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_0541_b_02L모임 가운데 보살마하살이 있었는데 이름을 지세(持世)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보살마하살의 무량한 공덕 장엄의 발심(發心)을 위하여 일체 법의 피안(彼岸)을 잘 알고자 하였고, 무량한 원을 발하여 무량한 장엄을 구족하는 것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무량한 모든 법의 결정된 상(相)에 통달하고자 하였으며, 무량한 장엄의 원을 발하여 깊은 마음의 소행이 청정하고자 하였으며, 청정하고 구족한 보시를 잘 알고자 하였으며, 필경엔 청정한 지계(持戒)를 잘 알고자 하였으며, 구족한 인욕과 부드러운 마음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청정한 정진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청정한 선정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반야바라밀의 피안에 통달하는 일을 잘 알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무량한 공덕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매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께 여쭙고자 합니다. 일체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또 모든 보살마하살로서 부처님의 씨를 끊지 않는 자로 하여금 위의행처(威儀行處)1)를 갖추어 지계에 집착하지 않게 하며, 청정한 계를 구족하여 큰 법을 받아 행하고, 무량한 행처의 도법(道法)을 지니는 것을 잘 알게 하며, 이러한 모든 보살들을 위한 까닭으로 지금 저는 부처님 세존께 여쭙니다. 어떠한 것이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알고, 또 일체 법의 글귀[長句]2)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염력(念力)3)을 얻고, 또 몸을 굴려 끊어지지 않는 염(念)을 성취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입니까?”
이때 세존께서 지세(持世)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지세야, 너는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한 까닭에 여래에게 이 일을 물었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너는 곧 많은 곳에서 중생을 안온하게 하고 세간(世間)을 가엾이 여기며,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며, 또 지금 세상과 뒷세상의 모든 보살을 위하여 큰 광명을 지을 것이다. 너의 공덕은 한량(限量)할 수 없으니, 여래에게 이와 같은 일을 물었다. 너는 반드시 일체 중생의 의혹을 끊고 일체 중생을 애호하기 때문에 광명을 짓고자 한다. 중생에게 의리(義 利)를 보이고자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험한 길을 건널 수 있게 하고자 하며, 중생을 위하여 돌아갈 곳이 되고, 집이 되고, 고을이 되고, 구제함이 되고자 한다. 3악도(惡道)에서 중생을 빼내고자 하며, 중생을 무상도(無上道)4)에 두고자 하며, 중생을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며, 중생에게 위없는[無上] 열반의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 너는 후세에 있어서 정법(正法)을 수호하고자 하며, 다음의 두려운 악세(惡世)에서 중생을 건지고자 한다. 지세야, 너는 지금 자세히 듣고 이를 잘 생각하여라. 나는 마땅히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해설하리라.”
010_0541_c_02L부처님께서 지세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으며,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구족(具足)한 염(念)을 얻고, 마땅히 끊어지지 않는 염을 얻고, 마땅히 안혜(安慧)5)로써 스스로 증장(增長)하는 염과 이를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다. 지세야, 이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네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지세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이익을 보고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며,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모든 법의 뜻을 결정하여 알며, 마땅히 모든 법의 뜻을 잘 알며, 마땅히 모든 법의 갖가지 인연을 잘 알며, 마땅히 모든 법의 여실(如實)한 문에 잘 드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이익을 보고,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며,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무량한 법상(法相)을 잘 알며, 마땅히 닦아 익혀 결정코 무량한 법을 잘 알며, 마땅히 무량한 공덕을 행하여 스스로 증장하며, 마땅히 모든 법의 생멸하는 모습[相]을 지견(知見)하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이익을 보고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며,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가까이하고, 마땅히 빨리 보리를 돕는 법을 갖추며, 마땅히 다른 말에 따르지 않으니 모든 법의 방편을 잘 알기 때문이며, 마땅히 일체의 지혜를 잘 안다. 지세야, 이는 모든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이익을 보기 위한 까닭으로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함이다.
010_0542_a_02L지세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으로 마음에 굳은 때[慳垢:번뇌]가 없으며, 항상 청정한 계를 행하여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密:정진바라밀)에 안주(安住)하기 때문에 정진을 행하여 쉬지 않으며, 그치지 않으며, 바르게 사유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잘 행하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깊은 마음의 청정한 원(願)을 성취하여 구족하고, 청정한 소행의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하고, 유화한 인욕의 공덕에 안주하며, 모든 법의 실상의 광명을 분별함을 얻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에게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어떠한 것이 넷인가? 큰 욕심으로 일체지(一切智)6)를 구하고, 잘 분별하여 선정(禪定)과 해탈의 모든 삼매를 알아 큰 욕심을 낳고, 큰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마음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청정한 행처(行處)7)를 행하며, 잘 결정된 뜻을 닦아 익힌다.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에게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지혜의 행을 구족하고, 또한 청정한 지혜의 행처를 구하며, 걸림이 없는 지혜[無碍智]8)를 원하며, 또한 항상 모든 지혜의 원(願)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지세야, 이를 보살마하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어 부지런히 모든 법의 실상을 닦아 익히고, 또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한다고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능히 염력(念力)을 구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염근(念根)9)을 닦아 모아서 구족하며, 마땅히 안온한 지혜를 행하며, 마땅히 끊어지지 않는 염(念)을 구족하며, 마땅히 네 가지 염처(念處)10)를 닦아 모으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010_0542_b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이익을 보고 능히 염력(念力)을 구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모든 보리를 돕는 법을 구족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있음을 염하며, 염근을 이롭게 함으로서 숙명을 잘 닦아 모으며, 청정한 지혜를 구족하기 때문에 마땅히 빨리 끊어지지 않은 염을 얻으며, 마땅히 모든 지혜의 인연을 씨 뿌리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이익을 보고 능히 염력을 구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사유(思惟)의 방편을 닦아 모아서 구족하며, 마땅히 여실한 지혜를 닦아 익히며,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을 내어 모든 부처님의 법을 얻기 때문이며, 마땅히 억념(憶念)11)을 잊지 않으니 끊어지지 않는 염력을 얻기 때문이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염력을 얻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안혜(安慧)를 염하기 때문에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여 쉬지 않고 그치지 않으며, 항상 그 마음을 하나로 하여 모든 법의 실상을 얻기 때문에 항상 방일(放逸)하지 않으며, 바르게 모든 법을 억념하기 때문에 항상 모든 근[諸根]12)을 수호하며, 바르게 사유하기 때문이다.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에게 네 가지 이익이 있어 능히 염력을 얻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청정한 지계(持戒)에 안주하며, 청정한 위의행처(威儀行處)를 성취하여 마음속의 5개(蓋)13)를 제거하며,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으며, 업장(業障)14)과 번뇌장(煩惱障)15)을 떠나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에게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염력을 얻는다. 무엇이 넷인가?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으로 착한 법을 구하고, 부지런히 일심(一心)의 상(相)을 닦아 익히며, 바르게 모든 법에 드는 문을 잘 알고, 마음이 산란하고 시끄러운 것을 원하지 않으며, 세속[在家]을 멀리 떠난다. 이를 넷이라 한다.
010_0542_c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염력을 얻는다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선지식(善知識)을 친근(親近)히 하고, 항상 깊은 법을 닦아 익히며, 항상 즐겨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고, 항상 즐겨 지혜를 청하여 묻고 닦아 익힌다. 지세야,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이 있어 이름하여 염력을 얻는다고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이익을 보고 능히 일체의 법[一切法]16)을 분별(分別)17)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익힌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일체의 모든 법의 실상을 잘 알고, 마땅히 일체 법의 인연하는 바를 분별하고, 마땅히 모든 법의 결정의 뜻을 알며, 마땅히 일체 법의 말과 글귀를 잘 아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의 이익을 보고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모든 법의 뜻을 따라 차례를 잘 알며, 마땅히 일체 법의 인연의 방편을 잘 알며, 마땅히 구족하여 일체 법의 방편을 닦아 익히며, 마땅히 분별하여 진실하고 극진한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경[了義經]과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경[未了義經]18)을 아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의 이익을 보고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땅히 이는 도(道)이며, 이는 도가 아니라고 하는 지혜를 잘 배우고, 마땅히 일체 법의 뜻을 설하는 힘을 얻으며, 마땅히 청정한 지혜의 행처를 빨리 얻으며, 마땅히 구족하게 지바라밀(智波羅密)을 닦는다. 지세야,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의 이익을 보고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고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모든 법이 모이는 상(相)을 잘 닦아 모아 알고, 모든 법의 인(因)이 소멸하는 상을 잘 알며, 모든 법의 연(緣)의 상을 잘 알며, 능히 인연의 방편에 든다. 이를 넷이라 한다.
