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일심(一心)이 쌓여 삼계(三界)가 된 것이지만 어리석음의 강물에 아득히 밀리고 고통의 숲이 울창하고 높아 그 끝을 논하고 싶어도 그 근본을 측량하기 어렵다. 이치로는 실상(實相)의 문(門)을 다하고 틀[筌]로는 임시로 빌린 언어의 영역을 다한 5인(因) 7과(果) 열두 가지 연생(緣生)의 법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범부는 곧 미혹하여 허망을 일으키고 성인은 곧 깨달아 진실에 통하며, 하근기는 토끼처럼 떠다니고, 상근기는 코끼리처럼 건넌다.
크구나, 오묘한 깨달음이여. 깊구나, 모두 받아들이도다. 십지(十地:十地經)와 쌍림(雙林:涅槃經)에서 함께 제창하시고, 문성(聞城:聞城十二因緣經)과 도간경(稻芉:稻芉經)에서 모두 부연하셨다. 이 경에 이르러서는 유독 그곳에서 나열한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설하지 않은 것들까지 여기에서 모두 설명하고 있다. 반연을 서두로 하고 대치를 말미로 하여 총합하면 11문(門)이고, 나누면 120문(問)이다. 그 종지는 자세하면서도 치밀하고, 그 표현은 간략하면서도 은미하니, 경의 강목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아울러 성자 울릉가(鬱楞迦)가 이 경의 종지에 부합하여 논을 지었으니, 그 논을 밝게 드러냄에 있어 3승(乘)의 뜻을 두루 취하고 어느 한 부파의 틀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먼저 게송으로 드러내고, 뒤에 논(論)과 석(釋)을 붙였는데, 게송이 30개이므로 또 삼십론(三十論)이라고도 한다.
010_0761_b_02L대업 2년 10월에 남현두국(南賢豆國)구역(舊譯)에 천축(天竺)이라 한 것은 오류다.의 삼장 법사 달마급다(達磨笈多)와 돌아가신 번경법사(飜經法師) 언종(彦琮) 스님께서 동도(東都) 상림원(上林園)에 계실 때 임읍(林邑)에서 얻은 현두 범본(梵本)에 의지해 수나라 말로 번역하였고, 3년 9월에 그 작업을 마치니, 경은 2권, 논은 1권이었다. 삼장 법사께서는 어학에 해박하고 밝으며, 이치를 해석함에 있어 깊고 치밀했으며, 언종 법사께서는 널리 경론에 통달하고 겸하여 범문에도 능하신 분이었다. 두 분이 패엽본(貝葉本)을 마주하고, 다시 서로를 논박하면서 한마디 말도 빠트리지 않고 세 차례나 세밀히 검토하였으니, 문장은 비록 간소하고 질박하나 그 의미는 진실하고도 바르다. 옛 분들의 번역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으니, 진실로 법의 등불이며, 지혜의 창고라고 칭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아득한 후세까지 전해져 영원히 세간에 이익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어느 때 부처님[婆伽婆]께서 사라바실제성(舍囉婆悉帝城)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법당에 모여 앉아서 의논을 하였다.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을 말하자면, 세존께서는 일찍이 무량한 법문으로써 12분연생(分緣生)을 말씀하시되, 그 최초에 무명(無明)을 연설하셔서 연생의 바탕[體]으로 삼으시니, 무슨 인연(因緣)이 있어서 일체의 번뇌와 모든 행(行)의 연(緣)에서 오직 무명만이 연생의 바탕이 된다고 하셨을까? 이 무명에서 어떠한 특별함[勝異]을 보셨을까?”
모든 비구들이 법당에 모여 앉아 의논이 끝나지 않는 동안 세존께서는 종일토록 정행(定行)에 드셔서 사람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 귀[天耳]로 그들의 의논을 들으시고, 날이 저물 무렵 정행에서 나와 그들이 앉아 있는 법당으로 가셨다. 법당에 이르러 비구들의 앞에 항상 시설되어 있는 자리 위에 앉으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슨 까닭에 법당에 모여 앉아 의논이 끊이지 않았는가? 여기에 모여 앉아서 무엇을 의논하고 있었는가?”
