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비유하건대 강을 건너다가 도중에 돌아오는 것을 일러 ‘피안에 이르지 못했다’ 한다. 예컨대 사리불은 60겁 동안 보살도를 행하면서 보시의 강을 건너려했는데 어떤 걸인(乞人)이 와서 그의 눈을 달라고 했다. 이에 사리불이 말했다. “눈을 맡기다니 이는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내 몸이나 재물이 필요하다면 주겠다.”
사리불이 생각했다. ‘이렇게 포악한 사람은 제도할 길이 없겠구나. 눈이 실제로 필요치도 않은데 기어코 달라더니 침을 뱉어 버리고 또한 발로 밟아 버렸다. 어찌 이다지도 포악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은 제도할 수 없다. 차라리 스스로 닦아 신속히 생사를 벗어나느니만 못하겠도다.’
또한 보시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魔)의 보시요 둘은 부처의 보시이다. 만일 보시하되 번뇌[結使]의 도적에게 끄달려 근심하고 걱정한다면 마의 보시이니, 일컬어 이쪽 언덕[此岸]이라 한다. 만일 청정하게 보시하여 번뇌의 도적이 없고 두려움이 없이 불도에 이른다면 이것은 부처의 보시이니, 일컬어 피안에 이르렀다 한다. 이것이 바라밀이다.
『불설독사유경(佛說毒蛇喩經)』2)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죄를 짓자 왕은 그에게 광주리를 하나 맡기면서 잘 간직하라 분부했다. 그 광주리 안에는 뱀 네 마리가 있었는데 왕이 죄인에게 잘 보살펴 기르라 하니, 이 죄인은 생각했다. ‘네 마리의 뱀은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사람을 해친다. 한 마리도 기르기 어렵거늘 하물며 네 마리이겠는가.’ 그리고는 광주리를 버리고 달아났다. 왕은 다섯 사람을 시켜 칼을 뽑아들고 좇아가게 했다.
도망가던 중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나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품고 말했다. “이치에 맞게 기르면 괴로울 리가 없다.” 하지만 죄인은 그 말의 뜻을 눈치 채고는 서둘러 달아나 목숨을 부지했다. 다시 어느 빈 마을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착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그에게 방편을 부려 말했다. “이 마을은 비록 비었으나 도적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대가 여기에 머문다면 반드시 도적에게 해를 입을 것이니, 행여나 머물지 말라.”
이에 그대로 달아나서 어느 큰 강가에 이르렀다. 그 강의 저쪽은 다른 나라였는데, 그 나라는 안락하고 평탄하고 청정하여 아무런 근심거리가 없는 곳이었다. 그는 온갖 초목을 모아 묶어서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손과 발로 저어 건너서 피안에 이르니, 안락하고 근심이 없어졌다.
014_0610_b_01L여기에서 왕이라 함은 마왕이요, 광주리라 함은 사람의 몸이요, 네 마리의 독사라 함은 4대(大) 요, 칼을 뽑아 든 다섯 사람이라 함은 5중(衆)이요, 입으로는 착하고 마음은 악한 사람이라 함은 물들고 집착됨[染著]이요, 빈 마을이라 함은 6정(情)이요, 도적이라 함은 6진(塵)이요, 가엾이 여겨 말해 준 사람이라 함은 좋은 스승이요, 큰 강이라 함은 애욕이요, 뗏목이라 함은 8정도요, 손과 발로 애써 건넜다 함은 정진이요, 이쪽 언덕이라 함은 세간이요, 피안이라 함은 열반이요, 건넌 자라 함은 누(漏)가 다한 아라한을 말한다.
보살의 법에도 이와 같아서 보시에 세 가지 장애, 즉 주는 나와 베푸는 바를 받는 자와 재물이 있게 되면 이는 마의 경계에 떨어지고, 아직 온갖 환란을 여의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보살의 보시는 세 가지가 모두 청정하여 이러한 세 가지 장애가 없어야 피안에 이르며, 부처님들에게 칭찬받는다. 이것을 보시[檀]바라밀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피안에 이른다’고 한다.
이 6바라밀은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인색함 등의 번뇌에 물든 바다를 건너 피안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한다.
014_0610_b_10L此六波羅蜜,能令人渡慳貪等煩惱染著大海,到於彼岸,以是故名波羅蜜。
【문】 아라한과 벽지불도 능히 피안에 이르는데 어찌 바라밀이라 하지 않는가?
014_0610_b_12L問曰:阿羅漢、譬支佛亦能到彼岸,何以不名波羅蜜?
【답】 아라한과 벽지불이 피안에 이르는 것은 부처님이 피안에 이르는 것과 이름은 같으나 실제는 다르다. 저들은 생사로써 이쪽 언덕을 삼고 열반으로써 피안을 삼거니와 보시바라밀의 피안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물건과 온갖 때와 온갖 종류로 베풀지 못하며, 설사 베풀더라도 큰 마음이 없거나 무기심(無記心)3)이거나 유루의 선심(善心)이다. 혹은 무루의 마음으로 보시하더라도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온갖 중생을 위하여 베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베푸는데, 중생의 수효가 다할 수 없으므로 보시 역시 다할 수가 없다. 또한 보살은 불법을 위하여 베푸는데, 불법이 한량없고 끝이 없으므로 보시 역시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러므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비록 피안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바라밀이라 부르지는 못한다.
【답】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살은 능히 온갖 것으로써 베푼다. 곧 안팎의 것,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것, 거칠고 고운 것, 애착되고 애착되지 않는 것,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 등 이런 것 모두를 보시하여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균등하게 일체 중생에게 주되 어른에게는 주지만 애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거나 출가한 사람에게는 주지만 출가치 않은 사람에게는 주지 않겠다거나 인간에게는 주지만 새ㆍ짐승에게는 주지 않겠다 하지는 않는다. 곧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베풀며, 베풀고는 보답을 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보시의 실상을 얻는 것을 ‘갖추고 원만히 한다’고 한다. 또한 낮과 밤, 겨울과 여름, 길한 때와 쇠퇴한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항상 평등하게 베풀되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아까워하는 일이 없으며, 나아가서는 머리ㆍ눈ㆍ골수까지도 베풀되 인색하지 않으니, 이것을 ‘갖추고 원만히 한다’고 한다.
또한 7주(住)의 보살은 온갖 법의 실상을 아는 지혜를 얻는데, 이때에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부처님들께 공양하여 큰 신통을 얻는다. 곧 능히 한 몸을 나누어 무수한 몸을 짓고 낱낱 몸에서 모두 7보의 꽃과 향과 번기와 일산을 비 내리며, 수미산같이 큰 등을 변화해 만들어 시방의 부처님과 보살에게 공양한다. 또한 묘한 음성을 내어 부처님의 공덕을 찬송하고 예배하고 공양하고 공경하여 맞이한다.
014_0611_b_01L가령 색계의 하늘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쾌락에의 집착을 제거해 주고 보살의 선법(禪法)을 즐기게 하나니, 이런 인연으로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게 된다. 이렇게 하여 10주(住)까지 이르니, 이를 ‘보시바라밀을 갖추고 원만히 했다’고 한다.
