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178_c_01L대승아비달마집론 제4권
016_0178_c_01L大乘阿毘達磨集論卷第四


무착보살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016_0178_c_02L無著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 제품 ②
016_0178_c_04L決擇分中諦品第一之二
집제(集諦)란 무엇입니까?
모든 번뇌 및 번뇌의 증상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업을 총괄적으로 집제라 이름한다. 그러나 박가범(薄伽梵)의 가장 수승한 설법에 따르면 애(愛)이거나 후유애(後有愛)이거나 희탐구행애(喜貪俱行愛)이거나 피피희락애(彼彼喜樂愛)를 집제라 이름하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수승하다는 것’이란 그 변행(遍行)의 이치를 지칭한 것이다. 애착에 연유해서 여섯 가지 변행의 이치를 구비하는 까닭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그 여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사변행(事遍行)이고, 두 번째는 위변행(位遍行)이고, 세 번째는 세변행(世遍行)이고, 네 번째는 계변행(界遍行)이고, 다섯 번째는 구변행(求遍行)이고, 여섯 번째는 종변행(種遍行)이다.
016_0178_c_05L云何集諦謂諸煩惱及煩惱增上所生諸業俱說名集諦然薄伽梵隨最勝說若愛若後有愛若喜貪俱行愛若彼彼喜樂愛是名集諦言最勝者是遍行義由愛具有六遍行義是故最勝何等爲六一事遍行二位遍行三世遍行四界遍行五求遍行六種遍行
번뇌란 무엇입니까?
중생수(衆生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연기(緣起)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경(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삿된 행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계(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무리 짓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번뇌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8_c_13L云何煩惱謂由數故相故緣起故界故相應故差別故邪行故界故故斷故觀諸煩惱
어떠한 것이 중생수(衆生數)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여섯 가지와 열 가지를 가리킨다. 여섯 가지는 탐(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의(疑)ㆍ견(見)을 말하고, 열 가지는 앞에서의 다섯 가지와 견을 다시 다섯 가지 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으로 말한다.
016_0178_c_16L何等數故謂或六或十六謂貪無明十謂前五見又分五謂薩迦耶見邊執見邪見見取戒禁取
어떠한 것이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만약 법이 생겨나는 때 그 모양이 적정(寂靜)하지 못하다면, 이같이 생겨나는 것에 기인해서 심ㆍ신이 그 적정하지 못함을 상속하여 전향하는 것이 번뇌의 모양이다.
016_0178_c_19L何等相故謂若法生時相不寂靜此生故身心相續不寂淨轉是煩惱相
016_0179_a_01L어떠한 것이 연기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번뇌의 수면욕(隨眠欲)을 영구히 끊지 못한 때문이고, 순번뇌법(順煩惱法)이 현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고, 바르지 못한 사유의 현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번뇌가 생겨나는 것을 연기라고 이름한다.
016_0178_c_21L何等緣起故謂煩惱隨眠未永斷故順煩惱法現在前故不正思惟現前起故如是煩惱方乃得生是名緣起
어떠한 것이 경계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일체의 번뇌를 써서 그 일체 번뇌의 소연경(所緣境)이 되는 것 및 여러 가지 번뇌사(煩惱事)를 연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욕계의 번뇌 중에서 무명ㆍ견ㆍ의를 제외한 여타의 번뇌는 그 상지(上地)를 연하는 경이 되지 못하고, 상지의 여러 번뇌도 하지(下地)를 연하는 경이 되지 못하니, 이는 그 지(地)에 해당하는 욕망을 여읜 때문이다. 또 멸제와 도제를 연하는 여러 번뇌는 멸제와 도제를 직접 연하는 경이 되지 못하고, 단지 그것에 의지해서 허망하게 일어난 분별에 연유해서만 소연이 된다고 해설한다. 또 번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연무사(緣無事)와 연유사(緣有事)이다. 연무사란 견과 그 견에 상응하는 법이고, 여타의 번뇌를 연유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79_a_02L何等境界故謂一切煩惱還用一切煩惱爲所緣境及緣諸煩惱事又欲界煩惱除無明見疑餘不能緣上地爲境上地諸煩惱不能緣下地爲境已離彼地欲故又緣滅道諦諸煩惱不能親緣滅道爲境唯由依彼妄起分別說爲所緣又煩惱有二種謂緣無事及緣有事緣無事者謂見及見相應法所餘煩惱名緣有事
어떠한 것이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탐(貪)이 진(瞋)과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진과 의(疑)의 경우도 이와 같다. 나머지는 모두 상응하는 것으로 탐과 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진이 탐ㆍ만(慢)ㆍ견(見)과 상응하지 않으면 만도 진(瞋)ㆍ의(疑)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무명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일체 번뇌에 상응하는 무명이고, 두 번째는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니, 불공무명이란 진제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견이 진ㆍ의와 상응하지 않고, 의는 탐ㆍ만ㆍ견과 상응하지 않으며, 분(忿) 따위의 수번뇌도 서로간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참(無慚)ㆍ무괴(無愧)는 일체의 불선품(不善品) 가운데에서 항상 서로 상응하고,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도 일체의 염오품(染汚品) 가운데에서 항상 서로 상응한다.
016_0179_a_11L何等相應故謂貪不與瞋相應如瞋疑亦爾餘皆得相應如貪瞋亦爾瞋不與貪慢見相應慢不與瞋疑相無明有二種一一切煩惱相應無二不共無明不共無明者謂於諦無智見不與瞋疑相應疑不與貪見相應忿等隨煩惱更互不相應無愧於一切不善品中恒共相應惛沈掉擧不信懈怠放逸於一切染污品中恒共相應
016_0179_b_01L어떠한 것이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여러 번뇌가 온갖 이치에 의지하여 갖가지 문(門)의 차별을 세우는 것으로, 소위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ㆍ폭류(瀑流)ㆍ액(軶:멍에)ㆍ취(取)ㆍ계(繫)ㆍ개(蓋)ㆍ주(柱)ㆍ올(杌)ㆍ구(垢)ㆍ소(燒)ㆍ해(害)ㆍ전(箭)ㆍ소유악행(所有惡行)ㆍ누(漏)ㆍ궤(궤)ㆍ열(熱)ㆍ뇌(惱)ㆍ쟁(諍)ㆍ치연(熾然)ㆍ조림(稠林)ㆍ구애(拘礙) 등이다.
016_0179_a_21L何等差別故謂諸煩惱依種種義立種種門差別所謂結隨眠隨煩惱暴流株杌惡行熾然稠林拘礙等
결(結)에는 몇 종류가 있습니까? 또 무엇이 결이고, 어느 처에 결이 있습니까?
결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무명결(無明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의결(疑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이다.
016_0179_b_02L結有幾種云何結何處結耶結有九謂愛結恚結慢結無明結見結疑結嫉結慳結
애결이란 3계의 탐결에 계류받기 때문에 삼계를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해서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해서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b_05L愛結者謂三界貪愛結所繫故不厭三界由不厭故廣行不善不行諸善由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에결이란 유정에게 있는 고 및 순고법(順苦法)이 심법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 에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에경(恚境)의 모양에 처해서 심법이 이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해서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리세의 고를 초래해서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b_08L恚結者謂於有情苦及順苦法心有損害恚結所繫故於恚境相心不棄不棄捨故廣行不善不行諸善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016_0179_c_01L만결이란 일곱 가지 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하열만(下劣慢:卑慢)ㆍ사만(邪慢)이다. 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과만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만과만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아만이란 5취온에 처해서 아ㆍ아소의 존재를 관찰하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증상만은 법을 아주 수승하게 증득하지 못하고도 자기가 이미 법을 아주 수승하게 증득하였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하열만은 자기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을 자기보다 조금 못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사만은 공덕이 없는데도 자기에게 공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이처럼 만결에 계류받는 까닭에 아ㆍ아소를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아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아ㆍ아소를 집착해서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b_12L慢結者卽七慢謂慢過慢慢過慢增上慢下劣慢邪慢慢者謂於下劣計己爲勝或於不相似計己相似心擧爲性過慢者謂於相似計己爲或復於勝計己相似心擧爲性過慢者謂於勝己計己爲勝心擧爲我慢者謂於五取薀觀我我所擧爲性增上慢者謂於未得上勝證計己已得上勝證法心擧爲性劣慢者謂於多分勝計己少分劣擧爲性邪慢者謂實無德計己有德心擧爲性慢結所繫故於我我所不能了知不了知故執我我所廣行不不行諸善由此能招未來世苦苦相應
무명결이란 이른바 삼계의 무지, 무명에 계박된 까닭에 고법과 집법에서 능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선을 널리 행하고, 모든 선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에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c_04L無明結者謂三界無智無明結所繫於苦法集法不能解了不解了故廣行不善不行諸善由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견결이란 세 가지 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이다. 견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삿되게 출리(出離)하고자 하는 허망한 분별에서 허망한 것을 추구하여 마침내 집착이 왕성해진다. 삿되게 출리하려는 그 허망함에 집착해서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c_08L見結者卽三見謂薩迦耶見邊執見邪見見結所繫故於邪出離妄計追求妄興執著於邪出離妄執著已行不善不行諸善由此能招未來世與苦相應
취결이란 견취결(見取結)과 계금취결(戒禁取結)이다. 취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삿된 출리의 방편에 대해서 허망하게 분별 내어 집착하게 된다. 삿된 출리의 방편을 허망하게 집착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c_13L取結者謂見取戒禁取取結所繫故於邪出離方便妄計執著以妄執著邪出離方便故廣行不善不行諸善由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의결이란 진제에 대해서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킨다. 의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불ㆍ법ㆍ승의 삼보에 대한 의혹이 허망하게 생겨난다. 이처럼 의심 내는 까닭에 삼보의 처소에서 바른 행을 닦지 못하게 되고, 삼보의 처소에서 바른 행을 닦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c_17L疑結者謂於諦猶豫疑結所繫故佛法僧寶妄生疑惑以疑惑故於三寶所不修正行以於三寶所不修正行故廣行不善不行諸善由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016_0180_a_01L질결이란 이로움에 탐닉해서 다른 사람의 호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것을 가리킨다. 질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자신의 이익을 아끼고 중히 여겨서 법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이로움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79_c_22L嫉結者謂耽著利養不耐他榮發起心妒嫉結所繫故愛重利養不尊敬重利養故廣行不善不行諸善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간결이란 이로움에 탐닉하여 생활필수품에 대한 인색한 마음을 가리킨다. 간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저축하는 것만을 아껴서 원리법(遠離法)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저축하는 것만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016_0180_a_03L慳結者謂耽著利養於資生具其心悋惜慳結所繫故愛重畜積不尊遠重畜積故廣行不善不行諸善此能招未來世苦與苦相應
박(縛)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박(貪縛)ㆍ진박(瞋縛)ㆍ치박(癡縛)이다. 탐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괴고(壞苦)에 처하도록 묶어지고, 진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고고(苦苦)에 처하도록 묶어지고, 치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행고(行苦)에 처하도록 묶어진다. 또 탐박ㆍ진박ㆍ치박에 의지하는 까닭에 선법의 가행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를 이름하여 박이라 하는 것이다.
