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5_0443_a_01L열반경본유금무게론(涅槃經本有今無偈論)
015_0443_a_01L涅槃經本有今無偈論一卷


천친(天親) 지음
015_0443_a_02L天親菩薩造
진제(眞諦) 한역
이미령 번역
015_0443_a_03L陳世眞諦三藏於廣州譯


열반경 삼세의(三世義)
015_0443_a_04L涅槃經三世義

순타(純陀)의 의문을 풀이한다.
015_0443_a_05L解純陁疑問
논하여 말한다. 많은 제자들이 이미 성숙하였으나 순타만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순타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대반열반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대경(大經)을 강설하여 큰 공덕을 주어서 성숙시키기 위하여 구시나성(拘尸那城)으로 오셨다.
어찌하여 순타에게는 아직 의심이 남아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동상(同相)은 보았으나 아직 별상(別相)을 보지 못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별상은 보았으나 동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015_0443_a_06L論曰多弟子已成熟陁未成熟佛爲純陁未成熟故顯示大般涅槃講說大經受大功德爲成熟故來拘尸那城云何純陁而有疑有二因緣見同相未見別相生疑心二見別相不見同相故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치 멀리서 나무 그루터기를 보고 ‘사람이다. 또는 나무 그루터기이다’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만일 까마귀가 위에 모여 있고 그 아래에 사슴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저것은 나무 그루터기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안다. 그러나 손을 들어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을 본다면, 사람이지 나무 그루터기가 아니라고 안다.
015_0443_a_11L起疑心如遙見杌疑爲是人爲是杌若見烏鳥集上鹿從其下過知是杌非人若見擧手挑衣者知人非杌
별상은 보았으나 동상은 보지 못하여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치 공(空)의 불공상(不共相)이 바로 상주(常住)하는 것과 같고, 땅[地]의 불공상이 바로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것과 같다. 성문이란 불공상이다. 성문의 불공상에 의심을 일으킴은 공을 상주하는 것과 똑같이 여기고, 지(地)를 무상한 것과 똑같이 여기는 것이다.
015_0443_a_14L別相不見同相生疑心者如空不共相是常如見地不共相是無常聲聞者不共相於聲聞不共相生疑爲同空是常住爲同地是無常
015_0443_b_01L범부는 동상 때문에 의심을 일으키고, 성문ㆍ연각은 별상 때문에 의심을 일으킨다. 범부는 법이 생겨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을 일으키고, 성문ㆍ연각은 법이 생겨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을 일으킨다. 순타는 이 두 가지로 인해 의심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자 이런 의심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대보살이 어찌 부처님께 의심을 품겠는가? 이 같은 큰 모임에는 외도의 무리가 아주 많이 있다. 어떤 외도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자는 기름이 다하여 불이 꺼지는 것과 같을 거라고 말한다. 어떤 자는 부처님의 멸후에는 다함도 있고 다하지 않음도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해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5_0443_a_18L凡夫爲同相故起疑心聲聞緣覺爲別相故起疑心凡夫爲有生法故起疑心聲聞緣覺爲無生法故起疑心純陁不爲此二種故起疑心爲欲利益衆生故生此如此大菩薩那得於佛生疑於此大會大有外道聚集有外道說佛死而更生復有說如燈盡火滅復有說佛滅後有盡有不盡爲釋此疑故說偈

본래 있으나 지금은 없다거나
본래 없으나 지금은 있다거나
3세가 있다는 법은
이치에 맞지 않다.
015_0443_b_05L本有今無
本無今有
三世有法
無有是處

부처님께서는 2승(乘)을 위해서 게송으로 “번뇌는 생득(生得)이고 성스러움은 수득(修得)이다. 범부의 성품은 생득이고 성현의 성품은 수득이다. 번뇌의 속박은 생득이고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은 수득이다. 나고 죽는 것은 생득이고 열반은 수득이다. 본래[本]는 생겨남이고 지금[今]은 닦음이다”라고 설하셨다. 본래가 바로 생겨남이고 지금은 바로 닦음이라는 것은 2승을 위하여 이런 해설을 하신 것이지 대승을 비방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승을 위해서 이런 해설을 하신다면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대승과 상응하지 않는데, 누가 능히 대승과 상응하게 하겠는가?
