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다라(修多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장(如來藏)은 자성(自性)이 청정하니 32상을 굴려 모든 중생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이는 값진 보석이때 묻은 옷에 싸여 있는 것과 같다. 여래장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으나 음(陰)ㆍ계(界)ㆍ입(入)의 더러운 옷에 싸이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진실하지 않은 망상과 번뇌에 더럽혀진다. 이는 모든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한 여래장은 외도가 말하는 나[我]와는 다르다. 대혜야, 나는 언젠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여실제(如實際)ㆍ법성(法性)ㆍ법신(法身)ㆍ열반(涅槃)ㆍ자성을 여읨[離自性]ㆍ생기지 않음[不生]ㆍ없어지지 않음[不滅]ㆍ본래의 적정함[本來寂靜]ㆍ자성열반(自性涅槃) 등의 구(句)를 말하였다. 또 여래장을 말한 뒤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어리석은 사람이 ‘내가 없다[無我]’는 구절에 두려운 생각을 내는 것을 끊어 주려고 망상을 벗어난 무소유 경계인 여래장의 문을 말한 것이다.
010_0797_a_02L 여래도 이와 같아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 모든 망상의 모습을 벗어난 것이지만 갖가지 지혜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써서 여래장(如來藏)이라 말하기도 하고 무아(無我)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여래장이라고 말한 것이지 외도가 말하는 나[我]와는 다르다. 이를 여래장을 설하는 것이라 한다.
나[我]에 계착하는 모든 외도를 이끌어 깨우치기 위해서 여래장을 설한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아견(我見)의 망상을 벗어나고 3해탈문(解脫門)의 경계에 들어가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얻기를 희망하게 하려고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여래장이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외도가 말하는 나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외도의 견해를 벗어나기 위해 무아인 여래장에 의지해야만 한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해야 수행자의 대방편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을 잘 분별하는 것,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관찰하는 것,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벗어나는 것,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수행자의 대방편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010_0797_b_02L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잘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삼계는 오직 마음의 범위[分齊]일 뿐이고,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 있으며, 동요하지 않고 오가는 것을 벗어나 있으며,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에 훈습된 것이다. 삼계는 온갖 물질과 행에 묶인 것이고, 신재(身財)를 건립하여 망상이 입(入)을 따라 나타난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잘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꽃이나 꿈 등의 모든 성품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과 습기가 원인임을 알고, 모든 성자성(性自性)을 관찰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잘 관찰하면, 이를 보살마하살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 한다.
입(入)에 따른 자기 마음의 범위일 뿐이다. 따라서 바깥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알고, 식(識)이 생기지 않고 연(緣)도 모이지 않음을 알고, 망상이 연으로 생기는 것인 줄을 알고, 삼계 내외(內外)의 모든 법이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성을 벗어나는 것인 줄을 알아 생긴다는 견해[生見]가 모두 없어진다. 환 등과 같은 모든 법의 자성을 알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며, 무생법인을 얻고 난 뒤에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벗어난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잘 분별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벗어나는 것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뜻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마치 마음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신속하고 빠르며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뜻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마치 마음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석벽이 장애되지 않는 것과 같다. 저 다른 나라가 한량없는 유연(由延)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전에 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잊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쏟아 끊어지지 않게 하면 몸에 장애되지 않고 그곳에 나타난다.
010_0797_c_02L대혜야, 이와 같이 뜻대로 나타나는 몸은, 보살마하살의 뜻대로 나타나는 몸의 여환삼매(如幻三昧)와 동시에 함께한다. 그 힘이 자재하고 신통하며 묘한 모습으로 장엄한 성스러운 종류의 몸이 일시에 함께 나타난다. 마치 뜻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엔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본원(本願)의 경계를 잊지 않고 생각하는 데 따라 중생을 성숙시키고,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어 즐거워하게 한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을 얻어 제8 보살지에 머물러 심ㆍ의ㆍ의식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과 두 가지 무아의 모습인 몸을 버리고, 뜻대로 나타나는 몸을 얻고 자각성지를 얻어 즐거워한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수행자의 큰 방편을 얻는 것이라 하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010_0797_c_10L是名菩薩摩訶薩成就四法,得修行者大方便。當如是學。”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세존께 청하였다. “저희를 위해 일체 모든 법의 연(緣)과 인(因)의 모습을 설명해 주십시오. 연과 인의 모습을 깨달음으로써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은 모든 성품이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망견(妄見)을 벗어나 망상의 견해가 차례로 또는 함께 생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에는 두 가지 연(緣)의 모습이 있으니, 밖의 것과 안의 것이다. 외연(外緣)이란, 진흙덩이나 기둥이나 바퀴나 밧줄이나 물이나 나무나 사람의 공력과 같은 모든 방편의 연이 있어 병(甁)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진흙으로 만든 병처럼 실로 짠 천이나 새끼를 꼬아 만든 자리나 씨앗의 싹이나 낙(酪)이나 소(酥) 등도 방편이 연이 되어 생기는 것이 역시 이와 같다. 이를 외연이라고 하며 전후로 바뀌어 생긴다.
무엇을 내연(內緣)이라고 하는가? 무명(無明)이나 애(愛)나 업 등의 법을 ‘연(緣)’이라 할 수 있고, 그 법으로부터 생긴 음(陰)ㆍ계(界)ㆍ입(入)의 법을 ‘연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차별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망상으로 이를 ‘내연법(內緣法)’이라고 한다.
010_0798_a_02L대혜야, 저 인(因)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당유인(當有因)ㆍ상속인(相續因)ㆍ상인(相因)ㆍ작인(作因)ㆍ현시인(顯示因)ㆍ대인(待因)이다. 당유인이란 인을 짓고 나서 안팎의 법이 생기는 것이고, 상속인이란 반연(攀緣)을 짓고 나서 안팎의 법이 음의 종자 등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또한 상인이란 끊임없는 모습을 지어 모습이 계속하여 생기는 것이고, 작인이란 증상사(增上事)를 짓는 것이니 전륜왕과 같다. 현시인이란 망상사(妄想事)가 생기고 나서 모습을 짓고 지어진 것이 나타나는 것이니, 등불이 물질 등을 비추는 것과 같다. 대인이란 없어질 때 상속하는 것이 끊어져 망상의 성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대혜야, 이런 것들은 어리석은 범부가 자기 스스로 분별하는 모습이다. 모든 법은 차례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함께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함께 생긴다면 짓는 자와 지어진 것의 분별이 없을 것이니, 인(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차례로 생긴다면 아상(我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례로 생기지 않음은 마치 아들이 생기지 않으면 아버지라는 명칭이 없는 것과 같다.
