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이상에서 설분(說分)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교량승분(校量勝分)을 설하겠다. 어떤 것이 교량승분인가? 보살이 이 지(地)에 머물면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수승하기 때문이다. 교량승(挍量勝)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서원의 수승함[願勝]이며, 둘째는 수행의 수승함[修行勝]이며, 셋째는 과(果)의 이익의 수승함[果利益勝]이다. 무엇이 서원의 수승함인가? 이른바 열 가지 큰 서원[大願]이다.
【經】“보살이 이와 같이 보살의 환희지에 안주하여 여러 큰 서원을 발하고 이와 같은 큰 방편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큰 행(行)을 성취하나니, 이른바 ‘남김없이 일체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므로 모든 종류를 구족하여 높고 깊은 믿음이 청정하여지이다’라고 하나니,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가 허공과 같아, 미래가 다하고 일체 겁수(劫數)와 일체 부처님의 성도(成道) 수(數)가 다하도록 크게 공양하고 공경하여 쉼이 없느니라.”
이 처음의 서원(誓願) 가운데 여섯 가지 큼[大]이 있으니, 이름하여 큰 서원[大願]이라 한다. 첫째는 복전이 큼[福田大]이니, 경의 ‘남김없이 일체의 부처님께 다 공양하고 다 공경한다’는 것과 같다. 둘째는 섬김이 큼[供事大]이니, 경의 ‘모두를 구족하였다’는 것과 같다. 셋째는 마음이 큼[心大]이니, 경의 ‘높고 깊은 믿음이 청정하다’는 것과 같다.
‘일체 부처님의 보리를 섭수(攝受)한다’는 것은, 이른바 법을 증득하는 것으로 세 가지 부처님의 보리법(菩提法)을 증득하고, 이 증득한 법을 섭수하여 교화를 펴 나가는 것이다. ‘일체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법을 모두 남김없이 지킨다’는 것은 법을 수행함에 있어 수행할 때의 온갖 장애에서 보호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이름하여 세 가지 성취라 한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다라 등 아함(阿含)의 차례에서 법륜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성취이고, 둘째는 세 가지 정각(正覺)을 증득한 증득의 성취이고, 셋째는 수행 및 여실(如實)한 수행을 통하여 정각을 얻는 성취이다. 이를 이름하여 세 가지 성취라 한다. 세 가지 부처님의 보리란 성문과 벽지불을 또한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
【經】“또 큰 서원을 세우니, 이른바 ‘일체 남김이 없이 성불한 부처님께서 일체 세계에 머무는 곳인, 도솔천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와 모태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고 처음 태어났을 때, 출가할 때, 불도를 이루었을 때, 법률을 굴리기를 청할 때, 대열반에 듦을 보일 때, 나는 이러한 때에 모두 가서 공양하고 법을 섭수(攝受)하여 상수(上首)가 되어 일체처(一切處)에서 한꺼번에 법을 이루고 일시에 법이 굴려지이다’라고 하나니,
015_0023_c_01L【論】세 번째 큰 서원이다. ‘일체 남김이 없이 성불한 부처님께서 일체 세계에 머무는 곳’이란 일체의 응신불(應身佛)이 가없는 일체 세계의 모든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며, 어떠한 세계의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인가에 따라 감응하여 중생의 견해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도솔천에서 내려와 대열반에 들 때까지 나는 이러한 때에 모두 가서 공양하고 법을 섭수하여 상수가 된다’는 것은 저 중생에 따라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편으로, 여래께서 설한 섭법(攝法:四攝法)의 방편으로써 공덕과 지혜와 보리를 돕는 법을 모으는 것이다. ‘일체처에 한꺼번에 법을 이루고 일시에 법을 굴린다’는 것은 전후(前後)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인간 세상에 있고 천상의 즐거움을 버리는가? 우리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인간세상 가운데로 와서 태어나는 것이니, 따라서 더 한층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015_0023_c_14L何故人中捨上天樂?愍我等故來生人中,生增上敬重心故。
무슨 까닭에 모태에 있는가? 중생과 함께 태어나 힘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스스로 정각을 이루는가? 다른 부처님의 교화로 대장부의 힘을 나타낸 것이 아니고, 타인을 통해서 보리를 증득함을 성취한 것이 아님을 보이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큰 열반에 들어감을 보이는가? 나태한 중생들로 하여금 근면한 마음으로 수도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015_0024_a_01L【經】“또 큰 서원을 세우니, 이른바 ‘일체 보살이 행하는 광대하고 한량없고 잡되지 않은 모든 바라밀이 섭수(攝受)하는 것이다. 모든 지(地)에서 청정하게 내는 온갖 조도법(助道法)은 전체인 모양[總相]ㆍ개체인 모양[別相]ㆍ같은 모양[同相]ㆍ다른 모양[異相]ㆍ이루는 모양[成相]ㆍ부수는 모양[壞相]으로 일체 보살이 행하는 여실한 지(地)의 도(道) 및 모든 바라밀의 방편업(方便業)을 설하여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받아 행하고 마음이 증장(增長)하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나니,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가 허공과 같아, 미래가 다하고 일체 겁수(劫數)와 행수(行數 : 모든 菩薩行의 수)가 다하도록 증장하여 쉼이 없느니라.”
저 보살행(菩薩行)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종(種種)이며, 둘째는 체(體)이며, 셋째는 업(業)이며, 넷째는 방편이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받아 행하게 하는 것이다.
015_0024_a_08L彼菩薩行有四種:一種種;二體;三業;四方便。以此四種教化令其受行。
그렇다면 무엇이 보살행의 종종인가? 세간행(世間行)에 세 가지가 있다. 넓은 것으로 말하면 초지(初地)로부터 6지(地)에 이르고, 큰 것으로 말하면 7지(地)이고, 한량이 없는 것으로 말하면 8지(八地)로부터 10지(地)에 이르고, 잡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법에 나[我]라는 관념이 없이 평등하여 출세간의 지혜를 관찰하니, 경의 ‘일체 보살이 행하는 광대하고 한량없고 잡되지 않다’는 것과 같다.
