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세존[婆伽婆]께서는 가야성(伽耶城)의 상두정사(象頭精舍)에서 머물고 계셨다. 그 당시에 여래께서는 성불하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였으나, 족히 천여 명에 달하는 큰 비구(比丘) 대중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는 나계선인(螺髻仙人:大梵天)이었으나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무거운 짐을 버려 오래전에 생사를 여의고 온갖 번뇌를 다하였으며, 평등한 공혜(空慧)1)와 정수(正受:三昧)와 지혜의 마음으로 일체를 깨달아 피안(彼岸)에 이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또한 한량없는 큰 보살마하살 무리들과도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앉아 사유하시며 온갖 삼매에 드시어 두루 법계를 관찰하셨다. 스스로 깨달아 성도(成道)하시어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셨고, 하셔야 할 일을 다 하여 마치셨고,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셨으며, 생사의 흐름을 건너시고 간탐(慳貪)을 버리셨으며, 3독(毒)의 가시를 뽑으시고 온갖 갈애(渴愛)를 없애셨다. 큰 법의 배[法船]를 모으셨고, 커다란 법의 북[法鼓]을 쳐 울리셨으며, 커다란 법의 소라[法螺]를 부셨고, 커다란 법의 깃발[法幢]을 세우셨다. 이미 생사를 끊으시고 바른 법을 연설하시어 모든 악취(惡趣)를 닫아 막으시고 선도(善道)의 문(門)을 여시었으며, 악한 국토를 영원히 여의시고, 모든 깨끗한 국토에서 유행(遊行)하셨다.
만약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라면 이 몸은 인지 작용이 없으니, 마치 풀이나 나무, 모래나 자갈, 담장이나 벽과 같아 헤아려 아는 작용이 없느니라. 이 몸은 단지 4대(大)가 화합된 것으로 부모가 낳은 것이니, 항상 음식을 먹고 옷을 입으며 목욕하고 어루만져 닦아도 끝내는 패퇴하여 무너지니, 이것이 닳아져 멸하는 법[磨滅法]이니라.
011_0429_b_02L이 보리라는 것은 단지 공한 명칭만 존재할 뿐, 실체적인 모습이 없고, 소리도 없으며, 색(色)도 없고, 이루어짐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들어감도 없고, 인지함도 없고, 오고 감도 없느니라. 이와 같은 법은 또한 얽어맴[繫縛]도 없으니, 능히 모든 법을 지나고 삼계를 초월해 벗어날 수 있으며, 보이는 바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으며, 짓는 자[作者]도 없고 처소나 은신할 굴이나 집도 없느니라. 취착(取着)함이 없고 출입함이 없으며, 바라는 바도 없고 머무는 바도 없으며, 모습이나 모양도 없으며, 저것이나 이것이라는 분별도 없고 보여 나타냄도 없으니, 환술(幻術)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으니라.
만약 마음으로 증득하는 것이라면 이 마음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니, 마치 환술로 변화를 만들어낸 것과 같으며, 모두가 과거의 망상이 지은 업(業)으로 인해 생긴 것이니, 형태도 없고 잡히는 바도 없어 마치 허공과 같으니라. 보리는 처소가 없으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어서 일체 법이 공(空)하니라. 또한 비록 언설로는 명칭이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으니, 이는 무위법(無爲法)이며 공(空)이며 무상(無相)이며 무작(無作)이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非有] 없는 것도 아니며[非無] 보여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라.
무릇 보리라는 것은 과거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현재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3세(世)를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라. 모습도 없고, 지음[作]도 아니며 짓지 않음[不作]도 아니니, 만약 이와 같이 3세의 법을 깨달아 이해할 수 있으면 이를 보리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이 보리를 배우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느니라.”
011_0429_b_22L佛告文殊師利:“諸菩薩等學菩提者,應如是住。”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들은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011_0429_b_23L文殊師利白佛言:“世尊!諸菩薩等應云何住?”
011_0429_c_02L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보리라는 것은 삼계를 초월해 벗어나고 언설을 뛰어넘으며 모든 문자를 떠나므로 일정하게 머무는 처소가 없느니라.