010_0543_a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모든 법이 괴로움[苦]임을 잘 알고, 모든 법의 모임[集:苦의 모임]을 잘 알며, 모든 법의 소멸[滅]을 잘 알고, 모든 법의 소멸에 이르는 길[滅道]을 잘 아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모든 법이 합하고 흩어지는 것을 잘 알며, 방편으로 앞의 인(因)의 힘을 얻고, 모든 법의 뜻하는 바를 잘 알며, 잘 분별하여 문자와 글귀를 아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불요의경(不了義經)을 잘 알고, 요의경(了義經) 중에서 다른 말에 따르지 않으며, 일체 법상(法相)의 인(印:標章)을 잘 알고, 또 일체 법의 무상지(無相智)19) 안에 잘 안주한다. 지세야,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이 있어 능히 일체 법을 분별하는 글귀의 지혜를 닦아 모은다고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이 있어 몸을 돌려[轉身]20) 항상 끊어지지 않는 생각[念]을 얻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선(善)과 선 아닌 법을 밝게 깨닫고, 제일념(第一念)의 안혜(安慧)를 성취하고, 능히 5개(蓋)의 마음을 떠나고,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염하는 일을 잊지 않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몸을 돌려 항상 끊어지지 않는 생각[念]을 얻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네 가지 염처(念處)를 잘 닦아 모으고, 배워서[學]21) 분별의 지혜를 잘 닦아 모으며, 모든 선정에서 지혜를 으뜸으로 하고, 결정코 지혜 가운데서 통달을 얻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010_0543_b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몸을 돌려 항상 끊어지지 않는 생각[念]을 얻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모든 다라니문(陀羅尼門)22)을 얻고, 또한 무생지(無生智)23)를 닦아 모으고, 진지(盡智)24)에 들고, 또한 멸지(滅智)25)를 관하는 것, 이를 넷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몸을 돌려 끊어지지 않는 생각[念]을 얻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사랑과 성냄을 끊고, 일체의 유위법(有爲法)26)에 탐착하지 않으며, 마음이 무위(無爲)27)의 지혜에 통달하고, 여래가 있는 행처(行處)에 이른다. 지세야,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이 있어 몸을 돌려 항상 끊어지지 않는 생각[念]을 얻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는다고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깊은 마음의 맑은 지혜의 힘과 원(願)의 맑은 지혜의 힘과 선근(善根)의 맑은 지혜의 힘과 회향(廻向)의 맑은 지혜의 힘과 업장(業障)의 맑은 지혜의 힘, 이를 다섯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모두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위의행처(威儀行處)의 맑은 지혜의 힘과 생각[念]의 구족한 맑은 지혜의 힘과 방편의 맑은 지혜의 힘과 중생을 인연하는 맑은 지혜의 힘과 연의 상[緣相]의 맑은 지혜의 힘, 이를 다섯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평등한 마음의 맑은 지혜의 힘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맑은 지혜의 힘과 대자(大慈)28)를 낳는 맑은 지혜의 힘과 대비(大悲)29)를 낳는 맑은 지혜의 힘과 대희(大喜)30)와 대사(大捨)31)를 낳는 맑은 지혜의 힘, 이를 다섯이라 한다.
010_0543_c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모두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지계(持戒)의 맑은 지혜의 힘과 지계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지혜의 힘과 인욕의 맑은 지혜의 힘과 인욕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지혜의 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는[多聞]32) 맑은 지혜의 힘, 이를 다섯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모두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깊은 정진의 맑은 지혜의 힘과 수정진(受精進)33)의 맑은 지혜의 힘과 선정(禪定)의 맑은 지혜의 힘과 선정의 방편의 맑은 지혜의 힘과 지관(止觀)34)의 방편의 맑은 지혜의 힘, 이를 다섯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모두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혜(慧)35)의 맑은 지혜의 힘과 다문(多聞)의 결정하는 방편의 맑은 지혜의 힘과 세간(世間:有漏)과 출세간(出世間:無漏)의 맑은 지혜의 힘과 혜(慧)의 방편의 맑은 지혜의 힘과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맑은 지혜의 힘, 이를 다섯이라 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또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모두 능히 위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게 얻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관(觀)36)의 방편의 맑은 지혜의 힘과 해탈을 밝히는 맑은 지혜의 힘과 생함이 없는 상[無生相]의 맑은 지혜의 힘과 일상(一相)37)이 무상(無相)38)인 맑은 지혜의 힘과 제일의(第一義)39)와 세제의(世諦義)40)의 맑은 지혜의 힘이다. 지세야, 이를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맑은 지혜의 힘이 있어 이와 같이 일체의 공덕을 빨리 구족하게 얻음이라 한다. 지세야, 이 이익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이 맑은 지혜의 힘 중에서 마땅히 부지런하게 닦고 모은다.
010_0544_a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세 가지 법을 성취하고 이 맑은 지혜의 힘 안에서 능히 부지런히 닦아 모은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하나는 욕심[欲]41)이며, 둘은 정진(精進)이며, 셋은 방일(放逸)하지 않음이다. 보살마하살은 이 세 가지 법을 성취하여 능히 이 일체의 공덕을 구족하는 맑은 지혜의 힘 안에서 능히 부지런히 닦아 모은다. 무슨 까닭인가? 지세야,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은 모두가 곧 일체 법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이 맑은 지혜의 힘을 얻어 능히 빠르게 일체지(一切智)를 얻는다. 또 정진하여 물러서지 않는 자라고 이름하며, 또 물러서지 않는 법이라고 이름한다. 또 이 공덕으로 빨리 증장(增長)함을 얻고, 또 일체 법 중에서 빨리 맑은 지혜의 힘을 얻는다.
지세야,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일체 법 가운데서 맑은 지혜의 힘을 얻은 자는 곧 세간의 복 밭[福田]이다. 이 사람은 나를 이어 능히 공양을 다할 것이다. 이 사람은 능히 여래의 행처에 이르고, 이 사람은 능히 여래의 법을 관하고,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능히 여래의 지혜를 깨달을 것이다.
지세야, 만약 사람이 있어 일체 법 가운데서 능히 이와 같이 맑은 지혜의 힘을 성취한 자는, 이 사람은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내가 지금 얻음과 같을 것이다. 이 사람 역시 법륜(法輪) 굴리기를 내가 지금 굴림과 같을 것이다. 이 사람 역시 사자후(師子吼)42)함이 내가 지금 사자후함과 같을 것이다. 이 사람이 일체 법 가운데서 자재(自在)한 힘을 얻음이 나의 지금과 같을 것이다. 지세야, 너희들이 이 맑은 지혜의 힘 가운데서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면 오래지 않아서 자연히 일체의 지혜를 구족할 것이다.
010_0544_b_02L지세야, 이 지고왕여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문의 스님들[聲聞僧]이 있었고, 또 무량한 여러 보살의 스님들[菩薩僧]이 있었는데, 이 부처님의 본원(本願)43)의 인연으로 이룬 것이었다. 이 지고왕부처님의 국토에는 3악도(惡法)44)가 없고, 그 모든 중생은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며, 필경엔 안온한 쾌락을 구족하였다. 욕심을 떠난 자 많고, 능히 5개(蓋)를 막았다. 이 모든 중생은 이와 같이 청정한 쾌락을 성취하여 제4선(第四禪)45)의 즐거움에 들어간 사람과 같았다. 이 지고왕부처님의 수명은 6백만억 나유타(那由他) 겁이다.
지세야, 이때의 국토는 오직 부처님을 왕으로 삼고 다시 왕은 없었으며, 국토의 중생은 모두가 부처님을 이름하여 법왕(法王)이라 하였다. 이 지고왕부처님께서는 여러 보살을 위하여 이 일체 중생의 의심을 끊고 일체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할 보살장경(菩薩藏經)을 설하셨다. 이때 5백의 보살이 있었는데, 이 여러 보살의 맑은 지혜의 힘을 듣고서 이와 같은 정진의 힘을 내어 모양[形]이 다하도록 앉아 있을 마음을 내지 않았으며, 모양이 다하도록 옷 생각을 내지 않았으며, 모양이 다하도록 나에 대한 생각과 중생에 대한 생각과 사람에 대한 생각과 남자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내지 않았으며, 모양이 다하도록 끝내 많이 먹지 않았고, 다만 이와 같이 맑은 지혜의 힘을 닦아 모으고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였다. 5백의 보살은 이 선근(善根)의 인연으로 목숨이 다하여서는 모두가 동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태어났으며, 이미 태어나서는 오래지 않아 이 법을 닦아 모았기 때문에 숙명(宿命:前生)을 알게 되어 총명한 근기[利根]46)를 성취하였다. 그 국토의 부처님 명호를 무량화적왕(無量花積王)이라 하며 현재도 법을 설하신다. 그 여러 보살은 나이 열여섯에 처음으로 무량화적왕부처님 계신 곳에서 출가하고 60억 세(歲)까지 동자(童子)의 범행(梵行)47)을 행하였으며, 또 이와 같은 정진을 수행하였다.