대혜야, 차례로 생겨 방편이 상속한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다. 망상(妄想)일 뿐이니, 반연ㆍ차제연(次第緣)ㆍ증상연(增上緣) 등을 인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차례로 생긴다고 하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니, 망상자성(妄想自性)으로 계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차례로 또는 함께 생기는 것도 아니니,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상(自相)과 공상(共相),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도, 대혜야, 차례로 생기지도 않고 함께 생기지도 않는다. 자기 마음이 나타낸 깨닫지 못한 망상 때문에 상(相)이 생기는 것은 제외한다. 이런 까닭에 인연이 짓는 일과 방편의 모습이 차례로 또는 함께 일어난다는 견해를 벗어나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언설망상상심경(言說妄想相心經)』이것은 위의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경’과 같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를 비롯한 다른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이 『언설망상상심경』을 잘 알게 된다면 말[言說]과 말의 내용[所說] 두 가지 뜻에 통달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고, 말과 말의 내용 두 가지로써 모든 중생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언설이란 자기 망상에 따라 물질의 모습에 계착해서 생기는 것이다. 몽언설이란 과거에 지나온 경계를 기억해서 생각함에 따라 생기는 것이니, 깨고 나면 그 경계는 성품도 없이 생긴 것이었다. 과거에 계착한 언설망상이란 과거에 원한으로 지은 업이 기억을 따라 생기는 것이다. 끝없는 옛날부터의 언설망상이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것에 계착한 허물이 종자습기(種子習氣)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이를 네 가지 언설망상의 모습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과 망상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말은 망상으로 인해 생기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말과 망상이 다른 것이라면 망상은 이 말의 인(因)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말이 뜻을 드러내지 못해야 하는데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言說]이 곧 제일의(第一義)입니까, 말의 내용[所說]이 제일의입니까?”
010_0798_c_08L大慧復白佛言:“世尊!爲言說卽是第一義,爲所說者是第一義?”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은 제일의가 아니며 말의 내용도 제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제일의란 성인의 즐거움이니, 말이 들어가는 곳이 제일의이지 말이 제일의는 아니다. 제일의란 성지(聖智)가 스스로 깨달아 얻는 것이지 언설망상이 깨닫는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언설망상은 제일의를 드러내지 못한다. 말이란 생기고 없어지며 동요하고 전전하며 인연으로 생긴다. 전전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것은 제일의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대혜야, 자타(自他)의 모습이 성품이 없는 까닭에 말의 모습은 제일의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또 대혜야,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을 따라 들어가므로 온갖 모습과 바깥의 성품이니, 성품이 아니니 하는 언설망상은 제일의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혜야, 말과 모든 망상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
모든 성품은 자성(自性)이 없고 또한 말로 나타낼 수도 없다. 깊고 깊으며 공(空)마저 공한 뜻을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한다.
010_0798_c_22L諸性無自性, 亦復無言說, 甚深空空義,
愚夫不能了。
모든 성자성(性自性)과 언설법(言說法)은 그림자 같으니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불자여 실제(實際)를 내가 말하노라.
010_0798_c_24L一切性自性, 言說法如影,
自覺聖智子, 實際我所說。
010_0799_a_02L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있음[有]과 없음[無], 같음[一]과 다름[異], 함께함[俱]과 함께하지 않음[不俱], 있지 않음[非有]과 없지 않음[非無], 상(常)과 무상(無常)을 벗어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외도가 행하지 않는 것과 자각성지가 행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망상인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벗어나 제일(第一)의 진실한 뜻에 들어가는 모든 지위의 상속과 점차(漸次), 상상(上上)으로 증진하는 청정한 모습과 여래지상(如來地相)의 개발(開發)함이 없는 본원(本願), 갖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마니 구슬의 경계와 같은 끝없는 상(相)과 행(行),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세계의 부분적 모습인 일체 모든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심량(心量)이 어리석은 범부는 안팎의 성품을 취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에 의지하니, 이는 자성의 훈습된 인[習因]으로 망상에 계착하는 것이다. 마치 사슴 떼가 갈증에 시달리다가 봄에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고는 미친 듯이 달리며 물이 아닌 줄 모르는 것과 같다.
010_0799_b_02L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도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에 훈습된 3독(毒) 때문에 그 마음을 태우고 물질의 경계를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보고 안팎의 성품을 취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과 같은 생각에 떨어져 망견(妄見)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마치 건달바신(乾闥婆神)이 허공에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성(城)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이 무지하여 진짜 성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끝없는 옛날부터 습기로 계착한 생각이 나타난 것이지, 그 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므로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남녀ㆍ코끼리ㆍ말ㆍ수레가 오가고 성(城)ㆍ읍(邑)ㆍ정원ㆍ숲ㆍ산ㆍ강ㆍ연못 등 갖가지로 장엄한 곳에 자신이 들어간 꿈을 꾸고는 깬 뒤에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범부는 악견(惡見)에 갇혀 있고, 외도는 지혜로우나 꿈처럼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해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한다. 마치 그림에 그려진 사람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데 저 어리석은 범부들은 높다거나 낮다는 생각을 한다.
이와 같이 미래의 외도도 악견과 습기가 충만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여 스스로 무너지고 남도 무너뜨릴 것이다. 그 밖에 유(有)와 무(無)를 벗어난 무생(無生)을 주장하는 자들 역시 ‘없다[無]’고 말하며 인과(因果)의 견해를 비방하고, 선의 근본을 뽑아버리며, 청청한 인을 파괴할 것이다.
010_0799_c_02L이와 같이 외도는 망견(妄見)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해 정법(正法)을 비방하며 자기도 무너지고 남도 무너뜨린다. 이는 마치 불을 돌렸을 때 생기는 바퀴 모양[火輪]은 바퀴가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는 바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지혜로운 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이라는 생각에 의지해,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물거품이 보배 구슬인 마니(摩尼)와 비슷하다고,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마니 보배라 생각하고선 계착해서 쫓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물거품은 마니 보배도 아니고 마니 보배가 아닌 것도 아니니, 취하기도 하고 취하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도들은 망상과 습기에 훈습된 악견으로 무소유(無所有)인데도 ‘생겼다’고 말하고, 연(緣)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졌다’고 말한다.
대혜야, 심ㆍ의ㆍ의식과 몸과 마음이 변화되고,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모든 망상이 끊어져야 여래지(如來地)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것에 대해서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다시 수행자가 이와 같은 경계를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고 하여 받아들이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곧 장양(長養)을 취하는 것이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취하는 것이다.
대혜야, 만약 저 성자성(性自性)은 공상(共相)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화불(化佛)의 말이지 법불(法佛)의 말은 아니다. 또 모든 설명은 어리석은 범부가 희망하는 소견으로 생긴 것이다. 따로 자성으로 나아가는 법을 건립해, 성지(聖智)의 자각삼매(自覺三昧)를 얻어 즐겁게 머무는 사람을 위해 분별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니다.
