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 지음 현장 한역 2. 섭결택분(攝決擇分)1) 본지분의 열일곱 자리[十七地]의 뜻을 결택하는데 12단(段)이 있다. 제1단, 제51권부터 제57권까지에서 오식신지(五識身地)와 의지(意地)를 합하여 결택한다. 제2단, 제58권부터 제61권까지에서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등의 세 가지 자리[三地]를 합하여 결택한다. 제3단, 제62권부터 제63권의 첫째부분까지에서 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를 결택한다. 제4단, 제63권의 중간 앞 부분의 한 장 남짓한 데서 비삼마희다지(非三摩呬多地)를 결택한다. 제5단, 제63권의 중간 뒷 부분의 두 장남짓한 데서 유심지(有心地)를 결택한다. 제6단, 제63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심지(無心地)를 결택한다. 제7단, 제64권에서 문혜지(問慧地)를 결택한다. 제8단, 제65권부터 제66권까지에서 사혜지(思慧地)를 결택한다. 제9단, 제77권의 첫 머리에서 수혜지(修慧地)를 결택한다. 제10단, 제67권부터 제71권까지에서 성문지(聲聞地)를 결택한다.(獨覺地는 결택하지 않고 있다). 제11단, 제72권부터 제80권의 전반(前半)까지에서 보살지(菩薩地)를 결택한다. 제12단, 제80권의 후반(後半)에서 유여의지(有餘依地)와 무여의지(無餘依地)를 합하여 결택한다
1)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 ①
①의지(意地) ① 이와 같이 이미 본지(本地)를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모든 자리[地]의 결택의 교묘함[決擇善巧]을 설명하겠는데, 이 결택의 교묘함을 의지[依]함으로써 온갖 자리에 대하여 잘 묻고 대답한다. 이제, 먼저 오식신지(五識身地)와 의지(意地)에 대한 결택을 설명하겠다.
【문】앞에서 종자의 의지[種子依]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설명하면서, 있다함[有]과 있다는 인연[有因緣]과 널리 분별하는 뜻[廣分別義]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설명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반연하여 널리 분별하는 뜻이 있음을 알 것이며, 어떻게 알아야 되겠는가.
【답】이렇게 세움은 바로 부처님ㆍ세존의 가장 깊고 은밀한 기별[記]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 때문에 설명하지 아니하였다. 세존2)의 말씀과 같다.
아다나식[阿陀那識]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온갖 종자[一切種子]는 사나운 흐름[瀑流]과 같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이에게 펴 말하지 아니했나니 그는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염려해서 이다.
다시, 올타남(嗢陀南)으로 말하리라.
집수(執受)와 처음[初]과 명료함[明了]과 종자(種子)와 업(業)과 몸의 느낌[身受]과 마음 없는 선정[無心定]과 목숨의 마침[命終]이니, 없다면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다.
여덟 가지 모습으로 말미암아 아뢰야식은 결정코 있다함이 증명된다. 만약 아뢰야식을 여의고서는 집수(執受)에 의지(依止)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맨 처음에 일어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명료한 성품[明了性]이 있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종자의 성품[種子性]이 있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업용(業用)의 차별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몸의 느낌의 차별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마음 없는 선정에 처하게 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목숨 마칠 적의 알몸[識]이라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무엇 때문에 아뢰야식이 없으면 집수에 의지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다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아뢰야식은 앞선 세상에 지었던 업행(業行)을 원인 삼으며, 눈[眼] 따위 전식(轉識)은 현재의 세상에서 뭇 인연[衆緣]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어서 감관[根]과 경계라고 말함과 같으며, 뜻 지음의 힘[作意力] 때문에 모든 전식이 생긴다고 널리 설명한다. 이것을 첫째의 원인이라 한다. 또, 6식신(六識身)에는 착함과 착하지 않음 등의 성품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으니, 이것이 둘째의 원인이다. 또 6신신에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이숙(異熟)이 소속한 것들은 인정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셋째의 원인이다. 또, 6식신은 저마다 따로 따로 의지[依]해서 구르므로 저들끼리의 의지에서는 저들끼리의 알음[識]이 굴러지는데, 곧 그의 의지할 것[所依]에서는 으레 집수(執受)가 있겠지마는 그 나머지에서는 집수가 없어서 도리에 맞지 않다. 설령 집수를 인정한다 하여도 역시 도리에 맞지 않으니, 알음[識]이 멀리 여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넷째의 원인이다. 또 의지할 것[所依止]이 자주자주 집수하는 허물이 이루어진다. 왜 그런가. 저 안식(眼識)이 한 때에는 구르고 한 때에는 구르지 아니하며, 그 밖의 알음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섯째의 원인이다. 이와 같이, 전생의 업과 현재의 인연으로써 원인을 삼기 때문이며, 착함과 착하지 않은 성품 따위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숙의 종류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며, 저마다 따로 따로 의지할 것에서 모든 알음이 굴러지기 때문이며, 자주자주 집수가 의지하는 허물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어째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맨 처음에 일어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만약 결정코 아뢰야식이 있다면, 응당 두 개의 알음[二識]이 같은 때에 일어남이 있어야 하리라’고 하면, 그에게 말하리라. ‘그대는 허물이 없는 데서 망령되이 허물되는 생각을 내고 있다. 왜냐 하면, 두 개의 알음이 같은 때에 굴러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잠시 어떤 사람이 같은 때에 보려고 하거나, 알려고 할 적마다 하나의 알음이 있음에 따라 맨 처음에 일어난다 함은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그는 그 때의 뜻 지음[作意]에 구별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감관과 경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무슨 인연 때문에 알음이 한꺼번에 구르지 않을 것인가.’ 어째서 만약 모든 알음이 한꺼번에 구름[轉]이 없다면, 안식 따위와 더불어 같이 행하는 의식(意識)의 명료한 체성(體性)도 인정할 수 없다 하는가. 혹 어느 때에는 과거에 일찍이 받았었던 경계를 기억하는 그 때에는 의식의 행(行)이 명료하지 않지마는 현재의 경계에서 뜻이 나투어 행해지는 때에는 이와 같은 명료하지 않은 모습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알음은 한꺼번에 구른다 함을 인정해야 할뿐더러 의식은 명료한 성품이 없다 함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종자의 성품이 있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이는 6식신은 차츰차츰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착함의 간단없는 데서부터 착하지 않은 성품이 나게 되고, 착하지 않음의 간단없는 데서 다시 착한 성품이 나게 되며, 두 가지의 간단없는 데서부터 무기(無記)의 성품이 나게 된다. 열등한 경계[劣界]의 간단없는 데서 중간 경계[中界]가 나게 되고 중간 경계의 간단없는 데서 훌륭한 경계[妙界]가 나게 되며, 이와 같이 하여 훌륭한 경계의 간단없는 데서, 나아가 열등한 경계가 나게 된다. 