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라고 함과 자재(自在) 따위라 함과 원인 없는 몸이라 함과 머무름이라 함이며 유전(流轉)함이라 함과 온갖 업의 지음이라 함과 두 가지 증상(增上)하는 몸이라고 함이네.
016_0100_a_12L“身者自在等, 無因身者住, 流轉作諸業,
及增上二種。”
016_0100_b_01L 논하건대, 온갖 쌓임[蘊]에서 선교(善巧=잘 알아 능람 함)치 못하기 때문에 온갖 쌓임 자체를 고집하여 자기 몸이라고 여기며, 온갖 계[界]에서 선교치 못하기 때문에 자재천(自在天) 따위가 몸을 내는 원인이 된다고 고집하며 혹은 원인이 없고 몸이 저절로 생겼다고 고집하나니 자기 종류의 원인으로부터 몸이 생기게 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계(界)라는 것은 공능(功能), 종자ㆍ족성(族姓)ㆍ원인 따위로 명칭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온갖 처(處)에서 선교 못하기 때문에 몸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가 몸에 의해 머물러서 바깥 대상을 취한다고 고집하며, 연기(緣起)에서 선교 못하기 때문에 몸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고 죽음에 유전(流轉)한다고 고집하며 처비처(處非處)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라는 것이 있어서 온갖 업(業)을 능히 짓는다고 고집한다. 모든 근(根)과 모든 체(諦)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 가지 증상(增上)하는 몸이 있다고 고집하나니, 좋아할 만한 업과(業果)과 좋아할만한 것이 아닌 업과가 증상함과 염오(染汚)ㆍ청정(淸淨)이 증상하는 것을 말하는데 괴로움과 쌓임[集]의 두 진리[諦]를 잘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염오의 증상함이 있다고 여기며, 사라짐[滅]과 도(道)의 두 진리를 잘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청정의 증상함이 있다고 여긴다.
내 몸이라고 잘못 여기는 이는 모든 감관에 의지한다고 하여 대상에서 이리 저리 회전하면서 사랑과 사랑 아님을 누린다고 하네.
016_0100_b_12L“妄計我身者, 依止諸根住, 於境界迴轉,
受用愛非愛。
말이 그것에 의지한 것이라고 하고 만든 것과, 감각하는 것이 있다 하며, 차별인 쌓임[蘊]으로 말미암아서 하나의 몸이라고 모두 보네.
016_0100_b_14L言說所依住, 作者有覺者,
由於差別蘊, 摠見一身者。”
016_0100_c_01L 논하건대, 몸이라는 것에서 어리석은 이는 물질의 쌓임[色蘊]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하나의 ⧼나⧽가 있어서 다섯 감관[五根]에 의지하여 대상에서 회전한다고 여기며, 느낌의 쌓임[受蘊]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누리는 이가 있어서 온갖 사랑과 사랑 아닌 사실들을 수용한다고 여기며, 생각의 쌓임[想蘊]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나⧽가 있어서 말[言說]에 의지한다고 별달리 계교하나니, 생각이 바로 말의 의지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바가범께서 그 생각함과 같이 말을 내게 된다고 말씀하심과 같다. 지어감의 쌓임[行蘊]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만든 이가 있다고 여기며, 인식의 쌓임[識薀] 자체를 알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감각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나니, 인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서 인식의 쌓임 자체에 대해서 감각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온갖 차별의 쌓임[蘊]의 제 모양에 대해서 하나의 몸이라고 모두 여김과 어리석어서 곧 몸이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것을 가려 ⧼나⧽라고 여긴다. 다시 다음(자재권 따위)에서 생겼다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논하건대,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혹 처음 생긴 몸의 원인에 대해서 미혹을 내기 때문에 평등 아닌 원인으로 고집하나니 말하자면, 항상 머무는 자재천(自在天) 비슬로천(毘瑟弩天), 자성(自性) 따위의 원인이 있다고 하여, 혹은 원인이 없다고 말하나니 온갖 능히 내는 원인 자체가 없다고 부정함을 말한다. 다시 다음, 참 ⧼나⧽가 주지(住持)한다고 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논하건대, ⧼나⧽가 모든 감관을 주지(住持)하여 능히 촉감을 내어 고수(苦受)인 촉감을 따르며, 낙수(樂受)인 촉감을 따르고, 낙수(樂受)인 촉감을 따르며, 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아 들이어 느낀다고 계교한다.
016_0100_c_11L論曰:計我住持諸根,能觸順苦受觸、順樂受觸,及能領受若樂若苦。
다시 유전함ㆍ짓는 것ㆍ증상(增上)함의 뜻과 염오와 청정에 대한 어리석음이란, 각각 따로 몸을 주지(住持)하는 ⧼나⧽가 있다고 계교함을 말함이다.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00_c_13L復次流轉作者,增上義及染污淸淨愚者,謂計有各別住持身者我已,頌曰:
이 죽고 태어나는 곳에서부터 유전(流轉)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며 법과 법 아님을 짓는 것과 그리고 저 결과가 증상함이라 하며,
016_0100_c_16L“從此死生處, 計有流轉者, 法非法作者,
及彼果增上。
삿된 행(行)을 닦고 익히는 그것을 염오(染汚)가 된다고 잘못 계교하며 바른 행(行)을 닦고 익히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잘못 계교하네.
016_0100_c_18L於修習邪行, 計爲染污者;
於修習正行, 妾計解脫者。”
016_0101_a_01L 논하건대, 저 어리석은 이들은, 저 죽고 태어나는 곳에서 「⧼참 나⧽가 있다고 계교하여 나고 죽음에 유전하는 것이 곧 이 ⧼참 나⧽라고 하며, 후세의 법과 법 아닌 것을 짓는 원인이 곧 이 ⧼참 나⧽가 된다고 하며, 저 결과에 대해서 자재롭게 수용(受用)하기 때문에 저 결과의 법의 생김이 곧 이 ⧼참 나⧽라고 하며, 결과인 법에 의하여 삿된 행(行)을 익히고 행함을 염오가 된다고 계교하며, 바른 행을 닦고 행함을 해탈이 된다고 계교한다. 」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삼세(三世)따위의 다름을 알므로 하나로 합했다는 생각 능히 없앤다. 즉(卽)함과 떠남과 해탈함에서도 중생이라는 것 얻을 수 없네.
016_0101_a_08L“知世等別故, 能除一合想, 卽離與解脫,
衆生不可得。
많은 종류와 그리고 총략(總略)과 함께 차별로 일어남 있음이며 증가하여 더 함과 줄이는 지혜를 쌓임(蘊)에 대한 선교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01_a_10L多種及摠略, 共有差別轉,
增益損減智, 蘊善巧應知。”
논하건대, 세(世) 따위의 차별이란, 온갖 쌓임의 과거ㆍ미래 등의 체성(體性)의 차별을 말함이다. 바가범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나니 「온갖 물질(色)에 과거ㆍ미래ㆍ현재ㆍ내(內)ㆍ외(外)ㆍ거치름ㆍ미세함ㆍ저열함ㆍ수승함ㆍ멀고ㆍ가까움 따위 」라고 내지 광범하게 말씀하셨다. 수승한 지혜로 말미암아 실다히 알기 때문에 온갖 쌓임[行]중에서 하나로 합했다는 생각을 버리나니 그것이 곧 「도로 사라짐 」이다. 또, 온갖 쌓임[蘊]중에서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체성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온갖 쌓임에 즉(卽)해서도 중생을 얻을 수 없고 온갖 쌓임을 떠나서도 중생을 또한 얻을 수 없고 온갖 쌓임을 해탈해서도 중생을 또한 얻을 수 없다. 마치 바가범께서 서이가(西爾迦)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물질의 쌓임(色蘊)에서 여래(如來)를 보는가, 나아가서는 인식의 쌓임(識伽)에서 여래를 보는가. 」서이가는 대답하기를, 「아니옵니다. 교답마(喬答摩)시여, 」라고 그와 같이 광범하게 말한 것과 같다.
