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唐西域求法高僧傳卷上

ABC_IT_K1072_T_001
032_0732_b_01L대당서역구법고승전 상권
(大唐西域求法高僧傳)


의정(義淨) 지음


사문(沙門) 의정(義淨)이 서국(西國)에서 돌아와 남해(南海) 실리불서(室利佛逝)1)에서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2)과 『나란타사도(那爛陀寺圖)』를 짓다.

머리말

옛부터 신주(神州:중국) 땅에서 삶을 가볍게 여기고 불법(佛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을 살펴보면, 법현법사(法顯法師)3)는 처음으로 거친 길을 개척하였고, 현장(玄장)법사4)는 그 중간에 바른 길을 개척하였다.
그 사이에 어떤 이는 서쪽으로 자새(紫塞)5)를 넘어 홀로 떠나거나, 또 어떤 이는 남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 단신으로 떠났다. 모두 부처님의 성스런 자취를 생각하며 오체(五體)6)를 다하여 귀례(歸禮)하고, 돌아와서는 사은(四恩)7)에 보답하여 서로 품었던 소망을 이루려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불적지를 향해 난 길은 어려움이 많았고 보배로운 곳은 멀디 멀었으니, 싹을 돋우어 열매를 맺으려는 사람들은 열을 채우고도 넘쳤지만 정작 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열매를 맺기 어려울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거대한 사막과 큰 강에서 밝은 해가 토해내는 빛과 거대한 바다에서 일어나는 넓고 큰 파도와 하늘까지 닿을 세찬 격랑을 경유해야만 하였다. 홀로 철문(鐵門)8) 밖을 걸어 만 겹이 가로지른 산중에 몸을 던지고, 혹은 동주(銅柱)9) 앞에서 방황하다 천강(千江)을 건너 목숨을 바쳤다. [발남국(跋南國:지금의 캄보디아)에 천강(千江) 입구가 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며칠을 버티는 일도 있었고, 여러 날 물조차도 마시지 못하였으니, 말 그대로 정신은 혼미해지고 시름과 피로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곳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수가 백의 반은 넘었지만, 머물 수 있었던 사람은 겨우 몇 명 안되었다. 서국(西國:인도)에 도착하였어도 떠돌아다니다 잠시나마 머물 대당(大唐)의 사찰이 없었으므로, 그 몸을 기탁할 곳 없어 허둥대고 정처없이 헤매고 다녀야만 했으니, 한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몸이 편안하지 못한데 어찌 도가 융성할 수 있으리오.
아! 참으로 그 분들의 아름다운 정성은 칭송되어야 할 것이다.
그 분들의 행적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며 대략 듣고 본 바에 의거하여 행장(行狀)을 지었을 뿐이다. 여기에서의 차례는 다분히 천축(天竺)으로 간 연대의 멀고 가까움과 생사를 고려하여 순서를 정하였다.

태주(太州)의 현조법사(玄照法師)
제주(齊州)의 도희(道希)법사
제주의 사편(師鞭)법사
신라(新羅)의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법사
신라의 혜업(慧業)법사
신라의 현태(玄太)법사
신라의 현각(玄恪)법사
신라의 두[二] 법사
도화라(都貨羅)의 불타발마사(佛陀跋摩師)
병주(幷州)의 도방(道方)법사
병주의 도생(道生)법사
병주의 상민선사(常愍禪師)
상민(常愍)의 제자 한 사람
경사(京師)의 말저승하사(末底僧揀師)
경사의 현회(玄會)법사
질다발마사(質多跋摩師)
토번공주(吐蕃公主)의 유모(乳母) 아들 두 사람
융법사(隆法師)
익주(益州)의 명원(明遠)법사
익주의 의랑율사(義朗律師)와 그 아우
익주의 지안(智岸)법사
익주의 회녕(會寧)율사
교주(交州)의 운기(運期)법사
교주의 목차제바사(木叉提婆師)
교주의 규충(窺沖)법사
교주의 혜염(慧琰)법사
신주(信冑)법사
애주(愛州)의 지행(智行)법사
애주의 대승등(大乘燈)선사
강국(康國)10)의 승가발마사(僧加跋摩師)
고창(高昌)의 피안(彼岸)과 지안(智岸) 두 법사
낙양(洛陽)의 담윤(曇潤)법사
낙양의 의휘논사(義輝論師)
대당(大唐) 승려 세 사람
신라(新羅)의 혜륜(慧輪)법사
형주(荊州)의 도림(道琳)법사
형주의 담광(曇光)법사
또 한 사람의 대당(大唐) 승려
형주(荊州)의 혜명(慧命)선사
윤주(潤州)의 현규(玄逵)율사
진주(晋州)의 선행(善行)법사
양주(襄州)의 영운(靈運)법사
예주(澧州)의 승철(僧哲)선사와 그 제자
낙양(洛陽)의 지홍(智弘)율사
형주(荊州)의 무행(無行)선사
형주(荊州)의 법진(法振)선사
형주의 승오(乘悟)선사
양주(梁州)의 승여(乘如)율사
예주(澧州)의 대진(大津)법사

이상 모두 56인이다. 그 중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된 분들이 많다. 의정이 돌아올 때 천축에 무행(無行)스님ㆍ도림(道琳)스님ㆍ혜륜(慧輪)스님ㆍ승철(僧哲)스님ㆍ지홍(智弘)스님 등 다섯 분이 계셨던 것을 보았다. 헤아려 보면 수공(垂拱) 원년(685)에 무행선사(無行禪師)와 서국(西國)에서 헤어졌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1)현조법사(玄照法師)
사문(沙門) 현조법사는 태주(太州)의 선장(仙掌:현 陜西省 華陰縣)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반가사말저(般迦舍末底:Prak syamati)이며, [당나라말로는 조혜(照慧)라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부(大夫) 이상의 문관(文官) 벼슬을 이어 내려 왔던 집안이다. 총각 시절에 비녀[簪]를 뽑고 세속을 떠났으며, 성인이 되고서는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경사(京師:長安)를 찾아가서 경론(經論)을 듣게 되었고, 정관(貞觀) 연간(627~649)에는 대흥선사(大興善寺)의 현증(玄證)스님 거처에서 처음으로 범어(梵語)를 배웠다.
이 때 석장(錫杖)을 짚고 서쪽으로 가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수행하려는 생각을 품고, 금부(金府:지금의 蘭州)를 떠나 유사(流沙)11)를 지나고 철문(鐵門)을 거쳐 설령(雪嶺)에 올라갔다. 그리하여 향지(香池)12)에서 몸을 씻고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다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총부(葱阜)13)에 올라가서 삼유(三有)14)를 제도할 것을 맹세하였다.
길은 속리(速利)를 거쳐 도화라(覩貨羅)15)를 지나 멀리 호(胡)나라 경계를 뚫고 토번국(吐蕃國:지금의 티베트)16)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문성공주(文成公主)17)의 전송을 받으며 북천축으로 가서점차 사란타국(闍蘭陀國)18)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멀고도 험한 길에서 도적에게 잡히게 되었다. 더 이상 여행할 계책도 막히고 호소할 곳조차 없게 되자 결국에는 신사(神寫)에 매달리니, 그의 간절한 마음이 성현에게 계합되어 꿈에 도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 보니 도적 무리들이 모두 자고 있어 가만히 빠져 나와 겨우 난을 면하였다.
사란타국에서 4년 간 머무르는 동안 그 곳 국왕으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 머물면서 공양을 받으며 경(經)ㆍ율(律)을 배우고 범문(梵文)을 익혀 마침내 조금은 통하게 되었다.
그 후 점차 남쪽으로 올라가 마하보리(莫河菩提)19)에 이르러 그 곳에서 다시 4년을 지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 부처님을 뵙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남기신 자취를 보게 되었으며, 자씨(慈氏)가 마련한 진용(眞容)20)을 우러러보게 되어 정성을 기울이는 데 변함이 없었다. 이에 우러르고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진 나머지 『구사(俱舍)』 연구에 뜻을 두어 『대법(對法)』을 알게 되었으며,21) 율의(律義)를 맑게 지니고자 생각하게 되었고, 대ㆍ소승 두 교리에도 밝아졌다.
그 뒤에 나란타사(那蘭陀寺)22)로 가서 3년 간 머물며 승광(勝光)법사에게 나아가 『중론(中論)』23)ㆍ『백론(百論)』24) 등을 배우고, 다시 보사자대덕(寶師子大德)에게 나아가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25)를 배웠으니, 선정(禪定)이 넘쳐 그 끝까지 체험하게 되어 이미 그 대강(大綱)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가하(弶伽河:갠지스강) 북쪽으로 가서 국왕 점부(苫部)26)의 공양을 받고, 신자사(信者寺)27) 등에서 머물며 다시 3년을 보냈다.
뒤에 당나라 사신 왕현책(王玄策)28)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 그참된 덕망을 알리니 드디어 황제가 칙명을 내렸으므로, 왕현책은 다시 인도로 가서 현조법사를 찾아 당나라 서울로 오게 하였다.
니파라국(泥波羅國:지금의 네팔)을 경유하여 돌아왔는데, 국왕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전송하였다. 토번에서 다시 문성공주를 뵈었는데, 공주는 법사를 깊이 예우하고 당나라로 돌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서번(西蕃)을 거쳐 동하(東夏:동쪽 중국)에 이르렀다. 9월에 점부왕과 헤어져 이듬해 정월에 낙양(洛陽)에 도착하였으니, 다섯 달 동안 경유한 길은 만 리나 되었다. 이 때가 인덕(麟德) 연간(664~665)이었는데, 황제가 동쪽 낙양까지 행차하였으니 궁전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이에 드디어 황제가 칙령을 내려 가습미라국(羯濕彌羅國)29)까지 가서 장년바라문(長年婆羅門) 로가일다(盧迦溢多)30)를 찾아오게 하였다.
낙양에서는 이미 여러 대덕(大德)과 만나 불법의 기강(紀綱)을 대략 논하였으며, 경애사(敬愛寺)의 도율사(導律師)와 관법사(觀法師) 등은 『살바다부율섭(薩婆多部律攝)』31)의 번역을 청하였다.
이미 칙명으로 인도로 갈 것을 재촉받아, 본래의 소망도 이루지 못한 채 가지고 온 범본(梵本)을 모두 서울에 남기고 거듭 유사(流沙)를 넘어 다시 적석(磧石)을 지나가게 되었다.
험한 잔도(棧道)의 측면을 반그림자를 끌고 비스듬히 통과해야 했으며, 동아줄로 만들어진 출렁이는 다리 아래를 온몸을 던져서 옆으로 기울며 건너야만 하였다.
토번의 도적들을 만나 목이 잘릴 뻔하다가 살아 남은 일도 있었고, 흉노(兇奴)의 강도들을 만나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한 적도 있었다.
계속 나아가다 북인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로가일다를 인도하여 오는 당나라 사신을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로가일다는 다시 현조(玄照)법사와 사신 몇 사람에게 명하여서 인도 라다국(羅茶國)32)으로 가서 오래 살게 하는 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박갈라(縛渴羅)33)를 지나 납바비하라(納婆毘揀羅)[당나라말로는 신사(新寺)라고 한다.]를 지나는 길에 여래께서 몸을 씻으셨던 곳 및 여러 성스런 유적을 보았다. 차츰 다시 가필시국(迦畢試國)34)에 이르러 여래의 정골(頂骨)에 예배하고 꽃과 향을 갖추어 바치고, 그 인문(印文)을 거두어서 내생(來生)의 선악(善惡)을 살펴보았다.
다시 신도국(信度國)35)을 지나 바야흐로 라다국(羅茶國)에 도달하였다. 왕의 예우와 존경을 받으며 4년 동안 안거(安居)하였다. 남천축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 가지 약을 구하여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법사는 금강좌(金剛座)36)에 도착한 뒤 다시 돌아서 나란타사에 이르렀는데, 그때의정(義淨)과 만나 평생에 뜻하던 소원을 다 풀고 내세에서는 함께 용화세계(龍華世界)37)에서 만날 것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니파라로 가는 길은 토번국이 가로막아 지나갈 수 없었고, 가필시(迦畢試)로 가는 길은 다씨(多氏)가 침입하여 통과하기 어려웠다. 이에 결국 잠시 영취산(靈鷲山)에 머물기도 하고, 죽원정사(竹苑精舍)에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불법을 전하려는 뜻은 항상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몸이 맞춰주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옆처럼 되는 것을 어찌하리. 아아! 고행과 정성을 다하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려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생각은 하늘 높이 오르려 하였지만 중천(中天)에서 날개가 꺾여버렸으니 어이하리오. 중인도(中印度)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60여 세였다.[앞의 다씨(多氏)는 즉 대식국(大食國:사라센.
현재의 아라비아에 있던 나라)을 말한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를 읊는다.

뛰어나고 씩씩한 뜻
세상에서 영특하고 빼어나니,
해지는 곳까지 두루 거쳐
몇 번이나 기련(菽連)38)을 거닐고.
상하(祥河)39)에 몸을 씻고
죽림정사(竹林精舍)에 머물렀으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마음에
간절히 깊이 생각하였던 것은
오로지 불법을 펴려는 소망뿐.
보리(菩提)의 한 삶으로 뜻을 맡겼으나
아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구나.
슬프도다, 이루지 못한 뜻.
양하(양河)에 뼈를 가라앉히고
팔수(八水)에 그 이름을 휘날리니,
장하도다, 목숨으로 바른 길 지키고
지혜로써 인간의 도리 다하였네.
[양하(양河)는 인도에 있고, 팔수(八水)는 중국에 속해 있다.]
2)도희(道希)법사
도희법사는 제주(齊州) 역성(歷城)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실리제바(室利提婆, Srideva)[당나라말로는 길상천(吉祥天)이다.]라 한다.
그는 예의를 지키며 사대부(士大夫) 벼슬을 이어온 집안 출신이다. 어려서 불교에 몸을 담아 일찍부터 불도를 지킬 것을 굳게 다짐했다.
이에 넓고 끝없는 유사(流沙)를 거쳐 중인도에서 성스런 유적을 다니며 그 덕화를 살펴보았으며, 구름 속 높이 솟은 험한 산들을 넘어 삶을 가벼이 여기고 불법을 위해 순교하였다. 그는 길을 나서 토번(吐蕃)에 이르렀으나 그 길이 위험하여 계율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결국 여행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일은 서쪽으로 갈때에도 다시 겪었다.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다가 드디어 마하보리(莫揀菩提:Mahabodhi)에 이르러 성스러운 유적을 우러러 참배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는 이미 나란타사에도 머물렀고, 또 구시국(俱尸國)에도 있었다.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에서는 국왕의 극진한 존경과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나란타사에서는 대승불교를 배웠으며, 수파반나(輸婆伴娜)[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곳에 세워진 절 이름이다.]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율장(律藏)을 전공하였다. 다시 성명학(聲明學)을 익혀 자못 그 학문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마쳤다. 문장에도 정통하였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도 잘 썼으며, 대각사(大覺寺:마하보리)에 있을 때에는 당(唐)나라의 비(碑) 한 수(首)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올 때 가지고 왔던 당나라의 신구경론(新舊經論) 400여 권은 모두 나란타사에 있다. 하지만 의정이 인도에 있을 때에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법사는 암마라발국에 머물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50여 살이었다. 뒤에 순례길에서 도희법사가 머물렀던 방을 보고, 그의 불행을 슬퍼하여 7언(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온갖 고생 피로도 잊고 홀로 떠났네.
사은(四恩)을 마음에 간직하여 널리 펼 것을 다짐하였지만 어찌하여 전등(傳燈)의 뜻 못다 이루고
갑자기 곤궁한 이 길을 만났는가.

