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법인이란 안의 6정(情)1)에 집착하지 않고 밖의 6진(塵)2)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두 가지에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안 모양이 바깥과 같고 바깥 모양이 안과 같아서 두 모습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모습이기 때문이고 인연으로 화합하기 때문이며, 그 실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습이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고, 여(如)ㆍ진제(眞際)ㆍ법성(法性)의 모습이기 때문이며, 둘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둘이 아니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마음으로 믿어 물러나지 않으면 이를 법인이라 한다.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 법주(法住)보살3)이 말했다. “생과 멸은 둘이요, 불생불멸은 곧 불이(不二)로 들어가는 법문이다.” 나아가 문수시리(文殊尸利)4)가 말했다.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아 일체의 마음이 멸하고, 말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 이것이 불이로 드는 법문이다.” 비마라힐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여기에서 보살들이 찬탄하며 말했다. “실로 훌륭하십니다. 이는 참된 ‘불이로 드는 법문입니다.”
014_0643_a_01L일체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이요, 둘째는 모든 법이다. 보살이 중생 가운데서 참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제는 법 가운데서 참는 일을 말하리라. 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마음의 법[心法]과 마음 아닌 법[非心法]이다. 마음 아닌 법에는 안의 것과 밖의 것이 있는데, 밖에는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등이 있고, 안에는 주림ㆍ목마름ㆍ늙음ㆍ앓음ㆍ죽음 등이 있다. 이러한 갖가지를 마음 아닌 법이라 한다. 마음의 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성냄ㆍ근심ㆍ의심 등이요, 둘째는 음욕ㆍ교만 등이다. 이 두 가지를 마음의 법이라 한다. 보살은 이 두 법에 대해 참고 동요되지 않으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문】 중생에게 만약 성을 내거나 목숨을 해치면 죄를 받고 가엾이 여기면 복을 얻거니와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에는 이익도 손해도 없거늘 어찌 참는가?
014_0643_a_05L問曰:於衆生中若瞋惱害命得罪,憐愍得福;寒熱風雨,無有增損,云何而忍?
【답】 비록 이익도 손해도 없지만 스스로 뇌란과 근심을 내어 보살도를 해치나니, 이런 까닭에 참아야 한다.
014_0643_a_07L答曰:雖無增損而自生惱亂憂苦,害菩薩道,以是故,應當忍。
또한 단지 중생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까닭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삿된 마음 때문에 인연을 짓는 까닭에 죄가 되는 것이다.그것은 왜냐하면 비록 중생을 죽였더라도 무기의 마음(無記心)이었다면 죄가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사랑해 주면 비록 준 것은 없더라도 큰 복을 얻는다. 비록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가 이익이나 손해를 주지는 않더라도 능히 악의(惡意)를 일으키기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참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국토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이다. 만약 보살이 더러운 국토에 태어난다면 이러한 괴로움과 주림과 추위 등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 스스로 청정한 서원을 세워 〈내가 성불하거든 내 국토에는 이런 괴로움들이 없어지리다〉고 하리라. 이 국토가 비록 깨끗하지 않으나 나에게는 이익인 것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은 성현도 면치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나이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참아야 하리라.’
014_0643_a_20L復次,菩薩思惟:“世閒八法,賢聖所不能免,何況於我!”以是故,應當忍。
014_0643_b_01L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인간의 몸은 견고함도 없고 강함도 없어서 늙음ㆍ병듦ㆍ죽음에 쫓김을 안다. 비록 하늘의 몸이 청정하여 늙음ㆍ병듦이 없다 하더라도 하늘의 쾌락에 집착된다. 마치 취한 사람과 같으니, 도와 복을 닦고 출가해 애욕을 여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 인간의 몸에서 스스로 참아서 복을 닦고,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하리라.’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4대와 5중의 몸을 받았으니 응당 갖가지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몸을 받고서 괴롭지 않은 이가 없다. 부귀하거나 빈천하거나 혹은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났거나,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아무도 면할 자가 없다. 왜냐하면 부귀한 사람은 항상 두려움으로 재물을 지키나니, 마치 살찐 염소는 일찌감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으며, 고기를 문 새를 뭇 새들이 좇는 것과도 같다. 빈천한 사람에게는 주리고 추운 고통이 있다. 집을 떠난 사람은 금생에 괴로움이 있으나 후생에 복을 받아 도를 얻는다.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금생에 비록 즐거우나 후생에 괴로움을 받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먼저 이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거니와 무상이 이르면 나중에는 괴로움을 받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상의 괴로움을 사유하고, 나중에 즐거움을 받는다. 이렇듯 몸을 받은 사람으로서 괴로움 없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보살은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의 세간은 모두 괴로운데 나는 어찌하여 거기에서 즐거움을 구하려하는가.’
