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부처님께서 갖가지 보배 꽃으로 장엄한 남쪽 해안가 능가산(楞伽山) 꼭대기에서 대비구승(大比丘僧)과 여러 다른 불국토에서 찾아온 대보살(大菩薩) 무리와 함께 계셨다.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삼매(三昧)와 자재력(自在力)과 신통력(神通力)으로 유희(遊戱)하였으며, 대혜보살마하살(大慧菩薩摩訶薩)을 우두머리로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손수 그들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 주시니, 스스로 마음에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그 뜻을 잘 알게 되었으며, 온갖 중생의 갖가지 심색(心色)과 한량없이 많은 해탈의 문[度門]이 근기에 따라 두루 나타났다. 그리고 다섯 가지 법과 자성(自性)과 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를 구경(究竟)까지 통달하였다.
모든 선정(禪定)의 무량함과 모든 음신(陰身)의 왕래 정수(正受)와 멸진정(滅盡定) 삼매(三昧)에서 깨어나는 마음 설명하리라.
010_0786_b_15L諸禪定無量, 諸陰身往來, 正受滅盡定,
三昧起心說。
심(心)과 의(意)와 식(識) 무아(無我)와 다섯 가지 법(法) 자성(自性)과 생각[想]과 생각하는 대상[所想] 그리고 현전(現前)의 이견(二見),
010_0786_b_17L心意及與識, 無我法有五,
自性想所想, 及與現二見,
승(乘)과 모든 종성(種性)과 금(金)과 은(銀)과 마니(摩尼) 등 일천제(一闡提)와 대종(大種)과 황란(荒亂)과 일불(一佛),
010_0786_b_18L乘及諸種性,
金銀摩尼等, 一闡提大種, 荒亂及一佛,
지혜와 이염(爾焰)과 얻음[得]과 향함[向] 중생의 있음과 없음 코끼리와 말과 모든 금수를 어떻게 잡아들이는가 하는 것,
010_0786_b_19L智爾焰得向, 衆生有無有, 象馬諸禽獸,
云何而捕取,
비유와 인(因)으로 실단(悉檀)을 이루는 것 그리고 짓는 자[作]와 지어진 것[所作] 울창한 숲 같은 미혹(迷惑)과 통함과 심량(心量)과 현전(現前)에 있지 않음,
010_0786_b_21L譬因成悉檀, 及與作所作,
鬱林迷惑通, 心量不現有,
모든 경지가 서로 이르지 않는 것 백 번 변하되, 백 번 받지 않는 것 의방론(醫方論)과 공교론(工巧論) 기술(伎術)과 모든 명처(明處),
010_0786_b_22L諸地不相至,
百變百無受, 醫方工巧論, 伎術諸明處,
010_0786_c_02L 모든 산과 수미산과 땅 큰 바다와 해와 달의 크기 하중상(下中上)의 중생 몸에 각각 얼마나 많은 미진(微塵)이 있고 각각의 국토에 얼마나 미진이 있으며 궁궁(弓弓)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팔꿈치 길이와 걸음 폭과 구루사(拘樓舍) 반유연(半由延)과 유연(由延),
대혜야, 이 108구는 과거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너를 비롯한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010_0787_c_18L大慧!是百八句,先佛所說,汝及諸菩薩,摩訶薩應當修學。”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식(識)에는 몇 종류의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이 있습니까?”
010_0787_c_20L爾時大慧菩薩摩訶薩復白佛言:“世尊!諸識有幾種生住滅?”
010_0788_a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식에는 두 가지의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이 있으니,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식에는 두 가지의 생김이 있으니 유주생(流注生)과 상생(相生)이고, 두 가지의 머묾이 있으니 유주주(流注住)와 상주(相住)이며, 두 가지의 없어짐이 있으니 유주멸(流注滅)과 상멸(相滅)이다. 모든 식에는 세 종류의 상(相)이 있으니, 전상(轉相)과 업상(業相)과 진상(眞相)이다.
대혜야, 간략히 말하면 세 종류의 식(識)이 있고, 자세히 말하면 여덟 가지 상(相)이 있다. 무엇이 세 종류인가? 진식(眞識)과 현식(現識) 그리고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이 모든 색상(色像)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으니, 현식에 색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다.
대혜야, 현식과 분별사식 이 두 가지는 무너지는 모습[壞相]과 무너지지 않는 모습[不壞相]이 번갈아 인(因)이 된다. 대혜야, 부사의훈(不思議薰)과 부사의변(不思議變)은 현식(現識)의 인이다. 대혜야, 갖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과 끝없는 옛날부터의 망상훈(妄想薰)은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인이다. 대혜야, 만약 저 진식(眞識)을 덮고 있는 온갖 진실하지 않은 것들과 모든 허망한 것들이 없어지면 모든 근식(根識)이 없어진다. 대혜야, 이것을 ‘상(相)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혜야, 상속(相續)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속하는 원인[所因]이 없어지면 상속이 없어지고, 말미암는 곳[所從]이 없어지거나 반연하는 대상[所緣]이 없어지면 상속이 없어지는 것이다. 대혜야, 왜냐하면 이것이 그 의지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것이란 끝없는 옛날부터의 망상훈(妄想薰)을 말하고, 반연하는 것이란 자기 마음과 견해 등으로 경계를 인식하는 망상을 말한다. 마치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금(金)과 장엄구(莊嚴具)도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대혜야, 전식(轉識)과 장식(藏識)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전식의 인(因)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없어지면 장식 역시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체의 진상(眞相)은 실제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혜야, 자체 진상의 식(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업상(業相)이 없어질 뿐이니, 만약 자체의 진상이 없어진다면 곧 장식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010_0788_b_02L대혜야, 장식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외도들의 논의인 단견(斷見)과 다르지 않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지면 식(識)의 상속 역시 없어진다. 만약 식의 상속이 없어진다면 끊임없는 옛날부터의 상속 역시 끊어져야 한다.’
