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4_0642_c_01L대지도론 제15권
014_0642_c_01L大智度論釋初品中羼提波羅蜜法忍義第二十五卷第十五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014_0642_c_02L龍樹菩薩造


25. 초품 중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의 법인(法忍)의 뜻을 풀이함
014_0642_c_03L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奉 詔譯

무엇을 법인(法忍)이라 하는가?
014_0642_c_04L云何名法忍
공경하고 공양하는 모든 중생과 화내고 괴롭히고 음욕스러운 사람들에 대하여 잘 참는 것을 생인(生忍)이라 하고, 공경 공양하는 법과 성내고 괴롭히고 음욕스러운 법을 잘 참는 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2_c_05L忍諸恭敬供養衆生及諸瞋惱婬欲之人是名生忍忍其供恭敬法及瞋惱婬欲法是爲法忍
또한 법인이란 안의 6정(情)1)에 집착하지 않고 밖의 6진(塵)2)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두 가지에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안 모양이 바깥과 같고 바깥 모양이 안과 같아서 두 모습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모습이기 때문이고 인연으로 화합하기 때문이며, 그 실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습이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고, 여(如)ㆍ진제(眞際)ㆍ법성(法性)의 모습이기 때문이며, 둘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둘이 아니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마음으로 믿어 물러나지 않으면 이를 법인이라 한다.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 법주(法住)보살3)이 말했다.
“생과 멸은 둘이요, 불생불멸은 곧 불이(不二)로 들어가는 법문이다.”
나아가 문수시리(文殊尸利)4)가 말했다.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아 일체의 마음이 멸하고, 말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 이것이 불이로 드는 법문이다.”
비마라힐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여기에서 보살들이 찬탄하며 말했다.
“실로 훌륭하십니다. 이는 참된 ‘불이로 드는 법문입니다.”
014_0642_c_07L復次法忍者於內六情不著於外六塵不受能於此二不作分別何以故內相如外外相如內二相俱不可得故一相故因緣合故其實空故一切法相常淸淨故眞際法性相故不二入雖無二亦不一如是觀諸法心信不轉是名法忍如『毘摩羅鞊經』中住菩薩說滅爲二不生不滅是不二入法門乃至文殊尸利說無聞無見一切心滅無說無語是不二入法門摩羅鞊默然無言諸菩薩讚言善哉善哉是眞不二入法門
014_0643_a_01L일체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이요, 둘째는 모든 법이다. 보살이 중생 가운데서 참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제는 법 가운데서 참는 일을 말하리라.
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마음의 법[心法]과 마음 아닌 법[非心法]이다. 마음 아닌 법에는 안의 것과 밖의 것이 있는데, 밖에는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등이 있고, 안에는 주림ㆍ목마름ㆍ늙음ㆍ앓음ㆍ죽음 등이 있다. 이러한 갖가지를 마음 아닌 법이라 한다.
마음의 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성냄ㆍ근심ㆍ의심 등이요, 둘째는 음욕ㆍ교만 등이다. 이 두 가지를 마음의 법이라 한다. 보살은 이 두 법에 대해 참고 동요되지 않으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014_0642_c_19L復次一切法有二種一者衆生二者諸法菩薩於衆生中忍如先說今說法中忍法有二心法非心法非心法中有內有外外有寒熱風雨等內有飢渴老病死如是等種種名爲非心法心法中有二種一者瞋恚憂愁疑等二者憍慢等是二名爲心法菩薩於此二能忍不動是名法忍
【문】 중생에게 만약 성을 내거나 목숨을 해치면 죄를 받고 가엾이 여기면 복을 얻거니와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에는 이익도 손해도 없거늘 어찌 참는가?
014_0643_a_05L問曰於衆生中若瞋惱害命得罪憐愍得福寒熱風雨無有增損云何而忍
【답】 비록 이익도 손해도 없지만 스스로 뇌란과 근심을 내어 보살도를 해치나니, 이런 까닭에 참아야 한다.
014_0643_a_07L答曰雖無增損而自生惱亂憂苦害菩薩道以是應當忍
또한 단지 중생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까닭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삿된 마음 때문에 인연을 짓는 까닭에 죄가 되는 것이다.그것은 왜냐하면 비록 중생을 죽였더라도 무기의 마음(無記心)이었다면 죄가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사랑해 주면 비록 준 것은 없더라도 큰 복을 얻는다. 비록 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가 이익이나 손해를 주지는 않더라도 능히 악의(惡意)를 일으키기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참아야 한다.
014_0643_a_09L復次非但殺惱衆生故得爲惡心作因緣故有罪所以者何雖殺衆生而無記心是便無罪慈念衆生雖無所與而大得福以是故寒熱風雨雖無增損然以能生惡意故得罪以是故應當忍
또한 보살은 스스로 전생에 쌓은 죄의 인연에 의해 이 괴로운 곳에 태어났음을 안다.
‘이는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스스로 감수해야 하리라.’
이와 같이 사유하며, 그래서 능히 참는 것이다.
014_0643_a_14L復次菩薩自知宿罪因生此苦處此我自作我應自受是思惟是故能忍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국토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이다. 만약 보살이 더러운 국토에 태어난다면 이러한 괴로움과 주림과 추위 등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 스스로 청정한 서원을 세워 〈내가 성불하거든 내 국토에는 이런 괴로움들이 없어지리다〉고 하리라. 이 국토가 비록 깨끗하지 않으나 나에게는 이익인 것이다’
014_0643_a_16L復次菩薩思惟土有二種有淨有不淨菩薩若生不淨國中受此辛苦飢寒衆惱自發淨我成佛時國中無此衆苦此雖不乃是我利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은 성현도 면치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나이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참아야 하리라.’
014_0643_a_20L復次菩薩思惟世閒八賢聖所不能免何況於我以是故應當忍
014_0643_b_01L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인간의 몸은 견고함도 없고 강함도 없어서 늙음ㆍ병듦ㆍ죽음에 쫓김을 안다. 비록 하늘의 몸이 청정하여 늙음ㆍ병듦이 없다 하더라도 하늘의 쾌락에 집착된다. 마치 취한 사람과 같으니, 도와 복을 닦고 출가해 애욕을 여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 인간의 몸에서 스스로 참아서 복을 닦고,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하리라.’
014_0643_a_22L復次菩薩思惟知此人身無牢無强爲老死所逐雖復天身淸無老無病耽著天樂譬如醉人得修行道福出家離欲以是故於此人身自忍修福利益衆生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4대와 5중의 몸을 받았으니 응당 갖가지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몸을 받고서 괴롭지 않은 이가 없다. 부귀하거나 빈천하거나 혹은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났거나,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아무도 면할 자가 없다. 왜냐하면 부귀한 사람은 항상 두려움으로 재물을 지키나니, 마치 살찐 염소는 일찌감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으며, 고기를 문 새를 뭇 새들이 좇는 것과도 같다. 빈천한 사람에게는 주리고 추운 고통이 있다. 집을 떠난 사람은 금생에 괴로움이 있으나 후생에 복을 받아 도를 얻는다.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금생에 비록 즐거우나 후생에 괴로움을 받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먼저 이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거니와 무상이 이르면 나중에는 괴로움을 받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상의 괴로움을 사유하고, 나중에 즐거움을 받는다.
이렇듯 몸을 받은 사람으로서 괴로움 없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보살은 인욕을 닦아야 한다.
014_0643_b_03L復次菩薩思惟我受此四大五衆身應有種種苦分無有受身而不苦者富貴貧賤出家在家愚智明闇無得免者何以富貴之人常有畏怖守護財物如肥羊早就屠机如烏銜肉衆烏逐貧賤之人有飢寒之苦出家之人今世雖苦後世受福得道在家之人今世雖樂後世受苦愚人先求今世無常對至後則受苦智人思惟無常苦後則受樂得道如是等受身之人無不有苦是故菩薩應當行忍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의 세간은 모두 괴로운데 나는 어찌하여 거기에서 즐거움을 구하려하는가.’
014_0643_b_14L復次薩思惟一切世閒皆苦我當云何於中而欲求樂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한량없는 겁 동안 항상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 아무런 이익이 없이 일찍이 법을 위하지 못했었다. 오늘은 중생을 위하여 불도를 구하니, 비록 이런 고통을 받으나 의당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팎의 모든 고통을 능히 참고 감수해야 하리라.’
014_0643_b_16L復次菩薩思惟我於無量劫中常受衆苦無所利益未曾爲今日爲衆生求佛道雖受此苦得大利是故外內諸苦悉當忍受
또한 보살은 커다란 마음으로 이렇게 서원한다.
‘아비지옥의 고통이라도 참아야 하거늘 하물며 작은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사소한 고통을 참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큰 고통을 참겠는가.’
014_0643_b_19L菩薩大心誓願若阿鼻泥犂苦當忍之何況小苦而不能忍若小不何能忍大
이와 같이 갖가지 밖의 법에 대해 참는 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3_b_22L如是種種外法中忍曰法忍
【문】 어찌하여야 안 마음의 법을 참을 수 있는가?
問曰云何內心法中能忍
014_0643_c_01L【답】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도는 얻지 못하고 아직 모든 번뇌를 끊지 못했으나 참지 못한다면 범부와 다를 것이 없으니, 보살이 아니다’고 한다. 또한 ‘만일 내가 도를 얻고, 번뇌를 끊었다면 곧 참아야 할 법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014_0643_b_23L菩薩思惟我雖未得道諸結未斷若當不忍與凡人不異非爲菩薩自思惟若我得道斷諸結使則無法可忍
‘주림ㆍ갈증ㆍ추위ㆍ더위 등은 밖의 마요, 매듭의 번뇌는 안의 마군인데 나는 이 두 가지 마군을 깨뜨려 불도를 이루리라.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불도를 이루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014_0643_c_04L復次飢渴寒熱是外魔軍結使煩惱是內魔賊我當破此二軍以成佛若不爾者佛道不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시는데, 마왕이 와서 말했다.
“찰리(刹利)5)의 귀인이여, 그대의 목숨은 이제 천분의 일밖에 남지 않았다. 속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서 보시하고 복을 닦아 금생과 후생에서 인간과 하늘의 즐거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도는 얻을 수 없다. 그대는 공연한 수고를 하고 있구나. 그대가 만일 말을 듣지 않고 열중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큰 마군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그대를 쳐부수리라.”
014_0643_c_06L如說佛苦行六年魔王來言剎利貴人汝千分生中正有一分活耳速起還國布施修可得今世後世人中天上之樂不可得汝唐勤苦汝若不受軟言迷不起我當將大軍衆來擊破汝
보살이 말했다.
“나는 지금 그대의 큰 힘을 지닌 내군(內軍)을 무찔러야 하거늘 하물며 밖의 군사이겠는가.”
014_0643_c_11L薩言我今當破汝大力內軍何況外
마군이 물었다.
“어떤 것이 나의 내군인가?”
魔言何等是我內軍
그러자 보살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욕망은 너의 첫 군사요
근심은 둘째 군사요
주림과 갈증은 셋째요
갈애는 넷째 군사이다.
014_0643_c_13L答曰欲是汝初軍
憂愁爲第二
飢渴第三軍
渴愛爲第四

