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덕본(德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모든 법상(法相)에 공교한 보살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란 어디에 한하여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께서는 어디에 한하여 그들을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덕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덕본이여.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깊은 뜻을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ㆍ사람ㆍ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모든 법상을 말하리라.”
010_0716_a_02L이른바 모든 법상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인가? 이른바 이름으로 거짓되게 세워진 일체 법의 자성과 차별이고, 나아가 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인연으로 생기는 자성이니,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나아가 순전히 큰 괴로움의 덩어리를 부르고 모은다. 무엇이 모든 법의 원성실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를, 모든 보살들은 용맹 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진리대로 생각하고 잘못됨 없이 사유하는 것을 인연하기 때문에 통달할 수 있다. 이러한 통달에서 점점 닦고 모아서, 나아가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를 바야흐로 원만하게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여, 눈병 난 사람의 눈에 생긴 눈병의 허물처럼, 변계소집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눈병 난 사람은 눈병으로 여러 모습 즉 머리털이나 바퀴, 벌과 파리와 거승(巨勝)과 혹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따위의 차별이 나타남과 같이, 의타기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눈에 눈병의 허물을 여의고 이 맑은 눈의 본성으로 행하는 바에 어지러운 경계가 없음과 같이 원성실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청정한 파지가(頗胝迦)보배는 푸르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제청(帝靑)이나 대청(大靑)의 마니(摩尼)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제청이나 대청의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붉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호박(琥珀)의 마니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호박의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초록으로 물든 빛과 합하면 곧 말라갈다(末羅羯多) 마니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말라갈다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노랗게 물든 빛깔과 합하면 곧 금의 모습과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진짜 금의 모습인 양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010_0716_b_02L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저 파지가보배에 상응하는 물든 빛깔이 나타나는 것처럼, 청정한 의타기상에 나타나는 변계소집상의 말과 습기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청정한 파지가를 두고 제청과 대청과 호박과 말라갈다와 금 따위가 있다고 여기는 삿된 집착처럼, 의타기상에 변계소집상을 집착하는 것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맑은 파지가보배처럼 의타기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맑은 파지가에 나타난 제청과 대청과 호박과 말라갈다와 진금 따위의 모습은 언제나 진실함이 없고 자성이 없는 성품인 것처럼, 의타기상에 나타난 변계소집상은 항상 언제나 진실함이 없으며 자성이 없는 성품이다. 원성실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변계소집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 모습 없는 법[無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의타기상을 깨닫는다면 곧 여실히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雜染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원성실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一切淸淨相法]을 깨달을 것이다.
010_0716_c_02L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모든 보살은 여실히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깨닫는 까닭에, 여실히 모든 모습 없는 법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과 청정한 모습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 까닭에 온갖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고,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 까닭에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한다. 이에 한하여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는 이에 한하여 그들은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만일에 모습 없는 법을 깨치지 못하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 끊을 수 없나니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 끊지 못하는 까닭에 미묘하고 맑은 모습의 법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010_0716_c_10L若不了知無相法, 雜染相法不能斷;
不斷雜染相法故, 壞證微妙淨相法。
모든 행의 뭇 허물을 관찰하지 않으면 방일(放逸)하는 허물이 중생을 해치리라. 게으름은 머무름과 움직이는 법에서 없음과 있음의 실수가 있느니라.