010_0544_c_02L지세야, 이 5백의 보살은 이와 같이 해서 20억의 부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여러 부처님 처소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제일념(第一念)의 안혜(安慧)48)를 성취하여, 뒤에 무량력고왕불(無量力高王佛)을 만나고 만 겁(劫)을 지난 다음,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수기가 주어졌다. 이 5백의 사람은 만 겁 중에서 2만억의 부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불도(佛道)를 구족하고 1겁 중에서 차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지세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이 맑은 지혜의 힘 가운데서 마땅히 욕심과 정진과 방일(放逸)하지 않음을 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지세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두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다른 도를 돕는 법[助道法]49)에 미쳐[及] 능히 불법을 구족하는 자이다.
지세야, 나는 이와 같이 정진하여 20억의 부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모든 법 가운데서 세세(世世)에 염력(念力)을 성취하고 세세에 숙명을 알 수 있었고, 이 법을 닦아 모아 쉬지 않고 그치지 않아 나는 마침내 이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을 잃지 않고, 나는 마땅히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하였다.”
이때 세존께서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 사방을 돌아보시고, 신통력을 나타내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염부제(閻浮提)에 다 화불(化佛)50)이 있어,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일체 중생의 의심을 끊고 일체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보살장경’을 설하게 하셨다. 또 신통력으로 죽원(竹園) 안에 모여 있는 대중으로 하여금 모두가 여러 부처님께서 널리 염부제에서 각각 설법하시는 것을 보게 하니, 대중은 모두가 기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함께 부처님을 예배하고 이러한 말을 하였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신통력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무량한 불가사의의 법을 성취하십니다.”
010_0545_a_02L이때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선남자(善男子)야, 여래에게 이 일이 족(足)하다 하기는 아직 어렵다. 왜냐하면 여래는 능히 법의 성품[法性]에 잘 통달하므로 만약 한 털구멍으로 신통력을 내면 광명은 널리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알[恒河沙]처럼 많은 세계를 비추고, 법음(法音:진리)을 연설하지만 한 털구멍의 백천만억 분(分)의 그 하나도 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이와 같이 불가사의의 공덕을 성취하였다.
여러 선남자야, 여래는 깊이 중생의 마음을 관(觀)하고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여러 선남자야, 지금 세상의 중생은 이 법 안에서 능히 욕락(欲樂)51)을 행함이 적다. 여러 선남자야, 지금 세상의 중생은 이 법 중에서 능히 정진을 행함이 적다. 여러 선남자야, 지금 세상의 중생은 이 법 중에서 능히 방일하지 않음을 행함이 적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지금 오탁악세(五濁惡世)52)에 나왔으니, 이른바 중생탁(衆生濁)ㆍ견탁(見濁)ㆍ명탁(命濁)ㆍ번뇌탁(煩惱濁)ㆍ겁탁(劫濁)이다. 여러 선남자야,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매우 깊은 청정한 법을 믿고 받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부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희유하다고 한다. 하물며 능히 여래의 행하는 바를 믿고 앎이겠는가?
여러 선남자야, 나는 항상 기나긴 밤, 이와 같은 원(願)과 이와 같은 정진과 인욕의 행을 장엄하였다. 고뇌하는 중생과 구호(救護)가 없는 자와 의지(依止)가 없는 자와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많은 자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마땅히 불도를 이루어 무량한 아승기(阿僧祇)53)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였다. 여러 선남자야, 마땅히 알라. 여래의 은혜의 힘은 본래 청정한 원을 정진하기 때문에 능히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깊은 법을 믿고 알고 받아 지니게 한다.
010_0545_b_02L선남자야, 내가 선세(先世:前世)에 중생을 교화함에 이 여러 중생은 능히 나의 법을 이해하였다. 여러 선남자야, 지금 부처는 10력(力)54)과 네 가지 두려움이 없는 지혜의 힘[四無所畏]55)으로써 약간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깊고 깊은 법을 믿고 알게 하였다. 만약 중생이 있어 이 법 중에 머무는 자는 모두가 곧 여래의 은혜의 힘의 방편 때문이며, 나는 기나긴 밤에 이와 같이 깊은 법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또 기나긴 밤에 약간 대자(大慈)와 대비(大悲)와 대희(大喜)와 대사(大捨)로 중생을 거두고, 여래가 있어 5탁(濁)의 세상에 나와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무슨 까닭인가? 여러 선남자야, 나는 선세(先世)에 큰 정진의 힘과 큰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모았다[集:習].
여러 선남자야, 나의 지난 세상을 생각함에 하루 안에 천(千)의 몸을 버려 보시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였고, 여러 선남자야, 나는 약간의 천만(千萬)의 세상에서 굶주린 중생을 보았기 때문에 내 몸의 살을 베어 삶아서 주었다. 나는 그때 마음에 근심과 후회가 없었다. 다만 중생에게 널리 대비(大悲)를 행하였을 뿐이다. 여러 선남자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이와 같이 큰 정진과 큰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모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선남자야, 마땅히 이와 같이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을 내어 내가 보살의 도를 행한 때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아 모아야 한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교화하여야 한다.
010_0545_c_02L여러 선남자야, 이 현겁(賢劫)56) 중에 여러 부처가 세상에 나와 나를 찬탄하지 않음이 없으며 이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깊이 정진을 행함이 이와 같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정진을 구족함이 이와 같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정진바라밀을 구족함이 이와 같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살도를 행할 때 중생을 교화함이 이와 같고, 5탁(濁)의 세상에 나와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였다.’ 여러 선남자야, 이와 같이 도를 행하기 때문에 마땅히 부지런히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을 내야 한다.
여러 선남자야, 나는 지금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지만 더욱 정진하여 쉬지도 그치지도 않을 것이며, 열반에 이를 때까지 더욱 정진할 것이며, 몸과 뼈를 갈아 개자(芥子)와 같이 하고 사지(四肢)와 뼈마디를 풀어 흩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미래 세상의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내가 선세(先世)에 보살도를 행할 때, 교화한 중생이 혹은 잘못을 행하여 여러 어려운 곳에 떨어졌다. 이를 면하도록 구제하고자 대비심을 일으켜 사리(舍利)와 나아가 개자와 같이 나누어 널리 퍼뜨렸는데 모두가 신통력을 일으켰다. 내가 멸도(滅度:열반)한 뒤에 만약 어떤 중생이 마땅히 사리로서 다스리는 자는 마음이 청정함을 얻고, 청정함을 얻은 다음에는 거처하는 모든 땅에서 원(願)대로 성취할 것이다.
여러 선남자야, 내가 선세에 도를 행할 때, 중생 가운데서 이와 같은 비심(悲心)을 성취하고 몸을 갈아 사리를 널리 나누어 퍼뜨렸다. 이것이 나의 본원(本願)이니, 나는 이와 같이 무량한 복덕(福德)과 그 인연의 대비심(大悲心) 때문에 뒤의 나쁜 세상에서 널리 중생을 덮을 것이다.
여러 선남자야, 만약 보살들이 이 법 가운데서 능히 욕심과 정진과 방일하지 않음을 내고 반드시 이 원을 발하면, 뒤의 말세에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이러한 경(經)들을 널리 설하면, 나는 마땅히 신통력으로써 여러 보살로 하여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널리 설하게 할 것이다. 나도 또한 이와 같은 경으로 이 여러 보살에게 부촉[囑累]57)할 것이다. 그는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하여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러 선남자야, 이 경이 머무는 곳에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땅에는 부처가 있어 멸하지 않으며, 이런 까닭으로 여래는 이 경으로써 여러 보살에게 부촉한다.
010_0546_a_02L여러 선남자야, 마땅히 알아라. 나는 숙세(宿世)에 이와 같은 인연으로 중생들을 섭수하였고, 금세(今世)에도 중생들을 섭수하며, 후세(後世)에도 중생들을 섭수할 것이다. 이른바 이와 같은 경법(經法)을 호념(護念)58)하여 뒤의 5백 세[後五百歲]에 널리 유포(流布)하기 때문이다.
여러 선남자야, 만약 지금 세상이나 내가 멸도한 뒤에, 혹 마을과 성읍(城邑)과 산림(山林)과 광야(曠野)에 이와 같은 경이 있어 만약 능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하여 해설하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곧 부처가 있게 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모든 부처님이 곧 이 법신(法身)59)이라고 설하니, 법을 보는 까닭에 곧 부처님을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마땅히 색신(色身)60)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법을 믿고 법을 들으면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을 믿고, 또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한다. 만약 사람이 이 법 안에서 능히 설하는 것과 같이 수행하면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을 본다고 한다. 이 사람을 이름하여 진실을 말하는 자, 법을 말하는 자, 법을 따라 행하는 자라고 한다.
여러 선남자야, 나의 몸은 법이 아니며, 법이 아닌 것[非法]도 아니며, 이를 법을 따라 행한다고 이름하며, 이를 첫째가는 법의 보시[法施]61)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법에 탐착(貪着)하지 않고, 법이 아닌 것에 탐착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에 탐착하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고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010_0546_b_02L여러 선남자야, 일체의 법에 탐착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부처님을 본다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 가운데서 보는 것이 없으면, 이를 부처님을 본다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법으로 설할 수 없으며, 법이 아닌 것으로 설할 수 없으며, 또 법으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러 선남자야, 경 가운데서 설함과 같다. 너희들 비구가 만약 나의 법이 뗏목의 비유62)와 같다고 알면 법도 더욱 마땅히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느냐. 만약 법과 법 아닌 것을 버리면 이를 부처님을 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를 일러 일체의 법을 버린 자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명자(名字)63)를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으면, 명자의 법 가운데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의 명자 가운데 떨어지겠느냐.