016_0101_b_01L저 경에서는, 「물질의 쌓임의 총(總)이건, 별(別)이건 간에 보특가라를 모두 얻을 수 없다 」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다만 생략하고 「모두 다섯 쌓임[五蘊]에서 바로 얻을 수 없다 」고만 말했다. 그와 같이 이미 말했으니 물질 따위의 모양 차별을 분명하게 알며 그리고 능히 저 다스릴 바 「증가하여 더하는 집착 」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온갖 쌓임[蘊]중에 저 모양과 공통된 모양이 모두 선교를 얻게 된다. 다시 또, 쌓임[蘊]이란, 바로 쌍아 모임의 뜻이니 바로 쌓아 모임의 뜻을 능히 잘 아는 것을 쌓임[蘊]의 선교라 이름한다. 그 쌓아 모임 뜻에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많은 종류의 뜻, 총략(總略)의 뜻, 함께 일어남이 있는 뜻, 증가하여 더함과 줄임의 뜻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모든 쌓임 자체와 장애가 끊어지는 수승한 이익이 바로 쌓임의 선교라고 이름함을 밝힌 것이다. 어떤 것이 계(界)에 대한 선교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삼인(三因)이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에 계(界)의 선교라고 말하나니 끝없이 제 종류[自種]에서부터 많이 생기며 또 가지 가지로 생긴다.
016_0101_b_10L“見三因生故, 說名界善巧, 從無始自種,
多種種生起。
그로 말미암아 그에 이르도록 취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제 지혜에 의해 이루기 때문에 하열성(下劣性)을 능히 제거하네.
016_0101_b_12L由此及於此, 取者不可得,
依自智成故, 能除下劣性。”
논하건대, 감관[根]ㆍ대상[境]ㆍ인식[識]의 세 법이 제 인[自因]으로부터 생기므로 계(界)에 대한 선교(善巧)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 모든 법으로 말미암아 끝없이 유전(流轉)함이 제 종류로부터 생기는데 많이 생기고 또 가지가지로 생긴다. 많이 생김이란, 경에서 「하나의 계(界)가 아니기 때문이라 」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가지가지로 생김이란, 경에서 「가지가지 계(界)이기 때문이라 」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다음, 모든 감관에 의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대상에서 능히 취하는 ⧼나⧽도 얻을 수 없나니 그러므로 지어진 것이 제 원인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요, 대자재천(大自在天) 따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능히 안다. 그러므로 무릇 하는 일에서 하열하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자재롭게 닦고 익힐 것이다. 이 중에서 계(界)에 대한 선교 자체와 저 장애가 끊어지는 수승한 이익이 바로 선교라고 이름함을 밝히었다. 어떤 것이 처(處)에 대한 선교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01_c_01L 모든 촉감[觸]과 모든 느낌[受]이 두 가지 생문(生門)으로 말미암아 촉감에 의지하기 때문에
처(處)에 대한 선교라고 알으리.
016_0101_b_23L“知諸觸諸受, 由二種生門, 依止於觸故,
當知處善巧。
법의 장소, 하늘의 장소와 같아서 다음의 것이 의지하는 바이며 세속 진리로 말미암기 때문에 두 가지 [觸ㆍ受] 체성임을 아네.
016_0101_c_02L如法處天處, 後後所依止,
由世俗諦故, 了知二種性。”
논하건대, 촉감의 생문(生門)인 자체를 잘 알므로 말미암아 두 처(處)를 내 세우나니 감관(根)과 대상[境]을 말한다. 그와 같이 능히 내는 뜻으로 말미암아 처(處) 라고 이름하나니 마치 세상에서 착한 법을 닦는 장소이면 법의 장소라고 이름함과 같다. 또는, 모든 느낌이 촉감에 의지함을 잘 알기 때문에 촉감이 저 처(處)가 된다고 세운다. 그와 같이 거주하는 뜻이 되므로 처(處)가 된다고 이름한 것이니 마치 세상에 하늘의 형상이 있는 곳을 하늘의 장송라고 이름함과 같다. 또 다시 촉감과 느낌 두 법이 생길 때에는 세속 법에 의하기 때문에 두 체성을 아나니 촉감 그것과 느낌 그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촉감은 능히 닿이어 상대하고 느낌은 능히 받아 들이므로 말미암는다. 그 중에서 승의(勝義)진리로 본다면 촉감 그것과 느낌 그것을 모두 얻을 수가 없는데, 세속(世俗)진리로 본다면 둘은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그를 처(處)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연기(緣起)에 대한 선교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무상한 원인을 끊지 못해서 모든 결과를 능히 내는 것과 계속함과 비슷함 때문임을 알므로 연기(緣起)에 대한 선교라고 말하네.
016_0101_c_14L“知未斷無常, 因能生諸果, 自相續相似,
名緣起善巧。
중생에게 얻을 수 없음은, 버림과 계속함이 있는 것 분명히 잘 알았기 때문이네. 매우 깊은 네 가지 연기를
016_0101_c_16L衆生不可得, 而有捨續者,
由了達甚深, 四種緣起故。”
016_0102_a_01L 논하건대, 무상(無常)의 원인을 영원히 끊지 못함에서 능히 모든 결과를 내게 됨을 잘 알므로 연기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하나니 말하자면 경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 순서대로 또, 능히 그 원인으로부터 제 계속[自相續]에서 모든 결과의 법이 생김을 잘 아나니 말하자면 경에서, 「다른 생(生)을 인연하여 늙어 죽음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는 비슷한 원인으로부터 모든 결과의 법이 생기는 것을 잘 아나니 말하자면 경에서, 몸이 나쁜 행(行)을 하는 이는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고 좋지 않고 뜻에 맞지 않은 이숙(異熟)을 능히 얻게 되며, 몸이 착한 행을 하는 이는 위와 반대되는, 즉 뜻에 맞는 따위의 이숙(異熟)을 능히 얻게 된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와 같은 따위에서 다시 다음으로 온갖 쌓임[蘊]에 즉(卽)해서 계속 하는, 즉 목숨을 버림과 계속 태어남이라고 하는 보특가라의 체성을 얻을 수 없다. 그는 네 가지 매우 깊은 연기를 잘 알므로 말미암아서이니 말하자면, 자(自)로부터 생김이 아니며 타(他)로부터 생김이 아니며 자타(自他)에서 생김이 아니며 원인 없이 생김도 아닌 그것이다. 그 중에서 연기의 자체와 저 장애가 끊어지는 수승한 이익을 밝혔으니 그를 연기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처비처(處非處)에 대한 선교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짓지 않음ㆍ가지 못함ㆍ얻지 못함과 두 몸과 딴 몸으로는 전환 못함이며 청정한 견해에는 단 업이 없나니 두 곳에 ⧼나⧽가 자재(自在)함 아니네.
016_0102_a_09L“不作,不趣,得, 二、餘體不轉, 淨見無餘業,
非我自在二。
그와 같은 지혜로 능히 알면 처비처(處非處)에 대한 선교라 하고 제 결과[自果]가 결정된 자리에서 그와 다르면 비처(非處)라 말하네.