014_0643_b_14L復次,菩薩思惟:“一切世閒皆苦,我當云何於中而欲求樂?”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한량없는 겁 동안 항상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 아무런 이익이 없이 일찍이 법을 위하지 못했었다. 오늘은 중생을 위하여 불도를 구하니, 비록 이런 고통을 받으나 의당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팎의 모든 고통을 능히 참고 감수해야 하리라.’
014_0643_c_01L【답】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도는 얻지 못하고 아직 모든 번뇌를 끊지 못했으나 참지 못한다면 범부와 다를 것이 없으니, 보살이 아니다’고 한다. 또한 ‘만일 내가 도를 얻고, 번뇌를 끊었다면 곧 참아야 할 법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시는데, 마왕이 와서 말했다. “찰리(刹利)5)의 귀인이여, 그대의 목숨은 이제 천분의 일밖에 남지 않았다. 속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서 보시하고 복을 닦아 금생과 후생에서 인간과 하늘의 즐거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도는 얻을 수 없다. 그대는 공연한 수고를 하고 있구나. 그대가 만일 말을 듣지 않고 열중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큰 마군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그대를 쳐부수리라.”
014_0644_a_01L또한 보살은 모든 번뇌에 대해 인욕을 닦되 번뇌[結]를 끊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번뇌를 끊으면 잃는 바가 매우 많으니, 아라한의 길에 떨어져서 근(根)이 무너진 자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막기만 하고 끊지는 말아야 하니, 인욕을 닦으면 번뇌[結使]에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사유하여 공하고 무상한 특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비록 매우 좋은 5욕이 있으나 모든 번뇌[結]를 일으키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국왕의 대신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는데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왕이 말했다. “기름기 없는 염소고기를 가져오라. 네가 만일 그것을 가져오지 못하면 너에게 벌을 내리리라.” 대신은 지혜가 많았으므로 큰 염소 한 마리를 매어두고 풀과 곡식으로 잘 양육하는 한편 날마다 세 차례씩 이리를 몰아다가 겁을 주었다. 염소는 비록 좋은 음식은 얻었으나 기름이 지지 않았다. 염소를 끌어다가 왕에게 바치니, 왕은 사람을 시켜 잡았는데, 과연 살은 쪘으나 기름기가 없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그러자 대신은 위의 사실로써 자세히 대답했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무상함과 괴로움과 공함이란 이치를 봄으로써 모든 번뇌의 기름이 사라지고 공덕의 살이 찌는 것이다.
또한 보살의 공덕과 복된 과보가 한량이 없으므로 그 마음이 부드럽고, 모든 번뇌의 매듭이 엷어져서 인욕을 닦기가 쉽다. 비유하건대 사자왕이 숲속에서 포효하는데 어떤 사람이 보고 머리를 숙여 애걸하면 놓아 주거니와 범이나 이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자는 귀한 짐승이어서 지혜로운 분별이 있거니와 범이나 이리는 미천한 짐승이어서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무너진 군대는 대장을 만나면 살 수 있거니와 졸병을 만나면 죽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보살은 지혜의 힘으로 성냄에는 갖가지 죄악이 있음을 관찰하고, 인욕에는 갖가지 공덕이 있음을 관찰한다. 그러므로 번뇌[結使]를 인내하는 것이다.
014_0644_a_20L復次,菩薩智慧力,觀瞋恚有種種諸惡,觀忍辱有種種功德,是故能忍結使。
014_0644_b_01L또한 보살은 마음에 지혜의 힘이 있으므로 능히 번뇌의 매듭을 끊을 수 있으나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세상에 머무르되 번뇌[結使]가 곧 도적임을 안다. 그러므로 인내할 뿐 따르지 않는다. 보살은 이 매듭의 도적을 결박하여 풀려나지 못하게 하고서 공덕을 행하나니, 비유하건대 도적일지라도 인연 때문에 죽이지 않고 한 곳에 가두어 놓고 스스로는 사업(事業)을 닦는 것과 같다.
또한 일체법은 알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라 한다. 고법지(苦法智)ㆍ고비지(苦比智)는 고제를 알고, 집법지ㆍ집비지는 집제를 알고, 멸법지ㆍ멸비지는 멸제를 알고, 도법지ㆍ도비지는 도제를 알며 나아가 선한 세간지[世智] 역시 고집멸도와 허공과 지혜의 반연이 아닌 멸을 안다. 이것이 알 수 있는 모습의 법이다. 때문에 하나라고 말한다.
