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최승(最勝)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생사를 겪으면서 부지런히 고행하며 한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는 동안 중생을 기르고 도량을 장엄하며, 비록 중생을 교화한다 하더라도 또한 교화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중생도 보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나는 교화한 바가 있다’라고도 보지 않나이까? 그렇게 하는 까닭은 법성은 텅 비어 없고 고요해서 있는 바가 없다고 관하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아서 보살마하살은 크고 넓은 서원과 가장자리도 폭도 없는 뜻을 지니고서 중생을 기르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비록 중생을 교화한다 하더라도 역시 교화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중생을 보지도 않나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법성은 텅 비어 없고 고요하여 모두 있는 바가 없다고 관하기 때문이니라. 모두가 공(空)하고 모두가 고요하여 형용도 없고 모양도 없나니, 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법 또한 스스로 공하고 중생도 중생 스스로 공하며 국토는 국토 스스로 공하고 열반은 열반 스스로 공하며 보살은 보살 스스로 공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은 관찰하되 깊이 법요에 들어가서 모든 법이 한 모양[一相] 그대로임을 이해하여 알며, 모든 법의 온갖 지혜도 텅 비어 고요하고 함이 없고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나니,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뜻을 받들어 도(道)에 나아가는지라 마음은 무너뜨리기 어렵나니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이르러 최정각(最正覺)을 이루느니라.
012_0418_a_01L뜻은 마치 금강(金剛)과 같아서 역시 전환(轉還)하지 않고 영락의 도수(道樹)는 무위의 법[無爲法]으로써 하며,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수왕(樹王) 아래 앉아 아직 항복받지 못한 무리를 이미 항복받고 장차 항복받으며, 그 중간에는 만(慢)의 뜻으로 ‘내가 수승하고 그는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만이나 ‘나는 그와 동등하다’고 하는 만이나 ‘그가 훌륭하고 나는 그보다 못하다’고 하는 만이나 증상만(增上慢)ㆍ증중만(增中慢)ㆍ증하만(增下慢)이나 중상만(中上慢)ㆍ중중만(中中慢)ㆍ중하만(中下慢)이나 하상만(下上慢)ㆍ하중만(下中慢)ㆍ하하만(下下慢)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사유하여 이 모든 만을 제거하고 또한 질투하지 않고 높은 체하는 마음을 숨겨야 하며,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 중생을 관찰하여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해야 하고, 선권방편으로써 5도(道)와 8무한처(無閑處)에 들어가며, 만일 어떤 중생이 교화를 받아야 할 이면 곧 그 사람을 위하여 벗이나 아는 이가 되어 주고 혹은 부모ㆍ형제ㆍ권속이 되기도 하며 혹은 큰 부호(富豪) 장자가 되어 앞의 중생의 모자란 바를 대어 주되 한량없는 창고에 있는 금ㆍ은의 값진 보배와 자거ㆍ마노ㆍ진주ㆍ호박과 좋은 명월주와 여의보주를 내어 주기도 하느니라.
혹은 음식ㆍ평상ㆍ침구ㆍ병을 치료하는 의약을 다 베풀어 주되 인색한 바가 없으며, 혹은 또 어떤 사람이 보살에게 와서 은근히 머리ㆍ눈ㆍ손발ㆍ나라ㆍ재물ㆍ처자와 일곱 가지 값진 기구를 요구하면 모두 보시하되 역시 보시하였다는 생각이 없나니, 이때에 보살은 곧 법계의 자재정의삼매정수에 들어가서 권방편으로써 그 중생을 위하여 허무(虛無)하다는 법을 연설하여 주느니라.
012_0418_b_01L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법이란 함이 없고 또한 하는 바도 없으며 6정(情)을 분별하여도 전혀 주인이 없느니라. 만일 눈으로 빛깔을 볼 적에 빛깔 또한 대(對)함이 없는데도 중생이 어리석고 미혹되어서 그 가운데서 식(識)을 일으키고 분별하며 사유하거니와 안식에는 주인이 없느니라. 또 귀로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알거나 몸으로 세활(細滑)을 알거나 뜻으로 법을 분별하거나 간에 보살은 도무지 아무것도 없다고 관찰하느니라. 법이 일어나는 것은 처소를 따라 일어나고 법이 소멸하는 것도 처소에 따라 소멸하나니,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소멸하여도 소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12인연과 18본지(本持)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혹은 때로 보살은 사자분신(師子奮迅)삼매에 들어가서 다시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 보이고 그 가운데서 청정한 음성을 연출하며, 이미 국토를 나타내되 온갖 보배로 장식하고 향기로운 꽃이 향기를 풍기면서 오색이 찬란하며 위의가 맑고 깨끗하며 뜻이 광명을 내는 것과 이전할 수 없으며, 다시 한량없는 정의 법문(定意法門)을 나타내어 여래께서 항상 즐기는 것으로 모든 법과 중생의 근본을 모두 앞에 나타나 있게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다시 신족으로써 한량없는 정(定)에 들어가 스스로 나타내 보이고 한 송이 연꽃 위에 가부(跏趺)하고 앉았는데 그 색신(色身)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의 모든 법의 공덕을 나타내며,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하는 자취를 깨끗이 제거하여 보살로서 출요(出要)의 길로 인도하며, 일체지에 의지하여 감로의 법을 연설하고 지혜의 광명을 드날려 부처님의 지혜를 나타내 보이되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혹은 값진 보배로써 칠보탑(七寶塔)을 일으켜 한 천하에 가득 채우기도 하고 혹은 두 천하에, 혹은 세 천하에, 혹은 네 천하에, 혹은 범천(梵天)까지 이르고 혹은 일구경천(一究竟天)까지 이르게 하기도 하되 겁(劫)을 지나도록 머물러 멸도를 취하지 않기도 하느니라.
012_0418_c_01L혹은 때로 보살은 권방편으로써 무위의 고요한 정(定)에 들어가서 모든 선근을 갖추고 여래께서 갖춘 일체지를 버리지 않고 삼매의 힘으로써 중생을 가르치느니라. 혹 어떤 중생은 소리를 듣는 것으로 가르쳐 주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냄새를 맡는 것으로 가르쳐 주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그 맛의 뜻[味義]을 알려 주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몸의 부드러움을 얻게 되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법을 체달하여 뜻을 깨치게 되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다시 ‘소리를 듣는 중생은 반드시 나의 청정한 뜻을 듣고 싶어하므로 나는 이제 마땅히 여래의 8음(音)을 연설하되 그 음성에는 여덟 구의 고의 음[苦音]과 습의 음[習音]과 진의 음[盡音]과 도의 음[道音]과 고를 보고는 고를 향하고 습을 보고는 습을 향하며 진을 보고는 진을 향하고 도를 보고는 도를 향하는 음성을 연설하겠다’라고 생각하나니, 이때에 중생은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도 뜻을 깨치지 못하고서 광명과 그의 신체를 보고 싶어하면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 평등한 관[平等觀]으로써 곧 지종(地種)의 산이나 강물ㆍ석벽(石壁)ㆍ수목(樹木)이며 꽃과 열매를 모두 다 7보인 자거ㆍ마노ㆍ수정ㆍ유리ㆍ산호ㆍ호박 등으로 변화시켜 모두가 광명을 놓으니 그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어 햇빛과 달빛을 가리게 하느니라.
이때에 중생은 뜻이 깨치지 못하여 다시 해와 달의 광명을 보고 싶어하면 보살은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곧 무애심념(無碍心念)삼매에 들어가서 천억의 수없는 털구멍에서 광명을 놓되 그 낱낱의 광명에는 7보로 된 연꽃이 있고, 그 낱낱의 연꽃에는 7보로 된 대(臺)가 있으며, 그 낱낱의 대 위에는 7보로 된 일산[蓋]이 있고, 그 낱낱의 일산 아래에는 7보로 된 자리[座]가 있으며, 그 낱낱의 자리 위에는 모두 여래께서 계셔서 그 중생을 위하여 고(苦)의 근본을 말씀하시는데, 고가 생기되 고가 없으면 이것은 바로 고제(苦諦)가 없는 것이요, 습(習)이 생기되 습이 없으면 이것은 바로 습제(習諦)가 없는 것이며, 진(盡)이 생기되 진이 없으면 이것은 바로 진제가 없는 것이요, 도(道)가 생기되 도가 없으면 이것은 바로 도제가 없는 것이니라.
012_0419_a_01L이때에 그 자리에서 냄새를 맡고도 중생의 뜻이 깨치지 못하면 다시 ‘우리들은 지극히 미묘한 향기를 향하여 나아가고 싶다. 그런데 지금 큰 성인께서는 소리에 관한 가르침을 연설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느니라.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지극히 미세한 온갖 향기[極微衆香]의 정의정수삼매(定意正受三昧)에 들어가서 곧 지종(地種)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를 모두 다 향기가 자욱한 우두전단(牛頭栴檀)과 계설애납(鷄舌艾納)ㆍ발향몽경(跋香夢經)ㆍ목필소합(木榓酥合)이며 분다리꽃[分陀利花]ㆍ수건제꽃[須乾提花]ㆍ만원건제꽃[滿願乾提花]과 청련(靑蓮)의 향기로운 꽃 등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꽃의 수천백 가지로 변화시켜 사방에 두루하게 하여 향기를 맡지 않음이 없게 하느니라.
이때 중생은 비록 이런 향기를 맡고도 뜻이 깨치지 못하고 그 향기 가운데서 도의 가르침이 나오기를 바라면 그때에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향기 가운데서 6중(重)의 법을 연설하나니, 이때에 향기 맡는 중생은 마음이 열리고 뜻이 깨쳐 이 세간의 과환(過患)을 다 마치고 다시 와서 나지 않으며 괴로움의 끝[苦際]을 다하고 곧 도과를 이루느니라.
이때에 자리 위에서 맛을 탐낸 중생은 뜻이 깨치지 못하면 곧 ‘우리의 뜻은 미묘한 맛[妙味]을 좋아하고 집착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지금 큰 성인께서는 향기에 관한 것을 말씀하고 계시니 실로 본심으로 탐하고 그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바를 알고는 곧 지극히 미세하고 청정한 맛[極微淨味]의 정의정수삼매에 들어가서 곧 지종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를 모두 다 감로가 되게 하고 저절로 된 음식으로 변화시켜 향기가 자욱하고 감미로움이 한량없게 하느니라.
