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은 9만 2천 명이었는데, 그 이름은 중덕장엄(衆德莊嚴)보살마하살과 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ㆍ광무장정왕(光無障淨王)보살ㆍ고산정자재왕(高山頂自在王)보살ㆍ애희정광(愛喜淨光)보살ㆍ광폐일월(光蔽日月)보살ㆍ묘정수(妙淨鬚)보살ㆍ신출연화광(身出蓮華光)보살ㆍ범자재왕음(梵自在王音)보살ㆍ유희세사자왕음(遊戱世師子王音)보살ㆍ금색정광위덕(金色淨光威德)보살ㆍ유연신(柔軟身)보살ㆍ금색상장엄신(金色相莊嚴身)보살ㆍ십광파마력(十光破魔力)보살ㆍ제근위의선적(諸根威儀善寂)보살ㆍ덕여고산보살(德如高山菩薩)ㆍ천음성보살(天音聲菩薩)ㆍ법력자재유행(法力自在遊行)보살ㆍ산덕정신(山德淨身)보살ㆍ묘덕(妙德)보살마하살을 비롯한 이와 같은 9만 2천의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길잡이와 같은 분이시여 외도(外道)와 잘못된 견해 가진 자들 그들이 연설하는 것들이 왜 평등하여 둘이 없습니까.
010_1155_c_04L如導世師人,
外道非見者, 其有所演說, 云何等無二。
여러 문자와 언어(言語) 이런 법들은 모두 일상(一相)이니 세존이시여, 큰 자비와 연민으로 원하오니 이 법문(法門) 열어주소서.
010_1155_c_05L諸文字語言, 是法皆一相, 世尊大慈愍,
願開是法門。
이때 세존께서 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마하살을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야, 너의 질문은 너무도 희유해 일체의 세간이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묻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새롭게 뜻을 일으킨 보살들은 이 공(空)의 견해와 무상(無相)의 견해와 무작(無作)의 견해와 무생(無生)의 견해와 무소유(無所有)의 견해와 모습을 취함이 없는 견해와 부처의 견해와 보리(菩提)의 견해에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와 같은 법은 새로 배우는 보살 앞에서 설해선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 법을 들으면 혹 선업(善業)을 끊고 불도(佛道)에서 곧 삿된 도를 행하거나, 혹은 단멸(斷滅)에 떨어지거나, 혹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 데에 떨어져 여래가 어떤 방편으로 적절하게 설한 것인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자유보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가엾이 여기셔서 꼭 설해 주십시오. 장차 올 세상에 공의 견해와 무상의 견해와 무작의 견해와 무생의 견해와 무소유의 견해와 모습을 취함이 없는 견해와 부처님의 견해와 보리의 견해에 대해 이것은 공이고, 이것은 무상이고, 이것은 무작이라고 분별하여 항상 찬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사업(事業)을 부지런히 하며, 문자를 좋아하고 집착하며 변설(辨說)을 묘하게 하고 명예와 이익을 귀하게 여기는 보살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래께서 설하시는 필경 청정한 이 문자가 없는 법을 듣는다면 분명 이런 온갖 견해를 버릴 것입니다.