【經】“또 큰 서원을 세우니, 이른바 ‘모든 일체의 중생계에서 색(色)이 있는 것, 색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없음도 아닌 것, 생각함이 아닌 것, 생각함이 아닌 것도 아닌 것, 그리고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화(化)하여 태어난 것 등이 3계에 얽매인 채 뒤섞여 6도(道)에 들어가 일체 태어나는 곳의 이름과 물질[名色]에 소속되는데,
【論】다섯 번째 큰 서원이다. 중생을 교화시킨다는 데, 무엇이 중생이며 무슨 뜻인가? 일체 중생에 여섯 가지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거칠고 세밀함[麤細]의 차별이고, 둘째는 태어날 때 의지[生依止]의 차별이고, 셋째는 깨끗하지 않은 곳과 깨끗한 곳의 차별이고, 넷째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차별이고, 다섯째는 자업(自業)의 차별이고, 여섯째는 자체(自體)의 차별이다.
무엇이 거칠고 세밀함의 차이인가? 거칠다는 것은 ‘색(色)이 있는 것’이고, 세밀하다는 것은 ‘색이 없는 것’이다. 색 가운데 거친 것은 ‘생각이 있는 것’이고, 세밀한 것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색이 없는 것 가운데 거친 것은 ‘생각이 없음도 아닌 것’이고, 세밀한 것은 ‘생각함이 아닌 것’과 ‘생각함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다.
이를 거칠고 세밀함의 차별이라 하니, 경의 ‘색이 있는 것, 색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없음도 아닌 것, 생각함이 아닌 것, 생각함이 아닌 것도 아닌 것’과 같다. 태어날 때 의지의 차별이란 경의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화(化)하여 태어난 것’과 같다. 그런데 화하여 태어나는 것[化生]은 어디에 의지하는가? 업(業)에 의지하여 태어난다.
깨끗하지 않은 곳과 깨끗한 곳의 차별이란 경의 ‘3계에 얽매인다’는 것과 같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차별이란 갖가지 몸을 지니는 것이니, 경의 ‘뒤섞여 6도(道)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 자업(自業)의 차별이란 경의 ‘일체 태어나는 곳’과 같다. 자체(自體)의 차별이란 경의 ‘이름과 물질[名色]에 소속된다’는 것과 같다.
015_0024_c_01L둘째는 이미 불법 가운데로 들어간 이들로 하여금 2승(乘)의 보리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경의 ‘일체 세간의 여러 가지 도(道)를 끊는다’는 것과 같다.
015_0024_c_01L二者已入佛法中,令入二乘菩提故,如“經斷一切世閒數道”故。
셋째는 이미 2승의 보리에 들어간 이들로 하여금 무상(無上)의 보리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경의 ‘일체 지혜의 지처(智處)에 머물게 한다’는 것과 같다.
015_0024_c_02L三者已入二乘菩提,令入無上菩提故,如經“令住一切智智處”故。
【經】“또 큰 서원을 세우니, 이른바 ‘모든 일체 세계가 광대하고 한량이 없고 거칠고 세밀하고 어지럽게 있고 거꾸로 있고 바로 있는 것이 마치 제석천의 그물의 차별과 같으며,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차별 입(入)들을 모두 눈앞에 나타나듯이 환히 알아지이다’라고 하나니,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가 허공과 같아, 미래가 다하고 일체 겁수(劫數)와 일체 세계의 수(數)가 다하도록 믿고 들어가[信人] 쉼이 없느니라.”
일체상이란 경의 ‘광대하고 한량이 없고 거칠고 세밀하고 어지러이 있고 거꾸로 있고 바로 있다’는 것과 같다. ‘광대하고 한량이 없다’는 것은 일천 세계, 이천 세계, 삼천 세계 따위를 의미한다. 세밀하다는 것은 어느 세계이든 그 세계의 의식신(意識身)을 따르는 것이고, 거칠다는 것은 어느 세계이든 그 세계의 의색신(意色身)을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의 수승하고 미묘하고 평등한 경계에 들어가, 중생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에 따라 모습을 나타내어지이다’라고 하나니,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가 허공과 같아, 미래가 다하고 일체 겁수(劫數)와 불국토의 수(數)가 다하도록 일체의 국토를 청정히 하여 쉼이 없느니라.”
【論】일곱 번째 큰 서원이다.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모습[相]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체 청정[同體淨]이니, 경의 ‘일체 불국토가 한 불국토이고 한 불국토가 일체 불국토’라는 것과 같다. 둘째는 자재 청정[自在淨]이니, 경의 ‘일체 국토가 평등하고 청정하다’는 것과 같다. 셋째는 장엄 청정[莊嚴淨]이니, 경의 ‘일체 불국토에 신통 장엄 광명한 모습이 구족하였다’는 것과 같다. 광명 장엄은 온갖 보배들로 장엄하는 것이다.
넷째는 수용 청정[受用淨]이니, 경의 ‘일체 번뇌를 여의고 청정한 도를 성취한다’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머무는 곳의 중생 청정[住處衆生淨]이니, 경의 ‘한량없이 지혜로운 중생들이 그 가운데 충만하다’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인연 청정[因淨]이니, 경의 ‘부처님의 수승하고 미묘하고 평등한 경계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 일곱째는 과보 청정[果淨]이니, 경의 ‘중생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과 같다. 이는 지혜와 신통력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015_0025_b_01L【經】“또 큰 서원을 세우니, 이른바 ‘일체 보살과 마음과 행실이 같으며, 함께 선근(善根)을 모아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으며, 일체 보살과 평등하게 한 가지로 관찰하며, 항상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친근히 하여 곁을 여의지 않으며, 뜻대로 부처님의 몸을 나투며, 스스로 마음속에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과 지혜의 힘을 남김없이 잘 알며, 물러나지 않고 뜻대로 할 수 있는 신통을 얻으며,
일체 세계를 남김없이 다닐 수 있으며, 일체 부처님 회상에 모두 몸[身相]을 나툴 수 있으며, 일체 중생이 태어나는 곳에 두루 태어나며, 불가사의한 대승(大乘)을 성취하며, 보살행을 구족하게 행하여지이다’라고 하나니,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가 허공과 같아, 미래가 다하고 일체 겁수(劫數)와 일체 행 수(行數)가 다하도록 대승의 도에 들어가 쉼이 없느니라.”
【論】여덟 번째 큰 서원으로, 다른 승(乘:敎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경의 ‘일체 보살과 마음과 행실이 같다’는 것과 같다.
