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두 불기법인(不起法忍:무생법인)을 얻은 불퇴전(不退轉)이었고, 몸ㆍ입ㆍ뜻이 안정되어 3세를 모두 거두어 잡으며, 홀로 삼계를 거닐면서 중생을 깨우쳐 교화하되, 병에 따라서 약을 주어 각기 원하는 바를 얻게 하는 자들이었으니, 문수사리와 미륵보살 등이었다. 또 여러 하늘 8만4천이 있었으니 모두 부처님 도에 뜻을 둔 자들이었다.
012_0487_b_01L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인사구의 실내로 들어가 석 달간 연좌(燕坐)하리라. 여러 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륜(阿須倫:아수라)ㆍ가류라(迦留羅:가루라)ㆍ진다라(眞陀羅:긴나라)ㆍ마휴륵(摩休勒:마후라가) 등 사람과 사람이 아닌 자들이 찾아오거든 그들을 잘 이해시키고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말아라. 여래(如來)ㆍ지진(至眞)은 남의 보호가 필요치 않다. 이제 부처가 천상과 세간의 여러 악마ㆍ범천ㆍ사문ㆍ범지와 여러 하늘의 인민과 아수륜을 관찰해 보면 여래ㆍ무상지진(無上至眞)이 건립한 것을 움직이고 옮길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자는 없다. 너는 잠자코 있어라. 여래는 대중에 있을 때도 스스로 돕고 보호하는 것이지 호위하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법은 만나기 어렵고 요의(了義) 또한 그러하며, 사람 몸 받기 어렵고 경의 도(道)는 희유하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은 오랜 겁에 가끔씩 있는 일이다. 여래가 말씀하신 경전을 믿고 출가해 도를 닦고 훌륭한 스승과 벗을 만나며, 잘 따라 깨우쳐 받아들이며 정진하고 좋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012_0487_c_01L 만일 경전에 밝은 비구가 청정한 법을 강론하는 것을 만났다면 그것은 있기 힘든 일이며,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다가 중우(衆祐:세존)를 만나 공양하고, 청정한 법을 다 받는 것도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설령 효순하고 은혜를 되갚으며 또 부지런히 배우고 경전과 계율을 따르고 지니기를 죽음에 죽음을 거듭해도 깨뜨리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아난아, 그 삿된 소견이란 무엇인가? 타인의 요망하고 거짓된 술수에 예배하고, 여러 하늘에 복종하며, 귀신ㆍ뼈다귀ㆍ썩은 나무ㆍ산ㆍ나무ㆍ강ㆍ하천ㆍ샘ㆍ돌 등의 신이나 천ㆍ지ㆍ일ㆍ월ㆍ동ㆍ서ㆍ남ㆍ북ㆍ북두성ㆍ사당이나 구렁이ㆍ뱀ㆍ날짐승ㆍ들짐승ㆍ고라니ㆍ사슴ㆍ교룡(蛟龍)을 받들어 섬기고, 또 여러 가지 기이한 도깨비들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삿된 소견이라고 말한다.
부끄러워하고 공손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삼계에 있지만 해탈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의 4등심(等心)을 행해야 한다.
012_0488_a_02L慚愧恭恪戰戰恐畏。在於三界不疑解脫,慈悲喜護行四等心。
지나는 곳마다 항상 때맞추어 움직이고 욕됨을 참으며 온화하고 겸손하게 뜻을 낮출 것이며, 다만 이치로 돌아가고 장엄을 취하지 말며, 오직 지혜로 돌아가고 알음알이의 집착을 취하지 말며, 오직 미묘한 경으로만 돌아가고 아름다운 표현을 취하지 말며, 오직 바른 법으로 돌아가고 사람을 취하지 말며, 깊고 미묘한 법인(法忍)을 따라 닦도록 가르쳐라.
중생을 위해 12인연을 말해야 할 것이니 일체법은 인연을 좇아 일어난다. 가령 인연이 없다면 일어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니, 12인연이 일어나는 것을 자세히 살피고 관해 그 근원을 살펴 받들어 행해야 한다. 만일 12인연을 자세히 관하지 않으면 재난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떻게 관해야 하는가?
다시 성현의 바른 행을 분별하여 중생을 위해 법을 말해야 한다. 무엇이 거룩한 진리[聖諦]인가? 행하는 일이 정성되고 미더운 것을 말한다. 그 거룩한 진리란 만일 마음으로 거룩한 진리를 듣고 생각하면 진실도 없고 속임도 없으니, 진실도 없고 속임도 없기 때문에 거룩한 진리라고 한다.
012_0488_b_01L참된 진리[眞諦]의 이치란 바로 정성되고 미더우면서 생기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 참된 진리라는 것은 실로 참되고 바른 것이어서 욕심을 여의는 진리이며, 믿고 아는 진리이며, 언사가 없는 진리이며, 행하는 것이 없는 진리이며, 괴로움을 짓지 않는 진리이며, 가짐이 없는 진리이며, 응함도 응하지 않음도 없고 칭찬도 없고 비방도 없는 진리이니, 곧 하나의 진리이며, 죄가 없는 진리이며, 멸도하지 않는 진리이니, 곧 함이 없는[無爲] 진리이다.
가령 아난아, 일체법은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무엇도 머무르는 것이 없고 중생과 다른 것도 없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성현의 진리[賢聖諦]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와 같은 법을 말한다. 현명한 제자로서 무위(無爲)를 행하여 분명한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괴로움을 일어나지 않게 하여 생기는 것이 없는 데에 이르러야 할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苦諦]라고 말한다.
