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5_1033_b_01L
유가사지론 제67권


미륵보살 지음
현장 한역


2. 섭결택분

9)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

이와 같이, 이미 사소성혜지(思所成慧地)의 결택을 설명하였으므로,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의 결택을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요약하여 열여섯 가지의 닦음[十六種修]이 있는 줄 알지니, ⑴성문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聲聞乘相應作意修]과 ⑵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大乘相應作意修]과 ⑶영상의 닦음[影像修]과 ⑷일의 맨 끝의 닦음[事邊際修]과 ⑸할 일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所作成辨修]과 ⑹얻음의 닦음[得修]과 ⑺익힘의 닦음[習修]과 ⑻제거함의 닦음[除去修]과 ⑼다스림의 닦음[對治修]과 ⑽적은 부분의 닦음[少分修]과 ⑾두루 통행함의 닦음[遍行修]과 ⑿움직여옮음의 닦음[動轉修]과 ⒀가행이 있음의 닦음[有加行修]과 ⒁이미 이루어 마침에 닦음[已成辨修]과 ⒂닦아서 이루는 바가 아닌 법의 닦음[非修所成法修]과 ⒃닦아서 이루는 바 법의 닦음[修所成法修]이다.
무엇을 성문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⑴이는 성문으로서 성문의 법 성품에 머무르며, ⑵혹은 아직 정성이생(正性離生)1)에 증득하여 들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었으며, ⑶다른 이의 이익되는 일은 살피지 않고 자기의 이익되는 일만을 자세히 살피며, ⑷안립체(安立諦)의 뜻 지음 문[作意門]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진여(眞如)를 살피고 한량이 있고 분별이 있는 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으며, ⑸탐애(貪愛)를 다하기 위하여 싫증 내어 여의고 해탈하려 하는 행상(行相)으로 말미암아 닦아 익히고 뜻을 짓나나ㅣ, 이것을 성문승과 상응한 뜻지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⑴이는 보살로서 보살의 법 성품에 머무르며, ⑵혹은 아직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지 못하였거나 혹은 이미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었으며, ⑶자기도 살필뿐더러 다른 이의 이익되는 일도 자세히 살피며, ⑷안립체와 비안립체(非安立諦)와의 뜻 지음 문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진여를 살피고 한량 없고 분별이 없는 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으며, ⑸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의 뛰어난 힘 때문에 자기와 남에게 있는 바의 탐애를 다하기 위하여 유정들을 거두어 주는 모든 이익되는 일의 방편의 행상으로 말미암는 것과 위없는 발자취에 향하여 나아가는 인연의 행상으로 말미암아서 닦아 익히고 뜻을 짓나나, 이것을 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영상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혹은 분별이 있는 비파샤나아품[毘鉢舍那品]에서 사마아디[三摩地]의 행하는 바 영상(影像)으로 알 바 일[所知事]의 동분(同分)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분별이 없는 샤마타품[奢摩他品]에서 사마아디의 행하는 바 영상으로 알 바 일의 동분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바의 닦음들을 영상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일의 맨 끝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와 안팎과 거칠고 가늘음과 하열하고 훌륭함과 가깝고 멀음 따위의 법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거나, 혹은 진여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나니, 이와 같이 혹은 있는 바를 다함의 성품[盡所有性] 때문에, 혹은 있는 바 그대로의 성품[如所有性] 때문에 있게 되는 닦음들을 일의 맨 끝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할 일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이미 근본 정려(根本靜慮)거나 혹은 모든 사마아파티[等至]거나 혹은 세간의 선정에 증득하여 드는 온갖 닦음을 할 일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얻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첫째 정려[初靜慮]에 의하여 혹은 무상함의 생각[無常想]을 닦고, 내지 죽음의 생각[死想]을 닦으며, 거기서 있는 바 그 밖의 앞에 나타나 있지 않은 생각으로서 혹은 제 자리[自地]에 속하였거나, 아랫 자리[下地]에 속한 것과 그의 이끄는 바 모든 그 밖의 공덕으로서 혹은 이는 세가이거나 혹은 벗어난 세간의 것이거나 간에 모두 그것을 닦아서 청정함과 장차 남[當生]을 더욱 왕성하게 하고 거기에서 자재함을 획득하여 성취하나니, 이것을 얻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익힘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바로 저 여러 가지 무상함 따위의 모든 착한 생각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거나 혹은 착한 법에 대하여 익히고 닦음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실제로 닦고 익히나니, 이것을 익힘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제거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사마아디[三摩地]로 행하는 바 영상(影像)의 모든 모양의 뜻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문설주로 문설주를 빼내는 것처럼, 방편으로 제거하여 버려서 제 성품의 모든 모양을 버림과 같으며, 또 어떤 사람이 그 가는 문설주를 써서 굵은 문설주를 빼버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는 가뿐한 몸으로써 거칠고 무거운 몸을 제거하나니, 그 나머지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이것을 제거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다스림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염환의 다스림[厭患對治], 혹은 단의 다스림[斷對治], 혹은 지의 다스림[持對治], 혹은 원분의 다스림[遠分對治]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온갖 닦음을 다스림의 닦음이라 한다.
이 안에서 염환의 다스림이라 함은, 온갖 세간의 착한도[善道]이니, 모든 한량없음[無量]과 그 밖에 수행하는 이로서 유희 신통(遊戱神通)하는 것과의 이끄는 바 뜻 지음만은 제외한다. 단의 다스림이라 함은, 진여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아서 하는 뜻 지음이며, 지의 다스림이라 함은 이 후에 얻는 세간과 벗어난 세간의 도[世出世道]와 해탈의 도이며, 원분의 다스림이라 함은 번뇌가 끊어진 뒤에 다스림의 도를 더 많이 닦아 익히거나 혹은 보다 윗 자리[上地]의 도를 닦고 익히는 것이다.
다시 차별이 있나니, 들음[聞]과 생각함[思]과 닦음[修]의 도를 염환의 다스림이라 하고, 벗어난 세간의 도를 단의 다스림이라 하며, 이 결과인 전의(戰依)를 지의 다스림이라 하고, 세간의 닦는 도를 원분의 다스림이라 한다.
무엇을 적은 부분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무상하다는 생각[無常想] 다위의 어느 하나의 착한 법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온갖 닦음을 적은 부분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두루 통행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법의 한 맛[一味]의 진여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온갖 닦음을 두루 통행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움직여 옳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모양 없음[無相]으로 닦고 방편(方便)으로 닦는 때에 때때로 모양 있음[有相]으로 틈츰이 닦음을 움직여 옮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가행이 있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바로 저 방편으로 닦는 때에 가행 있음의 모양[有加行相]으로 틈틈이 닦기 때문에 가행이 있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혹은 성문승이거나 혹은 독각승이거나 혹은 또 대승으로서 이미 온갖 전의(轉依)를 얻는 것과 온갖 모든 법의 자재함을 얻는 것의 여기에 있는 바의 닦음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닦아서 이루는 바가 아닌 법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부정지(不定地)의 모든 보시와 계율 등의 온갖 착한 법의 닦음을 닦아서 이루는 바가 아닌 법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닦아서 이루는 바 법이라 하느냐 하면, 정지(定地)의 모든 착한 법의 닦음을 닦아서 이루는 바 법이라 한다.
이 지(地) 안에 대한 그 밖의 결택하는 글은, 다시는 더 나타내지 아니한다.

