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말보살이 다시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공덕의 업과 성스러운 지혜의 업 또한 다함이 없습니다. 그 공덕의 업이란, 보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베풀되, 계율의 공덕과 도의 지혜의 업을 갖추기 위해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끝없이 행하고 온갖 선한 근본을 받들어서 곧 자신을 위한 보시인 동시에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한 보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공덕을 이룸에 있어서, 일체의 중생과 유학(有學)ㆍ무학(無學)과 성문승ㆍ연각승에 도달한 이와 내지 보살의 법을 배우기 위해 초발심한 이와, 보살의 법을 배워 그 수행에 들어간 이에게 물러나지 않는 지위와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지위에 이르도록 권합니다. 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부처님께서 지닌 상서로운 공덕의 근본을 닦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또 모든 부처님과 성현과 경전을 설하는 법사(法師)들을 축원하여서 이러한 공덕으로 말미암아 그의 수명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한없는 공덕의 근본을 닦게 합니다. 또 비록 복은 지어도 발심하지 못한 이가 있다면 그를 발심하게 하는 한편, 이미 발심한 자일지라도 더욱 도무극에 힘쓸 것을 권하기도 합니다.
또 빈궁한 이라면 재물로써 구제해 주고 질병이 있는 이라면 약품을 주어서 수시로 공양하되, 간사한 마음을 품지 않게 합니다. 또 사납고 용렬한 자에게는 인욕의 힘을 닦게 하고, 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그 죄를 숨기지 않고 항상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남김없이 다 드러내게 합니다.
007_0996_a_02L 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부처님을 받들어 공양하고 스승 및 스님에게 귀명하게 권합니다. 또 항상 법 보시를 행할 것을 권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서 법을 구함에 있어 게으르지 않게 하고, 모든 법사를 부처님처럼 보아서 설법을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하고, 경전이 있다는 곳을 듣게 되면 14천 리가 되는 길일지라도 스스로 나아가기를 수고롭게 여기지 않게 하고, 비록 경전의 법을 설하더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바라지 않게 권합니다.
또 밤낮으로 부모에게 효로써 공양하기 위해 그 곁을 떠나지 않게 하고, 항상 어릴 때부터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게 권합니다. 또 비록 많은 공덕을 쌓더라도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거나 후회하지 않게 합니다. 또 몸으로는 그 수행을 엄중하게 하고 허식을 없애게 하며, 입으로는 거친 말을 하지 않게 하고, 뜻으로는 스스로 그 마음을 지켜서 해로운 마음을 품지 않게 합니다.
또 불사를 일으켜 절을 세우고 법을 설함으로써 마치 범천(梵天)과 같은 공덕의 과보를 얻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범천의 복인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007_0996_a_08L建立佛寺、講說精舍,所獲功報猶如梵天。何謂梵福?
부처님께서 처음 성불하실 때부터 열반에 들고자 하실 때까지, 모든 범천들이 공손히 다 와서 권하기를, ‘이 시방 일체의 중생들은 5강(江)ㆍ3류(流)에 빠져서 저 예순 두 가지 전도된 소견에 미혹되고 아흔 여섯 가지 외도의 길에 허덕이고 있으니, 오직 큰 성인의 밝은 지혜로만 구제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훌륭하도다, 천왕들의 자비로운 마음이여. 이 5탁(濁)의 세간은 교화하기 어렵도다. 마땅히 3승(乘)을 분별하고 중생들을 교화한 연후에야 능히 위없는 큰 도에 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범천의 복이 한량없는 것처럼, 불사를 일으켜 절을 세우도록 하는 공덕 역시 한량없습니다.
또 한량없는 도무극의 공덕을 쌓고 이로 말미암아 32상(相)을 구족하게 하고, 온갖 선의 근본을 행하여 이로 말미암아 80종호(種好)를 원만히 갖추게 합니다.
007_0996_a_18L積無量度因此功勳具足諸相三十有二;奉行若干衆善之本,由是周滿八十種好。
또 10선업(善業)을 수행하되 스스로 훌륭한 체하지 않도록 권합니다. 또 그 몸을 장엄하되 단정하고도 아름답게 하고, 그 입을 장엄하되 온갖 추악한 말을 버려서 이로 말미암아 변재(辯才)를 나타내게 하고, 그 뜻을 장엄하되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하여 독한 마음을 품지 않게 하니 그 뜻이 마치 명월주(明月珠)와 같이 청정합니다.
