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지(持)라 하는가? 보살이 종성(種性)에서 처음으로 발심하여 모든 보리분법(菩提分法)에 이르기까지를 ‘지’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이 종성에 의지하면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감당해낼 수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종성을 일러서 필정지(必定持:반드시 결정코 유지함)라고 한다.
보살이 종성을 성취하면 모든 성문ㆍ벽지불을 뛰어넘나니 무슨 까닭인가? 두 가지 정(淨)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번뇌장정(煩惱障淨)이요, 둘째는 지장정(智障淨)이다. 이승(二乘)의 종성은 번뇌장정뿐이요, 지장정은 없다. 그러나 보살의 종성은 두 가지 정(淨)을 갖추었으므로 모든 부류에서 가장 뛰어나다.
단바라밀 보살 종성의 모습이란 이 보살의 성품이 본래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받을 자에게 베풀어야 할 물건으로 균등히 베풀되 싫증을 내지 않는다.
014_0071_c_07L檀波羅蜜菩薩種性相者,是菩薩性自樂施,於彼受者以所施物等施不惓,
재물이 많건 적건 평등한 마음으로 베풀고는 기뻐하되 후회하는 일이 없으며, 만일 보시할 물건이 없으면 마음에 항상 아쉬워한다.
014_0071_c_09L於諸財物若多若少等心惠施歡喜無悔,若無所施心常慚愧;
항상 사람들에게 보시의 공덕을 찬탄하여 보시하도록 권하며, 보시하는 이를 보면 진심으로 항상 기뻐하며 존경하는 어르신네나 복전(福田)으로서 공양할 곳을 만나면 앉은 자리까지도 버려서 공경히 받들어 보시한다. 만일 사람들이 금생이나 후생의 법다운 일에 대하여 물으면 모두 대답해 주며 만일 왕이나 도둑 그리고 물이나 불의 재난을 만나거나 악지식으로 인해 두려움이 일어나는 사람에게는 힘닿는 대로 무외(無畏)를 베풀어 준다. 남이 맡긴 물건은 조금도 틀림이 없게 하며 남의 빛을 져서는 끝내 거역하지 않으며 형제간에 재물을 나눌 때에는 평등하여 두 마음이 없으며 온갖 보물에 깊이 애착하는 이에게는 탐욕을 여의도록 가르치나니 남도 가르쳐 여의게 하거늘 하물며 스스로 탐내겠는가?
014_0072_a_01L본성이 재물을 좋아했더라도 자기가 쓸 생각을 버리어 뛰어난 업을 즐겨 닦아 이로운 과보가 크고도 많게 하며, 모든 주색ㆍ가무ㆍ창기와 갖가지로 변화해 나타나는 온갖 광대놀이에 대하여 항상 부끄럽다는 생각을 내어 속히 여읜다. 큰 재물을 얻더라도 탐내지 않거늘 하물며 작은 이익이겠는가? 이러한 종류를 단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시라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함은 이 보살의 신ㆍ구 의업의 성품이 부드러워서 나쁜 행을 늘리지 않고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며 설사 나쁜 업을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고 빨리 뉘우쳐서 더 자라지 않게 하며, 칼이나 몽둥이로 중생을 위협하지 않는다. 성품이 인자하여 항상 자비로운 생각을 품으며 어른을 공경하여 받들어 맞아 공양하며 적절한 시기[機宜]와 해야 할 방편을 잘 알며 사람들의 마음을 잘 따르고 말씨에는 항상 미소를 머금으며 화사한 얼굴과 평화스러운 눈길로 먼저 인사한다. 그리고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하며 구하는 바는 정직하여 거짓되거나 굽지[曲] 않으며 법다운 재물만 받아들이고 그릇된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성품이 항상 기쁘고 즐거워서 모든 복덕 닦기를 좋아하나니 남이 복 짓는 것을 보아도 몸소 돕거늘 하물며 자기가 하는 일이겠는가?
만일 중생들이 서로 해치고 때리고 결박하고 죽이고 헐뜯고 꾸짖는 등의 업을 지어 이러한 인연으로 한량없이 고통 받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항상 가엾이 여기며, 금생의 선(善)이나 내생의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며 가벼운 죄에 대하여도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거늘 그 밖의 무거운 죄에 대하여 어찌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겠는가?