대혜야, 이것이 바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등정각(等正覺)의 성자성제일의의 마음[性自性第一義心]이다.여기에서 ‘마음≺心≻’은 범음(梵音)으로 간율대(肝栗大)이다. 간율대는 송나라 말로 마음≺心≻이라고 하는데 나무의 심지와 같다는 뜻이다. 이는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念慮心≻이 아니다.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은 범음으로 질다(質多)라고 한다. 성자성제일의의 마음으로써 여래는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과 출세간상상법(出世間上上法)을 성취하고, 성스러운 혜안(慧眼)으로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들어가서 건립하니, 그 건립된 것은 외도가 주장하는 악한 견해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대혜야, 무엇이 외도가 주장하는 악한 견해와 같은 것인가? 이는 자기의 경계인 망상견(妄想見)에 대해서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인 줄 알지 못해 한계[分際]를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성품에 성자성제일의(性自性第一義)가 없어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의 논의를 짓는다.
또, 대혜야, 망상으로 인한 3유(有)의 고통이 없어짐, 무지(無知)와 애업(愛業)의 인연이 없어짐, 자기 마음에 나타난 환과 같은 경계를 견해에 따라 이제 설명하겠다.
010_0788_b_23L復次,大慧!妄想三有苦滅,無知愛業緣滅,自心所現幻境隨見。今當說。
010_0788_c_02L 대혜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종자가 없이[無種] 또는 종자가 있어서[有種] 인과가 나타난다고 하고, 일[事]과 시간[時]이 머문다고 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생김을 반연해 머문다고 하며, 혹은 생기고 나서 없어진다고 말한다면, 대혜야, 그들이 말하는 상속(相續)ㆍ일[事]ㆍ생김[生]ㆍ있음[有]ㆍ열반(涅槃)ㆍ도(道)ㆍ업(業)ㆍ과(果)ㆍ진리[諦]는 모든 법을 파괴하는 단멸론(斷滅論)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실에서 시초(始初)를 볼 수 없으니, 분(分)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깨어진 병이 병으로 쓰일 수 없는 것과 같고, 또 볶은 씨앗에서 싹이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은 이미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자기 마음의 망상견(妄想見)이어서 인(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차례로 생김이 없다.
대혜야, 만약 또 종자가 없는 것, 종자가 있는 것, 식(識), 이 세 가지 연(緣)이 합해서 생긴다고 말한다면, 거북이에게 당연히 털이 나야 할 것이고 모래에서는 당연히 기름이 나와야 할 것이니, 너의 주장은 틀린 것이며 결정된 이치에 어긋난다. 종자가 있다거나 종자가 없다는 말을 하는 데에는 이러한 잘못이 있으므로 하는 일이 모두 공(空)하여 의의[義]가 없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가 세 가지 연(緣)이 화합하여 생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어진 방편과 인과의 자상,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종자가 있는 모습과 종자가 없는 모습이 본래부터 사물을 이룬다는 각상지(覺想地)를 이어받고 굴러서는, 스스로 허물과 습기를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악견(惡見)의 해(害)를 받아 마음이 비뚤어지고 정신이 헷갈려 지혜가 없으면서, 망령되게 일체지(一切智)의 말이라고 칭한다.
대혜야, 만약 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자성(自性)을 떠난 것이 뜬 구름이나 불을 돌려 생기는 바퀴 모양[火輪]이나 건달바성(揵闥婆城)이나 생긴 적이 없는 환(幻)이나 아지랑이나 물에 비친 달이나 꿈과 같음을 본다면, 내외의 마음으로 나타난 망상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지만 자기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망상의 인연이 완전히 사라진다.
010_0789_a_02L 그가 망상으로 말[說]과 말의 내용[所說], 관(觀)하는 자와 관하는 대상을 모두 벗어나고, 몸의 장식(藏識)을 수용하고 건립하여 식경계(識境界)의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인 것과 서로 응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무소유(無所有) 경계에서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을 벗어나 자심으로 따라 들어가고 분별한다면, 대혜야, 이러한 보살은 오래지 않아 생사와 열반이 평등해지고 대비교방편(大悲巧方便)과 무개발방편(無開發方便)을 얻으리라.
삼계가 환과 같은 줄 이해하고 분별하여 관찰하면 반드시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게 되고,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것이어서 공한 것임을 헤아리면 반야바라밀에 머물게 되며, 저것이 일으켜 짓는 방편을 버리고 떠나면 금강유삼마제(金剛喩三摩提)를 얻는다. 그리고 여래의 몸에 따라 들어가고 여여(如如)한 변화에 들어가, 신통이 자재하며 자비스러운 방편으로 장엄을 다 갖춘다. 그리고 평등하게 모든 불국토와 외도가 들어가는 곳에 들어가며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을 벗어나니, 이 보살은 점차 몸을 바꿔 여래의 몸을 얻을 것이다.