007_0996_b_03L 또 그 불국토를 장엄하되 신통변화(神通變化)로 하게 하고, 그 경전의 법을 장엄하되 다른 사람을 위해 널리 설하게 하고, 그 대중의 모임을 장엄하되 도의 가르침을 받들게 권합니다. 또 그 모든 거짓말과 욕설과 이간질과 언쟁을 다 버리고서 오직 경전의 이치 그대로를 관찰하게 권합니다.
또 그 뜻을 더욱 지혜롭게 하여 장엄함으로써 모든 부처님께 귀명하여 예배하게 하고, 도량을 장엄하되 모든 공덕의 근본을 따르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 청정한 곳에 태어나게 권합니다. 또 모든 죄와 복 그리고 애욕의 번뇌에 허덕이는 자를 위해서는 보배로운 손을 얻어 온갖 값진 보배를 다 보시하게 함으로써 바라는 것이 없게 하고, 많은 재물을 지닌 자를 위해서는 그 재물을 다 베푸는 공덕으로 말미암아 광대한 보배의 창고를 얻게 권합니다.
또 항상 근심하지 않는 온화한 얼굴빛을 나타냄으로써 그 친구와 도반(道伴)들까지 다 환희심을 내게 하고, 중생들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함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마치 손바닥과 같은 평등함을 얻게 하여서 배움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경시하지 않게 하고, 등불을 켜 절에 바치게 함으로써 그 부모와 스승과 벗들에게 두루 광명을 비추게 하고, 공덕을 쌓거나 계율을 지킴에 있어 더러움이 없게 하여 대대로 청정한 곳에 태어나 다른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권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스승 없이 배운 것이기에 가장 존귀하고 청정하니, 온 세간 사람들이 보아도 싫증남이 없고 몸과 목숨을 바쳐도 애석할 것이 없으며 속임도 없고 해도 없습니다. 본래의 서원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성취하고 이러한 인연 때문에 모든 공덕의 근본을 다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007_0996_c_02L지혜의 업이란 또한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떤 원인에 따라 다섯 가지 지혜의 업을 통달하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 지혜의 업을 통달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바람을 부처님의 법을 구하는 것에 두어서 끊임없이 정진함으로써 끝내 밝은 지혜를 통달하는 것이 첫째이고, 눈밝은 벗들과 함께 경전을 받들어 공경하되 부처님의 지혜를 구할 뿐 성문승ㆍ연각승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둘째이고,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지 않고 지혜 있는 이를 높은 성인처럼 받들고 옳게 깨달은 이처럼 공경하는 것이 셋째이고, 항상 온화한 마음으로 벗들을 가까이 하여 서로가 지혜의 업을 닦되 말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법사(法師)가 행하는 도의 품(品)에 따르는 것이 넷째이고,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고 설법에서 들은 그대로 부지런히 법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이 법을 행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업입니다.
법의 업이란 또한 어떤 것이겠습니까?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이고 급급해 하지 않는 것이며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또 항상 스스로 힘써 정진하여 깨닫되 어떤 이치를 듣게 되면, 곧 사색하여 헤아리기를, 마치 법에 굶주린 듯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습니다. 또 그 생각이 분명하여 5음(陰)에 가려지지 않음으로써 과거의 죄과를 뉘우치고 온갖 재앙을 소멸시킵니다.
또 그 마음이 순박하여 아첨하지 않음은 물론 모든 행위에 있어서 법을 근본 삼아 그것을 좋아하고 즐겨합니다. 또 항상 경전의 이치를 구하되 마치 머리카락이나 몸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합니다. 또 수행에 힘써 가장 수승한 것을 닦을 뿐 법에 어긋나거나 동떨어진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또 수승한 경지에 나아가 산란함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홀로 머무르길 좋아합니다.
