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보살이 몸은 비록 중생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항상 버리지 않았나니, 조용한 곳에서 선정을 구하는 진실한 지혜를 얻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비유하건대 약을 먹고 몸을 조섭하거나 잠시 집안일을 쉬었다가 기력이 회복되면 전과 같이 사업을 하는 것과 같이, 보살이 적멸에 안주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선정의 힘으로 지혜의 약을 먹고 신통의 힘을 얻어 다시 중생들 속에 들어가서 부모처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스승 어른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하늘 인간, 나아가서는 축생이 되기까지 하면서 갖가지 말과 방편으로 그들을 깨우쳐 인도한다.
014_0660_b_01L또한 보살이 보시ㆍ지계ㆍ인욕 등 이 세 가지를 행하면 이 세 가지를 복덕문이라 하나니, 한량없는 세상에서 천왕이나 제석천왕이나 전륜성왕이나 염부제의 왕이 되어 중생들에게 7보와 의복과 5정(情)1)의 희망을 모두 보시하고 이 세상과 내생에 모두 구족하게 한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전륜성왕이 열 가지 선법으로 백성들을 가르쳐서 모두가 하늘에 태어나게 하고 세상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여 모두가 쾌락을 얻게 하나, 그 쾌락은 무상하여서 나중에 다시 괴로움을 받는다” 했다. 보살은 이 때문에 대비심(大悲心)을 내어 항상하고 즐거운 열반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한다. 이 항상하고 즐거운 열반은 진실한 지혜로부터 생기고, 진실한 지혜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선정에서 생긴다. 비유하건대 등을 켜면 등불이 능히 비추기는 하나 센 바람에서는 작용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밀실에다 두면 그 작용이 완전한 것과 같다. 흩어진 마음속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만일 선정을 위한 고요한 방이 없으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그 작용은 온전치 못하다. 선정을 얻어야 진실한 지혜가 생긴다. 그러므로 보살은 비록 중생을 떠나서 멀리 조용한 곳에 있더라도 선정을 얻으면 선정이 청정한 까닭에 지혜도 청정해진다. 비유하건대 기름의 심지[油炷]가 깨끗하기 때문에 그 광명도 깨끗한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청정한 지혜를 얻고자 하거든 이 선정을 행하여야 된다.
또한 세간의 가까운 일을 구하더라도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사명을 이루지 못하거늘 하물며 깊디깊은 불도를 구하는데 어찌 선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선정이란 모든 어지러운 마음을 쉬는 것이라 하나니, 어지러운 마음이 가벼이 나부끼기는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달리고 흩어짐이 멈추지 않기는 빨리 지나가는 바람과 같고, 제지하기 어렵기는 원숭이보다 더하고, 잠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기는 번개보다 빠르다. 마음의 모습도 이와 같아서 멈추게 할 수 없나니, 그것을 제어하려거든 반드시 선정이어야만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나는 감로의 맛5)을 얻어 안락하게 숲 사이에 앉아 있나니, 사랑과 애정에 매인 중생들 그들을 위하여 자애심을 일으키노라.
014_0660_c_08L我得甘露味, 安樂坐林閒,
恩愛之衆生, 爲之起慈心。
여기에서 셋째 딸은 부끄러운 생각을 내어 스스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애욕을 여의어서 움직일 수 없도다” 하고는 물러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014_0660_c_09L是時三女心生慚愧而自說言:“此人離欲,不可動也。”卽滅去不現。
【문】 어떤 방편을 행하여야 선정바라밀을 얻는가?
014_0660_c_11L問曰:行何方便,得禪波羅蜜?
【답】 다섯 가지 일[事]을 물리치고, 다섯 가지 법(法)을 제하고, 다섯 가지 행을 실천해야 한다.
014_0660_c_12L答曰:卻五事五塵,除五法五蓋,行五行。
014_0661_a_01L어떻게 다섯 가지 일을 물리치는가? 반드시 5욕을 꾸짖되 이렇게 생각한다. ‘가엽도다. 중생들은 항상 5욕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구하기를 마지않는구나.’ 이 5욕이란 것은 얻을수록 더욱 심하니 마치 종기를 불로 뜨는 것과 같다. 5욕은 이익이 없으니 마치 개가 마른 뼈를 핥는 것 같고, 5욕은 다툼을 더하니 마치 새가 고기를 다투는 것 같고, 5욕은 사람을 태우나니 마치 맛바람에 횃불을 잡은 것 같고, 5욕은 사람을 해치나니, 마치 독사를 밟은 것 같고, 5욕은 진실이 없으니, 꿈에 얻은 바와 같고, 5욕은 오래 가지 않으니 마치 잠시 빌린 것 같거늘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고 미혹하여 5욕을 탐내되 죽음에 이르기까지 버리지 않다가 그 때문에 오는 세상에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좋은 과일을 탐내어 나무에 올라가서 따먹다가 때에 맞추어 내려오지 않았는데 다른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베어 나무가 쓰러지자 몸과 머리가 깨어지고 아픔에 시달리다가 죽는 것과 같다. 또한 이 5욕은 얻을 때는 잠깐 즐겁다가 잃을 때는 몹시 괴롭나니, 마치 꿀을 바른 칼날을 핥으면 단맛에 빠져 혀를 상하는 줄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5욕의 법은 축생들과 똑같이 가지고 있나니 지혜로운 이는 알고서 능히 멀리 여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우바새6)가 많은 장사꾼들과 어울려서 멀리 나다니면서 생업을 삼고 있었다. 어느 때 춥고 눈 내리는 밤을 만나 동행을 잃고 어느 석굴(石窟) 속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산신이 한 여자로 변해 나타나서 다가오더니 그를 시험해보려고 이렇게 게송으로 말했다.
곧 색의 근심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색에 집착되면 모든 번뇌결사의 불길이 불붙어서 사람의 몸을 태워 버리니, 마치 불이 금이나 은을 태우는 것과 같다. 달구어져 끓는 꿀은 비록 모양과 맛은 있으나 몸을 태우고 입을 데이나니, 급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묘한 색과 아름다운 맛에 집착되는 것도 이와 같다.
014_0661_b_01L좋고 나쁨은 사람에게 있고 색은 일정함이 없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예컨대 멀리서 사랑스런 사람을 보면 곧 기쁘고 애착하는 마음을 내고, 멀리서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 곧 성내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을 내며, 그 중간 정도의 사람을 보면 성을 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
만일 이러한 기쁨과 성냄을 여의고자 하면 삿된 생각과 색욕을 제거해 둘을 동시에 버려야 한다. 비유하건대 금을 녹인 물에 몸을 데인 것과 같으니, 뜨거움을 제하려는데 불만을 제하고 금은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곧 금과 불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빈비사라(頻婆娑羅)7)왕은 색욕 때문에 자신이 적국에 들어가서 홀로 아범바라(阿梵婆羅)8) 음녀의 방에 있었고, 우진왕(憂塡王)9)은 색욕 때문에 5백 선인의 손과 발을 잘랐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을 일컬어 색을 꾸짖는다 하는 것이다.
어떻게 소리를 꾸짖는가? 소리의 모습은 머물지 않아서 잠깐 들렸다가는 곧 사라지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소리의 모습이 무상하게 변하여 없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성에 대하여 망념되이 ‘좋다,’ ‘즐겁다’라는 생각을 내고, 이미 지나간 소리를 생각하며 집착을 낸다.
예컨대 5백 사람의 선인들이 산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견다라(甄陀羅)10) 아가씨가 설산 기슭의 못에서 목욕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자 곧 선정을 잃고 마음이 취하여 미친 듯이 헤매며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한 일이 있다. 비유하건대 큰 바람이 불어 숲 속의 나무들을 요동치게 한 것과 같으니, 견타라 아가씨가 부르는 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노래 소리를 듣고는 삿된 생각을 내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미쳐 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없었다. 그들은 금생에서는 모든 공덕을 잃어버리고 내생에는 악도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소리가 생각마다 생멸하여 앞과 뒤의 것이 함께하지 못하며 서로 미치지도 못하는 것임을 관찰하나니, 이렇게 알면 더러운 집착을 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여러 하늘들의 음악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거늘 하물며 인간의 소리이겠는가.
어떻게 냄새를 꾸짖는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냄새에 집착되는 것은 죄가 없다’ 하고는 냄새에 물들고 애착되어 번뇌의 문을 여나니, 비록 백 년 동안 계행을 지니다가도 일시에 몽땅 무너뜨린다.
014_0661_b_21L云何呵香?人謂著香少罪,染愛於香,開結使門;雖復百歲持戒,能一時壞之。
014_0661_c_01L예컨대 어떤 아라한이 항상 용궁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돌아와서 사미(沙彌)11)에게 발우를 주어 씻으라 했다.
발우에는 남은 밥풀 몇 알이 있었는데, 사미가 냄새를 맡아 보니 몹시 향기로웠고 먹어보니 매우 맛이 좋았다. 그는 곧 꾀를 써서 스승의 승상(繩床)12)밑으로 들어가서 두 손으로 침대 다리를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승이 갈 때가 되자 침대에 붙어 함께 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용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직 도를 얻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데리고 왔습니까?” 하니, 스승이 대답하길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사미는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또한 매우 예쁘고 견줄 이 없는 향취를 내는 용녀를 보고는 크게 마음이 애착된 나머지 맹세하기를 “내가 복을 지어서 이 용의 궁전을 빼앗아 살리라” 했다. 그때 용이 말했다. “다시는 이 아이를 데리고 오지 마시오.” 사미는 돌아오자 일심으로 보시와 지계에 힘쓰면서 소원하는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애써 구하여 빨리 용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때 사미가 절을 도는데 자기의 발바닥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자 틀림없이 용이 될 것을 확신했다. 그러자 곧장 자신의 스승이 전부터 용궁으로 들어가던 큰 못가로 가서 가사자락으로 머리를 덮고는 물로 뛰어들었다. 그 복덕의 힘이 컸기에 그는 죽어서 곧 죽어서 용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본래의 용을 죽이니 온 못이 피로 붉게 변했다. 이렇게 되기 전부터 여러 스승들과 대중이 사미에게 꾸짖었지만 사미는 말했다.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고, 이제 그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때 스승은 여러 승려들을 데리고 못으로 가서 그 모양을 보았다. 이러한 인연은 냄새에 집착되었기 때문이다.
