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16_0157_c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016_0158_a_01L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본사분(本事分)과 결택분(決擇分)에는 각각 네 가지가 있으니, 삼법품(三法品)ㆍ섭품(攝品)ㆍ상응품(相應品)ㆍ성취품(成就品)과 제품(諦品)ㆍ법품(法品)ㆍ득품(得品)ㆍ논의품(論議品)이다.
016_0158_c_15L本事與決擇, 是各有四種, 三法攝應成,
諦法得論議。
종류가 몇이고 이유가 어떻고 그 취하는 모양[相]과 건립(建立)하는 차제(次第)에 대하여 이치를 새겨 자세히 분별하여 모두 게송으로 정리해 놓았으니 이를 숙지하라.
016_0158_c_17L幾何因取相, 建立與次第,
義喩廣分別, 集摠頌應知。
016_0159_a_01L 온(蘊)ㆍ계(界)ㆍ처(處)에는 각각 몇 종류가 있습니까? 온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이다. 계에는 열여덟 종류가 있으니,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ㆍ이계(耳界)ㆍ성계(聲界)ㆍ이식계(耳識界)ㆍ비계(鼻界)ㆍ향계(香界)ㆍ비식계(鼻識界)ㆍ설계(舌界)ㆍ미계(味界)ㆍ미식계(味識界)ㆍ신계(身界)ㆍ촉계(觸界)ㆍ신식계(身識界)ㆍ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이다. 처에는 열두 종류가 있으니, 안처(眼處)ㆍ색처(色處)ㆍ이처(耳處)ㆍ성처(聲處)ㆍ비처(鼻處)ㆍ향처(香處)ㆍ설처(舌處)ㆍ미처(味處)ㆍ신처(身處)ㆍ촉처(觸處)ㆍ의처(意處)ㆍ법처(法處)이다.
016_0159_b_01L어떤 이유에서 온에는 다섯 종류만 있습니까? 다섯 종류의 아사(我事)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신구아사(身具我事)ㆍ수용아사(受用我事)ㆍ언설아사(言說我事)ㆍ조작일체법비법아사(造作一切法非法我事)ㆍ피소의지아자체사(彼所依止我自體事)를 가리킨다. 어떤 이유에서 계에는 열여덟 종류만 있습니까? 신체가 구비된 것 등에 기인해서 과거와 현재의 6행(行)을 지키고 이를 수용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 처(處)에는 열두 종류만 있습니까? 신체가 구비된 것 등에 기인해서 미래의 6행을 유지하고 이를 수용하는 생장문(生長門)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취온(取蘊)이라고 이름합니까? 거둬서 합치기 때문에 취온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을 취(取)라고 합니까? 모든 온에 있는 욕탐(欲貪)을 가리킨다. 어째서 욕탐을 해설하여 취라고 이름합니까? 미래와 현재의 모든 온을 인도해서 버리지 않는 까닭에, 미래를 유추하거나 현재에 염착하는 욕탐을 취라고 이름한다. 어째서 계와 취를 유취법(有取法)이라 이름합니까? 온에 관한 설명과 동일하다. 계와 처가 서로 취합하는 까닭에 유취법이라 이름하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색온(色蘊)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변화를 보이는 모양이 색(色)의 모양이다. 이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가 촉대(觸對)의 변괴(變壞)이고, 두 번째가 방소(方所)의 시현(示現)이다. 어떠한 것을 ‘촉대의 변괴’라고 이름합니까? 손ㆍ발ㆍ흙덩이ㆍ돌ㆍ칼ㆍ창ㆍ추위ㆍ더위ㆍ배고픔ㆍ목마름ㆍ모기ㆍ파리ㆍ뱀ㆍ전갈 따위가 서로 접촉하는 것에서 즉시 변화하여 손상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을 ‘방소의 시현’이라고 이름합니까? 방향과 장소로부터 그 모양을 이루는 것을 이러이러한 색이 나툰다고 말한다. 그 이러이러한 색은 정심(定心)에 기인하기도 하고, 또는 부정지(不定地)의 심(尋)심소법이 사(思)심소법과 상응하는 것에 연유해서 갖가지 모양을 그려 내는 것이다. 수온(受蘊)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받아들이는 모양이 수온의 모양이다. 수온으로 인해서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못한 갖가지 업(業)을 받아들여 여러 과보(果報)를 이숙(異熟)시킨다고 말한다. 상온(想蘊)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인식하는 모양이 상온의 모양이다. 상온으로 인해서 온갖 제법(諸法)의 모양을 인식하는 것이니, 그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이해하는 이치에 수반해서 갖가지 언설(言說)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행온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조작하는 모양이 행온의 모양이다. 행온으로 인해서 마음을 선품(善品)ㆍ불선품(不善品)ㆍ무기품(無記品) 가운데에서 조작하여 그 마음을 부리는 것을 가리킨다. 식온(識蘊)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모양을 구별하여 아는 것[了別]이 식온의 모양이다. 식온으로 인해서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온갖 경계[境]를 구별하여 알게 된다. 안계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안근에 색이 직접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러한 종자(種子)의 축적을 이숙(異熟)시키는 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안계의 모양처럼 이계ㆍ비계ㆍ설계ㆍ신계ㆍ의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색계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색은 안근에 직접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 안계가 여기에서 증상(增上)되는 것이 색계의 모양이다. 색계의 모양처럼 성계ㆍ향계ㆍ미계ㆍ촉계ㆍ법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안식계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안근에 인연한 색과 색과 유사한 것[似色]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종자의 축적이 이숙되는 아뢰야식을 안식계의 모양이라 한다. 안식계의 모양처럼 이식계ㆍ비식계ㆍ설식계ㆍ신식계ㆍ의식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처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계와 같으므로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숙지해야 한다.
