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지수다라(十地修多羅)』에서의 말씀과 같다. “이 보살은 다시 깊이 생각하기를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행하여 인연을 모으기 때문에 곧 지옥과 축생이며 아귀에 떨어진다.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행하여 인연을 모으기 때문에 곧 사람 중에 태어나고 나아가 유정천(有頂天)에 나게 된다. 또 이보다 위의 열 가지 선한 업의 길과 지혜로 자세히 살피며 화합하여 수행하지만 그 마음이 좁고 열등하고, 마음에 삼계를 두려워하고 크게 가엾이 여김을 멀리 여의고, 다른 이로부터 소리를 듣고서 통달하기 때문에 소리를 듣고 뜻이 풀리므로 성문승을 이룬다.
또 이보다 더 으뜸가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깨끗하게 두루 갖추어 그 마음이 넓고 커서 한량없으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며, 방편으로 껴잡으며, 큰 서원을 잘 일으키며,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부처님의 지혜가 넓고 큼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보살의 자리가 깨끗하며 바라밀이 깨끗하여 깊고 넓은 행에 들어가서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온갖 것을 수행하며 깨끗함이 두루 갖추어지게 하기 때문이니, 이를 보살로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015_0141_b_21L又是上上十善業道,一切種淸淨十力,力故集一切佛法令成就故,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닦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자신의 안락에 집착하지 않으며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수행하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나는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보고서, 자비심으로써 곧장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롭게 한 뒤에는 다시 다른 이들에게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수행을 성취한다.
015_0141_c_01L是故我應等行十善業道,修行一切種令淸淨具足故,是名菩薩成就修行。
이런 이치 때문에,『십지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나는 먼저 선법에 머무르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법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게 된다.
또『십지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다. “이 보살은 다시 일체 중생들 안에서 안온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수호하는 마음과 나[我]라는 마음과 평등한 마음과 스승이라는 마음과 세존이라는 마음을 내느니라.
또 보살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 모든 중생들은 삿된 소견에 떨어지고 나쁜 뜻과 나쁜 마음으로 나쁜 길의 빽빽한 숲을 가므로, 나는 으레 그 중생들에게 진실한 길을 가고 바른 소견의 길과 사실대로의 법 중에 머무르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 등이니,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015_0142_a_01L『무진의(無盡意)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다. “대덕 사리불이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시라(尸羅)바라밀은 그지없나니, 언제나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범부의 계율은 곳곳에 태어나나니 그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인간 중의 열 가지 착함도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몸에 대한 소견[身見]의 번뇌 때[垢]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로써 나[我]라는 소견 따위의 때를 여의므로, 그때[時]를 깨끗한 업의 길이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수행을 성취한다.
무엇을 예순여섯 가지의 일이라 하는가? 첫째 다른 중생을 괴롭게 하지 않음이며, 둘째 남의 재물을 훔치지 않음이며, 셋째 남의 부녀를 끝내 삿되게 보지 않음이며, 넷째 중생들에게 속이는 일이 없음이며, 다섯째 처음부터 이간질을 안 하며 자기의 권속에게 그치고 만족한 줄을 아는 일이며,
여섯째 나쁜 말이 없으며 거칠고 사나움을 참는 일이며, 일곱째 꾸밈말이 없으며 언제나 착하게 말하는 일이며, 여덟째 다른 이가 즐기는 일에 탐내거나 시샘하지 않는 일이며, 아홉째 처음부터 성냄이 없으며 나쁜 말을 참는 일이며, 열째 바른 소견으로 딴 도(道)를 삿되다고 하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는 일이다.
열한째 부처님을 깊이 믿으며 마음이 흐리지 않는 일이며, 열둘째 법을 믿고 따르며 선법을 법으로 여기는 일이며, 열셋째 승가를 믿고 공경하며 성인들을 존중하는 일이며, 열넷째 온몸을 땅에 던져 부처님을 생각하는 일이며, 열다섯째 온몸을 땅에 던져 가르침을 생각하는 일이며,
열여섯째 온 몸을 땅에 던져 승가를 공경하는 일이며, 열일곱째 금지된 계율을 굳게 지녀서 모두 범함이 없으며 조그마한 계율에 이르기까지 놓아버리지 않는 일이며, 열여덟째 결함 없는 계율을 지니며 다른 법[乘]에 의지하지 않는 일이며, 열아홉째 뚫리지 않는 계율을 지녀 나쁜 곳에 태어남을 여의는 일이며, 스무째 거칠지 않은 계율을 지니며 모든 번뇌에 섞이지 않는 일이다.
