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唐西域記卷第十二

ABC_IT_K1065_T_012
032_0469_b_01L대당서역기 제12권
032_0469_b_01L大唐西域記卷第十二 二十二國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032_0469_b_02L三藏法師玄奘奉 詔譯
大摠持寺 沙門 辯機撰


12. 귀국길에 경유한 나라들22개국
032_0469_b_04L漕矩咤國
弗栗恃薩儻那國
安呾囉縛國
闊悉多國
活國
瞢揵國
阿利尼國
遏邏胡國
訖栗瑟摩國
鉢利曷國
呬摩呾羅國
鉢鐸創那國
淫薄健國
居勿反浪拏國
達摩悉鐵帝國
尸棄尼國
商彌國
朅盤陁國
烏鎩國
佉沙國
斫句迦國
瞿薩旦那國

1) 조구타국(漕矩陀國)
조구타국1)의 둘레는 7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학실나(鶴悉那)2)라고 부르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또는 학살라성(鶴薩羅城)3)을 도읍으로 삼기도 하는데 이 성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하며 이 두 성은 모두 견고하고 험준하다. 산과 강이 높고 가파르며 밭들도 높고 확 트인 곳에 위치해 있다. 농사는 때맞추어 파종하고 보리가 풍성하며 초목은 성글지만 꽃과 과일은 무성하다. 울금향(鬱金香)이 나기에 좋으며 흥구초(興瞿草)4)가 나는데 이 풀은 라마인도천(羅摩印度川)5)에서 자란다.
032_0469_b_13L漕矩咤國周七千餘里國大都城號鶴悉那周三十餘里或都鶴薩羅城城周三十餘里竝堅峻險固也山川隱軫疇壟爽塏穀稼時播宿麥滋豐草木扶疏花菓茂盛宜鬱金香出興瞿草草生羅摩印度川
학살라성 안에는 샘물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밭을 경작한다. 기후는 몹시 추우며 눈과 서리가 많이 내린다. 사람들의 성품은 경박하고 조급하며 남을 잘 속인다. 학예를 좋아하고 기술이 많고, 총기가 있긴 하지만 지혜롭지는 못하다. 이들은 아침마다 수만 마디의 문구를 외운다. 문자와 언어6)는 다른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허풍을 많이 떨며 그 말은 그다지 진실하지 않다. 비록 백신(百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3보를 공경한다.
032_0469_b_19L鶴薩羅城中踊泉流派國人利之以漑田也序寒烈霜雪繁多人性輕躁情多詭好學藝多技術聽而不明日誦數萬言文字言辭異於諸國多飾虛談成事實雖祀百神敬崇三寶
032_0469_c_02L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만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지금의 왕은 믿음이 독실하며 대대로 조상의 업을 이어받아서 좋은 복을 열심히 짓고 게다가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한다. 무우왕이 세운 솔도파가 십여 곳이 있다.
032_0469_c_02L伽藍數百所僧徒萬餘人竝皆習學大乘法今王淳信累葉承統務興勝福而好學無憂王所建窣堵波十餘所
천사 수십 곳이 있는데 이교도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이교도들 중에는 외도들이 많은데, 그 무리는 매우 세력이 강하며 수나천(䅳錫苟反那天)을 섬기고 있다. 이 천신은 옛날 가필시국 아로노산(阿路猱山)에서 이 나라의 남쪽 경계 수나희라산(䅳那呬羅山)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는 위엄을 부리기도하고 복을 베풀기도 하며 난폭한 일들을 저질렀다. 그를 믿고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경멸하는 자에게는 재앙을 안겼다. 그러므로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섬기고 신분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를 두려워해 기도하였다.
032_0469_c_05L天祠數十異道雜居計多外道其徒極盛宗事䅳錫茍反下同那天其天神昔自迦畢試國阿路猱山徙居此國南界䅳那呬羅山中作威作福爲暴爲惡信求者遂願輕蔑者招殃故遠近宗上下祗懼
풍속이 다른 이웃 나라에서도 임금과 신하 그리고 뭇 벼슬아치들이 해마다 길일이면 약속을 하지 않아도 모여서 금은 등의 재보를 바치거나 소나 말 등의 가축을 앞다투어 바치며 자신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금과 은이 땅에 깔리고 양과 말이 계곡을 가득 채웠지만 그들은 감히 분에 넘치는 희망을 품지 않고 그저 공양만을 올릴 뿐이었다. 외도들은 천사를 섬기면서 열심히 고행하였는데 천신이 주술을 내려주면 외도가 이를 준수하여 행하였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질병을 고치고 낫게 되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불률시살당나국(弗栗恃薩儻那國)에 도착한다.
032_0469_c_11L鄰國異俗君臣僚庶歲嘉辰不期而會或齎金奇寶以牛馴畜競興貢奉俱伸誠素以金銀布地羊馬滿谷無敢覬覦脩施奉宗事外道克心苦行天神授其呪術外道遵行多效治療疾病蒙痊愈從此北行五百餘里至弗栗恃薩儻那國

2) 불률시살당나국(弗栗恃薩儻那國)
불률시살당나국7)은 동서로는 2천여 리, 남북으로는 천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을 호필나(護苾那)8)라고 부르는데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조구타국과 같고 언어가 다르다. 기후는 몹시 추우며 사람들의 성품은 거칠고 난폭하다. 왕은 돌궐(突厥) 종족인데 3보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덕 있는 자를 존경한다.
032_0469_c_18L弗栗恃薩儻那國東西二千餘里北千餘里國大都城號護苾那周二十餘里土宜風俗同漕矩咤國語言有異氣序寒勁人性獷烈突厥種深信三寶尚學遵德
032_0470_a_02L이 나라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하천을 건너서 가필시국 변방에 있는 성의 작은 마을 수십 곳을 거치면 대설산 파라서나대령(婆羅犀那大嶺)9)에 이른다. 산마루는 매우 높이 솟아있고 험난한 고갯길이 심하게 경사져 있다. 굽이굽이 돌아서 좁은 길이 나있고 벼랑과 암굴의 기복이 몹시 심하여 어떤 때는 깊은 계곡으로 어떤 때는 높은 벼랑 위로 올라가야 한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기 때문에 얼음을 뚫어서 건너간다. 이렇게 3일을 가다 보면 그제야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032_0469_c_23L從此國東北踰山涉川越迦畢試國邊小邑凡數十所至大雪山婆羅犀那大嶺嶺極崇峻危隥㩻傾蹊徑盤迂巖岫迴互或入深谷或上高崖盛夏合凍鑿冰而度行經三日方至嶺上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대고 쌓인 눈이 계곡에 가득 차있기 때문에 길을 가는 사람들은 발을 멈출 수 없다. 날아다니는 송골매와 독수리들도 높이 날 때에는 단번에 날지 못하고 몇 발짝을 뗀 뒤에 비로소 날아간다. 아래로 산들을 내려다보면 마치 작은 무덤처럼 보인다. 섬부주 안에서는 이 산고개가 특히 높으며 이곳에는 나무가 없고 오직 산봉우리만이 많은데, 그런 봉우리들이 떼지어 한 곳에 모여 있는 모습은 마치 숲과 같다. 다시 3일을 더 가야 비로소 산고개를 내려갈 수 있으며 그러면 안달라박국(安呾羅縛國)에 도착한다.
032_0470_a_05L寒風凄烈積雪彌谷行旅經涉莫能佇足飛隼翺翔不能越度足趾步履然後翻飛下望諸山若觀培塿贍部洲中斯嶺特高其巓無樹唯多石峯攢立叢倚森然若林又三日行方得下嶺至安呾羅縛國

3) 안달라박국(安呾羅縛國)
안달라박국10)은 도화라국(覩貨邏國)의 옛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에 달한다. 대군주가 없으며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산이 연이어 늘어서 있고 강과 밭은 좁다. 기후는 몹시 춥고 눈보라가 세차게 분다. 농사는 풍요롭고 꽃과 과일이 잘 자란다.
032_0470_a_11L安呾羅縛國睹貨邏國故地周三千餘里國大都城周十四五里無大君役屬突厥山阜連屬川田隘狹序寒烈風雪凄勁豐稼穡宜花菓
사람들의 성품은 사납고 난폭하며 풍속은 기강이 없다. 죄와 복을 알지 못하고 학문을 익히는 일을 숭상하지 않는다. 오직 신의 사당에 제사지내는 일만을 할 뿐 부처님의 법을 믿는 자가 거의 없다. 가람은 세 곳이 있고 승도는 수십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중부의 법을 따르고 익힌다. 솔도파가 하나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계곡을 들어가고 산봉우리를 넘어 여러 작은 성들을 지나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활실다국(闊悉多國)에 도착한다.
032_0470_a_15L性獷暴俗無綱紀不知罪福不尚習唯脩神祠少信佛法伽藍三所徒數十然皆遵習大衆部法有一窣堵波無憂王建也從此西北入谷踰度諸小城行四百餘里至闊悉多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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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활실다국(闊悉多國)
활실다국11)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천 리에서 조금 모자라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한다. 대군주가 없고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산이 많고 강이 좁으며 바람이 많이 부는 데다 날씨는 춥다. 곡식이 풍성하고 꽃과 열매가 풍요롭다.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풍속에는 법도가 없다. 가람은 세 곳이 있는데 승도는 적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여러 성읍들을 지나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활국(活國)에 도착한다.
032_0470_a_20L闊悉多國睹貨邏國故地也周減千國大都城周十餘里無大君長屬突厥山多川狹風而且寒穀稼豐花菓盛人性獷暴俗無法度伽藍三僧徒尟少從此西北踰山越谷諸城邑行三百餘里至活國

5) 활국(活國)
활국12)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군주가 따로 없으며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토지는 평탄하고 농사는 때에 맞추어 파종한다. 초목이 우거지고 꽃과 열매가 고루 번성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풍속은 순박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조급하고 거칠며 모직으로 만든 옷[氈褐]을 입는다. 많은 사람들이 3보를 믿으며,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이들은 적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의 수는 백 명인데 이들은 대소승을 함께 닦고 익히고 있다. 이 나라의 왕은 돌궐인인데 철문(鐵門) 이남의 여러 작은 국가들을 관장하고 있다. 그는 철새처럼 여러 지방을 옮겨다니면서 거주하며 언제나 같은 마을에 머물지 않는다.
032_0470_b_03L活國睹貨邏國故地也周二千餘里國大都城周二十餘里無別君長屬突厥上地平坦穀稼時播草木榮花菓具繁氣序和暢風俗淳質性躁烈衣服氈褐多信三寶少事諸伽藍十餘所僧徒數百人大小二兼功綜習其王突厥也管鐵門已南諸小國遷徙鳥居不常其邑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총령(蔥嶺)13)으로 들어가게 된다. 총령이란 섬부주 가운데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설산에 접해 있고 북쪽은 열해천천(熱海千泉)에 닿고 서쪽으로는 활국에 닿으며 동쪽으로는 오쇄국(烏鎩國)에 닿는다. 동서남북이 각각 수천 리에 달하는데 벼랑과 봉우리가 수백 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곡이 깊고 험난하며 언제나 얼음과 눈이 쌓여있고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댄다. 파[蔥]가 많이 나기 때문에 ‘총령(蔥嶺)’이라고 부른다. 또 산과 벼랑이 푸르디푸르기[葱翠]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동쪽으로 1백여 리를 가면 몽건국(瞢健國)에 도착한다.
032_0470_b_11L從此東入蔥嶺蔥嶺者據贍部洲中南接大雪山北至熱海千泉西至活國至烏鎩國東西南北各數千里崖嶺數百重幽谷險峻恒積冰雪寒風勁多出蔥故謂蔥嶺又以山崖蔥翠遂以名焉東行百餘里至瞢健國

6) 몽건국(瞢健國)
몽건국14)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4백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5~16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활국과 대체로 같다. 대군주는 없으며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아리니국(阿利尼國)에 도착한다.
032_0470_b_17L健國睹貨邏國故地也周四百餘國大都城周十五六里土宜風俗大同活國無大君長役屬突厥北至阿利尼國

7) 아리니국(阿利尼國)
아리니국15)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박추하(縛芻河)의 양쪽 기슭을 끼고 있으며 둘레는 3백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이며 기후와 풍속은 대체로 활국과 같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라호국(曷邏胡國)에 도착한다.
032_0470_b_21L阿利尼國睹貨邏國故地也帶縛芻河兩岸周三百餘里國大都城周十四五里土宜風俗大同活國東至曷邏胡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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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갈라호국(曷邏胡國)
갈라호국16)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북쪽으로는 박추하에 임해 있는데 둘레는 2백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대체로 활국과 같다. 몽건국으로부터 동쪽으로 험준한 고개를 넘어 계곡을 거쳐 여러 하천과 성을 지나서 3백여 리를 가면 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에 도착한다.
032_0470_c_02L曷邏胡國睹貨邏國故地也北臨縛芻河周二百餘里國大都城周十四五里土宜風俗大同活國從瞢健國東踰峻嶺越洞谷歷數川城行三百餘里至訖栗瑟摩國

9) 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
흘률슬마국17)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동서로는 10여 리이고 남북으로는 3백여 리이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5~16리이다. 토지와 풍속은 몽건국과 대체로 같다. 다만 사람들의 성품은 다른 나라와 달리 난폭하고 악하다. 북쪽으로 가면 발리갈국(鉢利曷國)에 도착한다.
032_0470_c_07L訖栗瑟摩國睹貨邏國故地也東西十餘里南北三百餘里國大都城周十五六里土宜風俗大同瞢健國其人性暴愚惡有異北至鉢利曷國

10) 발리갈국(鉢利曷國)
발리갈국18)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동서로는 1백여 리, 남북으로는 3백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토지와 풍속은 흘률슬마국과 대체로 같다.
흘률슬마국으로부터 동쪽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3백여 리를 가면 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에 도착한다.
032_0470_c_11L鉢利曷國睹貨邏國故地也東西百餘里南北三百餘里國大都城周二十餘里土宜風俗大同訖栗瑟摩國從訖栗瑟摩國東踰山越川行三百餘里至呬摩呾羅國

11) 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
희마달라국19)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에 달하며 산과 강이 줄지어 이어지고 토지는 비옥하다. 농사가 잘 되고 보리가 많이 난다.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며 과일들도 풍성하다. 기후는 매섭게 춥고 사람들의 성품도 난폭하고 급하다. 죄와 복을 알지 못하고 생김새는 천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는 의젓하다. 모직[氈]과 가죽옷을 입어서 돌궐과 아주 똑같다.
032_0470_c_16L呬摩呾羅國睹貨邏國故地也周三千餘里山川邐迤土地沃壤宜穀稼多宿麥百卉滋茂衆菓具繁氣序寒人性暴急不識罪福形貌鄙陋措威儀衣氈皮褐頗同突厥
결혼한 여인의 경우 머리에 관으로 나무 뿔을 쓰는데 높이는 3척 남짓하다. 앞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이것은 남편의 부모를 상징하고 있다. 위의 가지는 아버지를 나타내고 아래의 가지는 어머니를 나타낸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가지를 없앤다. 시부모가 함께 사망하였을 때에는 뿔관을 아예 내버린다.
032_0470_c_21L其婦人首冠木角高三尺餘前有兩岐表夫父母上岐表父下岐表母隨先喪亡除去一岐舅姑俱沒角冠全棄
032_0471_a_02L이 나라는 초기에 강대한 국가였으며 왕은 석가 종족이었다. 총령의 서쪽 나라들이 대체로 신하의 예를 갖추었으며 국경이 돌궐과 이웃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그 나라 풍습에 물들고 만 것이다. 또 침략을 당하자 스스로 국경 지역을 방어하였으므로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수십 개의 견고한 성에서 각자 군주를 내세우며 살고 있다. 모직으로 만든 반구형(半球形)의 천막을 가지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지내는데, 서쪽은 흘률슬마국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 계곡을 따라 2백여 리를 가면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에 도착한다.
032_0470_c_24L其先强國釋種也蔥嶺之西多見臣伏境鄰突厥遂染其俗又爲侵掠自守其境故此國人流離異域數十堅城各別立主穹廬毳帳遷徙往來西接訖栗瑟摩國東谷行二百餘里至鉢鐸創那國

12)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
발탁창나국20)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21)은 산의 벼랑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둘레는 6~7리이다. 산과 강이 서로 이어지고 있으며 모래와 돌이 도처에 가득하다. 토지는 보리와 콩이 자라기에 좋으며 포도와 호두, 복숭아와 배, 능금 등의 과일이 많이 난다. 기후는 매섭게 추운데다 사람들의 성품은 강인하고 용맹하다. 풍속은 예법을 모르고 학예를 알지 못한다. 생김새는 비천하게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모직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가람은 3~4곳이 있으며 승도는 매우 적다. 왕의 성품은 순박하며 3보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산과 계곡을 따라 2백여 리 가다 보면 음박건국(淫薄健國)에 도착한다.
032_0471_a_07L鉢鐸創那國睹貨邏國故地也周二千餘里國大都城據山崖上周六七山川邐迤沙石彌漫土宜菽蒱陶胡桃柰等菓氣序寒烈人性剛猛俗無禮法不知學藝其貌鄙陋多衣氈褐伽藍三四所僧徒寡少性淳質深信三寶從此東南山谷中行二百餘里至淫薄健國

13) 음박건국(淫薄健國)
음박건국22)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1천여 리,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한다. 산봉우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어서 강과 밭이 몹시 좁다. 토산물과 기후 조건, 사람들의 성품 등은 발탁창나국과 같은데 다만 언어23)가 조금 다르다. 왕의 성품은 가혹하고 난폭하며 선악에 밝지 못하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위험한 좁은 길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굴랑나국(屈居勿反浪拏國)에 도착한다.
032_0471_a_15L淫薄健國睹貨邏國故地也周千餘國大都城周十餘里山嶺連屬田隘狹土地所產氣序所宜人性之同鉢鐸創那但言語少異王性苛不明善惡從此東南踰嶺越谷路危險行三百餘里至屈居勿反浪拏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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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굴랑나국(屈浪拏國)
굴랑나국24)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토지와 산천, 기후와 시절 등은 음박건국과 같다. 풍속은 법도가 없으며 사람들의 성품은 비천하고 난폭하다. 많은 이들이 복을 짓지 않으며 부처님의 법에 대해 믿음을 지닌 이도 아주 적다. 그들의 생김새는 추하고 볼썽사나우며 대체로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산의 암석에서는 순금이 많이 나는데, 이것은 그 돌을 쪼개고 가른 뒤에 얻을 수 있다. 가람의 수가 적어 자연히 승도들도 적다. 이 나라의 왕은 순박하며 3보를 숭배하고 존경한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오르고 계곡으로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5백여 리의 길을 걷다 보면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또는 진품(鎭偘)이라고 이름하며 또는 호밀(護蜜)이라고 부른다에 도착한다.
032_0471_a_21L屈浪拏國睹貨邏國故地也周二千餘里土地山川氣序時候同淫薄健俗無法度人性鄙暴多不營福信佛法其貌醜弊多服氈褐有山巖中多出金精琢折其石然後得之藍旣少僧徒亦寡其王淳質敬崇三從此東北登山入谷途路艱險五百餘里至達摩悉鐵帝國亦名鎭偘又謂護蜜