대혜야, 그러므로 여래에 따라 들어가는 몸을 얻으려면 반드시 음(陰)ㆍ계(界)ㆍ입(入)과 마음이 인연하여 일으키는 방편과 생기고 머물고 없어지는 거짓된 망상을 멀리 벗어나야 한다. 오직 마음만으로 곧장 나아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되고 허물인 망상과 습기로 인하여 3유(有)가 있음을 관찰하고, 무소유의 부처님 경지는 생기는 것이 아님을 사유하면, 자각성(自覺聖)에 이르고 자기 마음이 자재한 데에 나아가며 개발(開發)이 없는 행에 이를 것이다.
010_0789_b_02L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의 모습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신 것입니다. ‘자기 마음과 자기의 견(見) 등으로 반연하는 경계와는 화합하지 않는다’ 하신 것은, 모든 말씀이 진실한 모습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능가국(楞伽國) 마라야산(摩羅耶山) 바다 속 주처(住處)의 대보살들에게 마음[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가 찬탄한, 바다의 파도 같은 장식(藏識)의 경계가 법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인연 때문에 안식(眼識)이 움직인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줄 깨닫지 못하는 것,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고 허물인 물질에 습기로 계착하는 것, 식(識)의 성품이 원래 그러한 것, 갖가지 색상(色相)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대혜야, 이를 네 가지 인연이라고 하니, 물이 흐르는 곳처럼 장식이 움직여 식의 물결이 일어난다.
대혜야, 마치 큰 바다에 맹렬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으니, 바깥 경계의 바람이 마음 바다에 불어 식의 파도가 끊이지 않는다. 인(因)과 만들어진 모습[所作相]이 다르다 다르지 않다 하며, 업의 생상(生相)에 밀착하고 깊이 들어가 계착하며 물질 등의 자성을 명료하게 알지 못하므로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 구른다.
저들이 각각 무너지는 모습과 함께 움직인다고 경계를 분별하고 차별을 나누는 것이다. 저들의 움직임은 수행자가 선삼매(禪三昧)에 들어갔을 때, 미세한 습기가 움직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서 ‘식이 없어진 후에 삼매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은 식이 없어져 삼매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습기의 종자가 없어지지 않은 까닭에 없어진 것이 아니다. 경계의 움직임과 받아들임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한량없는 국토에서 모든 부처님이 관정(灌頂)하고, 자재력과 신통과 삼매를 얻으며, 모든 선지식과 불자가 권속이 되리니, 그런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은 자기 마음에 나타난 자성의 경계이다. 그는 허망한 생각과 생사라는 유위(有爲)의 바다, 업애(業愛)와 무지(無知) 등 이와 같은 인(因)을 모두 초월하고 건넌다. 그러므로 대혜야, 모든 수행자는 가장 훌륭한 선지식을 가까이해야 한다.”
망상으로 알 경계가 아니며 성문(聲聞)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불쌍히 여기는 이[哀愍者]가 말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은 자가 알 경계이니라.
010_0790_b_12L妄想非境界,
聲聞亦非分, 哀愍者所說, 自覺之境界。
또 대혜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과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는 대상과 망상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모여 쌓인 세속의 습관과 잠[睡眠]을 없애야 하며, 초저녁부터 한밤중을 지나 새벽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 각오(覺悟)하고 방편을 써서 수행하여야 하며, 악견(惡見)의 경론(經論)과 모든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하며, 자기 마음에 나타난 망상의 모습을 막힘없이 환히 알아야 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지혜상(智慧相)을 건립하여 머물고 나면, 높은 성지(聖智)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한다.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배우고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소유(無所有)의 모습과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스스로 원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自願處相]과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구경의 모습을 말한다. 수행하여 이것들을 얻고 나면, 능히 어리석은 마음과 지혜의 모습을 버리고 보살의 제8지(地)를 얻게 되니,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모습을 닦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010_0790_c_02L대혜야, 무소유의 모습이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모습을 말하니, 저들이 닦고 익혀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스스로 원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自願處相]이란, 모든 과거의 부처님께서 스스로 원한 곳에서 수행하여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자각성지의 구경의 모습이란, 모든 법의 모습에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이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는 것을 말하니, 모든 불지(佛地)에 나아가는 행으로 생긴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108구(句)가 의지하는 ‘성지사로써 자성을 분별하는 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시여, 이것을 분별해 말씀해 주시면, 보살마하살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망상자성(妄想自性)에 들어갔더라도, 망상자성을 분별하여 말씀해 주셨으므로 곧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人)과 법(法)이 무아(無我)인 줄 두루 관찰하고 망상을 깨끗이 없앨 것이며, 밝게 모든 지위를 비추어 모든 성문과 연각과 모든 외도와 모든 선정(禪定)을 초월할 것이며, 여래께서 행하시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관찰하여 마침내 확실히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을 버리고 벗어나서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신(法身)의 지혜로 훌륭히 스스로 장엄할 것입니다. 그리고 환(幻) 같은 경계를 초월하여 모든 불국토와 도솔천궁(兜率天宮)과 색구경천궁(色究竟天宮)에 올라가 여래의 상주법신(常住法身)을 얻게 될 것입니다.”