016_0180_a_07L縛有三種謂貪縛瞋縛癡縛由貪縛縛諸有情令處壞苦由瞋縛故諸有情令處苦苦由癡縛故縛諸有情令處行苦又依貪瞋癡故於善加行不得自在故名爲縛
016_0180_b_01L수면에는 일곱 종류가 있으니, 욕애수면(欲愛隨眠)ㆍ진에수면(瞋恚隨眠)ㆍ유애수면(有愛隨眠)ㆍ만수면(慢隨眠)ㆍ무명수면(無明隨眠)ㆍ견수면(見隨眠)ㆍ의수면(疑隨眠)이다. 욕애수면은 그 욕탐분(欲貪分)이 추중(麤重)한 것을 가리킨다. 진에수면은 그 진에품(瞋恚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만수면은 만품(慢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무명수면은 무명품(無明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견수면은 견품(見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의수면은 의품(疑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만약 욕구를 여의지 못하면 그 욕애와 진에에 연유된 수면이 증가되고, 유구(有求)를 여의지 못하면 유애에 연유된 수면이 증가하고, 삿된 것을 여의지 못하고 범행(梵行)을 추구하면 만ㆍ무명ㆍ견ㆍ의에 연유된 수면이 증가하게 된다. 중생이 약간의 대치도(對治道)를 성취하고 교만을 부려서 성제(聖諦)에 어리석으면서도 외도(外道)나 사도(邪道)의 해탈법이나 그 해탈의 방편을 허망하게 분별해내면, 마침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인 정법과 비나야(毘奈耶) 가운데에서 머뭇거리면서 의혹하게 된다.
016_0180_a_12L隨眠有七謂欲愛隨眠瞋恚隨眠愛隨眠慢隨眠無明隨眠見隨眠隨眠欲愛隨眠者謂欲貪品麤重恚隨眠者謂瞋恚品麤重有愛隨眠謂色無色貪品麤重慢隨眠者慢品麤重無明隨眠者謂無明品麤見隨眠者謂見品麤重疑隨眠者謂疑品麤重若未離欲求者由欲愛瞋恚隨眠之所隨增未離有求者有愛隨眠之所隨增未離邪梵行求由慢無明疑隨眠之所隨增彼衆生得少對治便生憍慢愚於聖虛妄計度外邪解脫解脫方便佛聖教正法毘奈耶中猶豫疑惑
수번뇌란 그 과보를 이루는 여러 가지 번뇌가 모든 수번뇌이다. 수번뇌는 번뇌는 아니지만 번뇌가 제거되고도 남아 있는 염오이기에 행온에 소속되는 모든 심소법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탐 따위의 여섯 가지 번뇌를 제외한 그 여타의 염오가 행온에 수렴된, 분(忿) 등의 여러 가지 심소법이다. 따라서 탐ㆍ진ㆍ치를 ‘수번뇌의 심소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번뇌로 인해서 그 시법이 따라서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심법을 고뇌에 따르게 해서 그 염착을 여의지 못하게 되고 해탈하지 못하게 되고 장애를 끊지 못하게 되는 까닭에 수번뇌라고 이름하니, 이는 세존께서 “너희들이 긴긴밤을 탐ㆍ진ㆍ치에 고뇌받아 어지러웠으니, 그 마음이 항상 오염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016_0180_b_03L隨煩惱者謂所有諸煩惱皆是隨煩有隨煩惱非煩惱謂除煩惱所餘染污行薀所攝一切心所法此復云謂除貪等六煩惱所餘染污行薀所攝忿等諸心所法又貪瞋癡名隨煩惱心所法由此隨煩惱隨惱於心令不離染令不解脫令不斷障故名隨煩惱如世尊說汝等長夜爲貪瞋癡隨所惱亂心恒染污
전(纏)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혼침ㆍ수면ㆍ도거ㆍ악작ㆍ질ㆍ간ㆍ무참ㆍ무괴이다. 누차 왕성하게 마음을 휘감는 까닭에 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지(止)를 수습하는 것에 의해서 그 버리는 모양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그것의 소의(所依)가 되는 범행 따위에 수렴되는 청정한 시라(尸羅)를 행하는 때에도 마음을 휘감게 되는 것이다.
016_0180_b_12L纏有八種謂惛沈睡眠掉擧惡作無慚無愧數數增盛纏繞於心名爲纏謂隨修習止擧捨相及彼所依梵行等所攝淨尸羅時纏繞於心
폭류(瀑流)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욕폭류(欲瀑流)ㆍ유폭류(有瀑流)ㆍ견폭류(見瀑流)ㆍ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그 흐르는 것이 세차게 울리는 것이 폭류의 이치이니, 잡염에 따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욕폭류는 이 같은 욕구를 훈습(薰習)하게 되고, 두 번째의 유폭류의 유구(有求)를 훈습하게 되고, 그 밖의 두 가지는 삿된 것의 훈습으로 범행을 구하는 것이니, 능의(能依)와 소의(所依)가 상응하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016_0180_b_16L暴流有四謂欲暴流有暴流見暴流無明暴流隨流漂鼓是暴流義隨順雜染故初是習欲求者第二是習有求者後二是習邪梵行求者能依所依相應道理故
액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욕액(欲軶)ㆍ유액(有軶)ㆍ견액(見軶)ㆍ무명액(無明軶)이다. 그 이계(離繫)를 장애하는 것이 액의 이치이니, 청정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 순서에 따라 세 가지의 구하는 것의 훈습이 상응하여 현행(現行)하게 된다.
