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지경론』은 신묘한 깨달음의 그윽한 동산이요, 신령한 지혜의 미묘한 집이며 온갖 선(善)의 기초요 모든 수행의 강령이니, 이치는 뭇 장경의 비전(秘傳)을 포괄하고 뜻은 뭇 경전의 심오한 뜻 가운데 으뜸이다. 점차 심행(心行)을 쌓음에 인학(忍學)의 근원을 궁구하고 널리 주덕(住德)을 높임에 도(道)와 혜(慧)의 창고를 구극(究極)하였다. 이런 까닭에 조려(肇慮)를 두터이 모으고 원종(圓種)을 밝게 이루어 포수(怖首)1)의 생각을 여의고 빛나는 뇌성(雷聲)의 위엄을 보인다.
그 가르침은 미묘하고 심원하여 정조(淨照)의 종지(宗旨)를 구극하고, 녹이고 다듬어 성령(性靈)의 묘리(妙理)를 극진히 하였다. 적멸도량에 해가 솟아오르고부터 고림(固林)에 해가 질 때까지, 비록 성훈(聖訓)과 금언(金言)이 온 세상에 가득 찰 만큼 많지만 그 심오한 뜻이 이 속에 남김없이 망라되어 있다. 찬연히 진궤(眞軌)를 선양하고 혼연히 현문(玄門)을 창달하기에 이르러, 처음 인(仁)을 믿음으로부터 마침내 공적(空寂)을 민멸(泯滅)하게 되었다.
인과가 이미 두루 충족함에 교화의 사업이 더욱 드러나 묵묵히 대방(大方:大地)을 비추어 영향이 8극(極:천하)에 빛나니, 어찌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만상(萬象)을 환히 비추고 큰 바다와 골짜기가 땅을 두르고 모든 시내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이미 이치가 바다와 산악같이 많아 말로는 헤아릴 수 없으니, 큰 뜻을 확연히 밝히는 것은 실로 심원한 대사(大士)에 달려 있다.
북천축(北天竺)의 대사 바수반두(婆藪槃豆)는 위(魏)나라 말로는 천친(天親)이라 하는데, 상법(像法)의 말운(末運)에 탁월한 오성(悟性)을 받고 말세 시속에 영특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빛나게 마명(馬嗚)의 뒤를 잇고 용수(龍樹)의 자취를 계승할 수 있었다.
015_0001_b_01L 진실로 세월은 5백 년이나 지났고 장소는 6천(天)이 아니며, 인간과 범천(梵天)이 아득히 서로 멀고, 정법(正法)과 상법이 현저히 서로 어긋났으나, 우주 안에서 미묘하게 계합함에 정신이 여지없이 합일하고 현묘한 법을 관통함에 옛 성현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에 대종(大宗)을 두루 상고하여 이 논을 지으니, 정미한 이치를 발함에 근본은 총명한 지혜에서 비롯하고 뜻은 깊되 말이 달라, 번역하여 널리 선양할 후세의 현인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진실로 뜻은 중흥을 부촉하고 때는 성대(聖代)에 의지하였다.
대위황제(大魏皇帝)께서 하늘같이 그윽한 뛰어난 정신과 운한(雲漢:은하수)같이 아득한 깊은 성정(性情)으로 천하 밖에 치풍(治風:治世의 기풍)을 드날리고 천 년 후에 도화(道化)를 펼치시는 한편, 매양 불경으로 마음이 노닐 터전으로 삼고 석전(釋典:佛典)으로 눈길이 깃들 동산으로 삼으셨다. 이에 은닉된 것을 뒤지고 결손된 것을 찾아서 밝게 드러내기에 힘써, 교법(敎法)이 있으면 반드시 세상에 펴서 갖추지 못한 전적(典籍)이 없었다.
영평(永平) 원년(508)년 세차(歲次) 현효(玄枵:戊子年) 4월 상일(上日)에 위(魏)나라 말로 도희(道希)라 하는 북천축의 삼장 법사 보리류지(菩提流支)와 위나라 말로 보의(寶意)라 하는 중천축(中天竺)의 륵나마제(勒那摩提) 및 전역 사문(傳譯沙門:번역을 맡은 승려) 북천축의 복타선다(伏陀扇多)와 의학치유(義學緇儒) 10여 명에게 명하여, 태극자정(太極紫庭:궁궐)에서 이 논 10여 권을 번역해 내게 하셨다.
이 일에 참여한 두 삼장 법사는 세속의 역량을 넘어선 분들로 도문(道門)에 높이 이르러 여러 깊은 장경들을 남김없이 연구하여 10지(地)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논(論)의 취지를 미묘하게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손으로 범문(梵文)을 잡으면 입에서 저절로 해석이 흘러나와 편사척설(片辭隻說)이라도 그 뜻을 설명하여 빠뜨림이 없었다.
이에 황상(皇上)께서 친히 그윽한 문장을 구사하여 앞장서서 붓을 휘두르시니, 신하와 승려들이 아래에서 도와 영평 4년 첫 여름(음력 4월)에 번역을 모두 마쳤다. 이 논을 보면 아득히 넓고 멀어 들어가는 문을 찾을 수 없으니, 문의(文義)가 풍부하고 취지가 현묘한데 누가 이를 엿볼 수 있겠는가. 금강장의 미묘한 설법이 상세(像世)에 다시 일어나고, 천친의 현묘한 뜻이 계운(季運:말세)에 거듭 빛나게 되었다. 내가 외람되이 말석(末席)에 참여했기로 감히 삼가 서문을 쓴다. 시중(侍中) 최광(崔光) 지음
어느 때 바가바(婆伽婆)께서 성도(成道)한 지 오래 지 않은 두 번째 7일째에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가운데 타화자재천왕궁의 마니보장전(摩尼寶藏殿)에서 대보살 대중과 함께 계셨다. 그 보살들은 모두 불퇴전(不退轉)의 지위에 올라 한 생(生)만 지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이들로, 타방의 부처님세계에서 이곳으로 와 모였다.
015_0002_a_01L 그리고 일체 보살이 일으키는 큰 서원(誓願)을 버리지 않아, 일체의 세상ㆍ일체의 겁(劫)ㆍ일체의 국토에서 항상 일체 보살행을 닦아 보살의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한량없는 여의신족통(如意神足通)을 얻어 능히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능히 일체 보살의 지혜 방편인 피안에 도달하여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도(世間道)를 등지고 열반문(涅槃門)으로 향하게 하며, 일체의 보살행을 끊지 않고 일체 보살의 선정(禪定)ㆍ해탈ㆍ삼매ㆍ신통ㆍ명혜(明慧:三明과 三慧)에 잘 유희하여 모든 하는 일을 능히 잘 시현(示現)하였다.
일체의 보살이 무작(無作) 자재하여 여의신족통을 모두 얻어 한 생각 사이에 능히 시방 모든 부처님의 큰 회상(會上)에 가서 설법을 권청하고, 일체 제불의 법륜(法輪)을 받아 지녀 항상 큰마음으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항상 능히 모든 큰 보살이 행하는 사업을 닦았다. 그리하여 몸은 한량없는 세계에 두루 시현하고, 음성은 어디에서든 들리지 않는 곳이 없고, 마음은 환하게 통달하여 3세를 환하게 보며, 일체 보살이 지닌 공덕을 구족하게 닦았다.
이와 같은 여러 보살마하살의 공덕은 한량없고 가없어 무수한 겁 동안 말해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015_0002_a_10L如是諸菩薩摩訶薩功德無量無邊,於無數劫說不可盡,
그 이름은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ㆍ보장(寶藏)보살ㆍ연화장(蓮華藏)보살ㆍ승장(勝藏)보살ㆍ연화승장(蓮華勝藏)보살ㆍ일장(日藏)보살ㆍ월장(月藏)보살ㆍ정월장(淨月藏)보살ㆍ조일체세간장엄장(照一切世間莊嚴藏)보살ㆍ지혜보조명장(智慧普照明藏)보살ㆍ묘승장(妙勝藏)보살ㆍ전단승장(栴檀勝藏)보살ㆍ화승장(華勝藏)보살ㆍ구소마승장(俱素摩勝藏)보살ㆍ우발라화승장(優鉢羅華勝藏)보살ㆍ
무슨 까닭에 색계(色界)에서 설법하지 않았는가? 이곳은 결과를 감응하기[感果]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처음 7일 동안에는 설법하지 않았는가? 인연행(因緣行)을 사유하고 행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타(利他)를 위하여 성도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7일 동안 사유만 하고 설법하지 않았는가? 큰 법락(法樂:法悅)을 스스로 즐긴다는 것을 나타내어 보이기 위해서였다.
