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대각존(天人大覺尊)의 복덕과 지혜가 모두 원만함과 위없는 글의 의미의 참되고 묘한 법과 바르게 알아서 받아 배우는 성현들께 공경히 예배하며
가장 뛰어난 대비하신 이가 널리 모든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여러 경전의 참되고 요긴한 뜻을 두루 모아 다섯 부분의 유가를 간략히 말씀하신 것에 머리 조아리며
법의 흐름의 오묘한 선정의 힘으로 집착하지 않는 공덕의 이름을 일으키고 능히 성자의 가장 뛰어난 바다에서 궁극적인 법의 감로를 이끌어 내어
아름다운 소리를 지어 받아 스스로 만족하고 다시 모든 세간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무궁한 자화의 비[字花雨]를 골고루 쏟아 부어 모니의 여의수(如意樹)를 윤택케 하심에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이 논의 뛰어남은 연꽃과 같고 묘한 보배의 창고와 같고 큰 바다와 같아서 여러 승(乘)의 광대한 뜻을 자세히 나타내며 그 글을 잘 풀이하나니 버릴 것이 없나이다.
유가사지론석이 유가의 대론 가운데서 제가 이제 힘닿는 대로 약간을 해석하리니 정법이 항상 다함이 없게 하고 모든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케 하여지이다.
이제 이 논을 말하리니, 까닭이 무엇인가?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여래의 위없는 법의 가르침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평등하게 모든 유정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하니, 첫째는 이미 없어져버린 것은 여래의 감로와 같은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기억하고 채집하여 다시 열어 나타나게 하며,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은 문답하고 결택하여 더욱 흥성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모든 유정계 가운데 종성(種姓)이 있는 자는 각각 자신의 승에 의지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선을 닦아 삼승의 과보를 얻어 생사를 벗어나게 하며, 종성이 없는 자는 인천승(人天乘)에 의지하여 세간의 선을 닦아 인천의 과보를 얻어 악취를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어떤 이가 공을 많이 말한 불요의경에 대하여 말 그대로 헤아리고 집착하여 무라는 소견을 일으켜서 유의 가르침을 모두 싫어하니, 모든 법의 유의 모습을 따라서 깨닫게 하고자 경의 은밀한 뜻을 풀이하여 무의 견해를 버리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다시 어떤 이가 유를 많이 설한 불요의경에 대하여 말 그대로 헤아리고 집착하여 유를 고집하여 공의 가르침을 모두 싫어하고 두려워하니, 모든 법의 무상의 모습을 따라서 깨닫게 하고자 경의 은밀한 뜻을 풀이하여 유의 견해를 버리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보살 종성의 보특가라(補特伽羅)를 성취하기 위하여 오직 큰 가르침에 의지하여 두루 여러 승의 문의와 행업ㆍ과보에 대하여 교묘한 방편지혜를 내어 모든 장애를 끊고 모든 선을 닦아 부처님의 보리를 증득하여 미래제가 다하도록 자신과 타인이 한없이 이롭고 즐겁게 위함이요, 둘째는 이승종성과 무종성의 보특가라를 성취하기 위하여 역시 큰 가르침에 의지하여 각각 자승의 문의와 행업ㆍ과보에 대하여 교묘한 방편지혜를 내어 번뇌장을 끊고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고 자기 분량의 선을 닦아 자승의 과보를 얻어 삼계의 모든 악취를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어떤 이가 과거세로부터 무지하고 머뭇거리며 뒤바뀌어서 외도와 소승의 삿된 가르침을 집착하기 때문에 대승을 믿고 이해할 수 없으니, 대승의 법상을 잘 분별하게 하여 믿고 이해하고 깨달아서 반드시 뒤바뀐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다시 어떤 이가 모든 계경의 여러 가지 의미가 매우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려움을 듣고서 그 마음이 혼란스러워 비난하며 믿지 않으니, 잘 드러내어 믿고 이해하게 하여 그를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간략히 말한 논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자를 포섭하여 이익되게 하고자 여러 경전의 넓고 중요한 법의 의미를 채집하여 간략히 분별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자세히 말한 논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설법하는 자를 포섭하여 이익되게 하고자 하나하나의 법에 대하여 한없이 차별되는 뜻을 열어 보이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모든 법의 실상을 열어 보이고자 문답하고 결택하여 바른 논을 세우기 위함이요, 둘째는 모든 허망한 집착을 없애고자 문답하고 결택하여 삿된 논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변계소집은 허망한 감정[情]으로 보면 있으나 바른 이치로는 없고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바른 이치로는 있고 허망한 감정으로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어 증익과 손감의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세간의 도리와 승의를 증득한 법문의 차별을 드러내어 이제(二諦)를 닦아 전도된 견해를 없애기 위함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하였다. 첫째는 수전(隨轉)과 진실의 두 가지 이문(理門)을 열어 밝혀 이장(二藏)과 삼장(三藏)의 법의 가르침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인연과 유식과 무상과 진여의 네 가지 이문을 열어 밝혀 관행을 닦아 차별이 있게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논을 말한다. 첫째는 경계의 차별을 나타내어 모든 법의 자성과 형상의 자리가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요, 둘째는 수행의 차별을 나타내어 삼승의 방편과 근본의 결과가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인연이 여러 곳의 경과 논에서 여러 가지로 다르게 설하여졌으니, 모두 이 논이 지어진 이유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이 논을 말하는데 연유가 무엇인가? 모든 유정이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법처 가운데의 실상에 대하여 무지하고 의혹되고 뒤바뀌고 편벽되게 집착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유루의 업을 나타내어 오취에 윤회하며 세 가지 큰 고통[三大苦]을 받는다. 