016_0180_b_21L軛有四種謂欲軛有軛見軛無明軛障礙離繫是軛義違背淸淨故此亦隨其次第習三求者相應現行
016_0180_c_01L취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쟁근(諍根)을 집취(執取)해서 그 후유(後有)를 집취하는 것이 취의 이치이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욕심에 탐착하는 계(繫)와 박(縛)에 연유해서 그 염착을 탐닉하는 것으로 인을 삼는 것을 모든 속인들이 서로 다투는 경우이니, 이같이 투쟁하는 근본은 바로 첫 번째의 욕취에 해당한다. 욕심에 탐착하는 계와 박에 연유해서 그 염착을 탐닉하는 것으로 인을 삼는 것은 모든 출가인들이 서로 다투는 경우이니, 이 같은 투쟁의 근본은 바로 나중의 세 가지 취에 해당한다. 예순두 가지의 견취(見取)는 견취에 해당하는 것이고, 제각각 별도의 계율로 금하는 바가 많아서 고행하는 것이 계금취이고, 또 그러한 것에 의지하는 살가야견이 아어취(我語取)이다. 그러므로 견취와 계금취로 인해서 여러 외도의 무리들끼리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고, 아어취로 인해서 여러 외도의 무리들끼리 서로 쟁론을 벌이지 않고 바로 정법과 논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집착이 바로 논쟁의 근본이다. 다시 능인취(能引取)가 있으니 후유(後有)의 고가 이숙되는 까닭에 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0_c_01L取有四種謂欲取見取戒禁取我語執取諍根執取後有是取義所以者何由貪著欲繫縛耽染爲因諸在家者更相鬪諍此諍根本是第一取由貪著見繫縛耽染爲因諸出家者更相鬪諍此諍根本是後三取六十二見趣是見取各別禁戒多分苦行是戒禁取彼所依止薩迦耶見是我語取由見取戒禁取諸外道輩更相諍論由我語取諸外道輩互無諍論與正法者互有諍論如是執著諍論根本復能引取後有苦異熟故名爲取
계(繫)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탐욕신계(貪欲身繫)ㆍ진에신계(瞋恚身繫)ㆍ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ㆍ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이다. 정의(定意)를 장애하는 성품의 무리인 까닭에 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이 같은 네 가지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인이 되는 때문이다. 재물을 탐애하는 따위가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다투는 일이나 바르지 못한 행이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행하기 힘든 것을 계율로 단속받는 고뇌도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정리(正理)와 어긋나게 경계를 추구하는 것도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016_0180_c_13L繫有四種謂貪欲身繫瞋恚身繫禁取身繫此實執取身繫以能障礙定意性身故名爲繫所以者何能爲四種心亂因故謂由貪愛財物等因令心散亂於鬪諍事不正行爲因令心散亂於難行戒禁苦惱爲因令心散亂不如正理推求境界爲因令心散亂
016_0181_a_01L개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욕탐개(欲貪蓋)ㆍ진에개(瞋恚蓋)ㆍ혼침수면개(昏沈睡眠蓋)ㆍ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ㆍ의개(疑蓋)ㆍ낙출가위(樂出家位)ㆍ각사행위(覺邪行位)ㆍ지거사위(止擧捨位)의 선품을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개의 이치이다.
016_0180_c_21L蓋有五種謂貪欲蓋瞋恚蓋惛沈睡眠蓋掉擧惡作蓋疑蓋能令善品不得顯了是蓋義謂於樂出家位覺邪行位止擧捨位
주올(株)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주올(貪株)ㆍ진주올(瞋株)ㆍ치주올(癡株)이다. 이는 탐ㆍ진ㆍ치에 연유해서 예전에 익힌 것을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다. 탐 등으로 그 행을 삼기에 마음이 다스리지 못해서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어 해탈을 이루기 힘들게 된다.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이 같은 행을 끊기 힘들게 하는 까닭에 주올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a_02L株杌有三謂貪株杌瞋株杌癡株杌由依止貪瞋癡先所串習爲方便故成貪等行心不調順無所堪能難可解脫令諸有情難斷此行故名株杌
구(垢)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구(貪垢)ㆍ진구(瞋垢)ㆍ치구(癡垢)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해서 이 같은 시라(尸羅)의 학처(學處)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처소에 범행을 닦는 지혜로운 이가 함께 머무르다가 마을이나 외진 곳에서 이 같은 범죄를 목격하고서 “이 장로가 이와 같은 일을 범했고 이와 같이 행하였습니다”라고 공표되는 마을이나 외진 곳에서 법의를 부정하게 염색했거나 바느질한 일 따위를 구(垢)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a_06L垢有三種謂貪垢瞋垢癡垢由依止貪瞋癡故毀犯如是尸羅學處由此有智同梵行者或於聚落或閑靜處見已作如是言此長老作如是事如是行爲聚落刺點染不淨說名爲
소해(燒害)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소해(貪燒害)ㆍ진소해(瞋燒害)ㆍ치소해(癡燒害)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생사의 소해를 받는 까닭에 소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a_12L燒害有三謂貪燒害瞋燒害癡燒害由依止貪瞋癡故長時數受生死燒故名燒害
전(箭)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전(貪箭)ㆍ진전(瞋箭)ㆍ치전(癡箭)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유(有)에서 유가 깊이 일어나는 것을 추구해서 이를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불ㆍ법ㆍ승의 삼보와 고ㆍ집ㆍ멸ㆍ도의 4제에 늘 의혹을 내는 까닭에 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a_14L箭有三種謂貪箭瞋箭癡箭由依止貪瞋癡故於有有具深起追求相續不絕於佛法僧苦集滅道常生疑惑故名爲箭
소유(所有)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소유(貪所有)ㆍ진소유(瞋所有)ㆍ치소유(癡所有)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재물을 축적하느라 두려움이나 원한이 많아져 그 살아가는 것이 어지러운 까닭에 소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a_18L所有有三謂貪所有瞋所有癡所有由依止貪瞋癡故積畜財物有怖有多住散亂故名所有
016_0181_b_01L악행(惡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악행(貪惡行)ㆍ진악행(瞋惡行)ㆍ치악행(癡惡行)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언제나 신ㆍ어ㆍ의의 악행을 저지르는 까닭에 악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이 같은 탐ㆍ진ㆍ치의 문에 의지하여 한량없는 악행과 불선한 행이 널리 생겨나는 까닭에,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모든 유정이 세간에서의 소유에 애착하는 것으로 인(因)을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고, 세간을 분별 내어 그 원상(怨相)으로 인을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탐ㆍ진ㆍ치를 악행이라고도 이름하고 불선근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a_21L惡行有三謂貪惡行瞋惡行癡惡行由依止貪瞋癡故恒行身語意惡行故名惡行又卽依此貪瞋癡門廣生無量惡不善行故建立三不善根以者何以諸有情愛味世閒所有爲因行諸惡行分別世閒怨相爲因行諸惡行執著世閒邪法爲因行諸惡是故此貪瞋癡亦名惡行亦名不善根
누(漏)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이다. 마음을 연달아 쏟아 흩트리되 끊어지지 않기에 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엇 때문입니까?
외문(外門)에 의지하여 쏟아져 내리는 까닭에 욕루를 건립하는 것이고, 내문(內門)에서 쏟아져 내리는 까닭에 유루를 건립하는 것이고, 그 두 가지의 소의문(所依門)에 의지하여 쏟아져 내리는 까닭에 무명루를 건립하는 것이다.
016_0181_b_07L漏有三種謂欲漏有漏無明漏令心連注流散不絕故名爲漏此復云何依外門流注故立欲漏依內門流注故立有漏依彼二所依門流注故立無明漏
궤(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궤(貪匱)ㆍ진궤(瞋匱)ㆍ치궤(癡匱)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유(有) 및 생필품을 추구하되 만족을 모르기에 언제나 가난한 중고에 고뇌하게 되므로 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b_12L匱有三種謂貪匱瞋匱癡匱由依止貪瞋癡故於有及資生具恒起追求無有厭足常爲貧乏衆苦所惱是故名匱
열(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열(貪熱)ㆍ진열(瞋熱)ㆍ치열(癡熱)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정리에 의지하지 않고 여러 모양에 집착하거나 그 좋아하는 바에 집착하는 것이다. 모양에 집착하거나 그 좋아하는 바에 따르는 것에 연유하여 몸과 마음을 애태워서 괴롭히기에 열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b_16L熱有三種謂貪熱瞋熱癡熱由依止貪瞋癡故不如正理執著諸相執著隨好由執著相及隨好故燒惱身心故名爲熱
뇌(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뇌(貪惱)ㆍ진뇌(瞋惱)ㆍ치뇌(癡惱)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하는 곳에 따라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에 탐착하는 것이니 그러한 것들이 변하여 없어지면 바로 근심과 걱정이 늘어나 갖가지 근심과 괴로움의 번뇌에 접촉하는 까닭에 ‘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b_20L惱有三種謂貪惱瞋惱癡惱由依止貪瞋癡故隨彼彼處愛樂耽著彼若變壞便增愁歎種種憂苦熱惱所觸故名爲惱
016_0181_c_01L쟁(諍)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쟁(貪諍)ㆍ진쟁(瞋諍)ㆍ치쟁(癡諍)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칼과 창을 쥐고서 여러 전쟁이나 온갖 싸움을 일으키기에 탐 등을 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c_01L諍有三種謂貪諍瞋諍癡諍由依止貪瞋癡故執持刀杖興諸戰諍種種鬪訟是故貪等說名爲諍
치연(熾然)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치연(貪熾然)ㆍ진치연(瞋熾然)ㆍ치치연(癡熾然)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비법하기에 탐욕의 거센 불길에 태워지는 것이고, 평등하지 않기에 탐욕의 거센 불길에 태워지는 것이다. 또 삿된 법의 거센 불길에도 태워지는 것이기에 치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c_04L熾然有三謂貪熾然瞋熾然癡熾然由依止貪瞋癡故爲非法貪大火所不平等貪大火所燒及爲邪法大火所燒故名熾然
조림(稠林)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조림(貪稠林)ㆍ진조림(瞋稠林)ㆍ치조림(癡稠林)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여러 생사에 근본하는 행 가운데 처해서 널리 염착을 일으켜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갖가지 신체를 감수케 하여 5취(趣)로 유전시키기에, 탐조림 등으로 해설해서 조림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c_08L稠林有三謂貪稠林瞋稠林癡稠林由依止貪瞋癡故於諸生死根本行中廣興染著令諸有情感種種身流轉五趣是故貪等說名稠林
구애(拘礙)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구애(貪拘礙)ㆍ진구애(瞋拘礙)ㆍ치구애(癡拘礙)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신체와 재물에 연연하여 깨닫는 바 없이 그 처(處)의 번잡함을 즐기기에 약간의 선법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싫증내게 된다. 이로 인해서 모든 선법을 닦지 못하게 되기에 구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6_0181_c_12L拘礙有三謂貪拘礙瞋拘礙癡拘礙由依止貪瞋癡故顧戀身財無所覺了樂處憒鬧得少善法便生厭足此不能修諸善法故名拘礙
이처럼 번뇌의 의문(義門)은 그 차별이 한량없는 것이다.
