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4_0340_a_01L불장경(佛藏經) 상권
014_0340_a_01L佛藏經佛藏經卷上 奉入龍華經一名 選擇諸法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014_0340_a_03L姚秦龜茲三藏鳩摩羅什譯


1. 제법실상품(諸法實相品)
014_0340_a_04L諸法實相品第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014_0340_a_05L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큰 비구의 무리와 함께 머무셨는데, 이들은 모두가 지식을 갖춘 이들이었으며, 또 가없는 대보살마하살의 무리는 한량없고 셀 수 없었다.
014_0340_a_06L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中與大比丘僧俱皆是衆所知識及無邊大菩薩摩訶薩衆無量無數
이 때 사리불이 삼매로부터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오른쪽 어깨를 한쪽으로 드러내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갖춰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希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은 생이 없고[無生], 멸이 없고[無滅], 상이 없고[無相], 함이 없는 것[無爲]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합니다.”
014_0340_a_08L爾時舍利弗從三昧起行詣佛所袒右肩頭面作禮白佛言希有世尊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어떠한 이익을 보았기에 찬탄하여 ‘희유합니다. 여래가 설하신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滅)이 없고 상이 없으며 함이 없는 것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한다’고 하는가?”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선정(禪定)에 있으면서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명상(名相)이 없는 법에 있어 곧잘 명상으로써 설하며 언어가 없는 법을 언어로써 설하신다.’
이 일을 사유하여 희유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014_0340_a_12L佛告舍利弗言汝見何利歎言希有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懈舍利弗白佛言世尊我在靜處每作是念尊乃於無名相法以名相說無語言法以語言說思惟是事生希有心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렇다. 이 일은 가장 희유하다. 이것을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말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훌륭한 화공(畵工)이 허공에 여러 가지 색상(色相)을 그려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화공을 희유하다고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a_17L告舍利弗如是如是是事希有第一希有謂是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舍利弗譬如巧畫師畫於虛空現種種色相於意云何是畫師者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014_0340_b_01L“사리불아, 여래가 얻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라고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함이 배(倍)나 희유하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명상(名相)이 없는 법은 생각이 없고 얻음이 없는 것으로서 역시 닦을 것도 없다. 불가사의하여 마음의 의지하는 바가 아니며 희론(戱論)함도 없다. 이는 희론이 의지할 곳이 아니고, 깨달을 것도 관(觀)할 것도 없고 거두는 바도 없다. 마음에 있지 않고, 얻고 얻는 것이 아니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분별함이 없다. 움직임도 없고 성품[性]도 없어 본래가 스스로 공(空)한 것이다. 생각할 수가 없고 나갈[出] 수가 없는 것으로서 일체의 세간이 믿을 수 없는 곳이다. 이와 같이 명상이 없는 법을 명상으로서 설하는 것이 그와 같다. 사리불아,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014_0340_a_22L舍利弗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說一切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所以者何無名相法無念無得亦無有修不可思議非心所依無有戲論非是戲論所可依止無覺無觀無有所攝不在於心非得所得無此無彼無有分別無動無性本來自空不可不可出一切世閒所不能信如是無名相法以名相說如是舍利弗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倍爲希有
사리불아,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 수미산(須彌山)을 씹어 삼켜서 능히 없애고 허공을 날아도 병이 되지 않음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냐, 하지 않으냐?”
014_0340_b_10L舍利弗譬如有人嚼咽須彌能令消盡飛行虛空不以爲患於意云何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사리불아, 모든 부처가 설하는 바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화성(火城)의 높이와 너비와 깊이가 각각 1유순(由旬)으로 네 개의 문으로부터 불꽃을 뿜어낸다. 사람이 마른 풀을 지고 그 속을 지나가니 사나운 바람에 불길이 불어 그 몸을 태우려 하지만, 이 사람은 풀을 태우지 않고 몸도 태우지 않고서 안에서 나올 수가 있어 본래와 같아 다름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b_12L舍利諸佛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譬如火城縱廣深淺各一由旬四門出焰人負乾草於中而過猛風吹焰燒爆其身是人能令火不燒草及不燒身於中得出如本無異於意云何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사람이 돌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바다의 이쪽 기슭에서 저쪽 기슭에 이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b_19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譬如有人以石爲栰從海此岸度至彼岸於意云何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014_0340_c_01L“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서 4천하(天下)와 그리고 모든 수미산의 강과 풀과 나무를 지고서 모기[蚊]의 다리로 사다리를 삼아 올라가 범천(梵天)에 이르고자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b_23L舍利弗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令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譬如有人負四天下及諸須彌山河草木以蚊腳爲梯登至梵天於意云何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연(蓮) 줄기의 실을 수미산에 걸어 허공에 있게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c_05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譬如藕絲懸須彌山在於虛空於意云何爲希有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겁(劫)이 다하도록 큰불이 타오를 때, 사람이 침을 한 번 뱉어서 능히 이 불을 끄고, 또 한 번 불어서 세계와 모든 천궁(天宮)을 다시 이루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c_09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譬如劫盡大火燒人以一唾能滅此火又以一吹還成世界及諸天宮於意云何爲希有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希有世尊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항하(恒河)의 광대(廣大)함을 무량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c_14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恒河廣大爲無量
“무량합니다, 세존이시여.”
如是世尊
“사리불아, 4천하(天下) 가운데 널리 큰비를 내려 항하에 넘치도록 함과 같은데, 사람이 있어 손으로 이 비를 받아 버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c_17L舍利弗四天下中普雨大雨渧如恒河有人以手承此雨渧無所遺落於意云何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014_0340_c_19L希有世尊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수미산을 넓고 크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c_20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舍利弗須彌山王爲高大不
014_0341_a_01L“높고 큽니다. 4천하 가운데 큰돌을 남김 없이 비오듯 뿌려 모두가 수미산과 같이 하는데, 사람이 있어 손으로 이 돌을 받아 개자(芥子)와 같이 버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0_c_22L高大世尊舍利弗四天下中普雨大石皆如須彌有人以手承接此石無有遺落如芥子者於意云何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014_0341_a_02L世尊
“사리불아, 여래의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사람이 있어 일체 중생을 왼손에 놓고 오른손에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갖가지 풀과 나무를 들어 올려 능히 일체 중생 모두로 하여금 한가지로 마음이 기쁘고 즐겁게 하고 그 뜻이 다르지 않게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014_0341_a_03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舍利弗譬如有人以一切衆生置左手中右手接擧三千世界山河草木皆能令是一切衆生同心喜樂其意不異於意云何爲希有不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014_0341_a_08L希有世尊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기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014_0341_a_09L舍利弗如來所說一切諸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
014_0341_b_01L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어 일체의 세간(世間)이 믿고 알기에 어려운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 법은 생각[想]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취(取)도 없고 버리는 것[捨]도 없고 희론(戱論)함도 없고 뜨거운 고뇌도 없다. 차안(此岸)도 아니며 저 피안(彼岸)도 아니며 육지도 아니다. 어리석음이 아니며 현명함도 아니며, 무량한 지혜로써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 사량(思量)으로써 능히 알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행(行)도 없고 상(相)도 없으며 뜨거운 고뇌도 없다.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을 지난 것이다. 마음도 없고 모든 마음을 지난 것이다. 앞[向]도 없고 뒤[背]도 없으며 묶임도 없고 풀리는 일도 없다. 망령됨도 없고 망령된 법도 없다.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은 법도 없다. 어리석음의 그물이 없으며 이름도 없고 말도 없다. 설함이 없고 설하지 않음도 없고, 다함이 없고 다하지 않음도 없다. 행(行)이 없고 행의 상(相)도 없으며 길이 없고 길의 결과[道果:보리와 열반]도 없다. 떠남도 없고 떠나는 모든 것도 지났다. 사유(思惟)함도 없고 뒤범벅이 된 것도 없다. 취(取)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얻음도 얻을 수 없는 것도 없다. 모든 집착을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앤다. 진실이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다. 항상함이 아니고 무상(無常)한 것도 아니다. 밝음이 아니고 밝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둠이 아니고 비춤[照]도 아니다. 마음에 있지 않고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품은 본래가 공(空)이다. 능히 악마를 항복하고 번뇌를 항복하고, 5음(陰)을 항복하고 12입(入)을 항복하고, 18계(界)를 항복하고 5음이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고, 12입이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고 18계가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며, 중생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목숨[壽]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명(命)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유(有)가 있다고 설하는 자와 무(無)가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며, 일체의 모든 삿된 행이 있는 자를 항복한다.
014_0341_a_11L舍利弗如來所說諸法無性所有一切世閒所難信懈何以故利弗是法無想離諸想無念離諸念無取無捨無戲論無惱熱非此岸非彼岸非陸地非癡非明以無量智乃可得解非以思量所能得知無行無無有惱熱無念過諸念無心過諸無向無背無縛無解無妄無妄法癡無癡法無有癡網無名無言無說無不說無盡無不盡無行無行相無道無道果無離過諸離無思惟無雜糅取不捨無得不可得除諸滯著除貪恚非實非虛妄非常非無常非明非不明非闇非照不在心無有性性本能降伏魔降伏煩惱降伏五陰伏十二入降伏十八界降伏說有五陰者降伏說有十二入者降伏說有十八界者降伏說有衆生者說有人說有壽者說有命者說有有者有無者降伏一切諸邪行者
사리불아, 나의 이 거룩한 법은 능히 일체의 탐착하고 내지 법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모든 법의 여실(如實)한 상을 바라지 않는 자와 불법(佛法)을 거스르는 자, 모두를 항복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중생의 아(我)를 설하는 자와 인(人)을 설하는 자와 끊어짐과 멸함을 설하는 자, 상(常)을 설하는 자와 유(有)를 설하는 자와 무(無)를 설하는 자, 여러 법을 설하는 자와 거짓 이름을 설하는 자와 가[邊]를 설하는 자가 있으면, 그 모두는 부처에게 어기고 배반하며 부처와 함께 다투는 자이다. 사리불아, 내지 법에 있어서 조금의 기약이라도 얻는 자는 모두가 부처와 함께 다툰다. 부처와 다투는 자는 모두가 삿된 길에 들며 나의 제자가 아니다. 만약 나의 제자가 아니면 곧 열반과 함께 다투며 부처와 함께 다투고 법과 함께 다투고 승(僧)과 함께 다툰다.
014_0341_b_07L舍利弗我此聖法皆能降伏一切貪著乃至說有法者不信樂諸法如實相者佛法者所以者何舍利弗若有衆生說我者說人者說衆生者說斷滅者說常者說有者說無者說諸法者假名者說邊者皆違逆佛與佛共諍舍利弗乃至於法少許得者皆與佛與佛諍者皆入邪道非我弟子非我弟子卽與涅槃共諍與佛共諍與法共諍與僧共諍
사리불아, 이와 같은 소견을 가진 사람이 출가하여 계를 받은 것을 나는 허가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내가 한 번 마시는 물을 받아도, 스스로 공양(供養)하는 것이라고 허락하지 않는다.