만일 고민과 근심을 만나서 고통 속에 있게 되면 모든 행을 쌓지 말고 인연을 끊어라. 인연을 이미 끊었으면 이것을 쌓임의 진리[集諦]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일체의 괴로움을 영원히 없애고 다해 오래도록 생기는 것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滅諦]라고 말한다.
모든 과거의 부처님과 제자들이 이 길을 따라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멸도를 취하였으니, 이것을 여덟 가지 성현의 길이라고 한다. 즉 첫째 정견(正見)이며, 둘째 정념(正念)이며, 셋째 정언(正言)이며, 넷째 정업(正業)이며, 다섯째 정활(正活)이며, 여섯째 정방편(正方便)이며, 일곱째 정의(正意)이며, 여덟째 정정(正定)이다.
012_0488_c_01L 그런 문자들로 여래가 모든 법을 건립하였으나 이 모든 문자 역시 자연이며, 공(空)이며, 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혹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니, 그 까닭은 문자가 37품과 같기 때문에 같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아난아, 비구들이 문자를 평등하게 안다면 이것이 바로 도품법(道品法)이고 머물러야 할 수순하는 이치[順義]이다.
또 아난아, 여래는 연좌할 것이니 만일 하늘ㆍ용ㆍ귀신ㆍ건답화(犍沓惒:건달바) 등 사람과 사람이 아닌 자들이 찾아오거든 그들을 위해 3세가 평등함을 강해야 한다. 무엇이 3세(世)인가?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니, 떨어져 전도되어 있어도 이것 또한 본래 깨끗한 것이다.
일체법 역시 모두 공하여 3세도 없고 머무르는 것도 없으니, 과거도 이미 공하였고 미래도 공할 것이며 현재도 공하다. 공도 공하고 공이 없는 것도 공하니 3세의 공함과 같고, 사람의 공함 역시 그와 같으니, 3세가 공한 것을 평등이라 한다. 하나의 이치[一義]로 들어가며 여러 가지란 없다. 만일 또 법을 말하게 되면 ‘삼계를 제거해야 비로소 편안하게 된다’고 하라.
그 존재하는 것이 없으므로 삼계를 밝게 알면 생각이 없이 생각하여 나아감도 없고 물러남도 없고 건립할 것도 없으며, 서원도 없을 것이다. 생각하거나 기억하지 않고 마음의 생각을 모두 버리면 3탈문을 얻을 것이니, 간절히 정신을 오로지하여 밝은 깨달음을 닦고 공ㆍ무상ㆍ무원의 3탈문을 받들어야 한다.
무엇을 3탈문이라 하는가? 밝은 깨달음에 이르러 평등을 버리지 않고 모든 법을 통달하여 지음도 짓지 않음도 없으며 일체법이 모두 다해 없어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면, 선정에 들지 않아도 뜻이 타락하지 않으며 하나가 있다거나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3탈문으로서 밝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012_0489_a_01L또 아난아, 그들을 위해서 법을 설해 5음(陰)을 떠나게 하라. 5음이란 색(色)ㆍ통(痛: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니, 이것이 5음이다.
012_0488_c_23L又復,阿難!當爲說法使去五陰。何謂爲五?色、痛、想、行、識,是爲五陰。
이것을 받아들이면 음이 치성하게 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음이 없다. 만일 한가한 곳에 거처하며 수행한다면 이 관을 지어야 한다. 여래는 늘 이렇게 말하였다. ‘색은 물거품의 무더기와 같고, 통은 큰 물거품과 같으며, 상은 아지랑이와 같고, 행은 파초 같으며, 식은 허깨비와 같다. 부처의 광명은 해보다 밝고 지혜는 허공보다 큰 것이다.’
몸소 이런 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설하여 이런 관을 짓게 해야 한다. 여래가 설명한 이치에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곧 이해하게 되리라. 욕계는 물거품의 무더기와 같으니 이것 또한 공할 뿐이며, 색계도 없는 것이며 무색계도 처소가 없는 것이니, 삼계에 집착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면 처소도 없다.
물거품의 무더기에는 나[我]도 없고 사람[人]과 수명(壽命)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에는 사람도 중생도 없어서 모두가 물거품의 무더기ㆍ큰 물거품ㆍ아지랑이ㆍ파초와 같은 것이다.
012_0489_a_10L聚沫無我無人壽命,以是之故,一切諸法無人衆生,悉如聚沫水泡、野馬芭蕉。
식도 환과 같아서 또한 공이며, 삼계에 집착하지 않고 처소가 없으면 의지할 바도 없다. 그 허깨비라는 것도 나와 사람과 수명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그 실상을 아는 자 역시 나와 사람과 수명이라는 근본이 없는 것이다. 5음이 이와 같이 처소가 없는 것임을 관하게 되면 곧 5음은 없어진다.
012_0489_b_01L 왜냐하면 모두가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다.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뜻이 또한 공하고 본래 깨끗하며 몸이 없는 것이다. 만일 본래 깨끗하고 공하여 모든 입(入)이 없다면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6입 역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뜻이 없으면 인연하는 의식도 없고 안팎의 6입도 없다. 왜 밖의 6입도 그런가? 일체법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없으며 버리는 것 역시 없으니, 생각으로부터 밖의 모든 6입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입을 익히지 않으면 처소도 없다.”