예컨대 수제나(須提拏)4)진(秦)나라 말로 호애(好愛)이다.란 태자는 그의 두 아들을 바라문에게 보시하고, 다음은 아내를 보시하고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014_0611_b_11L如須提拏太子秦言好愛以其二子布施婆羅門,次以妻施,其心不轉。
또한 살바달(薩婆達)5) 왕진(秦)나라 말로 일체시(一切施)다.은 적국에 나라를 빼앗기자 깊은 숲 속에 숨어 있는데 먼 나라의 바라문이 와서 구걸을 했다. 그러나 자신은 나라도 패망한채 몸 하나 숨어 살건만 그가 얼마나 아쉽기에 멀리에서 왔거늘 아무것도 얻지 못함을 보고는 가엾이 여겨 바라문에게 말했다. “나는 살바달 왕이다. 새 왕은 사람들을 모아 나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결박해 그에게 주어 새 왕에게 끌려가니, 그는 많은 재물을 얻었다.
또한 월광 태자(月光太子)6)가 길을 가는데 나병에 걸린 사람이 그를 보고는 수레를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나는 무거운 병에 걸려 몹시 괴로운데 태자께서는 혼자만 즐겁게 노니십니까? 자비한 마음으로 가엾이 여기사 구제해 주십시오.” 태자가 이 말을 듣고 의원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말했다.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성낸 적이 없는 사람의 피와 골수를 뽑아 바르고 또한 마시면 나을 수 있습니다.”
014_0611_c_01L이에 태자는 생각했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바라진 않으리라. 그러니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내 몸을 제하고는 얻을 수가 없으리라.’ 그리고는 곧 전다라(旃陀羅)에게 명하여 몸의 살을 베어내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뽑아내게 했으며, 그것을 병자에게 바르게 하고 또한 마시게 했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몸과 처자를 베풀되 인색함이 없었으니, 마치 초목을 버리는 것과 같이 했다. 보시한 물건은 인연 따라 있었던 것임을 알고, 그 실체를 구하여도 도무지 얻을 수 없고 일체가 청정해서 모두가 열반의 모습과 같음을 알았으며, 마침내는 무생법인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업에 매여 나는 몸으로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법신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원만히 하는 것인가? 곧 보살이 마지막 몸으로 무생법인을 얻고는 육신을 버리고서 법신을 얻고는 시방의 6도(道) 가운데서 몸을 변화하여 중생을 교화하되 갖가지 보물과 의복과 음식으로 모두에게 보시하기도 하고 또한 머리ㆍ눈ㆍ골수ㆍ뇌ㆍ나라ㆍ재산ㆍ처자 등 안팎의 모든 것을 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일찍이 여섯 어금니의 흰 코끼리이셨을 때, 사냥꾼이 틈을 엿보아 독약을 바른 화살을 쏘니 코끼리들이 화가 나서 달려와 그 사냥꾼을 밟아 죽이려 했다. 이에 흰 코끼리는 몸으로써 그들을 막아 사냥꾼을 보호하여 자식같이 가엾이 여기면서 코끼리들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사냥꾼에게 천천히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쐈는가?” 사냥꾼이 대답했다. “나는 그대의 어금니가 필요하다.” 그는 곧 여섯 어금니를 바위 구멍에 넣고 흔들었다. 그러자 피와 살과 함께 흘러나오자 코로 어금니를 집어 사냥꾼에게 주었다.
014_0612_a_01L또한 한때 염부제 사람들은 나이든 이나 유덕한 이에게 인사할 줄을 몰랐는데, 말로써 교화해도 제도할 수 없었다. 이때 보살은 스스로 그 몸을 변화하여 가빈사라(迦頻闍羅)8) 새가 되었다.
그 새에게는 친한 벗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큰 코끼리요, 또 하나는 원숭이였다. 그들은 다 같이 필발라9)나무 아래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상의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누가 어른이 되어야 할까?”
코끼리가 말했다. “내가 옛날에 보니, 이 나무는 내 배 밑에 있었는데 이제 이렇게 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내가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원숭이가 말했다. “나는 어릴 적에 땅에 웅크리고 앉아 이 나무 끝을 휘어잡고 놀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내가 어른이 되어야 마땅하다.” 새가 말했다. “내가 다른 필발라 숲에서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데, 씨가 똥에 묻어나와 이 나무가 자라나게 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내가 당연히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는 다시 말했다. “먼저 태어난 어른에게는 마땅히 예를 갖추어 공양해야 한다.”
그러자 즉시 큰 코끼리는 등을 낮춰 원숭이를 태우고, 새는 원숭이 위에 앉아 숲 속을 돌아다니니, 다른 새와 짐승들이 보고는 이상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왜들 그러는가?” 그들이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어른을 공경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이 말에 다른 새와 짐승들이 감화를 받아 모두가 예절을 지키고 민가의 밭을 침범하거나 생명 있는 것들[物]의 목숨을 해치지 않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새와 짐승들이 모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궁금히 여겼다. 그런데 어느 사냥꾼이 숲에 들어왔다가 코끼리가 원숭이를 지고, 다시 원숭이는 새를 이고 다니면서 공경을 행해 동물들을 감화시키니, 이로 인해 동물들이 모두 선을 닦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니, 사람들은 모두가 경사스럽게 여기면서 말했다. “시절이 크게 태평해지려고 한다. 새와 짐승들조차 어질어지고 있다.” 사람들 역시 그것을 본받아서 예의와 공경을 다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교화의 힘이 흘러 만 세대에 이르니, 이것이 법신 보살이다.
또한 보살의 법신은 잠깐 사이에 한량없는 몸으로 변화하여 시방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일시에 능히 한량없는 재물과 보배를 변화해 내어 중생들에게 공급하며, 능히 일체의 상ㆍ중ㆍ하의 음성에 따라 잠깐 사이에 모두에게 두루 법을 설하며, 나아가서는 보리수 밑에 앉는다. 이러한 갖가지를 일컬어 법신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하여 원만히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인연으로 보시가 생겨나니, 첫째는 신심이 청정함이요, 둘째는 재물이요, 셋째는 복밭[福田]이다.
014_0612_b_10L復次,三事因緣生檀:一者、信心淸淨,二者、財物,三者、福田。
마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가엾이 여김과 공경함과 가엾이 여기면서 공경함이다. 빈궁하고 하천한 이나 축생들에게 베푸는 것은 가엾이 여기는 보시요, 부처님이나 법신 보살 등에게 베푸는 것은 공경하는 보시요, 늙고 병들고 가난한 아라한이나 벽지불에게 베푸는 것은 공경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보시이다.
첫째의 마음에 의한다 함은 4등심(等心)10)이나 염불삼매에 의하여 굶주린 범에게 몸을 보시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을 ‘마음에 의해 공덕을 얻는다’ 한다.
