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세존[婆伽婆]께서는 가야성(伽耶城)의 산꼭대기에 있는 정사(精舍)에서 큰 비구 대중 천 사람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과거에 모두 장발 범지(長髮梵志)였으나, 모두 아라한이 되어 온갖 번뇌[漏]가 이미 다하였고, 해야 할 일을 다했으며, 온갖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체득(逮得)하였으며, 모든 번뇌의 결박을 다하였고, 바른 지혜로 해탈하여 마음이 자재함을 얻어 피안에 이르렀다. 또한 한량없는 보살마하살 무리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정각을 이루셨던 날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고요히, 그리고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삼매에 드시어 법계를 관찰하시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셨다.
011_0435_a_09L爾時,世尊得成正覺其日未久,寂然宴坐,入于三昧,觀察法界,作是念言:
‘나는 이미 보리(菩提)를 증득하였고, 이미 성스러운 지혜를 얻었으며, 이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했고, 이미 모든 무거운 짐을 버렸으며, 이미 생사의 광야를 벗어났고, 이미 무명(無明)을 버리고 떠나 지혜의 밝음[智明]을 획득했으며, 이미 독화살을 뽑았고, 이미 갈애를 다했으며, 이미 법계를 증득하였고, 이미 법고(法鼓)를 쳐 울렸으며, 이미 법의 소라를 불었고, 이미 법의 당기[幢]를 세웠으며, 이미 생사의 눈[眼]을 버리고 떠나 법안(法眼)으로 설했으며, 이미 악도(惡道)를 닫아 버리고 갖가지 선도(善道)를 열었으며, 이미 밭[田]이 아닌 것을 버리고 온갖 복 밭[福田]을 나타내 보였느니라.
내가 지금 이와 같은 법을 세밀히 관찰하건대 누가 현재 증험할 수 있으며, 이미 증험했으며, 장래에 증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은 몸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인가?
011_0435_a_18L我今審觀如是之法,誰能現證、已證、當證?爲身證耶?爲心證乎?
만일 몸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몸은 우둔하고 헤아림[覺]도 없고 생각함[思]도 없으니, 마치 풀이나 나무, 담장이나 벽, 기와나 돌과 같으며, 4대(大)로부터 비롯되어 부모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무상(無常)하고 무너지고 흩어져 멸하는 법이니, 반드시 바르고[塗] 씻고 옷 입고 음식을 먹는 등의 조건[緣]을 가탁하여 존립할 수 있느니라.
011_0435_b_02L만일 마음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이란 마술사가 변화해 낸 것[幻化]과 같아 모습이나 형태가 없고, 의지할 처소도 없고, 수용해 받아들일 바도 없느니라.
011_0435_b_02L若心證者,心如幻化,無相、無形,無所依處、無所容受。
또 보리란 세간에 수순(隨順)하여 명자(名字)를 세운 것이니, 음향(音響)도 없고 형색(形色)도 없으며, 실체를 이룸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가거나 옴도 없으며, 나가거나 들어옴도 없어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처소가 없으며, 보거나 들을 수도 없고 기억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으며, 반연한 처소를 떠나고 희론(戱論)의 경계가 아니며, 들어갈 바도 없고 문자도 없으며, 동요함도 없고 안립할 수도 없느니라.
일체의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현재 증험한다든가 이미 증험했다든가 장래에 증험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명자일 뿐이니 허망하게 분별한 것에 불과하며, 생겨나고 일어남도 없고 체성(體性)도 없어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애착할 수도 없느니라. 이 가운데는 진실로 이미 정각을 이루었다거나 현재 정각을 이룬다거나 앞으로 장래에 이룰 것이라거나 하는 것은 없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증득함도 없고 이루어짐도 없을 수 있다면 정각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보리라는 것은 일체의 변동하는 모습을 떠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문수사리여, 보리의 모습[相]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느니라.”
011_0435_b_18L佛言:“文殊師利!如菩提相,應如是住。”
문수사리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보리의 모습입니까?”
011_0435_b_19L文殊師利菩薩言:“世尊!何者是菩提相?”
011_0435_c_02L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문수사리여, 보리의 모습은 홀로 삼계를 초월하느니라. 비록 세속을 따라 명자(名字)가 존재하더라도 본래는 일체의 음성과 언설을 멀리 여의느니라. 모든 보살 무리가 보리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초발심으로부터 나아갈 것이 따로 없느니라.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모든 선남자나 선여인은 마땅히 일으켜 나아간다[發趣]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보리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문수사리여, 보살이 나갈 것이 없는 바에 일으켜 나아가는 것이 곧 보리의 도(道)를 향해 나아감이니라.
