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法門) 글귀와 그 차례를 세간의 밝은 지혜 여읜 이는 알지 못하네. 큰 지혜 통달하시니 저희들을 가르치시는 한량없는 공덕신(功德身)께 귀명(歸命)합니다.
015_0317_a_04L法門句義及次第, 世閒不解離明慧,
大智通達教我等, 歸命無量功德身。
이와 같이 높으신 분 마땅히 공경하여 머리와 이마를 발에 대어 예배하오니 부처님의 이기기 어려운 일 감당하시고 중생들을 거두어들여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015_0317_a_06L應當敬彼如是尊, 頭面禮足而頂戴,
以能荷佛難勝事, 攝受衆生利益故。
【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015_0317_a_08L如是我聞:
어느 때에 바가바(婆伽婆)께서 사바제성(舍婆提城)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신 채 사바제(舍婆提) 큰 성에 들어가시어 성 안에서 밥을 빌었다. 차례차례로 밥 빌기를 마치신 뒤에는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셨다. 식사를 마치시고 옷과 발우를 거두어 놓으시고 발을 씻고 나서 평소와 같이 자리를 깔고 결가부좌 하고 앉으시어 몸을 단정히 한 채 바른 생각에 잠겨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셨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께서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염려하시며,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付囑)하시나이다.”
015_0317_a_20L“希有世尊!如來、應供、正遍知善護念諸菩薩,善付囑諸菩薩。”
015_0317_b_01L【論】 ‘잘 보호하고 염려한다’고 한 것은 근기(根機)가 성숙(成熟)한 보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잘 부촉한다’고 한 것은 근기가 성숙되지 못한 보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왜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염려하며, 왜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잘 보호한다는 뜻을 마땅히 알라. 그의 몸에 힘을 더하여 같이 행하게 하는 것이니 증득했든 증득하지 못했든 물러나지 않게 함을 잘 부촉한다고 말한다.
015_0317_b_02L巧護義應知, 加彼身同行, 不退得未得,
是名善付囑。
어떤 것이 그의 몸에 힘을 더하여 같이 행하게 하는 것인가? 보살의 몸에 지혜의 힘을 주어 그로 하여금 불법을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요, 또한 그 보살들에게는 중생들을 거두어들여서 그들을 교화할 힘을 주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잘 보호하고 염려한다고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을 증득했든 증득하지 못했든 물러나지 않게 한다고 하는가? 공덕을 증득했든 증득하지 못했든 그 가운데에서 물러나 잃어버리게 될까 염려해서 그에게 지혜를 붙여 주는 것이다. 또 증득하되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승(大乘)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요, 증득하지 못하되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승 가운데로 그들을 승진(勝進)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잘 부촉한다고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네가 말한 것과 같이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고 염려하시며,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시느니라.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해 설법하리라. 만약 보살이 대승 가운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며,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하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럴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기꺼이 듣고 싶습니다.”
015_0317_b_19L須菩提白佛言:“世尊!如是,願樂欲聞。”
015_0317_c_01L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야 하리니, ‘존재하는 일체 중생, 즉 중생에 포함되어 있는 난생(卵生)이거나 태생(胎生)이거나 습생(濕生)이거나 화생(化生)이거나, 색이 있는[有色] 것이거나 색이 없는[無色]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有想] 것이거나 생각이 없는[無想]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非有想非無想] 것이거나 간에 나는 중생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중생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滅度)의 경지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멸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만 실제로 어떤 중생도 멸도의 경지를 증득한 이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중생이라는 모습에 집착하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왜 보살이 아닌가 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중생이라는 모습[衆生相], 남이라는 모습[人相], 목숨이라는 모습[壽者相]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보살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니라.”
【論】 어떻게 보살이 대승 가운데에 머물러야 하는가에 대하여 문답으로 이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17_c_07L論曰:云何菩薩大乘中住?問答示現此義,偈言:
광대(廣大)함ㆍ제일(第一)ㆍ항상함이며 그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함이니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는 심오한 마음에 머무는 것이 이 승(乘)의 원만한 공덕이다.