016_0159_c_01L색온은 어떻게 건립하게 됩니까? 모든 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4대종(大種)이나 4대종의 소조색(所造色)이다. 4대종이란 무엇입니까?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지계입니까? 견고한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수계입니까? 유동적이면서도 축축한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화계입니까? 더운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풍계입니까? 가벼우면서도 움직이는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소조색입니까?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의 5근(根)과 색처ㆍ성처ㆍ향처ㆍ미처의 4처에 접촉 받는 일부분과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안근입니까? 4대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안식에 의지하는 정색(淨色)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이근입니까? 4대종에서 이루어진 것[所造]으로 이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비근입니까? 4대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비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설근입니까? 4대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설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신근입니까? 4대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신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색입니까? 4대종의 소조색으로 안근에 다다른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추색[麤]ㆍ세색[細]ㆍ고(高)ㆍ하(下)ㆍ정(正)ㆍ부정(不正)ㆍ빛ㆍ그림자ㆍ구름ㆍ연기ㆍ먼지ㆍ안개ㆍ밝음ㆍ어두움ㆍ형색(色)ㆍ표색(表色)ㆍ공일현색(空一顯色)을 가리킨다. 또 세 종류가 더 있으니, 묘색(妙色)ㆍ불묘색(不妙色)ㆍ구상위색(俱相違色)이다. 어떠한 것이 소리입니까? 4대종에 소조된 이근에 섭취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가의성(可意聲)이거나, 불가의성(不可意聲)이거나, 구상위성(俱相違聲)이거나, 집수대종위인성(執受大種爲因聲)이거나, 불집수대종위인성(不執受大種爲因聲)이거나, 구대종인성(俱大種因聲)이거나, 세소극성성(世所極成聲)이거나, 성소인성(成所引聲)이거나, 변계소기성(遍計所起聲)이거나, 성언소섭성(聖言所攝聲)이거나, 비성언소섭성(非聖言所攝聲)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향기입니까? 4대종에 소조된 비근에 섭취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좋은 향기[好香]ㆍ나쁜 향기[惡香]ㆍ평등향(平等香:몸에 좋은 냄새)ㆍ구생향(俱生香)ㆍ화합향(和合香)ㆍ변이향(變異香)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맛입니까? 4대종에 소조된 설근에 섭취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쓴맛, 신맛, 단맛, 매운맛, 짠맛, 담백한 맛이다. 가의미(可意味)이거나, 불가의미(不可意味)이거나, 구상위미(俱相違味)이거나, 구생미(俱生味)이거나, 화합미(和合味)이거나, 변이미(變異味)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을 접촉 받는 일부분이라 합니까? 4대종에서 조작되는 신근에 섭취된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매끄러움ㆍ까칠까칠함ㆍ가벼움ㆍ무거움ㆍ부드러움ㆍ헐거움ㆍ뻑뻑함ㆍ추움ㆍ배고픔ㆍ목마름ㆍ배부름ㆍ기력ㆍ무기력ㆍ답답함ㆍ가려움ㆍ끈끈함ㆍ병ㆍ늙음ㆍ죽음ㆍ피곤함ㆍ편안함ㆍ활력 따위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입니까?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다섯 종류의 색이 있으니, 극략색(極略色)ㆍ극형색(極逈色)ㆍ수소인색(受所引色)ㆍ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ㆍ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을 가리킨다.
수온을 어떻게 건립하게 됩니까? 6수신(受身)을 가리키는 것으로, 안촉(眼觸)에서 생겨나는 수이고, (耳觸)에서 생겨나는 수이고, 비촉(鼻觸)에서 생겨나는 수이고, 설촉(舌觸)에서 생겨나는 수이고, 신촉(身觸)에서 생겨나는 수이고, 의촉(意觸)에서 생겨나는 수를 가리킨다. 이러한 6수신은, 낙(樂)이기도 하고, 고(苦)이기도 하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기도 하다. 또 낙의 신수(身受), 고의 신수, 불고불락의 신수, 낙의 심수(心受), 고의 심수, 불고불락의 심수가 있다. 또 낙의 유미수(有味受), 고의 유미수, 불고불락의 유미수, 낙의 무미수(無味受), 고의 무미수, 불고불락의 무미수가 있다. 또 기호(嗜好)에 따르는 낙의 수온이 있고, 기호에 따르는 고의 수온이 있고, 기호에 따르는 불고불락의 수온이 있고, 출리(出離)에 따르는 낙의 수온이 있고, 출리에 따르는 고의 수온이 있고, 출리에 따르는 불고불락의 수온이 있다. 어떠한 것이 신수(身受)입니까? 다섯 종류의 식(識)에 상응하는 수(受)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심수(心受)입니까? 의식과 상응하는 수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유미수(有味受)입니까? 그 자체로 애착과 상응하는 수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무미수(無味受)입니까? 이 같은 애착에 상응하지 않는 수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기호에 따르는 수입니까? 다섯 가지 묘한 욕락(欲樂)에 상응하는 수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출리에 따르는 수입니까? 이 같은 애욕에 상응하지 않는 수를 가리킨다.