016_0181_c_16L諸如是等煩惱義門差別無量
016_0182_a_01L어떠한 것이 사행(邪行)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탐과 진, 두 가지의 번뇌를 가리킨다. 경계(境界)와 견(見)에 미혹해서 사행(邪行)과만(慢)이 일어나고, 유정과 견에 미혹해서 사행과 살가야견ㆍ변집견ㆍ사견이 일어나고, 소지경(所知境)에 의해서 사행과 견취ㆍ계금취가 일어나고, 여러 가지 사견에 미혹해서 사행과 의심이 일어나고, 대치(對治)에 미혹해서 사행과 무명이 일어나고, 일체(一切)에 미혹해서 사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열 가지 번뇌는 모두 고제와 집제에 미혹해서 여러 가지 사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 같은 인연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또 열 가지 번뇌가 모두 멸제와 도제에 미혹해서 여러 사행이 일어나는 것에 연유해서 그러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016_0181_c_17L何等邪行故謂貪瞋二煩惱迷境界及見起邪行迷有情及見起邪行薩迦耶見邊執見邪見迷所知境起邪行見取戒禁取迷諸見起邪行迷對治起邪行無明迷一切起邪行又十煩惱皆迷苦集起諸邪行是彼因緣所依處故又十煩惱皆迷滅道起諸邪行由此能生彼怖畏故
어떠한 것이 계(界)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진(瞋)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는 3계(界)의 계(繫)에 통한다. 진은 오직 욕계의 계(繫)에 해당할 뿐이다.
016_0182_a_02L何等界故謂除瞋餘一切通三界繫瞋唯欲界繫
016_0182_b_01L또 탐의 욕계에서는 낙(樂)ㆍ희(喜)ㆍ사(捨)에 상응하는 것이니, 욕계나 초정려ㆍ제2정려의 경우도 이와 같으나, 제3정려에서는 낙(樂)과 사(捨)에만 상응하고, 그 이외에서는 오직 사에만 상응하게 된다. 진은 고(苦)ㆍ우(憂)ㆍ사(捨)와 상응하지만 욕계에서는 주로 희ㆍ사에 상응하고,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는 낙ㆍ희ㆍ사에 상응하고, 제3정려에서는 낙ㆍ사와 상응하고, 그 이상에서는 오직 사에 상응할 뿐이다. 만의 경우처럼 살가야견ㆍ변집ㆍ변취ㆍ계금취의 경우도 이와 같다. 사견은 욕계에서는 우ㆍ희ㆍ사에 상응하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그 감수하는 바에 따라 모두 더불어 상응하게 된다. 의는 욕계에서는 우ㆍ사에 상응하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그 감수하는 바에 따라 모두 더불어 상응하게 된다.
무명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상응무명(相應無明)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다. 상응무명은 일체의 번뇌에 상응하는 까닭에, 이 같은 처소마다 그 감수하는 바에 모두 상응케 된다. 불공무명은 욕계에서는 우ㆍ사에 상응하고 그 이상의 계(界)에서는 그 감수하는 바에 따라 모두 상응하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번뇌는 모두 사와 상응하는 것이기에 일체의 번뇌가 중용위(中庸位:六識身)에 떨어지면 바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탐은 욕계에서 6식신(識身)에 존재하는 것이니, 탐의 경우처럼 진ㆍ무명도 이와 같다. 탐은 색계에서는 4식신에 존재하고 무색계에서는 의식신(意識身)에 존재하게 된다. 이 같은 탐의 경우처럼 무명도 이와 같다. 만ㆍ견ㆍ의는 일체처에서의 의식신에 존재하게 된다. 탐ㆍ진ㆍ만은 욕계에서는 일부분의 사(捨)를 연하여 전향하는 것이니, 욕계의 경우처럼 색계ㆍ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 나머지 일체 사물은 일체 사물을 두루 연하여 전향하는 것이다.
016_0182_a_04L又貪於欲界與樂捨相應如於欲於初二靜慮亦爾於第三靜慮與捨相應已上唯與捨相應瞋與苦捨相應於欲界與喜捨相應初二靜慮與樂捨相應於第三靜慮與樂捨相應已上唯捨相應如慢薩迦耶見邊執見見取戒禁取亦爾邪見於欲界與憂捨相應於色無色界隨所有受皆與相應於欲界與憂捨相應於色無色界隨所有受皆與相應無明有二種謂相應不共相應無明一切煩惱相應故若於是處隨所有受皆得相應不共無明欲界與憂捨相應於上界隨所有受皆得相應何故諸煩惱皆與捨相應以一切煩惱墮中庸位方息沒故於欲界在六識身如貪無明亦於色界在四識身於無色界在意識身如貪無明亦爾見疑於一切處在意識身又貪於欲界緣一分事轉;如於欲界於色無色界亦所餘煩惱於一切處遍緣一切事轉
어떠한 것이 중(衆)입니까?
두 가지 중번뇌(衆煩惱)가 있으니 첫째는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둘째는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에는 다시 네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견도의 고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두 번째는 견도의 집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세 번째는 견도의 멸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네 번째는 견도의 도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다. 욕계에서 고제의 인견(忍見)으로 끊어지는 것에는 모두 열 가지 번뇌가 있다. 고제의 인견에서 끊어지는 경우처럼 집제ㆍ멸제ㆍ도제에서 끊어지는 바도 이와 같다. 색계에서 고제의 인견 등의 네 가지에서 끊어지는 것에는 각각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진은 여기서 제외된다. 색계의 경우처럼 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중번뇌는 총괄하여 백열두 가지의 번뇌가 있다.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에는 여섯 가지 번뇌가 있으니, 구생(俱生)의 살가야견과 변집견 및 탐ㆍ진ㆍ만ㆍ무명이다. 색계의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에는 진을 제외한 다섯 가지 번뇌가 있다. 색계의 경우처럼 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같이 수도에서 끊어지는 중번뇌는 총괄해서 열여섯 가지의 번뇌가 있게 된다.
016_0182_b_03L何等衆故謂二衆煩惱一見所斷衆二修所斷衆見所斷衆復有四種見苦所斷衆二見集所斷衆三見滅所斷衆四見道所斷衆欲界見苦所斷具十煩惱如見苦所斷見集滅道所斷亦爾色界見苦等四種所斷各九煩惱除瞋如色界無色界亦爾是見所斷煩惱衆摠有一百一十二煩惱欲界修所斷有六煩惱謂俱生薩迦耶見邊執見及貪無明界修所斷有五煩惱除瞋如色界色界亦爾如是修所斷煩惱衆摠有十六煩惱
016_0182_c_01L어떠한 것이 끊어짐입니까?
이 같은 차별의 끊어짐은 이러한 작의단(作意斷)에 연유하기에 이로부터 끊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차별의 끊어짐’이란 변지(遍智)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원리(遠離)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또 대치(對治)의 성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지는 피인연사변지(彼因緣事遍智)ㆍ자체변지(自體遍智)ㆍ과환변지(過患遍智)를 말한다. 원리란 비록 그러한 곳에 잠시 태어났으나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대치의 성취에 기인하는 것’이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는 태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태어난 자는 끊게 되기 때문에 대치도의 성취는 이 같은 작의단에 연유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작의단입니까?
작의를 총연(總緣)해서 일체법이 모두 무아의 성품임을 관찰하고 번뇌를 끊게 된다. 무상행(無常行) 등의 행은 단지 무아행(無我行)을 다스려 닦으려는 까닭이다.
‘이로부터 끊게 되는 것’이란 어디서부터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과거에 따르지도 않으니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고, 미래에 따르지도 않으니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고, 현재에 따르지도 않으니 도가 갖춰지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번뇌가 추중(麤重)하는 것에 따라서 그 끊는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끊어짐을 삼는 것이다. 어떠한 품(品)의 추중이 생겨나면 그 어떠한 품으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어떠한 품의 대치가 생겨나면 그 어떠한 품의 추중이 소멸되어 평등해진다. 그 평등한 것이 마치 세간에서 날이 밝으면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과도 같다. 이 같은 품에 연유해서 이계(離繫)하는 까닭에, 미래의 번뇌를 불생법(不生法)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을 끊어짐이라고 이름한다.
