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열기성(羅閱祇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1,250명의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이 비구들은 모두가 아라한으로서 생사가 이미 끊어졌고 번뇌의 티끌을 다하여 하는 말이 참된 말이었으며, 마음의 해탈을 얻었고 지혜로 제도하는 성스러운 수행을 요달한 상사(上士 : 보살)3)들이었다. 할 일을 이미 마쳐서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곧 스스로 소유하는 마음이 다하였으며 그 지혜는 이미 해탈하였고 마음먹으면 계획대로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분이신 아난은 제외되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지 않겠느냐?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 반야바라밀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느니라.” 사리불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수보리가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힘으로 설하려는 것일까,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설하려는 것일까?’
수보리는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을 알고, 곧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감히 부처님의 제자로서 법을 설하는 것과 법을 이루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하는 일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법에서 배운 것은 모두가 증험(證驗)이 있어서 알게 되는 것이요, 그리하여 곧 이루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반복하며 굴러서 능히 서로서로 가르침을 이루게 되고 모든 법에 있어서 그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달살아갈(怛薩阿竭 : 如來)께서 말씀하신 법에는 다른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어질고 착한 사람이 이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 가운데서 끝내 갈등을 느끼지 아니할 것입니다.”
005_0633_b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령 제가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한다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를 따라서 보살의 경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에게 보살이란 이름이 있는 것은 어떤 법에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란 이름이 생겼습니까? 또 법에도 법이란 이름은 보지 못하였으니 보살도 보살이란 이름은 보지 못하였으며 또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 반야바라밀도 보지 못하고 얻을 수도 없습니다. 또 보살도 볼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으며 또 반야바라밀도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여기 있는 보살마하살에게 곧 반야바라밀을 설법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 보살마하살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게으르지도 아니하고 겁나지도 아니하고 무섭지도 아니하고 어렵지도 아니하며 두렵지도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이런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에 호응하게 되었고 보살마하살은 ‘곧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곧 이곳에 머무는 것이 배우는 일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곧 이 배움을 지어 그 마음을 배워야지 스스로 ‘나는 보살이다’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은 없는 것이고 마음이란 청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떻게 마음이 있지도 아니하며 없지도 아니하고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다는 말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상대에 따라서는 비록 유심(有心)도 무심(無心)인 경우가 있으나 이와 같은 마음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만들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심이라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심이라 해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닙니다.”
005_0633_c_02L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부처님께서 천거하셨는데 천거하신 일은 망령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빈 몸[空身]과 몸을 비운 지혜[空身慧]로 하는 설법은 가장 뛰어난 설법입니다. 이로부터 이곳에 있는 보살들은 아유월치(阿惟越致 : 不退轉)의 지위를 얻게 될 것이며 명칭만 거론하여도 끝내 반야바라밀을 잃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 가운데 머물면서 성문(聲聞)의 경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곧 반야바라밀의 설법만 들어도 곧 배우고 간직하고 지키게 될 것입니다. 또 벽지불(辟支佛)의 경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곧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게 되면 곧 배우고 간직하고 지키게 될 것입니다. 또 보살마하살의 경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들으면 보살마하살의 경지를 배우고 간직하고 지키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의 법은 매우 그 범위가 넓고 큰 까닭에 보살마하살이 배울 법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깊이 생각해보니 보살마하살의 마음이란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곳도 알지 못하고 볼 수도 없으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설명으로 미칠 수도 없는데, 어느 곳에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이 있습니까? 보살이란 이름조차 찾을 수 없는데 이름과 있는 장소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이와 같은 이름과 장소는 멈추는 곳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을 만약 보살들이 듣게 되면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게 되고, 권태롭지 아니하게 되며, 무섭지도 아니하게 되고, 어려워하지 아니하게 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되어 마땅히 물러섬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란 머묾이 없는 곳에 머물게 됨이고, 이와 같이 머묾으로써 모든 이치를 환하게 알게 되어 다시는 옛날의 번뇌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아마도 색(色) 가운데서도 머물지 아니하게 될 것이며 또 통양(痛痒:受)과 사상(思想:想)과 생사(生死:行)와 식(識)에도 머물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색을 생각하고 거기에 머물게 되면 태어나고 죽음과 인식함을 행하게 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머물게 되면 태어나고 죽음과 인식함을 행하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음과 인식함을 행하지는 않더라도 가령 그 가운데 머무는 경우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되고 살운야(薩芸若:一切智)에도 호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보살이 만약 색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색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색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게 됩니다. 색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색은 색이 아니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것은 인식함이 아닙니다.
005_0634_a_02L또 반야바라밀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일이 됩니다. 다시 넓고 큰 범위에 들어가는 삼매(三昧)란 명칭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 내지는 살운야까지도 모두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무슨 까닭인가 하면 어떤 상상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상을 하게 되면 외도(外道) 중의 외도인 소도(小道)4)이면서 살운야에 관해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비록 외도와 다르다 하더라도 아직 해탈을 얻지 못한 사람이며, 비록 색(色)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더라도 아프고 가렵다는 생각이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작용은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더라도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며, 이는 바른 견해를 지닌 지혜가 아니며, 내부의 색을 밝히는 지혜도 아니며, 다른 색을 밝히는 지혜도 아닙니다. 또 이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아프고 가렵다는 생각이나 생사의 인식 작용을 밝히는 지혜도 아니며, 외부에서의 인식 작용을 밝히는 지혜도 아닙니다. 이렇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작용에서 그것을 밝히지 못하는 지혜나 또는 다른 인식 작용을 밝히는 지혜도 아닙니다.