무슨 까닭에 자기의 법락을 나타내는가? 중생들로 하여금 여래에 대한 애경심(愛敬心)을 증장시키기 위해서이며, 또 이러한 미묘한 법락을 버리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설법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오직 인연행만 행하는가? 이 인연행이 불공법(不共法)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보살이 이 법문을 설하는가? 여러 보살의 힘을 증장시키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오직 금강장보살만 설하는가? 일체의 번뇌는 부수기 어려운데 이 법[金剛]만이 능히 부술 수 있고, 선근(善根)의 견실(堅實)하기가 금강(金剛)과 같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설하지 않은 것이다.
015_0002_c_01L 무슨 까닭에 금강장(金剛藏)이라 이름하였는가? 장(藏)은 곧 견고[堅]하다는 말이니, 수장(樹藏)과 같고, 또 마치 아기를 잉태하여 뱃속에 간직해 두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견고하기가 금강과 같고 금강장과 같은 것이다. 이는 모든 선근(善根)ㆍ일체 여타의 선근 가운데 그 힘이 가장 뛰어나기가 마치 금강과 같고, 또한 능히 인천(人天)의 도행(道行)을 생성하여, 모든 여타의 선근들이 부술 수 없기 때문에 금강장이라 한다. 이상으로 서분(序分)을 설하였고, 다음은 삼매분(三昧分)을 설한다.
【論】무슨 까닭에 많은 부처님들이 가피하는가? 법과 법사(法師)를 나타내어 공경심을 증장시키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이름을 동일하게 금강장이라 했는가? 본원력을 가피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 이와 같은 원을 짓는가? 많은 부처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015_0003_a_01L 이 삼매는 법체(法體)이다. 본행 보살(本行菩薩)로 있을 때, 모두 이름을 금강장이라 하고 동일하게 이 법을 설하였기에 이제 정각(正覺)을 이루고도 역시 이름을 금강장이라 하니, 이 때문에 다른 이름을 더하지 않았고, 또 보살이 모든 여래께서 자기와 이름이 같음을 보고 이미 한층 뛸 듯이 기뻐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한량없는 세계를 지나갔음을 말하지 않았는가? 방편으로 많은 부처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십억 국토라고 한정하여 말했는가? 10지(地)를 설하기 위해서이니, 이 때문에 이 경에서 이렇게 10이란 수를 많이 말하였다. 저 부처님께서 먼저 이러한 서원을 하였고 지금 다시 가피하고 뒤의 다른 부처님도 가피하니, 이런 까닭에 ‘노사나불의 본원력 때문에 가피한다’고 말하였다. 무슨 까닭에 가피하는가? 이 법을 설하기 위해서 가피한다. 다시 이르건대, 무엇을 가피하는가?
【經】“또한 일체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밝게 설하여 지혜의 지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선근(善根)을 포섭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불법을 잘 분별하여 선택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을 널리 알기 때문이며, 모든 법을 잘 결정하여 설하기 때문이며, 분별없는 지혜[無分別智]가 청정하여 혼잡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의 마군[魔]의 법이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며, 출세간법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불가사의한 지혜의 경계를 얻기 때문이며, 나아가서 일체의 지혜를 갖춘 사람의 지혜의 경계를 얻기 때문이다. 또 보살의 10지의 시종(始終)을 얻기 때문이며, 보살 10지의 차별 방편을 여실하게 말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불법에 수순(隨順)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무루법(無漏法)을 잘 관찰하여 분별하기 때문이며,
큰 지혜 광명의 방편을 잘 선택하기 때문이며, 구족한 지혜의 문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며, 머무는 곳에 따라 바르게 설법하여 두려움이 없고 변재(辯才)가 밝기 때문이며, 크게 걸림 없는 지혜의 경지를 얻기 때문이며, 보리심을 생각하여 잊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세계를 교화하여 성취시키기 때문이며, 일체처(一切處)의 법을 통달하여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체 보살’이란 신행지(信行地)에 머무는 이를 말하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이란 출세간의 도품(道品)이고, ‘밝다[明]’란 지혜를 보아 증득하는 것이며, ‘설하다[說]’란 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며, ‘들어가다[入]’란 믿고 즐겨 증득하는 것이며, ‘지혜의 지’란 10지의 지혜를 말한다.
첫째, 섭입(攝入)이니, 지혜를 듣는 가운데 일체의 선근을 포섭하는 것으로, 경의 ‘일체의 선근을 포섭한다’는 것과 같다. 둘째, 사의입(思議入)이니, 사혜(思慧)는 일체의 도품(道品)중에서 지혜의 방편이기 때문으로, 경의 ‘일체 불법을 잘 분별하여 선택한다’는 것과 같다.
셋째, 법상입(法相入)이니, 각각의 뜻[義] 가운데 한량없는 갖가지를 알기 때문으로, 경의 ‘모든 법을 널리 안다’는 것과 같다. 넷째, 교화입(敎化入)이니, 뜻을 생각하는 대로 개념과 문자가 구족(具足)하여 설법을 잘하는 것으로, 경의 ‘모든 법을 잘 결정하여 설한다’는 것과 같다.
다섯째, 증입(證入)이니, 일체법에 대해 평등하게 알고[智] 견도(見道) 시에 선(善)하여 청정한 것으로, 경의 ‘분별없는 지혜가 청정하여 혼잡이 없다’는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남을 이롭게 함[利他]을 또한 이름하여 자신을 이롭게 함[自利]이라 한다. 여섯째, 불방일입(不放逸入)이니, 수도(修道) 시에 일체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는 것으로, 경의 ‘일체 마군의 법이 더럽힐 수 없게 한다’는 것과 같다.
015_0003_c_01L일곱째, 지지전입(地地轉入)이니, 출세간의 도품(道品)은 탐욕 등이 없어 선근이 청정한 것으로, 경의 ‘출세간법의 선근이 청정하다’는 것과 같으며, 또한 선근이 있어 능히 출세간의 도품의 인(因)이 된다.
여덟째, 보살진입(菩薩盡入)이니, 제10지(地) 가운데 일체 여래의 비밀지(秘密智)에 들어가는 것으로, 경의 ‘불가사의한 지혜의 경계를 얻는다’는 것과 같다.
아홉째, 불진입(佛盡入)이니, 일체의 지혜에 있어 그 지혜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경의 ‘나아가서 일체의 지혜를 갖춘 사람의 지혜의 경계를 얻는다’는 것과 같다.
015_0003_c_04L九者佛盡入,於一切智入智故,如經“乃至得一切智人智境界”故。
이 여러 입(入)들은 지혜와 뜻[智義]의 차별을 비교하고 헤아려 차례로 수승해 가는 것이니, 근본입(根本入)은 아니다. 일체의 설한 열 구절 중에는 모두 여섯 종류의 차별상문(差別相門)이 있으니, 이 언설의 해석에 마땅히 사법[事, 현상계]은 제외됨을 알아야하니, 사(事)는 5온, 18계, 12입 등을 말한다. 여섯 종류의 상(相)이란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을 말한다.
총상은 근본입이고, 별상은 나머지 아홉 입(入)이니, 별(別)은 근본에 의지(依止)하여 저 근본을 채우기 때문이다. 동상(同相)은 들어가기[入] 때문이고, 이상(異相)은 상(相)을 증가하기 때문이다. 성상(成相)은 대략 설하는 것이고, 괴상(壞相)은 널리 설하는 것이니, 마치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 다른 10구(句) 전체는 뜻에 따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0구에서 이른바 ‘보살의 10지(地)의 시종(始終)을 얻는다’는 것은 근본의 시종이니, 이 가운데 시(始)는 신심(信心)을 일으켜 친근하고자 하는 것 따위이고, 종(終)은 여러 지위를 생각하여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또 아함(阿含)과 증(證)2)이 있어, 이처럼 차례로 초상(初相)에 의거하니, 근본의 시종에 의지하여 열 종류의 시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 섭시종(攝始終)이니, 사유의 지혜[思慧智]로 뜻을 들음에 따라 설법을 받아 지니는 것으로, 경의 ‘보살 10지의 차별 방편을 여실하게 말한다’는 것과 같다. 둘째, 욕시종(欲始終)이니, 일체의 불법을 증득하게 하는 것으로, 경의 ‘일체의 불법에 수순(隨順)할 것을 생각한다’는 것과 같다.