014_0644_c_01L또한 온갖 법은 반연할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라 한다. 눈의 의식과 눈의 의식에 상응하는 법은 색을 반연하고, 귀의 의식ㆍ코의 의식ㆍ혀의 의식ㆍ몸의 의식 역시 이와 같다. 뜻의 의식과 뜻의 의식에 상응하는 법은 또한 눈을 반연하고 색을 반연하고 눈의 의식을 반연하며 나아가 뜻을 반연하고 법을 반연하고 뜻의 의식을 반연한다. 곧 일체법은 반연할 수 있는 모습이기에 하나라 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법은 유무의 모습이기 때문에 둘이 된다. 공함과 공하지 않음,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 나와 나아님, 색과 색 아님,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대할 수 있음과 대할 수 없음, 유루(有辯)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마음의 법과 마음 아닌 법,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과 마음에 속하지 않는 법, 마음에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마음에 응하지 않는 법 등이다.
또한 보살은 일체법을 관찰해 셋으로 본다. 어떤 것이 셋인가? 아래ㆍ중간ㆍ위와 선함ㆍ불선함ㆍ무기(無記)와 유ㆍ무ㆍ비유비무와 견제단(見諦斷)ㆍ사유단(思惟斷)ㆍ무단(無斷)과 유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과 과보ㆍ과보 있음ㆍ과보도 아니고 과보가 있지도 않음 등 이렇듯 한량없는 셋의 법문으로 하나를 깨뜨리고 차별에도 집착되지 않는 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5_a_01L또한 보살은 비록 무루의 도를 얻지 못하고 결사를 다 끊지 못하였더라도 능히 무루의 성스러운 법과 세 가지 법인(法印)을 아나니, 첫째는 온갖 유위의 생법은 무상하다는 등의 법인이요, 둘째는 일체법은 무아(無我)라는 법인이요, 셋째는 열반은 진실한 법이라는 법인이다. 득도한 성현들은 스스로 얻고 스스로 안다. 보살은 비록 도는 얻지 못하였더라도 능히 믿고 수긍하나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어떤 비구가 이 14난에 대하여 생각하고 관찰하여도 통달하지 못하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생기어 의발(衣鉢)을 들고 부처님께로 가서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를 위해 14난을 해명해 주시어 저로 하여금 이해하게 한다면 마땅히 제자가 되겠습니다만, 만약에 해명해 주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길을 찾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어리석은 사람아, 네가 본래 나와 맹세하기를 ‘이 14난에 대답해 주면 내 제자가 되겠다’ 하였느냐?”
014_0645_a_11L佛告:“癡人!汝本共我要誓’若答十四難,汝作我弟子’耶?”
비구가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014_0645_a_12L比丘言:“不也!”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지금 어째서 말하기를 ‘내게 대답해 주지 못하면 제자가 되지 않겠다’ 하느냐? 나는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해주어 제도하거늘 이 열네 가지 질문은 다투는 법이다. 법에 대해 이익이 없고 오직 희론일 뿐이다. 물어서 무엇하리오. 만일 네게 대답해 주더라도 그대는 요달하지 못하니라.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 채 생로병사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의 경우와 같으니라. 곧 친척들이 의원을 불러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가 말하기를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대의 성명과 부모와 나이를 알아야 되겠고, 다음은 화살이 어느 산의 어떤 나무, 어떤 깃이며, 활촉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떤 쇠인가를 알아야겠다. 또한 활은 어느 산의 나무이며, 어떤 짐승의 뿔인가를 알아야 되겠다. 또한 약은 어디서 난 것이며, 그 이름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겠다. 이러한 갖가지 일을 모두 안 뒤에야 그대가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르게 하겠다’ 했느니라.”
014_0645_b_01L부처님께서 다시 비구에게 물으셨다. “이 사람이 이런 일을 다 안 뒤에 화살을 뽑아야 되겠는가?”
014_0645_b_02L佛問比丘:“此人可得知此衆事,然後出箭不?”
비구가 대답했다.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다 알기를 기다린다면 그는 이미 죽은 뒤가 될 것입니다.”
014_0645_b_03L比丘言:“不可得知!若待盡知,此則已死。”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역시 이와 같으니라. 삿된 소견의 화살에 애욕의 독약이 발라진 채 이미 네 마음 깊숙이 박혔기에 너는 이 화살을 뽑기 위해 내 제자가 되었다. 그렇거늘 화살은 뽑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이 항상함과 무상함, 끝 있음과 끝없음 등을 구하려 한다. 그것을 구해도 얻지 못한 채 혜명(慧命)을 잃고 축생과 마찬가지로 죽어서는 스스로가 어둠으로 뛰어들고자 하는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법이 비록 공하나 또한 단절되거나 멸하지 않는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상속하여 생기며 또한 영원한 것도 아니다. 비록 모든 법에 주재자[神]가 없으나 죄와 복을 잃지도 않는다. 잠깐 사이에 몸의 모든 법과 모든 감관과 모든 지혜가 전멸(轉滅)하여 멈추지 않으니, 뒷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새록새록 생멸하나 역시 한량없는 세상 가운데 인연의 업을 잃지도 않는다. 온[衆]ㆍ처ㆍ계 안은 모두 공하여 주재자가 없으나, 중생들은 5도 가운데 윤전하면서 생사를 받는다.