014_0662_a_01L또한 어떤 비구가 숲 속 연못가를 거닐다가 연꽃 향기를 맡았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쳐 애착심을 일으키게 되였다. 이때 못의 신[池神]이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저 숲 속에 조용히 앉아 참선하던 자리를 버리고 와서 나의 향기를 훔치느냐.” 왜냐하면 향기에 집착하는 까닭에 모든 결사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 다시 다른 사람이 와서 못에 들어가 그 꽃을 많이 꺾고 그 뿌리를 캐어 아주 어지럽게 해놓고는 가버렸다. 그런데 지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비구가 말했다. “저 사람은 그대의 못을 파괴하고 그대의 꽃을 꺾어가도 그대는 아무런 말도 없으면서 어찌하여 나는 못 가에서 걷기만 하였는데도 ‘나의 향기를 훔치느냐’며 꾸짖는가?”
지신이 대답했다. “세상의 악인들은 항상 죄악의 분뇨 속에 빠져 더러움이 머리까지 묻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선정을 닦는 훌륭한 사람인데 이 냄새에 집착해 그대의 좋은 일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를 꾸짖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희고 고운 비단에 더러운 것이 한 점만 묻어도 여러 사람이 다 보거니와 저 악인은 마치 검정 옷에 먹을 떨어뜨린 것과 같아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묻겠는가.”13)
어떻게 맛을 꾸짖는가?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각오해야 한다. “나는 맛난 맛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에 뭇 괴로움을 받으며, 구리 녹인 물을 마시거나 뜨겁게 달군 무쇠알을 먹게 되리라. 만일 바르게 먹는 법을 관찰하지 않고 즐기는 마음만으로 굳게 집착되면 구더기[不淨虫]로 태어나게 되리라.”
예컨대 어떤 사미가 항상 타락[酪]을 좋아하였는데 시주들이 스님들께 타락 공양을 올릴 때면 사미는 의례 남은 찌꺼기를 얻어 몹시 좋아하여 그 곁을 떠나지 못하더니, 목숨이 다하여 그 타락 찌꺼기가 있는 병 속에 태어났다. 나중에 사미의 스승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는데 대중이 타락을 나눌 때엔 말했다. “조심조심해서 이 타락을 즐기는 사미를 다치지 않게 하라.” 사람들이 물었다. “이것은 벌레인데 어찌하여 타락을 즐기는 사미라 하십니까?” 이에 스승이 대답했다. “이 벌레는 본래 나의 사미였는데 타락 찌꺼기를 탐내고 애착했기 때문에 이 병 안에 태어난 것이다.” 스승이 자기 몫의 타락을 얻으면 벌레가 병 안에 있다가 나타나는데, 스승은 “타락에 애착하던 사람아, 무엇하러 왔느냐”라고 말하며 타락을 주는 것이었다.
014_0662_b_01L또한 월불(月分)14)이라는 국왕에게 태자가 있었다. 그는 향기로운 맛을 몹시 좋아하니, 왕의 정원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 날마다 좋은 과일을 따서 보내 주었다. 그 과수원 안에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나무 위에 새가 둥지를 짓고 새끼를 기르고 있었다. 어미 새는 항상 향산(香山)으로 날아가서 좋고 향기로운 과일을 물어다가 새끼를 먹였다. 어느 때 새끼들이 다투다가 과일 하나를 땅에 떨어뜨리니, 정원지기는 이른 아침에 나왔다가 그것을 보고 매우 신기하게 여겨 곧 왕에게로 보냈다. 왕은 이 과일의 빛과 냄새가 매우 이상한 것을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태자가 보자마자 달라고 했다. 왕은 자식을 사랑하는 까닭에 주었더니, 태자는 그 과일을 먹자 맛에 반해 물들은 마음으로 깊이 집착되어 날마다 달라고 했다. 왕은 정원지기를 불러 그 과일의 출처를 물으니, 정원지기가 대답했다. “이 과일은 종자가 없습니다. 그저 땅에서 얻었을 뿐 온 곳은 모릅니다.” 태자는 더욱 울면서 음식을 먹지도 않으니, 왕은 정원지기에게 재촉했다. “그대가 그것을 구해다오.” 과수원지기가 본래 과일 얻은 자리에 가서 살펴보다가 새둥지가 있는 것을 보고는 새가 물고 온 것임을 알았다. 그는 곧 몸을 숨기고 나무로 올라가서 몰래 빼앗으려고 기다렸다. 그리고는 어미 새가 돌아오자마자 즉시 그 과일을 빼앗아 왕에게 보냈다. 날마다 이렇게 하니, 화가 난 어미 새는 향산으로 가서 독기 있는 과일을 가져왔는데, 향기와 맛과 빛깔이 앞의 것과 완전히 같았다. 정원지기는 그것을 빼앗아 왕에게 보냈고, 왕은 태자에게 주었다. 태자가 그것을 먹자 오래지 않아 몸이 붓고 뭉그러지더니 죽어버렸다. 맛에 집착되면 이렇게 몸을 잃는 고통이 있는 것이다.
이 닿임은 모든 허물을 내는 원인이며, 마음을 속박하는 근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머지 네 감정은 제각기 자기의 몫이 있지만 이 닿임은 온몸에 두루하여 생기는 곳이 넓기 때문에 물들은 집착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이 집착은 여의기 어렵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예컨대 어떤 사람이 몸의 부정한 36종의 관법을 닦아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면서도 닿임에 의해 집착하는 마음을 내었다. 비록 그것이 부정함을 알면서도 그 보드랍고 연함을 탐내므로 아무리 부정함을 관찰하여도 이익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의기 어렵다.
또한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무거운 죄를 짓다가 지옥에 떨어진다. 지옥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하나는 한빙(寒氷)이요, 또한 하나는 염화(焰火)이다. 이 두 큰 지옥에는 모두가 몸의 닿임 때문에 죄를 받아 고통이 만 갈래나 되나니, 이 닿임은 매우 어두운 곳이라 하며 위험하고 험난한 곳이라 한다.
014_0662_c_01L또한 『라후라모본생경(羅睺羅母本生經)』15)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석가모니보살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구비야(劬毘耶)16)요, 또한 한 사람은 야수다라(耶輸陀羅)17)였다. 야수다라는 라후라의 어머니이다. 구비야 부인은 보녀[寶女]이었기에 아이를 배지 못했다. 야수다라 부인은 보살이 출가하시는 날 저녁에 태기를 느꼈다. 보살이 출가해서 6년 동안 고행하였는데 야수다라 또한 6년 동안 임신한 채 몸을 풀지 않았다. 이에 석가족 사람들[釋氏]이 따져 물었다. “보살은 출가하셨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는가?”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아기는 분명히 태자의 아기입니다.” “어째서 오래도록 아기를 낳지 않았는가?” “나도 모를 일입니다.” 이에 석가족 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왕에게 알리고 법답게 다스릴 것을 건의했다. 이때 구비야 부인이 왕에게 사뢰었다. “관대히 용서하시옵소서. 제가 항상 야수다라와 거처했으니 저는 그녀의 죄 없음을 증명합니다. 아기를 낳은 뒤 아비를 닮았는지의 여부를 살피신 뒤에 다스려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자 왕도 관대히 미루어 두었다.
014_0663_a_01L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을 마치시고 성불하시던 날 저녁에 라후라도 탄생했다. 왕은 그 아기가 아비를 닮은 것을 보자 사랑스럽게 여겨 모든 근심을 잊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 아들은 떠났지만 이제 그의 자식을 얻으니, 아들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야수다라 부인은 비록 벌은 면했으나 나쁜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으므로 야수다라는 그 나쁜 소문을 불식시키고 싶었다. 부처님께서 도를 얻으신 뒤 가비라바18)에 돌아와 석가족 사람들을 제도하셨는데, 이때 정반왕과 야수다라 부인은 매일 부처님을 궁안으로 청하여 공양을 올렸다. 이때 야수다라 부인은 발우에다 아주 맛난 환희환(歡喜丸)19)을 담아 라후라에게 주면서 부처님께 갖다 드리라 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 5백 아라한들의 모습을 모두 부처님과 똑같아 차이가 없게 하셨다. 라후라는 이때 일곱 살이었지만, 환희환을 들고 곧장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더니 바쳤다.
이때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거두시어 비구들은 제모습으로 돌아가게 하시니, 모두가 빈 발우로 앉았는데 부처님의 발우에만 환희환이 가득했다. 야수다라는 왕에게 말했다. “이것을 보건대 저의 무죄가 증명되옵니다.” 이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무슨 인연으로 6년 동안이나 애기를 배고 있었는지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대의 아들, 라후라는 아주 오랜 옛날에 국왕이었는데 5신통을 얻은 어떤 선인이 그 왕국에 들어와서는 ‘왕법은 도적을 벌주시니, 부디 저의 죄를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느니라. 이에 왕이 물었느니라. ‘그대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저는 왕의 나라에 들어와서 주지 않는 것을 가졌습니다. 왕의 물을 마셨고 왕의 양지(楊枝)로 이를 닦았습니다.’ ‘내가 준 것이거늘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를 때에 물과 양지 모두를 여러 사람에게 쓰도록 허락했노라.’ ‘왕께서 비록 주신 것이지만, 제가 마음속에 품은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벌주시어 다음에 다시 죄가 생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왕이 말하기를 ‘그대가 꼭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잠시 안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하고는 궁으로 들어가서 6일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으니, 선인은 왕의 뜰에서 6일 동안을 아무것도 마시거나 먹지 못했느니라. 이에 선인은 ‘이 왕께서 바로 이것으로 나의 죄를 다스리시는구나’라고 생각했느니라. 그런데 왕은 6일이 지나서야 나오더니 선인에게 ‘내가 깜박 잊었을 뿐이니 탓하지 마시오’라며 사과했느니라. 이런 인연으로 5백 생 동안 3악도의 죄를 받았고, 5백 생 동안 항상 어머니의 뱃속에 6년간을 있었으니, 이런 증거에 의하여 야수다라에게 죄가 없음이 입증됐느니라.”