부처님께서 이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연좌할 것이니, 만일 어떤 이가 찾아오거든 그를 위해 이렇게 법의 이치를 해설하라. 부처가 위엄과 신통을 세워 변화를 나타낼 때에 만일 근기에 맞아 제도될 수 있는 자라면 모두 이 법을 들을 것이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보거나 듣지 못하며 부처가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다고만 볼 것이다.”
012_0489_c_01L부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제수석실(帝樹石室)로 들어가시자 한량없는 풍악이 연주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울렸고, 하늘은 온갖 꽃을 온 대천세계에 무릎까지 쌓이도록 흩뿌렸다. 부처님께서는 연좌하여 삼매정수(三昧正受)에 들어가자마자 그 석실을 변화시켜 온통 수정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덕의 근본이 순일하고 맑은 삼천세계의 모든 중생은 모두 여래께서 석실에 앉아계신 모습을 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듯 볼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 오른쪽 손바닥으로 10만억의 광명을 놓으시자, 그 광명은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비쳐 해와 달의 광명을 모두 덮어버렸다.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시니, 그 행은 영원히 안정되어 머무름도 없고 업(業)도 없었으며 자연 그대로이고 공과 같아서 행에 망상이 없으셨다. 삼천대천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012_0489_c_11L世尊三昧,其行永定無住無業,自然如空行無妄想。三千大千世界六反震動。
그때 불국토에서 부처님의 위력과 신통을 본 2만 2천의 하늘은 모두 더할 나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어 각기 하늘 꽃을 가져다 석실에 뿌리며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석실을 세 번 돌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하늘에서 뿌린 꽃은 온 산과 계곡을 덮어 부처님 도량을 만들었고, 그 향기가 널리 퍼져 온 삼천세계가 모두 그 향기를 맡았다.
부처님께서는 문득 몸을 변화해 천왕(天王) 여래ㆍ등정각께 나아가 보광세계(普光世界)에 이르렀다.
012_0489_c_18L佛便變身,詣於天王如來、至眞、等正覺所,至普光世界。
그때 강과 하천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의 모든 부처님들 역시 능인(能仁) 여래ㆍ지진처럼 5탁 중생을 교화하기 어려워 모두 천왕불께 찾아오셨다. 그들 국토의 중생들 역시 이곳과 마찬가지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치성하고 스스로 크고 잘난 체하며, 반역하고 불효하고 아첨하고 삿된 생각을 품으며 낮은 제도에 뜻을 두었다.
012_0490_a_01L 무엇 때문인가? 그들 국토의 중생들 역시 부처님을 찾아가 뵙지 않고, 깨우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기왕에 들었던 것도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받들어 행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들 역시 선권방편(善權方便)으로 실내에 연좌하시고, 다시 몸을 변화해 보광세계의 천왕불께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요집을 분별하여 강설하신 것이다.
여래ㆍ지진께서 멸도하신 뒤 중생을 위해 덮고 가린 것을 없애줄 것이다. 큰 성인이신 모든 부처님은 곧 법의 주인이시니, 그 덕은 수미산을 뛰어넘고, 지혜는 강과 바다를 뛰어넘으며, 도는 허공을 뛰어넘어 비유조차 할 수 없다. 이로써 게으르고 방일하며 법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던 일체 어리석은 자들도 다시 이 경전은 받아들일 것이다.
무엇을 모든 부처님의 요집이라 하는가? 곧 진리와 같이 모든 법을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다. 무엇을 ‘모든 법’이라 하며, 무엇을 ‘숭상’이라 하며, 무엇을 ‘높임’이라 하는가?
012_0490_a_20L何謂諸佛要集?則如眞諦遵崇諸法。何謂諸法?何謂爲崇?何謂爲遵?
012_0490_b_01L일체법은 모두 하나의 법이 되니, 이 모든 법이라지만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으며 또한 말할 수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그 법이 없다는 것은 곧 생기는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도 없다는 것이며, 법이라고 말하지만 오래 보존할 수 없으니 언사를 빌린 것일 뿐이다.
무엇을 ‘숭상함’이라 하는가? 담박(澹泊)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숭상하고, 욕심 없음을 숭상하고, 참된 진리를 숭상하고, 근본 없음을 숭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계(法界)를 숭상하고 본제(本際)를 숭상하는 것이니, 모든 법은 모두 공하다는 이런 참된 진리를 숭상하는 것이다.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고 끝까지 다 사라졌으므로 사라지게 할 수가 없다. 임시로 문자와 언사를 빌려 사라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곧 생긴 적이 없는 것이며, 본래 깨끗하므로 뜻이 담박하다고 말하지만 그것 또한 생긴 적이 없는 것이니, 생기는 것이 있고 생기는 것이 없는 것을 버리고 떠난다.
이미 숭상한 것에는 소리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타락하는 자도 물러나는 자도 없지만 모든 권유와 도움만은 제외한다. 곧 밑도 없고 밑이 없는 것도 아니며, 일어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다. 평등을 강론하여도 생각이 없으며, 가까움도 없고 멂도 없으며 발자취도 없다. 그러므로 숭상한다고 말한다. 숭상하는 것이란 법의 성(城)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012_0490_c_01L일체법은 거짓으로 이름만 있을 뿐이니,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얻지 못할 것도 없다. 장차 갈 것도 없고 도로 돌아오는 것도 없으며, 바르지도 않고 삿되지도 않으며,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생각도 없고 앎도 없으며, 두렵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으며, 사랑도 없고 거처도 없다. 고요하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없으며, 굵지도 않고 가늘지도 않으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가운데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으며, 인연도 얻을 수 없다.
