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_0357_b_01L어느 때 바가바(婆伽婆)께서 가야산 정상의 탑에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고서 머물러 계셨다. 큰 비구들 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들은 이전에 모두 머리를 땋은 범지(梵志)로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하였고 이루어야 할 일은 이미 마친 이들이었다. 무거운 짐을 버렸으며, 자신의 이익을 빨리 얻었고, 모든 유결(有結: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을 다 하였고, 마음에 바른 지혜를 얻었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하였으며, 마음이 자재함을 얻어서 이미 저 언덕에 이르렀으니, 이들 모두는 곧 아라한들이었다.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보살마하살이 시방세계로부터 와서 모였는데 그들은 모두 큰 위덕이 있었으며, 모두가 모든 인(忍)과 다라니와 깊은 삼매를 얻었고 모든 신통을 갖추었다. 문수사리보살ㆍ관세음보살ㆍ득대세보살ㆍ향상(香象)보살ㆍ용시(勇施)보살ㆍ용수행지(勇修行智)보살 등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우두머리[上首]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모든 보살마하살은 그 수가 한량없었으며, 모든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와 인비인(人非人) 등의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論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등”은 법을 결집한 사람이 말한 것이다. “가야성에 머무시다”는 머무는 곳의 성취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가야산 정상’이란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대중들이 수행하며 머무는 곳에 나타내 보이신 것이며, ‘탑’이란 저 능히 공양하는 자를 위함이니, 그가 공양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바로 그가 깨달음을 이룬 때이다. ‘큰 비구들’이라는 것은 그 위대함 때문이며, 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천 명과 계셨는데…… 머리를 땋은 범지”라는 것은 학(學)과 무학(無學)의 비구를 밝힌 것으로 청중이 성취되었음을 칭한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다음에서 설하게 될 모든 보살행의 차별이니, 그 보살행은 두 가지로 거둔 법에 포섭되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섭(因攝)이고 둘째는 과섭(果攝)이다. 또 ‘가야산 정상의 탑’이란 근본서분(根本序分)으로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니, 그곳에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모이셨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이 법문은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거두어 보호하는 바이기 때문에 응당 이 수다라를 듣는 자는 거두어 취함을 성취하니, 학과 무학의 비구들은 모두 이미 머리를 땋은 범지들이다.
015_0357_c_01L또 무학(無學)에는 여덟 가지 덕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해야 할 것을 마친 것으로서 경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하였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필경에 지어야 할 것을 넘어서서 이미 지었으니, 경에서 “할 일은 이미 마치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삼매의 장애를 멀리 여의었으니, 경에서 “무거운 짐을 버렸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무거운 짐을 버리고 여의었으니, 경에서 “자신의 이익을 빨리 얻었다”고 한 것과 같다. 그 무거운 짐이란 것은 이른바 5음(陰)이다. 다섯째는 열반을 증득함이니, 경에서 “모든 유결(有結)을 다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삼계를 넘어섰으니, 경에서 “바른 지혜로써 마음이 해탈을 얻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뒤바뀌지 않은 것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함이니, 경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고 이미 저 언덕에 이르렀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4여의족(如意足)을 여실하게 수행함이니, 경에서 “모두는 곧 아라한들이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아라한이란 능히 믿음을 받는 자이니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보시 받기 때문에 응공(應供)이라고 이름한다. 또 학(學)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끝까지 계율을 잘 지키고 도(道)를 잘 배우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에 바라는 바대로 필경 만족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삼매분(三昧分)을 설하겠다.
經 이때 세존께서 홀로 사람들이 없는 곳에 고요히 머무시며 모든 부처님의 깊고 깊은 삼매에 드시어 법계(法界)를 관찰하셨다.
015_0357_c_10L經曰:爾時,世尊獨靜無人,入於諸佛甚深三昧,觀察法界。
論 “삼매에 드시어 관찰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헤아리는 경계가 아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삼매에 든다”고 하는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과 같지 않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삼매분을 모두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능관청정분(能觀淸淨分)을 설하겠다.
經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셨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고 모든 지혜를 얻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서 무거운 짐을 벗었고 온갖 험한 길을 건넜다. 무명을 멸하여 참다운 명(明)을 얻었으며, 온갖 화살을 뽑았으며 갈애(渴愛)를 끊었다. 법의 배를 완성하였고, 법의 북을 쳤으며, 법의 고둥을 불었고, 법의 깃발을 세웠다. 생사의 종자가 전환하여 열반의 성품임을 보였고, 잘못된 길을 폐쇄하여 바른 길을 열었으며, 온갖 죄의 밭을 떠나서 복의 밭을 보였다.’
