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09_0235_a_01L대반열반경 제27권
009_0235_a_01L大般涅槃經卷第二十七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009_0235_a_02L北涼天竺三藏曇無讖譯

11.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 ①
009_0235_a_03L師子吼菩薩品第十一之一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만일 부처님이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승가가 있는지 없는지, 괴로움이 있는지 없는지, 집(集)이 있는지 없는지, 멸(滅)이 있는지 없는지, 도(道)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實]가 있는지 없는지, 내[我]가 있는지 없는지,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깨끗함이 있는지 없는지, 항상함이 있는지 없는지, 승(乘)이 있는지 없는지, 유(有)가 있는지 없는지, 인(因)이 있는지 없는지, 과(果)가 있는지 없는지, 지음[作]이 있는지 없는지, 업이 있는지 없는지, 과보가 있는지 없는지가 의심된다면, 너희 마음대로 물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낱낱이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나는 진실로 하늘이나 사람이나 마군이나 범천이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내게 와서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다.”
009_0235_a_04L爾時佛告一切大衆諸善男子汝等若疑有佛無佛有法無法有僧無僧有苦無苦有集無集有滅無滅有道無道有實無實有我無我有樂無樂有淨無淨有常無常有乘無乘有性無性有衆生無衆生有有無有有眞無眞有因無因有果無果有作無作有業無業有報無報者今恣汝所問吾當爲汝分別解說善男子我實不見若天若人若魔若梵若沙門若婆羅門有來問我不能答者
그때 그 회중에 이름이 사자후(師子吼)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모를 단정히 하며 의복을 바로 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쭙겠으니, 여래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허락해주십시오.”
009_0235_a_15L爾時會中有一菩薩名師子吼卽從座起斂容整服前禮佛足長跪叉手白佛言世尊我適欲問如來大慈垂聽許
009_0235_b_02L그때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은 지금 마땅히 이 보살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찬탄하며, 가지각색 향ㆍ꽃ㆍ풍류ㆍ영락ㆍ번ㆍ일산ㆍ의복ㆍ음식ㆍ좌복ㆍ의약ㆍ집ㆍ전당으로 공양하며 영접하고 전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지나간 부처님들께 선근을 깊이 심어 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지금 내 앞에서 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다.
009_0235_a_19L爾時佛告諸大衆言諸善男子汝等今當於是菩薩深生恭敬尊重讚歎應以種種香花伎樂瓔珞幡蓋衣服飮食臥具醫藥房舍殿堂而供養之迎來送去所以者何是人已於過去諸佛深種善根福德成就是故今於我前欲師子吼
선남자야, 마치 사자가 자기의 기운을 알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뽐내며 네 발로 땅을 짚고 굴속에 있으면서 꼬리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지르듯이, 이런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추면 이는 크게 사자후하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자왕이 새벽에 굴속에서 나와 몸을 다듬고 입을 벌리고 사방을 살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열한 가지 일을 위해서이다.
009_0235_b_05L善男子如師子王自知身力牙爪鋒四足踞地安住巖穴振尾出聲有能具如是諸相當知是則能師子眞師子王晨朝出穴頻申欠呿向顧望發聲震吼爲十一事
그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사자가 아니면서 사자 행세를 하는 무리를 부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몸에 있는 기운을 시험하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있는 곳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새끼들로 하여금 있는 처소를 알게 하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여러 동무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009_0235_b_10L何等十爲欲壞實非師子詐作師子故爲欲試自身力故爲欲令住處淨故爲諸子知處所故爲群輩無怖心故
또 여섯 번째는 자는 놈을 깨우려고 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마음을 놓아버린 짐승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여러 짐승들로 하여금 와서 복종케 하려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향상(香象)들을 조복하려는 것이며, 열 번째는 새끼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자기의 권속들을 장엄하려는 것이다.
009_0235_b_14L爲眠者得覺寤故一切放逸諸獸不放逸故爲諸獸來依附故爲欲調大香象故教告諸子息故十一爲欲莊嚴自眷屬故
모든 짐승들은 사자후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에 사는 짐승들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뭍에 사는 짐승들은 굴속에 숨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떨어지고, 향상들은 두려워 달아나며 똥을 지린다.
009_0235_b_18L一切禽獸聞師子吼水性之屬潛沒深淵陸行之類藏伏窟穴飛者墮落諸大香象怖走失糞
선남자들이여, 여우는 사자를 100년 동안 따라다녀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는데, 사자의 새끼는 3년만 되어도 큰 사자처럼 사자후를 한다.
009_0235_b_20L諸善男子如彼野干雖逐師子至于百年終不能作師子吼也若師子子始滿三年則能哮吼如師子王
009_0235_c_02L선남자야, 여래 정각(正覺)께서는 지혜의 이빨과 발톱이며, 4여의족(如意足)과 6바라밀을 만족한 몸에, 10력이 용맹하고 대비(大悲)로 꼬리를 삼아서 4선정의 청정한 굴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사자후를 하신다. 마군을 쳐부수고 중생에게 10력을 보이시며, 부처님이 행하는 곳을 나타내어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곳을 만드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편안히 어루만져 무명의 졸음에서 깨어나게 하시며, 나쁜 짓을 행하는 이가 뉘우침을 내게 하고, 사견을 가진 중생들을 깨우치신다.
009_0235_b_23L善男子如來正覺智慧牙爪四如意六波羅蜜滿足之身十力雄猛悲爲尾安住四禪淸淨窟宅爲諸衆生而師子吼摧破魔軍示衆十力佛行處爲諸邪見作歸依所安撫生死怖畏之衆覺寤無明睡眠衆生惡法者爲作悔心開示邪見一切衆
육사외도는 사자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까닭이며, 부란나(富蘭那)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2승들로 하여금 뉘우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5주(住) 보살들로 하여금 큰 힘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른 견해를 가진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사견을 가진 4부중에게 두려운 생각이 없게 하려는 까닭이다.
009_0235_c_08L令知六師非師子吼故破富蘭那等憍慢心故爲令二乘生悔心故教五住諸菩薩等生大力心故爲令正見四部之衆於彼邪見四部徒衆不生怖畏故
거룩한 행ㆍ청정한 행ㆍ하늘의 행을 하는 굴속으로부터 몸을 쭉 펴면서 나오는 것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교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입을 벌리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사방을 살피는 것은 중생들이 4무애(無礙)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며, 네 발로 땅을 짚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지계(持戒)바라밀에 구족하게 머물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자후를 하시는 것이다. 사자후라고 함은 결정된 말이니, 모든 중생이 모든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계셔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009_0235_c_12L從聖行梵行天行窟宅頻申而出爲欲令彼諸衆生等破憍慢故欠呿爲令諸衆生等生善法故四向顧望爲令衆生得四無礙故足踞地爲令衆生具足安住尸波羅蜜故故師子吼師子吼者名決定說一切衆生悉有佛性如來常住無有變易
선남자야, 성문이나 연각들은 한량없는 백천 아승기겁 동안 여래 세존을 따라다니더라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지만 10주 보살은 이 세 가지 행을 닦기만 하면 능히 사자후할 것을 알아야 한다. 선남자야, 이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이제 이러한 대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깊은 마음으로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히 여기고 찬탄하여야 한다.”
009_0235_c_19L善男子聲聞緣覺雖復隨逐如來世尊無量百千阿僧祇劫而亦不能作師子吼十住菩薩若能修行是三行處當知是則能師子吼諸善男是師子吼菩薩摩訶薩今欲如是大師子吼是故汝等應當深心供養恭敬尊重讚歎
009_0236_a_02L 그때 세존께서 사자후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가 물으려거든 이제 마음대로 물어라.”
009_0236_a_02L爾時世尊告師子吼菩薩摩訶薩言善男子汝若欲問今可隨意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불성이라고 하며, 무슨 뜻으로 불성이라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합니까?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있는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10주 보살은 무슨 법에 머물러서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무슨 법에 머무르셔서 분명하게 보십니까? 10주 보살은 무슨 눈이기에 분명하게 보지 못하며, 부처님께서는 무슨 눈이기에 분명하게 보십니까?”
009_0236_a_04L師子吼菩薩摩訶薩白佛言世尊云何爲佛以何義故名爲佛性何故復名常樂我淨若一切衆生有佛性者何故不見一切衆生所有佛性十住菩薩住何等法不了了見佛住何等法而了了見十住菩薩以何等眼不了了佛以何眼而了了見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장하고 장하다. 어떤 사람이나 법을 위하여 물으면, 이는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다. 첫째는 지혜이며 둘째는 복덕이다. 만일 보살이 이런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 이라면 곧 불성을 알며, 불성이라 이름하는 것도 알 것이며, 나아가 10주 보살은 무슨 눈으로 보고 부처님 세존들은 무슨 눈으로 보는가를 알 것이다.”
009_0236_a_11L佛言善男子善哉善哉若有人能爲法諮啓則爲具足二種莊嚴一者二者福德若有菩薩具足如是二莊嚴者則知佛性亦復解知名爲佛乃至能知十住菩薩以何眼見佛世尊以何眼見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또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지혜 장엄이라 하고 어떤 것을 복덕 장엄이라 합니까?”