012_0419_b_01L그때에 중생이 비록 이런 맛을 얻었다 하더라도 뜻이 깨치지 못하여 앞의 것을 탐내면서 저절로 보내 주어서 그 형상을 보게 되어야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면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 속질무애(速疾無碍)삼매에 들어가서 곧 지종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를 변화시켜 모두 다 중생들이 되게 하고 그 하나하나의 중생들이 여러 가지 저절로 된 감로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감로의 음식 가운데서 ‘단 맛(甘味)은 밖에 있는 것인데 설식(舌識)으로 맛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이 섞이고 만나야 비로소 진로(塵勞)를 일으키는 것이니, 우리는 이제 스스로 조절하여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욕심 있는 몸[支形]으로 나아가되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수레에 기름을 쳐서 무거운 짐이 실릴 수 있게 한 것과 같나니 상처 있는 데는 약을 얻어서 힘써 그 통증을 구제할지어다’라는 소리가 났다. 이와 같은 법의 가르침이 모두 그 맛에서 나오면 중생은 그것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이 깨우쳐져서 이 세간의 과환을 다 마치고 다시는 와서 나지 않으며 괴로움의 끝을 다하여서 곧 도의 과위를 이루느니라.
이때에 자리 위 중생의 무리에서 세활(細滑)을 탐내는 이는 뜻이 깨치지 못하면서 곧 ‘우리의 지금의 뜻은 세활을 탐착하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 큰 성인께서는 미묘한 맛을 설명하고 계시니 실로 본심으로 탐하고 그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지극히 미세하고 유순하려는[極欲微細柔順] 정의정수삼매에 들어가 곧 지종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 등을 변화시켜 모두 다 중생이 되게 하고, 하나하나의 중생들이 모두 저절로 된 겁파육의(劫波育衣)를 입고 하늘의 비단이나 하늘의 채색으로 몸을 감아 있으면 중생들이 그것을 보고 손으로 가까이 대보면서 스스로 부드러움을 깨닫지만 얻어 가질 수는 없으므로 뜻에 한 벌의 옷을 생각하나니 곧 백 개로 쪼개져서 스스로 이르게 되며 중생은 마음이 깨어나게 되느니라.
그제야 자신을 몹시 책망하면서 ‘안타깝구나. 무엇 하러 이런 옷을 탐착했는가? 스스로 떨어져서 진로(塵勞)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형상은 마른 뼈로 된 것을 피와 살로 휘감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 곧 공중에서 소리를 내느니라. ‘남자야, 알아야 한다. 인간의 5욕락은 진실이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세활(細滑)을 집착하면 점점 서로 당기면서 관련되게 되나니 생각에 스스로 엄히 책망하면서 이런 탐애(貪愛)를 버릴지니라.’ 그때에 그 중생은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치게 되나니, 이 세간의 고통을 다 마치고 다시는 와서 나지 않고 괴로움의 끝을 다하여 곧 도의 과위를 이루느니라.
012_0419_c_01L이때에 자리 위의 중생 무리로서 법(法)을 탐한 이는 뜻이 깨치지 못하자 곧 ‘나의 지금의 뜻은 미묘한 법에 있다. 그런데 오늘 큰 성인께서는 세활을 연설하고 계시는구나. 실로 본심으로 탐하고 그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 한량없는 법계의 정의삼매정수에 들어가 곧 지종(地種)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 등을 변화시켜 모두 다 중생이 되게 하고 그 하나하나의 중생들이 모두 6도무극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선정ㆍ해탈과 유위ㆍ무위와 유루ㆍ무루와 생기고 소멸하고 집착하고 끊고 하는 이것은 바로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연설하게 하느니라.
혹은 때로 보살은 중생의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바를 관찰하고, 곧 방편으로 계책을 쓰되 몸의 색상(色相)을 나타내어 숨거나 없어짐이 자유자재하며, 허공으로 올라가 18가지 변화를 짓고 공중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에 걸림이 없으며, 혹은 다시 국토와 성곽을 나타내 보이면서 부처님 법을 연설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요긴한 선정[要定]을 체득하게 하기도 하느니라.
보살은 그때에 다시 비유할 수 없는 광명에 들어가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이 광명으로 들어가 가부(跏趺)하고 앉아 있게 하느니라. 혹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게 하기도 하고, 혹은 연꽃에 앉아 있게 하기도 하되 온 세계에 가득 차서 빈 자리가 없게 하며, 혹은 부처님 몸을 나타내어 보배 연꽃에 앉아 모든 부처님의 6도무극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선정ㆍ해탈을 연설하게 하기도 하며, 또 여래의 18불공법과 4무소외로써 중생들을 가피하여 저마다 제도될 수 있게 하느니라.
012_0420_a_01L그때에 보살은 다시 신족의 힘으로써 큰 광명을 놓아 부처님 세계 억백천 나라를 나타내고 낱낱의 광명마다 각각 억백천 중생들을 이끌어 광명을 타고 여기에 와서 법을 듣고는 제도되게 하느니라. 낱낱의 모공에는 10억의 광명이 있고 낱낱의 광명에는 10억의 국토가 있으니, 때에 변화로 된 국토에는 자연히 스스로 깨닫게 하는 마니보(摩尼寶)가 있고 여러 가지 진기한 보배로써 그 사이에 섞였는데 그 마니보는 열 길이나 떨어진 허공에 달려 있어 보주의 광명이 사무쳐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느니라.
다시 기이한 마니보로써 그것을 장엄하였고 그 낱낱의 보배 위마다 십억의 강물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국토와 십억 백천의 누관(樓觀)과 대각(臺閣)이 있으며, 그 낱낱의 누관에는 십억 백천의 부처님 국토의 보배 연꽃으로 된 사자좌(師子座)가 있고 그 낱낱의 보배 사자좌마다 십억 백천 국토의 신령한 보배 연꽃이 나 있으며, 그 낱낱의 꽃 위에는 십억 백천의 여래께서 사자좌에 앉아 계시고 그 한 분 한 분의 여래는 큰 광명을 놓아 십억 백천의 부처님 국토를 온통 뒤덮으셨으며 그 낱낱의 부처님 국토마다 십억 백천의 여래 사자의 두려움이 없는 덕(德)이 있고 그 낱낱의 두려움이 없는 덕에는 십억 백천의 중생들이 사는 곳[居處]이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중생에게는 십억 백천의 모든 부처님 국토가 나타나 있느니라.
그 낱낱 부처님 국토에는 십억 백천의 법구의 의미(義味)와 모든 부처님의 법이 있으며, 그 낱낱 법구의 의미와 법에는 십억 백천의 모든 경법(經法)이 생겨 진로(塵勞)를 활활 태우며, 더 나아가 모든 법과 정의 문[定門]도 역시 그와 같고, 낱낱의 모든 법문 가운데에서는 한량없는 온갖 지혜의 모습과 불퇴전법을 연설하되 여러 가지 지혜와 의미가 같지 않으며, 낱낱이 굴리는 법륜 가운데서는 십억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여 순숙(純熟)한 행을 얻고, 그 낱낱의 중생 세계에는 다시 십억 백천의 부처님 국토가 있었으니 저마다 자기 세계를 교화하여 좋은 곳[善處]으로 나아가게 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다 함께 부처님 도[佛道]에 이르게 하느니라.
012_0420_b_01L보살 대사(大士)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스스로 한량없는 위신력의 변화를 나타내되 삼매의 경계는 아직 일찍이 있지 못하였고 아직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이며, 교화한 바가 기이함을 다하여 마음으로 헤아릴 바도 아니고 뜻으로 꾀할 바도 아니며 안팎과 중간에도 도무지 처소가 없고 또한 오는 때를 보지도 못하고 또한 가는 때도 보지 못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법의 체성이 자연이기 때문이며, 백 겁의 수행으로 그 때[垢]를 다하고자 하고 여래의 서원을 향하여 중생에게 가피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헤아릴 수 없고 한이 없는 수겁(數劫) 동안에 집착이 없고 머무른 것도 없고 또한 물든 바도 없으며, 또한 다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그 근본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처소가 없나니 설령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권모술수를 써서 이 정(定)의 조화(造化)와 형상을 찾고 궁구하게 하여도 뜻이 지극하고 매우 깊어서 불가사의하느니라.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셔야 할 법이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닦을 바가 아니니라.
최승아, 다시 이런 이치를 사유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괴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8난(難)에 노닐며, 중생들의 뜻에 애욕이 있는 마음과 애욕이 없는 마음의 많이 있고 적게 있음을 관찰하여 또한 모두 다 알고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의 많이 있고 적게 있음도 역시 모두 다 알며,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의 많이 있고 적게 있음도 역시 모두 다 아느니라.
012_0420_c_01L만일 그 중생이 애욕의 마음이 있어 치우치게 여색에 집착하여 곱고 살지고 흰 것을 마음에 사랑하고 버리거나 여의지 못하면 이때에 보살은 다시 임시로 꾀를 내어 널리 방편을 써서 곧 그를 위하여 오로(惡露)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각관(覺觀)하는 생각을 나타내 보이고, 그 중생 앞에서 몸은 덧없다는 것과 4대는 흩어지고 떨어지며 딴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되 하루ㆍ이틀, 나아가 이레가 되면 형체가 띵띵 부풀어 오르고 악취가 나서 깨끗하지 못하며, 혹은 때로는 죽은 시신의 피와 살이 녹아 다하고 힘줄과 뼈만이 서로 이어진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괴이하게 변화하여 여러 가지 형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해골과 넓적다리의 뼈며 팔다리가 저마다 한 군데에 있되 오래되면 차츰차츰 변하여 흰 비둘기 같은 빛이 되고 세월이 차츰 오래 지나면 썩은 흙과 같이 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이 중생에게 보이고 나면 곧 스스로 깨우치고 비로소 허망한 욕심은 바로 범부의 행으로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바른 도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 스스로 옛날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뉘우치고 고치며, 이에 큰 성인에게 몸을 던져 범행(梵行)을 좇아 닦고 청정한 못에 들어가 음욕의 때[垢]를 씻으며 정신을 단련하고 속박을 버리고 위없고 지극히 참된 정각(正覺)을 이루며 자기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기르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애욕의 마음을 관하여 곧 그를 위해 설법하여 도의 과위를 얻게 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알아야 하느니라. 혹시 어떤 중생이 애욕의 마음은 없으나 뜻이 작은데 국한하여 큰 도에 이르지 못하면 보살은 부지런히 힘써 평등하고 바르게 깨닫는 도를 이루게 해야 하느니라. 지혜 창고[智慧藏]는 둘이 없는 법으로써 인도하고 지시하여 바른 길을 알게 하고 대승에 안전하게 세워 소승의 도[小道]를 취하지 않으며, 수없는 겁으로부터 공을 쌓고 덕을 세우고 선(善)을 행하되 게으르지 않으며, 뜻이 헷갈리고 마음이 미혹하여 진위(眞僞)를 구별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스스로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느니라.