여러 선남자야, 일체 법의 명자를 버리고 떠나는 것을 일러 여래라고 하며 능히 이와 같이 보는 자를 일러 여래를 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법을 보는 것을 버리고 떠나기 때문에 여래를 본다고 한다. 일체의 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실(如實)히 일체의 법을 알고 보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를 본다고 한다.
여러 선남자야, 만약 일체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일체의 법을 버리고 떠나면 이 가운데는 곧 헛된 말[戱論]이 없고, 곧 법과 법 아닌 것의 명자도 없고, 행(行)도 없고 나타남도 없다. 이것을 여래를 본다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능히 이와 같이 법을 보면 이것을 여래를 본다고 이름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여래를 보면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이름한다. 만약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이름하여 삿된 견해[邪見]라고 한다. 만약 삿된 견해이면 곧 망령된 견해라 하고, 이 사람을 이름하여 바른 이해[眞見]라고 하지 않는다.
여러 선남자야, 진견[眞見]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언어의 길이 끊기고, 진(眞)이 아니고, 망(妄)이 아니며, 유(有)가 아니고, 무(無)가 아니다. 일체의 법을 떠나고 일체의 법을 취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을 얻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보는 자를 이름하여 여래를 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여러 선남자야, 여래는 법성(法性)의 소견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법성을 떠나는 것을 보는 자를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보면 이름하여 정견(正見)이라 한다.
010_0546_c_02L여러 선남자야, 너희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여래를 보아야 한다. 너희들은 또 관(觀)하라. 내가 설함과 같이 여래를 관하여라. 이와 같이 관하면 일체 법 모두가 곧 여래임을 마땅히 알 것이다. 마땅히 일체 법의 진실한 본체[如]를 얻을 것이다. 마땅히 일체 법의 실상(實相)을 얻고, 마땅히 일체 법의 허망하지 않는 상을 얻을 것이다. 일체 법은 곧 여래의 법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법은 곧 여래의 행처(行處)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법은 곧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행처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러 선남자야,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일체의 법은 곧 여래의 행처라고 설한다. 여래의 행처는 곧 행처가 없는 것[無行處]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행처는 이 중에 법으로 가히 행하는 것이 없고, 이런 까닭으로 행처의 없음은 곧 여래의 행처라고 설한다. 일체 법의 행처, 이는 곧 행처가 없음이다. 행처가 없는 것은 곧 이 여래의 행처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행처는 소유(所有)가 없기 때문에 행처가 없음은 이 여래의 행처이다. 모든 행처가 여래의 행처에 들면 곧 행처가 아니다. 여래는 통달하여 이 법을 밝히시기 때문에 행처가 없는 것은 곧 여래의 행처라고 한다.
여러 선남자야, 능히 일체 법의 행처 없음을 알면 이 사람은 능히 여래의 행처에 들고, 이 사람은 능히 여래의 행처를 관하고, 이 사람은 능히 여래의 행처를 구하고, 이 사람은 또한 여래의 행처에 탐착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행처가 없는 것이 곧 여래의 행처이며, 행처를 떠난 것이 곧 여래의 행처라고 안다. 이른바 일체 법은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으며, 탐착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행처가 아닌 것을 곧 여래의 행처라고 이름한다. 이를 지혜의 행처에 든다고 이름하니, 일체의 법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법에는 문(門)이 없기 때문에 이 문으로 들어간다.
010_0547_a_02L여러 선남자야, 일체 법은 드는 일도 없고 나오는 일도 없다. 일체의 법은 모양[形]이 없다. 왜냐하면 여래는 법을 얻는 일이 없으나 어떠한 법도 혹은 내고, 혹은 들이고, 혹은 보며, 혹은 설한다. 여러 선남자야, 이를 일체 법의 문에 든다고 이름한다. 들지 않는 상[不入相] 때문에 일체의 법은 합함이 없고, 흩어짐이 없고, 얽매임이 없고, 푸는 일이 없다. 이 일체 법의 문은 문이 없기 때문에 이 문을 설하여 이름하기를 나올 수 없는 문이며, 들어갈 수 없는 문이며, 돌아갈 수 없는 문이며, 설할 수 없는 문이며, 필경엔 생함이 없는 문[無生門]64)이라 한다. 이 법의 문[法門]으로 법에 있어서 아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다. 이 법의 문으로 법에 있어서 밝히는 것[證]이 없고 들어가는 것[入]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여러 선남자야, 일체의 법에는 문이 없다. 문은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은 곧 일체 법의 문이다. 본래부터 줄곧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에 끊음이 없는 것[無斷]은 곧 일체 법의 문이다. 끊음은 소유(所有)가 없는 까닭에 가없음[無邊]은 곧 일체 법의 문이다. 가[邊]는 얻을 수 없는 까닭에 한량없음[無量]은 곧 일체 법의 문이다. 양(量)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음[無際]은 곧 일체 법의 문이다. 모든 끝[際]은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지세(持世)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지세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일체 법의 실상을 얻고자 하고, 혹은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하고자 하며, 혹은 염력(念力)을 얻고자 하고, 혹은 몸을 돌려 끊어지지 않는 생각[不斷念]을 구족하게 얻고자 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의 문에 빨리 들어가야 하니, 이 법의 문에서 지혜의 광명을 얻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법 안에서는 구족함을 빨리 얻기 때문이다.
010_0547_b_02L또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부지런히 이와 같은 법의 문을 닦아 모으고, 이 법의 방편의 문에 들면 곧 능히 음(陰)65)의 방편과 계(界)66)의 방편과 입(入)67)의 방편과 인연으로 생하는 법의 방편과 4념처(念處)68)의 방편과 5근(根)69)의 방편과 여덟 가지 거룩한 길[八聖道分]70)의 방편과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의 방편을 분별하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법의 방편을 분별(分別)71)함을 얻는다.
보살마하살은 바르게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五取陰]73)을 관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의 쌓임은 곧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이다. 괴로움의 쌓임은 곧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이다. 병이 쌓이고 등창이 쌓이고, 화살이 몸을 뚫고 들어감과 같은 것이 쌓이는 것은 곧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이다. 보살은 색의 번뇌의 쌓임[色取陰]을 분별하고 관찰하고 선택한다. 무엇을 색의 번뇌의 쌓임을 분별하고 관찰하며 선택한다고 하는가? 이 색의 번뇌의 쌓임은 네 가지 요소[四大:地ㆍ水ㆍ火ㆍ風]로부터 생긴 것이니, 거짓으로 이름하여 색의 번뇌의 쌓임이라고 한다. 이 색의 쌓임[色陰]74)은 자성(自性)이 없다. 다만 네 가지 요소가 화합한 것으로서 거짓으로 이름하여 색의 쌓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색의 쌓임은 짓는 자가 없고 부리는 자도 없다. 지음이 없고 일어남이 없고 남[出]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색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전의 업의 인연으로 네 가지 요소가 섭수하는 수(數)를 색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쌓임이 아닌 것[非陰]은 곧 색이 쌓인 것이다. 비유컨대 허공과 같아서 쌓임은 실로 생기는 상(相)이 없으며, 만약 허공의 쌓임을 설한다면 이 가운데 법의 생함이 없을 것이니, 다만 명자(名字)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허공의 쌓임이라고 한다. 범부는 이 쌓임이 없음에도 쌓임의 상이 있다. 전도(顚倒)된 마음 때문에 실(實)이 없음에도 실의 상이 있다. 나[我]의 다섯 가지 쌓임과 내 것[我所]의 다섯 가지 쌓임에 탐착하여 나의 색의 쌓임과 내 것의 색의 쌓임도 이와 같이 탐착한다. 이 모든 범부가 색에 탐착한 다음에는 색 가운데서 나와 내 것에 의지하여 색이 있고 색을 받고 색을 취하고 색에 탐착하고, 색을 의지하여 갖가지 악하고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을 받아 행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보리를 돕는 법을 닦고 모아야 한다. 지금 마땅히 바르게 색의 쌓임을 관찰하여야 한다.