015_0317_c_09L廣大第一常, 其心不顚倒, 利益深心住,
此乘功德滿。
이 게송에서는 어떤 종류의 뜻을 말한 것인가? 만약 보살이 네 가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보리의 마음이 있으면, 이 보살은 대승의 처소에 머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심오한 마음에서 원만한 공덕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네 가지 심오한 이익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중생을 거두어들이려는 마음이 생겨나서 대승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제일가는 마음으로 이익을 주는 것인가? 경에서 “내가 그들로 하여금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고 멸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5_0317_c_19L云何第一心利益?如經“我皆令住無餘涅槃而滅度之”故。
어떤 것이 항상한 마음으로 이익을 주는 것인가? 경에서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멸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만 실제로 어떤 중생도 멸도의 경지를 증득한 이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중생이라는 모습에 집착하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18_a_01L이 뜻은 무엇인가? 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제 몸처럼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보살 자신이 멸도(滅度)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중생들이 멸도의 경지를 증득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중생에 대하여는 중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땅히 보살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을 거두어들이되 제 몸같이 여겨 항상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이것을 일컬어 항상한 마음으로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전도(顚倒)되지 않는 마음으로 이익을 주는 것인가? 경에서 “왜 보살이 아닌가 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중생이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목숨이라는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보살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신견(身見)과 중생 따위 모습에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니, 모습이라는 생각에도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모습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의 덩어리는 생각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각으로써 동방(東方)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보리야, 그러면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四維:동북ㆍ동남ㆍ서북ㆍ서남]과 위아래의 허공을 생각으로써 헤아릴 수 있겠느냐?”
015_0318_a_20L佛言:“如是。須菩提!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可思量不?”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言:“不也。世尊!”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어떤 모습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복덕의 덩어리도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015_0318_a_22L佛言:“如是如是。須菩提!菩薩無住相布施,福德聚亦復如是不可思量。”
015_0318_b_01L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오직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하느니라.”
015_0318_b_01L佛復告須菩提:“菩薩但應如是行於布施。”
【論】 게송으로 말하리라.
論曰:偈言:
단(檀:布施) 바라밀에는 여섯 바라밀의 뜻이 포함되어 있네. 자생시(資生施)와 무외시(無畏施)와 법시(法施)가 있어 여기에 하나와 둘과 셋을 포함하고 있으니,1) 수행주(修行主)라 부른다.
015_0318_b_03L檀義攝於六, 資生無畏法, 此中一二三,
名爲修行住。
무엇 때문에 오직 단바라밀만을 설명하고서 여섯 바라밀을 다 설명했다고 말하는가? 일체 바라밀은 단(檀:布施)의 모양과 뜻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일체 바라밀에 단의 모양과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곧 자생단(資生檀:財施)바라밀과 무외단(無畏檀:無畏施)바라밀, 법단(法檀:法施)바라밀을 말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그 뜻은 무엇인가?
자생이란 곧 하나의 단바라밀이니 자체의 이름만 있기 때문이요, 무외단바라밀이란 두 가지가 있으니 시(尸:持戒)바라밀과 찬제(羼提:忍辱)바라밀을 말한다. 이미 지었거나 아직 짓지 않은 악(惡)에 대하여 조금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법단바라밀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비리야(毘梨耶:精進)바라밀 등을 말한다. 그것은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기에 훌륭한 지혜의 마음으로 여실(如實)하게 설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의 수행주이다.
자기의 몸과 은혜에 대한 보답 그리고 과보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거나 존양(存養)하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다른 일에서 구하는 것을 방지한다.
015_0318_b_18L自身及報恩, 果報斯不著, 護存已不施,
防求於異事。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요,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은혜에 대한 보답’이란 공양(供養)과 공경을 받는 등의 갖가지 일을 말한 것으로서 마치 경에서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빛깔 등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과보(果報)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데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만 하는가?
015_0318_c_01L게송에서 말하기를 “자신을 보호하거나 존양하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다른 일에서 구하는 것을 방지한다”라고 하였다.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집착하면 보시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 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이며, 만약 은혜에 대한 보답과 과보에 집착하면 불보리(佛菩提)를 버리고 다른 뜻을 위해 보시를 행할 것이므로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 아래는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에 대한 설명이니, 이 일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降伏) 받는 것이기에 항복이라고 말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18_c_05L自此以下說云何菩薩降伏其心。此事應知。云何降伏心名之降伏?偈言:
저러한 일을 조복(調伏)시켜야 하나니 모양에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가지가지 의혹을 끊어 없애야 또한 생겨나는 마음을 방지할 수 있다.