010_0716_c_12L不觀諸行衆過失, 放逸過失害衆生;
懈怠住法動法中, 無有失壞可憐愍。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010_0716_c_14L解深密經無自性相品第五
010_0717_a_02L 그때 승의생(勝義生)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예전에 고요한 곳에 홀로 앉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무량한 문으로 모든 온(蘊)에 있는 자상(自相)과 나는 모습[生相]과 멸하는 모습[滅相]과 영원히 끊음[永斷]과 변지(遍知)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모든 온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처(處)와 연기(緣起)와 모든 식(食)에 대해서도 그러셨다. 무량한 문으로 일찍이 모든 제(諦)에 있는 자상과 변지와 영원히 끊음과 작증(作證)과 닦고 익힘[修習]을 말씀하셨다. 무량한 문으로 모든 계(界)에 있는 모습과 갖가지 계(界)의 성품과 하나가 아닌 계(界)의 성품과 영원히 끊음과 변지를 말씀하셨다. 무량한 문으로 일찍이 염주(念住)에 있는 자상과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닦고 익힘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과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을 말씀하셨다. 염주(念住)를 말씀하심과 같이,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셨고, 무량한 문으로 8지성도(支聲道)에 있는 자상과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닦고 익힘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과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을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또 일체 법이 모두 자성(自性)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잘 모르겠구나. 세존께서는 무슨 밀의(密意)에 의지해 이와 같이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제가 이제 여래께 이 뜻을 여쭙니다. 바라건대 여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밀의를 해석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승의생이여, 그대가 생각한 것은 이치에 매우 합당하니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렇게 깊은 뜻을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ㆍ사람ㆍ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에게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말한 밀의(密意)를 해석해 주리라.
무엇이 모든 법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생무자성성을 말미암는 까닭에 무자성성이라 부르니, 즉 인연으로 생긴 법도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 가운데서 만일 이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라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의타기상은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부른다. 또 모든 법의 원성실상이 있으니,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을 승의(勝義)라 하며, 또는 무자성성(無自性性)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체 법의 승의제이기 때문이며, 무자성성에서 나타난 것인 까닭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지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010_0717_c_02L선남자여, 비유컨대 ‘허공의 꽃’과 같아서 상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꼭두각시의 모형과 같아서 생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1분(分)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허공은 오직 모든 색(色)이 없는 성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일체 처소에 두루 함과 같이, 1분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법무아의 성품이 나타난 것인 까닭이며, 일체에 보편한 까닭이다.
선남자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무자성성의 밀의(密意)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하노라.
010_0717_c_03L善男子!我依如是三種無自性性,密意說言:‘一切諸法皆無自性。’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또한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으로 나타난 것인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법무아의 성품에 의지해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은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法性)에 머무는 무위(無爲)이니, 일체 잡염(雜染)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에 머무는 까닭에 무위이다. 무위인 까닭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체 잡염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무아의 성품으로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010_0718_a_02L또 승의생이여, 유정의 세계에서 모든 유정의 무리는 따로따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自性)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또 그들이 따로따로 의타기(依他起)의 자성과 원성실(圓成實)의 자성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을 세운 것이 아니다.
유정들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 변계소집의 자성을 더하는 까닭에 내가 세 가지 무자성성을 세운 것이다.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의 모습에 의지해 모든 유정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여여하다[如如]’고 하고,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이와 같다[如是]’고 한다. 이처럼 언설(言說)로 훈습하는 마음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에 따른 깨달음[隨覺]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의 수면(隨眠)을 말미암는 까닭에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서 변계소집의 모습을 ‘여여하다’고 집착하고 ‘이와 같다’고 집착한다. 이처럼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나락가(那落迦)나 방생(傍生)이나 아귀(餓鬼)나 천상이나 아소락(阿素洛)이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010_0718_b_02L또 승의생이여, 만일 모든 유정이 본래로부터 아직 선근을 심지 않고, 아직 장애[障]를 맑히지 못하고, 아직 상속(相續)을 익히지 못하고, 아직 많은 승해(勝解)를 닦지 못하고, 아직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資糧)을 모으지 못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하는 까닭에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에 의지해 모든 법을 말한다. 그들은 이것을 듣고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행 가운데서 분수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항(無恒)하며 편안치 못하고 변해 무너지는 법임을 깨닫고, 일체 행상에 대하여 마음에 두려움을 내며, 깊이 싫어하는 생각을 낸다.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깊이 싫어하고, 모든 악을 막고 그치며, 모든 악한 법을 짓지 않으며, 모든 선법은 부지런히 닦고 익힌다. 착한 인을 익히는 까닭에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는 능히 선근을 심고, 아직 업장을 맑히지 못한 이는 능히 업장을 맑히며, 아직 상속이 성숙하지 않은 이는 능히 성숙시킨다. 이러한 인연으로 승해(勝解)를 많이 닦고, 또한 복덕과 지혜 두 가지의 자량을 많이 쌓고 모으게 된다.