셋째, 행시종(行始終)이니, 관분(觀分:법을 관찰하는 것)할 때 무루(無漏)의 도품(道品)을 분별하여 수상(修相:법을 분별하여 불도를 증진하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경의 ‘무루법(無漏法)을 잘 관찰하여 분별한다’는 것과 같다.
015_0003_c_22L三者行始終,觀分時中無漏道品分別修相覺故,如經“觀達分別無漏法”故。
015_0004_a_01L넷째, 증시종(證始終)이니, 견도(見道)일 때 법무아지(法無我智)의 방편을 얻는 것으로, 경의 ‘큰 지혜 광명의 방편을 잘 선택한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잘 선택한다’는 것은 그 중 가장 수승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니, 가장 수승한 것은 법무아지이기 때문이다. ‘큰 지혜’란 소승(小乘)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광명’이란 무명에 대치되기 때문이며, 이 일[事]과 저 때[時]에 잘 알기 때문이다.
첫째는 여러 삿된 논의를 타파하지 못하는 장애이니, 이미 바른 뜻을 말하였으나 다른 사람의 말이 이를 무너뜨릴 수 있고 게다가 권속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대답을 못하는 장애이니, 다른 사람의 질문에 대해 아득히 알지 못하여 대답할 수 없고, 설령 말할지라도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소승에 애착을 두는 장애이니, 스스로 큰 보리를 얻을 수 없고 또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넷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게으른 장애이니, 그 중에서 이타행을 버려 남의 선(善)을 돕지도 않고 자신의 선근(善根)도 증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는 방편의 지혜가 없는 장애이니, 중생을 잘 교화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보리행(菩提行)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를 대치(對治)하는 데 다섯 가지 시종(始終)이 있다. 첫째로 삿된 논의의 장애를 타파하는 시종이니, 상대방의 집착에 따라 나의 바른 뜻을 드러내어 삿된 집착을 치료하고 두려움이 없는 변재로 성품이 어둡지 않은 것으로, 경의 ‘머무는 곳에 따라 바로 설법하여 두려움이 없고 변재(辯才)가 밝다’는 것과 같다.
【論】이 10구 중에 ‘변재(辯才)’란 얻은 법과 뜻[義]에 따라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여 설법을 잊지 않는 것이다. ‘여러 법문’이란 10지(地)의 법을 말한다. ‘차별’이란 갖가지 이름과 모습[名相]이 있는 것이다. 이 법은 훌륭하고 교묘한 방법[善巧]을 통하여 이루니, 이런 까닭에 방편이라 한다.
근본 변재에 의지하여 두 종류의 변재가 있으니, 첫째는 타력(他力) 변재이고, 둘째는 자력(自力) 변재이다. 타력 변재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는 것이니, 어째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는가? 여래의 지혜의 힘은 어둡게 가피하지 않기 때문이니, 경에 ‘여러 부처님의 위신력과 여래의 지혜로 밝은 가피를 받는다’는 것과 같다.
셋째로 중생을 교화하는 청정한[化衆生淨] 변재이니, 경의 ‘중생의 세계를 이익되게 한다’는 것과 같다. 넷째로 몸이 청정한[身淨] 변재이니, 이 몸이 청정한 가운데 다음의 세 가지 극진(極盡:究竟과 같은 뜻임)을 나타낸다. 첫 번째는 보살의 극진함으로 두 가지 이익이 있고, 두 번째는 성문과 벽지불과 같지 않은 극진함이며, 세 번째는 부처님의 극진함이다.
보살의 극진함이란 법신(法身)이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떠나 오로지 지혜에 의지하는 것이니, 경의 ‘법의 몸[法身]과 지혜의 몸’과 같다. 두 가지 이익이란, 현세에 받는 이익은 부처님의 지위를 받는 것이며, 내세의 이익은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에 태어나는 것이니, 경의 ‘일체 부처님의 지위를 바로 받는다’는 것과 ‘일체 세간에서 가장 높고 큰 몸을 얻는다’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극진함이란 일체 지혜의 지혜[一切智智]에 들어가 만족하는 것이니, 경의 ‘일체 지혜로운 이의 지혜가 충족함을 얻는다’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자력 변재와 교량(挍量)이 차례로 점차 수승해져 간다. 이상으로 입 가피[口加:口辯으로 하는 가피]를 말했으니, 어떠한 것이 뜻 가피[意加:생각으로 하는 가피]인가?
일체를 두루 아는 지처(智處)를 주고, 모든 부처님의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을 주고, 두려움과 겁이 없는 여래의 담력을 주고, 일체 지혜로운 이의 걸림 없이 법을 분별하는 지혜의 바른 견해를 주고, 일체 여래께서 몸과 입과 마음에서 장엄이 일어나는 것을 잘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다.
015_0005_a_01L【論】이 10구는 뜻 가피[意加]이다. 두려움 없는 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위없는 수승한 위덕(威德)을 갖춘 몸을 주는 것이니, 왕이 뭇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두려움 없이 자재하는 것과 같다. 둘째, 두려움 없는 변재의 몸을 주는 것이니, 앞의 경우는 육체[色身]가 수승한 것이며, 뒤의 경우는 정신[名身]이 수승한 것이다.
둘째는 연설을 감당해 내는 변재이다. 연설을 감당해 내는 청정한 지혜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 연(緣)이고 둘째로 법(法)이며, 셋째로 작(作)이고 넷째로 성(成)이다. 이러한 뜻이 성립되는지 성립되지 않는지를 잘 아는 것이니, 경의 ‘청정한 지혜를 잘 분별할 수 있는 입을 준다’는 것과 같다.
셋째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변재로, 연설할 때 굳이 차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언사(言辭)가 끊이지 않아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마음대로 되어 명의(名義)를 잊지 않는 것이니, 경의 ‘잘 기억하여 잊지 않는 가피를 준다’는 것과 같다. 이 잊지 않는 가피는 의력(意力)의 가피이다.
015_0005_b_01L아홉째는 동화(同化)하는 변재이니, 일체 부처님의 두려움 없는 몸 등 세 가지 교화를 받아 구제하는 것에 따라 수승한 신ㆍ구ㆍ의 3업의 신통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경의 ‘일체 여래의 몸과 입과 마음의 장엄이 일어나는 것을 잘 분별하는 능력을 주었다’는 것과 같다.
【論】이 보살만이 대승광명 삼매법을 얻고 다른 이들은 얻지 못하는 연유이다. 삼매법을 얻는 데 두 종류가 있다. 첫째, 본원의 성취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경의 ‘또한 이 보살의 본원(本願)을 일으킨다’는 것과 같다. 둘째, 삼매의 몸이 공덕을 포섭하는 것이니, 이 삼매의 몸이 공덕을 포섭하는데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의거하여 여덟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인정(因淨)이니, 깊은 마음으로 보살 지위의 극진한 곳에 나아가 청정한 것으로, 경의 ‘깊은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과 같다. 깊은 마음이란 믿고 기뻐하는 것 따위로 또한 일체 선법(善法)의 근본이다. 둘째는 지정(智淨)이니, 보살 지위의 극진한 곳에 나아가 수도(修道)의 진여(眞如)를 관하는 지혜로, 경의 ‘원만한 지혜가 청정하다’는 것과 같다. 이 진여관 내의 지혜가 원만하여 법계를 두루 비추는 것이 마치 해가 온 누리에 두루 빛을 비추는 것과 같다.
셋째는 신전정(身轉淨)이니, 생(生)을 거듭할수록 더욱 수승하여 선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으로, 경의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잘 모은다’는 것과 같다. 넷째는 심조복정(心調伏淨)이니, 번뇌의 습기(習氣)를 잘 끊는 것으로, 경의 ‘본업(本業)을 잘 닦는다’는 것과 같다.