010_0761_c_02L비구들이 말하였다. “대덕(大德)이시여, 이처럼 많은 비구들이 법당에 모여 앉아서 이러한 의논을 하였습니다. ‘모든 목숨이 있는 것들을 말하자면, 세존께서는 일찍이 무량한 법문으로써 12분연생을 말씀하시되, 그 최초에 무명을 연설하셔서 연생의 바탕으로 삼으시니, 무슨 인연이 있어서 일체의 번뇌와 모든 행의 연에서 오직 무명만이 연생의 바탕이 된다고 하셨을까? 이 무명에서 어떠한 특별함을 보셨을까?’ 대덕이시여, 저희들 여러 비구는 법당에 모여 앉아서 아직 의논을 마치지 못했으며, 이러한 것을 의논하며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실제(實諦) 가운데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이니, 생기지 않은 번뇌염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점점 커져서 더욱 많게 하며, 생기지 않은 업염은 생기게 하고, 만약 이미 생긴 것은 다시 쌓고 모이게 하며, 생기지 않은 생염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변하지 못하게 하니, 그러므로 일체 종류의 번뇌염과 업염과 생염은 모두 무명으로써 유서와 근본적인 머물 곳을 삼는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무명의 유서가 특별함이다.”
010_0762_b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이 무명이 내생의 고제(苦諦)에 포섭되어 다시 태어난 몸에 대하여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며, 현재의 고제에 포섭되어 이미 태어난 몸에 대하여서도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니, 이 어리석고 미혹함을 말미암아 섭취연생(攝聚緣生)과 전출연생(轉出緣生)과 화합섭취(和合攝取)와 화합전출(和合轉出)이 있다. 이 두 가지 연생과 내세와 현재의 두 몸의 우혹(愚惑)이 모두 무명으로써 등기의 연을 삼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제2의 무명을 연하는 가운데서 수(受)가 연이 되어 애(愛)가 있고, 애가 연이 되어 취(取)가 있고, 취가 연이 되어 유(有)가 있고, 유가 연이 되어 생(生)이 있고, 생이 연이 되어 노사(老死)가 있으니, 이것이 전출연생과 화합연생이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어떤 것이 처음의 무명이 섭취연생과 화합섭취에게 일어나는 연이 되는 것입니까?”
010_0762_b_14L比丘白佛:“大德,云何初無明,於彼攝聚緣生、和合攝聚,而作起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한 무리가 다시 태어나는 몸[更生身:後有]에 대하여 어리석고 미혹하므로 알지 못하여 다시 태어나기를 구하니, 이와 같은 어리석고 미혹하므로 다시 태어나기를 구하는 까닭에, 다시 태어나는 가운데서 좋은 일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한 경계에 대하여 집착함을 말미암아 분별하는 까닭에 비복행(非福行)을 짓는다. 이른바 여러 가지의 살림살이[資具]에 대하여는 탐심을 내고, 손해나고 번뇌스러운 것에는 진심을 내고, 상응(相應)하는 까닭에 좋고 나쁜 일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곧 방일하고 미혹한 행을 지으며, 다른 세상의 악한 일도 생각하여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비복행은 무명이 연을 짓는다.
010_0762_c_02L만약 다시 태어나는 가운데 좋은 일을 보거나 벗어나는 길[出道]을 보면 즉시에 복행(福行)과 부동행(不動行)을 지을 것이니, 혹은 설법을 듣고 깨닫거나 스스로 정려(靜慮)를 닦아 그의 깨달은 생각 가운데 선심(善心)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바른 사유[正思]가 아니다. 그는 이러한 까닭으로 다시 태어나는 미혹에 이끌린다. 이른바 다시 태어나는 몸에 대하여 좋은 일을 보는 것도 겁약하지 않기[不怯弱] 때문이며, 벗어나는 길을 보는 것도 겁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 복(福)ㆍ비복(非福)ㆍ부동행(不動行)의 악대(惡對:障碍)와 대치상(對治相) 따위는 6식신(識身) 안에서 함께 나고 함께 멸하면서 현재에 보식(報識:異熟識)이 생멸하는 가운데에 모든 행의 훈습(熏習)을 안치(安置)하는 것이다. 뒤에 새로 생길 모든 종자를 섭취(攝取)하고 상응(相應)한 까닭에 모든 종자는 이미 모두 섭취되었다. 뒤에 만약 출생하면 차례가 있을 것이니, 이른바 명색ㆍ6입ㆍ촉 등이 점차로 출생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 명색 따위는 현재의 보식 안에서 다만 인상(因相)만을 내고 과상(果相)은 없으므로 섭취연생이라고 한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어떤 것이 무명이 전출연생과 화합전출에 대하여 일어나는 연이 되는 것입니까?”
