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집성문헌

ABC_NC_10061_0001_T_001

0001_0001_a_01L
조선사찰사료 朝鮮寺刹史料 (상)

0001_0001_a_01L朝鮮寺剎史料上

0001_0002_a_01L

0001_0002_a_01L빈페이지

0001_0003_a_01L
조선사찰사료 범례
1. 조선의 사찰은 신라·고구려·백제 삼국 정립의 시기부터 고려조 시대까지 많이 건립되었고, 당시 민심을 감화(感化)하여 정치를 비보(裨補)1)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그 사적(史籍)을 갖추지 않음은 일찍부터 학식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본서는 곧 그 유결(遺缺)을 보충하고, 훗날 사찰사(寺刹史)를 편찬할 자료로써 이를 수집한 것이다.
1. 조선의 사찰을 장엄하는 당탑가람(堂塔伽藍)2)은 비단 역사의 증징(證徵)으로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古代)의 미술 공예상의 지식을 집중시킨 유물로서도 가치가 있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학식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였기 때문에, 따라서 본서는 어떤 경우에서 조선 고대 미술의 설명서인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 본서는 각 사찰에 현존하는 비문·편액, 그 밖의 고문서류를 수집한 것이므로 문체(文體)를 통일하지 않으며, 또한 비문·고문서 중에는 신라 설총(薛聰)3)

0001__0003_a_01L朝鮮寺刹史料 凡例

0001__0003_a_02L
0001__0003_a_03L
一 朝鮮の寺刹は新羅·高勾麗·百濟三國鼎立の時より高麗朝の時代
0001__0003_a_04Lまでに多く建設せられ當時人心を感化し政治を稗補したる歷
0001__0003_a_05L史を有するも從來其の史籍の備はらさるは夙に識者の遺憾と
0001__0003_a_06Lする所なり本書は即ち其の遺缺を補ひ他日寺刹史を修むる資
0001__0003_a_07L料として之を採輯せるものなり

0001__0003_a_08L
一 朝鮮の寺刹を莊嚴する堂塔伽藍は啻に歷史の證徵として價値
0001__0003_a_09Lあるのみならす古代に於ける美術工藝上の智識を集中せる遺
0001__0003_a_10L物として價值あることは夙に識者の認むる所なれは本書は或
0001__0003_a_11Lる塲合に於て朝鮮古代美術の說明書たることを疑はす

0001__0003_a_12L
一 本書は各寺刹に現存する碑文扁額其の他古文書類を採輯せし
0001__0003_a_13Lものなれは文體一樣ならす且つ碑文古文書の中には新羅薛聰

0001_0004_a_01L창제와 관련한 이두(吏讀, 한자를 가지고 방언을 기록한 것)의 용어를 삽입한 것도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부 원문(原文)을 남기고 억지로 고치지 않는다.
1. 비문·편액 중 글자가 마멸되고 떨어져 나가서 자체(字體)를 알 수 없는 것은 △표시를 붙이고, 혹은 이하결략(以下闕略)으로 표기하여 탈자(脫字)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1. 각 도부군(道府郡)에서 보낸 본서의 자료 가운데, 임사(臨寫)4)의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일이 조회하여 살펴보기에는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대조하여 바로잡는 것은 모두 훗날로 미루는 것으로 한다.
1. 본서 편찬은 1910년(明治 43) 8월 자료 수집에 착수하였고, 1911년(明治 44) 3월까지 수집한 것을 조사·정리하여 인쇄에 부쳤다.
1. 사찰 사료의 수집은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하고, 다음을 기약하여 완성하고자 한다.5)
  1911년(明治 44) 4월 3일 편자 씀

0001__0004_a_01Lの創意に係る吏讀°°(漢字を以て方言を記せるもの)の用語を插入
0001__0004_a_02Lせるものありて難解不讀のものありと雖都て原文を存し敢て
0001__0004_a_03L之を改めす

0001__0004_a_04L
一 碑文扁額中磨滅剝落して字體の知れさるものは△印を附し
0001__0004_a_05Lは以下闕畧と標記し以て脫字にあらさることを明かにせり

0001__0004_a_06L
一 各道府郡より送附に係る本書の材料中臨寫の誤謬と認むるも
0001__0004_a_07Lのなきにあらすと雖一々之を照會して覈査を求むるに遑あら
0001__0004_a_08Lるさを以て檢校釐正は都て他日に讓ることとせり
0001__0004_a_09L一 本書編纂の業は明治四十三年八月材料採集に著手し明治四十
0001__0004_a_10L四年三月までに蒐輯したるものを査理して之を印刷に附せり

0001__0004_a_11L
一 寺刹史料の採集は仍ほ之を繼續し他年を期して大成せむとす

0001__0004_a_12L
0001__0004_a_13L
明治四十四年四月三日       編者  識す

0001_0005_a_01L
총목차總目次
경기도지부 京幾道之部
1. 고려국 오관산 대화엄영통사 증시대각국사 비명 병서 高麗國五冠山 大華嚴靈通寺 贈諡大覺國師 碑銘 并序
2. 대흥사 사적비 大興寺事蹟碑
3. 천마산 관음사 중건비 天磨山觀音寺重建碑
4. 개국사 중건기 開國寺 重建記
5. 백운산 내원사 사적 白雲山內院寺事迹 (영평군永平郡)
6. 사나사 비문 병서 舍那寺碑文并序, 원증국사 석종명 圓證國師石鍾銘
7. 지평현 미지산 윤필암기 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8. 유명조선국 미지산용문사 시정지국사 비명 有明朝鮮國彌智山龍門寺諡正智國師碑銘
9. 운악 현등사 사적 雲嶽懸燈寺事蹟
10. 용주사 龍珠寺
10-1. 권선문 勸善文
10-2. 팔로읍진과 서울 각궁 조전 시주록 八路邑鎮與京各宮曹廛施主錄
10-3. 각항各項의 택일擇日
10-4. 대웅전 상량문 大雄殿上樑文
10-5. 천보루 상량문天保樓上樑文
10-6. 건물면적 建物面積
10-7. 서 序
10-8. 대시주大施主 진신縉紳의 안案 大施主縉紳案
10-9. 용주사龍珠寺 건축시 각도各道의 화주승化主僧 龍珠寺建築時 各道化主僧
10-10. 본사의 서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방명 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

0001_0005_a_01L朝鮮寺剎史料目次

0001_0005_a_02L
京幾道之部
0001_0005_a_03L五冠山大華嚴靈通寺大覺國師碑       一
0001_0005_a_04L大興寺事蹟碑               一○
0001_0005_a_05L天磨山觀音寺重建碑            一二
0001_0005_a_06L開國寺重修記               一四
0001_0005_a_07L白雲山內院寺事迹             一七
0001_0005_a_08L舍那寺碑文                二三
0001_0005_a_09L彌智山潤筆菴記              二五
0001_0005_a_10L彌智山龍門寺正智國師碑          二七
0001_0005_a_11L雲嶽懸燈寺事蹟              三二
0001_0005_a_12L龍珠寺事蹟                四○

0001_0006_a_01L11. 장단군 강북면 월징산 심복사비 서문 長湍郡江北面月澄山心腹寺碑 序文
12. 삼성산 삼막사 사적 三聖山三幕寺事蹟
13. 경기좌도 시흥 삼성산 호압사 법당을 새로 조성한 데 따른 현판문 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新造懸板文
14. 경기도 죽주부 칠현산 칠장사 사실기 京畿道竹州府七賢山七長寺事實記
14-1. 인목왕후 어필 仁穆王后御筆
14-2. 죽산군 칠현산 칠장사 중건기 竹山郡七賢山七長寺重建記
14-3. 불사 서문 佛事序文
14-4. 칠현산 칠장사 백련암 중수기 七賢山七長寺白蓮菴重修記
14-5. 비전 바위 위에 새로 건축한 법당의 조성기 碑殿岩上新建法堂造成記
14-6. 칠현산 칠장사 명적암 중수기 七賢山七長寺明寂庵重修記
14-7. 칠현산 칠장사 상운암 중건기 七賢山七長寺上雲菴重建記
15. 여주 봉미산 보은사 중수사적 기사 驪州 鳳尾山報恩寺 重修事蹟記詞
16. 신륵사 중수기 神勒寺重修記
17. 안성군 석남사 어필 교지 安城郡 石南寺 御筆 教旨
18. 장단군 화장사 長湍郡華藏寺
18-1. 사적현판寺蹟懸板 옛 단주 화장사 개창기 古湍州華藏寺改創記
18-2. 경기우도 장단 보봉산 화장사 전후중창기 京畿右道長湍寶鳳山華藏寺前後重剏記
18-3. 대웅전 삼칸 후불탱 화성기 大雄殿三間後佛幀畫成記
18-4. 운하당 중수기 雲霞堂重修記
18-5. 옛 단주 화장사 적묵당 중창기 古湍州華藏寺寂默堂重剏記
19. 전군수 이학래 시 前郡守李鶴來詩
20. 계유 숙종대왕 시 癸酉 肅宗大王 時
21. 관악산 연주대 나한법당 중수와 하법당 신건을 함께 기록한 글 冠岳山戀主臺羅漢法堂重修與下法堂新建并記誌
22. 관음사 중수기 觀音寺重修記
23. 진관사 사적 津寬寺事蹟

0001_0006_a_01L月澄山心腹寺碑              六二
0001_0006_a_02L三聖山三幕寺事蹟             六三
0001_0006_a_03L三聖山虎壓寺法堂新造懸板文        六六
0001_0006_a_04L七賢山七長寺事實記            六七
0001_0006_a_05L七賢山七長寺白蓮菴重修記         七五
0001_0006_a_06L鳳尾山報恩寺重修事蹟           七九
0001_0006_a_07L神勒寺重修記               八二
0001_0006_a_08L石南寺御筆教旨              八四
0001_0006_a_09L華藏寺記                 八五
0001_0006_a_10L華藏寺改創記               九一
0001_0006_a_11L冠岳山戀主臺羅漢法堂重修誌        一○八
0001_0006_a_12L觀音寺重修記               一○九
0001_0006_a_13L津寬寺事蹟                一○九

0001_0007_a_01L24. 봉은사 남호 대율사 비문 奉恩寺南湖大律師碑文
25. 원증국사탑명 圓證國師塔銘
충청북도지부 忠清北道之部
1. 속리산 법주사 俗離山法住寺
 1-1. 속리산 법주사 자정국존비 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
 1-2. 속리산 법주사 벽암대사비 俗離山法住寺碧嵓大師碑
 1-3. 속리산 법주사 세존사리탑비 俗離山法住寺世尊舍利塔碑
 1-4. 속리산 대법주사의 내력 俗離山大法住寺之來歷
 1-5. 속리산 사실 俗離山事實
 1-6. 속리산 법주사 판하 완문 절목 1 俗離山法住寺判下完文節目
 1-7. 속리산 법주사 판하 완문 절목 2 俗離山法住寺判下完文節目
2. 치악산 백련사 중창기 雉岳山白蓮寺重創記
3. 공정산 상암사 중수기 公靜山上菴寺重修記
4. 보개산 각연사 삼세여래 및 관음개금기 寶盖山覺淵寺三世如來及觀音改金記

0001_0007_a_01L奉恩寺南湖大律師碑            一一○
0001_0007_a_02L圓證國師塔銘               一一三
0001_0007_a_03L忠清北道之部             一二○
0001_0007_a_04L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          一二○
0001_0007_a_05L俗離山法住寺碧嵓大師碑          一二三
0001_0007_a_06L俗離山法住寺世尊舍利塔碑         一二六
0001_0007_a_07L俗離山大法住寺之來歷           一二七
0001_0007_a_08L俗離山事實                一二八
0001_0007_a_09L俗離山法住寺判下完文節目         一二九
0001_0007_a_10L俗離山法住寺判下完文節目         一三五
0001_0007_a_11L雉岳山白蓮寺重創記            一四二
0001_0007_a_12L公靜山上菴寺重修記            一四七
0001_0007_a_13L寶盖山覺淵寺三世如來及觀音改金記     一四八

0001_0008_a_01L5. 천마산 중화사 天摩山重華寺
 5-1. 중화사 대웅전 중수기 1 重華寺大雄殿重修記
 5-2. 중화사 대웅전 중수기 2 重華寺大雄殿重修記
6. 낙가산 보살사 중수비 洛迦山菩薩寺重修碑
7. 산당산성 보국사 중건기 山黨山城輔國寺重建記
8. 구룡산 안심사비 九龍山安心寺碑
9 소백산 청련암 중창기 小白山青蓮庵重剏記
10. 황정산 원통암 중수기 黃庭山圓通菴重修記
전라남도지부 全羅南道之部
1 백암산 정토사 사적 서 白巖山淨土寺事蹟序
2. 극락전 불량계 서 極樂殿佛糧禊序
3. 백암산 정토사 사적 白巖山淨土寺事蹟
3-1. 전장경 제삼법회 방轉藏經第三會榜
4. 백암산 정토사 교루기 白巖山淨土寺橋樓記
5. 백암산 정토사 쌍계루기 白巖山淨土寺雙溪樓記
6. 백암사 전장법회 당사방 白巖寺轉藏法會堂司榜
7. 선덕 오년 사월일에 승록사첩 전서 宣德五年四月日僧錄司貼傳書
7-1. 선덕 육년 신해 팔월십일일 감무관첩 전서宣德六年辛亥八月十一日 監務官貼傳書
7-2. 선덕 칠년 임자 사월 초팔일 의정부관자 전서宣德七年壬子四月初八日 議政府關字傳書
8. 선조36년 제물목록과 행례식 宣廟三十六年祭物目錄行禮式
8-1. 선조37년 제물목록과 행례식 宣廟三十六年祭物目錄行禮式
9. 원불좌록願佛左錄
10. 원효암 중건기 元曉庵重建記
10-1. 법당 중창기 法堂重刱記
10-2. 불상기 佛像記
11. 유당신라국사 지리산 쌍계사 교시진감선사비명과서문 有唐新羅國師智異山雙谿寺 敎諡眞鑒禪師碑銘幷序

0001_0008_a_01L重華寺大雄殿重修記            一五○
0001_0008_a_02L天摩山重華寺大雄殿重修記         一五一
0001_0008_a_03L菩薩寺碑                 一五三
0001_0008_a_04L城輔國寺重建記              一五五
0001_0008_a_05L安心寺碑                 一五六
0001_0008_a_06L青蓮庵重剏記               一五八
0001_0008_a_07L圓通菴重修記               一五九
0001_0008_a_08L全羅南道之部             一六一
0001_0008_a_09L白巖山淨土寺事蹟             一六一
0001_0008_a_10L白巖寺轉藏法會堂司榜           一七五
0001_0008_a_11L僧錄司貼傳書               一七六
0001_0008_a_12L元曉庵重建記               一八七
0001_0008_a_13L智異山雙谿寺眞鑒禪師碑          一九○

0001_0009_a_01L12. 중봉산 죽림사 사적 中峯山竹林寺事蹟
13. 죽림사기 竹林寺記
14. 도선국사실록道詵國師實錄
15. 일행선사전발록 一行禪師傳鉢錄
16. 도선국사실록발 道詵國師實錄跋
17. 영광군 모악산 불갑사 고적 靈光郡母岳山佛甲寺古蹟
18. 불갑사 중수 권시문 佛甲寺重修勸施文
19. 불갑사 고적기 佛甲寺古蹟記
20. 기해년 토지측량 때 상서한 글 己亥量田時上書草
21. 이수형이 지은 발문 李洙馨跋
22. 전라도 순천부 영취산 흥국사 사적 全羅道順天府靈鷲山興國寺事蹟
23. 불호사 창건주 원정국사 전말사적佛護寺創建主元禎國師顚末事蹟
23-1. 도연대사의 초상화를 걸고 지은 명 道衍大師揭像銘
23-2. 도연국사 영정문道衍國事影幀文 원정국사元禎國師
24. 보의장군 효자비 保義將軍孝子碑
25.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 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
26. 사보은천교 원조국일도대선사 벽암비명과 서문 賜報恩闡敎 圓照國一都大禪師 碧巖碑銘幷序
27. 목포부 해제면 강산사 무량전 현판 木浦府 海際面 糠山寺 無量殿 懸板
28. 이로면 승달산 목우암 현판 二老面 僧達山 牧牛菴懸板
29. 남평군 다소면 불호사와 일봉암소장 문서를 등사한 서류 南平郡 茶所面 佛護寺與日封菴 現在謄寫寫書類
30. 일봉암기 日封菴記
31. 전라남도 함평군 용천사 대웅전 현판 단청기 全羅南道咸平郡龍泉寺大雄殿懸板丹靑記
32.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 창설 유서 全羅南道靈光郡佛甲寺創設由緖
33. 불법이 우리나라에 전파되고 160년이 지난 백제 성왕聖王 때에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佛法通韓後一百六十年。至百濟聖王時。渡于日本

0001_0009_a_01L中峯山竹林寺事蹟             一九八
0001_0009_a_02L道詵國師實錄               二○二
0001_0009_a_03L母岳山佛甲寺古蹟             二一三
0001_0009_a_04L靈鷲山興國寺事蹟             二二八
0001_0009_a_05L佛護寺創建主元禎國師顛末事蹟       二三○
0001_0009_a_06L聖德山觀音寺事蹟             二四四
0001_0009_a_07L賜國一都大禪師碧巖碑           二四八
0001_0009_a_08L糠山寺無量殿懸板             二五二
0001_0009_a_09L佛護寺記                 二五七
0001_0009_a_10L日封菴記                 二五九
0001_0009_a_11L龍泉寺大雄殿懸板丹青記          二六一
0001_0009_a_12L佛甲寺創設由緒              二六二
0001_0009_a_13L佛法通韓後一百六十年至百濟聖王時渡于日本 二六三

0001_0010_a_01L34. 곡성군 도상면 신덕암 중신기 谷城郡道上面神德菴重新記
35. 곡성군 도상면 길상암 나한전 유적 중수기 谷城郡道上面吉祥庵羅漢殿遺蹟重修記
36.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 현판 谷城郡竹谷面泰安寺懸板
37.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 현판 谷城郡竹谷面泰安寺懸板
38. 화엄사華嚴寺와 관련된 사적.
39. 대승선종 조계산 수선사 중창기(현재의 송광사)
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現今松廣寺)
40. 승평 조계산 송광사 사원사적비 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
41. 대승선종 순천군 조계산 송광사 중창기
大乘禪宗 順天郡 曹溪山 松廣寺 重刱記
42. 전남 순천군 조계산 선암사 사적 全南順天郡曹溪山仙巖寺事蹟
43. 전남 순천군 조계산 선암사 중수비 병서 全南順天郡曹溪山仙巖寺重修碑幷序
44. 전 낙안군 개운산 동화사 중창기 前樂安郡開雲山桐華寺重刱記
45. 전라남도 순천군 향림사 중수기 全羅南道順天郡香林寺重修記
46. 전라남도 순천군 상사면 운동산 도선암 중창기 全羅南道順天郡上沙面雲動山道詵庵重創記
47. 전라남도 흥양군 팔영 능가사 사적 비명과 서문 全羅南道興陽郡八影楞伽寺事蹟碑銘幷序
48. 팔영산 서불암 중수기 八影山西佛庵重修記
48-1. 만경암 중수기 萬景庵重修記
49. 능가사 시창 전후 단월록 서 楞伽寺始創前後檀越錄序
50. 흥양 모악산 중흥사 수도암 불량기 興陽暮岳山中興寺修道庵佛粮記

0001_0010_a_01L神德菴重新記               二六四
0001_0010_a_02L吉祥庵羅漢殿遺蹟重修記          二六五
0001_0010_a_03L泰安寺懸板                二六七
0001_0010_a_04L華嚴寺ニ關スル事蹟            二六八
0001_0010_a_05L大乘禪宗曹溪山修碑社重創記        二七四
0001_0010_a_06L曹溪山仙巖寺事蹟             二八一
0001_0010_a_07L曹溪山仙巖寺重修碑            二八八
0001_0010_a_08L開雲山桐華寺重剏記            二九○
0001_0010_a_09L香林寺重修記               二九三
0001_0010_a_10L雲動山道詵庵重創記            二九五
0001_0010_a_11L八影㮙伽寺事蹟碑             二九七
0001_0010_a_12L㮙伽寺始創前後檀越錄           三○三
0001_0010_a_13L暮岳山中興寺修道庵佛粮記         三○四

0001_0011_a_01L51. 보성군 천봉산 대원사 寶城郡 天鳳山 大原寺
52. 전라남도 강진군 만덕산 백련사 全羅南道康津郡萬德山白蓮寺
53. 해남 대흥사 사적비명海南大興寺事蹟碑銘
54. 정묘어제 서산대사 화상당명과 서문 正廟朝製西大師畫像堂銘幷序
55. 표충사옥 비각 중건기 表忠祠屋碑閣重建記
56. 표충사 창건기 表忠祠刱建記
57. 서산대사 행록西山大師行錄
58. 서산대사 비문西山大師碑文
59. 건사사적비명建祠事蹟碑銘
60. 표충사 상량문 表忠祠上樑文
61. 표충사 중이구지기 表忠祠重移舊址記
62. 대웅전 중창 상량문 大雄殿重刱上樑文
63. 대웅전 중수기 大雄殿重修記

0001_0011_a_01L天鳳山大原寺記              三○六
0001_0011_a_02L萬德山白蓮寺               三○七
0001_0011_a_03L海南大興寺事蹟碑銘            三○八
0001_0011_a_04L西大師畵像堂銘              三一四
0001_0011_a_05L表忠祠屋碑閣重建記            三一六
0001_0011_a_06L表忠祠剏建記               三一七
0001_0011_a_07L西山大師行錄               三二○
0001_0011_a_08L西山大師碑                三二三
0001_0011_a_09L建祠事蹟碑銘               三二七
0001_0011_a_10L表忠祠上樑文               三二八
0001_0011_a_11L表忠祠重移舊址記             三三一
0001_0011_a_12L大雄殿重剏上樑文             三三三
0001_0011_a_13L大雄殿重修記               三三五

0001_0012_a_01L64. 쌍계사 시왕전 중수기 雙溪寺十王殿重修記
65.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와 수미대사비명과 서문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師碑銘幷序
66. 묘각화상비와 서문 妙覺和尙碑幷序
67. 쌍봉사 창건 비문 雙峯寺刱建碑文
68. 중조산 쌍봉사 보은탐진록 中條山雙峯寺普恩探眞錄
69. 만연사 현판서 萬淵寺懸板書
70. 개천사 중수 상량문 開天寺重修上樑文
71. 개천사 중건서 開天寺重建序
경상북도지부 慶尙北道之部
1. 호거산 운문사 사적 虎踞山雲門寺事蹟
2. 남산 적천사 보조국사가 심은 은행나무에 대한 비갈(普照國師手植銀杏樹碣)
3. 동학산 대적사 초창기문 大寂寺初創記文
4. 내연산 보경사 內延山寶鏡寺
4-1. 내연산 보경사 금당탑기 內延山寶鏡寺金堂塔記
4-2. 보경사 원진국사비 寶鏡寺圓真國師碑
4-3. 내연산 보경사 사적 內延山寶鏡寺事蹟
5. 학가산 진월사 鶴駕山陳月寺

0001_0012_a_01L雙溪寺十王毀重修記            三三六
0001_0012_a_02L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師碑      三三九
0001_0012_a_03L雙峯寺剏建碑               三四七
0001_0012_a_04L萬淵寺懸板書               三五一
0001_0012_a_05L開天寺重修上樑文             三五二
0001_0012_a_06L開天寺重建序               三五五
0001_0012_a_07L慶尙北道之部             三五六
0001_0012_a_08L東虎踞山雲門寺事蹟            三五六
0001_0012_a_09L普照國師手植銀杏樹偈           三六四
0001_0012_a_10L大寂寺初創記文              三六五
0001_0012_a_11L內延山寶鏡寺金堂塔記           三六六
0001_0012_a_12L寶鏡寺圓眞國師碑             三七○
0001_0012_a_13L內延山寶鏡寺事蹟             三七五

0001_0013_a_01L5-1. 진월사 판상 서적 陳月寺板上書蹟
5-2. 진월사 법당과 심원각의 칠여래 회화 단청기(陳月寺法堂心遠閣七如來繪畵丹青記)
5-3. 학가산 진월사 응향각을 중수하고 기와를 덮은 기록(鶴駕山陳月寺凝香閣搆盖瓦記)
5-4. 심원각 중수기 心遠閣重修記
5-5. 학가산 진월사 법당 불상기 鶴駕山陳月寺法堂佛像記
6. 미숭산 반룡사기 美崇山盤龍寺記
7. 불영산 쌍계사 정혜대사비 佛靈山雙溪寺定慧大師碑
8. 불영산 청암사 중수기 佛靈山青巖寺重修記
9. 청화산 법주사 중수 현판기 青華山法住寺重修懸板記
10. 봉황산 부석사 鳳凰山浮石寺
11. 소백산 초암사 법당단청기 小白山草庵寺法堂丹青記
12. 황악산 직지사 사적의 비명과 서문(黃岳山直指寺事蹟碑銘并序)
13. 운서산 장륙사 불상개금기 雲棲山莊陸寺佛像改金記

0001_0013_a_01L陳月寺板上書蹟              三七八
0001_0013_a_02L陳月寺法堂心遠閣七如來繪畵丹青記     三七九
0001_0013_a_03L鶴駕山陳月寺凝香閣搆盖瓦記        三八○
0001_0013_a_04L鶴駕山陳月寺法堂佛像記          三八二
0001_0013_a_05L盤龍寺記                 三八三
0001_0013_a_06L佛靈山雙溪寺定慧大師碑          三八四
0001_0013_a_07L青巖寺重修記               三八六
0001_0013_a_08L法住寺重修懸板記             三八七
0001_0013_a_09L浮石寺                  三八九
0001_0013_a_10L草庵寺                  三八九
0001_0013_a_11L直指寺事蹟碑銘              三九一
0001_0013_a_12L石莊嚴龍頭龜床              三九二
0001_0013_a_13L莊陸寺佛像改金記             三九三

0001_0014_a_01L14. 팔공산 동화사 八公山桐華寺
15. 팔공산 파계사 八公山把溪寺
16. 최정산 남지장사 最頂山南地藏寺
17. 비슬산 용연사 毘瑟山龍淵寺
17-1. 용연사 사적 龍淵寺事蹟
17-2. 석가여래 부도비명과 서문(釋迦如來浮屠碑銘并序)
17-3. 용연사 중수비 서문 龍淵寺重修碑序
18. 팔공산 부귀사 八公山富貴寺
18-1. 부귀사 편액 1 富貴寺扁額
18-2. 부귀사 편액 2 富貴寺扁額
19. 팔공산 진불암 중수기 八公山真佛菴重修記
20. 팔공산 수도사 중건기 八公山修道寺重建記
21. 선암산 수태사 법당 중창기 船岩山水泰寺法堂重創記
22. 화산 인각사 강설루 중수기 華山麟角寺講說樓重修記
23. 가산 천주사 架山天主寺
23-1. 전 총섭 유공비각기 前摠攝有功碑閣記
23-2. 전 총섭 삼원당三願堂 선원善元의 영세불망비(前摠攝三願堂善元永世不忘碑)
24. 토함산 불국사 대웅전 중창 단청 기문 吐含山佛國寺大雄殿重創丹雘記

0001_0014_a_01L桐華寺                  三九四
0001_0014_a_02L𥝧溪寺                  三九七
0001_0014_a_03L南地藏寺                 三九八
0001_0014_a_04L龍淵寺事蹟                四○三
0001_0014_a_05L釋迦如來浮屠碑銘             四○六
0001_0014_a_06L龍淵寺重修碑序              四○八
0001_0014_a_07L富貴寺扁額                四一一
0001_0014_a_08L眞佛菴重修記               四一二
0001_0014_a_09L修道寺重建記               四一三
0001_0014_a_10L水泰寺法堂重創記             四一五
0001_0014_a_11L華山麟角寺講說樓重修記          四一六
0001_0014_a_12L架山天主寺前摠攝有功碑閣記        四一七
0001_0014_a_13L佛國寺大雄殿重創丹雘記          四一八

0001_0015_a_01L25. 금강산 백률사 중수기 金剛山栢栗寺重修記
26. 냉산 도리사 아도화상 사적비 冷山桃李寺阿度和尚事蹟碑
27. 영덕 대둔산 盈德大遯山
27-1. 나한전을 새로 창건하고 성상을 중수한 기문(新剏羅漢殿重修聖像記文)
27-2. 칠성각 七星閣
28. 비슬산 유가사 낙암대사비 琵瑟山瑜伽寺洛巖大師碑
29. 비슬산 수도암 중수기 琵瑟山修道菴重修記
30. 비슬산 도성암 琵瑟山道成庵
30-1. 도성암 중수기 道成菴重修記
31. 비슬산 소재사 琵瑟山消灾寺
31-1. 소재사중수기 1 消灾寺重修記 一
31-2. 소재사 중수기 2 消灾寺重修記 二
32. 비슬산 대견사 琵瑟山大見寺
33. 천주산 북장사 중수기 天柱山北長寺重修記
34. 연악산 갑장암 淵嶽山甲長庵
34-1. 연악산 갑장암 중수기 淵嶽山甲長庵重修記
34-2. 연악산 갑장암 유공찬 淵嶽山甲長庵有功賛
35. 식산 동해사기 息山東海寺記
36. 운제산 오어사 雲梯山吾魚寺
36-1. 불계비문 佛禊碑文
36-2. 염불계 비문 念佛禊碑文
36-3. 운제산 단월 발원 비문 雲梯山檀越發願碑文
36-4. 오어사의 편액 吾魚寺扁額

0001_0015_a_01L栢栗寺重修記               四二○
0001_0015_a_02L冷山桃李寺阿度和尙事蹟碑         四二三
0001_0015_a_03L新剏羅漢殿重修聖像記文          四二六
0001_0015_a_04L七星閣                  四二七
0001_0015_a_05L道成庵                  四三二
0001_0015_a_06L道成庵重修記               四三二
0001_0015_a_07L消灾寺                  四三三
0001_0015_a_08L大見寺                  四三五
0001_0015_a_09L天柱山北長寺重修記            四三五
0001_0015_a_10L淵嶽山甲長庵重修記            四三六
0001_0015_a_11L東海寺記                 四三九
0001_0015_a_12L吾魚寺                  四四○
0001_0015_a_13L雲梯山檀越發願碑文            四四三

0001_0016_a_01L36-5. 오어사 사적 吾魚寺事迹
37. 사불산 대승사 연혁 四佛山大乘寺沿革
38. 운달산 김룡사 사적기 雲達山金龍寺事蹟記
39. 운달산 양진암 중창기 雲達山養真庵重剏記
40. 운달산 화장암 雲達山華藏庵
40-1. 운달산 화장암 중창기 雲達山華藏庵重剏記
40-2. 운달산 화장암 중수기 雲達山華藏庵重修記
41. 팔공산 은해사 八公山銀海寺
41-1. 절을 보호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문(護寺感恩記 )
41-2. 팔공산 은해사 중건기 八公山銀海寺重建記
41-3. 팔공산 은해사 연혁변 八公山銀海寺沿革辨
41-4. 비각에 논을 바치고 수호한 기문(碑閣獻畓守護記)
41-5. 병자년에 헌납한 공에 대한 기록(丙子甲獻納有功記)
41-6. 군수 김공이 절을 보호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기(郡守金公護寺感恩記)
41-7. 종각에 단청을 한 서문(鍾閣丹 序文)

0001_0016_a_01L迎日雲梯得吾魚寺事迹           四四四
0001_0016_a_02L大乘寺沿革                四四六
0001_0016_a_03L金龍寺事蹟記               四四八
0001_0016_a_04L養眞庵重剏記               四五○
0001_0016_a_05L華藏庵重剏記               四五一
0001_0016_a_06L華藏庵重修記               四五二
0001_0016_a_07L護寺感恩記                四五三
0001_0016_a_08L銀海寺重建記               四五四
0001_0016_a_09L銀海寺沿革辨               四五八
0001_0016_a_10L碑閣獻沓守護記              四六一
0001_0016_a_11L丙子甲獻納有功記             四六二
0001_0016_a_12L郡守金公護寺感恩記            四六五
0001_0016_a_13L鍾閣丹序文                四六五

0001_0017_a_01L41-8. 영천군 북습면 은해사의 고적 조사(永川郡北習面銀海寺古蹟調)
41-9. 백흥암의 글씨 새긴 현판(百興庵書蹟刊板)
42. 팔공산 기기암 창건의 원인과 내력(八公山寄寄庵剏建原因來歷)
43. 팔공산 묘봉암의 원인과 내력 및 서적(八公山妙峯庵原因來歷書蹟)
44. 팔공산 중암암의 원인과 내력 및 서적(八公山中巖庵原因來歷書蹟)
45. 팔공산 미타암 八公山彌陁菴
46. 팔공산 충효암 八公山忠孝菴
47. 팔공산 운부암 八公山雲浮菴
48. 팔공산 백흥암 八公山百興庵
48-1. 백흥암 중창기 百興庵重剏記
48-2. 유명 조선국 선교양종정사 화엄대강주 영파대사 비명과 서문(有明朝鮮國禪教兩宗正事華嚴大講主影波大師碑銘并序)
49. 오지산 영지사 고적 五芝山靈芝寺古蹟
50. 경상북도 의성군 귀산면 고운사 慶尚北道義城郡龜山面孤雲寺
50-1. 등운산 고운사 사적 騰雲山孤雲寺事蹟
50-2. 등운산 운수암기 騰雲山雲水庵記
50-3. 함홍선사 비각문 涵弘禪師碑閣文
50-4. 함홍선사 영찬 涵弘禪師影贊
50-5. 수월선사 영찬 水月禪師影贊
50-6. 이후李侯 용준容準의 비문
50-7. 석탑石塔
50-8. 부도浮屠
50-9. 편액扁額
51. 천등산 운람사 天燈山雲嵐寺
51-1. 법당중수기 法堂重修記
51-2. 요사 중수기 寮舍重修記
51-3. 불상을 개금하고 후불탱을 조성하고 겸하여 단청을 한 기문(佛像改金後佛幀兼丹雘記)

0001_0017_a_01L銀海寺古蹟調               四六六
0001_0017_a_02L百興庵書蹟刊板              四六八
0001_0017_a_03L寄寄庵剏建原因來歷            四六九
0001_0017_a_04L妙峯庵原因來歷書蹟            四六九
0001_0017_a_05L中庵原因來歷書蹟             四七○
0001_0017_a_06L銀海寺百興庵重剏記            四七二
0001_0017_a_07L禪教兩宗正事華嚴大講主影波大師碑銘    四七三
0001_0017_a_08L弧雲寺記                 四七八
0001_0017_a_09L雲水庵記                 四七九
0001_0017_a_10L涵弘禪師碑閣文              四八一
0001_0017_a_11L天燈山雲嵐寺法堂重修記          四八五
0001_0017_a_12L寮舍重修記                四八六
0001_0017_a_13L佛像改金後佛幀兼丹艧記          四八七

0001_0018_a_01L52. 선방산 지보사의 불사 사적기 船放山持寶寺佛事事蹟記
53. 산운면 금성산 수정사 山雲面金城山水淨寺
54. 내사면 주월산 주월암 內舍面住月山住月菴
경상남도지부慶尙南道之部
1. 선암사 중수기 仙巖寺重修記
2. 가야산 해인사 고적 伽倻山海印寺古籍
3. 해인사에 유진하며 팔만대장경을 개간한 인유(海印寺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
4. 해인사 사적비 海印寺事籍碑
5. 진양 동쪽 월아산 청곡사 불상 개금 겸 개채기(晉陽東 月牙山青谷寺 佛像改金兼△改彩記)
6.고성 동쪽 벽방산 안정사 시왕전과 나한전 두 곳 불상을 중수한 현판(固城東 碧芳山安靜寺 十王·羅漢兩所尊像 重修懸板)
7. 용화사 현판 기문 龍華寺懸板記文
8. 미륵산 용화사 고금 송덕사적 기문 彌勒山龍華寺古今頌德事蹟記文
9. 마산부 진북면 의림사 馬山府鎭北面義林寺
10. 장용영 공문 壯勇營公文

0001_0018_a_01L船放山持寶寺佛事事蹟記          四八八
0001_0018_a_02L金城山水淨寺               四九一
0001_0018_a_03L住月山住月菴               四九二
0001_0018_a_01L船放山持寶寺佛事事蹟記          四八八
0001_0018_a_02L金城山水淨寺               四九一
0001_0018_a_03L住月山住月菴               四九二
0001_0018_a_04L慶尚南道之部             四九二
0001_0018_a_05L仙巖寺重修記               四九二
0001_0018_a_06L伽揶山海印寺古籍             四九三
0001_0018_a_07L海印寺留鎮八萬大藏經開刊因由       四九六
0001_0018_a_08L海印寺事籍碑               四九九
0001_0018_a_09L晉陽東月牙山青谷寺佛像改金兼△改彩記   五○○
0001_0018_a_10L龍華寺懸板記文              五○五
0001_0018_a_11L彌勒山龍華寺古今頌德事蹟記        五○五
0001_0018_a_12L義林寺記                 五○七
0001_0018_a_13L壯勇營公文                五○八

0001_0019_a_01L11. 마산부 내서면 광산사(일명 백련사) 현판문 馬山府內西面匡山寺(一名白蓮寺)懸板文
12. 광산사 대웅전 창건기 仝寺大雄殿創建記
13. 광산사 극락전 창건 현판문 仝寺極樂殿刱建懸板文
14. 광산사가 보존하고 있는 서적(仝寺所存書籍)
15. 의령군 덕암면 수도사내 편액 및 탑비(宜寧郡德岩面 修導寺內 扁額及塔碑)
16. 수도사 중수 편액기 修導寺重修扁額記
17. 의령군 일가례면 백련암 탑비 宜寧郡一嘉禮面白蓮菴塔牌
18. 구룡사 사적, 아울러 부도이안비명서(龜龍寺事蹟 并浮屠移安碑銘序)
19. 상동면 백운동 백운암 上東面白雲洞白雲菴
20. 하동면 백룡암 중수기 下東面白龍菴重修記
21. 유하면 불모산 장유암 柳下面佛母山長有菴
22. 우부면 봉곡리 흥부암 右部面鳳谷里興府菴
23. 활천면 서림사 活川面 西林寺
24. 용추사 편액 龍湫寺扁額
24-1. 경상남도 안의군 지대면 장수사내 용추암 창수원류와 흥폐부안록(慶尚南道 安義郡 知代面 長水寺內 龍湫菴創修 源流興廢符案錄)
24-2. 덕유산 장수사 용추암 중수기 德裕山 長水寺 龍湫庵 重修記
25. 은신암 사적 隱身菴事蹟
26. 영각사 사적 靈覺寺 事蹟
27. 통도사 창창 유서 通度寺創剏由緒

0001_0019_a_01L匡山寺記                 五○九
0001_0019_a_02L修導寺內扁額及塔碑            五一三
0001_0019_a_03L白蓮菴塔碑                五一五
0001_0019_a_04L龜龍寺事蹟并浮屠移安碑          五一六
0001_0019_a_05L白雲洞白雲菴               五一八
0001_0019_a_06L白龍菴重修記               五一八
0001_0019_a_07L佛母山長有菴記              五一九
0001_0019_a_08L興府菴記                 五二○
0001_0019_a_09L西林寺記                 五二一
0001_0019_a_10L龍湫寺扁額                五二二
0001_0019_a_11L隱身菴事蹟                五三○
0001_0019_a_12L靈覺寺事蹟                五三一
0001_0019_a_13L通度寺創剏由緒              五三二

0001_0020_a_01L28.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사리 부도비 娑婆教主釋迦如來靈骨舍利浮圖碑
29. 양주 통도사 석가여래 사리기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
30. 비명록 碑銘錄
31. 화엄종주 우담 대화상 비명 華嚴宗主 雨潭大和尙碑銘병서并序
32. 상연대암 중수기 上蓮臺庵重修記
33. 영원암 靈源庵
34. 영원암 중수기 靈源庵重修記
35. 신흥사 新興寺
36. 오봉암 五峯庵일명 옥천암玉泉庵이라고도 한다
37. 동축사 東竺寺
38. 용문사 창건기 龍門寺刱建記
39. 남해 금산 영응 기적비 南海錦山靈應紀蹟碑
40. 대한중흥 송덕축성비 大韓中興頌德祝聖碑
41. 망운산 영장사기 望雲山靈藏寺記
42. 망운산 화방사 중창서 望雲山花芳寺重創序

0001_0020_a_01L娑婆教主釋迦如來靈骨舍利浮圖碑      五三四
0001_0020_a_02L文靖公牧隱李先生所著           五三八
0001_0020_a_03L華巖宗主雨潭大和尚碑銘          五四八
0001_0020_a_04L上蓮臺庵重修記              五四九
0001_0020_a_05L靈源庵                  五五○
0001_0020_a_06L靈源庵重修記               五五三
0001_0020_a_07L新興寺                  五五四
0001_0020_a_08L五峯庵                  五五五
0001_0020_a_09L東竺寺                  五五六
0001_0020_a_10L龍門寺剏建記               五五七
0001_0020_a_11L靈應紀蹟碑                五六○
0001_0020_a_12L望雲山靈藏寺記              五六三
0001_0020_a_13L望雲山花芳寺重創序            五六七

0001_0021_a_01L43. 영우 남해 망운산 화방사기 嶺右南海望雲山花芳寺記삼창 병서 三刱并序
47. 연화산 옥천사 창건기문 蓮華山玉泉寺創建記文
48. 와룡산 운흥사 대웅전 불상개금 중수기 臥龍山雲興寺 大雄殿佛像 改金重修記
49. 운흥사 극락전 창건기 雲興寺極樂殿刱建記
50. 재약산 영정사 고적 載藥山霛井寺古蹟
51. 표충사사적 表忠祠事蹟
52. 서원 이건 사적 書院移建事蹟
53. 만일회 사적 萬日會事蹟
54. 서원향례 복사기 書院享禮復祀記
55. 표충사 전사비각 중수기 表忠寺殿舍碑閣重修記
55-1. 삼가 서산 대화상의 옥장 아래에 봉정함(謹奉呈西山大和尙玉帳下)
55-2. 붕상인의 시축운을 차운하여 송운 대사를 추모하여 읊다(次鵬上人軸中韻追詠松雲大師)
56. 거창부 우두산 견암사 사적 居昌府 牛頭山 見巖寺事蹟
57. 거창부 대덕산 연수사 중수기 居昌府大德山演水寺重修記
58. 대덕산 연수사 중수기 大德山演水寺重修記

0001_0021_a_01L望雲山花芳寺誌              五七三
0001_0021_a_02L曹溪山第二世故斷寺真覺國師碑       五七六
0001_0021_a_03L花芳寺誌跋                五八二
0001_0021_a_04L花芳寺三法堂重創記            五八三
0001_0021_a_05L蓮華山玉泉寺創建記文           五八六
0001_0021_a_06L臥龍山雲興寺大雄殿佛像改金重修記     五八八
0001_0021_a_07L雲興寺極樂殿剏建記            五九○
0001_0021_a_08L載藥山霛井寺古蹟             五九一
0001_0021_a_09L表忠祠事蹟                五九六
0001_0021_a_10L書院享禮復祀記              六○○
0001_0021_a_11L表忠寺殿含碑闍重修記           六○一
0001_0021_a_12L牛頭山見巖寺事蹟             六○三
0001_0021_a_13L大德山演水寺重修記            六○五

0001_0022_a_01L59. 단성군 율곡사 번와판문 丹城郡栗谷寺 飜瓦板文
60. 대성산 정취암 중건기 大聖山淨菴重建記  -신등면 정취암 新等面淨趣菴-
61. 지리산 대원암 세존사리탑 중수기 智異山大源庵世尊舍利塔重修記
62. 지리산 대원난야 창건기 智異山大源蘭若創建記
63. 방장산 심적암 중수기 方丈山深寂庵重修記
64. 방장산 심적암 중수기 方丈山深寂庵重修記
65. 방장산 화림암 중창기 方丈山花林庵重刱記
66. 석남사 내력 石南寺來歷
67. 조선국 경상우도 곤양군 북쪽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 (朝鮮國慶尙右道昆陽郡北智異山靈嶽寺重建碑)
68. 다솔사 명부전 태양루 사왕문 중수기 多率寺冥府殿大陽樓四王門 重建記
69. 팔상전 중수기 八相殿重修記

0001_0022_a_01L栗谷寺飜瓦板文              六○七
0001_0022_a_02L大聖山淨菴重建記新等面淨趣菴       六○七
0001_0022_a_03L智異山大源庵世尊舍利塔重修記       六○九
0001_0022_a_04L智異山大源蘭若創建記           六一○
0001_0022_a_05L方丈山深寂庵重修記            六一一
0001_0022_a_06L方丈山深寂庵重修記            六一三
0001_0022_a_07L方丈山花林庵重剏記            六一四
0001_0022_a_08L石南寺來歷                六一五
0001_0022_a_09L北智異山靈嶽寺重建碑           六一八
0001_0022_a_10L多率寺冥府殿大陽樓四王門重建記      六二一
0001_0022_a_11L八相殿重修記               六二二

0001_0023_a_01L
경기도(京畿道之部)
내무부 지방국 찬집內務部地方局纂輯
조동영 (역)
1. 고려국 오관산 대화엄영통사 증시대각국사 비명 병서 高麗國五冠山 大華嚴靈通寺 贈諡大覺國師 碑銘 并序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태위檢校太尉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상서判尙書 예부사禮部事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신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조산랑朝散郞 상서尙書 공부시랑工部侍郞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 오언수吳彦修는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상이 왕위를 계승한 지 4년6)째 되는 을사년(1125, 고려 인종 3) 가을 7월 경오일에 아울러 전액篆額까지 내렸다. 대각국사의 문인인 도승통都僧統 징엄澄儼 등이 국사의 행사行事를 갖추어 보고하기를, “우리 선사先師께서 세상을 뜨신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 비명碑銘이 찬술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덕업德業이 마멸되어 잊혀질까 늘 두렵습니다. 오직 임금께서 이 일을 애처롭게 여기셔서 비문을 짓도록 하여 영구히 전해지게 하소서.”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 국사는 나에게 종조부從祖父가 되신다. 남겨진 공덕이 환히 빛나서 볼 만한 점이 있는데, 어찌 덮어 두고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신 김부식金富軾7)에게 행장을 내려주며 “그대가 비명을 짓도록 하라.”하셨다.
신이 사양하였으나 승낙받지 못하였으므로 물러 나와 찬술하였다. “신의 견해로 보건대, 국사는 성인의 도에 있어서 천성적으로 터득하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라 하겠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줄 아는가 하면,

0001_0023_a_01L
朝鮮寺剎史料

0001_0023_a_02L內務部地方局纂輯

0001_0023_a_03L○京畿道之部

0001_0023_a_04L

0001_0023_a_05L○高麗國五冠山大華嚴靈通寺 贈諡大覺國師碑銘并序

0001_0023_a_06L
金紫光祿大夫檢校大尉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
0001_0023_a_07L書禮部事修△ [1]  史上△ [2] 國臣 [3] 〔以下欠略: 金富軾奉宣撰

0001_0023_a_08L朝散郎尚書工部侍郎△△ [4] 紫金魚袋臣 [5] 〔以下欠略: 彥修奉宣書

0001_0023_a_09L
上嗣位之四年乙巳秋七月庚午 [6] 大覺國師門人都僧統澄儼䓁具師之
0001_0023_a_10L行事以聞曰吾先師即世久矣而碑銘未著常懼其德業有所磨滅而△ [7]
0001_0023_a_11L [8] 〔以下欠略: 上哀憐之使之裒撰以示久遠上曰嗚呼師於余爲從祖而遺功餘烈炳然
0001_0023_a_12L可觀其可盖而不章乎 [9] 授臣富軾以行狀曰汝其銘之
臣讓不獲命退
0001_0023_a_13L而敘曰以臣觀之師於聖人  [10] 可謂性得而生知者也何以知其然哉

0001_0024_a_01L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 지나게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가한 뒤에 도덕은 쇠퇴하고 학문은 황폐한 때를 당하여 국사만이 오로지 세태와는 반대로 옛 성현을 따라 조술祖述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그가 수립한 공적이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으니, 자사子思의 말에, ‘스스로의 정성으로 발명發明한 자’가 이러한 유형일 것입니다.”
국사의 휘는 석후釋煦이고,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자는 의천義天인데, 그 후 이름이 송나라 철종의 휘와 같다 하여 자字를 대신 썼다. 우리 태조대왕의 4세손이며,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가 밤에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여 을미년(1055) 가을 9월 28일에 이르러 궁중에서 낳으셨다. 그때 향기가 가득하여 오래 지난 뒤에 사라졌다. 국사는 어릴 때부터 영특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책을 읽고 글을 지음에 있어, 그 뛰어나고 영리함이 마치 오래 익힌 것과 같았다. 형제들이 모두 훌륭한 행실이 있었지만, 국사가 유독 걸출하고 빼어났다. 문종이 하루는 왕자들에게 이르기를, “누가 승려가 되어 복전福田을 지음으로써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겠느냐?” 하자, 국사가 일어나 아뢰기를, “신에게 출가할 뜻이 있사오나 오직 상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모후母后는 예전의 태몽이 고귀한 징조라고 여겨 애석해하였지만 이미 부왕의 하명을 받은 터라 어찌하지 못하였다. 을사년(1065)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불러와 머리를 깎게 하고, 상이 두 번 절하며 경덕국사를 따라 영통사靈通寺8)로 가서 지내도록 하였고, 겨울 10월에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계를 받게 하였다. 당시에 나이가 11세였으나 학문을 쉬지 아니하여 이미 성인成人을 능가하였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징관법사澄觀法師9)의 책(『화엄경주소華嚴經註疏』)를 전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부터 지혜와 이해력이 날마다 증진하였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더욱 스스로 부지런히 힘써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수많은 책을 널리 읽고 잘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가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배웠다. (당나라) 현수賢首10)의 교관敎觀으로부터 돈점頓漸과 대소승大小乘의 경율론經律論과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여력이 있으면 외학外學도 근본부터 지엽까지 견문하여 중니仲尼(공자)· 노담老聃(노자)의 서적과 자사집록子史集錄 및 백가百家의 학설까지 일찍이 그 정수를 생각하고 음미하여 그 근저를 찾아냈다. 그러므로 의론이 종횡으로 내달리고 흘러나가서

0001_0024_a_01L [11] 〔以下欠略: 自少知學不爲紛華盛麗之所移及其出家當道衰學廢之時獨能背馳於時態追古聖
0001_0024_a_02L賢而祖述之不幸短命而其所樹立如此子思有言自誠而明者其是類
0001_0024_a_03L
師諱釋煦 俗姓王氏字義天後以名犯掊 [12] 宗諱以字行我△宗 [13]
0001_0024_a_04L王四 [14] 〔以下欠略: 世孫而文宗王第四子也母仁睿太后李氏夜夢若有龍入懷而有身焉
0001_0024_a_05L至乙未秋九月二十八日生於宮中時有香氣郁然久而後歇師少超悟
0001_0024_a_06L讀書屬辭精敏若宿習兄弟皆有賢行而師傑然出鋒頴上一△△ [15]
0001_0024_a_07L子曰孰能 [16] 〔以下欠略: 爲僧作福田爲利益乎師起曰臣有出世志惟上所使上曰善

0001_0024_a_08L
[17] 前夢貴徵竊惜之而業已受 君命叵如之何乙巳五月十四日徵景德
0001_0024_a_09L國師於內殿剃髮 上再拜之許隨師出居靈通寺冬十月就佛 [18] 〔以下
0001_0024_a_10L欠略: 日寺戒壇受時春秋十一歲而學問不息己能成人甞夢人傳澄觀法師書自是慧解日進

0001_0024_a_11L
至年甫△ [19] 益自勤苦早夜矻矻務博覽強記而無常師道之所存則從而
0001_0024_a_12L學之自賢首教觀及頓漸大小乘經律論章䟽無不探索又餘力外學
0001_0024_a_13L [20] 〔以下欠略: 見聞淵橫自仲尼老聃之書子史集錄百家之說亦甞玩其菁華而尋其根柢故議論縱橫馳

0001_0025_a_01L그 끝이 없었다. 비록 노사老師와 숙덕宿德이라 할지라도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당시 사람들이 “법문法門에 종장宗匠이 있게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정미년(1067) 7월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기리며 우세승통祐世僧統으로 삼았다. 국사는 일찍부터 송나라에 가서 불도를 배우려는 뜻을 가졌는데, 진수 정원晉水淨源11) 법사가 지혜와 수행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국사는 송의 상인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보내 예를 갖추었다. 원공源公이 국사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곧 답장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국사는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선종宣宗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인 송나라 원풍元豐 7년(1084) 봄 정월에 궁으로 들어가 정성껏 간청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지만,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국사가 어전에서 신료들과 더불어 말하기를, “성현은 몸을 잊고 도를 흠모하였으니, 현장玄奘12)이 서역으로 간 것과, 의상義湘13)이 중국에 들어간 경우가 그렇습니다. 참으로 편안히 지내면서 스승을 구하려고 힘쓰지 않는 것은 출가한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간절하였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자, 상이 크게 감동하여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의 결의가 확고하여 가부를 결정하지 않고 파하였다.
이듬해 4월 경오일 밤 상왕 및 태후에게 올리는 편지를 남겨놓고,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정주貞州에 이르러 상객선商客船을 타고 떠났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관료와 제자인 낙진樂眞, 혜선慧宣, 도린道隣 등을 보내어 수행하도록 하였는데, 5월 갑오에 송宋나라 판교진板橋鎭에 이르렀다. 이때 밀주지사密州知事인 조봉랑朝奉郞 범악范鍔이 영접하여 위로하고, 즉시 표주表奏를 올려 국사가 송나라에 온 뜻을 갖추어 보고하니, 황제가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소주정蘇注廷에게 명하여 안내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송의 수도(개봉)에 있는 계성사啓聖寺에 들어갔다. 중서사인中書舍人 범백록范百祿이 주선하여 며칠 만에 수공전垂拱殿에서 철종을 배알하니 객례客禮로써 대우하고 은택을 극진하게 내렸다. 다음날 표장表狀을 올려 학업을 배울 스승을 소개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특별히 조서詔書를 내려 그 뜻을 따르게 하니 드디어 화엄학의 유성有誠 법사를 만나뵐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황제가 (고려의) 승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양가兩街에 명하여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식을 갖춘 이로 스승이 될 만한 이를 미리 선발하게 하였더니, 양가에서 유성 법사를 추천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승통이 법사에게 절하고 제자의 예를 행하려 하자, 유성 법사는 세 번이나 사양한 뒤에 받아들였다. 나아가 여쭙기를, “모갑某甲은 해외의 비루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도를 구한 나날에 아직 얻은 바가 없으니, 원컨대 법사께서는 자애롭게 가련히 여기시어 저의 가득 찬 미혹함을 거두어주소서.”라고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예전 불자들은 고심刳心하여 법을 행하되 한 문장 한 구절을 구함에 있어서도 전륜성왕의 지위까지 버렸는데, 지금 상인上人이 이를 실행하였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할만하다. 원컨대 일승법에 뜻을 같이하며 함께 만행萬行을 닦아 화장세계의 바다에 노니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승통이 이러저러한 일을 청해 물으니, 법사가 찬탄하기를, “말의 뜻이 그윽하고 간절하여 중관重關의 법을 잘 계도하니, 법왕의 참된 법자法子가 아니면 의상의 후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조지朝旨를 받들어 주객원외랑 양걸楊傑14)과 함께 개봉을 떠나 배를 타고 회사淮泗에 이르렀다가 계속 나아가 여항餘杭(현재 절강성 항주 지역)에 있는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를 찾아가 정원淨源 공을 뵙고 유성 공을 만났을 때와 같은 예를 올리자, 정원 공은 엄숙하게 앉아있었다. 승통이 앞으로 나아가 여쭙기를, “모갑이 스님의 도를 우러러 그리워하여 하루를 1년 같이 여기고

0001_0025_a_01L衮衮 [21] 無津涯雖老師宿德皆自以爲不及聲名  [22] 時謂法門有宗匠
0001_0025_a_02L
丁未七月乙酉 教書褒爲祐世僧統師嘗△△ [23] 如△△△ [24] [25] 〔△△△
0001_0025_a_03L△△△△△△△: 晋水淨源法師以慧行爲學者師託舶賈致書以修禮源公知師非常人即復書相招由是欲往滋〕甚至 宣王在位第二年是宋元豐七年春正月入內
0001_0025_a_04L誠請 上會羣臣議皆以爲不可師於△△上前與羣臣言 [26] 〔以下欠略: 聖賢忘軀慕道如玄奬往西域義湘入中國苟安安而不務求師非所以出家本意其言懇切繼之以泣上感激
0001_0025_a_05L意許之而羣臣議確依違而罷
至明年四月庚午夜留書上 王及太后
0001_0025_a_06L卒弟子壽介微服至貞州寓商客船發 [27] 〔以下欠略: 上聞之驚差遣官僚與弟子樂眞慧宣道隣從之五月甲午至大宋板橋鎭知密州朝奉郎范鍔迎勞即附表陳所
0001_0025_a_07L以來朝之意 皇帝命△ [28] 客員外郎蘇注廷導之
秋七月入京師啓聖寺
0001_0025_a_08L以中書舍人范百祿爲主數日見垂拱殿 [29] 〔以下欠略: 待以客禮寵數渥縟明日表乞承師受業優詔從之遂見華嚴有誠法師先此皇帝聞僧統之來詔兩街預選
0001_0025_a_09L高才碩學堪爲師範者兩街推薦誠師
至是僧統樞衣下風欲行弟子之
0001_0025_a_10L誠師三辭而後受之乃進曰 [30] 海外之 [31] 〔以下欠略: 鄙人也虛襟求道之日又未有所得願師慈憫開我迷雲答古佛刳心而爲法至有求一文一句而捨轉輪王位今上人
0001_0025_a_11L能行之可謂難至 [32] 願同志一乘同修萬行以游華藏海者吾之願也於是
0001_0025_a_12L僧統請問云云 [33] 辭旨婉切善啓重開 [34] 非法 [35] 〔以下欠略: 王之眞子即義湘之後身
復承朝旨與主客員外郎楊傑出京師沿泝達淮泗浸尋以至餘杭詣大中祥符寺謁源
0001_0025_a_13L公如見誠公之禮原公儼然而坐僧統進曰某甲仰慕道誼以日爲歲

0001_0026_a_01L험난함을 무릅쓰고 모든 일을 제쳐놓고 와서 뵈니, 원하옵건대 금구金口의 옥음玉音을 열어 보여서 마침내 깨닫게 하여 주소서.”하니, 원공이 이르기를, “옛날 혜사慧思15)가 한번 지의智顗16)대사를 친견하고 곧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만난 구면임을 알았으니, 지금 승통이 찾아온 것도 전생의 오랜 숙연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무릎 꿇고 하는 예를 차릴 것도 없이 강의를 청해 들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 정성이 도에 맞아 떨어진 것이 마치 겨자씨가 바늘 끝에 닿는 것과 같이 묻고 답하고 하여 절구를 찧어 울리는 듯한 모습을 다하였다.
원공이 지주知州인 포종맹蒲宗孟의 초청으로 남산 혜인원慧因院17)에 들어가 주역본周譯本(실차난타實叉難陀 역 80권 본) 『화엄경』을 개강開講하게 되었다. 승통이 돈을 희사하여 재齋를 베풀었는데 많은 학도들이 모여 들었다. 원공이 전에 머물던 곳에 현수賢首(법장法藏)의 교장敎藏과 함께 그 조사상祖師像을 각기 두었었는데, 여기에 와서 다시 마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양공이 그 뜻을 알고 지주(포종맹)와 모든 관리들과 함께 힘을 합쳐 도모하였다. 승통도 은銀을 희사하고 교장 7,500여 권을 안치하였다. 귀국한 후 또 금으로 쓴 대경(화엄경) 삼역본(60·80·40권 본)을 보내어 성수聖壽를 축원하였다. 혜인원은 본래 선원이었으나, 강원으로 고치고 조세를 특별히 면제하였으니, 조정에서 승통을 위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고려)국왕이 표문表文을 보내 국사를 귀국시켜달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철종이 조칙으로 승통을 수도로 오게 하였는데, 원공에게 청하여 함께 오는 배 위에서도 강학講學을 그만두지 않았다.
원우元祐 원년(1086) 이후 2월 13일에 입경入京하여 황제를 재차 알현하고 5일 동안 머무른 다음, 하직 인사를 하였다. 수주秀州 진여사眞如寺에 이르러 능엄소주楞嚴疏主18)의 탑정塔亭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여 희사금喜捨金을 사승寺僧에게 주어 보수토록 하였다. 양공楊公이 이르기를, “선공璿公이 오늘에야 비로소 지음知音을 만났다.”고 하였다. 오흥吳興의 장형章衡이 그 사실을 기록하되, “승통은 독실한 호학好學의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그해 여름 4월에 다시 혜인원에 갔더니 원공이 도를 전하고 나서 바르게 앉아 분향하고는, “원컨대 승통은 귀국하여 널리 불사를 일으키고 하나의 등불을 전하여 백 개, 천 개의 등이 서로 이어서 끝이 없게 하라.”고 하였고, 마침내 경서經書와 향로와 불자拂子를 주어 표신表信으로 삼았다. 이는 승통 뿐만 아니라 원공에게도 도움이 되어 도가 더욱 증진되었다. 원공의 이름이 더욱 높아진 것은 승통이 그것을 선양하였기 때문이다. 원공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천태산에 가서 정광불롱定光佛隴에 올라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를 참배하고 직접 발원문을 지어 탑 앞에서 예를 올리면서 동국東國에 천태의 가르침을 펴겠다고 서원했다. 양공이 이를 기록하고 승려 중립中立이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밀수密水에서 시작하여 수도를 거쳐 오월吳越로 왕래하는 동안에 무려 14개월이 걸렸다. 이르는 곳마다 명산과 뛰어난 절경이 있었는데 성스러운 자취가 있는 곳에는 참례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만나서 법의 요체를 청해 물은 고승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정원 공과 같은 이는 함께 한 기간이 59일이나 되었다. (결락)
○○는 혜림慧林과 선연善淵이고, 계율戒律은 택기擇基와 원조元照였으며, 범학梵學은 천길상天吉祥19)과 소덕紹德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탁월하여 존경할만하였다. 따라서 모두 자신의 장점을 키워 일가를 이룬 선禪과 강講의 종사宗師로서 각기 대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락) (승통은) 삼장三藏과 모든