011_0429_c_02L佛告文殊師利:“夫菩提者,超出三界,越於言說,離諸文字,無有住處。
또한 문수사리여, 보살마하살은 머무는 바가 없는 곳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요, 집착함이 없는 것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며, 공법(空法)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며, 법성(法性)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며, 일체 법의 실체와 모습이 없는 것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며, 한량없는 믿음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며,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는 것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며, 생각함이 없음에 머무니 이것이 보리에 머무는 것이니라. 머무름[住]이란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으며,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으며, 물 위에 비친 달과 같으며,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은 것이니라. 문수사리여, 이와 같은 법들에 머무는 것이 바로 보리에 머무는 것이니라.”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선한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은 보리심(菩提心)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모든 보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011_0430_a_08L文殊師利言:“天子!善念恭敬,因發菩提心,諸菩薩等應如是學。”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리심은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납니까?”
011_0430_a_09L天子復白文殊師利:“菩提心者因何而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보리심은 6바라밀(波羅蜜)로부터 일어납니다.”
011_0430_a_10L文殊師利言:“天子!菩提心者從六波羅蜜起。”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6바라밀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납니까?”
011_0430_a_12L天子復白文殊師利:“六波羅蜜從何而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방편과 지혜로부터 일어납니다.”
011_0430_a_13L文殊師利言:“天子!從方便智慧起。”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마하살의 방편과 지혜는 무엇으로부터 일어납니까?”
011_0430_a_14L天子復白文殊師利:“菩薩摩訶薩方便智慧,從何而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방편과 지혜는 방일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일어납니다.”
011_0430_a_15L文殊師利言:“天子!方便智慧從不放逸起。”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방일하지 않음은 다시 무엇으로부터 일어납니까?”
011_0430_a_16L天子復白文殊師利:“不放逸者復從何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방일하지 않음은 세 가지 선업(善業)을 닦음으로써 일어납니다.”
011_0430_a_18L文殊師利言:“天子!不放逸者從修三善業起。”
천자가 다시 물었다. “세 가지 선업을 닦는 것은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납니까?”
011_0430_a_19L天子復問:“修三善業因何而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열 가지 선업(善業)을 닦음으로써 일어납니다.”
011_0430_a_20L文殊師利言:“天子!從修十善業起。”
천자가 다시 물었다. “열 가지 선업을 닦는 일은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납니까?”
天子復問:“修十善業因何而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신(身)ㆍ구(口)ㆍ의(意) 3업(業)을 잘 통섭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납니다.”
011_0430_a_21L文殊師利言:“天子!從善攝身口意起。”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이 세 가지 선업은 다시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납니까?”
011_0430_a_22L天子復問:“文殊師利,此三善業復因何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선한 생각에서 일어납니다.”
文殊師利言:“從善思惟起。”
천자가 다시 물었다. “선한 생각은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납니까?”
011_0430_a_24L天子復問:“善思惟者因何而起?”
011_0430_b_02L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선한 뜻과 관행(觀行)에서 일어납니다.”
011_0430_b_02L文殊師利言:“從善思觀行起。”
천자가 다시 물었다. “선한 뜻과 관행은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납니까?”
011_0430_b_03L天子復問:“善思觀行因何而起?”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기억해 지니어 잊지 않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011_0430_b_04L文殊師利言:“從憶持不忘起。”
천자가 다시 물었다. “기억해 지니어 잊어버리지 않음에는 몇 가지 마음이 있으며, 무엇을 인연으로 과보를 얻습니까?”
011_0430_b_05L天子復問:“憶持不忘,有幾種心?以何因緣,而得果報?”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시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 발심(發心)이 있어 인(因)으로부터 과(果)를 얻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초발심이요, 둘째는 관계된 생각을 수행함[係念修行]이며, 셋째는 퇴전하지 않음[不退]이고, 넷째는 선(善)과 함께 생하는 것입니다. 초발심을 바탕으로 하여 관계된 생각[係念]을 얻고, 관계된 생각을 닦음으로써 불퇴전을 얻으며, 불퇴전을 바탕으로 선과 함께 생합니다.