15)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
달마실철제국25)은 두 산 사이26)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동서로 1,500~1,600여 리이고 남북으로 넓은 곳이 4~5리, 좁은 곳은 1리도 넘지 못한다. 박추하에 임해 있으며 구불구불 굽어져 있다. 흙더미로 이루어진 언덕이 높거나 낮게 자리하고 있고 모래와 돌이 널려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032_0471_b_06L達摩悉鐵帝國在兩山閒睹貨邏國故地也東西千五六百餘里南北廣四五里狹則不踰一里臨縛芻河紆曲折堆阜高下沙石流漫寒風凄
보리와 콩만을 심으며 나무와 숲은 적고 꽃과 과일도 거의 없다. 종자가 좋은 말이 많이 나는데, 말의 생김새는 작지만 빠르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수 있다. 풍속은 예의가 없고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거칠다. 생김새도 비천하며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눈동자가 대체로 짙은 녹색인 것이 여느 나라와는 다른 점이다. 가람은 10여 곳이고 승도는 아주 적다.
032_0471_b_11L唯植麥少樹林乏花菓多出善馬形雖小而耐馳涉俗無禮義性獷暴形貌鄙陋衣服氈褐眼多碧異於諸國伽藍十餘所僧徒寡少
혼타다성(昏馱多城)27)이 이 나라의 도읍인데 그 속에는 가람이 있다. 이곳은 이 나라의 선왕이 바위를 뚫고 계곡에다 건물을 세웠다. 과거 이 나라에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 이들은 오직 삿된 신을 섬기고 있었다. 수백 년 전부터 비로소 부처님 법의 감화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032_0471_b_14L昏馱多城國之都也中有伽藍此國先王之所建立疏崖奠谷式建堂宇此國之先未被佛敎但事邪神數百年前肇弘法化
본래 이 나라 왕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온갖 의술을 모두 동원해서 치료해 보았지만 병이 낫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친히 천사로 가서 예를 올리며 아들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032_0471_b_18L此國王愛子嬰疾徒究醫術有加無瘳王乃躬往天祠禮請求救
이때 그 천사의 주인[祠主]이 신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반드시 나을 것이니 다른 걱정은 하지 말아라.”
032_0471_b_20L時彼祠主爲神下語必當痊復良無他慮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위안을 삼고서 가마를 돌려 돌아갔다. 그런데 길에서 사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용모와 행동은 우러러볼 만하였으나 그의 복장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어디서 오는 길인가를 물었다. 그런데 이 사문은 이미 성과(聖果)를 증득하였으며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일부러 이런 모습과 복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왕에게 답하였다.
“나는 여래의 제자입니다. 이른바 필추라고 하는 사람이지요.”
032_0471_b_21L王聞喜慰迴駕而歸路逢沙門容止可觀駭其形服問所從至此沙門者已證聖果欲弘佛法故此儀形而報王曰如來弟子謂苾芻也
032_0471_c_02L왕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이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032_0471_c_02L王旣憂心卽先問曰我子嬰疾生死未分
사문이 말하였다.
“왕의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 올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아들을 살리기는 어렵겠습니다.”
032_0471_c_03L沙門曰王先靈可起愛子難濟
왕이 말했다.
“천신은 아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사문은 죽는다고 말하니, 세상을 속이는 자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032_0471_c_04L王曰天神謂其不死沙門言其當終詭俗之人言何可信
잠시 후 왕이 궁중에 당도하고 보니 아들은 이미 죽어있었다. 왕은 아들의 죽음을 발설하지 말도록 조치하고 다시 신주(神主)에게 가서 물었다. 그런데도 신주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였다.
“죽지 않을 것이다. 아들의 병은 치료될 수 있다.”
032_0471_c_05L遲至宮中愛子已死匿不發喪更問神主猶曰不死疹疾當瘳
왕이 이 말을 듣자 크게 분노하여 신주를 묶고서 그 죄를 거론하면서 꾸짖었다.
“너희들은 무리 지어 살면서 오래도록 악을 행하고 망령되게 위엄과 복을 행사하여 왔다. 내 아들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하여 여전히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이는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고 속이는 일이니 그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 신주를 죽이고 영묘(靈廟)를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032_0471_c_07L王便發怒縛神主而數曰汝曹群居長惡妄行威福我子已死尚云當瘳此而謬惑孰不可忍宜戮神主殄滅靈廟
이에 신주를 죽이고서 신상(神像)을 없애 박추하에 던져버리고서 가마를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사문을 만나게 되자 왕은 사문을 보고 기뻐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일찍이 지혜로운 인도를 받지 못하여 삿된 길에 발을 디뎠습니다. 요사스러운 폐해가 비록 오래 전부터 자행되어 왔으나 이제 개혁하고자 합니다. 부디 발길을 이곳으로 돌리셔서 궁실에 기거하여 주소서.”
032_0471_c_10L於是殺神除神像投縛芻河迴駕而還又遇沙門見而敬悅稽首謝曰曩無明導佇足邪途澆弊雖久沿革在茲願能垂顧降臨居室
사문은 왕의 청을 받아들여서 궁 안에 머물렀다. 왕은 아들을 장사지내고 난 뒤에 사문에게 말하였다.
“인간의 세상은 어지럽게 삶과 죽음이 돌고 돕니다. 내 아들이 병에 걸린 뒤 아들의 생사에 관해 질문을 하였더니 신은 망령되게 반드시 쾌차할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가르침을 듣고 보니 과연 헛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가엾게 여기셔서 이 어리석은 무리들을 인도하여 주소서.”
032_0471_c_14L沙門受請隨至中宮葬子旣已謂沙門曰人世糾紛生死流轉我子嬰疾問其去留神而妄言當必痊差先承指告果無虛說斯則其法可奉唯垂哀愍導此迷徒
마침내 사문에게 청하여 가람을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법도에 따라 건립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옛 가람 속에는 정사가 있는데 이것은 나한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032_0471_c_18L遂請沙門揆度伽藍依其規矩而便建立自爾之後佛敎方隆故伽藍中精舍爲羅漢建也
가람의 큰 정사 속에는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데 불상 위에는 금동으로 만든 둥근 일산이 걸려있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에워싸고 돌면 일산도 따라서 돌고, 사람이 멈추면 일산도 따라서 멈추니 신령스러운 감응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032_0471_c_21L伽藍大精舍中有石佛像像上懸金銅圓蓋衆寶莊嚴人有旋繞蓋亦隨人止蓋止莫測靈鑑
032_0472_a_02L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성인의 원력이 미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는 내부적인 장치의 신기한 기술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을 관찰해 보니 석벽은 견고하게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들을 곰곰이 따져보아도 진실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나라의 큰 산을 넘어 북쪽으로 가면 시기니국(尸棄尼國)에 도착한다.
032_0471_c_24L聞諸耆舊曰或云聖人願力所持或謂機關秘術所致觀其堂宇石壁堅峻考厥衆議莫知實錄踰此國大山北至尸棄尼國

16) 시기니국(尸棄尼國)
시기니국28)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산과 강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으며 모래와 돌이 들판에 두루 깔려있다. 보리가 많이 자라고 곡식은 적다. 나무가 성글고 꽃과 과일도 매우 적다. 기후는 매섭게 추우며 풍속은 난폭하고 용맹스럽다. 살육하는 것을 태연스레 저지르고 도적질을 일삼고 있다. 예의를 알지 못하며 선악도 판가름하지 못한다. 미래의 재앙과 복에 어두우며 현세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있다. 생김새는 천하고 가죽과 모직 옷을 입고 있다. 문자는 도화라국과 같지만 언어29)에 차이가 있다. 달마실철제리국의 큰 산을 남쪽으로 지나면 상미국(商彌國)에 도착한다.
032_0472_a_04L尸棄尼國周二千餘里國大都城周五六里山川連屬沙石遍野多宿少穀稼林樹稀疏花菓寡少氣序寒風俗獷勇忍於殺戮務於盜竊知禮義不識善惡迷未來禍福懼現世災殃形貌鄙陋皮褐爲服文字同睹貨羅國語言有異越達摩悉鐵帝國大山之南至商彌國

17) 상미국(商彌國)
상미국30)의 둘레는 2천 500~2천 600리에 달하며 산과 강이 사이사이에 있고 구릉이 높거나 낮게 솟아있다. 곡식은 고루 잘 자라며 보리와 콩이 풍작이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雌黃)31)이 생산되는데 자황은 벼랑을 뚫고 돌을 깎아 낸 뒤에 얻을 수 있다. 포악한 산신이 살고 있어 여러 차례 재해를 일으켰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뒤에 산에 들어가면 평온하게 오갈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폭풍과 우박이 사납게 휘몰아친다. 기후는 춥고 풍속은 조급하다.
032_0472_a_12L商彌國周二千五六百里山川相閒堆阜高下穀稼備植麥彌豐多蒱出雌黃鑿崖析石然後得之山神暴惡屢爲災害祀祭後入平吉往來若不祈禱風雹奮發氣序寒風俗急
사람들의 성품은 순박하고 풍속은 예의가 없다. 지혜가 적고 기민하지 못하며 기능이 천박하다. 문자는 도화라국과 같지만 언어32)의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이 나라의 왕은 석가 종족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존숭하고 있다. 나라 사람들도 왕의 교화를 따라서 독실한 믿음을 지니지 않은 이가 없다. 가람은 두 곳이 있는데 승도는 적다.
032_0472_a_17L人性淳質俗無禮義智謀寡狹伎能淺薄文字同睹貨邏國語言別異衣氈褐其王釋種也崇重佛法國人從化莫不淳信伽藍二所僧徒寡少
032_0472_b_02L국경의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위험한 길을 따라서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파미라천(波謎羅川)33)에 도착한다. 동서로 천여 리, 남북으로 백여 리이며 폭이 좁은 곳은 10리를 넘지 못한다. 두 설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찬바람이 매섭게 분다.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날리고 밤낮 없이 바람이 휘몰아친다. 땅에는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자갈과 돌이 많다. 씨를 뿌리기는 하지만 풍요롭지 못하고 초목도 드물어 결국은 텅 빈 황무지가 되어버렸고 사람의 자취도 끊어지고 말았다.
032_0472_a_21L國境東北踰山越谷經危履險行七百餘里至波謎羅川東西千餘里北百餘里狹隘之處不踰十里據兩雪山閒故寒風凄勁春夏飛雪晝夜飄風地鹹鹵多礫石播植不滋草木稀少遂致空荒絕無人止
파미라천 속에는 커다란 용이 사는 못34)이 있는데 동서로 3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0여 리이다. 대총령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섬부주 중에서도 이 땅이 가장 높다. 물은 맑디맑아서 거울처럼 비치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색은 청흑색을 띠었고 맛은 감미롭다. 물 속에 사는 어족류로는 상어와 교룡(蛟龍), 물고기와 용, 큰 자라와 악어, 거북과 자라들이 있으며, 물 위를 떠도는 짐승으로는 원앙과 기러기ㆍ거위ㆍ너새[鴇] 등이 있는데 새들이 낳은 큰 알들의 껍질이 황야나 초원ㆍ늪지 혹은 물가에 널려있다.
032_0472_b_04L波謎羅川中有大龍池東西三百餘南北五十餘里據大蔥嶺內當贍部洲中其地最高也水乃澄淸皎鏡莫測其深色帶靑黑味甚甘美潛居則鮫黿浮遊乃鴛鴦鴻鴈鴐鵝諸鳥太卵遺㲉荒野或草澤閒或沙渚上
이 못의 서쪽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데 서쪽으로 달마실철제국의 동쪽 경계에 이르러 박추하와 합해져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런 까닭에 이 못의 오른쪽 물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35) 못의 동쪽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거사국(佉沙國)의 서쪽 경계에 이르러, 사다하(徙多河)와 합쳐져 동쪽으로 흐른다. 그런 까닭에 이 못의 왼쪽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간다.36)
032_0472_b_11L池西派一大流西至達摩悉鐵帝國東界與縛芻河合而西流故此已右水皆西流池東派一大流東北至佉沙國西界與徙多河合而東流故此已左水皆東流
파미라천 남쪽으로 산을 넘으면 발로라국(鉢露羅國)이 있는데 금과 은이 많이 나며 특히 금의 빛깔은 마치 불과도 같다. 이 강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 험한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없고 오직 얼음과 눈 뿐인데 이곳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걸반타국(朅盤陀國)에 도착한다.
032_0472_b_15L波謎羅川南越山有鉢露羅國多金金色如火自此川中東南登山履路無人里唯多冰雪行五百餘里至朅盤陁國