014_0341_b_17L舍利弗如是見我則不聽出家受戒舍利弗如是見人我則不聽受一飮水以自供養
014_0341_c_01L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선하지 못한 탐착한 일을 없애고 나의 법 가운데서 출가하여 도(道)를 구하면 열반을 염하고 열반으로써 염(念)을 삼고 열반을 탐하지 않는다. 필경공(畢竟空)의 법에 있어서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 사람은 더욱 모든 법을 끊기 위한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다. 하물며 이와 같이 선하지 못한 탐착(貪着)이겠느냐? 말하자면 나에게 집착하고 중생에게 집착하고 사람에게 집착하고 법에 집착함이겠느냐? 이 사람은 모든 탐착을 끊기 위한 까닭에 오직 부지런히 힘써 무상삼매(無相三昧)1)를 닦아 무상삼매에 있어서도 역시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일체의 모든 법의 상에 통달하면 이 모두는 하나의 상으로서 이른 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014_0341_b_19L舍利弗若人除捨如是不善貪著事於我法中出家求道不念涅槃以涅槃爲念不貪涅槃於畢竟空法不驚不畏是人尚爲斷諸法故勤行精進何況如是不善貪著謂著我衆生著人著法是人爲斷諸貪著故但勤修習無相三昧於無相三昧亦不取相是人通達一切諸法相皆是一相所謂無相
014_0342_a_01L사리불아, 이는 곧 거룩한 법 가운데서 유순한 법인(法忍)2)을 이룬다고 이름한다. 이 유순한 법인을 얻으면 이는 곧 나의 제자라고 이름한다. 능히 공양을 없애어 몸을 받음에 헛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리불아, 나의 이 진실한 상의 법은 들어갈 수 없고 취할 수 없고 버릴 수 없고 탐착할 수 없으며 설할 수 없어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이다. 기쁨이 없고 기쁨을 탐하는 마음까지도 끊어진 것이다. 뭇 인연과 뭇 인연의 합하고 떠남이 아니다. 길이 없고 길을 끊어 길 없음에 이른다. 모든 언어와 논의(論議)와 음성을 끊는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취함도 없고 착함[着]도 없고 쓰임[用]도 없다. 진실함도 없고 거짓됨도 없고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다. 무너짐도 없고 다툼도 없고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다. 움직임도 없고 생각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다. 때[垢]가 아니고 깨끗함이 아니며 이름이 아니며 상이 아니며 심수(心數: 心所. 마음의 작용)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이 법 가운데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하늘도 없고 용(龍)도 없으며 야차도 없고 건달바도 없다. 구반다(鳩槃茶)3)도 없고 비사사(毘舍闍)4)도 없다. 단견(斷見)5)도 없고 상견(常見)6)도 없고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사람도 없다. 오고 감이 없고 들고남도 없다. 계율도 없고 계율을 범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삼매도 없고 선정도 없고 선정(禪定)의 뿌리7)도 없다. 선(禪)도 없고 선의 뿌리도 없다. 앎[知]이 없고 견해도 없으며 탐욕도 없고 다툼도 없다. 도(道)도 없고 도의 열매도 없다. 지혜도 없고 지혜의 뿌리도 없다. 밝음[明]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다. 해탈도 없고 해탈 아님도 없다. 과보도 없고 과보의 얻음도 없다. 힘도 없고 힘 아님도 없다. 두려운 것도 없고 두려움이 없음도 없다. 생각도 없고 생각의 뿌리도 없다. 앉는 것[坐禪]도 없고 행(行:수행)함도 없으며 위의(威儀)도 없다. 이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없고 저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없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함도 없다. 보리(菩提)도 없고 보리의 분(菩提分)8)도 없고 지혜도 없고 지혜 아님도 없다. 땅[地]이 없고 물이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법(法)도 업고 법 아닌 것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일체의 모든 희론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 보든 것은 영원히 떠나고 차가워 불타지 않는다.
014_0341_c_05L舍利弗是則名爲於聖法中柔順法忍得是柔順法忍名是我弟子能消供養不空受身以者何舍利弗我是眞實相法不可入不可取不可捨不可貪不可說語言道無歡無喜斷貪喜心非衆緣合離衆因緣無道斷道至於無道諸語言論議音聲無形無色無取無著無用無實無妄無闇無明無壞無無合無散無動無念無有分別可得示非垢非淨非名非相非心數法非心所解我此法中無男無女無龍無夜叉無乾闥婆無鳩槃荼毘舍闍無斷無常無我無衆生無人來無去無出無入無戒無犯無淨無垢無有三昧無定無定根無禪無禪根知無見無貪無諍無道無道果無慧無慧根無明無非明無解脫無非解脫無果無得果無無力非力無所畏無無所畏無念無念根無坐無行無有威儀無此無彼無憶想分別無菩提無菩提分無智無非智無地無水無火無無罪無福無法無非法無苦無樂拔諸一切戲論根本一切永離冷而無煙
사리불아, 긴요한 것만을 들어서 이를 말하면 나의 변은 일체의 모든 생각[念]과 일체의 모든 견해와 일체의 모든 번뇌와 모든 증상만(增上慢)9)을 남김없이 깨트린다. 일체의 잊지 않는 모든 것을 염[念]하지 않고 일체의 여러 가지 언어를 끊는다. 나의 이 법 가운데에는 항상 함도 없고 무상함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단견(斷見)도 없고 상견(常見)도 없으며 아상(我相)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다. 인상(人相)도 없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으며 명상(命相)도 없고 생도 없고 멸(滅)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여래는 법에 있어서 모든 소득이 없으며 멸하는 바는 있다. 까닭에 이름하여 열반이라 이름한다. 또 열반을 얻는다고 보지 않는다.
014_0342_a_06L舍利弗擧要言之我法悉破一切諸念一切諸見一切諸結諸增上不念一切諸所憶念除斷一切種種語言我是法中無常無無常無苦無樂無垢無淨無斷無常無我無衆無人無壽者無命者無生無滅以故舍利弗如來於法都無所得有所滅故名爲涅槃亦不見有得涅槃
사리불아, 부처도 또한 열반을 염(念)하지 않는다. 열반으로서 소원을 삼지 않고 또 열반에 탐착하지 않는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 제일로 기특하고 희유하다 한다. 이른바 여래의 일체의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다고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014_0342_a_14L舍利弗佛亦不念涅槃不以涅槃爲念亦不貪著涅槃是故當知是爲第一奇特希有所謂如來說一切法無生無滅無相無爲令人信解倍爲希有

2. 염불품(念佛品)
014_0342_a_18L念佛品第二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 가운데서 무엇을 악지식(惡知識)이라 하고 무엇을 선지식(善知識)이라 합니까?”
014_0342_a_19L爾時舍利弗白佛言世尊於此法中云何爲惡知識云何爲善知識
014_0342_b_01L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비구가 있어서 다른 비구를 가르치는데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를 염(念)하고 법을 염하고 승(僧)을 염하고 계를 염하고 보시를 염하고 하늘을 염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몸을 관하여야 하고 취(取)는 이 몸의 상으로서 이른바 부정(不淨)한 것이며 마땅히 일체의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모두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일체의 법은 공하여 아(我)가 없다고 관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반연하는 바의 상을 취하여 마음이 반연하는 것 가운데 묶어 오로지 공의 상을 염하여야 한다. 마땅히 선근(善根)을 원해야 한다. 마땅히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이다.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일 뿐이라, 끊기 위한 까닭에 관(觀)하고 염(念)하는 것을 닦아라. 말하자면 탐욕을 끊기 위해서는 부정(不淨)한 상을 관하고, 성냄을 끊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관하고,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서는 인연의 법을 관하여라.
항상 깨끗한 계를 염하여 깊이 공의 상을 취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4선(禪)을 얻는다 한다. 마음을 다하여 도를 구하고 선하지 않은 법은 이 모두가 손해를 가져오는 고뇌라고 관하여라. 선한 법을 관하는 것은 곧 가장 안온한 것이다. 일심으로 수도하여 분별해서 밝게 관찰하라. 선하고 선하지 않는 법은 취의 상일 뿐이라고 밝혀라. 오직 열반을 관하면 안온하고 적멸하다. 오직 열반을 사랑하면 필경은 청정하다고 이와 같이 가르치면 이름하여 삿된 가르침이라 한다. 이를테면 이는 바른 가르침이면서도 곧 삿된 가르침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악지식(惡知識)이라 한다. 이 사람을 이름하여 나를 비방하고 외도(外道)를 돕는 자라 한다. 또 남을 위하여 삿된 길을 설하는 자라 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나쁜 사람에게서 내가 한 그릇의 마시는 물을 받았어도 그것으로 스스로 공양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받은 것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나의 법 가운데에는 이와 같이 많은 증상만(增上慢)의 가르침이 있다.
014_0342_a_21L佛告舍利弗若有比丘教餘比丘比丘當念佛念法念僧念戒念施念天汝當觀身取是身相所謂不淨觀一切諸有爲法皆悉無常觀一切法空無有我比丘汝當取所緣相繫心緣中專念空相當樂善法當取不善法相取不善法相已爲令斷故觀念修習謂爲斷貪欲觀不淨相爲斷瞋恚觀慈心相爲斷愚癡觀因緣法常念淨戒深取空相勤行精進爲得四禪專心求道觀不善法皆是衰惱觀於善法最是安隱一心修道分別諦觀善不善法諦取相已唯觀涅槃安隱寂滅唯愛涅槃畢竟淸淨如是教者名爲邪教謂是正教而是邪教舍利弗如是教者名惡知識是人名爲誹謗於我助於外道亦爲他人說邪道法舍利弗如是惡人我乃不聽受一飮水以自供養我說教者不說受者舍利弗於我法中多有如是增上慢教
사리불아, 만약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계를 받고, 다섯 해 동안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을 남김 없이 버리지 못하고, 이 가르침 중에 마음을 부지런히 정진하여 스스로 소득 없음[無所得]을 얻는 일이 있어도, 비구가 와서 스스로 묻지 않으면, 나는 이 사람에게 다섯 해가 있었지만 아직도 삿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고 외도의 법에 섞여 악마의 가르침을 순행(順行)하는 자라고 설한다.
014_0342_b_19L舍利弗若受教者受戒五歲不能悉捨如是所教於是教中勤心精進自有得無所有比丘不往諮問我說此人雖有五歲猶名邪見雜外道法順行魔教
014_0342_c_01L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서 이 가르침을 받기를 마치고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을 듣고서 곧 스스로나 먼저 받는 자는 이 모두가 삿된 견해라고 깨달아 알고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에 있어서 의심이 없고 뉘우침이 없고 깊이 통달하여 일체의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에 의지하지 않으면 사리불아, 나는 이 사람을 설하여 청정한 범행(梵行)을 얻었다고 이름한다.
014_0342_b_23L舍利弗若有比丘受是教已聞空無所得法卽自覺知先受者皆是邪見於空無所得法無疑無悔深入通達不依一切我見人舍利弗我說此人名爲得淸淨梵行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이와 같은 소득이 없는 인가를 성취하면 지금은 아직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10)10)생사의 괴로움을 여읜 진여(眞如). 번뇌의 장애를 끊고 이숙(異熱)의 보과(菩果) 현재(現在)의 몸까지도 멸하여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이름함.
을 얻지 못하였다 하여도 나는 이 사람에게, 미륵부처님 때 마땅히 첫 모임에 있게 되고 그 때 미륵부처님께서 환희하기를 세 번하고 이 사람이 석가모니부처의 가운데서 소득이 없는 인가를 성취했다고 말하도록 수기할 것이다.
014_0342_c_04L舍利弗若有比丘成就如是無所得雖現未得無餘涅槃我記是人勒佛時當在初會時彌勒佛歡喜三是人能於釋迦牟尼佛法中成就無所得忍舍利弗若在家出家成就此忍我記是人必得涅槃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기를 마치고서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無所得]11)을 듣고, 곧 그 때 놀라고 두려워하면 이 사람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구해 주는 자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어서 곧 지옥에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놀라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자, 이 사람은 곧 나쁜 길을 구족한 자라고 한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스스로 설하기를 소득이 있음[有所得]12)은 곧 나쁜 길의 분[惡道分]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부처가 얻는 법에는 차별이 없다. 이것이라든가 소견이 아니라든가 혹 차별하지 않으면 이는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다.
014_0342_c_10L舍利弗有人受如是教已聞空無所得法卽時驚畏是人可愍無有救者無有依直趣地獄何以故舍利弗於佛教中驚疑畏者是人則爲具足惡道以者何我常自說有所得者是惡道何以故舍利弗佛所得法無有差是與非是若可差別是有所得
014_0343_a_01L 사리불아, 사람은 5역죄(逆罪)의 무거운 악을 범하기보다는 모름지기 아견(我見)ㆍ인견(人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견(壽見)ㆍ명견(命見)ㆍ5음견(陰見)ㆍ12입견(入見)ㆍ18계견(界見)ㆍ지계에 탐착하고, 지계에 탐착한 견해와 삼매에 탐착함과 삼매에 탐착한 견해와 부처의 생각에 의지하고 법의 생각에 있어서 얻음과 승(僧)에 있어서 끊어야할 일을 성취한 몸에 대한 견해를 성취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불법 가운데에 신견(身見)을 성취함은 승(僧)의 일[事]13)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부처의 제자 무리는 마음에 분열이 없어야 한다. 사리불아, 부처의 제자 무리는 착하지 않는 자가 없고 계를 깨트리는 자가 없으며 견해를 깨트리는 자가 없으며 위의를 깨트리는 자가 없다.
014_0342_c_17L利弗人寧成就五逆重惡不成就我衆生見人見壽見命見界見貪著持戒著持戒見貪著三昧著三昧見依於佛想得於法想於僧斷事成就身見何以故於佛法中成就身見不在僧數舍利弗佛弟子衆心無分別舍利弗佛弟子衆無不善者破戒者無破見者無破威儀者
사리불아, 무엇을 악(惡)이며 착하지 않은 것이라 하는가? 불법 가운데에 승(僧)의 상응한 행에 있지 않는 것을 악이며 착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마음과 마음에 상응한 행의 법의 온갖 인연과 합하고 진실이 없는 일에 다만 분별할 뿐이다. 분별을 까닭으로 해서 얻음이 있는 것을 헤아린다. 이 사람은 모든 언설(言說)까지도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선(善)과 선이 아닌 법도 거룩한 법 중에서는 악하고 선하지 않다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모든 즐거운 곳 안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여래의 법은 이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다.