또 현인의 행을 닦아서 절제와 만족을 알고 물러나지 않으며 법의 즐거움을 즐겨하므로, 세간의 영화에 대해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또 세간을 제도하기 위해 법을 구하므로 그 법을 잊지 않습니다. 또 모든 거동과 나아가고 물러남을 항상 법의 이치대로 따르고, 유순한 업을 구하되 굳은 뜻을 세우며, 항상 잘못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서 행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지혜로움을 생각합니다. 또 온갖 무지를 버리고 어리석음과 무명(無明)의 그물을 제거하여서 지혜의 눈이 청정합니다.
007_0997_a_02L 또 그 깨달음의 광명이 함이 없이 매우 넓고도 멀리 비추어, 끝내 현재의 지혜와 미래의 공훈을 세우되 스스로 훌륭한 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공훈으로 미루어 찬탄합니다. 이것이 곧 죄와 복을 여의고 도의 지혜를 청정이 닦는 공덕의 업인 것입니다.
다시 그 지혜의 업에는 네 가지 보시가 있어서 그것을 성취하게 됩니다. 첫째는 종이와 죽백(竹帛)을 보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붓을 보시하여 경전을 베껴 쓰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좋은 벼루와 먹을 보시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사가 연설한 모든 법문을 다 받아 지니는 것이니, 세간에서 하기 어려운 가장 값진 공양으로 법사를 받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게송을 읊어 주거나 혹은 미묘한 법을 법사로부터 받더라도 지성을 다할 뿐 아첨하지 않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법사를 옹호하여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고, 둘째는 종성(種姓)을 옹호하여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도시나 촌락 할 것 없이 온 국토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옹호하는 것이고, 넷째는 스스로 그 마음을 옹호하여 날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다시 또 지혜의 업을 가까이 하여 그 공덕을 성취하게 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심오한 경전을 법사에게 받들어 올리는 것이고, 둘째는 밤낮으로 힘껏 지혜의 이치를 가까이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의복과 음식을 빈궁한 자에게 주는 것이고, 넷째는 점차 도량을 가까이 하되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의 인연입니다.
다시 또 이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힘의 지혜를 성취하게 됩니다. 그 다섯 가지란, 첫째는 믿음의 힘이고, 둘째는 해탈의 힘으로 끊임없이 정진하여서 널리 듣는 것에 싫증을 냄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뜻의 힘으로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선정의 힘으로 모든 법을 평등이 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지혜의 힘으로 들은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다섯 가지의 힘입니다.
007_0997_b_02L다시 또 계율과 지혜의 힘의 업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법의 진리에 따라 계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전을 탐구하여 그 이치가 귀결되는 바를 관찰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으로써 바르고 참된 도를 권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으로써 힘써 가르침의 정수를 구하여 계율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의 지혜입니다.
다시 또 인욕(忍辱)의 행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정진하여 법을 구하는 것으로 만약 그 누가 위해를 가하고 욕설을 퍼붓더라도 다 참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법을 사랑하고 즐기기 위해서 그 어떤 싸움이나 굶주림이나 추위나 더위를 만나더라도 다 참아 내는 것이며, 셋째는 훌륭한 스승을 받들어 공경하고 스님의 명에 따르는 것이고, 넷째는 모든 법의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다시 또 정진의 행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경전의 법을 듣는 것을 힘써 구하여 지치거나 싫증내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법을 들은 그대로 굳게 간직하여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수행에 정진하고 설법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고, 넷째는 중생들을 위해 바른 업을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다시 또 선정의 행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본 마음을 고요히 하여 시끄러움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항상 그 뜻을 한 가지로 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의 차별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전일한 마음으로 모든 신통을 구하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 지혜에 들어가 모든 세속의 지혜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다시 또 지혜의 행의 업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없다는 소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있다는 소견에 머물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그 마음이 미혹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연기(緣起)의 근본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고, 넷째는 나[我]가 없는 이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다시 또 방편 지혜의 업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세속의 법을 좋아하면 그 세속의 법에 따라 교화해 주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에 따라 헤아려서 그에 따라 이끌어 주는 것이며, 셋째는 경전의 도로써 권유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지혜를 닦으면 지혜를 밝혀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007_0997_c_02L다시 또 도의 지혜의 업을 성취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6도무극을 닦아 지극한 도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그 얻은 도로써 올바른 교화에 머무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다스려서 7각의(覺意)를 갖추는 것이고, 넷째는 항상 모든 지혜의 근본을 힘써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다시 또 성스러운 업을 성취하는 것에 싫증내지 않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법을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경전을 선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번뇌의 원인을 살펴서 제거하되 그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깊고도 높은 경지를 밝게 통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되 싫증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네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의 6도무극과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에 두루 들어가야만 지혜의 업을 바로 관찰하여 성취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보살이 그 다른 모든 것을 다 성취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중에 가장 으뜸 되는 지도무극(智度無極)을 성취함으로써 온 국토의 중생들을 다 도에 귀의시켜 지혜에 머물게 하고, 지혜롭지 못한 자들까지 교화하여 대승에 귀의시키며 내지 일체의 마군들로 하여금 그 틈을 엿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여러 부처님께서 건립(建立)하신 일체 지혜의 위없이 바른 진리인 동시에 곧 보살의 다함 없는 성스러운 지혜의 업인 것입니다.”