014_0072_b_01L만일 사람들이 농사짓고 장사하고 목장을 경영하며 문서를 헤아리고 계산하거나 어울려 쟁송하면서 재물을 구하여 지키거나 자식들을 혼인시키거나 집회하는 등 이렇듯 온갖 법다운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모두 힘을 모아 함께 해주며, 싸우거나 소송하거나 서로 겁을 주어 나와 남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는 온갖 일에는 전혀 함께 하지 않는다. 열 가지 착하지 못한 도는 잘 막으며 남의 심부름을 할 때엔 그 일러주는 것을 잘 따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는 또박또박 물어서 시행하며 모든 사업에 있어 자기를 폐하고 남을 성취케 하며 항상 측은한 마음을 내어 성내거나 해치지 않으며 설사 잠시 화를 냈더라도 이내 잊는다. 항상 진실한 말만 하여 중생을 속이지 않으며 친한 사이를 이간시키는 말이나 실속 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말씨는 항상 부드러워 거칠거나 포악함이 없다. 자신이 부리는 하인에게도 거친 말을 않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찬제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함은 이 보살의 성품이 원래 부드러워서 남에게 해로운 일을 당하여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보복할 마음도 내지 않으며 남의 참회를 받으면 곧 받아들여 원한을 맺지 않으며 다른 생각도 없나니 이러한 종류를 찬제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한다.
비리야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함은 이 보살의 성품이 본래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되 앉아서 졸거나 누워서 잠자는 습관을 멀리 여의며, 무릇 하는 일에는 정진을 놓지 않으며, 잘 생각하여 끝까지 완성코자 하며, 처음으로 시작하는 일에는 반드시 견고히 하며, 일이 설사 잘 되지 않더라도 중도에 그만두지 않으며 제일의제에서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며 이 일을 끝내지 못하겠다는 말을 경솔히 하지 않으며 하는 일에는 용맹스러우며, 대중 속에 들어가서는 삿된 주장을 겪으며, 온갖 질문에 잘 대답하며, 온갖 괴로운 일을 잘 견디어 낸다. 큰 방편의 힘에 대하여서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거늘 하물며 작은 일이겠는가? 이러한 종류들을 비리야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한다.
014_0072_c_01L선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함은 이 보살이 법과 뜻에 대하여 천성인 냥 잘 생각하여 아무런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며, 어느 산과 숲이 시끄러움을 여의고 적묵(寂黙)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듣거나 보면 곧 ‘이곳은 안락하고 이곳은 멀리 여의었다’라고 생각하고서 곧 그리로 가서 더욱 부지런히 닦아 배운다.
어떤 중생이 고통을 당하는 일을 보거나 들으면 곧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힘닿는 대로 방편으로 제도해서 고통을 여의게 한다.
014_0072_c_05L若見若聞衆生受苦,卽起悲心,隨力方便度令離苦。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편안하게 해주기를 좋아하는 성품인지라 친척이나 재물ㆍ죽임ㆍ속박ㆍ구박과 같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참아내며 모든 법의 깊은 이치를 빨리 받아 지니니 기억의 힘[念力]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이미 들은 진리[專諦]와 이미 오래 전에 닦은 업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해 지니며, 또 다른 이들로 하여금 기억해 잊지 않게 하나니 이러한 종류를 선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한다.
반야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함은 이 보살이 모든 밝은 곳[明處]과 지혜로운 곳[智處]에서 지혜가 생기는 공덕을 성취했으므로 완고하거나 둔하지 않으며 경박하거나 왜소하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으며 온갖 방일한 곳에서 모두 잘 생각하나니 이것을 반야바라밀 보살종성의 모습이라 한다.
종성의 보살이 오랫동안 생사에 처해 있거나 혹은 나쁜 길에 떨어지는 일이 있으나 나쁜 길에 떨어진 이는 빨리 해탈을 얻고 비록 나쁜 길에 처해 있더라도 큰 괴로움을 받지는 않는다. 다른 중생이 지옥에 들어 몸에 괴로움이 닥치면 그것을 능히 싫어하여 여의며 남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자비심을 일으킨다.
이렇듯이 종성은 대비심의 원인이 되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설사 나쁜 길에 떨어지더라도 다른 나쁜 길의 중생보다 뛰어나다.
014_0073_a_06L如是種性爲大悲因,是故菩薩雖墮惡道,勝餘一切惡道衆生。
무엇이 네 가지 번뇌인가? 첫째는 오랫동안 방일(放逸)을 익히어 번뇌가 잦고 날카로움이요, 둘째는 어리석어 나쁜 벗을 가까이 익힘이요, 셋째는 존주(尊主)나 왕이나 도적이나 원수에게 쫓기므로 자재하지 못하며 마음이 어지러움이요, 넷째는 모든 살림살이가 부족하여 항상 살아갈 일을 걱정함이다.
종성의 보살에게는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나니, 무엇이 넷인가 하면 첫째는 좋은 벗이나 불ㆍ보살과 같이 설법해 주는 이가 본래 없는 것이요, 둘째는 비록 좋은 벗이나 불ㆍ보살의 설법을 만났더라도 잘못 배우는 것이요, 셋째는 비록 좋은 벗이나 불ㆍ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잘못 배우지는 않았으나 방편을 부지런히 닦지 않거나 애써서 정진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비록 좋은 벗이든지 불ㆍ보살의 설법을 듣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으나 선근이 익어지지 않고 장엄이 갖추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마음이 조복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비록 보살의 종성을 갖추고 있더라도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위없는 보리를 이를 수 없고 이 네 가지 법을 여의면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요, 만일 보살의 종성이 없으면 온갖 방편의 행을 닦더라도 끝내 위없는 보리를 이루지 못한다.
