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배사(背捨)23)라 함은, 안에도 색이 있고 밖으로도 또한 색을 관[內有色外亦觀色]하나니 이것이 첫 번째 배사이고, 안에는 색이 없고 밖으로만 색을 관[內無色外觀色]하나니 이것이 두 번째 배사이며, 맑은 배사를 몸으로 증득[淨背捨身作證]하나니 이것이 세 번째 배사이며, 4무색정(無色定) 및 멸수상정(滅受想定)24)의 이들 다섯을 합하여 8배사가 된다.
배(背)25)란 5욕(欲)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그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기 때문에 배사라 부른다.
014_0706_c_08L背是淨潔五欲,離是著心,故名“背捨”。
안팎의 색(色)을 무너뜨리지 않고, 안팎의 색상(色相)을 멸하지 않으면서 이 부정(不淨)한 마음으로써 색을 관(觀)하나니 이것을 첫 번째 배사라 부른다.
014_0706_c_09L不壞內、外色,不內外滅色相,以是不淨心觀色,是名初背捨。
안의 색을 무너뜨리고 안의 색상(色相)은 없앴으나 밖의 색을 무너뜨리지 않고 밖의 색상은 없애지 않으면서 이 부정한 마음으로써 바깥의 색을 관하나니 이것이 두 번째 배사이다.
014_0706_c_11L壞內色,滅內色相;不壞外色,不滅外色相,以是不淨心觀外色,是第二背捨。
이 두 가지는 모두가 부정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첫째는 안을 관하고 밖을 관하며, 두 번째는 안은 보지 않고 바깥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는 두 가지 행(行)이 있기 때문이니, 곧 탐애하는 행[愛行]과 소견의 행[見行]이다. 탐애가 많은 이는 쾌락에 집착해 대개 밖에 있는 결사(結使)26)의 행에 속박되고, 소견이 많은 이는 대개 신견(身見)27) 등의 행에 집착해 안으로 결사에 속박을 당한다. 이 때문에 탐애가 많은 이는 밖의 색이 부정함을 관하고, 소견이 많은 이는 자기 몸이 부정함을 관해 무너뜨리고 깨뜨려버린다.
【답】 이것은 득해의 길[得解道]이지 실제의 길[實道]은 아니다. 수행자는 미래에는 죽어 불에 타거나 벌레에게 파 먹히며 흙 속에 묻혀 모두 닳아 없어지는 것을 생각한다.
014_0706_c_22L答曰:是爲得解道,非實道。行者念未來死及火燒、虫噉,埋著土中,皆磨滅。
만약에 현재에도 역시 이 몸을 분별해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한다. 이것을 일컬어 안으로는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고 하는 것이다.
014_0706_c_24L若現在觀,亦分別是身乃至微塵皆無,是名“內無色相外觀色”。
014_0707_a_01L【문】 두 가지의 승처(勝處)28)에서는 안팎의 색을 보고, 여섯 가지의 승처에서는 다만 밖의 색만 볼 뿐이며, 한 가지 배사(背捨)에서는 안팎의 색을 보고, 두 가지 배사에서는 다만 밖의 색만 볼 뿐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안으로는 색상을 무너뜨리면서 밖의 색은 무너뜨릴 수 없는가?
맑은 배사를 몸소 증득한다[淨背捨身作證] 함은 부정한 것에 대해 청정하다고 관찰[淨觀]한다는 것이니, 8승처(勝處)31)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앞의 여덟 가지 일체처(一切處)에서는 청정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및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을 관하는데, 청색을 관찰하기를 마치 푸른 연꽃과 같이, 마치 금정산(金精山)과 같이, 마치 우마가꽃[憂魔伽華]32)과 같이, 마치 참으로 푸른 바라내옷[婆羅捺衣]33)과 같이 하며, 황색ㆍ적색ㆍ백색을 관찰하면서 각각의 색을 따름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을 통틀어 맑은 배사[淨背捨]라 한다.
014_0707_b_01L또 수행하는 이는 먼저 부정함을 관찰하되, 몸의 안팎에 있는 부정함을 따라 마음을 관찰 가운데 매어 두는데, 이때 싫증을 내면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진다. 곧 자기 자신도 놀라 깨치면서 “나에게는 눈이 없다. 이 몸도 이와 같거늘 어찌 집착을 일으키겠는가”라며 마음을 가다듬고 진실로 관하여 다시는 착오가 없게 된다. 마음이 이미 조복되어 유연해지고 몸의 거죽과 살과 피와 골수의 부정함을 제거하여 물리치고자 하니, 오직 흰 뼈만이 남아 있게 되어 마음을 뼈로 된 사람[骨人]에게 매어 둔다. 만일 마음이 바깥으로 내닫고 흩어지면 그것을 거두어 돌아오게 한다. 깊이 마음을 거두는 까닭에 뼈에서 백골의 유광(流光)을 보게 되는데, 마치 흰 마노[珂]나 조개[貝]와 같이 능히 안팎의 모든 물건을 비추게 된다. 이것이 맑은 배사[淨背捨]의 첫 문이 된다. 그런 뒤에 뼈로 된 사람이 흩어져 소멸하는 것을 관하는데, 다만 뼈의 광명만을 보고 바깥의 정결한 색상(色相)을 취한다.
또 금강ㆍ진주ㆍ금ㆍ은 등의 보물이나 혹은 청정한 땅 혹은 맑은 물이 마치 연기나 장작도 없는 정결한 불과도 같으며, 혹은 맑은 바람에 먼지가 없게 되면 모든 청색은 마치 금정산(金精山)과 같고, 모든 황색은 첨복화(瞻蔔花)와 같고, 모든 적색은 붉은 연꽃과 같고, 모든 백색은 마치 흰 구름 등과 같아진다. 이러한 모양을 취하여 마음을 정관(淨觀)35)에 매어서 이 모든 색을 따르면 저마다 청정한 광휘가 있게 된다. 이때 수행하는 이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껴 온몸에 두루 채우니, 이것을 맑은 배사라 한다.
그러나 아직 번뇌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혹은 결사(結使)의 마음이 생겨나고 따라서 청정한 색(色)에 집착하기도 하는데,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런 집착을 끊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정관(淨觀)은 마음의 생각[心想]에서 생겨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환술사[幻主]가 환술로 만들어낸 물건을 관찰해 그것이 자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는 마음에 집착을 내지 않은 채 능히 반연되는 대상을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 이때에 배사(背捨)는 변하여 승처(勝處)라 부르게 된다.
014_0707_c_01L비록 정관에 있어서는 뛰어나다 하더라도 아직 광대하지는 못하다. 이때 수행하는 이는 도리어 청정한 모양[淨相]을 취하여 배사의 힘 및 승처의 힘을 이용하는 까닭에 이 청정한 지(地)의 모양을 취하고 점차로 시방의 허공에 두루 차게 한다. 수(水)ㆍ화(火)ㆍ풍(風) 역시 그러하다. 청색 모양[靑相]을 취하여 점차로 광대하게 하면서 역시 시방의 허공에 두루 차게 한다. 황색ㆍ적색ㆍ백색도 역시 그와 같다. 이때 승처는 다시 변해 일체처가 된다.
【문】 이 세 가지 배사와 여덟 가지 승처와 열 가지 일체처는 곧 실관(實觀)인가, 아니면, 득해의 관[得解觀]인가?
014_0707_c_07L問曰:是三背捨、八勝處、十一切處是實觀?是得解觀?
만일 실관이라면, 몸에는 피부와 살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백골로 된 사람만을 본다는 것인가? 또 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36)이 합해서 몸을 이루거늘 무엇 때문에 분별해서 산관(散觀)하는가? 4대(大)는 각각 스스로의 모양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세 가지 대는 없애고 지대(地大)37) 하나만을 관하는가? 네 가지 색깔이 모두 청색은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모두 청색의 관만을 짓는가?
【답】 실관도 있고 득해관도 있다. 몸의 모양은 실로 청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것은 실관이 된다. 바깥 법에서는 청정한 갖가지 색상(色相)이 있으니, 이것은 실로 정관(淨觀)이 되지만,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실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간의 청정한 것으로써 “일체가 모두 청정하다”고 널리 관하고, 이 한 웅큼의 물을 취하여 “일체는 모두 물이다”고 두루 관하며, 이 약간의 푸른 모양을 취하여 “일체가 모두 푸르다”고 두루 관하니, 이러한 것들은 바로 득해관으로 실관이 아니다.