3)사편(師鞭)법사
사편법사는 제주(齊州) 사람이다. 그는 밀주(密呪:禁呪)를 잘하였으며, 범어(梵語)에익숙하였다.
현조(玄照)법사와 함께 북천축에서 서인도로 향하였는데 암마라할파성(菴摩羅割跛城)에 이르러 국왕의 존경을 받으며 왕사(王寺)에 기거하였다. 그는 도희법사와 만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맘껏 토로하였다. 같이 한 여름을 기거하다 병이 나 죽으니 35살이었다.

4)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아리야발마(Āryavarma)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정관(貞觀) 연간(627~ 649)에 장안(長安)의 광협(廣脇)[왕성(王城)의 산 이름이다.]을 떠나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추구하며, 성스러운 유적을 몸소 순례하였다.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율(律)과 논(論)을 많이 익히고, 중경(衆經:대장경)을 간추려 베꼈다. 하지만 돌아올 마음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애달프기 짝이 없다.
아리야발마스님은 동쪽 경계인 계귀(雞貴)에서 나와 서쪽 끝인 용천(龍泉:나란타사)에서 돌아가셨다. 즉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70여 세였다.[계귀(鷄貴)는 범어로 구구타예설라(矩矩吒翳說羅, Kukuṭeśvara)이다. ‘구구라’는 닭[鷄]이고, ‘예설라’는 귀하다[貴]라는 뜻이니, 즉 고려국(高麗國)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나라에서는 닭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그 날개 털을 뽑아 장식한다고 한다. 나란타사에못[池]이 있는데, 이를 용천(龍泉)이라고 부른다. 인도에서는 고려를 ‘구구타예설라(矩矩吒翳說羅)’라고 부른다.]

5)혜업(慧業)법사
혜업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관(貞觀) 연간에 서역으로 가서 보리사(菩提 寺:대각사)에 머물면서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고, 나란타사에서 오랫동안 강(講)을 듣고 불서를 읽었다.
의정이 이 곳의 당나라 불서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양론(梁論)』40) 하기(下記)에 “불치목(佛齒木)41) 밑에서 신라승 혜업이 베껴 적었다”라는 글을 보았다. 그래서 이 절의 스님을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 곳에서 죽었으며 나이는 60살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가 베꼈던 범어 책은 모두 나란타사에 보존되어 있다.

6)현태(玄太)법사
현태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범어 이름은 살바신야제바(薩婆愼若提婆, Sarv-jindeva)[당나라말로는 일체지천(一切智天)이라고 한다.]이다.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토번(吐蕃:티베트) 길을 택해서 니파라(泥波羅:네팔)를 거쳐 중인도에 도착하였다. 보리수(菩堤樹)에 예배하고 경(經)과 논(論)을 상세히 조사한 뒤에 발걸음을 동쪽 땅(중국)으로 돌렸다.
토곡혼(土谷渾)에 이르러 도희(道希)법사를 만나게 되어 다시 서로 대각사(大覺寺)에 돌아왔다. 그 뒤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

7)현각(玄恪)법사
현각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현조(玄照)법사와 함께 정관(貞觀) 연간에 대각사에 이르렀다. 그 곳에 예경(禮敬)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나이는 겨우 40세를 넘었을 뿐이다.

8)신라의 또 다른 법사 두 사람
다시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을 알지 못한다. 장안(長安)에서 출발하여 멀리 남해(南海)42)로 갔었다.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43) 서쪽 파로사국(波魯師國)44)에 이르렀는데 모두 병에 걸려 죽었다.

9)불타달마(佛陀達摩)
불타달마(Budhadharma)는 도화라속리국(覩貨羅速利國) 사람이다. 체구가 크고 기력이 넘쳤으며, 소승불교(小乘佛敎)를 익혀 언제나 걸식하였다.
젊어서는 교역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기에 마침내 중국으로 오게 되어 익부(益 府:四川省 成都)에서 출가하였다. 성격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구주(九州) 땅을 밟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 뒤 마침내 서역을 경유하여 인도로 들어가 성스러운 유적을 두루 살폈다.
외정은 나란타사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 후 여정을 바꾸어 북천축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쯤 되었다.
이상은 10인이다.

10)도방(道方)법사
도방법사는 병주(幷州:山西省 太原市) 사람이다. 유사(流沙)와 적석(ψ石)을 지나 니파라국(泥波羅國:네팔)에 도착하였다. 대각사에 머물며 수년 간 책임자로 지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다시 니파라국으로 향했으며, 지금 그 나라에 있다. 법사는 계를받지 않았으며, 경전도 익히지 않았다. 나이가 노경(老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1)도생(道生)법사
도생법사는 병주 사람이다. 인도 이름으로는 전달라제바(旃達羅堤婆, Candradeva)[당나라말로는 월천(月天)이다.]라고 하였다. 정관(貞觀) 말년(649)에 토번 길을 따라 인도로 향하였다. 대각사에 도착하여 제저(制底)에 예배한 후, 나란타사에서 동자왕(童子王)으로부터 두터운 예경(禮敬)을 받았다.
다시 이 절에서 동쪽으로 12역(驛) 지점에 국왕의 절이 있었는데, 이 곳은 완전히 소승불교였다. 법사는 그 절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았으며, 소승의 삼장(三藏)을 배워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摩順正理論)』에 정통하였다.
법사는 중국에 범어 경전과 불상을 많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그 후 니파라국에 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0세 쯤이었다.

12)상민선사(常愍禪師)와 그의 제자 한 사람
상민선사는 병주(幷州) 사람이다. 머리를 깎고 관직을 버린 뒤 승복으로 갈아 입고부터는 나태하지 않고 정근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염송(念誦)하였다. 언제나 큰 서원(誓願)을 세워서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할 것을 기원하였으며, 정업(淨業)을 짓고 부처님 이름을 칭념(稱念)하였으니, 그 복의 터전을 닦는 것이 이미 넓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뒤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으로 가서도 오로지 염불만을 하였다. 깊은 정성에 영묘(靈妙)한 징조가 감득되어 드디어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揀般若波羅蜜多經)』을 사경(寫經)하여 만 권을 채우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리고 서쪽 인도로 가서 여래께서 수행하셨던 성스러운 유적에 예배하여 이 뛰어난 복덕으로 회향(廻向)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궁궐을 찾아가 글을 올려 간청하였다.
“여러 고을을 교화하여 『반야경』을 사경하겠습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뜻을 세운다면 하늘도 반드시 그를 따라줄 것으로 믿어 마침내 황제 친필의 칙서(勅書)를 받아 양자강(楊子江) 남쪽으로 내려가 『반야경』을 사경하여 황제의 은택에 보답하였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마침내 바닷가에서 배에 올라 남쪽으로 출범(出帆)하였다. 그리하여 가릉국(揀陸國:자바 섬)45)으로 가서 그 곳에서 다시 배편으로 말라유국(末羅瑜國)46)으로 들어갔고, 이 나라에서 다시 중인도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탔던 상선(商船)이 화물을 너무나 많이 실었기에 닻줄을 풀어 배를 띄우기는 하였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격랑에 휩쓸리고 말았다. 결국 배는 반나절도 못 되어 그대로 가라앉게 되었다. 배가 가라앉으려 하자 상인들은 앞다투어 작은 배에 올라타려고 서로 난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찍부터 신심을 굳게 지녀온 그 배의주인이 소리 높여 상민선사를 불렀다.
“스님, 오셔서 배에 오르십시오.”
상민선사가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태우도록 하시오. 나는 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보리심(菩提心)에 순응하는 길이요,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면 이것이 보살의 행이 되기 때문이오.”
그리고 나서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다. 그가 끊이지 않고 칭명염불 하는 가운데 배는 가라앉았으니, 어느덧 그의 몸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다하여 생을 마쳤다. 나이는 50여 세였다.
선사에게는 제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디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슬피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역시 서방 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스승과 함께 죽었다. 그 때 살아 남은 사람이 자세히 이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일을 애도하며 글을 짓는다.

애달프도다, 위인(偉人)이 중생을 위해 몸을 떠나보냈구나.
그 밝음은 수경(水鏡)과 같고, 귀함은 화진(和珍)과 같았네.47)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고, 갈아도 닳아지지 않았다.
몸을 혜헌(慧■)48) 에 의탁하여 지혜를 길러 법해(法海)를 이루었네.
자국(自國)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업을 넓혔고,
타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인(因)을 지었네.
중생들 험난한 파도에 빠지려는 모습 보고
스스로 결연히 제 몸 던졌네.
중생을 언제나 측은히 여겼지만 그에게는 응해주는 이웃이 적었네.49)
덧없는 몸 거친 파도에 뿌려 입멸하였어도
청정한 서원 안양(安養)으로 나아가 정신이 노니네.
도에 어둡지 않거늘 어찌 덕이 스러지겠는가.
자비의 빛을 펼치니 눈부시게 빛나고
겁진(劫塵)을 다하도록 여전히 새롭네.

13)말저승하(末底僧揀)
말저승하(Matisinha)[당나라에서는 사자혜(師子慧)라고 한다.]는 경조(京兆:長安)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황보(皇甫)라 하나 본래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사편(師鞭)스님과 함께 여행하여 중인도에 이르러서는 신자사(信者寺)에 머물렀다. 범어를 약간 공부하였으나, 경과 논에는 상세하지 못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니파라국(泥波羅國:네팔)을 지나다 병으로 죽었으니, 나이는 40여 세였다.

14)현회(玄會)법사
현회법사는 경사(京師) 사람이다. 안장군(安將軍)50)의 자식이라고 한다.
북인도에서 가습미라국(羯濕彌羅國:카쉬미르)으로 들어갔는데,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왕의 코끼리를 타고 왕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날마다 용지산사(龍池山寺)51)를 향하여 공양하였다.
이 절은 5백 나한(羅漢)이 공양을 받았던 곳으로 존자(尊者) 아난타(阿難陀)의 실쇄(室灑)였던 말전지(末田地)가 용왕(龍王)을 교화했던 곳이다.[실쇄(室灑:Sishya)는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구역(舊譯)에서 제자라 한 것은 잘못이다.]그는 또 가습미라 왕을 설득하여 대은사(大恩赦)를 행하게 하였다. 이 때 나라 안에는 사형수 천여 명이 있었는데, 왕에게 권하여 석방하게 했던 것이다.
수년 간 왕궁에 드나들었지만 그 후 실의(失意)하여 결국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각사에 이르러 보리수에 예배하고, 목진지(木眞池)52)를 둘러보았으며, 영취산(靈鷲山)에 올랐고, 존족령(尊足嶺)을 거닐었다.
그는 타고난 식견이 총명하여 많은 기예를 닦았다. 그리고 수학한 지 얼마 안되어 범어의 발음을 환히 알았다. 약간의 경전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와 살려고 마음먹었으나 니파라국에 이르러 불행히도 죽고 말았다. 나이는 겨우 30세를 넘겼을 때였다.[니파라국에는 독약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15)질다발마(質多跋摩)
또 중국 북도(北道) 여행 안내를 하던 사람[使人]과 함께 박갈라국(縛渴羅國)에 이르러 (북인도의) 신사(新寺)에서 소승불교의 승려에게 출가한 질다발마(Cittavarma)가 있다.
후에 그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려고 할 때 삼정육(三淨肉)53)을 먹지 않자, 그 스님이 물었다.
“여래께서 몸소 오정식(五正食)54)을 먹게 하였으니, 이를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데, 너는 어째서 먹으려 하지 않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많은 대승 경전이 한결같이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익혀온 습성이어서 고칠 수 없습니다.”
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삼장(三藏)에 의거한 것으로 율장에 그 조문(條文)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네가 인용하는 문장은 내가 배운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견해를 갖는다면 나는 너의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제로 먹게 하였으니, 이에 얼굴을 가리고 울며 고기를 먹었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구족계를 받고는 더욱 범어를 수학하였다.
그 후 북로(北路)를 되짚어서 귀국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인도의 어느 승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16)토번공주(吐蕃公主) 유모(乳母)의 아들 두 사람
또 니파라국(泥波羅國)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토번공주의 유모 아들이다.
두 사람은 처음 함께 출가하였으나 얼마 후 한 사람은 환속하였고, 또 한 사람은 대왕사(大王寺)에 거주하였는데, 범어와 범서(梵書)를 모두 잘하였다. 형의 나이는 35세, 동생은 25세였다.

17)융(隆)법사
융법사는 어느 곳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북쪽 길[天山北路]를 따라 여행을 나섰는데, 북인도 길을 택해 중천축의 성지를 살펴보며 부처님의 덕화를 살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범본(梵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암송할 수 있게 되었으나 건다라국(健陀羅國:간다라)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북방의 승려가 의정에게 와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이상은 20인이다.

18)명원(明遠)법사
명원법사는 익주(益州) 청성(靑城:四川省 灌縣西) 사람이다. 범어 이름은 진다제바(振多提婆, Cint deva)[당나라말로는 사천(思天)이라고 한다.]이다.
유년시절부터 불법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몸가짐은 우아하였으며, 학업은 우수하였다. 『중론(中論)』과 『백론(百論)』에 뛰어났으며, 『장자(莊子)』와 『주례(周禮)』도 연구하였다.
일찍이 칠택(七澤) 사이를 노닐었으며, 삼오(三吳)의 땅을 두루 다녔다.55) 그곳에서 거듭 경론을 배우고 다시 선(禪)을 익혔다. 이 때 여봉(鏑峰)에서 세상을 피하여 한 여름을 지냈다. 그러나 성스러운 가르침이 쇠퇴해 가는 것을 개탄하여 석장(錫杖)을 흔들며 남쪽으로 교지(交趾)56)까지 와서, 여기에서 배를 타고 큰 파도에 흔들리면서 가릉국(揀陵國:자바)에 도착하였다. 이어 사자국(師子國:스리랑카)에 이르러서 군왕(君王)으로부터 예우와 존경을 받았다.
어느날 그는 몸을 숨겨 전각(殿閣) 안으로 몰래 들어가 부처님 치아(齒牙)를 훔쳐 내었다. 그 치아를 중국으로 가지고 가서 공양올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치아를 손에 넣기는 하였으나 도리어 어떤 자에게 탈취 당하는 바람에 소망을 이루지도 못하고 오히려 능욕만을 당한 채 남인도로 향하였다. 사자국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대각사로 갔다고 하였으나, 중인도에서는 그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다. 아마 여행길에 죽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도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 뒤 사자국에서는 부처님 치아를 지키는 것이 한층 견고해졌다. 치아를 높은 누각위에 봉안하고 이중으로 열쇠를 걸어 그 자물쇠는 진흙으로 봉하여[泥封] 오관(五官)이 여기에 도장[印]을 찍었다. 만약 문이 하나만 열려도 그 소리가 성곽에 들리게 하였다.
매일 부처님 치아에 공양을 올려 꽃과 향이 절 안에 가득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하면 부처님 치아는 꽃 위에 나타나고, 혹은 이상한 빛을 발하였으니, (이 영험은)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는 “만약 이 사자국이 부처님 치아를 잃어버리면, 이 나라의 사람은 모두 나찰(羅刹)에게 잡아 먹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재앙을 방지하기 위하여 엄중히 지킨다는 것이다.
또 전하는 말로는 “장차 부처님 치아는 중국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는 성스러운 힘이 먼 곳까지 이른다는 것이며, 감응하는 곳이 있으면 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사람의 일이겠는가? 억지로 사리에 맞지 않는 말만 늘어 놓을 뿐이다.

