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5_0141_a_01L법계도기총수록1) 상권의 1
045_0141_a_01L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一
045_0141_b_01L

찬자 미상
김호성 번역


【본문(本文)】2) 『일승법계도』3) 시(詩)와 하나의 인(印)을 합한 것이니, 54각(角)이고 210자(字)이다.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은 모남이 없어서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닌데, 미혹한 자는 자취만을 집착하여 체(體)를 잃어버리는 줄을 알지 못하니 부지런히 종(宗)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 그러므로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반시(盤詩)’4)를 지으니,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는 이름이 없는 참된 근원[眞源]으로 돌아가길 바라노라.
시를 읽는 방법은 마땅히 가운데의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돌고 굽히며 굽어져서 ‘불(佛)’자에 이르러 마치게 되니, ‘인의 길[印道]’을 따르면서 읽어야 한다.

法性圓融無二相。諸法不動本來寂。無名無相絕一切。證智所知非餘境。真性甚深極㣲妙。不守自性隨緣成。一中一切多中一。一即一切多即一。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無量遠刧即一念。一念即是無量劫。九世十世互相即。仍不雜亂隔別成。初發心時便正覺。生死涅槃相共和。理事冥然無分別。十佛普賢大人境。能仁海印三昧中繁出如意不思議。雨寶益生滿虛空。眾生隨器得利益。是故行者還本際。叵識妄想必不得。無緣善巧捉如意。歸家隨分得資糧。以陁羅尼無盡寶。莊嚴法界實寶殿。窮坐實際中道床。舊來不動名為佛。

【본문】 『일승법계도』……2백10자이다.5)
『대기(大記)』6) 이러한 일승법계도 등으로 지엄(智儼: 儼師, 602-668)의 5중해인(重海印)8)에 분배하면, 이른바 일승법계(一乘法界)는 망상해인(忘像海印)에 배대되고『기(記)』에서는 첫째 폭을 부정하면서 ‘이는 해석에 해당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9) ‘도(圖)’ 한 글자는 현상해인(現像海印)에 배대되니, 이른바 ‘도’는 형상[像]이다. 경에 이르기를, “곧 그 형상과 같이 신통력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며, 법장[藏師]이 해석하기를, “그 염하는 바와 같아서 위의 1백 24가지 질문과 아래로 제6 회상 이래로 설한 바 법문에 이르기까지10) 이 질문에 답하는 자가 모두 여래의 법계신 가운데서 원명(圓明)하지 않음이 없어서 몰록 그 형상을 나타낸다”(운운)라고 하였다. 아래 경에서는 “청정한 법신 중에는 어떠한 상(像)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이상)라고 하였는데, 이 글은 ‘안으로 깨침[內證]’과 ‘밖으로 교화함[外化]’에 통한다. 여기서는 안으로 깨침을 기준으로 하여 배대한 것이다.
‘합시일인(合詩一印)’은 부처님의 외향11)해인(外餉海印)에 배대한 것이니, 이른바 시(詩)는 보현의 기틀을 나타내는 것이고, 인(印)은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外向心]’을 나타내는 것이다.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인(印)이 보현의 큰 기틀의 ‘안으로 향하는 마음[內向心]’ 맨 앞[頭]에 그윽이 계합하기 때문이다.
‘54각(角)’은 보현입정관해인(普賢入定觀海印)에 배대되니, 이른바 보현의 내증(內證)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만일 불보현문(佛普賢門)을 기준으로 하면 보현의 입정(入定)은 다만 외향심인(外向心印)을 궁극적으로 증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에 첫째와 둘째의 해인12)을 통틀어서 증득하는 것이니, 보현이 안으로 향하면 곧 십불(十佛)이고, 십불이 밖으로 향하면 곧 보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기틀[機]에 나아가 구분 짓는 문’을 기준으로 하면 불외향에는 오직 증분(證分) 하나뿐이니, 아직 원만하지 못하기13) 때문이다. 지금은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이 정장정(淨藏定)14) 중의 5교(敎)15)와 나아가 무량승(無量乘)의 ‘근기와 성품의 설고 익음[根性生熟]’ 및 법계 모든 법의 두각(頭角)이 몰록 나타나기 때문이다.
‘210자’는 보현이 정에서 나와 마음 가운데 있음과 어언해인을 나타냄에 배대하니, 이른바 이 해인에서 5주인과(周因果)16) 등의 법을 나누어 보여 문자ㆍ언어를 시설하기 때문이다.
신림(神琳)17)의 뜻은18) ‘일승법계도’란 법계의 법은 소증(所證)이며, 금일 나의 마음은 능증(能證)이니, 곧 이 능소를 얻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일(一)이며, 능히 닦는 사람의 수행 위계[行位]를 ‘승(乘)’이라 이름하고, 이와 같은 부동의 궤칙의 분제가 이루어지므로 ‘법계’라 하는 것이다. 법계 법의 본위(本位)는 곧 우리 5척의 몸[五尺身]이니, 이 뜻을 보이고자 전(全)법계 한 몸의 형상[像]을 그리기 때문에 ‘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인 가운데 ‘반(盤)’은 삼승인 것이니, 이른바 일승의 평등한 가르침[平道敎]19) 중의 머무름 없는[無住] 본체를 등지고, 일념의 ‘생하지도 않고 둘도 아닌[不生不二]’ 곳에 집착[盤蟄]하며,20) 나아가 하나의 모습[一相]ㆍ하나의 자취[一跡] 중의 보불(報佛)의 과(果)에 집착하기 때문이다.21)
‘회(廻)’는 소승이니, 이른바 법공진여(法空眞如)가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인공(人空)의 이치에 집착함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굴(屈)은 인천(人天)이니, 이른바 출세간[出世]의 행덕(行德)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5계(戒)ㆍ8계의 인천의 업에 굴집(屈執)하기 때문이다. 곡(曲)은 3도(途: 3악도)이니, 이른바 인천의 행업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사견에 집착[曲執]하여 3도(途)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승 3도의 모양[相]을 그려 다하므로 ‘전법계(全法界) 한 몸의 형상을 그려 짓는다[畫作]’고 하는 것이다.
『법융대덕기(法融大德記)』22) ‘일승법계도’에 2중(重)의 가려내고 취함[簡取]이 있다. 첫째는 교분은 가려내고 오직 증분만 취함이니, 이른바 일승의 법은 증(證)ㆍ교(敎)에 통하지만 계(界)라고 말한 것은 교분을 가려낸 것이니, 증분은 일승법의 궁극적인 경지[究竟際]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직 삼승을 가려내고 일승의 증ㆍ교 두 분(分)을 통틀어 취함[通取]이니, 이른바 일승으로써 삼승을 가려내기 때문이다. 이 일승의 일(一)과 이 아래의 ‘시종(始終)을 떠난 하나의 붉은 인[一朱印]’은 지엄의 본말상생문 중의 일자인(一字印)과 아울러 한 뜻인 것이다. 대경(大經)의 첫머리에서 일자인을 살핀 것은 ‘1부(部)의 처음부터 끝까지 설해진 문문구구가 오직 일(一)을 나타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또한 『오권소(五卷疏)』23)에서는 ‘삿됨에 대하여 올바름을 나타내는[對邪現正]’ 곳에서 일자인을 살핀 것은 모든 법 가운데 만일 두 가지 견해[二解]를 낸다면 이는 삿됨[邪]이며, ‘법이 하나임’을 안다면 곧 이 바름[正]인 것이다. 이른바 만일 보살이 한 번의 성내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60문(門)24)의 보행(普行)이 백만 장애를 이룰 것이니, 진실로 성내는 마음은 ‘나와 남이 다르다고 집착하는[自他別執]’ 가운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두 가지 견해를 낸다면 이는 삿됨이다’라고 한 것이다. 만일 보살이 동체대비를 일으킨다면 백만 가지 장애 문25)이 60보행을 이루니, 이른바 3세간의 법이 바로 자기의 몸과 마음임을 보고 동체대비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법이 이 하나임을 안다면 곧 이 바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 『입법계품초(入法界品抄)』26)에서 일자인을 살핀 것은, 만일 모든 법이 둘이고 셋이라고 본다면 곧 8가지 근본죄(根本罪)를 범하여 일승법계에 들어가지 못하나, 만일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않으면 곧 일승법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도 또한 그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둘을 설명하는 것도 셋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니, 다만 요컨대 일(一)을 나타내기 때문일 뿐이다.27)
이른바 일(一)이라는 것은, 능소가 없는 가운데서 우선 억지로 나누어서 능관(能觀)의 일이 있고 소관(所觀)의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만일 자기의 몸과 마음이 모든 법을 총섭(摠攝)함을 환히 알아 옆이 없고[無側] 남김도 없어[無有] 능소가 끊어지면 능관의 일이 되고, 곧 이 몸과 마음이 머무르는 곳은 소관의 일이 되는 것이다.
【문】 이 일 가운데 어떻게 들어가는가?
【답】 지관(止觀)을 닦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지관인가?
【답】 만일 일승에 의지하여 지관을 닦는다면, 6상의 도장[印]으로 10보법(普法)을 인(印)쳐서 각각의 지위[位]를 움직이지 않고 융섭하여서 하나가 되어 환하게 분명한 것이 관(觀)이니, 마치 도장이 사물을 인치는 것처럼 들지도[擧] 않고 구르지도[轉] 않으니 이와 같은 관지(觀智)가 법에 칭합하여 능(能)을 여의고 소(所)를 끊어 하나여서 분별이 없어[一無分別]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지(止)이다. 승(乘)은 위의 한 곳[一處]28)에서 능히 결정코 믿는 것을 승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믿지 않는 것은 승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만일 삼승이라면 진여의 법을 듣고 능히 몰록 믿지 못하고 점차로 믿기 때문에 10신(信)이 있으며, 몰록 이해하지 못하고 점차로 이해하기 때문에 10해(解)29)가 있으며, 나아가30) 몰록 증득하지 못하고 점차로 증득하기 때문에 10증(證)이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점차로 불과에 이르기 때문에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여실한 도[如實道]를 타고 와서 정각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인 것이다. 만일 일승이라면 위의 한 곳에서 만약 원만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곧 이 원만한 증득이므로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니,31) ‘하나가 옮겨가면[運] 일체가 옮겨간다’는 것이 곧 이 뜻인 것이다. 법은 바로 나의 몸과 마음이며, 계(界)는 곧 이 몸과 마음이 ‘통괄적으로 포섭하여 상대함을 끊어[統包絶待]’ 전후제가 끊어지니 곧 법의 구경변제의 뜻이다. 도(圖)는 상(像)이니, 마치 코끼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코끼리의 형상을 그려서 보여주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행자(行者)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법계불(法界佛)32)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법계불의 형상을 그려서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입법계품초』33) 이제 법계에 들어가 상응하는 바를 따라 법의 영역[分齊]을 이루되 먼저 그 허물을 떠나야 한다. 처음 발심한 보살[初發心菩薩]이 대승에 나아감에 8근본죄(根本罪)34)가 있어서 모든 선근을 태워버리고 악취에 떨어지며 안온한 곳을 떠나서 인천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또 대승 경계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35)
한 번 오탁악세에 태어나 어느 정도 선근이 있어서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깊은 법으로 돌아가서 위없는 마음을 발하며, 매우 깊은 법을 듣고 독송하며 수지하여 지혜가 적은 사람을 위하여 독송하고 해설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서 놀라고 의심하며 두려워하여 보리심에서 물러남을 일으키고 성문승을 즐겨하니,36) 이것이 첫 번째 무거운 죄[第一重罪]이다.
오직 모름지기 근기를 알고 마음을 요달하여 차례로 설하되 옅은 곳에서 깊은 곳에 이르러야 하니,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가 어떻게 대승심을 발할 수 있겠는가? 일찍 성문ㆍ연각을 향하여서 열반에 들어감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의 무거운 죄[第二重罪]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대가 어떻게 계(戒)와 위의(威儀)를 배울 수 있겠는가? 마땅히 대승심을 속히 발하고 대승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하면 몸ㆍ입ㆍ뜻의 업이 마땅히 청정함을 얻으며 역시 악한 과보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세 번째의 무거운 죄[第三重罪]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는 성문의 경전을 독송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마땅히 성문의 경전을 덮어라. 성문의 법 가운데서는 결사(結使)의 번뇌를 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청정하고 깊은 대승의 경전을 듣고 지니면 이는 능히 악을 멸하고 깨달음[菩提]의 선을 낼 수 있다”37)라고 말하여 믿고 받아 지니는 자가 있다면, 두 사람38)은 다 네 번째의 무거운 죄[第四重罪]를 얻게 된다.
또한 이익을 구하기 위해 대승법을 설하여 대승을 설해 이익 얻음을 보고 미워하며 훼손하고 가벼이 여기며 질투하면, 이것이 다섯 번째 무거운 죄[第五重罪]이다.
또한 이익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깊은 법을 이해한다”라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등지고 어긋나는 것, 이것이 여섯 번째 무거운 죄[第六重罪]이다.
또한 전다라(旃陀羅)39)의 행을 짓는 것이니, 다른 선한 비구의 물건과 3보의 물건을 취하여 높은 관리와 대왕에게 주어서 왕과 관리의 힘에 의지하여 선한 비구를 가벼이 여기며 화내고 미워하며 질투하는 것, 이것이 일곱 번째의 무거운 죄[第七重罪]이다.
또한 악행을 짓고 스스로 왕과 관리의 뛰어난 힘과 재시(財施)를 믿고서 선한 비구를 가벼이 여기고 놀리며 욕하고 싸워 어지럽게 하며, 비법(非法)으로 설법하여 올바른 경률을 버리고 법에 어긋나게 제정하며, 선을 행하는 비구 및 좌선이나 경전을 독송하는 비구들에 대하여 번뇌가 없는 데서 번뇌를 낳고 이미 번뇌가 늘어났다40)고 말하는 것, 이것이 여덟 번째의 무거운 죄[第八重罪]이다.
만약 이미 범한 자는 마땅히 허공장(虛空藏)보살41)을 의지하여 죄를 참회하여 멸해야 할 것이다. 초발심 보살이 만약 대법(大法)을 널리 유통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려는 자는 먼저 앞에서 말한 허물42)을 여의고 그 다음에 제9지(地)43) 법사의 법문에 의지하면 곧 법계에 응할 것이다.
『진수대덕기(眞秀大德記)』44) 일(一)이란 ‘타가 없다[無他]’는 뜻이다. 삼승에서는 ‘성품[性]이 하나’라고 하고, 일승에서는 ‘연(緣)이 하나’라고 한다. ‘연이 하나’라는 것은 이 중도 및 진여[如]를 기준으로 함을 따르는 것이다. 이는 「십회향품」45)에 나오는 1백 구절의 여(如)이니, 이른바 해의 여[日如]ㆍ달의 여[月如] 등이다. 비록 곧 이 여(如)이나 해의 이름[日名]ㆍ해의 모습[日相], 달의 이름ㆍ달의 모습이 있어서 이름과 모습이 없지 않다. 그러나 보현의 증득[證]을 기준으로 하면 이러한 이름과 모습이 없으니, 다만 삼승을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이름과 모습에 의지하였을 뿐이니, 이는 보현의 교분을 기준으로 하여 분별한 것이다.
【문】 ‘이 중도를 기준으로 함’을 따르는 것이 이미 매우 깊은데, 다시 어떤 뜻을 기준으로 하여 보현의 증득으로 삼는가?
【답】 ‘이 중도 및 진여를 기준으로 함’을 따른다는 것은, 삼승교용(三乘敎用)의 해의 이름ㆍ해의 모습 등에 의지하기 때문에 ‘교와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증분이란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끊은 것이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하였기 때문에 모습을 떠난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곳은 유마거사[淨名]46)의 침묵과 어떻게 다른가?
【답】 정명의 침묵은 이름과 모습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과 모습을 떠나야 바야흐로 침묵이 되는 것이며, 아홉 회상[九會]47)의 부처님의 침묵은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므로 매우 다른 것이다. 이른바 이름과 모습을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이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니, ‘허공이 도무지 아무 물건도 없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는 보현의 증분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한 것일 뿐이다.
【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한 것’도 또한 지극히 깊은데, 다시 어떤 뜻을 기준으로 하여 10불(佛)의 경계로 삼는 것인가?
【답】 앞에서는 비록 침묵이라 하더라도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지만, 만일 과분(果分)이라면 맨 처음부터[初初]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곳48)에는 법(法)도 없고 물(物)도 없는가?
【답】 앞의 위(位) 중에서 논한 법과 같아서 맨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이 가운데 실제로 법이 없는가?
【답】 갖추고 있다.
【문】 어떤 사물이 있는가?
【답】 이는 옛 스님[古德]이 말한 바 ‘정을 돌이켜 보는 곳[反情見處]’인 것이다.49)
‘승(乘)’은 ‘실어 나른다[運載]’는 뜻이다.
【문】 위의 ‘일(一)’ 자 중에 이미 3가지의 뜻50)이 있었는데, 승도 역시 그러한가?
【답】 그렇다. ‘과(果)와 다른 인(因)’으로부터 ‘인과 다른 과’에 이르는 것이 삼승에서의 승(乘)의 뜻이다. 지금은 ‘인이 곧 과’인 뜻을 기준으로 하여 ‘운재’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현의 교분인 것이다. 인과의 이름과 모습을 등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한[言語道斷心行處滅]’ 뜻을 기준으로 하면 보현 증분의 운재(運載)의 뜻이 된다.51) 성해(性海)52)의 과분(果分)은 곧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부사의승(不思議乘)’이라 하는 것이니, 이는 부동(不動)을 기준으로 하여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법(法)에 3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스스로의 체[自體]를 법이라 이름한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소[牛]의 자체 밖에 말[馬]이 있고 말의 자체 밖에 소가 있는 것’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이 법 옆[側]에 저 법[彼法]이 없으며 저 법 옆에 이 법[此法]이 없기 때문에 ‘자체’라고 하는 것이다.53) 둘째, 의식[意]에 상대함을 법이라 이름한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제6 의식이 대(對)하는 바를 법진(法塵)이라 이름하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다함 없는[無塵] 의식이 대하는 바를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셋째는 궤칙(軌則)54)의 뜻임을 가히 알 것이다.
‘계(界)’ 역시 3가지 뜻이 있다. 첫째, 성품이 다르다는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가지 성품이 각각 다르기 때문인 것이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3가지 성품 가운데서 ‘듦에 따라 온전히 다하여[隨擧全盡]’ 각기 서로 무측(無側)55)이니, 그러므로 ‘성품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因)의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오직 안식(眼識)을 생함을 안식의 명언종자(名言種子)라 이름하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6식(識)을 통틀어 생하는 것[通生]을 안식의 명언종자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지닌다[持]’는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과와 다른 인’이 ‘인과 다른 과’를 지니는 것이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과를 온전히 하는 인’이 ‘인을 온전히 하는56) 과’를 지니기 때문에 ‘지닌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圖)’는 해인의 상(像)에 의지하여 ‘일승ㆍ삼승의 가르침과 근기의 욕망[根欲]’을 나타낸다. 이른바 붉은 인[朱印]의 전후 차별은 삼승의 가르침이며 붉은 인의 원만함[圓]57)은 일승의 가르침인 것이고, 인(印)의 전후 차별 가운데 글자는 삼승 근기의 욕망이며 인(印)의 원만함 가운데 글자는 일승의 근기(根器)인 것이다.58)
『법융덕기(法融德記)』 ‘합시일인(合時一印)’은 한 줄의 붉은 선[一道朱畫]이 모든 검은 글자와 합하여야 바야흐로 원만한 인[圓印]을 이루기 때문에 ‘합시’라고 한다.
【문】 검은 글자를 쓴 뒤에 붉은 선을 그리는가, 붉은 선을 그린 뒤에 검은 글자를 쓰는가?
【답】 둘 다 옳다. 먼저 글자를 쓰고 뒤에 선을 그리는 것은 이치[理]로써 현실[事]을 따르는 뜻이며, 먼저 선을 그리고 뒤에 글자를 쓰는 것은 사로써 이를 따르는 뜻이다. 지엄이 비록 73가지의 인(印)을 지었으나 다만 그 1인(印)의 뜻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의상 화상[相和尙]이 깊이 스승의 뜻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이 하나의 근본인(根本印)을 지은 것이다.
『진수덕기(眞秀德記)』 시(詩)란 도문(圖文)에 7언 30구가 있으므로 ‘시’라고 말하였을 뿐이지, 운(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59)
‘1인(印)’은 하나의 대연기(大緣起)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60)
『대기(大記)』 ‘54각’은 아래 본문에서 “무엇 때문에 인문(印文)은 오직 한 길[一道]만 있는가? 답하기를, 여래의 1음(音)을 표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성기품(性起品)」의 10가지 음성[十種音]61)을 가지고 5승의 근기에 차례대로 배대하면 곧 50이니, 이는 능히 응신(應身)의 부처님이 4섭(攝)과 4무량(無量)을 갖춘 것이기 때문에 4각(角)이라 말하는 것이다.
『진수기』 ‘54각’은 사람의 선지식[人知識]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른바 55선지식62)이지만 처음과 뒤의 두 문수를 합하였기 때문에 오직 54이며, 처음과 뒤를 합하여 거론하고 중간을 통틀어 취하여 하나의 원만한 지혜[圓智]가 되며, 보현 선지식은 증득할 바[所證]의 이치[理]이니 법계의 모든 법이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10자’는 법의 선지식[法知識]이다. 이른바 「이세간품」63)에서 보혜(普惠)가 2백 구절의 물음을 구름같이 일으키고 보현이 2천 구절의 답을 병으로 쏟아 붓듯이 하였으니, 한 구절의 물음마다 모두 10구절로써 답하였기 때문에 10이라고 한 것이다.
『대기』 ‘210자’는 5주인과(周因果)에서 첫째의 인과를 제외하고 뒤의 4주[周]에서 과를 가려내고[簡] 인을 취하며, 4주의 인에 각기 50위(位)가 있으므로 2백을 이루는 것이고, 그 4주 중에 있는 과위(果位)를 합하여 넷을 하나로 하고 이러한 과가 바로 십불(十佛)의 과(果)와 같음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에 10이라 말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첫째의 인과를 제외하는가?
【답】 다만 믿는 바[所信]일 뿐이며, 행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과위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가?
【답】 인위(因位)에 이미 차별과 평등이 있으니 언표의 모습[詮相]이 다르기 때문이며, 과보 역시 마땅히 그렇다. 그러나 십불의 과와 같음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에 모두 하나로 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이 해인 중에 나타나는 3세간의 10문 10법인 것이다. 이른바 아래 본문64)의 10전유(錢喩)와 10보법(普法)이 20이 되고, 20이 각기 10현(玄)을 논하므로 합하여 2백이 되며, 본래의 10현을 아우르므로 ‘210’이라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인은 총(總)이 되고, 73인은 별(別)이 된다. 별인(別印) 가운데 나아가 70인을 가지고 3제(際)를 순력하니, 1제(際)에 인(印)치는 것이 각각 70이므로 합하여 210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210인을 합하여 하나의 해인삼매의 총상인(總相印)을 이루는 것이다.65)
7언 30구절은 앞의 법(法)과 비유가 각각 10이며, 아울러 본래의 10현을 합하여 30이 되는 것이다. 이 30구절이 경의 제목 7자66)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7언(言)으로써 시를 지은 것이다.67) 그러므로 법계의 법이 비록 다함없다고 하지만 210자를 벗어나지 않으니, 총체적으로 이는 곧 30구절을 이루며, 또한 총체적으로 이것은 7글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총체적으로 이것은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고, 또한 총체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가장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승법계도』라고 제목하는 것이다.68)
『청량소(淸凉疏)』69) 총체적으로 제목을 해석하는 것[總釋題名]70) 중에 ‘여섯째, 말아 거두어들여서 모습을 다한다[卷攝相盡]’71)는 것은, 이른바 뒤[後]로부터 점차 말아서[卷] 나아가 9회를 벗어나지 않고, 9회는 초회(初會)를 떠나지 않으며, 초회는 총체적인 제목72)을 떠나지 않으며, 총체적인 제목은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치[理]가 아니면 지혜[智]가 아니기 때문에 이치 밖에 지혜가 없고, 지혜가 아니면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지혜 밖에 이치가 없으니, 곧 이치와 지혜는 둘이 아니다. 또한 지혜를 거두어서 이치를 따르니 체(體)를 떠나서는 용(用)이 없으며, 용을 섭수하여 체로 돌아가니 체의 성품을 스스로 떠나기 때문에 체는 곧 체가 아닌 것이다. 본래 청정하나 억지로 이름하여 청정법계라 하니, 이러한 까닭에 극히 무진(無盡)으로부터 나아가 한 글자나 글자 없음까지도 모두 다 화엄 성해(性海)를 섭수하여 남음이 없는 것이다.

【본문】 위대한 성인의 훌륭한 가르침……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니거늘.
『법융기(法融記)』 위대한 성인이라고 한 것은 모든 가르침 중에서 이제 이 교주(敎主)73)가 가장 존승(尊勝)하기 때문이다.
【문】 아래 4교74) 중에서는 교화의 주체[能化]와 교화의 대상[所化]이 모두 미치지 못하는가?
【답】 그렇다.
【문】 삼승의 능화 3신(身)은 다만 일승 10신의 큰 작용[大用]일 뿐인데, 어찌하여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답】 이미 ‘다만 10신의 작용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문】 십불은 곧 자수용불(自受用佛)이니, 곧 나무75) 아래의 부처님이거늘 어찌하여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답】 만일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미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가르침의 품류[敎品]를 분별하고자 하여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청량소』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敎起因緣]’76) 중에 “지금 이 경을 설함에 부처님은 진(眞)이 되고 응(應)이 되며 하나[一]가 되고 많음[多]이 된다. 만일 진77)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석가가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인천(人天)이 동일하게 본다’고 하는가? 만일 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비로자나가 연화장에 거처하는데 대보살의 견해로 부처님 법신을 본다’고 말하는가? 만일 하나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여러 곳에서 따로 따로 나타나는가?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왜 다시 ‘몸을 나누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이 경의 부처님은 모두 앞에서 설한 바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니, 곧 법계의 다함 없는 신운(身雲)으로 진과 응이 서로 융섭하고[相融] 일과 다가 걸림 없는[無礙] 것이다(운운).78) 먼저 10신(身)을 밝히고, 뒤에 걸림 없음을 드러낸다.
‘10신’은 자체에 2가지 뜻이 있다. 첫째 3세간79)을 융섭하여 10신으로 삼음80)을 기준으로 하면, 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고, 둘째는 국토신(國土身)며, 셋째는 업보신(業報身)이고, 넷째는 성문신(聲聞身)이며, 다섯째는 연각신(緣覺身)이고,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이며,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이고, 여덟째는 지신(智身)이며, 아홉째는 법신(法身)이고,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 둘째는 부처님도 스스로 10신81)이 있으니, 첫째는 보리신(菩提身)이고, 둘째는 원신(願身)이며, 셋째는 화신(化身)이고, 넷째는 역지신(力持身)이며, 다섯째는 상호장엄신(相好莊嚴身)이고, 여섯째는 위세신(威勢身)이며, 일곱째는 의생신(意生身)이고, 여덟째는 복덕신(福德身)이며, 아홉째는 법신(法身)이고, 열째는 지신(智身)이다(운운).82)
이른바 ‘무애(無礙)’라는 것에는 간략히 10가지83) 뜻이 있다. 첫째는 용주무애(用周無礙)이고……열째는 원통무애(圓通無礙)이다.84) 이른바 이 불신이 이치[理]에 즉(卽)85)하고 현상[事]에 즉하며, 하나[一]에 즉하고 많음[多]에 즉하며, 의보[依]에 즉하고 정보[正]에 즉하며, 사람[人]에 즉하고 법(法)에 즉하며, 이것[此]에 즉하고 저것[彼]에 즉하며, 정(情)에 즉하고 비정(非情)에 즉하며, 깊음[深]에 즉하고 넓음[廣]에 즉하며, 인(因)에 즉하고 과(果)에 즉하며, 3신(身)에 즉하고 10신86)에 즉하니, 걸림 없는 법계의 신운(身雲)과 동일하다.87)
『법융기』 ‘훌륭한 가르침[善敎]’이란,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이 세상[此生]과 저 세상[他世]에서 수순하여 이익케 하는 것이 선(善)이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거스르고 손상하는 것은 악(惡)이며, 이 둘 중에서 가히 기별(記別)할 것이 없는 것이 무기(無記)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다만 이 선일 뿐이다. 무엇인가? 이른바 지엄이 말하기를, “원통(圓通)의 이치는 선하지 않음이 없음에 처하여 연(緣)을 접촉하면 이에 수순하여 물(物)을 가리지 않고 베푸는 것이다”88)(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은 오직 한결같이 선(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기(無記)와 악(惡)도 다만 한결같이 선(善)일 뿐인가?
【답】 그러하다.
【문】 그렇다면 악을 드는[擧]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은가?
【답】 그러하다. 그러나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듦에 따라 옆이 없다[隨擧無側]’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모남이 없다[無方]’는 것은, 만일 삼승이라면 하나 둘, 나아가 한량없음[無量]을 말함에 따르니, 이는 모남이 없는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그런가? 삼승의 가르침은 개별적인 근기를 따라 설하기 때문에 모남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일승의 가르침은 4제(諦)ㆍ12인연[緣]ㆍ6바라밀[度] 등을 설함에 따라 해인 구경의 제(際)에 통철하여 자재하게 설하기 때문에 ‘모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니다’는 것은, 마치 소의(小醫)는 각각 따로 약을 주지만 대의왕(大醫王)이라면 두루 천하의 갖가지 물건을 모아서 한 덩어리의 약을 만들어서 병이 어떻게 다른 지도 묻지 않고 평등하게 두루 시여하되 치료하지 못할 병이 없는 것과 같다. 일승의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두루 모든 가르침의 근기의 병에 응하여 오직 한 종류의 해인정(海印定)89)의 법으로써 근기에 딱 맞게 설하되 성문의 사람 중에서는 온전한 해인[全海印] 4제의 법90)을 주고, 독각의 사람 가운데서는 온전한 해인 연생(緣生)의 법을 주며, 보살의 사람 가운데서는 온전한 해인 6도(度)의 법을 주고, 나아가 숙교(熟敎)91)와 돈교(頓敎)의 사람 중에도 역시 온전히 온전히 줄 뿐이다.92)
『대기』 아래 4교의 사람은 모두 병기(病機)이나 원기(圓機)는 그렇지 않다. 또 원교의 근기에도 큰 병이 있으니, 한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백천(百千) 가지의 장애문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수기』 ‘위대한 성인[大聖]’이라는 것은, 아래 삼승의 작은 성인[小聖]과 대비하여 ‘위대한 성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선교(善敎)란 문지(文持)의 가르침이다. 이 문지의 가르침이 해인정 전체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한번 물[水]을 부르는 말 가운데 불ㆍ나무 등의 법이 모두 함께 오는 것이다. 한 마디 말 가운데 모든 법이 함께 오므로 ‘가르침의 구족[敎具足]’이라 하는 것이다. 이 물이라는 말 가운데는 물은 습하다는 뜻이 있고, 물은 습하다는 뜻 중에는 불의 뜨거움[熱] 등 법계의 모든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뜻의 구족[義具足]’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뜻이 물이라는 말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 불을 쓰고자 하는 때에 ‘물을 부르는 말 가운데에 이르는 바의 불’을 쓰는가?
【답】 이는 다만 물을 연하기[水緣] 때문이니, 만일 불을 쓰는 때라면 불이라는 말 가운데 와서 이르는 불을 쓰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물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水來中火]’은 ‘불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火來中火]’과 다른가?
【답】 이르기[旨] 때문에 동일하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다시 ‘불에 온다[火來]’는 말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가?
【답】 이미 불이 필요한 곳이라면 불이라는 말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 만일 ‘불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이라야 바야흐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물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은 실제의 불이 아닌 것인가?
【답】 이는 실제의 불이다. 그러나 이는 물을 이루는 불이므로 ‘불 가운데의 불’과 별도의 문을 이루는 것이다.
‘모남이 없어서 근기에 응한다’는 것은, 위와 같은 선교는 법계에 칭합(稱合)하여 별도로 취하고 버리는 방소(方所)가 없기 때문에 ‘모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이른바 다함 없는 원만한 총상(總相)의 가르침이어서 보현의 기틀에 응(應)함이다.
‘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니다’는 것은 아래의 4교이다.
『지귀장(旨歸章)』93) 무릇 원통을 주로 가르쳐서 티끌 같은 국토에서 허공을 다하고 제망의 구슬이 방광(方廣)하여 터럭 끝에서 법계를 잡으니, 걸림 없이 용융(鎔融)함은 노사나불의 묘한 경지이며, 한계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보현안(普賢眼)의 현감(玄鑑)이다. 넓디넓고 미묘한 말씀은 실로 그 취지를 찾을 수 없고, 넓고 깊은 법의 바다는 종(宗)의 근원에서 더욱더 꿰뚫어 헤아려진다.
그러므로 이제 간략히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러한 10가지 뜻을 열고 그 기요(機要)를 간추려서 ‘지귀(旨歸)’라 일컫는 것이니, 여러 진리를 찾는 선비가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 경을 설하는 곳[說經處]이다.
무릇 원만한 가르침이 일어남에 반드시 티끌 같은 세계를 두루 헤아려서 이미 법계를 다한 말이 되니, 어찌 가히 그 장소의 다름을 분별하겠는가?
이제 좁은 데서부터 넓은 데에 이르게 하여 간략히 10처(處)를 연다. 첫째는 이 염부제이며, 둘째는 백억에 두루한 것이고, 셋째는 시방에 다하는 것이며, 넷째는 티끌 같은 길에 두루한 것이고, 다섯째는 다른 세계[異界]에 통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개별적인 티끌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화장세계로 돌아감이며, 여덟째는 거듭 국토를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아홉째는 제망(帝網)과 같음이며, 열째는 다른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94)
둘째는, 경을 연설하는 때[演經時]이다.
무릇 항상(恒常)한 설은 전후제(前後際)에 끝이 없으니, 하물며 일념과 다겁[念劫]이 원융한데 어찌 가히 그 시분(時分)을 분별하겠는가? 이제 간략히 짧게 닦는 영역을 들어서 열 가지로 꼽으면 첫째는 오직 일념이며, 둘째는 7일을 다하는 것이고, 셋째는 삼제(三際)에 두루한 것이며, 넷째는 동류(同類)를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다섯째는 다른 겁[異劫]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여섯째는 일념이 다겁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일곱째는 거듭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여덟째는 다른 세계의 시간이며, 아홉째는 그것의 상입(相入)이고, 열째는 근본이 지말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95)
셋째는 경을 설하는 부처님[說經佛]이다.
【문】 이 경을 설하는 부처님인 노사나의 몸이 이미 앞과 같이 다함 없는 시간과 장소에 있다면, 그 부처님은 1신(身)인가, 다신(多身)인가?…….96)
이제 이 뜻을 나타내서 간략히 10가지[十重]로 변별하니, 첫째는 용이 두루하여 걸림 없는 것[用周無礙]이고, 둘째는 상이 편만하여 걸림 없는 것[相遍無礙]이며, 셋째는 적용이 무애한 것[寂用無礙]이고, 넷째는 의지하여 일어남에 걸림 없는 것[依起無礙]이며, 다섯째는 진과 응이 걸림 없는 것[眞應無礙]이고, 여섯째는 분원이 걸림 없는 것[分圓無礙]이며, 일곱째는 인과가 걸림 없는 것[因果無礙]이고, 여덟째는 의정이 걸림 없는 것[依正無礙]이며, 아홉째는 그윽이 들어감에 걸림 없는 것[潛入無礙]이고, 열째는 원만하게 통함에 걸림 없는 것[圓通無礙]이다.97)
넷째, 경을 설할 때의 대중[說經衆]이다.
무릇 중해(衆海)가 번잡하고 넓으니 어찌 티끌을 헤아려 능히 알 수 있으리오? 이제 대강(大綱)을 통틀어서 간략히 하면 역시 10위(位)를 나타낸다. 첫째는 과덕중(果德衆)이며, 둘째는 상수중(常隨衆)이고, 셋째는 엄회중(嚴會衆)이며, 넷째는 공양중(供養衆)이고, 다섯째는 기특중(奇特衆)이며, 여섯째는 영향중(影響衆)이고, 일곱째는 표법중(表法衆)이며, 여덟째는 증법중(證法衆)이고, 아홉째는 소익중(所益衆)이며, 열째는 현법중(現法衆)이다.98)
다섯째, 경을 설하는 의식[說經儀]이다.
무릇 무한한 대비는 중생계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万品]에 교화를 베품에 의식(儀式)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이제 통별(通別)에 나아가서 각각 10가지 예를 든다. 통틀어서 논하건대, 혹은 음성으로써 하며, 혹은 묘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며, 혹은 기이한 향(香)으로써 하며, 혹은 상미(上味)로써 하며, 혹은 묘하게 접촉함으로써 하며, 혹은 법경(法境)으로써 하며, 혹은 안의 6근[內六根]이며, 혹은 4가지 위의(威儀), 혹은 제자들의 인물, 혹은 일체의 짓는 바가 모두 중생[物]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따로 언성(言聲)을 나타내건대 역시 10가지 예가 있다. 첫째는 여래의 어업(語業)이 원음(圓音)을 스스로 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여래의 모공에서 소리를 내어 법을 설하는 것이고, 셋째는 여래의 광명이 음성을 펴서 법을 연설하는 것이며, 넷째는 보살의 구업으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보살의 모공으로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보살의 광명으로 역시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찰해(刹海)가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모든 중생이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삼세(三世)의 음성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며, 열째는 일체 법으로 모두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99)
여섯째, 경의 가르침을 보임[示經敎]이다.
원교의 미묘한 말씀은 반드시 법계에 다하나니 이미 여래의 다함 없는 변재의 힘을 다하여 각기 허공ㆍ터럭 끝ㆍ찰해에 두루하고, 다시 각각 미래제에 다하는 것이니 단박에 설하고 언제나 설함이라. 시간과 장소가 가없으니 이와 같은 가르침을 어찌 그 부질(部秩)을 한계 지을 수 있으리오. 여기서는 경의 본문에 준해서 분석하여 10가지 종류로 삼으니, 첫째는 이설경(異說經)이며,100) 둘째는 동설경(同說經)이고, 셋째는 보안경(普眼經)101)이며, 넷째는 상본경(上本經)이고, 다섯째는 중본경(中本經)이며, 여섯째는 하본경(下本經)이고, 일곱째는 약본경(略本經)이며, 여덟째는 주반경(主伴經)이고, 아홉째는 권속경(眷屬經)이며, 열째는 원만경(圓滿經)이다.102)
일곱째, 경의 뜻을 나타냄[現經義]이다.
무릇 뜻의 바다는 넓고 깊으며 진리의 근원은 아득히 넓으나 간략히 두 종류로 열어서 각기 10門으로 분별하면, 먼저 표방하는 법을 밝히는 것이니 넓고 크며 끝이 없어서 한데 모아 열 가지 짝[十對]으로 삼아 통괄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첫째는 가르침과 뜻이 하나의 짝이 되며[敎義一對], 둘째는 이치와 현상이 하나의 짝이 되고[理事一對], 셋째는 대상과 지혜가 하나의 짝이 되며[境智一對], 넷째는 행동과 지위가 하나의 짝이 되고[行位一對], 다섯째는 인과 과가 하나의 짝이 되며[因果一對], 여섯째는 의보와 정보가 하나의 짝이 되고[依正一對], 일곱째는 체와 용이 하나의 짝이 되며[體用一對], 여덟째는 사람과 법이 하나의 짝이 되고[人法一對], 아홉째는 역과 순이 하나의 짝이 되며[逆順一對], 열째는 응과 감이 하나의 짝이 되는 것[應感一對]이다.
다음으로 나타내는 이치를 밝힌다는 것은, 교묘한 변재가 자재하여 형세의 변화가 매우 많으나 역시 10가지 예를 들어 걸림 없음을 나타낸다. 첫째는 성상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性相無礙], 둘째는 넓음과 좁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廣狹無礙], 셋째는 일다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一多無礙], 넷째는 상입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相入無礙], 다섯째는 상시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相是無礙], 여섯째는 숨음과 나타남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隱現無礙], 일곱째는 미세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微細無礙], 여덟째는 제망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帝網無礙], 아홉째는 10세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十世無礙], 열째는 주반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主伴無礙].103)
여덟째, 경의 뜻을 해석함[釋經意]이다.
무릇 법상(法相)이 원융하나 실로 소인(所因)이 있으니, 인연이 한량없으나 간략히 10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모든 법에 정해진 상이 없음’을 밝히기 위함이며, 둘째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환사(幻事)와 같기 때문이며, 넷째는 꿈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뛰어난 신통력[勝通力]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깊은 선정의 작용[深定用]이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해탈의 힘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인(因)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연기(緣起)여서 서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열째는 법성이 융통하기 때문이다.104)
아홉째, 경의 이익을 밝힘[明經益]이다.
무릇 믿음으로써 취입(趣入)하는 것이 이 보현의 법이다. 원통의 돈익(頓益)이 광대하여 끝이 없으나 간략히 경의 본문을 거두어들여서 그 10가지를 나타낸다. 첫째는 보고 듣는 이익이며, 둘째는 발심의 이익이고, 셋째는 행을 일으키는 이익이며, 넷째는 지위를 거두어들이는 이익이고, 다섯째는 속히 증득하는 이익이며, 여섯째는 장애를 멸하는 이익이고, 일곱째는 이로움을 더하는105) 이익이며, 여덟째는 나아가 닦는 이익이고, 아홉째는 단박에 얻는 이익이며, 열째는 성품에 계합하는 이익이다.106)
열째, 경의 원만함을 나타냄[現經圓]이다.
무릇 법계는 원통하여 연(緣)에 계합하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위의 아홉 문(門)이 나타낸 바의 법은 모두 합쳐져 하나의 대연기법(大緣起法)이 되니, 한 곳이 있음을 따라 곧 일체가 있게 되니, 걸림 없이 원융하고 다함없이 자재하다. 만일 뜻에 따라 나누면 역시 10문이 있다. 첫째는 장소가 원만함이며, 둘째는 시간이 원만함이고, 셋째는 부처님이 원만함이며, 넷째는 대중이 원만함이고, 다섯째는 의식이 원만함이며, 여섯째는 교(敎)가 원만함이고, 일곱째는 의(義)의 원만함이며, 여덟째는 의(意)의 원만함이고, 아홉째는 이익이 원만함이며, 열째는 두루함이 원만함이다. 동일하게 걸림 없는 대연기이기 때문이며, 자재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부사의(不思議)이기 때문이니, 이는 이른바 화엄의 다함없는 법의 바다[法海]가 법계를 끝까지 다하고 허공계를 초월한 것이라서 오직 보현의 지혜[智]라야 비로소 그 바닥을 궁구할 수 있는 것이다.107)

【본문】 미혹한 자는……종(宗)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
『법기』 ‘미혹한 자’라는 것은 아래 4교(敎)의 사람이니, 일승의 무주(無住) 본법(本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취만을 집착하여[守跡] 체를 잃어버린 줄 알지 못하니’라는 것은, 비유하면 사냥꾼이 헛되이 토끼108)의 자취만을 지키고 있어서 토끼의 몸이 멀리 있음을 알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이 삼승의 사람은 3무수겁(無數劫)토록 설함과 같이 행을 닦지만 얻는 과보는 다만 자취뿐이니 지킴[守]을 궁극적인 경지로 삼아서 그 일승의 진실한 체를 잃어버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종(宗)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는 것은 무량억(無量億) 나유타겁(那由他劫)에 걸쳐서 6바라밀을 행하여 갖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부지런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승의 집으로 돌아갈 날이 없으므로 ‘종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거하여……이름이 없는 진원(眞源).
『법기』 ‘이치[理]에 의지하고 가르침[敎]에 의거하여’라는 것은, 이(理)는 망상해인(忘像海印)109)이니 이른바 부처님이 마음 가운데서 3세간을 증득하나 부처님이 증득한 마음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 교는 현상해인(現像海印)110)이니, 이른바 부처님이 증득한 바 3세간의 법이 각각의 지위[位]를 움직이지 않아 성품이 중도(中道)에 있어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망상(忘像)의 이치에 의지하여 한 줄의 붉은 획을 이끌고, 현상(現像)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많은 검은 글자를 나열해서 원만한 인[圓印]을 만드는 것이다.
‘간략히 반시(盤詩)를 지어서’라는 것은, 검은 글자는 붉은 획에 서리고, 붉은 획은 검은 글자에 서리므로 반(盤)이라 하는 것이다. 검은 글자가 붉은 획에 서리는 것은 곧 현상[事]이 이치[理]에 변만한 것이며, 붉은 획이 검은 글자에 서리는 것은 곧 이치가 현상에 변만한 것이다.
『대기』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로 하여금 이름이 없는 진원으로 돌아가길 바라노라’는 것은, 외화(外化)는 이름과 모습[名相]의 제(際)가 있으므로 아울러 이름에 집착함이 되지만, 곧바로 내증(內證)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이 없는 참된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는 다만 아래 4교이다. ‘이름이 없는 진원’이라는 것은,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내증과 외화가 하나여서 분별이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111)에서 ‘만일 이치를 기준으로 하면 증득[證]과 가르침[敎]의 양 법이 예로부터 중도이며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우선 증득의 대상[所證]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증득은 증분(證分)이라 하고, 보살의 증득은 교분(敎分)이라 이름한 것일 뿐이다.
【문】 자취를 지키던 사람이 진원으로 돌아갈 때에 앞에서 지키던 가르침의 자취를 버린 뒤에 돌아가는가, 지키던 바의 자취가 곧 돌아갈 바의 근원인가?
【답】 후자와 같다.112)
【문】 만약 그렇다면 연기의 실체를 이해하는 일승의 사람도 역시 4제(諦)ㆍ연생(緣生) 등을 이해하는가?
【답】 그 제(諦)ㆍ연(緣)의 이름을 움직이지 않고 곧 이 다함 없는 원통(圓通)의 법임을 본다.
【문】 만약 그렇다면 자취를 지키던 사람도 역시 다함 없는 원통의 법을 이해하는가?
【답】 나[我]를 기준으로 한다면 타(他)가 아니지만, 그113)를 기준으로 하면 열지114) 않는 것이다.115)

【본문】 중앙의 법(法)에서 시작하여……인도(印道)를 따르면서 읽어야 한다.
『법기』 ‘중앙의 법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돌고[盤廻] 굴곡을 이루다가 불(佛)에 이르러 마친다’는 것에서, 구불구불 돈다는 것은 곧바로 인(印)이 원만함을 보는 것이고, 굴곡은 곧 모든 뿔은 굽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문】 만일 인도(印道)를 기준으로 하면 곧 처음과 끝116)을 떠나는데, 무슨 까닭에 글자를 기준으로 하여 ‘법’에서 시작하여 ‘불’에서 끝나는가?
【답】 만일 곧바로 이(理)를 기준으로 하면 비록 처음과 끝이 없으나 그와 같이 처음과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법에 들어가는 방편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도를 따른다’는 것은, 만일 오직 글자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삼승별교이지만 만일 오직 인(印)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승별교이니, 인으로써 글자를 따르고 글자로써 인을 따른다면 일승동교이고, 만일 이 셋117)을 다 갖춘다면 일승원교인 것이다. ‘인으로써 글자를 따른다’는 것은 일승이 삼승에 드리우는[垂] 것이며, ‘글자로써 인을 따른다’는 것은 삼승이 일승에 참예(參詣)하는 것이니, 위로 참예하고 아래로 드리우는 것이 아울러 동교이다.
『교분기(敎分記)』 ‘동교(同敎)라는 것은……’이라고 한 것은, 첫째는 법상(法相)이 교참(交參)함을 잡아서 일승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삼승 중에서도 역시 인다라미세(因陀羅微細) 등을 설함이 있는 것 같지만 주반(主伴)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혹은 또한 화장세계를 설하고 있으나 ‘십(十)’ 등을 설하지 않고, 혹은 일승 중에도 또한 삼승의 법상 등이 있으니, 이른바 마치 ‘10안(眼)118) 중에도 또한 5안을 갖추고 있고, 10통(通)119) 중에도 또한 6통이 있는 것’ 같으나 의리(義理)가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곧 일승이 삼승에 드리우며 삼승이 일승에 참예하는 것이니, 이는 곧 양 종(宗)이 서로 접하고 연이어져 있으며 이끌어들이고 섭수하여서 근기의 욕망과 성품[根欲性]을 이루어 별교일승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대기』 도(圖)의 인문(印文)에 나아가면 많은 해석[義釋]이 있으니,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엄의 5중해인으로 배대하여 해석하는 것은, 처음의 4가지 해인은 곧 문구를 나누지 않으므로 모두 통틀어서 배대하는 것이며, 다섯째 해인은 다시 5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섯째 해인이 갖춘 바 5중해인으로 모든 구절을 분배하면, 곧 첫째 증분의 4구절은 첫째와 둘째의 해인이다.
그 다음 ‘진성’ 아래 연기분의 14구절은 곧 셋째의 해인이며, 그 다음 ‘능인’ 아래 이타행의 4구절은 곧 넷째 해인이고, 그 다음 ‘그러므로 행자’ 아래 수행방편의 4구절은 곧 다섯째 해인이며, 마지막 네 구절은 수행하여 얻는 이익인 것이다.120)
처음의 4구절 중에 첫째 한 구절은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해인이며, 그 다음 한 구절은 그림자가 나타나는 해인이다.
그 다음 한 구절은 앞에서 말한 ‘법성은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고, 마지막 한 구절은 앞에서 말한 ‘모든 법은 본래 적정한 것이다’를 해석한 것이다.121)
【문】 제목을 법의 입장에서는 ‘법계도’라 하고 비유의 입장에서는 ‘해인도’라 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법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연기분 중에 계(界)ㆍ종(種)ㆍ해(海)122)를 나누어서 각기 따로 배대하는 것은 행자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증분이라면 본래 계ㆍ종ㆍ해를 나누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다만 한 맛[一味]인 법계의 처소일 뿐이니, 법계ㆍ해인ㆍ법성이 동일한 양[量]이다. 그러므로 초회 중에서는 계ㆍ종ㆍ해를 나누지만, 제2회 중에서는 셋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총체적으로 ‘부처님의 국토가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인(印)에 의지하면, 만일 상근기라면 곧바로 증분에 들어가고, 중근기라면 ‘진성’ 아래의 교분(敎分)123) 중에서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하근기라면 뒤의 ‘행자’ 아래의 수행방편 중에서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표훈(表訓)ㆍ진정(眞定) 등 10여 대덕이 화상이 계신 곳에서 이 인(印)을 배울 때에 여쭈었다.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곧 이 법신 자체’라는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화상이 곧 4구게(句偈)로써 대답하셨다.