느낌과 생각이 사라지면 산란한 마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정에 들어가 휴식하는 것이 마치 열반의 법을 닮았고, 몸 가운데 드러나고 몸으로 얻기 때문에 몸으로써 증득한다[身證]고 한다.
014_0708_a_07L滅受想患厭散亂心故,入定休息,似涅槃法著身中得,故名“身證”。
8승처(勝處)라 함은,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이 적음을 관[內有色相外觀色少]하면서 혹은 아름답거나[好] 혹은 추하거나[醜] 간에 이 색을 두드러지게 알고[勝知] 두드러지게 관[勝觀]하니, 이것을 첫 번째 승처라 한다.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이 많음을 관[內有色相外觀色多]하면서 혹은 아름답거나 혹은 추하거나 간에 이 색을 두드러지게 알고 두드러지게 관하니, 이것을 두 번째 승처라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도 역시 그와 같다. 다만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內有色相外觀色]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또한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모든 색인 청ㆍ황ㆍ적ㆍ백을 관하니, 이것이 여덟 가지의 승처이다.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 함은 안 몸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바깥 대상이 적음을 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적은 까닭에 적다[少]고 하나니, 관하는 도[觀道]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인연을 관한다. 곧 많은 대상을 관하게 되면 거두기 어려울까 두렵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마치 사슴을 놀게 할 때에 아직 길들이지 못했으면 멀리 내놓는 것은 옳지 않는 것과 같다.
아름답거나 혹은 추하다 함은 처음 배우는 이가 마음을 대상 가운데 매어 두거나 혹은 미간, 혹은 이마, 혹은 코끝에다 두고서 안몸[內身]의 청정하지 않은 모양과 안몸 가운데 있는 청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깥의 모든 색의 착한 업보(業報)를 관하기 때문에 아름답다[好] 하고, 착하지 않은 업보이기 때문에 추하다[醜]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자기 몸 속에 마음을 한 곳에다 매어 두고 욕계(欲界)의 색을 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음욕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능히 성을 내는 것이다. 능히 음욕을 낸다 함은 바로 청정한 색으로, 일컬어 아름답다[好]고 한다. 능히 성을 낸다 함은 바로 청정하지 않은 색으로, 일컬어 추하다고 한다. 대상에 대해 자재롭고 두드러지게 알고, 두드러지게 보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가 음욕을 낼 수 있는 단정한 색(色)에 대해 음욕을 내지 않고, 성을 낼 수 있는 나쁜 색에 대해서 성을 내지 않으면서 다만 색을 관찰하기를 “4대(大)가 인연화합하여 생긴 것이며, 마치 물거품과 같아 견고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을 일컬어 혹은 아름답다고 하고 혹은 추하다고 한다.
승처(勝處)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이 청정하지 않은 문 가운데 머무르면서 음욕과 성냄 등의 모든 결사가 온다 해도 아직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을 승처라 하는 것이다. 이는 청정하지 않은 가운데서 청정하다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 등의 모든 번뇌의 적을 이기기[勝] 때문이다.
【답】 이 8승처는 깊이 정(定)에 들어가서 마음이 조복되고 유연해진 자라야 얻을 수 있다. 수행하는 이는 간혹 안몸의 부정함을 보기도 하고 또한 바깥 색의 부정함을 보기도 한다. 부정관(不淨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 등의 갖가지 부정함이고, 둘째는 내외의 피부와 살과 5장(藏)을 제외하고 다만 백골을 관하기를 마치 마노46) 같고 눈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서른여섯 가지의 물건에 대한 관을 추하다 하고, 마치 마노와 같고 눈과 같다고 관하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한다.
수행하는 이는 안팎으로 관을 할 적에 마음이 산란하면 선정에 들기 어려우므로 자기 몸의 모양을 제외하고 다만 바깥의 색만을 관하는데, 이는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해탈하는 관[解脫觀]47)을 얻음으로써 이 몸은 죽으며, 죽은 뒤에는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혀 벌레에게 파먹히며 결국은 없어지는 것을 보는데, 이때에 벌레와 불만을 보고 몸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고 한다.
014_0708_c_01L수행하는 이가 가르침대로 받아들여 “몸은 뼈로 된 사람[骨人]이다”고 관하다가 만일 마음이 바깥으로 흩어지면 도로 뼈로 된 사람의 인연 속으로 거두어 들인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처음 행을 익히면서 아직은 미세한 인연을 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적은 색[少色]이라 한다. 그리고 수행하는 이의 관하는 도[觀道]가 점차로 깊어지면서 더욱 자라면 이 뼈로 된 한 사람으로써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사람이 바로 뼈로 된 사람이라고 두루 관하나니, 이것을 많다[多]고 하며,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뼈로 된 한 사람을 관하므로 수승하게 알고 수승하게 본다[勝知勝見]고 한다.
또 뜻에 따라 5욕 중에서 남녀의 모양과 정결한 모습을 능히 이기는 까닭에 승처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건강한 사람이 말을 타고 도적을 잘 물리쳐서 능히 무찌르면 이것을 수승하다 하는 것과 같고, 또 그 말을 잘 제어(制御)하여도 이것 역시 수승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스스로 부정관 가운데서 적은 것은 많게 하고 많은 것은 적게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승처라 하고 또한 5욕의 도적을 깨뜨릴 수 있으므로 역시 승처라 한다.
【문】 이 나중의 네 가지 승처와 열 가지 일체처 중에 있는 청색 등의 네 가지 곳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014_0708_c_18L問曰:是後四勝處、十一切處中靑等四處,有何等異?
014_0709_a_01L【답】 청색의 일체처[靑一切處]는 온갖 것에 두루 반연해 능히 푸르게 만든다. 이 승처는 많거나 적거나 간에 뜻을 따라 관하되 다른 마음이 빼앗지 못하게 하고 수승하게 이 대상을 관하는 것을 승처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은 두루 사천하(四天下)에서 수승하며 염부제의 왕은 한 천하에서만 수승한 것처럼, 일체처는 두루 온갖 인연에서 수승하며, 승처는 다만 적은 색을 관하는 데에 수승할 뿐 온갖 인연에 두루 수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10일체처라 함은 배사와 승처에서 이미 설명하였나니, 이것은 대상에 두루하고 가득 차기 때문에 일체처라 한다.
014_0709_a_03L“十一切處”者,背捨、勝處已說,此以遍滿緣故,名一切處。
【문】 무엇 때문에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는 일체처라 하지 않는가.?
014_0709_a_04L問曰:何以無所有處、非有想非無想處不名一切處?
【답】 이 득해(得解)의 마음은 안온하고 즐거우며 광대하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허공처(虛空處)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이니, 일체처 안에는 모두가 식(識)이 있어서 온갖 법을 신속히 반연하기 때문에 온갖 법 중에는 모두가 식이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두 곳에서는 일체처가 성립된다.
또 허공처는 색계(色界)에서 가깝고 또한 색을 반연할 수도 있으며, 식처(識處)는 능연(能緣)48)으로 색을 반연한다. 또 식처가 일어나서 제4선(禪)에 뛰어들 수도 있고 제4선이 일어나서 식처에 뛰어들 수도 있지만 무소유처와 비유상비무상처는 무색(無色)의 인연과는 멀기 때문에 일체처가 아니다.
014_0709_b_01L두 가지의 일체처를 곧 공처(空處)라고 하며 공처는 식처를 포섭하고 식처는 앞의 세 가지 배사와 여덟 가지의 승처와 여덟 가지의 일체처를 포섭한다. 모두가 욕계(欲界)를 반연하지만 나중의 네 가지 배사는 무색계(無色界) 및 무루법(無漏法)의 모든 묘한 공덕을 반연하며 근본(根本) 중에 있으면서 착하다. 무색(無色)의 근본은 아래 지위[地下]를 반연하지 않는다. 멸수상정(滅受想定)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아니므로 반연함이 없으며, 비유상비무상처의 배사는 다만 무색의 4음(陰)과 무루의 법만을 반연한다.
【답】 다른 공덕에서는 모두가 다른 마음이 사이에서 생기기 때문에 차제가 아니다. 이 안에서는 깊은 마음과 지(智)와 행(行)이 날카로운 이는 스스로 그 마음을 시험하면서 1선(禪)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다음에는 2선으로 들되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이런 공덕에서 마음이 유연해지고 법애(法愛)를 잘 끊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간다. 이 차제정에서 두 가지는 바로 유루이며 일곱 가지는 혹 유루이기도 하고 혹 무루의 선[無漏禪]이기도 하다.