016_0160_b_01L어떻게 상온(想蘊)을 건립하게 됩니까? 6상신(想身)을 가리키는 것이니 안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이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비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설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신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의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다. 이 같은 상온에 연유하여 유상(有相)의 상온을 이해[了]하거나, 무상(無相)의 상온을 이해하거나, 소상(小想)을 이해하거나, 대상(大想)을 이해하거나, 무량(無量)한 상온을 이해하거나, 소유에 탐착하지 않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상온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유상(有相)의 상온입니까?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발성을 여읜 무상(無相)의 계정(界定)과 유정정(有頂定)의 상온 및 그 밖의 나머지 상온이다. 어떠한 것이 무상(無相)의 상온입니까? 그 밖의 나머지 상온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소상(小想)입니까? 욕계의 상온을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대상(大想)입니까? 색계의 상온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량한 상온입니까? 공무변처(空無邊處)와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상온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소유처의 소유(所有)에 탐착하지 않는 상온입니까? 무소유처의 상온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떻게 행온을 건립하게 됩니까? 6사신(思身)을 말하는 것이다. 안촉에서 생겨난 사(思)심소법이고, 이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비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설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신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의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다. 이 같은 사심소법에 연유해서 사심소법이 갖가지 선업을 짓게 되고, 사심소법이 잡염(雜染)하게 되고, 사심소법에서 분위차별(分位差別)을 짓게 되는 것이다. 또 이 같은 사심소법이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심소법(心所法)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함께 하는 것을 총괄해서 행온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을 그 밖의 다른 심소법이라 합니까? 작의(作意)ㆍ촉(觸)ㆍ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삼마지(三摩地)ㆍ혜(慧)ㆍ신(信)ㆍ참(慚)ㆍ괴(愧)ㆍ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ㆍ사(捨)ㆍ불해(不害)ㆍ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무명(無明)ㆍ의(疑)ㆍ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ㆍ사견(邪見)ㆍ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교(憍)ㆍ해(害)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망(忘)ㆍ염(念)ㆍ부정지(不正知)ㆍ산란(散亂)ㆍ수면(睡眠)ㆍ악작(惡作)ㆍ심(尋)ㆍ사(伺)이다.
016_0160_c_01L어떠한 것이 사(思)심소법입니까? 마음을 조작하는 의업(意業)이 그 바탕이다. 선품ㆍ불선품ㆍ무기품 가운데에서 그 마음을 부리는 것으로 업(業)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작의(作意)심소법입니까? 마음을 발휘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그 소연경(所緣境)에 처해서 마음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촉(觸)심소법입니까? 세 가지 화합에 의해 모든 근(根)이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그 바탕이다. 수온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욕(欲)심소법입니까? 그러한 것들의 인발(引發)에서 지어진 희망이 그 바탕이다. 정근(正勤)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승해(勝解)심소법입니까? 일을 결정하는 때에 그 결정된 바를 변동 없이 지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전향하지 못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염(念)심소법입니까? 습관적인 일을 마음속에 분명히 기억해서 잊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산란하지 않은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삼마지(三摩地)심소법입니까?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서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전일(專一)하게 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지혜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혜(慧)심소법입니까? 사물을 관찰함에 처해서 그 택법(擇法)하는 것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의심을 끊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016_0161_a_01L어떠한 것이 신(信)심소법입니까? 바탕을 갖추는 것이나 덕망을 갖추는 것이나 공능을 갖추는 것에 대한 인가(忍可)와 청정에 대한 바람이 그 바탕이다. 기꺼이 구하는 바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참(慚)심소법입니까? 모든 허물과 악행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을 멈추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괴(愧)심소법입니까? 모든 허물과 악행을 남들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업은 ‘참’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어떠한 것이 무탐(無貪)심소법입니까? 제유[諸有:有有]에 모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에 빠지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진(無瞋)심소법입니까? 모든 유정의 고(苦)와 고구(苦具)에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에 빠지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치(無癡)심소법입니까? 교증(敎證)의 보득(報得)에 연유해서 지혜로 결택(決擇)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에 빠지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근(勤)심소법입니까? 피갑(被甲)의 방편이 약해지거나 쇠퇴하거나 도중에 만족하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그 바탕을 삼는다. 선품(善品)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으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안(安)심소법입니까? 몸과 마음의 추중(麤重)을 쉬게 해서 몸과 마음을 홀가분하게 조절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일체의 장애를 없애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불방일(不放逸)심소법입니까? 정근ㆍ무탐ㆍ무진ㆍ무치에 머물러 모든 선법을 닦되 모든 유루법(有漏法)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복을 원만히 이루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사(捨)심소법입니까? 정근ㆍ무탐ㆍ무진ㆍ무치에 의지하여 잡염에 머무는 상온을 등지는 심법의 평등성(平等性), 심법의 정직성(正直性), 심법의 무공용(無功用)에 의지하는 성품이 그 바탕이다. 