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집성문헌

○咸鏡南道之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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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咸鏡南道之部)
이대형 (역)
총목차總目次
1. 동사 향림산 옥수암 사적비명서 東社香林山玉水庵事跡碑銘序
2. 보성사 기적비 寶盛寺紀績碑
4. 정광사 사적 定光寺蹟
4.1 사적 서문 寺迹序
4-2. 관성현 대덕산 정광사 사적 실록 觀城縣大德山定光寺事蹟實錄
4-3. 사적비
4-4. 금표비 행行 현감
5. 영흥부 성불산 안불사 사적
이전 사적을 말미에 붙임
6-1. (석왕사 사적비)
6-2. 안변 석왕사 비문 추가 기록(安邊釋王寺碑文追記)
6-3. 태조대왕 독서당 중건 사적 비명병서 太祖大王讀書堂重建事蹟碑銘并序
6-4. 안변 설봉산 석왕사 비 安邊雪峯山釋王寺碑
6-5. 설봉산 석왕사 중흥사적비 雪峯山釋王寺重興事蹟碑
7. 귀주사 중건기적 비명병서 歸州寺重建紀蹟碑銘并序
8. 조선국 함경도 이성현 만덕산 복흥사 다보탑비 서문 朝鮮國咸鏡道利城縣萬德山福興寺多寶塔碑序
9. (고원 반룡산 양천사 사적)
9-2. 일 대웅전 중수 개와 기문 一大雄殿重修改瓦記文
10. 덕원 반룡산 재성암 중수기 德源盤龍山再醒菴重修記
11. 속고산 만경암 기 束高山萬景菴記
12. 반룡산 조계사 사적 盤龍山曹溪寺事蹟
13. 반룡산 몽월암 창건과 네 번 중수한 기(盤龍山夢月菴初創及四度重營記)
14. 백운암 중수기 白雲菴重修記
15. 개화사 법당 중건기 開花寺法堂里建記
16. 정평군 성불사 탑비 定平郡成佛寺塔碑
17. 환희사 歡喜寺
17-1. 정평부 백운산 환희사 사적비명 定平府白雲山歡喜寺事蹟碑銘
17-2. 정평부 북 백운산 환희사 불향비명 定平府北白雲山歡喜寺佛享碑銘
18. 자복사 개축 서문 資福寺改建序文
19. (석왕사 사적 2)
19-1. 설봉산 석왕사기 雪峯山釋王寺記
19-2. 고려의 국사 도선전 高麗國師道詵傳
19-3. 태조 어제 太祖御製
19-4. 숙종 어제 肅廟御製
19-5. 영조 어제 추기 英廟御製追記
19-6. 발문 後跋
20. (광흥사廣興寺 사적)
20-2. 광흥사 보광전과 누각ㆍ향각 이건 중수기(廣興寺普光殿樓閣香閣移建重修記)
21. 함흥군 성덕산 보문암 중건기 咸興郡聖德山普門庵重建記
22. 백운산 성불사에 부처가 돌아와 옛터에 다시 지은 서문(白雲山成佛佛還建舊基序)
23. 천불산 개심사 사적문 千佛山開心寺事蹟文
1. 동사 향림산 옥수암 사적비명서 東社香林山玉水庵事跡碑銘序
(이원利原)현縣의 동쪽1) 20리 즈음에 산 하나가 있으니 ‘향림산香林山’이다. 향림이란 이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봉우리 봉우리들이 하늘과 나란하며 샘은 달고 토양은 기름지니 이 또한 은자들이 돌아다니는 곳이요 도한 부처를 앙모하며 복을 비는 장소가 된다.
임자년(1792)에 산 아래 김진성金振聲 공公께서 하루는 이 산에 올랐는데 일기가 매우 뜨거워서 갈증이 극심했다. 산등성이에서 어찌 목을 적실 방도가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성품이 본래 호방해서 (바위를) 보고는 밀치니 샘이 솟았다. 샘 이름을 ‘옥수玉水’라 하고 산 이름을 ‘향림’이라 하였다.
공이 산승 쾌명快明에게 보시하니, 오위장五衛將 윤덕윤尹德允2)과 그의 아들 칠성七星이 함께 했다. 함흥의 현상호玄尚好와 천궁주天弓主 김정응金正膺, 박현철朴賢喆, 함필흥咸必興, 신행석辛行石, ▣공명孔明 후後 갑진甲辰 김씨와 김진성 공의 손자 달건達建과 종증손從曾孫 득봉得奉이 힘을 합쳐 보시를 다했다. 도감都監 김치명金致明과 수좌首座 정준正俊, 본 암자의 성순成旬이 받들어 (시행했다.)

도광道光 27년(1847) 정미 4월 일 평산 후인平山后人 신진헌申辰憲 쓰다.
용파 문인龍波門人 도정都正 포허위성包虛偉性이 짓다,
김봉람金鳳覽.

2. 보성사 기적비 寶盛寺紀績碑
공덕이 있는데 전하지 않음은 미혹함이요 행적이 없는데 과도히 드날리는 것은 거짓이다. 이는 모든 선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유정공惟精公 역윤亦允이

0010_0001_a_01L○咸鏡南道之部

0010_0001_a_02L○利原縣東社香林山玉水庵事跡碑銘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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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地東二十里許有一區山名曰香林香林之名知何時而為始也峯峯
0010_0001_a_04L齊天泉甘而土肥是亦隱之所盤旋亦為慕佛祈福之處也
歲在壬子
0010_0001_a_05L下金公振聲一日登此山役而日氣酷爆喉渴極甚崗豈有潤喉之策
0010_0001_a_06L公性本豪揚見△手湧出泉泉名曰玉水山名香林也
公乃與山僧快明
0010_0001_a_07L五衛將尹德允子七星同 咸興玄尚好天弓主金正膺朴賢喆咸必
0010_0001_a_08L辛行石△孔明後甲辰 金氏 金公振聲孫子達建從曾孫得奉
0010_0001_a_09L力極化秩 都監金致明 首座正俊本庵成旬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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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二十七年丁未四月 日平山后人申辰憲 書

0010_0001_a_11L龍波門人都正包虛偉性 譔 [1]
金鳳覽

0010_0001_a_12L○寶盛寺紀績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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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功而不傳者惑也無行而過揚者誣也咸士之一言惟精公亦允 [2] 施五

0010_0002_a_01L5백금을 보시했으니 이는 인덕이 밝은 것이다. 선을 위하여 반드시 보시함은 크게 깨달은 이들이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니, 도시의 귀공자로서 개명한 용기가 아니라면 어찌 보시할 수 있겠는가. 지혜와 인덕과 용기의 달존達尊3)이 바로 이것이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며,4)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어5) 어려움을 구한다.6) 하물며 화주化主가 앉아서 비록 천 금 (누락) 소중한 재물을 보시하여 백 세토록 전하게 했다. 3백금은 건축에 사용하고 2백금은 1년 동안 이자를 불려서 논 5두락을 사서 매해 3일 동안 제사 지내니 복록(福履)이 한결같으리라.
사찰의 창건 시기는 건륭乾隆 36년(1771) 신묘년이다. 누가 하였는가. 행원行願과 행찰行察ㆍ보화普化 등이 화재(丙崇)를 견디지 못하고 소금강에서 왔던 것이다. 태수 남익초南益初7) 공께서 터를 정하고자 행차하셨고 나 또한 풍수에 밝아 먼저 (누락) 사찰명을 바꾸기를 청하였다.
“보물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또한 수고롭지 않습니까. 보물을 성대히 하여 성현께 바치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현의 남쪽 좁은 곳에 ‘화항火項’이 있고 화항에는 요충지 관문이 있다고 합니다. 태평한 시절에는 바탕이 문채보다 나으니, 옥을 쪼고 상하게 함이 어느 해에 있겠습니까.”
광무光武 기해년(1899)에 설송(雪松)이 인연 따라 와서, 그 해에 산신각을 짓고 다음 해에 또 불사를 했다. 신축년(1901)에 육화료六和寮8)를 크게 짓고 보광전普光殿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다음 임인년(1902)에 종을 주조하였고, 갑진년(1904)에 논을 매입하였고, 을사년(1905)에 비석을 세웠다. 7년 간 일곱 가지 중대한 사업을 하였으니9) 이 일들은 모두 옛사람도 하기 힘든 것들이다. 하기 힘든 것을 능히 행하였으니 논술하지 않으면 미혹함이요 거짓이며, 오로지 정성스레 한결같이10) 한 공적이다. 또한 결복結卜11)을 벗게 했으니 수천 년의 덕이다. 이러한 공덕으로 이제 삼보를 증명하니 후학들에게 보여 감계로 삼고, 대사를 위해서는 칠보정토와 함께 길이 아름다움을 같이하길 빌 따름이다.
송가는 다음과 같다.

我佛正覺            우리 부처님 정각을 이루신
一乘妙法            일승의 묘법은
△山之固            산처럼 굳건하니
祝君萬歲            임금님 만세를 축원하네
日登道塲            

0010_0002_a_01L百金此仁之既明也為善必施大覺者智之且△也紫陌貴公若非開明
0010_0002_a_02L之勇安得施乎知仁勇之達尊真是也君子萬年介爾景福悳必有隣
0010_0002_a_03L難如在矧且化主坐雖千金△善△△所重施財流傳百世三百金當用
0010_0002_a_04L成造二百金一年生殖買畓五斗落只年禋三日福履惟一
寺之剏在
0010_0002_a_05L乾隆三十六年辛卯歲孰為之也行願行察普化等不耐丙崇自小金剛
0010_0002_a_06L上來者也太守南公益初占址行次我亦風水先△請改寺號曰
多寶多
0010_0002_a_07L不亦勞乎寶盛供聖不亦樂乎治地南阨曰火項項之有重地關防云
0010_0002_a_08L昇平烟月質勝之文琢王傷王 [3] 何歲在
 光武己亥雪▼(土+公) [4] 人緣會而來
0010_0002_a_09L今年剏造山神閣明年又作佛事辛丑大營建六和寮修普光殿又明壬
0010_0002_a_10L [5] 鑄鍾甲辰買畓乙巳竪碣七年間七重大事其佛仸物此皆古人之難
0010_0002_a_11L行者也難行能行非論惑誣惟精惟一之功也又復脫橫結卜數千秋之
0010_0002_a_12L德也如是功德今證三寶肯示來學以戒為師七步 [6] 淨土 △世匹休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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頌曰
 @我佛正覺 一乘妙法 △山之固 祝君萬歲

0010_0003_a_01L날마다 도량에 오르니
三千土疆            삼천리 강토
大悳之崗            산등성이 같은 큰 덕으로
其天俱長            하늘과 함께 장구하리라

광무光武 9년(1905) 을사년 납월臘月(12월)에 세우다.
3. 만덕산 복흥사12) 사적기 萬德山福興寺事蹟記
태고를 상고하건대13) 태극이 비로소 갈라져 음양이 처음 나뉨에 도의 성쇠와 사물의 흥폐는 진실로 때와 사람의 이로움과 불리, 있음과 없음의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무슨 말인가. 도와 사물의 성대하고 흥함은 때와 사람의 이로움과 있음에 있고, 도와 사물의 폐색과 쇠퇴는 때와 사람의 불리와 없음에 있다는 것이다.
공자 문하로 논해 보자면, 공부자 이후 때가 오고 사람이 많아도 언어와 덕행ㆍ예악ㆍ교화가 세상에 찬연히 빛남은 모두 재아宰我와 자공子貢ㆍ염우冉牛ㆍ민자건閔子騫 등 십철제자十哲弟子들이 보아서 알고 들어서 알아 독실하게 믿고 닦아서 이룬 효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백여 년 후에 도를 전하여 얻은 이는 맹자 한 사람뿐이다. 지금 수천 년간에 이르러 적막하게 아무도 없고 또한 없을 따름이니, 도의 성쇠를 알 수 있다. 석가 문하로 논하자면 석가 이후에 때가 오고 사람이 많아도 신통과 덕업ㆍ자비ㆍ교화가 세상에 찬란함은 모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ㆍ부루나富樓那ㆍ목건련目犍連 등 십대제자十大弟子가 보아서 알고 들어서 알아 반문反聞14)하고 차례를 따른 효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수백여 년 후에 도를 전하여 얻은 이는 달마 선사뿐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에 적막하게 아무도 없고 또한 없을 따름이니 도의 성쇠를 또한 알 수 있다. 이러므로 도의 성쇠는 실로 때와 사람의 이로움과 불리함, 있음과 없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0010_0003_a_01L日登道塲 三千土疆 大悳之崗 其天俱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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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九年乙巳臘月 日 竪

0010_0003_a_03L○萬德山福興寺事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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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若稽古太極肇判陰陽始分道之盛衰物之興廢良由於時與人利不
0010_0003_a_05L存不存如何而已矣何謂言哉道物之盛與興時人之利與存也道物
0010_0003_a_06L之廢與衰時人之不利與不存也
若自孔門論之夫子之後時來人富另
0010_0003_a_07L言語德行禮樂教化粲然於世皆由於宰我子貢冉牛閔子等十哲弟子
0010_0003_a_08L見而知聞而知篤信脩成之效而百有餘載後道得其傳者孟子一人矣
0010_0003_a_09L于今幾千年間寂然無有而亦無有乎爾道之盛衰可知耳釋門論之
0010_0003_a_10L迦之後時來人富另神通德業慈悲教化奐然於世皆由於迦葉阿難富
0010_0003_a_11L樓那目犍連等十大弟子見而知聞而知反聞循序之效而幾百有餘載
0010_0003_a_12L道得其傳者達摩一禪矣于今幾千年間寂然無有而亦無有乎爾
0010_0003_a_13L之盛衰亦足以知耳是可曰道之盛衰實係於時人之利不利存不存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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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찰로 논해 보자면, 북쪽으로 6ㆍ7리 남짓 거리의 감토봉甘吐峯 아래에 한 구역의 오래된 터가 있으니, 노인들이 전하길, 예전 초창기에 성 동쪽에 (누락) 갑계甲契15)를 맺었는데 인민들이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초가집을 세우고는 ‘사암社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은 없고 연대 또한 미상이라 완전히 역사 이전의 소식과 같다. 이제 피폐한 옛 자취에 의거하고 또한 서울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검토하니, 정통正統 원년(1436) 병진년에 창건하여 ‘청수암清水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중간에 또 ‘정수암淨水庵’이라고 바꿨는데, 암자가 부흥하고 영성함이 끝내 작은 난야蘭若(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강희康熙 40년(1701) 경진년(1700)과 신사년(1701) 연간에 영흥永興16)의 선사 법총法聦 도인이 걸량乞粮17)하다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개연히 호연지기를 발휘하여 7칸 육화료六和寮를 재물을 모아 세웠다. 그리고 또 강희康熙 56년(1717) 정유년 이후 건륭乾隆 3년(1738) 무오년 이전에 신원信元과 법혜法惠ㆍ정언淨彥ㆍ담행曇行 등의 선사들이 성전을 짓거나 불상을 소화塑畫18)하거나 불상을 조각하거나 5백 근 큰 종을 주조하거나 옛 전각을 수리하는 등 모두 공적이 크고 일이 많았으며 사찰은 크고 널찍하게 되었다. 그래서 암자 이름을 고쳐 ‘정수사淨水寺’라 하고 성전을 고쳐 ‘대웅전’이라 하였다.
이에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온갖 물품이 구비되니 동료의 성대함과 물품의 풍성함을 다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편안하면 수고롭게 되는 법이니, 건륭 6년(1741) 신유년과 이보다 앞서 기유년(1729) 두 해에 천파天波19)로 인해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 대들보가 무너지는 환난을 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본사 승려 담행曇行과 신원信元 두 선사가 옮겨 지을 계획을 수립하고 옛 터를 버리고 새 터로 나아갔다. 남쪽으로 6,7리 거리에 감토봉 큰 줄기 아래 보금자리를 골라 정정定鼎20)하여 우선 새 절의 터를 잡았다. 육속전六續田21)을 20여 일 경작했고, 김준혁金俊赫이 은자

0010_0004_a_01L何矣
此寺論之盖自北去六七里許甘吐峯下有一區古基古老流傳
0010_0004_a_02L昔焉權輿之初城之東△間社甲契人民同心勠力草構一屋因以號曰
0010_0004_a_03L社庵云然墨蹟既無年代亦未詳完同於書契前消息也今依罷廢舊蹟
0010_0004_a_04L亦檢京師輿地勝覽則正統元年丙辰創建曰清水庵也中間又改曰
0010_0004_a_05L淨水庵也庵復庵另終不能免於一小蘭若矣在康熙四十庚辰辛巳年
0010_0004_a_06L永興禪法聦道人乞粮流入慨發浩然之性七間六知 [7] 之寮鳩財建構
0010_0004_a_07L而又次康熙五十六年丁酉以後乾隆三年戊午以前信元法惠淨彥曇
0010_0004_a_08L行等諸禪或營建聖殿或塑畫佛像或刻造佛像或鑄成五百斤大鍾
0010_0004_a_09L重脩舊閣皆功大而事煩寺大而宏廣故改庵名曰淨水寺改聖殿曰大
0010_0004_a_10L雄殿也
於是衲徒雲奔百物俱備僚之熾亨物之豐懍不可盡述也然承
0010_0004_a_11L安係勞乾隆六年辛酉與前此己酉兩年天波山崩地坼將未免壓樑之
0010_0004_a_12L故本寺僧曇行信元兩禪方劃移建之策去舊就新南去六七里許
0010_0004_a_13L吐峯大脉之下擇巢定鼎為先新寺基六續田二十餘日耕金俊赫處銀

0010_0005_a_01L50여 냥을 처분해 주어 토지를 매입하였다. 절을 세운 시기는 건륭 9년(1744) 갑자년 봄이니, 이 때에 함경도 내의 유명한 장인들을 초집超揖 스님이 북청 흥복사에서 초청하였다. 위태롭고 궁핍하던 즈음이라 먼저 7칸 청풍루清風樓와 소향각燒香閣을 짓고 옛 절의 불상을 새 누각으로 이안移安하였다. 이후 찬압粲鴨과 영삼暎森 선사 등이 위로 수령의 은택을 입고 아래로 서민들의 재물을 모아 승료僧寮와 법당을 짓기 위해 같은 해 8월에 먼저 첫 삽을 떴고 다음 해 단오의 달(5월)에 마지막 삽으로 완성(落成)하였다. 좌우로 돌아보는 경관이 여전하고 옛 터의 사우四宇22)가 모두 완성되어 하늘궁전 같았다. 이어서 산 이름을 ‘만덕산萬德山’이라 다시 바꾸고, 사찰 이름을 ‘복흥사福興寺’로 바꾸었다. 이에 김준혁金俊赫과 정순백鄭順伯이 사찰 내 모아두었던 물품들 가운데 대소 미두米豆와 콩(太)ㆍ벼(粟)ㆍ목포木布23) 등의 물품들을 처분하여 8백여 금을 모두 준비하여 주었다. 전후좌우 청룡과 백호, 주룡主龍24) 초평산草平山의 육속전을 아울러 사들였다. 6등 3백여 짐(卜)25)은 읍의 장부(大帳)에서 진황재탈陳荒災頉26)한 후 구역을 구분하여 나무를 꽂고 돌을 세워 표식을 정했다. 인물의 흥성함과 불전의 장대함이 사찰 가운데 거의 으뜸이었다. 이는 사람이 한 것인가, 신이 도운 것인가. 모두 만사를 총괄한 도편수 초집 스님이 먹줄을 제대로 놓은 위엄인가. 그러하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 지은 후에는 대대로 사람이 없지 않아서 건륭 25년(1760) 경진년과 신사년(1761) 사이에 9층 보탑寶塔이 뜰 가운데 우뚝 세워지니 가히 금상첨화요 불전 장엄이라 하겠다. 이는 집령執令 화주(승) 명제明濟 대사가 중흥한 공적이니 위풍威風의 시기로다.
아아, 법총 스님 이후에 때가 오고 사람이 많으며 사찰 물품의 풍성함, 승려 풍속의 규범(軌範)이 선경仙境에 밝게 드러나니, 모두 초집超揖과 신원信元ㆍ법혜法惠ㆍ정언淨彥ㆍ

0010_0005_a_01L子五十餘兩備給買地建寺之初即乾隆九年甲子之春也兹時道內名
0010_0005_a_02L現良工釋超揖師邀請於北青興福寺則危境逼近事勢窘迫之際先構
0010_0005_a_03L七間清風樓燒香閣而舊寺佛像移安于新樓後粲鴨暎森等禪上蒙本
0010_0005_a_04L倅之澤下募眾庶之財僧寮法堂同年八月始役於初簣翌年端陽之月
0010_0005_a_05L落成於終簣左右旋觀依然舊基四宇俱成彷彿天宮次復改山名曰萬
0010_0005_a_06L德山改寺號曰福興寺於是金俊赫鄭順伯處寺內儲留之物大小米豆
0010_0005_a_07L太粟木布等物丁八百餘金盡傾準給前後左右青龍白虎主龍草平山
0010_0005_a_08L六續田并加買得六等三百餘卜邑之大帳陳荒災頉後封疆植木立石
0010_0005_a_09L定標人物之富興佛殿之宏傑殆甲于諸剎人為耶神祐耶皆是萬事總
0010_0005_a_10L都片手超揖師善巧繩墨之風威耶然也又次新建之餘代不乏人
0010_0005_a_11L隆二十五年庚辰辛巳年間九層寶塔聳建庭中可謂錦上添華佛前莊
0010_0005_a_12L是乃執令化主明濟大師中興之功威風之秋也歟
嗚呼法聦師之後
0010_0005_a_13L時來人富另寺物豐觀僧風軌範昭然於仙境皆由於超揖信元法惠淨

0010_0006_a_01L담행曇行 등의 대 선납禪衲들께서 창업하고 후세에 전하는 극념克念27) 성심誠心의 효과이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다시 흥성시킨 것은 오로지 명제 스님뿐이다. 지금까지 수백 년 간에 (그런 이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으니 사물의 흥폐를 족히 알 수 있다. 이에 사물의 흥폐는 때와 사람의 이로움과 불리함, 있음과 없음이 어떠한가에 말미암는다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사물은 도를 따르고 도는 때를 따르고 때는 사람을 따르며, 사람은 때를 여의지 않고, 사물은 도道를 여의지 않으니 이는 순종하면 합하여 흥성하게 되고 거스르면 흩어져 쇠하게 되는 자연스런 이치요 당연한 의리다. 그래서 나는 재주도 없이 졸렬한 말도 잊은 채 억지로 옛 자취에 의거하여 고금의 도와 사물의 흥성과 쇠퇴, 때와 사람의 이로움과 불리를 이렇게 드러내어서 후인(可畏)28)을 기다릴 따름이다.
청나라 광서光緒 13년(1887) 정해년 5월 해동 사문 부휴浮休 후인 백엄청수柏广清秀가 짓다.
손상좌 광흡廣洽이 쓰니, 당시 16살이었다.
【백마柏摩29)가 서문을 지은 것은 병술년(1886) 겨울이고 내게 발문을 쓰도록 요청했으니 이는 정해년(1887) 5월이다.】

강희 40년(1701) 신사년에 7칸 육화료를 창건한 이후에 바라와 징(打錚), 탁자, 가마(上輦)를 완성하였으니, 화주는 법총 도인이다.

강희 56년(1717) 정유년에 성전을 짓고 각각의 탱화와 큰 놋시루(鍮甑)를 완성하였으니, 화주는 신원信元과 풍매風梅ㆍ

0010_0006_a_01L彥曇行等諸大禪衲剏業垂統克念誠心之效而十有餘載後物復興振
0010_0006_a_02L一明濟師矣于今幾百年間不見不聞物之興廢猶足以知耳是可曰
0010_0006_a_03L物之與 [8] 係由於時人之利不利存不存如何矣然則物殉于道道殉于
0010_0006_a_04L時殉于人人不離時時不離物物不離道是所以順之則合而興盛
0010_0006_a_05L之則散而廢衰理之自然義之當然者故予以不才忘其詞拙強依舊蹟
0010_0006_a_06L古往今來道物之盛衰時人之利不利現示于左以待可畏者云爾

0010_0006_a_07L
清之光緒十三年丁亥五月 日 海東沙門
0010_0006_a_08L浮休后柏广清秀 撰

0010_0006_a_09L孫上佐廣洽書 時年 十六歲

0010_0006_a_10L柏摩之序撰在丙戌冬而要余書其尾此丁亥五月也

0010_0006_a_11L
康熙四十辛巳七間六和寮剏建後鈸囉打錚卓子上輦成功化主法聦
0010_0006_a_12L道人

0010_0006_a_13L
康熙五十六年丁酉營建聖殿各軸幀畫與大鍮甑成功化主信元風梅

0010_0007_a_01L치옥緇玉 선사들이었다.

강희 61년(1722) 임인년에 불기佛器와 식반食盆, 다간茶間, 대법고大法皷, 철두무鉄頭蕪, 쟁반錚盤을 완성하였으니, 화주는 통정대부 채민彩玟과 도흠道欽, 정책淨策이었다.

강희 57년(1718) 무술년에 불상을 조성했으니, 화주는 취적翠寂이었다.

옹정 3년(1725) 을사년에 육화료를 중건하여 완성했으니, 화주는 통정대부 양율亮律과 법혜法惠였다.

옹정 6년(1728) 무신년에 성전을 중건하여 이름을 ‘대웅전’이라 바꾸고 겸하여 기와를 바꾸었으니, 화주는 정언淨彥과 월백당月栢堂, 성민性敏, 여숙麗淑, 양택亮擇, 정탄淨綻, 설웅雪雄이었다.


옹정 9년(1731) 신해년에 바라와 작은 놋시루, 법당의 단청과 수다라장30)을 완성했으니, 화주는 궤신軌信과 의천儀天, 통정대부 선호善湖, 광첨廣沾이었다.

옹정 12년(1734) 갑인년에 대종 5백 근을 주조하였으니, 화주는 의밀儀謐이었다.

건륭 3년(1738) 무오년에 큰 불상 3존과 촛불을 받든 동자 한 쌍, 둥근 업경業鏡을 짊어진 사자 한 쌍, 목어 하나를 완성했으니, 화주는 설웅雪雄과 담행曇行이었다.


같은 시기에 은자 1백 냥을 헌납한 대시주는 통정대부 신원信元이고 중료眾寮의 주불主佛을 도금한 가격 은자 10냥을 시주한

0010_0007_a_01L緇玉等禪

0010_0007_a_02L
康熙六十二 [9] 年壬寅佛器食盆茶間大法皷鉄頭蕪錚盤成功化主通政
0010_0007_a_03L彩玟 道欽 淨策

0010_0007_a_04L
康熙五十七年戊戌佛像造成化主翠寂

0010_0007_a_05L
雍正三年乙巳六和寮重建成功化主通政亮律法惠

0010_0007_a_06L
雍正六年戊申聖殿重建更號曰大雄殿兼盖瓦成功化主淨彥月栢堂
0010_0007_a_07L性敏麗淑亮擇淨綻雪雄

0010_0007_a_08L
雍正九年辛亥鈸囉小鍮甑法堂丹青與脩藏化主軌信儀天通政善湖
0010_0007_a_09L廣沾

0010_0007_a_10L
雍正十二年甲寅大鍾五百斤鑄成化主儀謐

0010_0007_a_11L
乾隆三年戊午大佛像三尊奉燭童子一雙圓鏡負獅子一雙木魚一首
0010_0007_a_12L成功化主雪雄曇行

0010_0007_a_13L
同時銀子一百兩獻納大施主通政信元眾寮主佛塗金價銀子十兩施

0010_0008_a_01L이는 통정대부 양율亮律이었다.


건륭 5년(1740) 경신년에 향로전을 새로 지었으니 화주는 의문儀文이었고, 불향답佛餉畓과 기물의 화주는 취적翠寂이었다.

건륭 9년(1744) 갑자년에 새 터로 옮긴 청풍루와 소향각燒香閣을 먼저 짓기로 담당한 화주는 담행曇行과 신원信元 두 스님이었다.

건륭 10년(1745) 을축년 봄에 승료僧寮와 법당을 완성하고 이후 새 터에 가마솥 하나를 완성했으니 화주는 찬붕粲鵬과 영삼暎森이었다.

건륭 12년(1747) 정묘년에 민적당泯迹堂을 새로 지었으니 화주는 월현月玄과 학계鶴桂와 선냉善冷이었고 도편수는 초집超揖, 별좌는 선초善楚였다.

건륭 19년(1754) 갑술년 봄에 대웅전 단청을 하고 겸하여 기와를 얹어 중창하였으니 화주는 취관翠寬과 광윤廣允이었다.

건륭 20년(1755) 을해년 봄에 대종과 중종을 다시 주조하였으니 화주는 사겸思謙과 석방碩芳이었다.

건륭 25년(1760) 경진년에 9층 보탑을 뜰에 우뚝하게 세웠다. 3년 지나 계미년(1763) 단오날에 일을 마치고 완성하였다. 당시 기이한 징조와 탑을 세운 사적이 별도 기록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번거롭게 다시 인용하지 않는다. 대공덕 도화주都化主는 벽송당碧松堂 명제明濟이고, 석공은 김두만金斗萬, 별좌는 금가錦珂, 용미별좌舂米別座는 한삼漢森, 내왕來往은 한십漢什 거사 지원智元이었다.

건륭 30년(1765) 을유년 봄에 7칸 청풍루를 중건하여 5칸으로 하니 즉 보광루寶光樓이다. 당시 화주는 단준丹俊과

0010_0008_a_01L通政亮律

0010_0008_a_02L
乾隆六 [10] 年庚申香爐殿新建化主儀文 佛餉畓器物化主翠寂

0010_0008_a_03L
乾隆九年甲子移下新基清風樓燒香閣擔當先構化主曇行信元兩師

0010_0008_a_04L
乾隆十年乙丑春僧寮法堂俱成後新地釜一座化主粲鵬暎森

0010_0008_a_05L
乾隆十二年丁卯泯迹堂新建化主月玄鶴桂善冷都片手超揖 別座
0010_0008_a_06L善楚

0010_0008_a_07L
乾隆十九年甲戌春大雄殿丹青兼盖瓦重剏化主翠寬廣允

0010_0008_a_08L
乾隆二十年乙亥春大鍾中鍾改鑄化主思謙碩芳

0010_0008_a_09L
乾隆二十五年庚辰設役九層寶塔聳建庭中越三年癸未端陽之日
0010_0008_a_10L役落成其時奇異之瑞符建塔之事蹟具載別錄強不繁引
0010_0008_a_11L大功德都化主碧松堂明濟 治石工金斗萬 別座錦珂 舂米別座
0010_0008_a_12L漢森 來往漢什居士智元

0010_0008_a_13L
乾隆三十年乙酉春七間清風樓重建為五間即寶光樓也其時化主丹

0010_0009_a_01L수익守益, 수간守侃이었다.

건륭 33년(1768) 무자년 봄에 40근 판쟁板錚을 스스로 발심하여 완성한 화주는 일임日稔이었다.

건륭 45년(1780) 경자년에 민적당을 중건하였으니 화주는 인회印懷와 채경彩敬이고, 상편수上片手는 단섬亶暹, 부편수副片手는 정륵淨勒, 별좌는 성흡性洽이었다.

건륭 53년(1788) 무신년에 새로 큰 불상 3존과 영산후불탱화와 감로신중탱화를 완성했으니 화주는 대유大裕와 상영尚英이고 양공良工31)은 설훈雪訓과 혜청惠清, 원유圓宥, 별좌는 처장處藏, 도감都監은 석경釋敬과 성흡性洽이었다.

건륭 54년(1789) 기유년과 경술년(1790) 두 대상大桑의 해에 백미석白米石과 소미석小米石을 헌납한 삼보三寶 공덕주는 성흡性洽이었다.

건륭 59년(1794) 갑인년에 대웅전을 중건하니 2월 7일에 시작하여 다음 해 가을 8월에 완성하였다. 도화주都化主는 대유大裕, 도편수는 선찬先賛 스님, 상편수는 옥홍玉弘 스님, 공양주는 대민大敏과 낭홍朗弘, 별좌는 낭은朗訔, 도감은 성흡性洽이었다. 다음 해 단청을 하였으니 화주는 상영尚英과 쾌징快澄이고, 공양주는 돈현頓賢과 양훈良訓, 별좌는 성심性心, 도감은 설묵雪默이었다.

가경 원년(1796) 병진년에 관음과 원불願佛ㆍ칠성ㆍ현왕現王32) 탱화를 스스로 발원한 화주는 돈식頓識과 용면龍面, 처징處澄,

0010_0009_a_01L俊守益守侃

0010_0009_a_02L
乾隆三十三年戊子春四十斤板錚自發心成功化主日稔

0010_0009_a_03L
乾隆四十五年庚子泯寂堂重建化主印懷彩敬上片手亶暹 副片手
0010_0009_a_04L淨勒 別座性洽

0010_0009_a_05L
乾隆五十三年戊申新大佛像三尊與靈山後佛幀甘露神眾幀化主大
0010_0009_a_06L裕尚英 良工雪訓惠清圓宥 別座處藏 都監釋敬性洽

0010_0009_a_07L
乾隆五十四年己酉庚戌兩大桑年白米石小米石納三寶功德主性洽

0010_0009_a_08L
乾隆五十九年甲寅大雄殿重脩二月初七日設役翌年秋八月畢役落
0010_0009_a_09L
0010_0009_a_10L都化主大裕 都片手先賛師 上片手玉弘師 供養主大敏朗弘 
0010_0009_a_11L別座朗訔 都監性洽 翌年丹青化主尚英快澄 供養主頓賢良訓
0010_0009_a_12L別座性心 都監雪默

0010_0009_a_13L
嘉慶元年丙辰觀音願佛七星現王四幀自發願化主 頓識龍面處澄

0010_0010_a_01L혜청惠清이고 공양주는 처붕處鵬, 별좌는 궤심軌諶, 도감은 성흡性洽, 증사證師는 정심당靜心堂 찰원察原, 송주誦呪는 청담당清潭堂 대윤大允이었다.

건륭 22년(1757) 정축년 3월 9일에 내원암을 창건하였고, 건륭 47년(1782) 임인년 3월 15일에 다시 지었고, 가경 20년(1815) 을해년 4월 22일에 중건하였다. 세월이 바뀌어 스러지고 무너지니 동치 12년(1973) 계유년 5월 19일에 이르러 새 목재로 다시 지었다. 화주비구는 경유敬裕, 도감비구는 대은大銀, 별좌비구는 부일富一이었다.

광서 정해년(1887) 4월에 백련암을 새로 창건하였으니, 화주는 용운당龍雲堂 성구性具, 도감은 석엄당石奄堂 부일富一, 별좌는 중엽仲曄이었다.
4. 정광사 사적 定光寺蹟
4.1 사적 서문(寺迹序)
이리저리 서성거리는데 성함性咸 스님이 내게 와서 말했다. “기록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여기에 있으니, 사찰의 연원을 대략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지금처럼 옛날에 전함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함이 없도록 하게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길, “거북이가 짊어진 바위의 역사가 어찌 빛나게 물시계의 물이 다하고 종이 울리도록33) 비방을 하지 않는 것과 같겠습니까. 바탕도 그렇게 할 수 없거든 다시 글(文)을 짓겠습니까. 그냥 두시지요, 그냥 두시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재배하고 정색하며 말했다. “스님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겨우 두세 가지입니다.

0010_0010_a_01L惠清 供養主處鵬 別座軌諶 都監性洽 證師靜心 堂察原
0010_0010_a_02L呪清潭堂大允

0010_0010_a_03L
乾隆二十二年丁丑三月初九日內院庵剏建而乾隆四十七年壬寅三
0010_0010_a_04L月十五日改建又嘉慶二十年乙亥四月二十二日重修矣歲換星移
0010_0010_a_05L頹仆覆至同治十二年癸酉五月十九日以新材改建化主比丘敬裕
0010_0010_a_06L監比丘大銀別座比丘富一

0010_0010_a_07L
光緒丁亥四月日白蓮庵新剏建而化主龍雲堂性具都監石奄堂富一
0010_0010_a_08L別座仲曄

0010_0010_a_09L○定光寺蹟

0010_0010_a_10L寺迹序

0010_0010_a_11L
方遑沉辛性咸師進余曰不可無記者在此略記寺之淵源庶无 [11] 諸後如
0010_0010_a_12L今之憫古無傳者為幸
慢而哂曰龜戴石史何等煥乎漏盡鍾鳴不為訕
0010_0010_a_13L質且不敢更敢文乎△姑置姑置
再拜正色曰師之不可為者僅可再

0010_0011_a_01L그러나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다섯 가지 있습니다. 지난 날 호계삼소虎溪三笑34)의 기회가 부족한데 공동崆峒35)의 상서로운 구름이 이어지고 기이한 봉우리들이 즐비하니 짊어지기 원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석필石畢과 인지麟趾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신축할 기회가 막혔는데 이제 수리하게 됨에 천신薦紳36)들이 남긴 일을 실추시키지 않아야 함이 둘째 이유입니다. 춘추필법을 오로지 숭상함이 후세의 법칙이 되었으니 흥성함은 서술하고 피폐함은 그냥 두는 게 불가함이 셋째 이유입니다. 종소리가 저녁노을(落霞)에 날아 이목을 막아버리니 지키지 못한 이들에게 알게 함이 넷째 이유입니다. 크게 보시한 아름다운 성함들의 장수를 송축하여 글로 바탕을 높여야 함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이 다섯 가지 일은 가르침으로 남겨야 하니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나는 불현듯 인상을 펴며 말했다. “두레박줄이 짧은37) 것도 헤아리지 않고 그저 싶은 연못을 부러워하고 오로지 수희隨喜38)하며 이천二天39)을 자부하노니, 허리띠를 풀고 정성껏 대함을 우러러 본받고 삼가 공손히 힘써 명銘을 짓겠습니다.”
그리고 절하고 붓을 잡았다.

광서光緒 17년(1891) 신묘년 스스로 방자하게 부휴浮休의 10세世라고 말하는 춘파탁여春坡卓如가 삼가 붓을 잡고, 덕월德月의 문인門人 응교應教 사미가 쓴다.

4-2. 관성현 대덕산 정광사 사적 실록 觀城縣大德山定光寺事蹟實錄40)
천지가 개벽한 후 산은 땅을 가리지 않으니 아름다운 산과 물은 모두 불교의 땅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사찰의 흥성은 사람으로 말미암으니 앞선 현인과 뒤의 후손들이 법을 지키는 이 아님이 없다. 산은 펑퍼짐하고 가팔라 수백 리에 걸쳐 있어 위로 백두산 줄기를 접하고 이 푸른 바닷가로 이어진 것은 오직 대덕산뿐이다. 사찰은 산이 머금고 계곡이 감춘 한 굽이 청정 지역으로, 정광여래의

0010_0011_a_01L此之不可不為存有五往乏三笑虎溪崆峒霱雲之綿綿奇峯戀戀
0010_0011_a_02L戴者一也石畢麟趾後尚閼經劫之再新及今營繕不墜薦紳之緒餘者
0010_0011_a_03L二也春秋筆法專尚降世之為則不可興敘弊置者三也鍾飛落霞塗諸
0010_0011_a_04L耳目令知不守者四也大施芳銜頌祝售遠以文崇質者五也此之五事
0010_0011_a_05L貽厥垂訓烏可已也
翻然觧眉曰不揣短綆只羨深泉一亶隨喜自負二
0010_0011_a_06L仰軆解帶之眷眷肅恭命銘之亹亹
拜手拈毫

0010_0011_a_07L
光緒十七年辛卯自恣曰浮休十世春坡卓如
0010_0011_a_08L謹慎操觚
0010_0011_a_09L德月門人應教沙彌書

0010_0011_a_10L○觀城縣大德山定光寺事蹟實錄

0010_0011_a_11L
天開地闢山不擇地佳山剎水盡為佛家之地宇往宙來寺興由人先哲
0010_0011_a_12L後昆莫非護法之人也山兮蹲蹲崢嶸根槃幾百里遡接白頭之龍而鍾
0010_0011_a_13L此蒼溟之顏者曰唯大德山也寺也山含谷秘一曲淨土來妥于定光如

0010_0012_a_01L자비보탑을 편안히 모셨으니 이것이 정광사이다.
삼가 대들보의 옛 글과 현판의 아름다운 글들을 살펴보니, 당나라 문종 개성開成 3년(838)에 난야蘭若를 하나 세워 ‘운흥암雲興庵’이라 하였고, 송나라 진종 함평咸平 원년(998)에 일신하여 중수하고는 ‘운흥사雲興寺’라 하였다. 혹자는 지역을 의심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가만히 헤아려 보면 만방이 비록 다르지만 연호는 동일하다. 불교가 서쪽에서 점차 동쪽으로 왔으니 중국을 적시고 동쪽을 적심에 명산에 사찰 8천이 세워졌고 동시에 춘추春秋로 통일되었다. 만방이 모두 사찰 건립을 받아들였으니 족히 의심할 만한 게 절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으나 한두 번이 아닌 병화가 들녘을 나눔이 여러 번 이어져 흔적(書契)을 대신할 만한 게 없고 기록(結繩)은 오래되어 희미해졌다. 문궤文軌41)를 생각하면, 당요唐堯 갑진년42)이 역사의 시작이다. 이 기원으로부터 기록한 것이 명확한 판단이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에 느닷없는 재난(병자호란) 이후 사찰에 완성을 서원한 이가 있었으니 그 법호는 원학元學이다. 일을 시작함에 뛰어났고,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는43) 법이니 단연檀緣(시주)을 모으는 한편 장인들을 불러 모았다. 법전(室殿)이 먼저 솟았고 누각(鴦樓)이 따라 나오니 동쪽 승방과 서쪽 선실이 일시에 흥기하여 옛날 모습보다 나았고 중흥이라 칭할 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도인의 부차적인 일이요, 부차적인 일이라서 하지 않고, 하지 않는데 자손(貽厥)44)에게 수통垂統45)하여 이처럼 창건하였으니, 사람들이 뭐라 일컬을 수 없을 정도엿다.
순치順治 경자년(1660)에 다시 드러난 이가 있었으니 법호는 성정性淨이다. 정광여래의 치사리齒舍利 2매枚를 어디선가 받들고 와서는 탑을 세우고 감실에 안치하며 말하길, “이는 천축국의 불보佛寶이니 이 사찰로 하여금 고통을 벗어나 해탈하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홀연 사라졌다. 혹자는 말하길, “성정性淨은 문수文殊의 본명이니 혹시 한 번 현현한 것인가.” 하였다. 아아, 이 나라는 본래 인의仁義를 숭상하는 산수의 고장이므로 정조 병오년(1786)에 공자 후손이 공자 영정을 모시고 경상도 창원부昌原府에 와서, 영전影殿을

0010_0012_a_01L來慈悲寶塔是為定光寺也
謹按助樑之古簡板上之閑文有唐文宗開
0010_0012_a_02L成三年草創一席蘭若曰雲興庵大宋真宗咸平元年一新重篇曰雲興
0010_0012_a_03L或者疆域疑之默數算來萬區雖別一歲同分斯教之漸東自西漸于
0010_0012_a_04L華夏漸于東名山樹剎八千同時春秋一統万邦咸受建寺絕元無足贅
0010_0012_a_05L然雖如是不一兵燹劃野累遷連無以代之書契依俙結繩之經劫
0010_0012_a_06L想文軌唐堯甲辰史氏之造端也自此紀元所記之明斷也

0010_0012_a_07L
崇禎丙子俄灾後寺有誓願成者厥號元學首事拔萃德必有隣左募檀
0010_0012_a_08L右招工匠室殿先涌鴦樓隨出東僧西禪一時並興猶勝舊貫尚稱中
0010_0012_a_09L然此等事業道人餘事餘事故無為無為故貽厥垂統若是建剏然人
0010_0012_a_10L不得稱焉
順治庚子次復有示現者法號性淨奉定光如來齒舍利二枚
0010_0012_a_11L自無何而來疊塔而安龕曰此天竺國之佛寶也可令此寺離苦觧脫
0010_0012_a_12L忽為無或曰性淨文殊本名其或一現哉嗚呼邦本仁義山水之鄉故我
0010_0012_a_13L正廟朝丙午孔子後孫宗人陪孔子影幀而來于慶尚道昌原府上為建

0010_0013_a_01L 짓고 ‘술성述聖’이라는 편액을 크게 썼었는데, 자취가 이와 비슷하다. 지역은 치우쳐 있지만 부처를 위하고 성현을 위함은 천하에 양보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어찌 오대산과 삼신산 사이에서만 모습을 드러내셨겠는가. 실로 산이 청량46)하여 천강千江의 달에 모습을 드러냄이니, 맑고도 가깝도다. 이곳저곳에 경계를 바꾸니47) 누가 시기하겠는가.
스님이 오실 때 갈래사葛來寺48)에 처음 방榜을 붙였는데 무리 속에 어떤 주인이 이윽히 살피더니, “청량산을 떠난 후에 이 땅에 인연이 익어 그대를 바란 지 오래되었다. 아아, 늦었도다.” 하였다. 객49)이 좌우를 돌아보며 타인에게 말했다. “남방이 풍년이라 도처에 환호하는 노래로다.” 주인이 말하길, “때마침 오고 때마침 가니 호념護念50)하기를 부촉咐囑51)하노라.” 하고는 탁자를 짚고 방장으로 돌아갔다. 객이 말하길, “북을 울려 대중을 모으라. 한 부처님이 열반하니 다들 두려워하지 말고 보아라.” 하니, 의젓하게 좌화坐化52)하였다. 객이 말하길, “체용軆用의 형상을 억지로 없앨 수 없다.” 하고는 장인을 불러 돌을 다듬으니 과연 대광大光 삼매 가운데 사리 하나를 얻었다. 낮에 찬란하고 밤에 밝아 대중들이 경탄했다. 이에 드디어 탑을 세우게 되니 북쪽 기슭 7층탑에 아직도 우뚝하게 글이 새겨져 있다. 객이 말하길, “대중은 또 말해보라. 새로 간 이는 누구인가.” 하니 혹자는 “취진翠真 스님(師主)입니다.”라 하고 혹자는 의동儀洞 대사라 하고 또는 얼굴은 익히 아는데 근본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객이 말하길, “그 호는 ‘유반有盤’이요 혹은 ‘몰골옹沒骨翁’53)이나 ‘면적개面赤箇’라 칭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때마침 오고 때마침 가니’라는 것은 괜찮음도 없고 괜찮지 않음도 없다는 뜻이다. 여여하게 오고 여여하게 가니 본래 가고 옴의 형상이 없다. 내가 온 인연은 바로 그가 간 인연이다. 정광여래의 사리가 마침 온 일을 잘 호념하고 새로 원적圓寂(입적)하여 마침 간 일에 대해 잘 부촉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제 불사리를 봉안하였고 또 보살감菩薩龕을 마련한 것이다. 공을 쌓은 이는 가고 도를 닦는 이는 행한다.”라고 하고는 홀연 사라졌다. 오는 이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자취와 가는 이가 드러내어 온 실상이 이와 같이 나누어지니

0010_0013_a_01L影殿述聖大額迹同類是矣地雖扁方為佛為聖何幸不讓於天下也
0010_0013_a_02L何間於五臺三神而播現乎抑實山之清凉而放貌乎千江之月惟清惟
0010_0013_a_03L三三替境孰敢猜譏哉
師之來也初榜於葛來寺眾中有一主人熟視
0010_0013_a_04L之曰清凉別後此土緣熟望子久矣嗚呼晚乎客顧左右而言他曰南方
0010_0013_a_05L大稔到處歡歌主曰適來適去護念付囑主丈一卓而纔歸房丈客曰撞
0010_0013_a_06L皷集眾一佛涅槃無僉悚渾視坐化儼然矣客曰軆用之相不可強泯
0010_0013_a_07L匠攻石果得一箇舍利於大光三昧中晝𤾗夜朗眾所驚動於是遂封層
0010_0013_a_08L於北麓七級之塔至今屹然刻書客曰大眾且道新逝者阿誰或曰翠真
0010_0013_a_09L師主也或曰儀洞大師也亦曰熟知面品不知其本客曰厥号有盤或稱
0010_0013_a_10L沒骨翁或曰面赤箇向云適來適去者無可無不可也如而來如而去
0010_0013_a_11L無去來之相也儂來之因即渠去之緣也謂定光如來舍利適來之事
0010_0013_a_12L護念新圓寂適去之事善付囑云云故今纔已安佛舍利又妥菩薩龕
0010_0013_a_13L者去者 [12] 道者行也仍忽化無來者現去之迹去者彰來之實如此分上

0010_0014_a_01L어떠하다 하겠는가,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으니, 그 모습을 그려서 천고에 맡겨둔다.
강희康熙 원년(1662) 임인년에 다시 탑을 만든 이가 있으니 호는 보영普影이요 이름은 인균印均이다. 일생동안 발원하여 삼생의 인연이 익어 삼세 여래와 십전명왕十殿冥王54), 후불탱화, 법보함法寶函, 불공(餉佛) 도구, 위엄 있는 협시불, 온갖 장엄을 새로 만드니 환연히 일신하여 오래도록 아름다움 전하고 많은 이들이 찬탄하였다. 자취에 감응한 조화造化가 아니라면 어찌 살아서는 조사의 적통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로 시적示寂(입적)하겠는가. 가히 천만 가지를 다 만족했다 이를 만하다.55) 무리 중에 이름을 드러내어 다행히 성현의 세상을 만나 즐거이 일을 일으켰도다.
금년에 불당 완성하고 내년에는 불사佛事, 선배들이 마치니 후배들이 애쓰도다. 연마하고 조탁하여 촘촘히 얽는 것은 바탕 이후의 일이다. 세상에서 짓는 것은 사람마다 공적이 나뉘니 진실로 고정된 것은 아니다. 구름을 뚫고 오르는 종과 경쇠소리로 임금의 만년 장수를 축원하고 태평세월에 무궁히 법륜을 굴리도다.
강희康熙 연간에 사찰에 해탈한 이가 있으니 법휘는 쾌묵快默이요 속성俗姓은 이씨(國氏)이다. 고향 함산咸山에서 본사로 와서는 잠관簪冠56)을 버리고 삭발하여 스승에게 계를 받았다. 벽파당碧波堂 법징法澄 대사를 수은사受恩師로 하고 보영당普影堂 인균印均 대사를 명계사冥戒師로 하여 머리 깎으니 천연스러웠고, 호는 마음에 걸맞았다. 앉아서는 직시하고 걸으면서는 땅을 살피며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서, 세월을 하루 같이 하여 말이라면 한 마디뿐, 평생 태평이라. 기질지성氣質之性57)은 평소 행하지 않고 천성지성天性之性을 항상 홀로 드러내었다. 처음에 서의금곡西意金谷의 법석에 참여해서, 잃은 듯하나 홀로 얻었으니58) 옛 친구를 만난 듯했다. 학린굴鶴隣窟59) 바위를 넘은 지 얼마 후 하나의 대포소리에 확철대오하였으니 바라보면 백억 석가모니요, 생각하면 한 줄기(一練) 만년萬年이었다. 태허에 온통 정신을 쏟았으니 강산을 어찌 친할 것인가. 노학魯鶴은 방장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백 리에 어찌 천리마 재주를 드러내겠는가. 대붕은 높이 날아 먼지 속의 말들과는 무리 짓지 않듯이 고문高門에 석장을 떨치며

0010_0014_a_01L何如哉莫知所云繪寫方樣任其千古
 康熙元年壬寅次復有塔寺者
0010_0014_a_02L號稱普影名曰印均一生發願三生緣熟新造三世如來十殿冥王後佛
0010_0014_a_03L諸幀法寶眾函餉佛資具侍佛威俄 [13] 凡所莊嚴煥然一新百代流芳万口
0010_0014_a_04L不賞若非應跡造化何為生而祖師嫡脉死而菩薩示寂可謂千足萬足
0010_0014_a_05L輩出名幸逢聖世樂生興事
今年堂成明年佛事前輩竣乎後人拮口
0010_0014_a_06L鑄雕琢綢繆後素世所營作人所分功固莫可固徹雲鍾罄祝聖壽於万
0010_0014_a_07L昇平烟月轉法論 [14] 之無窮
康熙年間寺有解脫者法諱快默俗姓國氏
0010_0014_a_08L鄉自咸山來到本寺投簪同冠剃髮稟師以碧波堂法澄大師為受恩師
0010_0014_a_09L以普影堂印均大師為冥戒師剃則天然號則稱心坐乃直視行乃審地
0010_0014_a_10L不問不言歲月同日語則一語平生太平氣質之性素不行天性之性
0010_0014_a_11L獨露初叅西意金谷法席似失偏得如逢舊識踰越鶴隣窟岩居無何
0010_0014_a_12L聲砲響廓徹大悟見則百億釋迦念則一練萬年太虛一精神江山何所
0010_0014_a_13L魯鶴不喜方丈之餐百里奚彰千里之駿大鵬高翔塵馬不羣高門振

0010_0015_a_01L거처에 일정함이 없었다. 돌아다님이 어찌 1백 성城뿐이며 두루 참학함이 하필 50인60)이겠는가. 그중에 가장 하궤荷簣61)에 친절했던 이는 용암龍岩62) 선옹禪翁이요, 여러 날 자면서 참학하여 문진問津63)한 이는 환성喚性64) 노스님(師翁)이다. 유한한 인연을 거두니 큰 별이 심원사深源寺에 떨어졌고, 입적에 임하여 부촉하니 유해를 부도浮圖65)에 안치함이라. 한 번 비방과 칭찬을 받았으나 함께 깨달음을 이루었도다. 내 생각에, 만고의 한 주인이 산수(烟霞)에 나온 것이라. 역사서에 이른바 ‘황제가 방주房州에 있다.’66) 하였으니 여기서는 주인이 공중에 있다 하리라.
옹정雍正 연간에 들은 것이 많고 견고한67) 이가 있었으니 호는 염화拈華, 법명은 천계天戒이니, 한양 조씨趙氏이며 9살에 입산하였는데 가학으로 내외 경전에 통달하였다. 선학으로 다섯 종파를 탐색하고 팔방을 주유하여 두루 선지식을 참학하고 가을에 근본으로 돌아오니 명성이 안팎으로 드날렸다. 언덕과 산에서 업을 바로잡고 숲에 어리석음을 붙이니, 실로 코끼리를 탄 나한으로서 복덕과 지혜가 온전하다 하겠다. 때가 이름을 미리 알고 정전正傳을 남기지 않으나, 현재 사리를 보니 누군가 종통宗統을 이었도다. 불로 변화한 상서로움(사리)을 북쪽 기슭의 부도와 묘갈에 실었으니, 이후 다시 주인은 석정石精에 있도다.
건륭乾隆 연간에 때마다 사람이 없지 않았으니 완해당玩海堂 인균印均 대사와 송월松月ㆍ설화雪華ㆍ명암明庵ㆍ한송寒松ㆍ청송青松ㆍ쌍곡雙谷ㆍ성봉聖峯ㆍ춘강春降ㆍ연파蓮波 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선사들이 추우騶虞68)라면 사자요, 까치라면 봉황이라 하여 같이 여길 수 없는데 어찌 감히 비판(雌黃)69)하겠는가. 이로부터 공적 외에는 일단 쓰기를 그친다. 선기璇璣70)가 돌아서 우주宇宙(시간)가 도도히 흘렀다.
가경嘉慶 병진년(1796)에 풍암체윤豐巖軆胤 선사가 여래불과 지장불ㆍ시왕 등 30여 존상尊像을 개금하니 위엄있게 상주하였다. 10년 지나 환정간홍幻靜侃弘 대사가 세존 불상과 육광六光 보살71) 등 7위를 조성하여 지금까지 호한澔汗72)하다. 단월檀越(시주) 최한빈崔漢彬 공이 천금을 크게 보시하였다. 도회지 공자公子가 부처님을 숭상하고 승려를 아니 진실로 우담바라가 드러남이라. 즐거운 군자여,73) 복을 누리고 또 복을 심도다.

