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수행자가 비록 한마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힘을 완성하지 못했으면 오히려 욕계의 번뇌 때문에 혼란하게 되니, 마땅히 방편을 만들어 나아가 초선(初禪)을 배우고 애욕을 꾸짖어서 버려야 한다. 어떻게 꾸짖어서 버리는가? 욕계의 허물을 관하여, 욕계는 깨끗하지 않으며 갖가지로 착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초선의 안온함과 쾌락을 생각해야 한다.
욕계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상하며, 공덕의 원가(怨家)이고, 허깨비나 요술과 같으며,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여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어리석은 마음은 이미 어지러우니, 어찌 하물며 이미 음욕으로 묶이고 덮였음에랴? 하늘 위의 극락세계도 오히려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닌데, 어찌 하물며 사람 가운데서랴? 사람의 마음이 욕망에 집착하여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면 불이 장작을 얻은 것과 같고, 바다가 물결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정생왕(頂生王)이 비록 일곱 가지 보물을 왕의 사천하에 비처럼 내리더라도 제석이 자리를 나누고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나후사(那睺沙)라는 성을 가진 전금륜왕(轉金輪王)이 욕망의 핍박을 받아서 이무기 가운데 떨어지는 것과 같다.
또한 선인(仙人)이 열매를 먹고 풀을 입으며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채 도를 찾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욕망의 도적이 파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욕망의 즐거움은 매우 적고 원망의 독은 매우 많으니,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쁜 친구와 서로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과 멀리하며, 욕망으로 독한 술을 삼아 어리석고 미혹되어 취하여 죽는다. 욕망은 속이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달리게 하고, 피로와 고뇌가 만 가지인데도 자재할 수 없으니, 오직 욕망을 여의는 것만이 몸과 마음을 안온하고 지극히 쾌락하게 할 수 있다.
030_0139_a_01L욕망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은 개가 마른 뼈를 씹는 것과 같으며, 욕망으로 구하는 것은 삼가 애쓰고 지극히 고생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을 얻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잃기는 매우 쉬워서, 마치 잠깐 동안 세력을 빌렸지만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 본 것이 황홀하더라도 곧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그것을 바라면 근심이 되며,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이미 괴로움이요, 그것을 얻어도 또한 괴롭다. 많이 얻으면 많은 괴로움이 있으니, 불이 장작을 얻되 많으면 많을수록 많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욕망은 살을 저미는 것과 같아서 온갖 새들이 다투어 따르니,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방이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고, 고기가 낚시바늘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사슴이 소리를 뒤따르는 것과 같고, 목마를 적에 짠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일체의 중생은 욕망 때문에 근심을 만들며 괴로움에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욕망은 독해(毒害)이므로 마땅히 초선을 구하여 욕망의 불을 끊어 없애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믿고 즐거워하여 생각을 증진시켜서 뜻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관하여 마음으로 싫어하고 번뇌를 다 없애면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욕망의 치성한 불길을 여의고 시원한 선정을 얻는 것은 마치 더운데 그늘을 얻는 것과 같고 가난한데 부귀를 얻는 것과 같다. 이때 문득 초선의 희각(喜覺)을 얻으니, 선(禪) 가운데 갖가지 공덕을 사유하고, 좋고 추함의 분별을 관하여 문득 한마음을 얻는다.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은 한마음의 모습[相]을 얻으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030_0139_a_12L問曰:“修行禪人,得一心相,云何可知?”
얼굴빛이 화열(和悅)하고 윤기가 나며, 천천히 다니고 조용하고 단정하여 한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눈은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신령한 덕과 선정의 힘으로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교만함을 격파하며, 그 바탕은 유연하여 독해를 품지 않으며, 또한 인색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곧게 믿어 마음이 청정하고 논의하여 다투지 않으며, 몸에 속임이 없어서 함께 말하기 쉽다. 부드럽고 부끄러워하여[慙愧] 마음이 항상 법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정진하며 지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030_0139_b_01L경전을 암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이 법행(法行)을 따르며, 마음은 항상 기쁨에 넘쳐 성낼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네 가지 공양 중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니, 청정한 보시면 받고 양을 알아서 만족할 줄 안다. 잠깨어 일어나면서부터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능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고 인욕으로 삿됨을 제거한다. 논의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말수는 매우 적으며, 겸손하고 삼가해서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공경하고,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하고 따른다. 음식은 절제할 줄 알고 좋은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혼자 있는 고요한 곳을 즐기며,괴롭거나 즐겁더라도 마음으로 참아 동요하지 않으며, 원망이나 다툼도 없고 다투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한마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각(覺)과 관(觀)1)의 두 가지 일이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차 물이 맑고 고요한데 파도가 일렁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미 안으로 한마음인데도 각과 관으로 번민하게 되니, 마치 목적지에 이르면 휴식을 얻고 졸리면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이때 차례대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서 청정한 선정을 일으키고,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2)해서 2선(禪)에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묵연(黙然)해서 본래 얻을 것이 아닌데, 이제 이 기쁨[喜]을 얻으니, 이때 마음의 관(觀)은 기쁨으로 근심을 삼음이 앞에서 말한 각과 관과 같다. 기쁨이 없는 법[無喜法]을 행하여 마침내 기쁨의 경지를 여의고 성현들이 말씀하신 바의 즐거움[樂]을 얻으며, 한마음으로 자세히 알아 생각하고 보호해서 3선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기쁨을 버렸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서 기억하고 즐겨 보호[護:捨]한다. 성인은 즐겨 보호할 것을 말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기[捨]가 어려우며, 즐거움 가운데 최고이니 이것보다 더한 다른 즐거움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일체의 청정한 경지 중에서 인자함[慈]이 최고의 즐거움이 됨을 설하였다. 즐거움은 곧 근심이니,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의 선(禪) 중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느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곧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으면 곧 괴로움이 생기니, 그러므로 3선에서는 즐거움으로 근심을 삼는다. 또한 선묘(善妙)로써 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함을 호념하여 제4선3)의 불고불락호청정념(不苦不樂護淸淨念)의 한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최고의 청정함을 보호하는 것을 제4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3선에서는 즐거움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괴로움[苦]이라 하니, 그러므로 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거하여 없애서 그것을 이름하여 동요하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한다. 점차 공처(空處)4)를 관조하여 안팎의 색상(色想)을 깨뜨리고, 유대상(有對想)5)을 없애며, 여러 가지 색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량공처(無量空處)6)를 관한다. 항상 색(色)의 허물을 관하고, 공처정(空處定)의 최상의 미묘한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공처정에 도달할 수 있다.
030_0139_c_01L무량한 식처(識處)를 생각하고 공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량한 식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식처정(識處定)에 도달할 수 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생각하고 식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무소유처정을 얻는다.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생각하되, 만일 일체의 생각에 그 근심이 매우 많다면 병이든 종기든 무상(無想)이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곳[愚癡處]이니, 그러므로 비유상비무상정은 제일 안온한 좋은 곳이므로 무소유처정의 허물을 관조하고, 비유상비무상의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비유상비무상처정을 얻는다.
혹 어떤 수행자가 먼저 초지(初地)에서부터 상지(上地)에까지 이르고, 다시 상지에서 자심(慈心:자무량심)을 익혀 행한다면, 먼저 스스로 즐거움을 얻어서 성냄의 독을 파괴하고, 다음으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비심(悲心:비무량심)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게 여기고, 능히 고뇌를 파괴하여 널리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비심삼매(悲心三昧)를 얻는다. 능히 기쁘지 아니한 것을 깨뜨리고 무량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희열을 얻게 하면, 이때 문득 희심(喜心: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030_0140_a_01L능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뜨리고 곧바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관하면, 이때 문득 호심(護心: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2선(禪) 역시 이와 같으며, 3선과 4선에서는 기쁨[喜]을 제거한다. 다음으로 5통(通)을 배우니, 몸이 능히 날아다닐 수 있고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일심정(一心定)ㆍ혜정(慧定)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을 관찰하고, 항상 가볍다는 생각을 지어서 날아다님[飛行]을 완성하고자 한다. 크든 작든욕정이 지나치면 큰 것이 되고, 욕정이 덜하면 작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근심이니, 정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항상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가볍다고 관할 수 있다. 마치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원숭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에 고통과 걱정이 없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욕력(欲力)ㆍ정진력(精進力)ㆍ일심력(一心力)ㆍ혜력(慧力)으로 그것을 넓고 크게 하면 몸이 더욱 작아져 문득 몸을 움직일 수 있다.
또한 몸의 공계(空界)를 관하고 항상 이 관을 익히면 욕력ㆍ정진력ㆍ일심력ㆍ혜력이 지극히 넓고 커져서 곧 몸을 들어올릴 수 있으니, 커다란 바람의 힘이 무거운 것을 보내어 먼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시험하여 땅에서 떨어져 한 자, 두 자 그리고 점차 한 길[丈]에 이르고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마치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다. 사유하여 스스로 살펴서, 마음의 힘이 크면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대(大)를 배우고 관하되, 지대(地大)를 제거하고 다만 나머지 3대를 관하여 심념(心念)이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자재할 수 있으니, 몸이 걸림이 없어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다시 배우고 익혀서 멀더라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 가까운 것이 먼 것을 없애버리게 된다. 또한 여러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나무를 땅의 일종이라고 관하고 나머지 종류는 없애버리면 이 나무는 문득 변하여 땅이 되니, 왜냐하면 나무는 땅의 요소의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금ㆍ은ㆍ보물도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신통(初神通)의 근본이다.