비록 믿음 따라 해탈을 얻고자 하고 살운야의 일을 알고자 하더라도 법에서 한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해탈을 얻은 것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그가 법에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해탈도 아직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열반으로써 스스로를 높이 받드는 일이 아닌 것이며 이것을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색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아프고 가렵다는 생각이나 생사의 인식 작용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게 되며 또 이것은 중도(中道)와 완전한 열반도 아니며, 10종력(種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부처님의 18사(事 : 18不共法)도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보살들의 반야바라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005_0634_b_02L다시 천중천(天中天 : 부처님)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수행에 들어갈 때는 마땅히 ‘여기에서 보이는 그 어느 곳이 반야바라밀이며 반야바라밀은 어디에 있는 법인가?’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고 그 있는 곳도 얻을 수 없으니, 그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보살마하살이 이 일을 듣게 되면 게으르지 아니하고 겁나지 아니하며 무섭지 아니하고 어렵지 아니하며 두렵지 아니하게 되어 이것으로 보살이 여기에 머묾으로써 반야바라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색을 벗어난다는 것은 색의 자연스러움이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인식 작용의 자연스러움입니다. 반야바라밀을 벗어나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자연스러움으로, 반야바라밀의 자연스러움은 상(相)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상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상을 벗어난 까닭에 상은 자연스런 상이며 상의 자연스러움은 상을 벗어난 경계입니다.”
005_0634_c_02L다시 사리불이여, 보살들이 정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고 가정합시다. 즉 ‘나는 반야바라밀을 배우고자 한다. 내가 설사 색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의 생각을 할 것이며, 설사 색행(色行)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수행을 위한 생각이며, 설사 색행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할 것이며, 설사 색행을 허문다고 하더라도 수행의 생각을 할 것이며, 설사 색행을 멸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할 것이며, 설사 색행이 공(空)이 된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할 것이며, 설사 나[我]에 대해서 자재(自在)한 행이 건립되며 그것을 얻고자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할 것이다. 설사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소멸된다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하고, 인식이 생기는 행을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하며, 인식의 병이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하며, 인식이 소멸된 행을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하며, 인식이 공(空)이 되는 행을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하고, 나에 대해서 자재한 행이 건립되어 그것을 얻고자 행을 한다 하더라도 수행을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보살마하살이 있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수행을 생각하는 일의 반대되는 행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반야바라밀을 지키는 행이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되는 일을 생각하며 행하는 것이며 이 보살은 가호가 없는 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하여야 반야바라밀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까?”
005_0634_c_05L舍利弗問須菩提:“菩薩摩訶薩當云何行般若波羅蜜?”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색행을 행하지 아니하고, 색행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색행을 생하지 아니하고, 색행을 허물지 아니하고, 색행을 멸하지 아니하며, 색행을 공이 되게 하지 아니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따른 행을 하지 아니하며, 인식 작용을 낳는 행을 행하지 아니하며, 인식 작용을 허무는 행을 하지 아니하며, 인식 작용을 멸하는 행을 하지 아니하며, 인식 작용이 공이 되는 행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또 반야바라밀에는 견해도 없고 행도 없고, 견해에 근거한 행도 없습니다. 행이 없으나 견해도 아니며 행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며 행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것을 ‘견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온 곳이 없고, 간직하고 있는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모든 문자(文字)로 된 법문에서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삼매는 가장자리가 없고 궁극의 지점이 없으며 들어가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데 그것은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들은 알 수 없는 경지입니다. 보살로서 이 삼매를 따르는 사람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빠른 시일 안에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이 말을 설하였을 때 그곳에 있던 보살들은 모두 수기(授記)를 얻었다. 지난 과거세에도 달살아갈께서 스스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었을 때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삼매를 따르는 사람은 그 삼매를 보지도 아니하였으며, ‘나는 그 삼매를 안다’라고 말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나는 삼매를 끝냈다’라고 생각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나는 삼매에 들었다’라고 생각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나는 삼매를 끝냈다’라고 말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이 삼매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아무 단점도 없게 되었다.
005_0635_a_02L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보살마하살이 삼매행을 따르는 것입니까? 지난 과거세의 부처님께서도 수기를 얻어 스스로 성불하셨으니 이 분들은 삼매가 있는 곳을 볼 수 있었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볼 수 없었습니다. 선남자여, 삼매에 있어서는 알지도 못하고 깨우치지도 못하고 환하게 깨닫지도 못하나니, 왜냐 하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곧 그에 대한 해답입니다. 또한 얻지도 못하고 삼매도 없으며, 삼매란 이름조차도 얻지 못합니다.”
