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5_0614_c_01L
유가사지론 제19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8) 사소성지 ④

현성(賢聖)은 항상 맨 처음[最]으로 착한 말[善語]을 설하고
애이면서 애 아닌 것도 아닌 말[愛非不愛語]을 두 번째로 하며
제이면서 제 아닌 것도 아닌 말[諦非不諦語]을 세 번째로 하며
법(法)이면서도 법 아니지도 아닌 말[法非非法語]을 네 번째로 하네.
賢聖常說最善語  愛非不愛語第二
諦非不諦語第三  法非非法語第四

지금 이 게송에서 ‘착한 말[善語]’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착한 설명[善說]과 착한 언어[善言]과 착한 이론[善論]이다. 착한 설명[善說]에는 세 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하리니, 소위 뜻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염오가 없는 것[無染]과 오직 착함[善]만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말에 의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경사스럽게 하고 기쁘게 하며, 두 번째 말에 의해서 자기의 시라(尸羅)를 끝내 무너뜨리지 않게 하며, 세 번째 말에 의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처(不善處)에서 나와 선처(善處)에 안주하게끔 하나니, 이로 인하여 이익과 안락을 끌어당긴다[引攝]48).
어떤 경우에는 애어(愛語)이면서도 진실한 말[諦]도 아니고 법어[法]도 아닌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미묘(美妙)한 말로써 다른 사람의 진실하지 않은 덕(德)을 칭찬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한 말[諦語]이면서 애어[愛]도 아니고 법어[法]도 아닌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염오심(染汚心)을 가지고 추악(麤惡)한 말로 다른 사람의 진실한 과오(過惡)를 질책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법어(法語)이면서도 애어[愛]도 아니고 진실한 말[諦]도 아닌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칭찬과 꾸짖음을 잘 알고 칭찬할 만한 것과 꾸짖을 만한 것을 알고 나서도 칭찬도 하지 않고 꾸짖지도 않으며 오직 좋은 방편[善方便]으로써 정법(正法)만을 말해 주며 능히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처(不善處)에서 벗어나 선처(善處)에 안주하게끔 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요점[標]과 풀이[釋]로 모든 착한 말[善語]을 현시하였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믿음[信]ㆍ부끄러움[慚]ㆍ계율[戒]ㆍ보시[施]ㆍ법(法)은
선인(善人)이 칭찬하는 바요
이것을 천으로 나아가는 도[趣天道]라고 하며
능히 천세간(天世間)에 갈 수 있네.
信慚戒施法  善人所稱讚
是名趣天道  能往天世間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집에 있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청정한 계[淨戒]를 수지(受持)하고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를 취득하고 곧 만족한 기쁨[喜足]을 일으켜 기물(器物)을 축소해 버리고[減除] 자연(資緣)49)을 검소히 하며 무릇 여법(如法)하게 획득한 이익[利養]은 끝내 사사로이 숨기지 않고 반드시 지인(智人)과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과 함께 수용하며, 모든 정법(正法)의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범행(梵行)을 잘 찬양하니, 이른바 계경(契經) 내지 논의(論議)를 모두 잘 수지하고 연구하고 통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며 그들을 위해서 널리 열어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가 이미 이러한 선법(善法)들을 성취한다면 반드시 세 가지의 뛰어난 이로움[勝利]을 얻게 됨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과 진실한 선인(善人)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요, 둘째는 만약 그가 시라(尸羅)와 재물 보시[財施]에서 끌어들인 복덕(福德)의 자량(資糧)과 법시(法施)에서 끌어들인 지혜의 자량(資糧)을 잘 원만히 한다면 곧 해탈을 증득하는 처소[證解脫處]50)와 청정한 여러 천(天)들의 동분(同分) 가운데에 취입(趣入)하게 되는 것이요, 셋째는 만약 그 두 가지의 자량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그것으로 하여금 속히 원만하게 될 수 있도록 하여 몸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는 반드시 선취(善趣)에 태어나고 대부분은 천상(天上)의 락세계(樂世界) 중에 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여 ‘나쁜 시라(尸羅)는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믿고 ‘간탐자(慳貪者)는 빈궁(貧窮)의 과보[報]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믿고 이와 같이 믿고 나서는 현법(現法) 중에 악계(惡戒)와 간탐(慳貪)에 깊이 수치스러움을 일으키며,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나쁜 시라(尸羅)를 버리고 청정한 계율[淸淨戒]을 받으며, 간탐을 버리고 무구심(無垢心)으로써 집에 편안히 머물면서 …… 내지 잘 보시를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인연에 의해서 현법(現法)에서 성현(聖賢)의 칭찬을 받고 몸이 무너진 이후에는 내지 선취(善趣)와 천상(天上)의 락세계(樂世界)에 반드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두 가지의 정행(正行)과 정행(正行)의 과보가 지니는 뛰어난 이익[勝利]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다문(多聞)은 능히 법(法)을 알 수 있고
다문(多聞)은 능히 악(惡)을 여의며
다문(多聞)은 무의(無義)를 버리며
다문(多聞)은 열반(涅槃)을 얻는다네.
多聞能知法  多聞能遠惡
多聞捨無義  多聞得涅槃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선시(先時)에 의하여 바르게 지어야 할 시론(施論)과 계론(戒論)과 생천론(生天論)과 전도 없는 교법(敎法)에 대하여 공경하게 청문하고 듣고 나서는 드디어 그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현법(現法) 중의 갖가지 악행(惡行)과 장차 악취(惡趣)의 괴로움은 무의(無義)의 원인이어서 모든 악행(惡行)은 마땅히 속히 원리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선취(善趣)에 가고 악취(惡趣)에 태어나는 괴로움의 무의(無義)의 원인을 버려야 한다’고 그는 이와 같은 법의(法義)를 분명히 알아서 법과 수법행(隨法行)으로써 능히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멀리 여의고, 능히 즐거움의 원인[樂因]을 능히 끌어당겨서, 이 인연으로 인해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다.
또한 더욱 더[增上] 4성제(聖諦) 등과 상응하는 교법(敎法)에 대해서 공경히 청문하고 청문하고 나서 드디어 그 이치를 능히 아니[了知], 일체의 생사(生死)의 큰 괴로움[大苦]과 적정열반(寂靜涅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법의(法義)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만약 근(根)이 이미 있고 자량(資糧)이 이미 채워지면 곧 능히 이와 같은 이치[義]를 획득한다. 식(識)ㆍ심(心)이 청정해지기 때문에 잠시 법을 듣고 나서, 여러 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현관(現觀)하지 않는 자는 능히 현관(現觀)에 들어가고 이미 현관(現觀)을 성취한 자는 바로 누진(漏盡)을 얻는다.
만약 근(根)이 성숙하지 않고 자량(資糧)도 아직 채워지지 않았으면 곧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여러 악(惡)을 멀리 여의고 증상계(增上戒)에 의지하여 증상심(增上心)을 일으키며, 증상심(增上心)에 의지하여 증상혜(增上慧)를 일으킨다. 이것에 의해서 모든 괴로움[一切苦]의 근본인 번뇌의 무의[煩惱無義]를 버리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먼저 정법(正法)을 듣고 여리(如理)하게 사유(思惟)하며, 먼저 여리(如理)하게 사유(思惟)하고 법(法)과 수법행(隨法行)을 하며, 법과 수법행을 선인(先因)으로 삼기 때문에 뛰어난 이익의 결과[勝利果]를 얻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지자(智者)는 허공[空]과 같아서 염오(染汚)가 없으며
움직이지 않음[無動]은 마치 천제(天帝)의 당기[幢]와 같으며
청량함[淸凉]이 가득 찬 못에 떠다니는 것과 같아서
진흙[淤泥]의 생사(生死)의 바다를 즐기지 아니하네.
智者如空無染汚  不動猶如天帝幢
如泛淸凉盈滿池  不樂淤泥生死海

지금 이 게송에서는 마음이 잘 해탈하고 모든 희론(戲論)을 뛰어넘은 아라한필추(阿羅漢苾芻)는 마치 허공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왜냐 하면 마치 허공은 모든 희론(戲論)을 떠나고 정(淨)과 부정(不淨)에 모두 다 능히 물들지 않는 것처럼, 모든 아라한 또한 그러하여 일체의 세법(世法)에 수순하고[順] 또한 거슬러도 모두 다 물들지 않나니, 소위 이익[利]과 쇠손[衰]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에 이르기까지이다.
또한 여러 유학(有學)들은 욕탐(欲貪)을 여의고 나서 아라한(阿羅漢)을 향하여 4념주(念住)에 잘 그 마음을 머물게 하고,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를 닦을 때에는 마치 천제(天帝)의 당기[幢]와 같아서, 그 모든 움직임[發動]과 교만[憍擧]와 희론(戲論)과 영위(營爲)와 생원(生願)과 함께 행하는 모든 탐애(貪愛)에 대해서 능히 기울거나 흔들리지[頓動] 않는다.
또한 여러 유학(有學)들은 욕탐(欲貪)을 여의고 나서 불환과(不還果)를 얻고 더욱 더 해탈[上解脫]에 대해서 마음으로 욕락(欲樂)을 일으키니, 마치 청량(淸凉)한 못[泉池]에 떠다니는 것과 같아서, 애미정(愛味定)51)의 상분(上分)의 제 결(結)이 타오르는 진흙 속에서는 끝내 즐거워하지[欣樂] 않는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지[欣樂] 않기 때문에 또한 생사(生死)의 대해(大海)도 즐거워하지[欣樂] 않는 것이다.
또한 차별(差別)이 있다. 말하자면 아라한(阿羅漢)의 모든 음식과 언설(言說)과 유행(遊行)은 무상주(無相住)에 처하나 유여의(有餘依)의 괴로움이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그 차례대로 3처(處)를 알아야만 한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혜해탈(慧解脫)의 여러 아라한(阿羅漢)과 유학(有學)의 신증(身證)과 그리고 구해탈(俱解脫)의 여러 아라한들을 말한다. 그 차례대로 3처(處)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3계(界)의 욕(欲)을 여의어도 아직 부처님의 성지(聖旨)에 오히려 여의(餘依)가 있다는 것과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어 승진도(勝進道)에 포함되는 것과 불환과(不還果)를 현시한다. 다음에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간략히 말하면 해탈(解脫)의 뛰어난 이익[勝利]과 등지(等持)의 뛰어난 이익[勝利]과 지혜의 뛰어난 이익[勝利]52)을 현시한다. 다시 차별이 있다. 간략히 말하면 증상심혜학(增上心慧學)의 소득과(所得果)를 현시하고 증상심혜(增上心慧)의 2학(學)을 현시한다.

만약 색(色)으로써 아(我)를 헤아리고53)
음성(音聲)으로써 아(我)를 찾으면서
욕탐(欲貪)에 집지(執持)된 자는
그는 아(我)를 알 수 없느니라.
若以色量我  以音聲尋我
欲貪所執持  彼不能知我

만약 안[內]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만[了知]54)
밖[外]에 대해서 볼 수 없다면
안의 결과[內果]로 관찰한 것이므로
그는 음성에 이끌린 것[所引]이네
若於內了知  於外不能見
由內果觀察  彼音聲所引

만약 안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無知]55)
밖에 대해서 볼 수 있다면
밖의 결과[外果]로 관찰한 것이므로
또한 음성에 이끌린 것이네.
若於內無知  於外而能見
由外果觀察  亦音聲所引

만약 안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56)
밖에 대해서도 볼 수 없다면
그는 두루 막혀진 우부(愚夫)라서
역시 음성에 이끌린 것이네.
若於內無知  於外不能見
彼普障愚夫  亦音聲所引