014_0343_a_02L舍利何等爲惡不善於佛衆中不在僧名惡不善謂心心數法與諸緣合無眞實事但作分別以分別故計有所得是人乃至所有言說心心相續乃至善不善法於聖法中名惡不善何以故舍利弗所有樂處中必有苦如來法者滅是苦樂
사리불아, 여래의 얻는 것, 이 중에는 욕심도 없고 욕심이 아닌 것도 없다.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생각[思]도 없고 생각[想]도 없고 닦음도 없다. 내지 또한 공(空)이라는 생각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공의 생각을 헤아리면 곧 이는 아상(我想)이며 중생상(衆生想)이다. 이는 상상(常想)이고 이는 단상(斷想)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온갖 생각에 따르게 되면 곧 온갖 생각을 낳는다. 이는 모두가 삿된 것에로 떨어지는 것이다.
014_0343_a_09L舍利弗如來所是中無欲亦無非欲無樂無苦思無想無修乃至亦無空想何以故舍利弗若計空想卽是我想衆生想是常想者是斷想者何以故舍利隨所有想則生諸想是皆墮邪
사리불아, 공은 생각이 없음에 이름한 것이며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 한다. 공이라는 생각까지도 역시 공한 것이며,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공중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내지는 역시 공이라는 생각도 없다. 이런 까닭에 공의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유위의 법은 알고 이해할 수 있다. 공은 알 수 없고 또 이해할 수가 없다. 사량(思量)하는 것이 아니다. 이 까닭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014_0343_a_14L利弗空名無念是名爲空空念亦空是名爲空舍利弗空中無善無惡至亦無空想是故名空舍利弗諸有爲法可知可解空非可知亦非可解非可思量是故名空舍利弗空非念何以故空無想故是故名空
사리불아, 공은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공은 생각이 없는 까닭이며 이 까닭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무슨 까닭에 공의 행을 공하다고 설하는가? 일체의 모든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또 공이라는 생각까지도 역시 생각하지 않는 이것을 공의 행이라고 이름한다.
014_0343_a_20L舍利何故說行空行不念一切諸想至空想亦復不念是名空行
014_0343_b_01L사리불아, 생각이라고 하는 이름은 내지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곧 이름하여 생각이라 한다.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을 곧 생각이 없다고 이름한다. 모든 생각을 떠났기 때문에 이름하여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취(取)하는 바의 생각에 따르면 이 모두는 삿된 소견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거룩한 법 가운데서 적멸(寂滅)을 얻는 것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말과 설(說)함이며, 하물며 설하는 자이겠느냐. 이와 같은 공의 법을 무엇으로써 설하겠느냐?
014_0343_a_22L舍利弗想名乃至心有所念卽名爲想無所念者乃名無想離諸想故名爲無想隨所取想皆是邪見何以故舍利弗於聖法中計得寂滅皆墮邪見何況言說何況說者如是空法以何可說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은 무슨 까닭에 온갖 언어를 설하여 삿되다고 이름하는가? 일체의 법에 통달할 수가 없는 것은 이는 곧 모두가 언설(言說)을 덮는 것이다. 이 까닭에 여래는 모든 언어(言語)는 이 모두가 삿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언어가 있으면 그 실(實)을 얻지 못한다.
014_0343_b_04L舍利弗諸佛何故說諸語言皆名爲不能通達一切法者是則皆爲言說所覆是故如來知諸語言皆爲是乃至少有言語不得其實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모두가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법에 있어서 체성(體性)을 얻지 않고 또 생각을 얻지 않는다.
014_0343_b_08L舍利弗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皆是無想無念何以故如來於法不得體性亦不得念
사리불아, 여래는 무슨 까닭에 염처(念處)14)가 있다고 설하는가? 사리불아, 경(經)에 설하기를 ‘만약 사람이 4념처(念處)15)를 얻으면 이 사람은 능히 모든 법의 체성(體性)을 얻고 능히 스스로의 몸을 얻고 자아[我]를 얻고 사람으로 나는 것을 얻는다. 이에 속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법의 다른 상(相)은 공임을 나타내지 않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하는 것이다. 4념처의 성품은 무성(無性)16) 무처(無處)이다. 생각이 없고 설함이 없어 탐착함도 없다. 생각의 성품은 더욱 없다. 하물며 염처(念處)이겠느냐? 이 까닭에 여래는 설하여 염처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법에 만약 결정적인 체성(體性)이 머리털을 끊어 그 100분(分)의 일이라도 있다면, 이에 곧 모든 부처님은 세상에 나지 않는다. 또 끝내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다고 설하지도 않는다. 사리불아, 모든 법은 실로 공하여 성품이 없는 그 하나의 상(相)뿐이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으로서 여래는 남김없이 본다. 여래는 이로써 염처가 있다고 설한다.
014_0343_b_11L舍利弗如來何故說有念舍利弗經說若人得四念處是人能得諸法體性能得自身得我得人無有是處示法別相空故說四念處四念處性無性無處無念無說無有貪著念性尚無何況念處是故如來說名念處舍利弗諸法若有決定體如析毛髮百分一者是則諸佛不出於世亦終不說諸法性空舍利弗諸法實空無性一相所謂無相如來悉見如來以是說有念處
014_0343_c_01L 사리불아, 염처를 이름하여 무처(無處)ㆍ무비처(無非處:속한 대상이 아닌 것도 없음)ㆍ생각이 없음[無念]ㆍ생각의 업도 없음[無念業]ㆍ생각이 없음[無想]ㆍ분별이 없음ㆍ뜻이 없음ㆍ뜻의 업이 없음ㆍ생각[思]이 없음ㆍ생각[思]의 업이 없음ㆍ법이 없음ㆍ법의 상이 없음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합하고 흩어짐이 없다. 이 까닭에 현성(賢聖)을 이름하여 분별이 없는 자라고 한다. 이것을 염처라고 이름하는 것은 여래가 이것으로써 염처가 있음을 설하고 소유가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염처라고 함은 염불(念佛)에 수순하는 것을 염처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014_0343_b_21L舍利弗處名爲無處無非處無念無念業想無分別無意無意業無思無思業無法無法相皆無合散是故賢聖名爲無分別者是名念處如來以是說有念處隨順無所有故名爲念處順念佛名爲念處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염불이라 하는가? 소유 없음을 보는 것을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은 무량(無量)하여 불가사의하고 칭량(稱量)할 수가 없다. 이 뜻 때문에 소유가 없음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염불(念佛)이라고 한다. 실로 분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분별이 없음이다. 이 까닭에 말하기를 분별이 없음을 염하는 것, 이가 곧 염불이라고 한다. 또 다음으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법은 필경은 공하여 소유가 없다. 이 필경은 공하여 소유가 없는 법으로써 염불하는 것이다. 또 다음으로, 이와 같은 법 가운데는 내지 작은 생각까지도 더욱 불가득이다. 이를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이 염불의 법은 언어의 길이 끊기고 모든 생각을 지나쳐 나온 것이다. 불가득인 생각, 이를 염불이라 한다.
014_0343_c_04L舍利弗云何名爲念佛見無所有名爲念佛舍利弗佛無量不可思議不可稱量以是義見無所有名爲念佛實名無分別諸佛無分別以是故言念無分別卽是念佛復次見諸法實相名爲見佛何等名爲諸法實相所謂諸法畢竟空無所有以是畢竟空無所有法念復次如是法中乃至小念尚不可是名念佛舍利弗是念佛法斷語言道過出諸念不可得念是名念佛
사리불아, 사리불아, 일체의 모든 생각[念]은 모두가 적멸의 상이다. 이 법에 수순하면 이를 곧 이름하여 염불을 닦고 익힌다고 한다. 색(色)으로써 염불하지 말아라. 무슨 까닭인가? 색을 생각하면 상(相)을 취하고 맛을 탐하여 알음알이[識]가 되기 때문이다. 모양도 없고 색도 없고 반연도 없고 성품도 없다. 이를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분별함이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것, 이것이 참다운 염불인 것이다.”
014_0343_c_14L舍利弗一切諸念皆寂滅相隨順是此則名爲修習念佛不可以色念何以故念色取相貪味爲識無形無色無緣無性是名念佛是故當知無有分別無取無捨是眞念佛

3. 염법품(念法品)
014_0343_c_19L念法品第三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하여 또 이 법을 설하는 것을 악지식(惡知識)이라 합니까?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하여 또 이 법을 설함을 선지식(善知識)이라 합니까?”
014_0343_c_20L爾時舍利弗白佛言世尊云何爲人亦說是法爲惡知識世尊云何爲人亦說是法爲善知識
014_0344_a_01L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비구가 있어 다른 비구에게 가르치면서 ‘비구여, 그대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불사(佛事)인 공(空)을 염하고 인연하는 것을 염하는 것, 이것은 마땅히 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염하는 것이 공한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또한 비워야[空] 한다. 이는 성품이 없는 공으로서 능히 색(色)에 대한 생각을 끊고 능히 취한다는 생각도 끊는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이 때, 생각[想]17)이 없음도 얻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염(念)이겠느냐? 이 때 이 사람은 전혀 소유함이 없어 적멸(寂滅)하여 성품이 없다. 온갖 생각을 모으지 않아 일체의 법을 멸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곧 염불을 닦아 익힌다고 한다. 염불이란 선(善)하고 선하지 않은 일체의 크고 작은 생각을 깨트리는 것을 이름한다. 크고 작은 생각도 없고 적연(寂然)하여 생각이 없음을 이름하여 염불이라 한다. 무슨 까닭에 마땅히 크고 작은 생각으로 모든 부처를 기억하고 생각하지 말라 하는가? 크고 작은 생각이 없음을 이름하여 청정한 염불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念] 중에는 곧 미세한 마음과 마음이 생각하는 업도 없다. 하물며 몸과 입의 업이겠느냐? 또 염불하는 자는 모든 생각을 떠난다. 온갖 생각이 마음에 있지 않으면 분별함이 없고 이름이 없고 장애가 없고 욕망이 없고 얻음이 없어 크고 작은 생각이 일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생각은 이 모두가 삿된 견해이다.
014_0343_c_23L佛告舍利弗若有比丘教他比丘比丘汝今當知念佛事念所緣處是不應念汝所念空念亦復空是無性空能斷色想能斷取是人爾時不得無想何況於念人爾時都無所有寂滅無性不集諸滅一切法是則名爲修習念佛佛名爲破善不善一切覺觀無覺無觀寂然無想名爲念佛何以故不應以覺觀憶念諸佛無覺無觀名爲淸淨念佛於此念中乃無微細心心念況身口業又念佛者離諸想諸想不在心無分別無名字無障㝵無欲無得不起覺觀何以故舍利弗隨所念起一切諸想皆是邪見
사리불아, 소유 없음에 따르면 크고 작은 생각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이에 통달한 자를 염불하는 자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생각 중에는 탐욕이 없고 집착함도 없다. 거슬림도 없고 순종함도 없고 이름도 없고 생각[想]도 없다. 사리불아, 생각도 없고 말도 없는 것을 곧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는 곧 미세한 작은 생각도 없다. 하물며 거친 몸과 입과 뜻의 업이겠느냐?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없는 곳에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싸움이 없고 다툼이 없으며 생각도 없고 분별함이 없다. 공적(空寂)18)하여 성품이 없어 모든 크고 작은 생각을 없앤다. 이것을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014_0344_a_14L舍利弗無所有無覺無觀無生無滅通達是者名爲念佛如是念中無貪無著逆無順無名無想舍利弗無想無語乃名念佛是中乃無微細小念何況麤身口意業無身口意業處無取無無諍無訟無念無分別空寂無性滅諸覺觀是名念佛
014_0344_b_01L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생각을 성취한 자로서 4천하(天下)의 땅을 굴리고자 바라면 뜻에 따라서 능히 굴린다. 또 능히 백천억(百千億)의 악마를 항복하게 한다. 하물며 무명(無明)에 가리워 거짓된 인연으로 일어난 결정함이 없는 상(相)이겠느냐? 이 법은 이와 같이 생각도 없고 무익한 의론(議論)도 없다.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어 설할 수가 없고 분별할 수가 없다. 어두움도 없고 밝음도 없다. 마왕(魔王)이나 혹은 마왕의 백성이 능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세속의 언설(言說)로써 교화함이 있을 뿐이어서 이러한 말을 한다.