015_0358_a_01L 論 능관청정(能觀淸淨)이란 이미 보리를 얻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경에서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셨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고”라고 한 것과 같다. 보리를 얻었다는 것은 저 성문이나 벽지불이 증득한 지혜보다 뛰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경에서 “모든 지혜를 얻었다”고 한 것과 같다. 그가 얻은 모든 지혜라는 것에는 열일곱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열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본래의 서원을 이룬 것[本願滿足]이니 경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지니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고 여읜 것이니, 경에서 “무거운 짐을 벗었다”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번뇌장을 잘 끊은 것이니, 경에서 “온갖 험한 길을 건넜다”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소지장을 잘 끊은 것이니, 경에서 “무명을 멸하여”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여실하고 미묘한 법을 증득한 것이니 경에서 “참다운 명(明)을 얻었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온갖 사악한 화살을 떠났으니, 경에서 “온갖 화살을 뽑았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온갖 뒤바뀐 생각을 떠났으니, 경에서 “갈애를 끊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출세간의 지혜를 성취한 것이니, 경에서 “법의 배를 완성하였고”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니, 경에서 “법의 북을 쳤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무아(無我)의 미묘한 소리를 내어서 일체의 악마로부터 능히 항복받으니, 경에서 ‘법의 고둥을 불었고”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58_b_01L열한째는 모든 외도로부터 능히 항복받으니, 경에서 “법의 깃발을 세웠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두째는 모든 결박의 인연을 잘 끊었으니, 경에서 “생사의 종자를 전환하여”라고 한 것과 같다. 열셋째는 세간과 출세간의 미묘한 법을 설하는 것이니, 경에서 “열반의 성품임을 보였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넷째는 뒤바뀌고 집착하는 상을 능히 멀리 여읜 것이니, 경에서 “잘못된 길을 폐쇄하여”라고 한 것과 같다. 열다섯째는 8정도를 굴리는 것이니, 경에서 “바른 길을 열었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열여섯째는 외도의 복전을 능히 멀리 여의었으니, 경에서 “온갖 죄의 밭을 여의고서”라고 한 것과 같다. 열일곱째는 3보의 복전을 나타내 보이니, 경에서 “복의 밭을 보였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능관청정분을 모두 설하였다. 다음에는 소관법분(所觀法分)을 설하겠다.
經 몸으로 얻는 것인가? 마음으로 얻는 것인가? 만약 몸으로 얻는다면 몸은 곧 앎이 없고 깨달음이 없다. 풀ㆍ나무ㆍ흙덩이ㆍ그림자와 같이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알거나 인식하는 것이 없고, 부모로부터 생겨나서 그 성품이 덧없으며, 의복ㆍ음식ㆍ이부자리 또는 욕조로써 임시로 존립할 수 있지만, 이 법은 반드시 마멸되고 부서져 사라진다.
015_0358_c_01L 論 경에서 말하기를 “몸으로 얻는 것인가, 마음으로 얻는 것인가?”라고 한 것은 몸과 마음이 보리를 증득하지 못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뜻을 밝힌 것인가? 몸과 마음을 여의고서 다시 실다움이 없는 것이니, 어리석은 사람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가? 그 법이 3세에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만 있고 실체가 없다는 것은 몸으로 보리를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여덟 가지 법이 있어서 그의 몸으로 보리를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짓는 자가 없음이니, 경에서 “만약 몸으로 얻는다면 몸은 곧 앎이 없고 깨달음이 없어서”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허망하게 모습을 취한 것의 성취이니, 경에서 “풀ㆍ나무ㆍ흙덩이ㆍ그림자와 같이”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생각[想]을 멀리 떠남이니, 경에서 “알거나 인식하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니, 경에서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몸은 본래 부정한 것이니, 경에서 “부모로부터 생겨나서”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정신 집중함에 머물지 않음이니, 경에서 “그 성품이 덧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낡은 물건은 항상 지닐 수 없음이니, 경에서 “의복ㆍ음식ㆍ이부자리나 또는 욕조로써 임시로 존립할 수 있으니”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본체가 바로 실답지 않음이니, 경에서 “이 법은 반드시 마멸되고 부서져 사라진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미 몸으로 보리를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내 보였다. 어떤 사람이 보리를 얻는 것인가? 그 법은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어떤 지혜로써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가를 설하니, 그 법은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보리를 얻지 못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經 만약 마음으로 얻는 것이라면 마음은 곧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며,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처소도 없고, 모습도 없고, 물질도 없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015_0358_c_11L經曰:若以心得,心則如幻,從衆緣生,無處無相,無物無所有。
015_0359_a_01L 論 여섯 종류의 법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보리를 얻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인가? 첫째는 법에 대해 뒤바뀐 견해로 허망한 것에 미혹된 어리석은 범부이니, 경에서 “마음은 곧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여러 인연에 의지하여 생함이니, 경에서 “뭇 연으로부터 생겨났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음이니, 경에서 “처소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허망하게 분별하여 상(相)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얻을 수 없음이니, 경에서 “모습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자성이 공함이니, 경에서 “물질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멀리 감이니 경에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마음으로 보리를 얻을 수 없음을 이미 설하였다. 어떠한 지혜로 보리를 얻는가? 저 법은 3세에서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무엇이 증득한 보리로서 그 법이 3세에 허망하게 분별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인가를 설하겠다.