010_0800_a_02L이는 마치 물에 나무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그림자도 아니고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니며 나무 형태도 아니고 나무 형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의 견해는 습기에 훈습된 망상으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이라는 생각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이 연(緣)을 따라 모든 물질의 형상을 나타내지만 망상이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형상도 아니며 형상이 아닌 것도 아닌데, 형상과 형상 아닌 것을 보는 망상의 어리석은 범부는 형상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惡見)으로 자기 마음에 형상이 나타난 것을 망상으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의 견해에 의지한다.
이는 마치 초목이 없는 대지에 뜨거운 아지랑이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일렁이는 파도나 구름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성품이 아니며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탐할 것이 없는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에 훈습된 망상으로 계착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에 의지하여 스스로 머무는 문(門)을 반연하니, 역시 저 뜨거운 아지랑이를 일렁이는 파도로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주술의 기능을 일으켜 무정물[非衆生數]로 비사사(毘舍闍) 귀신을 방편으로 합성하여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면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으로 오고 간다고 계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니, 희론(戱論)에 계착된 것이며, 진실한 건립이 아니다.
나타나는 모든 성품 그림이나 더운 날 아지랑이 같고 나타나는 온갖 여러 가지 물질 꿈과 같아 무소유(無所有)이다.
010_0800_b_16L一切性顯現, 如畫熱時炎,
種種衆色現, 如夢無所有。
“또 대혜야, 여래의 설법은 다음과 같은 네 구(句)를 벗어난다. 그것은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이다. 유(有)와 무(無)의 건립과 비방을 벗어나 진제(眞諦)ㆍ연기(緣起)ㆍ도(道)ㆍ멸(滅)ㆍ해탈(解脫)을 분별하고 결집하니, 여래의 설법은 이것을 으뜸으로 한다. 성품[性]이 아니고 자재(自在)도 아니며, 무인(無因)도 아니고 미진(微塵)도 아니며, 시(時)도 아니고 자성상속(自性相續)을 설법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인가? 성문과 연각과 외도 수행자가 인무아(人無我)와 성품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골쇄관(骨鎖觀)과 무상(無常)과 고(苦)와 부정상(不淨相)으로 계착하여 관찰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과 다르지 않게 관찰하고는 전후로 전진(轉進)하는 생각을 끊어 없애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禪)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열반이란 성지(聖智)가 스스로 깨닫는 경계이므로 단(斷)과 상(常)의 망상,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난다. 왜 상이 아닌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망상을 끊었으므로 상이 아니다. 왜 단이 아닌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성인이 스스로 깨닫게 되므로 단이 아니다.
대혜야, 열반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不壞] 죽는 것도 아니다[不死]. 만약 열반이 죽음이라면 다시 생(生)을 받아 상속하여야 할 것이며, 만약 무너지는 것이라면 유위상(有爲相)에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무너짐을 벗어나고 죽음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귀의할 곳이다.
또 대혜야, 두 종류의 자성상(自性相)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말의 자성상[言說自性相]에 계착하는 것과 사물의 자성상[事自性相]에 계착하는 것이다. 말의 자성상에 계착한다는 것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인 말에 계착하여 생기는 것이고, 사물의 자성상에 계착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나타낸 영역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 대혜야, 여래가 두 가지 신통력으로 건립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모든 부처님께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고 귀 기울여 듣고 이치를 여쭈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 신통력으로 건립하는 것인가? 삼매에 들어 일체의 몸을 나타내고 얼굴을 마주해 말하는 신통력, 손으로 관정(灌頂)하는 신통력이다.
010_0801_b_02L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초보살지(初菩薩地)에서 불신력(佛神力)에 머무니, 즉 보살대승조명삼매(菩薩大乘照明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삼매에 들어가고 나면 시방세계의 일체 부처가 신통력으로써 그들을 위해 모든 몸을 나타내고 얼굴을 마주해 말씀해 주시니, 금강장(金剛藏)보살마하살과 나머지 이와 같은 모습의 공덕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그들이다. 대혜야, 이들을 초보살지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얻는 보살삼매정수신력(菩薩三昧正受神力)은 백천 겁 동안 쌓은 선근으로 성취된 것이다.
차례로 모든 지위에서 대치(對治)하는 법과 대치해야 할 상(相)을 통달하여 완성하면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러 대연화미묘궁전(大蓮花微妙宮殿)에 머물고 큰 보배 연꽃 사자좌에 앉으며, 동류의 보살마하살 권속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여러 가지 보배 영락으로 그 몸을 장엄하여 마치 황금으로 만든 첨복(瞻蔔)꽃 같고 해와 달의 광명 같으며, 최승자(最勝子)들이 시방에서 찾아와 대연화 궁전의 윗자리에 앉아 그 정수리에 물을 부어 줄 것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모든 것을 분별하고, 삼매에 들어 신통력을 갖추고 설법하는 등, 이러한 모든 행을 하는 것은 모두 여래의 두 가지 신통력에 머물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떠나서 분별해 말할 수 있다면, 모든 범부도 역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통력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010_0801_c_02L대혜야, 산ㆍ바위ㆍ나무ㆍ모든 악기ㆍ성곽ㆍ궁전도 여래가 성(城)에 들어가면 그 위신력(威神力)으로 모두 저절로 음악 소리를 내거늘, 하물며 어찌 마음이 있는 자이겠는가?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벙어리 등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이들이 모두 해탈을 얻으리라. 여래에겐 이와 같이 한량없는 신통력이 있어 중생을 편안하고 이롭게 한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마업(魔業)과 번뇌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고, 성문지(聲聞地)의 선(禪)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여래의 스스로 깨달은 지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고, 얻은 법을 증진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모두 신통력으로 모든 보살마하살을 건립하는 것이다.
신통력 갖춘 인중존(人中尊) 큰 원(願)이 모두 청정하여 삼마제(三摩提)에서 관정하니 초지(初地)에서 10지까지이다.
010_0801_c_18L神力人中尊, 大願悉淸淨, 三摩提灌頂,
初地及十地。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연기법(緣起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인연을 말씀하셨으나 직접 도(道)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외도도 인연을 말하니, 승(勝)ㆍ자재(自在)ㆍ때[時]ㆍ미진(微塵)으로 생긴다고 하고 이와 같이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인연이 모든 성품을 생기게 한다는 말은 유간실단(有間悉檀)과 무간실단(無間悉檀)입니다.실단은 뜻≺義≻이라고 번역하며 종지≺宗≻ 혹은 이루다≺成≻ 혹은 침묵≺默≻이라고도 한다.