010_0791_a_02L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일종의 외도는 무소유에 대해 망상으로 계착하여 ‘인(因)이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는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낸다.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은 의미로 불법(佛法)에서도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대혜야, 또 어떤 다른 외도들은 종(種)ㆍ구나(求那)ㆍ극미(極微)ㆍ다라표(陀羅驃)ㆍ형처(形處)라는 구성법[橫法]들이 각각 차별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고 나서는 ‘토끼 뿔이 없음’을 구성하는 법에 계착하여 ‘소에게는 뿔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대혜야, 만약 다시 있고 없음을 벗어나 토끼에 뿔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이를 삿된 생각[邪想]이라고 한다. 그는 관찰하고 나서 토끼가 뿔이 없다 한 것이니,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티끌만큼이라도 사물의 성품을 분별하면 모두 옳지 않다. 대혜야, 성인의 경계는 소에게 뿔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지도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관찰하고서 망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망상이란 상대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니, 마치 저 뿔에 의지해서 망상이 생긴 것과 같다. 뿔에 의지해서 망상이 생겼기 때문에 ‘인(因)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망상과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벗어나며, 그러므로 관찰해서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을 ‘뿔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만약 또 망상이 뿔과 다르다면 뿔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요, 만약 망상과 뿔이 다르지 않다면 그것을 인(因)한 까닭에 티끌까지 분석하고 추리해 구하여도 모두 얻을 수 없으니, 뿔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저 뿔도 역시 참 성품이 아니다. 둘 다 성품이 없다면, 어떠한 법이 어떤 이유로 ‘없다’고 말하느냐? 대혜야, 만약 없기 때문에 뿔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토끼가 뿔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생각[想]을 가지지 말라. 대혜야, 바르지 않은 인(因)으로 인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대혜야, 허공은 곧 물질이니, 물질의 무리에 따라 들어간다. 대혜야, 물질은 곧 허공이니, 지니고 갖춰진 처소(處所)에서 세운 품성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허공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대혜야, 4대(大)가 생길 때 자상(自相)이 각각 다르고 또한 허공에 머무르지 않으나, 그 속에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소에 뿔이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토끼에 뿔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야, 쇠뿔이 있다고 한다면 쪼개면 티끌이 되고, 또 티끌을 분별하면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니, 소의 어느 곳을 보겠느냐? 그러므로 ‘없다’고 한다. 만약 그 밖의 다른 물질을 ‘본다’고 말한다면, 그 법도 역시 그러하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토끼의 뿔이나 쇠뿔이나 허공이나 물질이 다르다는 망상의 견해를 벗어나야 한다. 너희들 모든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는 망상을 잘 생각하고 모든 불국토의 보살들에게 따라 들어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는 방편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쳐라.”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차츰차츰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암라과(菴羅果)가 차츰차츰 익는 것이지 단박에 익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는 것도 이와 같아 차츰차츰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도예가(陶藝家)가 그릇을 만들 때 차례로 이루는 것이지 단박에 이루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아서 차례로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대지(大地)에서 차례로 만물이 생기며 단박에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아 차츰차츰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장식(藏識)이 단박에 분별하여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과 자신이 안립하고 수용하는 경계를 아는 것처럼, 저 모든 의불(依佛)도 이와 같아[의(依)를 호본(胡本)에서는 진이(津膩)라고 했는데 화불(化佛)을 뜻하니, 이는 진불(眞佛)의 일부이다] 단박에 중생이 처한 경계를 성숙시켜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 색구경천(色究竟天)에 편안히 있게 한다.
010_0792_a_02L 이는 마치 법불(法佛)이 지어낸 의불(依佛)의 광명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깨달은 성인들도 역시 이와 같아, 법상(法相)에 대해서 성품이 있다고 하고 성품이 없다고 하는 저들의 악견(惡見) 망상(妄想)을 비추어 없애 준다. 대혜야, 법불(法佛)과 의불(依佛)은 ‘모든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들어가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습기의 인(因)이 되며, 상속하는 망상으로 자성에 계착하는 인이 되어 갖가지 진실하지 않은 환(幻)에 갖가지로 계착하는 것이므로 얻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또 대혜야, 연기자성(緣起自性)에 계착하므로 망상자성(妄想自性)의 모습이 생긴다. 대혜야, 마치 재주 많은 요술쟁이가 풀이나 나무나 기와나 돌로 갖가지 환을 만들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형색을 보고 갖가지 망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그 모든 망상 역시 진실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연기자성에 의해 망상자성의 모습이 생기는 것이니, 갖가지 망상심(妄想心)과 갖가지 망상의 기능[行事]과 갖가지 망상의 모습으로 습기망상(習氣妄想)에 계착한다. 대혜야, 이를 망상자성의 모습이 생기는 것이라 하고, 이를 ‘의불(依佛)의 설법’이라 한다.
대혜야, 법불(法佛)이란, 마음의 자성상(自性相)을 벗어나고 성인이 연(緣)한 경계를 스스로 깨달아 건립하고 시행하는 것이다. 대혜야, 화불(化佛)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그리고 마음의 지혜를 말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벗어나 해탈할 것을 말하며, 식의 모습을 분별하고 관찰하여 건립함으로써 외도의 물질이 없다는 견해를 초월할 것을 말한다.
대혜야, 또 법불은 반연(攀緣)과 반연할 바를 벗어나며, 모든 지은 바의 근량(根量)을 벗어나서 상이 멸한 것이다. 모든 범부나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가 계착하는 아상(我相)으로 계착할 경계가 아니니, 자각성지[自覺聖]의 끝까지 차별된 상으로 건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마땅히 열심히 닦고 배워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견해를 반드시 제거하고 없애야 한다.
010_0792_b_02L무엇을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얻은 성문이라고 하는가? 무상(無常)ㆍ고통(苦痛)ㆍ공(空)ㆍ무아(無我)의 경계가 진제(眞諦)이므로 욕심을 벗어나 적멸(寂滅)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과 자상(自相)과 공상(共相)과 그 밖에 무너지지 않는 상(相)을 쉬고는 마음이 고요히 멈추었음을 여실히 알며, 그리고 마음이 고요히 멈춘 뒤에는 선정해탈(禪定解脫)과 삼매도과(三昧道果)와 정수해탈(正受解脫)이 습기의 부사의한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벗어나지 않고, 스스로 자각성지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이다. 이를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얻은 성문이라고 한다.