0010_0015_a_01L居無定止遊方豈啻百城徧叅何必五十箇中最親切於荷簣者龍岩
0010_0015_a_02L禪翁信宿叅於問津者喚性師翁收緣有限大星墜於深源寺臨滅遺囑
0010_0015_a_03L髑髏浮圖一見毀譽同成覺云愚謂萬古一主人出在烟霞中史稱帝在
0010_0015_a_04L房州此云主在空中
雍正年許有多聞堅固者號曰拈華名稱天戒鄉貫
0010_0015_a_05L漢陽趙氏九歲山家學通內外禪探五宗遊周八垓徧叅知識葉秋歸根
0010_0015_a_06L名動緇素讎業丘山痴屬藪林實謂象驂羅漢福慧兩全預知時至不遺
0010_0015_a_07L正傳現觀舍利人承宗統化火靈瑞具載北麓浮圖軿碣次復主人在石
0010_0015_a_08L
乾隆年間代不借人如玩海堂印均大師及松月雪華明庵寒松青松
0010_0015_a_09L雙谷聖峯春降蓮波等繼繼繩繩諸禪師如獅子之於騶虞鳳凰之於黃
0010_0015_a_10L鵲者未得同見豈敢雌黃從此當功之外姑置塞筆璇璣轉旋宇宙滔滔

0010_0015_a_11L
嘉慶丙辰豐巖軆胤禪師改金如地來藏十王三十餘尊像儼然常住
0010_0015_a_12L十年幼 [15] 靜侃弘大師創造世尊及六光菩薩凡七位至今澔汗檀越崔公
0010_0015_a_13L漢彬大施千金紫陌公子崇佛知僧者真曇華一現樂只君子享福又種

0010_0016_a_01L복록이 오래가고 또 번성하리로다.74) 그리고 지현知賢이란 이가 감당甘棠75)의 문을 두드려 연천淵泉 김金 상공相公76) 각하에게 명銘을 써주기를 구하였다. 그러자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특별히 써 주어 우뚝하게 바위에 새기니, 지난 자취를 잇고 미래의 안목을 뜨게 했다. 드디어 사찰에 전하는 바위역사(石史)가 되었다. 이와 같이 깊이 믿었으니 오히려 원학元學ㆍ인균印均과 함께 공적이 비견하여 중시된다.
세대가 내려오면 앞서 어렵던 것들이 더욱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 사찰의 사찰 됨은 암자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찰이 되고 광光에 흥하였으니 수 백 년 사이에 공적으로 손을 꼽을 자가 어찌 그저 하나 둘 셋 넷으로 셀 수 있겠는가. 공적이 높고 업적이 광대함이 저처럼 찬란한데 밤에 비바람 불어옴에 꽃이 짐을 짐작한다. 사람 일의 새로움을 부비흥賦比興77)으로 대략 적는다.

清波橋上 為龍興橋      청파교 위는 용흥교 되고
不二門內 即曹溪門      불이문 안은 조계문이라
過迎薦樓 上天王門      영천루 지나 천왕문 오르고
由功德碑 登万歲樓      공덕비 지나 만세루 오르네

聞梵鍾 而視佛界        종소리 들으며 불계를 바라보니
大雄殿 八相殿        대웅전, 팔상전
與冥府殿 通香積殿 智勝殿   명부전, 향적전 지나 지승전
與七星閣 連尋釰堂 寂默堂   칠성각, 심검당 이어 적묵당
軆用禪關 凝香閣 定光塔    체용선관, 응향각, 정광탑이라

同時見 異時見        같은 때 보고, 다른 때 보니
有寺之有庵 如月之有星    사찰의 암자는 달의 별 같아
明經之南庵 視行之雙溪庵   명경의 남암, 시행의 쌍계암
見道之西雲菴 修道之極樂庵  견도의 서운암, 수도의 극락암
見佛之彌陁庵 兜率之上雲庵  견불의 미륵암, 도솔의 상운암

南振北起            남쪽에서 떨치고 북에서 일어나
東吼西格            동쪽에서 외치고 서로 이어지니
谷谷之青烟          골짜기마다 푸른 연기요
峯峯之白雲          봉우리마다 흰 구름이라

烟霞相換            연기와 놀이 서로 바뀌니
巖洞共華            바위 골짜기가 함께 찬란하네
與物皆昌            만물과 함께 창성하니
不覺星移            시간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네

가경嘉慶 계유년(1813)에 북을 울려 대중(象)을 모으고 말했다. “우리들이 명색은 사문이나 항상 물품이 군색함을 걱정하여 방향 따라 살아감에 남북이 같지 않으니 한 차례 산업을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또한 하물며 토산물에 닥나무가 없으니 지역紙役을 할 수 없고 신발을 엮고 자리를 짜는 것도

0010_0016_a_01L福履長之又振振又知賢者甘棠扣門丐筆賜銘於淵泉金相公閣下
0010_0016_a_02L特設不鄙屹然鐫石繼𨓏迹開來眼遂為傳寺之石史焉如此深信尚與
0010_0016_a_03L元學印均功相比肩而重之
以世降則尤難於前之難之為愈也然此寺
0010_0016_a_04L之為此寺也始於庵漸於寺興於光相拒幾百年之間尚功屈指者豈徒
0010_0016_a_05L一二三四可與數哉功崇業廣如彼燦爛夜來風雨落花斟酌人事賁新
0010_0016_a_06L比賦之興略干如左
清波橋上為龍興橋不二門內即曹溪門過迎薦樓
0010_0016_a_07L上天王門由功德碑登万歲樓聞泛 [16] 而視佛界大雄殿八相殿與冥府
0010_0016_a_08L殿通香積殿智勝殿與七星閣連尋釰堂寂默堂軆用禪關凝香閣定光
0010_0016_a_09L同時見異時見有寺之有庵如月之有星明經之南庵視行之雙溪庵
0010_0016_a_10L見道之西雲菴修道之極樂庵見佛之彌陁庵兜率之上雲庵南振北起
0010_0016_a_11L東吼西格谷谷之青烟峯峯之白雲烟霞相換巖洞共華與物皆昌不覺
0010_0016_a_12L星移
嘉慶癸酉擊鼓執象曰吾徒名雖沙門常患資具之艱險而隨方生
0010_0016_a_13L南北不同一度產業確定乃已又况土產乏楮紙役無端梱屨織席

0010_0017_a_01L단서가 없으니 본업으로 농사를 짓는 것만 못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근본이다.” 그리하여 원의元議가 붓을 잡아 좌우 양쪽 골짜기를 두 마을의 수민首民 김국봉金國奉과 방순재方順才ㆍ김옥용金玉用ㆍ정광춘鄭光春ㆍ전응춘全應春 등에게서 매입하고 경계를 표시하였다. 순병영巡兵營78)에서 절목節目79)을 완성하고 수령의 첩어帖御에 의거하여 비석을 새기고 세워 이렇게 후손에게 전하였다. 일찍이 말하길, 파랑새의 시력과 반수般倕80)의 실력(規矩)은 하늘도 뺏을 수 없다 하였다. 아, 달이 둥근 지 오래되었으니 그믐과 초하루가 뒤에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가경嘉慶 갑술년(1814)에 맹풍이 불을 일으켜 뜨거운 화염이 하늘에 뻗치니 천 년의 만액萬液이 일조에 재로 날렸다. 편액이 불에 그슬러 대낮에 근심스레 하늘에 기도하고 아이며 노인들이 황혼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용천龍天이 참담해 하고 금수가 울부짖었다. 천행 만행으로 여래와 보살, 탑묘塔廟와 명왕冥王은 무사하였고 다음으로 시왕전을 보니 푸른 산 맑은 시내에 태연할 따름이었다. 땅이 문드러지고 쇠가 녹아 멀리 교각까지 불이 미쳤다.81) 아 저 우뚝한 비석은 완전하게 보전되었으니 천행인가 신이 도움인가. 비석이 온전한 것은 비각(冐閣) 때문에 온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 비각이 불에 타지 않은 것은 실로 비석이 불에 타지 않음을 위함인가. 이 공적탑이 무너지지 않음을 보건대 ‘남은 경사82)의 귀감’이라 하지 않는 게 옳겠는가.
새벽 이슬이 번잡한 옛 티끌을 씻어 내리고, 가을바람(啇風)83)이 청량한 새 운수를 불어오는구나. 불상(金身)이 담장과 벽 사이에 노출되어 있는데 승려가 삼가지 안을손가. 풍암豐巖과 환정幻靜 선사가 있어서 고경古鏡이요 거벽巨擘이기는 하나 등설대부藤薛大夫84)가 어찌 형산荊山의 옥85)을 바라리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장인들을 부리고 시주(檀緣)를 모집하였다. 비바람을 맞아가며 시주(檀門)의 금조각과 쌀 한 톨, 베 한 조각 실 한 줌이라도 많이 모으려 했고, 별을 이고 서리 밟으며 산골짜기에서 석곽과 재목과 진흙과 흙덩이 속에서 개미처럼 계획하고 벌처럼 일했다. 그리하여 높디 높은 보전寶殿이 구름 끝에 솟고,

0010_0017_a_01L非可緒莫若本業耕種耕種則有土為本乃元議秉筆欲買得左右兩洞
0010_0017_a_02L於兩里首民金國奉方順才金玉用鄭光春全應春等處是遣定植標榜
0010_0017_a_03L是矣巡兵營完節目據本倅帖御刻石樹碣以此傳之苗裔甞謂青鳥之
0010_0017_a_04L善視般倕之規矩天不能奪吁月圓既久晦朔在後夫不可信
嘉慶甲戌
0010_0017_a_05L猛風吹火烈焰亘天千年萬液一朝灰飛方▼(示+色)煖額祝天愁於白日垂髫
0010_0017_a_06L戴白扣地痛於黃昏龍天慘憛禽獸聲咽千幸萬幸如來菩薩塔廟冥王
0010_0017_a_07L無恙次看王殿青嶂碧澗泰然而已爛土鎔金遠及橋閣之火玩叢中
0010_0017_a_08L彼突兀央碣完安泰保天耶神耶石尚万或冐閣亦全不為閣之不然
0010_0017_a_09L為碣之下 [17] 然也視此功塔之不壞不云餘慶之龜鑑可乎
晨露滌降舊塵
0010_0017_a_10L之昏煩啇風吹來新運之清涼金身露坐墻壁間僧心罔或不勤乎豐巖
0010_0017_a_11L幻靜尚存雖是古鏡巨擘藤薛大夫豈望荊山之玉不仰自恤拮据工匠
0010_0017_a_12L鳩募檀緣餐風沐雨而裒多益寡於片金斗粟尺布寸絲之檀門戴星履
0010_0017_a_13L而蟻謀蜂役於石槨良材泥圖土塊之山壑巍巍寶殿涌出於雲端

0010_0018_a_01L성대한 선루禪樓(사찰)가 다시 눈 앞에 드러났다. 고래 기둥과 무지개 들보가 찬란하게 신의 공적인 듯하고 천리마 터럭과 용의 갑옷 또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바야흐로 하늘에 운수가 있음을 알겠다. 대지 역시 신령을 머금고 축하하였으니 제비와 까치가 공중에 날고 산색과 물빛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공업은 아홉 길에 실패하여86) 사업이 온전하지 못하니 누각이 완성되지 못하고 채색을 묻지 않으니 애석하지 않은가. 사람은 죽지 않음이 없고 때는 흐르지 않음이 없다. 세대가 멀어지니 안타깝고, 당시 일이 슬프도다.
도광道光 기해년(1839)에 사찰에 전하던 보배 사환유四環鍮87)를 동해에 있는 복흥사福興寺에서 빌려갔다. 당저當宁88) 연간에 여간 물품들을 거의 지키지 못할 정도였으니, 사람이 있어도 지키기 어려운데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동무東廡가 먼저 무너지고 서쪽 건물이 위태로웠다. 얼마나 다행인지 무신년(1848)에 산인山人 호암浩庵과 금담金潭 등 두세 사람이 먼지를 쓸고 종을 치니 처마에 제비가 다시 집을 짓고 대지도 환호하는 듯했다. 이에 전각을 보수하고 요사채를 정비하여 겨우 향화를 이었다. 옛 것을 지키고 새 것을 기다린 지 몇 년이 흐르니, 미타암이 무너져도 보수하지 못하고 명부전은 기와가 벗겨지는 등 훼손됨에 시간은 늦어져 갔다.
동치同治 무진년(1868)에 산인 춘파春坡가 무너진 것을 일으키려는 도리로 재목을 날라 향주香廚를 짓고 기와를 옮겨와 시왕전을 보수하였다. 일이 비록 허공을 뚫고 허공을 막는 듯하여 둘 다 온전하지는 못했으나 일단 조그만 다리로 큰 다리를 기다리는 급한 일은 한 셈이다.
광서光緒 을해년(1875)에 큰 요사채에 비가 새니 금담金潭의 제자(令足)인 성함性咸 산인山人이 강개하게 믿음을 분발하여,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정립하고자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시주자들의 공사公私 문하에 널리 고하였다. 몸소 진력하며 산과 들녘 길에서 비와 눈을 달게 맞으며 주머니에 적은 곡식과 동전을 채우고 손과 발이 트도록 기쁘게 분주히 다녔다. 묽은 죽이나 된 죽을 아침에 셋, 저녁에 넷으로 먹으며, 쩡쩡 바위를 깨고 쾅쾅 도끼를 휘두르는 것은 젊은 승려에게 맡기고, 자세히 지시하고 애써 권하는 것은 노장에게 물었다. 삼가 중건할 시기를 얻게 되니 재실이 변하여 저택이 되듯 옛것에 새것을 더하여

0010_0018_a_01L蔚禪視 [18] 復見於目下鯨棟虹樑煥若神功驥毛龍甲亦非人力方知天乃
0010_0018_a_02L有數地亦含靈獻賀鷰雀飛空山光水色舊顏然功虧九刃事不全美
0010_0018_a_03L [19] 未成繪事不問可勝惜哉人無不諱時無不流世遠借 [20] 時事可傷

0010_0018_a_04L光己亥傳寺寶四環鍮東海一座福興寺借去當宁年間幾至不守如干
0010_0018_a_05L資具有人猶難無人可餘東廡先壞西宅將危何幸戊申山人浩庵金潭
0010_0018_a_06L數三益掃塵撞鍾簷鷰復巢地抵歡格乃改庇殿閣起整寮舍僅續香火
0010_0018_a_07L守古待新者幾閱春秋彌陁庵毀壞不保冥府殿脫庇乏鱗腐侵時晚

0010_0018_a_08L治戊辰山人春坡以栽培傾覆之道輸材建香廚運瓦庇王殿事雖鑿空
0010_0018_a_09L塞空既非兩全姑是一得以杠待橋之急務也
光緒乙亥何大之宏寮
0010_0018_a_10L漏長楫金潭令足性咸山人慷慨憤信撤古鼎新夙夜矻矻普告檀門公
0010_0018_a_11L私門下鞠躬疹悴山野途中甘心雨雪瓶粟銖兩于囊手龜足繭載忻載
0010_0018_a_12L饘於是粥於是朝於三暮於四至於錚錚之攻石丁丁之運斤任之少
0010_0018_a_13L諄諄之指擇孜孜之勸力問於老座謹得重建之期齋變向甲仍舊添

0010_0019_a_01L9칸의 가운데를 공양간으로 하고 동쪽은 객실, 서쪽은 주실主室로 하였는데, 형체가 작으니 실로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탑이 서쪽(庚) 비탈에 서고 아울러 산신각 3칸을 지었는데 동쪽은 천태실天台室89)이요 서쪽은 칠성각이다. 춘분에 시작하여 추분에 일을 마쳤다. 경향京鄕 간을 왕래하며 승려들을 지탱해준 것은 밖에서 보호해준 대가大家들의 진념軫念90)한 은택이 아님이 없다. 본사로 보자면 원래 연헌椽軒과 재림齋林은 관계된 스님(系師)의 고관(縉紳) 대리大吏요, 지방 선비(遐士)의 말단(掾籌) 소리小吏이다. 대소의 구별은 있지만 우리를 보호해주어 미덥고 우리에게 은혜를 끼쳐 미더우니 실로 산방의 대가大家라 하겠다. 이제 이 건물의 완성에 있어서 시주를 많이 하지 않음이 없으니, 바깥에서 보호하고 진념하여 산사에 크게 은혜를 끼친 것에 대해 동일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승려의 허물을 보지 않고 다만 주선하길 살피며, 공적을 따지지 않고 보호하기를 힘썼도다. 이것이 원당願堂의 실제 인자함이다. 아아, 젊은이들이여. 해이하게 굴지 말고 실추시키지 말라. 천추에 붉은 옷(赤服), 백 세대에 붉은 마음이어야 한다.
3년 지나 정축년(1877)에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채(新寮), 산신각을 일신하여 중건하였다. 일을 이룸에 앞섬이 위대하고 인연 모음에 뒤처짐은 작음이 된다. 이렇게 계契를 남겨 세월이 흘렀다. 마침 남곤영南閫營91)이 통어영統禦營92)이 되자, 사찰에 걸었던 종을 풀어가기 위해 따로 서너 명을 파견하여 수령에게 촉관促關93)하니, 수령이 허락하고 싶지 않으나, 수상水商의 단절(絕漢)을 할 수 있는가. 백성들에게 풀어가게 하고, 단천부端川府로 이관移關94)하여 동덕사東德寺95)의 종을 풀어서 본사의 빈 종 걸이에 옮겨 걸게 하였다. 나도 오히려 참지 못하겠는데 타인이 어찌 참겠는가. 그러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데 타인이 또 어찌하겠는가. 3,4개월 후에 겨우 3백 냥을 얻어서 그 가운데 단천부 종의 값 50냥을 주고 또 축비縮費96)로 50냥이 드니 실제 2백 냥이 남았다. 그리고 황黃 노장이 바친 불향답(佛餉)97)이 50두락 되는데 팔아서 70냥이 되니 합하여 270냥이 되어, 값을 주고

0010_0019_a_01L九間中廚東客西主具軆之微實由不贍塔之庚嵎并時建山神閣三
0010_0019_a_02L東為天台室西為七星閣出簣春分覆簣秋分由來京鄉間住持沙門
0010_0019_a_03L莫非外護大家軫念之澤至於本寺元是椽軒齋林系師之縉紳大吏
0010_0019_a_04L遐士之椽 [21] 籌小吏也大小雖別護我之所恃惠我之所怙實為山房之
0010_0019_a_05L大家也今此堂成也不為不多之施而與其外護軫念之大惠山可同日
0010_0019_a_06L語哉不見僧過但審周旋不計其功惟力是保此為願堂之實仁也咨嗟
0010_0019_a_07L小子勿弛勿墜千秋赤服百世丹心
越三年丁丑大雄殿冥府殿新寮山
0010_0019_a_08L神閣一新改覆成事在先為大募緣在後為小是為貽契年所適仍南閫
0010_0019_a_09L營為統禦營當為運懸寺鍾次別遣三四輩促關本倅雖欲勿許水商之
0010_0019_a_10L絕漢得乎使民觧去仍移關于端川府解東德寺中鍾移懸於本寺之空
0010_0019_a_11L鐻上我尚不忍他何忍乎然此無奈何彼亦奈何乎三四箇月餘僅得三
0010_0019_a_12L百兩價則其中端川鍾價伍十兩出給又縮費為伍十兩實在文二百兩
0010_0019_a_13L又黃老長所獻佛餉當五十斗落放賣價七十兩合二百七十兩給價買

0010_0020_a_01L사들였다. 신응용申應用의 1섬지기 논을 불향답佛餉畓으로 삼았으니 무엇인들 하지 않으랴. 공은 실로 함경도 선비들을 정성껏 모은 공적이 있는데, 세월이 흘러 이에 이르니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지난 번 을해년(1875)부터 김신유金信裕와 주석관朱錫寬 등이 향계동香溪洞으로 흘러 흘러와 잠식하여 농사를 지으니 몇 년 지나자 성조成造가 스스로 보존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불어나서 세 골짜기를 개척하여 점차 사문沙門(절)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값을 주고 불계佛界를 매입하며 백탈白奪98)하려고도 하니 어찌 팔짱 끼고 좌시하겠는가. 이렇게 서로 대치한 지 몇 년 지나서 결국 감영의 칙령으로 해당 수령이 친히 살펴 경계를 정하고는 다시 가까이 개간하지 못하게 했다. 농사를 허락한 땅은 본사에 마땅히 속하게99) 했다. 간혹 계곡을 벗어난 민전民田은 매매하지 못하고 사찰로 돌이켜 붙이게 했다. 시체(를 묻는) 한 조항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아서 지경을 더럽히는 것을 잠시 멈추게 했다. 영읍營邑100)에서 입안立案101)한 절목節目102)이 절로 책이 되었고 한성부와 춘조春曹(예조)의 관지關旨(공문)와 영칙令飾(명령)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고 선명하게 사찰의 청사青史(역사)가 되었다.
무자년(1888)에 성함性咸 상인이 상헌棠軒103) 이 상국李相國 동운峒雲104) 각하閣下에게 나아가 뵙고, 특별히 아름다운 자취와 높으신 종적(綜)을 하사하시어 산수의 광영이 살아나도록 하고 화폭 진상真像을 비루하게 여기지 말기를 원하였다. 이에 상국이 손수 실록實錄 1권을 쓰고 머리를 어루만지며 부촉하기를, “내가 대덕산 주인공이 되리라.” 하였다. 상인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공경히 화폭을 가지고 와서, 1칸 정사精舍(절)를 짓고는 엄연히 우뚝하게 모시고 지내니, 일방 선궐仙闕(절)의 만세 주인이었다. 이 공이 자세히 살펴 볼겨를이 없이 문득 조정으로 돌아갔다.

寶月清凉            청량한 보배 달이
忽然在前            문득 앞에 있고
水聲冷冷            차디찬 물소리가
忽焉在後            문득 뒤에 있구나
君子萬年            군자께서 만 년토록
介爾景福            큰 복을 누리시길105)

또한 저빈邸賓 심기택沈基澤 주부主簿106)가 있었으니,107) 유명한 단월檀越(시주)의 집안이었다. 이 서봉西峯으로 재도림齋禱林108)을 삼고서 큰 단월이 되어 재물로 보시를 하였다. 무릇 시주라 칭할 때 어떤 고을을 보거나 듣는가. 시주하고 보호함이 귀하다. 하늘과

0010_0020_a_01L申應用畓一石地為佛餉畓么麼不為白公實是咸士懇團之功也
0010_0020_a_02L降至此不虞多端向自乙亥金信裕朱錫寬等流入香溪洞蚕食薺農
0010_0020_a_03L年伊來成造中自存不暇於焉滋漫三洞開拓延侵沙門又况給價買得
0010_0020_a_04L佛界期欲白奪奈何斂手坐視乎以此相持數年終以營飾本倅親審定
0010_0020_a_05L更不得狎墾許耕處應祝本寺或有出洞民田不得賣買還付寺內
0010_0020_a_06L尸一欵切不許暫停污界營邑立案節目自成卷軸至於漢城府春曹
0010_0020_a_07L旨令飾在在斑斑為寺之青史
越戊子性咸上人進拜棠軒李相國峒雲
0010_0020_a_08L閣下願賜殊世佳迹追仰高綜俾活山水之光榮特愛不鄙畵幅真像
0010_0020_a_09L手書實錄一卷摩頂付囑曰我作大德山主人公云云拜手稽首欽哉陪
0010_0020_a_10L爰成一間精舍儼然卓侍一方仙闕万世主公未及審詳遽然還朝

0010_0020_a_11L月清凉忽然在前水聲冷冷忽焉在後君子萬年介爾景福
又有邸賓沈
0010_0020_a_12L基澤主薄重冷洛化仁風元稱有名檀越家也以此西峯為齊禱林仍作
0010_0020_a_13L大檀越以財現施凡稱施主何鄉或見或聞貴䘖之為施為護也一重霄

0010_0021_a_01L땅처럼 먼 서울과 지방을 묵묵히 길을 오가며 공무에 부지런하니 도도히 하늘에 닿을 듯한데 이와 같이 자기 임무로 삼아 깊고 멀리 도모하니 삼소三笑109)의 고아高雅한 이도 응당 한 자리를 허락하리라.

繩繩奇葉            대대로 후손들 이어지고
振振遐福            성대하게 멀리 복을 떨쳐
億千年去            천 년 억 년 가도록
無量頌來            무량하게 칭송하리라

신묘년(1891)에 옛 대부의 영윤令胤 강위상姜謂尚이, 영가靈駕를 천도하기 위해 불향답佛餉畓 1섬지기를 바친다고 하니 지가地價는 수백 가옥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공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실로 불 속에 핀 연꽃이라 하겠다. 말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으나 오히려 지나쳐 미치지 못하는데 문을 밀침에 돌쩌귀에 떨어지니110) 다행히 때에 적합한 대화연大化緣111)을 얻은 것이라. 87년 사이에 최 공崔公112) 이후의 1인일 뿐이다. 효를 다하여 돌이켜 항상 도에 합당했으니 마땅히 복과 수명이 길이 영원하리라. 항상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고 만년 이어지도록 축원한 이래 집안의 도가 점차 스러져 사부대중(四眾)을 채우지 못하니 나를 알아주고 나를 벌주는 것이니,113) 누구의 공이요 누구의 상이런가. 모두 그러한 일이다. 그러나 노심초사하는 공적에 대해 하필 일을 가리키고 이름을 가리켜 하나는 함경도 선비요 둘은 함경도 선비라 할 것인가. 슬피 탄식하노라.
무릇 고금에 이루기 어려운 것이 공적이요 천하에 지키기 어려운 것이 수성守成이다. 지킬 때 바쁘고 한가롭다가 완성하기 어려움을 깨닫게 되고, 공적이 후손에 미쳐 지킴이 금성처럼 견고하게 된다. 이제 사찰은114) 이와 같이 내가 듣고 처음에 이와 같이 내가 묻지 않았지만 어찌하여 끝내 참여하지 않겠는가. 또한 걷고 또 뛰리니 달리 말하겠는가. 옛날에 사람을 시켜 사원을 돌보게 함115)에 사람을 얻었지만, 지금은 사람을 시켜 사원을 돌보게 함에 사람을 잃는다. 흥하고 쇠함은 오직 우리들의 근면과 태만이 어떠한가에 달렸을 뿐이다. 진구塵臼(세상)을 웃어 제치고116) 차디차게 절개를 지킴에 혹 때때로 토양에 부림을 받지만 토양에 쉬는 일을 잊지 않는다. 차라리 춘추의 책망을 받을지언정 도침擣枕의 명예를 바라지 말라. 양의 창자 같은 세상길을 맨발로 살펴 딛고, 물과 달을 장소 삼아 용천龍天에 우러러 부끄러우리. 편안함을 함께 누림 기뻐하여117)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라,118) 너희 후배(可畏)들아. 샘물이 아직 달콤하니

0010_0021_a_01L行住京鄉默默塗地黽勉公籍漫漫滔天如是己任深謀遠慮雖三笑
0010_0021_a_02L高雅應許一座矣
繩繩奇葉振振遐福億千年去無量頌來
越辛卯古大
0010_0021_a_03L夫令胤姜生謂尚為薦靈駕以獻佛餉畓一石地價直半千百屋煩公偎
0010_0021_a_04L念及此實火中之蓮也可辭可蹈猶過不及推門落臼幸得時中大化緣
0010_0021_a_05L八十七年之間崔公後一人而已盡其孝而反常合道宜 遐福壽祺永
0010_0021_a_06L揭付▼(扌+眉)麗常念不弛祝釐萬年伊來家道侵陵不滿四眾知我罪我
0010_0021_a_07L功誰賞皆然之事然於勞心焦思之功何必指事指名一則咸士二則咸
0010_0021_a_08L士歟感傷歎訝
凡古今之難成者功也天下之難守者成也守時遑閑覺
0010_0021_a_09L及難成功被苗裔守固金城今之寺也莫甚秋晚如是之我聞初不問如
0010_0021_a_10L是之如何終不叅亦步亦趨他尚言哉古之倩人看院得人也今之倩人
0010_0021_a_11L看院失人也得步興替惟在吾儕之勤怠操放如何耳汩汩塵臼冰冰持
0010_0021_a_12L或時伻壤之處勿忘息壤之事寧為春秋之責莫願擣枕之譽羊塲 [22]
0010_0021_a_13L跣審蹈地水月為塲仰愧龍天惟喜康共恕己及物曰爾可畏泉尚甘

0010_0022_a_01L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다하지 않도다. 땅은 아끼지 않는 태도가 있어 산이 높아도 소나무는 그늘져 맑고 흐린 구름 흐르니 이루어질 가망이 있도다. 잠시 앉아 있으면 크게 오나니 해가 가면 달이 오는 법. 국을 조화롭게 맛을 맞추어 적음으로 많음을 기다리니, 이치를 참구하고 사事를 참구함에 오직 늦게 깨달을까 걱정이네. 태허太虛의 주인공은 길이 푸르러 늙지 않으니, 강산의 해와 달처럼 의구하게 항상 새롭네. 천지의 조화에 나 또한 변화하고, 일월의 광명에 나 또한 빛나네. 이처럼 이루고 이처럼 지키리니, 이것이 손상되지 않고 이어 완성하는 공적이 된다. 손상되지 않고 이어서 완성하니, 이것이 창건을 저버리지 않는 덕이 된다. 난초를 캠에 어찌 초택楚澤119)을 생각하랴, 공덕을 어찌 반드시 운운하리오. 해마다 향기로운 풀이 해마다 자라니 꽃들과 풀들이 하나하나 봄이로다. 이와 같은 도량을 이와 같이 수호하니 아름다운 산과 물이 모두 불가의 지경이 되고 앞선 현인과 후배들이 법을 수호하는 사람 아님이 없네. 이와 같이 된다면 대천 사계沙界120)의 성인께 다시 청하여 가람이 눈에 가득하고 문수보살을 만나 대화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대덕산의 정광사는 원래 천하의 사림獅林이로다.
당나라 문종 개성開成 3년(838) 초에 운흥암雲興庵을 창건하니, 화주는 일신日信이었다.

송나라 진종 함평咸平 원년(998)에 일신하여 편액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니, 화주는 지헌芝憲이었다.

명나라 만력萬曆 10년(1582) 임오년에 대웅전을 중건하니, 화주는 지헌智軒이었다. 사환유四環鍮121)와 동해식東海食, 동해개東海箇, 동해불기東海佛器.【화주는 도견道堅, 시주는 의밀儀密과 강호혁姜虎赫.】


 15년(1587) 정해년 좌우방의 놋시루. 화주는 충조忠照와 양호良浩.


0010_0022_a_01L而旱不涸不凘 [23] 地有不愛之態山猶高而松陰清曇雲宿運有可成之望
0010_0022_a_02L小坐則大來日往則月來和羹調味以寡待夥理叅事叅唯恐覺遲太虛
0010_0022_a_03L主公長翠不老江山日月依舊常新於天地之造化我亦化之於日月之
0010_0022_a_04L光明我亦明之如是成之如是守之是為不墮繼完之功不墮繼完是為
0010_0022_a_05L不負草創之德採蘭寧惟楚澤功德何必云云年年芳草年年事花花草
0010_0022_a_06L草箇箇春如是道塲如是守護則佳山剩水盡為佛家之地先哲後昆
0010_0022_a_07L非護法之人若得如是更請大千沙界聖伽藍滿目文殊接話談然則大
0010_0022_a_08L德山定光寺元來天下獅林也夫

0010_0022_a_09L
有唐文宗開成三年初創雲興庵 化主日信

0010_0022_a_10L
皇宋真宗咸平元年一新重篇為雲興寺 化主芝憲

0010_0022_a_11L
大明萬曆十年壬午大雄殿重建 化主智軒
0010_0022_a_12L四環鍮東海食東海箇東海佛器化主道堅施主儀密姜虎赫

0010_0022_a_13L
十五年丁亥左右房鍮甑 化主忠照良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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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崇禎 8년 병자년(1636)122) 9월 10일에 화재로 소진되었다.

청나라 숭덕崇德 5년 계미년(1643)123) 10월 19일에 대웅전을 상량했다. 화주는 원학元學과 일순一順이고 편수片手124)는 법희法熙, 개와盖瓦 화주는 홍읍洪揖과 석련釋連, 단청 화주는 서민瑞玟, 현각반룡懸閣盤龍 화주는 의능儀能과 상현尚玄, 승당僧堂 화주는 옥경玉瓊과 장인藏印, 선당禪堂 화주는 법희法喜와 상능尚能, 만세루萬歲樓 화주는 승인勝印과 상임尚稔이었다. 10년 동안 진행되었다.

순치順治 11년(1654) 갑오년에 신이한 승려 성정性淨이 정광여래定光如來의 치사리齒舍利 2매를 받들고 왔으니, 이에 이르러 정광사가 되었다. 무위진도인無位真道人 취진당翠真堂 의동儀洞 대사大師는 성정性淨과 서로 작용함인가.

강희康熙 원년(1662) 임인년 3월 11일에 삼세여래 후불탱과 시왕十王 존상尊像, 법보法寶인 여러 경전, 불패佛牌, 전패殿牌,125) 양산陽傘, 난경卵鏡, 삼단三壇, 연輦(수레) 등 제반 위의威儀.126) 도대공덕주都大功德主는 보영당普影堂 인균印均 대화상, 화원畵員은 민안珉安과 천기天機, 옥순玉淳, 의매儀埋, 영각靈覺이었다.

 10년(1671) 신해년 4월 18일에 명부전을 중건했으니, 화주는 석균釋均과 석겸釋兼이었다. 시왕전루十王殿樓를 새로 지었으니 화주는 계철戒喆과 성찰性察이고 3년 걸렸다.

 14년(1675) 을묘년 돌계단. 화주는 석견釋堅. 바라鈸囉. 화주는 해영海映과 성탄性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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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八年丙子九月初十日回錄蕩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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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清崇德五年癸未十月十九日大雄殿上樑 化主 元學一順片手
0010_0023_a_03L法熙 盖瓦化主 洪揖釋連 丹青化主瑞玟 懸閣盤龍化主儀
0010_0023_a_04L能尚玄 僧堂化主玉瓊藏印 禪堂化主法喜尚能 萬歲樓化主
0010_0023_a_05L勝印尚稔十年終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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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治十一年甲子 [24] 神僧性淨奉定光如來齒舍利二枚至是為定光寺
0010_0023_a_07L位真道人翠真堂儀洞大師也與性淨相作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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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熙元年壬寅三月十一日新造三世如來後佛諸幀十王尊像法寶眾
0010_0023_a_09L經佛牌殿牌陽傘卵鏡三壇輦諸威儀都大功德主普影堂印均大和
0010_0023_a_10L畵員珉安天機玉淳儀埋靈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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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辛 四月十八日冥府殿重建 化主釋均釋兼 十王殿樓新建
0010_0023_a_12L化主戒喆性察 三年終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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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乙卯石砌化主釋堅鈸囉化主海映性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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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1676) 병진년, 대종과 중종, 운판雲板127). 화주는 신근信根, 편수片手는 사인思印.

 20년(1681) 신유년, 향적전香積殿, 화주는 채명彩明. 큰무쇠솥, 화주는 해능海能, 무게는 2백 근, 용량은 3섬(石).

 44년(1705) 을유년, 창당彰堂, 화주. 선당禪堂과 불상 개금, 화주는 민이敏頤.

 48년 무자년(1709)128), 대웅전 개와改瓦, 화주는 민이敏頤, 상원尚元, 처신處信.

 50년(1711) 신묘년, 괘불탱화, 화주는 인백印白과 인허印虛.  쌍▣암雙△庵 불상 개금, 화주는 청우清祐. 미타암 불상 개금, 화주는 인균印均. 사찰에 큰 도인이 있으니 호칭은 쾌묵快默 수좌首座129)인데 확철대오廓徹大悟하고 두루 다니며 공부하다가 심원사深源寺에서 마쳤다.

 51년(1712) 임진년, 용흥교龍興橋, 조계문曹溪門, 청파교清波橋, 불이문, 시주는 김정민金鼎敏.

 54년(1715) 을미년, 승당僧堂 중건, 화주는 대순大順과 일청一清, 취흡翠洽.

 51년(1712) 임진년, 명부전 중수, 화주는 원감元監과 천찬天賛.

옹정雍正 4년(1726) 병오년, 대웅전 중건, 화주는 대선大善과 극환克還. 만세루 중건, 화주는 민이敏頤와 처신處信. 대웅전 단청, 화주는 두영杜英과 승한勝閑. 불기佛器, 화주는 장진藏真과 청우清祐. 대강백大講伯 송화당松華堂 천계대사天戒大師가 있으니, 가르침의 바다인 삼장三藏과 선의 등불인 오종五宗에 대해 온 자취는 사람들 사이이나 간 자취는 보살에 이르렀다. 선당禪堂 중건, 화주는 민안敏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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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丙辰大鍾中鍾雲板化主信根片手思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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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年辛酉香積殿化主彩明 大鉄甑化主海能重二百斤入三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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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四年乙酉彰堂化主 禪堂佛像改金化主敏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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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八年戊子大雄殿改瓦化主敏頤尚元處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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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十年辛卯掛佛幀化主印白印虛
0010_0024_a_06L雙△庵佛像改金化主清祐 彌陁庵佛像改金化主印均寺有大道
0010_0024_a_07L稱曰快默首座廓徹大悟▼(彳*盧)叅遊方終於深源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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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十一年壬辰龍興橋曹溪門清波橋不二門施主金鼎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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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十四年乙未僧堂重建化主大順一清翠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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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十一年壬辰冥府殿重修化主元監天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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雍正四年丙午大雄殿重建化主大善克還萬歲樓重建化主敏頤處信
0010_0024_a_12L大雄殿丹青化主杜英勝閑佛器化主藏真清祐有大講伯松華堂天
0010_0024_a_13L戒大師教海三藏禪燈五宗來蹤人人間去迹菩薩禪堂重建化主敏

0010_0025_a_01L명철明喆. 바라鈸囉, 화주는 두인斗印.

건륭乾隆 2년(1737) 정사년, 사천왕 창조, 화주는 법찬法賛과 축률竺律. 천왕문, 화주는 장혜藏惠와 승원勝元, 편수片手는 송읍松揖. 팔상탱八相幀, 화주는 취화翠華와 찬일賛日. 팔상八相, 화주는 법률法律과 법순法順, 편수는 송읍松揖, 팔상전 개와, 화주는 태안泰安. 팔상전 단청, 화주는 승란勝蘭. 영청루迎清樓, 화주 겸 편수 지한智閑. 영자각影子閣, 화주는 용암龍岩. 10년 걸렸다.

 23년(1758) 무인년, 불이문, 시주는 법률法律, 화주는 문원文元.

 26년(1761) 신사년, 대웅전 개와, 화주는 법경法鏡. 미타암 개와, 화주는 수완守玩.

 40년 을미년(1775), 각 정사精舍의 개와改瓦, 화주는 채련彩連과 치휘致輝. 미타암 중건, 화주는 쾌평快平. 삼단三壇과 시련侍輦 보수(輔缺) 장엄, 금란청천錦蘭青天, 시주는 청송당青松堂 법신法信.

 47년(1782) 임인년 만세루 개건改建, 화주는 호휘護輝.

 57년1792) 임자년 용흥교龍興橋와 조계문曹溪門 개건, 시주는 선찬善賛과 보문普文.

 60년(1795) 을묘년 향로전 중건, 화주는 보문普文과 몽한夢閑.

가경嘉慶 원년(1796) 병진년, 여래ㆍ지장ㆍ시왕 개금, 화주는 풍암豐岩과 체윤軆胤.


0010_0025_a_01L安明喆鈸囉化主斗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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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二年丁巳四天王剏造化主法賛竺律 天王門化主藏惠勝元
0010_0025_a_03L片手松揖八相幀化主翠華賛日 八相化主法律法順 片手松揖
0010_0025_a_04L八相殿改瓦化主泰安 八相殿丹青化主勝蘭 迎清樓化主兼片
0010_0025_a_05L手智閑影子閣化主龍岩十年終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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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年戌寅不二門施主法律化主文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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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年辛巳大雄殿改瓦化主法鏡 彌陁庵改瓦化主守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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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十年乙未各精舍改瓦化主彩連致輝 彌陁庵重建化主快平
0010_0025_a_09L三壇侍輦輔缺莊嚴錦蘭青天施主青松堂法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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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七年壬辰 [26] 萬歲樓改建化主護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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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十七年壬寅 [27] 龍興橋曹溪門改建施主善賛普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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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十年己 [28] 香爐殿重建化主普文夢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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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元年丙辰改金如來地藏十王化主豐岩軆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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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1806) 병인년, 세존ㆍ육광보살六光菩薩130) 창조, 화주는 환정당幻靜堂 간홍侃弘.

 17년(1812) 임신년, 사적비 건립, 화주는 환정幻靜.

 18년(1813) 계유년, 골짜기 아래에 표를 세움.

 19년(1814) 갑술년 10월, 화재로 소실.

 22년(1817) 정축년 3월, 대웅전 중건, 화주는 환정幻靜

 23년(1818) 무인년 4월, 심검당, 화주는 환묵幻默과 달명達明.

   7월, 적묵당, 화주는 화봉당禾峯堂 위책偉柵.

 24년(1819) 기묘년, 향로전 중건, 화주는 채헌彩憲.

도광道光 19년(1839) 기해년, 사환유四環鍮, 동해일좌東海一座를 복흥사福興寺에서 빌려감.

함풍咸豐 원년(1851) 신해년, 대웅전 개와改瓦, 적묵당 정비(堅整), 화주는 호암당浩岩堂 승린勝鱗과 보파普▼(王+巴), 관찰寬察.

동치同治 7년(1868) 무진년, 향로전 이전, 명부전 개와, 화주는 춘파春坡와 탁여卓如, 도감都監은 금담金潭과 현찰現察, 별좌는 보파普▼(王+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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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丙寅剏造世尊及六光菩薩化主幻靜堂侃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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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壬申事蹟碑立化主幻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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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年癸酉植標于洞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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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年甲戌十月日回錄蕩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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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二年丁丑三月重建大雄 化主幻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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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年戊寅四月日尋釰堂化主幻默達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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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日寂默堂化主禾峯堂偉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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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年己卯香爐殿重建化主彩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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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九年己亥四環鍮東海一座借去福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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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豐元年辛亥大雄殿改瓦寂默堂堅整化主浩岩堂
0010_0026_a_11L勝鱗普▼(王*巴)寬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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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七年戊辰移建香爐殿改瓦冥府殿化主春坡卓如
0010_0026_a_13L都監金潭現察別座普▼(王*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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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光緒 원년(1875) 을해년, 무량수각 중건, 화주는 금담金潭, 도감은 채헌彩憲, 별좌는 보파普▼(王+巴). 산신각 이건, 화주는 성함性咸, 별좌는 성견性堅.

 3년(1877) 정축년, 대웅전 개와, 화주는 성함性咸, 도감은 도봉당道峯堂. 명부전 개와, 화주는 도봉道峯. 무량수각 개와, 화주는 춘파당春坡堂. 도감은 도봉. 향계동香溪洞과 용연동龍淵洞의 김신유金信裕와 주석관朱錫寬 등이 을해년(1875)에 개척.

 6년(1880) 경진년, 남곤영南閫營이 통어영統禦營이 되어 사찰에 매달았던 종두鐘頭131)를 옮기려고 따로 서넛을 파견했다. 다만 수령에게 통지하여 백성들에게 종을 풀어가게 하고 동감사東監寺의 종을 가지고 와서 달았다.

 14년(1888) 무자년, 동운峒雲 이 상국李相國(이돈하李敦夏) 각하의 영정을 가져왔는데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17년(1891) 신묘년, 대시주 강위상姜謂尚이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1섬지기 논을 바쳤다.
4-3. 사적비
사찰의 창건은 신라 상대에 있었으니 연대가 망연해서 징험할 게 없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에 몽고인에게 불태워졌는데, 승려 원학元學이 중건하였다. 순치順治 경자년(1660)에 어떤 승려가 호남에서 왔는데 법명이 성정性淨이라 했다. 그가 정광여래定光如來의 치사리齒舍利와 보궤寶机, 감로병甘露瓶, 당요령唐撓鈴, 오색 금포단錦蒲團을 받들어 와서 탑을 조성하여 안치하고서는, “이는 인도(天竺)의 불보佛寶이니, 이 사찰이 고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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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緒元年乙亥無量壽閣重建化主金潭都監彩憲
0010_0027_a_02L別座普▼(王*巴)山神閣移建化主性咸別座性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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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丁丑大雄殿改瓦化主性咸都監道峯堂
0010_0027_a_04L冥府殿改瓦化主道峯无量壽閣改瓦化主春坡堂都監道峯香溪洞
0010_0027_a_05L龍淵洞金信有 [29] 朱錫寬等乙亥開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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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年庚辰南閫營為統禦營運懸寺鍾頭別遣三四
0010_0027_a_07L但關本倅使民解鍾去東監寺中鐘來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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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戊子峒雲李相國閣下影幀陪來未召審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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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辛卯大施主姜生謂尚為薦靈駕獻畓一石地

0010_0027_a_10L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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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之剏在新羅上世年代茫然無可徵焉崇禎丙子火于蒙人僧元學重
0010_0027_a_12L新之順治庚子有僧自湖南來名性淨奉定光如來齒舍利及寶机甘露
0010_0027_a_13L唐撓鈴五色錦蒲團造塔以安之曰此天竺國之佛寶也可令此寺 [30]

0010_0028_a_01L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 여러 재난들을 벗어나게 할 것이다.”고 했다. 이후 명산을 유람하며 자취를 알 수 없었다. 혹자는 ‘성정’은 문수보살의 본명이니, 문수보살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사찰의 옛 이름은 ‘운흥사’인데 이에 이르러 ‘정광사’라 했으니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가경嘉慶 병진년(1820)에 승려 체윤軆胤이 여래와 지장과 시왕 등 30여 불상을 개금하였다. 10년 지나 승려 간홍侃弘이 또 세존과 육광보살 등 7위를 조성하여 장엄하니 빛이 시방을 비추었다. 그리고 돌에 새겨 그 사실을 전하고자, 내 집을 방문하여 글을 청하였다. 나는 장난스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님의 이 절에 대해 공적이 원학元學이나 성정性淨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스님은 비석을 기다리지 않고도 지금까지 이어져서, 두 스님의 공적을 모두 알고 잊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석이 군더더기임을 알겠습니다.” 간홍이 말하였다. “아니, 아닙니다. 이 일에 5천여 금을 소비하였는데 모두 조금씩 모은 것입니다. 최한빈崔漢彬 권관權官 같은 경우는 홀로 1천 금을 보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니 신심 있는 단월檀越(시주)들의 이름이 사라져 버린다면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진찰塵剎(무량세계)을 받들어 부처님 은혜에 보답한다는 데 이미 감동하였고 또한 타인의 선행을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점을 아름답게 여겨, 즐거이 글을 쓴다.
홍무洪武 이후 8번째 임신년(1812) 추8월에 관찰사 김이양金履陽132)이 글을 짓고 쓰다.

4-4. 금표비
행行133) 현감

영구히 금지하는 표식. 이는 정광사 승려들이 병영兵營에 가서 송사를 올린 것에 대해 관찰사의 제지題旨134)에 따른 것이니, 이미 그처럼 엄절하고 절도사의 배관背關135)이 또한 이처럼 준엄할 뿐만 아니라, 본 사찰은 불사리를 소장한 곳이다. 그 존귀함은

0010_0028_a_01L苦得樂解脫眾灾後遊名山不知所終或曰性淨文殊之本名意存其文
0010_0028_a_02L殊現在也寺舊名雲興寺至是為定光寺識其實也及嘉慶丙辰僧軆胤
0010_0028_a_03L改金如來地藏十王等三十餘像越十年僧▼(侄-土+(荒-芒))弘又為之剏造世尊及六
0010_0028_a_04L光菩薩凡七軀莊嚴澔[泳-永+旴]光照十方又將劉石以壽其事敲門乞言于余
0010_0028_a_05L余戲之曰師之於茲寺功不在元學性淨之下無然而二師者無待乎石
0010_0028_a_06L而至于今皆知二師之功不忘吾知石之為附贅也弘曰否否是役也
0010_0028_a_07L財五千餘金皆絲彙髮集若崔權官漢彬者獨能捐施千金夫有如是
0010_0028_a_08L心檀越名湮滅不揚非而以為報余既有感於奉塵剎以報佛恩且嘉其
0010_0028_a_09L不沒人之善樂為之書

0010_0028_a_10L
洪武後八壬申秋八月觀察使金履陽撰並書

0010_0028_a_11L禁標碑
 行縣監

0010_0028_a_12L
為永久禁標事此定光寺僧徒巡兵營呈議送據觀察使題旨既如彼嚴
0010_0028_a_13L節度使背關又若是功 [31] 峻哛不喻本寺乃佛舍利所藏之地其所尊與

0010_0029_a_01L다른 사찰에 비해 더욱 특별하다. 그래서 평소 도내의 대찰로 일컬어진다. 근래 인심이 옛날과 달라 사찰 구역 안에 산소를 만들고 개간을 하는 등 용호龍虎136)에 점차 다가오고, 나무꾼과 목동들이 금양禁養137)을 자주 범하여, 수백 년 지켜온 곳이 땔감과 농경의 장소가 됨을 피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한다. 이를 들으니 분통을 이길 수 없어서 엄금하도록 표를 세운 것이니, 사원의 위나 사원의 앞을 막론하고 다른 백성들이 풀 한 포기 밭 한 떼기라도 범함이 있어서 고발함이 있으면 병영에 보고하여 정죄定罪해서 단연코 피하지 못하게 하라. 가을걷이 후에 답험踏驗138)하는 것 또한 함부로 표시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다. 이를 비석에 새겨 영구히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가경嘉慶 18년(1813) 계유년 3월에 세우다.

