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5_0228_a_01L불지경론(佛地經論) 제1권
015_0228_a_01L佛地經論卷第一


친광(親光) 지음
015_0228_a_02L親光菩薩等造
현장(玄奘) 한역
이미령 번역
015_0228_a_03L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더 이상 위가 없는 훌륭한 복전(福田)이신
3신(身)ㆍ2제(諦)ㆍ1승(乘)의 승가에 머리 조아립니다.
제가 이제 힘껏 이 논을 짓는 것은
법이 오래도록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015_0228_a_04L稽首無上良福田
三身二諦一乘衆
我今隨力造此論
爲法久住濟群生

두루 큰 스님들의 뜻을 살펴서 제가 이미 청정해졌지만
나머지 지혜가 하열한 이들이 이치를 통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저 정토에 태어나는 뛰어난 덕을 얻게 하고자
제가 모니지(牟尼地)를 간략하게 풀어서 밝힙니다.
015_0228_a_06L覽諸師意我已淨
恐餘劣智未能通
爲令彼淨生勝德
故我略釋牟尼地


『불지경(佛地經)』이란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의어서 일체법과 일체종상(一切種相)을 능히 스스로 열어 깨닫는 것이며, 또한 모든 유정(有情)을 능히 열어 깨닫는 것이니, 마치 꿈꾸는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고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아서 불지(佛地)라고 이름한다.
015_0228_a_08L論曰『佛地經』者具一切智一切種智離煩惱障及所知障於一切法一切種相能自開覺亦能開覺一切有情如睡夢覺如蓮花開故名爲佛地
이른바 의지하시는 바이고 행하시는 바이며 거두시는 바로서 바로 마땅히 설하신 바인 청정법계(淸淨法界)이니, 대원경지(大圓鏡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수용하고 화합해서 한 맛의 일이 평등하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의지하시는 바이고 행하시는 바이며 거두시는 바이기 때문에 불지라고 이름한다.
015_0228_a_12L所依所行所攝卽當所說淸淨法界大圓鏡智平等性智妙觀察智成所作智受用和合一味事等是佛所依所行所攝故名佛地
능히 꿰뚫고 능히 거두므로 이름하여 경(經)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꿰뚫고 거두어서 교설의 뜻으로 응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바이니, 여기에서는 불지가 유정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을 널리 선포해 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언전(言詮)된 뜻에 입각하여 『불지경』이라고 이름하니,『연기경(緣起經)』과 같고『집보론(集寶論)』과 같다.
015_0228_a_16L能貫能攝故名爲經以佛聖教貫穿攝持所應說義所化生故應知此中宣說佛地饒益有情依所詮義名『佛地經』如『緣起經』如『集寶論』
015_0228_b_01L이 경에 담긴 뜻을 간략히 설명하면, 세존 불국토의 원만함과 공덕의 원만함과 권속의 원만함을 드러내서 불지(佛地)를 안립하는 것이며, 다섯 가지 법의 총별(總別)로 수용하고 화합해서 한 가지 맛의 사지[一味事智]로 청정법계에 의지하여 모든 공덕과 3신(身)의 차별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들을 차례로 나타내 보이면서 여래께서 이와 같은 곳에 머무시며, 이와 같은 덕을 갖추시고, 이와 같은 무리들과 함께 안립하시고, 이와 같이 지(地)의 뜻이 차별 된다.
015_0228_a_20L略說此經所攝義者謂顯世尊佛土圓滿功德圓滿眷屬圓滿安立佛地五法摠別受用和合一味事智依淨法界具諸功德三身差別此則次第示現如來居如是處具如是德如是衆俱安立如是地義差別
이와 같은 곳이란 이른바 부처님의 정토로서 곧 열여덟 가지가 원만하게 장엄된 광대한 궁전이다. 이와 같은 덕이란 이른바 불세존의 스물한 가지 특별하고 훌륭한 공덕이다. 이와 같은 무리란 이른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성문(大聲聞)과 마하살(摩訶薩)의 무리로서 갖가지 미묘한 공덕을 성취한 자들이다. 지(地)의 뜻의 차별이란 이른바 대각지(大覺地)가 다섯 가지 법의 총별로 수용하고 화합해서 한 가지 맛의 일이 평등한 것을 말한다. 나중에 가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015_0228_b_04L如是處者謂佛淨土卽十八種圓滿莊嚴廣大宮殿如是德者謂佛世尊二十一種殊勝功德如是衆者謂無數量諸大聲聞摩訶薩衆成就種種微妙功德地義別者謂大覺地五法摠別受用和合一味事等後當廣說
이 경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분[敎起因緣分]이고, 둘째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시는 부분[聖敎所說分]이고, 셋째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행하는 부분[依敎奉行分]이다.
015_0228_b_10L於此經中摠有三分教起因緣分聖教所說分依教奉行分
전체적으로는 내가 들은 것과 가르침이 일어날 때를 나타내고, 개별적으로는 가르침의 주인과 가르침이 일어나는 장소, 그리고 가르침의 은혜를 입는 유정중생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因)과 연(緣)이 되기 때문에 이름하여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의 부분’이라고 한다.
015_0228_b_12L摠顯己聞及教起時別顯教主及教起處教所被機卽是教起所因所緣故教起因緣分
또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시는 법문의 품류의 차별을 올바로 나타내므로 이름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시는 부분’이라고 한다.
015_0228_b_15L正顯聖教所說法門品類差別故名聖教所說分
당시 대중들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듣고 환희하며 받들어 행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행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015_0228_b_16L顯彼時衆聞佛聖教歡喜奉行故名依教奉行分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박가범께서.
015_0228_b_17L經曰如是我聞一時薄伽梵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자기가 들었음을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가 “이와 같은 일을 내가 옛날에 이와 같이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28_b_18L論曰如是我聞者謂摠顯己聞傳佛教者言如是事我昔曾
전체적인 말은 네 가지 뜻에 의거해 굴러간다. 첫째는 비유에 의거함이고, 둘째는 가르침과 훈계에 의거함이며, 셋째는 문답에 의거함이고, 넷째는 허가(인가ㆍ인정)에 의거함이다.
015_0228_b_20L聞如是摠言依四義轉依譬喩依教誨問答依許可
‘비유에 의거함’이란 가령 “이와 같은 부귀함은 마치 비사문(毘沙門:북방의 다문천왕)과 같다”고 설명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훈계에 의거함’이란 마치 “너는 반드시 이와 같이 경과 논을 독송해야 한다”고 설명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5_0228_b_22L依譬喩者如有說言如是富貴如毘沙門依教誨者如有說言汝當如是讀誦經論
015_0228_c_01L‘문답에 의거함’이란 마치 “나는 이와 같이 널리 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설명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허가에 의거함’이란 마치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짓고, 이와 같이 설한다”고 설명해서 말하거나, 혹은 “이 일은 이와 같다”고 허가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015_0228_c_01L依問答者如有說言如是我聞如是宣說依許可者如有說言我當爲汝如是而思如是而作如是而說或許可言是事如是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오직 허가에 의거할 뿐이라고 하니, 이른바 결집할 때에 모든 보살의 무리가 함께 청하면서 ‘당신이 들은 바와 같이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전법(傳法) 보살은 문득 그 말을 인정하면서 ‘이와 같이 마땅히 설하셨으니, 내가 들은 바와 같다’고 말한다. 또 이와 같은 말이 믿을 수 있는지 심사하여 정하니, 이른바 ‘이와 같은 법은 내가 일찍이 들은 적이 있으니, 이 일은 이와 같이 여래께서 설하신 말씀과 가지런해서 결정코 다름이 없다’고 한다.
015_0228_c_05L有義此中唯依許可謂結集時諸菩薩衆咸共請言如汝所聞當如是說傳法菩薩便許彼言如是當說如我所聞又如是言信可審定謂如是法我昔曾聞此事如是齊此當說定無有異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또한 문답에 의지한다고 하니, 이른바 누군가 묻기를 ‘그대가 그 설하신 바를 옛날에 정녕코 들었는가?’하면,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한다.
