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학(學)이라고 하는가?1) 세 가지 뛰어난 학[勝學]을 말하니, 첫째는 증상계학(增上戒學)이며, 둘째는 증상심학(增上心學)이며, 셋째는 증상혜학(增上慧學)이다. 무엇을 ‘증상계학(增上戒學)’이라고 하는가? 구족계[具戒] 등에 안주하는 것이며,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를 ‘증상계학’이라고 한다. 무엇을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고 하는가? 욕악불선법(欲惡不善法)을 여의고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이생희락(離生喜樂)에서 초정려에 들어가서 구족하게 안주하고 내지 능히 제 4정려에 들어가서 구족하게 안주하는 것이다. 이를 ‘증상심학’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가지 무색(無色) 및 그 밖의 모든 등지(等持)ㆍ등지(等至)도 역시 모두 증상심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려에 의지하여 맨 처음으로 능히 성제현관(聖諦現觀)하여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가며, 완전히 멀리 여의는 것[遠離]2)이 아닐지라도 모든 정려는 능히 이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려가 가장 수승한 것이 되기 때문에 치우쳐 설명하여 ‘증상심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 하는가? 4성제(聖諦) 등의 모든 것에 대해서 여실지견하는 것[如實知見]이다. 이를 ‘증상혜학’이라고 한다. 【문】무슨 까닭에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오직 ‘3학’만이 있는 것인가? 【답】정(定)을 건립하는 이치[義] 때문이며, 지소의(智所依)의 이치 때문이며, 소작(所作)을 판별하는 이치 때문인 것이다. ‘정을 건립하는 이치’란 증상계학을 말한다. 왜냐하면 계에 의하여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건립하고 능히 그 마음으로 하여금 삼마지(三摩地)를 접촉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지소의(智所依)의 이치’란 증상심학을 말한다. 왜냐하면 정에 의하여 정정심(正定心)으로 일경성(一境性)을 집중함[念]으로 소지사(所知事)에 대해서 여실지(如實知)와 여실견(如實見)이 있어서 구르기 때문이다. ‘소작(所作)을 판별하는 이치’란 증상혜학을 말한다. 왜냐하면 선청정(善淸淨)에 의해서 지와 견에 있어서 능히 구경을 증득하고 제 번뇌를 끊기 때문이다. 번뇌를 끊기 때문에 이것은 자신에게 의리(義利)이며, 이것은 뛰어난 소작이며, 이것을 뛰어넘어서는 다시는 뛰어난 소작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오직 3학만이 있는 것이다. 【문】무슨 까닭[緣故]에 3학(學)은 이와 같이 차제(次第)인 것인가? 【답】먼저 시라(尸羅)에 대해서 선청정(善淸淨)하기 때문에 곧바로 우회(憂悔)가 없고, 우회가 없기 때문에 환희하고 안락하며, 낙(樂)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정정(正定)을 얻으며, 마음에 정을 얻기 때문에 능히 여실지(如實知)하고 능히 여실견(如實見)하고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싫어함[厭]을 일으키고 더러움을 여의고, 더러움을 여의기 때문에 곧바로 해탈을 얻고, 해탈을 얻기 때문에 무소작(無所作)을 증득하여 구경열반(究竟涅槃)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맨 처음의 정계(淨戒)를 수습하고, 점차 다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후에 무작(無作)을 증득하고, 구경열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3학은 이와 같이 차제인 것이다. 【문】무슨 까닭에 3학(學)을 증상(增上)의 계(戒)ㆍ심(心)ㆍ혜(慧)라고 이름하는가? 【답】소취(所趣)의 의미[義] 때문에, 최승(最勝)의 의미 때문에, 증상(增上)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소취(所趣)의 의미’라고 하는가? 증상심(增上心)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정계(淨戒)를 닦는 것을 증상계학(增上戒學)이라고 하며, 증상혜(增上慧)로 나아가기 위해서 정심(定心)을 닦는 것을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고 하며, 번뇌의 끊음에 나아가기 위해서 지견(智見)을 닦는 것을 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소취의 의미’라고 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증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최승(最勝)의 의미’라고 하는가? 증상계학과 증상심학과 증상혜학은 오직 성교(聖敎)에만 유독 있고 이 세 가지는 외도(外道)와는 공통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최승의 의미’라고 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증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혹은 증상심학에서 능히 증상혜학을 인발(引發)하는 것이 있고, 혹은 증상혜학에서 능히 증상심학을 인발하는 것이 있다. 성제자(聖弟子)가 근본정려(根本靜慮)를 아직 얻지 못했지만 먼저 견적(見跡)을 배우고 후에 나아가 수도소단(修道所斷)의 일체의 번뇌를 끊기 위해서 정근가행(正勤加行)하고 염각지(念覺支)를 닦고 내지 4각지(覺支)를 닦는 것이다. 이를 ‘증상혜학으로부터 증상심학을 인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증상심학으로부터 증상혜학을 인발하는 것’이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내용과 같다. 또한 혹은 증상계학은 있으면서 증상심이 없고 증상혜도 없는 것이 있고 혹은 증상계학은 있으면서 역시 증상심도 있고 오직 증상혜만이 없는 것이 있고, 증상혜학은 있으면서 증상계도 없고 증상심도 없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 증상혜학이 있으면 필히 반드시 3학을 구족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세 가지 학을 건립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유가사(瑜伽師)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야만 한다. 학에는 다시 세 가지의 보특가라가 있으며, 이 3학에 의지하여 성제현관[諦現觀]에 들어가는 것이다. ‘3’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미이욕(未離欲)이며, 둘째는 배이욕(倍離欲)이며, 셋째는 이이욕(已離欲)이다. 이 가운데에 모든 욕(欲)에 대해서 전혀 여의지 못한 자3)는 부지런히 닦고 가행하여 성제현관에 들어가고 여러 제(諦)에 대해서 이미 현관(現觀)을 얻고 나서 예류과(預流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배이욕이란 이 때에 마땅히 일래과(一來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이욕이란 이 때에 마땅히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다시 3근(根)이 있다. 첫째는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이며, 둘째는 이지근(已知根)이며, 셋째는 구지근(具知根)이다. 어째서 이와 같은 3근(根)을 건립하는가? 여러 제(諦)에 대해서 아직 현관하지 못한 자는 가행하여 여러 제현관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니, 이것에 의해서 미지욕지근을 건립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 제에 대해서 이미 현관을 얻어서 유학위(有學; 有學位)에 있으면 이것에 의해서 이지근을 건립하는 것이다. 만약 아라한으로서 소작을 이미 이루었고[辦] 무학위(無學位)에 머무르면 이것에 의해서 구지근을 건립하는 것이다. 다시 3해탈문(解脫門)이 있다. 첫째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이며, 둘째는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며, 셋째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다. 어째서 3해탈문을 건립하는가? 소지경(所知境)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비유(非有)이다. 유(有)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위(有爲)이고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유위에 대해서는 또 3계(界)에 계박된[所繫] 5온(蘊)을 설하고, 무위에 대해서는 또 열반을 설하며,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유위와 무위를 합하여 설명하여 ‘유(有)’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아(我)를 설하거나 혹은 유정ㆍ명자ㆍ생자 등을 설명하는 것을 비유(非有)라고 이름한다. 