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성(舍衛城) 기타(祇陀)숲에 큰 비구들 2만 명과 함께 계셨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로는 미륵보살(彌勒菩薩)ㆍ득대세보살(得大勢菩薩)ㆍ사자의보살(獅子意菩薩)ㆍ사자상보살(獅子相菩薩)ㆍ대상보살(大相菩薩)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 생만 채우면 부처가 되는 보살[一生補處]들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수(上首) 제자 만 명과 함께 계셨다. 이때 세존께서는 대중에게 공경히 에워싸여 대승(大乘)을 닦겠다고 마음먹은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연설하셨다.
부처님께서 자재왕에게 말씀하셨다. “물을 것이 있거든 부처는 다 들어줄 것이니, 마음대로 질문하여라. 너를 위해 해설하여 이해시켜주겠다.”
007_1161_a_13L佛告自在王:“諸有所問,佛無不聽,隨意所問,當爲汝說,令汝得解。”
들어 주시겠다는 허락을 받고 자재왕보살은 한량없이 기뻐하며 부처님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대승법에서 자재행(自在行)을 얻어 남을 위해 이 법을 연설하는 것이라 하며, 무엇을 자재한 힘으로 모든 마군과 증상만(增上慢)1)에 빠진 자와 모든 외도(外道)와 어떤 견해를 내서 집착하는 자를 조복시켜 그들이 대승에 머물러 큰 원(願)을 구족하고 계행(戒行)을 성취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 것이라 하나이까?”
007_1161_b_02L부처님께서 자재왕보살에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네가 부처님께 이 뜻을 물었구나. 너를 위하여 설하겠으니, 한마음으로 자세히 듣고 모든 보살이 어떻게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에 머물러 큰 원을 구족하고 계행을 성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가를 잘 생각하도록 하여라.” 자재왕보살은 가르침을 받들었다.
부처님께서 자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 자재법(自在法)이 있는데, 이 법으로 자재행(自在行)을 하여 모든 중생을 대승에 머물게 한다.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계자재(戒自在), 둘째는 신통자재(神通自在), 셋째는 지자재(智自在), 넷째는 혜자재(慧自在)이다.
계자재(戒自在)라 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구족계(具足戒)를 실천하여 파괴하지도 않으며, 빼먹지도 않으며, 어긋나지도 않으며, 흐리게 하지도 않으며, 얻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으며, 꾸짖지도 않으며, 뜨거운 번뇌를 두지도 않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칭찬한 바를 도에 따라서 순종하는 계(戒)와 중생을 가르치는 계와 법을 보호하는 계와 기뻐하는 계와 사는 곳에 의지하지 않은 계와 일정하게 머무는 계와 지혜를 따르는 계와 깊은 법을 이해하고 믿는 계와 신통에서 물러나지 않는 계와 비어 모양 없고 지음 없는 계와 멸(滅)하여 고요한 계와 부처님 법을 포섭하는 계와 부처님 법을 설하는 계와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 계와 자비로 보호하는 계와 대비(大悲)에 근본하는 계와 믿음이 깨끗한 계와 위의를 흐뜨리지 않는 계와 두타(頭陀:청정한 행)를 미세하게 실천하는 계와 복 밭을 따르는 계와 끝까지 깨끗한 계와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는 계와 법의 종자를 보호하는 계와 성현(聖賢)의 무리를 보여주는 계와 보리의 마음에 편안히 머무는 계와 6바라밀(波羅蜜)을 돕는 계와 4념처(念處)2)를 닦는 계와 4정근(正勤)3)ㆍ4여의족(如意足)4)ㆍ5근(根)5)ㆍ5력(力)ㆍ7보리분(菩提分)6)ㆍ8성도분(聖道分)을 닦는 계와 보리법을 돕는 모든 것을 내는 계이다.
007_1161_c_02L자재왕아, 보살마하살이 이런 계를 지니면 계가 갖추어져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된다. 보살이 이와 같이 깨끗한 계를 지닌다면 삼천대천(三千大天)세계의 겁(劫)이 다하여 불이 탈 때 불을 끄고자하여 ‘불이여, 꺼져라’ 하면 불이 곧 꺼진다.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물로 변화시키고자 하거나,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많은 꽃비가 내리게 하고자 하거나,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보배로 만들고자 하거나,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의 수미산을 합하여 하나의 산을 만들고자 하거나,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의 큰 바다를 합하여 하나의 바다가 되게 하고자 한다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계를 지닌 힘 때문에 원하는 바를 모두 얻으며, 부리는 신통력이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계에 확실히 자리잡으면 이와 같이 자재한 힘을 얻나니, 깨끗한 계를 지니기 때문에 결국은 깊은 원을 모두 이루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자재왕아, 지난 과거세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지나서 부처님께서 계셨는데, 그 이름이 정명광왕(淨明光王) 여래(如來)ㆍ응(應)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였다. 그때 금강제(金剛齊)라는 보살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계를 지니는 힘을 얻어 깨끗한 계를 실천했기 때문에 항상 한가한 곳 수풀 사이를 거닐었다. 부처님 법을 갖추고자 했기 때문에 올바른 법을 익히고 닦았으며 올바른 법을 닦아 마치고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007_1162_a_02L‘모든 법을 얻지 않는 것이 계이다. 모든 법을 탐하지 않는 것이 계이며, 모든 번뇌를 멸한 것이 계이며, 거울 속 형상과 같이 몸을 관찰하는 것이 계이며, 모든 말을 메아리 같이 여기는 것이 계이며, 마음의 모양을 꼭두각시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 계이다.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이 둘도 없으며 다름도 없다고 아는 것이 계이다. 탐욕을 없애기 위해 몸이 깨끗하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 계이며, 성냄을 없애기 위해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계이며, 지혜로 어리석은 그물을 파괴하는 것이 계이며, 탐욕의 근본과 성냄의 근본을 찾을 수 없다고 아는 것이 계이다. 법에 대해 관찰과 표상과 분별이 없는 것이 계이다.
나라는 생각ㆍ중생이라는 생각ㆍ어느 만큼의 수명을 산다는 생각ㆍ남이라는 생각ㆍ항상하다는 생각ㆍ없어진다는 생각 등이 없는 것이 계이다. 모든 법을 조작하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는 것이 계이다. 마음에 두려운 바가 없는 것이 계이며,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계이다. 남이 없는[無生] 법을 믿는 것이 계이며, 남이 없는 법에 대해 믿음과 이해를 내서 확실히 아는 것이 계이다. 물질적인 이익을 탐내지 않는 것이 계이다. 모든 법이 공하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상(相)을 파괴하거나 떠나지도 않으며 모든 원(願)을 없애지 않는 것이 계이다.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계이다.