모든 연의 근본은 나[我]이며
일체 법의 근원은 마음[心]이니
크고 중요한 종지를 말씀하시는 분이
진실한 선지식이다.124)

이어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할 뿐이다”라고 하셨다.
표훈125) 대덕이 5관석(觀釋)을 지었으니,126) 첫째는 실상관(實相觀)이고, 둘째는 무주관(無住觀)이며, 셋째는 성기관(性起觀)이고, 넷째는 연기관(緣起觀)이며, 다섯째는 인연관(因緣觀)이다. 첫째 관(觀)은 ‘법의 근원이 되는 마음’과 ‘크고 중요한 종지[大要宗]’이며, 뒤의 네 가지 관은 ‘근본이 되는 나’인 것이다. 설함을 인연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송(頌)하였다.127)
‘나는 모든 연(緣)으로 이루어진 바 법이며 모든 연은 나[我]로써 연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은 인연관이며, ‘연으로 나를 이루므로 나는 체(體)가 없으며 나로써 연을 이루므로 연은 성품이 없다[無性]’라는 것은 연기관이고, ‘모든 법의 유무(有無)가 원래 하나이니 유무의 모든 법이 본래 둘이 아니다[無二]’라는 것은 성기관이며, ‘유(有)인 때에 유가 아니어서 도로 무(無)와 같고 무인 때에 무가 아니어서 도로 유와 같은 것이다’라는 것은 무주관이고, ‘모든 법이 본래 옮기거나 움직이지[移動] 않아서 능관의 마음도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은 실상관이다. 이러한 5관(觀)을 지어서 화상에게 드렸더니, 화상께서 “그렇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5관으로써 30구절에 준하면, 곧 증분의 4구는 실상관이며, 다음의 14구는 무주관이고, 다음 4구는 성기관과 연기관이며, 나머지 구는 모두 연기관과 인연관이다.128)
진정(眞定) 대덕은 3문석(門釋)을 지었는데, 첫째는 이사구덕문(理事具德門)이고, 둘째는 사융현리문(事融現理門)이며, 셋째는 수행증장문(修行增長門)이다.
이러한 3문에 표훈 대덕이 부동건립문(不動建立門)을 추가하여 4문(門)으로 삼았으니, 이로써 30구에 준해 보면 증분의 4구는 부동건립문이며, 다음의 14구는 이사구덕문 및 사융현리문이고, 나머지 구절은 모두 수행증장문인 것이다.
이른바 14구 가운데 처음 4구는 이사구덕문이니, 이 중에 첫째 한 구절은 무주(無住)의 체(體)이기 때문에 이(理)이고, 그 다음 한 구절은 무주의 상(相)이기 때문에 사(事)이며, 뒤의 2구는 무주의 용(用)인 것이다. ‘구덕(具德)’이란 진성의 이(理) 가운데 6도(道)의 인과ㆍ소승의 인과, 나아가 원교의 인과 등 보현의 22위(位)를 갖추고 있으니, 22위 가운데 진성의 체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뒤의 10구절은 곧 사융현리문이니, 이른바 ‘한 티끌이 시방을 용융하여 포함하는 도리’가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수행증장문이란 만약 여러 구절을 분배하면, 비록 이타의 4구에 속하겠지만 여기서의 뜻은 처음에 증분으로부터 혹은 징문하고 혹은 해석하니, ‘자기의 몸이 곧 이 법성임’을 알게 할 따름이다.129)
또한 4만(滿)의 뜻으로 분과하면, 증분의 4구절은 행실만(行實滿)의 뜻이고, ‘진성심심’ 아래는 증만(證滿)의 뜻이며, ‘초발심시’ 아래는 법만(法滿)의 뜻이고, ‘시고행자’ 아래는 인만(人滿)의 뜻이다.130)
이러한 말은 역시 표훈 대덕의 뜻이니, 상원(上元) 원년(元年: 131)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설한 것이다. 행만이란 다만 행이 가득 하면 이 증분이기 때문이다. 증만이란 증분만족의 법이니, 바야흐로 ‘일중일체(一中一切)・일즉일체(一卽一切)’ 등 걸림 없이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법만이란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初發心時便成正覺]’라는 것이니, 법을 만족하여 비로소 이룸을 얻기 때문이다. 인만이란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곧 불(佛)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印) 가운데 이 4가지 뜻으로 문장을 나누며, 또한 1부(部)132)의 대경(大經) 중에서도 이 4가지 뜻으로 나눈다. 이른바 행만이란 1부의 시종(始終)이 다만 이 십불의 내증인 것이며, 증만이란 1부의 시종이 일다(一多)ㆍ대소(大小)가 무장애인 뜻이다. 법만이란 1부의 시종이 오직 초발심이 곧 법을 만족하여 정각(正覺)을 이루는 뜻이며, 인만이란 1부의 시종이 곧 ‘이 범부의 몸이 바로 자체불’인 뜻이다.
인(印)에서는 여러 구절로 분배되고, 경에서도 역시 처음과 끝을 통틀어 배분하는 것이니, 자재로운 과(科)인 것이다.
『십구장(十句章)』133) 열째,134) ‘과문(科文)을 건너뛰어서 뜻을 이룸이 자재하다’는 것은 초회(初會)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모든 회처(會處)라면 법의 문구 등이 이러한 처음에 있어서 자재롭게 능히 이루는 것이니, 초회의 뜻과 같은 것이며 나머지도 역시 그러하니, 준하여 알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떠한가? 초회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도리천회(忉利天會)135)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법을 설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10주(住)의 법이라고 대답할 것이니, 이러한 언설(言說)들이 어긋나지 않게 능히 뜻을 이루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초회를 논하는 때에 모든 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능히 모든 회를 거두어들이며, 초회와 같아서 나머지 회(會)도 그러하니, 이 근본을 기준으로 함에 따라서 능히 전후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본문】 법성은 원융하여……다른 경계가 아니다.
『법기』 “어떤 것이 법인가?”
“인분(因分)136)의 언표를 빌어서 억지로 가리킨다면, 그대의 몸과 마음이 곧 그것이다.”
“어떤 것이 성품인가?”
“원융한 것이 곧 그것이다.”
“어떤 것이 원융한 것인가?”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까닭에 둘이 없는 것인가, 둘이면서 둘이 없는 것인가?”
“하나인 것이 아니므로 둘이 없는 것이니, 그 두 가지 모습에 즉하여 곧바로 ‘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모든 법인가?”
“법성이 그것이다.”
“무엇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가?”
“원융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본래 적정한 것인가?”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적정한 곳을 가히 이름할 수 있겠는가?”
“가히 이름할 수 없으니,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름이 없는 것인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모습이 없는가?”
“모든 것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가운데에는 닦음과 증득[修證]도 끊어졌는가?”
“끊어졌다.”
“실로 닦음과 증득이 없는 것인가?”
“실로 없는 것이지만, 성인 역시 닦고 증득한다.”
“요컨대 닦음과 증득을 필요로 한다면, 어떻게 닦고 증득하는가?”
“만약 가히 가르칠 수 있다면 이는 교분(敎分)이기 때문이니, 오직 대장부의 훌륭한 용심처(用心處)이지 나머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이 증분 중에 일체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는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갖추어져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역시 두루 분별하는[遍計] 비법(非法)도 갖추고 있는 것인가?”
“어찌 갖추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갖추고 있지 못한가?”
“어찌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한 물건도 보법(普法) 아닌 것이 있지 않으니 어찌 갖출 수 있으며, 변계의 비법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을 만족하니 어찌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엄 스님은 ‘1승 중에 어떤 법이 없는가? 비법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없지 않는가? 비법이 없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기(眞記)』 ‘법성이라는 것’은 미진법성(微塵法性)ㆍ수미산법성(須彌山法性)ㆍ1척법성(尺法性)ㆍ5척법성(尺法性)이니, 만약 금일의 5척법성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미진법성과 수미산법성 등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서 칭합하여 5척을 이루는 것이니, 작은 지위를 증가시키지도 않고 큰 지위를 감소시키지도 않으면서 능히 이루는 것이다.
‘원융이라는 것’은 미진의 법이 5척에 가득하고 수미산법이 5척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은 미진이 비록 가득하고 수미산이 비록 계합하였으나 다만 오직 5척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법’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품은 머무르지 않는 법성이므로 화상이 “금일 5척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무주(無住)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본래 적정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만 5척 법성이 옆에 다른 물건[餘物]이 없으므로 ‘본래 적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일체가 다 끊어졌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맨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이다.
‘깨달은 지혜로 알 바이며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古記)』 표훈 대덕이 의상 스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머무름 없음[無住]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곧 나의 범부의 5척 몸이 3제(際)에 칭합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머무름 없음이다.”
【문】 만약 3제를 기준으로 하여 나눈다면 곧 많은 종류의 5척입니까?
【답】 이것은 연(緣)의 5척이므로 하나[一]를 필요로 하면 곧 하나이고, 많음[多]을 필요로 하면 곧 많음인 것이다.
【문】 만약 3제에 칭합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면 곧 머무름이 있는 것입니까?”
화상이 말씀하셨다.
“만약 5척의 주처(住處)를 보지 않는다면 장차 유주(有住)와 무주(無住)를 내가 마땅히 설할 것이다.
또 월유사(月瑜寺) 법회에서 신림(神琳) 대덕이 말씀하셨다.
“옛날 상원(相元) 스님이 진정(眞定) 스님에게 여쭈기를, ‘머무름이 없으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까, 머무름이 있으면서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둘 다 모두 옳지 않다’라고 하셨다. 다시 여쭈기를,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머무름이 없는 것이라 합니까?’ 하니, 대답하시기를, ‘오직 머무르게만 하는 까닭에 머무름이 없다고 할 뿐이다’라고 하셨다. 여쭈기를, ‘머무름이 없음에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까? 머무름이 있음에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시기를, ‘또한 모두 옳지 않다’(이상)라고 하셨다.
이는 곧 묻는 것은 비록 감히 묻는 것이지만 감히 답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답은 비록 감히 답한다 하더라도 감히 물을 수는 없는 곳이다. 만약 임시로 말한다면 유위법과 같지 않아서 찰나에 머물지 않으므로 ‘머무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무위법과 같지 않아서 3제에 머물지 않으므로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신림 대덕이 설법을 할 때에 대운(大雲) 법사 군(君)137)이 아뢰었다.
“연기분의 설법은 이와 같으나 증분의 설법은 어떻습니까?”
신림 대덕이 침묵하며 잠시 있다가 말하였다.
“대답해 마쳤다.”138)
운(雲) 법사 군이 알지 못하자, 신림 대덕이 말하였다.
“그대가 이 물음을 일으킬 때에 앉아 있는 상(床)과 일체 법계의 모든 법(法)이 동시에 물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옳고, 다만 그대만이 묻고 나머지 모든 법이 물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이다.”
법사 군이 아뢰었다.
“법계의 인후(咽喉)와 다함 없는 혀끝이 동시에 물음을 일으킨 것은 연기분의 물음입니까?”
신림 대덕이 말씀하셨다.
“3세간의 법이 동시에 물음을 일으키는 것은 증분의 물음이며, 침묵에 칭합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증분의 설함이다. 3세간의 법이 각자 스스로의 지위에 머물러서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증분의 들음[聞]인 것이다.”

【본문】 진성(眞性)이 매우 깊고……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법기』 위의 증분 중에서는 그 몸과 마음을 가리켜 곧바로 법성을 보였으니, 이름과 모습이 없으므로 중생[機]들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법성을 바꾸어[轉] 진성이라 이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익히게139)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맹인이 비단짜기를 배우고자 하니 기술자가 ‘마땅히 모아 갖추어서 오라’고 지시하였는데, 저 맹인이 풀로 만든 끈을 가지고 오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증분은 일체를 끊었기 때문에 오직 증득[證]으로만 아는 바이나 8식(識)의 망심(妄心)으로써 증득해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능히 곧바로 증분의 처소를 가리키지 못하고 이에 아래로 한 걸음 내려와서 임시로 진성이란 이름을 지어서 보인 것이다.
‘매우 깊고[甚深]’라는 것은 진성에 들어가는 문이니, 이른바 화장세계의 매우 깊음과 미륵(彌勒) 누각의 매우 깊음이다. 화장세계가 매우 깊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티끌[塵] 속에서 법계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의 미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안과 밖을 구하나 아울러 다 얻지 못하는 것이다. 미륵 누각이 매우 깊다는 것은, 이른바 미륵이 손가락을 퉁겨 누각의 문을 열고 선재가 들어가자마자 몰록 삼세의 자기 몸[自身]과 법 및 모든 선우(善友)를 보기 때문이다.140)
‘지극히 미묘하다[極微妙]’는 것은 중도이다. 두 가지 극단[邊]을 떠나기 때문에 중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곧 모든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라 하는 것이다.
‘자성을 지키지 않고[不守自性]’ 등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타(他)로써 성품을 삼으며, 타가 무성(無性)임을 말미암아 자(自)로써 성품을 삼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진기(眞記)』 【문】 진성은 위에서 말한 법성과 어떻게 다른가?
【답】 어떤 사람141)은 다르다고 하니, 이른바 법성은 진(眞)과 망(妄)에 다 통하면서 원융을 취하는 것이고, 또 정(情)과 비정(非情)에도 통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직 진이면서 오직 또한 유정문(有情門)이니, 아래에서 ‘진성’의 단락을 해석할 때 중생의 12지(支)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實)을 기준으로 하여 ‘진성이 곧 이 법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성의 체(體)가 매우 깊고 미묘하다’는 것은 다만 자성을 두지 않고 모든 연을 거두어 잡아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의 바람이라는 연을 따라 차별적인 만법(萬法)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의 일승의 뜻이라면 연(緣) 이전에 법이 없기 때문에 먼저 진성이 있어서 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내가 금일에 혹은 물의 용[水用]이 되기도 하고 혹은 돌의 용[石用]이 되기도 하니, 연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남김없이 몰록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 가운데 물의 이름과 물의 모습, 돌의 이름과 돌의 모습 등이 있으므로 이름과 모습이 없지 않으나 이러한 이름과 모습이 곧 이름과 모습이 없음이다. 그래서 우선 중생의 첫째 무명지(無明支)를 기준으로 하여 열 번의 관(觀)을 거치면 무명의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 매우 깊은 법[甚深法]이니, 취하고 버릴 것이 없으므로 ‘미묘’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 ‘옆이 없는[無側]’ 이름과 모습을 이룬다. 만일 보현의 증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옆이 없는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이름을 떠나고 모습을 끊으며, 만일 십불의 증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맨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 등을 보지 않는 것이다. 무명지가 이미 그러하듯이, 나아가 노사지(老死支)도 모두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경142)에서 “일체의 모든 여래가 불법을 설한 바 없으니 마땅히 교화해야 할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설함이 없으면 증분이고 설하면 교분이다.
『도신장(道身章)』143) 만약 정해진 것이 예로부터라고 한다면144) 곧 연기에 성품이 있게 되어서 자재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연기라는 것은 자성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고, 머무름이 없는 것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며,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문】 이러한 이치가 어찌 예로부터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답】 삼승 중에서는 먼저 하나의 법을 두고 이 법이 연을 따르지만,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연이 곧 법이니, 연 밖에 연을 따르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미 ‘예로부터’라고 말했다면 곧 이것은 지금 연기하므로 그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정해진 것이 옛날에도 머물렀고, 또 정해진 것이 지금에도 머물러 있다면 연기가 아니므로 ‘연기의 법은 무성(無性)으로써 진성(眞性)을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대기』 표훈 대덕의 뜻은, ‘진(眞)’은 무주의 본법이고, ‘성(性)’은 본분(本分)의 종자이다. 본분의 종자라는 것은, 만약 ‘본문의 해당 부분[文處]’을 가리키면 초회(初會)의 과지오해(果地五海)145)인 것이다. 이러한 5해(海)로써 본식의 체로 삼는 것이며, 이 본식을 기준으로 하여 뒤의 여러 회(會) 중에서 혹은 ‘종성’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행업(行業)’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원선결정(願善決定)’ 등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른바 만일 상근기의 사람이라면 곧바로 증분에 의지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곧 법성임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증처(證處)는 이름과 모습을 끊었기 때문에 중하근기의 사람은 능히 믿어 얻지 못하기 때문에 ‘5해가 바로 그대의 본식의 근원’이라고 설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서 앞의 근기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법성임’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진성에 의지하여야 바야흐로 비로소 본식의 뜻을 건립하는 까닭에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혹은 구분(具分)의 뇌야(賴耶)를 설하기도 하고, 혹은 일분(一分)의 생멸하는 뇌야 등을 설하지만 오직 보현의 근기만이 ‘자기의 본식이 5해의 근원’임을 얻기 때문에 ‘십불과 보현 대인의 경계[十佛普賢大人境]’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진성이 이미 이와 같이 매우 깊고 미묘하다면 무슨 뜻에서 22위(位)를 나누는가?
【답】 자성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필요로 하는 바의 지옥, 나아가 불과(佛果) 등의 연(緣)을 따라 22위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22위(位)를 ‘보(普)’자 도장[印]으로 인(印)치면 곧 모두 다 보현 자체(自體)이기 때문에 제3중 해인이 바로 이 보현 대인의 경지인 것이다.
『관석(觀釋)』 숭업(崇業) 스님146)의 『관석』 중에서 「명난품(明難品)」147)의 ‘심성(心性)은 하나이다’라는 글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법장[藏師]은 지위에 의거함을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에 부정[遮]을 세워 거듭되는 어려움을 구한 것이며, 지엄은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갖가지 마음의 ‘습함에 지나는 바다[濕過海]’의 뜻을 해석하기 때문에 “마음은 분별이 없음으로써 하나의 성품을 삼는데, 어떻게 능히 갖가지 일[事]을 이루는가”148)라고 하였다. 이러한 질문의 뜻은 앞의 「광명각품」 가운데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법계에 칭합하여 두루하게 나타나는 것은 다만 하나의 불지(佛智)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6도인과(道因果)와 소승인과(小乘因果), 나아가 원교인과(圓敎因果) 등 보현의 22위를 열거한 것은 일승 가운데서 보현은 교분의 궤칙이 되고 십불은 증분의 궤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분의 궤칙을 보이고자 하는 까닭에 열거하였을 뿐이다. 불지를 얻고자 하면서 만일 한 물건을 제거한다면 반드시 전법계(全法界)의 지(智)는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요컨대 6도인과ㆍ소승인과 등으로써 보현의 아함위(阿含位)로 삼고 그 마음을 원융하게 단련하여 하나의 불지(佛智)를 이루기 때문에 불지로써 보현의 증득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아서 물었다. “불지는 하나인데 어떻게 능히 6도, 나아가 불(佛) 등 갖가지 신심(身心)의 과보 등을 생(生)하는가?”
149)에서 답하여 말하였다.

모든 법은 자재(自在)하지 않으니,
실(實)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네.
이러한 까닭에 일체의 법은
둘 다 모두 서로 알지 못하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ㆍ뜻[意]의
모든 감각기관[情根]이
이로 인하여 온갖 괴로움[衆苦]을 변화시키나,
실제로는 변화됨이 없네.

법성은 변화되는 바 없으나
나타내므로 변화가 있으며150)
거기에는 나타냄이 없으니
나타냄에 있는 바가 없네.

해석하여 말하면, ‘모든 법[諸法]’이란 것은 하나의 성품[一性] 및 갖가지 과[種種果]에 통하는 것이다.
이른바 하나는 자성이 없으므로 갖가지로써 하나를 삼고, 갖가지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로써 갖가지를 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선악의 갈래 가운데서 갖가지의 몸과 마음이 다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스스로의 위(位)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자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엄이 말하기를 “분별이 없고 머물지 않기[無分別不住] 때문에 능히 많은 일[衆事]을 이루는 것이다”(이상)151)라고 하였다.
자재하지 않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며, 머물지 않는다는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不動]는 뜻이다. 소(疏)152)에서 “지음에 주체[主]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은, 만일 그 몸과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여러 업을 짓는 것이라면 갖가지 과를 받겠지만, 만약 몸과 마음에 주재자가 없이 업을 짓는 것이라면 허공과 같이 동작하기 때문에 갖가지 과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의 인(因)으로부터 쫓아 허공의 과(果)를 생하기 때문에 인과의 뜻에도 역시 걸림 없는 것이다. 소(疏)153)에서 “경문에서 ‘서로 알지 못한다[不相知]’라 한 것은 정(情)으로 아는 것을 말함이 아니며, 지금 ‘안다[知]’라고 말하는 것은 힘[力]ㆍ성품[性]ㆍ지음[作]이다”라고 한 것에서, ‘힘’은 티끌 수와 같이 많은 연(緣)의 힘이니 곧 이 중문(中門)이고, ‘성품’은 무주법성이니 곧 이 즉문(卽門)154)이며, ‘지음’은 부사의한 지음이니 중즉문(中卽門)의 과(果)이다. 일체 모든 법이 요컨대 중ㆍ즉을 갖추어야 비로소 짓는 바[所作]가 있는 것이니, 자성법의 가고 오는[去來] 뜻이 있음이 아니기 때문에 ‘중문은 허공건립문(虛空建立門)이요, 즉문은 허공동작문(虛空動作門)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엄은 “연(緣)이라는 것은 옆이 없다[無側]는 뜻이며, 옆이 없다는 것은 힘ㆍ성품ㆍ지음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에 신림 대덕[林德]이 말하였다.
“「명난품」의 일심의 바다는 ‘습함에 지나는 것[過於濕]’이며 『기신론』의 일심의 바다는 ‘습함에 머무는 것[留於濕]’이니, 만일 ‘습함에 머무는 바다[濕留海]’의 입장에 서 있다면 답은 ‘뜻에 장애 되는 바가 있다’이며, 만일 ‘습함에 지나는 바다[濕過海]’의 입장에 서 있다면 답은 ‘뜻에 장애 되는 바가 없다’이다.
질응(質應) 대덕155)이 태백산[大白山]의 지오(智悟)156) 스님이 머물던 곳[藪]에서 하안거를 끝낸 다음에 대경(大經)157) 중의 “법성은 변화하는 바가 없다”라는 문장과 『공목(孔目)』 중의 “성종성(性種性)은 본유(本有)이고 습종성(習種性)은 수생(修生)이라는 것은 불법(佛法)의 즐기는 바가 아니며, 나아가 법성 밖에 수생이 일어남이 있다는 것은 연기(緣起)가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문장을 얻어 보고서 신림 대덕에게 바치면서 말씀드렸다.
“이것은 습과해의 증득입니까?”
신림 대덕이 말하였다.
“그렇다. 풀이해서 말하자면, ‘연기는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만일 ‘증득하는 바[所證]의 이치[理]는 예로부터 있었으며 능히 증득하는[能證] 지혜[智]는 바로 지금에 비로소 일어난다’라고 말한다면, 지혜로써 이치를 증득할 때[際]에 그 아직 증하지 못한 때를 바라보면 증승(增勝)의 뜻이 있기 때문에 ‘연기는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지혜는 연기인 것이니, 이 가운데서는 눈ㆍ귀 등을 기준으로 하여 법성으로 삼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위158)에서는 “눈ㆍ귀 등을 말미암기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변화한다”고 하고, 다음에 다시 “이는 법성이기 때문에 변화되는 바가 없다”159)고 하는가?
【답】 일체 법이 보현의 몸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눈ㆍ귀 등이 선악의 경계를 대하여 모든 업과를 일으켜서 온갖 괴로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제 일체가 보현의 몸인 줄 알기 때문에 눈ㆍ귀 등의 물(物)이 바로 곧 법성이어서 변화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일 눈ㆍ귀 등이 법성이 아니라면 연기는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문】 이것이 보현의 몸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경 중에서 보현이 말하기를, “이러한 구경의 삼세 평등한 청정법신을 얻으며, 다시 청정하고 위없는 색신을 얻는다”160)고 하였으니, 어찌 한 물(物)이라도 보현 아님이 있겠는가?
【문】 이러한 보현의 몸을 어떻게 봅니까?
【답】 경에서 “보현의 신상(身相)은 허공과 같으니 진(眞)에 의지하여 국토 아님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보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우리의 몸[吾身]인가 하면 허공이 바로 이것이며, 무엇이 허공인가 하면 우리의 몸이 바로 그것이니 무측(無側)이기 때문이다. 또 6도(道)가 곧 이 허공이고 허공이 곧 이 6도인 것이니, 다음과 같이 송(頌)한다.

허공 법계로 몸과 마음을 삼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생각 생각에 상속하네.
보는 바 모든 물(物)도 역시 몸과 마음이니
생각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네.

공삼인(空三印)161)의 글에서, “마음의 성품[心性]은 세 가지162) 세간이 습과해의 마음[濕過海心]163)이 되는 것이니, 바다에 의지하여 파도를 일으키지만 하나하나의164) 파도는 모두 3세간이므로 이것이 습과해의 마음이다. 바다에 의지하여 파도165)를 일으키면 바다가 인(因)이고 파도는 과(果)이며, 파도에 의지하여 바다를 일으키면 파도는 인이고 바다166)는 과이니, 동시에 서로 인과167)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연기 속제(俗諦)의 대법(大法)168)인 것이다.

【본문】 하나 가운데 일체……많음이 곧 하나이다.
『법기』 【문】 무엇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어진다’ 다음에 이 구절을 밝히는 것인가?
【답】 대개 연기법은 하나하나에 별도의 자성이 없어서 상호간에 타자[他]로써 자성을 삼고서야 바야흐로 능히 연(緣)을 따라 옆이 없이[無側] 일어나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다음에 하나 가운데 일체[一中一切]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문】 만약 연기의 법이 따라 일어남[隨起]에 옆이 없다면 오직 이는 연(緣) 이전에 법이 없다는 뜻인가?
【답】 연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는 법이 없으나, 성품[性]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 법이 있으니, 무엇인가? 연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금일(今日)의 연 가운데의 5척으로 나타나는 것이 연기의 본법(本法)이며 옆이 없이 서 있기 때문에 연 이전에 한 법도 없는 것이지만, 성품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본래 성기(性起)의 법체(法體)가 있는 것이다.
『진기』 ‘하나 가운데 일체……’ 등 2구절은 연기의 체(體)가 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뜻을 거듭 나타내어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 1구는 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이니, 이른바 하나를 얻으면 정(定)히 열[十]을 얻고, 열을 얻으면 정히 하나를 얻는 것이니, 인(因)을 얻으면 곧 과(果)를 얻는 것이고 과를 얻으면 곧 인을 얻는 것이다. 열의 연은 인이고 이루어지는 바의 일(一)은 과이니, 이러한 인과란 곧 하나의 시(時) 가운데 2위(位)가 부동이기 때문에 ‘인과도리문’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의 1구는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니, 이른바 이것은 곧 저것이며 저것은 곧 이것이니, 걸림 없고[無礙] 옆이 없기[無側] 때문에 덕용자재문 및 위동문(位動門)이라 하는 것이다.
【문】 앞은 중문(中門)이기 때문에 유력무력문(有力無力門)이고, 이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유체무체문(有體無體門)인데 어찌하여 용(用)이라 하는가?
【답】 이는 곧 인연의 당체(當體)가 인에 즉하고 과에 즉하는 뜻을 용이라 이름할 뿐이니, 역용(力用)의 용이 아니다.
【문】 ‘일중일체’란 열의 연이 인(因)이고 이루어지는 바의 일(一)이 과이니, 그렇다면 능소를 합하여 열 하나가 되는가?
【답】 하나의 연 가운데서 ‘타자를 바라보는[望他]’ 뜻을 기준으로 하면 능히 이루는[能成] 인이 되고, ‘대함을 끊은[絶待]’ 뜻에서는 이루는 바[所成]의 과가 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 뜻이 둘이 아니므로[無二] 열 하나가 아닌 것이다.
『대기』 ‘하나 가운데 일체’ 아래는 대연기(大緣起) 중의 인과 도리 및 덕용 자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2구절이 있는 것이다. 숭업(崇業) 스님이 말하기를 “삼승에도 역시 이러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만일 초교의 아뢰야식 중에서라면 3성(性)의 종자가 본식의 체와 같아서 무기(無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본식의 체 가운데 훈습하여 이루는 뜻은 체문(體門)이고, 또 덕용 자재의 뜻이다. 3성의 종자가 능히 훈습함을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역문(力門)이니 인과 도리의 뜻인 것이다. 만일 숙교 가운데라면 여래장의 체는 덕용 자재의 뜻이니, 생하거나 멸하는 것은 용이기 때문에 인과 도리의 뜻인 것이다. 만일 일승 가운데라면 법을 따라 인(因)을 변별하기 때문에 10보법(普法) 가운데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서 체를 갖추고 용을 갖추니, 체는 곧 덕용 자재이고 용은 곧 인과 도리인 것이다.
『도신장』 【문】 서풍(西風)의 파도는 동풍(東風)의 파도가 아니며 동풍의 파도는 서풍의 파도가 아니지만, 다만 두 가지 파도의 물의 체[水體]가 둘이 아닌 뜻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이라 말할 수 있으며, 두 가지 파도를 기준으로 하면 즉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만 이 현상[事]과 저 현상의 이체(理體)가 둘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이라 말할 수 있는데, 어떻게 두 가지 현상을 제거하지 않고서 상즉문(相卽門)을 논할 수 있는가?
【답】 만약 두 가지 바람[風]을 놓는다 하더라도 물에는 두 가지 파도가 없으니, 이미 두 가지 파도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무엇에 즉하겠는가? 이미 이것으로써 저것에 즉하므로 두 파도를 제거하지 않고서 상즉을 논했을 뿐이지 이체를 기준으로 해서 상즉을 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이 파도의 물은 저 파도의 물과 파도의 체는 하나이므로, 파도가 비록 다함 없으나[無盡] 체로 말하면 곧 하나라고 하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만약 이 파도가 아니면 곧 저 파도가 없고 만약 저 파도가 아니면 곧 이 파도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중문이요, 이 파도는 제 성품[自性]이 아니기 때문에 저 파도에 있고 저 파도는 제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 파도에 있다고 한다면 이는 즉문이라는 것은 일승이다.
『고기』 입(入)・즉(卽) 중에 제가(諸家)에서 이름을 세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니, 이른바 혹은 중문ㆍ즉문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상입(相入)ㆍ상즉(相卽)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상재(相在)ㆍ상시(相是)라 하기도 하고, 상자(相資)ㆍ상섭(相攝)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상호 의지하는 역(力)ㆍ무력(無力)의 뜻이기도 하며, 상호 형탈(形奪)하는 체(體)ㆍ무체(無體)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69)
또한 옛사람은 “중문은 등불의 빛이 서로 들어가는 것[相入]과 같기 때문에 다만 모든 등불의 용이 상입할 뿐이며, 즉문은 파도와 물이 서로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에 파도의 체와 물의 체가 둘170)이 아닌 상즉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본문】 하나의 미진(微塵) 가운데도……역시 그러하다.
『법기』 하나의 ‘미진’이란, 초교(初敎)에서는 극미진(極微塵)이라 하고, 숙교(熟敎)에서는 공린진(空隣塵)이라 하며, 일승에서는 총상진(總相塵)이라고 한다. 이 총상진은 작은 것을 필요로 하면 곧 작게 되고 큰 것을 필요로 하면 곧 크게 되므로, 하나의 티끌[塵] 가운데서 단박에 시방(十方)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하교(下敎)의 ‘방분(方分)이 있는 티끌’이라는 것은 일승의 티끌과 어떻게 다른가?
【답】 일승의 티끌은 방분을 필요로 하면 곧 방분이 있고[有方分], 방분이 없음[無方分]을 필요로 하면 곧 방분이 없으니, 필요로 함에 따라 자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문】 무방분의 티끌은 다시 더 부수어지지 않는가?
【답】 또한 부수어짐을 필요로 하여 다한다. 무엇인가? 만일 그 정(情)이 이른바 헤아려지는 바[所計]의 무방분이라고 한다면 요컨대 반드시 6상(相)을 써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기』 【문】 ‘하나의 미진 속에 시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시방계(十方界)를 거두어들여서 하나의 티끌을 이루기 때문에 시방을 포함한다고 하는가, 시방계를 거두어 잡아[攬] 하나의 티끌을 이루고 나서 새롭게 새롭게 다시 시방을 포함하는가?
【답】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문】 하나의 티끌을 이루는 때에 시방을 거두어들여 다한다면 다시 남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새롭게 새롭게 포함하겠는가?
【답】 이는 그럴 필요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須處須]이기 때문이다.171) 하나의 티끌을 이루는 때에 시방을 필요로 하여 다하고 ‘새롭게 새롭게 포함함’을 필요로 하는 때에도 역시 뒤에 뒤에 일어남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다.
『대기』 ‘하나의 미진’이란 불국토의 티끌 수만큼 많은 겁[塵數劫] 중에 익혀야 할 바[所練]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에 바야흐로 능히 시방세계를 포함하여 걸림 없이 자재하니, 이것은 사법으로서, 가장 미세한 초위(初位)인 것이다. 진정(眞定) 대덕이 말하기를, “사융현리문(事融現理門)이란 티끌이 시방을 포함하는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지, 하나의 티끌이 민멸(泯滅)하여 융섭하여서 같은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도신장』 의상 스님은 “하나의 미진 속에 시방세계를 포함한다는 것은 동일하게 머무름이 없음[無住]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상원 스님[元師]172)이 여쭈었다.
“미진은 머무름이 없는 작은 것[小]이고, 시방세계는 머무름이 없는 큰 것[大]입니까?
【답】 한 가지[一量]이다.
【문】 그렇다면 어떻게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미진과 시방세계가 각기 자성이 없어서 오직 머무름이 없을 뿐이니,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하고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큰 줄 알지 못하고 근기 중에서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큼을 알도록 하기 때문에 우선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큰 것이라 말한 것일 뿐이지, 한결같이 티끌은 소(小)의 자성이고 세계는 대(大)의 자성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티끌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 말할 수 있으니, 도리가 가지런하여 하나인 무주 실상(無住實相)이니라.
『고기』 작게 부수면 부술수록 더욱 작아지는 티끌이 있고, 작게 부술수록 더욱 커지는 티끌이 있으며, 작게 부수더라도 여전히 본래 그대로인 티끌이 있는 것이다. 『구사론』173)의 본송(本頌)에서는 “극미(極微)ㆍ미(微)ㆍ금(金)ㆍ수(水), 토(兎)ㆍ양(羊)ㆍ우(牛)ㆍ극진(隙塵)ㆍ서캐ㆍ이ㆍ손가락 마디 등은 뒤로 갈수록 일곱 배씩 증가하는 것이다”(이상)174)라고 하였다. ‘극진’이라는 것은 창틈에서 노니는 햇빛의 티끌이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이 되면 천안(天眼)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티끌은 창극진(窓隙塵)이다. 이렇게 천안이 보는 바175)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철진(鐵塵)이 되니 초과(初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동진(銅塵)이 되니 제2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은진(銀塵)이 되니 제3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금진(金塵)이 되니 제4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수진(水塵)이 되니 대독각(大獨覺)이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미진(微塵)이 되니, 34가지 염(念)으로 번뇌를 끊고[斷結] 깨달음[보리]을 얻은 부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이상은 모두 변계분(遍計分)에 거두어지는 바이다.
176)를 다시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극미진이 되니 초교(初敎)의 보살이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쪼개어 칠분의 일에 이르면 사진(似塵)이 되니 자수용불(自受用佛)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이상은 의타분(依他分)에 거두어지는 바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법진(法塵)이 되니 종교(終敎)의 부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공진(空塵)이 되니 돈교(頓敎)의 부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종교 이후는 원성분(圓成分)에 거두어지는 바이니, 이 가운데 색심(色心)의 두 가지 법은 모두 진여가 이루는 바이다. 이 종교의 법진은 의식(意識)의 대상[所緣]인 것이다. 초교에서도 역시 의식의 대상을 설하지만, 종교 중에는 하나의 의식을 세우기 때문에 제일의(第一義)의 일심안(一心眼)이 볼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법진을 삼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총상진(總相塵)이 되니 보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요, 이 보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티끌은 곧 3승의 다섯 가지 눈으로는 끝내 능히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 중에는 불공(不共) 별교(別敎)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여 미진 허공(微塵虛空)을 기준으로 하여 초위(初位)로 삼는 것이다.
【문】 이 일승의 티끌은 삼승의 이(理)와 어떻게 다른가?
【답】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곧 이(理)이고, 보안(普眼)의 보는 바를 기준으로 하면 곧 가장 미세한 사법(事法)인 것이다. 이상 설한 바는 처음에 비록 『구사론』을 인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177) 논의 뜻은 아니다. 이는 신림 대덕이 융수(融秀)에게 준 뜻이니, 마음을 관(觀)함을 기준으로 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을 체달하여 설한 것이다.
또한 기(記)에서는 “7미(微)라는 것은 창유진(窓遊塵)ㆍ양모진(羊毛塵)ㆍ토모진(兎毛塵)ㆍ우모진(牛毛塵)ㆍ금진(金塵)ㆍ수진(水塵)ㆍ극미진(極微塵)이다”라고 하였다. 풀이해 말하면, 창유진은 창틈에서 노니는 햇빛178)이며, 양모진은 창유진을 쪼개어서 일곱 등분한 것이니 오직 양털의 끝에만 붙기 때문이다. 토모진은 양모진을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눴기 때문에 양모에 붙지 못하고 오직 토끼 털의 끝에만 붙는 것이다. 우모진은 토모진을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눴기 때문에 오직 소 배의 아래쪽 털끝에만 붙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누면 금을 뚫고 나가도 금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눈 것은 물을 투과해도 물에 젖지 않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일곱이 된 것
이 극미인 것이다. 이 하나하나179)의 티끌이 모두 증식[生子]하기 때문에 7모진(母塵)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극미진은 초교 중에서는 3무수겁(無數劫) 동안에 나누고 쪼개지며, 이 초교의 티끌을 기준으로 하면 종교 중에서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동안에 나누고 쪼개지며, 일승에 이르러서는 하나하나의 부처님 세계 진수겁(塵數劫) 중에 나누고 쪼개지는 것이니, 가장 미세한 데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승의 극미진이 되는 것이다.

【본문】 한량없이 오랜 겁……따로 떨어져서 이룬다.
『법기』 ‘한량없이 오랜 겁이 곧 일념이다’라는 것은 한 터럭을 세로로 10등분 하고, 나아가 1백 등분ㆍ1천 등분하여, 그 한 부분을 옥판(玉板) 위에 얹어놓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끊되, 그 날카로운 칼이 판에 이르는 때를 기준으로 하여 일념이라 하는 것이다.
『진기』 ‘10세’라는 것은 일설에는 제10세라 하니, 이른바 총상(總相)의 염(念)을 말하는 것이고, 일설에는 10세라고 하니, 이른바 총별을 합하여 들기 때문이다.
【문】 총상의 1세가 현재의 일념을 취한다는 것은 별상(別相)의 세(世)에는 오직 여덟이라는 것인가?
【답】 현재의 일념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면 전후가 상대(相對)하여 별상의 가운데 서기 때문에 별상의 세는 아홉이지 여덟이 아니며, 전후를 바라보지 않고 총괄적으로 포함하여 대(待)함을 끊으면 총상의 제10세인 것이다.
『대기』 【문】180) 9세가 즉입하여 10세를 이루는가? 10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시 즉입을 논하는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이 모두 가능하다. 그러므로 강장(康藏)181)이 말하기를, “그러나 이 9세가 교대하여 서로 즉입하기 때문에 하나의 총구를 이루는 것이니 총별이 합하여 10세를 이루는 것이다. 이 10세가 별이(別異)를 구족하여 동시에 현현하여 연기를 이루기 때문에 상입(相入)을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귀장원통초(旨歸章圓通鈔)』182) 삼승 중에서는 법의 고단(孤單)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으니 법이 이미 유전하기 때문에 시간도 유전하는 것이다. 일승 중에서는 법의 원만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으며 법이 유전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유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락경』183)에서는 “부처님께서 범마달왕에게 고하여 말씀하시길, ‘그대 앞에 누워있는 개는 그대의 과거 몸이요, 장차 나는 그대의 미래 부처이다’라고 하였다”(운운) 하였다. 또한 신라[羅國]184)의 승려 지통(智通)은 의상 스님의 10성(聖) 제자 중 한 사람인데, 태백산185)의 미리암(彌里庵) 토굴에 머물면서 화엄관(華嚴觀)을 닦다가 어느 날 우연히 큰 돼지가 토굴 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지통은 평상시대로 목각존상(木刻尊像)을 예배하되 정성스러움을 다했다. 그러자 존상이 지통에게 말하였다.
“토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그대의 과거의 몸이요, 나는 곧 그대가 장차 얻을[當果] 부처이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서 곧 ‘삼세가 한 순간[三世一際]’이라는 이치를 깨달았다. 훗날 의상 스님을 찾아뵙고 그 일을 말씀드리니, 스님께서 그 그릇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수여하셨던 것이다(이상).
앞의 범마달왕(梵摩達王)의 일과 함께 생각하면, 비록 때에 정법과 상법의 차이가 있으며 장소 역시 중심과 주변의 다름이 있으나, 그 인연은 역시 서로 유사한 것이다(운운).
삼승 중에서 과거는 오직 개의 지위이고 현재는 오직 사람의 지위이며 미래는 오직 부처님의 지위이므로 과거의 개로부터 현재의 사람에 이르고, 현재의 사람으로부터 미래의 부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승 중에서는 법의 고단(孤單)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다”고 하니, 법이 항상함이 없으면 시간도 역시 항상함이 없는 것이다. 일승 중에서는 과거의 개 가운데 사람과 부처를 갖추고 있고, 현재의 사람 중에서도 개와 부처를 갖추고 있으며, 미래의 부처 중에도 개와 사람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개로부터 현재의 사람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사람으로부터 미래의 부처에게로 이르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 중에서는 법의 교철(交徹)186)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다”고 하니, 법이 상주(常住)이기 때문에 시간 역시 상주인 것이다.
【문】 법은 비록 하나라고 하지만 서로 바라보면서 9세를 이루는 것입니까, 9세가 다른 것같이 법 역시 다른 것입니까?
【답】 뒤의 뜻과 같으니, 이른바 우선 내 몸을 기준으로 하면, 일년 중에 달로 치면 곧 일년이 12달이므로 내 몸 역시 열둘인 것이다. 한 달이 30일이므로 몸 역시 삼십인 것이고, 하루가 12시간이므로 몸 역시 열둘인 것이다. 한 시간이 8각이므로 몸 역시 여덟인 것이다. 이와 같이 1년 360일에 하루가 1백 각(刻)이므로, 몸 역시 3만 6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9세가 다른 것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른 것이다.
【문】 5위(位)187)를 기준으로 하여 9세를 논하면, 그저께[昨昨日]는 과거의 과거이므로 오직 하나뿐이다. 어제[昨日]라는 것은 당체(當體)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의 현재이며, 오늘[今日]을 바라보면 현재의 과거이므로 둘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를 바라보면 과거의 미래요,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현재이며, 내일을 바라보면 미래의 과거이므로 셋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내일[明日]이라는 것은 오늘을 바라보면 현재의 미래요,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미래의 현재이므로 둘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모레[明明日]는 미래의 미래이므로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5위(位)라, 서로 바라보아서 논하기 때문에 9세를 이루는 것이니, 곧 법은 비록 하나라고 하지만 서로 바라보아서 논하기 때문에 역시 9세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9세의 다름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법장[康藏]은 “시간과 법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알라”고 했던 것이다. 삼승 중에 색(色)과 심(心) 등이 법이요, 이 법 위에서 전후와 변천의 뜻을 세워서 시간을 삼기 때문에 시간은 곧 임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을 논하지 않는다. 일승 중에서는 시간과 법이 서로 떠나지 않으므로 시간 역시 실(實)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다름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른 것이다.
『도신장』 어느 날 밤 꿈에 과거의 아버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이 각각 셋씩 아홉이 있으나 깨어났을 때 보면 다만 일념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요, 이러한 마음 가운데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버지를 삼고 조각으로 나누어서 나를 삼고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들로 삼는 것이 아니다. 총체적으로 일심에 있어서 듦에 따라 곧 아홉 사람을 다 거두어들이니, 서로 아는 바가 없으나 단절되어 아홉 사람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일념 밖에 셋을 세워서 유(有)로 삼는 것이 아니고 여섯을 세워서 무(無)로 삼는 것이 아니니, 유와 무가 동일하게 일념에 처하여서 유무의 다름이 없는 것이다(이상).188) 그러므로 다만 그 무아(無我)의 보심(報心)이 온전히 아버지가 되고 온전히 나가 되며 온전히 아들이 되기 때문에 9세의 다름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른 것이다.
【문】 현재의 일념이 나머지 8세의 별의(別義)를 배제하는 것은 9세 중에 치우침 없는 총의(總義)와 어떻게 다른가?
【답】 지엄 존자가 비유로써 의상 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어떤 사람의 꿈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 위에 올라가 있고 아들과 손자는 아래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신은 중간에 있으면서 차례로 전하여 주는 것과 같으니, 조부는 과거의 과거이므로 오직 하나의 지위이며,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이므로 두 가지 지위를 갖추고 있으며, 중간의 자신은 과거의 미래이고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의 과거이므로 세 가지 지위를 갖추고 있으며, 아들은 현재의 미래이며 미래의 현재이기 때문에 두 가지 지위를 갖추고 있고, 손자는 미래이므로 오직 하나의 지위인 것이다. 그 중간에 있으면서 기와를 나르는 사람은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나머지 8세를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현재인 것이다. 꿈속의 다섯 사람을 통틀면 9세 중에 치우침이 없으니, 이 사람의 분상(分上)에는 두 가지 뜻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별의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도신장』189) 지엄 스님이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제자[學徒]들이 나아가서 여쭈었더니, 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으셨다.
“경 중에 ‘하나의 미진 가운데 시방세계가 포함되어 있다’와 ‘한량없는 겁이 곧 일념이다’ 등으로 말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대중이 말씀드렸다.
“연기법은 자성이 없으니 작은 것이 작은 데 머물지 않고 큰 것이 큰 데 머물지 않으며, 짧은 것이 짧은 데 머물지 않고 긴 것이 긴 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나 아직 설었구나.”
그러자 대중들이 말씀드렸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말 것이니, 단지 하나를 말하기 때문이다.”

【본문】 처음 발심할 때……언제나 함께 어우러져 있다.
『법기』 【문】 무엇 때문에 ‘9세와 10세가 서로 상즉한다’ 다음에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는 뜻을 설하는가?
【답】 증분(證分)의 법은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 어떤 수행인[行人]이 이것을 분간하지 못하므로 이 사람을 위하여 증분의 법성(法性)을 전(轉)하여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하나에 자성이 없으니 일체로써 성품[性]을 삼고, 하나의 티끌[塵]에 자성이 없으니 시방으로 성품을 삼으며, 무량겁(無量劫)에 자성이 없으니 일념(一念)으로 성품을 삼고, 일념에 자성이 없어서 무량겁으로 성품을 삼으니, 이와 같은 것을 ‘매우 깊은 진성(眞性)’이라 이름한다”라고 한다.
수행인이 생각하여 말한다.
“이미 진성은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증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시 가르쳐서 말한다.
“요컨대 마땅히 이 진성으로 마음을 삼아서 발(發)하나 여기에서 행인이 이와 같이 발하기 때문에 발심(發心)이 곧 만과(滿果)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生死)에 노닐고, 생사에 노니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물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이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소전장(所詮章)』190) ‘부처님 종성(種性)’의 문장에서 “세 번째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2가지 설이 있다. 첫째, 앞의 여러 가르침에서 밝힌 종성을 거두어들여서 모두 주반(主伴)을 구족하여 종(宗)을 이루는 것이니, 동교(同敎)이기 때문이며 방편을 거두어들이는 까닭이다. 둘째, 별교(別敎)에 의거하면 종성이 매우 깊고 인과가 둘이 아니니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에 통하고 3세간을 다하여 일체의 이사(理事)・해행(解行)의 모든 법문을 두루 거두어들이고 본래 만족하여 이미 성취해 마쳤기 때문이다. 대경(大經)191)에서 “보살의 종성이 매우 깊고 광대하여 법계 허공과 더불어 같다”라고 한 것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진기』 ‘처음 발심할 때 문득 정각을 이룬다’라는 것은,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3현(賢)192) 10지(地) 가운데 10해(解)193)의 첫째 발심주(發心住)에서 부처를 이루고[成滿], 다시 치지주(治地住)194) 등에서 부처를 이루니, 이는 밝음과 어둠의 차이가 없으나 맡겨서 나타낸 것이다. 만일 스스로의 별교[自別敎]라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즉(卽)하여 정각이라 이름할 뿐이니 10해(解)의 지위에 맡김이 없다.
‘생사와 열반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은, 만일 지위[位]에 맡겨 말한다면 ‘적멸한 열반의 체가 연으로부터 쫓아 생사를 이루니, 생사를 이루는 때가 곧 성정열반(性淨涅槃)의 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생사와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연(緣)에 있다. 무엇인가? 생사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열반을 갖추고, 열반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생사를 갖추기 때문인 것이다.
【문】 무엇이 생사(生死)이고, 무엇이 열반(涅槃)인가?
【답】 생사가 곧 그대의 몸이며, 열반이 곧 그대의 몸인 것이다.
『탐현기(探玄記)』195)196) 가운데 ‘초발심 보살이 곧 부처이다’라는 문장을 해석하면서, 혹은 인(因) 가운데 과(果)를 설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해(解)가 부처님 경계와 같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이(理)를 기준으로 하여 평등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삼승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면 역시 위와 같은 설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아래위의 문장을 살펴보건대, 일승 원교(一乘圓敎)를 기준으로 하면 시종(始終)이 서로 거두어들여[相攝] 원융무애하니, 처음[始]을 얻으면 곧 마지막[終]을 얻고 마지막을 궁구하면 바야흐로 근원인 처음인 것이다. 첫째는 다라니문의 연기가 상섭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둘째는 보현의 보리심이 두루 6위(位)를 다 거두어들이기[該攝] 때문에 인(因)에 즉하여 곧 과(果)인 것이며, 셋째는 법성은 시종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발심하여 처음에 들어가는 것이 곧바로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위의 경문197)에서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니, 지혜의 몸[慧身]을 구족하여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198) 이제 이 뜻을 분별하건대, 간략히 4가지의 차별로 나누는 것이다. 첫째는 유인문(唯因門)이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언제나 보살이 만행(萬行)을 닦기 때문에 혹은 순수하며 혹은 잡스러워서 휴식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하나의 행에 구경(究竟)이 없기 때문이며, 중생계가 가히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나는 언제나 시방의 국토 중에서 보살행을 행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허공이 다할 수 없으며 중생이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룸이 없는 것이다. 마치 문수가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 되고 마야부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같으니, 이들은 모두 인문(因門)에 머물러서 교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유과문(唯果門)이니, 과거와 미래[前後際]가 다하도록 언제나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덕상(德相)이 온전히 진실하여 시절의 운수[時數]에 떨어지지 않으니, 다함이 없는 궁극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역인역과문(亦因亦果門)이니, 이른바 발심과 정각을 이룸이 있어서 모든 때에 생각생각마다 발심하고 생각생각마다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넷째는 비인비과문(非因非果門)이니, 이른바 가히 발할 마음이 없으며 가히 이룰 부처가 없기 때문이며, 진실한 법계 중에는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도신장』 【문】 ‘3세간으로 부처의 몸과 마음을 삼는다’는 것은 불신(佛身)이 크고 넓기 때문에 중생 등이 부처의 몸과 마음[身心]에 있는 것인가, 중생의 업과(業果)가 곧 부처인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이 다 가능하니, 「노사나품」에서는 “부처님의 하나의 모공(毛孔) 중에 한량없는 중생이 머물러서 각기 스스로 고락을 받되, 오고 감을 알지 못한다”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역시 “중생의 업과 등이 곧바로 부처이다”라는 것도 가능하다.
【문】 ‘중생의 업과가 곧 부처이다’라는 것은 예로부터 곧 부처이거늘 어떻게 ‘처음 발심하였을 때 비로소 부처를 이룬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예로부터 부처이지만 발심하였을 때 비로소 부처임을 알 뿐인 것이니, 마치 꿈속에서 달렸지만 스스로의 꿈이 곧 적정함이니 꿈을 깬 아침에 비로소 달린 것이 곧 누워 잔 것인 줄 아는 것과 같다.
『대기』 ‘처음 발심할 때[初發心時]’ 등은 22위 중에 어느 하나의 위(位)를 따라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초발심으로 삼으니, 곧 변정각(便正覺)인 것이다.
【문】 ‘선한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발심을 삼아 정각인 것은 가하지만, 어떻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초발심을 삼으며 또한 정각이겠는가?
【답】 머무름 없는 별교[無住別敎]를 기준으로 하면 22위(位)가 다 무주의 위이기 때문에 처음에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때에 후제(後際)의 불과를 거두어들임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주 별교 가운데도 또한 이와 같은 ‘발심 정각’의 뜻이 있는가?
【답】 어느 위(位)를 따라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고 변정각이라는 것은 먼저는 미혹하다가 나중에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다만 본래 깨달음이므로 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 등은 22위 가운데 3도(途)ㆍ5승(乘)199) 등이 갖고 있는 모든 분단(分段)ㆍ변역(變易)과 원교 중의 분단ㆍ변역을 합하여 생사의 변(邊)으로 삼고, 그 가운데 있는 이사열반(二四涅槃)과 열 가지 열반을 합하여 열반의 변으로 삼는 것이니, 이 둘은 서로 알지 못하며 하나인 무분별이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그렇다면 생사는 싫어할 바가 아닌데 무엇 때문에 지상(至相)200)은 “6도(道) 인과는 싫어함을 의지하여 벗어남을 구한다”고 하였는가?
【답】 이승 등의 여러 유정(有情)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뿐이니, 만일 보현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모두 실자덕(實自德)이요 다시 다른 일[異事]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3도(途)의 인(因)과 10악(惡) 등의 업(業)이 닦는 바가 되는가?
【답】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만족왕(滿足王) 선지식의 일201) 등이 실법문인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여환법문(如幻法門)’ 등이라 하였는가?
【답】 다만 삼승의 상(相)을 따라 이와 같이 말하였을 뿐이다. 또 죄복(罪福)이라 말한 것은 나와 남[我人]을 실제로 집착하는 지위[位]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만일 이러한 집착을 떠난다면 일체의 죄와 복이 허깨비[幻] 같고 공(空)과 같으니, 이와 같은 법 중에 무슨 죄와 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환(幻)이라 하는 것이다.
『관사석만족왕법문(觀師釋滿足王法門)【문】202) 이 가르침에서 설한 바는 일체가 다 실(實)인데, 어떻게 말로써 교화하는가?
【답】 스스로의 힘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이면 일체가 다 실이지만, 거스르는 행이나 괴로운 일은 모름지기 ‘권화(權化)’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의 뜻을 얻으면 교화[化]도 역시 실이니, 실의 체(體)가 두루하기 때문이며 실도 역시 교화이기 때문이다.
『도신장(道身章)』203) 일승의 연(緣)은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 나머지 다른 법을 모두 거두어들여 남음이 없어서 이 한 법의 연이 될 뿐이니, 네 가지 연(緣)204) 등 모든 연의 실(實)이 모두 일승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문】 만약 이러한 차원이라면, 역시 ‘10악(惡)을 지어도 천상에 태어나고 10선(善)을 닦아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답】 이러한 뜻을 얻는 데 이르면 이러한 뜻을 말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러한 뜻을 얻지 못하면 거칠게 전할 바가 아닌 것이니, 지엄 스님은 항상 깊고 옅음을 물음에 비로소 답의 뜻을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다(운운).
【문】 일승에서 그 같은 생명을 죽일 때는 죽이는 주체도 역시 죽고 역시 죄가 있는 것인가?
【답】 해행(解行) 이상의 자재위(自在位) 중에서는 역순(逆順)을 아울러 닦는 것이지만 견문(見聞) 이하의 열등한 범부는 능히 근기를 보지 못하고205) 함부로 중생[物]의 생명을 죽인다면 중생에 대하여 이익이 없고 역시 스스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마치 저 쥐새끼가 사자의 달리기를 본받고자 하다가 불구덩이 등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운운).
【문】 ‘3세간이 모두 부처이다’라고 한다면, 초목을 취하여 쓰는 것이 곧 부처의 몸을 해치는 것이니 죄를 얻는가?
【답】 부처의 입장에서 말하면 비록 모두 부처이나 중생의 입장에서 말하면 모두 부처가 아닌 것이니, 끊는다고 해서 죄가 있겠는가?(운운) 중생과 초목은 필요로 하는 곳의 필수품[所須]이니, 비록 내 안과 같은 것이지만 중생은 죽이면 죄가 되는 필수품[所須]이며 초목은 끊어서 취하더라도 죄가 없는 필수품인 것이다.