015_0318_c_07L調伏彼事中, 遠離取相心, 及斷種種疑,
亦防生成心。
이 글은 무슨 뜻을 설명한 것인가?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를 받는 이, 보시하는 사람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게송에 이르기를 ‘저러한 일들을 조복시켜야 하나니,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요, 경에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니, 모습이라는 생각에도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다음에도 보시로 얻어지는 이익에 대한 설명이니, 경에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보살이 모습이라는 데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의 덩어리는 생각으로써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각으로써 동방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무엇 때문에 먼저 수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다음에 보시로 얻어지는 이익에 대하여 밝혔는가? 마음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음에 보시로 얻어지는 이익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모습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015_0319_a_01L여기서부터 이 아래의 일체 수다라(修多羅)는 의심이 생겨날 것을 끊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떤 의심이 생겨나는가 하면, ‘만약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무엇 때문에 불보리(佛菩提)를 위해서 보시를 행하는 것일까?’라고 할 것이므로 그런 의심을 끊기 위한 것이다.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실체라고 여기므로 저 성취하여 얻은 모습을 방지하였다. 세 가지2)모습으로 실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저것을 여의어야 곧 여래라 할 수 있다.
015_0319_a_11L分別有爲體, 防彼成就得, 三相異體故,
離彼是如來。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분별할 수 있는 형상을 실체라고 생각하면, 이 여래를 유위상(有爲相)으로서는 제일간다고 하여 성취한 모습을 가지고 여래를 보려고 할 것이므로 그 성취한 모습을 방지함으로써 부처님의 몸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경에서 “모습을 성취한 것을 가지고 여래를 볼 수는 없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여래의 이름은 무위(無爲)의 법신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습은 곧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게송에 말하기를 “세 가지 모습으로 실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저것을 여의어야 곧 여래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저 모습을 성취한 것은 곧 모습을 성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습으로 여래의 몸을 변화시켜 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말이요, 만약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라고 보면 곧 허망한 말이 아니니, 이와 같이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라고 보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느니라”라고 한 것과 같은데, 이 구절에서는 유위법이 허망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015_0319_b_01L게송에 말하기를 “저것을 여의어야 곧 여래라 할 수 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그곳에서는 세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에 모습과 모습 아닌 것이 상대(相對)가 되니, 저곳에서는 생(生)ㆍ주(住)ㆍ멸(滅)ㆍ이(異)의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여래의 몸은 유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여래에 대하여 깨달아 알면 비록 부처님의 보리를 위해서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그 보살은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만 이와 같은 것을 성취할 것’이라는 의문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 의혹을 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經】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 세상인 말법시대[末世]에 이와 같은 수다라(修多羅)의 문장 구절을 듣고 진실한 생각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 세상인 말법시대에 이와 같은 수다라의 문장 구절을 듣고 진실한 생각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은 또한 나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수명이라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에게는 법이라는 모습도 없고, 또한 법이 아니라는 모습도 없으며, 모습도 없고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들이 만약 법이라는 모습을 취하면 나니 남이니 중생이니 수명이니 하는 것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이 보살에게 법이라는 모습이 있으면 곧 나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수명이라는 모습에 집착하게 될 것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뗏목에 비유하는 법문을 말씀하셨느니라. 옳은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법이 아닌 것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論】 이 뜻은 무엇인가? 앞에서 바라밀에 의거하여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라고 말한 것은 원인의 깊은 이치를 설명한 것이고, 여래에 의거하여 유위(有爲)의 몸이 아니라고 한 것은 결과의 깊은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악한 세계 사람들은 신심(信心)을 내지 않을 터인데, 그들에게 어떻게 부질없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원인과 결과의 심오한 이치를 저 악한 세상이 왔을 때에도 설하는 것은 진실이 있으므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요 보살이 세 가지 덕3)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015_0319_c_19L說因果深義, 於彼惡世時, 不空以有實,
菩薩三德備。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 악한 세계가 왔을 때에도 보살은 지계(持戒)와 공덕(功德), 그리고 지혜(智慧)를 원만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또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수행하고 공양하였으며, 한량없는 백천만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경문에서는 과거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계율을 원만하게 갖추었고, 그 부처님을 공양하였으며, 또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와 같은 차례로 저들은 지계(持戒)를 원만하게 갖추었고 공덕도 원만하게 갖추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또 게송으로 말한다.
저들은 수명과 법에 대하여 모습을 취하려는 마음 멀리 여의었으므로 또한 지혜롭다 말했지만, 그 모습은 여덟 가지4)에 의지하기에 여덟 가지 뜻이 다르다.