016_0102_a_11L如是智能知, 處非處善巧,
於自果定處, 異此說非處。”
016_0102_b_01L 논하건대, 만일 ⧼나⧽가 원인ㆍ결과의 두 곳에 자재함을 얻는다고 보지 아니하면 처비처 선교라고 이름할 것이니 짓지 않기 때문이며, 가지 않기 때문이며,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두 몸으로 전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딴 몸으로 전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청정한 견해에는 딴 업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짓지 않음이라고 하느냐 하면, 미묘하고 착한 행을 순전히 짓지 않음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자재한 ⧼나⧽가 있지 않다. 어떤 것을 가지 않음이라고 하느냐 하면, 미묘한 행(行)을 떠나서는 좋은 갈래[善趣]에 가지 못함을 말함이니 경에서, 「몸에 나쁜 행을 하고서는, 내지 천상에 나게 되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용납되지 않나니 반드시 그러한 일이 없다 」고 내지 광범하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얻지 못함이라고 하느냐 하면, 착한 방편(方便)과 샘이 없는[無漏]거룩한 도를 떠나서는 결코 도과(道果)에 해당한 필경청정(畢竟淸淨)을 능히 얻지 못함을 말함이니 경에서, 「五개(蓋)를 영원히 끊지 않거나 내지 7변각지(編覺支)를 닦지 않고서는 능히 괴로움이 다하는 막바지를 바르게 증득함이 있을 수 없고 용납되지 못하나니 반드시 그런 일이 없다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을 두 몸으로 전환 못함이라고 하느냐 하면,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 아니하고서 두 여래(如來)가 함께 세상에 출현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용납되지 않는다 」고 내지 광범하게 말씀하신 그것을 말함이다. 어떤 것을 딴 몸으로 전환 못함이라고 하느냐 하면, 대장부의 몸을 떠나서 그 외의 딴 몸으로는 반드시 전륜왕(轉輪王) 따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이니 경에서, 「여자로서는 전륜왕이 될 수 없고 용납되지 않는다 」고 내지 광범하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청정한 견해에는 딴 업이 없음이라고 하느냐 하면, 경에서, 「성자의 견해에는 보특가라(補特伽羅)가 구족했거나 일부러 중생의 생명을 끊거나 내지 제8의 존재[有]를 받을 수 없고 용납되지 않나니 반드시 그런 일이 없다. 그런 일이 있는 것이라면 온갖 이생(異生)을 의미 함이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 「짓지 않음이라 」고 말한 것은, 계교함인 ⧼나⧽가 원인에 자재로움을 얻지 못함을 말함이요, 「얻지 못함이라 」함은, 원인과 결과에 통함이요, 「청정한 견해에는 딴 업이 없다 」는 것도 역시 그러하며, 그 외의 것은 오직 결과에 통할 뿐이다. 또, 처비처(處非處)란, 제 결과에서 결정한 것을 처(處)가 된다고 이름 하나니 그 외의 딴 것이면 비처(非處)라 이름 한다고 알아야 한다. 뒤바뀜 없는 지혜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선교(善巧)함을 바로 처비처 선교라고 이름 한다. 그중에서는 처비처에 대한 선교 자체와 저 장애가 끊어지는 수승한 이익을 밝히었다. 어떤 것이 근(根)에 대한 선교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능히 취함과 생김과 유치함과 그리고 염오 및 청정(淸淨)과 무리한 ⧼나⧽라는 관념과 딴 것들이 저 결과에 증상(增上)함이 된다.
016_0102_b_16L“於能取生住, 及染污淸淨, 無理我觀餘,
於彼果增上。
그와 같은 것에 대한 방편을 근(根) 선교가 된다 이름하나니 말하자면 취함ㆍ생김ㆍ유지함과 염오ㆍ청정이 증삼함이기 때문이네.
016_0102_b_18L於如是方便, 名爲根善巧,
謂於取生住, 染淨增上故。”
016_0102_c_01L 논하건대, 만약에 ⧼나⧽가 능히 취함 따위에서 증상함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근(根)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계교하는 바 ⧼나⧽라는 관념과 그 밖에 딴 인연이 능히 취함 따위에서 증상하고 자재(自在)하거나 곧 딴 인연이 능히 취함 따위에서 바로 증상함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나⧽라 계교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말한 바, 「모든 감관(根)이 능히 취함 따위에서 바로 증상함이다 」라고 함은, 눈 따위 여섯 감관은 여섯 대상[六境]을 취하는 데에 바로 증상함이며, 남자와 여자의 두 감관[二根]은 능히 생(生)이 계속하는, 그러한 증상함이며, 명근(命根)의 한 가지는 계속 유지하는 그러한 증상 함이며, 가 증상하는 것은 다섯 가지 수근(受根)이며, 믿음 따위 8근(根)은 청정을 증상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 중에서는 근(根)의 선교 자체와 저 장애가 끊어지는 수승한 이익을 밝히었나니 그를 근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체[諦]에 대한 선교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가지 자성(自性)의 괴로움과 합하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나니 원인 없음과 원인 있음으로 말미암아서이며 다섯 가지 비유로 말미암아서이다.
016_0102_c_07L“二自性苦故, 合故不應理, 由無因有因,
及五種譬喩。
그와 같이 따라 깨닫기 때문에 응당 체(諦)의 선교라고 알아야 하나니 일찍이 보지 못함과 저 인연과 받지 못함과 저 인연을 따라 깨달음이네.
016_0102_c_09L如是隨覺故, 應知諦善巧,
隨覺未曾見, 未受義因緣。”
논하건대, 능히 ⧼나⧽가 염오와 청정의 두 법에서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을 잘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체(諦)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한다. 무엇이 둘이냐 하면, 자성(自性)의 괴로움 때문과 괴로움으로 더불어 합하기 때문인 그것이다. 어떤 것을 자성의 괴로움 때문이라 하느냐, 만일 ⧼나⧽자성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원인 없음이 되는가. 원인 있음이 되는가. 만일 원인 없음이라면 항상 응당 염오할 것이요, 만일 원인 있음이라면 응당 먼저는 청정했다가 그 후에 비로소 염오했을 것이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떤 것을 괴로움과 더불어 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가. 다섯 가지 비유를 이끌어 보아도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만일 괴로움이 ⧼나⧽와 더불어 합했다고 말할진대 응당 두 나무가 함께 합한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니 벗어나는 성질[出離性]에 해당하지 않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이 나무와 더불어 함께 합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니 벗어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016_0103_a_01L또한 불이 섶과 더불어 함께 합하는 것과 같지 않으니 그 성질이 무너지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옷이 염색과 더불어 함께 합한 것과 같지 않으니 ⧼나⧽의 자체 위에서는 희고 깨끗한 색깔을 조금도 역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과 마음 법이 합한 것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마음은 바로 능히 취함[能取]이니 그와 더불어 함께 하나의 대상 따위에 반연한다면 서로 합치된다고 말할 수 있거니와 ⧼나⧽에게는 그런 뜻이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는 일찍이 보지 못함의 뜻과, 그리고 저 인연을 관찰하여 봄에서와, 또 다시 일찍이 받지 못함의 뜻과, 그리고 저 인연을 관찰하여 보므로 말미암아 체(諦)선교라고 이름하나니 말하자면 옛적부터 일찍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쌓임(集)의 두 진리와 그리고 저 인연을 분명히 보지 못했으며, 옛적부터 일찍이 분명히 보지 못하여 사라짐과[滅], 사라짐의 도(道) 두 진리와 그리고 저 인연을 일찍이 받지 못한 것이다. 그 중에서는 출세지(出世智) 자체와 저 장애가 끊어지는 수승한 이익을 밝히었으니 그를 체(諦)에 대한 선교라고 이름한다. 다음 게송을 말하리라.
모든 선교(善巧)의 차별은 스물 세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이섭론(異攝論)이 첫째가 되고, 마지막은 최극청정지(最極淸淨智)이네.
016_0103_a_08L“當知諸善巧, 差別二十三, 異攝論爲先,
後最極淸淨。”
논하건대, 쌓임[蘊] 따위의 선교 차별에는 다시 스물 세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말하자면, 이섭론(異攝論)선교(善巧)와 문소생지(聞所生智)선교ㆍ사소생지(思所生智)선교ㆍ수소생지(修所生智)선교ㆍ순결택분지(順決擇分智)선교ㆍ견도지(見道智)선교ㆍ수도지(修道智)선교ㆍ구경도지(究竟道智)선교ㆍ연근지(練根智)선교ㆍ발신통지(發神通智)선교ㆍ불선청정세속지(不善淸淨世俗智)선교ㆍ선청정세속지(善淸淨世俗智)선교이다. 그리고 승의지(勝義智)선교ㆍ불선청정상 유분별지(不善淸淨相 有分別智)선교ㆍ선청정상유분별지(善淸淨相有分別智)선교ㆍ선청정상무분별지(善淸淨相無分別智)선교ㆍ성소작전행지(成所作前行智)선교ㆍ성소작지(成所作智)선교ㆍ성소작후지(成所作後智)선교ㆍ성문지(聲聞智)선교ㆍ독각지(獨覺智)선교ㆍ보살지(菩薩智)선교ㆍ최극청정지(最極淸淨智)선교이다. 그 중의 이섭론(異攝論)선교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종섭(種種攝)선교요, 둘째는 종종론(種種論)선교이다.
