통합대장경

大唐西域記卷第二

ABC_IT_K1065_T_002
032_0379_a_01L대당서역기 제2권
032_0379_a_01L大唐西域記卷第二 三國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032_0379_a_03L三藏法師玄奘奉 詔譯
大摠持寺沙門辯機撰


2. 인도총설(印度總說)
032_0379_a_05L濫波國
那揭羅曷國
健馱邏國

천축(天竺)이라는 호칭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면 의견이 갖가지로 분분하다. 구역(舊譯)에서는 신독(身毒)이라고 하였고 혹은 현두(賢豆)라고도 불렀는데, 이제는 정음(正音)을 따라서 인도(印度)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인도 사람은 지역에 따라서 나라를 부르는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체로서의 이름을 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일컬어 인도라고 부르고 있다.1)
032_0379_a_06L詳夫天竺之稱異議糾紛舊云身毒或曰賢豆今從正音宜云印度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擧摠名語其所美謂之印度
인도라는 말은 당나라에서는 달[月]을 의미한다. 달에는 많은 이름이 있는데 인도는 바로 그 명칭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중생들은 쉬지 않고 윤회하며 무명(無明)의 밤은 길고 길어서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은 태양이 숨으면 달빛이 그 빛을 잇는 것과 같다. 비록 별빛이 빛난다고 하더라도 어찌 환한 달빛의 밝기만 하겠는가? 오직 이 같은 이치에 따라서 달에 비유하는 것이다.
실로 그 땅의 성현들이 궤적을 잇고 범부들을 이끌고 만물을 인도하는 것은 마치 달이 천지를 환히 비추는 것과 같으니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2)
032_0379_a_10L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言諸群生輪迴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其猶白日旣隱宵燭斯繼雖有星光之照豈如朗月之明茍緣斯致因而譬月良以其土聖賢繼軌導凡御物如月照臨由是義故謂之印度
인도의 종성(種姓)과 족류(族類)는 다양하게 나뉘는데, 그 중 바라문이 가장 순수하고 귀한 계급이라 그 아칭(雅稱)을 따라 전하여 풍속이 되었으니, 토지 경계의 차별을 일컫는 말이 아니고 전체를 들어서 바라문국(婆羅門國)이라고 하는 것이다.
032_0379_a_16L印度種姓族類群分而婆羅門特爲淸貴從其雅稱傳以成俗無云經界之別摠謂婆羅門國焉
032_0379_b_02L그 국경의 구역을 대강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5인도3)의 국경 둘레는 9만여 리에 달한다. 삼면이 대해에 접해 있고 북쪽은 설산(雪山)에 닿아있다. 북쪽이 넓고 남쪽은 좁으며 그 형세는 반달과 같다. 전 국토는 70여 국으로 경계가 나뉘어 있는데 대단히 무더우며 대지에는 샘과 습지가 많다. 북쪽은 산들이 깊숙이 이어져 있으며 구릉은 간석지[舃鹵]가 많다. 동쪽은 내와 들이 비옥하고 윤택하며 밭은 기름지다. 남쪽은 초목이 무성하며 서쪽의 토지는 돌이 많고 척박하다. 이상은 그 대체적인 설명으로서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032_0379_a_19L若其封疆之域可得而言五印度之周九萬餘里三垂大海北背雪山北廣南狹形如半月畫野區分七十餘國時特暑熱地多泉濕北乃山阜隱軫丘陵舄鹵東則川野沃潤疇壟膏腴南方草木榮茂西方土地磽确斯大槪也可略言焉
무릇 수량(數量)은 유선나(踰繕那)구역에서는 유순(由旬)이라고 하고 또한 유사나(踰闍那)라고 하며 또는 유연(由延)이라고 하는데, 모두 다 잘못 생략된 말이다로 일컫는다. 유선나라는 것은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라고 한다. 구역(舊譯)에서는 1유선나가 40리라고 전한다. 인도국의 풍속으로는 30리에 해당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재된 바로는 오직 16리이다.
032_0379_b_03L夫數量之稱謂踰繕那舊曰由旬又曰踰闍那又曰由延訛略也踰繕那者自古聖王一日軍行也舊傳一踰繕那四十里矣印度國俗乃三十里聖敎所載唯十六里
궁미(窮微)의 수는 다음과 같다. 1유선나를 나누면 8구로사(拘盧舍:krośa)가 된다. 큰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까지를 구로사라고 말하는데, 1구로사를 나누면 500궁(弓:dhanus, 駄沙라고도 음역한다)이 된다. 1궁을 나누면 4주(肘:hasta)가 되고, 1주를 나누면 24지(指)가 된다. 1지절(指節)을 나누면 7숙맥(宿麥:yava)이 되고 나아가 이[蝨]ㆍ서캐[蟣]ㆍ먼지[隙塵]ㆍ소털[牛毛]ㆍ양털[羊毛]ㆍ토끼털[兎毫]ㆍ금수(金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7분(分)하여 세진(細塵)에 이른다. 세진을 7분하면 극세진(極細塵)이 된다. 극세진이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을 나누면 곧 허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극미(極微)라고 한다.
032_0379_b_07L窮微之數分一踰繕那爲八拘盧舍拘盧舍者謂大牛鳴聲所極聞稱拘盧舍分一拘盧舍爲五百弓分一弓爲四分一肘爲二十四指分一指節爲七宿麥乃至蝨隙塵牛毛羊毛金水次第七分以至細塵細塵七爲極細塵極細塵者不可復扸卽歸空故曰極微也
음양의 역운(曆運)이나 해와 달의 차사(次舍)에 대해서 말하자면 호칭은 비록 다르더라도 시후(時候)에는 차이가 없다. 그 성건(星建)에 따라서 달의 이름을 표시하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각을 찰나(刹那)라고 부른다. 120찰나는 1달찰나(呾刹那)가 되고 60달찰나는 1납박(臘縛)이 된다. 30납박은 1모호율다(牟呼栗多)가 된다. 5모호율다는 1시(時)가 된다. 6시가 합하여 1일(日) 1야(夜)를 이룬다[晝三夜三]. 통상 낮과 밤을 8시(時)[晝四夜四, 하나하나의 시(時)에 각 4분(分)이 있다]로 나눈다.
032_0379_b_15L若乃陰陽曆運日月次舍稱謂雖殊時候無異隨其星建以摽月名時極短者謂剎那也百二十剎那爲一呾剎那六十呾剎那爲一臘縛三十臘縛爲一牟呼栗多五牟呼栗多爲一六時合成一日一夜晝三夜三居俗日夜分爲八時晝四夜四於一一時各有四分
032_0379_c_02L달이 차서 만월(滿月)에 이르기까지를 백분(白分)이라고 하고, 달이 기울어서 그믐에 이르기까지를 흑분(黑分)이라고 한다. 흑분은 어떤 것은 14일, 어떤 것은 15일이기도 한데 달에는 크고 작은 달이 있기 때문이다. 흑분의 앞과 백분의 뒤[黑前白後]를 합하여 한달[一月]이라고 한다. 여섯 달을 합하면 1행(行)이 된다. 태양의 운행이 적도의 안에 있으면 북행(北行)이고 태양의 운행이 적도의 밖에 있으면 남행(南行)이다. 이 2행을 합하여 1년[歲]이 된다.
032_0379_b_22L月盈至滿謂之白分月虧至晦謂之黑分黑分或十四日十五日月有小大故也黑前白合爲一月六月合爲一行日遊在北行也日遊在外南行也摠此二合爲一歲
또 1년[歲]을 나누면 6시(時)가 되는데 정월(正月) 16일에서부터 3월 15일까지는 점열(漸熱:봄)이고, 3월 16일에서 5월 15일까지는 성열(盛熱:여름)이고, 5월 16일에서 7월 15일까지는 우시(雨時:장마)이고, 7월 16일에서 9월 15일까지는 무시(茂時:가을)이고, 9월 16일에서 11월 15일까지는 점한(漸寒:초겨울)이며, 11월 16일에서 정월 15일까지는 성한(盛寒:한겨울)이다.
032_0379_c_04L又分一歲以爲六時月十六日至三月十五日漸熱也月十六日至五月十五日盛熱也月十六日至七月十五日雨時也月十六日至九月十五日茂時也月十六日至十一月十五日漸寒也十一月十六日至正月十五日盛寒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 속에서 해[歲]는 3시(時)로 나뉜다. 정월 16일에서 5월 15일까지는 더울 때[熱時]이고, 5월 16일에서 9월 15일까지는 우시(雨時)이고, 9월 16일에서 정월 15일까지는 추울 때[寒時]이다.
032_0379_c_11L如來聖敎歲爲三時正月十六日至五月十五日熱時也五月十六日至九月十五日雨時也九月十六日至正月十五日寒時也
어떤 때는 4시(時)로 나누기도 하는데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그것이다. 봄의 석 달은 제달라월(制呾羅月)ㆍ폐사거월(吠舍佉月)ㆍ서슬타월(逝瑟吒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정월 16일부터 4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여름의 석 달은 알사다월(頞沙茶月)ㆍ실라벌나월(室羅伐拏月)ㆍ파라발타월(婆羅鉢陀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032_0379_c_14L或爲四時冬也春三月謂制呾羅月吠舍佉月逝瑟咤月當此從正月十六日至四月十五日夏三月謂頞沙荼月室羅伐拏月婆羅鉢陁月當此從四月十六日至七月十五日
가을의 석 달은 알습박유사월(頞濕縛庾闍月)ㆍ가랄저가월(迦剌底迦月)ㆍ말가시라월(末伽始羅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7월 16일부터 10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겨울의 석 달은 보사월(報沙月)ㆍ마거월(磨袪月)ㆍ파륵구나월(頗勒窶拏月)이라고 부르는데, 당나라의 10월 16일부터 정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032_0379_c_19L秋三月謂頞濕縛庾闍月迦剌底迦月末伽始羅月當此從七月十六日至十月十五日冬三月謂報沙月磨祛月頗勒寠拏月當此從十月十六日至正月十五日
032_0380_a_02L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양안거(兩安居)에 들어가는데 전삼월(前三月)이나 후삼월(後三月)이다. 전삼월은 당나라의 5월 16일부터 8월 15일에 해당하고, 후삼월은 당나라의 6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전에 경과 율을 번역한 자들은 안거를 좌하(坐夏)라고 하거나 또는 좌랍(坐臘)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변경의 다른 풍속에서 나온 말일 뿐 중국의 정음(正音)에 미치지 못한 것이며, 또한 방언(方言)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그대로 옮겨 번역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다. 또한 여래의 입태(入胎)ㆍ초생(初生)ㆍ출가ㆍ성불ㆍ열반의 날짜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기술하기로 한다.
032_0379_c_24L故印度僧徒依佛聖敎坐兩安居或前三月或後三月前三月當此從五月十六日至八月十五日後三月當此從六月十六日至九月十五前代譯經律者或云坐夏或云坐斯皆邊裔殊俗不達中國正音方言未融而傳譯有謬又推如來入初生出家成佛涅槃日月皆有參語在後記
마을과 부락은 네모 반듯하고 넓고 높으며, 도시의 크고 작은 거리들은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져 있다. 거리의 담과 문들은 도로를 향해 나있고, 술집과 요릿집들은 도로를 끼고 있다. 도축업자와 어부, 어릿광대와 망나니, 똥 치우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에 깃발을 세워서 표시를 해놓고 마을의 밖에 따로 살도록 되어 있으며, 길을 오고 갈 때에도 길 왼쪽으로 피하도록 하였다.4)
032_0380_a_09L若夫邑里閭閻方城廣峙街衢巷陌曲徑盤迂闤闠當塗旗亭夾路倡優魁膾除糞旌厥宅居斥之邑外行里往來僻於路左
집의 구조나 울타리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지세가 낮고 습한 까닭에 성의 대부분은 벽돌을 쌓았다. 담장이나 벽은 혹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기도 하였다. 방과 누각은 널빤지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평평하게 하였고, 석회를 발랐으며, 굽거나 굽지 않은 벽돌을 덮었다. 그 밖의 여러 가지 큰 건물을 짓는 법은 중국과 같다. 띠를 엮거나 풀을 엮거나 혹은 벽돌이나 널빤지를 이용하며, 벽에는 석회를 발라서 장식하고 바닥에는 쇠똥을 발라서 깨끗하게 만든다. 제철에 피는 꽃을 뿌려서 깔기도 하는데 이것이 다른 점이다.
032_0380_a_13L至於宅居之製垣郭之作地勢卑濕城多壘塼曁諸牆壁或編竹木室宇臺觀板屋平頭埿以石灰覆以甎墼諸異崇搆製同中夏苫茅苫草或塼或板壁以石灰爲飾地塗牛糞爲淨時花散布斯其異也
승가람은 그 제작법이 매우 기이하다. 우루(隅樓)는 네 개를 세우고 중각(重閣)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까래와 평고대5)와 동량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울타리와 담장에는 화려한 색깔로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032_0380_a_19L諸僧伽藍頗極奇製隅樓四起重閣三層榱梠棟梁奇形彫鏤戶牖垣牆圖畫衆綵
032_0380_b_02L서민 집의 경우 안은 호사스럽고 밖은 검소하다. 깊은 곳에 있는 방[隩室]이나 중당(中堂)의 높이와 너비는 여러 종류이며, 층대(層臺)나 중각(重閣)의 모습이나 제작법은 다양하다. 문은 동쪽으로 나있고, 조정의 좌석들도 동쪽을 향해 있다. 앉을 때에는 언제나 승상(繩床)을 이용하는데 왕족이나 권력가ㆍ서민이나 토호들의 자리 장식은 제각기 다르고 규격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군왕이 정사를 돌보는 자리는 이들의 것보다 더 높고 넓으며 온갖 형태의 보석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사자상(師子床)이라고 한다. 결이 고운 모직으로 깔개를 삼으며 보석으로 만든 상자를 발판으로 삼고 있다. 모든 백성과 서민들은 제각기 자기의 취향대로 장식하는데, 그 조각 모양도 매우 다양하고 장식물들도 아주 진귀한 것들이다.
032_0380_a_21L黎庶之居內侈外儉隩室中堂高廣有異層臺重閣形製不拘門闢東戶朝座東面至於坐止咸用繩牀王族大人豪右莊飾有殊規矩無異君王朝座彌復高廣珠璣閒錯謂師子牀敷以細㲲蹈以寶机凡百庶僚隨其所好刻彫異類瑩飾奇珍
모든 옷과 노리개는 옷감을 자르거나 꿰매어서 만들지 않는다. 선백색(鮮白色)을 귀하게 여기고 잡색을 천하게 여긴다. 남자들의 옷은 허리를 감아서 겨드랑이에 잡아매었고 옆으로 둘러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다. 여자들은 첨의(襜衣:행주치마)를 입고 아래까지 늘어뜨렸으며 어깨를 모두 휘감아 덮는다. 머리에는 작은 상투를 매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아래로 늘어뜨린다. 어떤 이는 수염을 깎기도 하는데 특별나게 괴이한 풍속이 있다. 머리에는 화만(花鬘)을 쓰고 몸은 보석으로 꾸민다.
032_0380_b_05L衣裳服玩無所裁製貴鮮輕雜綵男則繞腰絡腋撗巾右袒女乃襜衣下垂通肩摠覆頂爲小髻餘髮垂下或有翦髭別爲詭俗首冠花鬘身佩瓔珞
그들이 입는 옷은 이른바 교사야(憍奢耶)옷과 가는 모포 등이다. 교사야란 것은 산누에[野蠶]에서 나온 실로 짠 것이다. 총마(叢摩)옷은 마(麻)의 일종이고, 험발라(頷墟嚴反鉢羅)옷은 가는 양털로 짠 옷이며, 갈랄리(褐剌縭)옷은 들짐승의 털로 짠 것이다. 짐승의 털은 가늘고 부드러워서 옷감을 짤 수 있기 때문에 진귀하게 여겨 옷으로 만드는 것이다.
032_0380_b_09L其所服者謂憍奢耶衣及㲲布等憍奢耶者野蠶絲也摩衣麻之類也𢴮嚴反鉢羅衣織細羊毛也褐剌縭衣織野獸毛也獸毛細可得緝績故以見珍而充服用
북인도의 풍토는 지독하게 추워서 옷의 폭이 좁고 짧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호복(胡服)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도(外道)의 복장은 제각기 멋대로 만들어 입고 있는데, 어떤 이는 공작의 꼬리털을 입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해골을 보석으로 장식하며, 어떤 이는 옷을 입지 않고 온몸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풀과 나무 판자로 몸을 가리고, 어떤 이는 머리카락을 뽑고 수염을 잘랐으며, 어떤 이는 귀밑 털을 흐트러뜨리고 상투를 틀기도 하는 등, 의상에는 일정한 법도가 없으며 적색과 백색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032_0380_b_13L北印度風土寒烈短製褊衣頗同胡外道服飾紛雜異製或衣孔雀羽或飾髑髏瓔珞或無服露形或草板掩體或拔髮斷髭或蓬鬢椎髻衣無定赤白不恒
사문은 법복(法服)으로 오직 3의(衣)와 승각기(僧却崎), 니바새나(泥縛些桑箇反那)만을 갖게 되어있다. 3의를 재단하고 마름질하는 것은 부파마다 다르므로 옷의 가장자리가 넓거나 좁기도 하고, 혹은 시접이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승각기당나라에서는 암액(掩腋)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승기지(僧祇支)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는 왼쪽 어깨를 덮고 양 겨드랑이를 가리며, 왼쪽이 트였고 오른쪽이 합해졌으며 길게 마름질되었고 허리까지 내려온다. 니바새나당나라에서는 군(裙)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열반승(涅槃僧)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는 옷고름과 허리띠가 없으므로 입을 때에는 옷을 모아 주름을 만들어서 띠처럼 묶어 입는다. 주름은 각 부파마다 다르며 색은 황색이거나 붉은 색으로 서로 같지 않다.