015_0320_a_12L彼壽者及法, 遠離於取相, 亦說知彼相,
依八八義別。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다시 반야의 뜻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뜻을 설명한 것인가?
저 보살은 수명이라는 모습을 여의었고 법이라는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대(對)하여 이런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게송에서 “여덟 가지 뜻에 의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네 가지 수명이라는 모습에 의하여 네 가지 뜻이 있고, 네 가지 법이라는 모습에 의하여 네 가지 뜻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덟 가지 모습에 의지하여 여덟 가지 뜻의 차별이 생겨난 것이다. 이 뜻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나라는 모습’은 5음(蔭)의 차별상을 보고 하나하나의 음을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허망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는 모습이라고 부른다. ‘중생이라는 모습’은 몸이 상속(相續)하여 끊어지지 않음을 보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중생이라는 모습이라고 한다. ‘무명이라는 모습’은 한결같이 명근(命根: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머무름에 보답하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오래 산다는 모습이라고 한다. ‘수명이라는 모습’은 명근이 단멸(斷滅)되어 다시 6도(道)에 태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수명이라는 모습이라고 한다. 마치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은 다시 나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수명이라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무엇이 법집(法集)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일체 법은 공하여 아무 물질이 없으므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언사(言辭)에 의지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 법의 모습에는 네 가지가 있다.
015_0320_b_10L一切空無物, 實有不可說, 依言辭而說,
是法相四種。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법이라는 모습이요, 둘째는 법이 아니라는 모습이며, 셋째는 모습이요, 넷째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여기엔 또 어떤 뜻이 있는가?
015_0320_b_12L何者是四種?一者法相;二者非法相;三者相;四者非相。此義云何?
취할 대상과 취하는 이의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법의 모습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아무 물질도 없기 때문에 저 법에는 나라는 것도 없지만 공(空)은 실제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법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저것은 공한 것이어서 아무 물질도 없으나 이것을 가지고 있느니 없느니 하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아무 모습이 없다고 말한 것이요, 말에 의지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또한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015_0320_c_01L경에서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은 법이라는 모습도 없고 또한 법이 아니라는 모습도 없으며, 모습도 없고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지혜만 있어도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또다시 계를 지키는 공덕을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실상(實相)의 차별이 생기는 이치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 어떻게 나타내 보였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사람들은 신심에 의지하여 공경하므로 실상이 생겨난다. 설법한 소리를 듣고 바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설법을 통해서 이와 같이 취하기 때문이다.
015_0320_c_02L彼人依信心, 恭敬生實相, 聞聲不正取, 正說如是取。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저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공덕이 있어서 신심에 의지하여 공경하기 때문에 실상이 생겨난다. 이런 까닭에 저런 이치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와 같은 수다라의 문장 구절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 마침내 일념으로 청정한 신심을 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만 반야만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들은 대로 뜻을 취하지 않고 제일의지(第一義智)만을 따르고 순종하며, 바른 말을 통해 이와 같이 취하기 때문에 실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설명한 까닭에 다음에 “수보리야,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마땅히 설법한 소리대로 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요,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제일의의 지혜만을 따르고 순종하여 바른 설법에서 이와 같이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 보살은 설법을 듣고 이와 같이 수다라(修多羅)의 문장 구절에서 실상(實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과보를 보신 것은 비지(比知)5) 때문이 아니요 원지(願智)6)의 힘 때문에 나타남을 보신 것이니 공양이나 공경을 구하는 그런 사람이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015_0320_c_17L佛非見果知, 願智力現見, 求供養恭敬,
彼人不能說。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저 계율을 잘 지키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불ㆍ여래께서 그들의 과보를 보신 것이 비지(比智)로써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아셨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원지(願智)의 힘 때문에 나타남을 보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다시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을 다 본다고 말씀하셨는가?
015_0321_a_01L만약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본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들은 ‘여래께서 비지로써 아신 게 아닌가’ 하고 이와 같은 의심을 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만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본다고만 하면 충분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 모든 중생들을 다 안다고 또 말씀하셨는가?
만약 여래께서 이 모든 중생들을 다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은 여래께서 육안(肉眼) 등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한 까닭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라고 할 것이기에 이 두 가지 말씀을 한꺼번에 한 것이다.
“또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라고 하자 게송에 말하기를 “공양과 공경 받기를 바라는 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글 뜻은 무엇인가?
