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2_0417_c_01L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7권
012_0417_c_01L十住斷結經卷第七


요진 축불념 한역
송성수 번역
012_0417_c_02L 姚秦涼州沙門竺佛念譯

19. 화중생품(化衆生品)
012_0417_c_03L化衆生品第十九

그때에 최승(最勝)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생사를 겪으면서 부지런히 고행하며 한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는 동안 중생을 기르고 도량을 장엄하며, 비록 중생을 교화한다 하더라도 또한 교화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중생도 보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나는 교화한 바가 있다’라고도 보지 않나이까? 그렇게 하는 까닭은 법성은 텅 비어 없고 고요해서 있는 바가 없다고 관하기 때문이옵니다.”
012_0417_c_04L爾時最勝菩薩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涉歷生死執勤苦行從一佛國至一佛國育養衆生莊嚴道場雖化衆生亦不見化亦不見衆生不自見我有所化所以然者以法性觀虛無寂寞無所有故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아서 보살마하살은 크고 넓은 서원과 가장자리도 폭도 없는 뜻을 지니고서 중생을 기르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비록 중생을 교화한다 하더라도 역시 교화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중생을 보지도 않나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법성은 텅 비어 없고 고요하여 모두 있는 바가 없다고 관하기 때문이니라.
모두가 공(空)하고 모두가 고요하여 형용도 없고 모양도 없나니, 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법 또한 스스로 공하고 중생도 중생 스스로 공하며 국토는 국토 스스로 공하고 열반은 열반 스스로 공하며 보살은 보살 스스로 공하느니라.
012_0417_c_10L佛告最勝是如是如汝所言菩薩摩訶薩執大弘誓無邊幅意育養衆生淨佛國土雖化衆生亦不見化亦不見衆生以然者以法性觀虛無寂寞悉無所皆空皆寂無形無相不可見故切諸法法亦自空衆生衆生自空土國土自空泥洹泥洹自空菩薩菩薩自空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은 관찰하되 깊이 법요에 들어가서 모든 법이 한 모양[一相] 그대로임을 이해하여 알며, 모든 법의 온갖 지혜도 텅 비어 고요하고 함이 없고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나니,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뜻을 받들어 도(道)에 나아가는지라 마음은 무너뜨리기 어렵나니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이르러 최정각(最正覺)을 이루느니라.
012_0417_c_18L如是最勝菩薩當作是觀入法要解知諸法一相如爾諸法衆智虛寂無爲無所染著菩薩摩訶薩亦復如是御意趣道心難沮壞必至無上正眞之道爲最正覺
012_0418_a_01L뜻은 마치 금강(金剛)과 같아서 역시 전환(轉還)하지 않고 영락의 도수(道樹)는 무위의 법[無爲法]으로써 하며,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도량에 이르기까지 수왕(樹王) 아래 앉아 아직 항복받지 못한 무리를 이미 항복받고 장차 항복받으며, 그 중간에는 만(慢)의 뜻으로 ‘내가 수승하고 그는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만이나 ‘나는 그와 동등하다’고 하는 만이나 ‘그가 훌륭하고 나는 그보다 못하다’고 하는 만이나 증상만(增上慢)ㆍ증중만(增中慢)ㆍ증하만(增下慢)이나 중상만(中上慢)ㆍ중중만(中中慢)ㆍ중하만(中下慢)이나 하상만(下上慢)ㆍ하중만(下中慢)ㆍ하하만(下下慢)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012_0417_c_22L志如金剛亦不轉還瓔珞道樹以無爲法從初發意至于道場坐樹王下已降當降未降之徒於其中閒不興慢意我勝彼不如慢我與彼等慢彼勝我不如增上慢增中慢增下慢中上慢中中慢中下慢下上慢下中慢下下慢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사유하여 이 모든 만을 제거하고 또한 질투하지 않고 높은 체하는 마음을 숨겨야 하며,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 중생을 관찰하여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해야 하고, 선권방편으로써 5도(道)와 8무한처(無閑處)에 들어가며, 만일 어떤 중생이 교화를 받아야 할 이면 곧 그 사람을 위하여 벗이나 아는 이가 되어 주고 혹은 부모ㆍ형제ㆍ권속이 되기도 하며 혹은 큰 부호(富豪) 장자가 되어 앞의 중생의 모자란 바를 대어 주되 한량없는 창고에 있는 금ㆍ은의 값진 보배와 자거ㆍ마노ㆍ진주ㆍ호박과 좋은 명월주와 여의보주를 내어 주기도 하느니라.
012_0418_a_06L如是菩薩摩訶薩當念思惟除此諸亦不嫉妒隱貢高心菩薩入定觀察衆生應度不度以善權方便入於五道八無閑處若有衆生應受化者便與彼人作朋友知識或爲父母兄弟眷屬或爲大富豪尊長者隨前衆生給施窮乏出無量藏金銀珍寶𤥭璖瑪瑙眞珠琥珀好明月珠及如意寶珠
혹은 음식ㆍ평상ㆍ침구ㆍ병을 치료하는 의약을 다 베풀어 주되 인색한 바가 없으며, 혹은 또 어떤 사람이 보살에게 와서 은근히 머리ㆍ눈ㆍ손발ㆍ나라ㆍ재물ㆍ처자와 일곱 가지 값진 기구를 요구하면 모두 보시하되 역시 보시하였다는 생각이 없나니, 이때에 보살은 곧 법계의 자재정의삼매정수에 들어가서 권방편으로써 그 중생을 위하여 허무(虛無)하다는 법을 연설하여 주느니라.
012_0418_a_15L或以飯食牀褥臥具病瘦醫藥以給施無所悋惜或復有人至菩薩所慇懃求索頭目手足國財妻子七珍之具悉能惠施亦無施想是時菩薩便入法界自在定意三昧正受以權方便與彼衆生說虛無法
012_0418_b_01L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법이란 함이 없고 또한 하는 바도 없으며 6정(情)을 분별하여도 전혀 주인이 없느니라. 만일 눈으로 빛깔을 볼 적에 빛깔 또한 대(對)함이 없는데도 중생이 어리석고 미혹되어서 그 가운데서 식(識)을 일으키고 분별하며 사유하거니와 안식에는 주인이 없느니라. 또 귀로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알거나 몸으로 세활(細滑)을 알거나 뜻으로 법을 분별하거나 간에 보살은 도무지 아무것도 없다고 관찰하느니라. 법이 일어나는 것은 처소를 따라 일어나고 법이 소멸하는 것도 처소에 따라 소멸하나니,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소멸하여도 소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12인연과 18본지(本持)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012_0418_a_20L汝等當知法者無爲亦無所爲分別六情都無有主若眼見色色亦無對衆生愚惑於中起識分別思惟眼識無主若耳聞聲鼻嗅香舌知味身知細滑意分別法菩薩觀察都無所有法起隨所處起法滅隨所處滅起不知起滅不知滅十二因緣十八本持亦復如是
혹은 때로 보살은 사자분신(師子奮迅)삼매에 들어가서 다시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 보이고 그 가운데서 청정한 음성을 연출하며, 이미 국토를 나타내되 온갖 보배로 장식하고 향기로운 꽃이 향기를 풍기면서 오색이 찬란하며 위의가 맑고 깨끗하며 뜻이 광명을 내는 것과 이전할 수 없으며, 다시 한량없는 정의 법문(定意法門)을 나타내어 여래께서 항상 즐기는 것으로 모든 법과 중생의 근본을 모두 앞에 나타나 있게 하느니라.
012_0418_b_04L或時菩薩入師子奮迅三昧復能示現若干種變於中演暢淸淨音聲已國土衆寶莊飾香花芬熏五色玄威儀淸白志如安明不可移轉現無量定意法門如來恒常所娛樂一切諸法衆生根本皆現在前
이때에 보살은 다시 신족으로써 한량없는 정(定)에 들어가 스스로 나타내 보이고 한 송이 연꽃 위에 가부(跏趺)하고 앉았는데 그 색신(色身)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의 모든 법의 공덕을 나타내며,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하는 자취를 깨끗이 제거하여 보살로서 출요(出要)의 길로 인도하며, 일체지에 의지하여 감로의 법을 연설하고 지혜의 광명을 드날려 부처님의 지혜를 나타내 보이되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혹은 값진 보배로써 칠보탑(七寶塔)을 일으켜 한 천하에 가득 채우기도 하고 혹은 두 천하에, 혹은 세 천하에, 혹은 네 천하에, 혹은 범천(梵天)까지 이르고 혹은 일구경천(一究竟天)까지 이르게 하기도 하되 겁(劫)을 지나도록 머물러 멸도를 취하지 않기도 하느니라.
012_0418_b_10L菩薩復以神足入無量定而自示處一蓮華結加趺坐現其色身無限無量阿僧祇劫諸法功德淨除衆生想著之迹導引菩薩出要之路一切智演甘露法暢慧光明示現佛慧無所染著或以珍寶起七寶塔滿一天下或二天下或三或四或至梵天至一究竟天住壽經劫不取滅度
012_0418_c_01L혹은 때로 보살은 권방편으로써 무위의 고요한 정(定)에 들어가서 모든 선근을 갖추고 여래께서 갖춘 일체지를 버리지 않고 삼매의 힘으로써 중생을 가르치느니라. 혹 어떤 중생은 소리를 듣는 것으로 가르쳐 주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냄새를 맡는 것으로 가르쳐 주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그 맛의 뜻[味義]을 알려 주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고, 혹 어떤 중생은 몸의 부드러움을 얻게 되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법을 체달하여 뜻을 깨치게 되어야 제도될 이가 있기도 하느니라.
012_0418_b_18L菩薩以權方便入無爲靜定具諸善根不捨如來具一切智以三昧力訓誨衆生或有衆生應聞聲教而得度者或有衆生應聞香教而得度者或有衆生知其味義而得度者或有衆生身獲柔軟而得度者或有衆生體法意悟而得度者
이때에 보살은 다시 ‘소리를 듣는 중생은 반드시 나의 청정한 뜻을 듣고 싶어하므로 나는 이제 마땅히 여래의 8음(音)을 연설하되 그 음성에는 여덟 구의 고의 음[苦音]과 습의 음[習音]과 진의 음[盡音]과 도의 음[道音]과 고를 보고는 고를 향하고 습을 보고는 습을 향하며 진을 보고는 진을 향하고 도를 보고는 도를 향하는 음성을 연설하겠다’라고 생각하나니, 이때에 중생은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도 뜻을 깨치지 못하고서 광명과 그의 신체를 보고 싶어하면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 평등한 관[平等觀]으로써 곧 지종(地種)의 산이나 강물ㆍ석벽(石壁)ㆍ수목(樹木)이며 꽃과 열매를 모두 다 7보인 자거ㆍ마노ㆍ수정ㆍ유리ㆍ산호ㆍ호박 등으로 변화시켜 모두가 광명을 놓으니 그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어 햇빛과 달빛을 가리게 하느니라.
012_0418_c_02L是時菩薩復作是念聞聲衆生必欲聞我淸淨之義我今當演如來八音音演八句苦音習音盡音道音見苦向苦見習向習盡向盡見道向道是時衆生聞如此意不開悟欲睹光明及其身體薩入定以平等觀便化地種山河石樹木華果盡爲七寶車璖馬瑙精琉璃珊瑚虎珀皆放光明明明相照翳日月光
이때에 중생은 뜻이 깨치지 못하여 다시 해와 달의 광명을 보고 싶어하면 보살은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곧 무애심념(無碍心念)삼매에 들어가서 천억의 수없는 털구멍에서 광명을 놓되 그 낱낱의 광명에는 7보로 된 연꽃이 있고, 그 낱낱의 연꽃에는 7보로 된 대(臺)가 있으며, 그 낱낱의 대 위에는 7보로 된 일산[蓋]이 있고, 그 낱낱의 일산 아래에는 7보로 된 자리[座]가 있으며, 그 낱낱의 자리 위에는 모두 여래께서 계셔서 그 중생을 위하여 고(苦)의 근본을 말씀하시는데, 고가 생기되 고가 없으면 이것은 바로 고제(苦諦)가 없는 것이요, 습(習)이 생기되 습이 없으면 이것은 바로 습제(習諦)가 없는 것이며, 진(盡)이 생기되 진이 없으면 이것은 바로 진제가 없는 것이요, 도(道)가 생기되 도가 없으면 이것은 바로 도제가 없는 것이니라.
012_0418_c_11L是時衆生意不開悟欲得見日月光明菩薩觀察知彼心卽入無礙心念三昧放千億無數毛孔光明一一光明有七寶蓮花一蓮華有七寶臺一一臺上有七寶一一蓋下有七寶座一一座上皆有如來與彼衆生說苦原本生苦無苦是無苦諦生習無習是無習諦盡無盡是無盡諦生道無道是無道
그 소리를 듣는 중생으로서 그 광명을 본 이가 고(苦)에 관한 음향을 듣고는 마음에 싫증을 품어 저마다 괴롭고 공(空)하고 내가 없다[無我]는 생각과 생멸이 없다는 생각[無生滅想]을 일으켜 곧 그 자리에서 고의 근원을 다하는 청정한 음향에 상응하게 되느니라.
012_0418_c_20L彼聞聲衆生及見光者聞苦音響心懷厭患各興苦空無我之想無生滅想便於座上盡苦原底應淸淨響
012_0419_a_01L이때에 그 자리에서 냄새를 맡고도 중생의 뜻이 깨치지 못하면 다시 ‘우리들은 지극히 미묘한 향기를 향하여 나아가고 싶다. 그런데 지금 큰 성인께서는 소리에 관한 가르침을 연설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느니라.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지극히 미세한 온갖 향기[極微衆香]의 정의정수삼매(定意正受三昧)에 들어가서 곧 지종(地種)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를 모두 다 향기가 자욱한 우두전단(牛頭栴檀)과 계설애납(鷄舌艾納)ㆍ발향몽경(跋香夢經)ㆍ목필소합(木榓酥合)이며 분다리꽃[分陀利花]ㆍ수건제꽃[須乾提花]ㆍ만원건제꽃[滿願乾提花]과 청련(靑蓮)의 향기로운 꽃 등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꽃의 수천백 가지로 변화시켜 사방에 두루하게 하여 향기를 맡지 않음이 없게 하느니라.
012_0418_c_22L是時座上聞香衆生意不開悟復生斯念我等意樂極妙之香然今大聖乃說聲教菩薩知彼衆生心念便入極微衆香定意正受三昧便化地種山河石壁樹木華果盡爲香熏牛頭栴檀雞舌芆納跋香夢經木榓酥合分陁利花須乾提花滿願乾提花蓮芳花如是衆花數千百種普遍四方靡不聞香
이때 중생은 비록 이런 향기를 맡고도 뜻이 깨치지 못하고 그 향기 가운데서 도의 가르침이 나오기를 바라면 그때에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향기 가운데서 6중(重)의 법을 연설하나니, 이때에 향기 맡는 중생은 마음이 열리고 뜻이 깨쳐 이 세간의 과환(過患)을 다 마치고 다시 와서 나지 않으며 괴로움의 끝[苦際]을 다하고 곧 도과를 이루느니라.
012_0419_a_08L是時衆生雖聞此香意不開寤欲使香中出於道教爾時薩知彼衆生心中所念便於香中說六重之法是時聞香衆生心開意寤畢此世患更不來生盡於苦際卽成道果
이때에 자리 위에서 맛을 탐낸 중생은 뜻이 깨치지 못하면 곧 ‘우리의 뜻은 미묘한 맛[妙味]을 좋아하고 집착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지금 큰 성인께서는 향기에 관한 것을 말씀하고 계시니 실로 본심으로 탐하고 그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바를 알고는 곧 지극히 미세하고 청정한 맛[極微淨味]의 정의정수삼매에 들어가서 곧 지종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를 모두 다 감로가 되게 하고 저절로 된 음식으로 변화시켜 향기가 자욱하고 감미로움이 한량없게 하느니라.