한계도 없고 생각하는 바가 한량없으며, 지킬 것도 없고 보호할 것도 없으며, 불러올 것도 없다. 피안(彼岸)으로 건너는 것도 아니며,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원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며, 잃음도 아니고 얻음도 아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으며, 예의도 없고 예의 아닌 것도 없다. 명성을 바라지 않으며 또한 나도 없고 사람과 수명이라는 것도 없다.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으며, 참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으며, 나아가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다. 어디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없는 것도 아니며, 맑지도 않고 맑음이 없는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몸도 아니고 몸 없는 것도 아니며, 이름을 강론하지 않는 것이 허공처럼 평등하다. 마침도 없고 마치지 않음도 없으며, 교화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으며 벗어나지도 않는다.
012_0490_c_16L不身不無身,不講名號等如空空。無畢無不畢,不教化,不願不離。
짓지도 않고 짓지 않음도 없으며, 허물이 없기 때문에 죄를 없애지도 않으며, 생각도 없고 생각하지 않음도 없다. 움직이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주어도 그것을 받지 않고 애초에 그것을 주지도 않았으며, 고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다. 소멸하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으며, 재처럼 사라지게 하지도 않으며, 티끌도 아니고 티끌을 벗어난 것도 아니다.
자취를 움직이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는다. 끊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도로 합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나란한 것도 아니며, 입지도 않고 벗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않고 취하지 않음도 없으며, 허공도 아니고 허공 아님도 없다.
광명(光明)이 바닥이 없고 수명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사람도 없고 가르침도 없으니, 항상 강론하고 말하여 모든 처소(處所)를 버리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법의 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보살이란 글자에 집착하므로 집착함이 없는 법을 설해도 머무를 곳을 보지 못한다. 이것을 일컬어 숭상함이라 하니,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요집이다.
만일 보답을 생각지 않는다면 곧 일체 망령된 생각을 제거하게 될 것이니, 많이 짓지도 않고 적게 짓지도 않으며, 일으키지도 않고 끊지도 않으며, 과거도 생각지 않고 미래도 생각지 않고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이는 3세에 평등하여 곧 언설이 없어질 것이며, 여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중생에게 다가갈 것이다. 이것을 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가 이런 말과 가르침을 연설하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그 모습은 여여하게 머무르므로 법계 또한 그러하다. 법계가 머무른다는 것은 법계가 고요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법이라고 한 것인가? 고요하다는 것은 순수하고 맑음을 비유한 것이니, 그 때문에 모든 법이 고요하다고 한 것이다.
무엇을 순수함이 없는 것이라 하는가? 이것은 내 것이다 하고 스스로 몸이 있다고 하며, 소견ㆍ이름ㆍ물질ㆍ사상ㆍ처소ㆍ언사ㆍ지식ㆍ의지하는 것을 인연하는 것이다.
012_0491_a_21L何謂無純?計是我所自謂有身,因緣諸見名色思想,處所言辭識知依猗。
012_0491_b_01L 이른바 이름과 생각과 헤아림과 본말을 관찰하고 마음으로 오로지 생각하여 모든 5음ㆍ4대와 모든 입을 받아들이고는 ‘나는 삼계를 권유하여 돕고 일깨워 교화하며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없앨 것이니, 이것을 도의 가르침을 받들고 닦아 3탈문을 증득하고 도의 자취에서 왕래하며 다시 욕계에 돌아오지 않고 나한(羅漢)의 도에 이르는 것이라 한다’고 하는 것이다.
012_0491_c_01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 모든 부처님의 요집이라 말한 것은 곧 처음 보살의 마음을 내는 이의 말과 가르침을 두고 한 말이다. 처음 보살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로부터 생기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마음에 마음이 없고, 그 마음이 없으면 생기는 것이 없으며, 생기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처음으로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로 인해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무생법인)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일체의 모든 법을 분별하여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며, 일곱째는 항상 정진을 더하여 남은 번뇌가 없게 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그 지혜가 널리 들어가 통달하지 못하는 곳이 없는 것이며, 아홉째는 일체지(一切智)를 구족하여 하나의 문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열째는 모든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고 탐하고 아끼지 않음으로써 집착하는 모든 것을 끊는 것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이 많아서 사문ㆍ외도ㆍ범지ㆍ가난한 사람ㆍ거지ㆍ병자에게 공급할 적에 굶주린 이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는 물을 주며, 수레ㆍ코끼리ㆍ말ㆍ평상ㆍ침구ㆍ의복ㆍ금ㆍ은ㆍ보배ㆍ아내ㆍ아들ㆍ남자ㆍ여자ㆍ나라ㆍ읍ㆍ빈터ㆍ마을과 그 밖의 가진 것 모두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애석할 것 없이 모두 은혜롭게 베풀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시하고는 나를 헤아리고 그 보시한 바에 의지하여 ‘지금 나는 양식을 주었고 저 사람은 그것을 받았다. 나는 시주요, 탐하고 아끼는 바가 없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단바라밀을 행하였다. 이제 보시를 받는 이는 베푼 사람의 마음에 보답하고 나아가 일체 중생들에게 미칠 것을 원해야 하며, 다시 내가 베풀도록 권유하고 도와 중생들이 영원히 안온을 얻게 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렇게 보시를 한 이에게는 세 가지 집착과 걸림이 있다. 세 가지 집착과 걸림이란 첫째 나를 헤아리는 것이며, 둘째 다른 이라고 헤아리는 것이며, 셋째 망상으로 헤아리며 보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상을 건지지 못하는 세속의 단바라밀이라 한다. 왜 그런가? 세속에 얽매어 있어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세속에 떨어지지 않고 세상을 건지는 단바라밀이라 하는가? 세 가지를 깨끗이 하는 것이다. 세 가지란 첫째 보살이 보시할 때에 나라고 하지 않으며, 둘째 받는 이가 취하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셋째 보시하면서 보답을 바라는 망상을 일으킨 적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세 가지라고 한다.