015_0005_c_01L다섯째는 문섭정(聞攝淨)이니, 일체 여래께서 설한 비밀법(秘密法)을 능히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경의 ‘한량없는 법을 생각하여 마음에 간직한다’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통정(通淨)이니, 수승한 통력(通力:지혜의 성품)이 자재함을 얻는 것으로, 경의 ‘청정하고 광명한 법을 믿고 이해한다’는 것과 같으며, 확고한 신심으로 통력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변재정(辯才淨)이니, 다라니문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잘 아는 것으로, 경의 ‘무너지지 않는 다라니문(陀羅尼門)을 잘 얻는다’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 모든 처음 문장의 자모(字母)는 다라니문이니, 하나하나의 글자문[字門]이 한량없는 글귀와 자체(字體)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이만정(離慢淨)이니, 진실한 지혜를 가르쳐 틀림이 없는 것으로, 경의 ‘법계의 지혜의 인장[印]으로 잘 인가(印可)한다’는 것과 같다.
015_0005_c_10L八者離慢淨,謂眞實智教授不異故,如經“法界智印善印”故。
이 가운데 삼매의 몸[三昧身]이 포괄하고 있는 공덕이 네 가지가 있는데, 자리인(自利因)에 의거하니 깊은 마음이 청정한 것이며, 원만한 지혜가 청정한 것이며, 도를 돕는 법을 잘 모으는 것이며, 본업을 잘 닦는 것이다. 이 수다라 중에서 네 구를 차례로 설하니, 정진인(精進因)이며, 불망인(不忘因)이며, 세력인(勢力因)이며, 피불염인(彼不染因)이다.
또 이타인(利他因)에 의거하여 네 종류가 있으니, 한량없는 법을 생각하여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단의인(斷疑因:의심을 끊는 因)이며, 청정하고 광명한 법을 믿고 이해하는 것은 경중인(敬重因:공경하고 존중하는 인)이며, 신통력으로 부사의(不思議)한 현상을 나타내어 보여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반드시 믿고 들어가게 하고, 무너지지 않는 다라니문을 잘 얻는 것은 전법리인(轉法理因:법리를 굴리는 인)이며, 법이 무너지려 할 때 남은 법을 빌어서 외우고 지니며, 법계의 지혜의 인장[印]으로 잘 인가(印可)하는 것은 교수출리인(敎授出離因:법을 가르쳐서 고해를 벗어나게 하는 인)이다.
이처럼 교화하는 이가 자리(自利)를 얻어 잊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뜻 가피[意加]를 설했으니, 어떠한 것이 몸 가피[身加]인가? 정수리를 만지자 깨어난 것이다.
015_0005_c_21L如是化者,得自利不忘故。已說意加,云何身加?摩頂覺故。
015_0006_a_01L【經】이때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신통력으로 모두 오른손을 뻗쳐 금강장보살마하살의 정수리를 어루만지셨다.
015_0005_c_23L經曰:爾時十方諸佛,不離本處以神通力皆申右手,善摩金剛藏菩薩摩訶薩頂。
【論】본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 정수리를 어루만진 것은 수승한 신통력을 나타내어 보인 것이다. 만약 금강장보살이 있는 이곳으로 왔다면 기이한 일이 못 된다. 이 여의신통력[如意通力]은 여타의 다른 신통에 비할 것이 아니다. 이상으로 가분(加分)을 설하였으니, 어떠한 것이 기분(起分)인가?
【經】금강장보살은 삼매에서 깨어나자, 여러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불자(佛子)들이여, 이 보살들의 서원은 잘 결정한 것[善決定]이고 혼잡함이 없고 볼 수 없으며,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 허공과 같아,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일체 중생의 세계를 덮어서 보호합니다. 불자여, 이 보살들은 과거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자리[地]에 들어갈 수 있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며, 현재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015_0006_b_01L불자들이여, 이 보살의 10지는 과거 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설했고, 지금도 설하며 앞으로도 설할 것이다. 불자들이여, 모든 부처님세계에 계시는 모든 여래 가운데 이 보살의 10지를 환희심으로 설하지 않는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더없이 수승한 미묘법이며, 또한 보살의 광명의 법문(法門)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10지의 일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이여, 이 일은 불가사의하니, 이른바 보살마하살의 모든 지(地)의 지혜입니다.”
【論】무슨 까닭에 청하지 않았는데도 설법하였는가? 만약 자진하여 설하지 않으면 대중들이 설법할 것인지 설법하지 않을 것인지 알지 못하고, 또 무슨 법을 설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015_0006_b_07L論曰:何故不請而說?若不自說,衆則不知爲說不說,又復不知欲說何法。
‘서원(誓願)을 잘 결정한다’는 것은 초지(初地) 중의 ‘보리심을 낸다’는 것과 같으니, 이 본분 중에서 마땅히 알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잘 결정한 것[善決定]’이라는 것은 진실한 지혜가 포섭하기 때문이니, 잘 결정하는 것이 곧 이 선결정이다. 이는 이미 초지에 들어갔으니, 신지(信地)에 포함되지 않는다.
잘 결정하는 것에 여섯 종류가 있다. 첫째,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것을 잘 결정하는 것이니, 진여관(眞如觀)은 일미상(一味相)이기 때문으로, 경의 ‘혼잡함이 없다’는 것과 같다. 둘째, 진실대로 잘 결정하는 것이니, 일체 세간 경계가 아닌 출세간이기 때문으로, 경의 ‘볼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셋째, 수승하게 잘 결정하는 것이니, 큰 법계이기 때문이며 일체 부처님의 근본이기 때문이니, 경의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다’는 것과 같다. 또한 크다, 수승하다, 높다, 넓다는 것은 본체는 하나인데 이름만 다른 법상의 뜻이기 때문이며, 일체의 법은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015_0006_c_01L넷째, 원인[因]에 대해 잘 결정하는 것[因善決定]이니, 다음 두 종류가 있다. 첫째로 무상(無常)한 애욕의 결과[果]를 이루는 원인에 대해 잘 결정하는 것이니, 이는 원인이 마치 허공과 같은데 이에 의지하여 온갖 색(色)을 내어 색이 다하지 않는 것으로, 경의 ‘끝없기가 허공과 같다’는 것과 같다. 둘째로 항상한 결과의 원인에 대해 잘 결정하는 것이니, 열반도(涅槃道)를 얻는 것으로, 경의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이란 것과 같다.
여섯째, 겁내지 않고 잘 결정하는 것이니, 일체 부처님의 지혜의 지위에 들어가 겁내지 않기 때문이니, 경의 ‘불자여, 이 보살들은 현재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이 10지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내어 세상에 안주하여 불법을 지키기 때문이니, 경의 ‘여러 불자여, 이 보살의 10지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설했고, 지금도 설하며, 앞으로도 설할 것이다’라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에 보살 10지에 한정해서 설했는가? 열 가지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이 그 장애인가?
015_0006_c_15L何故定說菩薩十地?對治十種障故。何者一障?
첫째 범부의 아상(我相)의 장애, 둘째 중생의 몸 등에 삿된 행위를 하는 장애, 셋째 듣고 생각하고 닦는 등의 여러 법에 어두워 잊어버리는 장애, 넷째 법을 이해하는 데 게으른 장애, 다섯째 몸이 청정하다는 아만(我慢)의 장애, 여섯째 미세한 번뇌 습기(習氣)의 장애, 일곱째 세상(細相)6)의 습기의 장애, 여덟째 무상(無相)에 행(行)이 있는 장애, 아홉째 중생을 잘 이익되게 하지 못하는 장애, 열째 모든 법에 자재하지 못하는 장애이다.
015_0007_a_01L무슨 까닭에 10지의 처음을 환희지라 이름하고, 나아가서 열 번째를 법운지라 이름했는가? 위없는 자리(自利)와 이타행(利他行)을 성취하여 처음으로 성인(聖人)의 경지를 증득함에 환희심이 많은 까닭에 환희지라 이름하였다. 그릇된 마음으로 계율을 범하는 번뇌의 때를 벗어나 청정한 계율을 구족한 까닭에 이구지라 이름하였다. 듣고 생각하고 닦음에 따라 법을 비추어 보면 법이 잘 나타나는 까닭에 명지라 이름하였다.