만약 안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57)
밖에 대해서도 볼 수 있다면
영웅(英雄)의 출리(出離)의 지혜라서
음성에 이끌린 것이 아니네.
若於內了知  於外亦能見
英雄出離慧  非音聲所引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본체[體]는 이생(異生)이어서 아직 허망분별(虛妄分別)의 욕탐(欲貪)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세존(世尊)께서 갖추신 32대장부상(大丈夫相)을 보고서 드디어 바로 헤아리기를 ‘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반드시 여래(如來)ㆍ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이시라 그 설하신 법은 결정코 미묘(微妙)할 것이며, 그 제자들의 행하는 바[所行]도 반드시 착할 것이다’라고 관찰하다가, 그는 뒷날 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바르지 아니한 법을 듣고 다른 이론[論]과 다른 음성(音聲)을 듣고 다른 사람을 믿고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이끌렸기 때문에 불(佛)ㆍ법(法)ㆍ승(僧)에 대해서 오히려 훼방(毁謗)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여실(如實)하게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르르는 것이다.
다시 어떤 이생(異生)은 안[內]의 정려(靜慮)의 과보[果]의 천안통(天眼通)에 의해서 멀리서 세존(世尊)을 보고서는 곧바로 ‘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결정코 여래(如來)ㆍ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이시다’라는 알음알이[解]를 짓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시 밖[外]의 욕계계(欲界繫)의 업(業)의 과보의 육안(肉眼)에 의해서 보고 나서 헤아리니, 그 또한 다른 사람의 이론[論]과 다른 사람의 음성(音聲)을 따르며 다른 사람을 믿고 따르고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된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다시 어떤 이생(異生)은 그와 같은 것을 보는 것도 전혀 없고 그는 두루 막혀져서 오랜 세월 동안[長時] 다른 사람의 음성에 이끌린다.
만약 여러 성현(聖賢)의 경우라면 탐욕(貪欲)을 끊어 없애고 조복하며 초월하여 성스런 혜안(慧眼)을 얻나니, 그는 이와 같은 성스러운 혜안에 의하기 때문에, 안[內]으로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을 증득하여 알기 때문에 비록 밖[外]으로 여래(如來)의 색신(色身)을 보고 혹은 제다(制多)58)를 보거나 그림[圖畵]을 보더라도 능히 제일의(第一義)의 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이 아니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와 같이 안으로 바르게 알고[正知] 밖으로도 바르게 관하기[正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론과 다른 사람의 음성을 따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믿고 따르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지도 않아서, 불(佛)ㆍ법(法)ㆍ승(僧)에 대하여 결정코 믿고 받는다[信受].
위와 같이 모두 여실(如實)하게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은 데에 이르른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오직 세속으로만 여래(如來)를 보는 것은 곧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만약 승의(勝義)로서 여래(如來)를 보는 것만이 결정적인 것임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제 6의 증상왕(增上王)이
물들 때[染時]는 물듦[染]을 스스로 잡고[自取]
물듦[染]이 없는 데에서는 물들지 않나니
물듦이란 우부(愚夫)를 이름하네.
第六增上王  染時染自取
於無染不染  染者名愚夫

지금 이 게송에서 제 6의 증상왕(增上王)이란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한다. 만약 이미 다섯 가지 폭류를 건넜지만 여섯 번째의 의폭류(意暴流)를 아직 건너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때 그 마음은 여러 선정(禪定)의 모든 애미(愛味)를 따르게 되기 때문에 ‘물든 때[染時]’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어떤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오랜 세월 동안[長夜] 물듦[染]을 잡아서 자기 소유로 삼고 사랑할만한 법[可愛法]을 집장(執藏)하고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설하여 ‘물듦[染]을 스스로 잡는다[自取]’고 하는 것이다.
탐(貪)을 물듦[染]이라고 이름하고 탐(貪)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미래세[當來世]의 괴로움을 또한 물듦이라고 한다.
만약 물듦을 스스로 잡아서[自取] 물들어 버리는 마음[所染心]에 대하여 공용(功用)을 따르지 않고 섭수(攝受)하고 저지하고 의대치(意對治)의 작의(作意)를 닦는다면, 이 때문에 이와 같은 그 마음은 현법(現法) 중에서 염오(染汚)가 있지 않고 염오가 없는 마음에서, 이는 염오를 스스로 잡는 것[自取]이므로 미래세에 그로 인한 모든 괴로움 역시 물들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것59)을 따라 공용(功用)을 지으면서 섭수(攝受)하지도 않고 저지하지도 않으며 의(意)로써 대치(對治)의 작의(作意)를 닦지 않는다면 이 때문에 이와 같은 괴로움의 원인[苦因]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을 받으며, 이 괴로움의 원인을 능히 멀리 여읠 수 없기 때문에 ‘우부(愚夫)’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멀리 여의는 모든 뛰어난 이익[勝利]을 현시하고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으로 스스로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이 어리석은 범부[愚夫]의 성품임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어떤 성(城)에 뼈로 담을 만들고
힘줄과 살로서 칠하고 장식했는데
그 속에는 탐욕[貪]과 진에[恚]가 있고
교만[慢]과 숨김[覆]을 유지[任持]하네.
有城骨爲墉  筋肉而塗飾
其中有貪恚  慢覆所任持

지금 이 게송에서 ‘성(城)’이라고 말하는 것은 심(心)ㆍ의(意)ㆍ식(識)이다. 이 성(城)이야말로 뼈로써 벽돌을 충당하고 힘줄로 이음새를 대신하고 살로 칠하게 되니, 몸의 뼈로써 담을 만들어 주위를 둘러싼 것이다. 이 성(城)에서는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의 모든 선법(善法)을 해치는[違害] 네 가지 악법(惡法)이 있어서 유지된다. 첫째는 재가(在家)로서 여러 욕을 수용하는 탐욕[貪]과 진에[瞋]를 말하고, 둘째는 악설(惡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출가한 것으로서 교만[慢]과 숨김[覆]을 말한다. 여러 욕[諸欲]을 집착하여 여러 욕을 희구(悕求)하고 더러운 행[鄙穢行]과 서로 등지지 않기 때문에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오히려 신수(信受)하지 않거늘 하물며 선(善)을 닦음이겠는가.
악설(惡說)의 법(法)을 믿고 교만(憍慢)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연히 불(佛)ㆍ세존(世尊) 혹은 제자들에게 나아갈 수가 없으며, 설령 불(佛)ㆍ세존(世尊) 혹은 불제자(佛弟子)들이 가엾이 여겨서[悲愍] 스스로 그곳에 간다하여도, 그는 숨김[覆]의 수번뇌(隨煩惱)에 얽혀서 그 마음을 염오(染汚)한지라 오히려 여실(如實)히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거늘, 하물며 신해(信解)하여 여러 선법(善法)을 닦음이겠는가.
이와 같이 그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와 상응하는 선법(善法)의 두 가지 마음의 성(城)에 모두 들어갈 수 없거늘, 어찌 하물며 다시 능히 잡아서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재가(在家)나 출가(出家)나 간에 모두 네 가지의 잡염(雜染)의 인연으로 인하여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를 잃고 무너뜨린다[失壞]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거북이가 팔다리[支]를 자신의 껍데기에 감춘 것과 같이
필추(苾芻)는 의(意)의 심사(尋思)를 잘 거두어서
의지하는 바도 없고60) 남을 괴롭히지도 않아서
반열반(般涅槃)을 증득하니 비방하는 바 없어라.
如龜藏支於自★  苾芻善攝意尋思
無所依止不惱他  證般涅槃無所謗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초정려(初靜慮)에 의지하여 세 가지 악한 심(尋)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른바 욕심(欲尋)61)과 에심(恚尋)62)과 해심(害尋)63)이다. 또한 초정려지(初靜慮地)의 여러 가지 선(善)의 심사(尋思)를 능히 버리고 무심무사정(無尋無伺定) 중에 안주하니, 마치 거북이가 팔다리[支]를 자신의 껍데기에 감춘 것과 같다. 심사(尋思)를 줄여 거두는 것[略攝] 또한 이와 같다.
무심무사정(無尋無伺定)이란 이것64) 위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는 이 정(定)에서 바로 안주할 때 애미(愛味)를 일으키지 않으며 나온 뒤에는 사랑할만한 락법(可愛樂法)을 성취하고 조순(調順)하고 유화(柔和)하여 함께 머물기 쉬우며 지혜 있는 사람과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며, 또한 지혜 있는 사람과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기뻐하며[欣樂] 함께 살뿐만이 아니라 다툼이 없는 법[無違諍法]을 성취한다.
그는 이와 같은 바른 방편[正方便]에 의하기 때문에 여러 성제(聖諦)에 있어서 현관(現觀)에 들 수 있으며, 누진(漏盡)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제 법(法)에 대하여 다른 것을 믿지 않아서 깨끗하고[善淨] 뛰어난[勝] 지견(智見)을 획득하기 때문에, 여실(如實)하게 법이 진실로 법임을 분명히 알고 비나야(毘奈耶)가 진실로 비나야임을 분명히 안다. 이와 같이 알기 때문에 끝내 제 견(見)의 전도(顚倒)에 의지하여 법에 대하여 법을 비방하거나 비법(非法)에 대해서도 비법(非法)이라고 비방하지 않으며, 끝내 비법(非法)을 법이라고 하거나 법을 비법(非法)이라고 하거나, 비나야 아닌 것을 비나야라고 하거나 비나야를 비나야 아니라고 하는 것을 현시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선설법자(善說法者)의 네 가지 요란(擾亂)을 끊는 대치도(對治道)를 현시한다.
무엇을 네 가지 요란(擾亂)이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염오와 불염오를 심사(尋思)하는 요란(擾亂)이며, 둘째는 뛰어난 정[勝定]에 대하여 애미(愛味)하는 요란(擾亂)이며, 셋째는 서로 상위(相違)하고 쟁송(諍訟)하는 요란(擾亂)이며, 넷째는 정도(正道)에 대하여 비방하는 요란(擾亂)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동등함[等]과 동등하지 않음[不等]으로 태어나시어
모니(牟尼)께서는 존재의 작용[有行]을 버리시니
안[內]으로 정(定)을 즐기는 차별(差別)은
집[舍)과 함께하는 난생(卵生)과 같으니라.
等不等而生  牟尼捨有行
內樂定差別  如俱舍卵生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부처님께서 최후유(最後有)의 보살위(菩薩位)에 머무르는 것을 시현(示現)할 때에는 먼저 획득(獲得)한 32대장부상(大丈夫相)과 80수호(隨好)의 원만(圓滿)하고 장엄(莊嚴)한 미묘한 색신(色身)으로 태어나시고, 뒤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때에는 그 색신(色身)으로 태어나신 것은 앞에서와 똑같으나, 그 명신(名身)으로 태어나신 것은 뛰어난 무루(無漏)로써 상사(相似)하지 않기 때문에, 앞의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안의 적정락(寂靜樂)과 사문락(沙門樂)을 시현(示現)하는 것을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정(定)의 자재(自在)를 얻고, 정심력(定心力)으로 모든 수명의 작용[壽行]과 모든 존재의 작용[有行]을 버리셨는데, 그것65)을 버리고 맨 마지막[邊際]으로 묘한 색신(色身)으로 태어난 것은 앞과 똑같으며, 그 명신(名身)으로 태어나신 것은 앞과 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알로부터 생기는 닭 등은 알을 의지하여 태어나고 곧 생기고 나서 점차 자라서 종류(種類)가 서로 비슷해지면[相似]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색신(色身)과 명신(名身)의 차별(差別)의 도리(道理)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차별은 불(佛)ㆍ세존(世尊)께서 만약 모든 수행(壽行)66)을 버리시지 않았다면 응당 수명의 양[壽量]을 채우시고 비로소 반열반(般涅槃)하셨을 것이나, 정력(定力)으로 지키고 있던 수명의 작용[壽行]을 버리셨기 때문에, 수명의 양[壽量]을 채우지 않고 반열반(般涅槃)하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수행(壽行)을 버린 색신(色身)과 명신(名身)의 두 가지의 차별(差別)을 현시하고, 그리고 버림[棄捨]에 의지하게 되는 인연(因緣)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진흙[淤泥]과 같은 탐욕[欲]이 없고
도깨비[魑魅]와 같은 진에[瞋]가 없고
그물[羅網]과 같은 어리석음[癡]도 없고
강하(江河)와 같은 애욕[愛]도 없네.
無淤泥等欲  無魑魅等瞋
無羅網等癡  無江河等愛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능히 세속(世俗)에 부자재(不自在)한 법(法)이 되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세간에서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자재로이 구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실재로 본다[現見]는 것이다. 첫째는 진창[淤泥]에 빠지는 것이며, 둘째는 도깨비[鬼魅]에게 홀리는 것이며, 셋째는 그물[羅網]에 걸려드는 것이며, 넷째는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빠져서 흐름에 따라서 떠돌고 빠지는[漂溺] 것을 말한다.
능히 진실(眞實)에 부자재(不自在)한 법(法)이 되는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자재롭지 못하게 구르게 하는 것[轉]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욕계(欲界)에 태어나서 자라면서 깨끗하지 못하고 비린내ㆍ누린내[腥臊] 나는 여러 탐욕[諸欲]의 진흙[淤泥]에 빠져 있어서 자재롭게 선법(善法)을 끌어당기고[引發] 수호(守護)하고 증장(增長)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모든 욕[諸欲]을 버리고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出家)하게 되어서는 마음으로 분노(忿怒)을 품고 성질[性]로 악언(惡言)을 많이 하고 분(忿)으로 지탱되어서 자재롭지 못하고, 학처(學處)를 살피지 않아서 행동[動]에 위반[違越]을 일으키며 여러 지자(智者)와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 자주 추한 말[麤言]로써 대들고 배척하며 침범하여 괴롭히고 헐고 욕되게[毁辱]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여러 탐욕[諸欲]을 버리고 악설(惡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出家)하게 되어서는 여러 악마(惡魔)의 큰 어리석음의 견해[見]의 그물[網]에 걸려들었으므로 그는 들어가고 나서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며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상분(上分)의 여러 이욕지(離欲地)에 태어나 자라면서 여러 애결(愛結)에 대하여 아직 영원히 끊지 못하고 또한 두루 알지 못하고 자재(自在)를 얻지도 못하여 도로 하계(下界)에 태어나서 유전[流]에 따르면서 머물러서 출리(出離)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여러 세계[諸界]의 여러 품류의 어리석은 범부의 얽어 매는 것[纏縛]을 현시한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어떤 사람은 탐욕의 진흙[淤泥]의 빠져있기 때문에 자재롭게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청정하게 출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분노하는 성질 때문에 마음이 분노(忿怒)로 가리워 지고 분에(憤恚)로 얽혀서 오히려 자기 몸을 해치고 혹은 손상시키거늘 어찌 하물며 다른 사람의 경우와 같은 것이랴.
또한 어떤 사람은 치품(癡品)의 여러 악하고 삿된 견해[惡邪見]를 성취하여 부모가 없다고 말하면서 부모를 헐뜯고 부모한테 도리어 공경[敬]과 이양[養]을 바라게 되는데 하물며 스스로 능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랴.
또한 어떤 사람은 널리 여러 탐욕을 모으며 탐애(貪愛)에 표류되어서 자재할 수 없고 오히려 스스로 먹을 수도 없는데 하물며 남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랴.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야말로 여러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능히 장애하는 네 가지 마땅히 알아야 할 법[四應知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청정하게 출가하는 것이며, 진에[恚]와 해침[害]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며, 혜시(惠施)를 기꺼이 행하는 것이다.