졸음은 다섯째 군사요
두려움은 여섯째요
의심과 후회는 일곱째요
성냄은 여덟째 군사이다.
이양과 헛된 명칭은 아홉째요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김은 열째이다.
014_0643_c_15L睡眠第五軍
怖畏爲第六
疑悔第七軍
瞋恚爲第八
利養虛稱九
自高蔑人十

이러한 군대의 무리가
출가한 사람을 홀려 빠뜨리니
나는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너의 이 군사들을 무찌르고
불도를 이룬 뒤에는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리라.
014_0643_c_17L如是等軍衆
厭沒出家人
我以禪智力
破汝此諸軍
得成佛道已
度脫一切人

보살은 여기에서 모든 군사들을 다 굴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인욕의 갑옷을 걸치고 지혜의 검을 잡고 선정의 방패를 들고서 번뇌의 화살을 막았으니, 이것을 안의 인욕[內忍]이라 한다.
014_0643_c_19L菩薩於此諸軍雖未能破著忍辱鎧捉智慧劍執禪定楯遮諸煩惱箭名內忍
014_0644_a_01L또한 보살은 모든 번뇌에 대해 인욕을 닦되 번뇌[結]를 끊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번뇌를 끊으면 잃는 바가 매우 많으니, 아라한의 길에 떨어져서 근(根)이 무너진 자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막기만 하고 끊지는 말아야 하니, 인욕을 닦으면 번뇌[結使]에 떨어지지 않는다.
014_0643_c_22L復次菩薩於諸煩惱中應當修忍不應斷結何以故若斷結者失甚多墮阿羅漢道中與根敗無異是故遮而不斷以修忍辱不隨結使
【문】 어찌하여 번뇌를 끊지 않고서도 능히 따르지 않게 되는가?
014_0644_a_02L問曰云何結使未斷而能不隨
【답】 바르게 사유하는 까닭에 비록 번뇌가 있으나 능히 따르지 않게 된다.
014_0644_a_03L答曰正思惟故雖有煩惱而能不隨
또한 사유하여 공하고 무상한 특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비록 매우 좋은 5욕이 있으나 모든 번뇌[結]를 일으키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국왕의 대신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있는데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왕이 말했다.
“기름기 없는 염소고기를 가져오라. 네가 만일 그것을 가져오지 못하면 너에게 벌을 내리리라.”
대신은 지혜가 많았으므로 큰 염소 한 마리를 매어두고 풀과 곡식으로 잘 양육하는 한편 날마다 세 차례씩 이리를 몰아다가 겁을 주었다. 염소는 비록 좋은 음식은 얻었으나 기름이 지지 않았다. 염소를 끌어다가 왕에게 바치니, 왕은 사람을 시켜 잡았는데, 과연 살은 쪘으나 기름기가 없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그러자 대신은 위의 사실로써 자세히 대답했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무상함과 괴로움과 공함이란 이치를 봄으로써 모든 번뇌의 기름이 사라지고 공덕의 살이 찌는 것이다.
014_0644_a_04L復次思惟觀空無常相故雖有妙好五欲不生諸結譬如國王有一大臣自覆藏罪人所不知王言取無脂肥羊來汝若不得者當與汝罪大臣有智一大羊以草穀好養日三以狼而畏怖之羊雖得養肥而無脂牽羊與王王遣人殺之肥而無脂王問云何得答以上事菩薩亦如是見無常空狼令諸結使脂消諸功德肉肥
또한 보살의 공덕과 복된 과보가 한량이 없으므로 그 마음이 부드럽고, 모든 번뇌의 매듭이 엷어져서 인욕을 닦기가 쉽다. 비유하건대 사자왕이 숲속에서 포효하는데 어떤 사람이 보고 머리를 숙여 애걸하면 놓아 주거니와 범이나 이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자는 귀한 짐승이어서 지혜로운 분별이 있거니와 범이나 이리는 미천한 짐승이어서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무너진 군대는 대장을 만나면 살 수 있거니와 졸병을 만나면 죽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644_a_13L菩薩功德福報無量故其心柔軟諸結使薄易修忍辱譬如師子王林中吼有人見之叩頭求哀則放令虎豹小物不能爾也何以故師子王貴獸有智分別故虎豹賤虫不知分別故又如壞軍得値大將則活値遇小兵則死
또한 보살은 지혜의 힘으로 성냄에는 갖가지 죄악이 있음을 관찰하고, 인욕에는 갖가지 공덕이 있음을 관찰한다. 그러므로 번뇌[結使]를 인내하는 것이다.
014_0644_a_20L復次菩薩智慧力觀瞋恚有種種諸惡觀忍辱有種種功德故能忍結使
014_0644_b_01L또한 보살은 마음에 지혜의 힘이 있으므로 능히 번뇌의 매듭을 끊을 수 있으나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세상에 머무르되 번뇌[結使]가 곧 도적임을 안다. 그러므로 인내할 뿐 따르지 않는다. 보살은 이 매듭의 도적을 결박하여 풀려나지 못하게 하고서 공덕을 행하나니, 비유하건대 도적일지라도 인연 때문에 죽이지 않고 한 곳에 가두어 놓고 스스로는 사업(事業)을 닦는 것과 같다.
014_0644_a_22L復次菩薩心有智力斷結使爲衆生故久住世閒知結使是賊是故忍而不隨菩薩繫此結賊不令縱逸而行功德譬如有賊以因緣故不殺堅閉一處而自修事業
또한 보살은 실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알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삿되다 하지 않으며, 공덕을 묘하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에 대하여 성내지도 않고 공덕에 대하여 애착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지혜의 힘 때문에 인욕을 닦나니, 게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014_0644_b_03L菩薩實知諸法相故不以諸結使爲惡不以功德爲妙是故於結不瞋功德不愛以此智力故能修忍辱偈說

보살은 모든 불선을 끊어 버리어
아주 적은 티끌도 남기지 않나니
큰 공덕의 복은 한량이 없고
이루는 사업에 이루지 못함이 없다.
014_0644_b_07L菩薩斷除諸不善
乃至極微滅無餘
大功德福無有量
所造事業無不辦