030_0140_b_01L세존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법문을 익히고 배워서 뜻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선정이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기[快樂] 때문이요, 지혜가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많은 사람은 먼저 선법(禪法)을 배우고뒤에 열반을 배우며, 지혜가 많은 사람은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고, 또 아직 선(禪)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 마음을 다 기울여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열반을 구하여 애착 등 모든 번뇌를 초월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몸은 진실로 무상(無常)ㆍ고(苦)ㆍ부정(不淨)ㆍ무아(無我)이나, 몸을 뒤바꿔[顚倒] 생각하기 때문에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 여기니, 이것 때문에 일마다 그 몸을 애착하므로, 이것이 바로 최하의 중생이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지관(念止觀)7)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기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종기의 고통을 근심하면 약을 발라서 치료하고, 통증이 멈추면 즐거운 것과 같이, 커다란 괴로움 때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으로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樂]을 삼으니,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마치 불의 성질은 뜨겁기 때문에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이,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030_0140_c_01L혹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지만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으니,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과 애착을 서로 응하게 한다면 그때는 즐거움이며, 성냄과 서로 응한다면 그때는 괴로움이며, 어리석음과 서로 응한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니,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을 찾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여색을 찾음이 마땅히 음욕의 괴로움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되며, 만일 버린다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을 받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욕심이 불타오르면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노년에는 욕망을 싫어하고 욕망이 즐거움이 아니란 것을 아니, 만일 진실로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모습이지만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의 고통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움의 고통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한다. 마치 화살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마땅히 생기고 없어져 무상(無常)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통념지(通念止)라 한다.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030_0141_a_01L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 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030_0141_b_01L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색계도 무색계도 세계시(世界始)도 아니니, 세계시외도는 일체 유위법의 처음을 세계시라 하며, 열반이라 말한다. 이 처음이 있다는 것이 만물을 만들어내므로 곧 조화(造化)라고 말한다.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은 능히 이러한 괴로움을 없앨 수 없으며, 정견(正見) 등의 8정도가 바로 열반의 길이요, 나머지 외도의 고행(苦行)이나 갖가지 공지계(空持戒)ㆍ공선정(空禪定)ㆍ공지혜(空智慧)는 열반의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세 가지 법이 합하여 행해져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평지에 서서 좋은 활과 화살을 가져야 원수인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법을 합하여 행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계율을 평지로 삼고, 선정을 훌륭한 활[快弓]로 삼으며, 지혜를 예리한 화살로 삼아 세 가지 일이 구비되어야 능히 번뇌의 적을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수행자는 이때 네 가지 법연(法緣)을 만들어 연(緣)을 관하는 것이 활쏘기 놀이와 같다. 괴로움[苦]을 관8)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고(苦)이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공(空)이요,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습(習)을 관9)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번뇌와 유루업(有漏業)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集)이며, 상사과(相似果)가 생기기 때문에 인(因)이며, 이 가운데서 일체의 행(行)을 얻기 때문에 생(生)이고, 상사과가 아닌 것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진(盡)을 관10)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번뇌를 덮고 있기 때문에 폐(閉)이며, 번뇌의 불길을 제거하기 때문에 멸(滅)이고, 일체의 법 가운데서 최고이기 때문에 묘(妙)이며, 세간을 지나가기 때문에 출(出)인 것이다. 도(道)를 관11)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에 도(道)이며,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正)이고, 일체의 성인께서 간 곳이기 때문에 적(跡)이며, 세간의 근심과 고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離)이다.
030_0141_c_01L이와 같이 관하면 무루(無漏)의 상사법(相似法)을 얻으리니, 이름하여 따뜻한 법[煖法]12)이라 한다. 무엇을 따뜻하다 하는가?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따뜻한 법이라 이름하며, 모든 번뇌의 장작을 무루지(無漏智)의 불로써 태우니, 불이 나오려고 하는 처음의 모습을 이름하여 따뜻한 법이라 한다. 비유컨대 불을 모으는데 처음 모을 때연기가 나면 이것을 따뜻하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반도(涅槃道)의 첫 모습이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선정을 구하기를 매우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유루도(有漏道)이며, 두 번째는 대부분 애착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를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곧 바로 열반으로 향하여 따뜻한 법 가운데 들어가며, 따뜻한 모습[煖相]을 지닌 사람은 깊이 한마음을 얻는다. 참다운 법의 거울이 무루계(無漏界)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거울 가운데 모습은 표면의 세계와 비슷하며, 가장자리는 가운데가 아니므로 이렇게 비유했다., 수행자는 이때 크게 안온함을 얻어서 스스로 ‘나는 선정으로 마땅히 열반을 얻으리니, 이 도(道)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치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축축한 진흙에 도달하면 틀림없이 오래지 않아 물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적을 격파하여 적이 이미 물러나 흩어지면 스스로 승리했음을 알고 마음속이 안온해지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마땅히 먼저 막대기로 몸을 두드려 시험해 보되 만일 은은하게 진맥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따뜻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살 수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이 사유하되 기뻐서 마음으로 집착하면 이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이와 같이 따뜻한 법을 지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근법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4제(諦)의 인연을 행하며, 6지(地)13) 중 하나인 지혜는 일체 무루법의 기반이다. 야인(野人)이 능히 안온함을 행하니무루에서 소원(疎遠)하기 때문에 야인이라고 한다. 범본(梵本)에 살펴보면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이것을 따뜻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증진하여 더 올라가면 다시 정법(頂法)14)이라고 하니, 마치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법의 실상을 관하여 내가 마땅히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마음으로 이 법을 좋아하니, 이것은 참다운 법[眞法]이어서 능히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030_0142_a_01L이때 생각하기를, ‘이 법은 누가 설했는가? 바로 부처님 세존이시니, 이것을 좇아 불보(佛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만일 이 법이 없다면 일체의 번뇌를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법보(法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나는 마땅히 어찌해야 진실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밝혀 이로부터 법보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큰 환희심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불제자의 무리들과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참다운 지혜의 약간의 밝음이나마 얻을 것인가?’라고 하면, 이를 좇아 승보(僧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크게 환희심을 얻으며, 이 세 가지 보배 속에서 한마음의 청정함을 얻어 참다운 지혜에 계합한다. 이것이 정상(頂上)의 선근이니, 또한 정법(頂法)이라 이름하고,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파초는 열매를 생산하면 죽고 대나무도 열매를 생산하면 역시 그러하며 노새는 새끼가 있으면 곧 죽고 소인(小人)은 봉양을 받으면 죽는다.
030_0142_a_12L芭蕉生實死, 竹生實亦然! 騾有子則死,
小人得養死。
잘못을 타파해도 이롭지 않으므로 소인은 명예를 얻으려 하니 청정의 원인[白淨分]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침내 정법(頂法)에서 떨어진다.
030_0142_a_14L破失非利故, 小人得名譽;
白淨分失盡, 乃至頂法墮。
또한 아직 여러 결사(結使: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아직 무루의 무량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적다’고 말한다.
030_0142_a_15L復次,未斷諸結使,未得無漏無量慧心,以是故名少。
또한 부지런히 정진해서 한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가 다시 5음(陰)ㆍ4제(諦)ㆍ16행(行)을 분명하게 관하면, 이때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인(忍)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인선근(忍善根)이라고 한다. 인(忍)은 무엇인가? 4제를 따라 행하면 이것을 인이라고 한다. 이 선근에는 세 가지 상ㆍ중ㆍ하의 3시(時)가 있으니, 어째서 인이라고 이름했는가? 5음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음으로 견디어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忍)이라고 한다.
030_0142_b_01L또한 일체의 세간은 모두 고ㆍ공이요 즐거움이 없으니, 이 괴로움의 원인은 습(習)과 애착 등 여러 가지 번뇌이며, 이 습은 지혜의 연(緣)을 없애버린다.이것을 상법(上法)이라 하니, 다시 위[上]가 있지 않으며, 8정도(正道)는 능히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니, 다시 그 이상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후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참는 것을 인(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참음이 있어서 갖가지 결사(結使)와 갖가지 번뇌와 의심과 후회가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능히 파괴할 수 없게 하니, 비유컨대 돌산은 갖가지 바람과 물에도 떠다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忍)이라고 하니, 이 일로써 진실하고 훌륭한 야인(野人)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법의 구절 가운데서 설하신 것과 같다.
세계의 정견(正見) 위에서 누군가 많은 것을 얻는 자가 있다면 마침내 천만 년에 이르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리.
