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010_0773_a_09L故知像顯可徵,雖愚不惑,形潛莫睹,在智猶迷。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010_0773_b_02L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010_0773_c_02L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010_0774_a_02L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010_0774_b_02L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여러 대덕들이여, 세존께서는 일찍이 무량한 법문으로 12분(分)의 매우 깊은 연기(緣起)를 말씀하셨습니다. 최초에 무명(無明)을 말씀하셔서 연기의 성품[緣性]으로 삼으셨는데, 무슨 인연(因緣)으로 일체의 번뇌와 모든 행(行)의 연(緣)에서 오직 무명만을 연기의 성품이라 하셨을까? 이 무명에서 어떠한 특별함을 보셨을까?”
이 때문에 곧 시비(是非)가 일어났다. 그때 세존께서 하늘에 머물러 노니시다가, 사람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 귀[天耳]로 이 일을 들으셨다.
010_0774_b_22L由是因緣,便興諍論。于時世尊,遊於天住,以超過人淸淨天耳,聞如是事。
010_0774_c_02L 해가 저물 무렵에 선정에서 나와 안적당에 나아가셔서 대중 앞에 평상시와 같이 자리를 펴고 가부좌를 맺고 앉으시어 맑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무슨 까닭에 이 법당에 모여서 시비를 일으키는가?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의논하려고 이 법당에 모였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런 까닭에 갑자기 시비(是非)를 일으켰으며, 저희들은 이것을 토론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습니다.”
010_0774_c_11L世尊!我等由是因緣,便興諍論,我等今者爲論是事於此集會。”作是語已。
그때 세존께서 그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다음과 같은 분별연기초승법문(分別緣起初勝法門)이 있으니,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지극히 잘 생각하여라. 너희들에게 말하리라. 어떤 것이 분별연기초승법문인가? 이른바 열한 가지의 특별한 일 때문에 연기의 처음에 무명을 선설하여 인연의 성품을 삼는다. 어떤 것이 열한 가지인가?
이른바 소연이 특별한 점[所緣殊勝]과 행상이 특별한 점[行相殊勝]과 인연이 특별한 점[因緣殊勝]과 등기가 특별한 점[等起殊勝]과 전이가 특별한 점[轉異殊勝]과 사행이 특별한 점[邪行殊勝]과 상상이 특별한 점[相狀殊勝]과 작업이 특별한 점[作業殊勝]과 장애가 특별한 점[障礙殊勝]과 수박이 특별한 점[隨縛殊勝]과 대치가 특별한 점[對治殊勝]이다.”
010_0775_a_02L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무명의 연하는 바인 소연(所緣)은 곧 일체 세간의 인(因)이거나 과(果)로서, 여러 가지 허물과 모든 잡염(雜染)의 품류가 있고, 또 일체 인이거나 과로써 여러 가지 공덕(功德)과 모든 청정(淸淨)의 품류가 있다. 이것이 무명의 소연이 특별한 점이다.”
어떤 것이 무명이 널리 일체의 번뇌의 잡염과 모든 업의 잡염과 모든 생의 잡염에 대하여 능히 인연의 근본 의지가 된다고 하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제법에 두 가지의 어리석음이 있어서 능히 일체 번뇌의 잡염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고, 생긴 것은 더욱 넓어지게 하며, 일체 업의 잡염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고, 생긴 것은 쌓이게 하며, 또한 일체의 생의 잡염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고, 생긴 것은 물러나지 않게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무명은 혹 오는 세상의 고제(苦諦)에 포섭되는 뒷몸[後有] 자체에 어리석거나, 혹은 현재의 고제에 포섭되어 이미 얻은 자체에 어리석으니, 이러한 어리석음에는 혹 능인(能引)과 소인(所引)의 연기가 있고, 혹 능생(能生)과 소생(所生)의 연기가 있다. 이 두 가지의 연기는 현재와 오는 세상의 자체를 어리석게 하는 까닭에 무명이 등기의 연을 삼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제1의 무명(無明)이 연이 되어 행(行)이 있고, 행이 연이 되어 식(識)이 있고, 식이 연이 되어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이 연이 되어 6처(處)가 있고, 6처가 연이 되어 촉(觸)이 있고, 촉이 연이 되어 수(受)가 있으니, 이것을 능인과 소인의 연기라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제2의 무명이 연이 되어 수(受)가 있고, 수가 연이 되어 애(愛)가 있고, 애가 연이 되어 취(取)가 있고, 취가 연이 되어 유(有)가 있고, 유가 연이 되어 생(生)이 있고, 생이 연이 되어 노사(老死)가 있으니, 이것을 능생ㆍ소생의 연기라고 한다.”