【論】 【문】 마땅히 먼저 아홉 가지 모양[九相]을 익혀 탐욕을 없앤 후에 모든 선정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선정을 말씀한 뒤에 비로소 아홉 가지 모양을 말씀하시는가?
014_0709_b_20L【論】 問曰:應當先習九相離欲,然後得諸禪;何以故諸禪定後,方說九相?
【답】 먼저 과보(果報)를 설명하여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9상은 비록 부정하지만 사람들은 그 과보를 탐하기 때문에 반드시 익히고 행하게 된다.
014_0709_b_22L答曰:先說果報,令行者心樂。九相雖是不淨,人貪其果報,故必習行。
【문】 수행하는 이는 어떻게 이 창상(脹相) 등의 아홉 가지 일을 관하는가?
014_0709_b_24L問曰:行者云何觀是脹相等九事?
014_0709_c_01L【답】 수행하는 이는 먼저 계율을 지녀 청정해지고 마음에 뉘우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쉬이 관법(觀法)을 받아 음욕 등 모든 번뇌의 도둑을 깨뜨릴 수 있다.
사람이 처음 죽는 날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직하는 말을 하고 숨을 멈추어 갑자기 죽게 되면 온 집안사람들이 놀라 슬피 통곡하면서 하늘을 보고 울부짖으며 하는 말이 “갑자기 어디로 가시기에 숨이 끊어지고 몸이 차지면서 의식이 없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며 면할 수 있는 경우를 보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겁(劫)이 다하여 불이 탈 때에는 빠짐없이 모두 다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죽음이 다가오면 빈부(貧富)가 없고 부지런히 닦을 선악(善惡)도 없으며 귀한 이도 없고 천한 이도 없으니 늙은이건 젊은이건 면할 이가 없다.
014_0709_c_06L死至無貧富, 無懃修善惡, 無貴亦無賤,
老少無免者。
빌고 간청해도 구제될 수 없고 속임수를 써도 여의치 못하며 막고 겨루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어디서도 면할 수 있는 곳이 없다.
014_0709_c_08L無祈請可捄, 亦無欺誑離,
無捍挌得脫, 一切無免處。
죽음의 법을 일컬어 은혜와 사람을 영원히 여의는 곳이라 하나니, 온갖 생명이 있는 이라면 죽음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다. 우리의 몸도 오래지 않아서 당연히 이렇게 나무나 돌과 같이 되면서 의식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 5욕(欲)을 탐착하면서 죽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소나 양과 같이 죽어서는 안 된다. 소나 양이나 날짐승ㆍ길짐승은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뛰놀고 울고 지저거리면서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람의 몸을 얻어 좋고 나쁨을 분별할 줄 알므로 마땅히 죽지 않는 감로(甘露)51)의 법을 구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설한다.
6정(情)의 몸 완전히 갖추어지고 지혜의 거울 밝고 날카로워도 도법(道法)을 구하지 않으면 헛되어 몸과 지혜를 받은 것이다.
014_0709_c_16L六情身完具, 智鑑亦明利, 而不求道法,
唐受身智慧。
날짐승ㆍ길짐승도 욕락(欲樂)에 대하여는 제멋대로 구는 것 모두 알지만 도(道)를 위하고 선행을 닦는 방편을 알지 못한다.
014_0709_c_18L禽獸亦皆知, 欲樂以自恣,
而不知方便, 爲道修善事。
이미 사람의 몸을 얻고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착한 일 닦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014_0709_c_19L旣已得人身,
而但自放恣, 不知修善行, 與彼亦何異。
3악도(惡道)에 있는 중생은 도업(道業)을 닦을 수가 없지만 이미 이러한 사람 몸 받았으니 마땅히 자신의 이익에 힘써야 한다.
014_0709_c_20L三惡道衆生, 不得修道業, 已得此人身,
當勉自益利。
014_0710_a_01L 수행하는 이는 죽은 시체 곁으로 다가가 그 죽은 시체가 부풀어서 마치 가죽 주머니에 바람을 담아 놓은 것 같고 본래의 모습과 다름을 보고는 마음에 싫어함과 두려움을 내면서 “나의 몸도 역시 이렇게 되어서 이런 법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리라. 몸속에서는 식(識)이 주인이 되어 이 몸을 부리면서 보고 듣고 말하고 죄를 짓고 복을 지으며 이것을 스스로 귀히 여겼으나, 이제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지금은 빈 집만이 남았을 뿐이구나. 이 몸은 매력적인 긴 눈과 우뚝한 코며 편편한 이마와 두둑한 눈썹 등 이 같은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반하게 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부풀어 오른 모습을 볼 뿐이니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남녀의 모습조차 분간할 수 없구나”라고 한다. 이렇게 관하고 나서는 집착과 욕심을 꾸짖는다. 이 냄새나는 부풀은 똥주머니는 참으로 멀리해야 할 것이거늘 탐착할 것이 무엇이냐.
죽은 시체는 바람과 더운 열에 부풀어서 크게 째지고 문드러져서 땅에 뒹굴고 5장(藏)에서는 똥ㆍ오줌과 피고름이 흘러나와 추한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다. 수행하는 이는 이런 무너지는 모양을 자기 몸에 비추어서 “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두 이런 물건들로 가득 찼으니 저 시체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나는 심히 미혹되어서 이런 똥주머니인 얇은 가죽에 속아 왔다. 마치 불나방이 불에 뛰어 드는 것과 같으니, 밝은 빛만을 탐하였지 몸이 탈것은 몰랐구나”라고 한다. 이미 찢어지고 문드러져서 남녀의 모양이 소멸된 것을 보면 자신이 집착하던 것도 역시 모두 그와 같을 것이다.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누렇고 붉은색을 띄면 날짐승ㆍ길짐승도 파먹지 않는다. 게다가 매장하지 않았으면 오래지 않아 썩어 문드러져서 갖가지의 벌레가 생기게 된다. 수행하는 이가 보고는 이 죽은 시체가 본래 지녔던 아름다운 모양을 생각하면서 “좋은 향을 몸에 바르고 으뜸가는 옷을 입었으며 화려한 비단으로 장식했을 것인데 지금은 악취가 풍기고 썩어 문드러져서 더럽혀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진실한 모습이요 먼저의 화려한 장식은 모두가 임시로 빌린 것일 것이다”라고 한다.
014_0710_b_01L만일 태우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벌판에다 버린다 하면 날짐승ㆍ길짐승에 먹히게 되리니, 까마귀는 그의 눈을 후비고 개는 손발을 떼어 먹으며 범과 이리는 배를 갈라서 찢어 갈 것이며 그 나머지는 땅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다 없어진 것도 있고 다 없어지지 않은 것도 있게 된다. 수행하는 이는 보고 나서는 마음에 싫어함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이 시체가 아직 문드러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애착하던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썩어 문드러져서 다시는 본래의 모습은 없고 다만 먹다 남은 찌꺼기만 흩어져 있구나”라고 한다. 새나 짐승에게 파 먹힌 곳은 매우 비참하다.
새나 짐승들이 떠난 뒤에는 바람에 날리고 햇볕에 쬐여서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떨어져서 저마다 흩어져 있기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본래 몸의 법을 본다면 서로 화합하여서 몸의 모양이 있게 되고 남자 여자를 모두 분별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미 떨어지고 흩어져서 저마다 다른 곳에 있다. 화합한 법이 사라지면 몸의 모양도 또한 없고 모두 본래의 것과는 다르다. 도대체 애착해야 할 것이 이제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한다.
몸이 이미 흩어져 곳곳에 백골이 널려 있고 새나 짐승들이 먹은 뒤에 흰 뼈만이 남아 있으니, 이 뼈로 된 사람[骨人]을 관하는 것이 바로 골상(骨想)52)이다.
014_0710_b_10L身旣離散,處處白骨,鳥獸食已,唯有骨在;觀是骨人,是爲骨相。
골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뼈로 된 사람의 힘줄과 뼈가 서로 이어진 것이요, 둘째는 뼈마디가 서로 나뉘어 떨어진 것이다. 힘줄과 뼈가 서로 이어진 모습은 남녀ㆍ장단ㆍ호색ㆍ세골의 모습을 파괴하고, 뼈마디가 나뉘어 떨어진 모습은 중생의 근본 참 모습[實相]을 파괴한다.