010_0802_a_02L 세존이시여, 외도도 있음이 없음에서 생긴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존께서도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생기고 나서는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명(無明)이 행(行)과 내지 늙음과 죽음의 연(緣)이 된다면, 이것은 곧 세존께서 인(因)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이런 설(說)을 세우셨지, 차례로 생긴다는 설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외도들이 말하는 승(勝)을 관찰해 보면 여래께서 말씀한 것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외도들이 말하는 인(因)은 인연을 따라 생겨 있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因)을 보면 사(事)가 있고, 사를 보면 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다면 인과 연이 어지럽게 섞일 것이며, 이와 같이 전전하여 무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인이 없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인과 연이 어지럽게 섞였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성품이 아니라는 말이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혜야,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면 자기 마음의 현량임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 경계의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허물이 있는 것이니, 내가 말한 연기는 아니다. 나는 항상 인과 연이 화합하여 모든 법이 생긴다고 말했지, 인이 없이 생긴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성품이 없어도 말을 만든다. 이를테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 등이니, 세상에서 현재 쓰고 있는 말이다. 대혜야,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단지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네가 말한 대로 말에 자성(自性)이 있어 모든 법이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너의 이론은 무너지는 것이다.
010_0802_b_02L대혜야, 모든 국토에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란 곧 모습을 짓는 것일 뿐이다. 혹 어떤 불국토에서는 바라보기만 하여도 법(法)이 드러난다. 어떤 국토에서는 모습을 짓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눈썹을 치켜 올리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눈동자를 굴리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웃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하품을 하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생각만 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국토에서는 움직이기만 하기도 한다.
대혜야, 이 세계에 있는 모기나 파리나 벌레나 개미와 같은 중생들은 말없이도 제각기 일을 잘 처리한다.”
010_0802_b_06L大慧!見此世界蚊蚋虫蟻,是等衆生無有言說,而各辦事。”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0_0802_b_08L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허공과 토끼의 뿔 반대자(槃大子)는 없는 것인데도 말은 있으니 이와 같이 성품은 망상일 뿐이다.
010_0802_b_09L如虛空兔角, 及與槃大子, 無而有言說,
如是性妄想。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긴 법인데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을 일으켜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하고 3유(有)의 집에서 윤회한다.
010_0802_b_11L因緣和合法, 凡愚起妄想,
不能如實知, 輪迴三有宅。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영원하다는 소리[常聲]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010_0802_b_12L爾時,大慧菩薩摩訶薩復白佛言:“世尊!常聲者,何事說?”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혹란을 말한다. 저 혹란을 모든 성인도 나타내지만 전도되지는 않는다. 대혜야, 봄날 아지랑이나 불을 돌려 생기는 바퀴 모양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이나 건달바성이나 환(幻)이나 꿈이나 거울에 비친 모습 같은 것은 세상의 전도된 생각이니, 밝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혜야, 저 혹란이 갖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나 혹란이 무상(無常)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란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온갖 경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저 항하(恒河)를 아귀(餓鬼)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혹란은 성품이 없으나 다른 중생에게는 나타나므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이 혹란은 모든 성인이 전도된 것과 전도되지 않은 것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란은 영원하다. 이른바 모습 모습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니, 대혜야, 혹란의 온갖 모습과 망상의 모습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혹란은 영원하다.
010_0802_c_02L대혜야, 왜 혹란을 진실(眞實)이라고 하는가? 만약 다시 그 인연을 말한다면 모든 성인은 이 혹란에 대해서 전도된 깨달음을 일으키지도 않고, 전도되지 않은 깨달음을 일으키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모든 성인을 제외하고는 이 혹란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생각을 일으키니, 성지(聖智)의 사상(事想)이 아니다.
대혜야, 그 ‘있다[有]’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헛되이 말하는 것이니, 성인의 말이 아니다. 저 혹란은 전도되고 전도되지 않은 망상으로 두 가지의 종성(種性)을 일으키니, 성인의 종성과 어리석은 사람의 종성이다. 성인의 종성에 세 가지의 구별이 있으니,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불승(佛乘)을 말한다.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저 혹란상(惑亂想)에 즉하여 불승종성(佛乘種性)을 일으키는가? 자심(自心)의 현량(現量),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 망상이 아닌 상(相)을 깨달아 불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저 혹란에 즉하여 불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온갖 사성(事性)에 대해서 범부는 미혹된 생각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종성[愚夫種姓]을 일으킨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없는 것도 아니니, 이를 ‘종성의 뜻’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혹란은 망상이 아니다. 모든 성인의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허물[過]과 습기와 자성법(自性法)과 전변하는 성품[轉變性]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마음을 벗어난다고 말한다. 내가 이 구절[句]을 말한 것은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이니, 곧 모든 생각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010_0803_a_02L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혹란이 환과 같다면 다시 다른 미혹에게 인(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010_0803_a_03L大慧白佛言:“世尊!若惑亂如幻者,復當與餘惑作因。”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환(幻)은 미혹의 인(因)이 아니니, 허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환은 허물을 일으키지 않으니,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야, 환이란 다른 밝은 곳[明處]을 따라 생기는 것이지, 자기의 망상과 허물과 습기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혜야,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마음이 미혹하여 계착하는 것이니, 성현은 그렇지 않다.”
성인은 혹란을 보지 않는다 하면 보지 않는 중간 역시 진실이 없을 것이다. 중간이 진실이라면 혹란이 곧 진실이리라.
010_0803_a_09L聖不見惑亂, 中閒亦無實, 中閒若眞實,
惑亂卽眞實。
모든 미혹을 떠나 만약 모습이 생긴다면 이것 역시 혹란이 되리니 깨끗하지 못함이 눈병 난 것 같으리라.
010_0803_a_11L捨離一切惑, 若有相生者,
是亦爲惑亂, 不淨猶如翳。
또 대혜야, 환에 비슷한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법을 환과 같이 보라.”
010_0803_a_12L復次,大慧!非幻無有相似,見一切法如幻。”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온갖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가리켜 모든 법이 환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상(異相)에 계착하는 것을 가리켜 환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만약 온갖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가리켜 모든 법의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하셨다면, 세존이시여, 환과 같지 않은 성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의 온갖 모습은 인(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물질로 인해서 온갖 모습이 환과 같이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온갖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비유하여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갖가지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비유하여 모든 법이 환과 같다고 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온갖 법은 빨리 없어지니, 마치 번개와 같고 이런 면에서 환과 같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마치 번갯불이 찰나에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범부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모든 성품이 자기망상(自己妄想)이며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어서 관찰하면 본성(本性)이 없는 것이니, 현전(現前)의 색상(色相)으로 계착할 바가 아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김이 없다’고 하고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한 말에 전후가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긴다는 것[生]과 생김이 없다[無生]는 것은 자심의 현량으로 있는 것[有]과 있는 것이 아닌 것[非有]과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을 깨달으면 생김이 없다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혜야, 나에게 전후의 말이 서로 어긋나는 과오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도의 인(因)으로 생긴다는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내가 ‘모든 성품은 생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외도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있음과 없음이 생긴다고 하며, 자기의 망상이 갖가지로 계착한 반연[緣]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혜야, 아는 있음과 없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므로 나는 ‘생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성품을 말한 것은 생사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무견(無見)과 단견(斷見)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나의 제자들이 온갖 업(業)에 의해서 태어남을 받기 때문에, 성품이라는 말로써 생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혜야,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이 환이라고 말한 것은 성자성의 모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리석은 범부가 악견(惡見)에 치우쳐 서로 희망하면서, 자심의 현량인 줄을 알지 못하고 인(因)으로 지어진 생연(生緣)을 무너뜨리며 자성상이라 계착하므로, 모든 법의 자성상이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악견(惡見)으로 자타(自他)의 모든 법을 여실(如實)한 곳에서 본다고 희망하고 계착하여 올바르지 못한 논[不正論]을 짓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대혜야, 여실한 곳에서 모든 법을 본다는 것은 자심의 현량이다.”