012_0419_a_13L是時座上貪味衆生意不開寤便作是念我意在于樂著妙味然今大聖乃說香教實非本心之所貪慕菩薩知彼衆生所念便入極微淨味定意正受三昧便化地種山河石壁樹木花果盡爲甘露自然飮食香氣芬熏甘美無量
012_0419_b_01L그때에 중생이 비록 이런 맛을 얻었다 하더라도 뜻이 깨치지 못하여 앞의 것을 탐내면서 저절로 보내 주어서 그 형상을 보게 되어야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면 보살은 그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 속질무애(速疾無碍)삼매에 들어가서 곧 지종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를 변화시켜 모두 다 중생들이 되게 하고 그 하나하나의 중생들이 여러 가지 저절로 된 감로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감로의 음식 가운데서 ‘단 맛(甘味)은 밖에 있는 것인데 설식(舌識)으로 맛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이 섞이고 만나야 비로소 진로(塵勞)를 일으키는 것이니, 우리는 이제 스스로 조절하여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욕심 있는 몸[支形]으로 나아가되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수레에 기름을 쳐서 무거운 짐이 실릴 수 있게 한 것과 같나니 상처 있는 데는 약을 얻어서 힘써 그 통증을 구제할지어다’라는 소리가 났다. 이와 같은 법의 가르침이 모두 그 맛에서 나오면 중생은 그것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이 깨우쳐져서 이 세간의 과환을 다 마치고 다시는 와서 나지 않으며 괴로움의 끝을 다하여서 곧 도의 과위를 이루느니라.
012_0419_a_19L爾時衆生雖獲此味意不開寤意欲貪前自然奉送及見其形乃果我願菩薩知彼衆生心念便入速疾無㝵三昧便化地種山河石壁樹木華果盡爲衆生一一衆生擎若干種自然甘露甘露食中出斯輩甘味在外舌識而嘗二法交會乃興塵勞我今自節知足爲上趣欲支形使痛不生如車須膏以致重載痍得藥勉濟其痛如此法教皆出于衆生聞之心開意寤畢此世患更不來生盡於苦際卽成道果
이때에 자리 위 중생의 무리에서 세활(細滑)을 탐내는 이는 뜻이 깨치지 못하면서 곧 ‘우리의 지금의 뜻은 세활을 탐착하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 큰 성인께서는 미묘한 맛을 설명하고 계시니 실로 본심으로 탐하고 그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 지극히 미세하고 유순하려는[極欲微細柔順] 정의정수삼매에 들어가 곧 지종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 등을 변화시켜 모두 다 중생이 되게 하고, 하나하나의 중생들이 모두 저절로 된 겁파육의(劫波育衣)를 입고 하늘의 비단이나 하늘의 채색으로 몸을 감아 있으면 중생들이 그것을 보고 손으로 가까이 대보면서 스스로 부드러움을 깨닫지만 얻어 가질 수는 없으므로 뜻에 한 벌의 옷을 생각하나니 곧 백 개로 쪼개져서 스스로 이르게 되며 중생은 마음이 깨어나게 되느니라.
012_0419_b_07L是時上衆生之類貪細滑者意不開寤便作是念我今意在貪著細滑然今大聖乃說妙味實非本心之所貪慕薩知彼衆生心念便入極欲微細柔順定意正受三昧便化地種山河石壁樹木花果盡爲衆生一一衆生皆被自然劫波育衣天繒天綵以自纏絡衆生見之以手親近自覺柔軟不可獲持意念一衣百副自至衆生心寤
그제야 자신을 몹시 책망하면서 ‘안타깝구나. 무엇 하러 이런 옷을 탐착했는가? 스스로 떨어져서 진로(塵勞)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형상은 마른 뼈로 된 것을 피와 살로 휘감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 곧 공중에서 소리를 내느니라. ‘남자야, 알아야 한다. 인간의 5욕락은 진실이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세활(細滑)을 집착하면 점점 서로 당기면서 관련되게 되나니 생각에 스스로 엄히 책망하면서 이런 탐애(貪愛)를 버릴지니라.’ 그때에 그 중생은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치게 되나니, 이 세간의 고통을 다 마치고 다시는 와서 나지 않고 괴로움의 끝을 다하여 곧 도의 과위를 이루느니라.
012_0419_b_16L方自剋責咄哉何爲貪著此衣將非自墜增于塵勞形爲枯骨纏以血肉便聞空中出斯輩聲男子當知人閒五樂非眞非有心著細滑漸興牽縺念自剋責捨此貪愛爾時衆生聞空中聲方乃得寤畢此世苦更不來生盡於苦際卽成道果
012_0419_c_01L이때에 자리 위의 중생 무리로서 법(法)을 탐한 이는 뜻이 깨치지 못하자 곧 ‘나의 지금의 뜻은 미묘한 법에 있다. 그런데 오늘 큰 성인께서는 세활을 연설하고 계시는구나. 실로 본심으로 탐하고 그리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 한량없는 법계의 정의삼매정수에 들어가 곧 지종(地種)의 산이나 강물ㆍ석벽ㆍ수목이며 꽃과 열매 등을 변화시켜 모두 다 중생이 되게 하고 그 하나하나의 중생들이 모두 6도무극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선정ㆍ해탈과 유위ㆍ무위와 유루ㆍ무루와 생기고 소멸하고 집착하고 끊고 하는 이것은 바로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연설하게 하느니라.
012_0419_b_23L是時座上衆生之類貪於法者意不開寤便作是念我今意在微妙之法今日大聖乃說細滑實非本心之所貪慕菩薩知彼衆生所念便入無量法界定意三昧正受便化地種山河石壁樹木華果盡爲衆生一一衆生皆說六度無極空無想願禪定解脫有爲無爲有漏無漏生滅著斷斯無所有
혹은 때로 보살은 중생의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바를 관찰하고, 곧 방편으로 계책을 쓰되 몸의 색상(色相)을 나타내어 숨거나 없어짐이 자유자재하며, 허공으로 올라가 18가지 변화를 짓고 공중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에 걸림이 없으며, 혹은 다시 국토와 성곽을 나타내 보이면서 부처님 법을 연설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요긴한 선정[要定]을 체득하게 하기도 하느니라.
012_0419_c_08L或時菩薩觀衆生心意之所趣便設權計現身色相隱沒自由騰在虛空作十八變從空往來無所罣㝵或復示現國土城郭演說佛法使衆生類逮不思議諸佛要定
이때에 보살이 교화하고 있는 성곽(城郭)에서 인민들이 돌아다니며 제한이 없이 함께 서로 공경하고 대접하는 것이 마치 아버지와 같이 하고 어머니와 같이 하며 형님과 같이 하고 아우와 같이 하며 겸손하고 낮추면서 언제나 먼저 공경하게 되느니라.
012_0419_c_13L是時菩薩所化城郭人民周旋各各無限共相敬待如父如母如兄如弟謙恭卑下常先興敬
보살은 그때에 다시 비유할 수 없는 광명에 들어가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이 광명으로 들어가 가부(跏趺)하고 앉아 있게 하느니라. 혹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게 하기도 하고, 혹은 연꽃에 앉아 있게 하기도 하되 온 세계에 가득 차서 빈 자리가 없게 하며, 혹은 부처님 몸을 나타내어 보배 연꽃에 앉아 모든 부처님의 6도무극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선정ㆍ해탈을 연설하게 하기도 하며, 또 여래의 18불공법과 4무소외로써 중생들을 가피하여 저마다 제도될 수 있게 하느니라.
012_0419_c_15L菩薩爾時復入無喩光明令諸菩薩入此光明結加趺坐或坐高座或坐蓮華遍滿世界無空缺處或現佛身坐寶蓮花皆演諸佛六度無極空無相願禪定解脫復以如來十八不共四無所畏加被衆生各蒙得濟
012_0420_a_01L그때에 보살은 다시 신족의 힘으로써 큰 광명을 놓아 부처님 세계 억백천 나라를 나타내고 낱낱의 광명마다 각각 억백천 중생들을 이끌어 광명을 타고 여기에 와서 법을 듣고는 제도되게 하느니라. 낱낱의 모공에는 10억의 광명이 있고 낱낱의 광명에는 10억의 국토가 있으니, 때에 변화로 된 국토에는 자연히 스스로 깨닫게 하는 마니보(摩尼寶)가 있고 여러 가지 진기한 보배로써 그 사이에 섞였는데 그 마니보는 열 길이나 떨어진 허공에 달려 있어 보주의 광명이 사무쳐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느니라.
012_0419_c_21L爾時菩薩復以神足之力放大光明現佛世界億百千國一一光明各各引致億百千衆生乘光至此聞法得度一一毛孔有十億光明一一光明有十億國時化國土有自然自寤摩尼寶種種珍寶雜廁其閒其摩尼寶懸在虛空去地十仞珠光明徹靡不照曜
다시 기이한 마니보로써 그것을 장엄하였고 그 낱낱의 보배 위마다 십억의 강물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국토와 십억 백천의 누관(樓觀)과 대각(臺閣)이 있으며, 그 낱낱의 누관에는 십억 백천의 부처님 국토의 보배 연꽃으로 된 사자좌(師子座)가 있고 그 낱낱의 보배 사자좌마다 십억 백천 국토의 신령한 보배 연꽃이 나 있으며, 그 낱낱의 꽃 위에는 십억 백천의 여래께서 사자좌에 앉아 계시고 그 한 분 한 분의 여래는 큰 광명을 놓아 십억 백천의 부처님 국토를 온통 뒤덮으셨으며 그 낱낱의 부처님 국토마다 십억 백천의 여래 사자의 두려움이 없는 덕(德)이 있고 그 낱낱의 두려움이 없는 덕에는 십억 백천의 중생들이 사는 곳[居處]이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중생에게는 십억 백천의 모든 부처님 국토가 나타나 있느니라.
012_0420_a_05L復有奇異摩尼之寶以爲莊嚴一一寶上十億江河沙剎諸佛國土十億百千樓觀臺閣一一樓觀有十億百千佛土寶蓮華師子之座一一寶師子座有十億百千國土神寶蓮華一花上有十億百千如來坐師子座一一如來放大光明覆十億百千佛一一佛剎土有十億百千如來師子無畏之德一一無畏之德有十億百千衆生居處一一衆生有十億百千現諸佛國
그 낱낱 부처님 국토에는 십억 백천의 법구의 의미(義味)와 모든 부처님의 법이 있으며, 그 낱낱 법구의 의미와 법에는 십억 백천의 모든 경법(經法)이 생겨 진로(塵勞)를 활활 태우며, 더 나아가 모든 법과 정의 문[定門]도 역시 그와 같고, 낱낱의 모든 법문 가운데에서는 한량없는 온갖 지혜의 모습과 불퇴전법을 연설하되 여러 가지 지혜와 의미가 같지 않으며, 낱낱이 굴리는 법륜 가운데서는 십억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여 순숙(純熟)한 행을 얻고, 그 낱낱의 중생 세계에는 다시 십억 백천의 부처님 국토가 있었으니 저마다 자기 세계를 교화하여 좋은 곳[善處]으로 나아가게 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다 함께 부처님 도[佛道]에 이르게 하느니라.
012_0420_a_16L一一佛國有十億百千法句義味及諸佛法一一法句義味之法有十億百千生諸經法熾然塵勞乃至諸法定門亦復如是一一諸法門中演出無量衆智相貌不退轉法若干種智義味不同一一所轉法輪之中度十億百千衆生得純熟行一一衆生剎土復有十億百千佛國各化己界使趣善處令衆生類咸至佛道
012_0420_b_01L보살 대사(大士)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스스로 한량없는 위신력의 변화를 나타내되 삼매의 경계는 아직 일찍이 있지 못하였고 아직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이며, 교화한 바가 기이함을 다하여 마음으로 헤아릴 바도 아니고 뜻으로 꾀할 바도 아니며 안팎과 중간에도 도무지 처소가 없고 또한 오는 때를 보지도 못하고 또한 가는 때도 보지 못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법의 체성이 자연이기 때문이며, 백 겁의 수행으로 그 때[垢]를 다하고자 하고 여래의 서원을 향하여 중생에게 가피하기 때문이니라.
012_0420_b_01L菩薩大士入此三昧自現無量威神之變昧境界未曾所有未曾所見所化窮異非心所度非意所圖內外中閒睹無處所亦不見來時亦不見去時以者何斯由諸法體自然故百劫修行欲盡其垢行如來誓加于衆生
다시 헤아릴 수 없고 한이 없는 수겁(數劫) 동안에 집착이 없고 머무른 것도 없고 또한 물든 바도 없으며, 또한 다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그 근본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처소가 없나니 설령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권모술수를 써서 이 정(定)의 조화(造化)와 형상을 찾고 궁구하게 하여도 뜻이 지극하고 매우 깊어서 불가사의하느니라.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셔야 할 법이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닦을 바가 아니니라.
012_0420_b_07L於無量無限數劫無著無住亦無所亦復無能爲立名字尋其根本永無處所若使有人欲設權詐尋究此定造化形相義極甚深不可思議是諸佛所應行法非是羅漢辟支所
최승아, 다시 이런 이치를 사유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괴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8난(難)에 노닐며, 중생들의 뜻에 애욕이 있는 마음과 애욕이 없는 마음의 많이 있고 적게 있음을 관찰하여 또한 모두 다 알고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의 많이 있고 적게 있음도 역시 모두 다 알며,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의 많이 있고 적게 있음도 역시 모두 다 아느니라.
012_0420_b_13L最勝復當思惟此理菩薩謙苦遊於八難觀衆生意有愛欲心無愛欲有多有少亦悉知之有瞋恚心無瞋恚心有多有少亦悉知之有愚癡心無愚癡心有多有少亦悉知之
012_0420_c_01L만일 그 중생이 애욕의 마음이 있어 치우치게 여색에 집착하여 곱고 살지고 흰 것을 마음에 사랑하고 버리거나 여의지 못하면 이때에 보살은 다시 임시로 꾀를 내어 널리 방편을 써서 곧 그를 위하여 오로(惡露)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각관(覺觀)하는 생각을 나타내 보이고, 그 중생 앞에서 몸은 덧없다는 것과 4대는 흩어지고 떨어지며 딴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되 하루ㆍ이틀, 나아가 이레가 되면 형체가 띵띵 부풀어 오르고 악취가 나서 깨끗하지 못하며, 혹은 때로는 죽은 시신의 피와 살이 녹아 다하고 힘줄과 뼈만이 서로 이어진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괴이하게 변화하여 여러 가지 형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해골과 넓적다리의 뼈며 팔다리가 저마다 한 군데에 있되 오래되면 차츰차츰 변하여 흰 비둘기 같은 빛이 되고 세월이 차츰 오래 지나면 썩은 흙과 같이 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느니라.
012_0420_b_17L彼衆生有愛欲心偏著女色計好肥心玩不能去離是時菩薩復現權詐廣設方謀輒爲示現覺觀惡露不淨之想於衆生前現身無常四大散落落在異處一日二日乃至七日體胮脹臭處不淨或時死尸血肉消盡筋骨相連復現異變若干種形現髑髏䏶骨臂肘各在一處久久轉變似白鴿色歲月轉久與糞土同
이와 같이 보살이 중생에게 보이고 나면 곧 스스로 깨우치고 비로소 허망한 욕심은 바로 범부의 행으로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바른 도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 스스로 옛날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뉘우치고 고치며, 이에 큰 성인에게 몸을 던져 범행(梵行)을 좇아 닦고 청정한 못에 들어가 음욕의 때[垢]를 씻으며 정신을 단련하고 속박을 버리고 위없고 지극히 참된 정각(正覺)을 이루며 자기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을 기르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애욕의 마음을 관하여 곧 그를 위해 설법하여 도의 과위를 얻게 하는 것이니라.
012_0420_c_03L是菩薩衆生觀已便自開寤乃知妄是凡夫行墮入惡趣非歸正道心自改悔追昔不及乃投大聖遵修梵行入淸淨淵洗淫欲垢練神棄縛成無上至眞正覺淨己國土育養衆是謂菩薩觀愛欲心便爲說法得成道果
보살은 알아야 하느니라. 혹시 어떤 중생이 애욕의 마음은 없으나 뜻이 작은데 국한하여 큰 도에 이르지 못하면 보살은 부지런히 힘써 평등하고 바르게 깨닫는 도를 이루게 해야 하느니라. 지혜 창고[智慧藏]는 둘이 없는 법으로써 인도하고 지시하여 바른 길을 알게 하고 대승에 안전하게 세워 소승의 도[小道]를 취하지 않으며, 수없는 겁으로부터 공을 쌓고 덕을 세우고 선(善)을 행하되 게으르지 않으며, 뜻이 헷갈리고 마음이 미혹하여 진위(眞僞)를 구별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스스로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느니라.