자기를 높이고 상대방을 경멸하지 않는 것이 계이다. 6입(入:六根)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계이며, 다섯 가지 욕심[五欲]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계이다. 모든 음(陰)이 법의 음[法陰]과 같은 줄을 확실히 아는 것이 계이며, 모든 성품이 법의 성품과 같은 줄 확실히 아는 것이 계이다. 즐거워서 말다툼 없는 것이 계이며, 착한 법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이 계이다. 모든 법은 반드시 적멸(寂滅)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줄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 계이다.’
자재왕아, 금강제비구는 이와 같이 계에 안주하여 거룩한 법을 익히고 닦아 올바른 생각에서 전도된 적이 없었다.
007_1162_a_19L自在王!金剛齊比丘如是安住於戒,修習聖法正念無倒。
007_1162_b_02L그때 장애(障碍)라는 마군이 있었다. 그는 금강제비구가 이와 같이 계를 지니고 성인의 법을 익히고 닦아 올바른 생각에서 전도됨이 없는 것을 보고 8만 4천 마군과 그 권속과 함께 갑옷을 입고 무기를 지니고 그의 처소에 이르러 자신들의 몸을 숨기고 이 비구의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관찰하였다. 이렇게 천년토록 따라서 쫓아 다녔으나 한 생각, 한 마음도 흩어져 번뇌로 파괴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마군과 권속들은 그들의 마군의 몸을 나타내어 칼과 창을 잡고 비구의 앞에서 공포를 주려 하였는데, 비구가 마군의 무리들이 무기를 가지고 공포를 주려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이 서원 하였다.
‘만일 나의 계가 깨끗하여 성인의 법을 닦아 바른 행이 전도되지 않았다면 이 인연으로 마군 무리의 무기는 모두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색이 뒤섞인 연꽃으로 변하며, 수만나화(須曼那華)와 파리사화(波犁師華)와 기이하고 묘하고 이름난 꽃으로 영락(瓔珞)이 되며, 이때 마군은 그 권속과 함께 내몸 같은 형색과 거동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자재왕아, 금강제비구가 이 말을 하자 마군 무리의 무기가 모두 미묘한 빛깔의 꽃으로 변하여 특이하고 묘하며 깨끗한 향기를 머금은 영락(瓔珞)이 되었으며, 마군들 모두 자기 몸이 저절로 이 비구와 같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물들인 가사를 입은 것을 보았다. 마군은 비구가 큰 신통력 나타내는 것을 보고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 괴이하게 여겨 희유하다는 마음을 내어 권속과 함께 그의 발에 예를 올리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무슨 법을 얻었기에 이런 힘이 있습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이 힘은 얻어지는 일이 있는[有所得] 데서 난 것도 아니며, 몸과 입과 뜻이나 모든 법을 의지해서 난 것도 아니다. 이 힘은 모양에 머물기 때문에 난 것이 아니고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에 얻은 것이다.’ 마군은 말하였다. ‘비구여, 내가 천년토록 그대 마음이 가는 곳을 찾았으나 그 곳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비구가 말하였다. ‘그대가 갠지스강 모래와 같은 겁(劫)토록 찾았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으며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요술로 만들어낸 허깨비의 마음이 가는 곳을 알 수 있는가?’ 마군이 대답했다. ‘요술로 만들어낸 허깨비는 마음조차 있지 않은데 하물며 마음가는 곳이 있겠습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공하여 요술로 만들어낸 허깨비 같다 하셨는데, 이런 중에는 마음도 없고 생각도 없는 것이다.’
마군이 말하였다. ‘그대는 이렇게 정진수행하여 계에 머물고 성인의 법을 닦아서 어디로 나아가려 하십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나아가도 나아가는 일이 없다.’
007_1162_c_05L魔言:‘汝以是進行住於持戒,修習聖法爲何所趣?’比丘言:‘趣無所趣。’
마군이 말하였다. ‘무엇을 나아가도 나아가는 일이 없다 합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이 가운데는 과거에 간 일도 없으며, 현재 가는 일도 없으며, 미래에 갈 일도 없는 것이다. 나아갈 바가 없는 것이 곧 지음 없는 해탈의 문이다. 그대는 내게, 이렇게 정진 수행하여 계에 머물고 성인의 법을 닦아서 어디로 나아가려 하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색(色)에 나아가 나지도 않으며, 색에 나아가 없어지지도 않으며, 색에 나아가 머물지도 않는다. 또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나아가 없어지지도 않으며 수ㆍ상ㆍ행ㆍ식에 나아가 머물지도 않는다. 모든 법에 나아가 나지도 않으며 나아가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아가 머물지도 않으니 이것을 올바르게 나아간다[正趣]고 한다. 마군이여, 올바르게 나아간다는 것은 색을 취하지도 않으며 수ㆍ상ㆍ행ㆍ식을 취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보는 바 없는 법이 바로 내가 나아가는 것이며, 내가 나아가는 것이 바로 모든 성인께서 나아가는 것이다.’
마군이 말하였다. ‘비구여, 이런 법에 어떻게 나아감이 있습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모든 범부의 법과 모든 부처님의 법은 한 법이여서 둘도 없고 다름도 없다. 배우는 지위에 있는 자의 법과 아라한(阿羅漢)의 법과 벽지불(辟支佛)의 법과 부처님 법이 한가지로 이 모든 법에 둘도 없고 다름도 없다. 과거법과 미래법과 현재법이 한 가지로 한 법이어서 둘도 없고 다름도 없으니 나옴도 없고 남도 없는 평등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평등한 모양을 버리지 않는 것은 이 법을 중생에게 보여주고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아가는 것을 바르게 나아간다고 한다.
007_1163_a_02L마군이여, 바르게 나아가는 자는 욕계(欲界)에 나아가지 않으며, 색계(色界)에 나아가지 않으며, 무색계(無色界)에 나아가지 않는다. 평등한 법에 머무는 자는 모든 법의 실제 모습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으니 이것을 두고 바르게 나아간다고 한다. 여여(如如)하게 나아가듯 모든 법에도 이렇게 나아가며, 법의 성품에 나아가듯 모든 법에도 이렇게 나아가며, 실제(實際)에 나아가듯 모든 법을 이렇게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나아가는 자는 모든 나아감에 염두에 두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니 이것을 두고 바르게 나아간다고 한다.’