5. 영흥부 성불산 안불사 사적
아아, 경치 좋은 곳에 사찰이 없으면 되겠는가. 사찰이 있는데 사적이 없으면 안 되는도다. 이러므로 명산 대지大地에는 모두 사찰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는데 이 사찰의 경우에는 대지가 좋지 않은 게 아니고 건축이 오래되지 않은 게 아닌데 일찍이 전하는 사적이 없다. 이는 어찌 지식인들이 개탄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나는 보잘것없이 여기에 더불어 산 지 몇 년 되었으니 지나는 손처럼 심드렁하게 볼 수만은 없다. 그래서 비로소 사찰의 노인들에게 탐문하니, 예전 홍무洪武 26년(1393)에 유릉榆陵 묫자리를 구할 때에 조정에서 지관地官을 파견했고, 지관이 철령에 올라가 부적을 날리자 처음에 이곳에 떨어졌는데 이전에 무학 화상이 이미 암자를 지어놓고 장차 사찰을 세울 뜻이 있었기 때문에 지관들이 보고는 감히 탈취하지 못하였다. 다시 부적을 날렸더니, 암자의

0010_0029_a_01L他寺尤為特別故素稱道內大剎也近來人心不古入葬耒墾漸逼於龍
0010_0029_a_02L脫山樵牧多犯於禁養屢百年守護之地將不免樵耕之塲云聞不勝
0010_0029_a_03L痛惋故嚴禁植標為去乎毋論院上院前諸他民雖一草一畆田若或犯
0010_0029_a_04L禁而有告及之舉則報營定罪斷不可免是遣秋成後踏驗段置亦不得
0010_0029_a_05L擅入於標內事鐫石永久道行宜當者

0010_0029_a_06L
嘉慶十八年癸酉三月 日 立

0010_0029_a_07L○永興府成佛山安佛寺事蹟

0010_0029_a_08L
於戲有勝地而無寺剎可乎有寺剎而無事蹟不可歟是以名山大地
0010_0029_a_09L有建其寺記其蹟而至於此寺則地非不勝建非不久而曾無事蹟之留
0010_0029_a_10L傳者茲豈非識者之慨然者乎余以無似忝居于此有年矣不可如過客
0010_0029_a_11L之恝視者故遂乃搜問於寺之古老人則曰昔在洪武二十六年榆陵墓
0010_0029_a_12L占得時自朝家送地官而上鉄嶺飛符惵 [32] 則初落於此地而厥前無學和
0010_0029_a_13L尚已構草庵將有建寺之志故地官見而不敢奪取更飛其符則接于庵

0010_0030_a_01L동쪽 계곡 깊은 곳에 닿았고, 그래서 그곳으로 묫자리를 잡았으니, 지금의 유릉이 이것이라 한다. 그 후에 승려들이 점차 성대해지니 비로소 법당과 좌우 요사채를 창건하고 머물렀다.
숭정崇禎 무자년(1648)139) 중에 또 남루南樓를 짓고 그 위수位數를 충당하니 사찰은 거찰의 명성이 있게 되고 승려들은 편히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화재가 발생해서 불당이 재로 변했다. 순치順治 연간에 덕민德敏 노숙老宿이 법당을 중건하고 또 동서 상실上室을 창건하여 옛날 규모보다 넓혔다. 그런데 오고 가며 지세를 보는 이들과 거처하는 승려들이 화재가 잇따르고 사람이 거처하기에 편하지 않은데 이는 필시 대지가 크고 사찰이 작아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강희康熙 을사년(1665)에 태심太心과 지훈智訓 두 상인上人이 좌우 두 선방을 고쳐 짓고 구조를 넓혔다. 건물(棟宇)의 웅장함이 제도에 합당하니 승려들이 운집하여 이로부터 성대해졌다.
병진년(1676) 봄에 화재가 또 일어나서 법당과 불상들이 모두 재로 변했다. 그저 좌우 선방 네 채만 남았으니 사승寺僧들이 편히 거처할 수 있는 게 비록 다행이라 하겠으나 불전이 사라졌으니 과연 절통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신사大信士 응섬應暹이 특별히 중창하겠다고 발원하여 이름난 장인 인麟 도인道人을 불러와서는 몇 년 되지 않아 낙성하고 단청을 칠한 후에 또 미타금상彌陁金相 1구軀와 좌우 보처補處 2좌座를 함산咸山의 서쪽 백운산에서 모셔와 여기에 봉안했다. 그러자 황금 사자좌獅子座가 이로써 배나 나아지고 승려(雲水)의 모임이 이로써 빛이 났다. 어찌 영산靈山의 도움이 아니요 용천龍天의 보호가 아닐 수 있는가.
그리고 임신년(1692)에 ▣삼森이 남대루南大樓를 보수하였다.
임오년(1702)에 처륜處倫이 대종과 반쟁盤錚(쇠북)과 운판雲板 3가지(三物)를 주조하고, 두드릴 수 있는 것들을 만들 자료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축파築坡 무준無準 장로는 자기 재산을 보시하고 사중寺衆에게도 권하여

0010_0030_a_01L之東洞之奧故于以入墓焉今之榆陵是也厥後僧徒漸盛始創法堂
0010_0030_a_02L左右寮舍而居之矣
及至崇禎戊子中又建南樓充其位數則寺有巨剎
0010_0030_a_03L之名僧有安集之者而回祿告災佛宇已灰順治中德敏老宿重建法堂
0010_0030_a_04L又創東西上室增其舊制而往來相地及居僧之意以為火灾連仍人居
0010_0030_a_05L之不寧必是地大寺少之致也而矣
康熙乙巳太心智訓二上人改建左
0010_0030_a_06L右二禪房廣其間架焉棟宇之宏壯允合制度緇徒之雲集自此盛矣

0010_0030_a_07L辰春間火災又慘法堂與佛相盡為灰燼而只餘左右四禪房而已則寺
0010_0030_a_08L僧之安居雖曰幸也而佛殿之蕩無果非切痛者乎斯有大信士應暹
0010_0030_a_09L發重創之願邀致名匠麟道人不數年而落成仍以丹雘之後又迎彌陁
0010_0030_a_10L金相一軀與左右補處二座於咸山之西白雲山而奉安于此則金獅之
0010_0030_a_11L以之而倍勝雲水之會以之而生色何莫非靈山之翼佑龍天之衛護
0010_0030_a_12L而然也
而况壬申間△森改修南大樓
壬午歲處倫鑄成大鍾與盤錚雲
0010_0030_a_13L板三物而留作撞擊之資而且築坡無準長老自施己財兼勸寺眾創設

0010_0031_a_01L불향佛餉140)과 전향각奠香閣을 창설하여, 헌공獻供의 장소로 삼았다.
을미년(1715)에 만혜萬惠는 무오갑戊午甲의 승속 백여 인과 함께 바위를 잘라 운반하여 대웅전 계단을 신축했다.
병신년(1716) 봄에 수연粹然이 또 동상방東上房141)을 보수하니 규모가 예전보다 배나 되었다.
정유년(1717) 영흥부 사람 전인추全夤秋가 보시하여 와실瓦室 3칸을 마련하고 전향각을 중수하였다.
노인들의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찰의 전후 보수는 모두 화사化士의 좋은 방편(善權)의 힘과 군자들이 널리 보시한 공적이요 또한 우리 각황覺皇(부처)의 하늘에 가득한 덕이요 가없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한 구역의 땅을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감추어 둔 지 몇 억 년인지 모르지만 한 번 무학無學 대사가 자리를 잡은 이후로 간혹 8인의 재앙이 있었고, 거처하는 승려들이 경내에서 가장 많은 지 3백여 년이 되도록 아직 쇠퇴했다는 탄식이 없다. 그렇다면 이 사찰의 존속이 또한 몇만 년 이어질지 모르겠다. 이후의 자취는 솜씨 좋은 후생에게 맡기고 이왕의 흥하고 폐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이러할 따름이다. 내 어찌 천착하여 다시 덧붙이겠는가.
기해년(1719) 단양월(5월) 상완上浣142)에 능파陵坡 사문이 삼가 초안을 잡고, 축파築坡 문인門人 해철海喆이 붓을 다듬어 바르게 적었다.

이전 사적을 말미에 붙임

능파자陵坡子가 기록한 사적들로 이미 고래의 사적이 분명해졌는데, 정유년(1717)에 전향각을 중수한 이후로 전혀 사적이 없어서 후인들이 개탄함이 없을 수 없다. 이제 말미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


0010_0031_a_01L佛餉與奠香閣以為獻供之所
乙未萬惠與戊午甲緇素百餘人削石運
0010_0031_a_02L而新築大雄殿階砌之級
丙申春粹然又修東上房而規模倍舊也

0010_0031_a_03L府人全夤秋施以瓦室三間重修奠香閣
古老之說信不誣矣然則此
0010_0031_a_04L寺之前後繕修皆是諸化士善勤 [33] 之力及僉君子博施之功而亦豈非吾
0010_0031_a_05L覺皇彌天之德無邊之化乎一區之地天慳鬼秘者不知其幾億年
0010_0031_a_06L一自無學卜居之後間或有八人之災而僧居之盛甲於境內者三百餘
0010_0031_a_07L而尚無衰替之歎則此寺之留傳又不知其幾萬年也當來之蹟考仕
0010_0031_a_08L後生之善手而既往之興廢則耳聞而目覩者只此而已余何敢穿鑿
0010_0031_a_09L更贅也哉
時己亥端陽月上院 [34] 陵坡沙門謹識草
0010_0031_a_10L築坡門人海喆筆削正書

0010_0031_a_11L
前事蹟註尾

0010_0031_a_12L
陵坡子所題事蹟中既分明古來事而丁酉歲奠香閣重修以後絕無其
0010_0031_a_13L則於後之人不能無慨然之嘆以今為註尾以永其傳焉

0010_0032_a_01L
옹정雍正 병오년(1726)에 초흡楚洽과 시경是敬 두 화사化士가 대루大樓를 중건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덕영德英 화사가 서상실西上室을 고쳐 지었다.
건륭乾隆 2년(1738) 무오년143)에 월응月應 화사가 흥성암興聖菴을 중건했다.
 11년(1746) 병인년에 덕잠德岑과 탄웅坦雄 두 화사가 청운당青雲堂을 고쳐 지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갑오갑甲午甲 혜익慧翼이 사찰의 동갑인들과 함께 도모하여 조계문曹溪門을 새로 세웠다.
 20년(1755) 을해년에 찬희粲熙와 낭수郎守 두 화사가 백운당白雲堂을 중건했다.
 23년(1758) 무인년에 찬상彩祥 스님이 한월당寒月堂을 다시 지었다.
26년(1761) 신사년에 당시 도감都監 설정雪晶이 비각碑閣을 옮겨 세웠다.
27년(1762) 임오년에 극한克閑과 채기彩琦 두 화사가 진명헌震明軒을 옮겨 세우고, 극락전이라고 편액을 바꿨다.
33년(1768) 무자년에 탄눌綻訥과 응변應卞ㆍ택심澤諶 세 화사가 우화루雨花樓를 중건하여 옛 규모보다 자못 넓어졌다.

때는 건륭乾隆 34년(1769) 기축년 3월에 말미에 적는다.

뒤의 뒤에 또한 뒤가 있고, 생후에 차차 생하니, 이어받아 계승하고 계승하여 끊이지 않으면 그 사적의 종말이 천지와 함께 장수하리라.

도총섭都總攝 화압花押144)
도광道光 갑진년(1844) 5월 일.

6. (석왕사釋王寺 사적)
6-1. (석왕사 사적비)
동북면도원수 완산부원군 이성계李成桂와 상원수上元帥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145) 강서姜筮, 부원수 당성군唐城君 홍징洪徵, 조전원수助戰元帥 전첨서밀직사사상의前簽書密直司事商議146) 유원柳源, 전지밀직사사상의前知密直司事商議 정몽주鄭夢周, 전밀직부사前密直副使 이화李和 등이 홍무洪武 10년(1377) 여름에

0010_0032_a_01L
雍正丙午楚洽是敬兩化士重建大樓又同年德英化士改建西上室

0010_0032_a_02L隆二年戊午月應化士重構興聖菴
十一年丙寅德岑坦雄兩化士改構
0010_0032_a_03L青雲堂又同年甲午甲慧翼與諸寺中同甲人等合謀新建曹溪門
二十
0010_0032_a_04L祀乙亥粲熙郎守兩化士重建白雲堂
二十三戊寅彩祥師改築寒月堂

0010_0032_a_05L
二十六辛巳時都監雪晶移建碑閣
二十七壬午克閑彩琦兩化士移建
0010_0032_a_06L震明軒改額極樂殿
三十三戊子綻訥應卞澤諶三化士重建雨花樓
0010_0032_a_07L增舊制焉
 時乾隆三十四己丑三月日註尾

0010_0032_a_08L
後後亦在後生後生次欠 [35] 襲述繼繼不絕則其蹟之終與天地有壽焉

0010_0032_a_09L
都總攝 花押

0010_0032_a_10L道光甲辰五月日

0010_0032_a_11L [36]
東北面都元帥完山府院君李成桂上元帥判密直司事姜筮副元帥
0010_0032_a_12L唐城君洪徵助戰元帥前簽書密直司事商議柳源前知密直司事商
0010_0032_a_13L議鄭夢周前密直副使李和等於洪武十年夏

0010_0033_a_01L명을 받고 와서는 청주清州147)에 머물렀는데, 대장경 한 부와 불상과 법기法器가 해양海陽148) 광적사廣積寺에 있는데 전란의 여파로 승려는 없고 사찰은 파괴되어 소중한 보배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실로 측연하여 전중랑장前中郎將 김남연金南連을 보내, 배에 실어 오게 하고 그 소실된 얼마간의 함축函軸(책갑)을 보완하여 전체를 완성하고는 안변부安邊府 설봉산雪峯山 석왕사釋王寺에 두어, 길이 임금이 장수하고 나라에 복이 되는 자료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위 글에서) “면面, 사事, 조助, 상商, 청清, 훼毀, 봉峯” 7자는 결락된 것을 (숙종이) 손수 보완한 것이다.

학성 설봉산 석왕사는 우리 태조대왕께서 잠저潛邸149) 시절에 지으신 것이다. 길몽의 아름다운 징조가 하늘이 열어준 크고 상서로운 운수 아님이 없으니 일반 사찰에 비할 바 아니다. 하물며 이 판목에 새겨진 158글자는, 우리 태조대왕의 필적이라고 전한다. 표식이 없어서 단언하지는 못하나 사찰에서 보물로 간직하길 지금 3백여 년이 된다. 또한 변란에도 온전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도다. 마침 사찰 승려들이 바위를 깎아 옮겨 새겨서 영구히 전하려고 하다가 내용 중에 태조의 초휘初諱150)가 있으므로 지니고 상경하여 내사內司151)에 바쳤다. 이 사찰은 본래 내사 소속이기 때문이다. 두세 번 살펴보고 드디어 모간摹刊152)하여 축문軸文153)을 만들고 아래에 기록한다.
무자년(1708) 여름 4월 등석燈夕154)(8일)에 (숙종이) 스스로 쓴다.


0010_0033_a_01L命 而來次于清州聞大藏一部及佛像法器在海陽廣積寺兵火之餘
0010_0033_a_02L僧亡寺毀大寶幾於盡失心實惻然遣前中郎將金南連舟載以來
0010_0033_a_03L其所失若于 [37] 函軸以成全部置于安邊府雪峯山釋王寺永為壽
0010_0033_a_04L君 福國之資云

0010_0033_a_05L
面事助商清毀峯凡七字畵手自補缺

0010_0033_a_06L
鶴城雪峯山釋王寺即我
0010_0033_a_07L太祖大王潛邸時所建吉夢休徵莫非天啟景運之祥非尋常寺剎比也
0010_0033_a_08L况此鏤板一百五十有八字俗傳是我
0010_0033_a_09L太祖大王手筆也既無標識未敢必然而寺中寶藏于今三百餘年亦得
0010_0033_a_10L全完於兵火尤可異哉適會寺僧欲治石移刻以圖永久而以其有
0010_0033_a_11L太祖初諱故賚持上洛具呈內司盖以此剎本屬內司也再三披玩之餘
0010_0033_a_12L遂摹刊作軸文以記于下方

0010_0033_a_13L
歲戊子夏四月燈夕自書

0010_0034_a_01L
6-2. 안변 석왕사 비문 추가 기록(安邊釋王寺碑文追記)
아, 이 사찰에 우리 태조대왕의 어필이 있으니, 바로 동북면도원수東北面都元帥 시절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등 여러 공公과 북청北青에 머물다가 길주吉州 사찰의 오래된 물품을 배로 실어 와서 이 사찰에 안치하고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의안대군義安大君155)의 이름이 거기 있으니 아, 또한 기이하다.
무자년(1708) 여름 4월에 사찰 승려가 판목을 들고 상경하니, 우리 성고聖考156)께서 짧은 글을 지어 덧붙여 판각했다. 이것은 바로 소자가 지난 날에 목도한 것인데 51년 지난 무인년(1758) 같은 달에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에서 다시 볼 줄을 알았으랴. 3번 반복해서 공경히 감상하니 그리움이 사무친다. 아, 우리 성조聖祖께서 창업하여 내려주시고 우리 성고聖考께서 계승하여 빛내시니 한 모퉁이 청구青丘에 예의가 찬연하고 팔도 초가집 백성들이 은택을 입도다. 보잘것없고 덕 없는 내가 선업을 계승하지 못하여 예의 풍속이 날마다 떨어지고 초가집 백성들이 날마다 곤란하도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두려워진다.
아, 성고聖考께서 친히 짧은 글을 지으시고 소자가 이어서 이 기록을 완성함은 모두 옛것에 감동하고 선조를 추모함에서 나온 것이지 사찰이 품어줄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후대 왕들은 이를 보고 우리 성조의 창업한 뜻과 우리

0010_0034_a_01L安邊釋王寺碑文追記

0010_0034_a_02L
本寺有我
0010_0034_a_03L太祖大王御筆即為東北面都元帥時與文忠公鄭夢周等諸公次于北
0010_0034_a_04L以吉州寺中舊物舟載以來置于此寺而記之者而義安大君之名
0010_0034_a_05L在其中吁亦奇矣
戊子夏四月因寺僧之賚板上京
0010_0034_a_06L聖考作小識而添刻焉此即小子昔年仰覩者而豈意五十一年戊寅同
0010_0034_a_07L復見于北道 陵殿誌中乎三復敬玩愴慕深切
0010_0034_a_08L聖祖剏業垂後
0010_0034_a_09L聖考繼述光前一隅青丘禮義燦然八路蔀屋棃 [38] 民被澤而弗肖弗德莫
0010_0034_a_10L述 先業禮義之俗日下蔀屋之民日困思之及此弗覺悚然

0010_0034_a_11L聖考之親作小識小子之續成此記俱由於感舊而追先非以其寺為可
0010_0034_a_12L為後王者覽此仰體我
0010_0034_a_13L聖祖剏業之烈

0010_0035_a_01L성고의 계승한 덕을 본받아 힘써 근면하고 힘써 검소하게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겨, 왕의 꿈을 해석한 옛날의 상서로움을 만대에 마땅히 영원히 드리워야 할 것이다. 몇 줄의 글을 가지고 해동의 축원으로 삼노라.
홍무洪武 임신년(1392) 이후 366년(1758) 맹하孟夏(4월)에 (영조는) 손을 씻고 공경히 적는다.

6-3. 태조대왕 독서당 중건 사적 비명병서 太祖大王讀書堂重建事蹟碑銘并序
함흥 동쪽 10리 쯤에 있는 귀주동歸州洞 설봉산 아래에 사찰이 있고 사찰 옆에 독서당이 있으니 바로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용잠龍潛157) 시절에 독서하던 곳이다. 『함산지咸山志』에 이른바, “푸른 개울이 잔잔히 흐르고 섬돌이 아직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병화를 여러 번 겪어서 건물은 무너지고 섬돌만 남았는데 이후 중세中世에 ‘덕순德淳’이라고 하는 승려가 작은 재실을 지어 유적지임을 표시하였다. 연대가 오래되어 들보가 무너졌으니 우뚝한 건물이 오래도록 수리되지 않았으니 성스러운 자취를 융성하게 해야 하는 도리에 어찌 큰 흠이 아니겠는가.
이제 본궁本宮의 별차別差158) 문익성門益成이 개연히 이에 대해 보수하겠다는 뜻을 내사內司에 치보馳報159)하였고, 이것이 구중궁궐까지 전해졌다. 성상(숙종)께서 이를 듣고 감흥이 일어 즉시 내사에 명하여 새기고 그리는 도구를 돕도록 하였다. 익성이 공경히 명명明命160)을 받들어 정성을 다해 주선하였다. 이에 신臣의 감영에서부터 공력을 모으고 일을 감독하여 수리를 마쳤다. 판관 김종연金宗衍 또한 재력을 넉넉히 돕고 또한 당액堂額을 써주니, 함흥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이 부모 일처럼 대하니, 며칠 되지 않아 일이 이루어졌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눈을 씻고 다시 쳐다보며, 다시는 이전의 탄식이 없게 되었다.
이 일에 별차別差로서 주선하여 힘쓴 것은 진실로 가상하며, 중건한 전말을 기록해서

0010_0035_a_01L聖考繼述之德克勤克儉保民恤民釋王舊日之休祥當永垂於萬異矣
0010_0035_a_02L敢將數行之文仍作海東之祝云爾

0010_0035_a_03L
洪武壬申後三百六十六年孟夏盥手敬書

0010_0035_a_04L○太祖大王讀書堂重建事蹟碑銘并序

0010_0035_a_05L
咸興之東十里許歸州洞雪峯山下有寺寺傍有堂即我 太祖康獻大
0010_0035_a_06L王龍潛時讀書之所而咸山志所謂碧溪潺湲砌石尚存者此也累經兵
0010_0035_a_07L堂圮址存越在中世有僧曰德淳者構小齊表遺墟而年代寢遠棟宇
0010_0035_a_08L傾頹巋然一堂久未重修其在致隆 聖迹之道豈非大欠缺乎
今 本
0010_0035_a_09L宮別差臣門而 [39] 益成乃能慨然於此以改創之意馳報內司以轉聞于
0010_0035_a_10L九重 聖上聞興感即命內司以助雕繪之具益成祗承 明命殫誠經
0010_0035_a_11L於是自臣營鳩功敦事繕修畢舉判官臣金宗衍亦優補財力又書堂
0010_0035_a_12L則咸之民莫不歡抃而子來盖不日而功告成一邦士庶拭目改觀
0010_0035_a_13L復有前日之嗟惜焉
是役也別差之周旋措辨者誠有可尚欲記重建顛

0010_0036_a_01L금석에 입혀 영원히 전하고자 신臣에게 그 일을 서술해 달라 부탁했다. 신은 비루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위와 같이 경개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태어나면서 아는 자질로서 거만하지 않고 경사經史에 침잠하고 이치를 연구하여 힘써 여기에서 강독하여 마침내 성인이 되는 공적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억만 세 무강한 아름다움을 열어주셨다. 그리하여 3백 년 문명의 교화가 실로 이 독서당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그러한즉 이 독서당의 흥폐는 어찌 다스리는 도의 오르내림에 관계가 없을 것인가. 이제 우리 예성영렬睿聖英烈(숙종) 전하께서 긍구肯構161)하는 정성이 이에 더욱 드러나니, 우리 동방이 유신維新162)하는 경사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엎드려 절하며 명銘을 쓴다.

天佑我東 聖祖誕作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성조께서 탄생하셨도다
瞻彼歸洞 王迹如昨       저 귀주동을 보니, 왕의 자취가 어제 같은데
舊堂已圮 遺氓咸嗟       옛 건물은 이미 무너져,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였네
差官馳聞 宸心乃嘉       차관이 급히 보고하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기고
工役畢舉 軒簷重煥       공정을 다 마치니, 건물이 다시 찬란하니
潛德斯著 其光丕顯       잠겼던 덕이 이에 드러나고, 광채가 크게 빛나도다
猗歟神聖 丕承無疆       아름답다, 신성이여, 크게 무강한 덕을 계승했네
豈唯肯構 實慕羹墻       어찌 긍구163)할 뿐인가, 실로 갱장을 사모함164)이라
佳氣鬱葱 于茲萬年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니, 이에 천 년 만 년
貞珉斯刻 永壽其傳       단단한 비석에 새기어,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네.

가선대부 함경도관찰겸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함흥부윤嘉善大夫咸鏡道觀察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咸興府尹 신臣 김연金演이 짓다.
통훈대부 행함흥부판관 함흥진병마절제도위通訓大夫行咸興府判官咸興鎮兵馬節制都尉 신臣 김종연金宗衍이 쓰다.
현의광륜예성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 전하 42년(1716) 병신년 9월에 세우다.


0010_0036_a_01L被之金石以壽其傳屬臣敘其事臣不敢以鄙拙辭略書梗槩如右
0010_0036_a_02L因竊伏惟念我 聖祖以生知之資不自滿假沉潛經史研究理義孜孜
0010_0036_a_03L講誦于斯而終致作聖之功以開我億萬世無疆之休則三百年文明之
0010_0036_a_04L實基于此堂然則此堂興廢豈不有關于治道之污隆歟今我 睿聖
0010_0036_a_05L英烈殿下肯構之誠於斯尤著而吾東方維新之慶其不在茲謹拜手稽
0010_0036_a_06L首而銘曰
 天佑我東 聖祖誕作 瞻彼歸洞王迹始 [40]  舊堂已圮
0010_0036_a_07L遺氓咸嗟 差官馳聞 宸心乃嘉 工役畢舉軒簷重煥 潛德斯著
0010_0036_a_08L其光丕顯 猗歟 神聖丕承無疆 豈唯肯構實慕羹墻 佳氣鬱葱
0010_0036_a_09L于茲萬年 貞珉斯刻永壽其傳

0010_0036_a_10L
嘉善大夫咸鏡道觀察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咸興府尹
0010_0036_a_11L臣金 演撰

0010_0036_a_12L通訓大夫行咸興府判官咸興鎮兵馬節制都尉臣金宗衍書

0010_0036_a_13L顯義光倫睿聖英烈殿下四十二年丙申九月日建

0010_0037_a_01L
6-4. 안변 설봉산 석왕사 비 安邊雪峯山釋王寺碑165)
부처님께서 삼교(유불선) 가운데 최후에 나오셨으나 그 영험함은 가장 드러났다. 유자儒者들이 믿지 않으나 또한 왕왕 믿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대저 사람에게 소원이 있으니 지성이요, 부처님은 자비가 있으니 무위無為이다. 지성으로 무위를 감동시켜 해조海潮166)를 생각하고 생각하여 찰나도 잊지 않으면 지혜의 배가 항하를 사이에 두지 않고, 보배 등불이 기원祗園167)에서 빛을 비추어 법륜이 구르고, 연꽃비가 적시며 무량한 주력呪力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 수명을 구하는 자는 수명을 얻고 자식을 구하는 자는 자식을 얻으며 삼매를 구하는 자는 삼매를 얻고 마니보주를 구하는 자는 마니보주를 얻는다. 그 이치는 속이지 않음이 있으니, 하물며 국가는 신과 인간의 주인임에랴. 두드리면(接拍) 명령이 되어 두드리고 노래함이 함께 따르며, 지제支提168)에 한 번 보시하면 대대로 정토(琉璃)169)에 들어가니 그 보응의 빠름이 어찌 농부와 길쌈녀가 가만히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향을 사르며 절을 하는 것과 비교하겠는가. 아아, 우리 성현께서 가르치신바,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170) 하더니 주로 이를 이름이로다.
안변 설봉산에 석왕사가 있으니, 국초國初에 창건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왕이 되실 징조를 꿈에 얻고서 토굴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無學에게 가서 그 의미를 풀었다. 그래서 등극(龍飛)할 즈음에 토굴이 있던 터에 사찰을 세워 석왕사라 하고 밭 몇 이랑과 노복 몇 명을 주어 불공을 드리게 했다. 골짜기 소나무와 정원의 배나무 중에 우리 태조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 있다. 비석에 있는 두 가지 기록 또한 숙종과 영조께서 지으신 글이다. 사찰이 상서로움을 시작하고 운수를 연 땅으로서 온 나라가 우러르는 곳이 되니, 신도들은 군지軍持171)와 녹낭漉囊172)을 들고 왕래가 이어지고 건설(興造)로는 향실香室과 감원紺園(절)이 겹겹이 일어서고 사방으로 이어졌다. 상하 수백여 년 간 독경 소리와 범패가 구름 끝과

0010_0037_a_01L安邊雪峯山釋王寺碑

0010_0037_a_02L
佛於三教最後出而其靈也最著儒者不之信亦往往不得不信此何以
0010_0037_a_03L稱焉夫人有擔願至誠也佛有慈悲無為也以至誠感無為念念海潮
0010_0037_a_04L那勿忘則慧舟不隔於恒河寶燈放光於祗園法輪所轉蓮雨所霑無量
0010_0037_a_05L呪力叶于百順使求壽者得壽求子者得子求三昧者得三昧求摩尼者
0010_0037_a_06L得摩尼其理有不誣者况國家者神人之主也接拍成令敲唱俱隨一施
0010_0037_a_07L支提世入琉璃其報佑之捷奚啻耕夫紅女之竊竊 [41] 然自私自利攝衣爇
0010_0037_a_08L香比哉嗚呼我聖所訓至誠如神職是之謂乎
安邊雪峯山之有釋王寺
0010_0037_a_09L創自 國初盖我 太祖夢興王之徵而就神僧無學於土窟中占釋其
0010_0037_a_10L故於龍飛之際建寺於土窟舊址名曰釋王給田幾頃僕幾口俾供佛
0010_0037_a_11L而洞之松園之梨有我 太祖手植碑之二記又 肅祖 英考宸章
0010_0037_a_12L寺以肇祥啟運之地為一邦所顒仰徒眾則軍持漉囊往過而來續
0010_0037_a_13L造則香室紺園匝起而旁達上下幾百有餘年經聲梵唄互荅 [42] 於雲未 [43]

0010_0038_a_01L나무 끝 사이로 울렸다. 법상法相에 금을 더한 것은 인목仁穆ㆍ인원仁元173) 왕후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전慈殿(효의왕후)까지 이어지니 전후로 모두 세 번의 무신년174)이다. 선禪과 교教의 인연이 원만하고 과보가 익음에 셋으로 세는 경우가 많으니 삼장三藏이나 삼성三聖, 삼승三乘, 삼제三諦, 삼덕三德이 그러한데, 3년 지나 경술년(1790)에 우리 원자(순조)께서 탄생하셨으니 성대하도다. 보리菩提(부처)의 참된 마음이 그윽이 부합하고 나계螺髻175)의 신이한 비춤이 빨리 응함이니, 번거롭게 축원하지 않고도 큰 복이 절로 이르렀도다. 이처럼 ‘기약 같고 법 같도다.’176) 나(정조)는 들으니, 제왕의 복은 닦음이 내게 있고 응함은 하늘로부터 온다 했는데 그래도 신명이 그윽이 돕고 영령(靈教)이 가만히 보호함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왕이 되는 상서는 상서로움을 모으는 데서 조짐을 발하고, 후사를 낳는 경사는 모산茅山에서 기도를 얻은 것으로 쇠와 돌에 새겨져 있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사람의 이목에 환히 빛나고 있다. 저런 것을 어찌 모두 믿지 않겠는가.
이 사찰은 그 연기緣起를 물어보면 왕을 일으킴이요, 다음으로 그 공덕은 후사를 낳음이라. 한 구비 청정한 땅이 나라와 아름다움을 짝하니, 태평성대의 영험한 자취를 모아 우리에게 신묘한 작용을 돌림이라. 삼천세계와 백억 수미須彌177)가 정성 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정성 들이면 대자대비 가운데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영험하니 누가 믿지 않겠는가. 무릇 영험하며, 수렴했다가 펼치며 펼쳤다가 수렴하여, 한 번 베풀고 한 번 보답함에 반복해서 다함이 없고 천 년 만 년 순환하여 끝이 없다. 옥호玉毫와 금속金粟178)이 인수仁壽의 영역에 길이 이어지고, 보배 구슬의 휘장이 창성한 교화를 널리 덮어주도다. 불력佛力이 미치는 바에 천지가 기쁘게 답하도다. 풍사風師와 우사雨師ㆍ산신山神ㆍ해신海神에 이르기까지 물과 육지와 하늘에 행하는 일체 생명들이 각각 발원하여 우리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찰 역시 길이 도움이 있으리라. 그런 후에 부처의 영험함은 유구무강하여 광겁曠劫토록 상주하는 비밀스러운 법교法教가

0010_0038_a_01L [44] 之間若法相之加金始于 仁穆 仁元后逮我 慈殿宮前後凡三
0010_0038_a_02L戊申也禪教之因圓果熟多以三計藏曰三藏聖曰三聖乘曰三乘諦曰
0010_0038_a_03L三諦德曰三德是也而粵三年庚戌誕我元子則盛矣哉菩提之實心潛
0010_0038_a_04L螺髻之神照徯應祝史無煩景祿自至若是其如幾如式也予聞帝王
0010_0038_a_05L之福修之在我膺之自 天而猶不能無待於神祗之幽賛靈教之冥護
0010_0038_a_06L故興王之瑞發兆於儲祥降嗣之慶獲祈於茅山載之金石播之史乘
0010_0038_a_07L今焜耀人耳目彼豈皆不信哉
是寺也問其緣起則興王也次其功德
0010_0038_a_08L降嗣也一曲淨土與國匹休萃昭代之靈蹟歸我妙用而三千世界百億
0010_0038_a_09L須彌有不誠誠之無不包於大慈大悲之中斯其為靈孰敢不信夫既靈
0010_0038_a_10L斂而敷 [45] 而斂一施一報反復不窮時萬時千循環無端玉毫金粟
0010_0038_a_11L亘仁壽之域寶網珠幡遍蔭昌熾之化則佛力所被天地喜荅以至風師
0010_0038_a_12L雨師山神海神一切水陸空行之精莫不各各發願保佑我子孫黎民
0010_0038_a_13L寺亦永有賴焉然後佛之靈也悠久無疆而曠劫常住之微密法教乃信

0010_0039_a_01L이에 염부제閻浮提(인간세상)에서 믿게 되리라. 드디어 게송을 붙여 비석에 크게 새긴다.

自覺覺他覺行圓        자신 깨닫고 남을 깨치는 각행이 원만하여
莊嚴法相座承蓮        장엄한 법상의 자리를 연꽃으로 받드니
金精珠火增新彩        황금과 보배가 더욱 빛을 띠는데
報果云何瓜瓞綿        과보는 어이하여 길이 이어지나

土窟雲棲杳幾春        토굴에서 구름처럼 깃든 지 몇 년인가
興王奇兆此維因        왕이 될 기이한 조짐이 여기서 인연했네
慧心已卜天心定        지혜로운 마음으로 하늘 뜻 점쳤으니
佑我真人布廣輪        우리 진인이 널리 법륜 돌림을 돕네

應真殿上齊跏趺        응진전 위에 가지런히 가부좌하여
無漏心香點戒珠        번뇌 없는 심향으로 계주179) 점찍고
化雨靈山先陟岸        영산에서 비가 되어 언덕에 올라
更將休福飫東區        다시 복을 동녘에 흠씬 젖게 하네

九佛金人涌寶光        9위의 불상에서는 광채가 솟아나니
人工到處聖靈通        기술 지극한 곳에 성령이 통하네
花開子結無量劫        꽃 피고 씨 맺어 무량한 세월 동안
念念存存普濟方        생각 생각은 널리 제도할 방안에 있네

極樂界尋問赤縣        극락세계 찾아 적현180)을 물으니
無邊剎海即安邊        가없는 찰해181)가 곧 안변이라
三車滿載三乘出        세 수레에 가득 실어 삼승182)을 내어
去誘來招大願舡        큰 소원의 배로 부르고 유인하네

彩質金容互現機        채색 바탕과 금빛 모습이 서로 기미 드러내니
慈雲法雨暎雙扉        자비의 구름과 법의 비가 사립문 비추네
人天淨業同三教        인천의 청정한 업은 삼교가 동일하니
不鼓昭琴點瑟希        소문183)의 거문고 타지 않고 증점184)의 비파소리 드무네

나(정조) 소자가 등극(即阼)한 지 14년(1790) 가을 9월에 공경히 짓노라.

6-5. 설봉산 석왕사 중흥사적비 雪峯山釋王寺重興事蹟碑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박종경朴宗慶
관찰사 겸 순찰사觀察使兼巡察使 조덕윤趙德潤
행 안변도호수사行安邊都護守使 이우재李愚在
규장각별간역 이원현감奎章閣別看役利原縣監 한택조韓宅祚

0010_0039_a_01L於閻浮提云爾遂系之以偈大刻諸石曰

0010_0039_a_02L
自覺覺他覺行圓莊嚴法相座承蓮金精珠火增新彩報杲 [46] 云何瓜瓞綿
0010_0039_a_03L土窟雲棲杳幾春興王奇兆此維因慧心已卜天心定佑我真人布廣輪
0010_0039_a_04L應真殿上齊跏趺無漏心香點戒珠化雨靈山先陟岸更將休福飫東區
0010_0039_a_05L九佛金人誦 [47] 寶光人工到處聖靈通花開子結無量劫念念存存普濟方
0010_0039_a_06L極樂界尋問赤縣無邊剎海即安邊三車滿載三乘出去誘來招大願舡
0010_0039_a_07L彩質金容互現機慈雲法雨暎雙扉人天淨業同三教不鼓昭琴點瑟希

0010_0039_a_08L
予小子即阼十四年秋九月日敬撰書

0010_0039_a_09L雪峯山釋王寺重興事蹟碑

0010_0039_a_10L
資憲大夫吏曹判書 朴公宗慶

0010_0039_a_11L觀察使兼巡察使 趙公德潤

0010_0039_a_12L行安邊都護守使 李公愚在

0010_0039_a_13L奎章閣別看役利原縣監 韓宅祚

0010_0040_a_01L전가산군수 통정대부前嘉山郡守通政大夫 이한극李漢極

가경嘉慶 17년(1812) 임신년 9월에 세우다.

7. 귀주사 중건기적 비명병서 歸州寺重建紀蹟碑銘并序
예전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용잠龍潛185) 시절에 함산咸山(함흥) 동쪽 15리에 있는 귀주동歸州洞 설봉산 아래에서 독서하셨다. 그 당시 승려들 또한 수풀들을 걷어내고 머물렀다. 아, 이 산은 실로 왕 자취의 기반이로다. 국초에 사찰을 세워 성스러운 터를 보호하고, 숙종(肅廟)과 정조(正廟) 그리고 네 임금의 글(御製宸翰)을 공경히 받들어 전각을 지어 보관하였다. 불가에서 그로 인해 중요해지니 바로 석왕사와 서로 비등한 것이다. 그런데 무인년(1878) 납월(12월)에 이르러 문득 화재를 만나 사찰이 모두 타버렸는데 독서당과 어필각은 다행히 홀로 남았으니, 정녕 왕령王靈이 미친 바로다. 도계道啓186)가 이미 임금께 보고되었고, 내사內司187) 또한 그것을 위해 간절함이 지극했다. 다음 해 봄에 나는 관찰사로 임명을 받아 폐사陛辭188)할 때 임금께서 재건하라고 온륜溫綸189)을 거듭 내리셨다. 여기에 이르러 얼마 되지 않아 내탕전內帑錢190) 3,500꿰미(緡)와 공명첩 5백 장, 무명(白木)과 종이(紙束) 합가전合價錢 910냥을 일시에 내려주셨다. 이로부터 장인에게 명하여 비교碑校를 선발해 재목을 헤아리고 바위를 잘라 가까이 계곡들에서 취하게 했다. 허다한 잡비는 재상과 수령이 임금의 돌보심을 본받고 마을의 백성들이 임금의 은혜를 우러러 각기 정성과 힘을 다해 즐거이 보시하니, 거창하게 공사를 벌여 15개월에 이르러 완성을 하였다. 새로 지은 불감佛龕 선원이 3백여 칸이요, 소요된 경비는 28,900여 금이었다. 아름답도다, 임금께서 선인의 뜻을 따르는

0010_0040_a_01L前嘉山郡守通政大夫 李公漢極

0010_0040_a_02L嘉慶十七年壬申九月 日 立

0010_0040_a_03L○歸州寺重建紀蹟碑銘并序

0010_0040_a_04L
昔我 太租 [48] 康獻大王龍潛讀書干咸山之東十五里歸州洞雪峯山下
0010_0040_a_05L伊時緇徒亦闢蘿而處焉茲山實基 王跡國初建寺衛護 聖址
0010_0040_a_06L奉 肅廟 正廟西 [49] 聖御製宸輸 [50] 尊以閣之佛家依重即與釋王寺相甲
0010_0040_a_07L乙者也洎戊寅臘月遽遭回祿一剎蕩燼 讀書堂御筆閣幸賴獨存
0010_0040_a_08L是王靈攸暨道啟業已 上徹內司亦為懇至越明年春余承按使之命
0010_0040_a_09L及其 陛辭 聖旨申申以重構溫綸蒞茲未幾 內帑錢三千五百緡
0010_0040_a_10L空名帖五百張白木紙束合價錢九百十兩零一時頒下自此命倕選遣
0010_0040_a_11L碑校度材伐石近取諸洞許多冗費則卿宰牧伯軆 上眷庇閭里士庶
0010_0040_a_12L仰 聖惠究各盡誠力樂為普施巨創董功至於十五箇月而告成新構
0010_0040_a_13L佛龕禪院為三百餘間役錢所入二萬八千九百餘金猗歟聖上遹追之

0010_0041_a_01L은혜와 백성을 기르는 은택으로 성스러운 터를 다시 살펴보사 넓혀 중수하시고 도량을 복구하시니, 패상沛上191)의 부로들이 또한 손을 모아 축원하지 않음이 없다. 그 전말을 모은 것이 이와 같고, 드디어 명銘을 짓는다.

宸顧北土 前聖所址       임금께서 북녘을 돌아보시니, 성군이 터를 잡았던 곳
永奠守護 西教釋氏       길이 제사 지내 수호하는 건, 서쪽에서 온 불교라네
生靈蒙福 海左右區       백성들이 복을 받으니, 바다 좌우의 구역
禪劫難逃 嘻烏夜投       그러나 겁난을 피하지 못해, 아 깊은 밤에 화재 나니192)
重宸曰咨 締構不遲       임금께서 탄식하시고, 중수를 늦추지 않아
往欽來宣 帑金先施       뜻을 받들어 펼치사, 내탕고 금을 베푸시니
財幣坌集 匠石爭趨       재물이 어지러이 모이고, 장인들이 다투어 이르러
一新改觀 鞏固基固       일신하여 모습이 바뀌니, 공고히 기반이 굳건하네
聖德如海 慈航泛彼       성덕이 바다와 같고, 자비의 배가 뜨네
政珉紀槩 現光仰止       옥돌에 대강 기록하고, 빛나는 광채를 우러르도다.

정헌대부 행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함흥부윤正憲大夫行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咸興府尹 김병지金炳地193)가 짓다.
통훈대부 행함흥부판관 함흥진병마절제도위겸수성장通訓大夫行咸興府判官咸興鎮兵馬節制都尉兼守城將 심의두沈宜斗가 쓰다.

8. 조선국 함경도 이성현 만덕산 복흥사 다보탑비 서문194) 朝鮮國咸鏡道利城縣萬德山福興寺多寶塔碑序
남방에 칠보七寶195) 깃발(幡盖)과 5천 난간(欄楯)과 영락瓔珞ㆍ마노瑪碯로 만든 탑이 있으니 누가 만든 것인가. 땅에서 솟은 것이다.196) 북방에 칠보 깃발과 5천 난간과 영락ㆍ마노로 만든 탑이 있으니 누가 만든 것인가. 땅에서 솟은 것이다. 땅에서 솟은 이유는 다보여래의 밝은 행위에 대한 보답이리라. 세칭 다보여래불은 보정국寶淨國197) 출신으로, 무릇 시방에서 경전을 설하실 때 문득 이 탑이 솟아났다. 탑 가운데 사자좌를 두었는데 높이가 5길이며 전단대보향栴檀大寶香을 사르니 향기가 허공에 가득하고, 천룡과 귀신들이

0010_0041_a_01L涵育之澤更瞻 聖址增重繕修道場復舊沛上父老亦莫不攢手顒
0010_0041_a_02L摭釵顛末如右遂為之銘曰
 @宸顧北土 前聖所址 永奠守護西
0010_0041_a_03L教釋氏 生靈蒙福海左右區 禪劫難逃嘻烏夜投 重宸曰咨締構
0010_0041_a_04L不遲 往欽來宣帑金先施 財幣坌集匠石爭趨 一新改觀鞏固基
0010_0041_a_05L 聖德如海慈航泛彼 政珉紀槩現光仰止

0010_0041_a_06L
正憲大夫行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咸興府尹金炳地
0010_0041_a_07L

0010_0041_a_08L通訓大夫行咸興府判官咸興鎮兵馬節制都尉兼守城將沈宜斗書

0010_0041_a_09L○朝鮮國咸鏡道利城縣萬德山福興寺多寶塔碑序

0010_0041_a_10L
南方有七寶幡盖五千欄楯瓔珞瑪碯以為塔孰為之也曰從地涌北方
0010_0041_a_11L有七寶幡盖五千欄楯瓔珞瑪碯以為塔孰為之也曰從地涌其所以從
0010_0041_a_12L地涌者盖多寶杲行之報也世稱多寶如來佛出寶淨國凡十方說經之
0010_0041_a_13L輒涌此塔塔中置獅子座高五丈燒以栴檀大寶香充滿空虛天龍鬼

0010_0042_a_01L위에서 호위하였다. 다보여래가 정진하여 선근善根으로 본원本願198)을 근면히 닦아, 천억 분신이 연꽃과 함께 잎사귀마다 장엄하니 이른바 삼천세계와 갖가지 국토가 모두 칠보였다. 사자좌는 두지 않음이 없고, 전단 향을 사르지 않음이 없으며 번개와 난간과 마노ㆍ영락으로 꾸미지 않음이 없으니 천룡과 귀신이 또한 어찌 호위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이러므로 여래께서 도를 이룬 까닭은 오직 고요히 청정한 가운데 있다. 번뇌(塵勞)를 해탈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5백 보명제자普明弟子199)들이 모두 정각을 얻어 몸에서 광명이 나고 생멸이 없이 팔방을 다니며 그 오묘함을 드러낼 것이다. 비록 이 탑이 없는 곳이라도 하필 유리로 땅을 만들고 황금으로 끈을 만들며 보만寶幔(보배장막)으로 위를 덮은 연후에야 지극히 신령한 힘을 보겠는가.
이제 영변부寧邊府 묘향산의 보현사와 합천군 가야산의 해인사, 양산군 축서산의 통도사, 경주부 토함산의 불국사에는 모두 다보여래의 탑이 있으니, 보정寶淨 나라가 동방무량세계에 있어서 다보여래가 그 가운데 출현하심이리라. 그러나 날아다님이 자재하신 몸으로 상하에 걸림 없고 좌우 없고 전후 없고 출입 없이 사바세계에 두루 보이시니 대지 38만 7천 리 가운데 곤륜산과 유사流沙200), 교지交趾(월남), 한해瀚海201)가 보정 아님이 없는데 저렇게 동방에 탑을 조성함은 비루하다 하겠다.
명제明濟 대사는 이성현利城縣202) 만덕산 복흥사福興寺에 다보구층탑을 세우고 위에 『묘법연화경』을 안치하고 가운데 다보 석가상을 두었으며 아래에는 팔금강八金剛203)을 새겨 넣었다. 경진년 가을 7월에 시작하여 3년 후 계미년 여름 5월에 탑을 이루었다. 이에 폐물을 갖추어

0010_0042_a_01L護持其上然多寶精進善根勤修本願千億分身與蓮華葉葉莊嚴
0010_0042_a_02L所謂三千世界種種國土皆七寶也獅子之座無不置也栴檀之香無不
0010_0042_a_03L燒之幡盖欄楯瓔珞瑪碯無不飾也天龍鬼神又焉有不護持者邪是故
0010_0042_a_04L如來之所以成道者惟在於寂然清淨之中解脫塵勞教化眾生使五百
0010_0042_a_05L普明弟子皆得正覺身出光明無生無滅周流八方以顯其妙雖無此塔
0010_0042_a_06L所也何必以琉璃為地黃金為繩寶慢 [51] 上覆然後見至神之力乎
今寧邊
0010_0042_a_07L妙香山之普賢寺陝川郡伽山之海印寺梁山郡鷲棲山之通度寺
0010_0042_a_08L州府吐含山之佛國寺皆有多寶如來塔盖以為寶淨為國在東方無量
0010_0042_a_09L世界而多寶出於其中也然飛行自在之身無上無下無左無右無前無
0010_0042_a_10L無出無入徧見於娑婆世界則大地三十八萬七千里之中崑崙流沙
0010_0042_a_11L交趾瀚海無非寶淨也彼造塔於東方者可謂陋矣
明濟大師於利城縣
0010_0042_a_12L萬德山福興寺起多寶九層之塔上安妙法蓮華經中置多寶釋迦像
0010_0042_a_13L則雕八金剛位始於庚辰秋七月後三年癸未夏五月塔成於是具幣

0010_0043_a_01L이성利城에서부터 남쪽으로 철령 10여 리를 넘어 내게 게송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대사의 옷에 바늘구멍마다 실이 질러감에 칠보 깃발과 오천 난간 아님이 없으니, 이 백 길의 다보탑은 대사의 옷 안에서 결코 여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어찌 금색 32상(불상)을 장엄하여 공중에 있게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게를 말하였다.

有塔九成 聳于朔方        구층의 탑이, 북방에서 솟으니
上列蓮經 下則金剛       위에 『법화경』, 아래에 금강신중이요
多寶中臨 幢盖有光       다보여래 중간에 있어, 깃발 빛나네
天龍歡喜 如聞其香       천룡이 환희하니, 그 향을 맡은 듯
濟師修行 慧燈是張       명제 대사 수행하여, 지혜의 등불 밝혔네
飾此七寶 鎮我土疆       이 칠보를 수식하여, 우리 강토에 두니
北清女直 南服扶桑       북으로 여진이 깨끗하고, 남으로 일본이 따르네
如來之力 以綏大荒       여래의 힘으로, 먼 곳도 편안히 하도다
師之出寺 塔隨于囊       대사가 사찰을 나오면, 탑이 배낭에서 따를 것이요
師之入寺 塔立于岡       대사가 사찰에 들어오면, 탑이 등성이에 서리라
欄楯五千 常在師傍       난간 5천이, 항상 대사 곁에 있어
慈悲不滅 與天俱長       자비가 사라지지 않고, 하늘과 함께 영원하리라.
9. (고원 반룡산 양천사 사적)
9-1. (고원 반룡산 양천사 사적)
고주高州(함남 고원高原) 서쪽에 반룡산盤龍山이 있으니 북방의 명승지인데, 신라 시대에 세운 사찰이 있으니 양천사梁泉寺이다. 지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펑퍼짐한 산에 용이 있으니 ‘반룡산盤龍山’이라 한다. 산 뒤에 바위 샘이 있어 땅 속에서 흐르다가 산으로 나오는데 물소리가 시원해서 ‘양천梁泉’이라 부르는 것이리라.204) 사찰에는 원통전 안에 불상이 있고, 그 앞에는 만세루가 있으며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어 승려들이 거주하는데 거처가 청결하고 크고 아름답다. 승려들이 성대하고 안락하게 거주하니 인간세상이 아닌 듯하다. 극락전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백운당白雲堂’이라 하였다. 보수한 지 오래되어 자못 무너진 곳이 있었다. 그래서 승려들이 서로 도모하여 수리를 하였는데 화주로는 후관後冠과 위징位澄과 정안淨眼이 가장 공이 크다. 지역민으로 시주한 이들이 많은데 김이형金履衡과 손창세孫昌世가 가장 공이 크다. 3년이 되어 완성하였으니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답고

0010_0043_a_01L利城南踰鐵嶺十餘里請余說偈余咲曰大師之衣箴孔綫蹊未甞無七
0010_0043_a_02L寶幡盖五千欄楯也是多寶百丈之塔固不離於大師衣裏也又何以嚴
0010_0043_a_03L飾金色三十二相住在空中耶
遂說偈言曰
有塔九成聳于朔方上列蓮
0010_0043_a_04L下則金剛多寶中臨幢盖有光天龍歡喜如聞其香濟師修行慧燈是
0010_0043_a_05L飾此七寶鎮我土疆北清女直南服扶桑如來之力以綏大荒師之出
0010_0043_a_06L塔隨于囊師之入寺塔立于岡欄楯五千常在師傍慈悲不滅與天俱
0010_0043_a_07L

0010_0043_a_08L [52]
高州西有盤龍山北方之勝地也新羅時建寺名梁泉其地三面環山
0010_0043_a_09L山盤有龍故曰盤龍山山後石泉潛行出山束水聲泠然盖乃梁泉云
0010_0043_a_10L有圓通殿內塑佛像其前則萬歲樓西則極樂殿僧徒居之其居清深宏
0010_0043_a_11L其徒富盛安樂翛然非人境也極樂殿者舊名白雲堂其修改歲久
0010_0043_a_12L有傾頹於是僧徒相與經始而修葺之其化主者曰後冠位澄淨眼最有
0010_0043_a_13L州民之為施主者眾而金履衡孫昌世最有功三年而功訖其制益麗

0010_0044_a_01L볼 만 했다.
위징位澄 대사는 지혜롭고 문자를 알아 편지를 지니고 서울로 와서 내게 글로 기록해주기를 청하였다. 무릇 산수가 아름다워도 반드시 문인 재자才子들이 기록을 해야 그 이름이 알려지고, 인재가 훌륭하더라도 반드시 현인 군자들이 가르쳐야 재주가 완성된다. 이제 이 산은 기이하고 수려한 소문이 아름다운 글에 퍼져 있고, 뛰어나고 믿음직한 백성들이 그 맑은 기운을 타고남이 마땅한데, 문인 재자들이 전하지 않고 현인 군자들이 방문하지 않아서 그 산수로 하여금 어둡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인재로 하여금 승려 무리 속으로 사라지게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나는 유자들의 말로 고하자 하나 불가에서 믿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요 불가의 말로 고하고자 해도 또한 유자들이 말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 산수와 건물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주노라.
숭정崇禎 3 갑자년(1804) 3월에 원성原城(원주) 사고당師古堂 원유영元有永이 기록한다.