030_0142_b_08L世界正見上, 誰有得多者? 乃至千萬歲,
終不墮惡道。
이 세간의 정견을 이름하여 인선근(忍善根)이라 하니, 이 사람은 많이 증진하여 한마음으로 지극히 세계행(世界行)을 싫어하고, 4제(諦)의 모습을 분명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한마음의 가운데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이라고 한다. 일시에 4행(行) 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에 머물러 첫 번째 진리[諦]인 고법인(苦法忍)15)을 관하니, 고제(苦諦)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왜 욕계 5수음(受陰)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관하는가? 이 가운데서 심인(心忍)으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에 상응하니, 이것을 고법인(苦法忍)이라고 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여러 가지 행(行)과 현재ㆍ미래세의 일체 무루법의 초문(初門), 이것을 바로 고법인이라 한다.법은 무루법이며, 인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030_0142_c_01L차례대로 고법지(苦法智)16)를 내니, 고법인은 결사(結使)를 끊고, 고법지는 깨달음을 이룬다. 비유컨대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묶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쳐서 베어내되 바람을 맞으면 곧 쓰러지는 것과 같다. 인(忍)과 지(智)로 공부하기 때문에 이 일은 욕계의 번뇌[欲界繫]17)를 구별할 수 있고, 괴로움을 보고 열 가지 결사(結使)를 끊으니, 그때에는 등지(等智)와 달리 무루지(無漏智)를 얻어서 아직 얻지 못한 무루혜(無漏慧)를 얻는다.이때 하나의 지(智)를 성취한다.등지는 미래에 성취한다.
두 번째 마음속에서 법지(法智)와 고지(苦智), 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세 번째 마음과 네 번째 마음을 지나서 네 가지 지혜18) 즉 고지(苦智)ㆍ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습(習)ㆍ진(盡)ㆍ도(道)의 법지(法智) 가운데서 하나하나 지혜가 늘어나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지타심지(知他心智)19)를 성취하여 늘어난다. 고비인(苦比忍)과 고비지(苦比智)는 18가지 번뇌를 끊는다. 이 네 가지 마음으로 고제(苦諦)를 증득할 수 있다.
습법인(習法忍)과 습법지(習法智)로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습비인(習比忍)과 습비지(習比智)로 색계와 색계의 번뇌인 열세 가지 번뇌를 끊는다. 진법인(盡法忍)과 진법지(盡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진비인(盡比忍)과 진비지(盡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두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법인(道法忍)과 도법지(道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여덟 가지 번뇌를 끊으며, 도비인(道比忍)과 도비지(道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네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비지를 수타반나(須陀般那)하자상자(下子上子)20)라고 한다. 진실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열여섯 가지의 마음의 능함[能]이다. 열다섯 가지 마음속의 날카로운 근기를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며, 아둔한 근기를 수신행(隨信行)이라고 하니, 이러한 두 사람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초과향(初果向)21)이라고 한다.
먼저 아직 번뇌[結]를 끊지 못하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 것을 수타반나라고 한다. 만일 먼저 6품(品)의 번뇌를 끊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었다면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진(秦)나라 말로는 일래(一來)이다.22)라고 한다. 만일 먼저 9품의 번뇌를 끊고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다면 아나가미(阿那迦迷)진나라 말로는 불래(不來)이다.23)라고 한다.
먼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88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하며, 또한 무루과(無漏果)의 선근을 얻었으므로 수타반나(須陀般那)라고 한다. 예리한 근기를 견득(見得)24)이라 하고, 둔한 근기를 신애(信愛)25)라고 한다. 사유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나머지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며,26) 만일 사유의 번뇌 세 가지를 끊으면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있는 성자[家家]로 세 번 세상에 태어난다.27)
030_0143_a_01L성스러운 길 8분(分)과 37품(品)을 흐름[流]이라고 하니,열반을 향해 흐른다는 뜻이며, 이것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한다. 이것이 부처님 첫 공덕의 씨앗이 되며, 악도를 벗어날 수 있다.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세 가지 독을 엷게 하는 것을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번뇌는 아홉 가지[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ㆍ중상ㆍ중중ㆍ중하ㆍ하상ㆍ하중ㆍ하하]로 견제(見諦)로 끊고 사유(思惟)로 끊는다.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유루도(有漏道)로써 욕계의 번뇌인 여섯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으면 식기타가미라고 한다. 만일 여덟 가지를 끊어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한 가지인 식기타가미 과(果)에서 아나가미(呵那伽迷)로 향한다28).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수타반나를 얻으면 단순하게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식기타가미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사유하여 끊는 것으로,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여섯 가지로 끊으면 이것을 식기타가미의 여덟 가지 끊음이라고 하며, 한 가지 식기타가미의 과(果)가 아나가미로 향한다고 한다.
아나가미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반드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중음(中陰)에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태어난 뒤에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아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최상의 행(行)으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아가니타에 이르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무색정(無色定)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몸으로 깨닫는 아나가미, 아라한을 향해 가는 아나가미이다.
030_0143_b_01L색계와 무색계의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아홉 번째의 무애도금강삼매(無礙道金剛三昧)로써 일체의 번뇌를 타파한다. 아홉 번째 해탈도(解脫道)에서 지혜를 다하여 일체의 선근을 닦으면 이를 아라한과라고 하는데,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수법(守法)ㆍ주법(住法)ㆍ필지법(必知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탈(慧脫)ㆍ공탈(共脫)이다. 유지(濡智)30)로써 부드럽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나면 이것을 퇴법(退法)이라고 하며, 영리한 지혜[利智]로 영리하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남이 없으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이라고 한다.
유지(濡智)로 부드럽게 나아가되 영리하게 사유하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몸을 죽이는 것을 사법(死法)이라고 하며, 유지(濡智)로 크게 나아가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을 수법(守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로 적당하게 나아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가운데를 차지하여 머무는 것을 주법(住法)이라고 하며, 조금 영리한 지혜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지법(必知法)이라 하며, 영리한 지혜로 크게 나아가 처음으로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을 불괴법(不壞法)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선정에 들어가지 않고 아직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여러 가지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선정을 얻고 또한 멸선(滅禪)과 여러 가지 누진(漏盡)을 얻는 것을 공해탈(共解脫)이라고 한다.
어떤 아라한은 일체의 유위법을 언제나 충분히 만족하여 다시 공덕을 추구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열반에 들어가고, 어떤 아라한은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ㆍ4등심(等心)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일체입(一切入)ㆍ9차제(次第)ㆍ6신통(神通)ㆍ원지(願智)ㆍ아란야나삼매진(秦)나라 말로는 무쟁(無諍)이라고 한다. 아란야(阿蘭若)란 무사(無事), 혹은 공적(空寂)이라고도 한다. 옛적에 말하기를 “수보리가 늘 공적행(空寂行)을 행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로부터 무쟁행을 실천할 뿐이니, 무쟁이란 장차 중생들을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사리불과 목련이 밤에 도공(陶公)의 집에 들어가 자는데 구가리(拘迦離)가 와서 다툼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ㆍ초월삼매(超越三昧)ㆍ훈선(熏禪)ㆍ3해탈문(解脫門)ㆍ방사(放捨)방사라는 것은 3해탈문의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다. 공ㆍ무원ㆍ무상은 12문을 생각하되 도리어 집착하는 것이다.를 구하여 다시 이지(利智)를 지어 부지런히 정진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정의 공덕에 들어가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과 불괴법(不壞法)을 얻었다고 한다.
030_0143_c_01L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지 않아서 불법(佛法)이 없으며제자가 없는 때라면, 이때는 욕망을 여읜 사람인 벽지불(辟支佛)이 출현한다. 벽지불은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란 본래 수타반나를 얻었으나 식기타가미와 같다. 이 수타반나는 일곱 번째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태어났지만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었으나 다시 여덟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만일 식기타가미가 두 번째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으나 다시 세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어떤 사람이 벽지불이 되기를 원하여 벽지불의 선근을 심을 때는 불법이 없어도 선근이 익으니, 이때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으면 벽지불이라고 하며, 이것을 중벽지불(中辟支佛)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길을 찾아서 지력(智力)으로 나아감에 힘이 모자라 인연으로 물러나니예컨대 사리불과 같은 경우이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불법도 없으며 제자도 없으나 선근의 행이 익어서 벽지불이 된다. 특징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었기에 이것을 상벽지불(上辟支佛)이라고 한다.
모든 법 가운데 지혜가 얕아 들어가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중간 정도로 들어가는 것을 벽지불이라고 하며, 깊게 들어가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니, 마치 멀리서 나무를 보면 가지를 분별할 수 없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가지를 분별할 수는 있으나 꽃과 잎사귀는 분별할 수 없으며, 나무 아래에 도달해서는 모두를 분별할 수 있어서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아는 것과 같다. 성문(聲聞)은 일체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며, 일체의 모든 법은 주인이 없어서, 오직 열반만이 가장 안온한 것임을 안다. 성문이 능히 이와 같이 관할 수 있다 해도, 분별하여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벽지불은 약간은 분별할 수 있더라도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부처님께선 모든 법을 알고 분별하여 통하고 깊이 들어가 깊게 아신다.