016_0103_b_01L 종종섭 선교에 열 한 가지가 있나니 이른바 계섭(界攝) 그것이다. 계섭(界攝)이란, 모든 쌓임[蘊] 따위가 제 종자에 포섭한 바임을 말한다. 상섭(相攝)이란, 모든 쌓임[蘊] 따위가 제 모양[自相]과 공통된 모양[共相]에 포섭한 바임을 말한다. 종류섭(種類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두루 제 종류에 포섭한 바임을 말한다. 분위섭(分位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순낙수(順樂受)와 등분위(等分位)에 포섭한 바임을 말한다. 불상리섭(不相離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하나의 법으로 말미암아 온갖 쌓임 따위를 포섭함을 말함이니 저 무리들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섭(時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과거ㆍ미래ㆍ현재에 각각 달리 서로 포섭함을 말한다. 방섭(方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방위에 의하여 일어남을 말함이니 만일 이 방위에 의하여 생긴 것이면 곧 이 방위에 포섭됨임을 말한다. 전섭(全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50과 82따위로 포섭한 바를 갖춤이다. 일분섭(一分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각각 달리 조금씩 포섭한 바임을 말한다. 승의섭(勝義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진여(眞如) 모양에 포섭한 바임을 말한다. 갱호섭(更互攝)이란 모든 쌓임 따위가 번갈아 서로 포섭함임을 말한다.
016_0103_c_01L종종론(種種論)선교란, 쌓임[蘊] 따위에 대한 가지가지 문답의 방편선교(方便善巧)를 말함이니 만일 일행(一行)으로써 물으면 응당 순전구(順前句)와 순후구(順後句)와 4구(句)와 무사구(無事句)로써 대답하며, 만일 묻기를 「만일 유계(有界)에 해당하면 곧 형상 있음[有相]에 해당하는가. 설령 형상 있음에 해당한다면 다시 유계(有界)에 해당하는가 」라고 하면, 응당 눈에 의하여 네 구절[四句]로써 대답한다. 즉, 유계(有界)에 해당하고 형상 없음에 해당함 이니 [一句], 형상 있는 세계에 나면 눈[眼]을 얻지 않으며 설령 얻더라도 잃어버린다. 만일 이생(異生)들이 무형 세계[無色界]에 나면 혹 형상 있음에 해당하고 무계(無界)에 해당함이니[二句], 아라한(阿羅漢)의 최후인 눈을 말한다. 혹 유계(有界)에 해당하고 또한 형상 있음[有相]에 해당함이니[三句],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하고 그 외는 눈이 있는 자리이다. 혹 무계(無界)에 해당하고 또한 형상없음에 해당함이니 [四句], 아라한이 눈을 잃어 버린 이와, 무형 세계에 난 이와, 이미 진리를 본 이와, 이미 남김 없는 열반(涅槃)에 들어간 것 들을 말한다. 눈에 대해서 그와 같이 분별하는 것처럼, 그 밖의 모든 것에서도 그 적응하는 대로 응당 널리 분별하면 된다. 계섭(界攝)으로써 상섭(相攝)을 대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계섭으로써 그 외의 섭(攝=種類攝따위)에 대해서도 이리 저리 일행(一行)으로 응당 널리 분별하나니 그와 같이 그 외의 다른 섭(攝)으로써 그 외의 다른 섭(攝)을 대해서도 앞과 앞의 것으로 뒤와 뒤의 것을 대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응당 일행(一行)도리로써 그 적응하는대로 응당 널리 분별해야 한다.
다시 다음에 만일 법온(法蘊)에 해당한 바라면, 이는 법계(法界)에 해당하는 것인가. 설령 법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는 법온(法蘊)에 해당하는 것인가 라고 하면, 이는 응당 순전구(順前句)로써 대답해야 하나니 만일 법온에 해당한 것이라면, 이 법은 또한 계(界)에 해당하는 바이며, 혹 법계(法界)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쌓임[蘊]에 해당하는 바가 아니니 무위법(無爲法)을 말함이다. 쌓임[蘊]으로써 계(界)에 대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쌓임으로써 내지 진리[諦]에 대해서도 응당 일행(一行) 도리에 의하여 상섭(相攝)을 널리 분별할 것이다. 쌓임으로써 그 밖의 것에 대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계(界)로써 처(處)따위에 대하며 내지 근(根)으로써 진리(諦)에 대해서도 응당 널리 분별할 것이다.
016_0104_a_01L그 중에 불선청정세속지(不善淸淨世俗智) 선교(善巧)란, 곧 순결택분지(順決擇分智)선교이며, 선청정세속지(善淸淨世俗智)선교란, 곧 출세후득세간지(出世後得世間智)선교이며, 승의지(勝義智)선교란, 곧 견도지(見道智)선교이다. 그와 같은 세 가지는 곧 불선청정상 유분별지(不善淸淨相有分別智)선교와, 선청정상 유분별지(善淸淨相有分別智)선교이며, 그와 같은 세 가지는 곧 성소작전행지(成所作前行智)선교와, 성소작지(成所作智)선교와, 성소작후지(成所作後智)선교이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차별이란, 아직 끊지 않은 번뇌가 생김을 번뇌 다스림이 아님과, 이미 끊은 번뇌가 생김을 번뇌 다스림인 차별이기 때문이다. 그 중의 세 가지 차별이란, 곧 이 세 가지인 분별이 있음과, 분별이 없음과, 세속승의지(世俗勝義智)인 성질 차별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뒤의 세 가지 차별이란, 곧 이 세 가지로 밝힘인 끊기 이전인 행지성(斷前行智性)과 바로 끊는 도지성(正斷道智性)과 저 후시지성(後時智性)의 차별을 말하나니 그와 같은 아홉 가지 지(智)는 계속함인 보특가라(補特伽羅) 차별에 의한다. 그리고 다시 네 가지를 내세운다고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은 앞에서 먼저 말한 것과 같아서, 만일에 변지(遍知) 따위의 공덕을 바르게 수행하고자 한다 함이란, 괴로움 따위를 두루 아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괴로움에 대하여 두루 아는 것이라고 하느냐 하면, 괴로움의 진리[苦諦]에서 무상(無常)함과 괴로움과 공(空)함과 ⧼나⧽없음을 두루 알음이니 지금에 그 순서에 따라 응당 널리 성립시켜야겠다. 이 중에 무상함을 성립함이란, 응당 무상(無常)의 체성(體性)과 무상의 차별을 밝혀 보이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무상함이며, 어떤 것이 차별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무상함이란, 유위(有爲)를 말함이니 세 모양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무상함의 뜻을 그의 적응하는대로 여섯 가지, 여덟 가지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04_a_17L“無常謂有爲, 三相相應故, 無常義如應,
六八種應知。”
논하건대, 무상의 체성이란, 유위법(有爲法)을 말함이니 세 유위의 모양으로 더불어 함께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생기는 모양[生相]이요, 둘째는 없어지는 모양[滅相]이요, 셋째는 유지하다가 달라지는 모양[住異相]이다. 또 무상의 차별이란, 그의 적응하는대로 혹은 여섯, 혹은 여덟이라고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여섯이며 여덟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04_b_01L 체성 없음과 무너짐과 변해 달라짐과 떠나 이별함과 얻음과 앞으로 있음이며 찰나와 계속함과 병듦 따위와
마음과 그릇과 수용함 따위이네.