010_0547_c_02L보살이 바르게 색의 쌓임을 관찰할 때는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다고 안다. 어떻게 물거품의 모임과 같다고 아는가? 모임이 없는 것, 이것이 물거품의 모임이다. 다만 뭇 인연으로부터 생기니 붙잡을 수가 없으며, 견고하고 튼튼함이 없다. 물거품 속에는 모임의 상이 없고, 모임이 없는 것이 곧 물거품의 모임이다. 색의 쌓임도 이와 같다. 색의 쌓임 안에는 쌓임의 상이 없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이러한 생각을 한다. ‘범부는 허망한 색을 바르게 관찰하지 못하며, 색이 무상(無常)함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며, 색의 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바른 길에 들어 마땅히 허망한 것에 탐착하지 말고 색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색은 곧 탐착할 수 없는 상(相)이다. 색은 다만 명자(名字)만이 있을 뿐 결정적인 상(相)이 없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이 색은 결정적인 상이 없고 명자를 떠나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색이라 한다. 또 색을 설하여 번뇌를 무너뜨리는 상이라고 이름한다. 지혜 있는 자는 통달하여 이를 상이 없다고 안다. 우리들은 마땅히 잘 알아서 색에 상이 없는 방편을 닦아 모아서 색의 상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사람이 색의 상에 탐착하면 곧 색에 탐착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잘 알아서 색의 상에 들어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할 때, 여실하게 색을 관찰하고 선택한다. 이 색의 쌓임은 모두가 범부의 생각[憶想]과 분별로 일어난다. 만약 법이 생각과 분별로 일어난다면 이는 곧 불생(不生)이다. 모든 생각과 분별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범부는 전도(顚倒)되어 일어난 색에 의지하여 색에 얽매이고, 색 때문에 해를 입고 오고 가며 고뇌한다. 무명과 어리석음의 어둠 때문에 색을 탐착하여 버리지 않고, 색을 항상하고 견고하며 튼튼하다고 본다. 이것을 범부의 사람이 색에 얽매인다고 한다. 색에 얽매이기 때문에 지옥과 축생과 아귀(餓鬼)와 천인(天人)을 왕래하며, 색의 맛을 깊이 탐착하고, 색 가운데 온갖 잘못과 악(惡)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관찰하고 선택하고 분별하여 색의 방편을 닦아 익혀야 한다.
010_0548_a_02L색을 관찰하고 선택하고 분별할 때, 색의 성품을 보는 것은 꿈과 같다. 비유컨대 꿈속의 색은 모두가 생각과 분별의 각관(覺觀)75)으로부터 일어난다. 일찍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알았던 것의 인연에서 일어난다. 이 꿈속에서 또한 그와 나를 알고, 또 땅과 불과 물과 바람을 보고, 또 산과 강과 무성한 숲을 보아도 꿈속의 색의 상에 결정적인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생각과 기억으로써만 있을 뿐이다. 색의 쌓임의 상도 이와 같다. 선세(先世)의 업(業)의 인연으로부터 나와 결정적인 성품이 있을 리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사유(思惟)하여 색은 나이다, 혹은 내 것이다 하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다만 색은 여실히 무상(無常)한 상(相)으로서 허망하고 전도된 것이라고 바르게 관한다. 중생은 전도되어 탐착해서 색은 혹은 나의 색이며, 혹은 내 것의 색이며, 혹은 그의 색이며, 혹은 그의 것[彼所]의 색이라고 취한다. 이와 같이 색을 바르게 관찰하고 선택할 때, 색을 얻지 않으며, 색의 성품을 보지 않으며, 또 색의 무상함을 탐착하지 않는다.
보살이 이때 만약 색 중에서 사랑하는 생각과 탐착을 모두 남김없이 끊어 없애서 색의 바른 상을 잘 알고 색의 평등한 상을 잘 알고, 색이 없어지는[滅] 상을 잘 알고, 색이 없어지는 길[滅道]76)의 상을 잘 알고, 색의 쌓임이 쫓아오는 곳도 없고 또 가는 곳도 없음을 잘 알아서 이러한 생각을 한다. ‘이 몸의 색의 쌓임은 모두가 업의 과보와 각관(覺觀)에서 일어난다. 네 가지 요소[四大]가 모여서 된 것이 이 몸의 색의 쌓임으로서 나가 아니며, 그가 아니며, 속하는 것이 없으며, 쫓아 일어나는 곳도 없다.’ 색의 쌓임을 관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안의 색[內色]을 탐착하지 않고 받지도 않고, 바깥 색[外色]을 탐착하지 않고 받지도 않는다. 과거의 색도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으며, 미래의 색도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으며, 현재의 색도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는다. 곧 일체의 색의 쌓임은 생함이 없는 상이라고 안다. 이는 보살이 이때에 색을 없애지 않고, 또한 색을 없애는 법을 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010_0548_b_02L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색의 번뇌의 쌓임[色取陰]을 관찰하고 선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느낌[受:感受]의 번뇌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는가? 보살은 이렇게 사유한다. ‘이 괴로움의 느낌과 즐거움의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여러 가지 인연에 속하여 느낌의 상(相)에 든다. 이 안에는 받는 자가 없으며, 다만 탐착하기 때문일 뿐이다. 탐착하는 자는 곧 이 진실이 아니며 허망하여 생각과 분별로 일어난다.’ 이 보살이 이와 같이 사유할 때, 이러한 생각을 한다. ‘이 범부는 허망한 느낌에 얽매여 세 가지 느낌 때문에 해를 입는다. 이른바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 범부가 만약 즐거움을 받으면 사랑의 결박으로 부리는 바가 있다. 사랑의 결박으로 부림을 받기 때문에 능히 나쁜 업을 일으킨다. 만약 괴로움을 받으면 성냄의 결박으로 부리는 바가 되고, 성냄의 결박으로 부림을 받기 때문에 여러 나쁜 업을 일으킨다. 만약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받으면 무명(無明)의 결박으로 부리는 바 되고, 이 사람은 무명의 결박으로 인하여 부림을 받기 때문에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들은 이제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모든 법을 바르게 관하고, 우리들은 마땅히 모든 느낌을 여실하게 관할 것이다.’
보살은 여실히 느낌의 쌓임[受陰]을 관하여 이러한 생각을 한다. ‘쌓임이 아닌 것은 곧 느낌의 쌓임이다. 생각과 분별로 일어나 전도되어 상응(相應)한 것일 뿐 받는 자는 없다. 다만 선세의 업인(業因)에 따라 지금 세상에 연(緣)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모든 느낌은 자성이 공(空)하여 느낌 가운데 느낌의 상이 없다.’
010_0548_c_02L보살은 느낌의 쌓임을 관하여 통달한다. 비유컨대 빗방울은 물거품과 같아 생이 있고 멸이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없다. 느낌의 쌓임도 이와 같다. 차례의 인연으로 일어나며, 여러 인연에 속하여 머무는 때가 없다. 허망하고 실답지 않으며 생각과 전도되어 상응함을 따라 일어난다. 보살은 이때 이러한 생각을 한다. ‘범부를 가엾이 여겨야 한다. 여러 가지 느낌에 억제되어 느낌의 쌓임을 바르게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을 얻고서 탐착이 생기고, 괴로운 느낌을 얻어서는 또 탐착이 생기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얻고서는 또 탐착이 생긴다. 여러 가지 느낌에 얽매여 분주히 뛰어서 오고 가며, 몸을 좇아 몸에 이르러 번뇌[結]의 여러 결박을 받으며 다섯 가지 길[五道]77)에 윤회하여 쉬고 그침이 없다. 이 범부는 여러 가지 느낌에 탐착하고, 느낌에 억제되며, 느낌에 묶여 느낌의 쌓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느낌의 쌓임에서 나올 곳을 보지 못하고, 느낌의 쌓임을 바르게 보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에 느낌의 쌓임이 무상함을 여실히 관할 줄 모른다. 느낌의 쌓임 안에서 탐욕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묶이고 느낌의 쌓임의 여실한 상을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지금,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여실(如實)하게 느낌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해야 한다. 즉시 쌓임이 없는 것은 곧 느낌의 쌓임이며, 진실하지 않은 쌓임은 곧 느낌의 쌓임이며, 전도된 쌓임은 곧 느낌의 쌓임이며, 머무르지 않는 쌓임은 곧 느낌의 쌓임이라고 느낌의 쌓임을 여실하게 관해야 한다.’ 이때 느낌의 쌓임의 여실한 상을 봄에 지은 자가 없고 부리는 자도 없다. 느낌의 쌓임 중에서 느낌의 쌓임의 상을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느낌의 쌓임을 관함에 느낌의 쌓임이 안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느낌의 쌓임이 밖에 있음도 보지 않는다. 느끼는 나에게 집착하지 않고, 느끼는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느낌의 쌓임은 쫓아서 오는 곳이 없고 속한 것이 없음을 안다. 법은 능히 느낌을 생하는 일이 없다. 다만 전도되어 상응함을 쫓아 선세의 업의 과보의 수(數)를 느낌의 쌓임이라고 한다. 느낌의 쌓임을 허망한 인연이 서로 이어진 행이라고 본다. 이때 과거의 느낌의 쌓임을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미래의 느낌의 쌓임도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의 느낌의 쌓임도 역시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즐거운 느낌 중에서 사랑의 결박을 제거하며, 괴로운 느낌 중에서 성냄의 결박을 제거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중에서 무명의 결박을 알고 보기[知見]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다. 보살이 이때 만약 즐거운 느낌을 받아도 마음에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마음에 성냄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아도 마음에 어리석음이 생기지 않는다.