대혜야, 자각성지의 차별된 즐거움을 얻어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멸문락(滅門樂)이나 정수락(正受樂)이 아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본원(本願) 때문에 증득하지 않는다. 대혜야, 이것을 성문이 자각성지의 차별된 모습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저들이 얻는 자각성지의 차별된 모습의 즐거움을 배우고 닦아서는 안 된다.
대혜야, 어떤 것이 망상의 성품을 자성으로 계착하는 모습의 성문인가? 이른바 4대(大)의 파랑ㆍ노랑ㆍ빨간ㆍ하양ㆍ단단함ㆍ축축함ㆍ따뜻함ㆍ움직임은 만들어낸 자상(自相)이나 공상(共相)이 아니라고 선대(先代)의 승선(勝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을 보고 나서 자성이라는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그러한 사실을 반드시 알고 반드시 버려 법무아(法無我)에 들어가 상을 없애고, 인무아(人無我)의 모습을 보고는 차례로 모든 지위를 상속해서 건립하여야 한다. 이를 모든 성문이 망상의 성품을 자성으로 계착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010_0792_c_02L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가 인연으로 영원함과 부사의를 얻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자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영원함과 부사의가 자상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인(因)해서 영원함과 부사의가 나타나겠느냐?
또 대혜야, 부사의가 만약 자상을 인해서 이루어진다면 저들은 당연히 영원함일 것이나, 짓는 자[作者]의 인상(因相)이므로 영원함과 부사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010_0792_c_04L復次,大慧!不思議若因自相成者,彼則應常。由作者因相故,常不思議不成。
대혜야, 내가 말한 제일의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제일의 인상(因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고, 스스로 깨닫는 상(相)을 얻기 때문에 상이 있으며, 제일의지(第一義智)의 인(因)이 있으니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는 까닭이다. 마치 지음이 없는 허공이나 완전히 없어진 열반과 같기 때문에 영원한[常] 것이다.
또 대혜야, 외도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영원한 성품[常性]이 없으니, 이상(異相)의 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인상(因相)의 힘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또 대혜야, 모든 외도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지어진 것들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에 있어서 무상(無常)함을 보고 나서 헤아려 ‘영원함[常]’을 꾀하는 것이다.
대혜야, 나도 역시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성품이건 성품이 아니건 무상한 것을 보고 나서, 자각성지의 경계에서 ‘저 영원함[常]은 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만약 저 외도가 인상으로 영원함과 부사의가 이루어진다면, 자상의 성품[性]과 성품이 아닌 것[非性]에 인한 것이니, 토끼의 뿔과 같다. 이 영원함과 부사의는 단지 말뿐인 망상이니, 모든 외도의 무리들은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단지 말뿐인 망상이어서 토끼의 뿔과 같아 자기 인상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010_0793_a_02L대혜야, 내가 말한 영원함과 부사의는 스스로 깨달음을 인하여 상을 얻은 까닭에 지어진 것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벗어나므로 영원한 것이니,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의 무상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영원함을 꾀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만약 또 밖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이 무상한 것을 헤아려 생각하고, 영원함을 꾀하여 부사의한 영원함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영원함과 부사의가 자기의 인상임을 모르는 것이므로 자각성지의 경계상(境界相)과 거리가 머니, 그들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또 대혜야, 모든 성문이 생사와 망상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나, 생사와 열반의 차별된 모든 성품이 망상이어서 성품이 아닌 줄 알지 못하고는, 미래에 모든 감관[根]과 경계를 억지로 쉬어서 열반이라는 생각을 지으니, 자각성지로 나아가서 장식(藏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범부는 3승(乘)이 있다고 말하고, 마음으로 헤아려 무소유(無所有)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또 대혜야, 모든 법은 불생(不生)이니, 이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에서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나타낸 것이니, 유(有)와 비유(非有)를 벗어난 생(生)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모든 성품은 불생이다. 모든 법이 토끼와 말 등의 뿔과 같거늘, 어리석은 범부가 사실과 다르게 망상을 부리니, 자성이 망상이기 때문이다.
010_0793_b_02L 대혜야, 모든 법은 불생이다. 자각성지가 나아가는 경계는 모든 성품이 자성상(自性相)이어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저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으로 두 가지 경계인 자성과 신재(身財)를 건립하여 자성상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대혜야, 장식의 받아들이는 모습과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서로 전전(展轉)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생기고 머물고 없어지는 것에 대해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에 떨어져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생각하며, 있다거나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하는 망상을 일으키니, 현성(賢聖)은 그렇지 않다. 대혜야, 이것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라.
어떻게 성문승무간종성인 줄 아는가? 만일 말씀을 듣고 음(陰)ㆍ계(界)ㆍ입(入)과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끊을 줄 알게 되며, 그때 온몸의 털구멍까지 흔열(欣悅)하여 즐겨 상지(相智)만 닦고 연기하여 깨달음을 일으키는 상(像)을 닦지 않으면, 이를 성문승무간종성이라고 한다.