0001_0026_a_01L憚險難百舍來謁願開金口王 [36] 以△ [37] 覺語 [38] [39] 〔以下欠略: 公曰昔慧思一見智顗即知靈山之舊今僧統之來焉知非夙緣耶不須膝行爲禮請講以所聞於是誠投道應如芥
0001_0026_a_02L就鍼有問有答盡其春容
源公因知州蒲公宗孟之請入南山慧因院
0001_0026_a_03L講周譯經僧統施錢營齊 [40] 以延與 [41] [42] 〔以下欠略: 徒甚衆源公於前所居之處各置賢首敎藏並祖師像至此又欲辦焉而未能楊公知其意與知州及諸僚力營之僧統亦捨銀
0001_0026_a_04L教藏七千五百餘卷及還國又以金書大經三本歸之以祝 聖壽慧因
0001_0026_a_05L本禪院改爲講院特免租稅 [43] 〔以下欠略: 朝廷爲僧統故也會國王上表乞令歸國遂詔趣赴京請源公同舟講學不輟
以元祐元年後二月十三日入京再見淹五
0001_0026_a_06L日 朝辭至秀州眞如寺見楞嚴疏王塔亭傾圮慨然歎之以金屬寺僧
0001_0026_a_07L修葺楊公曰璿公今日始遇知 [44] 〔以下欠略: 音興章衡記其事云僧統可謂篤厚好學君子矣
夏四月復入慧因院源公傳道訖正坐焚香云願僧統歸廣作佛事傳一燈使百
0001_0026_a_08L千燈相續而無窮遂授經書爐拂以為信非△ [45] 僧統資源公而道益進
0001_0026_a_09L公名所以益高以僧統揚之也 [46] 〔以下欠略: 禮辭源公行至天台登定光佛隴觀智者親筆願文禮於塔前誓傳敎于東土楊公志之沙門中立立石始自密室京以及越往來
0001_0026_a_10L凡十有四月所至名山勝境諸有聖迹無不瞻禮所遇高僧五十餘人
0001_0026_a_11L皆咨問法要若源公雅所望以爲〔以下次略〕 [47]

0001_0026_a_12L
慧林善淵戒律則擇其元照梵學則天吉祥紹德此皆卓然可尙故資其
0001_0026_a_13L所長者已及將歸禪講宗師各率徒〔以下欠略〕 [48]

0001_0027_a_01L학문을 두루 겸비하였으니, 참으로 법을 중시하는 대보살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지 않고 자신이 터득한 것을 가지고 여러 법사들과 서로 시론試論하고자 송나라에 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어준 시에 “그 누가 우세(승통) 스님 같을까.”라고 하였다. (결락) 삼한의 왕자가 서쪽에서 법을 구하니 “(사해四海)습착치習鑿齒와 미천彌天20)이 서로 대적하니 당시의 현인들이 높이 받드는 바가 되었다.” 라고 한 유형이 모두 그러하다.
여름 5월 20일에 본국의 조하사朝賀使가 돌아오는 편을 따라 배를 타고 29일 (결락) 상과 좌우 신하가 감동하지 않음이 없었다. 황제가 선사한 금사金絲로 짠 비단과 국왕태후가 보낸 재보財寶가 수만 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 모두를 여러 도량과 법문을 들은 승려들에게 베풀어 주고,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결락) 국사는 태어나면서부터 기본이 이미 다져졌다. 여러 해 동안 국가에서 항상 법주를 구하였으나 마땅한 인물을 얻지 못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교리를 선양하고 오묘하고 신비한 이치를 다하자 학인들이 바다처럼 모여들었으니 일찍이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 임금과 여러 신하들이 (결락)
○○ 태만하여 강학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청이나 개인의 서책들이 거의 다 없어지거나 흩어져 버렸다. 마침내 다시 중국, 거란, 일본 등지에서 서책을 구입해 왔다. 또 신미년(1091) 봄에 남방으로 다니면서 수집해 얻은 책이 무려 4,000권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모두 먼지로 얼룩지거나 좀이 먹었을 뿐 아니라 완질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모두 수습하여 상자에 담아서 (개경으로) 돌아와 흥왕사興王寺에다 교장사敎藏司를 청해 설치하고 이름 있는 학자들을 불러 잘못되고 빠진 부분을 교정하도록 하였다. 이를 목판에 간행하게 하니 몇 년 안 되어 문적文籍이 대대적으로 갖추어지니 학자들이 기뻐하며 의지하였다.
갑술년(1094) 봄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로 들어갔는데 그의 교학은 예전과 같았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順宗이 병세가 위독해지자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이 대가람을 창건하여 액호額號를 홍원사로 하리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아마도 스스로 헤어나지 못할 듯하니, 만약 다음 임금이 잊지 아니하거든 승통도 마음을 같이 하여 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하니, 국사가 울면서 이르기를, “신이 감히 심력을 다 하여 죽든 살든 그 마음을 변치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홍원사가 낙성되자, 국사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에 해인사로 물러나 머물며 시냇물과 산천에서 유유자적하면서 호연浩然한 기백으로 여생을 마칠 생각을 하였다. 헌종이 두 차례나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을해년(1095) 겨울 10월 8일에

0001_0027_a_01L學之悉備此眞重法大菩薩者也然非是始學欲以己所得與諸師相試
0001_0027_a_02L故來耳故其所贈詩有孰若祐世師〔以下欠略〕 [49]
0001_0027_a_03L三韓王子西求法 [50] 齒彌天△△△ [51] 其爲時賢推尊類皆然也
夏五月二
0001_0027_a_04L十日隨本國朝賀回使放洋二十九日〔以下欠略〕 [52]
0001_0027_a_05L上及左右無不感動 皇帝所贈金繒 國王太后寄送財寶以巨萬計
0001_0027_a_06L舉施諸道場及所聞法諸師無少〔以下欠略〕 [53]
0001_0027_a_07L師誕年肇基旣成多歷年 國家每議其主而難其人至是宣演教理
0001_0027_a_08L妙窮神學者 [54] 得未曾有 上〔以下欠略〕 [55]

0001_0027_a_09L
怠不講故官幐私褚亡散幾△ [56] 遂重購求書於中國以及契丹日本又於
0001_0027_a_10L辛未春南遊搜索所得書無慮四千卷 [57] 〔以下欠略: 塵昏蟬斷編簡壤舛倶収並拾包匭以歸請置敎藏司於興王寺召名流校定謬缺使上之鈆槧不幾稔閒文籍大備學者
0001_0027_a_11L忻頼
甲戌春二月初入洪圓寺其教學如故居興王初 順王寢疴召師
0001_0027_a_12L寡人嘗願作大伽藍額號洪圓今病篤 [58] 〔以下欠略: 想不自濟若嗣君不相忘師其同心以終吾願師涕泣曰臣敢盡心力死生不易至於旣成乃命住持焉夏五月退居
0001_0027_a_13L海印寺溪山自適浩然有終焉之志 獻王再徵不能致
乙亥冬十月八

0001_0028_a_01L 숙종이 즉위하고 근신近臣을 수차례 파견하여 친서를 보내 맞이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또 하교하여 이르기를, “나의 국사에 대한 바람은 간절하다 할 것입니다. 덕행의 고상함을 칭송하는(高山景行) 차원이 아니라 자나 깨나 그리운 생각을 더하는 것은 척령재원鶺鴒在原21)의 의리가 소중한 때문이지 다른 뜻이 없습니다. 비록 직접 가지는 못해도 누차 정성을 다해 청하였건만 높은 자취만 남겨두고 훌훌 떠나서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십니다. 옛날 현달한 자도 백이伯夷22)와 유하혜柳下惠23) 말고는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으니, 바라건대 혹시나 한 번 오셔서 내 뜻에 부응해 주시지요.”라고 하였다. 국사가 홀연히 이르기를, “예를 갖추고 중후하게 말씀하시니 의리상 거역할 수가 없다.”하고는, 이에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니 교학은 처음처럼 한결 같았다.
정축년(1097) 여름 5월에 국청사國淸寺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교학을 강론하였다. 천태교학은 예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가 중간에 폐해졌는데, 국사가 중국의 전당錢塘에서 도道를 자문하고 불롱佛隴에서 맹세를 하여 천태를 일으켜 세우려는 생각을 한 이후로 하루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인예태후가 듣고는 기뻐하며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숙종이 이어서 그 공사를 마쳤다. 국사는 이때에 천태의 교문敎文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교리를 탐구하여 모두 깨닫게 하였다. 지관止觀24)에 두루 밝고 말씀과 묵언黙言에 구애되지 않으며 책만 믿고 고수하려는 생각을 모두 뽑아내고 악견惡見으로 공空을 취하는 집착을 깨뜨렸다. 당시의 배우는 이들이 국사의 성인의 경계를 우러러 바라보며 예전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으로) 오는 것이 거의 1,000명이나 되었으니, 성대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의하는 이들이 국사를 영원토록 변치 않는 종주로 삼았으니, 어찌 (국사를)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무인년(1098) 여름 4월 경인일에 상이 다섯째 왕자에게 명하여 국사를 모시게 하고 손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도승통都僧統이 바로 그이다. 신사년(1101) 봄 2월에 상이 홍원사洪圓寺의 구조당九祖堂이 완성되자 국사를 청하여 중수重修 낙성식을 하였다. (화엄의) 전대의 조보祖譜가 일정하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 마명馬鳴, 용수龍樹, 천친天親, 불타佛陀, 광통光統, 제심帝心, 운화雲華, 현수賢首, 청량淸凉을 9조祖로 삼았으니, 국사가 정한 것이다. 가을 8월에 병환이 나서 궤상을 기대고 앉아 관심觀心을 하거나 지경持經을 했는데 피곤하다고 스스로 멈추지 않았다.
문인들이 불사를 하겠다고 요청하자, “부처님을 섬긴 지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명의의 처방을 지어 (신통력 있는) 보의寶衣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들로 하여금 (국사의) 복을 빌어 청하게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상이 직접 와서 위문하기를,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원컨대 하시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십시오.”하니, 국사가 이르기를, “바라는 것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입니다만 병이 그 뜻을 빼앗아 갔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지극한 정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가 남긴 가르침에 부응하신다면, 죽어도 썩지 않는 영원한 공덕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겨울 10월 5일 임진일에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입적하시니 향년은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이보다 앞서 간혹 보당寶幢이 꺾여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상이 국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조의금을 보내고, 책봉을 더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대각大覺이라 하였다. 16일 계묘일에 다비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일에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동쪽(震方)에 안치하였으니, 본교本敎의 제도에 따른 것이다.
불법이 양梁나라 대통大通 원년 정미년(527)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의상과 원효가 나왔으니, 이 두 대사는 성스러운 혈통(種性)으로 대종사가 되었다. 희미한 빛(末光)이 비춰주고 잔물결(餘波)이 더해질 때에는 모두가 어두움(黮闇)에서 벗어나 높고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인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불법도 점차 해이해지자, 세상에 이른바 명사名士라는 자들이 마음은 명성에 빠지고 지혜는

0001_0028_a_01L 肅祖卽位數遣近臣齎書迎之固辭 [59] 〔以下欠略: 又敎曰不穀之望師可謂切矣非高山景行寤寐增想而鶺鴒在原義重匪他雖不能往屢以誠請拂衣高跡
0001_0028_a_02L不我願 [60] 古之達者非夷非惠與△ [61] 卷△ [62] [63] 或△ [64] 副我意焉師翻然曰
0001_0028_a_03L禮厚辭義不可拒乃赴都復居興王寺教學如 [65] 〔以下欠略: 初
丁丑夏五月住持國淸寺初講天台敎是敎舊巳東漸而中廢師自問道於錢塘立盟於佛隴思有以振起之未曾
0001_0028_a_04L一日忘於心 仁睿大后聞而悅之經始此寺 肅祖繼之以畢厥功
0001_0028_a_05L於此之時依文而顯理究理而盡 [66] 〔以下欠略: 悟止觀圍明語默自在抜盡信書之守破惡取空之執一時學者瞻望聖涯捨舊而自來幾一千之盛矣哉世之議台宗者
0001_0028_a_06L師百世不遷之宗渠不信哉
戊寅夏四月庚寅 上命第五子侍之師
0001_0028_a_07L落其髮今都僧統是也辛巳春二 [67] 〔以下欠略: 月上以洪圓寺九祖堂成請師重修而落之前世爲祖譜不一今以馬鳴·龍樹·天親·佛陀·光統·帝心·雲華·賢首·淸凉爲九祖
0001_0028_a_08L師所定也秋八月遘疾隱几而坐或觀心或持經不以疲憊自止
門人請
0001_0028_a_09L修佛事曰事佛久矣 上遣中使問禮 [68] 〔以下欠略: 名醫處方俵寶衣名令於諸寺爲之請福疾革親來慰問曰恐有不可諱願聞其所欲言者曰所願重興正道而病奪
0001_0028_a_10L其志伏望至誠外護以副如來遺教則死且不朽冬十月五日壬辰右脇
0001_0028_a_11L而化享年四十七僧臘三十六是前或夢 [69] 〔以下欠略: 寶幢崩摧于地上聞之慟命有司贈賻有加册爲國師諡曰大覺十六日癸卯茶毘収遺骨以十一月四日辛酉安備
0001_0028_a_12L於五冠山靈通寺之震方從本教也
佛法以梁大通元年丁未肇入新羅
0001_0028_a_13L後一百餘年義湘元曉作是二師者以聖 [70] 〔以下欠略: 種性爲大宗師末光所燭餘波所加皆得以出其黮闇而造其高明及去聖云遠法隨而弛世所謂名士者心蕩乎名智昏

0001_0029_a_01L이익에 혼미해져서 배움이 더욱 천박해지니, 전적들을 섭렵했다고는 하나 문구만 나열하여 치아齒牙 사이에 두고 시끄럽게 떠들며 마냥 좋아하였다. 뒤에 오는 자들은 또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되돌릴 줄을 몰랐다.
국사는 이에 습속의 폐단과 어리석음, 도덕의 막히고 버려짐을 근심하여 기운을 다하여 힘써서 도를 밝히고 폐해를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상투적인) 전학典學을 물리치고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어 감추어진 것들을 명백히 밝히고 나태해진 자들을 붙잡아 일으켰으니, 천둥소리가 진동하고 비와 이슬이 널리 적셔주듯이 하였다. 그중에는 마음으로 복종하며 기꺼이 따르려는 자도 있었으나, 삿된 견해를 가지고 바른 도를 시기하는 자들도 많아 헐뜯고 비방하는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그래도 도로써 자처하여 담담하게 조금도 마음에 동요치 않아 마침내 화합을 이루었으니, 점차 바른 견해로 바뀌고 이전에 편견을 가지고 망상에 집착하던 자들이 모습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근본적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찍이 말하기를, “선가禪家에서는 이른바 통발과 올가미를 빌리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이를 상상上上 근기의 지혜로운 자라고 한다. 만일 그렇지 않은 하사下士가 듣고 읊조리는 학문으로 일부의 법만 터득해도 스스로 만족해하며 삼장三藏 십이분교十二分敎를 가리켜서 쓸데없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 뭐 볼 것이 있겠느냐고 하면, 이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하고서 『능가경』과 『기신론』 등의 경론을 배우도록 권하였다. 또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를 잘 봉양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공덕을 쌓았으며, 심지어 스스로 팔에 불을 사르기까지 하였다. 뒤에 기일이 돌아왔을 때도 똑같이 하였다. 어질고 견식이 환하고 밝았으며 선행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번 관직에 있는 선생들과 마주 앉아 응대할 때면 그의 말과 논의가 성인의 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또 그의 문장이 평범하고 담담하나 깊은 뜻이 있으므로 사대부들이 그의 기풍에 자연스럽게 쏠리듯이 끌렸다. 문구를 가다듬는 것을 점차 싫어하면서도 격식에 맞고 올바른 데로 나아갔다. 심지어 비속한 관리나 무신들처럼 문학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지 않거나, 벼슬길과 술법을 추구하며 서로 원수처럼 등진 자들도 한번 그의 모습을 보거나 말을 들으면 황공해 하며 스스로 승복하면서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그 후 예종께서 국사의 화상畵像을 보고 배회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며 200자의 영찬影讚을 직접 지었다.
국사가 송나라에 갔을 때, 사수泗水가의 승가탑僧伽塔에 예를 올리자 위에서 빛이 등불처럼 밝았고, 천축사天竺寺에서 관세음보살을 예배하자 하얀빛이 환하게 비추었다. 또 해인사에서 경전을 강의하자 당우堂宇가 갑자기 흔들리며 깜짝 놀라 일어나는 자가 있었다. 예종이 동궁시절에 병을 앓자 국사에게 청하여 『금강반야경』을 독송케 하였는데, 을야乙夜(오후 9시~11시)가 되자 입에서 빛이 나와 방안을 비추었다. 고승전高僧傳에서 말하는 신이감통神異感通이란 이런 것을 이르는 말인가. 또 흥복사興福寺를 잊지 않았고 간혹 국가의 앞길이 영원히 새로워지기를 기원하였다. 이곳이 여러 지역(百郡)에서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예전에는 관館과 원院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지고 없어서 바로 문인들에게 지시하여 새로 만들게 하고 관은 지남관指南館이라 하고 원은 겸제원兼濟院이라 하였다. 예종께서는 이곳에 토지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처음 국사가 어렸을 적에 태후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흥왕사 안에 별도로 원院 하나를 개창하여 훗날 네가 도를 행하는 장소로 삼게 하는 것이다.”하였으므로 사람을 보내와 터를 잡고 그 뒤에 완공하니 천복원薦福院이라 이름 붙였다. 그 밖에 완성한 불상과 경문經文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국사는 이미 일국의 종실 어른(尊親)이었으므로 큰 정치적 사건이 있으면 반드시 긴밀히 자문하였으므로 임금과 더불어

0001_0029_a_01L [71] 學△ [72] 浮淺涉獵典籍磔裂 [73] 文句置之齒牙閒呶呶以自好後來者
0001_0029_a_02L誤襲謬往而不返
師於是疾習俗之蔽蒙也 [74] 〔以下欠略: 道德之欝滞也激昻奮勵以明道救弊爲己任黜其典學示之妙蘊剖發幽覆扶起窳情雷霆而震動之雨露以溥灌之
0001_0029_a_03L [75] 雖有心服而悅隨者而羣邪疾正謗毀沸騰以道自處恬不動心終而
0001_0029_a_04L翕然寢燮於正異時僻見△ [76] 執者革面遷慮 [77] 〔以下欠略: 爲根本之學
亦嘗言曰禪家所謂不籍筌蹄以心傳心則上上根智者也脫或下士以口耳之學認得一法自次爲足
0001_0029_a_05L指三藏△ [78] 二分教蒭狗也糟粕也又烏足觀者不亦誤乎乃觀學楞伽起
0001_0029_a_06L信等經論又天性至孝善事父母不怠及其△ [79] 則窮 [80] 〔以下欠略: 思畢情以營功德至自燒臂後値諱日亦如之仁譯持鑒識洞然樂善不倦每與縉紳先生燕見應對其言論不出聖人
0001_0029_a_07L之道
又其文辭平澹而有味故士大夫承風而披靡稍厭彫琢而趣雅正
0001_0029_a_08L至於俗吏虎臣不以文學自業及它道異術相背 [81] 〔以下欠略: 如仇讐者一見其貌聞其言則莫不竦然自服恨相値之晚後睿考覩畵像徘徊感慕親製讃詞二百字

0001_0029_a_09L
適宋時泗上禮僧伽塔上有光明如燈火天竺寺禮觀音放素光赫赫然
0001_0029_a_10L又在海印寺講經堂宇忽動有驚起者 睿考在東 [82] 〔以下欠略: 宮被疾請師爲讀金剛般若經至乙夜光自口出燭於戶牖傳所謂神異感通者豈是歟又不忘興福或告永
0001_0029_a_11L新前路是百郡之所出入舊有館院而壞亡卽指授門人作新之名館曰
0001_0029_a_12L指南院曰兼濟至 睿考錫以土田
始師之幼 [83] 〔以下欠略: 太后謂言吾願於興王寺內別開一院爲若異日行道之所伴來卜地至後營搆號之薦福其他所成佛像經文
0001_0029_a_13L亦不能盡書師旣爲一國尊親有大政事必款密諮决故所與 上論列

0001_0030_a_01L나랏일을 논의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으니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은덕(陰德)이 있었다.
또한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다 알지 못할까봐 국사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여 후세에 전해주려고 하였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여러 사람들의 주장이 방대하고 산만하다고 하여 그 정수와 요점을 뽑아 종류별로 분류해서 책을 만들고『원종문류圓宗文類』라고 이름하였다. 또 고금의 문장을 모아서 가르침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석원사림釋苑詞林』을 만들었는데 미처 교정을 보지 못하였고 국사 사후에 완성을 하고보니 버리고 취한 것이 합당함을 잃었다. 문인들이 국사가 지은 시문의 일부분과 단편적 원고를 수집했는데 보존된 것이 거의 없었다. 묶어서 엮어 놓은 것이 20권이었는데 이는 모두 대략 글을 써 놓은 것으로 후세에 남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는) 생전에 글을 필사했거나 판각한 것이 있으면 그 판목을 가져다가 불태워버렸다.
당시에 북요北遼의 천우황제天祐皇帝(도종道宗: 재위 1055~1101)가 국사의 명성을 듣고 요나라 대장경과 제종諸宗의 소초疏鈔 6,900여 권을 보내왔으며, 그 밖에 문서와 약물, 금과 비단 등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연경燕京에 있는 운서법사雲諝法師와 고창국高昌國의 고승 시라부저尸羅嚩底도 모두 국사를 존경하여 책서策書와 법복法服으로 문안하였으며, 요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모두 토산물을 가지고 뵙기를 청하고 공손히 절하였으며, 우리나라 사신이 요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국사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문서를 구하였는데 그 목록이 대각국사의 비지碑誌에 있으니, 그의 명성이 사방에 드러나서 다른 나라에서 존중받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국사가 일찍이 신의 선형先兄인 승려(釋) 현담玄湛을 불러 함께 노닐기를 좋아하였는데, 서로 아는 교분이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의 사이 정도만이 아니었다. 신이 그로 인해 한 차례 국사를 뵌 적이 있었는데, 얼굴빛이 맑고 깨끗하여 마치 푸른 하늘에 빛나는 해를 보는 것과 같았다. 같이 앉아서 이야기할 기회를 주어 낮부터 밤새도록 하였고, 『주역』과 『노자』, 『장자』의 한두 가지 대의大義를 시험 삼아 물어봐 신이 마침 답할 수 있었다. 뒷날 여러 번 일컫기를, “현담 스님의 아우도 재능 있는 선비더군요!”라고 하였다는데, 얼마 안 되어 국사가 입적하였다.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쓰인다고 하였으니, 가령 죽은 분이 다시 살아난다면 비록 머리카락을 펴서 발아래 깔아드릴지라도 또한 흔쾌히 따를 수 있겠다. 더구나 문자를 써서 비석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으니, 어찌 영광이고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학술이 고루하고 말솜씨가 서툴러서 그윽하고 깊은 덕의 빛을 제대로 발산시켜 후손들의 존숭을 받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바이다.
명銘을 지어 다음과 같이 이른다.

義湘西學     의상은 중국에 유학함으로써
傳佛圓音     불법의 원음을 전수해 왔고
元曉獨見     원효는 독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或幽極深     그윽하게 깊은 이치를 다하였네

0001_0030_a_01L國家事甚多而有陰德於人民
亦厚 [84] 世莫得而盡知 [85] 〔以下欠略: 欲立言以垂不腐而志莫之遂甞以群言汗漫撮其精要類別部分名曰圓宗文類又欲會古今文章有補
0001_0030_a_02L於教以爲釋苑詞林而未及參定至後乃成故去取失當門人集所著詩
0001_0030_a_03L文殘編斷藁存者無幾紬次爲二十卷此皆率爾 [86] 〔以下欠略: 落筆非將以貽後也故於生前有以其文寫而刻之者取其板焚之
當時北遼天祐帝聞其名送大藏及諸宗
0001_0030_a_04L疏抄 [87] 六千九百餘卷其餘文書藥物金帛至不可勝計燕京法師雲諝
0001_0030_a_05L昌國阿闍梨尸羅嚩底亦皆尊嚮以策書法服爲問遼人來使者 [88] 〔以下
0001_0030_a_06L欠略: 皆請見以土物籍手以拜吾使入遼則必問師之安否最後日本人求文書於我其目有大覺國師
0001_0030_a_07L碑誌其名顯四方爲異國所尊又如此
師嘗召臣先兄釋玄湛與之遊甚
0001_0030_a_08L相知之分非啻期牙臣由是得以一謁容色睟清若覩青天白日 [89] 〔以下
0001_0030_a_09L欠略: 辱賜之坐語自晝窮夜試問易老莊一二大義臣偶能言之他日數稱之曰湛師弟亦才士也
0001_0030_a_10L無何師入滅士爲知己者用假令死而可作雖布髮而藉足亦所忻慕
0001_0030_a_11L况以文字掛名於碑石之下豈不爲榮幸也哉而學術固降 [90] 辭語 [91] 〔以下
0001_0030_a_12L欠略: 澁訥不能發幽德之光以宗來裔是所恨焉
其銘曰

0001_0030_a_13L
義湘西學 傳佛△ [92]  元曉獨見 窮 [93] 幽椒 [94]

0001_0031_a_01L或出或處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머물지만
沕然同心     아득히 마음만은 같이 했구려
香薰霧潤     향초 내음 물들고 안개에 젖으니
學者林林     학인들이 숲을 이루었건만
道與世喪     도가 세상에서 사라지자
日薄月偸     나날이 가볍고 구차해지더니
有狂東走     광기 있는 자는 동으로 달려가고
無知北遊     지각없는 자는 북에서 노닐다가
迷不知復     미혹하여 회복할 줄을 모르고
放不知求     방일하여 구할 줄도 모르니
邪熾正滅     삿된 견해 피어오르고 정법은 멸하였네
不塞不流     이단을 막지 않으면 불도가 유행하지 못하며
否終則傾     아닌 상태로 끝나면 기울어지기 마련인데
異人挺生     비범한 이가 특출나게 나시더니
不留富貴     부귀 따윈 마음에 두지 않고
而趣高明     고명한 스승 찾아 떠나셨네
誰謂宋遠     그 누가 송나라를 멀다고 했던가
木道乃行     뱃길 따라 바로 가서는
索焉而獲     찾는 것을 죄다 얻었고
爲焉而成     하는 일도 모두 이루었지만
理無不盡     이치란 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事無不融     일이란 융회하지 않을 수 없으니
遊觀自在     노닐며 보는 것 자유자재였지만
浩不可窮     널리 다 끝을 볼 수는 없었네
攝諸刹海     모든 뭍과 바다를 당겨서
於一毛中     한 털끝 속에 넣듯이
不動一步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서
周行虛空     허공을 두루 다니듯이
橫流浪浪     흘러넘치는 물결 낭자하여도
獨爲之防     홀로 그것을 다 막으셨고
道其百派     길의 갈래는 백 가지나 되어도
東至于洋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네
始則不信     처음에는 믿음을 갖지 않고
狺狺衆狂     시끄럽게 떠드는 광인들이었지만
終隨而革     끝내 그에 맞추어 바꾸었네
磨淬發光     갈고 닦아 빛을 발산하니
惟君之哲     명철하신 임금께서도
其尊其師     그를 국사로 높이시고
問道之要     불도의 요체를 묻거나
謀事之疑     의문 나는 일을 논의하니
陰毘密賛     몰래 힘을 보태고 은밀히 도우니
幾格淸夷     타고난 성품이 맑고 온화하셨네
飄然遠擧     훌쩍 세상을 멀리하고 떠나가시니
則挽留之     붙잡아 머물게 하려 하였네
其道之大     그 도의 광대함은
如天如地     하늘과 같고 땅과 같으며
淵源之深     연원의 깊이는
固不聽議     본디 듣거나 논할 수 없으니
其出於時     그 때에 맞추어 나는 것은
土苴而己     토저 뿐이라 하겠네
如寸雲澤     한 치의 구름 덩어리 같은 것이
彌萬里厥     만리를 뻗어 갈 수도 있도다
徒叩閽稽     그저 궁궐 문을 두드려 아뢰니
首敷臆冀     임금이 마음속의 바라는 것을 펴는도다
書之碑      비문을 쓰게 하여
以揚宏則     널리 본보기로 선양하리니
上曰其然     상께서 그것이 옳다고 여기시고
乃命臣軾     이에 신 부식에게 명하셨네
臣拜獻辭     신이 절하고서 글을 바치니
貽厥罔極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주셨구려

0001_0031_a_01L或出或處 昭 [95] 然同心 香薰霧閏 [96]  學者林林
0001_0031_a_02L [97] 與世△ [98]  日薄△△ [99] [100] 〔以下欠略: 有狂東走無知北遊迷不知復放不知求邪熾正滅
0001_0031_a_03L不塞不流 否終則傾 異人挺生 不留富貴
0001_0031_a_04L [101] 趣高明 誰謂宋遠 木道△ [102]  索焉而獲
0001_0031_a_05L爲焉而成 [103] 〔以下欠略: 理無不盡事無不融遊觀自在浩不可窮攝諸刹海於一毛中
0001_0031_a_06L不動一步 △ [104] 行虛空 橫流湯湯 [105]  獨△ [106] 之防
0001_0031_a_07L [107] 其百派 東至于洋 始則不信 狺狺衆狂
0001_0031_a_08L [108] 隨而革 [109] 〔以下欠略: 磨淬發光惟君之哲其尊其師問道之要謀事之疑陰毘密賛
0001_0031_a_09L幾格清夷 飄然遠舉 則挽留之 其道之大
0001_0031_a_10L如天如地 淵源之深 固不敢 [110]  其出於時
0001_0031_a_11L [111] 苴而已 [112] 〔以下欠略: 如寸雲澤彌萬里厥徒叩閽稽首敷臆冀書之碑以揚宏則
0001_0031_a_12L上曰其然 乃命臣軾 臣拜獻辭 貽厥△△ [113]

0001_0032_a_01L
2. 대흥사 사적비 大興寺事蹟碑
지난해에 내가 임단臨湍의 태수가 되어 한번 서북쪽 산중에 갔다가 황량한 담벼락과 이끼 낀 주춧돌이 벼랑에 걸쳐 있거나 골짜기에 널브러져 있고 부도만 덩그러니 가시덤불 사이에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전조前朝의 사찰 터라고 하였다. 듣건대 대흥성大興城 안에 사찰을 새로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미처 보지 못하였다. 이번에 내가 문을 닫고 단정히 들어앉아 겨울 추위를 견디고 있는데, 한 승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만나기를 청하기에 나아가 물었더니 그는 대흥사大興寺의 처묵處默이라는 승려였다.
합장하고서 요청하기를, “우리 절의 이름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3년(1354)에 나옹대사懶翁大師25)가 천마산天磨山26)에 들어와서 처음 정결한 가람을 열고 이름을 대흥大興이라 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대개 부처님의 힘으로 국가의 복록을 영원토록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중간에 무너졌지만 중수重修하지 않아서 소나무 상수리나무가 들어서고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이 되었는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상이 재위하신 지 삼년三年27)째 되는 병진년에 조정에서 도성 근처에 험준한 곳으로는 천마산만한 곳이 없다고 하여 성을 쌓아 위급할 때 보장처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주관하는 대신이 이르기를 ‘성이 오래되고 절이 있으니 승려를 달래서 상주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드디어 희연熙衍과 각성覺性28) 등을 불러 사찰의 터에다 조영하게 하였습니다. 절이 완성되자 넓고 큰 규모가 예전에 비하여 적지 않았으니, 전殿은 대웅전大雄殿, 명경전明慶殿. 명부전冥府殿이라고 하고, 당堂은 대승당大乘堂, 명의당明義堂이라고 하고 누樓는 완월루翫月樓라고 하였습니다. 그 밖에 좌우의 낭요廊寮가 정교하게 단장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희연熙衍이 자수궁慈壽宮의 금불상 3구를 모셔 왔고 신행信行이 또 정자사淨慈寺의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모시고 왔습니다. 또 그 위전位田을 얻어서 공양을 충당하였으니 사찰의 단정하고 엄숙함이 성대하며 우리들의 원력願力도 다하였습니다. 다만 선생께서 그 본래의 인연을 기술하여 비석에 새겨 주신다면, 우리들을 이어 거처하는 자들로 하여금 사찰의 유래를 알게 하고 게으르거나 해이해지지 않게 하여

0001_0032_a_01L○大興寺事蹟碑

0001_0032_a_02L
去歲余守臨湍嘗行西北山中 [114] 見荒垣苔礎跨崖彌谷浮圖嶢然於榛莽
0001_0032_a_03L之間詢之前朝之寺墟也稍聞大興城中有寺新創而余未及睹 [115] 今者
0001_0032_a_04L余杜門端居窮陰液雪有一衲剝啄而求見進而問之乃大興寺僧處默
0001_0032_a_05L
合掌而請曰吾寺之號也古矣高麗恭愍王三年懶翁大師入天磨山
0001_0032_a_06L始開精藍名曰大興其意盖欲以佛力扶國祚於曠劫也中圮而不修
0001_0032_a_07L松櫟之地虎豹之宅未知自何年而始也 今上三年 [116] 丙辰朝廷謂近都
0001_0032_a_08L而險莫如天磨築城爲緩急葆聚之所當軸大臣謂城舊有寺可誘僧而
0001_0032_a_09L居也 [117] 募熙衍洞寬 [118] 就寺之址而營焉寺成而其閎鉅規制庶幾 [119] 無殺
0001_0032_a_10L於舊殿則曰大雄曰明鏡 [120] 曰冥府 [121] 曰大乘曰明義樓曰翫月樓 [122] 其他左
0001_0032_a_11L右廊寮莫不精飭 [123] 既而熙衍奉慈壽宮金佛三軀而來信行又奉淨慈寺
0001_0032_a_12L冥府十王而來又取其位田以充聖供寺之興矣 [124] 吾徒之願力亦殫矣
0001_0032_a_13L先生述其本因鑱諸琮琰 [125] 俾吾徒之嗣而居者知寺所繇肇毋懈怠毋廢

0001_0033_a_01L오래될수록 더욱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는 좋은 가르침의 원인을 나타내어 원만한 과보를 일으키는 것이라 하겠는데,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나는 잠자코 있다가 이르기를,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백성들을 모으고 포악한 자들을 막아내는 것이 성을 쌓게 된 기원이며, 가르침을 펴서 북을 치고 보살들을 교화하여 마병魔兵의 무리를 무찌른 것은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도道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근기는 같거나 다른 구분이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토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으면 돋아나는 것이 기장(黍)도 되고 보리(麥)도 되고 벼(稻)도 되고 메벼(稉)도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이름이나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같다. 그렇다면 성城에 절이 있고 절이 성에 있는 것이 이치상 참으로 서로 필요함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제향을 하여 모시는 대상은 나옹懶翁인데, 나옹의 육신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나는 스님들이 그의 자취를 따르기를 바라지, 허탄한 말을 늘어놓기를 바라지 않는다.
전해지는 말은 ‘나옹이 옛날에 이 산에 올라 동쪽으로 한양을 바라보고는 왕자王者가 반드시 날 줄을 알고 이곳에다 절을 세워 그 기운을 눌렀다.’고 하는데, 설령 이 말과 같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말에 살짝 의문이 든다. 나옹이 이미 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찌 허망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이러한 구차스러운 짓을 하였겠는가. 영산靈山의 훌륭한 모임 때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은 공자孔子 문하의 십철十哲이 모두 자기 자리에 있는 것과 견줄 만하다. 오직 겁빈나劫賓那만이 지성수知星宿29)라는 이름을 얻었고 나머지는 단지 옆에서 여러 덕을 겸하고 법의 교화를 온전히 드러냈을 뿐이다. 어찌 이른바 감여堪輿(풍수지리)의 학문과 압승壓勝(주술)의 술수가 있었겠는가? 하늘은 천수天數를 바꾸려 하며 역수曆數는 귀착점이 있는데, 총림叢林(사찰)의 몇 이랑의 땅을 가지고 흥기하는 것을 막고 폐해지는 것을 떠받치려 하였다니 또한 사실과 먼 일이 아니겠는가. 동방의 감여堪輿에 관한 설은 맨 처음 도선道詵에게서 엿볼 수 있는데, 점차 세간이 풍속에 스며들어 그 폐해가 지금까지 이르렀다. 나옹이 어찌 그 흐름을 다시 넓혔겠는가. 내 생각에 나옹은 단지 뛰어난 경치를 가진 천마산에 가서 주석하며 도량을 소제하고 사찰을 열어서 하나의 큰 인연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어찌 필요치 않은 술책을 써서 스스로 어리석게 만들었겠는가. 아니면 나옹을 지극히 존숭하는 어느 승도가 그의 말을 신비화하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0001_0033_a_01L經久而愈新是可謂立善教因成長圓果者也先生其無意否
余諭默
0001_0033_a_02L夫扼險集民以禦暴客城之所以起也 [126] 演教擊鼓 [127] 諸菩薩破魔兵衆
0001_0033_a_03L佛之所以度人也道有彼此機無異同譬如墾土殖穀則其生者爲黍
0001_0033_a_04L爲麥爲稻爲稉名色雖殊利益人等也然則城而有寺寺而有城其理固
0001_0033_a_05L若有相須者也且爾曹之所式刑者 [128] 懶翁懶翁之身壞也久矣吾欲爾曹 [129]
0001_0033_a_06L之躡其跡不欲爲之張其誕也
傳者謂懶翁嘗登此山東望漢陽知王者
0001_0033_a_07L必作立寺於此以壓之設如是言吾窃疑焉懶翁旣受內教 [130] 能祛妄想
0001_0033_a_08L而自爲此區區也當靈山勝集大阿羅漢擬諸孔門之十哲者 [131] 在其座
0001_0033_a_09L惟劫賓以知星得名其餘但曰旁兼衆德圓彰法化而已寧有所謂堪輿
0001_0033_a_10L之學壓勝之術者乎天將革麗曆數有歸而迺欲以叢林數畆之地遏其
0001_0033_a_11L所興扶其所廢不亦跡 [132] 盖東方堪輿之說始竅於道銑 [133] 漸漬流俗其獘
0001_0033_a_12L至今懶翁何復廣其流也吾意懶翁特就天磨之勝而住錫除塲闢剎
0001_0033_a_13L一大緣豈用其不可必之術以自愚也抑緇流尊懶翁之至欲神其衍 [134] [135]

0001_0034_a_01L이 두 가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절은 이미 대흥大興이라고 불리고 있고, 처묵處黙이 내게 부탁하여 기문을 청한 것도 이 때문이니 내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의미를 새겨서 대략 분별하였다. 부처는 이 세상의 모든 유위상有爲相30)을 일체 허망한 것으로 여겼고 산하대지도 오히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 한 사찰이 생겨나고 무너지는 것임에야. 게다가 (사찰의) 이름이 허망한 말에서 나왔는데 어찌 반드시 크고 깊은 뜻을 찾고 마음대로 갖다 붙여 어지럽게 하겠는가. 그리고는 마침내 기문을 적어 주었다. 절이 완성된 후 지금 벌써 15년이 되었는데 비문이 없었다. 처묵에게 권유하여 글을 청해 사적을 기록하게 한 이는 종실인 전성군全城君 준濬과 병조참판 이련李鍊이다. 이들 또한 더하여 적었다.
후숭정後崇禎 46년 경오(1690, 숙종 16) 5월 일에 비를 세우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 겸홍문관제학兼弘文舘提學 임상원任相元 글을 짓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겸춘추관편수관兼春秋舘編修官 남궁옥南宮鈺 글씨를 쓰다.
숭헌대부崇憲大夫 영은군靈恩君 함涵.
수성장 영장守城將營將 노도창盧道昌.
3. 천마산 관음사 중건비 天磨山觀音寺重建碑
경자년 여름에 내가 초당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어떤 승려가 찾아와 합장하고 절을 한 후 일어나 나에게 이르기를, “소승은 평소에 천마산天磨山31) 관음사觀音寺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사찰이 퇴락한 것을 계기로 하여 지난 병술년에 시주施主를 끌어들여 이렇게 연우蓮宇32)를 세우니 옛 터전에 단청까지 선명하게 새로 하여 공역을 이미

0001_0034_a_01L此說耶是兩者吾不能知也
然寺旣名大興故默之告余以請記者以此
0001_0034_a_02L余不得不述因疏其義而略辨之夫佛以世間諸有爲相一切爲妄山河
0001_0034_a_03L大地猶不得脫而况兹一梵宇之成壞乎且名因妄而立者何必索之大
0001_0034_a_04L而肆爲 [136] 膠擾乎遂敘而授之寺成今已十五年而無碑矣其勸處默 [137]
0001_0034_a_05L文而記跡者宗室全城君濬兵曹參判鏶 [138] 亦附而書

0001_0034_a_06L
後崇禎四十六年庚午五月 日立

0001_0034_a_07L嘉善大夫吏曹叅判兼弘文舘提學任相元撰

0001_0034_a_08L通訓大夫承文院判校兼春秋舘編修官南宮鈺書

0001_0034_a_09L崇憲大夫靈恩君涵 守城將營將盧道昌

0001_0034_a_10L

0001_0034_a_11L○天磨山觀音寺重建碑

0001_0034_a_12L
庚子維夏余在草堂有僧來訪合手拜訖起謂余曰僧素住天磨山觀音
0001_0034_a_13L寺焉往在丙戌古寺頹落 [139] 施爰開蓮宇是建仍舊基址煥新丹青工已

0001_0035_a_01L다 마쳤습니다. 다만 비석에 새길 글이 없어서 이렇게 찾아와서 감히 글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내가 쓴 문장을 살펴보면 취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일찍이 천마산에 구경 가서 관음사에 묵으며 여기저기 노닐고 시를 지었는데, 멀고 가까운 산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었고 사찰의 흥망성쇠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지 오래되었다. 또한 ‘힘을 다해 건립한 절간이 전보다 장엄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어찌 후세에 전할 말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그대들에게 충분히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내가 이르기를, “천마산은 사산四山33) 가운데 하나이고 그 안에 있는 사찰이 한둘이 아니지만 전에 왜란이 있었을 때 모두 병화兵火에 타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남은 것 중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관음굴觀音窟뿐이다. 이른바 관음이란 부처이고 굴이란 암혈岩穴이다. 관음제불觀音諸佛이 암혈에 있고 사찰이 그 옆에 있기 때문에 합쳐서 관음굴이라고 명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찰의 남쪽과 북쪽에는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 듯이 치솟아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땅을 뒤덮고 있으며 멀리는 대흥大興의 반석이 앉을 만하고 가까이는 태종太宗의 옛 석대石坮가 볼만하다. 서쪽에는 해가 뜨는 암자가 있고 북쪽으로는 구름이 머무는 사찰로 통하며 십리 되는 옥동玉洞의 금빛 물결이 1천 구비 감아돈다. 기妓·마馬·구龜·룡龍 네 개의 못이 서로 이어져 있는데 이른바 용담龍潭이란 곳이 또한 세 개 못의 근본이 되는데 천길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가장 절경이라고 일컫는다.
게다가 꽃이 흐드러진 늦봄에는 지는 꽃잎이 못에 떨어지고 녹음이 짙은 여름에는 장맛비가 물결을 더하고 단풍이 붉게 물든 구월에는 수놓은 비단이 밝게 비추고 흰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는 구슬 같은 얼음이 영롱하여 사계절을 폭포를 바라보노라면 때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다. 그렇기에 천마산을 유람하거나 연못과 폭포를 구경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절을 경유하며, 글 쓰는 이들이 남긴 제명題名과 시를 짓는 이들이 읊조린 글, 지둔支遁34)의 언어유희[학량謔浪]와 달마達摩35)의 법의 갈래[법류法流]가 모두 모여들어 몇 천이 넘었다.
비록 그러나 처음 세워진 후 오래되어 금金과 화火의 기운이 번갈아 바뀌며 비바람에 침식당하고 쥐나 벌레의 소굴이 되어 마룻대와 추녀 끝은 기울고 법당은

0001_0035_a_01L訖矣役已畢矣而所乏者唯片石之銘是以跋涉敢請
余應曰顧余之文
0001_0035_a_02L固無可取然而曾賞天磨仍宿觀音遊於斯詠於斯山川之遠近無不入
0001_0035_a_03L於眼寺宇之興廢無不領於心者久矣又飽聞爾等畢力結搆壯麗誇前
0001_0035_a_04L其可無辭以垂諸後於是乎
余曰夫天磨者四山之一而其中寺剎亦非
0001_0035_a_05L一二而昔在倭亂皆入兵燹存者無幾而獨嵬然者其唯觀音窟乎所謂
0001_0035_a_06L觀音者佛也窟者岩穴也觀音諸佛在於嵒穴而寺在其傍故合而名之
0001_0035_a_07L觀音窟也
夫寺之南北峯巒插天松柏立地遠則大興之盤石可坐
0001_0035_a_08L則太宗之古坮可臨西有日生之菴北通雲居之剎玉洞十里金波千迴
0001_0035_a_09L妓馬龜龍四潭相連所謂龍潭者又爲三潭之宗而千尺飛流瀑稱最絕
0001_0035_a_10L者也
况又紅老暮春落花點潭綠陰盛夏潦雨添流而楓丹九月錦繡暎
0001_0035_a_11L雪白三冬氷玉玲瓏四時看瀑隨時異態是以遊天磨賞淵瀑者必由
0001_0035_a_12L於此寺墨客之題名騷人之詠物支遁之謔浪達么 [140] 之法流皆爲輻湊歷
0001_0035_a_13L幾千矣
雖然創立已久金火遞遷風雨之攸侵虫鼠之攸穴棟宇傾側

0001_0036_a_01L좁고 더러워졌다. 참으로 승려가 되어서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설미雪眉와 운납雲衲이 탄식하며 서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 사찰에 거주하면서 이곳이 장차 무너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며 이 사찰을 경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사찰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곧 불교가 성행하고 쇠퇴하는 것과 관계되므로 오로지 다시 세워야 하며 결코 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에 부처님의 공덕을 널리 펴자, 넉넉히 은혜를 베풀어 한 자를 얻거나 한 치를 얻거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다 완비되어 이해 3월에 모든 공역을 마쳤다. 전보다 쇠퇴함이 없이 후세에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 명銘을 지어 후세에 전하지 않고 잠자코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지었다.

龍宮是建     용궁(사찰)을 여기에 세운 것은
象教斯崇     상교(불교)를 숭상해서이니
不有其是    그 시작이 있지 않았다면
何有是終     어찌 이 마침이 있겠으며
不有其毀     그 훼손됨이 있지 않았다면
安有是成     어찌 이러한 완성이 있으랴
後來繼今     후세 사람들이 오늘을 계승하니
有盛斯銘     이 명에 성대함이 있으리로다

순치順治 17년(1660) 여름 5월 어느 날에 세우다. 화원거사花園居士 지음.
4. 개국사 중건기 開國寺 重建記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삼한三韓36)을 통일하신 뒤에, 왕실과 나라에 이로움이 있으면 일을 거행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석씨釋氏가 다스리는 도에 도움이 되고 포악한 무리를 교화시킬 수 있다 하여, 승도僧徒들을 일반 백성으로 삼지 않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게 하였다. 대개 탑塔과 묘廟를 세울 때에는 산천의 지형이 음양의 이치와 부합되는지의 형세를 반드시 살펴서 손익損益이 압도적으로 나은 곳을 얻은 뒤에 시행하였으니, 양씨梁氏(양무제)처럼 죄를 두려워하거나 복을 사모하여 부처에게 아첨하지는 않았다.
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0001_0036_a_01L堂隘陋苟爲僧徒豈若視恝於是雪眉雲衲慨然相謂曰
吾輩居住此寺
0001_0036_a_02L觀此寺之將廢而可無此寺之經紀乎况此寺之興廢係佛氏之盛衰
0001_0036_a_03L當復建而决不可廢也明矣遂乃廣張佛功矣富施惠得尺得寸大小咸
0001_0036_a_04L是年三月鳩工告訖無替於前有煥於後豈可喑無斯銘以垂厥後
0001_0036_a_05L爲之銘曰

0001_0036_a_06L
龍宮是建 不有其是/始 不有其毀 後來繼今
0001_0036_a_07L象教斯崇 何有是終 安有是成 有盛斯銘

0001_0036_a_08L
順治十七年夏五月 日 立 花園居士撰

0001_0036_a_09L

0001_0036_a_10L○開國寺重修記

0001_0036_a_11L
恭惟我太祖旣一三韓有利家邦事無不舉謂釋氏可以贊理道化暴逆
0001_0036_a_12L不氓其徒俾闡其教凡立塔廟必相夫山川陰陽逆順之勢要有以損益
0001_0036_a_13L壓勝者然後爲之非如梁氏猥慕罪福求媚于佛也
都城東南隅其門曰

0001_0037_a_01L보정문保定門이라고 하는데, 그 길은 양광楊廣 · 전라全羅 · 경상慶尙 · 강릉江陵 네 도에서 도성으로 오는 사람과 도성에서 네 도로 가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다. 하천이 있어서 성 안의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시내와 도랑물이 모두 모여서 동쪽으로 흘러간다. 여름과 가을이 바뀔 때마다 큰물이 지면, 치닫는 물결이 마치 삼군三軍의 행진과 같아 몹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산이 있는데 곡봉鵠峯에서 시작하여 잇달아 뻗어 와서 누웠다 일어서고 달리다 멈추는 듯하여 마치 용과 범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기세가 웅장하다. 세간에서 이곳을 삼겸三鉗37)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청태淸泰 18년38)에 태조께서 술가術家의 말을 듣고 그 사이에다 절을 지어서 계율을 배우는 승려들을 거처하게 하고 개국사開國寺라고 이름하였다. 이때 전쟁이 겨우 평정되고 모든 일이 처음 시작되었기에 군사들을 모집하여 공역을 시키고 병기를 거두어 공사에 충당하였으니, 전쟁을 끝마치고 백성을 쉬게 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임진년에 불이 나서 소실된 절을 중수도 하지 못한 터라 승방과 불당이 비바람에 노출된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계단戒壇은 빈터가 되었고 강원講院(강사講肆)은 황폐해져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퇴락하여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물이 항상 쇠락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서 때를 만나면 번영하기 마련이고, 도가 끝내 막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서 사람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 남산종南山宗의 종사宗師 목헌구공木軒丘公은 변론을 잘하고 경론의 뜻을 잘 이해하여 정혜묘원 자행대사定慧妙圓慈行大師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오직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하루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우리가 왕의 국토에 발붙이고 살면서 누에를 치지도 않고 농사도 짓지 않지만, 의복은 추위와 더위를 막기에 충분하고 음식은 아침저녁을 나기에 족하다. 이는 우리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과 우리를 돕는 이들이 베푼 것이 또한 극진한 덕분이다. 그런데 지금 국가의 형편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전례에 따라 우리 사찰을 반드시 중수重修해 주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집의 울타리가 무너졌는데 이웃에게 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며, 밭에 잡초가 무성한데 남이 김매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대중들이 이를 듣고 그 뜻을 알아차려 팔을 걷고 따라나서서 종문宗門의 여러 사찰에 문서를 보내고 일할 사람들을 불러왔다. 땅의 높낮이를 고르고 우거진 풀들을 베어낸 다음 먹줄로 굽은 곳을 바로잡고

0001_0037_a_01L保定其路自楊廣全羅慶尙江陵四道而來都城者與夫都城之之四道
0001_0037_a_02L憧憧然罔晝夜不息也有川焉城中之水澗溪溝澮遠近細大咸會而
0001_0037_a_03L每夏秋之交雨潦旣集則崩奔汪濊若三軍之行吁可畏也有山焉
0001_0037_a_04L [141] 鵠峯邐迤而來若頫而起若鶩 [142] 而止猶龍虎之變動而氣勢之雄也
0001_0037_a_05L號斯地爲三鉗豈以是哉
清泰十八年太祖用術家之言作寺 [143] 時征役甫
0001_0037_a_06L萬事草剏 募卒伍爲工徒破戈楯充結搆所以示偃兵息民之意也

0001_0037_a_07L于壬辰莫爲重新僧寮佛宇無以庇風雨戒壇墟矣講肆蕪矣日月以損
0001_0037_a_08L幾至於無矣然而物不可以恒瘁得時而榮道不可以終否待人而興
0001_0037_a_09L我南山宗師木軒丘公以辨才義解賜號定慧竗圓慈行大師惟振起頹
0001_0037_a_10L綱是任一日集衆而告曰
吾儕寓跡王土不桑不稼衣足以禦寒暑食足
0001_0037_a_11L以度朝暮吾君之賜吾相之施亦已至矣今國家非曩日之比必欲使例
0001_0037_a_12L舊修吾廬難矣且夫藩缺而責補於隣非義也田莠而望耘於人非智也

0001_0037_a_13L衆聞而喻其意扼腕從臾牒宗門諸剎科徵役徒夷窊祟剔菑翳繩墨曲

0001_0038_a_01L공간(연궤筵几)의 넓이를 맞추며 용마루와 서까래를 만들고 회칠을 하고 단청을 하였다. 위쪽에는 높다란 전각을 짓고 양 옆에는 긴 복도를 두었으며, 두 복도 끝에는 누각을 세웠다. 또 두 누각 사이의 행랑채에는 문을 내었다. 그 서쪽에는 학도들이 머무는 곳과 스승의 방이 있는데 부엌과 곳간이 별도로 자리 잡았다. 간략하면서도 적당하고 검소하면서 견고하니, 이전의 것을 따르되 오래 갈 수 있도록 계획하여 늘이고 줄이기를 적절하고 알맞게 한 것이다.
지리至理 계해년(1323, 충숙왕 10)부터 시작하여 태정泰定 을축년(1325, 충숙왕 12)까지 3년에 걸쳐 공사를 끝내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어 낙성식을 하니, 보고 듣는 이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승도 가운데 나이 많은 원로가 영구히 전할 것을 꾀하면서 내 집에 찾아와 기문記文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근래의 승려들은 경영하여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권세가의 세력을 빌리려 한다.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나라에 해가 되어도 그저 빨리 완성하는 데만 힘쓰니, 복을 심는다는 것이 원한을 사는 길임을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목헌木軒 대사는 그렇지 않아서 정성어린 말로 하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동참하였다. 게다가 국가의 재정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인력을 잠시도 빌리지 않은 채 수립한 성과가 이러하니 이야말로 기록해둘 만한 일이다. 이 절을 창건한 것은 태조께서 왕실과 나라를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이었고 양씨梁氏처럼 아첨한 것이 아니었으니, 또한 후세 사람들이 살피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대강을 간략히 서술하는 바이다. 율승律乘(계율학)의 도道로 말하면, 그릇됨을 억제하고 정당함(선善)을 추구하게 하여 마치 순舜임금의 정치를 도와 구요咎繇39)가 형벌을 다스릴 때 형벌이 없게 하기를 기약했던 것과 같을 뿐이었다. 그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은 내 일찍이 배우지 않았으니 감히 억지로 말하지 않는다.
이제현李齊賢이 썼다.40)

0001_0038_a_01L筵几寬狹棟而桶之堊而雘之峙峻殿于上方引修廡于兩傍樓兩廡
0001_0038_a_02L之端而軒焉廊兩樓之間而門焉其西則學徒之舍監師之堂曰厨曰庫
0001_0038_a_03L各有攸位約而周儉而固酌旣往計可久增損而適宜者也
自至治癸亥
0001_0038_a_04L迄泰安乙丑三秋而畢功作慶會以落厥成見聞者莫不嗟賞焉於是
0001_0038_a_05L徒之老圖所以不杇踵余門求記甚勤
余惟近世浮圖之流有所經爲
0001_0038_a_06L假勢於權豪之家毒民病國徒務亟成而不知種福爲斂怨也木軒大師
0001_0038_a_07L則不然言發干誠衆樂爲用不糜國秋毫之財不藉民食頃之力其所樹
0001_0038_a_08L立如是是可書也而兹寺之始剏太祖蓋欲以利乎家邦非如梁氏之爲
0001_0038_a_09L亦不可使來者不察故粗敘梗概云若夫律乘之爲道其抑非趣善
0001_0038_a_10L堯舜之政而有咎繇之刑期于無刑而已㣲辭奧義則余未嘗學不敢強
0001_0038_a_11L爲言
 
李齊賢記

0001_0038_a_12L

0001_0039_a_01L
5. 백운산 내원사 사적 白雲山內院寺事迹  (영평군永平郡)
천하에 설립된 총림叢林에는 그 근본이 있으니 그 연유를 대략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周나라 소왕昭王 25년(기원전 1028) 계축년 7월15일에 대성인(부처)이 흰 코끼리의 상서를 보이며41) 구름을 타고 내려 와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마야부인의) 태중에서 오른쪽 옆구리에 있었다. 갑인년 4월 8일에 탄생하여 19세에 출가하였고 25세에 성불하였다. 그 뒤 서천西天(인도) 5천여 나라에 총림(사찰)과 전법륜轉法輪(가르침)42)을 세웠는데 동한東漢의 명제明帝 때 불교가 동쪽 땅(중국)으로 흘러들어오자, 황제가 꿈에서 감응하고 크게 기뻐하여 백마사白馬寺43)를 건립하고 불도를 크게 숭상하였다.
당시에 오악五嶽의 도사인 대소大素와 문신文信 등 6백여 명이 마침내 표문表文을 작성하여 황제에게 간언하기를, “천지가 확 트인 것은 그 이치가 서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국가의 안정과 평화의 요체는 도교를 신봉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인덕仁德의 교화를 전파하는 자는 예악을 살피고 문덕文德을 펴는 자는 흉악하고 완고함을 바로잡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께서는 서슬 퍼런 날카로운 칼이 손에 있으니 밝은 거울 같은 마음가짐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도종道宗은 멀리서도 가르침을 구하지만, 오랑캐 신의 법도는 괴이하고 그릇된 것이 많아 나라를 패망케 하고 집안을 망치니 중화와는 맞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저 불교와 우리 도교를 참고삼아 시험해 보시면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는 줄 아신다면 오랑캐 신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는데, 상덕전像德殿에 표문을 올리자, 황제가 명하여 이르기를, “불교와 도교 두 교를 한곳에 모이게 하여 서로 우열을 따진 연후에 바른 도를 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 황제의 명을 받은 관리가 백마사에서 재연齋筵을 펴서 베풀었는데 황제가 직접 보며 두 교의 우열을 시험하였다. 관리가 백마사 앞에서 칙서를 받들고 정성스럽게 정리하고 말끔히 청소하였으며 도량에 줄지어 늘어서서 도경道經 365권과 불경 500여 권을 한 곳에 모아놓고 불을 붙여 소각시켜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도가의 경문은 모두 타버리고 서천의 불경은

0001_0039_a_01L○白雲山內院寺事迹    永平郡

0001_0039_a_02L
天下叢林之設有本有原略示其由盖周昭王二十五年癸丑七月十五
0001_0039_a_03L大聖現白像瑞七支案地乘雲而下降神大術胎中右脇而住甲寅四
0001_0039_a_04L月八日生十九出家二十五成道而後西天半萬之國建叢林轉法輪而
0001_0039_a_05L至東漢明帝教流東土 皇帝感夢大悅建白馬寺大崇佛道
時五嶽道
0001_0039_a_06L士大素文信等六百餘人遂修表文諫於皇帝曰天地廓達理所籍文
0001_0039_a_07L家安和要在奉道播仁風者在其禮樂敷文德者格其凶頑伏惟 皇帝
0001_0039_a_08L下霜刀在手明鏡居心如何矣我道宗遠求 教之如胡神之法多是妖
0001_0039_a_09L訛敗國亾家不叅華夏伏乞 陛下彼此參驗真偽可知知佛若有靈則
0001_0039_a_10L可依胡神之教云云奉表於像德殿 皇帝命曰佛道二教會于一處
0001_0039_a_11L其優劣然後以行正道
於是聖旨所司白馬寺舖設齋筵朕親 視比試
0001_0039_a_12L二教所司奉勅於白馬寺前精修洒掃排立道場道經三百六十五卷
0001_0039_a_13L經五百餘卷集于一處下火焚燒以知眞僞道家經文盡爲煨燼西天佛

0001_0040_a_01L완전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도교를 버리고 불교를 취하자, 도사 등이 모두 입을 닫은 채로 다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저선신楮善信은 스스로 죽고 도교의 무리인 여혜통呂惠通 등 630인이 승려가 되고 강순예荀猊 등 120인이 동시에 출가하였으며 왕증王矰 등 130인은 청하여 승려가 되었다. 비빈妃嬪과 궁녀, 부녀 등 320인이 자청하여 비구니가 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10개의 대가람을 짓게 하여 승도와 니승을 안주하게 하였다. 여러 곳에 돌아가며 큰 사찰(叢林)을 건립하고 축리祝釐44)를 업으로 삼으니 매우 성행하여 재물이 넉넉하고 많은 지역에서 크게 빛났다.
우리나라 신라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치성하였으나 난리를 만나 쇠락하였고 고려왕 태조가 창업할 때에는 다행스럽게 성승聖僧인 도선道詵45)을 만날 수 있었다. 상이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안에 대하여 묻자, 대사가 응답하여 말하기를, “중국은 그 땅이 평탄하여 요堯임금 때에는 홍수가 재앙이 되었으나 우禹임금(神禹)이 물길을 다스려서 각각 지리에 맞게 터주었으니 어찌 흉년과 재난의 피해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수많은 산이 경쟁적으로 험준함을 뽐내고 여러 강물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치닫곤 합니다. 어떤 경우는 흡사 용이나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듯하고, 어떤 때는 마치 새나 짐승이 달아나는 듯하며, 어떤 것은 너무 멀리 가서 제어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끊겨서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어서 이러한 모습들을 다 갖추어 적기도 어렵습니다. 동쪽의 군郡에 이로운 것이 어떨 때는 서쪽 고을에 해가 되는 것도 있고, 남쪽의 읍邑에 길한 것이 어쩌다 북쪽 현縣에는 흉한 것도 있습니다. 산의 높고 험준함은 바꿀 수 없고 강물이 내달리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비유하면 질환이 많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물이 태어날 때는 산천의 기운에 감응하는 것이라서 그 마음과 형세가 서로 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심이 화합하지 못하고 지역에 따라 나눠지다보니 구한九韓이 있었고 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고 도적들이 횡행하는데도 금하고 막을 수 없었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가령 불씨佛氏의 도를 약초로 삼으시어