유위에 대해서 과실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과환(過患)을 보기 때문에, 기원할 것이 없으며 기원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서 무원해탈문을 건립하는 것이다. 유위에 대해서는 기원할 것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열반에 대해서 깊은 기원을 일으켜서 깊은 적정[極寂靜]을 보고 깊은 미묘[甚微妙]를 보고 영원한 출리를 보고 거기에서 영원한 출리를 보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서 무상해탈문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 비유의 무소유(無所有)에 대해서 기원하는 것에 있지 않고 기원하는 것이 없지도 않으니, 그 비유 그대로 돌리면 곧 이와 같으며 비유라고 알고 비유라고 보는 것이니, 이것에 의지하여 공해탈문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를 ‘3해탈문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수순학법(隨順學法)’이라고 하는가?4) 말하자면 열 가지 위역학법(違逆學法)이 있어서 그것을 대치하기 때문에 열 가지의 수순학법(隨順學法)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열 가지의 위역학법(違逆學法)’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모읍(母邑)은 소년ㆍ성장기에 좋은[可愛] 형색(形色)을 바르게 수학(修學)하는 선남자(善男子) 등에게 상품(上品)의 장애가 되는 것이며, 둘째는 살가야(薩迦耶)에 포함되는 제행(諸行)에 대하여 일으키는 애착이며, 셋째는 난타(嬾墮)ㆍ해태(懈怠)이며, 넷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이며, 다섯째는 단식(段食)에 의지해서 좋은 맛을 탐착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여러 세간의 갖가지 희론(戲論)의 하나가 아닌 많고 각각의 품류를 사념(思念)하는 가운데에 욕탐애(欲貪愛)를 일으키는 것이며, 일곱째는 제법을 사유하는 유가(瑜伽)를 작의하는 데 있어서의 과환이다. 이것5)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열 한가지를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여러 제(諦)ㆍ보(寶)ㆍ온(蘊)ㆍ업(業)ㆍ과(果)에 대해서 유예(猶豫)하고 의혹하는 것이며, 둘째는 수단(修斷)을 즐기는 자의 몸의 여러 추중(麤重)이며, 셋째는 게으름[慢緩] 있는 자가 지관(止觀)을 닦는 데 과환을 작의하여 혼침ㆍ수면으로 그 마음을 가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극히 줄어들게 하는 것이며, 넷째는 지나치게 용맹정진하는 자의 몸의 피로와 마음의 시달림이며, 다섯째는 지나치게 하열(下劣)하게 정진하는 자에 있어서 승진(勝進)을 얻지 못하고 선품(善品)을 퇴실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작은 이양(利養)ㆍ명예ㆍ칭탄(稱歎)에 대해서 어떤 하나의[隨一]의 즐거움[樂]에 대해서 깊이 기쁨[欣喜]를 일으키는 것이며, 일곱째는 도거(掉擧)하여 고요하지 않으며 들떠 있고[踊躍] 조급한 것[躁擾]이며, 여덟째는 살가야가 영원히 멸한 열반에 대해서 논란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며, 아홉째는 여러 언설(言說)에 대해서 척도에 맞지 않게 가행하고 언론(言論)이 너무나 지나쳐 법론(法論)을 설명할지라도 절복(折伏)을 좋아하여 쟁론의 방편[諍方便]을 일으키는 것이며, 열째는 먼저 보았던 것과 들었던 것과 느꼈던 것의 하나가 아닌 많은 각각의 품류의 여러 경계에 대해서 마음이 치닫고 마음이 흩어지는 것이며, 열 한 째는 마땅히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不應思處]에 대해서 억지로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법을 사유하고 유가를 작의하는 데의 과환’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덟째는 여러 정려(靜慮)ㆍ등지(靜慮等至)의 즐거움[樂]에 대해서 깊게 애미(愛味)를 내는 것이며, 아홉째는 무상정(無想定)에 증입(證入)하는 것을 낙욕(樂欲)하는 자가 제행에 대해서 따르거나[隨順] 잃는[流散] 것이며, 열째는 몸을 부딪치는 괴로운 느낌과 내지 목숨을 빼앗는 괴로움의 느낌이 있을 때에 수명을 탐애하고 살아남기를 희망하며 이 희망에 따라서 애타게 탄식[傷歎]하면서 정신을 잃는 것[迷悶]이다. 이것을 ‘열 가지의 위역학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위와 같은 열 가지의 위역학법을 대치하는 수순학법’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정상(不淨想)이며, 둘째는 무상상(無常想)이며, 셋째는 무상고상(無常苦想)이며, 넷째는 고무아상(苦無我想)이며, 다섯째는 염역식상(厭逆食想)이며, 여섯째는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이며, 일곱째는 광명상(光明想)이며, 여덟째는 이욕상(離欲想)이며, 아홉째는 멸상(滅想)이며, 열째는 사상(死想)이다. 이와 같은 10상[十想]을 잘 닦고 잘 익히고 자주 잘 수습하면 열 가지 학을 장애하는 법인 위역학법을 능히 끊을 수 있다. 여기에는 네 가지의 광명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법의 광명이며, 둘째는 의(義)의 광명이며, 셋째는 사마타(奢摩他)의 광명이며, 넷째는 비발사나(毘鉢舍那)의 광명이다. 이 네 가지의 광명에 의하여 더욱 뛰어난[增上] 광명상을 세우니, 지금 이 이치 속의 의미는 능히 제법을 사유하고 유가를 작의하는 데의 장애법을 끊는 것을 취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열 가지의 수순학법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숙인(宿因)이고, 둘째는 가르침을 수순하는 것[隨順敎]이고, 셋째는 여리하게 가행하는 것[如理加行]이고, 넷째는 무간과 은중의 소작[無間殷重所作]이며, 다섯째는 맹리한 낙욕[猛利樂欲]이며, 여섯째는 유가를 지니는 힘[持瑜伽力]이며, 일곱째는 신심의 추중을 그치게 하는 것[止息身心麤重]이며, 여덟째는 자주 자주 관찰하는 것[數數觀察]이며, 아홉째는 겁약함이 있지 않은 것[無有怯弱]이며, 열째는 증상만을 여의는 것[離增上慢]이다. 무엇을 ‘숙인(宿因)’이라고 하는가? 먼저 익혔던 제근(諸根)을 성숙(成熟)하고 제근을 적집(積集)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침을 수순하는 것[隨順敎]’이라고 하는가? 설한 바 가르침에 대해서 전도 없이 점차적으로 하는 것이다. 무엇을 ‘여리하게 가행하는 것[如理加行]’이라고 하는가? 그 가르침과 같이 전도 없이 수행하고 그와 같이 수행하여 능히 정견(正見)을 내는 것이다. 무엇을 ‘무간과 은중의 소작[無間殷重所作]’이라고 하는가? 위와 같이 바른 가행에 의하기 때문에 여러 선품(善品)에 대하여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지 않고 속히 모든 선품을 쌓고 익히는 것이다. 무엇을 ‘맹리한 낙욕[猛利樂欲]’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위에 있는 해탈에 대하여 바램을 일으켜서 ‘나는 어느 때라야 이곳에서 능히 구족하게 머무르게 되겠는가? 여러 성자들이 이곳에서 구족하게 머무르는 것과 같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유가를 지니는 힘[持瑜伽力]’이라고 하는가? 두 가지 인연은 능히 유가를 지니는 힘을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니, 첫째는 본성이 이근(利根)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오랜 시간 동안 자주 수습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신심의 추중을 그치게 하는 것[止息身心麤重]’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몸이 피곤하거나 몸이 고달픔으로 인해서 몸의 추중을 일으키고 마음의 추중을 일으킬 경우에는 이것은 위의(威儀)를 쉽게 벗어나는 것에 의해서 곧바로 그치게 하고, 혹은 심한 심(尋)ㆍ사(伺)에 의해서 몸의 추중을 일으키고 마음의 추중을 일으킬 경우에는 이것은 내심(內心)의 적지방편(寂止方便)에 의해서 곧바로 그치게 하며, 혹은 마음이 줄어들고 마음이 열악해져서 혼침ㆍ수면에 얽매어짐으로써 몸의 추중이 일어나고 마음의 추중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이것은 증상혜법의 비발사나(毘鉢舍那)에 따르는 정작의(淨作意)에 의해서 곧바로 그치게 하며, 혹은 본성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번뇌품이 남아 있어서 신심의 추중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것은 계속적으로 부지런하게 정도(正道)를 닦음에 의해서 곧바로 그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자주 자주 관찰하는 것[數數觀察]’이라고 하는가? 