010_0762_c_16L比丘白佛:“大德,云何後無明於彼轉出緣生、和合轉出,而作起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어떤 이들은 현재의 몸에서 미혹(迷惑)을 일으켜 6입(入)과 촉(觸)1)을 연으로 하여 수(受)를 내고는 즉시 그 맛을 안다. 맛을 아는 까닭에 오는 세상[當來]에도 이러한 수를 구하며, 구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취(取)를 일으킨다. 낙수(樂受)에서 갈애(渴愛)를 연으로 하여 욕취(欲取)가 생기는데, 욕취라는 것은 욕(欲)을 분별하는 까닭에 그것이 우두머리가 되니, 바야흐로 욕계의 모든 번뇌가 있다. 만약 새로운 수[新受]2)를 연하면 무유갈애(無有渴愛)가 생기니, 함께 싫어하여 멀리 여의려는 행을 한다. 이는 염리와 상응하지만 도리는 아니다.
만약 욕탐을 여의거나 색탐을 여의면 색계의 갈애와 무색계의 갈애가 생겨서 항상 있게 된다. 만약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서 번뇌가 생길 때에는 색계나 무색계의 취(取)를 일으킨다. 저들 색계나 무색계의 번뇌와 이들 모든 소견은 혹 색계의 갈애가 연이 되어 취를 내고, 혹은 무색계의 갈애가 연이 되어 취를 낸다.
이렇듯 갈애는 취의 연이 되는 까닭에 이미 모든 행을 얻고, 보식(報識)을 훈습하여 취와 함께 생긴다. 그 취를 포섭한 뒤에는 먼저부터 모든 행의 소유(所有)인 갈애가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이곳저곳에 곧 나타나서 자기의 몸이 전출(轉出)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출생이 있으니, 그러므로 행(行)은 유(有)가 된다고 한다. 취의 힘으로 행은 이미 유가 되었으나, 여기에서 죽으면 먼저부터 섭취한 것으로서 마땅히 출생할 것에는 연이 되어서 전출하게 하니, 그러므로 유는 생을 연한다고 한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무슨 까닭에 전출연생 가운데의 갈애와 취(取) 두 가지를 모든 행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010_0763_a_22L比丘白佛:“大德,何故轉出緣生中,渴、取二種而不說爲諸行緣也?”
010_0763_b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갈애와 취의 분제(分齊)가 다른 까닭이다. 마치 욕계의 갈애와 취가 색계와 무색계의 부동행(不動行)을 짓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경계가 아닌 까닭이다. 마치 욕계의 갈애가 부동행 가운데에서 이렇듯이, 색계의 갈애는 무색계의 무색 갈애(渴愛)에서, 욕계ㆍ색계의 색의 갈애는 욕계에서도 그러하다.”
비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무슨 까닭에 욕계의 갈애와 취는 복(福)ㆍ비복행(非福行)에게 연이 되지 않습니까?”
010_0763_b_06L比丘白佛:“大德,何故欲渴及取不與福、非福行爲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이 현전에 있는 모든 경계에서 애(愛)와 불애(不愛)로 증상을 삼고, 욕계의 갈애가 있으므로 선하지 못한 근(根)을 일으켜 비복행을 짓는다. 모두 인과를 말미암으며, 비복행 안에서 그 악함을 모르는 까닭이니, 이른바 마음이 악하고 지은 바가 악한 것이다. 알지 못하는 까닭에 비복행을 일으키되 마음과 지은 악 따위는 오직 무명으로써 연을 삼지 않으니, 같은 경계가 아닌 까닭이다. 만약 욕계의 갈애로써 복행을 지으면 믿음을 의지하여야 지어지리라.