014_0612_b_19L第一從心,如四等心、念佛三昧、以身施虎,如是名爲從心大得功德。
복밭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가엾이 여기는 복밭이요, 둘째는 공경하는 복밭이다. 가엾이 여기는 복밭이라 함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는 것이요, 공경하는 복밭이라 함은 공경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마치 아수가(阿輸伽)11)진나라 말로는 무우(無憂)이다. 왕이 국토를 부처님에 바친 것과 같다.
또한 보시하는 자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세간 사람이요, 또한 하나는 세간을 벗어난 사람이다. 세간 사람은 재물은 버리나 보시는 버리지 못한다. 세간을 벗어난 사람은 능히 재물을 버리고 능히 보시를 버린다. 왜냐하면, 재물도 보시하는 마음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버릴 바 없는 법을 구족한다’고 한다.
또한 방석에는 길고 짧음, 거칠고 고움, 희고 검고 누렇고 붉음 등이 있으며, 인과 연, 지음과 깨짐, 결과와 과보가 있어서 그 특성[法]을 좇아 마음이 생겨난다. 곧 열 자는 길고 다섯 자는 짧으며, 올이 크면 거칠고 올이 가늘면 고우며, 물들임에 따라 빛깔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올이 있음은 인(因)이요 짜는 기계가 있음은 연(緣)이 되나니, 이런 인연이 화합하기에 방석이 된다. 사람이 공을 들이면 지음이 있고, 사람이 훼손하면 깨뜨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를 막거나 몸을 가리면 과보라 한다.
사람들은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몹시 근심함이 있으니, 그러한 것으로써 보시한다면 복을 받고 도(道)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훔치거나 혹은 겁탈해서 그것을 저자거리에서 깐다고 해도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이 있는 까닭에 이 방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방석의 법이라 하거늘 어찌 보시할 물건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답】 그대가 말하기를 “이름이 있으므로 그 일이 있다” 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이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사실[有實]과 사실이 아님[有不實]이다. 사실이 아닌 이름이란, 마치 어떤 풀의 이름이 주리(朱利)진나라 말로는 도적(賊)이다.이지만, 풀 자체는 훔치거나 겁탈하지 않아 실제로는 도적이 아니거늘 도적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또한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처럼 다만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없는 것과도 같다. 방석은 토끼의 풀이나 거북의 털같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이 모이기 때문에 있고, 인연이 흩어지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숲이라든가 군대도 모두 이름은 있으나 실제에는 없다. 비유하건대 나무 사람이 비록 사람이란 이름은 있으나 사람의 특성[法]을 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방석 역시 이름은 있으나 방석의 실체는 구할 수 없다.
014_0613_b_01L방석이란 사람의 마음을 내게 하는 인연이 되나니,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근심한다. 이것이 생각의 인연이다. 마음이 생기는 데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실제로부터 생기는 것과 실제가 아닌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꿈속에서 본 것과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밤에 말뚝을 보고 사람이라 여기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것들은 일컬어 ‘실제가 아닌 것에서 능히 마음을 낸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이란 일정치 않으니, 마음으로 생겨나 존재하기에 곧 있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있음[有]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상대해서 있음[相待有]이요, 둘째는 거짓 이름으로 있음[假名有]이요, 셋째는 법답게 있음[法有]이다.
014_0613_b_06L復次,“有”,有三種:一者、相待有,二者、假名有,三者、法有。
상대해서 있다고 함은 마치 길고 짧음이나 너와 나[彼此]같이 실제로는 길고 짧음이 없고 너와 나가 없건만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이름이 있게 된다. 길다 함은 짧은 것에 인하여 존재하고, 짧다 함은 또한 긴 것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너라는 것은 나를 인하고, 나라는 것 역시 너를 인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물건의 동쪽에 있으면 그로써 이쪽은 서쪽이 되지만, 서쪽에 있다면 동쪽이 된다. 한 물건은 다름이 없는데 동쪽ㆍ서쪽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없다. 이러한 것들을 ‘상대해서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실재하는 법은 없으니, 빛ㆍ냄새ㆍ맛ㆍ닿임 등과는 같지 않다.
거짓 이름으로 있다고 함은 마치 소락[酪]이 빛ㆍ냄새ㆍ맛ㆍ닿임 등 네 가지 일이 있어 인연이 합하는 까닭에 거짓으로 소락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비록 있다고 하나 인연의 법으로 있는 것과는 같지 않고, 없다고 하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이 없는 것과도 같지 않다. 다만 인연이 합하는 까닭에 거짓으로 ‘있다’ 할 뿐이다. 소락이나 방석의 경우도 그러하다.
014_0613_c_01L【문】 일체의 존재[物]가 반드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미진(微塵)은 지극히 미세하므로 나눌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므로 화합할 것이 없다. 방석, 즉 비단은 거칠기 때문에 쪼갤 수 있지만 미진은 나눌 수조차 없거늘 어떻게 쪼개겠는가?
예컨대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비구 무리와 함께 계실 적에 왕사성에 들어가시다가 길가에서 큰물을 보셨다. 부처님께서는 물 위에다 니사단(尼師壇)13)을 펴시고 앉으셔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가 선정에 들어 자재(自在)를 얻으면 큰물로 하여금 땅이 되게 하기도 하는데 그때에는 곧 실제의 땅이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물속에는 땅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물ㆍ불ㆍ바람ㆍ금ㆍ은 등 갖가지 보물들도 모두 즉시에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물속에는 모두 그들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014_0614_a_01L또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데, 음인(淫人)이 보면 맑고 묘하다 하여 마음으로 염착을 일으킨다. 관(觀)을 닦는 사람이 보면 갖가지 악(惡)이 드러나서 한 곳도 깨끗한 데가 없다 한다. 비슷한 여자가 보면 질투와 미움으로 증오하고 눈을 흘기며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더럽다 한다.
음란한 사람이 보면 즐거워지고, 질투하는 사람이 보면 괴로워지고, 수행하는 사람이 보면 도를 얻고, 관심 없는 사람이 보면 아무런 느낌도 없어서 마치 초목같이 여긴다. 이 예쁜 모습이 실로 깨끗하다면 네 종류의 사람이 다 깨끗하게 보아야 할 것이요, 실제로 더러운 것이면 네 종류의 사람이 다 더럽게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좋고 나쁨은 마음에 있고 밖에서 정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을 관함도 역시 이와 같다.
어찌하여 보시하는 사람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마치 방석이 인연이 화합하므로써 있거니와 부분부분 분석하면 방석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보시하는 사람도 그리하여서 4대(大)가 허공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몸이라 하는데, 이 몸의 의식이 동작하고 왕래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을 거짓으로 사람이라 하거니와 부분으로 그것을 구하면 역시 얻을 수 없다.
또한 일체의 온[衆]ㆍ처(處)ㆍ계(界)에서 ‘나’를 얻을 수 없나니, ‘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보시하는 사람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에게는 갖가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ㆍ하늘ㆍ남자ㆍ여자ㆍ베푸는 사람ㆍ받는 사람ㆍ괴로운 사람ㆍ즐거운 사람ㆍ축생 등인데, 이들은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요 실다운 법은 얻을 수 없다.
>【답】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이름이 있으니, 집이나 수레 등과 같이 실다운 법을 얻을 수는 없다.