사리불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어떤 법을 배우는 것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무학(無學)의 법을 배우는 것이 된다. 왜냐 하면 법이란 배워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배우는 것처럼 어리석지 말아야 하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누가 능히 법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얻을 것이 없느니라[無所得]. 그런 까닭에 얻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얻을 것이 없는 법[無所得法]’은 말을 어린아이처럼 바보같이 배워서는 안 되느니라. 유(有)란 문자는 얻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니라. 법을 배워 익혀서 법문에 들어가고자 한 사람은 적시에 두 가지 법[二法:有ㆍ無]을 모두 얻었을 뿐 역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법이 만약 존재(有)하는 것이라면 그 법은 존재함으로써 곧 색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법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는 것이 된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는 말을, 어린아이처럼 어리석게 ‘몸이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해득하지 못하고 곧 이 말을 믿지 아니하게 되나니, 해득하지 못하는 가운데 머물게 되는 까닭에 어린아이라고 말한 것이다.”
005_0635_b_02L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이 이것을 배움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살운야를 배우는 것이 아닌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이것을 배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살운야를 배우는 것이 아니니라. 보살마하살이 이것을 배움이라 생각하지 아니하여야 살운야를 배우는 것이 되며 이로써 살운야를 이루게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천중천께서는 허깨비[幻]와 같은지라 부처를 배우고자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간혹 때에 따라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그에게 알려주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짐짓 너에게 묻겠으니 가는 곳마다 이를 알려주어라. 수보리야, 너에게는 허깨비와 색에 무슨 다른 것이 있더냐? 허깨비 같은 환상(幻相)과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어떤 차이가 있더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허깨비와 색(色) 사이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천중천이시여, 색이 곧 허깨비 같은 환상이고 환상이 곧 색이어서 다른 점이 없습니다. 또 그 환상과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도 다른 점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수보리가 질문한 것들이 법을 따르지 아니한 질문인가? 5음(陰)을 따라 보살이란 이름이 생겼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들이 부처가 되려고 배우고자 하는 것은 허깨비 같은 환상을 배울 따름이다. 왜냐 하면 허깨비가 만드는 것은 5음을 지닌 것이며, 그곳의 색은 환상과 같아 색은 아무 것도 없느니라. 6쇠(衰)ㆍ5음도 허깨비와 같은 환상이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모두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라. 다만 그러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그리하여 6쇠ㆍ5음이라고 이름한 것일 따름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신학보살마하살(新學菩薩摩訶薩)5)이 이 말씀을 듣게 되면 공포감을 얻는 일이 없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신학보살로 하여금 나쁜 스승과 더불어 배우게 하여 서로 따라다니면서 서로 얻게 될 경우 혹 두렵기도 하고 혹 무섭기도 하겠지만 가령 훌륭한 스승과 더불어 서로 따르게 되면 두렵지도 아니하고 무섭지도 아니할 것이다.”
005_0635_c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보살이 나쁜 스승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알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위대한 반야바라밀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이를 버리고 떠나게 하여, 멀리 보살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고, 도리어 상상(想像)을 하도록 시키고 잡경(雜經)을 배우게 한다. 이 잡경을 따라 마음이 간사해지고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의 일이 실린 다른 경을 가르치고 배우기를 즐기고 기뻐하여, 그 경(經)들을 한 권마다 모두 외우고 읊조리게 하여 악마의 일과 악마의 주된 행동을 설법하고, 보살의 지위를 허물고 썩게 하여 온갖 설법으로 생사윤회의 고뇌를 말하면서 보리의 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런 사람이 보살들의 나쁜 스승에 해당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보살이 훌륭한 스승이며 마땅히 무엇에 따라야 이를 알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위대한 반야바라밀을 존중하며 조금씩 사람들을 가르쳐 그것을 배워서 가르침을 이루게 하고, 악마의 일을 말해주어 악마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여 멀리 모든 악마에서 떠나게 한다. 이런 까닭에 보살들은 승나승열(僧那僧涅)6)과 마하연(摩訶衍 :大乘)의 진리[三拔致諦 :3諦]에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보살들의 훌륭한 스승에 해당된다.”
수보리는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경의 법을 모두 환하게 깨쳐서 그 까닭으로 보살이라고 이름지었다면 왜 또 마하살이라 부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마하살이란 말은 천상천하(天上天下)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이름을 마하살이라 한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듣고싶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마하살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듣고싶다면 그대를 위하여 이를 설명하겠다. 마하살이란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환하게 보고 모든 것을 환하게 안다는 뜻이다. 모든 세간에 있는 일을 모두 환하게 알며 사람들의 수명도 모두 환하게 안다. 모두 환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즐기는 길을 따라 그들을 위하여 설법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런 사람을 마하살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005_0636_a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마하살이란 천중천으로부터 마하살이란 이름을 얻어서 마하살이 된 것입니다. 가령 보살에게 아무 마음도 없고 마음과 마음이 평등한 사람은 아무도 그 경지에 미칠 사람이 없는 마음이며,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이 미칠 수 없는 마음이며 아무 집착이 없는 마음입니다. 왜냐 하면 이는 부처님의 지혜로운 마음이기 때문이며 그 마음의 작용에는 남아있는 다른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마하살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마하승나승열이라고 했는데, 무슨 인연으로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열을 하게 됩니까?”