015_0228_c_10L有義此中亦依問答謂有問言汝當所說昔定聞耶故此答言如是我聞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통틀어 네 종류에 의지한다고 하니, 비유(여기서는 비유량의 의미)에 의한다는 것은 이른바 ‘마땅히 설해진 이와 같은 문구는 내가 옛날에 들은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꾸짖음에 의한다는 것은 이른바 당시의 대중에게 고할 때에 ‘이와 같이 내가 옛날에 들은 것을 마땅히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라는 것은 모든 온(蘊)으로서 세속법의 가짜[假]이고, ‘들었다’는 것은 이근(耳根)이 인식작용을 일으켜서 받아 듣는 것이다. 개별적인 것을 폐하고 총체적인 것에 나아가므로 “나는 들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28_c_12L有義此中通依四種依譬喩者謂當所說如是文句如我昔聞依教誨者謂告時衆如是當聽我昔所聞餘如前說我謂諸薀世俗假者聞謂耳根發識聽受廢別就摠故說我聞
어떤 사람은 여래의 자비와 본원의 증상연의 힘으로 듣는 자의 식(識) 위에 경문의 뜻의 모양[文義相]이 생긴다고 하니, 이 경문의 뜻의 모양은 비록 자기 선근의 힘이 일어나는 것에 직접적으로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연에 나아가므로 이름하여 ‘불설(佛說)’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근의 힘을 통해 자기 마음이 변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하여 “나는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28_c_17L有義如來慈悲本願增上緣力聞者識上文義相生此文義相雖親依自善根力起而就强緣名爲佛說由耳根力自心變現故名我聞
어떤 사람은 듣는 자의 선근과 본원의 증상연의 힘으로 여래의 식(識) 위에 경문의 뜻의 모양이 생기는 것이니, 이 경문의 뜻의 모양이 바로 부처님의 이타(利他)적인 선근이 일어난 것이므로 이름하여 ‘불설’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자의 식심(識心)이 비록 취득하지 않았어도 그 모양과 비슷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나는 들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28_c_20L有義聞者善根本願增上緣力如來識上文義相生此文義相是佛利他善根所起名爲佛說聞者識心雖不取得然似彼相分明顯現故名我聞
015_0229_a_01L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늘리거나 줄이거나 다른 부분이 첨가되는 허물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와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고 달리 전전(展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015_0229_a_01L應知說此如是我聞意避增減異分過失謂如是法我從佛聞非他展轉
‘들음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감능(堪能)하는 바가 있어서 온갖 들은 것이 모두 늘리거나 줄이거나 다른 부분을 첨가하는 허물을 떠나 있으니, 어리석은 범부가 감능하는 바가 없어서 온갖 들은 것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혹은 다른 부분을 첨가하는 허물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015_0229_a_03L顯示聞者有所堪能諸有所聞皆離增減異分過失非如愚夫無所堪能諸有所聞或不能離增減異分
법을 결집할 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는 여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처음에 함으로서 중생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신수(信受)하게 하고자 하니, “이와 같은 법을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었으며, 경문의 뜻은 결정코 늘어났거나 줄어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는 응당 올바로 듣고 난 뒤에 이치대로 사유하여 부지런히 수행하고 배우는 것이다.
015_0229_a_06L結集法時傳佛教者依如來教初說此言爲令衆生恭敬信受言如是法我從佛聞文義決定無所增減是故聞者應正聞已如理思惟當勤修學
‘한때[一時]’라는 말은 설법을 들은 때이다. 이것은 찰나에 나아가 상속하며 끊어짐이 없어서 설법을 듣는 것이 구경(究竟)이므로 전체적으로 ‘한때’라고 이름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글자ㆍ이름ㆍ구절 등의 설법을 들은 때의 시간이 다를 것이다.
015_0229_a_10L言一時者謂說聽時此就剎那相續無斷說聽究竟摠名一時若不爾者字名句等說聽時異
무엇을 ‘한[一]’이라고 하는가? 혹은 설하는 자가 다라니를 능히 얻어서 한 글자 속 한 찰나 경에 모든 법문을 능히 설하고 능히 지니는 것이며, 혹은 듣는 자가 깨끗한 이근을 얻어서 한 찰나 경에 한 글자를 들을 때에 나머지 모든 것에 걸림 없이 모두 능히 받아들이는 까닭에 ‘한때’라고 이름한다.
015_0229_a_13L云何言一或能說者得陁羅尼於一字中一剎那頃能持能說一切法門或能聽者得淨耳根一剎那頃聞一字時於餘一切皆無障㝵悉能領受故名一時
혹은 서로 모여서 만나는 시분(時分)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한 때’라고 한다. 즉 이 설함과 들음이 함께 동일한 시각에 만난다는 뜻이다.
015_0229_a_17L或相會遇時分無別故名一時卽是說聽共相會遇同一時義
‘때[時]’란 바로 유위법에서 거짓으로 세워진 분위(分位)이다. 혹은 이 마음 위에서 분위의 영상(影像)은 색심(色心) 등에 의지하여 총체적으로 거짓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이것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포섭된다.
015_0229_a_19L時者卽是有爲法上假立分位或是心上分位影像依色心等摠假立故是不相應行薀所攝
015_0229_b_01L어찌하여 아래의 처소처럼 개별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단지 ‘한때’라고만 말하는가? 낮밤 등의 시분이나 방향들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설하지 않았다. 또 뜻이 일정하지 않으니 혹은 한 찰나이기도 하고 혹은 거듭 상속하기도 해서 일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총상(總相)으로서 다만 ‘한때’라고만 말한 것이다.
015_0229_a_21L何不別顯如下處等但說一時晝夜時分諸方不定不可別說又義不定或一剎那或復相續不可定說是故摠相但說一時
‘박가범’이란, 이른바 박가(薄伽)라는 소리는 여섯 가지 뜻에 의거하여 변전한다. 첫째는 자재(自在)의 뜻이고, 둘째는 치성(熾盛)하다는 뜻이고, 셋째는 단엄(端嚴)하다는 뜻이고, 넷째는 명칭(名稱)이라는 뜻이고, 다섯째는 길상하다는 뜻이고, 여섯째는 존귀(尊貴)하다는 뜻이니,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5_0229_b_02L薄伽梵者謂薄伽聲依六義轉在義熾盛義端嚴義名稱義吉祥義尊貴義如有頌言

자재함과 치성함과 존엄함
명칭과 길상함과 존귀함
이 여섯 가지 뜻의 차별은
총체적인 명칭[總名]을 박가(薄伽)로 삼음을 알라.
015_0229_b_05L自在熾盛與端嚴
名稱吉祥及尊貴
如是六種義差別
應知摠名爲薄伽

이와 같이 모든 여래는 일체종(一切種)을 갖추고 있어서 서로 여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여래를 박가범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29_b_07L如是一切如來具有於一切種皆不相離是故如來名薄伽梵
그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여래는 영원히 온갖 번뇌에 계박되거나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자재의 뜻을 갖추었고, 지혜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라서 태우고 단련하므로 치성의 뜻을 갖추었고, 미묘한 32상 등으로 장엄되었으므로 단엄의 뜻을 갖추었고, 온갖 뛰어난 공덕이 원만하여 알지 못함이 없으므로 명칭의 뜻을 갖추었고, 온 세상이 가까이하면서 공양하고 함께 찬탄하므로 길상(吉祥)의 뜻을 갖추었고, 온갖 덕을 갖추고 항상 방편의 이익을 일으켜서 모든 유정을 안락하게 하되 게으르거나 그만두지 않으므로 존귀(尊貴)의 뜻을 갖추었다.
015_0229_b_09L其義云何謂諸如來永不繫屬諸煩惱故具自在義焰猛智火所燒煉故具熾盛義妙三十二大士相等所莊飾故具端嚴義一切殊勝功德圓滿無不知故具名稱義一切世閒親近供養咸稱讚故具吉祥義具一切德常起方便利益安樂一切有情無懈廢故具尊貴義
혹은 능히 네 가지 마원(魔怨)을 쳐부수는 까닭에 박가범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마원인가? 번뇌마(煩惱魔)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자재천마(自在天魔)이다.
015_0229_b_17L或能破壞四魔怨故名薄伽梵四魔怨者謂煩惱魔薀魔死魔自在天魔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공덕의 명호를 갖추셨는데, 어찌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는 모든 경의 첫머리에 오로지 이와 같이 박가범이라는 이름만을 두는 것인가? 그것은 이 하나의 이름을 세상이 함께 존중하기 때문이다. 모든 외도들은 다 같이 본사(本師)를 일컬어 박가범이라고 한다. 또 이 하나의 이름은 온갖 덕을 총체적으로 거두지만 다른 이름은 그렇지 않으므로 경의 첫머리에는 모두 이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박가범의 덕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한다.
015_0229_b_19L佛具十種功德名號何故如來教傳法者一切經首但置如是薄伽梵名謂此一名世咸尊重故諸外道皆稱本師名薄伽梵又此一名摠攝衆德餘名不爾是故經首皆置此名薄伽梵德後當廣說
015_0229_c_01L 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로 장엄한 곳에 계시면서 커다란 광명으로 모든 가없는 세계를 두루 비추시니, 한량없는 방위와 처소가 미묘하게 장식되어 줄지었고 둥근 둘레는 가없어서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삼계의 행해지는 곳을 초월하고 출세간의 선근이 일어난 것보다 뛰어났고 지극히 자재한 정식(淨識)을 여래가 머무는 곳의 상(相)으로 삼았다.
015_0229_c_01L經曰住最勝光曜七寶莊嚴放大光普照一切無邊世界無量方所妙飾閒列周圓無際其量難測超過三界所行之處勝出世閒善根所起極自在淨識爲相如來所都
모든 대보살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한량없는 하늘과 용과 사람이거나 사람 아닌 무리들이 언제나 좌우에서 따랐으며, 광대한 법의 맛과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채 모든 중생의 온갖 의리(義利)를 지어서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과 속박의 티끌을 멸하였고, 온갖 악마를 멀리 여의고 모든 장엄을 뛰어넘었다. 여래의 장엄을 의지처로 삼고, 큰 염혜행(念慧行)을 여행길로 삼고, 커다란 지(止)와 미묘한 관(觀)을 탈것으로 삼고, 큰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고, 한량없는 공덕의 무리를 장엄으로 삼아서 대보화왕(大寶花王)의 무리가 세운 커다란 궁전에 머물고 있었다.