문수사리여, 자성이 없음[無自性]에 나아감이 바로 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처소가 없는 곳에 나아감이 바로 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법계의 성품[法界性]에 나아감이 바로 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일체의 법 가운데 집착함이 없는 것에 나아감이 바로 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실제(實際)의 차별 없음[無差別]에 나아감이 바로 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예컨대 거울에 비친 모습이나 빛 속의 그림자나 물속의 달이나 뜨겁게 타오를 때의 불꽃과 같은 것에 나아감이 바로 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라.”
“천자시여, 모든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데는 무릇 네 가지가 있어 인이나 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초발심(初發心)이고, 둘째는 해행주발심(解行住發心)이고, 셋째는 불퇴전발심(不退轉發心)이고, 넷째는 일생보처발심(一生補處發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초발심이 해행주(解行住)의 인(因)이 되고, 해행주발심이 불퇴전의 인이 되며, 불퇴전발심이 일생보처의 인이 되고, 일생보처발심이 일체지(一切智)의 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011_0436_b_02L또한 천자시여, 첫 번째 발심(초발심)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먼저 목재를 모으는 것과 같고, 두 번째 발심(해행주발심)은 목재를 얻은 다음에 각각 별도로 깨끗이 잘 다듬는 것과 같으며, 세 번째 발심(불퇴전발심)은 그 장인이 수레를 만드는 것과 같고, 네 번째 발심(일생보처발심)은 그 수레로 무거운 짐을 멀리 이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시여, 첫 번째 발심은 초승달과 같고, 두 번째 발심은 닷새에서 이레 정도 된 달과 같으며, 세 번째 발심은 열흘 정도 된 달과 같고, 네 번째 발심은 열나흘 달과 같습니다. 여래께서 지니신 지혜는 비유하면 밝은 달이 열닷새에 이른 것과 같아 일체의 광색(光色)이 다 원만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천자시여, 첫 번째 발심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자음과 모음을 배우는 것과 같고, 두 번째 발심은 그 학인(學人)이 점차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과 같으며, 세 번째 발심은 배움이 오래되어 잘 계산하는 것과 같고, 네 번째 발심은 학문이 성숙하여 온갖 논서를 깨달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천자시여, 보살마하살의 빠른 도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도를 행하면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됩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방편도(方便道)이고, 둘째는 반야도(般若道)입니다. 방편도는 모든 선법(善法)을 섭수하는 것이고, 반야도는 제대로 헤아려 알아 간택하는 것입니다.
011_0437_a_02L 방편도는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반야도는 모든 법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방편도는 법이 화합하는 것을 아는 것이고, 반야도는 화합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방편도는 인연(因緣)이 되는 것이고, 반야도는 적멸(寂滅)에 이르는 것입니다. 방편도는 온갖 법의 차별상(差別相)을 아는 것이고, 반야도는 법계에는 차별이 없다는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방편도는 모든 불국토를 갖추어 장엄하는 것이고, 반야도는 모든 불국토가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방편도는 중생의 근행(根行)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반야도는 근행(根行)이 공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방편도는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도량에 가도록 하는 것이고, 반야도는 보살들로 하여금 깨달을 바가 없다는 것을 체득하게 합니다.
천자시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다시 두 가지 빠른 도가 있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자량도(資糧道)이고, 둘째는 결택도(決擇道)입니다. 자량도란 보시를 비롯한 5바라밀을 말하고, 결택도란 반야바라밀을 말합니다. 유착도(有着道)와 무착도(無着道), 유루도(有漏道)와 무루도(無漏道)의 경우도 모두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용수지신보살이 물었다. “대사시여, 무엇 때문에 경계는 화합함이 아니고 지혜는 화합함입니까?”
011_0437_a_23L勇修智信菩薩言:“大士!以何因故義非和合,智是和合?”
011_0437_b_02L문수사리보살이 답하였다. “선남자여, 경계[義]는 무위(無爲)이고 무위이면 곧 경계가 아닙니다. 경계가 아닌 것 가운데는 어떤 법도 없으며, 화합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합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경계는 변하여 달라짐도 없고 이루어져 실체화됨도 없으며,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모두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지혜[智]는 도(道)라고 이름하며, 도와 마음[心]이 화합하니 화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한 선남자여, 지혜[智]는 오로지 화합하는 것이니 화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인지(因智)이고, 둘째는 과지(果智)이며, 셋째는 의지(義智)이고, 넷째는 방편지(方便智)이며, 다섯째는 반야지(般若智)이고, 여섯째는 섭지(攝智)이며, 일곱째는 바라밀지(波羅蜜智)이고, 여덟째는 대비지(大悲智)이며, 아홉째는 교화중생지(敎化衆生智)이고, 열째는 일체 법에 대해 집착이 없는 지혜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지혜라고 합니다.
