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5_0502_a_01L
유가사지론 제6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3) 유심유사 등 3지 ③

다음에1) 무엇을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의 시설건립(施設建立)이라 하는가?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한다.

인(因)에 과(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드러남[顯了]와 가고 옴[去來]이 있음과
나[我]와 항상함[常]과 숙작인(宿作因)과
자재(自在) 등과 해침을 법으로 삼는 것[害法]과
執因中有果  顯了有去來
我常宿作因  自在等害法

변(邊)ㆍ무변(無邊)과 교란(矯亂)과
원인이 없다고 계탁하는 것[計無因]과 단견[斷]과 공견[空]과
최승(最勝)과 청정[淨]과 길상(吉祥)의
16가지 이론(異論)에 의하네.
邊無邊矯亂  計無因斷空
最勝淨吉祥  由十六異論

16가지 이론(異論)의 차별에 의해서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를 드러냄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16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다는 론[因中有果論]이며, 둘째는 연에 따라서 드러난다는 론[從緣顯了論]이며, 셋째는 가고 옴이 실재로 있다는 론[去來實有論]이며, 넷째는 나를 계탁하는 론[計我論]이며, 다섯째는 항상함을 계탁하는 론[計常論]이며, 여섯째는 숙작인론(宿作因論)이며, 일곱째는 자재(自在) 등이 작자(作者)라고 계탁하는 론(論)이며, 여덟째는 해침을 정법으로 삼는 이론[害爲正法論]이며, 아홉째는 유변무변론(有邊無邊論)이며, 열째는 불사교란론(不死矯亂論)이며, 열 한째는 무인견론(無因見論)이며, 열 둘째는 단견론(斷見論)이며, 열 셋째는 공견론(空見論)이며, 열 넷째는 헛되이 최승을 계탁하는 론[妄計最勝論]이며, 열 다섯째는 헛되이 청정을 계탁하는 론[妄計淸淨論]이며, 열 여섯째는 헛되이 길상을 계탁하는 론[妄計吉祥論]이다.
인 가운데에 과가 있다는 론[因中有果論]2)이란 말하자면,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 중에 어떤 한 사람이 항상 어느 때이거나 모든 원인 중에 결과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니, 즉 우중외도(雨衆外道)3)가 이러한 계탁[計]을 한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저 외도(外道)들은 위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위와 같은 이론을 세워서 원인에 결과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드러내 보이는가?
【답】 가르침[敎]과 이치[理]에 의하기 때문이다. 가르침[敎]이란 말하자면 그들의 먼저 스승이 지었던 교장(敎藏)4)을 들은 대로 계속 전수하여 지금에 이르르면서, 원인 중에 먼저 결과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치[理]란 마치 그 사문이나 바라문이 성품[性]을 심사(尋思)하고 성품을 관찰하여 심사지(尋思地)에 머무르고 스스로 성취한 지위[自辦地]에 머무르고 이생지(異生地)에 머무르며 사유에 따라 행을 관찰하는 지위[隨思惟觀察行地]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저 성품으로부터 이 성품이 생기게 되면 일체의 세간(世間)은 모두 알고 모두 세우니, 그것이 이 원인이 되며 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결과를 구하는 것은 오직 이 원인을 취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에 공영(功營)을 가하여 여러 가지 구하는 대상[事]을 구축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그 결과가 있으면 곧 그것5)으로부터 생겨나며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원인 속에 이미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세워야만 한다. 하나의 결과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취해야 하며, 모든 것에 공영(功營)을 가하여 구축해야 하며, 모든 것에 따라 모든 결과가 생겨나야만 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구하여 취하기[求取] 때문에, 소작(所作)을 결정하기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에 그들은 원인 중에 항상 결과의 성품이 있다고 본다.
자세하게 그들에게 물어야겠다6).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인상(因相)이며, 무엇이 과상(果相)인가? 인(因)ㆍ과(果)의 두 상(相)이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만약 상(相)이 다르지 않다면 곧 인(因)ㆍ과(果)의 두 가지의 결정이 없어야 한다. 인(因)ㆍ과(果)의 두 가지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인(因)에 과(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상(相)에 다름이 있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인 중에 결과의 성품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相)인가, 이미 생겨난 상(相)인가?
만약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相)이라고 하면, 곧 원인 중에 결과가 오히려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이미 생겨난 상(相)이라고 하면, 곧 결과의 체(體)가 이미 생겨났거늘 다시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에 먼저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원인에 연(緣)을 기다려서 결과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상이 있는 법[有相法}은 상이 있는 법[有相法]에 다섯 가지 상(相)이 있기 때문에, 결국에 훤히 알 수[了知] 있다. 첫째는 처소(處所)에서 얻을 수 있으니 독 속의 물과 같으며, 둘째는 소의(所依)에서 얻을 수 있으니 눈의 안식(眼識)과 같으며, 셋째는 자상(自相)에 의하여 얻을 수 있으니 헤아림[比度}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自體)7)에서 비롯하는 것과 같으며, 넷째는 곧 자체(自體)의 작업(作業)에 의해서 얻을 수 있으며, 다섯째는 원인의 달라짐[變異]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게 되며 혹은 연(緣)이 달라짐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항상 어느 때나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인연에 의해서 그들이 세운 이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위와 같이 다르지 않은 상[不異相]에 의해서, 다른 상[異相]에 의해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未生相]에 의해서, 이미 생긴 상[已生相]에 의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연에 따라서 드러난다는 론[從緣顯了論]8)이란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일체 제 법(法)의 성품은 본래 있어서 뭇 연[衆緣]을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지, 연(緣)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즉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다는 논자[因中有果論者]와 성상론자(聲相論者)가 이와 같은 계탁[計]을 한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因中有果論者]는 모든 원인 중에 먼저 결과의 성품이 있어서 연(緣)에 따라서 드러난다고 하는가?
【답】 가르침[敎]과 이치[理]에 의하기 때문이다. 가르침[敎]이란 앞서 말한 것과 같으며, 이치[理]란 마치 어떤 사람이 성품을 심사(尋思)하고 성품을 관찰(觀察)하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과 같다. 그들은 ‘결과는 먼저 있는 것이므로 다시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功)을 들이지 않고 결과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시 무엇을 연(緣)하여 공용(功用)을 짓는가? 어찌 결과만을 드러내기[顯了]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와 같은 허망된 분별을 짓고서 현료론(顯了論)을 세운다.
자세하게 그들에게 물어야겠다9).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장애하는 연(緣)이 없는 데도 장애가 있다는 것인가, 장애하는 연이 있다는 것인가?
장애하는 연(緣)이 없는데도 장애가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장애하는 연(緣)이 있다고 한다면, 결과에 붙어 있는 원인인데 무슨 까닭에 장애하지 않는가?
똑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캄캄한 어둠이 독 안의 물을 가리고 또한 독도 가릴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장애의 연(緣)이 역시 장애의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다시 원인을 드러내야만 한다. 다같이 장애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원인 속에 먼저의 결과의 성품이 있다고 드러내면서 원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다시 그대들에게 물어야겠다.
유성(有性)은 바로 장애의 연(緣)인 것인가, 결과의 성품인 것인가?
만약 유성(有性)이 바로 장애의 연(緣)이라면 이는 곧 유성(有性)이 항상 현료(顯了)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원인 또한 있는 것인데 어떻게 장애되지 않는가?
만약 결과의 성품이 장애의 연(緣)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하나의 법이 원인이면서 결과가 된다. 마치 싹이 종자가 되고 열매가 줄기가 되는 것과 같다. 원인이 곧 하나의 법인데도 또한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게 되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이제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본래의 법은 드러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만약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법은 언제나 나타나야 하는데, 나타난 뒤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그 나타나는 것은 원인이 없는 것인가, 원인이 있는 것인가?
만약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이 나타남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원인이 있다면 결과의 성품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원인의 성품이 아니고, 원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장애의 연(緣)이 없기 때문에, 또한 장애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유상(有相) 때문에, 과상(果相) 때문에, 드러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 ‘만약 법의 성품이 없으면 곧 상(相)이 없으며 만약 법의 성품이 있으면 상(相)이 있으며, 성품이 만약 없으면 현료(顯了)할 수 없고 성품이 만약 있으면 비로소 현료(顯了)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내가 이제 설명하겠다.
비록 다시 있다고 하더라도 상(相)을 취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멀리 있기 때문에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취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네 가지 장애에 의하여 장애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니,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감각기관[根]을 손상하고 잃었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저것과 상응하는 지혜를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
인과현료론(因果顯了論)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성상론자(聲相論者) 또한 도리에 맞지 않음을 알아야만 한다.
