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성(體性)ㆍ해석ㆍ글ㆍ뜻의 법과 등기(等起)ㆍ의미ㆍ힐난을 풀이함이며 차제ㆍ스승ㆍ설중(說衆)ㆍ들음과 찬불(讚佛)의 약광(略廣)ㆍ학승리(學勝利)이네.
온갖 지(地)와 모양[相]과 작의(作意)와 의처(依處)와 덕과 덕 아님과 다스릴 바와 능히 다스림에 대한 간략함과 광범한 뜻을 알아야 하리.
3. 성선교품(成善巧品)
온갖 쌓임[蘊]과 계(界)ㆍ처(處)와 그리고 온갖 연기(緣起) 법과 처비처(處非處)와 근(根)과 제(諦)에서의 선교(善巧)한 사실이라고 알아야 하리.
몸이라고 함과 자재(自在) 따위라 함과 원인 없는 몸이라 함과 머무름이라 함이며 유전(流轉)함이라 함과 온갖 업 지음이라 함과 두 가지 증상(增上)하는 몸이라고 함이네.
몸이라는 것에서와 그러한 따위에서 생겼다 함과 참 ⧼나⧽가 주지(住持)한다 함이며 유전(流轉)함이라 함과 짓는 것과 온갖 증상(增上)함이라는 뜻에서이며
염오(染汚)와 그리고 청정(淸淨)에서 일곱 가지 어리석음 일으키기에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선교(善巧)를 포섭한다 알아야 하리.
내 몸이라고 잘못 여기는 이는 모든 감관에 의지한다고 하여 대상에서 이리저리 회전하면서 사랑과 사랑 아님을 누린다고 하네.
말이 그것에 의지한 것이라고 하고 만든 것과 감각하는 것이 있다고 하며 차별인 쌓임[蘊]으로 말미암아서 하나의 몸이라고 모두 보네.
처음 원인에 미혹하였기 때문에 항상함인 원인, 원인 없음이라고 하며 ⧼나⧽ 가 모든 감관을 주지(住持)하여 능히 촉감 내고 능히 느낀다고 하네.
이 죽고 태어나는 곳에서부터 유전(流轉)하는 것 있다고 여기며 법과 법 아님을 짓는 것과 그리고 저 결과가 증상함이라고 하며,
삿된 행(行) 닦고 익히는 그것을 염오(染汚)가 된다고 잘못 계교하며 바른 행(行) 닦고 익히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잘못 계교하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 그와 같은 어리석음이 일어났었는데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함으로 말미암아서 일곱 가지 선교(善巧)를 말씀하셨네.
세(世=三世) 따위의 분별을 알므로 하나로 합하는 생각 능히 없앤다. 즉(卽)함과 떠남과 해탈함에서도 중생이라는 것 얻을 수 없네.
많은 종류와 그리고 총략(總略)과 차별 있음과 함께 따로 전변하여 증가하여 더함과 줄어든 지혜를 쌓임[蘊]에 대한 선교라고 알아야 하리.
3인(因)이 생기는 것 보기 때문에 계(界)의 선교라고 말하나니 끝없이 제 종류[自種]에서부터 많이 생기며 또 가지가지가 생긴다.
그로 말미암아 그에 이르도록 취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제 지혜에 의해 이루기 때문에 하열성(下劣性)을 능히 제거하네.
모든 촉감[觸]과 모든 느낌[受]이 두 가지 생문(生門)으로 말미암아 촉감에 의지하기 때문에 처(處)에 대한 선교라고 알리라
법의 장소ㆍ하늘의 장소와 같아서 다음다음의 것이 의지하는 바이며 세속 진리로 말미암기 때문에 두 가지[觸受] 체성임을 아네. 무상한 원인을 끊지 못해서 모든 결과를 능히 내는 것과 계속함에서와 비슷함에서 임을 알므로 연기(緣起)에 대한 선교라고 말하네.
중생에게 버림과 계속함이 있는 것 얻을 수 없음은 매우 깊은 네 가지 연기를 분명히 잘 알았기 때문이네.
짓지 않음ㆍ가지 못함ㆍ얻지 못함과 두 몸과 딴 몸으로는 전환 못함이며 청정한 견해에는 딴 업이 없나니 두 곳에 ⧼나⧽가 자재(自在)함 아니네.
그와 같은 지혜로 능히 알면 처비처(處非處)에 대한 선교라 하고 제 결과[自果]가 결정된 자리에서 그와 다르면 비처(非處)라 말하네.
능히 취함과 생김과 유지함과 그리고 염오와 및 청정(淸淨)과 무리한 ⧼나⧽라는 관념과 딴 것들이 저 결과에 증상(增上)함이 된다.
그와 같은 것에 대한 방편을 근(根) 선교가 된다 이름하나니 말하자면 취함ㆍ생김ㆍ유지함과 염오ㆍ청정이 증상함이기 때문이네.