수행하는 이가 시체를 버린 숲[屍林] 속에 가면 혹 많은 풀과 나무를 쌓아 놓고 시체를 태울 때에 배가 터지고 눈이 튀어나오며 가죽이 검게 그을려서 몹시 역겹고 두려워할 만한 모양이 되었다가 잠깐 사이에 변해서 다 타버린 재로 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 소상(燒相)53)을 취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몸이 죽기 전에는 향탕에 목욕하고 꽃으로 장식하며 5욕을 마음대로 누렸을 것인데 이제는 불에 타버렸으니, 날이 시퍼런 병기(兵器)보다 심하구나. 이 시체가 처음 죽을 때에는 형상이 사람과 비슷했었는데 불에 타서 잠깐 사이에 본래의 모양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몸이 있는 온갖 것은 모두가 무상한 데로 돌아가고 마니, 나도 역시 그와 같으리라”고 한다.
014_0710_c_01L이 아홉 가지 모양[九相]은 모든 번뇌를 끊고 음욕을 없애는 데 가장 수승하니, 이 음욕을 없애기 위하여 이 아홉 가지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014_0710_c_01L是九相,斷諸煩惱,於滅婬欲最勝;爲滅婬欲故,說是九相。
【문】 무상(無常)54) 등의 열 가지 생각[十想]은 어떤 일을 없애기 위하여 말하는 것인가?
問曰:無常等十想,爲滅何事故說?
【답】 이것 역시 음욕 등의 3독(毒)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014_0710_c_03L答曰:亦爲滅婬欲等三毒。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모양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014_0710_c_04L問曰:若爾者,二相有何等異?
【답】 아홉 가지 모양은 아직 선정을 얻지 못한 채 음욕에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고, 열 가지 생각은 음욕 등 3독을 없애는 것이다. 아홉 가지 모양은 마치 도적을 포박하는 것과 같고 열 가지 생각은 마치 죽이는 것과 같다. 아홉 가지 모양은 처음 배우는 이를 위해서이고, 열 가지 생각은 이미 성취한 이를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열 가지 생각 중에 부정상과 식부정상(食不淨想)55)과 세간불가락상(世間不可樂想)56)으로 아홉 가지 모양을 포섭한다”고 했다.
014_0710_c_09L有人言:十想中,不淨想、食不淨想、世閒不可樂想攝九相。
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가지 생각과 아홉 가지 모양은 똑같이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이고 다 함께 열반을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의 사상(死相)은 움직이고 말을 하다가 잠깐 사이에 홀연히 죽게 되어 몸이 부풀어 오르고 썩어 문드러지고 나뉘어 흩어지면서 저마다 변하고 달라지니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법을 드러내 본다면 무상으로 파괴될 때는 바로 그것이 고통이다. 만일 무상함이 고통이라면 자재(自在, svatantra)함을 얻을 이가 없나니, 이것이 곧 무아(無我)이다. 청정하지 않으면서 무상하고 괴로우면서 무아라면 곧 즐거울 수가 없으니, 몸을 관함을 이와 같이 한다. 음식이 비록 입에 있을지라도 뇌의 점액[涏]이 흘러내려 침과 화합하여 맛을 이루고 삼키거나 토하거나 다름이 없이 뱃속으로 내러가니, 이것이 바로 식부정상(食不淨想)이다. 이 아홉 가지 모양으로 몸을 관할 때에 무상하여 변하고 달라지면서 생각 생각마다 모두 다 소멸하면 바로 그것이 사상(死想)57)이고, 이 아홉 가지 모양으로써 세간의 쾌락을 싫어하여 번뇌가 끊어져서 곧 안온하고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알게 되나니, 이것이 곧 단상(斷想)58)이다. 이 아홉 가지 모양으로써 모든 번뇌를 막으면 그것이 곧 이상(離想)59)이고, 이 아홉 가지 모양으로써 세간을 싫어하는 까닭에 이 다섯 가지 무리[五衆]가 소멸하여 다시는 생기지 않고 이곳이 안온해짐을 아나니, 그것이 곧 진상(盡想)60)이다.”
사상(死相)은 대부분 위의와 언어에 대한 애착[愛]을 없애주고, 창상(脹相)ㆍ괴상(壞相)ㆍ담상(噉相)ㆍ산상(散相)은 대부분 형용에 대한 애착을 없애준다. 혈도상(血途相)ㆍ청어상(靑瘀相)ㆍ농란상(膿爛相)은 대부분 색(色)에 대한 욕망을 없애주고, 골상(骨相)ㆍ소상(燒相)은 대부분 부드럽고 윤택한 몸에 대한 애착을 없애준다. 아홉 가지 모양은 여러 가지의 뒤섞인 욕망과 염착할 사람에 대한 애착을 없애주고 담상ㆍ산상ㆍ골상은 두루 사람에 대한 애착을 없애준다. 먹다 남아 흩어진 흰 뼈에서는 어떤 사람도 염착할 만한 것을 보지 못한다.
014_0711_b_01L이 아홉 가지 모양으로써 관하여 애착하는 마음을 여의면 성냄과 어리석음도 엷어지게 된다. 청정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 청정하다는 뒤바뀐 생각은 어리석음 때문에 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니 이제 이 아홉 가지 모양으로써 몸 안을 헤치고 쪼개서 이 몸의 모양을 보면 어리석은 마음이 얇아진다. 어리석은 마음이 얇아지면 탐욕이 얇아지고 탐욕이 얇아지면 성냄도 역시 얇아진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람이란 몸을 탐내는 까닭에 성을 내기 때문이다. 이제 몸이 청정하지 않다고 관하고 마음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다시는 몸을 탐내지 않으며, 몸을 탐내지 않기 때문에 다시는 성을 내지 않아 3독(毒)이 얇아진다. 때문에 온갖 98사(使)의 산이 모두 움직여 점차로 그 도(道)에 더욱 나아가서 금강삼매(金剛三昧)63)로써 번뇌[結]의 산을 꺾어 부술 것이다. 아홉 가지 모양은 비록 이것이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더라도 이것에 의지하여 큰 일을 이룩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 가운데 빠진 사람이 악취 나는 시체를 의지하여 건너게 되는 것과 같다.
【문】 이 아홉 가지 모양은 어떠한 성품[性]이고 반연할 대상[所綠]은 무엇이며 어느 곳에 속하는가?
014_0711_b_11L問曰:是九相有何性?何所緣?何處攝?
【답】 취하는 모양의 성품과 반연은 욕계(欲界)에 있는 몸의 색상(色相)인 음(陰)에 속하며, 또한 신념처(身念處)의 일부분이고 혹 욕계에 속하기도 하고 혹 초선(初禪)ㆍ2선ㆍ4선에 속하기도 한다. 아직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한 사람은 욕계계(欲界繫)64)를 얻고, 욕망을 여읜 사람은 마음에 색계계(色界繫)65)를 얻는다. 창상(脹相) 등 여덟 가지 모양은 욕계와 초선과 2선 중에 속하고, 깨끗한 골상[淨骨想]은 욕계와 초선ㆍ2선ㆍ4선 중에 속하며, 3선(禪) 가운데에는 쾌락이 많기 때문에 이런 상(相)이 없다.
이 아홉 가지 모양은 바로 신념처(身念處)의 문을 열고 신념처는 세 가지 염처[三念處]의 문을 열며, 이 네 가지의 염처는 37품(品)의 문을 열고 37품은 열반의 성문(城門)을 여는데, 열반에 들면 온갖 근심과 괴로움의 모든 고통을 여의고 5음에 대한 인연이 생김을 없애기 때문에 열반의 항상함[常]과 즐거움[樂]을 받는다.
014_0711_c_01L【문】 성문(聲聞)의 사람은 이처럼 관하면서 마음에 싫증을 내므로 빨리 열반에 들려고 하나 보살은 온갖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온갖 불법을 쌓아 모든 중생을 제도하면서 빨리 열반에 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아홉 가지 모양을 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2승의 깨달음[證]에 떨어지지 않는가?
【답】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낸다. 중생은 3독(毒)의 인연 때문에 이 세상과 뒷세상에 몸을 받아 나면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이 3독은 끝내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또한 그 밖의 도리로써 소멸시키지 못한다. 다만 집착한 안팎의 몸의 모양을 관한 연후에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 음욕의 독을 없애기 위하여 이 아홉 가지 모양을 관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병든 이를 가엾이 여기어 약을 조제하여 그를 치료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물질[色]에 집착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이 청어상(靑瘀相) 등을 말하여 그 집착하는 곳에 따라 모든 모양을 분별하나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9상관(相觀)이다.