잊히지 않는 번뇌의 섶을 지혜의 불이 잘 태우는 까닭에 염지라 하였다. 출세간의 훌륭한 지혜 방편을 얻어 제도하기 어려운 중생을 능히 제도하는 까닭에 난승지라 이름하였다. 반야바라밀행에 미흡함이 있으나 큰 지혜가 앞에 나타나는 까닭에 현전지라 이름하였다. 무상행(無相行)을 잘 닦아 공용(功用)이 구경에 이르러 능히 세간과 2승(乘)의 출세간도를 뛰어넘는 까닭에 원행지라 이름하였다.
이와 같이 법왕(法王)의 지위를 받는 것이 마치 태자가 다른 왕자들에 있어 자재한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세한 지혜의 장애가 있어 완전히 자재하지는 못하니, 이 장애를 치료하여 제거하였기 때문에 불지(佛地)라 한다. 또 아기가 잉태되어 뱃속에 있는 것처럼 보살의 10지도 역시 이와 같으니, 모든 지(地)에는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뱃속에 있을 때에도 다음의 10시(時)가 있다. 첫째, 다라바신(陀羅婆身)으로 있을 때이다. 둘째, 패라바신(捭羅婆身)으로 있을 때이다. 셋째, 시라타신(尸羅他身)으로 있을 때이다. 넷째, 견고한 몸[堅身]으로 있을 때이다. 다섯째, 형상이 색신과 흡사한 몸[形相似色身]으로 있을 때이다.
015_0007_b_01L여섯째, 성품과 모습이 서로 흡사한 몸[性相似身]으로 있을 때이다. 일곱째, 업이 움직이는 몸[業動身]으로 있을 때이다. 여덟째, 만족한 몸[滿足身]으로 있을 때이다.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신체 기관이 만족한 때[八地]와 남녀의 구별이 만족한 때[九地]와 넓고 긴 여러 모습이 만족한 때[十地]이다. 이와 같이 10시(時)는 여러 지(地)와 서로 흡사하다.
‘불자여, 나는 모든 부처님세계에 계시는 모든 여래 가운데 이 보살의 10지를 환희심으로 설하지 않는 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 법이 수승함을 나타내어, 당시에 모인 대중들로 하여금 더욱 법을 갈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세계란 그 가운데서 성불(成佛)하는 곳이니, 비유하자면 벼를 심는 논과 같다. 가서 불사(佛事)를 짓는 것을 역시 부처님세계라고 한다.
환희심으로 설하는 것은 그 가운데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아함(阿含)의 뜻을 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증입(證入)의 뜻을 설하는 것이다. 마하살은 세 종류의 큼[大]이 있으니, 첫째, 서원이 큼[願大]이며, 둘째, 행이 큼[行大]이며, 셋째, 중생에게 주는 이익이 큼[利益衆生大]이다. ‘수승한 미묘법’이란 모든 법문 가운데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광명’이란 이 대승의 법이 일체의 다른 법문을 환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법문’이란 이름을 법(法)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10지의 일을 분별한다’는 것은 세간의 지혜로 알고 있는 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 일은 불가사의하니, 이른바 보살마하살의 모든 지(地)의 지혜이다’라는 것은 출세간의 지혜를 나타내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세간의 분별지(分別地)의 지혜로 보살의 청정한 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본분을 설했으니, 어떠한 것이 청분(請分)인가?
【經】이때 금강장보살은 보살 10지의 이름들을 말하고는 묵묵히 있을 뿐 다시 분별하지 않았다. 그때 모든 보살 대중들은 보살 10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듣고 모두 이에 대한 해설을 듣기를 갈망하여 저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인연으로 이 금강장보살이 보살 10지의 이름들을 말하고는 묵묵히 있기만 할 뿐 다시 해석해 주지 않는 것일까?’
015_0007_c_01L
무슨 까닭으로 청정한 깨달음에 생각[念]과 지혜[智]의 공덕 갖추신 그대 매우 미묘한 10지의 이름만 말하고 힘이 있음에도 해석하지 않으십니까?
015_0007_c_01L何故淨覺人, 念智功德具, 說諸上妙地,
有力不解釋?
모든 대중 결정한 뜻이 있고 보살이라는 큰 명칭이 있건만 무슨 까닭에 지(地)의 이름만 말하고 그 뜻은 설명하지 않으십니까?
015_0007_c_03L決定此一切, 菩薩大名稱,
何故說地名, 而不演其義?
이 대중들 모두 듣기를 바라고 불자들의 지혜 두려움이 없으니 이러한 여러 지(地)의 뜻을 모쪼록 분별하여 설명해 주소서.
015_0007_c_04L此衆皆樂聞,
佛子智無畏, 如是諸地義, 願爲分別說。
이 대중들 모두 청정하고 게으름을 떠나 장엄하오며 견고한 수행에 편안히 머물고 공덕과 지혜가 구족하옵니다.
015_0007_c_05L此衆皆淸淨, 離懈怠嚴淨, 安住堅固中,
功德智具足。
서로서로 모두 우러러 보고 일체가 다 함께 공경하기를 꿀벌이 좋은 꿀을 바라듯이 목마른 이 감로수 생각하듯이 하옵니다.
015_0007_c_07L迭共相瞻住, 一切咸恭敬,
如蜂欲熟蜜, 如渴思甘露。
【論】무슨 까닭에 묵묵히 있기만 했는가? 대중들로 하여금 설법을 청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며, 보살의 존경하는 법을 더욱 증장시키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해탈월보살이 처음 설법을 청했는가? 저 대중들 가운데 상수(上首)이기 때문이며, 다른 이가 물으면 대중을 혼란케 하여 조복하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게송으로 설법을 청했는가? 적은 글자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며, 일반적으로 찬탄하는 이들이 게송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015_0007_c_12L何故偈頌請?少字攝多義故,諸讚歎者多以偈頌故。
이 다섯 수(首)의 게송은 어떠한 뜻을 설하였는가? 설법하는 이와 청법(聽法)하는 이가 모두 아무런 허물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니, 만약 허물이 있는 이가 있다면 설해서는 안 된다.
015_0007_c_13L此五偈說何等義?顯示說者聽者無諸過故,若有過者則不應說。
이 게송은 설법하는 이가 청정한 깨달음으로 허물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고, 또 청법하는 이가 같은 법을 수행하려는 확고한 의지[決定]가 있고, 법문을 듣기 좋아함을 나타내 보이고, 또 여타의 사람들도 마음이 밝음을 나타내 보이고, 또한 이 대중들이 모두 법문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려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게송에서 말했듯이 대중들이 서로서로 모두 우러러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하여 설법하는 이를 두고 찬탄하였는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청정한 깨달음에 생각[念]과 지혜[智]의 공덕 갖추신 그대 매우 미묘한 10지의 이름만 말하고 힘이 있음에도 해석하지 않으십니까?
015_0007_c_19L何故淨覺人, 念智功德具, 說諸上妙地,
有力不解釋?
‘무슨 까닭으로 오직 청정한 깨달음’을 찬탄했는가? 청정한 깨달음이 설법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깨달음[覺]은 각관(覺觀)이라 하니, 이는 입과 말의 행(行)에 청정한 설법의 인(因)이 있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설법하지 않았는가?
015_0007_c_21L何故唯歎淨覺?淨覺是說因故。覺名覺觀。是口言行有淨說因,何故不說?
015_0008_a_01L청정한 깨달음을 찬탄하는 이유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대치(對治)를 포괄하는 섭대치(攝對治)이며, 둘째는 모든 허물을 여의는 이제과(離諸過)이다. 이 가운데 ‘생각과 지혜의 공덕을 갖추었다’는 것은 대치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료할 대상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된 깨달음[雜覺]이며, 둘째는 잡된 깨달음의 인(因)인데, 기억과 상상에 따라 분별하기 때문이다.