18) 걸반타국(朅盤陀國)
걸반타국37)의 둘레는 2천여 리인데 나라의 큰 도성은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고 사다하(徙多河)를 등에 지고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산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고 강과 초원은 좁다. 곡식은 넉넉히 수확되지 않으며 보리와 콩은 풍성하다. 숲과 나무들은 드물고 꽃과 과일도 적다. 높고 낮은 땅이나 언덕ㆍ성읍은 텅 비어 황폐하다.
032_0472_b_19L朅盤陁國周二千餘里國大都城基大石嶺背徙多河周二十餘里山嶺連屬川原隘狹穀稼儉少菽麥豐多林樹稀花菓少原隰丘墟城邑空曠
032_0472_c_02L풍속은 예의가 없고 사람들은 학예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성품이 사납고 난폭하며 힘세고 용맹스럽다. 용모는 추하고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문자와 언어는 거사국(佉沙國)과 대체로 같다. 그런데 돈독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부처님의 법을 숭배한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5백여 명 있는데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익히고 있다. 지금의 왕은 순박하고 3보를 깊이 존경하고 있으며 자세와 용모가 단정하며 기품이 있고 마음이 굳어 학문을 좋아한다.
032_0472_b_23L俗無禮義人寡學藝性旣獷暴力亦驍勇容貌醜弊衣服氈褐文字語言大同佉沙國然知淳信敬崇佛法藍十餘所僧徒五百餘人習學小乘敎說一切有部今王淳質敬重三寶儀容閑雅篤志好學
건국이래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스스로를 지나제파구달라(至那提婆瞿呾羅)38)당나라 말로는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고 한다라고 부른다. 이 나라의 선조는 총령 안의 거친 평원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옛 파리랄사국(波利剌斯國)의 왕이 한(漢)의 지역에서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전쟁이 일어나서 동서의 길이 끊기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왕녀를 외딴 산봉우리에 두게 되었다. 이 산은 매우 험하고 위태로워서 벼랑에 사다리를 걸치고 오르내려야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 산 주위에 경비를 세우고 밤낮으로 경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석 달이 지나자 반란을 일으킨 적들이 비로소 평정되었다. 왕은 귀로에 오르려 하였는데 왕녀가 이미 임신 중이었다.
032_0472_c_06L建國已來多歷年所其自稱云是至那提婆瞿呾羅唐言漢日天種此國之先蔥嶺中荒川也昔波利剌斯國王娶婦漢土迎歸至此屬兵亂東西路絕遂以王女置於孤極危峻梯崖而上下設周衛警巡夜時經三月寇賊方靜欲趣歸路女已有娠
사신은 놀라서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왕께서 명하여 부인을 맞아들이다 이런 병란에 휩쓸려 거친 평원에서 노숙을 하며 하루하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왔다. 우리의 왕은 덕과 위엄이 있어 요망한 기운을 평정한 뒤에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렇게 왕의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분명히 근심스러운 일이 벌어져 어쩌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주범을 찾아서 그를 죽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032_0472_c_13L使臣惶懼謂徒屬曰王命迎婦屬斯寇亂野次荒川朝不謀夕吾王德感妖氛已靜今將歸國王婦有娠顧此爲憂不知死地宜推首惡或以後誅
그리고 나서 심문을 하며 소란을 피웠지만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때 부인을 모시던 몸종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서로 탓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부인이 신과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장부 한 사람이 태양으로부터 말을 타고 이곳에 와서 부인을 만났습니다.”
032_0472_c_17L訊問諠譁莫究其實時彼侍兒謂使臣曰勿相尤也乃神會耳每日正中有一丈夫從日輪中乘馬會此
사신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겠느냐? 돌아가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고 이곳에 남아있어도 우리를 토벌하러 올 것이다. 오도가도 못할 지경이니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032_0472_c_20L使臣曰若然者何以雪罪歸必見誅留亦來討進退若是何所宜行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누가 감히 처벌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국외에서 처벌을 기다리며 지금은 잠시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합시다.”
032_0472_c_21L僉曰斯事不細誰就深誅待罪境外且推旦夕
그리하여 이내 돌산 봉우리 위에 궁을 짓고 숙소를 세운 뒤에 둘레가 3백여 걸음에 달하도록 궁을 에워싸고 성을 구축한 다음 왕녀를 왕으로 세웠다.39) 그리고 관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다.
032_0472_c_23L於是卽石峯上築宮起館周三百餘步環宮築城立女爲主官垂憲
032_0473_a_02L산달이 되자 여왕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용모가 아름다웠다. 어머니가 섭정하면서 아들을 왕으로 모셨다. 아들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바람과 구름을 자유롭게 다루었다. 왕의 위엄과 덕은 널리 퍼졌고 그의 명성과 가르침은 아득한 곳까지 두루 미쳤다. 그리하여 가까운 주변 국가에서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는 곳이 없었다.
032_0473_a_02L至期產男容貌姸麗母攝政子稱尊號飛行虛空控馭風雲德遐被聲敎遠洽鄰域異國莫不稱
이 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 성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거대한 산의 암벽 석실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시체가 바짝 말라 지금도 부서지지 않고 있으며 그 모습은 파리하고 수척한 사람이 막 잠들어 있는 모습과 같다. 이따금 그의 옷을 바꿔 입히고 언제나 향과 꽃을 올리고 있다 자손들은 대대로 오늘날까지 그 선조의 출생에 대해서 어머니는 바로 한(漢)나라 사람이고 아버지는 곧 태양신의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일컬어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왕족의 용모는 중국 사람과 같고 머리에는 네모진 관을 쓰고 있으며 호복(胡服)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후대에 이르러 세력이 쇠퇴해져서 지금은 강국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032_0473_a_05L其王壽終葬在此城東南百餘里大山巖石室中其屍乾腊今猶不壞狀羸瘠人儼然如睡時易衣服恒置香花子孫弈世以迄于今以其先祖之世母則漢土之人父乃日天之種故其自稱漢日天種然其王族貌同中國首飾方冠身衣胡服後嗣陵夷見迫强國
무우왕40)은 당대에 걸출한 인물로서 그가 세상을 다스리게 되자 그 궁 안에 솔도파를 세웠다. 그 왕이 뒤에 궁중의 동북쪽으로 거처를 옮기자 그 옛 궁에 존자 동수(童受) 논사41)를 위해 승가람을 세웠다. 누대와 전각이 높고 넓으며 불상은 위엄이 있었다.
032_0473_a_12L無憂王命世卽其宮中建窣堵波王於後遷居宮東北隅以其故宮尊者童受論師建僧伽藍臺閣高廣佛像威嚴
존자는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찍부터 세속의 번뇌를 떠나 불교 경전들을 연구하여 노닐었고 현묘한 이치를 깊이 음미하였으며 날마다 3만 2천 마디의 문구를 암송하였고 겸하여 3만 2천 권의 책도 썼다. 그런 까닭에 그의 학문은 당시의 인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고 그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세우고 삿된 견해를 부수었으며 그의 품격 있는 논의는 맑고 분명하였으며 어떠한 논쟁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5인도에서 한결같이 그를 높이 받들어 모셨는데, 그는 수십 부에 달하는 논서를 지었으며 이것은 모두 널리 유포되어 그 논서를 익히고 공부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가 바로 경량부(經量部)의 조사(祖師)였다.
032_0473_a_16L尊者呾叉始羅國人也而穎悟早離俗塵遊心典籍棲神玄日誦三萬二千言兼書三萬二千故能學冠時彦名高當世立正法摧邪見高論淸擧無難不酬五印度國咸見推高其所製論凡數十部盛宣行莫不翫習卽經部本師也
032_0473_b_02L당시 동쪽에는 마명(馬鳴)이 있었고. 남쪽에는 제바(提婆)가 있었고, 서쪽에는 용맹(龍猛)이 있었으며, 북쪽에는 동수(童受)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네 개의 태양이 세상을 비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왕은 존자의 위덕에 관해서 듣고 병사를 일으키고 민중들을 동원해 달차시라국을 정벌한 뒤에 협박하여 존자를 자신의 나라로 모시게 되었으며 이 가람을 지어서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였다.
032_0473_a_22L此之時東有馬鳴南有提婆西有龍北有童受號爲四日照世故此國王聞尊者盛德興兵動衆伐呾叉始羅國脅而得之建此伽藍式昭瞻仰
성의 동남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암벽에 이르는데 이곳에 석실이 두 곳 있다. 이 석실에는 각각 한 사람의 나한이 멸진정42)에 들어있는데 단정하게 앉아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야윈 사람과도 같고 피부와 뼈는 썩지 않았다. 이미 7백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항상 자랐으므로 스님들이 해마다 그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있다.
032_0473_b_03L城東南行三百餘里至大石崖有二石室各一羅漢於中入滅盡定端然而坐難以動搖形若羸人膚骸不朽已經七百餘歲其鬚髮恒長故衆僧年別爲剃髮易衣
거대한 암벽에서 동북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분양사라(奔逋論反穰舍羅)43)당나라 말로는 복사(福舍)라고 한다에 이른다. 복사는 총령의 동쪽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고 네 산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토지는 4방 백여 경(頃)에 달하며 한가운데는 지대가 낮다.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눈이 쌓여있으며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댄다. 밭은 소금기가 많이 섞여있어서 풍작을 거두지 못하며 나무와 숲이 없고, 있는 것은 오직 가느다란 풀뿐이다. 때때로 무더워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눈보라가 많이 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 막 들어오면 그 순간 운무가 일어난다. 상인들이 오가지만 그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032_0473_b_08L大崖東北踰嶺履險行二百餘里通論反穰舍羅唐言福舍蔥嶺東岡四山之地方百餘頃正中墊下冬夏積雪風寒飄勁疇壟舄鹵稼穡不滋旣無林樹唯有細草時雖暑熱而多風雪人徒纔入雲霧已興商侶往來苦斯艱險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장사치가 만여 명의 무리들과 함께 낙타 수천 마리에 보화를 싣고 장사를 하러 왔다가 눈보라를 만나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지경에 놓였다. 때마침 겁반타국에 대아라한이 있었는데 그가 멀리서 이들이 재앙을 만난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서 신통력으로 날아와 그들을 구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라한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숨을 거두고 난 뒤였다. 이에 온갖 진귀한 보석들을 모두 거두고 그들이 지녔던 것을 한데 모아 숙소를 세우고 재물들을 비축해 둔 뒤 이웃나라에 땅을 사서 변방의 거주민들을 돕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의 은덕을 베풀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행인이나 상인들은 모두 그 보시를 입고 있다.
032_0473_b_15L聞諸耆舊曰昔有賈客其徒萬橐駝數千齎貨逐利遭風遇雪畜俱喪時朅盤陁國有大羅漢遙觀見之愍其危厄欲運神通拯斯淪溺適來至此商人已喪於是收諸珍寶集其所有構立館舍儲積資財買地鄰國鬻戶邊城以賑往來故今行人商侶咸蒙周給
이곳에서 동쪽으로 총령의 동쪽 산등성이를 내려가서 가파른 산봉우리를 오르고 깊은 계곡을 지나 계곡을 따라 난 험한 길을 가면 눈과 바람이 잇달아 불어닥친다. 이렇게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총령을 벗어나서 오쇄국(烏鎩國)에 이른다.
032_0473_b_22L從此東下蔥嶺東岡登危嶺越洞谷谿徑險阻風雪相繼行八百餘里出蔥嶺至烏鎩國
032_0473_c_02L
19) 오쇄국(烏鎩國)
오쇄국44)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사다하(徙多河)에 접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가 아주 잘 된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번성하다. 여러 옥(玉)들이 아주 많이 나는데, 즉 백옥(白玉)ㆍ예옥(黳玉)ㆍ청옥(靑玉) 등이 있다. 기후는 온화하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다.
032_0473_b_24L烏鎩國周千餘里國大都城周十餘南臨徙多河地土沃壤稼穡殷盛林樹鬱茂花菓具繁多出雜玉則有白玉黳玉靑玉氣序和風雨順
풍속은 예외가 없고 사람들의 성품도 강건하고 난폭하다. 남을 잘 속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문자와 언어는 거사국(佉沙國)과 비슷하고 용모는 추하며 가죽옷과 털옷을 입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믿고 공경하며 받들고 있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천 명에서 조금 모자란다. 이들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수백 년이래 왕족의 후사가 끊겨서 지금은 달리 군주를 내세우지 않고 걸반타국(朅盤陁國)에 복속되어 있다.
032_0473_c_05L俗寡禮義人性剛獷多詭詐少廉恥文字語言少同佉沙國容貌醜弊衣服皮然能崇信敬奉佛法伽藍十餘所僧徒減千人習學小乘敎說一切有自數百年王族絕嗣無別君長屬朅盤陁國
성의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큰 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운무가 자욱히 끼어있어 돌을 건드려도 구름이 일어난다. 낭떠러지가 몹시 가팔라서 지금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그 꼭대기에 솔도파가 있는데 참으로 그 솜씨가 훌륭하다.
032_0473_c_11L城西二百餘里至大山山氣巃嵷石興雲崖隒崢嶸將崩未墜其巓窣堵波鬱然奇制也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수백 년 전 산의 벼랑이 무너져 내렸을 때 그 속에 스님이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의 체구는 당당하고 컸지만 모습은 야위어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아래로 길게 길러 어깨를 덮고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사냥하던 사람이 이 모습을 발견하고 왕에게 가서 보고하자 왕이 친히 그를 찾아가 예를 올렸으며 도읍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곳으로 가서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다투어 공양을 올렸다.
032_0473_c_14L聞諸土俗曰數百年前山崖崩圯中有苾芻瞑目而坐軀量偉大形容枯槁鬚髮下垂被肩蒙面有田獵者見已白王王躬觀禮都人士子不召而至焚香散花競脩供養
왕이 말하였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토록 위엄이 있단 말인가?”
王曰斯何人哉若此偉也
032_0474_a_02L이때 어떤 필추가 대답하였다.
“이분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길게 자란 것이며, 입고 있는 옷은 가사인데 멸심정(滅心定)에 든 아라한이 분명합니다. 멸심정에 든 사람은 먼저 기한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치가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고 어떤 이는 태양이 비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런 일깨움이 있으면 곧 선정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일깨움이 없으면 고요히 선정에 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정의 힘이 몸을 유지하고 있어 끝내 쓰러지는 일은 없습니다. 거친 음식물로 버티는 몸은 선정에서 나오면 곧 죽어버리기 때문에 소유(蘇油)45)를 부어서 몸을 충분히 적셔주어야 합니다. 그런 뒤 북을 두드려서 선정의 마음에서 깨어나도록 일깨워 줍니다.”
032_0473_c_19L有苾芻對曰此鬚髮垂長而被服袈裟入滅心定阿羅漢也夫入滅心定者先有期限或言聞揵稚聲或言待日光照有茲警察便從定起若無警察寂然不動定力持身遂無壞滅段食之體出定便謝宜以蘇油灌注令得滋潤然後鼓擊警悟定心
왕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겠다.”
王曰兪乎
그리고 나서 건치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울리고서야 비로소 아라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누구인데 몸체가 작고 가사를 입고 있습니까?”
032_0474_a_03L乃擊揵稚其聲纔振而此羅漢豁然高視久之乃曰爾輩何人形容卑劣被服袈裟
그들이 답하였다.
“나는 필추입니다.”
對曰我苾芻也
그가 물었다.
“그런데 나의 스승이신 가섭파여래께서는 지금 어느 곳에 계십니까?”
032_0474_a_06L我師迦葉波如來今何所在
대답하였다.
“대열반에 드신 지 이미 오래입니다.”
032_0474_a_07L對曰入大涅其來已久
아라한은 이 말을 듣자 눈을 감고 처연하게 감회에 젖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물었다.
“석가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셨습니까?”
032_0474_a_08L聞而閉目悵若有懷重問曰釋迦如來出興世耶
그들이 답하였다.
“세상에 나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신 뒤 적멸에 드셨습니다.”
032_0474_a_09L對曰靈導世已從寂滅
그가 이 말을 듣자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자 일어서서 허공으로 날아오른 뒤 신통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더니 불을 만들어서 몸을 태웠다. 그의 유해가 땅에 떨어지자 왕이 그 뼈를 수습해서 솔도파를 세웠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산지와 광야를 5백여 리 가다 보면 거사국(佉沙國)구역에서 말하는 소륵(蘇勒)이란 바로 그 성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정음(正音)으로는 마땅히 실리흘률다저(室利訖栗多底)라고 불러야 한다. 소륵(疏勒)이라는 말은 오히려 잘못된 말인 것 같다에 도착한다.
032_0474_a_10L聞復俯首夂之乃昇虛空現神變化火焚身遺骸墜王收其骨起窣堵波從此北行磧曠野五百餘里至佉沙國舊謂疏勒者乃稱其城號也正音宜云室利訖栗多底疏勒之言猶爲訛也

20) 거사국(佉沙國)
거사국46)의 둘레는 5천여 리이고 모래와 자갈이 많고 토양은 적다. 농사는 번성하고 꽃과 과일도 풍성하다. 가는 모직물로 된 옷이나 양탄자를 짜는 기술이 훌륭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비와 바람은 순조롭다.
032_0474_a_14L佉沙國周五千餘里多沙磧少壤土稼穡殷盛花菓繁茂出細氈褐工織細㲲氍毹氣候和暢風雨順序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풍속은 남을 속이기를 잘한다. 예의가 경박하고 학예도 천박하다. 그들에게는 자식을 낳으면 머리를 눌러서 평평하게 만드는 풍속이 있다. 용모는 추하고 비천하며 문신을 새기고 눈동자가 녹색이다. 그들의 문자47)는 인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비록 생략되었거나 변해버린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도의 필법 양식을 지키고 있다. 언어48)는 어휘와 발음이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032_0474_a_17L人性獷暴俗多詭詐禮義輕薄學藝膚其俗生子押頭匾㔸容貌麤鄙身綠睛而其文字取則印度雖有刪頗存體勢語言辭調異於諸國
032_0474_b_02L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이 굳고 부지런히 복과 이익을 베풀고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만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대부분은 그저 그 글만을 외우고 있다. 그러므로 3장이나 『비바사』를 모두 외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사다하를 건너 거대한 모래산을 넘어서 작구가국(斫句迦國)구역에서는 조거(沮渠)라고 하였다에 도착한다.
032_0474_a_21L信佛法勤營福利伽藍數百所僧徒萬餘人習學小乘敎說一切有部究其理多諷其文故誦通三藏及『毘婆沙』者多矣從此東南行五百餘里濟徙多河踰大沙嶺至斫句迦國舊曰沮渠