10) 성문지(聲聞地)①

이와 같이, 이미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의 결택을 설명하였으므로 성문지의 결택을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본지분(本地分) 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성 없음[無種姓]에 머무는 푸드갈라는 바로 필경(畢竟)에 열반의 법이 없다[無般涅槃法]고 한다.
이 안에서, 혹은 마음에 의심이 생긴다. 어찌하여 필경에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하는가.
그것을 가르쳐 말하리라.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유정들의 가지가지의 계성(界性)과 한량없는 계성과 하열한 계성과 훌륭한 계성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있다고 말하면 필경에 열반의 법이 없는 푸드갈라가 있을 수 없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없다고 말하면 경전에서 모든 유정들에게는 가지가지의 계성, 내지 훌륭한 계성이 있다고 말씀한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가르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유정들에게 비록 가지가지의 계성, 내지 훌륭한 계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가관 없는 유정[無根有情]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은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아니한가. 혹은 감관이 없는 유정이 있다 함을 인정해야 하는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감관 없는 것은 바로 유정인 것인가. 유정이 아닌 것인가. 만약 유정이라면 바깥의 감관 없는 물건도 이는 유정이어야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만약 유정이 아니라면, ‘어찌 감관 없는 유정이 있다 함을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하는 말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마치 크흐트리야[刹帝利]가 된 뒤에 때로는 다시 브라흐마나[婆羅門]거나 바이샤[吠舍]거나 슈우드라[戌陀羅]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슈우드라가 된 뒤에 대로는 크샤트리야까지 되기도 한다. 또, 나라카[那落迦]가 된 뒤에 대로는 하늘[天]이 되기도 하고, 내지 하늘이 된 뒤에 대로는 다시 나라카까지 되기도 하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이 된 뒤에 대로는 다시 열반의 법이 있는 것이 되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크샤트리야로부터 슈우드라에 이르기까지 나라카로부터 모든 하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一切界]가 있는 것인가, 유독 하나의 계[一界]만이 있는 것인가. 만약 온갖 계가 있다고 하면 비유가 비슷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유독 하나의 계만이 있다고 하면 먼저는 바로 크샤트리야였다가 어느 때에는 슈우드라까지 되기도 하고, 먼저는 바로 나라카였다가 어느 때에는 하늘까지 되었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하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마치, 크샤트리야 등이 온갖 계를 갖추는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의 계[般涅槃界]가 있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열반의 법이 없는 계(界)와 모든 열반의 법이 있는 계의 이 두 가지 계는 서로서로가 어기는 것인가,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가. 만약 서로가 어긴다고 하면,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의 계가 있지 아니한가.’라고 하는 말이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서로가 어기지 않는다 하면 곧 이 푸드갈라는 바로 열반의 법이 없으면서 역시 이는 열반의 법이 있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현실에서 보건대, 한 땅의 방소에 어느 때에는 금(金)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대에는 금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마니[末尼]거나 진주(眞珠)거나 유리(瑠璃) 등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소금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갖가지 모양[相]과 계(界)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함이 그러한 것처럼, 먼저는 이 열반의 법이 없는 종성이 무엇 때문에 어느 때에는 열반의 법이 있는 종성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저 땅의 방소에 먼저는 이 종성이 없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있으며, 혹은 먼저는 이 종성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기도 한다 함이 그러한 것처럼, 먼저는 성문의 정한 종성[定種姓]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고, 내지 먼저는 대승의 정한 종성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먼저는 정한 종성이 없다가 뒤에는 정한 종성이 있다고 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말하면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착한 뿌리[善根]는 텅 비어서 결과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며, 또 만약 그렇다면 정한 종성을 세움이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대가 말한 ‘열반의 법이 없는 이는 먼저 종성 없음에 머무르고 나서 뒤에는 종성 있음에 머무는 것이, 마치 땅의 방소에서 같다.’고 하므로, 열반의 법이 있는 이는 먼저는 종성 있음에 머무르고 나서 그 뒤에는 종성 없음에 머무는 것은 마치 땅의 방소에서와 같으리니, 도리에 맞지 않다.
또,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열반의 법이 없는 하열한 계(界)를 지닌 이는 이와 같은 하열한 계 안에 편안히 머무르다가 바로 이생[此生]에서 바꾸어 열반의 법을 이루는 것인가, 후생(後生)에서 이루는가. 만약 바로 이생에서라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佛ㆍ法ㆍ僧]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일으킨다고 하면 저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킬 수 있는데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그렇지 못한다고 하면 그는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킬 수 없는데 열반의 법을 바꾸어 이른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만약 수생에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룬다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았기 때문에 후생 안에서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나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으지 않은 것인가. 만약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은다고 하면 그는 곧 이생 안에서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나서 착한 뿌리를 일으키게 되거늘 후생 안에서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룬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 그 원인 같은 것은 텅 비어서 결과가 없어야 한다. 만약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으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바로 앞뒤가 서로 비슷해서 다 같이 아직은 착한 부리를 쌓아 모으지 못하였거늘 후생 안에서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루는 것이요, 곧 이생 안에서 그렇지 못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다시 다음에, 요약하여 열 가지의 성문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⑴맑고 깨끗한 계의 성문[淸淨界聲聞]이요, ⑵이미 인연을 만난 성문[己遇緣聲聞]이요, ⑶섞여 물듦의 세계에 태어난 성문[離染界生聲聞]이요, ⑷맑고 깨끗한 세계에 태어난 성문[淸淨界生聲聞]이요, ⑸말법 때에 태어난 성문[末法時生聲聞]이요, ⑹어질고 착한 때에 태어난 성문[賢善時生聲聞]이요, ⑺아직 눈을 얻지 못한 성문[未得眼聲聞]이요, ⑻이미 눈을 얻은 성문[己得眼聲聞]이요, ⑼맑고 깨끗한 눈의 성문[淸淨眼聲聞]이요, ⑽극히 맑고 깨끗한 눈의 성문[極淸淨眼聲聞]이다.
⑴만약 성문의 종성(種性)에 편안히 머무름이 있으면, 이가 첫 번째의 성문이다. ⑵이미 법(法)에 든 이이니, 이를 두 번째라 한다. ⑶만약 성문이 태어난 세계의 그 안에 많은 고통들을 만나게 됨이 있으면, 다섯 가지 흐림[五濁]일 것이니, 이른바 목숨 흐림[壽濁]에서 유정 흐림[有情濁]가지이다. 이를 섞여 물듦의 세계에 태어난 성문이라 한다. ⑷위와 서로 반대의 것은, 바로 맑고 깨끗한 세계에 태어난 성문인 줄 알 것이다. ⑸말법 때에 태어난 성문들의 모양은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하면, 모든 성문으로서 장차 오는 세상에 법이 소멸하는 때에 태어나서 대부분이 이끗과 공경을 사랑하여 소중히 여기면서 미묘한 법은 어기며, 모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바르지 않은 법을 다 같이 더욱 왕성하게 하고 간탐과 질투 등의 모든 따르는 번뇌[隨煩惱]에게 그 마음이 얽히고 흔들려서 처소에 대한 간탐ㆍ집에 대한 간탐ㆍ이익에 대한 간탐ㆍ공경에 대한 간탐ㆍ명예에 대한 간탐ㆍ법에 대한 간탐을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며, 아첨과 속임이 항상 그의 앞에 나타나 있으며, 내지 살아가기 위하여 출가(出家)를 구하는 것이요 열반을 위해서가 아니며, 들떠서 동요함이 많고 뽐내고 경솔하고 입이 억세고 허풍을 잘 떨고 게으르고 잊어버리면서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해 있지 아니하며, 헷갈려 어지러움이 많고 근성(根性)은 암둔하고 하열하여 모든 번뇌가 많으며, 번뇌의 현행은 끊임이 없고 근심과 괴로움이 비록 많으나 싫증을 내지 아니하며, 많은 대중의 모임을 좋아하고 아련야(阿練若)의 맨 끝 침구를 버리고서 대중 안으로 들어오며, 마을 옆을 가까이 하고 온갖 친구에 기쁨을 내며, 이와 같아서 내지, 익살을 즐기고 시끄러운 대중을 좋아하고 난잡함을 즐기며, 스스로가 뽐내어 제멋대로 하면서 몸의 계율2)과 마음과 지혜[戒心慧]를 잘 닦지 못한다.
부처님ㆍ세존이 말씀한 바는 매우 깊어서 ≺공≻과 상응하며 연성(緣性)과 연기(緣起)와 연생(緣生)에 따르는 온갖 경전에 대하여는 다 같이 버리고서, 세간에서 총명한 이가 지은 바 풍송(諷誦)에 대하여는 말을 구미고 문장을 다듬어 세전(世典)에 따르면서 공경하고 받아 지니어 깊이 기쁨을 내며, 바른 법에 비슷한 것과 바른 법 아닌 것 안에서는 망령되이 법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바른 법안에서는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내며, 또 그것을 좋아하고 드러내고 널리 펴고 열어 보이면서 바른 법과 비나야(毗奈耶)를 비방하며, 바른 법과 비나야를 말한 푸드갈라에 대하여는 원수라는 생각을 내면서 쉬이라[尸羅]를 많이 범하고 모든 나쁜 법을 익힌다.
속은 실로 부패하였으면서도 바깥으로는 어질고 착한 척하며, 내지 실은 맑은 행[梵行]이 아닌데도 스스로가 많은 행이라 일컫고, 남음 없거나 남음이 있는 두 편[無餘有餘二篇]의 중한 죄조차 오히려 일부러 일으켜서 헐고 범하거든 하물며 중간과 경한 것이겠는가. 범한 뒤에는 많이가 법대로 들추어내는 것은 진실한 의요(意樂)에서가 아니며, 짐짓 모든 친한 벗의 집과 음식을 보시하는 집과는 교호(交好)를 맺으려 하여, 모든 집에 있는 이가 하는 일과 할 바로서 옳지 않는 것을 이끄는 많은 사업 안에서 좋아하여 영위하며, 집에 있는 속인들에게 친애와 존중과 공경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많이 내면서도 법을 같이하며 맑은 행을 닦는 이에게는 거의가 기뻐하거나 편안히 머무르지 아니한다.
속임수로 모양 따위를 나타내어 삿된 생활[邪命]의 법을 일으키고 점차로 서로가 모량하는 마음을 일으키어 갖가지 싸움과 쟁송을 하기 좋아하며, 대체로 가산과 살림 도구를 축적하기 좋아하고 거짓으로 법식(法式) 둠으로써 훌륭한 것을 삼으며, 제도할 바 사람을 출가시키어 계를 받게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물듦이 있는 마음[有染心]으로써 공양과 섬김에 충당하기 위함이면서도 말하기를, ‘나는 이제 다만 가엾이 여김의 인연만으로 그를 제도하여 출가시키며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한다’라고 한다.
기르는 바 함께 살거나 가까이 사는 제자로서 어제나 공양하고 모시면서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이면 그가 비록 완만(緩慢)하더라도 깊이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거두어 주면서도 그 밖에 그렇지 아니한 이면 비록 완만하지 않더라도 역시 사랑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거두어 주지도 아니하며, 만약 비구로서 여러 친족이 많아서 널리 이끗과 옷 등의 물건을 불러옴을 보면 문득 존중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면서도 만약 비구로서 친족이 없음을 보면 비록 욕심이 적음[少欲] 등의 공덕을 갖추었다곤 치더라도 오히려 업신여기면서 식용(食用)과 상기카[僧祗] 및 특별한 인물로 뽑아 쓰지 아니하다.
도무지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함이 없고 계율 범한 이를 거두기 좋아하며, 붕당 맺기를 즐기고 뉘우치는 심정은 아주 미열하거나 혹은 너무나 지나친다. 무릇 들어서 받는 바는 모두가 명성과 영예와 찬송을 위해서거나 혹은 또 많이가 이끗과 공경을 위한 것이어서 도무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조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모든 섞여 물듦의 법을 모두 다 성취한다. 법말(法末)의 때라 함은, 이른바 큰 스승께서 열반하신 뒤에 성인의 가르침이 없어진 때이니, 그 때에 이러한 성문 제자들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거개가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나라카에 가서 난다.
⑹만약 위와 서로 반대되는 물들지 않는 법[不染汚法]을 성취함이 있으면, 이를 어질고 착한 때에 태어난 성문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여래가 처음 세상에 출현하실 때에는 아직 군살이 생기지 못하였을 때거나, 큰 스승이 그 앞에 계실 때거나 혹은 어떤 무리는 열반하신 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의 대부분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도리어 착한 갈래를 얻어서 천상의 즐거운 세계 안에 가서 난다.