보살은 큰 지혜의 힘 때문에
모든 번뇌의 매듭에 시달리지 않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알고
생사와 열반이 하나요, 둘이 아님을 안다.
014_0644_b_09L菩薩大智慧力故
於諸結使不能惱
是故能知諸法相
生死涅槃一無二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비록 도를 얻지는 못했으나 모든 번뇌의 법에 대하여 능히 참나니,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4_b_11L如是種種因緣雖未得道於諸煩惱法中能忍是名法忍
또한 보살은 일체법에 대하여 한 모습이어서 둘 아님을 안다. 일체법은 분별할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하니, 눈의 의식(眼識)으로 색을 알고, 나아가 뜻의 의식으로 법을 안다. 이는 분별할 수 있는 모습의 법이다. 때문에 하나라 한다.
014_0644_b_13L復次菩薩於一切法知一相無二一切法可識相言一眼識識色乃至意識識法是可識相法故言一
또한 일체법은 알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라 한다. 고법지(苦法智)ㆍ고비지(苦比智)는 고제를 알고, 집법지ㆍ집비지는 집제를 알고, 멸법지ㆍ멸비지는 멸제를 알고, 도법지ㆍ도비지는 도제를 알며 나아가 선한 세간지[世智] 역시 고집멸도와 허공과 지혜의 반연이 아닌 멸을 안다. 이것이 알 수 있는 모습의 법이다. 때문에 하나라고 말한다.
014_0644_b_16L復次一切法可知相故言一苦法智苦比智知苦諦集法集比智知集諦滅法智滅比智滅諦道法智道比智知道諦及善世亦知苦虛空非智緣滅可知相法故言一
014_0644_c_01L또한 온갖 법은 반연할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라 한다. 눈의 의식과 눈의 의식에 상응하는 법은 색을 반연하고, 귀의 의식ㆍ코의 의식ㆍ혀의 의식ㆍ몸의 의식 역시 이와 같다. 뜻의 의식과 뜻의 의식에 상응하는 법은 또한 눈을 반연하고 색을 반연하고 눈의 의식을 반연하며 나아가 뜻을 반연하고 법을 반연하고 뜻의 의식을 반연한다. 곧 일체법은 반연할 수 있는 모습이기에 하나라 하는 것이다.
014_0644_b_21L復次一切法可緣故言一眼識及眼識相應法緣色耳識鼻識舌識身識亦如是意識及意識相應法亦緣眼亦緣色亦緣眼乃至緣意緣法緣意識一切法可緣相故言一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일체법은 각기 하나이다. 하나에 다시 하나가 있는 것을 둘이라 하고, 셋으로 된 하나를 셋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천만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하나이건만 거짓으로 천만이라 하는 것이다.”
014_0644_c_03L復次有人言一切法各皆一一復有一名爲二三一名爲三如是乃至千萬皆是一而假名爲千
또한 일체법 가운데에는 모습이 있으므로 하나라 하고, 한 모습이기에 하나라 한다. 일체의 사물을 일컬어 법이라 하는데, 법의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라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하나의 법문[門]으로 차별된 모습을 깨뜨리고, 하나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4_c_06L復次一切法中有相故言一一相名爲一一切物名爲法法相故名爲一如是等無量一門破異相不著是名法忍
또한 보살은 일체법을 관찰해 둘로 본다. 무엇이 둘인가? 둘이란 안팎의 모습을 말한다. 안팎의 모습이기 때문에 안은 밖의 모습이 아니요, 밖은 안의 모습이 아니다.
014_0644_c_09L復次菩薩觀一切爲二何等二二名外相外相故內非外相外非內相
또한 일체법은 유무의 모습이기 때문에 둘이 된다. 공함과 공하지 않음,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 나와 나아님, 색과 색 아님,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대할 수 있음과 대할 수 없음, 유루(有辯)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마음의 법과 마음 아닌 법,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과 마음에 속하지 않는 법, 마음에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마음에 응하지 않는 법 등이다.
014_0644_c_12L復次一切法有無相故爲二不空非常非我非色可見不可見有對非有對有漏無漏有爲無爲心法非心法心數法非心數法心相應法非心相應法
이렇듯 한량없는 둘의 법문으로 하나를 깨뜨리고 둘에도 집착되지 않는 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4_c_16L如是無量二破一不著二是名爲法忍
또한 보살은 일체법을 관찰해 셋으로 본다. 어떤 것이 셋인가? 아래ㆍ중간ㆍ위와 선함ㆍ불선함ㆍ무기(無記)와 유ㆍ무ㆍ비유비무와 견제단(見諦斷)ㆍ사유단(思惟斷)ㆍ무단(無斷)과 유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과 과보ㆍ과보 있음ㆍ과보도 아니고 과보가 있지도 않음 등 이렇듯 한량없는 셋의 법문으로 하나를 깨뜨리고 차별에도 집착되지 않는 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4_c_17L復次薩或觀一切法爲三何等爲三不善無記非有非無見諦斷思惟斷無斷無學非學非無學有報非報非有報如是無量三門一不著異是名爲法忍
014_0645_a_01L또한 보살은 비록 무루의 도를 얻지 못하고 결사를 다 끊지 못하였더라도 능히 무루의 성스러운 법과 세 가지 법인(法印)을 아나니, 첫째는 온갖 유위의 생법은 무상하다는 등의 법인이요, 둘째는 일체법은 무아(無我)라는 법인이요, 셋째는 열반은 진실한 법이라는 법인이다.
득도한 성현들은 스스로 얻고 스스로 안다. 보살은 비록 도는 얻지 못하였더라도 능히 믿고 수긍하나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014_0644_c_22L復次菩薩雖未得無漏道結使未斷能信無漏聖法及三種法印一者一切有爲生法無常等印二者一切法無我印三者涅槃實法印得道賢聖人自得自知菩薩雖未得道能信能受是名法忍
또한 14난(難)6)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는 법 가운데서 항상함과 무상함 등의 장애 없이 중도(中道)를 잃지 않음을 관찰하고, 이 법을 능히 참는다면,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5_a_04L復次於十四難不答法中有常無常觀察無㝵不失中道是法能忍爲法忍
어떤 비구가 이 14난에 대하여 생각하고 관찰하여도 통달하지 못하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생기어 의발(衣鉢)을 들고 부처님께로 가서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를 위해 14난을 해명해 주시어 저로 하여금 이해하게 한다면 마땅히 제자가 되겠습니다만, 만약에 해명해 주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길을 찾겠습니다.”
014_0645_a_07L如一比丘於此十四難思惟觀察不能通達心不能忍持衣鉢至佛所白佛言佛能爲我解此十四難使我意了者當作弟子若不能解我當更求餘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어리석은 사람아, 네가 본래 나와 맹세하기를 ‘이 14난에 대답해 주면 내 제자가 되겠다’ 하였느냐?”
014_0645_a_11L佛告癡人汝本共我要誓若答十四難汝作我弟子
비구가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014_0645_a_12L比丘言不也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지금 어째서 말하기를 ‘내게 대답해 주지 못하면 제자가 되지 않겠다’ 하느냐? 나는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해주어 제도하거늘 이 열네 가지 질문은 다투는 법이다. 법에 대해 이익이 없고 오직 희론일 뿐이다. 물어서 무엇하리오. 만일 네게 대답해 주더라도 그대는 요달하지 못하니라.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 채 생로병사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의 경우와 같으니라. 곧 친척들이 의원을 불러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가 말하기를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대의 성명과 부모와 나이를 알아야 되겠고, 다음은 화살이 어느 산의 어떤 나무, 어떤 깃이며, 활촉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떤 쇠인가를 알아야겠다. 또한 활은 어느 산의 나무이며, 어떤 짐승의 뿔인가를 알아야 되겠다. 또한 약은 어디서 난 것이며, 그 이름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겠다. 이러한 갖가지 일을 모두 안 뒤에야 그대가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르게 하겠다’ 했느니라.”
014_0645_a_13L佛言汝癡人今何以言若不答不作弟子我爲老死人說法濟此十四難是鬪諍法於法無益是戲論何用問爲若爲汝答汝心不至死不解不能得脫生如有人身被毒箭親屬呼醫欲爲出箭塗藥便言未可出箭我先當知汝姓字親里母年歲次欲知箭出在何山何木何羽作箭鏃者爲是何人是何等鐵復欲知弓何山木何虫角復欲知藥是何處生是何種名如是等事盡了了知之然後聽汝出箭塗
014_0645_b_01L부처님께서 다시 비구에게 물으셨다.
“이 사람이 이런 일을 다 안 뒤에 화살을 뽑아야 되겠는가?”
014_0645_b_02L佛問比丘此人可得知此衆事後出箭不
비구가 대답했다.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다 알기를 기다린다면 그는 이미 죽은 뒤가 될 것입니다.”
014_0645_b_03L比丘言不可得知若待盡此則已死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역시 이와 같으니라. 삿된 소견의 화살에 애욕의 독약이 발라진 채 이미 네 마음 깊숙이 박혔기에 너는 이 화살을 뽑기 위해 내 제자가 되었다. 그렇거늘 화살은 뽑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이 항상함과 무상함, 끝 있음과 끝없음 등을 구하려 한다. 그것을 구해도 얻지 못한 채 혜명(慧命)을 잃고 축생과 마찬가지로 죽어서는 스스로가 어둠으로 뛰어들고자 하는구나.”
014_0645_b_04L佛言汝亦如是爲邪見箭愛毒塗已入汝心欲拔此箭作我弟子而不欲出箭方欲求盡世閒常無常無邊等求之未得則失慧命與畜生同死自投黑闇
비구는 부끄러이 여기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똑똑히 이해하고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014_0645_b_08L比丘慚愧識佛語卽得阿羅漢道
또한 보살이 일체를 아는 자[一切智人]가 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일체법을 추구하여 그 참 모습을 알아야 한다. 열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막히지도 않고 장애받지 않으며, 이것은 곧 이 마음의 중한 병이 됨을 바로 알아 능히 벗어나고 능히 참는다면,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5_b_09L復次菩薩欲作一切智人應推求一切法知其實於十四難中不滯不㝵知其是心重病能出能忍是名法忍
또한 불법은 심히 깊고 청정미묘하거늘 갖가지 한량없는 법문을 잘 펴내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어 받들어 의심도 후회도 없으면 이를 법인이라 한다.
014_0645_b_12L復次佛法甚深淸淨微妙演暢種種無量法門能一心信受不疑不悔是名法忍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법이 비록 공하나 또한 단절되거나 멸하지 않는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상속하여 생기며 또한 영원한 것도 아니다. 비록 모든 법에 주재자[神]가 없으나 죄와 복을 잃지도 않는다. 잠깐 사이에 몸의 모든 법과 모든 감관과 모든 지혜가 전멸(轉滅)하여 멈추지 않으니, 뒷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새록새록 생멸하나 역시 한량없는 세상 가운데 인연의 업을 잃지도 않는다.
온[衆]ㆍ처ㆍ계 안은 모두 공하여 주재자가 없으나, 중생들은 5도 가운데 윤전하면서 생사를 받는다.
014_0645_b_14L佛所言諸法雖空亦不斷亦不滅法因緣相續生亦非常諸法雖無神亦不失罪福一心念頃身諸法諸根諸慧轉滅不停不至後念新新生滅亦不失無量世中因緣業諸衆中皆空無神而衆生輪轉五道中受生死
이렇듯 갖가지 심히 깊고 미묘한 법에 대해 아직 불도를 얻지는 못했으나 능히 믿고 받들어 의심치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법인이다.
014_0645_b_21L如是等種種甚深微妙法雖未得佛道能信能受不疑不悔是爲法
014_0645_c_01L또한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생사를 두려워하고 싫어하여 빨리 열반에 들고자 한다. 하지만 보살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지만 일체지를 구하고자 하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며, 모든 법의 실상을 똑똑히 분별해 알고자 하면서 능히 참으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014_0645_b_23L復次阿羅漢辟支佛畏惡生死求入涅槃菩薩未得成佛而欲求一切智欲憐愍衆生欲了了分別知諸法實相是中能忍是名法忍
【문】 어떻게 모든 법의 실상을 관하는가?
014_0645_c_03L問曰何觀諸法實相
【답】 모든 법은 티[瑕]도 틈[隙]도 없어서 깨뜨리거나 무너뜨릴 수 없으니, 이것이 법의 실상임을 관찰해서 안다.
014_0645_c_04L答曰觀知諸法無有瑕隙不可破不可壞是爲實相
【문】 일체의 언어는 모두 대답할 수 있고, 깨뜨릴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하기를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는가?
014_0645_c_05L問曰一切語皆可答可破可壞云何言可破壞是爲實相
【답】 모든 법은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 가운데에서는 일체의 언어의 길을 지나고 마음의 작용도 사라져서 항상 불생불멸함이 마치 열반의 모습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모습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뒤에 없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먼저는 있다가 나중에 없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단멸(斷滅)이 된다.
014_0645_c_07L答曰以諸法不可破故佛法中一切言語道過心行處常不生不滅如涅槃相何以故諸法相實有不應無若諸法先有今則是斷滅
또한 모든 법은 영원함[常]일 수도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영원하다면 죄도 복도 없고, 죽이거나 해침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목숨을 살려주는 복도 없고, 수행하는 이익도 없으며, 속박도 해탈도 없어서 세간이 곧 열반일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은 영원함이 아니다.
014_0645_c_11L復次諸法不應是常以故若常則無罪無福無所傷殺無施命亦無修行利益亦無縛無解世閒則是涅槃如是等因緣故諸法不應常
만일 모든 법이 무상하다면 이는 단멸이 되나니, 또한 죄도 복도 없고, 이익도 손해도 없고, 공덕과 업도 없으며, 인연과 과보도 잃을 것이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은 무상함도 아니다.
014_0645_c_15L若諸法無常則是斷滅亦無無福亦無增損功德業因緣果報亦失如是等因緣故諸法不應無常
【문】 그대가 말하기를 “불법에서는 항상하다 하여도 진실이 아니요, 무상하다 하여도 진실이 아니다” 하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에서는 항상함 역시 진실이요, 무상함 역시 진실이기 때문이다.
항상함이란 수연진(數緣盡), 비수연진(非數緣盡)과 허공인데, 나지도 머물지도 멸하지도 않는 까닭에 항상한 모습이라 한다. 무상의 모습이란, 5중(衆)이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까닭에 덧없는 모습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항상함과 무상함이 모두 진실치 않다” 하는가?
014_0645_c_17L問曰汝言佛法中常亦不實無常亦不實是事不然何以故佛法中常亦無常亦實常者數緣盡非數緣盡虛空不生不住不滅故是常相無常五衆生滅故無常相汝何以言無常皆不實
014_0646_a_01L【답】 성인은 두 가지 말씀이 있으니, 첫째는 방편의 말씀이요, 둘째는 곧은 말씀이다. 방편의 말씀이라 함은 사람을 위하는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위한다 함은 중생들을 위하여 ‘이는 항상함이다. 이는 무상함이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니, 대치실단(對治悉檀)7)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무상이라 말할 때에는 중생들이 삼계에서 쾌락에 집착함을 뽑아 주고자 부처님께서도 생각하시기를 ‘어찌하여야 중생들로 하여금 애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셨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과 같은 무상의 가르침을 말씀하신 것이다.
014_0645_c_23L答曰聖人有二種語一者方便語二者直語方便語者爲因緣故爲人者爲衆生說是常是無常如對治悉檀中說若說無常欲拔衆生三界著樂佛思惟以何令衆生得離欲是故說無常法如偈說