19)의랑율사(義朗律師)와 그 아우 및 지안(志岸)법사
의랑율사는 익주(益州:四川省) 성도(成都) 사람이다. 율장을 공부하였으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도 통달하였다. 동주(同州:陜西省 大荔縣)의 승려 지안(智岸)과의현(義玄)이라는 동생과 함께 장안(長安)에서 출발하여 강한(江漢:胡北省ㆍ安徽省)57) 끝까지 이르렀다.
율사는 20세를 갓넘은 나이로 불법을 흠양하였는데, 자못 내전(內典:佛典)도 익혔고 문필에도 뛰어났다. 그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동생과 함께 여행하여 참배하려고 생각하였다. 형제가 둘 다 뛰어나 서로 도왔으니, 마치 척령(鶺鴒)58)이 서로 돕듯이 돈독히 생각하였다.
드디어 오뢰(烏雷)59)에 도착하여 함께 상선(商船)을 타고 거친 파도를 넘어서 부남(扶南:캄보디아)을 거쳐 랑가술국(郞迦戌國:파타니)60)에 정박하였다. 랑가술왕의 가장 지극한 예우를 받았지만, 지안은 이 곳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의랑은 지안과의 사별(死別)의 슬픔을 가슴에 안은 채 동생과 배를 타고 사자주(獅子州:스리랑카)로 향하였다. 그 곳에서 진귀한 서적을 구하고, 부처님 치아에 정례(頂禮)한 뒤 인도로 나아갔다.
들리는 말은 이상과 같다. 지금 두 형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자국에는 이미 없으며, 중인도에도 그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아마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을 달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랑의 나이 불과 40여 세에 지나지 않았다.

20)회녕(會寧)율사
회녕율사는 익주(益州:四川省) 성도(成都) 사람이다. 나면서부터 뜻을 세워 행동하였으니, 그의 뜻은 중생들을 널리 이익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젊어서부터 총명하여 불법에 몸을 던져 그 뛰어난 이치를 계주(髻珠)61) 와 같이 존경하며 신발을 벗어 던지듯이 세속의 영화를 버렸다.
경과 논을 널리 잘 알았으나, 특히 율장(律藏)에 정통하였으며, 뜻은 인도에 가서 불법을 펼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인덕(麟德) 연간(664~665)에 남해(南海)로 가려고 배를 타고 가릉주(揀陵州:쟈바)로 갔다. 여기에서 3년간 거주하면서 드디어 가릉주의 다문승(多聞僧) 약나발다라(若那跋陀羅, Juanabhadra)62)와 함께 『아급마경(阿笈摩經:아함경)』 안의 여래의 열반(涅槃)과 분신(焚身)의일을 번역하였다. 이것은 대승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는 다른 경전이다. 『대승열반경』은 의정이 인도에서 친히 보고 말하기를 “그 수가 대략 2만5천 게송이므로 번역하면 60여 권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그 전부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손에 넣지못하였고 단지 처음의 「대중문품(大衆問品)」 1협(夾) 4천여 게송만 구했다”고 하였다.
회녕은 이미 구한 『아급마본(阿笈摩本)』을 번역한 후 소년 승려 운기(運期)에게 자신이 지은 상표문(上表文)과 번역한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운기는 교부(交府)에 이르러 파발마(擺撥馬)를 장안으로 급히 보내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이것을 온 중국에 유포하기를 바란다는 상표문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운기는 장안에서 교지(交趾)로 돌아와서 황제로부터 소견(小絹:본견) 수백 필을 받았다는 것을 그 곳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리고는 다시 가릉주로 가서 지현(智賢)[약나발다라(若那跋達羅)이다.]에게 알렸고, 회녕과 다시 만났다.
그 후 회녕은 인도로 갔는데, 그의 소재를 알고자 하여 풍문으로라도 늘 살펴보았지만, 인도에서의 그의 종적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이상의 경위로 보아 그는 이미 죽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이는 35세 가량 되었을 것이다.
슬퍼하며 읊는다.

아! 회녕이여,법을 구하려고 홀로 떠나, 비로소 두 권을 번역하여
온 나라에 유포하려 하였네.
사자국으로 향하려 하였으며, 홀로 잠시 화성에 머물렀도다.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의 도는 더욱 또렷하고
세월은 흘렀어도 이름을 남겼구나.
보살의 먼저 뜻 펴고자
함께 후념(後念)63) 하여 명성을 날렸네.

21)운기(運期)법사
운기스님은 교주(交州:베트남의 河內西) 사람이다. 담윤(曇潤)과 함께 불문(佛門)에 들어가 지현(智賢)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10여 년 동안 남해(南海)를 왕래하였으며, 곤륜음(崑崙音)64)을 잘 하였으며, 범어도 자못 알았다. 그러나 훗날 환속하여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수마트라)에 살게 되었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일찍부터 넓은 바다를 오고 가며 경전을 중국에 전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포된 것은 이 사람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30세쯤 되었다.

22)목차제바(木叉提婆)
목차제바(Moksadeva)[당나라말로는 해탈천(解脫天)이라고 부른다.]는 교주(交州) 사람이다. 그의 본명(本名)은 분명하지 않다.
배를 타고 남명(南溟:남해)으로 가서 여러 나라를 거쳐 대각사에 이르러 성스러운 유적에 두루 순례하고, 교주(交州)에서 죽었다. 나이는 24~5세쯤이었다.

23)규충(窺沖)법사
규충법사는 교주(交州) 사람이며, 명원(明遠)의 제자이다. 범명(梵名)은 질차라제바(質咀羅提婆, Citradeva)이다.
명원과 같이 배를 타고 남해(南海)로 가서 사자주(師子州)에 이르렀으며, 서인도에 가서 현조(玄照)스님을 만나 함께 중인도로 나아갔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범어 경전을 잘 암송하여 어떤 곳에 이르러서도 언제나 경전을 소리내어 외웠다. 보리수에 정성스레 예를 올린 뒤 왕사성(王舍城)에 이르렀는데, 그 때 병을 얻게 되어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죽었다.
나이는 30세쯤이었다.

24)혜염(慧琰)법사
혜염법사는 교주(交州) 사람으로 행공(行公:智行法師)의 제자이다. 스승을 따라서 승가라국(僧揀羅國:스리랑카)에 가서 그 나라에 머물렀으나 그의 생사는 분명하지 않다.

25)신주(信冑)법사
신주법사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범명(梵名)은 설리타발마(設唎陀跋摩, radvayma)[당나라말로는 신주(信冑)라 한다.]이다.
신주는 천산북로(天山北路)를 통하여 인도로 들어가 두루 국왕을 예알(禮謁)하고 신자사(信者寺)에 머물렀다. 그 절 상층에 전각(塼閣)을 하나 짓고 최상의 와구(臥具)를 마련하여 오래도록 물려줄 공양처로 삼았다.
훗날 병을 얻은 지 며칠되지 않아 명(命)을 다할 즈음 갑자기 밤중에 “어떤 보살이 나타나 손을 내밀면서 나를 영접한다”고 말하더니,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크게 호흡하고 죽었다. 나이 35세였다.
이상 30인이다.

26) 지행(智行)법사
지행법사는 애주(愛州:베트남 淸華) 사람이다. 범명은 반야제바(般若提婆, Pr j adeva)[당나라말로는 혜천(慧天)이라고 한다.]이다.
배로 남해로 가서 서천축(스리랑카)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두루 예배하고 강가하(4dk1伽河:갠지스강) 북쪽으로 가서 신자사(信者寺)에서 살다가 죽었다.
나이는 50여 세였다.

27)대승등선사(大乘燈禪師)
대승등선사는 애주(愛州) 사람으로 범명(梵名)은 마하야나발지이파(莫揀夜那鉢地已波, Mahāyānadipa)[당나라말로는 대승등(大乘燈)이라 부른다.]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배를 타고 두화라발저국(杜和羅鉢底國)65)으로 가서 비로소 출가하였다. 그 뒤 당나라 사신 담서(郯緖)를 따라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대자은사(大慈恩寺)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장)의 거처에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다. 장안에서 수년 간 있으면서 자못 불경을 읽었으나, 성스러운 유적에 예배하려는 생각으로 마음은 멀리 인도에 가 있었다.
그의 몸은 충서(忠恕)로 가득하였고, 성품은 바르고 굳었으며, 지계(持戒)를 높이 받들고 선정(禪定)으로 생각한 것과 화합하였다.
대승등선사는 생각하였다.
‘삼계(三界:有)에 빠진 자는 연(緣)을 빌리되 그 연이 그릇되면 삼계에 빠지고,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연의 도움을 받으나 그 연이 바르면 생사를 떠난다.’ 이에 왕성(王城:장안)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가서 팔난(八難)을 극복하고 사륜(四輪)을 구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드디어 불상을 품에 지니고 경과 논을 휴대하여 남명(南溟:남해)을 건너 사자국(師子國)에 가서 모든 영험을 갖춘 부처님 치아를 뵙고 예배하였다. 남인도를 지나 다시 동천축에 이르러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탐라聖티)으로 갔다. 하지만 배가 강구(江口)에 들어가자 도적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겨우 몸만 살아 남았다.
그는 이 나라에서 12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머물러 범어를 아주 잘하게 되었으며, 인연소생(因緣所生)의 가르침에 관한 경전 등을 암송하며 선행(善行)을 닦았다.
그러다 대상(隊商)의 무리를 만나 의정과 함께 중인도로 갔다. 먼저 나란타(那爛陀寺)에 갔다가 다음에 붓다가야의 금강좌(金剛座)에 예배하고 방향을 바꾸어 폐사리(薛舍離:베살리)를 거쳐 뒤에 구시국(俱尸國:구시나가라)에 이르러 이 곳에서 무행선사(無行禪師)와 같이 지냈다.
대승등선사는 언제나 한탄하여 말하였다.
“나의 본래의 뜻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이었는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어찌 마음먹을 수 있으랴. 어느 사이엔가 내 몸은 늙어 버렸으니, 이번 생에는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내생(來生)에는 반드시 이 뜻을 이루리라.” 대승등선사는 언제나 도사다천(都史多天:도솔천)에 태어나기 위해 그 곳에 계시는 미륵보살(彌勒菩薩:慈氏) 뵙기를 기원하며 매일 용화수(龍華樹) 한두 가지를 그려서 마음 속의 지성(至誠)을 나타냈다.
대승등선사는 불도 수행을 계속하고 있던 중 도희법사(道希法師)가 살고 있던 옛 방을 지나갔다. 그런데 당시 그는 이미 죽어 사람은 없고, 중국어로 번역된 경전과 범어로 된 불경꾸러미만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본 선사는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예날 장안에서는 같은 법석(法席)에서 노닐었건만, 지금은 그의 빈경연(經筵)만 볼 뿐이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를 읊었다.

아, 죽음의 왕은 세력이 더욱 강하니
전등(傳燈)의 선비가
어느새 가고 없구나.
중국에서 품었던 소망은 이루지 못하였고
부처님의 나라에서 그 혼백이 선양하네.
슬픔을 못 이겨 눈물 흘리고
흰 옷 애통하며 마음 상하네.

선사는 구시성(俱尸城) 반열반사(般涅槃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그 때 나이 60여 세였다.

28)승가발마(僧伽跋摩)
승가발마(Saṁghavarma)는 강국(康國:사마르칸트) 사람이다.
젊어서 유사(流沙)를 넘어 장안(長安)으로 가서 학업을 닦았다. 평소 신심이 두터웠으며, 계행이 맑고 엄격하였다. 보시하고 수행하여 자비가 마음에 가득하였다.
현경(顯慶) 연간(656~661)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사인(使人)과 함께 인도로 가서 부처님의 유적에 예배하고, 대각사(大覺寺)에 도착하였다.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에서 크게 추천(追薦:공양) 의식(儀式)을 설(設)하였는데, 7일간 연등(燃燈)을 계속 밝히며 대법회를 봉헌하였다. 또 보리원(菩提院:대각사) 안의 무우수(無憂樹)아래에 불상과 관세음보살상을 새겨서 성대하게 경찬(慶讚)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희귀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66)
뒤에 당나라로 돌아왔다. 승가발마는 다시 칙명을 받들어 교지(交趾)에 가서 약을 구해오게 되었다. 그 무렵 교주(交州) 지방에는 크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던 때였다. 그는 매일 음식을 절약하여 홀로 사는 빈궁자들을 구제하였는데, 가여워하는 마음에 언제나 눈물을 흘렸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상제보살(常啼菩薩)67)이라 하였다.
그러다 가벼운 질병에 걸렸는데 그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때 나이 60여 세였다.

29)피안(彼岸)법사와 지안(智岸)법사
피안법사와 지안법사는 둘 다 고창(高昌:新疆省 土魯蕃) 사람이다.
젊어서 장안에서 자랐으며, 법등(法燈)을 전하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정법(正法)에 힘쓰다가 마침내 중천축의 부처님 유적을 순례하면서 그 덕화를 살피고자 하였다.
사인(使人) 왕현곽(王玄廓)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으나, 바다에서 질병에 걸려 두 사람 모두 죽었다. 가지고 갔던 중국어 번역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및 그밖의 경과 논은 모두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수마트라)에 남겼다.

30)담윤(曇潤)법사
담윤법사는 낙양(洛陽:河南省 洛陽) 사람이다.
그는 주술에 뛰어났으며, 불교의 이치를 배우고 율장을 탐구하고 의술을 습득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매우 주도(周到)하였다.
담윤은 양자강(揚子江)가로 갔다가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어 점차 남쪽으로 나아가 교지(交趾)에 이르렀다. 수년 간 이 곳에 머물며, 승려든 속인이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배를 타고 남쪽으로 올라가 서인도로 가려고 하였으나 가릉국(揀陵國:자바) 북쪽의 발분국(渤盆國:보루네오)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나이는 30세였다.

31) 의휘논사(義輝論師)
의휘논사는 낙양(陽陽) 사람이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으며, 이해가 빠르고 생각이 깊었던 그는 학문을 두루 닦고자 마음먹고 진실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섭대승론(攝大乘論)』과 『구사론(俱舍論)』 등을 듣고,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 논의 뜻에 같고 다름이 있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에 범본(梵本)을 읽고 스스로 부처님 말씀을 접하려는 생각을 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렵지 않게 중천축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싹이 열매를 맺기도 전에 가을이 먼저 와서 그 장대한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랑가술국(郞迦戌國:파타니)에 이르러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0여 세였다.