014_0663_b_01L이때 세존께서 공양을 마치고 자리를 떠서 나가시니, 야수다라는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은 세상에서도 만나기 어려운데 내 이제 만났다가 다시 영원히 잃는구나.” 세존께서 앉으셨을 때엔 똑바로 쳐다보아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나간 뒤에는 그 뒤를 좇아 지켜보다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멈추고서는 크게 한탄했다. 서운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땅에 쓰러져 기절하니, 곁의 사람들이 물을 부어 주어야 다시 깨어났다. 항상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기를 ‘천하에서 누가 나를 위해 주술(呪術)을 잘 부려서 그 마음을 돌려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오게 해서 전과 같이 즐겁게 만들어 주겠는가’ 하고는 7보의 값진 구술을 풀어 황금소반 위에 놓고 그것으로 사람을 모집했다. 이때 어떤 범지가 나서서 말했다. “제가 능히 주술을 써서 그의 마음을 돌리겠습니다. 백 가지 맛을 내는 환희환을 지어서 약초에다 섞고 주문을 외우면 그 마음이 곧 돌아서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야수다라는 그의 말대로 해 놓고, 사람을 부처님께 보내어 여러 성인들과 함께 왕림해 주시기를 청했다. 부처님께서 왕궁에 드시자 야수다라는 곧 백 가지 맛을 내는 환희환을 내어 부처님의 발우에 넣어드렸다. 야수다라는 부처님께서 잡수신 뒤 소원이 이루어져서 처음과 같이 되기를 바랐으나 부처님은 잡수신 뒤에도 아무런 이상도 없이 마음과 눈이 맑고 고요하기만 했다. 야수다라는 생각했다. ‘아직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아직 약효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약효가 발동하면 반드시 내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부처님께서 공양 드시기를 마치시고 축원을 해주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리시니, 야수다라는 생각했다. ‘약의 힘이 저녁때가 되어 해가 지면 나타나서 반드시 궁으로 돌아오시리라.’ 하지만 부처님은 공양하신 뒤 여전히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이튿날 비구들은 밥을 먹을 시간이 되자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성으로 들어가서 걸식을 하다가 이 사실을 자세히 듣고는 더욱 공경하여 말했다. “부처님의 힘은 한량이 없으시고 신통한 마음씨는 헤아릴 수도 없으니, 말이나 생각으로 따질 수 없다. 야수다라의 약인 환희환은 그 힘이 매우 크건만 세존께서는 잡수시고도 몸과 마음에 아무런 이상이 없으시다.” 비구들은 밥을 받아 가지고 성에서 나와 이 일을 자세히 부처님께 말씀드리니,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야수다라는 지금만 환희환으로 나를 흘리는 것이 아니다. 지난 세상에도 환희환으로 나를 홀린 적이 있느니라.”
014_0663_c_01L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시 지난 생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들려 주셨다.20)
014_0663_c_01L爾時,世尊爲諸比丘說本生因緣:
아주 오랜 옛날에 바라내국(姿羅捺國)21)의 어느 산중에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봄날22) 목욕탕에서 사슴들이 모여 어울리는 것을 보자 음심이 발동한 나머지 목욕대야에 정액을 흘리고 말았다. 암사슴이 그 정액을 핥아먹고 곧 태기가 있더니 달이 차서 새끼를 낳았는데, 형상은 사람 같으나 머리에 뿔 하나가 있고 발은 사슴을 닮았다. 어미사슴은 분만할 때, 선인의 암자 근처에 가서 몸을 풀고는 새끼가 사람을 닮았다 하여 선인에게 주고는 가버렸다. 선인이 나왔다가 이 사슴새끼를 보자 자기의 지난 일을 기억해 보더니, 자신의 자식임을 알고는 데리고 가서 길렀다. 차츰 자라남에 따라 부지런히 학문을 가르쳐 18종의 경서23)에 통달했다. 또한 선정을 배우고 4무량심을 행하니, 곧 5신통을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큰 비를 만났다. 미끄러운 진흙땅에 발이 불편해서 쓰러지면서 물병을 깨뜨리는 바람에 발을 크게 다쳤다. 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물병에다 물을 담아놓고는 주술로 축원하여 비가 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 선인의 공덕으로 귀신들이 모두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니, 오곡과 오과가 익지 못하고 백성들은 가난에 시달려 살 길이 막막해졌다.
바라내국의 왕은 근심에 젖어 모든 대신들을 모아 비 내리는 일을 의논하게 했는데, 밝은 이가 있어 말했다. “제가 일찍이 듣건대, 선인들이 사는 산중에 뿔 하나를 가진 선인24)이 있다고 합니다. 불편한 다리로 산을 오르다가 그만 미끄러져 발을 다치고는 화가 나서 비가 오지 못하도록 주문으로 축원을 했는데, 12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왕은 생각했다. ‘12년이나 비가 오지 않는다면, 내 나라는 끝장이다. 백성들은 없어지리라.’ 왕은 공고를 내렸다. “누구든지 그 선인으로 하여금 신통을 잃고 내게 돌아오게 한다면 내 나라의 반을 나누어 주리라.”
014_0664_a_01L이때 바라내국에 선타(扇陀)25)라는 창녀[淫女]가 있었는데 단정하기 짝이 없었다. 왕의 모집에 응해 온 그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아닙니까?” “선인이 낳은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이라면 내가 능히 무너뜨려 주겠소.” 그리고는 금쟁반에다 훌륭한 보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국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 선인의 목에 무등을 타고 오겠습니다.” 음녀는 곧 5백 대의 수레를 구하여 5백 명의 미녀를 태우고, 5백 대의 사슴수레에는 갖가지 환희환을 실었다. 환희환에는 갖가지 약초를 섞어 조합하고 다양한 과일 모양을 내도록 채색했으며, 갖가지 큰 위력을 지닌 맛난 술을 색깔과 맛이 마치 물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나무껍질로 된 옷과 풀로 엮은 옷을 입고 숲 사이를 거닐면서 선인의 행색으로 선인의 암자 근처에다 초암26)을 짓고 살았다.
014_0664_b_01L어느 날 외뿔선인이 밖을 거닐다가 이것을 발견하자, 여자들이 모두 나와서 맞이하며 아름다운 꽃과 좋은 향으로 선인에게 공양했다. 선인이 매우 기뻐하니, 여자들은 모두 예쁜 말씨로 공경히 문안을 드렸다. 선인이 방으로 들어오자 훌륭한 평상에 앉게 하고는 맛난 술을 주니 맑은 물이라 여기고, 환희환을 주니 좋은 과일로 여겼다. 그는 배불리 먹고 나서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뒤 처음으로 이렇게 좋은 과일과 좋은 물을 먹어 봤소.” 여자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일심으로 착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어 이 좋은 과일과 좋은 물을 주신 것입니다.” 선인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피부가 그렇게도 풍만한가?” 여자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이 좋은 과일을 먹고 좋은 물을 마신 까닭에 이처럼 풍만해졌습니다.” 여자들이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이곳에서 살지 않습니까?” 이에 선인은 대답했다. “왜 살지 못하겠느냐.” 이말에 여자들이 “함께 목욕이라도 합시다”라고 권하니 그는 곧 허락을 했다. 여자들의 보드라운 손길이 연하게 건드리자 마음이 흔들리더니, 다시 여러 미녀들이 번갈아 문지르고 씻어주니 음심이 더욱 발동하여 급기야는 음행을 범하고 말았다. 그는 곧 신통을 잃었으며, 하늘은 마침내 비를 내렸다. 선인과 여인들은 7일 7야에 걸쳐 함께 즐기며 먹고 마셨다.
7일 뒤 술과 과일이 다하였기에 산의 물과 나무의 과일로 대신하니, 그 맛이 전과 같지 못했다. 전과 같은 것을 찾으니, 여자는 대답하기를 “다 떨어졌습니다. 지금 함께 가시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얻으실 수는 있습니다”하니, 선인은 “좋도록 하라”하고는 곧 따라 나섰다. 여자는 성이 이제 멀지 않음을 알자 문득 길바닥에 누우면서 말했다. “나는 힘이 다해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선인이 말했다. “그대가 더 이상 갈 수 없다면 내 목을 타거라. 내가 그대를 목에 태우고 가리라.”
음녀는 미리 전언을 왕에게 보내어 “왕께서는 나의 지략을 구경해 보십시오”라며 말해 둔 터였다. 왕이 행차를 갖추고 나와 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이리 되었느냐?” 음녀가 말했다. “저의 방편의 힘으로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성안에 머물게 하면서 잘 공양하고 공경하며, 다섯 가지 욕망을 충족시켜 주십시오.” 왕은 그를 대신으로 명했는데, 성에 머무른 지 며칠 안 되어 몸이 더욱 여위고 수척해지면서 선정을 생각하면 즐겁고 이 세상의 욕망을 싫어했다. 왕이 선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즐거워하지 않고 몸만 점점 수척해지는가?” 선인이 대답했다. “제가 비록 5욕락을 얻었으나 숲속의 고요한 곳을 항상 생각하여 선인들의 수행하는 곳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은 생각했다. ‘내가 만일 강제로 그의 뜻을 어긴다면 뜻을 어겼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움이 극에 달하면 죽을 것이다. 내 본래의 뜻은 가뭄을 제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이미 이루었거늘 다시 무슨 이유로 그의 뜻을 억지로 빼앗으랴.’ 그리고는 곧 그를 놓아 주니, 그는 산으로 돌아와 다시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다시 5신통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외뿔선인은 바로 나의 전생이요, 음녀는 야수다라이니라. 그때에도 환희환으로 나를 홀렸는데, 내가 미혹을 끊지 못했었기에 홀림을 당했다. 지금 또한 환희환으로 홀리려 하나 안 될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곱고 부드러운 촉감은 능히 선인들의 마음까지도 요동시키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범부이겠는가.
그대는 일어나라. 역겨운 몸을 안고 누워 있지 말라. 갖가지 부정하게 모인 것을 사람이라 부를 뿐이다.
마치 중법에 걸린 것 같고 화살이 몸에 박힌 것 같아서 모든 고통이 모여드는데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랴.
014_0665_b_02L汝起勿抱臭身臥, 種種不淨假名人,
如得重病箭入體, 諸苦痛集安可眠。
모든 세간에는 죽음의 불길이 치솟나니 너는 벗어나기를 구할 것이어늘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랴.
어떤 사람이 결박되어 죽음의 땅으로 가는 것 같아서 재앙이 곧 이르거늘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랴.
014_0665_b_04L一切世閒死火燒, 汝當求出安可眠,
如人被縛將去殺, 災害垂至安可眠。
도적을 묶어 제거하지 않는 한 재앙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듯 독사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 듯하고,
또는 전쟁터에서 칼날을 맞대고 선 것 같거니 그런데 어찌하여 잠을 잘 수 있으랴.
014_0665_b_06L結賊不滅害未除, 如共毒蛇同室宿,
亦如臨陣白刃閒, 爾時安可而睡眠。
잠[眠]은 큰 어두움이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나니 날마다 침노하여 사람의 밝음을 빼앗는다.
잠이 마음에 덮이면 보이는 것이 없나니 이렇게 큰 허물이 있거늘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랴.
