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음에, 보살의 비나야[毘奈耶]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 무더기[三聚]가 있는 줄 알 것이다. 첫째의 율의계(律儀戒) 비나야 무더기는 바가바안[薄伽梵]께서 모든 성문으로서의 교화할 바 유정들을 위하여 간략히 말씀하신 비나야의 모양과 같나니, 바로 이 비나야 무더기인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섭선법계(攝善法戒) 비나야 무더기이냐 하면, 모든 보살은 섭선법계를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때에는 요약하여 여섯 가지 마음[六心]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냐 하면, 첫째는 업신여기는 마음[輕蔑心]이며, 둘째는 게으름이 함께 행해지는 마음[懈怠俱行心]이며, 셋째는 덮어 가림이 있는 마음[有覆蔽心]이며, 넷째는 힘쓰다가 피로로 권태 있는 마음[勤勞倦心]이며, 다섯째는 병이 따라 다니는 마음[病隨行心]이며, 여섯째는 장애가 따라 다니는 마음[障隨行心]이다. ⑴모든 보살로서 착한 법 안에서의 있는 바 가벼이 여기는 마음[輕心]과 훌륭한 알음이 없는 마음[無勝解心] 및 깔보는 마음[陵蔑心]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 하며, ⑵만약 게으름과 뽐냄과 방일함에 얽혀진 마음이 있으면 게으름과 함께 행해지는 마음이라 하며, ⑶탐냄의 덮개[貪欲蓋] 따위의 어느 하나의 덮개가 있거나 혹은 모든 번뇌와 따르는 번뇌에 얽혀진 마음이면 덮어 가림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⑷만약 용맹스럽게 뛰어난 정진(精進)에 머물다가 몸이 피로하여지고 마음이 권태로워져서 그의 마음을 억눌려 가리면 힘쓰다가 피로로 권태 있는 마음이라 하며, ⑸만약 질병들이 있어서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지라 할 능력이 없고 수행해 낼 수 없으면 병이 따라 다니는 마음이라 하며, ⑹만약 모든 의론[論]을 기뻐하는 따위의 장애가 있어서 그의 마음에 붙따르면 장애가 따라 다니는 마음이라 한다. 보살은 이 여섯 가지의 마음 안에서, ‘나는 이 여섯 가지 마음 안에서 어느 하나라도 앞에 나타나서 행해짐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바르게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앞의 세 가지 마음을 보살은 한결같이 일으키지 않아야 하고, 설령 일으킨다 하여도 참아 받지 않아야 하며, 만약 참아 받으면서 버리지 않는다면 모두가 두루 다 죄가 있다[有罪]고 한다. 힘쓰다가 피로로 권태 있는 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에는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서 좋은 방편을 버리게 되므로, 만약 잠시라도 몸과 마음의 피로를 쉬게 하기 위하여 착한 법을 많이 닦고 익히는 이는 죄가 없는[無罪] 줄 알 것이나, 만약 온갖 것을 마침내 버리고서 ‘나는 무엇으로써 이러한 착한 법을 힘써 닦아 익히어, 나로 하여금 현재의 이 괴로움에서 편안히 머무르게 할꼬’라고 하는 이와 같은 이라면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병이 따라 다니는 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에는 보살은 이것에서 자재함이 없는지라 하고자 하는 대로 좋은 더한 행[加行]을 닦지도 않고 비록 다시 참아 받는다 하더라도 죄가 없다. 장애가 따라 다니는 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에는, 만약 하고자 하는 대로 그 안에 떨어져 있지 않거나 혹은 이 안에서 큰 옳고 이익 됨이 있음을 살폈다면 비록 다시 참아 받는다 하더라도 죄가 없거니와, 만약 하고 싶은 대로 그 안에 따라 들거나 혹은 이 안에는 옳고 이익 됨이 없거나 혹은 옳고 이익 됨이 조금 있는지라 짐짓 참아 받는다면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하리라.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마음에서, 앞의 세 가지가 난 뒤에 참아 받는 이는 한결같이 죄가 있거니와 병이 따라 다니는 마음은 비록 다시 참아 받더라도 한결같이 죄가 없으며, 나머지 두 가지 마음은 만약 일어난 뒤에 참아 받는다면 혹은 이는 죄가 있기도 하고 혹은 죄가 없기도 한다. 만약 모든 보살로서 유정의 이익을 짓는[作有情利益戒] 안에서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때에는, 바르게 여섯 가지 곳[六處]의 속한 행[攝行]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이른바, ⑴자기[自]와 ⑵남[他]과 ⑶재산의 쇠망[財衰]과 ⑷재산의 흥성[財盛]과 ⑸법의 쇠망[法衰]과 ⑹법의 흥성[法盛]이니, 이것을 여섯 가지 곳이라 한다. 재산의 쇠망이라 함은, 의복과 음식 등을 아직 얻지 못했거나 얻지 않았거나 얻은 뒤에 헤어지고 없어진 것이니, 이것과 반대의 것은 재산의 흥성인 줄 알아야 한다. 법의 쇠망이라 함은, 배울 바를 멀리한지라 먼저 아직 듣지 못했던 으뜸가는 이치에 포섭된 여래께서 말씀하신 미묘한 법구(法句)를 들을 수가 없으며, 먼저 아직 듣지 못한 바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먼저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바를 생각할 수도 없어서 들음에 장애가 있고 생각함에 장애가 있으며 설령 듣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여도 곧 또 잊어버리며, 아직 증득하지 못한 바의 닦아서 이루는 바 착함[修所成善]에서도 아직 증득할 수 없나니, 설령 증득한다 하여도 도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의 것은 법의 흥성인 줄 알아야 한다. 이 안에서, 보살은 자신의 법을 쇠망하게 하면서 남의 재산이 흥성되게 하는 이것은 곧 하지 않아야 하며, 재산을 흥성되게 하는 데서와 같이 법의 흥성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 안의 이치는, 배움의 멀리한 것에 포섭된 것과 배움을 멀리하게 한 것에 포섭된 그것이며 혹은 증득한 법에서 물러난 것에 포섭된 것들이니, 이것이 법의 쇠망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보살은, 자신의 재산을 쇠망하게 하면서 다른 이의 재산을 흥성하게 할 적에, 만약 이 재산의 흥성이 법의 쇠망을 이끌지 않는다면 이는 곧 하여야 하거니와 만약 법의 쇠망을 이끈다면 이는 하지 않아야 하나니, 재산을 흥성하게 하는 데서와 같아서 법의 흥성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또 모든 보살은, 자기의 재산을 흥성하게 하면서 다른 이의 재산을 흥성하게 하는 이것은 곧 하여야 되나니, 재산을 흥성하게 하는 데서와 같아서 법의 흥성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또 모든 보살은, 자신의 법을 흥성하게 하면서 다른 이의 재산을 흥성하게 하는 이것은 곧 하여야 되나니, 재산을 흥성하게 하는 데서와 같이 법의 흥성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와 같은 일들을 만약 수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있다고 하며, 만약 바르게 수행하면 죄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잠시 보살의 받는 바 세 가지 율의(律儀)의 요약된 비나야를 설명하였나니, 보살은 이 안에서 언제나 뜻을 짓고 생각하고 닦아 배워야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받는 바 보살의 계율 안에서 어느 하나라도 궐한 바가 있으면 수호함이 아닌[非護] 줄 알아야 하나니, 보살의 율의를 수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며, 이 세 가지 계율을 수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율의계를 껴잡아 지니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가 화합하게 하고 만약 이것을 부지런히 힘써 수호한다 하면, 역시 다른 두 가지도 부지런히 힘써 수호한 것이 된다. 만약 이것을 수호할 수 없다면, 역시 나머지 두 가지도 수호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만약 율의계를 깨뜨리면 온갖 보살의 율의를 깨뜨린 것이라 한다. 만약 다른 이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고 다른 이를 따르려는 까닭에 다른 이의 권함과 인도로 말미암아서 보살계를 받게 될 적에 스스로가 일으키는 바 뛰어난 의요[增上意樂]로써 따라서 보고 따라서 살피어 스스로가 깨끗한 믿음을 내어 모든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머무르며 착한 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서 보살계를 받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수호가 아니고 원만하게 착한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 과보의 훌륭한 이익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해야 된다. 