아차말보살이 다시 말하였다. “다음과 같은 보살의 뜻 역시 다함이 없습니다. 보살이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관찰하는 그 본래의 행은 정진의 업에 의해 성취된 것입니다. 보살은 몸에 대한 응보(應報)가 이루어지는 것을 고찰하여, 주장할 것도 탐할 것도 없는 이 몸이 마치 초목이나 숲과 같음을 알고, 인연에 따라 이루어지고 주장할 것도 없는 이 몸이 초목ㆍ담ㆍ벽ㆍ기와ㆍ돌ㆍ물 속의 달과 같음을 압니다.
007_0998_a_02L 또 5음(陰)ㆍ4대(大)ㆍ6입(入)에 대한 미혹을 깨달아서 자신의 몸이 공(空)하고 나[我]가 없어 영구히 존속할 수 없고, 견고하지 않아서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몸뚱이고, 여의게 될 법임을 관찰하여 끝내 이 몸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견고함이 없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몸뚱이로 말미암아 그 진리의 이치를 구하게 되니, 그 이치란, 여래의 몸으로서 이것이 곧 진리의 이치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금강(金剛)과 같이 파괴할 수 없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법의 몸을 구하여 삼계(三界)의 속된 몸을 초월하리라.
비록 이 몸에 허물이 많더라도 일체의 더러움을 제거함으로써 마땅히 여래의 공의 지혜로 이루어진 법의 몸을 성취하리라. 나는 힘써 닦음으로써 온갖 공덕을 성취하고 진리와 더불어 있을 것이며, 나의 이 몸이 저 땅ㆍ물ㆍ불ㆍ바람의 4대와 같음을 관찰하여서 중생들을 위해 도를 닦는 동시에, 창문과 우물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주택을 지어 그들 생활의 업을 안락하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보살은 자신의 몸을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에, 모든 방편을 다하여 한량없는 재화로써 먼저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고 그런 연후에야 자신의 안락한 업을 도모합니다.
또한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몸의 고통에 대해 관찰하되, 생사윤회 하는 이 덧없는 몸을 깨달음으로써 다시는 몸을 받는 것을 탐하지 않고 이 몸에 나가 없음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을 깨우쳐서 이것을 싫어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몸을 관찰하여 고요한 경지에 이르고 선정에 들게 하며, 몸이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임을 깨닫게 하여 곧 담담하고 청정한 진리에 귀의시킵니다.
보살은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관찰하여서, 몸에 대해 좋아하지 않고 몸을 견고한 것으로 생각지 않으며 영원히 존속되지 않는 것임을 압니다. 또 안팎의 그 몸의 행을 살펴서,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애욕에 따르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몰려드는 세속의 더러움과도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 아무런 더러움이 없어 청정합니다.
007_0998_b_02L 또 그 행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곧 뛰어난 장엄의 상호를 성취하게 되니, 모든 천상과 세간의 사람들보다 뛰어나서 그 거룩한 용모를 견줄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자기의 몸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관찰함에 있어서 다함 없는 뜻을 건립(建立)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만나더라도 그 즐거움과 괴로움에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3악취(惡趣)에 떨어진 중생들을 보고 큰 자비심을 일으켜 그 중생들로 하여금 번뇌의 그물에 얽매이지 않게 해 줍니다. 비록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만나더라도 그 어리석음과 어둠의 그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살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 중생들은 모든 느낌에 집착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온갖 고통스러운 느낌의 처소에 얽매여 항상 근심과 슬픔에 잠기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의지하여 마음이 미혹된다. 이 때문에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니, 나는 마땅히 지혜에 들어가 큰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포섭하고 일체 중생들의 느낌을 쉬게 하는 동시에 이 큰 자비심으로 경전의 법을 널리 설하여서 중생들의 온갖 환란을 다 제거하리라’라고 합니다.