010_1156_a_02L그런 보살들은 중생들이 믿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방편의 힘으로 법을 설하고, 비록 소욕지족(少欲知足)2)을 설하긴 하지만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록 경(經)과 계(戒)를 설하긴 하지만 역시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록 대중에 머무는 과오를 설하긴 하지만 역시 일체법이 멀리 벗어난 모습임을 알며,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지내지 않고 홀로 지내는 것을 항상 칭찬하긴 하지만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록 보리심(菩提心) 일으키는 것을 칭찬하긴 하지만 심성(心性)이 곧 보리임을 알며, 비록 대승의 경을 칭찬하긴 하지만 일체 모든 법이 다 대상(大相)임을 알며, 비록 보살의 도를 설하긴 하지만 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부처님을 분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보시(布施)를 칭찬하긴 하지만 보시의 평등한 모습을 통달하며, 비록 지계(持戒)를 칭찬하긴 하지만 모든 법이 다 곧 계의 성품임을 분명히 알며, 비록 인욕을 칭찬하긴 하지만 모든 법이 무생(無生)과 무멸(無滅)과 무진(無盡)의 모습임을 알며, 비록 정진을 칭찬하긴 하지만 모든 법이 일으키지 않고 행하지 않는 모습임을 알며, 비록 선정(禪定)을 갖가지로 칭찬하긴 하지만 일체법이 항상 선정의 모습임을 알며, 비록 지혜를 갖가지로 칭찬하긴 하지만 지혜의 참된 성품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비록 탐욕의 잘못을 설하긴 하지만 법에 탐할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성냄의 잘못을 설하긴 하지만 법에 성낼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어리석음의 잘못을 설하긴 하지만 모든 법에 어리석음이 없고 걸림이 없음을 알며, 비록 중생들에게 3악도(惡道)에 떨어지는 두려운 괴로움을 나타내 보이긴 하지만 지옥ㆍ아귀ㆍ축생의 모습을 얻지 않을 것입니다.
9만 2천의 야차와 귀신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고, 얻지 못하고도 얻었다고 하던 5백의 증상만(增上慢)을 가진 비구가 이 법을 듣고는 증상만이 없어졌으며, 참된 법을 얻어 일체의 법이 모두 일상(一相)이란 것을 믿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에 번뇌[漏]가 다하고 해탈을 얻었다. 이 보살의 무리 중 6만 2천 명은 모든 법의 장애 없는 모습을 믿고 이해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설법은 모든 설법 중에서 가장 으뜸이기 때문이다.
010_1157_c_02L선남자야, 나도 연등불(然燈佛)의 처소에서 모든 법이 일상으로서 장애가 없음을 믿고 이해하였으며, 그런 뒤에 무생법인을 얻고 6바라밀(波羅蜜)을 구족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겁에 보시하고 지계하며 인욕하고 정진하며 선정을 닦고 지혜를 닦더라도 만약 이와 같은 법상(法相)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혹 일체의 선근을 끊어 없앨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너는 큰 공덕과 선근이 있어서 32대인상(大人相)을 성취한 제바달다(提婆達多)를 보아라. 이와 같은 공덕이 있었지만 이와 같은 법상을 몰랐기 때문에 선근을 끊어 없애고 큰 지옥에 떨어졌다. 선남자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래도록 발심(發心)하여 큰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이 법문에 들지 않으면 모두 선근의 공덕을 끊어 없앨 수 있다.
선남자야, 저 과거 한량없고 가없는 불가사의한 아승기겁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그 명호는 고수미산왕(高須彌山王)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ㆍ불세존이시다. 수명(壽命)은 9천9백천만억 나유타(那由他) 세(歲)였으며, 국토의 이름은 금염명(金焰明)이었다. 그 나라는 흙이 모두 황금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설하신 법 역시 3승(乘)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고 해탈시켰다.
그 부처님의 첫 모임에는 80백천만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고, 다음 두 번째 모임에는 70백천만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으며, 세 번째 모임에는 60백천만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고, 네 번째 모임에는 50백천만 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을 얻고,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모든 존재의 결박을 없애고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었다.
010_1158_a_02L 비구니 대중의 수는 그 배(倍)였고, 우바새 대중의 수도 또 그 배였으며, 우바이 대중의 수도 또 그 배였다. 보살 대중의 수도 또 그 배였는데, 그들은 모두 아유월치(阿惟越致)의 무생법인을 얻고, 모두 한량없고 가없는 다라니문과 삼매의 문을 얻어 물러서지 않는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었으니, 하물며 새롭게 보살의 뜻을 일으킨 자들이겠는가. 또한 벽지불도(辟支佛道)의 마음을 낸 자들 역시 한량없고 가없었다.