016_0104_a_23L“無性壞轉異, 別離得當有; 剎那、續、病等,
心、器、受用故。”
논하건대, 여섯 가지 무상함이란, 첫째는 체성이 없어 무상함이요, 둘째는 무너져 무상함이요, 셋째는 변해 달라져 무상함이요, 넷째는 떠나 이별해 무상함이요, 다섯째는 얻어 무상함이요, 여섯째는 앞으로 있게 되어 무상함이다. 여덟 가지 무상함이란, 첫째는 찰나문(刹那門)이요, 둘째는 계속함인 문[相續門]이요, 셋째는 병드는 문(門)이요, 넷째는 늙는 문이요, 다섯째는 죽는 문이요, 여섯째는 마음인 문이요, 일곱째는 그릇인 문이요, 여덟째는 수용함인 문이다. 그 중의 찰나(刹那)와 계속함인 두 가지 무상(無常)은 온갖 곳에 두루하고 병듬 따위 세가지 무상은 안의 물질[內色]에 있고 마음인 무상은 오직 이름[名]에만 있고 그릇[器]과 수용함인 두 무상은 바깥 물질에 있다. 그 중의 체성이 없어 무상함이란, 그 성품이 언제나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무상이라고 한 것이다. 그 밖의 변해 달라지는 무상에 열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을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변해 달라짐에는 열 다섯 가지의 차별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분위(分位)가 따위가 그것인데 여덟 인연에 핍박하기 때문이네.
016_0104_b_12L“變異應當知, 十五種差別, 所謂分位等,
八緣所逼故。
아래 세계에는 모두를 갖추었고 중간 세계에는 세 문을 떠나서 세 가지 변해 달라짐 갖추었고 윗 세계에는 다시 그릇이 제외되네.
016_0104_b_14L下界具一切, 中界離三門,
具三種變異, 上界復除器。”
016_0104_c_01L 논하건대, 열 다섯 가지 변해 달라짐이란, 분위(分位)의 변이(變異)와 내지 일체종불현진(一切種不現盡)변이 이다. 분위 변이란, 어린 아이 적부터서 늙을 적에 이르기까지의 앞과 뒤가 서로 같지 아니하고 각각 달리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현변이(顯變異)란, 미묘한 빛깔과 고운 살과 윤택한 피부가, 내지 변하여 나쁜 빛깔과 거치른 살과 마르고 여읜 피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형변이(形變異)란, 살이 살찌거나 여읜 따위로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흥성변이(興盛變異)란, 권속과 살림살이와 계견(戒見) 따위가 흥성함을 말한다. 그리고 그와 상위(相違)되는 것을 쇠퇴변이(衰退變異)라고 이름한다. 지절변이(支節變異)란, 먼저는 지절(支節)을 갖추었다가 뒤에 변하여 불구(不具)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한열변이(寒熱變異)란, 추울 때에는 오싹 오싹하고 떨리다가 더울 적에는 쭉 펴지고 땀이 흐르게 되어 차가움과 따뜻하기를 바라는 따위로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딴 것에 손해를 당한 변이[他所損害變異]란, 손과 발이 채이거나 타박을 받았거나 모기 등에가 무는 따위로 몸이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피권변이(疲倦變異)란, 달리거나 뛰거나 던지거나 운동 따위로 인하여 몸이 피로해서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위의변이(威儀變異)란, 4위의(威儀=行ㆍ住ㆍ坐ㆍ臥)에 앞뒤가 쉽게 이탈되어 덜하거나 더하여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촉대변이(觸對變異)란, 괴로움ㆍ즐거움 따위의 닿임을 따라 변해 달라짐으로 말미암아 괴로움ㆍ즐거움 따위의 느낌[受]이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염오변이(染汚變異)란, 마음에 있는 탐냄과 성냄 따위의 크고 작은 두 번뇌가 어지럽히어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병듬 따위의 변이(變異)란, 먼저는 병과 고통이 없다가 뒤에 중한 병에 핍박한 바가 되어 신체가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사(死) 변이란, 먼저는 수명이 있다가 뒤에는 전혀 의식이 없어서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청어(靑瘀) 따위의 변이란, 목숨이 마친 후에 몸의 빛깔이 푸르고 어혈지고 부풀고 문드러지며 내지 뼈 따위가 나타나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일체종불현진(一切種不現盡)변이란, 뼈만 남아 있다가 불에 타고 망가지고 흩어져서 저 온갖 것이 전혀 볼 수 없게 되어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016_0105_a_01L또, 그 열 다섯 가지 변이(變異)가 여덟의 인연(人緣)으로 더불어 서로 응한다. 여덟의 인연이란, 첫째는 쌓일 때에 저축됨이요, 둘째는 딴 것에 손해를 받음이요, 셋째는 수용(受用)이 줄어짐이요, 넷째는 시절에 옮겨짐이요, 다섯째는 불에 타 버림이요, 여섯째는 물에 망가짐이요, 일곱째는 바람에 건조됨이요, 여덟째는 다른 인연과 합함이다. 쌓일 때에 저축됨이란, 시간을 지남이 오래되면 색체가 있는 물건이 본 자리에서 떠나지 않더라도 저절로 썩고 망가지게 됨을 말한다. 딴 것에 손해를 받음이란, 딴 것이 가지 가지로 핍박하고 괴롭히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전과 후가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수용이 줄어짐이란, 가지 가지 수용하는 바 물건이 각기 다른 주체에게 먹임과 쓰임이 되어 줄어지고 변해 달라짐을 말한다. 시절에 옮겨짐이란, 겨울에는 찬 눈이 나리고 여름에는 더위와 비가 있으므로 우거진 숲과 약초 따위가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함을 말한다. 불에 타 버림이란, 큰 불이 휩쓸게 되어 국성(國城)과 마을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림을 말한다. 물에 망가짐이란, 큰 물이 범람하여 마을이나 시ㆍ읍들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됨을 말한다. 바람에 건조됨이란,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젖은 옷이나 축축한 땅을 속히 마르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다른 이연과 합함이란, 탐심이 많은 이가 성냄의 인연과 합할 적에 탐심의 얽힘이 그치고서 성냄의 얽힘이 일어나게 된다. 그와 같아서, 성냄이 많은 이와 어리석음이 많은 이가 딴 번뇌의 인연과 합할 적에도 응당 그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아서, 모든 식(識)의 다른 대상에서 나타남도 역시 그러하다. 다시 다음에 그 무상에 대한 내용이 욕심 세계에서는 모두가 갖춰 있고 형상 세계에서는 병듬ㆍ늙음ㆍ수용인 세 문의 무상만 제외하고 또 촉대(觸對)변이 ㆍ염오(染汚)변이ㆍ사(死)변이인 세 가지만 있다. 형상 세계에서 말한 온갖 무상의 내용과 같아서 무형 세계에서도 역시 그러하여 그릇인 문만 제외된다고 알아야 한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체성 없음인 내용의 무상(無常)은 변계(違計)로서 고집하는 바이며 그 밖의 무상에 대한 내용들은 의타기(依他起)라고 알아야하네.
016_0105_a_15L“無性義無常, 遍計之所執; 所餘無常義,
依他起應知。”
논하건대, 체성 없음인 내용에 해당되는 무상은,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에 해당된다고 알아야 하고, 그 밖의 무상에 대한 내용은 의타기상(依他起相)에 해당되고, 원성실상(圓成實相)중에는 무상의 내용이 없다. 그와 같이 이미 무상의 내용 차별과 삼상(三相)에 해당되는 바를 밝히었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신, 온갖 무상이란, 모두 다 괴로움이라 」고 한 것에는 무슨 뜻이 있는 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온갖 무상이 모두 괴로움이라 함은, 모든 괴로움과 섞이었기 때문이니 법의 성품에 미혹한 어리석은 이는 해독을 받으면서 깨닫지 못하네.
