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법을 깨달으신 분이시고 모든 분별(分別)과 희론(戲論)을 여의신 분이시며 세간 중생들을 진흙구덩이에서 건져주시려는 분이시고 언설(言說)이 없는 가운데 언설하시는 분께 머리 조아립니다.
015_0341_a_04L稽首能悟眞實法, 離諸分別及戲論,
欲令世閒出淤泥, 無言說中言說者。
일체의 이도(異道)에서 지은 것으로는 모든 상견(想見)을 파괴할 수 없으니 저 무너뜨리기 어려운 견해를 금강(金剛)같이 끊었기에 저희들은 이 법문으로 마음을 돌렸나이다.
015_0341_a_06L一切異道之所作, 不能壞於諸想見,
彼難壞見金剛斷, 故我歸心此法門。
모든 글귀와 뜻 가운데 비밀한 이치 세간의 지혜로는 헤아려 알 수 없으리니 저희들과 모든 중생을 인도하고 깨우쳐 주시는 저 보살 대중께 지금 공경히 예배합니다.
015_0341_a_08L諸句義中秘密義, 世閒智慧莫能測,
開喩我等及群生, 彼菩薩衆今敬禮。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두 가지 진리에 귀결된다. 하나는 속제(俗諦)이고 다른 하나는 진제(眞諦)이니, 속제란 모든 범부ㆍ성문(聲聞)ㆍ독각(獨覺)ㆍ보살(菩薩)ㆍ여래(如來)와 나아가 명의지(名義智)와 경업과(境業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소속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진제란 여기에 나아가서 전혀 얻을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제일의(第一義)라고 설한 것과 같이 지혜의 인식 영역이 아니거늘 더구나 문자(文字)야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무업(無業)이나 무업과(無業果)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거룩한 성종(聖種)의 성품이니, 이런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가운데에서 머무름이 없는 보시(布施)와 모든 법은 아무 모습도 없어 집착할 것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생겨나는 법에는 나라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어서 증득할 수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으며 오고 감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 등의 설명이 바로 진제를 풀이한 것이다. 또 내외(內外)와 세간ㆍ출세간의 일체 법의 모습과 모든 공덕에 대한 설명이 바로 속제를 건립한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015_0341_b_01L‘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말한 것은, 이 경은 곧 세존께서 깨달으셨던 모습으로 화현해서 연설한 것이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님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느 때’라는 것은 이 경을 설한 때라는 말이니, 다른 때에도 또한 한량없이 많은 경을 설하셨기 때문이다. ‘사위성 등에 계셨다’라는 것은 이 경을 설하신 곳을 말한다. 장소를 말하는 것에 무슨 뜻이 있기에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며, 어떤 이익이 있는가? 중생들로 하여금 이 장소가 부처님께서 일찍이 계셨던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존경하며 숭상해서 복의 원인을 심기 위한 때문이다.
모든 경의 첫머리에 대중을 열거한 것은 무엇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것인가? 여래께는 큰 위엄과 덕이 있기 때문이며, 또 결집자(結集者)가 이미 전한 바에 다른 말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러 대승경에서도 세존과 보살의 공덕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수보리(須菩提)는 저기에서 이미 깨끗한 믿음을 내었으니, 그런 까닭에 희유(希有)하다는 등의 말을 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세존(世尊)’이란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가? 이것은 네 마군의 두려움을 영원히 덜어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선서(善逝)’란 제일의(第一義)에서는 모든 법을 다 믿을 것이 없다는 이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알기 때문이며, ‘여래(如來)’란 3무수겁(無數劫) 동안에 복과 지혜가 원만하고 이와 같은 몸으로 와서 정각(正覺)을 이룩하셨기 때문이다. ‘응(應)’이란 모든 번뇌와 원한을 이미 영원히 없앴기 때문이고, ‘정(正)’이란 뒤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며, ‘등(等)’이란 두루 하고 원만하다는 뜻이니 그런 까닭에 정등각(正等覺)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호념(護念)’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여래께서 거두어 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잘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량없는 중생들의 마음을 전환시켜 교화하시는 것이니, 가장 으뜸가는 호념이 된다. 이미 보호하여 지켜 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부촉(付囑)하셨는가? 아직까지 진실을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한 까닭이니,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저 모든 보살들은 널리 세간에서 마땅히 여래의 독존체상(獨尊體相)을 성취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찬미(讚美)하고 선지식을 부여하여[付] 그들로 하여금 잘 보호하게 하여 이미 생겨난 불법을 머무르게 하고 증장(增長)시키도록 부촉(付囑)하는 것이며, 아직 생기지 못한 뛰어난 법에 대해서는 그에게 부여하여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니, 가장 으뜸가는 부촉이 된다.
015_0341_c_01L또 어떤 이유로 진실을 본 사람은 버려두고 진실을 보지 못한 사람을 찬미하는가? 저들이 이제껏 뛰어난 지혜의 선품(善品)을 증득하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마음을 권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용맹스럽게 정진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선남자와 선여인이 보살승(菩薩乘) 등의 마음을 내었다’는 것은 호념하고 부촉한 보살들이 불승(佛乘)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등의 말에서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라는 말은 어떤 모습의 과(果)에 대하여 마음이 머물기를 서원(誓願)하고 욕구(欲求)해야 하는가라는 말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라는 것은 마땅히 어떤 행(行)을 닦아서 그 과를 얻어야 하는가라는 말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라는 것은 어떤 등류의 마음을 항복받아서 그 마음의 근원을 청정하게 하는가에 대한 말이다. 모든 법은 먼저 원인이 있음으로 해서 뒤에 결과가 오는 것인데, 어째서 결과에 대하여 먼저 설하시고 결과의 덕을 먼저 찬미하셨는가? 저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구하고 그 원인을 닦게 하려고 한 까닭이다. ‘자세히 들으라’고 한 것은 마음의 전일(專一)한 경지를 말한 것이고, ‘선(善)’이란 여여한 이치와 뜻에 대해 믿음을 내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며, ‘사념(思念)’이란 공경하여 지니고 잊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는 말 등은 그 순서대로 이와 같은 과(果)에 그 마음을 머물게 해 이와 같은 행(行)을 닦아 저 결과를 증득하고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으면 곧 원인이 청정해진다는 말이다.