시라(尸羅)에 의해서 악작(惡作)을 자주 자주 관찰하여 짓지 않는 것이며 선작(善作)을 자주 자주 관찰하여 지으며, 그 악작에 대해서는 짓지 않고 굴리지 않으며 그 선작에 대해서는 짓고 물러서지 않으며, 그 악작에 대해서는 짓더라도 버리며 그 선작에 대해서는 짓더라도 버리지 않으며, 또한 번뇌의 끊음과 아직 끊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관찰하고 작의하며 증상력에 의해서 자주 자주 관찰하며, 만약 이미 끊어졌다고 알면 곧바로 환희를 일으키고 만약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알면 곧바로 정도를 자주 부지런하게 닦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겁약함이 있지 않은 것[無有怯弱]’이라고 하는가? 후시(後時)에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보아야 하고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겁약을 일으키고 그 마음을 피곤[勞倦]하게 하고 그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匱損]이니, 그것은 겁약을 일으키고 나서는 굳게 집착하지 않고 능히 속히 끊어 없앤다. 무엇을 ‘증상만을 여의는 것[離增上慢]’이라고 하는가? 얻은 것과 접촉한 것과 증득한 것에 대해서 증상만이 없고 전도의 집착을 여의며 얻은 진실에 대해서는 득상(得想)을 일으키고 접촉한 진실에 대해서는 촉상(觸想)을 일으키고 증득한 진실에 대해서는 증상(證想)을 일으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은 즐겨 학을 닦는 여러 유가사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수학해야만 할 바이며,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때에도 항상 수순하며 거스르는 것이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수순학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유가가 무너지는 것[瑜伽壞]’이라고 하는가?6) 유가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간략하게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필경으로 유가가 무너지는 것[畢竟瑜伽壞]이며. 둘째는 잠시로 유가가 무너지는 것[暫時瑜伽壞]이며, 셋째는 얻은 유가를 퇴실하는 것[退失所得瑜伽壞]이며, 넷째는 삿된 행으로 지은 유가가 무너지는 것[邪行所得瑜伽壞]이다. ‘필경으로 유가가 무너지는 것[畢竟瑜伽壞]’란 종성(種姓)이 없는 보특가라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몸에는 능히 열반으로 취향할 법이 없기 때문에, 필경에는 출세간의 유가를 잃고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잠시로 유가가 무너지는 것[暫時瑜伽壞]’란 종성이 있는 보특가라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몸에는 능히 열반으로 취향할 법이 있기 때문에, 비록 외연(外緣)을 결여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앞으로 연(緣)을 모아서 유가를 수습하고 그것을 바로 일으키게끔[現起]하고 잘 수습하고 나서는 반열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니고 있는 유가를 ‘잠시로 잃고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얻은 유가를 퇴실하는 것[退失所得瑜伽壞]’이란 어떤 사람이 지(智)와 견(見)에 있어서 얻는 것과 접촉한 것과 증득한 것을 안락하게 머물게 하는 것[安樂住]을 퇴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삿된 행으로 지은 유가가 무너지는 것[邪行所得瑜伽壞]’이란 어떤 사람이 정리(正理)대로 정근수행(精勤修行)하지 않아서 비록 많은 공력을 들었지만 일체의 유가를 능히 성취하지도[成辦] 못하고 선법(善法)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의 번뇌의 성품이 많고 진예(塵穢)가 많으면서도 식(識)이 총예(聰銳)하고 각혜(覺慧)가 맹리하여 구생각(俱生覺)을 성취하고 잘 들은 것을 포괄하여 들은 것에 대하여 적던 많던 간에 끝까지[究竟]하고서는, 간혹 공한처[空閑]에 머무를 때에, 그 곳에 찾아온 성품됨이 순진한[質直] 어떤 재가와 출가가에게 설법해 주어서 마음을 환희하게끔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교사(矯詐)을 행하고 헛되이 갖가지 몸과 말과 상응하는 적절한[調善] 소작을 나타내어서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이양(利養)ㆍ공경(恭敬)ㆍ칭송(稱頌)ㆍ대복덕상(大福德想)을 불러모으고, 갖가지의 옷과 음식[衣食]ㆍ와구(臥具)ㆍ병에 대한 의약[病緣醫藥]ㆍ몸을 돕는 도구[資身什具]을 얻고 여러 국왕ㆍ대신ㆍ거사 내지 상주에게 공경과 존중을 받아서 모두 함께 ‘이분은 아라한이시다.’라고 말하게끔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그를 따라서 회전(廻轉)하는 출가와 재가대중의 제자들에게 연연해하고 친애하고 수순하게 하면서도 따라 움직이며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하여 다시 이러한 생각 ‘이 여러 출가와 재가의 제자들은 나를 믿고 따르며 모두 함께 나를 아라한이라고 말하니, 그들이 만약 유가작의와 지관 등의 것에 의거하고서는 찾아와서 나에게 청하여 물으면, 나는 그들의 질문을 받고나면 간혹 대답할 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러한 일로 인하여 나한테 믿고 향했던 마음[信向心]을 버리게 될 것이며, 다시는 나를 아라한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로 인하여 이양과 공경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스스로 사유하고 주량(籌量)하고 관찰하여 유가를 안립해야만 한다.’을 한다. 그는 이러한 일에 의한 증상력 때문에, 이양ㆍ공경ㆍ명예에 집착하여 홀로 공한처에 있으면서 스스로 제(諦)를 사유하고 주량하고 관찰하여 유가를 안립하지만, 이 유가는 계경을 따르지도 않고 계율을 나타내지도 않고 법성을 거스리는 것이다. 또한 삼장(三藏)을 잘 지니는 비구들이 있으면 그는 그한테 자신의 유가를 숨기고 나타내 보이려고 하지 않고, 여러 재가와 출가의 재자들한테는 사사롭게 몰래 가르침을 나타내고는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삼장의 가르침을 잘 지니고 있는 자가 있어서 그의 이와 같은 유가처(瑜伽處)을 듣고 나서 경(經)으로써 검증하면 계경에 따르지 않고 율(律)로써 비추면 계율을 나타내지 않고 법(法)으로써 관찰하면 법성을 거스리니,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곧바로 믿고 받들지 않고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나를 힐란하고 앞다투어서 싸움이 일어나고, 이것으로 인하여 국왕ㆍ대신ㆍ거사 내지 재산 많은 장자ㆍ상주가 다시는 나를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으며, 다시는 옷과 음식ㆍ와구ㆍ병에 대한 의약ㆍ몸을 돕는 도구을 획득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이양과 공경을 탐착하는 증상력 때문에 비법(非法)에 대하여 법상(法想)을 일으키고 부장상(覆藏想)을 일으키고 나쁜 욕락(欲樂)을 일으키고 비법을 일으키고 개시하여 법이라고 하는데도, 그의 소견(所見)을 인정하는 자들은 또한 비법에 대하여 ‘이것은 법상이다’라고 일으키고 우매하고 둔하여 비법에 대하여 법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가르침대로 정진하며 수행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삿된 행인 줄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삿된 행으로 지은 유가가 무너지는 것[邪行所作瑜伽失壞]’라고 하는 것이다. 형상은 정법과 흡사하지만 진실한 정법이 아니며, 능히 정법을 장애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가사(瑜伽師)로서 정려를 부지런히 닦는 비구들은 이 네 가지의 유가를 무너뜨리는 법에 대하여 응당 바르게 두루 알고 멀리 져버려야만 한다. 무엇을 ‘유가(瑜伽)’라고 하는가?7) 네 가지의 유가를 말하니, 첫째는 믿음[信]이며, 둘째는 의욕[欲]이며, 셋째는 정진(精進)이며, 넷째는 방편(方便)이다. 그 믿음[信]에는 두 가지의 행상(行相)과 두 가지의 의지처[依處]가 있는 줄을 알아야만 하니, 두 가지의 행상이란 첫째는 믿음을 따르는 행상[信順行相]이며 둘째는 청정의 행상[淸淨行相]이다. 두 가지의 의지처란 제법을 관찰하는 도리의 의지처[觀察諸法道理依處]이며 둘째는 보특가라를 신해하는 신통력의 의지처[信解補特伽羅神力依處]이다. 