여래께서 세간에 나타나시어 그 알맞은 바에 따라서 방편으로 여러 가지 묘한 법처 가운데의 실상을 말씀하시어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법이 이러이러하게 공이기 때문에 유가 아니며, 이러이러하게 유이기 때문에 공이 아님을 알게 하여 모든 법이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님을 깨달아서 의혹과 뒤바뀜과 편벽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그 종성에 따라서 법처 가운데의 행을 일으켜 점차 원만함을 닦아서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모든 장애를 영원히 없애고 삼보리를 얻어 적멸의 즐거움을 증득하게 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마군의 일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치우친 집착이 다투어 흥기하여 많은 이가 유견(有見)에 집착하게 되자, 용맹(龍猛)보살이 극희지(極喜地)를 증득하고 대승의 무상공(無相空)의 가르침을 모아 중론 등을 지어서 참된 요체를 궁극적으로 드날리고 저 유견을 없앴으며, 성제바(聖提婆) 등의 모든 대논사들이 백론(百論) 등을 지어 대의를 널리 밝혔다. 이로 말미암아 중생들이 다시 공견(空見)에 집착하자 무착보살이 초지(初地)에 올라 법광정(法光定)을 증득하고 큰 신통을 얻어 미륵보살을 섬기어 이 논을 설명하기를 청하니, 본질과 현상을 모두 다하였고 문장과 의미가 모두 풀이되었으며 의심과 집착이 모두 없어졌고 수행이 모두 닦였으며, 증득되지 않은 과보가 없었다. 바로 보살을 위하여 여러 승(乘)의 경계와 수행과 과보 등에 대해서 모두 선교를 얻어 대행을 부지런히 닦아 대보리를 증득케 하고, 널리 유정을 위하여 항상 뒤바뀌지 않게 말하며, 아울러 나머지 승을 위하여 자신의 법에 의지하여 자신의 분수에 맞는 수행을 닦아 자신의 승에 맞는 과보를 증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논의 연유하는 바를 대략 말하였다. 지금 말하는 유가사지론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스승이 경계ㆍ수행ㆍ과보 등 가지고 있는 모든 법을 다 ‘유가’라고 하니, 모두가 방편선교와 상응하는 뜻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유가(境瑜伽)’라는 것은 모든 경계의 뒤바뀌지 않는 성질, 서로 어기지 않는 성질, 순리를 따르는 성질, 구경(究境)을 향해가는 성질로서 바른 이치의 가르침과 수행과 과보가 상응하기 때문에 유가라고 이름한다. 이 경유가는 비록 모든 것에 통하지만 모든 경론에서는 상에 나아가고 근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르게 말하였다. 어떤 데에서는 모든 법의 네 가지 도리를 유가라고 하였으니, 관대와 작용과 법이와 종성이 모든 바른 도리를 총괄적으로 포섭하기 때문이고, 어떤 데서는 이십사 불상응행 중의 하나를 유가라고 하였으니, 인과가 서로 맞아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 결택분 등의 곳곳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데서는 잡염과 청정의 무성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어긋남을 없애고 순리에 계합하여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대범문계경(大梵問契經) 등에서 “모든 유가사들은 적은 법이라도 생겨나게 하거나 없어지게 할 수 없으며, 또한 적은 법이라도 증득하게 하거나 나타내 보일 수 없음을 본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즉 온갖 잡염무성의 유가 중의 행에 대하여 적은 법도 생겨나게 하거나 없앨 수 없음을 보며, 모든 청정무성의 유가 중의 행에 대하여 적은 법도 증득하게 하거나 나타내 보일 수 없음을 본다는 말이다. 어떤 데에서는 구경의 청정한 진여를 유가라고 하였으니, 이치 가운데에서 가장 궁극적인 모든 공덕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는 입릉가경(入楞伽經)에서 “만일 진여의 뜻을 보려면 분별을 제거하고, 더러움을 멀리 여의며, 능취를 없애고 소취도 없애며, 해탈도 없애고 속박도 없애야 하니, 이때 정에 있으면서 유가를 보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대의경(大義經) 중에서는 하나의 법으로부터 백법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유가라고 하였으니, 법문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광의경(廣義經) 중에서는 오온ㆍ십팔계ㆍ십이처ㆍ십이연기ㆍ사제 등을 모두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든 대상 세계를 포섭하여 근기의 알맞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경론 가운데서 모든 대상 경계를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두 네 가지 성질을 갖추고 네 가지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행유가(行瑜伽)’라는 것은 다음을 말한다. 즉 모든 행이 다시 서로 따르기 때문이며, 바른 이치에 맞기 때문이며, 바른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며, 바른 과보에 나아가기 때문에 유가라고 한 것이다. 이 행유가는 비록 모든 행위에 통하지만 여러 경론에서는 모양에 나아가고 근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르게 말하였다. 변유가사지경(辯瑜伽師地經)같은 데서는 모든 행위를 바르게 닦는 것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든 상응하는 행위를 다 포섭하기 때문이요, 월등경(月燈經)에서는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을 닦는 것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모든 과보를 따르는 행위 가운데서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요, ‘대분별육처경(大分別六處經)’ 중에서는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구별하여 평등하게 도를 운용하는 것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지관은 여러 행위의 으뜸이기 때문이요, 해혜경(海慧經) 중에서는 삼마지를 닦는 것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마음에 머물러 행위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현양론(顯揚論) 등에서는 신ㆍ욕ㆍ방편ㆍ정진의 네 가지 법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작의(作意) 혹은 지혜를 방편이라고 하는데 이 네 가지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내기 때문이요, 문소성지(聞所成地) 편에서는 아홉 가지 도를 따로 구별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이치에 부합하고 의혹을 제거하여 지위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니, 세간과 출세간의 가행(加行)ㆍ무간(無間)ㆍ해탈ㆍ승진(勝進)의 연중상(軟中上)의 도를 말한다. 