012_0420_c_10L菩薩當知或有衆生無愛欲意局在小不至大道菩薩勸勉成就平等正覺道也以智慧藏無二之導引指示令知正路安立大乘不取小道從無數劫積功立德行善不意迷心惑不別眞僞今乃自覺不到究竟
어떤 것이 보살의 둘이 없는 도(道)라 하는가? 보살이 수행하는 둘이 아닌 도[不二道]는 보살은 언제나 청정하면서도 청정한 데에 처하지 않고 청정한 데서 놀고 즐기면서도 밖으로는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요, 보살은 언제나 고요하면서도 밖으로는 어지러운 것과 같이 나타나고 고요한 데서 놀고 즐기면서도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착오가 있지 않고 정의(定意)로부터 일어나 밖으로 중생을 교화하나니 바로 이것이 둘이 아닌 도이니라.
012_0420_c_16L云何菩薩無二之道菩薩修行不二道者菩薩常淨不處於淨淨遊樂外化衆生是不二道菩薩常寂外現如亂於寂遊樂而化衆生不二道菩薩入定未始有錯從定意起外化衆生是不二道
012_0421_a_01L보살은 보시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뉘우침을 품지 않고 갚음에 생각이 없는 견고한 뜻을 지니며 밖으로 중생을 교화하되 세 가지 생각[想]을 제거하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보살은 계율이 구족하여 처음부터 이지러짐이 없고 다시 금률(禁律)로써 밖으로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보살은 매우 깊은 지려(智慮)가 넓고 커 스스로 찬탄하면서 ‘이룩한 바가 있다’라고 찬탄하지 않고 안으로는 언제나 한 마음이어서 더러움에 물든 바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며, 지혜를 지니어 짓고 교화함이 실로 끝이 없으며 그 가운데서 뜻을 다잡아 분산하지 않게 하고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을 가르치고 교화하되 너른 들판의 근심 없는 진펄[無憂澤]을 지나가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도이니라.
012_0420_c_21L菩薩施心初不懷悔持無想報牢固之意外化衆生使除三想是不二道菩薩戒具未始有缺復以禁律外化衆生是不二菩薩甚深智慮廣遠不自歎說有所成辦內常一心無所沾污是不二執智造化實無邊崖於中撿意使不分散亦以此法誨化衆生令過曠野無憂之澤是不二道
보살은 인정정(忍正定)삼매를 닦아 현재의 몸으로 부지런히 애써 사람 없는 산택(山澤)에 살며, 혹은 촌락 근처에서 걸식을 하되 때로는 일 년 내지 백천 년을 지나기도 하고, 혹은 한 겁 내지 백천 겁을 지나되 그 가운데서 현재 있는 몸으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느니라.
그때에 산중에는 사람인 듯 아닌 듯한 따위인 나찰귀(羅叉鬼)나 두 발ㆍ네 발ㆍ여러 발 달린 귀신이 저마다 칼이나 몽둥이를 가지고 보살에게 와서 접촉하기도 하고, 혹은 날카로운 칼로써 그의 코를 베면 코가 곧 다시 생겨나곤 하는데 마치 염부 열매와 같으니라.
012_0421_a_06L菩薩修忍正定三昧現身勤苦處在山澤無人之或近村聚現行乞食或經一歲至百千歲或經一劫至百千劫於中現身受無量苦爾時山中人及非人羅叉鬼二足四足及無數足各齎刀杖來觸菩薩或以利刀而截其鼻尋還生如閻浮果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염부 열매는 한 개를 따면 두 개가 생기고 두 개를 따면 네 개가 생기며, 네 개를 따면 여덟 개가 생기고 여덟 개를 따면 열여섯 개가 생기며, 열여섯 개를 따면 서른두 개가 생기나니, 이와 같이 하여 차츰차츰 나무는 온통 열매로 뒤덮혀 다시는 나무의 형상도 없게 되고 또한 가지ㆍ잎ㆍ줄기ㆍ마디조차 보이지 않게 되느니라. 보살은 정(定)에 들어가서 인(忍)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012_0421_a_13L最勝當知閻浮果取一生兩取兩生四取四生八取八生十六取十六生三十二如是展轉樹盡爲果無復樹形亦復不見枝葉莖節菩薩入定行忍如是
어떤 사람이 와서 보살의 코를 벨 적에 한 번 베면 두 개가 생기고 그 두 개를 베면 네 개가 생기며 네 개를 베면 여덟 개가 생기고 여덟 개를 베면 열여섯 개가 생기며 열여섯 개를 베면 서른두 개가 생기나니, 이와 같이 차츰차츰 몸은 온통 코가 되어 다시는 몸의 형상도 없고 또한 손ㆍ발ㆍ머리ㆍ눈조차 보이지 않나니, 중생에게는 다만 헤아릴 수 없는 코만이 보일 뿐이므로 곧 그때에 생각을 내어 그의 코를 벤 것을 후회하고 보살의 본래 몸을 보게 되기를 원하느니라.
012_0421_a_17L若有人來截菩薩鼻取一生兩取兩生四四生八取八生十六取十六生三十如是展轉身盡爲鼻無復身形復不見手足頭目衆生但見鼻無央尋時生念悔取其鼻願樂欲見菩薩本體
012_0421_b_01L이때에 보살은 삼매를 버린 뒤에 마음과 뜻이 안온하고 자상하면서 정(定)으로부터 일어나 도로 그의 형상을 본래와 다름 없이 나타내고 점차로 몸을 움직이고 흔들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차츰 다시 눈을 뜨면서 할 말이 있는 것같이 하면 중생은 그것을 본 뒤에 모두가 온몸을 땅에다 던지고 스스로 ‘원컨대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의 곁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며 귀의하나니, 이때에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때에 따라 잘 제도하여 해탈시키느니라.
012_0421_a_23L是時菩薩捨三昧已心意安詳而從定起還現其形如本無異漸動搖現出入息轉復開目如有所衆生見已皆投于地五體自歸爲給使在菩薩側是時菩薩觀察衆生內心所念隨時應適而度脫之
보살은 다시 정삼매(定三昧)에 들어가 안의 마음이 고요해져서 딴 생각이 없을 적에 다시 어떤 중생들이 보살에게로 와서 모두가 함께 에워싸고는 그의 눈을 후벼 파내면 눈이 곧 다시 생겨나되 마치 녹여 만든 유리(琉璃)를 흩은 것과 같이 되나니, 가령 어떤 사람이 녹여 만든 유리를 취하여 비라(毘羅) 열매만큼을 땅에다 뿌리면 겨자씨처럼 흩어져서 주울 수 없는 것과 같거니와 그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면서 저마다 정광(精光)이 있는데, 그 중생들은 다만 보살의 형체가 온통 눈이 되어 있는 것만을 볼 뿐이요, 다시는 본래의 형체나 모습은 볼 수 없으므로 곧 그때에야 생각을 내어 본래 했던 일을 후회하고 곧 자신들을 몹시 책망하며 보살의 본래 몸을 보고 싶어하느니라.
012_0421_b_05L薩復還入定三昧內心寂靜無他餘復有衆生至菩薩所盡共圍繞而挑其目目尋還生如散成融琉璃當有人取成融琉璃如毘羅果許而灑地者散如芥子不可收拾然明明相照各有精光衆生但見菩薩形體盡爲眼目不復見本形體相貌尋時生念悔本所作卽自剋責願樂欲見菩薩本體
이때에 보살은 곧 삼매를 버리고 마음과 뜻이 안온하고 자상하여 정(定)으로부터 깨어나 도로 그의 형상을 본래와 다름 없이 나타내고 점차로 움직이고 흔들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마치 할 말이 있는 것같이 하면 그 중생들은 그것을 본 뒤에 모두가 온몸을 땅에다 던지며 스스로 ‘원컨대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의 곁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며 귀의하나니, 이때에 보살은 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 때에 따라 알맞게 제도하고 해탈시키느니라.
012_0421_b_14L是時菩薩尋捨三昧心意安詳而從定起還現其形如本無異漸漸動搖示出入息如有所說衆生見已皆投于地五體自歸願爲給使在菩薩側是時菩薩觀察衆生內心所念隨時應適而度脫之
012_0421_c_01L이때에 보살은 다시 정에 들어가 안의 마음이 고요하여 다른 생각이 없을 적에 다시 어떤 중생들이 보살에게로 와서 손에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그의 머리와 발을 베어버리면 머리와 발이 도로 생기는 것은 마치 구다라나무[瞿多羅樹]와 같이 되느니라. 구다라나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ㆍ잎ㆍ줄기ㆍ마디를 베어 그 뾰족한 데를 조각조각 내어서 각각 다른 곳에 있게 하면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곧 지기(地氣)로 인하여 다시 본래대로 가지ㆍ잎ㆍ줄기ㆍ마디가 생겨 각각 나무가 되느니라. 그때에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형체와 팔다리가 온통 머리와 발이 되어 다시는 본래의 형상이 없나니, 중생들은 다만 보살의 형체가 모두 다 머리와 발 뿐이요 다시는 본래 모습의 형상은 볼 수 없으므로 곧 그때에 생각을 내어 본래 했던 일을 후회하고 곧 스스로 몹시 책망하며 보살의 본래의 몸 보기를 원하느니라.
012_0421_b_19L是時菩薩復還入定內心靜寂無他異念復有衆生至菩薩所手執利刀扤其首足首足還生如瞿多羅樹瞿多羅樹者若有人來誅伐其樹枝葉莖節諸觚段段各在異處彈指之頃尋因地氣還生如舊枝葉莖節各各成樹爾時菩薩亦復如是形體肢節盡爲首足無復本形衆生但見菩薩形體盡爲首足不復見本相貌之像尋時生念悔本所作卽自剋責願樂欲見菩薩本體
그때에 보살은 곧 삼매를 버리고 마음과 뜻이 안온하고 자상하여 정(定)으로부터 깨어나 도로 그 형상을 본래와 같이 나타내며, 점차로 움직이고 흔들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보이고 차츰 다시 눈을 뜨면서 할 말이 있는 것같이 하면 중생들은 그것을 본 뒤에 모두가 온몸을 땅에다 던져 스스로 ‘원컨대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의 곁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며 귀의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찰하고 때에 따라 알맞게 그들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애욕(愛欲)이 있는 마음과 애욕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모두 다 안다고 하는 것이니라.
012_0421_c_07L尋捨三昧心意安詳而從定起還現其形如本無異漸漸動搖示出入息轉復開目如有所說衆生見已皆投于地五體自歸願爲給使在菩薩側是時菩薩觀察衆生內心所念隨時應適而度脫之是謂菩薩有愛欲心無愛欲心有多有少皆悉知之
또한 스스로 ‘나는 진로(塵勞)에 있으면서 그 공(功)을 헛되이 버린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다시 ‘이 중생들을 쉬이 권유하여 나아가게 하였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보살의 행하는 것은 행하되 행함을 보지 않고, 또한 다시 교화를 받는 이가 있다고도 보지 않나니, 행(行)과 교(敎)의 두 가지 일은 스스로 텅 비어 고요하며 또한 하나[一]라고 보지도 않고 또한 하나가 없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하나에도 스스로 하나가 없거든 하물며 하나가 있다고 말하겠느냐?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스스로 붙인 이름[假號]이니라. 눈이라고 말하는 것도 스스로 붙인 이름이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법과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細滑]ㆍ법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보살이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법문(法門)을 열고 한량없는 문[無量門]을 나타내어 이끌어서 무법(無法)에 이르러 중생을 가르치려 함에서이니라.”
012_0421_c_13L亦不自念吾在塵勞唐捐其功亦復不念斯衆生等而易誘進菩薩所行行不見行亦復不見有受教者行教二業都自虛寂亦不見一亦不見無一自無一況言有一言一法者自假號言眼眼自假號耳鼻舌身意法及以色聲香味細滑法亦復如是菩薩所以言一法者欲開法門現無量門引至無法訓于衆生
이때에 최승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중생의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모두 다 알게 되나이까?”
012_0421_c_22L是時最勝復白佛言云何衆生有瞋恚心無瞋恚心有多有少皆悉知之
012_0422_a_01L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대사가 세계의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 노닐 적에 그 낱낱의 형상이 있는 종류로써 기고 날고 꿈틀거리고 기어 다니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맨 아래의 개미 새끼에 이르기까지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관찰하여 모두 다 분별하며 그 낱낱을 요량하고 간택하여 약을 주느니라.
012_0422_a_01L佛告最勝菩薩大士遊入世界無量佛土一一觀察有形之類蜎飛蠕動蚑行喘息下至蟻子有瞋恚心無瞋恚心有多有少皆悉分別一一料簡而投其藥
가령 어떤 중생이 성냄이 많은 이가 있으면 곧 고(苦)ㆍ공(空)ㆍ비상(非常)의 변(變)을 당하게 되나니, 혹은 어떤 이는 벌레나 짐승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는 도적이나 병사의 칼날에 해를 당하기도 하며, 혹은 물이나 불에 뜻밖에 타고 삶겨지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재변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가령 그 중생이 마음에 깨우침을 얻으면 그의 가르침과 경계[敎誡]를 따라 그 교화를 받나니, 곧 그곳에서 제도하고 해탈하게 할 수 있느니라.
012_0422_a_05L設有衆生瞋恚多者便見苦空非常之變或有虫獸所見噉食或有盜賊兵刃所害或爲水火撗見燒煮如是衆變不可稱計設彼衆生心得寤者隨彼教誡而受其化尋於彼處卽得度脫
만일 어떤 중생이 덧없는 변화를 보고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보살은 그때에 다시 권혜(權慧)로써 인(忍)의 삼매에 드나니 그 삼매의 이름은 무상관(無常觀)이며 다시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자항복거에(慈降伏去恚)삼매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정수에 들면 곧 성내는 마음을 항복받아 제거할 수 있느니라. 설령 지극히 악한 나찰 귀신이나 범ㆍ이리나 도적 등 폐악한 부류가 보살에게로 와서 상해하려 하지만 아직 이르기도 전에 중도에서 혹 되돌아가느니라. 그렇게 되는 까닭은 자정(慈定)의 힘이 사방 여러 세계를 덮고 수호하는지라 억(億)ㆍ해(姟)의 세계 국토가 구제받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라.
012_0422_a_11L若有衆生見無常變心不覺悟菩薩爾時復以權慧入忍三昧其三昧名無常觀復有三昧名慈降伏去恚三昧若菩薩摩訶薩入此三昧正受者便能降伏除瞋恚心若有極惡羅叉鬼神虎狼盜賊弊惡之部來趣菩薩欲取傷害未到之閒中道便還所以然者慈定之力覆護方界億姟剎土莫不蒙濟
012_0422_b_01L자삼매(慈三昧)에 들 수 있는 이에게는 법도(法度)에 열 가지 일[事]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매우 깊은 지혜를 닦고 한량없는 업(業)을 행하며, 총지로 오래도록 잘 기억하고 뜻을 무너뜨리기 어렵고, 스스로 한량없으되 법계로써 양을 삼아 한량없음에 들어가며, 모든 부처님께서 닦아 익힌 위없는 법인(法印)으로써 그를 봉인(封印)하고 여래의 힘에 의지하여 부처님 국토를 더욱 늘리며 항상 스스로 뜻을 세우고 도량을 청정하게 닦아 보살의 업을 세우는 것이니라.
012_0422_a_19L以得入慈三昧者度有十事云何爲十所謂修甚深智行無量業㧾持强記意難沮壞自無有量以法界爲量入於無量當來過去現在諸佛之所修習無上法印而封印之依如來力增益佛土恒自立志淨修道場建菩薩業
이와 같이 행하는 이는 법과 율에 상응하게 되고 나는 곳이 없는[無所生] 데도 상응하며 안목이 열리게 되어 환히 크게 깨쳐 혜안(慧眼)이 청정해지고 영원히 티끌의 가림[塵曀]이 없으며, 종성(種姓)의 눈을 얻고 부처님의 청정한 눈을 얻느니라. 혜안은 바깥이 없고 의안(議眼)은 깊고 멀며 법안(法眼)은 언제나 안정되고 선지식의 눈은 영호(營護)가 되고 도안(道眼)은 매우 깊어 변재의 눈[辯才眼]을 얻고 말은 막힘이 없으며 의심이 없는 눈[無疑眼]에 이르고, 마음은 피차(彼此)가 없어 또한 망설임이 없으며, 법문의 눈[法門眼]에 들어가서 소경의 무리를 인도하여 보이고 의미(義味)를 분별하여 법문을 드러내며, 진실로 아는 이[眞知識]를 친근하여 도의 마음[道心]을 성취하고 세운 바 경계는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또한 어떤 이도 헐뜯을 수 있는 이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모든 눈을 분별하여 도업(道業)을 이루어 마치는 것이니라.