의욕[欲]에는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증득하기 위한 의욕[爲證得欲]이며 둘째는 청문하기 위한 의욕[爲請問欲]이며 셋째는 자량을 수집하기 위한 의욕[爲修集資糧欲]이며 넷째는 유가를 수순하기 위한 의욕[爲隨順瑜伽欲]이다. ‘증득하기 위한 의욕’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더욱 위의 해탈[上解脫]에 대하여 바램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과 같다. ‘청문하기 위한 의욕’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바램을 일으키고 나서는 승가람(僧伽藍)에 머물면서 유식(有識)과 함께 범행을 닦아서 유가의 묘지(妙智)를 성취한 여러 사람들한테 찾아가서 듣지 못한 것을 들으려 하고 끝까지[究竟] 들으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량을 수집하기 위한 의욕[爲修集資糧欲]’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계율의(戒律儀)의 청정을 위하여 근율의(根律儀)의 청정을 위하여 음식에 대하여 양을 알고 수면을 살펴서 줄이며 바르게 알면서[正知] 머무르는 가운데에 전전하여 더욱 뛰어나게 바램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가를 수순하기 위한 의욕’이란 무간가행(無間加行)과 은중가행(殷重加行)을 하면서 도(道)을 수습하는 것에 대하여 비램을 일으키고 흔락(欣樂)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진(精進)에는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듣기 위한 정진[爲聞精進]이며, 둘째는 사유하기 위한 정진[爲思精進]이며, 셋째는 닦기 위한 정진[爲修精進]이며, 넷째는 장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 정진[爲障淨精進]이다. ‘듣기 위한 정진’이란 듣지 않은 것을 들으려 하고, 듣고 나서는 구경하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마음을 용맹하게 하여 심결(審決)하고 가행하는 것이다. ‘사유하기 위한 정진’이란 들은 바 법대로 홀로 공한처에 머무르면서 그 뜻을 사유하고 주량(籌量)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닦기 위한 정진’이란 적정에 들어가 시시때때로 지관(止觀)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장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 정진’이란 밤낮으로 책려(策勵)하며 정근(精勤)하고 경행하고 연좌하여 여러 가지 장법(障法)으로부터 그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부지런하게 마음을 용맹하게 하여 심결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방편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시라율의(尸羅律儀)의 증상력 때문이며, 잘 그 염(念)을 지키고 잘 염을 지키기 때문이며, 능히 방일(放逸)한 일이 없이 그 마음을 지키고 여러 선법을 닦기 때문이며, 방일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올바르게 사마타와 증상혜법의 비발사나를 닦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유가에 열 여섯 가지가 있는 줄 알라. 이 가운데에 처음의 믿음에 의하기 때문에 마땅히 얻어야 할 이치[應得義]에 대해서 깊이 신해(信解)를 일으키며, 마땅히 얻어야 할 이치에 대해서 믿고 나서는 여러 가지 선법(善法)에 대해서 낙욕(樂欲)을 일으키며, 낙욕에 의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책려하며, 안주하여 정근하고 견고한 용맹으로써 정진하고 나서는 방편을 섭수하여 능히 얻지 못한 것을 얻으며, 능히 접촉하지 못한 것을 접촉하며,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법을 설명하여 ‘유가’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작의(作意)’라고 하는가?8) 네 가지의 작의를 말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역려운전작의(力勵運轉作意)이고, 둘째는 유간운전작의(有間運轉作意)이며, 셋째는 무간운전작의(無間運轉作意)이며, 넷째는 무공용운전작의(無功用運轉作意)이다. 무엇을 ‘역려운전작의(力勵運轉作意)’라고 하는가? 처음 업을 닦는 자[初修業者]가 마음을 안으로 안주(安住)하고 등주(等住)하도록 하여 혹은 제법에 대해서 전도 없이 간택(簡擇)하고 내지 닦아야 할 작의를 아직 얻지 못한 때에는 작의를 더욱 힘써[力勵] 운전하고 더욱 힘쓰기 때문에 그 마음을 꺽어서 그 마음을 하나의 경계[一境]에 머무르도록 하기 때문에 ‘역려운전작의’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유간운전작의(有間運轉作意)’라고 하는가? 닦아야 할 작의를 얻고 나서도 세간과 출세간도에 점차로 승진(勝進)하여 상을 요달하는 작의[了相作意]에 있어서는 삼마지(三摩地)와 자량 사이에 혼잡(混雜)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한결같이[一向] 순수하게 수행하며 굴러가지 못하기 때문에, ‘유간운전작의’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간운전작의(無間運轉作意)’라고 하는가? 상을 요달하는 작의로부터 그 이후에 내지 가행구경작의(加行究竟作意)을 ‘무간운전작의’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공용운전작의(無功用運轉作意)’라고 하는가?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를 ‘무공용운전작의’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그 밖에도 네 가지의 작의가 있다. 첫째는 수순작의(隨順作意)이며, 둘째는 대치작의(對治作意)이며, 셋째는 순청정작의(順淸淨作意)이며, 넷째는 순관찰작의(順觀察作意)이다. 무엇을 ‘수순작의(隨順作意)’라고 하는가? 소연에 대해서 깊은 염괴(厭壞)를 일으키고 바른 가행을 일으키지만 아직은 혹(惑)을 끊지는 않은 것이다. 무엇을 ‘대치작의(對治作意)’라고 하는가? 능히 혹(惑)을 끊는 것이다. 무엇을 ‘순청정작의(順淸淨作意)’라고 하는가? 마음이 쳐져서 오그라들면 정묘상(淨妙相)을 취하여 북돋아서 희열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순관찰작의(順觀察作意)’라고 하는가? 관찰하는 작의이다. 이 작의의 증상력 때문에 번뇌가 끊어는 것과 아직 끊어지지 않는 것을 순관(順觀)하는 것이다. 【문】소연경(所緣境)에 대하여 바르게 작의할 때 몇 가지 상(相)을 사유하는가? 【답】네 가지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소연상(所緣相)이며, 둘째는 인연상(因緣相)이며, 셋째는 마땅히 원리해야 할 상[應遠離相]이며, 넷째는 마땅히 수습해야 할 상[應修習相]이다. ‘소연상(所緣相)’이란 소지사(所知事)와 동분(同分)인 영상(影像)이 명료하게 현현하는 것이다. ‘인연상(因緣相)’이란 삼마지의 자량(資糧)을 적집하여 가르침에서 지도하는 것과 수행하는 것이 함께 작용하고, 맹리하게 낙욕하며 싫어할 만한 법[可厭法]에 대해서는 깊이 염환(厭患)을 일으키고, 어지러움[亂]과 어지럽지 않음[不亂]을 능히 자세히 두루 알고, 다른 것 즉 사람의 소작이나 비인(非人)의 소작이나 음성의 소작이나 공용의 소작들에 시달림을 받지 않는 것이다. 만약 비발사나를 우선[上首]로 삼으면 안으로 그 마음을 줄여서 매우 맹성(猛盛)하게 한 후에 인연상을 관(觀)하고, 만약 사마타를 우선로 삼으면 승관(勝觀)을 일으켜서 매우 맹성하게 한 후에 인연상을 지(止)한다. 마땅히 원리해야 할 상[應遠離相]이란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침상(沈相)이며, 둘째는 도상(掉相)이며, 셋째는 착상(著相)이며, 넷째는 난상(亂相)이다. ‘침상(沈相)’이란 소연상과 인연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하열하게 하는 것이다. ‘도상(掉相)’이란 소연상과 인연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고거(高擧)하게 하는 것이다. ‘착상(著相)’이란 소연상과 인연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에 대해서 염오를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켜서 여러 가지 괴롭고 어지러움[惱亂]을 일으킴을 짓게 하는 것이다. ‘난상(亂相)이란 소연상과 인연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밖으로 흩어지고 요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들은 앞의 등인지(等引地)에서 이미 설명한 내용과 같다. 【문】이와 같이 작의하여 소연경에 대하여 승해(勝解)를 일으킬 때 몇 가지의 승해가 있는가? 【답】아홉 가지이다. 