번뇌가 있음[有漏]의 간단없는 데서 번뇌가 없음[無漏]이 나게 되고 번뇌가 없음의 간단없는 데서 번뇌가 있음이 나며, 세간의 간단없는 데서 출세간[出世]이 나고 출세간의 간단없는 데서 세간이 나는 것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종자의 성품이 있다 함은 바른 도리에 마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저 모든 알음은 오랜 동안에 끊임이 있으며 계속하여 오랜 동안에 흐르지 않게 되니, 그러므로 이것 또한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어째서 만약 모든 알음이 한꺼번에 구름이 없다면, 업용(業用)의 차별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네 가지의 업(業)3)이 있다. 첫째는 기세간[器]을 분별하여 아는 업이며, 둘째는 의지[依]를 분별하여 아는 업이며, 셋째는 나를 분별하여 아는 업이며, 넷째는 대경[境]을 분별하여 아는 업이다. 이 분별하여 아는 것들은 찰나 찰나 동안에 한꺼번에 구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알음은 한 찰나 동안에 이와 같은 업용의 차별이 있는 것이어서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어째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몸의 느낌의 차별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어떤 사람이 혹은 이치대로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이치대로 하지 않기도 하며, 혹은 생각함이 없기도 하고 혹은 따라서 머트럽게 생각하거나 세밀하게 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선정의 마음에 처하기도 하고, 혹은 선정에 있지 않기도 하는 그 때에 몸의 여러 가지 받아들임에서 하나만이 아닌 많은 갖가지 차별이 일어나는데 거기에는 없어야 하는데도 그러나 실제로는 있게 되니, 그러므로 결정코 아뢰야식은 있는 것이다. 어째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마음 없는 선정[無心定]에 처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무상정(無想定)이거나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아서 알음은 몸에서 떠나고 몸을 떠나지 않음이 없어야 되겠으나, 세존의 말씀하심과 같아서 그 때에 알음은 몸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목숨을 마치는 때의 알음이라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하는가. 죽으려 할 적에는 혹은 몸의 윗 부분으로부터 알음은 점차로 떠나면서 냉기가 점차로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몸의 아랫 부분으로부터 그러기도 하며, 저 의식이 구르지 아니하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아뢰야식이 있어서 몸을 붙잡아 유지하는 줄 알 것이다. 이것이 만약 버리고 떠난다면, 바로 몸 부분에는 냉기가 있게 되고 몸은 감각이 없을 것이나 의식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고 하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다시, 다음에 올타남으로 말하리라.
반연할 것[所緣]과 또는 상응함[相應]과 다시 서로가 반연의 성품이 됨과 알음[識] 등과 한꺼번에 구름[俱轉]과 더러움에 섞여 물듦[雜染汗]과 환멸[還滅]이니라.
간략하게 말한다. 아뢰야식에는 네 가지 모습으로 말미암아 유전[流轉]을 세우며, 한 가지 모습으로 말미암아 환멸(還滅)을 세운다. 어떻게 네 가지 모습으로 유전을 세우는가.반연할 것에서 유전[所緣轉]을 세우기 때문이며,상응함에서 유전[相應轉]을 세우기 때문이며, 서로가 반연 성품이 됨에서 유전[互爲緣性轉]을 세우기 때문이며, 알음 등이 한꺼번에 구름에서 유전[識等俱轉轉]을 세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가지의 모습으로 환멸을 세우는가. 섞여 물듦에서 유전[雜染轉]을 세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저 환멸을 세움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어떻게 반연할 것에서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가. 간략하게 말한다. 아뢰야식은 두 가지의 반연할 대경으로 말미암아 유전하는 것이다. 첫째는 안의 집수[內執受]를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둘째는 바깥의 분별이 없는 기세간의 모습[外無分別器相]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다. 안의 집수를 분별하여 안다 함은, 제 성품을 두루 계탁하고 집착하여[遍計所執] 망령되게 집착하는 습기(習氣)와 모든 형상의 감관[色相]과 감관이 의지하는 처소[根所依處]를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이것은 형상 있는 세계[有色界]에서 이며, 만약 형상 없는[無色] 세계에 있다면 습기와 집수와 분별하여 아는 것만이 있다. 바깥의 분별이 없는 기세간의 모습[器相]을 분별하여 안다 함은, 안의 집수를 반연하는 아뢰야식에 의지(依止)하기 때문에 온갖 시간에서 끊임이 없이 기세간(器世間)의 모습을 분별하여 안다. 마치 등불의 불꽃이 나는 때에는 안의 기름과 심지에 붙어서 바깥으로 광명을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의 안의 집수를 반연하고 바깥의 기세간 모습을 반연하여 생기는 도리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아뢰야식은 경계를 반연함이 미세하여 세간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조차 또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아뢰야식의 경계를 반연함은 그만 두는 때가 없고 변하거나 바꾸어짐이 없어서, 처음의 집수하는 찰나로부터 목숨을 마치기에 이르기까지 한 맛[一味]으로 분별하여 알면서 구르기 때문이다. 또 아뢰야식은 반연할 경계에서 생각생각에 나고 없어지니, 찰나에 계속하고 흘러 하나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닌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아뢰야식은 욕심 세계 안에서는 좁고 작은 집수(執受)의 경계를 반연하며, 형상 세계 안에서는 넓고 큰 집수의 경계를 반연한다고 말해야 한다. 무형 세계[無色界]의 공이 끝없는 하늘[空無邊處]과 식이 끝없는 하늘[識無邊處]에서는 한량 없는 집수의 경계를 반연하며, 아무것도 없는 하늘[無所有處]에서는 미세한 집수의 경계를 반연하며,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하늘[非想非非想處]에서는 지극히 미세한 집수의 경계를 반연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반연할 것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반연할 경계에서 미세하게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서로 비슷하게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찰나 동안에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좁고 작은 집수의 반연할 것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넓고 큰 집수의 반연할 것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한량 없는 집수의 반연할 것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미세한 집수의 반연할 것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며, 지극히 미세한 집수의 반연할 것을 분별하여 알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반연할 것에서의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상응함에서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가. 아뢰야식은 5변행(五遍行)의 마음과 상응하는 법과 언제나 함께 상응하니, 뜻 지음[作意]과 닿음[觸]과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思]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은 역시 이숙(異熟)에 속한 것으로서 가장 지극하게 미세하므로 세간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조차도 역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하나의 종류로서 경계를 반연하며 구른다. 