또 보살은 위대한 자비심으로 이 아홉 가지 모양을 행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아직 온갖 불법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고 열반에도 들지 못했다. 이것은 하나의 법의 문이 되므로 나는 이 하나의 문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나는 온갖 법의 문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보살은 아홉 가지 모양을 행하여도 방해될 것이 없다.
보살은 이 아홉 가지 모양을 행하다가도 때로는 싫증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이와 같이 청정하지 못한 몸은 증오해야 하고 근심해야 한다. 어서 열반을 취하고 싶구나”라고 하기도 한다. 그때 보살은 생각하기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법의 모양은 공하며 공한 가운데서는 무상(無常)함도 없다’고 하셨거늘 하물며 청정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다만 청정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 청정하지 않은 것을 익힐 뿐이다. 이 청정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인연(因緣)의 화합에서 생긴 것이라 자성(自性)도 없고 모두가 공한 모양으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이제 이 인연의 화합에서 생기고 자성도 없는 청정하지 않은 법을 취하면서 빨리 열반에 들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014_0712_a_01L경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만일 물질[色] 안에 맛[味]의 모양이 없다면 중생은 맛에 집착하지 않아야겠지만 물질 안에는 맛이 있기 때문에 중생은 집착을 일으킨다. 만일 물질에 허물[過罪]이 없다면 중생은 역시 물질을 싫어하는 이가 없겠지만 물질에는 실로 허물이 있기 때문에 물질을 관하여 곧 싫어하는 것이다. 만일 물질 안에 벗어나는[出] 모양이 없다면 중생도 물질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물질에는 벗어나는 모양이 있기 때문에 중생은 물질에서 해탈을 얻으니, 맛이란 청정한 모양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청정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 죽어서 일찍 열반에 취하지 않는 것이다.
014_0712_b_01L【답】 부처님의 제자는 아란야 처소[阿蘭若處]에서나 빈집[空舍]에서나 무덤 사이[塜間]에서나 산림(山林)에서나 광야(曠野)에서 아홉 가지 모양과 안팎의 부정관(不淨觀)66)을 잘 닦아 그의 몸을 싫어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어째서 이런 아주 천하고 청정하지 못한 똥오줌 주머니를 메고 다니면서 놀라고 두려워하며 그리고 악마가 갖가지 악한 일을 짓기 위하여 오면 두려워하면서 그를 물리치려 하는 것인가”라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차례로 그들을 위하여 이 여덟 가지 염(念)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경67)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아란야 처소에서나 빈 집에나 무덤 사이에서나 산림에서나 광야에 있으면서 사유(思惟)할 때에 만일 두려움 때문에 털이 곤두서게 되면 그때에는 마땅히 부처님을 염해야 하느니라. 곧 ‘부처님은 바로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68)요 아라하(阿羅呵)69)요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70) 내지 바가바(婆伽婆)71)이시다’라고 하나니, 무서움과 두려움이 곧 소멸되리라. 만일 부처님을 염하지 않는다면 신속히 법을 염하여야[念法] 하나니, 곧 ‘부처님의 법은 청정하며 교묘하고 특출(巧出)하며 좋은 말씀[善說]이라 금생에 과보를 얻고 지시(指示)하시고 개발(開發)하시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법을 염하면 두려움과 무서움이 곧 소멸되리라. 만일 법을 염하지 않는다면 곧 승가를 염하여야[念僧] 하나니, 곧 ‘부처님의 제자들은 바른 도를 닦고 법을 따라 행하며, 승가 중에는 아라한향(阿羅漢向)72)과 아라한 내지 수다원향(須陀洹向)73)과 수다원의 4쌍(雙)74) 8배(輩)75)가 있다. 이 부처님의 제자들은 당연히 공양과 합장과 공경과 예배와 영접과 전송을 받아야 하는 세간의 위없는 복전(福田)이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승가를 염하면 무서움과 두려움이 곧 소멸되리라‘고 하셨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아수라(阿修羅)와 싸우면서 큰 진(陣) 안에 있을 때에 저 여러 하늘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아수라와 싸울 때에 만일 두려움이 있으면 마땅히 나의 7보(寶) 당기[幢]를 염하라. 그러면 두려움이 곧 소멸하리라. 만일 나의 당기를 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사나천자[伊舍那天子:제석 왼편의 천왕]76)의 보배 당기를 염하라. 그러면 두려움이 곧 제거되리라. 만일 이사나의 보배 당기를 염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바루나천자77)[婆樓那天子:제석 오른편의 천자]의 보배 당기를 염해야 한다. 그러면 두려움이 곧 제거되리라’고 하느니라.”
【문】 경78)에서 세 가지 염[三念]의 인연으로 두려움을 제거한다고 말씀하셨다면 다섯 가지 염[五念]은 어떻게 두려움을 제거하는가?
014_0712_b_14L問曰:經中說三念因緣除恐怖,五念復云何能除恐怖?
【답】 비구는 스스로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의 공덕을 염하면서 두려움을 역시 제거시킨다. 그 까닭은 만일 계율을 깨뜨렸다면 마음속으로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만일 간탐을 부리면 아귀(餓鬼)79)와 빈궁 속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이런 청정한 계율과 보시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청정한 계율을 염[念戒]하거나 버림을 염[念捨]하게 되면 곧 마음이 기뻐지므로 말하기를 “만일 나의 목숨이 다하지 않았으면 다시 더욱 공덕에 정진해야 하며 설령 목숨을 마친다 해도 악도(惡道)80)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보시를 염하면 역시 두려움이 생기지 않게 된다.
16행(行)으로 안나반나(安那般那)를 염할 때에는 세밀한 생각[細覺]81)조차도 오히려 소멸되거늘 하물며 두려워하는 거친 생각[麁覺]이겠는가.82)
014_0712_c_02L十六行念安那般那時,細覺尚滅,何況恐怖麤覺!
죽음을 염한다[念死] 함은, 5음(陰)으로 된 몸은 생각마다 나고 멸하는 것을 염하는 것이니, 태어나서부터 언제나 죽음과 함께하고 있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것인가.
014_0712_c_04L念死者,念五衆身念念生滅,從生已來,常與死俱,今何以畏死?
이 다섯 가지의 염은 부처님께서 비록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른 공덕을 염해 그로써 두려움을 제거하기란 어렵거니와 스스로 자기의 일을 염해 두려움을 제거하기란 쉽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답】 수행하는 이가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을 염하면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고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성취된다. 그러므로 말에 착오가 없으며 거칠거나 세밀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깊거나 얕거나 간에 모두 진실하지 않음이 없고, 모두 진실하기 때문에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라 한다.
마치 3세(世)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어 모든 어두움을 깨뜨리고 마음으로 지혜의 광명을 내시어 중생의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시므로 공덕과 명문(名聞) 또한 시방에 두루 차면서 열반에 이르시는[去至] 것처럼 이 부처님도 역시 그처럼 가시나니, 이 때문에 또한 다타아가도라 한다.
이와 같은 공덕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에게 최상의 공양을 받아야 하나니, 이 때문에 아라하(阿羅呵)라 한다.
014_0712_c_20L有如是功德故,應受一切諸天、世人最上供養,是故名“阿羅呵”。
014_0713_a_01L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왜냐하면 부처님만이 여실하게 말씀하시며, 여래(如來)이고 여거(如去)이기 때문에 마땅히 최상의 공양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은 바르고 두루한 지혜를 얻기 때문이니, 바르다[正] 함은 모든 법이 움직이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 모양을 말하고 두루 하다[遍] 함은 하나의 법이나 두 가지 법만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온갖 법을 모두 알면서 그 밖의 것도 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라 한다.
이 바르고 두루한 지혜는 인(因)이 없이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연(緣)이 없이 얻는 것도 아니다. 이 안에서는 지혜와 지계(持戒)가 구족된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바르고 두루한 지혜를 얻는 것이다. 지혜라 함은 보살이 처음 뜻을 내서부터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이르는 동안에 상응하는 지혜를 말한다. 지계라 함은 보살이 처음 뜻을 내서부터 금강삼매에 이르기까지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 청정하고 뜻대로 행하는 것을 말하다. 이 때문에 비사차라나삼반나야(婢闍遮羅那三般那若)83)라 한다.
세 가지의 도(道)로써 능히 3독(毒)을 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3승(乘)의 도를 행하게 하나니, 이 때문에 세다제바마누사남(貰多提婆魔㝹舍喃)86)라 한다.