마군이 금강제비구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 바른 행동으로 무슨 법을 얻고자 하십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바른 행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는 데서 떠나며, 생각 없고 분별 없는 이것 때문에 완전한 평등을 얻는다. 그대는 내게 무슨 법을 얻느냐고 물었는데, 이 바른 실천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는 증상만(增上慢)도 없다. 이 바른 행으로는 아무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바른 행이란 다름 아닌 행이 없다는 뜻이다.’
007_1163_b_02L마군이 말하였다. ‘비구여, 그대의 스승은 누구이며, 누가 가르쳤기에 이렇게 언변이 좋으십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나를 파괴하지 않고 성품을 보아 보리를 얻는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더러움에 있지도 않고 깨끗함에 있지도 않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유위(有爲)7)에 있지도 않고 무위(無爲)8)에 있지도 않음을 안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남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모든 법에 머물지도 않고 모든 법을 버리지도 않고 생사의 모든 흐름을 건넌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모든 법을 빠짐없이 알면서도 모든 법에 이르지 않는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설하는 모든 음성이나 말이 설할 수 없는 법의 실상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모든 법이 나지 않고 일어나지 않고 나오지도 않지만 성인의 법바퀴를 굴려낸다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이 언덕에도 머물지 않고 저 언덕에도 머물지 않으며 중간의 흐름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 모든 법이 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것이 나의 스승이며, 모든 법이 멸하지 않기 때문에 멸하는 것이 나의 스승이니, 나는 이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언변이 이러한 것이다.’
마군이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무엇으로 법바퀴를 굴리십니까?’ 대답하였다. ‘여래는 색(色)을 굴리지도[轉, 流轉] 돌이키지도[還, 還滅] 않는다. 색의 여여(如如)함ㆍ색의 법ㆍ색의 빔ㆍ색의 모양 없음ㆍ색의 지음 없음ㆍ색의 멸함ㆍ색의 떠남ㆍ색의 남이 없음ㆍ색의 모양ㆍ색의 성품에 대해서도 굴리거나 돌이키지 않는다.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굴리거나 돌이키지 않는다. 식(識)의 여여(如如)함ㆍ식의 법ㆍ식의 빔ㆍ식의 모양 없음ㆍ식의 지음 없음ㆍ식의 멸함ㆍ식의 떠남ㆍ식의 남이 없음ㆍ식의 모양ㆍ식의 성품에 대해서도 굴리거나 돌이키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이 모든 법에 구르지 않기 때문에 법바퀴를 굴리신다. 이와 같은 법바퀴를 굴리거나 굴리지 않거나 한량없는 법의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법바퀴 굴리는 것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법 바퀴를 굴릴 수 있다.’
007_1163_c_02L마군이 말하였다. ‘함께 부처님께 갑시다.’ 그리하여 금강제비구가 마군과 8만 4천 마군의 무리와 함께 정명광왕 부처님 처소에 가서 머리를 부처님 발에 대고 예를 올리고 합장하고 공경히 한쪽에 서 있었다. 정명광왕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깨끗한 계를 지니고 성인의 법을 실천하므로 그들을 위해 이와 같은 법을 설하셨는데,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었다.
자재왕아, 그때의 금강제비구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바로 너의 몸이며, 장애 마군은 바로 지지(持地)보살이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계자재(戒自在)라 한다. 이 계자재를 얻는 보살은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원력을 보여주며, 한량없는 중생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교화하며, 또한 저절로 마군이나 원수의 항복을 받고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의 천안자재(天眼自在)라 하는가? 보살의 안근(眼根)이 벽이나 산림이나 수미산이나 철위산이나 세계 어느 곳에든 막히고 걸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천안이 자재하다고 한다. 보살은 이 걸림 없는 안근으로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불국토를 하나의 불국토로 본다. 왜냐 하면 빈 모양은 구별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불국토가 이곳과 저곳으로 구별되나 합하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007_1164_a_02L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에워싸여 계신 것을 보고 한 부처님으로 여기는데, 법의 성품은 파괴되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부처님의 깨끗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깨끗함을 보며, 모든 부처님의 깨끗함을 보기 때문에 자기 몸의 깨끗함을 보며, 자기 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깨끗함을 보아 자기 몸의 깨끗함과 모든 법의 깨끗함에 대해 두 모양을 내지 않는다. 또한 모든 부처님 제자를 부처님의 깨끗함과 다르지 않게 보며, 보살이 제자를 보는 바른 견해로 부처님을 보며, 부처님을 보는 바른 견해로 제자를 본다. 또한 보살이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서 무색계를 제외한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천상의 모든 중생이 나고 죽는 갈래와 선악을 행하는 곳을 천안으로 볼 수 있으며, 중생이 업을 짓고 보를 받는 것을 안다.
보살은 중생을 본다 할지라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데, 나라는 테두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중생이 업을 짓고 보를 받는 것을 본다 할지라도, 보살은 모든 법에 업도 없고 과보도 없는 줄을 안다. 보살은 이 천안으로 모든 색이 색의 상이 없음을 보는 것은 모든 법이 있다고 할 것이 없음을 믿기 때문이며, 모든 형색이 다 허망하여 본래 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의 천안이라 이름한다. 보살은 이 천안의 지혜력을 얻었기 때문에 수량을 갖는 색이나 수량을 갖지 않는 색이나 무엇을 보든지 간에 보지 않는 바가 없다. 보살은 백천만 종류의 중생 속에 있더라도 선정과 배사(背捨)9)와 삼매에 들어 내지는 한 중생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보살은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 여여하다는 것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색계(色界) 모든 하늘의 깨끗하고 미묘한 형상 앞에 그 몸을 나타내어 모든 천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이 보살도 모든 하늘의 몸을 본다. 보살이 모든 하늘에게 자신의 몸을 보게 하지만 모든 하늘은 스스로 몸을 보지 못하며, 혹은 모든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 그 몸을 보게 하지만 보살의 몸을 보지 못한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천안(天眼)이 자재하다고 한다.
007_1164_b_02L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천이자재(天耳自在)라 하는가. 보살이 이 천이(天耳)를 얻었다면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 있는 모든 소리, 즉 하늘 소리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의 사람인 듯 하면서 사람이 아닌 것들의 소리를 모두 듣는다.