012_0492_b_01L 보살의 보시는 일체 중생을 권유하고 돕는 효용이 있다. 중생에게 보시하되 받는 이가 취하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으면 곧 더할 나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권유하고 돕는 효용이 되며, 그것이 취하는 음식을 살피거나 보지 않는 법이니, 이것을 곧 세상을 건지는 단바라밀이라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세상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계율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이가 계율을 깨뜨린 것을 말한다면 법다운 행이 아니다. 또 약간의 제자를 일깨워 교화하고는 ‘나로 인해 제도되었다’라고 하고 ‘나는 부처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리라’고 하며, 스스로 몸이 있다고 헤아려 본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세상을 건지지 못하는 세속의 시바라밀(尸波羅蜜:지계바라밀)이다.
비록 이미 계율을 지녔더라도 나라고 헤아리지 말며, 다른 이가 법을 깨뜨리고 금계를 어지럽힘을 보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그들을 제도하며, 생사도 버리지 않고 무위도 의지하지 않으며 중생을 제도했더라도 근본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 또한 그와 같다.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세상을 건질 수 있고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세속에 떨어진다.
세간에서 희망하는 것이 있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공ㆍ무상ㆍ무원의 법을 깨달아 3세에 평등하여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으며, 3도(塗)에 평등하여 법신이 하나라는 것을 알며, 생사에 있지도 않고 멸도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일체를 일깨워 교화하고 두루 머무르는 곳이 없으면, 이것이 세속을 건지는 반야바라밀이며 바로 부처님의 요집이다.”
“또 부처님의 요집이란 들어갈 처소인 보살지(菩薩地)를 말한다. 무엇을 지(地)의 처소라고 하고, 들어간다고 하는가? 일체법 어디에도 들어갈 곳은 없으니, 모든 법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일체법은 또한 잃을 것도 없다. 도지(道地)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또 생각할 것도 없으며, 그 지를 닦고 다스려도 처소는 볼 수 없다.
그 지를 닦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살이 닦아 배우는 제1주(第一住)에 열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을 열 가지 법이라 하는가? 첫째 그 성품을 맑고 온화하게 하며, 둘째 모든 형상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셋째 평등심으로 중생을 제도하며, 넷째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모든 가난한 이를 구제하며, 다섯째 착한 벗을 몸소 가까이하며 미치지 못한 점들을 물어 아는 것이다.
여섯째 경전을 찾아 익혀서 의혹을 교화하고 깨우치며, 일곱째 가업을 버릴 생각을 자주 하고 살림살이를 그리워하지 않으며, 여덟째 부처의 몸을 구하며 그 모양 없음을 통달하고, 아홉째 법시(法施)를 활짝 열어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게 보이며, 열째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없애고 항상 지성과 신의로 받드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심한 보살이 행할 열 가지 법이다.
또 보살은 제2주를 행하며 항상 여덟 가지 법을 간절히 받들어 행해야 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계율을 받들어 청정히 하고 더러운 것에 물들지 말며, 둘째 효순함을 항상 닦으며 은덕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셋째 세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욕을 근본으로 삼으며, 넷째 공손하고 삼감을 받들어 닦고 항상 기쁘고 즐거운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보살이 행할 제3주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널리 듣기를 구하며 만족하지 않고, 둘째 활짝 드러나게 널리 보시하여 의식의 법을 벗어나고, 셋째 일으킨 덕의 바탕으로 불국토에서 권유하고 도우며, 넷째 한량없는 생사의 환난을 싫어하며, 다섯째 늘 부끄러움을 가지고 항상 참괴심(慙愧心)을 품는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 법이다.
012_0493_a_01L보살이 행할 제4주에는 다시 열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 법인가? 첫째 한가한 곳에 살기를 익혀 뜻이 항상 고요하며, 둘째 그 한계와 절도를 알아 마음으로 만족하며, 셋째 희롱ㆍ조소ㆍ잠꼬대를 버리며, 넷째 항상 삼가며 계율을 지켜 깨뜨리거나 범하지 않으며, 다섯째 5욕을 싫어하여 조화로운 땅에 처하는 것이다.
여섯째 그 마음을 내어 영원히 성취하는 데까지 이르며, 일곱째 가진 것 일체를 모두 다 보시하며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없고, 여덟째 그 마음이 언제나 용감하여 겁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며, 아홉째 가진 것 일체를 애석히 여기지 않으며, 열째 모은 덕의 바탕을 중생들에게 베푸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다.
여섯째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지도 않고 다른 이를 헐뜯지도 않으며, 일곱째 10악과 뽐내는 마음을 없애며, 여덟째 4도(倒)의 불순한 가르침을 베어 버리고, 아홉째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잘라 버리며, 열째 장애가 되는 망령된 생각의 집착에서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다.