005_0636_a_13L須菩提白佛:“摩訶僧那僧涅者,何因,菩薩摩訶薩爲摩訶僧那僧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나를 생각하면 곧 제도될 것이며 아승기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모두 열반의 세계로 옮겨가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열반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내려주지만 열반으로 옮겨지는 법은 없다. 왜냐 하면 수보리야, 비유하면 만약 요술쟁이가 넓고 큰 장소에서 조화를 부려 수많은 사람을 만들어 온 성 안에 가득하게 하였다가 조화로 만든 사람의 머리를 모조리 잘랐다고 하자.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가운데 부상당하고 죽은 사람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그 가운데 다치고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보리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기의 사람들을 제도하여 열반의 세계로 옮겨가는 혜택을 내려주어도 열반의 세계로 옮겨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을 듣고도 무섭지 아니하다면 알지어다.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이 마하승나승열을 하는 일이니라.”
005_0636_b_02L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의 경우에는 부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그 가운데서 일어난 일을 듣고도 마하승나승열을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살운야를 짓는 사람도 없고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사람도 없으며 작용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느 사람이 당장 승나승열을 하겠습니까? 물질에 대하여 천중천께서는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아프고 가려운 감각과 생각도 없고 태어나고 죽고 인식함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분만타니불(分漫陀尼弗:부루나)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색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하는 것은 곧 유(有)의 세계의 색에 대하여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유(有)의 세계에서의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대하여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인가? 수보리여, 어떤 색에 대하여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이며, 또 어느 곳의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대하여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것인가?”
수보리가 분만타니불에게 말하였다. “색이란 허깨비 같은 환상이다. 때문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아프고 가려운 감각과 생각과 태어나고 죽음과 인식하는 일도 허깨비 같은 환상이다. 때문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가장자리가 없기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황홀한 경지이기 때문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생겨나는 곳이 없기에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열을 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인연으로 보살마하살은 마하연(摩訶衍)과 3발제(拔諦 : 空ㆍ假ㆍ中의 3諦)를 하게 됩니까? 어느 것이 마하연이며 어느 곳에서부터 마하연에 머물게 되며 마하연이 머물게 되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무엇으로부터 마하연이 그 가운데 건립되는 것입니까?”
005_0636_c_02L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마하연이라 하는 것은 극(極)이 없으며 가장자리의 폭을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어느 곳에서부터 스스로 건립이 이루어지겠느냐? 마하연이라 하는 것은 삼계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지혜 가운데 건립되나 또한 마하연에는 건립되는 장소도 없고 건립되지도 아니한다. 왜냐 하면 건립되느니 건립되지 않느니 하는 것은 법에 있어서 법을 모르는 말이다. 어느 곳에 법이 당장 건립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마하연에서, 마하연이라 하는 것은 천상천하와 인간 세계 가운데 지극히 경계를 넘어선 그 위에 있는 것이며, 그 넓기[衍]는 허공과 같습니다. 마치 허공이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인간 세계를 덮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하연을 하는 보살마하살도 그 온 때를 보지 못하며 또한 떠나는 때도 보지 못하며 또한 머무는 곳도 보지 못합니다. 마하연에서는 부처님께서도 그 근본을 얻을 수 없으며 또 온 곳에 해당하는 지점도 얻지 못하며 그 중간도 얻지 못합니다. 다만 삼계에 나타난 문자를 마하연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털끝만큼도 허물이 되지 아니하였고 정확하게 그 중심을 맞추었다. 다시 천중천조차도 보살의 본지(本地)를 보지 못한다. 다가올 미래의 보살도 보지 못하며 중간의 보살인 가장자리의 색이 없는 보살도 보지 못하며 가장자리가 없는 색을 지닌 보살에게도 미칠 수 없고 알 수 없으며 얻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천중천조차 보살마하살을 알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데, 곧 무엇으로 반야바라밀을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말하겠느냐? 또 얻지도 못하는 보살, 보지도 못하는 보살에게 무슨 방법으로 반야바라밀을 말하겠느냐? 그런 보살이 자리를 바꾸어 모습을 되찾으면 이름하여 보살이라 한다.
005_0637_a_02L어떻게 천중천께서는 그 어느 곳에서 나의 이름을 ‘나는 천중천이다’라고 지었느냐? 나[我]라는 것은 멸하는 것이며, 이것은 법(法)의 자연(自然)인데 어느 곳이 색인가? 그 요체는 멸하지 아니하는 것인데 어느 곳의 색인가?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역시 그와 같다. 인식함이란 가장자리가 없고 보살도 가장자리가 없다. 보살이란 그 있는 곳을 아무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으며 또한 볼 수도 없다. 부처와 모든 보살마하살도 까마득히 그 있는 곳이 없고 또 얻을 수도 없는데, 어느 곳이 보살마하살이 있는 곳이기에 당장 그들을 위하여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말하겠느냐?