수소성지(修所成地) 편에서는 모든 대치도(對治道)를 모두 구별하여 수습하는 것을 ‘유가’라고 하니, 간략한 것을 좋아하는 자가 총괄적으로 수행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는 모든 계위에 포섭되는 뒤바뀌지 않는 지혜를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든 계위의 법을 반연하는 무전도지(無顚倒智)는 행위 가운데서 뛰어나기 때문이요, 어느 곳에서는 다시 방편과 선교, 혹은 오직 방편만을 나타낸 깨달음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공덕실성계경(功德實性契經) 중에서는 모든 연기의 관을 말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연기관의 지혜는 생사를 벗어나는 데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요, 정행경(正行經) 중에서는 정견 등의 팔지성도(八支聖道)를 말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열반의 성에 나아가는 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비나야경(毗奈耶經)에서는 계 등을 닦는 것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계학(戒學)ㆍ정학(定學)ㆍ혜학(慧學)은 인(因) 가운데 뛰어나기 때문이요, 대의경 중에서는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행위를 닦는 분위의 차별을 모두 유가라고 하였으니, 정행(正行)의 계위는 서로 부합하여 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데서는 모두 성문(聲聞)에 공통되는 행위를 말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삼승을 증득하는 것은 행위 가운데 뛰어나기 때문이다. 혜도피안계경(慧到彼岸契經) 중에서는 공을 관찰하는 작의를 말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큰 행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저 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이 가진 모든 큰 유가라는 것은 공작의(空作意)를 말하니, 보살이 이 공작의를 말미암기 때문에 성문과 독각지에 떨어지지 않으며, 내지 모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한 것과 같으며, 곧 저 경 중에서 다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다를 뛰어난 유가라고 하니, 대승의 행을 이끄는 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저 경에서 “보살이 가진 모든 유가 중에서 혜도유가(慧度瑜伽)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널리 말하고, 내지 “이것은 무등등(無等等)이니, 어째서인가?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뛰어난 유가법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른 곳에서는 이 혜도가 포섭하는 무분별정(無分別定)을 말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든 뛰어난 공덕을 내기 때문이요, 다른 곳에서는 다시 보살이 가진 뛰어난 지혜와 자비가 평등하게 쌍으로 펼쳐지는 것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머무름 없는 대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데서는 모든 불공행(不共行)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위없는 불보리를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요, 이와 같은 모든 경론 중에서는 모든 행을 말하여 다 유가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과유가(果瑜伽)’라는 것은 모든 과보가 다시 서로 따르기 때문이며, 바른 이치에 맞기 때문이며, 바른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며, 바른 인에 맞기 때문에 유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과유가는 비록 모든 과보에 통하나, 여러 경론에서는 모양에 의하고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말하였다. 분별의경(分別義經)에서는 역무외(力無畏)의 불공불법(不共佛法)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든 마구니를 굴복시키고 모든 다른 논리를 제압할 수 있어서 여타의 승(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요, 수승경(殊勝經) 중에서는 부처가 증득한 머무름 없는 열반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미래제를 다하도록 머무르는 바가 없기 때문이요, 대의경 중에서는 여래지의 무분별지와 대비를 유가라고 하였으니, 자리와 이타가 항상 다함이 없기 때문이요, 변설유가사지경(辨說瑜伽師地經) 중에서는 불지(佛地)의 공덕을 다 유가라고 하였으니, 법계에 다하도록 끊어지거나 다함이 없기 때문이요, 분별삼승공덕경(分別三乘功德經) 중에서는 삼승의 과덕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모두가 바른 이치 등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찬불론(讚佛論)에서는 삼신(三身)과 삼덕(三德)을 모두 유가라고 말하였으니, 모든 과덕과 서로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요, 집의론(集義論)에서는 과위에 포섭되는 유위ㆍ무위의 모든 공덕들을 유가라고 하였으니, 등지(等至)의 구경과 화합하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러 경과 논 중에서는 모든 과덕을 모두 유가라고 하였으니, 위의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가르침을 또한 유가라고 하니, 바른 이치에 맞기 때문이며, 바른 행위를 따르기 때문이며, 바른 과보를 이끌기 때문이다. 어떤 뜻은 바로 삼승(三乘)의 관행(觀行)을 취하여 유가라고 하였으니, 자주자주 나아가 닦으며, 이치에 맞고 행위를 따라 수승한 과보를 얻기 때문이다. 