015_0443_b_07L佛爲二乘故說偈煩惱生得聖修得凡夫性生得聖性修得煩惱縛生得解縛修得生死生得涅槃修得本生今修本是生今是修爲二乘作此解說不謗大乘爲大乘作此解說是謗大乘此是不相應大乘誰能令相應大乘
그러므로 우리들은 뜻에 의지하여 선택하여야 한다. 뜻을 사유하되 언어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사유의 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대승을 수행하는 자를 위해서 세 가지 뜻을 넘어서 요별(了別)의 뜻을 드러냄을 설한다.
015_0443_b_14L是故我等依義選擇思惟義依語言不選擇思惟語言爲修行大乘者說過三種義顯了別義
‘본래 있으나 지금 없으며, 본래 없으나 지금 있어서 3시(時)가 있다’고 하는 이 세 가지 뜻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세 가지 뜻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43_b_16L言本有今無本無今有三時有是三種義無無有是處何故三種義不成就
015_0443_c_01L만일 ‘본래 있으나 지금 없다’고 한다면 모든 여래들에게는 곧 해탈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성품이 일정하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고, 전제(前際)는 있으나 후제(後際)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진유(眞有)도 없고, 진유와 속유(俗有)도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진유는 전제와 후제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고, 속유는 본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속의 두 가지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두 가지 뜻을 환히 알지 못하는 승법외도(僧法外道)도 이와 같이 원인 가운데 결과가 있다[因中有果]고 설하면서 우유에 낙(酪)과 생소(生酥) 등이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니, 이것은 승법 등의 뜻을 증익하는 것이다.
015_0443_b_18L本有今無者一切如來等則無解脫何以故性不定住故以前有後無故一切眞有亦無眞有俗有亦無何以眞有前後無異故俗有無本故故眞俗二義不成就於此二義不明僧佉外道亦如是說因中有果如乳有酪生酥等是增益僧佉等義
만일 본래에 장애가 없다면 현재시(現在時)에 누가 능히 장애가 될 것인가? 만약 네가 인연의 화합을 방해하는 것을 장애로 삼는다고 사유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전후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걸림이 없다면 본래일 때는 어찌하여 걸리지 않는가? 어떤 도리가 있기에 본래는 인연(因緣)에 의거해 생겨나지 않다가 후에는 어떠한 인연에 의거하여 멸하는가?
015_0443_c_02L若本無㝵現在時中誰能爲障若汝思惟妨礙因緣和合爲障者是義不何以故前後無異故若今不障時何故不障有何道理本不依因緣後依那因緣滅
이른바 본래[本]란 어떤 법으로 본래를 삼는가? 처음 일어남과 미래에 상속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만일 처음 일어남을 본래로 삼는다면 처음[初]은 인연소생이 아니고, 나중[後]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또한 인연소생이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이 12인연법의 여여의(如如義)를 설한다면 모두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아서 외도가 말하는 무인(無因)의 뜻과 같다. 만약 ‘상속을 본래로 삼는다’면 상속 또한 일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부분 부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니, 어떻게 상속을 본래로 삼겠는가? 이런 까닭에 모든 생겨남이 있는 법은 본래 무인이라고 설하는데, 이와 같은 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015_0443_c_07L所言本者以何法爲本爲初起爲當相續爲本若初起爲本初不爲因緣所生後如初亦不爲因緣所生若如是說十二因緣法如如義皆悉已破則同外道說無因若相續爲本者相續亦不定何以分分不定故云何相續爲本是故一切有生之法說本無因如此說者則無道理
‘본래는 없으나[本無] 지금은 있다[今有]’는 것에서 만일 앞에서는 ‘본래’가 없는데 ‘지금’은 있다고 하면 그 있음[有]은 해탈을 얻지 못한 것이니, 앞에서 번뇌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는 해탈을 여읨이고 후에 번뇌를 낳았다면 해탈은 없는 것이다. 만일 ‘전에 없었으나[前無] 지금 있다’고 한다면, 가장 궁극적으로는 생겨남이 없는 것이라서 응당 생겨나게 되도 허공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을 것이다.