무엇이 한계가 없는 마음인가? 경에 이르기를 “존재하고 있는 모든 중생의 종류”라고 한 이와 같은 등의 중생의 종류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니 호흡하는 유정중생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어떤 것들인가? 이른바 알에서 생겨나는 여러 새의 종류와 태(胎)에서 생겨나는 사람 등의 여러 종류와 습기[濕]에서 생겨나는 여러 곤충 등과 변화[化]로 생겨나는 여러 천상[諸天] 등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가 각각 많은 종족의 종류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중생들은 어떤 곳에서 살고 있으며 어떤 형태의 몸을 가지고 있는가? 경에 이르기를 “색(色)이 있는 것과 또한 색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색이 있다’는 것은 형상이 있는 것이고, ‘색이 없다’는 것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 3계의 중생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015_0342_a_01L‘형상이 있다’는 것은 욕계(欲界)의 스무 가지 의지처(依止處)와 색계(色界)의 열일곱 가지 의지처이며, ‘형상이 없다’는 것은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여기엔 또 몇 가지가 있는가? 경에 이르기를 “생각이 있는 것과 생각이 없는 것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생각이 있는 것’이란 공무변처(空無邊處)와 식무변처(識無邊處)이니, 이들은 공이라는 생각과 의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생각이 없는 것’이라는 것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말하는 것이니 조그만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은 유정천[有頂]에 소속된 것을 말한다. 중생의 무리가 이와 같이 많은데 이 모두를 내가 다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최상의 마음인가? 경에 이르기를 “내가 모든 중생들을 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滅度)케 하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무여열반’이란 무슨 뜻인가? 모든 법은 생겨남이 없는 성품이라서 공하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온갖 근심이 있는 모든 쌓임[諸蘊]이 영원히 사라진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끝없이 희유(希有)한 공덕이 있게 되고 청정한 색상(色相)으로 원만하게 장엄하며, 모든 중생들에게 광대(廣大)한 이익을 주는 미묘한 업(業)이 다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랑으로 거두어들이는 마음인가? 경에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한량없는 중생들을 멸도하게 하였으나 실제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보살은 자애(慈愛)로워서 모든 중생들을 자기 몸과 똑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중생의 멸도는 곧 내가 멸도된 것이지 다른 사람이 멸도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사랑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제일의로써 초지(初地) 등에 들어간 모든 보살들은 중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것은 중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예류인(預流人)이 몸이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저 보살이 어떤 중생을 걸고 내가 제도시킬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5_0342_b_01L어떤 것이 바른 지혜의 마음인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이른바 범부(凡夫)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틀림없이 제일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여 나라는 생각ㆍ중생이라는 생각ㆍ수명이라는 생각ㆍ취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진실한 제일의를 증득한 사람이라면 중생이라는 등의 생각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 가운데 반야(般若)의 힘으로써 제일의를 증득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보살은 대비(大悲)의 마음 때문에 늘 중생들을 쫓아다니며 나고 죽음이 있는 세계에 살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따라 권유하며 제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마음으로 중생의 과업을 이롭게 하므로 마땅히 속제(俗諦)로써 그 마음을 머물게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원만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다음에 나타내 보였다.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또 수보리야, 보살은 일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행한다”는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시라는 이름 속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여섯 가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무엇이 세 가지 보시인가? 첫째는 자생시(資生施)1)요, 둘째는 무외시(無畏施)이며, 셋째는 법시(法施)이다. 이 가운데 자생시는 단나(檀那)2)바라밀을 포섭하고, 무외시는 시라(尸羅)3)와 찬제(羼提)4)의 두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니, 아직 짓지 않았거나 이미 지은 악에 대하여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시는 나머지 세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고 있으니, 부지런히 정진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모든 신통(神通)을 끌어들이는 것이 마치 얻을 대상이 없는 이치를 남을 위해 설법해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저 모든 바라밀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이 다 법시를 성취하는 것이 된다고도 한다.
‘일’ 등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인가? 자기 몸에 대하여 이 몸에는 항상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한량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 가운데에서 마음으로 애착함이 없는 것이며, ‘머무를 곳이 없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색 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생각할 만한 모든 경계를 희망하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무슨 뜻으로 인해 저기에 머무르지 않는가? 마음이 자기 자신에 집착하면 은혜로 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보리(菩提)에서 물러나 보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생시(資生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보시하는 사람이 보시하는 재물에 대하여 마땅히 애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애착하면서 보시를 행하게 되면 틀림없이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거나 혹은 보시하고 나서 도리어 후회하기 때문이다. ‘머무를 곳이 없다’는 것은 무외시(無畏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모든 보살들이 지계와 인욕바라밀을 닦을 때에 마땅히 마음을 내어 거기에 대한 과보(果報)가 있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색 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법시(法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법시엔 두 가지 결과가 따르는데, 하나는 현재에 생겨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때에 생겨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마땅히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015_0342_c_01L‘현재에 생기는 과보’라는 것은 보시하는 재물로 사용한 색(色) 등 다섯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설법하는 사람은 중생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대상이므로 그에게 미묘한 물질 등, 기악(妓樂)ㆍ향ㆍ꽃ㆍ음식ㆍ의복으로써 공양하는 것이다. ‘다른 때에 생겨나는 과보’라는 것은 법의 경계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도 머물지 않아야 하는가? 만약 모든 보살들이 진실을 증득하였을 때에는 마침내 법신까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수행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청정함을 얻는가?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모습이나 생각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을 한 뜻은 무엇인가? 모든 보살들이 제일의 가운데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를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질이라는 명의지(名義智)의 경계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은 곧 마음을 항복받아 그 원인이 청정한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보시하는 일 등에서 복의 덩어리가 생겨난다고 말하지만 세 가지 일이 다 허망한 복이거늘 어디에서 화(禍)가 생겨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은 제일의가 되기 때문에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제(俗諦)이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복의 덩어리는 헤아려 알기 어려우니, 마치 시방의 허공이 넓고 두루 퍼져 있어서 끝이 없는 것과 같다. 앞서 원인을 행한 곳에서 마땅히 그 복을 찬탄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을 항복받으면 모든 생각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이 생겨나지 않으면 보시가 비로소 청정하기 때문이며, 청정한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복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아래의 모든 경전[修多羅]에서는 문답(問答)으로 의심을 없앴다. 이것은 바른 법을 닦아 생긴 복덕의 위력을 지녔으며, 이 위력을 성취함으로써 일체법을 수행하고 이렇게 수행함으로써 결과와 원인의 청정한 모습을 임의대로 운용한다. 일체 중생이 여래장성(如來藏性)의 부처님 경계에서 부처님의 법신과 법계의 모습을 깨달아 머무름이 없는 열반에 들어 유위(有爲)를 관찰한다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일 뿐이다.