016_0105_a_22L“諸無常皆苦, 衆苦所雜故; 迷法性愚夫,
得爲害不覺。”
016_0105_b_01L
논하건대, 거치르고 중한 괴로움에 섞인 것으로 말미암은 무상이기에 그 무상의 성질은 바로 행고(行苦)이므로 괴로움이요, 변하고 무너지는 괴로움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도의 진리[道諦]는 괴로움이니 아니니 괴로움의 모양으로 섞인 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법의 성품에 미혹한 어리석은 이들은 항상함과 무상함의 내용을 능히 알지 못하며, 또는 현재의 무상에게 괴롭힘과 해독을 받음이 된다. 앞에서 찰나무상(刹那無常)이 모두에 두루 행한다고 말했으니 그 무상의 내용은 세상에서 현재 증득함이 아니기 때문에 응당 성립할 수 있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마음의 결과로 말미암기에 생기고서 저절로 사라지나니 뒤에 변해 달라질 수 있음은 찰나 찰나에 사라짐이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05_b_08L“由彼心果故, 生已自然滅, 後變異可得,
念念滅應知。”
논하건대, 저 온갖 지어감[行]은 바로 마음의 결과이므로 그 성품이 겨우 생기기만 하면 사라짐의 인연을 떠나서도 저절로 사라지고 무너진다. 또 다시 뒤에 변해 달라질 수 있음은, 온갖 지어감이 모두 찰나에 사라짐이라고 알아야 한다. 온갖 지어감이 바로 마음의 결과라고 어떻게 응당 알것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음의 훈습(薰習)이 증상(增上)하며 선정에서 전변(轉變)함과 자재(自在)함으로 영상(影像)이 생기게 되는 도리와 세 가지 성교(聖敎)로 인함이네.
016_0105_b_14L“心熏習增上, 定轉變自在, 影像生道理,
及三種聖教。”
016_0105_c_01L 논하건대, 도리(道理)와 성교(聖敎)로 인하여 온갖 지어감[行]이 바로 마음의 결과인 성질임을 증명하여 알게 된다. 도리란,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이 마음을 훈습(薰習)함을 말함이니 마음 훈습이 증상(增上)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온갖 지어감이 생기게 된다. 또 선정의 장애를 벗어나 마음이 청정한 이는 온갖 지어감이 마음을 따라 전변(轉變)하나니 저 의해(意解)의 자재한 힘으로 말미암아 가지 가지가 전변한다. 또, 선정에 마음이 자재한 힘으로 말미암이 그의 하고자 함에 따라 선정 마음의 경계(境界), 영상(影像)이 생기나니 그를 도리라고 이름한다. 성교(聖敎)란, 세 가지의 성인 말씀을 말함이니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곧 세간(世間)을 잡아 당기고 마음 힘으로 방호(防護)하는 것에서 마음을 따라 생기고는 자재롭게 모두 따라 일어난다 」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비구는 응당 전일하게 바른 도리와 같이 마음에 잘 관찰을 해야 한다 」고 내지 널리 말씀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성주(城主)라고 말함은 곧 온갖 취함이 있는 식온(識薀)이라 」고 하셨으니 그를 성교라고 말한다. 【문】 저 온갖 지어감이 저절로 사라지고 무너지는 도리를 어떻게 알 것인가. 【답】 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생인(生因)과 서로 어기기 때문이며 주인(住因)과 멸인(滅因)이 없으며 자연주(自然住)라면 항상함인 허물되리니 그러기에 저절로 사라짐이라고 알으리.
016_0105_c_07L“生因相違故, 無住滅兩因, 自然住常過,
當知任運滅。”
논하건대, 저 생인(生因=생기는 원인)이 온갖 지어감을 능히 없애는 것 아니니 생김과 사라짐의 두 종류는 서로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또, 주인(住因=머무는 원인)이 온갖 지어감으로 하여금 머물도록 함이 없나니 만일 있다면 응당 항상 머무는 것이 될 것이며, 지어감이 이미 머무는 것이 될 것이며, 지어감이 이미 머물지 아니한데 어찌 멸인(滅因=사라짐의 원인)을 필요로 하겠는가. 또 그 밖에 멸인의 성질도 얻을 수 없다. 만일 지어감이 생기고서 저절로 머무른다면, 그는 곧 응당 항상 머무는 것이 되어 곧 큰 허물이 되고 만다. 그와 같이 주인ㆍ멸인과 자연주에 모두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온갖 지어감은 저절로 무너지고 사라짐이라고 알아야 한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물ㆍ불ㆍ바람이 멸인(滅因) 아니니 함께 생기고 사라지기 때문이며 저와 서로 응하여 사라지면 그 밖에 변해 달라짐이 생김이네.
016_0105_c_16L“非水火風滅, 以俱起滅故; 彼相應滅已,
餘變異生因。”
016_0106_a_01L 논하건대, 만일 물과 바람이 바로 멸인(滅因)이라면, 도리에 맞지 않나니 함께 생기고 사라짐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만일에 저 물 따위가 바로 멸인(滅因)이라면, 물 커지는 물건과 태우고 건조시키는 물건이 응당 앞서 계속 사라지고서 다시 변해 달라짐이 계속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곧 실체없는 원인이 실체 있는 원인이 될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과 불과 바람이 물커지는 따위의 물건과 더불어 서로 응하여 사라질 적에 능히 저 물건에게 뒤에 변해서 생기는 원인이 된다. 그런 공능(功能)을 제외하고는 물 따위가 저 물건에게 다시 딴 힘이 없을 것이다. 다시 다음으로 사라지는 모양[滅相]이 사라짐의 원인[滅因]이라고 고집한다면, 이 능히 사라지는 모양[能滅相]이 사라질 바의 법[所滅法]으로 더불어 동시에 있는가.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되는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상위(相違)함과 상속(相續)이 끊어짐과 두 모양과 모양 없음을 이룸과 세상에서 현재 봄을 어김과 법 없음과 그 밖의 원인 그것이네.
016_0106_a_04L“相違相續斷, 二相成無相, 違世閒現見,
無法及餘因。”
논하건대, 저 능히 사라지는 모양이 사라질 바의 법으로 더불어 함께 있다고 말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나니 상위(相違)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함께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나니 저 상속(相續)이 끊어짐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사라지는 원인이 능히 사라지는 법이라면, 그 자체가 사라짐이 되는가. 그 자체가 사라짐이 아닌가. 만일 그 자체가 사라짐이라면, 곧 응당 하나의 법에 둘의 사라짐인 모양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 자체가 사라짐이 아니라면, 응당 사라짐의 모양이 없을 것이니 그와 같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세상에서 현재 보는 모양과 어기기 때문에 응당 사라짐이 바로 「사라지고 무너지는 원인 」이라고 고집하지 않은 것이니 사라짐의 법이 바로 사라짐의 원인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일 사라짐의 법이 바로 사라짐의 원인이라면 오직 사라짐 있는 것이 곧 능히 사라지는 법이 되는가. 다시 딴 사실을 기다리는가. 그 두 가지 원인에 모두가 과실이 있다. 만일 오직 사라짐 있음이 곧 「능히 사라지는 법이라면 어느 때에 사라짐이 있을 그 때에는 법 」의 자체가 필경 응당 없을 것이다. 만일에 다시 딴 사실을 기다린다면, 응당 곧 딴 사실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원인 」이 될 것이니 응당 사라짐을 「사라지고 무너지는 원인 」이라고 여기지 아니해야 할 것이다. 다시 다음으로 「뒤에 변해 달라짐 」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이 찰나에 없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몸과 젖과 수풀 따위가 처음에 변해 달라짐 없음이 아니며 또한 처음에 무너지지 않다가 최후 시간에야 없어짐이 아니네.
016_0106_a_22L“非身乳林等, 先無有變異, 亦非初不壞,
最後時方滅。”
016_0106_b_01L
논하건대, 온갖 세상이 몸과 젖과 수풀 따위의 안과 밖의 모든 법이 최후의 시간에 변해 달라짐을 얻을 수 있나니 그러므로 처음에 그 자체가 변역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처음에 사라지고 무너짐이 없다가 최후에야 비로소 사라짐이 아니니 다른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처음에 변해 달라지지 아니하면 뒤에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처음에 사라지고 무너짐이 없으면 뒤에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온갖 지어감이 찰나찰나에 변하여 사라진다고 알 것이니 그러므로 저 법의 찰나라는 뜻이 성립된다. 그와 같이 무상하다는 성질이 성립되고 보니 온갖 외도(外道)의 삿된 분별로 계교한, ⧼나⧽ㆍ자재함ㆍ자성(自性), 아주 작은 분자(極微)ㆍ깨달음 따위, 항상 머문다는 법은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나⧽와 항상하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처치[位]와 생각[思]과 번뇌와 시간으로 항상하지 않고 변하기 때문이니 그것이 만일 변해 달라짐 없다면 받음ㆍ지음ㆍ해탈은 옳지 못하리.