014_0614_a_21L答曰:因緣和合故有名字,如屋、如車,實法不可得。
【문】 어찌하여 나를 얻을 수 없는가?
問曰:云何我不可得?
014_0614_b_01L【답】 앞에서 ‘어느 때 내가 들었다’를 풀이하면서 이미 설명했거니와 이제 다시 설명하리라.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6식(識)을 설명하셨다. “눈의 의식과 눈의 의식에 서로 응하는 법은 함께 색을 반연하고, 집이나 성곽 등 갖가지 이름을 반연하지 않나니, 귀ㆍ코ㆍ혀ㆍ몸의 의식도 이와 같다. 뜻의 의식과 뜻의 의식에 서로 응하는 법으로는 눈과 색과 눈의 의식을 알며, 나아가서는 뜻과 법과 뜻의 의식까지를 안다.”
이 의식이 반연하는 법은 모두가 공하여 나가 없나니, 그것은 생멸하기 때문이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의 법에서는 나가 있다고 계교할 수 없나니,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태여 나라 할 법이 있다면 응당 제7식(識)이 있어서 나를 식별해야 할 터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문】 어떻게 나가 없음을 알겠는가?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서 나라는 계교를 내고, 다른 이의 몸에서 나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만일 자기 몸에 나가 없는데 헛되이 보고는 나라 여기는 것이라면 남의 몸에서의 나 없음에 대하여서도 헛되이 보아 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안으로 나가 없어서 색과 의식이 생각생각 사이에 생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빛이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을 분별해 알겠는가.
014_0614_b_13L復次,若內無我,色、識念念生滅,云何分別知是色靑、黃、赤、白?
또한 만일 나가 없다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의식이 차츰차츰 생멸하다가 목숨이 다할 때엔 역시 다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행위의 죄와 복은 누가 따르고 누가 받으며, 누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으며, 누가 해탈을 얻겠는가.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하므로 나가 있음을 알겠다.
【답】 여기에는 양쪽 모두에 모순이 있다. 만일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는 계교를 낸다면 마땅히 “어찌하여 자기의 몸에 대하여는 나라는 계교를 내지 않는가”라고 말해야 한다.
014_0614_b_18L答曰:此俱有難!若於他身生計我者,復當言:“何以不自身中生計我”?
또한 5중(衆)의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공하여 나가 없거니와 무명의 인연으로 스무 가지 신견(身見)이 생기는데 이 나라는 견해는 원래 5음(陰)에 대해서 상속되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5음의 인연에서 생겼기 때문에 이 5음을 나라고 계교한다. 남의 몸에 있지 않으니 그것은 습관 때문이다.
014_0614_c_01L또한 신(神)14)이 있다면 너와 나가 있다 하겠지만 그대는 아직 신이 있고 없음을 명료히 하지 못하면서 나를 묻는다. 이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묻는데 말의 뿔 같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말의 뿔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로써 토끼의 뿔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말의 뿔조차 아직 명료히 하지 못하면서 토끼의 뿔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몸에 대하여 나라는 소견을 내는 까닭에 신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대가 말하기를 “신이 두루하다”고 한다면 남의 몸도 내몸이라고 계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몸에 대하여는 나라고 계교하는 생각이 나거니와 남의 몸에서는 생기지 않으므로 신이 있는 줄 알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남의 물건에 대하여 나의 것이란 생각을 내는데, 마치 어떤 외도가 좌선을 하면서 일체를 땅으로 보는 관법에 들어갔을 때 땅이 나요, 내가 땅이 되는 것과 같다. 물ㆍ불ㆍ바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니, 전도된 까닭에 남의 몸에 대해서 내 것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다.
또한 어떤 때는 남의 몸에 대하여 내 것이라는 생각을 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서 빈방에 혼자 머무는데 밤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 그의 앞에 던졌다. 이내 뒤를 이어 다른 귀신 하나가 따라와서 앞의 귀신을 꾸짖되 “이 시체는 나의 것인데 어찌하여 네가 메고 왔느냐” 하니, 앞의 귀신은 대꾸하기를 “이것은 나의 것이므로 내가 가져 왔다” 했다.
그러니 나중의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 하여, 마침내 두 귀신은 제각기 시체의 팔 하나씩을 잡고 다투다가 먼저 귀신이 이렇게 제의했다. “여기 인간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그러자 즉시 나중의 귀신이 물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은 생각했다.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죽음을 당할 것이요, 거짓으로 말해도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음을 면하지 못할 텐데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
이 말에 나중의 귀신은 화가 나서 그 사람의 팔을 뽑아 땅에 던져버리니, 먼저 귀신은 시체의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 주었다. 이와 같이, 두 팔ㆍ두 다리ㆍ머리ㆍ허리 등 온몸이 모두 바뀌어버렸다. 여기에서 두 귀신은 함께 바뀌어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는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014_0615_a_01L이때 그 사람은 생각했다. ‘나는 부모가 낳아 주신 몸을 눈앞에서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나의 이 몸은 남의 몸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이것은 모두 남의 몸이고,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몸이 있지 않는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니, 그곳 불탑에 승려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다.
그러자 비구들은 “이 사람은 나 없음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이오”라고 서로 얘기한 뒤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4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계교를 내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 본래의 몸은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그를 제도해 주니, 그는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만일 형상이 있다면 법(法)이 있고 형상이 없으면 법도 없다. 나는 이제 형상이 없으니 곧 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만일 나가 항상한 것이라면 살생의 죄가 없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몸은 죽일 수 있고 항상치 않기 때문이며, 나는 죽일 수 없고 곧 항상하기 때문이다.
【문】 나가 항상한 까닭에 비록 죽일 수 없지만 단지 몸을 죽이기만 해도 곧 살생의 죄가 있게 된다.
014_0615_a_22L問曰:我雖常故不可殺,但殺身則有殺罪。
014_0615_b_01L【답】 가령 몸을 죽이면 살생의 죄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비니(毘尼)에서는 말하기를 “자살에는 살생의 죄가 없다. 죄와 복은 남을 괴롭히고 이익되게 하는 데서 생긴다”고 하며, 다시 비니에서 말하기를 “자신을 죽이면 살생의 죄는 없고, 어리석음ㆍ성냄의 허물이 있다”고 했다.
만일 영혼[神]이 항상하다면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대들의 법에 의한다면 영혼은 항상하여 일체의 5도(道)에 두루 차 있다. 그러니 어찌 생사가 있겠는가. 죽음이란 여기에서 없어진다는 말이요, 남이란 저기에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항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허공과 같아서 비도 적시지 못하고, 열기로도 말리지 못하며, 또한 금생과 내생도 없을 것이다.