대혜야, 이름이란 사물에 의지해서 이름을 세우는 것을 말하니, 이를 이름[名身]이라고 한다. 구[句身]란 구에는 자체의 뜻이 있어 구경(究竟)에 확실한 것을 말하니, 이를 구라고 한다. 형상[形身]이란 이름과 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하니, 이를 형상이라고 한다.형상은 글자다. 또 형상이란 길고 짧고 높고 낮은 것을 말하며, 또 구란 길에 난 발자국을 말한다. 마치 코끼리ㆍ말ㆍ사람ㆍ짐승 등이 지나간 길에 남은 발자국과 같은 것을 구[句身]라고 한다.
대혜야, 이름[名]과 형상[形]에서 이름은 색(色)이 없는 4음(陰)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름이라 하고, 자기 모습을 나타내므로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를 이름[名身]ㆍ구[句身]ㆍ형상[形身]이라 한다. 이름ㆍ구ㆍ형상의 차별된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름과 구와 형상에 차별 있어 어리석은 범부가 계착하니 코끼리가 깊은 진흙탕에 빠진 것 같다.
010_0803_c_17L名身與句身, 及形身差別, 凡夫愚計著,
如象溺深泥。
또 대혜야, 미래에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같음과 다름[一異],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俱不俱]과 같은 견해를 벗어나고서 자기가 통달한 뜻으로써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 물으면, 그 사람은 곧 ‘이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질 등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하고 묻고, 이와 같이 열반이나 모든 행의 상(相)과 소상(所相), 구나(求那)와 소구나(所求那), 짓는 자와 지어진 것, 보는 자과 보이는 것, 티끌과 작은 티끌, 수행과 수행하는 사람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고 묻는다.
010_0804_a_02L 이와 같이 비교하며 전전하는 모습으로 이와 같이 묻고는 ‘부처님은 무기(無記)를 말씀하셔서 논쟁을 그치게 하셨다’라고 말해 준다. 이는 저 어리석은 범부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들어서 얻는 지혜[聞慧]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그들을 두렵게 하는 말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려고 무기를 말하고, 드러내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외도의 견해와 이론을 그치게 하려고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대혜야, 외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명(命)이 곧 이 몸이다.’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무기를 논한 것이다.
010_0804_a_06L大慧!外道作如是說,謂:‘命卽是身。’如是等無記論。
대혜야, 저 모든 외도들이 인(因)에 대해 어리석기에 무기를 논한 것이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내가 말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을 벗어나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치게 하는가? 대혜야, 만약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면 자심의 현량임을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그치게 한 것이다.
또 대혜야, 모든 법은 짓는 인연을 벗어났으므로 생기지 않고, 만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생기지 않는다.
010_0804_a_14L復次,大慧!一切法離所作因緣不生,無作者故,一切法不生。
대혜야, 왜 모든 성품은 자성(自性)을 벗어나 있는가? 스스로 깨달아 관찰할 때 자성(自性)과 공성(共性)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모든 법을 가지고 올 수도 없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가? 자상과 공상은 가지고 오려 해도 가져올 것이 없고 가지고 가려 해도 가져갈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법은 가지고 오가는 것을 벗어나 있다.
대혜야, 왜 모든 법은 없어지지 않는가?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을 얻을 수 없고, 이로 인해 모든 법은 없어지지 않는다.
010_0804_a_21L大慧!何故一切諸法不滅?謂性自性相無故,一切法不可得,故一切法不滅。
대혜야, 왜 모든 법은 무상한가? 모습[相]은 무상한 성[無常性]에서 일어났으므로 모든 법이 무상하다고 말한다.
010_0804_a_23L大慧!何故一切法無常?謂相起無常性,是故說一切法無常。
010_0804_b_02L대혜야, 왜 모든 법은 영원한가? 모습이 생김이 없는 성[無生性]에서 일어나 무상함이 영원한 까닭에, 모든 법은 영원하다고 한다.”
010_0804_b_02L大慧!何故一切法常?謂相起無生性,無常常,故說一切法常。”
이때 부처님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0_0804_b_03L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기론에 네 가지 있어 일향(一向)과 힐문(詰問)과 분별(分別)과 지론(止論)이니 이로써 모든 외도를 제압한다.
010_0804_b_04L記論有四種, 一向及詰問, 分別及止論,
以制諸外道。
있는 것에서 생기고, 있지 않은 것에서 생긴다는 승거(僧佉)와 비사사(毘舍師)의 주장에 모두 다 무기로 대응하니 그들에게 이와 같이 드러내 보인다.
010_0804_b_06L有及非有生, 僧佉毘舍師,
一切悉無記, 彼如是顯示。
정각(正覺)이 분별하는 것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어 말을 벗어났다는 것이니 그래서 자성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010_0804_b_07L正覺所分別,
自性不可得, 以離於言說, 故說離自性。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수다원(須陀洹)과 수다원취(須陀洹趣)의 차별된 모습과 공통된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보살마하살이 수다원취의 차별된 모습과 융통된 모습을 잘 알고, 사다함(斯陀含)과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阿羅漢)의 방편의 모습을 분별해서 알고 나면, 이와 같은 것들을 중생을 위해 설법할 것입니다.
두 가지 무아(無我)의 모습을 알게 하고, 두 가지 장애를 없게 하며, 모든 지위의 모습을 건너 구경(究竟)에 통달하게 하고, 모든 여래의 부사의한 구경의 경계를 얻게 할 것입니다. 마치 여러 색의 마니 보배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것과 같아서, 모든 법의 경계와 다함이 없는 신재(身財)로 모두를 거두어 기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지금 너를 위해서 말하겠다.”
010_0804_b_18L佛告大慧:“諦聽,諦聽!善思念之。今爲汝說。”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듣고 믿겠습니다.”