015_0343_a_01L 성자(聖者) 수보리가 의심을 내어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보시할 때에 법에도 머물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면, 왜 상호(相好) 때문에 보시를 행하는가? 또 온갖 복의 형상 등과 공덕의 법 덩어리를 이름하여 세존이라 한다면, 만약 법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모든 부처님의 체상(體相)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심을 떨쳐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경에서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좋은 상호를 성취한 것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라는 등의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좋은 상호를 성취했다’는 것은 이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마치 경에서 “존재하는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라고 알면 곧 허망하지 않으리라”고 한 것과 같다. ‘허망하지 않다’는 것은 이른바 진실한 것이니, 진실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부른다. 모든 모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니, 마치 경에서 “마땅히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라고 알아야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모습에 나아가 증험하거나 구해 봐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만약 능히 모든 과보에 대한 희망을 영원히 버린다면 마침내 법신까지도 얻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항상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행해야만 곧 부처님의 몸을 빠른 시간 내에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수보리가 또 의심하여 말하였다. “만약 세 가지 보시가 다 얻을 것이 없어야 청정한 원인이 되고 모든 모습은 공(空)한 성품임을 깨달아 알아야 진실한 결과가 된다고 한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그것을 믿고 즐거워할 것인가? 장차 허무하고 부질없는 말이 되어버려 마치 석녀(石女)와 같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물었다. “미래 세상인 뒤의 50세가 경과하여 바른 법이 없어지려고 할 때에 상당한 중생들 중에서 이와 같은 경전의 내용을 듣고 진실한 생각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 이런 의심을 떨쳐버리게 하기 위해 경에서는 “수보리야, 그런 말은 하지 말라”라는 등의 이런 말을 하였다. ‘뒤의 50세’라는 것은 사람의 나이 100살을 사는 것을 둘로 나누면 앞부분 50은 교화의 힘이 증장하여 강해지는데 뒤에는 점점 쇠퇴하여 감소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를 미래 세상이라고 하였으니, 이때는 바른 법이 장차 소멸하는 시기로서 교화의 힘이 점점 미미해진다. 그런 까닭에 뒤의 50세가 경과할 때라고 말한 것이다.
015_0343_b_01L보살마하살이란 뜻은 무엇인가? 보리의 처소에 대해 결정적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살이라 하고,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이익을 일으키겠다고 서원하는 것을 마하살이라고 한다. 왜 또 시라(尸羅)가 있다고 말했는가? 과거생(過去生)에서 한량없이 많은 부처님을 뵙고 다 함께 공양하였기 때문이다. 공양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처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모시면서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며, 둘째는 필요한 물건을 엄격하게 준비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의 요점에 대하여 묻고 받들어 수호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을 시라라고 한다.
시라라고 하는 것은 6정(情)의 감관을 잘 지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리시라(能離尸羅)이니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十不善業]을 여의기 때문이며, 둘째는 능작시라(能作尸羅)이니 보리분업(菩提分業)을 짓기 때문이며, 셋째는 능취시라(能趣尸羅)이니 제일의제(第一義諦)를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이다. 왜 또다시 공덕이 있다고 말했는가? 탐욕이 없는 등의 세 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자질이 정직하고 부드럽고 온화하며, 또한 지혜롭고 자비롭다. 이러한 등을 공덕이라고 말한다. 왜 또다시 지혜가 있다고 말했는가? 생(生)과 법(法), 이 두 가지에 모두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생각이 생겨나는 법을 잘 알아차려 여의는 것이니, 생ㆍ법 두 가지에 각각 네 가지씩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생상(生想)을 여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 모든 보살은 나라는 생각이 없고,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수명이라는 생각이 없고, 취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015_0343_c_01L이 뜻은 무엇인가? 주재(主宰)하여 작용하는 것을 나[我]라고 말하는데, 모든 온(蘊)에는 그러한 체상(體相)이 없다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항상 한 성품에 편안히 머무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여러 가지 쌓임은 항상 함이 없어서 서로 이어지면서 유전(流轉)하므로 어느 한 법도 이렇게 편안히 머무르는 성품이 없음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다. 경에서 “너는 지금 이 찰나의 짧은 시간에도 나고 늙고 죽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수명이라는 생각이 없다. 그리고 모든 쌓임이 순환하여 여러 갈래의 다른 세계를 받게 되므로 취한다고 말하는데, 이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여러 세계를 취하는 이가 없으며, 현재의 온(蘊)을 버리고 나중의 온을 받는 것은 마치 낡은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다. 그러나 속제(俗諦)에 의지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바탕을 따라서 형상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바탕이 형상을 이르게 하지도 않았건만 형상이 나타나고, 먼저의 온(蘊)을 말미암기 때문에 나중의 온이 계속하여 생겨나는 법인데,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르게 하지도 않건만 뒤의 것이 서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보살은 취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한 것이니, 이것을 생(生)에 나라는 성품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법상(法想)을 여읜다고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법이라는 생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으며, 생각도 없고 또한 생각이 아닌 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제일의법(第一義法)은 본래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멸하여 없어질 이치가 없으니 그러므로 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다. 법이니 법이 아니니 하는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다. 여기에서는 생각이 없다고 하여 다만 생각이 없는 것만을 나타냈고 법이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이 아니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제일의가 비록 모든 생각을 여의었을지라도 세간의 언어에 따라서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보살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법에 나라는 성품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안다고 말한다.
어째서 단지 시라 등의 지계(持戒)의 선행을 심는 공덕을 말했는가? 능히 깊은 믿음을 일으켜 지혜로 진실을 보면 실상(實想)이 생겨나고 모든 공덕이 여기에서 갖추어져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무슨 뜻으로 지견(知見)을 말했는가? 그는 모든 보살들의 마음이 용감해지기를 장려했기 때문에 “내 이제 여래의 지견을 믿고 이해하여 마땅히 전일하고 부지런하게 모든 선법(善法)을 닦겠습니다”라는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지견 두 가지를 다 갖추었다고 말했는가? 그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를 열어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일체지’란 모든 경계에 대하여 밝게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는 비지(比智:比量智)로써 연기를 보고 불이 난 것인 줄은 알지만 모든 모습의 차별을 비추어 깨달을 수 없는 것과는 다르고, 또한 육안(肉眼)이 크고 가까이 있는 물체를 볼 수 있지만 미세한 장애와 먼 데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한결같이 말만 따라서 혹 저와 같이 되기 때문이다.