⑺만약 모든 범부로서의 성문이면, 아직 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다. ⑻예류(預流)와 일래(一來) 및 불환(不還) 등을 이미 문을 얻었다고 하다. ⑼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을 맑고 깨끗한 눈이라 한다. ⑽만약 삼명(三明)을 갖춘 구분해탈(俱分解脫)을 한 이면, 극히 맑고 깨끗한 눈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어떤 성문으로서 비록 알맞는 대로 용맹스럽게 정진한다 하더라도 현재 법에서 남보다 훌륭하게 뛰어난 법을 증득할 수 없거나, 혹은 어떤 성문으로서 현재 법 안에서 힘이 있어서 남보다 훌륭하게 뛰어난 법을 증득하였어도 사문의 결과[沙門果]의 증득은 방일함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기도 한다.
다시 다음에, 월유경(月喩經)3) 안의 구계(具戒)와 구덕(具德)과 유화(柔和)와 선법(善法)이라는 모든 글귀의 차별을 풀이하겠다. 성문 중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의 깨끗하고 미묘한 법이 있어서 모든 유정의 볼 수 있는 이로 하여금 몸과 말과 뜻으로 말미암아 한량 없는 복을 나게 한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구족 쉬이라[具足尸羅]4)에 머물러서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지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와 같다. 이것을 첫째의 법이라 한다. 다시 욕심이 적고 기뻐하여 만족히 여김[少欲喜足]과, 내지 모든 샘[漏]이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고 찬미하는 것이니, 이것이 둘째의 법이다. 다시 부드럽고 온화[柔和]하여 함께 삼게 되기가 쉽고 지혜 있는 맑은 행을 같이하는 이를 괴롭히지 아니할뿐더러 모든 비구로 하여금 같은 처소임을 기쁘게 하며, 또 네 가지 증정[四種證淨]을 갖추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셋째의 법이다. 또, 이익에 즐겨 빠지지 않고 공경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다른 이를 가엾이 여기고 자기의 선행을 감추면서 자기의 악행을 들어내며, 비록 또 실로 갖가지의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려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나는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였다’ 함을 알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넷째의 법이다.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성문으로서 다른 이의 집에 가려고 하면, 먼저 세 가지의 따르는 번뇌[隨煩惱]를 끊어 없앤 연후에야 가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는 친우의 집을 맺는 따르는 번뇌요, 둘째는 집에 대한 간탐[家慳]의 따르는 번뇌요, 셋째는 물듦이 있는 마음으로써 법 보시[法施]를 행하는 따르는 번뇌이다.
이 안에서, 성문은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친우의 집을 맺는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때때로는 가되 자주는 가지 말아야 하며, ⑵사랑할 만한 일에 대하여 이치답지 않게 그 모양에 집착되어 잠시라도 탐애가 생기면 바로 부끄러워하며, ⑶흉포하거나 입이 억세거나 허풍을 떠는 삿된 행으로써 의복 등의 물건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⑷잘 스스로가 수호하여 그의 몸을 잘 가리워서 몸으로써 닿지 않아야 할 바면 닿지 아니하고, 또한 앉지 않아야 할 데면 앉지 아니하고, 마침내 먹지 않아야 할 바면 먹지 아니하고, 도한 마침내 마시지 않아야 할 바면 마시지 아니하고, 또 받지 않아야 할 바면 받지 아니하며, 또 ⑸멀리 여의는 마음[遠離心]에 따르고 멀리 여의는 마음에 나아가 향하고 멀리 여의는 마음에 이웃함으로써 모든 선행을 찾고 생각하며, ⑹마치 산악(山岳)처럼 나아가기 어려운 처소인 깨끗한 믿음이 아닌 집을 깨끗이 믿게 하고, 옛부터 다니던 맑고 깨끗한 샘물처럼 깨끗이 믿는 집을 갑절 더하게 한다.
또,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집에 대한 간탐의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다른 이의 집에 가서 유정들의 일에 대하여는 물들지도 아니하고 집착하지도 아니하며, 유정의 일에서와 같이 ⑵이끗의 일에서도, ⑶공경의 일에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⑷또, 이익 없는 데 대하여 근심과 괴로움을 내지 아니하며, 이익 없는 데서와 같이 ⑸공경하지 않은 데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⑹또, 자기와 다른 이의 이끗 안에서는 그 마음이 평등하여 자기의 얻는 바 이끗과 공경에 대하여 스스로가 찬미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얻는 바 이끗과 공경에 대하여도 마침내 비방하지 아니한다.
또,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물듦이 있는 마음으로 법 보시를 행하는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깨끗이 믿을 것을 바라지 아니하며, ⑵벗어남의 법[出離法]에 대하여 사실대로 분명히 알고 또 다른 이에게 세 가지 순수하고 착한 의요[純善意樂]를 일으켜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⑶즐거움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며, ⑷괴로움을 없애 버리기 때문이며, ⑸공경하고 들어서 받고 법과 법을 따라 수행하는 이가 훌륭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⑹나는 괴로움[生苦] 따위의 괴로움에 괴로움을 받는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고, 만약 이미 해탈한 이는 바로 모든 법의 미묘하고 착한 법의 성품을 반연으로 하는 수우트라[素咀纜]와 비나야와 마아트리카아[摩咀理迦]의 포섭하는 바 세속의 바른 법 안에서 받아 지니고 익고 외워서 바른 법이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그 때문에 널리 펴 말한다. 처음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난잡함이 없는 데에 머무름으로써 마지막을 삼으며, 둘째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재물을 바르게 수용함으로써 마지막을 삼으며, 셋째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법을 바르게 수용함으로써 마지막을 삼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벌지가경(伐地迦經)5)을 풀이하겠다. 만약 어떤 성문으로서 물듦과 깨끗함[染淨]에 대하여 방편으로 교묘히 하려 하면, 요약하여 세 가지 것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아야 하다. 이른바, ⑴섞여 물듦[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의 의지할 바[所依] 안에서는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 대문에, ⑵섞여 물듦의 안에서는 섞여 물듦으로 말미암아서, ⑶맑고 깨끗함 안에서는 맑고 깨끗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⑴무엇을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이냐 하면, 바로 이 몸의 빛깔 있음[有色]과 추중(麤重)이니, 자세하게 설명하면 경에서와 같다. 이것은 바로 어리석은 이가 지혜가 없는지라 무명(無明)에 나아가는 이의 섞여 물듦의 의지할 바며, 역시 이는 총명하여 큰 지혜가 있는지라 밝음에 나아가는 이의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이다.
⑵무엇을 섞여 물듦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업을 조작하려 하기 위하여 먼저 머트럽게 생각하고 나서 그 뒤에 몸과 말로써 온갖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업을 조작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다섯 갈래[五趣]의 생사 안에서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아니함을 받아서 괴로움이 있거나 괴로움이 없는 자체(自體)가 나게 한다.
⑶무엇을 맑고 깨끗함이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 배움[二種學]은 맑고 깨끗한 품[淸淨品] 안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삼는다. 첫째의 배움이란 진여지(眞如智)로써 의지를 삼아 능히 짓는 바가 있는 것이며, 둘째의 배움이란 번뇌를 위하여 모두 매임 여읨[離繫]을 얻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바로 이 맑고 깨끗함은 요약하여 다섯 가지 인연[五因]으로 드러내 보임을 받게 된다.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는 바르게 말씀하는 이[正語者]요, 둘째는 바르게 행하는 이[正行者]요, 셋째는 바른 행[正行]이요, 넷째는 뛰어난 마음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의 끊어짐[增上心學所治隨煩惱斷]이요, 다섯째는 뛰어난 지혜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의 끊어짐[增上慧學所隨煩惱斷]이다.
이 안에서, 여래는 바로 바르게 말씀하는 이며, 근기가 성숙된 성문은 바로 바르게 행하는 이요,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라 하며, 진리와 지혜[諦智]의 포섭하는 바를 바른 행이라 한다.
번뇌를 능히 끊는 이치에 의거하면 이는 위없는 다스림인 까닭에 요약하여 다섯 가지가 있는데, 뛰어난 마음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라 한다. 첫째는 멀리 떨어진 데에 사는 이에게 있는 바의 모든 덤개[蓋]이며, 둘째는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는 데에서 참고 견디지 못하는 이에게 있는 바의 분내어 괴로워함[忿惱]이며, 셋째는 이끗과 공경함에 대하여 깊이 탐착하는 이에게 있는 바의 간탐과 시새움[慳嫉]이며, 넷째는 먼저 있던 바와 받았던 바 경계에 대하여 삿된 생각을 일으킴이며, 다섯째는 배울 바를 버림에 따라 탐애를 분별하는 것이다.
요약하여 세 가지 법이 있는데, 뛰어난 지혜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라 한다. 처음은 세속의 이치 문[世俗理門]에 대하여 법과 뜻[法義]을 알지 못한 이에게 있는 바의 무명(無明)이며, 다음은 이미 법과 뜻을 아는 모든 범부로서 모든 진리 안에서 있는 바 망설임과 의혹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며, 맨 나중에는 이미 진리의 자취를 본 모든 배울 것 있는 이[有學]로서 수도(修道)에 포섭된 지혜로 다스릴 바 온갖 젠체함[我慢]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따르는 번뇌를 영원히 끊어 없앰으로 말미암아 가장 잘 맑고 깨끗한 뛰어난 마음 배움과 뛰어난 지혜 배움의 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를 증득한 줄 알지니, 이 아라한이야말로 바로 가장 지극하게 맑고 깨끗함[最極淸淨]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이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所依]에서 모든 성문들은 요약하여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두루하게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제 성품[自性]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서요, 셋째는 과환(過患)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제 성품으로 말미암아서라 함은, 이 사람 몸[人身]에 있는 바 제 성품은 세 가지 모양으로 드러내 보인다. ⑴빛깔이 있음[有色]으로 말미암아서 그 밖의 온갖 몸의 공통한 모양[共相]을 드러내며, ⑵추중(麤重)으로 말미암아서 그 저마다 따로따로 몸의 제만의 모양[自相]을 드러내며, ⑶맑고 깨끗하지 아니함[不淸淨]으로 말미암아서 하늘의 몸[天身]과 동분(同分)이 아닌 모양을 드러낸다.
인연으로 말미암아서라 함은,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몸의 공통한 모양의 인연은 바로 네 가지 원소[四大種]이며, 저마다 따로따로의 제만의 모양인 사람 몸의 인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태어나게 하는 인연이니, 이른바 부모의 부정(不淨)의 화합이다. 둘째는 이미 태어났으면 머무르게 하는 인연이니, 미움과 밥 따위로 키우고 기르는 바를 말한다.
과환으로 말미암아서라 함은,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무상한 성질[無常性]과 괴로움의 성질[苦性]이다.
만약 차운 때이면 차운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덮고 가리우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으며, 만약 더운 때이면 더운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목욕하기를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으며, 길을 건너거나 일을 하여 피로함이 있는 이면 그 노고를 다스리기 위하여 안마 따위를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나니, 이런 종류를 괴로움의 성질이라 하는 줄 알 것이다.
손ㆍ흙덩이ㆍ막대기 따위에 맞아서 파괴하는 법이기 때문에, 칼에 베어서 끊어지고, 무너지는 법이기 때문에, 만약 죽어 없어지면 땅에 묻혀 지기 때문에, 혹은 불에 타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축생이며 벌레들에게 먹히기 때문에, 혹은 저 모든 바람이거나 햇빛에 말려지기 때문에 모두가 이는 흩어져 무너지고 닳아 없어지는 법의 성질이니, 이런 종류가 바로 무상한 성질인 줄 알아야 한다. 옛날에 모였다가 이제는 어기게 됨을 떠나 흩어짐[離散]이라 하고, 흩어진 뒤에는 변하여 무너지고 맨 나중에는 온통 다하여짐을 닳아 없어짐[磨滅]이라고 한다.
다시 다음에, 생각함의 반연할 바[思所緣]로 인하여 이름[名]6)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지라 이름에서 더 지나간 것이 없다. ‘이 이름이란 한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그에 따라 자재하게 지어간다.’고 말함과 같은 것은, 이 말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만약 요약하여 말하면, 맑고 깨끗함이 원인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제만의 모양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섞여 물듦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푸드갈라의 나 없음[補特伽羅無我]과 법의 나 없음[法無我]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푸드갈라의 나 없음의 네 가지 빛깔 없는 쌓임[四無色蘊]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고서 온갖 제 경계 모양[自境界相]을 끊으면 이름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 것이며, 만약 법의 나 없음의 제 나름 분별성[遍計所執自性]의 세속의 말과 이름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고서 온갖 저 의지할 바 모양[所依相]을 제거하면 이름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저 네 가지 빛깔 없는 쌓임을 지나고서 모든 나 모양의 일이란 기필고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저 세속의 말과 이름의 제 나름 분별성을 지나고서 모양의 일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두 가지를 다 같이 분명히 알지 못하면 온갖 경계 모양의 섞여 물듦의 따라 굴름[隨轉]과 온갖 경계 모양의 있는 바 섞여 물듦의 것을 일으킨다.
이 뛰어난 힘[增上力]으로 인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이 비밀한 뜻[密意]에 의하여 비가바안[薄伽梵]께서는 말씀하셨다.