014_0073_c_01L초발심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벗어남이요, 둘째는 벗어나지 못함이다. 벗어남이라 함은 초발심으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끝내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벗어나지 못함이라 함은 물러남이 있는 것이다. 물러남에는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끝내 물러나는 것이요, 둘째는 끝내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끝내 물러난다 함은 물러난 뒤에 두 번 다시 보살의 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요, 끝내 물러나지 않는다 함은 물러났다가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초발심보살에게는 네 가지 연(緣)과 네 가지 인(因)과 네 가지 힘[力]이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 연인가? 첫째는 선남자 선여인이 모든 불보살에게 불가사의한 신통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곧 생각하기를 ‘이는 큰일이며 불가사의하구나. 능히 이렇듯 모든 변화를 나투시다니……’ 한다. 이렇게 보고 들은 것이 증상연(增上緣)이 되는 까닭에 부처님의 큰 지혜를 좋아하여 보리심을 일으킨다.
셋째는 비록 법문은 듣지 못했으나 정법이 멸해가는 모습을 보고 ‘무량한 중생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보살이 세상에 계셨다면 능히 제거하여 멸해주셨겠지만 지금은 내가 보리도를 닦아 정법을 잘 보호하고 지녀서 중생들을 위해 무량한 고통을 덜어 주리라’ 하고 생각한다. 이렇듯 법을 지키려는 것이 증상연이 되는 까닭에 부처님의 큰 지혜를 좋아하여 보리심을 일으킨다.
014_0074_a_01L넷째는 정법이 멸하는 것을 보지는 않았지만 악세중생(惡世衆生)들이 열 가지 번뇌에 시달리는 것을 보나니 첫째는 우치(愚癡)요, 둘째는 무참괴(無慚愧)요, 셋째는 간질(慳忄疾)이요 넷째는 고뇌(苦惱)요, 다섯째는 예오(穢汚)요, 여섯째는 번뇌(煩惱)요, 일곱째는 악행(惡行)이요, 여덟째는 방일(放逸)이요, 아홉째는 해태(懈怠)요, 열째는 불신(不信)이다. 이런 일을 보고는 ‘대단히 혼탁한 세상이 벌어지는구나. 이 악세에서는 이승의 원도 내기 어렵거늘 하물며 위없는 보리에 뜻을 두어 구하겠는가? 내가 발심하고 또 그들도 발심케 하리라’ 하고 생각하나니 탁세에는 발심하기 어렵거늘 증상연이 있는 까닭에 부처님의 큰 지혜를 좋아하여 보리심을 낸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인연인가? 첫째는 종성의 구족이요, 둘째는 불ㆍ보살과 좋은 벗의 보살핌을 받음이요, 셋째는 대비심을 일으킴이요, 넷째는 생사의 괴로움ㆍ살아가기 어려운 괴로움과 같은 온갖 괴로움을 오래도록 한량없이 받더라도 이 뭇 괴로움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첫째 종성의 구족이란 이른바 끝없는 예부터 으레 그러한 것이다.
둘째 선우의 보살핌을 받음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선우가 어리석거나 둔하지 않고 똑똑하되 삿되지 않은 것이요, 둘째는 사람들을 방일하게 하지 않고 사람을 방일하게 하는 도구를 남에게 주지도 않으며, 셋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하지 않게 하고 또 악행을 하는 도구를 남에게 주지도 않으며, 넷째는 사람들이 끝까지 높게 향하는 믿음[上信], 더 선하게 하려는 의욕[上欲], 더 높은 경지에서의 받아들임[上受], 위로 나아가려는 정진[上精進], 높은 방편[上方便], 높은 공덕[上功德]을 그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이 물러나거나 하락하지 않게 하고 저열한 믿음[下信], 하급한 의욕[下欲], 저급한 수용[下受], 낮은 정진[下精進], 저급한 방편[下方便], 낮은 공덕[下功德]을 다른 이들에게 주지 않도록 한다. 이른바 위없는 대승[無上大乘]을 끊고 이승을 배우게 하며 수혜(修慧)를 끊고 사혜(思慧)를 주거나 사혜를 끊고 문혜(聞慧)를 주거나 문혜를 끊고 복업(福業)을 주거나 계(戒)를 끊고 보시를 주는 것은 이와 같이 높은 공덕을 끊어 물러나게 하고 낮은 공덕을 주어 닦아 익히게 하는 것이다.
014_0074_b_01L셋째 대비심을 일으킨다 함에는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어떤 세계에는 고뇌가 있고 어떤 세계에는 고뇌가 있는데 보살은 고뇌가 있는 곳에만 태어나서 남이 고통 받는 것을 보거나 자신이 고통을 받거나 나와 남이 모두 고통을 받는 것을 보거나 혹은 생사에서 오랫동안 쉼 없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본다. 보살은 스스로의 종성이 본래 어질고 현명하므로 이러한 네 가지 경계에서 하ㆍ중상의 자비를 일으킨다.