허공에는 새의 발자취[鳥迹]가 없고
외도(外道)에는 사문(沙門)이 없으며
어리석은 범부[愚夫]는 희론(戲論)을 즐기나
여래(如來)는 곧 (그것이) 있지 않네.
虛空無鳥迹  外道無沙門
愚夫樂戲論  如來則無有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중생은 뛰어난 탐욕[勝欲]을 바래서 욕구(欲求)에 소속되고, 또한 어떤 중생은 뛰어난 몸[勝身]을 바래서 유구(有求)에 소속되며, 또한 어떤 중생은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의 모든 해탈을 바래서 범행구(梵行求)에 소속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욕구(欲求)와 유구(有求)에 소속된다는 것은 ‘나는 조그마한 보시와 조그마한 지계(持戒)로 인해서 장차 선취(善趣)와 천상(天上)의 락세계(樂世界)에 왕생할 수 있으며, 묘오욕(妙五欲)을 스스로 맛보면서 재밌게 놀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원(願)을 수습하고 나서 가장 뛰어난 욕[最勝欲]과 가장 뛰어난 몸[最勝身]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뭇 새들이 허공을 빙빙 돌면서 날지만 허공에 발을 편안히 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들은 그 얻은 바 무상(無常)한 여러 탐욕[諸欲]과 몸에는 모두 안주할 것이 없는 것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의 모든 해탈을 즐기는 범행구(梵行求)에 소속되는 것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경우는 선설법(善說法)에 의지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악설법(惡說法)에 의지하는 것이다. 악설법(惡說法)에 의지하는 모든 외도(外道)의 무리에게는 사문(沙門)이 없고 선설법(善說法)에 의지하는 삿된 범행구(梵行求)에 섭수되는 자에도 또한 사문(沙門)이 없다. 바른 범행구(梵行求)에 섭수되는 자에는 사문(沙門)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이 일체는 3문(門)에 포함된다. 어떤 경우는 욕구(欲求)의 문(門)이며, 어떤 경우는 유구(有求)의 문(門)이며, 어떤 경우는 범행구(梵行求)의 문(門)이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희론(戲論)에 집착한다고 이름한다. 여래(如來)는 일체의 모든 희구(悕求)를 버렸기 때문에 희론(戲論)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곧 이러한 이치로써 견준다면 여래의 여러 제자 대중과 바른 범행구(梵行求)에 섭수되는 사람 또한 희론(戲論)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를 여의고서 부지런히 정진한 사람은 모두 공(空)하여 증익하는 것이 없음[無益]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희론(戲論)에 머무름이 모두 없고
담과 구덩이를 넘고 탐애[愛]를 여읜
모니(牟尼)께서 세간을 노닌다 하여도
천(天)ㆍ인(人)은 알 수가 없느니라.
住戲論皆無  踰牆塹離愛
牟尼遊世間  天人不能識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아라한필추(阿羅漢苾芻)가 영원히 탐애(貪愛)를 여의는 것은 네 가지 상(相)에 의한다는 것이다. 악한 마구니[惡魔]와 원수와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愚夫]에게 매여있는 주인에게서 벗어나서 자재롭게 뜻대로 공한처[空閑]와 취락(聚落)에서 노니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우연히 이와 같은 아라한(阿羅漢)이 최구경(最究竟)에서 자재롭게 유행(遊行)하는 것을 보면 여실(如實)하게 모르므로 문득 두 처소에 있어서 헛되게 경시하고 훼손한다. ‘어째서 이 선남자(善男子)는 자기에게 속한 양명(養命)과 값진 재보[珍財]를 버리고 남에게 딸린 살림도구를 구하며, 무슨 까닭에 생천(生天)의 방편을 버리고 괴롭게 힘쓰며 정진하고 존재[有]의 단멸(斷滅)을 구한단 말인가?’라고 한다. 이 어리석은 범부들은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뛰어남이 있는 공덕(功德)만을 보고 집에 있으면서 많은 재산을 지니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모니(牟尼)에 대해서 헛되이 경솔한 생각을 일으킨다. 그가 섬기는 천(天)도 이 모니(牟尼)의 광대한 공덕에 대해서 오히려 알 수 없거늘 하물며 능히 섬기는 자가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어떻게 탐애[愛]를 여읜 아라한들이 네 가지 상(相)에 의해서 악한 마구니와 원수와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에게 매여있는 주인에게서 벗어나서 자재롭게 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리석은 범부들은 4식주(識住)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주인으로 삼아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생사(生死) 가운데에 5취(趣)를 왔다 갔다 하지만 아라한(阿羅漢)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들은 무거운 허물[重過]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왕으로 삼아서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소위 증익(增益)하거나 혹은 다시 손감(損減)하는 여러 악견(惡見)들 때문에, 갖가지 칼과 몽둥이를 잡는 등의 악(惡)ㆍ불선법(不善法)을 일으키고 ‘여러 희론(戲論)’에 떨어지며 여러 악취(惡趣)에 태어나고 갖가지 악업(惡業)의 연(緣)들을 짓게 되지만 아라한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들은 중간의 허물[中過]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왕으로 삼아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욕애(欲愛)의 계박(繫縛)이라는 ‘담’에 처하게 되어 욕계(欲界)에 태어나는 괴로움에서 출리(出離)할 수 없지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들은 가벼운 허물[輕過]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왕으로 삼아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게 되어 무명(無明)이라는 깊은 ‘구덩이’가 둘레를 에워싸고 생사(生死)의 뭇 괴로움의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태어나는 등의 괴로움으로부터 출리(出離)할 수 없지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모든 어리석은 범부[愚夫]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것[羞]을 응당 부끄러워하고, 응당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응당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두렵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응당 두려워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두렵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킨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모든 심사(尋思)를 스며들어 없애게[熏除] 되면
안으로 남김없이[無餘] 분별을 여의며
모든 애착(礙著)과 색상(色想)을 뛰어넘으며
네 가지 멍에[四軛]를 제거하면 왕생(往生)하지 않는다네.
若有熏除諸尋思  於內無餘離分別
超過礙著諸色想  四軛蠲除不往生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이미 유학위(有學位)에 들어갔으나 아직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초정려(初靜慮)에 의지하여 욕계의 여러 악(惡)의 심사(尋思)를 스며들어 없애고[熏除], 제 2정려(靜慮)의 내등청정(內等淸淨)의 심일취성(心一趣性)에 의하여 초정려지(初靜慮地)의 모든 분별을 남김없이 영원히 여의어 다시는 분별함이 없으며, 제 3정려(靜慮)에 의하여 제 2정려지(靜慮地)의 모든 기쁨[喜]의 애착(礙著)을 뛰어넘으며, 제 4정려(靜慮)에 의하여 제 3정려지(靜慮地)의 모든 즐거움[樂]의 애착(礙著)을 뛰어넘으며, 무색정(無色定)에 의하여 일체의 모든 색상(色想)을 뛰어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점차로 정(定)이거나 생(生)이거나 간에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선정(禪定)에 의지하기 때문에 네 가지 멍에[四軛]를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염오(染汚)의 심사(尋思)의 멍에[軛]를 제거하는 것이며, 둘째는 불염오(不染汚)의 심사(尋思)의 멍에[軛]를 제거하는 것이며, 셋째는 희락(喜樂)의 계박(繫縛)의 멍에[軛]를 제거하는 것이며, 넷째는 일체의 색상(色想)의 멍에[軛]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해서 여러 하지(下地)에서는 다시 왕생(往生)하지 않는다. 이생(異生)은 비록 정(定)이거나 생(生)이거나 간에 유정(有頂)에 이르더라도 여전히 네 가지 멍에[四軛]에 계박(繫縛)되기 때문에 여러 하지(下地)의 도로 다시 왕생(往生)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변제(邊際)67)가 있는 곳까지 이르르는 유학(有學)과 이생(異生)의 두 가지 차별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혜시(惠施)는 복(福)을 증가하게 하고
잘못[非]을 막음은 원해(怨害)를 없애며
선(善)을 닦음은 모든 악(惡)을 버리고
혹(惑)을 다함은 열반(涅槃)을 얻는다네.
惠施令福增  防非滅怨害
修善捨諸惡  惑盡得涅槃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한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했기 때문에 비록 집에 머물더라도 마음에 인색이라는 때[慳垢]의 얽어 매임[纏縛]을 멀리 여의고 일곱 가지에 의지하는 복된 사업[七種有依福業]68)을 수지(受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인연에 의하여 가거나 머무르거나 간에 ……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이 내지 이와 같은 복덕(福德)을 일으키고 증장시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청정하게 출가하고, 이미 출가하고 나서 인력(忍力)을 구족(具足)하고 시라(尸羅)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비록 다른 사람의 욕설과 침범과 꾸짖음 또는 몸ㆍ손ㆍ기와ㆍ조약돌ㆍ칼ㆍ몽둥이로써 때리고 상해(傷害)하는 것을 만나더라도, 시라(尸羅)를 무너뜨려서 장차 장애가 되지 않을까하여, 마음에는 악한 생각[惡念]이 없고 악한 말[惡言]을 내뱉지 않으면서, 오직 그 경계를 연(緣)하여 자비[慈]와 함께하는 마음만을 모든 곳에 두루 차게 하면서 머무른다면, 이 인연에 의하여 현법(現法) 중에서 자(自)ㆍ타(他)에 상속(相續)하는 모든 ‘원해(怨害)’가 끊어질 것이며, 괴로움 없는 락세계(樂世界)에 앞으로 태어나서 많은 원적(怨敵)이 없으며, 세간에 흠모[欣仰]를 받고 대중들이 즐겨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방편을 잘 닦은 뒤에는 증상계(增上戒)에 의하여 증상심(增上心)을 일으키고, 증상심(增上心)에 의하여 증상혜(增上慧)를 일으키며, 장차 성제(聖諦)에 있어서 현관(現觀)에 들어갈 때에는 곧 악취(惡趣)에 나아가는 업(業)과 여러 악취(惡趣)를 능히 영원히 버리게 된다.
또한 먼저 얻었던 그대로의 도를 닦기 때문에 점차 영원히 온갖 모든 결(結)을 없애고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하게 되며, 이와 같이 하여 후시(後時)에는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 다시 반열반(般涅槃)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깨끗한 믿음[淨信]을 얻은 사람의 네 가지 정행(正行)을 현시하니, 첫째는 재부(財富)를 받게 되는 행(行)이며, 둘째는 선취(善趣)를 받게 되는 행(行)이며, 셋째는 악취(惡趣)의 괴로움을 여의는 청정한 행(行)이며, 넷째는 모든 괴로움을 여의는 청정한 수행(修行)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러 악[諸惡]들을 짓지 말고
여러 선(善)들을 봉행(奉行)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는 것이
바로 제 불(佛)의 성교(聖敎)이네.
諸惡者莫作  諸善者奉行
自調伏其心  是諸佛聖敎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온갖 종류[一切種]와 온갖 인연[一切因緣]과 온갖 처소[一切處所]69)에서의 모든 악행(惡行)을 다 능히 단멸(斷滅)하고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능히 잘 시라(尸羅)와 율의(律儀)를 잘 받아서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는 3상(相)70)에 의해서 뭇 선[衆善]을 봉행(奉行)하니, 말하자면 시라(尸羅)에 잘 머물러 별해탈(別解脫)의 청정한 율의(律儀)를 지키며 내지 모든 학처(學處)를 받아 배우는 것이다. 증상계학(增上戒學)에 의지하여 증상심학(增上心學)을 일으키고 증상심학(增上心學)에 의지하여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일으키나니, 그는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알아야 할 경계[所知境]에 대해서 여실(如實)히 지견(知見)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법(善法)을 구족한 뒤에는 다시 3상(相)에 의하여 자심의 마음[自心]을 조복(調伏)하니, 말하자면 여실히 알기 때문에 능히 염환(厭患)을 일으키는 것이며, 염환(厭患)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염오를 여의게[離染] 되며, 염오를 여의기 때문에 해탈을 능히 얻는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3학(學)과 학(學)의 과(果)를 현시하고 자신의 성교(聖敎)가 다른 것과 공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조복하기 어려운 들뜸[輕躁]은
모든 탐욕에 빠지는 것이니
그 마음을 잘 조복한다면
마음을 조복하여 안락(安樂)으로 이끈다네.
難調伏輕躁  淪墜於諸欲
善調伏其心  心調引安樂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심(心) 또는 의(意) 또는 식(識)이 오랜 세월동안[長夜]에 여러 시끄러운 곳을 애락(愛樂)하였음을 선설(宣說)하는 것이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멀리 여의기 어렵고 조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록 억지로 여러 선법(善法)을 끊임없이 닦는 데에 편안히 처할지라도, 한결같이 탐욕[貪]을 여의고 진에[瞋]를 여의고 어리석음[癡]을 여의는 데에 머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들뜸을 책려하여 도거(掉擧)가 없고 적정(寂靜)한 곳에 머물 수가 없다. 더군다나 다시 빠르게 도리어 탐욕이 있고 진에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는 하열(下劣)한 도거(掉擧)와 적정하지 않은 것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록 억지로 안으로 적정하게 그침[內寂止] 가운데에 편안히 처할지라도 오랜 세월동안[長夜]에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을 애락(愛樂)하였기 때문에 5욕(欲)의 경계[境]에 대해서 달려 나아가면서 빠진다.
여러 성제자(聖弟子)는 이와 같은 등의 잡염(雜染)에 즐겨 집착하여[樂著] 능히 괴로움을 일으키는 마음에 대해서 끝내 그것을 내버려두어 자재롭게 구르게 하도록 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수순(隨順)하지도 않으며 자주 자주 사택(思擇)하여 멀리 여읨[遠離]을 성취[成辦]하고 항상 선법(善法)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닦는다. 그는 이와 같이 바른 정심(定心)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여실(如實)히 알며, 여실히 알기 때문에 능히 염환(厭患)을 일으키고, 염환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염오를 여읨[離染]을 얻을 수 있으며, 염오를 여읨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해탈을 얻는다.
그는 이미 이와 같이 마음을 잘 조복하여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다하기 때문에 현법(現法)에서 안락하게 머무름을 얻으며, 미래[當來]의 뭇 괴로움[衆苦]도 영원히 다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오랜 세월동안[長夜] 유전(流轉)하는 좌도(左道)71)를 따르지 않는 마음과 따르지 않는데서 얻게 되는 뛰어난 이익[勝利]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심상(心相)을 잘 알고
원리(遠離)의 맛[味]을 능히 먹으면서
정려(靜慮)로 항상 자세히 생각하면
염오없는[無染] 희락(喜樂)을 받는다네.
於心相善知  能餐遠離味
靜慮常委念  受無染喜樂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유학(有學)의 자취[迹]를 보고서 능히 잘 지(止)ㆍ거(擧)ㆍ사(捨)의 상(相)을 분명히 알아서[了知], 이 인연에 의해서 4공덕(功德)을 얻는다. 말하자면 마음이 하나의 연(緣)에 머물러서 추중(麤重)을 멀리 여의어 몸과 마음의 안락(安樂)을 능히 잘 수용(受用)하는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공덕이다.
또한 깨끗한 정심(定心)이 닦을 것을 다하고 닦은 바대로 하기 때문에 제 법(法)의 도리를 바르게 헤아려서 내법(內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공덕이다. 그는 이와 같이 청정한 지(止)ㆍ관(觀)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수습한 바 보리분법(菩提分法)에 대하여 용맹하게 끊임없이 언제나 수습하고 자세히 수습하여 게으름 없고 거리낌도 없나니[無懈憚], 이것이 세 번째 공덕이다.
그는 이와 같이 게으름과 거리낌없는 마음에 의하여 제일(第一)의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획득하고 마음이 잘 해탈하며 또한 해탈의 희락(喜樂)과 염오없는 낙(樂)을 수용하여 현법(現法)에서 안락(安樂)하게 머무름[住]을 얻나니, 이것이 네 번째 공덕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상(相)에 대한 선교(善巧)에 네 가지 공덕(功德)을 현시하니, 사마타(奢摩他)의 소작(所作)과 비발사나(毘鉢舍那)의 소작(所作)과 게으름 없고 거리낌 없는[無懈憚] 소작(所作)과 구경(究竟)에 이르르는 소작(所作)을 말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공교(工巧)한 생활[活]과 자기를 가벼이 함이 없으며
뛰어난 제 근(根)72)을 즐기는 것을 다하여 해탈하며
집도 없고 처소도 없고 희망도 없이
탐욕[欲]을 끊고 홀로 행하면 진실한 필추[眞苾芻]이니라.
無工巧活輕自己  樂勝諸根盡解脫
無家無所無悕望  斷欲獨行眞苾芻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말하자면 5지(支)를 성취하고 5지(支)를 영원히 끊어야 진실한 필추(苾芻)라고 하는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방편을 교설(矯設)하는 삿된 활명법(活命法)에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력있는 집안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고 명칭과 가문의 명망을 닦지도 아니하며 또한 제 불(佛)의 소설(所說)과 성제자(聖弟子)의 말씀을 거짓으로 받지 않는 것이다. 마치 공교처소(工巧處所)에 의지하여 비법(非法)으로 의복과 음식을 희구(悕求)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초지(初支)라고 한다.
또한 기물(器物)과 여러 도구를 줄여 없애고 값진 재보[珍財]를 족히 버려서 옷은 겨우 몸만을 가리고 음식은 간신히 배만을 채워도 만족할 줄 알고 환희하면서 무릇 유행(遊行)하는 데에는 반드시 의발(衣鉢)을 지니니, 이것이 제 2지(支)이다.
또한 사문(沙門)을 흠모[悕慕]하고 사문(沙門)을 애락(愛樂)하며 학처(學處)를 흠모하면서 학처(學處)를 애락(愛樂)하여 생명이 곤란한 인연으로써도 오히려 배워야 할 금계(禁戒)를 어기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소소(少小)한 이익[利養]의 인연이겠는가. 이것이 제 3지(支)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바르게 방편을 닦고 깨끗한 생활[淨命]을 만족[喜足]하여 학처(學處)를 애락(愛樂)하고 제 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현관(現觀)하지 못한 사람은 능히 현관(現觀)에 들어서 청정한 견해[見]를 얻으며, 때로는 그 생각[念]을 잃어서 잠시 악(惡)ㆍ불선(不善)의 심사[尋]를 일으키고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와 더딤[遲緩]과 망념(妄念)을 이끌더라도 속히 다시 없애버리니, 이것이 제 4지(支)이다.
또한 그는 먼저 얻었던 것대로 도(道)를 수습하여 모든 결박(結縛)과 모든 수면(隨眠)과 수번뇌(隨煩惱)의 전(纏)에서 심해탈(心解脫)을 얻나니, 이것이 제 5지(支)이다.
이와 같은 것을 5지(支)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다시 5지(支)를 영원히 끊는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아라한필추(阿羅漢苾芻)는 5처소(處所)에 있어서 다시는 범하는 일이 없나니, 소위 배워야 할 곳[所學處]를 능히 버리고 다시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다시 저축한 것이 있더라도 집착하여 자기소유로 삼아 이를 수용(受用)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 욕(欲)의 경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재물[財]을 위해서, 생활[命]을 위해서 알면서도 망어(妄語)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여러 욕을 능히 버렸기 때문에 불여취(不與取)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탐욕을 영원히 여의어 홀로 머물고 홀로 다니면서 범행이 아닌 법[非梵行法]을 가까이 익히고 둘둘씩 교회(交會)하거나, 혹은 스스로 지어서[自作] 고(苦)ㆍ낙(樂)을 초래한다고 계탁[計]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짓는 것[他作]이라고 계탁하거나, 혹은 자신과 타인이 짓는 것[自他作]이라고 계탁하거나, 혹은 자신이 짓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짓는 것도 아니어서 원인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데도 고(苦)ㆍ낙(樂)을 초래한다고 계탁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을 5지(支)를 영원히 끊는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心]은 멀리 행하고[遠行] 홀로 행하며[獨行]
몸 없고[無身] 굴(窟)에서 잠자니
능히 조복[伏]하기 어려운 것을 조복(調伏)한다면
나는 바라문(婆羅門)이라고 설하네.
心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能調伏難伏  我說婆羅門