그들이 비록 이러한 모든 선근을 심고, 나아가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모았다고 해도,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 가운데서 아직은 상무자성성과 두 가지 승의무자성성을 여실히 깨닫지는 못한다. 또한 일체 행(行)에서 아직은 바르게 싫어하지 못하며, 아직은 바르게 욕심을 여의지 못하며, 아직은 바르게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번뇌의 잡염에서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모든 업의 잡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생의 잡염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그래서 법요(法要)를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과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그들로 하여금 일체 행에서 능히 바르게 싫어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르게 욕심을 버리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르게 해탈케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번뇌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업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생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다.
010_0718_c_02L그들은 이러한 설법을 들으면 생무자성성에서 능히 바르게 상무자성성과 승의무자성성을 믿고 간택하며 생각하고 실답게 통달한다. 의타기의 자성 가운데 능히 변계소집자성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말[言說]로 훈습되지 않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말을 따라 깨닫지 않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말의 수면(隨眠)을 떠난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능히 의타기상을 멸하고 현재의 법 가운데서 지혜의 힘을 유지해 오는 세상의 인연을 영원히 끊어 버릴 수 있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체 행에서 바르게 싫어하고, 바르게 욕심을 여의며, 바르게 해탈하고, 번뇌잡염ㆍ업잡염ㆍ생잡염 세 가지에서 두루 해탈할 수 있다.
또 승의생이여, 모든 성문승종성(聲聞乘種性)의 유정(有情)도 또한 이 도(道)와 이 행적(行迹)을 말미암는 까닭에 위없고 편안한 열반을 증득하며, 모든 독각승종성(獨覺乘種性)의 유정과 모든 여래승종성(如來乘種性)의 유정도 또한 이 도와 이 행적을 말미암는 까닭에 위없고 편안한 열반을 증득한다. 일체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 모두 이 하나의 묘하고 청정한 도[一妙淸淨道]를 같이하고, 모두 이 하나의 끝끝내 청정함[一究竟淸淨]을 같이하는 것이니, 다시 두 번째는 없다. 내가 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밀의로써 오직 일승(一乘)만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체 유정계(有情界) 가운데 갖가지 유정의 종성(種性)이 없는 것은 아니니, 둔근성(鈍根性)이나 중근성(中根性)이나 이근성(利根性)의 유정으로 차별된다.
010_0719_a_02L선남자여, 만일 한 결 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종성의 보특가라(補特伽羅)라면,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시설하여 갖가지 용맹한 가행(加行)과 방편(方便)으로 교화하고 인도하더라도, 끝내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치게 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본래 하열(下劣)한 종성만 가졌기 때문이며,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이며, 매양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양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리며, 그들은 한결같이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저버린다. 나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와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도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이라 한다. 만일 보리로 회향(廻向)한 성문종성의 보특가라라면, 나는 또한 다른 문으로써 그를 보살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번뇌장(煩惱障)을 해탈하였으니, 만일 모든 부처님들의 깨우쳐 주심을 입으면 소지장(所知障)에서도 그 마음이 분명 해탈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초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행을 닦아 번뇌장을 해탈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래는 그를 시설하여 성문종성이라 한다.
또 승의생이여, 이와 같아서 나의 좋은 말이며 좋은 제도의 법인 비나야(毘奈耶)와 가장 청정한 뜻과 즐거움을 말한 좋은 교법 가운데서 모든 유정들은 갖가지로 차별되는 뜻과 알음알이를 얻을 수 있다. 선남자여, 여래는 다만 이와 같은 세 가지 무자성성에 의지해 깊은 밀의를 말미암아 이미 말한 불요의경(不了義經)에서 은밀한 모습으로 모든 법요(法要)를 말하니, 이른바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니라.