21) 작구가국(斫句迦國)
작구가국49)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하는데 견고하고 험난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산과 구릉들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자갈과 돌이 길에 가득 깔려 있다. 두 강50)을 끼고 있어서 농사가 아주 잘 되며 포도ㆍ배ㆍ능금과 같은 과일들이 아주 풍성하다. 이따금 매서운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조급하고 난폭하며 풍속은 남을 속일 줄만 알고 공공연히 겁탈과 도둑질도 일삼고 있다. 문자는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과 같은데 언어는 차이가 있다.51) 예의가 경박하고 학예도 비천하다. 3보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고 복과 이익을 짓는 행동을 즐긴다. 가람은 수십 곳이 있는데 대부분이 무너졌다. 승도는 백여 명 정도 있는데, 이들은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032_0474_b_03L斫句迦國周千餘里國大都城周十餘里堅峻險固編戶殷盛山阜連屬礫石彌漫臨帶兩河頗以耕植蒲陶其菓寔繁時風寒人躁暴俗唯詭詐公行劫盜文字同瞿薩旦那國言語有異禮義輕薄學藝淺近淳信三寶好樂福利伽藍數十毀壞已多僧徒百餘人習學大乘敎
이 나라의 남쪽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벼랑과 산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뾰족한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다. 초목은 겨울의 추위도 이겨내고 봄과 가을에도 그대로이다. 시냇물은 깊은 여울을 돌다가 물보라를 4방으로 뿌리며 흘러내린다. 암굴(巖屈)과 석실(石室)이 산의 벼랑과 숲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032_0474_b_11L國南境有大山崖嶺嵯峨峯巒重疊草木凌寒春秋一觀谿㵎浚瀨飛流四注崖龕石室棋布巖林
인도에서 성과(聖果)를 증득한 많은 사람들이 신통력을 부려서 가볍게 날아올라 멀리 노닐다가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적멸에 든 아라한들이 아주 많으며 따라서 솔도파들도 많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세 명의 아라한이 암굴 속에 기거하면서 멸심정에 들어있는데 그들의 형체는 야윈 사람과도 같고 머리와 수염이 항상 길게 자란다. 그런 까닭에 사문들이 때때로 이곳에 와서 잘라주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대승경전52)의 수가 아주 많다. 부처님의 법이 퍼진 곳 가운데 이처럼 성대하게 행해진 곳도 없을 것이다. 십만송(十萬頌)으로 한 부(部)를 이루는 경전이 열 종류를 훨씬 웃돈다. 이후로 그것은 널리 유포되었으며 실로 광대하게 퍼져 나갔다.
032_0474_b_14L印度果人多運神通輕擧遠遊棲止於此諸阿羅漢寂滅者衆以故多有窣堵波也今猶現有三阿羅漢居巖穴中入滅心定形若羸人鬚髮恒長故諸沙門時往爲剃而此國中大乘經典部數尤多佛法至處莫斯爲盛也十萬頌爲部者凡有十數自茲已降其流寔
이곳에서 동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당나라 말로는 지유(地乳)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 지방의 표준어이다. 속어로는 이것을 한나구(漢那九)라고 하는데 흉노(匈奴)는 이 나라를 가리켜 우둔(于遁)이라고 한다. 제호(諸胡)는 계단(谿旦)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이 나라를 가리켜 굴단(屈丹)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우전(于闐)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도착한다.
032_0474_b_22L從此而東踰嶺越谷行八百餘里至瞿薩旦那國唐言地乳卽其俗之雅言也俗語謂之漢那國匈奴謂之于遁諸胡謂之壑旦印度謂之屈丹舊曰于闐訛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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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
구살단나국53)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54) 모래와 자갈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데 그 땅은 좁다. 농사가 잘 되며 온갖 과일이 많이 난다. 양탄자와 가는 모직물을 생산하는데 가늘게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 또 백옥(白玉)과 예옥(黳玉)을 생산하고 있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아다닌다.
032_0474_b_24L瞿薩旦那國周四千餘里沙磧太半壤土隘狹宜穀稼多衆菓出氍毹工紡績絁紬又產白玉黳玉氣序和暢飄風飛埃
풍속은 예의를 알며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능을 익히며 여러 기술에 널리 통달해 있다. 인민들은 부유하고 집집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음악을 숭상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춤과 노래를 즐긴다. 소수의 사람들은 털옷이나 모직옷을 입고 대부분은 명주를 기운 옷[絁紬]이나 흰 모직물[白氈]의 옷을 입는다. 행동거지에는 예의가 있고 풍속에는 기강이 있다. 문자와 법률ㆍ제도는 인도의 것을 따르고 있지만 필법이나 양식은 조금 바꾸었으므로 새로운 부분도 있다. 말은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55)
032_0474_c_05L俗知禮義人性溫恭好學典藝博達技能衆庶富樂編戶安業國尚樂音人好歌儛少服毛褐氈裘多衣絁紬白㲲儀形有禮風則有紀文字憲章聿尊印度微改體勢粗有沿革語異諸國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가람은 백여 곳이 있으며 승도는 5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왕은 매우 굳세고 용감하며 부처님의 법을 깊이 받들고 있어서 스스로를 가리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032_0474_c_10L崇尚佛法伽藍百有餘所僧徒五千餘人竝多習學大乘法敎王甚驍武敬重佛法自云毘沙門天之祚胤也
옛날 이 나라는 허허벌판의 광야였을 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비사문천이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무우왕의 태자가 달차시라국에 있다가 눈을 도려내는 일을 당하자 무우왕이 격노하여 태자를 보좌하던 신하를 내쫓았다. 또 그 호족들을 유배 보내어 거주하던 설산의 북쪽에서 내쳐서 황량한 골짜기에 자리 잡게 하였다. 유배당한 사람들은 맹수들을 쫓아내며 이 서쪽 경계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032_0474_c_13L昔者此國虛曠無人毘沙門天於此棲止無憂王太子在呾叉始羅國被抉目已無憂王怒譴輔佐遷其豪族出雪山北居荒谷閒遷人逐物至此西界推擧酋豪尊立爲王
당시에는 동쪽 지역 황제의 아들이 유배를 당하여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이 동쪽 경계에 와서 살았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의 권고에 의하여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세월이 꽤 흘렀어도 두 나라는 문화를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왕이 각각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황량한 늪에서 서로 만나 자신의 가계(家系)를 따지다가 서로의 우위를 주장하며 다투게 되었다. 말이 거칠어졌고 마침내 서로 병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032_0474_c_18L當是時也東土帝子蒙譴流徙居此東界群下勸進又自稱王歲月已積風敎不通各因田獵遇會荒澤更問宗緖因而爭長忿形辭語便欲交兵
그런데 신하가 이렇게 간언하였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사냥하러 와서 싸움이라니요? 게다가 지금은 군대와 무기도 미처 갖추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돌아가셔서 병사들을 정비한 뒤에 날을 정하여 모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032_0474_c_22L或有諫曰今何遽乎因獵決戰未盡兵鋒宜歸治兵期而後集
032_0475_a_02L이에 가마를 돌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뒤에 군마(軍馬)를 정비하고 훈련을 시켰으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자 병사들을 모아 깃발을 높이 세우고 북을 두드리며 나아가 대치하였다. 날이 밝자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 나라의 군주가 불리해지자 북쪽으로 달아났다. 동쪽 나라의 군주는 그를 쫓아가서 목을 베고 승리를 얻었다. 그는 군주를 잃은 나라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도읍을 중간 지역으로 옮겨서 성곽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적절한 땅인지 몰라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포고령을 내려서 지리에 해박한 사람을 찾았다.
032_0474_c_24L於是迴駕而返各歸其國挍習戎馬督勵士卒至期兵會旗鼓相望旦日合戰西主不利因而逐北遂斬其首東主乘勝撫集亡國遷都中地方建城郭憂其無土恐難成功宣告遠近誰識地理
이때 몸에 회를 바른 외도가 있었는데 그는 커다란 표주박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표주박에 물을 가득 담아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제가 지리를 압니다.”
032_0475_a_06L時有塗灰外道負大瓠盛滿水而自進曰我知地理
그리하여 그 물을 흘려보내니 물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다시 처음 흘려보냈던 곳으로 왔다가 갑자기 급하게 흐르더니 어느 순간 홀연히 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물이 흐르던 흔적을 따라서 성곽의 기초를 높이 세우고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지금의 왕이 이 성을 도읍으로 정하였는데 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공격을 받아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성을 빼앗은 사람이 없었다. 그 왕이 수도를 옮기고 마을을 만들고서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였다.
032_0475_a_08L遂以其水屈曲遺流周而復始因卽疾驅忽而不見依彼水迹峙其基堵遂得興功卽斯國治今王所都於此城也城非崇峻攻擊難剋自古已來未能有勝其王遷都作邑建國安人
그와 같은 위업을 이루고난 왕은 이미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직 후사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계가 끊어질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비사문천신에게 가서 기도를 올리며 후사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신상(神像)의 이마가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갓난아이가 나왔다. 왕이 그 아이를 받들고 가마를 돌려 돌아오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경사스러워 하였다. 그런데 아이가 인간의 젖을 먹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신사로 가서 거듭 아이를 길러줄 것을 청하였다.
032_0475_a_13L功績已成齒耋云暮未有胤嗣恐絕宗緖乃往毘沙門天神所祈禱請嗣神像額上剖出嬰孩捧以迴駕國人稱慶旣不飮乳恐其不壽尋詣神祠重請育養
그 순간 신상 앞의 땅이 불쑥 솟아올랐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젖가슴과도 같았다. 신이 내려준 아이는 그 젖을 먹고 자라나게 되었다. 아이의 지혜와 용기는 앞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빛났으며 그의 덕풍과 교화는 널리 사람들에게 미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사(神祠)를 지어 조상에게 제사지냈다. 그 뒤로 대대로 이 일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계승하여 군림하여 그 왕통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신묘(神廟)에는 수많은 진귀한 보배들이 있으며 제사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땅의 젖[地乳]’으로 왕을 길렀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032_0475_a_17L神前之地忽然隆起其狀如乳神童飮吮遂至成立智勇光前風敎遐被遂營神祠宗先祖也自茲已降弈世相承傳國君臨不失其緖故今神廟多諸珍寶拜祠享祭無替於時地乳所育因爲國號
왕성의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가람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이 비로절나(毘盧折那)56)당나라 말로는 편조(遍照)라고 한다아라한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032_0475_a_22L王城南十餘里有大伽藍此國先王爲毘盧折那唐言遍照阿羅漢建也
032_0475_b_02L옛날 이 나라에 부처님의 법이 아직 미치지 못하였을 때 아라한이 가습미라국으로부터 이 숲 속에 와서 조용히 가부좌하여 선정을 익히고 있었다. 이때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그 용모와 복장에 놀라서 그의 모습에 관하여 낱낱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032_0475_a_24L昔者此國佛法未被而阿羅漢自迦濕彌羅國至此林中宴坐習定時有見者駭其容服具以其狀上白於王
왕은 친히 그곳으로 나아가서 아라한의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데 홀로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이오?”
032_0475_b_04L王遂躬往觀其容止爾何人乎獨在幽
아라한이 답하였다.
“나는 여래의 제자로서 조용하게 지내며 선정을 닦고 있는 중입니다. 왕께서는 복을 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찬양하며 가람을 세우고 승가 대중을 불러 모아야 마땅합니다.”
032_0475_b_06L羅漢曰如來弟子閑居習定宜樹福弘讚佛敎建伽藍召僧衆
왕이 물었다.
“여래라는 자는 어떤 덕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신이기에 그대가 숲 속에서 지내며 고행을 하면서까지 그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인가?”
032_0475_b_07L如來者有何德有何神而汝鳥棲勤苦奉敎
나한이 답하였다.
“여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시며 삼계(三界)를 인도하시기 위해 모습을 나타내시거나 숨기시면서 나고 죽는 오묘한 이치를 보이십니다. 그 법을 따른다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지만 그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면 애욕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 것입니다.”
032_0475_b_09L如來慈愍四生誘導三或顯或隱示生示滅遵其法者離生死迷其敎者羈纏愛網
왕이 말하였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구체적인 일로 나타내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말로 따지는 것보다 더 명백해질 것입니다. 대성(大聖)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그분이 나를 위하여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면 우러러 뵌 뒤에는 마땅히 가람을 세워서 마음을 기울여 귀의하고 믿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겠습니다.”
032_0475_b_11L王曰如所說事高言議旣云大聖爲我現旣得瞻仰當爲建立罄心歸信揚敎法
그러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 먼저 가람을 세우시어 공을 이루시면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羅漢曰王建伽藍功成感應
왕은 그 청을 따라서 승가람을 세우니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와서 법회를 열고 경하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불러 모을 때 두드려야 하는 건치가 없었다.
032_0475_b_14L王茍從其請建僧伽藍遠近咸集會稱慶而未有揵稚扣擊召集
왕이 나한에게 말하였다.
“가람은 완성되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032_0475_b_16L王謂羅漢曰伽藍已成佛在何所
나한이 말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니 부처님의 보살핌이 멀지 않았습니다.”
032_0475_b_17L羅漢曰當至誠聖鑑不遠
왕이 나아가 예를 올리며 기도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불상이 나타나 내려와서 왕에게 건치를 내려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실하게 믿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게 되었다.
032_0475_b_18L王遂禮請忽見空中佛像下降授王揵稚因卽誠信揚佛敎
왕성의 서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에 구실능가산(瞿室綾伽山)57)당나라 말로는 우각(牛角)이라고 한다이 있는데 산봉우리 두 개가 솟아있고 4방이 절벽이다. 절벽 사이에 가람이 하나 서있는데 그 속에 모셔진 불상은 이따금 밝은 빛을 내고 있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오셔서 여러 하늘과 인간을 위해서 법의 요체를 간략하게 설하시며 이 땅에 나라가 세워지고 부처님께서 남긴 법을 믿고 대승을 따라 행할 것이라고 기약하셨다.
032_0475_b_20L王城西南二十餘里有瞿室綾伽山唐言牛角山峯兩起巖隒四絕於崖谷閒建一伽藍其中佛像時燭光明昔如來曾至此處爲諸天人略說法要記此地當建國土敬崇遺法遵習大乘
032_0475_c_02L우각산 암벽에는 커다란 석실이 있는데 그 속에 아라한이 멸심정에 들어서 자씨불(慈氏佛)을 기다리고 있다. 수백 년 동안 공양 올리는 일을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는데 근래에 벼랑이 무너지자 석실로 통하는 길이 막혀버렸다. 국왕이 이 병사들을 동원하여 무너진 돌을 치우려 하였지만 검은 벌떼가 몰려들어 사람들에게 독을 쏘았다. 그래서 지금도 석문은 열리지 않고 있다.
032_0475_c_02L牛角山巖有大石室中有阿羅漢滅心定待慈氏佛數百年閒供養無近者崖崩掩塞門徑國王興兵除崩石卽黑蜂群飛毒螫人衆以故至今石門不開
왕성 서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지가파박나(地迦婆縛那)가람58)이 있는데 그 속에는 협저(夾紵)59) 입불상(立佛像)이 모셔져 있다. 본래 굴지국(屈支國)으로부터 이곳으로 와서 머물게 된 것이다. 옛날 이 나라에 신하가 있었는데 견책을 당하여 굴지국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이 불상에게 예를 올렸는데, 훗날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온 마음을 기울여서 멀리서나마 예불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불상이 갑작스레 저절로 이곳으로 오자 그 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032_0475_c_07L王城西南十餘里有地迦婆縛那伽中有夾紵立佛像本從屈支國而來至止昔此國中有臣被譴寓居屈恒禮此像後蒙還國傾心遙敬分之後像忽自至其人捨宅建此伽藍
왕성의 서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발가이성(勃伽夷城)60)에 도착한다. 이 성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7척 남짓하고 얼굴과 모습이 아름다우며 위엄이 있고 숙연하다. 머리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는데 이따금 광명이 비친다.
032_0475_c_12L王城西行三百餘里至勃伽夷城有佛坐像高七尺餘相好允備威肅嶷然首戴寶冠光明時照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본래 가습미라국에 있던 불상이었는데 지극히 기도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떤 나한이 있었는데 그의 사미 제자가 죽음을 맞이해 신맛이 나는 떡을 찾았다고 한다. 나한이 천안으로 그 모습을 보고서 구살단나국에 그 음식이 있음을 알고 신통력으로 이곳에 와서 구하여 가져다주었다. 사미가 그것을 먹고 난 뒤에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바라던 대로 그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가 왕위를 이어받자 그의 위엄은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쳤으며 마침내 설산을 넘어 가습미라국을 정벌하러 갔다. 가습미라국의 왕도 군마를 정렬하고 소집하여 변방의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032_0475_c_15L聞諸土俗本在迦濕彌羅國請移至此昔有羅漢其沙彌弟子臨命終時求酢米羅漢以天眼觀見瞿薩旦那國有此味焉運神通力至此求獲沙彌噉願生其國果遂宿心得爲王子嗣位已威攝遐邇遂踰雪山伐迦濕彌羅國迦濕彌羅國王整集戎馬禦邊寇
이때 아라한이 왕에게 간언하였다.
“병사들을 부려서 전투를 벌이지 마십시오. 내가 능히 그들을 물리치겠소.”
032_0475_c_23L時阿羅漢諫王勿鬪兵也能退之
032_0476_a_02L이어서 나아가 구살단나왕을 위하여 여러 가지 법의 요체를 설해주었다. 왕은 처음에는 믿지 않고 여전히 병사를 일으켜 전쟁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한이 마침내 이 왕이 전생에 사미였을 때 입었던 옷을 가져다가 보여 주었다. 왕은 옷을 보고 나서 숙명지(宿命智)를 얻었다. 그리하여 가습미라왕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우호를 나누었으며 병사들을 해산시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미 사절에 자신이 공양을 올렸던 불상을 봉양하고 군사들과 함께 예를 올리며 청하였다. 그러자 불상이 이 땅으로 온 뒤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물러나서 가람을 세우고 승려들을 초청하였으며 자신의 왕관을 희사하여 불상의 머리 위에 올렸다. 지금 불상의 관은 바로 선왕(先王)이 보시한 것이다.61)
032_0475_c_24L尋爲瞿薩旦那王說諸法要王初未信尚欲興兵羅漢遂取此王先身沙彌時衣而以示之王旣見衣得宿命智與迦濕彌羅王謝咎交歡釋兵而返奉迎沙彌時所供養佛像隨軍禮請像至此地不可轉移環建伽藍或招僧侶捨寶冠置像頂今所冠卽先王所施也
왕성의 서쪽으로 150~16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사막의 길 한가운데에 구릉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쥐가 파낸 흙이 쌓인 것이다.62)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사막에 사는 쥐 가운데 큰 것은 고슴도치만 한데 그 털 빛깔은 금빛과 은빛이 섞인 듯 이채롭다고 한다. 쥐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구멍에서 나와 다닐 때마다 쥐떼들이 무리를 지어 따른다고 한다.
032_0476_a_08L王城西百五六十里大沙磧正路中有堆阜竝鼠壤墳也聞之土俗曰沙磧中鼠大如蝟其毛則金銀異色爲其群之酋長每出穴遊止則群鼠爲從
옛날에 흉노들이 수십만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방의 성을 노략질하러 나왔다가 쥐가 파서 쌓아놓은 흙더미 옆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이 있었다. 이때 구살단나왕도 수만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대적해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한편 왕은 평소 흙더미 속에 사는 쥐를 기이하게 여기기는 하였지만 신령스러운 힘이 있는지 미심쩍어 하였다. 그리하여 오랑캐들이 쳐들어 와도 살아남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신하들도 겁에 질리기만 하였지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은 하는 수 없이 제단을 마련하고 향을 사르며 쥐에게 빌었다.
“바라건대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군사력에 도움을 내려주소서.”
032_0476_a_13L昔者匈奴率數十萬衆寇掠邊至鼠墳側屯軍時瞿薩旦那王率數萬兵恐力不敵素知磧中鼠奇未神也洎乎寇至無所求救君臣震莫知圖計茍復設祭焚香請鼠其有靈少加軍力
그 날 밤 구살단나왕은 꿈에 커다란 쥐를 보았는데 쥐가 왕에게 말하였다.
“삼가 힘을 돕고자 하오니 부디 일찍이 병사들을 정렬하소서. 다음날 아침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이기실 것입니다.”
032_0476_a_18L其夜瞿薩旦那王夢見大鼠敬欲相助願早治兵日合戰必當克勝
032_0476_b_02L구살단나왕은 신령스러운 힘의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서 마침내 군마를 정렬하고 장수들에게 명하여 날이 새기 전에 전쟁터로 나아가서 멀리까지 적을 추격하여 덮치도록 하였다. 흉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겁을 내면서 수레에 올라타고 갑옷을 입으려고 하였는데, 모든 말의 안장과 사람들의 옷, 활의 시위와 갑옷의 솔기 등 모든 띠나 실의 종류를 쥐가 모조리 쏠아 끊어 놓았다. 그 사이 구실단나왕의 군대가 이미 들이닥쳐 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묶이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그 장수를 죽이고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으니, 흉노들은 겁에 질려 이것은 신령이 왕의 군대를 도운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032_0476_a_20L瞿薩旦那王知有靈祐遂整戎馬申令將士未明而行長驅掩襲匈奴之聞也莫不懼焉欲駕乘被鎧而諸馬鞍人服弓弦凡厥帶系鼠皆齧斷兵寇旣臨縛受戮於是殺其將虜其兵匈奴震以爲神靈所祐也
구살단나왕은 쥐의 큰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대로 이들을 존경하면서 특별히 진귀하게 여겼다. 위로는 군왕에서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제사를 모시며 복과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쥐구멍을 지날 때면 수레에서 내려서 종종걸음으로 빨리 나아가 절을 하며 지극한 공경심을 표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복을 구하기 위해 옷이나 화살, 또는 향이나 꽃, 온갖 맛난 음식들로 공양을 올리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면 많은 이들이 복과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곧 재난을 당한다고 한다.