이렇듯 갖가지 심히 깊고 미묘한 법에 대해 아직 불도를 얻지는 못했으나 능히 믿고 받들어 의심치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법인이다.
014_0645_b_21L如是等種種甚深微妙法,雖未得佛道,能信能受不疑、不悔,是爲法忍。
014_0645_c_01L또한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생사를 두려워하고 싫어하여 빨리 열반에 들고자 한다. 하지만 보살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지만 일체지를 구하고자 하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며, 모든 법의 실상을 똑똑히 분별해 알고자 하면서 능히 참으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답】 모든 법은 티[瑕]도 틈[隙]도 없어서 깨뜨리거나 무너뜨릴 수 없으니, 이것이 법의 실상임을 관찰해서 안다.
014_0645_c_04L答曰:觀知諸法無有瑕隙,不可破、不可壞,是爲實相。
【문】 일체의 언어는 모두 대답할 수 있고, 깨뜨릴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하기를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는가?
014_0645_c_05L問曰:一切語,皆可答、可破、可壞,云何言“不可破壞,是爲實相”?
【답】 모든 법은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 가운데에서는 일체의 언어의 길을 지나고 마음의 작용도 사라져서 항상 불생불멸함이 마치 열반의 모습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모습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뒤에 없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먼저는 있다가 나중에 없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단멸(斷滅)이 된다.
또한 모든 법은 영원함[常]일 수도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영원하다면 죄도 복도 없고, 죽이거나 해침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목숨을 살려주는 복도 없고, 수행하는 이익도 없으며, 속박도 해탈도 없어서 세간이 곧 열반일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은 영원함이 아니다.
【문】 그대가 말하기를 “불법에서는 항상하다 하여도 진실이 아니요, 무상하다 하여도 진실이 아니다” 하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에서는 항상함 역시 진실이요, 무상함 역시 진실이기 때문이다. 항상함이란 수연진(數緣盡), 비수연진(非數緣盡)과 허공인데, 나지도 머물지도 멸하지도 않는 까닭에 항상한 모습이라 한다. 무상의 모습이란, 5중(衆)이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까닭에 덧없는 모습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항상함과 무상함이 모두 진실치 않다” 하는가?
014_0646_a_01L【답】 성인은 두 가지 말씀이 있으니, 첫째는 방편의 말씀이요, 둘째는 곧은 말씀이다. 방편의 말씀이라 함은 사람을 위하는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위한다 함은 중생들을 위하여 ‘이는 항상함이다. 이는 무상함이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니, 대치실단(對治悉檀)7)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무상이라 말할 때에는 중생들이 삼계에서 쾌락에 집착함을 뽑아 주고자 부처님께서도 생각하시기를 ‘어찌하여야 중생들로 하여금 애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셨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과 같은 무상의 가르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무생(無生)의 법을 관한다면 생법을 여읠 수 있고 무위(無爲)의 법을 관하면 유위를 여읠 수 있다.
014_0646_a_05L若觀無生法, 於生法得離, 若觀無爲法,
於有爲得離。
어찌하여 생생(生生)을 인연화합이라 하는가? 곧 무상하고 자재하지 못하고 인연에 속하며, 노병사의 모습ㆍ속이는 모습ㆍ파괴하는 모습이 있으면 이를 생생이라 한다. 이는 곧 유위법이니, 대치실단(對治悉檀)에서 설한 바와 같다. 항상함과 무상함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니,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이 항상함도 아니요 무상함도 아니라 한다면 이는 우치한 논리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없음이 무너지고, 없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있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무너진다면 다시 무슨 법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답】 불법의 진실한 모습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거늘 그대가 주장하는 비유(非有)ㆍ비무(非無)는 받아들여 집착하는 까닭에 우치한 논리가 되는 것이다. 만일 비유ㆍ비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말할 수도 있고 깨뜨릴 수도 있다. 이는 곧 마음이 생기는 곳이며 투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불법은 그렇지 않다. 비록 인연에 의하여 비유ㆍ비무라고 하거거니와 집착을 내지 말아야 한다. 집착을 내지 않는다면 곧 무너뜨릴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다.
014_0646_b_01L모든 법이 끝이 있거나, 끝이 없거나, 있으되 끝이 없거나, 있지 않되 끝이 없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있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없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거나, 이 몸이 곧 정신이라거나, 몸과 정신은 다르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모두 진실치 않다. 예순두 가지 소견[六十二見]8) 가운데서 모든 법을 관찰하건대 이 역시 진실치 못하다.