009_0236_a_17L師子吼菩薩言世尊云何名爲智慧莊嚴云何名爲福德莊嚴
“선남자야, 지혜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1지(地)로부터 10지에 이르는 것을 지혜 장엄이라 하고, 복덕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로부터 나아가 반야에 이르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은 아니다. 또 선남자야, 지혜 장엄은 부처님과 보살들을 말하며, 복덕 장엄은 성문ㆍ연각과 9주 보살을 말하는 것이다.
009_0236_a_19L善男子莊嚴者謂從一地乃至十地是名慧莊嚴福德莊嚴者謂檀波羅蜜乃至般若非般若波羅蜜復次善男子莊嚴者所謂諸佛菩薩福德莊嚴者謂聲聞緣覺九住菩薩
009_0236_b_02L또 선남자야, 복덕 장엄은 함이 있는 것이며, 유루(有漏)이며, 유(有)가 있고 과보가 있고 걸림이 있고 항상하지 않은 것이니, 범부의 법이며, 지혜 장엄은 함이 없는 것이며 무루이며 유가 없고 과보가 없고 걸림이 없고 항상 머무는 것이다. 선남자야, 그대는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깊고 묘한 이치를 묻는 것이며, 나도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이 의미를 대답하는 것이다.”
009_0236_a_24L復次善男子福德莊嚴者有爲有漏有有有果報有礙非常是凡夫法莊嚴者無爲無漏無無無果報無㝵常住善男子汝今具足是二莊嚴是故能問甚深妙義我亦具足是二莊嚴能答是義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이러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다면 한 가지 두 가지를 물을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가지 두 가지를 대답한다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모든 법에는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는 까닭이니, 한 가지 두 가지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집착입니다.”
009_0236_b_07L師子吼菩薩摩訶薩言世尊若有菩薩具足如是二莊嚴者則不應問一種二種云何世尊說言能答一種二所以者何一切諸法無一二種二種者是凡夫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두 가지 장엄이 없다면 한 가지 두 가지를 알지 못하겠지만, 보살은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한 가지 두 가지를 이해한다. 모든 법이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다.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면, 모든 법은 하나도 없고 둘도 없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선남자야,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범부의 집착이라고 하면 이는 곧 10주 보살이라고 할 것이며, 범부가 아니다.
009_0236_b_12L佛言善男子若有菩薩無二種莊嚴則不能知一種二種若有菩薩具二莊嚴則能解知一種二種若言諸法無一二者是義不然何以故若無一云何得說一切諸法無一無二男子若言一二是凡夫相是乃名爲十住菩薩非凡夫也
왜냐하면 하나라고 함은 열반이며 둘이라고 함은 생사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를 열반이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둘을 생사라고 하는가? 애(愛)와 무명이기 때문이다. 항상함을 열반이라고 함은 범부의 모양이 아니며, 생사를 둘이라고 함도 범부의 모양이 아니다. 이런 뜻으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 이는 능히 묻고 능히 대답한다고 한다.
009_0236_b_19L何以故一者爲涅槃二者名爲生死何故一者名爲涅槃以其常故何故二者名爲生愛無明故常涅槃者非凡夫相死二者亦非凡夫相以是義故具二莊嚴者能問能答
009_0236_c_02L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어떤 것을 불성이라고 하는가?’ 하였으니, 자세히 들어라. 내가 그대에게 하나하나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불성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하고, 제일의공은 지혜라고 한다.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한 것이니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이며, 지혜라고 하는 것은 공한 것이나 공하지 않은 것과, 항상한 것이나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이나 즐거운 것과, 나인 것이나 내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공이란 것은 온갖 생사이며 공하지 않다는 것은 대열반이며, 나아가 내가 없다는 것은 생사이며 나라는 것은 대열반이다.
009_0236_b_24L善男子汝問云何爲佛性者諦聽吾當爲汝分別解說善男子佛性 名第一義空第一義空名爲智慧所言空者不見空與不空智者見空及與不空常與無常苦之與樂我與無我空者一切生死不空者謂大涅乃至無我者卽是生死我者謂大涅槃
온갖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中道)라고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온갖 내가 없는 것만 보고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라고 할 수 없다. 중도란 것은 불성이라고 하니 이런 뜻으로 불성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으며, 무명에 덮여서 중생들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한다. 성문과 연각은 모든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며, 나아가 모든 내가 없는 것만 보고 나인 것은 보지 못한다. 이런 뜻으로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며,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고, 중도가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 못한다.
009_0236_c_09L見一切空不見不空不名中道乃至見一切無我不見我者不名中中道者名爲佛性以是義故佛性常恒無有變易無明覆故令諸衆生不能得見聲聞緣覺見一切空不見不空乃至見一切無我不見於我是義故不得第一義空不得第一義空故不行中道無中道故不見佛性
선남자야, 중도를 보지 못하는 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코 즐거운 행이며, 둘째는 결정코 괴로운 행이며, 셋째는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苦樂行]이다. 결정코 즐거운 행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므로 비록 아비지옥에 있더라도 3선천락과 같이 여기는 것이며, 결정코 괴로운 행이라고 함은 범부들을 말하는 것이며,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이라고 함은 성문과 연각이다. 성문과 연각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행하면서 중도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뜻으로 비록 불성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이다.
009_0236_c_16L善男子不見中道者凡有三種一者定樂行二者定苦行三者苦樂行樂行者所謂菩薩摩訶薩憐愍一切諸衆生故雖復處在阿鼻地獄如三禪樂定苦行者謂諸凡夫苦樂行者謂聲聞緣覺聲聞緣覺行於苦樂中道想以是義故雖有佛性而不能
009_0237_a_02L그대는 묻기를 ‘무슨 뜻으로 불성이라고 이름하는가?’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불성이라고 함은 곧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중도 종자이다.
009_0236_c_24L如汝所問以何義故名佛性男子佛性者卽是一切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道種子
또 선남자야, 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下)와 상(上)과 중(中)이다. 하라고 함은 범천이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는 것이며, 상이라고 함은 생사가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고, 3보가 항상함을 무상하다고 잘못 여긴다. 어찌하여 상이라고 하는가? 가장 위가 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009_0237_a_03L復次善男 道有三種謂下下者梵天無謬見是常上者生死無常謬見是三寶是常撗計無常何故名上得最上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중이라고 함은 제일의공이라고 이름한다. 무상한 것은 무상하다고 보고 항상한 것은 항상하다고 본다. 제일의공은 하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갖 범부들이 얻지 못하는 까닭이며,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곧 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보살들이 닦는 도는 상도 아니고 하도 아니다 이런 뜻으로 중도라고 한다.
009_0237_a_07L名第一義空無常見無常常見於第一義空不名爲下何以故一切凡夫所不得故不名爲上何以故是下故諸佛菩薩所修之道不上不以是義故名爲中道
또 선남자야, 생사의 본고장[本際]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명이며 둘째는 애(愛)이다. 이 두 가지 중간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있는데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중도가 생사를 깨뜨리므로 중도라고 하며, 이런 뜻으로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불성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지만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불성은 진실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009_0237_a_12L復次善男子生死本際凡有二種無明二者有愛是二中閒則有生老病死之苦是名中道如是中道能破生死故名爲中以是義故中道之法名爲佛性是故佛性常樂我淨諸衆生不能見故無常無樂無我佛性實非無常無樂無我無淨
009_0237_b_02L선남자야, 가난한 집에 숨은 보배[寶藏]가 있지만 이 사람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하다가, 어떤 선지식이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 숨은 보배가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빈궁하고 곤고하여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방편으로 보게 하면, 이 사람이 보기 때문에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게 되는 것과 같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이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하지만, 선지식인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방편으로써 가지가지로 가르쳐 보게 하면, 보기 때문에 중생이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는다.
009_0237_a_19L男子譬如貧人家有寶藏是人不見以不見故無常無樂無我無淨有善知識而語之言汝舍宅中有金寶藏何故如是貧窮困苦無常無樂無我無淨卽以方便令彼得見以得見故是人卽得常樂我淨佛性亦爾衆生不見以不見故無常無樂無我無淨有善知識諸佛菩薩以方便力種種教告令彼得見以得見故衆生卽得常樂我淨
또 선남자야, 중생들이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이며, 둘째는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이다. 이러한 두 소견은 중도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항상함도 없고 아주 없다는 것도 없음은 곧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이니, 이것을 불성이라고 한다. 2승들은 비록 12인연을 관찰하여도 불성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불성이 항상하지만 모든 중생들은 무명에 덮였으므로 보지 못한다. 또 12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함은 토끼나 말과 같다. 왜냐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009_0237_b_06L復次善男子衆生起見凡有二種常見二者斷見如是二見不名中無常無斷乃名中道無常無斷卽是觀照十二因緣智如是觀智是名佛性二乘之人雖觀因緣猶亦不得名爲佛性佛性雖常以諸衆生無明覆故不能得見又未能渡十二因緣猶如兔馬何以故不見佛性故
선남자야,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종자이니, 이런 뜻으로 12인연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009_0237_b_14L男子是觀十二因緣智慧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種子以是義故二因緣名爲佛性
선남자야, 마치 오이[胡苽]를 열병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열병의 인연이 되기 때문이며 12인연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불성은 인이 있고 인의 인[因因]이 있으며, 과가 있고 과의 과[果果]가 있다. 인은 12인연이이며 인의 인은 곧 지혜이며, 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과의 과는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다.