9-2. 일 대웅전 중수 개와 기문 一大雄殿重修改瓦記文
반룡산 양천사는 고을의 주맥으로서 요상한 기운을 누른 곳이며, 철령 이북과 칠보산205) 이남 사이에서 이름난 곳이다. 대웅전을 창건한 게 어느 때인지 모르는데 새는 곳이 너무 많아 전패殿牌206)와 불상이 비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찰의 승려 지智 대사가 영흥永興 진정사鎮靜寺 백련당白蓮堂으로 발우를 옮겨 주야로 본사 법당의 퇴락에 대해 소원으로 삼아 이전에 없던 계책을 내었다. 사찰의 물레방아 하나를 팔아서 돈을 마련할 곳을 구하였다. 이윽고 함흥의 기와장이 박중로朴重魯에게 기와를 갈아달라고 청하니,

0010_0044_a_01L可觀焉
位澄大師也慧悟識文字齎書至漢大師請余文以記夫山水雖
0010_0044_a_02L必有文人才子為之記錄而其名著焉人材雖美必有賢人君子為之
0010_0044_a_03L教導而其材成焉今茲山與宜有奇異秀麗之聞播諸芳翰瑰瑋忠信之
0010_0044_a_04L鐘其淑氣而文人才子不為傳賢人君子不屑過使其山水沉晦不著
0010_0044_a_05L其人材泯滅於浮屠之徒豈不惜哉
余欲告以儒者言而固非釋氏之所
0010_0044_a_06L能信也欲告以釋氏之言而又非儒者之所當道也姑記其山水殿屋之
0010_0044_a_07L以贈之

0010_0044_a_08L
崇禎三甲子三月日 原城師古堂元有永記

0010_0044_a_09L一大雄殿重修改瓦記文

0010_0044_a_10L
夫盤龍山梁泉寺邑之主脉妖氣所壓之處鉄嶺以北七寶以南之間
0010_0044_a_11L區也而大雄殿創建不知何代而森漏太多殿牌佛像未免風雨故寺之
0010_0044_a_12L僧智大師移鉢于永興鎮靜寺白蓮堂以晝夜本寺法堂之墜落含願
0010_0044_a_13L出無前之計寺之水碓一座賣之出錢求處而已請咸山盖匠朴重魯翻

0010_0045_a_01L새로 짓고 보수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 공이 크도다. 내게 현판에 표시할 글을 청하였다.
도광道光 19년(1839) 기해년 4월에 유학幼學 변달홍邊達弘이 적는다.

10. 덕원 반룡산207) 재성암 중수기 德源盤龍山再醒菴重修記
듣자하니, 문수도량에는 본래 두 개의 문이 없고 여래의 호광毫光208)이 두루 시방을 비춘다고 한다. 이제 재성암再醒菴은 빈 산에 사람 없이 물 흐르고 꽃이 피고 있다. 암자는 비록 매우 가난하나 영험함이 무량하다. 덕원부德源府209) 뒤 산악은 세칭 면구眠狗210)라 하고, 안산에 성암醒菴이 있으니 풍수(의 이로움)를 머금을 수 있다. 읍을 설치한 처음에 이 정사를 지었으니, 읍의 흥폐가 암자의 성쇠와 관련 있다. ‘견성犬醒’이란 호칭은 진실로 이유가 있다. 백년 사이에 보시하는 승려가 없고 보시하는 속인이 없어 다만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만 보인다. 지난 갑오년(1834)에 이희철李熙哲 공이 수령(知府)을 할 때 우연히 기이한 꿈을 얻었으니, 삼세불三世佛이 빛나는 구슬들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이 차례로 태어났고, 이후 복을 비는 이들이 신이한 경험들을 했다. 마을사람과 이웃사람, 노인, 어린이들 모두 달려와서 향을 사르며 절을 하였다. 그런데 근래 이래 불전과 신당神堂이 비바람을 피하지 못해 기와가 부서지고 서까래가 썩어, 나날이 더욱 스산해져 갔다. 마을 사람들이 절을 가리키며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본 암자의 늙은 비구니가 이제 재물과 힘을 모아서 수리하고자 한다.
엎드려 바라건대 선남선녀들은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비용을 넉넉히 도와 절이 찬란하게 바뀌면, 어렵지 않게 범인을 넘어서고 금방 성인의 경지에 나아갈 것이다. 화엄 누각이 어찌 어려우리오. 손가락 하나 튕기는 사이에 장벽이 열리리라. 기와와 벽돌은 1천 게송 아님이 없고, 법신法身은 온 마을 사람들이 우러르는 바이다. 한 부府에 있어 부府의 흥망은 또한 암자가 새롭게 됨에 있으므로 이렇게 모금하는 인연이 있게 되니, 누가 정성껏 힘을 내어

0010_0045_a_01L則新造改建無異其功大矣也請余作文以標板

0010_0045_a_02L
道光十九年己亥四月 日 幼學邊達弘記

0010_0045_a_03L○德源盤龍山再醒菴重修記

0010_0045_a_04L
盖聞文殊道場本無二門如來毫光遍照十方今夫再醒菴空山無人
0010_0045_a_05L流花開菴雖懸磬現靈無量本府後岳世稱眠狗案有醒菴可含風水
0010_0045_a_06L邑之初建此精舍邑之興廢有關於菴之盛衰號稱犬醒良有以也百年
0010_0045_a_07L之間僧無布施俗無擅 [53] 徒見山高而水清往在甲午李公熙哲氏知府
0010_0045_a_08L偶得異夢三世佛現前光明聯珠二男次第降生踵後祈福者無不神
0010_0045_a_09L村的侑的老的少的莫不奔走焚香頂禮挽近以來佛殿神堂未免上
0010_0045_a_10L雨傍風毀瓦腐椽日益蕭索一邑之人莫不指点嗟歎矣本菴老尼僧
0010_0045_a_11L鳩財力以圖修葺
伏願善男善女特垂慈悲優助役費 [54] 然改觀則超凡
0010_0045_a_12L非難即聖在邇華嚴樓閣何難一指彈開場壁瓦礫無非千偈法身一邑
0010_0045_a_13L之眾所瞻仰在於一府府於 [55] 興亦在於菴之新故有此募緣孰不處 [56] 誠出

0010_0046_a_01L길이 굳건히 존재하도록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 정성에 감동하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수백 년 동안 향을 사르며 경전을 염송하는 장소가 쑥 더미에 벌레 우는 장소가 되지 않도록 하면 매우 다행이요 다행이리라. 지난번에 이 공李公이 암자 이름을 ‘재성再醒’으로 바꾸어 주었으니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잠자던 개(眠狗)가 때가 되어 다시 깨어나서 그러한 것인가. 경전에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하였으니, 개 역시 깨달아서 그러한 것인가.
광서光緒 17년(1891) 2월 10일.
화주는 비구니 쾌인快仁과 제자 만덕德萬.

11. 속고산 만경암 기 束高山萬景菴記
숭정崇貞 갑술년(1634) 일진一真 대사가 처음 창건하였다.
의춘宜春211) 서쪽에 큰 산이 하나 있으니, 이름은 ‘속고산束高山’212)이다. 산 허리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으니 ‘만경암萬景菴’이다. 법사 광조廣助는 유명한 스님 수초守初213)의 제자이다. 갑술년에 일진一真이라는 승려가 이 암자를 창건하였다. 그 후 인성認性과 청안清眼이 이어서 중수했는데 다만 단청이 없어서 흠이었다. 학성鶴城의 승려 광동廣洞이 이를 개탄하여 스스로 재력에 힘쓰고 보시 인연에 의지하여 단청을 마치니 광채가 배나 더했다. 이 세 승려를 기다린 것인가.
임자년 3월 15일에 짓다.

12. 반룡산 조계사 사적 盤龍山曹溪寺事蹟

0010_0046_a_01L以祈永固圖存哉感其誠而憐其人使數百年焚香念經之地 [57] 至蓬
0010_0046_a_02L蒿虫蟻之所幸甚幸甚往在李公改賜庵名再醒未知據何而云疑是眠
0010_0046_a_03L之狗當其時再醒而然歟經云狗子亦有佛性狗亦悟而然歟

0010_0046_a_04L
光緒十七年二月十日

0010_0046_a_05L化主 此邱尼 快仁 常 [58] 子德萬

0010_0046_a_06L○束高山萬景菴記

0010_0046_a_07L
崇貞甲戌年一真大師初創建設

0010_0046_a_08L
宜春之西有一大山名曰束高山山腰有一小菴名曰萬景法師廣助
0010_0046_a_09L僧守初之弟子也甲戌有僧一真者創建是菴其後認性清眼相繼重修
0010_0046_a_10L但以無丹雘為欠鶴城僧廣洞慨然於此自辦財力具賴善緣丹青既訖
0010_0046_a_11L光彩倍增以待斯若三僧者乎

0010_0046_a_12L
壬子三月十五日撰書

0010_0046_a_13L○盤龍山曹溪寺事蹟

0010_0047_a_01L
덕원부 서쪽에 마수령馬樹嶺(마식령)이 있고 산의 내맥來脉214)에 형제봉이 있으니 이름은 휴암산鵂岩山이다. 무슨 이유로 이름을 얻었는가. 구름이 어둡고 달이 그믐일 때 휴조鵂鳥(수리부엉이)가 그 바위 위에서 울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군大君 셋이 있었으니 옛날 목조대왕穆祖大王215)이 전주와 삼척에서 덕원부 남면 용주리湧珠里로 이사하였고, 이후 익조대왕翼祖大王216)이 거처할 때 이름을 ‘적도리赤島里’로 바꾸었고, 이후 도조대왕度祖大王217)이 적도리에 거처할 때 이름을 ‘적전리赤田里’로 바꾸었다. 휴암 아래 사찰을 짓고 ‘안양사安養寺’라 하였다. 안양이란 이름은 왜 그런가. 도조대왕이 사찰을 지어 성공聖供218)하고 기도할 때 원당願堂으로 삼았기 때문에 안양사라 한 것이다. 지난 병자란 이후에 사찰을 부수고 부운사淨雲寺로 옮겨 세웠고 또 옮겨 세우고는 ‘조계사曹溪寺’라 하였다. 조계曹溪라는 명칭은 왜 그런가. 물 두 줄기가 합하여 조계의 원류가 되기 때문이다. 대웅전과 좌우 요사채와 영성루迎聖樓, 명심당明心堂, 명부전冥府殿, 단속문斷俗門, 조계문曹溪門은 설암당雪岩堂219) 대사와 체운軆云ㆍ종흡宗洽ㆍ삼변三卞 네 명의 승려가 세운 것이다. 북쪽으로 7리 가면 성전암聖殿庵이 있으니 기도하는 곳이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면 암자가 있으니 ‘석천암石泉庵’으로서, 기도하여 세상을 돕던 곳이다. 사찰 아래 신이한 못이 있으니 ‘여계지女溪池’라고 한다. 여계라는 것은 어떠한 명칭인가. 병자년에 영흥永興 중영장中營將이 관비를 데리고 와서 놀다가 익사한 연못이다. 그래서 여계소女溪沼라고 부른다. 이렇게 기록하고 이후의 사적을 볼 따름이다.

13. 반룡산 몽월암 창건과 네 번 중수한 기 盤龍山夢月菴初創及四度重營記
강희康熙 정유년(1717) 언기彥機220)의 승려가 있던 산 아래 거처하던 이씨와 박씨가 서로 의논하기를, 내가 화주가 될 테니 당신이 시주가 되라 하고는

0010_0047_a_01L
德源府西有馬樹嶺而山之來脉為兄弟峯名曰鵂岩山何故得名也
0010_0047_a_02L陰月晦之間鵂鳥其岩上以鳴故為之名稱焉三大君者昔穆祖大王
0010_0047_a_03L全州三陟移居于本府南面湧珠里其後翼祖大王居時改名曰赤島里
0010_0047_a_04L其後度祖大王居時赤島改名曰赤田也鵂岩下建寺名曰安養寺安養
0010_0047_a_05L之名何也度祖大王建寺而聖供祈禱之時為願堂故名曰安養寺去丙
0010_0047_a_06L子亂以後破寺而移建于淨雲寺又移建焉名曰曹溪寺曹溪之稱何也
0010_0047_a_07L兩水合流而曹溪之源派也大雄殿左右僚舍迎聖樓明心堂冥府殿
0010_0047_a_08L俗門曹溪門者乃是雪岩堂大師與軆云宗洽三卞四僧之所建也北去
0010_0047_a_09L七里有聖殿庵祈禱之處西去十里許有庵名曰石泉也祈禱祐世之處
0010_0047_a_10L寺下有神池所謂女溪池女溪池稱何也丙子時永興中營將率來官
0010_0047_a_11L遊弄而溺死之池故名曰女溪沼也以此記觀後來蹟而已

0010_0047_a_12L○盤龍山夢月菴初創及四度重營記

0010_0047_a_13L
康熙丁酉年彥機之僧山下所居李朴相議曰我為化主君為施主仍而

0010_0048_a_01L터를 잡고 건물을 하나 세우고는 ‘몽월夢月’이라 했다. 터를 닦던 밤에 언기 선사의 꿈에, 둥근 달이 시방을 비추는 상서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 이후 전해진 것이다.
옹정雍正 경인년221)에 경총敬聦과 계인戒忍 두 장로長老가 재건하였다.
건륭乾隆 신사년(1761)에 표表 상인上人이 세 번째로 아래 터로 옮겨 세웠다.
을미년(1775) 가을에 낭활朗活의 승려가 재물을 모아서 불전과 요사채 공사를 병신년(1776) 중춘에 시작했다. 중수한 이후 정유년(1777) 봄에 불전과 요사채가 둘 다 불탔다. 낭활朗活의 승려는 운수雲水 출신으로 감로甘露로 성품을 씻는 곳을 구걸하여 경자년(1780) 중춘(2월)에 공사를 시작했고 그해 계하季夏(6월)에 마쳤는데, 아래 터를 옮겨서 옛 터에 다시 세웠다.
20여 년 동안 세 번 중수한 것이다. 용곡龍谷 대사가 창건하고 이후 4번 중수한 연호를 기록한다.
숭정崇貞 기원후 임인년(1782) 초겨울에 쓰다.

14. 백운암 중수기 白雲菴重修記
도광道光 23년 계묘년(1843) 지월至月(11월).

무릇 이 암자가 창건한 이래 한 번도 중수한 적이 없어서 기와와 서까래가 모두 벗겨지고 기둥이 다 썩어서 유자와 불자들이 개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유성有性 상인上人이 함산咸山(함흥)에서 와서는 권선문을 지니고 시주를 모아 개축하니, 이전보다 배는 빛나고 이름을 뒤에 드날리게 되었다.
이 암자의 흥폐와 산의 영험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한 서술이 있으니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김기용金基鏞 공은 자신이 백 냥을 내어서

0010_0048_a_01L開基創立一室名曰夢月開基之夜機禪之夢圓月照十方之祥故以其
0010_0048_a_02L乃傳其後者也

0010_0048_a_03L
雍正庚寅年敬聦戒忍兩長老再建者也

0010_0048_a_04L
乾隆辛巳年表上人三度移建於下基者也

0010_0048_a_05L
乙未秋朗活之僧鳩聚塵財佛殿及寮之兩役始於丙申仲春重修後丁
0010_0048_a_06L酉春殿與寮俱燒朗活之僧雲水出身甘露洗性處求乞庚子仲春始役
0010_0048_a_07L其年季夏畢功移建下基還立舊基
二十餘年三度經營龍谷大師初創
0010_0048_a_08L及四度經營年號記誌

0010_0048_a_09L
崇貞紀元後壬寅初冬撰書

0010_0048_a_10L○白雲菴重修記
 道光二十三年癸卯至月日

0010_0048_a_11L
夫此菴創建已來一無重修瓦椽俱脫棟柱并朽儒人釋子莫不慨然
0010_0048_a_12L是有性上人自咸山而來擔荷勸文鳩聚改建光倍前日名振後來
此菴
0010_0048_a_13L之興廢山之靈驗前述備矣更無述露焉然中金公基鏞自出兩百重新

0010_0049_a_01L이 암자를 거듭 새롭게 하였으니, 그 공을 논하자면 다른 이들의 공에 비해 크고 덕을 말하자면 다른 이들의 보시보다 뛰어나다. 이런 까닭에 유성 상인이 내게 부탁하여 말하길, 타인의 공이 김 공에게 미치지 못하고, 김 공의 덕이 여러 시주보다 특출하니 평범하게 이름을 걸 수 없어 별도로 기록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나는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대략 공덕을 들어 아름다운 이름을 드러낸다.

15. 개화사 법당 중건기 開花寺法堂里建記222)
대저 일의 온전함이나 결함은 사람의 현명하고 그렇지 않음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일은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사람은 일로 현명함이 드러나니, 이치가 당연하다. 그러나 간혹 일이 사람을 얻어도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이 일을 촉발해도 현명하게 되지 못함이 있으니, 이는 시기의 이롭고 이롭지 않음에 매인 것인가.
내가 일찍이 수진秀真 상인上人에게 들으니, 그는 경인년(1830) 간에 복흥福興223)에서 처소를 떠나 티끌세상을 떠돌다가 인연이 되어 이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만탑萬塔이 높다랗게 솟아 있고 하늘에 닿을 듯한 가람이 오랜 세월을 지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옛 자취가 모호해서 창건한 내력이 아득히 헤아릴 수 없었다. 전각이 무너지고 담장이 부서진 것은 당연하고 존안尊顏(불상)이 다행히 온전했는데, 넝쿨 덮인 계단에는 새들의 자취가 어지러웠다. 사람을 시켜 사원을 돌보게 했으나, 머리칼로 천 근을 끄는 격이요 수미산이 불타는 데 어찌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마침 북원北原 출신 황봉강黃鳳崗 공이 평소 뛰어나게 별다른 뜻이 있어서 사문沙門(승려)을 외호했으니, 상인보다 이미 오래전에 앞서 있었다. 을유년(1885)에 승당僧堂이 불에 타고 금전金田(사찰) 절반이 재로 변했다. 정해년(1887)에 승려 지주智珠가 감사監寺224)로서 같이 힘을 다하여 중건하였다. 오직 불전은 수리하지 못해서 마음에 맺히고 흠이 되었는데 이윽고 중건하였다. 병신년(赤猴, 1896) 호시절에 격오激悟 상인이 말하길, “불상이 진흙더미에 들어갔거늘 아! 너희들은 근심하지 않는가. 나의 보호가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폐해졌도다.” 하였다. 이에 승려와 신도들이 티끌(재물)을 모으자 백성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봄부터 여름까지 경영하여 마쳤는데 옛터가

0010_0049_a_01L此菴論其功則諸功之大也語其德之則眾施之勝也是以有性上人請
0010_0049_a_02L曰諸人之功不及於金公金公之德獨出於眾施不可尋常而懸名
0010_0049_a_03L求別錄而記之余不揆不才略舉功德后芳名云爾

0010_0049_a_04L○開花寺法堂里 [59] 建記

0010_0049_a_05L
大抵事之全缺乃緣於人之賢否故事以人而全人以事而賢理固然
0010_0049_a_06L或事得人而不完人觸事而不賢自系時之利不利歟
余甞聞秀真上人
0010_0049_a_07L庚寅年分自福興離巢越密飄泊塵臼仍緣到此萬塔嶷然鍾出而叅天
0010_0049_a_08L伽藍因循灰劫而陳基然古蹟糢糊剏自來歷渺莫可究殿頹墻廢固是
0010_0049_a_09L尊顏幸完榛階鳥跡垂至倩人看院顧念髮引千鈞熖燒湏彌奈堪能乎
0010_0049_a_10L蘊肛已而適有北原出身黃公鳳崗素卓𦖽有異志外護沙門先於上人
0010_0049_a_11L久矣乙酉僧堂燼飛金田半灰丁亥智珠僧監寺共戮力重建而唯以佛
0010_0049_a_12L殿未葺蘊結有欠仍建赤猴之良辰激悟上人曰佛入游泥咨爾不恤管
0010_0049_a_13L我護名存實廢於是緇素執塵塵民影從自春組夏經始竣乎仍嫌舊基

0010_0050_a_01L습하고 좁은 것을 꺼려 남방으로 터를 옮기니 날아갈 듯 거듭 새로워졌다. 들보와 문미에 연꽃 등을 새기니 조금도 옛 모습이 없었고, 용마루가 이전보다 나았다. 그 간에 신체의 수고로움은 일일이 언급하기 어렵다. 구입한 잡곡이 천 금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니, 그윽이 생각건대 일의 공덕이 이전 사람의 황금 모래의 도량225)보다 필시 더하리라. 전각이 다시 새로워지고 풍파가 사라지니 불일佛日이 거듭 빛났다. 좋은 아침에 일을 마치니 산하가 빛을 더하고 지역의 경사가 되도다. 이것이 일과 사람이 때를 기다린다고 내가 말한 까닭이다.
다음 해에 본사에서 좌석이 정해지고 나서 수진 상인이 편지를 써서 내게 글을 청하였다. 지극한 공은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내 글이 졸렬해서 굳이 사양하였는데 그래도 굳이 청하니, 만약 고집하면 끝내 기록되지 못할 걸 깨달았다. 이후부터는 사람들의 감흥이 어찌 줄어들리오. 연이어 흥기하고 이 지극한 공이 천년 후라도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이로 말미암아 내 졸렬한 솜씨를 잊고 붓을 휘둘러 대강을 대략 언급한다.
건양建陽 2년 정유년(1897) 2월에 백마栢摩 청수清秀가 삼가 기록하고, 선산善山 김윤성金允聲이 쓴다.
화주비구 수진秀真.
대시주 겸 도감都監 황봉강黃鳳崗.

16. 정평군 성불사 탑비 定平郡成佛寺塔碑
이 사찰이 창간된 세월을 살펴보면, 천계天啟 병인년(1626)에 신信과 준俊 두 사람이 처음 초암을 지었다. 숭정崇禎 갑오년226)에 이르러

0010_0050_a_01L之濕窄而移一址南方飛向鹿翼然重新雕樑蓮楣稍不及舊織欀完甍
0010_0050_a_02L有勝前制這間苦骨勞形枚舉難施而糙量斗買不下於千金暗唯事功
0010_0050_a_03L必陪於前人金沙道塲殿閣更新風波昏狽佛日重輝落成良朝山河增
0010_0050_a_04L地抵苦慶吾所以事人待時之謂也
粵明年於本寺結亥座席秀真以
0010_0050_a_05L請書于余不啻至功難言而以也文拙堅辭而堅請覺得若固執而終
0010_0050_a_06L不記從今以後人感何替連興起而使此至功不墜於千秋由是忘拙
0010_0050_a_07L毫略舉大槩

0010_0050_a_08L
建陽二年丁酉二月 日 栢摩清秀謹記
0010_0050_a_09L善山金允聲書

0010_0050_a_10L化主比丘秀真

0010_0050_a_11L大施主兼都監黃鳳崗

0010_0050_a_12L○定平郡成佛寺塔碑

0010_0050_a_13L
原夫此寺創構之歲天啟丙寅信俊二人始結草庵以至崇禎甲午其上

0010_0051_a_01L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이어서 전각을 다시 세우고 규모를 넓혔다. 그리고 강희康熙 원년 임인년(1662)에 양신養信과 지화智和ㆍ광찰廣察 세 상인이 이 옛터에 큰 건물을 다시 세웠고, 또 제휘濟輝 화상이 불상을 그려서 본사에 안치했다. 13년 갑인년(1674)에 본사 조현組玄과 학발學鉢 두 대사가 권선문을 소매에 넣고 다녀, 대웅전을 창설하였다. 옹정雍正 원년 계묘년(1723)에 신근信根과 초준楚俊 두 승려가 7문門 누각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4년 병오년(1726)에 숙임淑稔과 지십智什ㆍ장붕한張鵬閑이 그 부모와 스승을 위해 불향佛餉227)을 드리기 원했다. 이에 사찰의 승려 초균楚筠【화상은 도류道流였다.】이 대웅전을 중수하고서 향을 사르고 불공하는 전각을 설치하였다. 때는 옹정雍正 11년 계축년(1733)이었다. 이로부터 선을 좋아하는 시주자들이 빈부를 따지지 않고 앞을 다투어 납입하니, 한둘이 아니고 다수였다. 불공드리는 도량이 만고에 바뀌지 않으니 그렇다면 선을 심고 덕을 세움이 어찌 행복이 아니리오. 혹시 후인이 그 본말을 알지 못할까 걱정되어 사적을 대략 기록하노라.
가경嘉慶 7년 임술년(1802) 원월元月(1월)에 진파真坡 장로 해철海喆이 글을 짓고, 밀성密城 후인 박태시朴泰蓍가 쓰다.

편액扁額
 천계天啟 병인년(1626)에 세 번째 중건하다.
중봉中峯 문인門人 송운松雲이 기록하다.


0010_0051_a_01L位宗繼述師僧之志更建殿宇增益間架又至康熙元年甲 [60] 養信智和
0010_0051_a_02L廣察三上人仍茲舊址重建大廈而又濟輝和尚繪成佛像安于本寺
0010_0051_a_03L三年丙 [61] 本寺組玄學鉢兩大師袖䟽勸文創設大雄殿雍正元年癸卯
0010_0051_a_04L信根楚俊二師 [62] 新設七門樓閣又四年丙午淑稔智什張鵬閑為其父
0010_0051_a_05L母與其師僧願納佛餉則於是寺之僧楚筠和尚則道流也 [63] 重修大殿
0010_0051_a_06L設燃香供佛之閣時即雍正十一年癸丑也自爾好善檀越不計貧富
0010_0051_a_07L先自納者非徒一二乃有眾多則供佛之道萬古不易然則種善樹德
0010_0051_a_08L非幸以或恐後人未知其本末是故略記事蹟云爾

0010_0051_a_09L
嘉慶七年壬戌元月日
0010_0051_a_10L真坡長老海喆 草
0010_0051_a_11L密城后人朴泰蓍書

0010_0051_a_12L
扁額
 天啟丙寅三重建

0010_0051_a_13L中峯門人松雲記

0010_0052_a_01L
17. 환희사 歡喜寺
편액 석천암石泉菴
편액 천축암天竺菴
편액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 대웅전

탑비
17-1. 정평부 백운산 환희사 사적비명 定平府白雲山歡喜寺事蹟碑銘
함경도 전 진북총람승군대장咸鏡道前鎮北摠攬僧軍大將 강오江塢가 짓고 쓰다.

중산仲山 북쪽에 백운산白雲山이 있다. 여지도輿地圖에 실려 있으니 살펴볼 수 있다. 강희康熙 8년 기미년228)에 여한呂閑이 주맥主脉에 처음 선당禪堂을 창건하였다. 갑술년(1694)에 새통璽通이 옆에 불당(佛宇)을 지었다. 기묘년(1699)에 완습翫習이 3품品의 진영을 그리고, 경진년(1700)에 준기俊機와 의관儀寬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조성했다. 임오년(1702)에 정책貞策이 또 외승당外僧堂을 지었다. 기해년(1719)에 퇴체退体가 납기전納己錢 225냥과 백미 1섬으로 자본을 삼아 이자를 취해 오고 가는 이들을 고루 먹이면서 (이를) 영원히 지속되게 하였다. 신축년(1721)에 의익義益이 즐거이 동석銅錫 5백 근을 취해 종을 주조했다. 옹정雍正 3년 을사년(1725)에 회인懷仁과 응담應湛ㆍ석탄釋坦ㆍ월영月影ㆍ도현道玄ㆍ응우應佑 등이

0010_0052_a_01L○歡喜寺

0010_0052_a_02L
扁額 石泉菴 

0010_0052_a_03L仝 天竺菴 

0010_0052_a_04L仝 無量壽閣 

0010_0052_a_05L仝 大雄殿

0010_0052_a_06L塔碑

0010_0052_a_07L定平府白雲山歡喜寺事蹟碑銘

0010_0052_a_08L
咸鏡道前鎮北摠攬僧軍大將江塢撰書

0010_0052_a_09L
仲山之北有白雲山乃載與 [64] 考之可見矣康熙八年己未呂閑主脉初
0010_0052_a_10L剏禪堂甲戌璽通傍構佛宇己巳 [65] 翫習繪畵三品真影庚辰俊機儀寬塑
0010_0052_a_11L成陁觀世音勢至等像壬午貞策又作外僧堂己亥退体顧納己錢貳百
0010_0052_a_12L貳拾伍兩白米壹石存本取利均食去來之人敢使與後天相終辛丑義
0010_0052_a_13L益歡取銅錫五百斤鑄鍾雍正三年乙巳懷仁應湛釋坦月影道玄應佑

0010_0053_a_01L힘을 합해 승료僧寮를 바꾸어 법당을 세웠다. 도연道衍과 정수定修가 응보應寶의 단청을 단장하고, 설찬雪粲의 불향佛享도 또한 일시에 완성되었다. 이에 사적을 대략 기록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雲山地靈            백운산 영험한 곳에
寺立相煥            사찰 세워 찬란하니
佛安厥榻            불상을 탑상에 안치하고
願納青錢            푸른 동전 들이길 원하네
步步雪草            걸음마다 눈 꽃이 피어
易而新造            바꿔 새롭게 조성하니
僧樂其所            스님들 그곳을 즐겨
傳千萬古            영원히 전해지리라

옹정雍正 4년 병오년(1726) 8월에 세우다.
17-2. 정평부 북 백운산 환희사 불향비명 定平府北白雲山歡喜寺佛享碑銘
함경도 전 진북총령승군대장咸鏡道前鎮北摠領僧軍大將 강오당江塢堂 퇴휴退休가 짓고 쓰다.

위대한 석가모니께서 입적한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사람들이 추모하여 봉향함이 면면히 이어져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한 명제漢明帝229) 시대부터 제나라ㆍ양나라230)에 이르기까지 그 도를 숭배한 까닭이다.
지금 이 사찰은 섬부주贍部洲231) 해변에 있으나 도솔천(兜史天)232) 위에 닿을 수 있으니233) 향화香火가 지속될 수 있어서, 돌아가 추향追享함이 오래되었다. 설찬雪粲 대사가 옹정雍正 3년 을사년(1725)에 보시하기를 권하여서는 210냥을 한도로 매일 사시巳時234)에 불공을 올린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니 일이 우연이 아니다. 옛날에 믿지 않았다면 오늘날 어찌 추모하여 봉향하겠는가. 아, 법에는 고금이 없지만 사물에는 성패가 있도다. 까마귀 날고 토끼가 달림에235) 보시한 재물이 허사로 귀결될까 걱정되어 비석에 새겨 영원히 남도록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노라.

歸心景慕            귀의하는 마음으로 경모하여
帝古投誠            황제가 옛날 정성 바쳤지
是誰勤勉            근면한 이 누구런가
勒銘施緣            보시한 인연 새기네
有子來矣            그대가 오고서
人今順旨            사람들이 뜻을 따르니
雪粲開士            설찬 개사開士236)
與天終耳            하늘과 함께 영원하리


0010_0053_a_01L同力易僧寮建法堂道衍定修粧應寶之丹青雪粲之佛享亦一時告
0010_0053_a_02L於是乎略記事蹟
其詞曰
雲山地靈寺立相換 [66] 佛安厥榻願納青錢步步雪草易而新造僧樂其所傳千萬古

0010_0053_a_03L
雍正四年丙午八月日 立

0010_0053_a_04L定平府北白雲山歡喜寺佛享碑銘

0010_0053_a_05L
咸鏡道前鎮北摠領僧軍大將江塢堂退休撰書

0010_0053_a_06L
大釋氏之入寂雖有久而人之追遠奉享綿綿焉至今不絕者盖自漢明
0010_0053_a_07L之世以至於齊梁之間崇信其道故也
今此寺雖在贍部洲海邊寧衡兜
0010_0053_a_08L史天上可為香火之久歸而去之追享久矣雪粲大師雍正三年乙巳
0010_0053_a_09L借施錢貳百拾兩以限每日巳時改齋於佛亘古長今事非偶然也昔若
0010_0053_a_10L不信今何追奉噫法無古今物有成敗烏飛兔走或恐施惠之財終歸於
0010_0053_a_11L虛地也故縷 [67] 永貽浩劫乃作銘曰
歸心景慕帝古投誠是誰勤勉勒銘施緣有子來矣人今順旨雪粲開土 [68] 與天
0010_0053_a_12L終耳

0010_0054_a_01L
옹정雍正 4년 병오년(1726) 8월에 세우다.

18. 자복사 개축 서문 資福寺改建序文
무릇 하늘에는 원회元會237)가 있고 달은 차고 줄어듦이 있는데 하물며 만물에 흥폐가 없겠는가. 이 사찰은 마을과 함께 기초를 다졌는데 지금에 이르러 개축하게 되었다. 오래전 감독한 이의 후예가 지금 이어서 일을 하게 되니 첫 번째 기이함이다. 개축하는 달이 교묘히 합치하니 두 번째 기이함이다. 대웅전 섬돌 밑에서 불상 하나를 얻으니 세 번째 기이함이다. 옛 불당을 버리고 신기한 곳에 자리잡으니 네 번째 기이함이다. 승려가 지세를 살피고 표연히 와서 주인이 되니 다섯 번째 기이함이다. 이밖에 영험한 것들이 너무 많아 적지 못하는데 다섯 가지 기이함이 모임은 부처의 영험함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당시 백성의 우두머리 박춘희朴春喜 군이 크게 도모하고 바름에 입각하여 비방을 억누르고 막아, 두 전각과 영각靈閣, 문루門樓, 법당을 일신하여 개축하였으니, 원회元會와 차고 줄어듦의 운수를 징험할 수 있다. 이에 사문寺門238)이 모습을 바꾸고 불조佛鳥가 꽃을 머금으니 이 어찌 장엄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19. (석왕사 사적 2)
19-1. 설봉산 석왕사기 雪峯山釋王寺記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홍무洪武 17년 신우辛禑239) 10년 갑자년(1384)에 멀리 금마金馬(익산)에서 학성鶴城으로 와서는 초가집을 짓고 머물렀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행동이 비범하여 마을 사람들이 ‘관후대인寬厚大人’이라 칭하였다. 태조께서 어느 날 저녁에 설핏 잠이 들어서는, 1만 집에서 닭이 일시에 우는 것을 보고, 1천 집의 다듬잇돌이 일시에 울리는 것을 듣고, 부서진 집에 들어가서는 서까래 셋을 지고 나왔고, 낙화落花와 깨진 거울을 보고는 문득 놀라 잠이 깨었다.
꿈의 길흉을 몰라 답답하던 차에 옆에 노파가 있어서 꿈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노파가 만류하며 말했다.

0010_0054_a_01L
雍正四年丙午八月日 立

0010_0054_a_02L○資福寺改建序文

0010_0054_a_03L
夫天有元會月有盈虧况物之興廢者乎此剎與邑同礎迨此改建也
0010_0054_a_04L古監董之裔今焉繼役一奇也改建月日巧符二奇也雄殿階底幸得孤
0010_0054_a_05L三奇也捨舊堂而卜新奇四奇也僧地觀而飄然而作主五奇也外他
0010_0054_a_06L靈異之驗浩穰未述而五奇湊合抑非佛靈何幸時民首朴君春喜謀大
0010_0054_a_07L據正抑咎遮謗兩殿靈閣門樓法堂一新改建可驗元會盈虧之數矣
0010_0054_a_08L是乎寺門改容佛鳥含花此豈非壯麗哉耶

0010_0054_a_09L○雪峯山釋王寺記

0010_0054_a_10L
我太祖康獻大王洪武十七年辛禑十年甲子遠自金馬來寓鶴城結草
0010_0054_a_11L為屋為人性度寬弘行止非凡里人以寬厚大人稱 祖一夕假寐夢見
0010_0054_a_12L萬家鷄一時鳴又聞千家砧一時嗚 [69] 又入破屋中負三椽而出又見落花
0010_0054_a_13L落鏡忽驚𥧝
不知夢兆之吉凶傍有一老婆欲向說夢聞駿婆止之曰

0010_0055_a_01L“여자가 어찌 대장부 장래 일을 알겠습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리 가면 설봉산 토굴이 있는데 거기 기이한 승려가 세상을 피해 이름을 숨기고 솔잎을 먹으며 갈포 옷을 입고 언행이 비범한데 얼굴이 검은색이라 ‘흑두타黑頭陀’라 합니다. 그는 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지 이제 9년째이니, 그에게 물어볼 만합니다.”
태조가 즉시 베옷으로 지팡이(藜杖) 짚고 토굴을 찾아가니, 앉아 있는 승려가 있기에 예를 갖추고 나아가 말했다. “초가집에 속인이 들어가서 의심나는 일을 결정하고자 하니 자비로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승려가 머리를 들어, 무슨 일이냐고 했다. 태조께서 말했다. “어젯밤 꿈에 1만 집에서 닭이 일시에 우는 것을 보고, 1천 집의 다듬잇돌이 또한 일시에 울리는 것을 듣고, 낙화落花와 깨진 거울을 보고, 부서진 집에 들어가서는 서까래 셋을 지고 나왔으니 이러한 꿈은 장차 무슨 징조입니까.” 승려가 얼굴빛을 고치고 말했다. “이는 모두 군왕이 될 꿈이지 평범한 꿈이 아닙니다. 1만 집의 닭 소리라 함은 고귀위高貴位(고귀한 지위)를 축하함이요, 1천 집의 다듬이질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어좌를 가까이 함)을 알림이요, 꽃이 지면 어찌 열매가 없겠습니까. 거울이 깨지면 어찌 소리가 없겠습니까. 서까래 셋을 짊어짐은 왕王 자가 됩니다. 꽃과 거울 또한 왕업을 재촉하는 꿈입니다.”
승려가 또 머리를 들어 이윽히 보고는 말했다. “공은 얼굴에 군왕의 자태가 가득하십니다. 공은 오늘 일을 삼가 입 밖으로 내지 마십시오. 이곳 한 켠에 사찰을 지어서 ‘석왕사釋王寺’라 하시면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큰일은 급히 이룰 수 없으니 3년 동안 오백성재五百聖齋240)를 마련하여 몰래 기도하시면, 성승聖僧이 필시 왕업을 도울 것입니다. 공께서 제 가르침을 믿지 않으시면 비단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멸망할 테니 십분 삼가야 합니다.” 태조께서 자리에 물러나 승려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공경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바라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로 나의 큰일을 도와주십시오.” 승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태조께서 1년 안에 석왕사를 짓고는 또 3년 안에 오백성재를 마쳤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홍무洪武 무진년 신우辛禑 14년(1388)에 태조께 요동을 공격하라고 했다. 4월

0010_0055_a_01L女人安知大丈夫方來事此西去四十里雪峯山土窟中有異僧遁世逃
0010_0055_a_02L食松被葛言行非凡但形貌黯然故目為黑頭陀者坐不動今九年矣
0010_0055_a_03L宜可問彼
祖即布衣藜杖尋土窟見僧坐禮而進曰草屋塵入欲决疑事
0010_0055_a_04L願慈悲垂答僧舉頭曰何事耶祖曰昨夜夢見萬家鷄一時嗚又聞千家
0010_0055_a_05L砧亦一時嗚又見落花落鏡又身入破屋負三椽而出此等夢將有何驗
0010_0055_a_06L僧改客 [70] 此皆將作君王之夢非常夢也曰萬家鷄聲者賀高貴位也
0010_0055_a_07L千家砧聲者報御近當也落花何無實落鏡豈無聲負三椽者乃王字也
0010_0055_a_08L花鏡亦促王業之夢也
僧又舉頭熟視曰公有滿面君王態也公今日事
0010_0055_a_09L慎不出於口此一片地建一剎名曰釋王寺至佳至佳又曰大事不可速
0010_0055_a_10L限三年設五百聖齊潛祈則聖僧必助王業耳公若不信吾教則非徒
0010_0055_a_11L事不成禍必滅身望湏十分謹之祖退席執師禮曰敬受教矣願和尚慈
0010_0055_a_12L助我大事僧點頭惟惟祖一年內建釋王寺畢又三年內設五百齊畢
0010_0055_a_13L鄉人皆不知所以也
至洪武戊辰辛禑十四年使太祖為 攻遼東四月

0010_0056_a_01L초에 태조께서 군을 이끌고 의주로 가서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이르렀다. 태조께서 의를 위해 거사하여 군을 돌이켰다. 홍무 25년 임신년(1392) 7월 16일에 태조께서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시고 즉시 설봉산 토굴의 승려를 찾아 왕사王師로 봉하니, 이가 무학無學이다. 이에 무학이 나와서 태조를 위해 선묘先墓를 옮기고 왕도를 정했다.
아! 초가집에서 군왕이 되고, 토굴 안에서 왕사가 되니 그 큰 인연이 위대하도다. 그 해몽하는 날이 석왕釋王(왕의 꿈 풀이)의 시작이요, 그 즉위하는 날이 석왕의 마침이라. 그렇다면 석왕사는 성조聖祖의 집이 나라가 되게 한 최초의 원찰願剎이니, 역대 임금께서 공경히 보호함이 마땅하도다. 그러나 이어온 기록 가운데 병화로 사라지기도 하였으니 애석하도다. 내가 오늘 마침 여기를 지나다가 사라진 자취를 참지 못해 붓을 꺼내 대략 석왕사의 시종을 기록한다.
무戊(著雍)해(1598) 금붕월錦棚月 하순(下澣)에 서산西山 노석老釋241)이 적는다.

【서산 대사는 동해의 성승聖僧으로 당시 79인데 옛일을 생각하여 글을 지음에 붓끝에 고무된 나머지 한 글자를 더한 실수가 있으니, 앞면 “洪武十七年”의 ‘七’자이다. 한 글자의 증감은 일상사일 따름이다. 사문斯文 학명鶴鳴이 지은「사적비음기事蹟碑陰記」에 (결락) 애석하다, 애석하다.】

어느 봄날에 대왕이 왕사와 수창궁壽昌宮 송헌松軒에 마주 앉아 있었다. 왕이 재미 삼아 열등 다투기를 하자고 했다. 왕사가 청하길, 대왕께서 먼저 말씀하시라 했다.
“늙은 스님을 몸소 보니 돼지 같았소이다.”
“제가 대왕을 보니 부처님 같았습니다.”
“왜 열등하게 하지 않는 것이요?”
돼지 눈으로 보니 돼지로 보이고, 부처 눈으로 보니 부처님이지요.”
이에 왕과 왕사는 함께 손뼉 치고 크게 웃었다. 아름답도다,

0010_0056_a_01L初祖統軍于義州 渡鴨綠江及至威化島祖舉義四 [71] 軍也至洪武二十
0010_0056_a_02L五年壬申七月十六日祖即位于松京壽昌宮即尋雪峯土窟僧封王師
0010_0056_a_03L此無學也於是無學出為太祖遷先墓定王都
草屋中起君王土窟中
0010_0056_a_04L作王師其大因緣偉哉其解夢日乃釋王之始也其即位日乃釋王之終
0010_0056_a_05L然則釋王釋王 [72] 乃聖祖化家為國之最初願剎也冝曆 [73] 聖之敬護也
0010_0056_a_06L綿曆傳記中為兵火被蕩惜哉余今日適過此不忍泯蹟拔茟略記釋王
0010_0056_a_07L寺之始終爾

0010_0056_a_08L
著雍錦棚月下澣西山老釋記

0010_0056_a_09L
西山大師東海聖僧時年七十九思古染輸皷舞筆端之際有誤增一字初面洪武十七年之七字也一字增減固是常事而爾斯文鶴鳴所
0010_0056_a_10L事蹟碑陰記云△△△記△涉虛△者唯指此△而之以為△△之資斧惜哉惜哉

0010_0056_a_11L
春日大王與王師對坐壽昌宮松軒王戲謔約劣師請曰大王先立言

0010_0056_a_12L親見老師如猪也
師曰我見大王如佛也
王曰 何不鬪 劣也
師曰
0010_0056_a_13L以猪眼觀之則猪也以佛眼觀之則佛也
於是王與師共抵掌大笑美哉

0010_0057_a_01L물고기와 물처럼 어울리는 공간일지니, 가히 천연스럽도다.

【왕과 왕사의 열등을 다투는 놀이는 선가禪家의 조주趙州가 문원文遠과 한 마리 나귀를 논하던 이야기242)이다. 열등한 것 중에 가장 열등한 것을 재미로 논한 것이니 현묘함 중에 가장 현묘한 이치를 재미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귀 논한 것을 비유하여 돼지라 한 것이니 돼지와 나귀는 모두 미천한 것이다. 그래서 의탁한 것이 모두 미천하여 존귀함을 드러내는데 어리석은 이들이 어찌 비유를 알겠는가. 그래서 저것을 인용하고 이것을 해석하여 후인들에게 깨우치노라.】
19-2. 고려의 국사 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
처음에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 선사禪師에게 배웠다. 일행 선사는 삼교三教에 모두 통했고, 또한 천도天道와 음양陰陽, 산수筭數에도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간혹 ▣동洞 수간산水干山 위에서 칠성七星을 항아리 속에 넣기도 했다.
도선이 그 묘법을 다 전해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길 구하자, 일행이 도선에게 말했다. “나는 고려에 인연이 있다. 고려 산천에 대해 들으니 본 주인을 배반함이 많아서 구한九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삼한에 내부 역적과 외부 역적이 면면히 끊이지 않으니 이는 천지 혈맥이 조화롭지 못해서 생긴 병이다. 고려 백성들이 질병과 기근과 전쟁으로 많이 죽는 이유가 이 때문이니 애석하다, 애석하다. 이제 내 뜻과 소원으로 산수의 병을 조절해서 고려를 태평한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 너는 지금 고려 지도를 그려 와라.” 도선이 즉시 고려 산수도를 바쳤다. 일행이 한 번 보고 말했다. “산천이 이와 같으니 길이 전쟁터가 되는 게 당연하지. 옛날 성인이 9년 동안 물을 다스린 게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에 일행이 붓을 꺼내어 삼한 산수도에 3천8백 구역을 택하여 각각 점을 찍으며 말했다. “사람에게 급한 병이 있으면 즉시 혈맥을 찾아 침이나 뜸을 놓아야 즉시 병이 낫는다. 산천의 병도 또한 그러하다. 이제 내가 점을 찍은 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두거나 탑을 세우고 부도浮圖243)를 세우면 사람의 침과 뜸과 같아서 이름을 ‘비보裨補’라 하니 어찌 병이 낫지 않겠는가.

0010_0057_a_01L魚水之一堂也可謂天然

0010_0057_a_02L
王與師鬪劣是禪家趙州文遠論一頭驢之古事也戲論劣中最劣之物弄現玄中最玄之理也故論驢比謂猪猪驢皆微賤也故托皆微賤
0010_0057_a_03L現尊貴坎并之輩豈知比乎茲以引彼觧此以諭來後者耳

0010_0057_a_04L○高麗國師道詵傳

0010_0057_a_05L
初道詵入唐學於一行禪師一行禪師三教俱通亦及天道陰陽筭數
0010_0057_a_06L不精妙或△洞水干山上納七星于瓮中
道詵盡傳其妙求還本國一行
0010_0057_a_07L謂道詵我於高麗有緣聞高麗山川多背逆本主故作九韓三韓內逆
0010_0057_a_08L賊外逆賊綿綿不絕此天地血脉不調之病也麗民多死疾疫飢饉刀兵
0010_0057_a_09L以此也可惜可惜今我志願欲調山水病使高麗為太平地汝今畵高
0010_0057_a_10L麗圖來詵即呈于高麗山水圖行一覽曰山川若此冝長為戰塲也古聖
0010_0057_a_11L之治水九年豈偶然哉於是行拔筆向三韓山水圖中擇三千八百區
0010_0057_a_12L件落點曰人若有病急即尋血脉或針或炙則即病愈山川之病亦然
0010_0057_a_13L我落點處或建寺立佛立塔立浮圖則如人之鍼炙名曰裨補也豈不病

0010_0058_a_01L세상에 눈멀고 귀멀어 무식한 이들이 아만심我慢心244)으로 침과 뜸을 금하면 필시 죽게 된다. 비보를 믿지 않고 사찰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게 됨도 필연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후회해도 미칠 수 없으니, 통달한 이들은 잘 알아야 한다.”
또 훗날 도선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일행이 서책을 한 통 주면서 말했다. “너희 고려의 청목青木 아래 왕융王融이란 이가 살 테니 찾아가서 이 서책을 주며, ‘다음 해에 당신은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을 것이요 이 자식이 장차 삼한을 통일하는 군주가 되어 삼한의 백성을 구할 것입니다.’라고 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삼가고 삼가라.” 도선이 재배하고 말하길, “공경히 자애로운 가르침을 받으니 맹세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도선이 물러나 고려로 돌아와서는 왕융의 집을 찾아가 묵었다. 위로 천상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피며 말하길, “이 집에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융이 듣고 신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그 연유를 물었다. 도선이 서책을 주며 일행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왕융은 머리를 조아리며 놀라 감사하고 놀라 감사했다. 왕융은 항상 자식 없음을 한탄했는데 다음 해에 과연 자식을 낳아서 이름을 ‘건建’이라 하니, 곧 왕 태조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일행의 신이함이여. 천 리 밖에서 미래의 일어나지 않은 일을 통달했으니 진정 천인이로다.
도선이 5백 비보사찰을 세웠다. 이에 태봉泰封245)의 장수들이 궁예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는, 왕건을 맞아 왕으로 섬겼다. 왕건은 도선을 국사國師로 삼아 삼한을 통일하니 풀 위에 부는 바람처럼 삼한을 안정시켰다. 일행의 말이 딱 맞았고 태조 이후 5백 년246)이러니, 아아 아름답도다. 세 성인이 고려를 구하여 고려의 억조 백성들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은혜의 바다에 흠뻑 적셨다. 온 백성들이 노래하니 노래는 다음과 같다.

“오백 년 동안 참된 임금께서 참된 임금 만드셨네. 참된 임금, 참된 임금이라네.”(五百年來。真主作真主。真主真主。)

고려 사문沙門 굉연宏演247)이 짓기를, “옛날

0010_0058_a_01L世之聾瞽不識者以我慢心禁針炙則人死必矣不信裨補破佛剎
0010_0058_a_02L國破民死亦必矣是誰之過後悔何及通人達士識之
又他日道詵將還
0010_0058_a_03L本國行將一封書冊受詵曰汝高麗青木下有王融者居焉須尋訪付此
0010_0058_a_04L書曰明年汝必生貴子此子將為統三韓主必捄三韓民也不然則事不
0010_0058_a_05L謹之謹之詵再拜曰敬受慈教誓不負也
退還高麗尋王融家宿焉
0010_0058_a_06L觀天像俯察地理曰此家明年必生貴子融聞之倒屣而出問其由詵受
0010_0058_a_07L冊書以一行之教一一通之融扣頭驚謝驚謝融常恨無子明年果生一
0010_0058_a_08L名建此是王太祖也奇哉奇哉一行之神也千里之外達其未來未然
0010_0058_a_09L若真天人也
詵建裨補五百剎也於是泰封諸將見弓裔亂政迎王建
0010_0058_a_10L為王封道詵為國師統三韓如草上之風安三韓國也一行之言若合符
0010_0058_a_11L太祖曆世五百也嗚呼休哉三聖之捄高麗也高麗億兆頂踵俱洽恩
0010_0058_a_12L億兆歌之歌曰
五百年來真主作真主真主真主
高麗沙門宏演撰

0010_0058_a_13L
决曰昔之

0010_0059_a_01L왕 태조가 도선을 얻어 국사로 삼고 사찰을 세워 선구가 되었고, 태조가 되어 종묘와 자손을 보존한 것이 반 천 년이러니, 이제 우리 태조께서 무학을 얻어 국사로 삼고 또 사찰을 세워 후자가 되며, 태조가 되어 종묘와 자손을 보호한 것이 또한 수백 년이라. 그렇다면 누가 선가禪家를 쓸모없는 좌도左道라 하는가. 통달한 이들은 알지어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청허결清虛決이다.
그리고 일행이 도선에게 말하길, “너희 나라 산천이 불순해서 부처로 흥하고 부처로 망하리니 나라가 흥할 때는 반드시 신이한 승려가 있을 것이요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요사한 승려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과연 나라가 흥할 때는 도선이 나왔고 나라가 망할 때는 신돈辛旽248)이 나왔으니 그 말이 더욱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훗날의 군자여 살피지 않을 텐가.

19-3. 태조 어제 太祖御製249)
동북면도원수 완산부원군 이성계李成桂와 상원수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강서姜筮, 부원수당성군唐城君 홍징洪徵, 조전원수助戰元帥 전첨서밀직사사상의前簽書密直司事商議 유원柳源, 전지밀직사사상의前知密直司事商議 정몽주鄭夢周, 전밀직부사前密直副使 이화李和 등이 홍무洪武 10년(1377) 여름에 명을 받고 와서 청주清州250)에 머물다가, 대장경 한 부와 불상ㆍ법기法噐가 해양海陽251) 광적사廣積寺에 있는데 전란의 여파로 승려는 없고 사찰은 무너져 큰 보배들이 다 소실될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실로 측연했다. 그래서 전중랑장前中郎將 김남연金南連을 보내, 배로 실어 와서 소실된 약간의 함축函軸(책)을 보완하여 전부 완성해서

0010_0059_a_01L王太祖得道詵為師建佛剎為先作太祖王享宗廟保子孫者半千年
0010_0059_a_02L今之我
0010_0059_a_03L太祖得無學為師又建佛剎為後作太祖王 [74] 廟保子孫者亦幾百春秋
0010_0059_a_04L然則孰謂禪家無用左道也惟通人識之清虛決也
又一行謂道詵曰
0010_0059_a_05L國山川不順故以佛興以佛亡國家將興則必有神僧國家將亡則必有
0010_0059_a_06L妖僧云果將興國出道詵將亡國出辛盹 [75] 其言尤信也然則後之君子
0010_0059_a_07L可不察

0010_0059_a_08L○太祖御製

0010_0059_a_09L
東北面都元帥完山府院君李成桂上元帥判密直司事姜筮副元帥唐
0010_0059_a_10L城君洪徵助戰元帥前簽書密直司事商議柳源前知密直司事商議鄭
0010_0059_a_11L夢周前密直副使李和等於洪武十年夏受命以來次于清州聞大藏一
0010_0059_a_12L部及佛像法噐在海陽廣積寺兵火之餘僧亡寺毀大寶幾於盡失心實
0010_0059_a_13L惻然遺前中郎將金南連舟載以來補其所失若干函軸以成全部置于

0010_0060_a_01L안변부安邊府 설봉산 석왕사에 안치하여, 길이 임금이 장수하고 나라에 복이 되는 자료로 삼았다고 한다.