생각[念]이란 4념처(念處)이니, 잡된 깨달음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지혜[智]란 진여 무상(眞如無相)의 지혜이니, 잡된 깨달음이 기억과 상상에 따라 분별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밖의 나머지 부분은 모든 허물을 여의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허물에 세 종류가 있으니, 이 세 허물이 있는 이는 설법할 수 없다. 무엇이 세 허물인가? 첫째, 인색하고 질투심이 많은 것이며, 둘째, 설법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며, 셋째, 설법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인색’이란 법을 남에게 설해 주기를 아까워하는 마음이고, ‘질투’란 다른 이의 뛰어난 지혜를 시기하는 것이다. ‘공덕을 갖추었다’는 것은 성내지 않음 등의 공덕을 갖추어 첫째 허물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며, ‘매우 미묘한 10지를 말했다’는 것은 둘째 허물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며, ‘힘이 있다’는 것은 셋째 허물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법하는 이를 대상으로 한, 청정한 깨달음에 대한 두 종류의 찬탄을 말하였다. 다음은 청법하는 이에 대한 찬탄이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대중 결정한 뜻이 있고 보살이라는 큰 명칭이 있건만 무슨 까닭에 지(地)의 이름만 말하고 그 뜻은 설명하지 않으십니까?
015_0008_a_12L決定此一切, 菩薩大名稱, 何故說地名,
而不演其義?
‘결정한 뜻이 있다’는 것은 지혜가 명료(明了)하기 때문이다. 결정에는 다음의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상결정(上決定)이니 큰 보리를 발원하기 때문이며, 둘째, 명문결정(名聞決定)이니 다른 사람의 선(善)을 공경하기 때문이며, 셋째, 섭수결정(攝受決定)이니 저 설법하는 이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송에서 ‘보살’, ‘큰 명칭’, ‘지(地)의 이름만 말한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차례로 알아야 한다. 아무리 결정한 뜻이 있어 법을 받아들일 그릇이 된다 하더라도, 마음에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또한 설법해 주어서는 안 된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 대중들 모두 듣기를 바라고 불자들의 지혜 두려움이 없으니 이러한 여러 지(地)의 뜻을 모쪼록 분별하여 설명해 주소서.
015_0008_a_20L此衆皆樂聞, 佛子智無畏, 如是諸地義,
願爲分別說。
015_0008_b_01L 결정은 이 가운데 증득한 결정[證決定]이 아닌 아함결정(阿含決定)이 있고, 현전하는 결정(現前決定)이 없는 비현전결정(非現前決定)이 있다. 이와 같은 결정은 법의 그릇[法器]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법을 듣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대중들은 결정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법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게송에서 ‘불자들의 지혜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지혜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법을 증득한 것[證法]이고, 둘째는 현재 섭수(攝受)하는 것[現受]이다. 이와 같이 대중의 법의 그릇이 충분함을 잘 알고 금강장보살에게 ‘이러한 여러 지(地)의 뜻을 모쪼록 분별하여 설명해 주소서’하고 청하였다. 이상으로 같은 법을 수행하는 대중이 결정이 있어 공덕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찬탄하였다. 다음은 다른 대중[異衆]에 대한 찬탄이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 대중들 모두 청정하고 게으름을 떠나 엄정(嚴淨)하오며 견고한 진리에 편안히 머물고 공덕과 지혜가 구족하옵니다.
015_0008_b_07L此衆皆淸淨, 離懈怠嚴淨, 安住堅固中,
功德智具足。
청정이란 혼탁하지 않은 것이다. 혼탁에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혼탁들을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섯 가지 혼탁인가? 첫째는 불욕탁(不欲濁:설법을 바라지 않는 것), 둘째는 위의탁(威儀濁:위의가 엄숙하지 못한 것), 셋째는 개탁(蓋濁:번뇌에 덮인 것)이다. 넷째는 이상탁(異想濁)이니, 남의 장점을 질투하여 자기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부족공덕탁(不足功德濁)이니, 선근이 미약한 까닭에 다른 사람의 설법에 마음이 즐겨 머물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는 치탁(癡濁)이니, 우매함 따위를 말한다.
이 게송에서 ‘서로서로 모두 우러러 본다’는 것은 총상(總相)이고, ‘일체가 다 함께 공경한다’는 것은 별상(別相)이다. 이와 같이 위의 나머지 게송들도 처음 구(句)는 총상이고 나머지 구는 별상이다. 동상(同相)과 이상(異相),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게송으로 말한다.
큰 지혜로 두려움이 없는 금강장보살은 이 말을 듣고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즉시 게송으로 이렇게 말하네.
015_0008_c_06L大智無所畏, 金剛藏聞已, 欲令大衆悅,
卽時說頌曰:
제일 어렵고 희유하게 어려운 보살들이 행하고 보이는 10지의 일을 잘 분별하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라네.
015_0008_c_08L難第一希有, 菩薩所行示,
地事分別上, 諸佛之根本。
미묘하고 보기 어렵고 생각도 여의었고 마음자리[心地] 아니라면 얻기 어렵다네. 그 경계 참으로 무루의 지혜이니 듣는 사람들 아득하여 미혹하리라.
015_0008_c_09L微難見離念,
非心地難得, 境界智無漏, 若聞則迷悶。
마음 지키기를 금강과 같이 부처님의 지혜를 깊이 믿나니 마음자리 무아(無我)의 지혜라야 미세한 그 지혜 들을 수 있으리.
015_0008_c_10L持心如金剛, 深信佛智慧, 心地無我智,
能聞智微細。
허공에 채색 그림 그리는 듯 허공에 바람이 지나가는 듯 지혜도 이와 같이 분별하나니 부처님 무루 지혜 보기 어렵네.
015_0008_c_12L如彩畫虛空, 如虛空風相,
智如是分別, 難見佛無漏。
내 생각에 부처님의 지혜는 가장 거룩하여 세간에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려운 희유한 법인지라 이런 까닭에 내가 묵묵히 있었다네.
015_0008_c_13L我念佛智慧,
第一世難知, 難信希有法, 是故我默然。
【論】위의 첫째 게송에서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란 말은 총정수답상(總正詶答相)이다. 수답(詶答:대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감수답(堪詶答:능히 대답함)이고, 둘째는 불겁약수답(不怯弱詶答:겁내지 않고 대답함)이다. 게송에 말했듯이 큰 지혜가 있고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불감답(不堪答:답하지 못함)을 여의고, 부정답(不正答:바르지 않은 대답)을 여의는 것이니, 이 두 구(句)는 자기와 남이 허물이 없음을 보인다. 무엇이 정답상(正答相:바른 대답의 모습)인가? 이 법은 설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이다. 어찌하여 설하기 어려운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제일 어렵고 희유하게 어려운 보살들이 행하고 보이는 10지의 일을 잘 분별하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라네.
015_0008_c_20L難第一希有, 菩薩所行示, 地事分別上,
諸佛之根本。
015_0009_a_01L 어렵다는 것은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가장 어려움[最難]과 일찍이 없던 어려움[未曾有難]이다. 이는 게송에 말했듯이 제일이기 때문이며, 희유하기 때문이니, 이 두 구는 설법하기 어려움을 보인다. 무엇이 어려움인가? 게송에 ‘보살들이 행하고 보이는, 10지의 일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보살이 행한다’는 것은 출세간의 지혜이고, ‘보인다’는 것은 나타내어 보이는 것이다.
미묘하고 보기 어렵고 생각도 여의었고 마음자리 아니라면 얻기 어렵다네. 그 경계 참으로 무루의 지혜이니 듣는 사람들 아득하여 미혹하리라.
015_0009_a_09L微難見離念, 非心地難得, 境界智無漏,
若聞則迷悶。
이 게송에서 ‘얻기 어렵다’는 것은 총상이고, 나머지는 별상이다. 얻기 어려운 것은 증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얻기 어려움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묘하여 얻기 어려움이며, 둘째는 보기 어려워 얻기 어려움이고, 셋째는 생각을 여의어 얻기 어려움이고, 넷째는 마음자리가 아니라면 얻기 어려움이다.
‘미묘하여 얻기 어렵다’는 것은 듣고 아는 지혜[聞慧]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친 일[麤事]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보기 어려워 얻기 어렵다’는 것은 생각하여 아는 지혜[思慧]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을 여의어 얻기 어렵다’는 것은 세간의 닦아서 아는 지혜[修慧]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 3계(界)의 심(心)ㆍ심수법(心數法)의 분별과 세간의 수도의 지(智)의 경계가 아님을 보인다.