【본문】 이치와 현실206)이 흐릿하여[理事冥然]……대인(大人)의 경계이다.
『법기』 이 가운데 ‘이사(理事)’라는 것은, 생사는 성품이 없으므로[無性] 열반으로써 성품을 삼고 열반은 성품이 없어서 생사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니, 곧 생사와 열반의 성품 없음은 이(理)가 되고 성품이 없는 생사와 열반은 사(事)가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연기는 성품이 없으며[緣起無性] 성품이 없이 연기한다[無性緣起]”라고 하였다. 연기 무성은 이(理)이고, 무성 연기는 사(事)이다. 이(理) 역시 진성의 이이며, 사(事) 역시 진성의 사이므로 ‘흐릿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니, 이는 십불과 보현의 경계인 것이다.
『진기』 ‘이치와 현실이 흐릿하여’ 등은 총체적으로 위의 뜻을 밝히는 것이니, 위에서 나타낸 바는 비록 많은 법이 있다 하나 이치와 현실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십불과 보현의 경계’에 대해서이다.
【문】 연기분은 오직 보현의 경계인데 어찌하여 십불을 말하는가?
【답】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佛外向心]과 보현의 마음이 그윽이 합하여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보현을 취(取)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뜻 가운데서 아울러 십불을 거론하는 것이다.
『대기』 【문】207) ‘이사명연’ 등은 증분과 교분의 대의를 통틀어서 맺는 것인가, 오직 교분만인가?208)
【답】 어떤 사람은 ‘통틀어 맺는 것[通結]’이라 하니, 이른바 아래 구절에서 ‘십불과 보현의 대인의 경계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오직 교분을 맺는 것’이라 하니, 이른바 증분을 맺으면서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며 나머지 경계가 아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문】 처음의 뜻209)이라면 어떤 것이 이(理)이고, 어떤 것이 사(事)인가?
【답】 증분은 이(理)이고 연기분은 사(事)이니, 곧 증・교가 무분별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210)에서 “증ㆍ교의 두 법은 예로부터[舊來] 중도이며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증분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증득한 마음[佛證心]은 이(理)가 되고 나타나는 바 3세간의 법은 사(事)가 되는 것이다. 또 연기분 중에서는 무주의 본법은 이(理)가 되고, 22위(位)는 사(事)가 된다. 이러한 까닭에 증분의 이사무분별은 십불 대인의 경계이며, 교분의 이사무분별은 보현 대인의 경계인 것이다. 이 뜻이라면 증분은 오직 십불의 경계이고 교분 중에서는 십불을 말하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안으로 향하면 십불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이기211) 때문이다. 여기서는 안과 밖의 때를 통틀어 맺어서 이와 같이 말하였을 뿐이다.
둘째의 뜻은 이러하다.
【문】 이미 ‘십불 대인의 경계’라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오직 교분만을 맺는다’고 하는가?
【답】 연기분 중에도 또한 십불이 있으니, 이 교분도 역시 십불이 밖으로 향하는 문[十佛外向門]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과 보현이 상속하면서도 각기 다르다’는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212)
『간의장(簡義章)』 ‘8척(尺) 기둥의 모습[相]은 사(事)이고, 기둥의 ‘남이 없음[無生]’은 이(理)가 된다’라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만일 일승에서라면 곧 이 8척 기둥의 모습은 이(理)이고 기둥의 ‘남이 없음’은 사(事)가 된다. 또 이(理)가 평등하면 곧 사(事)도 역시 평등하고, 사(事)가 차별이면 곧 이(理)도 역시 차별인 것이다. 만약 대도(大道)를 체득하여 이해한다면 스스로의 사[自事] 이외에 어느 곳에서 이(理)를 얻을 것인가? 그러므로 지상(至相)이 말하기를, ‘깊은 종[冲宗]은 그윽한 생각[玄想]에 남아있지 않고 원만한 도는 시작하는 문(門)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 의미가 대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삼승은 평등한 일심을 설하고, 일승은 갖가지 마음을 설하니, 곧 ‘삼승은 이(理)가 평등함이고 일승은 이(理)가 차별됨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 단지 그 이름만 다를 뿐, 설명되어지는 바[所詮]는 응당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인가?
【답】 이(理)를 필요로 하면 곧 이(理)이고, 사(事)를 필요로 하면 곧 사(事)이니, 필요로 하는 바의 연(緣)이 달라지면 이사(理事)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둥은 필요로 함을 따라 세워지기 때문에 온전한 체(體)여서 둘이 없는 것이다.
【문】 이사의 평등과 차별의 4구213)는 어떠한가?
【답】 동교의 입장이라면 4구를 지어야 하겠지만 이 별교 중에서는 4구를 짓지 않으니, ‘법은 깊고 말은 얕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기둥이라는 말 아래의 ‘이(理)를 필요로 하면 곧 이(理)이고 사(事)를 필요로 하면 곧 사(事)이다’라는 것은 평등과 차별을 필요로 함에 따라서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로 해서 곧 원만해지고 말을 해서 곧 이것이니[卽是], 옆이 없고[無側] 그늘도 없어서[無陰] 중도에 근거한다. 일승 원교[滿宗]를 기준으로 하면 앞도 아니며 뒤도 아니니, 일승의 그윽한 이치가 그러하다. 청컨대, 흉금을 비우고서 취하기 바란다.”

【본문】 능인(能人)의 해인……이익을 얻는다.
『법기』 ‘해인’ 가운데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구족하였으니, 이른바 3세간의 법을 섭입(攝入)하는 것은 자리이고, 3세간의 법을 나투는 것[現現]은 이타이다. 그러나 일승 가운데서는 이타가 없으니, 무엇인가? 교화되는 바[所化] 중생이 바로 자내증(自內證) 5해(海) 가운데의 중생이기 때문이며, 근기에 응(應)하여 일어나고, 능히 입히는[能被] 가르침도 자기의 해인정[自海印定]으로부터 일어난 바이기 때문이다.214)
‘빈번하게 여의를 내어[翻出如意]’라는 것은 해인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가르침[敎]을 여의로 삼는 것이니,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뜻에 칭합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중생의 뜻에 칭합하기 때문에 ‘여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전륜왕[輪王]이 갖고 있는 여의가 왕의 창고 안에 있을 때는 온갖 보배를 비 내리지 못하지만, 만약 전륜왕이 이 여의를 깃대 위에 내다 걸어두고서 빈궁한 사람들을 위하여, 온갖 보배를 비처럼 내려주시길 청하면 그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 갖가지 물건을 비 내려서 뜻과 같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물건들은 본래 여의주 안이나 윤왕의 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허공 중에서 다만 중생의 감응과 왕의 세력으로써 이 여의주가 보배를 비처럼 내려 다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서원과, 중생이 해인의 가르침에 감응하는 것으로 중생에 응하는 것이다. 창고 안에 있을 때는 부처님의 내증(內證)을 비유하는 것이고, 깃대 위에 내다 걸어 보배를 비처럼 내리는 때는 부처님의 외화(外化)를 비유한 것이다. ‘부사의’라는 것은 부사의한 내증으로부터 일어나니, 불가설의 중생 수에 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배를 비처럼 내려서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雨寶益生滿虛空]’라는 것은, 허공이 가없으므로 세계가 가없고, 세계가 가없으므로 중생이 가없으니, 이 가이 없는 중생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입히지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중생이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衆生隨器得利益]’는 것은, 이 여의(如意)의 가르침은 삼승(三乘)ㆍ오승(五乘)ㆍ무량승(無量乘) 등 일체의 중생 가운데서 각각 근기에 칭합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화엄에서 삼승의 별과(別果)를 얻는가?
【답】 없다. 이른바 이 대경 중에 무량승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이 경전이 갖추고 있는 무량승 중에서 『대품경』 등이 별과를 얻을 뿐이다.
『진기(眞記)』 【문】215) ‘해인삼매’는 자증(自證)이어서 말을 떠난 것인데 무슨 까닭에 이타(利他)의 처음216)에서 밝히는가?
【답】 이타의 연기는 별도의 자체가 없이 다만 십불(十佛)의 내증의 해인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道)에 사적으로 숨기는 것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217)
‘빈번하게……내어’ 등은 생각 생각마다 여의(如意)의 가르침을 일으켜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휴식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만 일념이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들여 옆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부사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배를 비처럼 내린다[雨寶]’는 것은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보배’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중생이 수용하는 갖가지 보물인 것이다. ‘허공을 가득 채운다[滿虛空]’는 것은 중생이 부사의한 가르침을 입으면 곧 ‘범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법성 허공과 더불어 다만 이 한 물건이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함’을 알기 때문이다.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는 것에서, 산왕(山王)의 보기(普機)는 총상의 가르침을 얻고 차별의 소기(小機)는 차별의 가르침을 얻으니, 각기 스스로 이익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기』 ‘해인’은 증분과 교분에 통하기 때문에 교분에서 밝히는 것이다. 또 이 4구218)는 제4중 해인이기 때문이다.
【문】 제4중 해인219)은 정내(定內)이기 때문에 이타의 상(相)이 숨어있는데, 무슨 까닭에 이타에 배대하는 것인가?
【답】 제4중 안에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곧바로 한 줄의 붉은 인[一道朱印]을 기준으로 해서 논하면 곧 차별이 없기 때문에 별교이며, 만약 굴곡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면 차별이기 때문에 곧 동교 중의 근기를 따르는[逐機]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근기를 따르는 굴곡의 붉은 인이므로 ‘여의의 가르침[如意敎]’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근거한다’라고 말한 것은, 제3중 해인220)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이 없는 이치[理]ㆍ머무름이 없는 가르침[敎]인 것이고, 제4중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이 없는 이치ㆍ여의(如意)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 제4중을 기준으로 하여 4구를 다시 5중해인(重海印)으로써 분배하면 처음 2구는 차례대로 처음의 두 해인에 배대되고, 그 다음 1구는 제3 해인에, 그 다음 1구는 뒤의 두 해인인 것이다. 이른바 아래 본문221)에서 이 해인을 해석하기를, “구경에 청정하며 담연(湛然) 명백(明白)하여 3종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등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화상(和尙)의 뜻은, 이 가운데의 해인이 오직 한결같이 제4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 중에서 다시 분배한 것이다. 처음 구절은 영리해인(影離海印)이고, 다음 구는 영현해인(影現海印)이다. 그러므로 ‘빈번하게 여의를 내어’ 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은 제3중이니 능화(能化)의 부처님이 10보법의 보배를 비처럼 내려서 보현의 근기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뒤의 구절은 제4중에서 여의교(如意敎)의 붉은 인[朱印]이 근기의 굴곡에 칭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근기를 따라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5중(重)에서 언설의 법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알며 행하고 증득하도록[信解行證] 하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222)

그러나 제4중으로써 올바른 뜻을 해석한다면 ‘능인(能人)’이란 능화의 부처님이며, ‘해인’은 정장정(淨藏定)이다. ‘번출여의’란 여의교(如意敎)의 붉은 인(印)이 근기에 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보배를 비처럼 내려서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10보법을 비처럼 내려 정위(正爲) 가운데서 온전히 온전히 응하니, 이른바 한 줄의 붉은 인(印)이 원만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중생이 근기를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함께 구르면서 원연(遠緣)을 이끌어 교화하는[兼轉引遠爲之] 가운데서 몫마다 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저 근기의 마땅함을 따라서 각기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니, 마치 큰 모서리[大角]에서는 크게 굽고 작은 모서리에서는 작게 굽는 것처럼, 글자를 따라서 굴곡하는 것이다.
『관석(觀釋)』 경223)의 ‘마치 맑고 밝은 거울과 같아서 그 거울 면을 따라 상(像)이 나타나지만 안팎으로 있는 바가 없으니 업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네’라는 문장을 해석하였다. “거울에 3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여래장경(如來藏鏡)ㆍ정광파리경(錠光頗梨鏡)ㆍ해인경(海印鏡)이다. 여래장경은 나타나는 상(像)과 더불어 하나의 체이기 때문에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상을 제거하고자 하면 거울도 역시 따라서 깨지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몸이 곧 여래장이니, 따로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업과(業果)가 여래장경 가운데의 상(像)임을 안다면 6도의 인과가 곧 나지 않는[不生] 것이지만, 거울을 얻는 때에 나타나는 상은 얼음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숙교 가운데서는 근본과 지말이 둘이 아니어서 마치 물이 파도와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의지하는 주체[能依]이며 물은 의지할 대상[所依]이니, 물을 얻는 때에 파도가 쉬어야 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해인경 중에 나타나는 상(像)은, 나의 5척의 몸이 3세간을 갖추어서 별도로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주(無住)’라고 하는 것이니, 곧 이 무주를 또한 ‘부동(不動)’이라고도 한다. 이미 부동 무측의 내 몸이므로, 어느 곳으로부터 어느 곳으로 전(轉)하겠는가?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이 곧바로 거울의 체(體)이기 때문에 거울을 얻는 때에 상(像)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심륜초(心輪鈔)』 【문】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마음을 무슨 까닭에 해인(海印)이라 이름하는가?
【답】 하나의 ‘해(海)’자로써 3세간을 인(印)치면 ‘분별된 셋’을 떠나서 합하여 ‘하나인 불’의 명백한 마음이 되는 것을 해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보현ㆍ문수 등 9회(會)의 조화(助化)224)도 없고 또한 9회의 처소도 없기 때문에 경225)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여래가 불법(佛法)을 설함이 없다”고 하였으나, 기연(機緣)을 향하여 스스로 증득한 바의 법을 설하고자 하는 것이다(운운). 그러므로 경226)의 게송에서 “그 응화(應化)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을 설함에 5가지가 있으니, 불설(佛說)ㆍ보살설(菩薩說)ㆍ찰설(刹說)ㆍ중생설(衆生說)ㆍ삼세일체설(三世一切說)이다.

【본문】 그러므로 행자(行者)는……자량(資糧)을 얻는다.
『법기』 ‘행자’는 곧 모든 보법(普法)을 믿고 향하는[信向] 사람이며, ‘본제(本際)’란 내증의 해인인 것이다. ‘망상을 쉬어 기필코 얻음이 없고[叵息妄想必不得]’이란 것은 두 가지 아집(我執)227)으로써 망상을 삼는 것이니, 위의 안으로 증득한 해인의 경지[際]와 같아서 무아(無我)의 사람이라야 능히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내[我]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가의 풀228)은 바닷물이 있기 때문에 마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의식(意識)의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는 저 말나(末那) 및 뇌야의 바다 몸[海身]으로 말미암아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니, 왜냐하면 뇌야의 본식(本識)은 나의229) 뿌리이고, 그 말나식은 나의 줄기이며, 6식 및 전5식은 모두 두 가지 아(我)가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수미산을 오르고자 하는데, 여덟 가지 바다230)를 다 말려버리면 마침내 육지에 의지해서 가서 수미산에 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자가 만일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점차로 8식(識)의 망상(妄想)의 바다를 쉬어서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일승 가운데서는 만일 초해(初海)231)를 밟으면 곧 모든 바다를 밟고 수미산 정상을 걷는 것이기 때문에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제(本際)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연이 없는 선교[無緣善巧]……’에 대해서이다.
【문】 무엇 때문에 ‘망상을 쉰다’는 구절 다음에 이 구절이 있는가?
【답】 본제에 돌아가고자 하면 요컨대 망상을 쉬어야 하고, 망상을 쉬고자 하면 요컨대 모름지기 연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 무연(無緣)이란 무엇인가?
【답】 5식(識)이 5진의 경계[五塵境]를 연(緣)하는 때에 의식은 연과 같고, 그 말나는 안으로 향하여 아를 집착하고 아뢰야의 본식은 3가지 종류의 경계를 연하니, 이러한 까닭에 여의(如意)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연이 없기 때문에 성자(聖者)의 뜻을 얻을 수 있음을 ‘잘 여의를 잡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는 것은 법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량을 얻는다’는 것은 행자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인 것이다.
『진기』 ‘망상을 쉰다’는 것은, 지위[位]에 맡김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의 지(智)로 끊음을 구하여도 끊을 수 없고, 중간이나 나중의 지(智)로 끊음을 구하더라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論)232)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나중도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끊을 수 없음으로써 끊음을 삼기 때문에 끊는다는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233)에서 “처음ㆍ중간ㆍ나중에 취(取)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장애[障]를 듦에 체의 양[體量]이 법계와 같고, 지혜[智]를 드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이 말하기를, “연기의 성품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끊는 것이다. 만일 장애와 다른 지혜로써 지혜와 다른 장애를 끊으려고 한다면 망상을 쉬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지계(持戒)도 역시 그러하다. 만일 별도로 선(善)을 취하여 능히 막는 것[能防]으로 삼고 그 불선(不善)을 취하여 막음의 대상[所防]으로 삼는다면, 이와 같이 지니는 자를 오히려 ‘계를 깨뜨리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연이 없는 선교……’는 분별이 없는 것이며, ‘여의’는 가르침[敎]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원(眞源)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량’은 2천 가지 도품(道品)234) 등이다.
『관석(觀釋)』 소승에서의 계(戒)는 받음도 있고 버림도 있으며, 대승에서의 계는 받음은 있으나 버림은 없으며, 일승에서의 계는 받음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숙교(熟敎) 중의 가르침은 그 근본을 등지고 지말을 쫓는 사람이 스스로의 본각(本覺) 여래장(如來藏)을 알기 때문에 그 받는 바가 있으며, 본각을 얻고 나서는 항상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버리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일승의 계는 본래 받음과 버림[受捨]이 없어서 능소(能所)의 막음을 떠나는 것이니, 제2지(地)235)의 부처님▣▣236)로써 일승의 계(戒)를 삼으며, 일승 중에는 모든 범부 소승과 보살이 없고 오직 만족(滿足)의 불(佛)만 있기 때문이다. 10선(善) 중에서 처음의 셋은 「명호품(名號品)」의 신업(身業)이 행하는 바이고, 그 다음의 넷은 「사제품(四諦品)」의 구업(口業)이 행하는 바이며, 그 다음 셋은 「광명각품(光明覺品)」의 의업(意業)이 행하는 바이다. 이러한 3가지 업이 법계에 시현되면 일체 모든 법이 다 부처님의 3업(業)이니, 지금 이 나의 몸[吾身]이 바로 부처님 10선(善)의 감득한 바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본래 ‘미혹한 때’가 없으며 다시 ‘받을 법’도 없어서 삼세제(三世際)가 끝나도록 항상 스스로 부동(不動)이며, 또한 ‘버리는 법’도 없는 것이다. 몸 밖에 대상[境]이 없고 대상 밖에 몸이 없으니 능소(能所)의 막음을 떠나는 것이다.
『대기』 【문】 앞의 제4중(重)237) 안의 ‘이익을 얻는 기틀[機]’을 어떻게 보는가?
【답】 보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일 8회(會)의 조화(助化)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기틀’이라 말할 수 없으며, 제3중(重)에서야 바야흐로 기틀이 되는 것이다. 만일 제4중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광(威光)의 선재(善財)가 다 이 정장정(淨藏定)238) 중의 ‘이익을 얻는 기틀’인 것이다. 다만 정(定) 안에서 얻는 이익을 정(定) 밖에서 설하여 보였을 뿐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제5중 안에서는 소류(所流)ㆍ소목(所目)의 기틀로써 바야흐로 교화하는 대상[所化]을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위광 선재가 바로 이 정(定) 안에서 이익을 얻는 기틀이라면 오직 처음[初]과 나중[後]의 두 회(會)만 정내(定內)인가?
【답】 만일 제4중을 기준으로 하면 8회의 법이 모두 다 정(定) 안이다. 그러나 우선 위광 선재를 들어 말하였을 뿐이다. 이른바 『법계품초(法界品抄)』에서 “일승에서 선지식을 구하는 것은 오직 이 정내(定內)이기 때문에 정내의 일로써 보였을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제3중 안에서는 위광 선재 등으로써 기틀을 삼지 않는 것인가?
【답】 저 제3중은 불공(不共)의 별교(別敎)이기 때문에 다만 보현으로써 바야흐로 기틀을 삼는 것이며, 제4중에는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으므로 위광 선재로써 기틀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계품초』에서 “만약 삼승의 과문(科文)에 의지한다면 5상(相) 등이 있으며, 이 때문에 견문(見聞)ㆍ해행(解行) 등의 3생(生)239)이 삼승위(三乘位)에 의지하여 일승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 3생의 지위는 제4중 안에서는 깊고 얕음이 없고, 제5중에는 깊고 얕음이 있다. ‘행자(行者)’라고 말한 것은 제5중을 기준으로 하면 소류ㆍ소목의 기틀이며, 만일 제4중이라면 위광 선재인 것이다. 그러나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대개240) 모든 체(體)가 이러한 화엄을 향하는241) 사람이니, 모두 이 가운데의 ‘행자(行者)’이지만 위광의 선재가 수행하여 인(因)이 나타나기 때문에242) 치우쳐 드는243) 것이다. 이 ‘행자’ 등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노사나의 체(體)임을 알기 때문에 ‘본제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문】 제4중(重) 안에서는 무엇으로써 본제를 삼는 것인가?
【답】 위광의 선재가 얻는 화장세계(華藏世界)의 과(果)와 티끌 수같이 많은 법문 등이 이것이다. ‘망상’이라고 말한 것은 소류와 소목 등에 통하니, 이른바 하교(下敎)의 사람이 자교(自敎)의 자취를 지켜서 집착하여 구경을 삼기 때문에 이 미혹한 집착을 기준으로 하여 총체적으로 망상을 삼음이니, 만일 이러한 집착을 끊으려면 요컨대 모름지기 6상(相)의 칼날을 써야 하는 것이다. 또한 숙교(熟敎) 중에서는 3아승지겁에 4상(相)이 꿈임을 깨닫고 진여가 있다고 헤아려서 이른바 구경으로 삼으며, 자취를 지키고서 머무르기 때문에 6상 가운데 이상(異相)의 도장[印]으로 인(印)치면 곧 그 끊음의 대상이 끝내는 앞의 20가지 꿈이어서, 각자의 지위[位]를 움직이지 않고서 역연(歷然)히 차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만일 일승에 들어가면 요컨대 삼승의 이른바 망상을 끊겠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만일 그 이른바 망상을 끊어야 한다는 망상을 쉬지 않는다면 망상을 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망상을 끊겠다는 마음’을 끊어 없애어서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것을 ‘이 가운데서 망상을 쉬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망상이라는 것은 무릇 자기의 몸과 마음 밖에서 부처를 희구하고 법을 구하는 마음을 총체적으로 망상으로 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말하기를, “별교의 뜻으로써 이 문장을 해석하면 응당 ‘망상을 쉬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만일 망상을 쉰다면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서 이미 ‘분수에 따라 자량을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이는 바로 그 인연관(因緣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아래 본문244)에서 ‘행자’를 해석하기를, “행자란 일승의 보법을 견문한 이후부터……이는 별교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서는 동교라고 하는가?
【답】 이는 소목(所目)의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니, 불공(不共)의 머무름이 없는 별교가 아니다. ‘일승의 보법을 견문한다’고 말한 것은 제5중 해인의 입장에서 정(定) 밖의 견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선교로 여의를 잡아[善巧捉如意]’ 등이라 말한 것은, 비유하면 장님이 그 눈멂[盲]을 말미암기 때문에 ‘자신의 보배가 있는 곳’을 미혹하고 긴 세월동안 빈곤하여 멀리 타향에서 걸식하거늘, 눈을 갖춘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끈을 하나 가지고서 그 보배 있는 곳에 묶고, 그 한 끝을 장님의 손에 쥐어주고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만일 이 끈을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서 가면 그대의 보배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장님이 그 말을 듣고 나서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 가서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면, 그 보배가 있는 곳에 또한 영약(靈藥)도 있어서 그 약 기운의 힘으로 눈이 열려 밝음을 얻고 있는 바 온갖 보배를 자재하게 취(取)하여 쓰는 것과 같다. 행자(行者)도 또한 그러하여, 지혜의 눈[智眼]이 멀었기 때문에 자내증(自內證)의 법성(法性)의 보소(寶所)를 미혹하고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궁핍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거늘, 어떤 대성자(大聖者)가 대비의 원을 일으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등의 다라니 끈을 드리워서 행자의 신심(信心)의 손에 쥐어주고 진성심심(眞性甚深)의 한 끝을 저 증분(增分)의 보배 있는 곳에 묶어 두고 가르쳐서 말하였다.
“그대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한다면 반드시 곧바로 그대의 법성의 보배 집[寶宅]으로 돌아갈 것이다.”
행자가 믿고 받아서 성자의 뜻을 얻고 여의의 가르침을 잡으면 처음 발심하는 때에 문득 10안(眼)을 열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내증의 법성의 보배가 있는 곳에 들어가서 다함 없는 자가(自家)의 진기한 보배를 받아 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수행인[行人]이 만일 법성의 집에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면 요컨대 모름지기 다라니의 끈을 잘 잡아 지녀서 잃어버리지 말고 자량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도신장(道身章)』245)【문】 닦음과 닦지 않음이 다른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두 깨닫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부처님께서 한랑없는 겁에 닦았다는 뜻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새로 얻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끊어야 할 번뇌가 있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끊고자 한다면 번뇌가 본래 끊어야 할 바가 없음을 아는 것을 끊음이라 이름할 뿐이다. 또한 ‘법의 실(實)’은 3세간에 비추는 것으로 하나의 큰 연기[大緣起]를 삼는 것이니, 예로부터 이와 같은 것이다. ‘한량없는 겁에 닦아서 증득하여 법을 얻음’이라는 것은, 어찌 나만 깨닫고 다른 사람과 목석(木石)246)은 배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증감(增減)에 치우친 대사견(大邪見)으로 정도(正道)가 아닌 것이다.
『도신장』247) 【문】248) 어떤 글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고 하고, 어떤 글에서는 “실로 끊을 바가 없다”라고 하는데,249) 전자가 옳다면 후자가 틀리는 것이며, 후자가 옳다면 전자가 틀리는 것이거늘 어떻게 회통(會通)하겠습니까?
【답】 덕의 입장에서 말하면 처음부터 장애가 없는 것이며 번뇌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다함 없는 덕을 덮고 있는 것이니, 만약 ‘실로 끊을 바가 없다’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미혹한 사람은 얻지 못하며, 만약 끊어야 할 바가 있다면 끊을 바는 무엇이겠는가? 글250)에서 “처음도 아니며 중간이나 나중도 아니니 처음ㆍ중간ㆍ나중에서 취(取)하기 때문이다”라 하니, 세 때[三時] 중에 끊는 모습을 얻지 못하지만 깨닫고 나서는 세 때에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도리가 끊음과 끊지 않음 가운데 있지 않고 근기를 따라서 ‘끊는다’고 말하며, 또한 끊는 바가 없으나 마땅한 근기를 위하여 가르침을 찾아서 증입(證入)하고자 하니, 끊음과 끊지 않음의 걸림 없는 실상(實相)을 이와 같이 시설하는 것이다. 의상 스님[相和尙]께서 “미혹은 다만 작용[用]일 뿐이며 체(體)가 없는 것이지만, 지혜[智]는 체와 용을 갖추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251)
【문】 체(體)가 없는데 어떻게 작용이 있는가? 체는 머무름이 없는 실상이지만 미혹한 작용[迷用]이 번뇌가 되는 것이니, 미혹한 작용이 쉰다면 가히 끊어야 할 체(體)도 없는 것이다.
【문】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라는 것은, 이미 체가 없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니, 일체니 하는 것인가?
【답】 장애가 되는 법문을 기준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와 더불어 일체를 말하는 것이니, 하나를 장애하면 곧 모든 법문을 장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古記)』 대해(大海)는 독약으로 파괴되는 바가 아니며 큰 허공[大空]은 날카로운 칼에 손상되는 바가 아니어서, 연기의 3독(毒)이 3제(際)에 미쳐서 곧바로 무분별을 얻을 따름이니, 다시 쉬어서 멸하여야 비로소 끊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 다라니……부처라고 이름한다.
『법기』 ‘다라니’란 법계 법의 다함 없다는 뜻이다.
【문】 수많은 법이기 때문에 무진(無盡)이라 하는가, 다만 하나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또한 무진이라 말하는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 ‘진실한 보배 궁전[實寶殿]’이란 증분을 기준으로 하면 법성의 처소이며, 연기분을 기준으로 하면 곧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眞性)인 것이다.
【문】 만일 다라니로써 법성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는 것이라면, 증분의 처소에서는 가히 중중(重重)의 중즉(中卽)ㆍ미세(微細) 등의 뜻을 허락하는 것인가?
【답】 저 증분은 가히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을 설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법은 남음이나 빠뜨림이 없이 일체를 만족하기 때문에 인다라(因陀羅) 등의 구경의 궁극이라야 이에 증분인 것이다.
【문】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은 어떤 것인가?
【답】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문[佛外向門]이 그것이다. 화장(華藏) 정토는 삼승이 함께 배우는 곳이기 때문에 삼승의 근기를 따라서 계(界)를 나누고 바다[海]를 떠나지만, 만일 자종(自宗)252)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하나의 바다일 뿐이니, 세 품(品)253)이 없는 것이다.
‘궁좌(窮坐)’는 10세(世)가 상응하여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기 때문이며, ‘중도’는 3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는 것이니, 한 물건[一物]도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舊來]’는 위의 증분 가운데 ‘본래 고요함[本來寂]’이며, 부동(不動)은 위의 증분 가운데 ‘모든 법의 부동’인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床]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30여 역(驛)을 돌아다녔으나 깨고 난 뒤에야 바야흐로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 있은 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그러하니, 본래의 ‘법성’으로부터 쫓아 30구절을 지나 다시 법성에 이르렀으니, 단지 하나여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라고 말한 것이다.
【문】 이러한 뜻은 숙교 중의 ‘일심을 미혹하여 6도를 유전(流轉)하다가 깨달아서 일심으로 돌아오는 뜻’과 어떻게 다른가?
【답】 저 숙교 가운데서는 20가지 꿈이 민멸하여야 바야흐로 일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이 종(宗)254) 중에서는 몽념(夢念)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성이기 때문에 버릴 것이 없고 별도로 돌아갈 바도 없기 때문에 매우 다른 것이다.
『진기(眞記)』 ‘다라니’란 총지(總持)이고, ‘진실한 보배 궁전’은 세계해(世界海)이다.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는다[窮坐實際中道床]’라는 것은 일승 구경의 진원(眞源)에 철저하게 이르는 것이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음을 부처라고 이름한다[舊來不動名爲佛]’에 대해서이다.
【문】 무슨 까닭에 번뇌에 계박된 유정이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고 있는가?
【답】 만약 그가 아직 닦음의 연[修緣]을 일으키지 않은 때라면 ‘구래성불’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금일(今日) 발심의 연(緣)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바야흐로 몰록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혜의 연[智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번뇌 등의 법255)도 역시 지혜의 연을 이루어서 일어나게 되고, 번뇌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서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금일 발심의 연을 기다려서 옆에 다른 아무것도 없이 일어나는 때에야 비로소 예로부터 이루어진 것일 뿐이니, 연(緣) 이전에 한 법도 없기 때문에 ‘예로부터’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삼승이라면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있기 때문에 오직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다는 뜻만을 취하여 논하는 것이나,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없어 근본과 지말[本末]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로 함을 따라서 모두 하나를 얻는 것이다.
『대기(大記)』 ‘진실한 보배 궁전’이란 혹은 ‘국토해(國土海)’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성기과(性起果)와 3덕차별과(德差別果)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3덕(德)256)은 구경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 성기과인 것이다.
‘궁좌실제중도상’이라는 것은 인위(因位)의 배움이 궁극적으로 과위(果位)에 이르기 때문인 것이다.
‘구래부동명위불’이라는 것은 처음에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불(佛)’자에 이르는 것이니, 처음의 시작과 마지막의 끝남이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상께서 “가도 가도 본래 그 자리요, 이르러도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다”라고 하신 것이 대개 이 뜻인 것이다.
『고기(古記)』 일승 중의 구래성불(舊來成佛)257)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닦지 않은 중생이 이미 성불하였다는 뜻이고, 둘째는 이미 모든 부처를 이루어서 본래 닦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6상(相)258)에 의지하여 가히 이러한 뜻을 얻는다면, 이른바 부처님은 총상(總相)이 되고 중생은 별상(別相)이 되며, 일체 중생이 부처라는 뜻에서는 가지런하므로 동상(同相)이 되고, 일체 중생이 각기 서로 이것이지 않다[不相是]는 것은 이상(異相)이 되며, 일체 중생의 연기(緣起)가 구경에는 바로 부처인 것은 성상(成相)이 되며, 일체 중생이 각기 자기 자리[自位]에 머물러서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괴상(壞相)이 되는 것이다.
『대기』 이러한 인(印)의 대의는 그 하얀 종이로써 기세간(器世間)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하얀 종이는 본래 색에 물들어 있지 않으므로 검은 것[墨]을 찍으면 곧 검게 되고 붉은 것을 찍으면 곧 붉게 되는 것이다. 기세간[器界] 역시 그러하여 깨끗하고 더러움을 국집하지 않으니, 중생이 처하면 물들어 더러워지지만 현성(賢聖)이 처하면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 검은 글자로써 중생세간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검은 글자는 한결같이 모두 검지만 하나하나는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중생 역시 그러하여 번뇌 무명이 모두 스스로 어둡게 덮어서 갖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 붉은 선[畫]으로 지정각세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마치 붉은 선이 한 줄로 끊어지지 않고 처음과 끝이 둥글게 이어져서[連環] 모든 글자를 꿰는 가운데 빛깔이 분명하니, 부처님의 지혜도 역시 그러하여 평등하고 광대하게 중생의 마음에 두루하며 10세(世)가 상응하여 원명(圓明)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印)에 3세간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만일 『관석(觀釋)』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4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만약 하얀 종이를 취하면 검은 글자와 붉은 선이 모두 제거되므로 글자와 붉은 선은 종이를 떠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일 기세간을 떠나면 부처와 중생이 없기 때문에 기세간 중에 중생과 부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미진(微塵) 중에
3악도(惡道)가 나타나 있으니,
사람ㆍ하늘ㆍ아수라가
각기 업보를 받네.259)

하나의 미진 중에
각각 나유타(那由他)의 무수한 부처님께서
그 가운데서 법을 설하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네.

하나의 티끌 중에 티끌 수같이 많은 국토가 있고
하나하나의 국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시니
하나하나의 부처님 처소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서
언제나 보리행(菩提行)을 연설하심을 나는 보았네.

또 “하나의 미진 가운데 두루 삼세 일체 부처님의 불사(佛事)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둘째, 검은 글자를 기준으로 해도 역시 그러하니, 중생 중에도 기세간과 부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모공(毛孔) 중에
두루 시방의 국토를 보니
그 국토가 묘하게 장엄되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모이며260)

하나하나의 모공 중에
수많은 국토가 부사의한
갖가지 모습으로 장엄되어서
일찍이 비좁거나 더러움이 없었네.

모든 국토와 모든 부처님께서
내 몸 안에 있으면서 걸림이 없으니
나는 일체 모공 중에서
나타난 부처님의 경계를 자세히 관찰하였네.

또한 “보살은 자기 마음의 생각 생각마다 항상 부처님이 있어서 정각을 이룸을 안다”고 하며, 나아가 “자기의 마음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여래가 있어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붉은 선을 기준으로 해도 역시 그러하므로 부처 중에 기세간과 중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세의 모든 겁(劫)과
부처님 국토 및 모든 법과
모든 감각기관과 심(心)ㆍ심법(心法)
일체의 허망한 법이
하나의 불신(佛身) 중에
이 법이 모두 나타나네.261)

두루 시방의 모든 찰해(刹海)에 있는
모든 중생해(衆生海)가 다하도록
부처님의 지혜가 평등하여 허공과 같으니
모두 능히 모공(毛孔) 중에 나타나네.

또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일념 중에 한량없는 세계와 무량무수(無量無數)의 청정한 중생을 나타내 보이네”라고 하였다.
넷째,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와 붉은 선은 모두 다 온전히 서로 거두어들이므로 따로 취하여 3가지 물건이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3종세간이 융통(融通)하여 서로 거두어들여서 섞여 한 덩어리가 되지만 문(門)으로 삼는 것이 각기 달라서 역연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인(印)은 만약 기세간의 문으로써 관하면 곧 기해인(器海印)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장세계의 모든 티끌
그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서 법계를 본다.
두루한 광명[普光]이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구름이 모인 것 같으니
이는 여래의 국토가 자재한 것이네.