선남자야, 그때 그 부처님 모임의 제자 대중의 수는 한량없고 가없었다. 그 금염국(金焰國)에는 나무가 모두 7보로 되어 있고 그 보배 나무에서는 항상 법의 소리가 났다. 이른바 일체 모든 법의 공(空)한 소리와 무상(無相)의 소리와 무작(無作)의 소리와 무생(無生)의 소리와 무소유(無所有)의 소리와 무취상(無取相)의 소리로서 그 나라 인민들은 이 법의 소리를 듣고 자연히 모두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었고, 마음에 해탈(解脫)을 얻었다. 그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 법은 천 년을 머물렀고 모든 보배 나무의 소리 역시 다시는 나지 않았다.
선남자야, 그 고수미산왕불(高須彌山王佛)께서는 법을 정위의(淨威儀)보살에게 부촉하여 법을 수호하게 하셨고, 부촉하신 뒤에 곧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셨다. 그때 유위의(有威儀)라는 이름의 비구가 있었는데 지계(持戒)가 청정하지 못하였고,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과 5신통(神通)을 얻고 비니장(毘尼藏)을 잘 독송하였으나 고행을 즐기며 남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하였다. 그 제자들 역시 모두 고행하며 두타(頭陀)의 행을 귀하게 여겼다.
010_1158_b_02L이 정위의(淨威儀) 법사는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며 무소유법에서 교묘한 방편을 얻었다. 또 언제가 정위의 법사는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유위의(有威儀) 비구가 머무는 곳으로 가서 함께 머물게 되었다. 정위의 법사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머무는 곳으로부터 항상 마을로 들어가 음식을 먹은 뒤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백천만의 집을 교화하여 모두 제자로 삼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제자의 무리 또한 교화를 잘하여 여러 마을로 가서 설법을 하였고, 여러 백천의 중생들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유위의 비구는 항상 탑사에 머물기를 좋아하였고, 그 제자의 무리들도 청정한 계(戒)를 지니지 않고서 두타(頭陀) 행하기를 좋아하였다. 유위의 비구는 부지런히 정진하고 그 마음이 확고하며, 자신이 행한 것으로 모든 제자들을 교화했지만 선법(善法)에 탐착하여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가 무상하고, 모두가 괴로우며, 일체의 법은 무아라고 설하며 여러 선정의 법을 잘 행할 수 없었고, 또 보살이 행하는 도에 능숙하질 못했으니, 본심(本心)이 순수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정위의 법사는 날카롭고 우둔한 중생들의 여러 근기를 잘 알았고, 유위의 비구의 마음을 아는 까닭에 다시는 마음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여러 제자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유위의 비구는 정위의 법사의 여러 제자들이 항상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청정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켰고, 곧 건추(犍椎)를 울려 대중을 모으고 규율을 세웠다.
‘너희들은 지금부터는 마땅히 마을에 들어가선 안 된다. 일심(一心)으로 고요히 정묵(靜黙)을 행하지 못하면서 자주 마을에 들어가 무슨 이익을 얻겠느냐.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곳은 아련야주처(阿練若住處)이다. 너희들은 선의 즐거움을 행해야지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이때 여러 인민들은 그 스승과 여러 제자들이 보이지 않자 모두들 근심과 고뇌를 품었으며 선근(善根)을 잃어버렸다. 정위의 법사는 석 달을 보내고 자자(自恣)3)을 마친 뒤에 그곳을 떠나 다른 승방(僧坊)에 이르렀고, 그곳에 머무르며 스승과 제자들은 다시 성읍(城邑)의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였다.