‘마음자리[心地]가 아니라면 얻기 어렵다’는 것은 보생(報生)을 잘 얻는 수도의 지혜의 경계가 아님을 나타내어 보인다. 여기서 마음의 경계가 마음자리임을 보였으니, 그렇다면 어떠한 경계인가? 게송에서 지혜의 경계라 하였으니, 어떠한 것이 지혜의 경계인가? 진실된 뜻[實義]을 아는 것이다.
‘미세한 그 지혜 들을 수 있으리’란 것은 알기 어려움을 뜻하니, 이러한 미세한 지혜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시 비유로 미세한 지혜에 대해 설명하겠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015_0009_b_15L能聞智微細者,難知。如是微細,如前所說。復以譬喩顯微細義,偈言:
허공에 채색 그림 그리는 듯 허공에 바람이 지나가는 듯 지혜도 이와 같이 분별하나니 부처님 무루 지혜 보기 어렵네.
015_0009_b_17L如彩畫虛空, 如虛空風相, 智如是分別,
難見佛無漏。
이 게송은 마치 벽에 그림을 그리듯 허공에 채색 그림을 그리면 그 가운데 머물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마치 나뭇잎에 바람이 불듯 허공에 바람이 불면 그 가운데 머물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고 바람이 부는 이러한 두 가지 동작들이 허공중에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니, 이와 같은 허공중의 일은 말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이렇게 그림과 바람의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이다.
015_0009_c_01L자성(自性)이 아닌 까닭에 볼 수 없으니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나그네[客:자성의 地를 주인이라 하면 언설이 客이 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 수 없을 뿐이지 이 가운데 설명할 수 있는 언설(言說)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비유와 같이 부처님의 지혜는 언설로 여러 지(地)를 밝히고 비교 분별하는 방법을 통하여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그림은 자구(字句)에 비유하고 바람은 음성에 비유하였으니, 왜냐하면 자구와 음성이 서로 의지하여야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하는 이는 그림과 바람 이 두 가지 일을 설하고, 듣는 이 역시 이 두 가지 일을 들으니, 만약 이처럼 설할 수 있고 이처럼 들을 수 있고 이처럼 보기 어렵다면, 무슨 까닭에 설하지 않는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經】이때 해탈월보살이 이 말을 듣고 금강장보살에게 청하였다. “불자시여, 지금 청정한 큰 보살 대중이 모였는데, 깊은 마음이 청정하고, 모든 생각이 청정하며, 모든 행(行)을 잘 모으고,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하며,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잘 모읍니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하고, 어리석음과 의혹과 뉘우침을 여의어 번뇌에 물듦이 없고, 깊은 마음에 잘 머물러 불법을 믿고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장하신 불자시여, 이 뜻을 설명하여 주소서. 이 보살들은 이 깊은 법을 모두 증득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論】성자(聖者)인 해탈월보살이 무슨 까닭에 다시 이 대중을 찬탄하였는가? 위의 게송에서 금강장보살이 ‘세간에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다’고 했기에, 이곳에 모인 대중들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깊은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총상이다. 깊은 마음이 청정한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아함정(阿含淨)이고 둘째는 증정(證淨)이다.
015_0010_a_01L아함정에 다음의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로 욕정(欲淨)은 아함을 생각함에 따라 방편8)인 염각(念覺)9)이 청정함을 얻는 것이니, 경의 ‘모든 생각이 청정하다’는 것과 같다. 둘째로 구정(求淨)은 부처님을 따르는 몸과 입의 공경한 행(行)을 얻는 것이니, 경의 ‘모든 행(行)을 잘 모은다’는 것과 같다. 셋째로 수지정(受持淨)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불법을 많이 듣고 기억하여 착오가 없는 것이니, 경의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한다’는 것과 같다.
넷째로 생득정(生得淨)은 점차 생보(生報)10)가 수승하도록 수승한 생보를 생각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니, 경의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잘 모은다’는 것과 같다. 다섯째로 행정(行淨)은 법을 잘 증득하기를 구하고 욕심을 없애는 두타행 등을 익혀 많은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니, 경의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한다’는 것과 같다.
증정(證淨)에 다음 네 종류가 있다. 첫째로 득정(得淨)은 현전하는 지혜[現智:법이 마음에 나타남을 말함]로 잘 결정하는 것이니, 경의 ‘어리석음과 의혹과 뉘우침을 여읜다’는 것과 같다. 둘째로 불행정(不行淨)은 수도하는 중에 일체의 번뇌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니, 경의 ‘번뇌에 물듦이 없다’는 것과 같다.
셋째로 무염족정(無厭足淨)은 소승을 좋아하지 않고 수승한 대승을 얻기를 희망하는 마음이니, 경의 ‘깊은 마음에 잘 머물러 불법을 믿는다’는 것과 같다. 깊은 마음이란 희구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마음을 결정하는 것이며, 저 수승한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로 불수타교정(不隨他敎淨)은 도(道)의 구경에 이르러 스스로 정행(正行)을 닦는 것이니, 경의 ‘불법을 믿고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經】이때 금강장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비록 이 보살 대중은 깊은 마음이 청정하고, 모든 생각이 청정하고, 모든 행(行)을 잘 모으고,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하고,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잘 모으고,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하고, 어리석음과 의혹과 뉘우침을 여의어 번뇌에 물듦이 없고,
015_0010_b_01L 깊은 마음에 잘 머물러 불법을 믿고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밖의 여타 소승법을 좋아하는 이가 매우 깊어 불가사의한 이 법을 들으면 의심[疑]과 미혹[惑]을 많이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무명(無明)의 긴긴 어둠 속에서 온갖 무익한 고뇌를 겪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묵묵히 있었습니다.”
한 법[一法] 가운데 두 가지 허물이 있으니, 의심이란 정행(正行)과 서로 어긋나 머뭇거린다는 뜻이고, 미혹이란 마음이 혼미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능히 선법(善法)을 파괴하고 선법을 멀리 떠나게 할 수 있다. 가르침을 받아 실행하지 않게 되는 원인[不受行因]과 가르침을 행하는 일에서 물러나게 되는 원인[受行退因]을 이와 같이 나타내어 보였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일체의 서(書)ㆍ자(字)ㆍ수(數)ㆍ설(說)이 모두 자모(字母:初章)에 포괄되며, 자모가 근본이 되어 자모에 들어가지 않는 서(書)ㆍ자(字)ㆍ수(數)ㆍ설(說)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자여, 10지는 일체 불법의 근본으로, 보살이 이 10지를 구족하게 행하면 능히 일체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시여, 원컨대 이 뜻을 설하소서.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고 신력(神力)으로 가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받아들이고 파괴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015_0010_b_22L是故佛子!願說此義,諸佛護念加以神力,令人信受不可破壞。
015_0010_c_01L【論】성자인 해탈월보살이 무슨 까닭에 다시 거듭 설법을 청했는가? 저들이 의혹한다고 하여 회피해서는 안 되니, 만약 설법하지 않는다면 허물이 많아 일체의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뜻 때문에 거듭 금강장보살에게 청한 것이다.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신력이 있어 저들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할 수 있다면 무슨 까닭에 중생들이 저 법에 대해 오히려 비방할 생각을 일으키는가? 두 가지 정(定)이 있으니, 첫째는 감보정(感報定)이고, 둘째는 작업정(作業定)으로, 이 두 가지 정이란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초로 수행할 때에는 아함에 따라 수행하는 까닭에 일체의 불법을 성취한 것을 증지(證智)라 한다. 서(書)란 글자의 형상이니, 이를테면 ‘사(嘶, sa)’라든지 ‘사(師, ṣa)’라든지 하는 따위 글자의 형상이다. 자(字)란 ‘악(噁, aḥ)’이나 ‘아(阿, a)’ 등의 소리이다. 수(數)란 단어[名]와 구(句)이니, 이 두 가지가 수의 뜻이다. 설(說)이란 말이다. 일체의 서ㆍ자ㆍ수ㆍ설은 모두 자모가 근본이다.
‘최상’이란 총상이며, 또한 ‘최상’이란 증력의 변재가 수승함을 나타낸다. 변재를 찬탄함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지(眞實地)이고, 둘째는 체성(體性)이고, 셋째는 과(果)이다. 진실지란 무루(無漏)의 지혜로, 성문과 연각의 지혜보다 수승하니, 게송에 ‘미묘하여 때 없는 지혜’라 하였다.