014_0615_b_10L若常,應如虛空,雨不能濕,熱不能乾,亦無今世、後世。
만일 영혼이 항상하다면 후생에 태어나거나 금생에 죽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시 영혼이 항상하다면 항상 아견(我見)이 있어서 열반을 얻지 못할 것이며, 영혼이 항상하다면 일어남도 멸함도 없으며, 잊거나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혼은 없고 식(識)은 무상하기에 잊는 일이 있고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신식은 항상치 않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해 영혼은 항상한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영혼이 무상한 모습이라면 또한 죄도 없고 복도 없다. 만일 몸이 무상하다면 영혼도 무상하다.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지면 단멸의 극단에 떨어지고, 단멸에 떨어지면 후생에 이르러 죄와 복을 받을 이도 없게 된다. 만일 단멸 그대로가 열반을 얻는 것이라면 번뇌[結]를 끊을 필요도 없고, 또한 후생의 죄와 복의 인연도 필요치 않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하여 영혼이 항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생은 모두 괴로움을 좋아하지 않나니, 누가 즐거움을 좋아하면서도 괴로움을 차지하려 하겠는가. 이런 도리에 의하여 신은 자재하지 못하며, 짓는 이[作者]도 아님을 알 수 있다.
014_0615_c_02L復次,一切衆生皆不樂苦,誰當好樂而更得苦?以是故,知神不自在,亦不作。
또한 어떤 사람이 죄를 두려워해서 억지로 선을 행하는데 만일 자재하다면 어찌 죄를 두려워해서 억지로 복을 닦겠는가. 또한 중생들이란 항상 뜻대로 이루지 못한 채 항상 번뇌에 속박되어 끄달린다. 이런 갖가지 인연에 의해 영혼이 자재하지 못하고, 스스로 짓는 이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영혼이 자재하지 않고 스스로 짓는 이도 아니라면 이는 영혼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보통 말하는 나란 6식(識)일 뿐 별것이 아니다. 또한 짓는 이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염라왕이 죄인들에게 “누가 너로 하여금 이런 죄를 짓게 하였는가?”고 물으며, 죄인들은 대답하기를 “내 스스로가 지었소”라고 하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스스로 짓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영혼이 물질[色]의 모습이라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영혼은 마음속에 있어서 미세하기가 겨자씨 같고 청정한 것을 일컬어 맑은 색신(色身)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리쌀과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콩알과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크기가 반 치[半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크기가 한 치인데, 처음 몸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받는다. 마치 등상[像]의 골격 같다가 몸을 이루면 등상과 같이 이미 가지런히 이루어진다” 한다.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크고 작음이 사람의 몸에 따라 다르나, 죽어 무너질 때엔 이것이 또한 앞서 나간다” 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모두가 옳지 못하다.
【답】 만일 그렇다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마치 사람이 죽을 때 이 몸[生陰]을 버리고 중음(中陰)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이 세상의 몸이 멸하고 중음의 몸을 받는다. 여기에는 앞뒤가 없어서 멸할 때에 곧 생겨난다. 비유하건대 밀랍도장[蠟印]을 진흙에 찍으면 진흙에 도장이 찍히면서 밀랍도장은 이내 망가져 버리는 것과 같다. 곧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동시여서 앞뒤가 없는 것이다.
영혼은 물질의 특성이 없는 것[無色相]도 아니라고 했는데, 무색이란 4중(衆) 및 무위(無爲)를 말한다. 4중은 무상하고 자재롭지 못하고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영혼이 될 수 없다. 세 가지 무위15)에는 신이 있다고 계교할 수 없으니, 받아들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영혼은 물질의 특성이 없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014_0616_b_01L이와 같이 천지 사이의 안팎과 3세(世)와 시방에서 나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오직 12입(入)이 화합해서 6식(識)을 낳는다. 3사(事)16)가 화합한 것을 촉(觸)이라 하고, 촉은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을 내며, 이 법 가운데 무명의 힘 때문에 신견(身見)이 생겨나고, 신견이 생기므로 영혼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신견은 고제(苦諦)의 고법제(苦法諦)와 고비지(苦比知)를 본다면 곧 끊어지나니, 끊어진다면 곧 영혼이 있음을 보지 않게 된다.
그대가 먼저 말하기를 “만일 안에 영혼의 물질[色]이 없다면 식은 생각마다 생멸하거늘 어떻게 빛의 청ㆍ황ㆍ적ㆍ백을 분별해 알겠는가” 했으며, 또한 그대는 말하기를 “만약에 영혼이 있더라도 혼자서 아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눈의 의식에 의지해서야 안다”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영혼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눈의 의식으로 색을 아니, 색의 생멸은 생을 닮기도 하고 멸을 닮기도 한 것이다. 그런 연후에 마음속에 어떤 법이 생겨남을 일컬어 생각[念]이라 한다. 이 생각의 모습은 유위의 법이어서 비록 멸하여 과거가 되나 이 생각으로 능히 아는 것이다. 마치 성인이 지혜의 힘으로 미래의 일을 아는 것과 같다. 생각[念念]도 그와 같아서 능히 과거의 법을 안다. 만일 앞의 눈의식이 멸하고 뒤의 눈의식이 생긴다면 뒤의 눈의식은 더욱 예리하고 힘이 있게 된다. 색은 비록 잠시 있을 뿐 머물지 않으나 생각의 힘이 예리한 까닭에 능히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비록 생각마다 생멸하여 무상하나 능히 색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마치 노끈을 맺고 노끈을 푸는 일과 같다. 노끈이 곧 매듭이니, 매듭이란 다른 특징[法]이 없어서 세간에서는 노끈을 맺는다거나 노끈을 푼다고 말할 따름이다.
014_0616_c_07L如繩結、繩解,繩卽是結,結無異法,世界中說結繩、解繩。
이름과 모양도 이와 같아서 이름과 모양의 두 법이 화합한 것을 거짓으로 사람이라 한다. 이 번뇌는 이름이나 모양과 다르지 않아서 단지 일컫기를 ‘이름과 모양이 맺어지고, 이름과 모양이 풀렸다’고 할 뿐이다. 죄와 복을 받는 것도 이와 같아서 비록 한 법도 사람이란 실체가 없지만 이름과 모양 때문에 죄와 복의 결과를 받으며, 게다가 사람이란 명칭을 얻는다.
비유하건대 수레에 물건을 싣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 추궁하면 끝내 수레의 실체는 없지만 수레는 물건을 싣는다는 명칭을 받는다. 사람이 죄와 복을 받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이름과 명칭이 죄와 복을 받으며 게다가 사람이 그 이름을 받을 뿐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것도 이와 같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해 영혼은 얻을 수 없다.
영혼은 곧 베푸는 이요, 받는 이라 함도 이와 같나니, 그대는 영혼을 사람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베푸는 사람도 얻을 수 없으며, 받는 사람도 얻을 수 없음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해 이것을 일컫기를 ‘베푸는 물건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014_0617_a_01L【답】 범부들은 베푸는 이와 받는 이와 베푸는 물건을 보나니, 이는 뒤바뀌고 허망한 소견이다. 세간에 태어나서 즐거움을 받다가 복이 다하면 다시 윤회의 길로 굴러간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살들로 하여금 진실한 도를 행하여 진실한 과보를 얻게 하시려 하였으니, 진실한 과보란 곧 불도이다.