016_0106_b_11L“位思煩惱分, 非常變異故, 此若無變異,
受作脫非理。”
논하건대, 계교한 ⧼나⧽에는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의 처지와 선악 따위의 생각과 탐냄ㆍ성냄 따위의 번뇌와 시간의 차별이 있나니 그러므로 무상하다. 왜냐하면 그 계교한 바 ⧼나⧽에는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변해 달라짐이 있다면 응당 항상함이 아닐 것이요, 만일 전혀 변치 않음이라면, 응당 받는 이, 짓는 이, 해탈하는 이라고 계교하지 않을 것이니 저 법은 ⧼나⧽ 없음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으로 또한 「자재함ㆍ체성ㆍ항상 머무름ㆍ세상을 능히 내었다 」는 것이 없다. 왜 그런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공능이 있지 않기 때문이고 해당함과 해당함 아님이 상위하며 쓰임이 있음과 쓰임이 없음과 원인 된다는 것 허물을 이루네.
016_0106_b_20L“功能無有故, 攝不攝相違, 有用及無用,
爲因成過失。”
016_0106_c_01L 논하건대, 자재(自在)하다고 계교한 그것에는 세상을 내는 공능(功能)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자재함, 그것으로 세상을 내는 공능이 인연 없고 저절로 있다고 한다면 그대가 어찌하여 온갖 세간(世間)이 원인 없이 저절로 있다고 인증하지 아니하는가. 만일에 그 공능은 업으로 원인이 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온갖 세간이 업으로써 원인이 된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는가. 만일에 그 공능은 구하는 방편으로써 원인이 되어 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온갖 세간은 제의 공력으로써 원인이 되어 나게 된다고 믿지 아니하는가.
또, 만일 자재함이 세가네 해당한다면 세간에 떨어져 있게 됨이어늘 능히 온갖 세간을 낸다고 말하면 그는 곧 도리에 서로 어긴다. 만일에 그 자재함이 세간에 해당함이 아니라면 그는 곧 해탈이니 해탈의 법이 능히 세간을 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만일 자재함 그것이 쓰임이 있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세간을 내었으나 세간내는 것을 떠나서 쓰임이 이루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곧 자재함이 그 쓰임을 필요로 하는 데에는 자재함이 없어서 스스로 허물을 이루게 된다. 만일에 그 자재함이 비록 세간을 내나 필요로 하는 바가 없다면 응당 온갖 세간을 화생(化生)하지 아니할 것이며, 혹 그 자재함은 미친 우부(愚夫)와 같은 허물이 있을 것이다. 또 그 자재함이 세간을 내었다면 자재함만이 원인이 되어 모든 세간을 낸 것인가. 또한 다시 그 밖의 원인을 기다림이 되는가. 만일 자재함, 그 자체만이 원인이 되었다면, 자재함 자체가 본래 항상 있는 것처럼 세간도 역시 그러하여 응당 다시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 밖의 원인을 조금 기다린다면, 이 필요로 하는바 원인에 만일 원인이 없다면 온갖 세간도 역시 그와 같을 것이요, 만일 그 밖의 원인이 있다면 세간도 역시 그러하여 그 밖의 원인으로부터 생기는데 어찌 자재(自在)를 필요로 하리요. 그러므로 자재함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많은 허물이 있다. 다시 다음으로 자성(自性)과 항상 머무름이 있어 원인이 된다고 고집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07_a_01L 자성(自性)이라면 변해 달라지는 모양이 있음과 없음, 모두 맞지 않으며 차별이 없다면 무상함이 되고
차별이 있다면 다섯 허물이 있나니
016_0106_c_23L“自性變異相, 有無不應理, 無差別無常,
有差別五失。
모양 없음과 또한 원인 없음과 자성(自性) 아님과 항상 변함과 먼저 변해 달라짐이 있기 전에 ⧼나⧽가 응당 늘 해탈함 그것이네.
016_0107_a_02L無相亦無因, 非自性恒變,
先無有變異, 我應常解脫。”
논하건대 만일 자성이 항상함이라고 여긴다면 응당 변해 달라지는 원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계교한 바 자성은 변해 달라지는 모양이 있는 것 아니며, 또한 변해 달라지는 모양 없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그 자성이 기외의 변해 달라지는 모양으로 더불어 차별이 없다면 응당 무상함일 것이요, 만일 차별이 있다면 다섯 가지 허물을 이룰 것이니 첫째는 모양 없는 허물인데 변해 달라지는 모양을 떠나고서는 그 밖의 자성의 모양은 조금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인 아닌 허물이니 세상에서 항상 머무는 법이 바로 생기는 원인[生因] 자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성이 아닌 허물이니 세상에서 저 종류가 아니고서 저 자성이 되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항상 머무는 자성이 어느 때에서나 변해 달라짐을 일으키는 허물이니 기외의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이 자성이 변해 달라짐이 생기기 전에 ⧼나⧽가 해탈하는 허물이니 만일 그렇다면 그 뒤에는 응당 온갖 변해 달라짐을 일으키지 아니할 것이다. 다시 다음으로 아주 작은 분자[極微]가 항상함이라고 계교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항상함과 조작이 다 이치에 맞지 않음은 두 원인과 세 원인으로 인해서이다 재물ㆍ중생ㆍ증상(增上)함 그것으로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 머무름 아니네.
016_0107_a_16L“常、造不應理, 由二三因故; 財有情增上,
極微非常住。”
016_0107_b_01L 논하건대, 계교한 바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한 성질이라 함과 조작함이라 함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찌하여 항상한 성질이라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느냐 하면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그대는 아주 작은 분자의 성질이 미세하므로 말미암아 그 성질이 항상 머무름이라고 하는가 다른 종류로 말미암아 그 성질이 항상 머무름이라고 하는가. 만일 미세함으로 말미암아서라고 한다면 미세함은 아주 못나고 저열하기 때문에 응당 항상 머무름이 아니다. 만일 다른 종류로 말미암서라고 한다면, 그 모양은 얻을 수가 없나니 땅 따위 아닌 것으로 땅 따위의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어찌하여 조작함이라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느냐하면 세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첫째는 방소(方所)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요, 셋째는 자체로 말미암아서다. 어떤 것을 방소로 말미암기 때문에 조작함이라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느냐 하면, 아주 작은 분자로부터 거치른 물건을 만드는 것이 저 분량보다 지난다고 하겠는가. 저 분량보다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마닐 저 분량보다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치른 질애물(質礙物)도 응당 아주 작은 분자와 같아서 잡거나 취할 수가 없을 것이며, 또 다시 세상에서 질애(質礙)하여 밝거나 깨끗하지 못한 물건이 한 곳에 같이 있는 것을 볼 수 없나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저 분량보다 지난다고 한다면 저 분량을 지난 곳에 거치르고 질애가 된 물건이 아주 작은 분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응당 항상 머무름이 될 것이며, 만일에 다시 딴 아주 작은 분자가 있어서 생겼다고 계교한다면 그는 곧 아주 작은 분자가 응당 항상 머무름이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을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하느냐 하면, 만일 그대가 「화합성(和合性)으로 말미암아 인연이 되었기 때문에 딴 물건을 건립하여 화합하도록 한 것이라 」고 계교한다면 그 화합성은 생기고 능히 인연을 짓는 것인가. 아직 생기지 않아서 능히 인연을 짓는 것인가. 만일 생기고서 능히 인연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화합된 바 물건이 화합한 이후에 화합성과 조금이라도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아직 생기지 않아서 능히 인연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체성이 없어서 인연이 될 체성이 없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어떤 것을 자체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하느냐하면 그 아주 작은 분자의 성질이 거치른 물건을 만들 적에 응당 종자가 싹을 내는 것과 같지 않으리니 종자와 같으면 아주 작은 분자는 응당 없어지기 때문이며, 응당 젖과 같지 않으리니 아주 작은 분자가 응당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며, 응당 옹기장이와 같지 않으리니 아주 작은 분자는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조작함이라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비록 항상 머무는 아주 작은 분자가 없으나 겁초(劫初)에 그릇 누리[器世間] 따위와 수용할 물건이 있어서 모든 중생을 내며 업(業)이 증상(增上)하는 힘 때문에 아주 작은 분자로 말미암지 않나니 그러므로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 머무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다시 다음으로 항상한 감각이 있다고 고집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07_c_01L
무상하게도 저에게 의지하였으며 차례로 일어나고 차별로 일어나며 모든 느낌[受] 따위가 다르므로 감각이 무상함이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07_c_01L“無常爲彼依, 次第差別轉, 諸受等異故,
當知覺無常。”
논하건대, 안식(眼識) 따위의 감각이 무상한 눈[眼] 따위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물질[色] 따위의 것에서 차례로 일어나며, 많은 모양과 모습으로 달리 일어나며 즐거움 따위의 모든 느낌[受]과 탐냄 따위의 모든 번뇌와 보시[施] 따위의 착한 생각인 위치와 한계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항상한 감각이 그와 같이 달라지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어떤 인연 때문에 세상 중생들이 무상한 성품은 있는데도 그를 취하여 고집하지 아니하며 항상 머무는 성질은 없는데도 그를 가지 가지로 고집하는가.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무상(無常)에 대한 무지(無智) 그것이 4전도(顚倒)의 근본이 되나니 세간도(世間道)가 더욱 올라갈수록 어리석음의 힘도 더 증가한다고 알아야 하리.