이렇듯 모든 것을 제해 버리고 불법의 청정하고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믿으며,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동요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법인(法忍)이라 한다.
014_0646_b_03L如是一切除卻,信佛法淸淨不壞相,心不悔、不轉,是名法忍。
또한 유무의 두 변(邊)으로 모든 법의 나는 때와 머무는 때를 관찰하면 유견(有見)의 모습이요, 모든 법의 늙을 때와 무너지는 때를 관찰하면 무견(無見)의 모습이다. 삼계의 중생은 흔히 이 두 가지 소견의 모습에 집착되니, 이 두 가지 법은 거짓되고 진실치 않다. 만일 실로 존재하는 모습이라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은 없으나 먼저부터 있었다면 단견[斷]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단절된다고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또한 일체법은 이름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이 화합하여 생긴 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014_0646_b_10L復次,一切諸法,名字和合故,謂之爲有;以是故,名字和合所生法不可得。
【문】 비록 이름에 의해 생긴 법을 얻을 수는 없으나, 이름의 화합은 있지 않는가?
014_0646_b_12L問曰:名字所生法,雖不可得,則有名字和合!
【답】 만일 법이 없다면 이름이 누구를 위해 화합하리오? 그렇다면 이름이 없는 것이다.
014_0646_b_13L答曰:若無法,名字爲誰而和合?是則無名字。
또한 모든 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심식(心識) 때문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심식 때문에 존재[有]를 알게 된다면,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땅의 굳은 모습은 몸과 감관으로써 몸의 의식이 알기 때문에 존재하듯이, 만일 몸의 감관이 없이 몸의 인식만이 안다면 곧 굳은 모습도 없을 것이다.
【답】 먼저부터 굳은 모습이 있음을 스스로 알았거나 혹은 남에게 들음으로써 굳은 모습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먼저부터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더라면 굳은 모습은 없을 것이다.
014_0646_b_19L答曰:若先自知有堅相,若從他聞則知有堅相;若先不知、不聞,則無堅相。
014_0646_c_01L또한 땅이 만일 항상 굳은 모습이라면 그 모습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마치 응고된 연유ㆍ꿀ㆍ아교는 녹으면 그 굳은 모습을 버리고 액체[濕相]가 되는 것과 같다. 금ㆍ은ㆍ구리ㆍ무쇠 등도 그러하다. 물은 액체이지만 추우면 도리어 굳어진다. 이러한 갖가지는 모두가 모습을 버린다.
또한 일체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이다. 색법은 분석해서 미진(微塵)에 이르면 흩어져 멸해 남음이 없으니, 이미 단바라밀품(檀波羅蜜品)에서 보시할 물건을 파하는 데서 말한 바와 같다. 무색법은 다섯 감정으로는 알 수 없는 바이기 때문이고, 뜻과 감정이 생기고 머물고 멸할 때에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에 몫[分]이 있음을 안다. 몫이 있기 때문에 무상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있지 않나니,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예순 시각이 있으며, 낱낱 시각 가운데 마음에 생멸이 있다. 상속되어 생하는 까닭에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믿는 마음, 청정하고 지혜로운 선정의 마음임을 안다. 수행자는 마음의 생멸을 관찰하기를 마치 흐르는 물의 등잔불같이 하니, 이것을 공(空)의 지혜의 문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한때엔 생겼다가 다른 때엔 멸한다면 생멸한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은 응당 항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극히 짧은 시각 가운데에는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일시에 멸함이 없다면 끝끝내 멸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위의 법에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하셨다. 만일 극히 짧은 시간에 생겨나서는 멸함이 없다면 유위의 법이 아닐 것이요, 만일 극히 짧은 시간에 마음이 생하고 머물고 멸한다면 어째서 단지 먼저 생겼다가 나중에 멸한다고만 말하고 먼저 멸했다가 나중에 생긴다고 하지는 않는가?
014_0647_a_01L또한 만일 먼저부터 있던 마음이 나중에 생기는 것이라면, 마음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미 먼저부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부터 생함이 있었다면 생이 일어날 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생과 멸은 성품이 서로 다르니, 생에는 멸이 있을 수 없고, 멸에는 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시[一時]라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생함이 없다. 만일 생함이 없다면 머물고 멸함도 없다. 생함과 머무름과 멸함이 없다면, 곧 마음에 속하는 법도 없다. 마음에 속하는 법이 없다면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법이 없게 된다.