015_0344_a_01L만약 모든 보살이 나[我]라는 등의 생각과 법이라는 등의 생각을 일으킨다면 무슨 과실(過失)이 있는가? 이로 인하여 나라는 등의 집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째서 나라는 등의 생각에서 나라는 등의 집착이 생겨나는가? 만약 이러한 집착이 생겨난다면 그러한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법 등의 생각에서 나라는 등의 집착이 생겨나는가? 나[我]니 내 것[我所]이니 하는 5온(蘊) 가운데에서 법이니 법이 아니니 하는 생각이 생겨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것이 아주 없어서 흙이나 나무와 같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두 가지의 극단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니, 법에는 성품과 모습이 있을 지라도 오히려 취하지 말아야 하거늘 더구나 본래부터 성품도 모습도 없는 비법(非法)이겠는가? 또한 분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니, 선(善)한 법도 오히려 집착해서는 안 되거늘 더구나 불선(不善)한 비법이겠는가?
어떤 이는 의심하며 말한다. “불선은 마땅히 취하지 않아야겠지만 무엇 때문에 선한 것까지 취하지 않아야 하는가? 만약 선한 법도 취해선 안 된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3무수겁(無數劫) 동안 자량(資糧)을 쌓고 모으셨는가?” 그런 까닭에 경에서 말하였다.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항상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더구나 비법(非法)이겠는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냇물을 건너려고 할 때엔 마땅히 먼저 뗏목을 취해야 하지만 저 언덕에 이르고 나서는 뗏목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세존께서도 또한 그와 같이 고통의 냇물을 건너고자 하여 자량의 뗏목을 빌렸지만, 모든 과(果)를 뛰어넘어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 나면 즐거움의 원인조차도 오히려 여의어야 하거늘 더구나 괴로움의 원인이겠는가? 『상협경(象脅經)』에서 “만약 생사(生死)의 바다를 벗어나 열반의 경계를 증득하려면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보와 법(法)과 비법(非法)의 원인을 다 버려야 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015_0344_b_01L 또다시 의심하여 말한다. “증득할 때에는 법이든 법이 아니든 다 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왜 세존께서는 일념(一念)이 상응하는 바른 지혜[正智]로써 모든 법을 현각(現覺)하신다고 말씀하셨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셨다고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설법하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등의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세존께서 진실을 증득하셨지만 어떠한 법도 취한 것이 없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모든 법이라고 말한 것은 세속의 이름과 말을 따르는 것이어서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다. 만약 법과 법 아닌 것이 모두 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면 곧 속제(俗諦)에 의지해서 설명한 보리는 실물(實物)이 있지 않을 것이다. 가령 대범(大梵)5)이나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보리를 증득하셨다고 말했을지라도 증득한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증득한 것이 없다면 왜 세존께는 여러 가지 능사(能事)가 있는가? 여래의 본래 서원은 뭇 중생들을 널리 이익 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모든 분별을 여읜 것은 작의(作意)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지만 결국 중생들은 나고 죽음이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종류의 욕망과 즐거움이 같지 않음을 따라 형상(形相)과 언어의 차별에 상응하여 나타낸 것이다. 모든 법의 성품에 대하여 다 믿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얻은 보리 또한 법신이라고 이름 해야 할 것이다. 보리법신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비록 동념(動念)이 없다 하더라도 먼저 서원한 힘으로 인하여 가없는 색상(色像)으로써 그 몸을 장엄하였으며, 시방 국토를 두루 다녀도 걸림이 없고, 무릇 보고 듣는 이가 있으면 이로움을 입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성자 수보리는 보리는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라는 비밀한 뜻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여래께서는 그 어떤 조그만 법도 얻으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생겨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증득한 것을 나타내지도 않았으니 경에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는 것이며 설명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요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또 무슨 뜻인가? ‘생겨남이 없다’는 것은 옳은 법도 아니요 또한 그른 법도 아닌데 법이니 법이 아니니 하는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취해서도 안 되고 말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취할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며, 증득하였으되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무위(無爲)의 모습을 성인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무위’란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이며, ‘무위의 모습’이란 얻을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며, ‘성인’이란 진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015_0344_c_01L수보리가 다시 ‘시라(尸羅) 등이 있는 경에 대하여 깊이 믿는다면 그 복이 얼마나 될까?’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법을 지닌 위력(威力)에 대하여 자세히 밝혔다. 경에서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7보(寶)로써 보시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어떻겠느냐?”라고 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는 것은 두 가지 진리에 대하여 얻을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런 이치를 잘 열어서 연설하여 뒤바뀐 생각을 내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 복이 저 복보다 우세한 것이다. ‘한량없는 아승기’란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한량없기 때문이니, 60위수(位數)로도 미칠 수 없는 것을 아승기(阿僧祇)라고 한다. ‘복덕의 덩어리는 곧 복덕의 덩어리가 아니다’라는 것은 재물의 보시가 아무리 많아도 경을 지닌 복덕에 비하면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경을 지닌 복덕이 많다는 것에는 두 가지 문(門)이 성립되니, 그것은 교(敎)와 이(理)이다. 어떤 것을 교라고 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보시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은 이른바 법시(法施)인데 지금 이 보배를 보시하는 것은 바로 재시(財施)에 소속된다”고 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이(理)라고 하는가? 재시가 아무리 부유하고 넉넉한 결과를 획득하게 한다 하더라도 나고 죽음에 머물러 있어 덧없이 패하고 무너지지만 법시는 구경(究竟)의 공덕을 성취할 수 있어서 나고 죽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영원히 끊어버린다. 그러므로 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이 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과 여래도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45_a_01L어떻게 출생(出生)하는가? 이 법문에 의지하면 마음에 얻는 것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이치와 미묘한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다’는 등을 말한 뜻은 곧 율의(律儀)를 말한 것이니, 이것으로부터 많은 덕을 지닌 몸이 생겨나기 때문이며, 몸이 율의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상호[相]가 원만한 업을 성취하고 변화된 몸[化身]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어떤 뜻이 있는가 하면, 보시는 오직 큰 재위(財位)의 과보를 얻기는 하지만 모든 부처가 되는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불법(佛法)이란 곧 불법이 아니기에 이것을 불법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 뜻은 어떤 것인가? 모든 법의 체성(體性)은 공(空)하여 아무런 존재가 없으니, 이것을 만약 열어 나타내면 곧 부처님의 법신이 된다. 자성(自性)이 있다고 여기는 이는 법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므로 이러한 비밀한 뜻에 의거하여 불법(佛法)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만약 법에 자성이 없음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런 까닭에 불(佛)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은 부처님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기 때문에 이것을 불법이라고 말한다.