014_0665_b_08L眠爲大闇無所見, 日日侵誑奪人明,
以眠覆心無所識, 如是大失安可眠。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수면의 가리움을 제한다.
014_0665_b_10L如是等種種因緣,呵睡眠蓋。
들뜸과 후회[掉悔]27)의 가리움에 관하여 말하자면, 들뜸[掉]이라는 것은 출가인의 마음을 깨뜨린다. 사람들은 마음을 거두어 모아도 머무르지 못하거늘 하물며 들뜨고 산란해지는 경우이겠는가. 들뜨고 산란한 사람은 마치 고삐 없는 취한 코끼리 같고, 코를 잘린 낙타와 같아서 제지할 수가 없다. 이런 게송이 있다.
어찌하여 장난삼아 들뜨는 법에 집착하는가. 법의 이익은 없어지고 세간의 즐거움 잃게 되리라.
014_0665_b_14L汝已剃頭著染衣, 執持瓦鉢行乞食,
云何樂著戲掉法, 旣無法利失世樂。
뉘우침이란 큰 죄를 범한 사람이 항상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는 것 같으니, 뉘우침의 화살이 마음에 스며들면 뽑을 수 없다.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65_b_16L悔法者,如犯大罪人,常懷畏怖,悔箭入心,堅不可拔。如偈說: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뉘우침의 불길에 태워져서 후세에는 악도에 떨어지네.
014_0665_b_18L不應作而作, 應作而不作, 悔惱火所燒,
後世墮惡道。
사람이 죄를 뉘우치면 뉘우친 뒤에는 놓아버리라. 그러면 마음이 안락하리니 두고두고 생각하지 말지니라.
014_0665_b_20L若人罪能悔, 已悔則放捨,
如是心安樂, 不應常念著。
두 종류의 뉘우침이 있나니 하지 않았거나 이미 한 것이나 이런 뉘우침이 마음에 걸리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네.
014_0665_b_21L若有二種悔,
不作若已作, 以是悔著心, 是則愚人相。
마음을 뉘우치지 않음으로써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나니 모든 나쁜 일 이미 했으면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리.
014_0665_b_22L不以心悔故, 不作而能作, 諸惡事已作,
不能令不作。
014_0665_c_01L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들뜸과 후회의 가리움을 꾸짖는다.
014_0665_c_01L如是等種種因緣,呵掉、悔蓋。
의심의 가리움이란 의혹이 마음에 덮었기 때문에 모든 법에서 안정된 마음을 얻지 못하나니, 안정된 마음이 없으므로 불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보물산에 들어갔으되 손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의심의 뜻을 설명한 게송이 있다.
어떤 사람이 험준한 길에서 의심하면 가지 못하듯 모든 법의 실상을 배움에도 의심하면 그 허물 이와 같도다.
014_0665_c_06L如人在歧道, 疑惑無所趣, 諸法實相中,
疑亦復如是。
의심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을 부지런히 구하지 못하나니, 이 의혹은 어리석음에서 생긴 것 죄악 가운데서도 가장 나쁘다네.
014_0665_c_08L疑故不懃求, 諸法之實相,
是疑從癡生, 惡中之弊惡。
착한 법과 착하지 못한 법, 생사와 열반 사이에 반드시 진실로 참되게 있는 법, 그에 대해 의혹을 내지 말지니라.
014_0665_c_09L善不善法中,
生死及涅槃, 定實眞有法, 於中莫生疑。
그대들, 의심하는 마음을 내면 죽음의 옥졸에게 결박되리니 마치 사자가 사슴을 덮치듯 벗어나 풀려나기 어려우리라.
014_0665_c_10L汝若生疑心, 死王獄吏縛, 如師子搏鹿,
不能得解脫。
세상을 사노라면 의혹이 있겠지만 묘하고 선한 법을 따라 가거라. 마치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이가 이롭고 좋은 쪽을 따라가듯이.
014_0665_c_12L在世雖有疑, 當隨妙善法,
譬如觀歧道, 利好者應逐。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의혹의 가리움을 버려야 한다.
014_0665_c_13L如是等種種因緣故,應捨疑蓋。
이 5개를 버리면 마치 빚을 진 이가 빚에서 벗어나듯이, 중환자가 쾌차하듯이, 굶주리는 지역을 벗어나 풍요한 나라를 만나듯이, 옥에서 풀려나듯이, 흉한 도적들 틈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근심 없게 되듯 하리라. 수행자도 그와 같아서 5개를 제거하면 그 마음이 편안하고 청정하고 즐거우리라. 비유하건대 해와 달에 다섯 가지, 즉 햇무리ㆍ연기ㆍ구름ㆍ티끌ㆍ안개가 덮이거나 나후아수라(羅候阿修羅)28)가 손으로 막으면 밝게 비추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5개에 덮이면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
014_0666_a_01L정진이라 함은 집을 떠나 계를 지니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전일하게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절제 있게 먹고 마음을 거두는 것이다.
014_0666_a_01L“精進”名離家持戒,初夜後夜,專精不懈,節食,攝心,不令馳散。
기억이라 함은 초선천의 즐거움을 기억하되 욕계는 더럽고 미친 듯 어리둥절하고 미천하며 초선천은 존중하고 귀한 줄을 아는 것이다.
014_0666_a_03L“念”名念初禪樂,知欲界不淨,狂惑可賤,初禪爲尊重可貴。
공교로운 지혜라 함은 욕계의 즐거움과 초선천의 즐거움을 관찰하고 헤아려서 가볍고 무거움과 얻고 잃음을 아는 것이다.
014_0666_a_05L“巧慧”名觀察籌量欲界樂、初禪樂輕重得失。
한마음이라 함은 마음을 항상 대상 가운데 매어 두어 나뉘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014_0666_a_06L“一心”名常繫心緣中,不令分散。
014_0666_b_01L또한 초선천을 오로지 구하여 욕락을 버려야 하나니, 비유하건대 원수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가 항상 그 생각을 없애버리고자 한다면, 곧 원수의 해를 당하지 않는 것 같다. 부처님께서 욕락에 집착된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본래 욕락을 관찰했다. 욕락은 두려움ㆍ근심ㆍ괴로움의 인연이며, 욕락은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다. 욕락이란 악마의 그물에 걸린 것 같아 벗어나기 어렵다. 욕락은 모든 즐거움을 태우고 말리는 것이 마치 숲의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욕락은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아서 매우 두렵고, 독사에게 쫓기는 것 같고, 원수가 칼을 품은 것 같고, 나찰과 같고, 나쁜 독약이 입에 든 것 같고, 구리 녹인 물을 삼킨 것 같고, 세 갈래 개울의 미친 코끼리 같고, 크고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고, 사자가 앞을 막은 것 같고, 마갈어(摩竭魚)29)가 입을 연 것 같으니, 모든 욕락이 이와 같아서 매우 두렵느니라.” 집착된 욕락은 사람들을 번거롭고 괴롭게 만든다. 욕락에 집착된 사람은 마치 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다. 또한 우리 안의 사슴과 같고, 그물에 걸린 새와 같고, 낚시를 삼킨 고기와 같고, 이리에게 붙잡힌 개와 같고, 새매떼 속의 참새와 같고, 들돼지를 만난 뱀과 같고, 고양이들 속에 갇힌 쥐와 같고, 벼랑 끝에 선 소경 같고, 뜨거운 기름에 빠진 파리와 같고, 싸움터에 선 병든 이와 같고, 서지 못하는 이가 불을 만난 것 같고, 끓는 소금강에 뛰어든 사람과도 같다. 또한 꿀 묻은 칼을 핥는 것 같고, 네거리에 놓인 산적 같고, 얇은 천으로 칼숲[刀林]을 가린 것 같고, 꽃으로 더러운 것을 덮은 것 같고, 풀을 독약 항아리에 바른 것 같고, 독사를 담은 광주리 같다. 또한 꿈인 듯 거짓되고 빌린 것 같아서 돌려주어야만 하는 것 같고, 허깨비가 아이들을 속이는 것 같고, 아지랑이가 실제가 없는 것 같고, 큰 물에 빠진 것 같고, 마갈어의 입으로 들어간 배와 같고, 곡식을 해치는 우박과 같고, 사람에게 다가오는 벼락과도 같다. 모든 욕락이 그와 같아서 거짓되고 실다움이 없다. 견고함도 굳음도 없으며,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다. 욕락은 마구니이니, 모든 착한 공덕을 과괴하고, 항상 중생들을 포박해서 해치기 때문이다.
【답】 이 모든 선정은 사유로써 닦는 것[思惟修][선이란 진나라 말로는 사유수(思惟修)이다.]이다. 그러니 선바라밀이라 말하면 일체의 선이 포함되는 것이다.
014_0666_b_10L答曰:此諸定功德,都是思惟修。禪,秦言思惟修。言禪波羅蜜,一切皆攝。
또한 선은 가장 커서 마치 왕과 같으니, 4선이라고 말하면 모든 선정이 다 포함되지만 다른 선정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4선(禪)에는 지혜와 선정이 균등하고 즐겁지만, 아직 이르지 못한 지위[未到地]나 중간 지위[中間地]에는 지혜는 많되 선정이 적고, 무색계에는 선정은 많으나 지혜가 적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은 즐겁지 못하다. 마치 수레의 한 바퀴는 강하고 한 바퀴는 약하면 안정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지혜와 선정이 균등치 못함도 그러하다.
또한 이 4선(禪)에는 4등심(等心)과 5신통(神通)과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와 일체처(一切處)와 무쟁삼매(無諍三味)와 원(願)과 지(智)와 정선(頂禪)과 자재정(自在定)과 연선(練禪)과 14변화심(變化心)과 반주반(般舟般)과 보살들의 삼매인 수릉엄(首楞嚴)33) 등 대략 108종과 부처님들의 삼매인 부동(不動) 등 대략 8백 종과 부처님이 도를 얻으심과 수명을 버리심 등이 있나니, 이러한 갖가지 공덕과 묘한 정이 모두 4선에 속한다. 그러므로 선을 일컬어 바라밀이라 하고 다른 정은 바라밀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014_0666_c_01L【문】 그대는 앞에서 말하기를 “5욕을 버리고, 5개를 제하고, 다섯 가지 법을 행하면 초선정을 얻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닦고 어떤 도에 의지하여야 초선정을 얻는가?
014_0666_c_02L問曰:汝先言呵五欲,除五蓋,行五法,得初禪。修何事、依何道,能得初禪?
【답】 부정관(不淨觀)과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34)등 모든 선문(禪門)에 의지하여야 된다.
014_0666_c_04L答曰:依不淨觀、安那般那念等諸定門。
『선경(禪經)』에 이러한 선게(禪偈)가 있다.