32)대당(大唐)의 세 승려
그리고 또 대당의 세 승려가 있었는데, 그들은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따라 길을 나서서 오장나국(烏長那國)68)에 이르렀다. 전해 듣기로는 불정골처(佛頂骨處)를 예배하였다 한다. 지금 그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장나국 승려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이상 40명이다.

33)혜륜(慧輪)법사
혜륜법사는 신라(新羅) 사람이다. 범명(梵名)은 반야발마(般若跋摩, Pra- jnāvarma)이다.[당나라말로는 혜갑(慧甲)이라고 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출가하면서부터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할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민월(閩越:福建城) 땅에 상륙하여 걸어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그 후 칙명을 받고 현조법사(玄照法師)의 시자(侍者)가 되어 그를 따라 인도로 가게 되었다. 인도에 가서는 두루 성스러운 유적에 참배하고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의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을 살았다.
근래는 동쪽으로 가서 북방의 도화라국(覩貨羅國) 승려의 절에 머물고 있다. 이 절은 원래 도화라국 사람들이 자국(自國)의 승려들을 위하여 세운 절이다. 이 절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자산이 풍족하여 공양하거나 음식을 차리는 데 더할 나위없이 풍요로웠다. 절 이름은 건타라산다(健陀羅山茶)였고, 혜륜은 이 절에 거주하면서 범어를 잘익혀 『구사론(俱舍論)』을 깊이 배웠다. 의정이 그 절을 찾았을 때에도 그 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북방의 승려로서 이 절에 머무는 사람은 모두 주인 대접을 받았다.

여러 나라의 사찰
중인도 대각사(大覺寺) 서쪽에 가필시국(迦畢試國)의 사찰이 있다. 이 절 역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많은 고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소승불교를 수학하고 있었다. 북방에서 승려들이 찾아오면 또한 이 절에서 머물렀다. 절 이름은 구나절리다(窶拏折里多, Gunacarita)[당나라말로는 덕행(德行)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대각사에서 동북쪽으로 두 역(驛) 거리에 굴록가(屈錄迦)69)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남인도의 굴록가국 왕이 예전에 지은 절이다. 절은 비록 가난하지만 계행(戒行)은 맑고 엄격하게 지켰다. 근래에는 일군왕(日軍王)70)이 옛 절 옆에 또 하나의 절을 지었는데, 이제야 새로이 완성되었다. 남인도에서 승려들이 오면 대부분 이 절에서 머물렀다.
이와 같이 여러 나라에서 찾아오는 승려들을 위하여 저마다 절들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법을 본국에 유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찾아오는 승려들만은 머물 절이 한 곳도 없어 인도에 왕래하던 승려들은 갖은 고생뿐이었다.
나란타사에서 동쪽으로 40역(驛)쯤 떨어진 곳으로 강가하(弶伽河:갠지스강)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밀률가실타발나사(蜜栗伽悉他鉢娜寺, Mrgasthāvana)[당나라말로는 녹원사(鹿園寺)라고 한다.]에 이른다. 이 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옛 절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단지 벽돌[塼]로 된 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은 지나사(支那寺)라 하는데, 옛 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옛날에 실리급다대왕(室利?多大王, Srigupta)71)이 지나국(支那國) 승려들을 위하여 세웠던 절이라 한다.[지나(支那)는 즉 중국의 광주(廣州:지금의 광동(廣東)이다. 마하지나(莫揀支那)는 즉 중국의 경사(京師:서울)이다. 또 제바불저라(提婆弗咀羅:Devaputra)라고도 하는데 당(唐)나라 말로 천자(天子)라고 한다.]
당시에 당나라 승려 20명쯤 있었다. 그들은 촉천(蜀川)에서 장가(牂★:牂牁, 貴州省夜郞)를 거쳐서[촉천(蜀川)은 이 절에서 500여 역(驛) 거리에 있다.] 마하보리(莫揀菩提:대각사)에 가서 예배하였다. 왕이 이 광경을 보고 깊이 공경하게 되어 드디어 이 땅을 희사하여 승려들이 머물러 쉴 수 있게 하고, 대촌(大村) 24곳을 봉(封)으로 주었다.
그 뒤 당나라 승려들이 죽고 난 후 촌들을 거두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겼다.
현재는 세 곳의 촌이 남아 있는데, 녹원사(鹿園寺) 소유로 되어 있다. 지나사가 세워진 햇수를 헤아려 본다면 500여 년은 된 것 같다. 오늘날 이 지역은 동인도 왕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 왕의 이름은 제바발마(提婆跋摩, Devavarman)라고 하는데, 언제나 말하기를 “만약 대당(大唐) 천자(天子)의 땅에서 몇 사람의 승려라도 이 곳을 찾아온다면, 내가 다시 이 절을 일으켜 그 촌봉(村封)을 되돌려 주어 중단되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비록 까치의 집이 다른 새의 집으로 바뀐다72) 할지라도 복을 누릴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진실로 제도하고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을 품은 승려라면, 그 뜻을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불법이 널리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니 실로 소홀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금강좌(金剛座) 북쪽에 있는 대각사(大覺寺)는 승가라국(僧揀羅國:스리랑카) 왕이 지은 절이다. 사자주(師子洲:스리랑카)의 승려들은 옛부터 이 곳에 거주하였다.
대각사의 동북쪽으로 7역(驛) 거리를 가면 나란타사(那?陀寺)에 이르게 된다. 이 절은 옛 (굽타 왕조의) 왕이었던 실리삭갈라질저(室利鑠羯羅昳底, Srisa-kraditya)73)가 북천축의 비구(比丘) 갈라사반사(曷羅社槃社, Grantha-vatsa)74)를 위하여 세웠던 것이다.
이 절은 처음에는 그 터가 겨우 사방이 도(堵)75)에 불과했으나, 그 뒤 왕의 자손들이 이어서 절을 확장하였으며, 마침내 절의 규모는굉장히 커져서 인도 전역에서도 이보다 큰 절은 없었다. 그 규모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서 단지 그 구역만을 대략 기술하고자 한다.
절의 형태는 직사각형이며, 지붕은 성(城)76)과 같이 네 모서리의 처마[簷]가 직선으로 되었으며, 건물 둘레는 긴 회랑(回廊)으로 이어져 있다. 방들은 모두 벽돌로 되었으며, 거듭 겹쳐 3층으로 올렸고, 각 층의 높이는 1장(장) 조금 더 되었다. 대들보[樑] 위에 판자를 가로로 깔았으며, 서까래[椽]를 쓰지 않고 벽돌을 평행으로 늘어 놓아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절은 모두 일직선으로 되어 마음대로 돌아 자기 방으로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승방의 뒷벽은 바깥으로 면하고 있고 (정원에는) 벽돌을 쌓아올려 높이가 서너 장(장)이나 되었는데, 그 위에 등신대(等身大)의 사람 머리를 만들어 얹었다.
승방은 (외벽의 처마가 짧아서) 햇빛이 바로 들어온다. 각 방의 넓이는 사방 1장(장)이다. 방의 뒷면은 창이 설치되었으며, 그 창문은 처마와 접하고 있다. 방의 입구는 제법 높으며, 열린 채로의 문이 달려 출입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 모든 방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발[■]을 걸지 못하게 하였다.
방 밖에 나가서 보면 사면에서 서로가 모두 살필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어찌 사사로운 행동이 허용되겠는가? 한쪽 모서리에 가교[閣]를 놓아서 절 위를 오고 갈 수 있게 하였고, 네 모퉁이에는 각기 벽돌로 된 당(堂)이 있는데, 이 곳에는 장로(長老) 대덕(大德) 스님이 거주하고 있다.
절 (입구의) 문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위에 날아갈 듯한 누각은 하늘을 찌를듯이 걸려 있고, 기묘한 형태를 새겨 조각 솜씨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 문은 그대로 방과 서로 이어져 있으며, 원래부터 따로 만들지 않았다. 방 입구에서 2보(步)쯤 앞으로 나아가면 가지런히 네 기둥이 있다. 문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장식된 도리[架]는 매우 견고하다. 식사 때가 되어 이 문을 나갈 때면 언제나 이중으로 자물쇠를 건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사사로운 행동을 막기 위해서이다.
절 안의 면적은 사방 30보(步) 정도이며, 벽돌로 포장되어 있다. 좁은 곳도 17보 혹은 5보는 된다. 대체로 지붕 위나 처마 앞이나 방 안의 바닥은 모두 대추 크기의 벽돌 조각과 점토(粘土)를 혼합하여 깔고, 절구 공이[杵]로 두들겨서 전면을 평평하게다진다. 그 위에 석회(石灰)에 삼[麻] 껍질과 기름 및 삼 찌꺼기와 삶은 껍질을 섞어 며칠 동안 물에 적셔 두었다가 이것을 깔아 놓은 벽돌 위에 바르고 푸른 풀로 덮는다. 수삼일이 지나서 이것이 마르려고 하는 것을 보아 다시 활석(滑石)으로 간 다음 말끔히 씻어낸다. 그리고 붉은 흙의 즙이나 붉은 물감을 바르고 그 뒤에 기름을 입히면 거울같이 맑고 선명하게 된다. 이 절의 당전(堂殿)과 계단은 전부 이와 같이 되어 있다. 한번 이렇게 만들어진 후 사람들이 마구 밟고 지나다녔지만 10~20년이 경과하여도 부서지지 않았고, 석회의 수분(水分)이 없어지거나 (표면이) 곧 벗겨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만든 절이 8개소 있으며, 어느 것이든 바닥 위가 평평하고 규모는 서로 비슷하다.
절의 동면(東面)에는 1~3개소의 방이 있는데, 불타의 존상(尊像)이 모셔져 있다. 혹은 이 면(面)보다 다소 앞으로 내서 별도로 대관(臺觀)을 마련하여 불전(佛殿)으로 삼고 있다.
절의 서면(西面) 대원(大院) 밖에는 대솔도파(大窣堵波:Stupa)[옛날에 탑(塔)이라고 한 것은 잘못 줄인 말이다.] 및 제저(制底)77)[옛날에 지제(支提)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가 줄지어 있는데, 그 수는 100을 넘는다. 성스러운 유적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그것을 일일이 기술할 수가 없을 정도이며, 금과 보배로 빛나게 장식한 것은 참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이다.
절 안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규칙과 출납(出納) 일은 『중방록(中方錄)』 및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자세히 기술하였다.78)
절 안에서는 제일 장로(長老)인 상좌승(上座僧)이 존주(尊主)가 되는데, 그 덕행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모든 문의 자물쇠를 매일 밤 잠그며, 열쇠는 그 상좌승에게 건네 준다. 다시 따로 사주(寺主)나 유나(維那)는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절을 지은 사람은 사주(寺主)라 이름하였으며, 범어로는 비하라사미(毘揀羅莎弭, Vihārasvāmin)라고 한다.
일직(日直)의 당번(當番)이 되어 절 문을 지키는 사람이나 승려들을 화합하기 위해 일을 보고하는 사람을 비하라파라(毘揀羅波羅, Vihārapāla)라 이름하였다.[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호사(護寺)라 한다.]
또 건치(健稚)를 쳐서 울리고, 식사를 감독하는 사람을 갈마타나(羯磨陀那:Karmadāna)라 이름하였는데, 중국어로 번역하면 수사(授事)라 하며, 이를 유나(維那)라 한 것은 간략하게 줄인 말이다.
승려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모든 승려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사건을 규명하게 되는데, 이 때 호사(護寺)에게 각 승려를 차례로 돌게 하여 자백하게 한다.
자백한 승려는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 합장하고서 그 일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회초리로 쳐서 자백을 받는 일은 없다. 만약 용서하지 않는 승려가 있으면 이치로 그를 타이르며 강제로 압력을 가하여 설복하지는 않는다.
창고를 지키거나 장원(莊園)을 담당한 무리들 몇 사람이 일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책임자를 보내 합장하여 자백하도록 한다. 만약 다른 사람과 함께 창고의 물품을 사용하였다면, 다만 주모자 한 사람만을 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백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써버렸으면, 아무리 적은 좁쌀 반 되[半升]였을지라도 즉시 모두 배척을 받고 쫓겨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세도를 부려 절의 물품을 혼자서만 사용하거나 기강과 직무를 독선적으로 처리하고도 대중에게 고백하지 않는 사람을 구라발저(俱羅鉢底, Kulapati)79) 라고 하는데, [중국말로 번역하여 가주(家主)라고 한다.] 이는 곧 불법의 큰 병[■]으로 사람과 신(神)이 모두 미워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절에 도움이 되었던 자라 할지라도 끝내는 죄를 짓는 것이 더욱 깊어질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이와 같은 죄는 범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인도에는 외도(外道)들이 예전에는 96부(部)가 있었으나, 지금은 단지 10여 부에 불과하다. 만약 재회(齋會)가 있어 모이게 되면 각자가 스스로 한 곳에 모여서 모두 승니(僧尼)와 앞뒤를 다투는 일이 없다. 이미 그 믿는 법의 교리가 다르면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각자의 종지(宗旨)를 배울 뿐이며, 같이 앉아서 의견 교류는 하지 않는다.
나란타사의 규칙은 극히 엄격했다. 보름마다 전사(典事)ㆍ좌사(佐史)80)로 하여금 승방을 돌아다니며 규칙을 읽게 하였다.
여러 승려들의 이름은 왕적(王籍)에서 관여하지 않는다.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면 승려들 스스로 벌을 준다. 이러한 까닭에 승려들은 모두 서로 존경하고 어려워하며, 그 절에서 수용하는 물자가 모자라서 핍박당하더라도 승려들의 마음 씀씀이는 더욱 여유롭다.
회상해 보면 장안(長安)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린 기원정사(■園精舍)의 모양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듣고 본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간략하게 그 개요를 적어 보았다.
또 인도에서는 이와 같은 큰 절에는 국왕이 모두 다 물시계[漏水]를 설치하게 하였기 때문에 밤과 낮의 시간과 계절을 헤아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율장에 의하면 밤을 셋으로 나누어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는 좌선(座禪)과 송경(誦經)을 하게 하였고, 그 중간 시간에는 마음대로 쉬게 하였다. 이 물시계의 이용 방법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기술한 그대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금 절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절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 부디 눈으로 보아서 막히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만약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위의 모양에 의해 절을 만든다면 인도의 왕사성(王舍城)이 중국의 이치로 이루어져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절의 모습을 그려둔다.]