바른 법을 지니기 때문에 법에 아무 성품이 없음을 깨닫는 것인데, 재시를 행하는 것은 이와 같은 법시보다 복이 많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의심하는 자는 말한다. “만약 증득한 법에 아무 성품이 없다고 한다면 네 가지 성현의 과(果)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세간에서는 왜 물질은 없고 과만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수다원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는 등의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수다원이라고 부르는가? 생사의 흐름이 없는 것에 참예하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색(色) 등의 경계에 대하여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념(念)이 견도위(見道位)가 되는데, 이를 타고 과(果)로 향하므로 저것을 이름하여 과향(果向)이라고 부른다. 제16념(第十六念)은 주과(住果)가 되는데 인간 세상과 천상 두 곳을 일곱 번 오간다고 설한다.
015_0345_b_01L무슨 까닭에 일곱 번 태어나야 하는가? 일곱 가지 번뇌[七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번뇌’란 무엇인가? 욕탐(欲貪)ㆍ진색(瞋色)ㆍ무색(無色)ㆍ애(愛)ㆍ도(掉)ㆍ만(慢)ㆍ무명(無明)을 말한다. 이로부터 다시 욕계 가운데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의혹을 끊고 마침내 5품(品)에 이르게 되면 그 이름을 사다함향(斯陀含向)6)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가지 가가(家家)를 설하였으니 하늘과 인간 세계를 말한다. ‘천가가(天家家)’란 천상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혹 일천(一天), 혹은 이삼천(二三天), 이렇게 여러 가(家)를 유전(流轉)하면서 반열반(般涅槃)에 이른다. ‘인가가(人家家)’란 인간 세계를 말하는데 혹은 이 주(洲)에, 혹은 다른 주의 여러 가를 유전하면서 반열반에 이르게 된다. 제6품(第六品)이 다하면 이 과에 머무른다고 말하니, 다시 한 번 이 세간에 와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례대로 2품(品)을 끊고 한 번 세간에 태어나야 반열반을 증득하는데, 이것을 곧 아나함향(阿那含向)7)이라고 부르며, 9품(品)을 영원히 여의면 이 과에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다시는 욕계에 환생(還生)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다시 초선(初禪)의 경지에 있는 욕심을 끊고 나아가 유정(有頂)의 제9품 무간도(無間道)에 이르렀을 때를 모두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무간도라는 것은 또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이름하니, 이 선정으로써 모든 의혹[惑]과 수면(隨眠)을 영원히 무너뜨리고 해탈도(解脫道)에 이르게 되면 진지(盡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누진(漏盡)을 증득하여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아라한과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니, 마땅히 자기 자신은 물론 남에게까지 이익이 되는 일을 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탐착(貪着)이 있는 일체 중생들에게 공양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사람은 모두 ‘나는 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증득하였을 때에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기 때문이니, 경에서도 “실제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수다원이라 이름하며 나아가 실제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만약 이런 생각이 생기면 ‘나’ 등에 대하여 집착이 있게 되는데 신견(身見)을 여읜 사람은 저러한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무위(無爲)의 상(相)을 성인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다. 여기에서 ‘무위의 상’이란 성품과 모습이 공(空)하다는 뜻이다. 수보리는 자기 자신이 증득한 것을 서술하면서 이런 생각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무쟁행(無諍行)이고 제일가는 사람이며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이러한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수보리가 무쟁삼매를 수행하여 곧 공(空)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여래께서 제일가는 사람이라고 찬탄하여 말씀하셨겠는가? 여기에서 ‘제일’이라고 말한 것은 곧 공하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니 경에서 “수보리가 실제로 수행한 것이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쟁(諍)’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번뇌(煩惱)이니 그 번뇌를 여읜 것을 무쟁의 선정[無諍定]이라고 말한다. 수보리는 이 선정에 머물면서 장애와 번뇌로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언(俗言)을 따라 ‘무쟁행(無諍行), 무쟁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015_0345_c_01L 또다시 의심하는 자는 말한다. “만약 예류(預流) 등이 스스로 과(果)를 얻지 못했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연등(然燈)부처님을 만나서 생멸이 없는 법인[無生忍]을 획득하셨을까?” 그러하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에 대하여 취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이와 같은 언급 등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을 만났을 때에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달아 어떤 법도 취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속제(俗諦)이기 때문이니, “보리를 증득하였다는 것은 얻은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 경에 이르기를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말하기를 ‘내가 도량(道場)에 앉아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지만 금강장(金剛場)을 일으켰다’라고 하였다”고 하였고, 경에 또 이르기를 “나는 존재하는 모든 법을 다 얻을 수 없다. 만약 성문(聲聞)과 독각(獨覺), 그리고 여래가 혹 말하기를 ‘언어로는 증득한 법을 취할 수 없고 지혜가 아니면 또한 취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말은 경(經)에 위배된다”고 하였으니, 경에서 설한 제일의(第一義)는 지혜로운 이가 행할 바가 아니거늘 더구나 어떻게 문자로 말할 수 있겠는가?
015_0346_a_01L또한 지혜로 알 수 있는 경계는 소전경(所銓境)이라 이름한다. 이 두 가지 차별지(差別智)가 증득한 것을 초불행(初不行)이라고 말한다. 무슨 뜻으로 반드시 언어로는 취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간략한 것을 마땅히 갖추어 말한 것인 듯하다. 치아[牙齒]와 손발[手足] 등 여러 가지 몸의 일부분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에서는 세존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생멸이 없는 지혜를 증득했으나 어떤 법에서 취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저 경전에서 말하였다. “해혜(海慧)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ㆍ수행(修行)보살ㆍ불퇴전(不退轉)보살ㆍ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이다. 이 가운데 초발심보살은 색상여래(色相如來)를 나타낸 것이고, 수행보살은 공덕성취(功德成就)여래를 나타낸 것이며, 불퇴전보살은 법신(法身)여래를 나타낸 것이다. 해혜일생보처보살은 색상(色相)으로도 보지 못하고 공덕을 성취한 것으로도 보지 못하며 법신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보살은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지혜에 의지하고 청정한 수행에 의지하지만 청정한 지혜란 행하는 바도 없고 희론(戱論)도 아니기에 이것을 다시 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견(見)과 비견(非見)은 곧 두 가지 극단론인데, 이 두 가지 극단을 멀리 여의면 곧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를 보면 곧 자신을 보게 되어 제 몸이 청정함을 보고 부처가 청정함을 볼 수 있다.