032_0380_b_18L沙門法服唯有三衣及僧卻崎泥縛些桑箇反三衣裁部執不同或緣有寬狹或葉有小僧卻崎唐言掩腋舊曰僧祇支訛也覆左肩掩兩腋左開右合長裁過腰泥縛些那唐言裙曰涅槃僧訛也旣無帶襻其將服也集衣爲襵束帶以縚襵則諸部各異色乃黃赤不同
032_0380_c_02L찰제리와 바라문은 청결하고 소박하고 검약하게 생활한다. 국왕이나 대신의 복장과 완구는 아주 달라서 화만과 보배관을 머리 장식으로 하며 옥팔찌와 영락(瓔珞)을 노리개로 차고 있다. 부유한 상인들이나 큰 장사꾼들 중에는 오직 팔찌만 하고 있는 자도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맨발로 다니며 신발을 신고 있는 자는 아주 적다. 그들은 치아를 붉은 색이나 검은 색으로 물들였으며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귀를 뚫었고, 얼굴의 특징은 코가 길고 눈이 크다.
032_0380_c_02L剎帝利婆羅門淸素居簡潔白儉約國王大臣服玩良異花鬘寶冠以爲首飾環釧瓔珞而作身佩其有富商大賈唯釧而已人多徒跣少有所履染其牙齒或赤或黑齊髮穿耳脩鼻大眼斯其貌也
그들이 스스로 청결함을 지키는 것은 그 뜻이 교만하기 때문은 아니다. 보통 밥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손을 씻으며, 남긴 것을 다시 먹거나 식기를 다시 사용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질그릇이나 나무 식기는 사용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버린다. 금이나 은ㆍ구리ㆍ철로 만든 그릇은 언제나 문지르고 윤을 낸다. 밥을 먹고 난 뒤에는 양지(楊枝)를 씹어서 치아를 깨끗하게 유지한다. 손을 씻거나 이를 닦지 않고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용변을 마치고 나면 항상 반드시 몸을 씻는다. 몸에는 전단(旃檀)이나 울금(鬱金)과 같은 여러 가지 향을 바른다. 군왕(君王)이 목욕을 할 때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제사를 지내거나 사당에 참배할 때에도 반드시 목욕하고 손을 씻는다.
032_0380_c_07L夫其潔淸自守非矯其志凡有饌食必先盥洗殘宿不再食器不傳瓦木之器經用必棄每加摩瑩饌食旣訖嚼揚枝而爲淨澡漱未終無相執觸每有溲溺必事澡灌身塗諸香所謂栴檀鬱金也君王將浴奏絃歌祭祀拜祠沐浴盥洗
그들의 문자에 대해서 살펴보면, 인도의 문자는 범천(梵天)이 만들었으며6) 처음에 원칙을 내려 47개의 문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사물[物]에 의거하여 합성되었고, 일[事]을 따라서 전용되는 가운데 차츰 많은 가지가 파생되었고, 그 연원이 점차 넓어지게 되었다. 지역과 사람에 따라서 다소 개변(改變)이 일어났지만, 그 대강을 말하자면 본원(本源)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중인도7)는 특히 자세하고 정확하게 언어를 쓰고 있으며, 말이 조화롭고 우아하여 하늘의 소리 같이 들린다. 그들의 문장은 생동감 있고 고상하며 맑고 깨끗하여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다. 인근의 다른 나라들은 잘못된 것을 익혀서 법칙으로 삼고 있으며 경박한 풍속으로 다투어 달려갈 뿐 순박한 풍조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032_0380_c_14L詳其文字梵天所製原始垂則四十七言也寓物合成隨事轉用流演枝其源浸廣因地隨人微有改變其大較未異本源而中印度特爲詳辭調和雅與天同音氣韻淸亮人軌則鄰境異國習謬成訓競趍澆莫守淳風
말을 기록하고 역사를 저술하는 데에 있어서는 각각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다. 사고(史誥)를 통틀어 니라폐다(尼羅蔽茶)8)당나라 말로는 청장(靑藏)이라고 한다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선악이 낱낱이 열거되어 있으며 재난과 길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032_0380_c_21L至於記言書事各有司史誥摠稱謂尼羅蔽荼唐言淸藏善惡具擧災祥備著
032_0381_a_02L한편,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으로 나아가게 할 때에는 먼저 12장(章)9)으로 인도한다. 7살이 지나면 점차로 오명대론(五明大論)10)을 가르친다. 오명대론이란, 첫째는 성명(聲明)11)이니, 옛 서적의 자구를 해석하고 조목조목 나누어 설명하고 분류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교명(工巧明)12)이니, 기술(技術)과 기관(機關)과 음양(陰陽)과 역수(曆數)이다. 셋째는 의방명(醫方明)이니, 병을 물리치는 주술과 사악함을 물리치는 방법과 약재와 침과 뜸이다. 넷째는 인명(因明)13)이니, 바르고 그릇된 것을 고찰하여 진위를 밝히는 일이다. 다섯째는 내명(內明)14)이니, 5승(乘)의 인과의 미묘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032_0380_c_23L而開蒙誘進先導十二章七歲之後漸授五明大論一曰聲釋詁訓字詮目疏別二工巧明術機閞陰陽曆數三醫方明禁呪閑藥石鍼艾四謂因明考定正邪覈眞僞五曰內明究暢五乘因果妙
바라문은 4볘다론(吠陀論)15)구역에서는 비타(毘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배우는데, 그것은 첫째로는 수(壽)16)이니, 이른바 목숨을 보존하고 성품을 길들이는 것이다. 둘째는 사(祠)17)이니, 제사를 올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셋째는 평(平)18)이니, 예의와 점복(占卜)과 병법(兵法)과 군진(軍陣)이다. 넷째는 술(術)19)이니, 뛰어난 기능과 기예와 산술과 주문을 외는 것과 의약처방이다.
032_0381_a_06L其婆羅門學四吠陁論舊曰毘陁訛也一曰謂養生繕性二曰祠謂享祭祈禱三曰平謂禮儀占卜兵法軍陣四曰謂異能伎數禁呪醫方
스승은 반드시 정묘한 이치를 두루 궁구하여 심오하고 깊은 곳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큰 뜻을 나타내 보여주고 미묘한 말로써 인도하며, 제자를 타일러 능숙하게 이끌어 갈고 다듬으며 학문으로 나아가도록 권한다. 만일 식견이 있고 명민한 자가 도망가려는 생각을 품으면 붙잡아두고 그의 학업이 이루어진 후에야 풀어준다.
032_0381_a_09L師必博究精微貫窮玄奧示之大義導以微言提撕善誘雕朽勵薄若乃識量通敏志懷逋逸則拘縶反開業成後已
나이 30이 되어 뜻을 세워 학업을 이루어 국가의 녹을 받는 지위에 오르게 되면 가장 먼저 스승의 은덕에 보답한다. 그들은 고사(古事)에 널리 통하며,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고, 정숙하게 산다. 속세를 벗어난 것에 침잠하고 세속의 밖에서 노닐며,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여도 동요되지 않고 세상의 소문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군왕이 그들을 아름답게 여기지만 조정에 불러올 수가 없다.
032_0381_a_12L方三十志立學成旣居祿位先酬師其有博古好雅肥遁居貞沈浮物逍遙事表寵辱不驚聲問以遠王雅尚莫能屈迹
국가에서는 총명하고 예지 있는 이들을 중히 여기며 세속에서는 고명(高明)한 사람들을 귀히 여긴다. 융숭하게 덕을 기리고 칭찬하며 두텁게 예의를 갖추어 대접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뜻을 강건히 하고 배움을 돈독히 하며 피로를 잊고 예술을 즐길 수 있다. 진리를 찾아다니고 어진 이에 의지하여 천릿길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다닌다. 집안이 비록 부유하더라도 그들의 뜻은 나그네길에 있는 것과 같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돌아다니며 탁발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도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재산이 없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즐기고 노니느라 일을 하지 않거나 음식을 탐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또한 풍습도 아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추악한 이름이 4방에 퍼지게 된다.
032_0381_a_16L然而國重聰睿貴高明襃贊旣隆禮命亦重故能强志篤學忘疲遊藝訪道依仁不遠千家雖豪富志均羈旅口腹之資丐以濟有貴知道無恥匱財娛遊媮食靡衣旣無令德又非時習辱俱至醜聲載揚
032_0381_b_02L여래의 가르침은 중생들의 부류에 따라 제각기 이해하게 되었다. 성현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자 정법의 순수함은 차츰 흐려져 각자의 이해에 따라서 나름대로 문지(聞智)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저마다 부파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치하며 끊임없이 논쟁하였다. 배우는 것을 달리하여 제각기 배운 것을 전문(專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길은 달라도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18부가 각기 논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대승과 소승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거지도 서로 다르다. 그들의 좌선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과 거니시는 것[經行]과 머물러 서있는 것과 정혜(定慧) 등은 현격하게 서로 다르며, 떠들썩하고 조용함 또한 너무나 제각각이다.
032_0381_a_22L如來理敎隨類得解去聖悠遠正法醇醨任其見解之心俱獲聞智之悟部執峯峙諍論波濤異學專門殊途同致十有八部各擅鋒銳大小二乘居止區別其有宴默思惟經行住立定慧悠隔諠靜良殊
부파들은 각자 모여 살고 있는 곳에 따라 각기 규칙을 만들었는데, 율과 논을 운운하지는 않지만 그 큰 줄기는 부처님의 경전이다. 1부를 널리 강의할 수 있는 자는 승가의 지사(知事)20)를 벗어나게 되고, 2부는 좋은 방과 가구가 더해지며, 3부는 시자가 딸려서 일을 해주고, 4부는 정인(淨人)21)을 부려서 일을 하게 할 수 있으며, 5부는 외출할 때 코끼리 가마를 탈 수 있으며, 6부는 외출할 때에 앞뒤로 시종이 에워싸서 호위한다. 도와 덕이 높아지면 그에 대한 대우 또한 달라진다.
032_0381_b_05L隨其衆居各製科防無云律經是佛經講宣一部乃免僧知事二部加上房資具三部差侍者祇承四部給淨人役使五部則行乘象輿六部又導從周衛道德旣高旌命亦異
때로 모여서 강론(講論)을 하여 그들의 우열을 고찰하며, 선악을 구별해 드러내어 아둔한 자는 몰아내고 이치에 밝은 자를 천거한다. 그들 가운데 미묘한 말을 깊이 헤아리고 묘한 이치를 널리 드러내며, 말이 고상하고 아름다움이 넘치어 말솜씨가 좋고 명민한 자는 보석으로 장식한 코끼리에 올라타게 되는데, 그를 앞뒤에서 모시고 따르는 자들이 숲과 같이 무성하게 몰려든다.
032_0381_b_10L時集講論考其優劣彰別善惡黜陟幽明其有商搉微言抑揚妙理雅辭贍美妙辯敏捷於是馭乘寶象導從如林
그러나 교의의 구별[義門]에 이르러서 텅 비어 있고 논리의 예리한 기운이 꺾여져 있어서 이치가 모자란데도 말만 무성하며, 뜻은 어긋나면서도 말만 매끄러우면 이내 얼굴에는 붉은 흙이나 흰 흙이 발라지고 몸에는 먼지와 흙이 칠해진 채 황야로 쫓겨나거나 구덩이에 버려진다. 그리하여 선량한 자와 사특한 자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또한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032_0381_b_13L至乃義門虛闢辭鋒挫銳理寡而辭繁義乖而言順遂卽面塗赭堊身坌塵土斥於曠野棄之溝壑旣旌淑慝亦表賢愚
사람들은 도를 즐길 줄을 알아 집안에서도 부지런히 학업에 정진한다. 출가하거나 속가(俗家)로 돌아가는 일은 각자 원하는 대로 맡기고 있다. 죄를 짓거나 율을 범하면 승중(僧中)에서 벌을 내린다. 그 죄가 가벼우면 곧 대중들이 명하여 꾸짖고 탓한다. 그 다음으로 조금 무거운 죄를 진 자에게는 대중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 무거운 죄를 지면 대중들은 그와 함께 살지 않는다.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은 죄 지은 자를 내쫓아서 자기들과 같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머물던 곳에서 나가게 되면 생계를 유지하려 해도 마땅하게 있을 곳이 없게 되어 먼 길을 떠나 고생을 하거나 혹은 승복을 벗고 속가로 돌아가게 된다.
032_0381_b_16L人知樂道家勤志學出家歸俗從其所好罹咎犯律僧中科罰輕則衆命訶責次又衆不與語重乃衆不共住不共住者斥擯不齒出一住處措身無所羈旅艱辛或返初服
032_0381_c_02L무릇 족성(族姓)에는 네 종류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바라문으로서 정행(淨行)이다. 도를 지키고 정숙하게 살아가는데 그들의 지조는 결백하다. 둘째는 찰제리로서 왕종(王種)이다구역에서는 찰리(刹利)라고 하는데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군림하며 어짊과 용서를 뜻으로 삼고 있다. 셋째는 폐사(吠奢)구역에서는 비사(毘舍)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로서 장사치이다. 이리저리 무역하며 다니면서 멀거나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따라 다닌다. 넷째는 수다라(戍多羅)구역에서는 수다(首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로서 농사짓는 사람이다. 힘껏 밭을 갈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곡식을 심고 거둔다.
032_0381_b_21L若夫族姓殊者有四流焉一曰婆羅淨行也守道居貞潔白其操二曰剎帝利王種也舊曰剎利略也弈世君臨仁恕爲志三曰吠奢舊曰毘舍訛也商賈也貿遷有逐利遠近四曰戍陁羅舊曰首陁訛也農人肆力疇壟勤身稼穡
이러한 4성(姓)에는 청(淸)ㆍ탁(濁)이 나뉘며, 혼인을 할 때에도 같은 계급끼리 하고, 왕래할 때에도 각각 다른 길로 다닌다. 같은 계급의 본가[宗]와 분가[枝]도 서로 섞여서 혼인하지 않는다. 부인은 한번 시집을 가면 끝내 재혼하지 않는다. 이 밖의 잡성(雜姓)은 너무나도 많은데,22)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으며 이들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하기 어렵다.
032_0381_c_04L凡茲四姓濁殊流婚娶通親飛伏異路內外宗姻媾不雜婦人一嫁終無再醮餘雜姓寔繁種族各隨類聚難以詳
군왕은 대대로 오직 찰제리만이 될 수 있다.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도 가끔씩 있어 다른 성(姓)이 왕을 칭하기도 한다. 굳세고 용감한 자를 나라의 전사로 선발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업을 이어서 병술을 완벽하게 익히도록 한다. 평상시에는 궁궐을 호위하고, 전쟁에 나가서는 무리들의 사기를 크게 떨치며 앞장서서 진격한다.
032_0381_c_08L君王弈世唯剎帝利篡弒時起姓稱尊國之戰士驍雄畢選子父傳遂窮兵術居則宮廬周衛征則奮旅前鋒
대체로 4병(兵)이 있으니, 보병(步兵)ㆍ마병(馬兵)ㆍ거병(車兵)ㆍ상병(象兵)이다. 코끼리에게는 견고한 갑옷을 입히고 상아에 예리한 칼을 매단다. 장수가 올라타서 지시를 내리면 양쪽에 있는 군졸들이 좌우에서 코끼리를 부린다. 거병(車兵)은 곧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부린다. 장수가 그 수레에 올라타면 병졸들이 줄을 지어서 호위하는데 바퀴를 호위하고 바퀴 통을 에워싼다. 마군(馬軍)은 제각기 흩어져 방어하며 도망가는 적들을 열심히 뒤쫓는다. 보군(步軍)은 몸이 민첩하고 강하며 용감한 자를 선발한다. 큰 방패를 짊어지고 긴 창을 들거나, 혹은 칼을 들고 앞에서 용감하게 행군한다.
032_0381_c_11L凡有四兵象則被以堅甲牙施利距一將安乘授其節兩卒左右爲之駕馭車乃駕以駟兵帥居其乘列卒周衛扶輪挾轂軍散禦逐北奔命步軍輕捍敢勇充負大櫓執長戟或持刀劍前奮行
모든 병기들은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른바 창과 방패[矛楯], 활과 화살[弓矢], 칼과 검[刀劍], 작은 도끼와 큰 도끼[鉞斧], 창[戈殳], 긴 창[長矟], 고리와 밧줄[輪索] 같은 종류를 다루는 법은 모두 대대로 습득한 것이다.