015_0443_c_15L本無今有者若前是無本而今有有者則無得解脫者前煩惱未起則是離解脫而後生煩惱則無解脫若前無今有者最極無生當應得生如空生花
만일 그대의 사유가 일관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지만, 이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허공과 꽃 두 가지가 똑같이 있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인연이 허공을 낳아도 인연이 꽃 등을 낳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무(無)이기 때문이라면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015_0443_c_19L若汝思惟一則無因是義不然何以故如屋與花二同是未有何故因緣生屋不因緣生花是無故是義無道理
015_0444_a_01L만일 본래(本)가 생겨나지 않아도 지금(今)이 생길 수 있다면 본래의 뜻을 파괴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초생(初生)이 바로 본래인 까닭이다. 만일 그대가 인연을 사유하여 이 초생은 초(初)가 아니고 그 때문에 생이 바로 본래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그대의 뜻이 본래의 있음을 깨뜨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연의 본래를 세우고자 한다면, 이런 까닭에 본래를 넘어서지 못하니 앞서 아직 있지 않은 법의 인(因)이 어떻게 생하겠는가?
015_0443_c_22L若本無生而今得生則破本義是義不然何以故生是本故若汝思惟因緣是初生則非初是故生非是本是亦不然何以汝意欲破本有故欲立因緣本者是故不過本故前未有法因云何生
만일 그것이 생겨난다면 전체를 다 갖추어서 생겨나는가, 부분 부분이 차례로 생겨나는가? 만일 전체를 다 갖추어서 생겨난다면 일시생(一時生)인가, 전후생(前後生)인가? 만일 일시생이라면 인과가 동시에 일어나므로 분별할 수 없다. 만일 과가 후(後)에 생하고 인이 전(前)에 멸한다면 어떻게 후과(後果)를 낳겠는가? 마치 푹 삶아진 닭이 소리를 내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만일 전체를 다 갖추었다면 무엇을 써서 인을 바라겠는가? 만일 부분 부분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또한 앞의 잘못과 같다. 이런 까닭에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다’고 하는 것은 인(因)을 안립하고자 한 것이니,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다.
015_0444_a_04L若其生者爲具足生爲分分生若具足生者爲一時生爲前後生若一時則因果同時不可分別若果後生因在前滅誰生後果如煮熟鷄而復作聲還生若具足者何用觀因若分分生者亦同前失是故本無今有安立因是義不然
‘3시(時)가 있다’고 함도 그 뜻이 옳지 않다. 만일 3세가 있다면 하나의 뜻이 3세에 두루하겠는가? 하나하나의 뜻에 각각 3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하나의 뜻이 3세에 두루한다면 1세(世)에 3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뜻[義]이 시(時)에 의거한다면, 과거ㆍ미래는 나뉘고 나뉘어서 한이 없을 것이다. 만일 시가 뜻에 의거한다면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곧 3세는 없다. 이는 뜻을 여의는 일이라서 별다른 시[別時]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3시가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015_0444_a_11L三時有者無有是義若有是三世者爲一義遍三世爲一一義各各三世如此二義竝皆不然何以故若一義遍三世者不得一世有三何以故妨㝵故若義依時則過去未來分分無窮若時依義義一故則無三世義故則無別時是故三時皆不成就
015_0444_b_01L만일 하나의 물질이 3세에 두루한다면 이 물질을 이름 지을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물질이 둘의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생사와 열반은 하나가 될 것이다. 만일 각각에 3세가 있다면 3세는 각기 스스로 있을 것이다. 만약 현세가 능히 과를 낳는다면 과거와 미래가 무슨 뜻에서 능히 생할 수 없겠는가? 만약 모두 능히 생한다면 한 사람도 해탈을 얻는 자가 없을 것이다. 만일 과거와 미래를 능히 생할 수 없다면 누가 과보를 끊겠는가? 과거ㆍ미래가 바로 있다고 말함은 체(體)가 있어서 있다고 말하는가, 작용[用]이 있어서 있다고 말하는가?