007_0998_c_02L다시 그 느낌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속에 괴로움이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하면, 느낌의 없음과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수명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느낌에 의지하지 않아 탐하는 생각이 없고, 그 느낌을 받아들이되 전도된 느낌이 없어 잘못된 행을 짓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망령된 생각과 모든 견해에 대한 느낌도 없고, 눈에 대한 물질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입에 대한 맛과 몸에 대한 감촉과 마음에 대한 법의 느낌도 없습니다. 이 모든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 괴롭다거나 즐겁다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거나 하는 것이 바로 느낌인 것입니다.
간략히 말하면, 안팎도 그러합니다. 인연에 따라 일어남으로써 느낌에 이르게 되니, 괴롭거나 즐겁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 한 가지 느낌은 하나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두 가지 느낌은 이른바 안팎의 것이고, 세 가지 느낌은 과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과 미래의 행에 종속되는 것과 현재의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고, 네 가지 느낌은 땅ㆍ물ㆍ불ㆍ바람이라는 4대(大)를 따르는 것이고,
다섯 가지 느낌은 5음(陰)을 따르는 것이고, 여섯 가지 느낌은 6쇠(衰)를 따르는 것이고, 일곱 가지 느낌은 7식(識)1)을 따르는 것이고, 여덟 가지 느낌은 8사(邪)에 따라 미혹되는 것이고, 아홉 가지 느낌은 9신처(神處)에 따르는 것이고, 열 가지 느낌은 10악업(惡業)에 따르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러한 일체의 느낌은 다 안락을 탐하고 애욕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에 그 느낌이 한량없고 셀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보살은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느낌을 관찰하되, 그 느낌이 일어나는 갈래를 분별하여서 마땅히 지혜의 업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 느낌을 관찰함으로 인해 지혜가 생겨나게 하고 공덕의 근본을 관찰하여 온갖 죄악을 제거하게 합니다. 이것이 곧 보살이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느낌을 관찰함에 있어서 지니는 뜻입니다.
007_0999_a_02L보살은 또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함에 있어서 어떠한 뜻을 지니겠습니까? 보살의 마음은 잊음이 없고 그 거동과 행보에 대해 항상 스스로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관찰합니다. 마음이란 일어나는 대로 곧 사라지고 항상 머무는 곳이 없는가 하면, 안에 머물지 않고 바깥에 머물지도 않고 안팎의 중간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초발심(初發心)한 이래로 그 마음이 사라지고 흩어져 아무런 처소가 없는가 하면, 그 처소가 없는 것마저 없어 그 처소에 대해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어느 처소에 두어 온갖 공덕의 근본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사라지고 흩어져 머무는 처소가 없고 분별할 수도 없으니, 도의 뜻을 내는 것 또한 이러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컬어, 마음이란 알 수도 볼 수도 없으며 마음과 마음이 서로를 의지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마음으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마음을 내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도의 마음이란, 어떤 선악과도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그 선악의 근본을 권하지도 않아서 그 뜻과 더불어 부합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도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으며, 또 12연기(緣起)의 그 깊고도 미묘한 인과응보를 생각하되 일체의 법에 마음이 집착되지 않는다면, 그는 곧 일체의 법이 어떤 진리도 없고 주재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스스로 미혹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 또한 그러한 마음을 다스리고 정진하여서 물러나지 않으리라’라고 합니다.