스물한째, 더럽지 않은 계율을 지녀서 오로지 흰 법을 자라게 하는 일이며, 스물둘째 이 깊은 계율을 지녀서 뜻을 따라 회향하며 자재함을 얻는 일이며, 스물셋째 찬탄할 계율을 지녀서 지혜로운 이가 꾸짖지 않는 일이며, 스물넷째 순수하고 선한 계율을 지녀서 바른 생각으로 아는 일이며, 스물다섯째 꾸짖지 않을 계율을 지녀서 온갖 계율이 흩어지지 않는 일이며,
015_0142_c_01L 스물여섯째 착하고 굳은 계율을 지녀서 모든 감관을 막고 보호하는 일이며, 스물일곱째 이름이 들리는 계율을 지녀서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하여 주시는 일이며, 스물여덟째 만족할 줄 아는 계율을 지녀서 만족하지 아니함이 없는 일이며, 스물아홉째 욕심을 적게 하는 계율을 지녀서 탐욕과 인색함을 끊는 일이며, 서른째, 성품이 깨끗한 계율을 지녀서 몸과 마음이 적멸하는 일이다.
서른한째, 아란야의 계율을 지녀서 시끄러움을 여의는 일이며, 서른둘째 성인 종자의 계율을 지녀서 다른 뜻을 구하지 않는 일이며, 서른셋째 점잖은 거동의 계율을 지녀서 온갖 선한 뿌리가 자재함을 얻는 일이며, 서른넷째 말씀대로의 계율을 지녀서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는 일이며, 서른다섯째 인자한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중생을 보호하는 일이며,
서른여섯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모든 고통을 능히 참는 일이며, 서른일곱째 기쁜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게으르지 않는 일이며, 서른여덟째 버리는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사랑함과 성냄을 여의는 일이며, 서른아홉째 스스로 살피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잘 분별하는 일이며, 마흔째, 단점과 결함을 구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다른 이의 마음을 보호하는 일이다.
마흔한째, 잘 껴잡는 계율을 지녀서 잘 수호하는 일이며, 마흔두째 슬기로 보시하는 계율을 지녀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며, 마흔셋째 인욕의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성을 내는 장애가 없는 일이며, 마흔넷째 정진의 계율을 지녀서 물러나 돌아가지 않는 일이며, 마흔다섯째 선정의 계율을 지녀서 모든 선정의 갈래를 자라게 하는 일이며,
마흔여섯째 지혜의 계율을 지녀서 많이 들음의 선한 뿌리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일이며, 마흔일곱째 많이 들음의 계율을 지녀서 널리 배움에 견고한 일이며, 마흔여덟째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계율을 지녀서 보리를 돕고 이루는 일이며, 마흔아홉째 나쁜 벗을 멀리 여의는 계율을 지녀서 나쁜 길을 버리고 멀리 여의는 일이며, 쉰째 몸을 아끼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무상함의 형상을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015_0143_a_01L쉰한째, 목숨을 아끼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부지런히 선한 뿌리를 행하는 일이며, 쉰두째, 뉘우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이 깨끗한 일이며, 쉰셋째 삿된 생활을 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깨끗함을 행하는 일이며, 쉰넷째 그을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침내 깨끗한 일이며, 쉰다섯째 타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선한 행의 업을 닦는 일이며,
쉰여섯째 오만 함이 없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이 낮추어지며 교만하지 않는 일이며, 쉰일곱째 들뜨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모든 욕심을 멀리 여의는 일이며, 쉰여덟째 높은 체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이 공평하고 정직한 일이며, 쉰아홉째 부드럽고 온화한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곧장 돌진함이 없는 일이며, 예순째, 조복하는 계율을 지녀서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일이다.