015_0444_a_18L若一物遍三世者是物則不可說名何以故一物二成就故若爾生死涅槃則是一若各各世有者三世各自如現世能生果過去未來何意不能生若具能生則無一人得解脫者若不能生過去未來誰斷果報言過去未來是有者爲體故說有爲用故說有
만일 체 때문에 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파괴해서 셋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만일 용 때문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거는 멸하고 미래는 아직 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작용을 일으키겠는가?
015_0444_b_03L若爲體說有云何可破而爲三若爲用說有者過去滅未來未生云何起用
만일 그대가 3세가 유(有)라서 능히 설할 수 있다고 사유해도, 3세는 능히 설함이 되지도 않고 체의 설함[體說]이 되지도 않는다. 만일 똑같이 체가 있다고 하면, 하나라면 능함이 있고 둘이라면 능함이 없는데, 이 뜻은 옳지 않다. 만일 그대가 시절은 능함이 있다고 사유한다면 능히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파초가 한 번 열매를 맺으면 거듭해서 맺을 수 없다고 하는 이 뜻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뜻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3시는 누구의 소유이겠는가? 만약 유인(有因)으로 생겨난다면 논란은 끝이 없을 것이고, 만약 무인(無因)으로 생겨난다면 시절(時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
015_0444_b_05L若汝思惟三世是有爲能三世不爲能說三世不爲體說同有體一則有能二則無能是義不若汝思惟爲時節有不說能芭蕉一生果不能重生義亦不然以故義不定故此三時誰之所有有因生難則無窮若無因生則時節義不成就
만약 그대가 미래는 바로 전(前)이고, 현재는 곧 중(中)이며, 과거는 곧 후(後)라고 사유하여 3세를 만드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인가? 미래의 힘이 핍출(逼出)하기 때문에 현재가 있고, 현재의 힘은 과거에서 핍출한다. 이는 항하의 물과 같아서 미래의 물은 현재의 물을 핍박하고, 현재의 물은 과거의 물을 핍박한다. 만일 1세(世)를 성취하는 것이 곧 3세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면, 이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물의 본질은 같지만 흐르는 곳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삼시삼세유(三時三世有)의 뜻을 설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
015_0444_b_12L若汝思惟未來是前現在是中過去是後作三世者何以故來力逼出故現在現在力逼出過去如恒河水未來水逼現在水現在水逼過去水若一世成就則三世成就是義不然何以故水是同時處所別故說三時三世有義是故不然
‘이것은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함은 소승의 설과 외도의 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과 같아서 소승과 외도의 설을 깨뜨리는 것이다.
015_0444_b_18L無是處者如小乘說無是處如外道說無是處破小乘外道
이와 같은 게송의 뜻은 첫째는 삿된 생각을 깨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뜻을 세우는 것이다. 삿된 생각을 깬다는 것은 언어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고, 바른 뜻을 세운다는 것은 뜻에 의거해 말하는 것이다.
015_0444_b_20L如是偈義一破邪義二立正義破邪義者依語言立正義者依於義說
015_0444_c_01L이른바 바른 뜻이란 본래도 있고 지금도 있어서[本有今有] 3세를 넘어서 있는 것이니, 이를 바른 뜻이라고 이름한다. ‘본래도 있고 지금도 있다’란 초발심으로부터 열반을 얻기까지 오직 한 맛으로 변함이 없어서 생인(生因)에도 의거하지 않고 멸인(滅因)에도 의거하지 않는다.