032_0381_c_17L凡諸戎器莫不鋒銳所謂矛長槊輪索之屬世習矣
032_0382_a_02L그들의 풍속을 보면, 성품이 비록 성급하기는 하나 그들의 마음은 참으로 정숙하고 질박하다. 재물에 대해서는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않으며 의(義)에 있어서는 타인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저승세계에서 받을 죄를 두려워하며, 이승에서의 일은 중히 여기지 않는다. 괴이한 속임수를 행하지 않고 약속한 것을 지킨다. 정교(政敎)는 질박함을 숭상하고 풍속은 부드럽다. 패륜의 무리들이 때로 국법을 어지럽히고 군주를 모함하는 일이 있는데, 일의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나면 언제나 옥에 가두어 놓을 뿐 사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의 생사에 맡기며 사람의 무리에 끼워주지 않을 뿐이다. 예의를 범하거나 충효를 거스르면 곧 코나 귀를 자르거나 손이나 발꿈치를 잘라내고, 혹은 나라 밖으로 내쫓거나 황량한 들판으로 내몰기도 한다. 그 밖의 죄를 범하면 재산을 내어서 죄갚음을 한다.
032_0381_c_19L夫其俗也性雖狷急志甚貞於財無茍得於義有餘讓懼冥運之罪輕生事之業詭譎不行盟誓爲政敎尚質風俗猶和凶悖群小虧國憲謀危君上事迹彰明則常幽囹圄無所刑戮任其生死不齒人倫犯傷禮義悖逆忠孝則劓鼻截耳刖足或驅出國或放荒裔自餘咎輸財贖罪
송사를 다스릴 때에는 말로써 판단하고 매로 치거나 형을 가하지는 않는다. 물음에 대해서 정성껏 대답하면 사실에 의거하여 공평하게 벌을 내린다. 범한 것을 부인하거나 죄 지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자신의 비행을 그럴싸하게 꾸미려 하는 자가 있을 때 그 일의 진상을 알아보고자 고안해 낸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물[水]과 불[火]과 저울[稱]과 독[毒]이다.
032_0382_a_04L理獄占辭不加刑扑問款對據事平科拒違所犯恥過飾欲究情實事須案者凡有四條
물에 의해 판결하는 것은, 죄인과 돌을 자루에 각각 넣어 함께 깊은 물 속에 빠뜨려서 그의 고백의 진위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사람이 가라앉고 돌이 떠오르면 죄를 지은 것이고, 사람이 떠오르고 돌이 가라앉으면 숨기는 죄가 없다는 징표이다.
032_0382_a_07L水則罪人與石盛以連囊之深流挍其眞僞人沈石浮則有犯人浮石沈則無隱
불에 의해 판결하는 것은, 쇠를 달구어서 죄인을 그 위에 올라서게 한 다음 다시 발로 밟도록 하고 또 손바닥으로 그것을 누르게 한 뒤 죄인의 혀로 그것을 핥게 하는 것인데 만일 거짓말을 하였다면 다치는 곳이 없을 것이고, 진실을 주장하였다면 다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유약한 사람이라면 이글거리는 불길을 견뎌내지 못하므로,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들게 하고서 이것을 불길을 향해서 뿌리게 한다. 만일 거짓말을 하였다면 꽃이 필 것이고 진실하다면 꽃들은 타버리고 말 것이다.
032_0382_a_09L火乃燒鐵罪人踞復使足蹈旣遣掌案又令舌舐無所損實有所傷懦弱之人不堪炎捧未開花散之向焰虛則花發則花焦
저울로 판결하는 것은, 사람과 돌을 저울 위에 놓아 가볍고 무거운 것으로 시험해보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거워서 아래로 내려가고 돌이 올라간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돌이 무겁고 사람이 가볍다.
032_0382_a_13L稱則人石平衡輕重取驗則人低石擧實則石重人輕
독으로 판결하는 것은, 한 마리 암양을 데려다가 그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른 다음 소송 당한 사람이 먹을 분량만큼의 온갖 독약을 섞어서 그 오른쪽 넓적다리 속에 집어넣는다. 만일 그 사람이 진실하다면 독이 퍼져서 양은 죽어버리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면 독이 퍼지지 않아서 양은 살아난다. 이러한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수없이 많이 일어나게 될 오판을 막는 것이다.
032_0382_a_14L毒則以一羖羊剖其右髀隨被訟人所食之雜諸毒藥置右髀中實則毒發而死虛則毒歇而蘇擧四條之例百非之路
경의를 표하는 의식에 있어서 그 법식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소리를 내어서 위문을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머리를 숙여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손을 들어서 높게 맞잡는 것이고, 넷째는 손바닥을 합하여 가지런하게 맞대는 것이다. 다섯째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여섯째는 길게 엎드리는 것이고, 일곱째는 손과 무릎을 땅에 대는 것이고, 여덟째는 5륜(輪)23)을 함께 구부리는 것이고, 아홉째는 오체투지(五體投地)24)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등은 지극하게 오직 한 번씩만 절을 올리는 것이다. 꿇어앉고서 상대의 덕을 찬양하면 이것을 극진한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한다. 상대가 멀리 있으면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가까이 있으면 발을 핥고 발뒤꿈치를 쓰다듬는다. 인사의 말을 하고 명을 받을 때는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길게 엎드린다.
032_0382_a_18L致敬之式其儀九等一發言慰問俯首示敬三擧手高揖四合掌平拱五屈膝六長踞七手膝踞地八五輪俱屈九五體投地凡斯九等極唯一跪而讚德謂之盡敬遠則稽顙拜近則嗚足摩踵凡其致辭受命裳長跪
032_0382_b_02L윗사람은 절을 받고 나면 반드시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데, 그의 정수리를 어루만지거나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좋은 말로 가르치고 이끌며 친밀하고 돈독한 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출가 사문은 경례를 받고 나서는 다만 선원(善願)을 덧붙일 뿐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자신이 받들고 섬기는 사람에 따라서 그의 주위를 도는 일도 많은데, 어떤 때는 한 바퀴만을 돌기도 하고 또는 세 번을 돌기도 한다. 마음속에 각별한 청이 있으면 그 숫자만큼 자유롭게 돈다.
032_0382_b_02L尊賢受拜必有慰辭或摩其或拊其背善言誨導以示親厚家沙門旣受敬禮唯加善願無止跪隨所宗事多有旋繞或唯一周復三帀宿心別請數則從欲
질병이 생겼을 때에는 7일 동안 곡기(穀氣)를 끊는다. 그러면 기한 안에 대부분 쾌유된다. 만일 그렇게 하였는데도 차도가 없다면 그때서야 약을 먹는다. 약의 성질과 종류와 이름 등은 여러 종류가 있으며, 의사의 치료술이나 점술 등도 다양하다.
032_0382_b_06L凡遭疾病絕粒七日期限之中多有痊愈必未瘳差方乃餌藥藥之性類名種不同醫之工伎占候有異
목숨을 마쳐서 상을 당하게 되면 슬프게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뽑으며 이마를 치고 가슴을 두드린다. 상복을 입는 제도는 특별하게 제정되어 있지 않고 조상 기간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032_0382_b_09L終沒臨喪哀號相泣裂裳拔髮拍頟椎胸服制無間喪期無數
임종을 한 뒤에 올리는 장송의식(葬送儀式)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장(火葬)이니,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운다. 둘째는 수장(水葬)이니,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서 흩어지게 한다. 셋째는 야장(野葬)이니, 숲에 버려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다.
032_0382_b_11L送終殯葬其儀有三一曰火葬積薪焚燎二曰水葬沈流漂散三曰野葬棄林飤獸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대를 이을 군주를 내세워서 그로 하여금 상제(喪制)를 주관하게 하여 상(上)ㆍ하(下)를 정한다. 태어날 때에 덕호(德號)가 주어졌으므로 죽어서는 시호를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을 당한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례가 끝난 뒤에는 평상시대로 생활하며 거리끼지 않는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을 청결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모두들 마을 밖에서 몸을 씻은 뒤에 집 안으로 들어온다.
032_0382_b_13L國王殂落先立嗣君以主喪祭以定上下生立德號死無議謚喪禍之家人莫就食殯葬之後復常無諱諸有送死以爲不潔咸於郭外浴而後入
천수(天壽)를 누린 뒤 죽음에 임하게 된 사람들, 재앙을 만나거나 오래도록 고질병에 걸려서 생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덧없는 세속을 싫어하고 떠나고자 하여 인간세상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 생사를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며 세속에서 멀리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에 친척이나 오래된 벗들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송별식을 차려준다. 그 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서 긍가하(殑伽河)로 나아가서 강의 중류에 이르러 스스로 물 속에 몸을 던지는데, 그들은 이렇게 하면 하늘에 태어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아직 본 적은 없다. 출가승 가운데의 제도에는 울부짖거나 곡하는 법이 없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마음속으로 기리며 은혜에 보답하는데, 장례를 정중하게 모시는 것은 실로 명복(冥福)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032_0382_b_17L至於年耆壽耄死期將至嬰累沈痾生涯恐極厭離塵俗願棄人閒輕鄙生死希遠世路於是親故知友奏樂餞會泛舟鼓棹濟殑伽河中流自溺謂得生天十有其一未盡鄙見出家僧衆制無號哭父母亡喪誦念酬恩追遠愼終寔資冥福
032_0382_c_02L정교(政敎)는 관대하고 기무(機務) 또한 간결하다. 호적은 장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은 부역의 의무가 없다.
032_0382_b_24L政敎旣寬機務亦簡戶不籍書人無傜課
왕전(王田)은 크게 넷으로 구별된다. 첫째는 국가의 쓰임에 충당하는 것이니,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곡물로 사용한다. 둘째는 국왕을 보좌하는 대신이나 제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셋째는 총명한 대학자나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 상으로 내려주며, 넷째는 복전(福田)으로 삼아서 이교도들에게 보시한다.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가볍고 부역도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업(業)을 편안히 여기며 자기 소유의 밭을 경작한다. 만일 왕전(王田)을 경작할 때에는 6분의 1을 세금으로 낸다.
032_0382_c_03L王田之內大分爲四一充國用祭祀粢盛二以封建輔佐宰臣三賞聰睿碩學高才四樹福田給諸異道所以賦斂輕薄傜稅儉省各安世業俱佃口分假種王田六稅其一
장사꾼들은 이익을 좇아서 무역을 하러 오가며 항구와 도로의 세관에 가벼운 세금을 낸 뒤에 통과한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건축은 노역만 헛되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을 이룬 것에 상당하는 보수를 지불한다. 변경을 지키거나 출정을 하고 궁궐을 호위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일의 양을 헤아려서 사람을 모집하고 현상금을 내걸어서 사람을 불러들인다. 고위관료들과 직급이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가 각각 나누어진 땅을 가지고 있으며 그 봉지(封地)에 의하여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032_0382_c_07L商賈逐利來往貨遷津路關防輕稅後過國家營建不虛勞役據其成功酬之價直鎭戍征行宮廬營衛量事招募懸賞待人宰牧輔臣庶官僚佐各有分地自食封邑
풍토가 다르면 땅에서 나는 산물 또한 다르다. 꽃이나 풀, 열매나 나무 등 온갖 종류가 이름 또한 다르다. 이른바 암몰라과(菴沒羅果)ㆍ암미라과(菴弭羅果)ㆍ말두가과(末杜迦果)ㆍ발달라과(跋達羅果)ㆍ겁비타과(劫比他果)ㆍ아말라과(阿末羅果)ㆍ진두가과(鎭杜迦果)ㆍ오담발라과(烏曇跋羅果)ㆍ무차과(茂遮果)ㆍ나리계라과(那利薊羅果)ㆍ반나사과(般橠娑果) 등이니, 이와 같은 종류들은 낱낱이 기록하기가 어려울 정도이지만 인간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을 간략하게 말해보았다.
032_0382_c_12L風壤旣別地利亦殊花草果木雜種異名所謂菴沒羅果菴弭羅果末杜迦果跋達羅果劫比他果阿末羅果鎭杜迦果烏曇跋羅茂遮果那利薊羅果般橠娑果厥此類難以備載見珍人世者略擧言焉
대추나 밤ㆍ감[椑柹]과 같은 것은 인도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배ㆍ능금ㆍ복숭아ㆍ앵두ㆍ포도 등의 과일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25)을 지나면서부터는 드문드문 심어져 있다. 석류와 감귤은 모든 나라에서 심고 있다.
032_0382_c_18L至於棗椑杮印度無聞蒱萄等果迦濕彌羅國已來往閒植石榴甘橘諸國皆樹
밭을 개간하거나 씨앗을 뿌리거나 거두고, 김 매고, 나무를 심는 일 등은 시기에 맞추어서 행한다. 토양에서 나는 것으로는 벼와 보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032_0382_c_20L墾田農稼穡耕耘播植隨時各從勞逸宜所出稻麥尤多
채소는 생강이나 겨자, 오이와 조롱박, 훈타채(葷陀菜) 등이 있다. 파와 마늘은 적게 나지만 그것을 먹는 일 또한 거의 없다. 집에서 이것을 먹는 자가 있으면 마을 밖으로 내쫓는다.
032_0382_c_22L蔬菜則有薑瓠葷陁菜等䔉雖少噉食亦希有食者驅令出郭
032_0383_a_02L우유[乳酪]ㆍ고소(膏蘇)ㆍ사탕[粆糖]ㆍ석밀(石蜜)ㆍ개자유(芥子油), 여러 가지 병초[餠麨]26)는 언제나 반찬으로 먹는 것이다. 생선ㆍ양ㆍ노루ㆍ사슴은 때로 고기 안주로 추천되기도 한다. 소ㆍ노새ㆍ코끼리ㆍ말ㆍ돼지ㆍ개ㆍ여우ㆍ이리ㆍ사자ㆍ원숭이 등 이러한 털을 가진 짐승류는 통상적으로 먹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동물들을 먹는다면 그는 스스로 비천하고 부끄러워하고, 또한 대중들도 그를 더럽게 여기고 미워하므로 그는 마을 밖에서 숨어살면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일을 거의 할 수 없다.
032_0382_c_24L至於乳石蜜芥子油諸餠麨常所膳也鹿時廌肴胾師子凡此毛群例無味噉者鄙恥衆所穢惡屛居郭外希迹人
또한 술과 감주 등은 맛에 따라 차이가 생겨 구별된다. 포도나 사탕수수로 담근 술은 찰제리족이 마시는 술이고 누룩과 당귀로 만든 진한 술은 폐사 등이 마시는 술이다. 사문과 바라문은 포도와 사탕수수의 즙[漿]을 마시는데 이것은 술로 치지 않는다. 잡성(雜姓)의 비천한 계급들은 마시는 것에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는다.
032_0383_a_06L若其酒醴之差滋味流別蒱萄剎帝利飮也麴糵醇醪吠奢等飮沙門婆羅門飮蒱萄甘蔗漿非酒醴之謂也雜姓卑族無所流別
사용하는 그릇에는 세공과 품질[功質]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상생활에 쓰이는 도구는 수시로 만들어 충당하므로 부족하지 않다. 가마솥을 사용하지만 시루를 사용할 줄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그릇을 쓰고, 소수의 사람들이 적동(赤銅)으로 만든 그릇을 쓴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음식을 넣고 손가락으로 음식을 섞어 먹는다. 대부분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지만 늙고 병든 자들은 구리 숟가락을 사용한다.
032_0383_a_09L然其資用之器巧質有殊什物之具隨時無闕雖釜鑊斯用而炊甑莫知多器坏土少用赤銅食以一器衆味相調手指斟酌略無匙箸至於老病乃用銅匙
금ㆍ은ㆍ유석(鍮石)27)ㆍ백옥ㆍ화주(火珠)28) 등이 이곳에서 생산되는데 그 양은 아주 많다. 진귀하고 다양한 보배들은 그 종류도 다양하며 이름도 제각각이다. 바다의 한쪽 구석에서 산출되어 이것으로 무역을 하지만, 그때 화폐로써 사용하여 물건을 교역하는 일에는 금전(金錢)이나 은전(銀錢), 패주(貝珠)와 소주(小珠)가 쓰이고 있다.
032_0383_a_14L若其金鍮石白玉火珠風土所產彌復盈積奇珍雜寶異類殊名出自海隅易以求貿然其貨用交遷有無金錢銀錢貝珠小珠
인도의 토지 경계를 대체로 들어보았고, 그 풍토의 차이도 대략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서로 공통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대강 설명을 한 셈이니, 서로 다른 정치와 풍속에 대해서는 각 나라를 들어서 서술하기로 하겠다.
032_0383_a_18L印度之境疆界具擧風壤之差大略斯在同條共貫粗陳梗槪異政殊俗據國而敍

3. 북인도(北印度)3개국

1) 람파국(濫波國)
람파국29)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북쪽은 설산(雪山)을 접하고 있으며 3면이 흑령(黑嶺)에 닿아있다. 나라의 큰 도성30)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수백 년 전에 왕족의 후사가 끊어졌다. 호걸들이 힘을 다투고 있으나 큰 우두머리가 없었는데 근래에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예속되게 되었다. 메벼를 경작하기에 알맞으며 사탕수수가 많이 난다. 숲은 비록 많지만 과실은 적다. 기후는 다소 온화하며 서리가 적고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032_0383_a_20L濫波國周千餘里北背雪山三垂黑國大都城周十餘里自數百年族絕嗣豪傑力競無大君長近始附屬迦畢試國宜粳稻多甘蔗林樹雖果實乃少氣序漸溫微霜無雪
032_0383_b_02L 물산이 풍족하여 백성들은 안락하게 지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성품은 겁약하고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에는 속임수가 많은데, 서로서로 속이고 비난하며 남을 먼저 추천하는 일은 없다. 그들의 체격과 생김새는 작고 초라하며 행동거지가 경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고 가는 모포를 입는데 그들의 옷에는 고운 장식이 되어있다.