나중에 유위의 비구는 정위의 법사가 다시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이 일상의 위의를 훼손하고 잃은 것을 보고는 다시 청정하지 못한 나쁜 마음이 생겨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비구는 계를 깨뜨리고, 계를 훼손하였다. 어찌 보리가 있겠는가.’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비구는 잡스럽게 행동하니 불도(佛道)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유위의 비구는 이런 업(業)을 일으키고 나서 나중에 목숨이 다하였는데, 그 업의 과보로 아비(阿鼻:無間)의 큰 지옥에 떨어졌고, 9백천억 겁 동안 온갖 고뇌를 받았다. 지옥을 나와서는 63만 년 동안 항상 비방(誹謗)을 받고서야 그 죄가 점차 엷어졌으며, 그 후 32만 년 동안 비구가 되었으나 출가한 뒤에는 이 업(業)의 인연 때문에 도를 거스르고 환속하곤 하였다. 또 다른 죄업의 인연 때문에 정명불(淨明佛)의 처소에서 출가하고 도에 들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은근히 정진하였지만 천만억 년 동안에도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얻지 못하였고, 한량없는 천만 년 동안 모든 근기가 어둡고 둔하였다.
010_1159_a_02L사자유보야, 만약 이런 미세한 죄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 자라면 저 보살에게 나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보살이 행하는 도를 모두 믿고 이해해야 하며,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남의 마음을 잘 알 수 없다. 중생이 행하는 것, 그것 역시 알기 어렵다.’
선남자야, 여래는 이런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항상 이 법을 설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사람을 저울질해서는 안 된다. 오직 여래나 여래와 비슷한 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만약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사람을 저울질해 서로 거슬리는 짓을 절대 삼가야 한다. 보살이 만약 불법(佛法)을 닦고 모으고자 한다면 항상 밤낮으로 부지런한 마음으로 전념해야만 한다. 보살의 마음을 깊이 일으킨 자라면 사람의 장단점 찾는 걸 좋아해서는 안 된다.
보살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중생을 가르쳐 10선을 행하게 한다고 해도 보살이 한 식경(食頃)동안 일심으로 조용한 곳에서 일상(一相)의 법문을 염하는 것만 못하다. 나아가 듣고 받아들여 독송하고 해설한다면 그 사람의 복덕은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보살은 이 법문을 사용하여 모든 업장의 죄를 없앨 수 있고, 또한 일체 중생 속에서 미움과 사랑의 마음을 떠나 곧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빨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문수사리(文殊師利) 법왕자(法王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업장의 죄를 없앤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업장의 죄를 없앱니까?”
010_1159_a_17L爾時,文殊師利法王子白佛言:“世尊!如佛所說滅業障罪,云何滅業障罪?”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의 성품에 업이 없고 과보가 없음을 본다면 곧 업장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또 문수사리야, 만약 보살이 탐욕의 경계가 곧 진실의 경계임을 보고, 성냄의 경계가 곧 진실의 경계임을 보고, 어리석음의 경계가 곧 진실의 경계임을 본다면 곧 업장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010_1159_b_02L또 문수사리야,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임을 본다면 곧 업장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스스로 소견을 가지면 곧 업을 일으킬 수 있고, 아는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는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법이 완전히 없어진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보고 또 남을 보며, 이런 견해 때문에 곧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일으킨다.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을 분별하고서 이것은 선(善)이고, 이것은 선이 아니며, 이것은 알아야 하고, 이것은 끊어야 하며, 이것은 밝혀야 하고, 이것은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이른바 괴로움[苦]을 보아야 하고, 괴로움의 모임[集]을 끊어야 하며, 괴로움의 소멸[滅]을 증득해야 하고, 괴로움을 멸하는 도(道)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분별한다. ‘일체의 모든 행(行)은 모두 다 무상하고, 일체의 모든 행은 모두 다 괴로움이며, 일체의 모든 행은 모두 다 3독(毒)이 치성하니, 나는 이 유위법(有爲法)을 빨리 버리리라.’ 항상 이렇게 사유하며 모든 행에서 갖가지로 모습을 취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이때 곧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행을 이와 같이 보는 것, 이것을 괴로움을 보는 것이라 한다. 모든 행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이것을 괴로움의 모임을 끊는 것이라 한다.’