009_0237_b_17L善男子譬如胡瓜名爲熱病何以故能爲熱病作因緣十二因緣亦復如是善男子佛性有因有因因有果有果果有因者卽十二因緣因因者卽是智慧有果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果果卽是無上大般涅槃
009_0237_c_02L선남자야, 마치 무명이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식(識)이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되는 것처럼 불성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12인연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 선남자야, 인이며 과가 아님은 불성과 같고, 과이며 인이 아님은 대열반과 같고, 인도 되고 과도 됨은 12인연으로 생긴 법과 같으며,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님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인도 과도 아니므로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
009_0237_b_23L善男子譬如無明爲因諸行爲果行因識果以是義故彼無明體亦因亦因因識亦果亦果果佛性亦爾善男子以是義故十二因緣不出不滅不常不斷非一非二不來不去非因非果善男子因非果如佛性是果非因如大涅槃是因是果如十二因緣所生之法因非果名爲佛性非因果故常恒無
이런 뜻으로 나의 경에서 말하기를 ‘12인연은 그 뜻이 매우 깊어서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부처님과 보살의 경계이며, 성문이나 연각은 미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009_0237_c_09L以是義故我經中說十二因緣其義甚深無知無見不可思惟乃是諸佛菩薩境界非諸聲聞緣覺所及
무슨 까닭으로 매우 깊다고 하는가? 중생의 업행(業行)은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지만 과보를 얻으며 비록 생각마다 멸하지만 잃지 않으며, 짓는 이는 없지만 짓는 업은 있으며, 받을 이는 없지만 과보는 있으며, 받는 이가 멸하더라도 과보는 없어지지 않으며, 생각하여 앎이 없지만 화합하여 있다.
009_0237_c_11L何義故甚深甚深衆生業行不常不斷而得果報雖念念滅而無所失無作者而有作業雖無受者而有果受者雖滅果不敗亡無有慮知合而有
모든 중생들은 12인연과 함께 행하면서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보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나중과 처음이 없다. 10주 보살은 나중만 보고 처음을 보지 못하지만 부처님 세존께서는 처음도 보고 나중도 보신다. 이런 뜻으로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불성을 보신다고 한다.
009_0237_c_16L一切衆生雖與十二因緣共行而不見知不見知故無有終始住菩薩惟見其終不見其始諸佛世尊見始見終以是義故諸佛了了得見佛性
009_0238_a_02L선남자야, 모든 중생은 12인연을 보지 못하므로 바퀴 돌 듯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서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듯이 모든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스스로 번뇌의 업을 짓고 나고 죽는 데서 헤매는데, 마치 공을 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12인연을 보는 이는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곧 부처님을 본다고 하였으니, 부처님이란 곧 불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으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009_0237_c_20L善男子一切衆生不能見於十二因緣是故輪轉善男子如蠶作自生自死一切衆生亦復如是見佛性故自造結業流轉生死猶如拍毬善男子是故我於諸經中說有人見十二緣者卽是見法見法者卽是見佛佛者卽是佛性何以故切諸佛以此爲性
선남자야, 12인연을 보는 지혜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下)이며 둘째는 중(中)이며 셋째는 상(上)이며 넷째는 상상(上上)이다. 하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불성을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의 도를 얻는다. 중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불성을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연각의 도를 얻는다. 상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보아도 분명하지 못하며, 분명하지 못하므로 10주지(住地)에 머문다.
009_0238_a_04L善男子觀十二緣智凡有四種一者二者三者四者上上下智觀者不見佛性以不見故得聲聞道中智觀者不見佛性以不見故得緣覺道上智觀者見不了了不了了故住十住地
상상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분명히 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를 얻는다. 이런 뜻으로 12인연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불성은 곧 제일의공이며,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고 중도는 부처라 이름하며 부처는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009_0238_a_09L上上智觀見了了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以是義故十二因緣名爲佛性佛性者卽第一義空第一義空名爲中道中道者卽名爲佛佛者名爲涅槃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부처님과 불성이 차별이 없다면 모든 중생들은 도를 닦아서 무엇 합니까?”
009_0238_a_13L爾時師子吼菩薩摩訶薩白佛言若佛與佛性無差別者一切衆生何用修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대가 물은 것은 옳지 않다. 부처님과 불성이 비록 차별이 없으나 모든 중생들이 모두 구족하지 못하였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어미를 살해하고 뒤에 뉘우침을 냈다면, 두 가지 업이 비록 선하더라도 이 사람은 지옥 사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록 지옥의 5음과 18계와 6입이 없더라도 오히려 지옥 사람이란 이름을 얻는 것이다.
009_0238_a_16L佛言善男子如汝所問義不然佛與佛性雖無差別然諸衆生悉未具足善男子譬如有人惡心害母害已生悔三業雖善是人故名地獄人也何以故是人定當墮地獄是人雖無地獄陰界諸入猶故得名爲地獄人
009_0238_b_02L선남자야,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어떤 이가 선한 일을 닦으면 하늘 사람을 본다 하고 나쁜 일을 행하면 지옥을 본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으나, 모든 중생이 참으로 32상과 80종호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 경에서 게송을 말하였다.
009_0238_a_22L善男子是故我於諸經中說若見有人修行善者名見天人修行惡者名見地獄何以故定受報善男子一切衆生定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是故我說一切衆生 悉有佛性一切衆生眞實未有三十二相八十種好以是義故我於此經而說是偈

본래는 있으나 지금은 없으며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으니
이 세상 앞세상 다음 세상에
있다는 모든 법 옳은 곳 없다네.
009_0238_b_06L本有今無
本無今有
三世有法
無有是處

선남자야, 있다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음에 있는 것이며 둘째는 지금에 있는 것이며 셋째는 과거에 있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오는 세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이것을 불성이라 하고, 모든 중생이 지금에 번뇌의 결박이 있으므로 현재에 32상과 80종호가 없으며, 모든 중생이 지나간 세상에 번뇌를 끊은 일이 있었으므로 현재에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009_0238_b_08L善男子有者凡有三種未來有現在有過去有一切衆生未來之世當有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名佛性一切衆生現在悉有煩惱諸結是故現在無有三十二相八十種好一切衆生過去之世有斷煩惱是故現在得見佛性
이런 뜻으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며, 나아가 일천제들도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일천제들은 선한 법이 없으며 불성은 선한 법이지만, 오는 세상에 있을 것이므로 일천제들이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천제들도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는 까닭이다.
009_0238_b_15L以是義故我常宣說一切衆生悉有佛性乃至一闡提等亦有佛性一闡提等無有善法佛性亦善以未來有故一闡提等悉有佛何以故一闡提等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009_0238_c_02L선남자야, 마치 어떤 집에 우유와 타락이 있는데, 다른 이가 그대에게 소(酥)가 있느냐고 하니, 있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타락이 실제로는 소가 아니지만 공교한 방편으로 소를 만들 수 있으므로 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모두 마음이 있으며, 마음이 있는 이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 이런 뜻으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내가 떳떳하게 말하는 것이다.
009_0238_b_20L善男子譬如有家有乳酪有人問言汝有蘇耶我有酪實非蘇以巧方便定當得故言有蘇衆生亦爾悉皆有心有心者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以是義故我常宣說一切衆生悉有佛性
선남자야, 필경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엄필경(莊嚴畢竟)이며 둘째는 구경(究竟)필경이다. 첫째는 세간필경이며 둘째는 출세간필경[出世畢竟]이다. 장엄필경은 6바라밀이며 구경필경은 모든 중생이 얻을 1승(乘)이며, 1승은 불성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한다. 모든 중생이 다 1승이 있지만 무명에 덮여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북구로주나 삼십삼천은 과보가 덮여서 여기 있는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불성도 그러하여 번뇌에 덮였으므로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009_0238_c_03L善男子畢竟有二種一者莊嚴畢竟二者究竟畢竟一者世閒畢竟二者出世畢竟莊嚴畢竟者六波羅蜜竟畢竟者一切衆生所得一乘一乘名爲佛性以是義故我說一切衆生悉有佛性一切衆生悉有一乘無明覆故不能得見善男子如鬱單三十三天果報覆故此閒衆生不能得見佛性亦爾諸結覆故衆生不見
또 선남자야, 불성은 곧 수릉엄삼매이니 성품이 제호(醍醐)와 같으며, 여러 부처님의 어머니이다. 수릉엄삼매의 힘으로써 부처님들로 하여금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다 수릉엄삼매가 있지만 닦아 행하지 않으므로 보지 못하며,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한다.
009_0238_c_12L復次善男子佛性者卽首楞嚴三昧性如醍醐卽是一切諸佛之母以首楞嚴三昧力故而令諸佛常樂我淨一切衆生悉有首楞嚴三昧以不修行故不得見是故不能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선남자야, 수릉엄삼매에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는 수릉엄(首楞嚴)삼매이고 둘째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고 셋째는 금강(金剛)삼매이고 넷째는 사자후(師子吼)삼매이고 다섯째는 불성(佛性)이다. 그 짓는 대로 따라서 곳곳마다 이름을 얻는다. 선남자야, 한 삼매가 가지가지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마치 선(禪)에는 4선이라 하고, 근(根)에는 정근(定根)이라 하고, 역(力)에는 정력이라 하고, 각(覺)에는 정각(正覺)이라 하고 정(正)에는 정정(正定)이라 하고, 8대인각(大人覺)에는 정각(定覺)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수릉엄삼매도 그와 같다.