010_0775_c_02L 만약 현재의 법에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못한 경계에 집착하면 삿된 분별 때문에 비복행(非福行)을 짓는다. 그가 살림살이[資具]에 대하여 탐착하는 까닭에, 혹은 원수지고 미운 이에게 진에(瞋恚)를 내는 까닭에, 그리고 상응할 때에 공덕과 허물을 능히 결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이러한 악행을 짓되 뒷몸에 있을 과실은 능히 생각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니, 무명의 행상은 능히 이러한 비복행의 연이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잘 헤아려 생각하고 닦으면, 비록 착한 마음[善心]이 있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게 뜻을 내어 사유한 까닭에18) 뒷몸의 어리석음에 이끌린다. 이른바 뒷몸에 대하여 특별한 공덕을 보는 것도 어리석어 덮고 감추기[癡覆藏] 때문이며, 벗어남을 보는 것도 어리석어 덮고 감추기 때문이다.
뒷몸의 새로 생길 종자를 포섭해 지니는 까닭에 오는 생[當生] 가운데에 뒷몸이 일어날 것이니, 포섭된 명색ㆍ6처ㆍ촉ㆍ수가 차례로 난다. 이 명색들은 현재에 이미 얻은 이숙식 안에서 다만 원인의 성품만 일으키고 결과의 성품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다만 소인의 연기라고 한다. 이것을 제1의 무명이 능인ㆍ소인의 연기에게 등기의 인연이 된다고 한다.”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제2의 무명이 능생ㆍ소생의 연기에게 등기의 연이 되는 것입니까?”
010_0775_c_22L復言:“世尊!云何名爲第二無明與其能生所生緣起作等起緣?”
010_0776_a_02L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이들은 현재에 이미 얻은 스스로의 몸[自體]에 어리석어서 6촉처(觸處)를 연해서 수(受)가 생기는데, 이내 그에 맛들이고 탐착한다. 맛들이고 탐착하는 까닭에 다음 생을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들은 수를 바라고 구하는 까닭에 취를 낸다. 낙수(樂受)에서 일어난 애(愛)를 연하는 까닭에 욕취(欲取)가 발생한다.
욕취라는 것은 모든 욕구를 망령되이 분별하고 탐착하는 것이니, 이것이 우두머리가 된다. 이를 앞잡이로 하여 욕계(欲界)의 모든 번뇌가 있는 것이다.
010_0776_a_06L言欲取者,謂於諸欲,妄分別貪,此爲上首。此爲前行,便有欲界一切煩惱。
만약 또 고수(苦受)를 연하면 무유애(無有愛)가 생기니, 함께 싫어하여 멀리 여의려는 행을 한다. 이는 싫어하여 멀리 여의려는 것과 상응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가 애(愛)에 의지하여 그릇된 방편으로 구하기를 때가 없이 하면, 출리악견(出離惡見)ㆍ정기악견(定期惡見)과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의지가 되는 악견(惡見)을 낸다.
만약 욕탐을 여의거나 혹은 색탐(色貪)을 여의면 색계(色界)의 애(愛)와 무색계(無色界)의 애가 생처(生處)를 얻게 된다. 그가 색계 혹은 무색계에서 번뇌를 일으킬 때에 색계와 무색계의 취를 일으킨다. 이들 모든 색계나 무색계의 번뇌와 그리고 모든 소견을 말미암아, 색계의 애가 연이 되어 취가 있고, 무색계의 애가 연이 되어 취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애(愛)가 연이 되어 취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먼저 갖가지 행소(行所)를 얻어 이숙과식(異熟果識)을 훈습하는 것을 취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취가 섭수하는 것을 말미암아 먼저부터 쌓아 모았던 행들의 종자이거나, 혹은 이곳저곳에서 애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곳저곳의 공능이 현재에 나타나서 뒷몸을 내니, 그들의 행 따위로 말미암아 존재[有]가 마땅히 난다.