030_0144_a_01L바라내(波羅奈)의 국왕이 뜨거운 여름에 높은 누각 위에 살며7보로 꾸민 평상에 앉아 청의(靑衣)로 하여금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갈아 몸에 바르게 하였는데, 청의가 팔뚝에 많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왕의 몸을 문지를 때마다 팔찌 소리가 귀에 가득하였다.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차례대로 벗게 하였더니 팔찌가 적어지자 소리도 희미해졌고, 오직 팔찌가 하나일 때 고요하여 소리가 없었다. 왕이 그때 깨닫고 말하기를, “국가의 신하ㆍ백성ㆍ궁인(宮人)ㆍ채녀(婇女)가 일이 많으면 번뇌가 많은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욕망을 버리고 외로운 곳에서 사유하여 벽지불을 얻으리라”고 하고는, 수염과 머리를 스스로 깎고 자연의 옷을 입고 누각에서 떠나, 자신의 신족력(神足力)으로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으니, 이와 같은 인연은 중품(中品) 벽지불이다.
만일 수행자가 부처의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가면, 먼저 마땅히 마음을 묶어 시방 삼세의 여러 부처님의 생신(生身)을 오로지 생각해야만 하지, 땅ㆍ물ㆍ불ㆍ바람ㆍ산ㆍ나무ㆍ초목을 생각해선 안 되니, 하늘과 땅 사이에 형체가 있는 무리나 그 밖에 나머지 존재를 다 생각하지 말고, 다만 여러 부처님의 생신이 허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맑은 물 중앙에 금산왕수미(金山王須彌)와 같고,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불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 커다란 사당 가운데의 7보 깃발과 같이,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지니며, 항상 무량하고 청정한 광명이 허공의 푸른 색깔 속에서 나온다. 항상 부처님의 몸과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 수행자는 곧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의 눈앞에 있다’는 일체실견삼매(一切悉見三昧)를 얻는다.
030_0144_b_01L만일 마음이 한가하여 대상에 머물면 다시 거두어서 머물게 하고 생각을 부처님의 몸[佛身]에 두니, 이때 문득 동쪽 3백천만억 가지의 무량한 일체의 부처님을 보며, 이와 같이 남쪽ㆍ서쪽ㆍ북쪽 4유(維)와 위아래로 생각하는 바의 방향에 따라 일체의 부처님을 본다. 마치 사람이 밤에 별자리를 보되 백천 가지의 무량한 별을 모두 보는 것과 같다.보살은 이 삼매를 얻어 무량 겁의 두터운 죄를 제거하고 엷어지게 하며, 엷어진 것은 없어지게 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서 마땅히 부처님의 갖가지 무량한 공덕과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이해(理解)와 일체의 견해와 일체의 덕을 생각해야만 대자대비의 자재함을 얻는다. 처음 무명의 알에서 나와서는 4무외(無畏)ㆍ5안(眼)ㆍ10력(力)ㆍ18불공법(不共法)으로 능히 무량한 괴로움을 제거하여 늙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제되어 늘 즐거운[常樂] 열반과 함께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갖가지 무량한 공덕을 지니신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서 스스로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언제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을 얻어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을 것인가?”라고 하고, 다시 큰 서원을 세우기를, ‘과거 일체의 복과 현재 일체의 복을 모두 지니고 부처님의 길을 추구하되 나머지 과보를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다시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여러 부처님의 몸과 공덕은 높고 높아서 이와 같은데, 중생들은 어찌하여 다시 나머지 업을 구하고 부처님을 찾지 않는가?’라고 하니, 비유컨대 고귀한 집의 눈먼 아들이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배고프고 고단하고 괴로워하며 똥과 진흙을 먹으니, 아버지가 그것을 매우 가엾게 여기고 방편을 찾아서 깊은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내고 훌륭한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
030_0144_c_01L수행자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두 가지 몸과 공덕의 단이슬[甘露]은 이와 같지만 여러 중생들은 생사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먹는구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내 마땅히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고 생사의 언덕을 건너게 하며,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과 법의 맛[法味]으로 모두 배부르게 하리라”라고 한다. 일체의 불법(佛法)은 원하면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듣고 외워 지니며 질문하고 관하며 행하여 과(果)를 얻는 것으로 사다리를 삼고, 크고 요긴한 서원을 세워 세 가지 서원의 갑옷을 입으며, 바깥으로는 마군의 무리를 격파하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서, 곧바로 윤회하지 않는 경지[不迴]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서원을 무량한 여러 가지 서원과 비교하여 서원을 모두 머무르게 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서원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서 만일 음욕이 치우치게 많으면 먼저 스스로 몸을 관한다. 뼈와 살 피부ㆍ근맥(筋脈)ㆍ흐르는 피ㆍ간ㆍ폐ㆍ장ㆍ위ㆍ오줌ㆍ똥ㆍ눈물ㆍ침 등 서른여섯 가지 물건과 9상(想)31)의 더러움에 마음을 기울여 안으로 관하고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마치 사람이 촛불을 들고 잡곡 창고에 들어가서 갖가지로 분별하되 콩ㆍ보리ㆍ조 등을 모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몸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관하니, 단단한 것은 땅의 성분이고, 축축한 것은 물의 성분이며, 뜨거운 것은 불의 성분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분이며, 구멍은 허공의 성분이고, 아는 것은 식(識)의 성분이다. 또한 도살한 소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몸과 머리, 사지가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어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며,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담겨 있으니, 항상 이와 같이 관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만일 한마음을 얻어서 마음에 싫어함이 생겨 이 몸 여의기를 구하고, 재빨리 사라져 일찍 열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때는 마땅히 대자대비심을 일으켜서 커다란 공덕으로 중생들을 구제해야만 하니, 앞의 세 가지 서원을 일으키길, ‘모든 중생들이 부정(不淨)함을 알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잘못과 허물을 일으키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단이슬의 땅에 올려 놓으리라. 또한 욕계의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것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 마치 개가 똥을 먹는 것과 같으니, 내 마땅히 제도하여 청정한 도에 이르게 하리라’고 한다.
030_0145_a_01L또한, ‘나는 마땅히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는 것을 배워서 찾으리라. 나는 왜 이 부정한 것에 집착하는가? 부정함을 관하는 지혜는 인연을 좇아 생기니, 나의 법과 같은 이는 마땅히 참다운 모습을 구해야만 하리라. 어떻게 몸속의 부정함을 싫어하고 열반을 취하는가?마땅히 마치 큰 코끼리가 빠르게 흐르는 물을 건너기 위해 시내의 밑바닥 끝까지 다하듯이 참다운 존재의 모습을 얻어서 열반에 들어가야 한다. 어찌 원숭이나 토끼처럼 빨리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스스로 몸을 제도할 것인가? 내 이제 마땅히 배우되 보살법과 같이 하리라. 부정관(不淨觀)을 실행하여 음욕을 제거하고,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여 욕망과 근심을 여의게 하되, 부정관에 매몰되지는 않으리라.
또한 이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였으면 곧 생사를 싫어하여, 마땅히 정문(淨門)을 관하되 마음을 세 곳 즉 코끝ㆍ미간ㆍ이마 위에 묶어놓아야 하니, 마땅히 이 속에서 한 마디의 가죽을 열어 피와 살을 청정하게 제거하고, 마음을 백골에 묶어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세 가지 연(緣)에 집착해서 항상 마음과 더불어 싸우나니,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씨름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만일 마음을 이기자면 곧 그것을 제압하여 머물게 하는 것 만함이 없으니, 이것을 한마음이라고 한다.
만일 싫어하는 것으로 크게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면, 이 빈 뼈다귀 때문에 열반을 멀리 여의고 3악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여러 가지 공덕을 지어 중생들을 교화해서 신상(身相)의 공함을 이해하게 하리라. 뼈는 가죽으로 덮여 있으나 사실은 부정(不淨)한 것을 모은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이 모든 법의 모습을 분별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고, 부정하다는 생각이 많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존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를 낳는다.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또한 닫힘도 없고 나옴도 없어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관하여 무너뜨릴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한다.나한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030_0145_b_01L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동쪽의 중생을 생각해야 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청정하여 원망함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넓고 커서 헤아릴 수 없으면, 모든 중생들이 눈앞에 있음을 보리니, 남쪽ㆍ서쪽ㆍ북쪽의 4유(維)와 위아래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통제하고 인자함을 행하며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다른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마음의 눈으로 일체의 중생들을 관하면 모두가 분명하게 눈앞에 있음을 본다.
만일 한마음을 얻으면 마땅히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여 참다운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도이다. 자삼매에 머물러서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관하면 맑고 깨끗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발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의 이익[法利]을 얻게 한다. 이러한 삼매로 동쪽의 일체 중생들을 인자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도 또한 그러해서 마음이 구르고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자삼매문(慈三昧門)이라고 한다.