015_0025_b_09L論曰:第八大願不念餘乘故,如經“一切菩薩同心同行”故。菩薩行有十種:
보살행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함께 선근(善根)을 모아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일체 보살과 평등하게 한 가지로 관찰하는 것이다. 셋째는 항상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친근하여 곁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뜻대로 부처님의 몸을 나투는 것이다. 다섯째는 스스로 마음속에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과 지혜의 힘을 남김없이 잘 아는 것이다.
여섯째는 물러나지 않고 뜻대로 할 수 있는 신통을 얻는 것이다. 일곱째는 일체 세계를 남김없이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여덟째는 일체 부처님 회상에 모두 몸[身相]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아홉째는 일체 중생이 태어나는 곳에 두루 태어나는 것이다. 열째는 불가사의한 대승(大乘)을 성취하며, 보살행을 구족하게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는 공덕행(功德行)을 나타내었고, 둘째는 적정(寂靜)의 평등한 관찰[觀]에 머무는 것이고, 셋째는 모여서 불법을 해설하고 논하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대로 성불(成佛)을 나투는 것이고, 다섯째는 스스로 수승한 마음을 내어 여래의 법신(法身)을 생각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항상 물러나지 않는 신통을 얻는 것이다.
【論】아홉 번째 큰 서원으로, 헛되지 않게 보살행을 행함을 나타내었다. 다시 보살행을 행하는 것은 ‘불퇴전의 법륜(法輪)을 타고 보살행을 행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015_0025_c_12L論曰:第九大願顯不空行菩薩行,復行菩薩行,顯乘不退輪行菩薩行故。
여기서 ‘헛되지 않음[不空]’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짓는 업이 결정되어 헛되지 않은 것으로,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업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차례로 설한 세 구(句)의 뜻을 알아야 하니, ‘나를 보는 중생은 반드시 불법에 결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은 신업(身業)이 헛되지 않음을 밝혔고, ‘나의 음성을 들으면 즉시 진실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구업(口業)이 헛되지 않음을 밝혔으며, ‘마음으로 기뻐하고 공경하여 즉시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의업(意業)이 헛되지 않음을 밝혔다.
둘째는 짓는 이익이 헛되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중생에게는 크게 두 가지 괴로움이 있으니, 첫째는 갖가지 온갖 괴로움이고, 둘째는 빈궁한 괴로움이다. 이를 치료하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경의 ‘약왕 나무[藥樹王]와 같은 몸을 얻으며, 여의주와 같은 보배 몸을 얻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015_0026_a_01L【經】“또 큰 서원을 세우니, 이른바 ‘일체 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며, 한 범부의 도(道)도 여의지 않은 채 일체 범부의 도에서 몸이 처음으로 태어나 도량에 앉고 불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고 중생을 제도함을 보이고, 큰 열반에 듦을 보이고, 모든 부처님 경계의 큰 신통과 지혜의 힘을 나투고,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보살의 환희지(歡喜地)에 머물면서 여러 큰 서원을 세워 이와 같은 큰 방편과 이와 같은 큰 행(行)을 일으키되, 열 가지 서원의 문[願門]을 첫머리로 하여 이러한 십백천만 아승기의 큰 서원을 만족하느니라. 이 보살이 보살의 환희지에 머물러 이와 같은 서원을 일으키느니라.”
015_0026_b_01L업을 짓는다는 것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각(正覺)을 보이는 업業)이고, 둘째는 실제(寶諦)를 설하는 업이고, 셋째는 교화를 증득하는 업이고, 넷째는 갖가지 설법의 업이고, 다섯째는 부처님의 종자를 끊지 않는 업이고, 여섯째는 법륜을 다시 머물게 하는 업이고, 일곱째는 자재(自在)의 업이다.
부처님의 몸을 나툰다는 것은 모든 고난을 제거하고 저 수승한 곳에 태어나, 고(苦)를 없애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증득하고 도(道)를 닦음을 보이는 것이다.
015_0026_b_10L示現佛身者,除諸難處彼彼勝處生,示除苦斷集證滅修道。
셋째 업은 하나의 3보리(菩提)로 법에 나[我]라는 것이 없고 일체의 법성(法性)이 청정한 열반임을 관찰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015_0026_b_11L第三業者,以一三菩提觀法無我一切法性淨涅槃,令衆生信解故。
넷째 업은 한 가지 음성을 가지고 온갖 믿고 이해하여 교화할 만한 중생들에 따라, 일시에 이들로 하여금 모두 마음으로 환희하게 하는 것이다.
015_0026_b_13L第四業者,以一音聲隨種種信解可化衆生,一時皆令心歡喜故。
다섯째 업은 큰 열반을 보이되 보살이 해야 할 것을 끊지 않는 것이다.
015_0026_b_15L第五業者,示現大涅槃而不斷菩薩所行力故。
여섯째 업은 부처님 지혜의 지[佛智地]에 일체 수다라(修多羅) 등을 회복하여 설법이 법도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015_0026_b_16L第六業者,復佛智地一切修多羅等,所說法軌則不失故。
일곱째 업에 있어 법지통(法智通)이란 일체 법에 성상(性相)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고, 여의신통(如意神通)이란 자신이 현생(現生)에 살고 죽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을 마음대로 자재(自在)하는 것이고, 환통(幻通)이란 자기 뜻대로 모든 세상일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법지통은 세간에 머물지 않고 여의신통과 환통은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015_0026_c_01L무슨 까닭에 오직 이 열 가지 큰 서원만 설하였는가? 첫째 서원은 공덕행(功德行)이 만족한 것이고, 둘째 서원은 지혜의 행(行)이 만족한 것이다. 그 다음 다섯 서원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니, 첫째로 어떠한 몸으로 교화할 것인가, 둘째로 어떠한 마음으로 교화할 것인가, 셋째로 중생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넷째로 중생은 어떠한 곳에 머무는가, 다섯째로 자신은 어떠한 곳에 머물러 능히 중생을 교화할 것인가 등의 문제이다.