012_0422_b_02L如是行者應法律應無所生得開眼目㸌然大慧眼淸淨永無塵曀獲種姓眼佛淨眼慧眼無外議眼深遠法眼常善知識眼以爲營護道眼甚深獲辯才眼言無滯㝵致無疑眼心無彼此亦無猶豫入法門眼導示盲類別義味開露法門親眞知識成就道所建境界無能鄣蔽亦復無能有求毀呰是謂菩薩分別諸眼成辦道
모든 세간을 위하여 어질게 돕는 착한 벗이 되고 미리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아 위엄 있는 모양을 드러내 보이며, 선근을 세워 교화하는 바가 막힘이 없고 공덕이 청정하여 원하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지며, 포태(胞胎)가 진실하고 바르며 모든 해탈을 만나 의심 그물을 끊고 지혜의 겹친 구름이 퍼져서 허공의 세계에 두루 차며, 현성의 법으로써 마음의 때[心垢]를 통하여 알고 세운 바 뜻하는 원[志願]이 항시 앞에 나타나 있으며, 마음으로 한 일에는 끝내 의심이나 어려움이 없고 신근이 견고하여 공업(功業)이 다함 없으며,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받들어 근심이나 즐겁다는 생각을 없애고 도의 마음이 한층 더 깊어 지혜의 값진 보배를 채취하며, 지혜로운 선비[智士]를 공양하고 받듦이 마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바람에 불려서 맡지 않는 이가 없는 것과 같나니, 그 어떤 더럽고 악한 것도 모두 다 청정하게 되느니라.
012_0422_b_12L爲諸世閒作良祐善友豫了未生顯示威相立於善根所化無㝵功德淸淨所願必果胞胎眞正遇諸解脫斷諸疑網布慧重雲遍滿空界以賢聖法解暢心垢所建志願恒現在前心所作爲終不疑難信根堅固功業無盡親奉諸佛除憂樂想道心轉深採慧珍寶供奉智士猶妙香花爲風所吹靡不聞者其有穢惡悉爲淸淨
012_0422_c_01L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지금 이 염부리(閻浮利) 안에 사는데 살고 있는 나라는 비사리(毘舍離)이니, 육안(肉眼)으로 모든 방향의 국토를 살펴보아도 온갖 고통과 근심과 번거로움은 이곳보다 더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여래의 종성(種姓)을 내었으나 지금 이 중생들의 향기롭지 못한 악취는 위 허공의 십천 유순[由延]까지 뻗치며, 그리고 하늘은 인간을 기대고 인간은 천종(天種)을 돕는데 하늘은 또한 스스로 알아서 전생 일[宿命]을 보거니와 내가 쌓은 덕은 모두가 사람의 몸[人身]을 말미암은 것이니 가령 인간에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지 않으면 복과 경사[福慶]를 받지 못하느니라.
012_0422_b_20L最勝當知吾今居此閻浮利內所居之國名毘舍離以肉眼觀諸方剎土諸苦憂惱不過此處然復出於如來種性今此衆生不馨之臭上徹虛空十千由延然天於人人爲天種天亦自知觀於宿命吾所積德皆由人身設不從人殖衆德本者不蒙福慶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그때에 모든 하늘들은 저마다 종자[從]들을 거느리고 세간으로 함께 와서 공중에 도달하려 하다가 인간 세상의 고약한 냄새가 겹친 구름 끝에 배인 인간의 비린내와 부정(不淨)한 것을 맡고는 곧 그들이 있는 데로 되돌아가 인간에 이르지 않느니라. 그렇게 한 까닭은 그들의 향기롭고 청결한 몸으로써는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니라.
012_0422_c_04L勝當知爾時諸天各將營從欲來世閒咸來到空人閒臭氣重雲之際便聞人閒腥臊不淨卽還彼去不至人所以然者以其香潔不堪住故
보살 대사는 큰 자비를 행하는지라 교화할 국토에 대하여 이것은 곱다, 이것은 누추하다, 이것은 깨끗하다, 이것은 깨끗하지 않다는 것으로 선택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으로 ‘나는 지금 바라고 좋아하니 여기는 교화할 만하거니와 저 곳은 할 만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012_0422_c_08L薩大士行大慈悲所化國土亦不選擇是好是醜是淨是不淨亦不心念我今願樂堪教化此不堪彼處
마치 내가 오늘 이 인계(忍界)에 있으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연(緣)을 다 끝내고 남음이 없음을 시방의 모든 여래ㆍ등정각께서는 각기 당신이 계신 그 세계의 4부 대중에게 모두 알려서 ‘아무 지방에 아무 부처님의 성씨와 명호는 능인(能仁) 여래이신데 거기의 인계(忍界)는 다섯 가지 펄펄 끓는 솥[鼎沸] 안이요, 다섯 가지 찌르는 쇠꼬챙이[剌鐵] 안이며, 다섯 가지 칼과 검[刀劒] 안이요, 다섯 가지 훨훨 타는 불길[盛焰] 안이며, 다섯 가지 거칠고 어지러운[荒亂] 안이요, 다섯 가지 구제가 없는[無救] 안이며, 다섯 가지 꾸어 쓰기 어려운[難債] 안인데도 그 가운데 능히 계시면서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시니 매우 기이하고 특별하게 성현의 모든 도무극을 분별하시느니라’라고 찬탄하셨느니라.
012_0422_c_11L如我今日處此忍界教化衆生緣畢無餘十方諸如來等正覺皆遙讚歎各各自於彼剎告四部衆某方某甲稱佛姓字名號能仁如來於彼忍界五鼎沸中五刺鐵中五刀劍中五盛焰中五荒亂中五無救中五難債中能處其中訓誨衆生甚奇甚特分別賢聖諸度無極
모든 하늘은 청정하여 몸에 때[垢]나 더러움이 없는지라 악취가 난 구름 끝에 이르렀다가 곧 천상으로 되돌아가서는 궁중에 이르러 후원(後園)으로 나아가 무우지(無憂池)에 들어가서 7일 밤낮 동안을 스스로 몸을 씻고도 오히려 인간의 더러운 냄새가 몸에 붙어 있을까 두려워하나니 마음으로 인간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느니라.
012_0422_c_19L諸天淸淨身無垢穢至臭雲際輒還天上至宮殿中出到後園入無憂池七日七夜而自洒浴猶恐人閒臭氣著身心不願樂人閒周旋
012_0423_a_01L이때에 모든 하늘에는 향기로운 바람이 멀리 퍼지고 아래로 허공계의 1만 8천 유순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이 수효보다 더한 수람풍(隨嵐風)이 있어 향기가 아래로 지나가 허공의 풍향계(風香界)의 2천 유순까지 이르렀으니, 모든 하늘에는 비록 온갖 덕의 향기가 있어도 오히려 이와 같은 욕심 없는 사람이 지닌 계향(戒香)보다는 못하느니라.
012_0422_c_22L是時諸天香風遠布下至空界萬八千由旬復過此數有隨嵐風香氣下過至空風香界二千由旬諸天雖有衆德之香猶不如此無欲之人持戒香也
보살은 마땅히 관해야 하나니, 모든 하늘의 식복(食福)이 길고 오랜 것으로 여기지마는 천사(天使)가 앞에 와 있으면 그제야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 없자 인간 안에서 공(功)과 복된 업을 일으키기를 원하고 탐하는 것이니 이때에 뜻이 어찌 향기나 악취 사이에 있겠느냐?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고뇌의 다섯 가지 훨훨 타는 불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고달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또한 뉘우치거나 물러나지 않으며, 뜻은 언제나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는 데에 있느니라.
012_0423_a_04L菩薩當觀諸天食福謂爲永久天使在前乃悔不及願貪人中興功福業是時意豈在香臭閒乎菩薩大士亦復如是雖處苦惱五盛焰中不疲厭亦不悔還意常念在度脫衆
만일 어떤 현성인 신통 지닌 사람이 그의 신통력으로써 한 범부를 붙잡고 위의 허공의 향훈 지경[香熏界]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이 인간 세계에 있으면 몸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이 삼칠(三七) 일의 때를 경과하고서야 향기가 비로소 없어지거니와 욕심 없는 사람으로서 계율을 완전히 갖춘 이는 겁(劫)을 지나고 겁이 가도록 계덕(戒德)의 향기는 마침내 끊어지지 않느니라.
012_0423_a_09L若有賢聖神通之人以其神力接一凡夫至上虛空香熏之界還復來下在此世閒身體香熏經三七時香氣乃歇無欲之人戒完具者經劫去劫戒德之香終不斷絕
그리고 보살 대사가 같이 세간에 처하면 세간의 어른이며 다시 세간에서의 큰 횃불의 광명이 되나니, 비록 애쓰는 수고가 있다 하더라도 괴롭다고 여기지도 않고 도의 뜻이 왕성하여 마음에 이지러짐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중생의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관찰하여 모두 다 안다고 하는 것이니라.”
012_0423_a_13L然菩薩大士同處世閒於世閒長復於世閒作大炬明雖有勤勞不以爲苦道意興盛心不缺減是謂菩薩觀察衆生有瞋恚心無瞋恚心有多有少皆悉知之
그때에 최승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은 한 마음으로 사유하되 중생의 어리석음[愚癡]이 있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 많이 있고 적게 있는 것을 관찰하여 모두 다 아는 것이옵니까?”
012_0423_a_17L爾時最勝復白佛言世尊云何菩薩一心思惟觀察衆生有愚癡心無愚癡心有多有少皆悉知之
012_0423_b_01L“이에 보살은 곧 명혜(明慧)의 정수삼매에 들어가서 널리 세계를 관하되 허공의 끝[虛空際]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있는 모든 중생으로서 한 발, 두 발, 나아가 여러 발의 천ㆍ용ㆍ귀신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의 근원을 알고 낱낱이 분별하여 그 진실을 찾고 궁구하느니라.
012_0423_a_20L於是菩薩便入明慧正受三昧普觀世界至虛空際其中所有衆生之類一足二足至無數足鬼神阿須倫迦留羅栴陁羅摩休勒人若非人知其原本一一分別尋究審實
만일 어떤 중생이 어리석음이 많으면 곧 그를 위하여 견주고 헤아려 12인연(因緣)의 근본을 연설하느니라.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緣)이 되고, 행은 식(識)의 연이 되며,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되고, 명색은 6입(入)의 연이 되며, 6입은 갱락(更樂)의 연이 되고, 갱락은 통(痛)의 연이 되며, 통은 애(愛)의 연이 되고, 애는 수(受)의 연이 되며, 수는 유(有)의 연이 되고, 유는 생(生)의 연이 되며, 생은 사(死)와 근심ㆍ걱정ㆍ고뇌 등의 연이 되느니라.
012_0423_b_02L若有衆生愚癡多者便爲挍計演說因緣十二根本無明緣行行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更樂更樂緣痛痛緣愛愛緣受受緣有有緣生生緣死愁憂苦惱
모든 청정하지 못하고 산란한 생각의 마음이 있는 이면 역순(逆順)으로 다함 없는 지혜를 널리 연설하느니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6입이 멸하며, 6입이 멸하면 갱락이 멸하고, 갱락이 멸하면 통이 멸하며, 통이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수가 멸하며, 수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사가 멸하고 사가 멸하면 다시는 걱정ㆍ근심ㆍ고뇌와 모든 청정하지 않는 행[不淨行]이 없나니 번뇌[漏]는 큰 근심거리가 되고 열반[泥洹]은 미묘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모양을 관하면서 그를 위하여 연설하되 근원을 궁구하여 다하느니라.
012_0423_b_07L有諸不淨亂想之心逆順暢演無盡之智無明滅則行滅行滅則識識滅則名色滅名色滅則六入滅六入滅則更樂滅更樂滅則痛滅滅則愛滅愛滅則受滅受滅則有滅有滅則生滅生滅則死滅死滅則無復有愁憂苦惱諸不淨行漏爲大患泥洹爲妙如是菩薩觀諸相貌而爲演說究盡原本
만일 어떤 중생이 어리석은 마음이 견고하여 식(識)이 환히 밝지 못하면 점차로 나아가 인도하되 고요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그를 위하여 본래 없는 법이라 생기거나 소멸하는 법이 없고 집착이나 끊는 법이 없음을 널리 알리며 삼세 흥쇠의 모양과 어리석은 행이 지나가 버려도 식(識)은 소멸할 수 없다는 것을 분별하나니, 널리 빛나는 법문으로 미묘한 지혜를 나타내어 부처님 도를 일으키되 온갖 덕을 완전히 갖추고 보살로서 선지식의 행을 버리지 않으며, 언제나 보살의 한가하고 고요한 집에 노닐면서 모든 여래의 깊고 요긴한 관(觀)에 들어가느니라.
012_0423_b_15L若有衆生癡心彌固識不了朗漸進導引將至靜處復與解暢本無之法無生滅法無著斷法分別三世興衰之相癡行過去識不可滅廣曜法門出現妙智興起佛道衆德具足不捨菩薩善知識行常遊菩薩閑靜之堂入諸如來深要之觀
012_0423_c_01L또 열 가지 견고하고 요긴한 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열 가지 견고하고 요긴한 법을 사유하는가? 부처님의 창고[佛藏]와 법신(法身)의 모양을 친근히 하며 부사의를 생각하되 도리어 하나[一]로 포섭하며, 공(空)임을 알고 생각이 없되 또한 약간의 것도 없고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 소멸하여 역시 주된 바탕[主質]이 없으며, 지나간 행(行)은 실마리도 없고 수호하여 지닐 수도 없으며, 모든 도(道)를 출생하고 법계와 허공의 경계도 또한 끝나거나 다함이 없으며, 속박과 해탈을 스스로 알되 중생의 집착을 버리고 선근에 의지하여 일체지를 이루며, 한량없는 지혜의 경계를 초월하여 민첩하고 빠른 지혜로 모두 다 성취하며, 보살로서의 희망하는 마음을 충족시키고 모든 보살의 말과 행의 자취를 청정하게 하며, 여래의 도의 뜻이 일찍이 새어 없어지는 일이 없고, 온갖 법성의 모양을 버리며 들어갈 바의 지극하고 미묘한 데에 뜻이 잘못되지 않고 마음은 금강과 같고 힘은 무너뜨릴 수 없으며, 모든 부처님에게 그의 명호와 수기를 받으며, 모두 다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말한 바는 둘이 없되 전환(轉還)할 수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견고하고 요긴한 법이며, 나아가 도과를 이루고 도(道)를 취하되 어렵지 않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에게 으뜸가고 다함 없는 법이니 마땅히 생각하여 수행해야 하느니라.”
012_0423_b_21L當思惟十牢要法云何思惟十牢要親近佛藏法身之相念不思議還攝爲一解空無念亦無若干自起自滅亦無主質過行無緖不可護持出生諸道法界虛空境界亦無窮盡解自解去衆生著依於善根成一切越於無量智慧之境捷疾之智皆悉成就充足菩薩悕望之心淨諸菩薩言迹之行如來道義未曾漏失捨一切法性之相所入極微意不謬心若金剛力不可壞諸佛之所授其號莂悉無衆生應可度者所說無二不可轉還是謂菩薩十牢要法進成道果取道不難是謂最勝菩薩上妙無盡之法當念修行

20. 삼도멸도품(三道滅度品)
012_0423_c_13L三道滅度品第二十

그때에 최승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장궤(長跪)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지진의 도덕은 끝이 없고 도문(道門)에 의지하여 벗어나는 해탈을 구하지도 않으며 청정한 배움을 부지런히 닦고 사모하여 금강삼매에 미치며 헤아릴 수 없나이다. 이제 여래께서 말씀하신 멸도는 청정하고 세 가지 도(道)가 하나로 돌아가며 다시는 둘이라는 이름도 없고 또한 둘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함을 들었사온데 만일 진실로 그렇다면 왜 위없고 지극히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도를 갈망하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히 식의 미혹[識惑]을 잊게 하여 주소서.”