030_0145_c_01L 수행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집을 나오고 세속을 떠나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사유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먹음은 마땅히 이익을 행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인자함을 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곧 도에 들어가서 헛되이 보시를 받지 않는 것이다. 또한몸에는 물들인 옷을 걸치지만 마음은 응당 물들지 않아서 자삼매의 힘이 능히 오염되지 않게 한다. 또한 나의 마음으로 인자함을 행하여 법을 파괴하는 세상에서 나는 법이 있는 사람이며, 비법(非法)의 무리들 가운데 나는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므로 법다워서[如法] 고뇌가 없으니, 인자함의 선정32)이 지니는 힘 때문이다”라고 한다.
보살은 도를 행하여 감로문(甘露門)으로 향하고, 갖가지 뜨거운 번뇌를 인자함으로 시원하게 하여 즐겁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지독히 뜨거울 때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면 즐겁다. 또한 위대한 자비의 갑옷을 입으면 번뇌의 화살을 막아주며, 자비로 법의 약을 삼으면 원망과 번뇌의 독을 해소한다. 번뇌는 마음을 태우니, 인자함으로 능히 없앨 수 있다. 자비로 법의 사다리를 삼아 해탈의 집에 올라가며, 자비로 법의 배를 삼아 생사의 바다를 건너며, 훌륭한 법의 재물을 구할 때는 자비를 으뜸가는 보배로 삼고, 열반을 향해 가는 데는 자비를 도의 양식으로 삼는다. 자비로 준마(駿馬)를 삼아 열반으로 건너가고, 자비를 용감한 장수로 삼아서 3악도를 뛰어넘는다. 자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뭇 악을 녹일 수 있으며, 모든 하늘의 착한 신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옹호한다.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자삼매(慈三昧)를 얻는다면, 어떻게 해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더욱 늘리겠는가?
030_0145_c_13L問曰:“若當行人得慈三昧,云何不失而復增益?”
계(戒)를 배워서 맑고 깨끗하며, 잘 믿고 즐거움을 의지한다. 여러 가지 선정의 한마음의 지혜를 배우고, 조용한 곳에 살기를 즐거워하며, 항상 게을리하지 않는다.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함을 알며, 행동은 인자한 가르침을 따른다. 몸을 절제하고 음식을 적게 먹으며, 잠자는 것을 줄이고,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번거로운 언어를 줄여 묵묵히 고요함을 지킨다. 앉고 눕고 가고 머묾에 때를 알아서 쉰다. 법도를 잃어 피로와 괴로움이 극도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차고 따뜻함을 조화시켜 괴롭고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것을 일러 ‘인자함을 더한다’고 한다.
030_0146_a_01L또한 불도(佛道)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일체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크게 자비롭다고 한다. 수행자는 사유하기를, ‘현재와 미래의 위대한 사람은 인자함을 행하여 일체를 이롭게 하므로 나도 역시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이 나의 어진 도우미[祐]이다. 나도 마땅히 인자함을 행하여 마침내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또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대덕(大德)은 인자한 마음으로 일체의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나도 마땅히 그렇게 하리라. 저 중생들을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니, 이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또한 인자함의 힘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쾌락을 얻게 하며, 몸은 뜨거운 고뇌를 여의고 맑고 시원한 즐거움을 얻게 하니, 인자함을 행하는 복덕을 가지고 일체를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하여 그 은혜에 보답한다.
또한 인자함에는 훌륭한 이익이 있으니, 성냄의 법을 끊고 명칭의 문을 열며, 보시하는 이의 좋은 밭이어서 범천에 태어나는 원인이다”라고 한다. 욕심을 여읜 곳에 머물러 원망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뿌리를 없애버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능히 청정한 계율을 지녀 지혜의 밝음을 일으키고, 능히 법의 이로움을 들으며, 공덕의 제호(醍醐)로 좋은 사람을 결정한다. 출가의 용감한 힘으로 모든 악을 녹여 없애고, 욕설로 욕보이는 착하지 않음도 인자함으로 갚으면 항복시킬 수 있다. 열락(悅樂)을 묶어 모아서 정진법을 일으킨다. 부귀의 근본 원인은 지혜의 창고를 갖추는 것이니, 성실과 믿음의 창고는 여러 가지 훌륭한 법문이다. 칭찬하고 기리는 법[稱譽法]을 성취하여 근본적인 부처님의 바르고 참다운 길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만일 사람이 악을 지니고 그것을 지향하면 도리어 스스로 그 재앙을 받는다. 다섯 가지 나쁜 말이 있으니, 때에 맞지 않는 말, 진실하지 않은 말, 이롭지 않은 말, 인자하지 않은 말, 부드럽지 않은 말이다. 이 다섯 가지 나쁜 말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고, 일체의 독해(毒害)도 역시 막을 수 없으니, 비유컨대 작은 불로 커다란 바다를 뜨겁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이 아래는 우전왕(優塡王)이 5백 대의 화살을 쏘았다는 것에서 나왔다.
030_0146_b_01L『비라경(毘羅經)』에 나오는 우전왕의 아파타나(阿婆陀那: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무비(無比)였고, 둘째는 사미파제(舍迷婆帝)였다. 무비가 사미파제를 비방하니, 사미파제에게는 5백 명의 시종들이 있었는데 왕이 5백 대의 화살로 한 명 한 명 쏘아 죽이고자 했다. 사미파제가 여러 시종들에게 말했다. ‘내 뒤에 서라.’ 이때 사미파제는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갔다. 왕이 활을 당겨 쏘았으나 화살은 발아래 떨어졌으며,두 번째 화살은 도리어 왕의 다리 아래로 향했다. 왕이 크게 놀랐으나 다시 화살을 쏘려고 했다. 사미파제가 왕에게 아뢰었다. ‘그만두십시오, 그만두십시오. 부부의 도리는 서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화살을 쏜다면 곧바로 당신의 심장을 부술 것입니다.’ 왕이 그때 두려워하며 활과 화살을 버리고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술법을 지니고 있는가?’ 대답하였다. ‘저는 다른 술법이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자삼매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자삼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 가지 연(緣)이 있으니, 생연(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두를 생연이라 하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법연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과 세존은 무연이라 하니, 그러므로 간략하게 자삼매문이라고 설명한다.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에서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12분(分)을 관하여 두 가지 어리석음을 타파해야만 하니, 안으로는 몸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밖으로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타파한다. 사유하고 생각해 말하기를, “나와 중생은 함께 재액의 어려움 속에 있으니, 항상 태어나고, 항상 늙으며, 항상 병들고, 항상 죽으며, 항상 없어지고, 항상 나온다. 중생은 가엾어서 길에서 나올 줄 모르니, 무엇을 쫓아서 벗어날 것인가?”라고 한다.
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태어난다’라고 하고, 마땅히 다시 ‘어떤 인연으로 생기는가?’라고 사유하라. 한마음으로 ‘생의 인연은 유(有)이고, 유의 인연은 취(取)이며, 취의 인연은 애(愛)이고, 애의 인연은 수(受)이다. 수의 인연은 촉(觸)이고, 촉의 인연은 6입(入)이며, 6입의 인연은 명색(名色)이다. 명색의 인연은 식(識)이고, 식의 인연은 행(行)이며, 행의 인연은 무명(無明)이다’라고 사유하라. 이와 같이 다시 ‘마땅히 어떠한 인연으로 태어나며 늙고 죽음을 없애는가?’라고 사유하라.
030_0146_c_01L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남이 없어지기 때문에 늙고 죽는 것이 없어지며, 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어지며, 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가 없어진다. 애가 없어지기 때문에 취가 없어지며,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애가 없어진다. 촉이 없어지기 때문에 수가 없어지며, 6입이 없어지기 때문에 촉이 없어진다. 명색이 없어지기 때문에 6입이 없어지며,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명색이 없어진다. 행이 없어지기 때문에 식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이 없어진다’라고 하라.
이 가운데서 12분(分)은 무엇인가? 무명분(無明分)은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앞뒤도 모른다. 안도 모르고 바깥도 모르며 안팎도 모른다. 부처님도 모르고 법도 모르며 승가도 모른다. 괴로움[苦]도 모르고 습(習)도 모르며 진(盡)도 모르고 도(道)도 모른다. 업도 모르고 과보도 모르며 업과(業果)도 모른다. 인(因)도 모르고 연(緣)도 모르며 인연(因緣)도 모른다. 죄도 모르고 복도 모르며 죄복(罪福)도 모른다.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며 선악도 모른다. 유죄법(有罪法)도 모르고 무죄법(無罪法)도 모르며 마땅히 가까이해야 할 법도 모르고 마땅히 멀리해야 할 법도 모른다. 유루법(有漏法)도 모르고 무루법(無漏法)도 모르며 세간법(世間法)도 모르고 출세간법(出世間法)도 모른다. 과거의 법도 모르고 미래의 법도 모르며 현재의 법도 모른다. 흑법(黑法)도 모르고 백법(白法)도 모른다. 인연을 분별하는 법도 모르고 6촉법(觸法)도 모르고 참답게 깨닫는 법도 모른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여 어둡고 검어 밝음이 없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030_0147_a_01L무엇이 구행인가? 유각(有覺)과 유관(有觀)33)이니, 이것은 각(覺)과 관(觀)을 만들고 나서 이후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만일 각과 관이 없으면 말[言說]도 없으니, 이것을 구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의행인가?통(痛)은 세계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세 종류의 통을 말한다. 통은 응당 수(受)가 되니, 수(受)는 곧 경계에 따라 고락(苦樂)을 받는다. 상계(上界)엔 없으므로 마땅히 수상(受想)을 말하는 것이니, 출가한 이가 근심하는 바이다. 통상(痛想)34)이 바로 의법(意法)이니, 마음[意]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계행(繫行)ㆍ색계의 계행ㆍ무색계의 계행이 있으며,또한 선행(善行)ㆍ불선행(不善行)ㆍ부동행(不動行)이 있다. 무엇이 선행인가? 욕계의 일체 선행과, 또한 색계의 3지(地)이다. 무엇이 불선행인가? 여러 가지 착하지 않은 법이다. 무엇이 부동행인가? 제4선의 유루(有漏)의 선행과 무색정(無色定)의 착한 유루행(有漏行)이다. 이것을 행이라고 하니,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다. 무엇을 식이라고 하는가?