지금 이 게송에서 말한 바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의(意)라고도 이름하며 식(識)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일체 어리석은 범부[愚夫]의 무량(無量)한 차별적인 자체(自體)가 전전(展轉)하고 그리고 원인[因]도 전전(展轉)한 것이라 비록 작자(作者)는 없을지라도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는 전제(前際)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멀리 행한다[遠行]’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 하나 하나 움직이다가 두 번째의 도반인 심소(心所)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종류[一切種]의 마음으로 단번에 구르지 않기 때문에 ‘홀로 행한다[獨行]’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에 그 자체(自體)를 따라서 처음 현전(現前)에 일어나되 어떤 경우에는 탐성(貪性)에 의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진성(瞋性)에 의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치성(癡性)에 의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 하나의 그 밖의 번뇌(煩惱)와 수번뇌성(隨煩惱性)에 의하기도 하지만 곧 그 자체(自體)는 필경 구르지 않는다73).
5색근(色根)과 같이 하면 어떤 경우에는 같고 어떤 경우에는 다르며 어떤 경우에는 열등하고 어떤 경우에는 뛰어나게 그 자체(自體)를 따라 처음 현전(現前)하여 곧 그 자체(自體)는 필경에 구르지만 마음은 그와 같지 않다. 왜냐 하면 마음은 이런 저런 낮과 밤[日夜]ㆍ찰나(刹那)ㆍ랍박(臘縛) 등의 단계[位]를 지나치는 동안,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품류들은 생시(生時)와 다르게 생겨나고 멸시(滅時)와 다르게 멸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성(自性)은 염오(染汚)의 바탕[體]으로 이루어지거나 차있지 않기 때문에 ‘몸 없고[無身]’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세(未來世)에 4식주(識住)로 머무르면서 수면(隨眠)이 있고 가히 후생(後生)에 왕래(往來)하는 이치[義]가 있게 되므로 ‘굴(窟)에서 잠자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뛰어난 지혜로움[聰慧]이 있는 사람이 이 4상(相)74)에 의해서 능히 과거ㆍ현재ㆍ미래세의 마음을 여실(如實)하게 분명히 알아서[了知] 염리(厭離)의 멸(滅)을 닦아서 심해탈(心解脫)하게 되다면 그는 모든 살가야(薩迦耶)를 뛰어넘어 피안(彼岸)에 이르르며 육지(陸地)에 안주(安住)함으로 ‘바라문(婆羅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마음은 과거에 오랜 시간 동안 염오(染汚)되었기 때문에 작자(作者)의 성품[性]도 없으며 현재세(現在世)에서 성품[性]은 찰나(刹那)이면서 자성(自性)은 청정(淸淨)하며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는 방일(放逸)과 불방일(不放逸)이 있기 때문에 염오(染汚)하기도 하고 청정(淸淨)하기도 하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이 능히 세간(世間)을 덮으며[覆]
무엇이 능히 나타나지 않게 하며[不顯]
무엇이 다시 능히 더럽히며[染塗]
무엇이 대포외(大怖畏)가 되나이까.
誰能覆世間  誰能令不顯
誰復能塗染  誰爲大怖畏

무명(無明)이 세간을 가리며
방일(放逸)이 나타나지 않게끔 하며
희론(戲論)이 더럽히며
괴로움[苦]이 대포외(大怖畏)가 되느니라
無明覆世間  放逸令不顯
戲論能塗染  苦爲大怖畏

여러 흐름[諸流]들은 곳곳에서 새는데[漏]
이 새는 것[漏]을 누가 그치게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설하여 막을[防護] 수 있으며
뭇 흐름[衆流]은 무엇으로 둑이 되나이까.[堰]
諸流處處漏  是漏誰能止
當說誰防護  衆流誰所偃

세간에는 여러 흐름들이 새는데
이러한 새는 것[漏]을 누가 염(念)으로 그치게 할 수 있으며
나의 말[我說]로써 막을 수 있으며
지혜에 의해서 둑이 될 수 있느니라.
世間諸流漏  是漏念能止
我說能防護  由慧故能偃

염(念)과 혜(慧)와 명색(名色)을
지금 이 일체를 묻사오니
어떻게 영원히 멸진(滅盡)시킬 수 있습니까.
오직 원컨대 저희를 위해 설하소서.
念慧與名色  今問是一切
何當永滅盡  唯願爲我說