어떤 것이 보살의 둘이 없는 도(道)라 하는가? 보살이 수행하는 둘이 아닌 도[不二道]는 보살은 언제나 청정하면서도 청정한 데에 처하지 않고 청정한 데서 놀고 즐기면서도 밖으로는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요, 보살은 언제나 고요하면서도 밖으로는 어지러운 것과 같이 나타나고 고요한 데서 놀고 즐기면서도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착오가 있지 않고 정의(定意)로부터 일어나 밖으로 중생을 교화하나니 바로 이것이 둘이 아닌 도이니라.
012_0421_a_01L보살은 보시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뉘우침을 품지 않고 갚음에 생각이 없는 견고한 뜻을 지니며 밖으로 중생을 교화하되 세 가지 생각[想]을 제거하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보살은 계율이 구족하여 처음부터 이지러짐이 없고 다시 금률(禁律)로써 밖으로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보살은 매우 깊은 지려(智慮)가 넓고 커 스스로 찬탄하면서 ‘이룩한 바가 있다’라고 찬탄하지 않고 안으로는 언제나 한 마음이어서 더러움에 물든 바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지혜를 지니어 짓고 교화함이 실로 끝이 없으며 그 가운데서 뜻을 다잡아 분산하지 않게 하고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을 가르치고 교화하되 너른 들판의 근심 없는 진펄[無憂澤]을 지나가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니라.
보살은 인정정(忍正定)삼매를 닦아 현재의 몸으로 부지런히 애써 사람 없는 산택(山澤)에 살며, 혹은 촌락 근처에서 걸식을 하되 때로는 일 년 내지 백천 년을 지나기도 하고, 혹은 한 겁 내지 백천 겁을 지나되 그 가운데서 현재 있는 몸으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느니라. 그때에 산중에는 사람인 듯 아닌 듯한 따위인 나찰귀(羅叉鬼)나 두 발ㆍ네 발ㆍ여러 발 달린 귀신이 저마다 칼이나 몽둥이를 가지고 보살에게 와서 접촉하기도 하고, 혹은 날카로운 칼로써 그의 코를 베면 코가 곧 다시 생겨나곤 하는데 마치 염부 열매와 같으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염부 열매는 한 개를 따면 두 개가 생기고 두 개를 따면 네 개가 생기며, 네 개를 따면 여덟 개가 생기고 여덟 개를 따면 열여섯 개가 생기며, 열여섯 개를 따면 서른두 개가 생기나니, 이와 같이 하여 차츰차츰 나무는 온통 열매로 뒤덮혀 다시는 나무의 형상도 없게 되고 또한 가지ㆍ잎ㆍ줄기ㆍ마디조차 보이지 않게 되느니라.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서 인(忍)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보살의 코를 벨 적에 한 번 베면 두 개가 생기고 그 두 개를 베면 네 개가 생기며 네 개를 베면 여덟 개가 생기고 여덟 개를 베면 열여섯 개가 생기며 열여섯 개를 베면 서른두 개가 생기나니, 이와 같이 차츰차츰 몸은 온통 코가 되어 다시는 몸의 형상도 없고 또한 손ㆍ발ㆍ머리ㆍ눈조차 보이지 않나니, 중생에게는 다만 헤아릴 수 없는 코만이 보일 뿐이므로 곧 그때에 생각을 내어 그의 코를 벤 것을 후회하고 보살의 본래 몸을 보게 되기를 원하느니라.
012_0421_b_01L이때에 보살은 삼매를 버린 뒤에 마음과 뜻이 안온하고 자상하면서 정(定)으로부터 일어나 도로 그의 형상을 본래와 다름 없이 나타내고 점차로 몸을 움직이고 흔들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차츰 다시 눈을 뜨면서 할 말이 있는 것같이 하면 중생은 그것을 본 뒤에 모두가 온몸을 땅에다 던지고 스스로 ‘원컨대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의 곁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며 귀의하나니, 이때에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때에 따라 잘 제도하여 해탈시키느니라.
보살은 다시 정삼매(定三昧)에 들어가 안의 마음이 고요해져서 딴 생각이 없을 적에 다시 어떤 중생들이 보살에게로 와서 모두가 함께 에워싸고는 그의 눈을 후벼 파내면 눈이 곧 다시 생겨나되 마치 녹여 만든 유리(琉璃)를 흩은 것과 같이 되나니, 가령 어떤 사람이 녹여 만든 유리를 취하여 비라(毘羅) 열매만큼을 땅에다 뿌리면 겨자씨처럼 흩어져서 주울 수 없는 것과 같거니와 그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면서 저마다 정광(精光)이 있는데, 그 중생들은 다만 보살의 형체가 온통 눈이 되어 있는 것만을 볼 뿐이요, 다시는 본래의 형체나 모습은 볼 수 없으므로 곧 그때에야 생각을 내어 본래 했던 일을 후회하고 곧 자신들을 몹시 책망하며 보살의 본래 몸을 보고 싶어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곧 삼매를 버리고 마음과 뜻이 안온하고 자상하여 정(定)으로부터 깨어나 도로 그의 형상을 본래와 다름 없이 나타내고 점차로 움직이고 흔들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마치 할 말이 있는 것같이 하면 그 중생들은 그것을 본 뒤에 모두가 온몸을 땅에다 던지며 스스로 ‘원컨대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의 곁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며 귀의하나니, 이때에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 때에 따라 알맞게 제도하고 해탈시키느니라.
012_0421_c_01L이때에 보살은 다시 정에 들어가 안의 마음이 고요하여 다른 생각이 없을 적에 다시 어떤 중생들이 보살에게로 와서 손에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그의 머리와 발을 베어버리면 머리와 발이 도로 생기는 것은 마치 구다라나무[瞿多羅樹]와 같이 되느니라. 구다라나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ㆍ잎ㆍ줄기ㆍ마디를 베어 그 뾰족한 데를 조각조각 내어서 각각 다른 곳에 있게 하면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곧 지기(地氣)로 인하여 다시 본래대로 가지ㆍ잎ㆍ줄기ㆍ마디가 생겨 각각 나무가 되느니라. 그때에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형체와 팔다리가 온통 머리와 발이 되어 다시는 본래의 형상이 없나니, 중생들은 다만 보살의 형체가 모두 다 머리와 발 뿐이요 다시는 본래 모습의 형상은 볼 수 없으므로 곧 그때에 생각을 내어 본래 했던 일을 후회하고 곧 스스로 몹시 책망하며 보살의 본래의 몸 보기를 원하느니라.
그때에 보살은 곧 삼매를 버리고 마음과 뜻이 안온하고 자상하여 정(定)으로부터 깨어나 도로 그 형상을 본래와 같이 나타내며, 점차로 움직이고 흔들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보이고 차츰 다시 눈을 뜨면서 할 말이 있는 것같이 하면 중생들은 그것을 본 뒤에 모두가 온몸을 땅에다 던져 스스로 ‘원컨대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의 곁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며 귀의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찰하고 때에 따라 알맞게 그들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애욕(愛欲)이 있는 마음과 애욕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모두 다 안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한 스스로 ‘나는 진로(塵勞)에 있으면서 그 공(功)을 헛되이 버린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다시 ‘이 중생들을 쉬이 권유하여 나아가게 하였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보살의 행하는 것은 행하되 행함을 보지 않고, 또한 다시 교화를 받는 이가 있다고도 보지 않나니, 행(行)과 교(敎)의 두 가지 일은 스스로 텅 비어 고요하며 또한 하나[一]라고 보지도 않고 또한 하나가 없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하나에도 스스로 하나가 없거든 하물며 하나가 있다고 말하겠느냐?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스스로 붙인 이름[假號]이니라. 눈이라고 말하는 것도 스스로 붙인 이름이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법과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細滑]ㆍ법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보살이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법문(法門)을 열고 한량없는 문[無量門]을 나타내어 이끌어서 무법(無法)에 이르러 중생을 가르치려 함에서이니라.”
이때에 최승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중생의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모두 다 알게 되나이까?”
012_0421_c_22L是時,最勝復白佛言:“云何衆生有瞋恚心無瞋恚心,有多有少皆悉知之?”
012_0422_a_01L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대사가 세계의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 노닐 적에 그 낱낱의 형상이 있는 종류로써 기고 날고 꿈틀거리고 기어 다니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맨 아래의 개미 새끼에 이르기까지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관찰하여 모두 다 분별하며 그 낱낱을 요량하고 간택하여 약을 주느니라.
가령 어떤 중생이 성냄이 많은 이가 있으면 곧 고(苦)ㆍ공(空)ㆍ비상(非常)의 변(變)을 당하게 되나니, 혹은 어떤 이는 벌레나 짐승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는 도적이나 병사의 칼날에 해를 당하기도 하며, 혹은 물이나 불에 뜻밖에 타고 삶겨지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재변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가령 그 중생이 마음에 깨우침을 얻으면 그의 가르침과 경계[敎誡]를 따라 그 교화를 받나니, 곧 그곳에서 제도하고 해탈하게 할 수 있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덧없는 변화를 보고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보살은 그때에 다시 권혜(權慧)로써 인(忍)의 삼매에 드나니 그 삼매의 이름은 무상관(無常觀)이며 다시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자항복거에(慈降伏去恚)삼매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정수에 들면 곧 성내는 마음을 항복받아 제거할 수 있느니라. 설령 지극히 악한 나찰 귀신이나 범ㆍ이리나 도적 등 폐악한 부류가 보살에게로 와서 상해하려 하지만 아직 이르기도 전에 중도에서 혹 되돌아가느니라. 그렇게 되는 까닭은 자정(慈定)의 힘이 사방 여러 세계를 덮고 수호하는지라 억(億)ㆍ해(姟)의 세계 국토가 구제받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라.