이것과 상반된 것이면, 진실한 수호일뿐더러 그 과보의 훌륭한 이익도 얻게 된다고 하는 줄 알 것이다. 다시 다음에, 만약 이와 같은 율의를 버리지 않는다면 다른 생(生)에서도 따라 굴리게 되어 그것을 버리게 되지 않을 이인 줄 알아야 된다. 또, 버리는 인연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결정코 받겠다는 마음과 동분(同分)이 아닌 마음을 일으키며, 둘째는 잘 알아서 분별할 줄 아는 대장부 앞에서 고의(故意)로 버리겠다는 말을 하며, 셋째는 모두 다 또는 따로따로 네 가지의 피아라아지카아[他所勝法]를 범하며, 넷째는 뛰어난 품류의 얽음[纏]으로써 모두 다 또는 따로따로 따를 네 가지의 파아라아지카아를 범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보살의 율의를 버리는 줄 알 것이다. 만약 도로 맑고 깨끗하게 받을려는 마음이 있으면, 다시 도로 받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만약 집을 떠난 보살이 세 가지 옷[三衣]을 제외한 온갖 가외 물건[長物]으로서 부처님이 저축을 허락하신 바라 몸에 수용한 바로 안락하게 머무르고 있다가 만약 일부러 잘 생각하여 와서 구하는 이에게 보시하면, 죄가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착한 품류를 돌보며 간탐의 장애가 아니면서 보시하지 아니하면 역시 죄는 없다. 모든 엽지(葉紙)에다 이미 바른 법을 썼었는데 젖먹이 지혜 지닌 중생이 와서 구할 적에 만약 주면 죄가 있는 줄 알아야 되며, 만약 다른 이를 권하여 주게 하여도 역시 죄가 있다고 한다. ‘내가 이제 그에게 주어서 그 사람이 심히 깊은 법에 대해 받아 지닐 만한가. 믿고 이해할 만한가를 시험하려 하노라’고 하는, 이런 생각만은 제외되나니, 이와 같은 것은 죄가 없다. 만약 엽지에다 비슷한 바른 법[似正法]과 외도의 논(論)을 쓰거나 혹은 먼저 이미 써서 저 믿고 이해하는 중생의 수중에 주었거나 혹은 다른 이를 권하여 주게 하여도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하리니, 보살은 다만 그에게 권하여 수중의 이론(異論)을 버리게 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베껴 쓰게 할 뿐이다. 혹은 스스로가 그는 견실하지도 않고 열어 보이기에 마땅하지 않음을 알려고 하거나 혹은 엽지에 아직은 베껴 쓰지 못했는데 와서 구하는 이가 있으면, 그때에 보살은 그에게 물어야 하되, ‘그대는 이제 이와 같은 물건을 무엇에 쓰려는가’라고 해야 하며,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팔아서 식용품을 사렵니다. 라고 하면, 만약 이 엽지에 바른 법을 쓰기 위한 것이라면 주지 말아야 하고 재물이 있으면 그 값어치를 주어야 한다. 만약 그 값어치가 없으면, 두 가지를 다 함께 주지 않아도 죄가 없다. 그가 만약 대답하기를, ‘내가 이 물건을 구하는 것은 바른 법을 쓰기 위해서다’라고 하면, 곧 엽지를 그에게 주어야 하며, 이어 그에게 말하기를, ‘뜻대로 수용하십시오.’라고 한다. 그가 만약 하열한 전적(典籍)을 쓰려고 하면 주지 않아도 죄가 없으며, 하열한 글을 쓰는 것과 같은 것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가장 훌륭한 경전을 베껴 쓰려 하는데 주지 않는다 하면,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모든 보살로서 이미 은혜가 있었던 유정들에게 그 은혜에 따른다는 생각으로 계속 친한 벗이라는 의요(意樂)를 일으키어 물듦이 있는 마음[有染心]으로써 방편으로 거두어 주어서 붕당(朋黨)을 삼으려 하면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하며, 혹은 원한이 있는 유정들에게 원한을 따른다는 생각으로 계속 원수라는 의요를 일으키어 지저분한 마음이 있다면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하며, 혹은 은혜도 없고 원한도 없는 유정들에게 계속 중용(中庸)이라는 의요와 제멋대로 내버린다는 의요를 일으켜도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바로 앞에서 집을 떠나려 하는 이가 있어서 따르며 관찰할 때에 허물이 있으면 허물이 있다고 물리쳐서 집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은 죄가 없으며, 만약 그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비록 집을 떠나게 한다손 치더라도 역시 죄는 없다. 집을 떠나는 것에서 말한 것처럼,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적에 의지(依止)가 되어 주어 거두어서 도중(徒衆)을 삼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이와 같은 등의 온갖 행상(行相)으로 말미암아서 보살의 세 가지 계율 쌓임[戒蘊]은 모두가 원만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먼저 이미 보시[施] 등을 널리 설명하였으므로, 이제는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모든 보살에게 있는 바 보시는, 요약하면 다섯 가지 공덕과 상응하여 보시 바라밀다[到彼岸]의 수(數)에 든다.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는 집착이 없으며[無着], 둘째는 그리워함이 없으며[無戀], 셋째는 죄가 없으며[無罪], 넷째는 분별이 없으며[無分別], 다섯째는 회향(廻向)이다. 보시에서와 같이 계율[戒]에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⑴집착이 없다 함은, 온갖 보시 등의 장애되는 법안에서 걸림이 없으며, ⑵그리워함이 없다 함은, 물듦이 있음[有染]과 그 과보 안에서 마음에 매어 둠이 없으며, ⑶죄가 없다 함은, 온갖 보시 등의 따르는 번뇌를 멀리 여의며, ⑷분별이 없다 함은, 보시 등에서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제 성품을 살피지 않으며, ⑸회향이라 함은, 온갖 보시 등의 모든 행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과보 얻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 다섯 가지의 덕으로 말미암아서 온갖 바라밀다를 껴잡아 들임을 보살의 보시[菩薩施]라 하고, 내지 보살의 지혜[菩薩慧]라고 하며, 온갖 보시[一切施]라 하고, 내지 온갖 지혜[一切慧]라고 하며, 몹시 어려운 보시[艱難施]라 하고, 내지 몹시 어려운 지혜[艱艱慧]라고 한다. 온갖 우다아나[嗢拕南]의 게송을 널리 말하면서 모두 그에 따라 온갖 것을 결단하여 알게 하는 것은, 모두가 본지분(本地分)에서의 설명과 같다. 다시 다음에, 보시 바라밀다에서는 안과 바깥으로 말미암아서 열 가지 따는 번뇌[十隨煩惱]가 있으며, 그것을 다스리기 때문에 보시 바라밀다의 열 가지 맑고 깨끗함[十種淸淨]을 얻나니, 보살지(菩薩地)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증일(增一)의 차례로 말미암아서, 바깥의 문[外門]에 의하여 다섯 가지 따르는 번뇌가 있나니, 첫째는 두루 물들어서 고민하는 성품[遍染惱性]이며, 둘째는 버리는 성품[棄捨性]이며, 셋째는 즐거워함을 지니지 않은 성품[不持可樂性]이며, 넷째는 뜻의 바람이 원만하지 않은 성품[意望不圓滿性]이며, 다섯째는 성숙하지 않은 성품[不成熟性]이다. 안의 문[內門]에 의하여 다섯 가지의 따르는 번뇌가 있나니, 첫째는 벗어나지 않은 성품[不出離性]이요, 둘째는 섞여 물들어서 고민하는 성품[雜染惱性]이요, 셋째는 하열하여 천박하지 않은 성품[不劣薄性]이요, 넷째는 바로 앞에서 떨어지는 성품[現前墮性]이요, 다섯째는 법을 다하여 없애는 성품[盡滅法性]이다. 다시 다음에, 앞의 계품(戒品) 안에서 이미 열 가지 쉬이라의 맑고 깨끗함[尸羅淸淨]을 설명하였거니와 처음의 한 가지는 바로 의요(意樂)의 맑고 깨끗함이며, 나머지 아홉 가지는 바로 가행[加行]의 맑고 깨끗함인 줄 알아야 한다. 가행의 안에 다섯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사이의 결함이 없는 가행[加行]의 맑고 깨끗함인 줄 알아야 한다. 가행의 안에 다섯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사이의 결함이 없는 가행[無間缺加行]이며, 둘째는 두루 닦고 다스리는 가행[遍修治加行]이며, 셋째는 회향의 가행[廻向加行]이며, 넷째는 돕는 벗의 가행[助伴加行]이며, 다섯째는 수호의 가행[守護加行]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첫째의 가행이며, 네 번째가 둘째의 가행이며, 다섯 번째는 셋째의 가행이며, 여섯 번째ㆍ일곱 번째ㆍ여덟 번째ㆍ아홉 번째가 넷째의 가행이며, 열 번째가 다섯 번째의 가행이다. 다시 다음에, 인욕(忍辱) 바라밀다의 열 가지 맑고 깨끗함 안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의 맑고 깨끗함이 있는 줄 알지니, 앞의 아홉 가지는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이 맑고 깨끗함[思擇力淸淨]이라 하고, 그 열째 번은 닦아 익히는 힘의 맑고 깨끗함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죄가 남을 멀리 여읨[遠離罪生]이 맑고 깨끗하며, 둘째는 그것이 현행하지 않음[彼不現行]이 맑고 깨끗하며, 셋째는 죄가 남이 없음[無罪生]이 맑고 깨끗하며, 넷째는 그의 인연을 멀리 여읨[遠離彼因]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첫 번째ㆍ두 번째ㆍ세 번째의 세 가지는 그 차례대로이다. 