如『禪經』禪義偈中說:
욕락과 삿된 법을 여의면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며 생사를 여의어 기쁘고 즐거우니 이것이 초선정에 드는 것이다.
014_0666_c_05L離欲及惡法, 有覺幷有觀, 離生得喜樂,
是人入初禪。
음욕의 불길을 여읜 뒤에는 시원한 선정을 얻게 되나니 사람이 매우 뜨겁고 괴로울 때 서늘한 못에 들면 기쁜 것과 같다.
014_0666_c_07L已得離婬火, 則獲淸涼定,
如人大熱悶, 入冷池則樂。
가난한 이가 보물을 얻으면 매우 기쁜 느낌이 마음을 움직여 분별하면 그것을 관이라 하니 초선정에 든 것도 그러하니라.
014_0666_c_08L如貧得寶藏,
大喜覺動心, 分別則爲觀, 入初禪亦然。
두 법이 마음을 흔드는 줄 알면 비록 착한 법이라도 여의어야 하나니 마치 바닷물이 맑고 고요하면 물결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다.
014_0666_c_09L知二法亂心, 雖善而應離, 如大水澄靜,
波蕩亦無見。
마치 어떤 이가 편안히 누어 깊이 잠들었을 때 곁에서 누군가가 크게 부르면 그 마음 대단히 어지럽듯이
014_0666_c_11L譬如人大極, 安隱睡臥時,
若有喚呼聲, 其心大惱亂。
마음 모아 선정에 들어갔을 때 각과 관이 도리어 번거롭나니 그러므로 각과 관을 제해버려야 한 의식의 경지에 들어가리라.
014_0666_c_12L攝心入禪時,
以覺觀爲惱, 是故除覺觀, 得入一識處。
속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선정이 생기어 기쁨을 얻나니 이 두 선정에 들어간 뒤엔 기쁘고 용맹하여 매우 기쁘리.
014_0666_c_13L內心淸淨故, 定生得喜樂, 得入此二禪,
喜勇心大悅。
마음 거두는 일이야말로 으뜸가는 정이니, 적연(寂然)히 아무것도 생각지 않아 근심도 기쁨도 버리려 함이 각과 관을 버리는 마음과 같네.
014_0666_c_15L攝心第一定, 寂然無所念,
患喜欲棄之, 亦如捨覺觀。
느낌 때문에 기쁨이 있고 기쁨을 잃으면 근심을 내니 기쁘고 즐거운 느낌을 여의고 생각도 방편도 모두 버리네.
014_0666_c_16L由受故有喜,
失喜則生憂, 離喜樂身受, 捨念及方便。
성인이라야 버릴 수 있고 다른 이는 버리기 어렵나니 즐거움이 근심인 줄 알 수 있으면 견해가 요동치 않아 매우 편하리.
014_0666_c_17L聖人得能捨, 餘人捨爲難, 若能知樂患,
見不動大安。
근심과 기쁨은 이미 제했고 괴로움과 즐거움도 이제 끊어서 생각을 끊은 청청한 마음은 제4선에 들어가리라.
014_0666_c_19L憂喜先已除, 苦樂今亦斷,
捨念淸淨心, 入第四禪中。
제3선 속의 즐거움은 덧없이 움직이기에 괴로우니 욕계 가운데 근심을 끊고 초선과 2선에서 기쁨을 제하네.
014_0666_c_20L第三禪中樂,
無常動故苦, 欲界中斷憂, 初二禪除喜。
그러므로 불세존께서도 제4선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먼저는 근심과 기쁨을 끊고 지금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한다네.
014_0666_c_21L是故佛世尊, 第四禪中說, 先已斷憂喜,
今則除苦樂。
014_0667_a_01L 또한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면서 외딴 곳에 혼자 한가히 살며, 모든 감관을 거두고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부지런히 사유하여 밖의 즐거움을 버리고 선(禪)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며, 모든 욕망과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고 가라앉고 집중된 마음[未到地]35)에 의지하여 초선정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비구가 모든 욕망과 악과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면, 각(覺)과 관(觀)이 있으며 생을 여의어 기쁘고 즐거운 경지인 초선에 들어간다” 하셨다. 모든 욕망이라 함은 애착하는 대상인 색 등 5욕이니, 생각하고 분별해서 욕망을 꾸짖는 법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이라 함은 탐욕 등 5개(蓋)이다. 이러한 안팎의 두 가지를 여의기 때문에 초선을 얻게 되는데, 초선의 모습은 각과 관이 있고[有覺有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집중된 마음[一心]이다. 각과 관이 있다고 함은 초선 가운데서 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착한 법의 공덕을 얻는 까닭에 마음이 크게 놀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항상 욕망의 불길에 태워지다가 초선을 얻을 때는 마치 서늘한 못에 들어간 것 같고, 또한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보배광을 얻은 것과도 같다. 곧 수행자는 욕계의 허물과 죄를 사유하고 분별한 뒤에 초선의 이익과 공덕이 매우 많은 줄을 알고는 마음이 크게 기뻐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각과 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014_0667_b_01L【답】 두 법이 한마음에 있기는 하지만 두 모습이 함께하지는 않는다. 각이 있을 때는 관이 분명치 않고, 관이 있을 때는 각이 분명치 않다. 마치 해가 떴을 때 뭇별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일체의 심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게 되는 것도 그러하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일 한 법을 끓는다면, 나는 그대가 아나함(阿那含)36)을 얻게 됨을 보증하노라” 하셨다. 한 법이라 함은 곧 간탐(慳貪)이거니와 실제에는 5하분결(下分結)을 다 끊어야 아나함을 얻는다 해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한 법만 끊으면 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곧 이 사람은 간탐에 치우침이 많아서 다른 번뇌가 모두 따라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탐이 끊어지면 다른 번뇌도 끊어진다 하신 것이다. 각과 관이때에 따라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이와 같다.
수행자는 이 각과 관이 비록 좋은 법인 줄은 아나, 집중된 마음[定心]을 어지럽히기에 마음에서 그것을 여의기를 원한다. 때문에 이 각과 관을 꾸짖어 생각하기를 ‘각과 관이 선심(禪心)을 요동시킨다’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맑은 물에 파도가 치면 비치지 못하는 것 같으며, 또한 몹시 피로한 사람이 쉴 틈을 얻어 자려 하는데 곁의 사람이 부르면 갖가지로 어지러워지는 것 같으니, 마음을 거두어 속으로 안정시키는데 각과 관이 흔들어 어지럽히는 것도 이와 같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각과 관을 꾸짖어 각과 관이 멸하면 내적으로 청정해지고 마음을 한 곳에 매어두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집중[定]에서 생겨나는 기쁨이 있는 경지인 제2선에 들어간다. 2선을 얻은 뒤엔 2선에서 일찍이 얻어보지 못했던 비할 바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각과 관이 멸한다고 함은 각과 관의 허물을 아는 까닭에 멸한다는 것이다. 내적으로 청정해진다고 했는데, 곧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초선의 각과 관을 버림으로써 얻는 이익이 매우 중하며, 잃는 바가 매우 적고 얻는 바가 많고 큼을 믿어서 마음을 한 대상에 매어 두기 때문에 안으로 청정해지는 것이다.
014_0667_c_01L수행자가 기쁨의 허물을 관찰함도 각과 관의 경우와 같다. 기쁨이 있는 곳을 따라 기쁨도 많고 근심도 많다. 왜냐하면 마치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어 기쁨이 한량이 없다가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면 그 근심 또한 깊은 것 같으니, 기쁨은 곧 근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버려야 하니, 따라서 ‘생각을 버리는 지혜[捨念智]’를 행하여 이번에는 몸의 즐거움[身樂]을 받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성인만이 얻을 수 있고 버릴 수도 있나니, 전일한 마음을 즐거운 곳에 두어 제3선에 들어간다. 버린다 함은 기뻐하는 마음을 버리고는 다시 후회하지 않는 것이요, 지혜라 함은 이미 3선의 즐거움을 얻고는 그 즐거움에 대하여 근심을 내지 않는 것이요, 몸의 즐거움을 받는다 함은 이 3선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모두 받는 것이요, 성인이라야 능히 얻고 능히 버린다 함은 이 즐거움이 세간에서 으뜸가는 것이어서 능히 집착하는 마음을 내게 하므로 범부로서는 버리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비를 행하는 과보는 변정지(遍淨地) 가운데 제일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수행자는 즐거움의 허물을 관찰하기를 기쁨의 허물을 관찰하듯이 한다. 마음이 요동치 않는 곳이 제일인 줄 아나니, 만일 움직이는 곳이 있다면 이는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제3선천의 즐거움이 요동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곳을 구한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고 먼저 근심과 기쁨을 멸하니,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버리고 청정한 경지인 제4선에 들어간다. 이 4선에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오직 요동치 않는 지혜만이 있다. 이런 까닭에 제4선을 ‘생각을 버린 청정한 경지’(捨念淸淨)라고 하는 것이다. 제3선의 즐거움은 움직이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4선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끊어진 곳이라 한다.
014_0668_a_01L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색상을 초월하여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상[有對相]을 멸해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37)에 들어간다” 하셨다. 이때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색이 없다면 주림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 몸의 색은 거칠고, 무겁고, 가리어지고, 악하고, 거짓되고, 속이고, 진실 되지 않다. 전생부터의 인연이 화합해서 과보로 이 몸을 받았으나 갖가지 괴로움이 머무는 곳이다. 어찌하여야 이 몸의 근심을 면할 수 있을까. 이 몸에 대해 허공을 관해야 하리라.’ 항상 몸은 공적하여 대바구니[籠] 같고, 시루[甑] 같다고 관하며, 항상 생각하기를 ‘버리지 않으면 색계를 건너서 다시는 몸을 보지 않게 된다’ 한다. 몸 안이 공하듯이 밖의 색도 그러하나니, 이때에 능히 한량없고 가없는 허공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관(觀)을 얻으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어서 그 마음이 더욱 늘어나나니, 마치 새가 병 속에 갇혔다가 병이 깨지면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공처정(空處定)이라 한다.
이 공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어서 식(識)을 그 대상으로 삼나니, 대상이 많으면 곧 흩어져서 선정을 깨고 만다. 수행자는 허공의 반연[虛空緣]인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을 병 같고, 종기 같고, 상처 같고, 가시 같아서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고, 속이는 것이어서 화합하면 있을지언정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는 허공의 대상을 버리고 다만 식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연하는가? 곧 현전의 식을 반연하고, 과거ㆍ미래의 한량없고 끝없는 식을 반연하나니, 이 식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마치 허공이 한량없고 끝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일컬어 식처정(識處定)38)이라 한다.