016_0182_b_16L何等斷故謂如此差別斷由此作意從此而得斷如此差別斷者謂遍智故遠離故得對治故遍智者謂彼因緣事遍智自體遍智過患遍智離者雖彼暫生而不堅執得對治者謂未生者令不生故已生者令斷故得對治道由此作意斷者何等作意能斷耶摠緣作意觀一切法皆無我能斷煩惱無常等行但爲修治無我行故從此而得斷者從何而得斷不從過去已滅故;不從未來未生故;不從現在道不俱故然從諸煩惱麤重而得斷爲斷如是如是品麤重如是如是品對治若此品對治生卽此品麤重滅平等平等猶如世閒明生暗滅由此品離繫故令未來煩惱住不生法中是名爲斷
어떠한 것이 번뇌가 증상되어 생겨나는 여러 가지 업입니까?
사업(思業)이나 사이업(思已業)을 총괄해서 업의 모양이라고 한다. 다시 다섯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 번째가 취수업(取受業)이고, 두 번째가 작용업(作用業)이고, 세 번째가 가행업(加行業)이고, 네 번째가 전변업(轉變業)이고, 다섯 번째가 증득업(證得業)이다. 지금은 이러한 이치 가운데에서 의다분별(意多分別)은 가행업에 해당한다.
016_0182_c_10L云何煩惱增上所生諸業謂若思業若思已業摠名業相又有五種業取受業二作用業三加行業四轉變五證得業今此義中意多分別加行業
어떠한 것이 사업(思業)입니까?
복업(福業)과 비복업(非福業) 그리고 부동업(不動業)이다.
016_0182_c_15L何等思業謂福業非福業不動業
어떠한 것이 사이업입니까?
신업(身業)과 어업(語業) 및 의업(意業)이다.
016_0182_c_16L何等思已業謂身業語業意業
또 이 같은 신(身)ㆍ어(語)ㆍ의(意)의 3업(業)이 선하거나 불선한 것이다. 불선(不善)이란 십불선업도(十不善業道)이니, 살생(殺生)ㆍ불여취(不與取)ㆍ욕사행(欲邪行)ㆍ허광어(虛誑語)ㆍ이간어(離間語)ㆍ추악어(麤惡語)ㆍ잡예어(雜穢語)ㆍ탐욕(貪欲)ㆍ진에(瞋恚)ㆍ사견(邪見)이다. 선(善)이란 10선업도(善業道)이니 살생을 여의는 것이고, 불여취를 여의는 것이고, 욕사행을 여의는 것이고, 허광어를 여의는 것이고, 이간어를 여의는 것이고, 추악어를 여의는 것이고, 잡예어를 여의는 것이고, 탐하지 않는 것이고, 성내지 않는 것과 정견이다.
016_0182_c_17L又此身語意三業或善或不善不善卽十不善業道謂殺生不與取邪行虛誑語離閒語麤惡語雜穢語貪欲瞋恚邪見善者卽十善業道離殺生離不與取離欲邪行離虛誑離離閒語離麤惡語離雜穢語無瞋正見
016_0183_a_01L살생 따위는 마땅히 다섯 가지로 그 모양을 분별해야 한다. 사악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마음으로 즐기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방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번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구경(究竟)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016_0183_a_01L又殺生等應以五門分別其相謂事意樂故方便故煩惱故究竟故
이는 계경에서 “고사(故思)에서 조작되는 업이다”라는 말씀과도 같다.
무엇을 가리켜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故思造業]’이라 이름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니, 다른 사람에게 권유받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근본에 집착하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전도된 분별을 내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이 가운데에서의 근본에 집착하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다. 이 같이 전도된 분별을 내는 것이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기에, 짓거나 늘려 나가거나 이숙(異熟)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짓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업을 지어 현행케 하는 것이고, ‘늘려 나가는 것’이란 그 습기를 점차 늘려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016_0183_a_03L如契經言故思造業云何名爲故思造業謂他所教勅故思造業他所勸請故思造業無所了知故思造業本執著故思造業顚倒分別故思造此中根本執著故思造業顚倒分別故思造業若作若增長非不受異作者謂起造諸業令其現行增長謂令習氣增益
이는 경계에서 말씀하신 결정수업(決定受業)과도 같다.
무엇을 가리켜 결정수업이라 이름합니까?
업을 짓는 바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니, 이숙을 받는 것이 결정되고 그 분위(分位)가 결정된 것이다.
016_0183_a_11L如契經言決定受業云何名爲決定受業謂作業決定受異熟決定分位決定
10불선업도의 이숙과는 삼악취(三惡趣)가운데의 하품ㆍ중품ㆍ상품에 떨어져 방생(傍生)ㆍ아귀ㆍ나락가의 이숙을 받는 것이다. 그것의 등류과(等流果)는 인취(人趣) 가운데에서 제각기 그 모양을 따라 자신과 대중이 모두 쇠퇴하여 줄어듦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증상과(增上果)는 각기 그 모양에 따라 느끼는 모든 외부 사물이 쇠퇴하여 줄어드는 것으로, 그 자세한 설명은 경전에 나온 그대로이다.
016_0183_a_14L十不善業道異熟果者於三惡趣中隨下中上品受傍生餓鬼那落迦異等流果者各隨其相於人趣中感得自身衆具衰損增上果者各隨其相感得所有外事衰損廣說如經
10선업도의 이숙과란 인취와 천취(天趣)의 이숙을 받는 것이다. 등류과란 그 같은 처소에서 각각 그 모양에 따라 자신과 대중이 모두 흥성하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증상과는 그 같은 처소에서 각각 그 모양에 따라 모든 외부 사물이 흥성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016_0183_a_19L十善業道異熟果者於人天趣中受人天異熟等流果者卽於彼處各隨其相感得自身衆具興盛增上果者卽於彼處各隨其相感得所有外事興盛
016_0183_b_01L선불선업(善不善業)은 선취(善趣)와 악취 가운데에서 그 이숙이 생겨나는 것을 감지하는 때에 존재하는 초인업(招引業)과 원만업(圓滿業)이다. 초인업은 이 같은 업에 기인해서 능히 이숙과를 감지하는 것이고, 원만업은 이 같은 업이 생겨난 것에 기인해서 애불애과(愛不愛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 어떤 업은 하나의 업력(業力)에 기인해서 다수의 신체를 끌어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업은 다수의 업력에 기인해서 하나의 신체를 끌어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업은 다수의 업력에 기인해서 다수의 신체를 끌어 오기도 하는 것이, 마치 한 유정이 다수의 업을 성취한 것과 같다.
무엇을 가리켜 이숙과를 순서대로 받는 것[次第受]이라고 합니까?
그 신체 중에서 무거운 것이 먼저 익는 것을 가리킨다. 임종하는 때에 현전하는 것이거나, 또는 예전에 자주 익힌 것이거나, 또는 처음으로 행한 것의 이숙이 먼저 익은 것이다.
016_0183_b_01L善不善業於善趣惡趣中感生異熟有招引業圓滿業招引業者謂由此業能感異熟果圓滿業者謂由此業生已領受愛不愛果或有業由一業力牽得一身或有業由一業力牽得多或有業由多業力牽得一身或有業由多業力牽得多身若一有情成就多業云何次第受異熟果於彼身中重者先熟或將死時現在前者或先所數習者或最初所行者彼異熟先熟
계경의 말씀에 따르면 세 종류의 업이 있으니, 복업ㆍ비복업ㆍ부동업이다.
어떠한 것이 복업입니까?
욕계에 계류되는 선업이다.
어떠한 것이 비복업입니까?
불선업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부동업입니까?
색계와 무색계에 계류되는 선업이다.
016_0183_b_11L如契經言有三種業謂福業非福業不動業何等福業謂欲界繫善業等非福業謂不善業何等不動業色無色界繫善業
마치 계경에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복업ㆍ비복업과 부동도 이와 같다.
어째서 복과 부동의 행이 무명을 연하여 생겨난다고 하게 됩니까?
두 종류의 우매함이 있으니, 첫 번째가 이숙과에 대한 우매함이고, 두 번째가 진실한 이치에 대한 우매함이다. 이숙과에 대한 우매함에 연하는 까닭에 비복행을 발휘시키고, 진실한 이치에 대한 우매함에 연하는 까닭에 복행과 부동행을 발휘시키게 된다.
016_0183_b_15L如契經說無明緣行若福非福及與不動云何福及不動行緣無明生二種愚一異熟果愚二眞實義愚異熟果愚故發非福行由眞實義愚故發福及不動行
016_0183_c_01L살생의 업도(業道)는 탐ㆍ진ㆍ치가 그 방편을 이루는 가운데 진에 연유해서 구경을 이루는 것이니, 불여취ㆍ욕사행ㆍ탐욕의 업도도 이와 같다. 허광어의 업도도 탐ㆍ진ㆍ치가 그 방편을 이루는 가운데 어떤 한 가지에 연유해서 구경을 이루는 것이기에, 허광어ㆍ이간어ㆍ잡애어의 업도도 이와 같다. 사견의 업도도 탐ㆍ진ㆍ치가 그 방편을 이루는 가운데 치에 연유해서 구경을 이루는 것이다.