잡염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불해(不害)심소법입니까? 성내지 않는 선근(善根)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그 바탕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016_0161_b_01L어떠한 것이 탐(貪)심소법입니까? 삼계에 대한 애착이 그 바탕이다. 중고(衆苦)가 생겨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진(瞋)심소법입니까? 유정(有情)의 고(苦) 및 고구(苦具)에 마음이 노여워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편안하지 못하게 악행에 머무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만(慢)심소법입니까? 살가야견(薩迦耶見)에 의지해서 마음을 거만하게 가지는 것이 그 바탕이다. 불경스럽기에 괴로운 삶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명(無明)심소법입니까? 삼계의 무지(無知)가 그 바탕이다. 제법(諸法) 가운데 삿된 결정을 내리거나 어지럽게 의심을 내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의(疑)심소법입니까? 진제(眞諦)를 미심쩍어 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선품(善品)이 생기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살가야견입니까? 5취온(取蘊) 따위를 관찰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집착하는, 모든 인(忍)ㆍ욕(欲)ㆍ각(覺)ㆍ관(觀)ㆍ견(見)이 그 바탕이다. 모든 견취(見取)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변집견(邊執見)심소법입니까? 오취온 등을 관찰하고서 이를 가장 뛰어나다거나 최상이라거나 묘하다고 집착하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처중행(處中行)의 출리(出離)를 장애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견취견(見取見)심소법입니까? 갖가지 삿된 소견이나 삿된 소견에 의지하는 오취온 따위를 관찰하고서 이를 가장 뛰어나다거나 최상이라거나 묘하다고 집착하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바르지 못한 견해에 집착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계금취견(戒禁取見)심소법입니까? 갖가지 계율의 금지나 그 계율의 금지에 의지하는 5취온 등을 관찰하고서 이를 청정하다거나 해탈이라거나 출리라고 집착하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노력해도 과보가 없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사견(邪見)심소법입니까? 인을 비방하거나 과보를 비방하거나 그 작용을 비방하거나 그 실다운 일을 비방하거나 삿된 분별을 내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선근을 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기도 하고 불선이 생겨나는 것에서 업을 이루기도 하고 선업이 생겨나지 않는 것에서 업을 이루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사견에 있어서 증익견(增益見)은 몇 가지이고 손감견(損減見)은 몇 가지입니까? 네 종류가 증익견에 해당하는 것이니, 소지경(所知境)에 처해서 그 자체적인 성품이 차별되게 늘어난다고 여기는 까닭이고, 여러 가지 사견을 으뜸삼아 청정하게 늘어난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일체의 대부분이 손감견에 해당한다. 전제와 후제가 존재한다고 헤아리는 모든 견해에는 이 같은 다섯 가지 견해 중에서 어디에 귀속됩니까? 두 종류이거나 전부라고도 말한다. 분석할 수 없는 일[不可記事]에 해당하는 모든 견해는 이 같은 다섯 가지 소견 가운데에서 어디에 귀속됩니까? 두 가지 또는 전부에 귀속된다고도 말한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어떠한 허물을 관찰하셨습니까? 온ㆍ계ㆍ처에서 그 훼손되지 않는 것을 ‘나’라고 집착하는 다섯 가지 모양이다. 그들이 살가야견에 빠지게 되는 것을 관찰해 보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바로 이상과실(異相過失)이고, 무상과실(無常過失)이고, 부자재과실(不自在過失)이고, 무신과실(無身過失)이고, 불유공용해탈과실(不由功用解脫過失)이다. 5취온에서도 스무 가지의 살가야견이 생겨나는 것이니, 자아는 색에 의해 존재한다고 하거나, 색이 자아의 속성이라고 하거나, 또는 자아는 색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 또 이처럼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자아라고 헤아리거나, 자아는 식온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하거나, 식온이 자아의 속성이라고 하거나, 식온 가운데 자아가 존재한다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견해 가운데에서 몇 가지가 아견(我見)이고 몇 가지가 아소견(我所見)입니까? 이 가운데에서 다섯 가지만이 아견이고 나머지 열다섯 가지는 아소견이다. 색을 ‘자아’라고 헤아리는 것과 수ㆍ상ㆍ행ㆍ식을 자아라고 헤아리는 다섯 가지가 ‘아견’이다. 나머지 열다섯 가지는 ‘아소견’이다. 무슨 이유로 그 열다섯 가지가 아소견에 해당됩니까? 아소에 상응하기 때문이고, 아소에 수반되기 때문이고, 아소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살가야견에 따른 해설도 사물에 대해 확실히 요지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같은 사물에 대한 해설은 확실히 요지하는 것이 없으니, 마치 동아줄을 잘못 보고 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016_0162_a_01L어떠한 것이 분(忿)심소법입니까? 면전에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모양이니, 진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노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지팡이를 쥐고 분풀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한(恨)심소법입니까? 이 같은 일이 지나간 다음에도 진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 속에 간직해서 원망을 그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참지 못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부(覆)심소법입니까? 죄를 짓고도 다른 이가 이를 바르게 거론하는 때에, 치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허물을 감추려는 것이 그 바탕이다. 마음 속으로 뉘우치면서 편안하지 못하게 머무르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뇌(惱)심소법입니까? 앞에서 설명한 분심소법ㆍ한심소법ㆍ부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에 머물러서 눈물 흘리는 것이 그 바탕이다. 날뛰면서 악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고, 복이 아닌 것을 짓는 것에서 업을 이루고, 편안하지 못하게 머무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질(嫉)심소법입니까? 이익에 집착해서 다른 사람의 호강을 견디지 못하는 진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질투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마음이 근심스러워 편안하지 못하게 머무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간(慳)심소법입니까? 생활 필수품과 같은 이익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탐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몹시 인색하게 구는 것이 그 바탕이다.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광(誑)심소법입니까? 이익에 집착하는 탐심과 치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진실되지 않은 공덕을 거짓으로 현전(現前)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사명(邪命)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첨(諂)심소법입니까? 이익에 집착하는 치심소법과 탐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그릇된 방편을 꾸며 진실을 감추고 악을 행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다른 이의 교수(敎授)를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교(憍)심소법입니까? 