염(念)과 혜(慧)와 명색(名色)을
나는 이 일체를 설하리라
만약 모든 식[諸識]이 영원히 멸하면
여기에 있어서도 영원히 멸진(滅盡)하느니라.
念慧與名色  我說是一切
若諸識永滅  於斯永滅盡

어떻게 소행(所行)을 염(念)하여
모든 식[諸識]을 영원히 멸합니까.
이제 청하오니 방편을 드리우사
풀이하셔서 의심이 없도록 하소서.
云何念所行  諸識當永滅
今請垂方便  爲釋令無疑

안팎[內外]의 모든 느낌[諸受]에서
즐거워 함[欣樂]을 모두 일으키지 않고
이와 같이 소행(所行)을 염(念)하면
모든 식[諸識]은 영원히 멸하게 되리라.
於內外諸受  都不生欣樂
如是念所行  諸識當永滅

만약 여러 선설법자[善說法]와
유학(有學)의 다른 부류[異類]일 경우
그들은 상위(常委)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청컨대 대선(大仙)이시여. 설해주옵소서.
若諸善說法  及有學異類
彼常委能趣  請大仙爲說

여러 탐욕[諸欲]에 탐착하지 않고
그 마음은 탁[濁]하고 염오함[染]이 없으며
제 법(法)에 대해서 잘 염(染)하면
이러한 필추(苾芻)는 능히 나아갈 수 있느니라.
不耽著諸欲  其心無濁染
於諸法巧念  是苾芻能趣

이는 『파라연(波羅延)』75)에서 아씨다(阿氏多)76)가 청문(請問)한 것에 의한 게송이다. ‘세간(世間)’이라고 하는 것은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욕세간(欲世間)이고 둘째는 색세간(色世間)이고, 셋째는 무색세간(無色世間)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는 출가(出家)와 재가(在家)의 두 가지 세간을 말하는 것이다. 출가(出家)의 세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설법(惡說法)이고 둘째는 선설법(善說法)이다. 악설법(惡說法)은 무명(無明)으로 덮힌 것[所覆]이며, 선설법(善說法)은 명(明)이 있기 때문에 응당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하지만 방일(放逸)에 의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러 재가(在家)의 여러 종류[異類]의 백의(白衣)들은 제 희론(戲論) 때문에 더럽혀지는 것[染塗]이다.
희론(戲論)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세 가지의 언사(言事)77)를 희론이라고 이름하며, 네 가지 언설(言說)78)에 선담(宣談)하는 바가 있으면 이 또한 희론(戲論)이라고 이름하며, 능히 어언(語言)을 일으킨 모든 심사(尋伺)를 역시 희론(戲論)이라고 이름한다.
과거(過去)ㆍ미래(未來)ㆍ현재(現在)의 세 가지 언사(言事)에 대하여 네 가지 언설(言說)에 의지하여 다른 부류[異類]의 분별(分別)의 사유(思惟)를 일으키되, 어떤 경우에는 어기기도[違]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수순[順]하기도 하는 것을 ‘더럽혀진다[塗染]’고 하는 것이다. 앞의 희론(戲論)이거나 뒤의 더럽혀지는 것[塗染]이거나 간에 모든 재가자(在家者)는 다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제 희론으로 더럽혀진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악설법(惡說法)은 무명(無明)에 덮히고, 선설법(善說法)은 방일(放逸)에 나타나지 않으며, 여러 재가자들은 희론(戲論)에 더럽혀지는 것[塗染]이다. 그들은 현법(現法)에서 괴로움의 원인[苦因]이 구를 때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 여실(如實)하게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 애락(愛樂)하며 머무른다. 이 인연에 의해서 미래의 괴로움을 일으키니, 곧 이 괴로움을 설하여 ‘대포외(大怖畏)’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악설법자(惡說法者)는 무명(無明)의 문(門)에 의해서 6처(處)의 흐름[流]으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새며[漏泄], 여러 재가자는 희론(戲論)의 문(門)에 의해서 6처(處)의 흐름[流]으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새며[漏泄], 선설법자(善說法者)는 방일(放逸)의 문(門)에 의해서 6처(處)의 흐름[流]으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샌다[漏泄]. 이와 같이 무명(無明)과 방일(放逸)과 희론(戲論)의 여러 문(門)에서 흐름[流]이 새는 것[漏]이다.
타음(他音)을 듣고 안으로 바르게 작의(作意)하여 제 법(法)에 대한 과환(過患)을 분명히 알고 이것과 상응하는 염(念)은 흐름[流]을 거스르며 움직이기 때문에, 능히 막고 그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편을 복대치(伏對治)라고 이름한다. 만약 출세간(出世間)의 정견(正見)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의 무루혜(無漏慧)는 세 가지 흐름[流]에 대하여 모두 둑을 쌓아서 막을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방편을 단대치(斷對治)라고 이름한다. 이 흐름[流]이 새는 것에 대하여 혹은 조복하거나[伏] 영원하게[永] 하는 두 가지 대치(對治)는 모두 다 능히 끊기 때문에 ‘막는다[防護]’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악설법자(惡說法者)와 재가자(在家者)는 한결같이 염오품(染汚品)의 소속[攝]에 떨어지고, 또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서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제멋대로 방일하는 자들은 잡염품(雜染品)에 떨어지므로 분명하게 나타나는[顯了]데에 소속[攝]되지 않으며 제멋대로 방일하지 않는 자는 청정품(淸淨品)에 떨어지므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데에 소속[攝]된다. 또한 이미 분명하게 나타났거나 응당 분명하게 나타나야할 것의 두 가지 종류는 모두 방일함이 없는 아라한들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는 이미 분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불방일(不放逸)에 대해서 다시 불방일(不放逸)한 일[事]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4념주(念住)에 대하여 염(念)과 혜(慧)를 이미 잘 수습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청정(淸淨)한 식(識)을 이미 잘 증득하였기 때문에, 오직 결정(決定)적으로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 중에 선(善)ㆍ청정(淸淨)한 식(識)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염(念)과 혜(慧) 또한 따라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 밖의 의지[依;依止]에 포함되고 선업(善業)으로 끌리게 되는 일체의 명색(名色) 역시 따라서 멸진(滅盡)될 것이다. 내지 그 법(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데서 오는 6항주(恒住)에 언제나 잘 안주하고 이욕지(離欲地)의 모든 안의 느낌[內受]과 제 욕[諸欲]과 상응하는 밖의 느낌[外受]에 흔쾌한 즐거움[欣樂]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제 아라한의 정념(正念)이 현행(現行)하고 내지 수명[壽]이 다하면 식(識)이 비로소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유학(有學)의 경우에는 이것이 분명히 나타나야만[顯了] 하므로 불방일(不放逸)에 있어서 응당 다시 불방일(不放逸)한 일[事]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 그는 다시 두 가지 불방일(不放逸)과 불방일(不放逸)한 일[事]에 대해서 말하자면 항상 짓는 것[常所作]과 자세하게 다 짓는 것[委悉所作]이다.
유학(有學)의 다른 부류[異類]인 극칠반유(極七反有)79)의 여러 유학(有學)들이거나 혹은 다시 가가(家家)80)ㆍ일래과(一來果) 등과 현법(現法)에서 반열반(般涅槃)할만한 이는 하분결(下分結)과 상분결(上分結)에 있어서 마음에 염오(染汚)가 없고, 그것을 끊기 위해서 대치(對治)를 수습한다. 또한 여러 욕[諸欲]에 대하여 탐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하분결(下分結)로 능히 염오할 수 없으며, 마음에 탁함이 없기 때문에 여러 상분결(上分結)로도 능히 염오할 수 없다.
또한 일체의 괴로움이 있는 법[一切有苦法]에 대하여 여실(如實)히 알고 집(集) 내지 출리(出離)까지 알며 4념주(念住)에 잘 그 마음을 머물게 하며 먼저 얻은 것과 같이 성도(聖道)를 수습하여 능히 구경(究竟)에 나아간다. 이와 같이 대치도(對治道)를 수습하기 때문에 그는 일체의 불방일(不放逸)에서 마땅히 지어야 할 불방일(不放逸)의 일[事]을 구경(究竟)하는 것을 얻는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여러 재가자와 외도법(外道法)에서 출가한 사람은 결정코 잡염(雜染)되는 것을 현시하고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한 사람 가운데에 만약 방일(放逸)을 행하면 염오품(染汚品)에 떨어지고 불방일(不放逸)을 행하면 청정품(淸淨品)에 떨어짐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러 욕[諸欲]에 대해서 희구(悕求)하다가81)
혹은 바라는 바의 결과[果]를 이루기도 하고
얻은 뒤에는 마음이 반드시 기뻐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존하며 사랑하느니라.
於諸欲悕求  或所期果遂
得已心定喜  至死而保愛

여러 욕[諸欲]을 즐기는 중생은
만약 여러 욕[諸欲]을 잃게 되면[退失]
그 색(色)은 곧바로 변하여[變壞]
마치 독화살을 맞는 것과 같느니라
諸樂欲衆生  若退失諸欲
其色便變壞  如毒箭所中

만약 여러 욕[諸欲]을 멀리 여의기를
마치 독사의 머리와 같이 한다면
그는 애욕[愛]의 세간에서
정념(正念)으로 능히 뛰어넘으리라.
若遠離諸欲  猶如毒蛇首
彼於愛世間  正念能超度

밭이라는 대상[田事]과 금(金)ㆍ은(銀)과82)
말과 소와 구슬과 팔찌와
여자[女]와 노복[僕]은 여러 욕을 증익[增]하는
이러한 사람은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니라.
田事與金銀  牛馬珠環釧
女僕增諸欲  是人所耽樂

반연(攀緣)하여 하열(下劣)에 빠지고
변하는 여러 번뇌[諸漏]를 내나니
이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쌓이는 것은
마치 배가 파손되어 물이 넘쳐 드는 것과 같으니라.
攀緣沈下劣  變壞生諸漏
從此集衆苦  如船破水溢

만약 여러 욕을 영원히 끊어서
마치 다라(多羅)83)의 정수리를 끊는 것 같이한다면
모든 근심과 걱정[愁憂]을 버리게 되어
마치 연꽃에 물방울과 같이 되느니라.
若永絶諸欲  如斷多羅頂
棄捨諸愁憂  猶蓮華水滴