이 식은 한없고 끝이 없어 식으로써 반연하나니, 식이 많으면 흩어져서 선정이 깨어진다. 수행자는 이 식의 대상인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병 같고, 종기 같고, 상처 같고, 가시 같아서 무상하고, 괴롭고, 나 없고, 속이는 것이어서 화합하면 있을지언정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이렇게 관찰하고는 식의 모습을 깨뜨리나니, 이는 식처를 질책하고 무소유처(無所有處)39)를 찬탄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 식의 모습을 깨뜨리고 무소유에 마음을 매어 두니, 이것을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무소유처의 대상인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병ㆍ종기ㆍ상처ㆍ가시 같아서 괴롭고, 공하고, 나 없고 속이는 것이어서 화합하면 있을지언정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님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생각 없는 곳은 종기 같고, 생각 있는 곳도 병ㆍ종기ㆍ상처ㆍ가시와 같으니, 제일 묘한 곳은 바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40)가 된다.
014_0668_b_01L【답】 여기에는 생각은 있으나 미세하여 느끼기 어려운 까닭에 비유상(非有想)이라 하고, 생각이 있는 까닭에 비무상(非無想)이라 한다. 범부들의 마음에는 모든 법의 실상을 얻었노라 하고, 이것을 열반으로 삼는다. 불법 가운데에서는 비록 생각 있는 경계인 줄은 알지만 그 본래의 이름에 의거해 비유상비무상처라 한다.
이들 선정에는 두 종류가 있나니,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이다. 유루는 범부들의 행이니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무루는 16성자의 행이다. 유루의 도에서는 위의 지위에 의해서 아래 지위의 욕망을 여의고, 무루의 도에서는 자기 지위의 욕망과 윗 지위의 욕망을 여읜다. 이런 까닭에 범부는 유정처(有頂處)41)에서는 욕망을 여의지 못하나니, 더 높은 지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아홉 가지를 끊는 까닭에 불제자가 유루의 도에 의지하여 초선(初禪)을 얻고자 하면, 이때 미도지(未到地)42)인 9무애도(無礙道)43)와 8해탈도(解脫道)[매 지위마다에서 수행이 끝나는 과정]44)에서는 현재에는 유루의 도를 닦고, 미래에는 유루의 도와 무루의 도를 닦으며, 제9의 해탈도에서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경지에서 현재에는 유루의 도를 닦고, 미래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경지의 유루ㆍ무루의 도와 초선의 경지의 유루를 닦는다. 무루의 도에 의하여 초선을 얻고자 할 때도 이와 같다.
014_0668_c_01L만일 무루의 도에 의하여 초선의 욕망을 여의고자 한다면 제2선의 경지에 속하는 9무애도와 8해탈도에서 현재에는 2선의 경지에 속하는 유루를 닦고, 미래에는 2선의 경지에 속하는 유루의 도를 닦는다. 또한 무루의 초선 및 그 권속(眷屬)을 닦으며, 제9해탈도에서는 제2선의 경지에서 현재에는 2선에 속하는 유루의 도를 닦고, 미래에는 2선의 경지에 속하는 초선의 무루 및 그 권속과 2선의 깨끗한 무루를 닦는다.
만일 무루의 도에 의하여 초선의 욕망을 여의고자 하면 9무애도와 8해탈도에서 현재에는 자기 경지의 무루의 도를 닦고, 미래에는 초선 및 그 권속인 유루ㆍ무루의 도를 닦으며, 제9해탈도에서는 현재에는 자기 경지의 무루의 도를 닦고, 미래에는 초선 및 그 권속인 유루ㆍ무루의 도와 2선의 깨끗한 무루를 닦는다.
닦음[修]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득수(得修)요, 둘은 행수(行修)이다. 득수라 함은 본래 얻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야 얻고, 오는 세상에 스스로의 일을 닦거나 다른 일도 닦는 것이다. 행수라 함은 이미 얻은 것을 현재에 닦으며, 오는 세상에도 그와 같아서 다른 법은 닦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선정의 모습을 간략히 말하건대 23종이 있으니, 8미(味)와 8정(淨)과 7무루(無漏)이다.
014_0668_c_18L復次,禪定相,略說有二十三種:八味、八淨、七無漏。
여섯 가지 인(因)46)이 있으니, 상응인(相應因)47)과 공인(共因)48)과 상사인(相似因)49)과 변인(遍因)과 보인(報因)50)과 명인(名因)이다. 낱낱 무루가 7무루의 원인이 되는 것이 상사인이요, 자기 위에서 늘어나는 것이 상응인이다. 공유인(共有因)이란 초미정(初味定)이 초미정의 원인이 되고, 후미정(後味定)이 후미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3선의 무루정이 차례로 열 가지를 내나니, 자기 지위가 둘이요, 아래 지위가 넷이요, 위의 지위가 넷이다.
014_0669_a_06L三禪無漏定,次第生十種:自地二,下地四,上地四。
제4선과 공처(空處) 역시 그와 같다.
014_0669_a_07L第四禪、空處亦如是。
식처(識處)의 무루정이 차례로 아홉 가지를 내나니, 자기 지위가 둘이요, 아래 지위가 넷이요, 위의 지위가 셋이다.
014_0669_a_08L識處無漏定,次第生九種:自地二,下地四,上地三。
무소유처의 무루정이 차례로 일곱 가지를 내나니, 자기 지위가 둘이요, 아래 지위가 넷이요, 위의 지위가 하나이다.
014_0669_a_09L無所有處無漏定,次第生七種:自地二,下地四,上地一。
비유상비무상처의 청정[淨]이 차례로 여섯 가지 마음을 내나니, 자기 지위가 둘이요, 아래 지위가 넷이다. 다른 모든 청정한 지위[淨地] 역시 이와 같다. 또한 모두가 자기 지위의 맛[自地味]과 초선의 맛[初禪味]을 더하게 하나니, 차례대로 두 가지 맛은 깨끗하며, 비상비비상처의 맛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다.
014_0669_b_01L【답】 모든 성인들은 무루의 선정을 좋아하고 유루는 좋아하지 않는다. 욕망을 여윌 때에는 유루가 청정해지나니, 좋아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진다. 이제 그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무루로써 연마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금을 연마하여 그 찌꺼기를 버리는 것같이, 무루로써 유루를 연마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무루선으로부터 일어나서 깨끗한 선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자주자주 거듭하는 것을 연선이라 한다.
또한 모든 선 가운데는 정선(頂禪)이 있다. 왜냐하면 정선[頂]에는 두 종류의 아라한이 있기 때문이다. 곧 괴법(壞法)과 불괴법(不壞法)이다.56) 불괴법의 아라한은 일체의 깊은 선정에서 자재를 얻어서 능히 정선을 일으키나니, 이 정선을 얻으면 능히 수(壽)를 부(富)로 바꾸고, 부를 수로 바꾼다.
또한 원지(願智), 4변(辯), 무쟁삼매(無諍三味)가 있다. 원지라 함은 3세의 일을 알기를 원하고, 그 원하는 바에 따라 아는 것이다. 이 원지는 두 곳에 속하나니, 욕계와 제4선이다. 4변이라 했는데, 법변(法辯)과 사변(辭辯)은 두 곳에 속하니 욕계와 초선이요, 나머지 두 변은 9지(地)에 속하니 욕계 4선과 4무색정이다. 무쟁삼매라 함은 다른 이의 마음에 다툼이 일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다섯 곳에 속하니, 욕계와 4선이다.
【답】 선은 바라밀의 근본이니, 이 선을 얻은 뒤에 관찰하기를 “중생들은 내적으로 마음속에는 갖가지 선정의 묘한 즐거움이 있건만 구할 줄 모르고, 도리어 바깥 법의 부정하고 괴로운 가운데에서 쾌락을 찾는다” 하며 연민한다. 이렇게 관찰하고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드넓은 서원을 세우되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선정의 내적인 즐거움을 얻고, 부정한 쾌락을 여의게 하리라” 한다. 이 선정의 즐거움에 의지해서 이어서 불도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이때의 선정이 선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또한 보살이 깊은 선정에 들면 모든 하늘이나 인간이 그의 마음이 의지하고 반연하는 대상을 알 수가 없으니, 보고 듣고 지각하는 법 가운데에서 마음이 요동치 않는다.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 사리불에게 연차(宴坐)하는 법을 설명하면서 “몸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 의지하지 않으며, 삼계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삼계 안에서 신심(身心)을 얻지 않으니, 이것이 연좌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014_0670_a_01L또한 어떤 사람이 선정의 쾌락이 인천(人天)의 쾌락보다 수승하다는 말을 듣고는 곧 욕망의 쾌락을 버리고 선정을 구한다면, 이는 스스로의 쾌락과 이익을 구하는 것이니 기특한 것이 못 된다.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다만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으로 저들을 정화시키고자 하니,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선이다. 선정 가운데에서는 모두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선에는 지극히 묘한 내적인 즐거움이 있건만 중생들은 이것을 버리고서 밖의 쾌락을 구한다. 비유하건대 큰 부자인 소경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건만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구걸을 다니는 것과도 같다. 지혜로운 이는 그가 묘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여 구걸을 다니는 것을 가엾이 여긴다.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마음속에 원래부터 갖가지 선정의 쾌락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밖의 쾌락을 구한다.
【답】 아라한과 벽지불은 맛에 집착되지는 않으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으므로 선바라밀이라 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모든 선을 다 행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모든 선을 다 행한다. 거칠음과 미세함, 큼과 작음, 깊음과 얕음, 안의 대상과 밖의 대상 등 모두를 다 행하나니, 이런 까닭에 보살의 마음[心中]은 선바라밀이라 하거니와 다른 사람의 것은 선이라고만 한다.