중생의 문으로써 취하면 이는 중생해인이며, 부처의 문으로써 취하면 이는 불해인(佛海印)이다. 그러므로 소(疏)에서 “중생 마음 속의 부처가 부처 마음 속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부처 마음 속의 중생이 중생 마음 속의 부처가 설하는 법을 듣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다만 국집하여 말하기를 ‘능인해인(能人海印)’이라고만 하는가?
【답】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이와 같아서 부처님께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망상이 다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뜻을 따라서 임시로 ‘능인해인’이라 이름할 뿐이다.
045_0141_a_02L一乘法界啚 合詩一印五十四角二百一十字夫大聖善教無方應機隨病非一迷之者守迹不知失體勤而敀宗未日故依理據教略制盤詩冀以執名之徒還敀旡名眞源讀詩之法宜從中法爲始盤迴屈曲乃至佛爲終隨印道讀死涅槃常共和是故界實寶殿窮坐生意如出繁理益行法意如捉巧實覺不人境中事利者嚴敀資糧善際正思大能昧冥得還莊家得以緣中便議賢人三然器本寶隨分陁旡道時雨普海印旡隨際盡旡尼羅得牀心寶佛十別分生叵息妄想必不舊發益生滿虛空衆法佛爲名動不來初成別隔亂雜不性餘境妙不守自十方一切塵中仍园非眞微旡名性含卽念一念亦卽融知性極相旡隨中是劫卽一如相旡所甚深絕寂緣塵旡遠量旡是互二智訂切一來成微量劫九世十世相諸法不動本一一一卽多切一卽一一中多切一中一乘法界啚至二百一十字大記云以此一乘法界啚等分配儼師五重海印謂一乘法界配忘像海印記破初幅云此配釋啚之一字配現像海印謂啚者像也經云卽如其像現神通力藏師釋云如其所念如上一百二十四問及下至弟六會來所說法門荅此問者皆於如來法界身中旡不园明頓現其像云云下經云淸淨法身中旡像而不現故也已上此文通於內訂外化今約內訂配也合詩一印配佛外餉海印謂詩表普賢機印表佛外向心佛外向心印冥合普賢大機內向心頭故也五十四角配普賢入定觀海印謂普賢內訂有二義一若約佛普賢門則普賢入定非但窮訂外向心印亦乃通訂初二海印以普賢向內則十佛十佛向外則普賢故二若約就機作區門則於佛外向唯訂一分以未滿故今約後義於此淨藏定中五教乃至旡量乘根性生熟及法界諸法頭角頓現故也二百一十字配普賢出定在心中及現語言海印謂於此海印分示五周因果等法施設文字語言故也神琳之意則一乘法界啚者法界之法是所訂今日我心是能訂卽此能所不可得處是一能修之人行位名乘如是不動之軌則分齊成故云法界也法界法之本位是吾五尺身欲示此義畫作全法界一身之像故云啚也謂啚印中盤者是三乘也謂背一乘平道教無住本體盤蟄一念不生不二之處乃至著於一相一迹之中報佛果故迴者是小乘也謂不知有法空眞如但自迴著人空理故屈者是人天也謂不知有出世行德屈執五戒八戒人天業故曲者是三途也謂不知有人天行業曲執邪見墮三途故如是畫盡三乘三途之相故云畫作全法界一身之像也法融大德記云一乘法界啚有二重簡取一簡教分唯取訂分一乘之法通於訂教而言界者簡教分也以訂分者一乘法之究竟際故二唯簡三乘通取一乘訂教二分謂以一乘簡三乘故此一乘之一及此下離始終之一朱印與儼師本末相生門中一字印竝一義也大經之首按一字印者明一部#始終所說文文句句唯現一也又五卷疏對邪現正之處按一字印者於諸法中若生二解則是邪知法是一卽是正也謂#若菩薩起一嗔心則六十門普行成百萬障也良以嗔心起於自他別執之中故云若生二解卽是邪也若菩薩起同體大悲則百萬障門成六十普行也謂見三世閒法是自身心爲起同體大悲故云知法是一卽是正也又入法界品抄按一字印者若見諸法爲二爲三卽犯八根本罪不得入於一乘法界若於諸法不生二解卽得入於一乘法界故也此中亦爾 從始至終非是詮二詮三只要現一故耳言一者無能所中且强分之有能觀一有所觀一謂若了自身心摠攝諸法旡側旡遺絕能所則爲能觀一卽此身心住處爲所觀一也問於此一中云何得入荅修止觀也問云何止觀荅若依一乘修止觀者以六相印印十普法不動各位融而爲一了了分明者觀也如印印物不擧不轉如是觀智稱契於法離能絕所一旡分別而不動者止也乘者於上一處能決定信名爲乘也不如是信不名乘也若三乘則聞眞如之法不能頓信漸次信故有十信不能頓解漸次解故有十解乃至不能頓訂漸次訂故有十訂如是漸次至佛果故名爲乘也乘如實道來成正覺者是其義也若一乘則於上一處若起园信卽是园訂故名乘一運卽一切運者卽此義也法者是我身心也界者卽此身心統包絕待前後際斷卽是法之究竟邊際義也啚者像也如爲不知象人畫作象像而示之如是行者不知自之身心是法界佛故畫作法界佛像而指示也入法界品抄云今入法界隨所相應成法分齊先離其初發心菩薩趣向大乘有八根本罪燒盡一切善根墮於惡趣離安隱處失人天樂亦失大乘境界之樂也一生五濁世有餘善根近善知識敀趣深法發旡上心聞甚深法讀誦受持向小智人讀誦解說他人聞已驚疑怖畏於菩提心而生退沒樂聲聞乘是弟一重罪唯須知根了心次弟爲說從淺至深又語人言汝何能發大乘心不如早向聲聞緣覺入於涅槃第二重罪又語人言汝何用學戒威儀當速發大乘受持讀誦大乘經典身口意業當得淸淨亦不受惡報是弟三重罪又語人言汝不應讀誦聲聞經典當覆聲聞經典聲聞法中不能斷結使惑當聽受淸淨大乘甚深經典此能滅惡生菩提善有信受者二人俱得弟四重罪又爲求利故說大乘法見說大乘得利憎毀輕嫉是弟五重罪又爲求利故我解深不言從他聞得違負諸佛菩薩是弟六重罪又作旃陁羅行取他善比丘物及三寶物賞上官人及與大依王官力輕善比丘嗔嫌憎嫉是弟七重罪又作惡自恃王官勝力及恃財施輕善比丘戲辱鬪亂法說法捨正經律#違法立制於善行比丘及坐禪讀誦經典旡惱生惱已惱增長是弟八重罪若已犯者依虛空藏菩薩懺罪滅之初發心菩薩若欲弘通大法利益自他者先離前過後依弟九地法師法門卽應法界眞秀大德記去一者旡他之義三乘云性一也一乘云緣一也緣一者隨約是中道及如也此是迴向品百句如謂日如月如等也雖卽是如而有日名日相月名月相不旡名相然約普賢訂者旡此名相但爲引三乘依名相耳此約普賢教分弁也隨約是中道已是甚深更約何義爲普賢訂耶隨約是中道及如者依三乘教用日名日相等故云與教相應也此訂分者言語道斷故絕名也心行處滅故離相若爾此處與淨名默何別淨名默者以名相倒離此名相方爲默也九會佛默名相中默故玄別也謂不捨名相卽此名相中默非如虛空都旡物也此約普賢訂分弁耳言語道斷心行處滅亦極甚深更約何義爲十佛境界前雖是默名相中默若果分則初初不見名相處也若爾此處旡法旡物耶如前位中所論之法初初旡也然則此中實旡法耶具有也有何物耶此是古德所云反情見處也乘是運載義上一字中旣有三義乘亦爾耶爾也從異果之因至異因之果者三乘乘義今約因卽果義名運載也此是普賢教分也背因果名約言語道斷心行處滅之義則是普賢訂分運載義也性海果分則不可說故唯云不思議乘此約不動名爲乘法有三義一自體名法約三乘云牛自體外有馬馬自體有牛也約一乘云此法側旡彼法彼法側旡此法故云自體也對意名法約三乘云弟六意識所對名爲法塵約一乘則無盡意識所對名爲法也三軌則義可知界亦三義一性別約三乘云善惡旡記三性各別故也約一乘則於三性中隨擧全盡各互旡側故云性別二因義約三乘云唯生眼識名爲眼識名言種子約一乘則通生六識爲眼識名言種子也二持義約三乘云異果之因持異因之果約一乘則全果之因持全因之果故云持也啚則依海印像表一乘三乘教及根欲謂朱印之前後差別者三乘教也朱印之园者乘教也印之前後差別中字則三乘根欲也印之园滿中字則一乘根器也法融德記云合詩一印者一道朱畫合諸黑字方成园印故云合詩書黑字後畫朱畫耶畫朱畫後書黑字耶二俱是也先書後畫者以理從事之義先畫後書者以事從理之義也儼師雖作七十三印但欲現其一印之義而相和尚深得師意故唯作此一根本印也眞秀德記云詩者啚文有七言三十句故云詩耳非約韵言也一印者欲現一大緣起故也大記云五十四角者下文云何故印文唯有一道表如來一音故云云將性起品十種音歷對五乘機卽成五十此能應佛具將四攝四旡量故云四角也眞秀記云五十四角者表人知識謂五十五知識也以合初後二文殊故唯五十四合擧初後通取中閒爲一园智普賢知識是所訂理法界諸法不出理智故也二百一十字者法知識也謂離世間品普惠雲興二百句問普賢甁瀉二千句荅每一句問皆以十句荅故云一十也大記云二百一十字者五周因果除初因果於後四周簡果取因於四周因各有五十位故成二百其四周中所有果位合四爲一欲現此果同是十佛果故言一十也何故除初因果耶但是所信非所成行故何故果位合爲一耶位旣有差別平等詮相別故果應亦爾 然欲現同是十佛#果故摠爲一耳又云此海印中所現三世閒十門十法也謂下文十錢喩及十普法爲二十二十各論十玄合爲二百幷本十玄故云二百一十也又此印爲摠七十三印爲別就別印中將七十印歷三際印一際各七十故合爲二百一十也故合二百一十印成一海印三昧摠相印也七言三十句者前之法喩各十幷本十玄合爲三十此三十句不出經題七字故以七言造詩也是故法界之法雖云旡盡不出二百一十字摠此卽成三十句又摠此不出七字又摠此不出理智 又摠此不出一最淸淨法界是故題云一乘法界啚也淸涼疏摠釋題名中云弟六卷攝相盡者謂從後漸卷乃至不出九會九會不離初會初會不離摠摠題不出理智非理不智故理外旡智非智不理故智外旡理則理智不二亦攝智從理離體旡用用敀體體性自離故體卽非體本來淸淨强名之淸淨法界是以極從旡盡乃至一字旡字皆攝花嚴性海無有遺餘大聖善教至隨病非一法融記云大聖者於諸教中今此教主最尊勝故也下四教中能化所化皆不及爾也三乘能化三身但是一乘十身之大用何云不及耶旣云但是十身之用故不及也十佛卽自受用佛卽樹下佛也何云不及耶若約此義可云及焉然欲弁教品云不及耳淸涼疏教起因緣中云今說此經佛爲眞爲應爲一爲多若言眞者何名釋迦居娑娑界人天同見云應者那言遮那處蓮花藏大菩薩見見佛法身若云一何以多處別現若云異者何以復言而不分身故說此經佛竝非前說卽是法界旡盡身雲眞應相融一多旡㝵#云云先明十身後彰旡㝵言十身者自有二義一約融三世閒爲十身者#一衆生身二國土身三業報身四聲聞身五緣覺身六菩薩身七如來身智身九法身十虛空身二就佛上自有十身一菩提身二願身三化身四力持身五相好莊嚴身六威勢七意生身八福德身九法身十智身云云言旡㝵者略有十義一用周旡㝵云云十园通旡㝵謂此佛身卽理卽事卽一卽多卽依卽正卽人卽法卽此卽彼卽情卽非情卽深卽廣卽因卽果卽三身卽十身同一旡㝵法界身雲法融記云善教者約三乘則此生他世順益者善也此生他世違損者惡也於此二中旡可記別者旡記也約一乘則只是善也何者謂儼師云园通之致處旡不善觸緣斯不擇物而施已上故知一乘唯一善耳若爾旡記與惡只一善耶爾也爾則擧惡時亦如是耶爾也然云善者約隨擧旡側義云耳旡方者若三乘則隨說一二乃至旡量非是旡方何者三乘之教隨別機說非旡方一乘之教隨說諦緣度等徹於海印究竟之際自在而說故云旡方也應機隨病非一者猶如小醫各別與藥若大醫王普集天下種種諸物作一團藥問病之若于差別平等普與病旡不治一乘之佛亦復如是普應諸教機根之病唯以一種海印定法稱根而說聲聞人中與全海印四諦之法獨覺人中與全海印緣生之法菩薩人中與全海印六度之法乃至熟頓人中亦全全與之耳大記云下四教人皆病機也园機則不爾 也又园教之機有大病也起一嗔心卽有百千障㝵門故眞秀記云大聖者對下三乘小聖云大聖也善教者文持教也此文持教從海印定#全體而起故於一喚水言火木等法皆具來也於一言中諸法具來故云教具足#此水言中有水濕義水濕義中具火熱等法界諸義云義具足如是諸義於水言具是故合云一大緣起教也問欲用火時用喚水言中所至之火耶荅此但水緣故若用火時用火言中來至之火也若爾水來中火與火來中火別耶至故同也若爾何須更起火來辭耶旣須火須起火辭若火來中火方得用者水來中火非實火耶是實火也然而是成水之火故與火中之火爲門別也無方應機者如上善教稱法界旡別取捨之方所故云旡方此謂旡盡园滿摠相教也應普賢機也隨病非一者下四教也旨敀章云夫以主教园通盡虛空於塵剎帝珠方廣攬法界於毫端旡㝵鎔融盧舍那之妙境有涯斯泯普賢眼之玄鑑浩汗微言實叵尋其旨趣宏深法海尤穿測於宗源今略擧大綱開茲十義撮其機要稱曰旨敀庶探玄之士粗識其致焉說經處弟一夫园滿教起必周側於塵方旣爲盡法界之談詎可分其處別今從俠至寬略開十處初此閻浮二周百億三盡十方四遍塵道五通異界六談別塵七敀花藏八重攝剎九猶帝網十餘佛同云云演經時第二夫以常恒之前後際而旡涯況念劫园融豈可辨其時分今略擧脩短分齊折爲十重初唯一念二盡七日三遍三際四攝同類五收異劫六念攝劫七復重收八異界時九彼相入本收末云云#說經佛弟三說此經佛盧舍那身旣在如前旡盡時處其佛爲是一身爲是多身云云#今現此義弁十重一用周旡㝵二相遍旡㝵三寂用旡㝵四依起旡㝵五眞應旡㝵六分园旡礙七因果旡㝵八依正旡礙九潛入旡㝵十园通旡礙說經衆弟四夫衆海繁廣塵算能知今統略大綱亦現十位一果德衆二常隨衆三嚴會衆四供養衆五奇特衆六影響七表法衆八訂法衆九所益衆十現法衆說經儀弟五夫以旡限大悲周衆生界施萬品儀式難量今就通別各開十例通而論之或以音聲或現妙色或以奇香或以上味或以妙觸或以法境或內六根或四威儀或弟子人物或一切所作皆堪攝物次別現言聲亦有十例一如來語業园音自說二如來毛孔出聲說法三如來光明舒音演法四令艹艹口業說法五令艹艹毛孔出聲說法六令菩薩光明亦出聲說法七令剎海出聲說法八令一切衆生說法九以三世音聲說法十以一切法皆出聲說法示經教弟六园教微言必窮法界旣盡如來旡盡辯力各遍虛空毛端剎海復各盡窮未來際頓說常說時處旡邊若斯之教豈可限其部秩今約准經文析爲十類一異設經二同說經三普眼經四上本經五中本經六下本經七略本經八主#伴經九眷屬經十园滿經現經義弟七夫以義海宏深眞源眇漫略開二類各弁十門先明所摽之法浩汗旡涯撮爲十對用以統收一教義一對二理事一對三境智一對四行位一對五因果一對六依正一對七體用一對八人法一對九逆順一十應感一對次明所現理趣者巧辯自在勢變多端亦擧十例以現旡礙一性相無礙二廣俠旡礙三一多旡礙四相入旡礙五相是旡礙六隱現旡礙七微細旡礙八帝網旡礙九十世旡礙十主伴旡礙釋經意弟八夫以法相园融寔有所因因緣旡量略弁十種一爲明諸法旡定相故二唯心現故三如幻事故四如夢現故五勝通力故六深定用故七解脫力故八因旡限故九緣起相田故十法性融通故明經益弟九夫以信向趣入此普賢法园通頓益廣大旡邊略攝經文現其十種一見聞益二發心益起行益四攝位益五速訂益六滅障益七轉利益造修益九頓得益十稱性益現經园第十夫以法界园通緣旡不契謂上九門所現之法摠合爲一大緣起隨有一處卽有一切旡礙园融旡盡自在若隨義分亦有十門一處园二時园三佛园四衆园五儀园六教七義园八意园九益园十普园以同一旡礙大緣起自在難量不思識故是謂花嚴旡盡法海窮盡法界越虛空界唯普賢智方窮其底迷之者至敀宗未日法記云迷之者者下四教人也不知一乘旡住本法故也守迹不知失體者比如獵人空守兔不知兔身之遠也如是三乘之人三旡數劫如說修行所得之果只是迹耳守爲究竟不知失其一乘實體故也勤而敀宗未日者旡量億那由他劫行六婆羅密修習種種菩提分法故云勤也然而還於一乘之家旡日故#敀宗未日也依理據教至旡名眞源法記云依理據教者理則忘像海印謂佛心中訂三世閒而佛訂心一旡分別也教則現像海印謂佛所訂三世閒法不動各位性在中道了了現現是故依忘像理導一朱畫據現像教列多黑字园印也略制盤詩者黑字盤於朱畫朱畫盤於黑字故云盤也黑盤於朱則事遍於理朱盤於黑則理遍於事也大記云冀以執名之徒還敀旡名眞源者有以外化有相際竝爲執名直約內訂爲旡名眞源然執名之徒但下四教旡名眞源者若約實則內訂外化一旡分別之處故下文云若約理云訂教兩法舊來中道一旡分別也約所訂佛訂則名爲訂分菩薩訂則名爲教分耳守迹之人敀眞源時捨前所守教迹而後敀耶所守之卽所敀之源耶如後若爾解緣起實體一乘之人亦解四諦緣生等耶見其不動諦緣之名卽是旡盡园通之法也若爾守迹之人亦解旡盡园通之法耶約我則非他約其則不開也中法爲始至隨印道讀法記云中法爲始盤迴屈曲乃至佛爲終者盤迴則直見印园屈曲則約諸角曲也若約印道卽離始終何故約字法始佛終耶若直約則雖旡始終如其不示始終則不得入法方便故也印道者若唯約字則三乘別教若唯約印則一乘別教以印隨字以字隨印則一乘同教若具此三則一乘园教也以印隨字者一乘垂於三乘以字隨印者三乘參於一乘上參下垂竝同教教分記云同教者云云初約法相交參以明一乘謂如三乘中有說因陁羅微細等而主伴不具或亦說花藏世界而不說十等或一乘中亦有三乘法相等謂如十眼中亦具五眼通中亦有六通而義理全別此卽一乘垂於三乘三乘參於一乘是卽兩宗交接連綴引攝成根欲性令入別教一乘故也大記云就啚印文有多義釋有云以儼師五重海印配釋者初四重則不分文句故皆通配也約弟五重亦具五以此弟五重所具五重分配諸句則初訂分四句初二重海印也次眞性下緣起分十四句則弟三重海印也次能人下利他行四句則弟四重海印也次是故行者下修行方便四句則弟五重海印也後四句是修行所得之益也初四句中初一句影不現海印次一句影現海印次一句釋前法性旡二相也後一句釋前諸法本來寂也題中約法則法界啚則海印啚與此中法性何別耶緣起分中分界種海各別配者以隨行者之心故爾若訂分則本不分示界種海故是一味法界之處是故法界海印法性同一量也是故初會中分界種海第二會中不言三別而但摠云佛剎不可思議也依於此印若是上根直入訂分若是中根眞性下教分之中而能得入若是下根於後行者下修行方便之中方始得入也表訓眞定等十餘德從和尚所學此印時問云不動吾身是法身自體之義云何得見於是和尚卽以四句偈子而荅之云諸緣根本我一切法源心語言大要宗眞實善知識汝等當善用心耳表訓德作五觀釋一實相觀二旡住三性起觀四緣起觀五因緣觀也初觀者法源心與大要宗也後四觀者根本我也因說頌曰我是諸緣所成法諸緣以我得成緣是因緣觀以緣成我我旡體以我成緣緣旡性是緣起觀諸法有旡元來一有旡諸法本旡二是性起觀時非有還同旡旡時非旡還同有是旡住觀諸法本來不移動能觀之心亦不起是實相觀作此五觀以呈和尚尚曰是也以此五觀准三十句則訂分四句實相觀次十四句旡住觀次四句性起觀緣起觀後諸句緣起觀因緣觀眞定德作三門釋一理事具德門二事融現理門三修行增長門於此三門表訓德加不動建立門爲四門也以此准三十句者訂分四句不動建立門次十四句理事具德及事融現理門後諸句修行增長門也謂十四句中初四句理事具德此中初一句旡住體故理次一句旡住相故事後二句旡住用也具德者眞性理中具六道因果小乘因果乃至园教因果普賢二十二位二十二位中具眞性體故也後十句則事融現理門也謂一塵鎔融含十方之道理現前故也修行增長門者若分配諸句雖屬利他四句然此中意始從訂分或徵或令知自身#卽是法性耳又以四滿義科則訂分四句行實滿義眞性甚深下訂滿義初發心時下法滿義是故行者下人滿義此辭亦是訓德之義上元元年在皇福寺說也行滿但行滿則是訂分故訂滿者爲是訂分滿足之法方得一中一切一卽一切等旡礙自在故法滿者初發心時便成正覺者以法滿足方得成故人滿者不動凡 身卽滿足佛故如此印中以此四義科文亦於一部大經之中以此四義科也謂行滿者一部始終只是十佛內訂也訂滿者一部始終一多大小旡障礙義也法滿者一部始終唯初發心卽滿足法成正覺義也人滿一部始終卽此凡身是自體佛義也印則分配諸句經則亦通配始終自在科也十句章云十隔越科文成義自在者欲成初會義若餘諸會處法文句等在於此初自在能成如初會義餘亦爾准之其相云何若問初會名何耶是忉利天會若問說何法是十住法如是言說不違能成義何以故初會論爲諸會本故能攝諸會如初會餘會亦爾隨約是本能攝前後也法性园融至非餘境法記云何者是法借因分詮若强指者汝身心是何是性卽园融是也云何园融旡二相故故旡二二而旡二耶非是一故旡二卽其二相直云旡二何是諸法法性是也何故不動园融故何故本來寂旡二相故本來寂處可得名耶不可名目以旡名故何故旡名以旡相故何故旡絕一切故若爾此中修訂亦絕耶絕也實旡修訂耶實旡也然而聖亦修訂要須修訂如何修訂若可誨者是教分故唯大文夫善用心處非餘境也此訂分中一切諸法具耶闕耶具也亦具遍計非法耶何得具耶爾則闕耶何得闕耶謂旡有一物非普法故何得具耶不動遍計非法卽滿足法何得闕耶故儼師云一乘中何法缺非法缺何法不缺非法不缺也眞記云法性者微塵法性須彌山法性一尺法性五尺法性若約今日五尺法性論者微塵法性須彌山法性等不動自位稱成五尺不增小位不減大位而能成也园融者微塵法滿五尺須彌山法契五尺故也旡二相者微塵雖滿須彌雖只唯五尺故也諸法者指前法也不動者指前性也旡住法性也故此和尚云約今日五尺身之不動爲旡住也本來寂者指前旡二相也只是五尺法性側旡餘物故云本#來寂也旡名旡相絕一切者如上初初不見名相處也訂智所知非餘境者唯佛與佛乃可能知故也古記云表訓德問相和尚言云何旡住和尚曰卽我凡夫五尺身稱於三際而不動者是旡住也若約三際分之則多種五尺耶和尚云以是緣之五尺故須一卽一須多卽多也若稱三際而不動者卽有住耶和尚曰若不見五尺住處將來有住旡住我當說也又月瑜寺會神琳德云昔相元師問眞定師云旡住故旡住耶有住而旡住耶二竝不是若爾云何旡住耶唯是令住故云旡住耳旡住令住耶有住令住耶亦竝不是已上此則問雖堪問不堪荅荅雖堪荅不堪問處也若假言非如有爲法剎那不住故云旡住非如旡爲法三際不住故云旡住也又林德說法之時大雲法師君白言緣起分說法如是訂分說法云何林德默然有頃云荅之已了也雲法師君未會林德云君之起此問時所坐之牀及一切法界諸法同時發問者是耳但君問而餘一切法不起問者非也法師君白云法界咽喉旡盡舌端同時發問緣起分之問乎林德云三世間法同時發問者訂分之稱於默然不動者訂分之說三法問法各住自位來不動者訂分之聞也眞性甚深至隨緣成法記云上訂分中指其身心直示法性由旡名相機難得入故以法性轉名眞性令其習也如盲人欲學織錦匠者教云當集具來而彼盲人執草繩來如是訂分絕一切故唯訂所知然以八識妄心而欲訂入故於此人不能直指訂分之處乃下一步假作眞性之名以示之也甚深者入眞性之門謂花藏世界之甚深與彌勒樓閣之甚深也花藏世界甚深者以一一塵中見法界故是故約一微塵求其內外竝不可得彌勒樓閣甚深者彌勒彈指開樓閣門善財入已頓見三世自身及法與諸善友故也極微妙者中道也非謂離二邊故以爲中道卽約諸邊云中道也不守自性等者由自旡性以他爲性由他旡以自爲性故云不守自性隨緣成也眞記云眞性與上法性何別有云別也謂法性則通眞妄取园融又通情非情也此則唯是眞而又唯是有情門以下釋眞性段約衆生十二支故也然而今約實云眞性卽是法性也所謂眞性之體甚深微妙者但以不存自性攬諸緣成故也若約三乘論者自性淸淨心隨旡明之緣成差別萬法也若自一乘義則以緣前旡法故非先有眞性而隨緣成且吾今日或爲水用或爲石用緣中法界諸法旡遺頓起故也如是法中而有水名水相石名石相等不旡名相而此名相卽旡名相是故且約衆生一旡明支歷十番觀則不動旡明名相卽甚深法旡所取捨故云微妙故不動名相卽成旡側名相若約普賢訂則不動旡側名卽正離名絕相若約十佛訂則初初不見名相等也旡明支旣爾乃至老死支皆亦如是是故經云一切諸如來旡有說佛法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旡有說者證分說則教分道身章云若定自古則緣起有性不得自在所謂緣起者旡性旡性者旡住旡住者不偏於一不偏於一者旡所不當如是等理豈不自古三乘中先置一此法隨緣一乘不爾緣卽是法緣外旡隨緣之法云自古卽知是今緣起故爾若定住古又定住今非緣故可云緣起法以旡性爲眞性矣大記云訓德意則眞者旡住本法也性者本分種也#本分種者若指文處初會果地五海也以此五海爲本識體約此本識後諸會中或云種性或云行業或云願善決定等也謂若上根人直依訂分得自身心正卽法性然此訂處絕名故中下之人未能信得故說五海是汝本識之源由是前機得自身心卽是法性是故依此眞性方始建立本識義故於諸教中或說具分賴耶或說一分生滅賴耶等唯普賢機得自本識是五海之源故云十佛普賢大人境眞性旣如是甚深微妙於何義中分二十二位耶不守自性故隨我所須地獄乃至佛果等緣成二十二位也如是二十二位以普字印印則皆普賢自體故弟三重海印正是普賢大人之境也崇業師觀釋中釋明難品心性是一之文云藏師約寄位釋故立遮救重難儼師直約一乘種種心#濕過海義釋故云心以旡分別爲一性云何能成種種事耶此問意者前光明覺品中佛之智光稱周法界現只一佛智也所以其中列六道因果及小乘因果乃至园教因果等普賢二十二位者以一乘中普賢爲教分之軌十佛爲訂分之軌故也是故欲示教分之軌故列之耳#欲得佛智若除一物必不得全法界之智是故要以六道因果小乘因果等爲普賢阿含位融鍊其心得成一佛智故以佛智爲普賢訂也因此問云佛智是一云何能生六道乃至佛等種種身心果報等耶故經荅云諸法不自在求實不可得是故一切法二俱不相知眼耳鼻舌身心意諸情根因此轉衆苦而實旡所轉法性旡所轉示現故於彼旡示現示#現旡所有釋曰諸法者於一性及種種果也謂一旡自故以種種爲一種種旡自故以一爲種種也是故善惡趣中種種身心皆不相知#自位不動故云不自在也是故儼師云旡分別不住故能成衆事也已上不自在者不住義不住義者不動義疏云作旡主故者若其身心有主宰而造諸業者受種種果若身心旡主而造業者如虛空動作故不受種種果然而從虛空之因生虛空之果故因果之義亦不礙疏云文云不相知者非謂情知今言知者力性作也者力則塵數緣力是中門也性則旡住法性是卽門也作者不思議作是中卽門之果也一切諸法要具中卽方有所作也非是有自性法去來之義故云中門者虛空建立門卽門者虛空動作門也故儼師云緣者旡側旡側者力性作也昔林德云明難一心海者過於起信一心海者留於濕也若立在濕留海中答者有所㝵若立在濕過海中荅者義旡所礙也質應大德在大白山智悟師藪結夏之次得大經中法性旡所文及孔目中性種性本有習種性修生者非佛法所乃至云法性外有修生起者緣起可增失等文呈於林德云此是濕過海之訂耶林德曰是也解云緣起可增失者若謂所訂之理從古而有能訂之智今適始起者則以智訂理之際望其未訂之時有增勝義云緣起可增之失也智是緣起也此中約眼耳等爲法性也何故上云由眼耳等故衆苦轉也而次復云是法性故旡所轉耶不知一切法是普賢身故此眼耳等對善惡境起諸業果轉衆苦也今知一切是普賢身故眼耳等物正卽法性旡所轉也若眼耳等非法性者#緣起可增失也何知是普賢身耶經中普賢云得此究竟三世平等淸淨法身復得淸淨旡上色身何有一物非普賢耶此普賢身如何見耶經云普賢身相如虛空依眞而住非國土如是見也又何者吾身虛空是也何者虛空吾身是也以旡側故又六道卽是虛空虛空卽是六道也 頌曰虛空法界爲身心行住坐臥念相續所見諸物亦身心念念相續旡絕已空三印文云心性者三種世間爲濕過海依海起波二波波皆三世間故是濕過海心依海起波則海因波果依波起海則波因海果同時互爲巳果也此是大緣俗諦之法一中一切#多卽一法記云何故不守自性隨緣成之次明此句耶荅凡緣起法二旡別自性互相以他而爲自性方能隨緣旡側而起故不守自性之次明一中一切等義也若緣起法隨起無側者唯是緣前旡法之義耶就緣論之緣前旡法就性論之緣前有法何者就緣論現於今日緣中之五尺是緣起本法旡側而立故緣以前旡一法也就性論時本有性起法體也眞記云一中一切等二句重現緣起體之隨緣成義#令明了初一句因果道理門謂得一而定得十得十定得一得因而卽得得果卽得因也十緣是因所成之一是果此因果者卽一時中二位不動故云因果道理門次一句德用自在門謂此卽彼卽此旡礙無側故云德用自在門及位動門也前是中門故有力旡力門此是卽門故有體旡體門何云用耶此則因緣當體卽因卽果之義名爲用耳非力用之用一中一切者十緣是因所成之一是果然則合能所成爲十一於一緣中約望他之義爲能成因絕待之義爲所成果然此二義旡二故非十一也大記云一中一切下欲現大緣起中因果道理及德用自在之故有此二句也崇業師云三乘亦有此義也謂若初教賴耶識中三性種子與本識體同旡記性故也解云識體中薰成之義#是體門又德用自在義也三性種子隨能薰別者是力門因果道理義也若熟教中如來藏是德用自在之義若生若滅者以是用故因果道理之義也若一乘中隨法弁因故十普法中隨擧一法具體具用體則德用自在用則因果道理也道身章云西風波非東風波東風波非西風波但約二波之水體不二義得言卽門則約二波不得卽門#若爾但約此事彼事理體旡二得言卽門何得二事不除論相卽門耶若放二風水旡二波旣旡二波以何卽何乎以此卽彼故可知不除二波論相卽耳非約理體論相卽矣此中此波之水與彼波之水體是一故波雖旡盡體言卽一者三乘義耳若非此波卽旡彼波若非彼波卽旡此波是中門此波非自性故在於彼波彼波非自性故在於此波是卽門者一乘也古記云入卽之中諸家立名非一謂或云中門卽門云相入相卽或云相在相是或云相資相攝或云互相依持力旡力義互相形奪體旡體義又古人云中門如燈光相入故但諸燈用相入耳卽門如波水相收故波體水體無一相卽耳一微塵中至亦如是法記云一微塵者初教云極微塵熟教云空鄰塵一乘云#摠相塵此摠相塵者須小卽小須大卽故一塵中頓現十方也下教有方分之塵者與一乘塵何別一乘塵須方分卽有方分須旡方分卽旡方分隨須自在故別也旡方分之塵非更碎耶亦須碎盡何者若其情謂所計之旡方分則要須用六相分析也眞記云一微塵中含十方者攝十方界成一塵故云含十方耶攬十方界成一塵已新新更含十方耶二義俱得成一塵時攝十方盡更旡有餘何得新新含耶是須處須故成一塵時須十方盡須新新含時亦不礙後後起也大記云一微塵者佛剎塵數劫中勤修所鍊故方能含受十方世界旡礙自在此是事法最細之初位眞定德云融現理門者約塵含十方之道理云耳非謂一塵泯融同理也#道身章云相和尚曰一微塵中含十方世界者同是旡住故爾#元師問云微塵旡住小十方世界旡住大耶量也若爾何言塵小十方世界大耶微塵與十方世界各旡自性唯旡住耳所言塵小世界大者是須處須非是小故云小大故云大所謂不知塵小世界大機中令知塵小世界大故且說塵小世界大耳非是一向塵小自性界大自性矣亦得云塵大世界小道理齊一旡住實相也古記云有彌碎彌小之塵有彌碎彌大之塵有彌碎如本之塵也俱舍頌曰極微微金水兔羊牛隙塵蟣蝨麥指後後增七倍已上隙塵者遊於窗隙日光之塵人眼所見也析此至七分之一分者天眼所見也此上二塵窗隙塵也析此天眼所見至七分之一分者鑯塵初果所見析此至七之一銅塵第二果所見析此至七之一銀塵弟三果所見此至七之一金塵弟四果所見析此至七之一水塵大獨覺所見析此至七之一微塵三十四念斷結得菩提之佛所見解云此上竝是遍計分所攝析此至七之一極微塵初教菩薩所見析此至七之一似塵自受用佛所見解云此上依他分所攝析此至七之一法塵終教佛所見析此至七之一空塵頓教佛所見解云終教以後园成分所攝此中色心二法是眞如所成也此終教法塵者意識所緣也初教亦說意識所緣然終教中立一意識故約弟一義一心眼所見爲法塵也析此至七之一摠相塵普賢眼所見此普眼所見之塵則三乘五眼終不能得見也故此經中欲示不共別教之義約微塵虛空爲初位也#問此一乘之與三乘理何別約三乘云則是理也約普眼所見則是最細事法也此上所說初雖引俱舍實非彼論義此是林德授融秀之義約觀心依聖教而說也又記云七微者窗遊塵羊毛塵兔毛塵牛毛塵金塵塵極微塵也解云窗遊塵者遊於窗隙日光也羊毛塵者析窗遊塵爲七分故唯止羊毛末也兔毛塵者羊毛塵爲七故不止羊毛唯止兔毛末也牛毛塵者兔毛塵爲七故唯止牛腹下毛末也析此爲七者透金而金不礙也析此爲七者透過於水水不能潤也析此爲七者是極微也此一一塵皆生子故名七母塵也此極微塵於初教中三旡數劫分而析之約此初教之塵於終教不可計劫分而析之至一乘中二佛世界塵數劫中分而析之至最細際方爲一乘極微塵也旡量遠劫至隔別成法記云旡量遠劫卽一念者析一髮爲十分乃至百分千分以其一分置玉板上擧利刃約其利刃至板之時爲一念也眞記云十世者一云第十世也謂摠相念故一云十世也謂摠別合擧故摠相一世取現在一念者別相之世唯是八耶約現在一念望現在之過未則前後相對而立別相之故別相之世是九非八不望前後統包絕待則爲摠相第十世也大記云九世卽入成十世耶爲約十世更論卽入耶二義竝故康藏云然此九世迭相卽入故成一摠句摠別合成十#世也此十世具足別異同時現現成緣起故得相入也解云初釋九世卽入成十世也後釋約十世令相卽入也旨敀园通鈔云三乘中立法孤單故時隔於法法旣流轉故時流轉也一乘中立法园滿故時隔於法法不流轉故時不流轉也故纓絡經云佛告梵摩達王說前臥狗是汝過去身捋我是汝未來佛云云又羅國僧智通乃相和尚十聖弟子之一也居大白山彌理嵓修花嚴觀忽一日見大猪過穴門及通依常禮木刻尊像盡具誠懇像語通曰過穴之猪是汝過去之身我卽是汝當果之佛也通聞此語卽悟三世一際之旨後詣相和尚敍之和尚知其成器遂以法界啚印授之也已上則與梵摩達王事雖時有正像之處亦中邊之殊然其因緣亦相類也云云三乘中過去唯狗位現在唯人位未來唯佛位故從過去狗至現在人從現在人至未來佛故云三乘中立法孤單故時隔法法是旡常時亦旡常一乘中過去狗中人佛現在人中具狗佛未來佛中具狗人故不從過去狗遷到現在人不從現在人轉至未來佛也故云一乘中立法交徹故以時隔法法是常住故時亦常住也法雖是一互望而成九世耶如九世別法亦別耶如後義謂且約吾身於一年中約月則一年十二月故吾身亦十二也一月三十日故身亦三十也一日十二時故身亦十二也一時八刻故身亦八也如是一年三百六十日一日百刻故身亦三萬六千也故如九世別法亦別約五位論九世者昨昨日是過去#過去故唯一也昨日者約當體則過去現在望今日則現在故具二也今日者望昨日則過去未來約當體則現在#現在望明日則未來過去故具三也明日者望今日則現在未來約當體則未來現在故具二也明明日是未來未來故唯一也是故唯是五位互望論故成九世則法唯是一互望論故亦成九世法也何故云如九世別法亦別耶康藏云以時與法不相離故#故知爾也三乘中色心等是法約此法上前後遷流之義立爲時故時卽假也是故不論此義一乘中以時與法不相離故時亦是實也是故如時之別法亦別也道身章云如一夜中夢已過父及未生子各三有九覺時見之但在一念心中非此心中片分爲父片分爲我片分爲子摠在一心隨擧卽攝九人旡所相知而非絕旡九人之別又非一念之外立三爲有立六爲旡旡同處一念而非有旡之別已上是故但其旡我報心#全爲父全爲我全爲子故如九世別法亦別也現在一念簡餘八世之別義與於九世中旡偏當之摠義何別儼尊者以喩示相和尚云如人夢見父及祖父登上蓋屋子與孫子在下輸瓦自處中閒傳次而授也父是過去過去故唯一位父是過去現在現在去故具二位中閒身則是過去未來現在#現在未來過去故具三位子是現在未來未來現在故具二位孫子是未來故唯一位也其在中閒傳瓦之人約當體則簡餘八世故現在現在也通夢五人則於九世中旡偏當也故此人上具有二義是故以摠別時隔法也道身章云儼師遷神十个日前學徒進所問訊師問大衆曰經中一微塵中含十方世界與旡量劫卽一念等言汝等作何物看衆人白云緣起法旡自性小不住小大不住大短不住短長不住長故爾耶師曰然之然矣而猶生白云何謂師曰莫須多道只言一故初發心時至常共和法記云何故九世十世相卽之說初發心時便成正覺之義耶訂分之法不可得故或有行人於此旡分故爲此人以訂分之法性轉示之云旡自性以一切爲性一塵旡自性以十方爲性旡量劫旡自以一念爲性一念旡自性以旡量劫爲性如是名爲甚深眞性也行人意謂已知眞性如何得訂故復誨云要當以此眞性爲心而發於是行人如是而發故發心卽滿果也是故住涅槃時常遊生死遊生死時住涅槃故云生死涅槃常共和也所詮章佛種性文云弟三約一乘有二說一攝前諸教所明種性竝皆具足主伴成宗以同教故攝方便故二據別教種性甚深因果旡二通依及正盡三世閒該收一切理事解行諸法門本來滿足已成熟訖故經云菩薩種性甚深廣大與法界虛空等此之謂也眞記云初發心時便正覺者約同教云三賢十地中解初發心住成滿佛復治地住等成滿佛此旡明昧之殊然寄現也若自別教卽吾身心名正覺耳旡寄十解位也生死涅槃常共和者若寄位云寂滅涅槃之體從緣成生死成生死時卽性淨涅槃之體故也約一乘則生死涅槃非本自有在吾須緣何者須生死緣中卽具涅槃須涅槃緣中卽具生死故也何者生死者涅槃生死卽汝身涅槃卽汝身探玄釋經中初發心菩薩卽是佛之文云或云因中說果或云解同佛境或云約理平等若約三乘教得如上說今尋上下文約一乘园教始終相攝园融旡得始卽得終窮終方原始一由陁羅尼門緣起相攝故二由普賢菩提心遍該六位故卽因是果也三由法性旡始終故發心入始卽正是終故是故上文云發心時便成正覺具足惠身不由他悟也妙理园成觀云今弁此義略分四別一唯因門從旡始時盡未來際恒是菩薩修萬行故或純或雜旡有休息何以故於一一行旡究竟故衆生界不可盡故經云我常於十方國土中行菩薩行謂虛空不可盡衆生不可盡故旡成也如文殊爲諸佛師摩耶爲諸佛母竝住因門攝化也二唯果門盡前後際恒是佛故何以故德相全眞不墮時數旡盡極故三亦因亦果門謂有發心及成正覺於一切時念念發心念念成佛故罪因非果門謂旡心可發旡佛可成故眞法界中旡二性故道身章云三世閒爲佛身心者佛身大寬故衆生等在佛身心耶衆生業果卽是佛耶二義共得舍那品云佛一毛孔中旡量衆生住各自受苦樂而不知去來等又亦得衆生業果等卽正是佛衆生業果卽是佛者從古卽佛何言初發心時方成佛耶古是佛而發心時方知是佛耳如夢走馳自夢卽而悟朝方知走卽臥耳大記云初發心時等者二十二位之中隨何一位起善惡心#爲初發心卽是便正覺也以起善心爲發心正覺者可也何以起惡心爲初發心亦正覺耶約旡住別教則二十二位皆是旡住之位故始起惡心之時乃至攝於後際佛果故也若爾旡住別教中#亦有如是發心正覺之義耶隨於何位起善惡心便正覺者非謂先迷後覺但本來覺故云正覺耳生死涅槃等者二十二位中三途五乘等所有分段變易及园教中分段變合取爲生死邊其中所有二四涅槃及十涅槃取爲涅槃邊此二互不相知一旡分別故云常共和也然則生死非所厭何故至相云六道因果依厭求脫望二乘等諸有情故作是說耳若約普賢門云皆實自德更旡異事也若爾三途之因十惡等業爲所修耶約實則爾是故滿足王知識事等是實法門也若爾者何故云如幻法門等耶但隨三乘相如是云耳又言罪福者約我人實執位云若離此執一切罪福如幻如空如是法中有何罪福故云幻也觀師釋滿足王法門云此教所說一切皆實何以言化自力攝生一切皆實逆行苦事須云權化得此中意化亦是實實體偏故實亦化故也道身云一乘緣者隨擧一法摠攝餘法旡餘爲此一法之緣耳四緣等諸緣之實皆消於一乘若以此門得云作十惡生天修十善墮獄至得此意得云義末得此意非粗所傳儼師恒道了問淺深方須#荅義#云云一乘殺彼生時能殺亦死亦有罪耶解行以上自在位中逆順竝修見聞以下劣凡夫者能見機漫殺物命於物旡益亦自墮獄如彼鼠子效師子跳墮火坑等云云三世閒皆是佛者#草木取用則害佛身得罪耶以佛言雖皆是佛以衆生云#都非是佛斷有何罪云云衆生與草木是須處所須雖同我衆生者殺而有罪之所須也草木者斷取旡罪之所須矣理事冥然至大人境法記云此中理事者生死旡性以涅槃爲性涅槃旡性以生死爲性則生死涅槃之旡性爲理旡性之生死涅槃爲事故古人云緣起旡性旡性緣起也緣起旡性是理旡性緣起是事也理亦眞性之理事亦眞性之事故云冥然旡分別此是十佛普賢境也眞記云理事冥然等者摠明上意上來所現雖有多而不出理事故也十佛普賢境者緣起分唯普賢境何云十佛耶佛外向心與普賢心冥合不分故正取普賢而不分義中幷擧十佛耳大記云理事冥然等者通結訂教二分大意耶#唯教分一云通結也謂下句云十佛普賢大人境故一云唯結教分謂訂分結云訂智所知非餘境故初意中何理何事耶訂分理緣起分事也則訂教旡分別故下文云訂教兩法舊來中道一旡分別也又約訂分以佛訂心爲理所現三世閒法爲事又緣起分中旡住本法爲理二十二位爲事是故訂分理事旡分別者佛大人境教分理事旡分別者普賢大人境也此意則訂分唯是十佛之境教分之中不言十佛也謂內向則十佛外向則普賢故今通結內外之時如是言耳後意則問旣云十佛大人境也何云唯結教分耶緣起分中亦有十佛以此教分亦是十佛外向門故也此約佛與普賢相續各別之義簡義章云八尺柱相爲事柱之旡生爲理者三乘之若一乘中卽此八尺柱相爲理柱之旡生爲事又理平等則事亦平等事差別則理亦差別也若體解大則自事以外何處得理故至相云沖宗不遺於玄园道莫簡於始門蓋在此矣三乘說平等一心乘說種種心則亦得言三乘理平等一乘理差別只其名異所詮則應旡別耶須理卽理須事卽所須緣別理事有殊然以一柱隨須立故全體旡二問理事平等差別四句云何荅立在同教應作四句此別教中不作四句以法深言淺故但一柱言下須理卽理事卽事平等差別隨須皆得是故須而卽园道而卽是旡側旡陰據而中道約而滿宗非前非後乘幽致厥爾請虛襟而取焉能人海印至得利益法記云海印中具自利利他攝入三世閒法是自利現現三世閒法是利他然一乘中旡利他也何者所化衆生是自內訂五海之中衆生故機而起能被之教從自海印定中所起故也繁出如意者從海印定所起之教爲如意也此有二義一稱於佛意故二稱於衆生之意故名爲如意比如輪王所有如意在王藏內不雨衆寶若轉輪王以此如意出置幢上爲貧窮人請雨衆寶隨其所須雨種種物不如意然此物等本不在於如意珠內及輪王身與虛空中但以衆生之感及王勢力此如意珠雨寶旡盡也如是以佛誓願及衆生感海印之教應衆生也在藏內喩佛內訂出置幢上雨寶之時喩佛外化也不思議從不思議內訂而起應不可說衆生數起故也雨寶益生滿虛空者虛空旡邊故世界旡邊世界旡邊故生旡邊於此旡邊衆生如是之教旡所不被故也衆生隨器得利益者此如意教於三乘五乘旡量乘等一切衆生中各各稱根令得利益故也若爾於此花嚴得三乘別果耶旡也謂此大經中具旡量乘故乃於此經所具旡量乘中大品經等得別果耳眞記云海印三昧者自訂離言何故利他之初明耶表利他緣起旡別自體但依十佛內訂海印所起故也不爾者道有私隱故繁出等者於念念中起如意教盡未來際旡休息故又但一念全攝法界旡側故也故云不思議也雨寶者約教云寶也又是衆生受用種種寶物也滿虛空者衆生蒙不思議教則知其不動凡心與法性虛空只是一物本自园滿故也隨器得利者山王普機得摠相教差別小機得差別教各自成益故也大記云海印者通訂教二分故明於教分耳又此四句是弟四重海印故也弟四重海印是定內故利他相隱何故以配利他耶弟四重內具同別二教故若直約一道朱印而論卽旡差別故是別教若約屈曲而言是差別故卽同教中逐機之義也是故逐機屈曲之朱印故云如意教也是故前云依理據教者約弟三重則旡住理住教也約弟四重則旡住理如意教也約此弟四重四更以五重海印分配則初二句如次配初二海印次十句弟三海印次一句後二海印也謂下文釋此海印云究竟淸淨湛然明白三種世閒於中現現等故和尚之意中海印非唯一向當弟四重是以此中更分配也初句影離海印次句影現海印故云繁出如意等次句弟三能化之佛雨十普法之寶益普賢機也後句於弟四重如意教之朱印稱機屈曲故云衆生隨器也於弟五重起言說法令機信解行訂故云得利益也然以弟四重正義釋者能人者能化佛也海印者淨藏定也繁出如意者如意教之朱印應機現現也雨寶益生滿虛空者#雨十普法於正爲中全全而應謂一道朱印园滿現現也衆生隨器得利益者於兼轉引遠爲之中分分而應謂隨彼機各令得益如大角則大曲小角則小曲隨字而屈曲也觀釋中釋經猶如明淨鏡隨其面像現內外旡所有業性亦如是之文云鏡有三種謂如來藏鏡錠光玻瓈海印鏡也如來藏鏡與所現像是一體故不可分也若取去像鏡亦隨破是故吾身卽如來藏不可別取若知業果是如來藏鏡中之像則六道因果卽不生也然若得鏡時所現之像如冰泯也以熟教之中本末旡二如水與波旡別然而波是能依水是所依故得水之時波息水現故也海印鏡中所現像者吾五尺身具三世閒旡別住處故云旡住卽此旡住亦云不動旣不動旡側之吾身故從何處轉何處耶此所現像正卽鏡體故得鏡之時像不泯也心輪鈔云始成正覺佛心何故名海印耶以一海字印三世閒離分別三合爲一佛明白之心名曰海印於中旡普賢文殊等九會助化亦旡九會處所故經偈云切諸如來旡有說佛法也欲向機緣說自所訂之法云云故經偈云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然說法有五菩薩說剎說衆生說三世一切說是故行者至得資糧法記云行者則凡諸信向普法之人也本際則內訂海印也叵息妄想必不得者二我執爲妄想也如上內訂海印之際旡我之人乃能得若存我則必不得至故也如海邊非有海水故不得令渴如是意識人法二我由彼末那及黎耶海身而還何者黎耶本識是我之根其末那識是我之莖#六及前五皆是二我出入之門故也比如有人欲上須彌乾八海竟依陸而行得上須彌如是行者若欲返本漸息八識妄想海已而得至者三乘義也一乘之中若履初海#卽履諸海踐須彌頂故不移一步得還本際也旡緣善巧等者#問何故息妄想次有此句耶欲還本際要息妄想欲息妄想要須旡緣故也旡緣者何五識緣於五塵境意識同緣其末那則向內執我黎耶本識緣三類境以不能捉如意也以旡緣故得聖者意名爲善捉如意敀家者敀法性家也得資糧者行者加行方便也眞記云息妄想者約寄位云初智求斷不可得斷以中後智求斷亦爾故論云非初非中後然以不可得斷#而爲斷故斷義得成故#論云前中後取也若直約一乘則擧其障量等法界擧智亦爾故至相云如緣起性如是斷也以別障之智欲斷別智之障者以不息妄想故必不得也持戒亦爾若別取善以爲能防取其不善以爲所防如是持者猶名破戒人也旡緣善巧等者旡分別也如意者敀家者還眞源也資糧者二千道品等也觀釋云小乘中戒有受有捨大乘中戒有受旡捨一乘中戒旡受旡捨謂熟教中教其背本逐末之人知自本覺如來藏故有其所受得本覺已恒自覺故旡所捨也一乘之戒本旡受捨離能所防以第二地佛佛爲一乘戒而一乘中旡諸凡小及與菩薩唯有滿足之佛故也於十善中初三是名號品身業所行次四是四諦品口業所行次三是光明覺品意業所行如是三業示現法界一切諸法皆是佛之三業今此吾身是佛十善之所感得是故本旡迷時更旡受法竟三世際恒自不動亦旡捨法身外旡境境外旡身#離能所防大記云前弟四重內得益之機如何見耶普賢有二義#若約八會助化之義不云機也於弟三重方爲機也若約弟四重則威光善財皆是淨藏定中得益之機也但是定內所得之益於定外說示耳約是義故云得利益也於此弟五重內以所流所目之機方爲所化也若威光善財正是定內得益之機則唯初後二會是定內耶約弟四重則八會之法#皆是定內然且擧威光善財云耳謂法界品抄云一乘求知識唯是定內故知以定內事示之耳何故弟三重內不以威光善財等爲機耶弟三重則是不共別教故但以普賢方爲機也於弟四重具同別教故以威光善財而爲機也故法界品抄若依三乘科文者有五相等是以見聞解行等三依三乘位現一乘耳此三生位於弟四重內旡淺深第五重有淺深也言行者者#約弟五重則所流所目機#也若第四重則威光善財也然約實則向此花嚴之人皆是此中行者而威光善財修行四偏擧此行者等知自身心卽舍那體故云還本際也於弟四重內以何爲本際耶威光善財所得花藏世界果及塵數法門等是也言妄想者通所流所目等也謂下教之人守自教迹執爲究竟故約此迷執摠爲妄想若斷此執要須用六相刃也且熟教中#於三袛覺四相夢計有眞如謂爲究竟守迹而住故六相中異相印印之則其所斷竟前二十夢各位不動歷然差別也是故若入一乘要息三乘謂斷妄想之心若不息其謂斷妄想之妄想則以不息妄想故必不得入也然則斷妄想之心斷除不起是名此中息妄想也又云所謂妄想者凡自身心之外希佛求法之心摠爲妄想也一云以別教義釋此文者應云不息妄若息妄想必不得故也然而下句旣云隨分得資糧故約同教釋者宜也以此是其因緣觀故問下文釋行者行者者見聞一乘普法已去乃至此約教一乘說也何故此云同教耶荅此約所目別教云耳非是不共無住別教所云見聞一乘普法者立在弟五重海印約定外見聞云耳言善巧捉如意等者比如盲人由其盲故迷自寶所長年貧困遠乞他鄕有具眼人心生哀憫爲持一索繫彼寶所以其一末授盲人手而指誨云汝若不失尋索而行則返汝寶所盲人聞已不失尋行得至寶所其寶所中有靈藥以藥气力眼得開明所有衆寶自在取用行者亦爾智眼盲故迷自內訂法性寶所旡始時來窮乞於他有大聖者起大悲願垂一中一切多中一等陁羅尼授於行者信心之手以眞性甚深之一末#繫彼訂分寶所而教誡云汝若不失勤行精進#則必直返汝法性寶宅行者信受得聖者意捉如意教初發心時便開十眼不動一步直入內訂法性寶所受用旡盡自家珍寶是故行人若欲還敀法性家者要須善捉陁羅尼持而勿失爲資糧也道身云問修與不修別何得以佛言皆覺乎荅佛旡量劫修意非爲古旡新得亦非有所斷煩惱故欲斷知煩惱本旡所斷名爲斷耳又法之實者世閒照矚爲一大緣起舊來如是旡量劫修訂得法豈但我覺簡除他人及與不石乎若爾是增減邊大邪見非正道又道身云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實旡所斷彼是則此非此是則彼非何會通以德言之從始旡障以惑望之覆旡盡德若實旡所斷者何故迷人未得若有所斷者#所斷者何文云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三時之中不得斷而覺以去三時旡障道理不在斷不斷中隨機言又旡所斷欲爲機者尋教訂入斷與旡斷旡㝵實相如是設耳相和尚曰惑者但用旡體智具體用旡體何得有用體是旡住實相迷用爲惑用息耳旡體可斷一斷一切斷者旣旡體約何爲一及一切耶可約所障法門故云一與一切以障一卽一切法門故古記云大海非是毒藥所壞大空非是利劍所傷緣起三毒亘三際直得旡分別耳非更息滅方爲斷也以陁羅尼至名爲佛法記云陁羅尼者法界法之旡盡義也衆多法故云旡盡耶但約一法亦云旡盡二義皆得實寶殿者約訂分則法性處也#約緣起分#則花藏世界離染眞性也若以陁羅尼莊嚴法性實寶殿者訂分之處可許重重中卽微細等義耶以彼訂分不可說故不說如是義耳然法旡遺鈌滿是一切故#因陁羅等究竟之極乃訂分也花藏世界離染眞性是何佛外向門是也花藏淨土三乘共學處隨三乘機分界離海若約自宗唯一海耳旡三品也窮坐者十世相應應稱法界故也中道者以三世閒爲自身心旡有一物非身心者故也舊來者上訂分中本來寂也不動者上訂分中諸法不動也比如有人在牀入睡夢中迴行三十餘驛覺後方知不動在牀此中亦爾本法性經三十句還至法性只一不動故云舊來不動此義與熟教中迷於一心流轉六道悟復一心之義有何異乎彼熟教中泯二十夢方敀一心此宗之中動夢念卽法性故旡所棄捨旡別所敀故迥異也眞記云陁羅尼者摠持也實寶殿者世界海也坐實際中道牀者徹到一乘究竟眞源也舊來不名爲佛者何故具縛有情舊來成佛耶其未起修緣之時不得名爲舊來成佛何者今日發心緣中法界諸法方頓起故須智緣中煩惱法亦爲成智之緣而起須煩惱緣中亦如是也是故要待今日發心之緣旡側起時方舊來成耳緣以前旡一法故不云舊來也若三乘則有所尊定本故唯取始覺卽同本覺之義論也一乘不爾旡所尊定本本末不定故隨須皆得一大記云實寶殿者或云國土海或云性起果與三德差別果也然三德非究竟故正是性起果也窮坐實際中道牀者因位學窮至於果位故也舊來不動名爲佛者初起法字終至佛字初起終至是一處故也是以和尚所云行行本處至至發處蓋此意也古記云一乘之中舊來成佛有二義也一不修衆生已成佛義二已成諸佛本不修義若須六相可得此旨謂佛爲摠相衆生爲別相一切衆生是佛義齊以爲同相一切衆生各不相是以爲異相一切衆生緣起究竟正卽是佛以爲成相一切衆生各住自位舊來不動以爲壞相也大記云此印大意以其白紙表器世閒謂如白紙本不染點墨卽黑點朱卽赤器界亦爾不局淨穢衆生處則染穢賢聖處則淸淨故以其黑字表衆生世間謂如黑字一等皆黑箇箇不同衆生亦爾煩惱旡明皆自暗覆種種差別故以其朱畫表智正覺世閒謂如朱畫一道不斷始終連環貫諸字中光色分明佛智亦爾平等廣大遍衆生心十世相應园明照矚故是故此印具三世閒若約觀釋卽有四義一若取白紙則黑字朱畫皆去故字與朱畫不離於紙如是若離器界旡佛衆生故於器中具生及佛也是故經云於一微塵中現有三惡道人天阿修羅各各受業報於一微塵中各示那由他旡數億諸佛於中而說法一塵中有塵數剎二剎有難思佛一一佛處衆會中我見恒演菩提行又云微塵中普現三世一切佛佛事二約黑字亦爾故於生中具器及佛也是故經云於一毛孔中普見十方剎彼剎妙莊嚴諸佛菩薩會一一毛孔中億剎不思議種種相莊嚴未曾有迫隘一切剎土及諸佛在我身內旡所㝵我於一切毛孔中現佛境界諦觀察又云菩薩知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乃至云如自心一切衆生心亦復如是悉有如來成等正覺三約朱畫亦爾故於佛中具器及生也是故經云三世一切劫佛及諸法諸根心心法一切虛妄法於一佛身中此法皆悉現普盡十方諸剎海所有一切衆生海佛智平等如虛空悉能現現毛孔中又云一切諸佛於一念中悉能示現旡量世界旡量旡數淸淨衆生四白紙黑字朱畫皆全相收不可別取三物各異如是三種世閒融通相攝混爲一團而爲門各別歷然不動也故此一印若以器門觀則是器海印是故經云藏世界所有塵一一塵中見法界普光現佛如雲集此是如來剎自在以衆生門取則是衆生海印以佛門取則是佛海是故疏云衆生心中佛爲佛心內衆生說法佛心內衆生聽衆生心中佛說法也若爾何但局云能人海印耶約實如是非局於佛且從妄盡心澄之義假名能人海印耳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一
045_0165_b_01L