010_0719_b_02L이 경 가운데서 만일 모든 유정들이 이미 상품(上品)의 선근을 심고, 이미 모든 업장을 청정히 하고, 이미 상속을 이룩하고, 이미 많은 승해를 닦고, 이미 상품의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쌓았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설법을 여실히 깨닫고 이러한 법에 깊은 마음과 신해(信解)를 낼 것이며, 이러한 뜻에 뒤바뀜이 없는 지혜로써 여실히 통달할 것이다. 이 통달에 의지해 잘 닦는 까닭에 능히 빠르게 가장 극진한 구경(究竟)을 증득할 것이며, 또한 나에게 청정한 믿음을 깊이 일으키고, 이것이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일체 법에서 현전에 등정각을 이룬 것임을 알 것이다.
010_0719_c_02L만일 모든 유정이 이미 상품의 선근을 심고 이미 모든 업장을 맑히고 이미 상속을 성숙시키고 이미 많은 승해(勝解)를 닦았지만 아직 상품의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쌓지는 못했다면, 그 성품이 강직[質直]하다면, 이 강직한 무리가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가려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없지만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지는 않는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나의 매우 깊고 비밀한 말에 비록 여실히 깨달을 힘과 능력은 없어도 이 법에 대해 승해를 낼 것이며, 청정한 믿음을 내어 ‘이 경전은 여래의 말씀이며, 이는 매우 깊은 이치를 드러낸 것이며, 매우 깊은 공의 성품과 상응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심사(尋思)로 행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미세하고 자세하게 살피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고 믿을 것이다. 이 경전의 말씀에 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가장 깊으며, 모든 법의 법성 또한 가장 깊어서 오직 부처님만 요달하실 수 있지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갖가지 승해로 유정들을 위해 바른 법의 가르침을 펴시니, 모든 부처님은 무변한 지견(知見)이시고, 우리들의 지견은 소 발자국의 물과 같다.’ 그들은 이 경전을 공경하고, 남을 위해 말하고, 쓰고, 지니고, 읽고, 널리 퍼뜨리고, 소중히 여겨 공양하고, 외우고, 익히기는 하지만 그 닦는 모습[修相]으로써 가행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이런 까닭에 내가 매우 깊은 밀의로써 말한 가르침을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지해 모든 유정들이 또한 능히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더할 것이며, 그가 아직 상속이 성숙하지 않은 자라면 또한 성숙할 것이다.
010_0720_a_02L만일 모든 유정들이, 널리 말하건대 내지 아직 상품(上品)의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쌓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다면, 성품이 강직하지 못해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선택할 힘과 능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말을 여실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법에 믿는 마음을 낸다고 해도 그 뜻을 말을 따라 집착해 ‘일체 법은 단정코 모두 자성이 없으며, 단정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단정코 본래 고요하며, 단정코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에 대하여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을 것이다.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었음으로써 일체 모습은 모두 무상(無相)이라고 부정해 버리며,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비방하고 부정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이 있는 까닭에 변계소집상도 시설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없는 모습이라고 본다면 그는 또한 변계소집상도 비방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세 가지 모습을 비방하고 부인한다’고 말하니, 비록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 가운데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가운데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까닭에, 옳은 법 가운데서 옳은 법이라 지니고 잘못된 뜻 가운데서 옳은 뜻이라고 지닌다. 그는 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킨 까닭에 복덕이 증장하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 까닭에 지혜를 잃으며, 지혜를 잃는 까닭에 광대하고 무량한 좋은 법에서 물러난다.
다시 어떤 유정이 법을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뜻이라고 하는 말을 남에게서 듣고 그 소견에 따른다면, 그는 곧 법에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것에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켜, 법을 집착하여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집착하여 뜻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라, 그들은 함께 선법(善法)에서 물러나리라. 만일 어떤 유정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지는 않지만, 남에게서 홀연히 ‘일체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는 말을 듣고는 문득 두려움을 내고, 두려움을 내고는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군의 말이다’고 말하며, 이러한 소견을 내고는 이 경전에 대하여 비방하고 헐뜯고 욕한다면, 이런 인연으로 큰 쇠퇴와 손해를 얻고 큰 업장(業障)을 범하리라.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일체 모습에 대하여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뜻이 아닌 것을 뜻이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이가 있으면 이는 광대한 업장을 일으키는 방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무량한 중생을 구렁에 빠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큰 업장을 얻게 하는 까닭이다.