온갖 아름다움을 늘여 놓았어도
빼어난 인재는 이미 옛사람이 되었네.
생사의 갈림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상심하지 않으리.[절의 모습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실리나란타마하비하라(室利那爛陀莫揀毘揀羅)’의 모습이다. 중국말로 번역하면 길상신룡(吉祥神龍)의 대주처(大住處)라 한다.
인도에 있어서 대개 국왕 및 고관(高官)들은 대사찰의 이름을 부를 때는 모두 먼저 실리(室利)라는 말을 붙이는데, 그 뜻은 길상(吉祥)ㆍ존귀(尊貴)라는 말이다. 나란타(那爛陀)는 용(龍)의 이름인데, 이 부근에 나가란타(那伽?陀)라는 용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비하라(毘揀羅)는 머무는 곳[住處]이라는 뜻인데, 절[寺]이라고 하면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이 절 가운데 한 절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다른 일곱 절을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절앞의 길은 평탄하고 곧아서 통행인은 이 곳을 왕래했는데, 절의 전체를 보려면 남쪽에서 보아야 한다. 서쪽 문을 나와야만 비로소 절 전체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문의 남쪽 두둑 길로 10보(步)쯤 되는 곳에 높이가 100척(尺) 가량 되는 솔도파(窣堵波)가 있다. 이 곳은 세존께서 그 옛날 여름 세 달 동안 안거(安居)했던 곳으로, 범명(梵名)은 모라건타구지(慕攞健陀俱胝, Mūlagandhakuti)라고 하며, 당나라 말로 번역하여 근본향전(根本香殿)이라고 한다.
문의 북쪽 두덕 길로 50보쯤 되는 곳에 또 대솔도파가 있는데, 남쪽의 것이 이것보다 높다. 이 탑은 굽타왕조의 유일왕(幼日王)이 만든 것이다. 모두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그 장식은 정교하고, 기단부의 금상(金■)과 보지(寶地)는 좀처럼 보기 드문 공양법이다. 그 가운데에는 여래의 전법륜상(轉法輪像)을 봉안하고 있다.
이 솔도파 서남쪽에는 높이 1장(장) 남짓의 작은 제저(制底)가 있다. 이 곳은 한 바라문(婆羅門)이 참새를 잡아서 불타께 청문(請問)했던 곳으로 당나라에서 말하는 작리부도(雀離浮圖)가 바로 이것이다.
근본향전(根本香殿) 서쪽에는 불치목(佛齒木)이 있는데, 이 나무는 버드나무[楊柳]가아니다.
그 다음 서쪽 두덕에는 계단(戒壇)81)이 있다. 이것은 사방이 당(唐)의 대척(大尺)으로 1장(장) 남짓한 평지 위에 세워졌고, 그 주위에는 높이 2척(尺)쯤 되는 벽돌로 단(壇)을 둘러 쌓았으며, 단 안쪽에는 높이 5촌(寸) 가량 되는 좌기(坐基)가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작은 제저(制底)가 있다.
계단의 동쪽 근본향전의 모퉁이에 부처님께서 경행(經行)82) 하시던 터가 있다. 벽돌을 포개어 둘러 쌓았으며, 경행하셨던 길의 폭은 2주(■) 가량 되고 길이는 14~15주 되며, 벽돌로 된 담장의 높이는 2주 남짓 된다. 그 위에는 석회(石灰)를 버무려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만들었으며, 높이가 2촌쯤 되고 너비가 1척 가량 되는 14~15개의 부처님 발자국이 드러나 있다.
이 절에서 남쪽으로 보면 왕사성(王舍城)이 있는데 겨우 30리 떨어져 있으며, 영취산(靈鷲山)과 죽림정사(竹林精舍)는 모두 그 성 옆에 있다. 서남쪽은 대각사를 향하고, 정남쪽으로는 존족산(尊足山)이 있는데 모두 7역(驛) 거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는 벽사리(■舍里:바이샬리)를 향하고 있는데 25역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20여 역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녹야원(鹿野苑)이 바라보이고, 동쪽으로는 60~70역쯤에 위치한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을 향하고 있다. 이 곳은 바로 항구로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나란타사 안에는 3,500명의 승려들이 있었으며, 절에 속한 마을과 장원이 201개소 있었다. 모두 역대의 국왕이 그 인호(人戶)를 바쳐 오래도록 공양에 충당하였던 것이다.[역(驛)이란 곧 1유선나(踰繕那) 거리에 해당한다.]