032_0476_b_03L瞿薩旦那王感鼠厚恩建祠設祭弈世遵敬特深珍異故上自君王下至黎庶咸修祀祭求福祐行次其穴下乘而趍拜以致祭以祈福或衣服或香花亦旣輸誠多蒙福利若無享祭逢災變
왕성의 서쪽으로 5~6리를 가다 보면 사마약(娑摩若)승가람63)이 있다. 이 속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신령스러운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나며 이따금 신비한 빛이 비친다고 한다. 옛날 나한이 먼 곳에서 이 숲 속으로 와서 신통력으로 커다란 광명을 비추었다.
032_0476_b_09L王城西五六里有娑摩若僧伽藍有窣堵波高百餘尺甚多靈瑞時燭神光昔有羅漢自遠方來止此林中以神通力放大光明
이때 왕이 밤에 2층 누각에 올라 멀리서 숲을 바라보다가 광명이 환히 비치는 것을 보고서 그 내력을 물어보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어떤 사문 한 사람이 멀리서 와있는데 숲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서 신통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032_0476_b_13L時王夜在重閣遙見林中光明照曜於是歷問僉曰有一沙門自遠而至宴坐林中示現神通
왕이 곧바로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몸소 그곳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현자라고 생각해 마음에는 존경심이 일어났다. 왕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궁중으로 와줄 것을 완강히 청하자 사문이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각자 적합한 장소가 있으며, 뜻은 각자 있을 곳이 따로 있습니다. 깊은 숲과 늪지가 마음에 맞으니, 훌륭한 집과 높은 건물은 내가 찾아갈 곳이 아닙니다.”
032_0476_b_16L王遂命駕躬往觀察旣睹明賢乃心祗敬欽風不已請至中宮沙門物有所宜志其所在幽林藪澤之所賞高堂邃宇非我攸聞
이 말을 들은 왕은 한층 존경하고 우러러보면서 깊이 존중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그를 위해서 가람을 세우고 솔도파를 일으켰다. 사문은 왕의 청을 받아서 결국 그곳에서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은 감응을 통해 사리 수백 과[粒]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크게 기뻐하면서도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리가 나의 정성에 감응한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늦었단 말인가? 일찍 얻어서 솔도파 아래에 안치했더라면 어찌 훌륭한 유적지가 되지 아니하였겠는가?’
032_0476_b_19L王益敬深加宗重爲建伽藍起窣堵波門受請遂止其中頃之王感獲舍利數百粒甚慶悅竊自念曰舍利來應何其晩歟早得置之窣堵波下豈非勝迹
032_0476_c_02L그리고 곧 가람으로 가서 사문에게 자세하게 말하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안치하십시오. 금ㆍ은ㆍ동ㆍ철ㆍ대석(大石)을 가지고 상자를 만들어 차례로 사리를 넣으십시오.”
032_0476_b_24L尋詣伽藍具白沙門羅漢曰無憂也今爲置之宜以金鐵大石函等以次周盛
왕이 장인에게 명하자 하루도 안 되어 함이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보석들을 가마에 싣고 가람에 도착하였다. 이때 왕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부터 관리,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의 수가 만 명을 헤아렸다.
032_0476_c_03L王命匠人不日功載諸寶輿送至伽藍是時也王宮導從庶僚凡百觀送舍利者動以萬
나한이 오른손으로 솔도파를 들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에 왕에게 말하였다.
“이제 사리를 안장하십시오.”
032_0476_c_06L羅漢乃以右手擧窣堵波置諸掌謂王曰可以藏下也
마침내 땅에 구멍을 파서 사리함을 안장하자 공사는 끝이 났다. 이에 솔도파를 내려놓았는데 조금도 기울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며 찬탄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고 법을 공경하는 뜻이 더욱 강해졌다.
032_0476_c_07L遂坎地安函其功斯畢於是下窣堵波無所傾損觀睹之徒歎未曾有信佛之心彌篤敬法之志斯堅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부처님의 힘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신통력도 궁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어떤 때는 몸을 백억 가지로 나누고 또 어떤 때는 인간과 하늘에 그 모습을 나타내어 주시기도 한다고 들었다. 온 세계를 들어서 손바닥 안에 올려놓아도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은 조금도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며, 법의 성품을 평범한 말씀으로 널리 연설하여도 중생은 자기 근기에 따라서 깨우침을 얻는다고 하였다.
032_0476_c_10L王謂群官曰我嘗聞佛力難思神通難究或分身百億應迹人天擧世界於掌內衆生無動靜之想演法性於常音衆生有隨類之悟
바로 이런 부처님의 신통력이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비길 데가 없으며, 부처님의 지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여전히 그 가르침은 전해지고 있다. 그 교화를 즐기고 은택에 젖으며 도를 맛보고 그 풍모를 흠모하는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서 그 복의 도움을 크게 입게 되었으니, 사람들이여, 부지런히 깊이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깊고 광대해져 밝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032_0476_c_14L斯則神力不共智慧絕言其靈已隱其敎猶傳飡和飮澤味道欽風尚獲斯靈深賴其福勉哉凡百宜深崇敬佛法幽深於是明矣
왕성에서 동남쪽으로 5~6리 떨어진 곳에 마사(麻射)승가람64)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의 부인이 세운 것이다. 옛날 이 나라 사람들은 누에나 뽕나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동쪽의 나라에는 그것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에게 명하여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동쪽 나라의 군주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여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변방의 출입문에 엄명을 내려서 누에나 뽕나무 종자가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경비를 서도록 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구살단나왕은 자존심을 굽혀서 동쪽나라에 혼처를 구하였다. 동쪽 나라의 군주는 먼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뜻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 청을 받아들였다.
032_0476_c_17L王城東南五六里有麻射僧伽藍國先王妃所立也昔者此國未知桑聞東國有也命使以求時東國君秘而不賜嚴勅關防無令桑蠶種出瞿薩旦那王乃卑辭下禮求婚東國君有懷遠之志遂允其請
032_0477_a_02L구살단나왕이 사신에게 왕녀를 맞아들일 때 다음과 같이 하도록 명하였다.
“너는 동쪽나라 공주에게 ‘우리 나라에는 본래 비단실이나 누에, 뽕나무의 종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라.”
032_0476_c_23L瞿薩旦那王命使迎婦而誡曰爾致辭東國君女我國素無絲緜桑蠶之種以持來自爲裳服
공주는 그 말을 듣고 비밀리에 그 종자를 구한 뒤 모자 속에 감추었다. 마침내 변방의 출입문에 도착하였다. 관리는 두루 수색하였지만 공주의 모자만은 감히 조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구살단나국에 들어가서 마사(麻射)가람의 옛 땅에 머물렀다. 왕은 그곳에서 비로소 의례를 갖추고 공주를 받들어 궁으로 맞아들였다.
032_0477_a_03L女聞其言密求其以桑蠶之子置帽絮中旣至閞防主者遍索唯王女帽不敢以驗遂入瞿薩旦那國止麻射伽藍故地方備儀禮奉迎入宮
뽕나무와 누에의 종자는 이 땅에 남겨두었는데 따뜻한 봄이 오자 그 뽕나무를 심고 누에 먹일 달[蠶月:음력 사월]이 되자 다시 이곳으로 와서 뽕나무 잎을 따다가 누에에게 먹였다. 처음에 왔을 때는 여러 가지 잎을 섞여서 먹였지만, 이때 이후로는 뽕나무가 무성해졌다.
032_0477_a_07L以桑蠶種留於此地陽春告始乃植其桑蠶月旣臨復事採養初至也尚以雜葉飤之自時厥桑樹連陰
왕비가 이에 돌에다 규정을 새겨두었다.
“살상해서는 안 된다. 누에가 나방이 되어서 날아가 버린 뒤에 누에고치를 처리해야 한다. 만일 이 법칙을 어긴다면 신이 보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에를 위해 가람을 세웠다. 이곳에는 말라버린 뽕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이것이 그 본래 종자였던 나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나라에서는 누에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몰래 실을 가져가면 다음 해에는 누에 작황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032_0477_a_10L王妃乃刻石爲制不令傷殺蠶蛾飛盡乃得治繭敢有犯違明神不祐遂爲先蠶建此伽藍數株枯桑云是本種之樹也故今此國有蠶不殺竊有取絲者來年輒不宜蠶
성의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큰 강65)이 있는데, 이 강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밭을 경작하였다. 그런데 훗날 강물이 끊겼다. 그러자 왕은 참으로 괴이하다고 여기고 가마를 준비하게 하여 나한승(羅漢僧)에게 가서 물었다.
“큰 강의 물을 이 나라 사람들이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강물이 끊겼으니, 이것은 대체 누구의 잘못입니까? 정치를 공평하게 하지 못하였거나 저의 덕이 널리 두루 미치지 못하였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무거운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까?”
032_0477_a_14L城東南百餘里有大河西北流國人利之以用漑田其後斷流王深怪異於是命駕問羅漢僧曰大河之水人取給今忽斷流其咎安在爲政有不平德有不洽乎不然垂譴何重也
나한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정치와 교화는 맑고 온화하였습니다. 강물이 끊어진 것은 용의 소행입니다. 서둘러 사당으로 가서 기도하고 소원을 빈다면 예전처럼 이익을 회복하실 겁니다.”
032_0477_a_19L羅漢曰大王治國政化淸和河水斷龍所爲耳宜速祠求當復昔利
왕이 이 말을 듣고 가마를 돌려 사당에 가서 강의 용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한 여인이 파도를 타고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서 의지하고 따를 만한 지아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을 막아 농민에게 피해가 가도록 심통을 부렸던 것입니다. 왕께서 나라 안에 지체가 높으신 신하 한 사람을 골라서 나와 혼인을 맺어준다면 강물은 예전과 같이 흐를 것입니다.”
032_0477_a_21L因迴駕祠祭河龍忽有一女凌波而我夫早喪王命無從所以河水絕流農人失利王於國內選一貴臣配我爲夫水流如昔
왕이 말하였다.
“삼가 그대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032_0477_b_02L王曰敬聞任所欲耳
032_0477_b_02L용이 이 나라의 대신에게 맘에 드는 표정을 보였다. 왕이 가마를 돌려 환궁하고서 군신들에게 말하였다.
“대신은 이 나라의 막중한 인물이고 농사는 사람이 연명하기 위한 일이다. 나라가 막중한 인물을 잃는다면 곧 위험해질 것이고 사람에게 음식이 끊어진다면 곧 죽게 될 것이다. 위험함과 죽음의 일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032_0477_b_03L龍遂目悅國之大臣王旣迴駕謂群下曰大臣者國之重鎭農務者人之命食國失鎭則危人絕食則死死之事何所宜行
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답하였다.
“오래 전부터 미천한 몸으로 감히 나라의 중책을 맡아 일을 그르쳤습니다. 언제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그 시기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택된다면 감히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백성을 이롭게 한다면 이 한 사람의 신하가 어찌 아깝겠습니까? 신하란 나라를 보좌하는 사람이요,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부디 대왕께서는 더 염려치 마소서. 만약 다행히 복을 짓게 된다면 승가람을 세워주소서.”
032_0477_b_06L大臣越席跪而對曰久已虛薄謬當重任常思報國未遇其時今而預選敢塞深責茍利萬姓何吝一臣臣者國之佐人者之本願大王不再思也幸爲脩福僧伽藍
왕이 그의 소원을 받아들여 공사를 하여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 신하는 용궁으로 빨리 들여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연주하고 음식을 가지고 나와서 그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 신하는 흰옷으로 갈아입고서 백마에 올라탄 뒤에 왕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나라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을 몰아서 강으로 들어갔는데 물 위를 밟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강의 중류까지 건넜을 때 말채찍을 휘둘러서 물을 젓자 물의 가운데가 열리면서 가라앉아 버렸다. 잠시 후에 백마가 떠올랐는데 전단으로 만든 커다란 북 하나와 한 통의 편지를 싣고 왔다.
032_0477_b_11L王允所求功成不日其臣又請早入龍宮於是擧國僚庶鼓樂飮其臣乃衣素服乘白馬與王辭訣敬謝國人驅馬入河履水不溺濟乎中流麾鞭畫水水爲中開自茲沒矣頃之白馬浮出負一栴檀大鼓封一函書
그 편지에는 대략 이렇게 쓰여 있었다.
“대왕께서 미천한 저를 저버리지 않으셔서 과분하게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디 복을 지으셔서 나라를 이익 되게 하시고 신하들에게 은혜를 두루 미치소서. 이 큰 북을 성의 동남쪽에 걸어두소서. 만일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북이 미리 울려서 소리를 낼 것입니다.”
032_0477_b_17L其書大略曰大王不遺細微參神選願多營福益國滋臣以此大懸城東南若有寇至鼓先聲震
마침내 강물이 다시 흘렀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물을 이용하고 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용의 북은 없어진 지 오래이며 예전에 걸렸던 곳에 지금은 다른 북이 걸려있다. 연못 옆의 가람도 폐허가 되어 스님이 살고 있지 않다.
032_0477_b_19L水遂流至今利用歲月浸遠龍鼓久舊懸之處今仍有鼓池側伽藍圯無僧
왕성의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드넓게 황폐해진 늪지가 있다. 수십 경(頃)에 달하는 땅에 초목은 없고 토지는 검붉은 색이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전쟁에서 패한 곳이라고 한다.
032_0477_b_22L王城東三百餘里大荒澤中數十頃絕無蘖草其土赤黑聞諸耆舊曰敗軍之地也
032_0477_c_02L옛날 동쪽 나라의 장군이 백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을 정벌하러 왔다. 이때 구살단나왕 또한 군마를 정비하고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강적들과 대항하였다. 이곳에 이르러 두 나라 군사가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 병사들이 밀렸다. 그리하여 승리를 얻게 된 동쪽 나라의 병사들이 살육을 자행하였다. 왕을 포로로 잡고 그 장수를 죽였다. 병사들은 모조리 살육당하여 누구 한 사람 살아남지 못하였다. 유혈이 낭자하여 땅을 적셨으니, 그 흔적이 지금 이렇게 남아있다.
032_0477_c_02L昔者東國軍師百萬西此時瞿薩旦那王亦整齊戎馬數十萬衆東禦强敵至於此地兩軍相因卽合戰西兵失利乘勝殘殺其王殺其將誅戮士卒無復孑遺血染地其迹斯在
전투를 벌인 곳에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비마성(媲摩城)66)에 도착한다. 전단(栴檀)을 새긴 입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두 길[二] 남짓하고 영묘한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난다. 이따금 광명을 비추기도 하는데 누구든지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불상의 부위에 금박(金箔)을 붙이면 완쾌된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자는 대부분 소원을 들어준다.
032_0477_c_07L戰地東行三十餘里至媲摩城有雕檀立佛像高二丈餘甚多靈應時燭光明凡有疾病隨其痛處金薄帖像卽時痊復虛心請願多亦遂求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교상미국 오타연나왕이 만든 것인데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그곳에서 허공을 타고 이 나라 북쪽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67) 안으로 왔다고 한다.
032_0477_c_11L聞之土俗曰此像昔佛在世憍賞彌國鄔陁衍那王所作也佛去世後自彼凌空至此國北曷勞落迦城中
처음 이 성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안락하고 부유한데다가 삿된 견해에 깊이 빠져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거나 공경하지 않았다. 그 불상이 저절로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신기하게는 생각하였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어떤 나한이 이 불상에 예배를 하였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용모와 복장이 남다른 것에 놀라서 달려가 왕에게 보고하였다.
032_0477_c_14L初到此人安樂富饒深著邪見而不珍敬其自來神而不貴後有羅漢禮拜此國人驚駭異其容服馳以白王
그러자 왕이 명령을 내렸다.
“모래와 흙을 이 낯선 사람에게 뿌려라.”
그리하여 아라한은 온몸에 흙과 모래를 뒤집어썼고 입에 풀칠할 음식도 구하지 못하여 끼니를 굶고 있었다.
032_0477_c_17L乃下令宜以沙土坌此異人時阿羅漢身蒙沙土餬口絕糧
이때 어떤 한 사람이 속으로 이 일을 못 견뎌 하였다. 그는 옛날부터 언제나 이 불상을 공경하고 존귀하게 여겨 절을 올려왔던 사람이다. 그가 나한이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을 보고 몰래 그에게 음식을 주었다. 나한이 그 지방을 떠나가려 할 때에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떠난 지 7일이 지나면 흙모래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이 성을 가득 메울 것이며 아마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그대에게 그 일을 알려주니 서둘러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시오. 나에게 흙모래를 끼얹은 사람들은 그런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오.”
032_0477_c_19L時有一人甚不忍昔常恭敬尊禮此像及見羅密以饌之羅漢將去謂其人曰後七日當雨沙土塡滿此城略無遺爾宜知之早圖出計猶其坌我斯殃耳
032_0478_a_02L나한은 이렇게 말을 하고서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친지들에게 이 일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자는 누구라도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틀째가 되자 큰 바람이 홀연히 불더니 흙먼지가 불어왔다. 그리고 온갖 보석들이 비처럼 쏟아져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앞서 재앙을 예고한 사람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반드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은밀히 길을 파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032_0477_c_24L語已便去忽然不見其人入具告親故或有聞者莫不嗤笑第二日大風忽發吹去穢壤雨雜寶滿衢路人更罵所告者此人心知必竊開孔道出城外而穴之
7일째가 되던 한 밤에 모래와 흙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성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사람은 구멍을 통하여 성을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서 이 나라에 도착하여 비마성(媲摩城)에 머물렀다. 이 사람이 이곳으로 오자 불상도 따라왔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불상에게 공양을 올리자 다시 옮겨가지 않았다. 여러 앞선 기록들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이 다하면 불상이 용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 갈로낙가성은 커다란 구릉이 되어있는데 여러 다른 나라의 군왕이나 귀족들이 이곳에 와서 흙을 파고 그 보물을 발굴해내려고 많이 시도하지만 바로 그 옆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맹렬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대고 자욱한 연기와 구름이 4방에서 일어나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032_0478_a_05L第七日霄分之後雨沙土滿城中其人從孔道出東趣此國止媲摩城其人纔其像亦來卽此供養不敢遷移諸先記曰釋迦法盡像入龍宮今曷勞落迦城爲大堆阜諸國君王異方豪右多欲發掘取其寶物適至其側猛風暴發煙雲四合道路迷失
비마천(媲摩川)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사막으로 들어가서 2백여 리를 가게 되면 니양성(尼攘城)68)에 도착한다. 성의 둘레는 3~4리에 달하며 커다란 늪지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늪지는 무덥고 습하여 걸어다니기가 어렵다. 갈대가 어지럽게 자라있어 지나다니는 길이 없는데 오직 이 성을 거쳐 나가야지만 간신히 길을 찾아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왕래하는 사람은 이 성을 거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구살단나(瞿薩旦那)는 이 성을 동쪽 국경의 관문으로 삼고 있다.
032_0478_a_12L媲摩川東入沙磧行二百餘里至尼攘城周三四里在大澤中澤地熱濕難以履涉蘆草荒茂無復途徑唯趣城僅得通行故往來者莫不由此城而瞿薩旦那以爲東境之關防也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거대한 유사(流砂:사막)에 들어가게 된다. 모래가 4방으로 흘러내리고 바람에 따라서 쌓였다가 흩어지곤 하여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사라져 결국에는 대부분 길을 잃고 만다. 4방으로 멀리 바라보아도 망망한 모래뿐이어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오가는 사람들은 쌓인 유해로 표식을 삼곤 한다. 물과 풀이 부족하고 뜨거운 바람이 많이 일어나는데 바람이 불면 사람과 동물이 혼미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병이 생기기도 한다. 때로는 휘파람이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흐느끼며 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귀 기울여 듣고 보고 있는 사이에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서 이로 인해 자주 목숨을 잃게 되는데, 아마 이것은 도깨비의 소행일 것이다.
032_0478_a_17L從此東行入大流沙沙則流漫聚散隨風人行無迹遂多迷路四遠茫茫莫知所指是以往來聚遺骸以記之乏水草多熱風風起則人畜惛迷以成病時聞歌嘯或聞號哭視聽之怳然不知所至由此屢有喪亡蓋鬼魅之所致也
032_0478_b_02L이곳에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도화라(都貨邏)의 옛 영토에 도착하게 되는데, 나라는 이미 텅 빈 지 오래고 성도 완전히 황폐해졌다.69) 이곳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절마타나(折摩馱那)의 옛 영토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바로 옛 저말국(沮末國)의 영토이다.70) 성곽은 우뚝 높이 솟아있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끊어졌다. 다시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납박파(納縛波)의 옛 땅에 도착한다. 이곳은 바로 누란(樓蘭)의 땅이다.71)
032_0478_a_24L行四百餘里至都邏故國久空曠城皆荒蕪從此東行六百餘里至折摩馱那故國卽涅末地城郭巋然人煙斷絕復此東北行千餘里至納縛波故國卽樓蘭地也
각 나라의 산천을 명백히 밝히고 그 국토들을 두루 고찰하여 그 나라의 풍속이 거칠고 강한지, 부드럽고 순박한지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각처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엮어보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갖가지 상황이 동일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랐으며, 직접 끝까지 체험해보기가 어려웠고 함부로 억측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머물거나 도착한 곳마다 간략하게 그곳에 관하여 대체적인 줄거리를 기록하였고, 그 보고 들은 것을 열거하고 당나라의 덕화(德化)를 그리워하는 나라들을 기록하였다.
032_0478_b_05L推表山川考採境壤詳國俗之剛柔繫水土之風氣動靜無常取捨不同事難窮驗非可仰說隨所遊至略書梗槪擧其聞見記諸慕化
“태양이 지는 저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폐하의 은혜를 흠뻑 입고 있으며 대당의 교화가 퍼진 곳에서는 모두 폐하의 성덕을 우러러 받들고 있사옵니다. 천하가 대동(大同)을 이룩할 수 있게 폐하는 한 집안에 통일을 이루셨으니, 어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겠나이까?”
032_0478_b_09L斯故日入已來咸沐惠澤風行所及皆仰至德混同天下一之宇內豈徒單車出使通驛萬里者哉