도무지 볼 수도 없고 또 있는 곳도 알지 못하는데, 당장 어떤 법에 따라 그 가운데서 반야바라밀을 말하겠느냐? 보살마하살로서 보살이란 이름을 얻게 된 사람이 이와 같은 이름으로 나를 생각하기를 ‘내가 천중천’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멸하는 것이 법의 자연인데 어디에서 요체를 알아 멸하지 아니하는 법을 알겠느냐? 어디에서 법의 자연임을 알면서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멸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법이 짓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멸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없지는 아니하다. 어떻게 멸하지 아니하는가? 반야바라밀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다른 단멸이 작용하지 아니하는 것이 멸하지 아니하는 일이다.
당장 무슨 법을 따라야 스스로 보살의 지위를 이루어 거기에 머물고 행하게 되는가? 이 말을 듣고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일이 되며, 반야바라밀이란 천중천께서 깊이 생각하시는 일이다. 이 때는 색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때가 되는데 무엇으로 색을 얻겠느냐? 생겨나는 곳이 없기에 색이 아닌 세계가 되는 것이다. 가령 색이 아닌 세계라 하더라도 색이 없는 세계라고 한다면 색이 생겨나는 일도 없을 것이니, 그 가운데서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005_0637_b_02L이름이란 색이며 법의 작용으로 만드는 것에 해당된다. 이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법을 보고 깊이 생각하여 그 가운데 들어가야 한다. 이 때에도 역시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는 들어가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인식의 작용이란 생겨나는 곳이 없으면 인식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인식이 아닌 것이라면 인식 작용이 없는 것이 되며 생기는 인식도 없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얻는 것이 없다. 이름이란 인식이며 이는 법이 만드는 작용이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나도 보살들의 이와 같은 힘든 고행을 참도록 시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보살들이 힘든 고행을 참고 견디는 것은 보살의 도리이므로 그 스스로도 ‘내가 힘든 고행을 참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보살들의 마음이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야만 문득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을 위하여 그 근본이 되어 모든 사람을 편안하고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이러한 수많은 사람을 염려하는 것이 마치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아버지같이 생각하고 자식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은 마음을 간직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보살을 보지도 못하고 있는 곳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안팎의 법문에서 곧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러한 행을 하게 되는 것은 보살들이 힘든 고행을 참는 일에 해당합니다. 사리불이여, 설사 보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이것이 바로 보살이 태어나는 곳이 없는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005_0637_c_02L사리불이 다시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태어난 곳이 없다면 보살의 법도 생겨난 곳이 없을 것이고, 살운야가 생겨난 곳이 없다면 살운야의 법도 역시 생겨난 곳이 없을 것이고, 모든 사람도 태어난 곳이 없다면 모든 사람의 법도 생겨난 곳이 없을 것입니다. 보살이 어디로부터도 태어난 곳이 없다면 어떻게 스스로 살운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생겨난 곳이 없는 법을 따르지 아니하여도 살운야에 들어갈 수 있고, 또한 생겨난 곳이 없는 법에서도 이르러 얻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즐거움도 생기는 곳이 없기에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생긴 곳이 없는 소리를 듣는 것, 이것이 듣는 일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들으므로 해서 말하는 곳이 생깁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말하는 곳이 없는 것도 없나니 이것이 말의 본체이고, 말한 곳이 없으니 즐길 곳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하며 그런 까닭에 즐거운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은 법문 가운데 가장 높은 법문입니다. 왜냐 하면 존자 수보리께서는 묻는 것에 따라 즉시 대답하며 모든 것을 전부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가 말하는 법은 모두가 모조리 일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며, 묻는 것에 따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에 따라 일 그대로이기 때문에 또한 생겨나는 곳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어떤 바라밀을 따라야 보살마하살을 제도하게 됩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반야바라밀을 따라야 합니다. 이 법을 말할 때 만약 이를 읊조리고 읽는 보살마하살이라면 곧 알고 이를 믿게 될 것이며 의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문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이 법은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이 법을 따르지 아니한다고 해서 이 법은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005_0638_a_02L사리불이 다시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이 법을 따른다고 해서 법은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이 법을 따르지 아니한다고 해서 이 법은 줄어들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나 법문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법을 따를 경우 그 법을 잃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으로 모두 보살의 지위를 얻게 합니다. 왜냐 하면 모든 사람이 모조리 그 법을 배워 풍속이 여여(如如)해지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사리불이여, 내가 터득한 법도 당신의 말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의 자연이란 마땅히 생각하면 알게 되고 사람의 황홀한 경지는 마땅히 황홀한 경지를 생각하고 알게 되나, 사람의 몸은 환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이니, 곧 생각해서 이를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의 법은 마땅히 이를 지키고 마땅히 이를 행해야 합니다.”