‘부처가 청정함을 본다’는 것은 일체법이 다 청정함을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청정한 지혜도 또한 청정함을 보니,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해혜야, 내가 이와 같이 연등여래를 뵙고 얻은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으로서의 증득한 법은 취할 수도 없고 얻은 진리도 없다. 그때에 다라수(多羅樹) 일곱 그루의 높이만큼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일체지지(一切智智)가 밝고 또렷하게 앞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수많은 견품(見品)을 끊었고, 여러 가지 분별인 다른 분별[異分別]과 두루 하는 분별[遍分別]을 초월하였으며, 모든 식별 있는 경계에 머물지 않아서 6만 가지 삼매를 증득하였다. 그러자 연등여래께서 곧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너는 미리 세상에서 틀림없이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은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수기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고, 또한 그밖에 다른 지혜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나도 혼몽한 것도 아니건만 깨달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얻은 것도 없고 역시 부처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나라는 생각도 없었고, 수기도, 수기를 설하셨다는 생각도 없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지혜를 증득했으나 취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생각’이란 마음의 법은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에서 설명한 지혜의 경계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청정한 혜안(慧眼)으로써 관찰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또 ‘생멸이 없는 법인’이란 곧 마음의 법[心法]이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얻는 이도 없고 얻을 것도 없음을 증득했다’는 것은 법에는 성품도 없고 취득(取得)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015_0346_b_01L또 ‘증득한 법은, 얻은 사람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은 법에는 아무런 성품이 없어서 취할 수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니, 이렇게 얻을 것이 없는 이치에서 무엇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전혀 얻을 것이 없다면 어찌 지혜를 취할 수 있겠는가? 또 많은 견품(見品)을 끊고 여러 가지 분별심이 있는 견품을 초월한 분별지(分別智)의 법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일체 인식 작용의 경계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일체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계에 머물지 않음을 말로써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혜의 경계를 취할 바가 없다면 어떻게 다른 스승들이 단호히 부정(不定)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다시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지혜로써도 모든 부처님의 법을 취할 수 없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은 지혜로써 불국토[佛土]의 공덕을 취했으며, 서원(誓願)을 일으켰을까?”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불국토의 장엄을 성취하리라’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진실하게 말한 것이 아니니라”라는 등의 이와 같은 말을 한 것과 같다. 갖가지 미묘한 보배와 비단으로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도록 하는 것을 장엄(莊嚴)이라고 말한다. 저것은 실체의 형상과 빛깔 등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장엄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속제(俗諦)에 의하여 성취한 지혜이기 때문에 이것을 장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서는 안 되는데, 만약 마음에 머무름이 있게 되면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나니, 이와 같이 머무르는 마음은 마땅히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땅히 색깔 등 머무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색깔 등의 과보에 대하여 마땅히 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은 저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마땅히 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015_0346_c_01L또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일체의 법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면 어째서 모든 부처님들은 두루 가득하고도 자재(自在)한 몸을 취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은 몸이 수미산왕(須彌山王)과 같다”라는 등의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이 비유는 그것과 비슷한 법으로써 자재한 몸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수미산처럼 큰 것은 그 업력(業力)으로 말미암은 까닭이라서 비록 분별하지 않는다 해도 큰 몸을 내니 여래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한량없이 많은 겁 동안 모든 복행(福行)을 닦았으므로 비록 큰 몸을 획득하긴 했지만 분별로 말미암지는 않는다. 여래는 무슨 까닭에 수미산과 같은데도 분별함이 없는가? 제일의 가운데에는 산(山)이나 색신(色身)에 아무런 체성(體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형상(形相)은 모두 작용이 있는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경에서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부처님 말씀에 ‘몸이 아닌 것을 몸이라고 부르며, 몸이 있는 것이 아닌데 커다란 몸이라고 부른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다른 법을 받아 지니면 그 복이 매우 많음을 나타내 보였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 거듭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항하강 가에 있는 모래알 수만큼 많은 항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여러 항하의 모래가 많지 않다는 것인가? 이 훌륭한 비유를 어째서 먼저 들지 않았는가? 모든 범부들이 진실을 알고 있지 못하기에 먼저 자세히 설명하였다. 믿음을 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다가 점차로 설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믿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바른 법을 받아 지니므로 많은 복이 생기는 데에는 열세 가지 원인이 있어 복을 성취할 수 있으니, 이른바 장소가 공경할 만하기 때문이고, 사람을 존경하고 숭상할 만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보다 뛰어난 원인이 되기 때문이고, 이 경의 뜻이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며, 3계의 많고 많은 내외(內外)를 초월하기 때문이고, 수승한 부처님 형상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안의 보시로 얻은 복보다 뛰어나기 때문이고, 부처님과 똑같이 3계에 출현(出現)하기 때문이며, 믿고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고, 수행하는 사람이 있기 어렵기 때문이며, 믿고 수행한 과보가 크기 때문이고, 믿고 이해함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위력(威力)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은근하게 이 모든 인(因)의 모습을 설명하셨는가? 모든 중생들은 자생시(資生施)를 행하면서 재물이나 지위[財位]에 대한 과(果)만을 구하지, 바른 법을 지녀서 여러 가지 고통의 원인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처소가 공경할 만하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또한 수보리야, 어떤 처소를 따라 이 법문을 설하다가 마침내 하나의 4구게(句偈)에 이르게 되더라도 이곳은 곧 지제(支提)8)에서처럼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는 등의 이러한 말을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을 존경하고 숭상할 만하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은 최상의 희유(希有)한 법을 성취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 이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모든 것보다 뛰어난 원인이 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붙여야 마땅하겠습니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이름 해야 하느니라”라고 한 데까지 이와 같은 등의 말이 그것이다.