19-4. 숙종 어제 肅廟御製
학성鶴城 설봉산 석왕사는 우리 태조대왕께서 잠저潛邸 시절에 지으신 것이다. 길몽의 아름다운 징조는 하늘이 큰 운수를 열어주신 상서로움이 아닐 수 없으니 일반 사찰에 비할 수 없다. 하물며 이 판목에 새겨진 158글자는, 우리 태조대왕의 필적이라고 전한다. 표식이 없어서 단언하지는 못하나 사찰에서 보물로 간직하길 지금 3백여 년이 된다. 또한 전란에도 온전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도다. 마침 사찰 승려들이 비석을 다듬어 옮겨 새겨서 영구히 보존하려고 함에 태조의 초휘初諱가 있어서 지니고 서울로 와서 내사內司에 바쳤다. 이 사찰이 본래 내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두세 번 완상하고 드디어 베껴서 두루마리로 만들어 아래에 기록한다.
무자년(1708) 여름 4월 등석燈夕252)에 스스로 쓴다.

19-5. 영조 어제 추기 英廟御製追記
아, 본 사찰의 우리 태조대왕 어필은 즉 동북면도원수東北面都元帥 시절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등 여러 공公과 함께 북청에 머물다가 길주吉州 사찰의 오래된 물건을 배에 실어 와서 이 사찰에 안치하고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의안대군義安大君253)의 이름이 그 속에 있으니 아, 또한 기이하다.
무자년(1708) 여름 4월에 사찰 승려들이 판목을 들고 상경하니, 우리

0010_0060_a_01L安邊府雪峯山釋王寺永為壽君福國之資云

0010_0060_a_02L○肅廟御製

0010_0060_a_03L
鶴城雪峯山 [76] 王寺即我
0010_0060_a_04L太祖大王潛邸時所建吉夢休徵莫非天啟景運之祥非尋常寺剎比也
0010_0060_a_05L況此鏤板一百五十有八字俗傳是我
0010_0060_a_06L太祖大王手筆也既無標識未敢必然而寺中寶藏于今三百餘年亦得
0010_0060_a_07L全完於兵火尤可異哉適會寺僧欲治石移刻以圖永久而以其有
0010_0060_a_08L太祖初諱故賫持上洛具呈內司蓋以此剎本屬內司也再三披玩之餘
0010_0060_a_09L遂摹刊作軸文以記于下方
 歲戊子夏四月燈夕自書

0010_0060_a_10L○英廟御製追記

0010_0060_a_11L
本寺我太祖大王御筆即為東北面都元帥時與文忠公鄭夢周等諸
0010_0060_a_12L次于北青以吉州寺中舊物舟載以來置于此寺而記之者而義安大
0010_0060_a_13L君之名在其中吁亦奇矣
戊子夏四月因寺僧之賫板上京

0010_0061_a_01L성고聖考(숙종)께서 짧은 글을 지어 덧붙여 판각했다. 이것은 바로 소자가 지난 날에 목도한 것인데 51년 지난 무인년(1758) 같은 달에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에서 다시 보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세 번 반복해서 공경히 완상함에 그리움이 사무친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창업하여 내려주시고 성고聖考께서 계승하여 빛내시니, 한 구역 청구青丘에 예의가 찬연하고 팔도 오막살이 백성들이 은택을 입었다. 보잘것없고 덕 없는 내가 선업을 잇지 못하여 예의 풍속이 날마다 떨어지고 오막살이 백성들은 날마다 곤란해진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느새 두려워진다.
아, 성고께서 친히 짧은 글을 지으셨고 소자가 이어서 이 글을 완성함은 모두 옛것에 감동하고 선조를 추모함에서 나온 것이지, 사찰이 품을 만해서 그런 건 아니다. 후대 왕들이 이를 보고 우리 성조의 창업하신 공적과 우리 성고의 계승하신 성덕을 본받아 힘써 근면하고 힘써 검소하게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긍휼이 여겨, 왕의 꿈을 해석한 옛날의 상서로움을 만대에 길이 드리우도록 해야 한다. 몇 줄을 글로 해동의 축원으로 삼노라.
홍무洪武 임신년(1392) 이후 366년(1758) 여름에 손을 씻고 공경히 쓰다.

19-6. 발문(後跋254))
강헌성조康獻聖祖(태조)께서 잠저潛邸 시절에 신승神僧 무학無學이 길몽을 해석하고 또 명험冥驗을 아뢰었다. 이에 응진전應真殿을 일으켜 오백 성재聖齋를 마련하고, 이른바 천진당天真堂과 진헐당真歇堂, 인지료仁智寮와 용비루龍飛樓 등을 모두 일시에 이루었다. 등극하신 후에 거찰을 지으라 명하시니 누전樓殿과 요사채가 크고 아름답게 빛나서 도 전체에 으뜸이었다. 건문建文 신사년(1401)에 어가를 타고 친히 가셔서

0010_0061_a_01L聖考作小識而添刻焉此即小子昔年仰覩者而豈意五十一年戊寅同
0010_0061_a_02L月復見于△ [77] 道陵殿誌中乎三復敬玩愴慕深切我聖祖 創業垂後
0010_0061_a_03L聖考繼述光前一隅青丘禮義燦然八路蔀屋黎民被澤而弗肖弗德
0010_0061_a_04L述先業禮義之俗日下蔀屋之民日因 [78] 思之及此弗覺悚然

0010_0061_a_05L聖考之親作小識小子之續成此記俱由於感舊而追先非以其寺為可
0010_0061_a_06L為後王者覽此仰軆我
0010_0061_a_07L聖祖剏業之烈我聖考繼述之德克勤克儉保民恤民釋王舊日之休祥
0010_0061_a_08L當永垂於萬禩矣敢將數行之文仍作海東之祝云爾

0010_0061_a_09L
洪武壬申後三百六十六年夏盥手敬書

0010_0061_a_10L後跋

0010_0061_a_11L
康獻聖祖潛邸時神僧無學既釋吉夢又告冥驗於是遂起應真殿因設
0010_0061_a_12L五百聖齋所謂天真真歇二堂仁智寮龍飛樓等皆一時之營繕也登極
0010_0061_a_13L之後命剏巨剎樓殿寮舍宏麗輝煌甲於一道焉建文辛巳車駕親臨

0010_0062_a_01L골짜기에 소나무를 심고 뜰에 배나무를 심어, 지금까지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먹배(玄梨)를 진상하게 하니 또한 당시 성교聖教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편 불상을 간직하게 하고 경전을 인간하여 보내주고 노비를 획급畫給255)하며 농지를 절수折授256)하심은 모두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인즉 성군께서 여기를 돌아보는 마음이 또한 평범하지 않다.
애석하다, 여러 번 전란을 겪어 글이 사라지고 정통正統257) 이후 흥폐가 몇 번인지 알지 못하니 옛 자취는 거의 사라져서 지난 일이 아득해져 알 수가 없다. 그러하니 자세히 알 수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오직 요즘 일이로다.
숭정崇禎 기원후 신사년(1641)에 화재가 일어나니, 벽암 각성碧岩覺性258) 대사가 재물을 모아 중건하였다. 임오년(1642)에 시작하여 갑신년(1644)에 이르러 마쳤다. 그 후 임궁琳宮(사찰)의 보전寶殿이 산꼭대기로 이어지고 푸른 기와와 붉은 용마루는 시냇물에 반짝이니 선거禪居(사찰)의 대단함이 이에 극에 이르렀다.
성조의 친필 판목은 전란을 겪고도 홀로 완전히 보전되었으니 천지 신령이 아끼고 보호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숙종 무자년(1708)에 그 절 승려 행정行淨이 판함板函을 받들어 와서 내사內司에 바치고는 비석에 새기길 청하였다.259) 숙종께서 필적이 남아 있음을 깊이 감동하고 또 길이 전하려는 정성스런 마음을 가상히 여겨 손수 빠진 부분을 채우고 발문을 써서 아울러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건륭乾隆 무인년(1758) 봄에 지금 성상聖上(영조)께서 또 추모하는 기록을 쓰시어, 두 성군의 어필 아래에 새겼다.
아, 세 성군의 필적이 하루아침에 비석에 찬란하니,

0010_0062_a_01L松于洞種梨子 [79] 至今松木之禁斷玄梨之進御者亦由其時之聖教也
0010_0062_a_02L且夫藏護佛像印送經文至於奴婢之畫給田池 [80] 之折授皆出曠世之殊
0010_0062_a_03L則其
0010_0062_a_04L聖意眷戀于此者亦不尋常也
惜乎屢經兵燹文跡蕩然正統以後興廢
0010_0062_a_05L成毀未知其幾許而古跡幾盡 [81] 昧往事不可追認然則所可詳審而不
0010_0062_a_06L使闕漏者其惟近曰 [82] 事乎
蓋崇禎紀元後辛巳回祿釀災而碧岩覺性大
0010_0062_a_07L鳩財重建役自壬午至甲申而訖厥後琳宮寶殿羅絡山岑碧瓦宋 [83]
0010_0062_a_08L照曜溪潭禪居之壯於是極矣

0010_0062_a_09L
聖祖親筆 板獨能保完於蕩殘之餘無乃天神地靈愛惜呵護而然耶
0010_0062_a_10L肅宗戊子寺僧行淨奉持板函往納內司仍請鐫石
0010_0062_a_11L肅廟深感筆跡之猶存且嘉壽傳之誠心手自補缺因題跋文遂令並刊
0010_0062_a_12L一石矣乾隆戊寅春
0010_0062_a_13L聖上又述追慕之記刊於二聖御筆之下
[84] 聖宸輸 [85] 一朝炳換於碣面

0010_0063_a_01L전후가 하나의 법임을 볼 수 있다. 이제 청허清虛의 기록과 도선전道詵傳을 아울러 간행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도모하고, 또 삼조三朝의 어필을 간행하니 비록 비석에 찬란하지만 널리 곳곳에 배포하여 무궁한 세대에 전하도록 하고자 한다.
건륭乾隆 26년 신사년(1761) 봄에 함월 해원涵月海源260)이 삼가 발문을 쓴다.
가경嘉慶 11년 병인년(1806) 여름에 개판改板하여 경오景旿가 쓴다.

20. (광흥사廣興寺 사적)
20-1. 광흥사 보광전과 무량수각 중건 현판기(廣興寺普光殿無景壽閣重建顯板記)
풍패豐沛261) 서쪽에 울창하게 높은 산이 있으니 백운산262)이다. 그 산 남쪽에 천년 사찰이 있으니 예전에는 ‘심적深寂’ 또는 ‘원적圓寂’이라 했는데 새로이 ‘광흥사廣興寺’라 한다. 이렇게 편액을 한 것은 여기에 잠시라도 머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에 살이 찌므로 ‘광廣’이라 하고 마음이 열려 본성을 보기도 하므로 ‘흥興’이라 한다. 지난날 전란으로 기록이 상실되어 고찰할 바 없으나 내가 지난날 우연히 다른 원고를 보니, 만력萬歷263) 연간에 보학국사普學國師가 창건하였고 이곳에 세 번 옮겨졌다고 하니 오래되었도다.
아아, 하늘에는 차고 비는 운수가 있고 땅에는 흥하고 망하는 이치가 있으니 세상은 무상하다. 그래서 신미년(1811) 중춘(2월) 기망既望(16일)에 하늘이 불의 재앙을 내리고 신이 화재의 세력을 도와 일순간에 높다랗던 범우梵宇(사찰)가 다 타버려 허공으로 흩어지고 바람이 너른 건물을 쓸어버렸다. 어찌할 바 모르던 때에 산중 덕사德師264) 경행敬幸과 처준處俊이 함께 권선문을 지니고 다니며 재물을 모았다. 사찰 승려 탄의坦義는 천금 재물을 아끼지 않고 만년의 기틀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당시 관찰사 대감 김이양金履陽265) 씨가 동전 백여 꿰미(緍)를 내어 재물을 풍성하게 하고 크게 중생을 도우니 은혜가 막대하다.

0010_0063_a_01L可見前後之一揆也今者清虛記并道詵傳繡之於梓以圖不杇而又刊
0010_0063_a_02L三朝御筆者雖煥於碑上廣布諸方欲傳無窮之世爾

0010_0063_a_03L
乾隆二十六年辛巳春涵月海源謹跋

0010_0063_a_04L嘉慶十一年丙寅夏改板 景旿書

0010_0063_a_05L○廣興寺普光殿無景 [86] 壽閣重建顯板記

0010_0063_a_06L
豐沛之西鬱然▼(山/刖)屴者乃白雲山也其山陽爰有千年寺剎其舊曰深寂
0010_0063_a_07L圓寂其新曰廣興也以此扁額者暫住於此則心廣軆胖故曰廣或開心
0010_0063_a_08L見性故曰興也往古兵燹喪其實蹟無所可考然余向日偶覽他藁萬歷
0010_0063_a_09L之間普學國師之剏建而三徒于茲址厥攸舊矣
吁嗟天有盈虛之數
0010_0063_a_10L有興廢之理世其無常故辛未仲春既望天降回祿之災神助鬱攸之勢
0010_0063_a_11L一瞬之間崢嶸梵宇沒燼飛空風掃廣廈以惟忘措之際山中德師敬幸
0010_0063_a_12L處俊同袖勸文鳩聚錢財寺釋坦義不悋千金之財重建萬年之基也
0010_0063_a_13L [87] 時巡相大監金履陽氏出錢百有餘緍以豐其財大庇眾生惠莫大焉

0010_0064_a_01L다음 해 임신년(1812)에 집사승執事僧 쌍헌雙憲과 복선福善이 대중을 이끌고 일을 하니 전각과 여러 건물이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새로운 건물들이 우뚝 서서 온갖 황폐한 것들이 함께 흥성해졌다. 그러하니 기록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없어서 대강 경개를 기록하여 만고에 전하노라.
가경嘉慶 17년 임신년(1812) 월파당月坡堂 기옥基玉이 쓰다.
사사창건 화주승社寺剏建化主僧 경행敬幸과 처준處俊.
별좌승別座僧 복선福善.
도감승都監僧 쌍헌雙憲.

20-2. 광흥사 보광전과 누각ㆍ향각 이건 중수기(廣興寺普光殿樓閣香閣移建重修記)
귀룡龜龍이 계중繫衆한266) 처음에 인문이 비로소 드러났고, 불조佛祖가 전등傳燈267)한 후에 사찰이 비로소 일어났다. 이 사찰은 옮긴 것이 세 번 있으니, 심적사深寂寺, 원적사圓寂寺, 광흥사廣興寺라 했다. 광흥사는 신미년(1811) 화재를 참혹하게 겪은 후에 다행히 당시 보시의 큰 덕을 힘입어 옛 모습을 회복했는데 자리 잡은 터가 정맥正脉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후로 승려가 줄고 사찰이 스산해지니, 모든 이들이 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나머지 볼 만한 게 없으니 터를 옮기려는 마음이 있는 게 당연하다.
병오년(1846) 봄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동일하고 귀서龜筮268)도 사람 뜻과 같으니, 이에 건물 옮길 방법이 생기게 되었다. 드디어 예능화주藝能化主를 맡기니 용파龍坡와 성은性訔이고, 감동監董을 정하니 처준處俊과 취홍就泓이다. 각기 직책을 근면히 하여

0010_0064_a_01L越明年壬申執事僧雙憲福善率眾就役殿閣諸寮不日成之于時新搆
0010_0064_a_02L突几 [88] 百廢俱興然則不可泯沒無記略舉其槩揭傳萬古云爾

0010_0064_a_03L
嘉慶十七年壬申月坡堂基玉書

0010_0064_a_04L社寺剏建化主僧敬幸
0010_0064_a_05L處俊

0010_0064_a_06L別座僧福善

0010_0064_a_07L都監僧雙憲

0010_0064_a_08L○廣興寺普光殿樓閣香閣移建重修記

0010_0064_a_09L
龜龍繫眾之初人文始著佛祖傳燈之後寺剎肇起焉盖此寺移卜者有
0010_0064_a_10L曰深寂曰圓寂曰廣興也廣興慘被辛未回祿幸賴當時暨施之丕德
0010_0064_a_11L因復舊制而占址非其正脉故自此以後僧殘寺索咸曰緣彼而以也
0010_0064_a_12L餘無象遷基之懷有之允矣
歲在丙午春詢謨念同龜筮協人爰有徒 [89]
0010_0064_a_13L之道聿任藝能化主曰龍坡曰性訔定監董曰處俊曰就泓也各勤厥職

0010_0065_a_01L본인 살림을 일삼지 않고 오직 사찰 옮기는 것만 크게 헤아려 바야흐로 공적을 드러내려 했다. 병오년(1846) 봄에 기와를 굽고 정미년(1847) 여름에 전각을 남쪽 옛 주춧돌 있는 곳으로 옮기니, ‘불전佛殿’과 ‘누각樓閣’, ‘향각香閣’이다. 그리고 여러 건물을 중수하니 ‘무량수각無量壽閣’과 ‘판도방判都房’이다. 이에 법계에 광채가 있고 도량이 새로워지니 지나는 이들이 다시 보고 거처하는 이들이 황홀해 했다. 취홍就泓 두타는 신미년(1811)의 대공덕주 탄의坦義 스님의 상좌이다. 수백 꿰미를 보시하여 자본을 풍부히 하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오늘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그랬으니 존경스럽고 아름답도다. 스님과 상좌 두 사람이 이어서 큰 공을 세우니 실로 우연이 아니로다.
송문규宋文奎 씨 또한 1백 꿰미 금액을 보시하니 말세의 급고독269)이 아니런가. 소원이 다하고 공이 이루어지고 나서 화주化主 한 공閑公이 내게 기록을 청하니, 나는 재주 없음도 헤아리지 않고 그 사유를 대략 적노라.
도광道光 29년 기유년(1849) 5월에 능운당凌雲堂 언지彥誌가 짓고, 연월당蓮月堂 유민侑玟이 쓰다.
화주승化主僧 용파 성한龍坡性閑과 침운 성은枕雲性訔.
별좌승別座僧 운월 취홍雲月就泓.

0010_0065_a_01L不事其活惟荒度移建方僝功丙午春燔瓦丁未夏徙殿于南之舊礎
0010_0065_a_02L佛殿曰樓閣曰香閣也又重修眾寮曰無量壽閣曰判都房也於是法界
0010_0065_a_03L有光道塲維新行者改觀居者胥恍盖就泓頭陀印辛未大功德主坦義
0010_0065_a_04L師之上佐也施捐數百緍以豐其資不亦偉哉不啻今日亦前於後矣
0010_0065_a_05L哉善哉師佐二人繼立大功寔非偶然哉
宋文奎氏亦施百緍之金無乃
0010_0065_a_06L季世之給孤耶願已畢矣功已成矣化主閑公請余記蹟不揆不才槩舉
0010_0065_a_07L厥由云爾

0010_0065_a_08L
道光二十九年己酉五月日
0010_0065_a_09L凌雲堂彥誌譔 [90]
0010_0065_a_10L蓮月堂侑玟書

0010_0065_a_11L化主僧龍坡性閑
0010_0065_a_12L枕雲性訔

0010_0065_a_13L別座僧雲月就泓

0010_0066_a_01L도감승都監僧 처준處俊.

21. 함흥군 성덕산 보문암 중건기 咸興郡聖德山普門庵重建記
함흥군 서쪽 20리 떨어진 곳에 ‘성덕산聖德山’이 있고, 그 산에 암자가 있으니 보문암普門庵이다.
서술하노니, 만물이 이루어지고 무너짐에 대부분 순환한다. 이루어지고 무너지지 않으면 다시 새롭게 이루어지는 뜻이 없고, 무너지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머물 곳이 없다. 이루는 것은 사람이요 무너뜨리는 것은 때이다. 때가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사물은 절로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람이 있으나 때가 없으면 사물을 이루고자 해도 진정 그럴 수 없다. 때가 있고 사람이 있은 후에야 이루어지고 무너지며 무너지고 이루어지니, 끝나면 시작이고 시작이면 끝이 나는 게 가락지처럼 끝이 없다.
산은 백두산에서 온 맥을 등지고, 절은 함산咸山의 도국都局270)이다. 산천이 높고 오묘하여 만 리 푸른 바다가 눈앞에 들어온다. 산은 성스러운 덕이 많아서 ‘성덕산’이라 하고, 암자는 보살의 여러 외관 형상이 생겨나므로271) ‘보문암普門庵’이라 한다. 맑은 경계의 연기緣起를 다시 보는 것은 앞 사람의 서술에 자세히 실려 있다. 최초로 창건한 이는 누구인가. 서울에서 온 비구니 도관道寬이다. 그러나 창건한 지 오래되어 범우梵宇(절)는 기울고 비바람을 막지 못하니 절 모양새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삼유三有와 대선大善 두 비구니가 신심을 발휘하여 천금을 스스로 내고 또 멀리 가는 수고로움도 꺼리지 않아서 남북으로 치달려 수천 금을 모아 보허普虛 화상에게 도감都監272)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임인년(1902) 봄에 일을 시작하여 그해 가을에 마치니 이 무너진 암자를 새롭게 정람精藍(절)이 되게 하였다. 이른바

0010_0066_a_01L都監僧處俊

0010_0066_a_02L○咸興郡聖德山普門庵重建記

0010_0066_a_03L
咸興郡西距二十里許有山曰聖德 [91] 有庵曰普門庵也
述夫萬物之成
0010_0066_a_04L殆者循環也成而不壤 [92] 則更無新成之意壞而不成則無有人之處所
0010_0066_a_05L所以成之者人也壞之者時也有其時而無其人則物莫能自成有其
0010_0066_a_06L人而無其時則雖欲成物固自如必也有其時有其人而後成而壞壞而
0010_0066_a_07L終而始始而終如環指之無端耳
山負白頭之來脉寺乃咸山之都局
0010_0066_a_08L山川為高妙而萬里之滄海入於眼前山有聖蒙之德多故曰聖德山
0010_0066_a_09L則菩薩普觀象生故曰普門庵也若夫復見清界緣起則具載前人之述
0010_0066_a_10L最初創建者何也自京城來而尼道寬者也雖然創而久兮梵字 [93] 傾頹
0010_0066_a_11L風雨不庇兮寺樣無色矣顧多天幸三有大善兩尼廣發信心自出千金
0010_0066_a_12L又不憚遠行之惱苦而馳走南北鳩財幾千金請坐普虛和尚定為都監
0010_0066_a_13L而始役於壬寅之春訖功于其秋則使此頹庵咸維新成精藍所謂有其

0010_0067_a_01L때가 있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가.
아, 천지의 조화造化에 따라서 간 이는 돌아오고 떠난 이는 오며 사물이 오래되면 새로워지고 시간이 끝나면 시작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가고 오래된 것은 이루어지고 새롭게 되며, 시작되어 무너진 것은 끝나서 완성되는 것이다. 공적이 있는 곳에 공적을 기록함이 없다면 보시가 있는지 보시가 없는지 알지 못하므로 이런 까닭에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이와 같이 이루어지고 무너지는(成壞) 두 글자로 순환하여 끝이 없음을 해석하노라.
광무光武 8년 갑진년(1904) 중추(8월)에 보허普虛의 문인門人 한설제韓雪濟가 쓰다.

22. 백운산 성불사에 부처가 돌아와 옛터에 다시 지은 서문(白雲山成佛佛還建舊基序)
함주咸州(함흥) 서쪽 60리에 있는 백운산 아래 금수金水 북쪽에 ‘불지암佛地菴’이 있다. 우리 성조聖祖(태조)께서 용잠龍潛273) 시절에 창건한 원당願堂으로, 처음 주석한 무학 대사가 진경真境이라 일컬었다. 성조께서 넓고 큰 도량으로 험한 곳을 오르시고는 활연히 오월吳越274)을 삼키려는 뜻이 있어서 펼쳐 규장奎章275)을 지었다. 야사野史에 전하길, “손으로 넝쿨을 잡고 푸른 봉우리 오르니,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웠네, 눈에 보이는 것을 내 땅으로 삼는다면, 초楚ㆍ월越ㆍ강남을 어찌 용납하지 못하리.”276)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암자가 속한 절은 ‘성불사成佛寺’다. 절의 창건은 고려 2년이요, 원효 스님이 점지한 것이다. 처음 화재는 만력萬曆 무인년(1578)에 일어났고 두 번째 화재는 천계天啟 병인년(1626)인데, 모두 옛터의 서북쪽에 중건하였다. 정조 임자년(1792)에 이르러 또 이전처럼 화재를 만나서 고성古城 아래 1장정長亭277)되는 곳으로 옮겨 세웠다. 그 터가 산야 대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1주갑週甲(60년)이 되어서 성상聖上(철종)께서 권하시어

0010_0067_a_01L時有其人者其在斯人歟
天地之造化往者復去者來物故則新時終
0010_0067_a_02L則始故往而故者成而新矣始而壞者終而成矣夫有功之處無以記其
0010_0067_a_03L則不知其有施無施以此不揆不才如是以成壞二字釋之循環無端
0010_0067_a_04L云爾

0010_0067_a_05L
光武八年甲辰仲秋普虛門人韓雪濟 述書

0010_0067_a_06L○白雲山成佛佛還建舊基序

0010_0067_a_07L
咸州之西六十里白雲山下金水之北有菴曰佛地唯我聖祖龍潛時
0010_0067_a_08L建願堂而 肇錫者無學師之所稱真境也 聖祖以恢廓之大度登監
0010_0067_a_09L絕險豁然有吞吳越之志發而為奎章野史所傳曰引手板 [94] 蘿上碧峯
0010_0067_a_10L菴高臥白雲中 [95] 將眼界為吾土楚越江南豈不容者此也
菴之有寺曰
0010_0067_a_11L成佛寺之剏在於高麗二年元曉師之所點也初火于萬曆戊寅再燼于
0010_0067_a_12L天啟丙寅皆重建于舊基之西北矣迨夫正廟壬子又遭前日之災移建
0010_0067_a_13L于古城下一長亭之地而以基近於山野大路一週甲而聖上有宥之

0010_0068_a_01L다음 해 여름에 비로소 계획하여 옛터로 돌이켜 세우게 되니 한 달 만에 완공하였다. 옛것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터와 규모를 줄였다. 불전은 ‘대웅전’이라 하여 가운데에 두고, 법당은 ‘무량수각’이라 하여 서쪽에 두었다. 길운루吉雲樓와 향로료香爐寮가 동남으로 늘어서고 위쪽 창고와 아래 행랑이 크게 새로워졌으니 즉 천계天啟 정묘년(1627)에 중창했던 곳이다. 그 절의 법사 능운凌雲이 내게 부탁하여 기록하게 했다.
나는 진유[珍-王+木]榆 유민으로 암자 동쪽에 더부살이하면서 매번 임금님의 글을 읊조리면서도 성군 도량의 만 분에 일도 널리 알리지 못했다. 이제 이 자취에 갱장羹墻278)의 사모함을 더욱 금할 수 없어 유자儒者라고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자취를 서술하고 서序를 짓는다.
“아, 이곳은 이련李璉279)이 지켰던 산성280)이다. 지금 침랑寢郎281) 박영주朴永胄282)가 3천여 꿰미 동전을 내어 옛터를 사서 이것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송암松巖과 경월鏡月이 남북에서 재물을 모으고 창윤昌閏과 응첨應添이 협심하여 감독하였다. 송암이 처음 시작하고 경월이 토론하였으며 수식하고 윤색한283) 것은 능운이다.”
계축년(1793) 우수雨水284)에 만산晚山 거사가 짓다.
함풍咸豐 2년 임자년(1852) 8월에 전주 후인 주승로朱昇輅가 쓰다.

23. 천불산285) 개심사 사적문 千佛山開心寺事蹟文
승려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286) 내게 사찰의 사적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그러나 산사의 사적은 산사가 알고, 나는 산사가 아닌데 어찌 산사의 사적을 알겠는가. 스님이여, 그대는 물러나 산사에 자세히 물어본 후에 산사의 답을 내게 전해주면 나는 스님의 전언에 따라 서술할 테니 또한 좋지 않은가.
스님이 물러나 며칠 후에 즐거이 다시 와서는

0010_0068_a_01L年夏始謀還建舊基期月而竣歿益仍舊貫而小基制焉佛殿曰大雄
0010_0068_a_02L其中法堂曰無量壽閣在其西吉雲之樓香爐之寮翼然東南上庫下廊
0010_0068_a_03L輪焉一新即 天啟丁卯所重剏處也而山之法師凌雲屬余而記之

0010_0068_a_04L以▼(珍-王+木)榆遺氓曩僑菴東每伏誦宸翰未能對揚聖度之萬一今茲之蹟
0010_0068_a_05L不禁羹墻之慕不以儒者辭焉遂樓跡而序曰
嗟乎此李璉守之山城也
0010_0068_a_06L而今夫朴寢郎永胄出三千餘緡銅貿舊基故△以此為始松巖鏡月鳩
0010_0068_a_07L聚南北昌閏應添協心監董盖松岩初剏之鏡月討論之脩飾焉潤色凌
0010_0068_a_08L
歲昭陽赤奮若雨水節晚山居士撰

0010_0068_a_09L咸豐二年壬子八月日全州后朱昇輅書

0010_0068_a_10L○千佛山開心寺事蹟文

0010_0068_a_11L
有僧自遠方來不亦悅乎請我述寺蹟文不亦樂乎然山寺之事蹟山寺
0010_0068_a_12L自知我非山寺安知山寺之事蹟乎師耶君退詳問於山寺後以山寺之
0010_0068_a_13L來傳于我則我依師傳述之不亦可乎
師退數日後欣欣然復來傳於

0010_0069_a_01L내게 산사의 답을 전했다. 그래서 나는 스님의 전언에 따라 서술한다.
궁릉宮陵과 사찰은 나라에서 중히 여기는 것인데, 어이하여 근래 화재가 이처럼 거듭하여 꿈 밖의 꿈처럼 발생하는가. 혹 인심이 크게 변하여 천신이 노하여 그런 것인가. 또는 조성한 사람이287) 부처 자리로 세워 놓아 조상을 편안하게 하니, 편안한 끝에 화재의 신이 부처로 서서 조상을 치고 친 끝에 그러한 것인가. 병동丙童(화재)의 장난이 어찌 이처럼 심한가. 한참 침묵하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에 어떤 노승이 물소리 가운데 표연히 서서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康衢老人擊壤聲         강구康衢288)의 노인은 격양가289) 부르고,
南熏殿上彈琴聲         남훈전290) 위에는 거문고 타는 소리
耳似聞而不聞          귀로 듣는 듯하나 들리지 않네
下車問而落淚形         수레 내려 물어보니 눈물 떨구는 모양
桑林大野白茅形         뽕나무 숲 들판에 흰 띠풀 모양
目似見而不見          눈으로 보는 듯하나 보이지 않네
渭水上遵逢聖人         위수 물가에서 성인을 만나니291)
天贈周福分明          하늘이 주나라에 준 복이 분명하네
重三譯而獻白雉         세 번 통역할 이국에서 흰 까치 드리니292)
賴及萬方可知          은혜가 만방에 미침을 알리라
哀乎民之不思兮         슬프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음이여
忘國祚之無窮          나라 운세가 무궁함을 잊었도다
可笑可笑又可笑         가소롭고 가소로우며 또 가소로우니
海外諸國又可笑         해외 나라들이 또 웃는구나
天時尚今長遠          하늘의 때가 아직 길고 머니
故雲將靈魂登馬         옛 관운장 영혼이 말에 오르고
壬辰日月恒明          임진년 일월이 항상 밝으니
故西山四溟復生         옛 서산과 사명당이 다시 나셨도다.

이와 같이 노래를 들을 즈음에 한 줄기 청풍에 문득 꿈이 깨었다. 과연 일장춘몽의 넋이 천불산 개심사에 가서 놀았도다. 나는 또한 흔연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좋구나, 산 이름이여. 산 이름이 ‘천불千佛’이라는 것은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천 불을 말함인가, 미래 성숙겁成熱劫293)의 천 불을 말함인가. 이는 현재 현겁賢劫294)의 천 불이로다. 오묘하도다, 절 이름이여. 절 이름이 ‘개심開心’이라는 것은

0010_0069_a_01L我山寺之答故我依師傳以述之

0010_0069_a_02L
宮陵寺剎國之所重胡為乎近來回祿之變如此重重出於夢外之夢乎
0010_0069_a_03L其或人心大變天神發怒而然耶否又或造人立於佛也安祖也安之邊
0010_0069_a_04L而回祿之神立於佛也打祖也打之邊以然耶否是何丙童之嬉虐若是
0010_0069_a_05L為滋甚乎沈默良久忽然就睡矣夢見一老僧飄然立於水聲之中細聲
0010_0069_a_06L作歌曰
康衢老人擊壤聲南熏殿上彈琴聲耳似聞而不聞下車問而落
0010_0069_a_07L淚形桑林大野白茅形目似見而不見渭水上遵逢聖人天贈周福分明\
0010_0069_a_08L重三譯而獻白雉賴及萬方可知哀乎民之不思兮忘國祚之無窮可笑
0010_0069_a_09L可笑又可笑海外諸國又可笑天時尚今長遠故雲將靈魂登馬壬辰日
0010_0069_a_10L月恒明故西山四溟復生
如此廳 [96] 歌之際一聲清風忽然夢覺果是一場
0010_0069_a_11L春夢之魂往遊於千佛山開心寺矣余亦欣然舉筆曰

0010_0069_a_12L
好哉山之名兮山名千佛者稱其過去莊嚴劫之千佛兮稱其未來成熱 [97]
0010_0069_a_13L劫之千佛兮此乃現在賢劫之千佛也妙哉寺之號兮寺號開心者指其

0010_0070_a_01L밝은 별이 설산 보리수 아래 6년 고행하던 마음에 문득 열린 것을 가리킴인가, 밝은 달이 소림굴 앞에서 눈 속에 팔뚝 자르던 마음을295) 가리킴인가. 이는 지공指空296)이 개연히 마음을 본받은(則心) 것에서 사찰 기반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의 천불은 시방삼세 무량원겁의 천불이 아닌 줄 어찌 알겠으며, 이 승려의 개심開心은 시방법계의 꿈틀거리는 중생(含靈)들의 개심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세속에 전하길, 한 번 이 산과 이 절의 이름을 들으면 금강 종자種子를 먹은 것과 같아서 오역십악五逆十惡297)이나 무성천제無性闡提298)의 부류라도 이 선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필경에 개심開心하여 성불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전의 행적을 책마다 펼쳐 보니, 고금의 성쇠가 일장춘몽이라.
함주咸州(함흥) 북쪽 1백리 쯤에 대덕봉大德峰 하나가 하늘에 기대 우뚝 서니 이는 함산咸山 10경치 중에 이른바 ‘백악연천白岳連天’299)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가히 한 고을의 대찰大剎이요 도내道內의 명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공空이 대각大覺 가운데 생기니 바다에 물거품 하나 이는 것과 같고 유루有漏(번뇌)의 티끌 같은 나라들도 모두 공에 의해 생겨난다.”300)고 말함과 같다. 또 말하길, “그 속에 항하사처럼 말할 수 없이 많은 불세계가 있어서 공화空花301)처럼 어지러이 발생하고 어지러이 소멸한다.”고 한다. 이렇게 논하자면 황금산 진주사真珠寺라고 해도 허망한 것인데 하물며 북도北道 음방陰方 토산土山의 목사木寺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사물을 보는 정은 같지 않으므로 느끼는 마음은 각기 다르다. 그저 기암괴석으로 명산이라 하고 화려한 건물로 대찰大剎이라고 하면 이는 악양루岳陽樓의 범희문范希文302)이 근심하고 즐긴 것이 아니다. 어찌 다라니무진보多羅尼無盡寶로 법계法界의 참된 보전寶殿을 장엄莊嚴하는303) 심산心山과 심사心寺에 대해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문수와 보현의 안목으로 보자면 이 산과 이 사찰은 칠처산七處山 구회사九會寺304)라 하겠다. 그리고

0010_0070_a_01L明星怱 [98] 開於雪山中菩提樹下六年苦行之心耶指其明月怱 [99] 開於少林
0010_0070_a_02L窟前雪中斷臂之心耶此乃寺基忽開於指空慨然則心也然則此一山
0010_0070_a_03L之千佛安知不十方三世無量遠劫之千佛此一僧之開心安知不十方
0010_0070_a_04L法界蠢動含靈之開心乎是故諺傳一聞此山此寺之名號則如食金剛
0010_0070_a_05L種子雖五逆十惡無性闡提之類由此善綠 [100] 畢竟無不開心成佛云矣
0010_0070_a_06L事行蹟卷卷披閱古今盛衰一塲春夢
咸州之北百里之許大德一峯
0010_0070_a_07L天特立此乃咸山十景中所謂白岳連天者是也可謂一邑大剎道內名
0010_0070_a_08L山矣然如曰空生大覺中如海一漚發有漏微塵國皆依空所生又曰
0010_0070_a_09L中有不可說恒河沙佛世界猶如空花亂起亂滅以此論之雖黃金山真
0010_0070_a_10L珠寺猶為虛妄况北道陰方土山木寺者乎然覽物之情不同故所感之
0010_0070_a_11L心各異也若但以奇巖怪石為名山珠宮貝闕為大剎則此非岳陽樓范
0010_0070_a_12L希文之憂樂也豈可與論於以多羅尼無盡寶莊嚴法界實寶殿之心山
0010_0070_a_13L心寺哉若以文殊普賢之眼見之則此山此寺即是七處山九會寺也又以迦

0010_0071_a_01L가섭과 아난의 안목으로 보자면 이 산과 이 사찰은 자기산自己山 자기사自己寺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헤아리자면 이 산과 이 사찰이 어찌 특별히 한 고을의 대찰이나 도내道內 명산에 그치겠는가. 가히 천하 명산이요 인간세계 대찰이라 할 만하다. 보는 이들은 자세히 알지어다.
조선이 개척함에 요堯 임금과 병립하여 지금까지 4,217년에 이르렀다. 중국은 역대 정통正統으로 23성姓(나라)이 되는데, 조선은 역대 정통이 다만 5성이다. 지방은 불과 동서로 1,070리, 남북으로 3,007리 안쪽이다. 지관地官은 367관을 넘고, 민호民戶는 1조 9억 26,485호를 넘고, 인가는 21조 6억 64,850여 가를 넘는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소산물은 이 백성의 의식을 지탱하지 못하므로 극빈한 나라라 하겠다. 그러나 아직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과 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의 법도로 천명을 고수하니 가히 예의의 나라라 하겠다. 이런 까닭에 중원의 일행一行 도사가 조선 지도를 보고 말하길, “잉어 형상이다. 잉어에는 붉고 희고 누런 세 가지가 있으니 필시 삼신산三神山이 있을 것이요, 잉어는 36개의 비늘이 있으니 고을이 필시 360읍邑이 있을 것이다. 잉어의 비늘 36개는 36궁宮305)의 이치이니 36궁은 모두 봄이다. 그래서 세 번 변하여 108염주 모양이 되면 조선은 가히 불국세계佛國世界라 할 수 있다. 불도를 숭상하면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하며 풍년이 되리라.” 하였다. 도선道詵과 지공指空은 모두 도사의 말을 따라 사찰을 짓고 탑을 만들었고,

0010_0071_a_01L哉若 [101] 葉阿難之目見之則此山此寺即是自己山自己寺也如此推之
0010_0071_a_02L此山此寺豈特為一邑大剎道內名山而止哉
0010_0071_a_03L可謂天下名山人間大剎矣觀者詳之哉

0010_0071_a_04L
朝鮮開拓與堯並立至今為四千二百十七年之間而中國則歷代正統
0010_0071_a_05L為二十三姓朝鮮則歷代正統但為五姓也地方不過東西一千七十里
0010_0071_a_06L南北三千七里之內地官過於三百六十七官民戶過於一兆九億二萬
0010_0071_a_07L六千四百八十五戶人家過於二十一兆六億六萬四千八百五十餘家
0010_0071_a_08L故此地之所產不能支於此民之衣食可謂至貧之國也而然尚以堯舜
0010_0071_a_09L禹湯文武周公之法道固守天命可謂禮義之國也是故中原一行道士
0010_0071_a_10L見朝鮮地圖曰鯉形也鯉有亦 [102] 白黃三種故山必有三神山鯉有三十六
0010_0071_a_11L故邑必有三百六十邑矣鯉之三十六鱗者是三十六宮之理也三十
0010_0071_a_12L六宮都是春故三變為百八念珠形則朝鮮可謂佛國世界也若佛道崇
0010_0071_a_13L則為國泰民安時和歲豐云道詵指空皆從道士之言以其造寺造塔

0010_0072_a_01L산 이름과 물 이름을 한결같이 도사가 지시한 대로 하였으니, 이를 말함이다.
하늘은 자시子時에 열려 10,800년에 이르러 비로소 텅 빈(寥廓) 기운을 이루었고, 대지는 축시丑時에 열려 10,800년에 이르러 비로소 두텁고 무거운 모양을 이루었으며, 인간은 인시寅時에 낳아 천지와 함께 하나가 되니, 삼재의 이치가 비롯되었으나 그 이치를 알지 못했다. 4만여 년에 이르러 복희씨伏義氏가 서계書契306)를 만들어 비로소 팔괘八卦를 그렸고, 황제씨黃帝氏가 하도河圖를 받아 이에 갑자甲子를 만들었다. 우순虞舜307)의 시대에 선기옥형璿璣玉衡308)의 오묘함이 생겨났고, 하우夏禹의 시대에 낙수洛水에서 신령한 거북의 글(낙서洛書)이 나왔다. 주나라 도가 흥하여 역서易書가 이루어지니 길흉화복의 징조와 생사 증감의 징험을 오직 군자가 알 수 있었고,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음이 없고 교화가 행해지지 않음이 없으니 이 시대는 바로 오회午會309)의 가운데에 해당한다. 사방 천하와 백만 나라가 한결 같으니 어느 나라의 교화가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서역 5천축은 남섬부주南贍部洲의 가운데이니, 중국이 이른바 ‘천하’라 함은 4,400여 나라가 있는 셈이다. 이 중국의 주 소왕周昭王 13년 계축년 7월 15일 밤중에 석가께서 중천축中天竺 가비라국伽毘羅國310) 정반왕淨飯王311)의 비妃 마야부인摩耶夫人에게 하강하여 오른쪽 옆구리로 입태入胎하였다. 이때 도솔천 무리 99억 천자天子들이 부처를 따라 모두 와서 각기 인연 있는 곳을 따라 5천축 4,400여 나라에 입태하였다. 갑인년 4월 8일 오시午時에 부처님은 비람원毘藍園312) 무우수無憂樹313) 아래에서 탄생하셨다. 이 때 99억 천자들도 각기 탄생하였으니 가히, 별처럼 많은 법신들이 그림자로 심수心水에 떨어졌다314) 할 만하다. 『열국지列國誌』에는 “노자의 전신이 가섭이고, 공자의 전신은

0010_0072_a_01L山名水名一如道士所教之言者是之謂矣

0010_0072_a_02L
天開於子至一萬八百年始成寥廊 [103] 之氣地闢於丑至一萬八百年始成
0010_0072_a_03L厚重之形人生於寅與天地為一三才之理始焉而莫知其義矣至四萬
0010_0072_a_04L餘年伏義氏造書契而始畫八卦黃帝氏受河圖而乃作甲子虞舜之世
0010_0072_a_05L璿璣玉衡之妙生焉夏禹之時洛水靈龜之書出焉周道興而易書成
0010_0072_a_06L凶悔吝之兆死生消長之驗唯君子得而知之教非不明化非不行此時
0010_0072_a_07L則正當午會之中也一四天下百萬國何國之教化不然哉是以西域五
0010_0072_a_08L天竺乃是南贍部洲之中則中國之所謂天下者有四千四百餘國矣
0010_0072_a_09L中國周昭王十三年癸丑七月十五日夜半釋迦下降於中天竺伽毘羅
0010_0072_a_10L國淨飯王妃摩耶夫人之身從右脅入胎是時兜率天眾九十九億天子
0010_0072_a_11L從佛偕來各從有緣處入胎於五天竺四千四百餘國矣甲寅四月初八
0010_0072_a_12L日午時佛於毘藍園中無憂樹下誕生是時九十九億天子亦各誕生
0010_0072_a_13L謂星羅法身影落心水矣列國誌曰老子之前身迦葉是也孔子之前身

0010_0073_a_01L유동儒童315)이며, 장자의 전신은 응제應提다. 이들 모두 가비라국에서 태어나 부처의 교화를 도왔다.”316)고 했다. 이렇게 보면, 인간세계의 성현군자는 모두 전생 천인天人의 후신들임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부처들 가운데 주세불主世佛317)은 모두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 4겁劫으로 한계를 삼았다. 그러므로 과거장엄겁의 주세불은 가섭불迦葉佛이고, 주겁住劫 20증감겁增減劫318)에서 1감겁減劫 1조 8억 년간에 법을 마련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현겁의 주세불은 석가불인데 또한 주겁 20증감겁에서 1감겁 1조 8억 년간에 인간 수명이 백 세가 되는 시기에 부처님이 화현化現한 것이다. 증겁은 인간 수명이 점차 증가하므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또한 도를 닦지 않는다. 감겁은 인간 수명이 점차 줄어들므로 사람들이 죽음을 많이 두려워해서 또한 도를 많이 닦는다. 이것을 이른바 궁하면 도에 돌아오고 위태로우면 하늘에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석가만 그렇겠는가. 미래성숙겁의 주세불인 미륵불 또한 이와 같다. 이러므로 불리佛理와 천리天理ㆍ인리人理는 동일한 하나의 이치다. 세세생생에 허공과 함께 나란히 흐르는데 어이하여 요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길, 어떻게 사후의 일을 아냐고 하는 것인가. 이것이 어찌 이치를 아는 이의 말이라 하겠는가. 애석하다, 어찌 생각하지 않음이 심한가. 그렇다면 이 산과 이 사찰의 이치는 어찌 이 이치와 다르겠는가. 전생의 인연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은 것이 그것이고, 후생의 과보를 알고자 하면 금생에 하는 일이 그것이라고 하니, 진실로 대성인의 비결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이 생겨나고 고요하여 음이 생겨나니, 음양이 나뉘어 양의兩儀가 성립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사상四像이 생겨나고, 오기五氣가

0010_0073_a_01L儒童是也莊子之前身應提是也是皆生於伽毘羅國助佛揚化云以此
0010_0073_a_02L觀之人間聖賢君子皆是前世天人之後身推此可想矣

0010_0073_a_03L
佛佛主世皆以成住壞空四劫為限也故過去莊嚴劫主世迦葉佛其於
0010_0073_a_04L住劫二十增減劫中一減劫一兆八億年間設法度生矣又今現在賢劫
0010_0073_a_05L主世釋迦佛亦乃於住劫之二十增減劫中一減劫一兆八億年間人壽
0010_0073_a_06L百歲之時佛乃化現者增劫則人壽漸增故人不怖死亦不修道而減劫
0010_0073_a_07L則人壽漸減故人多怖死亦多修道而此所謂窮則返道危則禱天者
0010_0073_a_08L然則豈特釋迦哉未來成熟劫主世彌勒佛亦復如是矣是故佛理天
0010_0073_a_09L理人理同是一理也世世生生與虛空並流胡為乎今世之人皆曰安知
0010_0073_a_10L乎死後之事乎者是豈知理者之成說乎惜哉豈不思甚矣然則此山此
0010_0073_a_11L寺之理何異於此理哉欲知前世因今生受者是欲知後世果今生作者
0010_0073_a_12L是云誠是大聖之讖也

0010_0073_a_13L
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分陽分陰兩儀立焉陽變陰合四像生焉五氣

0010_0074_a_01L유행流行하여 팔괘八卦가 생겨난다. 배가 되어 거듭되면 64괘가 된다. 대개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요,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무극의 진真은 이오二五(음양과 오행)의 정묘精妙로서 합하여 뭉치면 건도乾道는 남자가 되고 곤도坤道는 여자가 된다. 만물이 화생化生하여 변화가 무궁한데 오직 인간이 그 빼어남을 얻어서 가장 영험하다. 그래서 형체가 생겨나고 정신이 알게 되며, 선악이 나뉘고 만사萬事가 출현한다. 이러므로 산사山寺라는 것은 한결같이 형체가 있다. 유형有形은 본래 무형無形이다. 무형의 보배와 유형의 이름이 오묘하게 만나 합해지니 도를 체득하여 산이 이루어지고 도를 운용하여 사찰이 이루어졌다. 삼보三寶가 화생化生하니 안도함이 무궁한데 오직 승려가 그 사리를 알아서 가부可否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모양이 검고(緇) 도를 스스로 닦는다. 선교禪教가 나뉨에 만행萬行이 사찰에서 나온다. 대저 이 이치를 안 연후에 비로소 승려가 된 효험이 있고 또한 산사의 맛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산 위의 터는 팔괘 중에 무슨 괘의 형국이기에 이러한 화재 변고가 이처럼 거듭하여 매번 신사년 가을 절기 중에 일어나는 것인가. 사주四柱를 조성할 때 택일을 잘못하여 그런 게 아닌가. 또는 주봉主峯319) 골절骨節의 기후가 매번 화성火星의 충살沖殺320)을 만나서 천명의 한계를 피하기 어려워 그런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에 이 터의 형국은 완전히 오회五會321)와 같은 터다. 무슨 말인가. 주객이 정이 있고 좌우가 도움이 있어 앞에서 맞고 뒤에서 옹위하며 수구水口322)에 산이 있어 사방을 깃발처럼 에워싸며 여러 아름다움을 구비하니 이는 큰 명당으로 장구히 보존될 터다. 이러므로 지공指空이 말하길, “산수가 뛰어남이 많으나 오회를 만나기 어려운 터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터는 필경 큰

0010_0074_a_01L流行八卦成焉倍而重之為六十四卦也盖陰陽一太極也太極本無極
0010_0074_a_02L無極之真二五之精妙合而凝乾道成男坤道成女萬物化生變化無
0010_0074_a_03L唯人也得其秀而最靈故形既生矣神發知矣善惡分而萬事出也
0010_0074_a_04L故山寺者一有形也有形本無形也無形之寶有形之名妙遇而合軆道
0010_0074_a_05L成山用道成寺三寶化生安堵無窮唯僧也知其事理而能言可否故形
0010_0074_a_06L既緇矣道自修矣禪教分而萬行出寺 [104] 大抵知此理義然後始有為僧之
0010_0074_a_07L而亦知山寺之味矣
0010_0074_a_08L然此山上基者是其八卦中為何卦之形局而有此火灾之變如此重重
0010_0074_a_09L出於每每辛巳年秋之節氣中乎其或成造四柱之不善擇日而為然耶
0010_0074_a_10L抑亦主峯骨節之氣候每逢火星之沖殺則難逃於天命之限而其然
0010_0074_a_11L耶否以吾觀之此基形局完如五會之址也何以言之主客有情左右有
0010_0074_a_12L前迎後擁水口有山四圍如幢眾美俱集此為大明堂長久之址也
0010_0074_a_13L故指空曰山水絕勝者雖多而唯難得五會之址也故此基將必三經大

0010_0075_a_01L화재를 세 번 겪은 이후에 비로소 만년 형통할 터가 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필경 위 터(上基)로 다시 들어갈 것이라 한다.
무릇 궁릉과 사찰의 터를 점찍어서 개척하는 경우에는 먼저 천문 서적을 열람하여 24기의 순회 도수度數와 길흉 지속이 어떠한지를 계산한 연후에 지리서를 열람하여 24기슭의 역회逆回 거리(里數)와 생극生克323) 원근이 어떠한지 자세히 살핀 이후에 아울러 하도河圖 가운데 55위位의 오행 생성의 이치를 살피고 또 낙서洛書에서 구성九星324) 팔문八門325)의 역순 윤회의 모양을 택한 후에 자기 일신의 350골절을 회광반조하면 자연히 그 육근六根과 육진六塵326)의 이치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연후에 중궁中宮에 옮게 세워 64괘를 포산布筭327)하고 조산祖山 주봉主峯에 다시 한 걸음 나아가 그 현무玄武ㆍ주작朱雀328)과 조종朝從329) 산의 4지支 72골절과 경영할 터의 형세를 계산한 후에 그 경위經緯 속에 들어가 앉아서 하나하나 한번 일어서고 한 번 엎드림을 1후候로 정하여 손가락을 꼽으면 삼재의 이치가 자연히 마음에 드러난다. 그런 후에 마음이 맑아지고 생각이 고요해질 때 궁 자리를 정하고 능을 짓고 사찰을 이루면 어찌 하늘과 사람 사이가 멀겠는가. 1후는 5리에 해당하고, 5리는 1기記가 된다. 이른바 1기記에 3대大가 있으니 1기記는 12년이다. 그러한즉 크게 1기가 세 번 돌면 3,600년이고 중간 1기가 세 번 돌면 360년이고 작게 1기가 세 번 돌면 36년이다. 도광道光 갑진년(1844)에 이 사찰을 위쪽 옛터로 옮겨 세울 적에 어떤 과객이 말하길, “작게 1기가 세 번 도는 시기를 편히 지난다면 다행히 360여 년을 보존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40년을