0001_0040_a_01L完然具在帝大悅捨道取佛道士等皆緘口結舌更無一言楮善信自
0001_0040_a_02L咸而孔其徒呂惠通等六百三十人爲僧姜荀猊等一百二十人俱時出
0001_0040_a_03L王矰等一百三十人請爲僧嬪妃宮女婦女等三百二十人請爲僧尼
0001_0040_a_04L 皇帝勅修十大伽藍以安僧尼轉展諸處建大叢林祝釐爲業極熾
0001_0040_a_05L而豐物衆地大文
至于我國新羅始盛而逢亂而衰至高麗王太祖創業
0001_0040_a_06L之時幸得道詵聖僧上問治國安邦之術師對曰中夏則其地平坦當堯
0001_0040_a_07L之時洪水爲災神禹治之各順地理之宜安有凶咎之害哉我國則不然
0001_0040_a_08L羣山競其險衆水爭其犇或有如龍如虎之相鬪者或有如禽如獸之飛
0001_0040_a_09L走者或有過遠而難制者或有斷㣲而不及者如斯等狀難可具述利於
0001_0040_a_10L東郡者或有害於西鄉吉於南邑者或有凶於北縣山之峻峙不可轉也
0001_0040_a_11L水之犇放不可遏也比之則多疾之人也故人物之生感是山川之氣者
0001_0040_a_12L其心其勢無不相類人心不合區域隨分或作九韓或作三韓互相侵伐
0001_0040_a_13L兵革不息盜賊橫行無能楚 [144] 制者有自來矣殿下假以佛氏之道爲艾

0001_0041_a_01L 산천의 앓고 있는 땅을 치료하시려거든 모자란 곳에는 사찰을 지어 보충하시고 지나친 곳에는 부처를 모셔서 억제하십시오. 치닫는 지형에는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 등을 진 형국에는 깃발을 걸어 불러들여서 도적을 방어하고 쟁투를 금지하고 선한 자가 심고 길한 자가 키우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법의 수레가 저절로 굴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대사의 말과 같이만 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하고, 여러 주현州縣에 명하여 총림과 선원을 건립하게 하고, 불상을 만들고 탑을 세운 것이 거의 3천 5백여 곳의 산천에 이르니, 질병과 재앙이 잦아들어 사라지고 민심이 온화하고 순하여 도적이 없어졌으며 큰 재난이 물러감으로써 삼한 전체가 혼연히 일가를 이루었다. 다만 9개 높은 산의 재앙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무 학鶴 3개를 만들어 하늘에 축원을 올리고 공중에 날렸더니 나무 학이 날아가서 하나는 동주東州의 동쪽에 멈추고 하나는 화강花江의 남쪽에 서고 하나는 병평並平의 동쪽에 이르렀다. 대사가 그곳을 찾아가보니 한 곳은 용이 큰불을 내뿜는 형국이고, 한 곳은 하늘에서 밝은 등불을 드리우는 지형이고, 한 곳은 흰 구름이 하늘을 버텨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사가 상서로운 일이라고 상주하였더니, 임금이 기뻐하며 상서의 감응을 경축하였으며 세 곳에다 동시에 사찰을 건립하고 상서로운 일로 이름 붙이게 하였다.
약사여래 삼존三尊을 주조하여 세 곳 사찰에 안치하니, 당시 상서로운 기운이 감응하여 궁궐에 아름다운 징조가 나타났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이 불도를 약재로 삼아 산천을 치료한 효력이로구나.”하셨다. 백운산은 세 곳 중에서 최고일 뿐만 아니라 사산四山보다도 특출한 산이다. 왜 그런가 하면 태백太白은 웅장하면서도 험준하고 봉래蓬萊는 파리하지만 빼어나고 두류頭流는 울창하지만 탁하며 구월九月은 낮으면서 민둥산이다. 그런데 이 산은 백두산의 정맥正脉이 한 곳에 모여들어 흘러와서 빼어나거나 험준하지도 않고 탁하거나 민둥산도 아닌데 산봉우리가 부드러우면서 높고 골짜기는 깊으면서 길며 지세는 정결하고 수기水氣는 맑고 깨끗하다. 암석이 기이하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고 푸르며 귀한 나무와 아름다운 숲, 특이한 꽃과 상서로운 풀들이 즐비하되 뒤섞이지 않았으며 상서로운 연기와 안개가 번갈아 맞물리고

0001_0041_a_01L醫之於山川痛痒之地而缺者以寺補之過者以佛抑之走者以塔止之
0001_0041_a_02L背者以幢招之賊者防之爭者禁之善者樹之吉者揚之則天下太平
0001_0041_a_03L輪自轉
王曰果如師言有何難乎勅諸州縣建叢林設禪院造佛造塔
0001_0041_a_04L至三千五百餘所山川病咎無不潛伏民心和順盜賊潛消大匿適去 [145]
0001_0041_a_05L韓之內混爲一家而但九有重嶽咎罔知所由作木鶴三斤祝天飛空
0001_0041_a_06L空空去 [146] 一止于東州之東一止于花江之南一止于並平之東大師進尋
0001_0041_a_07L而來一處則龍出大火一處則天垂明燈一處則白雲撐天師以瑞事奏
0001_0041_a_08L上喜賀瑞應三處一時建寺仍以瑞事名焉

0001_0041_a_09L
敬造藥師如來三尊以安三所寺時有瑞應九重休祥上曰此豈佛道醫
0001_0041_a_10L艾之力耶白雲者非獨三處之中爲最四山之中超出者也何也太白雄
0001_0041_a_11L而險蓬萊瘦而峻頭流肉而濁九月卑而禿此山則白頭正脉蹲蹲而來
0001_0041_a_12L不峻不險不濁不禿峯巒柔而高洞壑深而遠地勢淨而潔水氣清而白
0001_0041_a_13L岩石奇又恠松栢密又青樹琪 [147] 瓊林異花瑞章 [148] 行而不雜祥烟瑞霧交鎖

0001_0042_a_01L신기한 짐승과 신령한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니 이처럼 빼어난 절경이 천하에 어찌 두 곳이 있겠는가.
서천西天(인도)의 기이한 경관이 별천지의 아름다운 풍광이라는 명성을 들었을 뿐이지만 이곳과 같은지는 모를 일이다. 먼 곳에 있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가까운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온 세상이 다 그러하니 평소의 소견으로 귀하지 않다고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대체로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왕태조가 이 산을 특별히 중시하여 도선에게 맡겨서 사찰 7백여 칸을 창립하게 하고 산 아래를 빙 두른 전답 수백 결結로 제향祭享을 받들게 함으로써 나라의 안녕과 복을 비는 곳으로 삼았다. 도선의 부도 탑이 지금도 있으니 이 산이 그 당시에 중시되었음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훗날의 임금들은 이 선왕의 유적을 지켜서 무너질 때마다 일으켰는데 왕씨의 말엽에 이르러서는 거의 빈산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태조가 즉위한 뒤에 무학無學46)이 다시 처음과 같이 일으켜서 한 나라의 대가람이 되었다. 또 세조대왕 때에 이르러 전답을 다시 추가해 주고 겸하여 노비 100여 명을 주어서 향화香火(제사)의 자원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만력萬歷 임진년(1592) 난리를 겪으며 극도로 쇠락하였다.
숭정崇禎 신미년(1631)에 무영無影 대사가 영주사靈珠寺로부터 와서 문도 30여 명을 모아서 안거하며 강경講經하는 곳으로 삼았다. 주지승 두섬杜暹 등 수십 인이 요청하기를, “이 사찰은 전 왕조 때 도선道詵이 처음 창건하고 우리 조선의 무학無學이 다시 일으킨 도량이니, 원컨대 대사께서 중수하여 주십시오.” 하자, 대사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옛것을 중수하는 공덕은 옛 성인이 기리던 바이며, 스님들이 몸과 마음을 화합하여 아우르고 한결같은 노력으로 큰마음을 단단히 내신다면 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하였다.
시십時什과 앙해卬海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법당의 화주化主가 되어 단청을 다시 칠하고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일을 모두 관장하라.”하고, 덕호德湖와 난훈蘭薰에게는, “그대들은 시왕전의 화주가 되어 시왕의 영상影像과 단청 및 기와의 일을 다 주관하라.”하고, 사안思眼에게는, “그대는 응진전의 화주가 되어 전당을 중수하고 탁자와 단청까지 도맡아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0001_0042_a_01L奇獸靈禽紛飛如此絕勝之地天下豈有二也
西天異景壺裡勝概但聞
0001_0042_a_02L其名不知如此也貴耳賤目渾世皆然勿以常所見者爲不貴也盖勝絕
0001_0042_a_03L之地又有勝絕之事故王太祖偏重此山囑道詵創立梵宮七百餘間
0001_0042_a_04L山下田畓數百結以奉香火祈福安邦 [149] 所也道詵浮圖尙今存焉此山重
0001_0042_a_05L於其時於斯可知後之人君守是先王之迹隨獘隨興而至于 王氏之
0001_0042_a_06L幾至空山而我 太祖卽位之後無學復興如初爲一國之大伽藍也
0001_0042_a_07L而又至于 世祖大王更增田畓兼贈奴婢百餘口備香火之資至萬歷
0001_0042_a_08L壬辰之亂極殘衰也
 崇禎辛未年無影大士自靈珠而來聚門徒三十
0001_0042_a_09L安居講經之次住持僧杜暹等數十人請之曰此寺前朝道詵之始創
0001_0042_a_10L我朝無學復興之道場願師重修大士喜曰修舊之功古聖所讚師等和
0001_0042_a_11L身合心并爲一力堅立大心則予何敢不力
曰時什卬海汝爲法堂化主
0001_0042_a_12L重修丹青佛像改金汝皆掌之曰德湖蘭薰汝爲十王殿化主十王影像
0001_0042_a_13L丹青盖瓦汝皆掌之曰思眼汝爲應眞殿化主重修殿堂卓子丹雘汝皆

0001_0043_a_01L 성의性義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설진당說真堂 화주가 되어 관장하라.”하고, 복수(矢+畐)守에게는 “그대는 적묵당寂默堂의 화주가 되어 주관하라.”하였다. 학첨鶴瞻과 단찰檀察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대루大樓의 화주를 담당하도록 하라.”하고, 묘흘妙(女+乞)에게는 “그대가 관장할 곳은 영월루迎月樓이고 전심각傳心閣도 맡아라.” 하였고, 회성懷聖에게는 “그대가 할 일은 동별실東別室 화주이다.”하고, 묘련妙蓮에게는 “그대가 주관할 것은 서별실西別室의 화주이다.”라 하였으며, 충일忠日에게 “그대는 서상실西上室의 화주를 해라.”하였다. 그리고 “도겸道謙은 송월료送月僚의 화주를 하라.” 하였고, “일진日真 그대는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일과 대루大樓와 각방各房 요사채의 단청 화주를 하라.” 하였으며, “신견信堅 그대는 종을 주조하는 화주를 맡아라.” 하였다. 이어 “허원虛遠 그대는 약사전의 화주를 하라.” 하였고, “승천勝天 그대는 향로전의 화주를 맡아라.”고 하였다. 또한 “□□ 그대는 법당法堂 면석面席의 화주를 담당하라.”고 하였고, “정행淨行 그대가 맡을 것은 삼련三輦의 화주이다.”라고 하였으며, “소언紹彥 그대는 불량佛粮의 화주를 맡아라.”고 하고, “지사知事인 승인勝印 그대는 별좌別座가 되어 모든 일을 다 관장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십 명의 승도들이 대사의 명을 삼가 받들고 각기 그 일을 맡아서 7년 안에 아전鵝殿 · 도당島堂 · 안료雁僚, 여러 요사채 5백여 칸을 옛 것을 고쳐서 새로 바꾸니, 처음 건립되었을 때보다 배나 좋아졌다. 대작 불사를 일으켜 완성을 보았을 때는 무인년이었다. 대사가 이어 백장百丈47)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켰고 임금을 축원하는 맑은 독경소리와 염불소리가 났다. 고매한 선이 수백의 마음속에 깃들며 향 연기가 전각 곳곳을 감싸고 풍경소리가 방마다 울려 퍼지니, 임금의 교화를 은밀히 돕는 복지福地이며 군주의 덕을 그윽하게 뒷받침하는 영험한 도량이다. 대사가 총림의 중수 공사를 마치자 조계曹溪에서 도를 닦는 이들과 심검尋劒의 높은 손님들이 암자에 운집하여 사람은 많고 방이 비좁아 모두가 흠으로 여겼다. 기묘년 무렵에 대사가 상족上足 제자인 복혜(矢+畐)惠에게 명하여 산에서 옛터를 찾아서 선암禪菴 백 수십 칸을 창건하게 하고 이름을

0001_0043_a_01L掌之曰性義汝爲說眞堂化主以掌之曰▼(矢+畐)守汝爲寂默堂化主以掌之
0001_0043_a_02L曰鶴瞻檀察汝爲大樓化主以掌之曰妙▼(女+乞)汝掌之曰迎月樓汝掌之
0001_0043_a_03L傳心閣曰懷聖汝爲掌之曰東別室化主妙蓮汝爲掌之曰西別室化主
0001_0043_a_04L忠日汝爲掌之曰西上室化主道謙送月僚化主日眞汝爲掌之曰佛像
0001_0043_a_05L改金與大樓各房僚舍丹青化主信堅汝爲掌之曰鑄鍾化主虛遠汝爲
0001_0043_a_06L掌之曰藥師殿化主勝天汝爲掌之曰香爐殿化主△△△汝爲掌之
0001_0043_a_07L法堂面席化主淨行汝爲掌之曰三輦化主紹彥汝爲掌之曰佛粮化主
0001_0043_a_08L知事勝印汝爲別座以諸萬事汝皆掌之
數十輩伏受師命各任其事
0001_0043_a_09L年內鵝殿島堂雁僚諸舍五百餘間改舊換新倍勝初建之時也而作大
0001_0043_a_10L佛事而造成時當戊寅之歲也大士仍以大振百丈之風祝其君清梵念
0001_0043_a_11L高禪掌居於數百指香烟殿殿磬聲房房密助 王化之福地冥資聖
0001_0043_a_12L德之靈場也大士叢林修畢杜口曹溪尋劒高賓雲集其菴人多室窄
0001_0043_a_13L所病焉己卯年間大士命上足▼(矢+畐)惠尋山古基創禪菴百數十間名之以

0001_0044_a_01L 상선上禪이라 하였으며 승도를 모아 3년 동안 안거하게 하였다.
무자년에 청암清巖 대사가 북관北關(함경도)에서 와서 본사本寺에 들어와 대회를 연 후 문인들을 모아놓고 계획을 세우기를, “내가 동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익숙하게 보아왔지만 이처럼 절경인 곳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어찌 그에 맞는 암자를 짓지 않겠는가. 문인들 100여 인에게 맡겨서 마을을 다니며 시주를 권면하여 반년 안에 정사精舍 50여 칸을 크게 짓고 편액을 보문普門이라 하였다.
아! 무영과 청암은 우리 동방의 대중이 다 아는 선지식이니, 도선과 무학의 염원을 간직한 몸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청컨대 동진東晉 때 사람 허현도許玄度48)의 일을 보라. 후세 사람들이 두 대덕의 도행道行을 알고자 한다면 밝은 거울이 높이 걸려 있는 듯한 두 분의 넉넉한 모습을 보도록 하라. 관음과 자씨慈氏(미륵), 조계曹溪(6조 혜능)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여러 암자들을 창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아, 이 산의 성쇠盛衰는 기수氣數의 성쇠인 것이고, 기수의 성쇠는 국운의 성쇠이며, 국운의 흥폐는 우리 도의 융성함과 쇠퇴함을 의미한다. 불자들이 도를 스스로 지켜간다면 국운의 상서로움을 어쩌면 일으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강희康熙 45년(1706) 병술년 11월 일에 이전의 사적事迹이 흩어져서 고쳐서 성책하였다.
5-1. 편액조사표扁額調查表 (別紙第二号)
사명
寺名
편액집필
扁額執筆
주임主任
전각명칭
殿閣名稱
편액문扁額文적요摘要
백운사
白雲寺
세조대왕
大王
어필각
御筆閣
행도수궁처
行到水窮處
좌간운기시
坐看雲起時
동仝동仝금로불멸천년화
金爐不滅千年火
옥잔상명만세등
玉盞常明萬歲燈

0001_0044_a_01L上禪聚徒安居數三年焉
戊子之時清巖大士自北關而來入本寺大會
0001_0044_a_02L而後聚門人謀曰余東國名山徧踏慣見而如此絕勝之地未曾見也
0001_0044_a_03L如此絕勝之地豈不作絕勝之菴乎囑諸門人百餘輩聚落勸化半年之
0001_0044_a_04L大建精舍五十餘間額曰普門
無影清巖吾東邦衆所知識安知非
0001_0044_a_05L道詵無學留願之身乎請看許玄度之事後人欲知二大德之道行看取
0001_0044_a_06L二大德之高懸自餘觀音慈氏曹溪復生諸菴未知所創之人也於戲
0001_0044_a_07L山之盛衰氣數之盛衰也氣數之盛衰國運之盛衰也國運之興廢吾道
0001_0044_a_08L之汗隆也釋子苟以道自持則國運之祥庶可興也

0001_0044_a_09L康熙四十五年歲次丙戌至月日曾前事迹段破故改成冊

0001_0044_a_10L扁額調查表(別紙第二号)

0001_0044_a_11L
寺名扁額執筆
主任
殿閣名稱扁額文摘要
白雲寺大王御筆閣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金爐不滅千年火
玉盞常明萬歲燈

0001_0045_a_01L
고승古僧금불정전
金佛正殿
흥룡사興龍寺백운사白雲寺
고명古名
동仝십왕전
十王殿
십왕전十王殿
동仝산신각
山神閣
산신각山神閣
동仝어필각
御筆閣
어필각御筆閣
6. 사나사 비문 병서 舍那寺碑文 并序
원증국사圓證國師 석종명石鍾銘
중현대부中顯大夫 성균좨주 지제교成均祭酒知製教 정도전鄭道傳이 글을 짓다.
고려의 국사國師 이웅利雄 존자尊者가 소설산小雪山에서 입적하자, 문인門人들이 화장을 하여 얻은 사리가 매우 많았다. 양근군楊根郡의 부로父老들이 지군사知郡事 강만령姜萬岭에게 청하자, 돌을 다듬어 종鍾을 만들고 사리 10매를 봉안하여 사나사舍那寺에 두었다. 여기에는 좁쌀 30석碩과 베 300필匹이 들었으며 계해년(1383) 가을 9월 무신일에 시작하여 겨울 12월 경신일에 역사를 마쳤다. 문인 달심達心이 실질적으로 이 일을 주관하였다. 양근군은 본래 익화현益和縣으로 국사의 모친의 집이 있던 곳이다. 군의 서쪽에 흐르는 큰 강이 한강으로,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600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군 동쪽에 있는 산을 미지산彌智山이라 부르는데 우뚝 솟아 양주楊州와 광주廣州, 교주交州의 경계에 있어서 산수의 맑은

0001_0045_a_01L
古僧金佛正殿興龍寺白雲寺
古名
十王殿十王殿
山神閣山神閣
御筆閣御筆閣

0001_0045_a_06L○舍那寺碑文并序

0001_0045_a_07L
圓燈 [150] 國師石鍾銘
 中顯大夫均祭酒 知製
0001_0045_a_08L鄭道傳 撰

0001_0045_a_09L
高麗國師利雄尊者示寂小雪山門人火五得舍利甚多楊根郡父老
0001_0045_a_10L知郡事姜侯萬岭 [151] 石爲鍾藏舍利一十枚置舍那寺 [152] 用粟三十碩
0001_0045_a_11L三百匹始於癸亥秋九月戌申終於冬十二月庚申門人達心實主其事
0001_0045_a_12L夫楊根郡本益和縣師之母家也郡之西有大江曰漢發源太白山
0001_0045_a_13L流六百里入海郡之東曰彌智山屹然據乎楊廣交州之境其山水清淑

0001_0046_a_01L기운이 신령함을 품고 수려함을 낳으니, 기이하고 특별한 사람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 기운을 얻어서 그럴 것이다.
국사는 양근군 대원리大元里에서 태어났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임제臨濟의 18대손 석옥 청공石屋清珙 선사의 법을 계승하였으니 임제에게는 19대손이 된다. 석옥이 법의法衣와 선장禪杖을 주어 심인心印 전수(相契)를 드러냈다. 동쪽으로 돌아오자, 현릉玄陵(공민왕)이 예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삼고 이어서 국사國師로 올려주었다. 모친인 정씨鄭氏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고, 익화현益和縣을 양근군楊根郡으로 승격시켰으며 선발된 조신朝臣이 와서 군의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니 이는 국사를 존중하여 그가 태어난 근본을 받든 것이다. 이희계李希桂와 강만령은 모두 좋은 관리의 기질이 있어서 이로움을 일으키고 폐단을 개혁하여 군민이 편안히 살 수 있었는데 이는 모두 국사의 은혜이다. 국사는 이 군을 다시 만든 은덕이 있으니 군민들이 그를 흠모하여 비록 오래되어도 잊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사를 섬기는 이들이 사리를 모신 것은 또한 그만둘 수 없는 본심에서 발현된 것이어서 그렇다. 비명碑銘을 짓는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龍門崒𡷏     용문산이 드높고
漢水漣漪     한강 물은 굽이굽이
克生異人     특이한 분 나시더니
王國是師     왕사 되고 국사가 되어
臨濟之傳     임제의 법을 전수하자
式克肖之     본을 받고 닮으셨네
縣陛為郡     현은 군으로 승격되고
民安以嬉     백성들 편안하고 기뻐하니
惟師之德     오직 국사의 덕인 것을
郡人之思     군민들이 사모하여
承事舍利     사리 받들어 모시기를
如師在兹     국사가 여기 계신 듯이
有礱石鍾     돌을 깎은 석종에다
勒我銘詩     내가 지은 비명을 새겨
留鎮山門     산문에 두고 지켜서
傳示後來     후세에 전하노라

홍무洪武 19년 병인(1386) 10월 일에 문인 달심達心  비석을 세우다.
  

0001_0046_a_01L之氣孕靈產秀爲環 [153] 異奇特之人其必有得於是者歟
於是師生楊根郡
0001_0046_a_02L大元里遊學中國嗣臨濟十八代孫石屋清珙禪師之法則於臨濟爲十
0001_0046_a_03L九代之孫也石屋贈法衣禪杖以表相契東還 玄陵禮以爲 王師
0001_0046_a_04L加國師封母鄭氏三韓國大夫人陞益和縣爲楊根郡遴選朝臣來撫郡
0001_0046_a_05L所以重師而推本其由生也若李侯希桂姜侯萬岭皆有良利 [154] 之風
0001_0046_a_06L興獘革民得休息師之賜也師有再造是郡之德郡人慕之雖久不忘
0001_0046_a_07L其所以事師者事舍利其亦發於本心之不能已者然也銘之不亦宜乎
0001_0046_a_08L銘曰

0001_0046_a_09L
龍門崒𡷏 漢水漣漪 克生異人 王國是師

0001_0046_a_10L臨濟之傳 式克肖之 縣陛爲郡 民安以嬉

0001_0046_a_11L惟師之德 郡人之思 承事舍利 如師在兹

0001_0046_a_12L有礱石鍾 勒我銘詩 留鎮山門 傳示後來

0001_0046_a_13L
洪武十九年丙寅十月 日 門人達心  立石

0001_0047_a_01L재림사梓林寺 주지主持 선사禪師 의문誼聞 비문을 쓰다.
    훈곡薰谷과 명호明昊 비문을 새기다.
7. 지평현 미지산 윤필암기 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한산자韓山子(이색李穡)49)가 보제普濟(나옹 혜근懶翁惠勤)50)의 부도탑에 명銘을 짓고 그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보제는 우리 선왕先王의 스승이었던 분이다. 도가 높고 덕이 높았으니 나라 안에서 그 누군들 공경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설법을 듣는 것을 평생의 행운이라 여기지 않았겠는가. 오직 나만이 인사드릴 생각을 안 하고 죽원竹院의 스님의 담화조차도 귀에 접해 본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보제가 궁중을 출입할 때나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할 적에도 감히 경솔하게 나아가 뵘으로써 내가 지켜오던 것을 바꾸지 않았던 것은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일을 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제가 입적한 뒤에 사리가 나오는 이적異蹟이 있자, 세상에서 그의 도를 더욱 신뢰하게 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남에게 뒤질세라 달려가기에 바빴지만, 나는 또 병을 앓던 터라 이에 뜻을 두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그의 명銘을 지으라는 하명이 있으시니, 감히 분부를 받들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보제에게 내 글이 적합할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세상의 이름난 유학자로 글 잘 짓는 이가 적지 않은데 내가 이런 명을 받게 되다니 허무한 일이다. 스스로 행운이라 여기면서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얼마 후에 문인이 나에게 예를 갖추어 “윤필료潤筆料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이를 물리치며 이르기를, “대사는 선왕의 스승이었고,

0001_0047_a_01L梓林寺主持禪師誼聞   書

0001_0047_a_02L  薰谷明昊   刊

0001_0047_a_03L○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0001_0047_a_04L
韓山子旣筆普濟浮圖銘則告其徒曰普濟
0001_0047_a_05L先王之所師也道尊德高國中誰不敢 [155] 趨下風聞緒論以爲終身之本 [156]
0001_0047_a_06L獨穡懶於伺候雖竹院僧話亦未嘗一及於耳是以普濟之出入禁闥
0001_0047_a_07L揀擇功夫也 [157] 敢輕以進謁變吾所守蓋道不同不相爲謀 [158] 故也師旣示
0001_0047_a_08L有舍利之異師道之益信於世 [159] 國奔趨惟恐不及穡又病无由致意
0001_0047_a_09L於其間久矣
0001_0047_a_10L旨撰其銘則不敢不奉教但未知普濟之可吾文與否耳雖然當世大儒
0001_0047_a_11L秉筆者不少而穡獲承是命夫豈徒然未嘗不自幸且自悲也
旣而門人
0001_0047_a_12L行禮於僕曰潤筆予却之曰
0001_0047_a_13L先王之師也

0001_0048_a_01L나는 선왕의 신하였다. 내가 선왕의 신하로서 선왕의 스승의 명銘을 짓는 일인데, 예법에서 이러는 것은 부당하다. 가령 선왕이 건재하시어 친히 나에게 예물을 내려주시더라도, 나는 마땅히 사양해야 한다. 더구나 지금 하늘에 계신 선왕의 혼령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시는데, 내가 감히 이를 탐하여 스스로 옳지 못한 재물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사의 제자로서 스승의 은혜에 기어이 보답하고 싶다면, 퇴락한 옛 절을 수리하여 한편으로는 국가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승도를 편히 거처하게 할 일이다. 그리하면 비록 나에게 윤필요를 지급하지 않더라도 보제가 남긴 은덕을 더욱 윤택하게 하여 모든 이들에게 그 은혜를 끼침이 더욱 다함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는 승려 지선志先과 지수志守가 열심히 뛰어다닌 공이며, 지금은 묘덕妙德이란 이름의 비구니가 된 정안군定安君의 부인 임씨任氏가 재물을 희사한 덕분이다. 이렇게 해서 미지산에 이 암자가 세워지게 되었고, 내가 이 기문을 짓게 되었다. 뒷날 이 암자에 거처하는 자는 다만 보제의 사리이니 자신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유자儒者의 말에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가 했던 대로 하면 나도 그처럼 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청컨대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지어다. 시주자(단월檀越)의 성명은 뒤에다 갖추 기록한다.

창룡蒼龍 무오년(1378, 우왕 4) 8월 어느 날에 삼중대광三重大廣 한산군韓山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기문을 짓다.
  비구比丘 안분安分, 비구니比丘尼 묘징妙澄
숭정崇禎 기원후 140년이 되는 갑오년(1774) 12월 일에 서원西原 한정유韓廷維 비문을 쓰다.
  

0001_0048_a_01L先王之臣也
0001_0048_a_02L先王之臣而銘
0001_0048_a_03L先王之師禮不當如是使
0001_0048_a_04L先王無恙親賜臣臣當辭謝矧今先王在天之靈臨之在上臣敢貪買 [160]
0001_0048_a_05L納於黷貨哉師之弟子必欲報師恩者修舊寺之廢一以裨補國家一以
0001_0048_a_06L安處徒衆則雖不潤吾之筆其潤普濟之餘波以及於物者當益无窮矣

0001_0048_a_07L
此釋志先志守之奔走而與夫定安郡 [161] 夫人任氏今爲比丘尼名妙德 [162]
0001_0048_a_08L捨財而彌智之有是菴也此韓山子之有是記也後之居是菴者惟普濟
0001_0048_a_09L之舍利舍利於其身可也吾儒者曰舜何人也予何人也有爲者亦如是
0001_0048_a_10L請銘其座右其檀越名氏具銘于后
蒼龍戊午八月三重大廣韓山君
0001_0048_a_11L領藝文春秋館事牧隱李穡記

0001_0048_a_12L比丘安分比丘尼名妙澄

0001_0048_a_13L
崇禎記元 [163] 後百四十年甲午臘月 日西原韓廷維書

0001_0049_a_01L그 뒤 네 번째 갑오년 1월 일에 중간重刊하였다.
  중수를 담당한 승려는 장훈莊訓이다.
  주지승은 차상원車祥元이다.
8. 유명조선국 미지산용문사 시정지국사 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彌智山龍門寺諡正智國師碑銘 并序
홍무洪武 28년 을해(1395, 태조 4) 가을 7월 초7일에 고승 천공泉公이 천마산 적멸암寂滅菴에서 시적하였다. 다비茶毗51)한 뒤 여러 날이 지났는데, 그의 문도 해참海旵의 꿈에 나와서 “너희가 어찌 사리를 버려두고 거두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아침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승도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다비했던 곳으로 달려가자 셀 수 없이 많은 사리를 얻었는데 그 빛이 너무도 환하게 밝았다. 산중의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모여와서 극진히 예를 행하고 마음속 깊이 그리워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임금께서 듣고 기이하게 여기며 정지국사正智國師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문인 각안覺眼 등이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에 가서 부도를 세워 영골을 안치하고, 또 비를 세워 공덕을 기리고자 무인년(1398, 태조 7) 여름에 서울로 와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주상께서 신臣 권근權近에게 그의 비명을 짓도록 명하시므로, 물러나와 각안에게 묻고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선사의 휘는 지천智泉이요, 속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연延이니 사재부령司宰副令이었고, 어머니 윤씨는 의성부義城府의 사족士族이다. 원나라 태정泰定(진종晉宗의 연호) 갑자년(1324, 충숙왕 11)에 태어나서 19세에 장수산長壽山 현암사懸庵寺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글을 배우지 않고 곧바로 선지禪旨를 참구하였으며 뒤에 『능엄경』을 배웠으나 크게 깨닫지 못하다가, 다시 남명南明의 『증도가證道歌』52)를 배우고

0001_0049_a_01L後四甲午正月日重刊

0001_0049_a_02L重修僧莊訓

0001_0049_a_03L主僧車祥元

0001_0049_a_04L

0001_0049_a_05L○有明朝鮮國彌智山龍門寺諡正智國師碑銘并序

0001_0049_a_06L
洪武二十八年乙亥 [164] 七月七日高僧泉公示寂于天磨山寂滅菴茶毗
0001_0049_a_07L旣有日梦于其徒志修 [165] 爾何棄設利不收卽驚起告其徒卽 [166] 往茶毗
0001_0049_a_08L之所得舍利無算光甚明瑩山中諸衲 [167] 集致 [168] 頂戴感慕嘆未曾有
0001_0049_a_09L上聞而異之追贈 [169] 正智國師門人祖 [170] 眼等就彌智山龍門寺置浮圖安骨
0001_0049_a_10L又欲立碑記 [171] 戊寅之夏乃來 [172] 以聞

0001_0049_a_11L
上命臣近文之近退而問 [173] 諸祖 [174]
[175] 智泉俗姓金氏載寧人考諱延司宰
0001_0049_a_12L副令妣尹氏義城府士族以元泰定甲子生年十九祝髮于長壽山懸
0001_0049_a_13L菴寺初不學文字 [176] 參禪旨後學楞嚴不甚曉又學南明 [177] 若有得

0001_0050_a_01L오래 있다 깨달음이 있는 듯하여 다시 『능엄경』을 살펴보고 그 대의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 강사講師에게 질의할 때는 종종 그 강사가 미치지 못한 데까지 학습하고 해석하여 강사가 곧 굴복하곤 하였다.
지정至正(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계사년(1353, 공민왕 2)에는 지금의 왕사王師인 무학無學53)과 함께 연경燕京에 들어가 법천사法泉寺에서 지공指空54)을 뵈었는데, 당시 나옹懶翁55)은 앞서 연경에 들어가 지공의 인가를 받고 도의 명성이 이미 퍼져 있었다. 두 선사는 모두 나옹을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유력하고 찾아다니니 이룩한 경지가 더욱 높아졌다. 또 오대산에 가서 벽봉碧峯 화상을 뵈었는데, 그때 명사名士인 조중목趙仲穆이 있다가 축원竺源이란 두 글자를 전서篆書로 크게 써 주었으니 이것이 선사의 법호法號이다. 병신년(1356, 공민왕 5)에 귀국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가 오대산과 소백산, 지리산과 미지산彌智山 등 여러 산을 두루 다녔는데,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방 한 칸에 홀로 거처하며 대중이 모이는 곳에 나오지 않았으며, 항상 말과 웃음을 적게 하고 근엄하고 신중히 할 뿐이었다.
어쩌다 도의 요체를 묻는 이가 있으면, 질문에 따라 응답하되 말을 적게 하여 스스로 탐구하게 하고,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존경할 뿐이었지 특별한 덕망을 갖추었음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나옹과 무학은 서로 이어서 명성을 드날리며 왕사王師가 되어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으므로 사중四衆56)이 세찬 물결처럼 몰려들고 휩쓸려 왔지만, 공은 홀로 학식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를 감추어 깊은 산에 숨어 살며 한 번도 대중의 집회를 이끌거나 강석講席을 주관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수행으로 마음을 밝게 비추었고 늙어서까지도 게을리 하지 않더니, 입적하던 날 저녁에 모시는 시자侍者와 작별하고 가부좌를 한 채 세상을 떴다. 사리의 이적이 나타난 뒤에야 사람들이 그의 덕에 감복하여 참으로 도를 얻은 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72세였으며, 법랍法臘은 54년이었다.
내 일찍이 들으니 “부도씨浮屠氏(부처)는 이미 깨닫고 온 이로서 성인이 이해하는 경지를 다 감추고 세속에 자취를 섞어서 이류異類(중생) 안에서 행한다.”고 하였는데, 선사야말로 참으로 그러한 사람이었던가? 불법은 적멸로써 종宗을 삼고, 청정하고 욕심을 적게 함으로써 도를 삼는 법인데, 세간에서 일컬어지는 법사라는 자들이 서원은 지나치게 크고, 죄와 복을 유인해서 모으며, 청신사와 청신녀들에게 거만하게 굴며 공양을 받으면서도 떠들썩하며 과분한 사치를 사양하지 않으니 그 끝이 없도다. 이것은 적멸하며 욕심을 적게 하는 불도에 어떠한가? 오직

0001_0050_a_01L是更究 [178] 楞嚴大義了然質諸講師往往 [179] 學解所未 [180] 講師 [181] 乃服
至正
0001_0050_a_02L癸巳與今 王師無學俱入燕意 [182] 謁指空于法雲 [183] 時懶翁先入燕
0001_0050_a_03L指空印可道譽旣著二師皆投師之同遊參訪所著 [184] 益高又往五臺山
0001_0050_a_04L謁碧峯和尙有名士趙氏仲穆爲書竺源古篆二大字以贈師之號也
0001_0050_a_05L丙申還國 [185] [186] 諸名山所至必獨屛一室不隨衆會常寡言笑謹重而
0001_0050_a_06L
或有咨其道要者隨問而應言希以究不問則不言衆頗以老敬之
0001_0050_a_07L而己 [187] 衆未嘗知有異德也懶翁無學繼相 [188] 有重聲爲王者師大振宗風
0001_0050_a_08L衆奔波靡然趨向 [189] 公獨韜光晦迹潛德雲山未嘗一領衆會一主講
0001_0050_a_09L專修內朗至老無倦示寢 [190] 之夕與侍者訣趺坐而逝及有 [191] 舍利之異
0001_0050_a_10L然後衆服其德衆以爲眞得道者也春秋七十二臘五十四
予嘗聞浮屠
0001_0050_a_11L氏旣覺來者聖解俱泯混跡塵凡異類中行師眞其人願 [192] 佛法以寂滅
0001_0050_a_12L爲宗以清潔寡慾爲道而世所稱法師者願乃廣張罪福誘集士女偃
0001_0050_a_13L以受供施而不辭紛閙侈靡罔有其極是於寂滅寡慾之道如何

0001_0051_a_01L공만은 그렇지 않아 고고하고 절도 있게 스스로를 지키며 덕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참으로 도를 얻은 분이다. 각안이 30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지금 그 사람됨을 보면 질박하여 겉치레가 없고 말씨가 몹시 어눌하니, 역시 선사의 제자여서 그러한가? 승려의 비를 세우는 것은 당나라 때부터였다. 그러나 그 스승이 반드시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그 제자들 또한 당시에 번성한 이를 위한 일이었다. 스승이 크게 알려져 있지 않고 제자도 단출하지만 스승의 덕을 환히 드러내고자 온 힘을 다하면서도 말을 많이 하지 않기를 각안처럼 하는 이는 예로부터 있지 않았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신은 더욱이 주상의 명을 받았으니 감히 삼가 명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卓彼泉公     뛰어난 저 천공이시여
默契其妙     묵묵히 오묘한 법을 깨달으시니
迹泯外彰     자취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智融內照     지혜는 안을 환히 비추었도다
始訪于遠     처음에는 멀리까지 찾아갔으나
終晦于隱     마침내 은둔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匪覺其覺     깨달음이 없는 깨달음이요
無聞之聞     들음이 없는 들음이로다
鳥絶含花     한 세상 향기로운 자취 간 곳이 없으니
人孰知德     어느 누가 그의 덕망을 알 것인가
惟舍利存     오직 사리가 있을 뿐이니
厥靈以赫     그 영험이 빛이 나도다
伐石以藏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되
于山之陽     미지산 양지바른 쪽을 택했으니
密護邦國     은밀히 나라를 보호하여
永鎭無彊     길이 무궁하게 지킬 것이도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은 전교를 받들어 찬술하다.
비석을 세울 때 찬조한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사우權思愚
저평감무선무랑低平監務宣務郎 송면宋勉
삼사우三司尤         윤위안尹魏安

0001_0051_a_01L公不然高絕自守德嘿不彰是眞得道者也 [193] 眼事師三十年今觀其
0001_0051_a_02L質慤無文其言甚訥是亦其師之徒歟浮圖 [194] 有碑自唐已然然其師
0001_0051_a_03L必大顯於世其徒亦大盛於時者之所爲也師而不耀徒亦單寡尙慾 [195]
0001_0051_a_04L光照 [196] 其師之德拳拳致力而不懈 [197] 如祖 [198] 眼者古盖未有焉是可嘉也
0001_0051_a_05L臣承

0001_0051_a_06L上命敢不敬銘銘曰

0001_0051_a_07L
卓彼泉公 默契其妙 迹泯外彰 智融內照

0001_0051_a_08L鳥絕含花 人孰知德 惟舍利存 厥靈以爀

0001_0051_a_09L始訪于遠 終晦于德 匪覺其覺 無聞之聞

0001_0051_a_10L伐石以藏 于山之陽 密護邦國 永鎭無疆 [199]

0001_0051_a_11L
資憲大夫花山君權近 奉 教撰

0001_0051_a_12L
立碑時捐助名錄 
權思愚

0001_0051_a_13L低平監務宣務郎  宋 勉  三司尤  尹魏安

0001_0052_a_01L밀직사密直使         최흥적崔興迪 위권魏權
전전서前典書         이사위李士謂
서주사西州事         정수도鄭修道 최경만崔敬蔓
호군護軍           이실李實   유천보俞千寶
중랑장中郎將         김인석金仁錫 김함연金咸鍊 안신길安信吉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 김영겸金永謙 김귀생金貴生
               박귀천朴貴天 박이朴頤   김길생金吉生
               장귀봉張貴奉
대선사大禪師         은봉隱峯   조영祖英   해행海行
               각연覺連   지분志芬   신중信中
               각일覺一   지운志云   조일照一
               해여海如   법하法何   신명信明

0001_0052_a_01L密眞 [200] 使    崔興迪       魏權

0001_0052_a_02L前典書      李士謂  西州事  鄭修道

0001_0052_a_03L         崔敬蔓  護 軍  李實

0001_0052_a_04L         俞千寶  中郎將  金仁錫

0001_0052_a_05L         金咸鍊       安信吉

0001_0052_a_06L判事       李德時       金永謙

0001_0052_a_07L         金貴生       朴貴天

0001_0052_a_08L         朴 頤       金吉生

0001_0052_a_09L         張貴奉

0001_0052_a_10L大禪師      隱 峯  祖 英  海 行

0001_0052_a_11L         覺 連  志 芬  信 中

0001_0052_a_12L         覺 一  志 云  照 一

0001_0052_a_13L         海 如  法 何  信 明

0001_0053_a_01L               철암鉄菴   신현信賢   가암暇菴
               신산信山   각엄覺嚴   실혜實惠
               조선祖禪   해보海普
대선大選           연혜連惠   해증海證   신온信溫
               각성覺性   신교信教   도겸道岒
               계심戒心   신연信然   신영信英
               해인海印   해신海信   조견祖堅
               해안海安   신해信海   성증性證
               지장志莊   해혜海惠   신운信云
               조암祖岩   해인海因   신보信寶
               조명祖明   달명達明   해증海證
               조일祖一   신각信覺   신명信明
               해운海云   해각海覺   해명海明

0001_0053_a_01L         鉄 菴  信 賢  暇 菴

0001_0053_a_02L         信 山  覺 嚴  實 惠

0001_0053_a_03L         祖 禪  海 普

0001_0053_a_04L大選       連 惠  海 證  信 溫

0001_0053_a_05L         覺 性  信 教  道 岒

0001_0053_a_06L         戒 心  信 然  信 英

0001_0053_a_07L         海 印  海 信  祖 堅

0001_0053_a_08L         海 安  信 海  性 證

0001_0053_a_09L         志 莊  海 惠  信 云

0001_0053_a_10L         祖 岩  海 因  信 寶

0001_0053_a_11L         祖 明  達 明  海 證

0001_0053_a_12L         祖 一  信 覺  信 明

0001_0053_a_13L         海 云  海 覺  海 明

0001_0054_a_01L               돈명頓明   묘담妙湛   묘총妙聰
               신철信哲   묘영妙英   묘관妙觀
               조인祖因   묘안妙安   묘영妙英
               각선覺禪   묘법妙法   해몽海矇
               신명信明   해수海修   성총性聰
               신원信原   묘행妙行   선행善行
               묘원妙原   해선海禪   신현信賢
비구니比丘尼         승월勝月   묘장妙莊

홍무洪武 31년 무인(1398) 12월 일.
9. 운악 현등사57) 사적 雲嶽懸燈寺事蹟 (가평군加平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보조국사普照國師58)가 망일산望日山 원통암圓通菴에서 운악산雲嶽山을 바라보니 3일 밤을 불빛이 반짝거렸다. 그곳에 가보니 담쟁이덩굴 아래 관음전이 덩그러니 홀로 있고, 옥등玉燈이 관음전 남쪽 석탑 위에 매달려 있었는데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0001_0054_a_01L         頓 明  妙 湛  妙 聰

0001_0054_a_02L         信 哲  妙 英  妙 觀

0001_0054_a_03L         祖 因  妙 安  妙 英

0001_0054_a_04L         覺 禪  妙 法  海 矇

0001_0054_a_05L         信 明  海 修  性 聰

0001_0054_a_06L         信 原  妙 行  善 行

0001_0054_a_07L         妙 原  海 禪  信 賢

0001_0054_a_08L比丘尼    勝 月  妙 莊

0001_0054_a_09L
洪武三十一年戊寅十二月 日

0001_0054_a_10L

0001_0054_a_11L○雲嶽懸燈寺事蹟    加平郡

0001_0054_a_12L
如是我聞普照國師在望日山圓通菴望見雲嶽山中三夜放光往訪其
0001_0054_a_13L則藤蘿之下觀音一殿巋然獨存玉燈懸在殿南石塔之上而火不滅

0001_0055_a_01L국사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머리를 조아려 큰절을 올린 뒤에 풀 섶을 헤치고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옛날 대가람大伽藍의 터였다. 큰 불이 나서 다 타버린 자리에 기이한 나무들이 빽빽이 연이어 있었다. 국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승려와 속인이 모두 시주하였다. 목재는 먼 곳에서 구하지 않고 그곳에서 얻은 것으로 사찰을 지었고, 현등사懸燈寺라는 현판을 걸었다.
임금께서 보조普照를 국사國師로 봉하시어 삼가 공경하고 감사하였으며 천금을 희사하여 500결結의 전지田地를 하사하셨다. 이때 보조국사가 현등사에 있으면서 이르기를, “신라 법흥왕 때에 중국이 천축국(인도)의 승려 마라가미摩羅訶彌에게 흰 코끼리를 타고 해동海東에 불경과 불법을 전수하게 하자, 국왕이 소한주小漢州에서 맞이하였다. 마라가미가 임금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아호兒號를 부르면서, ‘옛날 구아산狗牙山의 법흥아法興兒가 이제 장차 기미箕尾 해안의 법흥왕이 되었구나.’하고서, 석장錫杖을 들어 흰 구름이 일고 있는 동쪽 석산石山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라가미는 신을 벗어 흰 코끼리의 양쪽 상아에 거꾸로 걸어주면서, ‘너는 중국으로 돌아가서 천자에게 사직 인사를 올리고 서쪽 고국으로 돌아가거라.’하자, 코끼리가 절을 하고 떠나갔다. 마라가미가 맨발로 가서 흰 구름이 솟아나는 석산으로 들어가자, 법흥왕이 그를 위하여 대가람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 산을 운악산雲嶽山으로 봉하고 전지 1만 결을 하사하니, 이것이 바로 동방의 불법과 사찰의 시초였다.
신라가 쇠퇴하고 운악산의 사찰이 화재로 소실된 뒤에 고려의 도선道詵59) 법사가 당唐의 일행一行 조사의 도술을 전수받아 통하였다. 송악산 아래에 나라의 도읍을 정하고 나무 학鶴을 날려서 약사삼불藥師三佛의 도량을 창건하여 동방의 빈 기운을 눌렀다. 운악산雲嶽山의 수려함을 보고서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그 산에 들어가 보니 절터가 있고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 나무들을 베어내 용마루와 들보를 삼아서 낙성을 한 후로, 고려의 역대 국왕들이 한량없이 많은 전결田結을 내렸다.

0001_0055_a_01L國師異之頂禮畢因披索而見之卽古大伽藍址也奇材異木簇立連
0001_0055_a_02L抱於劫灰之痕於是國師聞于
0001_0055_a_03L緣化僧俗材不遠鳩取諸其中而成之扃其寺曰懸燈
王旣封普照爲
0001_0055_a_04L國師重敬而感之施捨鉅千賜田五百結
0001_0055_a_05L伊時普照國神在懸燈寺曰新羅法興王時中國使天笙國 [201] 僧摩羅訶彌
0001_0055_a_06L騎白象傳經法于海東王迎于小漢州摩羅訶彌撫王頂兒呼曰昔時狗
0001_0055_a_07L牙山中法興兒今將爲箕尾海岸法興王耶因舉錫東指白雲生於石山
0001_0055_a_08L於是摩羅訶彌脫其屨掛白象之兩逆牙曰汝歸中國辭天子西還故國
0001_0055_a_09L象拜而去摩羅訶彌跣足往入白雲石山法興王爲建大伽藍封其山曰
0001_0055_a_10L雲嶽賜萬結乃東方佛法寺剎之始也
新羅之衰雲嶽山寺火後高麗道
0001_0055_a_11L詵法師傳通大唐一行祖師道術旣定國都於松岳山下飛木鶴創三藥
0001_0055_a_12L師道場以壓東方之虛見雲嶽之秀大奇之往入其山已有寺址而樹已
0001_0055_a_13L叅天爰伐棟樑落成之高麗列聖賜結無量

0001_0056_a_01L이때 도선법사가 운악산에서 금으로 된 관음상에 예배하고 천불千佛을 정념靜念한 후 탑이 있는 마당으로 걸어 나가 달에 절하고 별을 우러러보다가 문득 탑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300년 뒤에 병일도구並日刀口60)가 올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불이 났고 보조普照를 만나 현등사懸燈寺가 지어졌으니 그 연도가 딱 들어맞았다.
고려 중엽에 한 고승이 낮에 참선을 하는데 눈썹이 하얀 노승이 앞을 지나며 “불이 나겠네. 불이 나겠어!”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한(당)의 평상 위에 응진應真(나한)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뒤를 밟아보니 석실石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이날 절에 과연 불이 났다. 그 뒤에도 절의 대중들이 꿈을 꾸었는데 붉은 갑옷에 붉은 말을 타고 온 사람이, “팔인八人61)이 온다.”고 하였는데, 그 이튿날 불이 났다.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62) 11년(1411)에 함허조사涵虛祖師63)가 삼각산三角山 원각사圓覺寺로부터 오신산五神山으로 가다가 운악산을 지나는데 서쪽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 흰 사슴이 앞에 가길래 따라갔더니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서 울창한 숲을 만났다. 사슴은 보이지 않고 오래된 전각 하나가 숲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각 옆에는 탑이 있고 탑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데 “병일도구並日刀口가 바로 전신前身이었으니 인과因果가 이미 다하고 다시 과果가 인因이 되네.”라고 하였다. 함허조사가 느끼고 깨우치는 바가 있어서 그 터를 살펴보니 나무가 재목으로 쓸 만하였다. 그리하여 현등사를 중건하여 세 대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서 그 위실位室을 받드니 전지 3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숭정 갑신 후 두 번째 계미년(1763)에 구암노선龜巖老禪 문신文信이 현등사에 있었다. 3월 보름에 공중으로 불이 솟구치자 대중이 애써 진화했는데 17일에 다시 불이 나더니 승당僧堂의 다락 기둥 사이로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서 오래된 관음전까지 불을 피할 수 없었다. 구해낸 것은 금상金像이며 보존된 것은 위실位室 및 청심당清心堂, 양로방養老房 뿐이었다. 절의 동쪽 산기슭에 있는 원통전이란

0001_0056_a_01L伊時道詵法師在雲嶽山禮觀音金像靜念千佛出步塔庭拜月瞻星
0001_0056_a_02L聞塔中作聲曰三百年後並日刀口其後火果得普照爲懸燈寺其年紀
0001_0056_a_03L符焉
高麗中季有一高行晝叅白眉老釋前過曰回祿回祿因忽不見
0001_0056_a_04L羅漢榻上應眞之座虛矣跡之坐於石室中是日寺果火其後又寺衆夢
0001_0056_a_05L朱甲赤馬者曰八人來矣明日火
0001_0056_a_06L太宗大王十一年涵虛祖師自三角山圓覺寺往五神山過雲嶽山西迷
0001_0056_a_07L失道有白鹿前行隨之踰山度壑得鉅林不見其鹿見一古殿在林殿側
0001_0056_a_08L有塔塔間有吟曰並日刀口是前身因果旣盡又果因祖師因感悟搜觀
0001_0056_a_09L其墟樹可材也於是重建懸燈寺爲三大君願堂因奉其位室 賜三百
0001_0056_a_10L

0001_0056_a_11L
崇禎甲申後再癸未龜巖老禪文信在懸燈寺三月望火起空中大衆力
0001_0056_a_12L救勝之十七日火生僧堂樓楹之間瞥眼四延觀音古殿亦不得免焉
0001_0056_a_13L救者金像所存者位室及清心堂養老房而已寺東越一岡有菴曰圓通

0001_0057_a_01L암자는 비워 둔 지 오래였는데 4월 보름에 저절로 불이 났다.
또 비스듬히 동쪽 산등성이에 있는 지장암은 그대로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절은 일곱 번이나 흥하고 폐해졌는데, 모두 그 터에서 나무를 베어 절을 중건하였다. 옛사람이 이미 그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구암의 인정받는 제자인 취윤就允이 개탄하고 분격하며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이 참으로 옛날 사람과는 같지 않으나 만일 분발하여 일으키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고 말 것이니, 어찌 빈도貧徒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자, 원빈圓彬 화상도 그 말을 따랐다. 먼저 대군의 침궁寢宮으로 가서 단월檀越64)이 되기를 권면하고 공사工師 축견笁堅을 맞이하여 허공에 가설하고 끊어진 것을 넘어가며 마룻대를 메고 들보를 졌지만 끝내 손톱 하나 상처 입지 않고 요사채를 우선 완성하였다.
갑신년(1764) 봄에 동쪽 서쪽의 누각 및 보전寶殿이 완성되니, 다 합쳐 80여 칸이었다. 을유년(1765)에 삼보방三寶房을 건축하고 이듬해에 단청을 하였으며 위실位室은 요사채의 동쪽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 내가 생각건대 이 사찰의 흥폐興廢의 사적은 단지 탑 사이에서 난 소리만으로 그 실상을 다 보여주었다. 어찌 함허涵虛의 전신前身이 원래 보조普照였고, 또 함허의 후신後身이 바로 구암龜巖이라는 것뿐이겠는가. 실상을 생각해보면 천축국에서 와서 그 자취를 신이한 산에 남기고 때에 맞추어 법륜을 굴리고 무한한 인과를 닦았으니 스스로 여래의 공덕에 나아간 것이라 하겠다.
임진년(1772) 9월 하순에 쓰다.
청학대青鶴臺 절의 동쪽 산기슭 밖에 있다
만경대萬景臺 절의 동쪽에 있다
용소龍沼 절의 북쪽에 있다

0001_0057_a_01L殿空廢已久四月望自火
又迤而東越岡地藏菴尙在人曰此寺凡七興
0001_0057_a_02L皆伐木於其基而建之古之人猶然况今之人乎
龜巖之上足曰就允
0001_0057_a_03L慨然奮曰今之人固不如古之人若不奮發而興之其將永廢豈非貧徒
0001_0057_a_04L之耻乎和尙圓彬亦從之先赴於大君寢宮引勸檀越邀工師笁堅架虛
0001_0057_a_05L越絕荷棟負樑而竟無瓜甲之傷寮舍先成
甲申春東西樓及寶殿成
0001_0057_a_06L八十餘間乙酉建三寶房明年施雘位室遷於寮舍東而新之余惟兹寺
0001_0057_a_07L廢興之迹但舉塔間之吟可盡實相豈徒涵虛之前身原是普照亦粵涵
0001_0057_a_08L虛之後身厥惟龜巖盖念實相自天笁國來留蹟神山時乘輪回修無量
0001_0057_a_09L因果自登如來功德

0001_0057_a_10L歲壬辰九月下澣誌

0001_0057_a_11L
青鶴臺   在寺東岡外

0001_0057_a_12L萬景臺   寺東

0001_0057_a_13L龍沼    寺北

0001_0058_a_01L용혈龍穴 절의 북쪽에 있다
설봉雪峯 절의 서쪽에 있다
귀암龜巖 설봉雪峯에 있다
별암瞥巖
백련폭포 白練瀑 절의 남쪽에 있다
서왕폭포 西往瀑 백련폭포 아래에 있다
조계漕溪 서왕폭포 아래에 있다
무우대舞雩臺 절의 입구에 있다
대화주大化主   홍성弘性
별좌別座     쾌한快閑
대화주大化主   홍성弘性
주장住張     대숙大淑
장무掌務     위견偉堅
유사有司     석환釋還

0001_0058_a_01L龍穴    寺北

0001_0058_a_02L雪峯    在寺西

0001_0058_a_03L龜巖    在雪峯

0001_0058_a_04L瞥巖

0001_0058_a_05L白練瀑   在寺南

0001_0058_a_06L西往瀑   在瀑練下

0001_0058_a_07L漕溪    西往下

0001_0058_a_08L舞雩臺   在寺洞口

0001_0058_a_09L別座    快閑

0001_0058_a_10L大化主   弘性

0001_0058_a_11L住張    大淑

0001_0058_a_12L掌務    偉堅

0001_0058_a_13L有司    釋還

0001_0059_a_01L도감都監     희운希雲
         정임淨稔
         덕탄德坦
화주化主     진우振雨
         현명玄明
         쌍묵雙默
         귀창歸昌
         준활俊活
         위간偉侃
         양욱良旭
         담혜曇慧
공양주供養主   담심曇諶
         양연良演

0001_0059_a_01L都監    希雲

0001_0059_a_02L      淨稔

0001_0059_a_03L      德坦

0001_0059_a_04L化主    振雨

0001_0059_a_05L      玄明

0001_0059_a_06L      雙默

0001_0059_a_07L      歸昌

0001_0059_a_08L      俊活

0001_0059_a_09L      偉侃

0001_0059_a_10L      良旭

0001_0059_a_11L      曇慧

0001_0059_a_12L供養主   曇諶

0001_0059_a_13L      良演

0001_0060_a_01L         월훈月訓
         보감寶鑑
         혜철慧哲
편장片長     탄영坦暎
         각원覺圓
대시주大施主 가선대부嘉善大夫 겸 팔도승대장兼八道僧大將 교종판사教宗判事
         현즙玄楫
         원빈圓彬
         쾌한快閑
         차상건車尚建
         취윤就允
가선대부嘉善大夫 허완許完
수진궁내壽進宮內 이성창李成昌
         박덕흥朴德興

0001_0060_a_01L      月訓

0001_0060_a_02L      寶鑑

0001_0060_a_03L      慧哲

0001_0060_a_04L片長    坦暎

0001_0060_a_05L      覺圓

0001_0060_a_06L大施主嘉善大夫 兼八道僧大將 教宗判事玄楫

0001_0060_a_07L      圓彬

0001_0060_a_08L      快閑

0001_0060_a_09L      車尚建

0001_0060_a_10L      就允

0001_0060_a_11L 嘉善大夫 許完

0001_0060_a_12L壽進宮內  李成昌

0001_0060_a_13L      朴德興

0001_0061_a_01L         김덕징金德澄
증상證相     민기敏基

모든 승려와 속인은 이 산의 인연의 공덕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라가미摩羅訶彌가 동쪽을 가리키며 창건한 이후로 대대로 돌고 돌며 피폐해졌다가 결과를 이룬 것이 지금까지 7, 8번에 이른다. 이것이 어찌 소홀히 여겨 기록해 두지 않을 일이겠는가. 옛날에 무착無着65)과 천친天親66)의 두 성인이 서로 천태석天台石 위에서 만나 일체의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원리를 말하였다. 원래 인황人皇67) 때에 한 곤충이 나뭇잎을 파먹고 아홉 조각으로 만들어 구주九州로 나누는 것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좋은 과보(善果)를 얻어서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었으며 점차 업業을 닦기를 여러 번 반복하더니 총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왕생을 구하여 수단을 갖춘 훌륭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하물며 이 성대한 대중들이 한없는 세월동안 이 산과 인과를 이루어 쌓아온 것이 이미 많으니 내세의 보응이 어찌 작겠는가. 그 염원에 따라 성자聖者가 되거나 귀인貴人이 되고 더욱 선한 일을 행하고 수행을 하면 결국은 반드시 피안의 무한한 세계와 한량없는 천지에 오를 것이다. 세상에 머무시는 수없는 부처들이 이 중생들을 이끌고 교화하는 이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의 육신은 떨어진 갈옷과 같아서 벗어버리면 그만이고, 몸에 붙여진 성명은 마치 새겨놓은 눈금과 같아서 깎아버리면 증험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의 육신을 얻어서 선한 본성을 잘 닦으면 그 성명이 후세에 입으로 전해지고 얼마나 멀고 가깝게 전해지는지에 따라 크고 작은 공덕을 짓게 될 것이다. 아! 선함을 닦는 길이 많지만 그 중에 은덕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하며, 베푸는 일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기관을 만드는 귀중함으로 치면 어찌 불전과 도량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0001_0061_a_01L      金德澄

0001_0061_a_02L證相    敏基

0001_0061_a_03L
一切緇俗莫非此山緣功故自摩羅訶彌東指創建世世輪回
0001_0061_a_04L廢成果迄至于七八匝是豈可忽之而不錄者哉昔無着天親兩
0001_0061_a_05L相遇於天台石上因言生生物事元來人皇時一昆蟲蝕木葉
0001_0061_a_06L爲九區以教分州故得善果蛻化而蟬稍稍修業累飜爲睿人
0001_0061_a_07L問往生津俱爲聖釋云
矧兹盛衆世世生生與此山爲因果者
0001_0061_a_08L積其多矣來世報應豈其微哉隨其願念或聖或貴愈善愈修
0001_0061_a_09L畢竟必登彼岸無量世界無量天地無量住世之佛安知非此衆
0001_0061_a_10L緣化者乎
古人云人之肉身如弊褐脫之則不關身之姓名如刻
0001_0061_a_11L削之則无驗然若得一肉身能修善性則其姓名傳誦於後
0001_0061_a_12L其傳誦之遠近而乃作大小之功德修善之道多而施捨爲貴
0001_0061_a_13L施捨之事衆而成器爲重成器之重豈有大於佛殿道場者耶

0001_0062_a_01L생각건대 우리 대중은 숭려와 속인이 한마음으로 모두 힘을 모아서 앞선 자가 부르면 뒤따르는 자가 호응하여 누구는 시주를 권하고 누구는 보시하며, 재산이 있는 자는 재물을 내고 능력이 있는 자는 능력을 써서 이미 완성을 보았다. 이것이 어찌 선함을 닦는 소중한 방법이 아니겠으며 후세에 전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성명을 사적의 뒤에 기재하여 그 공덕을 함께 하려는 것이다.

