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13_1201_c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013_1202_a_01L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눈을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013_1202_b_01L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10)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1)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2)가 중국의 중심13)에 흐르는 팔천(八川)14)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 : 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5)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6)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 : 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013_1202_c_01L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 : 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17)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18) 이것은 법상(法相)19)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달・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 : 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어느 때 박가범(薄伽梵)께서 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寶)로 장엄된 곳에 머무시며 큰 광명을 놓아 끝없는 세계를 두루 비추셨다. 그러자 온 사방이 아름다운 장식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그 화려한 치장은 원만하여 끝이 없었다. 그 양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삼계(三界)의 모든 처소를 뛰어넘었고, 세간의 선근(善根)으로 일으키는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013_1203_a_01L 모든 번뇌와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때[垢]를 없앴으며, 뭇 마군을 멀리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여래의 장엄이 의지하는 바로서, 그곳을 오가는 길은 큰 생각[念]과 지혜와 행이고, 큰 삼매[止]와 묘한 관법[觀]을 수레로 삼으며,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게 공(空)하고 모습 없고[無相] 소원 없는[無願] 해탈이며, 한량없는 공덕으로 화려하게 꾸며졌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 큰 궁전에는 가장 청정한 깨달음을 이루신 박가범께서 머무시는데, 둘이 아닌[不二] 현행(現行)으로 모양 없는 법에 나아가 부처님의 머무르는 곳에 머무시며, 일체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얻어 걸림 없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굴리지 못하던 법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걸림이 없으며, 그 이룬 경지는 생각하기도 논하기도 어려우며, 3세(世)의 평등한 법에 노닐며 그 몸은 일체 세계에 두루 퍼졌다.
일체 법지(法智)는 의혹이나 막힘이 없으며, 모든 행은 큰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며, 모든 법지에 의혹이 없고, 나타내는 몸은 가히 분별할 수 없다.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이며, 부처님의 둘 아님[無二]을 얻어 훌륭한 저 언덕에 머무르되 서로 어지럽게 뒤섞이지 않으며, 여래해탈의 묘한 지혜를 다하였고, 중간이나 끝의 치우침도 없는 경지를 증득하였다. 부처님의 지위[佛地]는 평등하여서 법계에 다하였으며, 허공의 성품을 다하였으며, 오는 세상[未來際]까지를 다하였다.
법문 들은 것이 쌓여서 생각할 것은 잘 생각하며, 말할 것은 잘 이야기하며, 지을 것은 잘 지었다. 또한 민첩한 지혜와 빠른 지혜와 영리한 지혜와 세간을 뛰어넘는 지혜와 명쾌하게 잘 선택하는 지혜와 큰 지혜와 넓은 지혜와 동등함이 없는 지혜와 같은 지혜 보배를 성취하였고, 3명(明)을 모두 갖추었다.
013_1203_b_01L다시 한량없는 보살마하살이 모든 불국토에서 모여 오니 그들은 모두 대승에 머물렀고 대승의 법에서 노닐며, 모든 분별을 떠났다. 또한 갖가지 분별을 분별하지 않았으며, 모든 악마와 원수를 쳐부수었고, 일체 성문ㆍ독각의 얽매인 생각과 분별을 여의었으며, 광대한 법의 맛의 기쁨과 즐거움을 지녔다.
그때 세존께서 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묘생이여, 다섯 가지 법이 있어 큰 깨달음[大覺]의 지위를 포섭하는 줄 알아야 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이른바 청정법계(淸淨法界)와 대원경지(大圓鏡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와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또 허공이 비록 모든 색(色)에 두루하여 서로 여의지 않으나, 색 때문에 물들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그와 같이 여래의 청정한 법계도 비록 일체 중생의 심성(心性)에 두루하며 진실을 말미암은 까닭에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지만 그 허물 때문에 물들거나 더럽혀지지 않는다.
013_1203_c_01L또 허공이 일체 몸[身]ㆍ입[口]ㆍ뜻[意]의 업을 포용하지만 허공은 무엇을 일으키거나 짓는 일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청정한 법계도 그러하여서 일체 지혜로 중생에게 이로운 일들을 변화하여 만들어 내며 이 일들을 모두 포용하지만 청정한 법계에는 무엇을 일으킨다거나 짓는 일이 없다.
또 허공 가운데 갖가지 색상(色相)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이 허공은 생겨나거나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한 법계에 모든 지혜로 중생에게 이로운 일을 변화하여 만들어 내며 이런 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여래의 청정한 법계에는 생겨나거나 멸하는 일이 없다.
또 허공 가운데 가지가지 색상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 허공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니,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한 법계 속에서도 여래의 감로(甘露) 같은 성스러운 가르침의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만 여래의 청정한 법계는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다.
또 허공 가운데 시방의 색상은 가없고 다함이 없으니, 이는 허공의 경계가 가없고 다함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허공은 가거나 오거나 움직이거나 구른 적이 없다. 이처럼 여래의 청정한 법계에도 시방 일체 중생의 이익과 편안함을 건립하며 갖가지 작용이 가없고 다함이 없으니, 청정한 법계는 가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정한 법계는 가거나 오거나 움직이거나 구른 적이 없다.