법의 제 성품[法自性]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의 성품[我性]을 집착하여 구르며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저것을 깨달으며
깨달았기 때문에 환멸(還滅)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가 있다. 세존은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바로 번뇌를 깨끗이 함의 반연할 바 경계[淨煩惱所緣境界]를 말씀하셨나니, 괴로움의 진리[苦諦] 등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문】만약 진실하여 뒤바뀜이 없는 모양이 바로 진리의 모양이라면, 모든 외도의 소견과 모든 삿되게 훌륭한 알음[邪勝鮮]과 모든 삿된 이론을 진실이 아닌지라 다 같이 이는 뒤바뀜이거늘, 어찌하여 진리[諦]에 포섭되는가. 만약 포섭되지 않는다 하면, 그것은 장차 오는 세상의 뒤의 존재[候有]를 받지 않아야 할뿐더러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어야 한다.

【답】비록 진실이 아니고 뒤바뀜이 아니라 하더라도 괴로움과 쌓임[苦集]의 두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고 설명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비록 모두가 바로 삿된 성질[邪性]에 포섭된다손 치더라도 곧 이 삿된 성질의 모양은 바로 진실이고 모두가 뒤바뀐 것이 아니로되, 이는 괴로움의 성질이기 때문이며, 이는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두 가지 모양[二相]으로 말미암아서 무상함[無常]의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대승(大乘)의 도리에 의하는 모양이며, 둘째는 성문승(聲聞乘)의 도리에 의하는 모양이니, 존재함이 아니라[非有]는 뜻과 그의 모양은 없어지고 무너진다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괴로움[苦]의 뜻을 나타내 보이나니, 존재함이 아니라는 집착의 습기(習氣)며, 추중(麤重)이라는 뜻과 세 가지 느낌[三受]이 따르는 바인 나는 괴로움[生苦] 따위 여덟 가지 괴로움 모양의 구름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공≻(空)의 뜻을 나타내 보이나니, 푸드갈라의 제 성품은 멀리 여읨의 모양[遠離相]이라는 뜻과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멀리 여읨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나 없음[無我]의 뜻을 나타낸다. 대승의 도리와 성문승의 도리로 푸드갈라의 제 성품은 나 없음의 모양이라는 뜻과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나 없음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다시, 두 가지 가르침이 있나니, 무상함의 가르침[無常敎]과 비롯함이 없음의 가르침[無始敎]이다. 또 두 가지의 통달함이 있나니, 무상함의 가르침[無常敎]과 비롯함이 없음의 가르침[無始敎]이다. 또 두 가지의 통달함이 있나니, 함이 있는 경계의 통달함[有爲界通達]과 함이 없는 경계의 통달함[無爲界通達]이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만약 무상함이라면, 이는 괴로움이다. 첫째는 섭수함[攝受]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무상한 모든 행[諸行]은 모두가 추중 때문에 섭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의 성품[法性]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나는 괴로움 따위의 괴로운 법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붙따름[隨逐]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저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 항상 붙따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원인[因]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행(行)을 더욱 자라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집착함[執着]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뒤바뀜의 반연할 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만약 괴로움이라면, 바로 나 없음이다. 첫째는 괴로운 모든 행을 여의면 나라 함이 있을 수 없기 대문이며, 둘째는 저 괴로운 모든 행은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저 괴로운 모든 행은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작용(作用)이 없기 때문이며, 넷째는 찰나에 남이 있어서 항상 따라 구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차츰차츰 서로가 의지하기 때문이다.

【문】만약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된다면, 모두가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 만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며 이는 손해이며 이는 어김의 것인가. 또,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만 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며 이는 손해이며 이는 어김의 것이라면, 모두가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는가.