015_0321_a_07L又“何故如來如是說?”偈言“求供養恭敬,彼人不能說”故。此義云何?
만약 어떤 사람이 공양과 공경 받기를 원하여 스스로 계율을 지키는 등의 공덕을 찬탄하게 되리니,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하려고 한 것이며, 이 사람은 모든 불ㆍ여래께서 저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어떤 종류의 일을 행하는지 잘 알고 계시므로 스스로 안다고 말하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스스로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에서였다.
또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이 모든 보살들이 만약 법이라는 모습을 취하면 곧 나니, 남이니, 중생이니, 수명이니 하는 것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다만 무명(無明)의 번뇌[使]만 있고 현행(現行)하는 큰 번뇌(煩惱)가 없을 때에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견해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항상 뗏목에 비유하여 법문을 말씀하셨느니라. 마땅히 옳은 법도 버려야 하거늘 더구나 법이 아닌 것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무슨 차례에 의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들은 법에 머물지 않고 법 가운데 증지(證智)만을 따르고 순종한다. 마치 사람들이 배나 뗏목을 버리듯이 법 가운데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015_0321_a_20L彼不住隨順, 於法中證智, 如人捨舩栰,
法中義亦然。
015_0321_b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수다라(修多羅) 등의 법 가운데에서 증지(證智)는 머무르지 않는 것임을 보인 것으로서 증지를 증득한 뒤에 법(法)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저 언덕에 이르면[到彼岸] 뗏목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은 저 증지를 얻도록 하는 법을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이니, 그 법에서 마땅히 취하는 것이 마치 사람들이 저 언덕에 이르기 전에는 뗏목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아래는 어떤 종류의 뜻을 말씀하셨는가? 다른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의문인가? 앞에서 “성취한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유위의 모습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으셨기에 부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왜 설법을 하시는 걸까?’ 이러한 것이 다른 의혹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이러한 의혹을 끊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의심을 끊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에서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결정된 법에서 여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신 것도 없고, 또한 결정된 법에서 여래께서는 설법한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법하신 것은 모두가 취할 수 없는 것이요, 말로 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요,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인들은 다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이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論】 이러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은 부처도 아니요, 또한 설법도 하지 않았다고 하셨으니, 이 뜻은 무엇을 밝히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21_b_17L論曰:以是義故,釋迦牟尼佛非佛,亦非說法。此義云何?偈言:
응신불(應身佛)과 화신불(化身佛)은 진불(眞佛)이 아니요 또한 설법하는 사람도 아니다. 말씀하신 법을 두 가지7)라고 취해서도 안 되고 말씀하신 법은 언어를 떠난 다른 모습도 없다.
015_0321_b_19L應化非眞佛, 亦非說法者, 說法不二取,
無說離言相。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신불(法身佛)이요, 둘째는 보신불(報身佛)이며, 셋째는 화신불(化身佛)이다.
015_0321_b_21L此義云何?佛有三種:一者法身佛;二者報佛;三者化佛。
015_0321_c_01L또 여기에서 석가모니를 부처님이라고 부른 것은 곧 화신불이니, 이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시지도 않으셨고 또한 설법도 하지 않으셨다. 마치 경에서 “결정된 법에서 여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신 것도 없고, 또한 결정된 법에서 여래께서는 설법하신 것도 없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경에서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취할 수 없는 것이요, 말로 할 수도 없으며”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어떤 사람이 비방하여 말하기를 “여래께서는 한결같이 설법하시지 않으셨다”라고 할 것이므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한 까닭이다.
게송에 이르기를 “응신불과 화신불은 진불(眞佛)이 아니요, 또한 설법하는 사람도 아니다. 말씀하신 법을 두 가지로 취해서도 안 되고 말씀하신 법은 언어를 떠난 다른 모습도 없다”라고 한 것은 법을 들은 이가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며, 두 가지란, 즉 법과 법이 아닌 것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 법은 법도 아니요,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치에 의거하여 한 말인가? 진여(眞如)의 뜻에 의거하여 한 말이다. “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법에 실체와 모습이 없기 때문이요,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저 진여에는 아상(我相)은 없지만 실상(實相)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설(說)이라고만 말하고 증(證)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가? ‘설’이라고 말한 것은 곧 증을 성취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니, 만약 증득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설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015_0321_c_13L何故唯言說、不言證?有言說者卽成證義故;若不證者,則不能說。
경에 “왜냐하면 모든 성인들은 모두가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이 구절은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그 법은 곧 설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인은 진여법(眞如法)의 청정함을 의거해서 이름을 얻었으므로 무위법으로써 이름을 얻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저 성인은 무위법을 말씀하셨다.