보살은 이 소리를 들을 때 모든 소리에 대해 분별이 없는데, 그 어떤 소리도 형상을 통해 설명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또 이 소리를 듣고 나라는 생각ㆍ중생이라는 생각ㆍ음성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그 어떤 소리도 본래 형상을 통해 설명하지 못함을 통달하여 이 소리는 머무는 때가 없음을 믿고 아는데, 보살은 이성(耳性)ㆍ이식성(耳識性)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들을 때 소리의 실제 뜻을 이해하는 자는 모든 소리를 설명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멸하는 특성 때문에 실제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뜻에 의지하고 소리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모든 법에 생겨나는 특성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들은10) 법이 있다. 즉 유루와 무루ㆍ유위와 무위ㆍ세간법과 출세간법ㆍ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ㆍ죄 있는 법과 죄 없는 법ㆍ성문승(聲聞乘)과 벽지불승(辟支佛乘)과 불승(佛乘)을 말한다. 보살은 이들 법을 한 성품의 맛에 들게 하는데, 자기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다. 들은11) 바가 있다 할지라도 여섯 가지 대상[六塵]12)에 집착하지 않으며, 법을 듣는다 할지라도 어떤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다.
007_1164_c_02L보살은 법을 귀하게 여기므로 법에 의지하며, 법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법인가? 물듦을 떠난 것을 법이라 하며, 모양 없음을 법이라 하며, 함이 없음을 법이라 하며, 돌아 갈 곳이 없음을 법이라 하며, 생겨남도 일어남도 얻음도 없음을 법이라 하며, 견줌이 없음을 법이라 한다. 이러한 법 가운데 모양으로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며 희론한다면 이 것을 법이 아니라고 한다.
자재왕아, 보살은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말을 여의지 않고 뜻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 무엇을 뜻에 들어가는 마음이라 하는가? 빈 뜻에 떨어지지 않는 뜻의 견해며, 모양 없는 뜻의 견해며, 조작 없는 뜻의 견해니 이것을 뜻에 들어가는 마음이라 한다. 보살은 뜻에 들어가는 이 마음으로 법을 들으며 뜻에 의지하는데, 이 뜻은 얻을 수 없으며 얻지 못한다는 그것도 얻지 못한다.
또 자재왕아,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을 듣는다면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며 불요의경(不了義經)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경이란 뜻을 끝까지한 모든 경이니, 뜻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하면 요의경에 의지했다고 한다. 반면 어떤 사람이 모든 경에 있어서 이와 같이 뜻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을 불요의라 한다. 무엇 때문에 불요의라 하는가? 이 사람은 뜻을 끝까지하지 못해서 때묻고 더러운 길에 항상 끌려가기 때문이다. 무엇에 끌려가는가? 소리에 끌려간다. 뜻을 끝까지한 자는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뜻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법을 알아서 요의의 모습이 아닌 갖가지 치우침을 떠난다. 자재왕아, 이와 같이 뜻에 의지해서 법에 나아가는 자는 보는 경이 다 요의경이 되며, 이와 같이 의지하지 않는 자는 모든 경이 다 불요의가 된다.
007_1165_a_02L또한 자재왕아,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들을 때 식(識)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 의지한다. 왜냐 하면 보살은 식이 허망하여 허깨비와 같은 줄 알고, 모양을 떠났으므로 성품도 없고,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고, 상대적인 것도 없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의 특성을 이렇게 안다면 그것을 식이라 하지 않고 지혜라 한다. 보살이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식을 따르지 않으면, 저 식 또한 식이 아닌 줄 안다. 그러므로 식여(識如)에 집착하지 않고 따라서 지여(智如)라고 말한다. 자재왕아, 지혜에 의지하는 보살은 식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식을 알아서 법을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재왕아, 보살이 법을 설할 때 중생의 이름을 설하나 법에 의지하고 중생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나와 법 가운데 실제로 중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마침내 깨끗함도 없고 이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재왕아, 모든 법에는 끝내 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여래께서는 세간법에 따라서 중생이 있다고 설하시지만 모든 법에는 실제로 중생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법에 의지하고 중생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법이란 법의 성품을 뜻한다. 법의 성품이란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필경에 일어나지도 않으며 조작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뜻이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 하면 말로 법을 설명하지만 법은 말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로 뜻을 보이지만 보이고 설명할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말이 아니고 설명이 아니다. 분별할 바가 있고 설명할 바가 있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니, 분별이 없고 설명할 바가 없다면 이것이 부처님 법이다. 그러므로 설함 없는 이것을 부처님 법이라 한다.
만일 부처님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들어가야 하고 말로써 중생을 설해야 한다. 법을 설한다해도 견해를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둘이 있다면 부처의 말씀이라 하지 못하며, 둘도 없고 분별도 없다면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말소리가 있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며, 의논이나 설명이 있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다. 말소리도 없고 의논이나 설명이 없다면 이것을 부처님 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재왕아, 보살이 부처님 법 가운데 들어가면 이와 같은 천이(天耳)를 얻어 모든 소리로 제법의 실상에 따라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천이(天耳)가 자재하다고 한다.
007_1165_b_02L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타심지자재(他心智自在)라고 하는가? 타심지자재를 얻은 보살은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서 가는 곳마다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한다. 먼저 대중의 마음을 관찰하여 이 중생이 얼마나 깊은 마음을 가졌는지, 어떤 행을 닦는지, 어떤 원인을 심었는지, 어떤 모양이 있는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 설하는데, 보살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깨끗한 마음에 들어간다.
자재왕아, 마치 밝은 거울이 모든 형상과 빛깔을 비출 때 길든 짧든, 크든 작든, 거칠든 미세하든 더하거나 덜함 없이 본래 모양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거울은 분별하는 일 없이 밝고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살도 깨끗한 자기 마음의 법성으로 밝게 비추기 때문에 중생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마음법을 걸림 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중 가운데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보살은 그 마음을 알고 욕심을 여의는 모양도 본다. 왜냐 하면 마음의 모양은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 가운데 화가 많고,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보살은 그의 마음을 알며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는 모양을 본다. 왜냐 하면 마음의 모양은 성내지도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중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보살은 그가 실천하는 도의 법성(法性)이 소승이 되지 않음을 알며, 대중 가운데 벽지불(辟支佛)의 도를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실천하는 도의 법성이 중승이 되지 않음을 알며, 대중 가운데 대승(大乘)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실천하는 도의 법성이 대승이 되지 않음을 안다.