인욕하지 않은 인연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제부끄럼이 없고[無慚], 둘째는 남부끄럼이 없고[無愧], 셋째는 가엾이 여김이 없는 성품[無哀愍性]이다. 다시 다음에, 정진(精進) 바라밀다에 열 가지 맑고 깨끗함이 있나니, 첫째는 처소에 안정함[安處]이 맑고 깨끗하며, 둘째는 순수하게 성숙함[純熟]이 맑고 깨끗하며, 셋째는 다잡아 일으킴[策發]이 맑고 깨끗하며, 넷째는 방편(方便)이 맑고 깨끗하며, 다섯째는 헛된 때가 아니게 머무름[不虛時主]이 맑고 깨끗하며, 여섯째는 몹시 고생스럽지 않게 머무름[不艱辛住]이 맑고 깨끗하며, 일곱째는 벗어남[出離]이 맑고 깨끗하며, 여덟째는 돕는 벗을 거두어 줌[攝受助伴]이 맑고 깨끗하며, 아홉째는 빠른 신통[速疾神通]이 맑고 깨끗하며, 열째는 그지없는 성품[無盡性]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다시 다음에, 정려(靜慮) 바라밀다에 열 가지 맑고 깨끗함이 있나니, 첫째는 맑고 깨끗함[淸淨]이 맑고 깨끗하며, 둘째는 샘 없음[無漏]이 맑고 깨끗하며, 넷째는 근본을 증득함[證得根本]이 맑고 깨끗하며, 다섯째는 자재한 방편[自在方便]이 맑고 깨끗하며, 여섯째는 자재함에 머무름[住自在]이 맑고 깨끗하며, 일곱째는 신통을 이끌어 냄의 자재함[引發神通自在]이 맑고 깨끗하며, 여덟째는 유정을 성숙시킴의 자재함[成熟有情自在]이 맑고 깨끗하며, 아홉째는 외도를 항복시킴의 자재함[降服外道自在]이 맑고 깨끗하며, 열째는 위없이 매임 여읨[無上離繫]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다시 다음에, 지혜[慧] 바라밀다에 다섯 가지의 맑고 깨끗함이 있나니, 첫째는 모든 모양에 통달함[通達諸相]이 맑고 깨끗하며, 둘째는 연기에 통달함[通達緣起]이 맑고 깨끗하며, 셋째는 가르쳐 인도함에 통달함[通達敎導]이 맑고 깨끗하며, 넷째는 선비 작용에 통달함[通達士用]이 맑고 깨끗하며, 다섯째는 증득함에 통달함[通達證得]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다시 다음에, 어떻게 보살은 몸에 대한 순신관(循身觀)에 머무르는가 하면, 모양의 몸[相身]에서 순환하여 진여의 몸[眞如身]을 자세히 살피나니, 몸에서와 같이 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에서도 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보살은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게 되게 하기 위하여 하려함[欲]을 내느냐 하면(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진여의 경계에서 마음을 매어 머무르게 하면서 온갖 모양 및 추중으로서 아직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과 안에서 아직 생기지 않은 것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게 되게 하기 위하여 하려함을 낸다(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아직 생기지 않은 것으로 하여금 생기지 못하게 함이 그러한 것처럼, 이미 생겨서 이미 앞에 나타나게 된 것과 안에서 생긴 것을 끊게 하기 위하여 능히 다스림[能對治]의 모든 착한 법을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생기게 하고 이미 생겼으면 머무르게 한다(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안의 염주(念住)의 자리에서 맨 처음에 마음을 매어 반연할 바 경계에 두며, 그 다음에는 반연할 바에서 마음을 편안히 머무르게 하여 부지런히 정단(正斷)을 닦으며, 그 다음에는 정(定)을 얻은 뒤에 이 정으로 하여금 잘하고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신족(神足) 안에서 부지런히 가행(加行)을 닦으며, 정이 원만한 뒤에는 온갖 모양과 추중으로 하여금 매임 여읨[離繫]을 얻게 하기 위하여 신근(信根) 따위에 의하여 가행도(加行道)를 닦는다. 가행도 중의 근(根)은 바로 하등 품류[下品]이고, 힘[力]은 바로 상등 품류[上品]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가행도를 닦고 나서 그 다음에는 깨달음 갈래[覺支]를 얻어 실제(實際)에 통달하여, 실제에 통달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도의 갈래[道支]를 닦아 점차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를 증득하여 온갖 장애에서 모두 해탈을 얻는다. 다시 다음에,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은 차별하여 열네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감관의 속박[根縛]이며, 둘째는 경계의 속박[境縛]이며, 셋째는 유정들이 차츰차츰 서로서로가 사랑하는 속박이며, 넷째는 이룩하는[建立] 속박이니, 그릇 누리[器世間]로서, 모든 감관은 이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이룩한다고 한다. 다섯째는 알 바의 경계에서 지혜가 없는 속박이며, 여섯째는 능히 아는 지혜[能知智]에서 지혜가 없는 속박이며, 일곱째는 뒤의 존재[後有]에 대한 사랑의 속박이며, 여덟째는 없는 것[無有]에 대한 사랑의 속박이며, 아홉째는 평등하지 않은 원인[不平等因]과 원인 없음[無因]을 집착하는 속박이며, 열째는 증득하였다는 뛰어난 체[增上慢]의 속박이며, 열한째는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제 성품[遍計所執自性]을 집착하는 속박이며, 열두째는 푸드갈라[寶特伽羅]의 제 성품을 집착하는 속박이며, 열셋째는 푸드갈라를 두루 알았다는 뛰어난 체의 속박이며, 열넷째는 법을 두루 알았다는 뛰어난 체의 속박이다. 다시 다음에, ≺공≻(空)에 의하여 염주(念住)를 부지런히 닦는 보살은, 요약하여 여섯 가지의 망령된 생각의 속박[想縛] 안에서 그의 마음으로 하여금 빨리 해탈을 얻게 해야 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 생각의 속박이냐 하면, 이른바 몸에서부터 법(法)까지에서 안[內]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첫 번째 생각의 속박이며, 곧 이 안에서 바깥[外]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생각의 속박이며, 곧 이 안에서 안팎[內外]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세 번째 생각의 속박이며, 만약 시방의 수 없고 한량없는 유정의 세계에서 해탈되기를 원하여 염주를 닦아 익히면, 이 안의 모든 생각은 바로 네 번째 생각의 속박이다. 만약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몸 등의 경계를 순환하여 살피면서[循觀] 머무르면, 이 안의 모든 생각은 다섯 번째 생각의 속박이며, 곧 몸 등을 순환하여 살피면서 머무는 이로서의 이 안의 모든 생각은 바로 여섯 번째 생각의 속박이니, 곧 이 안에서 순환하며 살피기 때문이다. 다시, 열한 가지의 뒤로 갈수록 생각의 속박이 있다. 무엇이 열한 가지의 뒤로 갈수록 생각의 속박이냐 하면, 몸 등에 대한 순신관(循身觀) 등에 머무는 이로서, 모든 섞여 물듦[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의 진리 안에서 일으키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의 생각이 이는 것을 첫째의 속박이라 하며, 곧 섞여 물듦의 첫째가는 이치 안에서 일으키는 조작(造作)이라는 생각이 이는 것을 두 번째의 속박, 곧 맑고 깨끗함의 첫째가는 이치 안에서 일으키는 조작이 없다[無造作]는 생각이 이는 것을 세 번째의 속박, 곧 조작이 없는 첫째가는 이치 안에서 일으키는 항상하다[常]는 생각이 이는 것을 네 번째의 속박, 곧 조작의 섞여 물드는 안에서 일으키는 바 헤맨다[流轉]는 생각이 이는 것을 다섯 번째의 속박, 곧 항상함의 안에서 일으키는 바 변하고 달라짐이 없다[無變異]는 생각이 이는 것을 여섯 번째의 속박, 곧 헤맴의 안에서 괴로움이 있고 변하여 달라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일으키는 바 괴로운 성품[苦性]이라는 생각이 이는 것을 일곱 번째의 속박, 곧 이 안에서 나고 없어지고 머무르고 달라지는[生滅性異] 제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제 모양이 변하고 달라짐이 있기 때문에 일으키는 바 그것이 제 모양[彼自相]이라는 생각이 이는 것을 여덟 번째의 속박, 곧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과 변하여 달라짐이 있는 첫째 가는 이치 안에서 일으키는 바 물듦과 깨끗함의 온갖 법을 포섭한다[能攝染汚淸淨一切法]는 생각이 이는 것을 아홉 번째의 속박, 곧 이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온갖 법안에서 일으키는 바 나에겐 물듦과 깨끗함이 없다[我無染淨]는 생각이 이는 것을 열 번째의 속박, 곧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모든 법에서 일으키는 바 제 성품이 없는 모양[無自性相]이라는 생각이 이는 것을 열한 번째의 속박이라고 한다. 