경계와 과보와 성교(聖敎)는 유가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유가의 과보이기 때문이며, 유가를 논하였기 때문에 또한 유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 논한 유가라는 두 글자도 오히려 두루하여 성스러운 말의 큰 바다를 요동하는데 어찌 하물며 ‘유가사지’를 자세히 말하겠는가? 아마도 받아 지니기가 어려울 것 같으므로 우선 간략히 말하겠다. 삼승의 행이라는 것은 문(聞)ㆍ사(思) 등으로 말미암아 차례대로 이와 같은 유가를 익히고 행하여 분수에 따라 만족히 하고 더 나아가 모든 유정을 조화시키기 때문에 ‘유가사’라고 한 것이다. 혹은 모든 여래가 유가를 증득하여 원만히 하고,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이 유가를 지니고서 모든 성제자들을 조화시켜 그들이 차례대로 바른 행위를 닦게 하기 때문에 유가사라고 한다. ‘지(地)’라는 것은 경계를 말하며 의지하는 대상과 행하는 대상과 혹은 포섭하는 대상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유가사가 행할 경계이기 때문에 지라고 하였으니, ‘용마(龍馬)의 땅’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오직 이 가운데서 행하여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혹은 유가사가 이 처소에 의지하여 백법을 증장시키기 때문에 지라고 하였으니, ‘농사의 땅’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유가사지가 포섭하는 지혜가 이것에 의하여 나타나 진행하고 이것에 의하여 증장하기 때문에 지라고 하였으니, ‘보배의 땅’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유가사가 행위를 이 가운데 두고 백법을 수용하기 때문에 지라고 하였으니, ‘우왕(牛王)의 땅’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여러 여래를 유가사라고 하는데 평등지 등의 행위가 온갖 희론이 없는 경계와 머무름이 없는 열반의 유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니, 이것이 저기에 포섭되기 때문에 지라고 한다. 혹은 십칠지(十七地)가 모든 유가사에 속하기 때문으로 마치 ‘국왕의 땅’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러므로 ‘유가사지’라고 말한다.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문답하여 결택하기 때문에 ‘논’이라고 하였으니, 유가사지를 증득케 하기 위하여 이 논을 말하였기 때문에 명칭으로 삼은 것으로 대법론(對法論)과 같다. 혹은 다시 이 논이 유가사지를 뒤바뀌게 설명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명칭으로 삼았으니, 『십지경(十地經)』과 같다. 혹은 다시 이 논이 이 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름으로 삼았으니, 마치 물과 뭍의 꽃과 같다. 이 때문에 논의 명칭을 유가사지라고 한 것이다. 이제 이 논의 체는 모두 다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본지분(本地分)이니 대략 십칠지의 뜻을 널리 분별하였고, 둘째는 섭결택분(攝決擇分)이니 십칠지 가운데의 깊고 은밀하고 요긴한 뜻을 대략 포섭하여 결택하였고, 셋째는 섭석분(攝釋分)이니 여러 경의 의칙(儀則)을 대략 포섭하여 해석하였고, 넷째는 섭이문분(攝異門分)이니 경 가운데 있는 모든 법의 명칭과 의미의 차별을 대략 포섭하였고, 다섯째는 섭사분(攝事分)이니, 삼장들의 긴요한 사의(事義)를 대략 포섭하였다. 이 논에 이미 이와 같은 다섯 부분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명칭을 유가사지라고만 하였는가? 첫 번째에 의하여 이름을 세웠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 또 모든 법이 유가사지가 아님이 없으니, 유가사의 작용으로써 모든 법이 의지를 삼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간략한 것을 두어서 우선 십칠을 말하였으며, 또한 십칠지는 모든 문장의 뜻의 간략함과 완전함을 다 포섭하였다. 뒤의 네 부분은 모두 십칠지 가운데의 여러 중요한 문장의 뜻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역시 유가사지를 떠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이 논은 십칠지로써 종요를 삼는다. 비록 다시 여러 승의 경계 등을 통틀어 밝혔으나, 논을 말한 자가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묻고 답하여 결택하였으니, 그 의도는 보살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다 선교를 얻어서 불과를 닦아 이루어 한량없이 이롭고 즐겁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므로 이 논은 보살장의 아비달마에 속하니, 보살로 하여금 뛰어난 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論】 무엇이 유사가지인가? 십칠지를 말한다. 【釋】 처음에 “무엇이 유가사지인가?”라고 물은 것은 이 논 전체의 종요를 총괄적으로 물은 것이다. 묻는 자가 여러 경에서 말한 유가사지를 먼저 듣고서 그 뜻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이를테면 변유가사지경(辯瑜伽師地經) 중에서는 유가사지를 바르게 닦을 것을 자주 말하였고, 월등경 중에서도 역시 유가사지를 닦아 익힐 것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가 아니니, 앞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혹은 논을 지은 자가 먼저 총괄적으로 요청을 받고, 논의 체의 다섯 부분이 모두 마음 가운데 있으므로 배우는 무리에게 분별하고 해설해 주기 위하여 스스로 짐짓 질문하여 말한 인연을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무엇이 유가사지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먼저 대략 말할 수 없으며, 이 지가 어떤지 갑자기 묻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질문을 일으키는 것에 대략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의심나기 때문에 묻는 것이고, 셋째는 시험하려고 묻는 것이고, 넷째는 경솔하게 부딪치기 때문에 묻는 것이고, 다섯째는 유정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묻는 것이다. 지금은 이 다섯 번째로서 오로지 모든 유정의 무리를 이익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은 것이다. “십칠지를 말한다”란 이야기된 유가사지를 모두 모으면 대략 십칠이 있다. 만약 널리 세우면 지위가 한량없으니, 하나하나 지 가운데에 있는 차별에는 그 뜻이 한량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번 굴려 총괄적으로 묻고 총괄적으로 답하였다. 【論】 무엇을 십칠이라고 하는가? 온타남에서 말하였다.