014_0670_b_01L또한 외도나 성문이나 보살이 모두 선정을 얻는다. 하지만 외도의 선에는 세 가지 우환[患]이 있으니, 맛에 집착되거나 삿된 소견에 빠지거나 교만해지는 것이다. 성문의 선은 자비심이 얇아서 모든 법에 대해 날카로운 지혜로 모든 법의 실상을 꿰뚫어 통달치 못하고, 홀로 자기 몸만을 좋게 하여 불종자를 끊는다. 하지만 보살의 선에는 이러한 일이 없으니, 일체의 부처님들의 법을 모으려는 까닭에 모든 선 가운데에서 중생을 잊지 않고, 나아가서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항상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한다. 예컨대 석가모니불은 본래 나계선인(螺髻仙人)이었는데, 이름이 상사리(尙闍利)였다. 항상 제4선을 행해 들고나는 호흡을 끊고, 한 나무 밑에 앉아서 우뚝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새들이 이와 같은 일을 보고는 나무로 여겨 곧 상투 속에 알을 낳았다. 이 보살은 선정에서 깨어나자 머리에 새알이 있음을 알고는 생각했다. ‘내가 만일 일어나서 움직이면 반드시 어미 새가 오지 않을 것이요, 어미 새가 오지 않으면 새알은 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는 곧 다시 선에 들어갔으니, 그로부터 알이 부화하고 자라나 날아가게 되자 선에서 일어났다.
예컨대 5백 명의 선인들은 날아가다가 견타라(甄陀羅) 아가씨57)의 노랫소리를 듣자 마음이 집착되고 도취되어 모두가 신통을 잃고 일시에 땅에 떨어졌다.
014_0670_b_12L如五百仙人飛行時,聞甄陁羅女歌聲,心著狂醉,皆失神足,一時墮地。
014_0670_c_01L성문들은 긴나라왕인 돈륜마(屯崙摩)58)가 거문고를 키고 노래를 부르며 모든 법의 실상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함을 들었다. 이때 수미산과 나무들이 모두 진동하였고, 대가섭 등의 대제자들은 모두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지 못했다. 여기에서 천수보살(天須菩薩)이 대가섭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이도 가장 많고, 두타행도 으뜸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마음을 조절해 편히 있지 못하는가?” 대가섭이 대답했다. “나는 인간이나 하늘의 모든 욕망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으나, 이는 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으로 나타나는 소리이며 또한 지혜에서 변화되어 나온 소리인 까닭에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여덟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수미산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겁(却)이 다할 때 비람풍(毘藍風)59)이 불어오면 수미산은 마치 썩은 풀같이 흔들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알 수 있으니, 보살은 일체법 가운데 별상으로 관찰하여 모든 욕망을 여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단지 선이란 이름만 얻었을 뿐 바라밀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은 보살이 들고 나는 선의 마음은 알지만, 선에 머무르는 마음이 반연하는 바와 이르는 곳을 알거나 모든 법의 깊고 얕음을 알 수는 없다. 아라한이나 벽지불도 알기 어렵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비유하건대 코끼리가 물을 건너면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발자취는 볼 수 있지만 물 가운데 있을 때의 것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가령 누군가 초선(初禪)을 얻었을 때 동일한 초선을 얻은 사람은 능히 알 수 있지만, 보살이 초선에 든 경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2선을 얻었다면 초선의 마음을 관찰하여 분명하게 알 수는 있지만, 보살이 초선에 든 마음은 알지 못한다. 비유상비무상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또한 삼매를 뛰어넘을 때 초선에서 일어나서 제3선에 들어가고, 제3선에서 일어나서 허공처에 들어가고, 허공처에서 일어나서 무소유처에 들어간다. 2승60)은 오직 하나만을 뛰어넘을 뿐 둘은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보살은 자유롭게 뛰어넘어서 초선에서 일어나 3선에 들기를 예사롭게 한다. 혹은 제4선에 들기도 하고, 공처ㆍ식처ㆍ무소유처ㆍ비유상비무상처에 들기도 하며, 혹은 멸수상정에 들기도 하고, 멸수상정에서 일어나서 무소유처ㆍ식처ㆍ공처ㆍ4선에 들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초선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때로는 하나를 뛰어넘고, 혹은 둘이나 셋, 나아가서는 아홉을 뛰어넘는다. 성문은 두 지위를 뛰어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혜ㆍ공덕ㆍ선정의 힘이 얇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두 종류의 사자와 같다. 곧 백사자와 황사자가 있으니, 황사자도 잘 뛰어넘지만 백사자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해 선바라밀을 분별한다.
【문】 경에 말씀하시기를 “먼저 각관(覺觀)의 사유가 있은 뒤에야 능히 설법을 한다” 했다. 선정에 들어가 언어의 생각[覺觀]이 없다면 설법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어찌하여 말하기를 “항상 선정 가운데에서 각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한다” 하는가?
【답】 생사하는 사람의 법이란 선정에 들어가 먼저 말로써 언어의 각관을 일으키게 한 뒤에 설법을 한다.
014_0671_a_08L答曰:生死人法,入禪定,先以語、覺觀,然後說法。
그러나 법신 보살(法身菩薩)은 생사의 몸을 여의고, 일체법을 알아 항상 머무르기를 선정의 모습같이 머물며, 어지러움이 없음을 본다. 법신 보살은 한량없는 몸으로 변화해 나타나서 중생들에게 설법하지만 보살의 마음에는 분별이 없다. 예컨대 마치 아수라의 거문고와도 같으니, 항상 저절로 소리가 나서 마음을 좇아 울릴 뿐, 아무도 거문고를 켜는 이는 없다. 이것은 또한 마음을 흩어뜨림도 없고, 마음을 거둠도 없다. 오직 복덕의 댓가로 생겨난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소리를 낼 뿐이다. 법신 보살도 그와 같아서 분별이 없고, 마음을 흩어뜨림도 없고, 법을 설한다는 모습도 없다. 이는 한량없는 복덕과 선정ㆍ지혜의 인연 때문이다. 이 법신 보살은 갖가지 법음(法音)을 그 응함을 좇아 알맞게 표현해 낸다.
014_0671_b_01L또한 보살은 일체법의 어지러움과 안정된 모습이 모두가 둘 아닌 모습[不二相]으로 관찰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제하고서 안정을 구하려 한다. 왜냐하면 어지러운 법에 대하여는 성냄의 생각을 일으키고, 안정된 법에 대하여는 애착하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울타라가(鬱陀羅伽)61) 선인은 5신통을 얻고서 날마다 왕궁으로 날아가서 음식을 먹었다. 이때 왕의 대부인(大夫人)이 그 나라의 국법에 따라 선인의 발을 잡고 절을 하였는데 부인의 손이 닿자마자 신통을 잃었다. 왕에게 말과 수레를 달라고 하여 거마를 타고 나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와서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5신통을 구하는데 일심으로 전일하게 애를 썼다. 곧 신통이 얻어지려는 무렵에 새가 나무 위에서 급하게 울어 그의 생각을 어지럽히니, 그는 나무를 버리고 다시 물가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물고기들이 싸워 물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선정을 구해도 얻을 수 없게 되자 성을 내었다. “새와 물고기를 모두 죽여 버릴 테다.” 그 사람은 얼마 뒤에 사유해서 정(定)을 얻으니,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났는데, 거기에서 수명이 다한 뒤 아래 세상에 태어나자 날아다니는 삵이 되어 물고기와 새를 다 죽여 한량없는 죄를 짓고는 3악도에 떨어졌다. 이것이 선정에 집착의 마음을 일으킨 인연이다.
014_0671_c_01L이는 외도의 경우이고, 불제자의 예도 있다. 예컨대 어떤 비구가 4선을 얻었을 때 증상만(增上慢)을 내어 네 가지 도[四道]를 얻었다고 여겼다. 곧 초선정을 얻고는 수다원(須陀洹)62)을 얻었다 하고, 제2선을 얻고는 사다함(斯陀含)63)을 얻었다 하고, 제3선을 얻고는 아나함(河那含)64)을 얻었다 하고, 제4선을 얻고는 아라한(阿蘿漢)65)을 얻었다 하였는데, 이를 믿고 멈추어 더 정진하지 않았다. 목숨이 다하려 할 때 4선 세계의 중음상(中陰相)66)이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자, 문득 ‘열반이란 없는 것인데 부처님은 나를 속였다’라며 삿된 소견을 일으켰다. 이렇게 삿된 생각을 일으킨 까닭에 4선의 중음상마저 사라지고 다시 아비지옥67)의 중음상이 나타나더니 숨이 끊어져 아비지옥에 태어났다.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아무개 비구는 아련야(阿練若)에서 죽었는데 어디에 가서 태어났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아비지옥에 태어났느니라.” 비구들이 깜짝 놀라 다시 여쭈었다. “그 사람은 좌선하고 계행을 지키고 했는데도 그러한지요?”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은 증상만 때문에 4선을 얻자 4도를 얻었다 여겼느니라. 때문에 목숨이 마치려 할 때 4선천의 중음상을 보고는 문득 삿된 소견을 내어 생각하기를 ‘열반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라한인데도 이제 다시 태어나야 되다니, 부처님은 거짓말쟁이다’ 하였느니라. 이때 곧 아비지옥의 중음상이 보이더니, 목숨을 마치자 곧 아비지옥에 태어났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해 주셨다.
많이 듣고 계 지니고 선정 닦아도 무루의 법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그런 공덕이 있어도 이 일은 믿을 것 되지 못하네.
014_0671_c_07L多聞持戒禪, 未得無漏法, 雖有此功德,
此事不可信。
이 비구는 이러한 악도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
014_0671_c_09L是比丘受是惡道苦。
그러므로 어지러운 모습을 취하면 성냄 등의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선정의 모습을 취하면 역시 집착을 내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어지러운 모습도 탐내지 말고, 선정의 모습도 탐내지 말아야 하나니, 어지러움과 선정은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바라밀이라 한다. 초선의 모습이란 욕망을 여의고 가리움을 제하며,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다. 이 보살은 날카로운 감관과 지혜로 관찰하기 때문에 5개에 대해 버릴 바도 없고, 선정의 모습에 취할 바도 없나니, 곧 모든 법의 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5개에 대해 버릴 바가 없는가?
곧 탐욕의 가리움이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안에 법이 있는 것이라면 밖의 것을 기다려서 생긴 것이 아니요, 밖에 법이 있는 것이라면 나에게 아무런 근심이 되지 않을 것이요, 두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둘 사이는 일정한 장소[處]가 없기 때문이다.
014_0672_a_01L또한 전생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린아이에게는 욕심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전생부터 있는 것이라면 어리다 해도 욕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생으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뒷세상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모여온 것도 아니며, 항상 저절로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의 한 부분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온몸에 두루해 있는 것도 아니며, 5진(塵)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5정(情)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생긴 근원이 없고 사라져 가는 곳이 없다.