이른바 죽으면 반드시 생하고, 생하면 반드시 인연을 따르는 것임을 믿음으로써 포섭하는 까닭에, 갈애와 취는 다만 장부무기(障覆無記)라고 나는 시설한다. 만약 법이 장부무기라면 능히 행을 일으키지 못하리라. 인과와 복행 모두에 대하여 벗어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사랑스러운 생(生)을 구하여 복행을 지으므로 비록 복행이라 하나 또한 무명으로써 연을 삼는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무슨 까닭에 색계의 갈애와 취(取)는 색계의 부동행에게 연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까?”
010_0763_b_20L比丘白佛:“大德,何故色界渴、取不與色界不動行爲緣?”
010_0763_c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욕심을 여의지 않는 이는 색계의 갈애에 낳지 못하며, 머무를 곳을 얻지 못하여 저것이 있지 않을 때 주처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색계의 부동행에게 연을 지어 그로 하여금 일어나게 할 수 없다. 색계의 갈애와 같이, 색계의 부동행에서나 무색계의 갈애가 무색계의 부동행에서도 그러하다.
색계의 몸과 무색계의 몸에 허물이 있는 곳에 좋은 일을 보고 생각하되, 혹 설법을 인하거나 혹 교수하는 법을 인하여 이렇게 바르지 못한 생각이 있어서 행에게 연이 된다. 그러나 이 바르지 못한 생각은 무명에게 끌리는 것으로 바르지 못한 생각의 결과는 무명과 함께 화합하여 부동행에게 연이 된다. 그러므로 저 부동행은 또한 무명으로써 연을 삼는다.
마땅히 알라. 비구여, 또 어떤 이는 무유갈애(無有渴愛)에 의지하여 복행과 부동행을 짓는다. 무유갈애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유의 허물을 보게 되니, 어찌 즐거이 오는 세상[當來]의 유를 다시 구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또 무유에 대하여 여실히 알지 못하고, 또 대치하는 도를 얻지 못한 까닭에 대치가 아닌 것에 대치라는 생각을 내어 곧 복행과 부동행을 짓는다. 비구여, 이러한 까닭에 다만 무명만이 행을 연할지언정 갈애와 취가 연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함께 인(因)하여 수용(受用)하여 의지(依止)하는 것이며, 또 함께 인하여 수용하는 것인 까닭이다.”
010_0764_a_05L佛言:“比丘,共因受用依止及共因受用故。”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명(名)만이 생하고 색(色)이 없으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64_a_06L比丘白佛:“大德,若惟名生無色。當有何過?”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만약 명이 색(色) 가운데 머무르지 않으면, 선마가 상속하여 움직이되, 상응하지 못하리라.”
010_0764_a_08L佛言:“比丘,若名不住色中者,禪磨續轉,則不相應。”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만약 색(色)만이 생하고 명(名)이 없으면 어떤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64_a_09L比丘白佛:“大德,若惟色生無名,當有何過?”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색이 만약 명과 합하지 않으면 섭지(攝持)를 입지 못하므로 반드시 부서져서 자라나지 못하리라.”
010_0764_a_11L佛言:“比丘,色若不與名合,不被攝持,則當壞失不得增長。”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만약 식(識)이 6입만을 연한다 하면 어떠한 허물이 있겠습니까?”
010_0764_a_12L比丘白佛:“大德,若惟識緣六入,當有何過?”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가 시작할 때에는 6입이 원만하지 못하고 오직 신근(身根)과 의근(意根)만이 있어서, 그에서 변하여 나온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이 두 가지 근(根)의 체(體)는 명과 색뿐이다. 차례차례로 6입에게 만족하게 연이 되니, 그러므로 명색이 연이 되어 6입이 있다고 설한 것이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만약 6입만 만족하면 이 선마(禪磨)가 구경(究竟)한데, 무슨 까닭에 다시 촉과 수를 말씀하십니까?”