010_1159_b_17L爾時,便作是念:‘見諸行如是,是名見苦;惡厭諸行,是名斷集。’
모든 행을 분별하고 멸제(滅諦)를 보고는 곧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제 괴로움의 소멸을 보았으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도를 닦으며 곧 고요한 곳으로 가 이와 같은 법을 생각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마음을 거두어 잡고 선정에 머문다.
이 사람은 앞서 싫어하는 마음을 얻고, 지금은 선정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행에서 마음을 곧 버리고 떠났으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여 기뻐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010_1159_b_22L是人先得厭心,今得定心,故於諸行中心便捨離,而自愧厭不喜不樂。
010_1159_c_02L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일체의 법에서 이미 해탈을 얻었으며 다시는 짓는 것이 없다. 나의 몸은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이 사람은 목숨이 다한 뒤에 태어나는 곳을 받는 것을 보고는 곧 보리에서 마음에 의혹과 뉘우침을 일으킨다. 이런 의혹 때문에 목숨이 다한 뒤에는 큰 지옥에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무생법(無生法) 가운데서 분별했기 때문이다.”
이때 문수사리법왕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어떻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관해야 합니까?”
010_1159_c_06L爾時,文殊師利法王子白佛言:“世尊!今云何應觀四聖諦?”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일체의 법이 곧 무생(無生)의 성품임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괴로움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모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괴로움의 모임을 끊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필경 적멸한 모습임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소멸의 증득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존재가 없는 성품임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도를 닦는 것이라 한다.
문수사리야, 만약 행자가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법은 선하다. 이 법은 선하지 않다. 이 법은 보아야만 한다. 이 법은 끊어야만 한다. 이 법은 증득해야만 한다. 이 법은 닦아야만 한다’는 그와 같은 분별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괴로움은 보아야 하고, 괴로움의 모임은 끊어야 하며, 괴로움의 소멸은 증득해야 하고, 괴로움을 없애는 도는 닦아야 한다고.
무엇 때문인가? 범부의 소행(所行)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행자는 이런 법이 모두 공하고, 무생이며, 무소유이고, 분별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저 허망이 쌓이고 모인 것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법에서 취하는 것이 없고 버리는 것도 없고 삼계(三界)에서 마음이 걸리는 것도 없다. 일체의 삼계는 필경 나지 않는다[不生]고 보며, 모든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은 허망하고 거짓되며 실답지 않아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그림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불꽃과 같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행자는 이런 법을 얻지 않기 때문에 혹 사랑의 세계[處]에 태어나건 혹은 미움의 세계에 태어나건 허공과 같은 마음에 안주(安住)하며, 내지 부처를 보지 않고 법을 보지 않고 승가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일체의 법을 보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법을 보지 않으면 모든 법에서 의혹을 일으키지 않는다. 의혹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곧 일체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체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곧 스스로 적멸하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4념처(念處)를 관해야 합니까?”
010_1160_a_12L文殊師利復白佛言:“世尊!行者云何應觀四念處?”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장차 올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비구가 있을 것이다. ‘안으로 신처(身處)를 관하기를 만약 부정하다고 관하면 이것이 신념처(身念處)이다. 즐거움은 모두 공한 것이라고 관하면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마음이 나고 멸하는 성품을 관하면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화합상(和合相)을 파괴하는 것을 관하여 법상(法相)만을 얻으면 이것이 법념처(法念處)이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참으로 4념처를 관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문수사리야, 물을 필요 없다. 여래의 적절한 설법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수사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을 가엷게 여겨 꼭 설해 주십시오.”
010_1160_b_02L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몸을 허공처럼 본다면 이것을 신념처라고 한다. 만약 행자가 느낌을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 중간에서도 얻을 수 없다고 본다면 이것을 수념처(受念處)라고 한다. 만약 행자가 마음이란 오직 이름[名字]만 있을 뿐이라고 안다면 이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한다. 만약 행자가 선법도 얻지 않고 불선법도 얻지 않는다면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이와 같이 4념처(念處)를 관해야 한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8성도분(聖道分)을 관해야 합니까?”