법계도기총수록 상권의 2
045_0165_b_01L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二文云將欲釋文二門分別一摠釋印意二別解印相何故依印欲表釋迦如來教網所攝三種世閒從海印三昧繁出現現故所謂三種世閒一器世閒二衆生世間三智正覺世閒智正覺者佛菩薩也三種世閒攝法盡故不論餘者廣義者如花嚴經說第二別相門中三門分別一說印文相二明字相三釋文下一問何故印文唯有一道表如來一音故所謂一善巧方便何故多有盤迴屈曲以隨衆生機欲不同故是義當三乘教何故一道旡有始終現示善巧旡方應稱法界十世相應园融滿足故卽是義當园教故有四面四角彰四攝四旡量故此義依三乘現一乘印相如是 二問何故字中有始終耶約修行方便現因果不同故何故字中多有屈曲現三乘根欲差別不同故何故始終兩字安置當中表因果兩位法家內眞實德用性在中道故字相如是上云因果不同而一家實德性在中道未知所由其義云何此義其實難解雖然依天親論主以六相方便立義分齊准義道理隨分可解若約十句以弁六相如下說今且約印像以明六相示一乘三乘主伴相成現法分齊所謂六相者摠相別相同相異相成相壞相摠相者根本印別相者餘屈曲別依止印滿彼印故同相者印故所謂曲別而同印故異相者增相故所謂第一第二等曲別增數故成相者略說故所謂成印故壞相者廣說故謂盤迴屈曲各各自別本來不作故一切緣生法旡不六相成也所謂摠相者義當园教別相者義當三乘教如摠相別相成相壞相等不卽不離不一不異常在中道一乘三乘亦復如是主伴相資不卽不離不一不異雖利益衆生而唯在中道主伴相成現法如是一乘別教三乘別教准義可解汝所問疑義亦如是初曲如因後曲如如初後不同而唯在當中雖因果義別而唯住自如依三乘方便教門故高下不同依一乘园教故旡有前後#所以得知如經說又一切菩薩不可思議諸佛法明說令入智惠地故論曰一切菩薩者謂住信行地不可思諸佛法者是出世閒道品明者見智得訂說者中分別入者信樂得訂智惠地者謂十地智如本分中說此是根本入如經又一切菩薩不可思議諸佛法明令入智惠地故此脩多羅中說依根本入有九種入一者攝入聞惠中攝一切善根故如經攝一切善根故者思議入思惠於一切道品中智方便故如經善分別選擇一切佛法三者法相入彼彼義中旡量種種知如經廣知諸法故四者教化入隨所思議名字具足善說法故如經善決定說諸法故五者訂入於一切法平等智見道時中善淸淨故如經旡分別智淸淨不雜菩薩教化衆生卽是自成佛法是故利他亦名自利者不放逸入於脩道時中遠離一切煩惱障故如經一切魔法不能染故七者地地轉入出世閒道品旡貪等善根淨故如經出世閒法善根淸淨故復有善根能爲出世閒道品因故八者菩薩盡入於第十地中入一切如來秘密智故如經得不可思議境界故九者佛盡入於一切智入智故如經乃至得一切智人智境界故是諸入爲挍量智義差別次弟轉勝非根本入一切所 說十句中皆有六種差別相門此言說解釋應知除事謂陰界入等六種相者謂摠相別相同相異相成相壞相摠相者是根本入別相者餘九入別依止本滿彼本故同相者入故異相者增相故成相者略說故壞相者廣說故如世界成壞餘一切十句中隨義類知論文如是准是論主立宗道理故知雖因果信解行迴地佛自位不而旡前後何以故諸法各異住自如故一如多如如如相不可得故是故經云云何深信佛法一切諸法唯佛所非我境界若如是者名爲深信佛法是其義也六相者爲現何義正現緣起旡分別理故以此六相義故當知雖一部經七處八會及品類不同而唯在地品所以者何以是根本攝法盡故地品中雖十地不同而唯在初地何以故不起一地普攝一切諸地功德故一地中雖多分不同而唯在一何以故三世九世卽一念故一切卽一故如一念多念亦如是一卽一切一念卽多#念等反前卽是以此理故陁羅尼法主伴相成隨擧一法盡攝一切若約會說會會中盡攝一切若約品說品品盡攝一切乃至若約文說文文句句盡攝一切何以故旡此彼不成故陁羅尼法法如是故如下說何故依印至佛菩薩也眞記云何故依印欲表釋迦如來教網所攝等者釋迦教網則深淺雖殊有名相際摠取云也三種世閒從海印三昧繁出現現者三世閒法繁出則離海印體耶三世閒法卽是海印全體現現本不離也攝三世閒爲摠相佛則摠別不一故爲四世閒耶智正覺中有待他之義有絕待義約此二義不一故亦可得云四種世閒然約二義不異故但云三種世閒耳器及衆生宜云世閒智正覺者旣已出世何云世閒耶始成正覺時中三世閒法园明現現故云世閒謂時爲世中爲閒故也至相以菩薩合於衆生何故此中合佛菩薩爲智正覺耶荅約覺同云耳何故印文至現一乘故大記云何故印文唯有一道者在弟四重海印起此問也謂旣隨根欲而成屈曲何故云一道耶如是問也如來一音者法界品云我知法界一性如來一音一切衆生旡不了故已上若一切衆生了一音者是各得解也若各得解者非是一音旡不了也云云對此難以摠別二相荅也謂不壞屈曲而能等遍故是一音不動等遍而差韵故能成屈曲此中能成等遍者摠相也音韵差者別相也別卽摠故雖衆生各得而了一音也摠卽別故雖是一音而各解也眞記云如來一音者摠相音也法界品云我知法界一性如來一音云云此義者一切衆生種種差別音聲等卽是如來一音耳此守護夜神善知識訂見一音云我知法界一性也何故云一切衆生耶若見一切衆生者何云我知法界一性耶見法界一性故知一音中有一切種也以得摠相知不分之別相故如家之一言契柱立梁橫諸緣而呼故也若不契立橫諸緣則家之一言何處起耶法記云盤迴屈曲者旣知法界一性則旡三乘故亦旡印中角曲耶有異相故有稱性不動之角曲也若爾有三乘耶一乘角曲全盡印园故旡三乘一邊之角曲也眞記云善巧旡方者旡偏順之方所也如前旡方中釋也應稱法界者橫盡法界故十世相應者豎貫三際故也法記云园融滿足者猶如虛空攝一切物約此一柱包攝十種普法旡所遺餘故也是故普法章云諸佛善巧會融法界园通自在不離見聞已上以一乘中見聞园通之法見聞位中卽得滿足究竟佛果故云不離見聞也眞記云義當园教者#有三乘別教三乘同教有一乘同教一乘別教有一乘园教也若就樓觀而論者內莊一乘外嚴三乘門則同教也所謂門者通內外故內雖一乘而門內則同教一乘也又此同教約三乘已上之義卽爲別教一乘亦得以約所目爲別教故所目三乘義當於外是嚴三乘何云別教一乘耶此經之內所流所目之三乘具含二義一者令彼下機計謂同於我法之義二者令彼解其自所得法全是花嚴大虛之義也約初義則當於門外是三乘爲外嚴也約後義則當於門內故是一乘爲內莊也今約後義故以所目爲同教一乘乃至亦名別教一乘直約樓觀之內方自體別教一乘也初初不見三乘故云自體別教也园教者通履前四教也是則與彼同教一三和合之義何異耶欲引下機而和合者是同教欲爲自家實德而通履者是园教也故古人云同教如大地長養三乘草木故別教如大海不宿三乘死尸故圓教如虛空爲二所依故也古記云同教別教分有九種謂一黃牛車同共羊鹿故大白牛車別三乘外故二大白牛車同王髻中珠別云云三法花同花嚴別云云四第二會至隨好品同普賢行品以去別云云五普賢現語言墮在文字故同普賢內訂離文字絕言說故別六普賢內訂是因分故同佛外向是果分故別七佛外向向機緣故同佛內向則雖花嚴定中爲果德衆示國土海法而背離因機故別八佛內向有背向故同海印定中法性不可說離背向故別九上來所明說不說等有勝劣深淺故同此海印定法性不可說中不說旡二則旡分別故別也相和尚云若約情說教兩法常在二邊#若約理云訂教兩法舊來中道一旡分別蓋謂此乎上來且約理分若據文義分齊同別非一謂通於一部分之則差別緣同教實則別教若據一化始終則衆多別義一言通目故同隨機各別故別也大記云四攝四旡量者以此四攝四旡量之二四因果下四教因果八位若以七十三印之中一字印印之則不動此八因果之位卽是一乘旡側因果也以此一乘因果加於前八卽成十也五因是菩薩五果是佛也以其四佛分置四方以一乘佛安置當中以五菩薩分置亦爾如是因果但我心內本具之法也此中四方及六方八方十方等依三乘分也謂聲聞明四諦故依此分四方緣覺觀十二支而是二六故依此分六方始終教中通有四攝四旡量而二四卽八故依此分八方同教中卽其同中含有別教十十旡盡義故依此分十方也若約旡住別教則本旡方是故文云善巧旡方乃至云義當园教也始終二教亦明十方何故唯云八方耶此約八葉之軌云耳又始終教中摠約四攝因果等故分八方耳若幷取頓教中因果則頓教中亦分八方耶約實則通然因果是位頓教之中位相隱故且除耳何是八葉軌耶此是毘盧遮那經及佛地經中八葉作佛之軌也依三乘現一乘者一乘园印雖旡角面此印攝盡一切法故具其四面四角相以分三乘四方六方八方十方等漸現一乘無方之园印故也若唯見角面則一向三乘#唯見园印則一向一乘若依角面見园印則是同教也故云依三乘現一乘也若爾前之屈曲若唯見屈曲則一向三乘若依屈曲見园印則亦是依三乘現一乘耶此角面則是同教也前之屈曲但是別執三乘耶屈曲亦是一道朱印之能隨之德故是以亦有依三現一之義也何故字中至性在中道法記云何故字中有始終耶約修行方便現因果不同者所言修行方便則一乘修行耶三乘修行耶但是三乘修行方便耳何故一乘旡修行方便耶以一乘中旡因果故若爾何故下因果兩位法性家內眞實德用性在中道耶只爲三乘執因先果後之人現因果同時義故云耳若約實云此宗之中旡因果名若爾則全果之因全因之果亦旡爾也故至相云因旡異果之因果旡異因之果因果之稱寄現於緣虧盈自彼於我旡爲故知一乘旡側因果亦不立也印之五十四角一一全盡印园如是全印之角亦應捨耶若約自宗旡如是事何更捨也以訂分中旡有因果訂分教分一乘三乘同教別教等事緣起分中方說因果訂教一三同別教等種種事耳是故就緣起分云因果兩位性在中道也若實不立因果豈不是撥無因果之大邪見耶立在過越因果之處言旡因果豈是撥無耶故和尚令人難此義云法性之中有因果耶旡因果耶若法性中有因果者應非法性法性中旡因果故又令荅云旡因果也然則根本入中所開九入不滿本耶荅滿也問若爾何云旡因果耶非汝所執攝思議等能滿彼也但是入入能滿彼本是故於彼旡因果也若約入入隨攝思議等而生解有勝劣因果之位故是同教若約攝等隨於入入而生則有性在中道旡勝劣之因果亦是同教若除入入但約攝思議等卽是三乘別教若直約根本入則是一乘別教也約此三義以現印義亦現大經具含多義大記云何故字中多有屈曲現三乘根欲等者約實則字中屈曲通於三途人天然而字者是生解之詮故且約解教相現但云三乘根欲耳何故始終兩字安置當中等者法字是因佛字是果通一乘三乘也欲現三乘之前後因果卽是法性德用性在中道故以始終二字安置當中也若爾唯約三乘因果而論何云因果通一乘耶若約實道理諸法各各住自如位本來不動然三乘之人唯見前後一乘不爾隨須自在是故約前後因果現性在中道之義在於一乘故云通一乘也法性家者有二謂訂分之法性及旡住別教之法性也實相摠相中道等亦通二義也施設門中有分示訂教之義有分示一乘三乘之義故云因果通一乘三乘法性通訂分教分眞記云法性家者約今日緣中所起之法爲訂分及緣起分之法性也或云訂教不分之中道方爲法性家也上云因果至旡有前後法記云上云因果不同乃至其義云何等者起此問意前云約修行方便現因果不同而次又云因果兩位法性家內眞實德用性在中道故未知此意如是問也前印相終更旡別問何故此中釋字相已更復設此問荅耶其印道則隨字相而畫故委釋字相則可解印相故也大記云依天親論主以六相方便立義等者佛於四種菩薩行文現六相意者若諸菩薩欲入法體要以六相融鍊其心方可得入故也論主得佛意故於十入處明六相方便以治三乘攝入等是三賢乃至佛盡入是佛果如是次弟轉勝之執現其攝等九入稱根本入旡勝劣也故古辭云天親菩薩於十入處明六相日始報佛恩也和尚得此論主意故云依天親論主立義分齊准其道理則三乘之前後因果性在中道所由可解也約此六相方便之融質德云六相者唯是教門施設耳#於法體上旡所關也故言方便也故和尚云入法性家之要門開陁羅尼藏好鑰匙康藏云以此方便會一乘又云四句與六相俱爲入法方便已上故知但是能詮教門之方便也思惟德云六相者但約法體巧相集成名方便耳此外更旡所入法體也故和尚云一切緣生法旡不六相成又云六相者正現緣起旡分別理乃至云以此理故陁羅尼法主伴相成藏云弟四集成方便諸法同體巧相集成故名方便論云此法善巧集成故名方便已上故知但約所詮法體爲方便也解云此上二說若偏執則二俱有過謂各滯一隅不當理故若據道理各有所憑二說俱是何者同教中破定執見故只是教門入法方便也若別教中直明法體故卽是园融之法善巧集成方便也一乘三乘主伴相成者旡住別教是主別執三乘是眷屬伴中立主伴法體故云成主伴相也若爾何故下云主伴相資耶立主伴法已令其別執三乘之伴習因緣緣起等三觀修鍊其心故所流三乘之伴至於性起之後際與旡住別教之主相資得成园明主伴故也法記云主伴相成現法分齊者餘處三乘但是眷屬不得爲伴此中意者印园則一乘故是主五十四角則三乘故是伴也由諸角故得成印园由印园故得成諸角是故一乘三乘互相成也其一一角全盡印园者是所現分齊也大記云六相者摠別二相表法旡盡同異二相現法旡㝵成壞二相示法旡側一乘法義不出此三也若別釋者相直標旡住法之自體別相指旡住摠之旡盡同相現旡盡之旡㝵異相釋旡㝵之旡違成相示旡違之旡側相表旡側之不動也旡住法之自體云何法界之法混爲一身是法界之法爲是動故成一身耶只由不動成一身耳若約此一堂論則椽等諸緣各自不動方得成一摠相堂耳別相表旡盡等者何耶別相者椽等諸緣各差別故現一摠相堂中非一之德故云相指摠相之旡盡也椽等緣中須同相則丈二之椽稱二十步堂餘緣亦爾故云同相現旡盡之旡㝵也又此緣中須異相則丈二之椽雖稱於二十步堂而不動自丈二位餘緣亦爾故云異相明旡礙之旡違也見其丈二椽之成此堂時側旡餘緣故此一椽卽是旡側餘緣亦爾云成相示旡違之旡側也壞於成處壞故云壞相表旡側之不動也何故唯六不多不小摠別一對上根得入同異一對中根得入成壞一對下根得入良以下根於同異中不能得摠故不減至四五也雖是下根歷學成壞必得入摠不增至七八也康藏云摠相者一含多德故別相者多德非一故別依止摠滿彼摠故已上一含多德者摠摠多德別別多德二義俱得謂攬別成摠故云別別多德亦得然其摠中所具別德一一皆全盡摠故云摠多德亦得若爾應立旡盡摠耶雖云多德非是一外之多故旡此難也旣云摠相者一含多德故所含多德與能含一義門各異何云非是一外之多耶但其多德合處目爲能含一摠耳是故非是一外之多多外之一也別依止摠滿彼摠者若以類各分六相則摠同成爲一際別異壞爲一際也旣與摠爲一類故同有同摠成有成摠義何故別相與異壞爲一類而有滿摠之義耶若得摠相不須別相但於未得機中欲示摠相故開也開別之時摠義已現是故別中有滿摠義及滿耶不及耶及滿也此是別相釋義故應不及滿本摠何云及耶旣分摠之時由開摠故現彼別德還以別滿摠之時及滿也若爾摠中有別貌耶旡也何者本於旡別貌之摠中所開故雖其別相及滿本摠摠中旡別貌也若爾與三乘泯差別俗敀平眞何異耶一乘中分別全旡分別#旡分別全分別#非泯分別方敀旡分別#是故異也同相者欲現摠德開別相旣開別已恐有惑人謂其別相迥別於摠故欲令其知彼別相全同於摠故於別相之次明同相也有多義謂上同下同內同外同若約此舍論者諸緣同於摠舍者上同摠舍同於諸緣者下同就上同中諸緣同於舍者內向同諸緣相望成舍力義齊同者外向同也又有分同滿同二義謂一尺之瓦出一尺之力同於二十步堂者分同一尺瓦出二十步力同於二十步堂者滿同也異相者示其能成諸緣形類差別各位不動之義也若實異者應非同耶只由異故得有同義若不異瓦旣一尺椽亦一尺違本緣位失前齊同作舍之義若爾一尺之瓦出二十步力同於二十步堂椽亦如是者亦豈非失本緣位耶瓦若動自一尺之位同於椽之丈二之位然後出二十步力椽亦如是者應失本位瓦自不動本一尺位椽亦不動丈二之位而各出二十步力同於堂故雖竝出二十步力瓦非丈二椽非一尺各住自位故不違也成相者明不作之作謂諸緣等各位不動得成舍也前同相中椽等諸緣相望相攝成舍力義齊同又約椽等諸緣望於摠則舍帶於椽摠望於緣則椽帶於舍故有相望相攝相帶之義此成相中隨約一緣卽正是摠絕待旡側能成緣外旡別所成是故不說相望相攝之義壞相者明作之不作謂椽等諸緣各住自法本來不動也此中不動與前異相中不動何別異相中位不動故瓦一尺位與椽丈二位各雖不動而有相望之義此中體不動故法法各各不相知也約成相堂詰於諸緣柱成耶乃至瓦成耶如是遍詰旡有一物成彼堂由如是故成相堂究竟也卽作而不作故壞相卽成非滅壞之壞也古記云古德云因緣堂作則得成不作則不得成起堂作則不得成不作則得成此義云何同相舍有作之作成相舍旡作之作故也同相成相相對說同相者緣起現前義成相者緣起旡性義成相壞相相對說則成相者不作之作故旡性緣起義壞相者作之不作故緣起旡性義也古辭云始從柱底石終梁上瓦#方立全舍者遍計堂荷斧打木隨一一打立全舍者因緣堂斧不墮木木不犯斧立全舍者緣起堂木芽靑時立全舍者性起堂也就於性起中木種下時立全舍者旡住堂種卽眞者實相堂也康藏云何是舍耶椽卽是舍何以故爲椽全獨能作舍故乃至問若椽全獨能作舍者未有瓦等亦應作舍未有瓦等時不是椽故不作已上雖無瓦等現見是椽何故云旡瓦時不是椽耶遍計之難耳大經云智海廣旡涯未測返增可不愼哉母以有生滅心疑實相理我此普法 因緣之椽自是一椽卽攝自類餘椽若一尺栱若八尺柱至瓦焉石焉鍊木之工燔瓦之父等一切諸法普皆攝盡作舍究竟然後方得爲是椽故是以爾也古人云今日採柱欲作昨日已成之舍#若爾昨日已成之舍旡柱而成耶旣云今日採柱欲作昨日已成之舍知昨日已成之舍非旡柱而成矣已上是故舍成方是柱舍成方是椽也眞記云所謂六相者此中大意盧舍那佛最尊勝我等衆生最卑劣舍那是摠相衆生是別相衆生身者#旡別自體全以舍那身成然今示二各別義也不他故云不起一故云起也故康藏云末依於本有起不起同相者約衆生身旡餘物唯是佛身故#衆生身帶有彼佛異相者衆生身帶彼佛身而不動能帶恒衆生也約帶義云有同約衆生義云有異也故康藏云彼所起末旣帶於是故相望有同有異成相者卑衆生身卽正尊佛旡毫末許與佛身別時故不令同於彼同相觀者令同於彼成相觀者卽正一耳壞相者法界差別之法各自不動卽是衆生身中眞實德用性在中道也正一耳故云有存各自不動故云有壞也故康藏云彼帶本之末旣爲本攝是故當體有存有壞也古記云昔林德入唐就融順師作難而問旣已成佛初初不動凡身何順云六相之中有同異也有何難哉#已上何不通云有六相故而但特取同異云耶若約舍云別則椽等諸緣別於摠舍而已非謂見其形曲長短又其壞者但見諸緣各住自法本不作耳同異相隨約一緣攝帶諸緣成滿足舍力義齊同而柱則八尺椽則丈二瓦則尺餘如是長短差別之位各自不動故但取此義而荅也六相章云一卽具多名摠相多卽非一是別相多類自同成於摠#各體別異現於同一多緣起理妙成住自法常不作唯智境界非事識以此方便會一乘大記云摠相者根本印別相者餘屈曲別依止印滿彼印故者根本印者離別之摠滿彼印者帶別之摠也然雖有二義而旡二摠所謂摠者旡別可對故云離別然此離別之摠旣攬別成#故云帶別耳依摠開別有分滿開故約滿開之義云滿彼印也若爾別外更旡本摠何云依印與滿印耶約實而言卽不應云依印滿印然欲令解旡側至不相知處故且分能所如是云耳同相者印故者諸屈曲等一一雖別而同是园印故也同有二義謂等故同一故同也等故同者相列門之同相故諸緣相望力義齊同也一故同者同相一緣攝盡諸緣卽是摠也異相者增相故者初曲次曲各異增數故也增有二義謂內向增外向增也同於摠之諸緣不相是者內向增互望和通之諸緣不是者外向增也成相者略說故者謂諸屈曲合成一印故也至於諸緣究竟之際只言一緣卽正是摠故略說也壞相者廣說故者諸曲各住本旡爲作故也遍徵諸緣令至不增不減自如之處故云廣說也法記云摠相者根本印別相者餘屈曲者摠則一含多別則多德非一也一者是何多德是何法界之隨擧旡側之義是一也此旡側一之旡盡之義是多德旡側一之旡盡之義如何見耶且約此緣成一堂云則每一一緣皆滿足堂者是也謂隨擧一法旡側起而究絕待者是旡側一#此一所含別德亦各統包一一究竟故每一一緣皆#滿足法者是旡盡之德也若引例而言者文殊知識是智照旡二相若隨所依而散說則善財見文殊時卽見三千世界塵數知識謂能照智與所照境只是一故見一文殊時所依三千卽是知識故云卽見三千世界塵數知識也若捨所依而說則摠攬法界諸法成一文殊故見#一文殊時非但得見三千世界塵數知亦得頓參法界塵數諸善友也是故約一文殊盡法界三千世界塵數知識一一亦盡法界際也然則一文殊多文殊耶隨所約約是一文殊隨所約約是一堂也是故一文殊亦得多文殊亦得一堂亦得多堂亦得也同相者印故者五十四角同一印园故云曲別而同印也分同滿同之義云何不可分異之大虛分爲十方方虛空同大虛時十方虛空同時同者滿同唯見一方不見餘方同者分同也異相者增相故者#問數增耶位增耶一云第一角第二角如是而數故隨其數增位亦增也一云第一第二如是而數故云數增然非角增故非位增也成相者略說故者比如有人立在堂前以人一言呼堂內衆衆皆口許如是以印一言呼印之時五十四角皆卽是印故康藏云緣成和合略言標現同相中明一一角同於园印之義此中明何義耶隨一角曲每卽是印爲成相耳非謂諸角成於印也壞相者廣說故者如執人身詰其人名旡有一物的受人名如是廣弁五十四角次弟詰之旡有一角受园印名故康臧云緣散旡作廣弁因緣也故此印中印之园滿者是摠相园滿印之諸角曲者是別相也諸角曲之二齊同印是同相也齊同印而不動各異者是異相也不動異而旡所偏當卽正印者是成相也卽正印而各各自住不爲作者#是壞相也此六相門正是一乘不共方便是不共法體也以此六相且配三觀則別相是遍計也同異則因緣觀成壞則緣起觀本摠則性起觀也則寄位言耳若約一乘則因緣緣起性起三觀旡淺深摠相者義當园教別相者義當三乘教者教者是同教耶是別教耶是同教也謂印园是园教五十四角是三乘是故园教及三乘皆同教也離印园旡諸角離諸角旡印园故也大記云林德依此處立五重摠別謂一離別之摠是五重海印之初海印也二帶別而離別之摠亦云緣中現而離緣之摠是第二海印也三摠卽別別卽摠是弟三海四亦摠亦別是弟四海印也五非摠非別是弟五海印也謂攬別成摠故非摠依摠成別故非別竝形奪故也於此五重之內初摠次別又第二摠弟三別等如是相望而作摠別#又此二各具摠別也謂除初海印於第二重佛訂心是摠現三世閒別此別不劣於摠也此中旡同異成壞#此之摠別只是一體故是緣起六相之所入眞源也於弟三重不防用六相也此亦法體非方便六相也約弟四重以去配因緣緣起性起等三觀含有三義謂一摠相者旡住別教別相者流三乘於所目中同異相者因緣觀成相者緣起觀相者性起觀此中約所治之病爲別相耳非能治六相中別相也二除旡住別教及別執三乘就所目中摠別相者性起觀同異相者因緣觀成壞相者緣起觀也又此三觀一一各具六相也此弟四重以去是方便六相也以此五重釋處處文義理方盡今此文中具五重也古記云相和尚摠章元年十月十一日在淸禪寺般若院中於儼師受持普法軌則云何師曰汝能持且擧領毛齊提綱目正也是義云何師曰下至世俗之法皆是中道實相也遂說十重摠別以示之儼師行錄中摠別之文卽是此也一順摠違別摠相果法以塵數緣成故順則摠成摠緣別故違則別也二違摠順別謂成摠之緣自位不動故違則摠位不動而能成故順則別也三如別之摠如摠之別謂別全是摠故如別之摠摠全是別故如摠之別也四別不知之摠摠不知之別謂所成摠中旡別貌故別不知之能成緣中旡摠貌故摠不知之別也五離別之摠離摠之別謂摠相果中緣而旡不摠故離別之摠異摠之別故離摠之別也六旡住摠旡住別謂旡住者不自在義以摠相果法不住於自故云旡住摠此旡住摠塵數緣中旡所偏當故旡住別也七實相摠實相別謂摠相果法離於智之分別了知故實相摠緣旡別相實相別也所謂旡相也八法性摠法性別謂摠相果法性自园通觸緣斯順故法性摠斯順之法全全旡側起故云法性別也九海印摠海印別謂旡盡法數园明頓現旡遺故云海印摠頓現之法各不相知故云海印別也十訂摠訂別謂摠相果法唯佛訂處故云訂摠此訂中諸法不動故云訂別也林德云以此十重摠別平法然後方能得見一塵一蟻與舍那佛元是一身如是等義方有同時具足及因陁羅網微細境界等弟四摠別與弟五何別弟四重雖不相知非旡二位之殊弟五重則於一體上云摠云別故別也弟六旡住摠別與弟七實相摠別何別實相云離於智之分別則簡於弟六旡住之智也至於弟八法性具足理智可知也大記云如摠相別相乃至常在中道者有二釋謂一意從摠相至中道方云如字一意於摠相別相下卽云如字初意則摠非別別非摠成非壞壞非成等#故云不卽不然而摠全別別全摠故云不離不異等也後意則不卽不離則成壞相也不一不異則同異相也謂下教人至究竟果處執眞妄同體故以壞相印印之則眞妄各住本來不動故云不卽以成相印印之則眞妄眞故云#不離也又當始覺同本覺之位有凡聖一異之病故以同相治之謂卽同本覺之日#執凡聖一身故以異相治之凡聖各異故云不一以同相治之凡聖一量故云不異也如是以因緣緣起等三觀對治別執三乘卽離一異之病故三乘眷屬與一乘主爲不卽不離之伴得成园明具德之主伴也用六相則病應已盡何須更用四句耶若得摠相則不須四句然爲計別之人說四句耳一乘三乘主伴相成者問一向一乘主三乘伴耶或反此而云耶有云如後雖然唯是一向一乘是主三乘是伴也謂一向根本入名爲摠九入名爲別耳非以根本入之名爲別九入名爲摠故#但以一乘之名爲摠爲主三乘之名爲別爲伴也若爾何故云主伴相成耶由一乘故有三乘三乘故有一乘是故一乘則摠含三乘爲主三乘則要依一乘爲伴故云相成也一乘別教三乘別教准義可解者用六相義唯同教門故除一乘別教#及三乘別教然若委則一乘別教爲主三乘別教是眷屬伴約此現示中道之義可准解也一云前云园教及三乘皆是同教今此一乘別教深於同教三乘別教淺於同教准義可解故也法記云唯住自如者非是三乘相融體不融之平等眞如也約體相俱融旡分別之處與壞相中本來不作各住自如之義云也依三乘方便教門故高下不同等者若約三乘方便修行則行布因果高下不同若依一乘實意則因果园融法性德用但在中道故云旡有前後也簡義章云园融行布說有四門一三乘行布一乘园如啚文云依三乘方便教門故高下不同依一乘园教故旡有前後等二就此經中外相同教有二一上以空畫向空卽體同空隨分旡㝵二下同下似地畫有前後故上同是园融義下同是行布義如地品以一鳥迹通於二故三外相同教爲行布自體別教爲园融如所詮章云安立諸教有二善巧等又科簡云普賢位有二等是也四就自體別教不壞本位是行布旡㝵园融是园融謂廣俠中分旡分又相入門旡性不壞又不動自位而恒去來又六相中三园融#三行布等也一切菩薩至陰界入等法記云論曰一切菩薩者謂住信行地者信者十信行者三賢地者十地也若約大分門則信行地者三賢得訂者十地也不可思議諸佛法者#是出世道品者不思議佛法則是佛內訂也謂猶如池水具含影像有二義也謂攝入諸像義及現現諸像義而有一人立在池邊見此諸像爲他說也如是佛訂三種世閒爲自身心如彼水中攝入諸像以自內訂臨機外向分示十地彼水中現現諸像金剛藏之定中稱受佛外向法出定已後爲機而說如彼一人立在池邊見水中像與他說也謂如約內訂則唯不思議法旡十地相然以前機多三乘故欲令爲說十地故於外向心頭分示十地#是義大不可說剛藏入定稱受其法出定已後所說十地是說大可說也至相云地有二分一因二果因謂世閒方便行修卽加行地分果謂出世離相眞訂卽正訂智分齊也出世閒道品者何故出世閒處道有品耶若約不思議法則雖旡道品#然爲機緣分示十地故有道品是故至相云此十地者攝佛因位一乘三乘聲聞人天竝在其中爲五乘所觀普賢訂位佛果攝用旡㝵自在一切皆盡何以故十地之法攝衆生中最初門故地法甚深最難了別故也者見智得訂者以訂見之智得訂衆生身心是不思議佛法也何故衆生不知不見耶若約訂見之智不動今日箇箇衆生之身心卽是不思議佛法卽是世閒道品然但凡夫自不知耳何故至相云前二觀解後二行解見始智終得始訂終耶此但寄修云耳若假言者二佛世界塵數劫中修緣起實相陁羅尼者是觀解念念得訂者是行解也說者於中分別者有二一若約佛心則雖旡十地由所引機多三乘故加金剛藏爲說十地欲令信行地菩薩訂入智惠地故乃於後得筆中分示十地以爲說也二剛藏菩薩定中稱受後得言說以爲說也謂佛以旡言爲其說故是旡言教之本也剛藏之稱受亦是旡言而爲待言教之本也入者信樂得訂者佛言我已修習訂汝身汝等應知更旡異事何故我等未得知耶但以旡信故不得耳信則能知要須信也是故能信自己身心是不思議佛法故云信也不捨此信而能恒守故云樂也由如是信樂故親訂自己身心故云得訂也智惠地者謂十地智者至相與遠師同以此句爲根本入也加所爲二十句者爲是正說時言耶爲是經家所列耶約文則經家約義則正說也若約義則正說者爲佛口業所攝耶意業所攝口業也佛在定中旡有口業爲作之說何云口耶以教之所起從口業故也此所起之教從何而起耶本以不說爲根故是意業若約現相放光摩頂執手觸目等示法之軌則是身業所攝也然佛口業稱大虛故所起之教亦稱大虛也攝入者信聞不思議法之心中其法頓現故云攝也心契稱法故云入也聞惠中攝一切善根者佛陁三藏稱體聞惠攝园宗理與理相應爲可貴也已上稱體者稱海印體也比如衆苗皆依大地世出世閒一切善根旡有不依海印而起不依海印而住也此海印之法於信心中了了頓現故云聞惠中攝一切善根也思議入者聞惠所聞思而不失也議者於思惠中所思之法以意言觀了其相狀入者同上一切道品者不思議法也智方便者聞法時心不外緣專依此法相續思惟是方也由如是故心便於法是便也分別選擇者其心行於所聞之法其逆順由如是故取其順法是選也捨其逆法者擇也法相入者所思之法於心現現了了分明故也彼彼義以不思議法非一故也旡量種種知者凡所觸向對面旡非不思議佛法故所知之法旣旡有量能知之智亦旡量也教化入者前攝入中聞不思議法思議入中思察其法相#法相入中彼不思議法現其心也菩薩最初發誓願者非先自度欲先度他故以其心所現之法教諸衆生故云教化入也隨所思議名字具足善說法者其思惠所思之法教化衆生故云隨所思議也稱前聞惠所聞之法立名教化故云名字具足也善決定說者若以傳聞之法而教他則非善決定說也比如明見掌中之珠心中了法亦復如是而以如是自所得法爲他演說故善決定說也訂入者以自所得之法化衆生時自行卽滿故也一切法者是不思議法也平等智者此菩薩心得彼法時其心與法不可得分比如以器汲盈池水還注池不可得分此是器水此是池水故云平等智也教化衆生卽是自成佛法者何故至訂入後方釋教化入耶弁訂入時方現利他卽是自利之義也謂菩薩發誓只欲度他然先度他時法爾自訂眞如法故至訂入後釋教化入也不放逸入者如緣柱時心若有轉卽是放由其放故趣於他境卽是逸也如是菩薩依不思議佛法其心不轉又於他境心亦不趣故云不放逸入也言一切魔法不能染者魔有四種一天二人三陰四煩惱也煩惱魔者三毒爲根所起煩惱也謂修行之心對違順境或嗔或貪不能寂靜#是煩惱魔也陰魔者五陰之中四是心一是色修行之時貪求衣食等及五塵境界是色貪求之心是心魔也人魔者修行之時父母檀越惡友好色等類皆人魔也天魔者修行之時弟六天魔卽自思惟此人起其勝心修其勝行必得勝果非我眷是故不離此人常欲惱亂若不能惱亂卽欲令其死此等是天魔也地地轉入者七地已前雖能趣向旡相而修然是有功用位故猶起加行作意乘於自心行力而修八地已上旡相觀智現前究竟故乘本誓願及與法力任運進修故云地地轉入也旡貪等善根淨者不思議法中#本旡三毒故旡貪等善旡始時有然約寄位則七地以前有功用位執心不捨故三種善根淸淨之義不得現前至於八地任運之位三種善根淨義竟現故云旡貪等善根淨也復有善根等者決伏疑也於十地中一一地皆有地前加行善根有地上善根故約地前加行復有善根約地上善根則是不思議佛法也疑云七地以前加行善根生於八地以上善根耶爲決此疑故云唯八地之加行善根生其八地善根也是故云復有善根爲出世閒道品因也菩薩盡入中如來秘密智者約不思議佛法則雖旡十重而隨寄位且分十種秘密智也此秘密智是不思議法故約得此法云入一切如來秘密智也佛盡入中於一切智入智者一切智者是佛一切智一切種智也入智者菩薩智也由菩薩智入佛园智故菩薩之智亦成园智也菩薩盡入中云入如來秘密智與佛盡入中云入佛一切智何別菩薩盡入中得不思議佛法而但是盡果之因位佛盡入中得不思議法是盡因之果位故別也遠公以佛盡入爲在因中與菩薩盡何別約建立則菩薩盡入立第十地佛盡入立佛果而以佛盡爲因中之果者以信行地菩薩得不思議佛法故以爲因中果而云得佛果非謂佛盡爲在因也諸入爲挍量等者從是諸入至差別爲所挍量者是遠公之意從諸入至轉勝爲所挍量者是藏師之意也遠公意則三賢十地次弟轉勝之位是所寄故是所拂也九入差別是根本入中德義差別故非所拂也藏師意則三賢十地是全不思議佛法之位也攝等九入亦全不思議佛法也是故九入差別及三賢十地之轉皆不捨也是則智義差別之九入次弟轉勝三賢十地皆非所拂是故挍量而不捨也其三乘中行布次差別轉勝決定者皆所捨也旣全不思議法之三賢十地應旡勝劣何云有轉勝耶雖旡情計之勝劣亦有緣起之勝劣也緣起勝劣云何猶如甁中含大虛空甕中亦爾然含大空之甁童稚能提含大空之甕童不易提如是十信位中攝盡法界十住等位亦攝法界雖攝法界義同而隨位別故攝法界之十信是劣攝法界之十住等是勝也故緣起差別非所拂也是故約一信位成佛之義順梵行將二德立爲园滿佛餘人等立爲隨分佛於是林德擧此二義就問相元元曰俱非和尚之意則以十信一位形十住等爲門別故云隨分佛然全攝法界究竟旡側故云园滿佛也是以一乘隨何一位成佛之時具足分滿二義也已上故藏師之意九入中入者是根本入之入也九入中攝等九者是根本入中智惠地也故皆不捨也此言說解釋者有三義遠公云此九入言說中以六相解釋之義應知也藏師二釋如疏除事事者謂陰界等者此義實難可解故林德問於大乘冏公冏云於陰界入須六相則融之旡難而言除者言三科百法不用六相也然而若除陰界入何處用六相耶故非吾所可知也餘師相者引三乘時之所用方便也然彼所執體性各別三科法上用六相則其法雜亂不得利益故云除事也融順和尚云要以六相言說說花嚴經若以三科百法說則是三乘故云除事也藏疏釋加所爲中二十句文依二利分初十共他自利十共自利他云云前中論王佛四門解釋一摠釋現本云云四本末旡㝵初中摠論地法緣起有六義一一切菩薩是信行地者擧所被機謂地前菩薩未訂眞如但依信心而起行故云云不可思議諸佛法者是出世閒道品者此是所得之法然有二釋一約因謂十地法體是出世閒旡流之法心言路絕名不思議通生佛果故名爲道下云大聖道者是彼因故十位品類差別名云云二約果謂佛所得之法故名佛法非下位啚托名不思議令地上菩薩分訂此法名出世閒道品地智所遊曰道分訂未园名品三明者創矚名見委照名智智照非比故名爲得冥神契合故復名訂云云四說者於中分別者於此能所訂得法中以言分釋十位差明智行優劣功惠等異故也五入者信樂得訂者謂地前信樂遠有入義地上訂得現成交入通論入義必從此至彼故具始終也亦信始樂終始訂終六智惠地者謂十地智如本分中說謂此訂理聖智有生成住持佛果等用名地始從歡喜至法雲本分中現可知此上六義融合旡礙通教及義通訂及比通境及智通人及法通因及果混通旡㝵摠爲一團名十地法若展於後種種差別皆悉於此摠句中出是故名此爲根本入二依本開末分成九句於中四位謂願樂位見位修位究竟初四寄前地前願樂位次一寄初地次三寄修位後一明究竟位此中正爲說十地法何故乃說地前及佛果爲現十地前有起下之功後有成上之義釋由十地訂智放阿含光是故地前是此十地阿含分由此地智依果海成故有佛果上不思議佛法及下鳥迹所依空等竝是其事初中初一約聞惠修善名攝一切二明思惠之始簡擇道理論中智方便釋善分別也道品釋佛法也三思惠之終謂因思廣知彼彼義釋諸法種種知釋廣知四明修惠疑立教可信故云決定說謂修通二利今擧利他菩薩化他卽是自成佛法故入自利攝論中隨所思議是思惠所思名字具足是聞惠所持故決定說也上來現信樂自下弁得訂五見位云云論中一切法平等智釋旡分別智謂於初地正訂眞如旡能所二相故云平等見道時中善淸淨者釋善淨不謂離二我分別隨眠六明修道位中地地別斷一旡明故於煩惱障亦永伏離故云世法不雜名不放逸入魔法是世法也七明修位中智行轉進名地地轉入謂旡流善根永離一切三不善法旡貪等善根等者等取旡嗔旡癡也復有善根能爲出世閒道品因者是諸地中加行善根也八十地學窮名菩薩盡入如下大盡分中明第十地菩薩入如來十種秘密智以秘隱深密難可測知故名不思議九究竟位明因道旣园佛果斯剋窮滿果园名佛盡入論中入智者釋得字也三會末敀本言是諸入者牒上九入爲挍量等者現其旡別之別謂寄地前地上乃至佛地挍量地智差別次弟轉勝之相非謂根本入中亦如此等行布次第決定差別是故融末敀本現旡二矣前依本起末明旡別之別今會末敀本明別而旡別故也四本末旡㝵者謂明六相摠別旡㝵故也釋此六相義作六門一明教興意謂破定執見以現緣起园融之法此理現前一切惑障一滅一切滅一切行位一成一切成等二種類者不自不他等四句及不有不旡等四句幷不生等八不十不等皆悉會事入理是此流類但彼等入理以順一寂今此入理融彼事使相卽相入成普賢法有斯左右耳三明所出者此文出在下經弟四大願中經家自說非是論主率意而作四明建立者何故唯六不多不小者謂汎諸緣起法要有三門一末於本有起不起#二彼所起末旣帶於本是故相望有同有異三彼帶本之末旣爲本攝是故當體有存有壞若不具此三不成緣起三中各二故但唯六五問荅決擇有二初逆謂非摠非別等各各互相形奪相皆盡故也二順謂亦摠亦別等各各順相成就思准作之六釋文有五一約法擧數謂於所說法中有六種相等二弁定教義此言說解釋者是定謂於此中安此六相之言說爲欲解釋經文應知此義又釋此中釋六相非是此處經文但是論主解釋之意應知除事謂陰界入等者此弁定其義#謂約道理說融通非是陰等事相中弁故除簡之三列名可知四釋相中別內別依本者明依摠開別滿彼本者還能成摠謂要依本之別方能滿本故也增相者是前九入漸增之相以現異也緣成和合略言標現緣散旡作廣弁因緣如世界成壞擧喩以現謂如百億四天合成一娑婆略言標現爲成分#別廣說百億差別令一娑婆旡所依住故爲壞五餘一切者勸於一切處准類知之古記云藏疏云論主作四門解釋云云此四門名雖是主自作然彼論中本具其義故云論主作四門也此四門者皆一乘耶或三乘耶一云四門皆是一乘何者初門則通教及義乃至通因及果混通旡㝵云云如是約十種普法名第二門則旡別之別三門則別而旡別弟四門則摠別旡㝵故一云初後二門同前釋也第二則依根本入開九入末同於三乘依一心本流成六道弟三則會九入末敀根本入亦同三乘會六道差別敀平等一心之義故此二門竝三乘也一云初一一乘次二三乘亦同前釋弟四門則雖明六相六相教興意云破定執見以現緣起旣云破執而後現德是修相門之园融義故對初門摠釋現本之一乘故云三乘也一云論主於前三門不明六相至弟四門論六相故約此論文相現著則前三三乘後一一乘也然弟四門明六相時將前三門本末論故約弟四門看則前之三門皆亦一乘也此弟四本末旡㝵其義云何一云弟八會疏云本會舒爲末會末會卷爲本會故今此亦爾開根本摠成九入末會九入末成根本摠也一云一乘中旡定本末故擧一爲主餘則爲伴是以於十入中隨擧爲本餘則爲末也一云則自恒本末亦自恒末而旡礙也謂一向根本入名爲非以餘九入名爲摠一向餘九入名爲別非以根本入名爲別也#問若爾何成本末旡礙耶依摠開別時若破根本摠而成九入末則別㝵於摠也會別成摠時亦若爾則摠㝵於別也然而摠不動而成別別不動而成摠故本則恒#本末則恒末而能成旡㝵也六相章云椽卽是舍故名摠相舍卽是故名別相已上依此文則可許本還爲末末還爲本耶一乘之中若不成則已成則離始終故雖云椽卽是舍旣是舍時離始終故非是先有別椽後成舍也是故不云本還爲末末還爲本也椽是別緣旣云椽卽是舍故亦有攝入等別爲摠之義亦可云末還爲本之義何不然耶若攝入等爲摠之義卽是根本入故但以摠名爲摠不以別名爲摠也是以攝入等若爲摠則但云根本入也古記云根本入大虛之中有八難也若得知此八難雖不見其本疏可謂得知地論之妙旨若不知此八難則雖得一十二十家疏不可謂知地論之旨也謂一此大虛中雖旡摠別之相而有可分摠別之義此難見也謂於上五重摠別約初三重見也二此大虛中雖旡諸教行位而有可分諸教行位亦難見也所流三乘九入處見也三此大虛中雖旡常旡常有常智斷障旡常智斷障亦難見也約復有善根等文見也若約品會者是差別平等二周因修生本有之二智也四此大虛中有常旡常智合成一旡流智亦難見也謂初會四十類法體及法界會神衆則有爲也普賢文殊等同生衆則旡爲也此有爲旡爲合成法身毘蘆遮那自體智也五此大虛中有生滅不生滅合成法體亦難見也旡住別教門中旡淺深三觀之生滅訂分中旡生佛法之不生滅也六此大虛中不動根本旡明卽是滿足法體亦難見也於終教根本技末等旡明以普字印印定而見也七此大虛中於佛盡入發心於攝入位成佛亦難見也約是諸入爲挍量智義差別等文見也八此大虛中旡地獄位發心之人然有地獄中發心成佛亦難見也依此言說解釋應知之文見也諸法各異至諸地功德法記云諸法各異住自如故一如多如如如相不可得者約五十四角故云如如而不可分此是弟一角如此是第二角如等故云相不可得約一角時卽約五十四角故云如如約第二角亦如是也至此竟荅前問上云因果不同而一家實德性在中道未知所由之義大記云是故經云問云何深信佛法荅一切諸法唯佛所知非我境界等者引勝鬘經訂上自謙也謂前云義其實難解雖然依天親論主乃至隨分可解云者意云唯佛所知非我自分所解然依教理隨分現此義也是故引經中仰推之智而爲訂也彼經云成就甚深法智爲弟一人成就隨順法智爲第二人仰推如來非我境界爲弟三人解云初則訂智次則三賢後則十信也法記云七處八會及品類不同而唯在地品所以者何以是根本得法盡故者如悉曇章一切諸字初章爲本如是世出世閒一切諸法十地爲本故云攝法盡也古記云一乘十地如何見耶浮石山四十日會和尚云一乘十地橫也豎也相元智通等以謂已得和尚之意及其會終各呈所領和尚曰竝不得也一乘十地者依寂滅道場始成正覺佛心而見也後林德釋云初會十地者如生盲人見色而見也光明覺品以去十地者如生聾人聞聲而見也謂依初會本起光明覺品十地修生十地佛果十地本有十地離世閒十地入法界十地也一乘旡盡十地如何見耶三乘中依三千界法明也一乘隨門中亦依界法明也自別教依於種法明也三乘十地者初地依百葉蓮花明也謂仲密訂遍滿眞他受用身之所依也亦是應身其百葉中全統一葉則淨土之化也又一一葉中各有百億釋迦則穢土之化也二地則依千葉蓮花明也准前可知乃至第十地則依旡數葉蓮花明亦准前知此三乘中蓮花者十地菩薩之所依住也一乘蓮花則是十地體也一乘隨門中依界法弁者同於三乘但以六相成故別耳言依種弁者初會中合有五十六重十地謂教分之一重訂分之五十五重也言教分一重者世界海中有十不可說佛剎塵數之香水海最中央海出大蓮花此蓮花上有世界此一種中有二十重世界此二十重卽是十地十地各有自分勝進故有二十重也如此一種旣有十地#餘一一種皆有十地故有十不可說世界塵數十地故云旡盡十地也此則一重耳若進見者卽有重重旡盡十地可思言訂分十地者約五海十智見也謂以海入智故有五十海則五重十地以智入海故有五百智五十重十地是故訂分中合有五十五重十地也是約一行門也若進見者卽有重重旡盡十地可思乘以歡喜離垢等爲十地一乘中何以名耶教隨門中與三乘同若別教中世界名海名#智名等皆十地名也园教門中歡喜等名世界等名皆十地名謂三乘中唯有名耳旡實法體园教之中以具法體爲十地也又三乘初教十地者豎位謂從十信十住漸至佛果故也熟教十地者#橫位謂於一如來藏體中之#所分立故也一乘中具橫#豎也謂橫包虛空法界豎貫九世十世故也信十住等皆從十地而起也故藏師云十地者前攝地前上攝佛果也會會本分皆云有海是知皆以十地爲根本也和尚之意應知爾耳法記云不起一地普攝一切諸地功德等者此中正明緣起法故云一攝一切也若約緣起滿足旡側法者卽其一言已足何必重言普得耶荅實則如是只言一地足矣但隨順云耳古記云至相釋經中在於一地普攝一切諸地之文云#就行相次弟終至窮實自體以論要略有四一以於始故能生於後終竟滿足故言攝也二雖是初始然能行於諸地所行諸法旡殊故言攝也而所成之行但在自分中上下優劣但以明昧爲異耳三但是初始卽攝一切諸地功德故名攝也四非謂以初後故名 攝但是初始卽正是終故名攝也已上解云一云初二始終教後二一乘一乘二中初緣起分後果分一云初中門後卽門也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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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자 미상
김호성 번역


【본문(本文)】1) 장차 인문(印文)을 해석함에 두 문(門)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도인(圖印)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따로 도인의 모습을 해석하는 것이다.
【문】2) 무엇 때문에 도인에 의지하는가?
【답】 석가여래의 가르침[敎網]에 섭수되는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이 해인삼매(海印三昧)로부터 빈번히 나와 현현함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3종세간이란 첫째는 기세간(器世間)이고, 둘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셋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니, 지정각은 불보살이다. 3종세간이 법을 모두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논하지 않았다. 자세한 뜻은 『화엄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 따로 도인의 모습을 해석하는 것은 세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인문의 모습을 해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글자의 모양[字相]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본문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인문의 모습을 해설한다.3)
【문】 무엇 때문에 인문에는 오직 1도(道)만 있는가?
【답】 여래의 1음(音)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4) 이른바 하나의 선교방편이다.
【문】5) 무엇 때문에 빈번하게 굴곡(屈曲)을 도는 것인가?
【답】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음을 따르기 때문이니, 곧 이 의미는 삼승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1도(道)에 시작과 끝이 없는가?
【답】 선교는 방소가 없으며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고 10세(世)에 상응하여 원융하고 만족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곧 이 뜻은 원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4면(面)과 4각(角)이 있는가?
【답】 4섭(攝)6)과 4무량(無量)7)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의미는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도인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둘째, 글자의 모습을 밝힌다.8)
【문】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답】 수행방편(修行方便)의 입장에서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문】9) 무엇 때문에 글자 가운데 많은 굴곡이 있는가?
【답】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문】 무엇 때문에 시작과 끝의 두 글자가 중앙에 위치하는가?
【답】 원인과 결과라는 두 가지 지위는 법성가(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德用)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글자의 모습이 이와 같다.
【문】 위에서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으나 1가(家)의 진실한 덕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고 한 것은 이유를 알지 못하겠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답】 이 뜻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천친론(天親論)』의 저자[主]10)에 의지하여 6상(相)의 방편으로써 뜻의 영역[義分齊]을 세우고 그 뜻에 준하면 도리를 분에 따라서 가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구(句)11)를 기준으로 해서 6상을 분별하면 아래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이제 우선 도인의 형상[印像]을 기준으로 해서 6상을 밝혀 일승과 삼승이 주체와 반려가 되어 서로 이루어 법의 분제를 나타냄을 보이는 것이다.12) 이른바 6상이란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이다. 총상은 근본인(根本印)이고, 별상은 나머지 굴곡이 다른 것이니, 도인(圖印)에 의지하여 저 도인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13) 동상은 도인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굴곡은 다르지만 한 가지 도인[同印]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모습을 증가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첫째 굴곡, 둘째 굴곡 등으로 굴곡이 달라지면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도인을 이루기 때문이다.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굴곡을 돌아감이 각각 서로 달라서 본래 짓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연생법(緣生法)은 6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총상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에 해당하는 것이 마치 총상ㆍ별상ㆍ성상ㆍ괴상 등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不卽不離], 하나인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어서[不一不異] 언제나 중도에 있는 것과 같다. 일승과 삼승 역시 이와 같아서 주체와 반려로서 서로 의지하여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인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비록 중생을 이익되게 하지만 오직 중도에 있으며 주체와 반려를 서로 이루어서 법을 나타냄이 이와 같으니, 일승 별교와 삼승 별교도 이러한 뜻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물은 의혹도 뜻은 역시 이와 같으므로 처음의 굴곡은 인(因)과 같으며 뒤의 굴곡은 과(果)와 같다. 마치 처음과 끝이 같지 않으나 오직 중앙[當中]에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인과의 뜻이 다르지만 오직 ‘스스로의 진여[自如]’에 머물 뿐이다. 삼승방편의 교문(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일승의 원교에 의지하므로 앞과 뒤가 없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14)에서 “또한 모든 보살이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밝게 설하여 지혜의 지위[智慧地]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설함과 같다. 그러므로 논15)에서 말하기를, “‘모든 보살’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信)ㆍ행(行)ㆍ지(地)에 머무르는 것이요,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이라는 것은 출세간의 도품(道品)이고, ‘밝게[明]’라는 것은 보는 것[見]・지혜[智]・얻음[得]・증득[證]이며, ‘설한다’는 것은 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요, ‘들어간다[入]’는 것은 믿음[信]・즐거움[樂]・얻음[得]・증득[證]이며, ‘지혜의 지위[智慧地]’라는 것은 이른바 10지의 지혜이니 본분(本分) 중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근본입(根本入)이다. 경16)에서 ‘또 모든 보살이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밝게 설하여 지혜의 지위에 들도록 한다’라고 설함과 같다. 그러므로 이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설하기를, ‘근본입에 의지하면 아홉 가지 입(入)이 있다. 첫째는 섭입(攝入)이다. 문혜(聞慧) 가운데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니, 경17)에서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사의입(思議入)이다. 사혜(思慧)가 모든 도품(道品) 중에서 지혜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니, 마치18)에서 ‘모든 불법을 잘 분별하고 선택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법상입(法相入)이다. 그러한 뜻 중에서 한량없이 갖가지로 알기 때문이니, 마치 경19)에서 ‘널리 모든 법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교화입(敎化入)이다. 사의(思議)하는 바를 따라서 이름이 갖추어지며 잘 법을 설하기 때문이니, 마치 경20)에서 ‘잘 결정하여 모든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증입(證入)이다. 일체 법 평등지(平等智)로 도를 볼[見道] 때에 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마치 경21)에서 ‘분별이 없는 지혜가 청정하여 잡스럽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타를 역시 자리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불방일입(不放逸入)이다. 도를 닦을[修道] 때에 모든 번뇌장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 마치 경22)에서 ‘모든 마법(魔法)이 능히 오염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지지전입(地地轉入)이다. 출세간의 도품(道品)에서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마치 경23)에서 ‘출세간법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다시 선근이 있어서 능히 출세간 도품의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보살진입(菩薩盡入)이다. 제10지 중에서 모든 여래의 비밀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마치 경24)에서 ‘불가사의한 모든 경계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불진입(佛盡入)이다. 일체지에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마치 경25)에서 ‘나아가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의 지혜 경계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모든 입(入)이 교량지(校量智)의 뜻의 차별이니 차례로 더욱 뛰어나지만 근본입은 아니다. 일체 설하는 10구(句) 중에는 모두 여섯 가지의 차별상문(差別相門)이 있으니, 이러한 언설의 해석에서는 마땅히 사(事)는 제외함을 알아야 한다. 사라는 것은 이른바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다. 여섯 가지 상은 이른바 총상ㆍ별상ㆍ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이다. 총상은 근본입이며, 별상은 나머지 9입(入)의 다름이니, 본(本)에 의지하여 저 본을 원만케 하기 때문이다. 동상은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상은 모습을 더하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며,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마치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 나머지 일체 10구 역시 뜻에 따라서 유례(類例)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26)라고 하였다. 논의 글이 이와 같으니, 이 논주의 종(宗)을 세운 도리에 준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비록 원인과 결과, 신(信)ㆍ해(解)ㆍ행(行)ㆍ회향(廻向)ㆍ지(地)ㆍ불(佛)의 자위(自位)가 부동하나 전후가 없다고 하니 무엇 때문인가? 모든 법이 각기 달라서 ‘스스로 그러함’에 머물기 때문에 1여(如)와 다여(多如)의 여여(如如)한 모습으로는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27)에서 “묻기를, 어떻게 해야 불법을 깊이 믿는 것이 되는가? 답하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께서 알 바이며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이와 같다면 ‘깊이 불법을 믿는다’라고 이름할 것이다. 이것이 그러한 뜻이다.
【문】 6상은 어떤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답】 바로 연기 무분별의 이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6상의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마땅히 알아라. 비록 일부(一部) 경의 7처(處) 8회 및 품류(品類)가 같지 않으나 오직 「지품(地品)」28)에 있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이것이 근본이어서 법을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지품」 중에는 비록 10지가 같지 않은데 오직 초지(初地)에 있으니,29) 무엇 때문인가? 한 지위[地]를 일으키지 않고서 일체 모든 지위[諸地]의 공덕을 두루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지위 중에서도 비록 다분히 같지 않지만 오직 일념(一念)에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3세와 9세가 곧 일념이기 때문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치 일념과 같이 다념(多念) 역시 이와 같아서 하나가 곧 일체요 일념이 곧 다념 등이니, 앞을 뒤집어도 옳은 것이다.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다라니법은 주체와 반려가 서로 이루어서 한 법을 듦에 따라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만약 회(會)를 기준으로 해서 설하면 회회(會會)마다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만약 품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다면 품품(品品)마다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나아가 만약 문장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다면 문문구구(文文句句)가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요, 다라니법은 법이 이와 같기 때문이니, 아래에서 설한 것과 같다.30)