또 아뢰야식과 상응하는 느낌[受]은 한결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무기의 성품[無記性]에 속하니, 그 밖의 딸린 마음[心所]의 행상(行相)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변행(遍行)의 딸린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이숙의 한 종류와 상응하기 때문이며, 지극히 미세하게 구름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언제나 하나의 종류로서 경계를 반연하여 구름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무기와 상응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상응함에서의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 줄 알 것이다. 어떻게 서로가 반연의 성품이 됨에서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가. 아뢰야식은 모든 전식(轉識)과 함께 두 가지 반연함의 성품을 짓는다. 첫째는 그의 종자가 되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의 의지할 것이 되기 때문이다. 종자가 된다 함은 온갖 착함과 착하지 않음과 무기의 전식이 구를 때에 온갖 모두가 아뢰야식으로써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의지할 것이 된다 함은 아뢰야식이 형상 감관[色根]을 집수(執受)함으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의 식신[五識身]은 이에 의하여 구르는 것이며, 집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아뢰야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말라(末那)가 있게 되며, 이 말라를 의지함으로써 말미암아 의식(意識)이 구를 수 있게 된다. 비유컨대, 눈 따위의 다섯 감관에 의지하여 다섯 가지 식신이 구르므로 다섯 감관이 없는 것이 아님과 같으며, 의식도 역시 그러하여 의근(意根)이 없는 것이 아니다. 또, 모든 전식과 아뢰야식은 두 가지의 반연하는 성품을 짓는다. 첫째는 현재 법 안에서 그의 종자를 자라게 하고 기르기 때문이며, 둘째는 뒷날의 법 안에서 그것이 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의 종자를 거두어 심기 때문이다. 현재 법 안에서 그의 종자를 자라게 하고 기른다는 것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착함과 착하지 않음과 무기의 전식이 구를 때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이 하나의 의지(依止)에서 같이 났다가 같이 없어졌다가 하면서 아뢰야식에 훈습(熏習)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뒤로 갈수록 전식의 착함과 착하지 않음과 무기의 성품이 더욱 더 불고 자라며 더욱 더 왕성하며 더욱 더 명료하게 굴러지는 것과 같다. 뒷날 법 안에서 그것이 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의 종자를 거두어 심는다 함은, 그 훈습된 종류가 장차 오는 세상의 이숙 무기(異熟無記)의 아뢰야식을 잘 이끌어 껴잡는다. 이와 같이 그의 종자가 되기 때문이며, 그의 의지할 바가 되기 때문이며, 종자를 자라게 하고 기르기 때문이며, 종자를 거두어 심기 때문에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은 서로가 반연의 성품이 됨에서의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아뢰야식과 전식 등은 한꺼번에 구름에서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가. 아뢰야식은 혹 어느 때에는 한 가지만의 전식과 함께 구르기도 하니, 이른바 말라이다. 왜 그러한가. 이 말라로 말미암아 나라는 소견[我見]과 난체[慢] 따위와는 항상 함께 상응하고 행상(行相)을 생각하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마음 있는 지위[有心位]거나 마음 없는 지위[無心位]거나 간에 항상 아뢰야식과 한 때에 함께 구르며, 아뢰야식을 반연함으로써 경계가 되어 나라고 집착하고 난체를 일으키며 행상을 생각하고 헤아린다. 혹은 한 때에 두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니, 말라와 의식이다. 혹은 한 때에 세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니, 다섯 가지 식신의 어느 하나와 구르는 때이다. 혹은 한 때에 네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니, 다섯 가지 식신의 어느 두 가지와 구르는 때이다. 어느 때는 나아가 일곱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니, 다섯 가지 식신이 어울려서 구르는 때이다. 또, 의식은 더러움에 물듦의 말라로써 의지로 삼으므로, 그가 아직 사라지지 못하였을 때는 모양을 분별하여 아는 속박에서 해탈할 수가 없지마는 말라가 사라지고 나면 모양의 속박에서 해탈하게 된다. 다시, 의식은 다른 경계를 반연하고 스스로의 경계도 반연한다. 다른 경계를 반연한다 함은, 다섯 가지 식신이 반연하는 경계를 반연하되 혹은 단번에 하기도 하고 단번에 하지 않기도 한다. 스스로의 경계를 반연한다 함은, 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는 것을 말한다. 다시, 아뢰야식은 혹 어느 때에는 괴로운 느낌[苦受]ㆍ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과 한꺼번에 구른다. 이 느낌은 전식과 상응하여 그에 의하여 일어난다. 인간 안에서나 욕심 세계 하늘에서나 일부분의 아귀와 축생 안에서는 함께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과 전식과 상응하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서로 뒤섞여서 함께 구른다. 나락가(那落迦) 등의 안에서는 남에게 압도당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과 순수한 괴로움[純苦]을 뒤섞여 느끼게 되어 한꺼번에 구름이 없다. 여기서의 느낌은 압도당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알기 어려운 줄 알아야 한다. 나락가 등 안에서는 한결같이 괴로운 느낌이 함께 구르는 것처럼, 이와 같이 아래 셋의 정려 자리[三靜慮地]에서는 한결같이 즐거운 느낌이 함께 구르며, 제4 정려 자리로부터 유정천(有頂天)까지에서는 한결같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함께 구른다. 다시, 아뢰야식은 혹 어느 때는 전식과 상응하여 착함ㆍ착하지 않음ㆍ무기의 모든 딸린 마음[心所]과 같이 한꺼번에 구른다. 이와 같이 비록 아뢰야식이 전식과 같은 때에 구르며, 또한 객의 느낌[客受]과 객[客]의 착함ㆍ착하지 않음ㆍ무기의 딸린 마음과 같이 한꺼번에 구른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와 상응한다고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러한가. 그와 반연을 같이하면서 구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치 안식(眼識)이 비록 안근(眼根)과 함께 구른다 하더라도 그러나 상응하지 않은 것처럼, 이것 역시 그와 같다. 이 안의 조그마한 부분이 서로 비슷하다는 도리에 의한 까닭에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마치 모든 딸린 마음은 비록 딸린 마음의 성품과는 차별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한 몸 안에서 한 때에 함께 구르면서도 서로가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은 한 몸 안에서 한 때에 함께 구르면서도 서로가 역시 어기지 않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마치 하나의 사나운 흐름에서 많은 물결들이 한 때에 흐르면서도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과 같으며, 또 마치 하나의 맑고 깨끗한 거울 앞에서 많은 영상들이 한 때에 비추면서도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하나의 아뢰야식에서 많은 전식들이 한 때에 함께 구르면서도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마치 하나의 안식이 하나의 시간에서나 하나의 일의 경계에서는 다만 한 종류의 다름이 없는 색의 모양[色相]만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어느 때에는 단번에 하나가 아닌 갖가지의 색의 모양을 취하는 것과 같다. 안식의 뭇 색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식(耳識)의 뭇 소리에서나 비식(鼻識)의 뭇 냄새에서나 설식(舌識)의 뭇 맛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또, 마치 신식(身識)이 혹은 하나의 때에서나 하나의 일의 경계에서는 다만 한 종류와 다름이 없는 닿음[觸]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어느 때에는 단번에 하나 아닌 갖가지 닿음의 모양을 취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의식도 하나의 시간에서는 하나의 경계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 아닌 갖가지의 경계 모양을 취하는 그 도리 또한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 줄 알 것이다. 