032_0383_b_02L俗豐樂人尚歌詠志性怯弱情懷詭更相欺誚未有推先體貌卑小止輕躁多衣白㲲所服鮮飾
가람은 10여 곳 있으며 승도의 수는 아주 적은데,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천사(天祠)도 수십 곳이 있으며 이교도들이 매우 많다.
032_0383_b_05L伽藍十餘所僧徒寡少竝多習學大乘法敎祠數十異道甚多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가 큰 고개를 넘어서 큰 강을 건너면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032_0383_b_07L從此東南行百餘踰大嶺濟大河至那揭羅曷國北印度境

2)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
나게라갈국31)은 동서로 6백여 리, 남북으로 250~260여 리에 달하며 산이 주변으로 4방에 둘러쳐져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길은 험하다. 나라의 큰 도성32)의 둘레는 20여 리이고 군주가 없고 주령(主令)은 가필시국에 예속되어 있다.
032_0383_b_08L那揭羅曷國東西六百餘里南北二百五六十里山周四境懸隔危險大都城周二十餘里無大君長主令役屬迦畢試國
곡식이 풍요롭고 꽃과 과일이 많으며, 기후는 온화하고 더우며 풍속은 순수하고 질박하다. 용맹하고 굳세고 강인하며 재물을 천시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공경하며 이교도를 믿는 이는 적다. 가람은 비록 많지만 승도의 수는 매우 적으며 솔도파들은 황폐해졌거나 무너졌다. 천사는 다섯 곳이 있으며 이교도를 믿는 이들은 백여 명이다.
032_0383_b_12L豐穀稼多花果氣序溫暑風俗淳質猛銳驍雄輕財好學崇敬佛法少信異道伽藍雖多僧徒寡少諸窣堵波荒蕪圯壞天祠五所異道百餘人
성의 동쪽으로 2리를 가면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3백여 척이며 무우왕(無憂王)이 지은 것이다. 솔도파는 돌을 쌓은 것으로서 매우 높으며 조각을 새긴 것도 특이하다. 석가보살이 연등불(煙燈佛)을 만났을 때 사슴가죽 옷을 깔고 머리를 풀어서 진흙을 덮고서 수기를 얻은 곳이라고 한다.33) 세월은 괴겁(壞劫)34)만큼 흘렀지만 이런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재일(齋日)에 하늘에서 온갖 꽃이 비처럼 쏟아지기도 하여 군중들이 서로 경쟁하며 공양을 올리고 경배하기도 한다.
032_0383_b_16L城東二里有窣堵波高三百餘尺憂王之所建也編石特起刻雕奇製釋迦菩薩値然燈佛敷鹿皮衣布髮掩埿得受記處時經劫壞斯迹無泯或有齋日天雨衆花群黎心競式修供養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가람이 있는데 승도의 수는 적다. 이어서 남쪽에는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 석가보살이 머리털로 진흙을 덮었던 땅으로서 무우왕은 큰길을 피하여 옆으로 비켜선 곳에 지은 것이다.
032_0383_b_22L其西伽藍少有僧徒次南小窣堵波是昔掩埿之地無憂王避大路遂僻建焉
032_0383_c_02L성 안에 큰 솔도파가 있었던 기단이 있는데,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 솔도파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안치되어 있었다. 솔도파는 아주 크고 넓었으며,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치아도 없어졌고 오직 옛 터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 옆에 30여 척의 솔도파가 있다. 사람들은 그 기원은 알지 못하지만 이 솔도파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곳에 우뚝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원래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고 할 만큼 실로 신묘한 기적이 많은 곳이다.
032_0383_b_24L城內有大窣堵波故基聞諸先志曰昔有佛齒高廣嚴麗今旣無齒唯餘故基其側有窣堵波高三十餘尺俗相傳不知源起云從空下峙基於旣非人工寔多靈瑞
성의 서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여래가 중인도로부터 허공을 타고 오셔서 이곳에서 노니시고 교화하시다가 이곳에 유적을 남기신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이 그러한 자취를 사모하여 이러한 신령스러운 솔도파를 세운 것이다. 그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석가보살이 옛날에 연등불을 만나러 갈 때 이곳에서 꽃을 샀다.
032_0383_c_06L城西南十餘里有窣堵波是如來自中印度凌虛遊化降迹於此國人感建此靈基其東不遠有窣堵波釋迦菩薩昔値然燈佛於此買花
성의 서남쪽으로 20여 리 가다 보면 작은 돌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가람이 있는데 건물이 높고 중각(重閣)이며,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뜰 안은 고요하고 적막하며 승려의 자취가 없다. 그 안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032_0383_c_10L城西南二十餘里至小石嶺有伽藍高堂重閣積石所成庭宇寂寥絕無僧侶中有窣堵波高二百餘尺無憂王之所建也
가람의 서남쪽은 골짜기가 깊고 산비탈이 가파르며, 폭포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곧추 서있다. 동쪽 절벽의 석벽에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구파라용(瞿波羅龍)이 사는 곳35)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협소하고 굴 안은 매우 어둡다. 절벽의 돌에는 물방울들이 넘치도록 맺혀져 있어서 가느다란 물줄기를 만들며 흐르고 있다.
032_0383_c_14L伽藍西南深㵎陗絕瀑布飛流懸崖壁立東崖石壁有大洞穴瞿波羅龍之所居也門徑狹小窟穴冥闇崖石津滴谿徑餘流
옛날 이곳에는 부처님의 그림자가 있었는데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 모습 같았으며, 상호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서 그 근엄한 모습은 마치 지금 앞에 계신 것과 같았다. 근대(近代) 이래 사람들은 모두 그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설령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렴풋하게 볼뿐이다. 지성으로 청을 올리면 은연히 감응하여 아주 잠시나마 밝게 볼 수 있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032_0383_c_18L昔有佛影煥若眞容相好具足儼然如在近代已來人不遍睹縱有所見髣髴而已至誠祈請有冥感者乃暫明視尚不能久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 이 용은 소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에게 유낙(乳酪)을 제공하였는데 어쩌다 왕에게 바칠 시기를 놓쳐 버려 벌을 받았다. 그래서 마음에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다가 돈을 주고 꽃을 사서 수기솔도파(受記率堵波)에 공양하면서 이렇게 서원하였다.
“나는 악한 용이 되어 나라를 쳐부수고 왕을 살해하고야 말겠다.”
032_0383_c_21L昔如來在世之時此龍爲牧牛之士供王乳酪進奉失宜旣獲譴責心懷恚恨卽以金錢買花供養受記窣堵波爲惡龍破國害王
032_0384_a_02L그리고 나서 곧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죽었는데, 마침내 큰 용왕으로 태어나 이 굴에 살게 되었다. 그는 이내 굴을 나와서 본래 품었던 악한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032_0384_a_02L卽趣石壁投身而遂居此窟爲大龍王便欲出穴本惡願
마침 용왕이 이런 마음을 일으켰을 때에 여래께서는 이미 이 나라 사람들이 용의 피해를 입을 것을 가엾게 여기셔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중인도로부터 이곳에 이르셨다. 용은 여래를 보자 결국 독한 마음을 멈추게 되었으며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받았다. 그리하여 정법을 수호할 것을 서원하면서 여래께 청하였다.
“항상 이 굴에 머무시며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과 함께 언제나 저의 공양을 받아주소서.”
032_0384_a_04L適起此心如來已鑑愍此國人爲龍所害運神通力自中印度至龍見如來毒心遂止受不殺戒願護正法因請如來常居此窟諸聖弟子恒受我供
그러나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장차 적멸에 들 것이니, 너를 위하여 그림자를 남겨두겠다. 그리고 다섯 명의 나한을 보내 언제나 그대의 공양을 받게 할 것이다. 아무리 정법이 숨어들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만일 너에게 독한 마음이 치솟고 분노가 일어난다면 마땅히 내가 남겨둔 이 그림자를 보고 자애롭고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독한 마음을 멈추게 해야 할 것이다. 이 현겁(賢劫)36) 중에 장차 오게 될 모든 세존도 그대를 가엾게 여겨서 모두가 그림자를 남겨놓을 것이다.”37)
032_0384_a_08L如來告曰吾將寂滅爲汝留影遣五羅漢常受汝供正法隱沒其事無替汝若毒心奮怒當觀吾留以慈善故毒心當止此賢劫中來世尊亦悲愍汝皆留影像
부처님의 그림자가 있는 굴의 문 밖에는 두 개의 네모난 돌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의 돌 위에는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흔적이 있다. 윤상(輪相)38)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광명이 이따금 빛난다. 그림자 동굴의 좌우에는 많은 석실이 있는데, 이 모두는 여래와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이 선정에 들던 곳이다.
032_0384_a_12L影窟門外有二方石其一石上有如來足蹈之迹輪相微現光明時燭窟左右多諸石室皆是如來諸聖弟子入定之處
영굴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거니시던 곳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거기에는 여래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다. 이곳과 이웃해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진실한 가르침[眞宗]을 환하게 펼치시면서 온(蘊)과 계(界)와 처(處)39)를 설법하신 곳이다. 그림자 동굴의 서쪽에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여래께서 일찍이 그 반석 위에서 가사를 세척하셨다고 하며 그 옷의 무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032_0384_a_16L影窟西北隅有窣堵波是如來經行之處其側窣堵波有如來髮鄰此不遠有窣堵波是如來顯暢眞宗說薀界處之所也影窟西有大盤石如來嘗於其上濯浣袈裟文影微現
성의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혜라성(醯羅城)40)에 이르는데 둘레가 4~5리에 이르며 깎아지른 듯 곧추 세워져 있으며 험하고 견고하다.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숲이 우거졌으며 연못이 맑게 빛나는 것이 마치 거울 같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하며 불법을 독실하게 믿고 있다.
032_0384_a_21L城東南三十餘里至醯羅城周四五豎峻險固花林池沼光鮮澄鏡中居人淳質正信
032_0384_b_02L이곳에도 2층 누각이 있는데 동량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기둥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7보로 만들어진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의 정수리 뼈가 안치되어 있다.41) “나갈국(那竭國)의 혜라성에 도착하였다. 성 안에는 부처님의 정골(頂骨)을 모신 정사가 있는데 모두 금박과 7보로 장식하였다. 국왕이 정골을 몹시 경배하여 다른 사람들이 약탈해 갈 것을 우려하여 이에 그 나라의 부귀한 가문의 여덟 명을 선발하여 그들마다 하나의 도장을 가지고 와서 인봉(印封)하고 수호하게 하였다. 이른 아침에 여덟 명이 함께 와서 각자 그 안을 조사한 연후에 문을 연다. 문을 열고서 향즙으로 손을 씻고 부처님의 정골을 꺼내서 정사 밖의 높이 안치된 자리[高座] 위에 올려두고 7보의 원침(圓碪)을 아래에 괴고 유리로 만든 종을 위에 덮어씌운다. 이것은 모두 보석구슬로 장식되어 이다. 뼈는 황백색을 띠었고 방원(方圓) 4촌(寸)으로서 그 위가 솟아 올라있다. 매일 정골을 꺼낸 후에 정사의 사람들이 곧 높은 누각에 올라서 큰북을 두드리고 고둥을 불며 동발(銅鈸)을 두드린다. 그러면 왕이 이 소리를 듣고서 곧장 정사로 와서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린다. 공양을 마친 뒤에 차례로 정재(頂載)하고서 떠나간다. 왕은 동문(東門)으로 들어와서 서문(西門)으로 나간다. 왕은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공양 예배한 뒤에야 국정을 돌본다.” 뼈의 둘레는 1척 2촌이고 모공이 분명하게 보이며 황백색을 띠었다. 이 뼈는 보석함에 넣어져서 솔도파 속에 안치되어 있다. 만일 선악의 상(相)을 알고자 한다면 향가루를 진흙에 이겨서 정수리 뼈에 바른다. 그러면 복덕의 감응에 따라서 그 무늬가 밝게 빛난다.
032_0384_a_24L復有重閣畫棟丹第二閣中有七寶小窣堵波置如來頂骨骨周一尺二寸髮孔分明色黃白盛以寶函置窣堵波中欲知善惡相者香末和埿以印頂骨隨其福感其文煥然
또한 7보로 만든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 속에는 여래의 해골 뼈가 안치되어 있다. 모양은 마치 연꽃잎과 같으며, 정수리 뼈와 같은 색이다. 이 또한 보석함에 넣어져 봉함되어 안치되어 있다.
032_0384_b_06L又有七寶小窣堵波以貯如來髑髏骨狀若荷葉色同頂亦以寶函緘絡而置
또 하나의 7보로 만든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에는 여래의 눈동자가 있다. 눈동자의 크기는 능금 정도인데 맑고 투명하게 빛나서 안팎이 환히 비친다. 이 또한 보석함에 넣어져서 잘 봉해진 채로 안치되어 있다. 여래의 승가지가사(僧伽胝袈裟)는 결이 고운 모포로 만들어졌는데 황적색으로 보석함 속에 넣어져 있다. 세월이 이미 아득히 흘러 약간은 손상되었다. 여래의 석장(錫杖)도 있는데 고리는 흰 철로 만들어졌고 몸체는 전단(栴檀)으로 만들어져서 보석통 속에 넣어져 있다.
032_0384_b_08L又有七寶小窣堵波有如來眼睛睛大如柰光明淸徹曒映中外又以寶函緘封而置如來僧伽胝袈裟細㲲所作其色黃置寶函中歲月旣遠微有損壞來錫杖白鐵作鐶栴檀爲笴寶筒盛
근래에 어떤 국왕이 이러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여래께서 예전에 친히 사용하시던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위력을 믿고 협박하여 빼앗아 갔다. 본국에 도착한 뒤, 자신이 거처하는 궁궐에 그 물건들을 두었다. 그리고 12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것들이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알았다. 이에 황급하게 찾아보았는데, 이 물건들은 이미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032_0384_b_14L近有國王聞此諸物竝是如來昔親服用恃其威力迫脅而歸旣至本置所居宮曾未浹辰求之已失爰更尋訪已還本處
이 다섯 가지 성스러운 유적(遺迹)에는 영험스럽고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므로 가필시왕은 다섯 명의 정행(淨行)42)에게 명하여 향과 꽃을 공양 올리며 잘 돌보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것을 친견하고 예경 올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편, 정행들은 고요한 생활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재물을 중시하는 것을 생각하여 임시로 규칙을 만들어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 대체적인 내용을 보면, 여래의 정수리 뼈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금전 한 닢을 내야하며, 만일 인(印)을 떠가고자 한다면 금전 다섯 닢을 내야한다. 나아가 나머지 조항도 이와 같은 차례대로 마련되어졌다. 그러나 세금이 비록 무겁기는 했어도 친견하고 예를 올리려는 사람들은 더욱 더 많아졌다.
032_0384_b_17L斯五聖迹多有靈異迦畢試王令五淨行給侍香花觀禮之徒相繼不絕諸淨行等欲從虛寂以爲財用人之所重權立科條以止諠雜其大略曰諸欲見如來頂骨者稅一金錢若取印者稅五金錢自餘節級以次科條科條雖重觀禮彌衆
032_0384_c_02L2층 누각의 서북쪽에도 솔도파가 있는데 참으로 높고 크다. 그리고 신이한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지면 이내 흔들렸으며 기단이 기울어지고 흔들리며 풍경[鈴鐸]이 은은하게 울렸다.
032_0384_b_23L重閣西北有窣堵波亦甚高大而多靈異人以指觸便卽搖震連基傾動鈴鐸和鳴
이곳에서 동남쪽 골짜기로 들어가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건타라국(健馱邏國)구역에서는 건타위(乾陀衛)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게 된다.
032_0384_c_03L從此東南山谷中行五百餘里至健馱邏國舊曰乾陁衛訛也北印度境

3) 건타라국(健馱邏國)
건타라국43)은 동서로 천여 리, 남북으로 8백여 리에 달하며, 동쪽으로는 신도하(信度河)에 접해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포로사포라(布路沙布邏)44)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 리이다. 왕족은 이미 후사가 끊겼으며 가필시국(迦畢試國)에 복속되어 있다.
032_0384_c_04L健馱邏國東西千餘里南北八百餘東臨信度河國大都城號布路沙布邏周四十餘里王族絕嗣役屬迦畢試國
마을은 황폐해졌으며 살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궁성의 한쪽에 천여 가구가 있을 뿐이다. 곡식이 매우 번성하고 꽃과 과일이 풍성하다. 사탕수수가 많이 나며 석밀(石蜜)도 난다. 기후는 온화하고 더우며 대체로 서리와 눈이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겁이 많고 전예(典藝)를 익히기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교도를 숭경하고 있으며 불법을 믿는 이는 적다.