‘그대가 부처님을 염(念)할 때, 조그마한 생각이라도 취하지 말라. 무익한 의론을 하지 말아라. 분별을 하지 말아라. 무슨 까닭인가? 이 법은 모두가 공하여 체성(體性)이 없다. 하나의 상도 염하지 말아야 한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인 것이다. 이것을 진실한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생(生)이 없고 멸(滅)이 없고 상(相)이 없고 함[爲]이 없음이다. 무슨 까닭에 여래는 이름하여 색이라 하지 않고, 이름하여 생각[想]이라 하지 않으며, 이름하여 생각[念]이라 하지 않으며, 분별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거슬림이라 하지 않고, 순종함이라 하지 않고, 취(取)라 하지 않고, 버림이라 하지 않고, 선정이 아니며 지혜가 아니며 밝음[明:慧明]도 아니며 무명(無明)도 아니며 여래는 설할 수 없고 불가사의하고 상이 없다 하는가? 그대는 지금 취(取)의 상을 즐기지 말라. 무익한 의론을 즐기지 말라. 부처님은 모든 법에 있어서 집착함이 없고 헤아림[比量]이 없다. 법에 집착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처를 아직 얻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생각[念]에 있겠는가?’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이름하여 선지식이라 한다. 제일의(第一義) 중에는 결코 이는 선지식이다, 이는 악지식이다고 하는 일이 없다.
014_0344_a_21L舍利弗若人成就如是念者欲轉四天下地隨意能亦能降伏百千億魔況弊無明虛誑緣起無決定相是法如是無想無戲論無生無滅不可說不可分別無闇無明魔若魔民所不能測但以世俗言說有所教化而作是言汝念佛時莫取小想莫生戲論莫有分別何以故是法皆空無有體性不可念一相所謂無相是名眞實念佛所謂無生無滅無相無爲何以故如來不名爲色不名爲想不名爲念不名分別逆不順不取不捨非定非慧非明非無明如來不可說不可思議無相今莫樂取相莫樂戲論佛於諸法無執無量不見有法可執可量是人於佛猶尚不得何況於念舍利弗如是教者名善知識第一義中無有決定是善知識是惡知識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다른 비구를 가르치는데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모든 법을 분별하고 관찰해야 한다. 또 다시는 법의 상을 염하지 말라’고 한다. 이 비구는 이와 같이 닦아서 마음에 묶이고 집착함이 없어 곧 능히 모든 법이 일상(一相)임을 통달하면 이른바 무상(無相)이다. 이 사람은 더욱 법의 생각을 내지 않는다. 하물며 아(我)ㆍ아상(我想)과 인상(人想)이겠느냐?
사리불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법상(法想)을 염하는 자, 이 사람이 능히 일체의 법을 멸하겠느냐, 아니겠느냐?”
014_0344_b_16L復次舍利弗有比丘教餘比丘比丘汝當分別觀察諸法亦復莫念法相是比丘如是修習心無繫著則能通達諸法一相所謂無相是人猶尚不生法想況我人想舍利弗於意云何念法想者人能滅一切法不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사리불아, 만약 나무에 뿌리가 없는데 능히 가지와 잎이 있고 꽃과 열매가 맺겠느냐, 맺지 않겠느냐?”
014_0344_b_22L舍利弗如樹無根能有枝葉華果實不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014_0344_b_23L不也世尊
014_0344_c_01L“이와 같이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모든 법의 근본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 사람이 능히 모든 법상(法想)을 생하겠느냐, 생하지 않겠느냐?”
014_0344_c_01L如是舍利弗若人不得諸法根是人能生諸法想不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법상(法想)을 염함을 얻지 못하면, 이 사람이 능히 일체의 법을 멸하겠느냐, 아니겠느냐?”
014_0344_c_02L利弗若人不得不念法想是人能滅一切法不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이 사람은 법에 있어서 법상을 얻지 못함을 얻는다. 멸에 있어서도 또 생이 없음과 멸이 없음을 분별하지 못함을 얻는다. 이 사람은 이 때, 낳지 아니 하고 멸하지 아니하여도 열반을 얻은 자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제일의(第一義) 중에는 선지식(善知識)도 없고 악지식도 없다.
014_0344_c_04L是人不得於法不得法相不得於滅亦不分別無生無滅是人爾時不生不滅不名得涅槃者亦復不名無得涅槃舍利弗是教者名善知識第一義中無善知無惡知識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상(相)을 성취하면 세간에서 희유한 일로서 이치에 어긋나지 않음을 얻는다. 진실한 소견 때문이다.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바르게 짓는 것과 바른 행(行)과 바른 길과 바른 이해를 이름한다. 이치에 어긋남이 없고 여실하게 본다. 이 까닭에 여래는 설하여 바른 견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만약 중생이 있어서 이치에 어긋남이 없고 여실하게 보는 자는 곧 바른 견해가 있다 한다. 만약 아상(我想)ㆍ인상(人想)ㆍ중생상(衆生想)을 낳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의 이 모두는 삿된 행이다.
014_0344_c_09L舍利弗若人成就如是相者世閒希有得不顚倒眞實見故是爲正見復次舍利弗正見者名爲正正行正道正解無有顚倒如實而是故如來說名正見舍利弗若有衆生無有顚倒如實觀者則有正見若生我想人想衆生想者當知是人皆是邪行
사리불아, 부처와 제자는 나[我]가 있다고 설하지 않으며, 사람이 있다고 설하지 않으며 중생도 설하지 않고 수명(壽命)도 설하지 않으며, 변한다든가 변하지 않음을 설하지 않으며 이 까닭에 부처와 제자는 이름하여 바른 견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바르게 관(觀)하여 이치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014_0344_c_16L舍利弗佛及弟子不說有不說有人不說衆生不說壽命說斷常是故佛及弟子名爲正見以故正觀不顚倒故
014_0345_a_01L사리불아, 일체의 범부는 이 일 중에서 능히 드는 자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범부는 모두가 바른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바른 견해에 수순하여 유순(柔順)하다는 인가를 얻은 자가 있어도 여실할 수는 없다. 사리불아, 이 까닭에 바른 견해와 삿된 견해라는 구별을 이름한 것이다. 여실하게 보는 까닭에 이름하여 바른 견해라고 한다. 세간의 즐거움의 원인을 보고서 재물을 증장하는 것, 이는 세간의 바른 견해이지만 이는 모두가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서 생사(生死)를 면치 못한다. 사리불아, 부처는 세간의 바른 견해를 설하여 이는 게으르고 열등(劣等)한 법이라고 설한다. 현성(賢聖)은 ‘이것은 곧 바른 견해이다. 이것은 곧 삿된 견해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짓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일체의 모든 견해는 모두가 허망함을 인연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만약 ‘이것은 곧 바른 견해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짓고 말하면 이 사람은 곧 삿된 견해인 것이다. 사리불아, 거룩한 법 가운데서는 일체의 모든 견해의 근본을 뽑아 끊고 일체의 모든 언어의 길을 남김없이 끊는다. 허망한 것들 가운데 손에 잡히고 쥐는 것이 없음과 같다. 모든 사문(沙門)의 법도 마땅히 모두가 이와 같아야 한다.”
014_0344_c_19L舍利弗一切凡夫於此事中無能入者何以故一切凡夫都無正見但有隨順正見得柔順不能如實舍利弗是名正見邪見差別如實見故名爲正見見世樂因增長財利是世閒正見是皆欺誑不免生死舍利弗佛說世閒正見是說懈怠下劣者法賢聖不作是念此是正見此是邪見所以者何一切諸見皆從虛妄緣起舍利弗若作是念是正見是人卽是邪見舍利弗於聖法中拔斷一切諸見根本悉斷一切諸語言道如虛空中手無觸閡諸沙門法皆應如是

4. 염승품(念僧品)
014_0345_a_09L念僧品第四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거룩한 무리라 합니까?”
014_0345_a_10L舍利弗白佛言世尊何等爲聖衆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 능히 믿고 이해하여 일체 모든 법의 생이 없음과 멸(滅)이 없음과 일어남이 없음과 상(相)이 없음에 통달하고 이와 같은 인가를 성취한다 하여도 아직 나[我]를 얻지 못한다. 하물며 수다원(須陀洹)19)과 아나함(阿那含)을 얻겠느냐, 하물며 아라한을 얻겠느냐? 어찌 또 법을 얻고 어찌 남자와 여자를 얻고, 어찌 도를 얻고, 어찌 이와 같은 일들을 얻겠는가? 이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하는 이것도 역시 얻지 않는다.
014_0345_a_11L利弗若有人能信解通達一切諸法無生無滅無起無相成就如是忍尚不得我況得須陁洹斯陁含阿那含況得阿羅漢況復得法況得男女況得道況得如是等事是名聖衆亦不得
014_0345_b_01L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중생으로서 조금이라도 능히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 자, 혹은 능히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 자는 마음에 전도(顚倒)됨이 없고 서로가 함께 알고 이해한다. 법으로 해서 화합하여 다음의 존재를 받지 않는다. 모든 세간은 다만 허망함에 인연해서 일어남을 안다. 이 사람은 곧 다시는 이 몸에 머물지 않는다. 이 인연으로 해서 설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이 사람은 이 언어에 있어서 다시는 이름과 상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도 없고 무익한 의론도 없는 일을 모은다. 이것을 승보(僧寶)공양을 받음에 합당하다고 이름한다. 이에 어긋남이 없는 진실한 뜻을 얻기 까닭이다. 이 사람이 이 방편(方便)으로 승(僧)을 염하여도 이 일도 또한 공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는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014_0345_a_17L復次舍利弗衆生少能信解無生無滅無相法者若能信解無生無滅無相法者心無顚倒共相知解以法和合不受後有知諸世閒但從虛妄緣起是人則更不住是身以是因緣說名聖衆是人於是語言亦復不得謂諸名相但集無相無戲論事是名僧寶應受供養得無顚倒眞實義故是人以是方便念僧是事亦空舍利弗如是教者名善知識
사리불아, 일체의 언어의 길을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거룩한 법 중에 있으면서 언어에 의지하여 진실한 뜻을 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어도 역시 불가득(不可得)이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언어를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014_0345_b_03L舍利弗斷一切語言道名爲聖衆何以故聖法中所因語言說眞實義如是語言亦不可得是故當知斷諸語言爲聖衆
사리불아, 혹 사람이 있어서 ‘만약 이 가운데 언설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다면 무엇을 이름하여 승(僧)이라 할 것인가?’고 말한다면, 사리불아, 나는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은 답을 한다.
승(僧)의 무리를 이름하여 여실한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 일은 결정적이며 또 불가득이다. 한가지로 모두가 하나의 배움이며 하나의 참음이며 하나의 맛이다. 이 일도 또한 세속의 말이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제일의 중에는 실로 이름하여 승법(僧法)은 항상하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이름하여 정해진 일이 없다. 만약 성인(聖人)이 설하여 이 법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을 곧 잘못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불별을 짓고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용(龍)이다, 이것은 야차(夜叉)이다. 이것은 건달바(乾闥婆)이다, 이는 구반다(鳩槃茶)이다,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다 라고 이러한 분별을 짓기를 마치고서 여러 가지 일을 얻고 여러 가지 일을 얻는 까닭에 이러한 말을 한다. 이는 앉음이고 이는 눕는 것이며, 이는 가는 것이고 이는 머무는 것이라고 성인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는 까닭에 또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는 하늘이다, 이는 용이며,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을 얻지 않는 자는 능히 이 설(說)을 지어 이는 앉음이며 이는 눕는 것이며, 이는 가는 것이며, 이는 머무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지 않는가?”
014_0345_b_07L舍利弗或有人言若於此中無有言說無有定者何名爲僧舍利我於此中有如是答衆僧名爲示如實事此事決定亦不可得俱同一學一忍一味是事亦以世俗語故說非第一義第一義中無有定實名爲僧法常不壞者聖人若說言有是法是卽爲污所以者何若人作是分別是男是女是天是龍是夜叉是乾闥是鳩槃茶是法是非法作是分別得種種事得種種事故作是言坐是臥是行是住聖人得諸法實相亦不分別是男是女是天是龍至是法是非法不分別故不得種種不得種種法者能作是說是坐是臥是行是住不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사리불아, 만약 사람으로서 이는 남자이다, 이는 여자이다, 이는 하늘이다, 이는 용이다, 내지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이 한 짓은 허망하지 않는가?”
014_0345_b_22L舍利弗人言是男是女是天是龍乃至是法是非法是人所說非虛妄耶
014_0345_c_01L“허망합니다. 세존이시여.”
