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하여 말한다. 많은 제자들이 이미 성숙하였으나 순타만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순타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대반열반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대경(大經)을 강설하여 큰 공덕을 주어서 성숙시키기 위하여 구시나성(拘尸那城)으로 오셨다. 어찌하여 순타에게는 아직 의심이 남아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동상(同相)은 보았으나 아직 별상(別相)을 보지 못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별상은 보았으나 동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치 멀리서 나무 그루터기를 보고 ‘사람이다. 또는 나무 그루터기이다’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만일 까마귀가 위에 모여 있고 그 아래에 사슴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저것은 나무 그루터기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안다. 그러나 손을 들어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을 본다면, 사람이지 나무 그루터기가 아니라고 안다.
별상은 보았으나 동상은 보지 못하여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치 공(空)의 불공상(不共相)이 바로 상주(常住)하는 것과 같고, 땅[地]의 불공상이 바로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것과 같다. 성문이란 불공상이다. 성문의 불공상에 의심을 일으킴은 공을 상주하는 것과 똑같이 여기고, 지(地)를 무상한 것과 똑같이 여기는 것이다.
015_0443_b_01L범부는 동상 때문에 의심을 일으키고, 성문ㆍ연각은 별상 때문에 의심을 일으킨다. 범부는 법이 생겨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을 일으키고, 성문ㆍ연각은 법이 생겨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을 일으킨다. 순타는 이 두 가지로 인해 의심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자 이런 의심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대보살이 어찌 부처님께 의심을 품겠는가? 이 같은 큰 모임에는 외도의 무리가 아주 많이 있다. 어떤 외도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자는 기름이 다하여 불이 꺼지는 것과 같을 거라고 말한다. 어떤 자는 부처님의 멸후에는 다함도 있고 다하지 않음도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해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본래 있으나 지금은 없다거나 본래 없으나 지금은 있다거나 3세가 있다는 법은 이치에 맞지 않다.
015_0443_b_05L本有今無, 本無今有, 三世有法, 無有是處。
부처님께서는 2승(乘)을 위해서 게송으로 “번뇌는 생득(生得)이고 성스러움은 수득(修得)이다. 범부의 성품은 생득이고 성현의 성품은 수득이다. 번뇌의 속박은 생득이고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은 수득이다. 나고 죽는 것은 생득이고 열반은 수득이다. 본래[本]는 생겨남이고 지금[今]은 닦음이다”라고 설하셨다. 본래가 바로 생겨남이고 지금은 바로 닦음이라는 것은 2승을 위하여 이런 해설을 하신 것이지 대승을 비방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승을 위해서 이런 해설을 하신다면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대승과 상응하지 않는데, 누가 능히 대승과 상응하게 하겠는가?
015_0443_c_01L만일 ‘본래 있으나 지금 없다’고 한다면 모든 여래들에게는 곧 해탈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성품이 일정하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고, 전제(前際)는 있으나 후제(後際)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진유(眞有)도 없고, 진유와 속유(俗有)도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진유는 전제와 후제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고, 속유는 본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속의 두 가지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두 가지 뜻을 환히 알지 못하는 승법외도(僧法外道)도 이와 같이 원인 가운데 결과가 있다[因中有果]고 설하면서 우유에 낙(酪)과 생소(生酥) 등이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니, 이것은 승법 등의 뜻을 증익하는 것이다.
만일 본래에 장애가 없다면 현재시(現在時)에 누가 능히 장애가 될 것인가? 만약 네가 인연의 화합을 방해하는 것을 장애로 삼는다고 사유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전후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걸림이 없다면 본래일 때는 어찌하여 걸리지 않는가? 어떤 도리가 있기에 본래는 인연(因緣)에 의거해 생겨나지 않다가 후에는 어떠한 인연에 의거하여 멸하는가?