또 앞에서 말한 말라(末那)는 언제나 아뢰야식과 함께 구른다. 나아가 아직 끊지 못했을 적에는 언제나 선천적으로 저절로 있는 네 가지 번뇌와 한 때에 상응하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니, 살가야견(薩迦耶見)과 젠체함[我慢]과 자기를 사랑함[我愛]과 무명(無明)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번뇌는 선정의 자리[定地]거나 선정이 아닌 자리[不定地]이거나 항상 행하며, 착함[善] 따위와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유부무기의 성품[有覆無記性]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전식과 함께 구르기 때문이며, 모든 느낌과 함께 구르기 때문이며, 착함 따위와 함께 구르기 때문에 아뢰야식과 함께 구름에서의 유전의 모습을 세우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아뢰야식은 섞여 물듦에서의 환멸의 모양을 세우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아뢰야식은 바로 온갖 섞여 물듦의 근본이다. 왜 그러한가. 이 알음[識]은 바로 유정의 세간을 생기게 하는 근본이니, 모든 감관과 감관이 의지하는 처소와 전식 등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기세간(器世間) 생기게 하는 근본이니, 기세간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유정들을 서로 일으키는 근본이니, 온갖 유정들은 서로 견주어 보며 서로가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한 유정과 다른 유정이 서로 보게 되는 때에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를 내며, 다시 서로가 받아쓰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유정 세계는 서로가 증상연이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아뢰야식은 온갖 법의 종자를 지니기 때문에 현재 세상에서 바로 괴로움의 진리[苦諦]의 바탕[體]이며, 또한 미래의 괴로움의 진리를 내는 원인이며 또한 현재의 쌓임의 진리[集諦]를 내는 원인이다. 이와 같이 유정 세간을 내기 때문이며, 기세간을 내기 때문이며, 이는 괴로움의 진리의 바탕이기 때문이며, 미래의 괴로움의 진리를 내기 때문이며, 현재의 쌓임의 진리를 내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온갖 섞여 물듦의 근본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아뢰야식이 껴잡아 지니는 순해탈분(順解脫分)과 순결택분(順決擇分) 등의 착한 법의 종자는 쌓임의 진리[集諦]의 원인이 아니니, 순해탈분 등의 착한 뿌리[善根]는 헤맴[流轉]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세간의 온갖 착한 뿌리는 이로 인하여 나기 때문에 더욱 더 밝고 왕성하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섭수하는 자기 종류의 종자는 더욱 더 공능(功能)이 있으며 세력이 있어서, 종자를 더욱 자라게 하여 빨리 성립시킬 수가 있다. 또 이 종자에 의하기 때문에 저 모든 착한 법은 더욱 더 밝고 왕성하게 낸다. 또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더욱 불어나고 더욱 더 뛰어나게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한 모든 이숙 과보를 받는다. 다시 다음에, 이 온갖 종자의 아뢰야식에 의하기 때문에 박가범께서 말씀하시었다. “눈의 경계[眼界]와 색의 경계[色界]와 안식의 경계[眼識界]가 있으며, 나아가 뜻의 경계[意界]와 법의 경계[法界]와 의식의 경계[意識界]가 있으니, 아뢰야식 안에서 갖가지의 경계[界]가 있기 때문이니라.” 또 경에서 악차(惡叉)의 무더기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아뢰야식의 안에는 많은 경계[界]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 섞여 물듦의 근본인 아뢰야식은 착한 법을 닦기 때문에 비로소 바꾸어져서 없어지게 된다. 이 착한 법을 닦으면서 모든 범부[異生]들은 전식을 반연하여 대경으로 삼고서 뜻 지음[作意]의 방편으로 마음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맨 처음의 성체현관(聖諦現觀)에 들게 된다. 아직 진리[諦]를 보지 못한 이는 모든 진리 가운데서 아직 법안(法眼)을 얻지 못하여서, 곧 온갖 종자의 아뢰야식을 능히 통달하지 못한다.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이는 이와 같은 행을 닦은 뒤에 혹은 성문의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기도 하고 혹은 보살의 정성이생에 들기도 하여서 온갖 법의 참된 법계[眞法界]를 통달한 뒤에야 역시 아뢰야식을 통달하게 된다. 그 때에는 통틀어서 자기 안에 있는 온갖 섞여 물든 것을 자세히 살피며, 역시 제 몸의 바깥은 모양의 속박[相縛] 때문에 속박되었고 안은 추중의 속박[麤重縛] 때문에 속박되었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다시 다음에, 마음 보기[觀行]를 닦는 이는 아뢰야식은 온갖 쓸모없는 이론에 소속된 모든 행의 경계이기 때문에 그 모든 행을 요약하여 아뢰야식 안에서 통틀어 한 덩이 또는 한 가리 또는 한 무더기로 삼는다. 한 무더기로 삼은 뒤에는 진여(眞如)의 경계를 반연하는 지혜로 말미암아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전의(轉依)를 얻는다. 전의가 끊임없어지면 이미 아뢰야식을 끊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이미 온갖 섞여 물든 것을 끊었다고 말해야 한다. 전의는 서로 어긋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아뢰야식을 다스리게 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아뢰야식의 체(體)는 바로 덧없고 취하여 받음이 있는 성품[有取受性]이지만 전의는 바로 항상하고 취하여 받음이 없는 성품[無取受性]이니, 진여의 경계를 반연하는 성인의 도이어야 비로소 전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뢰야식은 항상 온갖 추중(麤重)이 따르게 되지만 전의는 마침내 온갖 추중을 멀리 여윈다. 또, 아뢰야식은 번뇌에 구르는 원인[轉因]이고 성인의 도에 구르는 원인이 아니며, 전의는 바로 번뇌에 구르는 원인이 아니고 성인의 도에 구르는 원인이니, 다만 이것은 원인의 성품[因性]을 세울 뿐이어서 내는 원인의 성품[生因性]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또 아뢰야식은 좋고 깨끗한 무기의 법 안에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게 하지만 전의는 온갖 좋고 깨끗한 무기의 법 안에서 크게 자재함을 얻게 한다. 또, 아뢰야식의 끊어져 없어짐의 모양[斷滅相]이라 함은, 이 알음[識]이 바르게 끊어져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의 취함[取]을 버리므로 그 몸이 비록 머문다 하더라도 오히려 변화의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장차 오는 세상에 받을 뒷 몸[後有]의 괴로움의 원인이 끊어지기 때문에 곧 장차 오는 세상의 뒷 몸 취함을 버리며, 현재 법 안에서 온갖 번뇌의 원인이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에 문득 현재 법의 온갖 섞여 물듦이 의지하는 취함을 버리는 것이다. 온갖 추중을 영원히 멀리 여의기 때문에 수명의 인연만이 있어서 잠시 동안 살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계경(契經)에서 말씀하시었다. “그 때에는 다만 몸의 맨 끝의 느낌[身邊際受]과 수명의 맨 끝의 느낌[命邊際]을 받으니, 더 널리 말하자면, 곧 현재 법의 온갖 받을 것에서 다 마치고 스러져 다하느니라.” 이와 같이, 섞여 물듦의 근본을 세우기 때문이며, 통달에 나아가 드는 닦아 익힘의 뜻 지음[作意] 때문이며, 전의(轉依)를 세우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섞여 물듦에서 환멸의 모습을 세우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으뜸가는 이치[勝義]의 도리에 의하여 마음과 뜻과 알음[心意識]의 이름이며 이치를 세웠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 3계(三界) 등의 모든 마음과 뜻과 알음의 온갖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도리를 알맞은 대로 결단하여 알 것이다. 이 밖의 곳에서 드러내는 마음과 뜻과 알음의 이치는, 다만 교화할 유정의 차별에 따라서 어린아이의 지혜를 지닌 교화할 이들을 위해 권도로 방편을 말하여 그들을 쉽게 들 수 있게 하려는 까닭이다.