오식상응(五識相應)과 의(意)와 유심사(有尋伺) 등의 세 가지와 삼마지구(三摩地俱)와 비(非)와 유심(有心)ㆍ무심지(無心地) 문(聞)ㆍ사(思)ㆍ수(修)가 세운 것과 이와 같이 삼승과 유의(有依) 및 무의(無依)를 갖춘 것, 이것을 십칠지(十七地)라 한다.
【釋】 무슨 인연으로 다시 무엇이 십칠지인지를 물었는가? 비록 총괄적인 수를 들었지만 각각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질문을 한 것이다. ‘온타남’이라는 것은 먼저 대략 게송으로 답하여 간략히 지의 이름을 모아서 배우는 자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온타남이라고 한다. ‘오식상응’이라는 것은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를 말하고, ‘의(意)’라는 것은 의지를 말한다. ‘유심사 등의 세 가지’는 유심유사 등의 삼지(三地)를 말하고, ‘삼마지구’라는 것은 삼마지를 말하는 것으로 온전한 이름은 삼마희다지이고, ‘비(非)’라는 것은 비삼마지를 말하는 것으로 온전한 이름은 비삼마희다지이다. 이것은 일상에 의하여 우선 지의 이름을 구별한 것이지 이치를 다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름은 서로 넓고 좁기 때문에 삼마지의 이름은 정(定)과 부정(不定)에 통하나 오직 유심에 있고, 삼마희다는 유심위와 무심위에 통하나 오직 정에 국한되어 있으니, 뒤에서 자세히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삼승을 갖춘 것’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문(聞) 등의 지(地)와 혹은 이와 같은 위의 모든 지를 말미암기 때문에 삼승 및 유여의지(有餘依地)와 무여의지를 갖추게 됨을 말한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이름은 뒤에서 자세히 해석한 것과 같다. 【論】 첫째는 오식신상응지이고, 둘째는 의지이고, 셋째는 유심유사지이고, 넷째는 무심유사지이고, 다섯째는 무심무사지이고, 여섯째는 삼마희다지이고, 일곱째는 비삼마희다지이고, 여덟째는 유심지이고, 아홉째는 무심지이고, 열째는 문소성지(聞所成地)이고, 열한째는 사소성지(思所成地)이고, 열두째는 수소성지(修所成地)이고, 열셋째는 성문지이고, 열넷째는 독각지이고, 열다섯째는 보살지이고, 열여섯째는 유여의지이고, 열일곱째는 무여의지이다. 이와 같이 대략 십칠을 말하였으니, 이를 유가사지라고 이름한다. 【釋】 다음은 널리 이름을 열거하였으니, 앞의 질문에 거듭 대답한 것이다. ‘오식신상응지’라고 말한 것은 안(眼) 등의 근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안 등의 식이 불공소의(不共所依)로서 안 등은 나머지 식에는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친의(親依)로서 안 등의 예리하고 둔함은 식의 밝고 어두움이기 때문이다. 또 동시의(同時依)로서 반드시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니, 의(意) 등과는 같지 않다. 이 오식이 안 등의 근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나타내어 구별하였으니, 마치 보리의 싹과 같고, 북의 소리 등과 같다. 그러므로 ‘오식’이라고 하였다. 의지하는 대상의 근이 형상[形]과 질애가 있기 때문이며, 또 반드시 의지하는 대상의 몸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치 신수(身受)와 같기 때문에 이름을 ‘신’이라고 하였다. 또 신이라는 것은 ‘의지한다’는 뜻이고, ‘본체’의 뜻이니 육식신(六識身)ㆍ육사신(六思身) 등과 같다. 오식신에 의지하여 이 지를 세우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한 것이니, 율(律) 가운데의 왕상응론(王相應論)과 적상응론(賊相應論)에서 “왕(王)과 적(賊)에 의지하여 언론을 일으킨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것도 이와 같다. 비록 이 지 가운데서 많은 법을 분별하였으나 오식(五識)이 주가 되기 때문에 치우쳐서 말한 것이다. 또 오식신상응심품을 총괄적으로 상응이라고 부른다. 이 지 가운데에서 비록 많은 법을 밝혔으나, 심과 심소가 뛰어나기 때문에 따로 말한 것이다. 또 상응이라는 것은 ‘포함한다’는 뜻이니, 이 지 가운데에서 오식신에 포함되는 법을 말한 것으로 곧 이것이 자성(自性)ㆍ소의(所依)ㆍ소연(所緣)ㆍ조반(助伴)ㆍ작업(作業)이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한 것이다. ‘지’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뒤의 여러 가지 식신상응은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통하는 것이 있어 생략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의지(意地)’라고 말한 것은 육ㆍ칠ㆍ팔식이 함께 의지하는 의근(意根)이니, 식ㆍ신ㆍ상응의 세 단어를 생략하였기 때문에 다만 ‘의(意)’라고 말한 것이다. 또 실의문(實義門)에는 비록 팔식이 있으나, 수기문(隨機門)에는 다만 육식이 있으니, 육ㆍ칠ㆍ팔식은 똑같이 제6식에 포함된다. 의지하는 대상의 이름에 의하였기 때문에 다만 의라고 말하였으니, 의지하는 대상은 색이 아니며, 혹은 몸을 여의어 마치 심수(心受)와 같다. 그러므로 신(身)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상응은 앞서와 같기 때문에 생략하여 말하지 않았다. 또 육ㆍ칠ㆍ팔은 비록 모두 심ㆍ의ㆍ식의 뜻이 있지만, 심법과 의처와 식온에 포함되어서 위의 뜻과 같기 때문에 다만 의를 말한 것이니, 모두 사량의근(思量意根)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제8식은 종자를 지니고 있어서 심(心)의 뜻이 특히 강하고, 제6식은 널리 경계를 인식하고 구별하여 식의 뜻이 특히 강하니, 이러므로 심지(心地)와 식지를 말하지 않았다. 