0010_0075_a_01L火之後始為萬年亨通之址也云故世人皆曰將必還入於上基云矣

0010_0075_a_02L
夫宮陵寺基點出開拓者先閱天門書著筭其二十四氣順回度數吉凶
0010_0075_a_03L遲速之為如何然後次閱地理書詳察其二十四麓逆回里數生克遠近
0010_0075_a_04L之為如何而後兼考河圖中五十五位五行生成之義理又擇洛書中九
0010_0075_a_05L星八門逆順輪回之事軆後回光反照于自己一身三百六十骨節則自
0010_0075_a_06L然自解其六根六塵之理矣然後移立於中宮而布筭六十四卦更進一
0010_0075_a_07L步于祖山主峯而計其玄武朱雀與朝從山之四支七十二骨節及所營
0010_0075_a_08L之基局軆勢後入坐于其經緯中枚枚以一起一伏定為一候而掘指則
0010_0075_a_09L三才之理自現於心上矣然後心清慮靜卜宮築陵造寺則豈為天人之
0010_0075_a_10L間遠矣哉一候者為五里五里者為一記也所謂一記有三大一記則一
0010_0075_a_11L十二年也然則大一記三回則三千六百年中一記三回則三百六十年
0010_0075_a_12L小一記三回則三十六年也道光甲辰年此寺移建于上舊基之時一過
0010_0075_a_13L客曰若安過小一記三回之時則幸保三百六十餘年而不然則難過四

0010_0076_a_01L넘기 어려우리라.” 했다. 당시 이 말을 믿지 않고 옮겨 세우기를 기약했으니 역시 천운이다. 비록 그러한 듯하나 투철하게 밝히 알지 못하였으니 그래서 금지하지 못한 것 또한 천운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옮겨 세움이 하늘이 큰 화재를 세 번 겪게 한 후에 만년 안도하도록 명한 이치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그 사람을 보냄에 필시 그 시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이치를 아는 이의 말이다.
무릇 선천과 후천이 운회를 느리게 하거나 빨리하는 이치가 분명하게 선기옥형璿璣玉衡에 밝게 드러났고 또한 다시 분명하게 자기 손가락 10개 끝에 명백하다. 그러므로 주자朱子330)는 “하늘과 인간 사이가 비록 멀지만 포산布筭하여 시각을 쌓으면(積刻) 천 년을 기록하더라도 반드시 갑자 삭일朔日331)과 한밤중과 동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진실로 곧은 언설이다. 갑ㆍ기甲己의 해는 병인丙寅 달, 갑ㆍ기甲己의 날은 갑자甲子 시時이므로 12개월은 각기 삭일을 따라 일어나고 24절기는 각기 절일節日을 따라 일어서니, 12시각이 또한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전년 대한大寒이 드는 때가 묘시卯時 정2각332)이면 금년 입춘은 인시寅時 정2각이다. 9년 전 입춘이 오시 정초각이면 금년 우수는 사시 정초각이다. 그 법은 시기마다 한 자리(位)를 물러난다. 우수로 경칩을 알 수 있고 차차 이렇게 헤아리면 백만 년 일시라도 손바닥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사찰의 이 운수는 이것이 필연이고 이것이 이치이다. 어찌 화재(丙童)와 택일을 잘못함을 말하겠는가. 이렇게 논하면 위 터의 이 화재는 큰 화재를 세 번 겪음의 마지막이니 어찌 만년 안도할 조짐이 이 화재의 끝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고래高來를 ‘현玄’이라 하고 심원深遠을 ‘무武’라 함에, 이 산의 현무는 높고 깊고 먼 데서 온 것이니 이 어찌

0010_0076_a_01L十年云矣當時不信此言而期於移建者亦天也雖似其然而未能透徹
0010_0076_a_02L明知故不為禁止者亦是天也然此等移建安知不天使三經大火之後
0010_0076_a_03L命其萬年安堵之理耶故世曰天作而地藏之以遺其人者必有其時云
0010_0076_a_04L此亦知理者之談也
夫先天後天運回延促之理了然昭著於璿璣玉衡
0010_0076_a_05L之中而亦復昭然明白於自己十指之端也故朱子曰天人之際雖遠而
0010_0076_a_06L布筭積刻苟錄千年則必得甲子朔日夜半冬至云此真直說也盖甲己
0010_0076_a_07L之年丙寅頭 [105] 甲己之日甲子時故十二月各從朔日起二十四氣各從節
0010_0076_a_08L日起則十二時刻亦何不然哉是故前年大寒入時為卯正二刻則今年
0010_0076_a_09L立春是寅正二刻前九年立春為午正初刻則今年雨水是巳正初刻也
0010_0076_a_10L其法時退一位以雨水知驚蟄次次做此推之則雖百萬年之日時如見
0010_0076_a_11L指掌云故此寺此運此必此理也何謂丙童及擇日之不善哉以此論之
0010_0076_a_12L上基此火是三經大火之終畢也豈不為萬年安堵之眹兆始於此火之
0010_0076_a_13L末後也高來者謂之玄深遠者謂之武此山玄武高且深而遠來此豈非

0010_0077_a_01L주봉의 큰 격식이 아니겠는가. 밖으로 인사함(外拱)을 ‘주朱’라 하고 안으로 인사함(內揖)을 ‘작雀’이라 함에, 이 산의 주작은 밖으로 인사하고 안으로 인사하니 이 어찌 안산案山333)의 큰 격식이 아니겠는가. 아, 장래 어느 때 어떤 사람이 또 위 옛터에 대찰을 세우려나. 또한 그 때에 현재의 우리들이 또한 지금과 같은 정으로 다시 위 옛터를 함께 유람할지 알 수 없다. 뜻 있는 이는 일을 끝내 이룬다334) 했으니, 옛 성현의 기록이 어찌 사람을 속이겠는가.
인황씨人皇氏 이후 45,600년 지나 갑진년에 이르면 요 임금이 즉위한 원년이다. 요 임금 25년 무진년은 단군이 즉위한 원년이다. 정묘년 4월에 단군은 처음 백두산에서 10일을 지나 이 산에서 머무를 때에 지제선인持提仙人을 만나 산수에 대해 문답하였다. 후에 그래서 이 산을 ‘지제산持提山’이라 하였다. 그 후 1,212년 지나 기묘년에 이르면 주 무왕이 즉위한 원년이고 또한 기자(箕聖)가 즉위한 원년이다. 기자가 온 처음에 또한 백두산에서 3일 지나 이 산에서 쉴 즈음에 밤낮으로 운룡雲龍 속에서 생황과 퉁소 소리를 들었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매우 기이하게 여겨서 이 산을 ‘풍류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1,047년 지나 을사년에 이르면 한 소제漢昭帝 11년(B.C.76)이고 또한 신라왕이 즉위한 원년335)이다. 그 후 129년 지나 무오년(58)은 한 명제漢明帝가 즉위한 원년336)이요 명제 14년 신미년(71) 10월 8일에 불경이 비로소 중국에 도달했다. 그 후 577년 지나 무신년(648)은 당 태종 22년으로 또한

0010_0077_a_01L主峯之大格耶外拱者謂之朱內揖者謂之雀此山朱雀外拱內揖此豈
0010_0077_a_02L非案山之大格乎吁將來何時何人又建大剎於上舊乎亦未知其時
0010_0077_a_03L令今世之我等亦復如今之情𧨏共遊於上舊基耶否有志者事竟成
0010_0077_a_04L之聖識豈欺人哉

0010_0077_a_05L
人皇氏以後至四萬五千六百年甲辰即帝堯即位之元年堯之二十五
0010_0077_a_06L年戊辰即檀君即位之元年也丁卯四月日檀君初自白頭山過次十日
0010_0077_a_07L逗遛於此山之時逢見持提仙人問答山水後仍名此山為持提山矣
0010_0077_a_08L後至一千二百十二年己卯即周武王即位之元年亦是箕聖即位之元
0010_0077_a_09L年也箕來之初亦自白頭山過次三日歇惺於此山之際日夜雲龍之中
0010_0077_a_10L雖聞笙簫之聲不知自何來心甚奇異仍名此山為風流山矣其後至一
0010_0077_a_11L千四十七年乙巳即漢昭帝十一年亦是新羅即位之元年也其後至一
0010_0077_a_12L百二十九年戊午即漢昭 [106] 帝即位之元年也明帝十四年辛未十月初八
0010_0077_a_13L佛經始到中國矣厥後至五百七十七年戊申即唐太宗二十二年

0010_0078_a_01L신라 734년이다. 이 해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산에 천 개의 탑을 축성해서 이름을 ‘천탑산’이라 했다. 그 후 16년 지나 갑자년(664)은 당 고종 15년 또한 신라 749년이다. 이 해에 지공국사指空國師가 위 터에 사찰을 조성하여 산 이름을 ‘천불산’이라 하고 사찰은 ‘개심사’라 했다.
또 무학이 말하길, “지공은 중국의 스님이고, 도선은 동국의 스님으로 모두 일행一行 도사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했다. 일행이 말하길, 사람에게 풍습風濕337)이 많으면 침과 뜸으로 제어하고, 땅에 악기가 많으면 탑과 사찰로 누른다고 했다. 두 스님이 듣고서 각기 그 묘법을 얻었고 함께 동토로 와서 도선은 탑을 쌓아 동국 산천의 악기를 압제하고, 지공은 사찰을 지어 동국 인물의 풍습을 금제禁制했다. 처음에 도선이 이 산에 와서 탑을 쌓을 때에 탑을 몇 개나 쌓아야 일국의 산천 악기를 압제할 수 있는지 몰라서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그런데 문득 한 조각 흰구름 속에서 ‘천 개를 쌓으라’는 소리가 바람결에 날려왔다. 그래서 천 탑을 쌓고 천탑산이라 했다. 그리고 지공이 이 산에 와서 사찰을 지을 때에 위 터를 답사하고는, 마땅히 먼저 이 터에 사찰을 세워야 하는데 저 바위 셋이 이렇게나 크니 이는 인력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매우 개탄하며 모퉁이의 노송 아래로 물러났다. 그날 밤중에 벼락이 골짜기에 부서지듯 울렸다. 다음 날 아침에 가서 보니, 바위 셋이 각기 방향 따라 물러나서 사찰 터가 바라던 대로 열렸다. 지공이 감탄하여, “땅이 사찰 터를 여는 때에 하늘이 지공의 마음을 여는구나.” 하고는 사찰을 지어 ‘개심사’라 명했다. 대덕봉大德峯 아래 별천지로서 조선의 정기가 용출鎔出한 곳이다.
동쪽으로 바라보면 깎아지른 듯 하늘에 꽂힌 봉우리가 허공 속에 솟아난 것이 있으니

0010_0078_a_01L是新羅七百三十四年也是年國師道詵築千塔于此山仍名千塔山矣
0010_0078_a_02L其後至十六年甲子唐高宗十五年亦即新羅七百四十九年也是年國
0010_0078_a_03L師指空造寺於上基而山名為千佛寺號為開心矣

0010_0078_a_04L
又無學曰指空中國之師也道詵東國之師也俱師於一行道士矣行曰
0010_0078_a_05L人多風濕則以針灸制之地多惡氣則以塔寺壓之云二師聞之各得其
0010_0078_a_06L妙矣偕來東土道詵築塔壓制東國山川之惡氣指空造寺禁制東國人
0010_0078_a_07L物之風濕矣初道詵來此山築塔之時未觧其塔數為幾許則能壓一國
0010_0078_a_08L山川之惡氣而心甚眩亂矣忽有一片白雲之中築千之聲風便飛來
0010_0078_a_09L築千而名曰千塔山矣又指空來此山造寺之時踏來上基曰宜先建寺
0010_0078_a_10L於此基而彼三巖如此甚大此非人力之所能移也心甚慨然而退一陬
0010_0078_a_11L老松之下矣夜半雷聲洞中如破也明朝往視則三巖各退其方寺基如
0010_0078_a_12L願開闢指空嘆曰地闢寺基之時天開指空之心仍造寺而名曰開心寺
0010_0078_a_13L盖大德峯下別乾坤朝鮮精氣鎔出處
東望則削插天峯半空聳出者

0010_0079_a_01L관음산으로서 관음이 머문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넓고 멀리 계곡이 일월을 삼키고 토해내니 천탑동千塔洞으로 천 탑이 있다. 사방 10리 안에 사방 백 보步 되는 석굴이 있으니 이는 앞서 도선이 탑을 쌓을 때에 피곤하면 눕던 곳이다. 가운데 네 연못이 있으니 피차 거리가 각각 1리 쯤 되고, 서로 비춰주는데 각기 네 연못의 전체 형상이 있으니 매우 기이하다. 동국 지리지에, 사상지四象池가 함경도에 있다고 하였으니, 과연 이것이 아닌가. 높이 올라 바라보면 천 탑이 일제히 드러나니 아마도 “마치 겨자씨를 담은 병과 같다.”338)고 함이 이런 게 아니런가. 1탑과 천 탑이 서로 섭입涉入하니 또한 “빈 방 천 개의 등불과 같다.”339)고 함이 저런 게 아니런가. 눕거나 서 있거나 숨거나 드러나거나 함께 이루어져 가을 하늘의 조각달 같고, 옆으로 여럿이고 수직으로 여럿이 하나와 많음이 중첩하니, 구름이 장공長空에 오름과 같다340)고 비유함이 이런 것이다. 고목과 나는 듯한 개울은 모두 학의 둥지이고 용담龍潭의 장소이며, 새의 등처럼 위태로운 바위는 천인이 퉁소 불고 신선이 바둑 두던 곳이로다. 이러므로 한 번 이 곳에 오면 사람의 상념이 문득 변하여 티끌세상이 어떤 것인지 육체가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되고 황홀하게 허공을 날아 거닐고픈 취향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 산의 물을 한 번 마시면 그 사람은 자연히 구별되어 10년 후라도 미간에 오히려 산수 자연(煙霞)의 기운이 머문다고 한다. 푸른 하늘의 흰 무지개는 흰 암자에 폭포가 옥처럼 부서짐이요, 석양의 푸른 안개는 동쪽 암자에서 염불하는 저물녘 종소리로다. 명성을 들어도 가보기는 어려운데 몸소 불정佛頂341) 위로 오르고, 명성을 듣고 걸음을 재촉하니 견불見佛한 장소에서 눈을 씻는도다. 사물은 하늘 보배를 본뜨니 네 연못에 각기 33천의 영상이 있고, 사람이 뛰어남은 땅이 신령스러움이니342) 여러 승려가 각기 임제臨濟343)의 모습을 안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용호龍虎(대덕)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칠처구회七處九會의

0010_0079_a_01L乃觀音山也觀音在焉西望則廣遠一壑吞吐日月者乃千塔洞也千塔
0010_0079_a_02L在焉四方十里之內有四方百步之石窟是乃前日道詵築塔之時困則
0010_0079_a_03L偃臥之所矣中有四池焉彼此相距各為一里之許而互相照入各有四
0010_0079_a_04L池之全軆此甚奇異也東國地誌曰四象池在於鏡道者果然是耶否
0010_0079_a_05L高一望千塔齊現疑是猶彼芥瓶者此耶否一塔千塔互相涉入亦是等
0010_0079_a_06L虛室之千燈者彼耶否或臥或立隱現俱成一似秋空之片月橫數竪數
0010_0079_a_07L一多重疊比如雲起長空者是矣古木飛泉盡是鶴穴龍潭之所鳥背危
0010_0079_a_08L多是天簫仙棊之軒矣是以一涉茲境使人意想 [107] 變不知塵世之為
0010_0079_a_09L何境形骸之為何物而怳惚然有凌空步虛之趣矣故一呻此山之水
0010_0079_a_10L人自為別雖十年之後眉間猶有煙霞水山之氣云矣青天白虹是白菴
0010_0079_a_11L布瀑之玉碎夕照青煙是東菴誦佛之暮鍾聞名難踏身登佛頂之上
0010_0079_a_12L名促步眼拭見佛之塲也物象天寶四池各有三十三天之影人傑地靈
0010_0079_a_13L眾僧各抱碧臨濟之態矣故不羨乎靈山會上之龍虎比肩乎七處九會

0010_0080_a_01L성현에 비견되도다.
아아, 천명에 한계가 있고 병동丙童(화재)은 사사로움이 없으니 226년 지나 무신년(888) 즉 당 희종僖宗 15년은 또한 신라 213년인데 이 해 9월 6일 밤에 불이 나서 성대한 범우梵宇(절)가 인간세계 불(火宅) 안으로 흩날려 사라지고 오이처럼 많던 승료僧寮가 연기 불꽃에 날아 흩어졌다. 세계 속에 무릇 형상 있는 것들은 모두 허망함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이 또한 희비가 교차하는 시기로다. 방백方伯(관찰사) 합하閤下께서 공을 세우려는 취지를 함께 펼치사 선남선녀가 모두 복을 심는 시기를 만나니, 천인과 같은 신묘한 장인들이 구름처럼 다투어 모여들고 힘센 이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며칠 되지 않아 완성하게 되니 실로 인력으로 한 게 아니로다. 빛나는 정사精舍가 찬란하게 즐비하니 황홀함이 꿈에서 막 깬 듯하다. 다시 1층을 오르면 옥경대玉扃臺이니, 앞 시내 용의 읆조림은 고택에 돌이켜 들어가는 안도함이 아니런가. 북쪽 산악의 학 소리는 엣 둥지로 다시 돌아가는 한가로운 울음이로다. 승려들의 찬불가 소리가 천탑동에 다하고, 학 무리가 연기 피하는 그림자가 네 연못 가에 떨어지도다. 진정 구름산과 안개 속 나무, 솔 바람, 넝쿨 사이의 달, 기이한 짐승, 신이한 새 등 모두가 산가山家의 기물器物이로다.
아이야, 이것이 산옹山翁의 부귀이니 속인에게 말하지 말라. 인간의 시비는 본래 산인이 알 바 아니라. 저 선동仙童아, 너도 듣지 않았는가. 어디서 피리소리가 이처럼 저물녘에 유장한가. 사찰 모양이 목욕하였는가, 무신년(888) 화광火光이요, 산빛이 껍질을 벗었는가, 기유년(889) 풍광이로다. 그렇다면 산수의 즐거움은 즐겁고 끝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옛 시에 이른바 “아침에 청산이 좋아 주렴을 일찍 걷고, 밤에 명월이 좋아 창을 늦게 닫는다.”344)고 한 것이다.
아, 성쇠흥망이 한결같이 사계절 윤회하는 이치와 같도다.

0010_0080_a_01L之聖賢矣
嗚呼天命有限丙童無私乃至二百二十六年戊申即唐僖宗
0010_0080_a_02L十五年亦即新羅二百十三年也是年九月初六日夜火巋然梵宇飄颻
0010_0080_a_03L於人間火宅之內瓜瓞僧寮飛散於煙火世界之中凡所有相皆是虛亡
0010_0080_a_04L推此可想矣
0010_0080_a_05L此亦悲喜交雜之時也方伯閤下共發立功之趣善男信女咸逢種福之
0010_0080_a_06L時矣天工神匠雲會競臻博士力士逐日輻輳不日告功實非人力也
0010_0080_a_07L乎精舍燦然櫛比怳若夢覺更上一層玉扃臺矣前溪龍吟還入古宅之
0010_0080_a_08L安堵否北岳鶴聲更回舊巢之閑鳴也僧徒唱佛響窮千塔之洞鶴陣避
0010_0080_a_09L影落四池之濱真可謂雲山烟樹松風蘿月異獸神禽沒數為山家之
0010_0080_a_10L器物也
童子此山翁之富貴莫向俗人說人間是非 [108] 非山人之所知也
0010_0080_a_11L彼仙童爾亦聞之否何處笛聲如此長日暮耶寺樣沐浴乎戊申之火光
0010_0080_a_12L山色脫殼乎己酉之風光然則山水之樂樂且無央此真古詩所謂朝愛
0010_0080_a_13L青山捲箔早夜憐明月閉窓遲者是矣
盛衰興亡一如四時論 [109] 回之理

0010_0081_a_01L92년 지나 신사년(981)은 송 태종 5년으로 또한 고려 89년이다. 이 해 9월 6일 밤에 불이 나서 대웅전과 요사채와 금고金庫ㆍ곡장穀藏ㆍ의탕衣帑ㆍ발낭鉢囊ㆍ고사姑舍 그리고 니소泥塑와 목조木彫ㆍ탱화幀畫ㆍ영상影像이 모두 타버리고 오직 대장경 쌓인 전각만 완전했으니, 당시 큰불 가운데 서 있었는데 불꽃들이 침범하지 못했다. 아, 가섭마등과 축법란345) 두 스님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서 있지 않았을까. 보신불과 화신불은 진정한 부처가 아니요 또한 설법하지 않음을 이에 이르러 알 수 있다. 마침 고려 나옹왕사懶翁王師가 임오년346)에 이 사찰을 중간 터로 옮겨 세웠다. 애석하다, 당시에 어찌 하나를 더 세워 세 운수(三運)를 영원히 마치지 않았을까. 중간 터는 세속에 전하길, ‘백악당판白岳塘坂’이라고 한다. 중첩되는 불전들이 굽이도는 산봉우리들 속에 가득하고, 빼곡한 요사채에 용호 대덕들의 형세가 늘어서 있도다.
누대 위 구름 같은 사다리는 옛날 옥경玉京(천상) 12누각으로 제향帝鄉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누대 아래 시냇물 소리는 약수弱水347) 3천리 같으니 신선 길로 통하도다. 현무玄武가 머리를 드리우고 주작朱雀이 춤을 추며 청룡이 걷고 백호가 앉아 있으니, 가히 영걸이 운집한 터라 하겠다. 이러므로 1기記가 차지 않은 때에 선교禪教를 함께 행하는 승려와 문장명필의 승려, 말 잘하는 준걸한 승려, 도덕군자 승려 나아가 또한 천 근을 들 수 있는 승려도 있어서 티끌세상의 속인들을 굽어봄이 초파리 보듯 함이 있다. 땅의 영험이 이와 같으니 사람의 기운이 지극히 치솟았다. 215년 지나 신사년(1161)은 송 고종 34년348)이고 또한 고려 299년이다. 이 해 9월 9일 밤에 불이 나서 새로 조성한 불상과 탱화 그리고 대장경을 꺼낸 외에 기와 하나 남기지 않고 타버렸다. 가련하다 초공焦工이여. 겁화劫火의 화로를

0010_0081_a_01L至九十二年辛巳即宋太宗五年亦即高麗八十九年也是年九月初
0010_0081_a_02L六日夜火雄殿尞舍金庫穀藏衣帑鉢囊姑舍而泥塑木彫幀畫影像
0010_0081_a_03L而唯其大藏經所積之一殿完然時立於太火之中熖熖不敢侵吁膝 [110]
0010_0081_a_04L蘭二師西邊東向立否報化非真佛亦非說法者到此可想矣適有高麗
0010_0081_a_05L王師懶翁壬午移建此寺于中基焉惜哉其時何不一又加建三運永畢
0010_0081_a_06L 中基者諺傳白岳塘坂者是也重重佛殿窮峯巒之縈回囷囷僧寮
0010_0081_a_07L列龍虎之軆勢
臺上雲梯昔誰玉京十二樓帝鄉可到否臺下溪聲疑是
0010_0081_a_08L弱水三千里仙路即通矣玄武垂頭朱雀翔舞青龍踏宛白虎蹲踞可謂
0010_0081_a_09L英傑雲集之基也是故未滿一記之內能有禪教雙行僧文章明筆僧
0010_0081_a_10L辯俊傑僧道德君子僧至於亦有能舉千斤之僧而俯視塵世之俗人
0010_0081_a_11L如醯鷄之類矣地靈如此故人氣極熾矣至二百十五年辛巳即宋高宗
0010_0081_a_12L三十四年亦即高麗二百九十九年也是年九月九日夜火唯其新造成
0010_0081_a_13L佛像幀畫及大藏經生出之外無一瓦沒燒可憐焦工 [111] 似劫火爐過之

0010_0082_a_01L지난 것 같도다. 그러나 사찰이 비록 승려를 버리고 불에 들어가 승려를 떠나보내도 승려가 어찌 부처를 버려 사찰을 따라 가버리겠는가. 하물며 사람 기질이 아직 있는데 기품氣品이 어찌 줄어들리오. 즉시 아래 터에 옮겨 세웠다. 아래 터는 세속에서 전하길, 능 뒤의 골짜기라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상한 말이다. 고려가 근처에서 능을 세우지 않았고 하물며 나라 운세가 장원長遠한데 어떤 능을 가리켜 ‘능 뒤의 골짜기’라고 칭한단 말인가. 하늘이 세속 말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실로 헛된 말은 아니다. 임오년(1162) 9월 9일에 낙성하였다.
무릇 대덕산의 지맥이 왼쪽으로 맺혀 봉황봉이 되고 오른쪽으로 맺혀 오동봉이 되었다. 오동봉 아래 덕안능德安陵349)이 있고 봉황봉 아래 개심사가 있으니 이러므로 무학왕사가 그림을 그려 아뢰자, 태조대왕께서 즉시 이 사찰을 덕안능 원당사願堂寺로 봉하였다. 그후 태종대왕이 또 이 사찰을 정화능定和陵350)의 제향봉향祭享奉香 사찰로 봉하였으니 사찰의 중대함이 이와 같다. 그래서 나라에서 애중함이 자연히 특별하다. 그러나 이 터에 부족한 것이 오직 좌향座向(방향)이다. 태兌는 백호의 여자 위치이니 이는 필시 사판事判351) 범승凡僧이 강하고 이판理判352) 대사大師가 약하게 된다. 이러므로 처음 창건한 631년 간에 호걸豪傑 사판승이 3분의 2는 되었다고 한다. 청룡이 10리 가다가 머리 돌려 조산祖山을 바라보고 백호가 10리 가다가 용의 머리를 세 번 안는다. 동일한 빛깔의 긴 하늘은 일월성신을 포함하고 그림자는 10리 시냇물 소리 가운데 떨어지니, 이는 이른바 360회會를 10리 용담龍潭에서 볼 수 있고, 49년 설법을 10리

0010_0082_a_01L後矣然寺雖棄僧入火去僧僧何棄佛追寺去况人氣尚存氣品何縮
0010_0082_a_02L為移建于下基焉
0010_0082_a_03L下氣 [112] 者諺傳陵後洞者是也然此亦異常之諺也高麗不入陵於近處
0010_0082_a_04L况國祚長遠指誰陵以己稱陵後洞耶盖天教方諺之說實非虛語矣
0010_0082_a_05L午九月九日落成焉

0010_0082_a_06L
夫大德山一枝脉左結為鳳凰峯右結為梧桐峯梧桐峯下德安陵鳳凰
0010_0082_a_07L峯下開心寺是故王師無學圖形啟聞 太祖大王即以此寺封德安陵
0010_0082_a_08L願堂寺矣其後太宗大王又以此寺封定和陵祭享奉香寺則寺之所重
0010_0082_a_09L如此故國之所愛自別矣然此基所欠者唯其座向也何以言之兌是白
0010_0082_a_10L虎女位則此必事判凡僧為強而理判大師為弱矣是故初創六百三十
0010_0082_a_11L一年之間有風力豪傑事判僧為三分之二也云矣青龍十里回頭顧祖
0010_0082_a_12L白虎十里三抱龍頭長天一色抱含日月星辰影落十里溪聲之中是之
0010_0082_a_13L所謂三百六十之會可見於十里龍潭之裏四十九年之說可聞於十里

0010_0083_a_01L여울 소리에서 들을 수 있다고 하리라. 묻나니, 석가는 어디에 있는가. 산승은 멀리 봉우리들의 석기石基 형국을 가리키네. 이와 같으면 한 번 세워서 6백 년 안도함이 어찌 유별난 일이 되겠는가. 이치가 그런 것이다. 동쪽에 구고九臯 1리가 있으니 관산觀山을 말한다. 서쪽에 오전梧田 1리가 있으니 능산陵山을 말한다. 남쪽에 죽전竹田 1백 리가 있으니 육사六社를 말한다. 북쪽에 만 개의 천화天花가 있으니 연산蓮山을 말한다. 희귀한 구성九星이 깃들고 팔문八門이 정해지니, 이는 이른바 수복壽福의 땅이라 하겠다. 만 금을 지닌 부유한 승려나 백 세를 누린 노승이 어찌 희귀하다 하리요 기본 상례일 뿐이다.
629년 지나 갑진년(1844)은 도광道光 24년으로 또한 우리 조선 452년이다. 이 해 춘추에 이 사찰을 위쪽 옛터로 옮겨 세웠다. 37년 지나 신사년(1881) 9월 6일 밤에 불이 났는데 다행히 경판과 불상을 보존하여 꺼낸 거 외에 말뚝 하나 없이 다 타버렸다. 이렇게 어찌 두 터의 화재가 매번 신사년 9월을 지나기 어려움이 부절 맞추듯 똑같은 것인가. 『하락경河洛經』에 이르길, “터의 형세가 목국木局353)이면 매번 화성의 해에 병혁兵革(전쟁)의 재앙을 피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위와 중간 두 사찰의 터 형세가 모두 토국土局354)이요 신辛 또한 금성이다. 토가 금金의 해를 만나면 이치상 응당 경사가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불길한 재앙이 있으니 하락河洛의 이치를 범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임오년(1882)에 아래 옛터에 절반을 조성하였다. 아, 옛날 탑사塔寺가 뇌고牢固355)하던 시절에도 사찰 조성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는데 하물며 5종 뇌고牢固356)를 이미 지나, 백성들이 가난하고 재물이 고갈된 시기를 당해 이러한 설상가상의 근심을 만남에랴. 박백半百의 승려 숫자도 되지 않는 가운데 각자 먼저 소지한 재물을 다 털어내고 이후에 5천금을 본사本社에

0010_0083_a_01L灘聲之上云矣借問釋迦何處在山僧遙指峯峯石基之形局如此則一
0010_0083_a_02L建安堵六百年豈為別事哉理固然矣東有九臯一里者觀山之謂也西
0010_0083_a_03L有梧田一里者陵山之謂也南有竹田百里者六社之謂也北有萬點天
0010_0083_a_04L花者蓮山之謂稀九星寓而八門定是所謂壽福之地也富僧萬金老僧
0010_0083_a_05L百歲者豈謂稀罕哉基本例常矣
至於六百二十九年甲辰即道光二十
0010_0083_a_06L四年亦即我朝四百五十二年也是年春秋移建此寺于上舊基矣至三
0010_0083_a_07L十七年辛巳九月初六日夜火幸保經板及佛像生出之外無一橛沒燒
0010_0083_a_08L是何兩基之火變每每難過於辛巳九月之若合符契乎河洛經曰基勢
0010_0083_a_09L [113] 則每逢火星之年難免丙 [114] 革之灾云而然上中二寺基形俱是土局
0010_0083_a_10L而辛亦金星也土遇金年則理當應有吉慶之事也而反有不吉之禍
0010_0083_a_11L洛之理凡人難解矣
壬午半成造于下舊基焉噫昔日塔寺牢固之時
0010_0083_a_12L曰造寺之難况五種牢固已過而當此民窮財竭之時遇此雪上加霜之
0010_0083_a_13L患乎未滿半百之僧數各先傾盡如干所持之物然後出債五千金於本

0010_0084_a_01L거하는 최치룡崔致龍 공의 댁에서 빌려, 사용할 자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옛날 한 냥 하던 물가가 지금은 10냥이 되었고 옛날 10냥 하던 물가가 지금은 1백 냥이 되었다. 그래서 금일 천 냥 수입이 옛날 백 냥 수입에 미치지 못하고, 오늘 만 냥 수입이 옛날 천 냥 수입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경영하는 건축도 10분의 1에 차지 못하고 수입 재물이 일을 마칠 재물을 이미 초과해버렸다. 불행한 시기를 만나니 이를 어이하리오. 그러나 이 일은 살아서도 해야 하고 죽어서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봉中峯과 춘계春溪ㆍ성허醒虛 등 스님들이 안에서 근근이 애를 쓰고 오암鰲巖과 수봉繡峯ㆍ완허玩虛 등 스님들이 사방 원근에서 열심히 모연募緣하였다. 용선龍船과 호산虎山 두 스님은 가히 큰 연못의 신룡이요 심산의 맹호라 하겠다. 그 몸이 밖에 있으면 관찰사에게 일을 아뢰어 천금을 얻었고 수령(城主)에게 고하여 외호外護를 얻어냈으며 아는 이들에게 청하여 수백 금의 보시를 얻어냈다. 몸이 안에 있으면 장인들을 잘 대하여 공적이 두 배가 되고, 승려들을 위로하여 화기和氣가 일어나게 하며 유무를 물어 부족한 걸 채우고 모자란 것을 도왔다. 그렇게 동분서주하고 남에서 번쩍 북에서 번쩍하며 바람을 잡은 사람 같았다. 사상四霜의 가을에 노심초사하고 오설五雪의 겨울에 노동하면서 수면과 식사도 잊으며 주야로 사양 않고 기사회생한 것이 몇 번이던가. 겨우 사찰 모양을 갖추어내니 가히 용龍의 능력이라 하리라. 일을 잘 처리한 공적은 산과 함께 나란하고 물과 함께 흐르리라. 그러나 24절기에 1기氣라도 빠지면 사계절의 공적을 이룰 수 없듯이, 온 산의 스님들이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대중의 힘이 중요한 일을 이룰 수 있다’ 함이 이를 이름이다. 그렇다면 한 덩어리 한탄은 강 위의 춘풍에

0010_0084_a_01L居崔公致龍家以為所用之本而然昔日一兩之物價今為十兩昔日
0010_0084_a_02L十兩之物價今為百兩故今日千兩之所入不及於昔日百兩之所入
0010_0084_a_03L日萬兩之所入不及於昔日千兩之所入故所營之成造未滿於十分之
0010_0084_a_04L而所入之財已過畢役之財也逢時不幸此將奈何然此事段不得不
0010_0084_a_05L生亦可為死亦可為故中峯春溪醒虛䓁諸師虞虞僅僅於內事鰲巖繡
0010_0084_a_06L峯玩虛等諸師孜孜募緣於四方遠近而龍船虎山二師者可謂大澤之
0010_0084_a_07L神龍深山之猛虎者也其身在外則奏事于道伯惠得千金稟告于城主
0010_0084_a_08L愛得外護請救於知面施得多百而其身在內則善撫於工匠事得倍功
0010_0084_a_09L慰勞於諸僧吹生和氣問其有無輔不足而助不給東騰西騰南閃北閃
0010_0084_a_10L便同捕風底人也焦思於四霜之秋勞身於五雪之冬眠食俱忘晝夜不
0010_0084_a_11L幾死還生幾涉幾時乎僅乃畫出寺樣可謂龍之能矣善務之功與山
0010_0084_a_12L並立與水共流矣然二十四氣若關 [115] 一氣則不得成四時之功一山眾師
0010_0084_a_13L無一不可故曰眾力能成重事者是之謂矣然則一塊恨嘆如春風江上

0010_0085_a_01L점차 녹는 얇은 얼음 같고, 한 조각 즐거움은 만리 긴 허공에 점차 일어나는 뭉게구름 같다. 청산이 미소 짓고 녹수綠水가 노래하며 청풍이 다시 불고 명월이 다시 오르니, 위대하다 천불千佛(산)은 오늘 또 천불의 장소가 되니 개심開心(사) 또한 개심이 되는 시기로다. 이렇게 보자면 이 산과 이 사찰은 가히 천지와 더불어 늙지 않고 일월과 함께 길이 존재하리라.
함경도 감영은 처음에 영흥永興에 세워졌다.357) 우리 조선이 등국登國358)한 후에 104년에 이르면 홍치弘治 14년 정사년359)이다. 이 해 관찰사 여자신呂自新360)이 함흥으로 감영을 옮기고 『함산지咸山誌』에 기록하였다. 경내 있는 암자는 모두 양릉兩陵361)의 원당願堂인 개심사에 귀속시켰으니 당시 사찰과 암자의 구분이 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지금(1885년)으로부터 293년 전인데 왜란 때에 금수암金水菴이 변하여 자칭 백운산 성불사成佛寺가 되었다.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362)은 지금으로부터 261년 전인데 이괄의 난 때 정수암淨水菴이 변하여 자칭 설봉산 정수사淨水寺가 되었다. 병자호란(1636)은 지금으로부터 249년 전인데 호란 시기에 대성암大聖菴이 변하여 자칭 광흥사廣興寺가 되었다. 임신년(1812) 서적西賊363)은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인데 서적西賊의 시기에 청송암青松菴이 변하여 송동사松洞寺가 되고 흥복암이 변하여 흥복사興福寺가 되었다. 그 외 암자들이 모두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로 귀속되는 추세를 본받았다. 아, 사찰의 풍도가 오히려 이와 같으니 티끌세상의 변화를 어찌 논하랴.
강희康熙 갑진년(1664)에 관찰사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364) 공이 친히 대웅전 액자를 썼고, 신해년(1671)에 관찰사 약천藥川

0010_0085_a_01L漸消之淺氷一片興樂如萬里長空漸起之繁雲矣青山含笑綠水唱歌
0010_0085_a_02L清風復來明月再騰偉哉千佛今又千佛之處開心亦復開心之時也
0010_0085_a_03L此觀之則此山此寺可謂與乾坤不老共日月長在哉

0010_0085_a_04L
咸鏡監營初設於永興矣我朝登國後至一百四年即弘治十年丁巳也
0010_0085_a_05L是年道伯呂公自新移營于咸興而記錄咸山誌中以境內所在菴盡屬
0010_0085_a_06L于兩 陵願堂之開心寺則當時自有寺菴之分矣壬辰倭亂至今為二
0010_0085_a_07L百九十三年倭亂之時金水菴變為自稱白雲山成佛寺甲子适亂至今
0010_0085_a_08L為二百六十一年也适亂之時淨水菴忽變自稱雪峯山淨水寺丙子胡
0010_0085_a_09L至今為二百四十九年也胡亂之時大聖菴忽變自稱廣興寺壬申西
0010_0085_a_10L至今為七十三年也西賊之時青松菴變為松洞寺興福菴變為興福
0010_0085_a_11L其外諸菴皆效背楚歸漢之情寺剎風道猶為如此塵世變態何可
0010_0085_a_12L論之哉

0010_0085_a_13L
康熙甲辰觀察使老峯閔公鼎重親筆大雄殿額字辛亥觀察使藥川南

0010_0086_a_01L남구만南九萬365) 공이 친히 우화루雨花樓와 영송루迎送樓 액자를 썼고, 6년 감사監使,366) 기미년(1679)에 관찰사 춘오春塢 이당규李堂揆367) 공이 친히 극락전과 약사전ㆍ적조당寂照堂의 액자를 썼고, 무자년(1708)에 영북嶺北에 설전設錢했다. 관찰사 우계愚溪 홍만조洪萬朝368) 공이 친히 명부전과 나한전의 액자를 썼고, 신묘년(1711)에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369)를 세웠다. 관찰사 호산湖山 이선부李善溥370)가 친히 양릉兩陵 원당願堂의 사적事蹟에 대한 서문을 기록하여 1권을 만들었다. 건륭乾隆 계미년(1763)에 북주北州에 도랑을 파고 논을 만들었다. 관찰사 우산愚山 이창의李昌誼371)가 친히 열반당 액자를 썼고, 갑신년(1784)에 박영월朴寧越이 친히 응향각凝香閣 액자를 썼다. 광서光緒 2년 병자년(1876)에 관찰사 다사茶史 서당보徐堂輔372) 공이 친히 사적寺蹟 1권을 기록하고, 임오년(1882)에 아래 터에 중건할 때에 관찰사 약현藥峴 김유연金有淵373) 공이 천 금을 크게 보시했다. 고금의 대신과 관찰사ㆍ수령들이 이 사찰을 보호했으니 이 모두 양릉이 중요한 까닭에 있다.
외산外山의 나머지는 본사 소속이다. 오직 기린사와 관음사 두 사찰은 창건과 중건 등의 사적이 각기 해당 사찰에 있기 때문에 거듭 기록하지 않는다. 본산本山 안에 있는 대승암은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백하白荷가 중건했으며, 불정암佛頂菴은 의상義相이 창건하고 풍암豐庵이 중건했으며, 백운굴白雲窟은 윤필侖弼374)이 창건하고 운암雲庵이 중건했으며, 견불암見佛庵은 나옹懶翁375)이 창건했으나 중건되지 못하고 폐지되었고, 보문암普門庵은 창건할 때 보진普真이 중건하였으니 산의 일곱 암자 가운데 다섯이 남아 있고 둘이 폐지되었다.
누군가 말하길, 조선 367주州 안에 사찰이나 암자가 마련된 것이 3,600을 넘는데 자고로 성현

0010_0086_a_01L公九萬親筆雨花樓迎送樓二額字六年監使 [116] 未觀察使春塢李公堂
0010_0086_a_02L親筆極樂殿藥師殿寂照堂四 [117] 額字戊子年嶺北設錢觀察使愚溪洪
0010_0086_a_03L公萬朝親筆冥府殿羅殿二額字辛卯年白頭山定界立碑觀察使李公
0010_0086_a_04L湖山善溥親記兩 陵願堂事蹟序文並一卷乾隆癸未北州開梁作畓
0010_0086_a_05L觀察使愚山李公昌𧨏親筆涅槃堂額字甲申年朴寧越親筆凝香閣額
0010_0086_a_06L光緒二年丙子觀察使茶史徐公堂輔親記寺蹟一卷壬午下基重建
0010_0086_a_07L觀察使藥峴金公宥 [118] 千金大施盖古今大臣方伯守令斗護此寺之
0010_0086_a_08L都在於兩陵所重之致矣

0010_0086_a_09L
外山餘在本寺所屬惟麒麟觀音兩寺而剏建重建等寺蹟各在該寺
0010_0086_a_10L不可疊錄而本山內大乘菴是元曉剏建而白荷重建佛頂菴是義相剏
0010_0086_a_11L而豐庵重建而白雲窟是侖弼剏建而雲庵重建見佛庵是懶翁剏
0010_0086_a_12L而未得重建而癈普門庵剏建時普真重建而一山七庵五存二癈矣

0010_0086_a_13L
有曰朝鮮三百六十七州內寺菴排設過於三千六百之多也而自古

0010_0087_a_01L군자와 도사들이 모두 삼남三南에서 나온 것은 무슨 이유인가 했다. 내가 말하길, 초목으로 보자면 환히 꽃 피어 씨앗을 맺음은 가지 끝에 있고, 산수로 말하자면 용담龍潭과 봉수鳳岫376)가 지맥의 끝에 있다. 그러므로 석가여래의 두골사리를 자장법사慈藏法師377)가 양산 통도사에 봉안하고, 팔만대장경을 애장왕哀莊王378)이 가야산 해인사에 보관하고, 십팔공十八公379)이 순천 송광사에서, 세 화상이 순흥順興(영주) 부석사에서, 도선道詵은 영암 도갑사에서, 지공指空과 홍진弘真380)은 대구 동화사에서 활동한 것은 모두 가지 끝에서 씨앗을 맺고 꽃이 핀 이치이다. 무엇이 괴이한가. 하물며 흥양興陽(고흥) 팔영산八靈山의 능가사楞伽寺에는 살아있는 관음이 있고,381) 고산高山 대암사大菴寺의 백운암白雲庵에는 살아있는 나한이 있는데 이 또한 지맥의 끝으로 용이 서리고 봉황이 쉬는 이치다. 무슨 의심이 있으리오.
아아, 이른바 불세계佛世界란 항시 맑아서 바다의 깨끗한 파도가 온갖 사물을 포함하는 것과 같고, 이른바 불화현佛化現이란 항상 밝아서 하늘(性空)382)에 뜬 만월이 온갖 개울에 떨어져 비치는 것과 같다. 이 어찌 버리고 택하는 구별이 있겠는가. 이러므로 진실한 지성至誠은 바다의 물방울 하나가 온갖 개울의 맛을 모두 포함하는 것과 같고, 진실한 감응이란 하늘의 10허공이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이치가 없는 것과 같다. 지역에 원근이 있으나 부처에게 어찌 남북이 있겠는가. 무릇 시기와 장소의 이치에 대해 이를 미뤄보면 알 수 있으리라.
세상에서 이른바 삼교의 도리는 모두 마음에 근본을 두는데 유학은 자취(跡)를 다스리고 불교는 참(真)에 계합하고 도교는 그 사이에 접하여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참이라 하고 무엇을 자취라 하는가. ‘자취’라 함은 모양 이후의 것이므로 정情이다. 하늘을

0010_0087_a_01L賢君子道士明人等皆出於下三南是何理耶余曰以草木觀之明開花
0010_0087_a_02L結子在於柯枝之端也以山水言之則龍潭鳳宙 [119] 在於脉派之緒也是故
0010_0087_a_03L釋迦如來頭骨舍利慈藏法師奉安於梁山通度寺八萬大藏經哀莊王
0010_0087_a_04L藏度於伽倻山海印寺而十八公之於順天松廣寺三和尚之於順興浮
0010_0087_a_05L石寺道詵之於靈巖道甲寺指空真弘 [120] 之於大丘桐華寺是皆枝端結子
0010_0087_a_06L開花之理也何足恠哉况興陽八靈山楞伽寺有生觀音高山大菴寺白
0010_0087_a_07L雲庵有生羅漢此亦脉派之緒龍盤鳳逸之理也何疑之有哉
嗚呼所謂
0010_0087_a_08L佛世界者恒如湛海之澄波虛含萬像所謂佛化現者恒如皎性空之滿
0010_0087_a_09L頓落百川是豈有推捨扜擇之區別哉是故真實至誠者如海一滴水
0010_0087_a_10L具含百川之味真實感應者如天十虛空無在不在之理也地有遠近
0010_0087_a_11L豈有南北哉凡於時處之理推此可想矣

0010_0087_a_12L
世之所謂三教之道皆本乎心而儒者攻乎跡佛者契乎真老者接於其
0010_0087_a_13L兩間而為之膠粘者也何謂真何為跡跡也者形而後者故情也其論天

0010_0088_a_01L논하자면, 365도度 1/4로 그 자취를 다스린다. 땅을 논하자면 24록麓 55위位로 그 자취를 다스린다. 사람을 논하자면 삼강오륜으로 그 자취를 다스린다. 시간을 논하자면 24절기로 그 자취를 다스린다. 하늘의 도수는 28수宿로 나뉘어 나열되고, 일월의 이수里數(거리)는 12진후辰堠로 나뉘어 펼쳐지고, 음양의 생성은 용마龍馬의 하도河圖에 나뉘어 정해지고, 구성팔문九星八門383)은 영귀靈龜의 낙서洛書에 엇갈려 있으며, 성패와 길흉은 팔괘八卦에 물어보고, 생사와 뉘우침은 별자리에서 택한다.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로 형체의 자취를 다스리고 견문을 주로 하면 이는 이른바 자취에 분량이 있다고 하겠다. 어찌 알겠는가, 하늘 위에 또 하늘 위가 있고,384) 땅 아래 또 땅 아래가 있으며, 천지 바깥에 또 천지 바깥이 있고, 일월 바깥에 또 일월 바깥이 있는 줄. 하루살이 귀에 만겁을 이야기함이요 개미에게 천지 형체를 보여줌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도의 넓고 좁음을 논할 뿐이다. 천지국天地國의 형체 없음 이외에 도통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개보다 못하게 될 뿐이라 하겠다.
‘참(真)’이라는 것은 형이상形而上이므로 ‘성性’이다. 시간을 논하자면 인간 5백 년은 도리천忉利天385)의 1주야가 되고, 도리천의 5백 년은 그 위 야마천耶摩天386)의 1주야이고, 야마천의 5백 년은 그 위 도솔천兜率天387)의 1주야이다. 이와 같이 층층이 위로 계산하면 욕계 6천과 색계 18천, 무색계 4천 합하여 28천이 있으니

0010_0088_a_01L則以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攻乎其跡其論地則以二十四麓五十
0010_0088_a_02L五位攻乎其跡其論人則以三綱五常攻乎其跡其論時則以二十四氣
0010_0088_a_03L攻乎其跡而天之度數分列乎二十八宿日月里數分張乎十二辰堠
0010_0088_a_04L陽生成分定乎龍馬河圖九星八門逆順乎靈龜洛書成敗吉凶問於八
0010_0088_a_05L死生悔吝擇於星辰而以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0010_0088_a_06L攻乎形跡而主乎見聞則此其所謂跡有限量者也安知夫天上之上
0010_0088_a_07L下之下又有地下之下天地之外又有天地外日月之外又有日月之外
0010_0088_a_08L可謂蜉蝣之耳萬劫之說螘虱之目天地之形也矣然此只論道之廣
0010_0088_a_09L狹耳也若未道通天地國無形外而但以口說心不行則可謂畵虎不成
0010_0088_a_10L反不如狗子而已矣

0010_0088_a_11L
真也者形而上者故性也其論時也則人間五百年為忉利天一晝夜
0010_0088_a_12L利天五百年為其上耶摩天一晝夜摩天五百年為其上兜率天一晝夜
0010_0088_a_13L如是層層上計而欲界六天色界十八天無色界四天合二十八天皆以

0010_0089_a_01L아래 5백 년이 위의 1주야가 된다. 계산하면 28천의 최상인 비비상천非非想天의 1주야는 과연 인간세계 몇몇 억억 조조의 5백 년이 되겠는가, 이는 진실로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시간에 대해서는 어찌 여기에 이르러 그치겠는가. 항하사겁에 이르고 또 불가설 불가설 완전 불가설 불찰佛剎과 극미진수極微塵數 무량원겁無量遠劫의 이치에 이르러도 이 이치는 이치이니 어찌 범인과 논하겠는가. 오직 부처 한 사람이 이 겁의 시간을 반나절 광음光陰 보듯 하였다고 한다. 장소를 논하자면 세계가 발생한 처음에 가장 아래에는 풍륜세계風輪世界가 있고 가장 위에는 운륜세계雲輪世界가 있다. 이 운륜세계로부터 큰비가 풍륜세계 위로 쏟아지고, 비를 불어서 얼음이 되고 맺어져 토륜세계土輪世界가 되며, 비를 받아 바다를 이루고 맺어서 수륜세계水輪世界가 되니, 수륜세계란 바로 대연화왕大蓮花王의 보광마니향수해普光摩尼香水海388)이다. 이 바다 안에 110찰종剎種이 있고, 매 찰종마다 모두 20층이 있으므로 ‘20중重 광대찰廣大剎’이라 한다. 그 가장 중앙에 있는 찰종의 13번째 종이 바로 비로자나화장찰해毘盧遮那華莊剎海이다. 그러한즉 풍륜은 나무, 빙륜은 쇠, 바다는 물, 티끌은 토土이다. 그 천지 사이에 사람과 만물이 화생化生하여 조화造化가 무궁하니 이것이 화火다. 오행의 이치가 세계를 화성化成함은 이를 말함이다. 한 사람의 비로자나화장찰해로 말하자면 이 13층에 있는 가없는 찰해剎海가 모두 1법신法身이 시현示現하는 장소이므로 ‘법계’라고 한다. 이 법계 안에 천화대千花臺 연장계蓮藏界가 있고 1계界마다 백억

0010_0089_a_01L下之五百年為上之一晝夜計筭則二十八天之最上非非想天一晝夜
0010_0089_a_02L果為人間幾幾億億兆兆之五百年乎此固難論也而然其時也豈時至
0010_0089_a_03L此而止哉至於有恒河沙劫又至於有不可說不可說全不可說佛剎極
0010_0089_a_04L微塵數無量遠劫之理則此理則理豈與凡人相論哉唯佛一人見此劫
0010_0089_a_05L時如見半日之光陰云矣其論處也則世界起始之初最下有風輪世界
0010_0089_a_06L而最上有雲輪世界自此雲輪世界大雨洪注於風輪世界之上吹雨成
0010_0089_a_07L結作土輪世界受雨成海結作水輪世界則水輪世界者即大蓮花王
0010_0089_a_08L普光摩尼香水海也此海之內有一百一十剎種而每一剎種皆有二十
0010_0089_a_09L故名曰二十重廣大剎也其最中央一剎種第十三種即毘盧遮那華
0010_0089_a_10L莊剎海也然則風輪是木也氷輪是金也海是水也塵是土也而其天地
0010_0089_a_11L之間人物化生造化無窮是火也五行之理化成世界者是之謂也若以
0010_0089_a_12L一人毘盧遮那華莊剎海言之則此十三層所載無邊剎海摠是一法身
0010_0089_a_13L示現之處故名曰法界也此法界之內有千花臺蓮藏界每一界有百億

0010_0090_a_01L화신化身과 석가 화현化現의 장소가 있으므로 ‘천백억 불찰佛剎’이라 한다. 이것이 1불이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로 시현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곳이 된다. 불경에 있는 시기와 장소의 이치를 말로는 할 수 있으나 뜻으로 도달할 수는 없다.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
천공天公 선생의 주겁론住劫論에 이르길, “자회子會에 하늘이 열리면 12지支가 온전히 갖추어진다. 그래서 ‘형제 12인’이라고 한다. 이 자회 10,800년이 지나고 나서 축회丑會에 땅이 열리고 자회가 제거되니 그래서 ‘형제 11인’이라고 한다. 이 축회가 지나고 나서 인회寅會에 사람이 태어나니 마땅히 형제 ‘11인’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러나 인간세계에 최초로 화생化生한 인간은 무색계 4천에서 복이 다하여 퇴락한 사람이 아래로 온 것이니, 자기의 광명이 사방 30리에 비치지만 볼 수 있는 형체가 없고 들을 수 있는 음성이 없다. 그래서 수를 헤아리지 않고 형제라 하지 않는다. 이 인회가 지나고 나서 묘회卯會에 색계 18천에서 복이 다하여 퇴락한 사람이 아래로 오면 자기의 광명이 사방 20리에 비치는데 비로소 볼 수 있는 형색이 있고 들을 수 있는 음성도 있다. 그래서 ‘형제 9인이 9주州를 나누어 다스린다.’389)고 한다. 이 묘회가 지나고 나서 진회辰會에 욕계 6천에서 복이 다하여 퇴락한 사람이 아래로 오니 자기의 광명이 사방 10리에 비치고 색욕의 마음이 제거되지 않아 청풍을 마시고 백운을 타며 허공을 떠돈다. 이 진회가 다하고 신선 가운데 과보가 다하여 돌아온(還退) 사람이 화생하니 비록 노을을 삼키고 기를 복용하는(服氣) 방법이 있으나 어찌 자기의 광명 이치가 있겠는가. 이 때에 비로소

0010_0090_a_01L化身釋迦化現之處故名曰千百億佛剎也是為一佛示現法報化三身
0010_0090_a_02L教化度生之處矣然佛經之所載時處之理言能及而志不到也鷰雀安
0010_0090_a_03L知鴻鵠之志哉

0010_0090_a_04L
天公先生住劫論曰子會天開則十二支具全故曰兄弟十二人此子會
0010_0090_a_05L一萬八百年已過後丑會地闢則子會已除故曰兄弟十一人此丑會已
0010_0090_a_06L過後寅會人生則宜曰兄弟十一人而然人間最初化生之人乃是無色
0010_0090_a_07L界四天中福盡退落之人下來則自己光明雖四方三十里而無形軆之
0010_0090_a_08L可見亦無聲音之可聞故不稱支數不曰兄弟矣此寅會已過後卯會色
0010_0090_a_09L十八天中福盡退落之人下來則自己光明四方二十里始有形色之
0010_0090_a_10L可見亦有聲音之可聞故曰兄弟九人分長九州云矣此卯會已過後
0010_0090_a_11L會欲界六天中福盡退落於人下來則自己光明雖四方十里而色欲之
0010_0090_a_12L心未除故飲清風騎白雲浮遊於虛空矣此辰會已過於神仙中報盡還
0010_0090_a_13L退之人化生則雖有吞霞服氣之述而豈有自己光明之道哉是時始有

0010_0091_a_01L일월성신의 도가 처음 생겨난다. 이 사회巳會가 지나고 나서 지금은 오회午會가 이르니 비로소 잉태(胞胎)하여 양생하고 욕대관왕浴帶冠旺390)하며 늙고 병들어 죽어 매장하는 도리가 생겨난다.
태생한 사람이 어찌 배고픔과 추위의 침입이 없겠는가. 이러므로 유소씨有巢氏 시대에 나무를 얽어 집(巢)을 만들고 나무 열매를 먹었다. 수인씨燧人氏 시대에 비로소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일으켰고(鑽燧) 사람들에게 화식을 가르쳤다. 복희씨伏羲氏 시대에 비로소 팔괘를 그어 서계書契391)를 만들었고, 염제炎帝 시대에 비로소 농경을 가르치고 비로소 의약이 생겨났으며 황제黃帝 시대에 탐욕이 점차 성해졌다. 그래서 방패와 창을 쓰는 전쟁이 시작되었고, 육신이 매우 둔하므로 배와 수레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소호少昊 시대에 백성과 신이 뒤섞이므로 전욱顓頊이 받아서 신은 하늘에 속하고 백성은 땅에 속하게 하여 서로 더럽히지 못하게 했다. 아, 옛날 인寅ㆍ묘卯ㆍ진辰ㆍ사巳 4회會에 화생한 천인들과 지금 오회에 태생한 사람들을 비교하여 논하면 하늘과 땅처럼 멀다 하겠다. 그러나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과 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 공자ㆍ안연ㆍ증자ㆍ자사ㆍ맹자(孔顏曾思孟) 같은 성인들은 진정 천지의 태에서 용출鎔出하고 일월의 몸에서 화생했다 하리니 천인과 지혜를 다투더라도 또한 괜찮다 하리라.
산이라는 것은 천지의 정기요, 절이란 인물의 집합소(淵藪)다. 산을 논하는데 어찌 삼재의 이치를 말하지 않으며, 절을 논하는데 어찌 성현의 일을 말하지 않으리오. 이 사방 천하의 향수해香水海 가운데 하늘 중심을 관통하여 서 있는 것을 일러 ‘수미산’이라 한다. 이 산이 허공에 빗겨 솟아난 꼭대기로 33천을 이고 바다 아래 8근根을 뚫고서 12중 광대찰廣大剎 꼭대기에 서 있다. 유순由旬392)으로 논하자면 위로 솟은 것이 84,000유순이고 아래로 들어간 것 또한 84,000유순이다.