012_0493_b_01L보살이 배울 제6주에서는 6도무극을 갖추고 여섯 가지 일은 익히지 말아야 한다. 익히지 말아야 할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그 마음을 고요히 가지고 성문을 구하지 말며, 둘째 그 마음을 밝고 환하게 가져 연각을 그리워하지 말며, 셋째 그 마음에 일체 중생을 버리지 말라.
열여섯째 없는 경계에 대해 짓는 것이 없으며, 열일곱째 항상 부처와 내지 구경에 집착하지 않으며, 열여덟째 일찍이 62소견에 순종한 적이 없으며, 열아홉째 모든 법을 죄다 알고 공을 비방하지 않으며, 스물째 근본이 없음을 죄다 알아서 도를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이 법을 행함으로써 스무 가지 일을 갖추게 된다.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공(空)의 행을 분명히 깨달으며, 무상(無相)에 밝고, 무원(無願)을 분별하며, 3장(場)을 깨끗이 닦으며, 항상 가엾은 생각을 품고, 중생을 사랑하며, 중생이라고 헤아리지 않으며, 모든 법을 평등하게 관하고, 지문(止門)과 무종생법인(無從生法忍:무생법인)과 일어남이 없는 거룩한 지혜를 분명히 이해하며, 1품의(品義)를 펴고, 여러 가지 생각을 없애며, 모든 망상을 버리며, 모든 삿된 소견을 버리며,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며, 고요히 지(地)를 관하며, 그 마음이 조화로워지며, 해칠 생각을 품지 않게 되며, 결박과 집착에 물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스무 가지이다.
012_0493_c_01L제8주 보살은 네 가지 법을 행해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마음으로 중생에게 들어가 신통과 지혜로써 그들을 일깨워 교화하며, 둘째 불국토의 공함을 보고 본 것을 구경까지 미치게 하며, 셋째 부처님 몸에 머리 조아리며 미치지 못한 것을 묻고 받아들이며, 넷째 이미 부처님 몸을 보았으면 관하여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 법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있다. 첫째 중생의 근본을 모두 환히 알아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 보이며, 둘째 불국토를 깨끗이 장엄하고 은근히 여환삼매(如幻三昧)를 힘써 배우며, 셋째 중생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따라 해탈시키고 제도하며, 넷째 중생이 태어나는 5취를 살펴서 쫓아가 그들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 법이다.
또 부처님의 요집은 문자로 설해진 것과 평등하고, 또 문자로 설해진 공문(空門)에 평등하게 들어간다. 무엇이 문자로 설해진 공문인가? 일체법은 모두 공이다. 왜 공문이라 하는가? 미래의 법을 생겨날 것이 없게 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탐욕의 문에서 그 집착을 없앴기 때문이다.
012_0494_a_01L그 도문(度門)이란 모든 법의 구경과 본말을 널리 드러내는 것이며, 그 행문(行門)이란 일체 모든 법은 놓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어 빠지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 것이며, 그 명문(名門)이란 일체법이 이미 이름과 글자를 벗어나 있고 그 이름은 본래 깨끗하여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 여문(如門)이란 근원을 환히 깨달아 나아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며, 그 수문(隨門)이란 일체법을 받들어 그것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 처문(處門)이란 일체법에 또한 처하는 곳이 없어 근심과 걱정을 무너뜨리지도 않는 것이며, 그 작문(作門)이란 모든 법으로 만들어진 종성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 등문(等門)이란 일체법에서 평등을 받들어 닦아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 구문(垢門)이란 모든 법을 헤아려 더러운 것을 벗어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흠이 없는 것이며, 그 수문(受門)이란 모든 법을 거두어 취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깊고 묘한 것에 뜻을 두어 6입과 일체법에서 마음이 영원히 고요해지는 것이다.
그 안문(岸門)이란 일체법을 저 언덕으로 건너게 하여 저것과 이것이며 건너고 건너지 못함을 보지 않는 것이며, 그 생문(生門)이란 모든 법의 태어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그 사문(思門)이란 일체법이 모두 고요해져 생각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집착하고 집착하지 않음도 않는 것이다.
012_0494_b_01L 그 법문(法門)이란 법계가 항상 존재하며 곧 이로써 수시로 모든 경전을 일으키고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 적문(寂門)이란 일체법이 담박하고 적막한 땅에 있어 환난이 없는 것이며, 그 허문(虛門)이란 일체법이 모두 허공과 같아 처음과 끝이 없고 머무름도 없는 것이다.
그 진문(盡門)이란 모든 법이 죄다 다하여 물러나지도 않으며 모두 또한 영원히 소멸한 것이며, 그 주문(住門)이란 모든 법이 움직이는 것도 없고 흔드는 자도 없는 것이며, 그 혜문(慧門)이란 그 지혜를 따라 익히고 행하는 것도 없으며 어떤 아는 자도 없고 또 모르는 자도 없으며 생각도 없고 소견도 없는 것이다.