기찬(記讚)
032_0478_b_12L記讚曰

그 얼마나 위대한가? 법왕(法王)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그 영묘한 감화는 부지불식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고, 그 신묘한 가르침은 온 4방에 퍼졌습니다. 그 육체와 마음은 무수한 세상에서 다하였고 그 태어남과 죽음은 가없는 시간 속에서 끊어졌습니다. 육체와 마음이 다하자 근기(根機)에 응해서 이 세상에 나시기는 하였지만 진정으로 나시지는 않으셨고,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적멸을 나타내시기는 하셨지만 진실로 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실로 가유(迦維:사위국)에 태어나시고 사라(娑羅:사라쌍수)에서 입멸하시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032_0478_b_13L大矣哉法王之應世也靈化潛運神道虛通盡形識於沙界絕起謝於塵劫形識盡雖應生而不生謝絕示寂滅而無滅豈實迦維降神娑羅潛化而已
여래께서는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영묘함[靈力]을 나타내셨고 인연에 감응하셔서 자취를 드리우신 분이며, 찰제리족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석가족의 후계자가 되셨으며, 인간 세상의 왕위를 이을 몸이셨음에도 출가의 길에 전심하셨던 분이십니다.
032_0478_b_17L固知應物效靈感緣垂迹嗣種剎利紹胤釋迦繼域中之擅方外之道
이리하여 금륜왕(金輪王)의 자리를 버리고 법계(法界)에 나아가 다스리시며 백호(白毫)로부터 광명을 비추시어 중생을 어루만지고 길러오셨습니다. 교법은 시방(十方)을 두루 적셨고 지혜는 만물에 널리 미치셨으며, 보고 들을 수 있는 범위 밖의 존재까지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셨고 법륜을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세 번 굴리시며 불타 본래의 일음(一音)으로 중생에게 웅변을 토하셨습니다. 그리고 팔만 법문으로 나누고 12부의 경법으로 요약하셨습니다.
032_0478_b_19L於是捨金輪而臨制法界摛玉毫而光撫含生道洽十方智周萬物雖出希夷之外將庇視聽之中三轉法輪於大千一音振辯於群有八萬門之區別十二部之綜要
032_0478_c_02L이렇게 부처님의 감화를 입은 범위는 복덕의 숲에까지도 미치며 부처님의 위풍이 뻗치는 영역은 장수를 누리는 복된 땅까지도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실로 성현으로서의 업적은 엄청나셨고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을 완전히 갖추셨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견고림(堅固林)에서 입멸하시어 허깨비 같은 이 세상을 떠나가신 뒤에는 인간세계에서는 뒤를 이을 자도 없으며 공(空)의 가르침[無物]을 궁구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032_0478_b_23L是以聲敎之所霑被馳騖福林風軌之所鼓扇載驅壽域聖賢之業盛矣天人之義備矣然忘動寂於堅固之遺去來於幻化之境莫繼乎有待匪遂乎無物
존자 가섭이 응진(應眞:아라한)을 선발하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자 법보(法寶)를 결집하였으니, 4부의 『아함경』으로 교법의 원류를 모두 거두고 3장으로 그 불법의 요지를 포괄하였습니다. 비록 부파들의 고집스러운 견해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위대한 법보는 지금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석가 세존의 탄생으로부터 적멸에 이르기까지 그 성스러운 자취와 신령스러운 조짐은 천만 가지로 다양하였습니다. 불멸의 가르침은 더욱 성대해지고 무위의 가르침은 더더욱 새롭게 행해져 이 동안의 일은 경전에 상세하게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전(記傳)에도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032_0478_c_05L尊者迦葉妙選應眞報佛恩集斯法寶四含摠其源流藏括其樞要雖部執茲興而大寶斯越自降生洎乎潛化聖迹千變瑞萬殊不盡之靈逾顯無爲之敎彌備存經誥詳著記傳
그렇지만 또한 많은 의견이 어지럽게 난무하고 이론(異論)들이 대립하여 퍼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일들에 대해서도 올바른 설은 거의 없습니다. 구체적인 실록에서조차도 여전히 이와 같이 이설이 다양하거늘 하물며 부처님의 정법은 깊고 그윽하며 그 지극한 이치는 심원하여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깊이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문헌상으로는 빠진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032_0478_c_10L然尚群言紛異議舛馳原始要終罕能正說指事之實錄尚衆論之若斯況正法幽玄至理沖邈硏覈奧旨文多闕焉
이런 까닭에 학덕이 있는 현자들이 없어져 버린 경전의 학문을 전하였고, 후세의 걸출한 학자들이 빠지고 조각난 문장을 이어받아 연구하였습니다. 그 대의는 아직 드러나지 못하고 정밀한 언어도 누락되어 물을 수 없었습니다.
032_0478_c_13L是以前脩令德繼軌逸經之學進英彦踵武缺簡之文大義鬱而未微言闕而無問
한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한대(漢代)로부터 이 성대(聖代)에 이르기까지 불경을 번역하는 사업은 성대하게 행해지며 훌륭한 성과를 거두어왔지만 현묘한 도(道)는 여전히 충분하게는 퍼지지 않고 진실한 종지는 여전히 잘 이해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드러나고 사라졌던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말할 필요도 없이 천자(天子)의 덕화가 그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032_0478_c_16L法敎流漸多歷年始自炎漢迄于聖代傳譯盛業流美聯暉玄道未攄眞宗猶昧匪聖敎之行藏固王化之由致
032_0479_a_02L우리 대당제국은 천하를 통치하고 해외의 여러 나라를 심복시키면서 성인(聖人)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자세히 밝히고 선왕(先王)의 법률과 제도를 올바로 잡았습니다. 나아가 불교를 천명하고 위대한 가르침을 울창하게 펴며, 도(道)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고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은 바로 천자의 밝은 덕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3승의 깊은 뜻은 천년 뒤에도 환히 드러나고 10력(力)의 유법(遺法)은 만리 밖에서 삼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신묘한 도는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롭게 통하나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것을 의지처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연(緣)이 있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 말은 진실합니다.
032_0478_c_20L大唐臨訓天下作孚海外考聖人之遺則正先王之舊典闡茲像敎鬱爲大訓道不虛行弘在明德遂使三乘奧義鬱於千載之下十力遺靈閟於萬里之外神道無方聖敎有寄待緣斯顯其言信矣
무릇 현장법사는 그 청정한 가계가 뇌택(雷澤)72)에서 연원하고, 그 근본은 규천(嬀川)73)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 사람 됨됨이는 훌륭한 덕의 상서로움을 체현하고 있고 중용을 잃지 않는 순수함을 간직하였습니다. 그의 행동에는 덕이 따르고 몸가짐에는 절조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복덕은 이미 전세(前世)에 인연을 갖고 있었고, 그의 운명은 바야흐로 탁 트인 세상을 만나게 될 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속세에서 벗어나 강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앞 세대 철인(哲人)들의 미덕을 흠모하게 되어 바랑을 지고 유학(遊學)하며 4방으로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032_0479_a_03L夫玄奘法師者疏淸流於雷澤派洪源於嬀川體上德之禎祥薀中和之淳粹履道合德居貞葺行福樹曩因命偶昌運拔迹俗塵閑居學肆奉先師之雅訓仰前哲之令德負笈從學遊方請業
연(燕)ㆍ조(趙)의 땅을 순례하고, 노(魯)와 위(衛) 땅의 구석구석을 유람하였고, 3하(三河:河南ㆍ河東ㆍ河內의 세 지역. 즉 長安 부근)를 등지고 진중(秦中:陜西省)에 들어갔으며, 3촉(蜀:蜀郡ㆍ廣漢ㆍ犍爲. 즉 四川省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에 이르렀습니다.
032_0479_a_08L周流燕之地歷覽魯衛之郊背三河而入秦步三蜀而抵吳會
학문에 통달한 준재에게는 애써 널리 가르침을 청하였고 세상에 명성이 높은 현자에게는 거듭 구법(求法)의 뜻을 말하였으며, 갖가지 논의에도 귀를 기울여 들었고 그 학문을 검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공부하는 부문의 교의와 뜻이 맞는 이들과만 무리를 짓고 어울릴 뿐 다른 교의의 학문을 혐오하였습니다. 이에 현장법사는 불교의 근본 뜻을 밝히고 싶은 마음을 내게 되었고 좀더 상세한 연구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032_0479_a_10L達學髦彦遍效請益之勤冠世英賢屢申求法之志側聞餘論考厥衆謀競黨專門之義俱嫉異道之學情發討源志存詳考
때마침 온 천하가 평온하고 4방 곳곳이 근심 걱정이라곤 없던 시절이라 정관(貞觀) 3년(639) 중추(仲秋:음력 8월) 초하루 아침,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출발하여 석장을 끌면서 아득한 여행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천자의 덕화에 의지하여 길을 묻고,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도움을 입어서 홀로 유랑하며 철문(鐵門)과 석문(石門)의 어려운 곳을 통과하였고, 능산(凌山)과 설산(雪山)의 험난한 길을 넘어섰습니다. 그리하여 몇 번인가 계절의 변화[灰管]74)를 반복한 후에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032_0479_a_13L屬四海之有截會八表之無虞以貞觀三年仲秋朔旦褰裳遵路杖錫遐皇化而問道乘冥祐而孤遊出鐵門石門之阨踰凌山雪山之險驟移灰達于印度
그리하여 당나라의 풍습을 외국에 선양하고 커다란 교화를 이역 땅에 주었으며, 스스로 범학(梵學)을 배우고 현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오랜 세월 품어왔던 의문은 원문(原文)을 살펴봄으로써 해명하였고, 교의의 깊은 뜻은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 널리 질문하여 답을 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열려 이치를 궁구하였으며 정신이 확 트여서 도를 체득하였으니 일찍이 듣지 못하였던 내용들을 듣고, 깨닫지 못했던 것도 깨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법사는 실로 도량(道場)의 좋은 친구가 되고 법문의 장인(匠人)이라 하겠습니다.
032_0479_a_19L宣國風於殊俗喩大化於異域親承梵學詢謀哲人宿疑則覽文明發奧旨則博問高才啓靈府而究理廓神衷而體道聞所未聞所未得爲道場之益友誠法門之匠人者也
032_0479_b_02L이렇게 법사의 도풍(道風)이 밝게 드러나고 덕행도 더욱 높아지는 가운데 학문 쌓기를 3년 만에 그 명성은 만 리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인도의 학인들은 모두 법사의 높은 덕을 우러렀는데, 어떤 이는 법사를 ‘걸어 다니는 경전 상자[經笥]’75)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불법의 장군[法將]’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소승의 학도들은 목차제바(木叉提婆)당나라 말로는 해탈천(解脫天)이다라 불렀고, 대승의 법중(法衆)들은 마가야나제바(摩訶耶那提婆)당나라 말로는 대승천(大乘天)이다라 불렀습니다.
032_0479_a_24L是知道風昭著德行高明薀三冬聲馳萬里印度學人咸仰盛旣曰經笥亦稱法將小乘學徒木叉提婆唐言解脫天大乘法衆號摩訶耶那提婆唐言大乘天
이것은 바로 법사의 덕을 높이 기려서 아름다운 칭호를 전한 것이며 그 인물 됨됨이를 존경하여 좋은 이름을 입에 담았던 것입니다. 3륜(輪)의 깊은 뜻76)과 3청(請)의 미묘한 말77)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원류(源流)를 연구하고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미묘하게 궁구하여 명확하게 납득하고 충분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법사의 질문의 내용은 별록(別錄)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032_0479_b_05L斯乃高其德而傳徽敬其人而議嘉名至若三輪奧義三請微言深究源流妙窮枝葉奐然慧悟怡然理順質疑之義詳諸別錄
이미 깊은 뜻에 정통하여 덕풍(德風)에 대한 평판이 높아졌으며, 학식이 넓어지고 덕도 이미 성대해지자 법사는 산천을 두루 다니고 도시와 마을을 순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성(茅城)을 나와서 녹원(鹿園)에 들어갔고, 장림(杖林)에 노닐다가 계원(鷄園)에서 쉬었으며, 가유국(迦維國)을 돌아다니며 구시성(拘尸城)을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옛 유적지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고, 입멸하신 옛 터는 마을과 떨어진 언덕 위에 황폐해진 채 있었습니다.
032_0479_b_08L旣而精義通玄淸風載扇學已博矣德已盛矣於是乎歷覽山川徘佪郊出茅城而入鹿菀遊杖林而憩雞迴眺迦維之國流目拘尸之城生故基與川原而膴膴潛靈舊趾郊阜而茫茫
부처님의 유적지를 돌아보자 감회가 더욱 커져 현묘한 감화를 우러르고는 길게 탄식하였으니, 그것은 ‘맥수(麥秀)의 노래’78)로 은의 멸망을 슬퍼하였고, ‘서리(黍離)의 탄식’79)으로 주(周) 왕실의 쇠락을 애통해 하였던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석가모니부처님의 고사(故事)를 상세하게 적어두고, 인도의 사실(史實)을 열거하였으며 나아가 그 나라의 풍토에 대해서도 조금씩 채집하고 이설(異說)까지도 기록에 남겨두었습니다.
032_0479_b_14L覽神迹而增懷仰玄風而永歎匪唯麥秀悲殷黍離愍周而是用詳釋迦之故事擧印度之茂頗採風壤存記異說
032_0479_c_02L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리고 여름과 겨울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법사는 안락한 고국이 그리워지고 망향의 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래의 육사리(肉舍利) 150과(顆), 금불상 1구(軀)(이것은 광좌(光座)까지 통틀어 높이 1척 6촌이며, 마게타국의 전정각산(前正覺山)에 있는 용의 굴에 부처님의 그림자를 남겨둔 불상을 본뜬 것이다) 금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3척 3촌이며, 파라닐사국(婆羅痆斯國) 녹야원의 초전법륜상을 본뜬 것이다)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1척 5촌이며, 교상미국의 출애왕(出愛王)이 여래를 사모하여 단향목을 깎아서 진영을 그린 상을 본뜬 것이다)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2척 9촌, 겁비타국에서 여래가 천궁으로부터 보석계단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의 불상을 본뜬 것이다) 은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4척이며, 마게타국 취봉산에서 『법화』 등의 경을 설하신 상을 본뜬 것이다) 금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3척 5촌이며, 나게라갈국에서 독룡을 항복시키고 그림자를 남기셨던 상을 본뜬 것이다)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한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1척 3촌이며, 폐사리국에서 성을 돌아다니시며 교화하신 상을 본뜬 것이다)와 나아가 대승경 224부, 대승론 190부, 상좌부의 경ㆍ율ㆍ논 14부, 대중부의 경ㆍ율ㆍ논 15부, 삼미저부(三彌底部)의 경ㆍ율ㆍ논 15부, 미사색부(彌沙塞部)의 경ㆍ율ㆍ논 22부, 가섭비야부(迦葉臂耶部)의 경ㆍ율ㆍ논 17부, 법밀부(法密部)의 경ㆍ율ㆍ논 42부, 설일체유부의 경ㆍ율ㆍ논 67부, 인론(因論) 36부, 성론(聲論) 13부, 그리하여 모두 520상자, 657부를 청하여 구해서 위없는 가르침을 널리 펼치기 위해 험하고 위태로운 길을 지나 고국을 향해 길을 서둘렀습니다.
032_0479_b_17L歲月遄邁暑屢遷有懷樂土無忘返迹請得來肉舍利一百五十粒金佛像一軀通光座高尺有六寸擬摩揭陁國前正覺山龍窟影像金佛像一軀通光座高三尺三寸擬婆羅痆斯國鹿野菀初轉法輪像刻檀佛像一軀通光座高尺有五寸擬憍賞彌國出愛王思慕如來刻檀寫眞像刻檀佛像一通光座高二尺九寸擬劫比他國如來自天宮降履寶階像銀佛像一通光座高四尺擬摩揭陁國鷲峯山說『法花』等經像金佛像一軀通光座高三尺五寸擬那揭羅曷國伏毒龍所留影像刻檀佛像一軀通光座高尺有三寸擬吠舍釐國巡城行化大乘經二百二十四部大乘論一百九十部上座部經律論一十四部大衆部經律論一十五部三彌底部經律論一十五部彌沙塞部經律論二十二部迦葉臂耶部經律論一十七部法密部經律論四十二部說一切有部經律論六十七部因論三十六部聲論一十三部凡五百二十夾摠六百五十七部將弘至敎越踐畏薄言旋軔載馳歸駕
그리하여 사위성의 옛 수도를 출발하여 불타가야의 옛 거리를 등지고 총령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 사막의 험한 길을 건너 정관 19년(645) 춘정월(春正月), 경읍(京邑:장안)에 돌아와 낙양에서 천자를 배알하였던 것입니다.
032_0479_c_19L出舍衛之故背伽耶之舊郊踰蔥嶺之危隥沙磧之險路十九年春正月達于京謁 帝雒陽
한편, 삼가 조칙을 받고 불경을 번역하라는 명을 받들어 이에 학자를 불러 모아 그들과 함께 이 대불사를 행하게 되니, 부처님의 법구름[法雲]은 다시 한번 중국을 덮었고 부처님 은혜의 태양[慧日]은 거듭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궁중에서는 취봉산의 교화가 흐르고, 중국 땅에서는 용궁의 가르침이 널리 펼쳐지니, 불교의 흥륭은 실로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032_0479_c_22L肅承明詔載令宣譯爰召學人共成勝業法雲再蔭慧日重明黃圖流鷲山之赤縣演龍宮之敎像運之興斯爲盛矣
032_0480_a_02L현장법사는 범학(梵學)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에 깊고 깊은 미묘한 경을 밝히거나 새로운 문장을 대할 때에도 마치 이전에 본 문장인 듯 능숙하였고, 소리를 옮김에 있어서도 메아리에 응하는 것과 같아서 경전의 취지를 그대로 존중하여 문장에 수식을 가하지 않았고, 뜻이 걸맞지 않는 방언은 범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애써 원전의 취지를 남기고 경전의 언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고려해보건대 원전과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032_0480_a_03L法師妙窮梵學式贊深經覽文如已轉音猶響敬順聖旨不加文飾方言不通梵語無譯務存陶治取正典謨推而考之恐乖實矣
어떤 지체 높은 분이 안색을 달리하며 엄한 태도로 앞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릇 인도라는 나라는 성인이 내려오신 곳이고, 현자가 태어나신 곳이며, 문자는 하늘나라의 글[天書]이라 불리고 언어는 하늘나라의 말[天語]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 글과 문자가 치밀하고, 음운은 말과 말 사이가 이어져 있으며, 어떤 때는 한 마디 말로 많은 뜻을 포괄하고 있고 어떤 때는 한 가지 뜻이 많은 말로 표현되기도 하며, 음성에는 억양이 있고 청탁(淸濁)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032_0480_a_06L有搢紳先動色相趣儼然而進曰夫印度之爲國也靈聖之所降集賢懿之所挺書稱天書語爲天語文辭婉密韻循環或一言貫多義或一義綜多聲有抑揚調裁淸濁