무엇을 ‘아홉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유광정승해(有光淨勝解)이며, 둘째는 무광정승해(無光淨勝解)이며, 셋째는 지둔승해(遲鈍勝解)이며, 넷째는 첩리승해(捷利勝解)이며, 다섯째는 협소승해(狹小勝解)이며, 여섯째는 광대승해(廣大勝解)이며, 일곱째는 무량승해(無量勝解)이며, 여덟째는 청정승해(淸淨勝解)이며, 아홉째는 불청정승해(不淸淨勝解)이다. ‘유광정승해(有光淨勝解)’란 광명상(光明相)에 대해서 마음을 맑게 하여 잘 취하고, 광명과 함께 하는 모든 승해를 말한다. ‘무광정승해(無光淨勝解)’란 광명상에 대해서 능히 잘 취하지 않고, 암매(闇昧)와 함께 하는 모든 승해를 말한다. ‘지둔승해(遲鈍勝解)’란 둔근(鈍根)의 몸에 있는 모든 승해를 말한다. ‘첩리승해(捷利勝解)’란 이근(利根)의 몸에 있는 모든 승해를 말한다. ‘협소승해(狹小勝解)’란 협소한 믿음의 의욕과 함께 작용하는 승해와 협소한 소연을 의해(意解)하는 승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작의는 협소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연도 협소하기 때문에 ‘협소승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광대승해(廣大勝解)’란 광대한 믿음과 의욕과 함께 작용하는 승해와 광대한 소연을 의해하는 승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작의는 광대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연도 광대하기 때문에 ‘광대승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량승해(無量勝解)’란 무변(無邊)ㆍ무제(無際)의 믿음ㆍ의욕과 함께 작용하는 승해와 무변ㆍ무제의 소연을 의해하는 승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작의는 무량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연도 무량하기 때문에 ‘무량승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청정승해(淸淨勝解)’란 이미 잘 닦았고 이미 성만(成滿)하였고 이미 구경한 것과 함께 작용하는 승해를 말한다. ‘불청정승해(不淸淨勝解)’란 아직 잘 닦지 못했고 아직 잘 성만하지 못하였고 아직 구경하지 못한 것과 함께 작용하는 승해를 말한다. 【문】유가지(瑜伽地)를 닦는 사람에게는 무릇 몇 가지 종류의 유가소작(瑜伽所作)이 있는가?9) 【답】네 가지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소의가 멸하는 것[所依滅]이며, 둘째는 소의가 구르는 것[所依轉]이며, 셋째는 소연을 두루 아는 것[遍知所緣]이며, 넷째는 소연을 애락하는 것[愛樂所緣]이다. ‘소의가 멸하는 것[所依滅]’과 소의가 구르는 것[所依轉]이란 부지런하게 유가의 작의를 수습하기 때문에 모든 추중과 함께 작용하는 소의가 점차적으로 멸하고, 모든 경안(輕安)과 함께 작용하는 소의가 점차적으로 구르는 것이니, 이를 ‘소의가 멸하는 것과 소의가 구르는 것의 유가소작(瑜伽所作)’이라고 한다. 소연을 두루 아는 것[遍知所緣]과 소연을 애락하는 것[愛樂所緣]이란 어떤 경우는 소연을 두루 아는 경우와 소연을 애락하는 경우에서 소의가 멸하고 구르는 것을 함께 함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소연을 두루 아는 것과 소연을 애락하는 증상력에 의하기 때문에 소의가 멸하고 소의가 구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소연을 두루 아는 것과 소연을 애락하는 것에서 소의의 청정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니, 이러한 소의의 청정의 증상력에 의하기 때문에 소연을 두루 아는 것으로 하여금 선청정(善淸淨)을 얻게끔 하고 소연을 애락하는 것으로 하여금 선청정을 얻게끔 하는 것이다. 이 소작을 ‘성판될 때에 구르는 네 가지 유가를 닦는 자의 유가소작’라고 한다. 【문】유가를 닦는 스승은 무릇 몇 가지 종류가 있는가?10) 【답】세 가지이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처음 업을 닦는 유가사[初修業瑜伽師]이며, 둘째는 이미 수행을 익힌 유가사[已習行瑜伽師]이며, 셋째는 이미 작의를 건너간 유가사[已度作意瑜伽師]이다. 무엇을 ‘처음 업을 닦는 유가사[初修業瑜伽師]라고 하는가? 두 가지의 처음 업을 닦는 자가 있으니, 첫째는 작의에 대해서 처음 업을 닦는 자이며, 둘째는 번뇌를 깨끗하게 하는 데에 처음 업을 닦는 자이다. 무엇을 ‘작의에 대해서 처음 업을 닦는 자’라고 하는가? 처음 업을 닦는 보특가라가 하나의 연(緣)에 안주하여 부지런히 닦고 작의하며 내지 아직까지는 닦아야 할 작의를 얻지 못하고 아직까지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능히 촉증(觸證)하지는 못한 것이다. 무엇을 ‘번뇌를 깨끗하게 하는 데에 처음 업을 닦는 자’라고 하는가? 이미 닦아야 할 작의를 증득하고 여러 번뇌들에 대해서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하여, 요상작의(了相作意)를 일으키고 섭수하고 정근하여 수습하는 것을 ‘번뇌를 청정하게 하는 데에 처음 업을 닦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미 수행을 익힌 유가사[已修習瑜伽師]’라고 하는가? 요상작의를 제외한 그 밖의 가행구경의 다섯 가지 작의에 대해서 이미 잘 수습한 것이다. 무엇을 ‘이미 작의를 건너간 유가사[已度作意瑜伽師]’라고 하는가? 가행구경과작의의 단계[加行究竟果作意位]에 머무르고 이것에 의해서 방편을 가행하여 닦아야 할 작의를 뛰어넘고 수과(修果)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설명하여 ‘이미 작의를 건너간 것[已度作意]’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처음 선법을 수습하려는 의욕[修習善法欲] 이후로부터 내지 아직까지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근(善根)을 일으키지 않을 때까지 이러한 기간에 대해서 ‘처음 업을 닦는 것[初修業]’이라고 한다. 만약 이미 순결택분의 선근, 즉 난(煖)ㆍ정(頂)ㆍ제를 수순하는 인[隨順諦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을 일으키면 ‘이미 수행을 익힌 것[已習行]’이라고 하며, 만약 이미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증입하여 제현관(諦現觀)을 얻고 타연(他緣)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성교(聖敎)에 대해서 그 밖의 연에 의해 빼앗기지 않으면, 마땅히 이러한 때를 ‘작의를 건너간 것[度作意]’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타연(他緣)에 의한 작의를 뛰어넘고 타연이 있지 않은 데에 있는 작의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런 까닭에 ‘이미 작의를 건너간 것[已度作意]’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유가를 닦는 것[瑜伽修]’라고 하는가?11)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을 닦는 것[想修]이며, 둘째는 보리분을 닦는 것[菩提分修]을 말한다. 무엇을 ‘상을 닦는 것[想修]’라고 하는가? 어떤 경우에 세간도(世間道)를 닦을 때 여러 하지(下地)에서 과환상(過患想)을 닦고, 어떤 경우에 열반도(涅槃道)를 닦을 닦을 때 단계(斷界)ㆍ이욕계(離欲界)ㆍ멸계(滅界)에 대하여 가장 뛰어나고 적정한 공덕을 관견(觀見)하여 단상(斷想)ㆍ이욕상(離欲想)ㆍ멸상(滅想)을 닦고, 어떤 경우 사마타(奢摩他)를 닦을 때 상품(上品)의 상하상(上下想)을 닦고, 어떤 경우 비발사나(毘鉢舍那)을 닦을 때 관품(觀品)의 전후상(前後想)을 수습하는 것이다. ‘상하상(上下想)’이란 이 몸을 관찰하는 데에 그것이 머무르는 것 그대로 그것이 원하는 것 그대로 위의 정수리로부터 아래의 발끝까지 갖가지 잡스러운 부정한 종류들이 가득 찬 것 즉 이 몸 속의 있는 갖가지의 모발과 손톱과 이빨 등을 말하며,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과 같다. ‘전후상(前後想)’이란 어떤 사람이 보여진 상[所觀相]에 대하여 은근하고 간절하게 잘 취하고 잘 생각하고 잘 알고 잘 도달하는 것 즉 머무름[住]에서 앉음[坐]을 관찰하고, 앉음에서 누움[臥]을 관찰하고 혹은 후행(後行)에서 전행(前行)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바발사나행으로써 3세(世)가 연하여 생기게 되는 제행(諸行)을 관찰하는 것을 현시한다. ‘머무름에서 앉음을 관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곧 현재의 작의로써 미래의 소지(所知)의 제행(諸行)을 관찰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작위위(作意位)는 이미 현생(現生)했기 때문에 설명하여 ‘머무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미래의 소지위(所知位)는 아직까지는 현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 임박했기 때문에 설명하여 ‘앉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앉음에서 누움을 관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곧 현재의 작의로써 과거의 소지의 제행을 관찰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작의위는 멸하려고 하는 것에 임박했기 때문에 설하여 ‘앉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과거의 소지위(所知位)는 이미 사라져버렸기[謝滅] 때문에 설하여 ‘누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후행에서 전행을 관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곧 현재의 작의로써 무간멸(無間滅)의 현행의 작의를 관찰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기(生起)하고 나서 곧바로 사라져버린 소취(所取)의 작의이면 설명하여 ‘전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이것 곧바로 새롭게 생기한 능취(能取)의 작의이면서 전에 곧바로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취하는 것을 설명하여 ‘후행(後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지관을 닦기 위하여 저 두 가지 품(品)의 뛰어난 광명상(光明想)을 닦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상을 닦는 것[想修]’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보리분을 닦는 것[菩提分修]’라고 하는가?