【문】만약 아뢰야식을 성취하면 역시 전식도 성취하는 것인가. 설령 전식을 성취하여도 역시 아뢰야식을 성취하는가.
【답】네 가지 구절로 말할 수 있다. 혹은 아뢰야식은 성취함이 있어도 전식은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이른바, 마음없는 수명[無心睡眠]과 마음없는 민절[無心悶絶]과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감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감과무상천(無想天)에 나는 것이다. 혹은 전식을 성취함이 있어도 아뢰야식은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이른바, 아라한과 모든 독각과 물러나지 않는 보살 및 모든 여래가 마음이 있는 자리[有心位]에 머무르는 것이다. 혹은 다 같이 성취함이 있기도 하니, 그 밖의 유정으로서 마음이 있는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혹은 다 같이 성취하지 못함이 있기도 하니, 아라한과 모든 독각과 물러나지 않는 보살 및 모든 여래가 멸진정에 들어가 남음이 없는 반열반의 경계[無餘依般涅槃界]에 처하는 그것이다.
【문】안팎의 모든 법은 제 성품이 저마다 따로 이어서 각기 제 모양에 머물거늘 무슨 인연 때문에 18계(界) 중의 6식계(六識界)만이 제 성품을 세우며, 그 밖의 모든 계는 그의 의지할 것[所依]과 반연할 것[所緣]과 돕는 벗[助伴]을 삼고서 세우는가.
【답】6식계는 저 여러 생각에서 순식간이거나 잠시 동안이거나 낮과 밤 등의 자리에서 빠르게 바뀌고 변하며, 저 여러 인연에 의탁하며, 눈 따위의 감관에 의하고 빛깔 따위의 대경을 반연하며, 모든 딸린 마음[心所]을 이용함으로써 돕는 벗을 삼으며, 하나만이 아닌 여러 가지 많은 종류를 일으킨다. 저 여러 가지는 이에 의하여 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저 여러 가지 이름을 얻으며, 마치 풀이 저 여러 인연에 붙좇기 때문에 불에 타게 되니, 그 때에 저 여러 가지 이름과 수를 붙임과 같다. 모든 풀ㆍ나무ㆍ소똥ㆍ겨ㆍ패[札] 따위를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불은 비로소 타게 되는 것이며, 그 때에 이름을 붙여서 풀의 불 내지 패의 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눈과 빛깔로써 반연이 되기 때문에 안식이 생기게 됨을 안식이라고 이름 붙이며, 이렇게 하여 의식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 이른다. 더 자세한 설명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그 나머지 눈 따위의 계(界)는 그의 제 성품은 처음 생긴 뒤로부터 곧 제 성품과 비슷하게 생기며, 차츰차츰 이으면서 마침내는 따라 구른다. 또, 하나의 알음[識]들은 그들끼리의 반연을 가자하여 갖가지의 차별의 제 성품이 생기니, 이 때문에 식계(識界)에서는 제 성품을 세우지만 그 밖의 모든 계(界)는 그의 의지할 것과 반연할 것과 돕는 벗을 삼고서야 세울 수 있게 된다. 다시 다음에는, 식신(識身)의 두루 앎[遍知]을 말하겠다.
【문】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는 몇 가지의 모양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을 두루 아는가.
【답】만약 간략하게 말하면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는다. 첫째는 섞여 물듦에 사랑하고 좋아함의 모양[雜染愛樂相]이며, 둘째는 섞여 물듦이 허물되고 재환임의 모양[雜染過患]이며, 셋째는 섞여 물듦을 돌이켜 없애는 방편의 교묘한 모양[雜染還滅方便善巧相]이다. 어떻게 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가 제 마음이 섞여 물듦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양을 두루 아는가. 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는 생각하기를, ‘지금 나의 이 마음은 모든 섞여 물듦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구나’라고 한다. 스스로가 모든 섞여 물듦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줄 알고서는 곧 탐냄 있는 성품[有貪性]에서 나와 탐냄 떠난 성품[離貪性]에 그의 마음을 편안히 머무르게 한다. 그 때에 그 마음이 탐냄 떠난 성품에 편안히 머무를 수 없으며 또한 사랑하거나 좋아하지도 않고 다시 다른 반연이 없으면, 빠르게 흘러 흩어져서 내닫는 탐냄 있는 성품 안으로 도로 나아가 들게 된다. 탐냄 있는 성품에서 그러한 것처럼, 성냄 있고 어리석음 있고 하열하고 들뜨고 고요하지 않고 산란하는 등의 성품에서 나오며, 나아가 방일하고 사랑하고 좋아함에 머무르는 성품에서 나와서 언제나 부지런히 모든 착한 법을 닦고 익히는 가운데 그 마음을 편안히 머무르게 한다. 그 때에 그 마음이 언제나 부지런히 모든 착한 법을 닦고 익히는 가운데서 편안히 머무를 수가 없으며 역시 사랑하거나 좋아하지도 않고 다시 다른 반연이 없으면, 빠르게 흘러 흩어져서 내닫는 방일하고 사랑하며 좋아하는 성품 안으로 도로 나아가 들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가 자기 마음이 섞여 물듦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양을 두루 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이 섞여 물듦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양을 두루 안 뒤에는, 이 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는 다시 자기 마음의 섞여 물듦이 허물되고 재환임의 모양을 두루 안다. 생각하기를, ‘지금 나의 이 탐냄 있는 마음은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고 두 가지 다 해치며, 현재 법에 죄를 짓고 후생 법에 죄를 짓고 현재 법과 후생 법에 죄를 지으며, 또 반연이 되어서 나는 것의 몸과 마음에 근심과 괴로움을 낸다’고 한다. 탐냄이 있는 성품에서 그러한 것처럼, 나아가 방일하고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성품에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다시 생각하기를, ‘이 탐냄이 있는 마음에서부터 방일하고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허물되고 재환이기 때문에, 돌림병이 있고 횡액이 있고 재앙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섞여 물듦이 허물되고 재환임의 모양을 두루 안 뒤에는, 다시 자기 마음의 섞여 물듦을 돌이켜 없애는 방편의 교묘한 모양을 두루 안다. ‘나는 지금 스스로가 섞여 물듦에 모든 허물과 재환이 있어 돌림병이 있고 횡액이 있고 재앙이 있고 괴로움이 있게 됨에 따라 마음을 자재롭게 구르지 못하지만, 반드시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나의 세력에 따라서 자재로이 구르게 하리라’고 한다. 그는 이미 이와 같이 ‘나는 지금 자기 마음을 따르면서 구르지 못하지만 마땅히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나를 따라 구르게 하리라’ 함을 분명히 알고서는, 자주자주 생각하고 선택하여 탐냄 있는 마음으로 하여금 탐냄이 있는 성품을 버리고 탐냄이 없는 성품 안에 편히 머물러서 좋아하게 한다. 또 그에 대한 훌륭한 공덕을 보고서, 이와 같이 하여 방일하고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성품에 이르기까지의 것을 버리게 하며, 나아가 언제나 부지런히 모든 착한 법을 닦고 익히는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며 사랑하고 좋아한다. 또 그에 대한 훌륭한 공덕을 보고서, 그는 많이 이와 같은 행에 편히 머무른 뒤에는 그 때의 그 마음은 생각하여 선택할 필요도 없고, 언제나 애쓰면서 모든 착한 법을 닦고 익히는 가운데 저절로 편안히 머무르고 좋아하며, 앞의 섞여 물듦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성품 안에서는 깊이 싫증을 낸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는 자기 마음이 섞여 물듦을 좋아하는 줄 사실대로 분명히 알면 비유할 수 없는 성품에 빠르게 회전(廻轉)한다. 또, 이와 같은 섞여 물든 마음은 허물되고 재환의 성품임을 잘 알뿐더러 이와 같이 섞여 물든 마음을 돌이켜 없애는 방편도 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맑고 깨끗한 행의 비구는 위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한 성품을 빨리 증득하니, 이른바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한다. 다시 다음에는, 마음의 교묘함[心善巧]의 차별과 마음 구름의 교묘함[心轉善巧]의 차별을 말하여야겠다. 두루 계탁하여 집착하는[遍計所執] 제 성품[自性]에 의하여 마음의 교묘함의 차별을 알아야 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으키는[依他起] 제 성품에 의하여 마음 구름의 교묘함의 차별을 알아야 된다. 다시 다음에는, 교묘하게 마음을 훈습하여 닦는 이는 두 가지의 훌륭한 이익을 얻는다. 첫째는 결과일 때에는 안락을 느껴 증득함이며, 둘째는 원인일 때에는 자재로이 구르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는, 마음이 혼탁한 이는 세 가지의 허물이 있다. 첫째는 이치답지 않은 뜻 지음[不如理作意]의 허물이며, 둘째는 수면(隨眠)의 허물이며, 셋째는 얽음 일으킴[起纆]의 허물이 그것이다.