012_0422_b_01L자삼매(慈三昧)에 들 수 있는 이에게는 법도(法度)에 열 가지 일[事]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매우 깊은 지혜를 닦고 한량없는 업(業)을 행하며, 총지로 오래도록 잘 기억하고 뜻을 무너뜨리기 어렵고, 스스로 한량없으되 법계로써 양을 삼아 한량없음에 들어가며, 모든 부처님께서 닦아 익힌 위없는 법인(法印)으로써 그를 봉인(封印)하고 여래의 힘에 의지하여 부처님 국토를 더욱 늘리며 항상 스스로 뜻을 세우고 도량을 청정하게 닦아 보살의 업을 세우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행하는 이는 법과 율에 상응하게 되고 나는 곳이 없는[無所生] 데도 상응하며 안목이 열리게 되어 환히 크게 깨쳐 혜안(慧眼)이 청정해지고 영원히 티끌의 가림[塵曀]이 없으며, 종성(種姓)의 눈을 얻고 부처님의 청정한 눈을 얻느니라. 혜안은 바깥이 없고 의안(議眼)은 깊고 멀며 법안(法眼)은 언제나 안정되고 선지식의 눈은 영호(營護)가 되고 도안(道眼)은 매우 깊어 변재의 눈[辯才眼]을 얻고 말은 막힘이 없으며 의심이 없는 눈[無疑眼]에 이르고, 마음은 피차(彼此)가 없어 또한 망설임이 없으며, 법문의 눈[法門眼]에 들어가서 소경의 무리를 인도하여 보이고 의미(義味)를 분별하여 법문을 드러내며, 진실로 아는 이[眞知識]를 친근하여 도의 마음[道心]을 성취하고 세운 바 경계는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또한 어떤 이도 헐뜯을 수 있는 이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모든 눈을 분별하여 도업(道業)을 이루어 마치는 것이니라.
모든 세간을 위하여 어질게 돕는 착한 벗이 되고 미리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아 위엄 있는 모양을 드러내 보이며, 선근을 세워 교화하는 바가 막힘이 없고 공덕이 청정하여 원하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지며, 포태(胞胎)가 진실하고 바르며 모든 해탈을 만나 의심 그물을 끊고 지혜의 겹친 구름이 퍼져서 허공의 세계에 두루 차며, 현성의 법으로써 마음의 때[心垢]를 통하여 알고 세운 바 뜻하는 원[志願]이 항시 앞에 나타나 있으며, 마음으로 한 일에는 끝내 의심이나 어려움이 없고 신근이 견고하여 공업(功業)이 다함 없으며,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받들어 근심이나 즐겁다는 생각을 없애고 도의 마음이 한층 더 깊어 지혜의 값진 보배를 채취하며, 지혜로운 선비[智士]를 공양하고 받듦이 마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바람에 불려서 맡지 않는 이가 없는 것과 같나니, 그 어떤 더럽고 악한 것도 모두 다 청정하게 되느니라.
012_0422_c_01L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지금 이 염부리(閻浮利) 안에 사는데 살고 있는 나라는 비사리(毘舍離)이니, 육안(肉眼)으로 모든 방향의 국토를 살펴보아도 온갖 고통과 근심과 번거로움은 이곳보다 더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여래의 종성(種姓)을 내었으나 지금 이 중생들의 향기롭지 못한 악취는 위 허공의 십천 유순[由延]까지 뻗치며, 그리고 하늘은 인간을 기대고 인간은 천종(天種)을 돕는데 하늘은 또한 스스로 알아서 전생 일[宿命]을 보거니와 내가 쌓은 덕은 모두가 사람의 몸[人身]을 말미암은 것이니 가령 인간에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지 않으면 복과 경사[福慶]를 받지 못하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그때에 모든 하늘들은 저마다 종자[從]들을 거느리고 세간으로 함께 와서 공중에 도달하려 하다가 인간 세상의 고약한 냄새가 겹친 구름 끝에 배인 인간의 비린내와 부정(不淨)한 것을 맡고는 곧 그들이 있는 데로 되돌아가 인간에 이르지 않느니라. 그렇게 한 까닭은 그들의 향기롭고 청결한 몸으로써는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니라.
보살 대사는 큰 자비를 행하는지라 교화할 국토에 대하여 이것은 곱다, 이것은 누추하다, 이것은 깨끗하다, 이것은 깨끗하지 않다는 것으로 선택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으로 ‘나는 지금 바라고 좋아하니 여기는 교화할 만하거니와 저 곳은 할 만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마치 내가 오늘 이 인계(忍界)에 있으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연(緣)을 다 끝내고 남음이 없음을 시방의 모든 여래ㆍ등정각께서는 각기 당신이 계신 그 세계의 4부 대중에게 모두 알려서 ‘아무 지방에 아무 부처님의 성씨와 명호는 능인(能仁) 여래이신데 거기의 인계(忍界)는 다섯 가지 펄펄 끓는 솥[鼎沸] 안이요, 다섯 가지 찌르는 쇠꼬챙이[剌鐵] 안이며, 다섯 가지 칼과 검[刀劒] 안이요, 다섯 가지 훨훨 타는 불길[盛焰] 안이며, 다섯 가지 거칠고 어지러운[荒亂] 안이요, 다섯 가지 구제가 없는[無救] 안이며, 다섯 가지 꾸어 쓰기 어려운[難債] 안인데도 그 가운데 능히 계시면서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시니 매우 기이하고 특별하게 성현의 모든 도무극을 분별하시느니라’라고 찬탄하셨느니라.
모든 하늘은 청정하여 몸에 때[垢]나 더러움이 없는지라 악취가 난 구름 끝에 이르렀다가 곧 천상으로 되돌아가서는 궁중에 이르러 후원(後園)으로 나아가 무우지(無憂池)에 들어가서 7일 밤낮 동안을 스스로 몸을 씻고도 오히려 인간의 더러운 냄새가 몸에 붙어 있을까 두려워하나니 마음으로 인간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느니라.
012_0423_a_01L이때에 모든 하늘에는 향기로운 바람이 멀리 퍼지고 아래로 허공계의 1만 8천 유순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이 수효보다 더한 수람풍(隨嵐風)이 있어 향기가 아래로 지나가 허공의 풍향계(風香界)의 2천 유순까지 이르렀으니, 모든 하늘에는 비록 온갖 덕의 향기가 있어도 오히려 이와 같은 욕심 없는 사람이 지닌 계향(戒香)보다는 못하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관해야 하나니, 모든 하늘의 식복(食福)이 길고 오랜 것으로 여기지마는 천사(天使)가 앞에 와 있으면 그제야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 없자 인간 안에서 공(功)과 복된 업을 일으키기를 원하고 탐하는 것이니 이때에 뜻이 어찌 향기나 악취 사이에 있겠느냐?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고뇌의 다섯 가지 훨훨 타는 불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고달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또한 뉘우치거나 물러나지 않으며, 뜻은 언제나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는 데에 있느니라.
만일 어떤 현성인 신통 지닌 사람이 그의 신통력으로써 한 범부를 붙잡고 위의 허공의 향훈 지경[香熏界]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이 인간 세계에 있으면 몸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이 삼칠(三七) 일의 때를 경과하고서야 향기가 비로소 없어지거니와 욕심 없는 사람으로서 계율을 완전히 갖춘 이는 겁(劫)을 지나고 겁이 가도록 계덕(戒德)의 향기는 마침내 끊어지지 않느니라.
그리고 보살 대사가 같이 세간에 처하면 세간의 어른이며 다시 세간에서의 큰 횃불의 광명이 되나니, 비록 애쓰는 수고가 있다 하더라도 괴롭다고 여기지도 않고 도의 뜻이 왕성하여 마음에 이지러짐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중생의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관찰하여 모두 다 안다고 하는 것이니라.”
012_0423_b_01L“이에 보살은 곧 명혜(明慧)의 정수삼매에 들어가서 널리 세계를 관하되 허공의 끝[虛空際]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있는 모든 중생으로서 한 발, 두 발, 나아가 여러 발의 천ㆍ용ㆍ귀신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의 근원을 알고 낱낱이 분별하여 그 진실을 찾고 궁구하느니라.
모든 청정하지 못하고 산란한 생각의 마음이 있는 이면 역순(逆順)으로 다함 없는 지혜를 널리 연설하느니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6입이 멸하며, 6입이 멸하면 갱락이 멸하고, 갱락이 멸하면 통이 멸하며, 통이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수가 멸하며, 수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사가 멸하고 사가 멸하면 다시는 걱정ㆍ근심ㆍ고뇌와 모든 청정하지 않는 행[不淨行]이 없나니 번뇌[漏]는 큰 근심거리가 되고 열반[泥洹]은 미묘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모양을 관하면서 그를 위하여 연설하되 근원을 궁구하여 다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어리석은 마음이 견고하여 식(識)이 환히 밝지 못하면 점차로 나아가 인도하되 고요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그를 위하여 본래 없는 법이라 생기거나 소멸하는 법이 없고 집착이나 끊는 법이 없음을 널리 알리며 삼세 흥쇠의 모양과 어리석은 행이 지나가 버려도 식(識)은 소멸할 수 없다는 것을 분별하나니, 널리 빛나는 법문으로 미묘한 지혜를 나타내어 부처님 도를 일으키되 온갖 덕을 완전히 갖추고 보살로서 선지식의 행을 버리지 않으며, 언제나 보살의 한가하고 고요한 집에 노닐면서 모든 여래의 깊고 요긴한 관(觀)에 들어가느니라.
012_0423_c_01L또 열 가지 견고하고 요긴한 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열 가지 견고하고 요긴한 법을 사유하는가? 부처님의 창고[佛藏]와 법신(法身)의 모양을 친근히 하며 부사의를 생각하되 도리어 하나[一]로 포섭하며, 공(空)임을 알고 생각이 없되 또한 약간의 것도 없고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 소멸하여 역시 주된 바탕[主質]이 없으며, 지나간 행(行)은 실마리도 없고 수호하여 지닐 수도 없으며, 모든 도(道)를 출생하고 법계와 허공의 경계도 또한 끝나거나 다함이 없으며, 속박과 해탈을 스스로 알되 중생의 집착을 버리고 선근에 의지하여 일체지를 이루며, 한량없는 지혜의 경계를 초월하여 민첩하고 빠른 지혜로 모두 다 성취하며, 보살로서의 희망하는 마음을 충족시키고 모든 보살의 말과 행의 자취를 청정하게 하며, 여래의 도의 뜻이 일찍이 새어 없어지는 일이 없고, 온갖 법성의 모양을 버리며 들어갈 바의 지극하고 미묘한 데에 뜻이 잘못되지 않고 마음은 금강과 같고 힘은 무너뜨릴 수 없으며, 모든 부처님에게 그의 명호와 수기를 받으며, 모두 다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말한 바는 둘이 없되 전환(轉還)할 수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견고하고 요긴한 법이며, 나아가 도과를 이루고 도(道)를 취하되 어렵지 않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에게 으뜸가고 다함 없는 법이니 마땅히 생각하여 수행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장궤(長跪)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지진의 도덕은 끝이 없고 도문(道門)에 의지하여 벗어나는 해탈을 구하지도 않으며 청정한 배움을 부지런히 닦고 사모하여 금강삼매에 미치며 헤아릴 수 없나이다. 이제 여래께서 말씀하신 멸도는 청정하고 세 가지 도(道)가 하나로 돌아가며 다시는 둘이라는 이름도 없고 또한 둘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함을 들었사온데 만일 진실로 그렇다면 왜 위없고 지극히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도를 갈망하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히 식의 미혹[識惑]을 잊게 하여 주소서.”