이른바 본래[本]란 어떤 법으로 본래를 삼는가? 처음 일어남과 미래에 상속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만일 처음 일어남을 본래로 삼는다면 처음[初]은 인연소생이 아니고, 나중[後]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또한 인연소생이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이 12인연법의 여여의(如如義)를 설한다면 모두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아서 외도가 말하는 무인(無因)의 뜻과 같다. 만약 ‘상속을 본래로 삼는다’면 상속 또한 일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부분 부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니, 어떻게 상속을 본래로 삼겠는가? 이런 까닭에 모든 생겨남이 있는 법은 본래 무인이라고 설하는데, 이와 같은 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본래는 없으나[本無] 지금은 있다[今有]’는 것에서 만일 앞에서는 ‘본래’가 없는데 ‘지금’은 있다고 하면 그 있음[有]은 해탈을 얻지 못한 것이니, 앞에서 번뇌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는 해탈을 여읨이고 후에 번뇌를 낳았다면 해탈은 없는 것이다. 만일 ‘전에 없었으나[前無] 지금 있다’고 한다면, 가장 궁극적으로는 생겨남이 없는 것이라서 응당 생겨나게 되도 허공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일 그대의 사유가 일관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지만, 이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허공과 꽃 두 가지가 똑같이 있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인연이 허공을 낳아도 인연이 꽃 등을 낳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무(無)이기 때문이라면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015_0444_a_01L만일 본래(本)가 생겨나지 않아도 지금(今)이 생길 수 있다면 본래의 뜻을 파괴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초생(初生)이 바로 본래인 까닭이다. 만일 그대가 인연을 사유하여 이 초생은 초(初)가 아니고 그 때문에 생이 바로 본래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그대의 뜻이 본래의 있음을 깨뜨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연의 본래를 세우고자 한다면, 이런 까닭에 본래를 넘어서지 못하니 앞서 아직 있지 않은 법의 인(因)이 어떻게 생하겠는가?
만일 그것이 생겨난다면 전체를 다 갖추어서 생겨나는가, 부분 부분이 차례로 생겨나는가? 만일 전체를 다 갖추어서 생겨난다면 일시생(一時生)인가, 전후생(前後生)인가? 만일 일시생이라면 인과가 동시에 일어나므로 분별할 수 없다. 만일 과가 후(後)에 생하고 인이 전(前)에 멸한다면 어떻게 후과(後果)를 낳겠는가? 마치 푹 삶아진 닭이 소리를 내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만일 전체를 다 갖추었다면 무엇을 써서 인을 바라겠는가? 만일 부분 부분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또한 앞의 잘못과 같다. 이런 까닭에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다’고 하는 것은 인(因)을 안립하고자 한 것이니,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다.
‘3시(時)가 있다’고 함도 그 뜻이 옳지 않다. 만일 3세가 있다면 하나의 뜻이 3세에 두루하겠는가? 하나하나의 뜻에 각각 3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하나의 뜻이 3세에 두루한다면 1세(世)에 3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뜻[義]이 시(時)에 의거한다면, 과거ㆍ미래는 나뉘고 나뉘어서 한이 없을 것이다. 만일 시가 뜻에 의거한다면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곧 3세는 없다. 이는 뜻을 여의는 일이라서 별다른 시[別時]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3시가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015_0444_b_01L만일 하나의 물질이 3세에 두루한다면 이 물질을 이름 지을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물질이 둘의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생사와 열반은 하나가 될 것이다. 만일 각각에 3세가 있다면 3세는 각기 스스로 있을 것이다. 만약 현세가 능히 과를 낳는다면 과거와 미래가 무슨 뜻에서 능히 생할 수 없겠는가? 만약 모두 능히 생한다면 한 사람도 해탈을 얻는 자가 없을 것이다. 만일 과거와 미래를 능히 생할 수 없다면 누가 과보를 끊겠는가? 과거ㆍ미래가 바로 있다고 말함은 체(體)가 있어서 있다고 말하는가, 작용[用]이 있어서 있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대가 3세가 유(有)라서 능히 설할 수 있다고 사유해도, 3세는 능히 설함이 되지도 않고 체의 설함[體說]이 되지도 않는다. 만일 똑같이 체가 있다고 하면, 하나라면 능함이 있고 둘이라면 능함이 없는데, 이 뜻은 옳지 않다. 만일 그대가 시절은 능함이 있다고 사유한다면 능히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파초가 한 번 열매를 맺으면 거듭해서 맺을 수 없다고 하는 이 뜻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뜻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3시는 누구의 소유이겠는가? 만약 유인(有因)으로 생겨난다면 논란은 끝이 없을 것이고, 만약 무인(無因)으로 생겨난다면 시절(時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그대가 미래는 바로 전(前)이고, 현재는 곧 중(中)이며, 과거는 곧 후(後)라고 사유하여 3세를 만드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인가? 미래의 힘이 핍출(逼出)하기 때문에 현재가 있고, 현재의 힘은 과거에서 핍출한다. 이는 항하의 물과 같아서 미래의 물은 현재의 물을 핍박하고, 현재의 물은 과거의 물을 핍박한다. 만일 1세(世)를 성취하는 것이 곧 3세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면, 이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물의 본질은 같지만 흐르는 곳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삼시삼세유(三時三世有)의 뜻을 설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것은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함은 소승의 설과 외도의 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과 같아서 소승과 외도의 설을 깨뜨리는 것이다.