032_0384_c_08L邑里空荒居人稀少宮城一隅有千餘戶穀稼殷盛花果繁茂甘蔗出石蜜氣序溫暑略無霜雪性恇怯好習典藝多敬異道少信正
예로부터 인도의 국토에는 여러 논사(論師)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즉 나라연천(那羅延天)45)ㆍ무착보살(無著菩薩)46)ㆍ세친보살(世親菩薩)47)ㆍ법구(法救)48)ㆍ여의(如意)49)ㆍ협존자(脇尊者:波栗濕縛)50) 등의 본향이기도 하다. 가람은 천여 곳이 있으나 부서지고 황폐해졌으며 잡초가 우거지고 뒤엉켜져 있으며 솔도파들은 대부분 무너지고 훼손되었다.51) 천사(天祠)는 백여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지내고 있다.
032_0384_c_12L自古已來印度之境作論諸師有那羅延天無著菩薩世親菩薩如意脅尊者等本生處也僧伽藍千餘所摧殘荒廢蕪漫蕭條諸窣堵波頗多頹圯天祠百數異道雜居
왕성 안의 동북쪽에 옛 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보대(寶臺)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발우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오자 수백 년에 걸쳐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 올렸는데,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지금은 파라사(波剌斯)에 있다.52)
032_0384_c_16L王城內東北有一故基昔佛鉢之寶臺也如來涅槃之後鉢流此國經數百年式遵供養流轉諸國在波剌斯
성 밖의 동남쪽으로 8~9리를 가다 보면 비발라수(卑鉢羅樹)53)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가지와 잎이 빽빽하여 그늘이 깊다. 과거 네 분의 부처님54)께서 이 아래에 앉으셨는데, 지금도 네 분 부처님의 좌상(坐像)이 있다. 현겁(賢劫) 중에 나오실 9백 96분의 부처님55)께서도 모두 이 자리에 앉으실 것이니, 이곳은 부처님의 가호를 받아 신령스런 감응이 눈에 보이지 않게 뒤덮여 있다.
032_0384_c_19L城外東南八九里有卑鉢羅樹高百餘尺枝葉扶疏蔭影蒙密過去四佛已坐其下今猶現有四佛坐像賢劫之中九百九十六佛皆當坐焉冥祇警衛靈鑑潛被
032_0385_a_02L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으신 뒤에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백 년이 지난 뒤 어떤 왕이 있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 이름을 가니색가(迦膩色迦)라고 할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를 세우리니, 내 몸의 모든 뼈와 살과 사리들의 대부분이 그 안에 모일 것이다.”
032_0384_c_24L釋迦如來於此樹下南面而坐告阿難曰我去世後當四百年有王命世號迦膩色迦此南不遠起窣堵波吾身所有骨肉舍利集此中
비발라수의 남쪽에 솔도파56)가 있는데 가니색가왕이 세운 것이다. 가니색가왕은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백 년째 되던 해에 세상에 군림하였으며 천하의 운에 따라서 섬부주를 통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죄와 복의 이치를 믿지 않았고 부처님의 법을 업신여기고 훼손하였다.
032_0385_a_05L卑鉢羅樹南有窣堵波迦膩色迦王之所建也迦膩色迦王以如來涅槃之後第四百年君臨膺運統贍部洲信罪福輕毀佛法
어느 날 초원에서 사냥을 하며 노닐다가 우연히 흰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왕이 몸소 쫓아 달려가 보았지만 이곳에 이르렀을 때 토끼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대신 나이 어린 목동이 수풀 사이에서 작은 솔도파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솔도파의 높이는 3척이었다.
032_0385_a_09L畋遊草澤遇見白王親奔逐至此忽滅見有牧牛小於林樹閒作小窣堵波其高三尺
왕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032_0385_a_11L王曰汝何所爲
목동이 답하였다.
“옛날 석가부처님께서 성스러운 지혜로써 기별하시기를 ‘훗날 어떤 국왕이 이 좋은 땅에 솔도파를 세울 것이며 내 몸의 사리들은 대부분 그곳에 모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스러운 덕을 과거에 이미 심으셨고 그 이름은 옛날 부처님께서 기별하신 이름과 꼭 들어맞습니다. 또한 공력과 복덕이 뛰어나시니 실로 기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먼저 그 일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홀연히 사라졌다.
032_0385_a_12L牧豎對曰昔釋迦佛聖智懸記當有國王於此勝地建窣堵波吾身舍利多聚其內大王聖德宿殖名符昔記神功勝福允屬斯辰故我今者先相警發說此語已忽然不現
왕은 이 말을 듣고 난 뒤 경사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성현의 옛 기별에 올라 있던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부처님의 법을 깊이 공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작은 솔도파의 주위에 다시 돌로 솔도파를 세워서 자신의 공덕의 힘으로 작은 솔도파를 덮어씌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돌로 만든 솔도파가 커지면 그에 따라 작은 솔도파는 항상 3척 더 높아졌다. 이렇게 해서 높이는 점점 높아져 4백 척이 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단이 세워진 터의 둘레가 1리(里) 반에 달하고 층기(層基)가 5층에 달하였으며, 높이는 150척이 되고서야 마침내 작은 솔도파를 덮을 수 있게 되었다.
032_0385_a_17L王聞是說嘉慶增懷自負其名大聖先記因發正信深敬佛法周小窣堵波更建石窣堵波欲以功力覆其上隨其數量恒出三尺若是增踰四百尺基趾所峙周一里半基五級高一百五十尺方乃得覆小窣堵波
032_0385_b_02L왕이 이에 크게 기뻐하며 그 위에 다시 25층의 금동상륜(金銅相輪)을 세우고는 여래의 사리 1곡(斛:10말)을 그 속에 안치하고서 예식을 갖추어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솔도파 짓는 일이 끝나자 또 다시 작은 솔도파가 대기(大基)의 동남쪽 모퉁이 아래에 옆으로 삐죽하게 반쯤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이 불쾌히 여기면서 내던져 버렸더니 작은 솔도파가 큰 솔도파의 제2층 아래의 석기(石基) 안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내었다. 본래의 장소에 가보니 작은 솔도파가 또다시 나와있었다.
032_0385_a_23L王因嘉慶復於其上更起二十五層金銅相輪卽以如來舍利一斛而置其中式修供養營建纔訖小窣堵波在大基東南隅下傍出其王心不平便卽擲棄遂住窣堵波第二級下石基中半現復於本處更出小窣堵波
왕은 이내 마음을 돌이켜 탄식하며 말하였다.
“오오, 사람의 일이란 미혹에 빠지기 쉬우며 신령스런 공덕은 가리기가 어렵구나. 부처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어찌 분노로 미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참회하고 난 뒤에 허물을 사죄하고 돌아갔다.
032_0385_b_06L王乃退而歎曰嗟夫事易迷神功難掩靈聖所扶憤怒何慚懼旣已謝咎而歸
그 두 기의 솔도파는 지금도 있다. 병에 걸려서 쾌유를 비는 자가 향을 바르고 꽃을 뿌리며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면 대부분 쾌유하게 된다.
032_0385_b_08L其二窣堵波今猶現在有嬰疾病欲祈康愈者香散花至誠歸命多蒙瘳差
큰 솔도파의 동쪽으로 돌계단이 있는데 그 남쪽에 두 기의 솔도파가 조각되어 있다. 하나는 높이가 3척이고 또 다른 하나는 5척인데 규모나 형상은 큰 솔도파와 같다. 또한 불상이 2구(軀) 만들어져 있는데, 하나는 높이가 4척이고 또 다른 하나는 6척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가부좌한 모습을 본뜬 것으로 태양이 비치면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해 그림자가 차츰 옮겨져 오면 돌 무늬가 청감(靑紺)색을 띤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수백 년 전 석기(石基)의 틈 속에 금색 개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개미들 가운데 큰 것은 손가락만 하고 작은 것은 보리알만 하였는데 같은 것끼리 무리를 지어서 그 석벽을 갉아먹었다. 그런데 그 무늬가 마치 아로새긴 것과 같았다. 금모래를 섞어서 이런 불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032_0385_b_10L大窣堵波東面石陛南鏤作二窣堵波一高三尺一高五尺規摹形狀如大窣堵又作兩軀佛像一高四尺一高六擬菩提樹下加趺坐像日光照燭金色晃曜陰影漸移石文靑紺聞諸耆舊曰數百年前石基之隙有金色蟻大者如指小者如麥同類相從齧其石壁文若雕鏤廁以金沙作爲此像今猶現在
032_0385_c_02L큰 솔도파의 돌계단 남쪽에 불상의 그림이 있는데 높이는 1장 6척이다. 가슴 위쪽은 두 개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슴 아래부터는 하나의 몸으로 합해져 있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잇고 있었다. 어느 날 금전 한 닢을 얻게 된 그는 그 돈으로 불상을 만들기를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솔도파가 있는 곳으로 가서 화공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여래의 훌륭한 모습을 그렸으면 합니다. 지금 내게는 금전 한 닢이 있는데 이것은 물론 그대의 품삯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부터 이 일을 뜻하여 왔지만 가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해 마음에 병이 되었습니다.”
032_0385_b_19L大窣堵波石陛南面有畫佛像高一丈六尺自胸已上分現兩身從胸已合爲一體聞諸先志曰有貧士傭力自濟得一金錢願造佛像至窣堵波所謂畫工曰我今欲圖如來妙有一金錢酬功尚少宿心憂負於貧乏
그러자 화공은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값을 따지지 않고 만들어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와서 앞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금전 한 닢을 가지고 불상을 그려 줄 것을 청하였다. 화공은 이에 두 사람의 돈을 받아 훌륭한 물감을 구하여 하나의 불상을 그렸다. 그 두 사람이 같은 날 함께 와서 인사를 하자 화공은 곧 하나의 불상을 가리키면서 두 사람에게 보여 주며 말하였다.
“이것이 당신들이 부탁한 불상입니다.”
032_0385_c_03L時彼畫工鑑其至誠無云價許爲成功復有一人事同前迹一金錢求畫佛像畫工是時受二人求妙丹靑共畫一像二人同日俱來禮敬畫工乃同指一像示彼二人而謂之曰此是汝所作之佛像也
두 사람이 함께 그 불상을 보았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화공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십니까? 당신들이 받을 물건에 추호라도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불상은 반드시 신통한 변화를 나타낼 것입니다.”
화공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상은 신비한 기적을 나타내었는데 그 몸이 나누어지더니 그림자가 서로 교차되었고 빛이 눈부시게 비쳤다. 이 모습을 본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화공의 말을 수긍하였으며 마음으로 믿고 좋아하였다.
032_0385_c_08L人相視若有所懷畫工心知其疑也謂二人曰何思慮之久乎凡所受物毫釐不虧斯言不謬像必神變言聲未靜像現靈異分身交影光相照著二人悅服心信歡喜
큰 솔도파의 서남쪽으로 백여 걸음 가다 보면 흰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데 높이는 1장 8척이며 북쪽을 향하여 서있다. 이 불상에도 신기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때로 광명을 밝히기도 하고, 이따금 불상이 밤에 나와 돌아다니면서 큰 솔도파를 빙빙 도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근래에 도적들이 불상을 훔치려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불상이 나와서 이들을 맞이하니 도적들은 모두 겁에 질려서 도망갔다. 그러자 불상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예전과 같이 섰다. 도적들은 이 일로 인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마을로 나아가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이 목격한 일을 4방에 낱낱이 알렸다.
032_0385_c_13L大窣堵波西南百餘步有白石佛像高一丈八尺北面而立多有靈相放光明時有人見像出夜行旋繞大窣堵波近有群賊欲入行盜像出迎賊黨怖退像歸本處住立如故盜因此改過自新遊行邑里具告遠
큰 솔도파의 좌우에는 작은 솔도파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빼곡하게 100여 개가 있다. 불상은 장엄하며 공을 들인 기교는 극치에 달하였다. 특이한 향이 풍기고 기이한 음성이 이따금 들려오며, 어떤 때는 신령이나 선인(仙人), 성현들이 빙빙 도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여래께서 기별하시기를, “이 솔도파가 일곱 번 불타고 일곱 번 세워지면 그때 부처님의 법이 비로소 다하게 될 것이다” 선현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세 번이나 무너졌다가 세워졌다”라고 한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때마침 큰 화재를 당하였다. 다시 세워져야 할 터인데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032_0385_c_20L大窣堵波左右小窣堵波魚鱗百佛像莊嚴務窮工思殊香異音有聞聽靈仙聖賢或見旋繞此窣堵波者如來懸記七燒七立佛法方盡先賢記曰成壞已三初至此國適遭大火當見營搆尚未成功
032_0386_a_02L큰 솔도파의 서쪽에 옛 가람이 있는데 가니색가왕이 지은 것57)이다. 중각(重閣)과 정자, 층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방들은 깊숙이 들어가 있다. 고승들을 초빙하여 가니색가왕의 커다란 복덕을 널리 드러낸다. 지금은 비록 허물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 제작 솜씨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다. 승도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소승을 공부하고 있다. 가람이 세워진 이래로 뛰어난 사람들이 간간이 나왔는데 그들은 모두 논사이거나 성현의 과위를 증득한 사람들로서, 그들의 맑은 기풍은 지금도 쉬지 않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극한 덕은 사라지지 않았다.
032_0386_a_02L大窣堵波西有故伽藍迦膩色迦王之所建也重閣累榭層臺洞戶旌召高僧式昭景福雖則圯毀尚曰奇工僧徒減少竝學小乘自建伽藍異人閒出諸作論師及證聖果淸風尚扇至德無泯
제3중각에는 파율습박(波栗濕縛)당나라 말로는 협(脇)이라고 한다존자의 방이 있는데, 지은 지 오래되어 다소 허물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정표(旌表)를 세우고 있다. 존자는 본래 바라문[梵志師]이었다. 그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세속을 버리고 승복을 입었다.
032_0386_a_08L第三重閣有波栗濕縛唐言脅尊者室夂已傾頓尚立旌表尊者之爲梵志師也年垂八十捨家染衣
그때에 성 안의 소년들은 곧 존자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리석은 노인에게 얕은 지식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무릇 출가한 자라면 두 가지 업을 닦아야 하나니 첫째는 정(定)을 익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는 것이거늘 그런데 지금 늙고 쇠하여 용맹정진하는 바가 없구나. 외람되게 청정한 스님들의 뒤를 따르려 하지만 하릴없이 배불리 먹을 줄만 아는구나.”
032_0386_a_10L城中少年更誚之曰愚夫朽老一何淺智夫出家者有二業焉一則習定二乃誦經而今衰耄無所進取濫迹淸流徒知飽食
그러자 협존자는 이런 비방하는 말을 듣고서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며 스스로 맹세하였다.
“내가 만일 3장의 이치에 통하지 못하고, 삼계의 탐욕을 끊지 못하며, 6신통을 얻거나 8해탈을 갖추지 못한다면 끝끝내 옆구리[脇]을 자리에 대지 않으리라.”
032_0386_a_14L時脅尊者聞諸譏議因謝時人而自誓曰我若不通三藏不斷三界欲得六神通具八解脫終不以脅而至於席
이렇게 맹세한 후에는 비록 시일이 부족하였으나 거닐고 연좌(宴坐)하며 멈추어 서서도 사유하였다. 낮에는 교학의 이치를 연구하고 익혔으며 밤에는 선정에 잠겨들어 정신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3년을 계속하자 마침내 3장을 모두 통달하게 되었으며 삼계58)의 탐욕을 끊었고 3명지(明智)를 얻었다. 그러자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가 높이 우러르고 공경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협존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032_0386_a_17L自爾之後唯日不足經行宴坐住立思惟晝則硏習理敎夜乃靜慮凝神緜歷三歲學通三藏斷三界欲得三明智時人敬仰因號脅尊者焉
협존자 방의 동쪽에 오래된 방이 있는데 세친보살이 이곳에서 『아비달마구사론』59)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려서 그 방을 봉(封)하고 이 일을 기록해 놓았다.
032_0386_a_21L脅尊者室東有故房世親菩薩於此製『阿毘達磨俱舍論』人而敬之封以記焉
032_0386_b_02L세친의 방 남쪽으로 50여 걸음 가다 보면 제2중각이 있는데 말노갈라타(末笯曷剌他)당나라 말로는 여의(如意)라고 한다60)논사가 이곳에서 『비바사론』61)을 지었다고 한다. 논사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1천 년 뒤에 태어났다.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말솜씨가 뛰어나 그의 명성이 먼 곳에까지 미쳐서 속인이나 출가인들이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032_0386_a_24L世親室南五十餘步第二重閣末笯曷剌他唐言如意論師於此製『毘婆沙論』論師以佛涅槃之後一千年中利見少好學有才辯聲問遐被法俗歸
한편 당시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의 비글라마아질다왕(毘訖羅摩阿迭多王)당나라 말로는 초일(超日)이라고 한다62)은 그 위풍이 먼 곳에까지 미쳤으며 인도의 여러 나라들이 복종하였다. 그는 날마다 5억의 금전으로 가난하거나 외로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는데, 창고를 관리하는 신하가 국고가 고갈될 것을 두려워하여 넌지시 간하였다.
“대왕의 위덕이 타국에까지 미치고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5억의 금전을 더하여 이로써 4방(方)63)의 결핍을 구휼하소서. 그런데 창고(府庫)는 이미 바닥이 났으니 토지세를 더 징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금 징수가 계속되면 원성이 높아질 것이니, 즉 ‘군왕은 베푸는 은덕을 지니고 있는데 신하들은 군왕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032_0386_b_06L時室羅伐悉底國毘訖羅摩阿迭多王唐言超日威風遠洽臣諸印度日以五億金錢周給貧寠孤獨主藏臣懼國用乏匱也乃諷諫曰大王威被殊俗澤及昆虫請增五億金錢以賑四方匱乏府庫旣空更稅有土重斂不已怨聲載揚則君上有周給之恩臣下被不恭之責
그러자 왕이 말했다.