또 허공 가운데 삼천세계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이 허공의 경계는 무너지거나 이루어짐이 없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한 법계 속에도 한량없는 모습을 나타내니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거나 혹은 위대한 열반에 드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만 청정법계에는 등정각을 이룸도 없고 적멸(寂滅)에 들어감도 없다.
013_1204_a_01L또 허공을 의지하는 갖가지 색상(色相)은 무너지고 썩고 불에 타고 말라지고 달라지기도 하는데, 허공의 경계는 그 때문에 변하지 않고 또한 시달려 피로해 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한 경계를 의지하는 중생의 세계 안에는 갖가지 배울 바와 몸ㆍ말ㆍ뜻의 업에 헐거나 범함이 있지만 청정한 법계는 그 때문에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며, 또한 시달려 피로해지지도 않는다.
또 허공에 의하여 땅과 산과 광명과 물과 불과 제석(帝釋)의 권속과 나아가 해와 달 등등의 온갖 것이 있지만 허공의 경계에는 그런 모습이 없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한 법계를 의지하여 계온(戒蘊)과 정온(定蘊)과 혜온(慧蘊)과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 등과 같은 온갖 온(蘊)이 있지만, 청정법계는 그러한 모습이 없다.
또 허공 가운데 갖가지 인연이 차례차례 생겨서 삼천대천의 한량없는 세계가 한없이 펼쳐지지만 허공의 경계는 일어나거나 짓는 것이 없다. 여래의 청정한 법계에도 그러하여 한량없는 모습을 모두 갖춘 부처님의 모임이 한없이 펼쳐져 있지만 청정한 법계는 일어나거나 짓는 것이 없다.
다시 묘생이여, 대원경지(大圓鏡智)란, 마치 원만한 거울을 의지하면 여러 물건의 영상이 나타나니,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 거울[慧鏡]을 의지하면 모든 곳[處:根]과 경(境)과 식(識) 따위 여러 모양의 영상이 나타난다. 오직 둥근 거울[圓鏡]로써 비유를 삼는 것은 둥근 거울과 여래의 지혜 거울은 평등하므로 지혜의 거울을 원경지(圓鏡智)라 부르는 것임을 마땅히 알라.
013_1204_b_01L또 둥근 거울이 지극히 잘 연마되어 밝으면 거울이 맑고 때[垢]가 없어 광명이 두루 비친다. 이와 같이 여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도 부처님의 지혜 위에서 일체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때를 영원히 벗어난 까닭에, 극히 잘 연마되어 밝아 선정을 의지 삼고 거두어 지니는 까닭에, 거울이 맑아 때가 없어서 모든 중생을 위해 이롭고 즐거움을 짓는 까닭에 광명이 두루 비친다.
마치 둥근 거울 위에 하나가 아닌 많은 영상(影像)이 일어나거나 둥근 거울 위에 모든 영상이 없어지거나 간에, 이 둥근 거울은 움직임도 없고 작용도 없다. 이와 같이 여래의 원경지 위에 하나가 아닌 많은 지혜의 영상이 일어나거나 원경지 위에 지혜의 영상이 없어지거나 간에, 이 경지(鏡智)는 움직임도 없고 작용도 없다.
또 둥근 거울은 여러 가지 영상과 합쳐진 것도 아니며 여읜 것도 아니니, 모인 것이 아닌 까닭이며, 저 대상이 나타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대원경지도 뭇 지혜의 영상과 합쳐진 것도 아니며, 여읜 것도 아니니, 모인 것이 아닌 까닭이며, 흩어져 잃어버리지 않는 까닭이다.
013_1204_c_01L또 둥근 거울이 두루 밝으면 그 면(面)이 모든 처소에서 갖가지 영상이 대상에 의지하여 두루 일어난다. 이와 같이 여래의 대원경지도 끊임없고 한량없는 뭇 행으로 잘 닦아져서 모든 지혜의 영상이 대상에 의지하여 두루 일어나니, 이른바 성문승(聲聞乘)의 모든 지혜의 영상과 독일각승(獨一角乘)의 모든 지혜의 영상과 위없는 대승의 지혜의 영상이다. 모든 성문승의 사람은 성문승에 의지하여 벗어나게 하며, 독일각승의 사람은 독일각승에 의지하여 벗어나게 하며, 대승의 사람은 위없는 승[無上乘]에 의지하여 벗어나게 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또 둥근 거울 속에는 큰 영상이 있을 수 있으니, 이른바 큰 땅과 산과 나무와 궁전 따위의 영상들인데, 이 둥근 거울은 저것들과 수량이 같지 않다. 이와 같이 여래의 원경지 위에는 극희지(極喜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지혜의 영상이 있으니, 세간과 세간을 벗어난 법과 지혜의 영상들도 얻을 수 있는데, 그러나 원경지는 저것들과 수량이 같지 않다.