또한 천자시여, 초발심이란 마치 종자를 훌륭한 밭에 심는 것과 같으며, 관계된 생각을 수행함이란 마치 싹이 트는 것과 같으며, 수행하여 퇴전하지 않음은 마치 줄기와 가지나 잎이 자라나는 것과 같고, 선과 함께 생함은 마치 꽃이 열매를 맺어 성숙하는 것과 같습니다. 발심과 관계된 생각의 수행과 불퇴전과 그리고 선과 함께 생함 또한 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자시여, 초발심은 마치 수레를 만드는 장인이 여러 가지 나무에 관해 잘 아는 것과 같고, 관계된 생각의 수행은 마치 나무를 짜 합하는 것과 같으며, 수행하여 퇴전하지 않음은 수레가 완성되는 것과 같고, 선(善)과 함께 생하는 것은 마치 실어 나르는 공용(功用)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발심과 관계된 생각의 수행과 불퇴전과 그리고 선과 함께 생함 역시 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자시여, 초발심은 마치 초승달과 같고, 관계된 생각의 수행은 닷새에서 이레의 달과 같으며, 수행하여 퇴전하지 않음은 열흘의 달과 같고, 선과 함께 생함은 열나흘의 달과 같으며, 여래의 지혜는 충분히 가득 차 완전무결하니 보름달과 같습니다. 발심과 관계된 생각의 수행과 불퇴전, 그리고 선과 함께 생함 역시 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자시여, 예컨대 오(噁)나 아(啊) 등의 음이 일체 문자의 근본이듯이 초발심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 선의 근본입니다. 예컨대 문자를 배우면 조금이라도 지혜를 얻을 수 있듯이 관계된 생각을 수행함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지혜를 얻습니다. 마치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무량(無量)을 계산해 보고 그 분제(分齊)를 아는 것과 같이 불퇴전심(不退轉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퇴전하지 않음을 압니다. 그리고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경론(經論)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처럼, 선과 함께 생하는 선심(善心)의 명료함 역시 이와 같습니다.
011_0431_a_02L또한 천자시여, 초발심을 바탕으로 법왕(法王)의 가문에 태어나고, 두 번째 발심을 바탕으로 법왕의 법을 배우며, 세 번째 발심을 바탕으로 법왕의 행을 닦고, 네 번째 발심을 바탕으로 왕위를 충분히 만족시킵니다. 이상을 네 가지의 발심이라고 합니다.”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신속한 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도를 증득하면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방편도(方便道)이고, 둘째는 반야도(般若道)입니다. 방편의 지혜를 수지하기 때문에 능히 일체 중생을 관찰할 수 있으며, 반야를 수지하기 때문에 일체 법이 공(空)함을 관찰하여 의혹과 집착을 끊을 수 있습니다.
방편의 지혜로 인해서 온갖 법이 화합하며, 반야로 인해 온갖 법이 화합하지 않습니다. 방편은 인(因)이고, 반야는 과(果)입니다. 방편으로 인해 일체 법을 알고, 반야로 인해 모든 법이 공하다는 것을 압니다. 방편의 지혜로 불국토를 장엄하며, 반야로 인해 모든 불국토가 다 평등하다는 것을 압니다.
011_0431_b_02L 유위는 5바라밀을 통틀어 포섭하고, 무위는 반야바라밀을 통틀어 포섭합니다. 다시 두 가지 행이 있어 보살마하살로 하여금 빨리 보리를 증득하게 합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유루행(有漏行)이고, 둘째는 무루행(無漏行)입니다. 유루행이란 5바라밀이며, 무루행이란 반야바라밀입니다.
다시 두 가지 행이 있어 보살마하살로 하여금 빨리 보리를 증득하게 합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머무는 행[住行]이고, 둘째는 머물지 않는 행[不住行]입니다. 머무는 행이란 5바라밀이고, 머물지 않는 행이란 반야바라밀입니다. 다시 두 가지 행이 있어 보살마하살로 하여금 빨리 보리를 증득하게 합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유량(有量)이고 둘째는 무량(無量)입니다. 유량한 것은 5바라밀이고, 무량한 것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유량행(有量行)은 유상법(有相法)이고, 무량행은 무상법입니다.