넷째 끝없는 생사의 쉼 없는 큰 괴로움에서 두려운 마음을 내지 않는다 함은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성품이 평안하고 용맹스러우며, 둘째는 똑똑하여서 일관되게 사유를 닦으며, 셋째는 위없는 보리에 가장 높은 즐거움을 일으키며, 넷째는 모든 중생에게 가장 높은 자비를 일으킨다.
어떤 것이 네 가지 힘[力]인가? 첫째는 자력(自力)이요, 둘째는 타력(他力)이요, 셋째는 인력(因力)이요, 넷째는 방편력(方便力)이다.
014_0074_b_09L云何四力?一者自力;二者他力;三者因力;四者方便力。
보살이 자기의 힘으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 이를 자력이라 하고 남에 의해 발심하면 타력이라 하고 먼저 익힌 대승법과 상응하는 선근 때문에 지금 불ㆍ보살을 잠시보거나 찬탄하는 말씀을 조금만 듣고도 문득 발심하면 이를 인력이라 하고 금생 동안에 선지식의 설법을 듣고 능히 갖가지 선을 닦으면 이를 방편력이라 한다.
014_0074_c_01L초발심이 견고해지는데 두 가지 일이 있어 세간의 수승하고 기특하고 미증유한 법을 뛰어넘나니, 첫째는 중생들에게 친척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친척을 거두는 허물이 없는 것이니 친척을 거두는 허물이라 함은 친척을 맞이할 때 마음에 애착이나 성법을 품는 것이다.
또 초발심이 견고해지는데 두 가지 일이 있어 중생들에게 참되고 맑은 마음을 일으키나니, 첫째는 편안한 마음이요, 둘째는 쾌락한 마음이다. 편안한 마음이라 함은 중생들을 위하여 착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고 착한 것을 놓아두는 것이요, 쾌락한 마음이라 함은 가난한 중생이 믿고 의지할 곳이 없거든 사섭법(四攝法)의 평등한 마음으로 이익되게 해 주는 것이다. 또 초발심이 견고해지는데 두 가지 방편이 있으니, 첫째는 정심방편(淨心方便)이요, 둘째는 도방편(道方便)이다. 정심방편이라 함은 위의 편안한 마음과 쾌락한 마음이 날마다 늘어나는 것이요, 도방편이라 함은 스스로가 밤낮으로 불법을 성취하고는 그 역량에 따라 정심방편에 의해서 모든 중생을 안락하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초발심이 견고해지는데 두 가지 일이 있어 발심과 성도에 속하는 선법(善法)으로서 모든 선법을 넘어서나니, 첫째는 인승(因勝)이요, 둘째는 과승(果勝)이다. 그 보리의 인에 의하여 닦은 선법을 인승이라 하고, 위없는 보리를 과승이라 하는데 모든 성문ㆍ연각보다 뛰어나므로 보살의 인과는 수승하다.
014_0075_a_01L초발심이 견고해지는데 두 가지 이익이 있으니, 첫째는 이 마음을 낸 뒤에 모든 한량없는 중생들을 위하여 청정한 보시를 지어 복전으로 존중하는 것이요, 둘째는 순수하고 깨끗한 복덕을 거두어 잡아 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 둘은 전륜왕(轉輪王)의 복덕이 보호하는 것이니, 누었을 때나 깨었을 때나 나쁜 짐승이나 나쁜 귀신의 시달림을 받지 않으며 태어나는 곳마다 병이 적거나 또는 병이 없으며 설법할 때엔 몸이 피곤하지 않고 마음은 기억력이 줄지 않는다.
어떤 것이 보살의 행(行)인가? 간략히 말하면 보살들이 배울 것[所學]과 배운대로 행하는 것이니 통틀어 말하면 이것이 보살의 행이다.
014_0075_a_16L云何菩薩行?略說諸菩薩所學,如學而學;摠說是菩薩行。
보살은 어디서 배우는가? 배울 것이 일곱 곳이 있으니, 어떤 것이 일곱인가? 첫째는 자리(自利)요, 둘째는 이타(利他)요, 셋째는 진실의(眞實義)요, 넷째는 역(力)이요, 다섯째는 성숙중생(成熟衆生)이요, 여섯째는 자숙불법(自熟佛法)이요, 일곱째는 무상보리(無上菩提)이다.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재물을 구하여 스스로 쓰거나 법을 비장(秘藏)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경법(經法)을 구해다가 굳건히 수호하거나 하늘에 태어나기 위하여 계율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 등의 법을 수지하거나 세간의 과보를 탐내서 불탑에 공양하거나 이익을 탐하기 위하여 이익을 구하는 모습을 짓거나 상대방을 속이기 위하여 까닭 없이 갖가지 스스로의 공덕을 말하거나 남들이 따라 주기를 탐하여 그릇된 방법으로 거두어 모으거나 스스로가 선정의 쾌락에 머물기 위하여 중생 위하는 일을 버리면 이를 순자리(純自利)라 하나니 끓어야 한다.