모든 보살은, 이 뒤로 갈수록 모든 행에 대한 생각의 속박의 알 바 경계를 바르게 관찰함으로 말미암아서 ≺공≻에 의하여 염주를 잘 닦으며, 마음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나니, 이 생각의 속박에서 해탈을 얻기 때문에 온갖 생각의 속박은 모두 해탈을 얻는다. 다시 다음에, 대승(大乘)의 안에서 어느 한 무리는 ≺공≻을 나쁘게 취함[惡取空]1)이 있기 때문에 말하기를, ‘세속으로 말미암아서는 온갖 모두가 있는 것이지마는, 으뜸가는 이치[勝義]로 말미암아서는 모두가 다 없다’라고 하나니, 그에게 말하기를, ‘장로(長老)여, 어느 것이 세속이며, 어느 것이 으뜸가는 이치인가’라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물은 뒤에 그가 만약 대답하기를, ‘온갖 법은 모두가 제 성품이 없으므로 이것을 으뜸가는 이치라 하고, 만약 모든 법의 제 성품이 없는 안에서 제 성품이 얻게 된다 하면, 이것을 세속이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세속이라는 가정으로 시설한 명언(名言)을 세워서 언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명언인 세속은 원인으로부터 있어서 제 성품이 얻게 되는 것인가. 명언인 세속의 것으로만 있다고 말하는가. 만약 명언인 세속이 원인으로부터 있다고 하면 명언인 세속은 원인으로 나는데도 이는 있는 것이 아님이 도리에 맞지 않으면, 만약 명언인 세속의 것만으로 있다고 말하면 명언인 세속은 일이 없는데도 있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라고 해야 한다. 또, 묻기를, ‘장로여, 어떤 일로 모든 얻게 되는 것은 이것이 제 성품이 없는가’라고 해야 하며, 이렇게 물은 뒤에 만약 그가 대답하기를, ‘뒤바뀜의 일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다시 말하기를, ‘그대의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이 뒤바뀜의 일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있다고 말하면, 온갖 법은 으뜸가는 이치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제 성품이 없다고 설명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없다고 말하면, 뒤바뀜의 일 때문에 모든 얻게 되는 것은 이는 제 성품이 없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라고 해야 한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대승경(大乘經)의 일으키는 인연의 말씀[起因緣說]2)을 생각하여 가리는 줄 알아야 한다. 말씀하는 이에게 공경심을 내기 위하여 첫째 번의 말씀[第一說]을 일으키며, 대중을 포섭하기 위하여 둘째 번의 말씀[第二說]을 일으키며, 바른 법에 존중심을 내기 위하여 세 번째의 말씀[第三說]을 일으키며, 일을 서술하기 위하여 넷째 번의 말씀[第四說]을 일으키며, 진실한 이치를 펴 말하려 함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다섯째 번의 말씀[第五說]을 일으킨다. 다시 다음에, 십이처(十二處)의 자기만의 모양[自相]과 공통의 모양[共相]을 살핌에 의하여 열 가지 뒤바뀜이 없는 도[無顚倒道]가 있어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不共佛法]을 증득한다. 이 안의 여섯 가지는 자기만의 모양을 살피고, 네 가지는 공통의 모양을 살피는 줄 알 것이다. ⑴십이처의 눈 따위의 명언인 가정으로 세운 모양 안에서 두루 명언의 모양일 뿐임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첫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⑵다음에, 십이처에서 두루 껴잡아 들이는 허망한 분별로 갖가지의 나는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둘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⑶다음에, 십이처에서 두루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셋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⑷다음에, 십이처에서 두루 모양의 무너지고 바꿔지는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넷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⑸다음에, 십이처에서 두루 맑고 깨끗하게 구르는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다섯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이 안에는 두 가지 업(業)에 의하여 두 가지의 맑고 깨끗함이 있나니, 첫째는 내어 일으킴[生起]이 맑고 깨끗하며, 둘째는 고요히 사라짐[寂滅]이 맑고 깨끗하다. ⑹다음에, 십이처에서 두루 온갖 명언의 발붙일 곳의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여섯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는 자기만의 모양을 자세히 살핀다. ⑺다음에, 곧 이와 같은 십이처 안에서 두루 공을 한 모양의 제 성품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일곱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⑻다음에, 곧 이와 같은 십이처 안에서 두루 공통한 모양의 분별없음[無分別]의 행할 바의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여덟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⑼다음에, 곧 이와 같은 십이처 안에서 두루 공통한 모양의 벗어난 세간의 법[出世法]의 행할 바의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아홉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한다고 한다. ⑽다음에, 곧 이와 같은 십이처 안에서 두루 공통한 모양의 맑고 깨끗한 원인[淸淨因]의 모양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열째의 뒤바뀜이 없는 도로서 모든 특수한 부처님 법을 증득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공통한 모양을 자세히 살핀다. 다시 다음에, 여덟 가지의 아주 훌륭함[殊勝]으로 말미암아 모든 머무름의 자리[住地]에서 뒤로 갈수록 더욱 더 훌륭한 줄 알 것이다. 첫째는 의요(意樂)가 아주 훌륭하며, 둘째는 마음의 맑고 깨끗함[心淸淨]이 아주 훌륭하며, 셋째는 가엾이 여김[悲]이 아주 훌륭하며, 넷째는 바라밀다[波羅密多]가 아주 훌륭하며, 다섯째는 유정을 성숙시킴[成熟有情]이 아주 훌륭하며, 여섯째는 모든 부처님을 뵙고 나아가 받들어 섬기면서 공양함이 아주 훌륭하며, 일곱째는 나기[生]가 아주 훌륭하며, 여덟째는 신통력[神力]이 아주 훌륭한 것이다. 다시 다음에, 으뜸가는 진리[勝義諦]에는 다섯 가지 모양이 있나니, 첫째는 명언을 여읜 모양[離名言相]이요, 둘째는 둘이 없는 모양[無二相]이요, 셋째는 찾고 생각함의 행할 바를 뛰어난 모양[超過尋思所行相]이요, 넷째는 모든 법의 동일함과 상이한 성품을 뛰어난 모양[超過諸法一異性相]이요, 다섯째는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遍一切一味相]이다. 이 으뜸가는 진리에서 명언을 여읜 모양과 둘이 없는 모양의 것은 해심밀경(解深密經)3)의 안에서와 같다. 여리청문(如理請問) 보살이,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 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온갖 법이란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함이 있음[有爲]이요, 둘째는 함이 없음[無爲]이니라. 이 안에서, 함이 있음은 함이 있음이 아니고 함이 없음도 아니며, 함이 없음 역시 함이 없음이 아니고 함이 있음도 아니니라.” “가장 훌륭한 이여,어떻게 함이 있음은 함이 있음이 아니고 함이 없음도 아니며, 함이 없음 역시 함이 없음이 아니고 함이 있음도 아니라고 하십니까.” “선남자여, 함이 있음이라 함은, 이는 본사(本師)께서 가정으로 시설하신 글귀이니라. 만약 이것이 본사께서 가정으로 시설하신 글귀라 하면 바로 이것은 제 나름으로 헤아려서 모인 언사(言辭)로 말한 바며, 만약 이것이 제 나름으로 헤아려서 모인 언사로 말한 바라면 바로 이것은 마침내 갖가지 제 나름으로 헤아린 언사로 말한 바라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함이 있음이 아니니라. 선남자여, 함이 없음이라 함 역시 언사에 떨어진지라, 가령 함이 있음과 함이 없음을 여읜다 하여도 조금이나마 말한 바가 있다면 그 모양 역시 그러하니라. 그러나 일이 없으면서 말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니라. 무엇을 일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성인들은 거룩한 지혜[聖智]와 거룩한 소견[聖見]으로써 명언을 여의셨기 때문에 실제로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았으며, 곧 이와 같은 언설을 여읜 법의 성품에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실제로 평등하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름이라는 생각을 가정으로 세워서 그를 함이 있음이라 하셨느니라. 