016_0107_c_09L“於無常無智, 四顚倒根本, 當知世上進,
愚癡力轉增。”
016_0108_a_01L 논하건대, 무상에 대하여 무지(無智)가 일어나기 때문에 실로 무상이 있는데도 그를 취하여 고집하지 아니하며 실로 항상함의 성질은 없는데도 가지가지로 고집함이 생긴다. 항상하다는 뒤바뀜에서만 무지가 원인이 될 뿐아니라 4전도(顚倒)에서도 모두 무지로써 그 근본이 된다. 왜냐하면, 무상에 대하여 실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상한 법에 항상하다는 뒤바뀜을 일으키며, 괴로움의 법에 즐거움이라는 뒤바뀜을 일으키며 깨끗하지 않은 법에 깨끗하다는 뒤바뀜을 일으키며 ⧼나⧽가 없는 법에 ⧼나⧽라는 뒤바뀜을 일으킨다. 그와 같은 차례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바가범(婆伽梵)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법이 무상하면 그것은 반드시 괴로움이며, 만일 법이 괴로움이면 그것은 반드시 ⧼나⧽가 없다 」고 하셨다. 세간도(世間道)로 말미암아 승진할 적에 무지(無智)를 끊지 않고 차츰 전진하여 올라가는 처지에서는 무상한 성질에서 어리석은 힘은 더욱 더 증상(增上)된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욕심 세계에서는 변역(變易)과 이별 따위의 온갖 무상한 모양을 쳐 부수는 것을 명백하게 알수가 있거니와 위 경지[上地=色界無色界]에서는 그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으로 어떤 인연 때문에 무상한 성직에서 무지(無智)가 일어나는가.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방일(放逸)과 게으름과 뒤바뀐 소견과 우매함과 돕는 양식[資糧]이 없음과 나쁜 벗과 바르지 못한 법 때문이니 그가 무지(無智)의 원인이라고 알아야 하리.
016_0108_a_02L“由放逸、懈怠、 見、昧、乏資糧、 惡友、非正法,
當知無智因。”
논하건대, 무상에 대한 무지(無智)가 일곱 가지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방일(放逸)이요, 둘째는 게으름이요, 셋째는 뒤바뀐 소견이요, 넷째는 우매함이요, 다섯째는 보리의 돕는 양식을 많이 저축하지 못함이요, 여섯째는 나쁜 벗으로 말미암음이요, 일곱째는 바르지 못한 법을 들음이다. 그리하여 경계(境界)에 대한 낙과 선정에 대한 낙이 일어나게 되어 방일하기 때문에 무상한 성질을 실다히 알지 못하며, 설령 방일하지 않더라도 다시 게으르며, 설 게으르지 않더라도 다시 뒤바뀐 소견이 있더라도 다시 우매하며, 설령 우매하지 않더라도 보리(菩提)의 돕는 양식을 저축하지 못하며, 설령 보리의 돕는 양식을 이미 닦아 익히었더라도 나쁜 벗을 따르며, 또 다시 그에게서 바르지 못한 법을 듣기 때문에 무상에 대하여 실다히 아지 못한다. 다시 어떤 인연이 있어서 무상을 아지 못하고 괜히 항상하다고 고집하여 헤매는가.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진리대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과거 따위를 기억해 생각하므로 비슷하게 계속적으로 헤매면서 무상을 항상함이라고 여기네.
016_0108_a_14L“不如理作意, 憶念前際等, 相似相續轉,
於無常計常。”
논하건대,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항상하다는 고집을 일으키나니 첫째는 진리대로 생각을 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과거 따위의 일을 기억하여 생각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과거 따위의 일로 말미암아 비슷하게 계속적으로 헤매기 때문에 그 밖의 세간(世間)에 대해서도 또한 항상 머무른다고 여긴다. 다시 다음으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셋 유우위[三有爲] 모양은 찰나 뿐만 아니다. 왜 그런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6_0108_b_01L 논하건대, 세 가지 유위의 모양은 중동분(衆同分)으로 말미암아 一생(生)에 해당되는 바인데, 처음 날 적을 생상(生相)이라고 취한 것이며, 취후 죽을 적을 멸상(滅相)이라고 취한 것이며, 그 두 중간에 계속하면서 머무는 때를 주이상(住異相)이라고 취한 것이니 그와 셋 유위 모양을 세웠다고 알아야 한다.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논하건대, 무상한 성질에 실다운 지혜로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나니 첫째는 념주(念住=생각이 머무름)로 말미암음이요, 둘째는 연기(緣起)로 말미암음이니 념주로 말미암아 온갖 경계에서 마음을 묶어 머무르도록 함이요, 연기로 말미암아 저 법성(法性)을 통달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나니 「집기법(集起法)을 신념주(信念住)에서 본다 」고 내지 널리 말씀하셨다.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논하건대, 무상한 성질을 보는 데에 여섯 가지 있다고 알아야 한다. 첫째는 세속지(世俗智)이니 순결택분(順決擇分) 자리까지를 말함이요, 둘째는 승의지(勝義智)이니 출세도(出世道) 자리까지를 말함이요. 셋째는 성문지(聲聞智)이니 무성(無性)을 제외한 무상(無常) 내용을 말함이요. 넷째는 보살지(菩薩智)이니 온갖 무상(無常)하다는 내용을 말함이요. 다섯째는 불선청정(不善淸淨)이니 저 二학지(學智)를 말함이요. 여섯째는 선청정(善淸淨)이니 저 二무학지(無學智)를 말한다. 또, 연기(緣起) 법에는 네 가지 도리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또, 연기(緣起) 법에는 네 가지 도리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제 종류이므로 여타 것이 아니고 인연을 기다리므로 제가 아니며 지음이 없기에 공통됨도 아니요 작용에 원인이 없음도 아니네.
016_0108_b_17L“自種故非他, 待緣故非自, 無作故非共,
用故非無因。”
논하건대, 네 가지 도리로 말미암아 무상한 성질에 든다 함은 말하자면, 온갖 지어감[行]의 법이 여타에게 생기지 않나니 제 종류에서 생기기 때문이요, 또한 제가 스스로 생기지 않나니 바깥 인연을 기다리기 때문이요, 또한 함께 생김이 아니니 함께 지음[作]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원인 없음도 아니니 저들이 생기는 데에 공용(功用)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