또한 이 탐욕은 먼저 생겼다거나 나중에 생겼다거나 동시에 생겼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먼저 생겼다가 나중에야 탐욕이 있는 것이라면 지금의 여기에는 탐욕이 생하지 않아야 하나니, 아직 탐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나중에 생이 있고 먼저부터 탐욕이 있다고 한다면, 곧 생이 일어난 곳은 없게 된다. 만일 동시에 생기는 것이라면, 생긴 것과 생기는 곳이 모두 없으리니, 생긴 것과 생기는 곳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탐욕과 탐내는 이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왜냐하면 탐욕을 떠나서는 탐내는 이를 얻을 수 없고, 탐내는 이를 떠나서는 탐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화합된 인연에 따라 생겼나니, 화합된 인연으로 생긴 법은 곧 자성(自性)이 공한 법이다. 이리하여 탐욕과 탐내는 이는 다르다 할 수 없다. 만일 같다고 한다면 탐욕과 탐내는 이는 곧 분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탐욕의 가리움을 관찰하면 선(禪)과 하나가 되리니, 나머지 가리움도 그와 같다.
014_0672_a_15L如是觀貪欲蓋,則與禪爲一;餘蓋亦如是。
만일 모든 법의 실상을 얻어 5개를 관찰하면 있는 바가 없게 되리니, 이럴 때에 5개의 실상이 곧 선의 실상이요, 선의 실상이 곧 5개임을 알게 된다. 보살은 이처럼 5욕과 5개, 선정과 나머지 바라밀[支]이 한 모습임을 알아, 기대는 바 없이 선정에 들어가니, 이것이 선바라밀이다.
014_0672_b_01L또한 보살은 선바라밀의 힘으로 무수하게 몸을 변화해 나투어 5도(道)에 두루 들어가서 3승의 법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014_0672_b_02L復次,菩薩以禪波羅蜜力,變身無數,遍入五道,以三乘法教化衆生。
또한 보살은 선바라밀에 들어가서 온갖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제하나니, 초선 내지 비유상비무상정에 들어가고, 그 마음이 부드럽게 길들어서 낱낱의 선에서 대자대비를 행하며, 자비의 인연으로써 한량없는 겁의 죄를 멸하여 모든 법의 실상지혜를 얻는다. 그러므로 시방의 부처님들과 큰 보살들의 아껴주심을 받는다.
또한 보살은 선바라밀 가운데 들어가서 천안으로써 시방의 5도에 있는 중생들을 관찰하건대, 색계에 태어난 이는 선정의 즐거운 맛을 받아 오히려 금수(禽獸) 가운데 떨어져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본다. 또한 욕계의 여러 하늘들은 7보의 연못에서 꽃향취에 홀려 즐기다가 나중에 짜고 끓는 똥물지옥[鹹沸屎地獄]에 빠지는 것을 보며, 인간에 태어난 이들은 들은 것이 너무 많고 세속적 지혜에 지나치게 총명하여 바른 도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돼지ㆍ양 등 축생 가운데 떨어져서 아무 분별도 없는 것을 본다. 이렇게 갖가지로 큰 즐거움을 잃고 큰 괴로움을 얻으며, 큰 이익을 잃고 큰 쇠운을 만나며, 존귀함을 잃고 비천함을 얻음을 아나니, 이런 중생에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차츰차츰 늘어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이루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중생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서 불도를 구한다.
014_0672_c_01L【답】 어지러움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미세한 것이요, 둘째는 거친 것이다. 다시 미세한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애욕이 많음이요, 둘째는 교만이 많음이요, 셋째는 소견이 많음이다. 무엇을 애욕이 많다 하는가? 곧 선정의 즐거움을 얻고는 그 마음이 즐기는 데 집착되어 맛에 애착하는 것이다. 무엇을 교만이 많다 하는가? 곧 신정을 얻을 때에 생각하기를 ‘어려운 일을 이미 얻었다’ 하고는 스스로가 높은 체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소견이 많다 하는가? 곧 나라는 소견 등으로 선정에 들어가서 분별하여 모습을 취하고는 ‘이것만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되다’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미세한 어지러움이라 한다. 이 인연에 의해 선정에서 물러나 삼독의 마음을 일으키니, 이를 거친 어지러움이라 한다. 맛들인다 함은 처음으로 선정을 얻고는 일심으로 애착하니, 이것이 맛들임이다.
【문】 일체의 번뇌가 모두 능히 물들이고 집착하게 하거늘 어찌하여 애욕만을 맛들인다 하는가?
014_0672_c_06L問曰:一切煩惱皆能染著,何以故但名愛爲味?
【답】 애욕과 선정은 비슷하다. 왜냐하면 선은 마음을 거두어 굳게 머무는 것인데, 애욕 또한 오로지 집착하여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으로 선정을 구할 때는 마음이 오로지 얻기만을 원하고, 그에 애착함을 본성으로 삼으며 욕락하여 오로지 구하니, 애욕과 선정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이미 선정을 얻었더라도 깊이 집착하여 버리지 않으면 선정을 무너뜨린다. 비유하건대 남에게 물건을 보시하고 반드시 그 보답을 바란다면 복덕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선에 있어서도 맛에 애착하고, 선 그 자체에 애착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애욕만을 맛들인다 하고, 다른 번뇌[結]는 맛들인다 하지 않는다.
23)열여덟 가지 바라문 성전(śāstra)을 말한다. 18명처(明處)라고도 한다. 인도정통종교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학술서를 열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곧 Ŗg- veda(讚頌)ㆍYajur-veda(歌頌)ㆍSāma-veda(祭祀)ㆍAtharva-veda(攘災)의 4베다와 Śīkṣā(음운론)ㆍVyākaraṇa(어법)ㆍKalpa(제식)ㆍJyotiṣa(천문)ㆍChandas(詩)ㆍNirukta(語源)의 6론, Mimāṁsā(철학)ㆍNyāya(논리)ㆍItihāsaka(古事)ㆍSāṁkhya(數論)ㆍYoga(수습)ㆍDhanur-veda(弓杖)ㆍGandharva(음악)ㆍArtha-śāstra(의약)의 8론을 말한다.
24)범어로는 Ŗṣyaikaśṛñga.
25)범어로는 Śāntā.
26)범어로는 paraṇaśālā.
27)흔들리고 후회한다는 의미이다.
28)범어로는 Rāhu-asūra.
29)범어로는 makara. 기대한 물고기로서, 일종의 공상 속의 물고기이다.
30)초선(初禪)ㆍ제2선ㆍ제4선ㆍ4무색정ㆍ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8단계의 선정관법을 말한다.
31)범어로는 aṭṭha abhibhāyatanāni. 8해탈(解脫)을 닦은 뒤 숙달된 관상법(觀想法)으로 자유롭게 정ㆍ부정의 경지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32)10변처(遍處)라고도 한다. 청ㆍ황ㆍ적ㆍ백의 색깔과 물질의 네 가지 특성인 지ㆍ수ㆍ화ㆍ풍과 허공ㆍ분별[識] 등의 열 가지 특성을 관찰하며, 그 하나하나의 상태를 모든 곳에 두루 채우는 관법이다.
33)범어로는 śūrañgama. 부처가 얻는 삼매의 이름. 건상(健相)ㆍ건행(建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34)범어로는 āna-apāna. 출입식을 헤아리는 수식관(數息觀)을 말한다.
35)범어로는 anāgamya. 초선의 경지에 들기 직전의 집중된 심리상태를 말한다.
36)범어로는 anāgāmin.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두 번 다시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 경지이다.
37)범어로는 ākāṡānantyāyatana-samapatti)를 가리킨다. 공무변처(空無邊處)라고도 한다.
38)범어로는 vijñānantyāyatana.
39)범어로는 ākiñcanyāyatanaṃ.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관찰해 얻는 경지’를 말한다.
40)범어로는 naivasaṃjñānâsaṃjñāyatanaṃ. 무색정의 마지막 경지이다.
41)색구경천(色究竟天, Akaniṣṭha)을 가리킨다.
42)anāgamya. ‘아직 본격적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는 뜻으로, 이른바 초선의 경지에 들기 직전의 집중된 심리상태를 말한다. 미지정(未至定)이라고도 한다.
43)무간도(無間道)와 같은 말. 위의 아홉 지위마다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44)범어로는 aṣṭa-vimokṣa. 삼계의 번뇌의 결박을 벗어나는 여덟 가지 선정을 가리킨다. 곧 초선ㆍ제2선ㆍ제4선ㆍ공무변처ㆍ식무변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ㆍ멸진정의 여덟 종류의 선정수습에 의해 탐착을 여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45)범어로는 samāpattī-acitte. 마음과 마음작용이 완전히 그친 상태를 말한다.
46)범어로는 ṣaḍ-hetu.
47)범어로는 saṃprayuktaka-hetuḥ. 서로간에 원인과 결과가 되어주는 관계를 말한다.
48)범어로는 saupādāna. 원인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49)서로 유사한 원인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50)어떤 원인이 다른 결과의 과보를 낳는 것을 말한다.
51)범어로는 catvāraḥ. pratyayaḥ. 모든 종류의 원인을 네 종류로 분류한 것.
52)범어로는 hetu-pratyaya.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을 말한다.
53)범어로는 samanantarana-pratyaya.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도 한다. 앞의 찰라심이 뒤의 찰라심의 원인이 된다고 간주되는 연을 말한다.
54)범어로는 ālambana-pratyaya. 가깝거나 먼 대상이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55)범어로는 adhipati-pratyaya. 일체의 간접인을 증상연으로 삼는다. 일체의 간접적인 연을 말한다.
56)괴법(壞法)이란 ‘백골을 태워 없애는 것’을 말하며, 불괴법(不壞法)이란 ‘백골을 태워 없앨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부정관을 성취한 수행자는 그 근기에 따라 두 종류가 있다. 곧 근기가 약한 자는 백골관을 성취해 아라한이 됐어도 다시 백골(白骨)에 집착할까 두려워하여 백골인(白骨人)을 태우는 관상법을 일으키는데, 이를 괴법아라한 이라 한다. 한편, 근기가 수승한 이는 백골인을 태워 부수지 않고 자신의 미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관상하는데, 이를 불괴법아라한이라 한다.
57)범어로는 Kiṃnarā. 곧 Kiṃnara의 여성형이다.
58)범어로는 Druma.
59)범어로는 vairambhaka. 겁말ㆍ겁초에 부는 빠른 바람으로,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한다.
60)아라한과 벽지불승을 말한다.
61)범어로는 Udraka-Rāmaputra
62)범어로는 srota āpatti.
63)범어로는 sakṛd-āgāmin.
64)범어로는 anāgāmin.
65)범어로는 arhat.
66)범어로는 antarabhava. 유정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중간적 존재를 말한다.
67)범어로는 avici-mahānaraka. 무간지옥(無間地獄) 혹은 무택대지옥(無擇大地獄)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