만약 무생(無生)의 법을 관한다면
생법을 여읠 수 있고
무위(無爲)의 법을 관하면
유위를 여읠 수 있다.
014_0646_a_05L若觀無生法
於生法得離
若觀無爲法
於有爲得離

어찌하여 생생(生生)을 인연화합이라 하는가? 곧 무상하고 자재하지 못하고 인연에 속하며, 노병사의 모습ㆍ속이는 모습ㆍ파괴하는 모습이 있으면 이를 생생이라 한다. 이는 곧 유위법이니, 대치실단(對治悉檀)에서 설한 바와 같다. 항상함과 무상함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니,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이 항상함도 아니요 무상함도 아니라 한다면 이는 우치한 논리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없음이 무너지고, 없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있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무너진다면 다시 무슨 법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014_0646_a_07L云何生生名因緣和合無常不自在屬因緣有老病死相欺誑相破壞相是名生生則是有爲法如對治悉檀常無常非實相二俱過故若諸法非有常非無常是爲愚癡論所以者若非有則破無若非無則破有破此二事更有何法可說
【문】 불법은 항상 공한 모습 가운데에서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공은 유(有)를 제함으로써 공이 되고 공은 무를 막으니, 이것을 비유ㆍ비무라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치한 주장이라 하는가?
014_0646_a_14L問曰佛法常空相中非有非無空以除有空遮無是爲非有非無何以言愚癡論
【답】 불법의 진실한 모습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거늘 그대가 주장하는 비유(非有)ㆍ비무(非無)는 받아들여 집착하는 까닭에 우치한 논리가 되는 것이다.
만일 비유ㆍ비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말할 수도 있고 깨뜨릴 수도 있다. 이는 곧 마음이 생기는 곳이며 투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불법은 그렇지 않다. 비록 인연에 의하여 비유ㆍ비무라고 하거거니와 집착을 내지 말아야 한다. 집착을 내지 않는다면 곧 무너뜨릴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다.
014_0646_a_16L答曰佛法實相不受不著汝非有無受著故是爲癡論若言非有非無是則可說可破是心生處是鬪諍處佛法則不然雖因緣故說非有非無不生著不生著則不可壞不可破
014_0646_b_01L모든 법이 끝이 있거나, 끝이 없거나, 있으되 끝이 없거나, 있지 않되 끝이 없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있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없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거나, 죽은 뒤에 갈 곳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거나, 이 몸이 곧 정신이라거나, 몸과 정신은 다르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모두 진실치 않다.
예순두 가지 소견[六十二見]8) 가운데서 모든 법을 관찰하건대 이 역시 진실치 못하다.
014_0646_a_21L法若有邊若無邊若有無邊若非有無邊若死後有去若死後無去若死後有去無去若死後非有去非無去是身是神身異神異亦如是皆不實於六十二見中觀諸法亦皆不實
이렇듯 모든 것을 제해 버리고 불법의 청정하고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믿으며,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동요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법인(法忍)이라 한다.
014_0646_b_03L是一切除卻信佛法淸淨不壞相不悔不轉是名法忍
또한 유무의 두 변(邊)으로 모든 법의 나는 때와 머무는 때를 관찰하면 유견(有見)의 모습이요, 모든 법의 늙을 때와 무너지는 때를 관찰하면 무견(無見)의 모습이다.
삼계의 중생은 흔히 이 두 가지 소견의 모습에 집착되니, 이 두 가지 법은 거짓되고 진실치 않다. 만일 실로 존재하는 모습이라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은 없으나 먼저부터 있었다면 단견[斷]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단절된다고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014_0646_b_05L復次無二邊觀諸法生時住時則爲有見相觀諸法老時壞時則爲無見相三界衆生多著此二見相是二種法虛誑不實若實有相則不應無何以故今無先則墮斷中若斷是則不然
또한 일체법은 이름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이 화합하여 생긴 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014_0646_b_10L復次切諸法名字和合故謂之爲有以是名字和合所生法不可得
【문】 비록 이름에 의해 생긴 법을 얻을 수는 없으나, 이름의 화합은 있지 않는가?
014_0646_b_12L問曰字所生法雖不可得則有名字和合
【답】 만일 법이 없다면 이름이 누구를 위해 화합하리오? 그렇다면 이름이 없는 것이다.
014_0646_b_13L答曰若無法名字爲誰而和合是則無名字
또한 모든 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심식(心識) 때문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심식 때문에 존재[有]를 알게 된다면,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땅의 굳은 모습은 몸과 감관으로써 몸의 의식이 알기 때문에 존재하듯이, 만일 몸의 감관이 없이 몸의 인식만이 안다면 곧 굳은 모습도 없을 것이다.
014_0646_b_15L復次若諸法實有不應以心識故知有若以心識故知有是則非有如地堅相以身根身識知故有若無身根身識知則無堅相
【문】 몸의 감관과 몸의 의식이 알건 알지 못하건 간에 땅은 항상 굳은 모습이 아닌가?
014_0646_b_18L問曰身根若知若不知而地常是堅相
【답】 먼저부터 굳은 모습이 있음을 스스로 알았거나 혹은 남에게 들음으로써 굳은 모습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먼저부터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더라면 굳은 모습은 없을 것이다.
014_0646_b_19L答曰若先自知有堅相若從他聞則知有堅相若先不知不聞則無堅相
014_0646_c_01L또한 땅이 만일 항상 굳은 모습이라면 그 모습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마치 응고된 연유ㆍ꿀ㆍ아교는 녹으면 그 굳은 모습을 버리고 액체[濕相]가 되는 것과 같다. 금ㆍ은ㆍ구리ㆍ무쇠 등도 그러하다. 물은 액체이지만 추우면 도리어 굳어진다. 이러한 갖가지는 모두가 모습을 버린다.
014_0646_b_21L復次地若常是堅相不應捨其相如凝酥蠟蜜樹膠融則捨其堅相墮濕相中鐵等亦爾如水爲濕相寒則轉爲堅相如是等種種悉皆捨相
또한 여러 논사(論師)들은 유를 무(無)로 만들기도 하고 무를 유로 만들기도 한다. 여러 현성들이나 좌선하는 사람들은 능히 땅을 물로 만들기도 하고 물을 땅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바뀌니, 열 가지 일체입(一切入) 가운데 설한 바와 같다.
014_0646_c_02L復次諸論議師輩有能令無無能令有賢聖人坐禪人能令地作水水作地如是等諸法皆可轉如十一切入中
또한 이러한 유견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번뇌의 속박ㆍ투쟁 때문에 생겨나니, 만약에 이러한 욕심ㆍ성냄 등이 생겨나는 곳이라면 이는 불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의 모습이란 착하고 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진실치 않다.
014_0646_c_06L復次是有見爲貪欲瞋恚愚癡鬪諍故生若有生此欲恚等處非佛法何以故佛法相善淨故以是故非實
또한 일체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이다. 색법은 분석해서 미진(微塵)에 이르면 흩어져 멸해 남음이 없으니, 이미 단바라밀품(檀波羅蜜品)에서 보시할 물건을 파하는 데서 말한 바와 같다.
무색법은 다섯 감정으로는 알 수 없는 바이기 때문이고, 뜻과 감정이 생기고 머물고 멸할 때에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에 몫[分]이 있음을 안다. 몫이 있기 때문에 무상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있지 않나니,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예순 시각이 있으며, 낱낱 시각 가운데 마음에 생멸이 있다. 상속되어 생하는 까닭에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믿는 마음, 청정하고 지혜로운 선정의 마음임을 안다.
수행자는 마음의 생멸을 관찰하기를 마치 흐르는 물의 등잔불같이 하니, 이것을 공(空)의 지혜의 문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한때엔 생겼다가 다른 때엔 멸한다면 생멸한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은 응당 항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극히 짧은 시각 가운데에는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일시에 멸함이 없다면 끝끝내 멸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014_0646_c_09L復次一切法有二種色法色法色法分析乃至微塵散滅無餘如「檀波羅蜜品」破施物中說無色法五情所不知故意情生滅時觀故知心有分有分故無常無常故空故非有彈指頃有六十時一一時中心有生相續生故知是貪心是瞋心是癡心是信心淸淨智慧禪定心者觀心生如流水燈焰此名入空智門何以故若一時生餘時中滅者此心應常何以故此極少時中無滅若一時中無滅者應終始無滅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위의 법에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하셨다. 만일 극히 짧은 시간에 생겨나서는 멸함이 없다면 유위의 법이 아닐 것이요, 만일 극히 짧은 시간에 마음이 생하고 머물고 멸한다면 어째서 단지 먼저 생겼다가 나중에 멸한다고만 말하고 먼저 멸했다가 나중에 생긴다고 하지는 않는가?