그 마음을 관찰함에 있어서 마음의 법은 어떤 것이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변화는 또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마음이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청정하게 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모든 미혹된 일을 다 벗어나 불국토에 이르게 권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또 그 마음이 마치 꿈과 같아서 그 처소를 알 수 없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계율을 삼가 행한 연후에 비로소 5신통(神通)을 권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007_0999_b_02L 또 그 마음이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서 시작과 끝이 없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일체의 인욕의 힘에 순종하여 온화하게 그 깨달음의 마음을 장엄하고 또 그렇게 하길 권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또 그 마음이 마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끝내 자연 그대로 고요하고도 깨끗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무수한 부처님의 법을 구족하기 위해 정진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또 가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없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선정을 닦고 해탈문(解脫門)에 들어가 끝까지 성불하기를 원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또 어떤 형체도 없고 비할 데도 없고 색상도 없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지혜를 능히 선포하고자 하여 과거세(過去世) 이래로 부처님의 도를 권하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또 그 마음이 인연이 없어 끝내 생기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일체의 중생들을 이끌어서 공덕의 근본을 세우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또 모든 것에 대응하는 마음이 없어 끝내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법이고, 법의 과보로 인하여 도의 마음을 닦으니 이것이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여서 신통을 얻고 그 마음이 선정에 들면, 그는 곧 일체 중생들의 마음에 대해 알아서 모든 죄와 복을 연설함이 다 자연스럽습니다. 나아가서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한 연후에는 곧 큰 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007_0999_c_02L 한편 그 마음은 사라지거나 다하지 않고, 그 마음은 견고하여 생사와 더불어 있지 않으며 더러움 속에 있더라도 스스로가 그 마음을 다스립니다. 또 이 성스러운 지혜에 대해 환히 앎으로써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성문ㆍ연각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 부처님의 모든 도의 법을 구족하기 위해 항상 지혜로운 마음을 얻음으로써 곧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어 최정각(最正覺)을 성취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함에 있어서 지니는 뜻입니다.
다시 또 보살은 자신에 대한 법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법을 관찰함에 있어서 그 법을 얻기 위해 어떠한 뜻을 지니겠습니까? 보살은 밝은 지혜의 눈으로 모든 법을 널리 보되, 성불할 때까지 그 법을 중간에 잊어버리지 않고서 자신에 대한 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법을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법을 볼 때에 그 법의 공함을 생각하되 공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생각하되 무상하다든지 무원하다든지 하는 생각을 버림으로써 끝내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또 생멸이 없고 모든 행을 여의어 일체의 법을 평등하게 봄으로써 12연기를 초월하며, 법계를 관찰함에 있어서 법이 아닌 것은 따르지 않고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수명이라든가 처소라든가 하는 것을 따지지 않아야만, 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법이 아닌 것이란, 스스로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수명이라든가 처소라든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며, 없다는 소견과 있다는 소견으로써 그 있고 없는 것과 합하고 흩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일체의 법이 다 이러한 법이니, 일체의 법 역시 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 하면 공ㆍ무상ㆍ무원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이 일체의 법이 다 서로 상응하는 것이고, 나라든가 하는 소견에 얽매여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일체의 법은 곧 법이 아닌 것입니다.