014_0345_c_01L虛妄
“사리불아, 만약 이 허망함에 들지 않으면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전도되지 아니한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
사리불아, 선하지 않은 모든 것, 알아야 한다는 모든 것, 얻어야 한다는 모든 것, 이 같은 일체의 모든 선하지 않은 법은 모두가 명상(名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현성(賢聖)의 법 중에서는 모든 명상을 끊는다. 또 명상을 염하지 않는다. 명상을 얻지 않는다. 어찌 이것은 거룩하고 이것은 거룩한 무리라고 마땅히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명상을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법에 계속한 대상으로서의 경계[處]가 있다면 깨트려야 하고 끊어야 한다. 현성의 법 중에는 이름도 없고 상도 없으며 언어도 없다. 모든 언어가 끊겼으며 합하고 흩어짐도 없다. 만약 승(僧)이 없으면 곧 거룩한 무리를 깨트린다고 말하나 이도 또한 얻지 못한다. 이른바 이름과 상의 허망한 생각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 집착하고 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후세에 몸을 받는다. 모든 견해에 탐착하면 곧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 생한다. 사리불아, 다섯 가지 쌓임은 이 모두가 허망한 탐착(貪著)이다. 이를 악도(惡道)라고 이름한다. 현성의 무리에게는 이 일이 없다. 다만 허망한 인연 때문에 3계(界)가 일어나는 것을 안다. 이 일을 아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014_0345_c_02L舍利弗若不入是虛妄者名爲聖不顚倒故名爲聖衆舍利弗所有不善所有可知所有可得如是一切諸不善法皆以名相爲本此賢聖法中斷諸名相又不念名相不得名相云何當言是聖是衆斷諸名相名爲聖衆若有法處可破可斷賢聖法中無名無相無有語言斷諸語言無有合散若言無僧則破聖衆是亦不得所謂名相虛妄想故著種種邪見是邪見更受後身貪著諸見則五陰舍利弗五陰皆是虛妄貪著名惡道是名邪見賢聖衆者無有此但知虛妄緣故起於三界知是事故名爲聖衆
014_0346_a_01L사리불아, 무릇 소유한 견해는 거룩한 무리 중에서는 불가득이다. 이른바 아견(我見)20)ㆍ중생견(衆生見)ㆍ수명견(壽命見)ㆍ인견(人見)ㆍ남견(男見)ㆍ여견(女見)ㆍ천견(天見)ㆍ지옥견(地獄見)ㆍ축생견(畜生見)ㆍ아귀견(餓鬼見)ㆍ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에 대한 견해와 온갖 소리를 갖추었다고 하는 주장과 북소리에 대한 견해와 땅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물과 불과 바람 소리에 대한 견해와 지계(持戒)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계를 깨트리는 소리에 대한 견해와, 바른 길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삿된 길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때묻은 소리와 깨끗한 소리와 선정(禪定)과 삼매(三昧)와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의 소리와, 수다원(須陀洹)의 과위(果位)와 사다함(斯陀含)의 과위와 아나함(阿那含)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해탈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과위를 얻은 소리에 대한 견해와 부처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법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승(僧)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멸(滅)의 소리에 대한 견해이다. 사리불아, 이를 허망한 음성들의 견해라고 이름한다. 현성의 무리는 제일의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를 얻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음성이 일상(一相)임을 통달한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으로서 어김이 없고 다툼이 없으며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法忍)을 성취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014_0345_c_16L舍利弗凡所有見於聖衆中皆不可得我見衆生見壽命人見男見女見天見地獄見畜生餓鬼見界見貝聲見鼓聲見地聲見水火風聲見持戒聲見戒聲見正道聲見邪道聲見垢聲淨禪定三昧八聖道聲須陁洹果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聲見脫聲見得果聲見佛聲見法聲見聲見滅聲見涅槃聲見舍利弗是名虛妄音聲等見賢聖衆者於第一義不得是見通達種種音聲一相所謂無相無違無諍成就不顚倒法忍故名爲聖衆
사리불아, 이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法忍)21)이라고 함은 이는 곧 무상(無相)이다. 상이 없는 까닭에 취(取)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거슬림도 없고 순종함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다. 이 중에 자연히 없어져 닿음도 없고 무너짐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항상 평등하고 떠나 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인(忍) 중에는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도 업고 분별도 없고 분별이 아닌 것도 없으며 상이 없음에 통달하여 이 인을 성취하는 것, 이를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화합(和合)을 깨트리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014_0346_a_06L舍利弗是不顚倒法忍卽是無相無相故無取無捨無逆無順無生無滅是中自然歸滅無修無壞無起無得不分別此彼故心常捨離所以者何於是忍中無此岸無彼岸無分別無非分別通達無相成就是名爲聖衆破和合故名爲聖衆
014_0346_b_01L사리불아, 나는 다른 경에서 ‘만약 사람이 법을 보면 이는 나를 보는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여래는 법이 아니고 또 법 아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사람과 여러 외도(外道)를 조달(調達)하기 위하여 모두가 색신(色身)으로써 부처를 보게 한다. 사리불아, 여래를 마땅히 색신으로써 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음성으로써 보지 않아야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색신으로써 부처를 보면 이는 부처를 떠나감이 멀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부처란 색을 보아서 이름하지 않기에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능히 모든 법의 무상(無相)을 보면 이름도 없고 감촉도 없고 기억도 없고 생각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무익한 의론도 없어 일체의 법을 생각[念]하지 않으며 열반을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으로써 생각[念]을 삼지 않고 열반을 탐하지 않는다. 모든 법을 믿고 이해하면 이 모두는 하나의 상이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이다. 사리불아, 이것을 참다운 견해라고 이름한다. 부처란 일체의 법에 구함이 없고 무익한 의론이 없고 생이 없음을 말한다. 이 일 중에서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 이를 부처를 본다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있어 이 법 중에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함이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고, 탐함도 없고, 어김도 없고 생각도 없고, 생각의 업도 없고, 언설을 탐하지 않고, 법의 거짓 이름을 알아 모두가 소유함이 없고 언설의 길을 끊고, 차별함이 없고, 또 무익(無益)한 의론이 없으면 이를 생이 없고 생각이 없는 수행자(修行者)라고 이름한다. 세간에서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014_0346_a_12L利弗我餘經說若人見法是爲見我如來非法亦非非法何以故調達愚人及諸外道皆以色身見佛舍利弗如來不應以色身見亦復不應以音聲見舍利弗若人以色身見佛是去佛遠所以者何佛不名見色名爲見佛舍利弗若人能見諸法無相無名無無憶無念無生無滅無有戲論念一切法不念涅槃不以涅槃爲念不貪涅槃信解諸法皆是一相所謂無相舍利弗是名眞見佛謂一切法無求無戲論無生於此事中亦不念不分別是名見佛若有人於此法中無憶想分別無取無捨無貪無違想無想業不貪言說知法假名皆無所有斷語言道無有差別亦無戲論是名無生無想行者於世閒中名爲聖衆
사리불아, 무슨 법을 보는 까닭에 부처를 본다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생각이 없고, 분별이 없고, 희론(戱論)함이 없는 것으로서 일체의 법을 느끼지[受] 않는 것이다. 혹은 공의 문(門), 혹은 적멸의 문, 혹은 떠남의 문으로써도 견해를 생각하지 않고 견해를 얻지 아니하고 이 일도 또한 얻지 않으며 이른바 이름이라고 하는 이 처소 또한 얻지 않는 이른바 열반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나는 오히려 열반을 염하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너희들에게는 마땅히 열반을 염하고, 열반을 얻으라고 설하겠는가?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열반을 얻으면 이 사람은 여래를 따르지 않는 출가자(出家者)로서 6사(師)22)를 따르는 출가자이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곧 법의 도적으로서 나의 법 안에 들려고 한다. 이 사람은 나의 법을 더럽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큰 도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마치 큰 성읍(城邑)에 큰 도적이 있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와 사람[我人]이겠느냐?
사리불아,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손으로써 막을 것이다. 나의 제자가 아니며 무리의 수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나는 그의 스승이 아니다.
사리불아, 만약 모든 법의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념(無念)ㆍ무상(無想)함을 알면 이는, 법인(法忍)을 얻은 것이지만 아직 열반은 얻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나와 사람이겠느냐? 사리불아, 부처도 이같이 설하여 법을 본다고 이름한다. 능히 이 일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014_0346_b_07L舍利弗見何法故名爲見佛謂無想無分別無戲論不受一切法若以空門若寂滅門若離門不念見不得見是事亦不得所謂名字是處亦不得所謂涅槃何以故舍利弗尚不念涅槃云何當說汝等當念涅當得涅槃舍利弗若人得涅槃者是人不隨如來出家隨六師出家利弗當知是人爲是法賊入我法中當知是人污辱我法當知是人爲是大賊如大城邑中有大賊所以者何如是癡人尚不得涅槃何況我利弗如是癡人我以手遮非我弟子不入衆數我非彼師舍利弗若知諸法無生無滅無念無想得是法忍者尚不得涅槃何況我舍利弗佛說如是名爲見法能見是事名爲見佛
014_0346_c_01L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하는가. 일체의 법은 같아서[如]23) 다르지 아니하고 무너지지 않는다. 이를 여래(如來)라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이 법 중에서 의심하고 뉘우침이 없으면 이를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014_0346_b_23L舍利弗云何名爲佛一切法如不異不壞是名如來若人於是法中無有疑悔是名聖衆
사리불아, 과거세(過去世)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알지 못하였는데, 어떤 큰 숲에 들어가 원숭이의 무리가 떼를 지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곧 말하길 이것이 도리천의 여러 하늘이라고 하였다. 곧 숲을 나와 자기의 마을에 돌아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일찍이 도리천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까?’
뭇 사람이 다하여 말하였다.
‘아직껏 보지 못하였소.’
그 때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보았소. 당신들은 보기를 원합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곧 대중(大衆)을 이 끌고 그 숲을 찾아가 원숭이의 무리를 가리켜 말하였다.
‘당신들은 보시오. 이는 도리천의 여러 하늘이오.’
여러 사람 모두가 도리천이 아니라 이는 곧 원숭이가 숲 속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며 당신은 어리석고 전도되었기 때문에 원숭이를 알지 못하며 또 도리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헛되이 대중을 이끌고 그 숲 속을 찾아 온 것이다.
014_0346_c_03L舍利弗過去世中有一癡人不識獼猴入一大林見獼猴群叢聚一處是人曾聞有忉利天便謂爲是忉利諸天卽出樹林還本聚多人衆中作如是言汝等曾見忉利天不衆人答言未曾見也卽時語我已得見汝欲見不皆言欲見將大衆詣彼林中示獼猴群汝等觀此忉利諸天衆人皆言非忉利天是獼猴樂住林中汝癡倒故不識獼又亦不識忉利諸天舍利弗是人空將大衆詣彼林中
014_0347_a_01L 이같이 사리불아,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도 마땅히 비구가 있어 속인(俗人)의 집에 이르러 이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은 부처님의 제자인 거룩한 무리를 보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받기를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그 중에 속인으로서 불법을 믿는 자가 있어서 모두가 보고 부처님 법을 듣고 받아 지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사리불아, 그 가운데 속인이 있어 언어에 탐착하고 즐겨 절에 들어온다. 여러 비구가 있어 언설을 좋아하고 능히 여러 가지 경에 통달해 있다. 언어에 의지하여 글을 꾸미기를 즐긴다. 이 여러 사문은 수순하여 설하고 이를 참다운 길이라고 말한다. 다만 무리의 수를 채움이 놓아먹이는 소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다만 경을 읽는 것을 즐길 뿐 진리의 경계에는 들지 못한다. 다만 사람의 뜻을 기뻐하고 명리(名利)를 귀하게 여긴다. 세속 일에는 훌륭하나 깨끗한 설법은 못한다. 다만 능히 말하여 세간의 도를 행한다. 위덕(威德)이 없어 열반의 인(因)은 깨어졌다. 거룩한 침묵을 버리고 선정을 즐기지 않으며, 밤낮으로 항상 담론(談論)하고 다투기를 좋아한다. 두터운 잠자리에 눕고 더욱 한 생각도 선정(禪定)에 수순함이 없다. 하물며 능히 사문(沙門)의 과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이 사람은 자면서도 항상 속된 마음과 상응한다. 초저녁과 새벽에 순인(順忍)을 닦지 않고서 하열한 법을 즐긴다. 이 사람은 또 많은 의복과 음식의 공양을 얻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항상 악마에게 포섭되어 천박한 말을 즐긴다.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배울 수가 없다. 제일의 깊은 경을 독송하고 지닐 수가 없다. 들으면 곧 놀라고 두려워 맛좋은 국물을 버리고 술찌꺼기를 취한다. 여러 범부가 있어 이익을 얻는 것을 보고는 탐착하는 마음을 내고 이러한 생각을 하고 말한다.
‘우리들도 또 마땅히 이 말을 익혀야 한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위없는 법보(法寶)를 버리고서 삿된 견해에 떨어져 있다. 이는 사문(沙門)의 전타라(旃陀羅)24)이다. 여러 속인이 와서 그곳을 찾아오면 이 같은 악인(惡人)은 그럼에도 설법을 한다. 이익 때문에 부처와 법과 승(僧)을 칭찬한다. 다만 목숨이 살기를 구하여 재물의 종이 되고 의식을 탐하고 귀중히 여겨 자기가 즐기는 것을 칭찬한다. ‘만약 보시를 행하면 천상(天上)에 남을 얻는다. 불법 중에서는 보시를 낮은 법이라고 한다. 칭찬하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말을 한다. ‘큰 보시의 인연은 천상에 남을 얻는다.’ 말을 모르고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처음으로 들어온 천박한 낮은 법을 알 뿐 나[我]와 사람을 탐착하여 제일의를 버린 것이다.