순이타(純利他)라 함은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다는 삿된 견해를 가지고 보시하거나 계를 범하고 도를 어기면서 남에게 설법하거나 자신은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경지의 밝은 법을 남에게 주거나 보살이 선(禪)을 버리고 욕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는 보살의 경지에서 시방세계에서 갖가지로 변화해 나타나서 중생들을 교화하되 여래의 완벽한 힘과 무소외(無所畏) 등 남과 함께하지 않는 뛰어난 법으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 이를 순타리(純他利)라 한다.
보살이 염오(染汚)를 여읜 즐거움과 갖가지 도구의 즐거움과 선에 머무는 즐거움으로 나와 남을 이롭게 하면 이를 섭수상(擺受相)의 안자타리(安自他利)라 한다.
014_0075_c_05L菩薩以離染污樂衆具樂,住禪樂饒益自他,是名攝受相,安自他利。
보살이 혹은 이 세상은 편안하고 다른 세상은 그렇지 않기도 하고, 혹은 다른 세상은 편안하고 이 세상은 그렇지 않기도 하고, 혹은 다른 세상은 편안하고 이 세상은 그렇지 않기도 하고, 혹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 모두가 편안치 않기도 하는 이 네 가지에서 네 가지 법을 받아들여 차례대로 마땅함에 따라 응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첫째 어떤 법은 현세에는 즐거움을 받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고통을 받고, 둘째 어떤 법은 현세에는 고통을 받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즐거움을 받고, 셋째 어떤 법은 현세에서도 즐거움을 받고 다른 세상에서도 즐거움을 받고, 넷째 어떤 법은 현세에서도 고통을 받고 다른 세상에서도 고통을 받는 것이니 이것을 차세상(此世相)과 타세상(他世相)의 안자타리(安自他利)라고 한다.
인락(因樂)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情)과 진(塵)이 부딪치는 인연 때문에 태어나기를 즐기는 일이요, 둘째는 금세와 후세의 과업(果業)을 사랑하는 일이니 이를 인락이라 한다.
014_0075_c_18L因樂有二種:一者情塵觸因緣故樂受生;二者今世後世愛果業。是名因樂。
뭇 고통이 멈춘 뒤에 세 가지 인락을 생각하여 몸과 마음의 느낌[受]을 일으키나니 이것을 수락(受樂)이라 한다.
014_0075_c_20L衆苦息已,思惟三種因樂,起身心受,是名受樂。
014_0076_a_01L수락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유루와 무루이다. 무루라 함은 무학(無學)을 배우는 일이요, 유루라 함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계에 얽매이는 것이니 저 온갖 삼계에서 그 알맞은 바에 따라 6입(入)으로 분별하나니 안촉(眼觸)의 인연으로부터 의촉(意觸)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생긴 5식(識)과 상응하는 것을 신수(身受)라 하고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것을 심수(心受)라 하는데 추위ㆍ더위ㆍ주림ㆍ목마름 등 이미 일어난 갖가지 고뇌이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뇌이거나 간에 모두 대치하여 쉬게 한다. 쉰 뒤에 삶의 즐거움을 아나니 이를 고대치락(苦對治樂)이라 하고, 멸수상정(滅受相定)을 단수락(斷受樂)이라 한다.
무죄락(無罪樂)이라 함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출가락(出家樂)이요, 둘째는 원리락(遠離樂)이요, 셋째는 적멸락(寂滅樂)이요, 넷째는 보리락(菩提樂)이다. 집은 집이 아님을 믿고 집을 떠나 도를 배워서 갖가지 집에 있는 고난을 벗어나는 것을 출가락이라 하고 나쁜 욕심 등 착하지 못한 법을 끊고 초선천(初禪天)의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離生喜樂]을 얻는 것을 원리락이라 하고 2선천을 시작으로 하여 각(覺)과 관(觀)을 쉬는 것을 적멸락이라 하고 모든 번뇌가 끝까지 멸하여 모든 법을 여실하게 즐겁다고 느끼고 아는 것을 보리락이라 한다.
인락(因樂)이라 함은 낙(樂)의 요인일 뿐 자성(自性)이 아니요, 수락(受樂)이라 함은 낙의 요인이 아닌 자성일 뿐이요, 대치락(對治樂)이라 함은 낙의 요인도 아니요 자성도 아니니 그저 고(苦)를 쉬게 하고 제거할 뿐이요, 단수락(斷受樂)이라 함은 낙의 요인도 아니요 자성도 아니요 고를 제거하는 것도 아니라 모든 느낌은 진실도 괴로움이라는 것이요 선정에 머무는 대로 이 수(受:느낌)가 멸하니 무죄락(無罪樂)에 속한다. 최후의 보리락(菩提樂)으로서 미래와 현재의 모든 번뇌가 끝까지 멸하면 그 밖의 무죄락이 이에 수순하나니 이를 무죄락이라 한다.