여섯 가지 식의 세계가 있으니,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까지 이것을 여섯 가지 식이라고 한다.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다. 무엇을 명(名)이라고 하는가? 무색(無色: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의 4분(分)인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 이것을 명(名)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색(色)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색은 4대(大)와 조색(造色:물질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을 색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4대인가? 땅ㆍ물ㆍ불ㆍ바람이다. 무엇이 땅인가? 단단하고 무거운 모양이 땅이다. 부드럽게 적시는 모양은 물이요, 뜨거운 모양은 불이요,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은 바람이다. 나머지 물질은 볼 수 있으니, 대(對)가 있거나 대가 없거나 간에 이것을 조색(造色)이라고 한다. 정신작용과 물질이 화합하면 이것을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명색을 인연하여 6입(入)이 있으니, 무엇이 6입인가? 안의 6입[內六入]은 눈의 내입[眼內入]에서부터 의식의 내입까지이니, 이것을 6입이라고 한다. 6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으니, 무엇이 촉인가? 여섯 가지 촉의 세계가 있으니, 안촉(眼觸)에서부터 의촉(意觸)까지이다. 무엇이 안촉인가? 눈은 빛깔을 연하여 안식(眼識)을 내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하면 이것을 안촉이라고 한다. 나아가 의촉도 마찬가지이다.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니, 무엇이 수인가? 세 가지 수가 있으니,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무엇이 낙수인가? 애착하는 번뇌[愛使]35)이다. 무엇이 고수인가? 성냄의 번뇌[恚使]이다. 무엇이 불고불락수인가? 어리석음의 번뇌[癡使]이다. 또한 낙수는 즐거움을 일으켜서 즐거움에 머물러 괴로움을 없애며, 고수는 괴로움을 일으켜서 괴로움에 머물러 즐거움을 없애며, 불고불락수는 괴로움도 모르고 즐거움도 모르는 것이다.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니, 무엇이 유인가? 세 가지 유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아래는 아비(阿鼻)의 커다란 지옥으로부터 위로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욕유라고 하며, 그리고 그것은 업을 발생시킬 수 있다. 무엇이 색유인가? 아래는 범(梵)의 세계로부터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색유라고 한다. 무엇이 무색유인가? 허공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무색유라고 한다.
030_0147_c_01L이것은 12인연에 일치하니, 일체의 세간은 인연의 테두리가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의 테두리도 아니며, 사람의 테두리도 아니고, 여러 가지 삿된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보살은 12인연을 관하되 마음을 묶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12분이 삼세, 즉 전생ㆍ금생ㆍ후생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관하여 만약 보살이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다면, 마땅히 12분은 공이요 주인이 있지 않다고 관해야 한다. 어리석음은 내가 행(行)을 만드는 것을 모르며, 행은 내가 어리석음을 따라 존재하는 것을 모르니, 다만 무명을 연하기 때문에 행이 생긴다. 마치 초목의 씨앗처럼 종자에서 싹이 나오지만, 종자 역시 내가 싹을 내는 것을 모르며, 싹도 역시 종자에서 나온 것을 모른다. 나아가 늙고 죽음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 12분 가운데하나하나가 주인도 없고 나도 없음을 관하여 안다. 마치 바깥의 초목은 주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다만 뒤바뀐 견해에 따라 내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만일 내가 없고[無我] 주인도 없으며[無主] 지음도 없다[無作]면, 어떻게 오고 가며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는가?
030_0147_c_03L問曰:“若無吾我、無主、無作,云何去來言說死此生彼?”
비록 내가 없지만 6정(情)이 씨앗[因]을 만들고 6진(塵)이 주변 조건[緣]을 만드는 가운데 6식(識)이 생기니,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감촉과 인식의 대상[法]이 생기며 모든 업을 생각하여 안다. 이 오고 감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비유컨대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와 마른 쇠똥이 화합하는 방편 때문에 불이 생기니, 5음(陰)도 역시 그렇다. 이 5음이 생겼기 때문에 후세의 5음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 5음이 후세에 이른 것은 아니며 또한 이 5음을 여의고서 후세의 5음을 얻은 것도 아니니, 5음은 다만 인연을 따라서 나온다.
비유컨대 곡식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이 씨앗이 싹은 아니며, 또한 나머지 싹의 테두리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후세에 몸을 얻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나무에 아직 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없지만 시절 인연을 얻어서 꽃과 잎을 구족하는 것처럼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또한 이와 같다. 씨앗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며, 싹ㆍ줄기ㆍ잎 등이 생기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죽고 태어나 서로 이어지는 것도 역시 그렇다.
수행자는 모든 존재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愛) 등 때문에 존재함을 알며, 소멸로 인하여 이것이 다함[盡]을 알고, 다함이 바로 도(道)임을 안다. 이 네 가지 지혜로써 12분을 알면 이것이 바로 정견의 길이다. 중생은 사로잡히고 집착하기 때문에 미쳐버리니, 사람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주(寶珠)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의 진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속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때 보살은 ‘내 마땅히 부처가 되어 바르고 진실한 법으로 저 중생들을 교화하여 올바른 길을 보게 하리라’고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킨다.
030_0148_a_01L 대승의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하는 것과 같이일체의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滅], 공(空)이요 무소유(無所有)이며,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데, 왜 무상(無常) 등을 관하는 것을 일컬어 정견이라고 하는가?
만일 대승 가운데서 일체 존재의 공(空)과 무상(無相)을 설하였다면, 왜 무상ㆍ고ㆍ공 등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만일 불생ㆍ불멸ㆍ공이 참다운 모습(實相)이라면 마땅히 무상(無相)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니, 그대의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말씀하셨으니, 무상(無常) 가운데 상(常)은 뒤바뀌었으나 또한 도리가 있다. 일체의 유위(有爲)는 무상(無常)하니,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무상한 인(因)과 무상한 연(緣)이 발생시키는 결과를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으며, 이미 있던 것이 문득 없어지니,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무상함을 보며, 안으로는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으며, 밖으로는 만물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어찌하여 무상(無常)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나는 항상하는 것[常]이 진실이고 항상하지 않는 것[無常]이 진실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항상하는 것과 항상하지 않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공(空) 가운데서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일을 얻을 수 없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둘 다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대의 말은 법과 서로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다시 둘 다 모두 뒤바뀌었다고 말하는가? 일체가 공하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이것은 진실한 것이요 뒤바뀐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항상함을 부숴버리고 항상하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나의 존재는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며 진실한 나[我]는 아니다. 유상(有常)하다고 뒤바뀐 것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상(無常)을 관하니, 왜냐하면 무상의 힘은 능히 유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이 능히 그 밖의 독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고, 약으로 병을 제거하면 약도 함께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약이란 것이 병을 미묘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만일 약을 버리지 않으면 뒤에는 약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만일 무상법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깨뜨려야만 하니,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030_0148_b_01L내가 무상법(無常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苦)는 네 가지 참다운 진리 가운데서 진실로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니, 누가 능히 즐겁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고(苦)의 인(因)은 참다운 인인데, 누가 능히 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고의 다함[盡]은 참으로 다하는 것인데, 누가 능히 다하지 않게 하겠는가? 다함의 길[道]은 참다운 길인데, 누가 능히 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해는 혹 차갑게 할 수 있고, 달은 혹 뜨겁게 할 수 있으며, 바람은 혹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네 가지 참다운 진리는 끝내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그대는 대승 가운데서 요달(了達)하지 못하고 단지 말소리에만 집착할 뿐이니, 대승 가운데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에서 참다운 모습[實相]은 깨뜨릴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만일 깨뜨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대승이 아니다. 마치 달이 처음 생겨서 하루나 이틀이 되면, 그것이 생길 때는 매우 미세하여 밝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가리켜 보여 주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손가락을 볼 뿐이요 달을 못보고 헤매니, 눈 밝은 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왜 단지 나의 손가락만 보는가? 손가락으로 달의 연(緣)을 삼은 것이지 손가락이 저 달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역시 이와 같다. 말소리는 참다운 모습이 아니니, 다만 말을 빌려서 참다운 이치를 표현할 뿐이다. 그대가 다시 말소리에 집착하면 참다운 모습에 어두울 것이다.