만일 음식 등 거친 물건을 가지고 연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이를 하품이라 한다. 보시를 익히고 더욱 늘려서 능히 의복이나 보물을 가지고 보시하면 이것은 하품에서 중품을 낳은 것이 된다. 보시할 마음이 더욱 늘어나서 아낌없이 머리ㆍ눈ㆍ피ㆍ살ㆍ나라ㆍ재물ㆍ처자를 모두 보시한다면 이것은 중품에서 상품을 낳은 것이 된다.
전생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하셨을 때 광명이라 불리는 국왕이셨는데,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적건 많건 모두 보시하였더니 윤회해서 뒷몸을 받자 옹기장이가 되었다. 그는 목욕하는 도구와 꿀물로써 지금과는 다른 석가모니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공양하였더니, 다시 몸을 바꾼 뒤에 큰 장자의 딸이 되었다. 다시 등불로써 교진야불(憍陳若佛)에게 공양하였으니, 이러한 갖가지를 보살의 하품의 보시라 한다.
014_0617_b_01L또한 석가모니부처님은 전생에 장자의 아들이었는데, 옷으로써 대음성불(大音聲佛)17)에게 공양하였으며, 그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90개의 탑을 일으켰다. 뒤에 다시 몸을 바꾸어서는 큰 국왕이 되었는데, 7보의 일산으로 사자불(師子佛)18)에게 공양했다. 나중에 다시 몸을 바꾸어서는 큰 장자가 되어 묘목불(妙木佛)19)에게 가장 좋은 방사(房舍)와 7보의 묘한 꽃으로 공양했다. 이러한 갖가지를 보살의 중품의 보시라 한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은 전생에 선인(仙人)이셨다. 교진야불의 상호가 단정하시고 수묘(殊妙)하심을 뵙고는 문득 높은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부처님 앞으로 몸을 던졌는데 그 몸이 무사하게 한쪽에 서 있었다. 또한 중생희견보살(衆生喜見菩薩)20)이 몸으로 등불을 만들어 일월광덕불(日月光德佛)께 공양했다. 이렇게 갖가지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처님들께 공양했으니, 이것은 보살의 상품의 보시이다. 이것을 보살의 세 종류의 보시라 한다.
어떤 이가 처음으로 불심(佛心)을 내어 중생에게 보시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처음에는 음식으로 보시하다가 보시할 마음이 차츰 늘어나서 몸이나 살로써 베풀게 된다. 먼저는 갖가지 좋은 음료수를 보시하다가 나중에 그 마음이 차츰 늘어나서 몸의 피를 베풀며, 먼저는 종이나 먹으로 된 경서를 보시하거나 의복ㆍ음식 등 네 가지 공양구로 법사에게 공양하다가 나중에는 법신을 얻어 한량없는 중생에게 갖가지 법을 말해 주는 법시를 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단바라밀에서 단바라밀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살의 보시에서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이 생겨나는 것인가?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중생들은 베풀지 않는 까닭에 후세에 빈궁해진다. 빈궁하기 때문에 훔치려는 생각을 내고, 훔치기 때문에 죽이고 해하게 된다. 또한 빈궁하기 때문에 색(色)에 있어서 충족하지 못하고, 색이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삿된 음행을 한다. 또한 빈궁하기 때문에 남보다 하천하게 되고, 하천해지면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014_0617_c_01L제바달다(提婆達多)는 전생에 뱀이었는데, 두꺼비와 거북과 함께 한 못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후에 그 못이 말라버리자 굶주림이 극에 달하고 견디기 어렵게 되었건만 구할 곳이 없었다. 이때 뱀은 거북을 보내어 두꺼비를 불렀다. 두꺼비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또한 보살은 베풀되 언제나 받는 이에게 자비한 마음을 내어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의 물건에 대하여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하물며 겁탈하거나 훔치겠는가. 받는 이를 자비로써 대하거늘 어찌 해칠 생각이 있겠는가. 이러한 일들은 능히 파계를 막으니, 이것이 보시가 계행을 낸다는 것이다. 만일 능히 보시한다면 그로써 인색한 마음을 깨뜨리며, 그 뒤에 지계ㆍ인욕 등을 행함이 쉬워진다.
문수사리는 아주 오랜 옛날에 한 비구였을 때에 성에 들어가서 걸식을 하다가 백 가지 맛을 내는 환희환(歡喜丸)21)을 발우 가득히 얻었다.
014_0617_c_17L如文殊師利,在昔過去久遠劫時曾爲比丘,入城乞食,得滿鉢百味歡喜丸。
014_0618_a_01L이때 성안에 있던 어떤 아이가 따라오면서 달라고 하였는데 주지 않고 불탑[佛圖]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손으로 환희환 두 개를 집어 들고는 그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이 한 알은 네가 먹고 한 알은 스님들께 보시하겠다면 주겠다.” 아이는 곧 그렇게 하겠다 하고는 환희환 한 알을 승려들에게 보시했다. 그 뒤 문수사리에게 계를 받고는 부처를 이루리라고 발심했다. 이와 같이 보시는 능히 계를 받고 성불할 마음을 내기까지 하게 하나니, 이것이 보시가 시라바라밀을 내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시에서 찬제바라밀이 생기는 것인가? 보살이 보시할 때에 받은 이가 도리어 꾸짖거나 지나치게 달라거나 때에 맞지 않게 구하거나 바라지 않을 것을 바라거나 한다면, 이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보시를 해서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 아무도 나에게 보시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가 한 것이다. 어찌 화를 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인욕을 행하나니, 이것이 보시에서 찬제바라밀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받는 이가 성을 내고 괴롭힌다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안팎의 재물을 모두 보시하여 버리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버렸다. 그러니 하물며 빈 소리를 참지 못하겠는가. 만일 내가 참지 못한다면 보시한 것은 더러워지고 만다. 마치 흰 코끼리가 못에 들어가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 나와서는 다시 흙을 몸에 묻히는 것과 같다. 베풀고서 참지 못함도 또한 이와 같으리라.” 이렇게 생각하고는 인욕을 행하나니, 이러한 갖가지 보시의 인연에서 찬제바라밀이 생겨난다.
어떤 것이 보시에서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 생기는 것인가? 보살은 보시할 때 항상 정진을 행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엔 공덕이 크지 못하니, 이때는 두 가지 보시를 행하여 모든 중생의 소원을 채워 주고자 하건만 재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물과 법을 간절히 구하여 그로써 베푸는 것이다.
014_0618_b_01L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전생에 큰 의원이셨는데, 일체의 병을 고쳐 주되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니,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었다. 병자는 매우 많은데 두루 다 구제하지 못해서 모두를 위해 근심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깊이 근심했다. 죽어서 곧 바로 도리천(忉利天)22)에 태어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하늘에 태어났으나 복의 갚음을 누릴 뿐 길이 이익되는 바가 없도다’라고 하고는 곧 방편을 써서 몸을 마쳤다. 이 하늘의 수명을 버리고는 사가타(娑伽陀)용왕23)의 궁에 태어나 용의 태자가 되니, 그 몸이 훤칠함에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용의 태자는 죽어서 염부제에 태어났는데 큰 나라의 태자가 되어 능시(能施)라 불렸다.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였는데 좌우의 사람들에게 묻기를 “지금 이 나라에 어떤 물건이 있는가? 모두 가지고 오라. 보시에 쓰리라” 하니, 사람들이 듣고 모두가 괴이하게 여기고 두려워하면서 그를 버리고 달아났다.