그때 석제환인(釋提桓仁 :帝釋天王)은 4만 명의 하늘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와서 모였고, 사천왕(四天王)은 하늘 위의 2만 명의 하늘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와서 모였으며, 범가이천(梵迦夷天 : 梵天王)은 1만 명의 하늘 나라 사람들과 모임을 함께 하였고 수타회천왕(首陀言會 天王)은 5천 명의 하늘 나라 사람들과 모임을 함께 하였다. 이 모든 천신(天神)들은 숙명의 덕(德)이 있어 광명이 우뚝하게 높았으나 부처님의 위력과 신통력을 얻어서 모든 천신들의 광명은 모조리 다시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拘翼 :釋提桓因)이여, 여기 온 몇 만 몇 천의 하늘 나라 사람들이 법문을 듣기를 즐긴다면 모두 들어라. 나는 곧 부처님의 위력과 신통력을 지니고 널리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말하겠다. 어느 하늘 나라 사람이 아직 보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한 사람들인가? 그들도 모두 곧 수행함으로써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을 사람이기는 하나 다시 보살의 도를 얻을 수는 없느니라. 왜냐 하면 생사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이런 무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보살의 도를 찾게 해야 한다. 나도 역시 부지런히 이들을 도와서 그 공덕이 끊어지지 아니한다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법 가운데 지극히 존귀한 법을 취하게 하여 지극히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고자 한다.”
005_0638_b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도 훌륭하도다. 수보리여, 모든 배움의 길을 즐겁게 권유하는 방법이란 곧 그런 것이다.”
005_0638_b_02L佛言:“善哉,善哉!須菩提!勸樂諸學乃爾。”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마땅히 은혜를 갚아야 하므로 이들에게 알려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과거세에 달살아갈들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연설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달살아갈께서도 그 모임에 계시면서 이와 같은 법을 배우셨고, 지금은 스스로 부처님의 지위를 이루셨습니다. 천중천이시여, 이러한 인연 때문에 마땅히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다시 반야바라밀을 연설하면 보살도 마땅히 다시 보살의 법을 받아들일 것이며, 저는 다시 쉽게 보살마하살이 빠른 시일 안에 성불하기를 권유하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가 구익에게 말하였다. “지금 그대가 묻는 말을 잠깐 들어보니 그대가 묻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머물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공(空)으로써 반야바라밀에 머물며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열과 마하연의 진리와 3발제로 색이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며 수다원과의 경지가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며 사다함과의 경지도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며 아나함과의 경지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아라한과의 경지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벽지불의 경지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부처의 경지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아니한다.
유(有)의 세계의 색이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고 유의 세계에서의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며 유의 세계의 수다원과가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고 유의 세계의 사다함과가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며 유의 세계의 아나함과도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고 유의 세계의 아라한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유의 세계의 벽지불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아니하며 유의 세계의 부처님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005_0638_c_02L색이 영구히 변하지 아니하건 무상한 것이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상(常)이건 무상(無常)이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색이 즐겁건 괴롭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괴로운 것이건 즐거운 것이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또 색이 공허한 것이건 공허하지 아니한 것이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공허한 것이건 공허하지 아니한 것이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색이 나의 소유[我所]이건 나의 소유가 아니건 [非我所]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나의 소유이건 나의 소유가 아니건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수다원의 도에서 흔들림 없는 경지를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이미 수다원의 도를 다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왜냐 하면 수다원의 길에서는 일곱 번 죽었다가 일곱 번 다시 태어나야만 번뇌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수다원의 도로써는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한다. 사다함의 도에서 흔들림 없는 경지를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사다함의 도를 이미 다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왜냐 하면 사다함의 도에서는 한 번 더 죽었다가 한 번 다시 태어나야만 곧 번뇌의 강을 건너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다함의 도로서는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한다.
아나함의 도에서 흔들림 없는 경지를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하며 아나함의 도를 이미 다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아나함의 도를 다 성취하면 곧 하늘 위에서 열반의 세계로 옮겨진다. 그런 까닭에 아나함의 도로써는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한다. 아라한의 도에서 흔들림이 없는 경지를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왜냐 하면 아라한의 도를 이미 성취하면 곧 번뇌가 다하니 이 사이에 유여열반(有餘涅槃)7)의 세계는 없으며 바로 열반의 세계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라한의 도로써는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한다.
벽지불의 도에서 흔들림 없는 경지를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머물지 못한다. 벽지불의 도가 이미 다 성취되면 성문의 도의 경지를 넘어섰으나 부처님의 도에는 미치지 못하여 곧 중도(中道)로써 열반의 세계로 옮겨진다. 그런 까닭에 벽지불의 도는 그 가운데 머물지 못하고 스스로 이루어 성불하여 아승기의 사람을 위하여 근본을 만들어주고,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들을 곧 열반의 세계로 옮겨가게 한다. 부처님께서도 작위(作爲)하는 것을 마침내 모두 다하고 나면 곧 열반의 세계로 옮겨지기에 역시 그 가운데는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다.”
005_0639_a_02L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혼자 속으로 말하였다. “그렇다면 보살은 어떻게 그 가운데 머무는가?” 이에 수보리는 사리불의 마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곧 그에게 알려주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리불이여, 부처님께서는 어느 곳에 머무신다고 생각합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머무시는 곳이 없습니다. 달살아갈의 마음은 머무시는 곳이 없습니다. 멈추는 마음도 아니며 역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멈춘 마음이며 역시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각기 이런 생각들을 하였다. ‘모든 열차(閱叉 : 야차)들의 말은 크건 작건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모조리 환하게 알 수 있는데, 존자 수보리가 설법하는 내용은 도무지 아무 것도 모르겠구나.’ 수보리는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뜻을 알고 곧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이 말은 깨우치기가 매우 어렵고 또 들을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다.”