010_0720_b_02L선남자여, 만일 모든 유정이 선근을 심지 못했고, 업장을 맑히지 못했고, 상속을 익히지 못했고, 승해를 많이 닦지 못했고,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한 무리로서 버리고 세울 것을 가릴 힘과 능력이 있으나 항상 자기의 견취 가운데 안주한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密意)의 말을 여실히 알지 못할 것이며, 또 이 법에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며, 옳은 법 가운데 잘못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옳은 뜻 가운데 잘못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킬 것이며, 옳은 법을 잘못된 법이라 집착하고 옳은 뜻을 잘못된 뜻이라고 집착하며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는 마군의 말이다’고 소리 높여 말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는 이 경을 비방하고 욕하고 거짓이라고 부정하며 무량한 문으로써 이러한 경전을 헐뜯고 무시할 것이며, 이 경전을 믿는 모든 이들을 원수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예전부터 모든 업장에 장애되었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다시 이러한 업장에게 장애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장은 처음에 시설하기는 쉬우나 백천 구지(俱胝) 나유타(那由陀)겁을 지나도 벗어날 기약이 없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혹은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이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行相) 중에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색온(色蘊)이라 하고, 혹은 자성의 모습이나 혹은 차별의 모습을 삼으며, 거짓 이름을 세워 색온의 생함[生]을 삼고 색온의 멸함[滅]을 삼으며, 색온의 영원히 끊어짐[永斷]과 변지의 자성의 모습과 혹은 차별의 모습을 삼으니, 이것을 변계소집상이라고 부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을 시설하셨습니다. 만일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이 되는 행상이라면 이는 의타기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과 1분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을 시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가운데서는 변계소집상이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이 자성의 무자성성(無自性性)과 법무아(法無我)와 진여(眞如)인 청정의 소연(所緣)을 원성실상이라 부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색온에서와 같이 이렇게 다른 온에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온에서와 같이 이렇게 12처(處)의 낱낱 처에 대해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12유지(有支)의 낱낱 지에 대해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4식(食)의 낱낱 식에 대해서도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6계(界)와 18계(界)의 낱낱 계에 대해서도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010_0721_a_02L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거짓 이름을 세워 고제(苦諦)와 고제의 변지(遍知)와 혹은 자성의 모습과 혹은 차별의 모습을 삼으니, 이것이 변계소집상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상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이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을 의타기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과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변계소집상이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곧 이 자성의 무자성성과 법무아와 진여인 청정의 소연을 원성실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고제(苦諦)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른 제(諦)에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성제(聖諦)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모든 염주(念住)와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와 도지(道支)에서도 낱낱이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010_0721_b_02L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거짓 이름을 세워 정정(正定)을 삼고, 또 정정의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바른 닦음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으며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이라 하며, 혹은 자성의 모습이라 하고 혹은 차별의 모습이라 하니, 이를 변계소집상이라 부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상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이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을 의타기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과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변계소집상은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곧 이 자성의 무자성성과 법무아와 진여인 청정의 소연을 원성실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비습박약(毘濕縛藥)은 일체 산약(散藥)과 선약(仙藥)의 방문에 모두 상응하여 넣을 수 있는 것처럼, 세존의 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了義)의 가르침은 두루 일체 요의가 아닌 경전에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림의 바탕은 일체 그림 그리는 사업에 보편하여 모두가 한맛이며 청ㆍ황ㆍ적ㆍ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채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세존의 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고 널리 말하면 나아가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의 가르침은 두루 일체 요의가 아닌 경전에서도 모두 한맛이며, 또 그 모든 경전의 요의가 아닌 뜻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요리한 모든 진수(珍羞)와 모든 떡과 과일에 숙소(熟酥)를 넣으면 더욱 훌륭한 맛을 내는 것처럼, 세존께서는 이 모든 법의 자성이 없고 널리 말하면 나아가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의 가르침을 일체 요의가 아닌 경전에 두어 수승한 환희를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010_0721_c_02L세존이시여, 비유컨대 허공이 모든 일체 처소에 보편하되 모두 한맛이어서 일체 짓는 바를 장애하지 않는 것처럼, 세존의 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고 널리 말하면 나아가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의 말씀은 일체 요의가 아닌 경에 보편하며 모두 같은 한맛이어서 일체 성문과 독각과 모든 대승의 수행하는 사업을 장애하지 않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지금 여래가 말한 매우 깊은 밀의(密意)의 말과 뜻을 잘 알았고 또 이 뜻의 비유를 잘 들었으니, 이른바 세간의 비습박약과 채색의 그림 바탕과 숙소와 허공이다. 승의생이여, 그렇고 그렇다. 틀림없으니 이와 같이 그대는 받아 지녀라.”