또한 외도와 부처님 제자들이 항상하는 법을 말함에 같음[同]과 다름[異]이 있다. 같은 것은 허공과 열반이다. 외도는 “신아(神我)9)ㆍ시간ㆍ방위ㆍ미진ㆍ명초(冥初)가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이 다름이다. 또한 불제자들이 말하기를 “비수연진(非數緣盡)은 항상하다” 하고, 다시 말하기를 “인연을 멸하는 법이 항상하며, 연연으로 생한 법은 무상하다” 한다. 마하연(摩訶衍)10)에서는 항상한 법은 법의 성품ㆍ진여[如]ㆍ진제(眞際)이니, 이 같은 갖가지를 일컬어 ‘항상한 법은 허공과 열반’이라고 한다. 앞의 「찬보살품」에서 말한 바와 같다. 신아ㆍ시간ㆍ방위ㆍ미진 역시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일체법이 실로 공하다면 죄와 복도 없을 것이며, 부모도 없고 세상의 예법도 없고, 선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 같은 종류이며, 옳고 그름이 한 꾸러미이어서 모든 물건이 다 없어져서 마치 꿈속에 보는 것과 같으리라. 만일 실로 없다고 말한다면, 이 같은 과실이 있게 되니, 이러한 말을 누가 믿으랴.
만일 ‘전도(顚倒)된 까닭에 있다고 본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한 사람을 볼 때에 두 세 사람을 보지 않는가? 그것이 실제에는 없는 것이나 전도되어 보기 때문이다.
014_0647_b_12L若言顚倒故見有者,當見一人時,何以不見二、三?以其實無而顚倒見故。
만일 이러한 유무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중도(中道)의 실상을 얻는다. 어찌 실상인 줄 아는가? 과거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알고 말씀하신 바, 미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알고 말씀하실 바, 현재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알고 말씀하고 계신 바와 같다. 믿음이 크기 때문에 의심치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믿음이 크기 때문에 능히 지니고 능히 받으니, 이를 법인(法忍)이라 한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범부들은 무명의 독 때문에 일체법에 대하여 뒤바뀐 모습을 짓나니, 항상함이 아닌데 항상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운 데 즐겁다고 생각하며, 나가 없는데 나가 있다고 생각하며, 공한데 실하다고 생각하며,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며, 있는데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갖가지 법 가운데서 뒤바뀐 모습을 만든다.’ 성스럽고 진실한 지혜를 얻어 무명의 독을 깨뜨리고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아 무상함ㆍ괴로움ㆍ공함 나 없음의 지혜를 얻고 사견을 버리어 집착하지 않으면서 이 법을 능히 참는다면,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이 법인에 세 종류가 있다. 곧 행이 청정하여 인욕의 법을 보지 않고, 자기 몸을 보지 않고, 욕하는 사람을 보지 않아서 모든 법에 희론치 않는 것이니, 이때를 청정한 법인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말하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물러서 능히 찬제바라밀을 구족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요되지 않고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014_0648_a_01L그렇다면 어떻게 동요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가?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거친 말을 내지 않으며, 몸으로 남에게 악한 짓을 하지 않고 마음에 의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의 실상을 알아 모든 법을 보지 않으며,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와서 욕하고 독극물로 살해하고자 해도 일체를 능히 참아낸다.
【문】 정진이 모든 착한 법의 근본이 되니 응당 첫머리에 두어야 되거늘 지금은 어찌하여 넷째 자리에 있는가?
014_0648_a_09L問曰:如精進是一切善法本,應最在初,今何以故第四?
【답】 보시ㆍ지계ㆍ인욕은 세상에 흔히 있는 것으로, 마치 나그네와 주인의 관계에서 당연히 대접해야 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축생조차도 보시를 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능히 보시를 하나니, 이 세상을 위해서나 혹은 내생을 위해서나 혹은 도를 위해서 베풀되 정진이 필요치 않다.
계를 지니는 경우는, 악을 저지른 사람을 왕법에 따라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서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혹은 성품이 착해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금생에 죄를 지으면 내생에 벌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 때문에 계를 지키며, 어떤 사람은 계를 지킨 인연으로 생노병사를 여의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외치기를 “오늘부터 나는 다시는 살생치 않으리라” 한다. 이런 것들은 곧 계율이거니 어찌 정진바라밀을 의지해서 행하겠는가.