014_0346_c_14L如是舍利弗未來世當有比丘至白衣家作是言汝欲見佛聖衆聽佛法不中有白衣信佛法者皆言欲見聽受佛法舍利中有白衣貪樂語言入於塔寺諸比丘好於言說能通諸經依止語言樂於文飾是諸沙門隨順爲說是眞道但充衆數如放牛人但樂讀不入眞際但悅人意貴於名利巧世事不淨說法但能巧語行世閒無有威德破涅槃因捨聖默然樂禪定晝夜常好談論諍訟臥厚被尚無一念隨順禪定何況能得成沙門果是人睡眠常與俗心相應夜後夜不修順忍樂於下法是人亦多得供養衣服飮食何以故是人常爲惡魔所攝樂淺近語於第一義不能勤學不能誦持第一深經聞則驚捨於淳濃而取糟粕有諸凡夫見得利養生貪著心作是念言我等亦當習是言論舍利弗是人捨於無上法寶墮在邪見是沙門旃陁羅有諸白衣往詣其所如此惡人而爲說法以利養故稱讚於佛及法與僧但求活命爲財奴僕貪重衣食讚己所樂若行布施得生天上於佛法中施爲下法讚以爲最而作是言大施因緣得生天上不知語言不解義趣但知初入淺近下法貪著我捨第一義
014_0347_b_01L사리불아, 이와 같은 설법은 혹 그 때, 사람이 있어 믿음이 생겨서 출가한다 하여도 여러 나쁜 사람과 화합하여 제일의의 깊은 뜻을 부지런히 닦을 수가 없게 한다. 소득이 있는 자는 나[我]와 사람과 수명이 있다고 설하고 소유가 없는 법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아비담(阿毘曇)25)과 수투로(修妬路)26) 중에서 스스로 의론을 하고 혹은 단상(斷常)27)을 설하고 혹은 지음이 있음을 설하고 혹은 지음이 없음을 설한다.
014_0347_a_19L舍利弗如是說法或時有人生信出與諸惡人而共和合不能勤求第一深義有所得者說有我壽者憶想分別無所有法於阿毘曇妒路中自爲議論或說斷常或說有或說無作
사리불아, 나의 법은 그 때, 외도의 법이 많아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견해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나의 청정한 법은 이 인연으로 해서 점점 멸하여 없어진다. 사리불아, 내가 오래도록 생사(生死)의 세계에 있으면서 온갖 괴로움을 받으면서 이룬 보리(菩提)도 이 여러 악인(惡人)들이 그 때 깨트릴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이 얻음이 있는 견해인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을 버리지 못하면 여래가 기쁘게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 결정적으로 나[我].0와 사람의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서는 내가 곧 하나의 마시는 물도 받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혹은 이 때 이 사람이 공의 법을 들을 수가 있어 마음이 청정하여 놀라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곧 도리어 뭇 사람을 마땅히 인도하여 실상(實相)의 뜻에 들게 한다. 곧 마땅히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比丘戒)를 받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 같은 견해를 버리지 않으면 이를 외도라고 이름한다.
014_0347_b_02L舍利弗我法爾時多外道法令諸衆生正見心壞如是舍利弗我淸淨法以是因緣漸漸滅盡舍利我久在生死受諸苦惱所成菩提是諸惡人爾時毀壞舍利弗若有比不能捨是有所得見我見人見解如來隨宜所說而言決定有我如是之人我則不聽受一飮水時是人得聞空法信心淸淨而不驚卽便還應導引衆人入實相義便應出家受具足戒何以故舍利弗人不捨如是見者是名外道
014_0347_c_01L 사리불아, 내가 세속의 인연을 빌어 나[我]가 있다고 설하지만 제일의가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말한다.
‘나도 또한 세속(世俗)의 인연을 가져 나[我]가 있다고 설한다.’
이 사람이 만약 능히 무생(無生)과 무멸(無滅)과 무상(無相)에 통달하면 나의 설하는 바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 자로서 이가 나의 제자인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여래는 무슨 까닭에 세속의 인연에 따라서 무아(無我)의 법이 있어 사람이 있다고 설하시는가? 여래는 마땅히 세간을 위하는 까닭에 부실(不實)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여러 경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있다고 설하였다. 부처의 설한 바는 마땅히 거짓이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사리불아, 마땅히 이 사람에게 ‘부처가 모든 법은 공하여 주인이 없고 성품이 없다고 못하는 것은 다만 이는 허망한 것으로서 제일의가 아니며, 여래는 제일의로써 하지 않으므로 나와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성인의 말에는 탐착하는 곳이 없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부처와 같을 수 없고 또 지나치는 자도 없다’고 답해야 한다.
014_0347_b_13L舍利弗我以世俗因緣假說有我非第一義若有人言我亦復以世俗因緣而說有我是人若能通達無生無滅無相之法與我所說不相違者是我弟子舍利弗若有人言如來何故隨世因於無我法而說有人如來不應爲世閒故作不實語又諸經中多說有佛所說者不應虛也舍利弗應答是人佛說諸法皆空無主無性但是虛妄非第一義如來不以第一義故說有我聖人言說無所貪著無智慧人無與佛等亦無過者
사리불아, 여래의 지혜는 불가사의한 것으로써 이 지혜로써 중생의 마음을 안다. 사람이 있어 마땅히 부처와 같다면 부처는 큰 용인 대법왕(大法王)을 위하여 마땅히 어지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어느 사람에게는 일체의 세간은 항상 나와 함께 싸운다 하고, 나는 항상 세간과 싸우지 않는다고 설한다.
014_0347_c_02L舍利弗來智慧不可思議以是智慧知衆生寧當有人與佛等者佛爲大龍大法之王不應難言佛說有人一切世閒常共我諍我常不與世閒共諍
사리불아, 자아(自我)가 있다고 설하는 자는 매우 가엾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 중에는 법도 없고 자아도 없다. 많은 중생이 있어도 여래가 기꺼이 설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법보(法寶)에 거역함이 많아 악의 한계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나는 삿된 견해를 알지만, 그러나 삿된 견해라고 하지 않는다. 능히 삿된 견해를 아는 것, 이는 곧 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삿된 견해는 끝내 바른 견해가 되지 않고 견해는 견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014_0347_c_06L利弗說有我者甚可哀愍此中無法亦無有我多有衆生不解如來隨宜所說違逆法寶多墮惡趣舍利弗知邪見而不爲邪見能知邪見者卽是正見舍利弗邪見終不變作正見不知見
014_0348_a_01L사리불아, 모든 부처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의 세간이 믿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모든 하늘과 일체의 세간에서 보다 가장 믿어야 하며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리불아, 나의 설하는 법은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역시 저 언덕에 이르는 것도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모든 행(行)을 다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 중에 또한 모든 행을 다함도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적멸을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적멸이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해탈을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해탈이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모든 지혜를 위한 까닭이지만 이중에 또한 모든 지혜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없다. 사리불아, 여래는 하늘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하늘이 없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사람이 없으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중생은 없다.
사리불아, 여래는 밝음[明]과 해탈을 설하지만 이 중에 밝음과 해탈은 없다. 내가 염불(念佛)을 설하나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내가 공의 행을 설하지만 공의 행을 행하지 말고 또 염하지도 말아라. 사리불아, 이를 여래의 설하는 바인 경과 법의 구절이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 설하는 자는 없다. 여러 악인(惡人)들이 구절을 얻어 남을 위하여 설하고 또한 나를 부처라 하여도 여래와 거룩한 부처의 공덕은 없다. 더욱 스스로 승(僧)에 속한다 함은 사리불아, 비유컨대 원숭이의 무리가 도리천과 비슷한 것과 같다. 이 같은 뭇 악인은 나의 거룩한 무리와 비슷하지 않다.
사리불아, 이 여러 악인은 다만 음성과 말로써 스스로 사문(沙門)이라고 말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원숭이의 무리를 보고서 도리천(忉利天)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닮았다.
014_0347_c_12L舍利弗諸佛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一切世閒所難得信於諸天一切世閒是最可信非不可舍利弗我所說法爲至彼岸是中亦無至彼岸者我所說法爲盡諸行是中亦無盡諸行者我所說法爲寂滅故是中亦無有寂滅者我所說法爲滅度故是中亦無有滅度者我所說法爲解脫故是中亦無有解脫者我所說法爲諸智故是中亦無有諸智者我所說法爲淨垢故是中亦無有淨垢者舍利弗如來爲天說法亦無有天爲人說法亦無有人爲衆生說法亦無有衆生舍利弗如來說明及與解脫是中無明及與解脫我說念佛佛不可念我說空行空不可行亦不可念舍利弗是名如來所說經法章句是中無有說者諸惡人等得此章句爲他人說亦復以我爲師有如來聖衆功德而自爲僧數舍利譬如獼猴群不似忉利天如是衆惡人不似我聖衆舍利弗是諸惡人但以音聲語言自謂沙門似如癡人見獼猴群謂忉利天
사리불아, 그 중에 출가한 사람이 있어 어려운 물음을 기뻐하고 즐긴다. 좋은 스승의 명색(名色)을 설함에 적멸하여 언어의 길을 끊고 그에 합당함을 얻어 일어남이 없고 잃음도 없고 무상(無相)에 통달하여 이같이 무생(無生)과 무멸(無滅)ㆍ무상(無相)의 법을 들음을 얻어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이미 일찍이 무량(無量)한 모든 부처를 공양하였고 능히 나의 법을 알아서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014_0348_a_12L舍利弗中有出家人喜樂問難得値善師爲說名色寂滅語言道斷無起無失通達無相得聞如是無生無滅無相之法不驚畏者當知是人已曾供養無量諸佛能知我法可名聖衆

5. 정계품(淨戒品) ①
014_0348_a_17L淨戒品第五之一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파계(破戒)한 비구에게는 몇 가지 근심과 고뇌의 화살이 있어 참고 견디기가 어렵다. 비구가 몇 가지 근심과 고뇌의 화살을 성취하면 곧 불법에서 재미를 얻지 못하고 설법(說法)을 미워하는 자는 불법에 친근함을 원하지 않는다.
014_0348_a_18L佛告舍利弗破戒比丘有十憂惱箭難可堪忍比丘成就十憂惱箭則於佛法不得滋味憎說法者不樂親近
014_0348_b_01L 무엇이 몇 가지인가?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승(僧)이 화합하는 것을 보고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화합의 포살(布薩)28)은 반드시 자기를 내쫓기 때문이다. 이 나쁜 비구는 스스로 잘못이 있음을 알고서 항상 근심과 고뇌를 품고 계를 지닌 자에 대해서는 한탄하고 성내어 기뻐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첫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014_0348_a_21L何等爲十舍利弗破戒比丘見僧和合不生喜心何以故和合布薩必驅我出是惡比丘自知有過常懷憂惱於持戒者瞋恨不喜舍利弗是名破戒比丘初憂惱箭必墮惡道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무리를 미워하고 친근(親近)함을 원하지 않는다. 사나운 소의 날카로운 뿔을 사람이 멀리하고 버리는 것과 같다. 잘못을 저지른 나쁜 비구는 스스로 잘못이 있음을 알고서 항상 조심과 고뇌를 품는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두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014_0348_b_03L復次舍利弗破戒比丘衆所憎惡不欲親近如惡牛利角人所捨遠是惡比丘自知有過常懷憂惱舍利弗是名破戒比丘二憂惱箭必墮惡道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비구의 무리를 만나 보고서 스스로의 나쁜 마음과 같지 않음을 알고서 떠나고 참괴심과 부끄러움을 품는 까닭에 무리에 들 수가 없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세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014_0348_b_07L復次舍利破戒比丘逢見比丘衆自知不同惡心捨離懷愧恥故不能入衆舍利是名破戒比丘三憂惱箭必墮惡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악하고 독한 마음이 왕성하여 교화할 수가 없다. 마치 외도에게 계법(戒法)이 없음과 같다. 하물며 깨끗한 계에 있어서이겠느냐. 그 파계한 인연으로 해서 사람이 친근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네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014_0348_b_11L復次舍利弗破戒比丘毒惡心盛不可化喩猶尚無有外道戒法況於淨戒以其破戒因緣人不親近舍利是名破戒比丘四憂惱箭必墮惡
014_0348_c_01L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남의 재물로써 스스로 그 몸을 먹인다. 나는 이 사람을 설하여 무거운 짐을 진 자라고 한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수행자(修行者)와 얻은 자[得者]29)는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한다. 파계한 비구는 곧 수행자도 아니며, 이는 얻은 자도 아니다. 이 까닭에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마땅히 백천억만(百千億萬)의 겁 동안 몸의 살을 찢고 빼어내서 시주(施主)에게 갚아야 한다. 만약 축생으로 태어나면 몸은 항상 무거운 짐을 진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한 머리털을 꺾어 천억(千億)으로 나눈다 해도 파계한 비구는 더욱 그 하나의 공양도 갚을 길이 없음과 같다. 하물며 남의 의복과 음식과 침구와 의약을 능히 갚겠는가?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가 거룩한 법복(法服)을 입었다 해도 더욱 마땅히 한 걸음도 절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물며 한 그릇의 마시는 물과 내지는 침상(寢床)을 받을 수 있겠느냐.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 같이 나쁜 사람을 하늘과 사람 중에서는 이를 큰 도적이라고 한다. 일체의 세간은 모두가 마땅히 멀리 하고 떠난다. 사리불아, 이 썩고 무너진 사람, 이는 곧 원수의 집인 것이다. 여래는 일체세간의 모두가 남김없이 나의 곳에 이르는 것을 허락하지만 파계한 사람은 여래가 손으로 막는다.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물며 하루라도 나의 법 가운데 머물게 하겠느냐?