체성이란 한량없는 뜻을 설명할 변재를 성취하는 것이니, 게송에 ‘한량없는 뜻을 설명하는 변재’라 하였다. 과(果)란 글자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매끄럽고 훌륭한 글자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니, 게송에 ‘아름답고 미묘한 말로 연설하여 진실한 뜻에 상응한다’고 하였다. 둘째 게송의 위의 구는 아함력을 찬탄하였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생각하여 지니는 청정한 지혜로 열 가지 힘 청정한 마음 얻도록 걸림 없이 뜻을 분별하여 이 10지법을 설하여 주소서.
015_0011_a_10L念堅淸淨慧, 爲十力淨心, 無㝵分別義,
說此十地法。
‘생각하여 지닌다[念堅]’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해 주는 것이니, 이는 보살이 아함에 있어 밝은 지혜로 의혹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증력과 아함력을 찬탄하였다.
015_0011_a_12L念堅者,受持顯說故,是菩薩於阿含中淨慧無疑故。如是歎證力阿含力已,
다음으로 설법을 듣는 이로 하여금 증(證)과 아함에 들어가게 한다. 이런 까닭에 설법을 청한 것이다. 무엇이 증에 들어가는 것인가? 이미 지(地)에 들어간 이는 부처님의 힘을 얻게 하고, 아직 지에 들어가지 못한 이는 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게송에 ‘열 가지 힘 청정한 마음을 얻도록’이라 하였다. 무엇이 아함에 들어가는 것인가? 걸림 없이 뜻을 분별하여 10지의 법을 받아 지니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법하는 이가 증력과 아함력을 성취했음을 찬탄하였다. 다음은 설법을 듣는 대중이 아함력과 증력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찬탄하였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015_0011_a_19L如是歎說者成就證力阿含力已,次復歎聽衆堪受阿含及證力故,偈言:
계율과 선정의 깊고 바른 뜻 아만과 망령된 소견 여의었나니 이 대중들 의혹의 마음 없어 좋은 설법 듣기만 오직 바라네.
015_0011_a_21L定戒深正意, 離我慢妄見, 是衆無疑心,
唯願聞善說。
015_0011_b_01L 이 게송에서 ‘오직 바란다’는 것이 총상이다. ‘오직 바란다’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아함을 구하는 것이며, 둘째는 ‘정증(正證:바른 證得)을 구하는 것이다. 아함을 들을 수 없게 하는 두 가지 망상(妄想)이 있으니, 첫째는 아(我:나)이고, 둘째는 만(慢:오만)이다. 이 아만(我慢) 때문에 법과 법사(法師)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아함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두 가지 대치법(對治法)이 있으니, 첫째는 정(定:선정)이고, 둘째는 계(戒:계율)이다. 정이란 마음을 조복 받는 것이고, 계란 위의(威儀)에 잘 머무는 것이다.
015_0011_b_07L有二種對治堪聞阿含:一、定;二、戒。定者心調伏故,戒者善住威儀故。
다음으로 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두 가지 대치법이 있으니, 첫째는 정견(正見:바른 견해)이고, 둘째는 정의(正意:바른 생각)이다. 정견이란 뜻을 잘 생각하는 것이고, 정의란 환희를 얻는 것이다. ‘깊다’는 것은 미세한 의식으로 잘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대중들의 법을 구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 감을 나타내어 보였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뜻이 어떠한가? 마치 물은 씹지 않고 얻는 대로 마시는 것처럼, 이와 같이 지혜를 들을 때에도 처음 듣고는 즉시 받아들이고 듣는 대로 받아 지니는 것이다. 마치 음식을 씹어 먹으면 신체의 힘이 조성(助成)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지혜를 생각할 때에도 들은 법을 씹어 지력(智力)을 조성한다.
마치 좋은 약을 복용하면 약 기운이 병을 제거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여 아는 지혜[聞思慧]로 바른 뜻에 따라 법답게 수행하여 일체 번뇌의 묵은 병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015_0011_b_20L如服良藥藥行除病。如是具聞思慧,隨順正義如法修行,遠離一切煩惱習患。
015_0011_c_01L 마치 뭇 벌들이 꿀에 의지하여 즐거이 노니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성인(聖人)은 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아는 지혜의 과(果)에 의지하여 현법(現法:진리가 마음에 나타난 것)의 맛을 즐기고 안락행을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법하는 이와 듣는 이를 찬탄하여 설법을 청하였다. 다음은 설할 법의 이익을 찬탄하여 다 함께 청하였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장하십니다. 청정한 지혜로 때 없는 그 수승한 자리 설하여 걸림 없는 열 가지 힘 갖추게 하고 선서(善逝)의 길[道] 남김없이 말씀하소서.
015_0011_c_03L善哉淸淨智, 說勝地無垢, 具十力無㝵,
盡說善逝道。
‘장하십니다’라는 것은 설할 법 가운데 잘 구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하다’는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소의(所依)이고, 둘째는 체성(體性)이고, 셋째는 과(果)이다.
015_0011_c_05L善哉者,所說法中善具足故。善哉有三種:一、所依;二、體性;三、果。
소의란 청정한 지혜를 뜻한다. 체성이란 설하는 여러 지(地)로 일찍이 설한 적이 없는 법이다. ‘수승한 자리’란 지를 견주어 봄에 수승한 것이며, ‘때 없다[無垢]’는 것은 설법이 뜻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뜻에 어긋난 설법에 세 종류의 때[垢]가 있으니, 첫째는 전도된 설법[倒說]이고, 둘째는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고, 셋째는 잘못 듣는 것[誑聞]이다.
1)연야달다(演若達多)라는 광인(狂人)이 홀연히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거울 속의 머리에 눈썹과 눈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다가 다시 정작 거울을 보고 있는 자기의 머리를 돌아보니 눈썹과 눈이 보이지 않자, 도깨비라고 여겨 미친 듯이 달아났다고 한다. 거울 속의 머리는 망상(妄想)에, 자신의 본래 머리는 진성(眞性)에 비유하였다. 『능엄경』에 보인다.
2)『십지의기(十地義記)』에 ‘처음과 끝[始終]의 법체(法體)이니, 아함은 처음[始]이고 증은 끝[終]이며, 또 아함은 정교(淨敎)를, 증은 앎[知得]을 뜻한다’고 하였다.
3)도를 배우는 이가 반드시 학습해야 할 다섯 가지로, 언어와 문자를 밝히는 성명(聲明)과 모든 공예ㆍ기술ㆍ산수 따위를 밝히는 공교명(工巧明)과 의술을 밝히는 의방명(醫方明)과 정사(正邪)를 고증하여 진위(眞僞)를 잘 따져서 밝히는, 일종의 논리학 격인 인명(因明)과 자가(自家)의 종지(宗旨)를 밝히는 내명(內明)을 말한다.
4)이에 대한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금강선론(金剛仙論)』에 의하면 일체의 법이 모두 무상(無常)이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임을 아는 것이라 하였고, 『별번론(別飜論)』에 의하면 일체법이 자상(自相)이고 동상(同相)이고 불이상(不二相)임을 아는 것이니, 자상은 세제(世諦)이고 동상은 진제(眞諦)이고 불이상(不二相)은 일실제(一實諦)로 일체의 법에는 동일하게 이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 같은 모습[三同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5)『금강선론』에 의하면 이법(理法)을 능히 아는 진실의정견(眞實義正見), 행법(行法)을 능히 아는 행정견(行正見), 교법(敎法)을 능히 아는 교정견(敎正見), 이법의 실정[情取]이 같지 않음을 능히 아는 이이변정견(離二邊正見), 행법이 덕을 성취시키고 정(情)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아는 부사의정견(不思議正見), 교법이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설법한다는 것을 아는 근욕성정견(根欲性正見)으로 설명한다.
6)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허공과 땅ㆍ물ㆍ불ㆍ바람의 미세한 다섯 가지 요소(要素)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7)『십지의기』에 ‘행하는 일을 이치[理]에 나아가 명명(命名)하면 의주가 되니, 이치의 차원이기 때문에 설할 수 없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