【본문】31) 무엇 때문에 도인에 의지하며……불보살이다.
『진기(眞記)』 ‘무엇 때문에 도인에 의지하는가? 석가여래의 가르침[敎網]에 섭수되는……보이고자’ 등은, 석가의 가르침은 곧 깊고 얕음이 비록 다르더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음을 총체적으로 취하여 말한 것이다.
【문】32) ‘3종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빈번히 나와서 나타난다’는 것에서, 3세간의 법이 빈번하게 나옴은 곧 해인의 체(體)를 여의는 것인가?
【답】 3세간의 법이 곧 해인이니 전체가 나타나서 본래 여읨이 없는 것이다.
【문】 3세간을 거두어들여서 총상의 부처로 삼는다면 곧 총상과 별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4세간이 되는가?
【답】 지정각(智正覺) 중에는 ‘타자를 기다린다[待他]’는 뜻도 있고 ‘기다림을 끊었다[絶待]’는 뜻도 있으니, 이러한 두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네 가지 세간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뜻이 다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다만 3종세간이라 할 뿐이다.
【문】 기(器)와 중생은 마땅히 세간이라 할 수 있으나 지정각은 이미 세간을 벗어난 것인데 어찌하여 세간이라 하는 것인가?
【답】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을 때 3세간의 법이 밝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까닭에 세간이라 하는 것이니, 이른바 때[時]가 세(世)이며, 그 가운데[中]가 간(間)이기 때문이다.
【문】 지상(至相)은 보살로써 중생에게 합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불보살을 합하여 지정각으로 삼는가?
【답】 깨달음[覺]의 입장에서는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본문】무엇 때문에 인문(印文)에는……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기(大記)』 ‘무엇 때문에 인문에는 오직 1도(道)만 있는가?’라는 것은, 네 번째 해인[第四重海印]33)의 입장에서 이러한 물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이미 근기와 욕망을 따라서 굴곡을 이루었다면 무엇 때문에 일도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여래의 1음(音)’이라는 것은 「입법계품」34)에서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아나니, 여래의 1음을 모든 중생이 요달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이상)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만약 모든 중생이 1음을 요달한다면 이는 각기 이해를 얻는 것이 아닐 것이며, 각기 이해를 얻는다면 1음을 요달하지 못함이 없음이 아닌 것이다……만약 이러한 힐난에 상대한다면 총상과 별상의 둘로써 답할 것이니, 이른바 굴곡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능히 평등하게 두루하기 때문이요, 이는 1음이기에 움직이지 않고 두루 편만하면서도 음운(音韻)을 차이나게 하므로 능히 굴곡을 이루는 것이다. 이 중에 능히 평등하게 두루함을 이루는 것은 총상이며, 음운이 다른 것은 별상이다. 별(別)은 총(總)에 즉하기 때문에 비록 중생이 각기 이해를 얻으나 1음을 요달하는 것이고, 총은 별에 즉하기 때문에 비록 1음이지만 각기 이해하는 것이다.
『진기(眞記)』 ‘여래의 1음’이라는 것은 총상의 음이다. 「입법계품」에서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아나니, 여래의 1음을……”라고 하였으니, 이 뜻은 모든 중생의 갖가지 차별된 음성 등이 곧 여래의 1음일뿐이라는 것이다.
【문】 이는 수호야신선지식(守護夜神善知識)이 1음을 증득하여 보고서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안다”라고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모든 중생’이라 하는가? 만약 모든 중생을 본다면 어떻게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안다’고 말하는가?
【답】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보기 때문에 1음 중에 모든 종류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총상을 얻어서 별상과 나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 마치 ‘집’이라는 한 마디 말은 기둥을 맞추고 대들보를 세우는 등 모든 연(緣)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맞추고 세우는 등의 모든 연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곧 집이라는 한 마디가 어느 곳에서 일어나겠는가?
『법기(法記)』 【문】35) ‘굴곡을 돈다’는 것에서, 이미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안다면 곧 삼승이 없기 때문에 또한 인(印) 가운데 굴곡도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답】 이상(異相)이 있으므로 성품에 계합하여 움직이지 않는 굴곡이 있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삼승이 있는가?
【답】 일승의 굴곡은 온전히 인의 원만함[印圓]을 다하므로 삼승 일변도의 굴곡은 없는 것이다.
『진기』 ‘선교(善巧)는 방소가 없으며’라는 것은 치우쳐 수순하는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니, 앞의 ‘방소가 없다’에서의 해석36)과 같다.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여’라는 것은 가로로 법계를 다하기 때문이며, ‘10세에 상응한다’는 것은 세로로 3제(際)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법기』 ‘원융하고 만족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이 모든 사물을 거두어들임과 같은 것이니, 이 하나의 기둥이 열 가지 보법(普法)을 포섭하여 남음이 없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법장(普法章)」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선교(善巧)로 법계를 융회하고 원통 자재하여 견문을 떠나지 않는다”(이상)라고 하였으니, 일승 중에서 원통의 법을 견문하기 때문에 견문의 지위 중에서 곧 구경의 불과(佛果)를 만족하므로 ‘견문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진기』 ‘뜻이 원교에 해당한다’는 것에서, 삼승의 별교와 삼승의 동교가 있으며, 일승의 동교와 일승의 별교가 있으며, 일승의 원교가 있는데, 만약 누관(樓觀)에 나아가서 논한다면 안으로 일승을 장엄하고 밖으로 삼승을 장엄하는 것이니, 문(門)은 곧 동교이다. 이른바 문이라는 것은 안과 밖을 통하기 때문이니, 안은 비록 일승이나 문 안에서는 동교일승인 것이다. 또한 이 동교를 삼승 이상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곧 별교일승이 되니, 소목(所目)을 기준으로 하면 별교가 되는 것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 소목의 삼승은 뜻이 밖에 해당되니, 이는 삼승을 장엄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별교일승이라 말하는가?
【답】 이 경전 안의 소류(所流)와 소목(所目)의 삼승에는 두 가지 뜻이 갖추어져 있다. 첫째는 저 하근기로 하여금 계교하여 아법(我法)과 같다고 여기게 하는 뜻이며, 둘째는 그로 하여금 그 스스로 얻은 법이 온전히 화엄(花嚴) 대허(大虛)임을 이해하게 하는 뜻이다. 첫 번째 뜻을 기준으로 하면 문 밖에 해당되기 때문에 삼승이며 밖을 엄식하는 것이 되고,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문 안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승이며 안을 장엄하는 것이 된다. 지금은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므로 소목이 동교일승이 되며, 나아가 또한 별교일승이라 이름할 뿐이며, 곧바로 누관의 안쪽을 기준으로 하면 자체의 별교일승인 것이다. 맨 처음부터 삼승을 보지 않으므로 ‘자체의 별교’라고 하니, 원교는 앞의 4교(敎)를 통틀어 밟은 것이다.
【문】 이는 곧 저 동교(同敎)의 일승ㆍ삼승이 화합하는 뜻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하근기를 인도하고자 하여 화합하는 것은 동교이며, 자가(自家)의 실덕(實德)으로 삼고자 해서 통틀어 밟는 것은 원교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동교는 대지(大地)와 같으니 삼승의 초목을 영원토록 기르기 때문이고, 별교는 대해(大海)와 같으니 삼승의 죽은 시체가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며, 원교는 허공과 같아서 그 두 가지의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고기(古記)』 동교와 별교는 나누면 아홉 가지가 있다. 이른바 첫째, 황우거(黃牛車)는 동교이니 양거(羊車)ㆍ녹거(鹿車)와 함께 하기 때문이며, 대백우거(大白牛車)는 별교이니 삼승의 밖이기 때문이다. 둘째, 대백우거는 동교이며 왕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은 별교이다……셋째, 법화는 동교이고 화엄은 별교이다……넷째, 제2회37)부터 「수호품(隨好品)」까지는 동교이며, 「보현행품」 이하는 별교이다38)……다섯째, 보현이 언어로써 나타냄은 문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동교이며,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은 문자를 떠났고 언어를 끊었으므로 별교이다. 여섯째,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은 인분(因分)이므로 동교이고 부처가 밖으로 향함은 과분(果分)이므로 별교이다. 일곱째,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함은 근기의 인연[機緣]을 향한 것이므로 동교이고, 부처님께서 안으로 향함은 곧 비록 화엄정(花嚴定: 화엄삼매) 중에서 과덕(果德)의 무리를 위하여 국토해(國土海)의 법을 보인 것이지만 인의 근기[因機]를 등지고 떠나 있으므로 별교이다. 여덟째, 부처님께서 안으로 향함은 등짐과 향함이 있으므로 동교이며, 해인정(海印定: 해인삼매) 중에서 법성을 가히 설할 수 없음은 등짐과 향함을 떠나기 때문에 별교이다. 아홉째, 위에서 밝힌 설함과 설하지 않음 등은 뛰어남과 열등함, 깊음과 얕음이 있으므로 동교이며, 이 해인정의 법성을 가히 설할 수 없는 중에서는 설함과 설하지 않음은 둘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별교이다. 의상(義相) 스님이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은 항상 두 극단[邊]에 있는 것이지만, 만약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이 옛부터 중도이며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39)고 하신 것이 대개 이를 일컫는 것이리라. 이상은 우선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나눈 것이지만, 문의(文義)의 분제(分齊)에 의거한다면 동별(同別)이 하나가 아니니, 이른바 1부(部)에 통하여 나누면 차별의 연(緣)은 동교이며 근본의 실상은 별교이다. 만약 일생 교화의 시종(始終)에 의거한다면, 곧 수많은 특수한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여 통틀어서 제목하기 때문에 동교이며, 근기가 각기 다름을 따르므로 별교인 것이다.
『대기』 ‘4섭과 4무량’에서 이러한 4섭과 4무량의 두 쌍의 네 가지 인과로써 아래 4교(敎)40) 인과의 여덟 가지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73인(印) 중에 일자인(一字印)으로 인(印)치면 곧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여덟 가지 인과의 지위가 곧 일승의 옆이 없는[無側] 인과인 것이다. 이러한 일승의 인과를 앞의 여덟에 더하면 곧 열이 되니, 다섯 가지 인은 보살이고, 다섯 가지 과는 부처님이다. 그 네 부처님을 사방에 나누어 모시고 일승의 부처로써 중앙에 안치하며, 다섯 보살로써 나누어 모시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러한 인과는 다만 내 마음 속에 본래 갖추고 있는 법이니, 이 중의 4방ㆍ6방ㆍ8방ㆍ10방 등은 삼승에 의지하여 나눈 것이다. 이른바 성문은 4제(諦)를 밝히기 때문에 이에 의지하여 4방을 나누고, 연각은 12지(支)를 관찰하는 것이니, 2 곱하기 6이기 때문에 이에 의지하여 6방으로 나누며, 시교와 종교 중에는 통틀어서 4섭과 4무량이 있으니 2 곱하기 4가 곧 8이기 때문에 이에 의지하여 8방으로 나누고, 동교 중에서는 그 같음 중에 별교의 10과 10의 무진(無盡)한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에 의지하여 10방을 나누는 것이다. 만약 머무름이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한다면 본래 방소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선교(善巧)는 방소가 없으며’라고 하였고, 나아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시교와 종교의 두 가르침 역시 10방을 밝히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오직 8방만 말하는 것인가?
【답】 이는 8엽(葉)의 궤칙을 기준으로 해서 말할 뿐이다. 또한 시교와 종교 중에는 총체적으로 4섭 인과 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8방으로 나눌 뿐이다.
【문】 만약 돈교 중의 인과를 아울러 취하면 곧 돈교 중에서도 역시 8방으로 나누는가?
【답】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통한다. 그러나 인과는 지위이거늘 돈교 중에서는 위상(位相)이 숨어 있기 때문에 우선 제외했을 뿐이다.
【문】 어떤 것이 8엽의 궤칙인가?
【답】 이는 『비로자나경』과 『불지경』 중의 8엽이 부처를 짓는 궤칙이다.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낸다’는 것은, 일승의 원만한 인[圓印]에는 비록 각진 면[角面]이 없으나 이 인(印)이 일체법을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4면 4각의 모습을 갖추어서 삼승의 4방ㆍ6방ㆍ8방ㆍ10방 등을 나눔으로써 점차 일승의 방소가 없는 원만한 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각면(角面)만 본다면 한결같이 삼승이며, 오직 원만한 인만 본다면 한결같이 일승이지만, 만약 각면에 의지하여 원만한 인을 본다면 곧 동교이다. 그러므로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앞의 굴곡도 오직 굴곡만 본다면 곧 한결같이 삼승이지만, 굴곡에 의지하여 원만한 인을 본다면 역시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내는 것인가? 각면은 곧 동교이고, 앞의 굴곡은 다만 따로 삼승에 집착하는 것인가?
【답】 굴곡도 역시 1도(道)의 붉은 인[朱印]41)이 능히 따르는 덕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또한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내는 뜻이 있는 것이다.

【본문】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서……성품이 중도에 있다.
『법기』 【문】42)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수행방편의 입장에서 인과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는 것에서, 수행방편이라 말하는 것은 곧 일승의 수행인가, 삼승의 수행인가?
【답】 다만 이는 삼승의 수행방편일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일승에는 수행방편이 없는 것인가?
【답】 일승 중에는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 본문43)에서 ‘원인과 결과의 두 지위는 법성가(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하는가?
【답】 다만 원인은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이라고 집착하는 삼승의 사람을 위하여 인과가 동시인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뿐이다.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이 종(宗)44) 중에는 인과의 이름이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결과를 온전히 하는 원인과 원인을 온전히 하는 결과도 역시 없는 것인가?
【답】 그렇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은 “원인은 결과와 다르지 않은 원인이고, 결과는 원인과 다르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일컬음은 연(緣)에 기탁하여 나타나니, 차고 이지러짐이 그로 말미암는 것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일승에는 옆이 없는 인과 역시 성립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문】 도인의 54각을 하나하나 온전히 다하여 인의 원만함이 이와 같다면 인을 온전히 하는 각 역시 마땅히 버려야 하는가?
【답】 만약 자종(自宗)의 입장이라면 이러한 일은 없을 것이니, 무엇을 다시 버리겠는가? 증분(證分) 중에는 원인과 결과, 증분과 교분, 일승과 삼승, 동교와 별교 등의 일이 없으며, 연기분 중에 비로소 원인과 결과, 증분과 교분, 일승과 삼승, 동교와 별교 등의 갖가지 일을 설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분에 나아가서 “원인과 결과의 두 지위가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진실로 원인과 결과를 세우지 않는다면 어찌 원인과 결과는 없다는 대사견(大邪見)을 뽑아버리지 않는가?
【답】 원인과 결과를 넘어선 곳에 서서 원인과 결과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어찌 없다고 함을 뽑아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스님[和尙]45)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뜻을 꾸짖어 “법성 중에 인과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법성 중에 인과가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법성이 아닐 것이니, 법성 중에는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게 하였으며, 또한 ‘인과가 없다’라고 대답하게 하였다.
【문】 그렇다면 근본입 중에 열었던 9입은 근본입을 만족시키지 못하는가?
【답】 만족시킨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원인과 결과가 없다고 하는가?
【답】 그대가 집착하는 섭입(攝入)과 사의입(思議入) 등으로 능히 그러한 근본입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모든 입들이 능히 그러한 근본입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있어서는 인과가 없는 것이다. 만약 모든 입이 섭입과 사의입 등을 따라서 이해를 내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뛰어남과 열등한 인과의 지위가 있기 때문에 이는 동교이다. 만약 섭입 등이 모든 입을 따라서 이해를 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성품이 중도에 있어서 뛰어남과 열등함의 인과가 없는 것 역시 동교이다. 만약 모든 입(入)들을 제하고 다만 섭입과 사의입 등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삼승의 별교이며, 만약 곧바로 근본입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는 일승 별교인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해서 도인의 뜻을 나타내고 역시 대경(大經)에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기』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나타내고자’ 등은, 실을 기준으로 하면 곧 글자 중의 굴곡이 3도(途: 3악도)와 인천(人天)에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는 이해를 내는 언표[詮]이기 때문에 우선 가르침의 모습이 나타내는 바를 이해함을 기준으로 해서 다만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라 말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시작하고 끝나는 두 글자를 중앙에 안치하는가?’ 등은 ‘법(法)’자는 원인이요 ‘불(佛)’자는 결과이니 일승과 삼승에 통하는 것이다. 삼승의 전후 인과가 곧 법성의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시작하고 마치는 두 글자를 한 가운데에 안치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오직 삼승의 인과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거늘, 어째서 인과가 일승에 통한다고 하는가?
【답】 만약 진실한 도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법이 각각 ‘스스로의 진여의 지위[自如位]’에 머물러서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삼승의 사람은 오직 전후를 보지만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서 자재하다. 그러므로 앞뒤의 인과를 기준으로 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는 뜻이 일승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승에 통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법성가(法性家)에 둘이 있으니, 이른바 증분의 법성과 머무름이 없는 별교의 법성이다. 실상ㆍ총상ㆍ법신ㆍ중도 등도 역시 두 가지 뜻46)에 통하는 것이다. 시설문(施設門) 중에 증분과 교분의 뜻을 나누어 보임이 있으며, 일승과 삼승의 뜻을 나누어 보임이 있으므로 ‘인과가 일승과 삼승에 통하며 법성이 증분과 교분에 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기』 법성가는 오늘의 연(緣) 중에서 일으키는 법을 기준으로 하여 증분 및 연기분의 법성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증분과 교분을 나누지 않는 중도가 비로소 법성가이다”라고 말한다.

【본문】 위에서 ‘인과가……’ 앞뒤가 없으니,
『법기』 위에서 ‘인과가 같지 않음으로……그 뜻이 어떤가?’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질문을 하는 뜻이 앞에서는 ‘수행방편의 입장에서 인과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또한 ‘원인과 결과의 두 지위가 법성가 안의 진실한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아직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이 묻는 것이다.
【문】 앞에서는 인의 모습[印相]을 마침에 다시 별다른 물음이 없었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글자의 모양[字相]을 해석하고서 다시 이러한 문답을 하는 것인가?
【답】 그 인도(印道)는 곧 자상(字相)을 따라서 그렸으니, 그러므로 자세히 자상을 해석하면 곧 인상(印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 ‘『천친론』의 저자에 의지하여 6상의 방편으로써 뜻을 세우고……’47)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네 가지 보살행을 말씀하시는 글에서 6상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만약 모든 보살이 법체(法體)에 들어가고자 하면 반드시 6상으로 그 마음을 원융하게 단련하여야 비로소 가히 득입(得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의 저자는 부처님의 뜻을 얻었으므로 10입(入)을 설하는 곳에서 6상의 방편을 밝혀 삼승을 다스리는 것이니, 섭입(攝入) 등은 3현(賢)이요, 나아가 불진입(佛盡入)은 불과(佛果)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더욱더 뛰어나다는 집착은 그러한 섭입 등의 9입(入)을 나타내서 근본입(根本入)에 칭합하면 뛰어남과 열등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古辭]에 “천친보살이 10입처에서 6상의 태양을 밝혀 비로소 부처님의 은혜를 갚았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 논의 저자의 뜻을 얻었으므로 “『천친론』의 저자에 의지하여 뜻의 영역을 세우니, 그 도리에 준하면 곧 삼승의 전후(前後) 인과가 그 성품은 중도에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6상 방편의 말을 기준으로 해서 융질(融質)48) 대덕은 “6상은 오직 교문의 시설일 뿐이니, 법체 상에서 여는 바가 없으므로 방편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긴요한 문(門)이며, 다라니의 곳집을 여는 좋은 열쇠이다”49)라고 하였고, 법장[康藏]은 “이 방편으로 일승을 회통하며……4구와 6상이 모두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 된다”(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이는 능히 언표할 수 있는 교문의 방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유(思惟)50) 대덕은 말하기를 “6상은 다만 법체를 기준으로 해서 교묘한 모습으로 집성하여 방편이라 이름한 것일 뿐이니, 이외에 다시 들어갈 법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상은 “연으로 생겨난 모든 법은 6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51)라고 하였으며, 또한 “6상은 바로 연기의 분별함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며”52) 나아가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다라니법은 주체와 반려[主伴]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53)라고 하였다. 강장(康藏)은 “넷째, 집성방편(集成方便)은 모든 법이 한 가지 몸이어서 교묘한 모습으로 집성하였으므로 방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지론(智論)』54)에서는 “이러한 법은 선교(善巧)로 집성하였으므로 방편이라 이름한다”(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언표의 대상[所詮]인 법체를 기준으로 해서 방편으로 삼는 것임을 알 것이다.
해석해 말한다. 이상의 두 가지 설을 만약 치우쳐 집착한다면 두 가지 모두 허물이 있는 것이니, 각기 한 구석에 정체되어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도리에 의거하면 각기 의지하는 바가 있으니, 두 가지 설이 모두 옳은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마치 동교 중에서는 정히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므로 다만 교문의 법에 들어가는 방편인 것이다. 만약 별교 중에서라면 곧바로 법체를 밝히는 것이므로 곧 원융한 법의 선교집성(善巧集成)의 방편인 것이다.
‘일승과 삼승의 주반(主伴)이 서로 이루어 준다’는 것에서, 머무름이 없는 별교는 주체이며, 따로 삼승에 집착하는 것은 권속이며 반려이니, 이 중에 주반의 법체를 세우는 것이므로 ‘주반의 모습을 이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에서는 ‘주반이 서로 의지한다’고 말하는가?
【답】 주반의 법을 세우고 나서 그 따로 삼승에 집착하는 반려로 하여금 인연관(因緣觀)ㆍ연기관(緣起觀) 등의 3관(觀)55)을 익혀서 그 마음을 수련하게 하기 때문에 소류(所流) 삼승의 반려가 성기(性起)의 궁극적 경지[後際]에 이르러서는 머무름이 없는 별교의 주체와 더불어 서로 의지하며 원만하고 밝은 주반을 이룸을 얻기 때문이다.
『법기』 ‘주반이 서로 이루어서 법의 영역[法分齊]을 나타낸다’는 것은 다른 곳의 삼승은 다만 권속이며 반려가 되지 않지만, 여기서 뜻하는 바는 인(印)이 원만한 것은 곧 일승이므로 주체이고, 54각은 삼승이므로 반려라는 것이다. 여러 각(角)으로 말미암아서 인의 원만함을 이루고 인이 원만함으로 여러 각을 이루니, 그러므로 일승과 삼승이 서로 이루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각이 온전히 인의 원만함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나타나는 분제인 것이다.
『대기』 6상에서 총상과 별상의 둘은 법의 다함 없음[無盡]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상과 이상의 둘은 법의 걸림 없음[無礙]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상과 괴상의 둘은 법의 ‘옆이 없음[無側]’을 나타내는 것이니, 일승법의 의미는 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따로 해석한다면 총상은 곧바로 머무름이 없는 법의 자체를 표시하는 것이고, 별상은 머무름이 없는 총상의 다함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상은 다함 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이 없음[無違]을 해석하는 것이고, 성상은 어긋남이 없음의 옆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며, 괴상은 옆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음[不動]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머무름이 없는 법의 자체는 무엇인가?
【답】 법계의 법이 어우러져서 한 몸이 된 것이다.
【문】 법계의 법이 움직여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인가?
【답】 다만 움직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 한 몸을 이룰 뿐이다. 만약 여기 한 채의 집[堂]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은 각자 움직이지 않으므로 비로소 하나의 총상인 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문】 ‘별상은……다함 없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별상은 서까래 등 모든 연이 각각 차별되기 때문에 하나의 총상인 집 가운데에서 하나가 아닌 덕을 나타내므로 ‘별상은 총상의 다함 없음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서까래 등의 연 중에서 동상을 필요로 하면 2장(丈) 길이의 서까래가 20보(步)의 집에 칭합하며, 나머지 연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동상은 다함 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 중에서 이상을 필요로 하면 곧 2장 길이의 서까래가 비록 20보의 집에 칭합하나 스스로의 2장 길이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으니, 나머지 연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2장 길이의 서까래가 이러한 집을 이룸을 보는 때에 옆에 나머지 다른 연이 없기 때문에 이 하나의 서까래가 곧 옆이 없는 것이며, 나머지 연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상은 어긋남이 없음의 옆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괴(壞)는 이루어지는 곳에서 무너지므로 ‘괴상은 옆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오직 여섯일 뿐이며 더 많지도 않고, 더 적지도 않은가?
【답】 총상과 별상의 한 짝[對]은 상근기가 들어가는 것이며, 동상과 이상의 한 짝은 중근기가 들어가는 것이고, 성상과 괴상의 한 짝은 하근기가 들어가는 것이다. 진실로 하근기가 동상과 이상 중에서 능히 총상을 얻지 못하므로 줄어서 넷이나 다섯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비록 하근기라 할지라도 두루 성상과 괴상을 배워서 반드시 총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늘어나서 일곱이나 여덟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강장이 “총상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별상은 많은 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니, 별상은 총상에 의지하여 그러한 총상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56)라고 하였다.
【문】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한다는 것은 총총다덕(總總多德)인가, 별별다덕(別別多德)인가?
【답】 두 가지 뜻이 모두 다 가능하다. 이른바 별을 거두어 잡아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별별다덕이라 해도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총 중에 갖추고 있는 개별적인 덕이 하나하나가 모두 온전히 총을 다했으므로 총총다덕이라 해도 역시 가능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다함 없는 총을 세웠는가?
【답】 비록 다덕이라 말하지만 ‘하나 밖의 다[一外之多]’가 아니므로 이러한 어려움은 없는 것이다.
【문】 이미 ‘총상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라고 말하였으니, 포함되는 많은 덕이 능히 하나를 포함함과 더불어 그 의미가 각기 다르거늘 무엇 때문에 ‘하나 밖의 다’가 아니라고 하는가?
【문】 다만 그 많은 덕이 합해지는 곳을 지목하여 ‘능히 하나의 총을 포함한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 밖의 다’가 아니며 다 밖의 하나가 아니다.
‘별은 총에 의지하여 그러한 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만약 부류[類]로써 각기 6상을 나누면 곧 총상ㆍ동상ㆍ성상이 하나[一際]가 되고 별상ㆍ이상ㆍ괴상이 하나가 되니, 이미 총과 더불어 한 부류가 되었으므로 동은 동상과 총상의 뜻을 가지며, 성은 성상과 총상의 뜻을 가지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별상이 이상ㆍ괴상과 더불어 한 부류이면서 총상을 만족시키는 뜻이 있는 것인가?
【답】 만약 총상을 얻으면 반드시 별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만 얻지 못하는 근기 중에서 총상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여는 것이다. 별상을 열 때 총상의 뜻이 이미 나타나는 것이니, 그러므로 별상 중에 총상을 만족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다.
【문】 만족함에 미치는 것인가,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답】 만족함에 미치는 것이다.
【문】 이는 별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근본의 총을 만족시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미친다고 하는가?
【답】 이미 총을 나눌 때에 총을 여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별덕(別德)을 나타내는 것이니, 도리어 별로써 총을 만족시킬 때에 만족함에 미치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총 중에 별다른 모습이 있는 것인가?
【답】 없다. 왜냐 하면 본래 별다른 모습이 없는 총 중에서 여는 바이므로 비록 그 별상이 근본의 총을 만족시키는 데 미친다 해도 총 중에는 별다른 모습이 없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삼승의 차별된 세속을 없애서 평등의 진여로 돌아감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답】 일승 중에서는 분별이 온전히 무분별이며, 무분별이 온전히 분별이니 분별을 없애서 바야흐로 무분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것이다. 동상은 총상의 덕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별상을 여는 것이니, 이미 별상을 열고 난 뒤에 미혹된 사람이 이르기를 “그 별상이 총상과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할까 두려워해서 그로 하여금 저 별상이 온전히 총상과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별상 다음에 동상을 밝히는 것이다. 동(同)에는 많은 뜻이 있으니 이른바 상동(上同)ㆍ하동(下同)ㆍ내동(內同)ㆍ외동(外同)이다. 만약 이러한 집[舍]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모든 연이 총체적인 집과 같으므로 상동이요, 총체적인 집이 모든 연과 같으므로 하동이다. 상동 중에 나아가면 모든 연이 집과 같은 것은 내향동이며, 모든 연이 서로 바라봄에 집을 이루는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은 것은 외향동이다.
또한 분동(分同)과 만동(滿同)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1척의 기와가 1척의 힘을 내는 것이 20보의 집[堂]과 같다는 것은 분동이며, 1척의 기와가 20보의 힘을 내는 것이 20보의 집과 같은 것은 만동이다. 이상(異相)은 그것이 능히 모든 연을 이루지만 형체와 종류가 각기 달라서 각각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만약 진실로 다르다면 마땅히 같지 않은 것인가?
【답】 다만 다름으로 말미암아서 같은 뜻이 있음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기와가 이미 1척이면 서까래 역시 1척이어서 본래 연(緣)의 지위를 어기고 앞에서 나란히 똑같이 집을 짓는 뜻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57)
【문】 만약 그렇다면 1척의 기와가 20보의 힘을 내어서 20보의 집과 같으며 서까래 역시 이와 같다면, 이 역시 어찌 본래 연의 지위를 잃어버림이 아니겠는가?
【답】 기와가 만약 스스로 1척의 지위를 움직여서 2장 길이의 서까래의 지위에 같게 된 연후에 20보의 힘을 내고 서까래 역시 그와 같다면 마땅히 본래의 지위를 잃어버리겠지만, 기와 스스로 본래 1척의 지위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서까래 역시 2장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각기 20보의 힘을 내어서 집과 같기 때문에 비록 아울러 20보의 힘을 내더라도 기와는 2장이 아니며 서까래도 1척이 아니면서 각기 스스로의 지위에 머물고 있으므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성상(成相)은 짓지 않으면서 짓는 것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연 등의 각 지위가 움직이지 않고서 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동상 중에서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며 서로 거두어들여서 집을 이루는 힘의 뜻이 가지런하여 같다. 또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을 기준으로 하여 총을 바라보면 집은 서까래에 거느려지는 것이며, 총이 연을 바라보면 서까래가 집에 거느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망(相望)ㆍ상섭(相攝)ㆍ상대(相帶)의 뜻이 있으니, 이러한 성상 중에 하나의 연의 입장을 따르면 곧바로 총이다. 상대를 끊어서 옆이 없으며 능히 연을 이루는 외에 따로 이루는 바가 없기 때문에 상망과 상섭의 뜻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 괴상은 짓되 짓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서까래 등 모든 연이 각기 스스로의 법에 머물러서 본래 부동인 것이다.
【문】 여기에서의 움직이지 않음과 앞에서 말한 이상 가운데 움직이지 않음은 어떻게 다른가?
【답】 앞에서 말한 이상 가운데서는 지위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기와 1척의 지위와 서까래 2장의 지위가 각기 비록 움직이지 않더라도 상망(相望)의 뜻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체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법과 법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상의 집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연에 물어 보면 기둥이 이루는 것인가, 나아가 기와가 이루는 것인가? 이와 같이 두루 힐난하면 한 물건도 저 집을 이루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까닭에 성상의 집이 구경인 것이다. 지으면서 짓지 않음에 즉하기 때문에 괴상이 곧 이루어지는 것이니, 멸괴(滅壞)의 괴(壞)가 아닌 것이다.
『고기』 【문】 옛 스님이 “인연(因緣)의 집은 지으면 이루어지고 짓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며, 연기(緣起)의 집은 지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짓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으니 이 뜻은 어떤 것입니까?
【답】 동상(同相)의 집은 지음이 있는 지음이며, 성상의 집은 지음이 없는 지음이기 때문이다. 동상과 성상을 상대하여 설하면 동상은 연기가 앞에 나타나는 뜻이며, 성상은 연기가 성품이 없는 뜻이며, 성상과 괴상을 상대하여 설하면 성상은 짓지 않으면서 짓는 것이기 때문에 성품이 없으면서 연기하는 뜻이며, 괴상은 지으면서 짓지 않기 때문에 연기의 성품이 없는 뜻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주초석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들보 위의 기와에서 마치니 비로소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변계(遍計)의 집이며, 도끼를 쥐고서 나무를 패고 하나하나의 때림을 따라서 온전히 집을 세우는 것은 인연의 집이고, 도끼를 나무에 떨어뜨리지 않고 나무가 도끼를 범하지 않으며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연기의 집이며, 나무의 싹이 푸를 때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성기(性起)의 집인 것이다. 성기에 나아가서는 나무의 씨앗을 심을 때에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무주(無住)의 집이고, 종자가 곧 진여라는 것은 실상(實相)의 집인 것이다. 강장(康藏)은 ‘어떤 것이 집인가? 서까래가 집이니, 무엇 때문인가? 서까래가 온전히 홀로 능히 집을 짓기 때문이다…… 묻기를, 만약 서까래가 온전히 홀로 능히 집을 짓는다면 기와 등도 마땅히 집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하기를, 기와 등이 있지 않을 때에는 서까래가 아니기 때문에 짓지 않는 것이다’(이상)58)라고 하였다.”
【문】 비록 기와 등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서까래는 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와가 없을 때는 서까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변계의 어려움일 뿐이다. 대경(大經)59)에서 “지혜의 바다가 넓고 가없어서 헤아리지 못함이 도리어 더욱 비방을 부르니 가히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멸이 있는 마음으로 실상의 이치를 의심하지 말라. 나의 이 보법(普法) 인연의 서까래는 스스로 하나의 서까래이니 곧 같은 종류의 나머지 서까래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1척의 기둥머리나 8척의 기둥, 나아가 기와ㆍ돌ㆍ나무를 다듬는 기술자와 기와를 굽는 기술자 등 일체 모든 법을 널리 모두 다 거두어들여서 집을 다 지은 연후에야 비로소 서까래가 되는 것이므로 그런 것이다. 옛사람이 ‘오늘 기둥을 베어내서 어제 이미 이룬 집을 짓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어제 이미 이룬 집은 기둥 없이 이루어진 것인가? 이미 ‘오늘 기둥을 베어내서 어제 이미 이룬 집을 짓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어제 이미 이룬 집이 기둥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이상)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집이 이루어짐에 비로소 기둥인 것이며, 또한 집이 이루어짐에 비로소 서까래인 것이다.
『진기』 이른바 6상이라는 것은, 이 중의 대의(大意)가 노사나불은 가장 높고 뛰어나며 우리 중생은 가장 낮다는 것이니, 사나는 총상이며 중생은 별상이다. 중생의 몸은 따로 자체가 없어서 온전히 사나의 몸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두 가지의 각기 다른 뜻을 나타내니, 他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지말은 근본에 의지하여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있다”60)라고 하였다. 동상이라는 것은, 중생신(衆生身)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물이 없으며 오직 이 불신(佛身)이므로 중생신이 그러한 부처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라는 것은, 비록 중생신이 그러한 불신을 거느리고 있으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능히 거느리는 것이니 언제나 중생인 것이다. 거느린다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같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며, 중생이라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다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지말이 이미 근본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바라봄에 같음도 있고 다름도 있는 것이다”61)라고 하였다. 성상이라는 것은, 비천한 중생신이 곧바로 존귀한 불신(佛身)이며, 터럭 끝만큼도 불신과 다른 때가 없으므로 그것과 같게 하지 않는 것이다. 동상으로 관찰하는 자는 그것과 같도록 하는 것이며, 성상을 관찰하는 자는 곧바로 하나일 뿐이다. 괴상이라는 것은 법계의 차별의 법이 각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요, 곧 이 중생신 중의 진실한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는 것이니 곧바로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며, 각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무너짐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근본을 거느리는 지말이 이미 근본에 거두어짐이 되니, 그러므로 당체(當體)가 존재함이 있고 무너짐이 있는 것이다”62)라고 하였다.
『고기』 옛날에 신림 대덕이 당나라에 들어가 융순(融順) 스님에게 나아가서 어려움을 지어 묻기를, “이미 부처를 이루었을진대 처음부터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융순 스님이 이르기를 “6상 중에 동상과 이상이 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문】 어찌하여 6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회통하지 않고 다만 특별히 동상과 이상만을 취하여 말하는 것인가?
【답】 만약 집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별은 곧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총체적인 집과 다를 뿐이며, 그 형태의 굴곡과 장단을 보고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괴상은 다만 모든 연이 각기 자법(自法)에 머물러서 본래 짓지 않는 것임을 볼 뿐이다. 오직 동상과 이상이 하나의 연을 기준으로 함을 따라서 모든 연을 거두어서 집을 원만히 이루고 힘의 뜻이 가지런히 한 가지이니, 기둥은 곧 8척이며 서까래는 곧 2장이요 기와는 1척 남짓이다. 이러한 장단의 차별된 지위가 각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다만 이러한 뜻을 취하여서 답한 것이다.
『육상장(六相章)』63) 하나가 곧 여럿을 갖추고 있는 것을 총상이라 이름하고, 여럿이어서 곧 하나가 아님은 별상이며, 여러 가지 종류가 스스로 동일하게 총상을 이루고, 각각의 체가 다르지만 동상을 나타낸다. 하나와 여럿의 연기는 이치가 묘하게 이루어지고 무너지며 자법(自法)에 머물러 항상 짓지 않으니, 오직 지혜의 경계이어서 현상[事]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방편으로 일승을 회통하는 것이다.
『대기』 ‘총상은 근본인이며 별상은 나머지 굴곡이니, 따로 인(印)에 의지하여 그러한 인을 원만케 하는 것이다’64)에서 근본인은 별상을 떠난 총상이며, ‘그러한 인을 원만케 한다’는 것은 별상을 거느린 총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총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총은 가히 상대할 별이 없으므로 ‘별을 떠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별을 떠난 총이 이미 별을 거두어 잡아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별을 거느린다라고 말할 뿐이다.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열면 분개(分開)와 만개(滿開)가 있으므로 만개의 뜻에 의지하여 ‘그러한 인을 원만케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별(別) 외에 다시 근본이 되는 총은 없을텐데 어찌하여 인에 의지함과 인을 원만히 함을 말하는 것인가?
【답】 실의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인에 의지하여 인을 원만히 함’을 말하지 않아야 하지만, 옆이 없음[無側]을 알게 하여 서로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선 주체와 대상[能所]을 나누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동상은 인에 들어가기65) 때문이다’라는 것은 모든 굴곡 등 하나하나가 비록 별이지만 동일하게 원만한 인이기 때문이다. 동(同)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평등하기 때문에 같으며,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것이다. ‘평등하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6상의 범주[列門] 중에 동상이므로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아서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은 것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동상의 한 가지 연이 모든 연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곧 이 총이다. ‘이상은 모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처음의 굴곡과 그 다음의 굴곡이 각기 달라서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66) 늘어남[增]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내향증(內向增)과 외향증(外向增)이다. 이른바 총의 모든 연과 같으므로 서로 이것이지 않다[不相是]는 것은 내향증이요, 서로 바라보아 조화롭게 통하는 모든 연이 서로 이것이지 않다는 것은 외향증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굴곡이 합하여 하나의 인을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연이 구경인 때에 이르러서 다만 하나의 연이 곧바로 총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간략히 설한다’라고 한 것이다.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모든 굴곡이 각기 머물러서 본래 함이 없이 짓기 때문이니, 두루 모든 연을 불러들여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자여(自如)의 처소에 이르게 하므로 ‘널리 설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법기』 ‘총상은 근본인이며 별상은 나머지 굴곡이다’라는 것은, 총은 곧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는 것이며, 별은 곧 많은 덕이 하나가 아닌 것이다.
【문】 하나는 무엇이며 많은 덕은 무엇인가?
【답】 법계 법의 듦에 따라 옆이 없다는 뜻이 바로 하나이며, 이 옆이 없는 하나의 다함 없는 뜻이 바로 많은 덕이다.
【문】 옆이 없는 하나의 다함 없는 뜻을 어떻게 보는가?
【답】 우선 이 연이 하나의 집을 이룸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매양 하나하나의 연이 모두 집을 만족케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른바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서 옆이 없이 일어나서 구경에 대(待)함을 끊는다는 것이 옆이 없는 하나이며, 이러한 하나가 포함하는 별덕(別德)이 역시 각기 구절을 통괄적으로 포함하여 하나하나가 구경이므로 매양 하나하나의 연이 모두 법을 만족한다는 것은 다함 없는 덕인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문수 선지식이 지혜로써 둘이 없는 모습을 비추는 것이고, 만약 의지하는 바를 따라서 산설(散說)하면 선재가 문수를 보았을 때에 곧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을 보는 것이다. 이른바 능히 비추는 지혜와 비춤의 대상이 되는 경계가 다만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문수를 볼 때 의지하는 삼천세계가 곧 선지식이므로 ‘곧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을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의지하는 바를 버리고서 설한다면 총체적으로 법계의 모든 법을 거두어 잡아서 하나의 문수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의 문수를 보는 때에 다만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단박에 법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모든 선우(善友)들을 참방(參訪)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수가 법계의 끝을 다함을 기준으로 하면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 하나하나도 역시 법계의 끝을 다하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하나의 문수인가, 많은 문수인가?
【답】 입장에 따라서는 하나의 문수이기도 하고, 입장에 따라서는 하나의 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수도 옳고, 많은 문수도 옳으며, 하나의 집도 옳고 많은 집 역시 옳다.‘동상은 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54각이 동일하게 인을 원만히 하기 때문에 ‘굴곡은 다르지만 똑같은 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분동(分同)과 만동(滿同)의 뜻은 어떠한가?
【답】 나누어 다르게 할 수 없는 큰 허공[大虛]을 시방으로 나누는 것이니, 1방의 허공이 대허와 같을 때 시방의 허공이 동시에 같다는 것은 만동이며, ‘오직 1방의 같음만을 보고 나머지 방향의 같음은 보지 않는 것’은 분동인 것이다.
‘이상은 상이 늘어나기 때문이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수가 늘어나는 것인가, 지위가 늘어나는 것인가?
【답】 한편으로는 “첫 번째 각(角), 두 번째 각……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에 그 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지위 역시 증가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첫 번째, 두 번째……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에 수는 증가하지만 굴곡은 증가하지 않으므로 지위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집 앞에 서서 사람의 한 마디 말로써 집 안의 대중을 부르면 대중들이 모두 입으로 대답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한 마디 말로써 인을 부를 때에는 54각이 모두 곧 이 인(印)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연이 화합을 이루는 것을 간략히 말해서 표방하여 나타내는 것이다”67)라고 하였다.
【문】 동상 중에서 ‘하나하나의 각이 원만한 인과 같다는 뜻’을 밝혔는데, 여기서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
【답】 하나의 각곡(角曲)마다 곧 이 인(印)임을 따라서 성상이 될 뿐이지, 모든 각이 인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사람의 몸에 집착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따져 물음에 어떤 한 물건도 꼭 맞게 그 사람의 이름을 받을 것이 있지 않으므로 이렇게 널리 분별하는 것이다. 54각을 차례대로 따져 물어서 어떤 한 각도 원만한 인의 이름을 받을 것이 없으므로, 강장이 “연이 흩어지면 지음이 없으니 널리 인연을 분별하는 것이다”68)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 중에서 인의 원만함은 총상이며, 원만한 인의 모든 각곡(角曲)은 별상이고, 모든 각곡의 하나하나가 가지런히 같은 인(印)인 것은 동상이고, 가지런히 같은 인이지만 움직이지 않아서 각기 다른 것은 이상이며, 움직이지 않아서 다르지만 치우치는 바가 없음은 곧 정인(正印)이니 이것은 성상이다. 곧 정인이면서 각기 스스로 머물러서 지음을 일삼지 않는 것은 괴상이다. 이러한 6상문(相門)이 바로 일승의 함께 하지 않는 방편이며, 또한 함께 하지 않는 법체(法體)인 것이다. 이러한 6상을 우선 3관(觀)에 배대하면 별상은 변계이며,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관이며, 근본의 총상은 성기관이니, 이는 곧 지위에 기대어서 하는 말이다. 만약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의 3관에 깊고 얕음은 없는 것이다.
‘총상은 뜻이 원교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에 해당한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원교는 동교인가, 별교인가?
【답】 이는 동교이니, 이른바 인의 원만함은 원교이고 54각은 삼승이다. 그러므로 원교 및 삼승이 모두 동교이다. 왜냐 하면 인의 원만함을 떠나서는 모든 각이 없으며, 모든 각을 떠나서는 인의 원만함도 없기 때문이다.
『대기』 신림(神琳) 대덕은 이러한 곳을 의지하여 5중총별(重總別)을 세웠으니, 이른바 첫째, 별을 떠난 총은 5중해인(五重海印)의 첫 번째 해인69)이다. 둘째, 별을 거느리면서 별을 떠난 총은 또한 ‘연 중에 나타나지만 연을 떠난 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해인70)이다. 셋째, 총이 곧 별이고 별이 곧 총이니 세 번째 해인71)이다. 넷째, 총이기도 하고 별이기도 한 것이 네 번째 해인72)이다. 다섯째,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닌 것이 다섯 번째 해인73)이다. 이른바 별을 거두어 잡아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총이 아니며, 총에 의지하여 별을 이루기 때문에 별이 아닌 것이니, 모두 형체가 없기[形奪] 때문이다. 이러한 5중 안에서 첫째는 총이며, 그 다음은 별이다. 또한 두 번째는 총이며, 세 번째는 별 등이니 이렇게 서로 바라보아서 총별을 짓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가 각기 총별을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첫 번째 해인을 제거하고, 두 번째 해인에서 부처님께서 마음을 증득함[佛證心]은 총이며 나타나는 3세간은 별이니, 이 별이 총보다 열등하지 않는 것이다. 이 중에는 동ㆍ이ㆍ성ㆍ괴가 없으니 이러한 총별이 다만 한 체이기 때문에 연기의 6상이 들어가야 할 진원(眞源)인 것이다. 셋째에서는 6상을 쓰는 것을 막지 않으나 이것 역시 법체이며 방편의 6상은 아니다. 넷째 이하를 기준으로 하여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 등의 3관에 배대하면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른바 첫째 총상은 머무름이 없는 별교이고, 별상은 소류(所流)의 삼승이다. 소목(所目) 중에서는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요 성상은 연기관이며 괴상은 성기관이다. 여기서는 다스려야 할 병(病)을 기준으로 해서 별상이 될 뿐이지 능히 다스리는 6상 가운데 별상은 아닌 것이다. 둘째, 무주(無住)의 별교와 따로 집착하는 삼승을 제외하고 소목 가운데 나아가면 총상과 별상은 성기관이요,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관이다. 또한 이러한 3관 하나하나가 각기 6상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이하는 방편의 6상이다. 이러한 5중으로 곳곳의 문장을 해석하면 의리가 비로소 다할 것이니, 이제 이러한 문장 가운데 5중(重)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고기』 의상 스님이 총장(總章) 원년(元年, 668년) 10월 11일 청선사(淸禪寺) 반야원(般若院)에 있으면서 지엄(智儼) 스님에게 여쭈기를, “보법의 궤칙을 수지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능히 지니겠는가? 우선 옷깃을 들면 털이 가지런해지고 벼리를 들면 그물눈이 바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이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스님은 “아래로 세속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도의 실상이다”라고 하시고 마침내 10중총별(重總別)을 설하여 보이셨다. 지엄 스님의 행록(行錄) 중에 있는 총별에 관한 글이 곧 이것이다.
첫째, 총을 따르고 별을 어기는 것이다. 이른바 총상의 과법이 티끌 수같이 많은 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순하면 총이며, 총을 이루는 연이 다르기 때문에 어긋나면 곧 별인 것이다. 둘째, 총을 어기고 별을 수순하는 것이다. 이른바 총을 이루는 연이 스스로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어긋나면 총이요, 스스로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지만 능히 이루기 때문에 수순하면 곧 별인 것이다. 셋째, 별과 같은 총이며 총과 같은 별이다. 이른바 별은 온전히 총이므로 별과 같은 총이며, 총은 온전히 별이므로 총과 같은 별인 것이다. 넷째, 별이 알지 못하는 총이고 총이 알지 못하는 별이다. 이른바 이룬 총 중에 별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별이 알지 못하는 총이며, 능히 연을 이루는 가운데 총의 모습이 없으므로 총이 알지 못하는 별인 것이다. 다섯째, 별을 떠난 총이요 총을 떠난 별이다. 이른바 총상의 과(果) 중의 연이어서 총 아님이 없으므로 별을 떠난 총이요, 총과 다름이 없는 별이기 때문에 총을 떠난 별인 것이다. 여섯째, 머무름이 없는 총이며 머무름이 없는 별이다. 이른바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자재하지 못하다는 뜻이니, 총상의 과법으로서 자신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는 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머무름이 없는 총이 티끌 수만큼 많은 연 중에서 치우침이 없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는 별인 것이다. 일곱째, 실상의 총이며 실상의 별이다. 이른바 총상의 과법(果法)이 지혜의 분별하여 요달해 앎을 떠나 있으므로 실상의 총이며, 연에 별상이 없으므로 실상의 별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다. 여덟째, 법성(法性)의 총이며 법성의 별이니, 이른바 총상의 과법의 성품이 스스로 원통하여 연을 만나면 곧 수순하므로 법성의 총이며, 이렇게 수순하는 법이 온전히 옆이 없이 일어나므로 법성의 별인 것이다. 아홉째, 해인의 총이며 해인의 별이니, 이른바 다함 없는 법수(法數)가 원만히 밝아 단박에 나타나서 남김이 없으므로 해인의 총이라고 말하고, 단박에 나타난 법이 각기 서로 알지 못하므로 해인의 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째, 증득(證得)의 총이며 증득의 별이니, 이른바 총상의 과법은 오직 부처님께서 증득한 곳이므로 증득의 총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증득 가운데서는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증득의 별이라 하는 것이다.
신림 대덕은 “이러한 10중의 총별로 법을 평정한 연후에 비로소 능히 티끌 하나, 모기 한 마리도 노사나불과 원래 한 몸임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뜻에 의지하여 비로소 동시구족(同時具足)과 인다라망(因陀羅網)의 미세한 경계 등이 있는 것이다.
【문】 넷째의 총별은 다섯째와 어떻게 다른가?
【답】 넷째는 비록 서로 알지 못하지만 두 지위의 다름이 없지 않은 것이요, 다섯째는 곧 하나의 체(體) 위에서 총이라 하고, 별이라 하기 때문에 별인 것이다.
【문】 여섯째의 머무름이 없는 총별은 일곱째 실상의 총별과 어떻게 다른가?
【답】 실상에서 “지혜의 분별을 떠나면 곧 여섯째 무주의 지혜를 간별해 낸다”라고 하였으니, 여덟째 법성에 이르러야 이지(理智)를 구족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기』 ‘마치 총상ㆍ별상……언제나 중도에 있는 것과 같다’74)는 것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른바 하나의 의미는 ‘총상’으로부터 ‘중도’에 이르러서 비로소 ‘……같이’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의미는 ‘총상ㆍ별상……’ 아래에서 ‘……와 같이’라고 하는 것이다.75) 해석해 말하면, 첫 번째 의미는 총은 별이 아니고 별은 총이 아니며, 성은 괴가 아니고 괴는 성이 아닌 등이므로 ‘즉하지도 않고 하나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총은 온전히 별이며, 별은 온전히 총이기 때문에 ‘여의지도 않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다’라는 것은 성상과 괴상이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동상과 이상이다. 이른바 아래 가르침의 사람이 구경의 과처(果處)에 이르러서 진망(眞妄)이 동체(同體)라고 집착하므로 괴상의 인(印)으로 인(印)치면 진망이 각기 머물러서 본래 부동이기 때문에 ‘즉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성상의 인으로 인치면 진망이 진(眞)이므로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아지는 지위에서는 범부와 성인은 하나라거나 다르다는 병이 있기 때문에 동상으로 다스리며, 이른바 곧 본각의 해[日]와 같아서 범부와 성인이 한 몸임을 집착하기 때문에 이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범부와 성인이 각기 다르므로 ‘하나가 아니다’라 하며 동상으로 다스리고, 범부와 성인이 하나의 양(量)이므로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인연관ㆍ연기관 등의 3관으로 삼승의 즉함과 여읨・하나와 다름을 따로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삼승의 권속이 일승의 주인과 더불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반려가 되어서 원명(圓明)하고 덕을 갖춘 주반(主伴)을 이루는 것이다.
【문】 6상을 쓰면 병이 마땅히 이미 다하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반드시 다시 4구(句)76)를 쓰는 것인가?
【답】 만약 총상을 얻으면 4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별을 계교하는 사람을 위하여 4구로 설하는 것이다.
‘일승과 삼승의 주반이 서로 이룬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한결같이 일승은 주체이고, 삼승은 반려인가? 혹은 이를 반대로 하여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후자와 같다”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오직 한결같이 일승은 주체이며 삼승이 반려(伴侶)이니, 이른바 한결같이 근본입(根本入)을 총이라 이름하고, 9입(入)을 별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근본입의 이름으로써 별로 삼고 나머지 9입의 이름으로 총을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일승의 이름으로 총이 되고 주체가 되며 삼승의 이름으로 별(別)이 되고 반려가 되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주반이 서로 이룬다’고 하는가?
【답】 일승으로 말미암아서 삼승이 있으며 삼승으로 말미암아 일승이 있다. 그러므로 일승은 총체적으로 삼승을 포함하여 주체가 되고, 삼승은 반드시 일승에 의지하여 반려가 되기 때문에 ‘서로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승 별교와 삼승 별교도 뜻에 준하여 가히 알 수 있다’라는 것은 6상의 뜻을 활용하면 오직 동교의 문이기 때문에 일승의 별교 및 삼승의 별교를 제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세히 설하면 일승의 별교가 주체가 되고, 삼승의 별교가 권속인 반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중도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가히 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앞에서는 원교 및 삼승이 모두 동교라고 하더니 이제 여기서는 일승 별교가 동교보다 더 깊고 삼승의 별교는 동교보다 더 얕으니, 뜻에 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기』 ‘오직 스스로의 진여[自如]에 머문다’는 것은 삼승이 아니니, 모습[相]은 원융하지만 체(體)는 원융하지 않은 평등진여인 것이다. 체와 모습이 모두 원융함을 기준으로 하면, 무분별의 처소와 괴상 중에서는 본래 짓지 않아서 각기 스스로의 진여에 머문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다. ‘삼승 방편의 교문(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다’는 등은, 만약 삼승 방편의 수행을 기준으로 하면 항포(行布)의 인과여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은 것이며, 만약 일승의 진실한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과가 원융하여 법성의 덕용이어서 다만 중도에 있으므로 ‘전후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간의장(簡義章)』 원융과 항포를 설함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삼승은 항포이고 일승은 원융이니, 마치 『일승법계도』의 본문77)에서 “삼승 방편의 교문(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으며 일승의 원교에 의지하므로 전후가 없다” 등으로 말한 것과 같다. 둘째, 이 경전에 나아가서는 외상(外相)의 동교가 둘이 있다. 첫째는 위와 같은 것이니, 허공의 그림으로 허공을 향함에 곧 체가 허공과 같아서 분수에 따라 걸림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아래와 같은 것이니, 아래로 땅의 그림과 흡사하여 전후가 있기 때문이다. 상동은 원융의 뜻이며, 하동은 항포의 뜻이다. 「지품(地品)」 중에서 한 마리 새의 자취가 둘에 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78) 외상의 동교로써 항포를 삼고 자체의 별교로써 원융을 삼는 것이니, 마치 『소전장(所詮章)』에서 “모든 가르침을 안립함에 두 가지 선교(善巧) 등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요간(料簡)』79)에서, “보현의 지위에 둘이 있다”라고 하는 등이 이것이다. 넷째는 자체의 별교에 나아가면 본래의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은 항포이며, 걸림 없는 원융은 원융이다. 이른바 넓고 좁음[廣俠] 가운데 나눔과 나누지 않음이며, 또한 상입문(相入門)의 성품 없음[無性]과 무너지지 않음[不壞]이며, 또한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오고 가는 것이며, 또한 6상 중에 세 가지 원융과 세 가지 항포 등이다.