지세야, 범부는 대부분 즐거운 느낌에서 사랑을 낳고, 괴로운 느낌에서 성을 내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어리석음을 낸다. 곧 여러 범부는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어둠 속에 깊이 들어가 느낌의 쌓임을 여실히 알지 못한다. 또한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상을 알지 못하여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깊이 탐착한다. 이른바 이는 나[我]78)이며, 내 것[我所]79)이다. 이는 이것이다, 저것[彼]이다 하는 따위이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이 가운데서 느낌의 쌓임을 바르게 관하면 사랑80)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끌리지 않는다. 만약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기면 곧 능히 끊어 없애고 바른 길을 행한다. 즐거운 느낌 가운데서 사랑의 결사[結使]81)를 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괴로운 느낌 가운데서 성냄의 결사를 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중에서 어리석음의 결사를 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세 가지 느낌의 상을 여실히 안다. 이때 느끼는 것이 있기를 혹은 괴로움이거나 혹은 즐거움이거나,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어도 모두 떠나서 탐착하지 않는다. 사랑의 결사를 떠나고 성냄의 결사를 떠나고 어리석음의 결사를 떠나, 모든 느낌이 일어날 때 능히 깨달아 느낌의 쌓임은 무상하다고 여실히 안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고 나면 느낌의 쌓임 안에서 탐욕에 물드는 것을 남김없이 끊는다. 느낌의 쌓임을 끊고, 탐욕으로 물드는 길에 들어도 모든 느낌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이 바르게 느낌의 쌓임을 관하면 느낌의 쌓임을 여실하게 알고, 느낌의 쌓임이 모인 것[集]과 느낌의 쌓임이 없어지는 것[滅]과 느낌의 쌓임이 없어지는 길[滅道]을 알고, 그런 뒤에 느낌의 쌓임은 곧 무생(無生)의 상이라고 여실하게 알며, 무생의 상으로써 느낌의 쌓임은 상이 없다고 통달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느낌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한다.
010_0549_b_02L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생각의 쌓임[想陰]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바르게 생각의 쌓임을 관할 때, 생각의 쌓임을 봄에 모두가 전도됨으로 좇아 일어나고 허망하며, 견고하지 않으며, 진실하지 않으며, 본래부터 상(相)을 낳지 않으며, 인연의 화합으로써 전생[先世]의 업력(業力)을 좇아 일어난다. 이러한 생각을 한다.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허망이 쌓인 것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전도된 것의 쌓임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생각의 쌓임 안에 생각이 쌓인 상이 없는 것을 비유하면 늦은 봄의 달무리와 같다. 명자(名字) 때문에 설하여 불꽃의 쌓임이라고 한다. 생각의 쌓임도 이와 같다. 인식[識]의 상 때문에 설하여 생각의 쌓임이라고 한다. 범부는 이 허망한 생각 때문에 얽매인다. 혹은 즐거움을 알고, 혹은 괴로움을 알고,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알고, 혹은 춥고 더운 것을 알고, 혹은 남자와 여자를 안다. 혹은 다섯 가지 길에 나고 죽는 것을 알고, 혹은 합(合)하는 것을 알고, 혹은 흩어지는 것을 알고, 혹은 과거를 알고, 혹은 미래를 알고, 혹은 현재를 알고, 혹은 좋은 것을 알고, 혹은 더러운 것을 알고, 혹은 있는 것을 알고, 혹은 없는 것을 안다. 이는 범부의 생각으로서 모두가 전도됨과 허망 때문에 여러 가지 인연에 속한다. 다만 거짓으로 이름하여 생각의 쌓임이라고 할 뿐이다. 이 가운데 혹은 밖에, 혹은 안에 생각이란 없다. 범부의 사람은 허망한 생각에 얽매었기 때문에, 혹은 탐욕을 알고, 혹은 성냄을 알고, 혹은 어리석음을 알고, 혹은 아내와 자식을 안다. 범부는 이 생각의 쌓임에 의지하고 허망한 것을 탐착하며, 이 생각의 쌓임 때문에 분주히 뛰어서 가고 온다. 생각의 쌓임이 곧 허망한 것을 여실하게 관하지 못한다. 범부의 사람은 나에 대한 생각과 그에 대한 생각과 남자와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생각의 쌓임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의 쌓임에 탐착하여 나는 곧 생각이 쌓인 것이며, 내 것은 곧 생각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010_0549_c_02L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바르게 생각의 쌓임을 관하므로 생각의 쌓임 가운데서 생각이 쌓인 상을 얻을 수가 없다. 마치 불꽃의 쌓임 가운데서 불꽃이 쌓인 상을 얻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보살이 생각의 쌓임은 불꽃의 성품과 같다고 보면 과거의 생각의 쌓임도 탐하지 않고 받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미래의 생각의 쌓임도 탐하지 않고 받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의 생각의 쌓임도 머무르지 않는다. 혹은 나, 혹은 그를 분별하지 않는다. 즉 그 생각과 느낌이 쌓이는 길을 없애고, 생각의 쌓임은 곧 남이 없는 것[無生]이라고 통달하며, 생각의 쌓임이 혹은 온 곳과 혹은 가는 곳을 보지 않는다. 다만 선세의 업인(業因)이 전도되어 상응하여 일어난 것으로 현재의 연(緣)에 묶인 것이며, 쌓임이 없음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생각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함에 좇아오는 곳이 없고, 또 가는 곳도 없다. 즉 생각의 쌓임은 생함이 없는 것이라고 통달하고, 또 생각의 쌓임이 없어지는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생각과 느낌의 쌓임을 없애기 위한 까닭이며, 또한 여실한 지견(知見)82)에 머무는 까닭이다.
보살이 여실하게 생각의 쌓임을 관할 때, 모든 생각의 길을 멀리 떠나며, 마음도 모든 생각의 길에 머물지 않는다. 다만 지견으로서의 생각의 쌓임과 또 여실한 생각의 쌓임과 탐착하지 않는 생각의 쌓임에 머물러 여실하게 모든 생각의 쌓임을 관찰하고, 여실하게 생각의 쌓임이 모이고 없어지고 다하는 것을 안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생각의 쌓임을 바르게 관찰하고 선택하면 곧 생각의 쌓임의 번뇌[欲染]를 떠나고, 또한 생각의 쌓임의 번뇌를 끊는 길을 행한다.
010_0549_c_15L持世!菩薩摩訶薩如是正觀察選擇想陰,則離想陰欲染,亦能行斷想陰欲染道。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행의 쌓임[行陰]83)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는가?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행의 쌓임을 관함에 전도됨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허망한 생각[憶想]과 분별을 임시로 빌려서 있는 것이다. 보살이 이때 혹은 몸의 행(行)과 입의 행과 뜻의 행 모두가 부정(不淨)하고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하며 무아(無我)라고 관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생각을 한다. ‘쌓임이 아닌 것은 곧 행의 쌓임이다. 괴로움이 쌓인 것은 곧 행의 쌓임이다. 인연으로 생하는 쌓임은 곧 행의 쌓임인 것이다. 모양[像]이 쌓인 것도 행의 쌓임이다. 모든 행의 쌓임은 더함이 없고 덜함이 없고 모임도 없다. 몸의 행과 입의 행과 뜻의 행은 짓는 자가 없다.’
010_0550_a_02L지혜로운 자는 느낌[受]이 곧 행의 쌓임이라 하여 탐착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몸의 행은 몸 안에 있지 않으며, 몸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다. 입의 행과 뜻의 행도 이와 같아서 뜻 안에 있지 않고, 뜻 밖에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 행의 쌓임 안에 행이 쌓인 상(相)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 행의 쌓임은 뭇 인연이 전도됨으로부터 일어난 것으로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으며 이전에 지은 업의 과보가 거두는 것이며, 또 인연으로 묶여 능히 짓는 것[所行]이 있다. 모든 지음이 있는 행, 혹은 몸의 행과 혹은 입의 행과 혹은 뜻의 행은 모두가 진실한 행이 아니다. 이는 지음이 없는 행이며, 이는 허망한 행이며, 이는 전도된 행이다. 이런 까닭에 쌓임이 아닌 것은 곧 행의 쌓임이라고 설한다. 무슨 까닭인가? 지혜로운 자는 결정코 행이 쌓인 상을 얻지 않는다. 이는 몸의 행이다, 이는 입의 행이다, 이는 뜻의 행이라든가 이곳이라든가 저곳이라든가, 혹은 안, 혹은 밖, 또는 몸과 입과 뜻의 행은 더욱 결정적인 행의 상이라고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다. 하물며 행의 쌓임을 얻을 수 있고 설할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쌓임이 없는 것은 곧 행의 쌓임이라고 설한다. 범부는 전도된 생각을 일으켜 몸과 입과 뜻의 행에 탐착하고 잊지 않고 생각해서 이는 행의 쌓임이라고 분별하며, 행의 쌓임 때문에 묶여서 분주히 뛰어서 가고 온다. 이 범부의 사람은 전도됨으로 해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일으키고, 일으킨 다음에는 탐착하여 돌아가는 곳이 법이 없음에도 법의 생각을 내고 쌓임[陰]이 없음에도 쌓임의 생각을 내는 곳이다. 전도된 행에 탐착하기 때문에 행의 쌓임에 묶여 다섯 갈래의 길에 오고 가며 항상 몸과 입과 뜻의 행을 따르므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여실하게 관할 수가 없다. 여실하게 행의 쌓임을 관할 수 없기 때문에 몸과 입과 뜻으로 모든 행을 일으킨다. 이는 모든 범부가 전도된 것에 탐착하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은 법에 탐착하기 때문에, 허망에 탐착하기 때문에 수(數)84)를 행의 쌓임이라고 이름한다.