또 무슨 뜻에서 저 성인이 증득한 바와 같은 법은 이와 같이 말할 수조차 없는데 더구나 이렇게 취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가? 왜냐하면 그 법은 언어의 모습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일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다만 부처라고는 말하지 않고 모든 성인이라고만 말했는가? 모든 성인은 진여의 청정함을 의지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요, 이와 같이 청정함을 원만하게 갖추었다면 일부분까지도 모두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매우 많을 것입니다. 바가바(婆伽婆)시여, 매우 많을 것입니다. 수가타(修伽陀)시여, 저 선남자와 선여인이 얻은 복덕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복덕의 덩어리는 곧 복덕의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의 덩어리,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일곱 가지 보배를 가지고 보시에 사용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경에서 그 뜻을 받아들여 간직하거나 마침내는 4구게(句偈) 등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했다면 그 복은 저 복보다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이 더 많으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은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불ㆍ여래도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니라.
스스로 법을 받아 지니고 다른 이를 위해 설법한다면 복덕이 헛되지 않으리라. 복으로는 보리에 나아가지 못하며 저 두 가지로 보리에 나아갈 수 있다.
015_0322_a_18L受持法及說, 不空於福德; 福不趣菩提,
二能趣菩提。
무엇 때문에 “세존이시여,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복덕의 덩어리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복으로는 보리에 나아가지 못하며, 저 두 가지로 보리에 나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복덕으로는 큰 보리에 나아가지 못하며, 저 두 가지로 큰 보리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5_0322_b_01L첫째는 스스로 받아 지니는 것이요, 둘째는 남을 위해 연설해주는 것이니, 마치 경에서 “그 뜻을 받아 지니거나 마침내는 4구게 등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복덕의 덩어리라고 했는가? 덩어리라는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쌓여 모인 덩어리라는 뜻이요[積聚義], 둘째는 진취(進趣)한다는 뜻이니, 마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과 같은 것을 덩어리[聚]라고 말한다. 이처럼 저 복덕의 덩어리에는 쌓여서 모인 덩어리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일컬어 덩어리라고 말하였다.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불ㆍ여래도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무슨 까닭에 모든 부처님의 보리법(菩提法)이 모두 이 법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왜 모든 불ㆍ여래도 전부 이 경에서 나왔다고 말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실상을 깨닫는 원인이라 부르며 또한 다른 불신(佛身)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하나니 오직 모든 부처님의 법만이 복 중에 제일을 성취할 수 있다.
015_0322_b_14L於實名了因, 亦爲餘生因; 唯獨諸佛法,
福成第一體。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보리’란 법신(法身)을 말하는 것이니, 그 바탕은 실로 법신이 된다. 그러므로 저 법신에서 이 두 가지 법이 능히 깨닫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나머지’라고 한 것은 과보로 받은 상호가 좋고도 장엄한 부처님과 화현(化現)으로 받은 부처님의 신상(身相)을 말하는데, 이 두 부처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보리의 원인을 지을 수 있으므로 인(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 복보다는 이 복이 훨씬 낫다’는 것은 마치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왜 이런 이치가 성립되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오직 모든 부처님의 법만이 복 중에 제일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015_0322_c_01L‘수보리야, 이른바 불법,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라고 한 것은 저 모든 불법을 다른 사람은 얻지 못하기 때문에 저 불법을 불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오직 모든 불법만이 제일이요 함께하지 못하는 이치[第一不共義]라고 말한 것이다. 제일가는 법의 원인이 되므로 저것은 복덕 가운데에서 이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한 것이니, 그것은 이와 같이 많은 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증득한 사람이 내가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015_0322_c_10L佛言:“須菩提!於意云何?斯陁含能作是念:“我得斯陁含果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부르니, 이것을 사다함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015_0322_c_12L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實無有法名斯陁含,是名斯陁含。”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015_0322_c_14L“須菩提!於意云何?阿那含能作是念:“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아나함이라 부르니, 이것을 아나함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015_0322_c_15L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實無有法名阿那含,是名阿那含。”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015_0322_c_17L“須菩提於意云何?阿羅漢能作是念:我得阿羅漢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곧 ‘나다, 남이다, 중생이다, 수명이다’라고 하는 모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無諍)삼매를 얻어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말씀하셨으며, 세존께서는 제가 곧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015_0323_a_01L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저는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을 증득하였다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면 세존께서는 곧 저에게 다툼이 없는 행[無諍行]을 하는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나, 수보리는 실제로 행한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를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論】 앞에서 말하기를 “성인은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이름을 얻었으니,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수다원 등의 성인이 스스로 과를 취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취할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이미 증득한 것처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성취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것이므로 여기서부터 아래로는 경문에서 이런 의심을 끊어주기 위하여 그 법은 취할 수도 없는 것이요,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은 스스로 성취한 과업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착하고 좋은 것에 의지한 사람이기에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다고 말했다.