007_1165_c_02L보살은 중생의 심성을 알아서 그에 맞게 법을 설하나 마음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승(乘)을 알아서 법을 설하나 법의 성품을 파괴하지 않으며, 법의 성품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품을 파괴하지 않고 그리하여 중생이 행하는 바를 안다. 보살은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되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맞고 안 맞는 것이 없으며, 또한 중생의 마음이 끊임없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안다. 또한 마음의 성품이 바로 법의 성품인줄 안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타심지자재(他心智自在)라고 하며, 이 자재를 얻었기 때문에 하늘 위나 사람 가운데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숙명지자재(宿命知自在)라고 하는가? 숙명지자재를 얻은 보살은 기억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定)을 얻은 근(根)이 날카롭기 때문에, 자기 일이든 남의 일이든 전생에 겪었던 갠지스강 모래와 같은 겁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하여 남에게 자신이 저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었고, 얼마나 오래 살았으며 어떤 고락을 받았는지를 설명해준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상[宿世]에 선근을 심은 중생, 인(因)의 힘이 있는 자, 연(緣)의 힘이 있는 자를 알며, 이 사람은 성문의 인(因)이 있고, 이 사람은 벽지불의 인이 있고, 이 사람은 대승의 인이 있는 줄을 안다. 보살은 그 중생이 지난 세상에 뿌린 씨를 알고 그에 맞게 법을 설한다.
007_1166_a_02L보살은 숙명을 안다 할지라도 지난 세상의 법이 오는 일이 없음을 안다. 법이 지난 세상으로부터 뒷세상에 이르는 것을 보지 않으며, 지금 세상이 지난 세상에 이르는 것도 보지 않는다.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 가는 바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를 생각하지만 먼저라는 견해를 내지 않으며, 뒷 시간에 대해서도 중간[中]이라는 견해나 끝[邊]이라는 견해를 내지 않으니, 모든 법은 끝이나 중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보살은 중생의 숙명을 기억하지만, 과거의 색(色)이 모양을 떠난 줄 알며 과거의 수ㆍ상ㆍ행ㆍ식이 모양을 떠났음을 안다. 과거 5음(陰)이 모양을 떠난 것이 바로 뒤의 5음이 모양을 떠난 것이며, 뒤의 5음이 모양을 떠난 것이 바로 현재 5음이 모양을 떠난 것이다. 보살은 과거 모든 법의 성품이 빈 줄을 알고 현재 모든 법의 성품이 빈 줄을 알며, 미래 모든 법의 성품이 빈 줄을 안다.
자재왕아, 보살이 이와 같이 숙명을 알 때 선근이 자라나서 지난 세상의 죄업인연(罪業因緣)을 다 멸한다. 왜냐 하면 보살은 모든 법에 새로운 모양도 낡은 모양도 없음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지혜를 이루고서는 모든 유위법이 다 공하여 꿈과 같은 줄 이해하고 믿는다. 자재왕아, 꿈속에서 나고 죽고 괴롭고 즐거운 것을 보듯이, 보살이 유위법을 이해하고 믿는 것도 그러하다. 이렇게 믿고 이해하는 자는 생사에 오가면서도 피곤하다거나 권태롭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중생 속에서 자비심을 내며, 모든 법에서 짐짓 모양을 지어낸다.
자재왕아, 보살이 숙명을 볼 때는 모든 유위법이 다 허망함을 본다. 어째서 그런가. 보살은 과거 전륜왕(轉輪王)의 즐거움도 모두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제석(帝釋)의 즐거움도 다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장엄하고 깨끗한 모든 부처님의 세계와 장엄하고 깨끗한 성문들의 세계와 장엄하고 깨끗한 보살들의 세계와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의 장엄함과 깨끗함을 보며, 또한 색신이 구족하신 모든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는 것도 모두 다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으로 본다. 이렇게 생각할 때 유위법에 탐내고 아까워할 것이 없다. 왜냐 하면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국토와 모든 부처님의 색신도 덧없이 다 없어지는데 하물며 내가 집착하는 것들이겠는가.’
007_1166_b_02L그리고는 바로 나가 없는 가운데, 나의 것이 없는 가운데 들어가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에 의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유위법은 다 덧없는데 중생이 여기에서 항상하다는 생각을 내는구나.’ 그리고는 중생에게는 큰 자비심을 내며, 모든 법에 대해서는 놓아버려야한다는 생각을 낸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이 숙명지자재(宿命智自在)를 얻었다고 한다. 이 자재를 얻은 보살은 모든 법이 덧없다는 사실을 믿지만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몸을 받는다. 그러나 받지 않기 위해 받으며, 취하지 않기 위해 취하니, 다만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여의족자재(如意足自在)를 얻었다 하는가? 여의족자재를 얻은 보살은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에 성인의 모양을 따라서 여의족(如意足), 하고자 하는 힘, 정진해 나아가는 힘, 결탄코 실천하며 믿고 이해하는 힘을 낸다. 보살이 이 여의족을 이해하고 믿으면 조작하거나 일어나지 않아도 갠지스강 모래와 같은 세계 어디에든 가고자 한다면 한 생각 사이에 갈 수 있으며, 그곳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 그가 오는 것을 본다. 자신은 본래 있던 곳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저들은 그가 설법하는 것을 보며, 이곳에서도 여전히 설법을 계속한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여의족이 자재하다고 한다.
보살은 이 여의족의 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에 여의족으로 제도할 중생이 있으면 여의족으로 제도하며, 항상한 모습에 집착하는 하늘중생이 있으면 겁(劫)이 타는 것을 보여주어 이 모든 중생에게 삼천대천세계가 다 타서 없어져도 이 세계는 손상되거나 줄어든 일이 없음을 보게 한다. 교만한 마음을 스스로 키워가는 중생이 있다면 보살은 금강을 잡은 신이 되어 불꽃이 타오르는 금강저(金剛杵)를 잡아 그들에게 보여주므로써 두렵게 하여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스스로 귀의하여 공경히 예를 올리게 한다.
007_1166_c_02L전륜왕의 형상을 즐기는 중생이 있으면 전륜왕의 몸으로 법을 설하고 석제환인(釋帝桓因)의 형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석제환인의 몸으로 법을 설하며, 범천왕의 형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범천왕의 몸으로 법을 설하며, 마왕의 형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마왕의 몸으로 법을 설한다. 부처님 몸을 보기를 즐기는 자가 있으면 부처님 몸으로 나타나 법을 설한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혹은 허공 속에 머물며 가부좌를 맺고 몸에서 빛을 내며 법을 설하기도 한다. 엄숙하고 깨끗한 세계를 즐기는 중생이 있으면 삼천대천세계를 장엄하여 비단 번(幡)과 일산을 달며, 모든 기를 세우고 보배 그물로 그 위를 다 덮고 이름 난 갖가지 향을 사르며 모든 음악을 연주한 뒤에 법을 설하기도 한다. 중생을 위하여 삼천대천세계를 하나의 바다 물로 만들어 나타내고 그 위를 푸르고, 빨갛고, 붉고, 흰 갖가지 연꽃으로 덮고, 그 물 중간에 설법좌를 나타내어 자기 몸을 그 위에 앉히고 법을 설하기도 한다.