009_0238_c_18L善男子首楞嚴三昧有五種名一者首楞嚴三昧二者般若波羅蜜三者金剛三昧四者子吼三昧五者佛性隨其所作處處得名善男子如一三昧得種種名禪名四禪根名定根力名定力覺名定覺正名正定八大人覺名爲定覺首楞嚴定亦復如是
009_0239_a_02L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세 가지 정(定)을 구족하였으니 상과 중과 하이다. 상정(上定)은 불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며, 중정(中定)은 모든 중생이 초선(初禪)을 구족하였으니, 인연이 있으면 닦아 익히고 인연이 없으면 닦지 못한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재(火災)이며, 둘째는 욕계의 결박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모두 중정을 구족하였다고 말한다. 하정은 10대지(大地) 중에 심수정(心數定)이다.
009_0239_a_02L善男子一切衆生具足三定謂上上者謂佛性以是故言一切衆生悉有佛性一切衆生具足初禪有因緣時能修習若無因緣則不能修因緣二一謂火災二謂破欲界結以是故言一切衆生悉具中定下定者十大地中心數定也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하정을 구족하였다고 말한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지만 번뇌에 덮여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10주 보살이 비록 1승을 보지만 여래가 항상 머무는 법인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10주 보살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수릉(首楞)이라 함은 온갖 일이 필경이라는 말이며, 엄(嚴)은 견고하다는 말이니 온갖 일이 필경에 견고함을 얻으므로 수릉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릉엄정(首楞嚴定)을 불성이라고 한다.
009_0239_a_09L以是故言一切衆生悉具下定一切衆生悉有佛性煩惱覆故不能得見十住菩薩雖見一乘不知如來是常住法以是故言十地菩薩雖見佛性而不明了善男子楞者名一切畢竟嚴者名堅一切畢竟而得堅固名首楞嚴以是故言首楞嚴定名爲佛性
선남자야, 내가 어느 때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아난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목욕하려고 하니 너는 옷과 비누[澡豆]를 가져 오너라’ 하고 물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온갖 나는 새와 물에 살고 뭍에 사는 생물들이 모두 와서 나를 보고, 또 500의 범지(梵志)들이 강가에 왔다가 나에게 와서 서로 말하기를 ‘어떻게 금강 같은 몸을 얻었는가? 만일 구담이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를 따라서 재계하는 법을 받으리라’ 하였다. 내가 그때에 타심통[他心智]으로 범지의 마음을 알고 범지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가 아주 없다는 소견을 말한다고 하는가?’
009_0239_a_16L善男子我於一時住尼連禪河告阿難言我今欲洗汝可取衣及以澡豆我旣入水一切飛鳥水陸之屬悉來觀我爾時復有五百梵志來在河邊因到我所各相謂言云何而得金剛之身若使瞿曇不說斷見我當從其啓受齋法善男子我於爾時以他心智知是梵志心之所念告梵志言何謂我說於斷見
009_0239_b_02L범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구담이여, 먼저부터 여러 경에서 모든 중생들은 모두 내가 없다[無我]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아주 없다는 소견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만일 내가 없다면 계행을 갖는 이는 누구며, 계행을 파하는 이는 누구겠습니까?’
009_0239_b_02L彼梵志言瞿曇於處處經中說諸衆生悉無有我言無我云何而言非斷見耶若無我持戒者誰破戒者誰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모든 중생이 모두 내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불성이 어찌 내가 아니겠는가? 이런 뜻으로 나는 아주 없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중생이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아주 없다는 소견이라 고 한다.’
009_0239_b_05L佛言我亦不說一切衆生悉無有我我常宣說一切衆生悉有佛性佛性者豈非我耶以是義故我不說斷見一切衆生不見佛性故無常無我無樂無淨如是則名說斷見也
그때 여러 범지들은 불성이 곧 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고 나서 마침내 출가하여 보리도[菩提道]를 닦았다. 나는 새와 물에 살고 뭍에 사는 생물들도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며, 마음을 내고 나서 곧 몸을 버렸다. 선남자야, 이 불성이 실제로는 내가 아니지만 중생을 위하여 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009_0239_b_10L時諸梵志聞說佛性卽是我故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尋時出家修菩提道一切飛鳥水陸之屬亦發無上菩提之心旣發心尋得捨身善男子是佛性者實非我也爲衆生故說名爲我
선남자야, 여래는 인연이 있으므로 내가 없는 것을 말하여 나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내가 없으며 비록 이런 말을 하였으나 허망하지 않다. 선남자야, 인연이 있으므로 나를 말하여 내가 없다 하였으나 실제로는 내가 있는 것이며, 세계를 위하여 비록 내가 없다고 하였으나 허망하지 않다. 불성은 내가 없지만 여래가 나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항상한 까닭이며, 여래는 나이지만 내가 없다고 말한 것은 자재함을 얻은 까닭이다.”
009_0239_b_15L善男子如來有因緣故說無我爲我眞實無我雖作是說無有虛妄善男有因緣故說我爲無我而實有我爲世界故雖說無我而無虛妄佛性無我如來說我以其常故如來是我而說無我得自在故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는 것이 금강역사와 같다면 무슨 이치로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009_0239_b_21L爾時師子吼菩薩摩訶薩白佛言若一切衆生悉有佛性如金剛力士者以何義故一切衆生不能得見
009_0239_c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마치 색법(色法)이 비록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이 다르고, 길고 짧은 모양이 있지만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이며, 소경이 보지 못한다 하여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길고 짧은 모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소경은 비록 보지 못하나 눈이 있는 이는 보는 까닭이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은 보지 못하나 10주 보살은 일부분을 보고 여래는 전부를 본다.
009_0239_b_24L佛言善男子譬如色法雖有靑白之異長短質像盲者不見雖復不亦不得言無靑短質像何以故盲雖不見有目見故佛性亦一切衆生雖不能見十住菩薩見少分故如來全見
10주 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은 밤에 색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낮에 색을 보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마치 애꾸눈이 물체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지만 용한 의원이 눈병을 치료하면 약의 효력으로 분명하게 보게 되듯이 10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치 못하지만 수릉엄삼매의 힘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009_0239_c_07L十住菩薩所見佛如夜見色如來所見如晝見色男子譬如瞎者見色不了有善良醫而爲治目以藥力故得了了見十住菩薩亦復如是雖見佛性不能明了以首楞嚴三昧力故能得明了
선남자야, 만일 어떤 사람이 온갖 법[一切法]도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이런 사람은 불성을 보지 못한다. 온갖 법은 생사라 이름하고 온갖 법 아닌 것은 3보를 이름한 것이다. 성문과 연각은 온갖 법이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온갖 법 아닌 것도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이런 뜻으로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009_0239_c_12L善男若有人見一切諸法無常無我無淨見非一切法無常無我無樂無淨如是之人不見佛性一切者爲生死非一切者名爲三寶聲聞覺見一切法無常無我無樂無淨一切法亦見無常無我無樂無淨是義故不見佛性
10주 보살은 온갖 법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온갖 법 아닌 것은 부분적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본다. 이런 뜻으로 10분(分) 가운데서 한 부분을 본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온갖 법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로 보고, 온갖 법 아닌 것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것으로 본다. 이런 뜻으로 불성 보기를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한다. 이런 뜻으로 수릉엄정을 필경이라고 이름한다.
009_0239_c_19L十住菩薩見一切法無常無我無樂無淨非一切法分見常樂我淨以是義故十分之中得見一分諸佛世尊見一切法無常無樂無淨非一切法見常樂我淨以是義故見於佛性如觀掌中阿摩勒以是義故首楞嚴定名爲畢竟
009_0240_a_02L 선남자야, 마치 초하루 달을 볼 수는 없으나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범부들이 보지 못하지만 불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009_0240_a_02L善男子譬如初月雖不可見不得言佛性亦爾一切凡夫雖不得見不得言無佛性也
선남자야, 불성이라고 함은 10력과 4무소외(無所畏)와 크게 불쌍히 여김과 3념처(念處)이다. 모든 중생은 모두 세 가지로 번뇌를 깨뜨림이 있으므로 그런 뒤에야 보는 것이며, 일천제들은 일천제를 깨뜨린 뒤에 10력과 4무소외와 크게 가엾이 여김과 3념처를 얻는다. 이런 뜻으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009_0240_a_05L善男子佛性者所謂十力四無所畏大悲三念處一切衆生悉有三種煩惱故然後得見一闡提等破一闡然後能得十力四無所畏大悲念處以是義故我常宣說一切衆生悉有佛性
선남자야, 12인연은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가진 것이며,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무엇을 인연이라고 하는가? 과거의 번뇌를 무명이라 하고, 과거의 업을 행(行)이라 하고, 현재 세상에 처음으로 태에 드는 것을 식(識)이라 하고, 태에 들어서 5분(分)과 4근(根)이 구족하지 못한 것을 명색(名色)이라 하고, 4근을 구족하였으나, 촉(觸)이라 이름할 수 없는 때를 6입(入)이라 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촉이라 하고,
009_0240_a_11L善男子十二因緣一切衆生等共有亦內亦外何等十二過去煩惱爲無明過去業者則名爲行現在世中初始受胎是名爲識入胎五分根未具名爲名色具足四根未名觸是名六入未別苦樂是名爲觸
한 가지 사랑[一愛]에 물드는 것을 수(受)라 하고, 5욕을 익혀 가까이함을 애(愛)라 하고, 안과 밖으로 탐하여 구함을 취(取)라 하고, 안과 밖의 일을 위하여 몸과 입과 뜻으로 업을 일으킴을 유(有)라 하고, 현재 세상의 식을 미래의 생(生)이라 하고, 현재의 명색ㆍ6입ㆍ촉ㆍ수를 미래 세상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12인연이라고 한다.