선남자여, 함이 없음이라 함 역시 이는 본사께서 가정으로 시설한 글귀이니라. 만약 이것이 본사께서 가정으로 시설하신 글귀라 하면 바로 이것은 제 나름으로 헤아려서 모인 언사로 말한 바며, 만약 이것이 제 나름으로 헤아려서 모인 언사로 말한 바라면 바로 이것은 마침내 갖가지 제 나름으로 헤아린 언사로 말한 바라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함이 없음이 아니니라. 선남자여, 함이 있음이라 함 역시 언사에 떨어진지라, 가령 함이 없음과 함이 없음을 여읜다 하여도 조금이나마 말한 바가 있다면 그 모양 역시 그러하니라. 그 무엇을 일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성인들은 거룩한 지혜와 거룩한 소견으로써 명언을 여의셨기 때문에 실재로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으셨으며, 곧 이와 가은 언설을 여읜 법의 성품에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실재로 평등하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름이라는 생각을 가정으로 세워서 그를 함이 없음이라 하셨느니라.” “가장 훌륭한 이여, 어찌하여 이 일에서 저 모든 성인들은 거룩한 지혜와 거룩한 소견으로써 명언을 여의셨기 때문에 실재로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으셨으며, 곧 이와 같은 언설을 여읜 법의 성품에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실재로 평등하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름이라는 생각을 가정으로 세워서 혹은 함이 있음이라 하시기도 하고, 혹은 함이 없음이라고도 하셨습니까.” “선남자여, 요술 잘한 스승이거나 혹은 그의 제자가 네거리에 서서 기와와 조약돌이며, 풀잎과 나무 따위를 쌓아 모아서는 갖가지의 요술, 이른바 코끼리의 몸ㆍ말의 몸ㆍ수레의 몸ㆍ걷는 이의 몸이거나 마니ㆍ진주ㆍ유리ㆍ나패ㆍ벽옥과 산호며, 갖가지의 재물과 곡식과 광 따위의 몸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으니라. 만약 모든 중생으로서 어리석고 무디고 나쁜 지혜의 종류인지라 깨달아 알지 못하면, 기와와 조약돌이며 풀잎과 나무 따위의 모든 요술로 한 일을 보고 듣고 한 뒤에 생각하기를, ‘여기 보이는 것은 참으로 코끼리 몸이며, 참으로 말의 몸이고 수레의 몸이고 걷는 이의 몸이며, 마니ㆍ진주ㆍ유리ㆍ나패ㆍ벽옥ㆍ산호요, 갖가지 재물과 곡식이며 광의 몸이로구나’라고 하고서, 그 보는 바대로 그 들은 바대로 굳게 집착하며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어 ‘이것만이 진실이어서 다른 것은 모두가 어리석고 허망이다’라고 하리니, 그는 뒷날에 다시 자세하게 살펴야 할지니라. 만약 어떤 중생으로서 어리석지도 않고 무디지도 않고 착한 지혜의 종류인지라 깨달아 환히 알면, 기와와 조약돌이며 풀잎과 나무 따위 위의 모든 요술로 한 일을 보고 듣고 한 뒤에 생각하기를, ‘여기 보이는 것은 실제의 코끼리 몸이 없으며, 실제의 말의 몸과 수레의 몸과 걷는 이의 몸이며 마니ㆍ진주ㆍ유리ㆍ나패ㆍ벽옥과 산호며 갖가지 재물과 곡식이며 광 따위의 몸이 없건마는, 그러나 환상(幻狀)으로 눈을 헷갈리게 하는 일이 있는지라, 그 안에서 큰 코끼리 몸이라는 생각과 혹은 큰 코끼리 몸이라는 차별된 생각을 일으키며, 내지 재물과 곡식이며 광 따위라는 생각과 혹은 그 갖가지의 차별된 생각을 일으키는구나’라고 하고서, 그 보는 바대로가 아니고 그 들은 바대로가 아니게 굳게 집착하며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어 ‘이것만이 진실 이어서 다른 것은 모두가 어리석고 허망이다’라고 하리라. 이와 같은 이치를 나타내어 알게 하기 위하여 역시 이 안에서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나니, 그는 뒷날에 자세히 살필 필요가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만약 어떤 중생으로서 이는 어리석은 무리요 이는 범부의 무리인지라, 아직 모든 성인의 벗어난 세간의 지혜[出世間慧]를 얻지 못했고 온갖 법의 말을 여읜 법의 성품을 분명하게 모르면, 그는 온갖 함이 있음과 함이 없음을 듣고 보고 한 뒤에 생각하기를, ‘여기 얻은 바의 것은, 결정코 진실로 함이 있음과 함이 없음이 있구나’라고 하고서, 그 보는 바대로 그 들은 바대로 굳게 집착하며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어 ‘이것만이 진실이어서 다른 것은 모두가 어리석고 허망이다’라고 하리니, 그는 뒷날에 다시 자세하게 살펴야 할지니라. 만약 어떤 중생으로서 어리석은 무리가 아닌지라 이미 거룩한 진리[聖諦]를 보았고 이미 모든 성인의 벗어난 세간의 지혜를 얻어서 온갖 법의 말을 여읜 법의 성품을 사실대로 환히 알면, 그는 온갖 함이 있음과 함이 없음을 보고 듣고 한 뒤에 생각하기를, ‘여기 얻은 바의 것은, 결정코 실제의 함이 있음과 함이 없음이 없건마는, 그러나 분별로 일으키는 행상(行相)이 있어서 마치 요술이 깨닮의 슬기[覺慧]를 헷갈리게 함과 같는지라, 그 안에서 일으키어 함이 없음의 생각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함이 없음의 차별된 생각이 되기도 하는구나’라고 하고서, 보는 바대로가 아니고 들은 바대로가 아니게 굳게 집착하며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어 ‘이것만이 진실이어서 다른 것은 모두가 어리석고 허망이다’라고 하리라. 이와 같은 이치를 나타내어 알게 하기 위하여 역시 이 안에서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키나니, 그는 뒷날에 자세히 살필 필요가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선남자여, 저 모든 성인들은 이 일 안에서 거룩한 지혜와 거룩한 소견으로써 명언을 여의셨기 때문에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이 나타났고, 곧 이와 같은 언설을 여읜 법이 성품에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평등한 깨달음이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이름이라는 생각을 가정으로 세워서 그것을 함이 있음이라 하고 그것을 함이 없음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해심심의밀의 보살은 거듭 이 뜻을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부처님은 언설 여읨[離言]과 둘이 없음[無二]의 이 치를 말씀하셨지마는 매우 깊어서 어리석은 이의 행할 바가 아니다. 어리석은 이는 여기서 어리석음에 미혹되어 둘에 즐겨 집착하며 말에 의하여 희론(戱論)하네.
그는 혹은 부정취(不定聚)며 혹은 사정취[邪定聚]인지라 극히 오래 나고 죽는 괴로움에 헤매는데 다시 이런 바른 지혜의 이론[正智論]을 어기면 장차는 소와 양들은 무리 안에 나리라.
다시 다음에, 으뜸가는 진리는 찾고 생각함의 행할 바 모양[尋思所行相]을 뛰어나나니, 해심밀경의 안에서와 같다. 법용(法涌) 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로부터 동쪽으로 72 항하 모래[殑伽河沙] 만큼의 세계를 지나서 세계가 있는데 이름은 구대명칭(具大名稱)이오며, 그 안의 여러 명호는 광대명칭(廣大名稱)이옵니다. 저는 지난 날에 그 부처님국토에서 여기에 왔나이다. 제가 그 부처님 국토에서 일찍이 보건대, 어느 곳에 7만 7천의 외도와 그의 스승들이 있었는데, 같이 한 모임의 자리에서 모든 법의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을 생각하기 위하여 그들은 함께 의논하고 헤아리고 관찰하면서 두루 추구(推求)하는 때에, 온갖 법의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을 마침내 얻을 수 없었고 다만 갖가지의 의해(意解)와 서로 틀린 의해와 달라지는 의해를 제거했을 뿐인데, 서로가 어기어 함께 다투면서 입에 창을 곤두세워 서로가 찌르고 찍고 괴롭히고 무너뜨리고 한 뒤에 각기 흩어졌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에 몰래 생각하기를, ‘여래가 세상에 나오심은 매우 기묘하고 희유하나니, 세상에 나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와 같은 온갖 찾고 생각함의 행할 바를 뛰어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에 대하여, 역시 통달하고 증득함이 있으셨으리라’고 하였나이다.” 이 말을 하여 마치자, 그 때에 세존은 법용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렇고 그러하며 그대의 말한 바와 같으니라. 나는 온갖 찾고 생각함을 뛰어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을 실제로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았고, 실제로 평등하게 깨달은 뒤에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널리 펴 말하고 나타내고 열어 풀이하고 시설하고 비추어 마쳤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말하는 으뜸가는 이치는 바로 모든 성인들이 안에서 스스로가 증득할 바지마는 찾고 생각함의 행할 바는 바로 모든 범부들이 차츰차츰 증득할 바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이치는 온갖 찾고 생각하는 경계 모양[尋思境相]을 뛰어난 줄 알지니라. 