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친근히 하고 적집하되, 닦고 익히고 많이 수습하는 것이다. 이를 ‘보리분을 닦는 것[菩提分修]’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37가지의 보리분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지성도(支聖道)를 말한다. ‘4념주(念住)’란 첫째는 신념주(身念住)이며, 둘째는 수념주(受念住)이며, 셋째는 심념주(心念住)이며, 넷째는 법념주(法念住)이다. ‘4정단(正斷)’이란 첫째는 이미 생긴 악불선법을 끊으려 하기 때문에 의욕[欲]을 일으켜서 책려(策勵)하고 부지런히 정진(精進)을 일으켜서 마음을 책려하고 마음을 지니면서 바르게 끊는 것[正斷]이다. 둘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불선법을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켜서 책려하고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켜서 마음을 책려하고 마음을 지니면서 바르게 끊는 것이다. 셋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에 대해서 생기게끔 하게 하기 위해서 의욕을 일으켜서 책려하고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켜서 마음을 책려하고 마음을 지니면서 바르게 끊는 것이다. 넷째는 이미 생긴 선법에 대해서 의욕을 일으켜서 머물게끔 하고 잊지 않게끔 하고 원만하게끔 닦으며 배로 수습하게끔 하며 그것을 증장하게끔 하고 그것을 광대하게끔 하기 위해서 의욕을 일으켜서 책려하고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켜서 마음을 책려하고 마음을 지니면서 바르게 끊는 것이다. ‘4신족(神足)’이란 첫째는 욕삼마지의 단행을 성취한 신족[欲三摩地斷行成就神足]이며, 둘째는 근삼마지의 단행을 성취한 신족[勤三摩地斷行成就神足]이며, 셋째는 심마지의 단행을 성취한 신족[心三摩地斷行成就神足]이며, 넷째는 관삼마지의 단행을 성취한 신족[觀三摩地斷行成就神足]이다. ‘5근(根)’이란 첫째는 신근(信根)이며, 둘째는 정진근(精進根)이며, 셋째는 염근(念根)이며, 넷째는 정근(定根)이며, 다섯째는 혜근(慧根)이다. ‘5력(力)’이란 첫째는 신력(信力)이며, 둘째는 정진력(精進力)이며, 셋째는 염력(念力)이며, 넷째는 정력(定力)이며, 다섯째는 혜력(慧力)이다. ‘7각지(覺支)’란 첫째는 염등각지(念等覺支)이며, 둘째는 택법등각지(擇法等覺支)이며, 셋째는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이며, 넷째는 희등각지(喜等覺支)이며, 다섯째는 안등각지(安等覺支)이며, 여섯째는 정등각지(定等覺支)이며, 일곱째는 사등각지(捨等覺支)이다. ‘8지성도(支聖道)’란 첫째는 정견(正見)이며, 둘째는 정사유(正思惟)이며, 셋째는 정어(正語)이며, 넷째는 정업(正業)이며, 다섯째는 정명(正命)이며, 여섯째는 정정진(正精進)이며, 일곱째는 정념(正念)이며, 여덟째는 정정(正定)이다. 이제 이 가운데에서12)간략하게 신상(身相)을 설명하면 35가지가 있다. 내신(內身)ㆍ외신(外身)ㆍ근소섭신(根所攝身)ㆍ비근소섭신(非根所攝身)ㆍ유정수신(有情數身)ㆍ비유정수신(非有情數身)ㆍ추중구행신(麤重俱行身)ㆍ경안구행신(輕安俱行身)ㆍ능조신(能造身)ㆍ소조신(所造身)ㆍ명신(名身)ㆍ색신(色身)ㆍ나락가신(那落迦身)ㆍ방생신(傍生身)ㆍ조부국신(祖父國身)ㆍ인신(人身)ㆍ천신(天身)ㆍ유식신(有識身)ㆍ무식신(無識身)ㆍ중신(中身)ㆍ표신(表身)ㆍ변이신(變異身)ㆍ불변이신(不變異身)ㆍ여신(女身)ㆍ남신(男身)ㆍ반택가신(半擇迦身)ㆍ친우신(親友身)ㆍ비친우신(非親友身)ㆍ중용신(中庸身)ㆍ열신(劣身)ㆍ중신(中身)ㆍ묘신(妙身)ㆍ유신(幼身)ㆍ소신(少身)ㆍ노신(老身)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신상의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순신관에 머무르는 것’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 신(身)에 의거하여 문(聞)ㆍ사(思)ㆍ수(修)의 혜(慧)를 증장하고, 이 혜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신(一切身)의 일체상(一切相)에 대해서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추구하는 수관(隨觀)ㆍ수각(隨覺)의 염(念)을 말한다. 말하자면 신(身)에 의거하여 정법(正法)을 수지(受持)하는 것을 더욱이 하고 법의(法義)를 사유하고 수습하며 작증(作證)하고 문의(文義)에 대해서 수습하고 작증하는 데에 있어서 마음에 잃어버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만약 자세하게 사유할 때는 ‘나는 정법을 바르게 수지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저 이치[義]들에 대해서 혜로써 잘 요달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저 해탈들을 능히 잘 촉증(觸證)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제(審諦)에 대해서 그 염(念)을 안주하는 것을 ‘염주(念住)’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염을 수호하기 위해서, 경계에서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소연에 안주하기 위해서, ‘염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수호하기 위한 염’이란 ‘먼저 염을 수호하고 또한 항상 염을 자세하게 하는 것이다’고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경계에서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 ‘수호심(守護心)을 염하여 평등위(平等位)를 행하여 그 상(相)을 취하지 않고 수호(隨好)를 취하지 않고 …… 내지 의근(意根)을 수호하고 의근의 율의(律儀)를 닦는 것이다’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소연을 안주하기 위해서’란 ‘네 가지 소연에 대하여 그 염을 안주한다’라고 설명한 것과 같으니, 편만소연(遍滿所緣)ㆍ정행소연(淨行所緣)ㆍ선교소연(善巧所緣)ㆍ정혹소연(淨惑所緣)에 있어서를 말한다. 이 세 가지 상(相)에 의해서 그 염을 잘 안주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수(受)’라고 하는가?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와 낙신수(樂身受)ㆍ고신수(苦身受)ㆍ불고불락신수(不苦不樂身受)를 말한다. 신수(身受)를 설하는 것과 같이 심수(心受) 또한 그러하다. 낙유애미수(樂有愛味受)ㆍ고유애미수(苦有愛味受)ㆍ불고불락유애미수(不苦不樂有愛味受)와 무애미수(無愛味受)ㆍ의탐기수(依耽嗜受) 또한 그러한 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낙의출리수(樂依出離受)ㆍ고의출리수(苦依出離受)ㆍ불고불락의출리수(不苦不樂依出離受)가 있으니, 이와 같이 도합 21수(受)가 있다. 혹은 아홉 가지 수(受)13)가 있다. 무엇을 ‘심(心)’이라고 하는가? 유탐심(有貪心)ㆍ이탐심(離貪心)ㆍ유진심(有瞋心)ㆍ이진심(離瞋心)ㆍ유치심(有癡心)ㆍ이치심(離癡心)ㆍ약심(略心)ㆍ산심(散心)ㆍ하심(下心)ㆍ거심(擧心)ㆍ도심(掉心)ㆍ불도심(不掉心)ㆍ적정심(寂靜心)ㆍ부적정심(不寂靜心)ㆍ정심(定心)ㆍ부정심(不定心)ㆍ선수심(善修心)ㆍ불선수심(不善修心)ㆍ선해탈심(善解脫心)ㆍ불선해탈심(不善解脫心)을 말하며, 이와 같이 도합 20가지의 심(心)이 있다. 무엇을 ‘법(法)’이라고 하는가? 탐(貪)과 탐비나야법(貪毘奈耶法)과 그리고 진(瞋)과 진비나야법(瞋毘奈耶法)과 그리고 치(癡)와 치비나야법(癡毘奈耶法)과 그리고 약(略)과 산법(散法)과 그리고 하(下)와 거법(擧法)과 그리고 도(掉)와 불도법(不掉法)과 그리고 적정(寂靜)과 부적정법(不寂靜法)과 그리고 정(定)과 부정법(不定法)과 그리고 선수(善修)와 불선수법(不善修法)과 그리고 선해탈(善解脫)과 불선해탈법(不善解脫法)을 말하니, 이와 같은 20가지의 법에는 흑품(黑品)과 백품(白品), 염품(染品)과 정품(淨品)으로 건립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낙수(樂受)’란 순락수촉(順樂受觸)을 연(緣)으로 하여 생겨나게 되는 평등수(平等受)로서 수에 포함되는 것을 낙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5식(識)과 상응하면 신수(身受)라고 이름하고 만약 의식(意識)과 상응하면 심수(心受)라고 이름한다. 순락수촉(順樂受觸)과 같이 이와 같이 순고수촉(順苦受觸)과 불고불락수촉(不苦不樂受觸)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 불평등수(不平等受)로서 수에 포함되는 것과 비평등비불평등수(非平等非不平等受)로서 수에 포함되는 이것을 고수(苦受)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만약 5식(識)과 상응하면 신수(身受)라고 이름하며 의식과 상응하면 심수(心受)라고 이름한다. 