015_0444_b_22L所言正義者本有今有過於三世是名正義本有今有者從初發心至得涅槃一味無不依生因不依滅因
이 있음[有]은 청정하여서 범부의 법도 능히 물들이지 못하고 성현의 법도 청정케 하지 못한다. 혹 사중오역(四重五逆) 죄를 일으켜도 그것을 줄어들게 할 수 없으며, 혹은 지혜를 닦아 악을 끊어도 능히 불어나게 할 수 없다.
015_0444_c_02L有則淸淨夫法不能染聖人法不能淸淨若起四重五逆不能令減若修慧斷惡不能令增
때로는 청정한 눈을 얻어서 보기도 하고, 때로는 악독한 눈을 얻어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방편에 의한 것으로 곧 언어의 길 나아가 일체의 사유를 넘어선 것이므로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하여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인과라는 것은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 이 지(地)는 숫자로 헤아려서 능히 일시에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경계로서 생사와 열반은 이 지(地)를 거스르거나 따르는 것이다. 만일 이 지를 거스른다면[逆] 생사요, 따른다면[順] 곧 열반의 경지이다. 이것은 전제이고, 후제이고, 발심지이고, 금강후심지(金剛後心地)이며, 온갖 견해를 깨고 온갖 견해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므로 모든 중생은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 여래의 일체(一體)는 가장 으뜸가는 귀의처이자 모든 보물을 섭수하는 대열반이다.
015_0444_c_05L若有見得淸淨眼若有見得毒惡眼依方便則過語言道及一切思惟不可說不可思惟攝受因果非因非果是地非數量一時能分別諸佛如來境界生死涅槃是地逆順若逆是生死若順是涅槃地是前是後際是發心地是金剛後心地破一切見淸淨一切見一切衆生應當受用如來一體最歸依處攝受一切寶是大涅槃
3세를 벗어난다는 것은 용(用)으로써 열반의 공덕을 설한 것이다. 무엇이 3세를 벗어난다는 것인가? 생(生)이 있는 까닭에 3세를 분별하지만, 열반은 생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 3세에서 미생(未生)은 생을 얻고 이생(已生)은 멸하였지만, 열반은 멸하는 일이 없는 까닭에 상주하며 자재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지극한 즐거움이 된다. 체(體)로써 설명하면 청정이고, 용(用)으로는 항상[常]하고, 즐겁고[樂], 참다운 나[我]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체인 까닭에 청정하며, 생사를 대(對)하는 까닭에 항상하고 즐겁고 참다운 나인 것이다.
015_0444_c_14L過三世者爲用說涅槃功德何者過三世爲生故分別三涅槃無生故不可分別三世者生得生已生卽滅涅槃無滅故常住是故自在以自在故是故最樂爲體故說淸淨爲用故說常樂我自體故淸淨對生死故常樂我
다시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일 ‘본래 있고 지금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상견(常見)이고, 만일 ‘3세를 넘는다’고 한다면 단견이 된다. 가령 두 가지 뜻을 기다려서 단견과 상견을 여읜다면 이것은 바로 중도이다. 이와 같이 속제와 진제는 상대(相待)하기 때문이다.
015_0444_c_20L復次有二種若本有今有則是常見若過三世則是斷見若二義待來離斷常是中如是俗諦眞諦相待故
015_0445_a_01L이와 같이 12인연은 진실하게 있으니, 왜냐하면 두 극단을 여의는 것이 바로 참다운 12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능히 잘 이해하면 곧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 계심을 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12인연이 바로 여래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니, 진속이제(眞俗二諦)에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 12인연은 참다운 불도이다.