015_0027_a_01L【經】“10진구로 모든 큰 서원을 이루나니, 무엇이 10인가? 이른바 첫째, 중생계가 다하는 것[衆生界盡], 둘째, 세계가 다하는 것[世界盡], 셋째, 허공계가 다하는 것[虛空界盡], 넷째, 법계가 다하는 것[法界盡], 다섯째, 열반계가 다하는 것[涅槃界盡], 여섯째,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는 세계가 다하는 것[佛出世界盡], 일곱째, 여래의 지혜의 세계가 다하는 것[如來智界盡], 여덟째, 마음이 반연하는 세계가 다하는 것[心所緣界盡], 아홉째, 부처님 경계의 지혜가 들어가는 세계가 다하는 것[佛境界智入界盡], 열째, 세간의 전변ㆍ법의 전변[轉:끊임없이 변하여 간다는 뜻임]ㆍ지혜의 전변하는 세계가 다하는 것이다.
중생계가 다한다면 나의 서원도 다하며, 세계가 다하고, 허공계가 다하고, 법계가 다하고, 열반계가 다하고, 부처님께서 출현하는 세계가 다하고, 부처님 지혜의 세계가 다하고, 마음이 반연하는 세계가 다하고, 부처님 경계의 지혜가 들어가는 세계가 다하고, 세간의 전변ㆍ법의 전변ㆍ지혜의 전변하는 세계가 다한다.
부처님이 출현하는 세계가 다하지 않고, 여래의 지혜의 세계가 다하지 않고, 마음이 반연하는 세계가 다하지 않고, 부처님 경계의 지혜가 들어가는 세계가 다하지 않고, 세간의 전변ㆍ법의 전변ㆍ지혜의 전변하는 세계가 다하지 않으므로, 나의 모든 서원의 선근 또한 다할 수 없다.”
무엇이 중생계인가? ‘중생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어느 곳에 머무는가? ‘세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모든 허공계에 대해서는 ‘허공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무슨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가? ‘법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교화하는 중생들을 어느 곳에 두는가? ‘열반계가 다한다’와 ‘부처님께서 출현하는 세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015_0027_a_15L論曰:於中衆生界盡是摠,世界盡乃至智轉界盡是別。
어떠한 방편을 쓰는가? ‘여래의 지혜의 세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어떠한 반연(攀緣)에 따르는가? ‘마음이 반연하는 세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또 어떠한 세계를 따르는가? ‘부처님 경계의 지혜가 들어가는 세계가 다한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이 문제에 관해서 설하였다.
015_0027_b_01L‘다한다[盡]’는 것은 다하지 않음[不盡]을 나타내 보이니, 생각마다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홉 가지 다함은 세 가지를 대략 설하였다. 세간의 전변[轉]ㆍ법의 전변ㆍ지혜의 전변, 이 세 전변은 이 10진구(盡句)의 수승한 힘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는 이 힘으로 항상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이상으로 서원의 수승함을 설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行)의 수승함인가?
모든 지(地)를 잘 성취하여 두려움 없는 힘과 부처만이 가지는 다른 이들과 다른 공덕[不共法]과 무너지지 않음[不壞]을 구족함과, 불가사의한 불법과 중간도 없고 변제(邊際)도 없는 여래의 경계의 일어남과 한량없는 행문(行門)인 여래의 경계에 들어감과 과보[果]를 성취함을 믿는다.
【論】‘이러한 큰 서원을 내고는 순응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은 저 모든 선근(善根) 가운데 자재(自在)한 수승함을 얻는 것이다. ‘유연한 마음’이란 수승한 즐거운 행[樂行]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믿음을 성취한 이’와 이 가운데 ‘본래의 행입(行入)’1)이란 보살행으로부터 보리의 깨달음을 성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015_0027_b_12L擧要言之,信一切菩薩行,乃至得如來智地說加故。
이 가운데 보살행에 소속된 본래의 행입에 두 가지 모습[相]이 있다. 첫째는 무엇이 보살행인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무엇이 차례로 성취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니, 경의 ‘모든 바라밀을 모아 증장시키며, 모든 지(地)를 잘 성취한다’는 것과 같다.
015_0027_c_01L여기서 보리의 성취에 소속된 본래의 행입에 여섯 가지 수승함이 있으니, 이런 까닭에 믿음이 수승하다. 첫째는 외도(外道)와 마(魔)의 원망과 성문ㆍ연각 등을 대치(對治)하는 수승함이니, 경의 ‘두려움 없는 힘과 부처만이 가지는 다른 이들과 다른 공덕[不共法]과 무너지지 않음[不壞]을 구족함’과 같다. 둘째는 불가사의한 신통력의 수승함이니, 경의 ‘불가사의한 불법’과 같다. 셋째는 잡된 오염이 없는 수승함이니, 경의 ‘중간도 없고 변제(邊際)도 없는 여래의 경계가 일어남’이란 것과 같다.
【經】“불자들이여, 저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이와 같이 매우 깊고, 이와 같이 적정(寂靜)하고, 이와 같이 적멸하고, 이와 같이 공(空)하고, 이와 같이 모습이 없고, 이와 같이 서원이 없고, 이와 같이 오염이 없고,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이와 같이 수승하니, 이 모든 불법이 이와 같이 얻기 어렵다.’
【論】‘모든 부처님의 정법이 이와 같이 매우 깊다’는 것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적정이 매우 깊음이고, 둘째는 적멸이 매우 깊음이고, 셋째는 공이 매우 깊음이고, 넷째는 모습 없음[無相]이 매우 깊음이고, 다섯째는 서원 없음이 매우 깊음이고, 여섯째는 오염 없음이 매우 깊음이고, 일곱째는 한량없음이 매우 깊음이고, 여덟째는 수승함이 매우 깊음이고, 아홉째는 얻기 어려움이 매우 깊음이다.
015_0028_a_01L‘적정’이란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망령되이 생각함을 여의고 사물을 취한다고 망령되이 생각함을 여의는 것이다. ‘적멸(寂滅)’이란 법의 뜻이 고요히 안정된 것이다. ‘공하고 모습이 없고 서원이 없다’는 것은 세 가지 장애를 대치(對治)하는 해탈 법문의 관찰[觀]이다.
무엇이 세 가지 장애인가? 첫째는 분별이고, 둘째는 모습[相]이고, 셋째는 취함[取]이다. ‘서원이 없다’는 것은 서원을 버린 것이다. ‘물듦이 없다’는 것은 잡된 오염을 여읜 법의 관찰[法觀]이다. ‘한량이 없다’는 것은 숫자로도, 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선근을 일으키는 관찰[生善根觀]이다.