예순한째, 적멸한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때와 더러움이 없는 일이며, 예순두째, 말에 수순하는 계율을 지녀서 말씀대로 행하는 일이며, 예순셋째 중생을 교화하는 계율을 지녀서 거두어 줌의 법을 여의지 않는 일이며, 예순넷째 바른 법을 보호하는 계율을 지녀서 어기지 않고 사실대로 하는 일이며,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특수한 결과를 이룩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수행을 성취하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로써 보리심을 껴잡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보리를 얻을 때에 특수한 결과를 이룩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015_0143_b_01L거룩한『사가라용왕경(娑伽羅龍王經)』에서의 말씀과 같다. “용왕아, 살생을 여읜 사람은 열 가지 깨끗한 법을 얻으며 살생을 멀리 여읜 온갖 선한 뿌리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그 사람은 보리를 얻는 때에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에 수명이 한량없느니라”고 하신, 이와 같은 것 등이다.
015_0143_c_01L【문】만약 곧 그 업이 길을 만들 수 있어서 업의 길이라 하며, 이와 같이 업의 길을 서로 이해하게 된다면 온갖 법은 마음에서 모두가 업의 길이라 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열 가지 업의 길만을 말하고 한량없는 업의 길은 말하지 않는가?
【문】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업은 정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혹은 가깝거나 먼 방편이 무겁기도 하고 바른 업[正業]은 가볍기[輕]도 하나니, 그러므로 열 가지 업만을 업의 길이라 말하고 한량없는 것을 말하지 않음은 마땅하지 않다.
또 세간의 중생들은 열 가지 업을 다분히 두려워하고 가깝거나 먼 방편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열 가지 업의 길은 깊고 무겁게 괴롭히지만 그 밖의 것은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업은 정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 뜻은 이미 대답하였다.
015_0143_c_07L答曰:“不然。何以故?十業多重、近遠方便多輕。
또 그대는 아까 말하기를 ‘온갖 법을 마음에서 모두 업의 길이라 하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일곱 가지의 업은 한결같이 극히 무겁지만 뜻의 세 가지는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며, 술을 마시는 것 따위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저 열 가지만을 업의 길이라 말하고 나머지 것은 업의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답】살생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고의(故意)이며, 둘째 다른 이[他]이며, 셋째 정하여지거나 정하여지지 않은 중생의 모습[定不定衆生相]이며, 넷째 의심(疑心)함이며, 다섯째 목숨을 버리게 하는 방편을 일으킴[起捨命方便]이며, 여섯째 작위(作爲)이며, 일곱째 부작위 모습[不作爲相]이며, 여덟째 무작위 모습[無作爲相]이다. 이들을 살생에 대한 몸의 업이라 하나니, 몸ㆍ입ㆍ뜻의 업을 살생이라 한다.
015_0143_c_15L問曰:“遠離殺生者,殺生等相應說?”
015_0144_a_01L【문】고의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의 없이 죽여도 살생의 죄가 이루어지나니, 마치 불에 닿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치 불이 태울 수가 있으므로 고의로 닿거나 고의 없이 닿거나 간에 모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것처럼, 살생하는 것도 그러하여 고의로 죽이거나 고의 없이 죽이거나 간에 모두 다 살생의 죄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하리라.
【답】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마음 없이 죽였다 하여 죄의 과보를 받는다면 곧 아라한은 열반을 얻지 못하리라.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아라한은 세간의 원인[因]을 끊느라고 고의 없이 중생을 죽이나니, 이와 같은 것도 도로 세간에 태어나야 하는데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이치 때문에 고의 없이 죽이면 죄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답】마음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이치는 그렇지 않나니, 왜 그러한가? 중생을 괴롭히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떠나고, 중생을 이롭게 하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을 떠남은 마치 선한 뿌리를 끊는 것과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과 다툼이 없는 것과 생각 끊은 선정[滅盡定] 따위가 죄를 얻고 복을 얻는 것과 같다.
【답】죽일 수 있는 것과 죽이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는 죽일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을 살생할 수 있으며 살생죄를 얻지만, 자기가 죽이는 것은 죽일 수 있는 대상이 없으므로 곧 다시는 죽일 이가 없으며 죽이는 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목숨을 끊으면 나쁜 과보를 받지 않는다.
015_0144_a_17L問曰:“以何義故自斷命者不得罪報?”
또, 과거의 쌓임[陰]이 살생 따위의 쌓임에 계속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스스로가 죽는 것은 살생죄가 되지 않는다.
015_0144_b_01L【문】자신을 죽이는 이는, 죽이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사람의 목숨을 끊고 다섯 가지 쌓임을 파괴하며 사람의 갈래[人趣]를 버리고 떠나며 살생이라는 업이 성취되거늘 어찌하여 살생죄의 과보를 받지 않는가?