그러자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각각 다시 생각하였다. ‘이 말은 마땅히 꼭 알아야 한다. 지금 존자 수보리가 알고 있는 것은 깊고 깊다.’
005_0639_a_13L諸天人心各各復念:‘是語當解當解。今尊者須菩提所知深入深入。’
그때 수보리는 곧 다시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수다원의 도를 얻고자 하면 증험으로 얻어야 한다. 수다원도는 인식이 아니며 그 가운데 머무는 것도 아닌 경지에서 바로 그 경계를 건너가게 된다. 또 사다함의 도를 얻고자 할 경우에도 증험으로 얻는 것이며 인식으로 얻는 것도 아니며 그 가운데 머무는 것도 아닌 경지에서 바로 그 경계를 건너가게 된다. 또한 아나함의 도를 얻고자 할 경우에도 증험으로 얻는 것이고 아나함의 도는 인식으로 얻는 것도 아니며 그 가운데 머무는 것도 아닌 경지에서 문득 그 경계를 건너가게 된다. 또한 아라한의 도를 얻고자 할 경우도 증험으로 얻는 것이고 아라한의 도를 얻고 나면 그것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며 그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닌 경지에서 문득 그 경계를 건너가게 된다. 또 벽지불의 도를 얻고자 할 경우에도 증험으로 얻는 것이고 얻고 나서도 그것을 인식하거나 그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닌 경지에서 문득 그 경계를 건너가게 된다. 또 부처님의 도를 얻고자 할 경우에도 증험으로 얻는 것이고 부처님의 도를 얻은 다음에도 그것을 인식하거나 그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닌 상태에서 문득 그 경계를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005_0639_b_02L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였다. ‘존자 수보리가 설법하는 말씀이 저러하니 누가 그것을 듣고 법문을 받아들이겠는가?’ 수보리는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허깨비 같은 사람들[幻人]은 마땅히 나의 법문을 들어야 하며 마땅히 나의 법문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 하면 나에게 법문을 듣고서도 증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은 다시 각각 생각하였다. ‘어찌하여 허깨비가 법문을 듣는 것이 사람들과 같고 다를 바가 없는가?’ 수보리는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고 모든 하늘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허깨비는 사람과 같고 사람은 허깨비와 같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내가 말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의 도는 허깨비와 같을 뿐이다. 바야흐로 나로 하여금 부처님의 도를 말하게 하신 것도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마침내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또 허깨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까?” 수보리가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지는 열반까지도 허깨비와 같다.”
이에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이 다시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열반까지도 허깨비와 같습니까?” 수보리가 모든 하늘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하늘 나라 사람들이여! 설사 또 어떤 법이 있어 열반의 세계 위에 솟아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허깨비와 같다. 왜냐 하면 허깨비와 열반에 내려준 것은 허공과 같은 것이며 그 허공과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005_0639_c_02L수보리가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아유월치의 지위에 이른 보살이 아마 이 법문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한 사람에게 다시 이 법문이 존재하게 되면 이를 지킬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에서 말하는 상(相)이란 이와 같아서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나니, 법문 가운데는 존재하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법은 무소문(無所聞)ㆍ무소득(無所得)의 법에 비유되며 이 법문 가운데서부터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 수보리는 곧 말하였다. “이 꽃은 도리천에서 나온 꽃이 아니며, 나는 일찍이 이 꽃을 보았으며, 이는 환화(幻化 : 요술)에서 나온 꽃이다. 이 꽃은 석제환인이 조화로 만들어 나의 머리 위에 뿌린 것이며 마음의 나무[心樹]에서 나온 꽃이지, 수목(樹木)에서 나온 꽃이 아니다. 이 꽃은 마음의 나무에서 나온 것인가?”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말씀하신 대로 이 꽃은 마음의 나무에서 나온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다, 구익이여.”
석제환인이 다시 말하였다. “또한 이 꽃이 마음의 나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런 까닭에 꽃이 아닙니다.”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존자 수보리께서 들어가신 지혜는 매우 깊고 깊으며 말씀하신 설법은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합니다. 이 설법을 하신 바에 따르면 수보리의 가르침과 같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이 말한 것은 나의 말과 같고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배울 바이며 보살마하살이 이것을 배우게 되면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부처님의 도는 배우지 아니한다. 이것이 보살들이 살운야를 배우는 일에 해당한다. 만약 이 배움을 짓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생겨나지 아니하는 색을 배우게 되고, 생겨나지 아니하는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배우게 되고, 색을 받아들이는 일을 배우지 아니하여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배우지 아니한다. 또 수(受)ㆍ상(想)의 법의 즐거움을 배우지 아니하며, 받아들이는 번뇌[有]를 잃지 아니하는 것도 배우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배움을 안다는 것은 살운야를 배우는 것이 되며 그 행위가 살운야와 같게 된다.”