014_0076_b_01L이 보살이 안온락(安隱樂)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안온락이 아닌 것은 여실하게 알아서 힘껏 방편으로 가르쳐 끊게 한다. 만일 괴로움 뒤에 편안할 이가 비록 근심하고 괴로워하더라도 끝내는 이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는 보살이 선교한 방편에 의하는 것이지만 만일 즐거운 뒤에 편안치 못할 이가 비록 괴롭고 근심스럽더라도 버리지 않으려하면 방편의 힘으로 제거해 끊어주려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뒤에는 반드시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중생이 편안하고자 원하면 즐거움도 얻게 하고자 원하나니, 그 편안함과 더불어 또한 즐거움도 주고 싶어 한다. 편안함[安]이라 함은 원인에 해당하는 곳이요 즐거움[樂]이라 함은 결과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알라. 중생을 즐겁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편안하게 해야 한다.
014_0076_c_01L장수하면서 오래 사는 것을 수구족이라 하고 얼굴 모습이 단정한 것을 색구족이라 하고, 높은 종족에 태어나는 것을 종성구족이라 하고 큰 재물과 많은 무리와 많은 권속을 얻으면 자재구족이라 한다. 사리를 판단하여 송사를 주재하며 법도를 제정하고 받거나 주는 일에 모두 엄정하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모두 믿고 따르나니 이를 신언구족이라 하고, 명성이 높고 방편이 능숙하며 큰 지혜와 갖가지 재주가 있어 사람들의 공경과 존중과 찬탄을 받으면 대력구족이라 하고, 대장부의 법을 성취하면 인구족이라 하고, 병이나 번뇌가 적어 일을 감당해낼 수 있으면 역구족이라 한다.
어떤 것을 보인(報因 =과보의 원인)이라 하는가? 중생을 해치지 않고 해칠 마음도 없으면 이는 수인(壽因)이라 하고, 인등(引燈)이나 깨끗한 물건을 보시하면 이를 색인(色因)이라 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면 이를 종성인(種性因)이라 하고, 뭇 도구로 베풀면 이를 자재인(自在因)이라 하고, 입의 네 가지 허물을 여의면 이를 신언인(信言因)이라 하고, 모든 공덕을 모아 큰 서원을 세우고 삼보와 존귀한 어른에게 공양하면 이를 대력인(大力因)이라 하고, 장부의 법을 좋아하고 여인의 법을 싫어하며 장부의 법을 설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여인의 법을 여의게 하면 이를 인인(人因)이라 하고, 중생들이 하는 여법한 일에 자기의 능력에 따라 모두 가서 도와주면 이를 역인(力因)이라 하나니 이러한 여덟 가지를 보인이라 한다.
보인을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뛰어남이 있어 보를 더욱 수승하게 하나니, 첫째는 마음의 깨끗함이요, 둘째는 방편의 깨끗함이며, 셋째는 복전의 깨끗함이다. 티끌 없는 마음으로 위없는 보리를 희망하여 선근에 회향하고 점점 늘어나서 수승하고 묘하고 순수한 선행을 믿고 즐기어 수행하며 다른 이가 행하는 것을 보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정법에 수순하되 느끼는 대로 관찰하면 이를 마음의 깨끗함이라 한다.
밤새도록 닦아 익히되 부지런하여 끓임이 없고 다시 이 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어 전해 줄 곳이 있음을 보면 수희하여 칭찬하고 그가 받아 행하는 것을 보면 수순하고 훈도하며 또 이 법으로 자신도 바로 세우면 이를 방편의 깨끗함이라 한다. 간략히 방편을 말해주어 바야흐로 방편의 결과가 일어나면 이를 복전의 깨끗함이라 한다.
014_0077_a_01L어떤 것이 보과(報果:보의 결과)인가? 보살이 수명을 구족하는 까닭에 오랫동안 선법을 닦아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성취하게 하면 이를 수구족과(壽具足果)라 한다. 보살이 색을 구족하는 까닭에 대중이 좋아하고 대중이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숭상하고 그의 말을 공경히 들으면 이를 색구족과(色具足果)라 한다.
보살이 인(人)을 구족하는 까닭에 남자의 모습을 성취하여 능히 모든 공덕의 법기(法器)가 되매, 모든 방편과 모든 지견(知見)에 두려울 것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롭게 왕래하는 곳에 모든 중생이 왕래하면서 함께 일을 도모하며 마을과 넓은 들에 마음대로 걸림이 없으면 이를 인구족과(人具足果)라고 한다.
014_0077_b_01L만일 보살이 비록 스스로에게는 힘이 있으나 그가 따라 주지 않으면 이타(利他)라 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힘이 없는데 감화를 받는 자가 순응한다 하여도 역시 이타라 할 수 없고 만일 스스로에게 힘이 있고 감화를 받는 이가 순응하여 이 두 가지가 구족하면 능히 겸하여 이익케 한다.