012_0423_c_14L爾時最勝菩薩卽從座起長跪叉手前白佛言唯然世尊如來至眞道德無崖不猗道門求出解脫於淸淨學勤修慕及金剛三昧不可稱量今聞如來說滅度淨三道歸一更無二名亦不著二若審然者何求無上至眞道乎唯然世尊願爲敷演令渴道家永忘識惑
012_0424_a_01L이때에 세존께서 금빛 몸을 돌이켜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을 돌아보시니 고요하여 이름도 없고 저마다 여러 생각들이 없자 은근히 최승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좋은 질문이다. 진실로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구나. 여래는 너희를 위하여 낱낱이 널리 펴 연설하여 장차 오는 세상의 배우는 이로 하여금 영원히 망설임이 없게 하겠느니라.”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
012_0423_c_22L是時世尊迴金體身四面顧眄諸來會者寂靜無名各無衆念微視最勝而告之曰快哉問矣誠難得聞如來爲汝一一暢演令將來學永無猶豫最勝白佛願樂欲聞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청정한 도의 뿌리에서는 더러운 가지가 생기지 않고 체성(體性)이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법도 청정하며 다시 법성도 또한 모두가 청정하므로 점점 작용이 있고[有數] 작용이 없는[無數] 것을 분별하느니라. 작용이 없는 청정함이란 것은 삼세의 청정함을 얻음이며 그로써 삼세가 공(空)한 줄 분명히 알고 삼계를 관하나니, 이것을 바로 미정(微淨)삼매라 이름하느니라.
012_0424_a_03L佛告最勝淸淨道根不生穢枝體性淨故則諸法淨復於法性亦悉淸淨漸當分別有數無數無數淨者得三世淨以了三世空觀三界是謂名曰微淨三昧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세 가지 도(道)의 멸도는 그 품류가 동일하지 않고 의지와 취향도 저마다 달라서 몸은 때의 근본[垢本]이 되고 기억은 때의 못[垢池]이 되며 생각은 떠다니는 티끌[遊塵]이 되고 식(識)은 번뇌의 우두머리[結首]가 되나니, 하나가 멸하여도 셋이 존재하여 청정해지지 못하고, 둘이 멸하여도 둘이 존재하여 역시 청정하기에 이르지 못하며, 셋이 멸하여도 하나가 존재하여 역시 청정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넷이 다 멸해야 공(空)하게 되어 비로소 청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니, 일체지에 이르러서 청정해지는 것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012_0424_a_08L最勝當知三道滅度其品不同志趣各異身爲垢本念爲垢池想爲遊塵識爲結首一滅三存不致淸淨二滅二存亦不至淨三滅一存亦不至淨四滅空存乃至於淨至一切智淸淨亦爾
처음 도적(道跡)으로부터 위의 무착(無着)에 이르고 다시 1주(住)로부터 나아가 10주에 이르기까지 4환(還)과 4귀(歸)와 4애(碍)를 다 소멸하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네 가지란 몸은 때의 근본이 되어 범부(凡夫)로서 만족하게 여기고, 기억은 때의 못이 되어 네 가지 흐름[流]에서 멋대로 굴며, 생각은 떠다니는 티끌이 되어 8만의 애욕을 일으키고, 식은 번뇌의 우두머리가 되어 3유(有)에 매이느니라.
012_0424_a_13L從初道迹上至無著復從一住乃至十住皆滅四還四歸四㝵云何爲四所謂四者身爲垢本凡夫滿足念爲垢池縱逸四流想爲遊塵興八萬愛識爲結首繫于三有
이 때문에 큰 성인[大聖]에게는 현재 3도(道)가 있는데 형상은 마치 우수하고 열등한 것과 같으나 진실로 멸도는 약간의 차별도 없으며, 도(道)는 열반에 있으나 텅 비고 고요함[虛寂]을 여의지 않느니라. 보살의 열반은 사람을 제도함으로써 이름이 붙여지고, 벽지불의 열반은 신족을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붙여지며, 성문의 열반은 좁고 하열함[狹劣]을 나타냄으로써 이름이 붙여지느니라.
012_0424_a_17L是以大聖現有三道像如優劣其實滅度無若干差別道在泥洹不離虛寂薩泥洹以度人爲名辟支佛泥洹現神足爲名聲聞泥洹現狹劣爲名
012_0424_b_01L또 최승아, 보살의 열반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써 중생을 양육하느니라. 가령 한 사람을 인도하여 도검(道檢)에 들어간 이가 있으면 모든 감관[根]이 즐겁고 기쁨이 한량없으며, 그 때의 의식(意識)은 맑고 고요하여 함이 없고 도인이나 세속[道俗]에 관한 생각이 없이 모든 감정이 다 청정하느니라.
012_0424_a_21L次最勝菩薩泥洹慈悲喜護育養衆設導一人入道撿者諸根容悅欣怡無量當時意識澄靜無爲無道俗諸情悉淨
청정함은 마치 열반과 같고 그것에서 영원히 다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바로 생각 없는[無念] 것이니, 의당 생각하는 바가 없고 또한 생각을 보지도 않고 그 생각도 역시 생각이 없어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배우는 이는 배우되 역시 배울 것이 없느니라. 빛깔[色] 또한 빛깔이 없고 또한 빛깔을 보지도 않으며,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의 생각 또한 의식의 생각이 없고 5음(陰)의 몸으로부터 형상이 없음에 이르기까지 법체(法體)는 청정하여 생각이 있음을 보지도 않나니 생각하는 바가 없느니라.
012_0424_b_02L淨若泥洹於彼永盡而無所有是謂無念應無所念亦不見念念亦無念無念學者學亦無學亦無色亦不見色心意識念亦無識從五陰身乃至無形法體淸淨不見有念而無所念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열반[泥洹]이란 말은 열반이 그러하거늘 어찌 멀다 하겠느냐? 이렇게 보지 말 것이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생각이 없는 법체라 형상이 없는 것으로 그 체성을 관하면 그것이 곧 바로 열반이기 때문이니, 열반의 체성은 곧 이것이 법관(法觀)이며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차별도 없나니 열반은 이름이 없으므로 볼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이라는 이름을 세울 수도 없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 대사가 이 열반의 청정한 도(道)를 배우는 것이니 도에 상응하도록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라.
012_0424_b_07L最勝當知夫言泥泥洹爾者豈爲遠乎莫作斯觀以然者無念法體無形觀體則是泥泥洹性體則是法觀一而不二亦無差別泥洹無名而不可見亦無能立泥洹名號是謂最勝菩薩大士學是泥洹淸淨道者而應於道應念無
최승아, 다시 분별해야 하느니라. 보살 대사가 수행하되 이 청정한 도인 열반의 체성을 분명히 통달하고자 하면 마땅히 청정한 행[淨行]을 닦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어떻게 그 청정한 행을 수행하는가? 항상 몸ㆍ입ㆍ뜻으로 하여금 청정하고 하자가 없게 하는 것이니, 무엇을 몸이 청정하고 하자가 없다고 하는가? 이에 보살은 자기의 몸이 이미 청정하면 모든 바깥의 몸[外身]도 역시 청정함을 이해하고 자기의 몸이 텅 비고 고요하면 모든 몸도 공(空)함을 알며 몸이 고요하면 모든 몸도 고요함을 알고 자기 몸이 해탈하면 모든 몸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012_0424_b_14L最勝復當分別菩薩大士欲行了達斯淸淨道泥洹體性者當修淨行云何菩薩修其淨行恒使身口意淸淨無瑕穢何謂身淨而無瑕穢於是菩薩己身已淨解諸外身亦復淸淨己身虛寂解諸身空身之寂靜知諸身寂己身解脫諸身亦然
012_0424_c_01L보살은 다시 법관(法觀)을 사유하여 게으름과 또한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자기의 몸에 게으름이 없거늘 도(道)에 어찌 게으름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보살은 몸에 게으름이 없음을 알고 보살이 생각에 세간의 오로관(惡露觀)을 일으키되 몸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고 청정한 생각[淨想]을 보지 못하나니 청정함을 통달하여 생각이 없어야 비로소 열반에 상응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청정한 열반이며 도는 차별이 없는 것이라 말하느니라.”
012_0424_b_20L菩薩復當思惟法觀了知懈慢亦無懈慢己身無慢道豈有慢是故菩薩解身無慢菩薩興念世惡露觀身如影響不見淨想達淨無想方應泥洹是謂菩薩摩訶薩淸淨泥洹道無差別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은 체(體)가 청정하고 욕심이 없으며 하고자 하나 욕심이 없는 것이옵니까?”
012_0424_c_02L最勝菩薩復白佛言云何菩薩體淨無欲欲而無欲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대사는 5취(趣)에 돌아다니며 생사에 유전(流轉)하되 방편과 권현(權現)으로 알맞게 교화할 적에 어떤 이가 몸의 청정함을 말하면 곧 남이 없음[無生]을 논하여 그 생사를 보아도 곧 생사가 없고 남이 없음을 알게 하나니 생사는 하나여서 다르지 않고 또한 약간의 차별된 이름도 없느니라.
012_0424_c_04L佛告最勝菩薩大士周旋五趣流轉生死方便權現適化應時說身淨則論無生其睹生死則無生解知無生生死一而不異亦無若干差別之名
보살은 다시 몸의 행[身行]을 환히 분별하여 남이 없음을 통달하며, 이들의 나고 죽음이 곧 몸의 행인 줄 알면 안팎의 법을 통달하느니라. 무엇을 말하여 몸의 행이라 하는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에 일어나고 쇠(衰)한 것이니, 과거는 자취가 없고 현재는 기록이 없으며 미래는 이름이 없느니라.
012_0424_c_08L菩薩復當了別身行彼達無生此等生死則知身行達內外法何謂身行去來現在三世興衰過去無迹現在無記當來無號
또 최승아, 과거의 것은 영원히 다하였고 미래의 것은 끝이 없으며 현재의 것은 변천하고 옮아가나니 역시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盡不盡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다하고 다하지 않는 법을 사유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의 청정한 생각을 분별하고 환히 통달하는 것이니, 그 다함이 없다고 함은 담연(淡然)하여 함이 없고 상념(想念)이 없음이니 상념이 있게 되면 현성의 계율에 큰 결함이 있게 되느니라.”
012_0424_c_11L復次最勝去者永盡來者無窮現在遷轉亦當思惟盡不盡法云何思惟盡不盡法於是菩薩分別了達虛空淨想其無盡者淡然無爲無有想念有想念者於賢戒律乃有大缺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옛날 성불하여 도수(道樹) 아래 앉아 7일 밤낮 동안 나무를 관하되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마음으로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깨달으셨고 먼저 어떤 법을 통달하셨을까?’라고 생각하였다. 때에 나는 최승아, 다시 ‘과거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서는 먼저 몸의 법[身法]을 통달하시고 최정각(最正覺)을 체득하셨다. 인(因)과 연(緣)이 모여서 식(識)이 있고 생각(想)이 있었으니 그 연을 알면 곧 공하고 생각도 없어서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다시 나고 없어지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라고 생각하였느니라.
만일 최승아, 이와 같이 관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몸의 청정함이니 대개 몸이 청정하다고 함은 모두 다 지혜의 바다[智海]로 돌아가는 것이니라.
012_0424_c_16L佛告最勝吾昔成佛坐道樹下七日七夜觀樹不眴心念過去恒沙諸佛由何自覺先達何法最勝復作是念過佛恒沙先達身法逮最正覺因緣合會有識有想其知緣者則空無想無所染著亦復不見生滅著斷若此最勝如斯觀者是謂身淨夫身淨者悉歸智海
012_0425_a_01L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바다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그 일에는 열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의 바다[佛海]에 돌아가서 법에 형상의 관[形觀]이 없고, 중생의 바다[衆生海]에 돌아가서 유의 재난[有難]을 초월하며, 법의 바다에 돌아가서 온갖 지혜를 쌓기 때문이며, 복전의 바다[福田海]에 돌아가서 본래부터 근(根)이 없는 것을 세우며, 5음의 바다[五陰海]에 돌아가서 더러운 법을 나타내 보이고, 지혜의 바다에 돌아가서 여러 가지 교계(敎誡)의 나아갈 바를 분별하며, 근의 뜻의 바다[根義海]에 돌아가서 선근을 더욱 늘리기 때문이며, 마음을 머무는 바다[住心海]에 돌아가서 중생들의 여러 가지 마음과 뜻으로 생각한 바 한량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걸림이 없음을 알며, 행의 바다[行海]에 돌아가서 원(願)을 어기지 않기 때문이며, 서원의 바다[弘誓海]에 돌아가서 생사의 근원을 궁구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이 바다에 돌아가는 열 가지 문(門)의 뜻이니 마땅히 생각하고 수행하여 모두 다 여래의 샘이 없는 법신[無漏法身]에 돌아가야 하느니라.
012_0424_c_23L最勝當知歸海之義其事有十云何爲十一者歸佛之海法無形觀歸衆生海超越有難歸法之海集衆智故歸福田海立本無根歸五陰海示現穢法歸智慧海分別若干教誡所趣歸根義海增善根故歸住心海了知衆生若干心意所念無量解知無㝵歸于行海不違願故歸弘誓海究生死原是謂最勝菩薩摩訶薩歸海十門之義當念修行悉歸如來無漏法
또 여래의 샘이 없는 법신을 관한다는 것은 본래 없음[本無]에 머물지 않고 삼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본래 없으면서 하나의 법신임을 통달하여 알고 몸은 샘이 없어서 본래 그대로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관하며 머무르되 머무름을 보지 않고 또한 머무르는 바가 없으며, 샘이 없는 몸으로써 생사의 바다에 들어가고 색신(色身)을 나타내 보이되 마치 색신이 없는 것과 같으며 끝이 없고 가장자리가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보거나 나타낼 수 없고, 색신이 멸한 뒤에도 역시 멸한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생함을 보지 못하며 몸의 본래 없음은 본래 그대로요 머무름이 없으며, 여래의 몸은 청정하면서 또한 흠이나 더러움이 없으며 중생의 무더기에 들어가 앞의 형질을 따르고 형상을 따르면서 나타내느니라.
012_0425_a_11L又觀如來無漏身者不住本無不墮三界達知本無爲一法身觀身無漏如本無住住不見住亦無所住無漏身入生死海示現色身如無色無邊無際無形不可睹現色身滅已亦不見滅亦不見生身之本無如本無住如來身淨亦無瑕穢入衆生聚隨前形質隨像而現
012_0425_b_01L중생들의 몸이 청정함을 분명히 통달하면 자기의 몸이 청정하고 중생의 몸도 청정하여 하나이면서 둘이 아니고 또한 약간도 있지 않고 평등하여 본래부터 없느니라. 본래부터 없는지라 도(道)가 없고 도가 있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또한 세속의 법과 유루ㆍ무루가 없고 또한 다시 삼승의 교계(敎誡)로 이것은 바로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과 부처님의 도라고도 보지 않으며, 또한 다시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법이라고 보지도 않고 모든 현성의 도와 법에 도무지 집착하는 바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행(行)과 상응하고 청정함과 상응하되 상응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012_0425_a_18L了達衆生身之淸淨己身淸淨衆生身淨一而不二亦不若干平等本無本無無道不見有道亦無俗法有漏無漏亦復不見三乘教誡斯是羅漢辟支佛菩薩亦復不見十力四無所畏十八不於諸賢聖道法都無所著是謂菩薩行應淸淨應無所應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입의 말[口言]이 청정함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입의 말이며 의당 청정해야 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계의 청정한 삼매[淸淨三昧]에 들어가서 널리 삼천세계에 있는 그 안의 중생으로서 형상이 있는 무리의 온갖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맑고 깨끗하거나 곱거나 누추하거나 간에 모두 다 공(空)으로 돌아가고 다 청정하다고 관하느니라.
012_0425_b_02L復次最勝薩摩訶薩當念思惟口言淸淨何謂口言而應淸淨於是菩薩入虛空界淸淨三昧普觀三千世界其中衆生有形之類一切賢愚淸白好醜悉歸于空皆悉淸淨
보살은 다시 평등한 관[等觀]을 사유하되 제일의(第一義)에서도 역시 평등하다고 보지 않고 또한 평등하지 않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평등한 모양[等相]으로써 관하기 때문이니 또한 평등하고 평등하지 않다는 것과 모양과 모양이 없다는 것도 보지 않으며, 다시 평등한 모양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하되 도법(道法)은 한없고 끝없는 것도 보지 않고 세속법도 한이 있고 끝이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현성이 3유(有)를 초월하는 것도 보지 않고 범부의 힘이 우열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느니라.