이 가운데에 차별이 있다면 외도(外道)의 성론사(聲論師)는 ‘성상(聲相)은 상주(常住)하여 생기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나 내뱉음[宣吐]으로 인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는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운다. 그러므로 이 이론도 현료론(顯了論)과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가고 옴이 실재로 있다는 론[去來實有論]10)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이나 이 법에 머무르는 사람 중에 바르지 못한 사유(思惟)에 의해서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어서 그 상(相)을 성취하는 것이 마치 현재와 같이 실재로 있는 것이요, 거짓이 아니다’라는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운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그들은 위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위와 같은 이론을 세우는가?
【답】 가르침[敎]과 이치[理]에 의하기 때문이다. 가르침[敎]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한 이 법에 머무르는 사람은 여래(如來)의 경전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즉 경전에서 ‘일체가 있다는 것은 곧 12처(處)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12처는 실상(實相)으로 곧 있는 것이다.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 과거(過去)의 업(業)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과거의 색(色)이 있고 미래(未來)의 색(色)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다고 자세히 말씀하셨다.
이치[理]란 어떤 하나의 성품을 심사(尋思)하고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그들은 ‘만약 법의 자상(自相)이 이 법에 안주하면 진실로 있는 것이며, 이것에 만약 미래가 없다면 그 때 상(相)을 받지 않아야 하고, 이것에 만약 과거가 없다면 그 때에 자상(自相)을 잃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이 되면 모든 법의 자상(自相)은 성취되지 않게 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러한 도리에 의하기 때문에 또한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성상(聲相)은 실재로 있다’는 이와 같은 사유에 의해서 위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자세하게 그들에게 물어야겠다11).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상(相)은 현재의 상(相)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같은 상(相)이라고 한다면 3세(世)의 상(相)을 세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다른 상(相)이라고 한다면 성(性)과 상(相)이 실유(實有)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자신들의 뜻에서 바라는 내용을 말해야 한다.
3세(世)에 떨어지는 법은 항상[恒]한 상(相)인가, 무상(無常)한 상(相)인가?
만약 항상한 상(相)이라고 한다면 3세(世)에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무상한 상(相)이라고 한다면 3세(世) 중에 항상 실유(實有)한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지금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미래의 법이 현재세(現在世)에 이른다고 여기는가? 거기서12) 죽은 후에 여기에13) 생기는 것인가? 곧 미래에 머무름을 연(緣)으로 하여 현재를 사는 것인가? 본래는 업(業)이 없는데 지금 업(業)이 있는 것인가? 본래의 상(相)은 원만(圓滿)하지 않는데 지금 상[異相]이 원만한 것인가? 본래의 다른 상[異相]이 지금 다른 상[異相]으로 되는 것인가? 미래에 현재의 부분[現在分]이 있는 것인가?
만약 미래의 법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면 이는 곧 방소(方所)가 있고 다시 현재와 차별이 없어야 하며 다시 항상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미래에 죽고 나서 현재에 생긴다고 한다면 이는 곧 금생에 사는 것이 아닌 미래여서 현재세(現在世)의 법에서는 본래 지금 사는 것이 없으며 또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를 죽여 없앴다고 말하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법이 미래에 머무르므로 그것을 연(緣)으로 하여 현재를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항상해야 만 하고 또 본래가 지금 사는 것이 없어야 하므로 미래의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어야 하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본래의 업(業)의 작용이 없는데도 이제 업의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본래 없는 것이 지금 있는 것으로서 곧 앞에서 설명한 과실(過失)과 같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업의 작용[業用]과 저 본래의 법[本法]은 다른 상[異相]인 것인가, 다른 상[異相]이 아닌 것인가?
만약 다른 상[異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 업의 작용의 상(相)은 미래에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른 상[異相]이 아니라고 한다면 본래의 업의 작용이 없는데 이제 업의 작용이 있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업의 작용이 없음에 이와 같은 과실이 있는 것과 같이 상(相)의 원만(圓滿)과 다른 상[異相]과 미래의 부분[未來分]의 상(相) 또한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하면 다시 자성(自性)이 뒤섞이는[雜亂] 과실이 있기14)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미래가 현재를 향하는 것처럼 위와 같이, 현재가 과거로 가는 것도 그 상응하는 바와 같이 과실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앞에서 헤아린 여러 인연과 설파(說破)된 도리(道理)와 같다.
위와 같이 자상(自相) 때문에, 공상(共相) 때문에, 왔기[來] 때문에, 죽기[死] 때문에, 연(緣)으로 하여 생기기[生] 때문에, 업(業) 때문에, 상(相)의 원만(圓滿) 때문에,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미래에 부분이 있는 것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본체[體]가 실유(實有)한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말하고 나면, 다시 어떤 사람이 ‘만약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어떻게 없는 것을 연(緣)하여 깨달음의 구름[覺轉]이 있으며, 만약 없는 것을 연(緣)하여 깨달음의 구름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마치 일체 존재하는 것[有]은 12처(處)라고 설한 것과 같이 가르침과 달라지는 과실이 있지 않는가?’라고 비난한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세간에서 없음[無]을 취하는 깨달음[覺]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능히 무아(無我)와 토끼의 뿔과 석녀(石女)의 아이 등을 취하는 깨달음[覺]은 모두 없어야만 하므로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 ‘나는 모든 아첨할 줄 모르는 성문(聲聞)들이 내가 설한 것을 그대로 바르게 닦고 행할 때 있는 것은 있다고 알고 없는 것은 없다고 아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이러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없음[無]을 취하는 깨달음[覺]은 있음의 행(行)을 짓는 것인가, 없음의 행(行)을 짓는 것인가?
만약 있음의 행(行)을 짓는다고 한다면 없음을 취하는 깨달음이면서 있음의 행(行)을 짓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없음의 행(行)을 짓는다면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없음의 행(行)의 깨달음은 있음의 현상[有事]을 연(緣)하여 일어나는가, 없음의 현상[無事]을 연(緣)하여 일어나는가?
만약 있음의 현상을 연(緣)하여 일어난다고 한다면 없음의 행(行)의 깨달음이 있음의 현상을 연(緣)하여 일어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없음의 현상을 연(緣)하여 일어난다면 연(緣)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비록 일체 존재하는 것[有]은 12처라고 말씀하셨을지라도 그러나 유법(有法)의 밀의(密意)로 유상(有相)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무법(無法)의 밀의(密意)로 무상(無相)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만약 유상법(有相法)이면 유상(有相)을 지닐 수 있고, 무상법(無相法)이면 무상(無相)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 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모두 있음[有]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모든 수행자(修行者)는 유(有)에 대해서만 알뿐이고 무(無)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지법(所知法)을 관(觀)하는 것이 아니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비록 과거의 업(業)이 있다’고 하고 ‘이 업 때문에 모든 유정(有情)은 손해(損害) 있는 느낌[受]과 손해 없는 느낌[受]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그 습기(習氣)에 의해서 밀의(密意)로 짐짓 있다[有]고 말하는 것이다. 제 행(行) 중에 일찍이 청정[淨]과 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이 있어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이 인연에 의해서 그 행(行)은 매우 달라지고[勝異] 상속(相續)하여 구르는 것을 습기(習氣)라고 하며, 이 상속에 포함되는 습기로 인해서 애(愛)와 불애(不愛)의 과(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허물이 없고 그대들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다시 비록 과거의 색(色)이 있고 미래의 색(色)이 있으며 현재의 색(色)이 있으며 위와 같이 하여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할지라도 이것 역시 3가지 행상(行相), 즉 인상(因相)과 자상(自相)과 과상(果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써 말한 것이다. 그 인상(因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 미래가 있다고 설한 것이며, 그 자상(自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 현재가 있다고 설한 것이며, 그 과상(果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 과거가 있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또한 과거와 미래는 실유상(實有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래(未來)에 12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인이 드러난 바의 상[因所顯相]이고, 둘째는 본체가 아직 생기지 않은 상[體未生相]이며, 셋째는 뭇 연을 기다리는 상[待衆緣相]이며, 넷째는 이미 생겨난 종류의 상[已生種類相]이며, 다섯째는 생겨날 수 있는 법의 상[可生法相]이며, 여섯째는 생겨날 수 없는 법의 상[不可生法相]이며, 일곱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잡염의 상[未生雜染相]이며, 여덟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청정의 상[未生淸淨相]이며, 아홉째는 응당 구할 수 있는 상[應可求相]이며, 열째는 응당 구할 수 없는 상[不應求相)이며, 열 한째는 관찰에 상응하는 상[應觀察相]이며, 열 둘째는 관찰에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觀察相]이다.
현재(現在)에도 12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과가 드러난 바의 상[果所顯相]이고, 둘째는 체가 이미 생겨난 상[體已生相]이며, 셋째는 뭇 연이 모인 상[衆緣會相]이며, 넷째는 이미 생겨난 종류의 상[已生種類相]이며, 다섯째는 한 찰나의 상[一刹那相]이며, 여섯째는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법의 상[不復生法相]이며, 일곱째는 현재의 잡염의 상[現雜染相]이며, 여덟째는 현재의 청정의 상[現淸淨相]이며, 아홉째는 희락할 수 있는 상[可憙樂相]이며, 열째는 희락할 수 없는 상[不可憙樂相]이며, 열 한째는 관찰에 상응하는 상[應觀察相]이며, 열 둘째는 관찰에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觀察相]이다.