009_0240_a_17L習一愛是名爲受習近五欲是名爲內外貪求是名爲取爲內外事起身口意業是名爲有現在世識名未來生現在名色六入名未來世老病死也是名十二因緣
009_0240_b_02L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비록 12인연을 가지고 있으나 혹은 구족하지 못하니, 가라라(歌羅羅) 때에 죽으면 12인연이 없고, 생으로부터 늙고 죽는 데 이르면 12인연을 구족하는 것이다. 색계의 중생들은 세 가지 수와 세 가지 촉과 세 가지 애가 없고, 늙고 병드는 일이 없지만 12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하며, 무색계의 중생들은 색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지만 역시 12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반드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평등하게 12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야,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내가 말하였다.
009_0240_a_22L善男子切衆生雖有如是十二因緣或有未如歌羅邏時死則無十二從生乃至老死得具十二色界衆生無三種三種觸三種愛無有老病亦得名爲具足十二無色衆生無色乃至無有老病亦得名爲具足十二以定得故名衆生平等具有十二因緣男子佛性亦爾一切衆生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是故我說一切衆生悉有佛性
선남자야, 설산에 이름을 인욕(忍辱)이라고 하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가 나는 것이다. 또 이상한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가 없어진다. 비록 제호가 없어지더라도 설산에 인욕초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불성도 그와 같다. 설산이라고 함은 여래를 말하며 인욕초는 대열반을 말하고, 이상한 풀은 12부경을 말한다. 중생이 만일 대반열반을 듣고 물으면 불성을 볼 것이니, 12부경 가운데에 비록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나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009_0240_b_09L善男子雪山有名爲忍辱牛若食者則出醍醐有異草牛若食者則無醍醐雖無醍不可說言雪山之中無忍辱草性亦爾雪山者名爲如來忍辱草者名大涅槃異草者十二部經衆生若能聽受諮啓大般涅槃則見佛性二部中雖不聞有不可說言無佛性也
선남자야, 불성은 색(色)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고,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며, 모양이기도 하고 모양이 아니기도 하고,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며,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 아니기도 하고,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다. 또한 항상함도 아니고 아주 없음[斷]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아주 없지 않음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고 다함도 아니고 다하지 않음도 아니다. 인이기도 하고 과이기도 하고,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기도 하며,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고 뜻도 아니고 뜻 아님도 아니며, 글자이기도 하고 글자 아니기도 하고 글자도 아니고 글자 아님도 아니다.
009_0240_b_16L善男子佛性者亦色非色非色非非亦相非相非相非非相亦一非一非一非非一非常非斷非非常非非亦有亦無非有非無亦盡非盡盡非非盡亦因亦果非因非果亦義非義非義非非義亦字非字非字非非字云何爲色金剛身故
009_0240_c_02L어찌하여 색이라고 하는가? 금강 같은 몸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색이 아니라고 하는가? 18불공법(不共法)은 색법이 아닌 까닭이다. 어찌하여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닌가? 색과 색 아닌 데에 일정한 모양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모양이라고 하는가? 32상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모양이 아니라 고 하는가? 모든 중생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모양과 모양 아닌 데에 결정치 못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하나라고 하는가? 모든 중생이 다 1승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가 아니라고 하는가? 3승을 말하기 때문이다.
009_0240_b_23L云何非色十八不共非色法故云何非色非非非色無定相故云何爲相三十二相故云何非相一切衆生相不現云何非相非非相非相不決定云何爲一一切衆生悉一乘故何非一說三乘故
어찌하여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헤아릴 수 있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항상함이 아니라고 하는가? 인연을 따라 보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아주 없음이 아니라고 하는가? 아주 없다는 소견을 여읜 까닭이다. 어찌하여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아주 없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나중과 처음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있다고 하는가? 모든 중생이 모두 가진 까닭이다. 어찌하여 없다고 하는가? 알맞은 방편을 따라서 보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허공의 성품인 까닭이다.
009_0240_c_06L云何非一非非一無數法故云何非常從緣見故云何非斷離斷見故云何非非常非非斷無終始故云何爲有一切衆生悉皆有故云何爲無從善方便而得見故云何非有非無虛空性故
어찌하여 다한다고 하는가? 수릉엄삼매를 얻은 까닭이다. 어찌하여 다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다함도 아니고 다하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모든 다했다는 모양이 없어진 까닭이다. 어찌하여 인이라고 하는가? 요인(了因)인 까닭이다. 어찌하여 과라고 하는가? 결과가 결정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뜻이라고 하는가? 뜻에 장애 없음[義無礙]을 모두 거두어 가진[攝取] 까닭이다.
009_0240_c_11L云何名盡得首楞嚴三昧故云何非盡以其常云何非盡非非盡一切盡相斷故云何爲因以了因故云何爲果果決定故云何非因非果以其常故云何爲義悉能攝取義無㝵故
어찌하여 뜻이 아니라고 하는가?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뜻도 아니고 뜻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필경까지 공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글자라고 하는가? 이름이 있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글자가 아니라 고 하는가? 이름하는 것이 이름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글자도 아니고 글자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온갖 글자가 없어진 까닭이다. 어찌하여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하는가? 온갖 받는 것[受]을 없앤 까닭이다.
009_0240_c_16L云何非義不可說故云何非義非非義畢竟空云何爲字有名稱故云何非字無名故云何非字非非字斷一切字云何非苦非樂斷一切受故
어찌하여 내가 아니라고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함[八自在]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나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나도 아니고 나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공이라고 하는가? 제일의공인 까닭이다. 어찌하여 공이 아니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공도 아니며 공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선한 법을 위하여 종자가 되는 까닭이다.
009_0240_c_20L云何非我未能具得八自在故云何非非以其常故云何非我非非我不作不受故云何爲空第一義空故云何非空以其常故云何非空非非空爲善法作種子故
009_0241_a_02L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대열반경』의 이러한 뜻을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성을 본 것이다. 불성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부처님 여래의 경계이고 성문이나 연각이 아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불성은 5음도 18계도 6입도 아니며, 본래는 없다가 지금은 있는 것도 아니며, 있었다가 도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선한 인연을 따라야 중생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검은 쇠[黑鐵]가 불에 들어가면 붉어지고, 나와서 식어지면 도로 검어지는 것과 같다. 이 검은 빛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009_0241_a_02L善男子若有人能思惟解了『大涅槃經』如是之義當知是人則見佛性佛性者不可思議是諸佛如來境界非諸聲聞緣覺所善男子佛性者非陰非本無今有非已有還無從善因緣衆生得譬如黑鐵入火則赤出冷還黑是黑色非內非外因緣故有
불성도 그러하여 모든 중생의 번뇌의 불이 꺼지면 보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씨앗이 소멸하여 싹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싹의 본성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는 것이며 꽃의 열매 또한 이와 같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선남자야,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은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하였다. 불성도 그러하여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009_0241_a_09L佛性亦一切衆生煩惱火滅則得聞見男子如種滅已芽則得生而是芽性非內非外乃至花果亦復如是從緣故有善男子是大涅槃微妙經典成就具足無量功德佛性亦爾悉是無量無邊功德之所成就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몇 가지 법을 구족하게 성취하였기에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며, 부처님들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셨기에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까?”
009_0241_a_15L爾時師子吼菩薩摩訶薩言世尊薩具足成就幾法得見佛性而不明諸佛世尊成就幾法得了了見
“선남자야, 보살은 열 가지 법을 구족하게 성취하였으므로 불성을 보면서도 분명하지 못하다. 무엇이 열인가? 첫 번째는 욕심이 적고[少欲] 두 번째는 만족함을 알고[知足] 세 번째는 고요함[寂靜]이며 네 번째는 정진이며 다섯 번째는 바른 생각[正念]이다. 여섯 번째는 바른 정[正定]이며 일곱 번째는 바른 지혜[正慧]이며 여덟 번째는 해탈이고 아홉 번째는 해탈을 찬탄함이며, 열 번째는 대열반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009_0241_a_18L男子菩薩具足成就十法雖見佛性而不明了云何爲十一者少欲二者知足三者寂靜四者精進五者正念六者正定七者正慧八者解脫九者讚歎解脫十者以大涅槃教化衆生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욕심이 적은 것과 만족함을 아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009_0241_a_23L師子吼菩薩言世尊少欲知足有何差別
009_0241_b_02L“선남자야, 욕심이 적은 것은 구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 것이며, 만족함을 아는 것은 적게 얻었을 때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욕심이 적은 것은 하고자 함이 적음이며 만족함을 아는 것은 불법의 일만 위하고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욕심은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나쁜 욕심이며, 둘째는 큰 욕심이고, 셋째는 욕망의 욕심[欲欲]이다. 나쁜 욕심이란 것은 만일 비구가 탐욕을 내서 모든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비구들이 나의 뒤에 따르고, 여러 사부대중이 모두 나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존중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내가 가장 먼저 사부대중에게 법을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말을 믿으며, 국왕ㆍ대신ㆍ장자들도 모두 나에게 공양하여 나로 하여금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와 의약과 훌륭한 가옥을 많이 얻어서 생사의 욕망을 만족하려 하면 이것은 나쁜 욕심이다.