010_1160_b_04L文殊師利復白佛言:“世尊!行者云何應觀八聖道分?”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일체의 법은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보고 분별함이 없다면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을 보고 사유함이 없고 분별함이 없다면 이렇게 보는 까닭에 이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한다. 일체법에 언설(言說)의 모습이 없음을 보고 언어의 평등한 모습을 잘 닦는 까닭에 이것을 정어(正語)라고 한다. 일체법의 짓지 않는 모습을 보면 짓는 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정업(正業)이라고 한다.
정명(正命)과 사명(邪命)을 분별하지 않고 평등한 명(命)을 잘 닦고 익히는 까닭에 이것을 정명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을 내지 않고 일으키지 않아 행하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것을 정정진(正精進)이라 한다. 일체의 법에 대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어 모든 기억과 생각의 성품을 떠나는 까닭에 이것을 정념(正念)이라 한다. 일체법의 성품이 항상 적정함을 보아 산만하지도 않고 반연하지도 않고 얻을 수도 없는 까닭에 이것을 정정(正定)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8성도분을 관해야 한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5근(根)을 관해야 합니까?”
010_1160_b_18L文殊師利!復白佛言:“世尊!行者云何應觀五根?”
010_1160_c_02L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일체법이 필경 나지 않고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상 스스로 그러함을 믿는다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한다. 일체법에서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어 멀고 가까운 모습에서 벗어나는 까닭에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에 대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인연의 성품에서 벗어난 까닭에 인연에 생각이 묶이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에서 사유(思惟)하는 것이 없어 두 가지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한다. 일체법은 항상 공하여 생상(生相)을 벗어난 것임을 보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다. 문수사리야,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5근을 관해야 한다.”
문수사리가 또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7보리분(菩提分)을 관해야 합니까?”
010_1160_c_06L文殊師利復白佛言:“世尊!行者云何應觀七菩提分?”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행자가 일체법을 볼 수 있어 기억과 생각이 없다면 이것을 염보리분(念菩提分)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은 선(善)이건 불선(不善)이건 혹은 무기(無記)이건 선택할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으니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택보리분(擇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삼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삼계를 잘 무너뜨리는 까닭에 이것을 정진보리분(精進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에서 기쁨의 모습을 일으키지 않고, 기쁨의 모습을 잘 무너뜨리는 까닭에 이것을 희보리분(喜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에서 그 마음을 없애면 인연의 모습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이것을 제보리분(除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얻을 수 없으면 무너뜨리는 모습을 잘 닦는 까닭에 이것을 정보리분(定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법에 의지하는 것이 없어서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을 보지 않는 까닭에 사심(捨心)을 얻으니, 이것을 사보리분(捨菩提分)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7보리분을 관해야 한다.
만약 행자가 이와 같이 4성제(聖諦)와 4념처(念處)와 8성도분(聖道分)과 5근(根)과 7보리분(菩提分)을 본다면 나는 이런 사람을 이미 건넌 자, 피안에 도달한 자, 두려움이 없는 곳인 육지로 올라온 자, 이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온갖 티끌과 때를 없앤 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소유함이 없는 자, 걱정이 없는 자, 받아들이는 것이 없는 자라고 한다.