법용이여, 내가 말한 으뜸가는 이치는 모양 없음[無相]의 행할 바지마는, 찾고 생각함은 모양 있는 경계에서만이 행하여지느니라.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이치는 온갖 찾고 생각하는 경계 모양을 뛰어난 줄 알지니라. 법용이여, 내가 말한 으뜸가는 이치는 말로 할 수 없지마는, 찾고 생각함은 언설의 경계에서만이 행하여지느니라.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이치는 온갖 차고 생각하는 경계 모양을 뛰어난 줄 알지니라. 법용이여, 내가 말한 으뜸가는 이치는 모든 다툼[諍論]이 끊어졌지마는, 찾고 생각함은 다툼의 경계에만이 행하여지느니라.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이치는 찾고 생각하는 경계 모양을 뛰어난 줄 알지니라. 법용이여, 그러므로 알아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그의 수명이 다하도록 맵고 쓴맛만을 익히면 꿀이거나 사탕[石蜜]의 훌륭한 맛은 찾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견주어 헤아릴 수도 없으며,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혹은 오랜 세월 동안에 탐욕의 뛰어난 알음[勝解]으로 말미암아 모든 욕심의 성한 불에 타게 되기 때문에 안의 온갖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의 모양을 없애버리는 미묘한 멀리 여읨의 낙[妙遠離樂]은 찾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견주어 헤아릴 수도 없으며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느니라. 혹은 오랜 세월 동안에 언설의 뛰어난 알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비단말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에, 안의 고요하고 거룩하고 잠잠한 낙은 찾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견주어 헤아릴 수도 없으며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혹은 오랜 세월 동안에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표시(表示)의 뛰어난 알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표시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에, 영원히 오갖 표시를 끊어 없애는 사트카아야 소멸[薩迦耶滅]의 마지막 열반[究竟涅槃]은 찾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견주어 헤아릴 수도 없으며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법용이여, 그러므로 알아라. 마치 어떤 사람이 그 오랜 세월 동안에 갖가지의 내 것[我所]과 껴잡아 들임[攝受]과 이론을 다투는[諍論] 뛰어난 알음으로 말미암아서 세간의 모든 이론을 다투는 것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에 웃타라쿠루[北拘盧洲]의 내것이 없음과 껴잡아 들임이 없음과 다툼을 여의는 것은 찾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견주어 헤아릴 수도 없으며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법용이여, 모든 찾고 생각하는 이들은, 온갖 찾고 생각함의 행할 바를 뛰어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은 찾으며 생각할 수도 없고 견주어 헤아릴 수도 없으며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느니라.” 그 때에 세존은 거듭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안에서 증득함[內證]과 모양 없음의 행할 바와 말로 할 수 없음과 표시가 끊어지며 모든 다툼을 쉬는 으뜸가는 진리는 온갖 찾고 생각함의 모양을 뛰어나네.
다시 다음에, 으뜸가는 진리는 모든 법의 동일함과 상이함의 성품 모양[一異性相]을 뛰어나나니, 해심밀경의 안에서와 같다. 선청정혜(善淸淨慧)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은 심히 희기하시고 세존은 잘 말씀하옵니다. 세존의 말씀과 같이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은 미세하고 매우 깊어서 모든 법의 동일함과 상이함의 성품 모양을 뛰어난지라 통달하기 어렵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곧 이것에 대하여 일찍이 보건대, 어느 곳에 여러 보살들이 있었는데 똑 같이 바르게 승해행지(勝解行地)를 수행하다가 같이 한 모임의 자리에서 모두가 함께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行)의 모양과의 동일함과 상이함의 성품 모양을 논의하고 있었나이다. 이 모임 안에서, 어느 분들의 보살은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은 도무지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사오며, 또 어느 분들의 보살은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이 아닌 것과 모든 행의 모양은, 도무지 다름이 없지마는, 그러나 으뜸가는 진리 모양은 모든 행의 모양과는 다르다’라고 하였나이다. 그 나머지 보살들은 의심하며 망설이면서 말하기를, ‘이 모든 보살들의 누구의 말이 진실이며,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누가 이치대로의 행이며, 누가 이치대로가 아닌가’라고 하였사오며, 혹은 부르짖되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은 모든 행의 모양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을 보고서 몰래 생각하기를, ‘저 모든 선남자들은 어리석고 둔하고 밝지 않고 착하지 않아서 이치대로의 행을 않은지라, 으뜸가는 진리는 미세하고 심히 깊어서 모든 행의 동일함과 상이함의 성품 모양을 뛰어난 것인 줄 잘 모르고 있구나’라고 하였나이다.” 이런 말을 끝내자, 그 때 세존은 선청정혜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렇고 그러하며 그대의 말한 바와 같으니라. 그 모든 선 남자들은 어리석고 둔하고 밝지 않고 착하지 않아서 이치대로의 행을 않은지라, 으뜸가는 진리가 미세하고 심히 깊어서 모든 행의 동일함과 상이함의 성품 모양을 뛰어난 것인 줄 모르고 있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선청정혜여, 모든 행에서 이렇게 행하는 때에는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을 통달하였다고 하거나 혹은 으뜸가는 이치에서 증득하게 되었다고는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선청정혜여, 만약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과는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면 지금에 온갖 범부들은 모두가 이미 진리를 보았어야 하며, 또 모든 범부들은 모두가 이미 위없는 방편의 안온한 열반을 얻었어야 했고 혹은 이미 아뇩다라삼먁삼 보리를 증득했어야 하리라. 만약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말하면, 이미 진리를 본 이는 모든 행의 모양을 제거시키지 않았어야 하며, 만약 모든 행의 모양을 제거시키지 않았다면 상박(相縛)에서 해탈할 수 없어야 하나니, 여기 진리를 본 이는 모든 상박에서 해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중박(麤重縛)에서도 또한 해탈하지 않았어야 하며,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진리를 본 이는 위없는 방편의 안온한 열반을 얻을 수 없어야 하고,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았어야 하느니라. 선청정혜여, 지금에 모든 범부는 모두가 이미 진리를 본 것이 아닌지라, 모든 범부들은 이미 위없는 방편의 안온한 열반을 획득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증득하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과는 도무지 다른 모양이 없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느니라. 만약 이 안에서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과는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면,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온갖 것은 이치대로의 행이 아니고 바른 도리대로 함이 아닌 줄 알지니라. 