중생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나타내어 수미산 꼭대기에 앉아서 법을 설하는데 그 소리가 범천에 이르기도 하며, 중생을 위하여 몸은 나타내지 않고 음성으로만 법을 설하기도 하며, 중생을 위하여 건달바 몸을 나타내어 여러 음악소리로 법을 설하기도 하며, 중생을 위하여 용왕의 몸을 나타내어 구름과 우레를 일으켜 큰 번갯불을 놓으며, 또는 큰비를 적셔 법을 설하기도 한다. 배고프고 목말라 매우 궁핍한 중생이 있으면 하늘 음식을 주어 몸을 충만케 하고 부족함 없이 기쁘게 하여 법을 설하기도 하며, 고뇌에 쫒기고 시달리는 중생이 있으면 신통한 힘으로 지옥의 불을 끄고 하늘의 정기로 그들의 털구멍까지 모두 안락을 얻게 하고 법을 설하기도 한다.
007_1167_a_02L눈 먼 자가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그에게 천안(天眼)을 주어 밝게 보게끔 하고 법을 설하며, 귀머거리가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그에게 이근(耳根)을 주어 소리를 듣게 하고 법을 설하며, 갖가지 병에 든 자가 있으면 신통한 힘으로 그의 병이 낫게 하여 법을 설한다. 죄를 짓고 죽을 곳에 이른 자가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사람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죄를 면해 마음을 편케 하고 법을 설한다. 손발이 잘려졌거나 귀와 코가 잘려나가 남은 몸이 추하고 더러워 항상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마음이 물러난 중생이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불구를 복구시켜 법을 설한다. 피ㆍ똥ㆍ오줌 등 깨끗하지 못한 태 속에 들어앉은 중생이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보배 집과 누각을 지어 그를 그 속에 거처하게 하며, 또한 의식(意識)을 이루게 하여 법을 설한다. 처음 태어나서 모든 근(根)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다 갖추게 하여 그가 법을 들을 능력을 가진 뒤에 법을 설한다. 자재왕아, 이것을 두고 보살이 여의족(如意足)을 성취했다고 하며, 이렇게 불가사의한 갖가지 신통력으로 법을 설한다.
보살에게는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일월중생(日月衆生)을 섬기고 받들어 제도하기 위하여 삼천대천세계를 그의 오른 손바닥에 놓고 멀리 타방(他方)의 한량없는 세계로 던져 모든 중생이 다 그것이 가는 것을 보게 하지만 그러나 이 세계는 움직이지 않게 한다. 또한 갠지스강 모래수와 같은 세계를 한 털구멍에 들어가게 하여 범천까지 들고 가서 타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던져 놓지만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게 한다. 갠지스강 모래와 같이 무량한 세계가 겁이 다하여 불에 탈 때 한 입에 불을 끄기도 하고, 두 손으로 해와 달을 가리고 몸에서 빛을 내어 모든 세계를 비추고서 법을 설한다.
007_1167_b_02L자재왕아,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 앞에 앉아 부처님께 공양하고자 하여 한 움큼의 꽃을 수미산 같이 하여 부처님의 몸 위에 뿌리면 꽃이 몸의 반에 이르며, 또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초목으로 모두 횃불을 만들어 세계에 가득 채우면 그 불이 비오듯 떨어진다.
자재왕아, 이 보살은 모든 중생이 귀하게 여기는 형상을 따라 제석이나 범천이나 성문의 형상이나 벽지불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보살의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즉 천안(天眼)을 얻어 보는 것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천이(天耳)를 얻어듣는 것이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일체 마음과 마음에 관계된 법을 통달했기 때문이며, 숙명지(宿命智)을 증득하여 과거의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여의족(如意足)을 얻어 모든 형색에 있어서 마음대로 보여주고 나타내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신통이 자재한 자는 모든 부처님의 일을 모든 중생에게 보이며, 모든 중생의 근기가 날카로운지 둔한지를 잘 알고 분별한다. 성문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며, 벽지불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며, 대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 대중이 그를 알며, 중생을 성숙시켜주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착한 법 가운데 출가하여 도를 실천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안다. 보시바라밀로 회향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과 정진바라밀과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로 회향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모든 마군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이 착한 뿌리를 심게 하기 때문에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007_1167_c_02L그리고 자재왕아, 보살은 이 자재한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몸의 힘과 명예와 칭송과 좋은 가문ㆍ좋은 성씨ㆍ재물ㆍ권속과 백성들이 다 뛰어나 대중이 그를 알므로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재왕아, 보살이 이 자재한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안다. 즉 모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긴나라ㆍ가루라ㆍ마후라가 등의 사람인 듯 하면서 사람이 아닌 것들ㆍ제석ㆍ범왕ㆍ세상을 보호하는 모든 이들ㆍ바르게 깨달은 모든 부처가 그를 알기 때문에 많이 안다[多識]고 한다. 자재왕아, 보살은 이 신통한 힘 때문에 근본 맹서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 많은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지자재(智自在)라 하는가. 음지(陰智)ㆍ성지(性智)ㆍ입지(入智)ㆍ인연지(因緣智)ㆍ제지(諦智)이다.
007_1167_c_11L自在王!何謂菩薩摩訶薩智自在?謂陰智、性智、入智、因緣智、諦智。
자재왕아, 무엇을 5음을 아는 지혜[陰智]라 하는가? 색(色)이 전 찰나에도 비었으며 후 찰나에도 비었으며 중간 찰나에도 빈 줄을 아는 것이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전 찰나에도 비었으며 후 찰나에도 비었으며 중간 찰나에도 빈 줄을 알아서 5음(陰)이 결국은 비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음지라 한다.
007_1168_a_02L자재왕아, 무엇을 법성을 아는 지혜[性智]라 하는가? 땅의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물의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불의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바람의 성품이 법의 성품임을 아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네 성품이 법의 성품에 들어가면 다 하나의 성품이 되기 때문인데 그것을 빈 성품이라 이름한다. 빈 성품과 법의 성품이 다 같이 성품이 없는 것이니 이 가운데는 땅의 성품도 없고, 물의 성품도 없고, 불의 성품도 없고, 바람의 성품도 없다. 왜냐 하면 파괴되지 않는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둘 없는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생겨남 없는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때가 없는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깨끗함 없는 성품이 법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법의 성품과 마찬가지로 수명의 성품ㆍ중생의 성품ㆍ나고 죽는 성품ㆍ열반의 성품ㆍ하고자하는 성품ㆍ색(色)의 성품ㆍ색 없는 성품ㆍ작위가 있는 성품ㆍ작위가 없는 성품도 그러하다. 성품을 아는 이런 지혜는 딴 데서 얻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성지(性智)라 한다.