범문(梵文)은 의미가 깊어서 번역은 지혜로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경의 뜻은 깊고 어려워서 그 의미는 덕이 매우 높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데 번역문을 수식하거나 음률을 다듬거나 한다면 실로 합당하지 못한 일이며, 결코 바른 논의가 아닙니다. 경전의 깊고 그윽한 취지를 전하는 데에는 이해하기 쉬운 점에 주력하면서도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032_0480_a_11L梵文深致譯寄明人經旨沖玄義資盛德若其裁以筆削調以宮商實所未安誠非讜論傳經深旨務從易曉茍不違本斯則爲善
문장의 수식이 지나치면 ‘화려하다’고 하고, 지나치게 질박하면 ‘거칠다’고 합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전하면서도 문장의 수식이 지나치지도 않고 의미를 궁구하면서도 지나치게 질박하지 않다면 일단은 커다란 과오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번역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는 ‘말을 아름답게 하는 자는 곧 믿을 수 없고, 말을 신실하게 하는 자는 곧 아름답지 못하다’라고 말하였고, 한비자(韓非子)는 ‘이치가 올바른 자는 그 말이 솔직하며, 말을 화려하게 꾸미는 자는 그 이치가 애매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032_0480_a_15L文過則豔質甚則野讜而不文辯而不質則可無大過矣始可與言譯也李老曰美言者則不信言者則不美韓子曰理正者直其言言飾者昧其理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쳐서 모범을 보일 경우 도리로써 자기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열어 주고 이익으로 이끌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기뻐하게 해주소서. 원전에 어긋나고 문장에 가식을 첨가한다면 본뜻을 해치는 일이 더욱 심해질 것이니 원문에 충실하는 일이야말로 예로부터 부처님께서 지극하게 권하시고 경계 삼으시던 지침입니다.”
032_0480_a_19L是知垂訓範物義本玄同庶祛蒙滯將存利喜違本從文所害滋甚率由舊章法王之至誠也
그러자 승려와 속인들이 다 함께 말하였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말은 정확한 의견이었습니다.
032_0480_a_21L素僉曰渝乎斯言讜矣
032_0480_b_02L그 옛날 공자는 벼슬에 있으면서 재판을 담당하였는데, 그 문서는 사람들과 공동으로 작성하였고 공자가 혼자서 쓰지는 않았습니다. 『춘추』를 편찬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기록해야 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해야 할 것은 삭제하며 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비롯해 공자 문하에서 문학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조차 단 한 마디도 손을 가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법사께서 불경을 번역하신 것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032_0480_a_22L昔孔子在位聽訟文辭有與人共者弗獨有也至於脩『春秋』筆則筆削則削夏之孔門文學嘗不能贊一辭焉法師之譯經亦猶是也
동수(童壽:구마라집)가 장안의 소요원(逍遙園)에서 불경을 번역하였을 때 생(生)ㆍ조(肇)ㆍ융(融)ㆍ예(叡)80)가 자기 마음대로 가필하였던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오늘날은 네모진 것도 둥글게 하여 각진 것을 깎아내는 세대이고, 장식을 깎아내어 질박하게 하는 시대이거늘 어찌 교지(敎旨)를 가감하거나 경문을 수식하는 일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032_0480_b_03L非如童壽逍遙之集文任生睿之筆況乎园方爲圓之世斲彫從朴之時其可增損聖綺藻經文者歟
한편 변기(辯機)는 멀리 은둔자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고답적인 인생을 보내고자 뜻하였다가 15세에 세상을 버리고81) 법복으로 갈아입고 대총지사(大總持寺)에 주석하는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도악(道岳)82)법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장석(匠石)83)이라 할지라도 손을 댈 수조차 없는 썩은 나무와 같은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법(法)의 무리 속에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물질 속에 있으면서 청빈은 지켰지만84) 부질없이 온종일 배나 불리면서 견문도 넓히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기가 이르러 이런 경사스러운 법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참새 같은 자질을 지녔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원홍(鵷鴻:조정 百官의 반열에 드는 큰 인물)의 말석에 참가하여 이에 평범한 재주를 다하여 이 『방지(方志)』를 찬술하게 되었습니다.
032_0480_b_06L辯機遠承輕擧之少懷高蹈之節年方志學抽簪革爲大摠持寺薩婆多部道嶽法師弟子雖遇匠石朽木難彫幸入法流脂膏不潤徒飽食而終日誠面牆而卒歲幸藉時來屬斯嘉會負燕雀之資廁鴛鴻之末爰命庸才撰斯方
학문이 고사(古事)에 두루 통하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지도 못합니다만 무디고 둔한 재주를 격려하고 미약한 몸을 고무하여 삼가 현장 법사의 지기(志記)를 이어받아서 문장을 정리하고, 상서성으로부터 지필을 하사 받아서 찬록하게 되었습니다. 지혜가 얕고 재능이 없는 까닭에 빠뜨리는 곳도 많이 있었을 것이며 또는 넣지 않아도 될 문구가 있어도 삭제하지 않은 부분마저도 있었을 것입니다.
032_0480_b_13L學非博古文無麗藻磨鈍勵朽疲曳蹇恭承志記倫次其文尚書給筆扎而撰錄焉淺智褊能多所闕漏或有盈辭尚無刊落
옛날 사마천은 훌륭한 역사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기』를 집필하고서 간신히 부자(父子) 2대의 업을 완성하였습니다만 책 속에는 이름만을 기록하고 자(字)를 쓰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현의 이름만을 기재하고 군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경우도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이 아무리 정밀하게 일을 한다고 하여도 생각이 여러 갈래로 걸쳐 있고 문장이 중복된다면 세부까지 음미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천박하고 우둔하며 어리석은 제가 어찌 능히 조금도 차질 없이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032_0480_b_16L昔司馬子長史之才也序『太史公書』仍父子繼業或名而不字或縣而不郡故曰一人之精思繁文重蓋不睱也其況下愚之智而能詳備哉
한편, 서역 각 지역의 풍토와 습속의 차이, 그 국토의 산물의 기록이나 성품과 지혜로움의 분류, 기후와 계절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우열의 상태를 묘사하고 사실을 세밀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호(胡)ㆍ융(戎) 등의 성씨(姓氏)나 종족에 대해서는 다소 그 나라의 사항을 기록하였지만 인도의 풍속 교화는 청탁(淸濁)으로 구분되어 있어 그 개략만을 기술한 점에 대해서는 본서 제일 앞에 나오는 서(序)의 내용과 같습니다. 국가의 의전(儀典)이나 예식, 호구(戶口)나 군비(軍備) 등의 사항에 대해서는 출가자의 몸으로 상세히 기록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032_0480_b_20L若其風土習俗之封畺物產之記性智區品炎涼節則備寫優薄審存根實至於胡戎姓氏頗稱其國印度風化淸濁群分略書梗槪備如前序賓儀嘉禮戶口勝兵染衣之士非所詳記
032_0480_c_02L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에 의해서 만물을 이끄시고 영묘한 감화로써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신령스러운 도(道)는 현묘하니 즉 그 이법[理]은 인간세계를 초월해있고, 그 영묘한 감화가 숨거나 나타나니 즉 일[事]은 아득한 경계까지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불(諸佛)이 강림하신 장소나 선성(先聖)께서 교화를 드리우셨던 유적지 등은 그 영묘한 유적을 대략 열거하고 설명을 개괄적으로 주를 달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도로는 굴곡이 많고 국경선도 깊숙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노정은 기록해두었던 바, 순서를 세워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도의 여러 나라들은 국경을 나누는 일이 없기 때문에 각 국가를 서술한 끄트머리에 영성(領城)의 대략을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032_0480_c_02L然佛以神通接物靈化垂訓故曰神道洞玄理絕人區靈化幽顯則事出天外以諸佛降祥之域先聖流美之墟擧遺靈粗申記注境路盤紆畺場迴行次卽書不存編比故諸印度分境壤散書國末略指封域
‘……로 가다 보면[行]’이라고 쓴 것은 법사께서 몸소 여행한 곳이고, ‘……에 이른다[至]’’라고 기록한 것은 전해들은 것에 의한 기술입니다. 사실을 직접 기록한 경우도 있고 문장을 완곡하게 한 부분도 있는 등 유연하게 하거나 꾸미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실록에 충실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에 정성스런 마음을 천자에게 바치는 바입니다.
032_0480_c_08L書行者親遊踐也擧至者傳聞記也或直書其事或曲暢其文優而柔之推而述務從實錄進誠皇極
20년(646) 가을 7월에 붓을 놓고 책은 완성되었습니다만 천자의 눈을 더럽힐 정도여서 도저히 성의(聖意)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원한 땅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대당(大唐)의 덕화에 의한 것이고 기이한 것들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실로 천자의 덕분이었습니다. 태양을 쫓아 세계의 끝까지 가도 과부(夸父)85)의 힘을 나의 것으로 하지 않아도 좋고, 서역을 향한 천릿길을 개척하더라도 장건(張騫)의 공적은 과거의 일로 듣는 것만으로도 잘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영취산을 중국으로 옮겨오고 녹야원을 외원(外苑)에 감싸는 바, 마치 천 년 전 옛날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는 것과 같고, 만 리 밖의 나라를 마치 직접 유람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032_0480_c_12L二十年秋七月絕筆殺靑文成油素塵黷聖鑑詎稱天規然則冒遠窮遐寔資朝化懷奇纂異誠賴皇靈逐日八荒匪專夸父之力鑿空千里徒聞博望之功鷲山徙於中州鹿苑掩於外國想千載如目擊覽萬里若躬遊
이것은 상고(上古)로부터 지금까지 일찍이 듣지 못한 일이며 어떠한 고서에서도 실려있지 않은 일입니다. 천자의 지극한 덕이 4방을 덮어서 4방의 여러 나라들이 내조(來朝)하였고, 덕풍(德風)이 먼 곳까지 넘쳐 나서 땅끝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032_0480_c_18L夐古之所不聞前載之所未記至德燾覆殊俗來王淳風遐扇幽荒無外
이 지지(地志)가 『산해경(山海經)』을 보충하고 사관(史官)의 참고로 쓰이며 여러 직책들을 위한 편람(便覽)으로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032_0480_c_20L庶斯地志補闕『山經』頒左史之書事備職方之遍擧
大唐西域記卷第十二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범어로는 Jāguḍa이며 『당서(唐書)』 「서역전(西域傳)」을 바탕으로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의 자브리스탄(Zaburistan)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구타라는 국명은 본래 에프탈인(Ephtalites)이 5세기 말에 대월지(大月氏)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인 카블(Kābul)강 유역 및 칸다하르(Kandahar) 일대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을 Jabula라고 부른 것이 시초이며, 현장이 기술한 이 나라의 별칭인 ‘조리(漕利)’나 ‘사율(謝䫻)’, 『혜초전』의 사호라살타나(社護羅薩他那, Jawulasthana)는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2. 2)범어로는 ghasna이며 지금의 가즈니Ghazni(카블에서 칸다하르에 이르는 길의 要地)이다.
  3. 3)범어로는 ghasala이며 지금의 헬문드(Helmund)강 유역의 주요도시인 Guzar로 추정된다.
  4. 4)약의 일종으로서 아위(阿魏)의 다른 이름이다. 서역에서 나는 식물의 이름으로서 흥거(興渠)라고도 한다. 5신채(辛菜)의 일종이다.
  5. 5)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부를 흐르는 헬문드강으로 추정되며 지리적으로 보아 이곳이 분명하다.
  6. 6)이 지방은 후한 시대부터 오랫동안 대월지(大月氏, Kụsāṇa)의 영역이었다가 5세기 후반에 에프탈인들이 북방에서 침입하여 카블강의 모든 영역과 칸다하르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 에프탈인들도 565년에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서돌궐족(西突厥族)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현장 당시에는 바로 돌궐족이 남하하는 중이었을 것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와 문자는 쿠샨 계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7. 7)범어로는 vṛjisthāna이며 카블강 유역에 있었던 나라인데 좀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8. 8)범어로는 hūbina이며 지금의 Hupiān, Opian(카블의 북쪽 Charikar)라고 한다.
  9. 9)범어로는 varasena이며 지금의 Khawak고개일 것으로 추측된다. 해발 3,500미터이다.
  10. 10)범어로는 antarāva이며 지도상으로는 Khawak 고개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Doshī강에 연한 지역이며, 오늘날에도 Andarāb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수도인 Andarāb은 10세기에 Ṭukhāristān 제3의 도시로 꼽혀지고 있었다.
  11. 11)범어로는 khasta이며 지금의 Khost이다. 옥쿠스(Oxus)강으로 흘러드는 상류의 Khost강 유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12. 12)범어로는 war이며 지금의 옥쿠스강(암 다리야)에 가까운 쿤두즈(Kunduz)를 가리킨다.
  13. 13)‘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이 산을 파미르(Pamir)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곳을 흐르는 같은 이름의 강인 파미라천(波謎羅川)에서 유래한 것 같다.
  14. 14)범어로는 mungān이며 정확한 소재지는 찾기 힘들다.
  15. 15)이 나라에서부터 뒤에 등장할 네 나라는 전해들은 나라임을 『자은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오늘날의 Hazrad Imām 부근이라고 한다.
  16. 16)범어로는 이란어로 rāgh이다. 오늘날의 바다쿠샨의 수도인 파이자바드(Faizabād)의 북방에 Rāgh라고 하는 대지(臺地)가 있다. 옥사스강이 크게 굽어지는 지역으로 현장이 기술한 바와 같이 북쪽이 옥사스강에 접해 있다.
  17. 17)범어로는 Kṛṣma이며 현재의 Kishm, 즉 Taliqan과 파이자바드 사이에 있으며 Kokcha강에 연한 마을이다. 현재의 쿤두즈바다쿠샨의 통로(通路)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이 지방이 가장 따뜻한 곳이며 과일도 많이 나는데 한 달이나 빨리 과일이 익는다고 한다.
  18. 18)범어로는 parīghar이다. 지도상에서는 Taliqan의 정북(正北)인 옥사스강 북쪽 기슭과 옥사스강 굴곡부 최북단에 가까운 곳과의 두 곳에 나란히 Parkhar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으며 나아가 Taliqan의 동남쪽, Kishm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점에 Farkhar라는 땅이 있다. 하지만 단정을 내릴 수 없다.
  19. 19)범어로는 hīmatala이며 ‘설산하(雪山下)’라는 뜻으로 현재의 Kwaja Muhammad산의 북단(北端) 부근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 마을인 Darāim은 현장이 제시하는 범어 이름에 가깝다.
  20. 20)범어로는 badakṣāna이며 현재의 바다쿠샨에 해당한다. 서장(티벳)과의 통상(通商)을 하던 창구라고도 말할 만한 지방이다. 마르코폴로도 이곳을 통과하였다.
  21. 21)이 수도는 오늘날에도 바다쿠샨의 정부청사가 있는 파이자바드일 것이다. 그 지세가 현장의 기술과 매우 합치한다.
  22. 22)범어로는 Yambagān이다. 오늘날의 Kokcha강의 유역이고, Jurm보다 상류의 옛 이름이 Yamgān, Hamakān이라고 불렀던 지방이 바로 이 나라라고 한다.
  23. 23)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동부이란어로 총칭되며, 다른 이란의 언어보다 옛 형태를 많이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발탁창나국 일대의 언어를 바다쿠샨방언이라고 부르고, 이 음박건국이 있는 Kokcha강 유역은 Shahr-i-Munji를 중심으로 하는 Munji방언을 쓰고 있다.
  24. 24)범어로는 kurāṅṇa이며 『신당서(新唐書)』 권221 하(下)에는 구란(俱蘭)ㆍ구라노(俱羅弩)ㆍ구라나(俱爛那)라고 음사하고 있다. 지금의 Kokcha강 상류 Kuran강 유역이다.
  25. 25)범어로는 dharmasthiti이며 Wakhan의 남쪽 계곡 속, Chitral의 동북쪽 약 90킬로미터 지점에 이 지방의 요충지인 Mastūj로 들어가는 입구에 Darah-i-Mastūj(Mastuj의 문)라는 땅이 있다. 달마실철제는 이 Darah-i-Mastūj를 음사한 것이라고 한다.
  26. 26)이 지대의 북쪽에는 Wakhan 산맥이, 남쪽에는 힌두쿠사 산맥의 동쪽 끝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으로 동북쪽으로부터 서남쪽으로 6천미터 이상의 높이로 가로놓여 있으며, 두 산록은 그 사이를 흐르는 옥사스강가까지 닿아있고 강가에는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다.
  27. 27)범어로는 khandāta이며 이 성은 와한(Wakha)계곡 속의 Āb-i-Panja강 남쪽 기슭 즉 아프가니스탄 쪽에 있는 부락으로서 오늘날에도 Khandūd라 불리는 와한 계곡 최대의 부락이며 그 반대편 언덕인 구 소련령에 Yamg이라는 부락이 있다.
  28. 28)범어로는 śikīni이며 현재의 와한 계곡 이북의 구 소련령인 파미르고원 서남쪽의 경사진 면 일대의 지역으로 지금도 Shighnān, Shughnān이라고 부르고 있다.
  29. 29)현재 Shighnān 일대에서 쓰이는 언어는 동부이란어 가운데 파미르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Ghalcha 방언에 속한다고 하며, 예로부터 주민의 이동도 적어 고립된 ‘언어의 섬’과도 같은 지리적 상황도 있었으므로 옛 형태를 많이 남기고 있다고 한다. 현장이 말하는 도화라의 언어도 이란어 계통의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30. 30)전해들은 나라이다. 범어로는 śami이며 지금의 치트랄(Chitral) 및 Mastūj의 지역을 가리킨다.
  31. 31)유황(硫黃)과 비소(砒素)의 화합물로 채색의 원료나 약용(藥用)으로 쓰인다.