이러한 뜻으로 하여 유는 생을 연한다 하는 것이다. 생이 이미 이루어지면 먼저 시간의 변이를 일으키니 노(老)라 하고, 최후로 목숨이 다하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생이 노사를 연한다 하니, 이러한 것을 제2의 무명이 능생ㆍ소생의 연기에게 등기연(等起緣)이 된다고 한다.”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무슨 까닭에 애(愛)와 취(取)의 두 가지 능생연기(能生緣起)는 행(行)에게 연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010_0776_b_08L復言:“世尊!何緣不說愛取二種,能生緣起與行爲緣?”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애(愛)와 취(取)의 두 가지는 자기의 경계에 시행하는 분제가 있는 까닭이니 무슨 뜻인가? 욕계의 애와 취는 색계 혹은 무색계의 모든 부동행에게 등기연이 될 수 없으니, 경계가 아닌 까닭이다. 욕계의 애와 취, 두 가지를 말함에 부동행에 의한다 함과 같다.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애와 취의 두 가지는 비복행(非福行)에 대하여 연이 되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010_0776_b_17L復言:“世尊!何緣欲界愛取二種,不與非福、福行爲緣?”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현전의 모든 유(有)인 애(愛)와 비애(非愛)의 경계는 증상(增上)한 힘인 까닭에 욕애(欲愛)를 내고, 착하지 못한 근을 일으켜 비복행을 지으니, 일체가 모두 인과 과에 의한다. 비복행의 안에는 허물을 모르거나 그 즐거워하는 마음[意樂]에 과실이 있는 까닭이다.
010_0776_c_02L만약 욕애에 의하여 모든 복행을 지으면 그는 신(信)으로써 의지를 삼아 이러한 행을 짓는다. 사(死)와 생(生)에서 결정된 신심을 일으킨 까닭에 먼젓번의 애(愛)와 취(取)는 신심에 의하여 섭복(攝伏)되고, 아시설(我施設)은 유부무기(有覆無記)가 된다.
010_0777_a_02L 그러나 무유(無有)에 대하여는 여실하지 못하고, 무지로 말미암는 까닭에 모든 유를 참으로 대치하는 도리를 얻지 못한다. 또 무지인 까닭에 대치가 아닌 것에 대하여 대치라는 생각을 일으키며, 모든 복행, 혹은 부동행을 지을 때도 이러한 도리에 말미암는다. 이와 같이 모든 행은 오직 무명으로써 연을 삼고, 애와 취는 모든 행의 연이 되지 않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의 식신과 복ㆍ비복, 그리고 부동행과 상응하여 함께 있으면서 같이 생기고 같이 멸하는 것으로서 이숙식(異熟識) 안에 모든 행을 안치하고, 종자를 훈습하여 다른 생의 새로운 이숙식이 인발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를 말미암으니, 이 까닭에 행이 연이 된다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오는 세상[當來]엔 앞뒤의 차례로 생기는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010_0777_a_15L世尊告曰:“彼於當來,先後次第而生起故,如是而說。”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명색ㆍ6처ㆍ촉ㆍ수를 일러서 오는 세상에 생길 몸의 모습이라 하십니까?”
010_0777_a_16L復言:“世尊!何緣名色、六處、觸、受,說爲當來生身之相?”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저것과 이것이 인(因)을 말미암아 수용(受用)하여 의지(依止)하는 것이며, 또 이것과 그것이 인하여 수용하는 체(體)인 까닭이다.”
010_0777_a_18L世尊告曰:“由彼是因,受用依止。及是其因受用體故。”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명(名)만 생기고 도무지 색(色)이 없으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77_a_19L復言:“世尊!若唯名生都無其色,斯有何過?”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일생 동안 오직 명뿐이며, 색성(色性)에 의지하지 않으면 상속하여 생겨날 도리가 없다.”
010_0777_a_21L世尊告曰:“若一生中,唯有其名,不依色住,相續生起不應道理。”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색만 생기고 명이 도무지 없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77_a_22L復言:“世尊!若唯色生都無其名,斯有何過?”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색뿐이며 명이 없으면 집수(執受)는 부서지고 자라나지 못하리라.”
010_0777_a_24L世尊告曰:“若唯有色無名,執受卽應散壞,不得增長。”
010_0777_b_02L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식은 6처에만 연이 된다고 말하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77_b_02L復言:“世尊!若但說言識緣六處,斯有何過?”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생(生)을 받을 때는 6처가 아직 원만치 못하고 다만 신근과 의근(意根)만이 움직이니, 그러므로 이 양근(兩根)을 말미암아 본체를 삼지 않을 수 없다. 명색(名色)이 최초에 있는 까닭에 차례차례 자라나서 후에 원만한 6처에게 연이 된다. 그러므로 명색이 6처의 연이 된다고 한다.”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6처가 원만하면 태어난 몸[生身]은 구경(究竟)한데, 무슨 까닭에 다시 촉(觸)과 수(受)를 말씀하십니까?”
010_0777_b_07L復言:“世尊!若六處滿生身究竟,何緣復說觸、受二種?”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태어난 몸이 6처가 이미 원만하면 수용하여 의지할 것[所依]은 구경하지만, 수용이 구경하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인함[因]과 받아들임[受]을 말미암아 비로소 수용이 구경하다 하리라. 그러므로 반드시 수용하여 의지할 것[所依]이 구경한 것과 수용의 인체(因體)가 구경하여야 바야흐로 태어난 몸이 구경하다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애(愛)에 세 가지가 있다. 마땅히 일시에 세 가지가 함께 일어날 것이니, 애가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觀待]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가 연이 되는 까닭에 일시에 일어나지 않으니, 이러한 도리에 의하여 무명만이 애(愛)에게 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010_0777_c_02L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애가 유에게만 연이 되고 취에게 연이 되지 않는다 하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까?”