다시 두 가지 행이 있어 보살마하살로 하여금 빨리 보리를 증득하게 합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지행(智行)이고, 둘째는 정행(定行)입니다. 지혜의 행[智行]이 있기 때문에 초지(初地)로부터 7지에 이르며, 선정의 행[定行]이 있기 때문에 8지로부터 10지에 이릅니다.”
불겁약지총지보살이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뜻에 실체가 없으며, 지혜 역시 실체가 없을 수 있습니까?”
011_0431_b_19L不怯弱智摠持菩薩復問文殊師利:“云何義無體,智亦無體?”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011_0431_b_20L文殊師利言:
“선남자여, 뜻에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무위(無爲)이고 무작(無作)이며 모습이나 모양이 없고 오고 감이 없으니 이를 뜻하는 것이며, 지혜에 실체가 없다는 것은 정법(定法)도 아니고 부정법(不定法)도 아닌 이것을 지혜라 하니, 이와 같이 받아 지녀야 합니다. 뜻이란 실체가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지혜라는 것도 체(體)가 공하여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니, 이와 같이 받아 지녀야 합니다.
또한 지혜는 선정(禪定)을 체로 삼으니 선정의 지혜는 평등하여 분별함이 없습니다. 방편이 있기 때문에 음(陰:蘊)ㆍ입(入:處)ㆍ계(界)와 12인연과 생사유전(生死流轉)하게 하는 선악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으니, 그것들은 마치 환술로 지어낸 것과 같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해야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열 가지 지혜의 행[智行]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인지(因智)이고, 둘째는 과지(果智)이며, 셋째는 의지(義智)이고, 넷째는 방편지(方便智)이며, 다섯째는 반야지(般若智)이고, 여섯째는 수지지(受持智)이며, 일곱째는 바라밀지(波羅蜜智)이고, 여덟째는 대비지(大悲智)이며, 아홉째는 연민교화중생지(憐愍敎化衆生智)이고, 열째는 불착일체제법지(不着一切諸法智)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지혜의 행이라고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청정한 행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자신이 스스로 발생시킨 신업(身業)이 청정한 행이고, 둘째는 일체 중생을 위해 발생시킨 신업이 청정한 행이며, 셋째는 자신이 스스로 발생시킨 구업(口業)이 청정한 행이고, 넷째는 일체 중생을 위해 발생시킨 구업이 청정한 행이며, 다섯째는 자신이 스스로 발생시킨 의업(意業)이 청정한 행입니다.
여섯째는 일체 중생을 위해 발생시킨 의업이 청정한 행이며, 일곱째는 일체 중생을 위해 발생시킨 청정한 평등행이고, 여덟째는 일체 중생 이외의 것들을 위해 발생시킨 청정한 평등행이며, 아홉째는 모든 부처님을 위해 발생시킨 청정한 지혜행이고, 열째는 깨끗한 불국토를 발생시켜 성취한 중생행(衆生行)입니다.