015_0229_c_06L諸大菩薩衆所雲集無量天人非人等常所翼從廣大法味喜樂所持作諸衆生一切義利滅諸煩惱災橫纏垢離衆魔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大念慧行以爲遊路大止妙觀以爲所乘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衆所建立大宮殿中

이것은 여래께서 머무시는 곳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정토가 이와 같다. 정토는 다시 열여덟 가지 원만한 일을 말미암기 때문에 원만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현색(顯色)이 원만하고, 형색(形色)이 원만하며, 분량(分量)이 원만하고 방소(方所)가 원만하고, 원인[因]이 원만하고, 과보[果]가 원만하고, 주(主)가 원만하고, 보필[輔翼)하는 것이 원만하고, 권속이 원만하고, 주지(住持)가 원만하고, 사업(事業)이 원만하고, 섭익(攝益)이 원만하고, 두려움 없음이 원만하고, 머무는 곳[住處]이 원만하고, 길[路]이 원만하고, 탈것[乘]이 원만하고, 문(門)이 원만하고, 의지(依持)가 원만하다.
015_0229_c_14L論曰此顯如來住處圓滿謂佛淨土如是淨土復由十八圓滿事故說名圓滿謂顯色圓滿形色圓滿分量圓滿方所圓滿因圓滿果圓滿主圓滿輔翼圓滿眷屬圓滿住持圓滿事業圓滿攝益圓滿無畏圓滿住處圓滿路圓滿乘圓滿門圓滿依持圓滿
열아홉 구절의 이와 같은 차례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열여덟 가지 원만함을 나타내 보이니, 곧 이 원만하게 장식된 궁전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정토라고 이름하며,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커다란 궁전에 머무시면서 이 계경(契經)을 설하신다.
015_0229_c_21L十九句如其次第顯示如是十八圓滿卽此圓滿所嚴宮殿名佛淨土住如是大宮殿中說此契經
015_0230_a_01L수용(受用)과 변화(變化)의 두 가지 부처님 국토 가운데 지금의 이 정토는 어느 국토에 속할까? 그리고 이 경에서의 부처님은 어떤 몸을 말하는 것일까?
015_0230_a_01L受用變化二佛土中今此淨土何土所攝說此經佛爲是何身
어떤 사람은 이 국토는 변화토(變化土)에 속한다고 하며, 이 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바로 변화신(變化身)이라고 한다. 성문 등의 무리가 이 국토에 머물면서 여래를 마주 대한 채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서 환희하고 믿어 받들며 봉행하기 때문에 이는 부처님의 마음이 변현한 것이다. 그래서 삼계를 벗어나는 정식(淨識)을 상(相)으로 삼아서 뛰어난 법을 설하는 것이다.
015_0230_a_03L有義此土變化土攝說此經佛是變化身聲聞等衆住此土中現對如來聞說是經歡喜信受而奉行故佛心所現故出三界淨識爲相爲說勝法
이 지(地) 이전의 모든 유정들을 교화하여 그 인(因)을 기쁘고 즐겁게 수행토록 하기 위하여 잠시 청정한 불국토를 화작(化作)해서 뛰어나고 미묘한 화신의 신통력을 대중들에게 가피하여 그들로 하여금 잠시 볼 수 있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문 등의 무리는 마땅히 모두 보지 못할 것이다.
015_0230_a_07L化此地前諸有情類令其欣樂修行彼因故蹔化作淸淨佛土殊妙化身神力加衆令蹔得見若不爾者聲聞等衆應俱不見
어떤 사람은 이 국토는 수용토(受用土)에 속한다고 하고, 이 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바로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한다. 이 정토의 양은 한없기 때문이며, 길과 탈것과 문 등이 바로 참다운 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하여 한결같이 깨끗하고 미묘하며, 한결같이 안락하고, 한결같이 죄가 없고, 한결같이 자재하여 다른 곳에서도 설하기 때문이며,『해심밀(解深密)』의 설에서는 3지(地) 이상은 곧 태어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며, 이 경에서 설하는 부처님은 나중에 설명하게 될 스물한 가지 참다운 공덕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며, 다른 경을 설할 때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공덕을 열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015_0230_a_11L有義此土受用土攝說此經佛是受用身此淨土量無邊際故路乘門等是實德故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一向安樂一向無罪一向自在餘處說故解深密說三地已上乃得生故說此經佛具後所說二十一種實功德故說餘經時不列如是佛功德故
만약 잠시 이와 같은 정토와 이와 같은 미묘한 몸을 화작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응당 다른 경에서와 같이 분명하게 나타내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설하지 않았으므로 이 수용토와 수용신과 성문 등의 무리는 부처님의 화작인 것이다.
015_0230_a_18L若蹔化作如是淨土如是妙身加衆令見應如餘經分明顯說然不說故是受用土及受用身聲聞等衆是佛化作
혹자는 모든 보살이 이 몸과 불국토의 장엄과 법을 설하는 모임을 만들어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바로 이 지상(地上) 보살은 응당 보고 듣는 바일 텐데, 어찌하여 이 화불토(化佛土) 중에 결집하고 유포하고 법을 전하는 보살이 있는가?
015_0230_a_21L或諸菩薩現作此身莊嚴佛土說法會故若爾此是地上菩薩所應見聞何故於此化佛土中結集流布傳法菩薩
015_0230_b_01L 일체지자(一切智者) 및 머무는 곳이 모든 세간법을 뛰어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이와 같이 나타내 보이는 것은 교화 받는 중생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이고, 다음 생에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에서 태어나 이와 같은 부처님을 뵙고 이와 같은 법을 듣고 그 인을 수행하고자 발원시키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 광대한 승해(勝解)를 낳게 해서 유정과 모든 보살이 뛰어나게 환희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증상의요승해(增上意樂勝解)의 경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집하고 유포하는 것이다.
015_0230_b_01L爲欲示現一切智者及所居處超過一切世閒法故如是示現欲令所化生欣樂故爲令發願當生如是淸淨佛土見如是佛聞如是法修彼因故爲生廣大勝解有情及諸菩薩勝歡喜故欲令增上意樂勝解界堅牢故結集流布
또 이 법은 뛰어나서 여기서 마땅히 들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 처소가 뛰어나지 않으면 화신(化身)은 그 모습이 거칠어서 법을 널리 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용신이 수용토에 머물러 초지(初地) 이상의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설해서 법을 전하는 자로 하여금 결집하고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015_0230_b_07L又是法勝於此宜聞然處非勝化身相麤不可宣說故受用身居受用土爲初地上諸菩薩說令傳法者結集流通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설한 법만을 설하지 않는가? 만약 설하는 곳이나 능히 설하는 자가 없다면 이 법을 어느 곳에서 누가 설하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에서 의심이 일어나므로 모름지기 갖추어 설한 것이다.
015_0230_b_10L若爾何故不但說彼所說法耶若不說處及能說者不知此法何處誰說一切生疑故須具說
참다운 뜻[實義]은 석가모니께서 이 경을 설하실 때에 지전(地前)의 대중들은 변화신이 이 예토에 머무시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보지만, 지상(地上)의 대중들은 수용신이 부처님의 정토에 머무시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본다. 듣는 것은 비록 같지만 보는 것은 각각 다르다. 비록 함께 환희하고 믿고 받아서 봉행하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고 행하는 바도 각각 다르다.
015_0230_b_13L如實義者釋迦牟尼說此經時地前大衆見變化身居此穢土爲其說法地上大衆見受用身居佛淨土爲其說法所聞雖同所見各別雖俱歡喜信受奉行解有淺深所行各異
그런데 법을 전하는 사람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 뛰어난 법을 듣고 염원을 발해서 그 인(因)을 닦아 다음 생에 정토에 태어나 부처님의 공덕을 증득케 하고자 하기 때문에 뛰어남에 나아간 자가 본 결집은 “박가범께서 가장 뛰어난 등등에 머무신다”고 말하면서 나아가 여래의 공덕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015_0230_b_18L而傳法者爲令衆生聞勝悕願勤修彼因當生淨土證佛功德故就勝者所見結集言薄伽梵住最勝等乃至廣說如來功德
‘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로 장엄한 곳’이란 것은 거대한 궁전이 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로 장엄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거대한 궁전이 7보로 장엄되어있으므로 가장 훌륭하게 빛난다고 하기도 한다.
015_0230_b_21L最勝光曜七寶莊嚴者謂大宮殿用最勝光曜七寶莊嚴或大宮殿七寶莊嚴故最勝光曜
015_0230_c_01L‘7보’라는 것은 첫째는 금, 둘째는 은, 셋째는 폐유리(吠瑠璃), 넷째는 모파락게파(牟婆洛揭婆), 다섯째는 갈습마게파(遏濕摩揭婆), 여섯째는 붉은 진주인데 붉은 벌레에서 나왔으므로 붉은 진주라고 하며, 혹은 구슬의 몸체가 붉기 때문에 붉은 진주라고도 한다. 일곱째는 갈계달락가(羯雞怛諾迦)이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칠보라고 말하는데, 참다운 정토는 한량없는 미묘한 보배들이 아름답게 장식되고 장엄되어 있어서 세간에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015_0230_c_01L言七寶者吠琉璃牟婆洛揭婆濕摩揭婆赤眞珠謂赤虫所出名赤眞珠或珠體赤名赤眞珠羯雞怛諾迦就此所重且說七寶其實淨土無量妙寶綺飾莊嚴非世所識
‘큰 광명으로 모든 가없는 세계를 두루 비춘다’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이 커다란 빛을 놓아서 널리 모든 가없는 세계를 비추는 것을 말한다. 또는 거대한 궁전의 본체가 가없는 세계에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큰 광명을 놓아서 일체를 두루 비춘다는 말이다. 이 두 구절을 통해 부처님의 정토가 색상을 드러냄이 원만함[顯色圓滿]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이 정토는 색상을 드러냄이 원만하다.