014_0646_c_20L佛說有爲法皆有三相若極少時中生而無滅者是爲非有爲法若極少時中心生滅者何以但先生而後滅不先滅而後生
014_0647_a_01L또한 만일 먼저부터 있던 마음이 나중에 생기는 것이라면, 마음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미 먼저부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부터 생함이 있었다면 생이 일어날 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생과 멸은 성품이 서로 다르니, 생에는 멸이 있을 수 없고, 멸에는 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동시[一時]라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생함이 없다. 만일 생함이 없다면 머물고 멸함도 없다. 생함과 머무름과 멸함이 없다면, 곧 마음에 속하는 법도 없다. 마음에 속하는 법이 없다면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법이 없게 된다.
014_0647_a_01L復次若先有心後有生則心不待生何以故先已有心故若先有生則生無所生又生滅性相違生則不應有滅滅時不應有以是故一時不可得異亦不可得是卽無生若無生則無住若無生則無心數法無心數法則無心不相應諸行
모든 행(行)에 색도 없고 무색법도 없는 까닭에 무위법 역시 없다. 왜냐하면 유위(有爲)를 인함으로써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유위가 없다면, 곧 무위 역시 없는 것이다.
014_0647_a_08L無色法無故無爲法亦無何以故因有爲故有無爲若無有爲則亦無無爲
또한 만들어진 법이 무상함을 보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이 항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만들어진 법이 존재하는 법이라고 본다면, 만들어지지 않은 법은 마땅히 없는 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한 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014_0647_a_10L復次見作法無常知不作法常若然者今見作法是有法不作法應是無法以是故常法不可得
또한 외도와 부처님 제자들이 항상하는 법을 말함에 같음[同]과 다름[異]이 있다. 같은 것은 허공과 열반이다. 외도는 “신아(神我)9)ㆍ시간ㆍ방위ㆍ미진ㆍ명초(冥初)가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이 다름이다.
또한 불제자들이 말하기를 “비수연진(非數緣盡)은 항상하다” 하고, 다시 말하기를 “인연을 멸하는 법이 항상하며, 연연으로 생한 법은 무상하다” 한다.
마하연(摩訶衍)10)에서는 항상한 법은 법의 성품ㆍ진여[如]ㆍ진제(眞際)이니, 이 같은 갖가지를 일컬어 ‘항상한 법은 허공과 열반’이라고 한다. 앞의 「찬보살품」에서 말한 바와 같다. 신아ㆍ시간ㆍ방위ㆍ미진 역시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014_0647_a_13L復次外道及佛弟子說常法有同有異同者虛空涅槃外道有神微塵冥初如是等名爲異又佛弟子說非數緣滅是常又復言滅因緣法因緣生法無常摩訶衍中常法法性眞際如是等種種名爲常法虛空涅槃如先「讚菩薩品」中說神及時微塵亦如上說以是故不應言諸法
만일 모든 법이 없다고 한다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항상함이 없음이요, 둘째는 단멸인 까닭에 무가 되는 것이다.
014_0647_a_21L若諸法無者有二種一者常無斷滅故無
만일 먼저는 있다가 지금은 없거나 지금은 있다가 나중에는 없어진다면 이는 단멸이니, 그렇다면 인연이 없는 것이다. 인연이 없다면 한 물건에서 온갖 물건이 나와야 되며, 또한 온갖 물건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도 하여야 한다.
014_0647_a_22L若先有今無若今有後是則斷滅若然者則無因緣無因緣者應一物中出一切物亦應一切物中都無所出
014_0647_b_01L미래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와 같아서 만일 죄와 복의 인연을 끊는다면 곧 빈부귀천의 차이 및 악도 축생에 떨어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014_0647_b_02L後世中亦如是若斷罪福因緣則不應有貧富貴賤之異墮惡道畜生中
만일 항상함이 없다면 고집멸도도 없어야 한다. 만약에 이 4제가 없으면 법보(法寶)도 없을 것이요, 여덟 가지 현성의 길도 없을 것이다.
또한 법보와 승보(僧寶)가 없으면 불보(佛寶)도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삼보가 깨어질 것이다.
014_0647_b_04L若言常無則無苦若無四諦則無法寶若無法寶則無八賢聖道若無法寶僧寶則無佛寶若如是者則破三寶
또한 일체법이 실로 공하다면 죄와 복도 없을 것이며, 부모도 없고 세상의 예법도 없고, 선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 같은 종류이며, 옳고 그름이 한 꾸러미이어서 모든 물건이 다 없어져서 마치 꿈속에 보는 것과 같으리라.
만일 실로 없다고 말한다면, 이 같은 과실이 있게 되니, 이러한 말을 누가 믿으랴.
014_0647_b_07L復次若一切法實空者則無罪福亦無父母無世閒禮法亦無善無惡然則善惡同門是非一貫一切物盡無如夢中所見若言實無有如是失此言誰當信者
만일 ‘전도(顚倒)된 까닭에 있다고 본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한 사람을 볼 때에 두 세 사람을 보지 않는가? 그것이 실제에는 없는 것이나 전도되어 보기 때문이다.
014_0647_b_12L若言顚倒故見有者當見一人何以不見二以其實無而顚倒見故
만일 이러한 유무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중도(中道)의 실상을 얻는다.
어찌 실상인 줄 아는가? 과거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알고 말씀하신 바, 미래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알고 말씀하실 바, 현재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알고 말씀하고 계신 바와 같다. 믿음이 크기 때문에 의심치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믿음이 크기 때문에 능히 지니고 능히 받으니, 이를 법인(法忍)이라 한다.
014_0647_b_14L若不墮此有無見得中道實相何知實如過去恒河沙等諸佛菩薩所知所說未來恒河沙等諸佛菩薩所知所說現在恒河沙等諸佛菩薩所知所說信心大故不疑不悔信力大故能持能受是名法忍
또한 선정의 힘으로 마음이 부드럽고 청정해지면 모든 법의 실상을 듣고는 마음에 계합되고 깊이 믿어 의심 없고 후회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의심과 후회는 곧 욕계에 얽매이는 법으로 거칠고 악하기에 부드러운 마음 가운데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7_b_19L復次禪定力故心柔軟淸淨聞諸法實相應心與會信著深入無疑無悔所以者何悔是欲界繫法麤惡故不入柔軟心中是名法忍
014_0647_c_01L또한 지혜의 힘 때문에 일체법에 대해 갖가지로 관찰하되 한 법도 얻을 수 없으니, 이 법을 능히 참고 능히 받아들여 의심치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이를 법인이라 한다.
014_0647_b_23L復次智慧力故於一切諸法中種種觀無有一法可得者是法能忍能受不疑不悔是名法忍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범부들은 무명의 독 때문에 일체법에 대하여 뒤바뀐 모습을 짓나니, 항상함이 아닌데 항상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운 데 즐겁다고 생각하며, 나가 없는데 나가 있다고 생각하며, 공한데 실하다고 생각하며,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며, 있는데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갖가지 법 가운데서 뒤바뀐 모습을 만든다.’
성스럽고 진실한 지혜를 얻어 무명의 독을 깨뜨리고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아 무상함ㆍ괴로움ㆍ공함 나 없음의 지혜를 얻고 사견을 버리어 집착하지 않으면서 이 법을 능히 참는다면,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7_c_02L復次菩薩思惟凡夫人以無明毒故於一切諸法中作轉相非常作常想苦作樂想無我有我想空謂有實有爲有有爲非有如是等種種法中作轉相得聖實智慧破無明毒知諸法實相得無常無我智慧棄捨不著是法能忍是名法忍
또한 일체법을 관찰하건데, 모든 법은 본래부터 공하고 지금도 공하니, 이 법을 능히 믿고 능히 받아들인다면,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7_c_09L復次觀一切諸法從本已來常空今世亦空法能信能受是爲法忍
【문】 만약에 본래부터 공하고 이제도 공하다 한다면, 이는 잘못되고 삿된 견해이다. 어찌 법인이라 말하는가?
014_0647_c_11L問曰若從本已來常空今世亦空是爲惡邪云何言法忍
【답】 만일 모든 법이 끝내 공함을 관찰하면서 형상을 취하고 마음으로 집착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만일 공을 관찰하되 집착하지도 않고 삿된 소견을 내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법인이니, 게송으로 설명하리라.
014_0647_c_13L答曰若觀諸法常畢竟空相心著是爲惡邪見若觀空不著生邪見是爲法忍如偈說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 공하지만
마음이 공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법을 능히 참으면
이는 불도(佛道)에 드는 첫 모습이다.
014_0647_c_15L諸法性常空
心亦不著空
如是法能忍
是佛道初相