천축의 나란타사는
그 땅이 하늘 땅과 맞붙어
말타고 달려도 길은 멀기만 하고
길에는 오는 사람 끊겼구나.
지금에 전하는 이야기들
올바른 것 찾아보기 힘드네.
명장(名匠) 청하여 그 모형 조성하기를
치수 어긋나지 않게 만들어
옛 그대로 완성했다면
너무나 비슷해서 보는 이 새삼 놀라고
보는 사람 깊이 생각에 잠기어
부처가 여기에 계시는 듯 정신 맑게 되리라.
032_0732_b_01L大唐西域求法高僧傳卷上 幷序沙門義淨從西國還在南海室利佛逝撰寄歸幷那爛陀寺圖觀夫自古神州之地輕生殉法之賓顯法師則創闢荒途奘法師乃中開王路其閒或西越紫塞而孤征或南渡滄溟以單逝莫不咸思聖迹罄五體而歸禮俱懷旋踵報四恩以流望然而勝途多難寶處彌長苗秀盈十而蓋多結實罕一而全少寔由茫茫象磧長川吐赫日之光浩浩鯨波壑起淊天之浪獨步鐵門之外亘萬嶺而投身孤標銅柱之前跨千江而遣命跛南國有千江口也或亡飡幾日輟飮數晨可謂思慮銷精神憂勞排正色致使去者數盈半百留者僅有幾人設令得到西國者以大唐無寺飄寄棲然爲客遑遑停託無所遂使流離蓬轉牢居一處身旣不安道寧隆矣嗚呼實可嘉其美誠冀傳芳於來葉粗據聞見撰題行狀云爾其中次第多以去時年代近遠存亡而比先後太州玄照法師  齊州道希法師齊州師鞭法師  新羅阿離耶跋摩法師新羅慧業法師  新羅求本法師新羅玄太法師  新羅玄恪法師新羅復有法師二人 睹貨羅佛陀跋摩師幷州道方法師  幷州道生法師幷州常愍禪師  常愍師弟子一人京師末底僧訶師  京師玄會法師質多跋摩師吐蕃公主嬭母息二人隆法師益州明遠法師  益州義朗律師朗律師弟子一人  益州智岸法師益州會寧律師  交州運期法師交州木叉提婆師  交州窺沖法師交州慧琰法師  信胄法師愛州智行法師  愛州大乘燈禪師唐國僧伽跋摩師  高昌彼岸智岸二人洛陽曇潤法師  洛陽義輝論師又大唐三人   新羅慧輪法師荊州道琳法師  荊州曇光法師又大唐一人   荊州慧命禪師潤州玄逵律師晉州善行法師  襄陽靈運法師澧州僧哲禪師哲禪師弟子一人  洛陽智弘律師荊州無行禪師  荊州法振禪師荊州乘悟禪師  梁州乘如律師澧州大津法師右摠五十六人先多零落淨來有無行師道琳師慧輪師哲師智弘師五人見在計當垂拱元年與無行禪師執別西不委今者何處存亡耳沙門玄照法師者太州仙掌人也名般迦舍末底唐云照慧乃祖乃父冠冕相承而摠髻之秋抽簪出俗成人之思禮聖蹤遂適京師尋聽經論以貞觀年中乃於大興善寺玄證師初學梵語於是仗錫西邁挂想祇背金府而出流沙踐鐵門而登雪漱香池以結念畢契四弘陟蔥阜而翹心誓度三有途經速利過睹貨羅遠跨胡疆到吐蕃國蒙文成公主往北天漸向闍闌陀國未至之閒途險隘爲賊見拘旣而商旅計窮告無所遂乃援神寫契仗 聖明衷夢而感徵覺見群賊皆睡私引出圍遂便免難住闍闌陁國經于四載國王欽重留之供養學經律習梵文旣得少通漸次南上到莫訶菩提經四夏自恨生不遇聖幸睹遺蹤慈氏所制之眞容著精誠而無替以翹敬之餘沈情俱舍旣解對法想律儀兩教斯明後之那爛陁寺住三年就勝光法師學中百等論就寶師子大德受瑜伽十七地禪門定瀲亟睹關涯旣盡宏綱遂往弶巨亮反伽河北受國王苫部供養住信者等復歷三年後因唐使王玄策歸鄕表奏言其實德遂蒙降重詣西天追玄照入京路次泥波羅國蒙王發遣送至吐蕃重見文成公主深致禮遇資給歸唐於是巡涉西蕃而至東夏以九月而辭苫部月便到洛陽五月之間途經萬里于時麟德年中駕幸東洛奉謁闕庭還蒙勅旨令往羯濕彌囉國取長年婆羅門盧迦溢多旣與洛陽諸德相見論佛法綱紀敬愛寺導律師觀法師等請譯薩婆多部律攝旣而勅令促去不遂本懷所將梵本悉留京下於是重涉流沙還經磧石崎嶇棧道之側曳半影而斜通搖泊繩橋之下沒全軀以傍渡遭吐蕃賊脫首得全遇兇奴寇僅存餘命行至北印度界見唐使人#引盧迦溢多於路相遇盧迦溢多復令玄照及使傔數人向西印度羅荼國取長年藥路過縛渴羅到納婆毘訶羅唐云新寺睹如來澡盥及諸聖迹漸至迦畢試國禮如來頂骨香花具取其印文觀來生善惡復過信度方達羅荼矣蒙王禮敬安居四載轉歷南天將諸雜藥望歸東夏到金剛座旋之那爛陀寺淨與相見盡平生之志願契摠會於龍花但以泥波羅道吐蕃擁塞不通迦畢試途多氏捉而難度遂且棲志鷲峯沈情竹苑雖每有傳燈之望而未諧落葉之心嗟乎苦行標誠利生不遂思攀雲駕墜翼中天在中印度菴摩羅跛國疾而卒春秋六十餘矣言多氏者卽大食國也傷曰卓矣壯志穎秀生田頻經細柳幾步祁連祥河濯流竹苑搖芉翹心念念渴想玄玄專希演法志託提生嗚呼不遂愴矣無成兩河沈骨八水揚名善乎守死哲人利貞兩河卽在西河八水乃屬京都道希法師者齊州歷城人也梵名室利提婆唐云吉祥天也乃門傳禮義家襲搢紳幼漸玄門少懷貞操涉流沙之廣蕩觀化中天陟雪嶺之嶔岑輕生殉法行至吐蕃中途危厄恐戒撿難護便蹔捨行至西方更復重受周遊諸遂達莫訶菩提翹仰聖蹤經乎數旣住那爛陁亦在俱尸國蒙菴摩羅跛國王甚相敬待在那爛陀寺學大乘住輸婆伴娜在涅槃處寺名也專功律復習聲明頗盡綱目有文情善草在大覺寺造唐碑一首所將唐國新舊經論四百餘卷竝在那爛陁矣淨在西國未及相見住菴摩羅跛國遭疾而終春秋五十餘矣後因巡禮見希公住房傷其不幸聊題一絕七言苦忘勞獨進影四恩存念契流通何未盡傳燈志溘然於此遇途窮師鞭法師者齊州人也善呪禁閑梵與玄照師從北天向西印度到菴摩羅割跛城爲國王所敬居王寺道希法師相見申鄕國之好同居一遇疾而終年三十五矣阿離耶跋摩者新羅人也以貞觀年中出長安之廣脅王城小名追求正教親禮聖蹤住那爛陀寺多閑律論抄寫衆痛矣歸心所期不契出雞貴之東沒龍泉之西裔卽於此寺無常七十餘矣雞貴者梵云矩矩咤㗨說羅矩矩咤是雞㗨說羅是貴卽高麗國也相傳云彼國敬雞神而取尊故戴翎羽而表飾矣那爛陀有池名曰龍泉西方喚高麗爲矩矩咤㗨說羅也慧業法師者新羅人也在貞觀年中往遊西域住菩提寺觀禮聖蹤於那爛陁久而聽讀淨因撿唐本忽見梁論下記云在佛齒木樹下新羅僧慧業寫記訪問寺僧云終於此年將六十餘矣所寫梵本竝在那爛陀寺玄太法師者新羅人也梵名薩婆愼若提婆唐云一切智天永徽年內取吐蕃道經泥波羅到中印度禮菩提樹詳撿經旋踵東土行至土谷渾逢道希師覆相引致還向大覺寺後歸唐國知所終矣玄恪法師者新羅人也與玄照法師貞觀年中相隨而至大覺旣伸禮敬遇疾而亡年過不惑之期耳復有新羅僧二人莫知其諱發自長遠之南海汎舶至室利佛逝國西婆魯師國遇疾俱亡佛陀達摩者卽睹貨速利國人也形摸足氣力習小教常乞食少因興遂屆神州云於益府出家性好遊九州之地無不履焉後遂西遄觀聖迹淨於那爛陀見矣後乃轉向北天年五十許右一十人道方法師者幷州人也出沙磧到泥波羅至大覺寺住得爲主人經數年後還向泥波羅于今現在旣虧戒撿不習經書年將老矣道生法師者幷州人也梵名栴達羅提婆唐云月天以貞觀末年從吐蕃路往遊中國到菩提寺禮制底訖在那爛陀學爲童子王深所禮遇復向此寺東行十二驛有王寺全是小乘於其寺內停住多載學小乘三藏精順正多齎經像言歸本國行至泥波羅遘疾而卒可在知命之年矣常慜禪師者幷州人也自落髮投簪披緇釋素精勤匪懈念誦無歇常發大誓願生極樂所作淨業稱念佛名福基旣廣數難詳悉後遊京洛專崇斯業幽誠冥兆有所感徵遂願寫般若經滿於萬卷冀得遠詣西方禮如來所行聖迹以此勝福迴向願生詣闕上書請於諸州教化抄寫般若且心所至也天必從之乃蒙授墨勅南遊江表敬寫般若以報天澤要心旣滿遂至海濱附舶南征往訶陵國從此附舶往末羅瑜國復從此欲詣中天然所附商舶載物旣重解纜未遠起忽滄波不經半日遂便沈沒當沒之時商人爭上小舶互相戰鬪其舶主旣有信心高聲唱言來上舶常慜曰可載餘人我不去也所以然者若輕生爲物順菩提心己濟人斯大士行於是合掌西方彌陁佛念念之頃舶沈身沒聲盡而春秋五十餘矣有弟子一人不知何許人也號咷悲亦念西方與之俱沒其得濟之人具陳斯事耳傷曰 悼矣偉人物流身明同水鏡貴等和珍涅而不磨而不磷投軀慧巘養智芳津自國而弘自業適他土而作他因將沈之險難決於己而亡親在物慜子其寡鄰穢體散鯨波以取滅願詣安養而流神道乎不昧德也寧布慈光之赫赫竟塵劫而新新末底僧訶者唐云師子慧京兆人也俗姓皇莫知本諱與師鞭同遊俱到中土住信者寺少閑梵語未詳經論思還故里路過泥波羅國遇患身死年四十玄會法師者京師人也云是安將軍之息也從北印度入羯濕彌羅國爲國王賞職乘王象奏王樂日日向龍池山寺供養寺是五百羅漢受供之處卽尊者阿難陀室灑末田地所化龍王之地也室灑譯爲所教舊云弟子者非也復化羯濕彌羅王大放恩赦國內有死囚千餘人勸王釋放出入王宅旣漸年載後因失意遂乃南遊至大覺寺禮菩提樹睹木眞池登鷲峯山陟尊足嶺識聰睿多繕工伎雖復經過未幾梵韻淸徹少儁經教思反故居到泥波羅國不幸而卒春秋僅過而立矣泥波羅旣有毒藥所以到彼多亡也復有一人與北道使人相逐至縛渴羅國於新寺小乘師處出家名質多跋摩後將受具而不食三淨其師曰如來大師親開五正旣其無罪爾何不食對曰諸大乘經具有全制是所舊習性不能改師曰我依三藏律有成科汝之引文非吾所學若懷別見我非汝師遂强令進乃掩泣而食爲受具少閑梵語覆取北路而歸知所至傳聞於北天之僧矣復有二人在泥波羅國是吐蕃公主嬭母之息也初竝出家後一歸俗住大王寺善梵語幷梵書年三十五十五矣隆法師者不知何所人也以貞觀年從北道而出取北印度欲觀化中誦得梵本法花經到健陁羅國疾而亡北方僧來傳說如此右二十人明遠法師者益州淸城人也梵名振多提婆唐云思天幼履法訓長而彌脩容儀雅麗庠序淸遒善中議莊周早遊七澤之閒後歷三吳之表重學經論更習定門於是棲隱廬峯經于夏日旣慨聖教陵遲遂乃振錫南遊屆於交阯鼓舶鯨波到訶陵國次至師子洲爲君王禮敬乃潛形閣內取佛牙望歸本國以興供養旣得入翻被奪將不遂所懷頗見陵辱南印度傳聞師子洲人云往大覺中方寂無消息應是在路而終莫委年幾其師子洲防守佛牙異常牢固置高樓上幾閉重關鎖鑰泥封五官共印若開一戶則響徹城郭每日供養香花遍覆至心祈請則牙出花上或現異光衆皆共睹傳云此洲若失佛牙竝被羅剎之所呑食爲防此患非常守護亦有傳云當向支那矣乃聖力遐被有感便通豈由人事申非分耳義朗律師者益州成都人也善閑律兼解瑜伽發自長安彌歷江漢同州僧智岸幷弟一人名義玄年始弱冠知欽正理頗閑內典尤善文筆思瞻聖迹遂與弟俱遊秀季良昆相攜帶鶺鴒存念魚水敦懷旣至烏同附商舶挂百丈陵萬波越舸扶綴纜郞迦戍蒙郞迦戍#國王待以上賓之禮智岸遇疾於此而亡朗公旣懷死別之恨與弟附舶向師子洲披求異典頂禮佛牙漸之西國傳聞如此而今不知的在何所師子洲旣不見中印度復不聞多是魄歸異代年四十餘耳會寧律師益州成都人也稟志操行意存弘益少而聰慧投迹法場敬勝若髻珠棄榮華如脫屣薄善經論尤精律典志存演法結念西方爰以麟德年中仗錫南海汎舶至訶陵洲停住三載遂共訶陵國多聞僧若那跋陁羅於阿笈摩經內譯出如來涅槃焚身之事斯與大乘涅槃頗不相然大乘涅槃西國淨觀見目云大數有二十五千頌翻譯可成六十餘卷撿其全部竟而不獲但得初大衆問品一夾有四千餘頌會寧旣譯得阿笈摩本遂令小僧運期奉表齎還至交府馳驛京兆奏上闕庭使未聞流布東夏運期從京還達交告諸道俗蒙贈小絹數百疋重諂訶陵報德智賢若那跋達羅也與會寧相見於是會寧方適西國比於所在每察風聞尋聽五天絕無蹤緖准斯理也卽其人已亡 傷曰嗟矣會寧爲法孤征纔翻二軸望天庭終期寶渚㩲居化城身雖沒而道著時縱遠而遺名將菩薩之先共後念以揚聲春秋可三十四五矣運期師者交州人也與曇潤同遊智賢受具旋迴南海十有餘年善崑崙音頗知梵語後便歸俗住室利佛逝國于今現在旣而往復宏波傳經帝里布未曾教斯人之力年可四十矣木叉提婆者交州人也唐云解脫天也不閑本汎舶南溟經遊諸國到大覺寺禮聖蹤於此而殞年可二十四五耳窺沖法師者交州人卽明遠室灑也梵名質呾囉提婆與明遠同舶而汎南海到師子洲向西印度見玄照師共詣中土其人稟性聰睿善誦梵經所在至處恒編演唱之首禮菩提樹到王舍城遘疾竹園淹留而卒年三十許慧琰師者交州人也卽行公之室灑師到僧訶羅國遂停彼國莫辯存亡信胄法師不知何許人也梵名設唎陀跋摩唐云信胄取北道而到西國禮謁旣住信者寺於寺上層造一塼閣施上臥具永貽供養遇疾數日餘命輟然忽於夜中云有菩薩授手迎接端居掌太息而終年三十五右三十人智行法師者愛州人也梵名般若提唐云慧天汎南海詣西天遍禮尊儀至弶伽河北居信者寺而卒年五十餘矣大乘燈禪師者愛州人也梵名莫呵夜那鉢地已波唐云大乘燈也幼隨父母汎舶往社和羅鉢底國方始出家後隨唐使郯緖相逐入京於慈恩寺三藏法師玄奘處進受具戒居京數載頗覽經書而思禮聖蹤情契西極體蘊忠恕性合廉隅戒巘存懷禪枝叶慮以爲溺有者假緣緣非則墜有離生者託助#是則乖生乃畢志王城敦心竹冀摧八難終求四輪遂持佛像經論旣越南溟到師子國觀禮佛牙備盡靈異過南印度復屆東天往耽摩立底國旣入江口遭賊破舶唯身得存淹停斯國十有二歲頗閑梵語誦緣生等經兼脩福業因遇商侶淨相隨詣中印度先到那爛陀次向金剛座旋過薜舍離後到俱尸國無行禪師同遊此地燈師每歎曰意弘法重之東夏寧知志不成遂奄爾衰年今日雖不契懷來生願畢斯志然常爲睹史多天業冀會慈氏日畫龍花一兩枝用摽心至燈公因道行之次過道希師所住舊房當于時#其人已亡漢本尚存梵夾猶列之潛然流涕而歎昔在長安同遊法今於他國但遇空筵 傷曰嗟矣死王其力彌强傳燈之士奄爾云亡神州望斷聖境魂揚眷餘帳而流涕慨布素而情傷禪師在俱尸城般涅槃寺而歸寂滅于時年餘耳順矣僧伽跋摩者康國人也少出流沙步京輦稟素崇信戒行淸嚴檀捨是慈悲在念以顯慶年內勅與使人相隨禮覲西國到大覺寺於金剛座廣興廌設七日七夜然燈續明獻大法會又於菩提院內無憂樹下雕刻佛形及觀自在菩薩像興慶讚時人歎希後還唐國又奉勅令往交阯採藥于時交州時屬大人物飢餓於日日中營辦飮食濟孤苦悲心內結涕泣外流時人號爲常啼菩薩也纔染微疾奄爾而終春秋六十餘矣彼岸法師智岸法師竝是高昌人也少長京師傳燈在念旣而歸心勝理遂乃觀化中天與使人王玄廓相隨汎舶海中遇疾俱卒所將漢本瑜伽及餘經論咸在室利佛逝國矣曇潤法師洛陽人也善呪術學玄理探律典翫醫明善容儀極詳審振錫表拯物爲懷漸次南行達于交住經載稔緇素欽風汎舶南上期西度至訶陵北渤盆國遇疾而終年三十矣義輝論師洛陽人也受性聰敏理鉤深博學爲懷尋眞是務聽攝論俱等頗亦有功但以義有異同情生舛互而欲思觀梵本親聽微言遂指掌中天還望東夏惜哉苗而不實壯志先秋到郞迦戍國嬰疾而亡年十餘矣復有大唐三僧從北道到烏長那國傳聞向佛頂骨處禮拜今亦弗委存亡烏長僧至傳說之矣右四十人輪師者新羅人也梵名般若跋唐云慧甲自本國出家翹心聖迹汎舶而陵閩越涉步而屆長安奉 勅隨玄照師西行以充侍者旣之西國遍禮聖蹤居菴摩羅跛國在信者寺住經十載近住次東邊北方睹貨羅僧寺元是睹貨羅人爲本國僧所其寺巨富貲產豐饒供養飡設餘加也寺名健陀羅山荼慧輪住此旣善梵言薄閑俱舍來日尚在年向四十矣其北方僧來者皆住此寺爲主人耳大覺寺西有迦畢試國寺寺巨富多諸碩德普學小乘北方僧來亦住此寺名寠挐折里多唐云德行大覺東北兩驛許有寺名屈錄迦卽是南方屈錄迦國王昔所造也寺雖貧素而戒行淸嚴近者日軍王復於故寺側更造一寺今始新成南國僧來住於此諸方皆悉有寺所以本國流神州獨無一處致令往還艱耳那爛陁寺東四十驛許尋弶伽河而下至蜜栗伽悉他鉢娜寺唐云鹿園寺也此寺不遠有一故寺但有塼基厥號支那寺古老相傳云是昔室利笈多大王爲支那國僧所造支那卽廣州也莫訶支那卽京師也亦云提婆弗呾羅唐云天子也于時有唐僧二十許人從蜀川䍧牫道而出蜀川去此寺有五百餘驛向莫訶菩提禮拜王見敬重遂施此地以充停息給大村封二十四所於後唐亡沒村乃割屬餘人現有三村入鹿園寺矣准量支那寺至今可五餘年矣現今地屬東印度王其王名提婆跋摩每言曰若有大唐天子處數僧來者我爲重興此寺還其村封不絕也誠可歎曰雖有鵲巢之易而樂福者難逢必若心存濟益奏請弘此誠非小事也 金剛座大覺寺卽僧訶羅國王所造師子洲僧舊住於此大覺寺東北行七驛許至那爛寺乃是古王室利鑠羯羅昳底爲北天苾芻曷羅社槃所造此寺初基纔餘方堵其後代國王苗裔相承造製宏壯則贍部洲中當今無以加也軌摸不可具述但且略敍區寰耳然其寺形畟方如城四面直簷長廊遍帀皆是塼室重疊三層層高丈餘撗梁板闐本無椽#瓦用塼平覆寺背正隨意旋往其房後壁卽爲外面也壘塼峻峭高三四丈上作人頭高共人等其僧房也面有九焉一一房中可丈許後面通窗戶向簷矣其門高唯安一扇皆相瞻望不許安簾出外平觀四面皆睹互相撿察寧片私於一角頭作閣道還往寺上四各爲塼堂多聞大德而住於此門西向飛閣陵虛雕刻奇形妙盡工其門乃與房相連元不別作但前出兩步齊安四柱其門雖非過大乃裝架彌堅每至食時重關返閉是聖教意在防私寺內之地方三十步皆以塼砌小者或七步或五步耳凡所覆屋脊上簷前房內之地竝用塼屑如桃棗大和雜粘泥以杵平築用疆石灰雜以麻筋幷油及麻滓皮之屬浸漬多日泥於塼地之上以靑草經三數日看其欲乾重以滑石揩拭拂赤土汁或丹朱之類後以油塗鮮澄若鏡其堂殿階陛悉皆如一作已後縱人踐踏動經一二十曾不圯磔不同石灰水沾便脫斯等類乃有八寺上皆平通規矩相似於寺東面西取房或一或三用安尊像或可卽於此面前出多少別起臺觀爲佛殿矣此寺西南大院之外方列大窣睹波舊云塔者訛略及諸制底舊云支提者訛乃盈百聖迹相連不可稱記金寶瑩實成希有其閒僧徒綱軌出納之具如中方錄及寄歸傳所述寺內但以最老上座而爲尊主不論其德諸有門鑰每霄封印將付上座更無別置寺主維那但造寺之人名爲寺梵云毘訶羅莎弭若作番直典掌寺門及和僧白事者名毘訶羅波羅譯爲護寺若鳴健稚及監食者名爲羯磨陀那譯爲授事言維那者略也衆僧有事集衆平章令其護寺巡行告白一一人前皆須合各伸其事若一人不許則事不得全無衆前打搥秉白之法若見不以理喩之未有挾强便加壓伏守庫當莊之流雖三二人亦遣典庫家人合掌爲白若和方可費用誠無獨任之咎不白而獨用者下至半升之粟卽交被驅擯若一人稱豪獨用僧物處斷綱務不白大衆者名爲俱攞鉢底譯爲家主斯乃佛法之大疣神所共怨雖復於寺有益而終獲罪彌深智者必不爲也又諸外道先有九十六部今但十餘若有齋會聚各各自居一處竝與僧尼無競先旣其法別理不同行各習所宗無交雜此之寺制理極嚴峻每半月令典事佐史巡房讀制衆僧名字不貫王籍其有犯者衆自治罰爲此僧咸相敬懼其寺受用雖迮而益利彌寬曾憶在京見人畫出祇洹寺樣咸是憑虛爲廣異聞略陳梗槪云爾又五天之地但是大寺君王悉皆令置漏水爲此晝夜期候不難准如律夜分三分初後制令禪誦中閒隨意消息其漏水法廣如寄歸傳中所述雖復言陳寺樣終恐在事還迷爲此畫出其圖冀令目擊無滯如能奏請依樣造之卽王舍支那理成無別耳此下宜畫寺樣也 此是室利那爛陁莫訶毘訶羅樣唐譯云吉祥神龍大住處也西國凡喚君王#及大官屬幷大寺舍先云室利意取吉祥尊貴之義那爛陀乃是龍名近此有龍名那伽爛陁故以爲號毘訶羅是住處義比云寺不是正翻如觀一寺餘七同然上平直通人還往凡觀寺樣者須南面看之欲使西出其門方得直勢門南畔可二十步有窣睹波高百尺是世尊昔日夏三月安居處梵名慕攞健陁俱胝唐云根本香殿矣門北畔五十步許復有大窣睹波更高於是幼日王所造皆竝塼作裝飾精金牀寶地供養希有中有如來轉法輪像次此西南有小制底高一丈是婆羅門執雀請問處唐云雀離浮圖此卽是也根本殿西有佛齒木非是楊柳其次西畔有戒壇方可大尺一丈餘卽於平地周壘塼牆子高二尺許牆內坐基可高五寸中有小制底壇東殿角有佛經行之基塼爲之寬可二肘長十四五肘高可二肘餘上乃石灰塑作蓮花開勢可二寸闊一尺許有十四五表佛足此寺則南望王城纔三十里鷲峯竹苑皆在城傍西南向大覺正南尊足山竝可七驛北向薜舍離乃二十五驛西瞻鹿苑二十餘驛東向耽摩立底國有六七十驛卽是海口昇舶歸唐之處此寺內僧衆有三千五百屬寺村莊二百一所竝是積代君王給其人戶永充供養言驛者卽當一踰繕那也龍池龜洛地隔天津途遙去馬絕來人致令傳說罕得其眞摸形別匠軌製殊陳依俙畫古髣髴驚新觀者之虔想若佛在而翹神大唐西域求法高僧傳卷上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srivijana. 옛 중국 광동(廣東)에서 인도로 가던 해상 항로(航路)에 있던 항구들 가운데 한 곳이다.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잠비(Jambi)로서, 수마트라섬의 하리(Hari)강 어구에 위치해 있다.
  2. 2)당나라 의정이 함형(咸亨) 2년(671) 중국 광주(光州)에서 배로 출발하여 인도와 남해 여러 나라를 25년 동안 견문하고, 695년 귀국하여 그동안 보고 들은 것과 불법의 유통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파하비소(破夏非小), 대존지의(對尊之儀)로부터 방인획죄(傍人獲罪), 고덕불위(古德不爲)에 이르기까지 모두 4권 4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 『기귀전(寄歸傳)』으로 약칭한다.
  3. 3)중국 동진(東晋) 때의 승려. 동진 융안(隆安) 3년(399)에 뜻이 맞는 동료들과 장안(長安)을 떠나 타크라마칸 사막을 횡단하고 중국 승려로는 최초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북인도에 이르렀고, 다시 중인도에서사자국(師子國:스리랑카)을 거쳐 뱃길로 중국에 돌아왔다. 그동안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연구하였고, 『오분율(五分律)』ㆍ『장아함경(長阿含經)』 등 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서 역경에 종사하였다. 유명한 『불국기(佛國記)』를 지어 자신의 행적과 당시인도의 사정을 후대에 전하였다.
  4. 4)당나라 때 승려(622~664). 당시 불교의 교리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인도에 가서 그 의심을 해결하고자 정관(貞觀) 3년(629) 국법을 어기고 몰래 국경을 빠져나가 고창(高昌), 구자국(龜玆國) 등을 지나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 인도에 들어갔다. 고승들을 찾아 불교와 그밖의 여러 학문을 연마하고 두루 성적(聖跡)을 참배한 뒤 여러 나라를 거쳐 645년 장안에 돌아왔다. 많은 경전과 사리, 불상 등을 가져왔으며, 돌아온 이후 『대반야경(大般若經)』 등 71부 1,335권을 번역하여 중국 역경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인도 견문록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은 인도학 연구의 획기적인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5. 5)만리장성(萬里長城)의 다른 이름. 그곳의 흙이 자줏빛인 데서 온 말이다.