선청정혜여, 지금에 진리를 보지 못한 이는 모든 행의 모양을 없애서 버리지는 못했지마는 그러나 없애서 버릴 수는 있으며, 진리를 보지 못한 이는 모든 상박에서 해탈하지는 못했지마는 그러나 해탈할 수는 있고 진리를 보지 못한 이는 추중박에서 해탈할 수는 없지마는 그러나 해탈할 수는 있으며, 두 가지 장애에서 해탈할 수 있기 때문에 위없는 방편의 안온한 열반을 획득할 수도 있고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한결같이 다른 모양이라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느니라. 만약 이 안에서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하면,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온갖 것은 이치대로의 행이 아니고 바른 도리대로 함이 아닌 줄 알지니라. 선청정혜여, 만약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과는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면, 모든 행의 모양의 섞여 물든 모양[雜染相]에 떨어지는 것처럼, 이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 역시 이와 같이 섞여 물드는 모양에 떨어져야 하느니라. 선청정혜여, 만약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한결같이 다르다고 하면, 온갖 행의 모양의 공통한 모양을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이라고 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선청정혜여, 지금에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은 섞여 물든 모양에 떨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행의 공통한 모양을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이라 함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도무지 다른 모양이 없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으뜸가는 이치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한결같이 다른 모양이라 함도 도리에 맞지 않느니라. 만약 이 안에서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은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한결같이 다르다’고 하면,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서 온갖 것은 이치대로의 행이 아니고 바른 도리대로 함이 아닌 줄 알지니라. 선청정혜여, 만약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면,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은 모든 행의 모양에서 차별이 없는 것처럼, 온갖 행의 모양 역시 이와 같이 차별이 없어야 하느니라.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모든 행 안에서 그의 보는 바대로요 그의 들은 바대로요 그의 깨달은 바대로요 그의 아는 바대로다. 뒷날에 다시는 으뜸가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만약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한결같이 다르다고 하면, 모든 행으로서, 나가 없는 성품[無我性]과 제 성품이 없음[無自性]이 나타나게 된 것만으로는 바로 으뜸가는 이치의 모양이 아니어야 하며, 또 같은 대에 따로따로의 모양이 성립되어야 하나니, 이른바 섞여 물든 모양과 맑고 깨끗한 모양[淸淨相]이니라. 선청정혜여, 지금에 온갖 모양에는 모두가 차별이 있어서 차별이 없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관행을 닦는 이는 모든 행 안에서 그의 보는 바대로요 그의 들은 바대로요 그의 깨달은 바대로요 그의 아든 바대로라, 다시 뒷날에 으뜸가는 이치를 구하게 되며, 또 모든 행의 나가 없는 성품과 제 성품이 없음이 나타나게 된 것만을 으뜸가는 진리 모양이라 하며, 또 같은 때에 물듦과 깨끗함[染淨]의 두 모양이 따로따로의 모양으로 성립됨이 아니니, 그러므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이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느니라. 만약 이 안에서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은 도무지 다름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하면,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서 온갖 것은 이치대로의 행이 아니고 바른 도리대로 함이 아닌 줄 알지니라. 선청정혜여, 마치 나패(螺貝) 위의 산뜻한 빛깔의 성질과 그 나패가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마치, 나패 위의 사뜻한 빛깔의 성질에서와 같아서, 금 위의 황색도 그와 같느니라. 마치, 공후(箜篌) 소리 위의 아름다운 곡조의 성질과 공후의 소리가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고, 흑침(黑枕) 위의 미묘한 향기가 있는 성질과 그 흑침이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고, 호초(胡椒) 위의 아주 매운 성질과 그 호초가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마치, 호초 위의 아주 매운 성질에서와 같이 하리타키이[訶梨]의 싱거운 성질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마치, 투울라솜[蠹羅綿] 위의 보드라운 성질과 그 투울라솜이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고, 익은 소(酥) 위에 있는 바 제호(醍醐)와 그 익은 소가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고, 또 온갖 행위의 무상한 성품과 온갖 샘이 있는 법[有漏法] 위의 괴로운 성품과 온갖 법 위의 푸드갈라 나 없는 성품[補特伽羅無我性]과 그의 행들이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며, 또 탐냄 위의 고요하지 않은 모양 및 섞여 물든 모양인 이것과 그 탐냄이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나니, 탐냄 위에서와 같이, 성냄과 어리석음의 위에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선청정혜여.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과 모든 행의 모양은 동일한 모양이며 상이한 모양임을 시설할 수 없느니라. 선청정혜여, 나는 이와 같은 미세하고 극히 미세하며 심히 깊고 극히 심히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극히 통달하기 어려운 모든 법의 동일함과 상이함의 성품 모양을 뛰어난 으뜸가는 진리 모양에서 실재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았으며, 실재로 평등하게 깨달은 뒤에는 다른 이를 위하여 널리 펴 말하고 나타내 보이고 깨우쳐 알리고 시설하고 비추어 마쳤느니라.” 그 때에 세존은 거듭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행(行) 경계의 으뜸가는 이치의 모양은 동일함과 상의함의 성품 모양 떠났나니, 만약 동일함과 상이함을 분별하면 그것은 이치대로의 행이 아니니라.
중생은 모양[相]에게 속박이 되고 추중(麤重)에게 속박이 되었으므로 종요로이 지관(止觀)을 부지런히 닦으리라. 그래야 해탈을 얻게 되느니라.