선바라밀에 의하여 사무량 등을 닦으면 복분(福分)이라 하고, 선바라밀에 의하여 음ㆍ계ㆍ입(陰界入)의 방편과 처비처(處非處)의 방편을 닦아 고ㆍ집ㆍ멸ㆍ도와 선ㆍ불선의 법과 유죄ㆍ무죄의 법과 상법ㆍ하법과 구법(垢法)ㆍ정법(淨法)과 모든 연기(緣起)를 관찰하여 모두를 여실히 분별하고 관찰하면 이를 지분(智分)이라 한다.
014_0077_c_01L근연(近緣)이라 함은 뒤바뀐 연에 머물지 않고 뒤바뀌지 않은 연에 머무는 것이니, 나쁜 벗을 가까이 하여 복과 지혜를 거꾸로 말하고 거꾸로 기억하고 거꾸로 느끼면 이것을 뒤바뀐 연에 머문다고 하고 이와 반대되는 깨끗한 쪽[淨分]은 뒤바뀌지 않는 연에 머문다고 한다.
복과 지혜를 자라게 하는 방편의 의욕ㆍ장애를 여의어 일어나지 않으면 이를 근(近)이라 하나니, 이 세 가지 인(因)이 갖추어 지지 않으면 복과 지혜가 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복과(福果)와 지과(智果)인가? 보살이 복에 의하여 끝없는 생사에서 뭇 괴로움을 갖추 겪는 중생들을 위해 그들의 욕망에 따라 중생을 거두어 준다.
보(報)와 보인(報因)과 보과(報果)가 모두 복에 의해 일어나고 복은 지혜에 의해 일어나나니, 이 두 가지가 구족하여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으며 위없는 보리를 얻지만 만일 복과 지를 구족하지 않으면 끝내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보살의 인섭과섭(因攝果攝)의 자타리(自他利)라 한다.
어떤 것이 차세(此世)와 타세(他世)의 자타리(自池利)라고 하는가? 현세에 복업(福業)을 닦아 여법한 재물을 얻으며, 숙세선근의 인연으로 금생에 과보를 받으며, 선(禪)을 잘 닦아서 이 세간의 즐거움에 머무르며 이 세간에 의지해 있으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며 모든 선정에 의지해 있으면서 현법열반(現法溫繁)을 여실히 하며 세간과 출세간에서 현법열반의 유위법을 향하면 이는 차세(此世)의 자리(自利)라고 하고, 이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면 차세(此世)의 타리(他利)라고 한다.
타세(他世)의 자타리(自他利)라 함은 욕계의 몸[身財]과 색계[禪], 무색계[無色]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근심과 고통에서 저 세계의 인(因)을 닦아 익히나니 이를 타세(他世)의 자타리(自他利)라 한다.
014_0077_c_21L他世欲界身財乃至禪無色,生此世憂苦,思惟修習彼因,是名他世自他利。
014_0078_a_01L이 세계의 기쁨과 즐거움에서 몸과 재물의 인(身財因)과 내지 이 세계에서 물러날 일[退分]과 색계ㆍ무색계의 삼매 [正受]를 사유하고 닦으면 이를 차세(此世)와 타세(他世)의 자타리(自他利)라 한다.
014_0077_c_23L此世喜樂,思惟修身財因,乃至此世退分禪無色正受,是名此世他世自他利。
어떤 것이 필경(畢竟)과 불필경(不畢竟)의 자타리(自他利)라 하는가? 욕계의 몸에 인과가 있거나 범부와 세속의 청정으로 인과가 있으면 이를 불필경자타리(不畢竟自他利:완벽치 못한 자타리)라 하고, 모든 번뇌를 끝까지 멸하고 팔정도와 그에 의해 생긴 세속의 선법(善法)을 필경자타리(畢竟自他利)라 한다.
필경과 불필경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自性)이요, 둘째는 퇴(退)요, 셋째는 수용과진(受用果盡)이다. 자성(自性)이라 함은 열반이니, 필경이다. 모든 유위법은 불필경이고 팔정도는 불퇴(不退)이며 수용하는 과덕이 다하지 않으면 필경이요 나머지 유루의 선한 법은 퇴(退)요 수용하는 과덕이 다하면 불필경이다.
어떤 것이 진실의(眞實義)인가?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실법성(實法性)이요, 둘째는 일체사법(一切事法:모든 사물과 법칙)이다. 이 두 가지 법성을 종류에 따라 나누면 다시 네 가지가 있게 되나니, 첫째는 세간소지(世間所知:세간에서 아는 것)온 둘째는 학소지(學所知:배워서 아는 것)요, 셋째는 번뇌장정지소행처법(煩惱障淨智所行處法:번뇌장이 맑아진 지혜로 행하는 법)이요, 넷째는 지장정지소행처법(智障淨智所行處法 지장이 다한 지혜로 행하는 법)이다.