이처럼 갖가지로 지혜에 들어가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하여 마음이 물러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다른 관법을 따르지도 않고 근심하는 바도 없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얻게 된다면, 이것을 법인이라 한다.
014_0647_c_17L如是等種種入智慧門觀諸法實相不退不悔不隨諸觀亦無所憂能得自利利他是名法忍
이 법인에 세 종류가 있다. 곧 행이 청정하여 인욕의 법을 보지 않고, 자기 몸을 보지 않고, 욕하는 사람을 보지 않아서 모든 법에 희론치 않는 것이니, 이때를 청정한 법인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말하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물러서 능히 찬제바라밀을 구족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요되지 않고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014_0647_c_20L是法忍有三種行淸淨不見忍辱法不見己身不見罵辱人不戲諸法是時名淸淨法忍以是事故說菩薩住般若波羅蜜中能具足羼提波羅蜜不動不退故
014_0648_a_01L그렇다면 어떻게 동요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가?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거친 말을 내지 않으며, 몸으로 남에게 악한 짓을 하지 않고 마음에 의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의 실상을 알아 모든 법을 보지 않으며,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와서 욕하고 독극물로 살해하고자 해도 일체를 능히 참아낸다.
014_0648_a_01L云何名動不退瞋恚不生不出惡言身不加心無所疑菩薩知般若波羅蜜實相不見諸法心無所著故若人來罵加楚毒殺害一切能忍
그러므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서 찬제바라밀을 구족한다”고 한 것이다.
014_0648_a_05L以是故說般若波羅蜜中能具足羼提波羅蜜

26. 초품 중 비리야바라밀(雇梨耶波羅蜜)을 풀이함
014_0648_a_06L大智度論釋初品中毘梨耶波羅蜜義第二十六

【經】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여 게으르거나 쉬지 않는 까닭에 비리야바라밀을 구족한다.
【論】 비리야(雇梨耶)11)[진나라 말로는 정진(精進)이다.]
014_0648_a_07L【經】
身心精進不懈息故應具足毘梨耶波羅蜜【論】
毘梨耶秦言精進
【문】 정진이 모든 착한 법의 근본이 되니 응당 첫머리에 두어야 되거늘 지금은 어찌하여 넷째 자리에 있는가?
014_0648_a_09L問曰如精進是一切善法本應最在初今何以故第四
【답】 보시ㆍ지계ㆍ인욕은 세상에 흔히 있는 것으로, 마치 나그네와 주인의 관계에서 당연히 대접해야 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축생조차도 보시를 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능히 보시를 하나니, 이 세상을 위해서나 혹은 내생을 위해서나 혹은 도를 위해서 베풀되 정진이 필요치 않다.
014_0648_a_11L答曰布施持戒世閒常有如客主之義法應供乃至畜生亦知布施或有人種種因緣故能布施若爲今世若爲後若爲道故布施不須精進
계를 지니는 경우는, 악을 저지른 사람을 왕법에 따라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서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혹은 성품이 착해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금생에 죄를 지으면 내생에 벌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 때문에 계를 지키며, 어떤 사람은 계를 지킨 인연으로 생노병사를 여의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외치기를 “오늘부터 나는 다시는 살생치 않으리라” 한다. 이런 것들은 곧 계율이거니 어찌 정진바라밀을 의지해서 행하겠는가.
014_0648_a_15L如持戒見爲惡之人王法治罪便自畏懼不敢爲非或有性善不作諸惡有人聞今世作惡後世受罪而以怖畏能持戒有人聞持戒因緣故得離生是中心生口言我從今日復殺生如是等卽是戒豈須精進波羅蜜而能行耶
또한 인욕하는 경우, 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려 하는데도 혹은 두려워서 보복치 않거나, 혹은 힘이 모자라거나, 혹은 죄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선인(善人)의 법을 닦고 있거나, 혹은 도를 구하기 때문에 잠자코 보복치 않기도 하는데, 이는 반드시 정진바라밀을 기다려 능히 참게 되는 것은 아니다.
014_0648_a_22L如忍辱中若罵若打若殺或畏故不報或少力或畏罪修善人法或爲求道故默然不報不必須精進波羅蜜乃能忍也
014_0648_b_01L이제 모든 법의 실상을 알기 위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선정을 닦는 것이다. 선정은 실로 지혜의 문이므로 여기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심으로 선정을 닦아야 한다.
014_0648_b_01L今欲得知諸法實相行般若波羅蜜故行禪定禪定是實智慧之門是中應懃修精進一心行禪
또한 보시ㆍ지계ㆍ인욕은 큰 복덕이면서 평안하고 즐겁고 좋은 명예가 있으며, 바라는 바를 얻게 된다. 이미 이러한 복덕의 맛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다시 정진을 더해 더욱 묘하고 뛰어난 선정과 지혜를 얻고자 한다. 비유하건대 우물을 파는데 물기가 보인다면, 더욱 노력을 가해 반드시 물을 얻고자 희망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을 켜는데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면, 더욱 부지런히 비벼서 반드시 불을 얻고자 희망하는 것과도 같다.
014_0648_b_04L復次布施持戒忍辱是大福德安隱快樂有好名譽所欲者得旣得知此福利之味今欲增進更得妙勝禪定智慧譬如穿井已見濕泥轉加增進必望得水又如鑽火已得見煙倍復力勵必望得火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데 무릇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복덕이요 둘은 지혜의 문이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을 행하는 것은 복덕의 문이요, 모든 법의 실상인 마하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은 지혜의 문이다. 보살은 복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죄업을 제거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업의 때[罪垢]에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문에 들어가더라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즐기지 않게 된다. 두 일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출생시키고자 하는데,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선정문(禪定門)을 인하며, 선정문은 반드시 대정진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산란한 마음으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물건을 비출 수 없지만 밀실(密室)에다 등을 켜면 밝게 타올라 반드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
014_0648_b_09L欲成佛道凡有二門一者福德二者智慧行施忍是爲福德門知一切諸法實相摩訶般若波羅蜜是爲智慧門菩薩入福德門除一切罪所願皆得若不得願者以罪垢遮故入智慧門則不厭生死不樂涅槃二事一今欲出生摩訶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要因禪定門禪定門必須大精進何以故散亂心不能得見諸法實相譬如風中然燈不能照物燈在密屋必能照
이 선정의 지혜는 복덕이나 소원만으로 구할 수 없으며, 또한 거친 관법으로도 얻을 수 없다. 반드시 몸과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게을리 하지 않아야 비로소 이루게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피ㆍ살ㆍ기름ㆍ골수가 모두 다하고 오직 가죽ㆍ뼈ㆍ심줄만 남도록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렇게 한다면 비로소 선정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 두 일을 얻으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 하셨다.
014_0648_b_20L是禪定智慧不可以福願求非麤觀能得要須身心精懃急著不爾乃成辦如佛所說髓皆使竭盡但令皮筋在不捨精進是乃能得禪定智慧得是二事則衆事皆辦
014_0648_c_01L그러므로 정진이 네 번째가 되니, 일컬어 선정과 실다운 지혜의 근본이라 하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에도 정진이 있기는 하나 적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014_0648_c_02L以是故精進第四名爲禪定實智慧之根上三中雖有精進少故不說
【문】 어떤 사람이 묻기를 “보시ㆍ지계ㆍ인욕만을 행하는 까닭에 큰 복덕을 얻고, 복덕의 힘 때문에 소원이 다 이루어져서 선정과 지혜에 저절로 이른다. 그런데 어찌 다시 정진바라밀을 필요로 하는가?” 한다.
014_0648_c_04L問曰有人言但行布施持戒辱故得大福德福德力故所願皆得禪定智慧自然而至復何用精進波羅蜜爲
【답】 불도는 매우 깊어서 얻기가 어려우니, 비록 보시ㆍ지계ㆍ인욕의 힘이 있더라도 반드시 정진의 힘을 의지하여야 매우 깊은 선정ㆍ실다운 지혜ㆍ한량없는 불법을 얻게 된다. 만일 정진을 행하지 않으면 선정이 생기지 않고, 선정이 생기지 않으면 범천(梵天)에 태어날 수도 없다. 그러니 하물며 불도를 구하고자 하겠는가.
014_0648_c_07L答曰佛道甚深難得雖有布持戒忍辱力要須精進得甚深禪實智慧及無量諸佛法若不行精進,則不生禪定禪定不生,則不得生梵天王處何況欲求佛道
또한 민대(民大)12) 거사 같은 이는 얻고자 하는 한량없는 보물을 마음대로 얻었다. 정생왕(頂生王)13) 같은 이는 사천하의 왕이 되자 하늘에서 일곱 가지 보배와 필요한 물건들이 비처럼 내리고, 석제바나민(釋提婆那民)이 자리를 나누어 함께 앉았다. 비록 이러한 복이 있었으나 도를 얻지는 못했다.
014_0648_c_11L復次有人如民大居士等,欲得無量寶物則應意皆得如頂生王王四天下,天雨七寶及所須之物釋提婆那民分座與坐有是福然不能得道
또한 나빈주(羅頻珠)14) 비구와 같은 이는 비록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으나 7일을 걸식해도 얻지 못한 채 빈 발우로 돌아왔다. 뒤에 선정의 불로 스스로의 몸을 태우고 열반에 들었다.
014_0648_c_15L如羅頻珠比丘雖得阿羅漢道乞食七日不得空鉢而還後以禪定火自燒其身而般涅
그러므로 알 수 있으니, 복덕의 힘만으로 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불도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큰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다.
014_0648_c_18L以是故知,非但福德力故得道成佛道要須懃大精進
【문】 보살은 정진에 어떤 이익이 있음을 관찰하기에 부지런히 닦아서 게을리 하지 말라 하는가?
014_0648_c_19L問曰菩薩觀精進有何利益而懃修不懈
【답】 금생과 내생의 도와 공덕의 이익이 모두 정진에 의해서 얻어진다.
014_0648_c_20L答曰切今世後世道德利益皆由精進得
또한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제도하고자 하여도 마땅히 부지런히 서둘러 정진해야 되거늘 하물며 보살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고 서원한 사람이겠는가.
정진을 찬탄한 게송에 이런 것이 있다.
014_0648_c_21L復次若人欲自度身尚當懃急精進,何況菩薩誓願欲度一切如讚精進偈中說
014_0649_a_01L
어떤 사람이 몸을 아끼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이 결정되어서
법답게 정진을 행한다면
구하는 일 어려움 없으리.
014_0649_a_01L有人不惜身
智慧心決定
如法行精進
所求事無難