나이가 젊거나 병이 없거나 장수하는 모습, 또는 하나의 유루법인 명예나 이익 같은 일에 의지하는 탐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들떠서 거리낌 없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수번뇌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해(害)심소법입니까? 진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애처롭게 여기거나 불쌍하게 여기거나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유정을 괴롭히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참(無慚)심소법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신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수번뇌를 보조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괴(無愧)심소법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고도 남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수번뇌를 조반(助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혼침(惛沈)심소법입니까? 우치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마음이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도거(掉擧)심소법입니까? 탐심소법과 욕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청정한 모양을 염두에 두기에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사마타(奢摩他)를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불신심소법입니까? 우치(愚癡)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여러 선법을 마음으로 견뎌내지 못하거나 마음속으로 이를 청정하게 여기지 않거나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게으름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해태(懈怠)심소법입니까? 우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잠에 취하여 늘 누워 있는 것을 즐기고 마음을 노력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선품의 방편을 닦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방일(放逸)심소법입니까? 해태심소법과 탐ㆍ진ㆍ치에 의지해서 선법을 닦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유루법에 처해 있음에도 마음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미워하고 싫어하여 손상시키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망념(妄念)심소법입니까? 여러 가지 번뇌가 그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어지러운 것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부정지(不正知)심소법입니까? 여러 번뇌가 혜심소법과 상응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이 같은 혜심소법에 연유해서 부정지심소법을 일으켜 신ㆍ구ㆍ의의 행을 훼손하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산란(散亂)심소법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이것에 다시 여섯 종류가 있으니 자성산란(自性散亂)ㆍ외산란(外散亂)ㆍ내산란(內散亂)ㆍ상산란(相散亂)ㆍ추중산란(麤重散亂)ㆍ작의산란(作意散亂)이다. 어떠한 것이 자성산란입니까? 5식신(識身)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외산란입니까? 선법을 올바로 닦는 때에 다섯 가지 묘한 욕락이 그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내산란입니까? 선법을 올바로 닦는 때에 혼침에 빠지거나 도거에 빠져서 미정(味定)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상산란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선법의 수행을 잘못 교시한 것을 그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추중산란입니까? 아와 아소의 집착에 의지하는 것 및 아만품(我慢品)의 추중(麤重)하는 세력에 기인하는 때문이니, 선법을 닦는 때에 이미 생겨난 일체의 수온에서 일어나는 아ㆍ아소 및 아만에서 간간이 잡되게 집수(執受)하여 그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작의산란입니까? 여승(餘乘)의 여정(餘定)에 의지하거나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이 흩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이것에 의지하거나 이 같은 정에 들어가게 되면 일체가 흩어져 이욕(離欲)을 능동적으로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016_0162_c_01L어떠한 것이 수면(睡眠)심소법입니까? 수면의 인연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우치(愚癡)의 일부분이 대략 그 바탕이다. 선(善)하기도 하고, 불선(不善)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시(時)이기도 하고, 비시(非時)이기도 하고, 응이(應爾)이기도 하고, 불응이(不應爾)이기도 하기에, 실념(失念)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악작(惡作)심소법입니까? 낙작(樂作)ㆍ불락작(不樂作)ㆍ응작(應作)ㆍ불응작(不應作)을 가리킨다. 이 우치(愚癡)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곧 후회하게 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선(善)하기도 하고 불선(不善)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시(時)이기도 하고, 비시(非時)이기도 하고 응이(應爾)이기도 하고 불응이(不應爾)이기도 하기에, 능히 심주(心住)를 장애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심(尋)심소법입니까? 사(思)심소법에 의지하거나 혜심소법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말과 그 이치를 헤아리는 작용이 있어 마음을 추중해서 전향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어떠한 것이 사(伺)심소법입니까? 사(思)심소법에 의지하거나 혜(慧) 심소법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과 이치를 세밀하게 헤아리는 작용이 있어 마음을 미세하게 전향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이 같은 두 종류의 그 머무는 것이 안정되거나 안정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심과 사, 두 종류의 행상은 서로 상대되는 것이기에 추중과 미세로써 그 차별을 건립하게 된다. 또 모든 선한 심법에 처해서 스스로 그 소치(所治)를 끊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되고, 번뇌와 수번뇌가 스스로 능치(能治)하는 것을 장애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016_0163_a_01L어떠한 것을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라 이름합니까? 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ㆍ무상이숙(無想異熟)ㆍ명근(命根)ㆍ중동분(衆同分)ㆍ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ㆍ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ㆍ이생성(異生性)ㆍ유전(流轉)ㆍ정이(定異)ㆍ상응(相應)ㆍ세속(勢速)ㆍ차제(次第)ㆍ시(時)ㆍ방(方)ㆍ수(數)ㆍ화합(和合) 등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득(得)입니까? 선법(善法)ㆍ불선법(不善法)ㆍ무기법(無記法)이 늘어나거나 또는 줄어든다고 임시로 세워서[假立] 그 성취를 일으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상정 불상응행법입니까? 변정천(遍淨天)의 욕을 이미 여의었으나 그 상계(上界)의 욕을 미처 여의지 못했기에 그 출리상(出離想)을 작의 심소법에 앞세우는 까닭이다. 