014_0078_b_01L어떤 것을 세간소지(世間所智)의 진실의(眞實義)라 하는가? 세간의 모든 일은 세속의 법칙[數]에 수순하고 지견도 모두 같으니 이른바 지(地)는 지일 뿐 수(水)나 그 밖의 것이 아니며, 수ㆍ화ㆍ풍(水火風)과 색ㆍ냄새ㆍ맛ㆍ촉감에서 고락(苦樂)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이 물건을 말하면 곧 이 물건일 뿐 저 물건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온갖 결정적인 생각이 시행되는 곳의 사물들은 세간에서 본래 스스로의 기억과 상상으로 알 뿐, 닦아 익힌 수행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니 이를 세간소지진실의(世間所知眞實義)라 한다.
어떤 것을 학소지(學所知)의 진실의(眞實義)라 하는가? 예컨대 세간의 지혜로운 사람이 현지(現智:직접 보거나 듣는 지혜)와 비지(比智:추측해 아는 지혜)와 그리고 스승에게 듣고 생각하거나 닦아 배우는 등 그러한 결정적인 지혜가 시행될 곳에서 결집(結集:외부상황을 파악함)하거나 건립(建立:능동적으로 행동함)하면 이를 학소지진실의(學所知眞實義)라고 한다.
어떤 것이 번뇌장정지(煩惱障淨智)로 행할 곳의 법의 소행처법진실의(所行處眞實義)인가? 모든 성문 연각의 무루지(無漏智)와 혹은 무루의 방편과 혹은 생사를 따르는 세속의 지혜로 닦는 경계이니 그러한 지혜의 반연에서 번뇌장이 깨끗해지고 미래세상의 장애가 끝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이를 번뇌장정지소행처법진실의(煩惱障淨智所行處法眞實義)라고 한다.
이른바 사성제란 고ㆍ집ㆍ멸ㆍ도이니 이 사성제를 관찰하고 무간(無間) 등의 지혜와 무간 등에 의해 일어나는 지혜에 들어간 성문이나 연각들이 음(陰)과 음을 여읜 자리에서 ≺나≻의 실체를 찾을 수 없고 제행(諸行)은 연기(綠起)의 법이어서 생멸로 화합했고, 음과 음을 여읜 자리에는 ≺나≻와 남이란 진실의 성품이 없음을 보고는 지견(知見)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이른바 여러 불ㆍ보살이 무아법(無我法)에 들어가고 들어간 뒤에는 청정해져서 모든 법의 언설을 여읜 자성[一切法離言說自性]과 거짓 이름의 자성[假名自性]에서 모든 망상을 여읜 평등하고 큰 지혜로 행하는 경계이니 제일이며 진실이며 위없고 가없어서 모든 법을 택멸(擇滅)하여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한다.
014_0078_c_01L또 진실상(眞實相)은 두 가지를 건립하나니, 첫째는 유성(有性:성품 있음)이요, 둘째는 무성(無性:성품 없음)이다. 유성(有性)이라 함은 가명자성(假名自性)을 건립하고 시설(施設)하나니 끝없는 옛부터 세간에서 헤아리고 탐착하는 온갖 생각[憶想]의 허망한 근본이다. 이른바 색과 수ㆍ상ㆍ행ㆍ식과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와 지ㆍ수ㆍ화ㆍ풍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과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세간의 거짓 이름은 자성이 있나니 이 를 유성(有性)이라 한다.
무성(無性)이라 함은 색가명(色假名)과 나아가 열반가명(涅槃假名)을 일삼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 것이니 거짓 이름인 가명(假名)에 의지한 것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무성(無性)이라 한다.
014_0078_c_07L無性者,色假名乃至涅槃假名,無事無依假名,所依一切悉無,是名爲無。
위에서 말한 유성과 무성은 둘이나 모두가 법상(法相)을 여의었나니, 속하는 바는 둘이지만 법에는 둘이 없다. 둘이 없다[無二]함은 곧 중도(中道)이니 양 끝[二邊]을 여의었기 때문에 이를 무상(無上)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진실함은 불ㆍ세존의 맑은 지혜의 경계이며 모든 보살들이 배워야 할 법이다.
만일 이 법을 닦아 배운 이를 대지방편보살(大智方便菩薩)이라 하나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보살이 공해탈(空解脫)과 상응하면 생사에 있으면서 생사의 도리를 여실히 알고 생사와 무상(無常) 등의 법칙에 대하여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게 되어 불법을 성취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생사에 대하여 여실히 알면 생사에 대하여 물들어 집착함이 없고 생사의 무상함 등에 대하여 싫어하지 않는 이는 빨리 열반에 들지 않고 열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열반의 도를 만족하여 열반의 공덕과 이익을 깊이 보나니 만일 빨리 열반에 들기를 구하지 않으면 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큰 방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