010_0777_b_24L復言:“世尊!若唯說愛與有作緣,不緣於取,斯有何過?”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바라고 구하는 것[希求]을 애라 하니, 험한 악취(惡趣)를 바라고 구하는 이는 없지만, 지은 비복행을 말미암는 까닭에 선취(善趣)를 구하나, 어긋나는 결과를 낸다. 그 결과가 생길 때에 어찌 애를 연하겠는가? 응당 취(取)만으로 그의 연을 삼는다.
또 말한 바와 같이 애(愛)가 없으면 바라고 구하는 것이 없고, 바라고 구하는 것이 없을 때에는 복행과 부동행을 짓는 까닭에 어긋나는 결과를 낸다. 이러한 결과를 낼 때에 어찌 애를 연하겠는가? 다만 취(取)만이 그의 연이 된다고 말한다. 이 도리에 의하여 다만 애는 유의 연이 되지 않는다 말할 뿐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에 종자를 내림이 있어 생이 있으니, 이로부터 쉼 없이 자라나서 생하고, 이로부터 쉼 없이 태(胎)에서 나와 생하고, 이로부터 쉼 없이 자라나 생한다. 이미 성장한 뒤에는 말[言說]을 수용하여 능히 등생(等生)하니, 이러한 종류를 차례차례 생긴다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명근(命根)의 힘에 의하여 잠시 머무르니, 분한법(分限法)인 까닭에 그의 성품은 무상(無常)하며, 무상한 법에서 이렇게 생긴다. 곧 이러한 네 가지 태어난 몸[生身]의 모습은 시분(時分)에 따라 변하고 달라져서 다섯 가지의 쇠손(衰損)을 지으니. 이것을 늙는다[老]고 함을 알아야 한다.”
010_0778_b_02L 셋째는 작업(作業)이 쇠손함이니 말을 하려면 상기가 되고, 숨을 쉬기가 더욱 급해지는 것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까닭이며, 섰으면 곧 꾸부러지는 것은 허리와 등에 모두 힘이 없는 까닭이며, 앉았으면 곧 수그러지는 것은 몸이 약한 까닭이며, 다닐 적에 반드시 지팡이를 요구하는 것은 몸이 허약한 까닭이며, 무릇 생각할 때에 정신이 우둔한 것은 생각이 어두워지고 어지러운 까닭이다.
다섯째는 명근(命根)의 쇠손이니 수명이 곧 다하려 하여 죽음이 가까웠거나, 어떠한 죽을 연을 만나면 견디지 못하는 까닭이다.
010_0778_b_06L五者命根衰損,壽量將盡,鄰近死故,遇少死緣,不堪忍故。
곧 이 네 가지의 태어난 몸의 모습에 다시 여섯 가지의 죽는 모습이 차별되어 있으니, 첫째는 구경사(究竟死)이며, 둘째는 불구경사(不究竟死)이며, 셋째는 자상사(自相死)이며, 넷째는 불구경사분차별상(不究竟死分差別相)이며, 다섯째는 구경사분차별상(究竟死分差別相)이며, 여섯째는 시비시사(時非時死)임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욕계에 태어난 몸[生身]의 모습이 가장 추한 까닭이며, 나타내기 쉬운 까닭이며, 영원히 해탈한 것이 아니어서 도에서 물러나 돌아오기 때문이다.”
010_0778_b_17L世尊告曰:“欲界生身相最麤故,易顯了故,非永解脫退還道故。”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먼저부터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인의 연기(引緣起)와 모든 생의 연기[生緣起]에 12분(分)이 있다 하셨습니다. 모든 분(分) 가운데 얼마를 능인(能引)이라 하고, 얼마를 소인(所引)이라 하며, 얼마를 능생(能生)이라 하고 얼마를 능소(能所)라 합니까?”
010_0778_c_02L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라. 이 12분 가운데 무명과 행과 식이 1분이 되어 능인이라 하고, 식과 명색ㆍ6처ㆍ촉ㆍ수가 1분이 되어 소인이라 한다. 다시 수와 애ㆍ취ㆍ유가 1분이 되어 능생이라 하며, 생과 노사를 소생이라 한다. 마땅히 알라. 1분은 명색ㆍ6처와 더불어 촉ㆍ수이니, 또한 소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