014_0618_c_01L다시 염부제 사람들이 빈궁하고 고달파하는 것을 보고는 보시해 주고 싶었으나 재물이 부족했다. 문득 울면서 사람들에게 묻기를 “어떤 방편을 써야 모두를 만족하게 할 재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여러 노숙[宿人]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이전에 듣건대 여의주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얻기만 하면 마음속에 구하는 것 모두를 반드시 얻는다 합니다.”
보살이 이 말을 듣자 부모에게 말하기를 “바다에 들어가서 용왕의 머리 위에 있는 여의주를 구해오겠습니다” 하니, 부모는 만류했다. “우리에게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뿐이다. 바다에 들어가면 온갖 환난을 건너기가 어렵거늘 자칫 너를 잃는다면 우리는 어찌 살아가겠느냐. 갈 필요가 없느니라. 지금 우리 창고에는 아직 재물이 남았으니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아들이 말했다. “창고에 있는 것은 한정이 있지만 저의 뜻은 끝이 없습니다. 저는 재물로써 일체를 충족시켜주어 모자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본래의 뜻을 이루어 염부제의 사람들 모두가 풍족하게 되도록 하여주옵소서.” 부모는 그의 뜻이 원대함을 알고는 더 이상 말리지 못한 채 결국 그를 떠나게 했다.
그때 5백 명의 상인이 있었는데 그의 복덕이 위대했기에 그들은 모두 그를 따라가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그가 떠나는 날을 알고는 포구[海道]로 모여 들었다. 보살은 먼저부터 사가타(娑伽陀)용왕의 머리 위에 여의보주25)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이므로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가 그 용궁으로 가는 물길을 아는가?”
보살이 다시 간청했다. “나의 이 길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두루 일체의 중생을 위한 것입니다. 여의주를 얻어서 중생들에게 베풀어 그 몸에 궁핍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며, 그리고는 도법의 인연으로써 그들을 교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거늘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그 어찌 그대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014_0619_a_01L준비가 모두 끝나고 일곱째 닻줄을 끊으니, 배는 달리듯 뭇 보배가 있는 갯벌에 이르렀다. 장사꾼들은 앞 다투어 보배를 주워 제각기 만족한 뒤에 보살에게 말했다. “어째서 보물을 캐지 않으십니까?” 보살이 대답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여의보주이다. 이 다함이 있는 물건은 내게 필요치 않다. 그대들은 각각 만족함을 알고 분량을 알아서 배가 무거워 견디기 어렵게 하지 말라.”
이때 장사꾼들이 보살에게 말했다. “대덕(大德)께서는 우리들이 평안히 돌아가도록 축원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014_0619_a_06L是時,衆賈白菩薩言:“大德!爲我呪願,令得安隱!”於是辭去。
이때 타사가 보살에게 말했다. “따로 배 한 척을 남겨 이 별도(別道)를 따라 가도록 하십시오. 바람이 7일 동안 분 뒤에 바다 남쪽 기슭으로 밀리어 어느 험한 곳에 이르면, 절벽이 있고 대추숲[棗林]이 있는데 가지가 온통 물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큰 바람이 불어 배를 뒤집을 것이니, 그대는 대추나무 가지에 매달리면 구제될 것이나 나는 눈이 없으니 거기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 기슭을 지나면 황금 모래섬이 있을 터이니, 내 몸을 이 모래 가운데 묻어주시오. 금모래는 청정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그리고는 혼자 찾아가서 그가 미리 일러 준대로 7일간을 깊은 물에 떠있고, 7일간 목까지 차는 물에 다니고, 7일간 허리까지 차는 물에 다니고, 7일간 무릎까지 차는 물에 다니고, 7일간 진흙밭을 다녔다. 드디어 예쁜 연꽃이 곱고 부드럽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 꽃이 부드럽고 약하니, 허공삼매(虛空三昧)에 들어야 되겠구나.’ 스스로 몸을 가볍게 하여 연꽃 위를 다니기를 7일, 독사들을 보고 생각했다. ‘독을 품은 벌레는 참으로 무섭도다.’
014_0619_b_01L곧 자심삼매(慈心三昧)에 들어 독사의 머리 위로 다니기를 7일, 독사들을 모두 머리를 들어 보살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했다. 이런 난관을 지나자 일곱 겹의 보배성이 나왔는데, 주변에는 일곱 겹의 구덩이[塹]가 있고, 구덩이 가운데에는 독사가 가득했으며, 세 마리의 큰 용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용들은 보살의 용모가 단정하고 상호에 위엄이 있으며, 그 어려운 난관들을 지나서 거기까지 온 것을 보고 생각했다. ‘이는 범부가 아니다. 반드시 보살의 대공덕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는 지름길로 나아가 용왕의 궁전에 들어가도록 허용했다.
이때 용왕 부부는 아들을 잃은 지 오래지 않았다. 때문에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보살이 오는 것을 보았다. 용왕 부인은 신통으로 자기의 아들이었음을 알자 두 젖에서는 젖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곧 앉으라고 분부하면서 물었다. “너는 내 아들이었는데 나를 버리고 죽어서 어디에 태어났느냐?”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 머리 위에 그 여의보주가 있기는 하나 머리장식이므로 얻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너를 데리고 보물창고에 들어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가져가라 하시리니, 너는 대답하기를 ‘그런 잡된 보물은 제가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대왕의 머리 위의 보주만을 원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그것을 저에게 주옵소서’ 하라. 그러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곧 아버지에게로 가니, 아버지는 슬픔과 기쁨이 한없이 복받쳤다. 그 아들이 험난한 길을 거쳐 멀리 온 것을 가엾이 여겨 묘한 보물이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주리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지거라.” 이에 보살이 말했다. “제가 멀리 온 뜻은 대왕을 뵙고 대왕의 머리 위에 놓인 여의보주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거든 마땅히 그것을 주시옵소서. 만일 주지 않으신다면 다른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014_0619_c_01L용왕이 대답했다. “나는 오직 이 보주 하나만으로 머리장식을 삼고 있다. 염부제 사람들은 복이 얇고 천박해서 여의주를 볼 수 없느니라.” 보살이 다시 말했다. “저는 그 때문에 멀리서 험난한 길을 지나서 죽음을 무릅쓰고 온 것입니다. 염부제 사람들이 복이 얇고 빈천하기 때문에 여의보주를 가지고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뒤에 불도의 인연으로 교화하려 합니다.”
마침내 용왕은 보주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보주를 너에게 주노니, 네가 세상을 뜨게 되거든 나에게 돌려주어야 하느니라.” 보살이 대답했다. “공경히 대왕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보살은 보주를 받아들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팔을 한번 굽혔다 펴는 사이에 염부제에 이르렀다.