그때 승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처음 언젠가 바라니사(婆羅尼斯) 선인이 떨어진 곳, 사슴에게 베푼 동산에서는 오직 성문승으로만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위해 4제법으로 바른 법륜(法輪)을 굴리셨습니다. 매우 기이하고 매우 희유한 일로서 일체 하늘과 인간에서 누구도 일찍이 굴린 이가 없는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때 굴린 법륜은 그보다 나은 것이 있고 용납할 것이 있어 요의가 되지 못하였으니, 모든 시비가 발을 붙일 곳이었습니다.
010_0722_a_02L세존이시여, 옛날에 두 번째로 오직 대승을 향해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의지해 은밀한 모습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비록 훨씬 기이하고 매우 희유하였사오나 그때 굴린 법륜 또한 그보다 나은 것이 있고 용납할 것이 있어 요의가 되지 못하였으니, 모든 시비가 발을 붙일 곳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세 번째로 널리 일체승을 향하는 이들을 위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인 무자성성이라 말씀하시고, 이에 의지해 뚜렷한 모습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십니다. 제일 기이하시고 가장 희유하십니다. 지금 세존께서 굴리신 법륜은 그보다 나은 것이 없고 용납할 것도 없어 참으로 요의이니, 모든 시비가 발을 붙일 곳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인 것에 의지해 말씀하신 매우 깊은 요의의 교법을, 선남자ㆍ선여인이 듣고 믿고 쓰고 지니고 공양하고 퍼뜨리고 받아 외우고 닦고 이치대로 생각하고 그 닦는 모습으로써 가행을 일으킨다면 복덕이 얼마나 생기겠습니까?”
010_0722_b_02L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승의생이여, 그런 선남자ㆍ선여인에게 생기는 복덕은 무량하고 무수하여 알기가 어려우니, 내가 지금 그대에게 조금만 말하리라. 손톱 위의 흙을 대지의 흙과 비교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수(數)ㆍ산(算)ㆍ계(計)ㆍ유(喩)ㆍ오파니살담(鄔波尼殺曇)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함과 같다. 소 발자국의 물을 4대해의 물과 비교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널리 말하자면 나아가 오파니살담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아서 모든 요의가 아닌 경을 듣고 믿고, 나아가 그 수행하는 모습으로써 가행을 일으켜 얻은 공덕을, 지금 말한 요의경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서 모인 공덕이나 나아가 그 닦은 모습으로써 가행을 일으켜 모인 공덕과 비교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널리 말하면 나아가 오파니살담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승의요의의 교법을 말씀하셨을 때 큰 모임 가운데 있던 60만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며, 30만 성문이 티끌[塵垢]을 멀리 벗어나 모든 법에 법안(法眼)이 맑아졌으며, 15만 성문이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해 심해탈(心解脫)을 얻었으며, 7만 5천의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