그 불항행(不恒行)의 심ㆍ심소가 소멸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무상정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멸진정 불상응행법입니까? 무소유처의 욕을 이미 여의고서 유정천을 초월하되 그 잠식상(暫息想)을 작의 심소법에 앞세우는 까닭이다. 모든 불항행의 심ㆍ심소와 항행(恒行)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심ㆍ심소가 소멸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멸진정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무상이숙 불상응행법입니까? 무상(無想)의 유정천(有情天)에 이미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불항행의 심ㆍ심소가 소멸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무상이숙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명근 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 있어서 예전의 업에 감득(感得)하는 것이니, 그 머무는 때의 결정을 임시로 세워서 명근이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중동분 불상응행법입니까? 이러이러한 모든 유정들이 종류에 따라 그 자체가 서로 비슷한 것을 임시로 세워서 중동분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생 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의 제행에는 본래 금생의 유(有)가 없으나 임시로 세워서 생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노 불상응행법이라고 합니까? 중동분에서 제행이 상속하여 다르게 변화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늙는 것[老]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주 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 제행이 상속하여 파괴되지 않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머무는 것[住]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무상 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 제행이 상속하여 변하여 없어지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무상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명신 불상응행법입니까? 제법의 자체적인 성품에서 그 언설이 늘어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명신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구신 불상응행법입니까? 제법의 차별에서 그 언설이 늘어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구신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문신 불상응행법입니까? 두 가지에 의지하는 각종 문자를 임시로 세워서 문신이라 한다. 이 문이란 그 두 가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또 현(顯)이라고도 이름하니 능히 그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또 명자(名字)라고도 하니, 그 의미가 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이생성 불상응행법입니까? 성법(聖法)을 얻지 못한 것을 임시로 세워서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유전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유전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정이(定異)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의 갖가지 차별을 임시로 세워서 정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상응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서로 대칭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상응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세속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신속하게 유전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세속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차제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하나하나 차례대로 유전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차제라고 한다. 어떠한 것이 시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상속하여 유전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시간[時]이라고 한다. 어떠한 것이 방 불상응행법입니까? 동ㆍ서ㆍ남ㆍ북ㆍ사유(四維)ㆍ상ㆍ하의 인과가 서로 차별적인 것을 임시로 세워서 방향[方]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수 불상응행법입니까? 제행을 하나씩 하나씩 차별하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수라고 한다. 어떠한 것이 화합 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중연(衆緣)에 의해 모여지는 것을 임시로 세워서 화합이라 한다.
016_0163_b_01L어떻게 식온(識蘊)을 건립한다고 말합니까?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차별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을 심(心)이라 합니까? 온ㆍ계ㆍ처의 습기(習氣)에서 일체종자(一切種子)를 훈습(薰習)하는 아뢰야식을 가리킨다. 또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이름하고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은 모든 습기를 축적시키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을 의(意)라고 합니까? 일체 시(時)에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연하여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는 것으로 그 성품을 이루는 것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상응하니 아견(我見)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ㆍ무명(無明)을 가리켜 이 의(意)가 변행(遍行)한다고 한다. 일체의 선ㆍ불선ㆍ무기의 자리[位]에서 오직 성도(聖道)가 현전하는 것이 제외된, 멸진정(滅盡定)이나 무학지(無學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또 6식(識)은 그 식의 소멸이 간단없기에 의(意)라고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식입니까? 6식신, 즉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안식입니까? 안근이 색을 연하는 것에 의지하여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이식입니까? 비근이 소리를 연하는 것에 의지하여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비식입니까? 비근이 향기를 연하는 것에 의지하여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설식입니까? 설근이 맛을 연하는 것에 의지하여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신식입니까? 신근이 감촉을 연하는 것에 의지하여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의식입니까? 의근에 의지해서 그 법을 연하여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떻게 계를 건립하게 됩니까? 색온이 곧 식계이니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의 계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계 및 법계의 일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수온ㆍ상온ㆍ행온은 바로 법계의 일부분에해당하는것이고,식온에는 7식계가 있으니 안식계ㆍ이식계ㆍ비식계ㆍ설식계ㆍ신식계ㆍ의식계의 6식계 및 의계(意界)이다.