012_0425_b_07L菩薩復當思惟等觀於第一義亦不見等亦不見不等以故以等相觀故亦不見等與不等相與無相復以等相觀察諸法不見道法無限無際不見俗法有限有際不見賢聖超過三有不見凡夫力有優劣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청정한 음성을 분별하되 중생이 생각하거나 뜻에 집착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니, 음향을 잘 살피면 음향이 없다고 관하여 알며 조심하거나 기뻐하거나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이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뒤바뀐[顚倒] 것을 좋아하여 뒤바뀐 것이 아니라거나 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중생의 온갖 것은 모두가 청정함을 통달하여 아느니라. 욕심도 없고 물듦도 없으며 또한 나고 없어지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도 없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毒)의 근본도 없으며, 다시 12인연과 18본지(本持)와 치(癡)로부터 사(死)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청정하고 치는 또한 내가 짓는 바의 행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행(行)도 또한 치로부터 있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법과 법은 저절로 생기고 법과 법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을 관찰해야 하나니 법이 법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치(癡)와 행(行)이 있겠느냐?
012_0425_b_13L最勝當了菩薩分別淸淨音聲無有衆生想著意者善察音響觀了無響不見憂喜是常非常樂於顚倒非顚倒者達知衆生一切皆淨無欲無染亦無生滅著斷無淫怒癡三毒根本復當觀察十二因緣十八本持從癡至死皆悉淸淨癡亦不知我所造行行亦不知從癡而有法法自生法法自滅法不見法何有癡行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법은 서로 알지 못하여 법이 생기면 곧 생기고 법이 소멸하면 곧 소멸하는 것이며 법은 스스로 생기고 생기지 않는 것과 소멸하고 소멸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생기고 소멸하는 것과 집착하고 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느니라.”
012_0425_b_21L如是最勝法不相知法生則生法滅則滅法不自知生與不生滅與不滅故言無生滅著斷也
012_0425_c_01L그때에 최승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삼세의 치와 행은 몸을 따라 회전(廻轉)하는 것이오니 몸이 있으면 행이 따르고 몸이 없으면 행이 소멸하며, 나아가 노사(老死)도 역시 그와 같사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의심되는 것을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장차 오는 세상의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이나 막힘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012_0425_c_01L爾時最勝菩薩白佛世尊三世癡行隨身迴轉有身則行隨無身則行滅乃至老死亦復如唯願世尊敷演狐疑令將來衆生永無疑滯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치(癡)는 몸을 물들이지 않고 몸은 치를 물들이지 않으며 치는 또한 나에게는 몸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몸도 또한 나에게는 치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저마다 청정하여 또한 나[吾我]가 없나니 나라고 말하는 것은 다 스스로 텅 비고 고요함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온갖 것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것이 말[言]이고 어느 것이 말이 아닌가? 말은 안에 있지도 않고 또한 밖에 있지도 않으며, 말에 나오는 것이 있고 들어가는 것이 있는 것도 보지 않나니, 곧 열 가지 견고한 뜻을 완전히 갖추어서 중생의 음종(陰種)이 나아갈 바를 분별해야 하느니라.
012_0425_c_05L爾時世尊告最勝曰癡不染身身不染癡癡亦不見我有身亦不見我有癡各各淸淨亦無吾我言吾我者悉自虛寂是謂菩薩一切淸淨言淸淨者何者是言何者非言言不在內亦不在外不見言有出有便當具足十堅固義分別衆生陰種所趣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에 보살은 먼저 벗어남[出要]을 구하여 온갖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수없이 교화하고 정진을 나타내지만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걸림이 없는 힘으로써 온갖 법이 공(空)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뜻을 쉬는 힘[息意力]을 나타내어 온갖 법에서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며,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을 회전(廻轉)하고 회전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의미를 분별하기 때문이며, 자성(自性)의 법력으로 지혜를 나타내어 드러내기 때문이며, 자재한 힘을 나타내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기 때문이며, 두려움이 없는 힘을 나타내어 바른 법에 편안히 처하기 때문이며, 변재를 나타내고 한량없는 지혜를 나타내되 낱낱이 펴 나타내기 때문이며, 둘이 없는 힘[無二力]을 나타내되 짝할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012_0425_c_12L云何爲十於是菩薩先求出要化一切衆生故現無數化精進無著現無㝵力以一切法空故現息意於一切法得自在故現迴心意識轉不轉故分別義味故現自性法力智慧顯故現自在力爲衆生說法故現無畏力安處正法故現辯才現無量智一一布現故現無二力無疇疋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중생의 종성이 나아갈 바를 분별하되 또한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또한 양쪽 중간에도 있지 않느니라. 말[言]로써 하려는 것이 바로 보살이겠느냐?”
012_0425_c_20L如是最勝菩薩摩訶薩分別衆生種性所趣亦不內亦不外亦不在兩中閒欲以言是菩薩耶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012_0425_c_22L對曰非也
012_0426_a_01L“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써 이것이 보살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써 이것이 보살이 아니라면 다시 모든 때[垢]와 속박[縛]과 집착[着]이 보살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012_0425_c_23L云何欲淫怒癡是菩薩耶對曰世尊若不以欲怒癡是菩薩者以諸垢縛著是菩薩乎對白非也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역시 말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말하지 않는 데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모든 법은 집착이나 집착하지 않는 것도 없고,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마음도 역시 집착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연설하게 되는 음향은 바람이 움직여 소리가 나오는 것이요, 인(因)과 연(緣)이 만나서 소리와 메아리가 있는 것이며,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곱거나 누추함에도 소리는 조금도 없고 또한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느니라.”
012_0426_a_03L佛告最勝菩薩摩訶薩亦不著言亦不著不言一切諸法皆無著不著眼耳鼻口身心亦不見著不著所演音響風動聲出因緣合會乃有聲響賢愚好醜聲無若干亦不住內復不在外尋其中閒而不可得
부처님께서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로서 본무동(本無動)삼매에 머무른 이는 움직이는 생각과 그 행하는 바가 모두 허공과 같이 평등하여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 것도 없고 또한 온갖 생각[衆想]도 없다고 사유하나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중생의 음성과 온갖 음향은 모두 다 공하고 진실이 아니며 권도로 속이는[權詐] 법이어서 믿거나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니라.”
012_0426_a_08L佛告最勝菩薩摩訶薩住本無動三昧者惟勤念及其所行皆如空等無住不住亦無衆想是謂最勝衆生言聲一切音響悉空非眞權詐之法不可恃
그때에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거룩한 진리[聖諦]는 현성의 도과를 이루거니와 권도로 속임은 진실이 아니거늘 어떻게 최정각(最正覺)을 이루겠나이까?”
012_0426_a_13L爾時最勝白佛言世尊如來聖諦成賢聖道果權詐非眞云何成最正覺乎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등정각의 도법(道法)은 자세한 진리[審諦]요 진실한 것이라 진실한 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니 모든 법은 진실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닌 줄 알 것이니라.
012_0426_a_15L佛告最勝如來等正覺道法審諦眞實以獲眞實之法故解知諸法非眞非有也
또 다시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5도를 돌아다니며 중생을 가르쳐 주되 그의 알맞는 바에 따라서 그를 제도하고 해탈시키며, 중생의 이름과 음성을 관찰하여 위없는 법륜을 굴리며 법구(法句)의 뜻에 따라 보응에 도달하게 하느니라. 고(苦)를 좋아하는 중생에게는 고의 근원을 연설하며, 모든 법의 말에는 모두 말이 없는 것인 줄 분명히 아느니라.어느 것이 말이고 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말은 나오는 것이 없는 줄 분명히 아느니라.
012_0426_a_17L又復最勝菩薩摩訶薩周旋五道教授衆生隨前所應而度脫之觀察衆生名字音聲轉于無上法輪隨法句義令達報應樂苦衆生說苦原本解了諸法言皆無言何者爲言言從何出了知言者無有出生
012_0426_b_01L이때에 보살은 다시 습(習)을 좋아하는 중생을 위하여 습의 근본은 이것이 바로 습이요 이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因)이요 이것이 바로 연(緣)이라고 연설하여 주나니, 인연을 분별하면 본래 습의 실마리가 없고 습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이름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습을 좋아하는 중생의 온갖 음성은 모두가 공하고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니라.
012_0426_a_22L是時菩薩復與樂習衆生說習根本是習是生是因是緣分別因緣本無習緖不見有習亦不見有字是謂樂習衆生一切音聲皆空非眞
또 보살은 앞의 그 중생에 따라 도(道)의 가르침으로써 갚고 법을 듣는 이로 하여금 법을 수순하여 행하게 하되 또한 행의 나아갈 바와 보응의 과보를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하지만 행하는 바가 없고 증득하지만 증득한 것을 보지 않으며 그대로의 한 모양이요 평등하게 온갖 괴로움을 멸하는 것이니라.
012_0426_b_03L復菩薩隨前衆生報以道教使聞法者順法而行亦不知行之所趣報應之果是謂菩薩行無所行證不見證如爾一相等滅衆苦
또 보살은 다시 다하는 것[盡]을 좋아하는 중생을 사유하되 모든 법을 환히 통달하여 나오고 생기는 것을 보지 않아야 하며, 말과 음성은 머물러 그치는 바가 없고 앉거나 다니거나 간에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으며, 비록 시끄럽고 난잡한 데서 놀아도 언제나 한가하고 고요하며 설령 대중에 있다 하여도 현성으로서 말이 없으며, 뜻으로 말을 나타내고자 하나 말이 곧 스스로 그치고 말한 바를 뒤쫓아 찾지만 집착하거나 집착이 없는 것에서도 다한 것과 다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에서도 또한 다한 것을 보지 않고 생기거나 소멸하거나 집착하거나 끊는다거나 하는 소리는 말에서 나오기는 하되 영원히 그 종적이 없느니라.
012_0426_b_07L復次菩薩復當思惟樂盡衆生了達諸法不見出生言音聲者無所住止若坐若行常若一心雖遊憒亂常若閑靜設在大衆賢聖默然意欲現言言便自止追尋所言於著無著不見盡與不盡一切諸法亦不見盡生滅著斷聲出於言永無蹤迹
또 보살은 도(道)를 좋아하는 중생이면 여덟 가지 행(行)을 사유하되 중생이 닦고 익혀 열반에 나아가게 하며, 정언(正言)과 정업(正業), 나아가 정정(正定)의 법다운 것과 법답지 않은 것은 평등하여 하나의 허공관[一虛空觀]으로 둘이 없고 어기거나 잘못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입의 말[口言]이 청정하여 흠이나 더러움이 없는 것이니라.
012_0426_b_14L復次菩薩樂道衆生思惟八行衆生修習進趣泥洹正言正業乃至正定其如法者不如法者平等一虛空觀無二不有違錯是謂菩薩摩訶薩口言淸淨而無瑕穢
012_0426_c_01L또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의식(意識)의 청정함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의식이 청정한가? 이에 보살은 마음이 청정하되 또한 하자도 없고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 없으므로 그 근본이 있다고 보지도 않나니, 그 마음의 근본이란 더러움에 물들 수도 없고 마음에 장애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함을 분명히 알지만 청정함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니, 세간에서는 어리석고 미혹된 이가 많아서 이것에 대하여 물들고 집착하게 되거니와 공(空)인 줄 통달하고서 사유하면 집착할 바가 있지 않고 마침내 권방편을 행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청정한 것인 줄 분별하느니라.
012_0426_b_18L復次菩薩摩訶薩當念思惟意識淸淨云何菩薩意識淸淨於是菩薩心爲淸淨亦無瑕穢本無淸淨不見有本其心本者不可染污無能爲心作留難者何以故菩薩摩訶薩了心本淨不見有淨世多愚惑於斯染著達空思惟不有所著分別究竟行權方便於本自淨
보살은 알아야 하느니라. 또 그 마음의 근본은 본래부터 오고 가는 것이 없고 고하(高下)나 존비(尊卑)나 귀천(貴賤)을 가리지도 않으며, 본래는 있다가 지금에야 없는 것이라고 보지도 않고 지금은 있는데 본래는 없던 것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덕(德)의 근본도 생각하지 않나니, 덕의 근본을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공(空)이요 이것이 바로 무생(無生)이며 이것이 바로 열반[泥洹]이니라.”
012_0426_c_03L菩薩當知又其心本本無往來不擇高下尊卑貴賤不見本有今無不見今有本無不念德本念德本者是謂空是謂無生是謂泥洹
여쭈었다.
“그 덕의 근본이란 마음의 근본[心本]을 분명히 아는 것이옵니까?”
대답하셨다.
“아니니라.”
“안[內]은 본래 공한지라 바깥[外]을 아나이까?”
“아니니라.”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하다 하나이까?”
012_0426_c_06L問曰德本者了識心本乎非也內本空解外乎非也最勝白佛言若爾者云何空耶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의 근본은 공하되 또한 근본이 아니나 근본이 아닌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며, 공심정(空心定)의 보살이 만일 스스로 마음을 보지 않으면 자기 마음은 근본이 없고 바깥도 또한 근본이 없으며 하나요 둘이 아니고 약간의 차별된 이름도 없으며, 마음은 나의 마음[我心]이 아니고 마음은 마음에 없으며, 나의 마음은 마음도 아니기에 나[我]와 나에게 없으며, 빛깔[色]은 나의 빛깔[我色]이 아니요 빛깔이 빛깔에 없고 나는 빛깔의 나[色我]가 아니므로 나는 나에게 없으며, 나의 마음과 나의 빛깔은 나의 마음과 나의 빛깔이 아니고 빛깔의 나와 마음의 나[心我]는 빛깔의 나와 마음의 나가 아니며,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細滑]ㆍ뜻ㆍ법에 이르기까지도 나의 뜻[我意]과 나의 법[我法]이 아니요, 또한 뜻의 나[意我]와 법의 나[法我]도 아니니라.
012_0426_c_09L佛言心本空亦非本非不亦非心非不心空心定菩薩者自見心己心本無外亦本無一而不二而無若干差別之名心非我心無心於心我心非心無我於我色非我色無色於色我非色我無我於我心我色非我心我色色我心我非色我心我至聲香味細滑意法非我意我法亦非意我法我也
012_0427_a_01L왜냐하면 마음의 근본은 공하며 바깥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니라. 바깥이 공함[外空]을 앎으로써 모든 법은 또한 다시 공과 같은 줄 분명히 통달하고, 하나요 둘이 아니고 약간의 모양[相像]도 없나니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본래는 있다가 지금에야 없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다시 지금은 있지만 본래는 없었다고 보지도 않으며, 없으나 또한 없지 않고 있으나 또한 있지도 않으며, 있다 해도 있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없다 해도 없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며, 없는 것은 없는지라 항상 스스로 없고, 있는 것은 있는지라 항상 스스로 있으며, 있는 것은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없는 것은 없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없는 것은 없지만 스스로 없지 않고 있는 것은 있지만 스스로 있지 않으며,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온갖 음성도 모두가 공하여 진실이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로서 마음이 청정한 것이니라.
012_0426_c_17L何以故心本空外亦空以知外空達了諸法亦復如空一而不二無若干相像一切諸法亦復如是不見本有今無亦復不見今有本無無亦不無有亦不有不知所以有無不知所以無無無恒自無有有恒自有有不出於有無不出於無無無不自無有有不自有不知無無不知有一切音聲皆空非是謂菩薩心爲淸淨
그 마음이 청정하다고 함은 36가지 막힘[湮]에 물들 수 없고, 마음의 근본은 티끌과 때[塵垢]에 영원히 집착한 바 없으며,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통달하고 또한 청정함에 대하여 생각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않나니 보살마하살로서 본말이 청정하고 공정의자재삼매(空定意自在三昧)를 환히 아는 이면 곧 자기 뜻을 굽히고 물러나 생사에 돌아다니고 5도에 오가면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느니라. 그 덕의 근본이란 마음[心]ㆍ뜻[意]ㆍ식[識]에는 마음ㆍ뜻ㆍ식이 없는 줄 아느니라.