이는 의품(義品)의 여러 욕[諸欲]에 의거한 게송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미래의 모든 욕들을 희구(悕求)하고 획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방편을 일으키고 얻고 나서 현전(現前)에 탐착하고 수용(受用)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희구(悕求)하고 곧바로 얻은 욕들을 수용하고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기쁨[喜]을 일으키고 즐거움[樂]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여러 욕[諸欲]의 애미(愛味)라고 이름한다. 또한 그는 희구(悕求)하고 곧바로 수용하는 데에 그 얻고 수용하는 것을 만약 잃게[退失] 될 때에는 그는 여러 욕을 따라가며 그리워하면서 애미(愛味)를 집착하니, 애욕[愛]의 화살이 심장에 들어가 독화살을 맞는 것과 같아서, 큰 고통[大憂苦]을 받고 혹은 죽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것을 여러 욕의 과환(過患)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독사를 여러 욕의 경계[欲境]로 비유하고 독사의 머리를 여러 욕의 모든 애미(愛味)에 비유하는 것이다. 여러 어리석은 범부[愚夫]들이 여러 욕을 애미(愛味)하고 탐착하고 수용한다면 마치 뱀에게 물린 것과 같으며, 만약 다문(多聞)의 성제자(聖弟子)들이 여러 욕의 모든 애미(愛味)를 멀리 여읜다면 마치 독사의 머리와 같아서 끝내 염오에 애착하지 않고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며 …… 내지 탐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제 색(色)의 모든 탐애로부터 내지 촉(觸)의 모든 탐애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히 조복하고 끊어 없애고 뛰어넘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여러 욕에서 출리(出離)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욕의 자성(自性)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욕(事欲)이며 둘째는 번뇌욕(煩惱欲)이다.
사욕(事欲)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곡식으로써 그가 의지하는 것은 말하자면 밭이라는 대상[田事]이며, 둘째는 재물[財]로써 그가 의지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금(金)ㆍ은(銀) 등의 대상[事]이다. 왜냐 하면 모든 곡식을 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밭이라는 대상을 구하게 되고, 모든 재물을 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금(金)ㆍ은(銀) 등의 대상을 구하기 때문이다. 금(金)ㆍ은(銀) 등을 구하는 데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왕을 섬기는 것이며, 둘째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곡식을 구하고 밭을 구하는 방편으로는 소가 필요하고 재물을 구하고 왕을 섬기는 방편으로는 말이 필요한 것이다. 재물을 구하는 장사를 하는 모든 방편으로 한다. 금(金)ㆍ은(銀) 등과 함께 상응하는 것은 여러 보배와 구슬을 말하며, 금(金)ㆍ은(銀)과 다른 종류[異類]로써 상응하지 않는 것은 팔찌 등을 말한다. 이것들은 가장 뛰어난 것을 (예로) 든 것이다. 또한 사고 파는 곳에서 하는 언설(言說)과 사무(事務)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위와 같이 재물과 곡식이라는 대상[事]을 쌓고 모은 뒤에는 수용하면서 희락(戲樂)하는 데의 모든 조반(助伴)은 여러 여색(如色)을 말한다. 만약 아직 적집(積集)하지 못했을 경우에 불러모으고 수호하고 식리(息利)84)의 모든 조반(助伴)은 종[僮僕]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재물과 곡식을 광대(廣大)하게 적집하고, 이 처소에 대해서 탐착하고 버리지 않나니,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사욕(事欲)이라고 한다.
번뇌욕(煩惱欲)이란 사욕(事欲)을 따라다니며 애미(愛味)하고 탐착하는 식(識)에 의지하여 갖가지 망분별(妄分別)의 탐욕[貪]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사욕(事欲)에 있어서 번뇌욕(煩惱欲) 때문에 마음을 침몰(沈沒)시키고 하열(下劣)한 성품을 이루는 것이니, 만약 그는 사욕(事欲)이 달라지고[變壞] 흩어지면[散失] 곧바로 모든 번뇌[諸漏]를 일으키고 근심[愁]과 한탄[歎]과 걱정[憂]과 슬픔[悲]의 갖가지 고뇌(苦惱)가 그 마음을 얽어맨다. 그는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현법(現法)에서 제 번뇌로 가리워 지고 눌려서 대치(對治)하는 일이 없다. 마치 배가 파손되어 물이 점차로 넘쳐 들어차는 것과 같으니, 미래(未來)의 생(生)ㆍ로(老)ㆍ병(病) 등의 갖가지 고뇌(苦惱)를 불러모은다.
만약 여러 욕에 대해서 이미 출리(出離)하게 되면 곧바로 욕[欲]의 애미(愛味)에 따라서 탐착을 일으키는 모든 염오식(染汚識)을 영원히 끊으니, 마치 다라(多羅) 나무의 정수리를 끊으면 다시는 크지[生長]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하고 내지 뜻에 맞는 그 사욕(事欲)이 만약 달라질 때면 청정식(淸淨識)에 여러 걱정과 근심[憂愁] 등의 일체의 고뇌가 모두 다 머물 수 없게 되니,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이 붙지 않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여러 욕의 애미(愛味)와 과환(過患)과 출리(出離)의 세 가지 자성을 현시하며, 또한 애미(愛味)가 능히 과환(過患)이 되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출리(出離)의 모든 공덕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과거를 연연[戀]하지 않고
미래를 희구(悕求)하지 않으며
현재의 제 법[諸法]에 대해서
곳곳으로 두루 관찰하는
지자(智者)가 증장(增長)하는 것은
빼앗김도 없고 움직임도 없느니라.
於過去無戀  不悕求未來
現在諸法中  處處遍觀察
智者所增長  無奪亦無動

이것은 현선(賢善)을 세우는 게송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깨끗한 믿음[淨信]을 획득하고 바른 신심[正信心]으로써 가법(家法)을 버리고 비가(非家)에 나아가서 다섯 가지 상[五種相]에 의해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여 매우 청정[善淸淨]하게끔 하는 것과 같다. 재가[居家]의 제 행(行)을 능히 버려도 연연[顧戀]할 것이 없고 또한 그것을 연(緣)하여 마음으로 돌이켜 연연함[追戀]을 일으켜 도로 염착(染著)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첫 번째 상[初相]이라고 한다.
또한 현법(現法)에 있어서의 이익[利養]과 공경(恭敬)과 미래의 여러 가지 종류(種類)의 모든 제 행(行)에 대해서 희망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미래의 인(人)ㆍ천(天)의 모든 제 행(行)을 구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제 2의 상(相)이다.
또한 현재와 현재의 5취온(取蘊)에 포함되는 색(色) 등의 제 법과 그것의 안립(安立)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관찰하고, 또한 현법(現法)과 미래세[當來世]의 여러 몸의 악행(惡行)과 악한 과보[惡果報]에 대해서 ‘나는 몸에서 모든 악행(惡行)을 일으키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이 내지 ‘몸의 모든 악행(惡行)을 끊고 몸의 선행(善行)을 닦겠다. 어(語)ㆍ의(意)의 선행(善行)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고 하며. 또한 색(色) 등의 제 온(蘊)에 대해서 능히 따라서 관찰하여 ‘과거ㆍ미래ㆍ현세[今世]가 모두 무상(無常)하나니,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우며, 괴롭기[苦]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저 일체에 대해서 아소(我所)라고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지 그것에 대해서 아(我)라고 집착하지도 않겠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여실(如實)하게 정혜(正慧)로써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 3의 상(相)이다.
또한 초법(初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하여 제 근(根)이 성숙(成熟)하고 복덕(福德)과 지혜(智慧) 두 가지 자량(資糧)을 미래세[當來世]에서 통달(通達)하고 증장(增長)하여 여러 왕들에 의해 겁탈되지 않는다. 이것이 제 4의 상(相)이다.
또한 제 2법(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하여 현법(現法)에서 열반(涅槃)의 공덕(功德)을 능히 잘 증장(增長)하고 여러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에 의해 가벼이 움직이지[輕動] 않는다. 이것이 제 5의 상(相)이다.
이 5상(相)에 의해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여 매우 청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하루 낮과 하루 밤을 하면 역시 현선(賢善) 중 제일(第一)의 현선(賢善)이 되며, 이 나머지 일체 모든 범행(梵行)도 뛰어넘게 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에서 닦게 되는 범행(梵行)은 일체의 상(相)을 모두 매우 청정하게 하며 다른 것과 공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겠다.