010_0804_b_19L大慧白佛言:“善哉,世尊!唯然聽受。”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수다원과 수다원의 과보[果]에 세 가지 차별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하(下)와 중(中)과 상(上)이다. 하란 최대 일곱 번의 생(生)을 받는 것이고, 중이란 세 번에서 다섯 번까지 생을 받고 나서 열반에 드는 것이고, 상이란 그 생에서 바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010_0804_c_02L대혜야, 신견(身見)에는 두 가지가 있다. 구생(俱生)과 망상(妄想)이니, 곧 연기망상(緣起妄想)과 자성망상(自性妄想)이다. 이는 연기자성(緣起自性)에 의지하여 갖가지 망상자성(妄想自性)의 계착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그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니, 진실이 없는 망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망상으로 온갖 망상을 자성의 모습으로 계착하니, 마치 더운 날 아지랑이를 본 사슴이 목마름에 그것을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수다원의 망상신견(妄想身見)이다. 이 사람은 인무아(人無我)를 알아 성품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오랜 옛날부터 무지(無知)로 계착하던 것을 끊어 없앤다.
대혜야, 구생(俱生)이란 수다원의 신견(身見)이니, 자기나 남의 몸 등의 4음(陰)은 색의 모습[色相]이 없기 때문이며, 색(色)은 조색(造色)과 소조색(所造色)에서 생기기 때문이며, 전전(展轉)히 서로 인(因)하는 모습[相]이기 때문이며, 대종(大種)과 색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다원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관찰해 신견이 끊어지며, 이와 같이 신견이 끊어져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를 신견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의심의 모습[疑相]이란 법(法)을 얻어 모습을 잘 보고, 앞의 두 가지 신견의 망상을 끊으므로 법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며, 다른 곳에 대하여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수다원이 의심하는 모습을 끊는 것이라 한다.
대혜야, 계취(戒取)란 무엇이고, 수다원이 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어나 몸을 받는 곳이 고통스러운 모습임을 잘 보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혜야, 취한다는 것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확고하게 고행을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을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생(生)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니, 저 수다원은 이런 것을 취하지 않는다. 돌이켜 스스로 깨닫는 뛰어난 경계[自覺勝]를 향하고 망상을 벗어난 무루법상(無漏法相)에서 방편을 행하여 계(戒)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제외한다. 이를 수다원이 계를 취하는 모습을 끊는 것이라 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여러 많은 탐욕 중에 저들은 어떤 탐욕이 끊어졌습니까?”
010_0805_a_03L大慧白佛言:“世尊!世尊說衆多貪欲,彼何者貪斷?”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을 좋아하여 얽히고 탐착하는 것이다. 갖가지 방편으로 몸과 입으로 짓는 악업은 현재에는 즐거움을 받으나 미래의 고통을 심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탐욕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매정수(三昧正受)의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탐욕이 끊어진다. 그러나 열반으로 나아가려는 탐욕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적정한 1승도를 얻은 성문이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나머지는 보살행(菩薩行)을 하거나 부처가 응화하여 화현한 것이니, 교묘한 방편과 본원(本願)으로 인하여 대중 가운데 생을 받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부처의 권속을 장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010_0805_b_02L대혜야, 망상처(妄想處)에서 갖가지 설법을 하기에 이른바 과위(果位)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선(禪)을 얻는 자는 선에 들어가 모두 벗어나기 때문이다. 자심의 현량을 얻어 과(果)를 얻는 모습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과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선(禪:4禪)과 무량(無量:4無量定)과 무색계(無色界:4無色定)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자심의 현량을 벗어나야 한다. 대혜야, 느끼고 생각하는 정수(正受)로 자심의 현량을 초월하려고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에 헤아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선(禪)과 4무량(無量) 무색(無色)과 삼마제(三摩提) 모든 느낌과 생각이 없어진 선정 마음의 헤아림이 거기에는 없다.
010_0805_b_06L諸禪四無量, 無色三摩提, 一切受想滅,
心量彼無有。
수다반나과(須陀槃那果) 왕래(往來)와 불환(不還) 또 아라한(阿羅漢) 이들의 마음이 곧 혹란이다.
010_0805_b_08L須陁槃那果, 往來及不還,
及與阿羅漢, 斯等心惑亂。
선자(禪者)는 선정(禪定)과 선정의 반연[緣] 이것을 진제(眞諦)로 알고 단정하지만 이것이 곧 망상으로 헤아림이니 이를 깨달으면 해탈하리라.
010_0805_b_09L禪者禪及緣,
斷知是眞諦, 此則妄想量, 若覺得解脫。
또 대혜야, 두 종류의 깨달음이 있으니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觀察覺]과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서 계착하는 자리에 건립하는 깨달음[妄想相攝受計着建立覺]이다.
010_0805_b_10L復次,大慧!有二種覺,謂:觀察覺,及妄想相攝受計著建立覺。
대혜야,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이란, 성품의 자성상(自性相)을 깨달아 이 4구(句)를 벗어나고는 얻을 수 없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4구란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를 4구라고 한다. 대혜야, 이 4구를 벗어나면 이를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한다. 대혜야, 이 4구로 모든 법을 관찰하는 것을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대혜야, 무엇이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세우는 깨달음인가?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단단하다거나 축축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움직인다고 계착하는 것이다. 진실하지 못한 망상의 모습인 4대종(大種)에 종(宗)과 인상(因想)과 비유를 세워 계착하고는 진실하지 못한 것을 세우고 또 세우는 것이다. 이를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세우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010_0805_c_02L이를 두 가지 깨달음의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깨달음의 모습을 성취하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모습을 끝까지 잘 알고 구경의 방편을 잘 알게 되며, 무소유를 깨닫고, 수행하는 행상(行相)과 지위(地位)를 관찰하여 초지(初地)를 얻으며, 백 가지 삼매에 들어가 차별된 삼매를 얻게 된다. 백 명의 부처와 백 명의 보살을 보고, 과거와 미래 백 겁 동안의 일을 잘 알게 되며, 빛이 백 개의 국토를 비추고, 상상지(上上地)의 모습을 알며, 큰 원이 수승해지고, 신통력이 자재해지며, 법운지(法雲地)에서 관정을 받아 여래의 자각지(自覺地)를 얻게 되며, 마음을 열 가지 다함이 없는 법[十無盡句]에 잘 집중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고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며 광명으로 장엄하게 된다. 이는 자각성락삼매정수(自覺聖樂三昧正受)를 얻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4대(大)와 조색(造色)을 잘 알아야 한다. 보살이 4대와 조색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010_0805_c_08L復次,大慧!菩薩摩訶薩,當善四大造色。云何菩薩善四大造色?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저 진제(眞諦)란 4대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배운다. 저 4대가 생기지 않는 것임을 이렇게 관찰하고, 관찰한 후에는 이름[名]ㆍ모습[相]ㆍ망상(妄想)의 범위와 자심현량(自心現量)의 범위와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깨닫는다. 이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의 범위라고 하니, 삼계를 말한다. 저 4대와 조색을 관찰하여 4구를 벗어나 모두 청정히 하고, 아(我)와 아소(我所)를 벗어나 여실한 모습인 자상의 범위에 머무르면, 생김이 없는 자상[無生自相]을 이루게 된다.