014_0713_a_17L能以三種道滅三毒,令衆生行三乘道,以是故名“貰多提婆魔㝹舍”。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이익되게 함이 한량이 없고, 다시 능히 남을 이익되게 함이 한량이 없는가. 곧 부처님은 온갖 지혜[一切智慧]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고 했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다하고 다하지 않으며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온갖 세간을 똑똑히 모두 아신다. 이 때문에 불타(佛陀)87)라 한다.
이 아홉 가지의 명호를 얻어서 큰 명칭이 시방에 두루 하나니, 이 때문에 바가바(婆加派)88)라 한다.
014_0713_a_23L得是九種名號,有大名稱,遍滿十方,以是故名爲“婆伽婆”。
014_0713_b_01L부처님은 경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되 “이와 같은 명호로써 부처님을 염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014_0713_b_01L經中佛自說如是名號,應當作是念佛。
014_0713_c_01L또 갖가지의 공덕은 모두 부처님에게 있다. 부처님은 바로 겁초(劫初)의 전륜성왕 마하삼마타(摩訶三摩陀)89) 등의 종성(種姓)이요 염부제 안에서 지혜와 위덕이 있는 모든 석자(釋子)90) 가운데 귀한 성바지인 교담씨(憍曇氏)91)로서 태어나셨다. 그때에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었고 범천왕(梵天王)92)이 보배 일산으로 받쳤으며, 석제환인(釋提桓因)은 하늘의 보배 옷으로 받들었고 아나바답다(阿那婆蹋多)용왕93)과 바가다(婆伽多)94)용왕은 묘한 향탕(香湯)으로 목욕을 시켰다. 태어나실 때에 땅은 여섯 가지로 진동했고 일곱 걸음을 걸어가셨으니, 찬찬하고 자세함은 마치 코끼리 왕과 같으면서 사방을 살펴보며 사자처럼 외치시기를 “나는 바로 맨 마지막의 몸이며 온갖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하셨다. 아사타(阿私陀)95) 선인(仙人)은 그의 상(相)을 보고 정반왕(淨飯王)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이 사람의 발아래는 천 개의 바퀴살 몸매[千輻輪相]와 손가락에는 무늬 없는 그물[縵網]이 있으므로 장차 스스로의 법 가운데서 평안히 설 것이며 움직이거나 무너뜨릴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손안의 덕자(德字)96)는 무늬 없는 그물로 장엄하였으므로 이 손으로는 중생을 편히 위로하면서 두려움이 없게 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나아가 살 뼈로 된 상투[肉骨髻相]는 마치 청주산(靑珠山)의 꼭대기와 같고, 청색의 광명은 네 면으로부터 나와서 머릿속의 정수리 모양을 쳐다볼 수 있는 이가 없으며, 하늘이나 사람으로서는 그보다 나을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흰 터럭[白毫]은 눈썹 사이에 있어서 그 흰 광명은 파리(頗梨)보다 뛰어나고 깨끗한 눈은 길고 넓어서 그 빛은 감청색(紺靑色)이며 코는 높고 우뚝하며 심히 사랑할 만합니다. 입 속의 마흔 개의 치아는 희고 깨끗하고 날카롭고 좋으며, 네 개의 어금니는 몹시 희고 그 광명은 가장 훌륭합니다. 입술은 위와 아래가 똑같아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혀는 얇고 대단히 부드러워 연한 붉은빛이 마치 하늘 연꽃과 같으며, 맑은 소리[梵聲]는 깊고 멀어서 듣는 이마다 좋아해 싫증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몸의 빛깔은 아름답고 묘하여서는 염부단금(閻浮檀金)97)보다 훌륭하며, 큰 광명이 몸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갖가지 빛의 묘하고 아름다움은 견줄 데 없습니다.
이와 같이 32상(相)98)을 두루 갖추었으니 이런 사람은 오래지 않아 출가하면 일체지(一切智)를 얻어서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 부처님 몸의 공덕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부처님을 염해야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 몸의 공덕과 몸의 힘은 10만의 흰 향상 보배[香象寶]보다 더 뛰어나시니, 이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체력(體力)이다. 만일 신통의 공덕에서 나는 힘이라면 한량없고 한이 없다. 부처님 몸은 32상과 80수형호(隨形好)99)로써 장엄하여 안으로 한량없는 불법의 공덕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아 부처님 몸을 뵙는 이는 세간의 5욕을 잊고 만사를 생각하지 않는다. 또 부처님 몸을 뵙게 되면 한 곳만을 좋아하여 싫증냄이 없으므로 다른 곳을 볼 수조차 없다. 부처님 몸의 공덕이 이와 같으므로 마땅히 부처님을 염해야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지계를 구족하시고 청정하시다. 처음 발심해서부터 계율을 닦아 쌓음이 한량없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함께하면서도 그 과보를 구하지도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辟支佛)의 도에 향하지도 않으며, 모든 결사(結使)에 섞이지도 않으신다. 다만 자기 마음만을 청정하게 하면서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세상마다 계율을 지니신다. 이 때문에 불도를 얻으실 때에 계율을 구족하시게 되었으니 이와 같이 부처님의 계율을 염하여야 한다.
014_0714_a_01L【답】 큰 지혜를 구족하셨기 때문에 선정도 반드시 갖추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연꽃이 큰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 못도 깊고 크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또한 등불의 광명이 크면 틀림없이 소유(蘇油)100) 또한 많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또한 부처님의 신통 변화의 힘은 한량없고 견줄 데가 없기 때문에 선정의 힘도 역시 구족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고, 또한 과보가 크기 때문에 원인 또한 틀림없이 크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또 어느 때에 부처님은 스스로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나의 선정의 모양은 심히 깊느니라”고 하셨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두마국(阿頭摩國)101)의 나무 숲 아래 앉아 선정에 드셨는데 이때 큰 비가 쏟아지면서 우레와 함께 벼락이 쳤으므로 네 마리의 수소와 두 사람의 농부가 이 소리에 놀라 죽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날이 훤히 개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어나서 경행하고 계셨는데, 마침 한 거사(居士)가 부처님의 발에 예배한 뒤에 부처님의 뒤를 따르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아까 뇌성과 벼락을 칠 때에 네 마리 수소와 농부 두 사람이 그 소리에 놀라 죽었나이다. 세존께서는 들으셨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듣지 못했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거사는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은 그때에 주무셨나이까?” 부처님께서 “자지 않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거사는 다시 여쭈었다. “무심상정(無心想定)102)에 들어 계셨나이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니라. 나는 심상(心想)이 있으면서 다만 선정에 들었을 뿐이니라”고 하시자, 거사는 말씀드렸다. “전에 없던 일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선정은 심히 깊고 큽니다. 심상이 있으면서도 선정에 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큰 소리를 깨어 있으면서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다른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이 들고 나는 모든 선정은 사리불이나 목건련조차도 오히려 그 이름을 듣지 못했거늘 하물며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 마치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103)와 사자유희삼매(獅子遊戱三昧)104) 등과 같아서 부처님이 그 안에 들면 능히 시방세계를 여섯 가지로 진동하게 하고 큰 광명을 놓으며 변화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시방에 가득 차게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014_0714_b_01L아난이 어느 때 마음에 생각하기를 “과거 연등불(然燈佛) 때에는 그 세상이 좋고 사람의 수명이 길어서 교화하기가 쉬웠다. 지금의 석가모니부처님 때는 세상이 악하고 사람의 수명이 짧아서 교화하기가 어려우므로 부처님은 일을 다 마치기도 전에 열반에 드실 것인가”라고 했다. 다음날 맑은 새벽에 이 일에 대하여 부처님께 아뢰려고 하였는데 벌써 해가 돋은지라 부처님은 그때 일출삼매(日出三昧)105)에 들어계셨다. 마치 해가 돋아 광명이 염부제를 비추는 것처럼 부처님의 몸도 그와 같아서 털구멍에서 광명을 두루 내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를 비추셨다. 그 낱낱 광명 속에서는 7보로 된 천 개의 잎사귀가 있는 연꽃을 내시고 그 낱낱 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다시 그 낱낱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한량없는 광명을 놓으시고, 하나하나의 광명에서는 모두 7보로 된 천 개의 잎사귀가 달린 연꽃을 내시고, 하나하나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이 모든 부처님들은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 차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셨는데 혹 설법을 하시기도 하고 혹 잠자코 계시기도 하며 혹 경행을 하시기도 하고 혹 신통 변화로 몸에서 물과 불을 내기도 하셨다. 이와 같은 갖가지 방편으로 시방의 5도(道)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아난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이 일들을 모두 보았는데 부처님은 신족(神足)106)을 거두시고 삼매에서 일어나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일을 보았으며, 이 일을 들었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자와 이미 보았고 이미 들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처에게는 이와 같은 힘이 있는데 능히 불사(佛事)를 마칠 수 없겠느냐?” 아난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설령 중생들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히 차 있고 부처님께서 하루 동안만 살아계시면서 이러한 힘을 쓰신다 해도 반드시 부처님 일을 마칠 수 있으리이다”고 하고는 다시 감탄하면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 법은 한량없고 불가사의하나이다”고 했다.