과거(過去)에도 또한 12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이도인상(已度因相)이고, 둘째는 이도연상(已度緣相)이며, 셋째는 이도과상(已度果相)이며, 넷째는 체가 이미 무너진 상[體已壞相]이며, 다섯째는 이미 멸한 종류의 상[已滅種類相]이며, 여섯째는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법의 상[不復生法相]이며, 일곱째는 잡염을 그친 상[靜息雜染相]이며, 여덟째는 청정을 그친 상[靜息淸淨相]이며, 아홉째는 돌이켜 연연해하는 것과 상응하는 상[應顧戀處相]이며, 열째는 돌이켜 연연해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顧戀處相]이며, 열 한째는 관찰에 상응하는 상[應觀察相]이며, 열 둘째는 관찰에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觀察相]이다.
나를 계탁하는 론[計我論]15)이란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이 말하자면 ‘나[我]ㆍ살타(薩埵)16)ㆍ명자(命者)는 있으며, 양육자(養育者)ㆍ삭취취자(數取趣者)17)는 있으며, 이와 같은 등의 진리[諦]는 실재로 상주(常住)18)한다’라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도(外道) 등이 이와 같은 계탁[計]을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저 외도(外道)들은 위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위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가?
【답】 가르침[敎]과 이치[理] 때문이다. 가르침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치란 어느 하나의 성품[性]을 심사(尋思)하고 성품[性]을 관찰하는 것과 같으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두 가지의 원인 때문이니, 첫째는 먼저 사량하여 느끼지[思覺] 못했는데, 갑자기[率爾] 살타(薩埵)가 있어서 느끼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저 이미 사량하여 느꼈던 것을 작용하는 것[作]이 있어서 얻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我]가 없다면 다섯 가지 대상[事]을 보면서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내가 있다는 느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첫째는 색(色)의 형상[形]을 보고 나서 색의 형상에 대한 지각[覺]만을 일으켜야 하고 살타(薩埵)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고ㆍ락을 따르는 행[順苦樂行]을 보고 나서 수(受)의 지각만을 일으켜야 하고 뛰어나고 열등하다는 살타(薩埵)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셋째는 이미 이름이 만들어진 사람의 이름과 상응(相應)하는 행(行)을 보고 나서 상(想)의 지각[覺]만을 일으키고 찰제리(刹帝利)ㆍ바라문(婆羅門)ㆍ폐사(吠舍)ㆍ술타라(戌陀羅)ㆍ불수(佛授)ㆍ덕우(德友) 등의 살타(薩埵)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넷째 청정[淨]과 청정하지 않음[不淨]과 상응하는 행(行)을 짓는 것을 보고 나서 행(行)의 지각만을 일으켜야 하고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라는 살타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는 경계(境界)에 대해서 식(識)이 따라 구르는 것[隨轉]을 보고 나서 마음의 지각[心覺]만을 일으켜야 하고 ’나에 대해서 볼 수 있다‘고 하는 등의 살타(薩埵)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먼저 사량으로 지각하지 못한 다섯 가지의 대상[事]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살타만이 지각하기 때문에 제 행(行)이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량하여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나서 갑자기 살타(薩埵)가 있어서 지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결정코 실아(實我)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만약 아(我)가 없다고 한다면 응당 제 행(行)에 대해서 먼저 사량으로 지각[思覺]을 일으켜서 소작(所作)이 있게 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나는 눈으로써 모든 색(色)을 볼 것이다, 지금 색들을 본다, 색들을 보았다’고 하고 혹은 다시 마음을 일으켜서 ‘나는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작용은 모두 나라는 지각이 작용해서 먼저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서 보는 것이 이와 같듯이 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에서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선업(善業)을 조작(造作)하고 선업(善業)을 그만두며, 불선업(不善業)을 조작하고 불선업(不善業)을 그만두는 이와 같은 등의 현상[事]은 모두 사량의 지각[思覺]을 먼저로 해야 비로소 작용(作用)할 수 있는 것이며, 제 행(行)에서만 이와 같은 작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량[思]에 의하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나는19)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서 대답하라.
본 대상[所見事]에 상즉[卽]하여 살타(薩埵)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인가, 본 대상과는 다르게 살타(薩埵)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본 대상과 상즉하여 살타의 지각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너희들은 색(色) 등에 상즉하여 살타(薩埵)가 있다고 계탁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있다고 계탁하는 것은 전도(顚倒)의 지각이다. 만약 보는 대상[所見事]과 다르게 살타(薩埵)를 일으킨다고 한다면 나에게 형량(形量)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혹은 뛰어나고 열등함이 있는 것,20) 혹은 찰제리(刹帝利) 등이 있는 것,21) 혹은 어리석음이 있는 것, 혹은 지혜로움이 있는 것,22) 혹은 그 색(色) 등의 경계를 취할 수 있기도 하는 것23)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법 자체(自體)에 의해서만 이러한 지각을 일으키는 것인가? 또는 다른 자체(自體)에 의해서 이러한 지각을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이 법의 자체에 의해서만 이러한 지각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보는 것[所見]에 상즉하여 그 ‘나’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은 전도(顚倒)의 지각이라고 설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다른 자체에 의해서 이러한 지각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곧 일체의 경계는 각기 일체의 경계의 지각이 원인이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정수(無情數)에서 유정(有情)이라는 지각과 유정수(有情數)에서 무정(無情)이라는 지각과 그 밖의 유정수(有情數)에서 그 밖의 유정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일어난다고 한다면 이는 곧 무정(無情)이 유정(有情)이어야만 하고, 유정(有情)이 무정(無情)이어야만 하며, 그 밖의 유정이 그 밖의 유정이어야 하므로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곧 현량(現量)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살타(薩埵)의 지각은 현량(現量)의 뜻을 취하는 것인가, 비량(比量)의 뜻을 취하는 것인가?
만약 현량(現量)의 뜻을 취한다고 한다면 오직 색(色) 등의 온(蘊)만이 현량(現量)의 뜻이고 ‘나’라는 것은 현량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비량(比量)의 뜻을 취한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어린아이와 같이 아직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갑자기 ‘나’라는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또한 나는 지금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세간(世間)의 소작(所作)과 같은 것을 지각으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하는 것인가, ‘나’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지각으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한다면 나의 소작[我所作]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나’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사량으로 지각해서[思覺] 소작(所作)을 얻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소작사(所作事)의 원인은 항상[恒]한 것인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만약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소작(所作)의 원인의 본체[體]가 달라지는데 나에게 소작(所作)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항상[恒]한 것이라고 한다면 달라짐이 없는데 달라짐이 없는데서 소작이 있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동작(動作)하는 내가 있어서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동작(動作)하는 내가 없는데도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동작(動作)하는 내가 있어서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항상 짓는 것이 있으므로 다시 짓지 않아야만 하고, 만약 동작(動作)하는 내가 없는데도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동작(動作)하는 성품이 없으면서도 소작(所作)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원인이 있기 때문에 나의 소작(所作)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이 나는 다른 원인을 일으켜서[策發] 비로소 소작(所作)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어느 때나 모든 일[一切事]을 지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나’는 스스로를 의지하기 때문에 소작(所作)이 있는 것인가,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소작(所作)이 있는 것인가?
만약 스스로를 의지한다고 한다면 이 ‘나’가 스스로 늙고 병들고 죽고 여러 가지 물드는 따위의 일들을 짓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른 것을 의지한다고 한다면 나의 소작(所作)이라고 계탁[計]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지금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온(蘊)에 상즉[卽]하여 내가 있다고 시설(施設)한다고 하는 것인가,24) 여러 가지 온[諸蘊]에서 시설한다고 하는 것인가? 온(蘊) 외의 그 밖의 처소라고 하는 것인가, 온(蘊)에 속해 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온(蘊)에 상즉[卽]해서 나를 시설한다고 한다면 이는 나와 온(蘊)의 차별이 없는데도 내가 있다는 진리[諦實]가 상주(常住)함을 계탁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여러 가지 온[諸蘊]에서라고 한다면 이때의 나는 항상[恒]한 것인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만약 항상[恒]한 것이라고 한다면 상주하는 내가 여러 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에 손익(損益)을 받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손익(損益)이 없는데도 법(法)과 비법(非法)을 일으키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법(法)과 비법(非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온[諸蘊]의 몸은 필경에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도 나는 항상 해탈해야만 한다.