010_0550_b_02L지세야, 보살은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이 모든 행은 근본이 없다고 바르게 관한다. 쇠약하고 용렬하고 힘이 없는 뭇 연[衆緣]의 화합으로써 행의 쌓임을 설할 것이다. 이 가운데 진실한 행의 쌓임은 없다. 쌓임이 없음은 곧 행의 쌓임이며, 본래부터 줄곧 생하지 않는 것은 곧 행의 쌓임이다. 성품이 없음은 곧 행의 쌓임이다. 모든 행의 과거[前際]는 얻을 수가 없다.85) 미래[後際]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中際]도 얻을 수가 없다. 머무는 때도 없고, 모든 행은 생각마다 나고 없어진다.
지세야, 보살은 이와 같이 바르게 행의 쌓임을 관한다. ‘공(空)하여 얻을 수가 없고 굳고 튼튼하지 않은 상이며, 나아가 호리(毫釐)86)도 얻을 수가 없다.’ 이 모든 범부는 굳고 튼튼하지 않은 법에 묶이고, 행의 쌓임에 묶이고, 탐착에 묶여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일으킨다. 나는 곧 행이며, 내 것은 곧 행이라고, 이와 같이 업을 일으켜 행의 쌓임에 묶여 행의 쌓임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서 무명(無明)의 어리석은 어둠 속에 들고, 모든 행 가운데서 진실의 상을 낳고 전도되기 때문에 느낌[受]과 취(取)함과 행의 쌓임에 탐착한다. 이 사람은 느낌과 취함과 행의 쌓임에 탐착하는 까닭에 혹은 즐거운 행을 일으키고, 혹은 괴로운 행을 일으키고,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행을 일으킨다. 이 사람은 즐거운 행을 일으켜서 즐거운 몸을 얻고, 괴로운 행을 일으켜서는 괴로운 몸을 얻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행을 일으켜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을 얻는다. 이 사람은 즐거운 몸을 얻고서는 사랑을 낳고, 괴로운 몸을 얻고서는 성을 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을 얻고서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이 사람은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모든 행의 잘못과 악(惡)을 보지 않고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청정하게 하지 못한다. 이 사람은 몸과 입과 뜻의 행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은 길에 떨어진다. 이른바 지옥과 축생(畜生)과 아귀(餓鬼)이다. 혹 때로는 천인(天人) 속에 나서 몸과 입과 뜻의 행에 탐착하고 깊이 행의 쌓임에 집착한다.
010_0550_c_02L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마땅히 행의 쌓임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행의 쌓임의 잘못과 악을 관해야 한다. 마땅히 행의 쌓임을 벗어날 길을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하는 자를 이름하여 여실하고 바르게 행의 쌓임을 관한다고 한다. 또 행의 쌓임의 무상함을 바르게 관한다고 이름한다. 즉시 여실하게 모든 행과 모든 행의 모임[集]과 모든 행의 없어짐[滅]과 모든 행의 없어지는 길을 관하여 모든 행을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행의 쌓임에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관할 때, 행의 상을 멀리 떠나고, 또한 행의 쌓임이 없는 길을 행한다. 즉 모든 행의 공(空)함을 관하여 일체의 모든 행 중에서 놀라고 두려워 싫어하여 떠나려는[厭離]87) 마음을 내고 다만 청정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일으킨다. 행의 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행의 쌓임의 상을 떠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얻은 바가 있는 몸이며 모두가 곧 청정하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몸의 업이 청정하고 입의 업이 청정하고 뜻의 업이 청정하며, 몸의 행이 청정하고 입의 행이 청정하고 뜻의 행이 청정하다. 이 사람은 행의 쌓임의 상을 멀리 떠나고, 모든 법과 근본의 상을 무너뜨린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할 때, 행의 쌓임이 쫓아오는 곳이 없고, 또 가는 곳도 없음을 본다. 결정코 모든 행의 생하는 상을 얻지 않으며, 또한 결정코 없어지는 상도 얻지 않는다. 즉 모든 행의 생함과 멸함이 없는 상을 관하여 일체의 모든 행도 역시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010_0551_a_02L이 사람은 일체의 모든 행의 생멸이 없는 상을 관하여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고 모든 행이 모이고 없어지는 상을 바르게 통달한다. 비록 모든 행의 생함이 없는 상을 밝혔다[證] 하더라도 모든 행의 상에 잘 통달한다. 무슨 까닭인가? 지세야, 이 행의 쌓임의 결정적인 상이 없는 것은, 비유컨대 파초와 같아서 굳고 튼튼한 상을 얻을 수가 없다. 굳고 튼튼함이 없는 상도 얻을 수가 없다. 행의 쌓임도 이와 같다. 굳고 튼튼한 상을 얻을 수가 없고, 굳고 튼튼함이 없는 상도 얻을 수가 없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고 선택하고 사유하여 행의 쌓임에 든다.”
6)부처님의 지혜, 또는 성문ㆍ연각의 지혜를 말한다. 모든 법의 염상(捻相)을 아는 지혜이다.
7)행(行)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즉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하는 것이며, 처(處)는 그러한 행이 짓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청정한 행처는 청정한 율의(律儀), 즉 청정한 계행(戒行)을 뜻한다.
8)부처님의 지혜. 모든 것에 통달하여 자재한 지혜.
9)5근(根) 중에서 정진에 의하여 마음과 마음이 반연하는 경계에 생각[念]이 머물러 잊어버리는 일이 없는 능력.
10)염처(念處)는 염주(念住)라고도 한다. 염(念)은 관조하는 지혜와 함께 일어나는, 생각하고 기억하는 마음의 작용. 처(處)는 관하는 대상의 경계. 그 넷은 신념처(身念處:몸은 不淨)한 것), 수념처(受念處:느낌은 괴로운 것), 심념처(心念處:마음은 無常), (法念處: 無我)이다. 이 넷을 관하여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전도(顚倒)를 치유하는 관법(觀法)이라 한다.
11)단단히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12)5근(根),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을 말한다.
13)탐욕ㆍ성냄ㆍ수면ㆍ도회(掉悔)ㆍ의심의 다섯 가지 번뇌. 개(蓋)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며, 뒤의 셋은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번뇌이다.
14)중생이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으로 악업을 짓고, 이로 인하여 바른 길이 가리고 막힌다.
15)변하지 않는 불멸의 나[我]가 있다고 자기에게 집착하는 소견에서 나온 근본적인 번뇌. 중생의 몸과 마음을 뇌란(惱亂)하여 열반을 가로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16)만유(萬有)를 모두 포섭하는 말.
17)여기서 말하는 분별은 차등 있게 하거나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밝힌다는 뜻이다.
18)불요의경이란 진실하고 극진한 뜻을 분명하게 말한 경전이 아닌 것. 즉 대승에서 보면 소승은 불요의경이지만 대소승의 경전 중에도 요의와 불요의는 있고, 요의는 곧 구경현료(究竟顯了)의 뜻이다.
19)세간의 사상(事相)과 반연을 짓지 않는 지혜.
20)몸을 자유로이 굴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여 향상(向上)으로 통하는 활로(活路)가 있음을 알고 몸을 자유로이 바꾸는 것.
21)아직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지 못하였으므로 더욱 닦아야 하는 경계.
22)선법(善法)을 지녀 흩어지지 않게 하고, 악법(惡法)으로 하여금 일어나지 않게 하는 힘과 작용.
23)이는 무학위(無學位), 즉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앤 소승증과(小乘證果)의 넷 중 가장 윗자리인 아라한과(阿羅漢果)에서 일어나는 지혜로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이 지혜는 다시는 퇴보하거나 타락하지 않음을 아는 지혜이다.
24)무학위(無學位)에서 일어나는 지혜. 온갖 번뇌를 모두 끊었을 때, 내가 이미 고(苦)를 알고 집(集)을 끊었으며, 멸(滅)을 증득하기 위해서 도(道)를 수행했다고 아는 지혜.
25)멸제(滅諦)를 반연하는 무루지(無漏智). 즉 진리를 증득하고 모든 번뇌의 허물을 여읜 청정한 지혜.
26)인연으로 된 것. 따라서 존재가 무상(無常)하고 인연 따라 변천하는 것.