012_0424_a_01L이때에 세존께서 금빛 몸을 돌이켜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을 돌아보시니 고요하여 이름도 없고 저마다 여러 생각들이 없자 은근히 최승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좋은 질문이다. 진실로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구나. 여래는 너희를 위하여 낱낱이 널리 펴 연설하여 장차 오는 세상의 배우는 이로 하여금 영원히 망설임이 없게 하겠느니라.”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청정한 도의 뿌리에서는 더러운 가지가 생기지 않고 체성(體性)이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법도 청정하며 다시 법성도 또한 모두가 청정하므로 점점 작용이 있고[有數] 작용이 없는[無數] 것을 분별하느니라. 작용이 없는 청정함이란 것은 삼세의 청정함을 얻음이며 그로써 삼세가 공(空)한 줄 분명히 알고 삼계를 관하나니, 이것을 바로 미정(微淨)삼매라 이름하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세 가지 도(道)의 멸도는 그 품류가 동일하지 않고 의지와 취향도 저마다 달라서 몸은 때의 근본[垢本]이 되고 기억은 때의 못[垢池]이 되며 생각은 떠다니는 티끌[遊塵]이 되고 식(識)은 번뇌의 우두머리[結首]가 되나니, 하나가 멸하여도 셋이 존재하여 청정해지지 못하고, 둘이 멸하여도 둘이 존재하여 역시 청정하기에 이르지 못하며, 셋이 멸하여도 하나가 존재하여 역시 청정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넷이 다 멸해야 공(空)하게 되어 비로소 청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니, 일체지에 이르러서 청정해지는 것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처음 도적(道跡)으로부터 위의 무착(無着)에 이르고 다시 1주(住)로부터 나아가 10주에 이르기까지 4환(還)과 4귀(歸)와 4애(碍)를 다 소멸하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네 가지란 몸은 때의 근본이 되어 범부(凡夫)로서 만족하게 여기고, 기억은 때의 못이 되어 네 가지 흐름[流]에서 멋대로 굴며, 생각은 떠다니는 티끌이 되어 8만의 애욕을 일으키고, 식은 번뇌의 우두머리가 되어 3유(有)에 매이느니라.
이 때문에 큰 성인[大聖]에게는 현재 3도(道)가 있는데 형상은 마치 우수하고 열등한 것과 같으나 진실로 멸도는 약간의 차별도 없으며, 도(道)는 열반에 있으나 텅 비고 고요함[虛寂]을 여의지 않느니라. 보살의 열반은 사람을 제도함으로써 이름이 붙여지고, 벽지불의 열반은 신족을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붙여지며, 성문의 열반은 좁고 하열함[狹劣]을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붙여지느니라.
012_0424_b_01L또 최승아, 보살의 열반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써 중생을 양육하느니라. 가령 한 사람을 인도하여 도검(道檢)에 들어간 이가 있으면 모든 감관[根]이 즐겁고 기쁨이 한량없으며, 그 때의 의식(意識)은 맑고 고요하여 함이 없고 도인이나 세속[道俗]에 관한 생각이 없이 모든 감정이 다 청정하느니라.
청정함은 마치 열반과 같고 그것에서 영원히 다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바로 생각 없는[無念] 것이니, 의당 생각하는 바가 없고 또한 생각을 보지도 않고 그 생각도 역시 생각이 없어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배우는 이는 배우되 역시 배울 것이 없느니라. 빛깔[色] 또한 빛깔이 없고 또한 빛깔을 보지도 않으며,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의 생각 또한 의식의 생각이 없고 5음(陰)의 몸으로부터 형상이 없음에 이르기까지 법체(法體)는 청정하여 생각이 있음을 보지도 않나니 생각하는 바가 없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열반[泥洹]이란 말은 열반이 그러하거늘 어찌 멀다 하겠느냐? 이렇게 보지 말 것이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생각이 없는 법체라 형상이 없는 것으로 그 체성을 관하면 그것이 곧 바로 열반이기 때문이니, 열반의 체성은 곧 이것이 법관(法觀)이며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차별도 없나니 열반은 이름이 없으므로 볼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이라는 이름을 세울 수도 없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 대사가 이 열반의 청정한 도(道)를 배우는 것이니 도에 상응하도록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라.
최승아, 다시 분별해야 하느니라. 보살 대사가 수행하되 이 청정한 도인 열반의 체성을 분명히 통달하고자 하면 마땅히 청정한 행[淨行]을 닦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어떻게 그 청정한 행을 수행하는가? 항상 몸ㆍ입ㆍ뜻으로 하여금 청정하고 하자가 없게 하는 것이니, 무엇을 몸이 청정하고 하자가 없다고 하는가? 이에 보살은 자기의 몸이 이미 청정하면 모든 바깥의 몸[外身]도 역시 청정함을 이해하고 자기의 몸이 텅 비고 고요하면 모든 몸도 공(空)함을 알며 몸이 고요하면 모든 몸도 고요함을 알고 자기 몸이 해탈하면 모든 몸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012_0424_c_01L보살은 다시 법관(法觀)을 사유하여 게으름과 또한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자기의 몸에 게으름이 없거늘 도(道)에 어찌 게으름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보살은 몸에 게으름이 없음을 알고 보살이 생각에 세간의 오로관(惡露觀)을 일으키되 몸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고 청정한 생각[淨想]을 보지 못하나니 청정함을 통달하여 생각이 없어야 비로소 열반에 상응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청정한 열반이며 도는 차별이 없는 것이라 말하느니라.”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은 체(體)가 청정하고 욕심이 없으며 하고자 하나 욕심이 없는 것이옵니까?”
012_0424_c_02L最勝菩薩復白佛言:“云何菩薩體淨無欲欲而無欲?”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대사는 5취(趣)에 돌아다니며 생사에 유전(流轉)하되 방편과 권현(權現)으로 알맞게 교화할 적에 어떤 이가 몸의 청정함을 말하면 곧 남이 없음[無生]을 논하여 그 생사를 보아도 곧 생사가 없고 남이 없음을 알게 하나니 생사는 하나여서 다르지 않고 또한 약간의 차별된 이름도 없느니라.
보살은 다시 몸의 행[身行]을 환히 분별하여 남이 없음을 통달하며, 이들의 나고 죽음이 곧 몸의 행인 줄 알면 안팎의 법을 통달하느니라. 무엇을 말하여 몸의 행이라 하는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에 일어나고 쇠(衰)한 것이니, 과거는 자취가 없고 현재는 기록이 없으며 미래는 이름이 없느니라.
또 최승아, 과거의 것은 영원히 다하였고 미래의 것은 끝이 없으며 현재의 것은 변천하고 옮아가나니 역시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盡不盡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을 사유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의 청정한 생각을 분별하고 환히 통달하는 것이니, 그 다함이 없다고 함은 담연(淡然)하여 함이 없고 상념(想念)이 없음이니 상념이 있게 되면 현성의 계율에 큰 결함이 있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옛날 성불하여 도수(道樹) 아래 앉아 7일 밤낮 동안 나무를 관하되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마음으로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깨달으셨고 먼저 어떤 법을 통달하셨을까?’라고 생각하였다. 때에 나는 최승아, 다시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서는 먼저 몸의 법[身法]을 통달하시고 최정각(最正覺)을 체득하셨다. 인(因)과 연(緣)이 모여서 식(識)이 있고 생각(想)이 있었으니 그 연을 알면 곧 공하고 생각도 없어서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다시 나고 없어지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라고 생각하였느니라. 만일 최승아, 이와 같이 관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몸의 청정함이니 대개 몸이 청정하다고 함은 모두 다 지혜의 바다[智海]로 돌아가는 것이니라.
012_0425_a_01L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바다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그 일에는 열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의 바다[佛海]에 돌아가서 법에 형상의 관[形觀]이 없고, 중생의 바다[衆生海]에 돌아가서 유의 재난[有難]을 초월하며, 법의 바다에 돌아가서 온갖 지혜를 쌓기 때문이며, 복전의 바다[福田海]에 돌아가서 본래부터 근(根)이 없는 것을 세우며, 5음의 바다[五陰海]에 돌아가서 더러운 법을 나타내 보이고, 지혜의 바다에 돌아가서 여러 가지 교계(敎誡)의 나아갈 바를 분별하며, 근의 뜻의 바다[根義海]에 돌아가서 선근을 더욱 늘리기 때문이며, 마음을 머무는 바다[住心海]에 돌아가서 중생들의 여러 가지 마음과 뜻으로 생각한 바 한량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걸림이 없음을 알며, 행의 바다[行海]에 돌아가서 원(願)을 어기지 않기 때문이며, 서원의 바다[弘誓海]에 돌아가서 생사의 근원을 궁구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이 바다에 돌아가는 열 가지 문(門)의 뜻이니 마땅히 생각하고 수행하여 모두 다 여래의 샘이 없는 법신[無漏法身]에 돌아가야 하느니라.
또 여래의 샘이 없는 법신을 관한다는 것은 본래 없음[本無]에 머물지 않고 삼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본래 없으면서 하나의 법신임을 통달하여 알고 몸은 샘이 없어서 본래 그대로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관하며 머무르되 머무름을 보지 않고 또한 머무르는 바가 없으며, 샘이 없는 몸으로써 생사의 바다에 들어가고 색신(色身)을 나타내 보이되 마치 색신이 없는 것과 같으며 끝이 없고 가장자리가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보거나 나타낼 수 없고, 색신이 멸한 뒤에도 역시 멸한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생함을 보지 못하며 몸의 본래 없음은 본래 그대로요 머무름이 없으며, 여래의 몸은 청정하면서 또한 흠이나 더러움이 없으며 중생의 무더기에 들어가 앞의 형질을 따르고 형상을 따르면서 나타내느니라.