만약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한다면 온(蘊)의 체(體)를 떠나서 밖의 생(生)ㆍ멸(滅)이 있어서 상속유전(相續流轉)하는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여기에서 없어진 후에 다른 곳에서 짓지 않아도 얻는다고 한다면 큰 과실이 있어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온(蘊) 외의 그 밖의 다른 처소라고 한다면 그대가 계탁하는 바 ‘나’는 무위(無爲)이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온(蘊)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어느 때나 염오(染汚)함이 없어야만 하고 나와 몸은 서로 속한 것이 아니어야 하므로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계탁하는 바[所計]의 ‘나’는 보는 것 등의 상(相)과 상즉[卽]한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것 등의 상(相)을 떠났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것 등의 상(相)과 상즉[卽]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는 등에 상즉하여 짐짓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등을 떠나서 별도의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등에 상즉해서 짐짓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한다면 보는 등은 바로 보는 것 등이어야만 하는데 그대는 ‘나’를 세워서 보는 것 등이라고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보는 것 등과 보는 상(相)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는 등을 떠나서 별도의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한다면 그 보는 등의 법은 내가 만들게 되는 업(業)인 것인가, 내가 가지게 되는 도구[具]인 것인가?
만약 내가 만들게 된 업(業)이라고 한다면 마치 종자(種子)가 무상(無常)과 같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도공[陶師]이 거짓으로 만든 장부(丈夫)와 같다고 한다면 이러한 ‘나’는 무상(無常)한 것이 되어야 하고 거짓으로 세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대가 ‘항상[常] 실재[實]이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신통(神通)을 갖춘 거짓으로 세운 장부(丈夫)와 같다고 한다면 이러한 ‘나’는 또한 무상(無常)한 것이 되어야 하고 거짓으로 세운 것이 여러 가지의 소작(所作)에 대하여 뜻에 따라 자재(自在)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이 또한 앞의 경우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땅[地]과 같다고 한다면 이는 무상(無常)한 것이 되어야 하며, 또한 계탁하는 대상[所計]의 ‘나’는 지대(地大)와 같이 드러난[顯了] 작업(作業)이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세간(世間)의 지대(地大)는 소작(所作)의 업(業)의 작용이 드러나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부지하여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데, ‘나’라는 것은 이와 같은 업(業)이 드러난 것을 얻을 수 없다.
만약 허공과 같이 된다고 한다면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하니, 색(色)이 없는데도 짐짓 허공을 세웠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허공은 비록 가유(假有)일지라도 업(業)의 작용이 있음을 분명하게 얻을 수 있지만 계탁한 바[所計]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세간(世間)의 허공의 소작(所作)의 업(業)의 작용을 분명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허공에 의해서 가고 오고 굽히고 펴는 등의 작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는 등은 내가 만들게 되는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가지게 되는 도구[具]라고 하고 낫[鎌]과 같다고 말한다면 낫을 떠나서 그 밖의 물건으로도 역시 끊을 수 있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보는 등을 떠나서 그 밖의 다른 물건 위에서 보는 등의 업(業)의 작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불[火]과 같다고 한다면 멋대로 나에 대해서 계탁[計]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세간의 불은 능히 불태우는 것을 떠나서도 역시 스스로 불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보는 것 등의 상(相)을 떠나서 별도의 나가 있다고 한다면 계탁하는 바[所計]의 아상(我相)은 모든 양(量)에 어긋나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그대들이 계탁하는 바[所計]의 ‘나’는 염(染)ㆍ정(淨)과 상응하면서 염(染)ㆍ정(淨)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염(染)ㆍ정(淨)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염(染)ㆍ정(淨)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염(染)ㆍ정(淨)과 상응하면서 염(染)ㆍ정(淨)이 있다고 한다면 제 행(行) 가운데에 질병과 여러 가지 횡액[橫]과 그것의 멈춤과 더욱 증가함을 얻을 수 있나니, 곧 그 제 행(行)은 비록 ‘내’가 없더라도 염(染)ㆍ정(淨)과 상응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바깥의 물질과 같이 안의 몸[內身]도 또한 그러하며 비록 내가 있지 않더라도 염(染)ㆍ정(淨)의 뜻은 성립되기 때문에 그대가 ‘나’라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염(染)ㆍ정(淨)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염(染)ㆍ정(淨)이 있다고 한다면 염(染)ㆍ정(淨)의 상(相)을 떠나서 나에게 염(染)ㆍ정(淨)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그대들이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는 유전상(流轉相)과 상응하면서 유전(流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유전상(流轉相)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유전(流轉)하고 멈추는 것[止息]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유전상(流轉相)과 상응하면서 유전(流轉)하고 멈추는 것이라면 제 행(行)에서 다섯 가지 유전상(流轉相)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원인이 있어야 하며, 둘째는 생길 수 있어야 하고, 셋째는 멸할 수 있어야 하며, 넷째는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일어나야 하며, 다섯째는 달라짐[變異]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제 행(行)에서 이 유전상(流轉相)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마치 몸ㆍ싹ㆍ시내ㆍ등불ㆍ탈 것 등과 같은 유전(流轉)의 작용 속에서 비록 ‘나’라고 하는 것은 없을지라도 곧 그 제 행(行)에 유전(流轉)과 그리고 멈춤이 있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계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그 상(相)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유전(流轉)하고 멈추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는 유전상(流轉相)이 없으면서도 유전(流轉)과 멈춤[止息]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그대들이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라는 것은 경계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것인가, 고(苦)ㆍ낙(樂) 그리고 사업(思業)에 의해서 아울러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 등의 달라지는 것에 의해서 설명하여 수자(受者)ㆍ작자(作者)ㆍ해탈자(解脫者)라고 하는 것인가, 그러한 달라짐에 의하지 않고 설명하여 수자(受者) 등이라고 설하는 것인가?
만약 그 달라지는 것에 의해서라고 한다면 이는 곧 제 행(行)이 수자(受者)가 되고 작자(作者)가 되고 그리고 해탈자(解脫者)가 되는데, 어찌 ‘나’를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가령 이것이 ‘나’라면 나는 무상(無常)한 것이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그 달라지는 것에 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서도 수자(受者)요, 작자(作者)요 해탈자(解脫者)라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만 작자(作者)가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다른 법(法)에 대해서 작자(作者)가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나에게 있어서만 이라고 한다면 세간(世間)에서 불을 타는 것이라고 하거나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법(法)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곧 보는 등의 제 근(根)에 대해서 작자(作者)라고 말하며 헛되이 나를 분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그대들의 뜻에서 바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나에 있어서만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다른 법(法)에서도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나에 있어서만 이라고 한다면 세간에서 그 가설(假說)의 사부(士夫)의 몸을 덕우(德友) 또는 불수(佛授) 등이라고 부르지 않아야 한다.
만약 또한 다른 법(法)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이는 곧 제 행(行) 중에 가설(假說)로 ‘나’라고 이름할 뿐인데, 어찌하여 별도의 내가 있다고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왜냐 하면 세간(世間)의 사람들은 오직 가설(假說)의 사부(士夫)의 몸에 대해서 유정(有情)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정의 이름을 세우고 자(自)ㆍ타(他)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고 계탁하는 견해[見]는 선(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불선(不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선(善)이라고 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 깊이 아견(我見)을 일으키고, 방편(方便)에 의하지 않고도 갑자기 일으키어 여러 중생들에게 해탈(解脫)을 두렵게 여기게 하는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또한 여러 가지 악(惡)과 과실(過失)을 증장(增長)할 수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불선(不善)이라고 한다면 올바름[正]과 전도하지 않음[非顚倒]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삿된 전도[邪倒]로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의 본체[我體]는 실유(實有)라고 하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아(無我)의 견해[見]는 선(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불선(不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선(善)이라고 한다면 그 상주(常住)하며 실유(實有)인 나 위에서 내가 있지 않음을 보면서도 선성(善性)이요, 전도(顚倒)의 계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불선(不善)이라고 한다면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선설(宣說)할 경우와 정근(精勤)의 방편(方便)을 일으킬 경우에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빨리 청정한[白淨] 결과를 증득할 수 있게 하여 모든 악(惡)의 과실(過失)을 여실(如實)하게 대치(對治)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곧 아성(我性) 자체가 ‘나’라고 계탁하는 것인가, 아견(我見)에 의한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아성(我性) 자체가 ‘나’라고 계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느 때나 무아(無我)의 깨달음이 없어야만 한다. 만약 아견(我見)에 의해서라고 한다면 비록 실아(實我)는 없을지라도 아견(我見)의 힘에 의해서 제 행(行) 가운데에 헛되이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반드시 내가 실유(實有)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지각하지 않음[不覺]을 먼저로 하여 그 지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리고 사량의 지각[思覺]을 먼저로 하여 소작(所作)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제 온(蘊) 가운데에 거짓으로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상(相)에 대해서 안립(安立)하여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을 건립(建立)하기 때문에, 그리고 유전(流轉)과 멈춤[止息]을 세우기 때문에, 그리고 수자(受者)ㆍ작자(作者)ㆍ해탈자(解脫者)를 짐짓 세우기 때문에, 그리고 작자(作者)가 있음을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그리고 언설(言說)을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그리고 견해[見]를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실아(實我)가 있다고 계탁하는 것은 모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나는 이제 제일의(第一義)의 아상(我相)에 대하여 말하겠다25). 즉 ‘나’란 제 온(蘊)에서 짐짓 세워서 있다고 하는 것 뿐이요, 실유(實有)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이 가아(假我)가 저 제 온(蘊)과 다르고 다르지 않은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 ‘나’는 실유(實有)의 체(體)라고 혹은 그 제 온(蘊)이 나의 성상(性相)이라고 말하지 말라.