신과 상응은 생략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지(地)’의 뜻은 앞서와 같다. 무슨 연유로 5식을 합하여 하나의 지에 세워 가장 앞에서 말하고, 나머지 식을 하나로 세워 두 번째에서 말하였는가? 5식은 동등하여 마땅히 설명이 나뉘어질 필요가 없고, 반연할 대상 등의 업과 말할 바의 일이 적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로 세워 설명이 가장 앞에 있고, 의지는 이것과 반대가 되기 때문에 따로 하나로 세워 설명이 두 번째에 있다. 또 5식은 똑같이 색근(色根)에 의지하고 똑같이 색경(色境)을 반연하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로 세웠고, 나머지는 무색(無色)에 의지하고 반연하는 대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하나로 세웠으니, 자성과 의지하는 대상과 반연하는 대상의 거칠고 미세한 차례 때문에 설명함에 앞뒤가 있다. 또 5식은 똑같이 현량(現量)에 포함되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로 세워 설명이 가장 앞에 있고, 나머지 식은 일정하지 아니하여 혹은 현량이거나 혹은 비량[比]이거나 혹은 비량(非量)에 포함되기 때문에 따로 하나로 세워 설명이 두 번째에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지가 자성ㆍ소의ㆍ소연ㆍ조반(助伴)ㆍ작업(作業)이 합하여져 체(體)가 되기 때문에 모든 법을 포함한다. 이 가운데 모든 법은 식을 여의지 아니하였으며, 식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식이 체가 되며, 식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먼저 팔식에 의하여 두 가지 지를 세웠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팔식의 자성과 소의와 소연과 조반과 업 등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유심유사 등의 세 가지 지’라는 것은 ‘심(尋)’은 찾아서 구하는 것이고 ‘사(伺)’는 살피는 것이다. 사(思)나 혜(慧)가 경계에 대하여 추구하는 거친 자리를 심이라 하고, 곧 이 두 가지가 경계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는 미세한 자리를 사라고 한다. 한 찰나에 두 법이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한 종류의 거칠고 미세함이 앞뒤로 달라지기 때문이니, 이제 이 둘에 의하여 삼지(三地)를 세웠다. 어떤 뜻으로는 이 세 가지가 둘의 전후의 상응에 의하여 세운 것이니, 욕계지(欲界地)와 초정려(初靜慮)에서는 거친 심ㆍ심소가 앞뒤로 서로 이어져 심사(尋伺)와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라고 하는 것이며, 정려 중간에서는 거친 심ㆍ심소가 앞뒤로 서로 이어지나 반드시 심은 없고 오직 사와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무심유사지(無心唯伺地)’라고 한 것이며, 제2정려 이상의 여러 지에서는 모든 심ㆍ심소가 앞뒤로 서로 이어지나 반드시 심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무심무사지’라고 한 것이다. 만일 욕계지와 초정려와 정려중간의 미세한 심ㆍ심소로서 심사와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 및 모든 색과 상응하지 않는 행과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심사와 함께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모두 ‘무심무사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뒤에서 논하기를 “유심유사지와 무심유사지는 한결같이 유심지이며, 무심수면(無心睡眠)과 무심민절(無心悶絶)과 무상정(無想定)과 무상생(無想生)과 멸진정(滅盡定) 및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는 무심지라고 한다”고 하였다. 어떤 뜻으로는 이 세 가지가 둘의 이욕분(離欲分)의 자리에 의하여 세운 것이니, 욕계와 색계지에서는 모든 법의 가유[假者]가 심과 사에 대하여 모든 욕심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명칭을 ‘유심유사지’라고 한 것이며, 정려중간에서는 모든 법의 가유가 심은 이미 욕심을 여의었으나 사는 아직 욕심을 여의지 아니하였으므로 ‘무심유사지’라고 한 것이며, 제2정려 이상의 모든 지에서는 모든 법의 가유가 심과 사에 대하여 함께 욕심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심무사지’라고 한 것이다. 만일 하지(下地)에서 아울러 욕심을 여의었다면 역시 ‘무심무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뒤에서 논하기를 “이 가운데 심사의 욕심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심무사지’라고 하니, 현행(現行)하지 않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욕계의 욕심을 아직 여의지 않은 자라도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것과 의도적인 마음의 차별에 기인해서 한 때에 역시 무심무사의 의가 현행하고, 심사의 욕심을 이미 여읜 자라도 역시 심사가 현행하니, 마치 저 정(定)에서 나오는 것과 저 지(地)에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실한 뜻으로는 이 세 가지가 다만 계(界)와 지에 의하여 세워지니, 욕계지(欲界地)와 초정려에서는 유루ㆍ무루의 모든 법이 그 가운데 심과 사를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제1지라고 부르고, 정려중간에서는 유루ㆍ무루의 모든 법이 그 가운데 심은 없고 오직 사만 있기 때문에 제2지라고 부르며, 제2정려 이상의 모든 지에서는 유루ㆍ무루의 모든 법이 그 가운데 심과 사가 모두 없기 때문에, 제3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뒤에서 논하기를 “이 가운데 욕계와 초정려는 정에 있거나 나오거나 유심유사지라고 하며, 정려중간에서는 정에 있거나 나오거나 무심유사지라고 하며, 제2정려 이상의 색계와 무색계는 온전히 무심무사지라고 한다”고 하였다. 