012_0425_b_01L중생들의 몸이 청정함을 분명히 통달하면 자기의 몸이 청정하고 중생의 몸도 청정하여 하나이면서 둘이 아니고 또한 약간도 있지 않고 평등하여 본래부터 없느니라. 본래부터 없는지라 도(道)가 없고 도가 있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또한 세속의 법과 유루ㆍ무루가 없고 또한 다시 삼승의 교계(敎誡)로 이것은 바로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과 부처님의 도라고도 보지 않으며, 또한 다시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법이라고 보지도 않고 모든 현성의 도와 법에 도무지 집착하는 바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행(行)과 상응하고 청정함과 상응하되 상응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입의 말[口言]이 청정함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입의 말이며 의당 청정해야 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계의 청정한 삼매[淸淨三昧]에 들어가서 널리 삼천세계에 있는 그 안의 중생으로서 형상이 있는 무리의 온갖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맑고 깨끗하거나 곱거나 누추하거나 간에 모두 다 공(空)으로 돌아가고 다 청정하다고 관하느니라.
보살은 다시 평등한 관[等觀]을 사유하되 제일의(第一義)에서도 역시 평등하다고 보지 않고 또한 평등하지 않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평등한 모양[等相]으로써 관하기 때문이니 또한 평등하고 평등하지 않다는 것과 모양과 모양이 없다는 것도 보지 않으며, 다시 평등한 모양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하되 도법(道法)은 한없고 끝없는 것도 보지 않고 세속법도 한이 있고 끝이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현성이 3유(有)를 초월하는 것도 보지 않고 범부의 힘이 우열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청정한 음성을 분별하되 중생이 생각하거나 뜻에 집착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니, 음향을 잘 살피면 음향이 없다고 관하여 알며 조심하거나 기뻐하거나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이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뒤바뀐[顚倒] 것을 좋아하여 뒤바뀐 것이 아니라거나 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중생의 온갖 것은 모두가 청정함을 통달하여 아느니라. 욕심도 없고 물듦도 없으며 또한 나고 없어지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도 없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毒)의 근본도 없으며, 다시 12인연과 18본지(本持)와 치(癡)로부터 사(死)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청정하고 치는 또한 내가 짓는 바의 행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행(行)도 또한 치로부터 있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법과 법은 저절로 생기고 법과 법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을 관찰해야 하나니 법이 법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치(癡)와 행(行)이 있겠느냐?
012_0425_c_01L그때에 최승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삼세의 치와 행은 몸을 따라 회전(廻轉)하는 것이오니 몸이 있으면 행이 따르고 몸이 없으면 행이 소멸하며, 나아가 노사(老死)도 역시 그와 같사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의심되는 것을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장차 오는 세상의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이나 막힘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치(癡)는 몸을 물들이지 않고 몸은 치를 물들이지 않으며 치는 또한 나에게는 몸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몸도 또한 나에게는 치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저마다 청정하여 또한 나[吾我]가 없나니 나라고 말하는 것은 다 스스로 텅 비고 고요함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온갖 것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것이 말[言]이고 어느 것이 말이 아닌가? 말은 안에 있지도 않고 또한 밖에 있지도 않으며, 말에 나오는 것이 있고 들어가는 것이 있는 것도 보지 않나니, 곧 열 가지 견고한 뜻을 완전히 갖추어서 중생의 음종(陰種)이 나아갈 바를 분별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에 보살은 먼저 벗어남[出要]을 구하여 온갖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수없이 교화하고 정진을 나타내지만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걸림이 없는 힘으로써 온갖 법이 공(空)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뜻을 쉬는 힘[息意力]을 나타내어 온갖 법에서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며,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을 회전(廻轉)하고 회전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의미를 분별하기 때문이며, 자성(自性)의 법력으로 지혜를 나타내어 드러내기 때문이며, 자재한 힘을 나타내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기 때문이며, 두려움이 없는 힘을 나타내어 바른 법에 편안히 처하기 때문이며, 변재를 나타내고 한량없는 지혜를 나타내되 낱낱이 펴 나타내기 때문이며, 둘이 없는 힘[無二力]을 나타내되 짝할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012_0426_a_01L“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써 이것이 보살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써 이것이 보살이 아니라면 다시 모든 때[垢]와 속박[縛]과 집착[着]이 보살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역시 말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말하지 않는 데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모든 법은 집착이나 집착하지 않는 것도 없고,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마음도 역시 집착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연설하게 되는 음향은 바람이 움직여 소리가 나오는 것이요, 인(因)과 연(緣)이 만나서 소리와 메아리가 있는 것이며,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곱거나 누추함에도 소리는 조금도 없고 또한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로서 본무동(本無動)삼매에 머무른 이는 움직이는 생각과 그 행하는 바가 모두 허공과 같이 평등하여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 것도 없고 또한 온갖 생각[衆想]도 없다고 사유하나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중생의 음성과 온갖 음향은 모두 다 공하고 진실이 아니며 권도로 속이는[權詐] 법이어서 믿거나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니라.”
또 다시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5도를 돌아다니며 중생을 가르쳐 주되 그의 알맞는 바에 따라서 그를 제도하고 해탈시키며, 중생의 이름과 음성을 관찰하여 위없는 법륜을 굴리며 법구(法句)의 뜻에 따라 보응에 도달하게 하느니라. 고(苦)를 좋아하는 중생에게는 고의 근원을 연설하며, 모든 법의 말에는 모두 말이 없는 것인 줄 분명히 아느니라.어느 것이 말이고 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말은 나오는 것이 없는 줄 분명히 아느니라.
012_0426_b_01L이때에 보살은 다시 습(習)을 좋아하는 중생을 위하여 습의 근본은 이것이 바로 습이요 이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因)이요 이것이 바로 연(緣)이라고 연설하여 주나니, 인연을 분별하면 본래 습의 실마리가 없고 습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이름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습을 좋아하는 중생의 온갖 음성은 모두가 공하고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앞의 그 중생에 따라 도(道)의 가르침으로써 갚고 법을 듣는 이로 하여금 법을 수순하여 행하게 하되 또한 행의 나아갈 바와 보응의 과보를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하지만 행하는 바가 없고 증득하지만 증득한 것을 보지 않으며 그대로의 한 모양이요 평등하게 온갖 괴로움을 멸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다시 다하는 것[盡]을 좋아하는 중생을 사유하되 모든 법을 환히 통달하여 나오고 생기는 것을 보지 않아야 하며, 말과 음성은 머물러 그치는 바가 없고 앉거나 다니거나 간에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으며, 비록 시끄럽고 난잡한 데서 놀아도 언제나 한가하고 고요하며 설령 대중에 있다 하여도 현성으로서 말이 없으며, 뜻으로 말을 나타내고자 하나 말이 곧 스스로 그치고 말한 바를 뒤쫓아 찾지만 집착하거나 집착이 없는 것에서도 다한 것과 다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에서도 또한 다한 것을 보지 않고 생기거나 소멸하거나 집착하거나 끊는다거나 하는 소리는 말에서 나오기는 하되 영원히 그 종적이 없느니라.
또 보살은 도(道)를 좋아하는 중생이면 여덟 가지 행(行)을 사유하되 중생이 닦고 익혀 열반에 나아가게 하며, 정언(正言)과 정업(正業), 나아가 정정(正定)의 법다운 것과 법답지 않은 것은 평등하여 하나의 허공관[一虛空觀]으로 둘이 없고 어기거나 잘못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입의 말[口言]이 청정하여 흠이나 더러움이 없는 것이니라.
012_0426_c_01L또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의식(意識)의 청정함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의식이 청정한가? 이에 보살은 마음이 청정하되 또한 하자도 없고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 없으므로 그 근본이 있다고 보지도 않나니, 그 마음의 근본이란 더러움에 물들 수도 없고 마음에 장애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함을 분명히 알지만 청정함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니, 세간에서는 어리석고 미혹된 이가 많아서 이것에 대하여 물들고 집착하게 되거니와 공(空)인 줄 통달하고서 사유하면 집착할 바가 있지 않고 마침내 권방편을 행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청정한 것인 줄 분별하느니라.
보살은 알아야 하느니라. 또 그 마음의 근본은 본래부터 오고 가는 것이 없고 고하(高下)나 존비(尊卑)나 귀천(貴賤)을 가리지도 않으며, 본래는 있다가 지금에야 없는 것이라고 보지도 않고 지금은 있는데 본래는 없던 것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덕(德)의 근본도 생각하지 않나니, 덕의 근본을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공(空)이요 이것이 바로 무생(無生)이며 이것이 바로 열반[泥洹]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의 근본은 공하되 또한 근본이 아니나 근본이 아닌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며, 공심정(空心定)의 보살이 만일 스스로 마음을 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은 근본이 없고 바깥도 또한 근본이 없으며 하나요 둘이 아니고 약간의 차별된 이름도 없으며, 마음은 나의 마음[我心]이 아니고 마음은 마음에 없으며, 나의 마음은 마음도 아니기에 나[我]와 나에게 없으며, 빛깔[色]은 나의 빛깔[我色]이 아니요 빛깔이 빛깔에 없고 나는 빛깔의 나[色我]가 아니므로 나는 나에게 없으며, 나의 마음과 나의 빛깔은 나의 마음과 나의 빛깔이 아니고 빛깔의 나와 마음의 나[心我]는 빛깔의 나와 마음의 나가 아니며,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細滑]ㆍ뜻ㆍ법에 이르기까지도 나의 뜻[我意]과 나의 법[我法]이 아니요, 또한 뜻의 나[意我]와 법의 나[法我]도 아니니라.
012_0427_a_01L왜냐하면 마음의 근본은 공하며 바깥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니라. 바깥이 공함[外空]을 앎으로써 모든 법은 또한 다시 공과 같은 줄 분명히 통달하고, 하나요 둘이 아니고 약간의 모양[相像]도 없나니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본래는 있다가 지금에야 없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다시 지금은 있지만 본래는 없었다고 보지도 않으며, 없으나 또한 없지 않고 있으나 또한 있지도 않으며, 있다 해도 있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없다 해도 없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며, 없는 것은 없는지라 항상 스스로 없고, 있는 것은 있는지라 항상 스스로 있으며, 있는 것은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없는 것은 없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없는 것은 없지만 스스로 없지 않고 있는 것은 있지만 스스로 있지 않으며,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온갖 음성도 모두가 공하여 진실이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로서 마음이 청정한 것이니라.