009_0241_b_02L善男子少欲者不求不取知足得少之時心不悔恨少欲者少有所欲知足者但爲法事心不愁惱男子欲者有三一者惡欲二者大欲三者欲欲惡欲者若有比丘心生貪欲爲一切大衆上首令一切僧隨逐我後令諸四部悉皆供養恭敬尊重於我令我先爲四衆說法令一切信受我語亦令國王大臣者皆恭敬我令我大得衣服飮食醫藥上妙屋宅爲生死欲是名惡
어떤 것이 큰 욕심인가? 만일 비구가 욕심을 내어서, ‘어찌하면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내가 초주(初住)에서부터 나아가 10주를 얻었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아라한과에서부터 나아가 수다원과를 얻었으며 4선(禪)과 4무애지(無礙智)를 얻은 줄을 알게 할 것인가?’라고 하며, 이양을 위한다면 이것은 큰 욕심이다.
009_0241_b_13L云何大欲若有比丘生於欲心何當令四部之衆悉皆知我得初住地乃至十住得阿耨多羅三藐三菩得阿羅漢果乃至須陁洹果我得四禪乃至四無閡智爲於利養是名大欲
욕망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만일 비구가 범천에나 마왕천에나 자재천에나 전륜성왕이나 찰제리나 바라문으로 태어나서 자재하고자 하면, 이는 이양을 위하는 것이므로 욕망의 욕심이라고 한다.
009_0241_b_18L欲欲者若有比丘欲生梵天自在天轉輪聖王若剎利居士婆羅門皆得自在爲利養故是名欲
009_0241_c_02L만일 이런 세 가지 나쁜 욕심의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는 욕심이 적다고 한다. 욕심은 25애(愛)라고 하는데, 25애가 없으면 욕심이 적다고 한다. 미래에 하고자 하는 일을 구하지 않으면 욕심이 적다고 하고, 얻고도 집착하지 않으면 만족한 줄 안다고 하며, 공경을 구하지 않으면 욕심이 적다 하고, 얻고도 쌓아 두지 않으면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009_0241_b_21L若不爲是三種惡欲之所害者名少欲欲者名爲二十五愛無有如是二十五愛是名少欲不求未來所欲之事是名少欲得而不著是名知不求恭敬是名少欲得不積聚名知足
선남자야, 또 욕심은 적으나 만족함을 안다고 하지 못할 것이 있으며, 만족할 줄은 아나 욕심이 적다고 하지 못할 것도 있으며, 욕심도 적고 만족함도 안다고 할 것이 있으며, 만족한 줄도 모르고 욕심도 적지 않다고 할 것이 있다. 욕심이 적은 이는 수다원이며, 만족함을 아는 이는 벽지불이고, 욕심도 적고 만족함도 아는 이는 아라한이고, 욕심도 적지 않고 만족함도 모르는 이는 보살이다.
009_0241_c_03L善男子亦有少欲不名知足有知足不名少欲有亦少欲亦知足有不知足不少欲少欲者謂須陁洹知足者謂辟支佛少欲知足者謂阿羅漢不少欲不知足者所謂菩薩
선남자야,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아는 데 또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선한 것이며 둘째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은 범부이며 선한 것은 성인과 보살이다. 모든 성인은 비록 도과(道果)를 얻었으나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시끄럽지 않다. 이것을 이름하여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대승 『대열반경』을 닦아서 불성을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아는 것을 닦아 익혔다고 한다.
009_0241_c_07L男子少欲知足復有二種一者不善不善者所謂凡夫善者聖人菩薩一切聖人雖得道果不自稱說不稱說故心不惱恨是名知足善男菩薩摩訶薩修習大乘『大涅槃經』欲見佛性是故修習少欲知足
어떤 것을 고요함이라고 하는가? 고요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고요하고 둘째는 몸이 고요함이다. 몸이 고요함은 몸으로 하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짓지 않는 것이고, 마음이 고요함은 뜻으로 하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한다. 몸이 고요한 이는 사부대중을 친근히 하지 않고, 사부대중의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며, 마음이 고요한 이는 마침내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을 익히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한다.
009_0241_c_13L云何寂靜寂靜有二一者心靜二者身靜身寂靜者終不造作身三種惡心寂靜者亦不造作意三種惡是則名爲身心寂靜身寂靜者終不親近四衆預四衆所有事業心寂靜者終不修習貪欲瞋恚愚癡是則名爲身心寂
009_0242_a_02L어떤 비구는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이가 있고,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고요하지 못한 이도 있고,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도 있고,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하지 못한 이도 있다.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어떤 비구가 고요한 데서 좌선(坐禪)하느라고 사부대중을 멀리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을 쌓아 둔다. 이를 일러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다고 한다.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어떤 비구가 사부대중과 국왕과 대신을 친근히 하면서도, 마음에는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을 끊었으면 이것을 말하여 마음은 고요하나 몸은 고요하지 못하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는 부처님과 보살이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하지 못한 이는 모든 범부들이다.
009_0241_c_20L或有比丘身雖寂靜心不寂靜心寂靜身不寂靜有身心寂靜又有身心俱不寂靜身寂靜心不寂靜者或有比丘坐禪靜處遠離四衆心常積集貪欲是名身寂靜心不寂心寂靜身不寂靜者或有比丘親近四衆國王大臣斷貪是名心寂靜身不寂靜身心寂靜者謂佛身心不寂靜者謂諸凡夫
왜냐하면 범부들은 몸과 마음이 비록 고요하더라도,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음을 깊이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범부들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법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일천제들은 4중금을 범하고 5역죄를 지으므로 이런 사람들도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이름하지 못한다.
009_0242_a_05L何以故凡夫之人身心雖靜不能深觀無常無樂無我無淨以是義故凡夫之人不能寂靜身口意業一闡提輩犯四重禁作五逆罪如是之人亦不得名身心寂靜
어떤 것을 정진이라고 하는가? 어떤 비구가 몸과 입과 뜻으로 하는 업이 깨끗하기 위하여 온갖 선하지 못한 업을 멀리 여의고, 모든 선한 업을 닦는 것을 정진이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는 이는 여섯 군데에 생각을 둔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와 계율과 보시와 하늘이다. 이것을 바른 생각[正念]이라고 한다.
009_0242_a_10L云何精進若有比丘欲令身口意業淸淨遠離一切諸不善業修習一切諸善業者是名精進是勤精進者念六處所謂佛是名正
바른 생각을 갖춘 이가 얻는 삼매를 바른 정[正定]이라고 한다.
具正念者所得三昧是名正定
바른 정을 갖춘 이는 모든 법을 관찰하되 허공과 같이 한다. 이것을 바른 지혜[正慧]라고 한다.
009_0242_a_15L正定者觀見諸法猶如虛空是名正
바른 지혜를 갖춘 이는 온갖 번뇌의 결박을 여의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009_0242_a_17L具正慧者遠離一切煩惱諸結名解脫
해탈을 얻은 이는 중생들을 위하여 해탈을 칭찬하면서, 이 해탈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009_0242_a_18L得解脫者爲諸衆生稱美解言是解脫常恒不變是名讚歎解
해탈은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며, 열반은 곧 번뇌로 결박한 불이 꺼지는 것이다. 또 열반은 집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번뇌라는 사나운 비바람을 막는 까닭이다. 또 열반은 귀의할 데라고 한다. 왜냐하면 능히 모든 공포를 없애는 까닭이다. 또 열반은 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네 가지 빠른 물결[四暴流]로도 떠내려 보낼 수 없는 까닭이다.
009_0242_a_20L解脫卽是無上大般涅槃涅槃者卽是煩惱諸結火滅又涅槃者名爲室宅何以故能遮煩惱惡風雨故涅槃者名爲歸依何以故能過一切諸怖畏故又涅槃者名爲洲渚何以四大暴河不能漂故
009_0242_b_02L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욕심 빠른 물결[欲暴流]이며 둘째는 유(有)의 빠른 물결이며 셋째는 소견의 빠른 물결이며, 넷째는 무명의 빠른 물결이다. 그러므로 열반을 섬이라고 한다. 또 열반은 필경에 돌아갈 곳이다. 왜냐하면 모든 필경의 낙을 얻는 까닭이다. 만일 보살이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여 갖추면 불성을 보기는 하나 분명하지 못하다.
009_0242_b_02L何等爲四欲暴二者有暴三者見暴四者明暴是故涅槃名爲洲渚又涅槃者名畢竟歸何以故能得一切畢竟樂若有菩薩摩訶薩成就具足如是十法雖見佛性而不明了
또 선남자야, 출가한 사람에게 네 가지 병이 있어서 네 가지 사문의 과를 얻지 못한다. 무엇을 네 가지 병이라고 하는가? 네 가지 나쁜 탐욕이니, 첫째는 의복을 위한 탐욕이며 둘째는 음식을 위한 탐욕이며 셋째는 와구를 위한 탐욕이며, 넷째는 유(有)의 탐욕이다. 이것을 네 가지 나쁜 탐욕이라고 한다.