  임신생壬申生 이씨李氏
  계유생癸酉生 김씨金氏
  을축생乙丑生 김씨金氏
  을묘생乙卯生 홍씨洪氏
         박씨朴氏
  을사생乙巳生 최씨崔氏
  정묘생丁卯生 최씨崔氏
10. 용주사 龍珠寺
산세는 주산主山이 성황城隍이고 중조中祖는 임감룡壬坎龍이며 임해壬亥가 주主가 되고 해자亥子에서 오午를 향해 앉았으니, 임壬은 분금分金이요 을득오파乙得午破로 되어 있다.

0001_0062_a_01L我大衆緇俗同心大小戮力先者倡之後者應之或引勸或施捨
0001_0062_a_02L有財者出財有力者出力以旣于成此豈非修善之所貴而可傳
0001_0062_a_03L於後者乎故錄其姓名於事蹟之後以同其功德云爾

0001_0062_a_04L壬申生李氏

0001_0062_a_05L癸酉生金氏

0001_0062_a_06L乙丑生金氏

0001_0062_a_07L乙卯生洪氏

0001_0062_a_08L朴氏

0001_0062_a_09L乙巳生崔氏

0001_0062_a_10L丁卯生崔氏

0001_0062_a_11L

0001_0062_a_12L○龍珠寺
來勢主山城隍中祖壬坎龍壬亥作主亥子坐
0001_0062_a_13L午向壬分金乙得午破

0001_0063_a_01L 청룡青龍은 사립봉簑笠峯이다.
 수구水口는 세남천細南川이다.
 백호白虎는 검암회黔岩回이다.
 내안內案은 택계수澤溪峀이다.
 외안外案은 노적봉露積峯이다.

용주사龍珠寺의 산세는 화산花山으로부터 전환하여 경태庚兌가 조祖가 되고 성황령城隍嶺 임행룡壬行龍이 이어서 주主가 되며 해亥가 혈穴로 이어지는 곳(입수入首)이 된다. 자子에서 오午를 향해 앉았고 곤을坤乙이 오파午破가 되었다. 내청룡內青龍의 본신本身은 사립봉簑笠峯이고 내백호內白虎는 검암회黔岩回이며 내안산內案山은 택계수澤溪峀이고 외안산外案山은 노적봉露積峯이다. 산의 외청룡外青龍인 독현禿峴과 외백호外白虎인 백곡현栢谷峴이 지키며 따르고, 산의 동쪽 구봉산九鳳山과 황교천黃橋川의 서쪽 홍범산洪範山, 분천汾川 남쪽의 세남천細南川과 손지巽地인 양산산陽傘山과 노적봉露積峯 북쪽 배양동背陽洞 주교천舟橋川, 곤지坤地인 서형산栖衡山이 밖에서 외호하며 뒤따른다.
10-1. 권선문 勸善文    이덕무李德𢡟 지음
삼가 생각건대, 사찰을 창건하여 선침68)을 호위하고 승도를 모집하여 주구69)을 보호하네, 본국에는 그러한 옛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불문佛門의 큰 서원이었네. 동쪽에선 국가를 받들고 서쪽에선 나라를 지키며 모연하고 왼쪽으론 선종이 오른쪽에선 교종이 삼가 양릉70)을 모셨네. 지금 이 수성隋城71)의 옛터에다 바로 이 현륭원顯隆園을 새로 마련하니 신명이 보호하고 귀신이 간직한 길지를 점지하였네.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며 아름다운 성을 우러러 보네. 돌이켜보건대 승려들까지도 역시 지키고 보호하려는 정성 간절하였으나 만약 대중의 단월72)의 공덕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큰 가람을 경영할 수 있었겠는가. 예조의 도첩으로 팔도의 읍진邑鎮까지

0001_0063_a_01L
青龍簑笠峯水口細南川白虎黔岩回
0001_0063_a_02L內案澤溪峀外案露積峯

0001_0063_a_03L龍珠寺來勢自花山轉換庚兌作祖城隍嶺壬行龍仍作主亥落入首
0001_0063_a_04L坐午向坤乙得午破內青龍本身簑笠峯內白虎黔岩回內案澤溪峀外
0001_0063_a_05L案露積峯山外青龍禿峴外白虎栢谷峴護從山東九鳳山黃橋川西洪
0001_0063_a_06L範山汾川南細南川巽地陽傘山露積峯北背陽洞舟橋川坤地栖衡山
0001_0063_a_07L外護從

0001_0063_a_08L勸善文 李德𢡟撰

0001_0063_a_09L
伏以剏梵宇而衛
0001_0063_a_10L仙寢募緇徒而護 珠丘肆有本國故事寔爲桑門大願粵若東奉國而
0001_0063_a_11L西守國募建諸寺所以左禪宗而右教宗虔奉兩陵今此隋城舊基卽是
0001_0063_a_12L顯隆新園神護鬼秘爰占吉地龍飛鳳舞仰瞻佳城顧以浮屠者流亦切
0001_0063_a_13L守護之誠如無衆枬越功德卽何大伽藍經紀春官度牒仰八路邑鎮之

0001_0064_a_01L공조를 의뢰하고 설산에서 석장을 날려 시방세계의 함께하는 보시를 기다렸네. 제천諸天이 이미 다 인가한 바이니 선남과 선녀들도 환히 증명하고자 하였다. 식량과 목재 기와 단청 등의 절목을 맡아서 많든 적든 널리 보시를 하고 보살, 금강과 나한, 여러 부처를 차례대로 만들거나 그렸다. 이는 모두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어서이니 또한 그 은혜가 매우 크도다.
삼가 원하옵건대 큰 시주 여러분을 천번 만번 굽어살펴 주시옵기를 지극히 빌고 또 비옵나이다.
10-2. 팔로읍진과 서울 각궁 조전 시주록(八路邑鎮與京各宮曹廛施主錄)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돈 500냥兩
수원부사水原府使   돈 300냥
선혜청宣惠廳     돈 1,000냥
호조戶曹       돈 500냥
병조兵曹       돈 500냥
장용사壯勇使     돈 500냥
훈련대장訓鍊大將   돈 500냥
금위대장禁衛大將   돈 500냥
어영대장御營大將   돈 500냥
수어대장守禦大將   돈 300냥
총융대장總戎大將   돈 300냥
사복시司僕寺     돈 300냥
장흥고長興庫     돈 1,000냥
제용감濟用監     돈 100냥
사옹원司瓮院     돈 100냥
내수사內需司     돈 1,000냥

0001_0064_a_01L共助雪山飛錫佇十方世界之同施諸佛諸天已所印可善男善女想惟
0001_0064_a_02L照證役粮材瓦丹雘等節隨其多寡普施普捨菩薩金剛羅漢諸佛可以
0001_0064_a_03L次第或望或畵兹皆所重者存抑亦爲惠甚大
伏願僉位大施主俯察千
0001_0064_a_04L至禱至祝

0001_0064_a_05L八路邑鎮與京各宮曹廛施主錄

0001_0064_a_06L京畿觀察使  錢五百兩  水原府使  錢三百兩

0001_0064_a_07L宣惠廳    錢一千兩  戶曹    錢五百兩

0001_0064_a_08L兵曹     錢五百兩  壯勇使   錢五百兩

0001_0064_a_09L訓鍊大將   錢五百兩  禁衛大將  錢五百兩

0001_0064_a_10L御營大將   錢五百兩  守禦大將  錢三百兩

0001_0064_a_11L總戎大將   錢三百兩  司僕寺   錢三百兩

0001_0064_a_12L長興庫    錢一千兩  濟用監   錢一百兩

0001_0064_a_13L司瓮院    錢一百兩  內需司   錢一千兩

0001_0065_a_01L           정철正鐵 500근斤
           내탕고內帑庫 돈 500냥
           백목白木 50필疋
           베布 50필
           호초胡椒 10두斗
           단목檀木 30근
어의궁於義宮     돈 300냥
           백지白紙 50권卷
용동궁龍洞宮     돈 300냥
명례궁明禮宮     돈 500냥
           백목白木 30필
           베 30필
           장지壯紙 30권
           백지白紙 30권
           자단향紫丹香 5근
           황밀黃蜜 10근
           당주홍唐朱紅 3근
           왜주홍倭朱紅 3근
수진궁壽進宮     돈 300냥
           백지白紙 50권
육상궁毓祥宮     돈 300냥
선희궁宣禧宮     돈 300냥
안현궁安峴宮     돈 100냥
경수궁慶壽宮     돈 200냥
가순궁嘉順宮     돈 200냥
청연군주방清衍郡主房 돈 100냥
청용군주방清瑢郡主房 돈 100냥
경각전京各廛     돈 2,991냥

0001_0065_a_01L       正銕五百斤 內帑庫   錢五百兩

0001_0065_a_02L       白木五十疋 布五十疋  胡椒十斗

0001_0065_a_03L       檀木三十斤 於義宮   錢三百兩

0001_0065_a_04L       白紙五十卷 龍洞宮   錢三百兩

0001_0065_a_05L明禮宮    錢五百兩  白木三十疋 布三十疋

0001_0065_a_06L       壯紙三十卷 白紙三十卷 紫丹香五斤

0001_0065_a_07L       黃蜜十斤  唐朱紅三斤 倭朱紅三斤

0001_0065_a_08L壽進宮    錢三百兩  白紙五十卷

0001_0065_a_09L毓祥宮    錢三百兩  宣禧宮   錢三百兩

0001_0065_a_10L安峴宮    錢一百兩  慶壽宮   錢二百兩

0001_0065_a_11L嘉順宮    錢二百兩  清衍郡主房 錢一百兩

0001_0065_a_12L清瑢郡主房  錢一百兩

0001_0065_a_13L京各廛    錢二千九百九十一兩

0001_0066_a_01L각공물방各貢物房   돈 921냥
경기각읍京畿各邑   돈 2,108냥
촌려村閭 사찰寺剎    돈 1,574냥
           놋쇠 대접鍮大接 1개個
           불기佛器 3개
개성부영읍開城府營邑 돈 455냥
동촌려仝村閭     돈 2,154냥
강화영읍江華營邑   돈 300냥, 쌀米 50석石
충청도영읍忠清道營邑 돈 4,555냥
           유광철鍮光銕 240근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 1,401냥9전錢
황해도영읍黃海道營邑 돈 7,272냥2전
           정철正銕 300근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 226냥5전

0001_0066_a_01L各貢物房   錢九百二十一兩

0001_0066_a_02L京畿各邑   錢二千一百八兩

0001_0066_a_03L村閭寺剎   錢一千五百七十四兩   鍮大接一個

0001_0066_a_04L佛器三個

0001_0066_a_05L開城府營邑  錢四百五十五兩

0001_0066_a_06L 仝村閭   錢二千一百五十四兩

0001_0066_a_07L江華營邑   錢三百兩  米五十石

0001_0066_a_08L忠清道營邑  錢四千五百五十五兩

0001_0066_a_09L鍮光銕二百四十斤

0001_0066_a_10L 仝村閭寺剎 錢一千四百一兩九錢

0001_0066_a_11L黃海道營邑  錢七千二百七十二兩二錢

0001_0066_a_12L       正銕三百斤

0001_0066_a_13L 仝村閭寺剎 錢二百二十六兩五錢

0001_0067_a_01L강원도영읍江原道營邑 돈 2,159냥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 313냥
경상도영읍慶尚道營邑 돈 1만 3,385냥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1,781냥8전
           장지壯紙 9권
           백지白紙 7권
           설화지雪花紙 10장張
평안도영읍平安道營邑 돈 1만 3,692냥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 6,251냥
함경도영읍咸鏡道營邑 돈 444냥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 547냥
           베 50필
           황간지黃簡紙 14권
전라도영읍全羅道營邑 돈 8,204냥5전
           정철正銕 170근

0001_0067_a_01L江原道營邑  錢二千一百五十九兩

0001_0067_a_02L 仝村閭寺剎 錢三百十三兩

0001_0067_a_03L慶尚道營邑  錢一萬三千三百八十五兩

0001_0067_a_04L 仝村閭寺剎 錢一千七百八十一兩八錢

0001_0067_a_05L       壯紙九卷        白紙七卷

0001_0067_a_06L       雪花紙十張

0001_0067_a_07L平安道營邑  錢一萬三千六百九十二兩

0001_0067_a_08L 仝村閭寺剎 錢六千二百五十一兩

0001_0067_a_09L咸鏡道營邑  錢四百四十四兩

0001_0067_a_10L 仝村閭寺剎 錢五百四十七兩

0001_0067_a_11L       布五十疋        黃簡紙十四卷

0001_0067_a_12L全羅道營邑  錢八千二百四兩五錢

0001_0067_a_13L       正銕一百七十斤

0001_0068_a_01L           장지壯紙 67권
           백지白紙 95권
           쌀米 2석石
동촌려사찰仝村閭寺剎 돈 1,684냥7전
           백지白紙 3권
제주영읍濟州營邑   양대凉臺 828죽竹
           사슴가죽鹿皮 1령領
           전복全鰒 8첩貼 48개個
           말꼬리馬尾 1근
           나무빗木梳 30개
           총모驄帽 7립立
동촌려仝村閭     양대凉臺 678죽竹
           전복全鰒 21첩貼
           사슴가죽鹿皮 28령領
           노루가죽獐皮 8령
           말린 고사리乾蕨 4석石 1두斗
           무회목 칼자루無灰木刃柄 53개個
           치자나무桅子 40근
           표고蔈古 2두斗
           무회실無灰實 6개
           진주真珠 32개
           무공주無孔珠 140개
           놋쇠 식기鍮食器 5근

0001_0068_a_01L壯紙六十七卷 白紙九十五卷

0001_0068_a_02L       米二石

0001_0068_a_03L 仝村閭寺剎 錢一千六百八十四兩七錢

0001_0068_a_04L       白紙三卷

0001_0068_a_05L濟州營邑   凉臺八百二十八竹    鹿皮一領

0001_0068_a_06L       全鰒八貼四十八個    馬尾一斤

0001_0068_a_07L       木梳三十個       騘帽七立

0001_0068_a_08L 仝 村閭  凉臺六百七十八竹    全鰒二十一貼

0001_0068_a_09L       鹿皮二十八領      獐皮八領

0001_0068_a_10L       乾蕨四石一斗      無灰木刃柄五十三個

0001_0068_a_11L       桅子四十斤       蔈古二斗

0001_0068_a_12L       無灰實六個       真珠三十二個

0001_0068_a_13L       無孔珠一百四十個    鍮食器五斤

0001_0069_a_01L           동철銅銕 5냥
           총모驄帽 25립立
           승총모僧驄帽 1립
           탕건宕巾 8립
           무관자無串子 1,150근
           노실蘆實 1개
           나무빗木梳 51개
           망건網巾 6립
           백랍白臘 12근
           대금大金 1첩貼
           피금皮金 1장張
           웅마雄馬 21필匹
           돈 14냥5전
도합都合       돈 8만 7,505냥 1전
5만 7,388냥 8전은 본사本寺 건축물력소建築物力所에 입하入下하고
2만 8,116냥 3전은 전답田畓을 매수買收하기 위하여 사중寺中에서 소유하고
2,000냥은 팔도화주승八道化主僧 등의 여비旅費로 썼다.
10-3. 각항各項의 택일擇日
 개기開基는 개국開國 399년 2월 19일 오시午時

0001_0069_a_01L       銅銕五兩        騘帽二十五立

0001_0069_a_02L       僧騘帽一立       宕巾八立

0001_0069_a_03L       無串子一千一百五十斤蘆實一個

0001_0069_a_04L       木梳五十一個      網巾六立

0001_0069_a_05L       白臘十二斤       大金一貼

0001_0069_a_06L       皮金一張        雄馬二十一匹

0001_0069_a_07L       錢十四兩五錢

0001_0069_a_08L都合錢八萬七千五百○五兩一錢

0001_0069_a_09L  五萬七千三百八十八兩八錢 本寺建築物力所入下

0001_0069_a_10L  二萬八千一百十六兩三錢 田畓買收寺中所有

0001_0069_a_11L  二千兩 八道化主僧等旅費下

0001_0069_a_12L各項擇日

0001_0069_a_13L
開基 開國三百九十九年二月十九日午時

0001_0070_a_01L 정초定礎는  개국 399년 3월 21일 사시巳時
 입주立柱는  개국 399년 4월 10일 미시未時
 상량上樑은  개국 399년 4월 15일 사시巳時
 조불造佛은  개국 399년 8월 16일, 점안點眼 9월 29일
10-4. 대웅전 상량문 大雄殿上樑文
 홍천호洪天浩가 교지를 받들어 쓰다.
삼가 생각건대, 선추73)가 구오74)에 아주 가까워서 상서로운 구름 아름다운 터를 잡았으며 사찰은 삼천의 불국토 세계를 두루 비추니 조포라고 편액하였네. 어찌 한갓 복을 기원하는 방도뿐이겠는가. 겸하여 공수하는 장소로 삼기도 한다. 한강 남쪽의 명승지요 수원 동쪽의 별천지니 제불의 지난 자취 황량하니 석벽만 우뚝하고 골짜기에 아름다운 기운 서리어 화산이 드높다. 전에 대책을 올린 사람은 이미 혈을 점지한 선견이 있었고 앞서 풍수를 말하는 승려는 몇 번이나 지팡이 꼽고 감탄을 일으켰던가. 이에 능침의 길한 자리를 잡은 날에 맞추어 선궁을 창건하는 거사가 있게 되었도다, 이미 널리 베풀고 아울러 구제하여 인심을 함께 함을 보였고 널리 제도하고 길이 평안하기를 크고 영험한 부처의 힘에 기대고 의지하였네. 하늘의 꽃이 길지에서 처음 꽃망울을 터뜨린 건 오늘을 기다림이오. 붉은 용마루가 사원에 높이 솟구쳐있는 것은 예로부터의 제도이다.
그러므로 길한 날을 잡아서 이 건물의 낙성을 거행하게 되었다. 의관 갖춘 이들이 달마다 나와 노니는 곳이라 용과 봉황이 날고 승도가 날마다 와서 모여 아름다우니 귀신도 보호하고 기뻐하네. 우러르니 저 소나무 잣나무 옮겨와 모두 승려들이 맡아서 보호하며 돌아보건대 이 당우의 공사 끝나고 붉은 무덤

0001_0070_a_01L定礎 仝 三月二十一日巳時

0001_0070_a_02L立柱 仝 四月初十日未時

0001_0070_a_03L上樑 仝 仝 十五日巳時

0001_0070_a_04L造佛 仝 八月十六日 點眼九月二十九日

0001_0070_a_05L大雄殿 上樑文
 
洪天浩奉 教書

0001_0070_a_06L
伏以仙楸密邇於九五祥雲美哉相土梵宇輪煥於三千寶界扁日 [202]
0001_0070_a_07L豈徒資福之方兼爲工需乏 [203] 惟漢南勝地隋東別天諸佛之往蹟荒
0001_0070_a_08L凉山魏 [204] 然石堛一壑之佳氣蟠蔚截彼花山獻策之前人已有占穴之先
0001_0070_a_09L談風談笑 [205] 之光 [206] 釋幾多植杖而興嗟兹屬 僊寢卜吉之辰乃有僊宮
0001_0070_a_10L經始之舉旣廣施 [207] 兼濟爰見所同之人心將普度而永安期賴大靈之佛
0001_0070_a_11L天花初綻於吉地有待于今珠甍條 [208] 飛於祗園其制自古
肆於日用之
0001_0070_a_12L爰舉棟宇之成處衣冠月出遊之方龍飛鳳翥致緇徒日來集之美鬼
0001_0070_a_13L護神呵瞻彼松栢之移來亦令白衲而掌護顧此堂宇之旣迄度 [209] 見丹邱

0001_0071_a_01L더욱 안온해지길 보려 하네.
이에 짧은 노래를 지어서 들보 올리는 데 쓰려하네.

兒郎偉拋梁東   어영차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舞鳳山高日色紅  무봉산 드높아 햇볕이 붉게 물드네
一帶黃川橋水遠  한 줄기 황천교 물 멀리 흘러가고
烟郊十里瑞烟籠  십리 밖 들녘엔 상서로운 연기 감도네
兒郎偉拋梁西   어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園樹蒼蒼入眼低  짙푸른 동산의 나무 나지막이 눈에 보이네
落日歸僧洪範寺  해 지자 승려는 홍범사로 돌아가고
白雲踈磬望中迷  흰 구름 속 아련한 경쇠소리를 듣네
兒郎偉拋梁南   어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無邊芳草色如藍  끝이 없는 향기로운 풀들 쪽빛으로 물들고
何處高峯天半峙  어느 곳의 높은 봉우리 하늘 위로 솟았는가
禿城粉堞隱烟嵐  독성의 성가퀴가 아지랑이 연기 속에 감춰졌네
兒郎偉拋梁北   어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光教山容高擁極  광교산 우뚝 솟아 북극을 끌어 안네
旗亭百隊開新市  많은 술집들 늘어서니 새 시장을 연 듯
大府繁如紫陌華  큰 고을 번화하기가 도성 길 화려함 같구나
兒郎偉拋樑上   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雨花諸天日月朗  하늘에 꽃비 내려 해와 달 밝구나
天作高山終有待  하늘이 높은 산 만든 건 기다림이 있어서니
九宸景福濟民仰  임금님의 크신 복을 만백성이 우러르네
兒郎偉拋梁下   어영차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
供佛飯僧降純嘏  부처 공양 반승함에 순수한 복 내리시네
聊將壽萬無疆祝  만수무강 하시옵길 축원하오니
仰獻年年度玉駕  해마다 법도대로 옥가에 우러러 바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에는 자비로운 보살핌 거두지 마시고 돕고 도와 정성껏 이루며 법문에 음덕을 베풀어 풀이 길게 자라서 탄식하지 않게 하소서. 능침에 경사를 키워 나무에 가지가 많이 나는 효과를 기대케 하소서.
10-5. 천보루 상량문 天保樓上樑文75)
세존이 다섯 왕의 왕릉을 점지하였다고 나는 들었거니와 주 목왕이 팔회도량을 지음에 영험한 도움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부처의 탄생설이 아득하니 주대周代의 지난 일은 있었는가 없었는가. 어찌 능원76) 옆에 터를 잡고 절을 세워 이름을 붙이는 것만 같겠는가. 복전이 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미루어 성상의 무궁한 수명을 비노라. 길일에 원침에서 제수를 받드심에77) 끝없는 깊은 효성을 찬양하노라.

0001_0071_a_01L之增安
聊爲短唱庸爲修梁

0001_0071_a_02L
兒郎偉拋梁東舞鳳山高日色紅一帶黃川橋水遠烟郊十里瑞烟籠

0001_0071_a_03L兒郎偉拋梁西園樹蒼蒼入眼低落日歸僧洪範寺白雲踈磬望中迷

0001_0071_a_04L兒郎偉拋梁南無邊芳草色如藍何處高峯天半峙禿城粉堞隱烟嵐

0001_0071_a_05L兒郎偉拋梁北光教山容高擁極旗亭百墜 [210] 開新市大府繁如紫陌華

0001_0071_a_06L兒郎偉拋 [211] 雨花諸天日月朗天作高山終有待九宸景福濟民仰

0001_0071_a_07L兒郎偉拋梁下供佛飯僧降純嘏聊將壽萬無疆祝仰獻年年度 玉駕

0001_0071_a_08L伏願上樑之後無替慈悲之眷裨補遂之忱 [212] 垂隲法門莫致草三丈之歎
0001_0071_a_09L毓慶 園寢竊期本百友 [213] 之効

0001_0071_a_10L天保樓上樑文 [214]

0001_0071_a_11L
世尊卜五王神地如是我聞周穆剏八會道塲若有靈助然而竺乾之誕
0001_0071_a_12L說茫昧姬代之往事有無曷若相基於珠丘之傍標號於金地之列推福
0001_0071_a_13L田利益之法祝 聖壽於無疆奉 園寢吉觸 [215] 之需賛睿孝於不匱者哉

0001_0072_a_01L아아 이 염부78)의 대지에 수성79)의 한 구역만한 곳이 없구나. 속리산에서 갈래가 나뉘어 오륙백 리를 날았고 정기가 두루 조화를 이루어 만억천 년을 신비롭게 지켜왔네. 마치 용처럼 무궁한 형세 신묘하게 변하고 구슬을 다루듯이 맑은 기운 끝없이 뭉쳐지네, 바라보면 구불구불 꿈틀거리니 어슴푸레 멀리 현포80)를 다하고 구름을 거느린 것 같네. 다가가면 촘촘하고 윤택하니 의연히 푸른 바다에 들어가 조개 진주를 따는 듯 음기를 들이쉬고 양기를 내쉬니 완연히 구오81)가 하늘에 있는 형세로다. 산은 빛나고 물은 고우니 열두 수레를 비친 보배82)보다 낫구나. 형상이 이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진실로 만남이란 때가 있는 것이로다.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효도가 백행의 근원이 되고 학문은 천·지·인의 삼재를 꿰뚫었고 대궐에서 갱장83)을 그리워하며 날마다 우러르고 달마다 뵈니 임금의 근심이 난수84)에 뭉쳐져 서리에도 쓸쓸하고 이슬에도 눈물 적시었다. 거북과 용이 기성의 글85)에 나타나니 마침 비 오듯이 마침 갠 듯이 정치를 폈네. 규벽86)이 주공의 눈에 비추니 어찌 하늘과 땅의 아낌없는 탄식이 없었으리요.
마침내 임금의 상여87)를 받들고 이에 불상88)을 옮기게 되었다. 임금의 눈물 피눈물 되어 소매에 흐르고 검은 안개 산을 덮고 봉화가 전각을 밝히도다. 하물며 다시 온천의 잘 아는 길이요 산성의 옛 요사채로다. 남겨진 백성들 길을 막으며 다투어 정반성89)의 눈물을 뿌리고 뭇 영령들이 영가를 호위하니 금속강90)이 위의를 완연히 갖추었다. 정성이 조용히 응집되어 하늘에 닿아 서로 감응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돌고 돌아 와서 온 세상에 상서를 밝히기를 이에 마음과 힘을 다 바치는 정성으로 마침내 여기에 절을 세우자는 의논을 결정했노라. 국왕의 대리를 다하지 못했어도 삼승의 은혜 널리 베풂을 바랄 수는 있겠고 팔방의 추모하고 공양함을 잘 펴서 시방의 그윽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도다. 창포 김치 올리면 좋아하시니 태상91)에 맛 좋은 음식이 없지 않고 맛 좋은 미나리 정성스럽게 바치고 향주92)에는 깨끗한 두부가 소중하네. 임금의 흉금93) 미묘하게 움직이니 우러러 마음속 경륜을 알겠도다. 많은 이들이 힘 모아

0001_0072_a_01L猗兹閻浮大地無若隋城一區支分俗離飛騰五六百里精殫造化藏秘
0001_0072_a_02L萬億千年其有 [216] 龍乎無窮軆勢之神變疑弄珠是不盡淑氣之團疑 [217] 望之
0001_0072_a_03L則透迤蛇蜒怳若窮玄間 [218] 而御雲氣就之則縝密縕潤依然入滄海而摘
0001_0072_a_04L蚌胎陰噏陽噓宛九五在天在地 [219] 之勢山揮 [220] 川媚邁照車十貳 [221] 之珍不圖
0001_0072_a_05L形象之至斯允矣遭逢之有日惟我
0001_0072_a_06L主上殿下孝源百行學貫三寸 [222] 僾 宸慕於墻羹日瞻月覲結 聖慮於
0001_0072_a_07L灤水霜凄露濡龜龍闡箕聖之書迄有雨時若暘時若之政奎璧應周公
0001_0072_a_08L之眼詎無天不愛地不愛之怵 [223]
遂奉龍輴爰移 象設玉涕成血御袖汍
0001_0072_a_09L玄霧濃山 隧閣昭朗况復湯泉熟路山城舊寮遺氓擁途爭洒淨飯
0001_0072_a_10L城之淚羣靈護駕載完金粟岡之儀精誠默凝格上 天相感吉慶旋至
0001_0072_a_11L徹下地而昭休乃以摩 [224] 不用極之忱遂決 [225] 焉建寺 [226] 千乘之代理未究尙
0001_0072_a_12L冀三乘之替 [227] 八方之追養克仲庶期十方之冥佑昌歜供嗜無非太常
0001_0072_a_13L之味珍 [228] 芹獻誠所貴香廚之泡淨 宸襟妙運仰認心上之徑綸 [229] 衆力

0001_0073_a_01L기꺼이 달려오니 눈앞에 우뚝 솟아있네.
그리하여 앞을 보면 옛 탑이 죽순 돋아난 듯하고 뒤를 가리키면 고운 산봉우리 꽃과 같구나. 기둥이 종횡으로 섰으니 위수 물가 천 이랑 넓이에 대나무 솟은 듯하고 날아오른 용마루 뒤얽히니 은하수에 일곱 번 실을 짜 놓은 듯하네. 화려한 문 늦도록 열어둔 지 오래니 서쪽 문 희미한 아지랑이가 그림 같고 채색한 난간 날이 개어 살짝 기대보니 남쪽 다리 향기로운 풀 하늘과 이어졌네. 삼천 병마의 고장이라 예로부터 이름이 났고 장육 금인의 불상 며칠 안 가 완성을 알렸네. 이때에 임금의 타신 수레가 머물며 재계하니 용안에는 슬픔을 머금었도다. 구씨산의 학 그림자94)는 석장을 세운 숲과 비슷하네. 우소95)에 봉황이 우니 경쇠를 치는 곳처럼 혼잡하도다. 전단나무 향96) 임금이 내린 향과 함께 떠돌고 소나무 잣나무는 깃발과 더불어 나부끼네. 차오르는 달 솟아오르는 해와 같은 큰 복97) 모든 백성이 바라는 바이나. 생각건대 천지의 끝없는 애통함에 천불이 모두 슬퍼하리라. 오직 대궐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내리신 것은 평소 은덕을 갚고자 하는 마음에서였고 옥룡사98)의 혜안 하늘을 꿰뚫었고 김쇄로의 위험 무릅쓴 충정 오늘을 기다렸도다.
이에 좋은 게송 읊조리며 중생에게 베풀어 고하노라.

兒郞偉拋樑東   어영차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海門朝日滿天紅  해협의 아침 햇살 하늘 가득히 붉어오면
恰似神龍初罷睡  마치 처음 잠에서 깨어난 신룡처럼
抱將珠顆弄晴空  여의주를 입에 물고 갠 하늘에서 노니네
兒郞偉拋樑西   어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柳川東北店煙迷  버드나무 냇가 동북쪽 여관에서 피어나는 연기
鑾輿歲歲經過地  임금님 수레 해마다 지나는 곳이련만
霜露郊原萬葉凄  서리 이슬 덮인 교외의 들 나뭇잎마다 쓸쓸하네
兒郞偉拋樑南   어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雉堞縈山滴翠嵐  성가퀴 산을 두르고 싱그러운 푸른 나무 무성하네
聖代河淸春似畫  태평성대에 강은 맑고 봄은 그림 같으니
老僧閒掃雨花龕  노승은 한가로이 꽃비 내리는 감실을 쓸고 있네
兒郞偉拋樑北   어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八達山前移井陌  팔달산 앞 우물은 옮겼지만
依然昔日新豐村  옛날과 다름없는 신풍 마을에서는
雞犬家家各自識  닭소리 개소리 집집마다 제각기 아네
兒郞偉拋樑上   어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重日前星乾象旺  중일99)과 전성100)에는 천체의 현상이 왕성하고
草木昭回被耿光  초목을 환히 비추어 돌며 밝은 빛이 비추니
雪山爭似喬山嶂  설산이 다투어 왕릉101)을 빙 두르는 듯

0001_0073_a_01L歡趍期有眼前之突凡 [230]
爾其前瞻則古堛抽笋背指則妍岑似花浮柱橫
0001_0073_a_02L縱渭濱踈 [231] 千畆之竹飛薨錯綜銀浦織七襄之絲繡闥晚披古西門之淡
0001_0073_a_03L靄如畵彩攔 [232] 晴倚細南橋之芳草連空三千兵馬之坊從古有號丈六金
0001_0073_a_04L人之像不日告成于時 鸞輿宿齋
0001_0073_a_05L龍顏含慽緱岑鶴影彷彿卓錫之林虞韶鳳鳴雜還 [233] 敲磬之地栴檀共
0001_0073_a_06L御香 [234] 浮動松柏與羽旗翻而恒月升日之嘏萬民所望想窮天極地之痛
0001_0073_a_07L千佛皆悲惟中宸肇錫以名由平日欲報之德玉龍師之慧眼洞徹諸天
0001_0073_a_08L金鎖老之危裏 [235] [236] 留待今日
兹凍 [237] 善頌播告衆生

0001_0073_a_09L
兒郎偉拋樑東海門朝日滿天紅恰似神龍初罷睡抱將珠顆弄晴空

0001_0073_a_10L兒郎偉拋樑西柳川東北店烟迷鑾輿歲歲經過地霜露郊原萬葉凄

0001_0073_a_11L兒郎偉拋樑南雉堞縈山滴翠嵐聖代河清春似畵老僧閑掃雨花龕

0001_0073_a_12L兒郎偉拋樑北八達山前移井陌依然昔日新豐村鷄犬家家各自識

0001_0073_a_13L兒郎偉拋樑上重日前星乾象王 [238] 草木昭回被耿光雪山爭似喬山漳

0001_0074_a_01L兒郞偉拋樑下   어영차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
䆉稏如雲滿大野  벼 이삭 구름과 같이 너른 들녘에 그득한데
白頭扶杖山前翁  흰머리에 지팡이 짚고 산 앞에 선 늙은이
華祝朝朝向北賀  화축華祝102)하러 아침마다 북쪽 향해 하례하네

삼가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로는 오직 향을 사르고 등불을 전하여 삼원103)을 고루 비추고 재앙 재해도 없는 나라의 상서로운 조짐, 길이 제사 드리니 이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선침을 영원히 호위하게 하소서. 서울이 매우 가까우니 질병이 없다면 군왕께서 매번 임하시고 군왕이 사는 운향이 멀지 않으니 좌우에서 오르내리는 것 보듯이 하옵소서.
정조正祖가 즉위한 지 14년째 되는 경술년(1790)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좌의정 신臣 채제공蔡濟恭은 전교를 받들어 글을 짓고 삼가 글씨를 썼다.
10-6. 건물 면적 建物面積
법당法堂     9칸
칠성각七星閣   6칸
향로전香爐殿   12칸
제각祭閣     6칸
선당禪堂     39칸
승당僧堂     39칸

0001_0074_a_01L兒郎偉拋樑下䆉䄽如雲滿大野白頭扶杖山前翁華祝朝朝向北賀

0001_0074_a_02L伏願上樑之後一炷傳燈三元調燭無灾無害長獻 宗國之禎祥
0001_0074_a_03L騫不崩永爲 仙寢之衛護神京孔邇無疾病 君王每臨雲鄉不遐
0001_0074_a_04L左右 涉 [239] 降如見

0001_0074_a_05L卽位二十四年庚戌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蔡濟恭奉 教撰謹書

0001_0074_a_06L

0001_0074_a_07L建物面積

0001_0074_a_08L
法堂    九間

0001_0074_a_09L七星閣   六間

0001_0074_a_10L香爐殿   十二間

0001_0074_a_11L祭閣    六間

0001_0074_a_12L禪堂    三十九間

0001_0074_a_13L僧堂    三十九間

0001_0075_a_01L천보루天保樓   15칸
좌우종루左右從樓 4칸
외삼문外三門   3칸
좌우익랑左右翼廊 3칸
동문東門     9칸
춘가春家     2칸
정井       2칸
10-7. 서 序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 즉위하신 지 13년째 되는 기유년(1789)에 현륭원顯隆園104)의 선침仙寢을 길지의 산등성이로 옮기시고, 이듬해인 경술년(1790)에 용주사龍珠寺를 화산花山의 양지바른 곳에 창건하도록 하셨다. 여기에 들어가는 물자物貲는 위로는 궁방宮房으로부터 4도四都와 8도八道의 목백牧伯과 수재守宰에 이르기까지 성심으로 보시하였는데 그 금액이 무려 8만여 냥에 달하였다. 이에 진위현령振威縣令 조윤식曹允植을 임명하여 이 공역을 감독하게 하고, 남·북한南北漢(산성) (도都)총섭緫攝인 사일獅馹과 철학哲學 두 선사先師를 특별히 선임하여

0001_0075_a_01L天保樓   十五間

0001_0075_a_02L左右從樓  四間

0001_0075_a_03L外三門   三間

0001_0075_a_04L左右翼廊  三間

0001_0075_a_05L東門    九間

0001_0075_a_06L春家    二間

0001_0075_a_07L井     二處

0001_0075_a_08L

0001_0075_a_09L
伏惟我
0001_0075_a_10L正宗大王 光御十三年己酉 遷奉
0001_0075_a_11L顯隆園 仙寢于吉岡明年庚戌剏建龍珠寺於花山之陽所入物貲
0001_0075_a_12L自宮房塈于四都八道牧伯守宰誠心捨施厥數將近八萬餘兩乃 命
0001_0075_a_13L振威縣令曹公允植監董是役另選南北漢緫攝獅馹哲學兩先師主掌

0001_0076_a_01L이 절의 공사를 이룰 수 있도록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소승 등운等雲이 철학 선사를 스승으로 섬겨 그의 기풍을 뒤따랐으므로 이 성대한 일을 받들어 따랐다. 그 뒤로 외람되게도 보잘것없는 내가 북성北城(북한산성)을 재차 맡게 되어 10년 동안 총섭緫攝을 하느라 옛 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경진년(1820)에 임기를 마치고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을유년(1825) 여름에 본사本寺의 총섭을 다시 맡게 되어 절에 보관하던 옛 문헌을 열람하게 되었다. 대개 그 당시에는 쉴 겨를이 없었고 크고 위대한 공적에 소홀함이 없지 않았으니, 사찰 일을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마침 전토田土를 바로잡고 정리하는 일로 친우인 윤성중尹聖中과 이군성李君成이 봉성鳳城에서 왔기에 등불을 밝혀놓고 사적을 함께 검토한 뒤에 삼가 몇 줄 글을 엮어 책머리에 싣기로 하였다. 이는 이 사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밝혀서, 뒤의 어진 이들에게 한량없는 대시주가 자금을 아끼지 않고 물자를 아끼지 않았던 굉장한 일을 함께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세월이 흘러간 뒤에도 다시 잊을 수 있겠는가.
도광道光 5년 을유년(1825) 12월 7일에 도총섭都緫攝 등운等雲이 재배하고 삼가 기록하다.
10-8. 대시주大施主 진신縉紳의 안案
관  직성  명관  직성  명
경기감사
京畿監司
서유방
徐有防
경상감사
監司
이조원
李祖源
평안감사
平安監司
정창성
鄭昌聖
함경감사
咸鏡監司
이병모
李秉模
전라감사
全羅監司
윤기동
尹耆東
충청감사
監司
권 엄
權 曮
황해감사
黃海監司
이홍재
李弘載
강원감사
江原監司
신 기
申 耆
동仝이시수
李時秀
통제사
統制使
신응주
申應周

0001_0076_a_01L於兹寺以至功何其偉哉
小僧等雲師事哲學師追隨下風承聆盛舉矣
0001_0076_a_02L其後猥以無狀再沗北城緫攝十年不返故山而歲庚辰爪熟歸依舊巢
0001_0076_a_03L乙酉夏復涖本寺緫攝閱覽寺中舊藏槩其時不遑啓處使偉功巨蹟
0001_0076_a_04L不無踈略寺舉能不悵悵于中乎適值田土厘正之事友人尹聖中李君
0001_0076_a_05L自鳳城至挑燈共討事蹟謹掇數行弁于卷首以考此寺設始之顛末
0001_0076_a_06L俾使后賢共覿無量大施主不惜貲不吝物之宏舉其又可忘乎時

0001_0076_a_07L道光五年乙酉十二月七日都緫攝等雲再拜謹識

0001_0076_a_08L大施主縉紳案

0001_0076_a_09L
京畿監司  徐有防    慶尚監司  李祖源

0001_0076_a_10L平安監司  鄭昌聖    咸鏡監司  李秉模

0001_0076_a_11L全羅監司  尹耆東    忠清監司  權 曮

0001_0076_a_12L黃海監司  李弘載    江原監司  申 耆

0001_0076_a_13L仝     李時秀新任   統制使   申應周

0001_0077_a_01L
평양서윤
平壤庶尹
조진명
평양중군
平壤中軍
김명준
金明俊
평양찰방
平壤察訪
김희섭
金禧燮
중화부사
中和府使
유회원
柳晦源
황주목사
黃州牧使
홍원섭
洪元燮
봉산군수
鳳山郡守
이하보
李夏保
재령군수
載寧郡守
홍선양
洪善養
해주판관
海州判官
임희후
任希厚
해주중군
海州中軍
홍술원
洪述遠
강령현감
康寧縣監
박도상
朴道相
옹진수사
瓮津水使
윤범행
尹範行
장연현감
長淵縣監
이 홍
李 弘
송화현감
松禾縣監
윤재급
尹載伋
풍천부사
川府使
장성한
張成漢
허사첨사
許沙僉使
강유순
康有淳
은율현감
殷栗縣監
이익수
李益洙
문화현령
文化縣令
서명존
徐命存
안악군수
安岳郡守
윤필병
尹弼秉
장련현감
長連縣監
김건수
金健修
배천군수
白川郡守
유병균
柳秉均
신천군수
信川郡守
김 착
金 鑿
봉산군수
鳳山郡守
왕한정
王漢禎
동리첨사
東里僉使
어하연
魚夏淵
소기만호
所己萬戶
김계묵
서흥부사
瑞興府使
한백림
韓百林
신계현령
新溪縣令
윤의후
尹義厚

0001_0077_a_01L平壤庶尹  趙鎮明    平壤中軍  金明俊

0001_0077_a_02L平壤察訪  金禧燮    中和府使  柳晦源

0001_0077_a_03L黃州牧使  洪元燮    鳳山郡守  李夏保

0001_0077_a_04L載寧郡守  洪善養    海州判官  任希厚

0001_0077_a_05L海州中軍  洪述遠    康寧縣監  朴道相

0001_0077_a_06L瓮津水使  尹範行    長淵縣監  李 弘

0001_0077_a_07L松禾縣監  尹載伋    豐川府使  張成漢

0001_0077_a_08L許沙僉使  康有淳    殷栗縣監  李益洙

0001_0077_a_09L文化縣令  徐命存    安岳郡守  尹弼秉

0001_0077_a_10L長連縣監  金健修    白川郡守  柳秉均

0001_0077_a_11L信川郡守  金 鑿    鳳山郡守  王漢禎

0001_0077_a_12L東里僉使  魚夏淵    所己萬戶  金啟默

0001_0077_a_13L瑞興府使  韓百林    新溪縣令  尹義厚

0001_0078_a_01L
수안군수
遂安郡守
이겸환
李謙煥
문성첨사
文城僉使
이태수
李台秀
곡산군수
谷山郡守
김로성
金魯成

조화석
趙華錫
양덕현감
陽德縣監
김중섭
金重燮
성천부사
成川府使
황승원
黃昇源
삼등현령
三登縣令
이희현
李羲玄
강동현감
江東縣監
강세륜
姜世綸
자산부사
慈山府使
위광익
魏光翼
순천군수
順天郡守
윤이동
영성첨사
寧城僉使
한성규
韓聖揆
은산현감
殷山縣監
이경운
李庚運
맹산현감
孟山縣監
윤치성
尹致性
영원군수
寧遠郡守
남형중
南衡重
덕천군수
德川郡守
신 엄
申 曮
개천군수
价川郡守
조운상
趙雲祥
영변부사
寧邊府使
허 근
許 𣷯
평안병사
平安兵使
이동엽
李東燁
안주목사
安州牧使
이민채
李敏采
동 우후
仝 虞侯
황 책
黃 策
박천군수
博川郡守
이 완
李 
태천현감
泰川縣監
김효건
金孝建
구성부사
龜城府使
김형주
金衡柱
식송만호
植松萬戶
박문채
朴文彩
안의첨사
安義僉使
최상흡
천마첨사
天摩僉使
김정한
金正漢

0001_0078_a_01L遂安郡守  李謙煥    文城僉使  李台秀

0001_0078_a_02L谷山郡守  金魯成    仝     趙華錫新任

0001_0078_a_03L陽德縣監  金重燮    成川府使  黃昇源

0001_0078_a_04L三登縣令  李羲玄    江東縣監  姜世綸

0001_0078_a_05L慈山府使  魏光翼    順天郡守  尹頤東

0001_0078_a_06L寧城僉使  韓聖揆    殷山縣監  李庚運

0001_0078_a_07L孟山縣監  尹致性    寧遠郡守  南衡重

0001_0078_a_08L德川郡守  申 曮    价川郡守  趙雲祥

0001_0078_a_09L寧邊府使  許 𣷯    平安兵使  李東燁

0001_0078_a_10L安州牧使  李敏采    仝 虞侯  黃 策

0001_0078_a_11L博川郡守  李 烷    泰川縣監  金孝建

0001_0078_a_12L龜城府使  金衡柱    植松萬戶  朴文彩

0001_0078_a_13L安義僉使  崔尙翕    天摩僉使  金正漢

0001_0079_a_01L
운산군수
雲山郡守
서유봉
徐有鳳
희천군수
熙川郡守
이득신
李得臣
유원첨사
柔院僉使
윤진오
尹進五
만포첨사
滿浦僉使
최경신
崔慶臣
강계부사
江界府使
안정현
安廷玹
대등만호
代登萬戶
신사휘
申思彙
고산리첨사
高山里僉使
이 욱
李 旭
위원군수
渭原郡守
이백연
李栢然
갈헌동권관
乫軒洞權管
이 진
李 震
초산부사
楚山府使
이방영
李邦榮
아이첨사
阿耳僉使
이윤장
李潤章
벽동군수
碧潼郡守
정학경
鄭學畊
창성부사
昌城府使
신홍주
申鴻周
창주첨사
昌州僉使
권성진
權聖
벽단첨사
碧團僉使
정이증
鄭履曾
삭주부사
朔州府使
이해우
李海愚
구령만호
仇寧萬戶
김흥택
金興澤
방산만호
方山萬戶
지경원
池慶源
의주부윤
義州府尹
이이상
용천부사
龍川府使
서유룡
徐有龍
철산부사
銕山府使
이붕운
李鵬運
선사포첨
宣使浦僉
정동인
鄭東仁
서림첨사
西林僉使
최 섭
崔 涉
곽산군수
郭山郡守
신 성
申 
선천부사
宣川府使
이한흥
李漢興
정주목사
定州牧使
이윤국
李潤國

0001_0079_a_01L雲山郡守  徐有鳳    熙川郡守  李得臣

0001_0079_a_02L柔院僉使  尹進五    滿浦僉使  崔慶臣

0001_0079_a_03L江界府使  安廷玹    代登萬戶  申思彙

0001_0079_a_04L高山里僉使 李旭祥    渭原郡守  李栢然

0001_0079_a_05L乫軒洞權管 李震赫    楚山府使  李邦榮

0001_0079_a_06L阿耳僉使  李潤章    碧潼郡守  鄭學畊

0001_0079_a_07L昌城府使  申鴻周    昌州僉使  權聖鎮

0001_0079_a_08L碧團僉使  鄭履曾    朔州府使  李海愚

0001_0079_a_09L仇寧萬戶  金興澤    方山萬戶  池慶源

0001_0079_a_10L義州府尹  李頤祥    龍川府使  徐有龍

0001_0079_a_11L銕山府使  李鵬運    宣使浦僉使 鄭東仁

0001_0079_a_12L西林僉使  崔 涉    郭山郡守  申 偗

0001_0079_a_13L宣川府使  李漢興    定州牧使  李潤國

0001_0080_a_01L
가산군수
嘉山郡守
김노성
金魯成
순안현령
順安縣令
정문재
鄭文在
영유현령
永柔縣令
조상존
趙象存
증산현령
甑山縣令
오재두
吳在斗
함종부사
咸從府使
이주봉
李周鳳
용강현령
龍岡縣令
장지현
張至顯
강서현령
江西縣令
이익영
李翊永
중화부사
中和府使
정주성
鄭周誠
10-9. 용주사龍珠寺 건축시 각도各道의 화주승化主僧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
    부화주副化主 성월당城月堂 철학哲學
경기京畿 전라全羅 양도 도화주兩道都化主 성월당城月堂 철학哲學
              동仝 동파당東坡堂 준홍俊弘
충청忠清 경상慶尚 양도 도화주兩道都化主 가의嘉義 무현懋絢
              동仝 가선嘉善 윤수允修
              동仝  거우처사巨愚處士 박묘희朴竗喜
강원江原 함경咸鏡 양도 도화주兩道都化主 영성당影成堂 양진養珍

0001_0080_a_01L嘉山郡守  金魯成    順安縣令  鄭文在

0001_0080_a_02L永柔縣令  趙象存    甑山縣令  吳在斗

0001_0080_a_03L咸從府使  李周鳳    龍岡縣令  張至顯

0001_0080_a_04L江西縣令  李翊永    中和府使  鄭周誠

0001_0080_a_05L龍珠寺建築時各道化主僧

0001_0080_a_06L
八道都化主寶鏡堂獅馹

0001_0080_a_07L   副化主城月堂哲學

0001_0080_a_08L京畿全羅兩道都化主城月堂哲學

0001_0080_a_09L       仝 東坡堂俊弘

0001_0080_a_10L忠清慶尙兩道都化主嘉義懋絢

0001_0080_a_11L       仝 嘉善允修

0001_0080_a_12L       仝 巨愚處士朴竗喜

0001_0080_a_13L江原咸鏡兩道都化主影成堂養珍

0001_0081_a_01L              동仝 호암당虎岩堂 태영泰英 연정衍定
황해黃海 평안平安 양도 도화주兩道都化主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
              동仝 기봉당奇峯堂 쾌성快性
경기京畿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성곡당聖谷堂 유신有信
              동仝 통정通政 덕함德含
              동仝 취정就淨 김상문金尚文
황해도黃海道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가선嘉善 우영宇榮
              동仝 통정通政 축훈竺訓 승안勝安
경상도慶尚道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영파당瀛波堂 풍일豐一
              동仝 가선嘉善 포념抱念 학련學連
전라도全羅道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금주당錦洲堂 복혜福慧
              동仝 벽담당碧潭堂 행인幸仁
              동仝 통정通政 성진性真

0001_0081_a_01L       仝 虎岩堂泰英衍定

0001_0081_a_02L黃海平安兩道都化主寶鏡堂獅馹

0001_0081_a_03L       仝 奇峯堂快性

0001_0081_a_04L京畿閭里寺剎化主聖谷堂有信

0001_0081_a_05L       仝 通政德含

0001_0081_a_06L       仝 就淨金尙文

0001_0081_a_07L黃海道閭里寺剎化主嘉善宇榮

0001_0081_a_08L       仝 通政竺訓勝安

0001_0081_a_09L慶尙道閭里寺剎化主瀛波堂豐一

0001_0081_a_10L       仝 嘉善抱念學連

0001_0081_a_11L全羅道閭里寺剎化主錦洲堂福慧

0001_0081_a_12L       仝 碧潭堂幸仁

0001_0081_a_13L       仝 通政性眞

0001_0082_a_01L평안도平安道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형원당荊原堂 법안法眼
              동仝 통정通政 기홍奇弘
함경도咸鏡道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가선嘉善 최린最璘
충청도忠清道 여리閭里의 사찰화주寺剎化主 통정通政 일한日閑
              동仝 가선嘉善 영호永昊
              동仝 청공당青空堂 찬침賛忱
10-10. 본사의 서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방명(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
『부모은중경』 석판石板과 철판銕板은 궐내로부터 하사하였다. 가경 7년(1802) 6월 22일.
『법화경』 10건은 전라도 순천 송광사에 보내왔다.
대웅전 보탑寶榻 뒤의 탱화와 삼세여래三世如來의 형상을 그린 화원畵員은 연풍현감延豐縣監 김홍도金弘道이며, 삼장三藏의 탱화105)를 그린 화원은 민관敏寬이며, 하단下坍의 탱화를 그린 화원은 상겸尚謙이다.
칠성각의 칠성여래와 사방칠성四方七星의 탱화를 그린 화원은 경옥敬玉 · 연홍演弘 · 설순雪順 등이다.
대웅전 단청의 도편수都片手는 가선嘉善 민관敏寬이다.

0001_0082_a_01L平安道閭里寺剎化主荊原堂法眼

0001_0082_a_02L       仝 通政奇弘

0001_0082_a_03L咸鏡道閭里寺剎化主嘉善最璘

0001_0082_a_04L忠清道閭里寺剎化主通政日閑

0001_0082_a_05L       仝 嘉善永昊

0001_0082_a_06L       仝 青空堂賛忱

0001_0082_a_07L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

0001_0082_a_08L
恩重經石板銕板自 內下嘉慶七年六月二十二日

0001_0082_a_09L法華經十件 全羅道順天松廣寺引來

0001_0082_a_10L大雄殿寶榻後佛幀三世如來軆幀畵員延豐縣監金弘道三藏幀畵員
0001_0082_a_11L敏寬下坍幀畵員尙 謙

0001_0082_a_12L七星閣七星如來四方七星幀畵員敬玉演弘雪順等

0001_0082_a_13L大雄殿丹青都片手嘉善敏寬

0001_0083_a_01L천보루天保樓 도편수와 단청화원丹青畵員은 강원도 삼척 영은사靈隱寺의 승려 팔정八定이다.
극락대원極樂大願 관음보살의 조성조각화원造成彫刻畵員은 관허당觀虛堂 설훈雪訓이다.
서방 아미타불의 조성조각화원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의 통정通政 봉현奉絃이며, 동방 약사여래의 조성조각화원은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의 통정通政 상식尚植이며, 석가여래의 조성조각화원은 전라도 정읍 내장사內藏寺의 통정通政 계초戒初이다.
승당의 도편수는 평안도 향산香山 보현사普賢寺의 승려 의섭義涉이다.
칠성각의 도편수는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의 승려 설잠雪岑이다.
선당仙堂의 도편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의 승려 운명雲明이다.
대웅전의 도편수는 전라도 장흥 천관사天冠寺의 승려 문언文彥이다.
누각樓閣의 편수片手는 경상도 영천永川 은해사銀海寺의 가선嘉善 남한南漢과 총섭總攝 쾌성快性이다.
철물차지鉄物次知는 통정通政 승오勝悟와 정헌正憲 철학哲學이며
전곡차지錢穀次知는 통정通政 신책信策과 서기書記 진환震環이다.

0001_0083_a_01L天保樓都片手丹青畵員僧江原道三陟靈隱寺八定

0001_0083_a_02L極樂大願觀音菩薩造成彫刻畵員觀虛堂雪訓

0001_0083_a_03L西方阿彌陀佛造成彫刻畵員全羅道智異山波根寺通政奉絃東方藥
0001_0083_a_04L師如來造成彫刻畵員江原道杆城乾鳳寺通政尙植釋迦如來造成彫
0001_0083_a_05L刻畵員全羅道定邑 [240] 內藏寺通政戒初

0001_0083_a_06L僧堂都片手平安道香山普賢寺僧義涉

0001_0083_a_07L七星閣都片手竹山七長寺僧雪岑

0001_0083_a_08L仙堂都片手江原道杆城乾鳳寺僧雲明

0001_0083_a_09L大雄殿都片手全羅道長興天冠寺僧文彥

0001_0083_a_10L樓片手慶尙道永川銀海寺嘉善南漢總攝快性

0001_0083_a_11L鉄物次知 通政勝悟 正憲哲學

0001_0083_a_12L錢穀次知 通政信策 書記震環

0001_0083_a_13L

0001_0084_a_01L
11. 장단군 강북면 월징산 심복사비 서문 長湍郡江北面月澄山心腹寺碑 序文
하늘이 훌륭하고 큰 영험한 절을 세우니 도끼로 베고 터를 닦아 산악에 설치되었다. 오직 월징산月澄山이 우뚝 솟아 청구青丘(동국)에서 으뜸이다. 동쪽으로 큰 냇물과 접해있는 좌우로 긴 누대가 있으니 이는 우화羽化이며, 남쪽으로 큰 강과 맞닿아 있는 높이 솟은 객사는 임단臨湍이다. 도가 일어나 그 서쪽을 감아 돌고 으뜸가는 용이 북쪽에 공손히 머무니 모두 월징산을 두르고 있다. 이곳 산천의 형세는 마치 지존至尊을 모시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그 사람을 기다리는 듯하다. 옛날 신라 때 선仙을 배운 불자인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절을 찾아 거듭 도사의 관을 벗었으니 불교의 스승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선禪의 명성은 중국을 흔들었다. 그는 천하의 명승지를 실컷 보고 들었는데 월징산에 와서 올라보고는 “이곳에 용궁을 지을 만하다.”하였다. 골짜기 이름을 심복心腹이라 하였는데 심복이란 사람 몸의 모든 신체 중에서 중요한 곳이다.
월징月澄이란 흰 달이 공중에 떠 있기에 붙인 이름이다. 얽거나 짜서 절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다시 승려가 조성해 지으니 석탑과 몇몇 대臺를 세웠다. 임진년의 병화 때에 계단戒壇이 파괴되어 승도가 도를 시험할 곳이 없고 법왕法王은 범음梵音의 의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진년에 기둥과 마룻대, 길과 계단을 중수하니 비로소 궁궐 담장과 아름다움을 대적하였고 울타리가 하늘처럼 높았다. 승려 한 사람이 온화하게 말하다가 뒤편 누각이 퇴락할까 걱정하며 이 일을 돌에 새겨 기록하려 하였다. 큰 전당을 지나며 이와 같이 내게 청하니, 마침내 명을 지었다.

籍籍律師     명성이 자자한 율사시여
玄玄索妙     지극히 깊은 오묘한 이치를 탐색하시니
摩尼之寶     마니보주106)인 듯하고
산천을 넘고 건너 아름다운 지역 자취를 남기시고 跋履山川。跡編佳麗
平陸隈隩     평평한 육지가 외오107)가 되도록
저 밖 월징산 경산景山108)과 서로 도모하여 外彼月澄。景山相基
遂直其好     다만 좋아할 뿐이어라
이에 사랑과 구제를 다하여 당도 짓고 전도 짓네 爰究愛度。乃堂乃殿
강희康熙 2년(1663) 8월(辛酉) 5일에 비석을 세우다.

0001_0084_a_01L長湍郡江北面月澄山心腹寺碑序文

0001_0084_a_02L
惟天設勝巨靈寺斧碁置山岳惟月澄山巍然冠乎青丘東接大川有臺
0001_0084_a_03L翼然者羽化也南臨大江有館屹然者臨湍也道起繞其西首龍峙巽北
0001_0084_a_04L皆環月澄若奉至尊此其山川形勢也天作地藏之以待其人古新羅學
0001_0084_a_05L仙佛人慈藏律師探寺覆空道冠者佛師表衆禪名動華是天下名勝
0001_0084_a_06L不厭見飫聞來登月澄曰此地可搆龍宮洞名曰心腹心腹者人身百軆
0001_0084_a_07L之所要也
月澄者白月之當空故名結搆來就復僧爲之作寺立石塔數
0001_0084_a_08L壬辰兵間戒壇破壞僧徒無肆道之所法王闕梵晉 [241] 之儀戊辰重修
0001_0084_a_09L楹軌級於是宮墻敵麗校捔穹崇有僧說誾者閔其廢後觀刻石志其事
0001_0084_a_10L過率堂爲余請之如是遂銘之曰
籍籍律師 玄玄索妙
0001_0084_a_11L摩尼之寶跋履山川跡編佳麗 平陸隈隩外彼月澄景山相基
0001_0084_a_12L遂直其好爰究愛度乃堂乃殿
0001_0084_a_13L康熙二年辛酉 五日 立石碑

0001_0085_a_01L12세 동자 선성宣城 김보金普가 짓고, 남양南陽 홍명기洪命其가 비석 머리의 전자篆字를 썼다.

법당의 현판문懸板文. 응진전. 목불木佛 5형形, 토불土佛 1형, 목촉木燭 1쌍雙, 석향합錫香盒 1개個, 향료香爐 1개, 소종小鍾 1개, 경磬 2개, 요령搖鈴 2개, 목불기木佛器 2개, 칸수 6칸
위실각位室閣 현판문懸板文. 숙선옹주 완산이씨 선가淑善翁主完山李氏仙駕 위패문位牌文. 제상祭床 1개, 목촉木燭 1쌍, 목향합木香盒 1개, 사기향로沙器香爐 1개, 칸수 2칸. 승려 거숙방居宿房 2칸, 전후공청前後空廳 모두 6칸. 총합계 16칸.
승려 1인 유명선柳明善.
석탑은 길이가 목척木尺으로 12척尺이며, 넓이는 사방 둘레가 24척이다.
12. 삼성산 삼막사109) 사적 三聖山三幕寺事蹟
삼막사三幕寺는 금천衿川 동북쪽 10리 거리에 있다. 이 절의 장로長老가 나에게 그 사적을 글로 엮어달라고 청하기를, “신라 때 승려 원효가 불법을 정통하게 배웠는데 그의 사제 의상義湘·윤필潤筆과 함께 이곳에 띠 집을 짓고 깊은 뜻을 연구하여 밝혔으니, 사람들이 그 산을 삼성산三聖山이라 불렀다. 그 후 몇 백 년이 지나 도선道詵이 호남의 영암으로부터 와서 그 터를 찾아 잡초를 베고 절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도를 행하니, 절을 관음사라고 하였다.