0010_0091_a_01L日月星辰之道始成矣此巳會已過後今午會當臻則始有胞胎養生
0010_0091_a_02L帶冠旺衰病死葬之道始焉
胎生之人豈無飢寒之侵是故有巢之時
0010_0091_a_03L木為巢食木實燧人之時始鑽燧教人火食伏羲之時始畫八卦造書契
0010_0091_a_04L炎帝之時始教耕始有醫藥至黃帝之時貪慾漸盛故習用干戈之戰始
0010_0091_a_05L肉身甚鈍故舟車之作始焉少昊之時民神雜糅故顓頊受之神屬天
0010_0091_a_06L民屬地使無相浸瀆噫與古之寅卯辰巳四會化生之天人比論於今午
0010_0091_a_07L會胎生人則可謂天壤之遠矣然若如堯舜禹湯文武周公孔顏曾思孟
0010_0091_a_08L之聖人則真可謂鎔出於乾坤之胎化生於日月之身也雖與天人爭智
0010_0091_a_09L亦可也云矣

0010_0091_a_10L
山也者天地精氣寺也者人物之淵藪也論山者豈不言三才之理論寺
0010_0091_a_11L豈不言聖賢之事哉此一四天下一香水海中貫天心而時立者謂之
0010_0091_a_12L須彌山也此山衡空上湧頭戴三十三天穿海下八根立於第十二重廣
0010_0091_a_13L大剎頭若以由旬論之則上湧者八萬四千由旬下入者亦八萬四千由

0010_0092_a_01L이수里數로 논하자면, 위로 솟은 것이 6억7만2천 리고 아래로 들어간 것이 또한 6억7만2천 리다. 상하 길이를 합하면 1조3억4만4천 리이니 이것이 실로 천하제일의 조종祖宗이 되는 산이다. 해와 해가 이 산을 의지하여 윤회하므로 주야의 구별이 생겨난다. 계사繫辭393)에 이르길, “천지 사이 상하의 거리는 22조4억2만8천 리이고 천하 동서남북의 거리는 2억3만6천 리이고, 일월의 넓이는 3천 리, 큰 별은 사방 1백 리, 중간 별은 사방 80리, 작은 별은 사방 40리이다. 천지가 열리고 닫히는 간격은 129,600년, 달은 1조5억5만5천2백 월, 해는 46조5억5만6천 일, 시時는 558조6억7만2천 시, 각刻은 4,469조3억7만6천 각이다. 1각은 15분이 되니 말을 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진실로 성인의 헤아림이다.
남명南溟과 북해가 넓어 끝이 없으니 밝은 거울에 사물을 대하면 어떤 사물인들 비추지 않으리오. 『산해경』에 이르길, “곤륜산은 위는 각지고 아래는 둥근데 둘레는 12,700리 93보步, 높이는 18,947리이다. 8괘로 나누어 논하자면 건乾ㆍ곤坤ㆍ리离ㆍ감坎ㆍ태兌 다섯 가지가 결국 절역絕域(변방)으로 귀결되고 서쪽으로 한해瀚海394)로 통하고 간艮ㆍ진震ㆍ손巽 세 가지는 중국으로 들어와서 나뉘어 오악五岳을 이루니, 3강江 5호湖가 또한 이들 산 아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해동 산수로 논하자면, 곤륜산 한 줄기가 대막大漠395)의 남쪽으로 행하여 동으로는 의무려醫巫閭 3산396)이 되고, 이로부터 크게 단절되어 요동 들판이 되고, 들판 건너

0010_0092_a_01L若以里數論之則上湧者六億七萬二千里下入者亦六億七萬二千
0010_0092_a_02L上下長合一兆三億四萬四千里此實天下第一祖宗山也日日依此
0010_0092_a_03L山而輪廻故遮成晝夜之別矣繫辭曰天地間上下相距二十二兆四億
0010_0092_a_04L二萬八千里天下東西南北相距二億三萬五千里日月廣長三千里
0010_0092_a_05L星四方一百里中星四方八十里小星四方四十里天地開閉之間年
0010_0092_a_06L十二萬九千六百年月則一兆五億五萬五千二百日則四十六兆五億
0010_0092_a_07L五萬六千日時則五百五十八兆六億七萬二千時刻則四千四百六十
0010_0092_a_08L九兆三億七萬六千刻一刻為十五分不言可想云是誠聖人局量
南溟
0010_0092_a_09L北海浩然無涯明鏡對物何物不照乎山海經曰崑崙山上方下圓周圍
0010_0092_a_10L一萬二千七百里九十三步高為一萬八千九百四十七里也若以八卦
0010_0092_a_11L分派論之則乾坤离坎兌五條終歸於絕域而西通於瀚海艮震巽三條
0010_0092_a_12L入於中國分作五岳而三江五湖亦出於此山之下云海東山水論曰
0010_0092_a_13L崙一枝行於大漠之南而東為醫巫閭三山自此大斷為遼東之野渡野

0010_0093_a_01L크게 일어서면 백두산이 되니, 바로 『산해경』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달리면 영고탑寧固塔이 되고, 이로부터 남쪽으로 두만강 6백 리에 이르러 동북으로 흑룡강 해구 3천 리에 이르고, 서북으로 오랄강烏喇江 542리에 이른다. 영고탑의 서남에 큰 돌이 있는데 ‘덕림석德林石’이라 한다. 넓이는 30리, 길이는 1백 리이니 이는 실로 조선의 근골根骨이 되는 것인가. 배후로 고개 한 줄기가 나와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고, 8도가 된다. 평안(도)은 심양瀋陽의 이웃이며, 함경은 여진女真의 이웃이고, 강원은 함경을 잇고 황해는 평안을 이었다. 경기는 황강黃江 남쪽에 있고, 충청과 전라는 경기 남쪽에 있고, 경상은 전라 동쪽에 있다. 그러하니 경상은 옛 변한과 진한의 땅이다. 경기와 충청ㆍ전라도는 옛 마한과 백제의 땅이다. 함경과 평안ㆍ황해도는 옛 고구려 땅이다.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濊貊의 땅인데 흥망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당나라 말에 왕 태조가 삼한을 통합해서 고려가 되고, 우리 조선이 천운을 이었다.
이 산의 사적과 이 절의 행적은 별도로 구句와 뜻(意) 두 가지 부분이 있다. 구라는 것은 경절문經截門397)으로서 활구活句이니 마음의 길(心路)이 없어지고 말의 길이 없어지고 모색함이 없어진다. 뜻이라는 것은 원돈문圓頓門398)으로서 살구殺句이니, 이치의 길이 있고 말의 길이 있고 들어서 이해하는 사상이 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뜻은 일에 따라 변하므로 하나와 다수가 연기緣起하여 끝이 없다. 그래서 산사의 행적은 이처럼 많은 말이 있으나 이 어찌 산꽃이 웃고 들새가 ‘라라리리라라’ 노래하는 살구가 아니겠는가. 또한 일에 있어서 이치를 얻어 융합하면 온갖 차별이

0010_0093_a_01L大起為白頭山即山海經所謂不咸山是也精氣北走千里為寧固塔
0010_0093_a_02L塔南至荳滿江六百里東北至黑龍江海口三千里西北至烏喇江五百
0010_0093_a_03L四十二里塔之西南有大石名曰德林石也廣三十里長一百里此實其
0010_0093_a_04L作朝鮮之根骨耶背後抽嶺一脉為朝鮮山脉之首者有八焉平安隣瀋
0010_0093_a_05L咸鏡隣女真江原承咸鏡黃海承平安京圻在於黃江之南忠全在於
0010_0093_a_06L京圻之南慶尚在於全羅之東也然則慶尚即古卞辰二韓之地也京忠
0010_0093_a_07L全三道即古馬韓百濟之地也咸平黃三道即古高句麗之地也江原一
0010_0093_a_08L別為濊貊之地而興滅未詳矣唐末王太祖統合三韓為高麗而我朝
0010_0093_a_09L繼運矣

0010_0093_a_10L
此山事蹟此寺行蹟別有句意二門焉句也者是經截門活句則沒心路
0010_0093_a_11L沒語路沒摸𢱢也意也者圓頓門殺句則有理路有語路有聞解思想也
0010_0093_a_12L何以言之盖意隨事變則一多緣起之無邊故山寺行蹟已有如此之多
0010_0093_a_13L此豈非山花笑野鳥歌囉囉咿咿囉囉之殺句耶又事得理融則千差

0010_0094_a_01L장애 없이 들어오게 되므로 산사의 사적은 다시 이와 같음이 없으리니, 이와 같은 한 마디 반 마디가 이 어찌 마른하늘에 벼락이 울리고 평지에 파도가 일어서는 활구가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이 산의 승려들은 향하는 바가 같지 않은데, 활구를 안고 경절문에 서면 때때로 춘풍에 취하여 춤을 추거나 문득 머리에 설산의 달을 이기도 하리니 이 승려의 의향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혹 살구를 안고 원돈문에 서면 때때로 술에 취해 타인을 욕하다가 문득 향을 사르며 예불하기도 하리니 이 승려의 의향을 또한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살구와 활구는 합하여 1구를 이루니 백척간두에 자취를 쓸어버리는 무형의 승려가 청한하게 천불산 개심사에 출입함을 세상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아, 청산 같은 머리를 잘라버리고 몸이 백납白衲399)의 승려가 되니 그 마음이 어찌 얕은 뜻에 있겠는가. 층층이 푸른 구름을 향하리라. 그러나 최초구와 말후구는 진금포真金鋪요 잡화포雜花鋪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대개 원각산圓覺山 보리사菩提寺는 무형의 부처와 무명의 승려가 3일 주야로 재미삼아 오고 간 행적으로 석가모니도 이해하지 못하거늘 가섭이 어찌 알아 기록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변산 나변사那邊寺는 그 중의 사적으로 유마維摩와 노방老龐400)도 기록하지 못하였거늘 조그만 일여一如 거사가 어찌 서술하겠는가. 다만 줄 없는 거문고로 홀로 바다 밑에서 연주하고 진흙 소의 등 위에서 또한 구멍 없는 피리를 가지고 바위 앞 돌호랑이 귓가에 조용히 불 따름이라.
아, 후대에 지금을 보면, 지금 옛날을 보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지금 사람의 기록이 미진하여 후인에게 기록을 미루어 전하면, 후대의 후대 세상에 후대의 후대 일을 후대의 후대 사람이 쓴 후대의 후대 기록은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리라. 그렇다면 천지에 앞서 그

0010_0094_a_01L涉入無碍故山寺事蹟更無若是若是之一言半辭此豈非青天轟霹靂
0010_0094_a_02L平地起波濤之活句耶是故山中諸僧所向不同也或抱活句立於徑截
0010_0094_a_03L則有時醉舞春風端 [121] 爾頭戴雪山月此僧之意向其誰能知乎或抱
0010_0094_a_04L殺句立於圓頓門則有時醉酒罵人去忽爾燒香作禮來此僧之意向
0010_0094_a_05L誰能知乎況殺句活句合成一句百尺竿頭拂跡無形之僧清閑出入於
0010_0094_a_06L千佛山開心寺世誰能知哉斷卻青山髮身為白衲僧其心何在淺意
0010_0094_a_07L向碧雲層矣然最初句末後句真金鋪雜花鋪知耶否

0010_0094_a_08L
大槩圓覺山菩提寺無形佛無名僧晝三夜三弄去弄來之行蹟釋迦猶
0010_0094_a_09L未觧迦葉豈能知誌況這邊山那邊寺箇中之事蹟維摩老龐尚未記
0010_0094_a_10L麼一如居士安敢述之哉所以只將無絃琴獨彈於海底泥牛之背上
0010_0094_a_11L將無孔笛暗吹於巖前石虎之耳邊已而哉

0010_0094_a_12L
後之視今何異於今之視昔哉今人記之未盡記推傳於後人則後後
0010_0094_a_13L之世後後之事後後之人後後之記與天地而無窮矣然則先天地而無

0010_0095_a_01L시작이 없고 천지 이후에도 그 마침이 없는 것이 마음과 부처라. 의기意氣가 있는 때에 의기를 더함은 풍류의 장소가 아니다. 풍류란 산과 절이다. 이 산의 이 절 안에서 이 마음과 이 부처가 등등임운騰騰任運401)하고 임운등등任運騰騰한 때에 도선道詵의 일신一身이 홀연 천화대千花臺 연화장세계(蓮藏界) 사나해회舍那海會402)에 나와 거닐었으므로 ‘천불산千佛山’이라 했고, 지공指空의 일심一心이 홀연 천화千花 위 백억계百億界 석가해회釋迦海會에 활짝 열렸으므로 ‘개심사開心寺’라 한 것이다.
대덕산 천탑千塔 위에 둥그런 밝은 달이 높게 걸리니 아, 너의 광채가 이처럼 청량한데 어찌 홍진의 근심에 물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는 또한 아직도 천불산에서 계속 청량하지 않은가. 나는 일찍이 너와 천불산에서 청량함을 함께 했는데 이제 어이하여 홍진 속에 떨어져 있는가. 그래서 매번 홍진에 길이 물드는 근심이 있으니, 이 어찌 후회막급의 한탄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주야로 탄식할 따름이로다.
동자야, 가서 너희 스승께 여쭈어라. 너희 스승께서 몸소 천불산에 들어오셔서 천불산에 길이 계시니 과연 천불의 면목을 보셨는가. 나처럼 천불의 면목을 보지 못하였다면 혹시 천불이 모두 다른 곳으로 나가서 빈 산에 달만 밝아서 그런 것인가. 너희 스승의 몸이 개심사에 계시고 개심사에서 늙어가니 과연 개심의 공부를 이루셨는가. 나처럼 개심의 공부를 이루지 못했다면 혹시 개심이 꽉 막혀서 빈 골에 바람만 불어대서 그런 것인가. 아아, 그렇지 않다면 천불 봉우리마다 달이 비치고 개심 잎사귀마다 바람 부니, 어찌 천불산 개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혹시

0010_0095_a_01L其始後天地而無其終者心與佛也有意氣時添意氣不風流處也風流
0010_0095_a_02L山與寺也此山此寺之內此心此佛騰騰任運任運騰騰之時道詵一
0010_0095_a_03L忽然出遊於千花臺蓮藏界舍那海會故曰千佛山也指空一心忽然
0010_0095_a_04L豁開於千花上百億界釋迦海會故曰開心寺云爾

0010_0095_a_05L
大德山千塔之上高掛一圓之明月阿爾光如此清涼爾豈有染於紅塵
0010_0095_a_06L之憂乎然爾亦尚今長清涼於千佛否吾曾與爾俱清涼於千佛山矣
0010_0095_a_07L何落在於紅塵之裏故每每有長染於紅塵之憂此豈非後悔莫及之恨
0010_0095_a_08L吾以此晝夜為歎息而已夫

0010_0095_a_09L
童子耶往問於爾師來爾師身入於千佛山長於千佛山果然得見千佛
0010_0095_a_10L面否若夫如我不得見千佛面則其或千佛盡出他而空山月獨明故其
0010_0095_a_11L然耶爾師身在於開心寺老於開心寺果然得成開心功否若夫如我不
0010_0095_a_12L得成開心功則其或開心閉塞空谷風獨鳴故其然耶嗚呼若不然則千
0010_0095_a_13L佛峯峯月開心葉葉風何須更問於千佛山開心寺在於何處哉然又或

0010_0096_a_01L청한하여 일 없는 때에 자연히 회광반조하면 사람마다 다리 밑에서 청풍이 스치고 낱낱이 면전에서 희고 밝은 달이 뜨리니 이것이 진정 천불산 개심사의 실제 사적이리라.
어제 밤에 꿈을 꾸니 만뢰萬籟403)가 모두 적막하고 심신心神이 청한한 때에 맑은 바람 한 줄기가 창 앞에 먼저 도달하고, 발소리 내며 (온) 손님이 홀연 옆에서 말했다. “존장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천지가 열리고 닫히는 사이가 129,600년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지금 광서光緒 갑신년(1884)에 전후로 계산하면 이미 지난 것은 몇 년이고 지금 남은 것은 몇 년이 됩니까.”
내가 말했다. “71,441년이 지났고, 지금 남은 것은 58,159년이오.”
“해와 달이 처음 나온 것은 지금까지 몇 년이 됩니까.”
“17,441년이오.”
“지금은 오회午會 10,800년 안쪽인데 지난 것은 몇 년이고 남은 것은 몇 년입니까.”
“6,641년이 지났고 4,159년이 남았소.”
“내가 듣기에 서역의 석가여래는 중국 주 소왕周照王 13년 계축 7월 15일 밤에 입태入胎하여 갑인년 4월 8일에 출태出胎하였고, 19세인 임신년 2월 8일 밤에 출가하고 30세인 계미년 납월臘月 8일 밤에 도를 깨우쳤으며, 79세인 임신년 2월 15일 밤에 입적(歸寂)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입적 후에 지금 갑신년까지는 몇 년이 됩니까.”
“2,833년이오.”
그리고 또 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한 명제漢明帝 즉위 3년 경신년(60)에 황제가 금인金人의 꿈을 꾸었기에 불경을 구해 오기 위해 즉시 대신을 서역으로 보냈으니

0010_0096_a_01L清閑無事之時自然回光反照則人人脚下清風拂箇箇面前白明月
0010_0096_a_02L真千佛山開心寺實事蹟而已夫

0010_0096_a_03L
昨夜一夢萬籟俱寂心神清閑之時清風一聲窓前先到矣跫音一客 [122]
0010_0096_a_04L然在傍曰尊丈恒言天地開閉之間為十二萬九千六百年然則今在光
0010_0096_a_05L緒甲申前後計筭則已過者為幾年今餘存者為幾年乎
余曰七萬一千
0010_0096_a_06L四百四十一年已過今餘在五萬八千一百五十九年矣
又曰日月始出
0010_0096_a_07L至今為幾年乎
余曰一萬七千四百四十一年矣
又曰今午會一萬八百
0010_0096_a_08L年內已過者為幾年餘存者為幾年乎
余曰六千六百四十一年已過
0010_0096_a_09L千一百五十九年餘在矣
客曰吾聞西域釋迦如來中國周照王十三年
0010_0096_a_10L癸丑七月十五夜入胎甲寅四月八日出胎年至十九年壬申二月八夜
0010_0096_a_11L出家年至三十癸未臘月八夜悟道年至七十九壬申二月十五日歸寂
0010_0096_a_12L然則入寂後至今甲申為幾年乎
余曰二千八百三十三年矣
又曰
0010_0096_a_13L聞漢明帝即位三年庚申帝有金人之夢故佛經求來次即送大臣於西

0010_0097_a_01L이 때에 대신 왕준王遵 등 10여 인이 명을 받들어 백마를 데리고 경신년 4월 8일에 서역으로 출발했소. 이 때 서역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승려가 또한 불경 『묘법연화경』과 『금강반야경』ㆍ『사십이장경』ㆍ『유마경』 4질을 받들어 중국에 전하기 위해 또한 경신년 4월 8일에 동쪽으로 출발하였고, 피차가 5년 갑자년 납월(12월) 8일에 우연히 천축天竺(인도) 월지국月支國404) 길에서 상봉하였으니 어찌 환희하지 않겠소. 가히 귀목침개龜木針芥405)의 인연이라 하겠소. 며칠 피곤을 푼 다음에 경전을 백마에 싣고 함께 길을 나섰는데 짐이 무거워 7년째인 신미년(71) 10월 8일에야 비로소 낙양에 도착했으니 피차 왕래가 각기 12년 걸린 셈이오.”
“그렇다면 임신년과 신미년 사이가 몇 년이고 또한 신미년과 지금 갑신년 사이가 또한 몇 년입니까.”
“임신년과 신미년 사이는 1,020년이 되니, 이는 5종 뇌고牢固 가운데 다문뇌고多聞牢固406)의 시기이지요. 신미년에서 지금 갑신년 사이는 1,813년이 되지요.”
“불경이 조선에 온 것은 또한 몇 년이 됩니까.”
“중국에 도달한 후에 121년 지난 신미년(191)에 이르러 조선에 왔으니 신미년과 갑신년 사이가 1,692년이 되지요.”
“도선道詵이 탑을 조성하고 지공指空이 절을 지은 것이 각각 지금까지 또한 몇 년인가요?”
“탑을 쌓은 것은 지금까지 1,177년이 되고, 절을 지은 것은 지금까지 1,161년이 되오.”
손님이 손가락을 굽혀 한참 헤아리다가 말했다. “세상의 이른바 대유大儒라면 누가 역대 세기世記의 서적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오래된 옛일을 물어보면

0010_0097_a_01L而此時大臣王遵等十餘人奉命持曰 [123] 白馬庚申四月八日發程向西
0010_0097_a_02L域焉此時西域藤蘭二僧亦奉持佛經妙法蓮華經金剛般若經四十二
0010_0097_a_03L章經維摩經四秩而來傳于中夏次亦庚申四月八日發程向東焉彼此
0010_0097_a_04L至五年甲子臘月八日偶然相逢於天竺月支國路中則豈不歡喜乎
0010_0097_a_05L謂龜木針芥之緣也數日解困後經載白馬發程同行而然駄重故至七
0010_0097_a_06L年辛未十月八日始到洛陽則彼此往來各十二年云
然則壬申辛未之
0010_0097_a_07L為幾年亦辛未今甲申年之間亦幾年乎
余曰壬申辛未之間為一千
0010_0097_a_08L二十年則此乃五種牢固中多聞牢固之時也自辛未至今甲申之間
0010_0097_a_09L一千八百十三年矣
又曰佛經來到朝鮮亦為幾年乎
余曰中國來到之
0010_0097_a_10L至一百二十一年辛未來到朝鮮則辛未甲申間為一千六百九十二
0010_0097_a_11L年矣
又曰道詵之造塔指空之造寺各至于今亦各幾年乎
余曰築塔至
0010_0097_a_12L今為一千一百七十七年造寺至今為一千一百六十一年矣
客掘指良
0010_0097_a_13L久曰世之所謂大儒者孰不見歷代世記之書哉然而問其久遠之事

0010_0098_a_01L모두 막연히 대답하지 못하고 근거(巴鼻)를 대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존장께서는 당년 칠순에 어찌 그리 이처럼 소상하게 기억하십니까. 혹시 문자에 대해 과연 신통한 묘수라도 얻으셨나요?”
“아니오. 알아도 모른다 하는 것이 지혜(智)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우둔함(愚)이며, 알고 모름을 모두 모르는 것이 슬기(慧)이고, 모두 모르고 도무지 모르는 것을 바보(癡)라 하는데, 지혜와 우둔함ㆍ슬기ㆍ바보 또한 모르는 것이 나입니다. 하물며 내가 눈멀고 귀먼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천 년 고찰의 일을 서술하겠습니까. 그러나 손님 또한 시방 법계의 성性과 시방삼세의 이치를 알지요? 보광마니향수해普光摩尼香水海 안에 110의 20중重 광대찰廣大剎이 있어 2,200청정 법신불이 피차 서로 모습을 보니, 제망帝網407)의 늘어진 구슬처럼 거듭거듭 서로 비추고 피차 서로 마주하여 서로 말하는 형상이 방 하나에 천 개의 등불이 빛과 빛이 서로 비침과 같습니다. 이 어찌 위대하고 장엄한 광경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직 보지는 못하였으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였더라도 이 시방법계의 모습은 항상 내 마음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작은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있으니 일체 티끌이 또한 이와 같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408)는 말을 항상 외울 따름입니다. 그러한즉 이 산의 이 절은 또한 이 가운데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리오. 내가 이른바 거처에 장애가 없다 함은 이를 이름이라오.
1원元에 12회會가 있고 1회會에 30운運이 있고, 1운運에 12세世가 있고, 1세世에 30년이 있고 1년에 12월이 있고 1월에 30일이 있고 1일에 12시가 있고 1시에 8각刻이 있고 1각刻에 15분分이 있소. 이것은 복희伏羲와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409) 네 성인이 시간을 논한 것입니다. 그러한즉 천지가 열고 닫히는 사이는 129,600년이 되는 것이니

0010_0098_a_01L皆漠然不答而討巴鼻不着也而今尊丈當年七旬何其記聦若是昭詳
0010_0098_a_02L其或於文字之上果得神通之妙乎
余曰非也知而不知者智也不知
0010_0098_a_03L而知者愚也知不知摠不知者慧也摠不知都不知者癡也智慧愚癡
0010_0098_a_04L不知者吾也况吾盲襲 [124] 之久安敢述千年古剎之事哉然客亦知夫十方
0010_0098_a_05L法界之性十方三世之理乎普光摩尼香水海內一百一十之二十重廣
0010_0098_a_06L大剎中二千二百清淨法身佛彼此互相相見之像如帝網之垂珠重重
0010_0098_a_07L交影彼此互相相談之像如一室之千燈光光涉入此豈不偉且壯觀哉
0010_0098_a_08L吾未見成故雖目不見耳不聞而然此十方法界之形容恒不忘於吾之
0010_0098_a_09L心頭故吾恒誦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而已也然則此山此
0010_0098_a_10L亦在此中豈其不然哉吾所謂處無碍者是之謂也夫

0010_0098_a_11L一元有十二會一會有三十運一運有十二世一世者三十年一年有十
0010_0098_a_12L二月一月有三十日一日有十二時一時有八刻一刻有十五分此則羲
0010_0098_a_13L文周孔四聖之論時也然則天地開閉之間為十二萬九千六百年者是

0010_0099_a_01L어찌 조금이라도 어그러짐이 있겠소. 이 또한 세제世諦의 이치라오. 그러나 이것은 다만 12지支 각기 10,800년으로 논한 것입니다.
사람의 수명을 18,000세로 논하자면 1주겁住劫 가운데 18,000세로 시작하여 1백 세마다 1년이 감하는 것으로 정식으로 삼아 10세까지 감해지는 때를 1감겁劫이라 하고 10세부터 또 1백 세마다 1년이 늘어나 다시 18,000세가 되는 때까지를 1증겁增劫이라 하니, 1증겁 사이가 1조8억 년이 되고, 1감겁의 사이가 또한 1조8억 년이 되며, 10증겁은 18조 년이 되고 10감겁 또한 18조 년이 되며, 20증ㆍ감겁은 모두 144조 년이 되오. 그러나 이는 다만 인간세계 사람 수명으로 논한 것 따름입니다.
33천의 땅에 거하며 세상의 주인인 제석천왕帝釋天王이 거하는 도솔천 사람의 수명으로 논하자면, 84,000세로 시작하여 백 세부터 1년 감하는 것을 정식으로 하여 10세까지 줄어드는 때를 1감겁이라 하고 10세부터 또 백 세 마다 1년이 늘어가 다시 84,000세가 되는 때까지를 1증겁이라 하니, 1증겁은 8조4억 년이 되고 1감겁도 8조4억 년이 되며, 10감겁은 84조 년이 되고 10증겁도 84조 년이 되며, 20증ㆍ감겁은 합쳐서 168조 년이 되오. 그렇다면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 4겁은 도합 672조 년이 되니, 이것이 현재현겁現在賢劫의 성주괴공 1대겁大劫이 되오. 그러나 이는 1화재겁火災劫 가운데 성주괴공 4겁이오.

0010_0099_a_01L豈有一毫差忒哉此亦世諦之一理也然此但以十二支各一萬八百
0010_0099_a_02L年論之也夫

0010_0099_a_03L若以人壽一萬八千歲論之則一住劫中始自一萬八千歲百歲减一年
0010_0099_a_04L為定减至十歲時為一减劫從十歲又百歲增一年還豋 [125] 一萬八千歲時
0010_0099_a_05L為一增劫則一增劫之間為一兆八億年一减劫之間亦為一兆八億年
0010_0099_a_06L十增劫為十八兆年十减劫亦為十八兆年二十增减劫都合一百四十
0010_0099_a_07L四兆年也然此但以人間人壽論之已而也

0010_0099_a_08L若以三十三天地居世主帝釋天王所居之兜率天人壽論之則始自八
0010_0099_a_09L萬四千歲百歲减一年為定减至十歲時為一减劫從十歲從十歲 [126] 又百
0010_0099_a_10L歲增一年還登八萬四千歲時為一增劫則一增劫為八兆四億年一减
0010_0099_a_11L劫亦為八兆四億年十减劫為八十四兆年十增劫亦為八十四兆年
0010_0099_a_12L十增减劫合一百六十八兆年然則成住壞空四劫都合六百七十二兆
0010_0099_a_13L是為現在賢劫成住壞空一大劫也然此乃一火災劫中成住壞空四

0010_0100_a_01L343화재겁과 49수재겁, 7풍재겁으로 모두 포산布筭하면 그 사이 연수年數는 과연 몇 년이 되는가. 이를 일러 광대겁廣大劫이라 하오. 내 비록 포산을 잘 하지는 못하나 이 지겁支劫은 인겁人劫과 천겁天劫의 합으로 광대겁의 수를 항상 내 마음에 잊지 않고 있소. 그래서 내가 혹 한가할 때면 입으로 외우길, 일념이 곧 무량겁이요 무량겁이 곧 일념이라 했소. 그렇다면 천불산 개심사 또한 이 가운데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소. 내가 이른바 때에 장애 없다 함이 이를 이름이로다.
내가 이 시방법계 시방삼세에서 때와 장소에 장애 없는 사이에서 마음이 여여하고 경계 또한 여여합니다. 그래서 나의 스승이 나를 부르길, ‘일여거사一如居士’라 하고, 나 또한 이것을 호로 삼을 뿐이니, 내 어찌 신통한 묘수가 있겠습니까.”
손님이 머리를 숙이고 한참 있더니 웃으며 물러났다.
나는 다시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과연 앞서 산사의 답변으로 내게 전한 것은 말하자면 청풍사문清風沙門과 명월비구明月比丘라 하겠다. 나 또한 놀라서 일어나 공경히 송별했다. 이윽고 꿈이 다하니, 청풍이 아직 베개에 일고 명월이 또한 이불에 나도다. 아아, 이 무슨 일장춘몽의 허튼소리로 산사에서 때와 장소가 장애 없는 사이에 답변한 것인가.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바람은 솔 앞에서 시방법계의 줄 없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비 온 후 시냇물은 시방삼세의 구멍 없는 피리를 불어주었다. 아, 혹시 뒷날 지금을 보는 이라면 또한 나의 그윽한 흥취와 같지 않겠는가. 나와 뜻이 같은 이가 있다면 또한 기이한 자취와 특이한 광경을 찾아서 나의 그윽한 흥취에 이어 기록을 더하고 나의 서술로 하여금 금상첨화의 흥미를 더하게 한다면 어찌 사마司馬에 대한

0010_0100_a_01L劫也若以三百四十三火災劫四十九水災劫七風災劫都為布筭則其
0010_0100_a_02L間年數果為幾年乎是之所謂廣大劫也吾雖未能布筭詳知而然此支
0010_0100_a_03L劫人劫天劫之合廣大劫數恒不忘於吾之心頭故吾或閑居則口常誦
0010_0100_a_04L一念即是無量劫即一念而已也然則千佛山開心寺亦在此中豈其不
0010_0100_a_05L然哉吾所謂時無碍者斯之謂也夫

0010_0100_a_06L吾於此十方法界十方三世時處無碍之間心如境亦如故吾師呼我
0010_0100_a_07L一如居士余亦以此為號而已也吾何則有通神之妙哉
客垂頭良久
0010_0100_a_08L而辭退
余更拭目詳見則果是向者以山寺之答來傳於余者謂之清風
0010_0100_a_09L沙門明月比丘者矣余亦驚起敬送矣俄然夢罷則清風只生枕明月亦
0010_0100_a_10L生衿嗚呼是何一場春夢之譫語多是山寺時處無碍之間答乎開戶出
0010_0100_a_11L則風前松奏十方法界之無絃琴雨後澗訴十方三世之無孔笛
0010_0100_a_12L或後之視今者亦復如我之幽興否若有與我同志者更又覓得奇蹟異
0010_0100_a_13L聯我幽興加錄使我所述益得錦上添花之興味則豈不謂司馬之於

0010_0101_a_01L양의楊意410)요 백아伯牙에 대한 종자기鍾子期411)라 하지 않겠는가.
갑신년(1884) 가을에 서술한다.
김용선金龍船이 쓰다.