015_0144_a_22L又過去陰不續殺生等陰,是故自殺不得殺罪。”
【답】만약 그렇다면 아라한인 사람도 으레 살생의 죄가 되어야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죽음의 모습이 된 아라한이 스스로가 그 몸을 해치고 몸소 목숨을 끊기 때문이다. 저 아라한 역시 목숨을 끊은 죄를 얻어야 하는데도 그는 죄가 없다. 왜 그러한가? 성냄 따위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죽는 것은 살생의 죄가 되지 않는다.
의심한다 함은 의심하면서 살생하여도 역시 살생죄가 된다. 그는 이 중생을 이미 버린 중생이었고, 그 마음이 비록 의심한다 하더라도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중생을 버리고 중생을 죽였기 때문에 살생의 죄가 된다.
015_0144_b_12L不定者,以捨一切故隨殺得罪,以彼處不離衆生相故。
목숨을 버리게 하는 방편을 일으킨다 함은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죽이려는 이가 그 일 중에서 착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반드시 그 중생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아니고 죄에서 보호하는 마음이 없으며 중생을 버리는 마음으로 죽일 방편을 쓰나니, 이를 일으킨다고 한다.
또, 작위와 부작위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인데, 작위라 함은 적극적으로 동작하는 일이며, 부작위라 함은 직접 동작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 동작하는 일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며, 비록 지은 업이 없어지더라도 착함[善]과 보람 없음[無記]의 법은 서로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015_0144_c_01L【답】짓는 일과 함께 원인을 짓고 결과를 짓는 일과 함께 원인을 지을 수 있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곳곳에서 또한 원인 있는 가운데서는 결과를 말하고 결과 중에서는 원인을 말한다.
015_0144_b_23L問曰:“云何不作而名爲業?”
여래 경전에서의 말씀과 같다. “볼 수 있고 닿을 수 있으면 무작색(無作色)이라 하며, 지음으로써 볼 수도 없고 닿을 수 없으면서 지어지면 볼 수도 있고 닿을 수도 있느니라”고 하시어, 그 짓지 않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닿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나니, 이와 같이 그곳에서 몸이거나 몸에 의지하여 섬기는 칼과 몸뚱이 등으로 살생하게 되면, 작위 또는 부작위라고 하며 몸의 업이라 하게 된다.
또, 자재인(自在人)이 입으로 살생을 명령하고 신선이 성을 내어 중생을 죽이려 할 적에, 명령 받은 심부름꾼이 자재인의 명령에 의하여 살생하고 신선을 믿는 야차가 신선의 성냄에 의하여 중생을 죽이면 그 자재인과 신선 등은 살생의 원인을 지었고 심부름꾼과 야차는 몸의 업이 이루어진다. 그때에 그 자재인과 신선은 모두 부작위의 몸의 업[身業]이 성취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입과 뜻으로도 살생을 이룩할 수 있다. 이 살생의 업은 바로 입과 뜻의 업이며, 이는 몸의 업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비록 이런 말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이치는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곧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 살생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입의 업일 수 있고 이는 뜻의 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015_0144_c_19L又應身作業,而身不動口說種種身業方便,彼事成時亦得成就不作身業。
015_0145_a_01L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입과 뜻이 바로 살생하는 업의 바탕이라면 자재인이 아무개 중생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신선이 마음으로 아무개 중생을 죽이겠다고 생각하는 즉, 명령하고 생각할 때에 그 목숨은 끊어졌어야 하는데도, 이 일은 그렇지가 못하고 그 심부름꾼과 신선을 믿는 야차의 몸의 업이 이루어질 때에야 살생의 일이 이루어진다.
또, 허물이 있다. 그 자재인이 입으로 살생하라고 명령하였는데도 심부름꾼이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그 자재인이 견도(見道)를 증득하게 되었고 명령받은 심부름꾼은 그 뒤에야 살생하였다고 하자. 만약 입으로 죽이라고 명령한 뒤에 살생이 이루어졌다면, 견도한 뒤에야 살생을 하였으므로 이 이치도 옳지 않다.