그 마음이 청정하다고 함은 36가지 막힘[湮]에 물들 수 없고, 마음의 근본은 티끌과 때[塵垢]에 영원히 집착한 바 없으며,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통달하고 또한 청정함에 대하여 생각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않나니 보살마하살로서 본말이 청정하고 공정의자재삼매(空定意自在三昧)를 환히 아는 이면 곧 자기 뜻을 굽히고 물러나 생사에 돌아다니고 5도에 오가면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느니라. 그 덕의 근본이란 마음[心]ㆍ뜻[意]ㆍ식[識]에는 마음ㆍ뜻ㆍ식이 없는 줄 아느니라.
또 근본의 마음[本心]으로써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고 중생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며,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도 본말이 청정하며 다시 덕의 근본으로써 널리 온갖 것에 미치고 중생들로 하여금 도에 나아가 닦게 하며 중생과 도는 평등하여 둘이 없나니, 이렇게 관한 이는 이것이 바로 본말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다시 이 청정으로써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평등하니 어리석음에 평등하고 도(道)에도 평등하면 도가 곧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요 어리석음이 곧 도이니 도도 청정하고 어리석음도 청정하여 하나요 둘이 없고 또한 약간도 없나니, 보살은 본말이 스스로 청정함을 관찰하여 모든 더러움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012_0427_b_01L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한 모양[一相]과 모양이 없음[無相]을 통달하여 알며 다시 모양이 없음으로써 한 모양을 분별하나이까? 어떻게 보살은 청정한 마음으로써 애욕(愛欲)에 놀며 애욕에서부터 다시 청정한 데로 이르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권도를 행하는[行權] 보살승(菩薩乘)은 모양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5도와 시방 세계를 돌아다니되, 혹은 욕계(欲界)나 형계(形界:色界)나 무형계(無形界:無色界)에 나느니라. 비록 그 세계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 세계에 물들지 않고 선남자ㆍ선여인들과 함께 법의 즐거움[法樂]으로써 그들과 재미있게 즐기느니라. 다시 형계의 모든 천인(天人)들과 궁전에 같이 처하며, 혹은 범천(梵天)에 범천왕과 함께 있으며 미묘한 승(乘)의 모양 없는 법[無相法]을 말하며 많은 범천의 대중에 있으면서 혹은 거닐기도 하고 혹은 때로 현성으로서 잠자코 있기도 하나니, 그 안에 있을 때는 홀로 높은 이가 되어서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또 최승아, 보살이 거기에 있을 때는 미묘하게 도의 가르침[道敎]을 나타내어 점차로 모든 하늘들을 항복받아 참된 이치[眞諦]를 행하게 하고 모든 범천들이 청정하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제거시키고 그 형계에 머무르며, 혹은 백 겁, 나아가 백천 겁을 지나고 다시 형계에서 욕계에 내려와 태어나 안으로는 언제나 고요함을 좋아하고 혼자 산이나 숲에 거처하며, 비록 인간 안에 처한다 하더라도 뜻은 언제나 선정(禪定)에 있느니라.
혹은 때로 보살이 집에 살고 있으면 처자(妻子)가 스스로 따르기도 하고 또 중생들과 같이 세간의 사업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높은 데 있으면 낮음을 나타내고 낮은 데 있으면 높음을 나타내되, 중생들의 마음과 돌아다니고 앉고 일어나고 말하고 가고 오고 하는 거동을 관찰하며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또한 스스로 헐뜯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그가 본말이 청정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또 보살은 다시 백천 정(定)의 정수삼매에 노닐되 삼매의 위신(威神)으로써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관하고 몸의 상호와 광명과 신족을 나타내며, 권혜(權慧)의 방편으로 노닐면서 교화함이 자유자재하며 마음이 응당 청정해야 비로소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느니라.
012_0427_c_01L보살마하살로서 이 선정과 상응하여야 비로소 승(乘)에서 모양이 없는 도(道)를 구할 수 있느니라. 모양[相]은 생기는 것을 보지 않고 모양은 없는 것도 보지 않으며, 생길 때는 없는 것으로써 익히고 도에도 또한 모양이 있지 않으며, 성인은 도가 없는 모양이며, 또한 모양을 구하지도 않고 또한 모양이 없는 것도 구하지 않으며, 도의 모양과 모양이 없는 것을 분명히 통달하여 일어날 적에는 곧 일어나고 소멸할 적에는 곧 소멸하며 도의 모양에 나아감이 있으며, 모양의 행(行)이 소멸하지 않고 있는 모양[有相]의 행이 소멸하여야 이것을 바로 보살의 도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또한 모양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의 모양을 삼느니라. 왜냐하면 도(道)는 스스로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모양이 없음을 구하는 것으로 도의 모양을 삼지도 않고 합하거나 흩어지는 것으로써 도의 모양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12인연의 근본과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이 치(癡)로부터 행(行)이 있으나 도의 모양이 있다고 보지 않고, 또한 다시 아ㆍ인ㆍ수명이 없는 것도 치로부터 행이 있고 도의 모양이 있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도는 스스로 모양이 없고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으며, 생길 바를 원하나 도의 모양을 바라지도 않으며, 4대는 이것이 몸이라거나 몸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공이라거나 공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나라거나 내가 아니라거나 취하고 버리고 합하고 흩어지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으레 그와 같아야 하고 으레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다르지 않은 것도 보지 않아야 비로소 도의 모양과 모양이 없는 것에 상응하여, 선의 몸[善身]ㆍ불선의 몸[不善身]ㆍ유기의 몸[記身]ㆍ무기의 몸[無記身]ㆍ유루의 몸[漏身]ㆍ무루의 몸[無漏身]ㆍ유위의 몸[有爲身]ㆍ무위의 몸[無爲身]ㆍ성공의 몸[成身]ㆍ패망의 몸[敗身]과 합하고 흩어지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모양과 도의 모양으로써 하면 모두 다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는 것이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따뜻할 때 생기는 아지랑이와 같다고 분별하느니라.
012_0428_a_01L또한 몸은 공하지도 않고 또한 몸은 공함이 없지도 않으며, 또한 몸은 모양[相]이 있지도 않고 또한 몸은 모양이 없지도 않으며, 또한 몸은 원(願)이 있지도 않고 또한 몸은 원이 없지도 않으며, 몸이 아닌[不身] 것은 또한 욕심이 없는[無欲] 것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몸이 아닌 것은 또한 12인연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12인연도 또한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18계(界)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법성도 그러하여 역시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癡)에서 애(愛)가 생기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모든 법의 명색(名色)과 6입(入)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다시 멸진정의(滅盡定意)의 부동(不動)삼매에 들어가고 또는 도의 모양[道相]은 18본지(本持)와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성은 12인연과 상응하지 않으나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한없고 수없고 불가사의한 진로(塵勞)의 때(垢)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법성의 모든 정(情)도 12인연과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노사(老死)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는 법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고[有數] 작용이 없는[無數] 것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에는 둘이 없는지라 작용이 있고 작용이 없는 것과는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세속이 있고[有俗] 세속이 없는[無俗] 것과 유루ㆍ무루와 유위ㆍ무위와 유기ㆍ무기와 선법(善法)ㆍ악법(惡法)과 곱고 추한[好醜] 것이 둘이 아닌 행[不二行]이고 둘이 아닌 행도 아니며, 무너진다는 뜻[壞敗意]이 없으나 도의 모양을 구하느니라. 도의 모양을 구한다 함은 제일의와는 유속ㆍ무속ㆍ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ㆍ유기ㆍ무기ㆍ선법ㆍ악법ㆍ호ㆍ추가 함께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니라.
012_0428_b_01L또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모양이 없는[無相] 모양에서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고 모양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이 도(道)는 모양이 없는지라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나니, 이것이 바로 도의 모양으로 모양이 없는 것에 상응하며, 모양이 없는 모양은 법이 스스로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허공이 모양이 없는 것과 같되 모양이 있지 않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이런 모양에 상응해야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이 도의 모양인 정의[道相定意]를 얻은 이는 모든 법계에서 다 자재할 수 있고 이 정(定)에 든 뒤 자기 몸의 낱낱 털구멍을 분별하되 한이 없고 수량이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가 다 눈앞에 나타나며, 이미 세계가 나타나면 다시 좌우에서 모신 제자들이 나타나므로 보살은 간절히 우러러 법을 듣고 법을 듣되 만족해 함이 없으며, 그 대중으로 하여금 널리 삼천대천 국토에 계신 여래의 금빛 몸에서 나온 한량없는 광명과 그 낱낱의 광명에서 수없고 한량없는 국토를 보게 하며, 그 부처님 세계에서 몸의 색상(色相)을 나타내어 그 대중에 있으면서 큰 법을 드날려 듣는 이들이 견고하여 금강정의삼매(金剛定意三昧)를 버리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그 세계에서 백천억 겁 동안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권지(權智)를 나타내 보이되 마치 권지가 없는 것과 같고 권지로서 교화해야 할 이들도 보지 않으며, 비록 그 세계에 처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나 세차게 타는 불길이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 마음으로는 ‘겁수가 길고 영원하므로 그것을 찾아보아도 근원이 없으며 그 중간에 게으른 뜻을 내었다’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또한 다시 ‘중생이 교화되기 쉬워서 나는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교화하고 돌아다녔는데 두루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억천만 겁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 교화한 이들보다 나는 특히 훌륭하였다’라고 하는 생각도 하지 않느니라.
012_0428_c_01L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도성(道性)의 모양이 없는 정[無相定]에 들어간 이는 낱낱이 몸의 털구멍을 분별하고 돌아다니며 교화하되 역시 고달파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교화를 받음이 없는 이도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크지도 않고 은근하면서 그 세계가 청정해지며 그 여래의 큰 법회의 처소에 나아가도 장점ㆍ단점이나 부정한 생각[不淨念]을 일으킨 이를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법계에 노닐되 마음과 뜻을 항복 받고 모든 진로(塵勞)를 참고 일찍이 없던 일을 행하였으며, 방소 없이 행을 깨우쳐 정진하는 행을 세우고 모두 다 분별하였기 때문이니라.