또한 인욕하는 경우, 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려 하는데도 혹은 두려워서 보복치 않거나, 혹은 힘이 모자라거나, 혹은 죄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선인(善人)의 법을 닦고 있거나, 혹은 도를 구하기 때문에 잠자코 보복치 않기도 하는데, 이는 반드시 정진바라밀을 기다려 능히 참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보시ㆍ지계ㆍ인욕은 큰 복덕이면서 평안하고 즐겁고 좋은 명예가 있으며, 바라는 바를 얻게 된다. 이미 이러한 복덕의 맛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다시 정진을 더해 더욱 묘하고 뛰어난 선정과 지혜를 얻고자 한다. 비유하건대 우물을 파는데 물기가 보인다면, 더욱 노력을 가해 반드시 물을 얻고자 희망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을 켜는데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면, 더욱 부지런히 비벼서 반드시 불을 얻고자 희망하는 것과도 같다.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데 무릇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복덕이요 둘은 지혜의 문이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을 행하는 것은 복덕의 문이요, 모든 법의 실상인 마하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은 지혜의 문이다. 보살은 복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죄업을 제거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업의 때[罪垢]에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문에 들어가더라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즐기지 않게 된다. 두 일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출생시키고자 하는데,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선정문(禪定門)을 인하며, 선정문은 반드시 대정진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산란한 마음으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물건을 비출 수 없지만 밀실(密室)에다 등을 켜면 밝게 타올라 반드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
이 선정의 지혜는 복덕이나 소원만으로 구할 수 없으며, 또한 거친 관법으로도 얻을 수 없다. 반드시 몸과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게을리 하지 않아야 비로소 이루게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피ㆍ살ㆍ기름ㆍ골수가 모두 다하고 오직 가죽ㆍ뼈ㆍ심줄만 남도록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렇게 한다면 비로소 선정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 두 일을 얻으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 하셨다.
【답】 불도는 매우 깊어서 얻기가 어려우니, 비록 보시ㆍ지계ㆍ인욕의 힘이 있더라도 반드시 정진의 힘을 의지하여야 매우 깊은 선정ㆍ실다운 지혜ㆍ한량없는 불법을 얻게 된다. 만일 정진을 행하지 않으면 선정이 생기지 않고, 선정이 생기지 않으면 범천(梵天)에 태어날 수도 없다. 그러니 하물며 불도를 구하고자 하겠는가.
또한 민대(民大)12) 거사 같은 이는 얻고자 하는 한량없는 보물을 마음대로 얻었다. 정생왕(頂生王)13) 같은 이는 사천하의 왕이 되자 하늘에서 일곱 가지 보배와 필요한 물건들이 비처럼 내리고, 석제바나민(釋提婆那民)이 자리를 나누어 함께 앉았다. 비록 이러한 복이 있었으나 도를 얻지는 못했다.
014_0649_b_01L또한 모든 일은 정진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비유하건대 설사약은 파두(巴豆)를 주약으로 삼는 것과 같다. 파두를 제거하면 내리는 힘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의지(意止)17)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도(覺道)는 반드시 정진을 기다려야 하니, 만일 정진이 없으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는 8정도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으며, 믿음은 근과 역에는 있으나 다른 곳에는 없다. 하지만 정진은 없는 곳이 없다. 이미 모든 법을 총괄하였으되 달리 한 문(門)이 있으니, 마치 무명(無明) 번뇌가 온갖 번뇌에 두루해 있으면서도 달리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있는 것과 같다.
【문】 보살은 일체의 불법을 얻고자 하거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거나 모든 번뇌를 멸하고자 하면 모두가 뜻대로 될 것이거늘 어찌하여 정진을 더하여야만 불법을 얻을 수 있는가? 마치 작은 불로는 큰 숲을 다 태울 수 없으나 불의 세력이 더해지면 모두를 태울 수 있는 것과 같은가?
또한 보살은 갖가지 인연으로 게으른 마음을 꾸짖고 정진을 즐기게 만든다. 게으름의 먹구름은 온갖 밝은 지혜를 덮고, 모든 공덕을 삼키어 멸하며, 불선(不善)을 자라나게 한다. 게으른 사람은 처음에는 조금 즐거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크게 고통 받는다. 마치 독이 든 음식이 처음에는 향기롭고 맛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곧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게으른 마음은 모든 공덕을 태우니, 마치 큰 불이 숲과 들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은 모든 공덕을 잃으니, 마치 도적을 맞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014_0650_a_01L또한 보살은 혼자서 아무런 반려가 없더라도 정진하는 복덕의 힘 때문에 능히 마군과 번뇌의 도적을 쳐부수고 불도를 성취하셨다. 불도를 얻은 뒤에는 모든 법이 한 모습으로 모습이 없어서 그 실제가 모두 공하건만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의 갖가지 명칭과 갖가지 방편을 말해 주어 중생들의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열반에 들려 할 때는 법신(法身)을 미륵보살ㆍ마하가섭ㆍ아난 등에게 전한 뒤에 금강삼매18)에 드셨는데, 스스로 몸과 뼈를 부수어 겨자씨처럼 만들며, 그로써 중생을 제도해 정진의 힘을 버리지 않으셨다.