성문무간(聲聞無間)은 제8지를 보고 기번뇌(起煩惱)는 끊으나 습기번뇌(習氣煩惱)는 끊지 못하며, 부사의한 변역사(變易死)는 헤아리지 못하고 분단사(分段死)만 안다. 그리하여 곧 사자후를 하되 ‘나의 생사(生死)는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을 이미 이루었으며 뒤의 세상에 몸[後有]을 받지 않음을 여실(如實)하게 안다’ 하고는, 인무아(人無我)를 닦고 익혀 마침내 열반에 든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대혜야, 각별무간(各別無間)이란, 아(我)와 인(人)과 중생(衆生)과 수명(壽命)과 장양(長養)과 사부(士夫)이니, 저 모든 중생이 이러한 깨달음을 지어 열반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또 어떤 다른 외도가 ‘모든 것은 주재하는 작자(作者)로부터 연유한다’고 하면서 모든 성품을 보고 나서 ‘이는 곧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지으면 법무아견(法無我見)은 그들의 몫이 아니므로, 그들에게는 해탈이 없다.
대혜야, 이런 모든 성문승은 외도종성(外道種性)과 간격이 없어서,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고 저 악견(惡見)을 바꾸었다고 여기므로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010_0793_b_19L大慧!此諸聲聞乘無閒外道種性,不出出覺,爲轉彼惡見故,應當修學。
010_0793_c_02L대혜야, 연각승무간종성(緣覺乘無間種性)이란, ‘제각기 무간(無間)을 따라 반연한다’는 말을 듣고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 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울며, ‘모든 반연을 가까이하지 않고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갖가지 자신(自身)과 온갖 신통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면서 갖가지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이런 말을 들을 때는 그 마음이 따라 들어가는 자이다. 만약 그가 연각승무간종성인 줄 알았다면 수순(隨順)하여 그를 위해 연각승(緣覺乘)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를 연각승무간종성(緣覺乘無間種性)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여래승무간종성(如來乘無間種性)에는 네 가지가 있다. 자성법(自性法) 무간종성과, 자상법(自相法)을 벗어나는 무간종성과, 자각성지(自覺聖智)를 깨닫는 무간종성과, 바깥 국토를 수승하게 하는 무간종성이다. 대혜야, 만약 이 네 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자기 마음이 신재(身財)를 나타내 부사의한 경계를 건립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를 여래승무간종성(如來乘無間種性)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부정종성(不定種性)이란, 저 세 가지 종성을 말할 때 말하는 데에 따라 들어가고, 그들이 말대로 이루는 것이다.
010_0793_c_11L大慧!不定種性者,謂:說彼三種時,隨說而入,隨彼而成。
대혜야, 이것이 처음으로 터를 닦는 것이니, 이른바 종성을 건립하는 것이다. 무소유(無所有)의 경지로 뛰어넘어 들어가기 위해 이러한 건립을 세우는 것이다. 저 장식(藏識)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저절로 번뇌의 습기가 깨끗해 질 것이며, 법무아(法無我)를 보아 삼매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은 반드시 여래의 가장 훌륭한 몸을 얻게 될 것이다.”
수다반나과(須陀槃那果) 일왕래(一往來)와 불환과(不還果) 아라한(阿羅漢)을 얻어도 이들은 마음이 미혹하고 산란하다.
010_0793_c_18L須陁槃那果, 往來及不還, 逮得阿羅漢,
是等心惑亂。
3승(乘)과 1승과 승(乘) 아닌 것을 내가 말하였으니 어리석은 사람 지혜가 적고 모든 성인은 고요함마저 멀리 벗어난다.
010_0793_c_20L三乘與一乘, 非乘我所說,
愚夫少智慧, 諸聖遠離寂。
제일의(第一義) 법문은 두 가지 가르침을 멀리 벗어나고 무소유에 머무니 어찌 3승을 세울 것인가.
010_0793_c_21L第一義法門,
遠離於二教, 住於無所有, 何建立三乘。
모든 선(禪)과 무량(無量) 등과 무색삼마제(無色三摩提)는 느낌과 생각, 모두 없어 고요하고 또한 헤아리는 마음도 없다.
010_0793_c_22L諸禪無量等, 無色三摩提, 受想悉寂滅,
亦無有心量。
010_0794_a_02L 대혜야, 저 일천제(一闡提)도 일천제가 아니니, 세간의 해탈을 누가 굴리겠는가? 대혜야, 일천제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선근(善根)을 버리고 무시중생(無始衆生)을 발원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선근을 버리는 것인가? 보살장(菩薩藏)을 비방하고 또 악한 말로 ‘이것은 수다라(修多羅)ㆍ비니(毘尼)ㆍ해탈하는 말에 수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니, 모든 선근을 버리는 까닭에 열반에 들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일천제(菩薩一闡提)는 모든 법이 본래 열반에 든 것임을 알고 나서 끝내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니, 모든 선근을 버린 일천제와는 다르다. 대혜야, 모든 선근을 버린 일천제는 다시 여래의 신통력으로 혹시 선근이 생기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래는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일천제는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연기자성은 사상(事相)의 모습과 행으로써 사상의 모습[相]임을 드러낸다. 계착에는 두 가지 망상자성이 있으니, 이는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세운 것으로서 명상으로 계착하는 모습[名相計着相]과 사상으로 계착하는 모습[事相計着相]이다.
010_0794_b_02L명상으로 계착하는 모습이란 안팎의 법을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고, 사상으로 계착하는 모습이란 안팎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 가지 망상자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의지나 반연으로 생기면 이를 연기라고 한다. 무엇이 성자성(性自性)인가? 명상과 사상의 망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성지(聖智)가 얻는 것이며, 자각성지(自覺聖智)들이 행하는 경계이다. 이를 성자성이라고 하니, 여래의 장심(藏心)이다.”