또한 이 가아(假我)는 무상(無常)한 상(相)이면서 항상[恒]하는 상(相)이 아니며, 안보(安保)의 상(相)도 아니고 달라지는 상(相)이며, 생기하는 법의 상(相)이며, 늙고 병들고 죽는 상(相)이다. 오직 제 법(法)의 상(相)일 뿐이며, 오직 고뇌(苦惱)의 상(相)일 뿐이므로 박가범(薄伽梵)께서 ‘비구(比丘)들이여, 마땅히 알라. 제 법(法) 가운데에서 짐짓 내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나는 무상(無常)하여 항상함[恒)]이 없으며 안보(安保)할 수 없으며 변하고 무너지는 법[變壞法]이다’고 이와 같이 자세히 말씀하셨다.
4인(因)에 의하기 때문에 제 행(行) 가운데에서 짐짓 내가 있다고 시설한 것이다. 첫째는 세간(世間)의 언설(言說)로서 쉽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여러 가지 세간(世間)을 수순(隨順)하고자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결정코 무아(無我)를 말하여 여러 가지 두려움들을 끊어 없애기 위함이요, 넷째는 자타(自他)가 성취한 공덕(功德)과 성취한 과실(過失)을 선설(宣說)하여 결정적인 신해심(信解心)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論]은 도리에 맞는 설명이 아니다.
항상함을 계탁하는 론[計常論]26)이란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세간(世間)은 모두 다 실재로 상주(常住)한다. 직(作)의 소작(所作)이 아니며27), 화(化)28)의 소작(所作)이 아니며, 손해(損害)할 수도 없고 적집(積集)하여 머무르는 것이 마치 이사가(伊師伽)29)와 같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제(前際)30)를 계탁하여 일체(一切)는 항상[常]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일부분만 항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후제(後際)31)를 계탁하여 상(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상(相)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상도 아니고 상아님도 아니다[非想非非想]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다시 극미(極微)는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와 같은 계탁[計]을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그 외도(外道)들은 ‘나와 세간(世間)은 상주(常住)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가?
【답】 그들이 계탁하는 인연(因緣)은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으니,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전제(前際)를 계탁한다란 상(上)ㆍ중(中)ㆍ하(下)의 정려(靜慮)에 의하여 숙주수념(宿主隨念)을 일으키되, 불선(不善)의 인연[緣]을 일으켰기 때문에 과거(過去)의 제 행(行)에 대해서 단지 기억[憶念]할 뿐 여실(如實)히 알지 못하며, 과거세(過去世)를 계탁하여 전제(前際)로 삼기 때문에 상견(常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혹은 천안(天眼)에 의해서 현재세(現在世)를 계탁하여 전제(前際)로 삼기 때문에 제 행(行)이 찰나(刹那)로 생멸(生滅)하고 유전(流轉)하는 것을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제 식(識)이 유전상속(流轉相續)하면서 끊임없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이르는 것을 보기 때문에 상견(常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혹은 범왕(梵王)의 뜻에 따라 성립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4대종(大種)으로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것이며, 혹은 제 식(識)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후제(後際)를 계탁한다란 상(想)과 수(受)에 있어서 차별을 본다할지라도 자상(自相)의 차별을 보지 않아서 이 때문에 상견(常見)을 일으켜서 ‘나와 세간은 모두 다 상주(常住)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극미(極微)는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한다란 세간정려(世間靜慮)에 의지해서 여실(如實)하게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는 것이다. ‘유(有)를 먼저로 하여 결과의 모이고 일어남[集起]이 있으며, 떨어지고 흩어짐을 먼저로 하여 결과의 무너지고 멸함[壞滅]이 있다’고 계탁한다. 이 인연에 의해서 그들은 ‘여러 미세한 성품[衆微性]으로부터 거친 물건의 결과[麤物果]가 생기고 점차로 거친 물건을 쪼개어 이에 작은 것으로 머물게 되나니, 그러므로 거친 물건은 무상(無常)하지만 극미(極微)는 항상하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전제(前際)와 후제(後際)에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는 이론[論]은 아집론(我執論)의 차별상(差別相)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이론에서 이미 타파[破]되었으며, 나의 차별상(差別相)에 대한 이론 또한 이미 타파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32)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숙주수념[宿主之念]은 제 온(蘊)을 취한다고 하는 것인가, 나를 취한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제 온(蘊)을 취한다고 한다면 나와 세간이 항상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나를 취한다고 한다면 과거(過去)의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이름 등을 갖고 있는 유정(有情)의 종류들에 대해서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이름과 이와 같은 성(姓) …… 이었다고 기억[憶念]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현전(現前)에 화합(和合)하는 색경(色境)을 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일어날 때 나머지 현전(現前)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는 색경[境]에 대해서 그 밖의 식(識)들은 멸(滅)한다고 하는 것인가, 구른다[轉]고 하는 것인가?
만약 멸(滅)한다고 한다면 멸하여 무너지는[滅壞] 식(識)을 항상하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구른다고 한다면 하나의 경계에 일체시(一切時)에 의지하여 일체의 식(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집착하는 바[所執]로서의 ‘나’는 상(想)의 소작((所作)과 수(受)의 소작(所作)에 의해서 달라짐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달라짐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세간(世間)과 내가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하나의 상(想)이 있은 뒤에 다시 갖가지 상(想)이 있고 다시 작은 상[小想]과 무량상(無量想)이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순수한[純] 즐거움이 있고 뒤에 순수한[純] 괴로움이 있으며, 다시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목숨[命]이 곧 몸[身]이라고 계탁한다면 그것은 ‘내’가 색(色)이라고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목숨[命]과 몸[身]이 다르다고 계탁한다면 그것은 ‘내’가 색이 아니다[非色]고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내’가 갖추어 두루 하고 둘도 없고 결함도 없다고 계탁한다면 그것은 ‘나’ 또한 색(色)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非色]도 하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곧 이 뜻[義]에서 다른 구(句)와 문(文)으로 주장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나’는 색(色)도 아니고 색이 아닌 것[非色]도 아닌 것을 계탁하는 것이다.
만약 적은 색[少色]과 적지 않은 색[少非色]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끝[邊]이 있다고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그것의 무량(無量)함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끝이 없다고[無邊]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다시 두루 하게 보아서 색(色)의 부분은 적고 색이 아닌 부분은 무량(無量)하며 혹은 색(色)의 부분은 무량(無量)하고 색이 아닌 부분은 적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끝이 있으면서[有邊] 또한 끝이 없는 것[無邊]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단지 문구[文]만이 다를 뿐이고 뜻[義]은 다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주장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邊非無邊]고 계탁하는 것이요, 혹은 해탈(解脫)의 ‘나’는 두 가지를 멀리 떠났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또한 극미(極微)의 상주론(常住論)을 계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서 대답하라.
그대들은 관찰(觀察)하고서 극미(極微)의 상주[常]를 계탁하는 것인가, 관찰하지 않고서 극미(極微)의 상주[常]를 계탁하는 것인가?
만약 관찰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을 떠나서 반드시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관찰했다고 한다면 모든 양(量)33)을 어겼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미진(微塵)의 성품은 미세함에 의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인가, 거친 결과의 물질[麤果物]과 그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인가?
만약 미세함에 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떨어져 흩어지고 줄어 없어지며 계속 다시 쇠하여 약해지는 것이 되는데도 이것이 상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극미(極微)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상(相)을 뛰어넘어서 같은 종류의 상(相)이 아니면서도 능히 저 종류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 극미(極微)는 다른 상(相)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극미(極微)로부터 일어나게 되는 거친 물질[麤物]은 달라진 상[異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달라진 상[異相]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달라진 상[異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원인과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역시 상주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는 곧 인과(因果)의 결정이 없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달라진 상[異相]이라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흩어지는[離散] 극미(極微)로부터 거친 물질[麤物]이 생긴다고 하는 것인가, 모인 것[積集]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흩어진 것[離散]으로부터라고 한다면 일체시(一切時)에 일체의 결과가 생겨야만 하니, 이는 곧 인과(因果)의 결정이 없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무인 것[積集]으로부터라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친 결과의 물질[麤果物]이 극미(極微)로부터 생길 때 그 형질(形質)의 양(量)을 초과[過]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저 형질(形質)의 양(量)을 초과한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그 형질(形質)의 양(量)보다 초과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형질(形質)의 부분이 있는 물질[物]로부터 형질(形質)의 부분이 있는 물질[物]이 생기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초과한다고 한다면 모든 극미(極微)의 본체[體]는 세분(細分)이 없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으며, 소생(所生)의 거친 물질[麤物] 또한 항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시 모든 극미(極微)는 본래는 없으나 지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극미(極微)의 상주를 계탁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극미가 만들어 낸 거친 물질[麤物]은 종자[種] 등과 같다고 하는 것인가, 도공[陶師]들과 같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종자(種子) 등과 같다고 한다면 체(體)는 무상(無常)이어야만 하고, 만약 도공 등과 같다고 한다면 그 극미들은 도공들과 같이 생각[思慮]이 있어야만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종자와 도공 등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곧 같은 비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바깥의 물질[外物]의 일어남은 유정(有情)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유정(有情)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바깥의 거친 물질은 유정(有情)에 의해서 생기게 되는데, 소의(所依)의 미세한 물질은 유정(有情)에 의하지 않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무엇이 다시 그것들에 대해서 그 공능(功能)을 짓는 것[制]인가?