【답】만약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 만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요 이는 손해요 이는 어김의 것이라면, 모두가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는 줄 알아야 한다. 혹은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면서도 사랑할 만하지 못하는 등등이 있나니, 고고(苦苦)에 포섭되는 모든 행을 제외한 그 밖의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에 포섭되는 모든 행이다.

【문】부처님ㆍ세존은 여덟 가지 모양으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분별하셨나니, 이른바 나는 괴로움ㆍ늙는 괴로움 내지 한데 묶은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五取蘊]이다. 이 안에서, 몇 가지의 모양이 고고의 성질을 나타내었고 몇 가지의 모양이 괴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몇 가지의 모양이 행고의 성질을 나타내었는가.

【답】앞에서 다섯 가지가 고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가운데의 두 가지가 괴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사랑한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은 이미 얻게 된 사랑한 바가 변하여 무너지기 때문이고, 구하여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은 아직 얻지 못한 사랑한 바가 변하여 무너지기 때문이다. 맨 나중의 하나로 한데 묶은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은 행고의 성질을 나타내었다.

【문】만약 무상한 것이면 이는 괴로움인가. 또 괴로운 것이면 이는 무상함인가.

【답】모든 괴로움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로되, 무상하면서도 괴로움이 아닌 것이 있나니, 도의 진리[道諦]이다. 왜 그러냐 하면, 도(道)는 괴로운 느낌[苦受] 따위에 포섭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고가 아니다. 도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변하는 때의 괴고를 냄이 있겠는가. 도는 온갖 섞여 물듦 품[雜染品]의 추중을 해탈하기 때문이고 온갖 나기[生]의 상속함을 어기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역시 행고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문】만약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공≻하고 나 없음인가. 또, ≺공≻하고 나 없는 것이면, 모두가 무상하고 괴로움인가.

【답】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공≻하고 나없음이로되, ≺공≻하고 나 없으면서도 무상하거나 괴로움이 아닌 것이 있나니, 이 안에서의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는 네 가지7)를 다 갖추어 있고, 도의 진리는 세 가지만 있으며, 사라짐의 진리[滅諦]는 두 가지만이 있어서 무상함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다.

【문】만약 무상하면서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에 이는 괴로움인가.

【답】혹은 무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제 성품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행이 괴고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바로 괴로운 것이요, 만약 고고 때문에 괴롭거나 행고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제 성품 때문에 이는 괴로운 것이니, 손해하고 괴롭히는 성질이기 때문이며, 괴로움을 주무르는 바이기 때문이다.

【문】만약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라면, 역시 쌓임의 진리인가. 또, 이것이 쌓임의 진리라면, 역시 괴로움의 진리인가.

【답】모든 이 쌓임의 진리는 모두가 이는 괴로움의 진리로되, 혹은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면서도 쌓임의 진리가 아니기도 하나니, 온갖 아라한으로서 맑고 깨끗함이 계속되는 동안에 있는 바의 착함[善]이거나 무기(無記)인 온갖 세간의 법, 온갖 범부 몸인 동안에 있는 바의 결과 이숙[果異熟]에 포섭한 무기의 모든 법, 온갖 현재의 사람의 작용[士用]으로 내는 바의 괴로움이거나 즐거움이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과 함께 행하여지는 무기의 모든 행은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만에 포섭되는 줄 알아야 한다.

【문】만약 뒤의 존재[後有]를 싫어하고 뒤의 존재를 등져서 세간 벗어나는 도[出世道]를 이끄는 세간의 모든 법이면, 그것이 어떠한 인연으로 쌓임의 진리에 포섭되는가.

【답】비록 그의 제 성품이 뒤의 존재를 싫어하고 등진다 하더라도 뒤의 존재의 몸과 말과 뜻[身語意]의 미묘한 행에 따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역시 쌓임의 진리에 포섭된다.

【문】만약 온갖 뒤의 존재의 업번뇌(業煩惱)는 모양[相]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이는 쌓임의 진리에 포섭된다면 어떠한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욕망[愛]만을 시설하시었는가.

【답】이 욕망은 잡음[取]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모든 일에 두루하기 때문이며, 이 욕망이 나는 때에는 열다섯 가지 옳음과 이익이 없는 것[無義利]을 널리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두루하다 함은, 이와 같은 욕망을 순후유의 욕망[順後有愛]이라하나니, 희탐구행의 욕망[喜貪俱行愛]과 피피희락의 욕망[彼彼喜樂愛]을 모든 일에 두루하다고 함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순후유의 욕망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뒤의 존재의 경계를 반연[緣後有境]하며, 둘째는 이것의 뒤의 존재의 원인[後有因]이다. 희탐구행의 욕망이라 함은, 이미 얻어진 뜻에 맞는 경계에서거나 혹은 바르게 수용(受用)하는 동안에서의 있는 바 서로가 여의지 않고 오래 머무는 욕망이다. 피피희락의 욕망이라 함은, 아직은 얻지 못한 구하는 바의 경계에서거나 혹은 화합하기 위하여 혹은 여의지 않기 위하여 혹은 더욱 더하기 위하여서의 모든 있는 바의 욕망이다.

【문】만약 이것이 욕망이라면, 역시 이는 순후유(順後有)이고 희탐구행(喜貪俱行)이고 피피희락(彼彼喜樂)인가.

【답】네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혹은 이것이 욕망이면서도 순후유가 아니고 희탐구행이 아니고 피피희락이 아니기도 하나니, 위의 해탈을 바라 구하면서 증득하려 하는 것이다. 혹은 순후유요 희탐구행이요 피피희락이면서도 이는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순후유와 희탐구행과 피피희락의 욕망과 그 나머지 번뇌와 상응하게 있는 바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思]와 무명(無明) 등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욕망은 이는 셋째의 구절이다. 위의 그러한 것을 제외한 이것이 넷째의 귀절이다.

【문】만약 순후유의 욕망이면, 이는 희탐구행의 욕망인가. 또, 희탐구행의 욕망이면, 역시 순후유의 욕망인가.

【답】모든 희탐구행의 욕망은 역시 이는 순후유의 욕망이로되, 혹은 순후유의 욕망이면서도 희탐구행의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더러움에 물듦의 근심과 함께 행하여지는 욕망[染汚憂俱行愛]이거나 혹은 따로 떨어짐의 욕망[別離愛]이거나 혹은 화합하지 않음의 욕망[不和合愛]이다.

【문】만약 순후유의 욕망이면, 역시 피피희락의 욕망인가. 또,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순후유의 욕망인가.

【답】만약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이는 순후유의 욕망이로되, 혹은 순후유의 욕망이면서도 피피희락의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뒤의 존재의 경계를 반연하는 욕망[緣後有境愛]과 희탁구행의 욕망이다.

【문】만약 희탐구행의 욕망이면, 이는 피피희락의 욕망인가. 또,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희탐구행의 욕망인가.

【답】네 가지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얻어진 사랑할 만한 경계에서거나 혹은 바르게 수용하는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첫째의 구절이며, 바로 사랑할 만한 것으로서 미래에 장차 얻음이 아직 결정되지 못한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둘째의 구절이며, 바로 이것을 장차 얻음이 결정적인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셋째의 구절이며, 위의 그러한 것을 제외한 이것이 넷째의 구절이다.

【문】만약 욕심 세계 매임[欲界繫]의 느낌[受]을 성취하면, 형상 세계 매임[色界繫]의 느낌도 성취하는가. 또 형상 세계 매임의 느낌을 성취하면, 욕심 세계 매임의 느낌도 성취하는가.

【답】네 가지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혹은 욕심 세계 매임은 성취하였으되 형상 세계 매임은 그렇지 아니함이 있나니,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아직은 형상 세계의 저 다스림[對治]을 얻지 못한 것이다. 혹은 형상 세계 매임은 성취하였으되 욕심 세계 매임은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나니, 형상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혹은 욕심 세계의 매임도 형상 세계의 매임도 성취하기도 하나니,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형상 세계의 저 다스림을 이미 얻은 것이다. 혹은 다 같이 성취하지 아니하기도 하나니, 무형 세계에 태어났거나 또 욕심 세계ㆍ형상 세계ㆍ무형 세계 안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세간 벗어난 도[出世道]와 생각 끓은 신정[滅盡定]에 머무르는 것이다.
욕심 세계 매임을 형상 세계 매임과 대조시켜 네 가지 구절을 만듦이 그러한 것처럼, 욕심 세계 매임을 무형 세계 매임[無色界繫]과 대조시키고 욕심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不繫]과 대조시키고 형상 세계 매임을 무형 세계 매임과 대조시키고 형상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과 대조시키고 무형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과 대조시키는 것도 그에 알맞는 대로 모두 네 가지 구절을 만들 것이다.

【문】모든 미묘한 욕심[妙欲]은 역시 이는 근심되고 허물됨[過患過失]과 상응한 욕심인가. 또, 이 근심되고 허물됨과 사응한 욕심이면, 이는 미묘한 욕심인가.