0001_0085_a_01L十二歲童 宣城 金 普僎 南陽 洪命其書篆

0001_0085_a_02L
法堂懸板文 應眞殿木佛五形 木燭一雙 香爐一個 土佛一形 錫香盒一個 小鍾一個 
0001_0085_a_03L磬 二個 木佛器二個 搖鈴二個 間數 六間


0001_0085_a_04L位室閣懸板文 淑善翁主完山李氏仙駕 位牌文祭床一個 木燭一雙 
0001_0085_a_05L木香盒一個 間數二間 沙器香爐一個 
0001_0085_a_06L僧居宿房二間 前後空廳并六間
共合拾六間
 
0001_0085_a_07L僧一口 柳明善

0001_0085_a_08L石塔長木尺十二尺 廣四方周回二十四尺

0001_0085_a_09L

0001_0085_a_10L○三聖山三幕寺事蹟

0001_0085_a_11L
三幕寺在衿川東北十里寺之長老以其事蹟請余爲文曰新羅時有僧
0001_0085_a_12L元曉善學佛與其弟義湘潤筆結茅於是修明奧旨人名其山曰三聖
0001_0085_a_13L後幾百年道詵自湖南靈巖來求其墟剪蕪穢作精室設像行道名曰觀

0001_0086_a_01L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으로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를 찾아뵙고 그 법을 얻어 돌아오니, 곧 건부乾符 연간(874~879)110)의 초년이었다.
도선이 풍수설로 고려 태조의 인정을 받아 창업할 때 500의 비보裨補사찰을 세워 산천의 기맥을 누르니, 이 산도 그 안에 들어갔다. 이에 법당을 중수하고 예전 규모를 조금 넓히고는 승도들에게 이르기를 “중국의 소주韶州 땅에 삼막사三藐寺가 있는데 그 동쪽에는 우천牛泉이 있고 서쪽에는 인각麟角이 있으며, 그 앞에 노봉爐峯이 섰고 그 뒤에 바위가 있다. 이곳의 높고 빼어나며 맑고 청량한 것이 그곳과 서로 비슷하지 않은가.”하고는 마침내 삼막사라 이름 하니, 선노禪老와 강백講伯이 풍문을 듣고 몰려들어 총림 중에서 으뜸이 되었다.
무자년(1348, 고려 충목왕 4)에 이르러 나옹 혜근懶翁惠勤111)이 휴휴암休休菴으로부터 이 절에 와서 머물었고, 이듬해 봄에는 지공指空112)이 또 원元의 대도大都에서 우두전단향牛頭旃檀香113)을 가지고 와서 해동의 선남자를 모아 도량을 열고 법당을 세웠다. 사람들이 와서 나옹과 지공의 방棒과 할喝을 보고는 향과 조주趙州의 일을 마음껏 음미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산은 더욱 중시되었고 절은 더욱 유명해졌다. 이때 무학無學114)이 있었으니 나옹의 제자이고 풍수지리의 학문에 매우 뛰어났다.
우리 태조께서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국도國都를 정하게 하니, ‘외백호外白虎의 지세地勢가 급하고 형태가 위태로워 내달리는 기운이 많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위에 절을 세워 호압虎壓이라 이름 하여 억누르고, 그 앞에 암자를 지어 사자라고 하여 위협했으며, 그 옆에는 개를 묻어 사견우四犬隅라 해서 두었다. 또 사방에 절을 지어 수도를 진압하니, 동쪽에 있는 것을 청련靑蓮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백련白蓮, 남쪽에 있는 것을 삼막三藐, 북쪽에 있는 것을 승가僧伽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여지輿誌』에 실려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외백호가 곧 이 산이고 삼막이 바로 이 절이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이 이른바 사찰을 창건하여 산천의 기맥을 진압하고 국가를 축원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고

0001_0086_a_01L音寺居無何入中國尋一行禪師得其法而歸卽乾符初也
詵以其術
0001_0086_a_02L知於高麗 太祖創統之際立五百裨補以鎮山川氣脉是山在其數內
0001_0086_a_03L乃重葺法宇稍增舊制謂其徒曰中原韶州地有三藐寺其東有牛泉西
0001_0086_a_04L有麟角爐峯立其前 [242] 在其後此地之崪然而秀冷然而清者無乃與彼
0001_0086_a_05L相類乎遂號曰三藐禪老講伯聞風而至蔚爲叢林之首
[243] 戊子懶翁勤
0001_0086_a_06L自休菴來寓是寺翌年春指空亦自大都齎牛頭降眞而來會諸海東善
0001_0086_a_07L男子 [244] 道場建法幢人之至而見懶翁指空之棒喝者莫不飽以香飫以
0001_0086_a_08L趙州由是山益重寺益名矣時有無學者懶翁之弟子尤善地理之學

0001_0086_a_09L太祖聞而徵之以定國都以外白虎勢急形危多有奔動之氣乃立寺其
0001_0086_a_10L曰虎壓以鎮之創菴其前曰獅子以威之埋犬其傍曰四犬隅以留之
0001_0086_a_11L又創剎四隅以鎮京都在東者曰青蓮在西者曰白蓮在南者曰三藐
0001_0086_a_12L北者曰僧伽載之輿誌云所謂外白虎卽此山也所謂三藐卽此寺也
0001_0086_a_13L則古人之所謂建寺創剎以鎮山川氣脉而使之祝釐邦家者尤曉然明

0001_0087_a_01L명백하다.
태종 때에 이르러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려 크게 중수하니, 불전이 3곳, 승료僧寮가 5곳, 어실御室 1곳, 누각과 문이 각 1곳, 대臺 2곳, 비碑 1곳, 탑塔 1곳 및 암자 약간이었다. 또 본현에 명을 내려 사찰의 주위 사방에서 땔나무 하고 가축 키우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전각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누대는 높고 넓었다. 초목과 금수의 무리들이 더욱 번성하고 왕성하니 수행을 닦고 또 편히 쉴 만하였다. 위로는 임금을 축원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도울 만한 곳이다. 그 전각을 대웅전이라고 한 것은 부처의 존엄함 때문이요, 당우를 적묵당寂默堂이라 한 것은 번뇌에 심란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전각을 첨성각瞻星閣이라고 한 것은 수행을 함에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면 망망대해가 앞에 펼쳐져 있어 그 누각을 망해루望海樓라고 이름 하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유 있게 스스로 얻는 바가 있어서 그 대를 청허대淸虛臺라고 하였다.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 탑을 세워 훌륭한 이를 드러내니, 구릉과 숲, 바위 골짜기와 시냇물 계곡 등에 모두 이름을 지은 뜻이 있었다.
지난 임진년(1592)에 왜구가 절에 불을 질러서 행랑이 모두 타버렸으나 법전만은 타지 않자, 그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서 향합香盒을 불전에 바쳐 죄를 참회하고 떠나갔다. 또 병자년(1636)에 호병胡兵(청나라 군대)이 산에 들어오자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으나 종변宗卞만 홀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대나무 화살을 길가에 꽂아 표시를 하고 떠나갔는데 그 화살과 향합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사찰은 신라 때 창건되고 고려 때 중수되었으며 우리 조선 초기에 융성하였으니, 원효·의상·윤필·도선·지공·나옹·무학 등이 머물렀다. 그 사이 사이에 수리하기도 하고 소소한 흥망성쇠도 있었으나, 시대와 함께 인물도 사라져 지금은 모두 알 수 없다.
아! 어질고 현명한 자는 흥하고 못나고 어리석은 자는 쇠퇴하리로다. 우리들은 서투르고 무지하지만

0001_0087_a_01L白矣

0001_0087_a_02L太宗時特降 綸旨大加營修凡佛殿三處僧寮五處 御室一處樓門
0001_0087_a_03L各一處臺二處碑一處塔一處及菴子若干處又 勅本縣環寺四方禁
0001_0087_a_04L樵牧殿閣雄以麗樓臺高以廣草木鳥獸之物益富以壯可以藏修可以
0001_0087_a_05L遊息上可以祝 一人下可以祐萬民大雄名其殿者以其舍那之尊嚴
0001_0087_a_06L寂默名其堂者以其煩惱之不亂也瞻星名其閣者以其藏修之有時
0001_0087_a_07L極目蒼茫滄溟在前故以望海名其樓散步逍遙悠然自得故以清虛
0001_0087_a_08L名其臺碑以記事塔以表勝以至丘陵林木巖洞溪澗皆有命名之意焉

0001_0087_a_09L
往在壬辰倭寇火寺廊廡皆燒而法殿獨不燃驚而奇之以香盒獻佛
0001_0087_a_10L罪而去又至丙子胡兵人山徒衆皆散而宗卞獨無懼見而異之以竹箭
0001_0087_a_11L插路表信而行箭與盒至今在焉盖是寺創於羅修於麗盛於我 朝之
0001_0087_a_12L而元曉義湘潤筆道詵指空懶翁無學之徒居焉若其間間修葺小小
0001_0087_a_13L興衰時與人 [245] 今皆不可知
嗚呼賢者之興而不肖者之廢吾輩貿貿焉

0001_0088_a_01L이 절에 주석하면서 크게 두려운 것은 이전 왕이 지키고 보호했던 덕과 여러 현인들이 교화한 자취가 사라져 후세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이를 기록해 주시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 덕을 좋아하고 현인을 우러르는 것이 사람의 양심인데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도선이 지맥을 누르고 무학이 형세를 제어하여 우리 국가의 무궁한 터전을 보전하였으며, 두 차례에 걸쳐 신이함을 드러내어 왜구와 오랑캐가 놀라고 탄복하였으니, 남겨진 기풍과 공덕이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바가 있다. 어찌 그 일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마침내 그 장로의 말을 엮어서 삼막사사적三幕寺事蹟이라고 이름 하였다.
건륭 신묘년(1771, 영조 47) 10월 하순에 설암 문인雪巖門人이 쓰다.

삼막사三幕寺 현존 불경佛經 목록目錄과 권수卷數
법화경法華經   1권卷
연종보감蓮宗寶鑑 1권卷
미타경彌陁經   1권卷
금강경金剛經   1권卷
13. 경기좌도 시흥 삼성산 호압사 법당을 새로 조성한 데 따른 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新造懸板文)
아람답고 신기하다. 산봉우리가 드높고 암석이 기묘한 것은 천고의 (세월을 겪은) 형상이며, 선악과 관계되어 신심어린 보시를 내는 것은

0001_0088_a_01L是寺大懼前王衛護之德諸賢行化之跡泯沒而不傳于後也子其爲我
0001_0088_a_02L記之余曰好德尙賢人之良心其可已乎况道詵之鎮脉無學之制勢
0001_0088_a_03L有以補我國家無疆之基而兩度著異二敵驚服則其遺風餘烈猶使人
0001_0088_a_04L有所興起者盍志其事以示後人遂編其長老之言名曰三幕寺事蹟云

0001_0088_a_05L
乾隆辛卯建亥月下弦雪巖門人

0001_0088_a_06L
三幕寺現存佛經目錄及卷數

0001_0088_a_07L法華經  一卷

0001_0088_a_08L蓮宗寶鑑 一卷

0001_0088_a_09L彌陁經  一卷

0001_0088_a_10L金剛經  一卷

0001_0088_a_11L

0001_0088_a_12L○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新造懸板文

0001_0088_a_13L
美哉奇哉峯巒之崔嵬巖石之妙奇千古之體也善惡之所關信施之所

0001_0089_a_01L인간 세상의 큰 작용이다. 본사本寺는 우리나라가 처음에 기틀을 마련할 때에 호혈虎穴115)을 진압한 곳이다. 사찰이 천년의 세월을 지나온 터라 무량존상無量尊像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할 즈음에 다행히도 상궁尚宮 남씨南氏와 유씨俞氏의 더할 나위 없는 신의를 얻었다. 자신의 고초를 생각지 않고 남들에게 권장하였으며 인색하고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수백 금의 재물을 내어 법당을 조성하였다.
난야蘭若116)는 우뚝 솟았고 채색 그림에 금빛 휘날리며 또 향과 초의 밝은 빛을 얻어서 번뇌를 벗어난 무루無漏의 큰 공업을 이루게 되었다. 선善은 입으로 다 말할 수 없고 아름다움은 귀로 다 분간할 수 없다. 생각건대 우리 불가佛家의 축일祝日(첨례瞻禮)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은 늘 다음 세상에 복을 심고, 빌며 마음을 내는 대시주이고 보시를 권하는 이들이다. 지금 여기에 동참한 자들은 현세에 한량없는 복을 얻어 인간의 오복을 갖추게 될 것이며, 다음 세상에 극락에 왕생하여 불도의 정과正果를 얻게 될 것이다. 선善을 심으면 천지와 함께 무궁할 것임을 늘 깨닫는다.
신축년 4월 일 병법사문秉法沙門 의민義敏이 글을 쓰다.
14. 조선국 경기도 죽주부 칠현산 칠장사 사실기 朝鮮國京畿道竹州府七賢山七長寺事實記
크도다, 각황覺皇(부처)의 교화를 베푸심이여! 서역과 중화의 오성五姓117)과 칠중七衆118)이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해동에 이르면 멀고 먼 궁벽한 곳이다 보니 감화를 입지 못하였다. 처음 한나라 명제明帝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고, 천하에 널리 퍼져서 명산의 경승지에는 사찰이 치솟아 있고 높은 산과 바위에는 참선하는 암자가 늘어섰으니 천하에 불법을 숭봉하는 정성이 가득함을 볼 수 있다. 이곳 칠장사七長寺는 백두산의 한 맥이

0001_0089_a_01L人世之大用也夫本寺也則惟我國初建基之時鎮壓虎穴之處也
0001_0089_a_02L宇遙隔千秋無量尊像不克風雨之際幸逢尙宮南氏俞氏無上信意
0001_0089_a_03L思辛苦而引勸他人破諸慳貪而出財累百造成法宇
而蘭若懸空彩畵
0001_0089_a_04L飛金而又得香燭之光明以成無漏之大功善未可口言美不可耳議也
0001_0089_a_05L惟我佛家瞻禮供俱之人常樹福於當來呪發心大施主引勸者乎今此
0001_0089_a_06L同叅者現世獲福無量備人間之五福後時往生極樂得佛道之正果
0001_0089_a_07L證樹善與天地無窮焉

0001_0089_a_08L辛丑四月 日秉法沙門義敏書

0001_0089_a_09L

0001_0089_a_10L○朝鮮國京畿道竹州府七賢山七長寺事實記

0001_0089_a_11L
大矣哉覺皇之垂化也西域中華五姓七衆莫不瞻仰而至於海東遠處
0001_0089_a_12L僻鄙未能霑化始自漢明流入支那覃及四海名山勝地梵宇崢嶸高嶽
0001_0089_a_13L峨岩禪庵羅列彌天下佛法崇奉之誠槩可見矣兹七長寺者白頭一脉

0001_0090_a_01L흘러와 금강산이 되고 금강산의 맥 하나가 일어났다 굽히고 이어졌다 끊기고 하면서 연창延昌(경기도 안성 죽산) 10여 리까지 이르렀다. 스스로 자리를 지키며 펼쳐놓아서 잇달아 높이 솟아 가파르니 여러 산봉우리 중에 우뚝 솟은 것이 칠현산이며, 봉우리를 죽 돌며 골짜기가 깊고 샘물은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 칠장사이다.
옛날 청녕淸寧119) 연간 병진년(1076)120)에 고려의 혜소국사慧炤國師121)가 안성군安城郡에서 태어났고 (수원) 광교산廣教山의 충회冲會 대사에게 삭발(출가)하였다. 타고난 본성이 청정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고 널리 배울만한 스승들을 찾아뵙고 많은 경전들을 섭렵하였다. 또 선禪의 핵심으로 들어가 치밀하게 닦았고 오로지 정성스럽게 하여 계합契合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는 중국에 들어가 임제臨濟122)의 정맥正脉을 계승하였다. 당시 송宋의 태조太祖는 그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관리를 보내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법요法要를 묻고 논하자 마른 땅에 단비가 촉촉하게 내린 듯 속세의 어지러운 생각을 말끔히 씻어내니 그를 높이어 사부로 삼았다.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황상皇上이 태자소보경太子少保卿 김양金陽123)과 좌가승정左街僧正 도원道元 등을 본국으로 오게 해서 선암禪庵을 건립하게 하였다.
이때에 태조 왕건王建이 조칙을 받들고 사신으로 하여금 그 일에 협조하도록 하였다. 칠장동七長洞에 도착해 보니 무성하게 우거진 풀숲 사이에 고요히 인적은 없고 숲속에서는 원숭이 울음소리, 계곡에서는 새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때마침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다 입구가 있어 들어가니 신선이 산다는 동천洞天처럼 밝고 햇볕이 내리비쳐 엄연히 하늘의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여기서 한 사냥꾼을 만나서 “이 산이 깊고 그윽한데 범궁梵宮은 있는가?”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아미산峨嵋山 아래 장군이나 재상이 나는 땅이 있다고 하는데 사찰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황제의 사신이 산 아래로 되돌아와 잡초를 헤치고 가시덤불을 잘랐으며 습지와 못을 메우고 감추어 아란야阿蘭若124)를 짓고 편액扁額을 홍제관弘濟舘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비전碑殿이 바로 그곳이다.
국사는 이곳에 탁석卓錫125)하고서 고요히 선을 닦았고, 교화를 행하고 구제하는 인연을 베풀었다. 어느 날 일곱 사람이 와서 뵈었는데, 국사는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은 것을 미리 알고 정성스럽게 상대해 주었다. 7인은 그가 덕이 높고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더한층 설법을 청하였다. 국사가 법요法要를 대략 설명해 주자, 7인이 이로 인해 뜻에 부합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특별히 서원誓願을 내어

0001_0090_a_01L流爲金剛金剛一脉或起或屈或連或絕以至延昌十餘里自戍爲臚
0001_0090_a_02L屴峭嶢逈出羣峯者七賢山也峯迴而洞邃泉甘土肥者七長寺也
始自
0001_0090_a_03L清寧龍集丙辰之歲高麗慧炤國師生於安城郡落髮于廣教山冲會大
0001_0090_a_04L性根清淨不染塵土廣叅知識涉盡羣經又入禪樞密密提撕專精有
0001_0090_a_05L因入中國繼臨濟之正脉爾時宋太祖聞偉賢使使請入宮中諮詢法
0001_0090_a_06L洽沾甘澍洗滌塵慮尊爲師傅師請歸本國皇上仍太子少保卿金陽
0001_0090_a_07L及左街僧正道元等來到本國欲營禪庵
伊時 王建太祖奉勅使使
0001_0090_a_08L協其事到于七長洞豐草茂林閴無人跡猿啼林間鳥鳴溪澗而已秪沿
0001_0090_a_09L流而行入一衖口則洞天明朗白日照臨儼然一天造也於是見一獵人
0001_0090_a_10L問曰此山深幽有梵宮乎曰古諺雖有峨嵋山下將相之地梵宮非有
0001_0090_a_11L皇使轉到山下披草剪荊填雲藏澤建阿蘭若額曰弘濟舘今碑殿是
0001_0090_a_12L
國師卓錫安禪垂化度緣一日有七人來謁師預知不善之心以實相
0001_0090_a_13L對之七人知其神悟反請說法師略說法要七人因而有契特發誓願

0001_0091_a_01L성황당을 지어서 일곱 곳을 지키고 보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을 칠현산七賢山이라 하고, 절을 칠장사七長寺라고 하였다. 국사가 직접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감로甘露라는 우물을 뚫었다. 법당을 높이 짓고 미혹한 중생을 널리 제도하자 혜해慧解가 더욱 밝아져서 명성이 원근에 퍼졌고 덕망이 당대의 존중을 받았다.
무자년(1048)126)에 이르러 하늘이 내린 수명이 끝나고 교화의 인연이 이미 다하여 나이 83세에 홀연히 입적하였다. 황상皇上127)은 그의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으며 조칙을 내려 정각도수定覺道首 혜소국사慧炤國師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 신 김현金顯128)으로 하여금 그의 행적비명行蹟碑銘을 짓게 하였다. 비석은 홍제관의 왼쪽에 세우고 9층 사리탑은 오른쪽에 세웠다.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었는데 임진년 난리에 귀비龜碑가 병장기에 깎이고 떨어져 나갔다. 비문의 자획이 대부분 마멸되어 국사가 태어난 시기와 평소에 수행한 내용과 임종할 당시에 나타난 상서로운 일들이 비록 전해오는 말들은 많으나 글로 기록해 놓은 것이 자세하지 못하니 이 어찌 매우 유감스럽고 애석하지 않겠는가.
뒤에 크게 일어났으니 지대至大 원년 무신년129)(1308년, 고려 충렬왕 34)에 처음 이 절을 창건하였다. 217년이 지난 뒤에 사운寺運이 불행하여 참혹하게도 화재를 당하여 빈 터에 재만 쌓이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종武宗130) 정덕正德 원년 병인년(1506)에 보배로운 절을 중건하여 예전의 제도를 잃지 않았고 강희康熙 13년 갑인년(1674)131)에는 세력가에서 산을 점유하게 되자, 산중의 승려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뜻을 가졌다. 당시에 초견楚堅이라는 이름의 도인이 있었는데 상산常山 사람이었다. 겉치레만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고 도의道義에 뜻을 두어 명산을 두루 다녔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하여 도를 단련하였다. 이 일을 지켜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절을 중건하고 단청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동지 네댓 명과 함께 다시 옛 절터의 북쪽에 땅을 살폈다. 산봉우리를 마주 대하고 있어 높고 상쾌하며 빼어났으니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손수 편문片文을 잡고 한번 산문을 나서자, 풍열風說 등 네 사람이 좇아와서 서로 도왔다. 갑인년(1674) 여름에 절을 다시 세우고 그해 가을에 단청을 마쳤다. 거의

0001_0091_a_01L作城隍衛護七處故山稱七賢寺稱七長也國師手植雙松穿井甘露
0001_0091_a_02L建法堂廣度羣迷慧解增明名播遠邇德重當世
至戊子之歲天朞已迫
0001_0091_a_03L化緣已盡壽至八十有三奄然長化皇上聞訃痛悼敕賜諡號定覺道首
0001_0091_a_04L慧炤國師使太子少保臣金顯撰行蹟碑銘立碑于弘濟舘之左立九層
0001_0091_a_05L舍利塔於右累經兵火至於壬辰之亂龜碑剝落於兵刃之下字劃多舛
0001_0091_a_06L國師降生之辰平生修行之節臨終現瑞之事雖多言傳而未詳書識
0001_0091_a_07L非感惜之甚者乎
後之大興至大元年壬申 [246] 之歲始剏此寺而閱二百十
0001_0091_a_08L七年後寺運不幸慘遭回祿之禍積灰空基蕩然無遺至 太祖正德元
0001_0091_a_09L年丙寅 [247] 重建寶坊不失舊制至康熙十二年甲寅 [248] 遂爲勢家之所占山
0001_0091_a_10L中緇徒皆有四散之志時有道人楚堅其名者常山人也不尙浮華志於
0001_0091_a_11L道義歷遊名山頤養道胎叅看厥事不忍慘心以重建丹雘爲己任與同
0001_0091_a_12L志四五人更相地于舊址之北面對巒峯爽塏奇秀尤得其勝手執片文
0001_0091_a_13L一出山門風說從四來相助建覆於青虎之夏粧雘於厥年之秋幾爲永

0001_0092_a_01L영구히 없어질 뻔했던 절을 몇 개월 안에 새롭게 중건한 것이다. 이듬해 4월에 천지수륙대회를 널리 폈다. 화주化主가 되어 건립하였으니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이 신기할 정도로 빠른 것은 실로 전무후무한 드문 일이었다.
갑술년(1694, 숙종 20)에 세력가가 다시 장지로 삼은 산을 옮겨갔기에, 그 뒤 갑신년(1704, 숙종 30) 봄에 이르러 본사의 주지 석규碩奎가 여러 승려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협의하여 옛터를 돌려받고자 하였다. 대화사大化士 사간思侃에게 청하여 권선문을 소매에 넣고 다니며 시주를 걷는 데 힘썼다. 재물을 모으고 기술자를 불러서 먼저 인천人天의 스승이 계시는 전각인 대법당과 응향각, 진여문을 옮겼다. 화사化士인 일준一俊은 청련당青蓮堂을 옮겨 짓고, 비구 정률精律은 심검당尋劒堂을 옮겨 세웠으며, 비구 치진緇進은 적묵당寂默堂과 백련당白蓮堂을 옮겨지었고, 화사 정순精順은 서별당西別堂을 지었다. 산인山人 상원尚元은 태청루太清樓를 옮겨 짓고, 화사 석신碩信은 향적전香積殿을 태청루 서쪽에 설립하였다. 을사년(1725)에 이르러 선진善真과 두한斗閑 등이 원통전圓通殿을 짓고, 병오년(1726)에 윤영允英과 처휘處輝 등이 관음의 존상尊像을 공경히 맞이하여 연화좌蓮花座 위에 봉안하였다. 화사 사간은 명부전을 냇물 가에다 짓고 지장대성地藏大聖(지장보살)의 존상을 봉안하였다. 시왕의 열위烈位가 환히 갖추어지니 마치 날아갈 듯한 모습이었다.
태청루 아래에 천왕문을 설립하고 문밖에는 해탈문을 세웠다. 절 북쪽에는 미타전이 있고 미타전 위에는 벽응대사碧應大師의 진영당이 있으며 당 앞에는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또 9층 사리탑과 제월당霽月堂의 사리부도, 흥정대사興淨大師의 항아리 부도瓮浮屠가 있다. 그 뒤에는 극락암이 있는데 선승 수경守敬이 처음에 서쪽 기슭에다 세웠는데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퇴락함이 매우 심하자 산인 희연熙演이 빛나게 새로 중수하였으니 산중의 암자 하나가 기이한 경관을 이루었다. 건륭乾隆 신미년(1751, 영조 27)에 이르러 절의 쇠잔하고 무너짐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가는 술사術士가

0001_0092_a_01L弊之寺不數月而重新翌年清和月廣張天地水陸大會焉爲化主而建
0001_0092_a_02L迄功之若是神速者實前後之所罕聞也
至甲戌歲勢家又移葬山
0001_0092_a_03L後至甲申之春本寺住持碩奎與諸緇徒同心協議欲還舊址請大化士
0001_0092_a_04L思侃袖藏勸詞力募檀緣鳩財請工先移人天師所臨殿大法堂凝香閣
0001_0092_a_05L眞如門化士一俊移建青蓮堂比丘精律移建尋劒堂比丘緇進移建寂
0001_0092_a_06L默堂白蓮堂化士精順建西別堂山人尙元移建太清樓化士碩信設香
0001_0092_a_07L積殿於太清樓之西至於乙巳之歲善真斗閑等設圓通殿丙午允英處
0001_0092_a_08L輝等敬速觀音尊像奉安花座上化士思侃設冥府殿於川邊奉安地藏
0001_0092_a_09L大堅 [249] 之尊像十王之烈位煥然結搆勢若翬飛
太清樓下設天王門門外
0001_0092_a_10L建解脫門寺北有彌陁殿殿上有碧應大師眞影堂堂前立鄭東溟斗卿
0001_0092_a_11L所撰碑銘又有九層舍利塔霽月堂舍利浮屠興淨大師瓮浮屠其後有
0001_0092_a_12L極樂庵禪僧守敬初創于西麓不滿十載墮非莫甚山人熙演煥然重新
0001_0092_a_13L山中一庵惟爲奇觀至於乾隆辛未之歲寺之殘敗日益甚矣來往術士

0001_0093_a_01L유독 이 암자가 산맥을 눌러서 해가 된다고 지적하자 주지 유선猷善이 헐어서 옮기자고 먼저 주장하였다. 절의 모든 승려들이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모아서 절 북쪽의 정악鼎岳 아래로 옮겨 세웠다. 남쪽에는 명적암明寂庵이 있고 암자 아래에는 53불佛의 명호名號를 적은 비碑가 있는데 부처를 위해 비석을 세웠으니 바로 탄명坦明이 조성한 것이다.
절에서 화살 한 대 쏘는 거리에 홍허문紅虛門이 있고, 그 문밖에 28층 되는 철당鐵幢이 있다. 여러 번 풍상을 겪고 중간이 꺾였는데도 보수하지 못하였으니 역시 복구해야 한다. 절의 경내에 28좌의 부도가 있으니 인걸은 땅의 영험함에 따라 난다는 것을 증험해 볼 수 있다. 사찰의 흥폐를 이미 네 번이나 겪었고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당하여 실제 사적은 없어져버렸다. 고려시대의 귀중한 사찰이 잡초 우거진 채로 매몰되어 버리면, 비록 맑고 고결한 선비가 사원 문 앞에 와서 개산開山은 어느 시대에 하였고 창사創寺는 어느 해에 하였는지 듣고자 해도 누가 그것을 밝혀줄 수 있겠는가. 내가 두류산頭流山에서 이 절에 당도하자, 주지인 개심開心이 나에게 글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자질이 둔하고 모자라고 심지가 막혔으며 식견도 어두우니, 문사文士에게 글을 구하는 것만 못하겠다고 하였다. 장로長老가 이르기를, “고려 시대에 창건한 절에 따를 만한 글이 없다면 임천林泉은 빛을 잃고 산문山門은 적막할 것입니다. 다행히 진실을 찾으려는 선비가 한번 보고 놀라면 벽을 맞대고 하는 탄식이 없을 것이니, 글이 훌륭하고 아니고는 내 바랄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외람되지만 붓을 들고 절의 흥하고 폐함과 중수의 대략을 적어서 뒤에 오는 자가 알 수 있게 하였다.

건륭乾隆 20년 청저青猪(1755)132) 2월 일에 화월자和月子 원일圓一이 기록하다.
을해년 봄에 내가 여러 시종들과 마침 이 절에 와서 열흘 남짓 놀면서 구경하였다. 한 승려가 빈 책 한 권과 100여 줄 되는 선가사실기禪家事實記를 손에 들고 와서 나에게 베껴 써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그 기록을 전부 읽어보고 글을 써서 뒷날 참고하여 볼 수 있게 하였다.

0001_0093_a_01L獨指此庵鎮脉爲害故住持猷善先唱毀移一寺僉僧同心戮力移建于
0001_0093_a_02L寺北鼎岳之下南有明寂庵庵下有五十三佛名號碑立石爲佛乃坦明
0001_0093_a_03L之所成也
寺之一箭道有紅虛門門外有二十八層鐵幢屢經風霜而折
0001_0093_a_04L腰未補亦可復也寺局有四七座浮屠人傑地靈從可驗矣凡寺之興廢
0001_0093_a_05L已經四度屢見兵火未有實蹟麗代寶剎埋沒於草昧之間清標高節之
0001_0093_a_06L來到院門雖欲聞開山之何代創寺之何年孰從而明之余自頭流來
0001_0093_a_07L到此寺住持釋開心請余筆記之余資質鈍滯心地茅塞識見茫眛莫若
0001_0093_a_08L求之於文士也長老曰麗代創建之寺無文可從則林泉失色山門寂寞
0001_0093_a_09L倖使探真之士一見而怳然則庶無面墻之歎文之工不工非吾所望也
0001_0093_a_10L余濫自秉筆敘其興廢復古之梗槩以曉後來者云爾

0001_0093_a_11L乾隆二十年青猪仲春日和月子圓一識

0001_0093_a_12L乙亥春余與諸從適到此寺旬餘遊賞有一師手持一券空冊及百餘行
0001_0093_a_13L禪家事實記屬余謄書以識余迺獵盡其記踵而書之以備後日之觀云

0001_0094_a_01L
14-1. 인목왕후仁穆王后 어필御筆
老牛用力已多年   늙은 소 힘을 쓴 지 이미 오랜 세월 되었으니
領破皮穿只愛眠   목덜미 갈라지고 가죽 헤져 아끼고 쉬게 해야 하네
犁耙已休春雨足   쟁기질 써래질 다 끝나고 봄비도 충분한데
主人何苦又加鞭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히고 또다시 채찍질 하는가
昔奉御書      예전에 임금의 글을 받아다가
琅函是藏      옥함에 담아 두었었는데
今玩寫詩      이제 와 써주신 그 시를 감상하니
尤健且強      매우 굳세고 힘이 있구려
天氣流動      천기가 흘러서 감돌고
之雲輝祥      상서로운 구름 빛을 발하니
紙舊墨新      종이는 묵었지만 먹은 새것인 듯
尚留餘香      외려 남은 향기 묻어있구려

임진년 봄 정월 상원일上元日에 절하고 삼가 쓰다. 위의 글은 직접 지은 것이다.
14-2. 죽산군 칠현산 칠장사 중건기 竹山郡七賢山七長寺重建記
백두산의 한 맥이 흘러서 금강산이 되고, 금강산의 맥 하나가 일어났다 굽히고 이어졌다 끊기고 하면서 죽주竹州에 이르렀다. 죽주에서 서쪽으로 10리쯤에 용반호거龍盤虎踞133)의 지세를 갖춘 곳이 칠현산七賢山이며, 산에는 칠장사七長寺라는 절이 있다. 어찌하여 칠현산이라고 하고, 칠장사라고 하는가. 청녕淸寧 용집龍集 병진년(1076)부터 고려의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절을 창건하고 고요히 선을 행했는데, 하루는 어디선가 7인이 찾아와 국사를 뵙고 법의 요체를 설해 주기를 요청하자, 국사가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7인이 이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어 항상 혜소국사를 따라 다니며 어질고 사리에 밝은 이들과 함께 하였다.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된 것처럼 장인匠人이 변하여 현명한 이가 되었기에 칠현산과 칠장사로 불렀다고 한다.
고려에서 지금까지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사찰의 모습은 퇴락하고 무너져 아침저녁 버티기가 어려웠으나

0001_0094_a_01L

0001_0094_a_02L仁穆王后御筆

0001_0094_a_03L
老牛用力已多年領破皮穿只愛眠▼((牛*ㄉ)/牛)耙已休春雨足主人何苦又加鞭
0001_0094_a_04L昔奉 御書琅函是藏今玩寫詩尤健且強天氣流動之雲輝祥紙舊墨
0001_0094_a_05L尙留餘香

0001_0094_a_06L
壬辰春正月上元日拜手謹書右自製

0001_0094_a_07L

0001_0094_a_08L竹山郡七賢山七長寺重建記

0001_0094_a_09L
盖白頭一脉流爲金剛金剛一脉或起或屈或連或絕流至竹州州西十
0001_0094_a_10L里許以龍盤虎踞勢爲七賢山山有寺名爲七長何爲七賢七長自清寧
0001_0094_a_11L龍集丙辰高麗慧炤國師創建安禪矣一日何許七人來謁于師請說法
0001_0094_a_12L師爲略說七人因而有契常隨慧炤國師正叅賢哲之衆魚變成龍
0001_0094_a_13L化爲賢故號爲七賢七長也
自高麗至今年久月深寺樣頹圮朝暮難支

0001_0095_a_01L고치려는 사람은 하나 없고 한탄하는 대중만 많았다. 광서光緖 정축년(1877)에 이르러 산인山人 서해瑞海와 해성海城 두 선사가 슬퍼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큰 자비심을 내어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권선문을 도맡았다. 선남선녀가 앞장서 재화를 모으고 있을 때 다행히도 전동磚洞의 민보국閔補國 대감주大監主가 특별히 베푼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재목 수백 그루와 돈 1천여 냥을 시주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니 실로 이는 태운泰運134)이 두 선사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들어맞은 것으로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듬해인 무인년(1878) 3월에는 공장工匠을 불러 태청太淸의 옛터를 새롭게 정비하고 누방樓房 48칸을 지었다. 4면 둘레에 법당이 있으니, 신실新室이 정 중앙 부근에 있어서 여러 전殿들 중에 가장 두드러졌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큰 규모가 오히려 예전 모습보다 나으니, 훌륭하도다. 만약 두 선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 외형을 갖춘 뒤에 두 선사가 나에게, “이는 덮어두기 어려운 공덕인데 기록해 두지 않으면 후대에 전할 수가 없습니다. 대략 써서 기록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여러 번 청하니, 내가 감히 굳이 사양할 수 없었다. 무릎 꿇고 절한 뒤에 붓을 잡고서 앞선 일은 앞에 기록하고 후대의 일은 뒤에다 기록하였으며 유가와 불가의 양가에 공로가 있는 이의 성명은 말미에 적어서 외람되이 영구히 전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았다. 뒷날 군자가 이를 보고 감흥을 느끼고 인차수즙鱗次修葺135)의 이 공덕의 자취가 천년동안 사라지지 않고 칠현의 이름이 만세토록 긴 봄날처럼 남기를 지극히 바라는 바이다.

광서光緖 4년 무인년(1878) 4월 일 완산인完山人 응총應摠은 삼가 쓰다.
14-3. 불사 서문 佛事序文
한강 이남에서 경치 좋은 가람으로는 청룡사青龍寺와 칠장사七長寺를 꼽는데 이 둘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본사에 경사스러운 운 때가 있는 듯하니

0001_0095_a_01L改無一人恨有衆人矣當於光緒丁丑山人瑞海海城二禪師揮却慷慨
0001_0095_a_02L之心特垂大慈之念不避風雨荷擔勸文善男善女前財貨鳩聚之際
0001_0095_a_03L蒙磚洞閔補國大監主特垂河海之澤材木數百株錢文一千餘兩許施
0001_0095_a_04L成事實是泰運之所契二師之誠心是豈偶然哉
越明年戊寅三月乃招
0001_0095_a_05L匠工新掃於太清舊墟以作樓房四十八間四面圓在法堂則新室正在
0001_0095_a_06L中央之界逈出羣殿之中也壯麗宏規猶勝於前容善哉若非二師之臂
0001_0095_a_07L焉能如此哉成樣之後二師請余曰此是難杇之功不以書之無以傳
0001_0095_a_08L略筆記之如是累累余不敢強辭拜跪執筆前事載前後事載後儒釋
0001_0095_a_09L兩家有功姓名書之于尾濫以爲永傳之本庶望後之君子覽此興感
0001_0095_a_10L次修葺使此功德之跡千秋不杇七賢之名萬世長春至扣至扣

0001_0095_a_11L
光緒四年戊寅四月日完山人應摠謹識

0001_0095_a_12L佛事序文

0001_0095_a_13L
漢以南勝藍稱青龍七長可謂難爲伯難爲仲本寺似有嘉會之運者

0001_0096_a_01L서해瑞海라는 한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대사가 이곳에서 수십 년 머무르다 보니, 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언제나 대사의 판단에 따랐다. 모으고 고쳐 지어 전각이 새로워지고 정돈하고 닦아 씀으로써 기물이 빛이 났다. 모든 폐해를 다 손보았지만 힘이 미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명부전과 천왕문의 소상塑像과 불화, 도량의 단청을 빠뜨렸다. 이에 정해년에 승도들과 교화를 행하기로 하였고 이듬해 늦봄에 그림과 채색 일을 시작하였는데 나에게 증인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며 이르기를, “지금 이렇게 이로운 때에 수천 금을 모아서 지장상地藏像을 개금改金하고 십명왕十冥王과 사천왕을 채색하고 탱화 10축軸을 그리는데 20일 만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눈 위에서 잠자고 빗속을 다니며 집집마다 다니며 시주를 거두는 것과 다소 번거로운 일의 어려움은 구태여 수고라고 할 것도 없지만, 크고 작은 단월檀越들의 시주가 성상聖像을 오랫동안 있게 하니 공은 그들의 공이며, 빈도로 하여금 서원을 이루게 하니 은혜도 그들의 은혜입니다. 또 250금씩을 시주한 두 사람이 있으니 독실하게 행한 단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덕과 은혜가 오래 가게 하려면 문자文子만한 것이 없으니, 그 성명을 기록하여 우리 스님의 글을 갖추십시오. 오늘날 응해 태수應海泰守가 신심을 내어 여러 단월들을 앞서서 이끌었음을 후세에 알게 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스님은 글을 바라지만 저는 그 공덕을 아낍니다. 본사의 전후의 일로 스님이 쌓아놓은 공적이 있는데도 그 노고를 내세우지 않으니 그것이 공이며, 겸손함이 바로 덕입니다. 단월들은 그 중 공 하나가 있지만 대사는 두 가지를 갖추었으니, 나에게 글을 쓰라 한다면 덕을 우선으로 하고 공을 뒤로할 뿐입니다.”하자, 선사가 정색하며 일어섰다. 나는 묵묵히 선사의 거처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낮잠에 들었다.
무자년 초여름에 대연 만우大淵萬雨가 쓰다.

0001_0096_a_01L瑞海一師以也師居兹數十年而寺中事細大輙倚師爲輕重蒐輯改造
0001_0096_a_02L殿閣之一新措置修用什物之潤色百廢悉手之而力未及冥府殿天王
0001_0096_a_03L門塑畵道塲顏色闕如者以此乃於丁亥謀衆行化粵明年暮春營始繪
0001_0096_a_04L請余證之
囑余記之曰今此惟利之時鳩聚數千金金地藏像彩十冥
0001_0096_a_05L王四天王繪幀十軸浹二旬功竣雪宿雨行戶說箕斂多少細徒之艱
0001_0096_a_06L敢其勞大小檀越之施使聖像久住功其功使貧道遂願恩其恩又一半
0001_0096_a_07L五百金有兩人焉可謂篤行檀者也功之恩之之久諸莫文字若也記其
0001_0096_a_08L姓名以吾師之文弁之使來世知今日有應海泰守發信爲衆檀首唱
0001_0096_a_09L亦可乎
余語之曰師欲其文我愛其德本寺前後之舉師有積累之功
0001_0096_a_10L不肯其勞則功也其謙則德也檀有其一師兼其二欲余文之先德后功
0001_0096_a_11L而已也師正色而作余默觀師之宿因不覺午睡焉

0001_0096_a_12L
0001_0096_a_13L戊子肇夏大淵萬雨書

0001_0097_a_01L
14-4. 칠현산 칠장사 백련암 중수기 七賢山七長寺白蓮菴重修記
살피건대, 하늘과 땅은 형성되었다가 무너지고 무너졌다가 형성되며, 범인과 성인은 태어났다가 죽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며, 전각도 새로워졌다가 오래되고 오래되었다가 새로워진다. 이는 인간 세상의 정해진 운수이다. 이번 비전碑殿의 중수는 어떤 상서로움이 있어서 비전이라 한 것이며, 누구의 은혜를 입어 중수하게 된 것인가? 전 왕조인 고려 때에 혜소국사慧炤國師라는 한 대사가 안성군安城郡 향반鄕班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광교산廣教山의 충회冲會 대사에게 출가하였다.
부처의 참된 가르침에 계합하여 중국으로 들어가 송 태조의 황사皇師가 되었다가, 본국의 이 산으로 돌아와서는 절을 세우고 편액을 홍제관弘濟舘이라 하였다. 국사가 교화를 펴자, 7인이 와서 깨달았으므로 아미산峨嵋山을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 불렸으며, 국사가 입적하자 황상皇上이 칙명으로 부도를 새워서 사리를 봉안하게 하고 비석을 세워 그 행적을 앞장서서 드러냈다. 그래서 홍제관弘濟舘을 고쳐 비전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비전이 처음 세워지자 절과 암자가 늘어서고 산문이 조용하고 엄숙해졌다. 임진년의 병화를 겪으면서 귀비龜碑가 부서지고 정전精殿이 소실되었는데 그 사이에 다시 지었으나 번번이 화재를 당하였다. 뒤에 사간 화사思侃化士가 중수하였지만 몇 백 년 동안 승려는 사라지고 암자는 무너졌다. 덕암 장로德庵長老가 출가하여 행장을 꾸려 이 산으로 들어와서 선행으로 몸을 닦은 지 40여 년이 되었다. 암자가 부서지고 퇴락한 것을 보고 어느새 신심을 일으켜 전답 1석 남짓의 마지기 땅을 팔고 아울러 시주를 모집하여 제도에 맞는 건물을 짓고 법에 맞게 점안點眼을 하였다. 만약 불조佛祖가 사람을 시켜 준비한 일이 아니라면, 이 칠현산에 다시 온 선사일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약 비전碑殿이 없었다면 국사는 몸을 편히 의탁할 곳이 없었을 것이다. 또 국사가 없었다면 7현이 도를 깨우칠 자리가 없었을 것이며, 7현이 없었다면 이 산이 그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화상이 없었다면 비전을 중수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0001_0097_a_01L七賢山七長寺白蓮菴重修記

0001_0097_a_02L
觀夫天地成而壞壞而成凡聖生而死死而生殿閣新而故故而新此人
0001_0097_a_03L世之常分也今者碑殿重修有何祥以名碑殿承誰恩以重修耶先王
0001_0097_a_04L高麗時有一大師號慧炤國師生長於安城郡鄉班家覺世無常剃髮于
0001_0097_a_05L廣教山冲會師
契 佛眞旨入中華爲宋太祖皇師還本國此山建一蘭
0001_0097_a_06L額號弘濟舘國師垂化七人來悟故改峨嵋山爲七賢山國師入寂
0001_0097_a_07L上勅立浮圖舍利奉安建碑文行蹟唱顯故改弘濟舘爲碑殿也
然則碑
0001_0097_a_08L殿初創寺菴羅列山門肅靜矣壬辰兵火龜碑剝落精殿燒盡間有成造
0001_0097_a_09L累當回祿後思侃化士重修幾百年僧殘菴敗矣德庵長老出世行李
0001_0097_a_10L此山以德修身四十餘年觀菴敗壞頓發信心自賣田沓一石餘斗落廤
0001_0097_a_11L并募檀緣如制成造如法點眼若非佛祖使人定是七賢山中再來之師
0001_0097_a_12L
反以思之則若無碑殿國師無以安身之地若無國師七賢無以開悟
0001_0097_a_13L之席若無七賢此山無以托名之由若無和尙碑殿無以重修之人耳

0001_0098_a_01L이는 국사의 공인가? 7현의 공인가? 화사化士의 공인가? 단월의 공인가? 이는 마치 방위에 동서남북이 있는 것처럼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바이다.
광서光緒 13년 정해(1887) 늦봄에 추산사문秋山沙門 혜룡慧龍이 삼가 기록하다.
14-5. 비전 바위 위에 새로 건축한 법당의 조성기(碑殿岩上新建法堂造成記)
강희康熙 42년 계미(1703, 숙종 29) 초봄에 비구 탄명坦明이 스스로 광대하고 깊은 서원을 내어 불상 8존을 봉안하였는데, 여러 해를 맨땅에 두다 보니 눈과 비를 모면하지 못하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슬퍼하고, 살고있는 이들은 염려하였다. 탄명이란 비구가 슬퍼하고 근심하는 모습을 차마 그대로 보지 못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건물을 조성하고 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하여 법당 하나를 마련하였다. 계미년 초봄에 일을 시작하여 4월이 되어 공역을 마쳤다.
14-6. 칠현산 칠장사 명적암 중수기 七賢山七長寺明寂庵重修記
높고 빼어나며 꽉 차서 견고하고 울창하여 깊숙이 우거져서 죽주竹州 경계의 진산鎭山이 된 것이 칠현산七賢山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봉우리 하나가 한 구역을 감싸 안아 칠현七賢의 대도량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한 맥이 구불구불 뻗어나가 우뚝 솟은 것이 바로 성산城山이다. 산 아래의 작은 구역이 조금 넓은데 몇 칸 암자가 있으니 바로 명적암明寂庵이다. 암자의 연대는 문헌이 전혀 없어서 상고할 길이 없다. 그런데 지난 건륭乾隆 갑인년(1794)에 취은 명의翠隱明誼 종사宗師가 앙첨卬沾장로와 함께 중수하였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고 비바람이 침범하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어렵게 재목을 구하여 옛 규모대로 지붕을 잇고 손을 보니, 완전히 처음 창건했을 때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암자의

0001_0098_a_01L則國師之功耶七賢之功耶化士之功耶檀越之功耶如方四維不可闕
0001_0098_a_02L聊記事實傳之後世云爾

0001_0098_a_03L
光緒十三年丁亥暮春秋山沙門慧龍謹識

0001_0098_a_04L碑殿岩上新建法堂造成記

0001_0098_a_05L
康熙四十二年癸未孟春比丘坦明者自發廣大深願奉安佛像八尊
0001_0098_a_06L年置於露地未免雨雪過者懷悲居者含慘矣坦明比丘者不忍悲慘
0001_0098_a_07L竭心力成造飜瓦丹青獨成一堂始於癸未孟春至於四月畢役矣

0001_0098_a_08L七賢山七長寺明寂庵重修記

0001_0098_a_09L
夫節然而秀充然而確菀然而邃而豐忝爲竹州界之鎮者七賢山也
0001_0098_a_10L海一峯包容一區爲七賢大道場南轉一脉逶迤而屹屹如也乃城山也
0001_0098_a_11L山之下小區稍寬有數間庵明寂是也菴之年代文獻無微不可歷考
0001_0098_a_12L粵在乾隆甲寅翠隱明誼宗師偕卬沾長老重修者也歲久頹圮風雨所
0001_0098_a_13L居人爲之嗟惜
艱末 [250] 材因舊制葺以繕之完然如復覩初創之年也

0001_0099_a_01L중수는 늦봄에 시작하여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니, 실로 우리 부처님 신력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화주化主 스님의 정성과 공경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아! 암자가 생긴 지 몇 천백 년이 되었는지, 또 몇 번이나 중수했는지 알 수 없다. 뒤에 다행히 취은이 있어 중수하였고 또 앙첨의 뒤에 몇 번이나 요행히 새로운 이들이 나와서 이어서 중수하여 길이 보전할 수 있었다. 이들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뒷날의 사람들은 과연 이에 대해 고맙게 여길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지금 나는 취은을 모시는 문인으로서 이 암자의 흥폐興廢에 간절한 감동이 있어 일의 전말을 대략 진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도광道光 8년 무자(1828) 12월 일에 무명씨無名氏가 적었다.
14-7. 칠현산 칠장사 상운암 중건기 七賢山七長寺上雲菴重建記
우리 동방의 산수山水는 동쪽이 제일 길고 남쪽이 그 다음이다. 남쪽의 기이한 곳으로는 칠현산七賢山을 치는데 영험한 뿌리(靈根)를 기르고 청정한 기운(清氣)을 모아서 천연의 금빛 모래와 아름다운 못을 이루니 하늘이 연 참다운 경계라 하겠다. 산 아래에 절이 있는데 그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하며 옛날 혜소국사慧炤國師가 도를 연마하고 불법으로 교화하던 곳이다. 절 뒤 산기슭에 암자가 있는데 그 이름을 상운암上雲菴이라고 하니, 이는 도광道光 신축년(1841)에 노선백老禪伯 정허 광일淨虛光一 대사가 중건하였다. 상운上雲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암자가 산꼭대기에 있어서 매번 봄여름에 구름 빛이 그 아래로 드넓게 펼쳐져 절반은 떠다니고 절반은 흩어진다. 칠장사와는 하늘 하나를 사이에 둔듯하여 여기에 오르는 이는 반드시 구름을 능가하는 기세가 있으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선혜善慧보살의 제9지地136)에 들어 여래보장如來寶藏(불성)과 청정한 불국토佛國土를 홀연히 일으켜 얻은 다음 마침내 문득 법의 구름(法雲)으로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암자에는 기기묘묘한 경관이 있다.

0001_0099_a_01L之經營始於暮春越三朔而告功實賴吾佛神力之所佑亦可以化主師
0001_0099_a_02L之誠敬矣
菴之起不知其幾千百年而幾遍重修之後幸有翠隱而葺
0001_0099_a_03L又卬沾之後幾幸有新人繼而修之壽而永存㣲斯疇能如之惟彼後
0001_0099_a_04L之人果能有感於斯也否也今不敏有奉爲翠隱門人於是菴之興廢
0001_0099_a_05L有感焉略陳首末以記之

0001_0099_a_06L
道光八年戊子十二月日 無名氏誌

0001_0099_a_07L七賢山七長寺上雲菴重建記

0001_0099_a_08L
我東山水東最長而南次焉南之奇曰七賢山毓靈根聚清氣渾成金沙
0001_0099_a_09L玉池而天開真境也山下有寺其名曰七長古慧炤國師鍊道化法之場
0001_0099_a_10L寺後麓有菴其名曰上雲今於道光辛丑老禪伯淨虛光一大師乃重
0001_0099_a_11L夫上雲奚取焉庵在山頂每春夏間雲光浩浩於其下半浮半散與七
0001_0099_a_12L長如隔一天而登之者必有凌雲之勢故名焉不然則乃取其苐九地菩
0001_0099_a_13L薩善慧頓發得如來寶藏淨佛國土了便登法雲之軆也
庵有奇奇要在

0001_0100_a_01L수봉繡峯의 경우는 천 개의 바위가 반쯤 둘러서 뜰에 채워지지는 않았으나 괴이한 돌이 많다. 연포練浦는 한 물줄기가 감돌며 지켜주는데 물길을 파지는 않았지만 연못에 물이 가득하다. 큰 들녘 남쪽에는 뽕나무 밭과 밤골이 펼쳐져서 의관衣冠의 고장과 나란히 하며, 깊은 골짜기 북쪽에는 계수나무와 송림을 지나면 깊고 넓게 사색하기에 참으로 적합하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암석이 빼어나고 빛깔이 밝은 것이 이 중에 뛰어난 경관이다. 산수의 기이함은 온 나라 안에서 찾아봐도 이에 견줄 만한 곳이 적다. 내가 마침 지나다가 이곳이 좋아져서 돌아가는 것을 잊고 쉰 지가 한 달이 되었다.
하루는 노선백老禪伯 한 분이 앞쪽 자리에서 나에게 다가와 이르기를, “노승이 어릴 때에 이 암자에 와서 삭발하고 또 사방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늙은 말년에 이 암자에 다시 와보니 암자가 이미 쇠락하였기에 터를 닦고 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암자가 좁아서 많은 이들을 수용하기가 어렵고 누추해서 정결한 거처로는 모자라기에 이를 근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노승은 금년에 78세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어찌 토목공사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마 용천龍天137)이 보호해 주지 않고 선려禪侶가 돌봐주지 않을까 꺼려져서 옛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기로 마음먹고 경영을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인연들이 응해주고 여러 일들이 다 모여서 소나무138)는 뒷산에서 베어오고 바위139)는 앞 골짜기에서 캐내 와 도끼를 내리쳐 바람을 일으키며 장인이 석공石工의 일을 마쳤습니다.
이에 앞서 좁았던 것이 넓어져서 많은 이들을 수용하기가 편해졌고 지난날 누추했던 것이 말끔해져서 정결하게 지내기에 알맞게 되었습니다. 용천이 기꺼이 수호하고 선려가 잘 돌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예전 규모에 비추어보면 그러한 점을 다소 면하게 되었습니다. 암자의 시초에 대해서는 기송杞宋의 문헌처럼 증명할 만한 것이 없어서 실제로 그 자취를 살펴볼 길이 없습니다. 헤아려보면 후대에 오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지금 옛날 일에 캄캄한 것과 같으니, 청컨대 한마디 기록하여 후손들이 보면서 웃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손을 맞잡고 대답하기를, “공이 늙은 나이에 이렇게 특별한 공을 세워서 이 산수의 기이함이 또한 옛날의 모습보다 더 뛰어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공입니다. 옛날 진晉의 사개士匃가 없어지지 않는 불후不朽에 대해 논의하자, 노魯나라 숙손표叔孫豹가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으로 대답하였습니다.140) 이는 후세에 사라지지 않을 것을 취하여

0001_0100_a_01L繡峯則千巖半落戶庭不貢而恠石富焉練浦則一派回護籬園不鑿
0001_0100_a_02L池水盈焉大野南開桑田栗里衣冠之鄉有方深谷北穿桂樹松林幽曠
0001_0100_a_03L之思允叶山高水麗岩秀色明此中之大觀而山水之奇求諸國中殆少
0001_0100_a_04L此比予適過愛而忘返息肩者有月矣
一日老禪伯一公前席近予曰
0001_0100_a_05L僧幼年入此庵雉髮既又遍叅四方末老還入庵庵已弊矣掃基而重搆
0001_0100_a_06L狹而難於容衆陋而欠於淨居病焉者久而老僧今年七十八也登灰無
0001_0100_a_07L有何土木之興而或恐有妨於龍天不護禪侶不顧意革古從新乃經
0001_0100_a_08L之營之衆緣既應庶務畢集斫雪姿於後罔採雲根於前壑運斤成風
0001_0100_a_09L石呈工
前之狹者廣而便於容衆前之陋者淘而宜於淨居可龍天欣護
0001_0100_a_10L禪侶善顧視其舊制稍免其然庵在權輿杞宋之文獻無徵實不考其蹟
0001_0100_a_11L推後之昧今猶今之昧古請一言記之可見笑於雲仍如何
予叉手應
0001_0100_a_12L公耄年立此奇功使此山水之奇又奇於昔日面目眞不世之功也
0001_0100_a_13L晉士匄之論不朽也魯叔孫以立德立功立言對之盖取其不朽於後

0001_0101_a_01L사람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이 어찌 암자를 차지하고 갖겠습니까. 공은 조용히 수행하는 선자禪子라서 무상無相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고 있으니, 어찌 공적을 (인정받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뒷날의 여러분들도 어찌 공의 공적 없는 공로를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염불을 하고 이곳에서 경전을 읽고 이곳에서 참선을 하면 능히 삼매가 현전現前하여 자기를 반조하게 되고, 혜안이 환히 열려 진실의 의리를 깊이 깨닫게 되며 의심 덩어리가 장차 드러나 넓게 꿰뚫고 크게 깨달을 것이니, 여러분이 바로 혜소慧炤이고 혜소가 곧 여러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단 공의 공로를 갚을 뿐만 아니라 비록 이 좋은 당에서 눕고 이 높은 상床에 앉아서 황금을 먹고 수많은 돈을 쓰더라도 요행이 아닌 마땅한 일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방의 구슬이 공허하게 잠기고 승냥이가 어지럽게 울며, 육창六窓141)이 비고 원숭이가 희롱하게 될 터이니 그렇다면 공의 공덕을 갚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록 기와 조각과 서까래 한 짝일지라도 거듭 그 업보를 더할 뿐이니 지옥에 들어가고 마귀 소굴에 떨어지더라도 불행이지만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니, 경외할 만한 일입니다.”하였다. 청컨대 여러분들은 모름지기 힘쓸지어다. 아!
신축년 8월 하한에 북해北海 화은자華隱子 회경恢暻이 기록하다.
15. 여주 봉미산 보은사 중수사적 기사(驪州 鳳尾山報恩寺 重修事蹟記詞 혹은 신륵사라고도 한다)
여흥군驪興郡 동쪽에 보은사報恩寺가 있다. 세조대왕이 세종대왕을 위하여 특별히 강복降福142)을 위하여 포목布木과 은금銀金 등을 이곳에다 내리어 세우게 한 사찰이다. 이곳은

0001_0101_a_01L利於人濟於世也今公於庵也何居之有公密行禪子也以無相爲己任
0001_0101_a_02L胡有待功而後之諸君亦何以報公無功之功乎
念佛於斯看經於斯
0001_0101_a_03L禪於斯能三昧現前返照自己慧眼通透深契了義疑團獨露廓徹大悟
0001_0101_a_04L則諸君即慧炤慧炤即諸君然則非徒報公之功雖臥此好堂坐此高床
0001_0101_a_05L食黃金消萬錢非幸也宜也若不然者四璧空鎖野干亂鳴六窓虛豁
0001_0101_a_06L猴弄精然則非徒不報公之功雖片瓦隻椽重增其業入地獄墮魔坑
0001_0101_a_07L幸也亦宜也可畏哉請諸君須勉旃

0001_0101_a_08L辛丑八月下澣北海華隱子恢暻識

0001_0101_a_09L

0001_0101_a_10L○驪州鳳尾山報恩寺重修事蹟記詞一曰神勒寺

0001_0101_a_11L
驪興郡之東有報恩寺
0001_0101_a_12L世祖大王
0001_0101_a_13L世宗大王特以降福次布木銀金之屬帖下于此俾爲營建之寺也乃是

0001_0102_a_01L나옹 조사懶翁祖師의 자취가 어린 곳이고 또 영녕英寧143) 두 능침陵寢의 원당願堂 및 조포造泡144)를 맡은 사찰이기 때문에 그 소중함이 다른 사찰보다 자연히 각별한 바가 있다. 건립한 지 이미 오래되어 용마루와 들보가 무너져 내리고 기와와 서까래가 깎이고 떨어져나갔다. 강희康熙 신해년(1671)에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 김수항金壽恒, 참판叅判 민정중閔鼎重,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치화鄭致和가 천 년된 고찰이 퇴락한 상황에 마음을 움직여서, 마침내 중수하려는 뜻을 임금께 여쭈어 바로 윤허를 받았다. 그리하여 해당 관서에서 8도의 도신道臣 및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재정을 모으니 본사本寺의 중수 역사를 행하고 보호한 지 오래되었다.
또 중수한 세월이 오래되어 점점 퇴락하였는데 그 모습이 예전보다 더욱 심하였다. 그러다보니 승도들의 탄식과 안타까움뿐 아니라 오가는 나그네들도 본사의 황량한 모습을 돌아보면서 오래전부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난 가경嘉慶 1년 병진년(1796)에 천만번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할 일이지만 영돈녕領敦寧 김이소金履素,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이 그 선대 때에 본사의 중수에 힘써 도운 뜻에 감동하였다. 반드시 본사를 중수하겠다는 뜻을 김공과 민공이 특별히 유념하여 임금에게 여쭈니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우선 예조에서 8도의 도신道臣들에게 공문을 내려 보내 능력에 따라 본사의 중수 자금을 내는 것을 돕게 하니, 본도의 도백道伯 김문순金文淳공이 포목布木과 많은 수의 금액을 본사에 주었고, 그 밖에 7도의 관찰사와 수령에게는 이 절의 승려가 보시를 얻으러 갈 때 공문을 보냈으므로 본사의 승려가 권선문을 가지고 가서

0001_0102_a_01L懶翁祖師遺墟之所而又是
0001_0102_a_02L英寧兩陵寢願堂造泡之寺故其爲所重與他寺剎有所自別也營建已
0001_0102_a_03L棟樑杇敗瓦椽剝落粵自康熙辛亥年 [251] 吏曹判書金公壽▼(忄+百) [252] 叅判
0001_0102_a_04L閔公鼎重戶曹判書鄭公致和感此千年古寺頹仆之情境果以重修
0001_0102_a_05L之意筵稟則即爲蒙
0001_0102_a_06L故自該曹行關于八道道臣及守令處鳩財即爲本寺重修之役
0001_0102_a_07L護以來 [253]
又以重修永久之致漸至頹壓 [254] 頹壓之狀尤甚於前則不啻
0001_0102_a_08L僧徒之嗟惜去來行客 [255] 顧眄本寺之荒凉莫不咨嗟 [256] 以來者久矣去嘉
0001_0102_a_09L慶一年丙辰 [257] 分千千萬萬夢寐之外領敦寧金公履素禮曹判書閔公
0001_0102_a_10L鍾顯感其先代極力本寺重修以給之意 [258] 必以本寺重修之意金公閔
0001_0102_a_11L [259] 另念筵稟則果爲蒙允先自禮曹行關于八道道臣處 [260] 以爲隨所力
0001_0102_a_12L助給本寺重修之資則本道道伯金公文淳布木及錢兩優數帖下于
0001_0102_a_13L本寺其外七道道臣守令前使此寺僧乞立次行關故本寺僧持勸善

0001_0103_a_01L차례로 성금을 모우고 기와 목재 등의 물품을 기간을 정하여 사들였다.
가경嘉慶 정사년(1797) 6월 일에 범중각泛中閣 12칸과 좌우 식당 10칸을 세우니 도합 22칸이 되었다. 새로 건축하고 부역을 하는데 재력은 약하고 공역이 커서 그 역사를 다 마칠 수 없었기에 공휴일궤功虧一簣145)의 지경을 면할 수 없었다. 본관사또 신대겸申大謙 공이 금전을 대는 것을 도왔고, 뒤에 본사의 공역에 돈이 부족하다는 뜻을 영문營門에 보고하자, 감영에서는 이를 임금께 아뢰니 가자첩嘉資帖 50여 장丈을 위로부터 특별히 본도의 도백道伯에게 내려 도신으로 하여금 전매轉賣하여 부족한 것을 보태어 쓰게 하였다. 사찰 공역의 분부는 역시 윤허를 받은 뒤에 본도의 도백으로 새로 부임한 이재학李在學 공이 사찰 역사의 부족한 자금을 대는 것을 도왔다. 그리하여 온 힘을 다하여 사찰이 일신一新되었으니 감축하고 감축할 일이다. 만약에 김공과 민공 두 대신이 아뢰지 않았다면 어떻게 본사를 보존하고 전하여 완전히 새롭게 하는데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재상들의 은택에 매우 감격스러울 따름이며, 대략 아래에 기록하여 후세에 볼 수 있게 하는 바이다.