  6. 6)보통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를 말하며,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표시로 이러한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대고 절하는 것이다.
  7. 7)부모의 은혜, 국왕의 은혜, 중생의 은혜, 삼보(三寶)의 은혜를 이르는 것이 보통이며, 때로는 부모, 스승이나 선배, 국왕, 시주(施主)의 은혜를 이르기도 한다.
  8. 8)파밀고원에서 아랄해(Aral)로 흘러 들어가는 오크스하(Oxus) 동쪽의 석회암석 지층을 뚫고 뻗어 있는 좁은 통로. 통로 양쪽의 높이는 600피트 이상이나 되는 길고 험한 길이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이 관문 끝 지점에 철로 문을 만들어 거기에 철제 방울을 걸어 놓았다고 하였다. 이 철문을 지나서 오크스하를 건너 힌두쿠슈(Hindukushu) 산맥을 넘어 북인도로 가게 된다.
  9. 9)지금의 베트남 하노이 지방. 이 곳은 중국 한(漢) 제국의 남쪽 경계선이었기에 동(銅)으로 기둥을 세워 경계의 표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10. 10)고려대장경에는 당국(唐國)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이다.
  11. 11)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의해 유동하는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여기서는 중국 신강성(新疆省)의 타크라마칸(Taklama Kan) 사막을 이른다. 타림(Tarim) 분지 안의 거대한 사막으로, 이른바 비단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막을 뚫고 뻗어 있는 남북의 두 갈래 길이다.
  12. 12)향지(香池)는 설령(雪嶺)에 있는 향산(香山) 남쪽에 있다고 하는 전설상의 연못으로서 아나바답다지(阿那婆答多池:無熱惱池)라고 불린다. 섬부주(贍部洲)의 중심이 되는 땅으로 여겨지며 강가하(4dk1伽河), 신도하(信度河), 박추하(縛芻河), 섭다하(涉多河)는 모두 이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오늘날의 인도하(印度河) 및 브라흐마푸트라강의 상류에 있는 마나사로와(Manasarowar) 호수가 바로 이것이다.
  13. 13)총령(葱嶺)의 다른 말이다. 총령은 일반적으로 파미르고원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본래 총령은 모래산[沙山]이라는 뜻으로서 설산(雪山)과 상대되는 말이다. 서북희마납, 카라코람(Karakoram), 파밀의 황량하고 얼어 붙은 사석(沙石)의 봉우리를 총칭하는 말인데, 여기에서 총부(葱阜:葱嶺)라고 하는 뜻은 서장(西藏:티베트)의 서쪽 경계에 해당하는 서북비마납산계(西北比馬拉山系)를 가리키는 것이다.
  14. 14)삼유(三有)란 욕유(欲有), 색유(色有), 무색유(無色有)를 말한다. 욕유(欲有)는 욕망의 세계의 업인(業因)과 과보(果報)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고, 색유(色有)는 물질계의 인과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며, 무색유(無色有)는 식심(識心)의 세계의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15. 15)대월지(大月氏)의 속(屬)으로서, 한(漢)나라 대하(大夏)의 땅을 점거하고 있었던 나라.
  16. 16)토번(土蕃), 위(衛), 전장(前藏), 서장(西藏), 포달납(布達拉) 등이라 불린다. 오늘날의 티베트이다.
  17. 17)당나라정관(貞觀) 15년 태종(太宗)은 농찬(弄贊) 찬보(贊普:티베트의 首長)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시집보냈다. 토번은 이 혼인을 영예로 여겨서 공주를 지극히 예우하였고, 특히 성 하나를 지어서 공주에게 바쳤다고 한다. 공주는 토번에서 약 40년을 머물렀는데, 그 동안 당나라의 문화를 고취하고 구법을 위해서 찾아 온 당나라 승려들을 두터운 예로써 옹호하였다. 영융(永隆) 원년에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18. 18)오늘날의 사란달라(闍蘭達羅, Jullundur)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산간에 위치한 대국으로서 전인도의 승사(僧事)를 총감독하였고, 불교가 매우 융성해 있던 나라이다.
  19. 19)불타가야(佛陀伽耶)의 보리수 북쪽에 위치한 마하보리(Mahabodhi) 승가람, 즉 대각사(大覺寺)를 말한다. 『대당서역기』 권8에는 승가라국(僧伽羅國:師子國)의 국왕이 건립한 연기(緣起)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본래 이 나라의 승려가 인도를 유람하면서 숙박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 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승가라국 사람이다. 그런데 당나라 승려는 기탁할 만한 중국의 사찰이 없었던 까닭에 이 대각사에 가서 청을 넣고 숙박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었다.
  20. 20)보리수 동쪽의 대정사(大精舍:佛陀伽耶大塔)에 미륵보살이 제작한 좌불(坐佛) 화상(畵像)이 있다. 높이는 1장 1척 5촌인데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어 항마상(降魔相)임을 보여준다. 의정(義淨)은 이것을 빼어나고 존귀한 손바닥 자세라는 뜻에서 일장의(逸掌儀)라고 불렀다. 이 화상(畵像)은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것으로 현조법사가 정성을 올리자 눈 앞에서 기적을 보이는 일이 매우 빈번하였다고 하며, 또한 의정이 베껴간 금강좌의 진용(眞容)도 바로 이 일장의(逸藏儀)였다. 오늘날 대탑 안에 모셔져 있는 항마석불상은 1876년 탑 발굴 이후에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21. 21)먼저 원어를 풀이해 보면 아비달마(Abidharma)인데 Abi는 대(對), Dharma는 법(法)으로서 논(論) 또는 논장(論藏)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의기』 권1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정념(情念)을 여읜 무상(無相)의 진지(眞智)를 무분별지라고 하는데, 논장(論藏)은 이러한 진지를 가지고 일체의 경(境)과 법(法)을 마주 대하여 바라보는 것처럼 환히 드러나는 까닭에 대법(對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비달마계신족론(阿毘達磨界身足論)』 3권,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20권,『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백 권과 같은 논장을 대법론(對法論)이라고 부른다. 한편 구사(俱舍, Kosa)는 포장(包藏)이라는 뜻으로서 핵심되는 뜻을감싸고 함축한다는 뜻이다. 『아비달마구사론본송(阿毘達磨俱舍論本頌)』 6백 송 1권(俱舍頌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30권(俱舍論이라고 줄여서 부른다)과 같은 논서는 대법론 중에서 요의(要義)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법론(對法論)과 구별하여 구사를 대법장(對法藏)이라고 부르기도한다. 현조법사는 대각사에서 오로지 구사를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서 대법론의요의를 획득하였던 것이다.
  22. 22)나란타사는 갠지스강 남쪽, 화씨성(華氏城)에서 동남쪽으로 20역(驛), 불타가야(佛陀伽耶)에서 동북쪽으로 7역, 왕사성의 정북 방향에서 1역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대가람이다. 당시 호법(護法)과 계현(戒賢) 등을 위시한 여러 대가들을 배출하였으며, 고승과 준재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실로 불교의 요람이었다.
  23. 23)『중론(中論)』은 중관론(中觀論)이라고도 한다. 용수(龍樹)의 저서로서, 총 4권27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에서는 불생(不生), 불멸(不滅), 부단(不斷), 불상(不常),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거(不去), 불래(不來)라고 하는 팔불(八不)의 미묘한 이치를 현양하여 이로써 소승교의 편협한 견해를 척파하고 외도의 망집(妄執)을 배척해서 중도(中道)의 교의를 건설하였다.
  24. 24)『백론(百論)』은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가 지은 2권으로 이루어진 논서인데, 외도의 편협한 견해를 척파하기 위해 총 10품을 열어서 이것을 백 가지 게송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백론(百論)이라 불리고 있다. 앞의 『중론』과 『백론』 그리고 『십이문론(十二門論)』을 합해서 삼론(三論)이라 부른다.
  25. 25)유가(瑜伽)는 심원한 대승교리를 표방하는 일파(一派)이다. 유가(瑜伽, yoga)는상응(相應)이라는 뜻이며, 상응(相應)은 계합(契合)의 의미이다. 모든 경(境)ㆍ행(行)ㆍ과(果) 등은 상응하는 까닭에 유가(瑜伽)라고 하는 것이다. 경(境)은 근(根)ㆍ의(意)ㆍ심(心)ㆍ지(智) 등의 대상 즉 법(法)이고, 행(行)은 작용(作用)이고, 과(果)는인(因)을 상대하여 일어나는 행(行)의 결과이다. 그리고 성(性: 本性ㆍ體)은 저절로있는 것으로서, 인연에 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경(境)이 능히 성(性)을 따르면 그 본성을 발휘하여 행(行)ㆍ과(果)도 함께 상응하여서 정리(正理)에 부합하고 정교(正敎)를 수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밝히는 성교(聖敎)를 유가론(瑜伽論)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수행해서 자법신(自法身:부처의 眞身이 地上의 菩薩身으로 응현하는 일)을 증장하는 자를 유가사(瑜伽師)라고 부른다. 그런 까닭에 유가사는 이러한 성교(聖敎)에 수순해서 경(境)ㆍ행(行)ㆍ과(果)ㆍ성교(聖敎)가 모두 함께 서로순응하도록 수행하는 자이다. 유가사지(瑜伽師地)란 유가사가 의지하고 행하며 포섭하는 경계인데,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 의지(意地),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 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 비삼마희다지(非三摩呬多地), 유심지(有心地), 무심지(無心地), 문소성지(聞所成地), 사소성지(思所成地), 수소성지(修所成地), 성문지(聲聞地), 독각지(獨覺地), 보살지(菩薩地), 유여의지(有餘依地), 무여의지(無餘依地)의 17지가 있다.
  26. 26)이차족(離車族)이 다스리던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옛 毘舍離國) 국왕의 이름이다. 점부(苫部, Champu)는 불법을 깊이 믿어서 중국에서 찾아온 승려를 후하게 예우하였다. 또한 이 지역은 니파라(泥波羅: 오늘날의 네팔) 길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의 구법승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에서 기탁하며 그 공양을 받았다.
  27. 27)『대당서역기』 권제7에는 습폐다보라(濕吠多補羅)가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을 번역하면 선업(善業)을 닦는 사람[장夫]이므로 신자사(信者寺)라는 말이 된다. 암마라발국왕의 사찰이다.
  28. 28)『법원주림(法苑珠林)』ㆍ『구당서(舊唐書)』ㆍ『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짧게나마 언급하고 있는 왕현책에 관한 사적을 종합해 보면, 정관(貞觀) 19년 왕사성에도착하여 대각사(大覺寺)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비를 세웠고, 정관 22년에는 아라나순(阿羅那順)을 포로로 하여 장안으로 돌아온 것이 첫 번째 서역행이다. 두 번째 여행은 다시금 마가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로에 유마(維摩)의 집을 순례한 것이다. 이 때 현조법사를 신자사에서 방문한 뒤에 귀향하여 그 실덕(實德)을 황제에게 주상하였다. 이 때가 용삭(龍朔) 연간의 일이다. 이로부터 다시 인도로 가서 현조법사에게 칙명을 전하여 당나라로 돌아오게 하며, 자신은 불로장생약을 구해오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장년바라문 노가일다(盧迦溢多)를 찾아다녔으니, 이것이 세 번째 길이다.
  29. 29)오늘날의 카쉬미르(Kashmir)이다. 한대(漢代) 계빈(罽賓) 지역이었으며 불교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지역이라고 하겠다. 수도는 주로 스리나가르(Srinagar) 지방에 있었는데 당대(唐代)에는 다른 곳으로 옮긴 적도 있었다.
  30. 30)로가일다(盧迦溢多, Lokayata)는 육체적인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면서 도덕이나 성현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순세외도(順世外道), 즉 인도의 유물론파로서, 또는 장년바라문(長年婆羅門)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나라 고종이 방사(方士)와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해오도록 왕현책을 보내어 로가일다 바라문을 당나라로 데려오게 한 일을 말한다.
  31. 31)살바다부(薩婆多部, Sarvastivada)는 일체유부(一切有部)에서 분파하여 나온 파로서, 모든 법의 실유(實有)를 주장하며 그 원인[因由]을 설하였으므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 불린다. 그 후 설일체유부에서 다시 독자부(犢子部)ㆍ정량부(正量部)ㆍ경량부(經量部) 등이 파생하게 되자 이들 말파(末派)와 구분하여 설일체유부를 근본설일체유부(根本說一切有部)라고 불렀다. 『살바다부율섭』은 후에 의정이 번역하여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제9권에 『근본살바다부율섭』 12권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다.
  32. 32)라다국(羅茶國)은 마하랄타국(摩揀剌吒國)이라고도 부른다. 이 나라의 수도는 오늘날의 와다(Wada)이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건지보라(建志補羅)의 서북쪽으로 약 4,400~4,500리 떨어졌으며, 내말타하(耐秣陀河, Narbada) 동남쪽에 위치한 강대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토지가 매우 비옥하고 백성들은 용맹하며, 수백의 상군(象軍)을 비축하고 있어서 계일왕(戒日王)이 5인도의 갑병(甲兵)을 일으켜서 침공하려 하였으나 끝내 정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불교 또한 매우 융성하여 가람이 백여 곳, 승도가 5천여 명 있었으며, 천사이학(天祠異學) 또한 자못 흥해 있었다고 현장은 전하고 있다. 특히 사히아드리파르바트(Sahyadriparvat)령 남쪽에 현존해 있는 아잔타석굴에는 불교유적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은 불교 외의유적이 남겨져 있어 이것으로 볼 때 라다국의 문화를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승려들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또는 선약(仙藥)을 구하러 멀리에서부터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모두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33. 33)박갈국(縛喝國, Balkh)을 말한다. 도화라(都貨羅)의 고성(古城)으로서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고도 불리며, 신사(新寺)와 불조관(佛澡罐), 불치(佛齒) 등이 있어서 성지순례의 요지가 되고 있다.
  34. 34)유군(遊軍)의 대국(大國)으로서 10여 국을 거느렸으며, 그 수도에는 불교와 이교도의 유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나라는 계빈(罽賓)이라고도 부른다.