015_0347_a_01L이 뜻은 무엇인가? 모든 불보살(佛菩薩)은 반야바라밀로써 세간과 출세간에 대하여 가장 뛰어나게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며, 지금 이 법문에서는 이와 같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경에서 “그것은 곧 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혜 공덕의 언덕[智功德岸]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저 언덕이 아닌 것은 3계의 법지(法智)를 말하는 것으로서 능히 칭량(稱量)하여 알 수 있으며, 본성(本性)이 생겨남이 없는 제일의(第一義)처럼 견고하지도 못하니 그런 까닭에 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 뜻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라는 것은 이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니,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설법하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015_0347_b_01L이 뜻은 무엇인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어떤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도 문자로써 설법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오직 이 분량(分量)만큼의 설법만이 보리(菩提)라고 이름 할 수 있으니, 마치 어떤 경에 이르기를 “공중에서 새의 자취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리의 성품도 이와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얻을 것이 없는 가운데에서 능히 깨달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3계 밖의 많은 것을 초월한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작은 먼지를 많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천세계의 작은 먼지처럼 많음을 거론한 것은, 이 법문을 받아 지녀서 생긴 복과 대비시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어떻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가? 경전을 지녀서 생기는 복에 비하면 많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 “여래께서는 이 모든 작은 먼지는 작은 먼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작은 먼지가 아니다’라는 것은 많지 않다는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만약 많지 않은 것이라면 작은 먼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왜 다시 이것을 이름하여 작은 먼지라고 말했는가? 스스로의 분한(分限)에 의거한 것이니, 이것이 한 대천세계의 작은 먼지의 수효이기 때문이다. ‘3계 안의 많은 것을 초월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존재하는 이 세계를 여래께서는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세계’란 중생 세계를 말한 것이니, 대천세계 가운데 하나하나 중생들마다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미진찰나(微塵刹那)가 모두 많기 때문에 세계 등은 작은 먼지가 아니라고 설한 경우와 같다. ‘뛰어난 부처님의 색상의 원인이 된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서른두 가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는 것인가? 법신(法身)은 모습이 없는 것으로 실체를 삼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경에서 “서른두 가지 모습은 곧 실제 모습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모습이 아니다’라는 것은 법신의 모습이 아닌데 이것을 모습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 부처님의 색신(色身)은 장부의 모습으로서 바른 법을 받아 지녀서 생긴 복이 곧 법신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 여러 모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이 복이 가장 수승(殊勝)한 것이 된다. ‘안의 보시로 얻은 복보다 뛰어나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선남자(善男子)나 선여인(善女人)이 항하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몸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이 복은 저것보다 한량없는 아승기만큼이나 뛰어나다”라고 한 데까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재물을 보시했기 때문이니, 몸을 버려 보시한 것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밖의 물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무엇을 이름하여 ‘부처님과 똑같이 3계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다 해도 박복한 중생은 만나 뵙기 어려운 것처럼 이 경전도 이와 같아서 여기에 참예하여 듣는 자가 적으니, 경에서 “그때 수보리가 이 법문을 듣고 믿음을 깊이 내고 이해하고는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리다가 눈물을 닦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수보리는 아라한(阿羅漢)이었으므로 부처님을 따라 이 바른 법을 깨달았는데도 예전엔 오히려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과 함께 이 세계에 출현한 것이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믿고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실한 생각을 낸다면, 이 사람은 가장 훌륭하고 드문 공덕을 성취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진실한 생각’이란 이 법문을 들으면 한량없는 복의 원인이 되는 그것이 진실함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이런 법문은 듣기조차도 어려운데 부처님과 함께 이 세계에 태어난 그것이 진실함이 되기 때문이며, 또 일체법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음을 설법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진실함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의 법이 생겨남이 없다면 왜 마땅히 진실한 생각을 낸다고 말했는가?
015_0347_c_01L비록 진실한 생각을 내었더라도 무생의 이치를 무너뜨리지도 않기 때문이니, 경에서 “진실한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진실한 생각을 낸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진실한 생각을 낸다’는 것은 속제(俗諦)에 의거한 설명이니, 제일의제에서는 곧 진실한 생각이란 것도 없다. 또한 속제를 진실한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제에 따른 생각이니, 이러한 사람은 비록 모든 법은 생겨남이 없는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속제의 법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가장 으뜸가는 희유(希有)한 것이 된다. ‘수행하는 사람이 있기 어렵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제가 지금 이와 같은 법문을 듣고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이와 같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믿고 수행한 과보가 크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다시는 나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수명이라는 생각, 취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 거기에 해당된다. 이 뜻은 무슨 뜻인가? 이 경전에 대하여 믿고 또한 실천했기 때문에 모든 법에 나라는 성품이 없음을 깨달아 나라는 생각 등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이 가운데에서 곧바로 취하려는 생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저 취하려는 생각은 속제를 따라 설명한 것이고, 제일의제에서는 이런 생각이 없다. 왜냐 하면 모든 불세존께서 증득하신 법에는 나라는 것이 없으며 모든 분별의 생각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체상(體相)을 큰 과보[大果]라고 말하는 것이다.
015_0348_a_01L‘믿고 이해함을 성취한다’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나서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다는 이치에 대하여 마음에 놀라지 않고 생도(生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며,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법은 화합하는 모습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에 무서움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중생은 세속의 화합상(和合相) 중의 상속(相續)을 분별(分別)하여 진실이라고 집착하게 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이와 같지 않아서 영원히 결정지어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또다시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차례대로 말하자면 법을 들을 때, 깊이 생각할 때, 닦고 익힐 때에 마음이 평안하고 동요하지 않아서 중생 등이라는 생각을 이미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위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은 수보리야, 이 제일바라밀은 여래께서 설명하신 것이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또한 이와 같이 설명하셨느니라”라고 그렇게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제일(第一)이라고 말하는가? 그와 더불어 동등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그와 더불어 동등할 것이 없는 것인가? 모든 불법 가운데 그 위력이 가장 우세하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연설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 열세 가지의 원인 때문에 이 경전을 지닌 복이 보배를 보시한 것보다 더 많다.