자재왕아, 눈은 주재가 없으니 이 속에는 보는 자가 없으며, 귀는 주재가 없으니 이 속에는 듣는 자가 없으며, 코는 주재가 없으니 이 속에는 냄새 맡는 자가 없으며, 혀는 주재가 없으니 이 속에는 맛보는 자가 없으며, 몸은 주재가 없으니 이 속에는 촉각을 느끼는 자가 없으며, 뜻은 주재가 없으니 이 속에는 아는 자가 없다.
자재왕아, 눈의 성품은 색을 보지 못하며, 귀의 성품은 소리를 듣지 못하며, 코의 성품은 냄새를 맡지 못하며, 혀의 성품은 맛을 알지 못하며, 몸의 성품은 접촉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뜻의 성품은 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눈은 조작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조작하는 바가 없어 풀이나 나무, 흙이나 돌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눈은 바깥경계에 물들지도 않고 성품을 떠나 있지도 않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은 물들지도 않고 떠나 있지도 않다. 어째서 그런가? 눈은 본래부터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본래부터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모든 감관을 이렇게 알고서 욕심을 떠날 수 있다면 이것을 입지(入智)라 한다.
자재왕아, 보살은 모든 음(陰)ㆍ성(性)ㆍ입(入)이 나지 않고 일어나지 않아 결국은 멸한다는 것을 안다. 멸하고 나서는 다시 태어나고 물러나 없어져서 음과 성과 입을 받을지라도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데, 이것을 지자재(智自在)라 한다. 무슨 말인가? 음과 성과 입을 알고, 음과 성과 입의 특성을 알지만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서 삼계(三界)에 나타나지만 어떤 번뇌에도 머물지 않으며, 태어나고 멸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태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을 지자재(智自在)라 한다는 것이다.
007_1168_b_02L자재왕아, 무엇을 연을 아는 지혜[緣智]라 하는가? 무명(無明)은 행(行)을 반연하지만 무명은 내가 행을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행은 식(識)을 반연하지만 행은 내가 식을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식은 명색(名色)을 반연하지만 식은 내가 명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색은 육입(六入)을 반연하지만 명색은 내가 육입을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육입은 촉(觸)을 반연하지만 육입은 내가 촉을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촉은 수(受)를 반연하지만 촉은 내가 수를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수는 애(愛)를 반연하지만 수는 내가 애를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애는 취(取)를 반연하지만 애는 내가 취를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취는 유(有)를 반연하지만 취는 내가 유를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유는 생(生)을 반연하지만 유는 내가 생을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생은 노사(老死)를 반연하지만 생은 내가 노사를 일으킨다 생각하지 않으며, 노사는 근심[憂]ㆍ슬픔[悲]ㆍ고뇌(苦惱)를 반연하지만 노사는 내가 근심ㆍ슬픔ㆍ고뇌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재왕아, 이와 같이 열두 가지 인연(因緣)을 관찰해내는 보살은, 모든 것은 없어진다거나 모든 것은 항상하다거나 하는 그 어떤 견해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보살은 ‘법은 많은 인연에 속해 있으므로 많은 인연을 미루어 구한다면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열두 가지 인연에서 참다운 지혜를 얻는다.
무엇을 참다운 지혜[眞智]라 하는가? 열두 가지가 연하여 생기는 법은 생겨남 없음과 같으며, 생겨남 없음은 비고 성품 없고 작위 없음과 같으며, 비고 성품 없고 지음 없음은 많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과 같음을 아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작용을 하셨다 하면 평등히 일체 법을 얻는데, 이 법은 열두 가지가 연하여 생기는 법과 같으며, 열두 가지가 연하여 생기는 법은 법이 생겨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하여 생겨나는 열두 가지 법은 생기는 일이 없는 법임을 꼭 봐야한다고 설하며, 연하여 생기는 열두 가지 법은 생겨나는 일이 없음을 아는 지혜가 바로 열두 가지가 연하여 생겨남을 아는 지혜라고 설한다.
007_1168_c_02L자재왕아, 밝음[明]과 밝지 않은 것[無明]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행(行)과 행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식(識)과 식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명색(名色)과 명색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육입(六入)과 육입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촉(觸)과 촉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수(受)와 수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애(愛)와 애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취(取)와 취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유(有)와 유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생(生)과 생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노사(老死)와 노사 아닌 것이 다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안다.
연에서 생겨난 것은 옳은 곳이 없으며, 연에서 생겨난 것은 실체[我]가 없으니 그러므로 공하다. 연에서 생겨난 것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연에서 생겨난 것은 진실이 아니며, 연에서 생겨난 것은 하나의 제성품도 없으며, 연에서 생겨난 것은 행하는 바가 없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을 연하여 생김을 아는 지혜[緣生智]라 한다. 연하여 생긴다는 것을 보는 자는 무명(無明)을 보지 않으며, 행(行)을 보지 않으며, 식(識)을 보지 않으며, 명색(名色)을 보지 않으며, 육입(六入)을 보지 않으며, 촉(觸)을 보지 않으며, 수(受)를 보지 않으며, 애(愛)를 보지 않으며, 취(取)를 보지 않으며, 유(有)를 보지 않으며, 생(生)을 보지 않으며, 노사(老死)를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을 보지 않는 자’는 연하여 생하는 법을 본다고 하며, 연하여 생하는 법을 본다면 이것을 법을 본다고 한다.
007_1169_a_02L무엇을 법을 본다 하는가? 무엇을 물들음을 떠난 법을 본다 하는가? 무엇을 물들음을 떠난 행이라 하는가? 모든 법을 볼 때 물들음을 떠났기 때문에 물들음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물들음을 떠난 법을 본다고 설한다. 무엇을 본다고 하는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이와 같이 보아서 법성을 파괴하지도 않고 합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법성과 함께 하면서 파괴하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는다면 이와 같이 보는 자는 실제를 파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본다고 할 수 없으니,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천안(天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혜안(慧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육안은 무작(無作)이 없기 때문에 보지 않으며, 천안은 지어 모양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위법을 보지 않으며, 혜안은 분별하는 특성이 없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
자재왕아, 이와 같이 일체 법을 보는 보살이 있다면 그는 부처를 본다. 색(色)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갖가지 모양으로도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법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계(戒)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정(定)과 혜(慧)와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智見)13)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과거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보며, 미래나 현재로도 보지 않기 때문에 본다.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고 한다.”