【답】네 가지 구절로 만들어야 한다. ⑴혹은 미묘한 욕심이면서도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 아닌 것이 있나니,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으로 더러움에 물듦[染汚]이 현행(現行)하지 아니 하거나 그에 대하여 공력을 짓지 아니하여도 죄 없이 안락하게 머무르면서 맑은 행[梵行]을 능히 껴잡아 들이는 것이다. ⑵혹은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면서도 미묘한 욕심이 아니기도 하나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으로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지 아니하고 즐길 만하지 아니하고 기뻐할 만하지 아니하여 뜻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과 번뇌의 욕심이다. ⑶혹은 미묘한 욕심이면서 역시 이는 근심되고 허물됨과 사응한 욕심이기도 하나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으로 더러움에 물듦이 현행하지 아니할 수 없으면서도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고, 내지 뜻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⑷혹은 미묘한 욕심도 아닐뿐더러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 아니기도 하나니, 온갖 형상 세계ㆍ무형 세계의 번뇌와 그리고 일이다. 세존은 이 미묘한 욕심과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에 의하여 ‘망령되게 분별하는 탐냄은 바로 사람[士夫]의 욕심이니라.’고 하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시 다음에, 이 욕망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처음은 바로 존재함의 욕망[有愛]이요, 나중은 수용함의 욕망[受用愛]이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이미 얻었거나 아직 얻지 못한 것에서 수용하는 데의 차별 때문이며, 또 곧 이 욕망은 경계의 차별 때문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욕심 세계 욕망[欲愛]과 형상 세계 욕망[色愛]과 무형 세계 욕망[無色愛]이다.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욕심 세계의 뒤의 존재[後有]를 바라며 구하는 이가 이미 얻어진 수용한 바의 일을 기뻐하고 아직은 얻지 못한 수용할 바의 일을 기뻐하는 데에 있는 바의 욕망들을 바로 욕심 세계의 욕망이라 한다. 욕심 세계에 태어났거나 형상 세계에 나서 이미 욕심 세계의 욕심은 떠났고 형상 세계의 뒤의 존재를 바라며 구하는 이가 이미 얻어진 형상 세계의 사마아파티[等至]를 기뻐하고 아직 얻지는 못하였으되 보다 으뜸가는 사마아파티를 기뻐하는 데에 있는 바의 욕망들을 바로 형상 세계 욕망이라 하며, 형상 세계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무형 세계 욕망도 그의 알맞음에 따라서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곧, 이 뒤의 존재의 욕망은 항상하다는 소견[常見]과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을 의지로 삼는 까닭에 존재함의 욕망과 존재함이 없는 욕망[無有愛]을 세우나니, 이 때문에이 욕망을 모든 일에 두루한다고 한다.
어떻게 이 욕망이 나는 때에 열다섯 가지의 옳지 않음을 널리 일으키느냐 하면, 첫째는 수면(隨眠)을 견고하게 하며, 둘째는 얽음[纏]으로 말미암아서 온갖 임자 마음ㆍ딸린 마음의 법[心心所法]을 물들여 괴롭히며, 셋째는 마음의 상속함을 반연할 바 경계에서 뒤바뀌게 구르게 하며, 넷째는 잡음[取]에 포섭된 그 밖의 번뇌를 일으키며, 다섯째는 제 종류의 상속함을 벌려 세우고 상속시키며, 여섯째는 따르면서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며, 일곱째는 따르면서 이미 생겼던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더욱 광대하게 하며, 여덟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장애하여 생길 수 없게 하며, 아홉째는 이미 생긴 착한 법을 장애하여 머물러서 잊지 않게 하거나 갑절 더욱 키워서 광대할 수 없게 하며, 열째는 나쁜 행을 행하게 하는 까닭에 온갖 나쁜 갈래[惡趣]의 고통을 결합하여 모으며, 열한째는 뒤의 존재를 바라며 구하는 까닭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괴로움을 결합하여 모으며, 열두째는 유정들로 하여금 열반을 두려워하게 하며, 열셋째는 유정들로 하여금 나고 죽는 삿된 집착에서 있는 바의 공덕과 훌륭한 이익을 좋아하게 하며, 열넷째는 나고 죽음에서와 같이 경계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열다섯째는 유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목숨 해칠 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이를 해칠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세한 설명은 경전에서와 같으며, 내지 느낌[受]과 욕망[愛]으로 내는 바의 마음은 모두가 근심과 괴로움이다.
015_1033_b_01L瑜伽師地論卷第六十七 積彌勒菩薩說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攝決擇分中修所成慧地如是已說思所成慧地決擇脩所成慧地決擇我今當說當知略有十六種脩謂聲聞乘相應作意脩大乘相應作意脩影像修事邊際修所作成辦修得脩習脩除去修對治脩少分遍行修動轉修有加行修已成辦非脩所成法修脩所成法脩云何聲聞乘相應作意修謂如有一是聲聞住聲聞法性或未證入正性離生或已證入正性離生不觀他利益事唯觀自利益事由安立諦作意內觀眞如緣有量有分別法爲境爲盡貪愛由厭離欲解脫行相修習作意是名聲聞乘相應作意脩云何大乘相應作意修謂如有一是菩薩住菩薩法性或未證入正性離或已證入正性離生觀自觀他諸利益事安立非安立諦作意門觀眞如緣無量無分別法爲境大悲增上力故爲盡自他所有貪愛由攝受有情諸利益事方便行相及由趣向無上足迹因緣行相修習作意名大乘相應作意脩云何影像脩謂或於有分別毘鉢舍那品三摩地所行影像所知事同分作意思惟故或於無分別奢摩他品三摩地所行影像所知事同分作意思惟故諸所有脩名影像修云何事邊際脩謂於過去未來現在內外麤細下劣勝妙近遠等法作意思惟或於眞如作意思惟如是或盡所有性故或如所有性故諸所有脩名事邊際脩云何所作成辦脩謂已證入根本靜或諸等至或世閒定或出世定諸所有修名所作成辦脩云何得脩謂如有一依初靜慮