【經】‘그러나 모든 범부들은 마음이 사견(邪見)에 떨어져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이 그 의식(意識)을 가린 탓에, 항상 교만을 앞세우고 욕념과 애욕[渴愛]의 그물 속에 떨어지며, 아첨의 숲 속을 다니고 항상 질투를 품어 후생(後生)에 태어날 몸의 인연을 지으며,
015_0028_a_06L上者,依自利利他增上智觀故。難得者,三阿僧祇劫證智觀故。云何具足諸苦?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많이 모으고 모든 업행(業行)을 일으켜 혐오와 원망의 맹렬한 바람이 죄로 인한 마음의 불을 불어 불길이 항상 거세게 타오르도록 하여, 모든 지은 업은 항상 전도되고 욕심의 번뇌[欲漏]와 세간사(世間事)에 대한 번뇌[有漏]와 무명의 번뇌[無明漏]에 따라 계속해서 심의식(心意識)의 종자를 일으킨다.’
【論】‘그러나 모든 범부들은 마음이 사견(邪見)에 떨어진다’는 것에 있어, 사견에 아홉 종류가 있다. 첫째는 뜻을 가리는 사견이니, 경의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이 그 의식(意識)을 가린다’는 것과 같다. 둘째는 교만의 사견이니, 경의 ‘항상 교만을 앞세운다’는 것과 같다. 셋째는 애념(愛念)의 사견이니, 경의 ‘욕념과 애욕의 그물 속에 떨어진다’는 것과 같다.
넷째는 아첨의 사견이니, 경의 ‘아첨의 숲 속을 다닌다’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질투행(嫉妬行)의 사견이니, 경의 ‘항상 질투를 품어 후생(後生)에 태어날 몸의 인연을 짓는다’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업을 모으는 사견이니, 경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많이 모으고 모든 업행(業行)을 일으킨다’는 것과 같다.
015_0028_b_01L일곱째는 마음의 불길을 불어 일으키는 사견이니, 경의 ‘혐오와 원망의 맹렬한 바람이 죄로 인한 마음의 불을 불어 불길이 항상 거세게 타오르도록 한다’는 것과 같다. 여덟째는 업을 일으키는 사견이니, 경의 ‘모든 지은 업은 항상 전도된다’는 것과 같다.
아홉째는 심의식(心意識)의 종자의 사견이니, 경의 ‘욕심의 번뇌[欲漏]와 세간사(世間事)에 대한 번뇌[有漏]와 무명의 번뇌[無明漏]에 따라 계속해서 심의식(心意識)의 종자를 일으킨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뜻을 가리는 사견ㆍ교만의 사견ㆍ애념(愛念)의 사견, 이 세 사견은 법의 뜻[法義]에 의지하여 망령된 생각을 이와 같이 차례대로 일으키는 것이다.
아첨의 사견과 질투행(嫉妬行)의 사견, 이 두 사견은 목적을 추구(追求)할 때 마음이 짓는 허물이다. ‘질(嫉)’이란 몸에 삿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고, ‘투(妬)’란 재물 따위에 삿된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세생생(世世生生) 태어나는 곳마다 비천한 데에 떨어져 모습이 비루하고 생계가 늘 궁핍하다.
접촉의 인연(因緣)으로 감각[受]이 생기고, 감각을 깊이 좋아하는 까닭에 애욕이 생기고, 애욕이 증장하는 까닭에 취함[取]이 생기고, 취함이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후유(後有:후생의 과보인 몸과 마음)를 일으키고, 유(有:몸과 마음)의 인연으로 태어나고,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함이 있게 된다.
015_0028_c_01L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 속에서 생장하나, 실은 이러한 중생의 세계가 모두 공(空)하여 나[我]와 내 것[我所]이란 관념을 여의어, 초목이나 석벽(石壁)처럼 아무런 지각(知覺)이 없고 또한 마치 메아리와 같건만 중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고뇌를 받는다.’”
자상에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보상(報相)이니, 이름과 물질[名色]이 아리야식(阿梨耶識)과 함께 생겨나는 것으로, 경의 ‘3계란 땅에 다시 싹을 틔우나니, 이른바 이름과 물질[名色]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과 같다. 이름과 물질이 함께 생긴다는 것은 이름과 물질이 저[彼]와 함께 생기는 것이다.
둘째는 피인상(彼因相)이니, 이는 이름과 물질이 저를 여의지 않고 저에 의지하여 함께 생겨나는 것으로, 경의 ‘여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015_0028_c_11L二者彼因相,是名色不離彼、依彼共生故,如經“不離”故。
셋째는 피과차제상(彼果次第相)이니, ‘6입(入)으로부터 ‘유(有)’에 이르기까지로, 경의 ‘이름과 물질을 증장(增長)하여 이미 6입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6입이 이루어지고서 안과 밖이 상대하여 접촉[觸]이 생기고, 접촉의 인연(因緣)으로 감각[受]이 생기고, 감각을 깊이 좋아하는 까닭에 애욕이 생기고, 애욕이 증장하는 까닭에 취함[取]이 생기고, 취함이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후유(後有:후생의 과보인 몸과 마음)를 일으키고, 유(有:몸과 마음)의 인연으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함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 속에서 생장한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란 관념을 여의었다’는 것은 이 두 가지의 공(空)을 나타내고, ‘아무런 지각(知覺)이 없다’는 것은 자체(自體)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저 아무런 지각이 없다는 것은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비중생수(非衆生數)의 일을 보이는 것으로, 경의 ‘마치 초목이나 석벽(石壁)과 같고 또한 마치 메아리와 같다’는 것과 같으니, 서로 유사한 법을 인연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저 가운데 두 가지 전도(顚倒)인가? 경의 ‘중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고뇌를 받는다’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즉시 가지고 있던 시주할 만한 모든 물건을 남김없이 희사하나니, 이른바 재물과 곡식 창고 등을 희사하며, 혹은 금ㆍ은ㆍ마니(摩尼)ㆍ진주ㆍ유리ㆍ보석ㆍ보패(寶貝)ㆍ자거(車渠:바다 속에 있는 큰 조개)ㆍ마노ㆍ생금(生金) 등을 희사하며, 혹은 영락 등의 보배 장신구를 희사하며, 혹은 코끼리와 말이 끄는 수레와 가마 등을 희사하며,
이익희에는 다시 여덟 종류가 있다. 첫째로 엄식(嚴飾:몸을 꾸미는 것) 이익희이니, 보배 장신구 등을 말한다. 둘째로 대보(代步:타고 다니는 것) 이익희이니, 코끼리나 말 따위를 말한다. 셋째로 희락(戲樂:즐기며 노는 것) 원림(園林)과 누관(樓觀) 등을 말한다. 넷째로 대고(代苦:일을 대신해 주는 것) 이익희이니, 노비나 하인 등을 말한다.