대혜야, 저 4대종(大種)이 어떻게 조색(造色)을 생기게 하는가? 축축하다는 망상대종[津潤妄想大種]이 안팎의 수계(水界)를 생겨나게 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망상대종[堪能妄想大種]이 안팎의 화계(火界)를 생겨나게 하고, 펄럭이며 움직인다는 망상대종[飄動妄想大種]이 안팎의 풍계(風界)를 생겨나게 하고, 물질을 끊고 자른다는 망상대종[斷截妄想大種]이 안팎의 지계(地界)를 생겨나게 한다. 색(色)과 허공이 함께하여 삿된 진리에 계착하면 5음(陰)의 모임이라는 사대조색이 생긴다.
010_0806_a_02L 대혜야, 식(識)이란 온갖 자취의 경계를 좋아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다른 곳으로 나아가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대혜야, 지(地) 등의 4대와 조색 등에 4대연(大緣)이 있으나, 그것은 4대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품ㆍ형상(形相)ㆍ처소(處所)ㆍ짓는 방편[作方便]은 성품이 없으며 대종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품ㆍ형상ㆍ처소ㆍ짓는 방편이 화합해서 생기므로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4대와 조색이라는 상(相)은 외도의 망상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대혜야, 모든 음(陰)의 자성상(自性相)을 말하겠다. 무엇을 모든 음의 자성상이라고 하는가? 5음을 말하니, 무엇이 다섯인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4음은 물질이 아니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대혜야, 색이란 4대(大)와 조색(造色)으로서 각기 그 모습이 다르다.
대혜야, 물질이 없는데 넷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마치 허공과 같다. 이는 마치 허공이 숫자의 모습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숫자를 벗어났지만 망상으로 하나의 허공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혜야, 이와 같이 음(陰)도 숫자의 모습을 초월하여 숫자를 벗어나고,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며, 4구를 벗어난다. 숫자의 모습이란 어리석은 범부가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 성현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적정을 말할 때 법무아(法無我)의 견해가 청정해져 부동지(不動地)에 들어가게 되며, 부동지에 들어간 후 무량삼매(無量三昧)에서 자재함[自在]과 뜻대로 나타나는 몸[意生身]을 얻고,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구경의 힘[力]과 밝음[明]과 자재함[自在]을 통달하게 되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거두어 이롭게 한다. 마치 대지가 중생을 받아들여 키우는 것과 같으니, 보살마하살이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이와 같다.
010_0806_b_02L또 대혜야, 모든 외도에는 네 가지 열반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성자성(性自性)이 성품이 아니라는 열반과, 온갖 상(相)과 성품이 성품이 아니라는 열반과, 자상(自相)과 자성(自性)이 성품이 아닌 줄 깨닫는 열반과, 모든 음(陰)의 자상과 공상이 상속하여 흘러드는 것을 끊는 열반이다. 이를 모든 외도의 네 가지 열반이라 하니, 내가 말한 법이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은 망상식(妄想識)이 멸하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약 세우셨다면, 왜 의식(意識)을 벗어나라 하시고, 7식(識)을 벗어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010_0806_b_08L大慧白佛言:“若建立者,云何離意識,非七識?”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의 인(因)이 되고, 저것의 반연(攀緣)이 되기 때문에 7식이 생기지 않는다. 의식이란 경계의 분단(分段)에 계착해서 생기고, 습기가 장식(藏識)을 자라나게 하고 의(意)와 함께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계착해서 생각하는 인연으로 생기며, 무너지지 않는 몸의 모습[不壞身相]인 장식이 인이 되어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를 반연해 계착하는 마음이 모여 생기며, 전전하며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다.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에 바람이 부는 것이니,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이 없어지면 7식(識)도 없어진다.”
나는 열반의 성품이 만들어지거나 함께하는 모습이라 하지 않는다. 망상과 이염식(爾炎識) 이것이 없어지는 게 내가 말하는 열반이다.
010_0806_b_16L我不涅槃性, 所作及與相, 妄想爾炎識,
此滅我涅槃。
그것이 인(因)이 되고 그것이 반연하여 의취(意趣) 등이 몸을 이룰 때 인이 되어 주는 것, 이 마음이니 식이 의지하는 곳이다.
010_0806_b_18L彼因彼攀緣, 意趣等成身,
與因者是心, 爲識之所依。
물의 흐름 사라지면 파도가 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의식이 없어지면 온갖 식도 생기지 않는다.
010_0806_b_19L如水大流盡,
波浪則不起, 如是意識滅, 種種識不生。
또 대혜야, 이제 망상자성(妄想自性)이 분별하는 통상(通相)을 설명하겠다. 만약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통상을 잘 분별하면,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망상을 떠나 자각성지[自覺聖]에 이르러, 외도가 모두 향하는 선견각(善見覺)인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망상이 끊어질 것이다. 연하여 일어난 온갖 모습은 망상자성이 행한 것이므로, 다시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010_0806_c_02L 대혜야, 무엇이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인가? 언설망상(言說妄想)ㆍ말한 사실의 망상[所說事妄想]ㆍ상망상(相妄想)ㆍ이익망상(利妄想)ㆍ자성망상(自性妄想)ㆍ인망상(因妄想)ㆍ견망상(見妄想)ㆍ이룬다는 망상[成妄想]ㆍ생긴다는 망상[生妄想]ㆍ생기지 않는다는 망상[不生妄想]ㆍ상속한다는 망상(相續妄想)ㆍ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縛不縛妄想]이니, 이를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통상(通相)이라고 한다.
이처럼 망상자성(妄想自性)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에 대해서,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한다. 대혜야, 연(緣)에 의지해서 일어난다고 계착하니, 계착한다는 것은 온갖 망상으로 자성(自性)에 계착하는 것이다. 이는 환(幻)으로 갖가지 몸을 나타내 보이면 범부는 망상으로 갖가지 다른 환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대혜야, 환과 온갖 모습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르다면 환이 온갖 모습의 인(因)이 아니어야 하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환과 온갖 모습은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대혜야, 너를 비롯한 나머지 다른 보살마하살은 환으로 연기(緣起)하는 망상자성을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하지 말라.”
마음은 경계에 묶이고 깨달음은 지혜를 따라 움직이니 무소유(無所有)와 훌륭한 곳[勝]에서 평등한 지혜가 생긴다.