011_0437_c_02L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발기(發起)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신발기(身發起)이니 일체 중생을 위하여 신업(身業)을 깨끗이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구발기(口發起)이니 일체 중생을 위하여 구업(口業)을 깨끗이 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심발기(心發起)이니 일체 중생을 위해 의업(意業)을 깨끗이 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내발기(內發起)이니 일체 중생에 대해 취착(取着)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외발기(外發起)이니 일체 중생에 대해 평등한 행(行)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는 지발기(智發起)이니 일체의 불지(佛智)를 닦아 익히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국토발기(國土發起)이니 일체 불국찰토(佛國刹土)를 공덕으로 장엄하기 때문이고, 여덟째는 교화중생발기(敎化衆生發起)이니 모든 번뇌 병에 대한 약을 잘 알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진실발기(眞實發起)이니 결정적인 취(聚)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고, 열째는 무위지만족발기(無爲智滿足發起)이니 일체 삼계에 대해 마음이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발기라고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행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바라밀행이고, 둘째는 사물을 섭수(攝受)하는 행이며, 셋째는 반야행이고, 넷째는 방편행이며, 다섯째는 대비행이고, 여섯째는 혜(慧)를 구하는 자량행(資糧行)이며, 일곱째는 지(智)를 구하는 자량행이고, 여덟째는 청정한 신심행(信心行)이며, 아홉째는 온갖 진리[諦]에 들어가는 행이고, 열째는 분별이나 애증의 경계가 없는 행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행이라고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무진관(無盡觀)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신무진관(身無盡觀)이고, 둘째는 사무진관(事無盡觀)이며, 셋째는 법무진관(法無盡觀)이고, 넷째는 애무진관(愛無盡觀)이며, 다섯째는 견무진관(見無盡觀)이고, 여섯째는 자량무진관(資糧無盡觀)이며, 일곱째는 취무진관(取無盡觀)이고, 여덟째는 무소집착무진관(無所執着無盡觀)이며, 아홉째는 상응무진관(相應無盡觀)이고, 열째는 도량식자성무진관(道場識自性無盡觀)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무진관이라고 합니다.
011_0438_a_02L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조복행(調伏行)이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간탐(慳貪)과 질투를 조복하는 행이니 베풀어 나누어 줌이 마치 비가 내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둘째는 파계(破戒)를 조복하는 행이니 세 가지 업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진에(瞋恚)를 조복하는 행이니 자애로운 마음을 닦아 익히기 때문이고, 넷째는 해태(懈怠)를 조복하는 행이니 법을 구하는 일에 권태로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선하지 않음[不善]을 조복하는 행이니 선해탈(禪解脫)의 신통(神通)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는 무명을 조복하는 행이니 결정적인 선교혜(善巧慧)의 자량을 낳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모든 번뇌를 조복하는 행이니 일체지(一切智)를 두루 가득하게 하는 자량이기 때문이고, 여덟째는 전도됨을 조복하는 행이니 진실하여 전도되지 않는 자량의 도를 낳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자재하지 못함[不自在]을 조복하는 행이니 때나 때가 아닌 때에 자재하기 때문이고, 열째는 나[我]에 대한 집착을 조복하는 행이니 모든 법이 무아임을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조복행이라 합니다.
또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적정지(寂靜地)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신적정지(身寂靜地)이니 세 가지 몸의 불선업(不善業)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둘째는 구적정지(口寂靜地)이니 네 가지 구업(口業)을 깨끗이 다스리기 때문이며, 셋째는 심적정지(心寂靜地)이니 세 가지 마음[意]의 악행을 영원히 버리기 때문이고, 넷째는 내적정지(內寂靜地)이니 자신의 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외적정지(外寂靜地)이니 일체의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남자여,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여실하게 행하면 보리를 얻을 수 있으나 여실하게 행하지 못하면 얻을 수 없습니다. 여실한 행이란 그 말한 바대로 그렇게 행하는 것이고, 여실하지 못한 행이란 단지 언설만 존재할 뿐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닦아 익히지도 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