011_0432_a_02L 만일 중생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게 되면 그들에게 의약을 나누어 주어 안락하게 해 주고, 번뇌에 매여 있는 이들에게는 무위지(無爲智)로써 교화하여 삼계를 벗어나도록 하여 모두 다 공덕과 지혜와 무위의 도(道)에 만족하도록 하는 이것을 보살이 열 가지 청정한 행을 원만히 갖추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방편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피안방편(彼岸方便)이고, 둘째는 수지(受持)방편이며, 셋째는 지혜(智慧)방편이고, 넷째는 방편(方便)방편이며, 다섯째는 대비(大悲)방편이고, 여섯째는 지만족(智滿足)방편이며, 일곱째는 혜만족(慧滿足)방편이고, 여덟째는 정념(靜念)방편이며, 아홉째는 진실행(眞實行)방편이고, 열째는 일체 중생에 대한 갖가지 애증(愛憎)이 없는 평등한 방편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분별신(分別身)의 다함이 없음[無盡]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사물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번뇌를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고, 넷째는 갈애를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며, 다섯째는 온갖 견해를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선악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며, 일곱째는 조작(造作)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고, 여덟째는 집착함이 없음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며, 아홉째는 화합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이고, 열째는 보리지(菩提智)의 원만함을 분별함이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열 가지 분별신(分別身)의 다함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조복행(調伏行)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조복하여 선(善)을 행함이고, 둘째는 아끼고 탐하는 것을 조복하고 비처럼 베풀어 보시하는 행이며, 셋째는 정진(精進)하지 않는 것을 조복하는 행이고, 넷째는 세 가지 업을 조복하는 행이며, 다섯째는 독심(毒心)을 조복하여 성내거나 화내지 않는 행입니다.
다시 열 가지 조복행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어리석음[愚癡]과 무지(無智)를 조복하여 파괴하는 행이고, 둘째는 조복하여 방편으로 반야바라밀을 두루 지니는 행이며, 셋째는 번뇌를 조복하는 행이고, 넷째는 조복하여 도(道)를 생하여 일으키는 행이며, 다섯째는 조복하여 신실(信實)함을 두루 지니는 행입니다.
여섯째는 조복하여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행이며, 일곱째는 착하지 않은 마음을 조복하는 행이고, 여덟째는 조복하여 때와 때가 아닌 경우에 자재한 행이며, 아홉째는 자신(自身)을 조복하는 행이고, 열째는 조복하여 공(空)을 관(觀)하는 행입니다. 이것을 열 가지 조복행이라고 합니다.
다시 내외(內外)의 법을 관찰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열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몸의 내계[身內界]가 다 공하다는 것을 관찰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고, 둘째는 몸의 외계[身外界]도 또한 다 공하다는 것을 관찰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며, 셋째는 내외의 온갖 법이 다 공하다는 것을 관찰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고, 넷째는 일체지(一切智)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수행해야 할 도(道)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고, 여섯째는 모든 성현(聖賢)의 지위[地]를 관찰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입니다.
011_0432_c_02L 일곱째는 오랫동안 청정함을 닦아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고, 여덟째는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며, 아홉째는 법을 강론하여 중생을 교화시키는 것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이고, 열째는 모든 중생들을 관찰하여 큰 방편을 일으켜 자비를 내고 애민하되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입니다. 이것을 내외의 법을 관찰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열 가지라고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견고한 마음을 내어 보리의 도를 닦아야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견고한 마음을 내어 보리의 도를 닦지 않는다면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습니다. 견고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몸과 입과 마음의 세 가지 업이 상응하여 서로 위배되지 않는 이것을 견고함이라 합니다. 견고하지 않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몸과 입과 마음의 세 가지 업이 상응하지 못하고 함께 서로 위배되는 이것을 견고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보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두 가지 바른 행[正行]이 있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보리를 바르게 생각[正念]하는 행이고, 둘째는 선정(禪定)을 닦아 온갖 번뇌를 끊는 행이니, 이것들을 보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두 가지 바른 행이라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가지 바른 행의 견고함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부지런히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닦아 익히지 않는 경우에도 일체지를 얻는 것입니다. 이를 보살마하살의 두 가지 바른 행의 견고함이라 합니다.
011_0433_a_02L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가지 바른 행의 견고함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오염된 자리[染地]를 멀리 여의는 바른 행의 견고함이요, 둘째는 자리마다 방편으로 자신의 행을 원만하게 하는 바른 행의 견고함입니다. 이를 보살마하살의 두 가지 바른 행의 견고함이라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가지 바른 행의 견고함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성문지(聲聞地)와 벽지불지(辟支佛地)에서 시현(示現)하는 바른 행의 견고함이요, 둘째는 불지(佛地)에서 보리방편(菩提方便)이 퇴전하지 않는 바른 행의 견고함입니다. 이를 보살마하살의 두 가지 바른 행의 견고함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