015_0145_a_06L若不如,是彼自在人口言殺時,及彼仙人起瞋心時應卽成殺,而實不成。
그 살생의 원인과 계율을 깨뜨리는 등의 나쁜 마음은 멀리 여의게 되었나니, 그러므로 입과 뜻의 뚜 가지 업으로서는 살생의 바탕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업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착함[善]과 착하지 않음[不善]과 보람 없음[無記] 등의 업은 서로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차별이 없는 형상이라면 이와 같은 몸과 입과 뜻의 업은 곧 차별이 없을 터인데, 멀고 가까운 방편으로 몸ㆍ입ㆍ뜻 등은 살생의 업을 이루므로, 이는 곧 막아내지 못한다.
【답】비록 실제의 목숨이 없다 하더라도 화합된 바탕을 끊으면 살생이라고 한다. 마치 나무숲을 베고 등불 심지를 없애는 것 따위이다. 만약 신아(神我)가 있다면 신아는 항상[常]하는 것이므로 살생이라는 이치가 없다.
015_0145_b_01L問曰:“無命可殺,云何斷命得殺生罪?”
【문】어떠한 쌓임[陰]을 해치면 죽였다고 하는가? 과거를 해치는 것인가, 미래를 해치는 것인가, 현재를 해치는 것인가? 만약 과거를 해치는 것이라면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만약 미래를 해치는 것이라면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고, 만약 현재를 해치는 것이라면 찰나(刹那)는 머무르지 않는다.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세상에 머무르다가 미래세상에 무너지는 화합된 쌓임의 바탕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래와 현재에 무너지는 것이다”라고도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현재의 쌓임 가운데서 칼과 몽둥이가 닿을 수 있고 해로운 일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섯 가지 쌓임은 저절로 없어지고, 인연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의 쌓임 중에서 오직 빛깔의 쌓임[色陰]만이 무너지나니, 칼과 몽둥이 따위로써 벨 수도 있고 부딪칠 수도 있지만 나머지 네 가지 쌓임은 베거나 부딪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섯 가지 쌓임을 살해한다. 스스로 나머지 네 가지 쌓임은 비록 부딪칠 수가 없다손 치더라도 빛깔 쌓임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이므로, 빛깔의 쌓임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들 또한 따라서 무너짐은 마치 병이 깨지면 물과 우유도 역시 상실되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015_0145_c_01L이 세 가지 업은 어떻게 차별되는가? 의지함[依]으로부터 말하는가, 바탕[體]으로부터 말하는가, 일어남[起]으로부터 말하는가? 만약 의지함으로부터 말한다면 곧 이는 하나의 업이니, 온갖 업은 몸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바탕으로부터 말한다면 곧 이는 하나의 업이니, 온갖 업은 오직 입의 업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어남으로부터 말한다면 곧 이는 하나의 업이니, 온갖 업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답】세 가지 차례에 의지하여 세 가지 업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므로 곧 이는 마음의 업이며 그 마음의 업에 의하여 몸과 입의 업이 일어나나니, 마음을 의지하기 때문에 몸과 입의 업이 일어나는 줄 이와 같이 차례로 알아야 하며, 그 작위와 무작위도 알아야 하며, 그 몸과 입의 업의 차별도 알아야 한다.
【문】몸의 가고 오고 움직이고 옮는 것이 몸의 업이라 하면,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 업이라 이름하지 않는가?
015_0145_c_08L又身業作者依身威儀,依止身作彼彼形相,是名身作業。”
【답】만약 가고 오는 것을 몸의 업이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온갖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찰나도 머무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면 어디서 없어지는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음을 어떻게 가고 오고 움직이고 옮는다고 말하며 몸의 업이라 하겠는가?
015_0145_c_10L問曰:“以身去來動轉名爲身業,不去不來不名爲業?”
【문】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온갖 법이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어떤 법은 찰나 동안 머무르는 것으로도 보이므로 이는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가?
015_0146_a_01L만약 법이 곧 생길 때에 없어지지 아니하면 뒤에도 없어지지 않아야 하며, 만약 없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정해지고 진실이어야 한다. 만약 정해지고 진실하다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아야 하며, 만약 그와 같다면 그 없어짐은 인연으로부터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답】어떻게 땔나무 등의 법이 불 등의 인연에 의하여 없어지는 것을 아는가? 나는 인연 없이 저절로 없어진다고 말했는데, 이 이치는 생각해야 한다. 불과 땔나무 등의 법으로 인하여 없어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인연이 없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답】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 마음과 소리는 서로가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의심하며 아는 것과 결정코 아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두 가지 법은 함께 하지 않나니, 괴로움과 즐거움ㆍ탐냄과 성냄 등이 모두 또한 그와 같다.