012_0427_a_03L其心淨者可染污三十六湮心本塵垢永無所復以善權方便達本自淨亦不於淨起于想著菩薩摩訶薩以了本末淨空定意自在三昧者便能屈還周旋生死往來五道殖衆德本彼德本知心意識無心意識
또 근본의 마음[本心]으로써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고 중생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며,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도 본말이 청정하며 다시 덕의 근본으로써 널리 온갖 것에 미치고 중생들로 하여금 도에 나아가 닦게 하며 중생과 도는 평등하여 둘이 없나니, 이렇게 관한 이는 이것이 바로 본말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012_0427_a_09L復以本心愍及一切識了衆生空無所有我人壽命本末淸淨復以德本普及一切衆生類進修於道衆生及道平等無二觀如是者斯謂本末淸淨
다시 이 청정으로써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평등하니 어리석음에 평등하고 도(道)에도 평등하면 도가 곧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요 어리석음이 곧 도이니 도도 청정하고 어리석음도 청정하여 하나요 둘이 없고 또한 약간도 없나니, 보살은 본말이 스스로 청정함을 관찰하여 모든 더러움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012_0427_a_13L復以此淨等淫怒癡癡等道等道則是慾怒癡癡則是道道淨癡淨一無有二亦不若干菩薩觀察本末自淨不著諸穢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몸의 행이 청정하여 악을 짓지 않고, 입의 말이 청정해서 항시 지성(至誠)에 돌아가며, 뜻의 생각이 청정하여 온갖 것에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나니, 이 모든 행이 완전히 갖추어져야 비로소 보살이라 일컫느니라.”
012_0427_a_16L爾時世尊告最勝曰身行淸淨而不作惡口言淸淨恒歸至誠意念淸淨慈悲一切衆行具足乃稱菩薩
그때에 세존께서 이 본래 없는 청정품(淸淨品)을 설하실 때에 5천의 보살들이 모두 일생보처(一生補處)를 얻었으며, 수없는 천(千)의 사람들이 모두 위없는 평등한 도의 뜻[無上平等道意]을 내었다.
012_0427_a_19L爾時世尊說此本無淸淨品時五千菩薩皆得一生補處無數千人皆發無上平等道意

21. 승무상품(乘無相品)
012_0427_a_22L乘無相品第二十一
012_0427_b_01L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한 모양[一相]과 모양이 없음[無相]을 통달하여 알며 다시 모양이 없음으로써 한 모양을 분별하나이까?
어떻게 보살은 청정한 마음으로써 애욕(愛欲)에 놀며 애욕에서부터 다시 청정한 데로 이르나이까?”
012_0427_a_23L最勝白佛言菩薩摩訶薩從初發意至成作佛云何了達一相無相復以無相分別一相云何菩薩以淸淨心遊處愛欲從愛欲中復至淸淨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권도를 행하는[行權] 보살승(菩薩乘)은 모양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5도와 시방 세계를 돌아다니되, 혹은 욕계(欲界)나 형계(形界:色界)나 무형계(無形界:無色界)에 나느니라. 비록 그 세계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 세계에 물들지 않고 선남자ㆍ선여인들과 함께 법의 즐거움[法樂]으로써 그들과 재미있게 즐기느니라. 다시 형계의 모든 천인(天人)들과 궁전에 같이 처하며, 혹은 범천(梵天)에 범천왕과 함께 있으며 미묘한 승(乘)의 모양 없는 법[無相法]을 말하며 많은 범천의 대중에 있으면서 혹은 거닐기도 하고 혹은 때로 현성으로서 잠자코 있기도 하나니, 그 안에 있을 때는 홀로 높은 이가 되어서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012_0427_b_04L佛告最勝行權菩薩乘無相淨心周旋五道十方世界或生欲界形無形界雖處於界不染於界與善男子善女人法之樂而娛樂之復遊形界與諸天人同處宮殿或在梵天與梵天王說於微妙乘無相法處衆梵中或時經行或時賢聖默然在中獨尊無能及
또 최승아, 보살이 거기에 있을 때는 미묘하게 도의 가르침[道敎]을 나타내어 점차로 모든 하늘들을 항복받아 참된 이치[眞諦]를 행하게 하고 모든 범천들이 청정하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제거시키고 그 형계에 머무르며, 혹은 백 겁, 나아가 백천 겁을 지나고 다시 형계에서 욕계에 내려와 태어나 안으로는 언제나 고요함을 좋아하고 혼자 산이나 숲에 거처하며, 비록 인간 안에 처한다 하더라도 뜻은 언제나 선정(禪定)에 있느니라.
012_0427_b_12L又復最勝菩薩在彼微現道教降諸天使行眞諦除去諸梵計淨之住彼形界或經百劫至百千劫從形界下生欲界內常樂靜獨處山雖處人中意常禪定
혹은 때로 보살이 집에 살고 있으면 처자(妻子)가 스스로 따르기도 하고 또 중생들과 같이 세간의 사업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높은 데 있으면 낮음을 나타내고 낮은 데 있으면 높음을 나타내되, 중생들의 마음과 돌아다니고 앉고 일어나고 말하고 가고 오고 하는 거동을 관찰하며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또한 스스로 헐뜯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그가 본말이 청정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또 보살은 다시 백천 정(定)의 정수삼매에 노닐되 삼매의 위신(威神)으로써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관하고 몸의 상호와 광명과 신족을 나타내며, 권혜(權慧)의 방편으로 노닐면서 교화함이 자유자재하며 마음이 응당 청정해야 비로소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느니라.
012_0427_b_16L或時菩薩現有居家妻子自隨復與衆生同世居處高現卑在卑現尊觀衆生心周旋坐起言語行來進止不興憍慢亦不自毀所以然者以其達了本末淨又復菩薩復遊於百千定正受三以三昧威神復觀三千大千世界現身相好光明神足權慧方便遊化自在心應淸淨乃謂無相
012_0427_c_01L보살마하살로서 이 선정과 상응하여야 비로소 승(乘)에서 모양이 없는 도(道)를 구할 수 있느니라. 모양[相]은 생기는 것을 보지 않고 모양은 없는 것도 보지 않으며, 생길 때는 없는 것으로써 익히고 도에도 또한 모양이 있지 않으며, 성인은 도가 없는 모양이며, 또한 모양을 구하지도 않고 또한 모양이 없는 것도 구하지 않으며, 도의 모양과 모양이 없는 것을 분명히 통달하여 일어날 적에는 곧 일어나고 소멸할 적에는 곧 소멸하며 도의 모양에 나아감이 있으며, 모양의 행(行)이 소멸하지 않고 있는 모양[有相]의 행이 소멸하여야 이것을 바로 보살의 도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012_0427_c_01L菩薩摩訶薩應此定者乃得求於乘無相道相見生不相見無生以無習道亦不於聖無道之相亦不求相亦不求無相了達道相無相起時卽起滅時卽滅有趣道相不相行滅有相行滅是謂菩薩而爲道相
보살마하살은 또한 모양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의 모양을 삼느니라. 왜냐하면 도(道)는 스스로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모양이 없음을 구하는 것으로 도의 모양을 삼지도 않고 합하거나 흩어지는 것으로써 도의 모양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12인연의 근본과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이 치(癡)로부터 행(行)이 있으나 도의 모양이 있다고 보지 않고, 또한 다시 아ㆍ인ㆍ수명이 없는 것도 치로부터 행이 있고 도의 모양이 있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도는 스스로 모양이 없고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으며, 생길 바를 원하나 도의 모양을 바라지도 않으며, 4대는 이것이 몸이라거나 몸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공이라거나 공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나라거나 내가 아니라거나 취하고 버리고 합하고 흩어지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으레 그와 같아야 하고 으레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012_0427_c_07L菩薩摩訶薩亦不求相以爲道相何以故道自無相不求無相爲道之相不見合散以爲道相不見十二緣本我人壽命從癡有行而有道相亦復不見無我人壽從癡有行有道相也何以故道自無相亦不見相不望所生冀于道相了知四大是身非身是常非常是空非空是我非我取捨合散皆非眞是謂菩薩摩訶薩應如應爾
또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다르지 않은 것도 보지 않아야 비로소 도의 모양과 모양이 없는 것에 상응하여, 선의 몸[善身]ㆍ불선의 몸[不善身]ㆍ유기의 몸[記身]ㆍ무기의 몸[無記身]ㆍ유루의 몸[漏身]ㆍ무루의 몸[無漏身]ㆍ유위의 몸[有爲身]ㆍ무위의 몸[無爲身]ㆍ성공의 몸[成身]ㆍ패망의 몸[敗身]과 합하고 흩어지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모양과 도의 모양으로써 하면 모두 다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는 것이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따뜻할 때 생기는 아지랑이와 같다고 분별하느니라.
012_0427_c_16L亦不異非不異亦不見異亦不見不異應道相無相善身不善身記身無記漏身無漏身有爲身無爲身成身敗身合散取捨以相道相分別悉空而無所有如夢如影如響如熱時焰
012_0428_a_01L또한 몸은 공하지도 않고 또한 몸은 공함이 없지도 않으며, 또한 몸은 모양[相]이 있지도 않고 또한 몸은 모양이 없지도 않으며, 또한 몸은 원(願)이 있지도 않고 또한 몸은 원이 없지도 않으며, 몸이 아닌[不身] 것은 또한 욕심이 없는[無欲] 것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몸이 아닌 것은 또한 12인연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12인연도 또한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18계(界)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012_0427_c_21L亦不身空亦不身無空亦不身想亦不身無想亦不身願亦不身無願身亦不與無欲相應非不相應不身亦不與十二因緣相應非不相應二因緣亦不相應非不相應至十八界亦復如是
법성도 그러하여 역시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癡)에서 애(愛)가 생기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모든 법의 명색(名色)과 6입(入)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012_0428_a_04L法性如爾亦不與道相相應非不相應從癡生愛亦復如是不與道相相應亦非不相應一切諸法名色六入不與道相相應亦不不相應
또 보살마하살은 다시 멸진정의(滅盡定意)의 부동(不動)삼매에 들어가고 또는 도의 모양[道相]은 18본지(本持)와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성은 12인연과 상응하지 않으나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한없고 수없고 불가사의한 진로(塵勞)의 때(垢)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법성의 모든 정(情)도 12인연과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노사(老死)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는 법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고[有數] 작용이 없는[無數] 것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에는 둘이 없는지라 작용이 있고 작용이 없는 것과는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세속이 있고[有俗] 세속이 없는[無俗] 것과 유루ㆍ무루와 유위ㆍ무위와 유기ㆍ무기와 선법(善法)ㆍ악법(惡法)과 곱고 추한[好醜] 것이 둘이 아닌 행[不二行]이고 둘이 아닌 행도 아니며, 무너진다는 뜻[壞敗意]이 없으나 도의 모양을 구하느니라.
도의 모양을 구한다 함은 제일의와는 유속ㆍ무속ㆍ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ㆍ유기ㆍ무기ㆍ선법ㆍ악법ㆍ호ㆍ추가 함께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니라.
012_0428_a_08L菩薩摩訶薩復當入于滅盡定意不動三昧次觀道相不與十八本持相應非不相應法性不與十二因緣相應非不相應無限無量不可思議塵勞之垢不與道相相應亦不不相應乃至法性諸情不與十二因緣相應非不相應乃至老死無婬怒癡不與道相相應亦不不相應非不相有數無數不與道相相應亦不不相應道相無二不與有數無數相應亦不不相應於第一義有俗無俗有漏無漏有爲無爲有記無記善法惡法若好若醜以不二行非不二行壞敗意求于道相求道相者不與第一義有俗無俗有漏無漏有爲無爲有記無記善法惡法若好若醜而共相應亦不不相應
012_0428_b_01L또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모양이 없는[無相] 모양에서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고 모양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이 도(道)는 모양이 없는지라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나니, 이것이 바로 도의 모양으로 모양이 없는 것에 상응하며, 모양이 없는 모양은 법이 스스로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허공이 모양이 없는 것과 같되 모양이 있지 않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이런 모양에 상응해야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다고 하느니라.
012_0428_b_01L復次菩薩摩訶薩復於諸法無相之相亦不見相非不無相是道無相亦不見相斯謂道相應於無相無相之相法自虛寂如空無相非不有相當應此相應無所應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이 도의 모양인 정의[道相定意]를 얻은 이는 모든 법계에서 다 자재할 수 있고 이 정(定)에 든 뒤 자기 몸의 낱낱 털구멍을 분별하되 한이 없고 수량이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가 다 눈앞에 나타나며, 이미 세계가 나타나면 다시 좌우에서 모신 제자들이 나타나므로 보살은 간절히 우러러 법을 듣고 법을 듣되 만족해 함이 없으며, 그 대중으로 하여금 널리 삼천대천 국토에 계신 여래의 금빛 몸에서 나온 한량없는 광명과 그 낱낱의 광명에서 수없고 한량없는 국토를 보게 하며, 그 부처님 세계에서 몸의 색상(色相)을 나타내어 그 대중에 있으면서 큰 법을 드날려 듣는 이들이 견고하여 금강정의삼매(金剛定意三昧)를 버리지 않게 하느니라.
012_0428_b_05L如是菩薩摩訶薩得此道相定意者於諸法界悉得自在入此定已分別己身一一毛孔無限無量不可思議諸佛世界悉現在前已現世界復現翼從弟子菩薩渴仰聞法聽無厭足使彼大衆普見三千大千剎土如來金體出無量光一一光明無數無量佛土於彼佛剎現身色相在彼大衆闡揚大法聞者牢固不捨金剛定意三昧
다시 그 세계에서 백천억 겁 동안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권지(權智)를 나타내 보이되 마치 권지가 없는 것과 같고 권지로서 교화해야 할 이들도 보지 않으며, 비록 그 세계에 처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나 세차게 타는 불길이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 마음으로는 ‘겁수가 길고 영원하므로 그것을 찾아보아도 근원이 없으며 그 중간에 게으른 뜻을 내었다’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또한 다시 ‘중생이 교화되기 쉬워서 나는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교화하고 돌아다녔는데 두루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억천만 겁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 교화한 이들보다 나는 특히 훌륭하였다’라고 하는 생각도 하지 않느니라.
012_0428_b_15L復於彼界百千億劫周旋教化示現權智如無權智不見權智所可化者雖處彼界心如影像猛焰鏡形心無是念劫數長遠尋之無原於其中閒生懈慢意亦復不念衆生易化吾於一日一夜教化周旋普遍恒沙諸佛世界億千萬劫諸佛所化吾爲特勝
012_0428_c_01L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도성(道性)의 모양이 없는 정[無相定]에 들어간 이는 낱낱이 몸의 털구멍을 분별하고 돌아다니며 교화하되 역시 고달파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교화를 받음이 없는 이도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크지도 않고 은근하면서 그 세계가 청정해지며 그 여래의 큰 법회의 처소에 나아가도 장점ㆍ단점이나 부정한 생각[不淨念]을 일으킨 이를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법계에 노닐되 마음과 뜻을 항복 받고 모든 진로(塵勞)를 참고 일찍이 없던 일을 행하였으며, 방소 없이 행을 깨우쳐 정진하는 행을 세우고 모두 다 분별하였기 때문이니라.
012_0428_b_22L如是菩薩摩訶薩入道性無相定者一一分別身體毛孔周旋教化亦不疲厭無受化者於婬怒癡不大慇懃淨彼世界詣彼如來大會之處不見長短起不淨念何以故菩薩摩訶薩遊無量法界降伏心意忍諸塵勞未曾有行無方喩行建精進行悉分別故
부사의정(不思議定)과 무도상정(無道相定)과 진제상정(眞際相定)은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차별도 없나니, 그 중생으로 하여금 도의 모양을 분별하되 세속이 있고 세속이 없는 것과 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ㆍ유기ㆍ무기ㆍ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데서 도의 모양과 상응함을 보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도 세속이 있고 세속이 없는 것과 유루ㆍ무루ㆍ유기ㆍ무기ㆍ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것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은 12인연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癡)를 반연[緣]하여 애(愛)와 생ㆍ노ㆍ병ㆍ사가 있되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12인연도 도(道)와 상응하지 않되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를 반연하여 애와 생ㆍ노ㆍ병ㆍ사가 있는 것도 도와는 상응하지 않되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012_0428_c_06L不思議定無道相定眞際相一而不二亦無差別令彼衆生分別道相有俗無俗有漏無漏有爲無爲有記無記有欲無欲不見與道相相應亦不不相應道相不與有俗無俗有漏無漏有記無記有欲無欲相亦不不相應道相不與十二因緣相應亦不不相應緣癡有愛生老病死亦不相應十二因緣不與道相應亦不不相應緣癡有愛生老病死與道相應亦不不相應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마하살로서 이 도상정의(道相定意)를 얻은 이는 상응함을 보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도상정의에서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는 것이니라. 무상정(無相定)에서도 역시 상응함을 보지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음이며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미치거나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왜냐하면 그들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모든 부처님 세존은 불가사의하여 널리 온갖 시방 세계에 들어가서 모든 상호와 위의와 예절과 18가지 변화(變化)와 사자분신무외삼매(師子奮迅無畏三昧)를 나타내시느니라.