27)유위(有爲)에 대한 말. 즉 조작(造作)이 없고 인연을 여읜 것이므로 생(生)ㆍ주(住)ㆍ괴(壞)ㆍ멸(滅)의 4상(相)의 변천이 없는 모든 법의 실체, 즉 진리를 말한다.
28)한정 없는 중에서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29)남의 괴로움을 내 것으로 삼아 덜어 주려는 마음.
30)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어 기쁘게 하려는 마음.
31)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며 원친(怨親)의 구별을 두지 않는 것.
32)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오래 될수록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없어져도 불경을 많이 듣고 외우고 익히는 이가 있어 불법(佛法)이 지속된다. 이 불법을 그렇게 해서 지속시키는 사람을 다문(多聞)이라고도 한다.
33)수(受)는 정신작용의 하나. 즉 바깥 경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정신작용. 따라서 여기서의 정진은 그러한 정신적인 면의 정진을 가리킨다.
34)정(定)과 혜(慧)를 닦는 두 가지 방법으로 불교의 중요한 수행방법. 지(止)는 정지, 정적으로 마음을 거두어 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 관(觀)은 관찰, 동적으로 지혜를 내어 관조하여 진여에 계합(契合)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어 서로 의지하고 도와 해탈의 길을 이루므로 지관(止觀)이라 한다.
35)지관(止觀)의 관(觀)에 해당하는 것. 지관의 주(註) 참조.
36)지관의 주 참조.
37)차별하는 여러 가지 모양이 없고 오직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모양, 곧 진여(眞如)와 같은 것.
38)진여의 법상(法相)은 미혹된 생각으로 인식하는 그러한 현상이 없으며, 따라서 무상(無相)이라 한다.
39)구경의 진리. 진제(眞諦)ㆍ세속적인 진실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 이는 가장 으뜸이므로 제일의(第一義)이며 거기에 깊은 뜻이 있으므로 의(義)라 한다.
40)세(世)는 세간ㆍ세속의 뜻이고, 제(諦)는 사실 또는 도리. 즉 세간의 사실을 말한다.
41)불도(佛道)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즉 원(願)이다.
42)부처님의 설법을 사자의 포효(咆哮)에 비유한 말.
43)모든 부처님이 과거세(過去世)에 성불하려는 뜻을 냈을 때, 성불하는 목적을 세운다. 예를 들면 아미타불은 48원(願)이 그의 본원이다.
44)지옥ㆍ아귀ㆍ축생을 말한다.
45)4선천(禪天)의 제4선천. 욕계(欲界)를 떠나고, 색계(色界) 즉 의식(意識)만의 세계. 이곳은 번뇌가 없는 세계이며, 그 세계 이상인 다섯 가지 정거천(淨居天)과 무운(無雲)ㆍ복생(福生)ㆍ광과(廣果)로 되어 있다.
46)교법(敎法)을 이해하고 수지(受持)하는 능력.
47)범(梵)은 청정, 즉 음욕(婬欲)을 끊는 법.
48)뜻을 지혜에 안치(安置)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49)관법(觀法)을 돕는 도법(道法). 5정심(停心)과 6도(度)의 행(行).
50)신통력으로 변화해서 이루어진 부처님. 응신불(應身佛).
51)본문에는 욕락(欲樂)이나 송본(宋本)ㆍ명본(明本)에 의하면 낙(樂), 즉 원(願)과 같다. 따라서 불도 성취의 원(願)이다.
52)나쁜 세상에 나타난 다섯 가지 좋지 않는 현상. 즉 ① 사람의 수명이 점차 줄어 서른 살, 스무 살, 열 살이 되고 따라서 기근과 질병과 전쟁이 혹심한 것(겁탁), ② 불법(佛法)이 쇠퇴한 시기에 이르러 삿된 견해와 삿된 법이 일어나 부정(不淨)한 사상이 만연함(견탁), ③ 사람의 마음이 번뇌에 가득하여 흐려짐(번뇌탁), ④ 사람이 악(惡)만을 행하고 도덕을 돌아보지 않고 나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음(중생탁), ⑤ 인간의 수명이 차례로 단축됨(명탁)의 다섯 가지다. 악세(惡世)는 이 같은 세상, 즉 말세이다.
53)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54)부처님에게만 갖추어진 열 가지 지력. 이것으로 일체를 요해(了解)한다.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⑤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⑥ 변월행지력(遍越行智力), ⑦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⑧ 사생지력(死生智力), ⑨ 생사지력(生死智力), 누진지력(漏盡智力)의 열 가지이다.
55)불보살(佛菩薩)이 설법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능히 이해하는 네 가지 지력(智力). ①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 ②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 ③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④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의 넷이다.
56)과거ㆍ현재ㆍ미래의 3겁(劫) 중 현재의 겁을 말한다.
57)부처님이 제자에게 부촉(附囑)하여 불법(佛法)을 후세에 전수 유포하도록 명하는 것.
58)마음에 잊지 않고 염송(念頌)하는 일.
59)부처님의 자성인 진신(眞身). 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敎法). 여기서는 둘을 함께 뜻한다.
60)법신(法身)에 대한 말. 즉 유형(有形)한 신상(身相). 널리는 육신을 가리킨다.
61)세간과 출세간에서 온갖 선법(善法)을 사람들에게 듣게 하는 것.
62)바다를 뗏목으로 건넌 사람이 바다를 건넌 다음에 뗏목으로 인해서 바다를 건너게 된 은혜를 잊지 못하여 뗏목을 메고 갔다 하면, 이것은 뗏목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행위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바닷가에 띄워 놓고 가는 것이 뗏목에 대해 할 일을 다 한 것이 된다. 따라서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敎法)을 배워 그 뜻을 안 뒤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과 같이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남전 사유경(南傳蛇喩經)』
63)명은 실명(實名), 자(字)는 가명(假名)이다.
64)모든 법이 생하지 않는 이치. 이 무생(無生)을 관하는 것은 불도의 시종을 일관하는 입도(入道)의 초문(初門)이다.
65)적집(集積)의 뜻. 많은 법을 종류에 따라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한 것을 가리킴. 음(陰)에는 5음이 있다.
66)종족(種族)의 뜻. 18계(界).
67)처(處)와 같다. 12입(入).
68)①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이 부정(不淨)하다고 관(觀)하는 것[身念處], ② 즐거움이라고 하는 음행ㆍ자녀ㆍ재물 등이 실은 즐거움이 아니고 괴로움이라고 관하는 것[受念處], ③ 마음은 항상 변하며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心念處], ④ 나[我]의 실체가 없고 나에 속한 것 나의 소유가 없으며 또 일정한 소유자도 없다고 관하는 것[法念處].
69)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감촉하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을 말한다.
70)8정도(正道)란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이다. 보살이 열반에 이르는 수행방법.
71)차별하여 가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분명히 밝혀 아는 것이다.
72)5온(蘊)을 말한다. ① 스스로 변화하고 또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色陰 즉 물질의 집적(集積), ② 고(苦)ㆍ낙(樂)ㆍ희(喜)ㆍ불락(不樂)ㆍ노(怒) 등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수음(受陰) 즉 느낌의 집적 ③ 외계(外界)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상상하는 마음의 작용-상음(想陰) 즉 생각의 집적, ④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하는 것-行陰 즉 작용의 집적, ⑤ 의식하고 분별하는 것-식음(識陰) 즉 인식의 집적. 앞의 음(陰)의 주(註) 참조.
73)번뇌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취(取)하여 생긴 업을 집착하여 오래 기르므로 취(取)라 하고, 이를 통털어 5취(取)라 한다. 뒤에 색으로부터 차례로 설명이 나온다.
74)5음(陰) 중의 하나. 색음(色陰)에는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의 5근(根)과 그 5근의 대상 다섯 가지와 무표색(無表色), 즉 남에게 표시할 수 없는 것을 합하여 11종의 색음이 있다.
75)각(覺)은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것이고, 관(觀)은 세밀히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76)멸(滅)은 생사의 인과를 멸한 열반, 즉 멸제(滅諦)이다. 도(道)는 열반을 밝히는 길, 즉 도제(道諦)이다. 멸은 과(果)이며 도는 인(因)이다.
77)5취(趣) 또는 5악도(惡道)라고도 한다. 즉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天上)의 다섯 가지이다.
78)나의 존재는 실재하며 영원하다고 믿는 것.
79)그러한 나에게 소속된 것이 있다고 믿는 것.
80)탐욕과 같은 의미이다.
81)번뇌의 다른 이름. 번뇌는 중생을 얽어매고 생사에 나돌게 하므로 결(結)이라 하며, 중생을 몰아 부려서[驅使] 뇌란(惱亂)케 하므로 사(使)라고 한다.
82)사물을 바르게 관찰하는 견해.
83)행(行)의 조작 천류(造作遷流)의 뜻.
84)수량(數量)의 뜻. 색신(色身)의 모든 법을 낱낱이 구별하여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85)모든 법은 인연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 항상 존재하는 실체(實體)가 없으므로 인간의 사려(思慮) 밖에 있다 해서 불가득(不可得)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