무엇이 인무아인가? 나와 나의 것과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벗어나고 무지(無知)와 업(業)과 애(愛)가 생기는 일도 없으며, 안색(眼色) 등이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식(識)을 일으키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감관[根]은 자기 마음이 기세간[器]과 유정[身]을 나타내는 장(藏)이며, 자기 망상의 모습이 시설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고 종자와 같고 등(燈)과 같고 바람과 같고 구름과 같아 찰나찰나에 전전(展轉)하며 무너진다.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원숭이와 같으며, 더러운 곳을 좋아하는 것이 날아다니는 파리와 같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바람이나 불과 같다.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의 인(因)이 되는 것은 두레박의 바퀴와 같아서 생사취(生死趣)에 윤전(輪轉)하며 온갖 몸을 받으니, 환술(幻術)의 신통스런 주문으로 조화를 부려 만들어 놓은 상(像)을 일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모습을 잘 아는 것을 인무아지(人無我智)라고 한다.
010_0794_c_02L무엇을 법무아지(法無我智)라고 하는가? 음ㆍ계ㆍ입이 망상자성(妄想自性)이어서 음ㆍ계ㆍ입이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므로, 음ㆍ계ㆍ입이 모여 쌓인 것이 업(業)과 애(愛)의 속박으로 인해 전전하여 서로 반연하여 생기되, 실은 동요함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벗어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범부들은 망상의 힘으로 진실하지 않은 망상의 모습을 일으키나 성현은 그렇지 않으니, 마음ㆍ의(意)ㆍ식(識)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모든 법이 무아인 줄 잘 분별해야 한다. 법무아를 잘 분별하면, 보살마하살은 오래지 않아 반드시 초지(初地) 보살의 무소유관지(無所有觀地)의 모습을 얻어 관찰하여 각지(覺智)를 개발(開發)하고 환희하게 되며, 차례로 나아가 9지의 모습을 뛰어넘어 법운지(法雲地)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무량한 보배로 장엄한 커다란 보배 연꽃과 커다란 보배 궁전을 건립하니, 환(幻)과 자성의 경계를 닦고 익혀 생기는 것이다. 그 위에 앉으면 같은 부류의 모든 보살 권속들이 둘러싸고, 모든 불국토에서 온 부처님들이 마치 전륜성왕이 태자에게 관정을 해 주듯이 손으로 관정을 해 주며, 불자(佛子)의 지위를 초월하여 스스로 깨달은 성법취(聖法趣)에 이르러 여래의 자재한 법신(法身)을 얻게 된다. 이는 법무아를 보았기 때문이니, 이를 법무아의 모습[法無我相]이라고 한다. 너희들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건립하고 비방하는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마하살이 건립하고 비방하는 두 극단에 치우친 악견(惡見)을 벗어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게 해 주시고, 깨달은 뒤에는 영원하다[常]고 건립하고 단멸한다[斷]고 비방하는 견해를 벗어나 정법(正法)을 비방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 이 게송의 뜻을 거듭 펴시고자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있지 않은데 있다고 건립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있지 않은 상(相)을 건립하는 것, 있지 않은 견(見)을 건립하는 것, 있지 않은 인(因)을 건립하는 것, 있지 않은 성품을 건립하는 것이니, 이를 네 가지 건립이라고 한다. 또 비방이란, 그들이 세운 무소득(無所得)에 대하여 분에 맞지 않다고 관찰하고는 비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들을 비방하고 건립하는 모습이라 한다.
또 대혜야, 무엇을 있지 않은 상(相)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하는가? 음(陰)ㆍ계(界)ㆍ입(入)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없다. 그런데도 계착(計着)을 일으켜 ‘저것은 이것과 같다’, ‘저것은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있지 않은 상(相)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 있지 않은 상을 건립하는 망상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고 허물인 온갖 습기로 계착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야, 있지 않은 인(因)을 건립하는 모습이란, 처음에 식이 인이 없이 생기므로 후에도 진실하지 않음이 환(幻)과 같아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닌데, 눈[眼]과 빛깔[色]과 안계(眼界)와 생각으로 ‘앞에서 식이 생겼고 생기고 나서 실제로 있다가 그리고 나서 다시 파괴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있지 않은 인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있지 않은 성품을 건립하는 모습이란, 허공(虛空)ㆍ멸(滅)ㆍ열반(涅槃)은 짓는 것이 아닌데 계착하여 성품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는 성품도 성품이 아닌 것도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업은 토끼나 말 등의 뿔과 같고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垂髮]처럼 나타난 것이므로, 있음과 있지 않음을 벗어난다. 건립과 비방은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으로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을 잘 관찰하지 못한 것이니, 현성은 그렇지 않다. 이를 있지 않은 성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건립하고 비방하는 악견을 벗어나는 법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마치 여러 가지 색깔을 띤 여의보주(如意寶珠)와 같이 일체 불국토 모든 여래의 대중 집회에 널리 나타나, 모든 법은 환(幻)과 같고 꿈과 같고 해 그림자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는 경법(經法)을 듣는다. 그리하여 모든 법에 있어서 생멸(生滅)과 단상(斷常)을 벗어나고, 성문이나 연각의 법을 벗어나며, 백천 삼매와 나아가 백천억 나유타 삼매를 얻는다.
삼매를 얻고 나서는 모든 불국토를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천궁(天宮)에 태어나 삼보를 선양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 보여 성문과 보살 대중이 둘러싸면,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고, 바깥 경계의 성품[性]과 성품 없음[無性]을 분별하여 연설함으로써 모든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등의 견해를 멀리 벗어나게 한다.”