【문】세존의 말씀과 같이, “마음에서 깊이 용맹스럽게 이치대로 잘 관찰할 뿐이니라”고 하셨고, 염주(念住) 가운데에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몸에 대하여는 신순관(身循觀)에 머물러야 하며 나아가 법에 대하여는 법순관(法循觀)에 머물러야 하느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어떠한 비밀한 뜻이 있는가.
【답】4염주는 오직 마음을 관찰할 뿐임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다. 마음이 집수(執受)함을 살펴보며, 마음이 받아들임[領納]을 살펴보며, 마음이 분별하여 앎[了別]을 살펴보며, 마음이 물듦과 깨끗함[染淨]을 살펴본다. 오직 마음에 집수된 것[所執受]과 마음에 받아들인 것[所領納]과 마음의 대경을 분별하여 앎과 마음의 물듦과 깨끗함을 자세히 살피기 위한 까닭에 말씀하셨을 뿐이다. 다시 다음에는, 모든 비구는 세 가지의 머무름[三種住]에 머무르고 여섯 가지 바른 행[六正行]을 행하며 큰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짓는 것이 많다. 해탈의 머무름[解脫住]에 머무르고,해탈문의 머무름[解脫門住]에 머무르고,해탈문을 능히 이끄는 법의 머무름[能引解脫門法住]에 머무른다. 끊임없음의 행[無間行]을 행하며,생각을 잘 받음의 행[善受思惟行]을 행하며, 닦아서 착한 뿌리가 생김을 이끄는 것의 행[修所引善根生起行]을 행하며, 모든 사랑의 맛을 여의고 진리를 간택함의 행[離諸愛味簡擇諦行]을 행하며, 곧 여기에서 뛰어난 체함이 없음의 행[無增上慢行]을 행하며, 바르고 맑고 깨끗하게 받아씀의 행[正淸淨受用行]을 행하는 그것이다. 다시 다음에는, 두 가지의 보시함[捨施]이 있다. 첫째는 받는 이가 보시함이며, 둘째는 베푸는 이가 보시함이다. 보시의 결과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크게 재물이 풍부함을 얻음이며, 둘째는 이 같은 종류[等流]인 수용과 훌륭한 알음[勝解]을 얻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는, 증성도리(證成道理)를 말하여야겠다.
【문】어떤 도리에 의하여 오직 ‘미래의 실제가 아니고 있지도 않은 것[非實非有]으로부터 모든 행상[行相]이 난다’라고 펴 말씀한 것을 알아야 하는가.
【답】만약 미래의 법인 행상이 실제로 있어서 나게 된다고 하면, 이 법은 구르면서 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미래 세상의 처소로부터 굴러서 현재 세상의 처소에 향하리라. 죽어서 난다는 것인가. 미래 세상에 죽어서는 현재 세상에 나는 것이리라. 저것을 반연으로 하여 나게 된다는 것인가. 미래에서는 법이 머물러서 변하지 아니하고 그를 이용하여 반연으로 삼아 현재의 세상에서 다른 법이 있어서 나는 것이리라. 업용(業用)이 있으면서 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미래에는 본래 업용이 없으며 현재 세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업용이 있는 것이리라. 모양을 원만하게 하면서 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미래에서는 모양이 아직 원만하지도 못하며, 현재 세상에 이르러서야 모양이 비로소 원만한 것이리라. 다른 모양[異相]을 말미암으면서 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미래에는 미래의 갈래가 있고 원인의 갈래[因分]가 있으니,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그의 모양에 다름이 있다. 현재에 와서는 현재의 갈래가 있고 결과의 갈래[果分]가 있으니,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그 모양에 다름이 있으리라.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모든 법의 생기는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아니하다. 왜 그러한가.방소도 없고 처소도 없는 법이거늘, 다른 방소로부터 굴러서 다른 방소로 나아가다는 이치가 잘못이다. 또한 아직 나지 않은 것은 아직은 이미 났던 법이 아니거늘 죽는다는 이치가 잘못이다. 만약 그것을 반연으로 삼아서 나게 된다고 말하면 바로 다른 법이 난 것이며, 미래에 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미래에서는 곧 아직 있지 못한 것이 되리라. 또 온갖 법은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에서는 작용(作用)이 없는 까닭에 업용은 모양[相]을 여의고서는 다르게 될 수가 없으며, 오직 모양에서 임시로 세울 뿐이다. 설령 다른 것이 있다면 미래와 현재가 똑 같이 실제 모양이 있는 것이어서 오직 현재 홀로 업용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로서 인정될 수 없다. 또 이 업용은 응당 본래 없는 것인데도 이제 나는 것이 되리라. 또, 세존의 미묘한 말씀과도 서로 어긋난다. “모든 행은 덧없고 항상함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는 “모든 행은 그 업용이 무상하다”라고 드러낸 것과 같아서,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행이 마땅히 항상한 것이 된다. 또, 똑 같이 하나의 모양에서 만약 모양의 다른 갈래[異分]가 바로 있게 된다면, 모양의 다른 갈래가 어째서 있지 아니하겠는가. 또, 모양의 다른 갈래는 본래 없는데 이제 있다면, 모양의 다른 갈래가 어째서 본래 없는데 이제 있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또, 색(色) 등의 온갖 행상을 여의고서 그 나머지 미래의 갈래는 반드시 인정될 수 없다. 또 미래에는 결과 모양이 없고 현재에는 바야흐로 결과 모양이 있어서 생기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증성도리를 말하였는데, 이 도리에 의하여 미래의 모든 법의 온갖 행상은 실제가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본래 없는데 이제는 있다고 펴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다. 미래에서 이러한 것처럼, 과거에도 그의 알맞은 대로 이 도리로 말미암아 실제가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펴 말하는 줄 알아야 하리라. 다시 다음에, 과거의 행은 어떠한가. 모양은 이미 사라져 없어지고 제 성품도 이미 버려져 버렸다. 현재의 행은 어떠한가. 모양은 아직 사라져 없어지지도 않았고, 제 성품도 아직 버려지지 아니했으며, 나는 때에 잠시 머무른다. 미래의 행은 어떠한가. 원인이 현재 있고 제 성품은 아직 나지 않았으며 아직 제 성품을 얻지 못하였다.