【본문】모든 보살은……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다.80)
『법기』 논81)에서 ‘모든 보살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信)ㆍ행(行)ㆍ지(地)에 머무르는 것이요’라고 말한 것에서, 신은 10신이요 행은 3현(賢)이며 지는 10지(地)이다. 만약 크게 나누면 ‘신ㆍ행ㆍ지’는 3현이고, ‘증득을 얻음’은 10지이다.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이란 출세간의 도품(道品)이다’라는 것에서, 부사의한 불법은 곧 부처님의 내증(內證)이다. 이른바 마치 못물에 그림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모든 상(像)을 거두어들인다는 뜻과 모든 상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어떤 한 사람이 못가에 서 있으면서 이러한 모든 상을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 주는 것과 같아서, 이렇게 부처님께서 3종세간이 자기의 몸과 마음임을 증득한다는 것은 그러한 물 중에 모든 상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으며, 자내증으로써 근기에 임하여 밖으로 향하고 10지를 나누어 보이는 것은 저 물 중에 모든 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금강장(金剛藏)보살이 삼매[定]82) 중에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법을 칭합해 받고서 삼매에서 나온 이후에 근기를 위하여 설하는 것은 마치 저 한 사람이 못가에 서서 물 속의 상(像)을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과 같으니, 이른바 만약 내증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부사의한 법일 뿐이라서 10지의 모습이 없으나 앞의 근기에는 삼승이 많으므로 부처님의 뜻은 10지를 설하게 하고자 해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 맨 앞[頭]에 10지를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니, 이 뜻은 커서 가히 설할 수 없는 것이다. 금강장이 정(定)에 들어가서 그 법을 칭합해 받고 정에서 나온 이후에 설하는 바 10지는 이 설이 커도 가히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은 “지(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因)이고, 둘째는 과(果)이다. 인은 이른바 세간의 방편 행을 닦는 것이니 곧 가행지(加行地)의 영역[分齊]이며, 과는 이른바 세간을 벗어나 상을 떠나서 참으로 증득하는 것이니 곧 정증지(正證智)의 영역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세간의 도품’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83)
【문】 무엇 때문에 세간을 벗어난 곳의 도[出世間處道]에 품이 있는가?
【답】 만약 부사의한 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록 도품이 없으나, 근기의 인연을 위하여 10지를 나누어 보이는 까닭에 도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은 말하기를, “지금 여기서의 10지는 부처님의 인위(因位)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일승과 삼승, 성문과 인천이 모두 그 중에 있어서 5승(乘)84)의 관찰 대상이 되는 것이며, 보현의 증위(證位)는 불과의 섭용(攝用)이 걸림 없이 자재하여 모두 다하는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10지의 법이 중생 가운데 최초의 문(門)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지위의 법이 매우 깊어서 가장 요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85)라고 하였다.
‘밝게[明]라는 것은 보는 것[見]・지혜[智]・얻음[得]・증득[證]이며’라는 것은 증견(證見)의 지혜로 중생의 몸과 마음이 바로 부사의한 부처님 법임을 증득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중생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가?
【답】 만약 증견의 지혜는 움직임이 없음[不動]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 개개의 중생의 몸과 마음이 곧 부사의한 불법이며 출세간의 도품이지만 다만 범부가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지상은 “앞의 둘은 관해(觀解)이고 뒤의 둘은 행해(行解)이며, 보는 것[見]은 시작[始]이고 지혜[智]는 마침[終]이며, 얻음[得]은 시작이고 증득[證]은 마침이다”86)라고 말하였는가?
【답】 이는 다만 닦음에 의지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말을 빌린다면[假言], 하나하나의 부처님 세계 티끌 수만큼 많은 겁 중에서 연기 실상의 다라니를 닦는다는 것은 관해이며, 생각생각에 증득을 얻는다는 것은 행해이다.
‘설한다는 것은 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다’라는 것에 둘이 있다. 첫째, 만약 부처님의 마음[佛心]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록 10지가 없더라도 이끌어 들이는 근기로 말미암아서 삼승이 많기 때문에 금강장을 가피[加]하여 10지를 설하는 것이다. 신ㆍ행ㆍ지의 보살로 하여금 지혜의 지위[智慧地]에 증득하여 들어가게[證入] 하기 때문에 뒤에 얻은 필[後得筆] 중에 10지를 나누어 보여서 설함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금강장보살이 삼매 중에서 칭합해 받은 뒤에 언설(言說)을 얻어서 설함으로 삼는 것이다.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말 없음[無言]으로 설함을 삼기 때문이니, 이것이 무언의 가르침의 근본인 것이다. 금강장이 칭합해 받음도 역시 무언이지만 언교를 기다리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들어간다[入]는 것은 믿음・즐거움・얻음・증득이며’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내가 이미 닦아 익혀 그대의 몸과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다른 일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믿음이 없으므로 얻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믿으면 능히 알 수 있으니 요컨대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자기의 몸과 마음이 부사의한 불법임을 믿기 때문에 ‘믿음’이라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서 능히 항상 지키므로 ‘즐거움’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과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몸과 마음을 직접 증득하기 때문에 ‘얻음과 증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혜의 지위는 10지의 지혜다’라는 것은, 지상(至相)과 원사(遠師)87)가 함께 이 구절로써 근본입(根本入)을 삼고 있다.
【문】 ‘가피의 행위’의 20구절88)은 바로 설할[正說] 때에 말한 것인가, 경가(經家)가 열거한 것인가?
【답】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경가가 열거한 것이며, 뜻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설한 것이다.
【문】 만약 뜻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구업(口業)에 거두어진 것인가, 의업(意業)에 거두어진 것인가?
【답】 구업이다.
【문】 부처님께서 선정 중에 계실 때는 구업으로 일삼아 짓는 설(說)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구업이라 말하는가?
【답】 가르침이 일어나는 것이 구업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어나는 바의 가르침이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겠는가? 본래 설하지 않음[不說]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이는 의업이며, 만약 나타나는 모양[現相]을 기준으로 하면 방광(放光)ㆍ마정(摩頂)ㆍ집수(執手)ㆍ촉목(觸目) 등으로 법의 궤칙을 보이는 것은 신업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구업은 큰 허공[大虛]에 칭합하기 때문에 일으키는 가르침도 역시 큰 허공에 칭합하는 것이다.
‘섭입(攝入)’이라는 것은 부사의한 법을 믿고 듣는 마음 가운데 그 법이 단박에 나타나기 때문에 ‘섭’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법에 계합하기 때문에 ‘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혜(聞慧) 중에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에서, 불타(佛陀) 삼장89)이 “체(體)에 칭합하는 문혜가 원종(圓宗)의 이치를 거두어들여서 이치와 상응하니 가히 귀한 것이다”(이상)라고 말하였으니, ‘체에 칭합한다’는 것은 해인(海印)의 체에 칭합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많은 묘목이 모두 대지(大地)에 의지함과 같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근이 해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음과 해인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인의 법이 믿는 마음 중에 분명히 단박에 나타나기 때문에 ‘문혜 중에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인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의입(思議入)’이라는 것은 문혜로 듣는 바를 생각하면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의’라는 것은 사혜(思慧) 중에 생각의 대상이 되는 법을 의언(意言)으로 관찰하여 그 모습을 요달하는 것이요, ‘입’은 위와 같은 것이다.
‘모든 도품’은 부사의한 법이다.
‘지혜의 방편’이라는 것은, 만약 법을 들을 때에 마음이 연(緣)을 밖에 두지 않고 전적으로 이 법을 의지하여 상속 사유함이 ‘방(方)’이며, 이와 같음으로 말미암아서 마음이 법에서 편안한 것이 ‘편(便)’이다.
‘분별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들은 법을 행하고 그 역순(逆順)을 구별하는 것이니, 이러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법에 따름을 취하는 것은 ‘선(選)’이며, 그 법에 거스름을 버리는 것은 ‘택(擇)’이다.
‘법상입(法相入)’은 생각의 대상이 되는 법이 마음에 나타나서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이라는 것은 부사의한 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고, ‘한량없이 갖가지로 앎’은 대개 접촉하고 대면하는 것에 부사의한 불법 아님이 없으므로 앎의 대상이 되는 법이 이미 한량없고 능히 아는 지혜도 역시 한량없는 것이다.
‘교화입(敎化入)’은 앞에서 말한 섭입 중에서 저 부사의한 법을 듣고, 사의입 중에서 그 법상(法相)을 헤아리며, 법상입 중에서 저 부사의한 법이 그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보살이 최초로 서원을 발한다’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 마음에 나타나는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교화입’이라 말하는 것이다.
‘사의(思議)하는 바를 따라서 이름이 갖추어지며 잘 법을 설한다’는 것은 그 사혜의 생각하는 대상이 되는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사의하는 바를 따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문혜의 듣는 대상이 되는 법에 맞게 이름을 세우고 교화하기 때문에 ‘이름이 갖추어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잘 결정하여 설한다’는 것은 만약 전해들은 법으로써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 잘 결정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손바닥 가운데의 구슬을 분명히 보는 것과 같아서 마음에서 법을 요달함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 스스로 얻는 법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기 때문에 ‘잘 결정하여 설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증입(證入)’은 스스로 얻는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할 때에 스스로의 행 역시 곧 원만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은 부사의한 법이며, ‘평등한 지혜’는 이 보살이 마음으로 그러한 법을 얻을 때 그 마음이 법과 더불어 가히 나눌 수 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그릇으로 못의 물을 떠 담았다가 다시 못에 물을 버림에 가히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아서,90) 이는 그릇의 물이기도 하고 못의 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평등한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다’에 대해서 묻는다.
【문】 무엇 때문에 증입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교화입을 해석하는가?
【답】 증입한 뒤에 비로소 이타가 바로 자리의 뜻임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이른바 보살이 서원을 발하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니, 먼저 다른 사람을 제도할 때에 법이 그러하여 스스로 진여의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증입에 이른 뒤에 교화입을 해석하는 것이다.
‘불방일입(不放逸入)’은 만약 연(緣)이 머무를 때 마음에 만약 전변함[轉]이 있으면 곧 ‘방(方)’이며, 그러한 ‘방’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경계에 나아가는 것이 ‘일(逸)’이다. 이러한 보살이 부사의한 불법에 의지하여 그 마음이 전변하지 않고, 또 다른 경계에도 마음이 나아가지 않으므로 ‘불방일입’이라 말한 것이다.
‘모든 마법(魔法)이 능히 오염시키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마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천마(天魔)이며, 둘째는 인마(人魔), 셋째는 음마(陰魔), 넷째는 번뇌마(煩惱魔)이다. ‘번뇌마’라는 것은 3독이 뿌리가 되어서 일어나는 번뇌이니, 이른바 수행하는 마음이 위순(違順)의 경계에 부딪혀서 혹은 화를 내고 혹은 탐내어 적정(寂靜)할 수 없음이 바로 번뇌마이다. ‘음마’는 5음(陰) 중에 넷은 마음이요 하나는 색이니, 수행할 때에 옷과 음식 등 다섯 가지 대상의 경계를 탐하여 구하는 것은 색마(色魔)요, 탐하여 구하는 마음은 심마(心魔)인 것이다. ‘인마’는 수행할 때에 부모ㆍ단월ㆍ나쁜 친구ㆍ호색(好色) 등이 모두 인마인 것이다. ‘천마’는 수행할 때에 제6천91)의 마가 곧 스스로 “이 사람이 그렇게 뛰어난 마음을 일으켜서 뛰어난 행을 닦으면 반드시 뛰어난 결과를 얻을 것이니, 나의 권속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이 사람을 떠나지 않아 언제나 어지럽히고자 하며, 만약 능히 어지럽히지 못하면 곧 그로 하여금 죽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이 천마이다.
‘지지전입(地地轉入)’은, 7지(地) 이전은 비록 능히 나아가서 상(相)이 없이 닦지만, 그러나 이것은 공용(功用)이 있는 지위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행(加行)의 작의(作意)를 일으켜서 자심(自心)의 행력(行力)을 타고서 닦는 것이요, 8지 이상은 무상(無相)의 관지(觀智)가 궁극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본래의 서원 및 법력(法力)을 타고서 자유자재로 나아가서 닦기 때문에 지지전입이라 말하는 것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 청정하다’는 것은 부사의한 법 가운데는 본래 3독(毒)이 없기 때문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善)은 비롯함이 없는 때부터 있는 것이지만 지위에 기댐을 기준으로 하면 7지 이전은 공용이 있는 지위라서 마음을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므로 세 가지 선근의 청정한 뜻이 현전하지 않는 것이며, 8지의 임운(任運)의 지위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 선근의 청정한 뜻이 구경에 나타나기 때문에 ‘무탐 등의 선근이 청정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선근 등이 있다’는 것은 잠재되어 있는 의심을 해결하는 것이니, 10지 가운데 하나하나의 지위가 모두 지전(地前)의 가행선근(加行善根)과 지상(地上)의 선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전의 가행을 기준으로 하면 ‘다시 선근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지상의 선근을 기준으로 하면 부사의한 불법인 것이다. 의심해서 말하기를, ‘7지 이전의 가행 선근이 8지 이상의 선근을 생하는 것인가?’라고 하니, 이러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직 8지의 가행선근이 그러한 8지의 선근을 낳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선근이 있어서 능히 출세간 도품의 인(因)이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보살진입(菩薩盡入)’ 중에 ‘여래의 비밀한 지혜’라는 것은 부사의한 불법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10중(重)이 없으나 지위에 기댐을 따라서 우선 열 가지 비밀한 지혜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한 지혜가 부사의한 법이므로 이러한 법을 얻음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여래의 비밀한 지혜에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진입(佛盡入)’ 중에서 ‘일체지(一切智)에서 지혜에 들어감[入智]’이라는 것은, ‘일체지’는 부처님의 일체지와 일체종지(一切種智)요, ‘입지’는 보살지(菩薩智)이니 보살지로 말미암아서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에 보살의 지혜 역시 원만한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문】 보살진입 중에서 ‘여래의 비밀한 지혜에 들어간다’고 한 것과 불진입 중에서 ‘부처님의 일체지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 어떻게 다른가?
【답】 보살진입 중에서 부사의한 불법을 얻는 것은 다만 과(果)를 다하는 인위(因位)이며, 불진입 중에서 부사의한 법을 얻는 것은 인을 다하는 과위이므로 다른 것이다.
【문】 원공(遠公)이 불진입으로써 인(因) 가운데 있음을 삼는 것은 보살진입과 어떻게 다른가?
【답】 건립(建立)을 기준으로 하면 보살진입은 제10지에 세우는 것이고, 불진입은 부처님의 과위에 세우는 것이니, 불진입으로 인 중의 과를 삼는 것은 신(信)ㆍ행(行)ㆍ지(地)의 보살이 부사의한 불법을 얻기 때문에 인 중의 과로 삼아서 ‘부처님의 과덕을 얻는 것이지 불진입이 인(因)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입(入)이 교량(挍量)……된다’는 것에서, 이러한 ‘모든 입’으로부터 ‘차별’에 이르는 것92)이 교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혜원[遠公]의 뜻이며, ‘모든 입’으로부터 ‘점점 뛰어나게 됨[轉勝]’에 이르는 것93)이 교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법장[藏師]의 뜻이다. 혜원의 뜻은 3현10지의 차례대로 점점 뛰어나게 되는 지위가 바로 기탁하는 바[所寄]가 되므로 불식해야 할 대상[所拂]이라는 것이며, 9입의 차별은 근본입 중에서 덕의 뜻이 차별되기 때문에 불식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장의 뜻94)은 3현10지가 온전히 부사의한 불법의 지위이며 섭입 등의 9입도 역시 온전히 부사의한 불법이므로 9입의 차별과 3현10지의 점점 뛰어나게 됨을 모두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지혜의 뜻이 차별되는 9입과 차례로 점점 뛰어나게 되는 3현10지가 모두 불식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교량하되 버리지 않는 것이고, 그 삼승 가운데 항포(行布)의 차례ㆍ차별ㆍ전승(轉勝)ㆍ결정 등은 모두 버릴 바라는 것이다.
【문】 이미 온전히 부사의한 법의 3현10지라면 마땅히 뛰어남과 열등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점점 뛰어나게 됨이 있다고 하는가?
【답】 비록 정(情)으로 헤아린 뛰어남과 열등함은 없으나 또한 연기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있는 것이다.
【문】 연기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병 중에 큰 허공을 포함하고 있고 옹기 중에도 역시 그러하지만, 큰 허공을 포함한 병은 어린 아이가 능히 들 수 있으나 대공을 포함하는 옹기는 어린 아이가 쉽게 들어올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10신(信)의 지위 중에 법계를 거두어들여서 다하고 10주 등의 지위도 역시 법계를 거두어들이지만, 비록 법계를 거두어들이는 뜻은 같으나 지위의 다름을 따르기 때문에 법계를 거두어들이는 10신은 열등한 것이고 법계를 거두어들이는 10주 등은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연기의 차별은 불식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신위(信位)에서 성불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순범(順梵)과 행장(行將)의 두 대덕95)이 원만불(圓滿佛)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수분불(隨分佛)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신림 대덕[林德]은 이러한 두 가지 뜻을 거론하여 상원(相元)에게 물었는데, 상원이 말하기를 “모두 화상의 뜻이 아니니 곧 10신의 한 지위로 10주 등을 형용하는 것은 문이 다르기 때문에 수분불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법계를 거두어들여서 구경에 옆이 없으므로[無側] 원만불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은 어떠한 한 지위를 따라서 부처를 이룰 때에 분(分)・만(滿)의 두 가지 뜻을 갖추는 것이다”(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장의 뜻은 9입 중의 입은 근본입의 입이며, 9입 중 섭(攝) 등의 아홉은 근본입 중의 지혜지(智惠地)이므로 모두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언설의 해석’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혜원은 “이러한 9입의 언설 가운데 6상으로써 해석한 뜻을 마땅히 알 것이니라”고 하였다. 법장의 두 가지 해석은 소(疏)96)와 같다.
‘사(事)는 제(除)하는데, 사라는 것은 이른바 음(陰)ㆍ계(界) 등이다’라는 것에서, 이러한 뜻은 실로 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림 대덕이 대승경공(大乘冏公)에게 물었더니, 경(冏)이 말하기를 “음ㆍ계ㆍ입에서는 6상이 필요한즉 원융하여 어렵지 않지만 ‘제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3과(科)와 백법(百法)을 말함에 6상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음ㆍ계ㆍ입을 제외하면 어느 곳에서 6상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스님은 말하기를 “6상은 삼승을 인용할 때에 쓰이는 방편이다. 그러나 그 집착하는 바 체성(體性)이 각기 다르니 3과의 법에 대하여 6상을 쓰면 그 법이 잡란(雜亂)하여 이익을 얻지 못하므로 ‘사는 제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융순(融順) 화상은 말하기를 “요컨대 6상의 언설로써 『화엄경』을 설하는 것이지만, 만약 3과와 백법으로 설하면 곧 삼승이므로 ‘사는 제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소(藏疏)』97) 가피의 행위[伽所爲]를 해석하는 중에 20구절의 글을 두 가지 이로움에 의지하여 나누면, 처음 10구절은 타(他)와 함께 하는 자리(自利)이고, 뒤의 10구절은 자리와 함께 하는 타인 것이다…….
앞 가운데서 논주(論主)98)는 네 가지 범주[四門]를 지어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해석하여 근본을 나타내는 것이다……넷째는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는 것이다.
첫째 중에서 총체적으로 10지의 법[地法]을 논하면 연기에 여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모든 보살은 신ㆍ행ㆍ지이다’라는 것은 미치는 바[所被]의 근기를 드는 것이니, 이른바 지전(地前)의 보살은 진여를 증득하지 못하고 다만 신심(信心)에 의지하여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둘째,99)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은 출세간의 도품이다’라는 것은 얻는 바 법이다. 그러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인(因)을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10지 법의 체(體)는 출세간의 무류(無流)의 법이니,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짐을 ‘부사의’라 이름하며, 통틀어서 불과를 낳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래 본문에서 ‘위대한 성인의 도는 그러한 인(因)이기 때문이니, 10위(位)의 품류가 차별됨을 품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둘째, 과(果)를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부처님께서 얻는 법이기 때문에 ‘불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아래의 지위가 의도할 바가 아니므로 ‘부사의’라 이름하는 것이고, 지상(地上)의 보살로 하여금 이 법을 나누어 증득하는[分證] 것을 ‘출세간의 도품’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지위의 지혜[地智]가 노니는 바를 ‘도’라 하고 분증이어서 원만하지 못하므로 ‘품’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셋째,100) ‘밝게[明]’라는 것은 처음 바라봄을 ‘본다[見]’라고 이름하고, 자세히 비추는 것을 ‘지혜[智]’라 이름하며, 지혜로써 비추어 보는 것이지 헤아리는 것이 아니므로 ‘얻음[得]’이라 이름하고, 그윽하고도 신령스럽게 계합하므로 다시 ‘증득[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넷째, ‘설한다는 것은 그 가운데 분별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이러한 증득하는 주체와 증득의 대상이 되는 법 중에 10위의차별을 나누어서 해석하여 지행(智行)의 우열(優劣)과 공혜(功惠)의 같고 다름을 밝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들어간다[入]는 것은 믿음[信]・즐거움[樂]・얻음[得]・증득[證]이다’라는 것은 이른바 지전(地前)에서는 믿음과 즐거움에 멀리 ‘들어간다’는 뜻이 있으며 지상(地上)에서는 증득과 얻음에 서로 들어감[交入]을 현성(現成)하는 것이다. 통틀어서 입의 뜻을 논하면 반드시 여기서부터 저기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과 마침을 갖추는 것이니, 역시 믿음은 처음이고 즐거움은 마침이요, 얻음은 시작이고 증득은 마침인 것이다. 여섯째, ‘지혜의 지위[智惠地]’라는 것은 이른바 10지의 지혜이니 본분(本分)101) 중에 설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이렇게 이치를 증득하는 성스러운 지혜에는 불과(佛果) 등을 생성하고 주지(住持)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지(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처음에 환희지(歡喜地)로부터 마지막 법운지(法雲地)까지는 본분 중에 나타나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뜻이 걸림 없이 융합하여 가르침과 뜻에 통하고, 증득[證]과 헤아림[比]에 통하며, 대상[境]과 지혜[智]에 통하고, 사람[人]과 법(法)에 통하며, 원인[因]과 결과[果]에 통하여서 걸림 없이 융통하여 총체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니, 10지의 법이라 이름한다. 뒤에 펼쳐지는 갖가지 차별 역시 모두 이러한 총구(總句) 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근본에 의지하여 지말을 여는 것이다. 아홉 구절을 나누어서 이루니, 이 중에 네 가지 지위가 있다. 이른바 원락위(願樂位)ㆍ견위(見位)ㆍ수위(修位)ㆍ구경위(究竟位)이다. 처음의 네 구절은 앞의 지전(地前)의 원락위에 부치는 것이며, 그 다음 한 구절은 초지에 부치는 것이며, 그 다음 세 구절은 수위에 부치는 것이며, 마지막 한 구절은 구경위를 밝히는 것이다.
【문】 여기는 바로 10지의 법을 설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지전과 불과도 설하는가?
【답】 10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앞에는 아래를 일으키는 공(功)이 있고 뒤에는 위를 이루는 뜻[義]이 있기 때문이다.102) 또 이렇게도 해석한다. 10지의 증지(證智)로 말미암아서 아함(阿含)103)의 빛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전은 이러한 10지의 아함에 분섭(分攝)되는 것이며, 이러한 지위의 지혜가 과해(果海)에 의지하여 이루어짐을 말미암기 때문에 불과가 있으니, 위의 ‘부사의한 불법’과 아래의 ‘새의 자취가 의지하는 바 허공 등’이 모두 그러한 일이다.
처음의 네 구절 중에서 첫째 구절은 문혜를 기준으로 하여 선근을 닦는 것이니 ‘모든 것을 거두어 들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 사혜의 시작을 밝혀서 도리를 간택하는 것이니, 논 중에 ‘지혜 방편’은 ‘잘 분별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며, ‘도품’은 ‘불법’을 해석한 것이다. 셋째 구절은 사혜의 마침이다. 이른바 생각함으로 인하여 널리 아는 것이니, ‘그러한 뜻’은 ‘모든 법’을 해석하는 것이며, ‘갖가지 앎’은 ‘널리 앎’을 해석한 것이다. 넷째 구절은 수혜(修慧)를 밝히는 것이니 의심할 바 없이 가르침을 세워서 가히 믿을 만하므로 ‘결정설(決定說)’이라 말한다. 이른바 닦음[修]은 두 가지 이로움에 다 통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이타를 드는 것은 보살이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리의 거둠에 들어가는 것이다. 논 중에 ‘사의(思議)하는 바를 따른다’는 것은 사혜(思慧)가 생각할 바이며, ‘이름이 갖추어진다’라는 것은 문혜(聞慧)가 지니는 바이기 때문에 ‘결정설’인 것이다. 이상은 믿음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아래부터는 얻음과 증득을 분별하는 것이다. 다섯째 구절은 지위를 보는 것[見位]이다……논 중에 ‘일체법의 평등한 지혜’라는 것은 ‘무분별의 지혜’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른바 초지에서 올바로 진여를 증득하여 주관과 객관의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견도(見道)의 때에 잘 청정하다’라는 것은 ‘잘 청정하여 잡스럽지 않다’를 해석하는 것이니, 이른바 두 가지 아(我)의 분별과 수면(隨眠)을 떠나는 것이다. 여섯째 구절은 수도위(修道位) 중에서 지지(地地)가 달라짐에 따라서 하나의 무명을 끊기 때문이며, 번뇌장에서도 영원히 굴복하고 떠나기 때문에 ‘세간의 법이 잡스럽지 않음을 불방일입(不放逸入)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는 것을 밝히니, 마법은 세간의 법이다. 일곱째 구절은 수위(修位) 중에서 지행(智行)이 더욱 전진하는 것을 ‘지지전입(地地轉入)’이라 이름함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무류의 선근이 영원히 세 가지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을 모두 떠나버리는 것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라는 것은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를 가지런히 취하는 것이다. ‘다시 선근이 있어서 능히 출세간 도품의 인(因)이 된다’라는 것은 모든 지위 중의 가행선근이다. 여덟째 구절은, 10지의 배움이 다하는 것을 ‘보살진입’이라 이름하니, 아래 대진분(大盡分) 중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다. 제10지의 보살이 여래의 열 가지 비밀한 지혜에 들어가는 것이 비밀스럽고 은밀하며 깊어서 가히 헤아려 알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홉째 구절은 구경위이니, 인행의 도[因道]가 이미 원만하여 불과가 이렇게 수승하니 궁극적인 과가 원만함을 ‘불진입’이라 이름함을 밝히는 것이다. 논 중의 ‘입지(入智)’는 ‘얻음[得]’이라는 글자를 해석하는 것이다.
셋째, 지말을 모아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른바 ‘이러한 모든 입’은 위의 9입(入)을 거듭 거론한 것이고, ‘교량 등이 된다’는 것은 그 분별이 없는 분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지전ㆍ지상과 나아가 불지(佛地)에 부쳐서 지위의 지혜의 차별을 교량하여 차례로 점점 뛰어난 모습이 되는 것이지, 근본입 중에서 또한 이와 같은 항포(行布)의 차례ㆍ결정ㆍ차별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말을 원융하여 근본으로 돌아가서 둘이 아님을 나타내니, 앞104)에서는 근본에 의지하여 지말을 일으켜서 분별이 없는 분별을 밝히는 것이고, 여기서는 지말을 모아서 근본으로 돌아가 다르면서 다름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넷째,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는 것이니, 이른바 6상의 총별이 걸림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6상의 뜻을 해석함에 여섯 가지 범주[六門]를 짓는다. 첫째, 가르침이 일어난 뜻을 밝히는 것이다. 이른바 정히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려서 연기의 원융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가 나타나면 모든 혹장(惑障)은 하나가 멸(滅)하면 일체가 멸하고, 일체 행(行)의 지위는 하나가 이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는 등이다. 둘째, 종류는 스스로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不自不他] 등의 4구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不有不無] 등의 4구 및 불생(不生) 등의 8불(不)과 10불(不) 등이 모두 현상[事]을 모아서 이치[理]에 들어가는 것이다.105) 이러한 부류는 다만 그것들이 이치에 들어가서 하나의 적정함에 수순하는 것일 뿐이요, 이제 여기서 이치에 들어가는 것은 저 현상을 원만히 융합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하게 해서 보현의 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셋째, 출전[所出]을 밝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아래 경의 넷째 대원(大願)106) 중에서 경가(經家) 스스로 설하는 것이지, 논주의 의도대로 지은 것이 아니다. 넷째, 건립을 밝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오직 여섯이며, 더 많지도 않고 더 적지도 않은가? 이른바 대개 모든 연기법은 요컨대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첫 번째 지말은 근본에 대해서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저 일어나는 지말은 이미 근본을 띠고 있는 것이므로 서로 바라보아서[相望] 같음[同]이 있고 다름[異]도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저 근본을 띠고 있는 지말이 이미 근본에 거두어짐이 되는 것이므로 당체(當體)에 존재함[存]과 무너짐[壞]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세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연기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며, 셋 중에 각기 둘이 있으므로 다만 여섯이 있을 뿐이다.
다섯째, 문답하여 결택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역(逆)이니, 이른바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닌[非摠非別] 등이 각각 서로 존재를 부정하여[形奪] 모든 상(相)이 다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순(順)이니, 이른바 역시 총이며 역시 별이기도 하다[亦摠亦別]는 등이 각각 순조롭게 서로 성취하는 등이므로 이렇게 사유하여 이를 지은 것이다.
여섯째,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니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법을 기준으로 하여 수(數)를 드는 것이니, 이른바 설하는 법 중에 여섯 가지 상(相)이 있는 등이다. 두 번째, 가르침과 뜻을 분별하여 정하는 것이니, ‘이러한 언설로 해석하는 것’은 가르침을 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이 중에 이러한 6상의 언설을 안배하여 경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이렇게도 해석한다. 이 중에서 6상을 해석하는 것이 이 경의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논주의 해석하는 뜻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사(事)를 제하는 것이니, 이른바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다’라는 것은, 이는 그 뜻을 분별하여 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리(道理)를 기준으로 하여 융통함을 설하는 것이지 음(陰) 등의 사상(事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제거하여 가려내는 것이다. 세 번째,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모습[相]을 해석하는 중에서, 별상 안에서 ‘별(別)은 근본에 의지한다’는 것은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여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그러한 근본을 원만케 한다’는 것은 도리어 능히 총을 이루는 것이다. 이른바 반드시 근본에 의지하는 별이라야 비로소 능히 근본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모습을 더한다’는 것은 앞의 9입(入)이 점차 증가되는 모습이니 다름107)을 나타내는 것이고, 연이 화합을 이룸은 간략한 말로 표방하여 나타내는 것이며, 연이 흩어지면 지음이 없다는 것은 널리 인연을 분별하는 것이다.108) ‘마치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은 비유를 들어서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백억의 4천하(天下)가 하나의 사바세계를 합성하는 것과 같아서 간략한 말로 표방하여 나타내면 ‘이룸[成]’이 되는 것이요, 만약 분별하여 널리 백억의 차별을 설하면 하나의 사바세계로 하여금 의지하여 머무르게 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무너짐[壞]’이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나머지 일체’라는 것은 모든 곳에서도 이런 유(類)에 준거하여 알아야 함을 권장한 것이다.
『고기』『장소(藏疏)』에서 “논주가 네 가지 범주[四門]를 지어서 해석하였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4문의 이름이 비록 소주(疏主)109) 스스로 지은 것이지만, 저 논 중에 본래 그러한 뜻을 갖추고 있으므로 ‘논주가 4문을 지었다’라고 했던 것이다.
【문】 이러한 4문은 모두 일승인가, 혹은 삼승인가?
【답】 일설에는 “4문이 모두 일승이니 어째서인가? 첫째 문은 가르침과 뜻에 통하고, 나아가 원인과 결과에 통하며 혼연(混然)히 통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열 가지 보법(普法)을 기준으로 해서 제2문을 이름하면, 다름이 없는 다름인 것이다. 제3문은 다르면서 다름이 없는 것이며, 제4문은 총과 별이 걸림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처음과 마지막의 두 문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제2는 근본입에 의지하여 9입의 지말을 여는 것이니, 삼승과 같아서 일심(一心)의 근본에 의지하여 흘러 6도(道)를 이루는 것이다. 제3은 9입의 지말을 모아서 근본입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역시 삼승이 6도의 차별을 모아서 평등한 일심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문이 모두 삼승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처음의 하나는 일승이고, 그 다음 둘은 삼승이니, 역시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제4문은 비록 6상을 밝히고 있으나 6상의 가르침이 일어나는 뜻에 ‘정히 집착된 견해[定執見]를 깨뜨려서 연기를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미 ‘집착을 깨뜨린 뒤에 덕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는 수상문(修相門)의 원융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첫째 문(門)인 총체적으로 해석하여 근본을 나타내는 일승에 상대하기 때문에 삼승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논의 저자가 앞의 세 문에서 6상(相)을 밝히지 않고 제4문에 이르러서 6상을 논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 문장 모습이 현저하게 드러남을 기준으로 하면 곧 앞의 셋은 삼승이요 뒤의 하나는 일승인 것이다. 그러나 제4문에서 6상을 밝힐 때에 앞의 세 문의 본말론(本末論)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4문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면 앞의 세 문이 모두 또한 일승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여기서 ‘네 번째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다’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인가?
【답】 일설에는 “제8회110)의 소(疏)에서 말하기를 ‘본회(本會)를 펼치면 말회(末會)가 되고 말회를 거두어 말면 본회가 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도 그와 같아서 근본의 총을 열어 9입(入)의 지말을 이루고, 9입의 지말을 모아서 근본의 총을 이루는 것이다. 일설에는 “일승 중에는 정해진 근본과 지말이 없기 때문에 하나를 들어서 주(主)를 삼으면 나머지는 곧 반(伴)이 되니, 그러므로 10입(入) 중에서 듦에 따라 근본을 삼으면 나머지는 곧 지말이 되는 것이다”111)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근본은 스스로 언제나 근본이며 지말 역시 스스로 항상 지말이라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한결같이 근본입을 총이라 이름하나 나머지 9입은 총이라 이름하지 않고, 한결같이 나머지 9입을 별이라 이름하나, 근본입으로써 별을 삼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근본과 지말에 걸림이 없음을 이루는가?
【답】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열 때에 만약 근본의 총을 깨뜨려서 9입의 지말을 이루면 곧 별이 총을 장애하는 것이며, 별을 모아서 총을 이룰 때도 역시 그와 같으니 만약 그렇다면 총이 별을 장애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별을 이루고 별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근본은 곧 언제나 근본이며 지말은 언제나 지말이어서 능히 걸림이 없음을 이루는 것이다.
【문】 『육상장(六相章)』112)에서는 “서까래[椽]가 곧 집[舍]이므로 총상이라 이름하며, 집이 곧 서까래이므로 별상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글에 의지하면 가히 근본이 도리어 지말이 되고,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되는 것인가?
【답】 일승 중에서는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거니와 이루어진다면 시작과 마침을 떠나기 때문에 비록 ‘서까래가 곧 집이다’라고 하더라도 이미 집일 때는 시작과 마침을 떠나기 때문에 먼저 별(別)의 서까래가 있어서 뒤에 집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본이 도리어 지말이 되고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문】 서까래는 별의 연[別緣]이거늘 이미 ‘서까래가 곧 집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역시 섭입(攝入) 등의 별이 총이 되는 뜻이 있으므로 역시 가히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되는 뜻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가?
【답】 섭입 등이 총이 되는 뜻은 곧 근본입이기 때문에 다만 총의 이름으로써 총을 삼는 것이지, 별의 이름으로써 총을 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섭입 등이 만약 총이 된다면 다만 ‘근본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고기』 근본입의 대허(大虛) 중에도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다. 만약 이러한 여덟 가지 어려움을 알 수 있다면 비록 그 근본이 되는 소[本疏]를 보지 못하더라도 가히 『지론(地論)』의 미묘한 뜻[妙旨]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거니와, 만약 이러한 여덟 가지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열 명[家], 스무 명의 ‘소’를 얻었다 하더라도 가히 『지론』의 뜻을 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첫째는 이러한 대허(大虛) 중에 비록 총과 별의 상(相)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히 총과 별을 나누는 뜻은 있는 것이니,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위에서 말한 5중총별(重總別)에서 처음 세 가지[重]를 기준으로 하여 보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비록 여러 가르침의 행위(行位)가 없으나 가히 여러 가르침의 행위를 나눌 수 있으니,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소류(所流) 삼승의 9입처(入處)에서 보는 것이다. 셋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서는 비록 무상(無常)하고 무상하지만 항상함이 있는 지혜[有常智]가 장애를 끊음과 항상함이 없는 지혜[無常智]가 장애를 끊음은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니, ‘다시 선근이 있다’ 등의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알 것이다. 만약 품(品)과 회(會)를 기준으로 하면 이는 차별과 평등의 2주인과(周因果)113)와 수생(修生)과 본유(本有)의 두 가지 지혜이다. 넷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유상(有常)과 무상(無常)의 지혜가 합하여 하나의 무류지(無流智)를 이루는 것이니,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초회(初會)의 40류(類)114)의 법체(法體)와 법계회(法界會)의 신중(神衆)115)은 유위(有爲)이며, 보현과 문수 등 동생(同生)116)의 무리는 무위(無爲)이니, 이러한 유위와 무위가 합하여 법신 비로자나의 자체지(自體智)를 이루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이 있어서 합하여 법체를 이루니,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머무름이 없는 별교문(別敎門) 중에 깊고 얕은 3관의 생멸과 증분 가운데에 태어남이 없는 불법의 불생멸이 없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움직이지 않는 근본 무명이 곧 만족한 법체인 것 역시 알기 어려우니, 종교(終敎)의 근본ㆍ지말 등의 무명에서 ‘보자인(普字印)’으로 인정(印定)하여 아는 것이다. 일곱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불진입(佛盡入)에서의 발심과 섭입의 지위에서 부처를 이룸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입(入)을 기준으로 하면 ‘교량지(校量智)의 뜻과 차별이 된다’는 등의 문장을 알 수 있다. 여덟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지옥의 지위에서 발심하는 사람은 없으며 지옥 중에서 발심하여 성불하는 것 역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언설에 의지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라’는 글에서 알 수 있다.