015_0230_c_06L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者謂大宮殿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或大宮殿其體周遍無邊界故放大光明普照一切由此二句顯佛淨土顯色圓滿如是淨土顯色圓滿
그렇다면 형체와 양은 어떤가? ‘한량없는 방소(方所)는 미묘한 장식이 줄지어 있고’는 이른바 거대한 궁전의 미묘한 장식이 줄지어 있는 것이 방향이나 장소가 한량없다는 말이다. 또는 대궁전의 한량없는 미묘한 장식이 방향과 처소 사이에 줄지어 있다는 말이다.
015_0230_c_11L形量云何無量方所妙飾閒列謂大宮殿妙飾閒列無量方所或大宮殿無量妙飾方所閒列
‘한량없다’는 것은 숫자가 한량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장소가 한량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혜(慧)를 앞세워서 보기 좋게 장식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묘한 장식이 줄지어 있다고 설한 것이다.
015_0230_c_14L言無量者或數無量或處無量如慧爲先安布閒飾是故說名妙飾閒列
어떻게 불국토는 깨끗한 마음을 모양[相]으로 삼는가? 외적인 공구(工具)를 쓰는 세속의 장인(匠人)이 이룬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여여한 지혜를 앞세워서 보기 좋게 장식을 늘어놓은 것은 이른바 불세존이 옛날 보살이었을 때에 선교방편혜(善巧方便慧)를 일으켜서 이렇게 이렇게[如是如是] 가행(加行)하고 서원(誓願)하여 불국토를 장엄한 것이다. 가행과 서원의 세력을 앞세운 탓에 과위(果位) 중에서 비록 옛날과 같은 희론각혜(戲論覺慧)는 없어도 부처님의 정식(淨識)이 이와 같이 변현하였고, 또한 보살의 식(識)도 이와 같이 변현케 하였기 때문에 서로 어긋남이 없다. 나머지 곳 또한 이런 이치에 의하여 설해야 한다.
015_0230_c_16L云何佛土淨心爲相非外工具世匠所成而有如是如慧爲先安布閒飾謂佛世尊昔菩薩時發巧便慧如是如是加行誓願莊嚴佛土由先加行誓願勢力於果位中雖無如昔戲論覺慧而佛淨識如是變現亦令菩薩識如是變故不相違餘處亦應依此理說
015_0231_a_01L이와 같이 정토는 형색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분량은 어떠한가?’
‘둥근 둘레는 가없어서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그 양의 둘레가 가없어서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또는 거대한 궁전의 그 양은 가없어서 둘레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동쪽 등의 분제(分齊)가 없으므로 길고 짧음 등의 모양을 측량하기가 어렵다.
015_0230_c_23L如是淨土形色圓滿分量云何周圓無際其量難測謂大宮殿其量周圓無際難測或大宮殿其量無際周圓難測又東方等分齊無故長短等相難可測量
어떤 사람은 여래의 수용신토(受用身土)는 교화를 받을 중생의 마땅한 바를 따라서 나타나는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그 양이 일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비록 광대하게 나투신다고 해도 또한 변제(邊際)가 있지만, 그러나 지전(地前) 보살의 지(智) 등에 나아가서는 가없어서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015_0231_a_05L有義如來受用身土隨所化生所宜而現或大或小其量無定雖現廣大亦有邊際然就地前菩薩智等說言無際其量難測
어떤 사람은 여래의 수용신토는 3무수겁 동안 닦은 가없는 선근이 감응한 주변 법계라서 지상(地上) 보살과 모든 여래도 능히 그 양의 변제(한계:가장자리)를 헤아릴 수 없으며, 가없기 때문에 비롯함이 없는 때와도 같다고 말한다.
015_0231_a_08L有義如來受用身土三無數劫所修無邊善根所感周遍法界地上菩薩及諸如來亦不能測其量邊際以無邊故如無始時
참다운 뜻에서 수용신토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수용(自受用)이다.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3무수겁 동안 닦은 가없는 선근이 감응한 주변 법계를 자수용의 커다란 법의 즐거움으로 삼기 때문에 처음 부처를 이룬 때부터 미래세가 다하도록 서로 이어져 변함이 없음이 모든 공덕과 같고, 모든 대보살 또한 능히 볼 수 없으나 다만 들을 수는 있다. 이와 같이 정토는 한량없는 까닭에 모든 부처가 비록 보아도 또한 능히 그 양의 변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015_0231_a_12L如實義者受用身土略有二種自受用謂諸如來三無數劫所修無邊善根所感周遍法界爲自受用大法樂故從初得佛盡未來際相續無變如諸功德諸大菩薩亦不能見但可得聞如是淨土以無量故諸佛雖見亦不能測其量邊際
둘째는 타수용(他受用)이다.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지상(地上)의 모든 보살들이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훌륭한 행에 나아가 닦아서 마땅함에 따라 나투시니, 혹은 빼어난 모습이거나 하천한 모습이거나 혹은 커다란 모습이거나 작은 모습으로 바꾸어 나투시며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마치 변화토(變化土)와도 같다. 이와 같은 정토는 변제가 있으므로 지상 보살과 여러 여래가 모두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있다. 다만 지전(地前) 보살에 대해서는 나투시는 모습과 처소가 일정치 않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차별로 말미암기 때문에 둥근 둘레가 가없어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31_a_18L他受用謂諸如來爲令地上諸菩薩衆受大法樂進修勝行隨宜而現或勝或劣或大或小改轉不定如變化土如是淨土以有邊故地上菩薩及諸如來皆測其量但就地前言不能測由是二種差別故言周圓無際其量難測
015_0231_b_01L이와 같이 정토의 분량이 원만함은 삼계에 처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삼계가 행해지는 곳을 훨씬 넘어 있다’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의 처소와 방위와 구역이 삼계가 행해지는 곳을 넘어 있다는 말로서 삼계 자체 경지의 모든 갈애[愛]를 자기의 소유로 삼아서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소연(所緣)과 상응의 두 가지 속박[縛]이 점점 더 늘어나면 바로 저 삼계의 이숙과(異熟果)와 증상과(證上果)이다.
015_0231_b_01L如是淨土分量圓滿爲三界處爲不爾耶超過三界所行之處謂大宮殿處所方域超過三界所行之處非如三界自地諸愛執爲己有所緣相應二縛隨增是彼異熟及增上果
이와 같이 정토는 삼계의 갈애가 집착해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속박을 여의었으며, 그래서 저 삼계의 이숙과와 증상과가 아니기 때문에 열반 등이 삼계의 이숙과지(異熟果地)를 넘어서 있는 것과 같다.
015_0231_b_06L如是淨土非三界愛所執受故離二縛故非彼異熟增上果故如涅槃等超過三界異熟果地
만약 그렇다면 정토는 삼계에 소속되지 않으므로 곧 무루(無漏)이다. 만약 무루가 유위에 거두어지면 이는 바로 도제(道諦)로서 곧 선한 성품일 텐데, 어떻게 색과 소리와 냄새 등을 그 체성(體性)으로 삼겠는가? 18계(界)와 15유루(有漏)와 8무기(無記) 등을 다른 곳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015_0231_b_09L若爾淨土非三界攝便是無漏若是無漏有爲所攝卽是道諦便是善性云何得用色聲香等爲其體性以十八界十五有漏八無記等餘處說故
어떤 사람은 18계는 유루와 무루에 통하며 모두가 선한 성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2승(乘)의 경계에 의거하면 거친 모양[麤相]과 비슷해서 18계 가운데 15유루와 8무기 등이 있다고 말한다.
015_0231_b_13L有義十八界通有漏無漏皆有善性然據二乘境界麤相相似說言十八界中十五有漏八無記等
어떤 사람은 정토는 정심(定心)이 변한 바이니, 비록 색 등은 10계(界)의 모습과 닮았지만 10계에 거두어지지 않으며, 여러 세간의 5식(識)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변처(遍處)1) 등의 소연(所緣)인 청(靑) 등과 같이 모두 자재함으로 생겨난 색(色)인 까닭에 법계가 거두는 바이다. 그러므로 정토는 비록 색 등을 그 체성으로 삼고 있지만, 이것은 무루선(無漏善)과 또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015_0231_b_16L有義淨土定心所變雖有色等似十界相非十界攝非諸世閒五識所得如遍處等所緣靑等皆是自在所生色故法界所攝是故淨土雖用色等爲其體性是無漏善亦不相違
015_0231_c_01L만약 그렇다면 보살의 5식은 수용토를 인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인가? 비록 그 힘에 의거하여 스스로의 식이 변이한다고 해도 모양의 거칠고 미묘함은 서로 닮지 않는다. 다섯 가지 경계가 여래의 5식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반연할 수 없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일[事]과 마음에 반연하는 작용이 서로 비슷해서 거짓으로 5식이라고 이름하지만, 실제로는 5식이 아니니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 널리 설하셨다. 5식의 체는 바로 스스로의 성품이 어지럽고 흐트러져 있는 것이니 선정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31_b_20L若爾菩薩五識不緣受用土耶雖依彼力自識變異然相麤妙不相似故非五境攝如來五識可不緣耶佛緣事心作用相似假名五識實非五識恒在定故餘處宣說五識體是自性散亂無有定故
만약 그렇다면 5근(根)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여래의 5근과 색ㆍ소리 등은 서로 동일한 근(根)의 경계라서 거짓으로 5근이라고 이름한다. 나아가 색 등의 경계는 정심(定心)이 변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법계로서 자재하게 색을 낳는다.