016_0183_b_20L殺生業道貪瞋癡爲方便由瞋究竟如殺生麤惡語瞋恚業道亦爾不與取業道貪瞋癡爲方便由貪究竟不與取欲邪行貪欲業道亦爾虛誑語業道貪瞋癡爲方便於三種中隨由一究竟如虛誑語離閒語雜穢語業道亦爾邪見業道貪瞋癡爲方便由癡究竟
016_0184_a_01L마치 계경에서 “공업(共業)이 있고 불공업(不共業)이 있고 강력업(强力業)이 있고 열력업(劣力業)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공업이란 무엇입니까?
갖가지 기세간(器世間)을 갖가지로 차별시키는 업이다.
불공업이란 무엇입니까?
유정세간(有情世間)을 갖가지로 차별시키는 업이고, 또 모든 유정을 전전시켜 증상케 하는 업이다. 이 같은 업력에 연유해서 여러 유정이 상호간에 그 구경의 모양을 의지하는 것을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해설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서로 증상하는 세력을 가지기 때문에 공업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리하여 경전에서 “이는 유정과 그 밖의 유정이 서로 바라보는 것 등이니, 수용하지 않고 뒤바뀌지 않고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
강력업이란 무엇입니까?
대치하는 힘이 강한 보특가라(補特伽羅)의 고사(故思)에서 조작되는 여러 가지 불선업이 그 대치하는 세력에 연유해서 굴복되기 때문에, 마땅히 나락가(奈落迦)의 업을 받아야 함에도 현법수업(現法受業)으로 전향되거나 마땅히 현법수업을 받아야 함에도 그 현법수업을 받지 않는 것으로 전향된다. 이 같은 업을 강력하다고 이름하는 것은 그 업을 대치하는 힘이 강한 것에 연유하는 때문이다. 또 고사에서 조작되는 일체의 선업도 모두 강력하다고 이름하게 된다. 이 같은 업에 의지하는 까닭에, 박가범께서도 “나의 거룩한 제자들은 한량없이 광대한 업으로써 그 마음을 어질게 훈습하기에, 여러 가지 조작되어진 유량(有量)의 업에 끌려가지도 않고, 이에 머무르지도 않고, 저들 중생의 수에 떨어지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 대치하는 힘이 약한 보특가라의 고사에서 조작되는 갖가지 불선업이 여러 선업을 유추하게 되는 것도 모두 강력하다고 이름하고, 또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 이숙하는 과보의 그 결정을 끊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도 강력업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일체 선불선업이 이숙하는 그 과보의 결정이 성도(聖道)의 힘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것을 강력업이라 이름한다.
또 욕계에 계류되는 모든 불선업의 성품도 모두가 강력한 것이다. 또 예전에 익힌 바도 강력업이라 이름하고, 또 그 같은 강력한 지위에 의지하는 것도 강력업이라 이름한다. 또 대치가 불가능하게 조작되어진 갖가지 업을 강력업이라 이름하니,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까닭이다. 또 전(田)에 연유해서 강력업이 발휘되고, 또 마음의 가행에 연유해서 강력업이 발휘되고, 또 아홉 종류의 인(因)에 의지해서 강력업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는 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일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소의(所依)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작의(作意)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의요(意樂)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보조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수습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많은 중생이 함께 행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과 반대되는 것이 열력업(劣力業)이다.
016_0183_c_05L如契經言有共業有不共有强力業有劣力業云何共業業能令諸器世閒種種差別云何不共業若業能令有情世閒種種差別或復有業令諸有情展轉增上由此業力說諸有情更互相望爲增上緣以彼互有增上力故亦名共業是故經言如是有情與餘有情互相見等而不受用不易可得云何强力業對治力强補特伽羅故思所造諸不善業由對治力所攝伏故令當受那落迦業轉成現法受應現法受業轉令不受所以此業名强力者由能對治業力强故又故思所造一切善業皆名强力依此業故薄伽梵說我聖弟子能以無量廣大之業善薰其心諸所造作有量之業不能牽引不能留住亦不能令墮在彼數又對治力劣補特伽羅故思所造諸不善業諸善業皆名强力又故思造業異熟決定不斷不知名强力業此中意說一切善不善業異熟決定聖道力不斷者皆名强力業又欲界繫諸不善業性皆是强力又先所串習名强力又依强位名强力業又不可治者所造諸業名强力業無涅槃法故由田故發强力業又由心加行故發强力業又由九種因發强力業謂由田故事故自體故所依故作意故樂故助伴故多修習故與多衆生共所行故與此相違是劣力業
016_0184_b_01L세존께서도 어떤 때에는 “그들의 장부(丈夫)인 보특가라가 이러이러한 순소수업(順所受業)을 짓거나 늘리는 것에 따라서 이러이러한 이숙과를 받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청정한 범행을 닦을 수가 없고 또한 모든 고를 바르게 끊어서 고의 변제(邊際)를 이루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도 말씀하셨고, 또 어떤 때는 “그들의 장부인 보특가라가 이러이러한 순소수업을 짓거나 늘리는 것에 따라서 다시 이러이러한 순소수업의 이숙을 받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청정한 범행을 수습해야 할지니 또한 모든 고를 바르게 끊어서 고의 변제를 이루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같은 경전의 말씀에는 어떠한 비밀스러운 뜻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부처님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사설(邪說)을 제지하고자 함이니, 소위 낙구행업(樂俱行業)이 낙구행(樂俱行)의 이숙을 능히 감득(感得)한다는 것이고, 또 고구행업(苦俱行業)이 고구행(苦俱行)의 이숙을 능히 감득한다는 것이고, 불고불락구행업(不苦不樂俱行業)이니 다시 능히 불고불락구행의 이숙을 감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정설(正說)을 계시하고자 함이니, 소위 낙구행의 이숙을 능히 감득하는 낙구행업과 고구행의 이숙을 능히 감득하는 고구행업 및 불고불락구행의 이숙을 능히 감득하는 불고불락구행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이 같은 정설을 열어 보이시려는 것이니, 낙구행업의 순락수(順樂受)란 즐거움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낙구행업의 순고수(順苦受)란 고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낙구행업의 순불고불락수(順不苦不樂受)란 불고불락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다. 또 ‘고구행업의 순락수’란 다시 즐거움의 이숙을 받는다는 것이고, ‘고구행업의 순고수’란 고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고구행업의 순고불고불락수’란 순불고불락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다. 또 ‘불고불락구행업의 순락수’란 즐거움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불고불락구행업의 순고수’란 고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불고불락구행업의 순불고불락수’란 불고불락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경전의 비밀스런 뜻이라고 이름하게 된다.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율의업(律儀業)ㆍ불율의업(不律儀業)ㆍ비불율의업(非不律儀業)이다.
016_0184_a_12L如世尊若有說言彼彼丈夫補特伽羅如是如是業若作若增長還受如是如是異熟若有是事便不應修淸淨梵行亦不可知正盡諸苦作苦邊際若有說言彼彼丈夫補特伽羅隨如是如是順所受業若作若增長還受如是如是順所受異熟若有是事便應修習淸淨梵行又亦可知正盡諸苦作苦邊際如是經言有何密意中佛意爲欲遮止如是邪說謂樂俱行業還能感得樂俱行異熟苦俱行業還能感得苦俱行異熟不苦不樂俱行業還能感得不苦不樂俱行異故作是說又爲開許如是正說樂俱行業順樂受者還受樂異熟苦受者還受苦異熟順不苦不樂受者還受不苦不樂異熟苦俱行業樂受者還受樂異熟順苦受者還受苦異熟順不苦不樂受者還受不苦不樂異熟不苦不樂俱行業順樂受者還受樂異熟順苦受者還受苦異順不苦不樂受者還受不苦不樂異熟如是名爲此經密意又業差別有三種謂律儀業不律儀業非律儀非不律儀業
016_0184_c_01L율의업이란 무엇입니까?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에 수렴되는 업이고, 정려율의(靜慮律儀)에 수렴되는 업이고, 무루율의(無漏律儀)에 수렴되는 업이다. 별해탈율의에 수렴되는 업이란 바로 7중(七衆)이 수지 받는 율의이니, 필추율의(苾芻律儀)ㆍ필추니율의(苾芻尼律儀)ㆍ식차마나율의(式叉摩那律儀)ㆍ근책율의(勤策律儀)ㆍ근책녀율의(勤策女律儀)ㆍ오파색가율의(波索迦律儀)ㆍ오파사가율의(波斯迦律儀) 및 근주율의(近住律儀)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출가율의(出家律儀)를 건립하게 됩니까?
수행으로 악행을 원리하고 욕행(欲行)을 원리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오파색가율의와 오파사가율의를 건립하게 됩니까?
율의를 남김없이 받아 지켜서 악행을 원리하되 욕행을 원리하지 못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근주율의를 건립하게 됩니까?