015_0444_b_18L無無是處者,如小乘說無是處,如外道說無是處。破小乘外道。
이와 같은 게송의 뜻은 첫째는 삿된 생각을 깨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뜻을 세우는 것이다. 삿된 생각을 깬다는 것은 언어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고, 바른 뜻을 세운다는 것은 뜻에 의거해 말하는 것이다.
015_0444_b_20L如是偈義一破邪義、二立正義。破邪義者,依語言說。立正義者,依於義說。
015_0444_c_01L이른바 바른 뜻이란 본래도 있고 지금도 있어서[本有今有] 3세를 넘어서 있는 것이니, 이를 바른 뜻이라고 이름한다. ‘본래도 있고 지금도 있다’란 초발심으로부터 열반을 얻기까지 오직 한 맛으로 변함이 없어서 생인(生因)에도 의거하지 않고 멸인(滅因)에도 의거하지 않는다.
때로는 청정한 눈을 얻어서 보기도 하고, 때로는 악독한 눈을 얻어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방편에 의한 것으로 곧 언어의 길 나아가 일체의 사유를 넘어선 것이므로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하여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인과라는 것은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 이 지(地)는 숫자로 헤아려서 능히 일시에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경계로서 생사와 열반은 이 지(地)를 거스르거나 따르는 것이다. 만일 이 지를 거스른다면[逆] 생사요, 따른다면[順] 곧 열반의 경지이다. 이것은 전제이고, 후제이고, 발심지이고, 금강후심지(金剛後心地)이며, 온갖 견해를 깨고 온갖 견해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므로 모든 중생은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 여래의 일체(一體)는 가장 으뜸가는 귀의처이자 모든 보물을 섭수하는 대열반이다.
3세를 벗어난다는 것은 용(用)으로써 열반의 공덕을 설한 것이다. 무엇이 3세를 벗어난다는 것인가? 생(生)이 있는 까닭에 3세를 분별하지만, 열반은 생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 3세에서 미생(未生)은 생을 얻고 이생(已生)은 멸하였지만, 열반은 멸하는 일이 없는 까닭에 상주하며 자재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지극한 즐거움이 된다. 체(體)로써 설명하면 청정이고, 용(用)으로는 항상[常]하고, 즐겁고[樂], 참다운 나[我]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체인 까닭에 청정하며, 생사를 대(對)하는 까닭에 항상하고 즐겁고 참다운 나인 것이다.
015_0445_a_01L이와 같이 12인연은 진실하게 있으니, 왜냐하면 두 극단을 여의는 것이 바로 참다운 12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능히 잘 이해하면 곧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 계심을 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12인연이 바로 여래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니, 진속이제(眞俗二諦)에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 12인연은 참다운 불도이다.