둘이서인 자성(自性)의 괴로움과 합하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나니 원인 없음ㆍ원인 있음으로 말미암아서이며 다섯 가지 비유로 말미암아서이다.
그와 같이 따라 깨닫기 때문에 응당 제(諦) 선교라고 알아야 하나니 일찍이 보지 못함과 저 인연과 받지 못함과 저 인연을 따라 깨달음이네.
모든 선교(善巧)의 차별은 스물세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이섭론(異攝論)이 첫째가 되고 마지막은 최극청정지(最極淸淨智)이네.
4. 성무상품(成無常品)
무상(無常)함이란, 유위(有爲)를 말함이니 세 모양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무상함의 뜻을 그의 적응하는 대로 여섯 가지, 여덟 가지라고 알아야 하리.
체성 없음과 무너짐과 변해 달라짐과 떠나 이별함과 얻음과 앞으로 있음이며 찰나(刹那)와 계속함과 병듦 따위와 마음 그릇과 수용함 따위이네. 변해 달라짐에는 열다섯 가지의 차별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분위(分位) 따위가 그것인데 여덟 인연에 핍박되기 때문이네.
아래 세계에는 모두들 갖추었고 중간 세계에는 셋 문을 떠나서 세 가지 변해 달라짐을 갖추었고 위 세계에서는 기세계(器世界)가 제외되네.
체성 없음인 내용의 무상(無常)은 변계(遍計)로서 고집하는 바이며 그 밖의 무상에 대한 내용들은 의타기(依他起)라고 알아야 하리.
『온갖 무상이 모두 괴로움이라』함은 모든 괴로움과 섞이었기 때문이니 법의 성품에 미혹한 어리석은 이는 해독을 받으면서 깨닫지 못하네.
저 마음의 결과로 말미암기에 생기고서 저절로 사라지나니 뒤에 변해 달라질 수 있음은 찰나 찰나에 사라짐이라고 알아야 하리.
마음의 훈습(薰習)이 증상(增上)하며 선정에서 전변(轉變)함과 자재(自在)함으로 영상(影像)이 생기게 되는 도리와 세 가지 성교(聖敎)로 인함이네. 생인(生因)과 서로 어기지 때문이며 주인(住因)과 멸인(滅因)이 없으며 자연주(自然住)라면 항상하다는 허물되리니 그러기에 저절로 사라짐이라고 알리라.
물ㆍ불ㆍ바람이 멸인(滅因) 아니니 함께 생기고 사라지니 때문이며 저와 서로 응하여 사라지면 변하여, 그 밖의 다른 생이 되는 인이 되네.
상위(相違)함과 상속(相續)이 끊어짐과 두 모양과 모양 없음[無相]을 이름과 세상에서 현재 봄을 어김과 법 없음과 그 밖의 원인 그것이네.
몸과 젖과 수풀 따위가 처음에 변해 달라짐 없음이 아니며 또한 처음에 무너지지 않다가 최후 시간에야 없어짐이 아니네.
처지[位]와 생각[思]과 번뇌와 시간을 항상하지 않고 변하기 때문이니 그것이 만일 변해 달라짐 없다면 받음ㆍ지음ㆍ해탈은 옳지 못하리.
공능이 있지 않기 때문이고 해당함과 해당함 아님이 상위하며 쓰임이 있음과 쓰임이 없음과 원인 된다는 것 허물을 이루네. 자성(自性)이라면 변해 달라지는 모양이 있음과 없음, 모두 맞지 않으며 차별이 없다면 무상함이 되고 차별이 있다면 다섯 허물이 있나니
모양 없음과 또한 원인 없음과 자성(自性) 아님과 항상 변함과 먼저 변해 달라짐이 있기 전에 ⧼나⧽가 응당 늘 해탈함 그것이네.
항상함과 조작이 다 이치에 맞지 않음은 두 원인과 세 원인으로 인해서이다 재물ㆍ중생ㆍ증상(增上)함 그것으로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 머무름 아니네.
무상하게도 제에게 의지하였으며 차례로 일어나고 차별로 일어나며 모든 느낌[受] 따위가 다르므로 감각이 무상함이라고 알아야 하리.
무상(無常)에 대한 무지(無智) 그것이 4전도(顚倒)의 근본이 되나니 세간도(世間道)가 더욱 올라갈수록 어리석음의 힘도 더 증가한다고 알아야 하리.
방일(放逸)과 게으름과 뒤바뀐 소견과 우매함과 돕는 양식[資糧]이 없음과 나쁜 벗과 바르지 못한 법 때문이니 그가 무지(無智)의 원인이라고 알아야 하리. 진리대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과거 따위를 기억해 생각하므로 비슷하게 계속적으로 헤매면서 무상을 항상함이라고 여기네.