015_0323_a_10L不可取及說, 自果不取故; 依彼善吉者,
說離二種障。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그 이름을 얻었으니, 그런 까닭에 한 법도 취하지 않는다.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6진(塵)의 경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니,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역류(逆流)를 취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경에서 “물질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부르며 나아가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한 법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인은 무위법까지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취한 과(果) 때문에 만약 성인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 ‘나는 과를 증득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나라고 생각하는 따위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뜻은 어떤 것인가? 사번뇌(使煩惱)8)는 현행하는 번뇌가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그가 증득하였을 때에 나라는 따위의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없어도 ‘나는 과를 증득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015_0323_b_01L무슨 까닭에 존자 수보리는 몸소 수기를 얻은 것을 찬탄하면서 자신이 과를 증득했다고 말했는가? 저런 이치 가운데에서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었다. 무슨 까닭에 오직 다툼이 없는 행(行)만을 말했는가? 으뜸가는 공덕을 밝히기 위한 까닭이며, 깊은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무슨 까닭에 수보리는 실제로 행한바가 없는데, 수보리는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그는 착하고 좋은 것에 의지한 사람이기에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두 가지 장애’란 첫째는 번뇌장(煩惱障)이요, 둘째는 삼매장(三昧障)이다. 이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기 때문에 행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장애라 불렀고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행을 한다고 말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날 연등불(然燈佛)의 처소에 계셨을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셨을 때에 법에서는 실제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습니다.”
【論】 또 의심하기를 ‘석가여래께서 예전에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셨을 때에 받은 법이 있을 것이며, 또 그 부처님께서 이 부처님을 위하여 설법하셨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왜 저 법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라고 하므로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저 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취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부처가 연등부처님께 얻은 것을 설법한 말이며 이실지(理實智)9)를 취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진실한 뜻이 있기 때문에 저것은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 성립된다.
015_0323_b_19L佛於然燈語, 不取理實智; 以是眞實義,
成彼無取說。
015_0323_c_01L 이 게송의 뜻은 어떤 것인가? 석가모니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셨을 때에 언어를 설법한 것일 뿐, 증득한 법을 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그가 증득한 지혜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 이르기를 “이와 같은 진실한 뜻이 있기 때문에 저것은 취할 수도 없는 것이요,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 성립된다”라고 하였다.
또 만약 “모든 성인이 무위법으로 그 이름을 얻었으므로 이 법은 취할 수도 없는 것이요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 모든 보살들은 장엄하고 청정한 부처님의 국토를 취하며, 무엇 때문에 보신불의 몸 받기를 즐거워하고 스스로 법왕의 몸[法王身]을 취하려 할까? 아마도 다른 세간에서 다시 그는 곧 법왕의 몸을 취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심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아래 경문에서는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나는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莊嚴)하겠노라’라고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 보살의 말은 진실한 게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이 곧 장엄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고 하기 때문이니라. 그런 까닭에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 머무는 곳이 없어야 하며,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고,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며, 마땅히 어느 곳에도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須彌山王)과 같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을 크다고 생각하느냐?”
【論】 이 뜻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23_c_18L論曰:此義如是應知。云何知?偈言:
지혜를 닦아 오직 식(識)뿐임을 통달하여 이와 같이 정토를 취한다. 형상이 없기에 가장 으뜸가는 체(體)이며 장엄이 아니기에 장엄의 뜻이 있다.