악(惡)과 설(說)과 탐(貪)과 류(流)와 포(怖)와
류(類)와 예(譽)와 지(池)와 류(流)와 탐(貪)과
작(作)과 구로(劬勞)와 득의(得義)와
논의(論義)의 40종(種)이라네.
惡說貪流怖  類與池流貪
作劬勞得義  論議十四種
015_0614_c_01L瑜伽師地論卷第十九 習彌勒菩薩說三藏法師玄奘奉 詔譯本地分中思所成地第十一之四賢聖常說最善語 愛非不愛語第二諦非不諦語第三 法非非法語第四今此頌中言善語者所謂善說善言善論當知善說有三種相所謂悅意無染唯善由第一語令他慶悅由第二語令自尸羅終無穿缺由第三語能令他人出不善處安住善處因此引攝利益安樂或有愛語非諦非法謂如有一以美妙言稱讚他人非眞實德或有諦語非愛非法謂如有一以染污心發麤惡言訶責他人眞實過惡或有法語亦愛亦諦謂如有一善知稱讚及與訶責知可稱讚可訶責已然不稱讚亦不訶責唯善方便爲說正法能令彼人出不善處安住善處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所有善語若摽若釋當知是名此中略義信慚戒施法 善人所稱讚 是名趣天道能往天世閒此頌所明謂如有一於佛所證法柰耶獲得正信恥在居家受持淨戒趣得衣服飮食臥具便生喜足減除器物儉約資緣凡所獲得如法利養終無私隱必與智人同梵行者而共受用所有正法初後善稱揚梵行所謂契經乃至論議皆能受持硏尋究達傳授他人廣爲開闡彼旣成就是諸善法當知必獲三種勝利一者諸佛諸佛弟子眞實善人之所稱讚二者若彼尸羅財施之所攝引福德資糧法施攝引智慧資糧善圓滿者便得趣入證解脫處淸淨諸天衆同分中三者若彼二種資糧猶未圓滿便能令彼速得圓滿身壞已後定生善趣多往天上樂世界中復有差別謂如有一於佛所證法毘柰耶獲得正信信惡尸羅當墮惡趣信慳貪者得貧窮報如是信已於現法中惡戒慳貪深生羞恥以羞恥故棄惡尸羅受淸淨戒棄捨慳貪以無垢心安處居家廣說乃至善行布施由此因緣於現法中聖賢所讚身壞已後乃至當生善趣天上樂世界中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在家出家二種正行及正行果所有勝利當知是名此中略義多聞能知法 多聞能遠惡 多聞捨無義多聞得涅槃此頌所明謂如有一於依先時正所應作施論戒論生天之論無倒教法恭敬聽聞聞已遂能了知其義謂現法中種種惡行及當惡趣苦無義因諸惡行所應速遠離及往善趣捨生惡趣苦無義因彼由了知如是法義隨法行能遠苦因能引樂因由此因緣得樂捨苦若於增上四聖諦等相應教法恭敬聽聞聞已遂能了知其義謂一切有生死大苦寂靜涅槃彼由了知如是法義若根已熟資糧已滿便能獲得如是義心淸淨故纔聞法已於諸聖諦未現觀者能入現觀已現觀者便得漏盡若根未熟資糧未滿卽由如是遠離諸惡依增上戒起增上心依增上心發增上慧由此能捨一切苦本煩惱無義證得涅槃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先聞正法如理思惟先如理思隨法行隨法行爲先因故得勝利果當知是名此中略義智者如空無染污 不動猶如天帝幢如泛淸涼盈滿池 不樂淤泥生死海今此頌中辯阿羅漢苾芻心善解脫超諸戲論猶如虛空何以故譬如虛空離諸戲論淨與不淨皆不能染阿羅漢亦復如是一切世法若順若皆不能染所謂利衰乃至苦諸有學已離欲貪向阿羅漢於四念善住其心修無相心三摩地時天帝幢於其一切動發憍擧戲論生願俱行所有貪愛不能傾動諸有學已離欲貪得不還果於上解心生欲譬如遊泛淸冷泉池愛味定上分諸結熱淤泥中終不欣由於此中不欣樂故亦不欣樂生死大海復有差別謂阿羅漢所有飮言說遊行處無相住有餘依苦之所隨逐如其次第三處應知復有差別謂慧解脫諸阿羅漢有學身證及俱解脫諸阿羅漢如其次第三處應知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離三界欲於佛聖旨猶有餘離欲界貪勝進道攝及不還果復有差別謂略顯示解脫勝利等持勝利智慧勝利復有差別謂略顯示增上心慧學所得果及顯增上慧二學若以色量我 以音聲尋我 欲貪所執持彼不能知我 若於內了知 於外不能見由內果觀察 彼音聲所引 若於內無知於外而能見 由外果觀察 亦音聲所引若於內無知 於外不能見 彼普障愚夫亦音聲所引 若於內了知 於外亦能見英雄出離慧 非音聲所引此頌所明謂如有一體是異生未斷虛妄分別欲貪觀見世尊具三十二大丈夫相遂便測量此薄伽梵定是如來應正等覺其所說法決定微妙弟子衆所行必善彼於後時近不善聞不正法隨逐他論及他音聲順於他他所引攝他所引故於佛還生毀謗如是皆由不如實知如來法身故致如此復有異生由內靜慮果天眼通遠見世尊便作是解薄伽梵定是如來應正等覺餘如前復有由外欲界繫業果報肉眼已測量當知彼亦隨逐他論及他音信順於他他所引攝復有異生爾所見都無所有彼普被障長時他音聲所引若諸賢聖除斷調伏超越欲貪得聖慧眼彼由如是聖慧眼於內證解如來法身雖於外見如來色身或見制多或圖畫等而能了知非第一義應正等覺彼由如是於內正知於外正觀不隨他論及他音不信順他非他所引於佛僧決定信受如是皆由如實了知如來法身故致如此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若唯世俗見如來者則不決定若以勝義見如來者是則決定當知是名此中略義第六增上王 染時染自取 於無染不染染者名愚夫今此頌中第六增上王者謂心若有已渡五暴流未渡第六意暴流爾時其心隨逐諸定所有愛味故染時復有補特伽羅於長夜染取爲己有於可愛法執藏不捨是故說彼爲染自取貪名爲染因貪所生當來世苦亦名爲染若染自取於所染心不隨功用攝受遮止修意對治作意如是彼心於現法中無有染污無染心此染自取當來世中因彼諸亦無有染若有於彼隨作功用而不攝受亦不遮止不修意對治作意依此苦因長夜受苦於此苦因能遠離故名愚夫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遠離苦因所有勝利及顯苦因能感自苦是愚夫性當知是名此中略義有城骨爲墉 筋肉而塗飾 其中有貪恚慢覆所任持今此頌中所言城者謂心此城唯以骨充甎筋代繩肉當塗漫爲形骸墉周帀圍繞此城中有違害善說法毘柰耶所有善法四種惡法之所任持二是在家諸受欲者謂貪與瞋二是惡說法毘奈耶中而出家者謂慢與覆由著諸欲悕求諸欲鄙穢行不相違背於善說法及毘柰尚不信受況當修善恃惡說法而生憍慢不能自然趣佛世尊或弟子所設佛世尊或佛弟子由悲愍故往其所然彼由覆隨煩惱纏染污其尚不如實發露己過況能信解諸善法如是當知於彼善說法毘柰耶相應善法二種心城皆不能入況復能取爲己有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在家出家摠由四種雜染因緣失壞善說法毘奈耶當知是名此中略義如龜藏支於自㲉 苾芻善攝意尋思無所依止不惱他 證般涅槃無所謗此頌所明謂如有一依初靜慮捨三惡尋所謂欲尋恚尋害尋又能棄捨初靜慮地諸善尋思安住無尋無伺定中如龜藏支於其自㲉略攝尋思亦復如是無尋無伺定者應知此上乃至有頂彼於此定正安住時不生愛味出已成就可愛樂法調順柔和易可共住不惱有智同梵行者又爲智人同梵行者欣樂共住又復成就無違諍法彼由如是正方便故於諸聖諦能入現觀及得漏盡彼於諸法不由他信獲得善淨勝智見故如實了知法眞是法毘柰耶眞是毘柰耶由如是知故終不依止諸見顚倒法謗法及於非法亦謗非法終不顯示非法爲法法爲非法非毘奈耶爲毘柰耶或毘柰耶爲非毘柰耶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善說法者四種擾亂斷對治道何等名爲四種擾亂一染不染尋思擾亂二於勝定愛味擾亂三互相違諍訟擾亂四於正道誹謗擾亂當知是名此中略義等不等而生 牟尼捨有行 內樂定差別如俱舍卵生此頌所明謂佛示現住最後有菩薩位時先所獲得三十有二大丈夫相八十隨好圓滿莊嚴妙色身生於後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其色身生與前正等其名身生由勝無不相似故與前不等又佛示現內寂靜樂及妙門樂爲依止故得定自如定心力捨諸壽行及諸有行捨邊際妙色身生與前正等其名身與前不等故有差別如因其㲉卵生雞等依卵而生卽此生已漸漸增種類相似破㲉而出如是如來色名身差別道理當知亦爾此中差別謂佛世尊若不棄捨諸壽行者滿壽量方般涅槃定力所持捨壽行不滿壽量而般涅槃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捨諸壽行色身名身二種差別及顯棄捨所依因緣當知是名此中略義無淤泥等欲 無魑魅等瞋 無羅網等癡無江河等愛此頌所明謂有四種能爲世俗不自在法世閒現見能令有情不自在轉一者陷溺淤泥二者鬼魅所著三者入於羅網四者墮駃流河隨流漂溺復有四種能爲眞實不自在法能令有情不自在轉當知亦爾何等爲四謂如有一生長欲界陷溺不淨腥臊生臭諸欲淤泥不能自在引發守護增長善法又如有一棄捨諸欲於善說法毘柰耶中而得出家心懷忿怒性多惡言由忿所持不得自在不數學處動生違越於諸智者同梵行所屢以麤言擊刺訶擯侵惱毀辱又如有一棄捨諸欲於惡說法毘柰耶中而得出家入諸惡魔大癡見網彼旣入已流轉生死不得自在又如有一生長上分諸離欲地於諸愛結未能永斷亦未遍知不得自在還生下界順流而住難可出離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諸界諸品愚夫纏縛復有差別謂如有一陷欲淤泥不能自在於善說法毘柰耶中淸淨出家又如有一爲性忿怒忿怒所蔽憤恚纏心尚於自身或害或損何況於他又如有一成就癡品諸惡邪見謂無父母毀謗父母於父母所反悕敬況自能爲又如有一廣集諸欲貪愛所漂不得自在尚不欲自食況能惠於他如是四法當知能障諸聰慧者四應知法謂善說法毘柰耶中淸淨出家遠離恚敬事父母樂行慧施虛空無鳥迹 外道無沙門 愚夫樂戲論如來則無有此頌所明謂有衆生悕樂勝欲欲求所攝又有衆生悕樂勝身有求所攝又有衆生悕樂沙門及婆羅門所有解脫梵行求攝此中欲求有求攝者謂我因少分布施少分持戒當得往生善趣天上樂世界中以妙五欲而自賞納歡娛遊戲彼旣修習如是願得最勝欲及最勝身譬如衆鳥翺翔虛空遍虛空中無安足處如是衆於其所得無常諸欲及身分中無安住當知亦爾若樂沙門及婆羅門所有解脫梵行求攝復有二種依善說法或依惡說法依惡說法諸外道輩竝無沙門依善說法邪梵行所攝受者亦無沙門正梵行求攝受者得有沙門又此一切三門所或欲求門或有求門或梵行求門如是皆名樂著戲論當知如來棄捨一切所有悕求故無戲論卽以此義類知如來諸弟子衆正梵行求所攝受者亦無戲論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離善說法及毘柰耶勤精進者皆空無益當知是名此中略義住戲論皆無 踰牆塹離愛 牟尼遊世閒天人不能識此頌所明謂阿羅漢苾芻永離貪愛由四種相於惡魔一切愚夫所繫屬主解脫自在隨意遊行空閑聚落有諸愚夫遇見如是眞阿羅漢於最究竟自在遊行不如實知便於二處妄生輕毀云何此善男子棄捨自屬養命珍財乃求屬他資生衆具何故棄捨生天方便苦勤精進求有斷滅是諸愚夫見生天上有勝功德見處居家有多財產故於牟尼妄生輕忽彼所事天於此牟尼廣大功德尚不能了況能事者而能識知云何離愛諸阿羅漢由四種相於惡魔一切愚夫所繫屬主解脫自在謂諸愚夫由四識住爲魔怨主之所驅役令生死中往還五趣非阿羅漢又諸愚夫如由重過爲魔怨主之所驅役謂或增益或復損減諸惡見故發起種種執刀杖等惡不善法墮諸戲論生諸惡趣令造種種諸惡業緣非阿羅漢又諸愚夫如由中過爲魔怨主之所驅役令處欲愛繫縛垣牆不能出離欲界生苦非阿羅漢又諸愚夫如由輕過爲魔怨主之所驅役令生色界及無色界無明深塹周帀圍繞閉在生死衆苦牢獄於生等苦不得出離非阿羅漢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一切愚夫羞不應羞應羞不羞於不應怖而生怖見於應怖中生無怖見當知是名此中略義若有熏除諸尋思 於內無餘離分別超過㝵著諸色想 四軛蠲除不往生此頌所明謂如有一已入有學位離欲界欲依初靜慮熏除欲界諸惡尋思依第二靜慮內等淸淨心一趣初靜慮地所有分別無餘永離復分別依第三靜慮超過第二靜慮地諸喜㝵著依第四靜慮超過第三靜慮地諸樂㝵著依無色定超過一切所有色如是漸次因依諸定乃至有頂若定若生蠲除四軛何等爲一蠲除染污尋思軛二蠲除不染污尋思軛三蠲除喜樂繫縛軛四蠲除一切色想軛由此因緣於諸下地不復往生當知異生雖到有頂若定若生猶爲四軛所繫縛故於諸下地還復往生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到有邊際有學異生二種差別當知是名此中略義惠施令福增 防非滅怨害 修善捨諸惡惑盡得涅槃此頌所明謂如有一於佛所證法柰耶獲得正信雖處居家而心遠離慳垢纏縛受持七種依福業事由此因緣若行若住廣說如經乃至生長如是福德若有復能於善說法毘柰耶中淸淨出家旣出家已具足忍力爲護尸羅雖遭他罵訶責或以歐擊傷害恐壞尸羅當爲障㝵心無惡念不出惡言唯緣彼境與慈俱心於一切方遍滿而住由此因緣於現法中他相續所有怨害竝皆止息當生無惱樂世界中無多怨爲世欣仰衆所樂見如是善修正方便已依增上戒起增上心依增上心發增上慧當於聖諦入現觀時則能永捨趣惡趣業及諸惡趣又修如先所得道故漸次永除所有諸結於有餘依涅槃界中而般涅槃如是後時於無餘依涅槃界中復般涅槃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得淨信者四種正行一感財富行二感善趣行三離惡趣苦淸淨修行四離一切苦淸淨修行當知是名此中略義諸惡者莫作 諸善者奉行 自調伏其心是諸佛聖教此頌所明謂如有一於佛所證法柰耶獲得正信於一切種一切因緣一切處所所有惡行皆能斷滅於善說法毘柰耶中能善受學尸羅律儀彼由三相奉行諸善謂善住尸羅別解脫淸淨律儀乃至受學所有學依增上戒學發增上心學依增上心學發增上慧學彼由此故於所知如實知見如是具足諸善法已由三相調伏自心謂如實知故能起由厭患故能得離染由離染故能得解脫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三學學果顯自聖教不與他共當知是名此中略義難調伏輕躁 淪墜於諸欲 善調伏其心心調引安樂此頌所明謂宣說心若意若識長夜愛樂憒鬧雜處於憒鬧處難得遠離難可調伏雖强安處無閒修習諸善法中而不一向能住離貪離瞋離癡亦不一向能住策擧無掉寂靜然復疾疾還生有貪有瞋有癡下劣掉擧及不寂靜雖强安處內寂止中長夜愛樂色觸故於五欲境馳趣淪沒諸聖弟子於如是等樂著雜染能生苦心終不縱其令自在轉亦不隨順數數思擇成辦遠離恒修善法心一境性彼由如是正定心故能如實知如實知故能起厭由厭患故能得離染由離染故能得解脫彼旣如是善調伏心盡苦因故於現法中得安樂住當來衆苦亦得永盡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能不隨順長夜流轉左道之心及不隨順所得勝利當知是名此中略義於心相善知 能飡遠離味 靜慮常委念受無染喜樂此頌所明謂如有一有學見迹能善了知止捨相由此因緣得四功德謂心住一緣遠離麤重能善受用身心安樂是初功德又淨定心盡所修如所修故能正審慮諸法道理得內法毘鉢舍那是第二功德彼由如是淸淨止觀爲依止故於所修習菩提分法勇猛無閒能常修習能委修習無懈無憚是第三功德彼由如是無懈憚心獲得第一正念正知善解脫又能受用解脫喜樂及無染於現法中得安樂住是第四功德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於相善巧四種功德謂奢摩他所作毘鉢舍那所作無懈憚所到究竟所作當知是名此中略義無工巧活輕自己 樂勝諸根盡解脫無家無所無悕望 斷欲獨行眞苾芻此頌所明謂成就 