가경嘉慶 5년 경신년(1800) 월 일
  영돈녕領敦寧 김이소金履素.
  호조참판戶曹叅判 민종현閔鍾顯.
  경기감사京畿監司 김문순金文淳.
  경기감사京畿監司 이재학李在學.
  

0001_0103_a_01L次次鳩財瓦材等物刻期貿取
嘉慶丁巳年六月 日 [261] 泛中閣十
0001_0103_a_02L二間及左右食堂十間合二十二間新建赴役以力線 [262] 役巨猶未得訖
0001_0103_a_03L未免功匱之境矣本官使道申公大謙助給錢兩 [263] 後以寺役功匱之
0001_0103_a_04L [264] 轉報于營門而自營門繼爲筵稟則嘉資帖五十餘丈自上特下本
0001_0103_a_05L道道伯使其道臣轉賣補用寺役之教亦為蒙 允後本道道伯新莅
0001_0103_a_06L李公在學 [265] 給寺役不足之資故以至完力以為一新感祝感祝若非
0001_0103_a_07L金公閔公兩大臣所稟則烏可得本寺保傳而以至一新之新 [266] 也哉
0001_0103_a_08L僚之澤極感無已略錄于左以覽後世耳

0001_0103_a_09L
嘉慶五年庚申年月 日

0001_0103_a_10L領敦寧金公履素

0001_0103_a_11L戶曹叅判閔公鍾顯

0001_0103_a_12L京畿監司金公文淳

0001_0103_a_13L京監司李公在學

0001_0104_a_01L여주목사驪州牧使 신대겸申大謙.
16. 신륵사 중수기(神勒寺重修記 편액을 옮겨 쓰다)
사찰의 흥망은 세상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기에 유자儒者들은 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한두 가지 폐지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고적古蹟에 의지할 것이 있거나 뛰어난 경관이 있는 경우이다. 신륵사는 고려 때 창건되어 나옹 혜근懶翁惠勤이 주석한 곳이며 백운 경한白雲景閑이 시詩을 남긴 곳이다. 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같은 여러 현인들이 기문을 쓴 곳이다. 큰 탑과 이끼 낀 비석이 차가운 안개 고목 사이에 이리저리 뒤섞여 죽 늘어서 있으니 예스럽다 하겠다. 여주는 산수山水가 (남한강의) 상류에서 이름이 나서 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지대가 넓고 평평하여 시원스럽게 툭 트인 곳이다. 절도 이를 공유하고 있으니 아름다운 경치라 할 만하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이 지역에서 명성을 떨친 것이 이미 천년 세월이 되었으니, 어찌 유자儒者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여 폐지할 수 있겠는가.
옛날 우리 혜장대왕惠莊大王(세조)께서 사찰 하나를 두어 영침英寢(세종의 영릉英陵)의 도량으로 삼으려 했는데 그 뜻이 매우 깊으셨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창릉昌陵(예종)146)이 너그럽게 살펴서 일자日者147)의 말을 적용하여 영침을 여주의 북쪽으로 난천灤遷148)하였다. 정희성비貞憙聖妃가 선왕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조정의 신하들에게 당시 신륵사가 왕릉과 매우 가까우므로 별도로 창건하지 않고 곧 이 절을 증축하고 넓히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불경을 간행하고 남은 재정을 하사해 주었다.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이전 것을 보수하고 새롭게 만드니 모두 200여

0001_0104_a_01L驪州牧使申公大謙

0001_0104_a_02L

0001_0104_a_03L○神勒寺重修記扁額寫

0001_0104_a_04L
佛宇之廢興無關乎世教而儒者之所不務也然亦有一二不可廢者
0001_0104_a_05L其古蹟之攸寄而勝境之攸擅也神勒之爲寺剏自麗代懶翁之所住錫
0001_0104_a_06L白雲之所留詩又有牧隱諸賢之所題記穹塔荒碑錯落離立於寒烟古
0001_0104_a_07L木之間者如其古也驪以山水名於上游而奇秀窈窕平遠爽塏寺又兼
0001_0104_a_08L而有之者如其勝也惟是二者之擅稱於域中已爲千年所則豈可以儒
0001_0104_a_09L者之所不務而廢之與
昔我
0001_0104_a_10L惠莊大王欲寘一寺爲 英寢道場 聖志甚殷而未就 昌陵在宥
0001_0104_a_11L日者言灤遷 陵寢于驪之此 [267]
0001_0104_a_12L貞憙聖妃以 先王遺旨教于廷臣時以神勒寺密邇珠邱不別創造
0001_0104_a_13L其寺而增拓開廣 特頒刊經餘財 命近董其事葺舊剏新摠二百

0001_0105_a_01L칸이었다. 아름답도다. 성조聖祖와 성비聖妃가 선영을 받들고 선대의 일을 기록한 의의가 이렇듯 크게 드러나서 빛을 발하니, 비록 예스럽거나 명승지가 아니라 해도 이는 더욱 폐기할 수 없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로부터 몇 번이나 더 흥폐를 겪을지 모를 일이지만 예전 우리 선조이신 문충공文忠公께서 재산을 기부하여 중수하셨고, 족증조族曾祖이신 의정공議政公께서도 힘을 보태어 수리하셨으니, 이는 집안에 전해오는 고사이다.
그 뒤로 110년이 흘러 또다시 떨어지고 부서진 것이 더욱 심하여 전각이 기울고 무너져 거의 금신金身(불상)을 감싸고 가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두세 명의 승려가 겨우 향화香火(제향)를 유지할 뿐이었다. 우리 순원성모純元聖母149)께서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이 사찰에는 오랜 역사적 연고가 있으니,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두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단연코 안 될 것이다.”라고 하고, 서둘러 탕화帑貨를 내어 신께 명하여 조영하게 하였는데, 곤성坤聖(왕후)께서 또 부조하여 완성을 돕게 하였다. 신이 하명을 조심스럽게 받들어 재정을 모우고 공장工匠을 불러와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공사비용이 부족한 것은 별도로 마련해 처리하고 몇 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다. 불전佛殿과 선료禪寮, 종루鍾樓와 향주香廚가 환하게 면모를 일신하니 붉은 단청 흐르고 푸른 여운 하늘 높이 빛나며 난간에는 구름이 스치고 풍경소리와 목탁소리 바람에 교차하니 승려와 속인이 마주보고 뛸 듯이 기뻐하고 찬송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 우리 (순원)성모聖母께서는 성인이시니,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고자 하셨겠는가. 이렇게 보시를 행한 것은 실로 계술繼述150)하려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담당 관리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특별히 신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한 것은 이곳이 상재桑梓151)의 고향으로 선조(祖先)께서 일찍이 성의를 다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가 영험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부처의 지혜의 햇살(慧日)이 항상 비추고 자비의 구름(慈雲)이 두루 퍼져서 선침仙寢(왕릉)을 앞으로 계속 보호하고 보록寶籙(왕위)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서방西方 노자老子의 법력이 보호해준 것이라고만 하겠는가. 바로 우리 성모께서 시주하신 것이 하늘을 감동케 하고 이치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이치에 따라 행하면 저절로 상서로움이 모이게 될 것이다.”하였고, 『시경詩經』에도 이르지 않았던가? “의젓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데

0001_0105_a_01L有餘間美矣哉 聖祖 聖妃奉先述事之義若是其丕顯丕光雖㣲古
0001_0105_a_02L與勝此尤不可廢之大者自始厥後不知其幾經廢興而昔我先祖文
0001_0105_a_03L公捐財而營葺之族曾祖議政公又出力而修治之是則家傳故事也

0001_0105_a_04L後百十年來又復陊剝轉甚殿宇傾圮殆不能庇其金身 [268] 而數三緇徒
0001_0105_a_05L持香火而已我 純元聖母聞而歎曰此寺遠有故實斷不宜任其廢而
0001_0105_a_06L不顧也亟頒帑貨 命 [269] 營治 坤聖又佽助之夾成 [270] 承 命兢怵
0001_0105_a_07L財鳩工爰始斧鋸工費不足者別爲營辦閱幾月而工告蕆 [271] 佛殿禪寮
0001_0105_a_08L樓香廚奐然改觀流丹韵碧絢耀中天欄楯俛雲鈴鐸交風緇俗頂瞻
0001_0105_a_09L不踊躍讚頌
我 聖母聖人也豈欲佞佛而邀福爲此檀施寔出於繼
0001_0105_a_10L述之 聖意而且不煩有司  [272] 特命管董者以其桑梓之鄉而祖先之
0001_0105_a_11L所嘗致意者存焉耳然謂佛無靈則已佛若有靈慧日恒照慈雲遍覆
0001_0105_a_12L仙寢於來兹綿 寶籙於無疆是豈但西方老子法力所庇即我 聖母
0001_0105_a_13L施爲動合天理
古語云順理而行自與吉會 [273] 詩又不云乎愷悌君子求福

0001_0106_a_01L사특하지 않구나(愷悌君子, 求福不回)”라고 하였다. 성모는 구하는 데 뜻이 없으셨다 할지라도 그 복과 은택이 중생들에게 스며들고 미침이 어찌 무궁할 뿐이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이는 징험이 없을 수 없어서 삼가 이와 같이 기록한다. 공역工役의 시작과 마침, 경비가 얼마나 들었는지는 아래에 별도로 기록한다.
경신년(1860) 5월 5일(端陽, 端午)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겸호조판서兼戶曹判書 규장각검교제학奎章閣檢校提學 안동安東 김병기金炳冀(1818~1875)가 기문을 쓰다.

  공역의 시작은 무오년(1858) 6월이며,
  공역의 마침은 같은 해 11월이다.
17. 안성군 석남사 어필 교지 安城郡 石南寺 御筆 教旨
경기 안성 땅의 석남사石南寺는, 감사와 수령에게 일찍이 전지傳旨를 내렸거니와 다시 살펴서 더욱 완호完護152)하도록 하고 잡역을 감면할 것.
국왕國王
천순天順153) 원년元年(1457, 세조 3) 7월 29일

0001_0106_a_01L不回 聖母無意於其求而福澤之滲漉於衆生者永無窮已 [274] 嗚呼盛矣
0001_0106_a_02L是不可以無徵謹書之如此若其工役之始卒費之幾許別識於左方

0001_0106_a_03L申端陽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戶曹判書奎章閣檢校提學
0001_0106_a_04L東金炳冀記

0001_0106_a_05L始役戊午六月

0001_0106_a_06L迄役同年十一月

0001_0106_a_07L

0001_0106_a_08L○安城郡 石南寺 御筆 教旨

0001_0106_a_09L
0001_0106_a_10L
0001_0106_a_11L
京畿安城地石南寺乙良監司守令曾下傳旨更審尤加完護雜役减除
0001_0106_a_12L

0001_0106_a_13L國王

0001_0106_a_14L天順元年七月二十九日

0001_0107_a_01L
18. 장단군 화장사 長湍郡華藏寺
대웅전 15칸
아미타불 도금상阿彌陁佛塗金像          1위位(앉은 길이 3척尺 7촌寸)
관세음보살 도금상觀世音菩薩塗金像        1위(앉은 길이 4척 8촌)
대세지보살 도금상大勢至菩薩塗金像        1위(앉은 길이 3척 1촌)
법기보살 도금상法起菩薩塗金像          1위(앉은 길이 1척 5촌)
후불탱後佛幀                   3폭幅(각각의 길이 7척 2촌, 각각의 넓이 9척 1촌)
신중탱神衆幀                   1폭(길이 7척 5촌, 넓이 8척 5촌)
감로탱甘露幀                   1폭(길이 6척 8촌, 넓이 8척)
삼장탱三藏幀                   1폭(길이 7척, 넓이 7척 5촌)
삼화상탱三和尚幀                 1폭(길이 4척 1촌, 넓이 7척)
공민왕탱恭愍王幀                 1폭(길이 6척 8촌, 넓이 5척 1촌)
삽십삼조사탱卅三祖師幀              6폭(길이 4척 1촌, 넓이 6척 1촌)

0001_0107_a_01L○長湍郡華藏

0001_0107_a_02L
大雄殿十五間

0001_0107_a_03L阿彌陁佛塗金像                  一位坐長三尺七寸

0001_0107_a_04L觀世音菩薩塗金像                 一位坐長四尺八寸

0001_0107_a_05L大勢至菩薩塗金像                 一位坐長三尺一寸

0001_0107_a_06L法起菩薩塗金像                  一位坐長一尺五寸

0001_0107_a_07L後佛幀                      三幅各長七尺二寸各廣九尺一寸

0001_0107_a_08L神衆幀                      一幅長七尺五寸廣八尺五寸

0001_0107_a_09L甘露幀                      一幅長六尺八寸廣八尺

0001_0107_a_10L三藏幀                      一幅長七尺 廣七尺五寸

0001_0107_a_11L三和尙幀                     一幅長四尺一寸廣七尺

0001_0107_a_12L恭愍王幀                     一幅長六尺八寸廣五尺一寸

0001_0107_a_13L卅三祖師幀                    六幅各長四尺一寸各廣六尺一寸

0001_0108_a_01L응진전 10칸
석가모니불 도금상釋迦牟尼佛塗金像        1위(앉은 길이 4척 3촌)
문수보살 오채상文殊菩薩五彩像          1위(앉은 길이 2척 8촌)
보현보살 오채상普賢菩薩五彩像          1위(앉은 길이 2척 8촌)
나반존자 오채상那畔尊者五彩像          1위(앉은 길이 2척 1촌)
나한 오채상羅漢五彩像              516위(각각의 길이 2척 1촌)
신중탱神衆幀                   1폭(길이 4척 5촌, 넓이 4척 6촌)
명부전 10칸
지장보살 도금상地藏菩薩塗金像          1위(앉은 길이 3척)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오채상道明尊者無毒鬼王五彩像 2위(서있는 길이 4척)
시왕 오채상十王五彩像              10위(각각의 길이 4척 5촌)
동자 오채상童子五彩像              12위(각각의 길이 2척)
판관 오채상判官五彩像              2위(각각 길이 4척 7촌)

0001_0108_a_01L應眞殿十間

0001_0108_a_02L釋迦牟尼佛塗金像                 一位坐長四尺三寸

0001_0108_a_03L文殊菩薩五彩像                  一位坐長二尺八寸

0001_0108_a_04L普賢菩薩五彩像                  一位坐長二尺八寸

0001_0108_a_05L那畔尊者五彩像                  一位坐長二尺一寸

0001_0108_a_06L羅漢五彩像                    五百十六位各長二尺一寸

0001_0108_a_07L神衆幀                      一幅長四尺五寸廣四尺六寸

0001_0108_a_08L冥府殿十間

0001_0108_a_09L地藏菩薩塗金像                  一位坐長三尺

0001_0108_a_10L道明尊者無毒鬼王五彩像              二位立長四尺

0001_0108_a_11L十王五彩像                    十位各長四尺五寸

0001_0108_a_12L童子五彩像                    十二位各長二尺

0001_0108_a_13L判官五彩像                    二位各長四尺七寸

0001_0109_a_01L귀왕 오채상鬼王五彩像              2위(각각 길이 4척)
사자 오채상使者五彩像              2위(각각 길이 4척 5촌)
장군 오채상將軍五彩像              2위(각각 길이 5척 1촌)
상단탱上壇幀                   1폭(길이 5척, 넓이 6척)
각부탱各部幀                   6폭(각각의 길이 5척 5촌, 각각의 넓이 7척 2촌)
사자탱使者幀                   2폭(각각 길이 4척, 각각 넓이 5척)
적묵당寂默堂 28칸
개산조 지공화상 오색상開山祖指空和尚五色像    1위(앉은 길이 3척)
후불탱後佛幀                   1폭(길이 4척 6촌, 넓이 7척 6촌)
신중탱神衆幀                   1폭(길이 4척 8촌, 넓이 3척 8촌)
중종中鍾                     1구口(높이 1척 3촌, 둘레 3척 8촌)
만세루 10칸
대종大鍾(쌍포뇌수雙蒲牢首)             1구 무게 800근斤(높이 5척, 둘레 18척)

0001_0109_a_01L鬼王五彩像                    二位各長四尺

0001_0109_a_02L使者五彩像                    二位各長四尺五寸

0001_0109_a_03L將軍五彩像                    二位各長五尺一寸

0001_0109_a_04L上壇幀                      一幅長五尺廣六尺

0001_0109_a_05L各部幀                      六幅各長五尺五寸各廣七尺二寸

0001_0109_a_06L使者幀                      二幅各長四尺各廣五尺

0001_0109_a_07L寂默堂二十八間

0001_0109_a_08L開山祖指空和尙五色像               一位座長三尺

0001_0109_a_09L後佛幀                      一幅長四尺六寸廣七尺六寸

0001_0109_a_10L神衆幀                      一幅長四尺八寸廣三尺八寸

0001_0109_a_11L中鍾                       一口高一尺三寸圍三尺八寸

0001_0109_a_12L萬歲樓十間

0001_0109_a_13L大鍾(雙蒲牢首)                   一口重八百斤(高五尺圍十八尺

0001_0110_a_01L운하당雲霞堂 46칸아미타불도금상阿彌陁佛塗金像  1위(앉은 길이 1척 1촌)
후불탱後佛幀                   1폭(길이 4척 4촌, 넓이 7척 7촌)
신중탱神衆幀                   1폭(길이 4척 1촌, 넓이 4척)
향각香閣 5칸
금고金鼓                     1구(약간 깨짐)
산신각山神閣 2칸
산신탱山神幀                   1폭(길이 4척 7촌, 넓이 4척 7촌)
칠성탱七星幀                   1폭(길이 4척 7촌, 넓이 5척 3촌)
정중탑庭中塔(7층 2급級)              1좌座(높이 11척 5촌, 하층 사방 3척 2촌)
지공 정혜영조탑指空定慧靈照塔(종형鍾形 2급)    1좌(높이 4척 1촌, 둘레 12척)
부도浮圖(종형 각 1급)               4좌(① 목암당牧菴堂 부도: 길이 4척, ② 용봉당龍峰堂 부도: 3척, ③ 적조당寂照堂 부도: 3척, ④ 글자 없는 부도: 4척)

0001_0110_a_01L雲霞堂四十六間

0001_0110_a_02L阿彌陁佛塗金像                  一位坐長一尺一寸

0001_0110_a_03L後佛幀                      一幅長四尺四寸廣七尺七寸

0001_0110_a_04L神衆幀                      一幅長四尺一寸廣四尺

0001_0110_a_05L香閣五間

0001_0110_a_06L金鼓                        一口微破

0001_0110_a_07L山神閣二間

0001_0110_a_08L山神幀                       一幅長四尺七寸廣四尺七寸

0001_0110_a_09L七星幀                       一幅長四尺七寸廣五尺三寸

0001_0110_a_10L庭中塔七層二級                   一座高十一尺五寸下層方三尺二寸

0001_0110_a_11L指空定慧靈照塔鍾二形級               一座高四尺一寸圍十二尺

0001_0110_a_12L浮圖鍾形各一級                   四座一牧菴堂浮圖長四尺三寂照堂浮二龍峰堂浮圖長三尺圖三尺四浮圖長四尺無名字

0001_0111_a_01L사적비事蹟碑                   1좌(비문碑文은 인쇄하여 별도 항목에 부침)
포허대사 공덕비抱虛大師功德碑          1좌
위실각位室閣 3칸, 또 정문正門 3칸
평원대군 위판平原大君位版            1위
제안대군 위판齊安大君位版            1위
영창대군 위판永昌大君位版            1위
용성대군 위판龍城大君位版            1위
○ 평원平原 · 제안齊安 두 대군大君의 의동생義同生 6인
생육신生六臣으로 단종조端宗朝의 충신이다.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조선趙璇, 성담수成聃壽 이들은 단묘端廟(단종)가 승하한 뒤에 늘 불편한 마음을 가졌고 매번 명산의 청정한 사찰을 찾아다니다가 이곳 장단長湍 보봉산寶鳳山 화장사華藏寺에 제단祭壇154)을 설치하여 향을 사르고 (단종이 있었던) 영월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육식을 하지 않았으며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은 채 남은 여생을 보냈다.
○ 가정嘉靖155) 18년 기해년(1539) 중종中宗대에 두 대군의 절의節義에 감동하고 그것을 그리면서 청정한 사찰(화장사華藏寺)에 명복冥福을 비는 재齋를 설하기를 매년 한 차례씩 하였다.
○ 강희康熙 8년156) 기유년(1669),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일찍 죽은 것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매우 슬퍼하고 불쌍히 여겼다고 하여 두 대군한테 부쳐 추천追薦157)하였다.
○ 강희 21년158) 임술년(1682), 일찍 죽은 용성대군龍城大君을 영창대군에게 붙여 천도薦度하였다.

0001_0111_a_01L事蹟碑                      一座碑文印刷付別項

0001_0111_a_02L抱虛大師功德碑                  一座

0001_0111_a_03L位室閣三間 又正門三間

0001_0111_a_04L平原大君 位版                   一位

0001_0111_a_05L齊安大君 位版                   一位

0001_0111_a_06L永昌大君 位版                   一位

0001_0111_a_07L龍城大君 位版                   一位

0001_0111_a_08L
平原齊安兩大君義同生六人

0001_0111_a_09L生六臣端宗朝忠臣也(金時習南孝溫李孟專元昊趙璇成𣆀壽)端廟(昇遐後常懷不平每遊名山淨剎即長湍寶鳳山華
0001_0111_a_10L藏寺)設擅焚香哭望寧越不飲酒不喫肉不近女色以終餘年

0001_0111_a_11L
[275] 靖十八年己亥中宗朝感慕兩大君節義淨剎(華藏寺)設齋薦修冥福年為一次

0001_0111_a_12L
康熙十八年己酉永昌大君早卒 仁穆大妃慘悼甚憐附兩大君而迫薦

0001_0111_a_13L
康熙三十一年壬戌龍城大君早卒依永昌大君而附薦

0001_0112_a_01L
극락암極樂菴 8칸
아미타불 도금상阿彌陁佛塗金像 1위(앉은 길이 1척 7촌)
후불탱後佛幀          1폭(길이 3척 3촌, 넓이 6척 2촌)
신중탱神衆幀          1폭(길이 4척 5촌, 넓이 3척 5촌)
산신탱山神幀          1폭(길이 3척 2촌, 넓이 4척)
미정암彌幀菴 20칸
지장보살 도금상地藏菩薩塗金像 1위(앉은 길이 1척 1촌)
후불탱後佛幀          1폭(길이 4척 7촌, 넓이 6척 7촌)
신중탱神衆幀          1폭(길이 3척 7촌, 넓이 3척 1촌)
산신탱山神幀          1폭(길이 3척 5촌, 넓이 2척 6촌)
편액 필자 씨명 扁額筆者氏名
(대웅전大雄殿)(만세루萬歲樓)(보봉산寶鳳山 화장사華藏寺)이 세 편액은 가경嘉慶 12년 정묘년(1807)에 윤사국尹師國이 본사本寺를 찾아보고 찬탄하는 마음으로 글씨를 써서 받들어 걸었다.
(적묵당寂默堂)(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 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본당本堂의 웅장하고 화려함과 승려의 규범을 우러르고 기뻐하며 글씨를 써서 주었다.

0001_0112_a_01L
極樂菴八間

0001_0112_a_02L阿彌陁佛塗金像  一位坐長一尺七寸

0001_0112_a_03L後佛幀      一幅長三尺三寸廣六尺二寸

0001_0112_a_04L神衆幀      一幅長四尺五寸廣三尺五寸

0001_0112_a_05L山神幀      一幅長三尺二寸廣四尺

0001_0112_a_06L彌幀菴二十間

0001_0112_a_07L地藏菩薩塗金像  一位坐長一尺一寸

0001_0112_a_08L後佛幀      一幅長四尺七寸廣六尺七寸

0001_0112_a_09L神衆幀      一幅長三尺七寸廣三尺一寸

0001_0112_a_10L山神幀      一幅長三尺五寸廣二尺六寸

0001_0112_a_11L扁額筆者氏名

0001_0112_a_12L(大雄殿)(萬歲樓)(寶鳳山華藏寺)此三額嘉慶十二年丁卯尹師國本寺拜觀慶讚心書而奉揭

0001_0112_a_13L(寂默堂)(東國第一禪院)此二額秋史金正喜本堂雄麗禪侶規模慕悅書贈

0001_0113_a_01L
18-1. 사적현판 寺蹟懸板
옛 단주 화장사 개창기 古湍州華藏寺改創記
옛일을 상고하건대, 사찰의 처음 시작과 연혁이 빠져있어 적을 만한 것이 없다. 비록 한두 가지를 듣기는 했지만 그 근거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도끼를 내리쳐 바람 소리를 내는 것159)을 생각했지만 손을 다칠까 두렵고 꺼려지며 주먹을 펴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으니, 해사海師의 요청이 비록 강고하지만 마치 담을 뚫어 쑥을 심는 것과 같아서 붓을 잡기가 어렵다. 원元나라 태정泰定160) 연간에 서천西天의 108대代 제납박다존자提納薄多尊者 지공指空161) 선현禪賢이 서계西界(서역)에서 신주神州(중국)에 오자, 원의 태자가 별궁에서 그를 맞이하여 향을 사르고 법문을 청하였다. 그의 명성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까지 퍼졌다. 현릉玄陵(공민왕)이 멀리서나마 재례齋禮를 펴서 열며 본사의 주지승을 보냈는데 그 이름은 내가 잊어버렸다. 그를 내원內院으로 맞이하여 스승으로 섬기자, 대사가 이르기를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마땅한 것은 깊은 숲에 살게 하는 것이다.”162)라고 하고, 끝내 보봉산寶鳳山 꼭대기로 발걸음을 옮겨갔는데 임금의 말씀을 전하는 흰 말의 그림자가 구름 낀 시내에 드리우고 말 달려 안부를 묻는 사자使者의 말고삐가 산길에 교차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와 속인들이 경쟁하듯 선禪의 섬돌로 달려와 제각각 연지燃指163)하고 향香을 사르며 계조암繼祖菴이 있던 절터에 사찰을 창건하고 편액을 화장사華藏寺라고 하였다. 이것이 절에 대한 대강의 내용으로 당시에 들은 것이다.
그 밖에 존자尊者가 서쪽에서 유력하다가 동쪽에 도달한 상황과 적묵寂默 및 영전影殿의 개창, 기이하고 신비한 자취는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귀신처럼 자유자재하게 나타나고 사라진 일을 오래된 붓164)으로 어떻게 덧붙일 수 있겠는가. 만약 뛰어난 언변165)과 글재주166)를 가졌다면 현판 위에 말을 더할 수 있겠지만, 둔한 붓이라면 어찌 그 사이에 글을 얽어놓을 수 있겠는가. 선사는 짚으로 이엉을 엮는 자에게 채소를 구해 얻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옛날에 절을 창건할 때는 나라의 임금이

0001_0113_a_01L寺蹟懸板

0001_0113_a_02L
○古湍州華藏寺改創記

0001_0113_a_03L
曰若稽古寺之權輿貫藉闕如無地措言然艱 [276] 耳其一二條而未得其本
0001_0113_a_04L故雖思運斤畏忌傷手莫悟夫伸拳之方海師之請雖膠固其猶鑿墻垣
0001_0113_a_05L植蓬蒿把筆難矣盖以元泰定之間西天百八代提納薄多尊者指空禪
0001_0113_a_06L自西界到神州則元太子奉迎別宮懷香請法既已聲動麗京玄陵遙
0001_0113_a_07L展攝齋禮遣大寺住持僧其名則余忘之矣則迎之內院事之以師師迺
0001_0113_a_08L曰能以鳥養者宜捿之深林遂步於寶鳳山頂則白麻綸影綴雲蹊馳訊
0001_0113_a_09L使者交轡山程於是緇白競奔走禪堦各各燃指燃香爲創淨利於繼祖
0001_0113_a_10L菴蘭若遺基額曰華藏焉此其寺之大槩而時所聞者也
其餘尊者西遊
0001_0113_a_11L東到之歲月寂默影殿之開創及與奇踪秘跡歲久年深神出鬼沒老巨
0001_0113_a_12L之之玄杖如何能臻如其三尺喙五色毫能駕說於板上若池州魯筆
0001_0113_a_13L焉能措辭於其間乎師可論 [277] 求菜於編苫者也矧又昔寺之創也國君爲

0001_0114_a_01L단월을 하고, 조정의 인재167)가 감독관이 되기도 하였기에 골짜기에 정랑암正郎巖과 좌랑암佐郎巖168)이 있었다. 능인能仁(부처)의 궁宮(사찰) 및 적묵당寂默堂을 완성하니, 우뚝 솟은 전각이 웅장하고 금벽金壁이 찬란하여 홀로 한 나라의 으뜸169)이 되었다.
타도馱都(사리)170)의 장식한 돌, 아로새겨진 담과 요사 및 당우(寮宇)의 위의威儀와 절차, 빽빽이 늘어선 전당과 누각이 비록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에는 미치지 못해도, 기이한 바위와 아름다운 골짜기의 신령한 구역과 옥처럼 빛나는 나무와 숲의 신비한 경역이었다. 복을 빌며 향화를 올리는 본래의 일과 삼보를 외호하는 뛰어난 인연으로 소탈하고 초월한 승려들이 흠모하여 산에 꽉 차고 선행을 하는 자171)들이 골짜기를 메웠다. 선정의 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지혜의 달이 높이 떠있는 것은 모두 지공指空의 도덕 풍화風化가 아닌 것이 없었다.
동국의 500이나 되는 선찰禪刹의 표본으로 월등하게 뛰어나서 또한 회암사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이 사찰의 300년 전의 규모가 대개 이러했지만 그 처음의 크고 훌륭한 공덕과 일을 어찌 한갓 문사를 수식하고 글귀를 천착하는 것으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원컨대 글을 여기서 받으면 다행이겠다고 하니, 스님이 “아! 아닙니다. 절묘한 좋은 글172)은 우리 절의 스님이 베껴 적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전일에 각각 전각과 요사채를 중건하게 된 연유와 화재로 소실된 뒤에 개창한 사적이 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꺼려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원楊園173)의 길이 비록 낮지만 높은 언덕으로 이어지니, 스님의 연석燕石174)을 모아서 한유韓愈와 이백李白李175)의 겸금兼金176)을 얻고자 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알겠다고 답하였다.
대개 절을 처음 지은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 모진 비바람을 겪은 탓에 높은 전각 및 화려한 담장과 토목土木의 업적이 날로 썩어 없어지니, 잘 아는 속인177)과 승려178)들이 이 모습에 일찍부터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을〇년과 병〇년 이후부터 대사가 천준天濬 · 성총性聦 · 수진守真 · 인종印宗 · 묘순妙淳 · 유옥唯玉 · 밀현密玄 · 묘경妙經 등의 무리들을 이끌고 권장하여 적묵당寂默堂의 전등傳燈과 전각 및 각 전각의 요사채를 2-3년

0001_0114_a_01L檀越邦彥爲司存故洞有正則 [278] 佐郎嵒妙選邦傑成能仁之宮寂默之
0001_0114_a_02L𦑿 [279] 飛烏革金壁煥煥 [280] 獨爲一國之巨擘
而其馱都之釦石雕垣寮宇之
0001_0114_a_03L威儀節次殿堂之秩秩樓閣之鱗鱗雖未及於天寶山檜巖而奇嵒玉洞
0001_0114_a_04L之靈區璣樹瓊林之神境祝釐香火之本事外護三利 [281] 之勝緣洒洒衲子
0001_0114_a_05L之蟻慕者彌山膺化 [282] 者塞壑而定林蕤秀慧月騰揚皆指空之道德風化

0001_0114_a_06L
而超出於東國中五百禪剎之表 [283] 檜巖寺之所未及而此三百年前規
0001_0114_a_07L大槩如是而厥初盛德盛事則豈徒飾詞竄句以爲記乎願筆路於斯
0001_0114_a_08L受辛 [284] 師曰吁咈哉黃絹幼婦之辭非吾師所能模寫只如前日各殿寮舍
0001_0114_a_09L重創因由及火後改創事蹟而已有何難乎 [285] 無憚煩楊園之道雖卑
0001_0114_a_10L乎畝丘以師之燕石爲注欲得韓李之兼金不亦宜乎日諾 [286]
盖寺之初剏
0001_0114_a_11L自麗季到于今幾至半千餘禩盲風怪雨峻宇雕墻土木之功日趨於腐
0001_0114_a_12L青眸白足未甞不痛楚於斯焉故自乙丙年東 [287] 師乃引勸天濬性聦守眞
0001_0114_a_13L印宗妙淳唯玉密玄妙經等若干輩寂默之堂傳燈殿各殿寮舍數三年

0001_0115_a_01L이내에 모두 중창하였다. 그 나머지 법당 및 미처 중창하지 못한 것은 대사가 스스로 담당하여 5-6년 이내에 중창의 역사를 마치고 단청까지도 마쳤다. 그리하여 임진년 청화월清和月 관불灌佛179)하는 날에 경찬대회慶讚大會를 베풀고자 했는데 불행하게도 3월 12일 밤 3경에 반주삼매般舟三昧를 할 때 화재가 발생하여 혁혁한 금전金田이 깡그리 다 소진되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하늘의 운 때인가! 산의 운명인가 절의 운수인가?
존자尊者께서 지난날 서천西天(인도)에서 가져온 조파祖派의 영정 10여 위位와 주조한 금속 종 1구口, 짜서 만든 황색 주렴 1쌍과 화준花樽(꽃병) 1쌍, 그 밖에 귀중한 유적이 모두 불에 타버렸으니, 장차 무엇으로 뒤에 오는 이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하겠는가. 이것이 더욱 통곡할 만한 일이다. 하늘과 땅은 어찌 그리 무정하며 해와 달은 어찌 그리 무심한가. 이 일을 듣거나 보았다면 누구나 다 소리를 삼키며 울먹였는데 하물며 직접 겪은 이들이야 어떻겠는가. 공사公私의 기물器物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었으니, 그저 열 손가락 손만으로 서로 마주하여 피눈물을 흘렸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어떤 이는 동쪽으로 어떤 이는 서쪽으로 제각기 가고자 하여 대중이 소란스러웠다.
3일이 지나자 대사가 경쇠를 한번 울려 대중들을 모으고는, “절 안에 다른 생각이 있는 자가 없겠냐마는 만약 수서首鼠180)와 같이 망설이는 행동을 하는 자는 잡아다 현관縣官에 고발할 것이다. 나라에는 형벌이 있고 절에는 청규清規가 있으니, 몸 둘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대중을 위로하며 이르기를, “노승이 이 절에서 같이 한 지 10여 년 동안 중창을 위한 노고의 공을 하룻밤에 헛되이 되돌렸으니 비록 함께 불에 타버리고 싶지만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고통스럽고 애처로움을 차마 말로 할 수 없고 차마 볼 수가 없다. 살아서 고통을 견디는 것과 죽어서 편한 것이 어찌 같겠는가.
아! 하늘이 실지로 행한 일에 어찌 무엇이라 호소하겠는가. 천도天道는 돌고 도는 것을 좋아하고 지세地勢는 서로 다투기 마련이니, 다시 변화시키려는 하늘의 뜻이 있는 줄 어찌 알겠으며, 조물주가 끝없이 계속 뒤집는 것인 줄 또 어찌 알겠는가. 불에 소실된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0001_0115_a_01L盡爲重剏其餘法堂及未爲重剏者師自擔當五六年來 [288] 重剏旣已畢
0001_0115_a_02L丹雘亦已了乃於壬辰之年清和月灌佛之日方欲說 [289] 慶讚大會不幸三
0001_0115_a_03L月十二日夜三更般舟 [290] 三昧之火流 [291] 赫赫金田蕩然燒盡了無孑遺
0001_0115_a_04L乎時乎山之運所 [292] 寺之數耶
尊者 [293] 西天持來祖派影子十餘位鑄金鍾
0001_0115_a_05L一口黃色 [294] 簾席一雙花樽一雙其餘貴重遺蹟盡爲灰燼將何以刮後來
0001_0115_a_06L之眼目此尤可痛哭也天地何以無情日月何以無心聞見所及皆吞聲
0001_0115_a_07L飲泣而况親煑之者乎公私器物燒盡無餘徒將十指手相對泣血無可
0001_0115_a_08L奈何或欲東或欲西衆口囂囂
越三日鳴磬 [295] 一聲集介衆曰寺內無乃有
0001_0115_a_09L異議者乎若夫爲首鼠之行者執之告縣官則國有常刑寺有清規措身
0001_0115_a_10L何所乃慰衆曰老僧與寺 [296] 十餘年中重剏勞苦之功一夕反歸虛地
0001_0115_a_11L欲與之偕燼孰云能得苦苦哀哀不忍言不忍見與其生而能忍曷若死
0001_0115_a_12L而能忘 [297]
嗚呼曷其天實爲之謂之何其吁 [298] 天道好還地勢相傾則庸詎知
0001_0115_a_13L天意更化之有在乎又安知夫造物無盡藏之翻覆乎勿以回祿介於心

0001_0116_a_01L마치 메뚜기와 노래기가 서로 돕듯이 하면 공적을 거둘 수 있고 일을 완성할 수 있다. 여러 스님들은 마땅히 각자 힘쓸지어다.”하니, 모두가 이르기를, “예, 그러겠습니다. 우리 스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누가 감히 거스르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대사가 심력心力의 허실을 비교하고 일의 성취 여부를 따져서 홍해弘海, 해설海雪, 행흘行屹, 지헌智軒 등에게 나누어 분부하기를, “스님들을 일을 주관하는 간고승幹蠱僧으로 삼으니 나를 도와서 법당 중창의 시주를 거두는 연화緣化 일을 스님들이 맡아주시오.”라고 하고, 또 혜당慧塘을 시켜서, “우리 스님은 어릴 때 출가하여 세상을 집으로 삼고 헤어진 낡은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새가 날듯이 거침이 없고 도가 내면에 넘치고 덕은 밖에 드러나 있습니다. 천 명, 백 명 중에 헤아려 봐도 스님 밖에는 큰일을 담당할 자가 감히 없으니, 말을 많이 할 것 없이 힘쓰고 힘써 주시오. 이른바 당堂이란 것은 제도가 웅장하고 규모가 크고 넓으므로 법당의 공력은 곱절이 드니, 적당히 생각하고 넘기지 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결 같이 예전 법도에 따라 죽을 각오로 한다면 노승도 작은 힘이나마 거들 것이오.”하였다.
또 수령秀零과 제익濟益 등에게 명하기를 “법당에 기와를 얹는 일은 중차대하니, 스님이 맡도록 하시오.”하고, 수령에게 거듭 분부하기를, “스님은 여유 있게 시주금을 거두었으니. 동상실東上室의 대양문大陽門을 아울러 짓도록 하시오.”하였다. 유옥唯玉의 동운요東雲寮, 덕륜德崘의 지장전地藏殿, 해민海敏·법운法雲의 현릉玄陵(고려 공민왕릉)의 어보御寶 등은 모두 스스로 원하는 대로 하고,181) 글을 써서 붙였다. 권축勸軸182)을 소지한 자가 50여 명이나 되었으니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한편 관서關西지역의 판목을 요청하였는데 출중한 능력을 가진 어떤 승려가 이 일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도구를 짊어지고 무리 3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불사에 참여한 수백여 명과 함께 절반씩 둘로 나누었다. 한 쪽은 해서도海西道(황해도) 담주覃州의 고곡古谷으로 갔고, 나머지는 관동도關東道(강원도) 화산花山과 안삭安朔으로 갔다. 나무 베는 소리 쩡쩡 울리고 인부들이 부르는 아랑위兒郎偉 소리가 깊은 산천에 여기저기 퍼졌다. 이와 같이 삼제三際(1년)를 두 번 겪는 동안 큰 나무는 뗏목을 이었고 작은 나무는

0001_0116_a_01L [299] 以似蛩與蚷相救則功可収而事可成矣棐組僉師宜各勉旃僉曰諾
0001_0116_a_02L吾師所言孰敢技捂
於是師乃較心力之虛實事功之成不成分命弘海
0001_0116_a_03L海雲 [300] 行屹智軒等曰用師輩作幹蠱僧爲我羽翼法堂改剏緣化事師等
0001_0116_a_04L掌之又命慧塘曰吾師童眞出俗八紘爲家鶉衣𪅏食鳥行無章道溢於
0001_0116_a_05L德符於外推度千百人中師外無敢擔當其大事者不湏多言懋哉懋
0001_0116_a_06L所謂堂也制度雄偉規模宏濶倍倍法堂之功不得草草念過不增不
0001_0116_a_07L一依古規而以死爲期則老僧示 [301] 助涓埃之力
又命秀零濟益等曰
0001_0116_a_08L堂盖瓦事重且大師乃掌之申命秀零日 [302] 師之化緣綽然故東上室大陽
0001_0116_a_09L門并剏之唯玉之東雲集 [303] 德崙之海藏殿 [304] 海敏法雲之玄陵御室 [305] 皆從自
0001_0116_a_10L [306] 而作文付之持勸軸者五十餘人可謂盛矣
一以請關西梓僧某乃邦
0001_0116_a_11L傑也聞斯事乃揮涕而負其器率其徒三十 [307] 餘名而來與緣化并數百餘
0001_0116_a_12L分半爲二一以赴海西道之覃州古谷一以赴關東道之花山安朔
0001_0116_a_13L木丁丁呼耶許兒郎偉交雜於洞天如是者几 [308] 兩經三際大者聯筏小者

0001_0117_a_01L배에다 실었다.
수십여 척의 배를 바닷길과 강물에 띄웠는데 두 달 만에 부소갑扶蘇岬183)의 화장포華藏浦와 야교夜橋184)의 근처에 도착하자, 온 성 안의 사녀士女들이 우마牛馬를 이끌고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일시에 운반해 들였다. 법당 및 각 전각과 요사채는 같은 날 공역을 시작하였는데 도끼를 잡은 자가 200여 명이었다. 요사 터의 넓이와 전각 및 당우의 규모와 제도 모두 예전의 관례를 따랐다. 그 사이에 주춧돌을 바꾸고 돌을 섞거나 계단을 고치면서 돌을 갈 때 여러 사람들이 재능을 겨루어 각자 기묘한 기술을 발휘하였다. 모습은 나는 날개와 같아서 주요 행랑이 사방을 두르니 돌연히 거북 등이 터지고? 형세는 용이 치닫는 듯하다. 흙을 다지고 쇳물을 메워 연반蓮槃이 밝게 빛나니 세속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조물주도 도리어 수줍어하였기에 명성이 천하에 떨쳤다. 8년이 지나 공사를 마치니, 아! 아름답도다.
그 사이에 내탕內帑(임금)의 자금만 해도 은혜를 입은 것이 매우 컸다. 간혹 재회에 음식을 가져오는 무리가 지거나 이고 오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하니, 지공指空의 때에도 또한 이와 같았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겠다. 아! 옛날과 지금의 일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옛날 지공이 절을 처음 창건한 해의 3월에는 뿔이 네 개 달린 소가 와서 도왔는데, 이번 우리 스님이 중창하는 날에는 뿔 셋 달린 소가 또한 와서 도왔으며, 예전에 처음 지을 때에는 이림李琳185)이 대공덕주였는데 지금 고쳐 지을 때에는 이산李山이 대공덕주이니 기이하고 기이한 일이로다. 옛 사람이 세 번 환생하여 당나라 때 배휴裴休가 되어 용흥사龍興寺의 대전大殿을 창건하였고, 이씨李氏의 아들이 나무 구멍에서 오랜 구슬을 찾아냈다. 예로부터 이와 같은 일이 사적史籍에 가득 넘치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우리 스님이 친한 벗186)을 잃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대사의 휘諱는 숭해崇海이다. 그는 서쪽 사람으로 이곳에서 수행하고 이곳에서 득도하였으며, 명산名山을 이미 다 유람하고 선지식善知識187)도 다 찾아뵈었다. 작은 방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겨울과 여름을 납의 한 벌로 지내고 아침과 저녁을 죽 한 그릇으로 때웠다. 20년을 한 자리에서 참선하며 무위에 그대로 맡겼으나 사찰이 다 없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마음이 슬픔과 애탐으로 가득하니 눈물을 닦고 길을 나서니 선한 자가 따르기를 마치 바람이 범을 따르고 구름이

0001_0117_a_01L載舟
數十餘艘泛海浮江則月再彀而達于扶蘇岬之華藏浦及夜橋之
0001_0117_a_02L傾城士女持牛馬裏粮餉一時運八 [309] 而法堂及各殿寮舍同日董役
0001_0117_a_03L斧斤者二百餘人而寮舍 [310] 基址廣狹殿堂規模制度悉遵古例而其中易
0001_0117_a_04L礎而和石改砌以礱碣衆手爭能各逞妙技 [311] 飛翼腰廊四朿突如鼈抃 [312]
0001_0117_a_05L勢若龍趨 [313] 合土填金蓮槃照曜 [314] 煙火抱慚造物還羞是故聲過九夏 [315]
0001_0117_a_06L八年功乃告訖猗歟休哉
其間內帑之資沾及太重或日 [316] 齋餽餉之徒
0001_0117_a_07L負或戴始終如一未知夫指空之時其亦如是否吁古與今事之同不同
0001_0117_a_08L未爲論也昔指空初剏之年三角 [317] 牛來助今吾師改剏之日三角牛亦來
0001_0117_a_09L昔之初剏李琳爲大功德主今之改剏李山 [318] 爲大功德主奇哉奇哉
0001_0117_a_10L人第三生爲唐裴休剏龍興大殿李氏子探舊珠於樹穴古來如是者
0001_0117_a_11L滿史籍其可誣乎恨吾師之失其郢人也
師諱崇海崇海西人也行於斯
0001_0117_a_12L得於斯名山旣已遊知識亦已叅歸隱斗室冬夏衲一衣朝暮粥一盂
0001_0117_a_13L坐廿秋縱任無爲俱寺蕩盡滿心戚醮 [319] 拭淚登道則善者從之若風雲之

0001_0118_a_01L용을 따르듯188)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골라서 빗질하며 쌀알을 세어서 밥을 짓는189) 나날에 나라의 대가람 10여 칸을 다 만들어 세우니 온갖 폐단이 모두 다스려졌다. 아! 아름답도다. 시詩에서 이르지 않았던가? “진실한 군자여, 참으로 크게 이루셨도다.”라는 말은 스님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사람에게 명예는 있지만 좋은 평판이 없는 자가 있는데 우리 스님은 온전히 갖추었으며, 덕행은 있어도 도행道行이 없는 자가 있는데 우리 스님은 겸비하였으니, 법의 바다의 거북이자 용이요 선문禪門의 기둥이자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선정의 물을 마시고 오디를 먹는 것이 어찌 유독 옛 시대에만 그러했겠는가. 오늘날 우리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논을 바쳐서 부처님께 공양한 자가 하나둘에 그치지 않으니, 이는 더욱 알릴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지공指空의 상서로운 도(鳳猷)는 우리 스님을 얻고 난 연후에 다시 일어났고, 지공의 도덕은 우리 스님을 얻은 뒤에 더욱 빛을 발하였다. 우리 스님의 도는 지공이 아니면 드러날 수 없었고, 지공의 덕도 우리 스님이 아니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대의 사람이 옛날에 부르고 후대의 사람이 오늘날에 소리를 내니, 본말本末이 서로 부합하고 원근이 서로 비추어 천년이 지났지만 아침저녁으로 만난 것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산야山野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어리석고 미련하며 성품도 둔하고 옹졸하다. 말도 또한 사리에 맞지 않는데 어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스님에게 향화香火의 인연이 있고, 스님은 나에게 망리望履의 인연이 있으므로 이것으로 말하려 한다. 아! 스스로 같다고 보면 사물과 내가 다 무한정 많으며, 스스로 다르다고 보면 간과 쓸개도 일가一家가 아닌 것이다. 스님이시여! 고요한 방이나 빈 당우에서 마음의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삼라만상을 분별없이 그윽하게 관찰하면 지공指空이 서 있는 곳도 가시나무가 땅에 가득하고 우리 스님이 가는 곳에 하늘과 땅이 돌고 돌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옛날의 지공이 먼저가 될 수 없고 지금 우리 스님이 뒤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금과 선후는 같은 이치이고, 삶과 죽음,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하나의 도이며,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 그러함과 그렇지 아니함이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다.

0001_0118_a_01L於龍虎 [320] 故如此簡髮而櫛數米而炊之日國大伽藍十餘間盡爲剏立
0001_0118_a_02L百廢俱成嗚呼休哉詩不云乎允矣君子展矣 [321] 大成非師而孰也
人有有
0001_0118_a_03L令譽而無令望者而吾師全有有德行而無道行者而吾師兼可謂法海
0001_0118_a_04L龜龍禪門柱石𣂏定水食葚者豈獨古之時爲然今也慕吾師之道德
0001_0118_a_05L水田爲佛粮者非止一二此尤可聞也然則指空之風獻 [322] 得吾師然後重
0001_0118_a_06L指空之道德得吾師然後增輝吾師之道非指空則無以著指空之德
0001_0118_a_07L非相吾師則無以顯上之人鳴於古下之人鳴於今可謂本末相符遠近
0001_0118_a_08L [323] 而千載之下朝暮遇者 [324]
儂乃山野之蟣蝨而蠢蠢嗤嗤性魯且拙
0001_0118_a_09L又䖃磋 [325] 可以書然吾於師有香火之因師於吾有望履之緣故以此言
0001_0118_a_10L及之自其同者而觀之則物我皆無盡藏自其異者而觀之則肝膽非
0001_0118_a_11L一家師乎師乎靜室空堂掃拂心塵混萬像而冥觀則指空立處滿地荆
0001_0118_a_12L吾師行地天回地轉若如是則古指空而不爲先今吾師而不爲後
0001_0118_a_13L則古今也先後也一理也死生也成毀也一道也可不可然不然爲一貫

0001_0119_a_01L이러한 도리를 부처마다 조사마다 잇고 또 이어 면면히 끊이지 않고 지공부터 우리 스님에게 이른 것이니, 스님은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순치順治 17년 경자년(1660, 현종1) 월 일에 눌암 지백訥菴知白이 쓰다.
18-2. 경기우도 장단 보봉산 화장사 전후 중창기 京畿右道長湍寶鳳山華藏寺前後重剏記
목은牧隱 이공李公(이색)이 일찍이 지공指空190)의 비문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이르기를, “서국西國 만왕滿王의 아들인 선현禪賢이 호를 지공이라고 하는데, 태정泰定 연간(1324-1328)에 수십 개 나라의 중역重譯을 거쳐 와서 난수難水 가에서 천자를 뵙고 불법佛法을 논하였다. 천자의 뜻으로 해마다 옷과 양식을 지급하자, 지공이 “나는 이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오.”하고, 떠나가서 동쪽 고구려(고려)를 유람하고 금강산에 있는 법기法起보살의 도량에 예를 드렸다. 얼마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수현壽峴의 문집에는 「화장사 중건기華藏寺重建記」가 있는데 그 글에서는, “절은 기전畿甸(경기) 장단부長湍府 보봉산寶鳳山에 있다.”하였고, 옛 건물에 있던 상량문을 보니 “홍무洪武 18년 을축년(1385)191)에 고려왕이 계조암繼祖菴의 절터에다 청정한 사찰을 창건하고 편액을 화장사華藏寺라고 하였다.”고 짧게 기록되어 있는데 편액을 화장華藏이라 했으니 바로 지공이 이름 붙인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고려왕이 지공의 풍모를 일찍이 듣고 마음을 기울여 애타게 찾다가 만나보고는 그가 한 말을 모두 따랐다. 청정한 사찰을 짓고 원당願堂을 세운 것도 지공의 뜻을 좇아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절에는 고려 국왕의 화상畫像과 지공의 소상塑像이 있어서 사람들이 우러르고 그리워하게 하였다. 또 지공이 가져온 패엽경貝葉經(불경) 한 축과 우두전단향牛頭旃檀香192) 한 개가 있고 우리 효묘孝廟(효종)가 잠저潛邸 시절 연경에 들어가 가져온 강진향降眞香을 사찰의 승려에게 하사하였다. 그렇기에 절에 기이한 물건이 많은 것이다. 동쪽에는 지공指空과 정혜定慧, 영조靈照의 탑이 있고 또

0001_0119_a_01L遮箇道理佛佛祖祖繼繼承承綿 [326] 綿歷不絕自指空而至于吾師師乎師
0001_0119_a_02L [327] 其不可不盡心也

0001_0119_a_03L順治十七年庚子 月 日 訥菴知白記

0001_0119_a_04L京畿右道長湍寶鳳山華藏寺前後重剏記

0001_0119_a_05L
牧隱李公甞撰指空碑曰西國滿王之子禪賢號指空泰定間重譯數十
0001_0119_a_06L而來見天子于難水之上論佛法補旨歲給衣粮曰吾不是爲也去而
0001_0119_a_07L東遊高句麗禮金剛山法起道塲未幾趣還燕以有旨云云壽峴文集中
0001_0119_a_08L有華藏寺重建記其文曰寺在畿甸長湍府寶鳳山觀其舊藏樑上短識
0001_0119_a_09L洪武十八年己丑麗王剏淨剎于繼祖菴蘭若遺基額曰華藏乃指空所
0001_0119_a_10L命也先是麗王甞聞指空之風采傾心渴求而引見之所言皆從盖剏淨
0001_0119_a_11L剎立願堂亦從指空之謨而爲之也
故寺有麗王畫像指空塑像使人之
0001_0119_a_12L仰慕之亦有指空所齎來貝葉經一夾牛頭旃檀香一條洎我孝廟在潛
0001_0119_a_13L藩入燕取降真香錫寺僧由是寺多奇物焉東有指空定慧靈照之塔

0001_0120_a_01L붉은 적삼(珠衫)이 있는데 이는 고려왕이 지공에게 내린 물건으로 용궁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효묘 무자년193)에 승려 숭해崇海와 수령秀零과 제익濟益 등이 슬퍼하고 한탄하면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8년 동안 사업을 일으켜 공사를 겨우 완전히 마쳤다. 그 전당의 규모와 제도는 한결같이 지공이 지은 옛날 사찰의 모습을 준수하였다. 가지런히 정돈되고 우뚝 솟은 굉장한 규모는 우리나라 명산의 거찰 중에 거의 으뜸일 것이다. 훌륭하구나. 앞에는 지공의 자취가 안팎에 흩어져있고 뒤에는 숭해의 노력이 있으니 말하고 듣기에 충분하다.
18-3. 대웅전 삼칸 후불탱 화성기 大雄殿三間後佛幀畫成記
순치順治 14년 정유년(1657, 효종 8)에 대덕大德인 숭해崇海가 사찰을 중건하고 나서 이어 삼회후불三會後佛 탱화를 그렸다. 그 후 120년194)이 지난 건륭乾隆 41년 병신년(1776, 영조 52)에 한 대덕이 절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염파옥련艷葩玉鍊장로’였다. 하루는 북을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는, “너 법일法一은 삼회후불탱을 다시 그리는 일을 삼가고 또 삼가도록 하라.”고 하고, 또 “최현最賢은 사방에서 모아온 것들의 쓸 곳과 쓰지 않을 곳을 네가 맡아서 하라.”고 하였으며, 또 삼인三印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사찰을 중건할 때에 대덕 숭해가 한번 경쇠를 치며 명하자 대중들이 모두 수긍하였다.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사람이 어찌 다르겠는가. 크고 작은 일의 정회貞悔195)를 잘 따져서 대중들이 모두 마음을 함께 하여 행여 한 사람이라도 어기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법일法一과 쾌유快裕 등이 권소卷䟽(설계 계획서)를 가지고 44년196)인 기해년(1779)에 이르기를, “지금 처음 시작의 기초를 다지고 마무리를 잘하여 예전에 분부하신 말씀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계획하고 궁리하는 공력에 달려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랫사람의 일입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잘 헤아려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와 어진 덕이 있는 자를 제대로 가려서 써야합니다. 누구누구는 식견이 밝고 환하며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니 증불사證佛師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재주와 명망이 먼 데까지 소문이 나고 필법의 신묘함이

0001_0120_a_01L有珠衫乃麗王賜空之物龍宮之所自云
孝廟戊子歲有僧崇海秀零濟
0001_0120_a_02L益等慷慨誠心績犯八年功才完全而其殿堂規制一遵空古侔彙飛宏
0001_0120_a_03L殆甲于我邦之名山巨藍偉矣哉前乎指空之跡浪藉表裏後乎崇海
0001_0120_a_04L之力言足聽聞

0001_0120_a_05L○大雄殿三間後佛幀畫成記

0001_0120_a_06L
順治十四年丁酉大德崇海重剏寺剎後仍繪三會後佛後百二十四年
0001_0120_a_07L卽乾隆四十一年丙申有一大德在寺曰艷葩玉鍊長老一日擊皷集衆
0001_0120_a_08L汝法一重繪三會之事欽哉欽哉曰最賢四方鳩合而來者用處不用
0001_0120_a_09L汝其掌之曰三印昔重剏寺剎之時大德崇海一鳴磬命介衆畢頷
0001_0120_a_10L雖異人豈爾哉 [328] 事之大小度量貞悔使衆咸一其心無或一人用違
法一
0001_0120_a_11L快裕等挾卷䟽四年己亥乃言曰今欲原始要終以荅囊者之命而凡事
0001_0120_a_12L係運籌之功而奔走則在下請師料量之賢才賢德是選是庸曰格曰某
0001_0120_a_13L識殆通暢智勇兼人足以爲證佛之師夫才望有所遠聞而筆法之妙

0001_0121_a_01L생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 자입니다.”하니, “아무개를 어찌하면 가서 볼 수 있겠는가.”하였다. 삼인三印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기를, “우리 스님의 말씀이 이러하셨다.”라고 하며, 스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차례대로 구역을 맡아 정하고 단을 건립하고 도량을 일으켜 세웠다.
이해 2월 병진 삭일 초4일 기미己未에 산천후토山川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수십일 동안 깃발을 세워서 위아래의 일을 맡은 이들이 그 공업을 봉헌하였다. 정축일에는 낙성회落成會를 베풀었는데 이 때에 형상이 없는 현상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서 사람마다 신심信心이 샘솟듯 하였고, 말이 없는 말이 감실龕室 앞에서 들리니 하나하나가 지혜의 힘이 바람에 드날린 것이니, 이야말로 중생의 마음속에 제불諸佛이 생각 생각마다 깨달음을 증득하고 제불의 마음속에 중생이 새록새록 부처를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 예전 숭해의 시절에는 산문山門의 훌륭한 일이 바다에서 출현하였는데 오늘날 산문의 훌륭한 일은 염파 장로로부터 나왔다. 때도 때이려니와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진실한 군자여! 크게 이루셨도다.’고 할만하다.
건륭乾隆 44년(1779) 3월 일에 품곡 무희品谷無喜가 기록하다.
18-4. 운하당 중수기 雲霞堂重修記
순치順治 연간(1644-1661)의 개창기改剏記를 삼가 살펴보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원元의 태정泰定197) 연간(1324-1327)에 서천西天(인도)의 108대 조사祖師 제납박다존자提納薄多尊者인 지공 선현指空禪賢이 서쪽 지역으로부터 신주神州(중국)에 오자, 원나라 태자가 별궁에서 맞이하여 향을 가슴에 품고 법문을 청하였다. 이윽고 그의 명성이 고려의 수도(개경)에까지 퍼지니, 현릉玄陵(고려 공민왕)이 멀리서 재례齋禮를 펴서 행하고 사람을 보내 맞이해 와서 스승으로 섬겼다. 조사가 이르기를, “새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마땅히 깊은 숲에서 살게 해야 한다.”198)라고 하고, 결국 보봉산寶鳳山 꼭대기로 발길을 옮겨 계조암繼祖菴이 있던 절터에다 청정한 사찰을 창건하여 편액을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이곳을 춘저春邸(세자)의 복을 비는 곳으로 삼았다. 국왕이 내는 내탕금內帑金의