수행자가 만일 이와 같이 바른 지견(知見)을 얻는다면, 12분(分)이 화합하여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분이 됨을 관할 것이다. 과(果)일 때의 12분은 고제(苦諦)이고, 인(因)일 때의 12분은 습제(習諦:集諦)이며, 인이 소멸할 때는 이것이 진제(盡諦)이며, 인과 과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도제(道諦)이니, 네 가지로 과를 관하면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네 가지로 인을 관하면 집(集)ㆍ인(因)ㆍ연(緣)ㆍ생(生)이다.
과(果)에 네 가지가 있는데 단지 고제(苦諦)라 이름할 뿐이니, 그렇다면 그 밖의 것은 진리의 이름이 없는가?
030_0148_b_20L問曰:“果有四種但名苦諦,餘者無諦名也?”
030_0148_c_01L 만일 무상의 진리[無常諦]라고 말해도 의심스럽고, 고의 진리[苦諦]라고 해도 역시 의심스러우며, 무아의 진리[無我諦]라 해도 역시 의심스러워서 똑같이 난처하다. 또한 무상의 진리가 때[咎]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과 무아의 진리도 역시 때가 없으며, 만약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진리를 설명하자면 중복되기 때문에그러므로 네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설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칼을 잡고 자살하거나 바늘로 찌르거나 쓴 약을 도적에게 준다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는 괴로움을 찾는 것이 아닌가?
030_0148_c_05L問曰:“有人欲得捉刀自殺,鍼炙苦藥入賊,如是種種非求苦也?”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니,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취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제일의 근심이며, 즐거움은 제일의 이로움이니, 이 때문에 참다운 괴로움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분(果分)으로 오직 괴로움의 진리를 이름하셨을 뿐이요, 무상이나 공이나 무아로 하지 않으셨다.
이 네 가지 진리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를 분명하게 깨닫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는 이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갖가지로 불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하니, 삿된 생활을 제거하고 네 가지 삿된 말을 거두며, 그 밖의 네 가지 삿된 말을 여의고 네 가지 바른 말을 섭수한다. 삿된 생활을 제거하여 몸의 세 가지 업을 섭수하고, 그 밖의 세 가지 삿된 업을 제거하면 바른 업[正業]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가지가지 삿된 생활을 여의면 이것을 바른 생활[正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때를 관하여 정진하면 이것이 올바른 방편[正方便]이며, 이 일을 생각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올바른 관찰[正念]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을 올바른 선정[正定]이라고 한다. 올바른 깨달음[正覺]은 왕과 같아서 일곱 가지 일이 따르니, 이것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이 일을 한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하며,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도를 찾으면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하고, 마음이 한곳에 머물러 또한 내달려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며, 사유하고 분별하여 무상(無常) 등을 깨달으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이 근(根)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것을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고 한다.
030_0149_a_01L 8정도에서혜(慧)ㆍ염(念)ㆍ정(定) 등을 모두 설하였는데, 근력(根力)에서 무슨 이유로 거듭 설명하는가?
030_0149_a_01L問曰:“八正道中皆說慧念定等,根力中何以重說?”
따라 들어가 행할 때, 처음에는 작은 이익을 얻으니, 이때를 ‘근(根)’이라 하며, 이 다섯 가지 일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때 ‘힘[力]’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030_0149_a_02L答曰:“隨入行時初得小利,是時名爲根。是五事增長得力,是時得名爲力。”
처음으로 무루(無漏)의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 공덕을 8정도(正道)라고 하며,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갈 때는 7각의(覺意)라고 하며, 처음 도에 들어가서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하여 항상 한마음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4념지(念止)라고 하며, 이와 같이 선법(善法)의 맛을 얻어서 네 가지로 정근(精懃)하면 이것을 4정근(精懃)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욕(欲)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의 초문(初門)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대로 자재함을 추구하면 이것을 4신족(神足)이라고 하니, 비록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 등으로 부르더라도 모두 거두어 수행할 때에는 처음과 끝, 적고 많음, 수행하는 경지[地]의 연(緣) 등에 따라서 각각 이름을 얻는다.
비유컨대 4대(大)에 각각 4대가 있어서 다만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일 땅의 종류가 많고 물ㆍ불ㆍ바람이 적은 곳이라면 이름을 지대(地大)라 할 것이며, 물ㆍ불ㆍ바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37품(品) 가운데 각각 여러 품이 있으니, 마치 4념지 가운데 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 등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12분ㆍ4제를 관하여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를 행하면 그 마음이 안락하다. 또한 이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한마음으로 서원하고 정진하여 부처님을 찾을 때 마음속으로 사유하고 관하여 생각하기를 ‘나는 분명하게 이 도를 관하여 알더라도 마땅히 깨달음을 취하지 않으리라.
030_0149_b_01L두 가지 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아직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리니, 첫째는 커다란 슬픔[大悲]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깊이 아는 것이다. 모든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은 인연 따라 생기는데, 나는 지금 어찌하여이 진실하지 않은 것에 따르는가? 마땅히 스스로 사유해서 12인연을 깊이 관하여 들어가 인연이 어떠한 법인가를 알고자 한다’라고 한다. 또 다시 사유하기를 ‘이 네 가지 연, 즉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은 다섯 가지 인(因)37)으로 인연을 삼는다. 과거와 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을 제거한 나머지 과거와 현재의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이 바로 차제연이다. 연연과 증상연은 일체의 존재에서 연유한다’라고 한다.
다시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존재가 먼저 인연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이 존재는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없다면 또한 마땅히 인연 가운데서 생긴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반은 있고 반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인연이 있다고 하는가? 만일 존재가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과거의 마음과 대상이 없어지면 어떻게 차제연을 만들 수 있는가? 만일 불법(佛法) 가운데 미묘한 법에 연(緣)이 없다면 열반은 어떻게 연연을 만들 것인가?
만일 모든 존재가 진실로 자성이 없다면 어떠한 존재도 얻을 수 없다. 만일 인연으로 결과가 생겨서 이것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말은 곧 틀린 것이다. 만약 인연 속에 각각 차별이 있거나 혹은 한곳에 화합하더라도 이 과(果)는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인연의 테두리에서 결과가 나오는가? 인연 가운데 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과가 없는데도 나온다면 무슨 까닭에 인연의 테두리에서 과를 낳는가? 둘 다 모두 없기 때문이다.
과는 인연에 속하며,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지만 이 인연은 자재하지 않아서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 이 과가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면 어찌하여 자재하지 않는가? 인연은 능히 과를 생기게 하니, 그러므로 과는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연 아닌 것을 따라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가 아니니, 과가 없기 때문에 연(緣)과 연이 아닌 것[非緣]도 역시 없다”라고 한다.
030_0149_c_01L 부처님께서 12인연은 무명을 연하여 모든 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대는어찌하여 인(因)과 과(果)가 없다고 하는가?
030_0149_b_23L問曰:“佛言十二因緣,無明緣諸行,汝云何言無因果?”
먼저 이미 대답했으니 마땅히 다시 논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다시 대답하리라. 부처님께서 “눈이라는 인(因)과 빛깔이라는 대상[緣]에 의해 어리석음의 테두리에서 삿된 억념(憶念)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리석음이 바로 무명이다. 이 가운데 무명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눈[眼]에 의지하는가, 혹은 빛깔[色] 가운데 의지하는가, 혹은 식(識)에 의지하는가? 마땅히 눈에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되니, 만일 눈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빛깔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항상 어리석어야 마땅하다. 만일 빛깔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눈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바깥의 어리석음인데 어떻게 나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 만일 식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식은 무색이고, 상대도 없으며, 감촉도 없고, 분별이 없으며, 처소가 없으니, 무명도 역시 그러한데 어떻게 머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무명은 안도 아니며, 바깥도 아니고, 양쪽의 중간도 아니다. 전생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내생으로도 가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4유(維)와 상하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참다운 존재가 있지 않다. 무명의 본성이 그러하니, 무명의 본성을 요달하면 변하여 밝음이 되며, 하나하나를 추궁하면 어리석음을 얻을 수 없다.