015_0231_c_03L若爾不從五根生耶如來五根及色聲等相同根境假名五根及色等境定心變故實是法界自在生色
만약 그렇다면 4지(智)2)는 마땅히 동시(同時)가 아니다. 일시에 한 중생에게 많은 식(識)이 한 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또 어떤 과실이 있는가?
015_0231_c_06L若爾四智應不同時無有一時一類多識一身起故許亦何失
진정한 뜻은 이렇다. 여래의 몸과 국토는 너무나 깊고 미묘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유루인 것도 아니고 또한 무루인 것도 아니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무기(無記)도 아니며, 온(蘊)이나 계(界)와 같은 법문에 포섭되는 바도 아니며, 다만 마땅한 바에 따라서 갖가지 다른 설이 있을 뿐이다.
015_0231_c_07L如實義者如來身土甚深微妙非有非無非是有漏亦非無漏非善非惡亦非無記非蘊界等法門所攝但隨所宜種種異說
다른 곳에서 설한 것은 이렇다. 18계 가운데 15유루와 8무기 등이 있는데, 다만 2승과 범부 등의 경계에 나아가 거친 상(相)으로 분별했을 뿐 모든 부처나 모든 대보살의 깊고 깊은 경계에 나아가 말한 것이 아니므로 다른 곳에서는 여래는 실제로 온과 계와 처에 포섭된 것이 아니면서 모든 선(善) 등을 다 바로 나타내 보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15_0231_c_11L餘處說言十八界中十五有漏八無記等但就二乘異生等境麤相分別不就諸佛諸大菩薩甚深境界故餘處說如來非實薀界處攝所有善等皆是示現乃至廣說
이와 같은 정토는 삼계와 동일한 곳에 있는가? 아니면 각각 별개의 곳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각각 별개라고 말하니, 어떤 곳에서는 정거천(淨居天) 위에 머문다고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서방(西方) 등에 머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곳이라고 하니, 정토의 둘레는 변제가 없고 법계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015_0231_c_15L如是淨土爲與三界同一處所爲各別耶有義各別有處說在淨居天上有處說在西方等故有義同處淨土周圓無有邊際遍法界故
참다운 뜻은 이렇다. 실제의 수용토는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삼계의 장소를 여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삼계의 처소에 즉(卽)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만약 보살의 마땅한 바를 따라서 나타난다고 한다면, 색계의 정거천 위에 있기도 하고 혹은 서방 등의 처소에 있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015_0231_c_19L如實義者實受用土周遍法界無處不有不可說言離三界處亦不可說卽三界處若隨菩薩所宜現者或在色界淨居天上或西方等處所不定
015_0232_a_01L이와 같이 정토의 방소(方所)가 원만하여 이미 삼계의 이숙과지(異熟果地)를 넘어서 있으니, 마치 열반 등에 응당 인(因)이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인이란 것이 있다면 응당 삼계에 포섭될 것이다.
015_0231_c_23L如是淨土方所圓滿旣超三界異熟果地如涅槃等應無有因若有因者應三界攝
만일 정토가 삼계를 멀리 뛰어넘는다고 말한다면 또한 삼계법인(三界法因)을 멀리 뛰어넘는 것이니, 이것이 응당 그 모양을 설한 것이라면 어떻게 ‘출세간의 선근으로 일어난 것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득지(後得智)의 선근을 인(因)으로 하여 생기(生起)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자재천 등을 인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015_0232_a_03L若言淨土超過三界還有超過三界法因此應當說其相云何勝出世閒善根所起謂大宮殿用出世閒無分別智後所得智善根爲因而得生起非是無因非大自在天等爲因
어떻게 정토는 삼계를 멀리 뛰어넘으면서도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득지와 세간의 정법(淨法)을 이숙인(異熟因)으로 삼는가? 그것을 이숙인으로 삼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머지 인으로 그것이 생기할 수 있는 것이니, 마치 고법지인품(苦法智忍品)의 제일법(第一法)을 인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분별지와 후득무루선법종자(後得無漏善法種子)를 사용하여 3무수겁 동안 증광(增廣)시켜 닦아서 이 정토가 변현하여 생기게 하는 원인을 삼은 것이다.
015_0232_a_08L云何淨土超過三界而用出世無分別智後所得智世閒淨法爲異熟因不說與彼爲異熟因然爲餘因彼得生起如苦法智忍品世第一法爲因此用本來無分別智後得無漏善法種子三無數劫修令增廣爲此淨土變現生因
무분별지(無分別智)는 출세간이라고 이름한다. 후득지는 무분별지보다 뛰어나서 승용(勝用)이라고 이름하는데, 출세간의 무루선근보다 뛰어난 것을 이 생인(生因)으로 삼는다. 혹은 모든 성문과 독각의 성도(聖道)를 출세간이라고 이름한다. 여래의 선근은 그들 이름의 뛰어남을 능가하니, 이 부처님의 정토는 여래식(如來識) 가운데 무루의 선근을 인으로 삼아서 생겨난다.
015_0232_a_14L無分別智名出世閒後得過前說名爲勝用勝出世無漏善根爲此生因或諸聲聞獨覺聖道名出世閒如來善根過彼名勝此佛淨土如來識中無漏善根爲因而生
어떤 사람은 이것은 다만 증상연(增上緣)이니 외법(外法)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인연으로 생겨났으니 몸소 능히 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응당 인연이 없다. 외법은 상망(相望)하여서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외법은 전부 내법(內法)의 훈습을 인으로 삼는다.
015_0232_a_18L有義但是增上緣生以外法故有義亦是因緣而生親能生故若不爾者應無因緣外法相望非因緣故一切外法皆用內法熏習爲因
만약 그렇다면 외법도 이미 함께 있는 것인데, 어떻게 유정이 각각 별개의 종자를 공통의 인연으로 삼아서 하나의 과보를 합하여 낳는다는 것인가?
015_0232_a_22L若爾外法旣是共有云何有情各別種子共爲因緣合生一果
015_0232_b_01L작은 마음으로 큰 법을 헤아리지 말아야 하니, 외부의 사물이 어찌 극미의 합성(合成)으로 실다운 체성이 있어서 많은 인에 공통으로 감응하겠는가? 단지 이것은 유정의 서로 다른 식(識)이 각기 변하면서 같은 장소에서 서로 비슷해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니, 마치 여러 등불이 비추는 것과 같고 많은 사람이 꿈꾸는 것과 같다. 인류(因類)는 같고 과상(果相)은 비슷한데다 처소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서 거짓 이름으로 공통[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차이가 있다.
015_0232_b_01L勿以小心測量大法外物豈是極微合成實有體性多因共感但是有情異識各變同處相似不相障㝵如衆燈明如多所夢因類是同果相相似處所無別假名爲共實各有異
모든 부처님의 정토 또한 이와 같다. 각각 별개의 식이 변하여 모두 법계에 두루한데, 동일한 처소에서 비슷한 것을 이름하여 공통이라고 한다.
015_0232_b_06L諸佛淨土亦復如是各別識變皆遍法界同處相似說名爲共
이와 같이 정토의 인상(因相)은 원만하다. 그렇다면 과상(果相)은 어떠한가?
‘지극히 자재한 정식(淨識)을 상(相)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지극히 자재한 부처님의 무루심(無漏心)을 체상(體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오직 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식을 떠나서 달리 보물 등이 있지 않으니, 곧 부처님의 깨끗한 마음이 이와 같이 변화해 나타나서 흡사 온갖 보물들과 같은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경계상(境界相)이기 때문이다. 마치 청(靑) 등에 들어가는 변처정(遍處定)은 식이 나타낸 상인 것과 같으니, 이는 바로 여래의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이다.
015_0232_b_07L如是淨土因相圓滿果相云何最極自在淨識爲相謂大宮殿最極自在佛無漏心以爲體相唯有識故非離識外別有寶等卽佛淨心如是變現似衆寶等如前已說境界相故如入靑等遍處定者識所現相此卽如來大圓鏡智相應淨識
옛날에 닦은 자리(自利)의 무루정토종자의 인연력(因緣力)을 말미암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두루하면서 작의(作意)를 기다리지 않고 운(運)에 맡겨 변현할 수 있으며, 온갖 보배로 장엄한 수용불토(受用佛土)와 자수용신(自受用身)이 의지처가 된다.
015_0232_b_14L由昔所修自利無漏淨土種子因緣力故於一切時遍一切處不待作意任運變現衆寶莊嚴受用佛土與自受用身作所依止處
그리고 이타(利他)의 무루정토종자의 인연력 때문에 다른 지상(地上) 보살의 마땅한 바를 따라 정토를 변현하되, 그 정토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하고 뛰어나기도 하면서 타수용신(他受用身)의 의지처가 되니, 이른바 초지 보살의 마땅한 바를 따라 작고 열등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나아가 10지까지 이르면 지(地)와 지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하니, 처음과 가운데와 나중 등도 이와 마찬가지다.