【문】만약 저 모든 행이 미래에 본래는 없는데 나게 된다고 하면, 허공의 꽃[空花]과 토끼의 뿔[兎角]과 석녀(石女)의 아이 따위는 어째서 나지 않는가.
【답】허공의 꽃 따위는 나는 원인[生因]이 없기 때문이니, 온갖 모든 행은 저마다 서로가 다르게 반드시 나는 원인이 있다.
【문】만약 온갖 행이 저마다 서로가 다르게 나는 원인이 있다면 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행은 같은 때에 단번에 나지 않는가.
【답】모든 행에는 비록 저마다 따로 나는 원인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연을 기다려서 비로소 생기게 된다. 만약 그 여러 가지의 행에 나는 인연이 그 앞에 나타나면 그 여러 가지의 행의 원인이 그 여러 가지의 행을 낸다. 그러므로 모든 행은 비록 현재에 원인이 있다 하더라도 같은 때에 단번에 생기게 되는 허물이 없다. 다시 다음에, 이 가운데 무엇이 모든 행의 인(因)이라 하며, 어떤 것을 연(緣)이라 하는가. 바가범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든 행의 나는 연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연(因緣)이며, 둘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며, 셋째는 소연연(所緣緣)이며, 넷째는 증상연(增上緣)이니라.” 인연의 한 가지는 인도 되고 연도 되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연일뿐이며 인은 아니다. 무엇이 인연인가. 모든 색의 감관[色根]과 감관의 의지할 것[根依] 및 알음[識]이다. 이 두 가지를 요약하여 말하면, 온갖 모든 법의 종자를 지닌다. 색 감관에 붙따라서 모든 색 감관의 종자 및 그 나머지의 형상 있는 법[色法]의 종자인 온갖 임자 마음, 딸린 마음[心心所] 등의 종자가 있다. 또는 알음에 붙따라서 온갖 알음의 종자와 그 나머지 형상 없는 법[無色法]의 종자와 모든 색 감관의 종자와 그 밖에 형상 있는 법의 종자가 있다. 그 밖에 형상 있는 법의 제 성품은 다만 제 종자에만 붙따른 것이다. 원소[大種]의 물질만은 제외되는데 원소의 물질은 두 가지 종자에 붙따른 것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원소의 종자와 물질 만듦의 종자[造色種子]이다. 곧 여기서 세우는 붙따르는 것은 서로가 다르게 종자에 상속한다. 그 알맞은 것에 따라서 나는 법을 바라 볼 것이니, 이것을 인연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는, 만약 모든 색 감관과 자기의 원소가 임자 마음, 딸린 마음의 종자에 붙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멸진정에 들거나 무상정에 들거나 무상천(無想天)에 났을 적에는 뒷날에 알음[識] 등이 다시 나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러나 반드시 다시 난다. 그러므로 임자 마음, 딸린 마음의 종자가 색 감관의 종자를 붙따르면서 이것으로써 반연이 되어서 그것이 다시 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만약 모든 알음이 형상의 종자에 붙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무형 세계에 나는 범부는 거기서부터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여 죽어 없어진 뒤에는 도로 아래[色界, 欲界]로 태어날 때에 형상에 종자가 없다고 하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여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형상의 종자는 알음에 붙따르며 이것으로써 반연이 되어서 형상의 법이 다시 나는 것인 줄 알아야 하다. 다시 다음에는, 만약 모든 범부로서 세간의 도[世間道]로 말미암아 첫째 정려[初靜慮]에 들거나 거기에 나게 된다면, 그 때에는 욕심 세계의 모든 더러움에 물듦의 법과 그 밖의 욕심 세계의 모든 법의 종자는 다만 억눌려 있을 뿐이어서 영원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이 범부가 그 선정으로부터 물러나면 욕심 세계의 물듦의 법은 다시 그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며, 첫째 정려로부터 없어진 뒤에는 다시 돌아와 욕심 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해쳐 누름[損伏]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멀리 떠남의 해쳐 누름[遠離損伏]이며, 둘째는 싫증냄의 해쳐 누름[厭患損伏]이며, 셋째는 사마타의 해쳐 누름[奢摩他損伏]이다. 무엇이 멀리 떠남의 해쳐 누름인가. 어떤 사람이 가정의 법을 버리고 집 아닌 데에 나아가서 갖가지로 수용하는 욕심 도구를 멀리 떠나고 계율을 받아 지니며 받아 지녀야 할 멀리 떠남의 계율에 대하여 친근하여 닦아 익히거나 많이 닦고 익힌다. 친근하여 닦아 익혀서 계속 끊어지지 않은 까닭에 모든 욕심 도구에 대하여 마음으로 나아가 들지 아니하고 마음이 흘러 흩어지지 않으며, 마음에 편안히 머무르지도 않고 마음에 사랑하거나 좋아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의 뛰어난 힘[增上力]으로 그의 경계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멀리 떠남의 해쳐 누름이라 한다. 무엇이 싫증냄의 해쳐 누름인가. 어떤 사람이 혹은 허물되고 재환이라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혹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혹은 푸른 어혈 따위라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혹은 하나의 이치다운 뜻 지음에 따름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고 이와 같이 모든 욕심에 싫증을 낸다. 비록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모든 욕심에 대하여 싫증냄을 닦으니, 그 때문에 마음으로 나아가 들지 아니하며 나아가 자세한 설명은 위와 같다. 이와 같은 것을 싫증냄의 해쳐 누름이라 한다. 무엇이 사마타의 해쳐 누름인가. 어떤 사람이 세간의 도로 말미암아 욕심 세계의 욕심을 여의거나, 형상 세계의 욕심을 여의게도 된다. 그것은 사마타의 마음이 계속 맡아 지녀서 이어가기 때문에 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에서 마음으로 나아가 들지 아니하며 나아가 자세한 설명은 위와 같다. 이와 같은 것을 사마타의 해쳐 누름이라 한다. 만약 성인의 제자로서 출세간의 도[出世道]로 말미암아 욕심 세계의 욕심을 여의고 나아가 3계(三界)의 욕심을 여의게 되면, 그 때에는 온갖 3계의 더러움에 물든 모든 법의 종자를 모두 다 영원히 없앤다. 왜 그러한가. 