자재왕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많은 인연이 있는데,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본다면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까?”
007_1169_a_14L自在王菩薩白佛言:“世尊!頗有所緣,“菩薩見如是諸法,而能見佛耶?”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어째서 그런가? 색은 다해 없어지는 양상을 가지며 생겨나지 않는 성품을 갖는다. 색을 이렇게 본다면 여래를 본다고 하기 때문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다해 없어지는 양상을 가지며 생겨나지 않는 성품을 갖는다. 수ㆍ상ㆍ행ㆍ식을 이렇게 본다면 여래를 본다고 하기 때문이다. 계(戒)는 하염없고, 조작없고, 일어나는 모양이 없다. 이와 같이 계를 본다면 여래를 본다고 하기 때문이다. 정과 혜와 해탈과 지견에 대해서도 이렇게 본다면 여래를 본다고 하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내가 과거 연등부처님[燃燈佛] 때 부처님의 청정함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연하여 생겨나는 법을 보았기 때문에 법을 보았으며, 법을 보았기 때문에 여래를 보았다.”
007_1169_b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색신의 모양으로 보았기 때문에 보았으며, 둘이 아닌 법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았다.14) 지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내가 처음 발심해서부터 이제까지 부처님을 본 적이 없다. 왜냐 하면 색상(色相)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부처를 본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재왕아, 보살이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내가 연등 부처님을 본 것과 같이 해야할 것이니, 모든 법은 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한 모양인가? 내 몸과 같이 연등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으며, 연등 부처님과 같이 내 몸도 이와 같다. 한 몸이기 때문에 둘이 아닌 것, 다르지 않은 것으로 한 법의 모양에 들어간다. 이것을 연하여 생겨나는 법을 본다고 한다. 연하여 생겨나는 법을 보기 때문에 법을 본다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를 본다고 한다. 보살이 한 생각 속에서 멸제[滅]를 증득해도 실제로 멸제를 증득한 일이 없으며, 태어나고 죽는 것을 찾을 수 없되 방편의 지혜를 쓰기 때문에 멸제를 증득하는 일과 생사에 빠지는 일을 보인다면 이것을 보살의 지혜가 자재하다[智自在]고 한다.”
1)자신이 가장 훌륭한 법을 얻었다고 아만심을 일으키는 것. 즉 성도(聖道)를 얻지 못한 이가 성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
2)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 네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
3)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네 가지 바른 노력. ① 이미 생긴 악은 없애려고 노력함[斷斷]. ②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함[律儀斷]. ③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함[隨護斷]. ④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커지도록 노력함[修斷]. 이 각각을 단(斷)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이 나태함과 나쁜 행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임.
4)사신족(四神足)이라고도 하며, 뜻대로 되는 뛰어난 선정에 들기 위한 네 가지 기반. ① 뜻대로 되는 선정에 들기를 원함[欲神足]. ② 뜻대로 되는 선정에 들려고 노력함[精進神足]. ③ 뜻대로 되는 선정에 들려고 마음을 가다듬음[心神足]. ④ 뜻대로 되는 선정에 들려고 사유하고 주시함[思惟神足].
5)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다섯 가지 뛰어난 능력. ① 부처의 가르침을 믿음[信根]. ② 힘써 수행함[精進根]. ③ 부처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잊지 않음[念根]. ④ 마음을 한 곳에 모아 흐트러지지 않게 함[定根]. ⑤ 부처의 가르침을 꿰뚫어봄[慧根]. 이 다섯 가지 자질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활동을 5력(力)이라 함.
6)7각지(覺支), 7각분(覺分), 7각의(覺意)라고도 하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곱 가지 수행. ① 가르침을 명심하여 잊지 않음[念覺支]. ② 지혜로써 바른 가르침만 선택하고 그릇된 가르침은 버림[擇法覺支]. ③ 바른 가르침을 사유하면서 수행함[精進覺支]. ④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평온한 기쁨이 생김[喜覺支]. ⑤ 평온한 기쁨이 생긴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경쾌해짐[輕安覺支]. ⑥ 몸이 경쾌한 수행자가 정신을 집중 통일시킴[定覺支]. ⑦ 집중 통일된 마음을 평등하게 잘 응시함[捨覺支].
7)허망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마음작용.
8)허망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탐ㆍ진ㆍ치가 소멸된 열반의 상태. 허공이나 진여 등이 무위법에 속함.
9)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여덟 가지 선정. 8해탈이라고도 함. ① 마음 속에 있는 색상(色相)을 버리기 위해 바깥 대상의 색상에 대해 부정관(不淨觀)을 닦음. ② 마음 속에 색상은 이미 없어졌으나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부정관을 계속 닦음. ③부정관을 버리고 바깥 대상의 색상에 대하여 청정한 방면을 주시해도 탐욕이 일어나지 않고, 그 상태를 몸으로 완전히 체득해 들어감. ④ 형상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허공은 무한하다고 주시하는 선정으로 들어감. ⑤ 허공은 무한하다고 주시하는 선정을 버리고 마음의 작용은 무한하다고 주시하는 선정으로 들어감. ⑥ 앞의 선정은 버리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주시하는 선정으로 들어감. ⑦ 앞의 선정은 버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의 선정으로 들어감. ⑧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선정으로 들어감. 이 여덟 가지 선정은 앞 단계를 등지고 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배사(背捨)라 함.
10)원문에는 물을 문(問)이나 문맥상 들을 문(聞)으로 읽었다.
11)마찬가지로 원문의 물을 문(問)을 들을 문(聞)으로 읽었다.
12)6근(根)의 대상인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
13)이상 다섯 가지는 부처와 아라한이 갖춘 공덕으로서 5분법신(分法身)이라고 함. ① 행동과 말이 청정함[戒身]. ② 모든 현상은 인연 따라 생기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관조하는 공삼매(空三昧)와 대립적인 차별은 없다고 관조하는 무상삼매(無相三昧)와 원하고 구할 것은 없다고 관조하는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성취함[定身]. ③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앎[慧身]. ④ 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지혜를 갖추어 무지에서 벗어남[解脫身]. ⑤ 자신은 이미 사제를 체득했다고 아는 진지(盡智)와 자신은 이미 사제를 체득했기 때문에 다시 체득할 필요가 없다고 아는 무생지(無生智)를 갖춤[解脫知見身].
14)고려대장경 1169쪽 상단 끝부분에 원문이 잘못된 듯하다. 색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볼 수 있었고 둘 아닌 법신으로 보았기 때문에 볼 수 있었다고 해야 맥락이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