위와 같이 여러 수(受)들이 만약 열반(涅槃)에 수순(隨順)하고 결택필경(決擇畢竟)과 출리필경(出離畢竟)과 이구필경(離垢畢竟)에 수순하면 능히 범행(梵行)으로 하여금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무애미수(無愛味受)라고 이름하며, 만약 계(界)에 떨어지면 유애미수(有愛味受)라고 이름하며, 만약 색(色)ㆍ무색계(無色繫)이면서 이욕(離欲)에 수순하면 의출리수(依出離受)라고 이름하며, 만약 욕계계(欲界繫)이면서 이욕에 수순하지 않으면 의탐기수(依耽嗜受)라고 이름한다. 또한 ‘유탐심’이란 가애(可愛)의 소연경사(所緣境事)에 대하여 탐전(貪纏)으로 얽혀진 것을 말한다. ‘이탐심’이란 즉 이와 같은 탐전을 원리하는 것을 말한다. ‘유진심’이란 가증(可憎)의 소연경사에 대하여 진전(瞋纏)으로 얽혀진 것을 말한다. ‘이진심’이란 즉 이와 같은 진전을 원리하는 것을 말한다. ‘유치심’이란 가우(可愚)의 소연경사에 대하여 치전(癡纏)으로 얽혀진 것을 말한다. ‘이치심’이란 즉 이와 같은 치전을 원리하는 것을 말한다. 위와 같은 여섯 가지 마음은 모두 행시(行時)에 일어나게 되는 3번뇌품(煩惱品)과 이 3품(品)의 대치(對治)의 차별인 줄 알아야만 한다. ‘약심’이란 지행(知行)으로 인하여 안의 소연에 대하여 그 마음을 계박(繫縛)하는 것을 말한다. ‘산심’이란 밖의 5묘욕(妙欲)에 대하여 수순하여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심’이란 혼침(惛沈)ㆍ수면(睡眠)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거심’이란 정묘한 소연에 대하여 명료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도심’이란 크게 들뜨기 때문에 도전(掉纏)으로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불도심’이란 들뜰 때[擧時]에 그리고 줄어들을 때[略時]에 평등의 사[平等捨]를 얻는 것을 말한다. ‘적정심’이란 제 개(蓋)로부터 이미 해탈을 얻은 것을 말한다. ‘부적정심’이란 제 개로부터 아직까지 해탈을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정심’이란 제 개로부터 해탈을 얻고 나서 다시 근본정려(根本靜慮)에 능히 증입(證入)하는 것을 말한다. ‘부정심’이란 아직까지 능히 증입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선수심’이란 이 정(定)에 대해서 오랜 시간동안 자주 익혀서 원하는 것[所欲]을 따라서 얻으며, 어려움[艱難] 없는 것을 얻으며, 껄끄러움이 없는 것을 얻어서 빠르게 능히 증입하는 것을 말한다. ‘불선수심’이란 이것과 상위(相違)하여 그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선해탈심’이란 일체로부터 구경해탈(究竟解脫)하는 것을 말한다. ‘불선해탈심’이란 일체로부터가 아니고 구경해탈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열 네 가지 마음은 모두 주시(住時)에 일어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정개지(淨蓋地)에 의거하여 머무를 때에 여덟 가지 마음이 있어 일어나게 되니, 약심ㆍ산심 내지 적정과 부적정심을 말한다. 정번뇌지(淨煩惱地)에 의거하여 머무를 때에 여섯 가지 마음이 일어나게 되니, 정심과 부정심 내지 선해탈심과 불선해탈심을 말한다. 또한 안에 개(蓋)가 있으면 ‘나에게는 제 개가 있다’라고 스스로 능히 요지하고 안에 개가 없으면 ‘나에게는 제 개가 없다’라고 스스로 능히 요지하며, 저 제 개가 아직 생기지 않았지만 생긴다는 것 그대로 또한 능히 요지하며, 저 제 개가 생겨나서 사라져 버리는 것 그대로 또한 능히 요지한다. 눈에 결(結)이 있고 내지 의식[意]에 결이 있을 때에는 능히 ‘나에게는 안결(眼結)이 있고 내지 나에게는 의결(意結)이 있다’고 요지하며, 눈에 결이 없고 내지 의식에 결이 없을 때에는 ‘능히 나의 눈에는 결이 없고 나의 의식에도 결이 없다’고 능히 스스로 요지한다. 그 안결(眼結)과 같이 내지 의결(意結)에 이르기까지 아직 생겨나지 않았지만 생기는 것 그대로를 또한 능히 요지하고 그 제 결(結)이 생기고 나서 사라져 버리는 것 그대로 또한 능히 요지한다. 또한 안의 염등각지(念等覺支)가 있으면 ‘나에게 염등각지가 있다’고 능히 스스로 요지하고, 안에 염등각지가 없으면 ‘나에게 염등각지가 없다’고 능히 스스로 요지한다. 염등각지가 생겨나지 않았지만 생기는 것 그대로를 또한 능히 요지하고 생기고 나서 머물러 잃어버리지 않으면 원만하게 닦고 배로 다시 수습하고 증장(增長)하고 광대해지는 그대로 또한 능히 요지한다. 염등각지와 같이 이와 같이 택법ㆍ정진ㆍ희ㆍ안ㆍ정ㆍ사의 등각지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여실하게 여러 잡염법(雜染法)의 자성(自性)ㆍ인연(因緣)ㆍ과환(過患)ㆍ대치(對治)를 두루 안다면, 이를 법념주(法念住)의 체(體)라고 한다. 신(身)에 대해서 순신관에 머무르는 염(念) 및 염주(念住)를 설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수(受)에 대해서도 그리고 심(心)에 대해서도 그리고 법(法)에 대해서도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내신(內身) 등에 대하여 순신(循身) 등의 관(觀)에 머무른다.’고 하며, 무엇을 ‘외신(外身) 등에 대하여 순신 등의 관에 머무른다.’고 하며, 무엇을 ‘내ㆍ외신 등에 대하여 순신 등의 관에 머무른다.’고 하는가? 만약 안에 있는 자신의 유정수의 몸의 물질[身色]을 연하여 경(境)으로 삼아서 순신관에 머무르면 이를 ‘내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밖에 있는 비유정수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아서 순신관에 머무르면 이를 ‘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밖에 있는 다른 유정수의 몸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아서 순신관에 머무르면 이를 ‘내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안에 있는 자신의 유정수의 몸의 물질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受)ㆍ심(心)ㆍ법(法)을 연하여 경으로 삼아서 순삼관(循三觀)에 머무르면 이를 ‘내의 수ㆍ심ㆍ법에 대하여 순수심법관(循受心法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밖에 있는 비유정수의 물질을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아서 순삼관에 머무르면 이를 외의 수ㆍ심ㆍ법에 대하여 순수심법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밖에 있는 유정수의 몸의 물질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아서 순삼관에 머무르면 이를 ‘내외의 수ㆍ심ㆍ법에 대하여 순수심법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차별이 있다. 만약 근(根)에 포함되는 유집유수(有執有受)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근에 포함되지 않는 무집무수(無執無受)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근에 포함되지 않는 유집유수(有執有受)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만약 앞의 세 가지의 물질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곧 이를 ‘순삼관에 머무른다.’고 하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또 다른 차별이 있다. 만약 자신의 안에 있는 정지(定地)의 경안(輕安)과 함께 작용하는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안에 있는 부정지(不定地)의 추중(麤重)과 함께 작용하는 색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경안과 함께 작용하고 다른 추중과 함께 작용하는 색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만약 앞의 세 가지의 색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곧 이를 ‘순삼관에 머무른다.’고 하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또 다른 차별이 있다. 만약 안에 있는 능조(能造)의 대종(大種)의 물질[色]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밖에 있는 능조의 대종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능조의 대종의 물질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근(根)과 경(境)에 포함되는 조색(造色)에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만약 앞의 세 가지의 색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곧 이를 ‘순삼관에 머무른다.’고 하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또 다른 차별이 있다. 만약 식이 있는 몸[有識身] 안에 있는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식이 없는 몸[無識身]에 있는 유정수의 청어(靑瘀) 등의 단계의 물질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식이 없는 몸의 물질을 연하되. 