“재산은 넉넉한데 나누어주는 것은 풍족하지 않다. 구차하게 이 한 몸의 사치를 위하여 국고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5억을 더하여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032_0386_b_13L王曰聚有餘給不足茍爲身侈靡國用遂加五億惠諸貧
그 후에 왕은 사냥을 하러 나가서 돼지를 쫓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돼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자취를 아는 자에게 1억의 금전을 상으로 주었다.
032_0386_b_15L其後畋遊逐豕失蹤有尋知迹者賞一億金錢
한편 여의 논사(如意論師)는 어느 날 사람을 시켜서 머리를 깎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1억의 금전을 내려주었는데, 그 나라의 사신(史臣)이 곧장 이것을 기록하였다. 그러자 왕은 여의 논사에 대한 명망이 자기가 한 일보다 더 높다고 말해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그 불쾌함을 언제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여의 논사를 창피 주고자 하여 외도의 가르침[異學]을 익힌 덕이 높은 자들 백 명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칙명을 내려서 말하였다.
“세상을 보고 듣는 일을 그만두고 참다운 경계에서 노닐고자 하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어지럽게 분분하니 마음을 귀의할 곳을 찾지 못하겠구나. 이제 그런 가르침들의 우열을 가려서 가장 훌륭한 것을 택하여 그것만을 오로지 닦고 지키며 봉행하고자 한다.”
032_0386_b_16L如意論師一使人剃髮輒賜一億金錢其國史臣依卽書記王恥見高心常怏怏欲衆辱如意論乃招集異學德業高深者百人下令曰欲收視聽遊諸眞境異道紛歸心靡措今考優劣專精遵奉
그리고 나서 곧 사람들이 논의하러 모여들게 되자 왕은 다시 명을 내렸다.
“외도 논사들은 모두 빼어난 준재들이다. 그러니 사문으로서 법을 따르는 무리들은 능히 자신들의 종치(宗致)를 잘 선양하라. 그리하여 사문이 외도를 이기면 나는 부처님의 법을 숭배하고 받들 것이나 지면 승도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이다.”
032_0386_b_21L乎集論重下令曰外道論師竝英俊沙門法衆宜善宗義勝則崇敬佛負則誅戮僧徒
논쟁이 시작되고 이에 여의 논사가 나서서 여러 외도들을 힐난하니, 99명의 외도들은 논쟁에서 패하자 모두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032_0386_b_24L於是如意詰諸外九十九人已退飛矣
032_0386_c_02L이때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그를 보고서 경멸하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이로 인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논쟁은 불과 연기에 관한 것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왕과 외도가 함께 목청을 높여서 말하였다.
“여의 논사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무릇 먼저 연기가 있은 뒤에 불이 있게 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이치이다.”
032_0386_c_02L下席一人之蔑如也因而劇談論及火煙王與外道咸諠言曰如意論師辭義有失夫先煙而後及火此事理之常也
여의는 비록 그들의 힐난을 풀이해 주고 싶었지만 들으려고 하는 자가 없을 뿐 아니라 대중들의 모욕을 당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그리고 나서 글을 써서 문하의 사람인 세친(世親)에게 충고하였다.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패거리들과는 대의(大義)를 다투지 말 것이며, 미혹한 군중들 속에서 정론(正論)을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죽었다.
032_0386_c_05L意雖欲釋難無聽覽者恥見衆辱斷其舌乃書誡告門人世親曰黨援之衆無競大義群迷之中無辯正論言畢而死
이 일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서 초일왕(超日王)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새로운 왕이 권좌에 오르면 빼어난 현사[英賢]들을 표창하는 법이다. 이에 세친보살이 앞서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왕64)에게 가서 고하였다.
“대왕께서는 성덕(聖德)으로써 군림하시고 만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이전의 제 스승이었던 여의는 그 학문이 깊은 이치에 통달하였으나 전왕(前王)이 마음에 맺힌 감정이 있어서 대중들을 불러 모아 스승의 높은 명성을 먹칠하였습니다. 저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서 다시금 이전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자 합니다.”
032_0386_c_09L居未夂超日王失國興王膺運表式英賢世親菩薩欲雪前恥來白王曰大王以聖德君臨爲含識主命先師如意學窮玄奧前王宿憾衆挫高名我承導誘欲復先怨
왕도 일찍부터 여의가 철인(哲人)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세친의 아름다운 뜻을 기리고 있었던 터라 이에 여의 논사와 담론하였던 모든 외도들을 불렀다. 세친이 다시 한번 스승의 가르침을 논하자 외도들은 이에 굴복하고 사죄하며 물러갔다.
032_0386_c_13L其王知如意哲人也美世親雅操焉乃召諸外道與如意論者世親重述先旨外道謝屈而退
가니색가왕가람에서 동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강65)을 건너서 포색갈라벌저성(布色羯邏伐底城)66)에 이르게 된다. 성의 둘레는 14~5리이며 그곳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집들이 이어져 있다. 성의 서쪽 문 밖에 천사(天祠)가 하나 있는데 천상(天像)은 위엄이 있으며 신기한 기적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032_0386_c_16L迦膩色迦王伽藍東北行五十餘里渡大河至布色羯邏伐底城周十四五里居人殷盛閭閻洞連城西門外有一天祠天像威嚴靈異相繼
성의 동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만든 것으로,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곳이다. 옛 성현들 가운데 중인도로부터 내려와 중생을 인도하였다는 일화가 이 땅에는 참으로 많다. 즉 벌소밀달라(伐蘇蜜呾羅)당나라 말로는 세우(世友)이며 구역에서는 화수밀다(和須蜜多)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67)논사가 이곳에서 『중사분아비달마론(衆事分阿毘達磨論)』68)을 지었다.
032_0386_c_20L城東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過去四佛說法之處先古聖賢自中印度降神導物斯地寔多卽伐蘇蜜呾羅唐言世友舊曰和須蜜多訛也論師於此製『衆事分阿毘達磨論』
032_0387_a_02L성의 북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에 옛 가람이 있는데 정원과 건물은 이미 황량해졌고 승도들은 아주 적다. 이들은 모두 소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르고 있다. 달마달라다(達磨呾邏多)69)당나라 말로는 법구(法救)이고 구역에서는 달마다라(達磨多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논사가 이곳에서 『잡아비달마론(雜阿毘達磨論)』70)을 지었다.
032_0387_a_02L城北四五里有故伽藍庭宇荒涼徒寡少然皆遵習小乘法敎卽達磨呾邏多唐言法救舊曰達磨多羅訛也論師於此製『雜阿毘達磨論』
가람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수백 척에 이르며 무우왕이 만든 것이다. 나무를 조각하거나 돌에 무늬를 새긴 솜씨는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이곳은 석가불께서 이전에 국왕이 되셔서 보살행을 닦던 곳인데 중생이 원하는 대로 은혜롭게 베풀되 싫증낸 일이 없었으며, 몸을 희생하여도 마치 계속 남아있는 것처럼 보시행을 하면서 이 국토에서 천 생(千生) 동안 왕이 되었으니, 즉 이 승지(勝地)에서 ‘천 생 동안 자신의 눈을 희사한 것[千生捨眼]’이다.71)
032_0387_a_06L伽藍側有窣堵波高數百尺無憂王之所建也雕木文石頗異人工是釋迦佛昔爲國王修菩薩行從衆生欲惠施不倦喪身若遺於此國土千生爲王卽斯勝地千生捨眼
눈을 버린 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만든 솔도파가 두 기 있다. 각각 높이가 백여 척에 이르는데 오른쪽의 것은 범왕(梵王)이, 왼쪽의 것은 천제(天帝)가 세운 것72)이다. 미묘하고 진귀한 보배로 탑을 장식하고 있는데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그 보배는 변하여 돌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기단[基]은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높이 솟아있다.
032_0387_a_11L捨眼東不遠有二石窣堵波各高百餘尺右則梵王所立左乃天帝所建以妙珍寶而瑩飾之如來寂滅寶變爲石基雖傾陷尚曰崇高
범왕과 천제가 세운 솔도파에서 서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또 다른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석가여래께서 귀자모(鬼子母)73)를 교화하여 두 번 다시 사람을 살해하지 못하게 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다.
032_0387_a_15L釋窣堵波西北行五十餘里有窣堵波是釋迦如來於此化鬼子母不害人故此國俗祭以求嗣
귀자모를 교화한 곳에서 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상막가(商莫迦)구역에서는 영마보살(暎摩菩薩)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보살이 앞 못 보는 부모를 지극하게 모시고 부양하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과일을 따다가 잘못하여 사냥하러 나온 왕의 독화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을 받은 천제가 약을 내려주었고, 그의 덕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이내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032_0387_a_18L化鬼子母北行五十餘里有窣堵波是商莫迦菩薩舊曰映摩菩薩訛也恭行鞠養盲父母於此採菓遇王遊獵毒矢誤至誠感靈天帝傅藥德動明聖卽復蘇
032_0387_b_02L상막가보살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동남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발로사성(跋虜沙城)74)에 도달하게 된다. 성의 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소달나(蘇達拏)당나라 말로는 선아(善牙)라고 한다75)태자가 부왕의 큰 코끼리를 바라문에게 베풀었다가 그 책임을 물어서 축출당하게 되자, 나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성문을 나서다가 이곳에서 작별을 고하였다. 그 옆에는 50여 가람이 있는데 이곳에 사는 승려들은 모두 소승을 익히고 있다. 옛날 이습벌라(伊濕伐羅)당나라 말로는 자재(自在)라고 한다논사76)가 이곳에서 『아비달마명등론(阿毘達磨明燈論)』77)을 지었다.
032_0387_a_23L商莫迦菩薩被害東南行二百餘里至跋虜沙城城北有窣堵波是蘇達拏太子唐言善牙以父王大象施婆羅門譴被擯顧謝國人旣出郭門於此告其側伽藍五十餘僧竝小乘學也昔伊濕伐邏唐言自在論師於此製『阿毘達磨明燈論』
발로사성(跋虜沙城)의 동쪽문 밖에 가람이 하나 있는데 승려들이 50여 명 살고 있고 이들은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솔도파78)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소달나태자가 축출당하여 탄다락가산(彈多落迦山)79)구역에서는 단특산(檀特山)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있었는데 바라문이 그의 아들과 딸을 원하자 이곳에서 그들을 팔았다.
032_0387_b_07L跋虜沙城東門外有一伽藍僧徒五十餘人竝大乘學也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立昔蘇達拏太子擯在彈多落迦山舊曰壇特山訛也婆羅門乞其男女於此鬻賣
발로사성의 동북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탄다락가산에 이르는데 고개 정상에 무우왕이 세운 솔도파가 있다. 소달나태자가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태자가 이곳에서 아들과 딸을 바라문에게 보시하였다. 바라문은 그 자식들을 매질하였는데 그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물들였다. 그래서 지금도 풀과 나무들이 진홍빛을 띠고 있다. 바위틈에 있는 석실은 태자와 태자비가 선정을 닦던 곳이다. 계곡 사이에는 숲이 있는데 나무들이 가지를 드리워서 마치 휘장을 친 것과 같다. 이곳은 모두 태자가 옛날에 노닐던 곳이다. 이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돌로 지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옛 선인(仙人)80)이 살던 곳이다.
032_0387_b_12L跋虜沙城東北二十餘里至彈多落迦山嶺上有窣堵波無憂王所建達拏太子於此棲隱其側不遠有窣堵波太子於此以男女施婆羅門羅門捶其男女流血染地今諸草木猶帶絳色巖閒石室太子及妃習定之處谷中林樹垂條若帷竝是太子昔所遊止其側不遠有一石廬卽古仙人之所居也
032_0387_c_02L선인이 살던 암자에서 서북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작은 산을 하나 넘어서 거대한 산에 이르게 된다. 산의 남쪽에는 가람이 있는데 승도의 수는 아주 적고, 그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다. 그 가람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독각선인(獨角仙人)이 살던 곳이다. 선인은 음란한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신통력을 잃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타고 성읍으로 돌아왔다.81) 옛날 파라니사국(婆羅痆斯國)에서 사슴으로부터 태어나 머리에 뿔이 하나 있는 사람이 우연히 신통을 나타내서 비를 내리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국왕은 현상금을 내걸고 비 내리는 법을 두루 물었다. 그때 선다(扇多)라고 하는 음녀(淫女)가 5백 명의 미녀를 데리고 독각선인에게 다가갔다. 어느 날 선인에게 약주를 먹인 뒤에 유혹하여서 신통력을 잃게 하는 것에 성공하여 7일 낮 7일 밤 동안 연이어 비를 내리게 하였다. 선다는 선인과 함께 파라니사성으로 나가서 도중에 짐짓 병이 든 척하였다. 그러자 선인은 정말로 병에 걸렸다고 믿고서 선다를 어깨에 태우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다. 현장은 이 설화의 무대를 건타라(健馱邏)로 비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설화도 불교 조각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032_0387_b_21L仙廬西北行百餘里越一小山至大山山南有伽藍僧徒尟少竝學大乘側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昔獨角仙人所居之處仙人爲婬女誘亂退失神通婬女乃駕其肩而還城邑
발로사성(跋虜沙城)의 동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높은 산82)에 이른다. 산에는 푸른 돌로 된 대자재천부상(大自在天婦像)이 있다. 즉 비마천녀(毘摩天女)83)이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천상(天像)은 저절로 생겨났다고 한다. 신령스러운 기적이 많이 일어나므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인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복을 구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4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천신의 모습을 보기 원하는 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7일 동안 음식을 끊으면 천신의 모습을 간혹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구하고 원하는 일들은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산 아래에는 대자재천사(大自在天祠)가 있는데 몸에 재를 바른 외도[塗灰外道]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032_0387_c_03L跋虜沙城東北五十餘里至崇山有靑石大自在天婦像毘摩天女也聞諸土俗曰此天像者自然有也異旣多祈禱亦衆印度諸國求福請貴賤畢萃遠近咸會其有願見天神形者至誠無貳絕食七日或有得見求願多遂山下有大自在天祠塗灰外道式修祠祀
비마천사(毘摩天祠)에서 동남쪽으로 1백 50리를 가다 보면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84)에 이르게 된다. 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남쪽으로는 신도하(信度河)에 접해 있다. 성에 사는 사람들은 풍요로우며 재물과 보화가 넘쳐난다. 여러 지방의 진귀한 물건들이 대부분 이곳에 모인다.
032_0387_c_11L毘摩天祠東南行百五十里至烏鐸迦漢荼城周二十餘里南臨信度河居人富樂寶貨盈積諸方珍異多集於此
오탁가한다성에서 서북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사라도라읍(娑羅覩邏邑)에 이른다. 이곳은 「성명론(聲明論)」을 지은 파니니(波儞尼)85) 선인(仙人)이 태어난 곳이다. 아주 먼 옛날에는 문자가 아주 많았지만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세계가 공허하게 황폐해졌다. 장수제천(長壽諸天)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교화하여 이로 말미암아 문자와 전적[文籍]이 생겨나게 되었다.
032_0387_c_15L烏鐸迦漢荼城西北行二十餘里娑羅睹邏邑是製『聲明論』波你尼仙本生處也遂古之初文字繁廣時經劫壞世界空虛長壽諸天降靈道俗由是之故文籍生焉
이때 이후로 자원(字源)이 범람해지자 범왕(梵王)과 천제(天帝)는 규칙을 만들어서 그 때를 맞추었다. 그런데 이도(異道)의 여러 선인(仙人)들이 각기 문자를 만들어내자 사람들은 서로 그 뜻을 서술하고, 앞다투어 전해진 문자를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언어를 쓰고 자세하게 연구해 내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032_0387_c_20L自時厥後其源泛濫梵王天帝作則隨時異道諸仙各製文字人相祖述競習所傳學者虛功難用詳究
032_0388_a_02L한편, 사람들의 수명이 백 세가 되었을 때86) 파니니 선인이 세상에 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사물에 두루 통하였는데 시대가 경박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서, 근거 없고 거짓된 것은 깎아내고 어지럽게 뒤섞인 것은 삭제하고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을 노닐며 도를 묻다가 자재천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마침내 술작(述作)의 뜻을 말하자 자재천이 말하였다.
“갸륵한 일이다. 나도 마땅히 그대를 도우리라.”
032_0387_c_23L人壽百歲之時有波你尼仙生知博物愍時澆薄欲削浮刪定繁猥遊方問道遇自在天申述作之志自在天曰盛矣哉吾當祐汝
선인은 가르침을 받고서 물러갔다. 그리하여 이에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사유하며 모든 언어들을 두루 모아서 선별하였다. 마침내 자서(字書)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천 개의 각 게송이 갖추어져 있으며, 게송은 32개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고금의 모든 문자와 언어를 살펴서 총괄한 것이다. 그가 이것을 왕에게 진상하자 왕이 매우 진기하게 여겨서 두루 익히고 전할 것을 전국에 명하였다. 그리고 잘 외우고 쉽게 익히는 자에게는 1천 금전을 상으로 내렸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 전수하여 당시에 성행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도읍에 사는 모든 바라문들은 학문이 뛰어나고 재주가 비범하였으며 사물에 두루 박식하며 뛰어났다.