015_0232_b_18L利他無漏淨土種子因緣力故隨他地上菩薩所宜變現淨土或小或大或劣或勝與他受用身作所依止處謂隨初地菩薩所宜現小現劣如是展轉乃至十地最大最勝於地地中初中後等亦復如是
015_0232_c_01L이처럼 정토의 과상(果相)은 원만하다. 그렇다면 그 주(主)는 어떠한가? 궁전은 반드시 주인이 있어서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머무시는 곳[如來所都]’이 이른바 대궁전이다. 모든 불세존께서 주가 될 뿐 나머지는 그처럼 수승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여래께만 속할 뿐이며, 혹은 오직 세존만이 주지하고 섭수할 뿐이지 나머지는 능한 자가 없다. 자수용토는 비록 법계에 두루하여도 하나하나가 스스로 변하여 각자가 주가 되므로 서로 걸림이 없다. 타수용토는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변현한 것이지만, 그러나 일합상(一合相)3)이고 또한 일상신(一相身)4)이라서 섭수하는 것이 주가 되므로 서로 걸림이 없다.
015_0232_b_23L如是淨土果相圓滿其主云何宮殿定有主依持故如來所都謂大宮殿諸佛世尊爲主非餘以殊勝故唯屬世尊或唯世尊住持攝受非餘所能自受用土雖遍法界一一自變各自爲主不相障㝵他受用土雖諸佛變然一合相亦一相身攝受爲主不相障㝵
이와 같이 정토의 주가 이미 원만하면 마땅히 보필하는 자가 있나니, 주(主)는 반드시 보필하는 자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보살의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다’라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에는 언제나 한량없는 대보살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 있다는 말이다. 이른바 궁전의 조정에 들어온 자는 반드시 보필이 되나니, 이미 무수한 대보살의 승려가 언제나 와서 보필하므로 원수의 적이 능히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015_0232_c_08L如是淨土主旣圓滿應有輔翼主必攝受輔翼者故諸大菩薩衆所雲集謂大宮殿常有無量大菩薩僧共所雲集謂來朝者必爲輔翼旣有無數大菩薩僧常來輔翼故無怨敵能爲違害
그러나 모든 성문의 무리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으며, 이른바 초지 이상의 모든 보살의 무리들도 비록 모든 부처님의 자리수용정토에 모일 수는 없지만 모든 부처님의 이타수용정토에는 능히 모일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는 스스로의 식(識) 위에서 보살들의 마땅함을 따라 거칠거나 미묘한 국토를 나타내신다. 보살은 자신의 선근과 원력을 따라 스스로의 식 위에서 흡사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정토의 모습과 비슷하게 나타낸다.
015_0232_c_14L諸聲聞等無如是事謂初地上諸菩薩衆雖不能集諸佛自利受用淨土而能集會諸佛利他受用淨土諸佛慈悲於自識上隨菩薩宜現麤妙土菩薩隨自善根願力於自識上似佛所生淨土相現
비록 그 스스로의 마음이 각각 개별적으로 변현하였지만 동일한 곳이고 형상도 비슷하니, 이른바 한 국토가 되어서 공통으로 그 안에 모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 보살의 정토는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
015_0232_c_19L雖是自心各別變現而同一處形相相似謂爲一土共集其中如是地上菩薩淨土爲是有漏爲是無漏
015_0233_a_01L어떤 사람은 무루라고 하는데, 이른바 제 마음속 후득무루정토종자(後得無漏淨土種子)의 원력이 밑천이기 때문에 정토에 변생(變生)하여 그 속에서 대승법의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초지 이상의 모든 보살의 무리가 진여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참다운 무루처에 참다운 법의 흐름을 얻고 참다운 정토에 머물며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친견한다. 그러므로 변현하는 국토는 바로 참다운 무루도제(無漏道諦)에 섭수된다.
015_0232_c_22L有義無漏謂自心中後得無漏淨土種子願力資故變生淨土於中受用大乘法樂以初地上諸菩薩衆證眞如理得眞無漏處眞法流住眞淨土常見諸佛故所變土是眞無漏道諦所攝
어떤 사람은 유루라고 하는데, 이른바 자기 마음속 가행유루정토종자(加行有漏淨土種子)의 원력이 밑천이기 때문에 정토에 변생하여 그 속에서 대승법의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그 보살은 비록 진여를 증득하고 참다운 무루를 얻으나 7지(地)에 와서는 번뇌를 현기(現起)하며, 나아가 10지에 이르기까지도 가히 닦아 끊어야 할 번뇌종자와 소지장이 있으니, 제8식의 본체가 능히 그것을 지니기 때문이며 당장 받아서 훈습하기 때문이다.
015_0233_a_04L有義有漏謂自心中加行有漏淨土種子願力資故變生淨土於中受用大乘法樂以彼菩薩雖證眞如得眞無漏而七地來煩惱現起乃至十地猶有修斷煩惱種子及所知障第八識體能持彼故現受熏故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유루무기의 성품에 포섭되며 유위무루도제(有爲無漏道諦)에 포섭되는 바라서 결정코 선하다. 만약 10지 가운데서 제8식의 본체가 바로 무루의 선(善)이라면 응당 불지(佛地)처럼 유루종자를 집지(執持)할 수 없어야 해서 훈습을 받을 수 없어야 한다. 제8식의 체가 이미 유루무기성에 포섭되는데, 변현된 정토가 어떻게 무루선성(無漏善性)에 포섭되겠는가?
015_0233_a_10L猶是有漏無記性攝有爲無漏道諦所攝決定是善若十地中第八識體是無漏善應如佛地不能執持有漏種子不應受熏第八識體旣是有漏無記性攝所變淨土云何無漏善性所攝
나아가 하나의 유정에게는 두 개의 실다운 몸이 없으니, 그 몸이 당시 이미 유루인데 의지하는 정토가 어떻게 무루이겠는가? 그러므로 10지 보살의 정토는 바로 미묘한 유루고제(有漏苦諦)에 포섭된다.
015_0233_a_15L又一有情無二實身其身爾時旣是有漏所依淨土云何無漏是故十地菩薩淨土是妙有漏苦諦所攝
015_0233_b_01L실다운 뜻이란 것은 10지 보살의 제 마음이 변현한 정토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만약 제8식이 변현한 정토라면, 이것은 유루식상분(有漏識相分)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유루의 몸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록 무루의 선한 힘이 자량하고 훈습해서 그 모양은 깨끗하고 미묘하더라도 이것은 유루고제에 포섭되는 바이며, 가행(加行) 등에 따라서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후득무루심(後得無漏心)에 따라서 변현한 정토의 영상이라면 곧 무루식상분(無漏識相分)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무루의 선한 종자로부터 생하였기 때문에 그 체(體)는 바로 무루도제에 포섭된다.
015_0233_a_18L如實義者十地菩薩自心所變淨土有二若第八識所變淨土是有漏識相分攝故是有漏身所依處故雖無漏善力所資熏其相淨妙而是有漏苦諦所攝隨加行等所現亦爾若隨後得無漏心變淨土影像是無漏識相分攝故從無漏善種子生故體是無漏道諦所攝
이와 같이 정토의 보필이 원만하면 반드시 권속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한량없는 하늘과 용과 사람이거나 사람 아닌 자 등이 언제나 옆에서 모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오직 하늘 등의 권속이 에워싸고 있지 그 밖의 다른 중생 등은 있지 않다. ‘등’이란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호라가 등이며, 마호라가는 곧 커다란 이무기에 속한다.
015_0233_b_02L如是淨土輔翼圓滿應有眷屬故次說言無量天龍人非人等常所翼從謂大宮殿唯有天等眷屬圍繞無有餘類等者等取藥叉揵達縛阿素洛揭路荼緊捺洛莫呼洛伽等莫呼洛伽卽攝大蟒
그런데 어떻게 정토가 삼계의 소행처를 멀리 초월해 있으면서 하늘 등을 권속으로 삼는가? 하늘 등은 모두 삼계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식(淨識)은 이와 같이 섭수하여 변현하면서 정토를 장엄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015_0233_b_08L云何淨土超過三界所行之處而有天等以爲眷屬天等皆是三界攝故淨識如是攝受變現嚴淨土故不相違
혹은 교화될 중생들을 성숙케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변화의 종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마치 겁비나왕(劫比拏王)을 조복시키기 위해서 한량없는 전륜성왕 무리를 권속들이 위요(圍繞)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혹은 모든 보살들이 한량없는 하늘이나 용 등의 몸으로 화작(化作)하여서 정토에 머물며 부처님을 공양하는 모습을 나타내거나, 혹은 스스로 몸을 변화하여[自化身] 하늘이나 용 등이 되어서 여래를 보필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015_0233_b_11L或爲成熟所化有示現如是變化種類如爲調伏劫比拏王現化無量轉輪王衆眷屬圍或諸菩薩化作無量天龍等身住淨土中以供養佛或自化身爲天龍等翼從如來故無有過
이와 같이 정토의 권속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머무르려면 어떻게 임지(任持)하여야 하는가? ‘광대한 법의 맛인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는 것’이란 이른바 여기에서는 대승법의 맛인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바로서 음식으로 먹으며 능히 머물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임지의 뜻이다. 앞서 정토가 삼계의 소행처를 멀리 뛰어넘는다고 말하였는데, 어떻게 음식이 있다는 말인가? 또한 무루법을 음식이라 이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음식은 능히 3유(有)의 중생을 길이 길러내지만 이 무루법은 존재[有]를 끊는 것이므로 음식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015_0233_b_16L如是淨土眷屬圓滿於中止住以何任持廣大法味喜樂所持謂於此中大乘法味喜樂所持食能令住是任持義已說淨土超過三界所行之處云何有食又無漏法不應名食食能長養三有衆生此斷有故應不名食
015_0233_c_01L이는 임지(任持)의 인(因)이므로 음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그대의 일가[宗]가 색계 등에 태어나서 무루정(無漏定)에 들어간다면 이것 또한 음식이라 이름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과거의 음식은 응당 음식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나니 과거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당연히 마찬가지라서 바로 임지의 인이므로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33_b_22L是任持因故亦名食如汝宗中生色界等入無漏定亦應名食非過去食應名爲食過去無故此亦應爾是任持因故說爲食
가령 유루법이 비록 무루를 장애한다고 해도 유루를 가지므로 음식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니, 무루 또한 마찬가지라서 비록 유루를 끊어도 무루를 지니는데, 어떻게 음식이라고 이름하지 않겠는가?