  35. 35)신도하(信度河) 하류에 위치한 강대국으로서 불교가 매우 성하였고, 수도는 비점파(毗苫婆, Sahwan)이다.
  36. 36)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자리로서 불타가야(佛陀伽耶)에 있다. 오늘날에도 대탑 옆 보리수 아래에는 평평하고 둥근 석좌(石座)가 있다.
  37. 37)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 내원(內院)에 거주하고 있으며, 56억 7천만 년 뒤에 하생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례의 설법을 베풀어 널리 인간과 하늘을 교화할 것이라고 석가모니가 수기하였다. 도솔천은 욕계천(欲界天)인데, 그 내원(內院)은 미륵보살의 정토이고, 외원(外院)은 천중(天衆)이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다.
  38. 38)기련(菽連)은 감숙성 장액현(張掖縣) 동남쪽에서 양관(陽關) 서남쪽에 이르는 기련산맥을 말한다. ‘몇 번이나 기련을 거닐고’라는 말은 기련산맥을 넘어서 옥문관(玉門關)을 지나 몇 차례나 서역여행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9. 39)상하(祥河)는 불타가야에 위치한 니련하(尼連河), 니련선하(尼連禪河, Nairanjana)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이루기에 앞서 먼저 이 강에서 목욕을 한 뒤에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로 향하였다. 그래서 이 강을 상하(祥河), 용하(龍河), 영하(靈河) 등으로 부른다.
  40. 40)무착보살은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어서 대승의 중요한 뜻을 11문(門)으로 요약하여 논하였다. 이것을 불타선다(佛陀扇多), 진제(眞諦), 현장(玄奘) 세 사람이 번역한 것이 있다. 그 뒤에 세친보살은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을 지어서 『섭대승론』을 통석(通釋)하였다. 역시 여기에도 진제, 급다(笈多), 현장 세 사람의 번역이 있다. 이에 양나라 진제의 번역을 『양론(梁論)』이라고 부른다.
  41. 41)불치목(佛齒木)은 작은 나뭇가지 끝을 부수어서 가늘게 만들어 치아를 닦는 데 사용한다. 양지(楊枝)라고도 말하지만 중국에서 말하는 버드나무[楊柳]와는 다른 것이다. 나란타사의 근본향전 서쪽에 있는 불치목은 붓다와 인연이 있는 나무로 사람들의 숭앙을 받고 있다.
  42. 42)남해(南海)는 남명(南溟), 창명(滄溟), 명발(溟勃) 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해(南海)라는 말은 본래 남해현(南海縣), 즉 광동지방(廣東地方)을 가리키며, 나중에는교주(交州), 안남(安南) 주변을 지칭하였고, 의정 당시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 가릉(揀陵) 등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Sumda해협을 지나 소마달도(蘇馬達雁) 남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해는 바로 이 곳이다.
  43. 43)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에 관한 논쟁은 분분한데 대체로 실리불서국이 소마달도(蘇馬達島) 동남부에 있으며, 점차로 그 동북해안 일대를 영유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의 잠비(Jambi)에 해당한다.
  44. 44)파라사국(婆羅沙國), 파로사국(婆露斯國), 파로국(婆露國)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바로스(Baros)인데, 소마달도(蘇馬達雁) 서남부 및 그 지방 해상무역권을 영유하여 실리불서국과는 끝까지 대립하였다.
  45. 45)가릉(揀陵)은 주로 당대(唐代)에 부르던 명칭이고, 사바(闍婆), 사바(社婆), 자바(Java), 객류파(喀留巴) 등은 비교적 후대에 부르던 명칭이다.
  46. 46)소마달도(蘇馬達雁) 동북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마랄가(馬剌加)해협과 인도양의 항로를 소유하고 해상에서 활약하던 강대국이었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말라유국은 대체로실리불서와 갈다(羯茶) 사이에 있었던 나라로 추정되며, 의정이 고국으로 돌아오던 시기에는 말라유국은 불서국(佛逝國)의 땅이 되고 있었다.
  47. 47)수경(水鏡)과 화진(和珍)은 상민선사의 인격을 찬미하는 비유이다. 수경(水鏡)은 그 인물이 매우 뛰어나서 운무를 헤치고 드러나는 파란 하늘처럼 명철함을 뜻한다. 화진(和珍)은 아주 귀한 옥(玉)의 이름이다.
  48. 48)현응(玄應)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제81권에는 혜헌(慧巘)을 승려 이름이라고 하였다.
  49. 49)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德)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니 그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子曰德不孤必有隣)”이라고 한 것을 여기에서 인용하였다. 상민선사 또한 그 이름처럼 중생을 가엾이 여겼지만 대신 불행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뜻을 부연한 것이다.
  50. 50)옹주(雍州) 사병참군위(司兵參軍韋) 안석(安石)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1. 51)용지산사(龍池山寺)는 『대당서역기』 제3권에 이 절의 연기(緣起)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못에 살고 있던 용이 말전저가(末田底迦, 또는 末田地) 아라한에게 감복되어서 자신의 연못을 바치고 공양을 올린다. 이 아라한이 용의 땅을 받아들여서 5백 개의 가람을 세웠는데 바로 이것이 용지산사이다.
  52. 52)목지린타(目支隣陀)용의 못이란 뜻이다. 불타가야의 성보리수 옆에 있다. 선정에 드신 붓다를 이 용이 자기 몸으로 일곱 번 감싸 보호하였다.
  53. 53)무조건 육식(肉食)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소승 계율에서는 삼정육(三淨肉)의 조항을 들어서 이에 해당되면 먹어도 무방하다고 한다. 즉 죽이는 것을 보지 못한 것, 나(수행자) 때문에 이 동물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 나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의 삼정육만큼은 허락하였다.
  54. 54)출가자가 먹어도 되는 다섯 가지 음식. 밥, 보리와 콩을 넣은 밥, 보리 미숫가루, 고기, 떡을 말한다.
  55. 55)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 “초(楚)지방에 칠택(七澤)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일곱 곳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옛날 초(楚)지방은 오늘날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소(江蘇), 강서(江西), 절강(浙江), 하남(河南)의 남부 등인데 이 지방에 칠대호(七大湖)가 있다. 또한 호북(湖北), 강남(江南), 강서(江西, 江表)에는 큰 못이 많아서 이 지방에서는 일찍부터 문화가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불교가 특히 융성하였다. 의정은 언제나 이 지방을 칠택(七澤)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옛날 오(吳)지역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지방이다. 나중에 오군(吳郡), 오여(吳與), 회계(會稽)의 셋으로 나누어서 삼오(三吳)라고 불렀다. 삼오는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북부를 가리킨다. 즉 양자강 입구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외국과의 무역과 문화 수입이 가장 활발했던 지방이다. 명원법사는 사천(四川)에서 나와 먼저 호북(湖北)과 호남(湖南) 지방에서 수학한 뒤에 이어서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의 불교를 두루 섭렵했던 것이다.
  56. 56)교지는 오늘날의 베트남을 가리킨다.
  57. 57)강(江)은 양자강, 한(漢)은 한수(漢水), 즉 한강(漢江)이다. 진령(秦嶺)에서 나와서 호북성(湖北城) 중앙을 흘러 양자강에 들어간다. 강한(江漢) 끝까지 이르렀다는 말은 성도(成都)에서 나와서 호북(湖北)과 안휘(安徽) 등의 강한(江漢) 지방을 두루 편력하였다는 말이다.
  58. 58)현응(玄應)의 『일체경음의』 81권에는 “모시(毛詩)에는 ‘척령이 들에 있네. 형제끼리 돕네’라고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석에는 ‘척령은 할미새이다’라고 하였다. 척(鶺)자는 속자인데, 정자로는 척(★)이다”라고 하였다.
  59. 59)오늘날 흠현(欽縣) 동남쪽에 오뢰각(烏雷角)이 있다. 용문강(龍門江) 동쪽에 해당한다. 위로는 오뢰묘(烏雷廟)가 있고, 아래로는 상비사(象鼻沙)가 있다. 바다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이 모래톱을 건너서 강으로 들어가기란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배는 언제나 묘(廟) 아래에 정박해 둔다.
  60. 60)말레이지아반도[馬來半雁] 동북쪽, 태국만(泰國灣) 서북쪽에 해당하며, 아마 오늘날의 Rajburi가 랑가술국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61. 61)계주(髻珠)는 법화칠유(法華七喩) 가운데 하나로서 계주유(髻珠喩)라고 한다.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전륜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복할 때에 병사들가운데 가장 공로가 큰 사람에게는 자신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말은 전륜성왕은 부처님, 상투[髻]는 소승의 가르침, 구슬[珠]은 대승(법화의 가르침)에 비유한 것이다.
  62. 62)지현(智賢)으로 번역한다. 가릉국(揀陵國) 고승으로서 삼장에 능통하였고, 회녕(會寧)과 함께 『대반열반경』 「다비분(茶■分)」 1부 2권을 번역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속고승전』 제2권에 기록되어 있다.
  63. 63)처음 일념(一念)에 결정한 것이 영원히 상속되어가는 동안의 시기를 후념(後念)이라고 한다.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데에 용맹정진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최초에 마음먹은 보살의 일념을 영원히 수행하여 그 명성을 드날렸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64. 64)곤륜이란 중국 광주(廣州) 이남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머리를 틀어올리고 피부색이 어두운 것이 특징이다. 곤륜음은 이 지역 사람들의 말을 가리키는데 주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어를 의미한다.
  65. 65)오늘날 방콕 동북쪽에 위치한 Dhanyaburie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66. 66)석가모니가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태를 빌려서 태어났던 룸비니 동산의 나무.
  67. 67)『대지도론(大智度論)』 96권 「석살타파륜품(釋薩陀波崙品)」에 등장하는 보살의 이름이다. 그 마음에는 언제나 중생을 향한 대비심이 가득 넘쳐 흘러서 중생들이 세상에서 받는 온갖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보살을 살타파륜(薩陀波崙)이라고 불렀는데, 언제나 슬피 운다는 뜻의 상제(常啼)라는 의미이다.
  68. 68)웃다야나(Udyana). 북인도 산중에 있는 대국이었으며 수도는 Manglaur이다.
  69. 69)굴록가는 Kalinga라고도 하는 나라 이름이다. 남방에 위치한 강대국이었으며, 일찍이 항로가 열리고 그에 따른 해상무역업이 활발해지자 인도양 연안에 그 세력을 펼친 국가이다. 특히 이 나라에서는 불교가 매우 성하였는데, 다양하게 꽃피운 불교문화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육왕에게 정복당한 뒤에 끝내 국운을 일으키지 못하고 멸해 갔으며, 자연히 굴록가사(屈錄迦寺)도 나라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70. 70)일군왕(日軍王)은 아일다서나왕(阿逸多犀那王, Adityasena)이다. 마게타국(摩揭陀國) 국왕이다.
  71. 71)290년경 아유사국(阿踰闍國)을 세워서 인도를 통일한 굽타왕조의 시조이다.
  72. 72)『시경(詩經)』「소남(召南)」에 “유작유소 유구거지(維鵲有巢 維鳩居之:까치가 집을 지으니 비둘기가 와서 사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비둘기는 집을 짓지 않고 까치가 집을 지으면 그 곳에 들어가서 사는 것으로 믿어 왔다. 제후의 딸이 이웃 나라로 시집가서 아주 부유하게 사는 모습을 그린 내으로서 수고하지 않고도 쉽게 그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을 비유한 내용이다.
  73. 73)제일왕(帝日王)으로 번역한다. 굽타왕조 제4대 왕인 쿠마라굽타 1세(415~455)이다. 삭갈라(鑠羯羅)는 제석천[帝]이란 뜻이다.
  74. 74)반사(槃社)는 니건외도(尼乾外道)를 가리킨다. 원래 니건외도는 머리를 깎고 벌거벗은 모습을 하며 삼계(三界)의 속박을 벗어나기를 목표로 삼는 이들인데, 불교인들은 이들을 가리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無■]라는 뜻의 니건(尼乾)이라고 불렀다. 반사(槃社)는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여 소승독자부(小乘犢子部)의 시조가 된다.
  75. 75)도(堵)는 사방 1장(장) 크기의 단위인데, 여기서 말하는 사방 1장이란 승려들이 거처하던 방의 크기로 보는 것이 좋다.
  76. 76)본문에는 역(域)이라고 되어 있으나 성(城)자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77. 77)제저(制底)는 caitya의 음사어이며, 제다(制多)라고도 음사한다. 영묘(靈廟), 영사(靈祠)의 뜻이며, 인도에서는 나무나 사당, 돌탑, 의총(蟻塚), 당(堂) 등과 같은 것을 신성시하여 그 곳에 영혼이 머문다고 생각하여 숭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부처님을 공양하고 숭배하는 장소 또는 당사(堂舍)가 되었다. 불당(佛堂)을 의미한다.
  78. 78)『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4권은 의정(義淨)이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에서 찬술한 서적이며, 그밖에 인도의 일을 기록한 『중방록(中方錄)』과 서방 여러 나라의 일들을 기록한 『서방록(西方錄)』이 있지만 뒤의 두 권은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다.
  79. 79)일반적으로 거사(居士)라고 하며, 재가인이면서 재산을 모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구하고자 마음을 낸 사람을 말한다. 또는 탐욕스럽고 그 행동이 방자하여 사람들에게 쫓겨난 사람을 가주(家主)라고 하기도 한다.
  80. 80)전사(典事)는 일을 책임지는 사람, 좌사(佐史)는 그를 돕는 보좌관이다. 인도에서는 매월보름 다음날(16일)에서 그믐으로 가는 것을 흑월(黑月)이라 부르고, 그믐에서 다시 보름으로 가는 날을 백월(白月)이라 부른다. 흑월 1일과 백월 1일에 전사와 좌사가 각 방을 돌아다니면서 절의 규칙을 봉독하여 승가대중들이 자중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재촉하는 의식이다.
  81. 81)계단(戒壇)은 계를 줄 때나 계를 설할 때마련한 단(壇)이다. 평지에 있는 것을 계장(戒장)이라 하고, 단(壇)을 설치한 것을 계단(戒壇)이라고 한다.
  82. 82)일정한 장소를 반복하여 오가는 행동으로 참선의 연장이며 수행자의 운동 역할도한다. 부처님이 머무신 곳에는 경행하셨던 유적지가 매우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