【본문】모든 법이 각기 다르니……모든 지위의 공덕.
『법기』 “모든 법이 각기 달라서 스스로의 진여에 머물기 때문에 1여(如)와 다여(多如)의 여여(如如)한 모습을 가히 얻지 못한다”는 것은 54각을 기준으로 해서 ‘여여’라고 하였으나 가히 나눌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첫째 각(角)의 여(如)이며, 이것이 둘째 각의 여 등이기 때문에 ‘모습을 가히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1각(角)을 기준으로 하는 때에 곧 54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여’라고 말하는 것이며, 제2각을 기준으로 해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마침내 앞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니, 위에서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지만 1가(家)의 진실한 덕의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말미암는 바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기』 ‘그러므로 경117)에서, 묻기를, 어떻게 해야 깊이 불법을 믿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께서 알 바이며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한 것 등은 『승만경』을 인용하여 위를 증명하며 스스로 겸손한 것이다. 이른바 앞118)에서는 ‘이러한 뜻을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천친론』의 저자에 의지하여……분수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뜻으로는 ‘오직 부처님께서 알 바이며 내 스스로는 알 바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에 의지하여 분수에 따라서 이러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 중의 ‘우러러 미루는 지혜’를 인용하여서 증거로 삼은 것이다. 저 경에서 ‘심심법지(甚深法智)를 이룬다’고 말한 것은 첫 번째 사람을 위해서이며, ‘수순법지(隨順法智)를 이룬다’는 것은 두 번째 사람을 위해서이며, ‘여래에게 우러러 미루는 것이지 나의 경계는 아니다’는 것은 세 번째 사람을 위해서이다. 해석에 말하면 첫째는 증지이고, 그 다음은 3현(賢)이고, 마지막은 10신(信)이다.
『법기』 ‘7처8회와 품류(品類)가 같지 않지만 오직 「지품(地品)」119)에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본으로 법을 얻어서 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실담장(悉曇章)」에서 “일체 모든 글자는 초장(初章)이 근본이 된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세간・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은 10지가 근본이 되므로 ‘법을 거두어들여서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고기』 【문】120) 일승의 10지는 어떻게 보는 것인가?
【답】 부석산의 40일 법회에서 화상(和尙)이 “일승의 10지는 횡(橫)이며 수(竪)이다”라고 하자, 상원(相元)과 지통(智通) 등이 “이미 화상의 뜻을 얻었다”라고 말하고, 그 법회가 마침에 이르러서는 각기 그 얻은 바를 바쳤더니, 화상이 “모두 얻지 못했다. 일승의 10지란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의 마음에 의지하여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뒤에 신림 대덕이 해석하여 말하기를, “초회의 10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빛깔[色]을 보고서 본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광명각품」 이하의 10지는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하는 사람이 소리[聲]를 듣고서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초회의 근본에 의지하여 뒤의 「광명각품」의 10지를 일으킨 것이니, 수생(修生)의 10지・불과(佛果)의 10지・본유(本有)의 10지・이세간(離世間)의 10지・입법계(入法界)의 10지이다.
【문】 일승의 다함없는 10지는 어떻게 보겠는가?
【답】 삼승 중에서는 3천세계[三千界]에 의지하여 법을 밝히며, 일승의 수문(隨門) 중에서도 역시 계(界)에 의지하여 법을 밝히는 것이고, 스스로의 별교 중에서는 종(種)에 의지하여 법을 밝히는 것이다. ‘삼승의 10지’에서 초지(初地)는 백엽의 연꽃에 의지하여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중밀(仲密)・증편(證遍)・만진(滿眞)의 타수용신(他受用身)이 의지하는 바이며, 역시 응신(應身)이다. 그 백엽 가운데 하나의 잎은 온전히 통괄하는 것이 곧 정토의 교화인 것이다. 또한 하나하나의 잎 중에 각기 백억의 석가가 있으니, 곧 예토의 교화인 것이다. 2지(地)는 곧 천엽의 연꽃에 의지하여 밝히는 것이니, 앞에 준하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제10지는 무수한 잎의 연꽃에 의지하여 밝히는 것이니, 역시 앞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삼승 중의 연꽃’은 10지 보살이 의지하여 머무는 바이고, ‘일승의 연꽃’은 10지의 체(體)이다. ‘일승의 수문 중에 계(界)에 의지하여 법을 분별한다’는 것은 삼승과 같지만, 다만 6상(相)으로써 이루기 때문에 다를 뿐이다. ‘종에 의지하여 분별한다’고 말하는 것은 초회 중에는 모두 56중(重)의 10지가 있으니, 이른바 교분의 1중과 증분의 55중이다. ‘교분의 일중’이라 말하는 것은 세계해(世界海) 중에 10불가설불찰진수(不可說佛刹塵數)의 향수해(香水海)가 있는데, 가장 중앙의 바다에서 큰 연꽃이 나오고, 이 연꽃 위에 세계종(世界種)이 있다. 이러한 하나의 종(種) 중에 20중의 세계가 있으니, 이러한 20중이 곧 10지이다. 10지에 각기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이 있으므로 20중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종에 이미 10지가 있고, 나머지 하나하나의 종에 모두 10지가 있기 때문에 10불가설세계진수의 10지가 있으니, 그러므로 ‘다함없는 10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1중(重)일 뿐이지만, 만약 나아가서 보면 곧 중중무진의 10지가 있으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증분의 10지(地)’라고 말하는 것은 5해(海) 10지(智)를 기준으로 하여 보는 것이다. 이른바 바다로써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에 50해가 있으니 곧 5중(重)의 10지(地)인 것이고, 지혜로써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에 5백 지(智)가 있으니 곧 50중의 10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증분 중에 모두 55중의 10지가 있으니, 이는 하나의 행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나아가서 본다면 곧 중중무진(重重無盡)의 10지가 있으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 삼승은 환희지・이구지 등으로 10지를 삼는데, 일승 중에서는 어떻게 이름하는가?
【답】 동교의 수문(隨門) 중에는 삼승과 같으나, 만약 별교 중에서라면 세계의 이름・바다의 이름・지혜의 이름 등이 모두 10지의 이름인 것이다. 원교문(圓敎門) 중에는 환희 등의 이름과 세계 등의 이름이 모두 10지의 이름이니, 이른바 삼승 중에는 오직 이름만 있을 뿐 실다운 법체가 없으며, 원교 중에는 법체를 갖추고 있으므로 10지를 삼는 것이다. 또한 ‘삼승과 초교(初敎)의 10지’라는 것은 수위(竪位)이니, 이른바 10신(信)과 10주(住)로부터 점차 불과(佛果)에 이르기 때문이다. ‘숙교(熟敎)121)의 10지’는 횡위(橫位)이니, 이른바 하나의 여래장 체(體) 중에서 나누어 세운[分立] 바이기 때문이다. 일승 중에는 횡과 수를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횡으로는 허공 법계를 포함하고, 수로는 9세와 10세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10신・10주 등이 모두 10지(地)를 쫓아서 일어나므로 법장[藏師]은 “10지는 앞의 지전(地前)을 거두어들이고 위로 불과를 섭수한다. 회회(會會)마다 본분(本分)에서 모두 ‘바다가 있다’고 하였으니, 모두 10지로써 근본을 삼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화상(和上)의 뜻도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법기』 ‘한 지위[地]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널리 일체 모든 지위의 공덕을 거두어들인다’122)라는 것은, 여기서 올바로 연기법을 밝히기 때문에 ‘하나가 일체를 거두어들인다[一攝一切]’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연기의 만족하고 옆이 없는 법’을 기준으로 하면 곧 그 한마디로 이미 충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널리 얻는다’123)라고 거듭 말하는 것인가?
【답】 실제[實]로는 이와 같아서 다만 한 지위[一地]를 말하면 족하지만 필요에 따라서 말한 것일 뿐이다.
『고기』 지상(至相)이 경을 해석하는 중에 ‘한 지위에 있으면서 널리 일체 모든 지위를 거두어들인다’는 문장에서 말하기를, “행상의 차례에 나아가서 마침내 궁극적이고 진실한 자체에 이르러 논하면 간략히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작[始]이 있으므로 능히 뒤[後]를 낳는 것이니, 마지막에 마침내 만족(滿足)하므로 ‘거두어들인다[攝]’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록 처음의 시작이지만 능히 모든 지위에서 행할 수 있고, 행하는 모든 법이 허식[姝]이 없으므로 ‘거두어들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루어지는 행은 다만 자분 중에 있어서 상하의 우열이 단지 ‘밝고 어두움[明昧]’으로써 다를 뿐이다. 셋째는 다만 처음의 시작에서 곧 일체 모든 지위의 공덕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넷째는 처음과 뒤이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처음의 시작이 곧바로 마침이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124)라고 하였다(이상).
해석해 말한다. 일설에는 “처음의 둘은 시교(始敎)와 종교(終敎)이며, 뒤의 둘은 일승이다. 일승의 둘 중에도 첫째는 연기분이며 둘째는 과분이다”라고 하였고, 또 일설에는 “첫째는 중문(中門)이고, 둘째는 즉문(卽門)이다”125)라고 하였다.
  1. 1)편자(編者) 미상. 번역에 있어서 한국불교전서 6책에 수록된 교감본과 김지견 편・운허 현토, 『법계도기총수록』(동방원, 1988), 이기영 역본 등을 참조하였다. 이기영 역본 『한국의 불교사상』(삼성출판사, 1993)은 완역이 아니라 상권(전체 4권 중의 2권)만 번역된 부분역으로서 A군(群)만 번역된 부분역이며, 임의로 번역을 생략하기도 하였다. 역자는 본문 번역을 함에 있어서 필요할 경우, 이를 참조하였음을 밝혀 둔다. 역자의 해석과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경우에만 그 차이를 주기(註記)한다.
  2. 2)『법계도기총수록』은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 모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의상 『화엄일승법계도』의 본문과 각 주석서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역자의 임으로 원문을 삽입하였으며, 이하 같다.
  3. 3)김지견은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 의하여, 원제목은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김지견,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 김영사, 1983, p.40 참조)
  4. 4)‘반(盤)’은 소반・대야의 뜻으로, 그러한 모양을 상징한다. 일반적으로『일승법계도』라 지칭할 때는 원도(原圖)인 법계도인(法界圖印)과 7언 30구의 시(時)인 법성게(法性偈)와 해석부분인 법계도기(法界圖記)까지를 아울러 통칭하는 말이다. 또는 법계도인과 법성게를 합쳐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 또는 ‘반시(盤詩)’라고도 한다. 이러한 ‘반시’ 형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회문시(回文詩) 형식을 채용하여 최신 기술이던 목판 인쇄에 다라니를 강조하여 담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5)이기영 역본은 이 부분 번역을 생략하고 있다(이기영, 앞의 책, p.314).
  6. 6)한불전 6, p.768 중-하. 『대기』에는 숭업(崇業)의 설 및 그의 저서 『관석(觀釋)』이 인용되어 있음을 볼 때, 『대기』의 저술 연대를 대개 9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할 뿐이다(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88, p.43). 또 『법계도기총수록』에는 모두 50여 회 인용됨으로써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대기』의 저자에 대해서 김복순은 “표훈계(表訓系) 승(僧)들이 표훈을 드러내기 위해 쓴 저술로 보인다”고 보았다.(김복순, 『신라화엄종연구』, 민족사, 1990, p.55)
  7. 668)7)5중해인을 지엄이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오히려 의상이나 의상 주변 혹은 제자들 중 누군가가 지엄에게 가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전해주, 의상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3, p.151 참조)
  8. 8)망상해인(忘像海印)ㆍ현상해인(現像海印)ㆍ외향해인(外向海印)ㆍ정관해인(定觀海印)ㆍ어언해인(語言海印)이다. 이를 각기 일승법계ㆍ도ㆍ합시일인ㆍ54각ㆍ210자에 배대하는 것이다(한불전 6, p.768 중-하).
  9. 9)여기의 『기』는 곧 『대기』일 것이다. 『대기』의 내용을 모두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일승법계’ 부분에 대한 『대기』의 해석을 생략한 것이다. 여기서, 첫째 폭[初幅]은 ‘일승법계’인 망상해인에 해당하고, ‘이(此)’는 현상해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0. 10)『화엄경』 「십지품」 22부터 「보왕여래성기품」 32까지를 가리킨다.
  11. 11)‘향(餉)’은 ‘향(向)’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12. 12)망상해인과 현상해인을 말한다.
  13. 13)운허 현토본에는 ‘말(末)’이라 되어 있으나 ‘미(未)’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14. 14)『화엄경』의 초회(初會)에서 설한 일체여래정장삼매(一切如來淨藏三昧)를 가리킨다. 삼매 속에서 모든 가르침과 모든 존재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5. 15)소승교ㆍ대승시교ㆍ종교ㆍ돈교ㆍ원교를 말한다. 이는 현수 법장의 교판이다.
  16. 16)법장은 60권 『화엄경』의 「노사나불품」에서 「입법계품」까지를 다음의 다섯 범주로 나누었다. 그것은 ① 소신인과(所信因果) - 「노사나불품」 2 ② 수생인과(修生因果) - 「여래명호품」 3, 「불소상광명공덕품」 30 ③ 수현인과(修顯因果) - 「보현보살행품」 31, 「보왕여래성기품」 32 ④ 성행인과(成行因果) - 「이세간품」 33 ⑤ 증입인과(證入因果) - 「입법계품」 34이다.
  17. 17)신림은 8세기 중엽의 인물로서 의상의 직제자인 상원에게 나아가 배운 부석적손(浮石嫡孫)이다. 그의 활동 시기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데, 부석사에서 1천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법장의 『화엄교분기』를 강의하였다. 불국사에서도 법회를 주관하였으며, 당(唐)나라에 들어가 융순(融順)의 문하에서 배우기도 하였다. 법융(法融)은 그의 제자이다(김상현, 앞의 책, pp.29-31 참조). 『법계도기총수록』에 보이는 신림의 법계(法系)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의상(義相)-상원(相元: 相源, 常元)-신림(神琳)┬─법융(法融)-범체(梵體)
                          ├─융수(融秀)
                          ├─대운(大雲) 법사 군(君)
                          ├─숭업(崇業)
                            └─질응(質應)
  18. 18)여기서 신림은 『일승법계도』 제목과 ‘반회굴곡’에 대해서만 주석하고 있다.
  19. 19)도인의 구불구불 나 있는 굴곡은 삼승을 나타내며,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한 길로 이어져 있는 것은 평평한 한 길의 일승을 나타낸다. 따라서 법계도인의 인도(印道)는 삼승과 일승이 둘이 아님을 나타낸다.
  20. 20)‘칩(蟄)’은 ‘집(執)’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반집(盤執)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뒤에 보이는 굴집(屈執)ㆍ곡집(曲執) 등의 용어와 같은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21. 21)이 문장을 이기영 역본은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도인(圖印) 안의 반(盤)은 삼승(乘)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승평도교(一乘平道敎) 가운데는 집착함이 없는 본체(本體)가 있는데, 그것을 배반하고 한 가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불이의 경지에 나지 못하고, 나아가 하나의 상, 하나의 흔적에 집착하고, 보불(報佛)의 과(果)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이기영, 앞의 책, p.316)
  22. 22)『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된 법융의 주석은 모두 47회에 이르며, 이 『법융기』는 그 내용이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23. 23)지엄의 저술. 『수현기』나 『십지경론』에 대한 소(疏)라는 목촌청효(木村淸孝)의 견해가 있으나 (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p.29), 『수현기』 5권을 가리킨다는 고익진의 주장(고익진, 「십구장원통기 본문고(本文考)」, 『한국불교학』 제6집(서울:한국불교학회, 1981, pp.58-63)이 있다.
  24. 24)6바라밀의 하나하나에 각기 10가지가 있으므로 60가지가 된다.
  25. 25)60권 『화엄경』 「보현보살행품」에 나온다.
  26. 26)『입법계품초』 1권은 지엄이 저술한 것이다(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 참조). 이 책은 현존하지 않으며, 균여의 저술과 『법계도기총수록』에 그 단편적인 내용이 인용되어 전한다.
  27. 27)한불전 6, p.769 상.
  28. 28)몸과 마음이 머무는 곳.
  29. 29)10주(住)이다.
  30. 30)10행(行)과 10회향(廻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음을 ‘나아가’라는 말로 축약해 놓은 것이다.
  31. 31)화엄의 성불론인 신만성불(信滿成佛)을 말한다.
  32. 32)의상이 말하는 행경(行境)의 십불 중 여섯 번째 부처님이다. 이것은 법계, 즉 한 티끌이나 소나무 등 모든 법계가 그대로 부처라고 보는 것이다.
  33. 33)여기서 『법계도기총수록』의 구성 형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화엄일승법계도』의 원문이 제시된다. 그런 뒤에 그에 대한 주석이 부가되는데, 이는 다시 둘로 구분된다. 즉 A군(群)과 B군이다(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p.35). B군의 주석은 A군의 주석에 대한 복주(複註)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원본 자체에 이미 B군은 A군에 비해서 한 글자 들여서 편집되어 있다. 그러므로 번역에서도 한 글자 들여서 편집한다.
  34. 34)『대방광여래비밀장경』 하권에서는 5무간죄에 대해 설한다. 5역의 처음 업은 성냄 중에서 중한 것이라고 한다.
  35. 35)『입법계품초』는 『법융대덕기』에 인용된 『입법계품초』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즉 8가지 근본죄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36. 36)지혜가 적은 사람에게 설함으로써 오히려 물러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
  37. 37)성문의 경전은 필요하지 않다고 설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38. 38)그렇게 설하는 자와 믿고 받아 지니는 자.
  39. 39)caṇḍāla의 음사.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수드라보다 더 낮은 최하층 계급으로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일컫는다.
  40. 40)여기 이 문장은 그 의미가 다소 애매하다. 이 문장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선을 행하는 비구 및 좌선이나 경전을 독송하는 비구를 비방하며 방해하는 제3의 비구가 있다. 그 악한 비구는 선한 비구에 대하여 ‘무뇌생뇌 이뇌증장(無惱生惱已惱增長)’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이 부분을 제3의 악한 비구가 선을 행하는 비구들에게 행하는 비방의 언사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문장 속에서 ‘말한다’는 의미의 동사는 없으나 그 의미상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둘째, 행위로써 선한 비구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 경우는 ‘번뇌가 없는데 번뇌를 생하게 하며 이미 생한 번뇌는 더욱 더하게 한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옮김의 문제점은 선한 비구가 ‘번뇌 없는’ 비구일 수도 있으며 ‘이미 번뇌를 생한’ 비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자는 첫째 해석을 택한다.
  41. 41)지혜와 자비의 상징. 왼손에는 반야의 칼을 잡고, 오른손에는 자비의 보주(寶珠)를 갖고 있다. 천장(天藏)보살ㆍ지장(地藏)보살과 함께 3장(藏)보살이라 불린다.
  42. 42)여덟 가지 근본죄를 말한다.
  43. 43)제9지는 법사위이다(『화엄경탐현기』 3, 동국역경원, 1995, p.300 참조).
  44. 44)진수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법계도기총수록』에는 총 24회 인용되어 있다.
  45. 45)『화엄경』 「십회향품」의 제8 여상회향(如相廻向)에서 1백 여[百如]가 설해지고 있다.(대정장 9, pp.525 하-527 중)
  46. 46)정명은 유마힐(維摩詰)을 가리킨다. 유마힐은 산스크리트어 Vimalakīrti를 음역한 것이고, 뜻으로 번역하면 정명이 된다. Vimalakīrti에서 kīrti는 ‘이름’을 말하고, Vimala는 ‘청정케 한다’는 뜻이다. mala는 ‘때[垢]’이고, Vi는 ‘분리’를 의미하는 접두사이다.
  47. 47)『화엄경』 전체를 가리킨다. 80권 『화엄경』에 의하면, 일곱 곳에서 아홉 번 모임[7處9會]을 가지면서 『화엄경』을 설했다는 것이다. 『화엄경』 전체에서 비로자나불은 침묵하고 있다.
  48. 48)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
  49. 49)이상, ‘일’에 대한 해석을 마친다.
  50. 50)위에서는 삼승의 입장, 일승 중 보현의 교분의 입장, 일승 중 보현의 증분의 입장에서 각기 ‘일’을 해석하였다.
  51. 51)‘승’에 대한 세 가지 의미가 이상에서 설명되었다.
  52. 52)법성의 바다를 뜻한다.
  53. 53)삼승에서는 소와 말의 자체[自性]가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므로 동일시될 수 없다. 일승에서는 피차(彼此)의 자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54. 54)법칙을 말한다.
  55. 55)이기영 역본에서는 ‘상호무측(各互無側)’을 ‘서로 병립 대립하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다. (이기영 역, 앞의 책, p.320)
  56. 56)여기서 ‘온전히 한다[全]’는 것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57. 57)시작의 ‘법(法)’자와 마지막의 ‘불(佛)’자가 만나므로 원(圓)인 것이다. 시작과 마지막이 만나는 것이 원 아닌가.
  58. 58)이상, ‘일승법계도’에 대한 제목 해석을 마친다.
  59. 59)한시에서 쓰이는 운에 맞게 쓴 시는 아니라는 뜻이다.
  60. 60)이상, ‘합시일인’에 대한 주석을 마친다.
  61. 61)『화엄경』 「성기품」에서는 여래의 음성을 10가지 뛰어난 행으로 세분하고 있다. (대정장 9, pp.618 하-622 중)
  62. 62)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을 55선지식, 54선지식, 53선지식 등으로 달리 말하고 있다. 선재가 만난 선지식은 모두 55명이지만, 문수는 처음과 끝에서 두 번 만나게 되므로 한 사람으로 보면 54명이 된다. 또 문수는 2번으로 치면서도, 천주광동녀ㆍ변우동자ㆍ덕생동자ㆍ유덕동녀를 1명으로 계산하면 53선지식이 된다. 즉 회수로는 55선지식이며, 인수로는 54선지식이고, 위수로는 53선지식이다.
  63. 63)『화엄경』 「이세간품」은 2천 가지의 행을 설하고 있다. 먼저, 2백 가지 물음은 보혜보살이 질문하며, 그에 대해 보현보살이 하나의 물음에 대하여 각기 10가지씩 총 2천 가지를 답하고 있는 것이다.(대정장 9, p.631 하-669 하 참조)
  64. 64)『법계도기총수록』(한불전 6, p.830 상 참조).
  65. 65)210인(印)은 별인(別印)이고, 하나의 인이 총인(總印)이다.
  66. 66)경제(經題)인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한다.
  67. 67)이상 210자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법성게가 210자가 된 데에는 어떠한 상징적인 의미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균여는 그렇게 보고 있다[균여, 『일승법계도원통기』(한불전 4, p.3 하)]. 이하에서는 『대기』의 저자가 결론을 맺는 것이다.
  68. 68)이 『대기』의 설명은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도 제시되어 있다(한불전 4, p.4 상-중).
  69. 69)청량 징관(淸凉澄觀), 『대방광불화엄경소』(대정장 35, p.525 상). 이 인용 구절은 바로 앞의 『대기』 중 마지막 문장, “그러므로 법계의 법이 비록 다함 없다 하지만……『일승법계도』라 제목한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한 주석인 것이다.
  70. 70)『청량소』에서는 『화엄경』을 다시 열 가지 범주[十門]로 나누어서 해석하고 있는데, 그 중 ‘총체적으로 제목을 해석하는 것’은 아홉째이다.
  71. 71)이 아홉째 중에 다시 열 가지가 있는데, 그 여섯째가 ‘말아 거두어들여서 모습이 다한다’는 것이다. 이는 80권 『화엄경』의 가르침[敎相]이 제목으로 모아질 수 있으며, 그것은 다시 이지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80권(『화엄경』 전체) → 구회 → 초회 → 제목 → 이지’로 거두어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운허 현토본에서는 ‘제6권의 섭상진자(攝相盡者)는 ……’으로 현토하였다. (운허 현토본, p.19 참조)
  72. 72)‘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한다.
  73. 73)원교의 부처님을 가리킨다.
  74. 74)원교를 제외한 가르침. 인천교ㆍ대승시교ㆍ종교ㆍ돈교를 가리킨다.
  75. 75)보리수나무. 법신과 응신이 둘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76. 76)『청량소』에서 『화엄경』을 해석하는 열 가지 범주 중에서 첫째이다.
  77. 77)법신.
  78. 78)『대방광불화엄경소』(대정장 35, p.505 하).
  79. 79)기세간(器世間)ㆍ중생세간(衆生世間)ㆍ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다.
  80. 80)운허 현토본에 따라서 ‘위십(爲十)’을 삽입하여 옮긴다. 여기의 10신은 「십지품」에서 설하는 것이다(대정장 9, p.565 중).
  81. 81)이 10신도 「십지품」에서 설하는 것이다(대정장 9, p.565 하).
  82. 82)징관, 『대방광불화엄경소』(대정장 35, p.505 하-506 상).
  83. 83)10신에 이 열 가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열 가지는 용주무애(用周無礙)ㆍ상변무애(相遍無礙)ㆍ의기무애(依起無礙)ㆍ진응무애(眞應無礙)ㆍ분원무애(分圓無礙)ㆍ인과무애(因果無礙)ㆍ의정무애(依正無礙)ㆍ잠입무애(潛入無礙)ㆍ원통무애(圓通無礙)이다.
  84. 84)이는 위의 ‘10신의 걸림 없음’을 주석하는 부분이므로, 열째 원통무애만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85. 85)‘즉’의 의미는 하나가 되며, 하나가 되어서 그것을 잘 활용한다는 뜻이다.
  86. 86)10신은 「십지품(十地品)」에 설해져 있다(대정장 9, p.565). 10신이라 말하는 것은 자체에 2가지 뜻이 있다. 첫째 3가지 세간을 융통하여 10신으로 삼음을 기준으로 하면, 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며, 둘째는 국토신(國土身), 셋째는 업보신(業報身), 넷째는 성문신(聲聞身), 다섯째는 연각신(緣覺身),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 여덟째는 지신(智身), 아홉째는 법신(法身),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 둘째 부처님도 스스로 10신이 있으니, 첫째는 보리신(菩提身), 둘째는 원신(願身), 셋째는 화신(化身), 넷째는 역지신(力持身), 다섯째는 상호장엄신(相好莊嚴身), 여섯째는 위세신(威勢身), 일곱째는 의생신(意生身), 여덟째는 복덕신(福德身), 아홉째는 법신(法身), 열째는 지신(智身)이다.[청량 징관, 『대방광불화엄경소』(대정장 35, pp.505 하-506 상) 참조]
  87. 87)위의 책, pp.505 하-506 상.
  88. 88)이 문장을 이기영 역본에서는 “왜냐하면 지엄 스님이 말했듯이 원통(圓通)이 이르는 곳에 선 아닌 것이 붙어서 연(緣)을 맺는 일이 없고, 또 물건을 택하지 않고 베풀어 준다고 하였는데……”라고 옮겼다. (이기영 역, 앞의 책, pp.322-323)
  89. 89)해인삼매. 『화엄경』의 해인삼매에 대해서는 김호성, 『선관의 대승적 연원 연구』, 동국대 대학원 박사논문, 1995, pp.211-216 참조.
  90. 90)‘온전한 해인 4제의 법’은 4제의 법 역시 해인삼매로부터 나온 4제의 법이라는 뜻이다.
  91. 91)종교(終敎)를 말한다.
  92. 92)‘역전전여지이(亦全全與之耳)’에서 첫째 ‘전(全)’ 뒤에 ‘해인(海印)’이 생략된 것으로 보았다.
  93. 93)법장의 저서, 『화엄경지귀(華嚴經旨歸)』 1권을 가리킨다(대정장 45, p.589 하).
  94. 94)이하는 이 10처에 대한 상세한 부연설명이 생략된 것이다(대정장 45, p.589 하 참조).
  95. 95)대정장 45, p.590 중. 이하 10중에 대한 상세한 부연설명을 생략하였다.
  96. 96)여기서 생략된 부분은 ‘문’의 나머지 부분과 ‘답’이다. 답의 요지는 “이 노사나 법계의 신운에 장애가 없으므로 언제나 이곳에 있지만 곧 다른 곳에 있음과 같다”는 것이다.(대정장 45, pp.590 하-591 하 참조)
  97. 97)대정장 45, p.591 참조.
  98. 98)대정장 45, p.591 하 참조.
  99. 99)대정장 45, p.592 중-하 참조.
  100. 100)신수대장경에 따라서 ‘설(設)’을 ‘설(說)’로 바꾼다.
  101. 101)『보안경』은 대본(大本)이라고도 하는데, 「입법계품」의 해운 비구가 수지한 것이라 한다.
  102. 102)대정장 45, p.592 하 참조. 『화엄경』의 부류에 대해서는 『탐현기』 제1권에서도 설해지고 있다.
  103. 103)대정장 45, p.594 상 참조.
  104. 104)대정장 9, p.594 하 참조.
  105. 105)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전(轉)’으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 등에는 ‘경(輕)’으로 되어 있다.
  106. 106)대정장 45, p.595 하 참조.
  107. 107)대정장 9, p.596 하 참조.
  108. 108)운허 현토본에 따라서 ‘면(免)’을 ‘토(兎)’로 고쳐서 옮긴다(운허 현토본, p.26).
  109. 109)5중해인(重海印)의 첫째.
  110. 110)5중해인의 둘째.
  111. 111)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4 중).
  112. 112)지키던 자취가 곧 돌아갈 바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113. 113)‘나’는 자취를 지키는 사람을, ‘그’는 다함 없는 원통의 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114. 114)고려대장경 원문에는 ‘개(開)’라고 되어 있으나, ‘관(關)’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115. 115)일승과 삼승의 차별을 언급한다. 일승의 우월성이 있다.
  116. 116)운허 현토본은 ‘종(終)’을 ‘연(緣)’이라 하였다(운허 현토본, p.28).
  117. 117)삼승별교ㆍ일승별교ㆍ일승동교.
  118. 118)10안은 육안(肉眼)ㆍ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ㆍ지안(智眼)ㆍ명안(明眼)ㆍ출생사안(出生死眼)ㆍ무애안(無礙眼)ㆍ보안(普眼)이다.(대정장 9, p.657 하)
  119. 119)10통에 대해서는 대정장 9, p.639 중 참조.
  120. 120)이상, 『대기』의 「법성게」에 대한 과분(科分)은 의상 스스로의 과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한불전 2, p.2 하). 의상의 과분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하, 도표에서 숫자는 모두 30구의 구절 수를 나타낸다.
    법성게─┬─자리행──┬─증분(1-4)
    │ └─연기분(5-18)
    ├─이타행(19-22)

    └─수행방편 및 이익─┬─수행방편(23-26)
    └─이익(27-30)
  121. 121)「법성게」 과분에 대해서는 전해주, 『의상화엄사상사연구』, p.167에서 도표로 정리하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곳이 있다. 다음과 같이 그려야 할 것이다.
    ① 망상해인(일승법계)
    ② 현상해인(도)
    ③ 외향해인(합시일인)
    ④ 정관해인(54각)
    ┌─1구 영불현해인(影不現海印)
    ⑤ 어언해인(210자)┬망상해인┐ ├─2구 영현해인(影現海印)
    │ ├증분┼─3구‘법성무이상(法性無二相)’해석
    ├현상해인┘ └─4구‘제법본래적(諸法本來寂)’해석
      │
    ├외향해인-연기분┬─망상해인,영리해인(影離海印,19)
    ├정관해인-이타행┼─현상해인,영현해인(影現海印,20)
    │ └─ ┐
    └어언해인┬수행방편─┼─외향해인,(21)
    └수행이익─┼─정관해인,중생수기(衆生隨器)
    └─어언해인,득리익(得利益)
  122. 122)계=법계, 종=법성, 해=해인을 말한다.
  123. 123)교분은 연기분이고, 또한 인분(因分)이다. 연기는 언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124. 124)원문은 “제연근본아(諸緣根本我) 일체법원심(一切法源心) 어언대요종(語言大要宗) 진실선지식(眞實善知識)”이다. 의상 스님의 4구게는 그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기존의 번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을 뿐이다. “모든 연은 나를 근본으로 하고 / 일체 법은 마음에서 근원한다 / 대요종(大要宗)을 말하자면 / 진실이 선지식이다.”(안광석 역, 『화엄연기』, 우린각, 1990, p.120)
  125. 125)김복순은 표훈이 의상의 직제자가 아니라 상원이나 진정에게 배운, 의상의 법손이라고 하였다. (김복순, 앞의 책, p.54 참조)
  126. 126)김복순은 ‘작오관석(作五觀釋)’에서 오관석을 책명으로 파악하여, 『오관석(五觀釋)』으로 표기하고 있으나(김복순, 앞의 책, p.53), 역자는 5관석은 물론 3문석(門釋)ㆍ4문석(門釋) 등도 책이 아니라 『법성게』 30구절에 대한 과목으로 보고자 한다.
  127. 127)다음 게송의 작자는 역시 표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뒤에 “이러한 오관을 지어서 화상에게 올렸더니……”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128. 128)표훈의 5관에 의한 「법성게」 과분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증분──────────────────실상관
    연기분─────────────────무주관
    ┌─성기관
    이타행───────────────┴─연기관
    ┌─연기관
    수행방편 및 이익──────────┴─인연관
  129. 129)실제 진정의 3문은 증분에 대한 평가를 수행증장문으로 배대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표훈은 부동건립문을 추가하여 증분에 배대함으로써, 진정의 과분에서 증분에 대한 부적절한 평가를 보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진정과 표훈의 과분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의 상
    진 정
    표 훈
    증분(1-4)
    수행증장문
    부동건립문
    연기분(5-8)
    이사구덕문
    이사구덕문
    연기분(9-18)
    사융현리문
    사융현리문
    이하(19-30)
    수행증장문
    수행증장문
  130. 130)이상, 4만(滿)의 과분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법성게」 1-4구─────────행실만(行實滿)
        「법성게」 5-14구────────-증만(證滿)
       「법성게」 15-22구────────법만(法滿)
       「법성게」 23-30구────────인만(人滿)
  131. 131)경덕왕 19년이다.
  132. 132)『화엄경』을 말한다.
  133. 133)균여, 『십구장원통기』(한불전 4, p.79 하). 『십구장』의 저자에 대해서 고익진은 “법융 설(說)……융불 가필(加筆)”을 주장하고(고익진, 「십구장원통기 본문 재고」, 『불교사학논문집』, 동국대 출판부, 1988, p.334), 김상현은 “법융 설(說)……범체 가필(加筆)”을 주장하고 있다(김상현, 「신라 화엄학승의 계보와 그 활동」, 『한국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p.31).
  134. 134)지엄이 『오권소』의 수지(首紙)에 써넣었다고 하는 열 구절의 열째이다.
  135. 135)초회는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이며 10주를 설하는 도리천회는 제3회인데, 여기서는 초회를 도리천회라고 하였으니, 단순한 오류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136. 136)인분(因分)은 과분(果分)에 상대한 개념이며, 증분에 상대한 개념인 교분과 같은 뜻이다. 『십지경론』에서는 “인분은 설할 수 있고[可說], 과분은 설할 수 없다[不可說]”고 하였다.
  137. 137)신림의 제자이다.
  138. 138)이는 『유마경』에서 설하는 ‘유마의 일묵’과 같은 차원이다. 모두 깨달음의 세계[證分]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과 『화엄경』이 같은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9. 139)운허 현토본에는 ‘습(習)’을 ‘지(智)’라고 하였다(운허 현토본, p.35 참조).
  140. 140)『화엄경』 「입법계품」(대정장 9, p.781 상 참조).
  141. 141)양원(良圓)을 가리킨다.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 인용된 「양원화상기」의 내용과 그 의미가 같기 때문이다. (한불전 4, p.7 하)
  142. 142)『화엄경』 「야마천궁설게품」의 지림(智林)보살의 게송이다(대정장 9, p.466 하).
  143. 143)『삼국유사』 등 한국측 기록에는 도신이 의상의 10대제자 중 한 명이었다는 기록이 없지만, 『송고승전』에서는 ‘당(堂)에 올라 오묘한 경지를 본 자’로 평가하고 있다(대정장 50, p.729 하). 또한 균여의 저술에는 ‘도신(道申)’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김상현은 도신장의 단편을 모아서 「도신장 습유」를 발표하였다(김상현, 「도신장 습유」, 『불교학보 33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96, pp.273-281). 이하, 『도신장』과 상응하는 균여 저술의 인용 페이지를 주기하는 것은 이에 의지한 것임을 밝힌다. 다만, 김상현은 『법계도기총수록』의 『도신장』 인용 회수는 9회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10회이다. 균여의 『석화엄지귀장원통초』 권하(한불전 4, p.140 중) 인용부분 역시 『법계도기총수록』(한불전 6, p.782 하)에서도 인용하고 있는데, 계산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144. 144)‘본래 자성이 있었다면’의 의미이다.
  145. 145)일체제세계해(一切諸世界海)ㆍ일체중생해(一切衆生海)ㆍ성계업해(性界業海)ㆍ일체중생욕락제근해(一切衆生欲樂諸根海)ㆍ일체삼세제불해(一切三世諸佛海).
  146. 146)신림의 제자이다.
  147. 147)대정장 9, p.427 상 참조.
  148. 148)지엄, 『수현기』(대정장 35, p.28 중).
  149. 149)상동.
  150. 150)경에 의하여, ‘고(故)’ 뒤에 ‘유전(有轉)’을 삽입하여 옮긴다.
  151. 151)지엄, 『수현기』(대정장 35, p.28 중 참조).
  152. 152)상동.
  153. 153)상동.
  154. 154)중문은 상입(相入)을, 즉문은 상즉(相卽)을 말하는 것이다.
  155. 155)질응은 신림의 제자이다.
  156. 156)김복순은 ‘지오’를 지통 스님과 오진 스님이라고 보았으나(김복순, 앞의 책, p.42), 그렇게 보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지오’ 그 자체가 하나의 스님 이름일 수도 있다.
  157. 157)『화엄경』을 말한다.
  158. 158)대정장 9, p.427 상 참조.
  159. 159)상동.
  160. 160)상동.
  161. 161)원 속에 이자삼점(伊字三點)을 가리킨다. 성중원월(星中圓月)이라고도 한다. 이는 지(智)바라밀을 상징한다. (안진호 편, 『석문의범』 하, 불서보급사, 1972, pp.154-155)
  162. 162)운허 현토본에 따라서 ‘종(種)’ 앞에 ‘삼(三)’을 삽입하여 옮긴다(운허 현토본, p.41 참조).
  163. 163)운허 현토본에 따라서, ‘해(海)’ 뒤에 ‘심(心)’을 삽입하여 옮긴다(상동).
  164. 164)원문의 ‘이(二)’는 ‘일일(一一)’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생각된다. 세로쓰기에서 ‘일일(一一)’은 자칫 ‘이(二)’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165. 165)운허 현토본에 의해서 ‘기(起)’ 다음에 ‘파(波)’를 삽입하여 옮긴다(운허 현토본, p.41 참조).
  166. 166)운허 현토본에 의하여, ‘과(果)’ 앞에 ‘파인해(波因海)’를 삽입하여 옮긴다(상동).
  167. 167)운허 현토본에 의하여, ‘과(果)’ 앞에 ‘인(因)’을 삽입하여 옮긴다(상동).
  168. 168)운허 현토본에 의하여, ‘제(諦)’ 뒤에 ‘대법(大法)’을 삽입하여 옮긴다(상동).
  169. 169)‘중문=상입=상재=상자’이고, ‘즉문=상즉=상시=상섭’이다. 상입은 역(力)의 차원이며, 상즉은 체(體)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다. 이기영 역본은 제일 마지막 구절을 ‘호상의지력무력의, 호상형탈체무체의’로 옮기고 있어서 ‘상입 상즉’의 이명(異名)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이기영, 앞의 책, p.337). 그런데 역자는 이 구절을 각기 상입 상즉의 설명으로 보고서 옮겼다.
  170. 170)원문에는 ‘일(一)’이라 되어 있으나, ‘이(二)’로 고쳐서 옮긴다. ‘무이(無二)’가 상즉의 의미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171. 171)이기영 역본에서는 ‘시수처수고(是須處須故)’를 “이것은 필요한 곳에라면 필요에 응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이기영 역본, p.338).
  172. 172)상원(相元)ㆍ상원(相源)이라고도 한다.
  173. 173)『구사론』 「분별세계품」 제3(대정장 29, p.314).
  174. 174)7극미=1미, 7미=1금…….
  175. 175)‘차(此)’ 다음에 ‘천안소견(天眼所見)’은 아무래도 잘못 들어간 연문(衍文)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부분은 앞에 이미 나왔다는 점에서, 또 중복하여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176. 176)미진을 말한다.
  177. 177)삼승의 입장에서 논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178. 178)‘월(月)’은 ‘일(日)’의 잘못일 것이다. 앞에서 ‘일광(日光)’으로 나오며, 창틈에 먼지가 보이는 것은 햇빛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179. 179)운허 현토본의 ‘이(二)’는 ‘일일(一一)’의 잘못이다(운허 현토본, p.47).
  180. 180)원문에는 없지만, 뒤에 ‘답’이 있으므로 여기서 ‘문’을 삽입하여 옮긴다.
  181. 181)강장은 법장을 말한다. 법장은 강거국 출신이므로, 강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182. 182)법장의 『지귀장』 제7 현경의(顯經義)에 대한 주석 부분에 나온다.[김지견 편, 『균여대사화엄학전서』 상권, pp.365-366(한불전 4, pp.139 하-140 중)]
  183. 183)‘영락(纓絡)’을 ‘영락(瓔珞)’으로 고쳐서 옮긴다.
  184. 184)‘라(羅)’ 앞에 ‘신(新)’을 삽입하여 옮긴다.
  185. 185)‘대백산(大白山)’을 ‘태백산(太伯山)’으로 고쳐서 옮긴다.
  186. 186)『균여대사화엄학전서』에는 ‘교철(交徹)’이 ‘원만(圓滿)’으로 되어 있다.
  187. 187)그저께ㆍ어제ㆍ오늘ㆍ내일ㆍ모레를 말한다.
  188. 188)『도신장』의 이 내용은 균여의 『석화엄지귀장원통초』 권하(한불전 4, p.140 중)에도 인용되어 있다.
  189. 189)이 내용은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 권상(한불전 4, p.8 상) ; 『십구장원통기』 권하(한불전 4, p.66 하) ; 『석화엄지귀장원통초』 권하(한불전 4, p.143 상-중)에도 인용되어 있다.
  190. 190)「소전장」은 『화엄오교장』의 ‘소전’을 가리킨다(대정장 45, p.488 상).
  191. 191)『화엄경』「십주품」(대정장 9, p.444 하).
  192. 192)10주ㆍ10행ㆍ10회향.
  193. 193)10주를 말한다.
  194. 194)10주의 두 번째이다.
  195. 195)대정장 35, p.202 하 참조.
  196. 196)『화엄경』「범행품」(대정장 9, p.449 하).
  197. 197)『화엄경』 「범행품」(대정장 9, p.449 하).
  198. 198)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묘리원성관』 3권(대정장 55, p.1166 상)을 신수의 저서라 하였다. 『묘리원성관』의 인용은 『법계도기총수록』 이외에도 균여의 『석화엄지귀장원통초』와 『화엄교분기원통초』 등에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판본행남(坂本幸男)・길진의영(吉津宜英)・김영태(金煐泰)는 모두 여기의 신수가 북종선의 신수가 아니라 회계 신수(會稽神秀)라 주장하기도 한다.[정성본(鄭性本),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민족사, 1991, p.397]
  199. 199)인천승ㆍ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ㆍ불승.
  200. 200)지엄을 가리킨다. 지엄은 종남산 지상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지상이라고도 한다. 의상도 이 지상사에서 지엄에게 화엄을 배웠다.
  201. 201)대정장 9, p.708 상-하 참조. 만족왕은 「입법계품」의 53선지식 중에서 18번째 선지식인데, 10악(惡)을 버리고 10선(善)을 닦을 것을 설하고 있다.
  202. 202)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203. 203)‘도신운’을 ‘도신장’으로 옮긴다. 『도신장』을 그 출전으로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204. 204)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
  205. 205)운허 현토본에 의하여 ‘불(不)’ 다음에 ‘능견(能見)’을 삽입하여 옮긴다(운허 현토본, p.56 참조).
  206. 206)‘사(事)’를 현상으로 옮길 수 있으나 이치가 실체ㆍ본체 개념과 다르므로 현상이라 옮기지 않고 현실이라 옮긴다.
  207. 207)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208. 208)17-18구가 증분까지 포함한 자리행 전체를 모두 맺는 것인가, 아니면 연기분만 맺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209. 209)증분과 교분(연기분) 모두를 맺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210. 210)한불전 6, p.812 상.
  211. 211)‘일승법계도……210자’에 대한 『대기』의 주석 중에 한번 언급된 바 있다. “보현이 안으로 향하면 십불이고 십불이 밖으로 향하면 보현이다.” (한불전 6, p.768 중)
  212. 212)「법성게」에 대한 의상의 과목을 검토할 때, 그는 17-18구를 자리행의 총결(總結)이 아니라 연기분의 총결이라 하고 있으므로 의상의 입장은 이 둘째의 뜻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13. 213)이치와 현실이 둘 다 평등한 경우, 이치는 평등한데 현실이 차별인 경우, 이치는 차별인데 현실은 평등인 경우, 이치와 현실 둘 다 차별인 경우이다.
  214. 214)중생도 자내증 중의 중생이며, 교화하는 부처의 가르침도 자기의 해인정 중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밖에 별도의 타자[他]가 없으며, 타자가 없으므로 이타도 없는 것이다.
  215. 215)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216. 216)해인삼매는 이타행을 밝힌 19-22구 중의 첫째 구절, 즉 19번째 구이다.
  217. 217)도는 지극히 공적인 것이어서 사적인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18. 218)이타행의 4구절, 즉 19-22구를 말한다.
  219. 219)5중해인의 넷째 정관해인(定觀海印)을 가리킨다. 『대기』는 5중해인설에 의해서 법성게를 과분(科分)하고 있는데, 이타행 4구는 넷째 정관해인에 속하는 것으로 배대하였다.
  220. 220)외향해인.
  221. 221)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3 하).
  222. 222)이상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망상해인, 영리해인(影離海印) : 19구
    제4 정관해인 이타행 󰠏󰠊󰠏현상해인, 영현해인(影現海印) : 20구
    󰠉󰠏외향해인: 21구
    󰠉󰠏정관해인: 22구(衆生隨器)
    󰠌󰠏어언해인: 22구(得利益)
  223. 223)『화엄경』 「명난품」의 보수(寶首)보살의 게송이다(대정장 9, p.427 하).
  224. 224)교화를 돕는다는 뜻이다.
  225. 225)『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의 지림(智林)보살의 게송이다(대정장 9, p.466 상).
  226. 226)상동.
  227. 227)인아(人我)와 법아(法我).
  228. 228)신수대장경 제45권(p.728 중)에는 ‘정(井)’자로 되어 있으나, 고려대장경 원문의 글자는 ‘비(菲)’자의 이체자로 추정된다.
  229. 229)운허 현토본에 따라서 ‘아(我)’ 다음에 ‘지(之)’를 삽입하여 옮긴다(운허 현토본, p.63).
  230. 230)수미산 둘레에 여덟 가지의 바다가 있다.
  231. 231)여덟 가지 바다 중의 첫 번째 바다.
  232. 232)지엄, 『수현기』(대정장 35, p.27 하).
  233. 233)상동.
  234. 234)『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에서 설하는 2천 가지 행을 말한다.
  235. 235)이구지(離垢地). 지계바라밀을 설하고 있는데, 그 내용으로서 10선계(善戒)를 설한다.
  236. 236)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불(佛)’자 뒤에 몇 글자가 마멸되어 있다.
  237. 237)정관해인.
  238. 238)일체여래정장삼매(一切如來淨藏三昧). 초회의 설주(說主)가 의지하는 삼매.
  239. 239)견문생(見聞生)ㆍ해행생(解行生)ㆍ증입생(證入生).
  240. 240)운허 현토본은 ‘즉(則)’ 뒤에 ‘범(凡)’을 삽입하여 옮긴다(운허 현토본, p.66).
  241. 241)운허 현토본은 ‘엄(嚴)’ 앞에 ‘향차화(向此華)’를 삽입하여 옮긴다.
  242. 242)운허 현토본은 ‘행(行)’ 다음에 마멸된 세 글자를 ‘인현고(因現故)’로 보았다.
  243. 243)운허 현토본은 ‘편(偏)’ 뒤에 마멸된 한 글자를 ‘거(擧)’로 추정하였으며, ‘거(擧)’ 뒤의 마멸된 한 글자는 추정하지 못하였다(운허 현토본, p.66).
  244. 244)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4 상).
  245. 245)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도신(道身)’으로 되어 있다.
  246. 246)고려대장경 원문의 ‘불석(不石)’은 ‘목석(木石)’을 잘못 판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247. 247)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도신(道身)’으로 되어 있다.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 권5(한불전 4, p.388 상)에도 “道身章云 有文云 一斷一切斷 有文云 實無所斷 彼是則此非 此是則彼非 云何會通 答以德言之 從始無障 以惑望之 覆無盡德(已上)”이라 하여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248. 248)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249. 249)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 권5(한불전 4, p.391 상)에는 “道申章云 問有文云 一斷一切斷 有文云 實無所斷(已上)”이라 하여 각주 248번(한불전 4, p.388 상) 내용 중 앞부분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균여의 저술에 인용된 이 두 곳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p.388 상에는 ‘道身章云’이라 되어 있고, p.391 상에는 ‘道申章云’으로 되어 있다.
  250. 250)지엄, 『수현기』(대정장 35, p.27 하).
  251. 251)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한불전 4, p.387 상)에 “道身章相和尙云 惑者 但用無體智具體用 問無體何得有用 答體是無住實相 迷用爲惑 迷用息耳 無體可斷”이라 하여, 동일한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252. 252)일승을 설하는 화엄종을 가리킨다.
  253. 253)법계・법성・해인.
  254. 254)화엄의 일승원교.
  255. 255)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뇌(惱)’ 뒤의 두 글자가 마멸되었다. 운허 현토본(p.70)에서는 ‘등심(等心)’으로 추정하였으며, 한불전 6(p.79)에서는 ‘등법(等法)’으로 추정하였다.
  256. 256)지덕(智德)ㆍ단덕(斷德)ㆍ은덕(恩德).
  257. 257)의상 화엄의 성불론을 구래성불설(舊來成佛說)이라 한다.
  258. 258)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
  259. 259)『화엄경』 「십지품」(대정장 9, p.564 상).
  260. 260)『화엄경』 「초발심보살공덕품」(대정장 9, p.454 중).
  261. 261)『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대정장 9, p.627 하).
  262. 1)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참조).
  263. 2)‘문(問)’ 아래는 첫째 총체적으로 도인의 의미를 해석하는 부분이다.
  264. 3)문맥에 따라서 ‘일(一)’ 다음에 ‘설인문상(說印文相)’을 삽입하여 옮긴다.
  265. 4)『화엄경』(대정장 9, p.399 중).
  266. 5)문맥에 따라서 ‘문(問)’과 ‘답(答)’을 삽입하여 옮긴다.
  267. 6)4섭법(攝法)을 말한다. 4섭법이란 보살이 중생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네 가지 방법으로서, 보시섭(布施攝)은 상대편이 좋아하는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여 친절한 정의(情誼)를 감동케 하여 이끌어 들이는 것이며, 애어섭(愛語攝)은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친해서 이끌어 들이는 것이며, 이행섭(利行攝)은 동작・언어・생각에 선행으로 중생을 이익 되게 하여 이끌어 들이는 것이며, 동사섭(同事攝)은 상대방의 근기와 성품을 따라 변신하여 친하며 행동을 같이 하여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268. 7)자무량심(慈無量心)・비무량심(悲無量心)・희무량심(喜無量心)・사무량심(捨無量心)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말한다.
  269. 8)문맥에 따라서 ‘이(二)’ 다음에 ‘명자상(明字相)’을 삽입하여 옮긴다. 도인의 모습을 해석하는 세 가지 중에 두 번째이다.
  270. 9)문맥에 따라서 ‘문(問)’과 ‘답(答)’을 삽입하여 옮긴다.
  271. 10)『천친론』은 『십지경론』을 가리키며, 천친은 곧 세친(世親)을 말한다. 『십지경론』 제3권(대정장 12, p.139 상).
  272. 11)“또한 모든 보살이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밝게 설하는 것은 지혜의 지위에 들게 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고, 모든 불법을 잘 분별하여 선택하기 때문이며, 지위의 모든 법을 넓히기 때문이고, 잘 결정하여 모든 법을 설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지가 청정하여 잡스럽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마법(魔法)이 능히 오염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며, 출세간법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불가사의한 지혜 경계를 얻기 때문이며, 나아가 일체지가 경계에 들어감을 얻기 때문이다.” [『십지경론』 제1권(대정장 26, p.124 중)]
  273. 12)흔히 6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두 가지 비유를 쓰고 있으니, 의상의 ‘도인의 비유’와 법장의 ‘집의 비유’이다. 여기에서는 ‘도인의 비유’가 설해진다.
  274. 13)앞의 도인은 굴곡의 도인이며, 뒤의 도인은 근본인을 가리킨다. 굴곡의 인은 별상이며, 근본인은 총상이다. 즉 별상은 총상에 의지하여 총상을 원만케 한다는 뜻이다.
  275. 14)『화엄경』(대정장 9, p.542 중).
  276. 15)『십지경론』 제1권(대정장 26, p.124 하).
  277. 16)상동.
  278. 17)상동.
  279. 18)상동.
  280. 19)상동.
  281. 20)상동.
  282. 21)상동.
  283. 22)상동.
  284. 23)상동.
  285. 24)상동.
  286. 25)상동.
  287. 26)『십지경론』(대정장 26, pp.124 하~125 상 참조).
  288. 27)『승만경』(대정장 12, p.222 하).
  289. 28)『화엄경』 「십지품」을 말한다.
  290. 29)6상은 『화엄경』 「십지품」 등의 초지(初地)에서 10원(願)을 설하는 가운데 그 네 번째 원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온다.
  291. 30)이상은 도인의 모습을 해석하는 중에서 글자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여러 주석가의 주석이 집성된다.
  292. 31)위에서 길게 제시한 본문을 이제부터는 다시 세분하여 그에 해당하는 주석을 집성하는 형식을 취한다. 본문의 내용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본문(本文)’을 삽입하여 옮긴다. 이하 같다.
  293. 32)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294. 33)5중해인 중의 넷째 정관해인(定觀海印)을 말한다. 정관해인은 54각(角)에 배대되었다.
  295. 34)『화엄경』 「입법계품」의 수호일체성주야신장(守護一切城主夜神將)(대정장 10, p.388 중).
  296. 35)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297. 36)“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훌륭한 가르침이 법계에 계합하여 따로 취할 바가 없으므로 ‘방소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298. 37)80권 『화엄경』의 경우는 제7 「여래명호품」에서 제12 「현수보살품」까지이다.
  299. 38)「수호품」은 80권 『화엄경』의 제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을 가리키며, 「보현행품」은 제36 「보현행품」을 가리킨다.
  300. 39)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4 중).
  301. 40)인천교ㆍ시교ㆍ돈교ㆍ종교.
  302. 41)법계도의 선은 한 줄로 이어져 있으며 붉은 색이다.
  303. 42)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304. 43)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1 중).
  305. 44)일승의 원교.
  306. 45)여기서 ‘화상’은 모두 의상 스님을 가리킨다. 이하 같다.
  307. 46)증분의 차원과 머무름이 없는 별교.
  308. 47)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1 하).
  309. 48)9세기 중반 경의 인물. 법융의 『십구장』에 해석을 가한 인물로서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 인용되어 있다.
  310. 49)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7 하).
  311. 50)전기와 생몰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312. 51)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1 하).
  313. 52)위의 책(한불전 2, p.2 중).
  314. 53)위의 책(한불전 2, p.2 하).
  315. 54)『대지도론』을 말한다.
  316. 55)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
  317. 56)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대정장 45, p.507 하).
  318. 57)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대정장 45, p.508 중).
  319. 58)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대정장 45, pp.507 하~508 상). 기와나 서까래 등이 집이라는 전체 속에서 비로소 ‘기와’나 ‘서까래’가 된다는 의미이다.
  320. 59)『화엄경』(대정장 9, p.625 하 참조).
  321. 60)법장, 『탐현기』(대정장, p.282 중).
  322. 61)상동.
  323. 62)상동.
  324. 63)『육상장』은 지엄(智儼)이 저술한 것으로 전하는 6상송(相頌)을 말한다. 그러나 “법장의 『화엄오교장』 의리분제(義理分齊) 중 ‘육상원융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전호련, 「화엄 육상설 연구 1」, 『불교학보』제31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94, p.169)라는 견해도 있다. 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대정장 45, pp.508 하~509 상 참조).
  325. 64)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1 하).
  326. 65)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동상자인고(同相者印故)’로 되어 있으나, 한국불교전서에서는 ‘인(印)’자 앞에 ‘입(入)’자를 넣어 편찬하였다(한불전 2, p.1 하). 번역자는 한국불교전서에 의거하여 ‘입’자를 첨가하여 해석하였다.
  327. 66)도인을 그려 가는 모습을 실제 상상해 보면 ‘모습이 증가한다’는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28. 67)법장, 『탐현기』(대정장 35, p.282 중).
  329. 68)상동.
  330. 69)망상해인(忘像海印).
  331. 70)현상해인(現像海印).
  332. 71)외향해인(外向海印).
  333. 72)정관해인(定觀海印).
  334. 73)어언해인(語言海印).
  335. 74)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1 하).
  336. 75)이 두 가지 해석은 “여총상별상(如總相別相)……중도(中道)”의 문장에서 ‘여(如)’가 어디까지 걸리는가 하는 데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것이다.
  337. 76)즉함[卽]ㆍ여읨[離]ㆍ하나[一]ㆍ다름[異].
  338. 77)한불전 2, p.2 상.
  339. 78)원융과 항포를 설함에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셋째이다.
  340. 79)‘과간(科簡)’은 ‘요간(料簡)’의 오자로 보인다.
  341. 80)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2 상~중).
  342. 81)『십지경론』(대정장 26, p.124 하).
  343. 82)『화엄경』 「십지품」의 설주인 금강장보살의 삼매는 대지혜광명삼매(大智慧光明三昧)이다.
  344. 83)‘문’과 ‘답’을 별행(別行)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자(者)’를 ‘……에 대해서 묻는다’라고 옮긴다. 이하 같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이 번역한다.
  345. 84)인천승ㆍ성문연각ㆍ점교ㆍ돈교ㆍ일승.
  346. 85)지엄, 『공목장』(대정장 45, p.560 중).
  347. 86)지엄, 『수현기』(대정장 35, p.50 중).
  348. 87)혜원(慧遠)을 가리킨다.
  349. 88)법장의 『탐현기』에서 「십지품」을 해석하는 중에 제3 가피분(加被分)을 셋으로 나누는데, 그 둘째이다. 「십지품」에는 이 가피의 행위를 설명하는 데 20구절이 있는 것이다.
  350. 89)불타선다(佛陀扇多). 중인도 출신으로 중국에 와서 『섭대승론』을 번역하였다.
  351. 90)못의 물과 그릇의 물이 다른 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352. 91)타화자재천.
  353. 92)이러한 모든 입이 교량지의 뜻의 차별이 된다(한불전 2, p.2 중).
  354. 93)이러한 모든 입이 교량 지혜의 뜻의 차별과 차례로 더욱 뛰어남이 되는 것이다. 상동.
  355. 94)『탐현기』(대정장 35, p.282 상 참조).
  356. 95)순범과 행장의 전기와 생몰 연대 등은 알 수 없다.
  357. 96)『탐현기』(대정장 35, p.281 중).
  358. 97)법장의 『탐현기』(대정장 35, pp.281 상~282 중)를 가리킨다. ‘……’ 부분은 중략 부분이다.
  359. 98)‘논왕불(論王佛)’은 ‘논주작(論主作)’의 잘못이다.
  360. 99)문맥에 따라서 ‘불(不)’ 앞에 ‘이(二)’를 삽입하여 옮긴다.
  361. 100)연기에 여섯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 셋째이다.
  362. 101)「십지품」을 열로 나누는 중 넷째 정설분(正說分)을 가리킨다. 10지에서 행하는 수행의 내용을 설하는 부분이다.
  363. 102)아래는 지전(地前)을, 위는 불과(佛果)를 가리킨다.
  364. 103)증득에 상대하는 개념으로서 가르침을 의미한다.
  365. 104)네 가지 범주 중의 둘째를 말한다.
  366. 105)8불ㆍ10불 등의 공에 치우치는 부정적인 것일 뿐이며, 여기서 말하는 상즉상입하여 보현의 법을 이루는 긍정적인 측면은 없다는 것이다.
  367. 106)60권 『화엄경』 「십지품」(대정장 9, p.545 중~하)과 80권 『화엄경』 「십지품」(대정장 10, p.181 하) 등에 6상(相)의 연원으로 보이는 명목이 나온다. 「십지품」에서는 10지(地)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서 열 가지 대원(大願)을 설명하는 가운데 네 번째 원에서 6상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동진(東晉)시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418-420년에 번역한 60권 『화엄경』 「십지품」에는 “또 ‘모든 보살의 행하는 바가 광대하고 한량없고 무너지지 않으며 분별이 없고 모든 바라밀에 섭수되며 모든 지(地)의 청정해지는 바이고 모든 도를 돕는 법을 내며, 전체인 모양[總相]ㆍ각각의 모양[別相]ㆍ모양 있음[有相]ㆍ모양 없음[無相]ㆍ이루어짐이 있음[有成]ㆍ무너짐이 있음[有壞]의 일체 보살의 행하는 바 모든 지의 도와 모든 바라밀의 본행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받아 행하여 마음이 증장을 얻게 하리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대주(大周)시대에 실차난타(實叉難陀)가 695-699년에 번역한 80권 『화엄경』 「십지품」에는 “또 큰 원을 세우기를, ‘일체 보살의 행이 넓고 크고 한량없고 무너지지 않고 섞이지 않으며 모든 바라밀을 거두고 모든 지를 청정하게 다스리며, 전체인 모양[總相]ㆍ각각의 모양[別相]ㆍ같은 모양[同相]ㆍ다른 모양[異相]ㆍ이루는 모양[成相]ㆍ무너지는 모양[壞相]의 모든 보살의 행을 여실히 설하며, 일체 중생을 교화해서 그들로 하여금 받아 행하여 마음이 증장케 하여지이다’라고 한다”라 되어 있다.
  368. 107)이상(異相).
  369. 108)괴상(壞相).
  370. 109)『탐현기』의 저자 법장을 말한다.
  371. 110)『화엄경』 「입법계품」을 가리킨다.
  372. 111)10입 중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의 입을 들면 나머지 아홉은 모두 지말이 된다. 이때 근본입 역시 지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73. 112)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대정장 45, p.508 상).
  374. 113)차별인과[修生因果]는 법장의 5주인과 중의 둘째로서 「여래명호품」부터 「불소상광명공덕품」까지 해당되며, 평등인과[修顯因果]는 그 셋째로서 「보현보살행품」과 「보왕여래성기품」에 해당되는 것이다.
  375. 114)『화엄경』 「세간정안품」에 나오는 신중들을 가리키는데, 정확하게는 39류(類)이다.
  376. 115)『화엄경』 「입법계품」의 신중들을 가리킨다.
  377. 116)화엄의 일승에서는 법계는 둘이 아니므로 모두 동생(同生)으로 보고, 법계는 또 차별이 있으므로 모두 이생(異生)으로 보는 것이다.
  378. 117)『승만경』(대정장 12, p.222 하).
  379. 118)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1 중~하).
  380. 119)『화엄경』 「십지품」.
  381. 120)문맥에 따라서 ‘문(問)’을 삽입하여 옮긴다.
  382. 121)종교(終敎)와 같은 의미이다.
  383. 122)의상, 『화엄일승법계도』(한불전 2, p.2 하).
  384. 123)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보득(普得)’으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과 한국불교전서에는 ‘보섭(普攝)’으로 되어 있다.
  385. 124)지엄, 『수현기』(대정장 35, p.17 중).
  386. 125)중문은 상입(相入)의 포함관계를, 즉문은 상즉(相卽)의 동일관계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