그 사문(斯門)이란 일체의 모든 법은 응하거나 응하지 않는 것도 없고 합하거나 흩어짐도 없으며 그 언사는 빈 것이며, 그 천문(闡門)이란 비록 모든 법에 노닐기는 하지만 모든 문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개문(蓋門)이란 일체법에서 가리고 덮은 모든 것을 제거해 공하여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 6사를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 염문(念門)이란 모든 법에 있어 변화로 생긴 것을 소멸해 기억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 것이며, 그 이문(已門)이란 모든 법이 다 공을 말미암은 것인데도 두려움을 일으키고 인연하여 온갖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 거문(去門)이란 일체법에서 단멸한다거나 영원하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그 수문(數門)이란 모든 법에서 생기는 것을 실로 거론할 수 없으므로 모든 수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이다. 그 입문(立門)이란 일체법의 머무름은 머무른다지만 머무는 것이 없어 모든 처하는 곳을 버리는 것이며, 그 무문(無門)이란 비록 모든 법이 있지만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서지도 않고 앉지도 않으며 노닐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으며 응하거나 응하지 않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 구문(具門)이란 모든 법을 구족하게 보존하였으되 여섯도 없고 도(度:바라밀)도 도가 아님도 없어 마치 허공처럼 두루 어디에도 처소가 없는 것이며, 그 음문(陰門)이란 모든 법이 다 5음이고 일어나도 일어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그 향문(響門)이란 일체법은 음성이 없어 이른바 메아리도 없고 길이 문자와 언사가 벗어났음을 아는 것이다.
012_0494_c_01L 그 차문(差門)이란 모든 법을 분명히 알아서 비록 방일에 처하더라도 빨리 내달림이 없는 것이며, 그 고문(固門)이란 모든 법을 분명히 알아 굳고 억센 것을 흩어 길이 멸도하게 하는 것이며, 그 소문(消門)이란 온갖 법을 죄다 통달하고 그 끝까지 환히 알아 처소가 없고 끝과 처음이 없고 또한 나는 것도 없는 것이 마치 세존과 같은 것이다.
문자로 헤아려도 감당할 수 없으며, 언사를 갑절이나 늘여도 또한 있는 것이 없으며, 다시 이름과 문자도 없고 말도 없고 담화도 없으며, 향하는 곳을 잡을 수 없고 글도 없고 읽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비어서 속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이와 같아서 이것을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이것이 총지(總持)에 들어가는 것이다. 없다는 것을 헤아려서 널리 펴고 자라게 하여 공에 드는 것이니, 여기에 들 수 있으면 보살의 행에 가까우리라.
모든 문자에 병이 없는 것을 알아 문자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고, 모든 법의 말미암은 차제를 분별하고 거룩한 지혜가 음성을 말미암은 것임을 체득하라. 가령 보살이 문자의 공인문(空印門)의 자취에 들어가 듣거나 받아들이거나 기억을 유지하거나 마음에 품거나 남에게 설명한다면 마음이 타락하지 않을 것이며, 곧 스무 가지의 여러 결박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마음으로 깨닫고 환히 알아서 모두 통달하며, 일곱째 지혜가 높고 뛰어나 그 빛을 받지 않는 자가 없으며, 여덟째 재주 있는 말솜씨로 어디 하나에도 걸림이 없으며, 아홉째 총지를 이루어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해 잊어버리지 않으며, 열째 의심의 그물을 없애 망설임이 없는 것이다.
열한째 통달하여 음침한 생각을 품지 않으며, 열두째 거처에 있건 여러 사람 속에 있건 좋고 나쁘다는 생각이 없으며, 열셋째 말씨가 부드럽고 온화하여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자가 없으며, 열넷째 비록 추한 말을 듣더라도 그것으로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으며, 열다섯째 성품이 사납지 않아 항상 편안하고 자상한 것이다.
012_0495_a_01L 열여섯째 머무르는 곳이 환하여 음향을 분멸하며, 열일곱째 5음ㆍ4대ㆍ모든 입ㆍ인과응보와 인연을 환히 알며, 열여덟째 모든 법을 분석해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 모든 법을 환히 깨닫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 그를 위해 법을 설하며, 열아홉째 옳은 도리와 그릇된 도리며 한계와 한계 없는 것을 알며 지혜를 밝게 깨달고 좋은 방편을 분명하게 알아 수시로 일깨워 교화하는 것이다.
이 문자의 공인문(空印文)을 말하였으니, 만일 듣거나 받아들이거나 받들어 지니거나 외우거나 한다면 그렇게 듣자마자 열 가지 공훈을 이루리라. 첫째 태어나는 세상마다 여자 몸을 받지 않으며, 둘째 여러 환난과 여덟 가지 불한처(不閑處)를 버리게 되며, 셋째 머무는 거처가 항상 한가하여 서두르는 생각이 나지 않으며, 넷째 언제나 부처님 계신 세상을 만나 세존을 뵙고 곧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리라.
다섯째 그 마음이 넓어 큰 성인을 공양하며, 여섯째 여래께서 그 마음을 보고 그를 위해 경전을 설하며, 일곱째 그 말씀을 듣고 곧 받들어 행하게 되며, 여덟째 곧 확고부동함을 얻어 물러나지 않게 되며, 아홉째 공의 지혜를 환히 깨달아 무소종생법인을 얻으며, 열째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빨리 이루게 될 것이니, 이것이 부처님의 요집이다.
또 널리 펴야 할 부처님의 요집이란, 3세에 평등하고 3장(場)을 깨끗이 장엄하며 생기는 것이 없는 데에 이르고 참된 진리의 법을 환히 아는 것이다. 삼계를 분명히 알고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통달하면 자연히 즐거움도 없으며, 단멸도 없고 영원함도 없고 처소도 없고 머무름도 없다.