009_0242_b_07L復次善男子出家之人有四種病故不得四沙門果何等四病謂四惡爲衣欲爲食欲爲臥具欲爲有欲是名四惡欲
이 출가한 이의 병은 네 가지 좋은 약이 있어 치료하는데, 누더기옷[糞掃衣]으로는 비구의 의복을 위하는 탐욕을 고치고, 걸식함으로는 음식을 위한 탐욕을 깨뜨리고, 나무 밑에 앉음으로는 와구를 위한 탐욕을 깨뜨리고, 몸과 마음이 고요함으로는 비구들의 유(有)의 탐욕을 깨뜨린다. 이 네 가지 약으로 네 가지 병을 치료하는 것을 성인의 행이라고 하며, 이런 성인의 행을 일러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009_0242_b_11L是出家病四良藥能療是病謂糞掃衣能治比丘爲衣惡欲乞食能破爲食惡欲下能破臥具惡欲身心寂靜能破比丘爲有惡欲以是四藥除是四病名聖行如是聖行則得名爲少欲知
고요함은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는 출가한 즐거움이며, 둘째는 고요한 즐거움이고 셋째는 영원히 멸하는 즐거움이며 넷째는 끝까지 즐거움이다. 이 네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고요하다고 한다.
009_0242_b_17L寂靜者有四種樂何等爲四一者出家樂寂靜樂永滅樂畢竟得是四樂名爲寂靜
4정진을 갖추었으므로 정진이라 하고, 4념처(念處)를 갖추었으므로 바른 생각이라 하고, 4선정을 갖추었으므로 바른 정이라 하고, 네 가지 진실한 이치[四聖實]를 갖추었으므로 바른 지혜라 하고, 모든 번뇌의 결박을 영원히 끊었으므로 해탈이라 하고 모든 번뇌의 허물을 꾸짖으므로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구족하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
009_0242_b_19L具四精進名精進具四念處故名正念具四禪故名正定見四聖實故故名正慧永斷一切煩惱結故故名解脫呵說一切煩惱過故故名讚歎解脫善男菩薩摩訶薩安住具足如是十雖見佛性而不明了
009_0242_c_02L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경을 듣고 친근히 하고 닦아서 모든 세상일을 멀리 여의면 욕심이 적다 하고, 출가한 뒤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만족함을 안다 하고, 고요한 곳을 가까이하고 시끄러운 데를 멀리 여의면 고요하다고 한다.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이는 고요한 데를 좋아하지 않지만,
009_0242_c_02L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聞是經已親近修習遠離一切世閒之事是名少欲旣出家已不生悔心是名知足旣知足已近空閑處遠離憒鬧是名寂靜不知足者不樂空閑
만족함을 아는 이는 고요한 데를 좋아한다. 그리고 고요한 데서 항상 생각하기를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말하여 사문의 도를 얻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얻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을 속이겠는가?’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지런히 사문의 도과를 닦는 것을 정진이라 하고, 대열반을 친근히 하여 익힘을 바른 생각이라 하고,
009_0242_c_07L夫知足者常樂空寂於空寂處常作是念切世閒悉謂我得沙門道果然我今者實未能得我今云何誑惑於人是念已精勤修習沙門道果是名精親近修習大涅槃者是名正念
하늘의 행을 따라 익힘을 바른 정이라 하고, 이 정에 편안하게 머물러 옳게 보고 옳게 아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고, 옳게 보고 옳게 아는 이가 번뇌의 결박을 멀리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10주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열반을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 구족하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
009_0242_c_12L順天行是名正定安住是定正見正是名正慧正見知者能得遠離煩惱結縛是名解脫十住菩薩爲衆生稱美涅槃是則名爲讚歎解脫男子菩薩摩訶薩安住具足如是十雖見佛性而不明了
또 선남자야, 욕심이 적다는 것은 비구가 고요한 데 있어서 단정하게 앉아 눕지 않거나, 나무 밑에 있거나 무덤 곁에 있거나 한데[露處]에 있거나 풀밭에 가서 앉으며, 걸식하여 먹으면서 얻는 대로 만족하고, 혹은 한 자리에서 먹으면서 한 때만 먹고, 세 가지 가사와 누더기 옷과 취의(毳衣)1)만을 가지면, 이것을 욕심이 적다고 한다. 이런 일을 행하면서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으면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009_0242_c_18L復次善男子夫少欲者若有比丘住空寂處端坐不臥或住樹下或在塚或在露處隨有草地而坐其上食而食隨得爲足或一坐食不過一惟畜三衣糞衣毳衣是名少欲行是事心不生悔是名知足
009_0243_a_02L공삼매(空三昧)를 닦는 것을 고요하다고 하고, 4과를 얻고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쉬지 않음을 정진이라 하고, 여래는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고 마음을 두어 생각함을 바른 생각이라 하고, 8해탈을 닦음을 바른 정이라 하고, 4무애를 얻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고, 일곱 가지 누(漏)를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열반에는 열 가지 모양이 없다고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009_0242_c_24L修空三是名寂靜得四果已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不休息是名精進心思惟如來常恒無有變易是名正修八解脫是名正定得四無㝵名正慧遠離七漏是名解脫稱美涅槃無有十相名讚歎解脫
열 가지 모양은 낳는 것ㆍ늙는 것ㆍ병나는 것ㆍ죽는 것ㆍ색ㆍ소리ㆍ향기ㆍ맛ㆍ촉감ㆍ무상이다. 이 열 가지를 여의는 것을 대열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구족하면 불성을 보면서도 분명하지 못하다.
009_0243_a_07L十相者無常遠離十相者名大涅槃善男子是名菩薩摩訶薩安住具足如是十法雖見佛性而不明了
또 선남자야, 탐욕이 많아서 국왕ㆍ대신ㆍ장자ㆍ찰제리ㆍ바라문ㆍ비사ㆍ수타를 친근히 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나, 나아가 아라한과를 얻었다’라고 하여 이양을 위하며, 가고 서고 앉고 눕거나 나아가 대소변을 하다가도 단월을 만나면 공경을 행하거나 상대하여 말을 하여 나쁜 욕심을 파하는 이는 욕심이 적다고 이름하며, 모든 번뇌를 깨뜨리지 못하였더라도, 여래의 행하는 곳과 같이 하면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009_0243_a_11L復次善男子爲多欲故親近國王長者剎利婆羅門毘舍首陁自稱我得須陁洹果乃至阿羅漢果爲利養故行住坐臥乃至大小便利若見檀越猶行恭敬接引語言破惡欲者名爲少欲雖未能壞諸結煩惱而能同於如來行處是名知足
선남자야, 이러한 두 가지 법은 바른 생각과 바른 정에 가까워지는 인연이며, 스승이나 함께 공부하는 이의 칭찬을 받으며, 나도 항상 여러 경전에서 이 두 가지 법을 찬탄하였으니, 이 두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는 대열반의 문과 다섯 가지 낙에 가까워질 것이다.
009_0243_a_18L善男子是二法乃是念定近因緣也常爲師宗同學所讚我亦常於處處經中稱美讚歎如是二法若能具足是二法則得近於大涅槃門及五種樂
009_0243_b_02L이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계행을 굳게 지니는 이를 정진이라 하고, 부끄러움이 있는 이를 바른 생각이라 하고, 마음의 모양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정이라 하고, 모양이 없어져서 번뇌가 끊어짐을 해탈이라 하고, 이러한 『대열반경』을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문다고 하는데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는 않다.
009_0243_a_22L名寂靜堅持戒者名爲精進有慚愧名爲正念不見心相名爲正定求諸法性相因緣是名正慧無有相煩惱則斷是名解脫稱美如是『大涅槃經』名讚歎解脫善男子是名菩薩摩訶薩安住十法雖見佛性而不明了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10주 보살은 무슨 눈이기에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고, 부처님 세존께서는 무슨 눈이기에 불성 보기를 분명히 하는가?’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혜안(慧眼)으로 보는 까닭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불안(佛眼)으로 보는 까닭으로 분명한 것이며, 보리행을 하는 까닭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행함이 없으므로 분명한 것이다.
009_0243_b_06L善男子如汝所言十住菩薩以何眼故雖見佛性而不了了諸佛世尊以何眼故見於佛性而得了了男子慧眼見故不得明了佛眼見故故得明了爲菩提行故則不了了無行故則得了了
10주에 머물렀으므로 보는데도 분명하지 못하고, 머물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므로 분명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지혜의 인이므로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끊었으므로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온갖 것을 깨달은 것을 불성이라고 하지만, 10주 보살은 온갖 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비록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
009_0243_b_11L住十住故雖見不住不住故則得了了菩薩摩訶薩智慧因故見不了了諸佛世尊斷因果故見則了了一切覺者名爲佛性十住菩薩不得名爲一切覺故是故雖見而不明了
선남자야, 보는 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들어서 보는 것[聞見]이다. 부처님 세존께서는 눈으로 불성을 보시므로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하시고, 10주 보살은 불성을 들어서 보므로 분명하지 못하다. 10주 보살은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스스로는 알지만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009_0243_b_16L善男子見有二種眼見二者聞見諸佛世尊眼見佛如於掌中觀阿摩勒果十住菩薩聞見佛性故不了了十住菩薩唯能自知定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能知一切衆生悉有佛性
“선남자야, 또 눈으로 보는[眼見] 일이 있으니, 부처님 여래와 10주 보살은 불성을 눈으로 본다. 또 들어서 보는 일이 있으니 모든 중생과 9지 보살들은 불성을 들어서 본다. 보살이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믿음을 내지 않으면 들어서 본다고 할 수 없다.