010_0764_a_18L比丘白佛:“大德,若惟六入滿足,則是禪磨究竟。何故復說觸及受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이 6입의 선마가 구경하면 수용(受用)하여 의지(依止)하는 것이 구경한 것이지만, 수용이 구경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수용이 구경하려면 함께 인(因)하여 받아들여야[領受] 하리라. 그러므로 수용하여 의지하는 것이 구경한 것과 수용이 구경하여야 선마가 구경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세 가지의 갈애와 세 가지의 유(有)가 일시에 움직여 생기는[轉生] 까닭이다. 그러나 수가 연이 되어 갈애가 있는 까닭에 서로 의존하는 것[相待]이 힘이 되어 움직여 생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만 무명만이 연이 되어 갈애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만약 갈애가 유에게만 연이 되고 취의 연이 되지 않는다 하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64_b_10L比丘白佛:“大德,若惟渴緣於有,不以取緣,當有何過?”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갈애는 구하는 것이니, 저 악취(惡趣)를 구하는 이는 없지만, 지은 비복행(非福行)으로 비록 선취(善趣)를 구하나, 항상 서로 어긋난다. 과보가 움직여 생길[轉生] 때에는 갈애로써 연을 삼지 않고 취로써 연을 삼아 그가 생겨나게 한다. 비구여, 말한 갈애가 없으면 구하는 것이 없다 하고, 이 구하는 것이 없는 것은 비록 어긋난 것이지만 복행과 부동행을 짓고 결과가 또한 움직여 생긴다. 이러한 인연으로 다만 갈애는 유에게 연이 되지 않는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만약 취가 연이 되어 유가 있고, 유가 연이 되어 생이 있다면, 무슨 까닭에 취와 유로써 집제(集諦)를 삼지 않습니까?”
010_0764_b_18L比丘白佛:“大德若取緣有有緣生者何故,不說彼取及有以爲集諦?”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갈애가 네 가지의 업을 짓는 까닭이니, 첫째는 자기 몸의 경계인 수(受) 안에서 맛에 탐착하고 얽매이는 업을 짓는 것이며, 둘째는 갈애가 취(取) 안에서 출현하게[等起] 하는 업을 짓는 것이며, 셋째는 행이 유(有) 안에서 끌어당기는[牽引] 업을 짓는 것이며, 넷째는 죽은 뒤에 상속하여 속박하는 업을 짓는 것이니, 그러므로 갈애만을 집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출생하는 모습이 차례로 생긴다 하시니, 어떠한 것이 비슷한 것입니까?”
010_0764_c_16L比丘白佛:“大德,出生之相次第而生,當何所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가 처음에 종자를 내리면 곧 생이 있으니, 그가 차례로 자라나서 생하고, 그가 차례로 태에서 나오고, 그가 차례로 자라나서 생하고, 그가 자라나서는 능히 세속을 수용하여 생하니, 이것이 차례로 생하는 것이다. 또 어디에서 생기는가? 중(衆:蘊)과 계(界)와 입(入)에서 생기지만, 나[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5중(衆)들이 자라나고 흘러가는 것이 무상한 까닭이며, 명근(命根)의 힘이 한량 있는 시간에 머무는 것도 무상에서 생기는 까닭이다. 비구여, 저 네 가지의 출생하는 모습은 시분(時分)이 부서지면 곧 다섯 가지의 쇠악(衰惡)을 이루니, 이것을 늙는다[老]고 한다.”
다섯째는 명근(命根)이 쇠악함이니 목숨이 다하고 죽음이 가까워서 조그만 죽을 인연을 견디지 못하는 까닭이다.
010_0765_a_11L五者命根衰惡,壽盡死近,及少緣死,不堪忍故。
비구여, 저 네 가지의 출생하는 모습 가운데 또 여섯 가지 죽음의 차별이 있으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진경사(盡竟死)이며, 둘째는 부진경사(不盡竟死)이며, 셋째는 자상사(自相死)이며, 넷째는 부진경사분(不盡竟死分)이며, 다섯째는 진경사분(盡竟死分)이며, 여섯째는 비시시사(非時時死)이다. 비구여, 그 중에 자상사라는 것은 식이 몸 안에서 나와 딴 곳으로 가고 색근(色根)이 멸하여 부서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비구여, 명색 등이 출생하는 모습이 생ㆍ노ㆍ사와 더불어 이러한 차별이 있다.”
010_0765_b_02L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만약 이 섭취연생(攝聚緣生)과 전출(轉出)을 12분(分)으로 말하건대 몇 가지가 능섭취분(能攝聚分:能引)이며, 몇 가지가 소섭취분(所攝聚分:所引)이며, 몇 가지가 능전출분(能轉出分:能生)이며, 몇 가지가 소전출분(所轉出分:所生)입니까?”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간략히 말하면 몇 가지의 모양으로 연생을 알 수 있겠습니까?”