또 다시 의심하는 자는 말한다. “만약 모든 불법 가운데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만이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롭고 괴롭게 다른 바라밀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이 다른 바라밀을 모두 포섭하여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여래의 인욕(忍辱)바라밀은 곧 바라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바라밀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 분별심(分別心)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분별심이 없는가? 경에 이르기를 “내가 옛날 가리왕(歌利王)9)에게 사지[支體]를 끊기고 잘림을 당했었는데, 나는 그때에 나라는 생각도 없었고 중생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수명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취한다는 생각도 없었느니라”고 말한 이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만약 그때 나라는 등의 생각이 있었더라면 곧 나니 남이니 하는 견해가 있게 되어 다른 사람이 와서 나를 범하게 되면 틀림없이 성내고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만약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일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이 인(因)이 되어 성내는 마음이 다시 일어난다. 그 왕의 처소에서 누가 능히 헤아리지 않겠는가?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증득한 지혜[證知]엔 아무 생각이 없다 해도 그것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나라는 등의 생각이 없는 것이니,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과 성내고 원한을 품는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015_0348_b_01L무슨 까닭에 어리석은 것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인지, 이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관찰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이 없는 것도 또한 생각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생각과 생각이 없는 데에 물들고 집착[染着]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핍박과 학대를 당했을 때에 인욕을 포섭하여 지녔음[攝持]을 이미 말하였다. 다시 다른 때에 포섭하여 지닌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여 경에 이르기를 “또 기억해 보니 과거 5백 세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되었을 때였다”라는 등의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이것은 지난 과거에 악한 왕을 만나지 않았을 적에도 이미 여러 생 동안 나라는 등의 생각을 끊고 모두 반야의 섭지력(攝持力)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또다시 보리를 포섭하여 지녔음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셨으므로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모든 생각을 여의어야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에 보리좌(菩提座)에 앉아서 모든 생각을 영원히 끊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을 여의어야 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색(色)에 머물면서 마음을 내어서도 안 되고, 마땅히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에 머무른 채 마음을 내어서도 안 되며, 마땅히 머무름이 없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만약 머무는 곳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면 왜 보리에 머물면서 마음을 내는가? 보리에 머물기 때문에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이니 경에서 “왜냐하면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이 곧 머물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머문다’라는 것은 속제(俗諦)이기 때문이며, ‘머물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은 제일의(第一義)이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보리에 머무르므로 곧 이것은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보리는 머무는 곳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보리에 머무는 다른 이름이 된다. 이미 반야가 인욕을 포섭하여 지녔고 또한 다른 바라밀도 포섭하여 지녔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습은 어떤 것인가?
015_0348_c_01L경에 이르기를 “이런 까닭에 보살은 마음이 색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하며,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세 가지 보시가 여섯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기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이 보시하는 물질ㆍ보시하는 사람ㆍ보시를 받는 사람의 세 가지 분별을 여의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모습이 된다. 그러므로 다른 바라밀을 포함해 지니고 있다는 뜻이 성립될 수 있으니 다섯 가지 바라밀을 설명한 것과 같다. 만약 반야를 여의면, 마치 눈이 없는 사람에게 인도하는 스승이 없는 것과 같다. 저러한 방편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약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면 어떻게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할까?”라고 하므로 경에서 “모든 중생의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익이 되게 한다’는 것은 속제(俗諦)에 의거해서 하는 말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에서의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 집착하므로 온(蘊)과 다르니 혹은 다르지 않느니 하고 헤아리지만 제일의 가운데에는 다 얻을 수 없다. 경에서 “이 모든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지(智)와 소지(所知), 이 두 가지 분별을 멀리 여의어야 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지(智)에는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고, ‘중생이 아니다’라는 것은 소지(所知)가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저 두 가지가 다 성품이 없으며 여래가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하는 모든 생각도 영원히 제거되므로 증득한 법에는 성품이 없는 것이다.
2)범어 dana의 음역으로, 단나(旦那)ㆍ타나(拕那)ㆍ타나(柁那)ㆍ태낭(馱囊)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단(檀)이라고도 한다. 의역하여 보시(布施)나 시(施)가 되는데, 즉 준다[給與]. 또는 시사(施捨)의 뜻이 된다. 범어와 한어를 합해서 단시(檀施)ㆍ단신(檀信)이라고도 한다.
3) 범어 śīla의 음역으로 행위ㆍ습관ㆍ성격ㆍ도덕ㆍ건경(虔敬) 등의 여러 뜻을 함유하고 있다. 6육바라밀 중의 지계(持戒)이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여 허물을 방지하고 악업을 그치는 용도로 제자들에게 수지하게 한 것이다.
4)범명은 Kṣānti이며, 인욕(忍辱)이라고 번역한다.
5)사바세계를 지키는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인 대범천왕(大梵天王)을 말한다.
6)범어 sakṛd-āgāmin, 파리어 sakad-āgāmin의 번역이다. 또는 사갈리다가미(沙羯利陀伽彌)라고도 음역한다. 의역하면 일래(一來)ㆍ일왕래(一往來)가 된다. 사문의 4과(果)의 두 번째이다. 사다함향(斯陀含向)과 사다함과(斯陀含果)로 나누는데, 예류과(預流果)의 성자가 나아가 욕계의 1품(品)에서 5품(品)까지의 수혹(修惑)을 끊는 것을 사다함향이라고 한다. 혹은 일래과향(一來果向)이라고도 한다. 만약 여기에 다시 욕계 6품(品)의 수혹을 끊고 천상에서 인간으로 와서 반열반에 이를 수 있는 한 번의 생을 기다리고 있어서, 이 이후에는 다시 생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을 사다함과라고 칭한다. 혹은 일래과(一來果)라고도 한다.
7)범어 anāgāmin의 번역으로, 구역에서는 아나가미(阿那伽彌)ㆍ아나가미(阿那伽迷)라고 하였다. 나함(那含)이라고 약칭한다. 의역하면 불환(不還)ㆍ불래(不來)ㆍ불래상(不來相)이 된다.
8)범어 caitya, 파리어 cetiya를 번역한 것이다. 또는 지제(支帝)ㆍ지제(枝提)ㆍ지타(支陀)ㆍ지징(支徵)ㆍ지제(脂帝)ㆍ제다(制多)ㆍ제저(制底)ㆍ제저야(制底耶)라고도 한다. 적집(積集)의 뜻이다. 또는 취상(聚相)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석존을 다비할 때에 장작[香柴] 더미를 크게 쌓아놓은 것을 지제(支提)라고 하였다. 그 후로는 불타의 유적 등에 벽돌이나 돌로 쌓아서 만들어 세존의 무량한 복덕이 이곳에 모인다고 하면서, 탑묘(塔廟)ㆍ영묘(靈廟)ㆍ묘(廟)ㆍ방분(方墳) 등을 다 지제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석굴(石窟)을 뚫은 특수한 구조물도 역시 지제라고 부른다.
9)범명 Kaliṅgarāja, 혹 Kalirāja의 번역이다. 석가세존께서 과거세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수도할 때 그 팔과 다리를 끊었다고 하는 본생담(本生譚)에서 나온 인물이다. 가리왕(哥利王), 갈리왕(羯利王), 가리왕(迦梨王), 가릉가왕(迦陵伽王), 갈릉가왕(羯陵伽王), 가람부왕(迦藍浮王)으로도 표기한다. 의역하여 투쟁왕(鬥諍王), 악생왕(惡生王), 악세왕(惡世王), 악세무도왕(惡世無道王)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