0001_0121_a_01L生㹨 [329] 兒去者曰某如何其往看之三印議衆曰吾師之言其如是乎於是
0001_0121_a_02L一依師言列爲掌區結界建壇成立道塲
是年二月丙辰朔初四日己未
0001_0121_a_03L享祭于山川后土幡揚數十日上下諸掌奉獻厥工丁丑設落成之會
0001_0121_a_04L時也無相之相顯于雲中人人信心湧泉無說之說聒于龕前箇箇慧力
0001_0121_a_05L風揚是可謂衆生心內諸佛念念證眞諸佛心內衆生新新作佛嗚呼
0001_0121_a_06L之崇海之日山門勝事自出于海今日之山門勝事 [330] 艷葩長老時哉時哉 [331]
0001_0121_a_07L允矣君子展也大成

0001_0121_a_08L乾隆四十四年三月 日 品谷無喜記

0001_0121_a_09L雲霞堂重修記

0001_0121_a_10L
謹按順治改剏記略曰元泰定年間西天百八代祖師提納嚩多尊者指
0001_0121_a_11L空禪賢自西界到神州元太子奉迎別宮懷香請法旣已聲動麗京玄陵
0001_0121_a_12L遙展攝齋禮遣人迎之事之以師師迺曰能以烏養鳥者宜捿之深林
0001_0121_a_13L步于寶鳳山頂剏淨剎于繼祖菴遺址扁曰華藏爲春邸祝釐之所內帑

0001_0122_a_01L넉넉한 은혜와 관료와 백성들 중 신심이 깊은 단월들이 성대하다고 하겠다. 전당과 실방室房은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누각과 요사채는 절차대로였다. 삼보를 외호하는 뛰어난 인연으로 많은 이들이 흠모하고 선행을 함은 모두 지공指空199)의 도덕과 교화였다. 우리 동방의 300이나 되는 선찰禪刹의 표본으로 가장 으뜸이니 이것이 처음 창건한 대강의 내역이다.
이서二鼠200)가 번갈아 침노하는 바람에 높은 건물과 아로새겨진 담장이 부서지고 무너졌다. 순치順治 을병년201) 이래로 숭해崇海 장로라는 분이 이곳에 있으면서 무위無為를 일로 삼고 대성大成을 성공으로 삼아 몇몇 사람들에게 보시를 권하고 약간의 재화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 새롭게 중창하는데 한결같이 힘썼다. 토목공사를 이미 마치고 단청도 공역을 끝냈다. 그리하여 임진년 관불灌佛하는 날(4월 8일) 아침에 경찬대회慶讚大會를 베풀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3월 12일 밤에 화재가 나서 일대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어버렸다.
하늘이여! 시운이여! 존자尊者가 가져온 조파祖派의 진영眞影 10여 위位와 쇠로 주조한 종鍾 1구口와 짜서 만든 황색 염석簾席 1쌍과 화준花樽(화병) 1쌍, 그 밖의 귀중한 유적이 모두 불에 타버렸으니, 아! 장차 무엇으로 뒤에 오는 자들에게 눈을 비비고 보게 하겠는가. 이것이 더욱 애통하고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되돌리는 것을 좋아한다. 숭해 장로가 뜻을 더욱 부지런히 하고 힘을 더욱 쏟아서 대중을 격려하고 서원을 세웠으니, 8년 안에 이전 것을 다시 중수하여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예전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건축하였다. 이에 부처님을 모실 전각과 부처님을 공양할 곳간이 있게 되었고, 도를 수행할 법당과 불을 때고 밥을 지을 부엌이 있게 되었으며, 손님을 맞이할 요사채와 오르내릴 누각이 있게 되었다. 완연히 두솔兜率202)인가 싶고 마치 화성化城203)과 같으니 이것이 중흥의 큰 줄거리인 셈이다.
그 뒤로 화재가 나거나 훼손될 때마다 보수하고 신축한 인연은 결코 한두 번의 일이 아니지만 증빙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다 기록할 수 없다. 함풍咸豐 갑인년(1854)에 적묵당寂默堂에 불이 났는데, 뒤에 중건한 이는 바로 무경無鏡 대사였다. 동치同治 갑자년(1864)에 다시 화재를 만났는데

0001_0122_a_01L之優惠民臣之信檀可謂盛矣殿堂室房之壯麗樓閣寮舍之節次外護
0001_0122_a_02L三利 [332] 之勝緣蟻慕鷹化者之秋秋 [333] 皆指空之道德風化而最甲于我東方
0001_0122_a_03L三百禪剎之表此迺初剏之大槩也
二鼠迭侵峻宇雕墻杇敗零落自順
0001_0122_a_04L治乙丙年來爰有崇海長老者以無爲爲事以大成爲成勸化若干人
0001_0122_a_05L聚若干財數十年間一從重新土水 [334] 既已畢功丹雘亦以竣役迺於壬辰
0001_0122_a_06L年灌佛朝將設慶讚大會不幸三月十二日夜八人流灾一大精剎蕩然
0001_0122_a_07L燒燼
天乎時乎尊者持來祖派影子十餘位鑄金鍾一口織做黃色簾席
0001_0122_a_08L一雙花樽一雙其餘貴重遺蹟亦入燒燼嗟呼將何以刮後來之眼目
0001_0122_a_09L尤痛恨處也然而天道好還崇海長老志益勤力益壯激衆立誓八年之
0001_0122_a_10L更修前轍因舊制而建築不減 [335] 于是奉佛有殿供佛有廩行道有堂
0001_0122_a_11L爨有廚應賓而寮登▼(幅-巾+目)而樓宛疑兜率殆同化城此則中興之大略也

0001_0122_a_12L後之或火或毀隨補隨新之緣决非一二之舉而無文獻之懲不得盡錄
0001_0122_a_13L咸豐甲寅寂默堂之火 [336] 重搆無鏡大師其人也同治甲子旋遭回祿

0001_0123_a_01L법윤法胤 대사와 용파龍波 대덕이 이어서 새롭게 중건하였다. 지금 그 법당이 있지만 규모가 점점 줄어 5분의 1이 되었다. 광서光緒 무인년(1878) 무렵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장연부長淵府 학림사鶴林寺에서 시왕상十王像을 모셔와 명부전을 짓고 그곳에 안치하였다. 향각香閣을 옮기거나 대루大樓를 중수하면서 채색을 다시하고 단청하는 일을 우리 노야老爺이신 우담藕潭 화상께서 누구누구와 함께 해를 넘겨 주선하다가 공사를 반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입적하셨다. 아! 슬프도다. 큰일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법야法爺이신 덕운德雲 화상께서 공경하며 용파龍波 대덕께 자문을 받고 여러 사람의 계책을 모아서 선사先師의 공적을 계승하였다. 공역을 마치고 나니 비록 예전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또한 중창하게 된 대체적 줄거리이다.
광무光武 원년(1897)에 이르러 용파龍波 대덕과 미산眉山 장로가 경쇠를 치며 대중을 불러 모아 이르기를, “응진법궁應真法宮과 운하승료雲霞僧寮가 나날이 썩고 무너져가는데 불자佛子의 도리로 어찌 괴롭고 슬픈 마음이 없겠는가? 대중은 단문檀門에 교화를 행하는 일에 각자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하자, 모두가 손을 들어 올리며 호응하기를 “감히 분부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동쪽 서쪽에서 개미가 모여들고 남쪽 북쪽에서 벌이 몰려오듯이 사람들이 왔다. 기해년(1899) 청화清和의 달(4월)에 응진법궁의 중수 역사를 시작하여 계하季夏의 달(6월)에 공사를 마쳤다. 이듬해인 경자년(1900) 2월에 운하대요雲霞大寮를 중건하여 자자自恣204)하는 때(7월 15일)에 이르러 공사를 끝마쳤다. 아! 공역의 방대함을 어떻게 실행하였기에 그 성취한 바가 이리도 용이하였다는 말인가. “두 사람이 합심하면 쇠나 돌도 끊는다.”205)고 하였으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나는 평소에 재주도 얕고 부족한 데다 가슴속이 막혔으니 어떻게 큰 덕과 훌륭한 일에 대하여 기록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덕의 분부를 감히 거스를 수 없고, 여러스님들의 부탁을 저버리기 어려웠으며, 두세 번 사양하였지만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다.
마지못해 좇아서 기문을 적게 되었다. “첩첩산중 우뚝 솟은 봉우리가 가로질러 달려들고

0001_0123_a_01L師法胤龍波大德繼而重新今其堂存而稍减五之一焉光緒戊寅間
0001_0123_a_02L雄殿之重葺也迎十王像于長淵府鶴林寺剏冥府殿而安之也移香閣
0001_0123_a_03L修大樓也改彩也丹雘也我老爺藕潭和尙共某也誰也經年周旋
0001_0123_a_04L未半途而奄然仙化嗚呼哀哉大事誰可托于是我法爺德雲和尙収悌
0001_0123_a_05L而質諏于龍波大德協同衆人之謀爰繼先師之勣功役載完雖未及於
0001_0123_a_06L古昔此亦或重剏之大略也
至於光武元年龍波大德眉山長老鳴磬而
0001_0123_a_07L集衆曰應真法宮雲霞僧寮日趨腐敗佛子之道寧無惻愴咨爾介衆檀
0001_0123_a_08L門行化事各其盡誠僉各上手而應曰敢不唯是命於是東西而蟻集
0001_0123_a_09L北而蜂聚己亥清和之月設應眞重修之役越季夏之月訖功明年庚子
0001_0123_a_10L二月重建雲霞大寮至自恣之辰功乃告畢功役之浩大倘復何如
0001_0123_a_11L其所成就若是之容易十人同心 [337] 能斷金石之謂謂是 [338] 之爲歟不佞素以
0001_0123_a_12L譾劣之才胷次茅塞何能當盛德盛事之記爲然大德之命莫敢違僉師
0001_0123_a_13L之囑亦難孤再三受辛而受辛不得
強從而記曰疊嶂攢峯橫騰馳突

0001_0124_a_01L서북쪽을 병풍처럼 둘러막은 것은 천마산天摩山과 성거산聖居山이다. 산 하나가 다소곳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둥글게 두르고 있어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게 푸르고 인물이 번성하여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니 아침노을과 저녁연기가 은은하게 비추는 곳은 송악松岳의 고도故都(개성)이다. 심도沁都(강화도)가 남쪽에 떠 있어 바다 빛이 아득한데 동쪽 산마루가 높이 이어지다가 구불구불 흩어진 곳은 단주湍州(장단)의 경내이다. 세 강의 봄 물결에 끊임없이 돌아오는 돛단배의 조운漕運으로 분주하지만 모두 우리 억만년 이어질 황도皇都로 들어간다.
중정中庭으로 발길을 옮기면 기이한 바위 높이 솟아 있고, 옥동玉洞은 신령하고 상쾌하다. 아름다운 숲엔 나무들이 우거지고 보전寶殿은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대군의 위실位室은 엄숙하고 넓으며, 영조靈照의 보탑寶塔은 이끼 낀 채 엄연하니, 묵묵히 씻어내고 법을 강의하는 곳으로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다. 게다가 깨끗한 단檀의 은덕과 여러 선사들의 부지런한 공적이 이렇듯 귀중하니, 거주하는 이나 모여든 이들은 청컨대 눈여겨보고 활구活句를 참상叅商하고 금문金文을 외도록 하라. 그밖에 예경禮敬과 염송念誦은 사람마다 능력에 맡게 스스로 취할 방도가 있을 것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아! 일개 장부의 몸으로 고금의 크고 작을 일들을 모두 가져다가 존재하지 않는 귀모토각龜毛兔角206) 속에 깊이 감추어 두고서 봄날의 졸음에서 언뜻 깨니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밝도다.
여러 가지 온갖 색채와 형체가 화장사의 비로불毗盧佛이 앉아 있는 곳이 아닌 데가 없다. 혹 그렇지 않은가 싶어 다시 세세하게 점검해 보았다. 도를 말하자면, 지공指空이 먼저이고 숭행崇海가 뒤이며, 숭해가 먼저이고 아무아무 대사가 뒤인데 모두가 개산조開山祖이자 중창주重剏主이다. 덕을 논하자면, 예전에는 이림李琳이었고 지금은 이산李山이며, 예전에는 이산이었고 지금은 보통 사람들인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실제로 대단월大檀越이며 대공덕大功德이다. 감히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기에 그들을 방함芳啣에 기록하여 장차 올 사람들에게 등등상속燈燈相續207)하는 법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0001_0124_a_01L蔽障乎西北者天摩聖居諸山也一山雍容秀麗抱圍磅磚佳氣鬱葱
0001_0124_a_02L物繁滋千門萬戶隱映於朝霞暮烟者此松岳故都也沁都浮其南海色
0001_0124_a_03L茫茫然東嶺偃蹇散落逶迤湍州之闔境三江春波歸帆絡繹者載漕載
0001_0124_a_04L盡入于我億萬年之皇都也
步出中庭則奇嵓岧嶢玉洞靈爽瓊林蕤
0001_0124_a_05L寶殿翼如大大君 [339] 之位室肅且閬然靈照之寶塔苔而儼焉洒灑社默 [340]
0001_0124_a_06L講法之所莫越乎斯然則淨檀之德惠僉師之勤功如許珍重而居者集
0001_0124_a_07L請着眼看叅商活句唱誦金文其他禮敬念誦當人分上自有有 [341] 捐有
0001_0124_a_08L益之道勉旃哉勉旃哉於戲一箇丈夫漢都將古今多少事深藏龜毛兔
0001_0124_a_09L角裏一覺春睡雲捲月朗
頭頭物物色色形形無非華藏剎毗盧坐處
0001_0124_a_10L或未然更細點撿語其道則先指空而後崇海先崇海而后某某大師
0001_0124_a_11L作開山祖重剏主也論其德則古李琳而今李山古李山而今張三李四
0001_0124_a_12L實爲大檀越大功德也母敢踈忽母敢踈忽因書芳啣使將來人以爲燈
0001_0124_a_13L燈相續法也

0001_0125_a_01L
광무光武 5년 신축년(1901) 2월 차나재일遮那齋日 경찬회연慶讚會筵에서
화악문손華岳門孫 향엄 야납香嚴埜衲 지순之淳이 기록하다.
봉래과객蓬萊過客 회명 일승晦溟日昇이 글씨를 쓰다.
18-5. 옛 단주 화장사 적묵당 중창기(古湍州華藏寺寂默堂重剏記)
융희隆熙 2년 무신년(1908) 7월 17일에 화장사華藏寺의 적묵당寂默堂을 중창하는 공사를 마쳤다. 대개 웅장하고 아름다운 전당이나 누각을 건축한 뒤에는 반드시 기문을 써서 걸어둔다. 그 이유는 사실을 서술하고 공적을 기록하여 장래에 보여 주기 위함이니, 후세 사람들에게 옛 사람이 일한 노고와 재물을 모으는 어려움을 자세히 알게 함으로써 함부로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지 말고 더욱 권장하여 힘쓰려는 뜻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개산조인 지공指空 대화상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올 때에 지나는 곳마다 교화하여 바른 법의 안목을 얻은 자가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그의 도道와 덕德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모셔 와서 향을 올려 법문을 청하였다. 이때 그의 법의 교화에 젖은 자들이 경외京外에 두루 가득하였다. 공민왕 22년, 지금으로부터 535년 전인 계축년(1373)에 마침내 본사를 창건하고 이름을 화장사라고 하였는데, 가람의 장엄함이 경기지역에서 으뜸이었다. 본당을 특별히 크고 넓게 만들어 아자亞字 형태를 받아들여 적용하고 수리하여 꾸밈으로써 좌선하는 자는 좌선하고 고요히 명상하는 자는 명상하며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기르는 곳으로 삼게 하였다. 뒷사람들이 이로 인해 개산조의 남겨진 상像을 봉안함으로써 동국의 제일선원第一禪院으로 일컫게 되었다. 당시 도덕과 교화가 미친 바가 어떠했었으며, 재물을 후원하여 후사를 도운

0001_0125_a_01L
光武五年重光赤奮若大壯之月遮那齋日慶讚會筵

0001_0125_a_02L華岳門孫香嚴埜衲之淳誌

0001_0125_a_03L蓬萊過客晦溟日昇 書

0001_0125_a_04L古湍州華藏寺寂默堂重剏記

0001_0125_a_05L
隆熙二年戊申七月十七日華藏寺寂默堂重剏役事畢大凡殿堂閣樓
0001_0125_a_06L之宏嚴 [342] 建築以後必文而記而書而 [343] 揭之者所以敘其事實錄其功績
0001_0125_a_07L垂示將來而俾後之人細想古之人董事之勞鳩財之難不敢尋常看過
0001_0125_a_08L而尤有所勸勉底意也開山祖指空大和尙從印度遊支那几歷 [344] 所化得
0001_0125_a_09L法眼淨者 [345] 不許 [346] 其數勝國恭愍王聞其道德遣使奉邀懷香請法爾時得
0001_0125_a_10L沐法波者 [347] 徧滿中外恭愍 [348] 二十二年距今五百三十五年癸丑遂剏本山 [349]
0001_0125_a_11L因號華藏焉伽藍之壯麗殆畿甸 [350] 而本堂特搆宏濶內用亞字形而修飾
0001_0125_a_12L使安禪者安禪靜慮者靜慮以爲明心鍊性 [351] 之所後人因奉開山祖遺
0001_0125_a_13L而乃有東國第一禪院之稱矣當時道風化 [352] 之所及如何 [353] 當時 [354] 捐財助

0001_0126_a_01L시혜가 또 얼마나 성대했던가.
본조의 효묘孝廟(효종) 3년 임진년(1652)에 이 절이 전부 불에 타버렸는데 숭해崇海 장로가 도를 행하고 교화하여 대가람을 중창하고 성대하게 새롭게 하였다. 본당의 경우는 더 한층 주의를 기울여 예전 제도를 본받아 규모를 늘리거나 줄이지 않았다. 효종 10년, 지금으로부터 249년 전인 기해년(1659)에 공사를 마쳤다. 8년간 공역의 큰 규모와 조성한 자금의 많음은 처음 창건할 때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 뒤 몇 번이나 세우고 부서졌는지는 증빙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붓을 멈추고 탄식할 뿐이었다. 그런데 들보 위의 짧은 기록을 보고 겨우 근래에 있었던 한두 가지 일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어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철종哲宗 5년,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갑인년(1854)에 무경無鏡 노야老爺가 화재로 폐허가 된 빈터에다 본당을 중창하였는데, 규모와 제도는 비록 옛날의 아자방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도를 행하고 경행經行을 하는 데는 50명의 대중을 수용이 가능하였다.
또 다시 화재를 당하자 태황太皇(고종) 2년,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을축년(1865)에 법윤法胤 노야와 용파龍波 대덕이 이어서 지었으나 겨우 열 몇 칸을 얽어서 만들었을 뿐이었다. 대덕이자 문손인 경제 영공鏡濟永公은 젊어서 출가하여 여기저기 강사講肆(講院)를 찾아다니다가 본당에 와서 거처하였다. 만일회萬日會를 베풀고 정토淨土 수행할 사람을 모집하여 날마다 만 번 미타彌陁를 소리 내어 외우면서 기쁘게 보고 듣는 대로 귀의하여 함께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약하였다.
다만 본당이 좁은 데다가 지붕이 썩고 담장이 기울어져 무너져버릴까 하는 근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때 단문檀門(신도)에 널리 알려서 약간의 성금을 모아, 융희隆熙 2년 3월 2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 17일에 낙성함으로써 이전에 협소했던 것이 넓어졌다. 기울어진 것을 바로 세우고 썩은 것을 완전히 복구하고 나니, 새로운 사찰 하나가 자리 잡고 늘어선 골짜기가 빙 둘러 보호하는 가운데 우뚝 솟았다. 이 때에 실낱같은 산위 구름이 피어올라 절을 보호하고 넘실대는 바닷물이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되돌아가는가 하면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0001_0126_a_01L後之惠施倘復何如也哉
本朝孝廟三年壬辰本山 [355] 沒入燒燼崇海長老
0001_0126_a_02L以道行化重剏大伽藍而興然 [356] 一新至於本堂又一層注意倣舊制而不
0001_0126_a_03L增不减粵孝廟十年距今二百四十九年前己亥功訖八年之間功役之
0001_0126_a_04L捐助之盛亦不下於初剏之秋也厥後幾度興廢無文獻之徵記者 [357]
0001_0126_a_05L筆咨嗟而已又閱樑上短誌 [358] 勤採近世事一二條以續曰哲宗五年距今
0001_0126_a_06L五十五年前甲寅無鏡老爺重剏本堂于回祿遺址而規模制度雖未及
0001_0126_a_07L於古之亞字房然行道經行容衆五十也
又遭八人之灾太皇二年距今
0001_0126_a_08L四十四年前乙丑老爺法胤龍波大德繼而剏之僅搆十數間架而已
0001_0126_a_09L德門孫鏡濟永公妙年出俗遊歷講肆歸棲本堂設萬日會募淨土修行
0001_0126_a_10L日念萬聲彌陁期使隨喜見聞同生淨土
但本堂陜隘且屋壞墻傾
0001_0126_a_11L免顛離 [359] 之患於是普喙檀門鳩集若干金於隆熙二年三月廿七日董事
0001_0126_a_12L七月十七日落成向之陜隘者宏廣傾者正壞者完一座新蘭若聳立乎
0001_0126_a_13L列壑圍護之中于時也縷縷山雲出而歸護汪洋海波汐而復潮花灼灼

0001_0127_a_01L기뻐하는 듯, 새들은 지저귀며 하례를 드리는 듯하였다. 이는 모두 본당의 진정한 정취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것들이다.
이 당에 머무는 자가 불조佛祖의 본분종지本分宗旨를 잘 발휘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본래의 서원을 잊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을 넉넉히 여지가 있게 한다면, 본당 안에서 기거하며 날마다 황금 100상자를 쓰더라도 마음속에 부끄러울 것이 없겠다. 혹시라도 그렇지 않으면 검은 산 아래 귀신 소굴에서 어둡고 캄캄한 가운데 섣달(12월) 30일 동안 애쓰더라도 염가노자閻家老子(염라대왕)의 손에 들린 쇠몽둥이를 받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는가. 나는 배운 것이 얕고 재주가 부족하여 사실을 서술하고 공적을 기록할 책임을 감히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영공永公의 부탁을 저버리기도 어려웠다. 또 후세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이런저런 사실과 공적을 알게 함으로써 계속 이어 중창하고, 끝없는 억겁의 세월 동안 우리 불조佛祖의 진정한 종지宗旨를 발휘하게 하여 대지大地가 생명을 품고 각기 그 오묘함을 얻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처마 끝의 허물을 헤아리지 않고 그 전말을 대략 기록하였다.

융희隆熙 2년 무신년(1908) 9월 일
석존釋尊 탄강誕降 2935년
 화악華岳의 문손인 향엄 지순香嚴之淳이 삼가 기록하다.
19. 전군수 이학래208) 시 前郡守李鶴來詩 진사시進士時 인천부仁川府
結搆行宮二百春   행궁을 건립하고 이백 년 만의 봄을 맞아
還成蕭寺住山人   되려 소슬한 절에 머무는 산사람이 되었네
當時採鷁江湖近   당시의 채색 배 강호에 가까웠으련만
驀地金蓮歲月新   어느덧 연꽃 보좌에 세월이 새로워라
瞿曇何日通中國   석가가 언제 중국에 알려졌던가
仙取如雲杳上賓   신선이 구름처럼 아득히 귀빈을 받아들였네
遺說先王耆老在   전해지는 말에 선왕의 기로소에 있으니
白頭正似舊臣隣   센 머리 마치 옛 신하를 이웃한 듯하여라

0001_0127_a_01L而似欣鳥喃喃兮獻賀此皆本堂之助發眞趣者也
而居斯堂者能發揮
0001_0127_a_02L佛祖本分宗旨不忘度生本誓自利利人恢有餘地則坐臥乎本堂裏
0001_0127_a_03L消黃金百箱無愧于中其或不然黑山下鬼窟昏昏然瞢瞢然做去臘月
0001_0127_a_04L三十日到來閻家老子手中銕棒豈不大懼也哉記者學淺才踈不敢當
0001_0127_a_05L敘事實記功績之任難孤永公之囑亦可使後之人知今之人之伊麼事
0001_0127_a_06L伊麼功績繼而剏之無量億劫發揮我佛祖眞正宗旨大地含生各得
0001_0127_a_07L其妙是所望不揣楣上之疵略記顚末云爾

0001_0127_a_08L
隆熙二年 月 日

0001_0127_a_09L釋尊誕降二千九百三十五年

0001_0127_a_10L華岳門孫香嚴之淳謹誌

0001_0127_a_11L前郡守李鶴來詩 進士時   〔仁川府〕

0001_0127_a_12L
結搆行宮二百春 還成蕭寺住山人 當時採鷁江湖近驀地金蓮歲
0001_0127_a_13L月新瞿曇何日通中國仙取如雲杳上賓 遺說先王耆老在白頭正似

0001_0128_a_01L
20. 계유 숙종대왕 시 癸酉 肅宗大王 時
나는 계유년(1693) 봄에 향신鄉紳을 가려 쓰는 일로 조정의 성대한 뜻을 받들게 되었다. 미련하고 둔함에도 외람되이 이 절의 공역을 감독하게 되었는데, 예전 절터에다 다시 새로 지으니 비록 내탕內帑의 자금이 내려지고 여러 유생儒生들이 시주하였지만 외따로 떨어진 섬인지라 일은 크고 능력은 모자라서 걱정이 없지 않았다. 3년에 걸쳐 공사를 마치게 되니 근방의 선비들이 모두 찾아왔다. 어떤 이가 나에게 묻기를, “불교가 동녘 땅에 전해진 것은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까?”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신라와 고구려 중엽에도 있었으며 백제의 경우는 침류왕枕流王 때에 서역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나라로부터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에 모시고 예로 공경하니 불법이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 뒤에 신라의 통일을 거쳐 고려에 이르자 절과 탑이 대대적으로 갖추어지니 금은이 산으로 들어가고 단청丹青이 바위를 보호하며 비단 장막이 연잇고 등불 단 나무들이 서로 비추니 이 역시 일대의 뛰어난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처음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요 근원은 고려 때이며 본조(조선)에서 도가 수립되었습니다.”고 하였다.
객이 이르기를, “앞서간 수레가 전복되면 뒤따르는 수레는 이를 경계로 삼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쇠퇴하였고, 고려 말에 용렬하고 어리석은 군주가 부처에게 아첨함이 너무 심하여 화려한 누각을 세우고 종을 만들었지만 여우 떼가 궁궐에 들어와도 구제함이 없었고 옥룡玉龍(도선)의 비결秘訣에 잘못된 승려가 조정을 어지럽게 한다고 도리어 웃었는데, 본조에 들어와 도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하였다. 내가 옷깃을 여미고 바로 앉아 대답하기를,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합니까? 우리나라 산세는 중주中州에서 기력이 바다 속으로 기세 있게 들어가 10배나 커졌으니 100리 되는 평지가 없고 1000리 되는 높은 산만 있습니다. 이름난 도읍과 큰 도시, 넓은 고을과 문화가 있는 향리 같으면 단군과 기자 이래로

0001_0128_a_01L舊臣隣

0001_0128_a_02L癸酉肅宗大王時

0001_0128_a_03L
余於癸酉春有鄉紳之汲引承 朝家之盛意猥以駑鈍監董是寺之役
0001_0128_a_04L仍舊址而改新建雖有內帑之劃下諸章甫之施助孤懸殘島之裡不無
0001_0128_a_05L事巨力綿之憂乃至跨三載而工告訖傍近衿紳皆到或有門於余日
0001_0128_a_06L教之傳於東土始自何代曰新羅句麗中葉皆有而百濟則枕流王時
0001_0128_a_07L僧摩羅難陀自晉至王迎致宮內禮敬濟之佛法始此其後新羅統一
0001_0128_a_08L至高麗大備寺塔金銀歸山丹青護岩綵綳連亘火樹相照此亦一大之
0001_0128_a_09L勝事以此觀之草創於三國濫觴於高麗而道立於 本朝也
客曰前車
0001_0128_a_10L之覆後車之戒也羅濟之衰勝國之季庸君暗主佞佛滋甚珠樓韻鍾
0001_0128_a_11L救衆狐之入宮玉龍秘訣還笑非僧之亂朝至於 本朝而道立何謂也
0001_0128_a_12L余正襟危坐而荅曰何謂不然也我國山勢自中州然氣力突入海中
0001_0128_a_13L倍雄強無百里之坦有千里之險若其通邑大都雄州文鄉檀箕以來

0001_0129_a_01L교화가 이미 행해져서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 속이거나 강 상류의 물살 빠른 협곡에는 인적이 드물고 수목이 우거져 하늘을 뒤덮고 승냥이와 이리 같은 짐승들이 판을 치니 그 발톱과 어금니가 두려울 뿐 아니라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않아서 마치 버려진 땅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묘당廟堂(의정부)에서 국가를 경영할 계책을 강구하여 명산의 깊은 곳에 큰 사찰을 짓게 하고 가장 궁벽한 곳 물줄기에 승려들을 마음대로 살게 하니, 종과 경쇠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염불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러자 노닐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장사꾼들이 드나들면서 도로가 뚫리고 풍속을 따라하며 초목과 새와 짐승, 물고기가 모두 자유로이 사니, 이것이 어찌 도가 세워지고 교화가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이 함께 행해지되 어긋남이 없다는 것으로 안과 밖이 태평스러워서 실로 만세토록 끝이 없는 아름다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객이 이르기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절은 어느 시기에 창건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신라와 백제 때의 일을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 고려 시기에는 사찰과 탑의 성대함이 후세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자연도紫燕島 안에는 현재 옛 절터가 네댓 곳이 있지만 유독 이 절만이 의발衣鉢을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본조(조선)에 들어온 뒤의 옛 일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답하기를 “우리 인묘仁廟(인조) 갑자년(1624)에 임금이 남쪽으로 행차하실 때 본진本鎭에 머물면서 월미도에 속하게 하고 당시 백운사白雲寺에 승장僧將 인수印綬 하나를 하사하고 그 뒤에 쌀 9말을 매달 승장 한 사람의 급료로 지급한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70년이 지나서 이 공역을 일으켰고 또 월미도의 행궁行宮의 역사도 하고 있습니다.”하니, 객이 기뻐하며 떠나갔다. 나는 글재주가 서툴기는 하나 마침내 붓을 들어 차례대로 적어서 편액에 새겨서 절의 벽에다 걸게 하였다.
상上의 21년 을해년(1695) 4월 8일에 유학幼學 문화文化 류지화柳枝華가 삼가 기록하다.

0001_0129_a_01L化已行蔑以加矣深山窮谷之中高江急峽之隈足跡罕到樹木戾天
0001_0129_a_02L狼交橫爪牙斯畏王化不及類若弃地是故 廟堂究其經國之策名山
0001_0129_a_03L邃地脩茸大剎僻流絕頂任捿殘衲鍾磬不斷念佛聲高游賞者到焉
0001_0129_a_04L商者至焉通其道路襲其風俗暨草木鳥獸魚鼈咸若此豈非道立而致
0001_0129_a_05L化乎此所謂儒佛之教并行不背內外昇平實萬世無疆之休也客曰唯
0001_0129_a_06L本寺之創在於何時
日羅濟之時吾不知已的在麗時也寺塔之盛
0001_0129_a_07L世莫及而紫燕島內現存舊址者有四五處而獨此寺僅存衣鉢也日入
0001_0129_a_08L本朝有證古乎日粵我 仁廟甲子南幸時駐驆本鎭屬月尾島時 賜
0001_0129_a_09L白雲寺僧將印一顆其後米九斗朔下以爲僧將一人料已有年矣距今
0001_0129_a_10L七十年後此役之舉亦際月尾島行宮之役而爲之耳客喜而起去余不
0001_0129_a_11L拘於文拙遂操觚悉次是語付之剞劂藏之于寺壁焉

0001_0129_a_12L上之二十一年乙亥四月八日幼學文化柳枝華謹識

0001_0129_a_13L

0001_0130_a_01L
21. 관악산 연주대 나한법당 중수와 하법당 신건을 함께 기록한 글(冠岳山戀主臺羅漢法堂重修與下法堂新建并記誌)
한강 북쪽에 삼각산이 있다. 산의 기세가 한껏 높아 만리의 긴 파도에 용이 번개를 일으키며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우뚝 솟아서 쉽게 오를 수가 없다. 삼각산 남쪽에는 나라의 수도가 있는데 웅장하고 넓어서 마치 천리의 연원淵源에 용이 서려 있고 봉황이 일어나는 것과 같아서 그 성대한 모습을 묘사하기가 어렵다. 국도의 남쪽에는 관악산이 있다. 천개의 바위가 빼어남을 다투고 봉우리 그림자가 울쑥불쑥하며 수없이 우뚝 솟아 낭떠러지의 구름사다리 같다. 관악산 정상에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을 연주대戀主臺라고 한다. 처음 시작되어 이름을 알린 것은 대명大明의 태조太祖 홍무洪武 3년209) 임신년(1392)이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이곳에 직접 왕림하여 먼저 대를 축조하고 오백년의 복을 기원하였다. 새롭게 원각圓覺과 연주戀主의 두 절을 지어 영원히 남방의 27개 재액과 질병을 막았고, 친필로 연주대라고 썼는데 그 꼭대기의 제액에는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중간에 세조대왕 역시 선조의 자취를 본받아 친히 행차하여 200일을 기도하여 화재를 가라앉히고 물리쳤다. 이후 근년에 세월의 운수가 불리하여 암자가 텅 비고 사람이 적막하였다. 위로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어오고 대들보가 썩고 기둥이 무너져 시커먼 먼지만 눈에 가득하였다. 공양이 많이 없고 복로福路가 오래되어 못쓰게 되자 한 사람도 제사 드리기를 꺼려 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대청大淸 광서光緖 13년 병술년(1886) 초여름에 서울의 판관判官 윤태일尹泰逸이 이곳의 퇴락한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슬퍼하고 놀라워하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출연했지만 부족하였다. 승려 행문幸文과 이씨李氏 선덕행善德行이 함께 일을 하자고 먼저 주창하여 5월 그믐에 공사를 마쳤다.

0001_0130_a_01L冠岳山戀主臺羅漢法堂重修與下法堂新建并記誌

0001_0130_a_02L
漢水之陽有三角山氣勢崢嶸如萬里長波龍電登天屹威莫攀也角山
0001_0130_a_03L之陽有國都雄雄宏宏似千里淵源龍盤鳳起赫赫難模者也 國都之
0001_0130_a_04L有冠山千巖竸秀峯影㠁嵯百矗無盡嶮𡼑雲梯也岳之頂有一蘭若
0001_0130_a_05L其題曰戀主臺也經始傳名大明太祖洪武三年壬申
0001_0130_a_06L太祖大王親臨此地先爲築臺祈福五百歲鮮作圓覺戀主二寺以永鎭
0001_0130_a_07L南方二七之灾患而親筆戀主臺顙題至今有名
而中間 世祖大王
0001_0130_a_08L効先祖之影跡親臨二百日祈禱八人之灾沉辟矣以下近年歲運不利
0001_0130_a_09L庵空人寂上雨傍風樑朽棟頹玄塵滿目應供無多福路久陳一人奠惜
0001_0130_a_10L何幸大清光緒十三年丙戌孟夏分京內判官尹泰逸見此頹落立地
0001_0130_a_11L悵愕自財盡出不足與幸文僧及李氏善德行先唱同謀五月晦告功云
0001_0130_a_12L

0001_0130_a_13L

0001_0131_a_01L
22. 관음사 중수기 觀音寺重修記
아! 천하에 금강산金崗山이 셋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서금강西金崗이고, 둘째는 남금강南金崗이며 셋째는 동금강東金崗이다. 이른바 동금강은 곧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말한다. 이 산이 본래 세 갈래인데 그중 한 갈래가 흘러와 삼각산으로 우뚝 솟았고, 그 아래의 낙성洛城(서울)은 수백 년 전 성제聖帝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 기틀이 된 곳이다. 그 남쪽의 관악산은 범왕梵王의 수십 년 유적의 터이다.
아! 관음본사觀音本寺는 아마도 삼한 이래의 고찰인데 오랜 세월을 겪은 탓에 전각이 퇴락하고 불상은 비바람을 맞았다. 몇 안 되는 힘없는 승려들이 중수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심지어 제향을 드리는 것마저도 거르기 일쑤이다 보니 항상 마음의 한으로 느끼며 분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계해년 가을 8월에 영은대감永恩大監이 너그럽고 어진 덕성德性으로 특별히 천금의 재화를 내어 크게 시주하셨다. 그리하여 전우殿宇 및 법발法鉢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당을 하나하나 중수하였고, 옥허玉墟의 진상真像도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제향을 드리는 예도 갖추고 받들고 섬기는 법도도 차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사문의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몇 줄의 글을 적어서 현판에 작게 새겨 억만년까지 뼛속 깊이 새겨 잊지 않도록 우러러 축원하는 바이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실로 성대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갑자년 정월 초6일에 본사의 승려 행임行䄒이 삼가 쓰다.
23. 진관사 사적 津寬寺事蹟    고양군高陽郡

0001_0131_a_01L觀音寺重修記

0001_0131_a_02L
天下有三金崗其一西金崗也其二南金崗也其三東金崗也而所謂
0001_0131_a_03L東金崗卽我國金崗山也山本三枝一枝流落三角屹立其下洛城累百
0001_0131_a_04L世聖帝定鼎之基也其南冠岳梵王數十年遺蹟之址也
觀音本寺
0001_0131_a_05L自三韓古剎歲月由久殿宇剝落佛像冐雨如干殘僧力不能修葺至於
0001_0131_a_06L供享多闕則常心之恨無時不感發而有意莫遂者久矣不意癸亥八月
0001_0131_a_07L永恩大監以寬仁德性特許千金之財大施主故殿宇及法鉢僧居之
0001_0131_a_08L一一重修玉墟眞像因舊而成樣
自今以往供享有禮奉崇有道則兹
0001_0131_a_09L豈非沙門之大幸事耶不勝感激敢搆數行文字細刊板眉至于億萬歲
0001_0131_a_10L銘骨不忘仰祝此非偶然之事也實是盛事美事哉

0001_0131_a_11L甲子元月初六日本寺僧行䄒謹書

0001_0131_a_12L

0001_0131_a_13L津寬寺事蹟高陽郡

0001_0132_a_01L
진관사津寬寺는 한양의 건방乾方(서북)과 삼각산의 곤방坤方(남서)에 있으면서 간방艮方(동북) 쪽을 둘러싸고 있다. 바위산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산수가 맑고 깨끗하여 실로 높고 전망 좋은 곳이지만 세월이 오래되고 흘러간 옛 일이다보니 상고할 문헌이 없다. 다만 야담에 이르기를, “고려 때 진관사의 대사가 이곳에 암자를 지었는데 도망 나온 왕자를 만나 이곳에서 봉양하였다. 뒤에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고려 현종顯宗이었다. 이로 인해 국사國師로 봉하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 돌기둥과 섬돌 등 깎고 다듬은 여러 석물은 모두 그 당시에 만든 것들인데 비석이 없고 문서 기록도 부족하여 서계書契의 이전 소식과 다를 것이 없으니, 누구에게 묻고 무엇을 질의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일을 감독했던 자가 미처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비석을 세우고 기록을 해 두었는데 병화兵火에 소실되어버린 것인지, 나무꾼의 손에 훼손되어버린 것인지, 시냇물과 산은 말이 없으니 물어보기조차 어렵다.
서울 대적사大寂寺 탑 옆에 1장丈 남짓 되는 큰 비석이 있는데 바로 원각사비圓覺寺碑이다. 그 비문에는 ”동쪽에는 불암사佛岩寺가 있고 서쪽에는 진관사津寬寺가 있으며 남쪽에는 삼막사三幕寺가 있고 북쪽에는 보개산寶盖山 심원사深源寺가 있다.“고 하였고, 송도松都(개성)의 현화사비玄化寺碑에도 역시 진관津寬 조사를 국사國師로 봉하고 사찰을 건립하여 존숭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두 비문에 의거해 보면 진실로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며, 중간에 불운을 만나 병화兵火에 소실되어버려서 승려는 남지 않고 절은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 이후 80년째 되는 정해년(1707) 6월에 우리 숙묘조肅廟朝(숙종)께서 소의昭儀(장희빈)의 묘소를 이곳에 들였다. 묘소를 위해 예전 절터에다 사찰을 건립하였으니 범종이 다시 울리고 향연香烟이 재차 피어오른 지 지금 수백 년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을 적어 기문으로 삼는다.
24. 봉은사 남호대율사 비문 奉恩寺 南湖大律師碑文    광주군廣州郡

0001_0132_a_01L
津寬寺在漢陽之乾三角之坤揖艮回抱而岩巒秀麗泉石清灑實塽塏
0001_0132_a_02L而年久事往雖非無 [360] 可考但野語云麗朝津寬寺大師結廬於此而逢王
0001_0132_a_03L子之出奔而養之後更爲嗣即高麗顯宗也因封爲國師建剎於是而石
0001_0132_a_04L柱石砌等諸刪磨石物皆其時之所役而石無楮乏錄便無書契以前時
0001_0132_a_05L消息無異畓問 [361] 於誰而質於何或當時董事者未遑之致歟或立石編楮
0001_0132_a_06L而蕩於兵火歟式剝落樵手而然歟溪山無語難以扣也
京大寂寺塔側
0001_0132_a_07L有丈餘穹碣即圓覺寺碑而其詞曰東有佛岩西有津寬南有三幕北有
0001_0132_a_08L寶盖山深源寺松都玄化寺碑亦有封津寬祖師爲國師及建剎尊崇之
0001_0132_a_09L據斯二碑則固非虛說間值否運兵火燒燼僧殘寺廢久矣 崇禎戊
0001_0132_a_10L辰後八十年丁亥六月及我 肅廟朝入昭儀墓於此爲墓所建寺剎於
0001_0132_a_11L舊基墟而鍾梵更振香烟復凝者今數百年也姑寫所聞以爲之記

0001_0132_a_12L

0001_0132_a_13L奉恩寺 南湖大律師碑文   廣州郡

0001_0133_a_01L
해동海東 조선국朝鮮國 보개산寶盖山 석대암石臺庵 남호율사南湖律師 개간화엄開刊華嚴 비명병서碑銘并序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겸 이조판서兼吏曹判書 이의익李宜翼 지識
한남거사漢南居士 국하菊下 이항억李恒億 전액篆額
심양산인沁陽散人 이화래李化來 서書
마음을 밝혀 불성을 깨닫는 것이 석씨釋氏의 학문이다. 마음과 불성을 넓히면 우주라도 오히려 좁고, 거두어들이면 옆의 빈틈마저도 오히려 여유가 있다. 고요한 큰 지혜는 맑고 담백하며 묵묵한 참된 근기는 그윽하고 깊다. 삼공三空210)을 물로 깨끗이 하고 사대四大(지地, 수水, 화火, 풍風)를 향으로 적시며 무루無漏의 법을 듣고 유위有爲의 티끌을 씻었다. 하물며 걸림이 없는 비밀한 가르침은 그 도가 크니, 원래부터 전해지는 오묘한 도를 얻어 우리 고장을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대사가 바로 그분이다. 법명은 영기永奇이고 호남 고부古阜 사람이다. 속성은 정씨鄭氏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우복愚伏211)이 곧 그의 조상이다. 부친의 휘는 언규彦奎이고 어머니는 반씨潘氏인데, 한 도인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고 그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서 남과 달랐는데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나이 14세에 형과 함께 한양으로 가는 길에 삼각산 승가사僧迦寺로 가서 대연大演 노숙老宿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여러 곳을 찾아가 배웠으며 정원사淨願社에서 깃발을 세우고 이끌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입적할 때까지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이야기로 신출귀몰하였다. 하지만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샘물을 길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지금은 사람들의 귀를 쫑긋하게 할 것만 간추려 적을 뿐이다.
임자년(1852)에 보개산寶盖山 지장암地藏庵에 들어가 성상省常212)의 고사故事에 의거해 『미타경』을 필사하였다.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부처를 세 번 일컫고 세 바퀴를 돌고 세 차례 절을 하였으니, 이는 모두 자비의 서원(悲願)에서 나온 것이고 또 사은四恩213)에 보답하는 공덕이었다. 밤에 붓을 잡는 꿈을 꾸고 채색 깃발을 감응해 얻었다. 계축년(1853) 여름에 삼각산으로 들어가 경판經板을 판각하고, 이어서 『십육관경十六觀經』과 『연종보감蓮宗寶鑑』을 간행하여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 보관하였다.

0001_0133_a_01L
海東朝鮮國寶盖山石臺庵南湖律師開刊華嚴碑銘并序

0001_0133_a_02L
輔國崇祿大夫兼史曹判書李宜翼識
 漢南居士菊下李恒億篆額
 
0001_0133_a_03L沁陽散人李化來書

0001_0133_a_04L
明心見性釋氏學也而心與性放之則宇宙猶狹卷之則隣虛猶寬閒閒
0001_0133_a_05L之大智澹泊默默之眞機玄奧氷潔 [362] 三空香沾四大聽無漏之法濯有物
0001_0133_a_06L之產 [363] 矧乃无碍秘宗道則大矣以得原傳妙道廣耀吾鄉豈異人哉大師
0001_0133_a_07L是也法名永奇湖之南古阜人也俗姓鄭氏系出晉州愚伏卽其鼻祖也
0001_0133_a_08L考諱彥奎母潘氏夢一道人騎馬渡江因有娠生而俊异早失恬恃年十
0001_0133_a_09L與兄將歸漢陽之三角之僧迦寺大演老宿祝髮遊學諸氏 [364] 竪幢於淨
0001_0133_a_10L願之社以導之自朵洎滅奇蹤秘說神出鬼沒短綆不能撮今其聳人耳
0001_0133_a_11L而已
壬子入寶盖地藏庵 [365] 省常故事寫彌陁經每字三稱佛三繞三拜
0001_0133_a_12L盡是悲願中流出亦乃報答四恩之功矣折筆夜夢感得彩幡自西分四
0001_0133_a_13L癸日 [366] 入三角刊其板繼刊十六觀經蓮宗寶鑑藏之水落山興國寺

0001_0134_a_01L을묘년(1855) 봄에는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여러 동지들과 시주를 권면하는 화연化緣을 모집하여 『소초화엄경䟽鈔華嚴經』 18권과 『별행別行』 1권, 『준제천수합벽準提千手合璧』 1권, 『천태삼은시집天台三隱詩集』을 판각하고, 새로 판전板殿을 지어 봉안하였다. 판전의 편액은 시랑侍郎 김추사金秋史(김정희)가 썼다. 당시 서울 지역 대덕大德들이 다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고, 내탕內帑의 하사금이 많았으며 진신縉紳(관리)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부원군 홍공洪公 재룡在龍은 왕명을 받들어 책임을 맡았다.
경신년(1860)에 석대石臺에서 쉬며 머물다가 산봉우리의 빼어남과 영험하고 성스러운 자취에 기뻐하며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 암자를 다시 세우고 『지장경地藏經』과 『관심론觀心論』을 판각하면서 육시六時의 정근精勤을 중단하지 않았다. 임술년(1862)에 심도沁島에 이르러 무차회無遮會214)를 10일 동안 열고 수륙재水陸齋의 이로움을 더하였다. 을축년(1865)에는 해인사의 대장경大藏經 2질을 인출하여 명산名山에 봉안하기 위해 설악산 오세암五歲庵과 오대산五臺山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가는데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가노라니 상서로운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고 신령한 거북이가 앞뒤에서 따랐다. 봉안을 마치고 200일 동안 끊임없이 수행에 힘쓰면서 꿈에서 본 25칙則을 기록하였으니 모두 정성들여 집중하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간혹 용으로 변해 옥우玉雨를 내리기도 하고 혹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기거동작과 제법諸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없어지고, 혹은 팔괘八卦를 한 짐 실었다고도 하며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215)을 짐에 더하였다고 한다. 혹은 달 속 계수나무의 푸르고 연한 가지를 들어서 먹었다고 하며, 또 꿈속에 석벽 속으로 넘어 들어가니 왼쪽 벽에 ‘구성범九聖梵’이라는 글자가 있고 글자에는 둥근 빛이 비추는데, 단정한 부인婦人이 범자梵字 속에서 나와서 손을 잡고 아들을 위로하듯 하더니 다시 글자 속으로 들어가 숨고는 보이지 않았다. 대사가 감응함이 있어 거처하는 방에 준제보살凖提菩薩을 모셨다.
임신년(1872)에 심원사深源寺의 삼전三殿과 갈래보탑葛來寶塔216)을 개수하면서 그 일을 맡아서 다스렸는데 병이 나자 탄식하면서, “덧없는 몸이 병치레가 많아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이 무익하다.”라고 하고 곡기를 끊더니, 9월 22일에 입적하였다. 또 문인들에게 숲속의 짐승들에게 시신을 던져주고 싶다고 말하였는데 반응이 없자 큰 한숨을 쉬며 ‘나라의 풍습이도다.’하고 말을 마치더니 운명하였다. 세수는 53세, 법랍은 39년이었다.

0001_0134_a_01L卯春至廣州奉恩寺與諸仝志鳩緣刻䟽鈔華嚴經十八卷別行一卷
0001_0134_a_02L提千手合璧一卷天台三隱詩集新建經 [367] 藏之殿額金侍郎秋士筆也
0001_0134_a_03L域中大德咸造在會入帑 [368] 優賜縉紳奔波府院君洪公在龍奉 命爲司
0001_0134_a_04L存焉
庚申憩足于石臺喜峯巒之秀靈聖之跡爲久住計重建庵刻地藏
0001_0134_a_05L觀心論六時精勤無替壬戌到沁島開無遮會十日夜利益水陸乙丑
0001_0134_a_06L印海印大藏二帙藏之名山雪岳之五歲五臺之寂滅自東萊航海達之
0001_0134_a_07L祥颷徐動靈龜後先奉安訖二百日精勤▼(言+生)▼(言+生)紀夢二十五則皆精力中
0001_0134_a_08L出來
或化龍住玉雨或行住坐臥至諸法皆寂滅或有云載八卦於一駄
0001_0134_a_09L以日月燈明佛加駄或月中桂青軟一枝舉而食之又夢跋入石壁間
0001_0134_a_10L壁有九聖梵字字有圓光端正婦人從梵字中出執手慰之如子還入字
0001_0134_a_11L隱而不現師感之所居室奉凖提菩薩
壬申改修深源三殿葛來寶塔
0001_0134_a_12L經紀其事疾作嘆曰幻軆多病住世无益仍絕粒九月二十二日示寂
0001_0134_a_13L告門人曰欲投林獸無以應太息曰國風言訖逝壽五十三僧臘三十九

0001_0135_a_01L아! 대사는 속뜻이 깊은 사람이었다. 계율을 잘 지키고 말세를 부지하려 하였으니 이 또한 근실하였다. 문인인 상정爽淨·두흠斗欽·유담宥淡 등 여러 상인上人이 그의 공적이 사라져버리면 후진을 일으키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화엄경전華嚴經殿 옆에다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事佛如親     부처 섬기기를 어버이 같이 하셨으니
淨業217)穹崇    청정한 평생 사업 매우 숭고하도다
誰回狂瀾218)    누가 광란의 물결을 되돌릴 것인가
毘尼219)之宗    비니220)에서 으뜸이셨도다
吁嗟護法     아, 불법을 지키심이여
人中之龍     사람 중에 용이라 하리로다
25. 원증국사탑명 圓證國師塔銘
고려국高麗國 국사國師 대조계사조大曹溪嗣祖 전불심인傳佛心印 행해묘엄行解妙嚴 비지원융悲智圓融 찬리왕화贊理王化 부종수교扶宗樹敎 대원보제大願普濟 일국대종사一國大宗師 마가실다라摩訶悉多羅 이웅존자利雄尊者 시諡 원증圓證 탑명塔銘 병서幷序
추충보절推忠保節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신臣 이색李穡 전교傳敎를 받들어 비문碑文을 짓고,
전봉익대부前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 신臣 권주權鑄 전교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아울러 단전액丹篆額을 쓰다.
주상이 즉위하신 지 11년이 되는 해 정월 10일에 좌대언左代言 신臣 중용仲容이 전한 교지敎旨에서는, “국사國師인 태고太古의 부도탑에 그대가 비명碑銘을 짓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국사의 휘는 보우普愚,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홍씨洪氏이고 홍주洪州 사람이다. 부친의 휘는 연延이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리병부사判吏兵部事

0001_0135_a_01L師有心人也尊戒律持衰世其亦勤矣門人爽淨斗欽宥淡諸上人
0001_0135_a_02L烟滅其跡無以起後進樹碑華嚴經殿傍銘曰
事佛如親淨葉 [369] 穹崇誰回
0001_0135_a_03L汪瀾 [370] 鬼尼 [371] 之宗吁嗟護法人中之龍

0001_0135_a_04L○圓證國師塔銘

0001_0135_a_05L
高麗國國師大曹溪嗣祖傳佛心印行解妙嚴悲智圖融贊理王化
0001_0135_a_06L宗樹教大願普濟一國大宗師摩訶悉多羅利雄尊者諡圓證塔銘
0001_0135_a_07L并序

0001_0135_a_08L
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三重大匡韓山府院君領藝文春秋舘事
0001_0135_a_09L李 穡奉 教撰
前奉翊大夫判典校寺事進賢舘提學臣權 鑄
0001_0135_a_10L教書丹并篆額

0001_0135_a_11L
上之十一年正月十日左代言臣仲容
0001_0135_a_12L旨若曰國師太古浮屠汝其銘之臣謹案 [372] 國師諱普愚號太古俗姓洪
0001_0135_a_13L洪州人也考諱延贈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下侍中判史兵部事

0001_0136_a_01L홍양공洪陽公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정씨鄭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이 둥근 해가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대덕大德 5년 신축년(1301) 9월 21일에 국사를 낳았다. 국사는 어린 나이에 총명함이 남달리 뛰어났다. 13세 때 회암사檜巖寺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고, 19세에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였다. 원통元統 계유년(1333)에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에서 지내는데 하루는 의심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자 8구句의 송頌을 지었는데, “불조佛祖와 산하山河를 입도 없이 모두 삼켜 버렸구나.”가 그 결구結句이다. 그 뒤 지원至元 정축년(1337)은 대사의 나이 37세였는데, 그해 겨울에 전단원栴檀園에서 안거安居하면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1월 7일 5경更에 활짝 뚫리듯 큰 깨달음을 얻어 8구의 게송을 지었으니, “뇌관牢關(우리의 빗장)을 타파하고 나니 맑은 바람이 태고적부터 불어온다.”는 것이 결구이다. 3월에 양근楊根의 초당草堂으로 돌아와 부모를 모셨다.
국사는 일찍이 공안公案 1700칙則을 보다가 ‘암두밀계巖頭密啓’의 부분에 이르러 막혀서 넘어가지 못하였다. 얼마 후 문득 막힌 것을 깨뜨리고 냉소하며 한마디 하기를 “암두巖頭는 비록 활을 잘 쏘지만 이슬에 옷이 젖는 줄 깨닫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신사년(1341) 봄에 한양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머물면서, 동봉東峯에다 암자를 짓고 편액扁額을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그곳에서 영가체永嘉體를 본떠서 노래 한 편을 지었다. 지정至正 병술년(1346)에 국사의 나이 46세 때에 원元나라 연도燕都로 유학을 가서 천축天竺의 원성源盛 선사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았으나 이미 입적한 후였다. 다시 호주湖州의 하무산霞霧山으로 가서 석옥 청공石屋淸珙 선사를 뵙고 자신이 체득한 바를 모두 아뢰고 태고암가太古庵歌도 바치자 석옥이 큰 법기法器로 여기고 일용사日用事를 물었다. 국사가 답을 마치고 천천히 다시 여쭙기를 “이 밖에 또 다시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석옥이 이르기를 “노승도 이러했고 삼세三世의 불조佛祖도 이러했다.”라고 하고, 드디어 가사袈裟를 신표信表로 주며 이르기를 “노승이 오늘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석옥은 임제臨濟의 18대 법손이었다. 국사가 그곳에서 반 달가량 머물고 작별할 때 주장柱杖을 주면서 “길을 잘 가게. 잘 가게.”하고 당부하였다. 국사가

0001_0136_a_01L洪陽公妣鄭氏贈三韓國大夫人夫人夢日輪入懷旣而有娠以大德
0001_0136_a_02L五年辛丑九月二十一日生師師成童穎悟絕倫十三投檜巖廣智禪
0001_0136_a_03L師出家十九叅萬法歸一話充統癸酉寓城西甘露寺一日疑團剝落
0001_0136_a_04L作頌八句佛祖與山河無口悉吞却其結句也後至元丁丑師年三十
0001_0136_a_05L冬寓栴檀園參無字話明年正月初七日五更豁然大悟作頌八句
0001_0136_a_06L打破牢關後清風吹太古其結句也三月還楊根草堂侍親也
師嘗看
0001_0136_a_07L千百則至巖頭密啟處過不得良久忽然捉敗冷笑一聲云巖頭雖善
0001_0136_a_08L不覺露濕衣辛巳春住漢陽三角山重興寺卓菴於東峯扁太古
0001_0136_a_09L永嘉體作歌一篇至正丙戌師年四十六遊燕都聞竺源盛禪師在南
0001_0136_a_10L往見之則逝矣至湖州霞霧山見石屋珙禪師具陳所得且獻太古
0001_0136_a_11L菴歌石屋深噐之問日用事師荅訖徐又啟曰未審此外還更有事否
0001_0136_a_12L石屋云老僧亦如是三世佛祖亦如是遂以袈裟表信曰老僧今日展
0001_0136_a_13L脚睡矣屋臨濟十八代孫也留師半月臨別贈以柱杖曰善路善路

0001_0137_a_01L절하고 다시 연도燕都로 돌아오니 국사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천자天子가 이를 듣고 영녕사永寧寺에서 개당開堂 법회를 청하면서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침향목沈香木 불자拂子를 하사하였고, 황후와 황태자는 향과 폐물을 내렸으며, 왕공王公과 사녀士女들도 분주하게 예배드렸다.
무자년(1348) 봄에 고려로 귀국하여 미원현迷源縣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봉양하였다. 임진년(1352) 여름에 현릉玄陵(공민왕)이 국사를 왕도王都로 부르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어 더욱 간절히 청하므로 국사가 나갔다가 가을에 애써 사양하고 산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뒤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다. 병신년(1356) 3월에 국사를 초청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법회를 열자, 선사와 강사들이 모두 모였다. 현릉도 친히 법회에 행차하여 가득 수놓은 가사와 수정 염주, 그 밖의 입고 쓸 것들을 헌사하였다. 국사가 법좌에 올라 종지宗旨를 천양하였는데, 천자天子가 잡색雜色 비단 가사 3백 벌을 이날 참가한 선과 교의 석덕碩德들에게 나누어 주니 법석의 성대함이 예전에 있지 않았다. 국사가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현릉이 이르기를 “대사가 내게 머물지 않으면 도리를 어기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4월 24일에 왕사王師로 봉하고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여 관속과 정3품 장관을 두니 지극히 존숭한 것이다.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왕사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대사가 밤에 달아나버렸다. 현릉이 스님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법복法服·인장印章 등을 모두 처소로 보내주었다.
임인년(1362) 가을에 양산사陽山寺에서 머물기를 청하고, 계묘년(1363) 봄에는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기를 청하자, 국사는 모두 왕명에 따랐다. 병오년(1366) 10월에 왕사 직위를 사임하고 인장印章을 봉하여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본성에 따라 수양하겠다고 거듭 빌자 현릉玄陵이 따랐으니 신돈辛旽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앞서 국사가 상소하여 신돈을 논박하기를,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정한 승려가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간사한 승려가 그 때를 만납니다. 원컨대 상께서는 이를 살펴서 신돈을 멀리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368) 봄에 전주

0001_0137_a_01L拜受迴至燕都道譽騰播
0001_0137_a_02L天子聞之請開堂于永寧寺賜金襴袈裟沉香拂子
0001_0137_a_03L皇后 皇太子降香幣王公士女奔走禮拜
戊子春東歸入迷源小雪山
0001_0137_a_04L躬耕以養者四年歲壬辰夏 玄陵邀師不應再遣使請益勤師乃至
0001_0137_a_05L力辭還山未幾日辛亂作丙申三月請師法于奉恩寺禪教具集
0001_0137_a_06L玄陵親臨獻滿綉袈裟水精念珠及餘服用師陛座闡揚宗旨
0001_0137_a_07L天子賜雜色段疋袈裟三百領是日分賜禪教頌德法筵之盛古所未有
0001_0137_a_08L師請還山 玄陵曰師不留我倍道矣四月二十四日封爲王師立府
0001_0137_a_09L曰圓融置寮屬長官正三品尊崇之至也留居廣明寺明年辭位不允
0001_0137_a_10L師夜遁 玄陵知師志不可奪悉送法服印章于師所
壬寅秋請住陽
0001_0137_a_11L山寺癸卯春請住迦智寺師皆應命丙午十月辭位封還印章仍乞任
0001_0137_a_12L性養眞 玄陵從辛盹用事故也先是師上書論盹曰國之治眞僧得
0001_0137_a_13L其志國之危邪僧逢其時願 上察之遠之宗社幸甚戊申春寓全州

0001_0138_a_01L보광사普光寺에 머물렀는데, 신돈이 국사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고 온갖 계책을 꾸몄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국사가 중국의 강절江浙 지방으로 유학을 가려 하자, 신돈이 현릉에게 고하기를 “태고太古는 은혜를 입은 것이 지극합니다. 안거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것이 그의 직분일 터인데, 지금 멀리 유학을 떠나려 하니 필시 다른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주상께서 더욱 살피소서.”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불안하여 현릉이 부득이 따랐다. 신돈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궁하고 국사의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어 속리사俗離寺에 가두었다. 기유년(1369) 3월에 현릉이 후회하고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신해년(1371) 7월에 신돈이 죽임을 당하자, 현릉은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고 국사로 책봉하고 영원사瑩源寺에 주석하기를 청하였으나, 국사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전지傳旨를 내려 멀리서나마 사찰의 일을 다스리게 한 것이 무려 7년이었다.
무오년(1378) 겨울에 금상(우왕禑王)의 명을 받아 비로소 영원사에 가서 1년을 지내다가 돌아갔다. 신유년(1381) 겨울에 양산사陽山寺로 옮겨 사원에 들어가는 날에 왕이 다시 국사로 책봉하였으니, 선군先君(공민왕)의 뜻이었다. 임술년(1382) 여름에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17일에 가벼운 병세를 느끼고 23일에 문인門人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일 유시酉時(오후 5시-7시)에 나는 떠날 것이다. 군郡의 지사知事에게 청하여 봉인封印토록 하라.”하고, 말로 전하여 세상을 하직하는 글 몇 통을 적었다. 때가 이르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단정히 앉아 임종게臨終偈 네 구句를 설하다가 목소리가 끊기더니 입적하였다. 부음이 국왕에게 전달되자 임금은 매우 슬퍼하였고, 계해년(1383) 1월 12일에 다비하는데 향을 하사하였다. 그날 밤 밝은 빛이 하늘에 뻗쳤고 사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 100과를 대궐에 올리니 상이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원증圓證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우고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였다. 석종石鍾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한 것이 세 곳이니, 가은加恩의 양산사陽山寺와 양근楊根의 사나사舍那寺와 이 절의 부도 옆에 서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석탑을 만들어 보관한 곳은

0001_0138_a_01L普光寺旽必欲置師死地百計莫能中後以師將遊江浙白 玄陵曰
0001_0138_a_02L太古蒙恩至矣安居送老是渠職也今欲遠遊必有異圖請上加察
0001_0138_a_03L言甚急 玄陵不得已從之旽下其事推訊誣服師之左右錮于俗離
0001_0138_a_04L己酉三月 玄陵悔之請還小雪辛亥七月旽誅
0001_0138_a_05L玄陵遣使備禮進封國師請住瑩源寺師以疾辭有 旨遙領寺事凡
0001_0138_a_06L七年
戊午冬被今
0001_0138_a_07L上命始至寺居一年而還辛酉冬移陽山寺入院之日 上再封國師 
0001_0138_a_08L先君之思也壬戌夏還小雪冬十二月十七日感微疾二十三日召門
0001_0138_a_09L人曰明日酉時吾當去矣可請知郡封印口占辭世狀數通時至沐浴
0001_0138_a_10L更衣端坐說四句偈聲盡而逝訃聞于 上上甚悼癸亥正月十二日
0001_0138_a_11L降香茶毗其夜光明屬天舍利無算進百枚于 內 上益敬重焉
0001_0138_a_12L攸司諡曰圓證樹塔于重興寺之東峯曰寶月昇空作石鍾藏舍利者
0001_0138_a_13L凡三所加恩陽山楊根舍那是寺浮圖之傍所立是已作石塔以藏之

0001_0139_a_01L미원현의 소설암이다.
신臣 이색李穡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건대, 선왕께서 불교를 숭신함이 지극하다 하겠으나 그 사이에 참언이 횡행하였고, 태고太古가 불교를 떠받치고 가르침을 지킨 것이 또한 지극하다 하겠으나 환란이 그의 몸에 미쳤습니다. 이는 인연의 과보 때문이니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명성이 중국에까지 멀리 퍼지고 사리의 빛이 과거와 현재를 비추니 일생에 어찌 많이 볼 수 있겠는가. 신 이색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명銘을 짓는다.