015_0444_c_23L有如是十二因緣眞實何以故離二邊是眞十二因緣若能善解卽見如來現在於是故如來說十二因緣是如來身於眞俗二諦以不二故是十二緣眞佛道
이와 같이 게송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곧 대인의(對因義)로서 잘못된 도를 끊는 것이고, 둘째는 이득의(理得義)로서 진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이 바로 여래의 일[事]로서 대지(大智)에 의거하고 대자비에 의거한다.
015_0445_a_05L如是偈有二義一則對因義於邪道理得義顯示實如是二義是如來事依大智依大慈悲
5상의(常義)란 첫 번째는 무궁상(無窮常), 두 번째는 무기상(無起常), 세 번째는 항재상(恒在常), 네 번째는 담연상(湛然常), 다섯 번째는 무변상(無變常)이다.
015_0445_a_07L五常義無窮常無起常恒在常然常無變常
무궁상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因)이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둘째는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셋째는 대비(大悲)가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넷째는 4여의족(如意足)이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다섯째는 혜(慧)가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여섯째는 항상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항상하다. 일곱째는 안락하고 청량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여덟째는 세간에서 행해지는 여덟 가지 법으로도 능히 물들일 수 없는 까닭에 항상하다. 아홉째는 감로적정(甘露寂靜)하여 네 가지 마(魔)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항상하다. 열째는 성품이 생하지 않으므로 항상하다.
015_0445_a_09L無窮常者有十無邊故常衆生無邊故常大悲無邊故常四如意足無邊故常慧無邊故常恒在定故常安樂淸涼故常行於世閒八法不能染故常甘露寂靜遠離四魔故常性無生故常
인이 무변하다는 것은 무량겁으로부터 목숨과 재물을 버리고 바른 법을 거두어서 지녔기 때문이다. 바른 법은 이미 변제(邊際)가 없고 무궁무진하니, 이는 곧 무궁한 인으로써 무궁한 과를 얻는 것인데 과(果)가 바로 3신(身)이다.
015_0445_a_15L因無邊者無量劫來捨身命財爲攝持正法正法旣無邊際無窮盡此卽以無窮之因得無窮之果卽三身也
두 번째, 무기상(無起常)은 전제(前際)가 ‘본래는 없고 지금은 있음[本無今有]’이 아님에 의거해서 의생신(意生身)으로 생겨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015_0445_a_18L二無起常者依前際非本無今有爲意生身所生故
세 번째, 항재상(恒在常)은 후제(後際)가 불가사의한 사괴(死壞)를 여읨에 의하기 때문이다.
015_0445_a_20L三恒在常者依後離不可思議死壞故
네 번째, 담연상(湛然常)은 중제(中際)가 무명번뇌의 병으로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45_a_21L四湛然常者依中際不爲無明煩惱病所破壞故
다섯 번째, 무변상(無變常)은 3제(際)를 넘어서 무루업의 과보가 변이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015_0445_a_22L五無變常者過三際不爲無漏業果報所變異故
015_0445_b_01L세 번째인 항재상은 죽음을 여의고, 네 번째인 담연상은 병을 여읜다. 다섯 번째인 무변상은 초지부터 여래지에 이르는 것을 통틀어서 무궁(無窮)이라고 이름하며, 8지부터 여래에 도달하는 것을 무기(無起)라고 이름하고, 9지부터 여래에 이르는 것을 또한 나누어서 무변상이라고 이름한다. 올바르게 다섯 가지 뜻을 논하면 모두가 불지(拂地)에 있는 것이다.
015_0445_b_01L第三恒在離死第四湛然離病第五無變者初地至如來地通名無窮從八地至如來名無起九地至如來亦分得名爲無變常者正論五義倂在佛地

모든 행은 무상하니
이것은 생멸법이다.
생멸까지 멸하고 나니
적멸하여 즐겁구나.
015_0445_b_05L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3장(藏)의 아사리(阿闍梨)가 뜻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모든 행은 무상하다’라는 것에서 모든 행이란 곧 색법과 심법의 온갖 행으로서 3세에서 행하는 것이다.