010_0807_a_17L心縛於境界, 覺想智隨轉, 無所有及勝,
平等智慧生。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있다고 하지만 연으로 일어나니, 없는 것이며 혹 망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연으로 일어나니 망상이 아니다.
010_0807_a_19L妄想自性有, 於緣起則無,
妄想或攝受, 緣起非妄想。
온갖 연[支分]으로 법이 생기지만 환과 같으니, 이루어지지 않고 그 모습 갖가지로 있으나 망상이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010_0807_a_20L種種支分生,
如幻則不成, 彼相有種種, 妄想則不成。
그 모습은 곧 허물이니 모두 마음이 속박되어 생긴 것 망상으로 알지 못하여 연기(緣起) 위에서 분별한다.
010_0807_a_21L彼相則是過, 皆從心縛生, 妄想無所知,
於緣起妄想。
이 모든 망상의 성품은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이니 망상으로 온갖 모습 있어 연기 위에서 분별한다.
010_0807_a_23L此諸妄想性, 卽是彼緣起,
妄想有種種, 於緣起妄想。
세제(世諦)와 제일의(第一義) 제삼(第三)은 인(因)이 없이 생기는 것 망상으로 세제(世諦)를 말하니 끊으면 성인의 경계이다.
010_0807_a_24L世諦第一義,
第三無因生, 妄想說世諦, 斷則聖境界。
010_0807_b_02L
마치 수행하는 것과 같으니 하나에서 온갖 모습이 나타나지만 저 법에는 온갖 모습이 없는 것처럼 망상의 모습도 이와 같다.
010_0807_b_02L譬如修行事, 於一種種現, 於彼無種種,
妄想相如是。
마치 갖가지 눈병처럼 망상으로 여러 색(色)이 나타나고 눈병에는 색도 없고 색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연기의 깨닫지 못함 역시 그렇다.
010_0807_b_04L譬如種種翳, 妄想衆色現,
翳無色非色, 緣起不覺然。
마치 정련한 진금(眞金)처럼 모든 더러움 멀리 없애니 허공에 가리는 구름 없듯이 망상의 맑아짐도 역시 그렇다.
010_0807_b_05L譬如鍊眞金,
遠離諸垢穢, 虛空無雲翳, 妄想淨亦然。
망상에 성품이 없고 그의 연(緣)으로 일어나는 것도 없으니 건립(建立)과 비방(誹謗)이 모두 망상이기에 허물어진다.
010_0807_b_06L無有妄想性, 及有彼緣起, 建立及誹謗,
悉由妄想壞。
망상은 성품이 없지만 연기한 성품은 있다고 하면 성품이 없으면서 성품이 있는 것이니 성품 있음과 성품 없음이 생기게 된다.
010_0807_b_08L妄想若無性, 而有緣起性,
無性而有性, 有性無性生。
망상이란 인(因)에 의지하여 저 연기를 얻으니 모습과 이름이 항상 서로 따르며 모든 망상을 일으킨다.
010_0807_b_09L依因於妄想,
而得彼緣起, 相名常相隨, 而生諸妄想。
끝내 성취 못하리니 곧 모든 망상을 건너라. 그런 후에 청정함을 알 것이니 이를 제일의(第一義)라 한다.
010_0807_b_10L究竟不成就, 則度諸妄想, 然後知淸淨,
是名第一義。
망상에 열두 가지 있고 연기법에 여섯 가지 있으나 스스로 깨달아 이염(爾炎)을 알면 그것에는 차별이 없다.
010_0807_b_12L妄想有十二, 緣起有六種,
自覺知爾炎, 彼無有差別。
다섯 가지 법이 진실하고 자성(自性)에 세 가지 있으니 수행하여 이것을 분별하면 여여(如如)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010_0807_b_13L五法爲眞實,
自性有三種, 修行分別此, 不越於如如。
여러 가지 모습과 연기(緣起) 그들의 이름이 망상을 일으키니 저 모든 망상의 모습이 저 인연으로 생긴다.
010_0807_b_14L衆相及緣起, 彼名起妄想, 彼諸妄想相,
從彼緣起生。
깨달은 지혜로 잘 관찰하라. 연(緣)도 없고 망상도 없으니 이루고 나면 성품이 없는 것 어찌 망상으로 깨달으랴.
010_0807_b_16L覺慧善觀察, 無緣無妄想,
成已無有性, 云何妄想覺。
저 망상자성이 두 가지 자성을 건립하여 망상이 갖가지로 나타난 것을 청정한 성인의 경계라 한다.
010_0807_b_17L彼妄想自性,
建立二自性, 妄想種種現, 淸淨聖境界。
망상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연기한 것을 망상으로 계착하니 망상과 다른 것이라 하면 곧 외도의 주장에 의지하는 것이다.
010_0807_b_18L妄想如畫色, 緣起計妄想, 若異妄想者,
卽依外道論。
망상으로 생각을 말하니 견(見)으로 인하여 화합하여 생긴다. 두 가지 망상을 떠나면 그런다면 곧 성취하리라.
010_0807_b_20L妄想說所想, 因見和合生,
離二妄想者, 如是則爲成。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습과 1승(乘)을 말씀해 주십시오. 자각성지의 모습과 1승을 말씀해 주시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자각성지의 모습과 1승을 잘 알아, 다른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 불법(佛法)에 통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의 성인들께서 알고 있는 것을 서로서로 전수해 주었으니 ‘망상에는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홀로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스스로 깨달아 관찰하고, 다른 가르침을 연유하지 않고 망상의 견해를 벗어나면, 위로 승진(昇進)하여 여래지(如來地)로 들어갈 것이다. 이를 자각성지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1승의 모습인가? 1승도(乘道)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나는 1승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1승도의 깨달음을 얻는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망상인 줄을 알아 여실한 곳에서 망상을 내지 않는 것이니, 이를 1승의 깨달음[一乘覺]이라고 한다. 대혜야, 1승의 깨달음이란 다른 외도ㆍ성문ㆍ연각ㆍ범천왕(梵天王) 등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래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1승이라고 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왜 3승만 말씀하시고 1승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010_0807_c_13L大慧白佛言:“世尊何故說三乘,而不說一乘?”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반열반법(般涅槃法)에 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에게는 1승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성문과 연각은 여래가 조복시켜 적정한 방편을 주어 해탈을 얻은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승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대혜야, 저들 모두는 일어난 번뇌와 허물과 습기를 끊고 나아가서 법무아를 깨달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일어난 번뇌와 허물과 습기를 끊고는 삼매의 즐거움에 맛들이고 집착해 성품이 아닌 무루계(無漏界)를 깨달을 것이다. 깨달은 뒤에는 다시 출세간(出世間)의 가장 높은 무루계에 들어가 온갖 요인[衆具]을 만족할 것이며, 여래의 부사의하고 자재한 법신(法身)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