만약 유정(有情)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곧 작용이 없이 바깥의 물질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제 온(蘊)과 유정(有情)을 수념(隨念)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의 경계에 의해서 모든 식(識)이 유전[流]하면서 단절(斷絶)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상(想)과 수(受)로 변하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전제(前際)를 계탁하고 후제(後際)를 계탁하여 상주한다고 하는 논[常住論]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관찰하고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공상(共相) 때문에, 그리고 자상(自相) 때문에, 일으켜 만들기[起造] 때문에, 근본(根本)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미(極微)의 상주론[常論]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34) 상주를 계탁하는 이론[計常論]은 도리에 맞는 설명이 아니다. 나는 이제 상주의 상[恒相]은 일체시(一切時)에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일체종(一切種)에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자연으로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다른 것에 의해서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또한 무상상(無常相)이 상주의 상[常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5_0502_a_01L瑜伽師地論卷第六 堂彌勒菩薩說三藏法師玄奘奉 詔譯本地分中有尋有伺等三地之三復次云何不如理作意施設建立拕南曰執因中有果 顯了有去來 我常宿作因自在等害法 邊無邊矯亂 計無因斷空最勝淨吉祥 由十六異論由十六種異論差別顯不如理作意應知何等十六一因中有果論二從緣顯了論三去來實有論四計我論五計常論六宿作因論七計自在等爲作者論八害爲正法論九有邊無邊論十不死矯亂論十一無因見論十二斷見論十三空見論十四妄計最勝論十五妄計淸淨論十六妄計吉祥論因中有果論者謂如有一若沙門婆羅門起如是見立如是論常常時恒恒時於諸因中具有果性謂雨衆外道作如是計何因緣故彼諸外道起如是見立如是論顯示因中具有果性由教及理故教者謂彼先所造教藏隨聞轉授傳至于今示因中先有果性理者謂卽如彼沙若婆羅門爲性尋思爲性觀察尋思地住自辦地住異生地住隨思惟觀察行地彼作是思若從彼性性得生一切世閒共知共立彼爲此非餘又求果者唯取此因非餘卽於彼加功營搆諸所求事非餘若彼果卽從彼生不從餘生是故彼果因中已有若不爾者應立一切是一切因爲求一果應取一切應於一加功營搆應從一切一切果生是由施設故求取故所作決定故彼見因中常有果性應審問彼何所欲何者因相何者果相果兩爲異不異若無異相便無因果二種決定果二種無差別故因中有不應道理若有異相汝意云何中果性爲未生相爲已生相若未生便於因中果猶未生而說是有應道理若已生相卽果體已生復從因生不應道理是故因中非先有果然要有因待緣果生又有相法於有相法中由五種相方可了知一於處所可得如甕中水二於所依可得眼中眼識三卽由自相可得如因自體不由比度四卽由自作業可得由因變異故果成變異或由緣變異果成變異是故彼說常常時恒恒因中有果不應道理由此因緣所立論非如理說如是不異相故相故未生相故已生相故不應道理從緣顯了論者謂如有一若沙門婆羅門起如是見立如是論一切諸法性本是有從衆緣顯不從緣生卽因中有果論者及聲相論者作如是計何因緣故因中有果論者見諸因中先有果性從緣顯耶由教及理故教如前說理者謂如有一爲性尋思爲性觀察廣說如前彼如是果先是有復從因生不應道理非不用功爲成於果彼復何緣而作功用豈非唯爲顯了果耶彼作如是妄分別已立顯了論應審問彼汝何所欲爲無障緣而有障㝵爲有障緣若無障緣者無障㝵緣而有障㝵不應道理若有障緣者屬果之因故不障同是有故不應道理譬如黑障瓫中水亦能障瓫若言障緣障因者亦應顯因俱被障故而言但顯因中先有果性不顯因者不應道復應問彼爲有性是障緣爲果性若有性是障緣者是卽有性常不顯了不應道理因亦是有何不爲障若言果性是障緣者是則一法亦因亦果如芽是種子果是莖等因是卽一法亦顯不顯不應道理又今問汝隨汝意答本法與顯爲異不異若不異者法應常顯顯已復顯不應道理若言異者彼顯爲無因耶爲有因耶若言無因無因而顯不應道理若有因者果性可顯非是因性以不顯因能顯於果不應道理如是無障緣故有障緣故有相故果相故顯不異故顯異故不應道理是故汝言若法性是卽無相若法性有是卽有相若是無不可顯了性若是有方可顯了者不應道理我今當說雖復是有不可取相謂或有遠故雖有而不可又由四種障因障故而不可取由極微細故而不可取或由心散亂而不可取或由根損壞故而不可或由未得彼相應智故而不可取如因果顯了論不應道理當知聲相論者亦不應理此中差別者外聲論師起如是見立如是論聲相常住生無滅然由宣吐方得顯了是故此如顯了論非應理說來實有論者謂如有一若沙門婆羅門若在此法者由不正思惟故起如是見立如是論有過去有未來其相成就猶如現在實有非假因緣故彼起如是見立如是論教及理故教如前說又在此法者於如來經不如理分別故謂如經言切有者卽十二處此十二處實相是又薄伽梵說有過去業又說有過去色有未來色廣說乃至識亦如是理者謂如有一爲性尋思爲性觀察廣說如前彼如是思若法自相安住此法眞實是有此若未來無者爾時應未受相此若過去無者爾時應失自相若如是者諸法自相應不成就由此道理亦非眞實故不應理由是思惟起如是見立如是論過去未來性相實有應審問彼汝何所欲二相與現在相爲一爲異若言相一立三世相不應道理若相異者性相實有不應道理又汝應說自意所欲墮三世法爲是常相爲無常相若常相者墮在三世不應道理若無常相於三世中恒是實有不應道理又今問汝隨汝意答爲計未來法來至現在世耶爲彼死已於此生耶爲卽住未來爲緣生現在耶爲本無業今有業耶爲本相不圓滿今相圓滿耶本異相今異相耶爲於未來有現在分耶若卽未來法來至現在者此便有方所復與現在應無差別復應是不應道理若言未來死已現在生是卽未來不生於今現在世法無今生又未來未生而言死沒不應道理若言法住未來以彼爲緣生現在者彼應是常又應本無今生非未來法生不應道理若本無業用今有業用是則本無今有便有如前所說過失不應道理又汝何所欲此業用與彼本法爲有異相爲無異相若有異相此業用相未來無故不應道理若無異相本無業用今有業用不應道理如無業用有此過失如是相圓滿異相未來分相應知亦爾此中別者復有自性雜亂過失故不應道如未來向現在如是現在往過去如其所應過失應知謂卽如前所計諸因緣及所說破道理如是自相故共相故來故死故爲緣生故業故圓滿故相異故未來有分故說過去未來體實有論不應道理如是說已復有難言若過去未來是無云何緣無而有覺轉若言緣無而有覺轉者云何不有違教過失如說一切有者謂十二處我今問汝隨汝意答世閒取無之覺爲起耶爲不起耶若不起能取無我兔角石女兒等覺皆應是無此不應理又薄伽梵說我諸無諂聲聞如我所說正修行時若有知若無知無此不應道理若言起者汝意云何此取無覺爲作有行爲作無行若作有行取無之覺而作有行不應道理若作無行者汝何所欲無行覺爲緣有事轉爲緣無事轉緣有事轉者無行之覺緣有事轉應道理若緣無事轉者無緣無覺應道理又雖說一切有者謂十二處然於有法密意說有有相於無法密意說有無相所以者何若有相法持有相若無相法能持無相是故俱名爲法俱名爲有若異此者諸修行者唯知於有不知於無應非無閒觀所知法不應道理又雖說言有過去業由此業故諸有情受有損害受損害受此亦依彼習氣密意假說爲謂於諸行中曾有淨不淨業若生若滅由此因緣彼行勝異相續而轉是名習氣由此相續所攝習氣故不愛果生是故於我無過而汝不應道理復雖說言有過去色有未來色有現在色如是乃至識亦爾者此亦依三種行相密意故說謂因相自相果相依彼因相密意說有未來依彼自相密意說有現在依彼果相密意說有過去是故無過又不應說過去未來是實有相何以故應知未來有十二種相故一因所顯相二體未生三待衆緣相四已生種類相五可生法相六不可生法相七未生雜染八未生淸淨相九應可求相十不應求相十一應觀察相十二不應觀察相當知現在亦有十二種相一果所顯相二體已生相三衆緣會相四已生種類相五一剎那相六不復生法相七現雜染相八現淸淨相九可憙樂相十不可憙樂相十一應觀察十二不應觀察相當知過去亦有十二種相一已度因相二已度緣相三已度果相四體已壞相五已滅種類相六不復生法相七靜息雜染相八靜息淸淨相九應顧戀處相十不應顧戀處相十一應觀察相十二不應觀察相計我論者謂如有一若沙門若婆羅起如是見立如是論有我薩埵生者有養育者數取趣者如是等諦實常住謂外道等作如是計故彼外道等起如是見立如是論由教及理故教如前說理者謂如有一爲性尋思爲性觀察廣說如前二種因故一先不思覺率爾而得有薩埵覺故二先已思覺得有作故如是思若無我者見於五事不應起