인간 왕의 부모는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껴안고 물었다. “너는 무엇을 얻었느냐?” 보살이 대답했다. “여의보주를 얻어왔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이 옷자락 속에 있습니다.” “어찌 그리 작으냐?” “신비한 공덕은 커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부모에게 말했다. “마땅히 성에 명을 내려 성의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향을 사루고, 비단 번과 일산을 달고, 가지런히 계를 지녀야 합니다.”
이때 구름이 온 하늘을 두루 덮으면서 갖가지 보물과 의복ㆍ음식ㆍ와구ㆍ탕약 등을 비처럼 내렸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모두 구족되니, 그들의 수명이 다하기까지에 항상 갖추어져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보살의 보시가 정진바라밀26)을 낸다’ 한다.
014_0620_a_01L어떻게 해서 보살의 보시가 선정바라밀을 내는가? 보살이 보시할 때 능히 인색함과 탐냄을 제거한다. 인색함과 탐냄을 제한 뒤에는 이 보시에 의하여 일심으로 행한다면, 점차 5개(蓋)27)를 제하게 된다. 능히 5개를 제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선(禪)이라 한다.
나아가 마음은 보시에 의해 초선(初禪) 내지는 멸정선(滅定禪)28)에 든다. 어떻게 보시에 의지하는가? 만일 선을 닦는 사람에게 베풀 때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이 사람이 선정을 닦는다 하여 맑은 마음으로 공양한다. 그런데 어찌 내가 지금 선에서 물러서려 하는가’ 하고는 생각을 거두어 모우고 사유해 선정을 닦는다.
여러 작은 왕들은 생각하기를 ‘대왕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여도 우리들 또한 사사로이 쓸 수는 없다’ 하고는 다 같이 7보의 궁전을 세우고, 7보의 정자나무[行樹]를 심고, 7보의 못을 만들었다. 궁전 안에는 8만 4천 개의 7보 누각을 세우고, 누각 안에는 모두 7보의 평상을 마련하였으며, 갖가지 색깔의 이부자리와 목침을 평상의 양쪽에 두고,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달고, 향훈을 땅에 바르는 등 모든 일을 갖춘 뒤에 대왕에게 말했다. “바라옵건대 법전(法殿)ㆍ보배 나무ㆍ목욕터를 받아주시옵소서.”
왕은 잠자코 받아들이고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새 궁전에 먼저 들어가서 스스로 즐길 것이 아니라 먼저 착한 사람들, 즉 사문이나 바라문들을 찾아 먼저 들어가게 하여 공양한 뒤에야 머물러야 하리라.’ 그리고는 곧 착한 사람들을 모아 먼저 보배 궁전에 들게 하여 갖가지로 공양하고 미묘하게 구족하게 했다.
014_0620_b_01L여러 사람들이 나온 뒤에 왕은 보배 궁전에 들어가서는 금 누각에 올랐다. 그리고 은 평상에 앉아 보시를 억념해 5개(蓋)를 제하고, 6정(情)을 거두고, 6진(塵)을 물리쳐 기쁨과 즐거움을 감수하는 초선(初禪)에 들었다. 다음은 은 누각에 올라 금 평상에 앉아 2선에 들었다. 다음은 비유리 누각에 올라 파리 보배 평상에 앉아 3선에 들었다. 다음은 파리 보배 누각에 올라 비유리 평상에 앉아 4선에 들었다.
홀로 앉아 사유하기 석 달에 이르니, 옥녀(玉女) 보후(寶后)가 8만 4천의 시녀들과 함께 모두 흰 구슬과 이름난 보배로 그 몸을 장식하고는 대왕에게 와서 말했다. “오랫동안 뵙지 못해서 감히 문안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왕이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제각기 마음을 단정히 하여 선지식이 될지언정 나의 원수가 되지는 말라.”
왕이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세상의 인연으로 여기어 음욕의 일을 함께 행하면서 즐긴다면 이는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이요, 만일 덧없음을 깨닫고, 몸이 환(幻) 같음을 알고, 복을 닦고 선을 행하며 욕정을 끊어버린다면 이는 선지식이 되느니라.” 옥녀들이 대답했다. “삼가 왕의 말씀대로 하겠나이다.” 그리고는 이 같은 말이 끝나자 각자 여자들을 돌려보냈다.
여자들이 떠난 뒤에 왕은 금 누각에 올라 은 평상에 앉아 자삼매(慈三昧)를 행했다. 다시 은 누각에 올라 금 평상에 앉아 비삼매(悲三昧)를 행하고, 비유리 누각에 올라 파리 평상에 앉아 희삼매(喜三昧)를 행하고, 파리 보배 누각에 올라 비유리 평상에 앉아 사삼매(捨三昧)를 행했다. 이것이 곧 보살의 보시가 선바라밀을 낳는 것이다.
014_0620_c_01L또한 보살이 보시할 때는 능히 이런 일을 분별해 안다. 곧 계를 지니지 않는 사람이 채찍으로 때리거나 고문하거나 가두고, 법을 어기고 재물을 얻었지만 보시를 짓는다면 코끼리ㆍ말ㆍ소로 태어나나니, 비록 축생의 모습을 받아 무거운 짐을 지고 채찍을 맞고 굴레에 얽매이고 사람을 태우지만 항상 좋은 우리와 좋은 먹이를 받으며,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고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갖가지 보시할 때에 대해 잘 분별해 아나니, 이것이 곧 보살의 보시가 반야를 낳는다는 것이다.
014_0620_c_19L如是種種,當布施時能分別知,是爲菩薩布施生般若。
014_0621_a_01L또한 음식을 보시하면 힘과 목숨과 혈색이 보기 좋은 과보를 얻으며, 의복을 보시하면 태어날 적마다 부끄러움을 알고, 위덕 있고 단정하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된다. 방과 집을 보시하면 갖가지 7보를 얻고 궁전이 저절로 나타나 5욕을 마음껏 즐기게 된다.
우물이나 샘이나 갖가지 좋은 음료수를 보시하면 태어나는 곳마다 주림과 목마름이 없고 5욕이 구족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보시하면서 부모나 삼촌이나 형제ㆍ자매에게 공양하며,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고 다투는 일을 보기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도리천ㆍ야마천ㆍ도솔천ㆍ화자재천ㆍ타화자재천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분별해서 보시하니, 이것이 곧 보살의 보시가 반야를 낳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보시를 행하되 마음이 물들지 않고 세간을 싫어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구한다면 이는 벽지불과 아라한의 보시가 된다. 어떤 사람이 보시를 행하되 불도를 위하거나 중생을 위해서라면 이는 보살의 보시가 된다. 이렇게 갖가지 보시 가운데 분별해 아니, 이것이 곧 보시가 반야바라밀을 낳는 것이다.
014_0621_b_01L또한 일체의 지혜와 공덕의 인연은 모두가 보시를 말미암는다. 천(千) 부처님이 처음 발심하실 때에도 갖가지 재물로 여러 부처님께 보시하나니, 혹은 꽃이나 향 혹은 의복 혹은 이쑤시개[楊枝]를 보시해 그로써 뜻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보시하니, 이것이 곧 보살의 보시가 반야바라밀을 낳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