그 3승이 1문(門)으로 돌아가 모든 법을 통달하여 다툴 것도 없으며, 같은 부류가 없는 데에 들어가 갈 것도 없고 걸을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견줄 것도 없다.
012_0495_a_21L其三乘者歸于一門,通達諸法而無所諍,入無等倫,無行無步,無想無比。
012_0495_b_01L또 부처를 헤아려 보아도 일찍이 깨달아 최정각에 이른 일이 없으며, 모든 법을 결단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한다. 부처는 지혜에 미치지 못하였고 지혜가 없는 것도 아니며, 번뇌에 합하지도 않고 성냄과 원한도 없고 증득을 취하지도 않으며, 얻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고 또 행할 것도 없으며, 평등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부처는 도를 얻지 않았고 잃은 것도 없으며 법도 없고 대중도 없다. 부처는 부처를 얻지 않고 보살도 생각지 않으며 풀지도 않고 묶지도 않으니, 일체 중생은 본래 매우 청정하다. 부처는 법을 보지 않고 듣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으며 또한 가르치는 것도 없다. 부처는 말한 것도 없고 언사도 없다.
모든 부처님을 아는 자는 이에 말도 없고 애초에 소리를 연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며, 장차 오는 세상에도 또한 펴는 것이 없어서 사람에게 말하여 가르치지 않으며 지혜도 지혜 아님도 없다는 것을 안다.
012_0495_b_07L解諸佛者乃知無言初不演音,於當來世亦無所宣,不教人說無慧不慧。
부처는 중우(衆祐)가 아니며 또한 중우의 덕을 깨끗이 마친 이도 아니다. 부처는 마시거나 먹지 않으며 남에게 음식을 보시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몸도 없고 형체도 없다. 여래에게 색신이 있다고 관하지 말라. 상호도 없으며 경전과 법계도 없다. 부처는 출현하지도 않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일찍이 멸도한 적도 없었고 멸도할 것도 없으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이 영원히 멸도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는 혼자 있지도 않고 대중에 거처하지도 않으며, 부처를 볼 수 있는 자는 없고 들을 자도 없으며 공양할 수도 없다. 모든 불법을 헤아려 보아도 여러 가지도 없고 하나도 아니다. 부처는 도를 얻지 않았고 처소도 구하지 않았으며, 법륜을 굴리지도 않았고 또한 물러나지도 않았다.
부처는 거짓 이름이고 부처와 마찬가지로 음성 또한 그러하며, 과거와 미래의 음향도 전혀 다르지 않고 가건 오건 평등하다. 그는 평등하니 곧 한쪽으로 쏠림이 없으며, 그 한쪽으로 쏠림이 없으므로 그는 한량없는 것도 없으며, 그 한량없는 것도 없으므로 그는 죽는 것도 없으며, 그 죽는 것이 없었으므로 의약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의 요집이다.
나는 항상 두루 다니면서 시방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설법을 들어왔다. 지금 모두들 하나의 불국토에 모이셨으니 이런 때는 만나기도 어렵고 전에 없던 드문 일이다. 위없는 성인들께서 이처럼 나란히 세상에 출현하시는 기회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으며 보고 듣기도 어려울 것이다.’
문수사리는 미륵에게 말하였다. “함께 천왕불이 계신 보광국토로 갑시다. 무수히 많은 부처님들이 10억 년 만에 모두 그곳에 모여 함께 부처님의 요집의 법을 널리 펴서 말씀하시니, 함께 듣고 받으며 아울러 모든 부처님을 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고 높은 분들께서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만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륵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대답하였다. “그대는 가고 싶으면 곧 가십시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모이셨다면 그 도덕이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높고 뛰어나 몸을 볼 수 없고 형상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문수사리여, 형상과 빛으로 여래를 보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곧 법신이니, 법신은 보기도 어렵고 들을 것도 없으며 공양할 것도 없습니다.”
미륵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문자로 인해 집착해서 하는 말입니다. 일체법을 살펴보면 실로 생기는 것이 없으며, 형상은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012_0496_a_22L彌勒答曰:“因其文字言有所著,察一切法實無所生相不可動。”
012_0496_b_01L이때 문수사리는 다른 보살과 여러 족성자들에게 함께 천왕불께 나아가 모든 여래를 뵙고 말씀을 듣자고 말하였다.
012_0496_a_23L時,文殊師利謂餘菩薩諸族姓子,俱共往至天王佛所,見諸如來聽受所說。
변적(辯積)보살이 문수에게 말하였다. “여래ㆍ지진은 뵐 수가 없는데 무슨 일로 그대는 그런 가르침으로 함께 여래를 뵈러 가자고 하십니까? 여래께서 어디에 계시기에 뵙고자 하는 것입니까? 일찍이 부처님 말씀을 듣건대 여래ㆍ지진은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문수는 말하였다. “족성자께서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여래는 없고 경전도 없으며, 볼 수도 없고 공양할 수도 없습니다. 변적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어찌 분별한 언사를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부처님ㆍ여래께 중생이 오가면서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다는 것은 모두 문자를 빌린 것이니, 문자는 자연 그대로 공(空)입니다. 그러므로 평등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여래께서는 말도 없고 근본도 없고 굴리는 것도 없어서 모두 자연 그대로 공이니,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평등할 뿐입니다. 여래께서는 말도 없고 근본도 없고 굴리는 것도 없으십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은 함께 갈 수 있을 것이고, 마땅치 않은 분은 그만두십시오. 저 혼자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