五支永斷五支知得名眞實苾芻何等爲五謂不依止矯設方便邪活命法亦不恃賴有勢之家亦不修治名稱族望亦不詐受諸佛所說聖弟子說猶如依止工巧處所非法悕求衣服飮食是名初又復減省器物衆具善棄珍財僅蔽身食纔充腹知足歡喜凡所遊必持衣是第二支又悕慕沙門愛樂沙門悕慕學處愛樂學處命難因緣尚不違越所學禁戒何況少小利養因緣是第三支又彼如是正修方便淨命喜足愛樂學處於諸聖諦未現觀者能入現觀得淸淨見或時失念暫爾發生惡不善尋引起貪欲瞋恚愚癡遲緩忘念速復除遣是第四支又彼修習如先得道於諸結縛一切隨眠隨煩惱纏心得解脫是第五支如是名爲成就五支云何復名永斷五支謂阿羅漢苾芻於五處所不復能犯所謂不能捨所學處而復退還又復不能有所貯積執爲己有而受用之亦不受用諸欲境界又復不能爲財爲命知而妄語又復不能棄捨諸欲行不與取亦不復能永離貪欲獨住獨行而更習近非梵行法兩兩交會或計自作而招苦樂或計他作或自他作或非自作亦非他作不由因生而招苦樂如是名爲五支永斷心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能調伏難伏我說婆羅門今此頌中所言心者亦名爲意亦名爲識此於過去一切愚夫無量差別自體展轉及因展轉雖無作者而流生死前際叵知故名遠行此於現在一而轉第二伴心所遠離故一切種不頓轉故名爲獨行又此現在其自體初起現前或由貪性或由瞋或由癡性或由一一所餘煩惱煩惱性卽彼自體不畢竟轉如五色或同或異或劣或勝隨其自體起現前卽此自體畢竟而轉心不如何以故心經彼彼日夜剎那臘縛等位非一衆多種種品類異生時生異滅時滅由心自性染污之體不成實故名爲無身此未來世居四識住而有隨眠可於後生有往來義名寐於窟若有聰慧由此四相能於過未來世心如實了知修厭離滅及心解脫彼能超度諸薩迦耶到於彼岸安住陸地名婆羅門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心於過去長時染污無作者性於現在世性是剎那自性淸淨於未來世由有放逸不放逸故染污淸淨當知是名此中略義誰能覆世閒 誰能令不顯 誰復能塗染誰爲大怖畏 無明覆世閒 放逸令不顯戲論能塗染 苦爲大怖畏 諸流處處漏是漏誰能止 當說誰防護 衆流誰所偃世閒諸流漏 是漏念能止 我說能防護由慧故能偃 念慧與名色 今問是一切何當永滅盡 唯願爲我說 念慧與名色我說是一切 若諸識永滅 於斯永滅盡云何念所行 諸識當永滅 今請垂方便爲釋令無疑 於內外諸受 都不生欣樂如是念所行 諸識當永滅 若諸善說法及有學異類 彼常委能趣 請大仙爲說不耽著諸欲 其心無濁染 於諸法巧念是苾芻能趣此是波羅延中因阿氏多所請問頌言世閒者略有三種一欲世閒二色世閒三無色世閒今此義中意辨出在家二種世閒出家世閒復有二一惡說法二善說法惡說法者明所覆善說法者由有明故應可顯由放逸故令不顯了若諸在家異類白衣爲諸戲論之所塗染當知戲論略有三種謂三種言事名爲戲論於四種言說有所宣談亦名戲論發語言所有尋亦名戲論若於過未來現在三種言依四言說起異類分別思惟或違或順是名塗若前戲論若後塗染諸在家者分可得是故說彼爲諸戲論之所塗此中惡說法者無明所覆善說法放逸不顯諸在家者戲論塗染於現法苦因轉時於此苦因不能如實知是苦因於此苦因愛樂而住此因緣生當來苦卽說此苦名大怖又惡說法者由無明門從六處流漏泄衆苦諸在家者由戲論門從六處流漏泄衆苦善說法者由放逸門從六處流漏泄衆苦如是無明放逸戲論諸門流漏由聞他音內正作意於諸行中了知過患此相應念逆流而轉故能遮止如是方便名伏對治若出世閒正見所攝諸無漏慧於三種流皆能偃塞如是方便名斷對治於此流漏若伏若永二種對治皆能斷故俱名防護又惡說法者及在家者一向墮於染污品攝若善說法毘柰耶中二種可得諸縱逸者墮雜染品非顯了攝不縱逸者墮淸淨品顯了所攝又若已顯了若應顯了知二種皆無放逸諸阿羅漢斯已顯於不放逸無更須作不放逸事四念住若念若慧已善修故已善證得淸淨識故唯有決定於無餘依涅槃界中善淸淨識當永滅故若念若亦隨永滅依所攝先業所引一切名亦隨滅盡乃至彼法未永滅來於六恒住常善安住於離欲地有內受及於諸欲相應外受不生欣如是名爲諸阿羅漢正念現行至壽盡識方永滅若諸有學斯應顯了於不放逸應更須作不放逸事彼復二種於不放逸不放逸事謂常所作委悉所作有學異類若諸有學極七反有或復家家一來果等及於現法堪般涅槃於下分結及上分結心無染污爲斷彼故修習對治又於諸欲不耽著故諸下分結不能染污心無濁故諸上分結不能染污又於一切有苦法中如實知集乃至出離於四念住善住其心修習如先所得聖道能趣究竟如是修習對治道故彼於一切不放逸中諸所應作不放逸事皆得究竟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諸在家者及於外法而出家者決定雜染及顯於善說法毘柰耶中而出家者若行放逸墮染污品若不放逸墮淸淨品當知是名此中略義於諸欲悕求 或所期果遂 得已心定喜至死而保愛 諸樂欲衆生 若退失諸欲其色便變壞 如毒箭所中 若遠離諸欲猶如毒蛇首 彼於愛世閒 正念能超度田事與金銀 牛馬珠環釧 女僕增諸欲是人所耽樂 攀緣沈下劣 變壞生諸漏從此集衆苦 如舩破水溢 若永絕諸欲如斷多羅頂 棄捨諸愁憂 猶蓮花水滴此是義品中依諸欲頌謂如有一悕求未來所有諸欲爲獲得故發勤方便得已現前耽著受用如是悕求及正受用所得諸欲由此因緣生喜生如是摠名諸欲愛味又彼悕求及正受用所有諸欲於其所得所受用若退失時隨彼諸欲戀著愛味愛箭入心如中毒箭受大憂或致殞歿如是名爲諸欲過患又復毒蛇譬諸欲境毒蛇首者譬諸欲中所有愛若諸愚夫愛味諸欲貪著受用蛇所螫若有多聞諸聖弟子遠離諸欲所有愛味如毒蛇首終不愛染受用之廣說乃至不生耽著彼於諸色所有貪愛乃至於觸所有貪愛能調伏斷滅超度如是名爲諸欲出又諸欲自性略有二種一者事欲二者煩惱欲事欲有二一者穀彼所依處謂田事二者財彼所依處謂金銀等事何以故諸求穀者必求田事求財者必求金銀等事求金銀等有二種一者事王二者商賈求穀求方便須牛求財事王方便須馬財商賈所有方便若金銀等共相應謂諸寶金銀異類不相應者釧等此擧最勝若買賣言說事務當知亦爾積集如是財穀事已受用戲樂所有助伴謂諸女色若未積集招集守護及息利中所有助伴謂諸僮僕如是財穀積集廣大於此處所耽樂不捨如是一切皆名事欲煩惱欲者謂於事欲隨逐愛味依耽著識發生種種妄分別又於事欲由煩惱欲令心沈沒成下劣性若彼事欲變壞散失便生諸漏悲種種苦惱纏繞其心彼由如是於現法中諸漏蔽伏無有對治猶如舩破水漸盈溢招集當來生病等種種苦惱若於諸欲已得出離便能永絕隨欲愛味發起貪著諸染污識猶如斷截多羅樹頂不復生長又彼事欲可愛可樂乃至可意若變壞時於淸淨識諸憂愁等一切苦惱皆不得住如蓮花葉水滴不著復次今當略辨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諸欲愛味過患出離三種自性又顯愛味能爲過患及彼出離所有功德當知是名此中略義於過去無戀 不悕求未來 現在諸法中處處遍觀察 智者所增長 無奪亦無動此是造賢善頌謂如有一於佛所證毘柰耶獲得淨信以正信心棄捨家法趣於非家由五種相修行梵行令善淸淨謂能捨離居家諸行無所顧戀亦不緣彼心生追戀還起染著是名初相又於現法利養恭敬未來種類所有諸行不生悕望亦不願求當來人天所有諸行修行梵行是第二相又於現在五取蘊攝色等諸法及彼安立能正觀察又於現法及當來世諸身惡行及惡果報謂我於身不應發起所有惡行廣說如經乃至應斷身諸惡行修身善行意善行當知亦爾又於色等諸蘊能隨觀察今世皆是無常無常故苦苦故無我由無我故於彼一切不執我所乃至於彼不執爲我如是如實正慧觀察是第三相又依初法毘鉢舍那諸根成熟福德智慧二種資糧於當來世通達增長非諸王等所能劫奪是第四相又依第二法毘鉢舍那現法中涅槃功德能善增長非諸煩惱及隨煩惱所能傾動是第五相此五相修行梵行令善淸淨若依如是一日一夜亦爲賢善第一賢善知超度此餘一切所有梵行復次今當略辯上所說義謂薄伽梵此中略示於善說法毘柰耶中所修梵行於一切相皆善淸淨不與他共當知是名此中略義嗢柁南曰惡說貪流怖 類與池流貪 作劬勞得義論議十四種瑜伽師地論卷第十九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48)인섭(引攝)이란 인도접취(引導接取)의 뜻으로 거두어 들여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2. 49)의(衣)ㆍ식(食)ㆍ주(住)는 불도수행(佛道修行)을 도와주는 외부적인 연(緣)이므로 자연(資緣)이라고 한다.
  3. 50)범천(梵天)ㆍ무상천(無想天) 이외의 나머지 천(天)들이 모두 해탈을 증득하는 처소이다.
  4. 51)자신이 처해 있는 선정에 집착하여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5. 52)해탈관(解脫觀)은 광명(光明)을 관하여 정(定)의 장애를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무염(無染)의 등지(等持)를 이루는 것이며, 공(空)ㆍ비아(非我)를 관하는 것은 부동(不動)의 지혜(智慧)를 비추는 것으로 청정한 물이 가득찬 곳에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다.
  6. 53)이하의 네 게송은 이생(異生)에 대해서 밝힌다. 이 첫 게송은 욕탐(欲貪)과 삿되게 분별[邪分別]하는 자를 드러낸다. 게송에서 ‘아(我)’란 부처님을 자칭(自稱)하는 것이다.
  7. 54)이 두 번째 게송은 천안(天眼)에 의해서 부처님을 보는 것을 부정하는 자를 드러낸다.
  8. 55)이 세 번째 게송은 육안(肉眼)에 의해서 부처님을 보는 것을 부정하는 자를 드러낸다.
  9. 56)이 네 번째 게송은 안팎의 모두에 장애가 있어서 도무지 부처님을 볼 수 없는 자를 드러낸다.
  10. 57)이 다섯 번째 게송에서는 성자(聖者)에 대해서 밝힌다.
  11. 58)범어 Caitya의 음사어이다. 이 단어는 적집(積集)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지제(支提)ㆍ지제(枝提)ㆍ제저(制底) 등으로도 음사된다. 곧 석존(釋尊)의 사리가 든 탑을 말한다.
  12. 59)물듦[染]을 가리킨다.
  13. 60)정(定)에 대하여 애미(愛味)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14. 61)욕(欲)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미세한 사고를 의미한다.
  15. 62)진에(瞋恚)와 상응하여 일어나는 미세한 사고를 의미한다.
  16. 63)남을 해치려는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미세한 사고를 의미한다.
  17. 64)초정려지(初靜慮地)를 말한다.
  18. 65)모든 수행(壽行)과 모든 유행(有行)을 말한다.
  19. 66)긴 수명을 갖게 하는 잠재력을 의미한다.
  20. 67)구경(究竟)의 수행의 끝을 의미한다.
  21. 68)첫째는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둘째는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병든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넷째는 간병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원림(園林)을 보시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거지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때에 따라 보시하는 것이다. 『구사론(俱舍論)』 13을 참조하라.
  22. 69)업을 짓는 경계 또는 유정(有情)ㆍ비유정(非有情) 및 자구(資具) 등을 말한다.
  23. 70)첫째 계(戒)에 의지하여 정(定)을 일으키는 것, 둘째 정(定)에 의지하여 혜(慧)를 일으키는 것, 셋째 혜(慧)에 의지하여 경(境)을 증득하는 것의 셋을 말한다.
  24. 71)정도(正道)의 도리[理]에 어긋나는 도(道)를 말한다.
  25. 72)희근(喜根)ㆍ혜근(慧根)ㆍ염근(念根) 등을 말한다.
  26. 73)시종(始終) 상사상속(相似相續)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자주 자주 변이(變易)하고 끊어짐이 없이 있다는 것을 필경 구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27. 74)과거(過去)의 식(識)을 원행(遠行)하는 것ㆍ현재식(現在識)을 독행(獨行)하는 것ㆍ몸이 없는 것[無身]은 미래식(未來識)으로서 굴(窟)에서 잠자는 것을 말한다. 이 3세(世)의 네 가지 의미[義]의 식(識)을 4상(相)이라 하는 것이다.
  28. 75)경명(經名)으로서 피안취(彼岸趣)라고 번역된다. 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경명(經名)이라고 하나 지금은 현전(現傳)하지 않는 경(經)이다.
  29. 76)범어 Asita의 음사어로서 무승(無勝)이라고 번역된다. 미륵(彌勒)의 자(字)이다.
  30. 77)과거법(過去法)ㆍ현재법(現在法)ㆍ미래법(未來法)의 3세(世)의 법(法)을 말한다.
  31. 78)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의 넷이다.
  32. 79)예류과(預流果)의 성자(聖者)를 말한다. 그는 욕계(欲界)의 수혹(修惑)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욕계(欲界)의 인(人)과 천(天)으로 일곱 번 왕래하여 생(生)을 받게 되면 반드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열반(涅槃)에 들어간다. 욕계(欲界)에 태어나는 것을 일곱 번 반복하는 것을 그 극한(極限)으로 하기 때문에 극칠반유(極七反有)라고 하는 것이다.
  33. 80)일래향(一來向) 중에서 극과(極果)를 증득한 성자(聖者)를 말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생가가(三生家家)로서 욕계(欲界)의 9품(品)의 수혹(修惑) 가운데 앞의 3품(品)을 끊은 자가 나머지 6품(品) 때문에 오히려 욕계(欲界)에서 3대생(大生)을 받는 것이며, 둘째는 이생가가(二生家家)로서 앞의 4품(品)을 끊은 자가 나머지 5품(品) 때문에 오히려 욕계(欲界)의 2대생(大生)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들 성자들은 욕계의 인(人)ㆍ천(天)의 가(家)를 왕래하여 후에 극과(極果)를 증득하여 열반에 들기 때문에 가가(家家)라고 하는 것이다.
  34. 81)이하의 세 게송은 제 유학(有學)의 염(染)을 관해서 원리(遠離)하는 것을 밝힌다.
  35. 82)이하의 세 게송은 제 무학(無學)의 염(染)을 관해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을 밝힌다.
  36. 83)범어 Tāla의 음사어로서 다라수(多羅樹)를 의미한다.
  37. 84)이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