과거의 시기에는 식성(識性)이 있었으나 식이 있는 몸의 물질이 미래의 시기에는 무식성(無識性)이어서 상사법성(相似法性)과 평등법성(平等法性)을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만약 앞의 세 가지의 물질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곧 이를 ‘순삼관에 머무른다.’고 하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또 다른 차별이 있다. 자신의 몸 속의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이빨 등의 상(相)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것의 몸 곳에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이빨 등의 상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이를 ‘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안의 몸에서 드러나는 달라지고[變異] 달라지지 않은[不變異] 청어 등의 상을 연하고 밖에서 몸에서 드러나는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은 청어 등의 상을 연하여 상사법성과 평등법성을 경으로 삼으면 이를 ‘내외신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앞의 세 가지의 물질에 의거하여 생기게 되는 수ㆍ심ㆍ법을 연하여 경으로 삼으면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곧 이를 ‘순삼관에 머무른다.’고 하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종류의 심ㆍ수ㆍ심ㆍ법의 여러 가지 차별문(差別門)은 많은 종류인 줄을 알아야만 한다. 이제 이 가운데에서 다시 작은 부분으로 여러 가지 문의 차별을 현시한다. 또한 네 가지의 전도(顚倒)을 대치하기 위하여 세존께서는 네 가지의 염주(念住)을 건립하신 것이다. 즉 부정(不淨)을 정(淨)이라고 계탁하는 전도를 대치하기 위하여 불ㆍ세존께서는 순신염주(循身念住) 가운데에서 부정과 상응하는 네 가지의 담파로(憺怕路)을 선설하심으로써 심염주를 세우신 것이다. 만약 능히 이것에 대하여 많이 사유하면 곧바로 부정에 대하여 정이라고 하는 전도을 끊을 수 있다. 여러 가지의 고(苦)에 대하여 락(樂)이라고 계탁하는 전도를 대치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수(受)에 대하여 순수관(循受觀)에 머물러서 여실하게 여러 가지 존재하는 수는 모두 다 고임을 요지함으로써 곧바로 여러 가지의 고(苦)에 대하여 락이라고 하는 전도를 끊는 수염주를 세우신 것이다. 무상(無常)에 대하여 상(常)이라고 계탁하는 전도를 대치하게 위하여 유탐심(有貪心)의 갖가지 차별 즉 일야(日夜)ㆍ찰나(刹那)ㆍ순식(瞬息)ㆍ수유(須臾)을 겪는 하나가 아닌 수 많은 갖가지 품류(品類)의 마음의 생멸성(生滅性)을 요지함으로써 곧바로 무상에 대하여 상이라고 하는 전도을 끊는 심염주을 세우신 것이다. 무아(無我)에 대하여 아(我)라고 계탁하는 전도를 대치하게 위하여, 저것은 먼저에서 온 유아(有我)라고 하는 견해[見] 등의 여러 번뇌들이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하는 견해 등의 여러 선법(善法) 등이 없기 때문에, 제 온(蘊)에 대하여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데에 있어서 제법에 대하여 순법관(循法觀)에 머물러서 여실하게 계탁한 제 온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요지함으로써 곧바로 무아에 대하여 아라고 하는 전도을 끊는 법염주을 세우신 것이다. 또 다시 차별이 있다. 여러 세간의 대부분은 제 온(蘊)에 있어서 온성(蘊性) 만이 있고 법성(法性) 만이 있다고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유아를 계탁하여 몸에 의지하고, 몸에 의지하게 때문에 고락(苦樂)을 수용하고, 고락을 수용하면 법(法)ㆍ비법(非法)에 의하여 염(染)ㆍ정(淨)이 있으므로 내가 의지하는 대상[我所依事]에 대한 어리석음[愚]을 제거하기 위하여 신염주을 세우는 것이며, 내가 받아들이는 대상[我所領受事]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염주을 세우는 것이며, 심(心)ㆍ의(意)ㆍ식(識)에 대하여 나를 집착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나라는 대상[我事]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심염주를 세우는 것이며, 집착하는 나의 마음〈으로 인한〉 염ㆍ정의 대상[我心能染淨事]에 대한 어리석음을 능히 제거하기 위하여 법염주을 세우는 것이다. 또 다시 차별이 있다. 또한 이것에 의하여 여러 업을 짓고[諸業], 또한 이것 때문에 여러 업을 짓고 또한 업을 짓는 자와 또한 이것에 말미암아서 여러 업을 짓는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다 현시하기 위하여 4염주를 세우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몸[身]에 의지하여 여러 업을 짓고, 느낌[受]을 구하기 위하여 여러 업을 지으며, 마음[心]이 능히 업을 지으며, 선과 불선업에 의하여 능히 여러 업을 짓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 또 다시 차별이 있다. 또한 이것에 의지하여 염ㆍ정이 있으며, 또한 이것을 때문에 염ㆍ정을 일으키며, 또한 염ㆍ정인 자와 또한 이것에 말미암아서 염ㆍ정을 성취하는 이와 같은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다 현시하기 위하여 4염주를 세우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몸에 의지하여 염ㆍ정이 있으며, 느낌을 구하기 위하여 염ㆍ정을 일으키며, 또한 마음이 염ㆍ정인 자가 제법에 말미암기 때문에 염ㆍ정을 성취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문】염주(念住)란 무슨 뜻인가? 【답】이것에 대하여 염(念)을 머물게 하고, 또는 이것에 의하여 염을 머물도록 하는 것을 모두 염주라고 이름한다. ‘이것에 대하여 염을 머물게 한다.’란 소연(所緣念住)을 말한다. ‘이것에 의하여 염을 머물도록 한다.’란 혜(慧) 또는 염의 정(定)을 섭지(攝持)하는 것이니, 자성염주(自性念住)이다. 그 밖의 여러 심(心)과 심법(心法)와 상응하는 것은 잡상염주(相雜念住)이다. 또한 신ㆍ수ㆍ심ㆍ법의 증상(增上)에 의하여 생기게 되는 선의 유루ㆍ무루도를 모두 염주라고 이름한다. 이것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문소성(聞所成)이며, 둘째는 사소성(思所成)이며, 셋째는 수소성(修所成)이다. 문ㆍ사소성은 오직 유루일 뿐이고, 수소성은 유루와 무루에 통한다.
1)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다섯 번째의 3학(學)에 대해서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세 가지 부분이란 첫째는 3학을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3학에 대하여 3근(根)을 건립하는 것이고, 셋째는 정학(定學)에 대하여 3해탈문(解脫門)을 건립하는 것이다.
2)일체의 번뇌를 완전히 제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3)미이욕자(未離欲者)에 대한 설명이다.
4)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여섯 번째의 학을 수순하는 법[隨順學法]에 대해서 두 종류의 10법(法)으로 해석한다.
5)앞의 일곱째의 제법을 사유하는 유가(瑜伽)를 작의하는 데 있어서의 과환을 가리킨다.
6)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일곱 번째의 유가의 무너짐[瑜伽壞]에 대해서 네 종류로 나누어서 해석한다.
7)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여덟 번째로 유가(瑜伽)에 대해서 네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8)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아홉 번째로 작의(作意)에 대해서 해석한다. 첫째는 작의의 종류에 대해서 두 가지 부분으로 해석하고, 둘째는 작의로써 사유하는 상(相)을 밝히고, 셋째는 작의의 경계에 관계하는 아홉 가지 승해(勝解)를 밝힌다.
9)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열 번째로 유가사(瑜伽師)의 소작(所作)을 네 가지로 해석한다.
10)성문지의 삭취취에 대해서 19부분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하에서는 그 열 한 번째로 유가사(瑜伽師)를 해석한다.
11)이하는 위에서 나열한 37보리분법(菩提分法)의 각각의 내용의 그 하나 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해석하는 부분이다.
12)신(身)과 심(心)의 두 가지 수(受)에 각각 락(樂)ㆍ고(苦)ㆍ사(捨)의 3수(受)가 있기 때문에 6수(受)가 되며, 여기에 3수(受)를 보태서 9수(受)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신(身)’이라고 하며, 무엇을 ‘신에 대해서 순신관에 머무른다’고 하며, 무엇을 ‘염(念)’이라고 하며, 무엇을 ‘염주(念住)’라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