016_0163_c_01L어떻게 계법(界法)은 온에 소속되지 않습니까? 법계 내의 모든 것이 무위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무위법에는 다시 여덟 종류가 있으니, 선법진여(善法眞如)ㆍ불선법진여(不善法眞如)ㆍ무기법진여(無記法眞如)ㆍ허공(虛空)ㆍ비택멸(非擇滅)ㆍ택멸(擇滅)ㆍ부동멸(不動滅)ㆍ상수멸(想受滅)을 가리킨다. 선법진여란 어떠한 것입니까? 무아(無我)의성품이니,공성(空性)ㆍ무상(無常)ㆍ실제(實際)ㆍ승의(勝義)ㆍ법계(法界)라고도 이름한다. 어째서 진여를 진여라고 이름합니까? 그 자성이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진여를 무아상(無我相)이라 이름합니까? 두 종류의 자아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진여를 공성이라 이름합니까? 일체의 잡염에 천류(遷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무상이라 이름합니까? 일체의 모양이 모두 적멸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실제라고 이름합니까? 전도됨이 없이 소연하는 성품을 가리킨다. 어째서 다시 승의라고 이름합니까? 가장 수승한 성지(聖智)가 행해지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법계라 이름합니까? 모든 성문과 독각 및 모든 부처님께서 그 묘법을 소의(所依)하시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선법진여와 마찬가지로 불선법진여와 무기법진여도 이러함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허공입니까? 색이 없는 성품을 가리킨다. 일체의 조작된 업을 수용하는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비택멸입니까? 이것이 소멸해도 이계(離繫)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택멸입니까? 이것이 소멸하게 되면 바로 이계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부동입니까? 변정천의 욕을 이미 여의었으나, 미처 상계(上界)의 욕을 여의지 못하고 단지 괴로움과 즐거움의 소멸이 유추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것이 상수멸입니까? 무소유처의 욕을 이미 여의었으되 잠식상(暫息想)을 작의 심소법에 앞세우는 까닭에, 모든 불항행(不恒行)의 심ㆍ심소와 항행(恒行)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심ㆍ심법이 소멸한 무위법이다. 또 5종색이나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 및 여기서 해설한 여덟 가지 무위법을 총괄적으로 법계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처를 건립한다고 합니까? 10색계가 바로 10색처(色處)이고, 7식계가 바로 7식처이고 법계가 바로 법처이다.
016_0163_c_20L云何建立處?謂十色界卽十色處,七識界卽意處,法界卽法處。
016_0164_a_01L 이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모든 온ㆍ계ㆍ처가 3법에 소속되는 것으로, 바로 색온ㆍ법계ㆍ의처를 가리킨다. 안근과 안계에 대해 설명한 것처럼, 만약 안근이 있으면 안계도 있어야 합니까? 안계가 있게 되면 안근도 있게 됩니까? 혹 안근만이 있고 안계가 없는 것을 ‘아라한 최후의 안근’이라고 말한다. 혹 안계는 있으나 안근이 없다는 것은, 난각(卵殼)의 갈라람(羯邏藍)1)에 처한 때나 알부담(頞部曇)2)에 처한 때나 폐시(閉尸)3)에 처한 때처럼 모태 속에 있어서 미처 안근을 얻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가령 있었다가 잃게 되거나, 혹은 무색계의 이생(異生)이 안근의 인(因)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안계가 있어서 안근도 있다는 것은 그 밖의 지위라고 말한다. 또 안근도 없고 안계가 없다는 것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계에 이미 들어간 것과 여러 성자(聖者)가 무색계에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안근이 안계와 함께 하는 경우처럼, 이근ㆍ비근ㆍ설근도 이계ㆍ비계ㆍ설계를 동반하면서 그 처소에 따라 소멸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근과 의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만약 의근이 있으면 의계도 있어야 합니까? 의계가 있게 되면 의근도 있어야 합니까? 혹 의근만이 있고 의계가 없는 것을 아라한 최후의 의근이라고 말한다. 혹 의계는 있으나 의근이 없다는 것은 멸진정에 처한 사람이 의근의 인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혹 의근도 있고 의계도 있다는 것은 여타의 지위를 가리킨다. 또 의근도 없고 의계도 없다는 것이란, 무여의열반의 계에 이미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 만약 어떤 지위(地位)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경우, 즉시 그 같은 지위에 해당하는 안근으로 그 같은 지위에 있는 색을 볼 수 있습니까? 그 같은 지위에 해당하는 안근을 써서 다시 그 같은 지위에 있는 색이나 또는 그 밖의 지위의 색을 보게 된다는 것은, 만약 욕계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경우, 욕계에 미치는 안근으로 욕계(欲界)의 색을 보거나 색계에 미치는 안근으로 색계(色界)의 색을 보거나 상지(上地)에 해당하는 안근을 써서 하지(下地)의 색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안근으로 색을 상대하는 것처럼 이근으로 소리를 상대하는 것도 욕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와 같고 색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와 같다. 