사리불아, 비유컨대 죽은 뱀과 죽은 게와 같이 가장 더러운 냄새가 난다. 청정한 모든 하늘이 교화하고자 할 때에도 마땅히 발견함을 얻지 못한다. 만약 본다 해도 곧 멀리한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그 세 주검과 같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부정(不淨)하다. 지혜로운 자는 멀리 떠나고 동사(同事)30)와 포살(布薩)과 자자(自恣)31)를 함께 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나의 법 중에서는 곧 불길(不吉)하다고 한다. 계를 지닌 비구가 이 파계한 비구를 보면 즉시 멀리 떠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파계한 비구의 손이 닿는 곳의 물건과 받은 물건은 계를 지닌 자에게 있어서는 곧 나쁜 독이 된다. 사리불아, 참으로 세 가지 주검의 더러운 냄새가 땅에 가득하게 하고 내가 그 안에서 능히 네 가지 위의[四威儀]32)를 행한다 해도 이 파계한 비구는 잠시도 함께 머물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는 사문(沙門) 중에서 가장 비루(卑陋)하고 하천(下賤)하다. 사문 중에서 썩어서 메말라버린 흙이며 폐악(弊惡)한 것이다. 사문 중의 쭉정이와 겨[粃糠:하찮고 쓸모없는 것]인 것이다. 사문 중의 때[垢]이다. 사문 중의 혼탁(混濁)함이다. 사문중의 오물(汚物)이다. 사문 중의 왜곡(歪曲)됨이다. 사문 중에 추한[麤=추(醜)] 것이다. 사문 중에서 거룩한 길을 잃은 자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나의 법 중에서 출가하고 도를 구해서 무거운 죄를 얻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사람을 나의 법 중에서는 곧 역적이라 한다. 이는 법의 도적이라 한다. 이는 거짓된 사기꾼[詐欺]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황문(黃門)33)의 사나이가 아니며 여자도 아님과 같다. 파계한 비구도 또한 이와 같다. 집에 있다고도 이름할 수 없고 출가하였다고도 이름할 수 없다. 목숨이 끝난 뒤에는 곧 지옥에 들어간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박쥐가 새를 잡고자 할 때는 곧 쥐가 되어 구멍으로 들어가 쥐가 되고, 쥐를 잡고자 할 때는 곧 하늘을 날아 새가 되는 것과 같다. 이미 포살과 자자(自恣)에 들지 않는다. 또한 임금의 사역(使役)에도 들지 않는다. 속인(俗人)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출가자(出家者)라고도 이름하지 않는다. 주검을 태우다 남은 나무를 다시는 쓰지 않음과 같다. 이와 같은 비구에게는 계품(戒品:계율의 품류와 종류)과 선정의 품[定品]과 지혜의 품[慧品]과 해탈품(解脫品)과 해탈지견품(解脫知見品)이 없으며 오직 깨끗한 계를 깨트린 일을 구족할 뿐이다. 크고 미묘한 음성과 계의 소리와 선정의 소리와 지혜의 소리와 해탈의 소리와 해탈지견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오직 계를 깨트리는 폐악한 소리를 낼 뿐이다. 여러 같은 악인과 함께 나쁜 소리를 내고 오직 의복과 음식과 잠자리를 논하고 나무와 꽃과 열매의 보시를 받으며, 귀한 사람의 심부름꾼이 되고 또 국토(國土)의 길흉(吉凶)과 안위(安危)를 논하고, 뭇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말을 웃으며 한다. 밤과 낮으로 항상 세속의 일에 물든 것을 바라고 구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의 업도 부정(不淨)하고 입의 업도 부정하고 뜻의 업도 부정하여 마땅히 지옥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이 비구는 어두움을 즐기기를 박쥐와 같이 한다. 바른 경(經)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는 근심을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실한 설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사람은 진실한 설은 기뻐하지 않고 다만 뜻에 따르는 것을 즐긴다. 이와 같은 비구는 설법에 있어서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는다. 더욱 겹쳐서 죄를 짓고 지옥을 더한다. 사리불아, 이를 다섯 번째의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
014_0348_b_15L復次舍利弗破戒比丘以他財物自養其身我說此人爲重擔者所以者何行者得者應受供養破戒比丘非是行者非是得者是故舍利弗戒比丘當於百千億萬劫數割截身肉以償施主若生畜生身常負重以者何如析一髮爲千億分破戒比丘尚不能消一分供養況能消他衣服飮食臥具醫藥舍利弗破戒比丘著聖法服猶尚不應入寺一步何況得受一飮之水乃至牀榻何以故利弗如是惡人於天人中是爲大賊一切世閒皆應遠離舍利弗是敗壞人卽是怨家如來悉聽一切世閒皆至我所破戒之人如來手遮非我弟何況一日住我法中舍利弗譬如死人死蛇死狗最爲臭穢淸淨諸天欲遊戲時不應得見若見則遠如是舍利弗破戒比丘如彼三屍臭穢不智者遠離不與同事布薩自恣利弗破戒比丘於我法中爲是不吉持戒比丘見此破戒卽時遠離何以若破戒比丘手所觸物及所受物於持戒者則爲毒惡舍利弗正使三屍臭穢滿地我能於中行四威儀能與此破戒比丘須臾共住何以故舍利弗是爲沙門中卑陋下賤爲沙門中朽壞弊惡爲沙門中粃糠爲沙門中垢爲沙門中濁爲沙門中污沙門中曲爲沙門中麤爲沙門中失聖道者如是人等於我法中出家求道而得重罪舍利弗如是之人於我法中爲是逆賊爲是法賊爲是欺誑詐僞之人但求活命貪重衣食是則名爲世樂奴僕舍利弗譬如黃門非男非女破戒比丘亦復如是不名在不名出家命終之後直入地獄利弗譬如蝙蝠欲捕鳥時則入穴爲欲捕鼠時則飛空爲鳥而實無有大鳥之用其身臭穢但樂闇冥舍利破戒比丘亦復如是旣不入於布薩自恣亦復不入王者使役不名白不名出家如燒屍殘木不復中用如是比丘無有戒品定品慧品解脫解脫知見品但有具足破淨戒品不能出大微妙音聲戒聲定聲慧聲解脫聲解脫知見聲但出毀戒弊惡音聲與諸同惡俱出惡聲但論衣服飮食牀臥受取布施樹木華果爲貴人使及論國土吉凶安危戲笑衆事諸不善語常於日夜伺求塵染比丘如是身業不淨口業不淨意業不淨當墮地舍利弗是破戒比丘樂於闇冥如彼蝙蝠聞說正經以爲憂惱所以者何如實說故世閒之人不喜實說但樂順意如是比丘於說法者心不淸淨重更爲罪增益地獄舍利弗是名破戒比丘五憂惱箭必墮地獄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다. 모든 뿌리가 산란하여 부정을 성취한다. 몸과 입과 뜻이 없이 깨끗하지 않은 위의(威儀:行動)는 입은 옷까지도 모두가 법답지 아니함과 같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기뻐해서 입을 지키지 못한다. 마음은 항상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더러운 때에 물든다. 사리불아, 새로운 질그릇에 오줌과 똥과 썩은 냄새를 풍기는 피고름을 가득 담는 것과 같다. 뒤에 더러운 것을 버리고 전단향(栴檀香)을 발라도 또 전단향이 사라지면 이 같은 질그릇에 무슨 기운이 있겠느냐?”
014_0349_b_03L復次舍利弗破戒比丘無有羞恥諸根散亂成就不淨身口意業不淨威儀所著衣服皆不如法好喜妄語不能護口心常馳騁染於垢穢舍利弗如新瓦器盛以屎尿臭爛膿血後去不淨著栴檀香復去栴檀如是瓦器有何等
“세존이시여, 이 새 질그릇은 먼저 담은 오줌과 똥의 냄새가 굳게 묻어 오직 그 냄새가 있을 뿐 전단의 향내는 없습니다.”
014_0349_b_10L世尊是新瓦器先盛屎尿臭氣堅唯有臭氣無栴檀香
014_0349_c_01L“사리불아, 사람이 청정한 믿음으로 모든 뿌리를 고르게 하여 출가해서 도(道)를 배우고 악지식(惡知識)을 만나서는 그 가르침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 사리불아, 무엇들을 악지식이라 하는가? 악지식이란 항상 나쁜 희롱을 좋아하고 경박하여 부끄러움이 없다. 말은 산란하여 모든 뿌리를 거두지 못한다. 마음은 전일(專一)하지 못하여 어리석기가 흰 염소와 같다. 이 같은 악지식에게 친근하면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사다함과(斯陀含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잃고 법을 깨트리는 자와 함께 일을 따른다. 이 사람은 부정(不淨)한 몸의 업과 부정한 입의 업과 부정한 뜻의 업과 부정한 지계(持戒)를 성취하여 몸이 죽은 뒤에는 나쁜 세계에 든다. 무엇을 나쁜 세계[惡趣]라고 하는가. 나쁜 세계란 지옥과 축생과 마귀와 아수라의 길을 이름한다. 또 나쁜 길이 있는데 아유륵충(阿由勒蟲)34)과 바가라목거충(婆伽羅目呿蟲)과 부미수차가충(浮彌修遮迦蟲)과 수지목가충(修脂目迦蟲)과 같다. 이 사람은 이 많은 벌레 속에 난다.
사리불아, 이 사람이 악지식에게 따르면 혹 사람 가운데 태어나도 태어나면서 부모를 이별하거나 죽어서 잃으며 친족과 고향은 쇠뇌(衰惱)하고 국토는 파괴된다. 팔난(八難 :부처님을 만나서 교법을 들을 수 없는 경계에 여덟 가지가 있다. 즉 지옥과 출생과 아귀와 장수천(長壽天)과 변두리[邊地]와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인 자와 세간의 지혜만이 총명한 자와 부처님이 나기 전과 부처님이 가신 뒤의 여덟 가지) 가운데 나서 여덟 가지 즐거운 곳을 버린다. 성냄이 많고 어리석음이 많으며 나쁜 희롱을 좋아하고 경박하여 부끄러움이 없다. 말이 산란하고 마음을 거두지를 못하여 어리석기가 흰 염소와 같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해서 무너지며 귀먹고 벙어리이며 눈멀고 언청이이며 손과 발은 굽고 곱사가 되어 악지식과 함께 부처가 없는 곳에 태어난다. 만약 부처를 만난다 해도 눈은 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법을 듣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부처와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화합하지 않는다. 이 악업(惡業)을 일으키어 악인(惡人)과 삶을 함께하여 하열(下劣)한 법을 즐긴다. 바른 견해 중에 있어서는 삿된 견해의 생각을 내고 삿된 견해 가운데 있어서는 바른 견해의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를 하열(下劣)한 욕망이며 하열한 법인(法忍)이며 하열한 지혜라고 이름한다.