1생(生)의 처음ㆍ마지막ㆍ중간에서 세 유위[三有爲] 모양을 취함이네.
무상을 조복(調伏)하는 지혜는 두 원인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알아야 하리. 저를 보는 데에 여섯 가지 있고 연기(緣起)에는 네 가지가 있다.
자기 종류이므로 여타 것이 아니고 인연을 기다리므로 자기가 아니며 지음이 없기에 공통됨도 아니요 작용하므로 원인 없음도 아니네.
5. 성고품(成苦品)
생길 적엔 애욕 떠나려는 원인 되고 사라질 적엔 애욕에 어울리는 원인되며 뒤바뀜과 뒤바뀜 없음과 싫어하는 저 원인이 괴로움의 모양이 되네.
3수(受)의 차별에 의하여 3고(苦)의 모양을 건립하나니 그러므로 온갖 느낌[受]들은 그 체성이 다 괴로움이라 말하네.
지어감의 체성은 괴로움이라고 알 것이니 모두가 거칠고 중함에 따르기 때문이다. 낙(樂)과 사(捨)라 함이 맞지 않으니 함께 해탈이 없는 허물이기 때문이네.
날카로움ㆍ깊음ㆍ평등함ㆍ장애이며 의지ㆍ승진(勝進)ㆍ머무름ㆍ공(空)에 집착함이며 집착함에 그 성질이 하열(下劣)하며 뒤바뀜과 그리고 염오(染汚)임이네.
종기ㆍ옴ㆍ대풍창 따위와 같아서 3수(受)가 그것에 의지한다. 그것이 능히 3촉(觸)을 발기하며 즐거움 따위를 취함에 따라 일어나네.
자기 모양[自相]과 자기 분별[自分別]과 불안함으로 괴로움의 성질이라 함이니 쉰다섯이 있다고 알아야 하는데 모두 3고(苦)에 해당된 것이네.
계(界)ㆍ인연ㆍ몸 등과 갈래[趣]와 종류ㆍ진리[諦]ㆍ3세(世)ㆍ시절과 목숨 보호함과 품(品)이 다르기에 뭇 괴로움의 차별을 이끌어 내네.
욕심[欲]과 형상[色] 따위를 떠나지 못하여 세 가지 경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욕심세계에는 온갖 종류 갖추었고 형상과 무형 세계에는 둘을 제거했네.
세속(世俗)에 두 가지가 있으며 승의(勝義)에는 변행(遍行)만 있다 이른다. 두 연(緣)이 위 경지에 통하는데 현재의 염오는 없다고 알아야 하네.
무형 세계에는 무거운 부담이 없고 변행(遍行)인 하늘, 거칠고 중함과 진리의 최후 쪽에 온갖 취온(取蘊)이 있으며 그 외는 일곱이고 위에는 속박 따르네.
태어나는 따위의 괴로움에는 각기 다섯 가지 차별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괴로움과 거칠고 중함과 상응하며 3고(苦)가 의지함이 그것이네.
5사(事)에 해당한바 아님이니 이 밖에 또 있는 것 없네. 이름[名]이 뜻[義]에서 일어나며 둘이 번갈아 서로 객체가 되네.
이름 전에는 감각이 없으며 많은 이름과 고정함 아니며 뜻 있음ㆍ뜻 없음에서 일어남이 옳지 않은 뜻이 성립되네.
취하고 이름[名]을 세우기 때문이며 그 외는 곧 능히 취하지 못한다. 중생의 삿된 집착은 불어남과 같기에 뒤바뀜이 되네.
훈습으로 말미암아 의타(依他)가 생기고 그에 의하여 뒤바뀜이 생기고 그와 같이 서로 인연이 되어 이리저리 몸이 생기게 되네.
자성(自性)과 차별(差別)과 각오(覺悟) 있음과 수면(隨眠)과 가행(加行)과 명변계(名遍計)인데 또 다섯 가지 있다고 알아야 하리.
분별(分別)에는 여덟 가지가 있어서 능히 3사(事)를 내나니 분별의 자체가 3계(界)의 마음과 마음 법이라고 알아야 하리.
두 속박에 묶인 것을 말미암아 둘의 자성(自性)을 굳게 집착하나니 그러므로 두 속박을 해탈한다면 바로 얻음 없고 소견 없으리라.
가유(假有)는 의지한바 원인이 있네. 만일 다르면 두 가지가 무너지리니 잡염(雜染)은 얻을 수가 있으므로 의타기(依他起)가 있다고 알아야 하리.
모양과 거칠고 무거움으로 자체가 되어 그것이 번갈아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고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김의 체성 없다고 말하네.
결정적으로 있음과 없음 아니며 온갖 종류를 모두 긍정함이 가(假)와 실(實), 두 성질에 통하는데 세속에 의하여 있다고 말함이네.