005_0640_a_02L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이 배우는 사람은 살운야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또 배운 것을 잃지 아니하면 살운야를 배우는 것이 되며 그 작위가 살운야와 같게 됩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이 배움을 짓는 사람은 살운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도 배운 것을 잃지 아니하면 이것이 살운야를 배우는 일이 됩니다. 그리하여 살운야와 같게 됩니다.”
석제환인은 존자 수보리에게 물었다. “당장 어떤 위력과 신통력의 은혜를 지녔기에 배우신 것입니까?” 이에 수보리가 말하였다. “내가 배운 것은 모두 부처님의 위력과 신통력을 이어받은 그 은혜에 속하는 일이다. 구익 그대가 질문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해야 합니까?’라는 것은 색을 따라 구해서도 안 되며 색을 떠나서 구해서도 안 된다. 또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서 구해서도 안 되며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떠나서 구해서도 안 된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색도 아니며 색을 벗어난 것도 아닌 것이 반야바라밀이며 반야바라밀은 통양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아니며 또 반야바라밀은 인식을 벗어난 것도 아닌 것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005_0640_b_02L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위대한 바라밀은 가장자리가 없고 위대한 바라밀에는 극한이 없습니까?” 이에 수보리가 말하였다. 구익이여, 위대한 바라밀에는 가장자리도 없고 극한도 없느니라. 바라밀은 까마득히 볼 수 없으며 그 극한 점이 없다. 바라밀은 아무도 궁극까지 도달할 사람이 없다. 사람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바라밀도 그와 같다. 구익이여, 어떻게 바라밀을 구해야 하겠느냐? 법 가운데는 극한이 없고 가장자리도 없으며 또 중간지점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다. 한계 되는 곳이 없는 바라밀도 이와 같다. 또 구익이여, 법이란 끝이 없고 한계가 없으며 궁극점도 없고 중간도 없으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느니라.”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존자 수보리시여, 어찌하여 사람에게도 극한이 없고 바라밀에도 극한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모두가 말로 의논하고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번뇌의 주체는 사람의 수효의 갑절의 또 갑절이어서 역시 극한이 없고 바라밀도 극한이 없느니라.”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무슨 연유로 사람도 극한이 없고, 바라밀도 극한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구익이여,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어떤 법 가운데 사람의 근본을 말하였느냐?”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그런 말을 한 법은 없습니다. 또 그런 말을 남겨둔 법도 없습니다. 설사 그런 말이 나온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만 문자일 뿐입니다. 작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문자일 뿐입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볼 수 없습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알려주었다. “짓는 사람이 없는데 어디 어떤 사람이 있어 번뇌의 주체로서 달살아갈아유삼불(怛薩阿嵑阿惟三佛)을 이루어 수명이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겁을 사는 사람이 있겠느냐?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란 멸하는 것이니라.”
1)1)범명(梵名) Dharma-priya. 담마비(曇摩卑)라고 한다. 법애(法愛)라고 번역하며, 계빈국(罽賓國)의 사문(沙門)이다. 타고난 기품(氣稟)이 총명(聰明)하고 민첩(敏捷)했다. 항상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널리 펴는 데 뜻을 두었다. 전진(前秦) 건원(建元) 연간(年間)에 중국에 왔다. 건원(建元) 18년(A.D. 382)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불호(佛護 : 竺佛念)와 함께 번역하여 『마하반야초경(摩訶般若鈔經)』 5권을 만들었다.
2)동진(東晉)의 승려(僧侶)이다. 양주(涼州 :지금의 甘肅武威)사람이며 어려서 출가하여 많은 경전(經典)을 외우고, 범어(梵語)와 한문(漢文)의 음의(音義)에 정통하고 외전(外典)에도 정통했다. 부진(苻秦) 건원(建元) 연간(年間, A.D. 365~384)에 승가발징(僧伽跋澄)ㆍ담마난제(曇摩難提) 등과 함께 역경(譯經)에 종사하였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ㆍ『중아함경(中阿含經)』 등 12부 74권을 번역했다.
3)3)자신만 해탈하고, 다른 이는 해탈케 하려 하지 않는 이를 중사(中士)라 하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두 가지 생각이 없는 이를 하사(下士)라 함에 대하여, 자타(自他)를 함께 구제하려고 생각하는 보살(菩薩)을 상사(上士)라고 한다.
4)소승(小乘)인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을 말한다.
5)새로 발심(發心)하여 불도(佛道)를 학습하는 보살을 말한다.
6)범어 saṃnāha-saṃnaddha. 승나(僧那)는 홍서(弘誓)ㆍ대서(大誓)라 번역하고, 승열(僧涅)은 자서(自誓)라 번역한다. 다 같이 보살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하며, 사홍서원을 스스로 맹서하는 것을 승나승열이라 한다. 승나는 갑옷[鎧]이고, 승열은 입는 것[著] 혹은 장엄(莊嚴)으로 비유하여 번역했다. 그러므로 사홍서원을 매우 견고한 큰 갑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7)범어 sopadhi-śeṣa-nirvānṇa.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의 준말이다.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상대하여 일컫는 말이다. 수행정진으로 미망(迷妄)의 번뇌는 끊었으나, 아직도 과거의 업보로 받은 육신(肉身)이 소멸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