만약 욕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 즉시 욕계에 미치는 비근ㆍ설근ㆍ신근으로 다시 욕계에 미치는 향기ㆍ미각ㆍ감촉을, 냄새 맡고 맛보고 지각하게 된다. 만약 색계에서 태어나 자라난 경우에는 즉시 색계에 미치는 신근으로 자신이 태어난 지위의 감촉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그 세계 자체가 정(定)으로 이루어져 향기와 미각이 없고 단식(段食)에 대한 탐욕도 여읜 때문이다. 이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색계에는 비식과 설식이 없다. 만약 욕계에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 즉시 욕계에 미치는 의근으로 삼계의 법과 무루법을 요지하게 된다. 욕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것처럼 색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도 이와 같다. 만약 무색계에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 무색계에 미치는 의근으로 무색계에 미치는 자신이 태어난 지위에 존재하는 법과 무루법을 알게 된다. 만약 무루의 의근으로 삼계의 법과 무루법을 안다면, 어째서 모든 온에 이와 같은 차제가 있어야 합니까? 식에 연유하여 머물기 때문에 네 종류의 식주처(識住處)와 그 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전자는 후자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그 색의 상으로 접수하기 때문이고, 그 접수 받는 대로 깨달아 알기 때문이고, 그 요지하는 대로 사(思)를 이루기 때문이고, 사를 이루는 대로 각각의 처소에 따라 구별하여 알기 때문이다. 또 그 염오(染汚)와 청정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같은 처소에서 염정(染淨)을 일으키거나 그 접수받는 것에 연유해서 모양을 취하고 조작하기 때문에 염오이거나 청정하게 된다. 소염오(所染汚)이거나 소청정(所淸淨)이거나 모두 이 같은 이치에 연유해서 온의 차제를 해설하는 것이다.
016_0164_c_01L어째서 여러 계에 이와 같은 차제가 있는 것입니까? 세간사(世間事)의 차별에 따라 유전되기 때문이다. 세간사의 차별에 따라 유전된다는 것은 모든 세간에서의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서로 만나고 나면 다시 서로 간에 인사를 하게 되고 인사를 하고 나서야 목욕을 하고 향을 바르고 화관을 쓰게 된다. 그 다음에 갖가지 좋은 음식을 대접받게 되고 그 다음에 갖가지 이부자리와 시녀를 대접받게 되는 것처럼, 이 같은 연후에야 의계가 여러 처로 분별되는 것이니 내계(內界)에도 차제가 있는 까닭에 외계를 건립하게 되고, 또 이 같은 차제에 따라서 10계를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계(界)의 차제가 이러한 것처럼 처(處)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온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모든 소유색(所有色)을 말하는 것이니, 과거이거나 현재이거나 미래이거나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추색이거나 세색이거나 열악하거나 수승하거나 멀거나 가까운 것에 해당한다. 이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총괄해서 1색온(色蘊)이라 해설하는 것은 ‘축적된다는 이치’ 때문이니, 마치 재화가 쌓인 것과도 같다. 이같이 해서 식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고통스러운 모양이 광대한 까닭에 온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마치 커다란 재목이 쌓여 있는 것[蘊]과도 같으니, 계경(契經)의 말씀대로 순대고온(純大苦蘊)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또 잡염(雜染)이라는 무거운 짐을 메게 되는 까닭에 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마치 어깨에 짐을 메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계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일체법의 종자가 된다는 이치이니, 아뢰야식 내에 있는 제법의 종자를 계라는 이름으로 해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는 바로 인(因)의 이치이다. 또 능동적으로 지속시키는[能持] 자체적인 모양의 이치가 계의 이치이기도 하고, 또 인과를 능동적으로 지속시키는 성품의 이치가 계의 이치이기도 하다. 처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식(識)이 자라나고 태어나는 문(門)의 이치가 바로 처의 이치이니, 그 종자의 이치를 숙지해야만 한다.
마치 부처님 말씀처럼 색(色)은 물을 끓일 때 거품이 일어 모이는 것과 같고, 수(受)는 물거품이 떠 있는 것과 같고, 상(想)은 아지랑이 같고, 행(行)은 파초와 같고, 식(識)은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어떠한 이치에서 색온은 물을 끓일 때 거품이 일어 모이는 것과 같다고 하며, 수온은 물거품이 떠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상온은 아지랑이와 같다고 하며, 행온은 파초와 같다고 하며, 식온은 환상과도 같다고 합니까? 무아(無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청정함을 여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그 미경(味境)의 세력이 감소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견고하거나 실답지 않은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