5상의(常義)란 첫 번째는 무궁상(無窮常), 두 번째는 무기상(無起常), 세 번째는 항재상(恒在常), 네 번째는 담연상(湛然常), 다섯 번째는 무변상(無變常)이다.
015_0445_a_07L五常義:一,無窮常;二,無起常;三,恒在常;四,湛然常;五,無變常。
무궁상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因)이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둘째는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셋째는 대비(大悲)가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넷째는 4여의족(如意足)이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다섯째는 혜(慧)가 무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여섯째는 항상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항상하다. 일곱째는 안락하고 청량하기 때문에 항상하다. 여덟째는 세간에서 행해지는 여덟 가지 법으로도 능히 물들일 수 없는 까닭에 항상하다. 아홉째는 감로적정(甘露寂靜)하여 네 가지 마(魔)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항상하다. 열째는 성품이 생하지 않으므로 항상하다.
두 번째, 무기상(無起常)은 전제(前際)가 ‘본래는 없고 지금은 있음[本無今有]’이 아님에 의거해서 의생신(意生身)으로 생겨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015_0445_a_18L二無起常者,依前際,非本無今有,不爲意生身所生故。
세 번째, 항재상(恒在常)은 후제(後際)가 불가사의한 사괴(死壞)를 여읨에 의하기 때문이다.
015_0445_a_20L三恒在常者,依後際,離不可思議死壞故。
네 번째, 담연상(湛然常)은 중제(中際)가 무명번뇌의 병으로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45_a_21L四湛然常者,依中際,不爲無明煩惱病所破壞故。
다섯 번째, 무변상(無變常)은 3제(際)를 넘어서 무루업의 과보가 변이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015_0445_a_22L五無變常者,過三際,不爲無漏業果報所變異故。
015_0445_b_01L세 번째인 항재상은 죽음을 여의고, 네 번째인 담연상은 병을 여읜다. 다섯 번째인 무변상은 초지부터 여래지에 이르는 것을 통틀어서 무궁(無窮)이라고 이름하며, 8지부터 여래에 도달하는 것을 무기(無起)라고 이름하고, 9지부터 여래에 이르는 것을 또한 나누어서 무변상이라고 이름한다. 올바르게 다섯 가지 뜻을 논하면 모두가 불지(拂地)에 있는 것이다.
셋째, 변하고 달라진다는 것은 뼈의 색이 처음에는 흰 색이었다가 나중에 비둘기 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바뀐다는 것은 곧 흰 색이 바뀌어서 비둘기색이 되는 것이다.
015_0445_b_14L三變異者,如骨色初白,後變爲鴿色也。迴轉者,卽轉白爲鴿色。
넷째, 유분의 무상이란 근(根)ㆍ진(塵)ㆍ식(識)의 3사(事)가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를 본무무상(本無無常)이라고 이름하고, 화합한 후에 무(無)를 돌아가는 것을 멸괴라고 이름한다. 즉 화합한 후에 무로 돌아가는 것은 무상한 근과 진과 식이 함께 쌓인 덩어리이니 총체적으로 유분(有分)이라고 이름한다.
다섯째, 자성이란 앞의 네 가지 뜻이 있으므로 모든 성품의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생(生)이란 바로 미래세의 생이며, 멸법(滅法)이란 바로 과거세에 이미 멸한 법이고, 생멸이란 바로 현재세이다. 그리고 현재가 생멸을 섭수하는 것은 생하면 곧 멸하기 때문에 생멸이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
015_0445_c_01L‘적멸하여 즐겁구나’라는 말에서 만일 멸한 법을 일컬어 즐겁다고 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유(有)는 현재이고 멸(滅)은 바로 과거라서 이미 멸한 법이 남겨지는데, 남겨짐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만일 현재의 생멸을 멸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이 일도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의 생이 있다는 것은 이 현재세의 남김이 있기 때문이니, 남김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만일 미래의 생이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이 뜻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까닭에 항상하지 않다. 만일 능히 미래로 하여금 응당 법을 생하게 하면서도 생함을 얻지 못해야 비로소 즐거움이라고 할 만하다. 적멸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것도 곧 이런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