다시 묘생이여, 평등성지(平等聖智)란, 열 가지 상호를 원만히 성취함을 말미암으니, 모든 모습에서 가장 높은[增上] 기쁨과 사랑을 깨치고 평등한 법성을 원만히 성취한 까닭이며, 일체를 받아들이는 연기를 깨치고 평등한 법성을 원만히 이룬 까닭이며, 멀리 여의어야 할 다른 모습[異相]과 그릇된 모습[非相]을 깨치고 평등한 법성을 원만히 이루는 까닭이며, 큰 자비로 널리 건지고 평등한 법성을 원만히 이룬 까닭이다.
또 세계는 가지가지 구경할 만한 동산과 숲과 못 따위로 장엄하여 심히 사랑스러우니, 이와 같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가지가지 볼 만한 바라밀다와 보리분법(菩提分法)과 10력(力)과 두려움 없음[無畏]과 부처님과 함께하지 않는 법[不共佛法]으로써 장엄하여 심히 사랑스럽고 즐겁다.
013_1205_c_01L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몸을 부지런히 변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가지가지 공교로운 처소에 나타나서 모든 재주 있고 오만스러운 중생을 꺾어 항복 받으니, 이 공교로운 방편[善巧方便]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 익어지고 해탈하게 한다.
또 중생의 받아들이는 몸의 업[領受身業]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중생이 지은 착하거나 악한 업의 과보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받아들여 몸을 변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본사(本事)와 본생(本生)의 닦기 어려운 모든 행을 받아들임을 나타내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을 쓰는 까닭에 모든 중생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또 중생의 경축하고 위로하는 말의 업[語業]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중생이 차례차례 말하여 서로서로 경축하고 위로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경축하여 말로 교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가지가지 즐거워하는 법을 따라서 글과 뜻으로 교묘함을 나타내면 지혜가 적은 중생이 처음 듣고 숭상하며 믿으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013_1206_a_01L또 중생의 방편의 어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서 중생이 차례차례 가르치고, 짓는 바를 전일하게 힘쓰고, 악을 나무라고 착함을 칭찬하며, 또 서로서로 부르거나 명령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일으키는 방편의 말로써 변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서 여래는 빠른 배울 곳[學處]을 세우며, 모든 방일(放逸)을 나무라며, 방일하지 않음을 칭찬하며, 또 믿음을 따라 행하는 사람과 법을 따라 함을 건립하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그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서 익어지고 해탈하게 한다.
013_1206_b_01L또 중생의 변론하여 드날리는 말의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중생이 차례차례 열어 보여서 요의(了義)가 아닌 곳에서 모든 논리를 편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변론의 말로 교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서 여래는 모든 중생의 한량없는 의혹을 끊으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서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또 중생의 결택하는 뜻의 업[意業]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서 중생이 가히 지을 것과 가히 짓지 못할 것을 결택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뜻으로 결정하여 교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중생의 8만 4천 마음의 길[心行]의 차별을 결택하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또 중생이 조작하는 뜻의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중생이 가지가지 모든 일으킬 바 업을 조작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는 뜻을 지어 교화하는 업이다.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모든 중생의 닦는 행이 행인가, 행이 아닌가? 얻음인가, 잃음인가를 관찰하여 그로 하여금 취하고 버리고 물리침[對治]을 조작하게 하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서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또 모든 중생의 일으키는[發起] 뜻의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중생이 모든 업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도 뜻을 일으켜 교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저들을 위하여 물리침을 말하려고 하는 까닭에 그들이 즐기는 이름[名]과 글귀[句]와 글자[字]의 몸[身]을 나타내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을 쓰는 까닭에 모든 중생을 이끌어서 그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서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또 중생의 받아들이는[領受] 뜻의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중생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소작지는 받아들여 뜻으로 교화하는 업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결정되지 않은 이에게 반문(反問)하여 기별(記別)을 두니, 기별하기 위한 까닭에 그의 마땅함을 따라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뜻을 받아들인다. 이는 공교로운 방편으로 힘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그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서 익어지고 해탈하게 함이다.”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친 보살이다. 그 보살이 무생법(無生法) 가운데서 인의 견해[忍解]를 얻는 데에 두 가지 상(想)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나[自]와 남[他]이라는 두 가지 상을 버린 까닭에 평등한 마음을 얻었으니, 이로부터 위로는 모든 보살이 나와 남의 다른 생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화합한 한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하는 것이다.”
013_1206_c_01L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삼십삼천이 잡 숲[雜林]에 들지 못하면 마침내 혹은 일[事]이거나 혹은 받음[受]이거나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어서 화합하게 수용함을 얻지 못하지만, 만일 이 잡된 숲에 들면 곧 분별없이 뜻에 따라 수용한다.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또 묘생이여, 비유컨대 가지가지 크고 작은 여러 흐름이 큰 바다에 들기 전에는 각각 의지하는 것이 다르니, 다른 물[異水]과 적은 물[少水]은 분량의 더함과 덜함이 있으며, 그 물의 일[業]에 따라 짓는 것이 각각 다르며, 적은 수중생물[水族]에게 생명의 의지가 되어 주지만, 만일 큰 바다에 들어가면 달리 의지하는 것이 없고, 물의 차별이 없고, 물의 한량이 없고, 물의 더함과 덜함이 없고, 지은 일이 한결같이 광대하게 수중생물들의 생명의 의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