經 보리란 다만 명자(名字)만이 있을 뿐 세속에서 임시로 설하는 것이니, 소리도 없고 색도 없으며, 이루어지지도 않고 행하는 것도 아니며, 들어감도 아니고, 볼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으며, 오고 가는 길이 끊어졌고, 모든 언설(言說)을 넘어선 것이다. 삼계에서 벗어났으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다. 관찰할 수도 없으며 희론(戲論)을 떠났고, 말다툼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다. 관찰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메아리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언어를 여읜 것이다.
論 경에서 말하기를 “보리란 다만 명자만이 있을 뿐이요, 세속에서 임시로설하는 것이니”라고 말한 것은 증득할 수 있는 법은 오직 이름만이 있을 뿐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허망하게 분별함으로써 있는 것이고, 그 본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명자만이 있을 뿐이고 세속에서 임시로 설하기 때문”이라고 설하는 데는 스물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스물세 가지인가? 첫째는 일이 없음[無事]이니, 경에서 “소리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지각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선 것이니, 경에서 “색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모든 법의 본체는 공함이니, 경에서 “이루어지지도 않고”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모양을 여의었으니, 경에서 “행하는 것도 아니며”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일체 세간의 범부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들어감도 아니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인식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섰으니, 경에서 “볼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의지할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나고 죽음이 없으니, 경에서 “오고 가는 길이 끊어졌고”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일체세간의 명자(名字)를 넘어섰으니, 경에서 “모든 언설을 넘어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행의 모든 법은 가히 얻을 수 없으니, 경에서 “삼계에서 벗어났으니”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59_b_01L열한째는 보는 것을 여의어 있으니, 경에서 “볼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두째는 이식(耳識)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들을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셋째는 의식(意識)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깨달을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넷째는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경에서 “집착할 수도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다섯째는 허공과 같으니, 경에서 “관찰할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열여섯째는 함이 없으니[無爲], 경에서 “희론을 떠났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일곱째는 온갖 근심과 모든 번뇌[漏]를 여의었으니, 경에서 “말다툼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열여덟째는 작은 지혜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나타낼 수도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아홉째는 한량없으니, 경에서 “관찰할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무째는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음이니 경에서 “볼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물한째는 안의 마음에 앎이 없으니, 경에서 “메아리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물두째는 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니, 경에서 “글자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스물셋째는 가히 말할 수 없으니, 경에서 “언어를 여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經 이와 같이 능히 보리를 증득하는 자는 어떤 지혜로써 보리를 증득하겠는가? 증득한바 깨달은 법이란 이와 같이 모든 법은 다만 명자만이 있을 뿐이요, 다만 거짓으로 이름하여 말하고, 다만 화합한 것을 이름하여 말하는 것이고, 세속에 의해 이름하여 말하는 것이다. 분별하거나 분별하여 설함이 없고, 임시로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짐이 없으며, 물질이나 물질을 떠나 있고,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집착함이 없다. 그곳은 사람이 증득함도 없고 소용(所用)의 증득도 없으며, 또한 증득할 만한 법도 없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이니,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것도 없고 보리상(菩提相)도 없다.
論 다음에는 무엇이 보리를 증득함인가를 설하나니, 이것 역시 다만 거짓 이름과 명자만이 있을 뿐이며, 세속의 설을 의지해서 허망하게 분별하여 실체가 없다. 그 세속의 이름에 의지한 것에 여섯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인가? 첫째는 실제로 분별함이 없음이니, 경에서 “분별하거나 분별하여 설함이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본체의 공함이니, 경에서 “임시로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짐이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나’라는 것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경에서 “물질이 없고 물질을 떠나 있다”고 한 것과 같다.