부사의정(不思議定)과 무도상정(無道相定)과 진제상정(眞際相定)은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차별도 없나니, 그 중생으로 하여금 도의 모양을 분별하되 세속이 있고 세속이 없는 것과 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ㆍ유기ㆍ무기ㆍ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데서 도의 모양과 상응함을 보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도 세속이 있고 세속이 없는 것과 유루ㆍ무루ㆍ유기ㆍ무기ㆍ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것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은 12인연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癡)를 반연[緣]하여 애(愛)와 생ㆍ노ㆍ병ㆍ사가 있되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12인연도 도(道)와 상응하지 않되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를 반연하여 애와 생ㆍ노ㆍ병ㆍ사가 있는 것도 도와는 상응하지 않되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마하살로서 이 도상정의(道相定意)를 얻은 이는 상응함을 보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도상정의에서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는 것이니라. 무상정(無相定)에서도 역시 상응함을 보지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음이며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미치거나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왜냐하면 그들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모든 부처님 세존은 불가사의하여 널리 온갖 시방 세계에 들어가서 모든 상호와 위의와 예절과 18가지 변화(變化)와 사자분신무외삼매(師子奮迅無畏三昧)를 나타내시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마음으로 한 생각 동안에 삼매에서 일어나 시방 세계에서 고통과 액난을 당하는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곧장 그들에게로 가서 네 가지 일[事]인 의복ㆍ음식ㆍ코끼리ㆍ말ㆍ7보[珍]ㆍ평상ㆍ침구와 병을 치료하는 의약을 공양하게 하고 권혜(權慧)로써 온갖 것들을 다루되 모두 다 중생만을 위하고 자기 자신은 위하지 않으며,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교화하고 돌아다니면서 바른 법을 드날리되 또한 만족해 함이 없고, 모든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서 그 곳의 중생으로 하여금 다 교화를 받게 하되 깨달아 아는[覺知] 이가 없게 하며, 불사(佛事)를 왕성하게 일으키고 온갖 지혜를 나타내며 마음에 두루 접할 때면 생각나는 즉시 그에게로 가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도상정의에 들어가면 널리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마음ㆍ뜻ㆍ식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있는 바를 관찰하여 전에 지은 행[宿行] 때문에 이 사람은 지옥[泥鯖]으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아귀로 나아가며, 이 사람은 축생으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천도(天道)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인도(人道)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별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모두 다 중생들이 나아갈 바를 능히 분별하며, 혹은 어떤 중생은 선도(善道)를 수행하여 도상정(道相定)에 상응하나니 역시 그 중생은 소승의 마음이나 벽지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 있음을 아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널리 모든 부처님 세계에 노닐되 모든 부처님 세존을 예배하고 받들고 섬기며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고루 원만하게 하며, 혹은 부처님 국토에 있을 적에 간탐(慳貪)하는 중생들을 보면 곧 스스로 나타내 보여 크게 보시하느니라.
012_0429_b_01L그 국토에서 큰 보시의 깃대[幢]를 세우고는 청정한 범음(梵音)으로써 온갖 중생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어진 이들이여, 알아야 하오. 나의 이름은 온갖 것을 보시하면서도 보답을 구함이 없는 이[一切施無求報者]라 합니다.’ 만일 의복ㆍ음식ㆍ병을 치료하는 의약과 평상ㆍ침구 등이며 나라ㆍ재물ㆍ자식ㆍ아들ㆍ코끼리ㆍ말ㆍ7보 등에 모자람이 있으면 보살은 보시하되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보시하지 않는 것[三不施]을 제외하고 그 밖의 것은 다 보시하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 아버지요, 둘째 어머니이며, 셋째 사장(師長)이니라. 이것이 바로 근(根)을 세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있어 보시를 행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선권방편으로써 다시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 국토에 노닐면서 거기에 살고 있는 중생들로서 게으름을 피우는 이를 보면 몸으로 계율을 지니는 것을 나타내고 18가지 법(法)을 실천하며, 혹은 나무 아래나 들판이나 무덤 사이나 높은 산이나 깊은 낭떠러지나 숲속이나 굴에 숨어서 은근하게 계율을 받들어 온갖 법을 범하지 않느니라. 인간에 노닐 적에는 위의와 예절을 지키며 들고 나는 거동과 다니거나 앉거나 간에 마음은 언제나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며 처음부터 계율을 여의지 않고 금계는 본래 있는 바가 없다고 분명하게 통달하느니라.
나는 것[生者]은 모두 다하고 온갖 것은 덧없으며 나의 몸과 그는 하나요 다르지 않고 마지막으로 청정한 데에 이르며, 지(地)로부터 지에 이르고 이에 10지(地)에 이르렀으나 10지의 장애를 보지도 않고 10지의 장애 없는 데로 건너가는 것이 마치 나는 새가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만물은 모두가 공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물건도 또한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닌 것도 또한 물건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세계를 노닐되 큰 서원과 견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게으른 중생을 섭수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도상정수(道相正受)에 들게 하느니라.
012_0429_c_01L또 보살마하살은 권도의 지혜를 지니고 다시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노닐되 그곳의 중생들로서 게으름이 있는 이가 언제나 성을 내고 처음부터 기뻐함이 없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에 대하여 몸소 인욕을 나타내 보이며 어떤 사람이 욕설을 퍼부어도 잠자코 갚지 않고, 설령 다시 어떤 사람이 그의 손발을 자르거나 그의 몸을 헐어뜨리고 욕되게 하여도 마음이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되 마음을 지니는 것이 마치 땅과 같고 ‘이 몸은 4대로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정신이 떠나면 곧 흩어질텐데 무슨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관하여 환히 통달하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하나도 탐할 만한 것이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 또한 마치 소를 도살하는[屠牛] 집에서 소를 네 갈래로 찢어서 나누어 놓으면 근본이나 가지가 모두 있는 바가 없는 줄 분명히 아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몸에는 주인이 없고 또한 있는 바가 없으며 어느 것이 이 몸이고 몸은 또 누구의 소유인가. 그리하여 이름이나 모양도 다 진실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니라.
혹은 어떤 보살이 선정으로 인하여 인욕을 행하되 너른 들판에 사람이 없는 곳이나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한 마음으로 사유할 적에 길 가던 사람이나 소 치는 사람이나 땔나무와 풀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이 그 곁을 지나다가 혹은 풀 가지로 그의 코를 찌르거나 혹은 그의 귀를 찌르거나 해도 보살은 곧 깨닫고 그를 눈여겨 자세히 보고 나서 다시 그 눈을 감고 마음과 뜻을 고요히 하며 뜻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고 또한 다른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혹은 길가던 사람이 기왓조각이나 돌로써 때리거나 던져서 머리나 눈이 깨지고 몸이 다쳤다 하여도 보살의 심식(心識)은 역시 움직이거나 변하지도 않고 산란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선정으로 인하여 인욕을 행하고 중생을 접하고 제도하되 헤아리거나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012_0430_a_01L또 보살마하살은 불가사의한 힘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가서 노닐 적에 그곳 중생들이 항상 게으름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보살은 거기에서 몸소 정진을 나타내 보이되 중생을 섭취(攝取)하여 무위(無爲)에 안전하게 있게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한 중생을 위해서도 백천 겁을 경과하도록 마음에 게으르지도 않고 또한 고달파하거나 싫어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법계는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 통달하여 알고 여래의 도(道)로써 제도하고 해탈시키기 때문이니라.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역시 제도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제도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은근히 정진하여 마음이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또한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 중간에 모든 고뇌를 받거나 혹은 그 세계 국토가 겁소(劫燒)로 불이 일어나서 불길이 범천(梵天)에까지 이르거나 혹은 큰 불이 나서 역시 범천에까지 이르거나 혹은 바람이 일어나서 모든 세계의 국토가 티끌이나 안개처럼 부수어질 적에 보살은 그 곳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다 섭취하여 무위에 안전하게 있게 하여 동요하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노닐 적에 정진하되 궐(闕)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보살마하살이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가 노닐 적에 그곳 중생들이 마음이 산란하여 안정하지 못한 것을 보면 보살은 그곳에서 좌선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되 혹은 촌락에 앉아 있기도 하고 혹은 나무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며 혹은 산 속 숲이나 깊은 굴 속에 앉아 있으면서 백천 겁을 지나도 마음에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인도하고 섭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길 옆에 있으면서 정(定)에 들어가나니, 그 삼매의 이름은 무형상정(無形想定)이니라. 이 정에 들어가면 혹은 한 겁을 지나기도 하고 백천 겁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이 녹아 문드러져서 산이나 하천이나 수목이 모두 다 흩어져 떨어지고 바닷물이나 샘의 근원이며 강물이 빠르게 흘러 버려 모두 다 바짝 말라버렸다 하여도 선정에 든 보살은 그 안에서 좌선하고 있으되 마음이 변하거나 동요하지도 않고 또한 무너지지도 않느니라.
012_0430_b_01L혹은 소 치는 사람이나 땔나무를 지고 풀을 지고 가던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다가 혹은 나뭇가지로 코를 찌르거나 혹은 귓구멍을 찌르거나 혹은 곧장 눈을 벌려 보게 하거나 혹은 입을 벌려 이가 보이게 하거나 혹은 머리칼을 거머쥐고 목을 뽑아내려 한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혹은 날카로운 칼로써 보살의 손톱을 베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두 다 이것은 보살의 정의 힘[定力]이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시 위신(威神)을 더하여 주어 이 보살로 하여금 고뇌를 만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노닐되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산란한 뜻을 보고 곧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겁(劫)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고달파하거나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보살마하살이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노닐 적에 중생으로서 어리석고 미혹된 이가 있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들에게 지혜를 나타내 보이되 그 중생들을 위하여 의취(義趣)를 분별하고, 삼세와 현재의 일을 사유하되 차례로 모든 지(地)를 초월하며 지로부터 지 없는[無地] 데에 이르고 지 없는 데서부터 지(地)에 이르는 것이 마치 날으는 새가 부딪치거나 걸림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형상이 아닌[非像]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며, 물건 아닌[非物] 데서 물건이 되고 물건에서 물건이 아닌 것이 되느니라.
어떻게 형상이 아닌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제(虛空際)의 정의정수(定意正受)에 들어가서 다른 지방 세계의 약 열매[藥果]나 수목이나 산하(山河)나 석벽(石壁)이 다 공(空)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그 공도 또한 공하여 없다[空無]고 관하나니,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세계가 모두 공과 같아 평등한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형상이 아닌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며 물건이 아닌 데서 물건이 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하느니라.
다시 온갖 지혜[衆智]의 자재정의(自在定意)에 들어가서 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여 어리석고 어두운 생각[愚闇想]을 제거하며, 모두 다 편안히 처하여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되 그곳의 중생들이 어리석고 미혹된 것을 보면 그들을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나타내어 영원히 어두움을 없게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