악행을 원리하지 못하고 욕행도 원리하지 못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만약 오파색가의 학처(學處) 일부분만을 닦아 익히는 것만으로 성취하였다고 말하는 경우에, 오파색가율의를 그 말과 같이 성취하지 못하였으면서 성취하였다고 말하게 되면, 이를 범계(犯戒)라 하는 것이다.
선체반택가(扇半擇迦) 따위가 오파색가율의를 수지하는 것을 제지하여야 합니까?
그가 오파색가율의를 수지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더라도 그의 오파색가의 성품은 자동적으로 제지된다. 필추ㆍ필추니 등의 2부(部)의 출가대중(出家大衆)을 가까이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반택가(半擇迦)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생경반택가(生更半擇迦)ㆍ질투반택가(嫉妬半擇迦)ㆍ반월반택가(半月半擇迦)ㆍ관쇄반택가(灌灑半擇迦)ㆍ제거반택가(除去半擇迦)이다.
016_0184_b_14L云何律儀業謂別解脫律儀所攝業靜慮律儀所攝業無漏律儀所攝業別解脫律儀所攝業者卽是七衆所受律儀謂苾芻律儀苾芻尼律儀叉摩那律儀勤策律儀勤策女律儀鄔波索迦律儀鄔波斯迦律儀及近住律儀依止何等補特伽羅建立出家律儀依能修行遠離惡行遠離欲行補特伽羅依止何等補特伽羅建立鄔波索迦律儀鄔波斯迦律儀能盡受遠離惡行不遠離欲行補特伽羅依止何等補特伽羅建立近住律儀依止不能遠離惡行及不能遠離欲行補特伽羅若唯修學鄔波索迦一分學處爲說成就鄔波索迦律爲說不成就應說成就而名犯戒扇搋半擇迦等爲遮彼受鄔波索迦律儀不耶不遮彼受鄔波索迦律儀然遮彼鄔波索迦性不堪親近承事苾芻苾芻尼等二出家衆故又半擇迦有五種謂生便半擇迦嫉妒半擇半月半擇迦灌灑半擇迦除去半擇迦
정려율의에 업이 수렴된다는 것은 한번 일어나면 계율을 범하게 되는 번뇌의 종자를 꺾어 누를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욕계의 욕(欲)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하는 것이다. 초정려(初靜慮)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 같은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한다는 것이다. 제2정려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한다는 것이다. 제3정려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이름하여 정려율의에 수렴되는 신ㆍ어의 2업(業)이라 한다.
016_0184_c_14L靜慮律儀所攝業者謂能損伏發起犯戒煩惱種子離欲界欲者所有遠離初靜慮欲者所有遠離離第二靜慮欲者所有遠離離第三靜慮欲者所有遠離是名靜慮律儀所攝身語業
무루율의에 수렴되는 업은 사제(四諦)를 인견(忍見)한 이가 무루(無漏)의 작의(作意)하는 힘으로 누없이 원리하는 계율의 성품을 성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것을 이름하여 무루율의에 수렴하는 업이라고 한다.
016_0184_c_20L無漏律儀所攝業者謂以見諦者由無漏作意力所得無漏遠離戒性名無漏律儀所攝業
016_0185_a_01L불율의업(不律儀業)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불율의업은 그가 태어난 종성(種性)에 기인하거나, 또는 그가 종사하는 직업에 기인해서 그 기약된 바가 현행하여 그의 업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불율의라 합니까?
이른바 양을 잡아 생계를 잇는 일, 닭을 쳐서 생계를 잇는 일, 돼지를 길러 생계를 잇는 일, 새를 잡아 생계를 잇는 일,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일, 사슴 사냥으로 생계를 잇는 일, 토끼 덫을 놓아 생계를 잇는 일, 도둑질로 생계를 잇는 일, 망나니짓으로 생계를 잇는 일, 소를 잡아 생계를 잇는 일, 코끼리를 길들여 생계를 잇는 일, 단(壇)을 세우고 용을 부리는 주문[呪龍]을 외워 생계를 잇는 일, 감옥을 지켜서 생계를 잇는 일, 첩자 노릇으로 생계를 잇는 일 등이다.
016_0184_c_23L云何不律儀業謂諸不律儀者或由生彼種姓中故或由受持彼事業故所期現行彼業決定何等名爲不律儀者所謂屠羊養鷄養猪捕鳥捕魚獵鹿罝兔劫賊魁膾控牛縛象立壇呪龍守獄讒搆好爲損等
비율의비불율의업(非律儀非不律儀業)이란 무엇입니까? 이른바 비율의비불율의(非律儀非不律儀)에 머무른 자에게 존재하는 선불선업을 말한다.
016_0185_a_06L云何非律儀非不律儀業謂住非律儀非不律儀者所有善不善業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순락수업ㆍ순고수업ㆍ순불고불락수업이다. 순락수업이란 욕계에서 제3정려까지 존재하는 선업이고, 순고수업이란 불선업을 가리킨다. 순불고불락수업이란 제3정려 이상에 존재하는 선업이다.
016_0185_a_08L又業差別有三種謂順樂受業順苦受業順不苦不樂受業順樂受業者謂從欲界乃至第三靜慮所有善業順苦受業者謂不善業順不苦不樂受業者謂第三靜慮已上所有善業
016_0185_b_01L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ㆍ순생수업(順生受業)ㆍ순후수업(順後受業)이다.
순현법수업이란 업이 현법(現法) 가운데에서 이숙되어 성숙하는 것이니 자정(慈定)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조작되어지는 바가 감소되거나 증가되거나 반드시 현전해서 이숙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정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무쟁정(無諍定)에서도 일어나고 멸정(滅定)에서도 일어나고 예류과(豫流果)에서도 일어나고 아라한과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이와 같다. 또 부처님께서 상수(上首)로 계신 승가 대중 가운데에서 짓는 선악도(善惡道)도 반드시 현전해서 그 이숙을 얻게 된다. 또 유여(有餘)의 맹렬한 이근(利根)이 그 의요(意樂)의 방편으로 행하는 선업과 불선업도 현전해서 그 이숙을 얻게 된다.
순생수업이란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도중에 그 이숙이 성숙되는 업으로써 5무간업(無間業)을 가리킨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선업과 불선업이 있다. 무간지옥에 태어나 그 이숙을 성숙시키는 일체에 모두 순생수업이라 이름한다. 순후수업이란 무간에 태어난 후에 그 이숙이 성숙하는 업을 바로 순후수업이라 이름한다.
016_0185_a_13L又業差別有三種謂順現法受業生受業順後受業順現法受業者業於現法中異熟成熟謂從慈定起於彼造作若損若益必得現異熟如從慈定起從無諍定起從滅定起從預流果起從阿羅漢果起亦爾於佛爲上首僧中造善惡業必得現異熟又有餘猛利意樂方便所行善不善業亦得現異熟順生受業者業於無閒生中異熟成熟謂五無閒復有所餘善不善業於無閒生異熟熟者一切皆名順生受業順後受業者若業於無閒生後異熟成熟名順後受業
또 업의 차별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ㆍ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ㆍ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과 능히 모든 업을 소진시키는 비흑백무이숙업(非黑白無異熟業)이 있다. 흑흑이숙업이란 불선업을 가리키고, 백백이숙업이란 삼계의 선업을 가리킨다. 흑백흑백이숙업이란 욕계에 계류되는 작업(作業)이니, 혹 어떤 업을 의요케 하려는 까닭에 검다고 하고 방편에 기인해서 희다고 하거나 혹 어떤 업은 방편에 기인해서 검다고 하거나 의요케 하려는 까닭에 희다고 하는 것이다. 비흑백무이숙업이 모든 업을 능히 소멸시키는 것으로, 무간도(無間道)에서 가해(加行)하는 모든 무루업을 가리킨다.
016_0185_b_04L又業差別有四種謂黑黑異熟業白白異熟業黑白黑白異熟業非黑白無異熟業能盡諸業黑異熟業者謂不善業白白異熟業謂三界善業黑白黑白異熟業者謂欲界繫雜業或有業意樂故黑便故白或有業方便故黑意樂故白非黑白無異熟業能盡諸業者謂於加行無閒道中諸無漏業
총괄하면 모든 무루업은 모든 장애가 순종하는 바탕이 되는 성품이기에, 그 자체에 맞춰 곡(曲)ㆍ예(穢)ㆍ탁(濁)의 모든 염오업(染汚業)과 정모니(淨牟尼) 따위의 모든 청정업(淸淨業)을 건립하는 것이다.
016_0185_b_12L摠約一切無漏業所有障礙隨順體如其次第建立曲穢濁等諸染污淨牟尼等諸淸淨業
016_0185_c_01L다시 보시 따위의 온갖 청정업이 있다.
보시업(布施業)이란 무엇입니까?
인연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등기(等起)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처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에 기인하기 때문에 보시업이라 분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연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을 가리키고, 등기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저것이 행(行)과 사(思)를 갖춘 것을 가리킨다. 처소(處所)란 보시되는 물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당하게 보시를 행하는 때의 신ㆍ구ㆍ의의 3행을 가리킨다.