007_1000_a_02L 또한 중생계에 머물더라도 끝없는 큰 자비심을 일으켜서 그들의 모든 번뇌를 치료해 주되 더럽다거나 더럽지 않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중생들을 평등이 제도함에 있어서 그 번뇌를 의심하지 않고 탐욕을 겁내지 않아 이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면, 그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 더러움이 있거나 없거나 거리낌없이 자연 그대로의 도에 따라 마음을 세워서, 비록 머물기는 하되 머무는 처소가 없이 머문다면, 그것이 바로 머무름이기 때문입니다. 또 법계에 있어서나 중생계에 있어서 머무름도 머물지 않음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허공이기 때문입니다. 일체 법의 평등함이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보살이 만약 자신에 대한 법을 관찰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법을 관찰함에 있어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따른다면, 일체의 법이 다 해탈의 법에 귀의하게 됩니다. 또 이것을 분명히 깨달은 이라면 함도 없고 생멸도 없는 도의 법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잠시라도 버리지 않습니다. 또 근본법의 경지에 들어가 모든 법에 뜻을 두되 그 법의 경지에 굳게 머무름으로써 성문ㆍ연각의 법과 내지 부처님의 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고, 법의 경지에 굳게 머무르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모든 법에 미혹되지 않고 언제나 법을 잊어버리지 않으며, 항상 그 법의 유래를 관찰하여 한량없는 법문의 장구(章句)를 분별하고 선포하되, 부처님의 법을 근본으로 삼아 그 끝없는 평등함을 행함으로써 일체 중생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온갖 마군을 굴복시켜서 끝내 자재로운 지혜를 얻어 도의 이치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자신에 대한 법을 관찰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법을 관찰함에 있어서 그 법을 얻기 위해 지니는 뜻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007_1000_b_02L다시 또 4의단(意斷)이 다함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아직 자라나지 않은 악한 법을 끝내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이미 자라 난 악한 법에 대해서는 곧 없애기 위해 정진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거두어 이치에 수순하되 더욱더 정진함으로써 절차를 잊지 않고 평등한 행을 닦아서 진리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치에 수순하는 것이란, 그 선하지 못한 악한 법이 다시는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하지 않은 것이란, 계율을 어기고 선정을 어지럽히고 지혜를 미혹케 하는 것입니다. 또 계율을 어기는 것이란, 천상에 태어나려고 하거나 법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 선정을 어지럽히는 것이란, 예의를 잃거나 수행이 전일하지 못하거나 다른 생각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또 지혜를 미혹케 하는 것이란, 삿된 소견을 끊기 위해 갖가지 품류를 보다가 그만 그 일에 전도되거나 번뇌와 장애로 가려져서 지혜를 훼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을 선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모든 선하지 못한 법을 자라나지 못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의단(意斷)입니다. 가령 모든 선하지 않은 법이 이미 자라났더라도 그것이 선하지 않은 법임을 깨달아 알고, 법이 아닌 것은 선하지 않은 응보를 받게 됨을 알며, 추악한 행은 해를 끼치게 됨을 알고, 이치에 수순하여 더러운 애욕을 소멸시키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성냄을 제거하는 동시에 12연기(緣起)의 법을 관찰하여 어리석음을 끊어서 그 번뇌가 다하면, 이것을 일컬어 단(斷)이라고 합니다. 또 12연기를 따라 일어나는 법을 관찰하여서 습기를 따라 일어나는 일체의 법이 그 처음과 끝을 얻음이 없고 생멸이 없으면, 그것이 두 번째 의단입니다.
가령 선한 법이 아직 자라나지 못했더라도 자라나게끔 정진을 더하고, 스스로 그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한량없는 선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이 그에 걸맞게 수행하여서 온갖 지혜로운 근기와 온갖 공덕의 근본을 다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 복되게 성취하면, 그것이 세 번째 의단입니다.
007_1000_c_02L 이른바 선한 법이란, 일체의 법을 견고하게 머무르게 하고 절차를 잃거나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밤낮으로 정진을 더하는 것이며, 스스로 그 마음을 거두어 도의 마음으로써 권하는 것이니, 이것을 또한 법의 평등함이라고도 합니다. 왜냐 하면 도의 마음을 권하는 것은 덕의 근본이 이지러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비록 삼계(三界)에 머물더라도 아무런 집착이 없습니다. 만약 그 삼계에 의지하여 공덕을 권하면 곧 이것을 장애의 다함이라고 합니다. 또 만약 일체의 지혜를 좋아하게 권하면, 지혜의 근본을 통달하는 것에 끝내 해가 없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의단입니다.
다시 또 보살이 신족(神足)을 닦아 수행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이미 스스로 정진하는 것을 즐겨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족의 근본을 일으켜 닦는가 하면,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닦아야 하고 항상 네 가지 방일한 행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광대하게 하여 몸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그 마음을 다스려서 초선(初禪)에 들고 이와 같이 하여 4선(禪)에 이르게 되면 그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가벼워집니다. 그 몸과 마음이 가벼워짐으로 말미암아 신통(神通)으로 얻고, 신통으로 말미암아 곧 신족이 생깁니다.