아(我)와 법(法)의 작용 말함을 모두 세속이 된다고 이름하며 승의(勝義) 진리는 일곱 가지 진여(眞如)를 말함이라고 알아야 하리
원성실(圓成實)의 자성(自性)은 둘의 가장 수승한 지(智)의 내용으로 온갖 실없는 이론 없으며 하나와 다른 성질 멀리 떠났네.
청정함 그를 반연하는 바이며 항상함과 변함과 다름없으며 착함의 성질과 즐거움의 성질인 온갖 것을 모두 성취하였네.
원성실(圓成實)인 승의가 무성(無性)임은 실없는 이론과 아(我)가 없기 때문이다. 의타기(依他起)는 저 모양 없거니와 이 승의(勝義)야말로 무성(無性)이네.
3상(相)에 의해 5상(相)을 내세움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저것은 그 적응하는 대로 따로 따로 5업(業)이 있네.
법집(法執) 때문에 어리석은 이가 저 중생집(衆生執)을 일으키나니 저것을 제거하고 법성(法性)을 깨달으면 법성을 깨달으므로 아집(我執)이 끊어지네.
의타기는 처음 자성(自性)에 집착하므로 훈습 일으키면 잡염을 이루고 집착 없는 원성실(圓成實)에서 훈습 일으키면 청정을 이루네.
잡염(雜染)은 유루(有漏)인 성질이요 청정(淸淨)은 곧 무루(無漏)이니 그는 곧 전의(轉依)의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두 가지라고 알아야 하네.
진실(眞實)과 자체이며 고요함[寂靜]과 공덕(功德)이니 온갖 불가사의(不可思議)는 네 가지 도리로 말미암는다고 알아야 하리.
성문(聲聞)에 두 가지가 있으니 열반에 나아감과 보리에 나아감인데 그는 변화(變化)하는 몸에 의하여 위없는 정각(正覺)에 나아가네.
모든 성문의 전의(轉依)는 싫어하고 등져 닦음으로 얻음이요 보살의 전의는 방편수(方便修)와 둘 없는 지혜에 의지함이네.
생김과 사라짐에 머무르지 않기에 부처님 지혜만이 위가 없나니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며 불가사의이고 둘이 없으시네.
8. 성현관품(成現觀品)
하품(下品)ㆍ중품(中品)ㆍ상품(上品)의 일을 현관(現觀)할 바라고 알아야 하나니 유루(有漏)와 그리고 무루(無漏)와 보지 못함ㆍ받지 못함ㆍ두루함이네.
출세간(出世間)의 수승한 지혜로 능히 제거하고 견(見)으로 끊음이니 분별없음으로 그를 증득하며 오직 정려(靜慮)에 의지하네.
아주 괴로운 악취(惡趣)가 아니며 아주 즐거운 위의 두 세계도 아니요 욕심 세계의 인간과 천상에 있어서 부처님이 출세하여 현관(現觀)하시네. 욕심 못 떠난 이와 갑절을 떠난 이와 그리고 욕심을 이미 떠난 이와 혼자 깨달은 이와 정각(正覺)을 증득하려는 이니 가장 수승한 ⧼나⧽에서 생기는 바이네.
⧼나⧽가 지혜의 원인 되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취하는 대상 아니요 ⧼나⧽는 스스로 현관(現觀) 아니니 자아(自我)에 고집하고 애착하기 때문이다.
무상함(無常)이라면 경계(境界)가 있어서 인연을 기다려 지(智)가 생길 것이며 거칠고 중한 따위 셋을 끊으리니 그러므로 마음에 의해 현관(現觀)함이다.
이미 상속(相續)을 성숙하고서 혹 바른 법을 듣기도 하며 저절로 진리에 아주 합하여 작의(作意)하므로 현관(現觀)하네.
생각을 소연(所緣)에 얽매어 두며 정근(精勤)과 고요한 정(定) 닦으며 증상(增上)한 선근(善根)과 선근의 힘으로 성각분(聖覺分)과 성도분(聖道分) 증득하리.
이로부터 견도(見道)에 들어가면 무루(無漏)인 바른 소견 생기고 3결(結)을 영원히 끊어서 현관(現觀)을 증득한다고 알리라. 비록 악취(惡趣)ㆍ잡염(雜染)의 계교와 일으키는 바와 번뇌를 끊으나 대상(境)과 소견(見)과 길잡이 따위에서 따라 나므로 3결(結) 끊음에 해당하네.
전에 들음과 세간지(世間智)로 말미암아 진리를 간택하여 끝장을 내며 진리에 가행(加行)을 거치지 않고서 결정(決定)이 생기는 모양이네.
그 지(智)가 대상과 화합한 모양으로서 소지(所知)에 끝장을 이루었나니 진리[諦]에 대해 현관(現觀)함인 열 가지 결정(決定)이라고 알아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