015_0233_c_03L如有漏法雖障無漏然持有漏得名爲食無漏亦爾雖斷有漏然持無漏云何非食
이 정토 가운데에서 모든 불보살의 후득(後得)의 무루는 대승법의 맛을 능히 말하고 능히 받아들여서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킨다. 또 정체지(正體智:根本無分別智)는 진여의 맛을 받아들여서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키며, 능히 몸을 임지하여 무너지거나 끊어지지 않게 함으로서 선법을 길이 길러내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이름한다.
015_0233_c_05L此淨土中諸佛菩薩後得無漏能說能受大乘法味生大喜樂又正體智受眞如味生大喜樂能任持身令不斷壞長養善法故名爲食
이와 같이 정토는 임지가 원만한데 어떤 사업(事業)을 짓는가?
‘모든 중생의 온갖 의리(義利)를 짓는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스스로 능히 모든 유정의 온갖 의리를 짓거나, 혹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모든 의리를 짓게 하는 것이다. 현재의 이익을 의(義)라고 이름하고 미래의 이익을 이(利)라고 이름하며, 세간을 의라고 이름하고 출세간을 이라고 이름하며, 악함을 여의는 것을 의라고 이름하고 착함을 거두는 것을 이라고 이름하며, 복덕을 의라고 이름하고 지혜를 이라고 이름한다.
015_0233_c_09L如是淨土任持圓滿作何事業作諸衆生一切義利謂於此中自能現作一切有情一切義利或令一切有情自作一切義利現益名義當益名利世閒名義出世名利離惡名義攝善名利福德名義智慧名利
이와 같은 차이는 비록 적정(寂定)에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닦은 가행(加行)과 원력을 말미암아 운(運)에 맡겨서 능히 모든 유정의 온갖 의리를 짓는 것이다.
015_0233_c_15L如是等別雖在寂定由先所修加行願力任運能作一切有情一切義利
이와 같이 정토의 사업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어떤 섭익(攝益: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있는가?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과 전(纏)과 구(垢)를 멸하였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모든 번뇌인 전과 구와 나아가 온갖 재난과 횡액을 멀리 여읜 것이다.
즉 모든 번뇌를 이름하여 전과 구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을 곧 온갖 재난과 횡액의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번뇌인 전과 구가 정토 안에 없기 때문에 지은 바 재난과 횡액도 이 정토 안에 없다.
015_0233_c_17L如是淨土事業圓滿有何攝益滅諸煩惱災橫纏垢謂於此中遠離一切煩惱纏垢及諸災橫卽諸煩惱名爲纏垢如是卽名諸災橫因煩惱纏垢此中無故所作災橫此中亦無
015_0234_a_01L또한 번뇌란 이른바 백스물여덟 가지의 근본번뇌이다. 전(纏)이란 바로 참괴(慙愧) 등이 없는 것이다. 때란 바로 아첨[諂]과 속임[誑]과 교만 등이다. 재난과 횡액은 곧 그가 일으킨 업 및 얻어진 과보이다.
015_0233_c_22L又煩惱者謂一百二十八根本煩惱纏者卽是無慚愧等垢者卽是諂誑憍等災橫卽是彼所發業及所得果
소지장(所知障)이나 온갖 수면(隨眠)을 번뇌라고 이름하는데, 그것이 현전해 일어나면 전과 구라고 이름한다. 본혹(本惑)5)은 전이고 수혹(隨惑)6)은 구(垢)이다. 소지장 등은 재난과 횡액이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서 어떤 법을 섭익(攝益)이라고 하는가? 바로 번뇌인 재난과 횡액과 전과 구를 여의는 것을 섭익이라고 이름한다.
가령 세속의 영지의 주인[封主]이 비록 섭수하지 않더라도 다만 재난만 없으면 소작인은 또한 “주인이 나를 거두어 이익[攝益]되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 또한 마찬가지다.
015_0234_a_02L若所知障或諸隨眠名爲煩惱卽彼現起說名纏垢本惑名纏隨惑名垢所知障等名爲災橫此中何法名爲攝益卽離煩惱災橫纏垢名爲攝益如世封主雖不攝受但不爲災封戶亦言主攝益我此亦如是
또한 번뇌와 재난과 횡액과 전과 구로부터 해탈해서 뛰어난 복과 지혜를 증득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섭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토는 내적인 재난과 횡액을 여의고 섭수한 이익이 원만해서 응당 외적인 두려움의 원인도 없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무외(無畏)의 원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015_0234_a_08L又現證得解脫煩惱災橫纏垢殊勝福智故名攝益如是淨土離內災橫攝益圓滿亦應無有外怖畏因故次示現無畏圓滿
‘온갖 악마들을 멀리 여읜다’는 이른바 여기에서 모든 번뇌와 온(蘊)과 죽음과 하늘의 악마까지도 멀리 여의는 것이며, 혹은 능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네 가지 악마를 멀리 여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악마가 바로 두려움의 원인이니, 이를 말미암아 능히 온갖 두려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것들이 없으므로 곧 두려움이 없다.
015_0234_a_11L遠離衆魔謂於此中遠離一切煩惱死及以天魔或能令他遠離四魔如是四種是怖畏因由是能生諸怖畏故此中無彼故無怖畏
번뇌마(煩惱魔)는 이른바 백스물여덟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이다. 온마(蘊魔)는 5취온(取蘊)이다. 사마(死魔)는 유루내법(有漏內法)으로서 온갖 덧없는 모습이다. 천마(天魔)는 욕계의 여섯 번째 하늘인 자재천자(自在天子)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능히 온갖 선한 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악마라고 한다.
015_0234_a_15L煩惱魔者謂一百二十八煩惱幷隨煩惱薀魔謂五取薀死魔者謂有漏內法諸無常相天魔者謂欲界第六自在天如是四種皆能損害諸善法故名爲魔
이러한 네 가지 악마로 말미암아 온갖 두려움이 생기지만, 여래는 영원히 네 가지 악마를 여의었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초지 이상의 대보살들은 정토에 머물면서 네 가지 악마를 여의고 다섯 가지 두려움이 없다. 이와 같이 정토는 무외가 원만해서 그 머무는 곳도 응당 훌륭하기 때문에 이어서 다시 머무는 곳의 원만함을 설명한다.
015_0234_a_20L由是四魔生諸怖畏如來永離四種魔故無諸怖畏初地已上諸大菩薩在淨土中離麤四魔無五怖畏如是淨土無畏圓滿其所住處亦應殊勝故次復說住處圓滿
015_0234_b_01L‘여래께서 의지하는 곳의 장엄은 온갖 장엄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의 훌륭함은 일체 보살이나 다른 장엄된 머무는 곳[住處]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오직 여래만이 미묘하게 꾸며진 장엄을 머무는 곳으로 삼는다. 온갖 장엄된 머무는 곳보다 뛰어남을 말미암으니, 이 때문에 머무는 곳이 원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토는 머무는 곳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어떤 길이 있어서 왕래하는가?
015_0234_b_01L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謂於此中佛所住處勝過一切菩薩及餘莊嚴住處唯是如來妙飾莊嚴爲所住處由勝一切莊嚴住處是故說名住處圓滿如是淨土住處圓滿有何道路於中往來
‘큰 생각과 지혜와 행이 노니는 길[遊路]이 된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큰 생각과 큰 지혜와 큰 행이 거니는 길이 되고 노닐며 밟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길에 다른 이름이 있다. 들어서 이루어진 지혜[聞所成慧]를 이름하여 큰 생각이라고 하나니, 듣고 난 뒤에 기억해 지녀서 뒤바뀜이 없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이루어진 지혜[思所成慧]를 이름하여 큰 지혜라고 하나니, 이치에 의지하여 살피고 생각해서 결정(決定)을 얻기 때문이다. 수행으로 이루어진 지혜[修所成慧]를 이름하여 큰 행이라고 하나니, 닦고 익히는 힘을 말미암아 진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015_0234_b_07L大念慧行以爲遊路謂於此中大念大慧及以大行爲所行路所遊履故名爲遊路是道異名聞所成慧名爲大念聞已記持無倒義故思所成慧名爲大慧依理審思得決定故修所成慧名爲大行由修習力趣眞理故
‘크다’는 것은 생각[念] 등이 대승법을 인연하여서 생기하기 때문이며, 대승법의 과이기 때문이며, 대승법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미묘한 지혜7)를 밟고 정토로 가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보살이 세 가지 미묘한 지혜를 인연하여 정토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이름한다.
015_0234_b_13L大者念等緣大乘法而生起故是彼果故彼所攝故履三妙慧淨土往還故名遊路此說菩薩因三妙慧得入淨土故名遊路
만약 모든 여래의 큰 생각[大念]이 곧 무분별지이니, 생각[念]이 진여의 이치에 안주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큰 지혜는 곧 후소득지(後所得智)이니, 온갖 법의 진속(眞俗)의 모습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정토의 증상업용(增上業用)을 짓기 때문에 함께 행이라고 이름한다. 이 두 가지 지혜를 통하여 정토에 나게 되므로 이름하여 노니는 길이라고 한다.