015_0359_c_01L넷째는 세간의 지혜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취할 수도 없고”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언어를 넘어서 있으니, 경에서 “말할 수도 없으며”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멀리 떠났으니, 경에서 “집착함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그곳은 사람이 증득함도 없고 소용(所用)의 증득도 없으며, 또한 증득할 만한 법도 없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바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 어떤 뜻을 밝히고자 함인가? 능히 증득한 사람을 밝히고, 소용(所用)의 증지(證智)를 밝히고 증득한 경계를 밝힌 것이니, 이와 같은 법은 어떤 법으로써 미묘하고 올바른 지혜를 쓰는가? 여실지로 본 바와 안 바와 증득한 바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또 경에서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것도 없고 보리상(菩提相)도 없다”라고 한 것은 어떤 뜻을 밝히고자 함인가?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것도 없다”는 두 구절은 그 증득한 법이 청정하고 적정함을 밝힌 것이다. “보리상도 없다”는 뜻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미 소관사분(所觀事分)을 설하였다.
015_0360_a_01L 다음에 말할 기분(起分)에는 다시 어떤 뜻이 있는가? 삼매의 일을 설하기 때문이며, 설할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당연히 일어나는 것[起]이다. 또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삼매 중에 관찰되어지는 뜻으로써 문수사리로 하여금 설하게 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문수사리가 여래에게 답을 묻는 것이다.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오직 문수사리에게만 말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으셨는가? 문수사리와 마주해서 이 법을 설하셨기 때문이다. 또 어찌하여 문수사리만을 마주하여 이 법문을 설하셨는가? 이는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이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지혜가 깊은 보살에게 말하신 것이다. 또 어찌하여 오직 문수사리만이 여래께 물었는가? 여래께서 다만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수사리는 뜻을 순서에 따라 물었으며, 그가 한 질문은 마음이 청정하여 문답도 청정하였다. 다음에는 현설분(顯說分)이다.
經 이때 문수사리 법왕자가 모임 가운데 있었는데, 부처님의 오른쪽을 향해 서서 커다란 보배 덮개를 잡고 부처님의 위를 덮어드리고 있었다. 이때 문수사리는 세존께서 이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을 가만히 알고 나서 이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리가 이와 같은 모양이라면, 선남자ㆍ선여인은 어떻게 보리에서 발심하여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셨다. “선남자ㆍ선여인은 마땅히 이와 같은 보리상을 알아서 발심하여 머물러야 한다.” 문수사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리상이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015_0360_b_01L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셨다. “보리상이란 삼계를 벗어나 있으며, 일체 세속의 명자와 언어를 뛰어넘었고, 일체 메아리를 뛰어넘었으며, 발심이라고 마음 낸 것이 없으며, 발심한 모든 것을 멸한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發菩提心住)이다.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일체를 뛰어넘어 있는 것이 바로 발심주를 발하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발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마음을 내어서 머묾이 없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장애가 없는 것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법성(如法性)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실제(如實際)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옮아가지 않고 더하지 않으며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바로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뜨거운 날의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허공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 이와 같은 발보리심주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論 이 발청정(發淸淨)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어떤 것이 아홉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 희론을 버림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발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온갖 법에 취착함을 버리는 것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마음을 내어서 머묾이 없는 것이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허공과 같으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장애가 없는 것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적정함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법성(如法性)에 머무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항상하거나 덧없는 모양에 취착함을 버림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도(道)를 무너뜨리지 않고 도를 버리지 않음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여실제(如實際)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60_c_01L일곱째는 비방함을 떠나고 집착함을 떠나는 것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옮아가지 않고 더하지 않으며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것이니 바로 발보리심주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일체법의 한 모양에 들어가는 것이니, 경에서 “문수사리여,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바로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뜨거운 날의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허공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 이와 같은 발보리심주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반야바라밀을 여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나머지 네 구절 “삼계를 넘어서 있다” 등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현설분을 이미 설하셨으니 이어서 보살공덕세력분(菩薩功德勢力分)을 설하겠다.