014_0714_c_01L또 대비(大悲)와 지혜를 잘 닦았기 때문에 지혜를 구족하셨다. 그 밖의 사람은 이런 대비가 없고,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대비를 두루 갖출 수가 없다.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갖가지 지혜를 구하셨기 때문에 나아가 법애(法愛)108)를 끊고 예순두 가지의 삿된 소견[邪見]을 없애버렸으며 두 가지 치우침[二邊]에 떨어지니 않았으니, 곧 5욕의 즐거움을 받는다거나 몸을 괴롭히는 도를 닦는다거나 아주 없다거나[斷] 항상 하다고 헤아리거나 있다거나[有] 없다거나[無] 하는 등 모든 법의 치우침이 그것이다.
또 부처님의 지혜가 위없이 투철히 비춤이 견줄 데 없는 것은 심히 깊은 선정 중에서 생기기 때문이고 모든 거칠고 세밀한 번뇌로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며, 37품(品)ㆍ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8배사(背捨)ㆍ9차제정(次第定) 등 모든 공덕을 잘 닦았기 때문이고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이 있으면서 걸림없고 불가사의한 해탈을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는 구족되어 있다.
또 능히 외도의 대논의사(大論議師)들을 항복 받으셨기 때문이니, 이른바 우루빈라가섭(憂樓頻螺迦葉)109)과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健蓮)과 살차니건자(薩遮尼健子)110)와 바차수라(婆磋首羅)와 장조(長爪)111)등의 대논의사들이 모두 항복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가 구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은 3장(藏)ㆍ12부경(部經)112)ㆍ8만 4천의 법문에 이런 말씀이 많은 것을 보아도 지혜가 역시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느 한 거사가 맑은 아침에 큰 비가 왔던 곳을 보고서 뭇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젯밤에 비를 내린 용은 그 힘이 아주 대단했소이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물었다.“당신은 무엇으로 그런 일을 압니까?” 그러자 대답하기를 “나는 땅이 축축하고 진흙이 많으며 산이 무너지고 나무가 꺾였으며 모든 날짐승ㆍ길짐승이 죽은 것을 보았소. 이 때문에 용의 힘이 큰 줄을 아는 것이오”라고 했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심히 깊은 지혜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법의 비를 내리어 여러 대논의사들과 제석ㆍ대범천왕을 모두 항복 받으셨으니, 이것으로서도 부처님의 지혜가 많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은 걸림 없는 해탈[無礙解脫]을 얻었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에서 지혜에 걸림이 없다.
014_0714_c_23L復次,諸佛得無㝵解脫故,於一切法中智慧無㝵。
014_0715_a_01L또 부처님의 이 지혜는 모두가 청정하여 모든 관(觀)에 뛰어났으므로 모든 법의 영원한 모양[常相]ㆍ덧없는 모양[無常相], 끝이 있는 모양[有邊相]113)ㆍ끝이 없는 모양[無邊相]114), 감이 있는 모양[有去相]ㆍ감이 없는 모양[無去相], 존재하는 모양[有相]ㆍ존재하지 않는 모양[無相], 유루의 모양[有漏相]ㆍ무루의 모양[無漏相], 유위의 모양[有爲相]ㆍ무위의 모양[無爲相], 생멸하는 모양[生滅相]ㆍ생멸하지 않는 모양[不生滅相], 공한 모양[空相]ㆍ공하지 않은 모양[不空相]을 관하지 않나니, 항상 청정하여 한량이 없음이 마치 허공과도 같다. 이 때문에 걸림이 없다. 만일 생멸(生滅)을 관한다면 생멸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생멸하지 않음을 관한다면 생멸을 관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만일 생멸하지 않음이 진실이라면 생멸은 진실하지 않고, 생멸이 진실이라면 생멸하지 않음이 진실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든 관이 다 그러하다. 걸림 없는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는 두루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은 해탈(解脫)이 구족되어 있음을 염할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번뇌와 습기(習氣)115)에서 해탈하여 그 근본을 뽑아내었기 때문에 그 해탈은 진실이어서 무너뜨릴 수 없다. 온갖 지혜를 성취했기 때문에 걸림 없는 해탈[無礙解脫]이라 하며, 8해탈을 성취하여 심히 깊고 두루 얻었으므로 두루 갖춘 해탈[具足解脫]이라 한다.
014_0715_b_01L또 보살은 견제도(見諦道)119) 중에서 깊은 16해탈(解脫)을 얻었다. 첫째는 고법지(苦法智)120)와 상응하는 유위(有爲)의 해탈이고, 둘째는 고제(苦諦)로 10결(結)을 끊고 다하여 무위(無爲)의 해탈을 얻은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 도비지(道比智)121)까지에 이른다. 사유도(思惟道)에서는 18해탈(解脫)을 얻었다. 첫째는 비지(比智)122) 또는 법지(法智)123)와 상응하는 유위의 해탈이고, 둘째는 무색계(無色界)의 3사유결(思惟結)을 끊었기 때문에 무위의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제18까지 이르고 진지(盡智)와 상응하는 유위의 해탈과 온갖 번뇌[結使]가 다한 무위의 해탈을 얻었다.
또 부처님은 해탈지견(解脫知見)124)이 구족되어 있음을 염해야 한다. 해탈지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014_0715_b_06L復次,念佛解脫知見衆具足。解脫知見衆有二種:
첫째,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해탈한 가운데서 진지(盡智)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시었다. 이미 괴로움을 아시고, 그 괴로움의 쌓임[集]을 끊으시고, 그 괴로움의 다함[盡]을 증득하시고, 도(道)를 닦아 마치는 이것이 진지의 해탈지견이다. 괴로움을 안 뒤에는 다시는 알지 않고 나아가 도를 닦은 뒤에는 다시는 닦지 않는 것이 곧 무생지(無生智)의 해탈지견125)이다.
둘째, 부처님은 “이 사람은 공의 문[空門]에 들어가서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모양 없는 문[無相門]126)에서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지음이 없는 문[無作門]127)에서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방편 없이도 해탈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은 오래오래 있어야 해탈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 해탈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은 즉시 해탈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은 부드러운 말로 하면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간절히 가르치면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여러 가지 말로 하면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신통력을 보면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설법을 하면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음욕이 많으므로 음욕을 더욱더 내다가 해탈을 얻겠다, 이 사람은 성을 냄이 많으므로 성을 더욱 내다가 해탈을 얻겠다”고 함을 아신다. 이는 마치 난타(難陀)128)와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129)의 용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해탈을 얻는 것은 법안(法眼) 중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해탈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보시나니, 이것을 해탈지견이 구족되었다 한다.
014_0715_c_01L또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ㆍ일체지견(一切智見)130)ㆍ대자대비(大慈大悲)ㆍ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 등을 염해야 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은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공덕을 염하는 것을 바로 부처님을 염한다[念佛] 한다.
이 염(念)은 7지(地) 안에 있나니, 혹 유루(有漏)이기도 하고 혹 무루(無漏)이기도 하다. 유루라 함은 과보가 있는 것이요 무루라 함은 과보가 없는 것이다. 세 가지 근(根)과 상응하는 낙근(樂根)과 희근(喜根)과 사근(捨根)은 행으로 얻고[行得] 또한 과보로 얻는다[果報得], 행으로 얻는다 함은 마치 이 세간의 나라 안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131)를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요, 과보로 얻는다 함은 마치 무량수부처님[無量壽佛]132)의 나라에 가 나면 그 사람은 나자마자 저절로 부처님을 염하게 되는 것과 같다.
23)범어로는 Aṣṭa-vimokṣa. 초선(初禪)ㆍ제2선ㆍ제4선ㆍ4무색정ㆍ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8단계의 선정관법을 말한다. 8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24)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samāpatti. 느낌과 생각이 지멸한 경지이다.