농부가 부지런히 힘쓰면
수확이 반드시 풍부한 것과 같고
먼 길을 가려는 자가 부지런히 걷는다면
반드시 이르는 것과 같네.
014_0649_a_03L如農夫懃修
所收必豐實
亦如涉遠路
懃則必能達

하늘에 태어나거나
열반의 즐거움 얻으니
이 인연은
정진의 힘이니
014_0649_a_04L若得生天上
及得涅槃樂
如是之因緣
皆由精進力

하늘의 힘도 원인 없음도 아니네.
스스로 짓는 까닭에 스스로 얻는 것이니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리오.
014_0649_a_05L非天非無因
自作故自得
誰有智慧人
而不自勉勵

삼계의 불이 타오름은
마치 맹렬한 불꽃 같으니
지혜롭고 결단 있는 이라야
비로소 면하고 여의게 되리라.
014_0649_a_07L三界火熾然
譬如大炎火
有智決斷人
乃能得免離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으니
바르게 정진해
이처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곧장 불도에 이르리라.
014_0649_a_08L以是故佛告
阿難正精進
如是不懈怠
直至於佛道

힘써 부지런히 땅을 판다면
능히 샘으로 통하니
정진도 역시 이와 같아서
구하면 얻지 못할 것 없네.
014_0649_a_09L勉强而懃修
穿地能通泉
精進亦如是
無求而不得

능히 행도(行道)의 법과 같이 하여
정진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한량없는 과보 반드시 얻어지고
이 과보는 끝내 잃지 않으리.
014_0649_a_11L能如行道法
精進不懈者
無量果必得
此報終不失

또한 정진의 법은 모든 착한 법의 근본이어서 능히 일체의 도법과 나아가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낳는다. 그러니 하물며 작은 이익이겠는가. 비니(毘尼)15) 가운데 말하기를 “모든 선법 및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모두 게으르지 않는 정진에 의하여 생겨난다” 했다.
014_0649_a_12L復次精進法是一切諸善法之根本出生一切諸道法,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況於小利如毘尼中說一切諸善法,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皆從精進不放逸生
또한 정진은 능히 전생의 복덕을 발동하게 하니, 마치 비가 종자를 적시어 반드시 싹이 트게 하는 것과 같다. 이 일도 그와 같아서 비록 전생의 복덕의 인연이 있다고 해도 정진이 없으면 생겨날 수가 없으며 나아가 금생의 이익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하물며 불도이겠는가.
014_0649_a_17L復次精進能動發先世福德如雨潤種,能令必此亦如是雖有先世福德因緣無精進則不能生乃至今世利尚不能得何況佛道
또한 대보살들은 중생들을 짊어지고 온갖 괴로움에서 아비니리(阿鼻泥犁)16)의 괴로움을 받더라도 게을리 하지 않나니, 이것이 정진이다.
014_0649_a_21L復次諸大菩薩荷負衆生受一切苦,乃至阿鼻泥犂中苦心亦不懈,是爲精進
014_0649_b_01L또한 모든 일은 정진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비유하건대 설사약은 파두(巴豆)를 주약으로 삼는 것과 같다. 파두를 제거하면 내리는 힘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의지(意止)17)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도(覺道)는 반드시 정진을 기다려야 하니, 만일 정진이 없으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는 8정도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으며, 믿음은 근과 역에는 있으나 다른 곳에는 없다. 하지만 정진은 없는 곳이 없다.
이미 모든 법을 총괄하였으되 달리 한 문(門)이 있으니, 마치 무명(無明) 번뇌가 온갖 번뇌에 두루해 있으면서도 달리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있는 것과 같다.
014_0649_a_23L復次一切衆事若無精進,則不能成譬如下藥,以巴豆爲主若除巴豆,則無下力如是意神足必待精進若無精進,則衆事不辦如戒唯在八道不在餘處信在根餘處則無如精進者無處不有,旣摠衆法而別自有門如無明使,遍在一切諸使中,而別有不共無明
【문】 보살은 일체의 불법을 얻고자 하거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거나 모든 번뇌를 멸하고자 하면 모두가 뜻대로 될 것이거늘 어찌하여 정진을 더하여야만 불법을 얻을 수 있는가? 마치 작은 불로는 큰 숲을 다 태울 수 없으나 불의 세력이 더해지면 모두를 태울 수 있는 것과 같은가?
014_0649_b_08L問曰菩薩欲得一切佛法欲度一切衆生欲滅一切煩惱皆得如意云何增益精進而能得佛譬如小火不能燒大林火勢增益能燒一
【답】 보살은 처음 발심하여 서원을 세우되 “마땅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락을 얻게 하리라”고 하였나니, 항상 일체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 만일 몸을 아낀다면 모든 착한 법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진을 더하고 늘리는 것이다.
014_0649_b_12L答曰菩薩從初發心作誓願當令一切衆生得歡樂常爲一切,不自惜若惜身者於諸善法不能成辦是故增益精進
또한 보살은 갖가지 인연으로 게으른 마음을 꾸짖고 정진을 즐기게 만든다. 게으름의 먹구름은 온갖 밝은 지혜를 덮고, 모든 공덕을 삼키어 멸하며, 불선(不善)을 자라나게 한다. 게으른 사람은 처음에는 조금 즐거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크게 고통 받는다. 마치 독이 든 음식이 처음에는 향기롭고 맛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곧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게으른 마음은 모든 공덕을 태우니, 마치 큰 불이 숲과 들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은 모든 공덕을 잃으니, 마치 도적을 맞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014_0649_b_15L復次菩薩種種因緣呵懈怠心令樂著精進懈怠黑雲,覆諸明慧呑滅功德增長不善懈怠之人,初雖小樂後則大苦譬如毒食,初雖香美久則殺人懈怠之心,燒諸功德,譬如大火燒諸林野懈怠之人失諸功德,譬如被賊,無復遺餘如偈說

응당히 얻을 것을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은 다시 잃는다.
스스로 그 몸을 가벼이 여기면
다른 이들도 공경치 않네.
014_0649_b_21L應得而不得
已得而復失
旣自輕其身
衆人亦不敬

항상 큰 어두움 속에 있어서
위덕도 존귀함도 없고
지혜의 법도 없으니
이러한 것들을 영원히 잃어버리네.
014_0649_b_23L常處大闇中
無有諸威德
尊貴智慧法
此事永以失
014_0649_c_01L
묘한 길에 관한 가르침을 들어도
자신을 이롭게 하지 못하니
이러한 허물들은 모두가
게으름에서 생겨나네.
014_0649_c_01L聞諸妙道法
不能以益身
如是之過失
皆由懈怠心

설사 이로운 법을 듣더라도
위로 미칠 수 없으니
이러한 죄과는 모두가
게으름에서 생겨나네.
014_0649_c_02L雖聞增益法
不能得上及
如是之過罪
皆由懈怠心

업을 낳고 도리를 닦지 않고
도법에 들지 않으니
이 같은 과실은 모두가
게으름에서 생겨나네.
014_0649_c_04L生業不修理
不入於道法
如是之過失
皆由懈怠心

높고 지혜로운 분에게 버림받고
중간 사람은 가끔 가까이하며
못난 바보들은 거기에 빠져서
돼지가 시궁창을 즐기는 것과 같네.
014_0649_c_05L上智所棄遠
中人時復近
下愚爲之沒
如豬樂在溷

세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세 가지 일을 모두 잃나니,
욕락과 재산을 잃고
복덕 또한 사라지네.
014_0649_c_06L若爲世中人
三事皆廢失
欲樂及財利
福德亦復沒

출가한 사람이라면
두 일을 얻지 못하나니,
곧 생천ㆍ열반과 명예
두 가지를 모두 잃네.
014_0649_c_08L若爲出家人
則不得二事
生天及涅槃
名譽二俱失

이 모든 허물의 이유 알고 보면
이는 바로 게으름이니,
모든 도적 가운데
이를 지나는 것은 없네.
014_0649_c_09L如是諸廢失
欲知其所由
一切諸賊中
無過懈怠賊

이러한 여러 허물 있으니
게으른 마음 짓지 말라.
마정(馬井) 등의 두 비구는
게으름 때문에 악도에 떨어졌으니,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들었으나
또한 스스로 면하지 못했네.
014_0649_c_10L以是衆罪故
懶心不應作
馬井二比丘
懈怠墜惡道
雖見佛聞法
猶亦不自免