030_0150_a_01L보살은 도를 보면 마땅히 세 가지 인(忍)을 행해야 하니, 즉 법생인(法生忍)ㆍ유순법인(柔順法忍)ㆍ무생인(無生忍)이다. 무엇이 생인(生忍)인가? 일체의 중생들이 혹욕하고, 혹 때리고, 혹 죽이는 등 갖가지 나쁜 일을 해도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더욱 자비스럽다면, 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추구하고 일체를 얻고자 원하리니, 마음을 풀어놓지 않으면 이때 점차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서 마치 기운이 배어들어서 달라붙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인자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여 젖을 먹여 양육하되 갖가지 더러움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가엾은 생각을 두 배로 더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중생들이 갖가지 나쁜 일과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악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물러나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또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나 한 사람이 마땅히 모두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게 하리라고 마음으로 참아서 물러서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게으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생인 가운데 한마음으로 생각을 묶어서 세 가지 사유가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이것을 생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이미 생인의 공덕이 무량함을 얻었으면 이 공덕의 복덕과 과보가 무상(無常)함을 안다. 이때 무상함을 싫어하여 스스로 변함없는 복덕을 찾으며, 또한 중생을 위하여 항상 머무는 법을 찾는다. 일체의 모든 존재에서 즉, 물질과 비물질의 존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존재, 대립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 존재,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상ㆍ중ㆍ하의 존재에서 그 참다운 모습을 찾는다.
030_0150_b_01L참다운 모습이란 무엇인가?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이 아닌 것도 아니며,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항상하는 것이 아닌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이제 있으며, 그러므로 이미 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항상하지 않음[無常]이 아닌가? 업보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바깥의 번뇌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인연이 증가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음이 아니다. 어찌하여 즐거움이 아닌가? 새로운 괴로움 속에서즐거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무상한 성질 때문이며, 욕망에 연유하여 생기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어찌하여 즐겁지 않음[不樂]이 아닌가? 즐거움은 감수작용을 지니기 때문이고, 욕망에 물들어서 생기기 때문이며, 즐거움을 찾아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空)이 아닌가? 안팎의 입(入:12處)은 각각의 받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죄와 복의 과보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의 중생이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 아닌 것[不空]이 아닌가? 화합 등으로 생기기 때문이고, 분별하여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공 아닌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자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제7식의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정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후세가 있기 때문이고, 해탈을 얻기 때문이며, 각각 나의 마음이 생겨서 그 밖의 것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니, 언설(言說)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갈 곳도 끊어진다. 마치 열반의 본성과 같으니, 이것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법 가운데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정체되지도 않고 걸림도 없으며, 유연하게 알고, 유연하게 믿으며, 유연하게 정진하니, 이것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한다.
030_0150_c_01L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인가? 위와 같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서 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고, 근(根)이 날카로우면 이것을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성문법(聲聞法) 가운데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서 인법(忍法)을 얻는 것과 같다. 인(忍)이란 열반을 참아내고 무루법을 참아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 하고, 새롭게 얻고 새롭게 인식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고 하니, 법인(法忍)도 역시 이와 같다. 시해탈(時解脫)38)한 아라한은 무생지(無生智)를 얻을 수 없으며, 더욱 정진하여 널리 이롭게 해서 불시해탈(不時解脫)을 성취하면 무생지를 얻으니, 무생법인도 역시 이와 같다. 아직 보살의 과(果)를 얻지 못하고서 무생법인을 얻으면보살의 참다운 행의 과를 얻으니, 이것을 보살도의 과라고 한다.
이때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얻고, 중생 가운데서 대비를 얻으며, 반야바라밀의 문에 들어간다. 그때 여러 부처님께서 문득 그 칭호를 주면 따라서 부처님의 세계 가운데 태어나, 여러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바가 되어 일체의 무거운 죄가 엷어지고, 엷은 사람은 없어지며, 3악도가 끊어진다. 항상 천상의 사람 가운데 태어나며, 물러나지 않는다[不退轉]고 이름하며, 움직이지 않는 곳에 도달하고, 마지막 육신은 모두 법신(法身) 속에 들어가 능히 가지가지 변화를 만들어서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한다. 6바라밀을 구족하여 일체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10지(地) 가운데 서서 공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니 차례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보살의 선법(禪法) 가운데 초문(初門)이 된다.
1)여기서 말하는 각(覺, Vitarka)은 신역(新譯)에선 심(尋)으로 번역하고, 관(觀,Vicara)은 신역에선 사(伺)로 번역한다. 합하여 심사(尋伺)라고 하는데, 각은 거칠고, 관은 세밀한 분별작용으로서 모두 초선에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2)제2선에서는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의 선정 작용을 수반한다.
3)제4선에서는 행사청정(行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비고비락수(非苦非樂受)의 선정 작용을 수반한다.
4)차례로 무색계에 상응하는 4무색정(無色定)을 설한다.
5)물질적으로 서로 대립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6)신역에서는 무량공처정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이다.
7)4념처관(念處觀)이라고도 한다.
8)고제(苦諦)의 네 가지 관법은 무상ㆍ고(苦)ㆍ공ㆍ무아이다.
9)집제(集諦)를 말하며, 이것은 집(集)ㆍ인(因)ㆍ생(生)ㆍ연(緣)의 네 가지가 있다.
10)멸제(滅諦)를 말하며, 폐(閉)ㆍ멸(滅)ㆍ묘(妙)ㆍ출(出)의 네 가지가 있다.
11)도제(道諦)에는 도(道)ㆍ정(正)ㆍ적(跡)ㆍ이(離)의 네 가지가 있다.
12)난(煖:따뜻하다, Usmagata)은 견도(見道) 무루지(無漏智)의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따뜻함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3)4선의 근본정(根本定)과 미지정(未至定)과 중간정(中間定) 등 여섯 가지이다.
14)난위(煖位)의 수행이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15)고법인이란 정확하게는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서 앞의 4선근의 인법(忍法)과 구별하기 위해서 다음의 제이의 고법지(苦法智)를 일으키는 인(忍)이란 의미에서 고법지인(苦法智忍)이라 부른다.
16)고법지는 바로 욕계에서 고제(苦諦)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서 이것이 제이의 마음이다.
17)욕계계란 욕계에 묶여있는 번뇌란 의미로서, 열 가지 번뇌란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
18)4지란 고지ㆍ법지ㆍ비지ㆍ등지이다. 고지(苦智)란 심계의 고제에 대한 미혹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무루지혜이며, 법지(法智)란 욕계에서 일어나게 되는 유위법의 4제를 관찰하는 오염되지 않은 성스러운 지혜이고, 비지(比智)란 신역으로서는 유지(類智)라 한다. 유지란 상계(上界)의 번뇌에 대해서 작용하는 지혜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제행의 4제를 관찰하고 번뇌를 끊는 무루지를 말한다. 등지(等智)란 세속의 일을 아는 지혜이다.
19)타심통을 아는 것이다.
20)진나라 말로는 ‘열반으로 흘러 들어감’이라고 한다. 원(元)ㆍ명(明) 본에 의하면 열반에 흘러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21)4향4과 중의 예류향을 말한다.
22)일래과(一來果)라 번역하며, 사다함과라고도 한다.
23)불래(不來)라 번역하며, 아나함을 말한다.
24)수법행자(隨法行者)가 예류과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25)수법행자가 예류과를 얻은 것을 말한다.
26)여잔칠세생(餘殘七世生)이란 욕계 9품의 수혹(修惑)을 적어도 끊지 않고 초과(初果)를 얻는다는 것은 최대한도로 일곱 번 욕계에 태어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27)삼종단명가가삼세생(三種斷名家家三世生)이란 욕계 수혹의 앞의 3품을 끊을 때는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는 가운데 네 번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면하고, 나머지 세 번 태어난다. 가가(家家)란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위치하는 성자를 가리킨다.
28)이것은 일래과(一來果)의 성자가 불환과(不還果)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종(一種)이란 일간(一間)을 잘못 보고 번역한 것으로 판단되며, 일간이란 아직 일품의 번뇌가 남아서 불환과에 도달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9)하나의 번뇌를 끊고 끝내 이것을 해탈하여 진지(眞智)가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제9의 해탈도란 욕계 9품의 미혹 가운데 제9를 끊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30)유(濡)는 부드럽다는 의미로서 부드러운 지혜를 유지라 할 수 있다.
31)탐욕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람의 시신에 대해 부정관을 닦고, 청정함이 뒤바뀌는 생각을 없애는 것으로, 창상(脹想)ㆍ괴상(壞想)ㆍ혈도상(血途想)ㆍ농란상(膿爛想)ㆍ청치어상(靑癡瘀想)ㆍ담상(噉想)ㆍ산상(散想)ㆍ골상(骨想)ㆍ소상(燒想)을 말한다.
32)원문에는 ‘자정(慈定)’이라 되어 있어서 풀어서 해석했다. 이것은 자삼매를 지칭하는 것이다.
33)이것은 신역의 유심(有尋)과 유사(有伺)와 서로 통한다. 분별 추구하는 마음의 작용이 조잡한 것을 각이라 하고, 세밀한 것을 관이라 한다.
34)통(痛, vedana)은 신역의 수(受)에 해당한다.
35)사(使)란 신역에서는 수면(隨眠)이라 하며, 대체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36)이상에서 음은 5음(陰)을 가리키며, 음은 구성요소의 집적을 의미한다. 또한 지는 계(界)라는 의미로 18계를 의미하며, 입은 12처를 의미한다.
37)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이다.
38)아라한의 둔근기인 자가 열반에 들어갈 때 시절인연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불시해탈(不時解脫)은 이근(利根)으로서 시기를 선별하지 않고 수시로 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