015_0234_b_16L若諸如來大念卽是無分別智由念安住眞如理故大慧卽是後所得智分別諸法眞俗相故此二皆有造作淨土增上業用故俱名行由此二智通生淨土故名遊路
또는 큰 생각의 행은 자기에게 이익되는 행이니, 안으로 기별을 거두기 때문이다. 큰 지혜의 행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니, 밖으로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례를 통하여 여래의 두 종류의 정토에 나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한다.
015_0234_b_21L或大念行是自利行內攝記故大慧行者是利他行外分別故如其次第通生如來二種淨土故名遊路
015_0234_c_01L이와 같이 정토의 길이 이미 원만하다면 응당 탈것이 있어서 그 탈것에 올라타서 이 길을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큰 지(止)와 미묘한 관(觀)을 탈것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지는 소위 삼마지(三摩地)이고, 관은 소위 반라야(般羅若)이다. ‘크다’는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실어 나르므로 ‘탈것’이라고 이름한다. 지와 관에 올라타고 그 감응에 따라서 앞의 길로 나아가는데, 길이란 총제적인 지위[總位]로서 위(位) 가운데 지와 관은 개별적인 이름의 탈것이다.
015_0234_b_23L如是淨土路旣圓滿應有所乘御彼所乘行此道路故次說言大止妙觀以爲所乘止謂三摩地觀謂般羅若大義如前此二等運故名所乘乘此止觀隨其所應行前道路路是摠位位中止觀別名所乘
이와 같이 정토의 탈것이 이미 원만해졌다면 응당 들어가는 문[入門]이 있어야 하며, 그 들어가는 문을 따라서 이 탈것을 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큰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015_0234_c_06L如是淨土乘旣圓滿應有入門從彼入門御此乘入故次說言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세 가지 해탈의 문을 들어가는 곳으로 삼는다. 해탈은 곧 벗어나 여의는 열반[出離涅槃]으로서 대공(大空) 등을 해탈문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문을 따라서 정토에 들어간다. 변계소집(遍計所執)으로 생겨난 법은 참다운 나[我]가 없다는 것을 설하여 공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삼마지를 연하는 것을 공해탈문(空解脫門)이라고 한다.
015_0234_c_09L謂大宮殿三解脫門爲所入處解脫卽是出離涅槃卽大空等名解脫門依從此門而入淨土遍計所執生法無我說名爲空緣此三摩地名空解脫門
상(相)에는 열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색(色), 둘째는 소리, 셋째는 냄새, 넷째는 맛, 다섯째는 촉감, 여섯째는 남자, 일곱째는 여자, 여덟째는 태어남, 아홉째는 늙음, 열째는 죽음이다. 이 열반에는 이런 상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삼마지를 반연하므로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라고 한다.
015_0234_c_13L相謂十相卽是涅槃無此等相故名無相緣此三摩地名無相解脫
원(願)이란 구하고 원하는 것이다. 삼계는 괴롭기 때문에 구하고 원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무원이라고 이름한다. 이 삼마지를 반연하므로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라고 한다.
이 공(空) 등의 세 가지 해탈문을 말미암아서 정토에 들어가게 되므로 문(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크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정토 중에도 일이 있으니, 길과 탈것과 문 등은 중생들로 하여금 참다운 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기 때문에 행에 나아가 설한다.
015_0234_c_17L願謂求願觀三界苦無所求願名無願緣此三摩地名無願解脫門由此空等三解脫門得入淨土故名爲門大如前說此淨土中亦應有事路乘門等爲令有情欣樂實德故就行說
015_0235_a_01L이와 같이 정토의 문이 이미 원만해졌으면, 나머지 궁전도 의지할 바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다시 의지(依持)의 원만함을 설한다. ‘한량없는 공덕의 무리로 장엄되었고 커다란 보배 화왕(花王)의 무리들이 건립한 바이다’란, 이른바 대지 등이 풍륜(風輪) 등에 의지하거나 세간의 궁전이 대지에 의지한 것처럼 정토는 한량없는 덕의 무리로 장엄되었고 큰 보배인 홍련화왕의 무리로 세워졌으니, 이른바 홍련화의 큰 보배로 이루어진 것이다.
015_0234_c_22L如是淨土門旣圓滿如餘宮殿應有所依故次復說依持圓滿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衆所建立謂如地等依風輪等或如世閒宮殿依地如是淨土無量德衆所嚴大寶紅蓮花王衆所建立謂紅蓮花大寶所成
이와 같은 큰 보배는 한량없는 공덕과 뭇 선(善)이 일으킨 바라서 온갖 보배 중에서도 뛰어나므로 크다고 이름하며, 이 보배 홍련은 모든 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이름하여 꽃의 왕이라고 한다. 혹은 이 보배 꽃은 모든 보살의 선근이 일으킨 바라서 모든 홍련 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크다고 이름하며, 부처님이 이 법왕이다. 이 부처님은 가장 뛰어난 선근이 일으킨 바라서 꽃의 왕이라고 한다.
015_0235_a_05L如是大寶無量功德衆善所起於衆寶中勝故名大此寶紅蓮於諸花中最爲殊勝故名花王或此寶花望諸菩薩善根所起紅蓮花衆勝故名大佛是法王是佛最勝善根所起故名花王
또 이 보배 꽃은 지극히 얻기 어려우므로 크다고 이름하고, 보배 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꽃의 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꽃은 하나가 아니거나 꽃잎이 많으므로 무리라고 이름한다.
세존께서는 이 꽃의 무리 위에 세워진 커다란 궁전에 머무셔서 이 계경(契經)을 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궁전 안에’라고 하는 것이다.
015_0235_a_11L又此寶花極難得故名爲大花中最勝故名花王此花非一或花葉多故名爲衆世尊住此花衆建立大宮殿中說是契經是故說言大宮殿中
만일 여래의 실제 수용신이 의지하는 정토를 대궁전이라고 이름한다면 그 양(量)은 법계와 같은데,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부처님의 수용신이 바로 근본을 설하시므로 이 경을 설한다고 이름한다.
015_0235_a_15L若就如來實受用身所依淨土名大宮殿量同法界於中一一佛受用身是能說本名說此經
만약 여래께서 보살들의 의당함을 따라 나타내신 수용신이 의지하는 정토를 이름하여 대궁전이라고 한다면 그 양은 일정하지 않은데, 그 속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하나의 몸을 나투시어 바로 이 경을 설하시기 때문에 이 궁전의 분량과 방소(方所)는 일정하게 말할 수 없다.
015_0235_a_17L若就如來隨菩薩宜現受用身所依淨土名大宮殿其量不定於中諸佛同現一身正說此經故此宮殿分量方所不可定說
佛地經論卷第一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정확하게는 10변처(遍處)이다. 삼계의 번뇌를 멀리 여월 수 있는 일종의 선관(禪觀)을 말한다. 지ㆍ수ㆍ화ㆍ풍ㆍ청 황ㆍ적ㆍ백ㆍ공ㆍ식의 열 가지 방식으로 무변무이(無邊無二)의 관법을 행하는 것이다. 삼계가 이 열 가지 가운데 하나에 편만(遍滿)되어 있다고 관하는 것을 순차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10일체처(一切處)라고도 한다.
  2. 2)부처의 지혜로서 대원경지ㆍ평등성지ㆍ묘관찰지ㆍ성소작지를 말한다. 유식의 이치에 들기 위한 네 가지 지혜이다.
  3. 3)여러 가지의 것이 융합하여 하나의 상을 이루는 것이다.
  4. 4)일상(一相)이란 차별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 평등한 경지로서 차별이 없는 진여상(眞如相)을 의미한다. 그런 하나의 상으로 이루어진 몸이란 만물에 공통하는 차별 없는 하나의 몸이다.
  5. 5)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교만ㆍ의심ㆍ사악한 견해의 여섯 가지 근본적인 번뇌이다.
  6. 6)수번뇌(隨煩惱), 즉 따라서 일어나는 번뇌이다. 근본번뇌[隨眠]에 수반하는 제2의적(第二義的)인 번뇌로서『구사론』과 ‘유식학’의 설명이 조금 차이가 있다. ‘유식교의’에 의거하여 설명하면 수혹, 즉 수번뇌란 근본번뇌인 6대 번뇌에 대해서 그 이외의 스무 가지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열 가지의 소수혹(小隨惑)인 분(忿)ㆍ한(恨)ㆍ뇌(惱)ㆍ복(覆)ㆍ광(誑)ㆍ첨(諂)ㆍ교(憍)ㆍ해(害)ㆍ질(嫉)ㆍ간(慳)과 두 가지의 중수혹(中隨惑)인 무참(無慙)과 무괴(無愧), 그리고 여덟 가지의 대수혹(大隨惑)인 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혼침(昏沈)ㆍ도거(掉擧)ㆍ실념(失念)ㆍ부정지(不正知)ㆍ산란(散亂)이다. 이 스무 가지의 번뇌는 근본번뇌를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수혹ㆍ수번뇌라고 부른다.
  7. 7)앞서 언급한, 들음으로써 이루어진 지혜와 생각으로써 이루어진 지혜와 수행으로써 이루어진 지혜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