0010_0101_a_01L楊意伯牙之於子期哉
甲申秋述

0010_0101_a_02L金龍船述
  1. 1)동쪽 : 규장각 소장 『이원현읍지』(규 17532)에 따르면 북쪽에 있다.
  2. 2)윤덕윤尹德允 : 『이원군지利原郡誌』(利原郡誌編纂委員會 編, 1973) 105쪽에 실린, 같은 글에는 ‘윤덕구(尹德久)’로 되어 있음.
  3. 3)달존達尊 : 세상 사람 모두가 존경할 만한 사람. 『맹자』「공손추公孫丑」에 “천하에 달존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이 하나요 연치가 하나요 덕이 하나이다.”라고 했다.
  4. 4)군자는 ~ 누리며 : 원문 ‘君子萬年。介爾景福’은 『시경』「대아大雅」 ≺기취旣醉≻의 구절이다.
  5. 5)덕이 ~ 있으니 : 『논어』「리인里仁」에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했다.
  6. 6)어려움을 구한다 : 원문 ‘疊難如在’은 의미가 통하지 않아 문맥을 고려하여 의역하였다.
  7. 7)남익초南益初 : 1768년에 이성利城(함남 이원) 현감을 맡고 있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8. 8)육화료六和寮 : 요사채. 육화六和는 부처님이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을 말씀하신 것이다.
  9. 9)-‘其佛仸物’은 미상.
  10. 10)오로지 정성스레 한결같이 : 원문 ‘惟精惟一’은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의 구절이다.
  11. 11)결복結卜 : 토지에 매기는 단위인 결結과 복卜. 곧 전지田地의 단위면적. 양전척量田尺으로 1척 평방을 줌(把)이라 하고 10파를 1뭇(束)이라 하고 10속을 1짐(負 또는 卜)이라 한다. 100부를 1목(結)이라 함.
  12. 12)복흥사 : 이원현 동쪽 20리, 승려는 32명이라고 『이원현읍지』에 기록됨.
  13. 13)태고를 상고하건대 : 원문 ‘曰若稽古’는 『서경』「우서虞書ㆍ요전堯典」의 구절이다.
  14. 14)반문反聞 : 돌이켜 들음. 『능엄경』에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反聞聞自性)’ 하였다.
  15. 15)갑계甲契 : 불교사찰에 거주하는 동갑 또는 비슷한 연령의 승려들이 조직했던 계.
  16. 16)영흥永興 :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
  17. 17)걸량乞粮 : 양식을 구걸함.
  18. 18)소화塑畫 : 소상塑像과 화상畫像. 소상은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인데 여기서는 동사로 쓰였다.
  19. 19)천파天波 : 지진을 가리키는 듯함.
  20. 20)정정定鼎 : 자리를 정하다. 본래는 주 성왕周成王이 구정九鼎을 만들어 낙양洛陽에 두고 왕도王都로 정한 데서 도읍을 정함을 뜻함.
  21. 21)육속전六續田 : 조선시대 토지를 6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토질이 비옥하지 못하여 때로는 휴경休耕함으로써, 경작한 때에만 과세課稅하는 토지.
  22. 22)사우四宇 : 사방의 건물을 뜻하는 듯함.
  23. 23)목포木布 : 베와 무명.
  24. 24)주룡主龍 : 산맥 또는 산의 능선을 용이라 한다. 많은 산맥이나 능선 중에서 자기가 쓰고자 하는 혈이나 묘지, 혹은 집터와 관계되는 능선만을 주룡이라 한다. 주룡은 내룡來龍, 혹은 용맥龍脈이라고도 부른다.
  25. 25)짐(卜) : 1/100결. 부負와 같음. 양전척量田尺 1척 평방 면적을 1파把,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00부가 1결임.
  26. 26)진황재탈陳荒災頉 : 진황은 논밭이 묵어서 황폐하게 됨. 재탈은 천재지변으로 농사가 잘 안된 것 또는 그로 인해 세금을 걷지 않는 것을 가리킴.
  27. 27)극념克念 : 제대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서경書經』「다방多方」에 “성스러운 사람이라도 제대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정신없는 바보가 되고, 바보라 할지라도 제대로 생각만 하면 성스럽게 될 수 있다.(惟xxx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는 말이 있다.
  28. 28)후인(可畏) : 『논어』「자한子罕」에 “뒤에 태어난 사람이 두려우니 어찌 장래의 젊은이들이 지금의 나만 못하다고 하겠는가(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라 하였다.
  29. 29)백마柏摩 : 앞의 ‘백엄柏广’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30. 30)수다라장修多羅藏 : 경장經藏ㆍ율장律藏ㆍ논장論藏의 삼장三藏 가운데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장. 대장경이나 그것을 나무에 새긴 판목版木을 보관해 두는, 절에 있는 곳집.
  31. 31)양공良工 : 불화를 그리는 승려. 화승畵僧.
  32. 32)현왕現王 : 지옥을 다스리는 열 명의 왕 중 다섯 번째인 염라대왕. 현왕신앙이 인기를 얻으면서 다른 왕들과 따로 그려지게 되었다. 현왕의 본래 명칭은 보현왕여래普現王如來이다. 특히 사람이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현왕現王 마지를 올려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그려 모신다.
  33. 33)물시계의 물이 다하고 종이 울리도록 : 원문 ‘漏盡鍾鳴’은 “年過七十而以居位, 譬猶鍾鳴漏盡而夜行不休, 是罪人也.”에서 나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권26「위지魏志ㆍ전예전田豫傳」.
  34. 34)호계삼소虎溪三笑 : 동진 시대 혜원惠遠 법사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살면서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혜원 법사는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건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랑이 울음소리에 혜원법사는 스스로 맹세를 어긴 것을 깨달았으며,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고 한다.
  35. 35)공동崆峒 : 광성자廣成子란 선인仙人이 살고 있었고 황제黃帝가 도道를 물은 곳. 『장자莊子』「재유在宥」.
  36. 36)천신薦紳 : 관위가 있는 사람. 또는 지체가 높은 사람.
  37. 37)두레박줄이 짧은 : 원문은 ‘短綆’. 『순자荀子』「영욕榮辱」에 “짧은 두레박줄로는 깊은 샘의 물을 길을 수 없고, 지혜가 짧은 사람과는 더불어 성인의 말을 언급할 수 없다.(短綆者不可以汲深井之泉, 知不幾者不可與及聖人之言)”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재식才識이 천루淺陋함을 말한다.
  38. 38)수희隨喜 : 다른 사람이 행한 좋은 일을 보고 자기의 일처럼 기뻐하는 것.
  39. 39)이천二天 : 남의 특별한 은혜를 하늘에 비겨 이르는 말. 후한 순제後漢順帝 때 소장蘇章이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어 관할을 순행하다가 청하淸河에 이르렀는데, 마침 청하 태수淸河太守는 옛 친구로 부정이 매우 많았다. 소장은 그 부정을 다 조사해 놓고서 곧 태수를 청하여 술을 마시며 친구간의 우의를 담론하니, 태수가 매우 기뻐하며, “남들은 모두 하늘이 하나뿐이지만 나만은 하늘이 둘이다.”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 『후한서後漢書』「소장전蘇章傳」.
  40. 40)이 글은 문맥을 파악하기 어려운 곳이 많음을 밝혀둔다.
  41. 41)문궤文軌 : 글과 수레. 천하 통일을 뜻함. 『중용中庸』 “지금 천하에 수레는 바퀴의 궤도가 똑같으며, 글은 문자가 똑같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고 한 데서 온 말.
  42. 42)당요唐堯 갑진년 : 요 임금 갑진년이 중국 역사의 시작으로 일컬어진다.
  43. 43)덕은 ~ 있는 : 원문 ‘德必有隣’은 『논어』「이인里仁」의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에서 온 말이다.
  44. 44)자손(貽厥) : 『서경』「오자지가五子之歌」에 “밝고 밝으신 우리 선조는 만방의 임금이시니, 전장과 법도를 마련하시어 자손들에게 물려주셨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는 말에서 나온 말.
  45. 45)수통垂統 : 훌륭한 사업을 자손에게 전함.
  46. 46)청량 : 『화엄경』「보살주처품」에 문수보살이 청량산에 상주한다고 하였다. 청량산은 오대산이라고도 한다.
  47. 47)이곳저곳에~바꾸니 : 원문은 ‘三三替境’. 무착문희無着文喜 선사의 전삼삼 후삼삼前三三後三三과 관련되는 듯하다. 중국 항주 오대산에서 문수를 만난 무착이 대중들의 수효를 묻자 문수가 답한 내용이다.
  48. 48)갈래사葛來寺 : 정선에 있는 정암사淨巖寺의 이칭인 듯함.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
  49. 49)객 : 문맥상 성정 스님을 가리킴.
  50. 50)호념護念 : 불보살이 늘 염두에 두고 보호함.
  51. 51)부촉咐囑 : 부탁하여 맡김.
  52. 52)좌화坐化 : 앉은 채 입적함.
  53. 53)몰골옹沒骨翁 : 고려시대 회정懷正 스님이 관음의 진신을 보고자 기도했을 때 몰골옹과 해명방海明方을 찾아가 물으면 된다고 했는데 몰골옹이 문수보살이고 해명방은 보현보살이었다.
  54. 54)십전명왕十殿冥王 : 명부전의 시왕.
  55. 55)가히~만하다 : 『서장』「왕장원 석성에게 보내는 답장(答汪狀元聖錫又一)」의 구절. 모든 인연을 그만두고 일상에 번거롭게 움직이는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세상사에 천만 가지 모두 만족하다 할 만하다고 하였다.
  56. 56)잠관簪冠 ; 잠簪과 갓. 잠은 머리털을 갓 속에서 세우는 도구.
  57. 57)기질지성氣質之性 : 혈기의 성품. 선천적인 본연지성과 대비되는 말. 기氣에서 생기는 것이기에 ‘통함과 막힘’, ‘치우침과 바름’의 차별이 생기게 된다.
  58. 58)홀로 얻었으니 : 원문 ‘偏得’은 『장자』「경상초庚桑楚」에서 나온 말.
  59. 59)학린굴鶴隣窟 :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면 주의리 대덕산에 있는 학린암鶴隣庵을 가리키는 듯함. 고려 중엽 학암鶴巖이 창건했다.
  60. 60)50인 : 『화엄경』「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개 나라를 다니며 선지식을 만나고 마지막에는 미륵보살을 찾아가 설법을 들었다.
  61. 61)하궤荷簣 : 바랑을 짊어진 쾌성을 가리킴. 본래는 삼태기를 멘 사람이라는 뜻으로 혼란한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자隱者를 가리키는데, 그가 공자의 경쇠 소리를 듣고 비평하자, 공자가 “세상을 잊는 데에 과감하구나. 출처를 그렇게만 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果哉, 末之難矣)”라고 말한 내용이 『논어』「헌문憲問」에 나온다.
  62. 62)용암龍岩 : 용암을 호로 하는 이는 18세기 보림사寶林寺에 용암증숙龍岩增肅, 그리고 만년에 대흥사 만일암挽日庵에 머물렀던 용암혜언龍岩慧彦(1783~1841년), 그리고 환성지안의 제자인 용암신감龍巖信鑑이 있다.
  63. 63)문진問津 : 나루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 즉 도를 추구함을 뜻한다. 『논어』「미자微子」에 “장저와 걸닉이 김매며 밭 갈고 있을 때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보게 하였다.(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하였고, 남조南朝 양梁나라 심약沈約의「동백산금정관비桐柏山金庭館碑」에 “스승을 찾아 도를 강론하고 벗을 맺어 나루를 묻는다.(尋師講道, 結友問津)”이라 하였다.
  64. 64)환성喚性 : ‘喚醒’이라고도 함. 법명은 지안志安. 1664∼1729년.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였고, 정원淨源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전국의 명산을 순력하고 1725년(영조 1)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학인 1,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喚惺詩集』 1권이 현존한다.
  65. 65)부도浮圖 : 부도浮屠라고도 함. 사리를 안치한 탑.
  66. 66)황제가 방주房州에 있다 : 당나라 제3대 황제인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684년 자신의 아들인 제4대 황제 중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통치하였는데, 이때 중종이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방현房縣인 방주房州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강목綱目』
  67. 67)들은~견고한 : 원문 ‘多聞堅固’는 부처님이 가신 지 점점 오래되어 교敎를 실행하는 이는 없지만, 오히려 불경을 많이 듣고 외우고 익히는 이가 있어, 불법이 지속되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68. 68)추우騶虞 : 본래는 상서로운 짐승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그저 짐승이라는 뜻으로 사용함.
  69. 69)비판(雌黃) : 원문 ‘자황’은 비소와 유황의 화합물로 선명한 황색을 띠며 주로 약용이나 안료顔料로 사용되는 물질이다. 옛날에 오기誤記하였을 때 이것으로 지우고 다시 썼다.
  70. 70)선기璇璣 : 천체를 관측하던 기계. 또는 북두칠성의 제1성星에서 제4성까지를 가리키던 말.
  71. 71)육광六光 보살 :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6보살 즉 용수龍樹, 상비常悲, 다라니陀羅尼, 관음觀音, 금강장金剛藏, 지장地藏 보살을 말함.
  72. 72)호한澔汗 : 넓고 크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색채가 선명하다는 뜻으로 쓰임. 사마상여司馬相如의「상림부上林賦」 “采色澔汗”.
  73. 73)즐거운 군자여 : 원문 ‘樂只君子’는 『시경』「소아小雅」 ≺남산유대南山有臺≻ 등에 나오는 표현.
  74. 74)번성하리로다 : 원문 ‘振振’은 『시경』「주남周南」 ≺종사螽斯≻ “수많은 베짱이들 화목하게 모여들듯, 그대의 자손 또한 번성하리라.(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 등에 나온다.
  75. 75)감당甘棠 : 어진 관리의 아름다운 정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어진 관리의 관청을 뜻함. 주周 나라 때 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그가 쉬어간 일이 있다는 팥배나무를 아껴서 노래했다고 한다. 『시경』「소남召南」의 편명.
  76. 76)연천淵泉 김金 상공相公 : 김이양金履陽. 1755-1845년.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命汝.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 확립에 힘쓰는 한편 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77. 77)부비흥賦比興 : 『시경』 표현수법.
  78. 78)순병영巡兵營 : 감사가 직무를 보는 순영과 병마절도사가 근무하는 병영.
  79. 79)절목節目 : 특정 정책이나 사업의 시행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것.
  80. 80)반수般倕 : 고대의 유명한 목수인 노반魯般과 공수工倕를 말한다.
  81. 81)원문 ‘遠及橋閣之火玩叢中’에서 ‘玩叢中’의 의미는 미상.
  82. 82)남은 경사 : 원문 ‘餘慶’. 『주역』「문언전文言傳」에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83. 83)가을 바람(啇風) :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 중에 상성商聲은 금성金聲에 해당하며, 금金은 또한 서방西方으로서 가을에 해당하므로 가을의 서풍을 가리킨다.
  84. 84)등설대부藤薛大夫 : 등과 설은 작은 나라이고 대부는 국정을 담당한 사람이다. 여기서는 작은 사찰의 승려라는 겸칭으로 쓰인 듯하다. 본래는 『논어』「헌문憲問」에 나온다.
  85. 85)형산荊山의 옥 : 매우 귀중한 물건을 이르는 말. 형산荊山에서 구한 구슬. 초나라 화씨和氏가 형산에서 신기하고 아름다운 옥돌을 얻고는,​ 자신이 갖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라 생각해서 옥돌을 임금에게 바쳤다.
  86. 86)공업은 ~ 실패하여 : 원문 ‘功虧九刃’은 『서경』「여오旅獒」에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큰 덕에 끝내 누를 끼칠 것이니, 이는 마치 아홉 길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에서 나온 말이다. 『맹자』에도 인용됨.
  87. 87)사환유四環鍮 ; 네 귀퉁이에 고리가 달린 큰 놋시루.
  88. 88)당저當宁 : 당시 재위 중인 임금. 여기서는 헌종.
  89. 89)천태실天台室 : 독성獨聖(나반존자那畔尊者)을 모신 곳. ‘나반’은 저쪽 피안을 뜻하여 반야용선을 타고 지혜의 배를 타고 저 이상의 경계에 이른 것을 나반이라 이른다. 나반 존자께 절을 할 때 ‘나무 천태산상 독수선정 나반 존자’ 즉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은 나반존자께 귀의합니다.’라고 한다.
  90. 90)진념軫念 : 존귀한 사람이 아랫사람의 사정을 돌보아 생각한다는 뜻.
  91. 91)남곤영南閫營 : 곤영은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을 달리 이르는 말.
  92. 92)통어영統禦營 : 경기ㆍ충청ㆍ황해도 등에 수군을 관할하기 위해 교동에 설립된 수군 최고 사령부.
  93. 93)촉관促關 :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보내던, 독촉하는 내용의 공문.
  94. 94)이관移關 : 받은 공문이나 통첩을 다른 부서로 다시 보내어 알림.
  95. 95)동덕사東德寺 : 함경남도 단천시 두연리에 있는 절. 동덕사는 현 위치에서 약 15리 떨어진 곳에 있던 화장사華藏寺를 이전하여 재건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1702년에 쓴 『단천읍지』에는 ‘화장사는 군의 동쪽 오봉산에 있다. 지금은 동덕사로 부른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에 옮겨 지으면서 사명寺名을 변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96. 96)축비縮費 : 문맥상 운송비를 가리킴.
  97. 97)불향답(佛餉) : 불향답佛享沓. 부처님께 공양할 쌀을 생산하는 논이나 밭. 또 절에 딸린 논밭.
  98. 98)백탈白奪 : 대낮에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
  99. 99)속하게 : 원문은 ‘祝’이나 문맥상 풀이하였다.
  100. 100)영읍營邑 : 감영과 고을.
  101. 101)입안立案 : 어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관청에서 발급한 문서.
  102. 102)절목節目 : 특정 정책이나 사업의 시행지침 또는 규칙을 나열한 것.
  103. 103)상헌棠軒 : 선화당宣化堂. 관찰사가 집무하던 정당正堂. 주周나라 소백召伯이 관찰사로 나가서 남국을 순행하며 아가위나무 그늘에서 쉬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104. 104)이 상국李相國 동운峒雲 : 이돈하李敦夏. 182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서오敍五이다. 좌승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 의정부 우참찬, 판의금부사, 예문관 제학, 홍문관 제학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함경도관찰사로 재직할 때에는 청나라와 외교상의 문제가 되는 청인들의 사무역확대로 인한 월경문제가 자주 발생하여 그 처리를 위하여 조정에 빈번한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다.
  105. 105)군자께서 ~ 누리시길 : 원문 “‘君子萬年。介爾景福”은 『시경』「대아大雅」 ≺기취旣醉≻에 나오는 구절이다.
  106. 106)주부主簿 :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관직.
  107. 107)이 구절 뒤의 ‘重冷洛化仁風元稱’은 미상.
  108. 108)재도림齋禱林 : 재도는 재계齋戒하고 기도한다는 뜻이므로, 재도림은 재계를 행하는 숲을 가리키는 듯함.
  109. 109)삼소三笑 : 호계삼소虎溪三笑.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손님을 전송할 때에도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았는데,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이 방문했을 적에는 서로 의기투합한 나머지 그들을 전송하면서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함.
  110. 110)문을 ~ 떨어지니 : 문을 여닫을 때 수돌쩌귀가 암돌쩌귀를 벗어나지 않고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는 상태로서 틀림없는 결과를 뜻한다.
  111. 111)대화연大化緣 : 교화하는 큰 인연.
  112. 112)최 공崔公 : 1806년 경에 최한빈崔漢彬이 천금을 보시하였다고 앞에 기록되어 있다.
  113. 113)나를 ~ 것이니 : 원문 ‘知我罪我’는 자신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이 평가하는 근거를 뜻하는 말이다. 공자가 “나를 알아주는 이도 오직 춘추 때문이요, 나를 죄주는 이도 오직 춘추 때문일 것이다.(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
  114. 114)이후 ‘莫甚秋晚’은 미상.
  115. 115)사람을 ~ 함 : 원문 ‘倩人看院’은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권29「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권29「答張侍郞(子韶)」에 나옴.
  116. 116)웃어 제치고 : 원문 ‘汩汩’은 웃음소리 또는 콸콸 물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를 가리킨다.
  117. 117)편안함을~ 기뻐하여 : 원문 ‘惟喜康共’은 『서경』「상서商書ㆍ반경盤庚」에 나오는 말.
  118. 118)자기를 ~ 대하라 : 원문 ‘恕己及物’은 『포박자』「행품行品」 등에 나옴.
  119. 119)초택楚澤 : 초나라 물가. 초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상강湘江의 못 가로 유배되어 그곳에서「이소離騷」를 지었는데, 그 글 안에 난초를 비롯하여 기타 많은 향초를 읊은 부분이 들어 있다. 『사기』 권84「굴원전屈原傳」.
  120. 120)사계沙界 : 갠지스 강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
  121. 121)사환유四環鍮 ; 네 귀퉁이에 고리가 달린 큰 놋시루.
  122. 122)숭정崇禎 8년 병자년(1636) : 병자년은 숭정 9년에 해당하므로 오류가 있다.
  123. 123)숭덕崇德 5년 계미년(1643) : 계미년은 숭정 8년에 해당하므로 오류가 있다.
  124. 124)편수片手 : 불교 사찰에서 건축ㆍ단청ㆍ목장 등의 일에 종사하는 기술자.
  125. 125)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긴 나무패.
  126. 126)위의威儀 : 위엄 있는 모습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의례에 사용되는 물품을 가리킴.
  127. 127)운판雲板 :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구름 모양의 넓은 청동판으로서 두들겨 청아한 소리를 내게 하는 일종의 악기.
  128. 128)48년 무자년(1709) : 무자년은 강희 47년에 해당하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129. 129)수좌首座 : 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승려.
  130. 130)육광보살六光菩薩 : 육도六道(天ㆍ人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육도에 각각 나타나는 육지장六地藏.
  131. 131)종두鐘頭 : 종을 매다는 고리 즉 종뉴鐘紐를 가리키는 듯함.
  132. 132)김이양金履陽 : 1755-1845년.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 확립에 힘쓰는 한편 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133. 133)행行 : 조선 시대 때 관계官階가 높고 관직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위에 붙여 일컫던 말.
  134. 134)제지題旨 : 조선시대 관부官府에 올린 민원서의 여백에 쓰는 판결문 또는 처결문.
  135. 135)배관背關 : 하급 관청의 보고문 뒤에 기록된 관문關文(공문서)을 이르던 말.
  136. 136)용허龍虎 : 풍수지리에서 왼쪽과 오른쪽 지형을 이르는 말.
  137. 137)금양禁養 : 특정 지역의 산림에서 수목의 벌채, 분묘墳墓의 설치, 농지農地의 개간, 토석土石의 채취 등을 금지하고, 특히 소나무의 재식栽植과 육성에 힘쓰는 것을 말함.
  138. 138)답험踏驗 : 세금이나 소작료를 제대로 거두기 위하여 논밭에 가서 실제로 농작물이 잘되고 못된 상황을 조사하는 일.
  139. 139)숭정崇禎 무자년(1648) : 숭정 연호 기간에 무자년은 없다. 1648년은 명나라 ‘영력永曆’ 또는 청나라 ‘순치順治’ 기간에 해당한다.
  140. 140)불향佛餉 : 불향은 대개 불향답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불향각佛香閣의 오기일 수 있다.
  141. 141)동상방東上房 : 남향南向 대청大廳 동쪽에 있는 큰 방. 여기서는 위의 ‘上室’과 같은 의미인 듯함.
  142. 142)상완上浣 : 상순上旬.
  143. 143)건륭乾隆 2년 무오년(1738) : 무오년은 건륭 3년에 해당하므로 착오가 있다.
  144. 144)화압花押 : 관직에 있는 사람이 문서에 도장 대신 붓으로 써서 나타내던 독특한 표지인 수결과 함자를 아울러 이르던 말.
  145. 145)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군사 기밀 따위를 맡아보던 밀직사의 으뜸 벼슬.
  146. 146)전첨서밀직사사상의前簽書密直司事商議 : 첨서는 밀직사의 정상품 벼슬, 상의商議는 재추의 관직 뒤에 붙여 그 관직과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147. 147)청주清州 : 함경남도 북청군.
  148. 148)해양海陽 : 함경북도 길주군.
  149. 149)잠저潛邸 : 나라를 새로 세웠거나 세자가 아닌 종실 가운데 즉위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기간을 일컫는 말.
  150. 150)초휘初諱 : 돌아가신 어른의 처음 이름.
  151. 151)내사內司 : 왕실 재정 관리를 맡아보는 관아.
  152. 152)모간摹刊 : 베껴서 기록함.
  153. 153)축문軸文 : 두루마리 글.
  154. 154)등석燈夕 : 사월 초파일, 관등절觀燈節이라고도 함.
  155. 155)의안대군義安大君 : 이성계의 서제庶弟 이화李和.
  156. 156)성고聖考 : 돌아가신 전 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숙종을 가리킴.
  157. 157)용잠龍潛 : 나라를 처음 이룩한 임금이나 종실에서 들어온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이르던 말.
  158. 158)별차別差 : 나라에서 특정한 임무를 위하여 특별히 파견하던 임시 관원.
  159. 159)치보馳報 : 지방에서 역마驛馬를 달려 중앙에 급히 보고하던 일.
  160. 160)명명明命 : 임금이 내리는 명령.
  161. 161)긍구肯構 : 『서경書經』「대고大誥」에 나오는 말로서 ‘조상의 유업을 잇는다’는 뜻.
  162. 162)유신維新 : ‘새롭다’는 뜻으로 『시경』「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나오는 구절.
  163. 163)긍구肯構 :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로, 『서경』「대고大誥」에,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 한 대목에서 온 말.
  164. 164)갱장羹墻을 사모함 : 선왕先王을 사모함. 『후한서後漢書』「이고전李固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 하였다.
  165. 165)이 글은 『홍재전서』 권15에도 실려 있다.
  166. 166)해조海潮 : 중생이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함에 대하여 관세음보살이 때를 가리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을 파도소리에 비유한다.
  167. 167)기원祗園 : 기원정사祗園精舍의 준말. 옛날 중인도 마가다 사위성舍衛城 남쪽에 있던 절. 석가모니의 수도와 설법을 위해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세웠다.
  168. 168)지제支提 : caitya의 음사. 신성한 것으로 여겨 공양하고 숭배하는 나무ㆍ탑ㆍ당堂 등을 말함. 원래 부처의 유골을 안치하고 일정한 형식에 따라 흙ㆍ벽돌ㆍ나무ㆍ돌 따위를 높게 쌓은 구조물을 탑이라 하고, 그것을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라고 하였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 함.
  169. 169)정토(琉璃) : 유리광세계琉璃光世界. 약사여래가 그곳에서 중생들의 질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170. 170)지극한 ~ 같다 : 원문 ‘至誠如神’은 『중용』의 구절.
  171. 171)군지軍持 : kundikā. 승려들 가지고 있는 물병.
  172. 172)녹낭漉囊 : 비구육물比丘六物의 하나. 물을 걸러 벌레를 제거하는 주머니.
  173. 173)인목仁穆ㆍ인원仁元 :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 인원왕후는 숙종의 계비.
  174. 174)세 번의 무신년 : 인목왕후는 1608년, 인원왕후는 1728년, 효의왕후는 1788년이 된다.
  175. 175)나계螺髻 : 트레머리. 부처의 상호 가운데 하나. 여기서는 부처를 가리킴.
  176. 176)기약 ~ 같도다 : 원문 ‘如幾如式’은 『시경』「小雅」 ≺초자楚茨≻의 구절. 『논어』「子路」에 인용됨.
  177. 177)수미須彌 :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 이 산 꼭대기에 제석천이 있다. 여기서는 불교의 신명들을 말함.
  178. 178)옥호玉毫와 금속金粟 : 옥호는 부처 미간에 있는 흰 털. 금속은 금속여래金粟如來의 준말로 곧 부처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옥호와 대응하는 표현으로 사용함.
  179. 179)계주戒珠 : 계를 구슬에 비유하는 말. 계율을 잘 지키게 되면 청정 결백하여 사람을 향기롭게 장엄하는 까닭에 구슬에 비유해서 계주라 한다.
  180. 180)적현赤縣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중원中原을 ‘신주적현神州赤縣’이라고 일컬은 데에서 유래하여 대개 ‘중국’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극락세계’를 뜻하는 듯하다.
  181. 181)찰해剎海 : 수륙水陸. 찰刹은 범어梵語로 토지를 말함.
  182. 182)삼승三乘 : 승乘은 짐을 싣는 수레로 부처님의 중생을 태우고 깨달음의 경지로 간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으며,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3승이 있다.
  183. 183)소문昭文 : 가야금의 명인으로 『장자』「제물론」에 나옴. 소문이 연주를 하면 성成과 휴虧가 있으나 연주를 하지 않으면 성과 휴가 아예 없어진다고 하였다.
  184. 184)증점曾點 : 공자 제자. 공자의 제자들이 각자 하고 싶은 일을 말할 때, 증점이 비파를 타다가 쟁그렁 소리가 나게 놓고는 일어나서, 늦봄 무렵에 봄옷이 마련되면 어른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다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논어論語』「선진先進」.
  185. 185)용잠龍潛 : 제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때. 『주역周易』「건괘乾卦」의 ‘잠룡潛龍’에서 나온 말.
  186. 186)도계道啓 : 각 도의 관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 또는 그와 관련한 문서를 뜻함.
  187. 187)내사內司 : 내수사內需司. 궁중에서 쓰는 쌀, 베, 잡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
  188. 188)폐사陛辭 : 신하가 임금을 뵙고 임지任地로 가는 인사말을 드리는 일.
  189. 189)온륜溫綸 : 임금이 내린 온화한 말씀.
  190. 190)내탕전內帑錢 : 내탕고에 넣어 두고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
  191. 191)패상沛上 : 한 고조의 고향. 여기서는 함흥을 가리킴.
  192. 192)화재 나니 : 원문 ‘投’는 미상인데 문맥에 따라 풀이했다.
  193. 193)김병지金炳地 : 1830~1888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는 백령伯靈. 할아버지는 김조순金祖淳이며, 아버지는 김원근金元根이다. 1854년(철종 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갔다. 1878년 12월에 함경도감사가 되었다. 함경감사로 있는 동안 개항장이 된 덕원부德源府의 원산항문제를 덕원부사 김기수金綺秀와 함께 조정에 일일이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때 김병지가 올린 장계에는 덕원부 원산항 개항을 전후하여 일본 상인 및 거류민들에 의해 빚어지는 경제적 침투과정이 드러나 있다. 1881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194. 194)앞의「만덕산 복흥사 사적기 萬德山福興寺事蹟記」 참조.
  195. 195)칠보七寶 : 금ㆍ은ㆍ유리ㆍ파리玻璃ㆍ차거硨磲ㆍ적주赤珠ㆍ마노瑪瑙. 금속 등의 재료에 유리질을 녹여 붙이는 과정을 거쳐 장식하는 공예를 가리키기도 함.
  196. 196)땅에서 ~ 것이다 : 『법화경』「견보탑품見寶塔品」에, 부처님 앞에 칠보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왔는데 오천 개의 난간과 무수한 당번幢幡 등으로 꾸며져 있다고 하였다.
  197. 197)보정국寶淨國 : 과거 동방 무량 천만억 아승기阿僧祇 세계에 있는 나라. 『묘법연화경』「견보탑품見寶塔品」 제11.
  198. 198)본원本願 : 부처님이 성불하기 전 보살행을 닦을 때 발한 서원.
  199. 199)5백 보명제자普明弟子 : 『법화경』「오백제자수기품」에, 5백의 아라한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어 똑같이 이름을 ‘보명普明’이라 할 것이라 했다.
  200. 200)유사流沙 : 중국 서쪽의 사막.
  201. 201)한해瀚海 : 고비사막 또는 내몽고의 호수 호륜호呼倫湖라는 의견이 있음.
  202. 202)이성현利城縣 : 함남 이원利原.
  203. 203)팔금강八金剛 : 『금강경』을 수지受持ㆍ독송讀誦 하려 할 때 마음을 다하여 부르면 어디서든 호위해 준다는 호법신.
  204. 204)물소리가 ~ 것이리라 : 양천梁泉의 ‘양梁’을 ‘양凉’의 의미로 보는 것임.
  205. 205)칠보산 : 함경북도 명천군 상고면에 있는 산.
  206. 206)전패殿牌 : 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殿’ 자를 새긴 나무패.
  207. 207)반룡산 : 덕원부 서쪽 15리에 위치. 서남쪽으로 수십 리에 걸쳐 있는 큰 산. 같은 이름의 산이 함흥과 고원에도 있다. 『덕원부읍지』(규장각 소장)
  208. 208)호광毫光 : 백호광白毫光. 부처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에서 나오는 밝은 빛.
  209. 209)덕원부德源府 : 현재는 강원도 원산시 일대에 해당함.
  210. 210)면구眠狗 : ‘졸고 있는 개’라는 뜻의 풍수 용어.
  211. 211)의춘宜春 : 덕원부에 속한 군郡.
  212. 212)속고산束高山 : 해발 721m. 덕원부 북쪽 27리에 위치. 반룡산 북쪽. 매우 높아서 사방 경치가 다 보여 ‘만경대萬景臺’로 불림. 『덕원부읍지』(규장각 소장)
  213. 213)수초守初 : 1590~1668년. 호는 취미翠微. 자는 태혼太昏. 1606년 두류산의 선수善脩를 찾아가 그의 천거로 각성覺性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2년 이후에는 오도사悟道寺와 설봉사雪峯寺 등에서 강설하였다. 유학에도 통달하여 김육金堉과 이식李植 등 당시의 유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14. 214)내맥來脉 : 내룡來龍과 같은 의미. 혈장穴場으로 들어오는 본신용本身龍으로, 혈장에 지기를 공급한다고 한다.
  215. 215)목조대왕穆祖大王 :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216. 216)익조대왕翼祖大王 : 조선 태조의 증조부인 이행리李行里.
  217. 217)도조대왕度祖大王 : 조선 태조의 조부인 이춘李椿.
  218. 218)성공聖供 : 부처님께 음식을 바침.
  219. 219)설암당雪岩堂 : 설암 추붕雪巖秋鵬. 1651-1706년. 시문에 능하여 탈속한 선시를 많이 남겼다. 제방을 순력하다가 묘향산 보현사에 머물며 월저 도안月渚道安의 문하에서 10여년 간 수학한 후 그의 법을 이었다.
  220. 220)언기彥機 : 호는 편양鞭羊. 1581~1644년. 서산 대사 문하 편양파鞭羊派의 개조. 금강산 천덕사, 구룡산 대승사, 묘향산 천수암 등에서 개강 설교했으며 묘향산 내원암에서 입적했다. 문도들이 화장한 후, 영골을 묘향산과 금강산에 석종石鐘을 세워 안치하였고, 또 두 곳에 비를 세웠는데 금강산의 비문은 이명한李明漢이, 묘향산의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221. 221)경인년 : 옹정雍正 기간(1723~1735)에는 경인년이 없다. 경술년은 1730년이다.
  222. 222)이 글은 문맥이 잘 통하지 않거나 미상인 곳이 많음.
  223. 223)복흥福興 : 전북 순창.
  224. 224)감사監寺 : 절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
  225. 225)황금 모래의 도량 :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가리키는 듯함. 코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위성舍衛城(슈라바스티)의 수달다須達多(Sudatta) 장자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그는 정사를 짓기 위해 동산을 뒤덮을 만큼의 금을 주고서 코살라국 기타祇陀(jetṛ) 태자의 동산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그의 신심에 감동한 기타 태자가 동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함께 정사를 건립하였다.
  226. 226)갑오년 :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는 갑오년이 없고 영력永曆 갑오년은 1654년이다.
  227. 227)불향佛餉 : 부처님께 공양하는 쌀.
  228. 228)기미년 : 강희 8년은 기유년(1669)이고 기미년은 강희 18년(1679)이다.
  229. 229)한 명제漢明帝 : 후한의 황제(재위, 57~75년). 광무제光武帝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나라 회복 사업을 공고히 했다. 일찍이 낭중郎中 채음蔡愔 등을 천축天竺에 보내 불법佛法을 구했고, 채음과 사문沙門 섭마등攝摩騰, 축법란竺法蘭 등을 낙양에 오게 하여 백마사白馬寺를 세우고, 두 스님에게 『42장경章經』을 편역하게 하면서, 중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되도록 했다.
  230. 230)제나라ㆍ양나라 : 한나라 때 전래된 불교는 위진魏晉 시대에 점차 뿌리를 내리고 제량齊梁 시대에 이르러 극도의 번영을 구가했다. 양무제는 동태사同泰寺를 창건하고 막대한 재물을 보시하여 나라 재정이 궁핍해지기도 했다.
  231. 231)섬부주贍部洲 : 수미산 남쪽 해상에 있다는 대륙. 여기서는 조선을 가리킴.
  232. 232)도솔천(兜史天) : 욕계 6천 중의 제4천. 미륵보살이 머무는 내원과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외원으로 구성된 천상의 정토를 가리키는 이상세계. 지족천. 범어 Tusita의 음역.
  233. 233)닿을 수 있으니 : 원문은 ‘寧衡’으로 정확한 의미는 미상이나 문맥상 풀이하였다.
  234. 234)사시巳時 : 오전 9시~11시.
  235. 235)까마귀 ~ 달림에 : 해가 가고 달이 감 즉 시간이 흐름을 뜻함.
  236. 236)개사開士 : 승려에 대한 존칭.
  237. 237)원회元會 :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나오는 용어로, 30년이 1세世, 12세가 1운運, 30운이 1회會, 12회가 1원元이다.
  238. 238)사문寺門 : 절의 문이라는 뜻인데 절 전체를 가리키기도 함.
  239. 239)신우辛禑 : 고려 32대 임금인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이라 하여 이르는 말.
  240. 240)오백성재五百聖齋 : 오백나한에 대한 공양.
  241. 241)서산西山 노석老釋 : 서산 대사 휴정休靜. 1520-1604년. 완산 최씨.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평안도 안주 출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242. 242)한 마리 나귀를 논하던 이야기 : 조주趙州와 그의 어린 제자 문원文遠이 호떡 내기를 했다. 상대보다 더 못난이가 되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내기의 조건을 정하고, 잘난 편을 차지하는 사람이 진 대가로 호떡을 사기로 약속을 정했다. 조주가 먼저 “나는 한 마리 나귀다(我是一頭驢)”라고 하자 문원이 “저는 나귀의 위장입니다”라고 응수했다. “나는 나귀의 똥이다.” “저는 그 똥 속에서 사는 벌레입니다.” “너는 그 속에서 무얼 하느냐?” “저는 그 속에서 하안거를 보냅니다.” “호떡을 가지고 오너라.”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권46.
  243. 243)부도浮圖 : 승탑僧塔. 부도浮屠라고도 함.
  244. 244)아만심我慢心 : 자기에 집착하여 마음이 거만해지는 것.
  245. 245)태봉泰封 : 신라 말기, 궁예가 송악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
  246. 246)5백 년 :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지속되었다.
  247. 247)굉연宏演 : 호는 죽간竹磵, 자는 무설無說이다. 나옹 혜근懶翁惠勤의 제자이며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5대 주지를 지냈다.
  248. 248)신돈辛旽 : 고려 말기의 승려. ?-1371년. 자는 요공耀空. 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국정을 장악하고, 전제田制 개혁과 노비 해방 따위의 개혁 정책을 폈으나, 상층 계급의 반발로 실패하였으며, 후에 왕의 시해를 음모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249. 249)이 글을 포함하여 아래 어제御製들은 앞(석왕사 사적비)에도 실려 있다.
  250. 250)청주清州 : 함경남도 북청군.
  251. 251)해양海陽 : 함경북도 길주군.
  252. 252)등석燈夕 : 관등절. 음력 4월 8일.
  253. 253)의안대군義安大君 : 이화李和의 봉호. 이성계의 서제庶弟.
  254. 254)이 글은 함월 해원涵月海源(1691~1770)의 문집 『천경집天鏡集』에「釋王寺事蹟後跋」이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255. 255)획급畫給 : 정해진 수량대로 다 주지 않고 갈라서 다른 사람이나 관아에 나누어 줌.
  256. 256)절수折授 : 토지나 전결세田結稅를 나누어 줌.
  257. 257)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의 연호. 1436-1449년.
  258. 258)벽암 각성碧岩覺性 : 1575-1660년. 충북 보은 출생. 9세에 아버지를 잃자 10세에 화산華山에 들어가 설묵雪默을 스승으로 공부했고,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후 경전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선수善修가 화산에 들어오자 그의 제자로 속리산 등에서 수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海戰에 참가하였다.
  259. 259)숙종 ~ 청하였다 : 이 부분은 『천경집』에는 없다.
  260. 260)함월 해원涵月海源 : 1691-1770년. 전주 이씨. 자는 천경天鏡, 호는 함월涵月. 함경남도 함흥 출신. 14세 때 도창사道昌寺에서 삭발, 출가하였고, 영지英智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지안志安 대사에게 종문宗門의 깊은 이치를 얻어 법맥을 이었다. 그의 행적은 주로 남쪽 지방에 미쳤고, 법을 이은 제자로는 성규聖奎과 궤홍軌泓 등 24인이 있다. 제자들이 석왕사에 탑을 세우고, 화엄대회의 도량인 대둔산大芚山에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의 글을 받아 비를 세웠다.
  261. 261)풍패豐沛 : 제왕의 고향. 여기서는 함흥을 가리킴.
  262. 262)백운산 : 함경남도 함주군 친서면 신흥리의 산.
  263. 263)만력萬歷 : 1573-1615년.
  264. 264)덕사德師 : 훌륭한 스승.
  265. 265)김이양金履陽 : 1755-1845년.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 확립에 힘쓰는 한편 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266. 266)귀룡龜龍이 계중繫衆한 : 하도낙서河圖洛書. 계중繫衆은 점들의 연결을 가리키는 듯함. 하도는 황하에서 출현한 용마의 등에, 낙서는 낙수에서 출현한 신귀神龜의 등에 적혀 있었다고 함.
  267. 267)전등傳燈 : 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말로, 법맥을 받아 전하는 것을 이르는 말.
  268. 268)귀서龜筮 : 점을 쳐서 그 일의 길흉을 가리는 것.
  269. 269)급고독 :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舍衛城의 수달다(Sudatta) 장자.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그는 정사를 짓기 위해 동산을 뒤덮을 만큼의 금을 주고서 기타 태자의 동산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그의 신심에 감동한 기타 태자가 동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함께 정사를 건립하였다.
  270. 270)도국都局 : 음양설에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땅의 형국을 나타내는 말.
  271. 271)여러 ~ 생겨나므로 : 원문은 ‘普觀象生’. 문맥상 ‘보문시현普門示現’ 즉 관음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남을 가리키는 듯함.
  272. 272)도감都監 : 절에서 돈이나 곡식을 관리하는 일.
  273. 273)용잠龍潛 : 잠저潛邸. 왕이 즉위하기 전의 시기.
  274. 274)오월吳越 : 중국 남쪽 지역인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가리킴.
  275. 275)규장奎章 : 임금이 쓴 글씨.
  276. 276)손으로 ~ 못하리 : 이 시는 『동인시화東人詩話』, 『열성어제』 등에 전한다.
  277. 277)장정長亭 : 10리. 노정路程을 표시하기 위해 5리에 있는 것을 단정短亭, 10리에 있는 것을 장정長亭이라 함.
  278. 278)갱장羹墻 :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羹)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이고전李固傳」.
  279. 279)이련李璉 : 1431-1463년.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서자. 시호는 충성忠成, 자는 광지光之.
  280. 280)산성 : 백운산고성白雲山古城. 함흥부 서쪽 63리 지점에 있다. 석축으로 그 주위가 1만 4천 5백 73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함흥부」편에 전한다.
  281. 281)침랑寢郎 : 능과 원의 영令 및 참봉.
  282. 282)박영주朴永胄 : 1804년 생. 함흥에 거주. 헌종憲宗 6년(18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에 2등으로 합격.
  283. 283)처음 ~ 윤색한 : 이 구절은 『논어』「憲問」의 표현을 차용하였다.
  284. 284)우수雨水 : 양력 2월 19일 또는 20일, 음력으로는 정월 중기.
  285. 285)천불산 : 함경남도 신흥군 서고천면과 원평면에 걸쳐 있는 산.
  286. 286)멀리서 ~ 않은가 : 이 구절은 『논어』「學而」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차용하였다.
  287. 287)조성한 사람이 : 이 문장은 의미가 모호하다.
  288. 288)강구康衢 : 큰 거리. 요堯 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천하가 잘 다스려지는지 알 수 없어, 친히 미복 차림으로 강구에 나가서 들어보니, 백성들의 모두 태평을 구가했다고 한다.
  289. 289)격양가擊壤歌 : 태평성대를 구가한 요 임금 때 노인이 땅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불렀다는 노래.
  290. 290)남훈전南薰殿 : 순 임금이 오현금을 타며 남풍곡南風曲을 불렀다는 장소.
  291. 291)위수 ~ 만나니 :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던 여상呂尙 강태공을 문왕이 만나 의기투합하였다.
  292. 292)세 ~ 드리니 :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주공周公이 섭정하여 천하가 태평해지자, 월상씨越裳氏가 와서 주공에게 ‘흰 꿩’을 바치며 “우리나라 노인들이 말하기를 ‘하늘에 풍우가 거세지 않고 바다에 해일이 일지 않은 지 지금 3년이 되었다. 아마도 중국에 성인이 계신 듯한데, 어찌하여 가서 조회하지 않는가.(天之不迅風疾雨也, 海不波溢也, 三年於玆矣. 意者中國殆有聖人, 盍往朝之.)’라고 하기에 조공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였다는 말이 『한시외전韓詩外傳』 권5에 나온다. 월상씨는 교지交趾의 남쪽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293. 293)성숙겁成熱劫 : 성수겁星宿劫. 미래의 1대겁을 말함.
  294. 294)현겁賢劫 : 현재의 1대겁大劫으로, 이 기간에 수많은 현인들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일컬음.
  295. 295)소림굴 ~ 마음을 : 혜가慧可는 40세에 소림사에서 보리달마를 만나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대사는 오로지 벽을 마주하고 수행하며 외면했다. 큰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눈 속에 서서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안심安心 문답’을 계기로 혜가는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그래,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마음이 심히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다는 그 마음을 어디 가져와 보라.” “찾아보니 없습니다.” “됐다. 그대 마음은 편안해졌다.” 이렇게 하여 보리달마를 6년 동안 받들었으며 『능가경』과 전법의 증표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가사인 신의信衣를 받았다.
  296. 296)지공指空 : 인도 스님. 본명은 제납박다提納薄陀(dhyāna-bhadra). 인도 마갈타국 왕족 태생으로 8세에 출가, 19세에 남인도 길상산吉祥山 보명普明(samanta-prabhāsa)을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아 서천西天 제108조祖가 되고, 호號를 지공指空(śūnyā-diśya)이라 함. 사자국師子國에 갔다가 북쪽으로 편력하여 서역을 거쳐 1324년경에 원 나라 연경燕京에 도착함. 1326년(충숙왕 13)에 고려에 와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주처住處라고 하는 금강산에 예배하고 숭복사崇福寺에 머무름. 이후 원나라로 돌아가 입적함. 1372년(공민왕 21)에 그의 사리 일부가 고려에 전해 오니, 왕명으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부도를 세움.
  297. 297)오역십악五逆十惡 : 오역죄는 오무간업五無間業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 말한 다섯 가지의 역적 중죄를 말한다. 오역죄는 소승과 대승에서 말하는 것이 다른데 대승의 오역죄는 ① 탑과 절을 파괴하고 경전과 불상을 불태우며 삼보의 물건을 훔치고 혹은 그와 같은 일을 남에게 시키거나 그런 행위를 보고 기뻐하는 것. ② 성문, 연각, 대승의 법을 비방하는 것. ③ 출가자를 비방하고 혹은 그를 죽이는 것. ④ 소승의 오역죄중 하나를 범하는 것. ⑤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고 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열 가지의 악업을 짓는 것이다. 십악은 ① 산목숨을 죽이는 것(殺生). ②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偸盜). ③ 배우자 아닌 이를 간음하는 것(邪婬). ④ 거짓말을 하는 것(妄語). ⑤ 쓸데없는 달콤한 말을 하는 것(綺語). ⑥ 이간하는 말을 하는 것(兩舌). ⑦ 험악한 말을 하는 것(惡口). ⑧ 탐욕貪慾. ⑨ 성을 내는 것(瞋恚). ⑩ 삿된 소견을 지니는 것(邪見).
  298. 298)무성천제無性闡提 : 범어 icchantika. 부처가 될 바탕이 전혀 없는 사람. 천제는 음역, 무성은 의역. 무종성無種性이라고도 함.
  299. 299)백악연천白岳連天 : 흰 산이 하늘에 닿도록 높다.
  300. 300)공 ~ 생겨난다 : 『능엄경』 권6의 구절.
  301. 301)공화空花 : 공중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의 실례의 하나. 눈병을 앓는 사람이 착각으로 공중에 꽃이 있다고 보는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관념 위에 그려내는 것.
  302. 302)악양루岳陽樓의 범희문范希文 : 악양루는 악주岳州 파릉현巴陵縣 성문의 서쪽 누대를 말하고, 희문希文은 북송의 정치가 범중엄范仲淹(989-1052년)의 자. 범중엄의 친구 등종량이 좌천되어 악주를 다스리고 있을 때 그곳의 명소인 악양루를 수리하고 이를 기념하는 글을 부탁하자, 범중엄이 친구를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악양루기」를 써주었다. 범중엄은「악양루기」에서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후에 즐긴다.”라는 글을 남겼다.
  303. 303)다라니 ~ 장엄莊嚴하는 : 이 부분은 『법성게法性偈』의 구절이다.
  304. 304)칠처산七處山 구회사九會寺 :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7장소에서 9번 설법을 하셨다고 한다.
  305. 305)36궁宮 : 36궁에 대해서는 해설이 많은데, 송나라 소자邵子의 경우는 64괘 중에서 반역反易하지 않는 건, 곤, 감, 이, 이頤, 대과大過, 중부中孚, 소과小過 등 8괘를 제외하면 반역하는 것은 모두 56괘이니, 그것을 반씩 마주 대하게 하면 28괘가 되고 다시 거기에 반역하지 않는 8괘를 더하면 모두 36궁이 된다고 함. 『갈암집葛庵集』 참조.
  306. 306)서계書契 : 문자. 특히 은대殷代에 대나무ㆍ귀갑 따위에 새긴 문자를 가리킴.
  307. 307)우순虞舜 : 순임금. 성은 우虞ㆍ유우有虞. 이름은 중화重華. 요堯의 뒤를 이어 천하를 잘 다스려 태평 시대를 이루었다.
  308. 308)선기옥형璿璣玉衡 : 천문을 살펴볼 수 있는 천문시계. 혼천의渾天儀.
  309. 309)오회午會 : 우주의 여름.
  310. 310)가비라국伽毘羅國 :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현재 네팔의 남부 타라이Tarai 지방.
  311. 311)정반왕淨飯王 : 기원전 6세기 인물. Suddhodana. 백정왕白淨王, 진정왕真淨王이라고도 함. 사자협왕의 장자로서 석가모니의 생모인 마야 부인을 왕비로 두었으나,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자 그녀의 동생인 마하파자파티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312. 312)비람원毘藍園 : 룸비니원藍毘尼園. 가비라성 룸비니원의 준말. 가비라성 동쪽에 위치. 현재 네팔의 남부 타라이 서부.
  313. 313)무수無憂樹 : 석가의 어머니가 이 나무 아래서 석가를 안산하여 근심할 것이 없었다는 데서 생긴 보리수의 별칭.
  314. 314)별처럼 ~ 떨어졌다 : 이 구절은 『화엄경』「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나온다.
  315. 315)유동儒童 : 마납박가摩納縛迦(māṇava)의 번역. 정행淨行을 닦는 젊은 보살. 석존의 전생에서 보살일 때의 명칭.
  316. 316)노자의 ~ 도왔다 : 이 문장을 『열국지』에서 찾을 수는 없고, 노자와 공자 그리고 장자 대신 안회에 대해 『조천진경造天地經』이나 『청정법행경清靜法行經』 등에 언급되었다고, 송나라 나필羅泌의 『노사路史』에 보인다. “釋有所謂造天地經云, 寶厯菩薩, 下生世間, 號曰伏羲, 吉祥菩薩下生世間, 號曰女媧, 摩訶迦葉, 號曰老子, 儒童菩薩, 號曰孔丘, 復有清靜法行經云, 迦葉往為老子 淨光童子往為孔丘 又遣月明儒童往為顔回 三弟子者 出生其國.”
  317. 317)주세불主世佛 : 한 시대를 책임지고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
  318. 318)20증감겁增減劫 : 주겁住劫에 20증감겁이 있다. 겁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며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증감겁이라 한다. 증감겁은 인간 수명에 따른 정의인데 수명은 10세에서 8만 세까지 8만 세에서 10세까지 백 년에 한 살씩 증 또는 감한다고 한다. 제1겁劫은 감겁減劫, 뒤의 제20겁劫은 증겁增劫. 중간의 18劫은 증감겁增減劫.
  319. 319)주봉主峯 : 주인봉. 그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
  320. 320)충살沖殺 : 충돌하는 기운.
  321. 321)오회五會 : 인체 머리 꼭대기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의 다른 이름.
  322. 322)수구水口 : 한 지역의 하부에 있는 강이나 개천 등의 물이 흘러가는 지점.
  323. 323)생극生克 : 오행의 상생상극.
  324. 324)구성九星 : 북두칠성과 좌우에 있는 좌보성左輔星과 우필성右弼星을 합하여 모두 9개의 별을 말하는데 길흉화복에 관여한다.
  325. 325)팔문八門 : 팔택八宅인 듯함. 팔택은 생기生氣, 오귀五鬼, 연년延年, 육살六煞, 화해禍害, 천을天乙, 절명絶命, 복위伏位. 주택의 길흉 판단에 이용되는 가상家相 이론.
  326. 326)육근六根과 육진六塵 : 육근은 지각기관인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육진은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327. 327)포산布筭 : 산대(筭)를 배열하여 숫자를 계산하는 일.
  328. 328)현무玄武ㆍ주작朱雀 : 현무는 북방의 주산主山, 주작은 남방의 주산.
  329. 329)조종朝從 : 조종祖宗과 대비되는 풍수 용어.
  330. 330)주자朱子 : 1130-1200년. 남송南宋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주자학朱子學을 완성함.
  331. 331)삭일朔日 : 음력 매월 초하루.
  332. 332)묘시 정2각 : 1653년 이후로 1시는 8각, 1각은 15분으로 하고 매시를 2등분하여 초初와 정正으로 나누었다. 매시를 初初刻에서 시작하여 초1각에서 초3각까지 그리고 정초각, 정1각에서 정3각으로 나눈다. 묘시는 오전 5시에서 7시까지이고 정2각은 오전 6시 30분에서 45분까지이다.
  333. 333)안산案山 : 풍수지리에서 가택이나 묘택이 있는 혈 맞은편의 낮고 작은 산.
  334. 334)뜻~이룬다 : 『후한서後漢書』「경엄전耿弇傳」에 광무제가 경엄을 칭찬한 말.
  335. 335)신라왕이 즉위한 원년 : 박혁거세는 한 선제 갑자년 B.C. 57년에 즉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본문과는 차이가 있다.
  336. 336)무오년~원년 : 한 명제가 즉위한 것은 57년이지만 첫 연호 영평永平 1년은 무오년 58년이다.
  337. 337)풍습風濕 : 습한 땅에서 사는 까닭에 습기를 받아서 뼈마디가 저리고 아픈 병.
  338. 338)마치 ~ 같다 : 원문 ‘猶彼芥瓶’은 청량 징관淸凉澄觀이 지은 『大方廣佛華嚴經疏』 권1에 나옴.
  339. 339)빈 ~ 같다 : 원문 ‘等虛室之千燈’은 『大方廣佛華嚴經疏』 권1에 나옴.
  340. 340)구름이 ~ 같다 : 원문 ‘如雲起長空’은 『大方廣佛華嚴經疏』 권1에 나옴.
  341. 341)불정佛頂 : 부처의 정수리가 마치 상투 모양처럼 된 것. 최고의 불지佛智를 일컫는 말.
  342. 342)사물은 ~ 신령스러움이니 : 이 부분은 왕발王勃의「등왕각서滕王閣序」 “물건의 정화는 천연의 보배이니 용천검의 광채가 우성 두성의 자리를 쏘아 비추고, 사람이 걸출함은 땅이 영수하기 때문이니 서유가 진번의 걸상을 내려놓게 했다.(物華天寶, 龍光射牛斗之墟, 人傑地靈, 徐孺下陳蕃之榻.)” 부분을 차용한 것이다.
  343. 343)임제臨濟 : ?-867년. 당나라 때의 선승으로 임제종의 개조. 속성은 형邢씨, 이름은 의현義玄, 임제는 법호, 시호는 혜조慧照. 임제종은 중국 오가五家 선종의 하나로 종풍을 크게 떨쳤다.
  344. 344)아침에 ~ 닫는다 : 원문 ‘朝愛青山捲箔早, 夜憐明月閉窓遲’는 『백련초해百聯抄解』의 구절.
  345. 345)가섭마등과 축법란 : 가섭마등迦葉摩騰(Kyapa-mtaga)과 축법란竺法蘭은 1세기 인도의 승려로서 중국에 불법을 최초로 전하고 불경을 번역하였다.
  346. 346)임오년 : 나옹 화상의 생몰년(1320~1376)을 기준으로 하면 임오년은 1342년인데 본문의 전후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347. 347)약수弱水 : 신선이 산다는 봉래도蓬萊島에서 약 30만 리쯤 떨어져 인간 세상과 신선 세계를 격리시키고 있다는 전설 속의 물 이름이다. 『太平廣記』「神仙」.
  348. 348)송 고종 34년 : 남송 고종은 32년까지 재위하였고 신사년은 31년에 해당하니 본문은 착오가 있다.
  349. 349)덕안능德安陵 : 조선 태조의 고조부 목조穆祖와 그 부인을 모신
  350. 350)정화능定和陵 : 조선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인 정릉定陵과 태조의 어머니 의혜 왕후懿惠王后의 능인 화릉和陵.
  351. 351)사판事判 :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
  352. 352)이판理判 : 수행에 전념함.
  353. 353)목국木局 : 해亥ㆍ묘卯ㆍ미未. 목의 기운은 해에서 출생하고 묘에서 왕성해지며 미에서 사망한다고 한다.
  354. 354)토국土局 : 인寅ㆍ오午ㆍ술戌
  355. 355)뇌고牢固 : 튼튼하고 단단함. 시기에 따라 5종 뇌고牢固가 있다.
  356. 356)5종 뇌고牢固 : 불법의 흐름을 시대에 따라 나눈 양상. 『월장경藏經』에서 석가모니 입적 후에 처음 5백 세歲는 해탈이 뇌고하고, 둘째 5백 세는 선정이 뇌고하며, 셋째 5백 세는 다문多聞이 뇌고하며, 넷째 5백 세는 탑사가 뇌고하며, 다섯째 5백 세는 투쟁이 뇌고하리라고 예언하였다.
  357. 357)함경도 ~ 세워졌다 : 함경도는 1413년(태종 13) 관내에 영흥과 길주가 있다 하여 영길도永吉道라 하였고, 1416년에 영흥을 강등하고 함주를 승격하여 함흥부咸興府라 하였다. 관찰사 본영本營을 함흥에 두고 함길도咸吉道로 고쳤다. 이시애의 난 때 부인府人이 관찰사를 살해한 탓에 1470년(성종 1)에 함흥을 강등하고 본영을 영흥으로 옮겨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가 중종 4년(1509)에 복구시켰다. 본문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괴리가 있다.
  358. 358)등국登國 : 임금의 자리에 오름.
  359. 359)정사년 : 홍치 14년은 신유년(1501)이고 정사년은 홍치 10년이니 괴리가 있다.
  360. 360)여자신呂自新 : 본관은 함양咸陽. 무과에 급제한 뒤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냈다. 1479년(성종 10) 병조참판이 되고, 1486년 영안남도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가 되어 변방의 방어에 전력, 큰 공을 세워 1490년 내직으로 공조참판ㆍ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기도ㆍ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1492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로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연산군 때 오위도총부도총관,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중종반정 후 병조와 형조판서를 지내며 많은 치적을 올렸다. 아들 여윤철呂允哲과 함께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361. 361)양릉兩陵 : 정화능定和陵과 덕안능德安陵.
  362. 362)이괄李适의 난 :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363. 363)서적西賊 : ‘관서 지역의 역적’이란 뜻으로 홍경래洪景來를 가리킴. 1811년 12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평안도에서 홍경래와 그의 무리가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364. 364)민정중閔鼎重 : 1628-1692년. 본관은 여흥으로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유중의 형으로 인현왕후의 백부이다.
  365. 365)남구만南九萬 : 1629-1711년.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남구만은 1671년 7월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1674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이 되었다. 그는 변방의 형세를 시찰하여 수만 언에 달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가 떠난 후에 주민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366. 366)6년 감사監使 : 미상. 남구만은 4년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냄.
  367. 367)이당규李堂揆 : 1625-1684년. 본관은 전주. 자는 기중基仲, 호는 퇴촌退村. 이당규는 1679년(숙종 5) 3월에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1680년 6월에 파직되었다.
  368. 368)홍만조洪萬朝 : 1645-1725년. 본관은 풍산.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좌참찬 등을 역임.
  369. 369)정계비定界碑 : 1712년에 청이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의 압록강과 토문강 물이 수원에서 갈라지는 곳에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건립하였다. 비석은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다. 이 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졌다
  370. 370)이선부李善溥 : 1646-1721년. 본관은 덕수. 자는 계천季泉, 호는 육송六松. 함경도관찰사, 경기감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
  371. 371)이창의李昌誼 : 1704-1772년. 본관은 전주. 자는 성방聖方. 세종의 아들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후손. 1759년 이조판서, 1763년 1월에 함경도관찰사를 맡았다가 1764년 10월에 체직되었고 이후 병조판서ㆍ경기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372. 372)서당보徐堂輔 : 1806-1883년. 본관은 대구. 자는 계긍季肯, 호는 다사茶史. 홍문관부응교, 동래부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 서당보는 1873년 12월에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876년 2월에 대사헌으로 체직되었다.
  373. 373)김유연金有淵 : 1819-1887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원약元若. 호는 약산藥山. 1844년(헌종 1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고, 1862년(철종 12) 이조참의ㆍ예방승지ㆍ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1864년(고종 3)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변경 방비 및 국경통상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처리하였다. 186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한성부판윤ㆍ대사헌ㆍ반송사(伴送使) 등을 거쳐 관북지방 안무사按撫使로 나가 많은 폐단을 바로잡는 데 공이 컸다. 1880년에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1882년까지 재직했다.
  374. 374)윤필侖弼 : 潤弼이나 尹弼로도 표기함. 원효ㆍ의상과 같은 시기에 수행한 이로 야사에만 전하는 인물.
  375. 375)나옹懶翁 : 1320-1376년. 고려 말기의 승려. 호는 나옹ㆍ강월헌江月軒.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 지공指空ㆍ무학無學과 함께 삼대화상三大和尙으로 불린다.
  376. 376)봉수鳳岫 : 봉황이 사는 산봉우리.
  377. 377)자장법사慈藏法師 : 590-658년. 신라의 대국통, 황룡사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 불도에 입문하는 자를 위해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았다.
  378. 378)애장왕哀莊王 :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0대(재위: 800-809) 왕. 802년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에 의해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였다. 애장왕이 팔만대장경을 당나라에서 얻어 번각해서 해인사에 보관했다는 전설이 있다.
  379. 379)십팔공十八公 : 송광사松廣寺 ‘松’의 파자. 송광사에서 18분의 국사가 나올 것이라고 풀이되는데 고려와 조선에서 16분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380. 380)홍진弘真 : 홍진국사弘眞國師 혜영惠永. 1228-1294년.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으로 받들어 모셔졌던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으로 1298년에 동화사를 크게 중창했다.
  381. 381)살아있는 관음이 있고 : 옛날 유구국琉球國의 태자가 표박漂泊하다가 잘못 능가사에 도착하였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7주야晝夜를 관음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자, 관음대사가 현신現身하여 그를 겨드랑이에 끼고 파도를 헤치며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절의 중이 관음상을 그려 놓았는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에 기재되어 있다.
  382. 382)하늘(性空) : 성공은 모든 현상의 본성에 대한 분별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하늘’로 해석했다.
  383. 383)구성팔문九星八門 : 점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태을구성太乙九星은 태을太乙, 섭제攝提, 헌원軒轅, 초요招搖, 천부天符, 청룡靑龍, 함지咸池, 태음太陰, 천을天乙을 말하고, 팔문은 생生ㆍ상傷ㆍ두杜ㆍ경驚ㆍ사死ㆍ경驚ㆍ개開ㆍ휴문休門이다.
  384. 384)또 하늘 위가 있고 : 이 부분은 원문에 없는데 문맥상 보완되어야 한다.
  385. 385)도리천忉利天 : ⓢ Trāyastriṃśa.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두 번째 하늘로, 수미산의 정상에 위치. 도리천의 천인들의 수명은 1000세이고, 도리천의 하루가 인간세상의 100년이다
  386. 386)야마천耶摩天 : ⓢ Suyāma. 욕계육천의 셋째 하늘. 여기서는 때를 알고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받아 수명은 2,000세이며 그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200년에 상당하다고 함.
  387. 387)도솔천兜率天 : ⓢ Tusita. 욕계육천의 넷째 하늘. 여기 내원內院은 장래 부처가 될 보살의 주거지로 일컬어지며, 석존도 예전에 여기에서 수행하고, 현재 미륵보살도 이곳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 천인天人의 수명은 4천년, 그 하루 밤낮이 인간계의 4백년에 해당한다고 한다.
  388. 388)보광마니향수해普光摩尼香水海 : 『화엄경』에 ‘수승위광장능지보광마니장엄향수해殊勝威光藏能持普光摩尼莊嚴香水海’가 나온다.
  389. 389)형제 ~ 다스린다 : 이 문장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나온다.
  390. 390)욕대관왕浴帶冠旺 : 목욕하여 띠를 두르고 관을 써서 뜻을 펼친다는 뜻으로 보임. 이 구절과 앞뒤 구절을 합친 ‘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이 祖臘의 十二方衰旺之說이라고 『성호사설』 권16에 기재되어 있다.
  391. 391)서계書契 : 사물을 나타내는 부호로서의 글자.  
  392. 392)유순由旬 : 고대 인도에서 이수를 잰 단위. 대유순(80리), 중유순(60리), 소유순(40리)의 3가지가 있다. 혹은 소달구지로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유순이라 하는데, 11~15km라는 설이 있다.
  393. 393)계사繫辭 : 『주역』 각 괘의 길흉을 서술한 괘사卦辭와 각 괘를 이루는 여섯 개의 효를 설명한 효사爻辭를 합친 것인데, 이하 인용문은 계사에 있지 않다.
  394. 394)한해瀚海 : 고비사막 또는 내몽고의 호수 호륜호呼倫湖라는 의견이 있음.
  395. 395)대막大漠 : 몽고 고원의 사막.
  396. 396)의무려醫巫閭 3산 : 의무려산은 중국 요령성遼寧省에 있는 산 이름. 순舜 임금이 십이산十二山을 봉할 때에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고, 산세가 6리를 덮으므로 육산六山이라고도 함. ‘3산’은 미상.
  397. 397)경절문經截門 : 간화경절문看話經截門. 화두를 들어 수행해 들어가는 방법. 문자나 언어를 떠나 수행의 지위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증과證果를 얻는 방법.
  398. 398)원돈문圓頓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원만한 화엄의 교리를 일순간에 깨달아 믿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수행법.
  399. 399)백납白衲 : 흰 장삼.
  400. 400)노방老龐 : 늙은 방온龐蘊. ?~808년. 방거사. 당나라 때의 재가 불자. 석두 희천石頭希遷을 찾아가 마음을 이해했고, 마조 도일馬祖道一을 만나 분명한 깨달음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401. 401)등등임운騰騰任運 : 등등은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고, 임운은 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무심하게 인연의 흐름에 맡겨 두는 것.
  402. 402)사나해회舍那海會 : 비로자나불의 모임. 해회는 바다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임을 가리킴.
  403. 403)만뢰萬籟 : 만물의 소리.
  404. 404)월지국月支國 : ‘월지月氏’라고도 하는 서역에 있던 왕국.
  405. 405)귀목침개龜木針芥 : 귀목은 맹귀우목盲龜遇木. 『아함경』에서 부처가 비구들에게 말하길, 바다에서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 씩 머리를 내미는데 이 때 물에 떠다니는, 구멍 하나 있는 나무의 구멍을 얻는 것을 말한다. 침개는 침개상투針芥相投. 땅 위에 가느다란 바늘 하나를 세워놓고 공중에서 겨자씨 하나를 떨어뜨려 바늘 끝에 꽂히게 하는 일.
  406. 406)다문뇌고多聞牢固 : 부처 입멸 이후 5백년을 단위로 하여 세 번째 시기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많은 기간.
  407. 407)제망帝網 : 인다라망因陀羅網. 제석천의 보망寶網. 도리천忉利天 천주天主의 궁전 곧 제석전帝釋殿의 보궁寶宮을 꾸미는데 쓰이는 나망羅網.
  408. 408)작은 ~ 같다 :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 구절.
  409. 409)복희伏羲와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 복희는 팔괘를 만들었고, 문왕은 괘사卦辭를, 주공은 효사爻辭를, 공자는 십익十翼을 붙여 『주역』을 완성했다.
  410. 410)사마司馬에 대한 양의楊意 : 전한前漢 무제武帝가「자허부子虛賦」를 읽은 후 그 지은이와 동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자, 이를 들은 양의가 지은이이자 자신의 벗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추천함.
  411. 411)백아伯牙에 대한 종자기鍾子期 :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때 백아는 거문고를 잘 연주했고 종자기는 백아의 연주를 잘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