  32. 32)치트랄 및 Mastūj를 포함한 이 지역은 다르디스탄(Dardistan)이라고 총칭되며, 그 언어를 Dardic어라고 부른다. 이 언어는 이란어와 인도 아리야어와의 접경 지대에 있으며, 두 계통의 특징을 보유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오늘날에는 인도 아리야어의 한 지파로 간주되고 있다.
  33. 33)범어로는 pamiēr이며 파미르라는 말의 의미는 ‘황야’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어인 Bam-i-dunya는 ‘세계의 지붕’이라는 의미이다. 파미르강 유역은 동서로 길게 뻗은 두 개의 산, 즉 북쪽의 Alichur(Shakhdarinskiy)산맥(높은 곳은 5,500미터에 달한다)과 남쪽의 와한산맥(높은 곳은 6,500미터) 사이에 끼어있는 좁은 지역이다.
  34. 34)오늘날의 빅토리아 호수를 말한다.
  35. 35)빅토리아호의 서쪽에서 파미르천이 서남쪽으로 흘러, Qala Panja의 상류이며 소(小)파미르지방의 호수로부터 흘러온 Āb-i-Panja(Oxus)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합류된 뒤의 강 이름은 Āb-i-Panja, 즉, 옥사스(박추하)라고 부르고 있다.
  36. 36)이 부분에 대한 현장의 기술에는 일부 착오가 있다. 즉 거사국의 서쪽 경계로 흘러서 야르칸드강과 합류하는 강은 아마 오늘날의 Tashkurghan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 강의 서쪽 상류의 하나인 Kara Chukur강의 발원지는 Pamir-i-Wakhan 산 속에 있으며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發源)하지 않는다.
  37. 37)범어로는 kharbanda이며 오늘날의 타쉬쿠르간(Tashkurghan)이다.
  38. 38)범어로는 cīna-deva-gotra이다.
  39. 39)타쉬크루간에서 이 바위산의 요새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Taghdumbash- Pamir의 계곡에서 중국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강기슭에 고립해서 돌출해있는 바위산 위에는 폐허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중국 변경의 요새에서 볼 수 있는 장성풍(長城風)의 건축법에 의한 성벽을 지금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왕녀(王女)의 솔도파’라고 부르고 있다.
  40. 40)기원전 2세기 공작(孔雀) 왕조의 아육왕은 아니다. 동명이인이다.
  41. 41)부법장(付法藏) 제18조로 저서가 수십 부 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는 않았다.
  42. 42)범어로 nirodha-samāpattidlau이며 멸수상정(滅受相定)이라고도 하고 멸진삼매(滅盡三妹)라고도 일컫는다. 심불상음행법(心不相應行法)의 하나이다.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떠난 성자(聖者)가 그 정(定)의 경지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고요함에 견주어 무심(無心)의 적정경(寂靜境)을 즐기기 위해 들어가는 정(定)이니, 이 정을 닦음으로서 무색계(無色界)의 제4천인 유정천(有頂天)에 태어난다고 한다.
  43. 43)범어로는 pu(ṁ)ñaśala이며. 자선사업을 하는 곳, 즉 복을 베푸는 집이다.
  44. 44)범어로는 uṣā이며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설이 있다. 대체로 야르칸드 혹은 그 상류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추정된다.
  45. 45)우유를 끓여서 만든 기름으로 먹거나 몸에 바른다.
  46. 46)범어로는 khāṣa이며 지금의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 끝에 위치한 요지인 카쉬가르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한데 거사(佉沙)의 원음(原音)에 관해서는 다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47. 47)이 지역의 불교시대의 유적에서 1906년 P. 페리오가 브라흐미 문자의 단편을 발견하였다. 당시의 중앙아시아와 그 밖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8. 48)현장이 방문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기사 외에 구체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지만 11세기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토르코인인 Maḥmūd al-Kašghar는 그 저서인 『토르코아라비아어 사전』에서, 이 지역은 위글루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카쉬가르 교외에서는 Känjäkī어가 사용되었고, 도시에서는 Khāqānī의 토르코어를 사용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성 안에는 한인(漢人)이 많이 살며 성 밖에는 전상(纏商, 이슬람 계통의 토르코인)이 모여 살고 있다.
  49. 49)범어로는 cakoka이다. 이 지역은 『위서(魏書)』와 『북사(北史)』에서는 주거(朱居)ㆍ주거반(朱居半)ㆍ주구파(朱駒波)로, 『송운행기(宋雲行紀)』에는 주구파(朱俱波), 수(隋)나라 비장방(費長房)이 편찬한 『역대삼보기』에는 차구가(遮拘迦)ㆍ차거가(遮居迦)로 나타나며, 중앙아시아 출토의 고문헌에서는 cugupanㆍcugopa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장이 기술한 거사국 카쉬가르로부터의 거리나 방위ㆍ지세 등을 살펴볼 때 지금의 엽성(葉城), 즉 합이갈리극(哈爾噶里克, Karghalik)로 추정된다.
  50. 50)카르갈리크 지역 일대의 북부를 서남 파미르 고원으로부터 동북쪽으로 흐르는 야르칸드강과 그 남쪽의 카르갈리크 근방을 같은 방향으로 흘러서 사막 속으로 사라지는 Tiznaf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강 사이에는 작은 물줄기가 있어서 이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51. 51)현장은 이 지역의 문자와 언어를 모두 우전(于闐, 코탄)의 그것과 비교하고 있지만 코탄의 문자와 언어는 그 주변에서 다수 출토된 문서를 통해볼 때, 그 문자는 인도에서 행해지는 브라흐미 문자에 지방적인 수식을 조금 가한 것이라는 점, 그 언어는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은 언어(unknown language)”라고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동(東)이란어파에 속하는 말이라는 점이 판명되어 코탄어라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종합적인 문서가 출토된 적이 없어서 그 상세한 차이를 판명할 수 없다. 코탄어에는 카쉬가르의 동쪽 사막 속에 Maralbashi에서 사용되었던 방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과의 차이점도 불분명하다.
  52. 52)이 지역에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역대삼보기』 권12의 『신합대집경(新合大集經)』 권60 항목에 수(隋) 사나굴다(闍那崛多)의 말로써 “우전의 동남쪽 2천여 리에 차구가국(遮拘迦國)이 있다. 그 왕은 믿음이 순수하고 대승을 존중하며 다른 나라의 이름 있는 승려로서 그 나라에 들어온 자를 모두 다 시험해 보아서 만일 소승을 배우는 자라면 곧 바로 내보내고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하연(Mahāyāna,대승)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청하여 머물게 하고 공양한다. 왕궁에는 친히 마하반야ㆍ대집ㆍ화엄의 1부 대경(大經)과 10만 게(揭)를 지니고 있는데, 왕이 친히 간직하고 있으며 몸소 자물쇠를 들고서 돌려 읽을 때에는 곧 열어서 향과 꽃으로 공양한다. 또 도량 안에는 갖가지 장식과 온갖 보배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며 온갖 꽃들과 제철이거나 제철이 아닌 과일을 걸어두고 여러 작은 나라의 군주들을 불러 들여서 예배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53. 53)범어로는 gostāna이며 즉 오늘날의 화전(和闐)이다. 오늘날에는 화전은 Khotan, 우전(于闐)은 동방의 keriya를 나타낸다.
  54. 54)구살단나국의 대도성(大都城)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화전 지방은 곤륜산계(崑崙山系)인 티벳고원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는 동쪽의 옥롱객십하(玉隴喀什河, Yurung Kash Darya:白玉河)와 서쪽의 합납객십하(哈拉喀什河, Kara Kash Darya:黑玉河)와의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이다) 이 두 강은 이윽고 사막에서 합류하여 화전하(和闐河)라고 불린다. 현재의 화전 거리는 백옥하에 가까운 지점에서 동쪽의 회성(回城)과 서쪽의 한성(漢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화전의 도시는 지금의 한성(漢城:新城이라는 뜻)의 서문(西門)으로부터 약 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Yōtkan이라 불리는 작은 부락이 산재한 폐허에 해당한다.
  55. 55)화전의 동북동쪽 사막의 유적인 단단 우일리크(Dandan-Uiliq)에서 발견된 문서에 들어있는 인도 문자는 브라흐미 문자이고 대략 8세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언어는 동(東) 이란어에 속하는 코탄어이다.
  56. 56)범어로는 virocana이며 비로자나(毗盧遮那)ㆍ비로사(毗盧舍)ㆍ미로자나(微盧者那)라고도 음사한다. 지금의 Yōtkan 남남동쪽 13마일 떨어진 지점의 Chalma-kazān의 폐허가 이 사원의 터라고 추측된다.
  57. 57)범어로는 go-śṛṅga이며 ‘소의 뿔’이란 뜻이다. Yōtkan의 남남서쪽 11마일, 화전오아시스의 서남단, 흑옥하(黑玉河)의 동쪽 기슭에 있는 Kohmāri Hill로 추정된다. 이 산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성지로 숭배하는 석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1892년 1, 2세기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카로슈티 문자에 의한 인도 속어의 『법구경』이 발견되었다.
  58. 58)위치는 Yōtkan의 서남쪽으로 약 4마일 떨어진 지점인 Bōwa-Kambar의 옛 터로 추정된다.
  59. 59)건칠법(乾漆法)에 해당하는 당대(唐代)의 용어이다.
  60. 60)Bhagai, Bhāgya 등으로 원음을 추정하지만 확정을 내릴 수 없다. 코탄으로부터 서쪽으로 나가는 주요도로상인 Piālma 부근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61. 61)이 전설은 우전국(于闐國)과 총령 저쪽 카시미르에 있어서 간다라 불교 미술과의 교섭을 이야기해주는 문헌상의 증거로서 주목할 만하다.
  62. 62)피아르마로부터 동쪽으로 16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Kum-rabāt-Pād-shāhim Mazār로 추정된다. 20피트에 달하는 높은 반월형 사구(砂丘)가 연속해 있다. 그곳에는 지금 일반적으로 Kaptar-Mazār(비둘기의 冢墓)라 불리는 사당이 있는데 참배객들의 공양물로 살아가는 비둘기들이 무리를 지어 서식하고 있다. 일찍이 ‘성스러운 쥐’가 이슬람 시대에는 ‘성스러운 비둘기’로 변형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옛 전설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성지이다.
  63. 63)이 원어는 samājñā일 것으로 추정한다. 티벳트에 전해오는 『우전국사(于闐國史)』에 의하면 코탄국왕 Vijaya-Virya가 성의 망루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을 때 성 밖에 금은 빛의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 위치를 찾아다니던 중 Ḥgum-stir의 가섭불의 사리를 넣은 솔도파가 서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그곳으로 Buddhadūta 아라한 등의 가르침에 따라 Ḥgum-stir절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Yōtkan(옛 于闐國의 首都)의 서쪽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마을인 Somiya로 추정되며 그곳에는 먼 이국에 와서 머물다 간 성인(聖人)의 신령스런 자취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64. 64)코탄의 옛 수도로 Yōtkan의 동남쪽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Kum-i-Shahīdān이라 불리는 흙으로 지은 사당이 있는데 이것으로 추측된다.
  65. 65)이 강은 지금의 Yurung-kāsh(하얀 옥), 즉 백옥하(白玉河)라 불리는 강이다.
  66. 66)범어로는 phēma이며 현재의 화전(和闐, Khotan)과 우전(于闐, Keriya)의 중간에 있는 책륵(策勒, Chira Bazar)으로 추정된다.
  67. 67)범어로는 Krora, Kroraina. 즉 누란(樓蘭)을 가리킨다.
  68. 68)범어로는 niña, ninya이며 현재의 니아(尼雅, Niya Bazar)의 북쪽 65마일 떨어진 사막 안에 있는 니아(Niya) 옛 터를 가리키며 비마로부터는 동북쪽에 해당한다.
  69. 69)오늘날의 Endere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폐허는 수레바퀴 모양의 성벽이 있고 성벽의 일부분은 카로슈티 문서를 포함한 먼지 층을 기초로 하고 그 성 안의 거주지(居住址)에서는 개원(開元) 7년(719)의 기년문서(紀年文書)가 발견되었고 나아가 성 안의 사원에서는 브라흐미 티벳ㆍ한문의 문서류가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 지역은 일찍이 기원후 2~3세기 무렵은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현장이 말하는 도화라의 주민이 살았지만 이윽고 니아와 함께 차츰 폐허가 되었으며 현장이 통과한 뒤 8세기 초엽에는 당나라가 서역을 개척해 가던 과정에서 그 치세에 들어가게 되며, 안사(安史)의 난(755) 직후에는 토번(吐藩)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70. 70)지금의 Charchan Bazar(Cherchen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중국 이름으로도 且末이라고 함)이다. 이 지역은 Charchen강을 연한 지역인데 농업이나 목축이 성행하지 않고 곤륜산록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는 짐승을 잡아서 얻는 가죽은 광산과 함께 이 지역의 거대한 산업이다.
  71. 71)납박파(納縛波)는 한(漢)나라 이래 누란(樓蘭)에 수도를 설치한 선선국(鄯善國)을 말하는데, 5세기에는 청해성(靑海省)에서 차츰 강대해진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당하였다. 수나라는 토곡혼을 무너뜨리고 선선군(鄯善郡)을 설치하였으며, 당나라 초기 아직 그 세력이 서역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정관(貞觀) 초년에는 강국(康國) 소그디아나의 대수령(大首領) 강염전(康豔典)이 오랑캐를 이끌고 동쪽으로 와서 이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고 있다. 이 같은 시기에 현장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점으로 본다면 그가 납박파의 ‘옛 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서북인도에 원류를 두고 있는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과거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납박파의 ‘옛 땅’도 navapa라는 고어(古語)에서 원류를 찾아야 할 것이다.
  72. 72)연못의 이름이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복현(濮縣)의 동남쪽ㆍ서남쪽으로 흘러서 황하로 들어가는데 순(舜) 임금이 낚시하던 곳이라고 한다. 즉, 현장법사의 가계가 순임금의 가계와 통한다는 뜻이다.
  73. 73)강의 이름이다. 하북성(河北省) 연경현(延慶縣) 동북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상건하(桑乾河)로 들어간다. 규씨(嬀氏) 성(姓)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74. 74)회관(灰管)이란 옛날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얇은 막을 태워서 만든 재를 악기의 율관(律管) 속에 넣은 뒤에 기후를 점친 것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따라서 기후 또는 날씨를 의미하기도 한다.
  75. 75)경서(經書)를 넣어두는 상자로 박학(博學)한 사람을 의미한다.
  76. 76)3륜(輪)의 깊은 뜻이란 부처님의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 3업으로 중생의 미혹한 업을 부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77. 77)3청(請)의 미묘한 말이란 것은 부처님께서 사리불의 세 번의 권청에 의해 『법화경』의 요의를 설하셨던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78. 78)은(殷)나라가 망한 뒤 기자(箕子)가 폐허가 된 은의 도읍지를 지나다가 감개무량하여 지은 노래이다.
  79. 79)주(周)나라가 멸망하여 옛 궁전 터에 기장만이 무성함을 보고 하는 탄식이다. 이(離)는 이삭이 드리운 모양을 말한다.
  80. 80)이들은 각각 도생(道生)ㆍ승조(僧肇)ㆍ도융(道融)ㆍ승예(僧叡)를 말한다. 모두 구마라집 문하의 으뜸가는 제자들이었으며 구마라집이 역경하는데 참여하여 활약한 인물들이다.
  81. 81)원본에는 추잠(抽簪)이라고 되어있다. 잠(簪)은 관(冠)을 머리에 꽂는 것, 즉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하며 그 관을 뽑아낸다는 뜻은 관(官)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82. 82)속성은 맹(孟)씨이며 하남성(河南省) 낙양 사람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수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대총지사(大總持寺)에 주석하고(34세), 당나라 정관(貞觀) 8년(634)에 보광사(普光寺)로 옮겨왔다. (『續高僧傳』 권13) 변기는 15세의 나이로 도악 법사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83. 83)고대의 명공(名工)으로 자귀를 휘둘러서 빼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오묘한 경지에 오른 장인을 말한다. 이름은 석(石), 자(字)는 백(伯)이다.
  84. 84)지고(脂膏)란 풍부한 물질을 의미한다. 지고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후한 공분(孔奮)이 풍요로운 지방의 장관으로 있으면서도 스스로 청빈을 지킨 고사에서 온 말이다.
  85. 85)과부(夸父)는 상고(上古)의 인명이다. 과부가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태양의 그림자를 쫓으려다가 끝내 지쳐 죽고 말았다는 고사이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사(大事)를 꾀하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列子』, 「湯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