於五有我覺一見色形已唯應起於色形之覺不應起於薩埵之覺二見順苦樂行已唯應起於受覺不應起於勝劣薩埵之覺三見已立名者名相應行已唯應起於想覺不應起於剎帝利婆羅門吠舍戍陁羅佛授友等薩埵之覺四見作淨不淨相應行已唯應起於行覺不應起於愚者智者薩埵之覺五見於境界識隨轉唯應起於心覺不應起於我能見等薩埵之覺由如是先不思覺於此五事唯起五種薩埵之覺非諸行覺是故先不思覺見已率爾而起有薩埵覺故如是決定知有實我又彼如是思若無我者不應於諸行中先起思覺得有所作謂我以眼當見諸色正見諸色已見諸色或復起心我不當見如是等用皆由我覺行爲先導如於眼見如是於耳應知亦爾又於善業造作善業止息不善業造作不善業止息如是等事皆由思覺爲先方得作用應不可得如是等用唯於諸行不應道理由如是思說有我我今問汝隨汝意答爲卽於所見事起薩埵覺爲異於所見事起薩埵覺耶若卽於所見事起薩埵覺者汝不應言卽於色等計有薩埵計有我者是顚倒覺若異於所見事起薩埵覺者我有形不應道理有勝劣或剎帝利等或愚或智或能取彼色等境界不應道理又汝何所爲唯由此法自體起此覺耶爲亦由餘體起此覺耶若唯由此法自體起此覺者卽於所見起彼我覺不應說名爲顚倒覺若亦由餘體起此覺卽一切境界各是一切境界覺因不應理又汝何所欲於無情數情覺於有情數無情覺於餘有情數餘有情覺爲起爲不起耶若起者卽無情應是有情有情應是無情餘有情應是餘有情此不應理若不起者則非撥現量不應道理又汝何所欲此薩埵覺爲取現量義爲取比量義耶若取現量義者唯色等薀是現量義我非現量義故不應理若取比量義者如愚稚等未能思度不應率爾起於我覺又我今問汝隨汝意如世閒所作爲以覺爲因爲以我爲因若以覺爲因者執我所作不應道理若以我爲因者要先思覺得有所作不應道理又汝何所欲所作事因常無常耶若無常者此所作因體是變異執我有作不應道理若是常者卽無變異無變有作不應道理又汝何所欲爲有動作之我能有所作無動作之我有所作耶若有動作之能有所作者是卽常作不應復作若無動作之我有所作者無動作性而有所作不應道理又汝何所欲爲有因故我有所作爲無因耶若有因此我應由餘因策發方有所作應道理若無因者應一切時作一切不應道理又汝何所欲此我爲依自故能有所作爲依他故能有所作若依自者此我自作老雜染等事不應道理若依他者計我所作不應道理又我今問汝隨汝意答卽於薀施設有我爲於諸薀中爲薀外餘處爲不屬薀耶若卽於薀施設我者是我與薀無有差別而計有我諦實常住不應道理若於諸薀中者此我爲常爲無常耶若是常者常住之我爲諸苦樂之所損益不應道理若無損益起法非法不應道理若不生起法及非法應諸薀身畢竟不起又應不由功用我常解脫若無常者離薀體外有生有滅相續流轉法不可得故不應理又於此滅壞後於餘不作而得有大過失故不應理薀外餘處者汝所計我應是無爲應道理若不屬薀者我一切時應無染污又我與身不應相屬此不應理又汝何所欲所計之我爲卽見者等爲離見者等相若卽見者等相者爲卽於見等假立見者等相爲離於見等別立見者等相若卽於見等立見者等相者則應見等是見者等而汝立我爲見者等不應道理以見者等與見等相無差別故若離於見別立見者等相者彼見等法爲是我所成業爲是我所執具若是我所成業者若如種子應是無常不應道若言如陶師等假立丈夫此我應是無常應是假立而汝言是常是實不應道理若言如具神通假立丈夫此我亦應無常假立於諸所作隨意自在此亦如前不應道理若言如地應是無常又所計我無如地大顯了作業故不應理何以故世閒地大作業用顯了可得謂持萬物令不墜我無是業顯了可得若如虛空非實有唯於色無假立空故不應道虛空雖是假有而有業用分明可非所計我故不應理世閒虛空所作業用分明可得者謂由虛空故起往來屈伸等業是故見等是我所成業不應道理若是我所執具者言如鐮如離鐮外餘物亦有能斷作如是離見等外於餘物上見等業不可得故不應道理若言如火徒計於我不應道理何以故如世閒火離能燒者亦自能燒故若言離見者等相別有我者則所計我相乖一切量不應道理又我今問汝隨汝意汝所計我爲與染淨相應而有染爲不與染淨相應而有染淨耶與染淨相應而有染淨者於諸行中有疾疫災撗及彼止息順益可得彼諸行雖無有我而說有染淨相應如於外物內身亦爾雖無有我染淨義成故汝計我不應道理若不與染淨相應而有染淨者離染淨相我有染淨不應道理又我今問汝隨汝意汝所計我爲與流轉相相應而有流轉爲不與流轉相相應而有流轉及止息耶若與流轉相相應而有流轉及止息者於諸行中有五種流轉相可得一有因二可生三可滅四展轉相續生起五有變異若諸行中流轉相可得如於身乘等流轉作用中雖無有我卽彼諸行得有流轉及與止息何須計我若不與彼相相應而有流轉及止息者則所計我無流轉相而有流轉止息不應道又我今問汝隨汝意答汝所計我爲由境界所生若苦若樂及由思業幷由煩惱隨煩惱等之所變異說爲受者作者及解脫者爲不由彼變異說爲受者等耶若由彼變異者是卽諸行是受者作者及解脫者何須計設是我者我應無常不應道理不由彼變異者我無變異而是受者作者及解脫者不應道理又汝今應說自所欲爲唯於我說爲作者爲亦於餘法說爲作者若唯於我世閒不應說火爲燒者光爲照者若亦於餘卽於見等諸根說爲作者徒分別不應道理又汝應說自意所欲唯於我建立於我爲亦於餘法建立於我若唯於我者世閒不應於彼假說士夫身呼爲德友佛授等若亦於餘法者是則唯於諸行假說名我何須更執別有我耶何以故諸世閒人唯於假設士夫之身起有情想立有情名及說自他有差別故又汝何所欲計我之見爲善爲不善耶若是善者何爲極愚癡人深起我見不由方便爾而起能令衆生怖畏解脫又能增長諸惡過失不應道理若不善者應說正及非顚倒若是邪倒所計之我體是實有不應道理又汝何所欲無我之見爲善爲不善耶若言是善於彼常住實有我上見無有我而是善性非顚倒計不應道理若言不善而一切智者之所宣說精勤方便之所生起令諸衆生不怖解脫能速證得白淨之果諸惡過失如實對治應道理又汝意云何爲卽我性自計有我爲由我見耶若卽我性自計有我者應一切時無無我覺若由我見雖無實我由我見力故於諸行中妄謂有我是故汝計定實有我不應道理如是不覺爲先而起彼覺故覺爲先見有所作故於諸薀中假施設故由於彼相安立爲有故建立雜染及淸淨故建立流轉及止息故立受者作者解脫者故施設有作者施設言說故施設見故計有實我皆不應理又我今當說第一義我相所言我者唯於諸法假立爲有非實有我然此假我不可說言與彼諸法異不異性勿謂此我是實有體或彼諸法卽我性相又此假我是無常相是非恒相非安保相是變壞相生起法相老病死相唯諸法相唯苦惱相薄伽梵說苾芻當知於諸法中立有我此我無常無恒不可安保變壞法如是廣說由四因故於諸行假設有我一爲令世閒言說易故二爲欲隨順諸世閒故三爲欲斷除謂定無我諸怖畏故四爲宣說自他成就功德成就過失令起決定信解心故是故執有我論非如理說計常論者謂如有一若沙門若婆羅起如是見立如是論我及世閒實常住非作所作非化所化不可損積聚而住如伊師迦謂計前際一切常者說一分常者及計後際有相者說無相者說非想非非想者復有計諸極微是常住者作如是計何故彼諸外道起如是見立如是我及世閒是常住耶彼計因緣如經廣說隨其所應盡當知此中前際者謂或依下上靜慮起宿住隨念不善緣起故於過去諸行但唯憶念不如實知計過去世以爲前際發起常見或依天眼計現在世以爲前際於諸行剎那生滅流轉不如實又見諸識流轉相續從此世閒彼世閒無斷絕故發起常見或見梵王隨意成立或見四大種變異或見諸識變異計後際者於想及受雖見差別然不見自相差別是故發起常謂我及世閒皆悉常住又計極微是常住者以依世閒靜慮起如是見由不如實知緣起故而計有爲先果集起離散爲先有果壞滅由此因彼謂從衆微性麤物果生漸析麤乃至微住是故麤物無常極微是此中計前際後際常住論者是我執論差別相所攝故我論已破當知我差別相論亦已破訖又我今問汝隨汝意答宿住之念爲取諸薀爲取我耶若取薀者執我及世閒是常應道理若取我者憶念過去如是名等諸有情類我曾於彼如是名如是乃至廣說不應道理又汝意云何緣彼現前和合色境眼識起時於餘不現不和合境所餘諸識爲滅爲轉若言滅者滅壞之識而計爲常不應道理若言轉者由一境界依一切時一切識起不應道理又汝何所欲執之我由想所作及受所作爲有變爲無變異若言有者計彼世閒及我常住不應道理若言無者有一想復種種想復有小想及無量想應道理又純有樂已復純有苦復有苦有樂有不苦不樂不應道理又若計命卽是身者彼計我是色若計命異於身者彼計我非色若計我俱遍無二無缺者彼計我亦是色亦非色若爲對治此故卽於此義中由異句異文而起執者彼計我非色非非色又若見少色少非色者彼計有邊見彼無量者彼計有無邊若復遍見而色分少非色分無量或色分無量非色分少者彼計亦有邊亦無邊爲對治此故但由文異不由義異起執者彼計非有邊非無邊或計解脫之我遠離二種又計極微常住論我今問汝隨汝意答汝爲觀察極微常爲不觀察計彼常耶若不觀察者離慧觀察而定計常不應道理若言已觀察者違諸量故不應道理又汝何所欲諸微塵性爲由細故彼是常爲由與麤果物其相異故彼常耶若由細者離散損減轉復羸而言是常不應道理若言由相異故者是則極微超過地風之相不同種類相故而言能生彼類果應道理又彼極微更無異相可得故不中理又汝何所欲從諸極微所起麤物爲不異相爲異相耶若言不異相者由與彼因無差別故亦應是常是則應無因果決定不應道理若異相者汝意云何爲從離散極微麤物得生爲從聚集耶若言從離散者一切時一切果生是則應無因果決不應道理若從聚集者汝意云何彼麤果物從極微生時爲不過彼形質之量爲過彼形質量耶若言不過彼形質量者從形質分物生形質有分物不應道理若言過者諸極微體無細分故不可分析所生麤物亦應是常亦不中理若復說言有諸極微本無今起者是則計極微常不應道又汝何所欲彼諸極微起造麤物爲如種子等爲如陶師等耶若言如種子等者應如種子體是無常若言如陶師等者彼諸極微應有思慮陶師等不應道理若不如種等及陶師等者是則同喩不可得故不應道又汝意云何諸外物起爲由有情爲不爾耶若言由有情者彼外麤物由有情生所依細物不由有情不應道理誰復於彼制其功能若言不由有情者是則無用而外物生不應道如是隨念諸薀有情故由一境界一切識流不斷絕故由想及受變不變故計彼前際及計後際常住論者不應道理又由觀察不觀察故由共相故由自相故由起造故根本所用極微常論不應道理是故計常論非如理說我今當說常住之相一切時無變異相若一切種無變異若自然無變異相若由他無變異又無生相當知是常住相瑜伽師地論卷第六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등의 3지(地)를 간략히 5문(門)으로 시설(施說)하여 건립(建立)하는 가운데에 이하는 네 번째로 불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不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것이다.