010_1161_a_02L 이를 아라한이라 하고, 이를 사문이라 하며, 이를 바라문이라 하고, 이를 비구라 하며, 이를 정결하게 목욕한 자라고 하고, 이를 지혜로운 자라고 하며, 이를 벗어난 자라고 하고, 이를 들은 자라고 하며, 이를 부처의 아들이라고 하고, 이를 석가모니의 아들이라고 하며, 이를 가시나무를 벤 자라고 하고, 이를 관문의 열쇠를 부순 자라고 하며, 이를 이미 참호[塹]를 건넌 자라고 하고, 이를 출가하기를 바라고 구하는 자라고 하며, 이를 문을 연 자라고 하고, 이를 현성의 뛰어난 모습을 가진 자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만약 이와 같은 법을 성취하는 비구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과 세간에서 복 밭이라고 불리며 공양을 받을 것이다. 문수사리야, 이 비구가 만약 나라의 보시를 헛되게 먹지 않기를 바라는 자이고, 마왕의 그물을 파괴하는 자이고, 생사의 바다를 건너려는 자이고, 열반을 얻으려는 자이고, 일체의 고뇌를 벗어나려는 자이고, 일체 하늘과 사람의 세간을 위해 복 밭이 되려는 자라면 부지런히 이와 같은 법을 닦고 익혀야 한다.”
이 법을 설하셨을 때, 3만 2천의 모든 하늘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고는 제각기 하늘의 만다라 꽃을 부처님 위에 뿌리며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법을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을 훌륭한 출가자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믿고 받아들여 독송하며 말씀처럼 행하는 자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잠깐이라도 이 법을 듣는 자가 있다면 그를 곧 증상만(增上慢)이 없는 자라 할 것입니다.”
이때 문수사리법왕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오직 원하오니, 세존이시여, 다라니(陀羅尼)를 설해 주십시오. 그 다라니가 있으면 모든 보살이 걸림없는 변재를 얻어 모든 음성에 두려움이 없게 할 것이며, 모든 법을 다 불법으로 만들고 또 모든 법이 곧 일상(一相)임을 믿고 이해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010_1161_b_02L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분명하게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 종성[不動種性]의 법문을 설하리라. 이 법문에 들어가는 모든 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의 법을 비추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빨리 얻을 수 있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의 중생은 모두 마음이 없으니, 인연의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의 중생은 모두 동일한 양(量)이니, 이것을 종자(種子)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不動相]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탐욕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다. 법의 성품에 안주하지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이 탐욕은 성품을 얻을 수 없고 항상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진에(瞋恚)가 곧 금강(金剛)이다.”
010_1161_c_02L“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금강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성냄은 끊을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또한 금강을 끊을 수가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아 끊을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으니, 모든 법은 본래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금강과 같다고 한다. 문수사리야, 어리석음이 곧 지혜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지혜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지혜를 벗어나고 또 어리석음을 벗어난 것이니, 비유컨대 허공과 같아서 지혜도 없고 또 어리석음도 없다. 일체의 법도 이와 같아 지혜도 없고 또 어리석음도 없다. 지혜와 어리석음, 지혜와 알 수 있는 법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모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리석음과 지혜의 처소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색음(色陰)이 곧 움직이지 않는 곳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천제(天帝)의 당간은 뿌리가 깊고 단단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법 또한 그와 같아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 성품에 안주하여 이 법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니, 머무름 없는 곳에 안주하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색(色)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수음(受陰)이 곧 적멸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적멸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모든 느낌의 모습과 성품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느낌은 안도 바깥도 아니며, 동쪽이 아니고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귀퉁이와 위와 아래에서 온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이 안에 있다면 일체 중생은 항상 즐거움을 느껴야만 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이 안에 있다면 일체 중생은 항상 괴로움을 느껴야만 한다. 만약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안에 있다면 일체 중생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껴야만 한다.