다섯째로 자재(自在) 이익희이니, 국토나 취락 등을 말한다. 여섯째로 권속(眷屬) 이익희이니, 아내와 자식 등을 말한다. 일곱째로 견착(堅著:매우 애착하는 것) 이익희이니, 일체 아끼는 것들을 말한다. 여덟째로 칭의(稱意:자기 뜻대로 되는 것) 이익희이니, 머리ㆍ눈ㆍ귀ㆍ코 등을 말한다.
【經】“보살이 이와 같이 크게 보시하는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점점 세간과 출세간의 이익되는 수승한 일을 구하는데, 그가 이익되는 수승한 일을 구할 때 지치거나 게으른 마음이 없나니, 이런 까닭에 보살이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는 마음을 성취한다고 한다. 이렇게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면 일체 경론에 대해 마음에 겁내거나 나약한 마음이 없나니, 이를 일체 경론의 지혜를 성취한다고 한다.
015_0029_c_01L 이렇게 일체 경론의 지혜를 성취하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헤아려, 상ㆍ중ㆍ하 세 부류의 중생에 있어 마땅함[宜]에 따라, 마땅히 행할 것에 따라[宜而行], 힘에 따라, 감응하는 것에 따라 교화하나니, 이런 까닭에 보살이 세상의 지혜를 성취한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이러한 청정한 여러 지(地)의 법을 일으킴을 모두 아나니, 이른바 믿음ㆍ불쌍히 여김ㆍ인자함ㆍ희사함ㆍ지치거나 게으르지 않음ㆍ모든 경론(經論)을 아는 것ㆍ세상 법을 잘 이해하는 것ㆍ부끄러워함ㆍ견고한 힘ㆍ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인데, 설법대로 수행하느니라.”
【論】여기서 ‘이 세상 지혜에 의지하여 마땅함에 따라, 마땅히 행할 것에 따라’라고 함은 논에서 말한 ‘자기의 힘에 따라, 상대가 능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따라’와 같다. ‘부끄러워함[慚愧]에 의하여 시기를 알고 역량을 안다’는 것은 세 가지의 시기를 보인다. 첫째는 생각할 때이고, 둘째는 밤과 낮이고, 셋째는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어 끊임이 없을 때이다. 견고한 힘에 의하여 이와 같이 저 행(行) 가운데’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믿음 등과 같다.
‘부지런히 정진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물러나지 않는 힘과 그만두지 않는 행이고, 둘째는 돌아서지 않는 힘으로 정진하여 쉬지 않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설법을 들은 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이양공양(利養供養)이며, 둘째는 수행공양(修行供養)이다.
이 열 가지 행은 두 가지 수승한 성취를 나타낸다. 첫째는 깊은 마음의 성취이니, 믿음ㆍ불쌍히 여기는 마음ㆍ인자한 마음 등이다. 둘째는 수행의 성취이니, 희사함ㆍ지치거나 게으르지 않음ㆍ모든 경론을 아는 것ㆍ세상 법을 잘 이해하는 것ㆍ부끄러워함ㆍ견고한 힘ㆍ모든 부처님께 공양함ㆍ설법대로 수행함 등이다.
나머지 세 가지 행은 믿음 등을 호섭(護攝)한다. 첫째는 드러내지 않는 행[不著行]이니, 부끄러워함으로써 장애를 대치(對治)하여 믿음 등의 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동요하지 않는 행[不動行]이니, 견고한 힘이 있어 믿음 등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수행(修行)이니, 저 보살이 번뇌의 때가 제거되어 청정해지면 이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여 믿음 등의 선근을 호섭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두 종류의 공양에 의하여 두 종류의 몸을 얻는다. 첫째는 수승하고 미묘한 몸[上妙身]이니, 보는 이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 이익이 있고 헛되지 않는다. 둘째는 조화롭고 유연한 마음[調柔心]이니, 자성(自性)의 선근(善根)이 즐거운 행법[樂行法]을 성취하는 것이다.
앞의 경문(經文)에서 설한 30구(句), ‘믿음이 증장한다’로부터 ‘항상 상상(上上)의 수승한 도를 구한다’까지는 청정한 지(地)의 법이고, 지금의 이 10구, ‘믿음’ 등으로부터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지에 대한 장애를 제거하는 법[障地淨法]이니, 이를 수행의 수승함이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果)의 이익의 수승함인가?
【經】“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보살의 환희지에 머물면 큰 신통의 힘과 큰 서원(誓願)의 힘으로 부처님들을 많이 보게 되나니, 수 백 부처님, 수 천 부처님, 수 백천 부처님, 수 백천 나유타 부처님, 수 억 부처님, 수 백억 부처님, 수 천억 부처님, 수 백천억 부처님, 수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을 큰 신통의 힘과 큰 서원의 힘으로 보게 된다.
015_0030_b_01L이 보살은 부처님들을 볼 때 높은 마음과 깊은 마음으로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의복ㆍ음식ㆍ침구ㆍ약품 등 모든 것을 갖추어 보시하며, 모든 보살의 수승하고 미묘한 약으로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고는 이러한 선근(善根)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기를 발원한다.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인연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유익하게 하는 법을 성취한다.
이 보살은 많은 2섭(攝)2)으로 중생들을 섭취(攝取:거두어 보호하는 것)하니, 이른바 보시와 애어(愛語:좋은 말을 하는 것)이며, 뒤의 2섭법(攝法)은 단지 믿고 아는 힘으로 행하지만 잘 통달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바라밀 가운데 단(檀:보시)바라밀이 수승한 것이니, 다른 바라밀을 닦고 모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과 분수에 따를 뿐이다.