다시 다음에, 으뜸가는 진리는 온갖 것에 두루한 맛의 모양[遍一切一味相]이니, 해심밀경의 안에서와 같다. 세존은 장로 선현(善現)에게 말씀하셨다. “선현아, 너는 유정 세계 안에서 얼마의 유정들이 뛰어난 체함[增上慢]을 품었고 뛰어난 체함에 잡혔기 때문에, 안 바[所解]를 기별(記別)한 줄 아느냐. 너는 유정 세계 안에서 얼마의 유정들이 뛰어난 체함을 여의고, 안 바를 기별한 줄 아느냐.” 장로 선현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정 세계 안의 적은 부분의 유정이 뛰어난 체함을 여의고서 안 바를 기별한 줄 아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정 세계 안의 한량없고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유정들이 뛰어난 체함을 품었고 뛰어난 체함에 잡혔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한 줄 아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느 때에 아련야(阿練若)의 큰 나무 숲 안에 머물렀더니, 때에 여러 비구들도 이 숲에서 저를 가까이 의지하며 머물렀나이다. 저는 그 비구들을 보았는데, 저녁 무렵에 차츰차츰 모이더니 얻은 바 있는 현관(現觀)에 의하여 저마다 여러 가지의 모양의 법[相法]을 말하면서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그 안에서 어느 한 무리는 쌓임[蘊]을 얻었기 때문에 쌓임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쌓임의 일어남[起]을 얻었기 때문에 쌓임의 다함[盡]을 얻었기 때문에 쌓임의 사라짐[滅]을 얻었기 때문에 쌓임의 사라짐의 증득함[蘊滅作證]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마치, 이 한 무리의 쌓임을 얻어서와 같이,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처(處)를 얻었기 때문에,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연기(緣起)를 얻었기 때문에 역시 그러하였나이다.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식(食)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일어남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사라짐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사라짐의 증득함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식(食)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일어남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사라짐을 얻었기 때문에 식의 사라짐의 증득함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진리[諦]를 얻었기 때문에 진리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진리의 두루 앎[遍知]을 얻었기 때문에 진리의 영원히 끊음[永斷]을 얻었기 때문에 진리의 증득함을 얻었기 때문에 진리의 닦아 익힘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다시 어느 한 무리는, 계(界)를 얻었기 때문에 계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계의 갖가지의 성품을 얻었기 때문에 계의 하나가 아닌 성품을 얻었기 때문에 계의 사라짐을 얻었기 때문에 계의 사라짐의 증득함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염주(念住)를 얻었기 때문에 염주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염주의 능히 다스림[能治]과 다스릴 바[所治]를 얻었기 때문에 염주의 닦음[修]을 얻었기 때문에 염주가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을 얻은 까닭에, 염주가 생기고 나서는 굳게 머물러 잊지 않고 갑절 닦아서 더욱 넓어짐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어느 한 무리는 마치 염주를 얻어서와 같이,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정단(正斷)을 얻었기 때문에, 신족(神足)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근(根)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힘[力]을 얻었기 때문에 깨달음 갈래[覺支]를 얻었기 때문에, 역시 그러하였나이다. 다시 어느 한 무리는, 여덟 갈래의 거룩한 도[八支聖道]를 얻었기 때문에 여덟 갈래의 거룩한 도의 모양을 얻었기 때문에 여덟 갈래 거룩한 도의 능히 다스림과 다스릴 바를 얻었기 때문에 여덟 갈래 거룩한 도의 닦음을 얻었기 때문에 여덟 갈래 거룩한 도의 아직 나지 않은 것을 나게 함을 얻었기 때문에 여덟 가지 거룩한 도가 생겨난 뒤에는 굳게 머물러 있지 않고 갑절 닦아서 더욱 넓어짐을 얻었기 때문에 안 바를 기별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을 보고서 몰래 생각하기를, ‘이 모든 장로는 얻은 바의 현관에 의하여 저마다 갖가지 모양의 법을 말하면서 안 바를 기별하거니와, 저 모든 장로들은 모두가 다 뛰어난 체함을 품었고 뛰어난 체함에 잡혔기 때문에, 으뜸가는 진리의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을 잘 모르고 있구나’라고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세존은 매우 희기하시고, 세존은 잘 말씀하였나이다. 세존의 말씀과 같아서 으뜸가는 진리의 모양은 미세하고 가장 미세하며 심히 깊고 가장 심히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거룩한 가르침 안에서 수행하는 비구조차도 으뜸가는 진리의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을 오히려 통달하기 어렵거든, 하물며 모든 외도들이겠나이까. 그 때에 세존은 장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선현아, 나는 미세하고 가장 미세하며 심히 깊고 가장 심히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인 으뜸가는 진리를 실제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았으며, 실제로 평등하게 깨달은 뒤에는 다른 이를 위하여 널리 펴 말하고 나타내 보이고 깨우쳐 알리고 시설하고 비추어 마쳤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선현아, 나는 이미 온갖 쌓임 안에서 맑고 깨끗한 반연할 바는 바로 으뜸가는 진리임을 나타내 보였으며, 나는 이미 온갖 처와 연기ㆍ식ㆍ진리ㆍ계ㆍ염주ㆍ정단ㆍ신족ㆍ근ㆍ힘 및 깨달음 갈래와 도의 갈래 안에서 맑고 깨끗한 반연할 바는 바로 으뜸가는 진리임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니라. 이 맑고 깨끗한 반연할 바는 온갖 쌓임 안에서 이는 한 맛의 모양인지라 따로 된 다른 모양이 없으며, 쌓임 안에서 그러한 것처럼, 온갖 처의 안에서부터 온갖 도의 갈래 안까지도 이는 한 맛의 모양인지라 따로 된 다른 모양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선현아,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진리는 바로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선현아, 관행을 닦는 비구는 한 쌓임의 진여(眞如)와 으뜸가는 이치의 법[勝義法]과 나 없는 성품[無我性]을 통달하고 나면 다시는 따로따로의 그와 다른 쌓임이거나 모든 처며 연기ㆍ식ㆍ진리ㆍ계ㆍ염주ㆍ정단ㆍ신족ㆍ근ㆍ힘 및 깨달음 갈래와 도의 갈래의 진여와 으뜸가는 이치의 법과 나 없는 성품을 찾거나 구하지 않으며, 곧 이 진여와 으뜸가는 이치에 따라 둘이 없는 지혜[無二智]를 의지로 삼아서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인 으뜸가는 이치를 자세히 살피며 나아가 증득할 따름이니라. 그러므로 선현아,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진리는 바로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선현아, 마치 저 모든 쌓임이 차츰차츰 다른 모양인 것처럼, 마치 저 모든 처와 연기ㆍ식ㆍ진리ㆍ계ㆍ염주ㆍ정단ㆍ신족ㆍ근ㆍ힘 및 깨달음 갈래와 도의 갈래가 차츰차츰 다른 모양인 것처럼, 만약 온갖 법의 진여와 으뜸가는 이치의 법과 나 없는 성품도 역시 다른 모양이라 하면, 이는 곧 진여와 으뜸가는 이치의 법과 나 없는 성품 역시 원인이 있어서 원인으로부터 나는 바라 하여야 되며, 만약 원인으로부터 난다고 하면 이는 함이 있음[有爲]이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함이 있음이라면 으뜸가는 이치가 아니어야 하며, 만약 으뜸가는 이치가 아니라 하면 다시는 이와 다른 으뜸가는 진리를 찾거나 구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선현아, 이로 말미암아서 진여와 으뜸가는 이치의 법과, 나 없음의 성품은 원인이 있다고 하지 않으며 원인으로 나는 바가 아닐뿐더러 함이 있음이 또한 아니니, 이것이 으뜸가는 진리이니라. 이 으뜸가는 진리를 얻어서 다시는 그와 다른 으뜸가는 진리를 찾거나 구하지 않아도 언제 어느 때나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셨거나 나오시지 않았거나 간에 모든 법의 법 성품은 벌려져 있고 법계(法界)는 편안히 머무를 뿐이니라. 그러므로 선현아.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으뜸가는 진리는 바로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선현아, 이를테면 갖가지 하나만이 아닌 품류들의 다른 모양인 빛깔 안의 허공은 모양이 없고 분별이 없고 달라짐이 없어서 온갖 것에 두루 한 맛의 모양인 것처럼, 이와 같이 다른 성품과 다른 모양의 온갖 법안에서 으뜸가는 진리의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은 거듭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온갖 것에 두루한 한 맛의 모양인 으뜸가는 이치를 부처님들께서는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시었는데, 만약 이 안에서 다르다고 분별하면 그는 결정코 어리석어서 뛰어난 체함에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