或脩無常想乃至或修死想彼所有餘不現前想或自地攝或下地攝及彼所引諸餘功德或是世閒或出世閒能脩彼令其增盛淸淨當生於彼獲得自在成就是名得脩云何習修謂如有一卽於彼彼無常等諸善想作意思惟或於善法由習脩故皆現修習是名習修云何除去脩謂如有一由三摩地所行影像諸相作意故如楔出楔方便除遣棄於自性諸相又如有一用彼細楔遣於麤楔如是行者以輕安身除麤重身餘如前說是名除去修云何對治修謂於厭患對治或斷對或持對治或遠分對治作意思惟諸所有修名對治修此中厭患對治謂一切世閒善道除諸無量及餘行者遊戲神通所引作意斷對治者謂緣眞如爲境作意持對治者謂此後得世出世道若解脫道遠分對治者謂煩惱斷已於對治道更多脩習多修習上地之道復有差別謂聞修道名厭患對治出世閒道名斷對此果轉依名持對治世閒脩道遠分對治云何少分脩謂於無常想等隨一善作意思惟諸所有脩名少分脩云何遍行修謂於諸法一味眞如意思惟諸所有修名遍行修云何動轉脩謂於無相脩方便脩時時時有相閒隔而脩名動轉脩云何有加行脩謂卽於彼方便脩時由有加行相閒隔而脩名有加行脩云何成辦脩謂或聲聞乘或獨覺乘或復大乘已得一切所有轉依及得一切諸法自在此所有修名成辦脩云何非修所成法脩謂不定地諸施戒等所有善法修名非脩所成法脩云何脩所成法修謂定地諸善法修名修所成法修於此地中餘決擇文更不復現攝決擇分中聲聞地之一如是已說修所成慧地決擇聲聞地決擇我今當說如本地分說住無種性補特伽羅是名畢竟無般涅槃法此中或有心生疑惑云何而有畢竟無般涅槃法耶應誨彼言汝何所欲諸有情類種種界性無量界性下劣界性勝妙界性爲有爲無耶若言有者無有畢竟無般涅槃法補特伽羅不應道理若言無經言諸有情類有種種界性乃至勝妙界性不應道理如是誨已復有難言如有情類雖有種種界性乃至勝妙界性而無有無根有情如是無般涅槃法何故不爾或應許有無根有情應詰彼言汝何所欲諸無根者爲是有情爲非有情若是有情外無根物應是有情然不應道理若非有而言何不許有無根有情者不應道理如是詰已復有難言如作剎帝利已或時復作婆羅門吠舍戍陁羅如是乃至作戍陁羅已或時乃至作剎帝利又作那落迦已或時乃至作乃至作天已或時乃至復作那落迦如是何故不作無般涅槃法已時復作有般涅槃法耶應詰彼言何所欲諸剎帝利乃至戍陁羅及那落迦乃至諸天爲有一切界耶爲獨有一界耶若有一切界者喩不相似不應道理若獨有一界者先是剎帝或於一時乃至作戍陁羅先是那落迦或於一時乃至爲天不應道理如是詰已復有難言如剎帝利等具一切界如是無般涅槃法何故不有般涅槃法界耶應詰彼言汝何所欲諸無般涅槃法界諸有般涅槃法界此二界爲互相違耶爲不相違耶互相違而言無般涅槃法何故不有般涅槃法界者不應道理若不相違卽此補特伽羅是無般涅槃法亦是有般涅槃法者不應道理如是詰已復有難言如現見有一地方所於一時閒無金種性或於一時有金種性於一時閒無有末尼眞珠瑠璃等種或於一時有彼種性於一時閒鹽種性或於一時有彼種性於一時無種種相界種性或於一時有彼種性如是先是無般涅槃法種性故不於一時成有般涅槃法種性耶應詰彼言汝何所欲如彼地方所先無此種性後有此種性或先有此種後無此種性如是先有聲聞定種後無是種性乃至先有大乘定種後無是種性或先無定種性後有定種性耶若言爾者順解脫分善根應空無果又若爾者立定種性不應道理若不爾者汝言無般涅槃法者先住無種性已後住有種性如有地方所有般涅槃法者先住有種性已住無種性如地方所者不應道理又應責彼汝何所欲無般涅槃法下劣界者安住如是下劣界中爲卽於此生轉成般涅槃法爲於後生耶言卽於此生者汝意云何彼遇佛僧已於現法中爲能起順解脫分善根耶爲不能耶若言能者彼遇佛僧已於現法中能起順解脫分善根而言無般涅槃法者不應道理若言不能者彼遇佛僧已於現法中能起順解脫分善根而言轉成般涅槃法者不應道理若言後生方成般涅槃法者汝意云何彼爲先積集善根故於後生中遇佛能起順解脫分善根耶爲先不積集善根耶言先積集善根者彼卽於此生中能起善根而言於後生中成般涅槃法者不應道理又如彼因應空無果若言先不積集善根者則前後相似俱未積集善根而言於後生中方成般涅槃法非卽此生中不應道理復次略有十種聲聞何等爲十謂淸淨界聲聞已遇緣聲聞雜染界生聲聞淸淨界生聲聞未法時生聲聞賢善時生聲聞未得眼聲聞已得眼聲聞淸淨眼聲聞極淸淨眼聲聞有安住聲聞種性是初聲聞已入法是名第二若有聲聞所生世界其中多有衆苦可得容有五濁所謂壽濁乃至有情濁是名雜染界生聲聞與此相違當知卽是淸淨界生聲聞末法時生諸聲聞相云何可知謂諸聲聞於當來世法末時生多分愛重利養恭敬違背妙法諸貪癡及不正法竝皆增盛爲慳嫉等諸隨煩惱纏擾其心處慳家慳利慳敬慳譽慳法慳無不具足諂誑矯詐恒現在前說乃至爲活命故而求出家非爲涅多諸掉動高擧輕躁强口傲誕怠失念心不靜定多諸迷亂根性闇多諸煩惱煩惱現行無有閒斷雖多不生厭患樂多衆會棄阿練若邊際臥具來入衆中習近村側有臥具便生喜樂如是乃至喜樂談喜樂諠衆喜樂猥雜自擧縱逸能善修身戒於佛世尊所說甚深與空相應隨順緣性緣起緣生所有經典竝皆棄捨於世聰慧所造諷綺飾言辭絢藻文章隨順世典敬受持深生歡喜於似正法非正法妄生法想於正法中起非法想卽於彼愛樂顯現宣說開示誹謗正法及毘奈耶於說正法及毘奈耶補特伽羅生怨家想多犯尸羅習諸惡內實腐敗外現賢善廣說乃至實非梵行自稱梵行無餘有餘二篇重尚起故思現行毀犯何況中輕毀犯已多不如法發露對治或爲他知而行發露非實意樂故欲結好諸親友家及施食家於諸在家所爲所作能引無義多事業中好喜營造於諸在家白衣者所多起親愛尊重恭敬愍念之心非於同法修梵行所多喜安住詐現相等起邪命法展轉互起謀略之心好爲種種鬪訟違諍多樂蓄積家產資具假存法式以之爲勝凡所度人出家受戒一切皆以有染污心爲充供事然作是言我今但爲憐愍因緣度其出家受具足戒所畜共住近住弟子恒常供侍隨心轉者彼雖慢緩而深愛念悅意攝受餘不爾者雖不慢緩亦不愛念悅意攝受若見苾芻多諸親屬廣招利養衣服等物則便尊重恭敬供養若見苾芻闕乏親屬雖少欲等功德具足仍生輕蔑而不採錄食用僧祇及別人物都無悔愧好攝犯戒樂結朋黨悔情微劣或復太過凡所聽受皆爲聲讚誦因緣或復多爲利養恭敬都不自爲調伏身如是等類諸雜染法皆悉成就法末時者所謂大師般涅槃後聖教沒時爾時如是聲聞弟子身壞命終多墮惡趣生那落迦若有成就與此相違不染污法當知是名賢善時生聲聞彼於如來初出世時瘜肉未生時大師現前時或有一類般涅槃後如是多分身壞命終還得善趣往生天上樂世界中若諸異生聲聞名未得眼預流一來及不還等名已得眼慧解脫阿羅漢名淸淨眼若具三明俱分解脫名極淸淨眼復次或有聲聞雖如所應勇猛精進於現法中而不能證勝過人法或有聲聞於現法中有力能得勝過人法沙門果證由放逸故而不能證復次當釋月喩經中具戒具德柔和善法諸句差別謂聲聞中略有四種淨妙之法令諸有情若得見者由身生無量福何等爲四謂住具足尸羅守別解脫律儀廣說如經是名初法復有少欲喜足廣說乃至諸漏永盡作證讚美是第二法復有柔和易可共住不惱有智同梵行者令諸苾芻喜樂同處又具成就四種證淨是第三法又有不耽利養不著恭敬憐愍於他覆藏己善發露己惡雖復實有種種功德而不欲求令他知有謂欲令他知我成就如是功德是第四法復次若有聲聞欲往他家應先斷除三隨煩惱然後當往何等爲三一結親友家隨煩惱二家慳隨煩惱三以有染心而行法施隨煩惱此中聲聞由六種相應斷結親友家隨煩惱已乃往他家謂時時往不應數往於可愛事若不如理執取其相蹔生貪愛卽便羞恥不以兇暴强口傲誕邪行追求衣服等物善自守護善覆其身不以身觸所不應觸亦不坐於所不應坐終不食於所不應食亦終不飮所不應飮又不應受所不應受又以隨順遠離心趣向遠離心鄰亞遠離尋思諸善猶如山嶽難往趣處非淨信家能令淨信如舊所履淸淨泉諸淨信家倍令增長又由六相斷家慳隨煩惱已乃往他家謂往他於有情事不染不著如有情事利養事於恭敬事當知亦爾又於無不生憂苦如於無利於不恭敬知亦爾又於自他諸利養中其心平於己所得利養恭敬不自讚美他所得利養恭敬終不毀呰又由六應斷有染心而行法施隨煩惱已乃往他家謂不悕望他於己淨信於出離法如實了知又於他所應起三種純善意樂何等爲三謂引發樂除遣苦故恭敬聽受法隨法行得勝利故爲生等苦所苦惱者令脫苦若已解脫者卽於諸法妙善法性爲緣素呾纜毘奈耶摩呾理迦所攝俗正法中爲令受持讀誦正法久住故宣說當知初隨煩惱斷故無猥雜以爲究竟第二隨煩惱斷故正受用財以爲究竟第三隨煩惱斷故受用法以爲究竟復次當釋伐他迦經若有聲聞欲於染淨方便善巧略於三處應遍了知謂於雜染淸淨所依中由雜染淸淨所依故於雜染中由雜染故於淸淨由淸淨故云何雜染淸淨所依卽此身有色麤重廣說如經此是愚夫無有智慧趣無明者雜染所依是聰明有大智慧趣於明者淸淨所云何雜染謂諸愚夫爲欲造作淨不淨業先尋思已後以身造作所有淨不淨業由此因緣於五趣生死感愛非愛有惱無惱自體令生何淸淨謂二種學淸淨品中最爲殊第一學者謂眞如智以爲依止有所作第二學者謂爲煩惱皆得離繫復次卽此淸淨略由五因之所顯示何等爲五一正說者二正行者三正四增上心學所治隨煩惱斷五增上慧學所治隨煩惱斷此中如來是正說者根熟