經 이때 모임 가운데 이름을 월정광덕(月淨光德)이라고 하는 어떤 천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서지 않음을 얻었다. 월정광덕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어떤 법을 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어떤 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은 대비(大悲)를 근본으로 삼으니, 이는 모든 중생을 위함입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곧은 마음[直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일체 중생에게 있어 평등한 마음[平等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깊고 깨끗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015_0361_a_01L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삽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육바라밀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육바라밀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6바라밀은 방편지혜[方便智]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불방일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은 세 가지 선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10선업도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015_0361_b_01L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10선업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10선업도는 지계(持戒)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올바른 정신집중[憶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올바른 정신집중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올바른 정신집중은 바른 관찰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견고한 염(念)으로 잊지 않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論 모든 보살마하살의 공덕 세력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첫째는 마음먹은 바대로 일체를 만족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한 바대로 설하며 뛰어난 말솜씨로 법을 설함에 있어 장애가 없는 것이다. 마음먹은 바대로 일체를 만족한다는 것은 상상승승(上上乘勝)법을 일으키는 것이니, 저 상상승승법을 일으킨다는 것에는 열네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이 열네 가지인가?
015_0361_c_01L첫째는 가르침을 받아서 잊지 않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관찰은 견고한 정신집중과 잊지 않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바른 가르침을 잘 지녀서 유위법을 관찰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기억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바른 기억은 바른 관찰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그것을 넘어선 다른 곳이 없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계는 바른 기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모든 허물을 따르지 않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십선업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십선업도는 지계(持戒)를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10선업도를 잘 닦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 가지 선한 행은 10선업도를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몸과 입과 뜻의 업인 세 가지 법이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不放逸)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불방일은 세 가지 선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62_a_01L일곱째는 계의 청정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지혜는 불방일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6바라밀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6바라밀은 방편지혜[方便慧]를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보리를 돕는 모든 법을 만족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6바라밀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째는 피로하거나 싫증내지 않음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깊고 깨끗한 마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한째는 업과(業果)의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은 깊고 깨끗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두째는 수행의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은 다름이 없고 다름을 여읜 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62_b_01L열셋째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함에 있어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곧은 마음은 일체 중생에게 있어 평등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열넷째는 마음의 청정함이니, 경에서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대비는 곧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이때 모임 가운데 어떤 천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월정광덕(月淨光德)이라고 한다.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서지 않음을 얻었다. 월정광덕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어떤 법을 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어떤 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보살행을 행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은 대비(大悲)를 근본으로 삼으니, 이는 모든 중생을 위함입니다’”라고 한 이와 같은 수다라(修多羅)는 뒤에서부터 앞으로 향하여 해석한 것이니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이미 마음먹은 바대로 일체를 만족하는 것을 설하였다. 이어서 뜻한 바대로 설하며 뛰어난 말솜씨로 법을 설함에 있어 장애가 없음에 대해 설하겠다.
015_0362_c_01L 經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몇 종류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인(因)을 성취하고 과(果)를 성취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어서 인을 성취하고 능히 과를 성취합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초발심(初發心)이요, 둘째는 행발심(行發心)이요, 셋째는 불퇴발심(不退發心)이요, 넷째는 일생보처발심(一生補處發心)입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줄기ㆍ잎ㆍ꽃ㆍ과일이 처음으로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일 등이 쓰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재료를 모으는 지혜와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재목을 갈고 다듬어서 깨끗하게 만드는 지혜와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재목을 잘 맞추어 놓는 지혜와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수레로 운반하고 나르게 되는 지혜와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달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달이 차서 5일이 된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달이 차서 10일이 된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달이 차서 14일인 것과 같습니다. 여래의 지혜는 보름달의 달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능히 성문지를 넘어섭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벽지불지를 넘어섭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부정지(不定地)를 넘어섭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안주정지(安住定地)입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첫 장[初章]을 배우는 지혜와 같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여러 장을 차별하는 지혜와 같습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숫자를 헤아리는 지혜와 같습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여러 논서에 통달한 지혜와 같습니다.
또한 친자여, 초발심은 인(因)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智)로부터 생겨납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斷)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果)로부터 생겨납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포섭합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포섭합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포섭합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포섭합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낳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낳습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낳습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낳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차별분(因差別分)입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차별분(智差別分)입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차별분(斷差別分)입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차별분(果差別分)입니다.
015_0363_a_01L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약초를 가져오는 방편과 같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약초를 분별하는 방편과 같습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하는 방편과 같습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병에 차도가 생겨나게 하는 방편과 같습니다.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법왕(法王)의 가문에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능히 법왕의 법을 배워서 구족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워서 자재함을 능히 얻는 것입니다.”