032_0388_a_04L仙人受敎而退於是硏精覃思採摭群言作爲字書備有千頌頌三十二言矣究極今古摠括文言封以進上王甚珍異下令國中普使傳習有誦通利賞千金錢所以師資傳授盛行當世故此邑中諸婆羅門碩學高才博物强識
파라도라읍 가운데에 솔도파가 있는데 나한(羅漢)이 파니니 선인의 후진을 교화하던 곳이다. 여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5백 년이 흘러 큰 아라한이 나왔는데 가습미라국에서 유화(遊化)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범지(梵志)87)가 어린 아이를 때리며 훈계하는 것을 보고서 범지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이 아이를 괴롭히십니까?”
032_0388_a_10L娑羅睹邏邑中有窣堵波羅漢化波你尼仙後進之處如來去世垂五百年有大阿羅漢自迦濕彌羅國遊化至此乃見梵志捶訓稚童時阿羅漢謂梵志曰何苦此兒
범지가 답하였다.
“성명론(聲明論)을 익히게 하였는데 학업이 일정하게 진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032_0388_a_15L梵志曰令學『聲明論』業不時進
아라한이 빙그레 웃자 늙은 범지가 말했다.
“무릇 사문이란 자비로써 중생을 위하고 만물이 다치는 것을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지금 웃고 있으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032_0388_a_16L阿羅漢逌爾而笑梵志曰夫沙門者慈悲爲情愍傷物仁今所笑願聞其說
아라한이 말했다.
“이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자칫 깊은 의혹에 이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일찍이 파니니 선인이 성명론을 지어 세상에 가르침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032_0388_a_18L阿羅漢曰不容易恐致深疑汝頗嘗聞波你尼仙製『聲明論』垂訓於世乎
바라문이 답하였다.
“이 고을의 아이들은 파니니 선인의 후진이며, 그의 덕을 추앙하여 상(像)을 세웠으니 그것은 지금도 있습니다.”
032_0388_a_20L婆羅門曰此邑之子後進仰德像設猶在
032_0388_b_02L아라한이 말했다.
“지금 그대가 때리는 이 아이가 곧 그 선인입니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세상의 전적을 반복하여 탐독하였지만 그것은 다만 이론(異論)을 말한 것이었을 뿐 진리를 궁구하지는 못하였으며, 신령스러운 지혜를 헛되이 버려두고 정처없이 흘러 다니면서 쉬지 못하다가 이제야 다른 선한 일 덕분에 이렇게 그대의 사랑스런 아이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처럼 세상의 전적과 문장들은 부질없는 공적을 쌓느라 피로할 뿐이니, 어찌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과 복된 지혜와 중생을 향한 가피88)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032_0388_a_21L阿羅漢曰今汝此子卽是彼仙猶以强識翫習世典唯談異論不究眞理神智唐捐流轉未息尚乘餘善爲汝愛子然則世典文辭徒疲功績豈若如來聖敎福智冥滋
예전에 남쪽 바닷가에 고목이 하나 있었는데 5백 마리의 박쥐가 그 나무에 구멍을 내어서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러 장사꾼들이 이 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에 몹시 매서운 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굶주리고 얼어붙었는지라 나무와 풀을 쌓아 놓고 그 밑동에 불을 붙였습니다. 연기와 불길이 점점 치성해지자 고목에도 불이 옮겨 붙게 되었습니다.
032_0388_b_03L曩者南海之濱有一枯樹五百蝙蝠於中穴居有諸商侶止此樹下時屬風寒人皆飢凍聚積樵蘇薀火其下煙焰漸熾枯樹遂燃
한편 이때 장사꾼 가운데 한 사람이 밤중에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암송하였습니다. 나무에 살고 있던 박쥐들은 비록 불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법의 소리를 사랑하고 좋아하였으므로 고통을 참아내며 불길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이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업(業)에 따라 다시 태어나 모두 사람의 몸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출가하여 수학하니, 이전에 법의 소리를 들은 덕분에 아주 총명하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성과(聖果)를 증득하게 되었으며 세상의 복전이 되었습니다.
032_0388_b_06L時商侶中有一賈客夜分已後誦『阿毘達磨藏』彼諸蝙蝠雖爲火困愛好法音忍而不去於此命終隨業受生俱得人身捨家修學乘聞法聲聰明利智竝證聖果爲世福田
근래에 가니색가왕이 협존자와 함께 5백 명의 성현들을 불러 모아서 가습미라국에서 『비바사론』을 지었을 때89)에 이들이 모두 고목 속에 살고 있던 5백 마리의 박쥐들이었던 것입니다. 나같이 불초한 사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니, 이들에게는 우열의 구별이 있고 세상에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차이가 크게 있습니다. 그대가 지금 자식을 사랑한다면 출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출가의 공덕은 능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032_0388_b_11L近迦膩色迦王與脅尊者招集五百賢聖於迦濕彌羅國作『毘婆沙論』斯竝枯樹之中五百蝙蝠也余雖不肖是其一數斯則優劣良異飛伏懸殊仁今愛子可許出家出家功德言不能述
이렇게 아라한은 말을 마치고 나서 신통을 나타내 보여 홀연히 사라져 모습을 감추었다. 바라문이 이에 경이로운 마음을 크게 일으키고 오래도록 이 일에 감탄하고 인근의 마을에 낱낱이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이를 출가시켜 수학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믿음을 돌이켜서 3보를 숭앙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그 교화를 따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믿음이 더욱 돈독하다.
032_0388_b_16L時阿羅漢說此語已示神通事因忽不現婆羅門深生敬異歎善久之具告鄰遂放其子出家修學因卽迴信重三寶鄕人從化於今彌篤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으로부터 북쪽으로 산을 넘고 내를 건너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오장나국(烏仗那國)당나라 말로는 원(苑)이라고 한다. 옛날 윤왕(輪王)이 새나 짐승을 기르던 동산이다. 구역에서는 오장(烏場)이라고 하거나 또는 오다(烏茶)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게 된다.
032_0388_b_20L從烏鐸迦漢荼城北踰山涉川行六百餘里至烏仗那國唐言菀昔輪王之菀囿也舊云烏場或曰烏茶皆訛北印度境
大唐西域記卷第二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고대 이란 지방으로부터 침입한 아리안족이 최초로 자리잡았던 곳이 Shindhu(지금의 인더스) 강가이다. 이에 따라 그 지역과 사람들을 통칭하여 Shindhu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사실상 이 명칭은 외국에서 인도를 부르는 데 주로 사용되어 온 이름이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전체로서 부르는 용어는 섬부주(贍部州, jambu-dvipa) 정도였다. Shindhu라는 말은 고대 이란어의 특성에 따라 Hindu로도 통용되었는데, 후일 페르시아인들로부터 이 Hindu가 그리스어에 전해졌으나, 그리스어에 H가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국명 India나 강 이름 Indus가 여기에서부터 유래하게 되었다.
  2. 2)이 구절이 바로 현재 사용되는 인도(印度)라는 단어의 연원이다. 현장이 착각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범어 단어 Indu로서, 달을 뜻하는 명사이다. 앞의 각주 1)에서 언급했던 사실을 현장은 알지 못하고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한 또 하나의 지리학적 증거로, 『대당서역기』 본문에서 인더스 강을 신두하(信度河)라고 하여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인도를 지칭했던 이전의 표현인 신독(申毒)이나 현두(賢豆) 또한 원음에 가깝다. 아마 현장은 명칭만이 전해지고 어원이나 뜻은 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나름대로 단어의 어원을 추리했던 것 같다. 인도의 현재 중국어 표준 발음은 ‘인뚜’와 비슷하게 난다. 현장의 이러한 착오에 대하여, 조금 늦게 인도를 여행했던 의정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권2에서 “마치 외국에서 우리 대당(大唐)을 지나(支那, china)라고 부르는 것과 같아서 그저 명칭일 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쨌든 이 인도라는 단어는 그 후로 굳어져 오늘에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3. 3)5인도(印度) 또는 5천축(天竺)ㆍ5인(印)ㆍ5천(天)이라고도 부른다. 고대 인도인은 일찍부터 인도라는 국토의 생김새나 너비에 대해서 대단히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9분(分) 또는 5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5분으로 나눈 것은 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ㆍ중(中) 인도를 말한다.
  4. 4)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말하며 이들은 4성(姓)에 포함되지 않는 최하층의 사람들이다.
  5. 5)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가로놓은 나무를 말한다.
  6. 6)인도의 문자는 보통 ‘범자(梵字)’라고 일컬어지고 있듯이 범왕천제(梵王天帝 : Brahma-deva)가 만든 것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은 Semitic계(係) 문자에서 기원하여 기원전 500년 무렵에 47자모(字母)를 완성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현장이 방문할 당시 인도는 실담문자기(悉曇文字期:6세기)였지만 북서부 인도는 나가리(데바나가리) 문자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7. 7)『자은전』 권3에 의하면, 현장은 범자범어(梵字梵語)를 중인도의 나란타에서 학습하였다. 그가 교재로 택한 책은 본래는 비야갈랄남(毗耶羯剌諵, vyākaraṇa, 聲明記論) 백만 송(誦)이었던 것을 제석천이 십만 송으로 만들고, 나아가 건타라국의 파니니(Pāṇini)가 8천 송으로 간략하게 만든 것이다. 그가 지은 Ashṭādhāyayi 『8장』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전 범어 문헌의 최고 권위서이다.
  8. 8)범어로는 nīla-piṭa를 음사한 것으로 nīla는 청(靑), piṭa는 장(藏)이며 기록 또는 왕의 칙명을 집록한 것이라는 뜻을 가진 이른바 Blue Annals이다.
  9. 9)범자(梵字)의 자모음을 배합하고 철자(綴字)하는 방법을 ‘실담장(悉曇章)’이라고 하며, 아동기에 수학하는 것이었다.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는 47개의 자모음을 18장(章)으로 나누었는데 현장이 말하는 12장은 의장의 18장보다 더 간략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10. 10)오명대론(五明大論)이란 범어로 pañca vidyāsthānāni를 번역한 말로써 다섯 가지의 학업이라는 뜻이다.
  11. 11)소리에 관련된 학술이란 뜻으로 문자와 음운 및 화법의 학문을 가리킨다.
  12. 12)공예(工藝)ㆍ음악ㆍ미술ㆍ산술ㆍ점술ㆍ주술 등에서부터 평상시의 의식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학술과 기예를 망라한 것이다.
  13. 13)언어의 적부(適否), 사고의 정사(正邪)를 논구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올바른 주장을 깨닫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4. 14)다른 4명(明)이 형이하학적인 학문과 기예를 다루는 것에 비해서 이것은 5승(乘:人ㆍ天ㆍ聲聞ㆍ緣覺ㆍ菩薩)의 인과의 이치를 나타내 보여 주는 제불(諸佛)의 말씀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말한다.
  15. 15)범어로는 veda이다. 바라문의 성전으로 옛날 부분은 태고에 아리야 인종이 인도 오하(五河:Panjab) 지방에 이주할 당시(기원전 1500~1000년)의 것을 포함하는 자연숭배 찬가로 세계 최고(最古)의 문학으로 4베다가 있다. 첫째는 이구(梨俱)베다 ŕe-veda, 둘째는 삼마(三摩)베다 sāma-veda, 셋째는 야유(夜柔)베다 yajur-veda, 넷째는 아달바(阿闥婆)베다 stharva-veda이다. 각 베다에는 각각 부(副)베다 upa-veda가 있다. 바로 이어서 본문에 현장이 거론한 4베다는 이 베다와 부베다를 혼용하여 열거하고 있는 듯하다. 현장의 이 같은 설명에 대해 학자들은 현장이 베다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착각은 중국에서 드물지 않다. 더구나 베다를 종교로 설명하는 장이 아니라 교육을 설명하는 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가 당시 사회의 이른바 ‘왕자가 학습해야 할 과목(Rājavāhana)’과 혼동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추측된다. 그 과목은 Āyurveda(의학)ㆍDhaurveda(군사)ㆍGhandharvaveda(음악)ㆍSthāpatyaveda(건축)ㆍItihāsareda(문학ㆍ역사)이다.
  16. 16)이구(梨俱)폐다를 말하며 수(壽)ㆍ수명론(壽命論)이라고 번역되는 의서(醫書)이다.
  17. 17)야유(夜柔)폐다를 말하며 제사(祭祠) 등으로 번역되고, 공희(供犧)를 행하며 제사 지낼 때에 외는 주문(呪文)과 그 주석(注釋)을 모은 것이다.
  18. 18)삼마(三摩)폐다를 말하며, 평(平)ㆍ등(等)ㆍ가영명륜(歌詠明倫) 등으로 번역된다. 제사를 올릴 때 큰 소리로 외는 찬가와 그 가곡을 모은 것이다.
  19. 19)아달바(阿闥婆)폐다를 말하며 주(呪)ㆍ주술(呪術)ㆍ양재(穰災)등으로도 번역한다.
  20. 20)유나(維那)ㆍ지원사(知院事)라고도 불리며 절에서 승가 대중의 잡사 업무를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직책 명이다.
  21. 21)절에 있으면서 아직 출가하지 않고 중승(衆僧)들에게 급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특히 식사시에 급사하는 승려들을 말한다.
  22. 22)현장이 인도를 방문할 당시의 족성의 전체적인 숫자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족성은 계속 나누어져 오늘날에는 전(全) 카스트가 약 3천 종류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것은 더 나아가 2만 5천 이상의 아(亞)카스트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잡종(雜種) 계급이 가장 많다.
  23. 23)두 무릎과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것을 말한다.
  24. 24)두 무릎과 두 팔꿈치,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것을 말한다.
  25. 25)현재 인도 북부의 캐쉬미르 지역이다.
  26. 26)보릿가루로 만든 건조식품이다.
  27. 27)동(銅)과 노감석(爐甘石)을 합하여 정련한 쇠붙이를 말한다.
  28. 28)수정(水晶)의 일종이다.
  29. 29)람파국은 람파(籃婆)ㆍ람파(覽婆)ㆍ람파(嵐婆)로도 쓴다. 지금의 Lamghān(또는 Laghmān) 지방에 해당된다. 한편, 이 람파국에서부터 북인도의 경계가 시작되는데 개별적인 지리적 기사(記事)로서는 이 람파국에서부터 북인도로 들어간다. 현장이 말하는 ‘북인도’는 권4의 ‘설다도로국(設多圖盧國)’까지의 지역이다. 이 북인도 가운데 인더스강 이서(以西)를 ‘서북인도’라고 부른다. 인도적 풍토라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언어와 풍속이 상당히 다른 취향을 지니고 있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의 가필시국(迦畢試國)의 산악지대를 지나서 람파국의 평지에 들어서면 기후와 풍토, 산물이 모두 달라진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도 이 지역에서 인도 침략의 진용(陳容)을 재편성하고 전쟁의 승리를 신에게 기도하였으며 바블대제도 이곳을 ‘신세계의 입구’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로 다른 세계관을 띠고 있다.
  30. 30)람파국의 수도가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카블의 동남쪽 10킬로미터 떨어진 Logar강변에 있는 베그람(수도 또는 도시라는 의미인 듯함)이 아닐까 추측된다.
  31. 31)범어로는 nagarahāra이며 현재의 젤랄라바드(Jelālābād)를 중심으로 하는 카블강 유역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법현전』에는 나갈(那竭)로 표기되어 있다.
  32. 32)동쪽으로 흐르는 카블강 남안(南岸)에 있는 젤랄라바드시의 서남쪽 Chahār-bāgh에 가까운 Dasht-i-Begrām이라고 불리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은전』에는 연등불(燃燈佛)의 전설에 의해서 ‘연등성(燃燈城, Dipavatī)’으로 불리고 있다.
  33. 33)연등불은 연등(煙燈)ㆍ정광(錠光)이라고도 표기하며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의 호칭이다. 석가모니가 전생에 유동(儒童)이었을 때 연등불을 만났으며, 어떤 바라문여인으로부터 다섯 송이의 연꽃을 사서 연등불에게 공양을 올렸고 자기의 머리카락을 진흙에 덮어서 연등불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시게 하였다. 그러자 연등불은 장래 석가모니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내리셨는데, 이 전설은 불교 조각에 있어 매우 좋은 소재가 되고 있으며 예전에는 산치의 탑문(塔門)에 그림으로 그려진 이래 특히 간다라 조각에서 자주 보여지는 것이다.
  34. 34)인도의 시간 구분법으로 하나의 세계가 성립해서 다음 세계가 성립하기까지의 거대한 시간을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4단계[四劫]의 무량한 시간으로 나누었다. 괴겁은 제3기에 해당하여 세계가 파괴를 향해 가는 시기이다.