또한 아난이 비구들에게 7각의(覺意)19)를 말해 주어 정진각의(精進覺意)에 이르게 하는 것과도 같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그대가 정진각의를 말하였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예, 정진각의를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 묻고 세 번 대답하자 부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능히 정진을 닦기를 좋아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어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리니,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이러한 정진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때로는 욕망[欲]이라 하시고 때로는 정진이라 하시고, 때로는 불방일이라 하셨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려는데 처음 떠나려고 생각하는 것을 욕망이라 하고, 출발해서 멈추지 않는 것을 정진이라 하고, 스스로를 격려해서 나아감을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을 불방일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알게 되니, 욕망에서 정진이 생기고, 정진이 생기는 까닭에 불방일이 있고, 불방일이 있는 까닭에 능히 모든 법을 낳게 하며 나아가서는 불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이 생ㆍ노ㆍ병ㆍ사를 벗어나고자 하고, 또한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진하여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기름잔을 들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다니는 것과 같으니, 현전에서 일심으로 불방일하기에 큰 이익을 얻는다. 또한 외지고 험한 길을 새끼줄에 매달리거나 혹은 산양(山羊)을 타고 가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모든 악도(惡道)에서는 일심으로 불방일하기에 몸의 안온을 얻으며, 금생에서는 크게 명리를 얻게 된다. 도를 구해 정진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면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다.
014_0650_b_01L또한 보살은 세 가지 생각을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과보를 얻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하면 끝내 잃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반드시 정진을 닦나니, 불도를 위하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조그마한 아란야에서 혼자 좌선을 하다가 게으름을 일으켰다. 숲 속에 신이 있었는데 그는 부처님의 제자였다. 어떤 시체의 뼈 속에 들어가서 노래하고 춤추며 와서는 이런 게송을 읊었다.
숲 속의 작은 비구야, 어째서 게으름을 부리느냐. 낮에 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으면 밤에도 이렇게 오리라.
014_0650_b_07L林中小比丘, 何以生懈廢, 晝來若不畏,
夜復如是來。
이 비구가 깜짝 놀라서 일어나 앉아 생각하다가 밤중에 다시 잠에 떨어졌다. 그 신이 다시 나타났는데 머리는 열이요, 입에서 불이 나오고, 어금니와 손톱은 칼 같고 눈은 붉은 불꽃 같았다. 졸개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게으른 비구를 잡아라. 여기는 게으름을 부릴 곳이 아닌데 어째서 그러느냐?” 이때 비구가 크게 놀라며 생각했다. 전일하게 법을 생각하여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니, 이것을 일컬어 ‘스스로 정진하여 불방일의 힘을 기른다면 능히 도과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정진은 스스로의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과보를 아끼는 것이다. 몸의 네 가지 위의, 곧 다니고 앉고 멈추고 누움에 있어서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며, 차라리 스스로가 몸을 잃을지언정 도업은 그치게 하지 않는다. 마치 불을 끄기 위해 법의 물을 던져 넣는 것은 마음이 오직 불을 끄는 데 있을 뿐, 법을 아끼지 않는 것과 같다.
결정된 마음 거뜬하면 대과보를 얻은 듯하니 원하는 일 이루어진 뒤에야 이것이 가장 묘한 줄을 안다.
014_0650_b_20L決定心悅豫, 如獲大果報, 如願事得時,
乃知此最妙。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정진의 이익을 관찰해 능히 정진을 늘리고 더해야 한다.
014_0650_b_22L如是種種因緣,觀精進之利,能令精進增益。
014_0650_c_01L또한 보살이 고행을 닦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머리ㆍ눈ㆍ골수ㆍ뇌를 달라고 한다면, 능히 그것을 모두 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인욕ㆍ정진ㆍ지혜ㆍ방편의 힘이 있어도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삼악도의 중생이겠는가. 내가 이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닦고 신속히 불도를 이루어 그들을 제도하리라.’
6)열네 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말한다. 곧 세상의 존속성, 세간의 공간적 한계, 몸과 마음, 깨달은 이[如來]의 사후 존족에 관한 질문을 말한다. 곧 ①세계는 항상한가. ②무상한가. ③항상하면서 무상한가. ④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⑤세계는 끝이 있는가. ⑥끝이 없는가. ⑦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⑧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⑨몸과 마음은 하나인가. ⑩다른 것인가. ⑪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⑫존재하지 않는가. ⑬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⑭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 열네 가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이 곧 14무기(無記)이다. 여기에서 무기(avyākṛta)란 ‘대답되지 않거나 혹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7)범어로는 prātipākṣika-siddhānta. 네 가지 실단의 하나.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미혹을 대치하고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8)62견이란, 불교외의 사상의 조류를 62종류로 분류해 놓은 것을 말한다. 장부 『범망경(梵網經)』에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9)범어로는 ātman. 곧 영원불변한 나를 말한다.
10)범어로는 mahāyana. 대승(大乘)을 말한다.
11)범어로는 Virya.
12)범어로는 Meṇḍaka. 비바시불(毘婆尸佛)에게 7보로 된 코끼리집[象屋]을 헌상한 공덕으로 그의 창고는 비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