015_0445_b_07L三藏闍梨解旨云諸行無常者諸行卽是色心諸行行於三世中也
무상에는 다섯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잃고 없어지는 무상, 둘째는 모습을 여의는 무상, 셋째는 변하고 달라지는 무상으로 회전(廻轉)의 무상이라고도 칭한다. 넷째는 유분(有分)의 무상이고, 다섯째는 자성(自性)의 무상이다.
015_0445_b_09L無常自有五義失滅無常相離無常變異無常亦名迴轉無常有分無常自性無常
잃고 없어지는 것은 백 세(歲)의 과보가 다해서 수명이 다하여 멸하는 것과 같다.
015_0445_b_12L所言失滅者如百年報盡壽命失滅也
둘째, 모습을 여의는 무상이란 바로 뼈와 살이 홑어지는 것을 말한다.
015_0445_b_13L二相離無常者卽是骨肉離散也
셋째, 변하고 달라진다는 것은 뼈의 색이 처음에는 흰 색이었다가 나중에 비둘기 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바뀐다는 것은 곧 흰 색이 바뀌어서 비둘기색이 되는 것이다.
015_0445_b_14L三變異者如骨色初白後變爲鴿色也迴轉者卽轉白爲鴿色
넷째, 유분의 무상이란 근(根)ㆍ진(塵)ㆍ식(識)의 3사(事)가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를 본무무상(本無無常)이라고 이름하고, 화합한 후에 무(無)를 돌아가는 것을 멸괴라고 이름한다. 즉 화합한 후에 무로 돌아가는 것은 무상한 근과 진과 식이 함께 쌓인 덩어리이니 총체적으로 유분(有分)이라고 이름한다.
015_0445_b_16L四有分無常如根塵識三事未和合時名爲本無無常已有還無名爲滅壞卽是已有還無無常根塵識共聚摠名爲有分也
다섯째, 자성이란 앞의 네 가지 뜻이 있으므로 모든 성품의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생(生)이란 바로 미래세의 생이며, 멸법(滅法)이란 바로 과거세에 이미 멸한 법이고, 생멸이란 바로 현재세이다. 그리고 현재가 생멸을 섭수하는 것은 생하면 곧 멸하기 때문에 생멸이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
015_0445_b_19L五自性者有前四義故名爲自性無常也是生是未來世生也滅法者是過去世已滅法也生滅者是現在世也而現在攝生滅者生而卽滅故云生滅居現在也
015_0445_c_01L‘적멸하여 즐겁구나’라는 말에서 만일 멸한 법을 일컬어 즐겁다고 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유(有)는 현재이고 멸(滅)은 바로 과거라서 이미 멸한 법이 남겨지는데, 남겨짐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만일 현재의 생멸을 멸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이 일도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의 생이 있다는 것은 이 현재세의 남김이 있기 때문이니, 남김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만일 미래의 생이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이 뜻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까닭에 항상하지 않다. 만일 능히 미래로 하여금 응당 법을 생하게 하면서도 생함을 얻지 못해야 비로소 즐거움이라고 할 만하다. 적멸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것도 곧 이런 뜻이다.
015_0445_c_01L言寂滅爲樂者若言滅法爲此義不然何以故爲有現在滅是過去已滅法爲殘以有殘故非樂也若滅現在生滅爲樂者此事不然以故爲有未來生是現在世殘故殘故非樂也若言未來生是常者義不然生必有滅故非常也若能令未來應生法而不得生乃可爲樂耳寂滅爲樂卽其義也
위의 세 구절은 생사가 유위법인 까닭에 무상한 것임을 밝혔고, 뒤의 한 구절은 열반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무위법인 까닭에 항상 머무른다.
015_0445_c_09L上三句明生死有爲法故無常後一句辦涅槃是無爲法故常住
涅槃經本有今無偈論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