‘큰 신통력으로 부처님을 본다’는 것은 수승한 신통력으로 색신(色身)의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큰 원력’이란 내면의 바른 원력으로 법신(法身)의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수 백의 부처님’으로부터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까지는 좋은 방편으로 많은 부처님을 시현하여, 많은 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공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경 공양이니, 찬탄 등을 통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존중 공양이니, 예배 등을 말하고, 셋째는 보시 공양이니, 꽃향[花香]ㆍ바르는 향[塗香]ㆍ가루[末香]ㆍ깃발ㆍ일산 등을 말한다. ‘모든 보살의 수승하고 미묘한 약’이란 보살만이 가진 세간에 없는 물건이니, 이러한 것들을 갖추어 일체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발취과(發趣果)의 이익의 수승함인가?
015_0031_a_01L 이와 같이 보살이 초지 가운데 머물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선지식 등에게 구하고 물어, 제2지(第二地) 중에서 여러 모습의 과를 얻고 지의 여러 법을 성취하여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어야 하나니, 이와 같이 제3지(第三地)ㆍ제4지 제5지ㆍ제6지ㆍ제7지ㆍ제8지ㆍ제9지ㆍ제10지 중 여러 모습[相]의 과(果)를 얻으면 마땅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선지식께 물어서 10지의 법을 성취하여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다.
이 보살은 모든 지의 장애와 그에 대한 대치법(對治法)을 잘 알며, 지의 이루어짐과 무너짐[成壞]를 잘 알며, 지의 모습을 잘 알며, 지의 수행을 잘 알며, 지의 청정함을 잘 알며, 지에서 지로 옮겨감을 잘 알며, 지와 지의 머무는 곳을 잘 알며, 지와 지의 수승한 지혜를 잘 알며, 지의 불퇴전을 잘 알며, 일체보살의 지에서 청정하게 옮겨 여래의 지혜의 지[智地]로 들어감을 잘 안다.
불자들이여, 비유하자면 훌륭한 인솔자가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저 큰 성을 향해 떠날 때, 출발하기 전에 먼저 도중의 이익이 되는 일들에 관해 묻고, 다시 도중의 걱정거리에 관해 묻고, 다시 도중의 수승한 일에 관해 묻고, 다시 도중의 환란에 관해 물은 다음,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갖추고 마련할 것을 마련하는 문제에 관해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한다.
이렇게 출발하기 전에 이 훌륭한 인솔자는 저 큰 성에 도달할 방도를 잘 알며, 출발하기 전에 이 훌륭한 인솔자는 능히 지혜로 생각하고 헤아려 모든 필요한 물품들을 부족하지 않게 구비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바로 인도하여 무사히 큰 성에 당도하며, 도중의 험난한 곳에서 모든 환란을 면하여 사람들은 아무런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015_0031_b_01L 이때 보살은 큰 복덕과 조도법(助道法)이란 양식과 선악을 가리는 지혜의 조도법을 갖춘 다음 일체 중생을 거느리고 살바야의 큰 성을 향해 떠나려 하면서, 아직 출발하기 전에 먼저 지(地)라는 길의 공덕을 묻고, 다시 여러 지의 걱정거리를 묻고, 다음으로 지라는 길의 수승한 일을 묻고, 다음으로 지라는 길의 걱정거리를 묻고는, 큰 공덕과 지혜라는 양식을 갖추고 마련할 것을 마련한 다음,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선지식들께 자문을 구한다.
이렇게 출발하기 전에 이 보살은 지(地)의 장애와 그에 대한 대치법을 잘 알고 나아가 살바야의 큰 성에 도달할 방도를 잘 안다. 아직 출발하기 전에 이 보살은 이와 같이 지혜로 분별하여 큰 공덕과 지혜라는 양식을 장만한 다음 일체 중생을 거느리고 근기에 따라 잘 교화하여 세간의 험난하고 나쁜 곳을 벗어나 살바야의 큰 성에 머물게 하며, 세간의 생사(生死)와 험난함에 물들지 않아 자신과 중생이 모두 아무런 탈이 없다.
불자들이여, 이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이 항상 마음에 지치거나 게으른 생각을 내지 않고 모든 지(地)의 업(業)인 수승한 지혜의 본행(本行)을 부지런히 닦느니라. 불자들이여, 이를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초지인 환희지의 문(門)에 들어감을 간략히 설한다고 하며, 모두 말하자면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기의 일이 있다.”
【論】‘여러 모습[相]’이란 여러 지(地) 가운데 있는 모든 장애와 그에 대한 대치법이다. ‘얻는다’는 것은 출세간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 ‘과(果)’란 증득한 지혜의 힘으로 인하여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지의 온갖 법을 성취함’이란, 이른바 믿음 등이 저 보살에 만족한 것이다.
015_0031_c_01L관방편이란 장애에 대한 대치(對治)와 이루어짐과 무너짐[成壞], 방편[善巧] 등으로, 경의 ‘이 보살은 모든 지(地)의 장애와 그에 대한 대치법(對治法)을 잘 알며, 지의 이루어짐과 무너짐[成壞]를 잘 안다’는 것과 같으니, 열 가지 지(地)의 장애를 대치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10지라 한 것은 본분(本分) 중의 말씀과 같으니, 이와 같이 차례로 모으고[集], 이루고[成], 흩어 버리고[散], 무너뜨린다[壞].
‘불자들이여, 비유하자면 훌륭한 인솔자가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저 큰 성을 향해 떠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바른 행[正行]을 얻게 하는 것이다.
015_0031_c_13L諸佛子!譬如善巧導師多將人衆向彼大城者,令得正行故。於中導師者,
여기서 ‘인솔자’에 두 가지 방편이 있다. 첫째는 길을 헤매지 않는 방편으로, 무엇이 도중에 이익이고 무엇이 걱정이며 무엇이 도중에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쁜가를 모두 잘 아는 것이니, 경의 ‘먼저 도중의 이익이 되는 일들에 관해 묻고, 다시 도중의 걱정거리에 관해 묻고, 다시 도중의 수승한 일에 관해 묻고, 다시 도중의 환란에 관해 묻는다’는 것과 같다.