惟師之心     생각건대 국사의 마음은
海闊天臨     드넓은 바다요 끝없는 하늘이며
惟師之跡     생각건대 국사의 발자취는
浮杯飛錫     물에 뜬 잔이요 떠도는 석장이로다
歸而遇知     돌아와 지우를 만나시니
王者之師     임금의 스승이 되었고
躬耕小雪     소설암에서 몸소 밭을 갈았으니
隱現維時     은둔했다 나옴을 때맞춰 하셨네
時維鷲城     이때 취성(신돈)이 있어
竊弄刑名     제멋대로 형벌을 내렸으나
如雲蔽日     구름이 잠시 해를 가린 것과 같아
何損於明     광명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었네
月墜崐崘     달이 곤륜산으로 져도
餘光之存     남은 달빛이 유지되니
舍利晶瑩     사리舍利가 밝게 빛나며
照耀王門     임금 계신 문까지 환히 비추었네
惟三角山     오직 삼각산은
翠倚雲端     비췻빛 구름 끝에 기울어
樹塔其下     그 아래에 탑을 세우니
與國恒安     나라와 더불어 언제나 평안하리다
惟師之風     생각건대 국사의 풍모가
播于大東     대동大東에 널리 퍼졌으므로
臣拜作銘     신이 절하고 이 명을 짓노니
庶傳無窮     영원무궁토록 전해지길 바라네

홍무洪武 18년 을축년(1385) 9월 11일
문인門人 전前 송광사松廣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석굉釋宏이 비석을 세우다.
 문도門徒
국사國師     지웅존자智雄尊者     혼수混脩
왕사王師     원응존자圓應尊者     찬영粲英

0001_0139_a_01L迷源小雪也
竊伏惟念
0001_0139_a_02L先王崇信釋教可謂極矣而讒說行乎其間太古扶持宗教亦可謂至矣
0001_0139_a_03L而患難及于其躬此所以因緣果報雖聖人有所不能免也歟至於聲
0001_0139_a_04L名洋溢華夏舍利照曜古今代豈多見哉臣檣再拜稽首而銘曰

0001_0139_a_05L
 惟師之心 海闊天臨 惟師之跡 浮杯飛錫 歸而遇知 王者之師
0001_0139_a_06L 躬耕小雪 隱現維時 時維鷲城 竊弄刑名 如雲蔽日
0001_0139_a_07L 何損於明 月墜崐崘 餘光之存 舍利晶瑩 照耀王門 惟三角山
0001_0139_a_08L 翠倚雲端 樹塔其下 與國恒安 惟師之風 播于大東
0001_0139_a_09L 臣拜作銘 庶傳無窮

0001_0139_a_10L
洪武十八年乙丑九月十一日

0001_0139_a_11L門人前松廣寺住持大禪師釋宏立石

0001_0139_a_12L
門徒

0001_0139_a_13L國師智雄尊者  混脩 王師圓應尊者    粲英

0001_0140_a_01L내원당內願堂   묘엄존자妙嚴尊者     신이神異
내원당內願堂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원규元珪
도대선사都大禪師 광화군廣化君       현엄玄嚴
 대선사大禪師
수서守西   단굉袒宏 자소慈紹 선진旋軫 일영一寧
정유定柔   상총尙聰 혜렴惠廉 혜심慧深 경돈慶敦
등 90인

 선사禪師
신규信規   참교旵皎 덕제德齊 의경義瓊 수윤壽允
내유乃由   내규乃圭 성잠省岑 천긍天亘 유창惟昌
등 107인

 운수雲水
법공法空   정유定乳 환여幻如 달생達生 성명省明
중철中哲   복남卜南 정일定一 조행祖行 성인省因

0001_0140_a_01L內願堂妙嚴尊者 袒 [373] 異 內願堂國一都大禪師 元珪

0001_0140_a_02L都大禪師廣化君 玄嚴

0001_0140_a_03L大禪師

0001_0140_a_04L守西 袒宏 慈紹 旋軫 一寧

0001_0140_a_05L定柔 尙聰 惠廉 慧深 慶敦

0001_0140_a_06L等九十人

0001_0140_a_07L禪師

0001_0140_a_08L信規 旵皎 德齊 義瓊 壽凡 [374]

0001_0140_a_09L乃由 乃圭 省岑 天亘 惟昌

0001_0140_a_10L等百七人

0001_0140_a_11L雲水

0001_0140_a_12L法空 定乳 幻如 達生 省明

0001_0140_a_13L中哲 卜南 定一 祖行 省因

0001_0141_a_01L법자法慈   법순法淳 달심達心 희엄希儼 명회明會
각명覺明   선견善見 희오希悟 가신可信 가생可生
지천止川   설잉雪仍 선정宣正 가운可雲 가인可印
설상雪祥   설강雪岡 설사雪思 설류雪柳 요환了幻
설진雪珍   가송可松 가순可淳 내령乃寧 약무若无
등 1003인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환尹桓
영삼사사領三司事     이인임李仁任
판문하判門下       최영崔瑩
문하시중門下侍中     임견미林堅味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성계李成桂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림李琳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廉興邦
찬성사贊成事       우인열禹仁烈
연흥군延興君       박형朴形
개성군開城郡       왕복명王福命
문하평리門下評理     반익순潘益淳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민李仁敏
김해군金海君       김사행金師幸
밀산군密山君       박성량朴成亮
지신사知申事       염정수廉廷秀
전공판서典工判書     최경만崔敬萬
김해부사金海府使     이희계李希桂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
비구니比丘尼       묘안妙安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인귀金仁貴

0001_0141_a_01L法慈 法淳 達心 希儼 明會

0001_0141_a_02L覺明 善見 希悟 可信 可生

0001_0141_a_03L止川 雪仍 宣正 可雲 可印

0001_0141_a_04L雪祥 雪岡 雪思 雪柳 了幻

0001_0141_a_05L雪珍 可松 可淳 乃寧 若无

0001_0141_a_06L等千三人

0001_0141_a_07L漆源府君尹   桓  領三司事李  仁任 判門下崔  瑩

0001_0141_a_08L門下侍中林   堅昧 守門下侍中李 成林 判三司事李 成桂

0001_0141_a_09L鐵城府院君李  琳  三司左使廉  與 [375] 邦 贊成事禹  仁烈

0001_0141_a_10L延興   朴  形  開城君王   福命 門下評理潘 益淳

0001_0141_a_11L政堂文學李   仁敏 金海君金   師幸 密山君朴  成亮

0001_0141_a_12L知申事廉    廷秀 典工判書崔  敬萬 金海府使李 希桂

0001_0141_a_13L三韓國大夫人李氏   比丘尼妙安     典工判書金 仁貴
  1. 1)역자주 : ‘비보(裨補)’란 ‘약하거나 모자란 것을 도와서 보태거나 채운다’는 뜻이다. 한편 사찰의 배치와 창건을 비보사상(裨補思想)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가령 비보사사(裨補寺社)는 태조(太祖)에 의해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위해 형성된 관념이다. 고려 태조 대의 산천순역(山川順逆)을 참고하여 수도와 지방 사원을 정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고, 국가의 불교 의례를 주관한다는 점에서 국가 사원으로 관리되었다. 이후 조선 시기 국가 이념이 달라짐에 따라 국가기관으로서 비보사원의 위상과 기능은 상실하였다.(한기문, 「高麗時代 裨補寺社의 成立과 運用」, 『한국중세사연구』 21, 한국중세사학회, 2006. 참조)
  2. 2)역자주 : 사찰에 있는 건물(建物)을 총칭한 것. 당(堂)은 불상을 봉안한 법당과 같은 건물, 탑(塔)은 석가의 유골이나 유물을 안치한 장소 혹은 탑과 같은 건축물, 가람(伽藍)은 승려가 모여서 수행하는 장소를 통칭한다.
  3. 3)역자주 : 설총(薛聰)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 시대에 출생하여 강수(强首, ?~?), 최치원(崔致遠, 857~?)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 우리말을 표현하는 차자(借字) 표기법 즉, ‘이두(吏讀)’를 정리하고 체계화시켰다. 한편 이두로 표기된 불교 관련 자료들은 주로 조성기, 조상기, 발원문 등의 금석문 자료이다. 이 가운데 신라시대 이두 자료에는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 755년)’를 비롯하여 ‘갈항사석탑명(葛項寺石塔銘, 758)’, ‘영태이년명석비로자나불조상기(永泰二年銘石毘盧遮那佛造像記, 766년)’ 등이 알려져 있다.
  4. 4)역자주 : 임사(臨寫)는 원본(原本) 혹은 본보기가 되는 모범(模範)을 보고 글자나 그림을 그대로 베끼는 것을 말한다.
  5. 5)역자주 : 1911년에 수집된 자료는 상·하 2권 분량으로 경기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 함경남도의 순서로 10개 지역을 수록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2개 지역의 자료는 이때 수록되지 못했다. 이 두 지역의 자료는 이후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불교학보』의 1964년과 1966년 간행물에 부록으로 수록되었고, 본 번역에는 12개 지역이 다 포함되었다.
  6. 6)4년 : 고려 인종 때의 을사년은 1125년이며 즉위 3년이 되는 해이므로 4년은 오류이다.
  7. 7)김부식金富軾 : 고려 시대의 학자, 정치가(1075~1151).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이다.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1145년에 『삼국사기』를 완성하였다.
  8. 8)영통사靈通寺 : 1027년(현종 18)에 창건하였으며, 1036년(정종 2)에 왕이 자식 넷이 있을 경우에는 한 자식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법을 제정한 뒤 이 절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경률經律을 익히는 한편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만들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1065년에 이 절에서 출가하였고, 그의 입적 후인 1125년(인조 3)에는 비를 이 절에 건립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이 절에서 많은 참배를 갖게 되었다. 인종을 비롯하여 영종·신종·충렬왕·충선왕·공민왕 등은 자주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하였을 뿐 아니라 이 절과 인연이 깊은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진영각을 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이 많이 개설되었다.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2002년 11월 대한민국의 대한불교천태종 교단과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함께 복원사업에 착수하여 2005년 10월 2만여 평의 부지에 29개의 전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9)징관법사澄觀法師(?~839) : 당나라 승려로 화엄종의 제4조이다. 자는 대휴大休, 속성은 하후夏侯. 월주 산음 사람인데, 청량산에 있었으므로 청량 대사라라고도 하였다. 11세 패선씨霈禪氏를 섬기고, 14세 승려가 됨. 계율을 성선사醒禪師와 담일曇一에게, 삼론종을 현벽玄璧에게 『기신론』·화엄종을 법장法藏과 법선法詵에게, 천태종을 잠연湛然에게, 남종선을 유충惟忠과 도흠道欽에게, 북종선北宗禪을 혜운慧雲에게 배우고 불교의 교학과 내외의 학예學藝를 폭넓게 연구하였다. 특히 5교의 교판을 확실히 하며, 4종 법계의 성기설性起說을 대성大成하였다. 796년(당 정원 12) 반야 삼장이 40권 『화엄경』을 번역하는 데 참여하고, 뒤에 그 『소疏』 10권을 지었다. 839년(당 개성 4)에 나이 102세로 입적. 또는 원화 때(806~820)에는 나이 70여 세로 입적하였다고도 함. 저서로는 『화엄경주소華嚴經註疏』·『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화엄경강요華嚴經綱要』·『화엄현담華嚴玄談』·『화엄약의華嚴略義』·『법계현경法界玄鏡』·『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 등 4백여 권이 있다. 『불교사전』
  10. 10)현수賢首(643~712) : 중국의 승려로 화엄종의 제3조이다. 조상은 강거康居 사람이며, 조부 때 중국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는 향상香象, 이름은 법장法藏이며 속성은 강씨康氏이다. 17세에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경론을 연구하고, 다시 낙양 운화사에서 지엄智儼에게 『화엄경』을 들었다. 26세 지엄이 죽은 뒤에 그 법을 깊이 수호하고, 28세에 칙명으로 출가하여 여러번 『화엄경』을 강하였으며, 53세 때에 인도 스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에서 『화엄경』 범본梵本을 가지고 와서 번역할 때 그 필수筆受를 맡아 5년만에 마치니, 이것이 『팔십화엄경』이다. 699년 10월에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청으로 불수기사에서 새로 번역된 『화엄경』을 강하여, 현수라는 호를 받았다. 당 선천 1년 11월 장안 대천복사에서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20권,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3권, 『화엄지귀華嚴旨歸』·『유심법계기遊心法界記』·『금사자장金獅子章』·『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등이 있다. 『불교사전』
  11. 11)정원淨源 : 북송의 승려이다. 호는 잠수潛叟, 자는 백장伯長이며 진강 사람이다. 구족계를 받고, 『화엄경』을 오대산 승천承遷에게 배우고, 『합론』을 횡해의 명단明單에게 배웠으며 『기신론』·『능엄경』·『원각경』을 자선子璿에게 배웠다. 고려 의천(義天의 금서화엄(金書華嚴 3역본(譯本 180권을 받아서 장경각을 짓고 봉안하였으며, 1088년(원우 3)에 나이 78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는 『망진환원관소초보해妄盡還源觀疏鈔補解』 1권과, 『원인론발미록原人論發微錄』 1권이 있다.
  12. 12)현장玄奘(622~664) : 당나라 승려이다. 속성은 진씨陳氏이고, 속명은 위褘이며 낙주洛州 구씨현緱氏縣 사람이다. 12세에 낙양 정토사에서 출가하여, 혜경慧景·도기道基·보천寶遷·법상法常·승변僧辨·도심道深·도악道岳·엄법사嚴法師·진법사震法師 등에게서 『열반경』·『섭론』·『발지론』·『비담론』·『구사론』·『성실론』 등을 수학하였다. 629년 당나라 정관 3년에 고창高昌·구자국龜玆國 등을 지나서 총령을 넘어 인도에 들어가 여러 곳의 성적聖蹟을 두루 참배하고 고승 대덕들을 찾아서 불교와 아울러 학문 예술을 연구하였다. 특히 나란타사의 계현戒賢에게서 『유가론』·『인명론』·『구사론』 등을 5년 동안 학습하고, 마침내 온 인도의 유력遊歷을 마치고, 우전국 등 여러 나라를 지나서 645년 1월 장안에 돌아왔다. 당 인덕 1년 2월 대자은사에서 63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은 역사가들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3. 13)의상義湘(625~702) : 신라의 승려이다. 속성은 김씨이고, 2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당나라의 불교가 성함을 듣고, 650년 원효와 함께 중국에 가려고 요동까지 가서, 원효는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달아 돌아오고, 그는 당나라에 가서, 처음 양주에 있다가 662년 종남산 지상사 지엄智儼에게서 현수顯首와 함께 『화엄경』을 연구하였다. 신라의 사신 김흠순金欽純을 당나라가 잡아두고 신라를 치려 하자, 그가 670년에 본국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알렸다. 676년 문무왕16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현수가 『화엄수현기華嚴搜玄記』를 짓고 부본副本을 보내면서 편지한 것이 지금 전해 오고 있다. 저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대화엄십문간법관大華嚴十門看法觀』·『괄진일승추요』·『천세구경』·『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 등이 있다. 성덕왕 1년 나이 78세로 입적하였다.
  14. 14)양걸楊傑 : 생몰년 미상이다. 송나라 무위주無爲州 사람이다. 자는 차공次公, 호는 무위자無爲子이다. 신종神宗 말년에 태상太常)로서 예악禮樂의 일을 의논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예부 시랑 범진范鎭과 논의가 맞지 않았다. 저서로 『무위집無爲集』, 『악기樂記』 등이 전한다.
  15. 15)혜사惠思(515~577) : 천태종 제2조이며, 남북조南北朝 때 남예주南豫州 무진武津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법화경』만을 전공하고 혜문慧文의 가르침을 받아 일심으로 연구 정진한 공으로 드디어 법화 삼매를 얻었다. 그 뒤에 그의 이름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강력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곳곳에서 『법화경』을 강하다가, 568년 남악에 들어가 강석을 펴고 선양하였다. 도사道士들의 참소함을 여러번 받다가 진陳 대건 9년 6월에 63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대승지관大乘止觀』 2권, 『사십이자문四十二字門』 2권, 『안락행의安樂行儀』 1권, 『남악원문南岳願文』 1권, 『무쟁행문無諍行門』 2권 등이 있다. ⇒남악南嶽 『불교사전』
  16. 16)지의智顗(538~597) : 수나라 승려이다. 천태종의 개조開祖이며, 자는 덕안德安이고, 속성은 진씨陳氏이며, 형주 화용현 사람이다. 18세에 과원사에서 법서法緖에게 출가하여, 혜광惠曠에게 율학과 대승교를 배우고, 560년에 광주 대소산으로 혜사慧思를 찾아가 심관心觀을 받았으며, 30세에 혜사의 명으로 금릉에서 전도하였다. 32세에 와관사에서 『법화경』을 강하였고, 38세에 천태산에 들어가 수선사를 창건하였으며, 『법화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통일하여 천태종을 완성하였다. 나이 60세로 입적하였으며, 저서는 『법화현의法華玄義』·『법화문구法華文句』·『마하지관摩訶止觀』·『관음현의觀音玄義』·『관음의소觀音義疏』·『금광명현의金光明玄義』·『금광명문구金光明文句』·『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䟽』 등 30여 부가 있다. ⇒지자智者·천태대사天台大師 『불교사전』
  17. 17)혜인원慧因院 : 중국 항주杭州에 있다.
  18. 18)능엄소주楞嚴疏主(965~1038) : 송나라 승려이다. 수주 사람으로, 처음 수주홍민秀州洪敏에게 『능엄경』을 배우고, 낭야혜각瑯耶慧覺을 뵙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장수長水에 있으면서 『화엄경』의 뜻을 널리 설파하였다. 당나라 규봉(圭峯) 이후의 고승으로 추앙받았으며 저서로는 『능엄경』·『기신론의 기』에 대한 해석서가 있다. ⇒ 장수 자선長水子璿. 『불교사전』
  19. 19)천길상天吉祥 : 인도 승려로 중국에 와서 흥국사興國寺에 있었다.
  20. 20)미천彌天 : 진晋나라 승려 도안道安을 말한다. 도안이 중국 양양養陽에 있을 적에 재사才士 습착치가 와서 “나는 사해 습착치四海習鑿齒오.” 하니, 도안은 “나는 미천 석도안彌天釋道安이오.”하였다 한다.
  21. 21)척령재원鶺鴒在原 : 『시경』 「상체常棣」에 “척령이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어려울 때 도와주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형제가 급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하여 서로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을 표시한 작품이다.
  22. 22)백이伯夷 : 그의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주무왕周武王 당시에 수양산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 먹고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일컫는다. 『맹자孟子』에 ‘백이와 숙제는 성인 중에서 청백한 이들이다[夷齊聖之淸者]’라는 글이 보인다.
  23. 23)유하혜柳下惠 :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대부. 본명은 전금展禽이고, 자는 계季다. 어질고 덕이 있어서 공자孔子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동생은 도적의 대명사인 도척盜跖이다. 유하柳下는 식읍食邑의 이름이고, 혜惠는 시호諡號이다.
  24. 24)지관止觀 : 지는 끊어버리므로 해탈이고, 관은 지혜이므로 반야이고, 사상은 법신이다. 『역주월인석보』
  25. 25)나옹대사懶翁大師(1320~76) : 고려의 승려로,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당호는 강월헌江月軒. 속성은 아씨牙氏. 영해寧海 사람이다.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공덕산 묘적암에 가서 요연了然에게 출가하다. 요연이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라고 묻자 혜근은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답하므로 요연은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그곳을 떠나서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 원나라 북경에서 지공指空을 뵙고 계오契悟한 바 있었고, 2년 동안 공부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가서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서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았고, 복룡산에서 천암千巖의 선실禪室에 들어 갔으며, 사방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찾은 뒤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의 법의와 불자를 전해받았다. 1371년 왕사가 되고, 대조계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뒤에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여,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낙성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 2 왕명을 받아 밀양의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의 신륵사에서 나이 57세, 법랍 38년으로 입적하였다. 이색李穡이 글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26. 26)천마산天摩山 : 높이 762m. 개성 북부에 있는 개성의 진산이다. 최고봉은 만경대萬鏡臺라 하며, 청량봉淸凉峰·성거산聖居山 등의 암봉이 마치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다 하여 천마산이라 한다. 고려 건국과도 관계가 깊은 산이다.
  27. 27)삼년三年 : 『韓國寺刹全書』에는 ‘二年’으로 되어있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확인할 수 없다.
  28. 28)각성覺性 : 『염헌집恬軒集』 권28 「天磨山大興寺記」에는 ‘洞寬’이 ‘覺性’으로 되어 있어 바로잡았다.
  29. 29)지성수知星宿: 천문과 역법에 정통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0. 30)유위상有爲相 : 갖가지 인연으로 생겨나고 변하는 모든 현상의 모습을 일컫는다.
  31. 31)천마산天磨山 :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810m이다. 광주산맥에 속하며 경춘가도의 마치고개에서 북쪽으로 3㎞ 지점에 있다. 산세가 험하고 조잡하다 하여 예로부터 소박맞은 산이라는 별칭이 있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가 이 산이 매우 높아 손이 석자만 길어도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 하여 천마산(하늘을 만질 수 있는 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32. 32)연우蓮宇 : 사원寺院을 일컫는 말이다.
  33. 33)사산四山 : 원래는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네 개의 산, 즉 북쪽의 백악산白嶽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 동쪽의 타락산駞駱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서울을 멀리 외호外護하는 경기도의 네 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34. 34)지둔支遁(314~366) ; 남북조시대 동진東晉의 승려로, 자는 도림道林이다. 반야般若 계통의 경전을 연구하였고, 그의 공空 해석은 노장老壯의 영향을 받아 ‘즉색의卽色義’라고 한다. 시詩에 능하였으며 사변적 담론인 청담淸談으로도 유명하다.
  35. 35)달마達摩 : 보리달마라고도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인 6세기 초에 활동하여 선종禪宗을 창시한 인물로, 남인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520년 경에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 좌선하고 본래 청정한 마음을 닦는 수행법인 ‘이입사행二入四行’을 주창하였으며 선법을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다.
  36. 36)삼한三韓 : 삼국시대 이전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뜻한다. 마한은 지금의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위치하였고, 진한은 경상도 동북부, 변한은 경상도 서남부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명한 고려는 삼한을 통일하였다고 자부하였다.
  37. 37)삼겸三鉗 : 삼태기 모양의 지형으로 한 곳만 트이고 세 곳이 산으로 둘러 막힌 곳을 가리킨다.
  38. 38)청태淸泰 18년 : 청태는 후당後唐 시대의 연호이며 2년까지였으므로, 고려 태조의 연호인 천수天授 18년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서기로는 935년이다.
  39. 39)구요咎繇 : 순임금 때 형정刑政을 맡아보던 관리로, 순임금을 계승한 우禹임금을 도와 큰 치적을 남겼다.
  40. 40)이제현李齊賢이······지었다 : 문집에는 “태정 3년 병인(1326) 9월 어느 날 동암후인東庵後人 이모李某가 기문을 쓰다(泰定三年丙寅九月日. 東庵後人李某記)”로 되어 있다.
  41. 41)원문 ‘七支案地’는 미상.
  42. 42)전법륜轉法輪 :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법륜法輪이라고 한다. 법륜을 굴린다는 전법륜이라는 용어는 부처의 가르침을 분류하는 교상판석敎相判釋에 널리 사용되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후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사성제四聖諦 등을 설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43. 43)백마사白馬寺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불교의 전래와 관련된 감몽구법感夢求法 설화를 토대로 낙양교외 동쪽 12km 지점에 건설한 사찰이다. 백마사는 전승 및 문헌으로 확인되는 중국 최고最古의 절이기도 하다. 서기 68년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승려가 대월지(아프가니스탄) 경내에서 만난 왕준, 채음蔡愔 등 후한의 사신을 따라 흰 말에 『사십이장경 42章經』과 불상을 싣고 낙양에 왔다는 전설에 따라 백마사白馬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마사는 두 승려들이 머무르면서 가지고 온 불경을 번역했던 홍려관鴻臚館 자리라고 한다.
  44. 44)축리祝釐 : 왕을 위하여 축원하는 것을 이른다.
  45. 45)도선道詵(827~898) : 신라 말기의 승려로 호는 옥룡자玉龍子이며 속성은 김씨이다. 영암 사람으로 15세에 출가하여 23세에 비구계를 받았다. 지리와 음양학陰陽學에 조예가 깊어 고려 태조의 출현을 예언하였으며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고려 때 『도선비기道詵秘記』가 유행하였다. 72세에 입적하였다. 효공왕이 요공선사了空禪師라 시호하고, 탑호를 증성혜등이라 하였으며 고려의 현종은 대선사를, 숙종은 왕사를,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를 추증하였다.
  46. 46)무학無學 : 고려 말기 조선 초기의 승려인 자초自超(1327~1405)의 호. 속성은 박씨이다. 삼기 사람으로,18세에 소지(小止)에게 승려가 되고, 용문산 혜명慧明 국사에게 법을 묻고, 진주鎭州 길상사·묘향산 금강굴로 다니면서 공부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연도燕都에 가서 지공指空을 뵙고, 다음 해 법천사에 가서 나옹懶翁을 뵈었다. 고려 말년에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사퇴하였으며, 1392년(조선 태조 1) 송경으로 청하여 왕사를 삼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 호하고, 회암사에 있게 하였다. 태종 5년 4월 금장암에서 나이 79세, 법랍 61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47. 47)백장百丈 : 당나라 중기의 선승인 회해懷海(720-814)를 지칭하는 말로,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시호는 대지大智이고, 복건성 출생이다. 백장산百丈山에 오래 머물러 백장선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각조覺照 또는 홍종묘행弘宗妙行이라는 별칭도 있다. 20세 때 서산西山 혜조慧照를 따라 출가하여, 강서성 대웅산大雄山(백장산)에 자리를 정하고, 향존암鄕尊庵(백장사)을 창건하여 선풍을 일으키고, 선의 규범인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하여 교단의 조직이나 수도생활의 규칙 등을 성문화하였다.
  48. 48)허현도許玄度 : 동진東晉 사람 허순許詢의 자이다.
  49. 49)한산자韓山子 : 고려 말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색李穡(1328-1396)을 일컫는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여말삼은麗末三隱의 한 사람인 그는 1341년에 진사가 되고, 1348년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88년에 철령위鐵嶺衛 사건 때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견제하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되었다. 1391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으로 책봉하였으나 사양하고, 이듬해에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에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에 『목은시고』와 『목은문고』가 있다.
  50. 50)보제普濟 : 고려 후기의 승려인 혜근惠勤(1320-1376)을 일컫는다. 성은 아씨牙氏이고, 속명은 원혜元惠이며,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인데, 혜근慧勤으로도 쓴다. 21세에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서 출가한 뒤 사찰을 돌며 수행하다가 1344년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득도하였다. 1347년 원나라에 들어가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1352년 원나라 순제順帝에 의해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임명되었다가 1358년 귀국했다. 1361년 회암사 주지가 되고, 1371년 왕사가 되고, 대조계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뒤에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여,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다. 1376년(고려 우왕2) 왕명을 받아 밀양의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의 신륵사에서 나이 57세, 법랍 38년으로 입적하였다. 저서에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과 『가송歌頌』이 있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51. 51)다비茶毗 : 승려가 입적하였을 때 불교식으로 화장하는 의식을 말한다.
  52. 52)『증도가證道歌』 : 원래는 당唐의 영가 현각永嘉玄覺이 선의 요체를 운문으로 읊은 글로, 이후 송宋의 남명 법천南明法泉이 320편의 구절 끝에 7자 3구의 송頌을 붙여 해석하였고, 이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널리 유통되었다.
  53. 53)무학無學 : 고려 말기 조선 초기의 승려인 자초自超(1327~1405)를 일컫는다. 주 64) 참조.
  54. 54)지공指空 : 원나라 때의 고승. 인도 마갈타국 사람으로 8세에 승려가 되었다. 이름은 제납박타(提納薄陀, 禪賢)이다. 원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전했는데, 이때 나옹懶翁에게 인가를 주었다. 충숙왕 15년(1328)에 고려에 들어와서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예배하고 연복정延福亭에서 계를 설했다. 다시 원으로 가 연경에서 법원사法源寺를 짓고 머물렀는데 이때 고려의 혜근慧勤에게 선종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그의 부도가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와 개성시 화장사華藏寺에 남아 있다.
  55. 55)나옹懶翁 : 고려 후기의 승려인 혜근惠勤(1320-1376)을 일컫는다. 주 77) 참조.
  56. 56)사중四衆 :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줄임말로, 각각 남녀 출가자와 신도를 뜻하는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가리킨다.
  57. 57)현등사懸燈寺 :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절로, 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 인도의 승려 마라사미摩羅詞彌를 위해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보조 지눌普照知訥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1411년(태종11)에 함허 기화涵虛己和가 중수하였다.
  58. 58)보조국사普照國師 : 고려 중기의 승려인 지눌知訥(1158-1210의 호이다. 속성은 정씨鄭氏이고, 자호는 목우자牧牛子로, 한국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이다. 8세 때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출가하여 종파대립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모든 이에게서 배운다는 자세로 정진했다. 1205년에 송광사松廣寺에서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고 그곳에서 강설과 저술을 계속함으로써, 천진天眞, 확연廓然, 인민仁敏 등 수백 명의 문인을 배출시켰다. 저서에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과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고,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59. 59)도선道詵(827~898) : 신라 말기 승려. 주 63) 참조.
  60. 60)병일도구並日刀口 : 파자破字 풀이의 일종으로, ‘병일並日’을 조합하면 ‘보普’자가 되며, ‘도구刀口’를 조합하면 ‘조照’자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병일 도구는 ‘보조普照’를 파자한 것이다.
  61. 61)팔인八人 : 파자 풀이로 볼 때 팔인을 조합하면 ‘화火’자가 된다.
  62. 62)원각사圓覺寺 : 서울의 원각사는 태종이 아닌 세조 때에 창건되었다.
  63. 63)함허조사涵虛祖師 : 함허는 기화己和의 당호이다.
  64. 64)단월檀越 : 사원과 승려에게 물건을 시주하는 신자, 또는 사원을 후원하는 단신도檀信徒를 일컫는 말이다.
  65. 65)무착無著 : 인도의 조사 아상가(Asaga), 유식唯識 사상가로, 불멸 후 1천 년경 사람.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성의 바라문 출신. 아버지는 교시가橋尸迦이며, 세친世親과 사자각師子覺은 그의 아우이다. 처음 소승화지부小乘化地部에 들어가 출가하여 빈두라賓頭羅(Piola)를 따라 소승의 공관空觀을 닦았다. 뒤에 중인도 아유차국의 강당에서 넉 달 동안 밤마다 미륵보살의 설법을 들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 5부의 대론大論은 이 때에 미륵보살이 설한 것이라 하며, 무착은 아유차·교상미에서 법상대승法相大乘의 교리를 선양하였다. 한다. 『서장전西藏傳』에 의하면 75세에 왕사성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아우 세친은 본디 소승의 학자였으나, 무착의 권유에 따라 대승에 귀의하여 크게 이름이 났다. 저서는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20권,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7권, 『섭대승론攝大乘論』 3권, 미륵보살의 말을 적은 것으로 전해진 『유가사지론』 100권, 『대승장엄론』 13권이 있다. ⇒아승가阿僧伽.
  66. 66)천친天親 : 세친世親. 인도의 조사 바스반두, 유식사상가로 무착의 아우이다.
  67. 67)인황人皇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삼황三皇인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중의 하나로,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를 이른다.
  68. 68)선침仙寢: 능침陵寢을 달리 이르는 말.
  69. 69)주구珠丘 : 왕릉을 비유하는 말로, 『습유기拾遺記』에 “순舜임금을 창오蒼梧의 들에 장사지냈는데, 참새와 비슷한 빙소憑霄라는 새가 때때로 청사주靑砂珠를 입에 물고 창오의 들로 날아와 떨어뜨려 그것이 쌓여 구릉을 이루었다.”라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70. 70)양릉兩陵: 세조의 광릉과 성종의 선릉(중종의 정릉도 옮겨짐)으로 각각 교종본사 봉선사奉先寺와 선종본사 봉은사奉恩寺가 능침사 역할을 하였다.
  71. 71)수성隋城 : 수원水原의 옛 이름.
  72. 72)단월枬越 : 시주를 일컫는 말.
  73. 73)선추仙楸 : 묘소에 심어놓은 소나무를 이른다.
  74. 74)구오九五 : 『주역周易』에서 쓰이는 용어로 제왕의 지위를 일컫는다.
  75. 75)『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 권58에는 ‘花山龍珠寺上樑文’으로 되어있다.
  76. 76)주구珠邱 : 능원陵園을 비유하는 말. 『습유기拾遺記』에 “순舜임금을 창오蒼梧의 들에 장사지냈는데, 참새와 같은 빙소憑霄라는 새가 때때로 청사주靑砂珠를 입에 물고 창오의 들로 날아와 떨어뜨려 그것이 쌓여 구릉이 이루어졌다.”라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77. 77)제수를 받드심에(吉蠲) : 길일吉日을 택하여 재계하고 제사 지낸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길일을 택하여 정갈하게 술밥을 지어, 이것을 효도로 제향하여, 약사와 증상의 제사를, 선공과 선왕에게 올리도다.(吉蠲爲饎, 是用孝享. 禴祠烝嘗, 于公先王.)”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78. 78)염부閻浮 : 염부제閻浮堤의 준말로, 불가에서 인간 세상을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79. 79)수성隋城 : 수원水原의 별칭이다.
  80. 80)현포玄圃 : 곤륜산 위의 신선의 거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81. 81)구오九五 : 역괘易卦에서 밑에서 위로 다섯 번째인 양효陽爻를 일컫는 말로, 임금의 지위를 가리킨다.
  82. 82)열두······보배 : 원문의 십이조거十二照車는 전국시대 양혜왕梁惠王이 제위왕齊威王과 평륙平陸에서 회합할 때에 “우리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직경 한 치 되는 구슬로 12채의 수레를 앞뒤로 비출 수 있는 구슬이 10개나 된다.(若寡人國小也 尙有徑寸之珠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라고 자랑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83. 83)갱장羹墻 : 요堯임금이 죽은 뒤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지극히 앙모한 나머지 국그릇에서도 요 임금을 보고 담장에서도 요 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인용해 온 말이다.
  84. 84)난수灤水 : 중국 회하淮河의 지류인 과수渦水의 끝에 있는 강 이름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아버지 왕계王季를 과수의 끝에서 장사 지냈는데, 난수에 의해 그 무덤이 깎여 나가 관이 드러나자, 문왕이 “선군께서 뭇 신하와 백성들을 한 번 보고 싶어 하시므로 하늘이 난수로 하여금 드러나게 한 것이다.”라고 하고, 관을 열어 백성들이 보게 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呂氏春秋 卷21 開春』
  85. 85)기성箕聖의 글 :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에게 선정善政의 방법을 물었을 때 기자가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86. 86)규벽奎璧 : 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나 천자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옥을 일컫는다.
  87. 87)용순龍輴 : 임금의 상여를 일컫는 말.
  88. 88)상설象設 : 불상을 일컫는 말.
  89. 89)정반성淨飯城 : 석가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이 살던 성.
  90. 90)금속강金粟岡 : 금속여래를 일컫는 말로 유마거사를 지칭함.
  91. 91)태상시太常寺 : 나라의 제사와 시호諡號 제정하는 일을 맡은 관아이다.
  92. 92)향주香廚 : 제사에서 흠향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을 일컫는다.
  93. 93)신금宸襟 : 임금이 간직한 마음을 일컫는다.
  94. 94)학 그림자 : 주周 영왕靈王의 태자인 진晉이 도술을 닦아 신선이 된 뒤에 백학白鶴을 타고 구씨산緱氏山에 내려왔다는 전설을 인용한 말이다. 『列仙傳』 「王喬傳」.
  95. 95)우소虞韶 : 순舜임금의 음악. 순임금의 악관樂官인 기夔가 아뢰기를 “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습니다.[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書經』 「益稷」.
  96. 96)전단栴檀 : 천축국 남해南海에 소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우두산牛頭山이 있고, 이 산에 향목香木인 전단수가 자라는데 이 나무는 향기가 매우 강하고 잘 없어지지 않아서 불상과 같은 기물을 만든다고 한다.
  97. 97)『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달이 점점 차오르는 것과 같고 해가 떠오는 것과 같으며 남산이 장수하는 것과 같아서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송백이 무성함과 같아서, 그대를 계승하지 않음이 없도다.(如月之恆,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 如松柏之茂, 無不爾或承.)”라고 한 데서 인용해 말이다.
  98. 98)옥룡사玉龍師 : 도선道詵의 벌칭이다.
  99. 99)중일重日 : 3월 3일, 5월 5일처럼 달과 날의 수가 같은 날을 일컫는다.
  100. 100)전성前星 : 왕을 상징하는 심성心星의 앞에 있는 별로 왕위를 잇는 후계자를 가리킨다. 왕세자.
  101. 101)교산喬山 : 황제黃帝를 장사지낸 곳이라 한다.
  102. 102)화축華祝 : 화봉삼축華封三祝. 요堯 임금이 화華 지방을 순행할 때, 그곳에 봉해진 태수가 임금의 덕을 찬양하며, ‘성인聖人은 장수하시고 부귀하시고 다남多男하시라’고 축복했다는 고사. 임금에게 경축의 인사를 드릴 때 쓴다.
  103. 103)삼원三元 :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 또는 정월 초하루 원단元旦을 이른다.
  104. 104)현륭원顯隆園 :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묘를 이른다.
  105. 105)삼장三藏의 탱화 : 하늘·땅·지하의 삼계三界를 제도하는 천장보살天藏菩薩·지지보살地持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을 그린 불화
  106. 106)마니보주 : 주珠·보寶·무구無垢·여의如意·보주寶珠 혹은 여의주如意珠라고도 한다. 이 구슬은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혹은 제석천왕이 가진 금강저로 아수라와 싸울 때 부서져서 남섬부주에 떨어진 것이 변하여 이 구슬이 되었다고도 한다. 또는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의 사리가 불법이 멸할 때에 모두 변하여 이 구슬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범마니梵摩尼·일정마니日精摩尼·월정마니月精摩尼 등의 종류가 있다.
  107. 107)외오隈隩 : ‘隈’는 구비, ‘隩’는 깊음을 뜻한다. 隈隩’는 굽이굽이 깊고 좁은 협곡을 지칭한다.
  108. 108)경산景山 : 중국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 북쪽에 있는 원대元代 이후의 인공 산을 이른다.
  109. 109)삼막사: 통일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경기도 금천金川 삼성산三聖山에 건립한 사찰. 677년(문무왕 7)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潤筆 등 세 대사大師가 관악산冠岳山에 들어와서 막幕을 치고 수도한 것에서 유래됨. 원효가 창건하고, 도선道詵이 중건하였다.
  110. 110)건부乾符 : 중국 당나라 21대 황제인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111. 111)나옹 혜근懶翁惠勤 : 고려의 승려. 주20), 주77) 참조.
  112. 112)지공指空 : 원元나라 때의 고승. 주82) 참조.
  113. 113)우두항진牛頭降真 : 우두전단향牛頭旃檀香. 가장 향기가 좋고 껍질이 검붉은 전단나무로 만든 향을 이른다.
  114. 114)무학無學 : 고려 말기 조선 초기의 승려인 자초自超(1327~1405)의 호. 주64) 참조.
  115. 115)호혈虎穴 :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범의 혈 자리를 일컫는다.
  116. 116)난야蘭若 : 범어 āranyak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자가 수행하는 조용한 곳, 즉 사원을 말한다.
  117. 117)오성五姓 : 보살정성菩薩定性, 독각정성獨覺定性, 성문정성聲門定性, 부정종성不定種性, 무성유정無姓有情을 일컫는다.
  118. 118)칠중七衆 :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式叉摩那,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식차마나는 예비 비구니로 미성년 여자 출가자, 우바새는 불법을 받드는 재가 남신도, 우바이는 여신도이다.
  119. 119)청령淸寧 : 요遼의 8대 황제 도종道宗이 사용한 첫 번째 연호(1055~1064년)이다.
  120. 120)병진년 : 혜소국사비慧炤照國師碑에 의하면 출생연도가 972년(고려 광종 23) 임신년이므로 이는 오기이다. 또한 병진년(1076)은 청령 연간이 아닌 도종 재위 시기의 태강太康 2년이다.
  121. 121)혜소국사慧炤國師(972-1054) : 고려의 승려 정현鼎賢의 시호이다. 속성은 이씨이며 젊어서 광교사 충회忠會에게 출가하고, 죽산 칠장사 융철融哲에게 배웠다. 영통사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996년(고려 성종 15) 미륵사의 5교敎 대선大選에 뽑히고, 목종 때 대사大師, 현종 때 수좌首座, 덕종 때 승통僧統이 되어 현화사에 있었다. 문종이 내전으로 청하여 『금고경金鼓經』을 강론하게 하였고, 1049년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칠장사에서 입적하니 나이는 83세였고, 법랍은 74세였다.
  122. 122)임제臨濟 : 중국 선종禪宗 오가五家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의 창시자로 임제의현臨濟義玄을 일컫는다.
  123. 123)김양金陽 : 1061년(문종 15)에 태자좌우서자(太子左右庶子)가 되었다가 곧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진하였다. 1067년 병부상서로 있을 때 흥왕사(興王寺)가 12년 동안의 역사 끝에 완공되어 왕이 낙성재(落成齋)를 베풀고자 하였는데, 각 지방의 승려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으므로 김양은 왕명을 받들어 우가승록(右街僧錄) 도원(道元) 등과 함께 계행(戒行)이 있는 자 1천 명을 참석하게 하고, 이들을 그 절에 상주시켰다. 그 뒤 1072년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고, 1075년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제수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4. 124)아란야阿蘭若 : 범어 āranyaka의 음역으로, 출가자가 수행하는 조용한 곳, 즉 사원을 말한다. 주183) 참조.
  125. 125)탁석卓錫 : 석장(錫杖)을 꽂는 것으로, 승려가 머무는 것을 말한다.
  126. 126)무자년(1048) : 혜소국사비慧炤照國師碑에 의하면 입적한 해는 1054년(고려 문종 8) 갑오년이다.
  127. 127)황상皇上 : 송나라 황제가 아닌 고려 문종을 가리킨다.
  128. 128)김현金顯 : 1016년(현종 7) 문과에 급제하여 1035년(정종 1)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가 되고, 1052년(문종 6)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으며, 1053년에는 지중추원사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057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에 오르고, 3년 뒤인 1060년에는 수사공(守司空)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듬해 문하성에서 숙직하던 중 화재가 있었으므로 벼슬이 좌복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29. 129)무신년(1308) : 원문의 임신년은 오기. 원문 교감주 참조.
  130. 130)무종武宗 : 원문의 태조는 오기. 원문 교감주 참조.
  131. 131)강희13년 갑인년(1674) : 원문의 12년은 오기. 원문 교감주 참조.
  132. 132)청저靑猪 :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을해乙亥를 달리 표기한 것이다.
  133. 133)용반호거龍蟠虎踞 :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렸다는 뜻으로, 형세가 험준한 지형을 일컫는다.
  134. 134)태운泰運 : 태평한 운수 또는 기운氣運. 『주역周易』 ‘태괘泰卦’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135. 135)인차수즙鱗次修葺 : 인차는 생선의 비늘처럼 가지런하고 빽빽하게 정렬된 모습을 이르는데 주로 가옥이나 사찰의 지붕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수즙은 집의 허름한 데를 고치고 지붕을 새로 이음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136. 136)『화엄경華嚴經』 「십지품十地品」 제9 선혜지善慧地를 이른다.
  137. 137)용천龍天 :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지칭하는 말로서 모두 호법신護法神이다.
  138. 138)설자雪姿 : 눈 속에서도 그 자태를 잃지 않는 소나무를 가리킨다.
  139. 139)운근雲根 : 구름이 생기는 근원으로 높은 산이나 바위를 가리킨다.
  140. 140)숙손표叔孫豹는 노魯나라의 대부인데 진晉나라에 갔을 때 범선자范宣子의 “옛사람이 말하기를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을 두고 한 말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제가 듣기로는 최고의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며, 그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고, 그다음은 말을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답하였다.(襄公二十四年春, 穆叔如晉. 范宣子逆之問焉, 曰, 古人有言曰, 死而不朽, 何謂也 ······穆叔曰, 豹聞之, 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 『春秋左傳』 襄公24년條.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는 세 가지 업적, 곧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을 삼불후三不朽라고 하는데 그 출전이 바로 이것이다.
  141. 141)육창六窓 : 불가에서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6근根을 6창窓에 비유한다,
  142. 142)강복降福 : 하늘에서 내리는 복을 이름.
  143. 143)영녕英寧 : 영릉英陵은 세종과 소헌昭憲왕후의 능이며, 녕릉寧陵은 효종과 인선仁宣왕후의 능이다.
  144. 144)조포造泡 : 제사용 두부를 만듦을 이른다.
  145. 145)공휴일궤功虧一簣: 아홉 길(丈)의 산을 쌓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못해 공功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뜻으로, 거의 성취되어 가던 일을 마지막에 그만두는 것을 일컫는 말. 『서경書經』 ≺여오편旅獒篇≻에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九仞 功虧一簣”라 하였다.
  146. 146)창릉昌陵 : 예종睿宗과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이다.
  147. 147)일자日者 : 천문을 보거나 길흉을 예측하는 음양가陰陽家를 이른다.
  148. 148)난천灤遷 : 능침을 옮기는 천릉遷陵, 곧 이장移葬을 이르는 말이다.
  149. 149)순원純元 :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
  150. 150)계술繼述 : 계지술사繼志述事의 준말로, 선왕의 뜻과 하던 사업을 잘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을 이른다.
  151. 151)상재桑梓 :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뜻하는 말로,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일컫는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변小弁≻에 “어버이가 심어 놓으신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법이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하였다.
  152. 152)완호完護 : 나라에서 보호해 주는 것을 이른다.
  153. 153)천순天順 :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154. 154)‘設擅’은 문맥상 ‘設壇’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55. 155)‘喜靖’은 문맥상 ‘嘉靖’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56. 156)‘18년’으로 되어 있으나 강희康熙 기유년(1669)은 8년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57. 157)‘迫薦’은 문맥상 ‘追薦’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58. 158)‘31년’으로 되어 있으나 강희 임술년(1682)은 21년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59. 159)운근運斤 : 운근성풍運斤成風의 준말로 최고의 기술자, 전문가를 가리킨다. 초楚나라 장석匠石이 상대방의 코끝에다 하얀 흙을 얇게 발라 놓고는 자귀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러 그 흙만 떼어 내고 상대의 코는 다치지 않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莊子 徐无鬼』
  160. 160)태정泰定(1324~1327) : 원元나라 진종晉宗의 연호이며, 고려 충숙왕忠肅王 시기이다.
  161. 161)지공指空 : 원元나라 때의 고승. 주 82) 참조.
  162. 162)새를······것이다 : 산승을 산에 돌아가 살게 하는 것이 은혜를 베푸는 일임을 말한다. 『장자莊子』 「지락至樂」편에 원거爰居라는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진수성찬을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대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넓은 고원에서 노닐게 해야 한다.(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夫以鳥養養鳥者, 宜栖之深林, 遊之壇陸)”라고 하였다.
  163. 163)연지燃指 : 불가에서 계戒를 받을 때 불법을 지킬 것을 굳게 맹세한다는 의미로 손가락을 헝겊에 싸서 태우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를 소지燒指 또는 연지燃指라고 한다.
  164. 164)현장玄杖 : 『고운집孤雲集』 권3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에 “유자儒者의 눈먼 지팡이로 더듬는 것이 부끄럽네(腐儒玄杖慙擿埴)”하였고, 그 주석에 ‘현장은 붓이다’라고 하였다.
  165. 165)삼척三尺의 긴 부리 : 부리가 긴 새는 많이 지저귀지 않는다는 데서 말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孔子가 초왕楚王과 만난 자리에서 초왕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요청하자, 공자가 초나라의 시남의료市南宜僚와 손숙오孫叔敖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위無爲의 덕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던 사실을 말하면서 자신도 세 척의 부리를 지닌 새처럼 말이 없고 싶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뛰어난 언변의 뜻으로 사용하였다.『莊子 徐无鬼』
  166. 166)오색호五色毫 : 오색필五色筆과 같은 말로 문재文才를 뜻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강엄江淹이 만년에 꿈속에서 오색필을 곽박郭璞이라는 미장부美丈夫에게 돌려준 뒤로부터 아름다운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詩品 卷2』
  167. 167)방언邦彦 : 국내國內의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168. 168)정랑正郎과 좌랑佐郞은 조선시대 이·호·예·병·형·공조 6조의 정5품과 정6품 관직으로 해당 관서의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169. 169)거벽巨擘 : 어떤 분야에서 그 기능이나 능력이 남달리 뛰어남을 일컫는 말이다.
  170. 170)타도馱都 : 다투(dhātu)라고도 하며, 쇄신사리碎身舍利 즉 다비한 유골을 말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석가모니를 다비한 후 쇄골하여 나온 작은 구슬 모양의 부서지지 않는 골편骨片을 사리라고 하였다.
  171. 171)응화鷹化 : 『고운집孤雲集』 권3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에 “악인이 변화하여 선인으로 되는 것이 마치 새매(鷹)가 변화하여 비둘기(鳩)가 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172. 172)절묘한 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색色과 사絲를 조합하면 절絶이라는 글자가 되는데, 이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고 쓴 것을 조조曹操의 참모인 양수楊修가 풀이하면서,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이를 합치면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이를 합치면 묘妙가 된다.”는 식으로 분석하여, ‘절묘호사絶妙好辭’라고 해설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世說新語』 「捷悟」.
  173. 173)『시경』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양원의 길이여, 높은 언덕에 얹혀 있도다.
  174. 174)연석燕石 : 송宋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옥돌과 비슷하면서도 보통의 돌멩이에 불과한 연석燕石을 보옥寶玉으로 알고 애지중지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51에 보인다.
  175. 175)한이韓李 : 문장과 시를 대표하는 인물로 한유韓愈와 이백李白을 꼽는다.
  176. 176)겸금兼金 : 『맹자孟子』 「공손추하公孫丑下」 주자朱子의 주석에 “겸금은 좋은 금이니, 그 값이 다른 금보다 배나 비싸기 때문에 겸금이라고 한다.”하였다.
  177. 177)청모靑眸 : 푸른 눈동자. 즉, 반가운 눈길을 뜻하는 말로,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미운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으로 보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청안靑眼으로 보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178. 178)백족白足 : 주로 고승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후진後秦 시대 고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인 담시曇始가 발이 얼굴보다 희고 진흙탕 물을 건너도 발이 더럽혀지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하였다.
  179. 179)관불灌佛 : 석가가 탄생할 때 제석천帝釋天과 용왕이 향탕香湯으로 목욕시켰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여 불탄일佛誕日(4월 8일)이 되면 불상에 향수를 끼얹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이를 관불회灌佛會나 욕불浴佛이라고 한다.
  180. 180)수서首鼠 : 수서양단首鼠兩端의 준말로, 쥐가 의심이 많아 동굴 속에서 머리를 밖으로 내놓고 형세를 관망하는 것처럼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을 말한다. 진퇴와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181. 181)‘自願’의 아래에 『韓國寺刹全書』에는 ‘그 나머지 당실 및 재회에 쓰는 기물은 모두 자원에 따랐으므로[而其餘堂室及齋用器物 一從自願]’가 있으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82. 182)권축勸軸 : 권진장勸進帳을 이르는 말로 사찰의 건립 등을 위하여 모금하는 장부帳簿이다. 권화장勸化帳이라고도 함.
  183. 183)부소갑扶蘇岬 : 개성開城의 옛 이름. 원래는 고구려 때의 지명으로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太祖 2년에 도읍을 송악松岳 남쪽에 정하고 이곳을 개주開州로 승격시켰다.
  184. 184)야교夜橋 : ‘야다리’를 음차한 것으로, ‘약대다리’의 준말이며, ‘낙타다리’라는 뜻이다. 송경松京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 이름으로 만부교萬夫橋라고도 한다.
  185. 185)이림李琳 :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이교李嶠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덕적도·자연도紫燕島의 두 섬에 침입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서북면선위사가 되어 이를 시찰하였으며, 다시 왜구가 울주에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자 경상도조전원수가 되어 이를 방어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6. 186)영인郢人 : 영郢이라는 지역의 장석匠石이 도끼를 휘둘러서 사람의 코끝에 살짝 묻힌 하얀 흙만 교묘하게 떼어 내고 사람은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였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송원군宋元君이 그를 불러 시연試演을 청하자, 그가 “예전에는 잘했지만 지금은 나의 친구가 오래 전에 죽어서 더 이상 솜씨를 발휘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서 인용해온 말이다.
  187. 187)선지식善知識 : 덕과 지식이 높아 대중을 교화하고 이끄는 승려를 이른다.
  188. 188)바람이······따르듯이 :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나니, 성인이 나오면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게 마련이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라고 하였다.
  189. 189)머리카락을······짓는 :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서 인용해온 말로 세세한 것을 까다롭게 따진다는 말로 쓰인다.
  190. 190)지공指空 : 원元나라 때의 고승.
  191. 191)을축(1385) : 원문의 ‘기축己丑’을 홍무 18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92. 192)우두전단향牛頭旃檀香 : 산봉우리가 소머리 모양인 인도 마라야산에서 나는 향나무를 이른다. 전단향旃檀香으로도 부른다.
  193. 193)무자戊子 : 효종 연간에 무자년은 없다. 아마도 효종 9년인 무술년(1658)을 잘못 표기한 듯하다.
  194. 194)120년 : 순치14년부터 건륭41년까지의 간격은 120년이므로 원문의 ‘百二十四年’은 환산을 잘못하였거나 표기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95. 195)정회貞悔 : 『주역』 괘卦에 대하여 일컫는 말로, 내괘內卦를 정貞, 외괘外卦를 회悔라고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우선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의 문집에는 “정貞은 일의 처음[始]이고, 회悔는 일의 끝終이며, 정은 물건이 바른 것[正]이고, 회는 물건이 지나친 것[過]이다. 꽃망울이 맺힌 것은 정이고, 활짝 핀 것은 회이다.”라는 해석이 있다.
  196. 196)44년 : 건륭 41년은 병신년이며, 기해년은 건륭 44년이 되어야 하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97. 197)태정泰定 : 원元나라 晉宗의 연호이며, 고려 충숙왕忠肅王 시기이다.
  198. 198)새······한다 : 산승山僧은 산으로 돌아가서 살게 하는 것이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는 말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편에 원거爰居라는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진수성찬을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대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넓은 고원에서 노닐게 해야 한다.(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夫以鳥養養鳥者 宜栖之深林 遊之壇陸)”라고 하였다.
  199. 199)지공指空 : 원元나라 때의 고승. 주 62) 참조.
  200. 200)이서二鼠 : 세월이란 뜻. 불가佛家의 말로, 인간이 오욕五欲에 집착하여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주야晝夜가 흘러 등藤 즉, 명근命根을 갉아먹는 것으로 비유한 말이다. 흑백黑白의 두 쥐를 밤과 낮으로 비유하여 낮은 흰 쥐이고 밤은 검은 쥐로 구분하였다.
  201. 201)을병년乙丙年 : 順治(1644-1661) 연간에 순치 2년인 을유년(1645)과 3년인 별술년(1646)이 있고, 순치 12년인 을미년(1655)과 13년인 병신년(1656)이 있다.
  202. 202)두솔兜率 : 도솔천兜率天을 말함.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로, 여기에는 칠보七寶로 된 궁전이 있고 수많은 하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203. 203)화성化城 : 번뇌를 막아주는 안식처를 뜻하는 말로, 법화도사法華道師가 험한 길 가운데에서 변화를 부려 성城을 만들고 피로한 대중들을 그 안에 들어가 쉬게 했다 한다. 『법화경法華經』
  204. 204)자자自恣 : 하안거夏安居를 마칠 때, 모든 승려들이 서로 자기의 죄과罪過를 고백하고 참회하여 다른 승려들에게서 훈계를 받는 일을 일컫는다.
  205. 205)두 사람이······ 끊는다 :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들의 말은 난초 향기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에서 인용해 온 것으로, 주로 무슨 일이든 합심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말로 쓰인다.
  206. 206)귀모토각龜毛兎角 : 『수신기(搜神記』에 “상나라 주왕 때에 큰 거북에 털이 나고 토끼에 뿔이 났으니, 이는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다.(商紂之時 大龜生毛 兔生角 兵甲將興之象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이란 본디 전쟁의 징조를 말하는데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 혹은 유명무실한 것을 비유한다.
  207. 207)등등상속燈燈相續 : 의발衣鉢을 제자에게 전하는 것을 뜻하며, 불법을 끊임없이 전수해서 이어지게 하라는 의미이다.
  208. 208)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고종 3년(1866년) 서부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령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군수로 부임했다.
  209. 209)홍무洪武 3년 : 홍무년간에 임신년은 1392년이며 25년에 해당하므로, 3년은 잘못된 표기이다.
  210. 210)삼공三空 : 아공我空, 법공法空, 아법구공我法俱空을 이른다.
  211. 211)우복愚伏 : 정경세鄭經世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경임景任이다. 아버지는 좌찬성 정여관鄭汝寬)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가李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기도 하다.
  212. 212)성상省常(959-1020) : 송宋대의 정토종淨土宗 7대 조사.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유풍을 이어 항주杭州 소경사昭慶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고 뒤에 정행사淨行社로 개명하였다.
  213. 213)사은四恩 :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는 네 가지 은혜. 곧 부모, 국왕, 중생, 삼보三寶의 은혜를 말한다. 또는 부모, 스승, 국왕, 시주施主의 은혜를 가리키기도 한다.
  214. 214)무차회無遮會 : 성범聖凡, 도속道俗, 귀천貴賤, 상하上下의 구별 없이 일체 평등으로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하는 대법회大法會를 일컫는다.
  215. 215)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 : 하늘의 해와 달과 같고, 땅의 등불과 같은 광명을 지닌 부처의 이름. 오랜 겁전劫前에 나서 중생을 위하여 돈교頓敎·점교漸敎와 대승·소승의 여러 경을 설하고, 뒤에는 방편교가 그대로 일승진실교一乘眞實敎임을 보이며 『법화경』을 설법. 같은 이름의 부처 2만 명이 계속 출현하여 설법하였으므로 2만 등명불이라고도 한다. 최후에 일월등명불이 묘광보살에게 『법화경』을 설하였고, 묘광은 또 대중에게 설하는데 청중 8백 명 중에 있던 구명求名보살이 미륵이고, 묘광보살은 지금의 석가모니라고 한다.
  216. 216)갈래보탑葛來寶塔 : 강원도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에 있는 탑을 이른다.
  217. 217)‘淨葉’이 『韓國寺刹全書』에는 ‘淨業’으로 되어 있어 문맥상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18. 218)‘汪瀾’이 『韓國寺刹全書』에는 ‘狂瀾’으로 되어 있어 문맥상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19. 219)‘鬼尼’가 『韓國寺刹全書』에는 ‘毘尼’로 되어 있어 문맥상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20. 220)비니毘尼 : 부처가 그의 제자를 위하여 마련한 모든 계율을 일컫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