010_1162_a_02L 문수사리야, 지금 일체의 모든 느낌은 실로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고, 둘의 중간에 있지 않고,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귀퉁이와 위와 아래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느낌은 풀이나 나무, 기왓장이나 돌처럼 끝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모습이 없다. 이런 까닭에 느낌을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상음(想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이 생각의 모든 기억과 분별은 허망한 것에서 생기니 빈주먹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아 본성이 스스로 벗어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상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행음(行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모든 행(行)은 수(數)와 무수(無數)를 벗어나 평등한 수에 들어간다. 비유컨대 파초(芭蕉)는 끝내 알맹이가 없고 본성이 스스로 그러한 것과 같다. 일체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름이 없고 성품이 없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행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식음(識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이 알음알이는 허깨비와 같아서 알맹이가 없고 일어남이 없고 남이 없어 공이고 모습이 없고 성품이 없으니 다섯 손가락으로 허공을 칠하여도 허공에는 나타나는 모습이 없음과 같다. 이런 까닭에 식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빛깔[色]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빛깔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비유컨대 거울 속 모습은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일체의 빛깔 또한 그와 같아 볼 수 있지만 실체가 없고, 그저 눈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며 허망하고 실답지 않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빛깔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소리[聲]가 곧 종자의 성품이다.”
010_1162_b_02L“세존이시여, 왜 냄새가 종자의 성품입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에 냄새의 모습과 성품이 없고 앎도 없다. 따라서 공(空)함이 허공과 같아 코도 냄새도 그에 대한 알음알이도 얻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냄새를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맛[味]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촉감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촉감은 허공처럼 그 성품이 스스로 벗어나 있어 닿음도 없고 합함도 업다. 일체의 법 또한 이와 같으니 몸을 잘 무너뜨리기 때문이며, 촉감의 모습을 벗어나서는 촉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촉감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문수사리야, 법(法)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법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모습이 없고 마음도 없으며, 마음의 성품을 떠나고 이름을 떠나서는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런 법의 성품과 모습이니, 이런 까닭에 법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문수사리야, 흙[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불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여, 일체의 법에는 열(熱)이 없다. 허망한 열의 모습을 벗어나면 본성은 적멸하니, 전도를 벗어낫기 때이다. 그 실재를 분별해 보면 결정된 것도 없고 생(生)도 없다. 이런 까닭에 불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바람[風]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010_1162_c_02L“세존이시여, 왜 바람[風]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고 모습이 없고 성품이 없으니,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며 바람의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바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부처가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법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모든 법은 무너뜨릴 수 없고 끊을 수도 없다. 무너뜨림과 끊음을 벗어났기 때문에 모습이 없고 이름이 없고 성품이 없으며 언어(言語)의 길을 벗어났다. 이런 까닭에 법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승가[僧]가 곧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다.”
“세존이시여, 왜 승가를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성스러운 대중은 법다운 성품의 실제와 안정됨과 어지러움이 평등한 가운데 안주한다. 지혜와 어리석음과 해탈과 번뇌가 평등한 일체의 법 가운데 안주하며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으니, 머묾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승가를 움직이지 않는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이 행하는 곳을 움직이지 않음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모든 허공이 행하는 곳은 불가사의하게 행하는 곳이며, 행을 끊은 곳이며, 근본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이 행하는 곳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 법의 인연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의지함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고, 인연이 없고, 순응함도 없으니 모든 인연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의 인연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모습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010_1163_a_02L“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모두 여여(如如)로 돌아가고 법의 성품에 있어서 한가지이다. 이 법은 취할 수 없고 버릴 수 없으며, 구함도 없고 원함도 없다. 모든 원이 끊어진 까닭에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상 적멸한 모습으로서 허공과 같다. 이런 까닭에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때[垢]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법은 때가 없고 소유함이 없어 청정하고 밝고 밝아 가림이 없는 허공과 같으니, 모든 죄의 공한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의 때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돌아갈 곳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성품은 배움이 없는 것으로서 배워서는 안 되고, 닦아선 안 되고, 사유해선 안 되고, 기억해선 안 되고, 머물러선 안 되고, 일으켜선 안 되고, 행해선 안 되고, 끊어선 안 되고, 증득해선 안 되고, 말해선 안 되고, 이야기해선 안 되고, 구해선 안 되고, 설해선 안 되고, 취해선 안 되고, 버려선 안 되고, 벗어나선 안 되고, 없애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