009_0243_b_21L善男子復有眼見諸佛如來十住菩薩眼見佛性復有聞見一切衆生乃至九地聞見佛性菩薩若聞一切衆生悉有佛性心不生信不名聞見
009_0243_c_02L선남자야,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하거든 마땅히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해야 한다.”
009_0243_c_02L善男子有善男子善女人欲見如來應當修習十二部經受持讀誦書寫解說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관찰하여야 알게 되겠습니까?”
009_0243_c_04L子吼菩薩摩訶薩言世尊一切衆生不能得知如來心相當云何觀而得知耶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진실로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만일 관찰하여 알고자 하면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들어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의 몸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눈으로 본다고 한다.
009_0243_c_07L善男子一切衆生實不能知如來心相若欲觀察而得知者有二因一者眼見二者聞見若見如來所有身業當知是則爲如來也是名眼
만일 여래의 입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들어서 본다고 한다. 만일 얼굴빛이 모든 중생으로는 같을 수 없는 줄을 본다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009_0243_c_11L若觀如來所有口業當知是則爲如來也是名聞見若見色貌一切衆生無與等者當知是則爲如來也名眼見
만일 음성이 미묘하고 훌륭하여 중생들의 음성과 같지 않은 것을 들으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께서 짓는 신통이 중생을 위하는 것인가, 이양을 위하는 것인가 하여, 중생을 위하는 것이며 이양을 위하는 것이 아닌 것을 본다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009_0243_c_14L若聞音聲微妙最勝不同衆生所有音聲當知是則爲如來也名聞見若見如來所作神通爲爲衆爲爲利養若爲衆生不爲利養知是則爲如來也是名眼見
만일 여래가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로 중생을 관찰할 때에 이양을 위하여 말하는 것인가, 중생을 위하여 말하는 것인가 하여, 중생을 위하는 것이며 이양을 위하는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009_0243_c_18L若觀如來以他心智觀衆生時爲利養說衆生說若爲衆生不爲利養當知是則爲如來也是名聞見
여래가 어떻게 이 몸을 받았으며, 무슨 까닭으로 몸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하여 몸을 받았는가 하면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가 어떻게 법을 말하며 무슨 까닭으로 법을 말하며 누구를 위하여 법을 말하는가를 관찰하면,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009_0243_c_21L云何如來而受是身何故受身爲誰受身是名眼若觀如來云何說法何故說法誰說法是名聞見
009_0244_a_02L 몸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나에게 더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입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내게 더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009_0243_c_24L以身惡業加之不當知是則爲如來也是名眼見口惡業加之不恚當知是則爲如來是名聞見
만일 보살이 처음 태어날 때에 시방으로 일곱 걸음씩 다녔고, 마니발타(摩尼跋陀)ㆍ부나발타(富那跋陀) 신장들이 깃발과 일산을 들고 한량없는 세계를 진동하여 금빛이 찬란하게 허공에 가득하였으며, 난타(難陀)용왕과 발난타(跋難陀)용왕이 신통의 힘으로 보살의 몸을 목욕시켰고
009_0244_a_04L若見菩薩初生之時十方面各行七步摩尼跋陁富那跋陁鬼神大將執持幡蓋震動無量無邊世界金光晃曜彌滿虛空難陁龍王及跋難陁以神通力浴菩薩身
모든 하늘의 형상들이 영접하여 예배하였으며,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합장하여 공경하였고, 청년시절에는 욕락을 버리기를 침 뱉듯 하여 세상 향락에 미혹되지 않았으며,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고요한 데를 좋아하였고,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6년 동안 고행하였으며,
009_0244_a_08L天形像承迎禮拜阿私陁仙合掌恭盛年捨欲如棄涕唾不爲世樂之所迷惑出家修道樂於閑寂爲破邪六年苦行
또한 여러 중생에게 평등하여 둘이 없었고, 마음은 항상 선정에 있어 애초부터 산란하지 않았으며, 얼굴과 몸매가 단정하고 그 몸을 장엄하였고, 다니는 곳마다 언덕이나 구렁이 평탄하였으며, 옷은 몸에서 네 치쯤 떨어져 있어도 흘러내리지 않고, 다닐 때에는 앞만 보고 좌우로 살피지 않았다.
009_0244_a_12L於諸衆生平等無二常在定初無散亂相好嚴麗莊飾其所遊之處丘墟皆平衣服離身寸不墮行時直視不顧左右
음식은 항상 갖춰져 있어 거르는 일이 없고, 앉고 일어나는 곳에는 풀이 요동하거나 어지럽지 않았으며,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가서 법을 말하되 마음에 교만이 없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
009_0244_a_15L所食之物無完過坐起之處草不動亂調衆生故往說法心無憍慢是名眼
곧 보살은 일곱 걸음을 다니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 몸이 최후의 몸이다’라고 하였고, 아사타 선인도 합장하고 말하기를 ‘대왕은 아십시오. 실달 태자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 전륜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009_0244_a_18L若聞菩薩行七步已唱如是言今此身最是後邊阿私陁仙合掌而大王當知悉達太子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終不在家作轉輪王
009_0244_b_02L왜냐하면 32상과 80종호(種好)가 분명한 까닭입니다. 전륜왕은 상호가 분명하지 못하지만 태자의 상호는 매우 분명하시니,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보살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은 참으로 가련하다. 이렇게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므로 함께 따라다니면서도 보지 못하고 항상 괴로움만 행하니 내가 마땅히 끊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009_0244_a_22L何以故相明了故轉輪聖王相不明了悉達太子身相炳著是故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見老病死復作是言一切衆生甚可憐愍常與如是生老病死共相隨逐而不能觀常行於苦我當斷之
아라라(阿羅邏) 5통 선인에게서 무상정(無想定)을 받아 성취하고 나서 옳지 못함을 말하고, 울타(鬱陀) 선인에게서는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정[非有想非無想定]을 받아 성취하고 나서 열반이 아니고 나고 죽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009_0244_b_04L從阿羅邏五通仙人受無想定旣成就已後說其非從鬱陁伽仙受非有想非無想定成就已說非涅槃是生死法
또 6년 동안 고행하고서도 얻은 바가 없어서 말하기를 ‘고행을 하는 일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만일 실지가 있다면 내가 마땅히 얻었을 것인데, 허망하기 때문에 얻은 바가 없으니 그것은 삿된 술법이며 바른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009_0244_b_07L六年苦無所剋獲卽作是言修是苦行無所得若是實者我應得之以虛妄我無所得是名邪術非正道也
또 성도한 뒤에 범천이 권청하기를 ‘바라건대, 여래께서 중생을 위하여 감로의 문을 열어 위없는 법을 말씀해주십시오’ 하니, 여래가 말하기를 ‘범왕이여, 모든 중생들이 번뇌에 가려져서 내가 말하는 바른 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009_0244_b_10L成道已梵天勸請惟願如來當爲衆生廣開甘露說無上法佛言梵王切衆生常爲煩惱之所障覆不能受我正法之言
범천이 다시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세 가지가 있으니, 영리한 근성과 중품 근성과 둔한 근성입니다. 영리한 근성은 받을 수 있으니 말씀해주십시오’ 하였다.
009_0244_b_14L梵王復言世尊一切衆生凡有三種所謂利根中根鈍根根能受惟願爲說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범왕이여,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감로문을 열리라’ 하시고, 바라나국에 나아가 바른 법륜을 운전하여 중도를 말씀하셨다. 이에 모든 중생이 여러 가지 결박을 깨뜨리지 않았으나 깨뜨리지 못한 것이 아니다. 깨뜨린 것도 아니며 깨뜨리지 못한 것도 아니므로 중도라고 한다.
009_0244_b_16L佛言梵王諦聽我今當爲一切衆生開甘露門於波羅柰國轉正法輪宣說中道切衆生不破諸結非不能破非破非不破故名中道
중생을 제도하지 않았으나 제도하지 못한 것이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온갖 것을 이룬 것도 아니며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무릇 말한 것이 있으나 스스로 스승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제자라고 말하지도 않으므로 중도라고 한다.
009_0244_b_20L不度衆生非不能度是名中道非一切成亦非不成是名中道凡有所說不自言師不言弟子是名中道
말하는 것이 이양을 위함이 아니며 과를 얻지 못함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바른 말이며 진실한 말이며 때에 맞는 말이며 참된 말이며, 말을 헛되이 내지 않아 미묘하기가 제일이다. 이런 법을 들어서 본다고 한다.
009_0244_b_23L說不爲利非不得果是名中道正語實語時語眞語言不虛發微妙第一如是等法是名聞見
009_0244_c_02L선남자야, 여래의 마음은 실제로 볼 수 없지만,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두 가지 인연을 의지해야 한다.”
009_0244_c_02L善男如來心相實不可見若有善男子善女人欲見如來應當依是二種因緣
大般涅槃經卷第二十七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스님들의 법복(法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