012_0428_c_16L如是最勝薩摩訶薩得此道相定意者不見相應不見不相應是謂菩薩摩訶薩於道相定意應無所應於無相定亦不見應亦不見不應是謂應無所應羅漢辟支佛所能及知何以故非彼境界故諸佛世尊不可思議普入一切十方世界現諸相好威儀禮節八變化師子奮迅無畏三昧
012_0429_a_01L이때에 최승보살마하살은 여래의 도상정의를 완전히 갖추고 금강서원정의(金剛誓願定意)를 버리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보다 더 뛰어나게 제도하되 제도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제도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제도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았느니라.
012_0429_a_01L是時菩薩摩訶薩具足如來道相定意不捨金剛誓願定意過諸佛度無所亦不見度亦不見不度
보살마하살은 마음으로 한 생각 동안에 삼매에서 일어나 시방 세계에서 고통과 액난을 당하는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곧장 그들에게로 가서 네 가지 일[事]인 의복ㆍ음식ㆍ코끼리ㆍ말ㆍ7보[珍]ㆍ평상ㆍ침구와 병을 치료하는 의약을 공양하게 하고 권혜(權慧)로써 온갖 것들을 다루되 모두 다 중생만을 위하고 자기 자신은 위하지 않으며,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교화하고 돌아다니면서 바른 법을 드날리되 또한 만족해 함이 없고, 모든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서 그 곳의 중생으로 하여금 다 교화를 받게 하되 깨달아 아는[覺知] 이가 없게 하며, 불사(佛事)를 왕성하게 일으키고 온갖 지혜를 나타내며 마음에 두루 접할 때면 생각나는 즉시 그에게로 가느니라.
012_0429_a_04L菩薩摩訶薩心一念頃從三昧起不捨十方苦厄衆生尋復往至四事供養衣被飯食象馬七珍牀褥臥具病瘦醫藥權慧調御一切盡爲衆生不自爲己從一佛國至一佛國教化周旋闡揚正法亦無厭足入諸佛土令彼衆生悉令受化無覺知者興隆佛事現一切智心所周接尋念卽至
보살마하살이 이 도상정의에 들어가면 널리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마음ㆍ뜻ㆍ식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있는 바를 관찰하여 전에 지은 행[宿行] 때문에 이 사람은 지옥[泥鯖]으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아귀로 나아가며, 이 사람은 축생으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천도(天道)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인도(人道)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별하느니라.
012_0429_a_12L菩薩摩訶薩入此道相定意普入十方恒沙無央數剎諸佛世界衆生之類心意識中察所念分別宿行是趣泥犂是趣餓是趣畜生是趣天道是趣人道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모두 다 중생들이 나아갈 바를 능히 분별하며, 혹은 어떤 중생은 선도(善道)를 수행하여 도상정(道相定)에 상응하나니 역시 그 중생은 소승의 마음이나 벽지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 있음을 아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널리 모든 부처님 세계에 노닐되 모든 부처님 세존을 예배하고 받들고 섬기며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고루 원만하게 하며, 혹은 부처님 국토에 있을 적에 간탐(慳貪)하는 중생들을 보면 곧 스스로 나타내 보여 크게 보시하느니라.
012_0429_a_16L是菩薩摩訶薩彈指之頃盡能分別衆生所趣或有衆生修行善道應道相定亦知彼衆生有小乘心辟支佛菩薩心如是菩薩摩訶薩普遊諸佛世界禮拜承事諸佛世尊淨諸佛具滿一切衆生所念或在諸佛剎見慳貪衆生類輒自示現行於大
012_0429_b_01L그 국토에서 큰 보시의 깃대[幢]를 세우고는 청정한 범음(梵音)으로써 온갖 중생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어진 이들이여, 알아야 하오. 나의 이름은 온갖 것을 보시하면서도 보답을 구함이 없는 이[一切施無求報者]라 합니다.’ 만일 의복ㆍ음식ㆍ병을 치료하는 의약과 평상ㆍ침구 등이며 나라ㆍ재물ㆍ자식ㆍ아들ㆍ코끼리ㆍ말ㆍ7보 등에 모자람이 있으면 보살은 보시하되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보시하지 않는 것[三不施]을 제외하고 그 밖의 것은 다 보시하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 아버지요, 둘째 어머니이며, 셋째 사장(師長)이니라. 이것이 바로 근(根)을 세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있어 보시를 행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012_0429_b_01L於彼剎土豎大施幢以淸淨梵音告一切曰諸賢當知我名一切施無求報者若有乏短衣被飯食病瘦醫牀臥具等國財妻子象馬七珍菩薩布施從初發意至于成佛除三不施餘者盡施云何爲三一者父二者母三者師長是謂立根菩薩在諸佛剎土行於布施
또 보살마하살은 선권방편으로써 다시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 국토에 노닐면서 거기에 살고 있는 중생들로서 게으름을 피우는 이를 보면 몸으로 계율을 지니는 것을 나타내고 18가지 법(法)을 실천하며, 혹은 나무 아래나 들판이나 무덤 사이나 높은 산이나 깊은 낭떠러지나 숲속이나 굴에 숨어서 은근하게 계율을 받들어 온갖 법을 범하지 않느니라. 인간에 노닐 적에는 위의와 예절을 지키며 들고 나는 거동과 다니거나 앉거나 간에 마음은 언제나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며 처음부터 계율을 여의지 않고 금계는 본래 있는 바가 없다고 분명하게 통달하느니라.
012_0429_b_08L復次菩薩摩訶薩以善權方便復遊十方恒沙剎土見彼衆生有懈慢者現身持戒行十八法在樹下曠野塚閒高山深崖隱處林慇懃奉戒不犯衆法遊在人閒執持威儀禮節出入進止若行若坐心常懇惻初不離戒達了禁戒本無所
나는 것[生者]은 모두 다하고 온갖 것은 덧없으며 나의 몸과 그는 하나요 다르지 않고 마지막으로 청정한 데에 이르며, 지(地)로부터 지에 이르고 이에 10지(地)에 이르렀으나 10지의 장애를 보지도 않고 10지의 장애 없는 데로 건너가는 것이 마치 나는 새가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만물은 모두가 공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물건도 또한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닌 것도 또한 물건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세계를 노닐되 큰 서원과 견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게으른 중생을 섭수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도상정수(道相正受)에 들게 하느니라.
012_0429_b_15L生者皆盡一切無常我身與彼一而不異至竟淸淨從地至地乃至十不見十地是㝵度十地是無㝵如鳥飛虛空亦無足迹解知萬物皆空如空物亦非物非物亦非物菩薩摩訶薩亦復如是遊於無量諸佛世不捨弘誓牢固之心攝彼懈怠衆安處入于道相正受
012_0429_c_01L또 보살마하살은 권도의 지혜를 지니고 다시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노닐되 그곳의 중생들로서 게으름이 있는 이가 언제나 성을 내고 처음부터 기뻐함이 없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에 대하여 몸소 인욕을 나타내 보이며 어떤 사람이 욕설을 퍼부어도 잠자코 갚지 않고, 설령 다시 어떤 사람이 그의 손발을 자르거나 그의 몸을 헐어뜨리고 욕되게 하여도 마음이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되 마음을 지니는 것이 마치 땅과 같고 ‘이 몸은 4대로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정신이 떠나면 곧 흩어질텐데 무슨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관하여 환히 통달하느니라.
012_0429_b_22L復次菩薩摩訶薩執權智慧復遊十方恒沙剎土見彼衆生有懈怠者常懷瞋恚未始有悅菩薩於彼現身忍辱若人罵者默而不報設復有人截其手足毀辱其形心不變易不興恚怒持心如地觀達此身四大合成神離則散有何可貴
지혜로운 이는 하나도 탐할 만한 것이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 또한 마치 소를 도살하는[屠牛] 집에서 소를 네 갈래로 찢어서 나누어 놓으면 근본이나 가지가 모두 있는 바가 없는 줄 분명히 아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몸에는 주인이 없고 또한 있는 바가 없으며 어느 것이 이 몸이고 몸은 또 누구의 소유인가. 그리하여 이름이나 모양도 다 진실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니라.
012_0429_c_06L智者分別無一可貪亦如屠牛之家分牛爲四分了知本末悉無所菩薩大士亦復如是解身無主亦無所有何者是身身爲誰有名相號字悉不眞實
혹은 어떤 보살이 선정으로 인하여 인욕을 행하되 너른 들판에 사람이 없는 곳이나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한 마음으로 사유할 적에 길 가던 사람이나 소 치는 사람이나 땔나무와 풀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이 그 곁을 지나다가 혹은 풀 가지로 그의 코를 찌르거나 혹은 그의 귀를 찌르거나 해도 보살은 곧 깨닫고 그를 눈여겨 자세히 보고 나서 다시 그 눈을 감고 마음과 뜻을 고요히 하며 뜻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고 또한 다른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혹은 길가던 사람이 기왓조각이나 돌로써 때리거나 던져서 머리나 눈이 깨지고 몸이 다쳤다 하여도 보살의 심식(心識)은 역시 움직이거나 변하지도 않고 산란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선정으로 인하여 인욕을 행하고 중생을 접하고 제도하되 헤아리거나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012_0429_c_10L或有菩薩因禪行忍于曠野無人之處樹下端坐一心思行路之人及牧牛人擔薪負草逕過其邊或以草枝而刺其鼻或刺耳菩薩尋覺熟觀彼已還閉其目寂然心意意無亂念亦無他想或値行人以瓦石打擲破傷頭目毀壞形體菩薩心識亦不移變不興亂想是謂菩薩摩訶薩因禪行忍接度衆生不可稱記
012_0430_a_01L또 보살마하살은 불가사의한 힘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가서 노닐 적에 그곳 중생들이 항상 게으름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보살은 거기에서 몸소 정진을 나타내 보이되 중생을 섭취(攝取)하여 무위(無爲)에 안전하게 있게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한 중생을 위해서도 백천 겁을 경과하도록 마음에 게으르지도 않고 또한 고달파하거나 싫어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법계는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 통달하여 알고 여래의 도(道)로써 제도하고 해탈시키기 때문이니라.
012_0429_c_19L復次菩薩摩訶薩以不思議遊至十方恒沙剎土見有衆生常懷懈慢菩薩於彼現身精進攝取衆生安處無爲是時菩薩爲一衆生經百千劫心不懈惓亦不疲厭何以故達了法界空無所有以如來之道而度脫之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역시 제도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제도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은근히 정진하여 마음이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또한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 중간에 모든 고뇌를 받거나 혹은 그 세계 국토가 겁소(劫燒)로 불이 일어나서 불길이 범천(梵天)에까지 이르거나 혹은 큰 불이 나서 역시 범천에까지 이르거나 혹은 바람이 일어나서 모든 세계의 국토가 티끌이나 안개처럼 부수어질 적에 보살은 그 곳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다 섭취하여 무위에 안전하게 있게 하여 동요하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노닐 적에 정진하되 궐(闕)하지 않는 것이니라.
012_0430_a_02L雖度衆生亦不見度亦不見不度是謂菩薩摩訶薩慇懃精進不變移亦不他想於其中閒受諸苦或値剎土劫燒火起焰至梵天値水出亦至梵天或値風動吹諸剎土碎如塵霧菩薩處彼盡取生類處無爲令不擾亂是謂菩薩摩訶薩遊恒沙剎土精進不闕
또 보살마하살이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가 노닐 적에 그곳 중생들이 마음이 산란하여 안정하지 못한 것을 보면 보살은 그곳에서 좌선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되 혹은 촌락에 앉아 있기도 하고 혹은 나무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며 혹은 산 속 숲이나 깊은 굴 속에 앉아 있으면서 백천 겁을 지나도 마음에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인도하고 섭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느니라.
012_0430_a_09L復次菩薩摩訶薩復以善權方便遊至十方恒沙剎土見彼衆生心亂不定菩薩於彼現乎坐禪或坐村落或坐樹閒或坐山林深窟之中或經百千劫心無他引取衆生令心不亂
이때에 보살은 길 옆에 있으면서 정(定)에 들어가나니, 그 삼매의 이름은 무형상정(無形想定)이니라. 이 정에 들어가면 혹은 한 겁을 지나기도 하고 백천 겁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이 녹아 문드러져서 산이나 하천이나 수목이 모두 다 흩어져 떨어지고 바닷물이나 샘의 근원이며 강물이 빠르게 흘러 버려 모두 다 바짝 말라버렸다 하여도 선정에 든 보살은 그 안에서 좌선하고 있으되 마음이 변하거나 동요하지도 않고 또한 무너지지도 않느니라.
012_0430_a_14L是時菩薩在於路側入定其三昧名無形想定此定者或經一劫至百千劫天地融爛山河樹木悉皆散落海水泉源江河駃流悉皆涸竭入定菩薩處中坐心不變移亦不腐壞
012_0430_b_01L혹은 소 치는 사람이나 땔나무를 지고 풀을 지고 가던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다가 혹은 나뭇가지로 코를 찌르거나 혹은 귓구멍을 찌르거나 혹은 곧장 눈을 벌려 보게 하거나 혹은 입을 벌려 이가 보이게 하거나 혹은 머리칼을 거머쥐고 목을 뽑아내려 한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혹은 날카로운 칼로써 보살의 손톱을 베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두 다 이것은 보살의 정의 힘[定力]이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시 위신(威神)을 더하여 주어 이 보살로 하여금 고뇌를 만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노닐되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산란한 뜻을 보고 곧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겁(劫)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고달파하거나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니라.
012_0430_a_19L或放牛人擔薪負草經過其邊或以木枝而刺鼻者或刺耳孔或直擘眼而視者或開口而看齒者或前取髮頂捉而不能得者或以利刀翦菩薩爪而不能得何以故皆是菩薩定力威神不可沮故十方諸佛復加威神令此菩薩不遭苦惱是謂菩薩摩訶薩遊于十方恒沙剎土見彼亂意便自入定劫至劫不以疲惓
또 보살마하살이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노닐 적에 중생으로서 어리석고 미혹된 이가 있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들에게 지혜를 나타내 보이되 그 중생들을 위하여 의취(義趣)를 분별하고, 삼세와 현재의 일을 사유하되 차례로 모든 지(地)를 초월하며 지로부터 지 없는[無地] 데에 이르고 지 없는 데서부터 지(地)에 이르는 것이 마치 날으는 새가 부딪치거나 걸림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형상이 아닌[非像]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며, 물건 아닌[非物] 데서 물건이 되고 물건에서 물건이 아닌 것이 되느니라.
012_0430_b_05L復次菩薩摩訶薩復以善權方便遊至恒沙剎土觀見衆生有愚惑者菩薩於彼示現智慧爲彼衆生分別義趣思惟三世現在之事越次諸地從地至無地從無地至地猶如飛鳥無所觸㝵菩薩亦復如是非像爲像像爲非像非物爲物物爲非物
어떻게 형상이 아닌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제(虛空際)의 정의정수(定意正受)에 들어가서 다른 지방 세계의 약 열매[藥果]나 수목이나 산하(山河)나 석벽(石壁)이 다 공(空)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그 공도 또한 공하여 없다[空無]고 관하나니,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세계가 모두 공과 같아 평등한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형상이 아닌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며 물건이 아닌 데서 물건이 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하느니라.
012_0430_b_12L云何非像爲像像爲非像於是菩薩入虛空際定意正受觀他方世界藥果樹木山河石壁悉空如空亦空無菩薩摩訶薩亦復如是一切世界皆如空等是謂菩薩摩訶薩非像爲像像爲非像非物爲物亦復如是
다시 온갖 지혜[衆智]의 자재정의(自在定意)에 들어가서 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여 어리석고 어두운 생각[愚闇想]을 제거하며, 모두 다 편안히 처하여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되 그곳의 중생들이 어리석고 미혹된 것을 보면 그들을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나타내어 영원히 어두움을 없게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012_0430_b_18L復入衆智自在定意示現衆生除愚闇想皆悉安處令至彼岸謂菩薩摩訶薩遊于十方無量世界觀彼衆生愚惑想者爲現慧明永無闇昧
十住斷結經卷第七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