성인의 제자는 현재의 법에서 다시 욕심을 여윈 데서부터 물러나 다시 아래 지위[下地]의 번뇌를 일으켜 앞에 나타나게 하지 않으며, 혹은 위의 지위[上地]에 나거나, 또한 거기서 없어진 뒤에 도로 아래 지위에 태어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곡식이며 보리 따위의 종자들을 흙 아닌 한데에 놓아두거나 혹은 마른 그릇에 두면 비록 싹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자 아님이 없다. 만약 불에 손상된 것이라면 그 때에는 마침내 종자로 되지 않는 것처럼, 안의 법의 종자가 억눌리거나 영원히 없어지는 도리도 역시 그와 같다. 만약 성인의 제자가 장차 남음 없는 열반의 경계[無餘涅槃界]에 들려 할 적에는 가지고 있는 온갖 착함과 무기(無記)의 모든 법의 종자는 모두가 손상된다. 더러움에 물드는 법의 종자가 없어지기 때문에 다시는 장차 오는 세상에 이숙 과보를 받게 될 수 없으며 또한 자기 종류[自類]의 결과도 날 수조차 없다. 이것을 네 번째의 억눌림이라 하니, 이른바 돕는 벗[助伴]을 영원히 해치는 억눌림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속박을 갖춘 자[具縛者]로서 온갖 마음이 일어남에는 혹은 즐거움과 함께 행하여지기도 하고 혹은 괴로움과 함께 행하여지기도 하고 혹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함과 함께 행하여지기도 한다. 이 온갖 마음은 모두가 즐거움의 종자거나 괴로움의 종자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종자에 붙따른다. 또는, 착한 마음이거나 더러움에 물듦의 마음이거나 무기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니, 이 온갖 마음은 모두가 착하의 종자와 더러움에 물듦의 종자와 무기의 종자에 붙따르는 것이다. 또 모든 배울 것이 있는[有學] 속박을 갖추지 않는 자는 온갖 마음을 일으킴에 혹은 세간의 착한 마음이거나 혹은 출세간의 마음이거나 혹은 더러움에 물듦의 마음이거나 혹은 무기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 온갖 마음은 모두가 온갖 수도위(修道位)에서 끊을 번뇌 종자에 붙따르는 것이다. 아직은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나게 되며, 또한 그 밖의 모든 법의 종자에 붙따르게 된다. 또, 모든 배울 것이 없는[無學] 온갖 번뇌를 이미 영원히 끊은 자는 온갖 마음을 냄에 혹은 세간의 착한 마음이거나 혹은 출세간의 마음이거나 혹은 무기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 온갖 마음은 모두가 이미 물든 법의 종자를 영원히 여의며, 다만 온갖 착함과 무기의 법의 종자에 붙따라서 계속하며 난다. 또 이 세우는 종자의 도리는 아직은 아뢰야식을 세우지 못한 성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설명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미 아뢰야식을 세웠다면 간략하게 설명하여 모든 법의 종자는 모두가 아뢰야식에 의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모든 법은 아직 영원히 끊지 못하였거나 또는 끊을 것이 아니거나 간에 그의 알맞은 것에 따라 온갖 종자의 붙따르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세존께서 “아라한 비구는 네 가지의 뛰어난 마음의 법[增上心法]과 현법낙주[現法樂住] 가운데 어느 하나를 따라서 물러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그가 온갖 더러움에 물듦의 종자들을 모두 영원히 없앴다면 어찌하여 다시 아래 자리의 번뇌를 일으키는가. 만약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는 어찌하여 다시 물러나는가.
【답】 물러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단퇴(斷退)이며, 둘째는 주퇴(住退)이다. 단퇴라 함은 이것은 범부에서 뿐이며, 주퇴라 함은 이는 모든 성인과 또한 범부이다. 만약 세간의 도로 모든 번뇌를 끊으면 다시 일어나서 앞에 나타나므로 그 때에는 단퇴 때문에 물러남이며, 또한 이는 주퇴인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출세간의 도로 번뇌를 끊은 뒤에 마음에 세간의 일을 경영하면서 오로지 이치대로의 뜻 지음을 닦아 익히지 않는다면, 이로 말미암아 그 중간에 현법낙주가 자주 일어나 앞에 나타나 먼저 얻었던 것대로 뒤에도 또한 그와 같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아래 자리에서 이미 끊어진 번뇌는 다시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을 주퇴 때문에 물러난다고 하며 이는 단퇴는 아니다. 또 만약 온갖 번뇌를 끊고 아라한이 되었으면서도 그 온갖 물드는 법의 종자를 아직 영원히 없애지 못하였다면, 어찌하여 마음이 잘 해탈한 아라한의 과위로서 모든 번뇌[漏]를 영원히 다하였다고 이름하게 되겠는가. 만약 이미 영원히 없앴다고 하면, 서로 계속되는 가운데서 영원히 온갖 더러운 법의 종자조차도 없고, 오히려 바르지 않은 생각[不正思惟]을 일으키지도 않겠거든, 하물며 모든 번뇌이겠는가. 그러므로, 출세간의 도로 말미암아 번뇌를 끊은 이는 기필코 물러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이 논(論)의 전체를 통틀어서 다섯으로 구분하였는데, 첫째의 본지분(本地分)은 앞의 50권까지에 있었고 거기서는 이미 열일곱 자리[十七地]의 체의(體義)를 밝혔다. 이하의 넷의 부분에는 뜻을 거듭하여 밝히는데, 그 때문에 이 아래 넷 부분[攝決擇分, 攝釋分, 攝異門分, 攝事分]에서는 다 같이 첫머리에 모두 섭(攝)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여기서는 본지분 중에서 아직 결단하여 이치를 분별하지 못한 요간(了簡)을 포섭하기 때문에 섭결택분이라 한다. 포섭[攝]이라 함은 혹은 글로써 글을 포섭[攝]하기도 하고 혹은 글로써 뜻을 포섭하기도 하며, 혹은 뜻으로써 글을 포섭하기도 하고 혹은 뜻으로써 글을 포섭하기도 하고 혹은 뜻으로써 뜻을 포섭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결택분이라 함의 결(決)은 의심을 결단한다는 뜻이며, 택(擇)은 옳고 그름을 간택한다는 뜻이다. 앞의 본지분에서는 곧바로 이치 모양을 말하였고, 여기서는 그것을 거듭 묻고 대답하면서 의심을 결단하여 요점을 간택하기 때문에 결택이라 한다. 분(分)은 구별하여 나누었다는 뜻인데, 그러므로 본지분의 뒤이며 섭석분(攝釋分) 앞의 한 부분이다.
2)『해심밀경(解深密經)』제1권「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제3에서 나온다.
3)기(器)는 기세간(器世間)이며, 의지[依]는 감관 있는 몸과 온갖 종자를 말한다. 이 둘을 분별하여 아는 것은 제 8식(識)의 업용(業用)이며, 나(我)를 분별하여 아는 것은 제7식(識)의 업용이며, 대경[境]을 분별하여 아는 것은 전6식(前六識)의 업용이다. 이상의 네 가지 업용은 만약 하나의 식만이 있다고 하면 도리에 맞지 않으며, 8식이 있어서 함께 구른다고 하여야 옳다. 현장 삼장(玄獎三奘)의 유식비량(唯識比量)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