論 걸림 없이 즐겨 설하는 말솜씨로 법을 설하는데 네 종류의 발보리심이 있으니, 10지(地)를 거두고 취하는데 갖가지 차별을 설하기 때문이다. 그 갖가지 차별에 열두 구절이 있다. 경에서 말하기를 “천자가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몇 종류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인(因)을 성취하고 과(果)를 성취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어서 능히 인을 성취하고 과를 성취합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초발심(初發心)이요, 둘째는 행발심(行發心)이요, 셋째는 불퇴발심(不退發心)이요, 넷째는 일생보처발심(一生補處發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초발심은 능히 두 번째 행발심의 인(因)이 되어주고, 두 번째 행발심은 세 번째 불퇴발심의 인이 되어주며, 세 번째 불퇴발심은 능히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의 인이 되어주니, 이 구절은 상상인(上上因)의 뛰어나고 뛰어나서 잃지 않음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015_0363_b_01L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친자여, 초발심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줄기ㆍ잎ㆍ꽃과 과일이 처음으로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일 등이 쓰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청정한 인으로부터 청정한 과보가 성취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친자여, 초발심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재료를 모으는 지혜와 같고”라고 한 것은 온갖 소원에 의지하여 능히 일체 부처님의 법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행발심은 재목을 갈고 다듬어서 깨끗하게 만드는 지혜와 같고”라고 한 것은 청정한 계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 불퇴발심은 재목을 잘 맞추어 놓는 지혜와 같고”라고 한 것은 지혜방편에 의지하여 일체 행을 닦아 모두 상응하기 때문이며,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수레로 운반하고 나르게 되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앞의 것들을 버리지 않고 무거운 짐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달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과 같고, 두 번째 행발심은 달이 차서 5일이 된 것과 같고,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달이 차서 10일이 된 것과 같고,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달이 차서 14일인 것과 같습니다. 여래의 지혜는 15일의 달(보름달)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상상대력(上上大力)이 청정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능히 성문지를 넘어섭니다”라고 한 것은 초지(初地) 전의 보살의 근기가 예리하여 일체 보리분법(菩提分法)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벽지불지를 넘어섭니다”라고 한 것은 초지 전의 보살이 반야승지(般若勝智)에 의지하여 능히 모든 보살의 한량없는 행을 모으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부정지(不定地)를 넘어섭니다”라는 것은 이미 초지에 들어 지혜의 증득을 얻었기 때문이며, 또 성문이나 벽지불지를 넘어섰다는 것은 일체 공용행(功用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안주정지(安注定地)입니다”라고 한 것은 왕자의 지위에 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015_0363_c_01L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첫 장[初章]을 배우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하지법(下地法)을 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여러 장을 차별하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지혜가 늘어나 차별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숫자를 헤아리는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방편지(方便智)가 능히 일체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여러 논서에 통달한 지혜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증지(證智)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因)으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자성이 청정하여 본래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智)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방편[慧方便]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斷)으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 세간의 희론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果)로부터 생겨납니다”라고 한 것은 자연히 일체 행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신행조도(信行助道)가 성숙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초지(初地)의 경계를 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경계의 성숙에 의지하여 공용행을 관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 경계에 의하여 아직 불법을 관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포섭합니다”라고 한 것은 과보가 성숙하여 모든 불국토를 따름으로써 응당 부처님의 처소를 이루고 곧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을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선근성(修行善根性)이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를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법의 궁극적 성품[法究竟性]이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을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수행성(修行性)이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를 낳습니다”라고 한 것은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015_0364_a_01L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인차별분(因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무량한 선근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지차별분(智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무량하고 끝없는 법문을 마침내 완성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단차별분(斷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한량없는 삼매문에 들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과차별분(果差別分)입니다”라고 한 것은 한량없는 신통분신(神通奮迅)을 뜻대로 자재하게 쓰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약초를 가져오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병을 다스리는 법을 거두고 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약초를 분별하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번뇌의 병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약을 알아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하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모든 방편을 앎으로써 그에 상응하여 수용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병에 차도가 생겨나게 하는 방편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번뇌의 병이 멸하기 때문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또한 천자여, 초발심은 법왕(法王)의 가문에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로부터 항복 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 행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를 배워서 승처(勝處)를 얻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퇴발심은 능히 법왕의 법을 배워서 구족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수도하여 뛰어난 과보를 얻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일생보처발심은 법왕의 법을 배워서 자재함을 능히 얻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일체법에서 능히 자재하고 걸림 없음을 얻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