聲聞是正行者亦名聰慧者智所攝名爲正行據能斷煩惱義是無上對治故略有五法名增上心學所治隨煩惱一居遠離者所有諸蓋二於教授教誡不堪忍者所有忿惱三於利養恭敬深貪著者所有慳四於先所用所受境界發起邪念五順捨所學分別貪愛略有三法名增上慧所治隨煩惱初於世俗理門不了法義者所有無明次已了法義諸異生者於諸諦中所有猶疑惑未斷後已見諦迹諸有學者修道所攝慧所對治所有我慢由於如是諸隨煩惱永斷滅故當知證得最善淸淨增上心學增上慧學阿羅漢果此阿羅漢當知是名最極淸淨復次於此雜染淸淨所依諸聲聞衆略由三相應遍了知一由自性故由因緣故三由過患故由自性者此人身所有自性由三種相之所顯由有色故顯餘一切身之共相麤重故顯其各別身之自相由不淸淨故顯與天身不同分相由因緣者略有三種謂一切身共相因緣卽四大種各別自相人身因緣復有二種一者未生令生因緣所謂父母不淨和合二者已生令住因緣謂糜飯等之所長養由過患者復有二種謂無常性及與苦性若於寒時爲治寒苦追求覆障以爲對治若於熱時爲治熱苦追求沐浴以爲對治涉路作業有劬勞者爲治勞苦求按摩等以爲對治當知此類名爲苦性杖等之所觸對破壞法故刀所觸對斷壞法故若終沒已埋於地故或火燒故或爲種種傍生諸虫所食噉故或卽於彼爲諸風日所暴燥故皆是散壞磨滅法性當知此類是無常性昔會今乖名爲離散散已變壞最後都名爲磨滅復次因思所緣如說名映於一切有過名者由此名一法皆隨自在行此言有何義謂若略說觀淸淨因故觀自相故觀雜染因故及爲顯示補特伽羅無我及法無我故若遍了知補特伽羅無我四無色薀能斷一切自境界相名映一切若遍了知法無我遍計所執自性世俗言能除一切彼所依相名映一切若過四無色諸我相事定不可得若過世俗言名遍計所執自性相事亦不可得於二種俱不了知則便發起一切境相雜染隨轉一切境相所有雜染不因此增上力故依此密意薄伽梵說執法自性故 執我性而轉 覺此故覺彼由覺故還滅復次有四聖諦世尊爲諸聲聞說是淨煩惱所緣境界謂苦諦等如前已若眞實無顚倒相是諦相者外道見諸邪勝解諸邪論等非眞非實竝是顚倒云何諦攝若不攝者應不感當來後有應非苦因雖非眞實亦是顚倒然說苦集二諦所攝所以者何彼雖皆是邪性所攝然卽此邪性相是眞是實皆不顚倒是苦性故是苦因故復次由二相故顯無常義一依大乘道理相二依聲聞乘道理相謂非有義及其相滅壞義由二種相顯示苦謂非有執習氣麤重義及三受所隨生等八種苦相轉義由二種相示空義謂補特伽羅自性遠離相義及諸法自性遠離相義由二種相無我義謂大乘道理及聲聞乘道理補特伽羅自性無我相義諸法自性無我相義復有二教謂無常教無始教又有二種通達謂有爲界通達無爲界通達復次由五因緣若無常卽苦一由攝謂無常諸行皆爲麤重所攝受故二由法性謂是生等苦法性故三由隨逐謂彼三苦常隨逐故四由因是增長行因故五由執著謂是顚倒所緣事故復次由五因緣若苦卽無我一離苦諸行我不可得故二彼苦諸行依衆緣故三無作用故四有剎那生常隨轉故五展轉相依故若苦諦攝不可愛不可樂是苦是損惱是違害設不可愛不可樂是苦是損惱是違害皆苦諦攝耶若不可愛不可是苦是損惱是違害當知皆是苦諦所攝或有是苦諦攝非不可愛至廣說謂除苦苦所攝諸行所餘壞行苦所攝諸行如佛世尊以八種相分別苦諦所謂生苦老苦廣說乃至摠略五取薀苦此中幾相顯苦苦性幾相顯壞苦性幾相顯行苦性前五顯苦苦性中二顯壞苦性別離苦已得所愛變壞故求不得苦未得所愛變壞故後一摠略五取薀苦顯行苦性若無常是苦耶設苦是無常耶諸苦皆無常有無常非苦謂道諦以者何道非苦受等所攝故非苦苦道非變壞何有變時當生壞苦道能解脫一切雜染品麤重故能違一切生相續故是故亦非行苦所攝若無常苦皆空無我耶設空無我皆無常苦耶諸無常苦皆空無我有空無我非無常苦謂於此中苦諦具四種道諦有三滅諦有二非無常非苦若無常苦者皆無常故是苦耶或無常故或自性故謂所有行壞苦故苦彼無常故是苦若苦苦故苦苦故苦彼自性故是苦損惱性故所揉故若是苦諦亦集諦耶設是集諦亦苦諦耶諸是集諦者皆是苦諦或是苦諦而非集諦謂一切阿羅漢淸淨相續中所有若善若無記一切世閒法一切異生身中所有果異熟攝無記諸法一切現在士用所生若苦若樂若不苦不樂俱行無記諸行當知唯是苦諦所攝若厭患後有能背後有引出世道世閒諸法彼何因緣集諦所攝彼自性厭背後有然能隨順後有身意妙行是故亦是集諦所攝若一切後有業煩惱由相故皆是集諦攝何緣世尊唯施設愛此愛能起取故能發業故遍諸事故此愛生時普能發起十五種無義利故諸事者謂如此愛名順後有愛若喜貪俱行愛若彼彼喜樂愛名遍諸事當知亦爾順後有愛復有二種一緣後有境二是後有因喜貪俱行愛者謂於已得可意境界或於正受用中所有不相離久住愛彼彼喜樂愛者謂於未得所求境界或爲和合或爲不離或爲增益諸所有愛問若是愛者亦是順後有喜貪俱行彼彼喜樂耶應作四句或有是愛非順後非喜貪俱行非彼彼喜樂謂於上解脫悕求欲證或有順後有喜貪俱彼彼喜樂而非是愛謂與順後有喜貪俱行彼彼喜樂愛及餘煩惱相應所有受無明等卽此三愛是第三句除上爾所相是第四句若順後有愛是喜貪俱行愛耶喜貪俱行愛亦順後有愛耶諸喜貪俱行愛亦是順後有愛或有順後有愛非喜貪俱行愛謂染污憂俱行愛或別離愛或不和合愛問若順後有愛亦是彼彼喜樂愛耶設彼彼喜樂愛亦順後有愛耶若彼彼喜樂亦是順後有愛或有順後有愛彼彼喜樂愛謂緣後有境愛及喜貪俱行愛若喜貪俱行愛是彼彼喜樂愛耶設彼彼喜樂愛亦喜貪俱行愛耶應作四句謂於已得可愛境界或於正受用中所有愛是初句卽於可愛未來當得未決定中所有愛是第二句卽於此當得決定中所有愛是第三句除上爾所相是第四句若成就欲界繫受亦成就色界繫受耶設成就色界繫受亦成就欲界繫受耶應作四句或成就欲界繫非色界繫謂生欲界未得色界彼對或成就色界繫非欲界繫謂生色或成就欲界繫亦色界繫謂生欲已得色界彼對治或俱不成就生無色界又生欲界色界無色界中所作已辦住出世道及滅盡定如欲界繫望色界繫作四句如是欲界繫望無色界繫欲界繫望不繫色界繫望無色界繫色界繫望不繫無色界望不繫如其所應皆作四句諸妙欲亦是過患過失相應欲耶設是過患過失相應欲是妙欲耶應作四句或有妙欲非過患過失相應欲謂若色觸能不染污現行若於彼不作功力無罪安樂住攝受梵行或有過患過失相應欲妙欲謂若色觸一向不可愛不可樂不可欣不能悅意及煩惱欲或有妙欲亦是過患過失相應欲若色觸不能不染污現行向可愛乃至悅意或有非妙欲亦非過患過失相應欲謂一切色無色界繫煩惱及事世尊依此妙欲及過患過失相應欲故說如是言妄分別貪是士夫欲復次此愛略有二種初是有愛後是受用愛此復二種謂於已得未得所受用處差別故又卽此愛界差別故復有三種謂欲愛色愛無色愛若生欲界悕求欲界後有者喜於已得所受用事欣於未得所受用事諸所有愛是名欲愛若生欲界或生色界離欲界欲悕求色界後有者喜於已得色界等至欣於未得勝上等至諸所有愛是名色愛如色愛如是無色隨其所應當知亦爾卽此後有愛常見斷見爲依止故建立有愛及無有愛是故此愛名遍諸事云何此愛生時普能發起十五無義一令隨眠堅固二由纏故染惱一切心心所法三令心相續於所緣境顚倒而轉四發起取所攝所餘煩惱五能安立自類相續六能隨順生起未生惡不善法七能隨順已生惡不善法令其增廣八能障礙未生善法令不得生九能障礙已生善法令不得住不忘倍增長益廣大十令行惡行故結集一切諸惡趣苦十一悕求後有結集生死等苦十二能令有情怖畏涅槃十三能令有情愛樂生死邪執所有功德勝利十四如於生於境界亦爾十五能令有情思爲自害思爲害他廣說如經乃至受所生心諸憂苦瑜伽師地論卷第六十七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정성이생(正性離生):일부(一分)의 무루지(無漏智)로써 번뇌를 끊어서 얻은 것을 정성(正性)이라 하며, 이 정성으로 영원히 범부로서의 생(生)을 여의기 때문에 정성이생이라 하다. 이는 견도위(見道位)이다.
  2. 2)계율과 마음과 지혜[戒心慧]:게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말한다.
  3. 3)월유경(月喩經):불설 월유경(佛說月喩經). 1권, 북송(北宋)의 시호(施護)가 번역하다.
  4. 4)구족 쉬이라[具足尸羅]:구족계(具足戒)를 말한다.
  5. 5)벌지가경(伐地迦經):벌지가국(伐地迦國) 사람 이름으로 경 이름을 붙였다.
  6. 6)이름[名]은 온갖 것을 압도한다:나 없음[無我]의 네 가지 쌓임[四蘊]의 이름으로써, 온갖 네 가지 쌓임의 제 경계[自境界]의 인아상(人我相)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7. 7)네 가지 무상함[無常]:괴로움[苦]ㆍ≺공≻함[空]ㆍ나 없음[無我]의 네 가지 행상[四行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