다시 말하건대, 도에 뜻을 두어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써 도의 이치를 가까이 하고, 도의 이치를 가까이 하여 정진함으로써 방편의 법을 얻고, 방편의 법을 얻어 전일한 마음으로 신통을 성취함으로써 비로소 신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신족을 항상 좋아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정진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이 닦은 공덕에 따라 광대한 신족의 도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의 신족은 도의 이치를 가까이함을 비롯해 광대한 도를 성취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자재로와 이르는 곳마다 방해할 자가 없고, 마침내 그 근본을 성취하여 모든 행을 다 갖춤으로써 어떠한 마군도 기회를 노릴 수 없습니다. 마치 허공처럼 평등하여 그지없는 경지를 들여다보고 끝없는 음성을 다 듣는가 하면, 선정의 힘이 한정 없고 신족 또한 한계가 없으며, 일체 중생들의 근기를 관찰하여 그 근원을 살핍니다.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4신족(神足)의 다함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근이 무엇인가 하면, 항상 모든 법을 믿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지닌 자가 믿는 법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생사를 유전하더라도 그 신족에 따라 행을 성취하되 다른 신족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제일의 진리의 이치를 깨치는 것입니다. 또 깊고도 미묘한 12연기(緣起)를 초탈하여 나라든가 사람이라는 생각이 없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문에 들어가 다른 소견에 떨어지지 않으며, 오직 부처님 법에 따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를 믿되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한정 없는 부처님 법 그대로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믿음의 근입니다.
그 정진의 근이 무엇인가 하면, 법을 믿는 자가 더욱 정진을 더하여 해와 달과 같은 광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뜻의 근이 무엇인가 하면, 법을 닦는 정진의 근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그 뜻을 광대하게 하여 어떤 한계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 선정의 근이 무엇인가 하면, 뜻의 근을 어기지 않는 자가 더욱 그 뜻을 허공처럼 고요하고 광대하게 하며 전일한 마음을 닦아서 산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이 무엇인가 하면, 고요하고도 전일한 선정의 근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관찰하여 그 이치를 깨달아 분별하되 나[我]가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007_1001_b_02L이러한 5근(根)을 구족한 자라면 모든 부처님의 법을 구족할 수 있고, 부처님의 법을 다 구족한 자라면 수결(受決)의 지위에 머물러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외도를 배우는 5신통의 선인(仙人)들이 비록 태중(胎中)을 보아도 남녀의 근을 분별할 수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법 역시 이러하여서 보살도 5근을 성취하지 않으면 수결의 지위에 이를 수 없으니, 보살이 5근을 성취한 연후에야 비로소 수결의 지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5근의 다함 없는 것입니다.
그 정진의 힘이 무엇인가 하면, 가령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여 수행하되 이르는 곳마다 경전을 유포하여 공덕을 쌓으면 태어나는 곳마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공덕의 근본을 닦게 되니, 천상과 세간이라 할지라도 능히 헐뜯을 수 없고, 제재를 가할 수도 없으며 더 뛰어난 이로움이 없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공덕의 근본이 크게 일어나 한량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정진의 힘입니다.
그 선정의 힘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대중의 모임이나 시끄러운 곳에 있더라도 고요히 머물면서 법을 널리 설하고 도의 힘을 더욱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007_1001_b_18L何謂定力?若在衆會遊憒鬧中所在寂靜,頒宣道力進止行步。
그래서 제1의 선정에 들어가 장애 없이 공덕의 근본을 힘써 닦으니 또한 헐뜯을 이가 없고, 제2의 선정에 들어가 환희심으로 닦으니 마음이 청정 담박하여 걸림이 없고, 제3의 선정에 들어가 중생들을 교화하되 다른 관찰 없이 바른 법을 옹호하고, 제4의 선정에도 역시 걸림 없이 들어가 그 누구도 어지럽게 하거나 따를 수 없는 자재로운 힘을 갖춥니다. 이것이 선정의 힘입니다.
007_1001_c_02L 그 지혜의 힘이 무엇인가 하면, 세속의 법이거나 세속을 벗어난 법이거나 간에 다 환히 앎으로써 태어나는 곳마다 스승으로 삼을 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속의 문자와 신선의 이술(異術)과 내지 5경(經)2)ㆍ6예(藝)3)와 변두리의 이서(異書)와 세속을 제도하는 그 모든 법을 보살이 배우지 않고 다 통달하기 때문에 천상과 세간에 짝할 이가 없을 만큼 홀로 뛰어나 그 밝은 지혜를 수시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이른바 지혜의 힘이니, 보살이 수행하는 5력(力)의 다함 없는 힘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