시원만(施圓滿)이란 무엇입니까?
잦은 보시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치우쳐서 보시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바라는 바에 따라 만족스럽게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가 원만케 된다. 또 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하기 때문이고, 널리 청정하게 보시하기 때문이고, 지극한 마음에서 보시하기 때문이고, 되풀이해서 보시하기 때문이고, 전답과 기물을 보시하기 때문이고, 신참과 구참비구를 잘 안배해서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가 원만하게 된다.
016_0185_b_15L復有施等諸淸淨業云何施業謂因緣故等起故處所故自體故分別施因緣者謂無貪無瞋無癡善根起者謂彼俱行思處所者謂所施物自體者謂正行施時身語意業云何施圓滿謂數數施故無偏黨施故其所欲圓滿施故施得圓滿又無所依施故廣淸淨施故極歡喜施故數施故田器施故善分布新舊施故施得圓滿
보시물의 원만함은 어떠한 것으로 인지하게 됩니까?
보시된 재물이 거짓말이나 허위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남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진구(塵垢)를 여읜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을 여법하게 추렴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 보시한 재물의 원만함을 숙지해야 한다.
016_0185_c_02L云何應知施物圓滿謂所施財物非誑詐得故所施財物非侵他得故所施財物非穢離垢故所施財物淸淨故所施財物如法所引故如是應知施物圓滿
마치 계경에서 “시라를 성취하여 별해탈율의를 잘 방호(防護)하고 궤범(軌範)에 따라 그 행하는 바를 모두 원만케 해서, 미세한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익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시라를 성취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청정한 시라를 받아서 보호하는 것이다.
‘별해탈율의를 잘 방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출리(出離)의 시라를 잘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의궤(儀軌)에 따라 모두 원만케 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시라를 청정하게 갖추어 훼손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소소한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용맹심을 내어 시라를 공경스럽게 익히기 때문이다.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익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배워 익혀야 하는 시라를 배우고 익혀서 지금 이후로는 시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경전을 풀이해 보면 신근(身根) 따위를 방호한다는 이치가 드러난다.
016_0185_c_07L如契經說成就尸羅善能防護別解脫律儀軌則所行皆悉圓滿見微細罪生大怖畏於諸學處善能受學何成就尸羅能受能護淨尸羅故何善能防護別解脫律儀能善護持出離尸羅故云何軌則所行皆悉圓滿具淨尸羅難爲毀責故云何見微細罪生大怖畏勇猛恭敬所學尸羅云何於諸學處善能受學圓滿學所學尸羅故從是已後依止尸羅釋佛經中護身等義
016_0186_a_01L‘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의 방호’라고 이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바른 견해에 연유해서 거두어 지키는 바이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원만한 구족’이란 무엇입니까?
끝까지 계율의 소범(所犯)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청정한 현행(現行)’이란 무엇입니까?
무회(無悔) 등에 연유해서 점차 행을 닦아 나가되 정을 얻을 때까지 의지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지극히 어질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염오의 심사(尋思)에 섞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죄가 되지 않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삿된 것을 멀리 여의어서 범행 닦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해롭지 않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쉽게 함께 머루르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순종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열반법에 순종하는 것에 기인해서 성취하게 되는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감추거나 드러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선법은 감추고 악업은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사이좋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범행을 닦는 이들과 함께 시라로 포섭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절도 있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신업과 어업이 공경스럽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한 가르침을 공경스럽게 받들어 따르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무열(無熱)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고행의 치열한 고뇌와 저급한 깨우침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고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재산과 직업을 포기하여 후회와 고뇌가 없는 것이다.
‘신업과 어업이 후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비록 성취가 약간 있더라도 이를 기뻐하지 않기에 그에 따른 후회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세존께서 “이와 같이 유정들은 그 자신의 업에 기인해서 업이 어긋나고 바로 인해 다투게 되고 업에 따라 생겨나고 업에 의해 출리하고 업에 기인해서 유정의 높고 낮음과 우수하고 열등함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유정이 모두 자신의 업에 기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스스로 짓는 업에 연유해서 그 이숙과를 받기 때문이다.
‘업이 어긋나는 바에 따라 다투게 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업에서 얻게 된 이숙을 받는 때에 선업과 불선업이 서로 어긋나서 다투기 때문이다.
‘업을 따라 생겨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모든 유정은 무인(無因)이나 악인(惡因)을 멀리하고 오직 업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업에 의해 출리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대치하는 업에 의지해서 업박(業縛)을 풀기 때문이다.
‘업에 기인해서 유정의 높고 낮음’이란 무엇입니까?
업에 기인하는 까닭에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서 자체적인 차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수하고 열등하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유정의 성취에는 그 공덕과 과실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016_0185_c_19L云何名爲防護身語由彼正解所攝持故云何身語具足圓滿終不毀犯所毀犯故云何身語淸淨現行由無悔等漸次修行乃至得定爲依止故云何身語極善現行染污尋思所不雜故云何身語無罪現行遠離邪願修梵行故云何身語無害現行不輕陵他易共住故云何身語隨順現行由能隨順涅槃得故云何身語隨隱顯現行隱善顯惡故云何身語親善現行同梵行者攝受尸羅故何身語應儀現行於尊尊位離憍慢云何身語敬順現行於尊教誨敬順受故云何身語無熱現行遠離苦行熱惱下劣欲解故云何身語不惱現行棄捨財業無悔惱故云何身語無悔現行雖得少分不以爲喜而無悔恨故如世尊說如是有情皆由自業所乖諍從業所生依業出離能分別一切有情高下勝劣云何有情皆由自業由自造業而受異熟故云何業所乖諍於受自業所得異熟善不善業互違諍故云何從業所是諸有情遠離無因惡因唯從業所生故云何依業出離依對治業解業縛故云何由業有情高下謂猶業故於善惡趣得自體差別云何勝劣謂諸有情成就功德過失差別
016_0186_b_01L세존께서 유정의 업이 이숙하는 바는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업의 이숙이 가사의(可思議)하다는 것이란 무엇이고, 업의 이숙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선업이 인취와 천취에서 좋게[可愛] 이숙되는 것이 가사의이다. 삼악취에 떨어지는 여러 불선업이 좋지 못한 이숙을 얻는 것이 가사의이다. 이 같은 업감(業感)에 기인하여 모든 유정과 자신을 이숙하는 등의 갖가지 차별이 불가사의이다. 또 선업과 불선업의 처차별(處差別)ㆍ사차별(事差別)ㆍ인차별(因差別)ㆍ이숙차별(異熟差別)ㆍ품류차별(品類差別) 등이 모두 불가사의이다. 또 갖가지 외사차별(外事差別)이 있으니, 이것에 능히 감득(感得)하는 것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또 말니주(末尼呪)ㆍ약초ㆍ주술이 상응하는 것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또 모든 관(觀)을 닦는 자의 위덕(威德)도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또 모든 보살이 자재한 것도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른바 명(命)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재물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태어남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승해(勝解)가 자재하기 때문이고, 원력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신통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고, 겁(劫)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보살이 이러한 자재한 힘에 연유하는 까닭에 그 지어지는 업의 쓰임새도 불가사의하다. 또 일체의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것과 모든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사업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같이 집제에는 총괄해서 네 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있으니, 인상(因相)ㆍ집상(集相)ㆍ생상(生相)ㆍ연상(緣相)을 가리킨다.
인상이란 무엇입니까?
남아 있는 습기를 능히 인발(引發)시키는 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인상이라 한다.
집상이란 무엇입니까?
그 유정 내에 모여든 습기를 가리키는 것이니, 그들에 있어서 유정이라는 무리로 함께 일어나는 인을 가리키는 것을 집상이라 이름한다.
생상이란 무엇입니까?
그 내신(內身)이 제각각 한량없는 품류가 차별되는 생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생인이라 한다.
연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유정이 제각각 버리는 인을 성취하는 것을 이름하여 연상이라 한다.
016_0186_a_23L如世尊說有情業異熟不可思議何業異熟可思議云何業異熟不可思議謂諸善業於人天趣得可愛異是可思議諸不善業墮三惡趣得不愛異熟是可思議卽由此業感諸有情自身異熟等種種差別不可思又卽善不善業處差別事差別差別異熟差別品類差別等皆不可思議復有種種外事差別能感業用不可思議又末尼珠藥草呪術相應業用不可思議又諸觀行者威德業用不可思議又諸菩薩自在業用不可思議所謂命自在故心自在故自在故業自在故生自在故勝解自在故願自在故神通自在故智自在法自在故諸大菩薩由如是等自在力故所作業用不可思議又一切所作諸佛應所作事業用不可思議如是集諦摠有四種行相差別謂因集相生相緣相云何因相謂能引發復有習氣因是名因相云何集相謂彼彼有情所集習氣於彼彼有情類爲等起因是名集相云何生相各別內身無量品類差別生因是名生相云何緣相謂諸有情別別得捨是名緣相
大乘阿毘達磨集論卷第四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