둘째는 필요한 물품을 장만하는 이익의 방편이니, 경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갖추고 마련할 것을 마련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섭보과(攝報果)의 이익의 수승함인가?
015_0031_c_21L二者資具利益方便,如經“具道資糧,作所應作”故。云何攝報果利益勝?
015_0032_a_01L【經】“보살마하살이 이 초지(初地)에 머물 적에는 흔히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어 호화와 부귀를 마음대로 누리며 항상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능히 크게 보시하여 중생들을 거두어 보살펴서, 중생들의 인색과 탐욕ㆍ질투 따위의 허물을 잘 제거하며, 항상 크게 희사(喜捨)하기를 끝없이 하여, 선업(善業)을 짓고 보시하고 좋은 말을 하고 이익을 주고 중생과 동사섭(同事攝)한다.
이러한 온갖 복덕(福德)들이 모두 부처님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법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승가를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보살들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보살행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바라밀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10지(地)를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힘[不壞力]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두려움 없음[無畏]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부처님의 불공법(不共法)을 생각함을 여의지 않고, 나아가서 일체종(一切種)을 구족한 일체지의 지혜[一切智智]를 생각함을 여의지 않는다.
항상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일체 중생 가운데 머리가 되고, 으뜸이 되고, 큼이 되고, 묘함이 되고, 미묘함이 되고, 위가 되고, 위없음[無上]이 되고, 길잡이가 되고, 통솔자가 되고, 스승이 되고, 존자가 되고, 나아가서 일체지의 지혜가 의지하는 곳이 되리라’고 한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마하살이 집을 버리고 떠나 부지런히 수행하고 정진하고자 한다면 불법 중에서 곧 능히 집과 처자와 5욕(欲)을 버리고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고 정진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 생각 사이에 백(百) 삼매를 얻고, 백 부처님을 보고, 백 부처님의 신통력을 알고,
능히 백 부처님세계를 진동하고, 능히 백 부처님세계로 들어가고, 능히 백 부처님세계를 비추고, 능히 백 부처님세계의 중생을 교화하고, 능히 백 겁이나 오래 살고, 능히 과거와 미래 세상의 각각 백 겁의 일을 알고, 능히 백 법문에 잘 들어가고, 능히 변신하여 백 개의 몸을 나투고, 하나하나의 몸마다 능히 백 보살을 나투어 권속으로 삼는다.”
【論】섭보과(攝報果)의 이익의 수승함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在家)의 과(果)이며 둘째는 출가의 과이다.
015_0032_a_22L論曰:攝報果利益勝者,有二種:一、在家果;二、出家果。
015_0032_b_01L재가의 과에 다시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매우 수승한 육신이니, 염부제의 왕이 되는 것 등으로, 경의 ‘보살마하살이 이 초지(初地)에 머물 적에는 흔히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어 호화와 부귀를 마음대로 누리며 항상 정법(正法)을 수호한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생각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승함에 대한 생각[上念]이니, 3보(寶)를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법이 같음에 대한 생각[同法念]이니, 모든 보살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공덕에 대한 생각[功德念]이니, 자신과 타인의 보살행 자체가 점점 수승해짐을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뜻을 구하려는 생각이니, 부처님의 모든 힘 등이 진실되고 구경임을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 ‘수승함에 대한 생각’인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법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재물과 보리(菩提)에 대해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일체의 지은 업(業)에 있어 지은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지은 일에 집착하지 않고 과보에 집착하지 않고서, 이 일체의 행(行)을 모두 큰 보리로 회향한다.
‘길잡이[導]’란 아함(阿含) 중에서 법의 뜻을 분별하여 바르게 설하는 것이며, ‘통솔자[將]’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법을 증득하여 번뇌를 소멸하게 하는 것이며, ‘스승’이란 법을 가르쳐 주어 정도(正道)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일체지의 지혜가 의지하는 곳이 되리라’라는 것은 큰 보리의 도로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재가 보살의 섭보과(攝報果)의 이익의 수승함이라 한다.
또 출가 보살의 선정(禪定)의 수승한 업에 관해 말하겠다. 수승한 업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삼매의 수승함이니, 이른바 ‘한 생각 사이에 백(百) 삼매를 얻는다’는 것으로, 삼매의 자재한 힘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삼매가 하는 일의 수승함이니, 이른바 ‘백 부처님을 본다’는 것 등으로, 이러한 삼매의 힘을 얻음으로 해서 시방 보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보살이 닦고 익히는 지혜를 가피하는 것이다.
‘능히 백 부처님세계를 진동한다’는 것은 교화할 만한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능히 백 부처님세계로 들어가고 능히 백 부처님세계를 비추고 능히 백 부처님세계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은 부처님세계로 가서 정도를 보이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능히 백 겁이나 오래 산다’는 것은 수승한 생(生)을 섭취(攝取)하는 것이다.
‘능히 과거와 미래 세상의 각각 백 겁의 일을 안다’는 것은 중생들을 교화하여 악(惡)을 떠난 수승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지어 태어나는 세계에 대해 설하는 것이다. ‘능히 백 법문에 잘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의 지혜와 사유와 갖가지 법문의 뜻을 증장하기 위한 것이다. ‘능히 변신하여 백 개의 몸을 나투고 하나하나의 몸마다 능히 백 보살을 나투어 권속으로 삼는다’는 것은 신속하게 많은 이익을 짓기 위한 행(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지과(願智果)의 이익의 수승함인가?
015_0033_a_01L【經】“만약 원력의 자재하고 수승함으로 말한다면 보살의 원력은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시현하고 갖가지 신통을 보여, 혹은 몸, 혹은 광명, 혹은 신통, 혹은 눈, 혹은 경계, 혹은 음성, 혹은 행, 혹은 장엄, 혹은 가피, 혹은 믿음, 혹은 업(業) 등 이러한 온갖 신통들을 백천만억 나유타 겁 동안 헤아려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란 삼매문(三昧門)에 의지하여 신통력을 나투고 중생의 믿음에 따라 이익을 주고 성취시키는 것이다. ‘업’이란 혜안(慧眼)이 포괄하는 다라니문(陀羅尼門)에 의지하여 설법을 나투는 것이다. 이상으로 대략 일체 모든 지(地)에 각기 인체(因體)와 과상(果相)이 있음을 설했으니, 알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