015_0323_c_19L智習唯識通, 如是取淨土, 非形第一體,
非嚴莊嚴意。
015_0324_a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에게는 국토를 장엄하는 일이 없다. 오직 모든 불ㆍ여래의 진실한 지혜는 식(識)만을 익혀 통달할 뿐이니, 그런 까닭에 그 국토는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국토의 형상(形相)을 취하고 나서 “나는 청정한 부처님의 국토를 성취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말이 아니다.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고 하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형상이 없기에 가장 으뜸가는 체이며 장엄이 아니기에 장엄의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장엄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형상이며, 둘째는 제일의상(第一義相)이다. 또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장엄이 아니며, 이와 같이 장엄이 없으면 이것은 곧 가장 으뜸가는 장엄이 된다. 왜냐하면 일체의 공덕으로써 장엄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국토에 대하여 이것은 형상이 있는 것이라는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청정한 부처님의 국토를 성취하리라”라고 말한다면, 그 보살은 물질 따위의 경계에 머물러서 이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경에서 “그런 까닭에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 머무는 곳이 없어야 하며,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고,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며, 마땅히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앞에서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보신불의 몸 받기를 즐거워하고 스스로 법왕의 몸을 취하려 하는 걸까? 아마도 다른 세간에서 다시 그는 곧 법왕의 몸을 취하게 될 것이다’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기꺼이 받을 보신불의 몸은 저 수미산왕의 경상(鏡像)의 뜻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유하면 산왕(山王:須彌山王)이 취하는 것 없는 것처럼 장차 받을 보신불 또한 그러하니 모든 번뇌[諸漏]와 유위법(有爲法)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015_0324_a_20L如山王無取, 受報亦復然, 遠離於諸漏,
及有爲法故。
015_0324_b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수미산왕의 형세와 힘이 높고도 먼 것과 같기에 크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 산왕은 몸에 집착하지도 않고 ‘나는 곧 산왕이다’라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요, 기꺼이 받을 보신불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하여 가장 높은 법왕의 몸을 얻었기 때문에 크다고 일컬었지만, 그는 법왕의 몸에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나는 곧 법왕이다’라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분별심이 없는가? 분별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이 아닌 것을 곧 일컬어 큰 몸이라고 하니, 그의 몸은 몸이 아니기에 이것을 큰 몸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015_0324_b_05L如經“何以故?佛說非身,是名大身。彼身非身,是名大身”故。何故如是說?
게송에 이르기를 “모든 번뇌와 유위법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가 기꺼이 받을 보신불의 몸은 모든 번뇌를 여의었다고 하니, 만약 그렇다면 곧 아무 물질도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물질이 있다고 일컫는다 해도 오직 청정한 법신만 있어 멀리 유위법을 여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진실로 내 몸이 있는 것이니, 이는 곧 다른 인연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하나라는 것은 단(檀:布施)바라밀이니 자생시(資生施)에 해당하며, 둘이라는 것은 시(尸:持戒)바라밀과 찬제(羼提:忍辱)바라밀이니 무외시(無畏施)에 해당하며, 셋이라는 것은 유체(惟逮:精進)바라밀ㆍ선(禪:禪定)바라밀ㆍ반야바라밀이니 법시(法施)에 해당한다.
2)생겨나고[生]ㆍ머무르며[住]ㆍ변하여 소멸되는[異滅] 것을 말한다.
3)덕(德)과 계율(戒律)과 지혜(智慧)를 말한다.
4)수명(壽命:自我)이라는 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별개의 존재인 5온(蘊)을 자아라고 생각하고, 둘째는 존재의 지속성을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셋째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을 수명이라 부르고, 넷째는 죽은 뒤에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자아의 개념이다. 그리고 법(法)이라는 관념이 네 가지이니, 첫째는 물질이라는 관념, 둘째는 물질이 아니라는 관념, 셋째는 관념이라는 것, 넷째는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합하여 여덟 가지가 된다.
5)색계와 무색계의 4제(諦)에 대한 진리를 관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지혜.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진리를 아는 지혜인 법지(法智)와 비슷하다 하여 유지(類智)라고도 한다.
6)진실을 알고자 하는 서원을 일으켜 선정에 들어감으로써 모든 진리를 바로 깨달아 아는 지혜이다.
7)법(法)과 비법(非法)을 말한다.
8)결사(結使)라고도 하며, 마음을 제멋대로 부려서 악업을 짓게 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9)이지(理智)를 말하는데, 이는 소관(所觀)의 도리요, 지는 능관(能觀)의 지혜인데 이 두 가지가 은근히 계합하는 것을 각오(覺悟)라고 한다. 이에 의하여 지를 내고 지에 의하여 이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