25)범어로는 vimokṣa. 곧 ‘해탈’을 의미한다.
26)범어로는 각각 saṃyojana, anuśaya. 결(saṃyojana)은 ‘얽어 맴’을, 사(anuśaya)는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 결과 사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27)범어로는 satkāya-dṛṣṭi. 유신견을 말한다. 5온이 화합해 이루어진 몸에 대해 나 혹은 내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집착, 또는 몸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로, 이 sat를 경량부에서는 무상하고 무너지는 것으로 보며, 설일체유부에서는 실제의 존재[實有]로 본다.
28)범어로는 abhibhāyatanāni. ‘뛰어난 지(知)와 견(見)을 일으키는 곳’이란 뜻이다.
29)범어로는 caturmahābhūta. 4대란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 견고함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 pṛthivi-dhātu)ㆍ습기를 모으는 수대(水大, ab-dhātu)ㆍ열을 본질로 하며 성숙작용을 지니는 화대(火大, tejo-dhātu)ㆍ생장작용을 하는 풍대(風大, vāyu-dhātu)를 말한다.
30)범어로는 rūpa-dhātu. 욕계에서의 본능적 욕망을 여의고, 오직 순수한 물질로만 이루어진 생존계를 가리킨다.
31)범어로는 aṭṭha abhibhāyatanāni. 8해탈(解脫)을 닦은 뒤 숙달된 관상법(觀想法)으로 자유롭게 정ㆍ부정의 경지를 관찰 하는 것을 말한다.
32)범어로는 Umākāpuṣpa.
33)바라나시산 비단으로 짠 옷을 말한다.
34)범어로는 aśubhāvanā. 5정심관(停心觀) 가운데 하나.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육체의 부정한 특징을 관찰하는 관법. 예를 들어 버려진 시신이 차례로 썩어가서 이윽고 백골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기까지를 관찰한다. 그 관찰의 단계를 아홉으로 나눈 것이 9상(相)이며, 열로 나눈 것이 10상(相)이다.
35)범어로는 śubhabhāvanā. 부정관(不淨觀, aśubhāvanā)의 상대되는 개념이다.
36)36물(物)이란, 몸 안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부정한 요소들을 말한다. 곧 머리칼ㆍ털ㆍ손톱ㆍ이빨ㆍ눈곱ㆍ눈물ㆍ침ㆍ가래ㆍ소변ㆍ대변ㆍ때ㆍ땀과 간ㆍ쓸개ㆍ창자ㆍ위ㆍ비ㆍ신장ㆍ심장ㆍ폐ㆍ생장(生藏)ㆍ적담(赤痰)ㆍ백담(白痰)과 피(皮)ㆍ부(膚)ㆍ피ㆍ살ㆍ근육ㆍ핏줄ㆍ뼈ㆍ골수ㆍ지방ㆍ고(膏)ㆍ뇌ㆍ막 등이다.
37)범어로는 pṛthivīmahabhūta. 물질의 굳은 성질을 말한다.
38)범어로는 ārūpyavimokṣa. 곧 무색정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 해탈이다.
39)범어로는 rūpyālambana. 곧 색이라는 대상을 말한다.
40)범어로는 ākāśānantyāyatana. 공무변처(空無邊處)라고도 한다.
41)범어로는 vijñānānantyāyatana.
42)범어로는 ākiñcanyāyatana.
43)범어로는 naivasaṁjñānāsaṁjñāyatana.
44)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vimokṣa. 느낌과 생각이 멸해 얻게 되는 해탈의 상태이다.
45)범어로는 asaṁjñisamāpatti.
46)범어로는 śaṅkha. 법라패를 말한다.
47)범어로는 ādhyātmika-saṁjñā.
48)범어로는 ālambanābhibhavana. 객관을 인식하는 주관, 곧 주체를 말한다.
49)곧 제2선의 상태란 5개(蓋)를 여의어 불선법을 떠난 까닭에 착하다고 하며, 아직 거칠고 세밀한 마음작용[尋司]이 남아 있는 까닭에 때가 끼여 있다고 하는 것이다.
50)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samāpatti. 곧 느낌과 생각이 모두 지멸한 상태를 말한다.
51)범어로는 amṛta. ‘불사(不死)’라는 뜻이다.
52)범어로는 asthisaṁjñā
53)범어로는 vidagdhakasaṁjñā.
54)범어로는 anityasaṁjñā.
55)범어로는 āhāre pratikūlasṁjñā.
56)범어로는 sarvaloke `nabhiratisaṁjñā.
57)범어로는 maraṇasaṁjñā.
58)범어로는 prahāṇasaṁjñā.
59)범어로는 vairāgyasaṁjñā.
60)범어로는 nirodhasaṁjñā.
61)범어로는 amṛtadvāra.
62)범어 ānāpānasmṛti의 음역어.
63)범어로는 vajropamasamādhi. 금강(vajra)과도 같이 견고해 무너지지 않는 삼매라는 뜻이다.
64)범어로는 kāmadhātvavacara.
65)범어로는 rūpadhātvavacara.
66)범어로는 adhyātmabahirdhāśubhabhāvanā.
67)범어로는 Dhvajāgrasūtra.
68)범어 Tahāgata 의 음역어.
69)범어 Arhat 의 음역어.
70)범어 Saṁyaksaṁbuddha 의 음역어.
71)범어 Bhagava 의 음역어.
72)범어로는 arhatphalapratipannaka.
73)범어로는 srotāpannaphalapratipannaka.
74)범어로는 catvāri puruṣayugāni.
75)범어로는 aṣṭau puruṣapudgalāḥ.
76)범어로는 īśāna.
77)범어로는 Varuṇa.
78)Dhvajāgra-sūtra를 가리킨다.
79)범어로는 preta.
80)범어로는 durgati. 지옥ㆍ아귀ㆍ축생의 길을 말한다.
81)범어로는 sūkṣmavitarka.
82)범어로는 audārikavitarka.
83)범어 Vidyācaraṇasaṁpanna의 음역어. 명행족(明行足)을 말한다.
84)범어 Sugata의 음역어. 선서(善逝)를 말한다.
85)범어 Anuttara-puruṣadamyasārathiḥ의 음역어. 조어장부(調御丈夫)ㆍ무상사(無上士)를 말한다.
86)범어 śāstā-devamanuṣyāṇāṁ의 음역어. 천인사(天人師)를 말한다.
87)범어 Buddha의 음역어. 각자(覺者)를 말한다.
88)범어 Bhagava의 음역어. 세존(世尊)을 말한다.
89)범어 Mahāsaṁmata의 음역어.
90)석가족(śākya)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91)범어 Gautama의 음역어.
92)범어로는 Brahmā Devarāja.
93)범어로는 Anavatapta-nāgarāja.
94)범어 Sāgara의 음역어.
95)범어로는 Asita.
96)덕자(德字, Śrīvatsa)란 만(卍)자를 말한다.
97)범어로는 jambūnada-kanaka. 염부금(閻浮金)이라고도 한다. 염부제에서 나는 금이라는 뜻이다.
98)범어로는 dvatriṃśa-lakṣaṇa. 32상이란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인간이 지니는 상서로운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99)범어로는 aśītyanuvyañjanāni. 80종호(種好)라고도 한다.
100)범어로는 taila.
101)범어로는 Ādumā. 팔리어로는 ātumā.
102)범어로는 asaṁjñisamāpatti.
103)범어로는 samādhirājasamādhi. 모든 삼매 가운데 최상의 삼매를 말한다.
104)범어로는 siṁhavikrīḍitasamādhi. 여덟 가지 삼매[八三昧] 가운데 하나이다. 마치 사자가 사슴을 잡아 유희하는 듯한 삼매라는 뜻이다.
105)범어로는 sūryodayasamādhi.
106)범어로는 ṛddhipāda.
107)범어로는 Sadāprarudita. 팔천송반야에서 등장하는 보살이다.
108)범어로는 dharmasaṅga. 곧 법에 대한 애착이다.
109)범어로는 Urubilvākāśyapa.
110)범어로는 Satyaka Nirgranthīputra.
111)범어로는 Dīrghanakha.
112)범어로는 dvādaśāńga-dharmapravacana.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12분교(分敎) 혹은 12분성교(分聖敎)라고도 한다.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113)범어로는 antavat
114)범어로는 anantavat.
115)범어로는 vāsanā. 훈습(bhāvanā)으로 남겨진 업의 잠재적 인상(印象). 종자(種子)와 같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