  2. 2)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삿된 주장에 대하여 기술한다.
  3. 3)수론사(數論師 Saṃkhya)들을 말한다. 이들은 25제(諦)를 세우는데, 신아(神我 Puruṣa)의 제(諦)를 제외한 23제(諦)를 과(果)라고 하고 자성(自性 Prakṛti)의 제(諦)를 인(因)이라고 하며, 과(果)는 인(因) 가운데 존재하고 인(因)ㆍ과(果)의 별체(別體)는 없다고 주장한다.
  4. 4)가르침의 내용을 수록한 장경(藏經)을 의미한다.
  5. 5)원인[因]을 의미한다.
  6. 6)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이치로써 그들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7. 7)그 고유의 특징을 가진 본질을 의미한다.
  8. 8)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종연현료론(從緣顯了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종연현료론(從緣顯了論)의 삿된 주장[邪執]을 기술한다.
  9. 9)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종연현료론(從緣顯了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이치로써 그들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10. 10)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거래실유론(去來實有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거래실유론(去來實有論)의 삿된 주장[邪執]을 기술한다.
  11. 11)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거래실유론(去來實有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이치로써 그들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12. 12)미래세(未來世)를 의미한다.
  13. 13)현재세(現在世)를 의미한다.
  14. 14)묘음존자(妙音尊者)의 설은 3세(世)에 모두 3세(世)의 상(相)이 있기 때문에 3세(世)가 뒤섞이는 과실(過失)이 있다고 논파하는 것이다.
  15. 15)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아론(計我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계아론(計我論)의 삿된 주장[邪執]을 기술한다.
  16. 16)범어 Sattva의 음사어로서 유정(有情)으로 의역(意譯)된다.
  17. 17)삭취취(數取趣)는 범어 Pudgala의 의역(意譯)으로서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음사되기도 한다. 이는 곧 유정범부(有情凡夫)라는 뜻으로서 범부(凡夫)는 수시로 5취(趣)에 태어남을 취하고 윤회(輪廻)하기 때문에 삭취취(數取趣)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18. 18)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은 상주(常住)를 당주(當住)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상주(常住)의 오기(誤記)인 듯 하여 바로 잡아 해석한다.
  19. 19)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아론(計我論)에 대하여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그들의 삿된 주장[邪執]을 열 가지로 타파한다.
  20. 20)이것은 수(受)의 심소(心所)이며, 수과(修果)의 뛰어남과 열등함을 말하는 것이다.
  21. 21)이는 상(想)의 심소(心所)를 말하는 것이다.
  22. 22)이는 행온(行蘊)을 말하는 것이다.
  23. 23)이는 식온(識蘊)을 말하는 것이다.
  24. 24)여기에서 온(蘊)이란 5온(蘊)을 말하며, 아체(我體;靈魂)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 상즉(相卽)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즉온(卽蘊)의 아(我)라고 하는 것이다.
  25. 25)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아론(計我論)에 대한 기술중, 그 세 번 째로 정의(正義)를 나타낸다.
  26. 26)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다섯 번째로 계상론(計常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계상론(計常論)의 삿된 주장을 기술한다.
  27. 27)지음[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작(自作)으로서 숙작인(宿作因)을 말하며 둘째는 타작(他作)으로서 공(空)ㆍ시(時)ㆍ방(方)ㆍ아(我)ㆍ본제(本際) 등의 지음[作]을 말한다. 그런데 수론사(數論師)들은 이 두 가지가 작자(作者)가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8. 28)화(化)란 모든 사물을 변화시키는 자재천(自在天) 및 범왕(梵王) 등을 말한다.
  29. 29)이사가(伊師伽)란 범어(梵語) Īṣīka의 음사어로서 인도[西方]에는 이에 대한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왕사성(王舍城) 부근의 이사가산(伊師伽山)이 있어서 크고도 견고하므로 이를 높고 상주(常住)하며 견고한 나[我]에 비유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사가(伊師伽) 풀이 있어서 정실(貞實)하여 일찍이 쇠락한 적이 없다고 하므로 이를 항상한 나에 비유하는 것이다.
  30. 30)전세(前世)를 말한다.
  31. 31)후세(後世)를 말한다.
  32. 32)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상론(計常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계상론(計常論)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33. 33)3량(量)을 말한다. 양(量)이란 척도를 의미한다.
  34. 34)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상론(計常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세 번째로 정의(正義)를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