마음의 크기와 같은 세간을 불자는 관찰하라. 종류(種類)의 몸이 짓는 행위를 벗어나고 힘을 얻어 신통해지면 자재(自在)를 성취하리라.
010_0795_b_16L心量世閒, 佛子觀察, 種類之身,
離所作行, 得力神通, 自在成就。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해 모든 법이 공(空)하고, 생김이 없고[無生], 둘이 없으며[無二], 자성상(自性相)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들과 나머지 모든 보살들이 이 공(空)과 생김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과 자성상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망상을 떠나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입니다.”
010_0795_c_02L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大慧白佛言:“善哉!世尊!唯然受教。”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공공이란, 곧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처하는 곳이다. 대혜야, 망상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은 ‘공이란 생김도 없고 다름도 없어 자성상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대혜야, 공을 간략히 일곱 종류의 공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모습이 공한 것[相空], 성자성이 공한 것[性自性空], 행이 공한 것[行空], 행이 없음이 공한 것[無行空], 모든 법이 말을 떠나 공한 것[一切法離言說空], 제일의인 성지가 크게 공한 것[第一義聖智大空], 그곳에 그것이 공한 것[彼彼空]이다.
무엇이 모습이 공하다는 것인가? 모든 성품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공한 것을 말한다. 전전(展轉)하여 모여 쌓인 것을 관찰하므로 성품이 없음을 분별하여 자상과 공상이 생기지 않고, 자성(自性)도 타성(他性)도 구성(俱性)도 성품이 없기 때문에 모습이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성의 모습이 공하다고 한다.
무엇이 성자성(性自性)이 공하다는 것인가? 자기의 성자성은 생겨나지 않나니, 이를 모든 법의 성자성이 공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성자성이 공하다고 말한다.
010_0795_c_12L云何性自性空?謂:自己性自性不生,是名一切法性自性空。是故說性自性空。
무엇이 행이 공하다는 것인가? 음(陰)은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났으니, 이루어진 업[所成業]과 지어진 업[所作業]의 방편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이를 행이 공한 것이라 한다. 대혜야, 이와 같이 행이 공하나 전전하여 연(緣)으로 일어나며, 자성의 성품이 없으므로 이를 행이 없음이 공한 것이라 한다.
010_0796_a_02L무엇이 그곳에 그것이 공하다는 것인가? 그곳에 그것이 없어서 공한 것을 말하니, 이를 그곳에 그것이 공하다고 한다. 대혜야, 마치 녹자모(鹿子母)의 집에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양 등은 없고 비구들은 없는 것이 아닐 때, ‘저것이 공하다’고 말하면 집[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집과 집의 성품이 공(空)하다는 것이 아니고, 비구와 비구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 아니며, 다른 곳에 코끼리나 말이 없다는 말도 아닌 것과 같다. 이를 모든 법의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모든 법의 자상은 그곳에 그것이 없다. 이를 그곳에 그것이 공한 것이라 한다.
이를 일곱 가지 공(空)이라고 한다. 그곳에 그것이 공한 공이 가장 거친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멀리 벗어나야 한다.
010_0796_a_05L是名七種空。彼彼空者,是空最麤,汝當遠離。
대혜야,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니, 삼매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고는 ‘생김이 없다[無生]’고 한다. 자성을 벗어나면 곧 이것이 생김이 없는 것이다. 자성을 벗어나 찰나마다 상속(相續)하며 흘러 들어 다른 성품이 나타나므로, 모든 성품이 자성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성품이 자성을 벗어난다.
무엇이 둘이 없다[無二]는 것인가? 모든 법이 차거나 뜨겁고, 길거나 짧고, 검거나 흰 것처럼 두 가지 법인 듯하나, 대혜야 모든 법은 둘이 아니다. 열반이 저 생사가 아니고 생사가 저 열반이 아니니, 다른 모습인 것은 성품이 있음을 인하기 때문이다. 이를 둘이 없는 것이라 한다. 열반과 생사처럼 모든 법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공하고, 생김이 없고, 둘이 없고, 자성상(自性相)을 벗어난 것임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
내가 항상 공한 법을 말하여 단(斷)과 상(常)을 멀리 벗어나게 하니 생사는 환(幻)과 같고 꿈과 같으나 저 업은 무너지지 않는다.
010_0796_a_15L我常說空法, 遠離於斷常, 生死如幻夢,
而彼業不壞。
허공(虛空)과 열반(涅槃) 두 가지를 없애는 것 역시 이와 같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망상을 짓고 모든 성인은 있고 없음을 떠난다.
010_0796_a_17L虛空及涅槃, 滅二亦如是,
愚夫作妄想, 諸聖離有無。
이때 세존께서 다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공하고 생김이 없고 둘이 없어 자성상(自性相)을 떠나면, 두루 모든 부처님의 모든 수다라(修多羅)에 들어간다. 모든 경은 다 이 뜻을 말한 것이다. 모든 수다라는 일체 중생의 희망하는 마음을 따르는 까닭에 그들을 위해 분별하여 그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니, 진실이 실재로 말에 있는 것은 아니다.
010_0796_b_02L 마치 갈증 난 사슴이 미치고 미혹되어 사슴 무리를 보고는 그 모습을 물이라고 계착하지만 거기에는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수다라에서 말한 모든 법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일 뿐, 진실한 성지(聖智)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뜻에 의지해야지 말에 집착하지는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