010_0765_b_21L比丘白佛:“大德,幾相略說緣生可知?”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략 세 가지의 상을 말하면 연생을 알 수 있으니, 첫째는 부동연생(不動緣生)의 모습니리하(泥梨賀)를 번역하면 부동이니, 이것은 공(空)의 뜻이다. 공인 까닭에 움직임이 없다.이며, 둘째는 무상연생(無常緣生)의 모습이며, 셋째는 감능연생(堪能緣生)의 모습이다.”
010_0765_c_02L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네 가지의 연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인연과 무간연(無間緣)구역은 차제연(次第緣)이다.과 반연(攀緣)과 증상연(增上緣)또 생연(生緣)이라고도 한다.입니다. 대덕이시여, 그 중의 어떠한 연들로써 무명이 행에게 연이 되며 내지 어떠한 연(緣)들로써 생이 노사에게 연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모든 행은 더욱 같은 상[同相]을 움직여 생기는[轉生] 까닭에 내가 네 가지의 연을 말하니, 이들 뜻에서 오직 증상연(增上緣)만이 무명이 행을 연하고 내지 생이 연이 되어 노사가 있다고 설한다. 그 증상연에 다시 불상착(不相著)과 상착(相著)이 있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어떤 것이 불상착증상연(不相著增上緣)이며, 어떤 것이 상착증상연(相著增上緣)입니까?”
010_0765_c_10L比丘白佛:“大德,何者是不相著增上緣,何者是相著增上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바르지 못한 생각이 생기기 전에는 순면(順眠:수면)이 모든 행에 집착[著]하지 않고 연이 된다. 만약 생긴 뒤에는 곧 서로가 집착[著]한다. 비구여, 그 바르지 못한 생각이 행과 합하고 6식신(識身)과 화합하여 함께 나니, 생긴 것이 멸하지 않으면 식과 서로 집착하지 않고 연을 지으며, 만약 생긴 것이 멸하면 곧 서로가 집착한다.
비구여, 죽음에 이르지 않은 식(識)은 명색(名色)에게 집착하여 연을 짓는 것이 아니다.범본(梵本)에는 “식(識)은 명색(名色)에게 집착하여 연을 짓는 것”이라는 이 구절≺句≻이 역시 없다. 식이 명색에 대한 것이 이와 같은 것처럼 거두어 모인[攝聚:所引] 명색(名色)이 전출(轉出:所生)한 명색에게도 그러하며, 명색이 명색에 그러한 것과 같이 6입(入)이 6입에게, 촉(觸)이 촉에게, 수(受)가 수에게도 또한 그러하다. 무명이 행에 그러한 것과 같이 무명이 갈애에게, 갈애가 취에게, 취가 유에게도 또한 그러하다. 식이 명색에 그러함과 같이 명색들이 명색들에게도 그러하며, 유가 생에게도 그러하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인(因)은 어떠한 뜻으로써 볼 수 있으며, 연(緣)은 어떠한 뜻으로써 볼 수 있으며, 유(由)는 어떠한 뜻으로써 볼 수 있겠습니까?”
010_0766_a_08L比丘白佛:“大德,因以何義可見,緣以何義可見,由以何義可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뒤에 날 곳의 종자를 안치(安置)하는 까닭에 인의 뜻을 볼 수 있으며, 반드시 주지(住持)하여 그 생이 전출(轉出)하게 하는 까닭에 연의 뜻을 볼 수 있으며, 죽은 뒤에 태어날 곳으로 나아가고 향하여 태어나게 하는 까닭에 유의 뜻을 볼 수 있다.”
1)법상의 차례로 보아 “6입(入)과 촉(觸)”은 촉에 해당하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이 경의 이역본인 『분별연기초승법문경(分別緣起初勝法門經)』에는 이 부분이 “6촉처(觸處)”로 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6입(入)과 촉(觸)”은 “6촉입” 정도의 단어로 대치되어야 옳다.
2)앞에서 낙수(樂受)가 나왔으므로 새로운 수[新受]라는 것은 고수(苦受)를 말한다. 문장에 괴로움을 느끼면 싫어하여 여읜다고 하였으니, 내용상으로도 신수는 고수를 의미한다. 이역본인 『분별연기초승법문경』에도 이 부분이 “고수(苦受)”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