【답】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물건이 없다는 법으로써 어떻게 없어지는 원인을 지을 수 있는가? 또 나는 원인과 없어지는 법과 법 아닌 것은 찰나도 머무르지 않으며, 찰나의 마음과 찰나의 마음 가운데서도 마침내 나는 원인과 없어지는 원인을 지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온갖 함이 있는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없어지는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또, 대답하리라. 만약 불 등에 의하여 땔나무 등이 없어지는 원인을 지을 수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원인[生因]은 곧바로 없어지는 원인이다. 이는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어떠한 불꽃에 의하여 어떠한 빛깔을 내면 곧 그 불꽃은 갈수록 더 익게 할 수가 있고 더 익게 하는 것은 없어지는 원인이니, 그러므로 나는 원인은 곧 없어지는 원인이며, 다시는 다른 원인이 없다.
이치가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어떻게 이 하나의 법이 나게 할 수 있고 법이 없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또, 달라지고 달라지는 불꽃 가운데서 이와 같은 원인의 차별을 허망하게 분별함은, 마치 잿물[灰汁]과 쓴 술[苦酒]ㆍ눈[雪]ㆍ해ㆍ땅ㆍ물 따위로 인하여 곡식과 쌀이 나고 익고 달라질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익고 달라지는 따위의 빛깔을 그곳에서 어떻게 분별하는가?
그러므로 온갖 함이 있는 법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며, 인연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없어지는 법은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곧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이룩되는 모든 법은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고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이 법은 저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문】나는 다른 곳에서 오히려 이런 법을 본다. 만약 법이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딴 곳에서 보게 되고 딴 곳에서 알게 되는가?
015_0146_c_05L問曰:“我於餘處猶見此法,若法不去,云何而得於餘處見、於餘處識?”
【답】풀과 불꽃과 같나니, 그러므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의 점잖은 거동[威儀]은 몸의 짓는 법이라 한다. 이 이치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몸과 달리 따로 진실한 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치 한 편으로 빛이 나 있으면 긴 빛이라고 하고, 그 긴 빛에 다시 따로 빛을 보이면 짧은 빛[色]이라고 하고, 네모진 데에 의지해서 보이면 네모진 빛이며, 둥근 물건에 의지한 것이면 둥근 빛이라 한다.
이와 같이 길고 짧고 모나고 둥글고 높고 낮은 여러 빛들은, 마치 불을 돋우는 것과 같다. 한 곁방으로 곧장 가면서 끊어지지 않고 서로 이어지면서 보이면 긴 불이라고 하고, 둘레의 네 곁방을 돌면서 끊어지지 아니하면 둥근 불이라고 하며, 갖가지로 옮김에 따라 갖가지의 불을 보게 되나니, 이와 같이 불을 여의고서는 다시 따로 진실한 형상의 법이 없다.
만약 불을 여의고 그 밖에 형상의 법이 있다면 당연히 두 개의 감관으로 엿보게 되어, 눈의 감관은 긴 것을 보고 몸의 감관은 짧은 것이 닿아져야 한다. 하나의 빛깔[色]이 두 개의 감관으로 보지 아니함은 마치 닿음의 법과 길고 짧은 것 따위와 같나니, 이와 같이 빛깔 중에서 알아야 한다.
닿음의 법은 오직 마음이어서 이는 나타나는 감관으로 붙잡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빛[火色]을 보면서 닿음 중에서는 생각을 내어 아는 것과 같고, 꽃냄새를 맡으면서 빛깔 중에 생각을 내는 것과 같아서 이 법은 이와 같아야 하나니, 다른 법에 의하여 다른 법을 생각하나 닿음의 법은 하나도 없다.
점잖은 거동 중에서도 실로 닿음의 법에 의하여 다른 법을 얻음이 있나니, 그러므로 실로 몸의 점잖은 거동이란 없다.
015_0146_c_23L於威儀中實有依觸法得餘法,是故無實身威儀法。”
015_0147_a_01L【문】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캄캄한 밤에 멀리서 흙과 담장 따위의 빛깔을 보면 혹은 길기도 하고 혹은 짧기도 한데, 이것은 바로 진실이어야 한다.