  35. 35)구파라(瞿波羅)는 양(梁)나라 승가바라(僧伽婆羅)가 번역한 『공작왕주경(孔雀王咒經)』과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도 등장하는 말로 현장이 새롭게 번역한 말은 아니며, 소먹이는 목동이란 뜻이다. 이 동굴이 있었던 장소는 젤랄라바드의 남쪽 절벽을 연한 Chahār-bāgh 마을의 남쪽에 있는 Syāh-sang(검은 돌)의 암벽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남겨둔 동굴[留影窟] 자체의 위치에 관해서는 오늘날 침식 등으로 인해 땅의 요철[凹凸]이 심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부근 5백미터의 범위 안에 5~6개의 사원과 그 갑절에 해당하는 탑이 있으므로 이 지역이 바로 그 성지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6. 36)범어로는 bhadra-kalpa이다. 3겁(劫)의 하나로 과거의 주겁(住劫)을 장엄겁이라 하고, 미래의 주겁을 성수겁(星宿劫), 현재의 주겁을 현겁이라고 한다.
  37. 37)부처님께서 독룡(毒龍)에게 항복받고 용왕의 청에 의해서 굴 안에 그림자를 남겨 주었다는 전설은 동진(東晋)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제7에 등장한다.
  38. 38)보통 9층 정도 되는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바퀴 모양의 장식으로 상륜(相輪)ㆍ공륜(空輪)ㆍ금당(金幢)이라고도 한다.
  39. 39)5온(蘊)ㆍ12처(處)ㆍ18계(界), 즉 3과(科)를 간략하게 이르는 말이다. 모든 존재의 이법(理法)을 파악하여 설명하려는 분류체계이다.
  40. 40)젤랄라바드 남쪽 약 8킬로미터에 있는 핫다(Haḍḍa)라는 작은 마을로서 지금은 나무가 전혀 자라고 있지 않는 황량한 폐허가 되어 버렸다. 부근에는 Teppe Kalan 등의 많은 유적지가 있는데, 이곳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유적이다.
  41. 41)『법현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2. 42)바라문을 번역한 말인데 여기에서는 어쩌면 사찰의 잡무를 돌보고 있는 정인(淨人)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43. 43)범어로는 gāndhāra이며 건타위(乾陀衛)ㆍ건타월(健陀越)ㆍ향행국(香行國)ㆍ향편국(香遍國)이라고도 한다. 카블강 하류, 아프가니스탄 영(領)의 Kunar 강과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대충 지금의 페샤와르(Peshāwar) 현(縣)에 해당한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이래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왕래가 많으며 쿠산왕조 시절에는 그 중심지가 되었고 4세기에는 소월지(小月氏), 5세기에는 White Hun족의 침입 하에 들어갔으며, 7세기 당나라 초기에는 가필시국의 치하에 있다가 8세기 혜초가 인도를 방문할 당시에는 돌궐족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44. 44)범어로는 Puruṣapura이다. 쿠산왕조 시절에 건설되었으며 카블강 남안(南岸)에 있는(간다라의 고대도시 선견성(善見城)은 북안(北岸)에 있다) 지금의 파샤와르이다.
  45. 45)나라연천(那羅延天)은 비슈누신[毗濕拏神]의 권화(權化)이다. 현장이 인도를 방문할 당시 간다라 지방은 시바[大自在天]를 섬기는 도회(塗灰)외도가 있었고, 나라연천사(那羅延天祠)는 중인도 전주국(戰主國)에 있다고 현장은 본서 제7권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통해 볼 때 나라연은 신의 이름이기보다는 학자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46. 46)범어로는 Asaṅga이다. 불멸 후 1천 년 무렵의 사람으로 북인도 부루사부라성의 바라문 출신이다. 처음 소승화지부(小乘化地部)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뒤에 중인도 아유차국의 강당에서 네 달 동안 밤마다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는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 5부의 대론(大論)은 이때에 미륵보살이 설한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무착은 아유차ㆍ교상미에서 법상대승(法相大乘)의 교리를 선양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논소를 지어 여러 대승경을 해석하였다. 75세에 왕사성에서 죽었다.
  47. 47)범어로는 Vasubandhu이다.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성 사람으로 4~5세기 경의 학승이다. 무착의 동생이자 사자각의 형이다. 처음에 형과 함께 소승의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많은 저술을 통해 대승을 비방하다가 마침내 무착의 권유에 의해 대승에 들어가 아유차에서 그 선전에 노력하였다. 아유차 국왕 초일(超日)ㆍ신일(新日)은 차례로 이를 회호하여 크게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80세를 일기로 아유차국에서 죽었다.
  48. 48)범어로는 dharmatrāta이며 달마달라다(達磨呾邏多), 달마달라다(達磨怛邏多)ㆍ달마다라(達磨多羅)ㆍ담마다라(曇摩多羅)라고도 표기한다. 설일체유부의 논사이며 법승(法勝)의 문하에 속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뒤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49. 49)말노갈라타(末笯曷剌他)라고 한다. 말노갈라타는 뒤에 나올 아질다왕(阿迭多王)과 동시대 인물이므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엽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뒤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50. 50)범어로는 Pārśva이며 파사(波奢)라고도 한다. 설일체유부의 논사이며 부법장(付法藏)의 제9조(祖)이고 선종전법(禪宗傳法)의 제10조이다. 본서에는 푸르샤푸라 사람이라고 하고 있지만 선종 계통의 서적에는 중인도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있다. 중인도 마게타국 화씨성의 마명을 굴복시켜서 제자로 삼았고 가니색가왕의 명에 의해서 카시미르에서 5백 명의 현성들과 함께 『대비바사론』을 지었다.
  51. 51)지금의 페샤와르 현으로부터 그 동쪽으로 인접해 있는 카그시라 지방, 북쪽에 접해 있는 수와트 현 남부, 나아가 아프가니스탄의 일부에 걸친 고대 간다라국과 그 인접 지역에서는 불교가 번영했음을 증명해 주는 불탑이나 승원의 유적이 아주 많이 산재해 있다. 1849년 펀잡주가 영국령에 속한 이래 그 대부분의 유적은 도굴꾼의 손에 의해 약탈되었다.
  52. 52)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생전에 사용하셨던 발우는 마게타국 화씨성(華氏城)에 전해지고 있었지만 북천축(北天竺) 소월지국(小月氏國)의 왕이 화씨성을 공략해서 부처님의 발우와 마명보살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아마 카니시카왕이나 또는 그 이전에는 북인도에서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파라사국, 즉 페르시아국까지 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53. 53)보리수의 원래 이름이 바로 이 비발라수이다. 범어로는 pippala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bodhi]를 얻으셨다고 하여, 그 후로 보리수(菩提樹)라고 불리게 되었다.
  54. 54)석가모니불 이전에 출세(出世)하신 부처님으로는 비바시불(毘婆尸佛)ㆍ시기불(尸棄佛)ㆍ비사부불(毘舍浮佛)ㆍ구류손불(拘留孫佛)ㆍ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ㆍ가섭불(迦葉佛)이 계시고 석가모니불을 포함하여 7불(佛)이라고 한다. 이 중에 앞의 세 부처님을 과거장엄(過去莊嚴)의 3불(佛)이라고 하고 뒤의 4불(佛)을 현재현겁(現在賢劫)의 4불(佛)이라고 한다.
  55. 55)현겁 동안에는 천 분의 부처님께서 출세하실 것인데, 그 중에 이미 네 분의 부처님께서 출세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부터 세상에 출현하실 부처님은 9백96분이 된다.
  56. 56)이것이 저 유명한 페샤와르의 동남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Shāh-jī-kī-Ḍheri(大王塚)인 가니색가대탑(迦膩色迦大塔)으로서 이른바 ‘작리부도(雀離浮圖)’란 이 탑을 가리킨다. 지금도 탑지(塔址)는 남아있지만 그 위에 어떤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는지는 오늘날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이 탑지의 지하로부터는 높이 19.7센티미터, 직경 12.7센티미터의 동제(銅製) 원통형 사리용기를 발굴할 수 있었는데, 이 용기는 오늘날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나 많은 문제점을 불러일으키는 유명한 유물이다.
  57. 57)이른바 가니색가가람(迦膩色迦伽藍)을 말한다. 오늘날 페샤와르 시 동북쪽에 솟아있는 오래된 건축물인 Ghor Khatti는 본래는 불교사원이었는데 이어서 힌두사원으로서 탈바꿈하여 번영을 누린 것이며, 이것이 가니색가왕의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8. 58)중생이 생사에 유전하는 미(迷)의 세계로 유정(有情)의 경계를 셋으로 나눈 것이다.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59. 59)소승논부의 서적으로 30권에 달한다. 세친보살이 짓고 당나라 현장이 번역하였으며 줄여서 『구사론』이라고도 부르고 『대법장(對法藏)』으로 번역한다. 유부(有部)에 기초를 두고 광대하게 여러 부파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 기초학의 연구서로서 인도는 물론이고 널리 중국ㆍ한국ㆍ일본에서도 연구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60. 60)말노갈라타는 뒤에 나올 아질다왕(阿迭多王)과 동시대 인물이므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엽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61. 61)불멸 후 4백 년에 가니색가왕이 5백 명의 아라한을 카시미르에 집결시켜서 행한 제4결집 때에 편찬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백 권을 말한다. 유부(有部)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파의 연구서이다.
  62. 62)5세기 무렵 중인도에서 일어난 굽타왕조에는 Vikramāditya라는 이름을 지닌 왕이 몇 사람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아마도 굽타왕조 제3대째인 챤드라굽타 2세(381년 이전에 즉위, 413~414에 사망)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동남인도와 서북인도를 정복하여 전 인도를 통치하였으며 서구와도 교류하였고 굽타기원(紀元)을 세워서 이른바 굽타문화의 융성을 가져온 인물이다.
  63. 63)원문에 사력(四力)이라고 되어있으나 도저히 뜻이 통하지 않는다. 4방(方)의 오자로 추측된다. 여기서는 4방으로 번역하였다.
  64. 64)이 때의 왕은 초일왕(超日王)의 아들인 쿠마라굽타 1세, 즉 유일왕(幼日王)으로서 414년에 즉위하여 40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왕위에 있었다.
  65. 65)큰 강이란 스와트(Swat)강을 말한다.
  66. 66)범어로는 puṣkarāvatī이며 오늘날 스와트강과 카블강의 접합점에서 조금 상류에 위치한 스와트강 좌안(左岸)에 있는 Chārsadda(Chārsada)이다. 페샤와르로부터 17마일 떨어진 지점이다. 알렉산더 대왕 침입 때부터 법현(法顯)의 인도 방문 시에도 간다라의 수도였다.
  67. 67)범어로는 vasumitra이며 벌소밀다라(伐蘇蜜多羅)ㆍ파밀다(婆蜜多)ㆍ파수밀다(婆修蜜多)ㆍ파수밀(婆須蜜)ㆍ화수밀(和須蜜)이라고도 표기하며 천우(天友)라고도 번역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1조(祖)이며, 비사론(婆沙論)의 4대 논사 가운데 첫 번째 인물이며, 이른바 카시미르의 제4결집을 주도한 사람이다.
  68. 68)유송(劉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와 보리야사(菩提耶舍)의 공역(共譯)이며 구역(舊譯)이라고 한다. 현장이 번역한 것도 있는데, 『아비달마품류족론(阿毘達磨品類足論)』이라는 이름이며 신역(新譯)이라고 불린다. 소승논부의 서적이며 유부의 설에 근거하고 있다. 문답분별(問答分別)을 주로 하며, 『아비달마육족론(阿毘達磨六足論)』가운데 가장 종합적인 저작이다.
  69. 69)앞의 본문 권2 주 49) 참고.
  70. 70)보통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줄여서 『잡심론(雜心論)』이라고도 불리는 논서이다. 이 『잡심론』은 유송(劉宋) 승가발마(僧伽跋摩) 등이 번역한 것이다.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보충하여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설명한 것으로 번간(繁簡)의 중용을 지키기 때문에 각지에서 크게 성행되었다.
  71. 71)『미륵보살소문본원경(彌勒菩薩所問本願經)』에 등장하는 석가모니불의 본생담 가운데 하나로, 부처님께서 과거에 월명왕(月明王)이라는 이름의 왕이었을 적에 맹인을 만났는데, 그가 왕의 눈을 뽑아 자기에게 주어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므로 그대로 두 눈을 뽑아 보시하셨다는 일화이다.
  72. 72)범왕(梵王)은 범천왕(梵天王)으로서 하늘 세계를 다스리고 천제(天帝)는 제석천을 말하며 인간 세상을 다스린다. 이 둘은 함께 부처님과 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73. 73)범어로 hāritī이며 가리제(訶利帝)ㆍ가리저(訶利底) 등으로 표기되며, 가리제모(訶利帝母)라고도 한다. 청색(靑色)ㆍ황색(黃色)ㆍ청의(靑衣) 등으로 번역한다. 약차여신(藥叉女神)의 이름으로 환희모(歡喜母)ㆍ애자모(愛子母)ㆍ천모(天母)ㆍ공덕천(功德天)의 칭호가 있다. 『잡보장경(雜寶藏經)』 제9에 의하면 “귀자모는 노귀신왕(老鬼神王) 반저가(般闍迦)의 아내인데 만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제일 어린 자식의 이름은 빈가라(嬪伽羅)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귀자모는 다른 사람의 자식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처님께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빈가라를 발우 속에 숨기셨다. 그러자 귀자모는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서 자식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하는 수 없이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에 의지하러 찾아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자식을 만 명이나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자식을 잃어버린 것을 번민하고 있는 귀자모의 모습과 세상에서 몇 명밖에 자식을 두고 있지 않은 부모가 그 자식을 잡아먹히고 말 때의 괴로움 등을 대비하면서 세간의 부모의 마음을 귀자모에게 일러 주어 교화하셨다”고 한다.
  74. 74)원음은 varuṣapura이며 페샤와르의 동북동쪽 6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3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는 지금의 Shahbaz Garhi로 추측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매주 시장이 서는 지방 촌락에 지나지 않지만 일찍이는 Purṣapura와 나란히 간다라의 거대한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영하였다.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향하는 통과 지점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에 남아있는 남쪽 교외의 구릉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돌에 새겨진 카로슈티 문자의 아육왕 비문이나 근교의 사원 터, 또는 그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한 바블의 이야기도 그 옛날의 번영했던 시절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75. 75)이 외의 다른 문헌에서는 선아(善牙)가 선여(善與)로 되어 있다. 보시를 잘한다는 뜻의 번역이므로 선여로 보는 것이 옳다. 아(牙)자는 여(與)의 약자인 여(与)의 착오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원음은 Sudāna이다.
  76. 76)범어로는 īśvara이며 라(邏)는 라(羅)의 오사(誤寫)로 생각된다. 이 논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77. 77)이 책은 현재 장경(藏經) 속에는 찾아볼 수 없어서 이 논서를 지은 인물과 함께 어떤 내용의 저서인지 알 수 없다.
  78. 78)바라문이 소달나태자의 두 아이를 팔라고 하였던 장소는 Shahbaz Garhi로부터 동문을 나서서 수 킬로미터 가면 Hund로 가는 길의 남쪽에 현재 But Shahri라 불리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79. 79)범어로는 Daṇḍalka이며 형벌처(刑罰處)라는 뜻이다. 현재의 Mekha-Sanda 산이다.
  80. 80)태자가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이다.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에 의하면 단특산(檀特山)에 도착하여 산 속에 살고 있던 아주타(阿州陀) 도인을 만나는데, 이 도인은 오래도록 산에 살면서 현묘한 덕이 있었으므로 태자가 그 가르침을 따라서 수업하였다고 한다.
  81. 81)독각선인(獨角仙人)은 또는 일각선인(一角仙人)이라고도 한다. 범어로 ekaśṛṅga, 사슴의 뿔이란 뜻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7의 라후라모본생경(羅睺羅母本生經)에 의하면 이 이야기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82. 82)Shahbaz-Garhi로부터 동북동쪽으로 높은 구릉이 있다. Karamar(서있는 뱀이란 뜻의 토속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 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83. 83)대자재천(大自在天), 즉 시바신의 아내인 여신이다.
  84. 84)후세의 인더스강과 카블강의 합류지점의 동북쪽, Attock으로부터 16마일 상류에 있는 Ohind, Hund, Uṇḍ를 가리킨다. 이 지역에 관한 인더스강 도하점(渡河点)의 상황은 권3의 ‘발로라국(鉢露羅國)’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대군이 30일 동안 전쟁을 쉬고 그 후에 인더스강을 건넌 곳도 이곳이고, 가필시왕(迦畢試王)의 부도(浮都)가 세워졌던 곳과 또한 후에 토르코 및 아라비아의 압박을 받고서 가필시로부터 천도한 곳도 있다.
  85. 85)범어로는 Pāṇnini라고 한다. 그가 지은 Aṣṭādhyāyi(8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뜻에서 『팔장서(八章書)』라고도 번역되며 위에서 말하는 성명론이란 이 책을 가리킨다)는 고전 범어 문법서의 집대성이며 또한 세계 최고(最古)의 완전한 문전(文典)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략 기원전 4세기의 인물인데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86. 86)태초에는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 살이었는데 백 년이 지날 때마다 한 살씩 줄어든다고 한다.
  87. 87)범어로는 Brahmacārin이며 범사(梵士)라고도 쓴다. 정예(淨裔)ㆍ정행(淨行)이라고 번역한다. 바라문의 생활 가운데 4기(期)가 있는데 이것은 제1기로 스승에게 가서 수학하는 동안을 말한다.
  88. 88)불ㆍ보살이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위해 일종의 힘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89. 89)이른바 제4결집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