이렇게 갖가지로 게으름의 허물을 관찰하고는 정진을 증장시킨다.
014_0649_c_12L如是等種種
觀懈怠之罪
精進增長
또한 정진의 이익을 관찰하건대 금생과 내생의 불도와 열반의 이익은 모두가 정진을 말미암는다.
014_0649_c_13L復次觀精進之益今世後世佛道槃之利皆由精進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이 다 공해서 아무것도 없음을 알지만 열반을 증득하지 않고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온갖 착한 법을 모으나니, 이것이 정진바라밀의 힘이다.
014_0649_c_15L復次菩薩知一切諸法皆空無所有而不證涅槃憐愍衆生,集諸善法是精進波羅蜜力
014_0650_a_01L또한 보살은 혼자서 아무런 반려가 없더라도 정진하는 복덕의 힘 때문에 능히 마군과 번뇌의 도적을 쳐부수고 불도를 성취하셨다. 불도를 얻은 뒤에는 모든 법이 한 모습으로 모습이 없어서 그 실제가 모두 공하건만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의 갖가지 명칭과 갖가지 방편을 말해 주어 중생들의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열반에 들려 할 때는 법신(法身)을 미륵보살ㆍ마하가섭ㆍ아난 등에게 전한 뒤에 금강삼매18)에 드셨는데, 스스로 몸과 뼈를 부수어 겨자씨처럼 만들며, 그로써 중생을 제도해 정진의 힘을 버리지 않으셨다.
014_0649_c_17L菩薩一人獨無等侶以精進福德力故能破魔軍及結使賊得成佛道旣得佛道於一切諸法一相無相實皆空而爲衆生說諸法種種名字,種種方便度脫衆生老病死苦將滅度時以法身與彌勒菩薩摩訶薩阿難等然後入金剛三昧自碎身骨令如芥子以度衆生而不捨精進
또한 아난이 비구들에게 7각의(覺意)19)를 말해 주어 정진각의(精進覺意)에 이르게 하는 것과도 같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그대가 정진각의를 말하였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예, 정진각의를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 묻고 세 번 대답하자 부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능히 정진을 닦기를 좋아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어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리니,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014_0650_a_03L復次如阿難爲諸比丘說七覺意,至精進覺意,佛問阿難汝說精進覺意阿難言說精進覺意如是三問佛卽從坐起告阿難人能愛樂修行精進無事不得得至佛道終不虛也
이렇게 갖가지 인연으로 정진의 이익을 관찰하고는 더욱 증장시키게 되는 것이다.
014_0650_a_07L如是種種因緣觀精進利而得增益
이러한 정진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때로는 욕망[欲]이라 하시고 때로는 정진이라 하시고, 때로는 불방일이라 하셨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려는데 처음 떠나려고 생각하는 것을 욕망이라 하고, 출발해서 멈추지 않는 것을 정진이라 하고, 스스로를 격려해서 나아감을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을 불방일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알게 되니, 욕망에서 정진이 생기고, 정진이 생기는 까닭에 불방일이 있고, 불방일이 있는 까닭에 능히 모든 법을 낳게 하며 나아가서는 불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014_0650_a_08L如是精進佛有時說爲欲或時說精有時說不放逸譬如人欲遠行欲去時是名爲欲發行不住,是爲精能自勸勵不令行事稽留,是爲不放逸以是故,知欲生精進精進生故不放逸,不放逸故能生諸法乃至得成佛道
또한 보살이 생ㆍ노ㆍ병ㆍ사를 벗어나고자 하고, 또한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진하여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기름잔을 들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다니는 것과 같으니, 현전에서 일심으로 불방일하기에 큰 이익을 얻는다.
또한 외지고 험한 길을 새끼줄에 매달리거나 혹은 산양(山羊)을 타고 가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모든 악도(惡道)에서는 일심으로 불방일하기에 몸의 안온을 얻으며, 금생에서는 크게 명리를 얻게 된다.
도를 구해 정진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면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다.
014_0650_a_15L復次菩薩欲脫生亦欲度脫衆生常應精進一心不放逸人擎油鉢行大衆中現前一心不放逸故,大得名利又如偏閣嶮道若懸繩,若乘山羊此諸惡道以一心不放逸故身得安隱,今世大得名利求道精進亦復如是若一心不放逸所願皆得
다시 예를 들어 흐르는 물에 돌이 패이듯이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마음도 그와 같아서 오로지 방편을 닦아 항상 행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능히 번뇌와 모든 결사의 산을 무너뜨린다.
014_0650_a_22L復次譬如水流,能決大石不放逸心,亦復如是專修方便常行不廢能破煩惱諸結使山
014_0650_b_01L또한 보살은 세 가지 생각을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과보를 얻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하면 끝내 잃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반드시 정진을 닦나니, 불도를 위하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조그마한 아란야에서 혼자 좌선을 하다가 게으름을 일으켰다. 숲 속에 신이 있었는데 그는 부처님의 제자였다. 어떤 시체의 뼈 속에 들어가서 노래하고 춤추며 와서는 이런 게송을 읊었다.
014_0650_b_01L復次菩薩有三種思惟若我不作,不得果報若我不自作,不從他來若我作者,終不失是思惟當必精進,爲佛道故懃修專精而不放逸如一小阿蘭若獨在林中坐禪而生懈怠林中有神是佛弟入一死屍骨中歌儛而來說此偈言

숲 속의 작은 비구야,
어째서 게으름을 부리느냐.
낮에 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으면
밤에도 이렇게 오리라.
014_0650_b_07L林中小比丘
何以生懈廢
晝來若不畏
夜復如是來

이 비구가 깜짝 놀라서 일어나 앉아 생각하다가 밤중에 다시 잠에 떨어졌다. 그 신이 다시 나타났는데 머리는 열이요, 입에서 불이 나오고, 어금니와 손톱은 칼 같고 눈은 붉은 불꽃 같았다. 졸개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게으른 비구를 잡아라. 여기는 게으름을 부릴 곳이 아닌데 어째서 그러느냐?”
이때 비구가 크게 놀라며 생각했다. 전일하게 법을 생각하여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니, 이것을 일컬어 ‘스스로 정진하여 불방일의 힘을 기른다면 능히 도과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014_0650_b_09L是比丘驚怖起坐,內自思惟中夜復是神復現十頭口中出火牙爪如眼赤如炎,顧語將從捉此懈怠比此處不應懈怠何以故爾是比丘大怖卽起思惟專精念法得阿羅漢是名自强精進不放逸力能得道
또한 이 정진은 스스로의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과보를 아끼는 것이다. 몸의 네 가지 위의, 곧 다니고 앉고 멈추고 누움에 있어서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며, 차라리 스스로가 몸을 잃을지언정 도업은 그치게 하지 않는다. 마치 불을 끄기 위해 법의 물을 던져 넣는 것은 마음이 오직 불을 끄는 데 있을 뿐, 법을 아끼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650_b_16L復次是精進不自惜身而惜果報於身四儀坐常懃精進寧自失身不廢道業譬如失火以甁水投唯存滅火而不惜甁
어떤 선인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이런 게송을 읊었다.
014_0650_b_19L如仙人師教弟子說偈言

결정된 마음 거뜬하면
대과보를 얻은 듯하니
원하는 일 이루어진 뒤에야
이것이 가장 묘한 줄을 안다.
014_0650_b_20L決定心悅豫
如獲大果報
如願事得時
乃知此最妙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정진의 이익을 관찰해 능히 정진을 늘리고 더해야 한다.
014_0650_b_22L如是種種因緣觀精進之利能令精進增益
014_0650_c_01L또한 보살이 고행을 닦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머리ㆍ눈ㆍ골수ㆍ뇌를 달라고 한다면, 능히 그것을 모두 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인욕ㆍ정진ㆍ지혜ㆍ방편의 힘이 있어도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삼악도의 중생이겠는가. 내가 이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닦고 신속히 불도를 이루어 그들을 제도하리라.’
014_0650_c_01L復次菩薩修諸苦行若有人來求索頭盡能與之而自念我有忍辱精進智慧方便之力之尚苦,何況愚騃三塗衆生我當爲此衆生故懃修精進早成佛道而度脫之
大智度論卷第十五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6근을 말한다.
  2. 2)6경(境)을 말한다.
  3. 3)범어로는 Dharma-sṭīthi-bodhisattva.
  4. 4)범어로는 Mañjuśrī.
  5. 5)범어로는 kṣatriya. 찰제리(刹帝利)라고도 한다.
  6. 6)열네 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말한다. 곧 세상의 존속성, 세간의 공간적 한계, 몸과 마음, 깨달은 이[如來]의 사후 존족에 관한 질문을 말한다. 곧 ①세계는 항상한가. ②무상한가. ③항상하면서 무상한가. ④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⑤세계는 끝이 있는가. ⑥끝이 없는가. ⑦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⑧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⑨몸과 마음은 하나인가. ⑩다른 것인가. ⑪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⑫존재하지 않는가. ⑬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⑭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 열네 가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이 곧 14무기(無記)이다. 여기에서 무기(avyākṛta)란 ‘대답되지 않거나 혹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7. 7)범어로는 prātipākṣika-siddhānta. 네 가지 실단의 하나.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미혹을 대치하고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8. 8)62견이란, 불교외의 사상의 조류를 62종류로 분류해 놓은 것을 말한다. 장부 『범망경(梵網經)』에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9. 9)범어로는 ātman. 곧 영원불변한 나를 말한다.
  10. 10)범어로는 mahāyana. 대승(大乘)을 말한다.
  11. 11)범어로는 Virya.
  12. 12)범어로는 Meṇḍaka. 비바시불(毘婆尸佛)에게 7보로 된 코끼리집[象屋]을 헌상한 공덕으로 그의 창고는 비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3. 13)범어로는 Māndḥātṛ.
  14. 14)범어로는 Losaka-tiśa.
  15. 15)범어로는 vinaya. 율장을 말한다.
  16. 16)범어로는 Avīci-Naraka. 아비지옥이라고도 한다.
  17. 17)4념처(念處)를 말한다.
  18. 18)범어로는 Vajropamasamādhi.
  19. 19)7각지(覺支)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