015_0147_a_01L問曰:“此義不然。何以故?若於闇夜遠見土牆等色,或長或短此應是實。”
【답】다만 빛깔을 보았을 뿐, 허망하게 길고 짧음 따위의 빛깔을 분별하는 것은 분명히 몰랐다. 마치 다르지 않은 개미들이 가는 것이 보이고 둘러쌈이 보이는 것처럼, 이것 또한 그와 같아서 몸의 점잖은 거동과는 달리 다시 진실한 법이란 없다. 오직 몸의 점잖은 거동만이 짓는 법이라 하고 몸을 여읜 그 밖에서 따로 짓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리라.
아까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마음속으로 분별하여 ‘나는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짓겠다’고 하고서, 몸과 입의 업을 낼 수 있으면 마음의 업이라 하고, 만약 몸으로 하는 일이면 몸의 업이라 하며, 만약 입으로 하는 일이면 입의 업이라고 한다. 세 가지 업과는 달리 따로 진실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때 없는 빛깔이라 함은 샘이 없는 빛깔[無漏色]이라 말한다. 무엇이 샘이 없는 빛깔인가? 샘이 없는 빛깔은 샘이 없는 법[無漏法]을 말한다. 무엇이 샘이 없는 법인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빛깔 중에서 성냄과 애욕을 내지 않고, 나아가 의식[識] 중에서 성냄과 애욕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샘이 없는 법이라 한다.
만약 몸과 입의 업을 떠나서 다시 무작법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마음을 달리하는 법으로서 더욱 자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몸과 입의 업을 여의고서 무작법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스스로가 업을 짓지 않고 다른 이를 시켜서 업을 짓게 할 적에, 만약 무작법이 없다면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또, 힐난이 있다. 만약 무작법이 없다면,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1)를 여의고서 역시 무작계(無作戒)가 없어야 하리니, 계를 받은 뒤여서 곧 없기 때문이다. 잠을 잤었고 미치광이 따위의 실심한 이들이라도 비구 또는 비구니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니, 결정코 무작법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샘이 없는 빛깔이라 함은, 곧 그 삼매의 선정의 힘에 의한 빛깔이므로 때가 없다[無垢]고 하며, 성인은 샘이 없는 삼매 중에서 샘이 없는 법을 말씀하신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라한의 빛깔과 그 밖의 빛깔을 샘이 없다고 하나니, 샘이 있는 법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또, 공덕이 더욱 자란다 하는 이 이치는 어떤 것인가? 법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이 보시하는 이와 보시하는 물건을 자주자주 받아쓰며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자주자주 받아쓰는 이가 되지만, 받아쓰는 사람의 공덕의 힘 때문에 비록 보시하는 이가 마음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과 생각에 의하여 닦으므로 계속되는 바탕이 가늘고 가늘면서도 차츰차츰 나아지나니, 차츰차츰 나아지기 때문에 미래의 세상에서는 많은 복덕의 결과를 성취하게 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공덕이 많이 생기며, 공덕이 더욱 자란다”고 하셨으며, 마음을 여의고 빛깔을 여의고서 무작법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015_0147_c_19L依此義故,如來說言多生功德增長功德,非離心離色有無作法。”
【문】어떻게 몸과 마음을 달리하고 달리한 몸과 마음에 의하여 달리한 몸과 마음 중에서 계속하여 차츰차츰 복덕이 더욱 자라나는가?
015_0147_c_21L問曰:“云何異身心依異身心,異身心中相續轉細增長福德?”
【답】어떻게 몸과 마음을 달리하고 달리한 몸과 마음에 의하여 달리한 몸과 마음 중에서 무작법이 있겠는가?
015_0147_c_22L答曰:“云何異身心依異身心,異身心中有無作法?
015_0148_a_01L또, 대답하겠다.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마음에 의지하여 몸의 업과 입의 업에 선하고 악한 공덕이 있으므로 본래 마음에 의하여 짓고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계속되는 바탕을 지니면, 미치고 잠자는 것 등에서도 언제나 더욱 자라게 되지만, 짓지 않는 이가 이미 스스로가 짓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짓는다고 하면 어떻게 업의 길을 이룩하게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