무루ㆍ유위의 초정려정(初靜慮定)은 또한 유심유사지라고 하니, 심사의 처소의 법에 의하여 진여를 반연하여 경계를 삼아 이 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분별(分別)의 현행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니, 나머지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만일 상응에 의하고 욕심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3지를 세운다면 포함되는 법이 다하지 아니하며, 또한 크게 혼란되니, 비록 유심유사 등의 지가 오직 유심이라고 말하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문에 의하여 지의 모양을 거칠게 분별한 것이다. 이 문 가운데 “오직 제2정려 이상은 무심무사지”라고 말한 중에 무상정ㆍ무상생ㆍ멸진정을 무심지라고 하고, 나머지 모든 지위를 유심지라고 한다. 뒤에 있는 네 문은 다시 다르게 세우니, 뒤에서 말하려는 것과 같다. 비록 이 가운데 심사의 욕심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심무사지라고 한다고 말하였으나, 오직 저 제2정려 이상의 모든 지는 반드시 심사지의 욕심을 여의었다고 말하고 이미 심사의 욕심을 여읜 자가 낮은 지의 모든 법에서도 무심무사라고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만일 이와 같다면 낮은 지의 심사의 욕심을 여의지 않은 자는 높은 지의 모든 법에서도 역시 유심사 등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세우면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니,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오직 계와 지의 높고 낮음에 의하여 세운 것이다. 이른바 ‘삼마희다지(三摩多地)’라는 것은 승정지이니, 혼침과 도거 등을 여의어 평등하도록 이끄는 주체이니 혹은 평등을 이끌며, 혹은 이 평등이 이끌어 발생시킨 대상이기 때문에 명칭을 등인지라고 한다. 어떤 뜻으로는 이 이름이 오직 모든 유심의 온갖 정을 포함하여 모두 평등하게 공덕을 이끌 수 있으나, 무심에는 통하지 않으니, 앞의 게송 가운데서에서 ‘삼마지구(三摩地俱)’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며, 삼마지는 별경(別境) 가운데의 심수법이기 때문이다. 두 무심정은 모든 공덕을 평등하게 이끌 수 없기 때문에 등인지(等引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등인지라고 말하였는가? 이 등인지는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정려와 해탈과 등지(等持)와 등지(等至)이다. 정려라는 것은 사정려를 말하고, 해탈이라는 것은 팔해탈을 말하며, 등지라는 것은 공등지(空等持)ㆍ무원(無願)등지ㆍ무상(無相)등지를 말하며, 등지라는 것은 오현견(五現見)등지ㆍ팔승처(八勝處)등지ㆍ십변처(十邊處)등지ㆍ사무색(四無色)등지ㆍ무상(無想)등지ㆍ멸진(滅盡)등지를 말하니, 여기에는 과실이 없다. 두 무심정(無心定)은 등인(等引)의 과보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주었으나, 실제는 등인이 아니다. 어떤 뜻으로는 이 이름이 유심위(有心位)와 무심위에 있는 정(定)의 체에 통한다. 만일 유심정이라면 평등하게 모든 공덕을 이끌 수 있으며, 또한 평등의 근대(根大) 등을 이끌며, 혼침과 도거를 여의어 계율에 참회할 것 등이 없어서 평등한 방편이 이끌어서 발생시킨 것이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일 무심정이라면 비록 뛰어난 공덕은 이끌지 못하지만 평등한 근대 등은 이끌 수 있으며, 평등정이 이끌어서 발생시킨 것이기 때문에 또한 등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앞의 게송 중에 삼마지구라고 하였는가? 여기에는 과실이 없으니, 게송 중의 글을 생략하여 우선 저 ‘구(俱)’라고 말하였으나, 사실은 등인은 구가 아니며, 뒤에서는 등인이 무심(無心)에 통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실한 뜻으로는 등인지(等引地)의 이름은 통하는 경우도 있고 국한되는 경우도 있다. 유심ㆍ무심의 두 자리에 함께 포함되기 때문에 통한다고 하였으니, 뒤에서는 무상ㆍ멸진정은 또한 등인지의 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으며, 오직 유루와 무루의 뛰어난 정에만 있어서 욕계 등의 일체의 산란한 마음은 아니기 때문에 국한된다고 한 것이니, 뒤에서는 오직 정려 등을 등인지라고 하니, 욕계의 심일경성(心一境性)에서 이로 말미암아 등인이 무회(無悔)ㆍ환희ㆍ안락의 소인(所引)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욕계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에 준하여 상계(上界)에서도 만일 산란한 마음에 있다면 또한 등인이 아니니, 욕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배대하여 4구(句)를 지을 수 있다. 