014_0349_b_11L舍利弗人以淸淨信等諸根出家學道遇惡知識而隨其教舍利弗何等爲惡知識知識者常好調戲輕躁無羞言語散亂不攝諸根心不專一癡如白羊近如是惡知識者失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乃至失於生天之樂況涅槃道但能修集破法罪業與破法者而共從事是人成就不淨身業不淨口業不淨意業不淨持戒身死之後入於惡趣云何惡趣惡趣名爲地獄畜生餓鬼阿修羅道復有惡道如阿由勒虫婆伽羅目呿浮彌修遮迦虫修脂目迦虫是人多生此諸虫中舍利弗是人隨惡知若生人中父母生離死亡喪失里衰惱國土破壞生八難中捨八樂多欲怒癡常好戲調輕躁無羞言語散亂不能攝心癡如白羊爲貪欲瞋恚愚癡所壞聾瘂盲瞎手腳攣躄共惡知識生無佛處若値佛世目不喜見不喜聞法不與佛衆而共和合起是惡業惡人共生樂下劣法於正見中生邪見想於邪見中生正見想是名下欲下忍下慧舍利弗下慧之終不能爲厭離滅道涅槃生心
014_0350_a_01L사리불아, 하열한 지혜의 사람은 세속을 싫어하여 출가하고 적멸의 길과 열반의 세계에 낳는 마음을 끝내 내지 못한다. 사리불아, 악지식을 만나서는 이 같은 여러 가지 쇠뇌(衰惱)한 환난은 얻으나 이러한 모습은 없다. 이 사람은 이 깊은 여러 가지 경을 들으면 놀라고 의심하고 두려워해서 깊은 함정에 떨어짐과 같다. 즉 큰 죄의 깊은 함정 속으로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경 중에서 설함과 같다. 파계한 비구에게는 크고 무거운 죄가 있다. 무슨 인연 때문에 이름하여 파계라 하는가? 받은 바 계를 깨트려 가르침의 말씀과 같이 하기 어렵고 행에 항상 따름이 없고 어기고 거슬림은 많다. 항상 탐착함을 행하여 나쁜 것이 얽히고 섞인 행이 많다.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을 행하여 여러 가지 잡(雜)된 말을 즐기는 것, 이를 파계라고 이름한다.
또 맑은 사무(事務)를 즐기고 많은 잠을 즐긴다. 말하는 바는 순하지 않고 차례가 없다. 청정하지 않음을 설하고 아상(我想)과 인상(人想)과 수자상(壽者想)과 명자상(命者想)에 탐착한다. 이 때문에 이름하여 폐악한 비구라고 한다. 절조(節操)를 헤아릴 줄 모르고 사문의 법을 알지 못하며 바라문의 법까지도 모른다. 의술(醫術)을 파는 행을 하여 이익을 구하는 것을 즐기며 나라의 사신이 되어 여러 가지의 더러움[汚染]를 즐기며 속인과 더불어 일을 시키고 일을 해서 여러 가지 나뭇잎과 꽃과 열매를 받들어 올리기를 즐기며, 속인을 위하여 외도의 법을 설하는 것을 즐기며, 마음은 항상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버리고 떠난다. 아직 스무 살이 차지 않았음에도 구족계(具足戒: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고 계를 받은 일 중에 여러 가지로 갖추지 못함이 있다. 형체(形體)는 왜소하여 법에 마땅하지 않음에도 쌀과 곡식과 돈과 포목(布木)과 금은(金銀)을 받아서 살고 뉘우치지 않으면 반대로 스승의 명을 거역한다. 스스로의 몸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까지도 알지 못하며 귀천의 차별까지도 분별하지 못한다. 즐겨 거짓말을 하고서 기뻐하고 계취(戒取)35)를 탐착한다. 하는 일은 산란하여 마음은 전일하지가 않다. 얼굴에 성내는 상이 있고 간탐하고 믿지 아니한다. 은혜와 의리를 알지 못하여 많은 탐욕을 품고 잠들며, 나쁜 희롱을 하고 의심하고 성내고 죄악을 덮어 감추고, 자기 혼자서만 갖기를 좋아하여 질투하고 아첨하여 참괴함이 없다. 스스로 크게 방일(放逸)하여 교만하고 아만(我慢)하고 크게 오만하고 삿되고 게으르다. 즐겨 방편을 지어서 이익의 문을 연다. 속인을 짓밟아 업신여겨 거짓으로 친숙함을 나타낸다. 시세(時勢)를 인(因)하여 재물을 얻고서 뭇 사람에게 자랑을 한다. 계품(戒)과 선정품(禪定品)과 지혜품(智慧品)과 해탈품(解脫品)과 해탈지견품(解脫知見品)을 무너트리고 불법 중에서 마음에 정해진 믿음이 없다. 업보(業報)를 믿지 아니하고 눈앞의 이익을 존중한다. 후손(後孫)이 없다고 말하면서 의심하고 뉘우침이 많다. 뜻[志]과 성품이 얕고 약해서 항상 놀라고 두려워하기를 잘 한다. 사리불아, 이를 폐악(幣惡)한 비구라고 이름한다.
014_0349_c_13L利弗遇惡知識而得如是諸衰惱患有是相貌是人聞是諸深經法驚疑怖畏如墮深坑則墮大罪深坑塹中何以故舍利弗如經中說破戒比丘有大重罪何因緣故名爲破戒破所受戒難可教語行無常准多所違逆常行貪著多雜糅行貪瞋癡行樂諸雜語名爲破戒復有樂多事務樂多諷誦樂多睡眠所言不順無有次第說不淸淨貪著我壽者命者是故名爲弊惡比丘不知節量不知沙門不知婆羅門法樂行醫術販賣求樂爲國使污染諸家樂與白衣給使作務以諸樹葉華果奉上好爲白衣說外道法心常捨離出世閒法滿二十受具足戒受戒事中有諸不形體缺少不應於法受生米穀錢帛金銀不順教誨拒逆師命不自知身不知他人不能分別貴賤差品喜妄語貪著戒取行事散亂心不專面有瞋相慳貪不信不識恩義多懷貪欲睡眠戲調疑悔瞋恨覆藏罪惡好自專執嫉妒諂曲無所慚愧自大放逸憍慢我慢大慢邪慢好行欺誑讚美其身多作方便開利養門踐白衣僞現親厚因勢得財以誇衆毀破戒品定慧解脫品解脫知見品於佛法衆心不定信不信業報貴於現利謂無後世多諸疑悔志性淺弱常好驚怖舍利弗是名弊惡比丘
014_0350_b_01L 이 사람은 몸과 입과 뜻의 입을 성취하여 목숨이 청정하지 않은 까닭에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길에 떨어져 큰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와 같은 비구는 모든 여래와 부처와 그 제자의 무리가 항상 멀리 떠나는 바이다. 다른 길을 좋아하는 자도, 멸도(滅度:열반)를 구하는 자도, 또한 모두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전단(栴檀)을 더러운 그릇에 놓아 더러운 것과 같이 하면 다시는 쓰는 데 합당하지 않음과 같다. 이같이 사리불아, 만약 재가자(在家者)와 출가자(出家者)로서 이 사람에게 친근하여 행하는 바를 익히면 역시 계품(戒品)을 깨트리게 되어 오래지 않아서 악과 같아진다. 얼굴빛은 깨어져 초췌하고 위의(威儀)를 깨트려 잃는다. 목숨이 끝난 뒤에는 지옥에 난다.
사리불아, 이 같은 악인은 모든 부처와 여래와 또 제자의 무리와 그리고 다른 길을 구하고 멸도(滅度)를 좋아하는 자, 모두가 멀리 떠나는 곳이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전단을 더러운 그릇에 두면 다시는 쓰는 것에 합당하지 않음과 같다. 이같이 사리불아, 만약 재가자와 출가자로써 몸에 전단향을 바른다 해도 더욱 부정한 것을 섞은 것과 같다. 사리불아, 이 나쁜 비구도 이와 같다. 무리 가운데 앉아 거룩한 법복(法服)을 입고 있다 하여도 그대로 이 비구의 나쁜 상은 더욱 나타난다. 범행(梵行)의 비구는 이 부정을 보고서 멀리하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 남이 멀리하고 떠나는 것을 보고서 마음이 곧 성내고 한탄하면 이 인연으로써 죽어서 지옥에 든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여섯 번째 근심과 고뇌의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
014_0350_a_20L是癡人於我法中便是屎尿臭穢不是人成就身口意業命不淸淨故命終之後墮在惡道入大地獄如是比丘諸佛如來及弟子衆常所遠離餘好道者求滅度者亦皆不近舍利譬如栴檀置不淨器同於不淨不復任用如是舍利弗若在家出家親近是人習效所行亦破戒品不久同顏色毀悴破失威儀命終之後生地獄中舍利弗如是惡人諸佛如來及弟子衆幷餘求道好滅度者皆所遠離舍利弗譬如栴檀置不淨器復任用如是舍利弗若在家出家雖以塗身猶雜不淨舍利弗此惡比丘亦復如是雖坐衆中著聖法服然是比丘惡相猶現梵行比丘見此不淨遠而不近見他遠離心則瞋恨以是因緣死入地獄舍利弗是名破戒比丘六憂惱箭必墮地獄
佛藏經卷上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열반이 상(相)이 없음을 관하는 행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정심(定心), 즉 삼매(三昧).
  2. 2)믿기 어렵던 이치를 잘 받아들이고 의혹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3. 3)귀신(鬼神)의 하나.
  4. 4)나찰(羅刹)의 한 종류인 귀신.
  5. 5)모든 것은 무상하여 실재(實在)하지 않음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 버린다는 주장.
  6. 6)모든 것이 영원히 변치 않음과 같이 이 몸도 죽으면 다시 태어나 끝없이 지금의 상태를 지속한다는 주장.
  7. 7)선정이 온갖 선근(善根)이라 함.
  8. 8)분(分)은 지분(支分)의 뜻. 37과(科)의 도행(道行)을 지분하므로 보리분이라 하고, 또는 분은 인(因)의 뜻으로 7각지(覺支), 37과(科)의 도행(道行)이 보리에 순종하므로 보리분이라 함.
  9. 9)훌륭한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여 자만하는 것.
  10. 11)무상(無相)의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집착함이 없고 분별함이 없는 것.
  11. 12)집착하는 마음인 나의 마음으로써 모든 법(法)중에서 상(相)을 취하므로 유소득이라 함.
  12. 13)상응하는 행(行)의 뜻이다. 편의상 일이라 하였음.
  13. 14)염은 관조(觀照)하는 지혜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 처(處)는 관조하는 대상의 경계.
  14. 15)①육신이 부정하다고 관하는 신념처(身念處) ②음행(婬行)ㆍ자녀(子女)ㆍ재물( 財物),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고(苦)라고 관하는 수념처(受念處) ③마음은 늘 변화한다고 관하는 심념처(心念處) ④위의 셋을 제외한 만유(萬有:法)에는 아(我)가 없고 아에 속한 것도 없다고 관하는 범념처(法念處).
  15. 16)성(性)은 체(體)이고 일체의 모든 법에는 실체(實體)가 없으므로 무성(無性)이라 함.
  16. 17)이것이다, 저것이다 가리는 생각.
  17. 18)공(空)은 제상(諸相)이 없음이며 적(寂)은 기멸(起滅)이 없는 것.
  18. 19)성문(聲聞)이 닦는 4과(果) 중의 하나로 그 첫 단계인 예류과(預流果)와 사다함(斯陀含).
  19. 20)영원히 불멸하는 아(我)가 있다고 하는 견해. 이하 동일하게 이해함.
  20. 21)인(忍)은 인허(忍許)의 뜻. 믿기 어렵던 이치를 잘 받아들여 의혹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이치는 4제(諦)의 이치를 관하여 인가함을 법인이라 함.
  21. 22)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던 대표적 외도의 스승 여섯 사람.
  22. 23)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법(法)으로써 이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여(如)이다. 진여(眞如).
  23. 24)고대 인도에 있어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천민으로 백정을 업으로 삼는다.
  24. 25)3장(藏)의 하나인 논(論)을 말함.
  25. 26)부처님이 설한 교법, 즉 경(經).
  26. 27)단(斷)은 만유(萬有)는 변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 상(常)은 만유는 불변한다는 주장.
  27. 28)출가자에게는 계를 설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며 재가자에게 있어서는 정기적인 재일(齊日)의 의식임.
  28. 29)공양을 받음에 합당한 과위(果位)를 얻은 자.
  29. 30)보살이 중생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나타내는 사업을 함께 하여 훌륭하게 중생을 거두는 것.
  30. 31)안거 맨 끝날 대중이 서로 보고 듣고 의심하는 일에 대하여 죄를 지적해서 참회하고 복을 닦는 일.
  31. 32)일상적인 기거동작, 즉 행(行)ㆍ주(住)ㆍ(坐)ㆍ와(臥).
  32. 33)장가들었으나 평생토록 자식이 없는 남자.
  33. 34)벌레의 이름이나 알 수 없음. 이하 모두 같다.
  34. 35)계금취(戒禁取), 취는 집지(執持), 집취(執取)의 뜻. 허망한 생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존재를 취하기 때문에 취라 하며, 계금취는 계율이 금하는 인연을 취하는 것.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아어취(我語取)와 함께 4취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