혹은 등지구(等持俱)는 등인지가 아니니, 욕계 등의 산심위(散心位) 중의 삼마지구의 심ㆍ심소 등을 말하며, 혹은 등인지는 등지구가 아니니, 정위(定位) 중의 삼마지의 체와 무상정과 멸진정의 자리에 있는 모든 법을 말하며, 혹은 등지구는 또한 등인지이니, 모든 정려와 모든 무색유심정(無色有心定)의 자리의 심ㆍ심소 등으로 삼마지를 제외한 것을 말하며, 혹은 구(俱)와 비(非)가 있으니, 상위에 있는 모든 법을 제외한 것을 말한다. 또 삼마지ㆍ삼마발저(三摩鉢底)ㆍ삼마희다는 이름에 넓고 좁음이 있다. 삼마지의 이름은 심수(心數) 중의 등지를 가리키니, 하나의 법이 모든 유심위 중의 심일경성을 통틀어 포함하여 정위(定位)와 산위(散位)에 통한다. 그러나 여러 경론에서는 뛰어난 것에 의하여 다만 공ㆍ무원 등을 삼마지라고 하였다. 삼마발저는 모든 유심ㆍ무심의 모든 정위 중에 있는 정의 체를 통틀어 가리키나, 모든 경론 중에서는 뛰어난 것에 의하여 오직 오현견(五現見) 등과 상응하는 모든 정(定)만을 등지라고 하였다. 등인지의 이름은 모든 유심ㆍ무심정위의 공덕을 통틀어 가리키기 때문에 이 지(地) 가운데 모든 정위의 공덕을 통틀어 포함하니, 이로 말미암아 총괄하기 때문에 지의 이름을 특별히 가리킨 것이다. 비삼마희다지라고 말한 것은 위의 것을 풀이하면 쉽게 알 수 있으니, 번거롭게 자세히 해석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모든 정ㆍ비정(非定)의 자리에 있는 모든 법을 총괄적으로 포함한다. 이른바 ‘유심ㆍ무심지’라는 것은 대략 오문(五門)에 의하여 차별을 세운다. 첫째는 지의 총설문(說門)에 의한 것이니,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와 의지(意地)와 유심유사지와 무심유사지를 말한다. 이 네 가지는 한결같이 유심지이며 무심무사지 중에서는 무상정과 무상생과 멸진정을 제외한 나머지가 한결같이 유심지이고 무상정과 무상생과 멸진정은 무심지이다. 이 문(門) 가운데 무심수면(無心睡眠)과 무심민절(無心悶絶)도 또한 유심이니, 일곱ㆍ여덟이 있기 때문이며, 오직 무상정 등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은 행과 심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무심지라고 한다. 둘째는 마음의 산란과 불산란의 문이니, 네 가지의 뒤바뀜을 말한다. 뒤바뀐 산란심은 무심지라고 하니, 본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음의 생(生)과 불생문(不生門)이니, 만일 연(緣)이 갖추어져서 이 마음이 생기게 되면 유심지라고 하고, 연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저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면 무심지라고 한다. 이 문 중에서는 이 마음이 생김에 따라 유심지라고 하고, 저 마음이 생기지 않음을 무심지라고 한다. 넷째는 지위를 구분하여 세운 문이니, 육위(六位)를 제외한 것을 유심지라고 하고, 무심수면위와 무심민절위와 무상정위와 무상생위와 멸진정위 및 무여의열반계위는 무심지라고 한다. 다섯째는 진실의문(眞實義門)에 의한 것이니, 오직 무여의열반계 중에서 모든 마음이 없어진 것만을 무심지라고 하고, 나머지 자리는 모든 전식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임시로 무심이라고 하고, 제8식이 아직 없어지지 않음을 말미암아 유심지라고 한다. 이와 같은 두 지의 모든 차별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일정하지 않다. ‘문소성지(聞所成地)’라는 것은 들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문의(文義)를 이해하는 혜(慧)와 혜상응(慧相應)과 심ㆍ심소 등을 말하며, ‘사소성지(思所成地)’라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법상을 이해하는 혜와 혜상응과 심ㆍ심소 등을 말하며, ‘수소성지(修所成地)’라는 것은 수행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본질[理]과 현상[事]을 이해하는 혜와 혜상응과 심ㆍ심소 등을 말한다. ‘문(聞)’은 ‘듣는다’는 것을 말하니, 곧 이근(耳根)이 이식(耳識)을 내어 말씀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며, ‘사(思)’는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니, 곧 이 사의 심소가 지혜를 내어 법의 결택을 생각하는 것이며, ‘수(修)’는 ‘닦아 익힌다’는 것을 말하니, 곧 이 뛰어난 정이 지혜를 내어 대치를 닦는 것이다. 이 세 가지로부터 세 가지 지혜[三慧]와 상응법 등을 내는 것을 삼지의 체라고 하니, 세 가지 지혜의 넓은 뜻은 뒤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삼지는 삼혜품(三慧品)의 심ㆍ심소 등과 얻은 과보로써 자성을 삼는다. 그러므로 뒤에서 논하기를 “수소성지도 또한 유여ㆍ무여의지이다”라고 하였다. ‘성문지(聲聞地)’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소리가 으뜸이 되니, 스승이나 벗의 처소에서 이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서 계속하여 닦고 증득하여 영원히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니, 작은 수행을 하여 작은 과보를 얻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문종성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과보를 얻는 모든 것을 다 성문지라고 한다. ‘독각지(獨覺地)’라는 것은 항상 적정을 좋아하여 어지러이 머물고자 하지 않고 가행을 닦아 원만히 하고, 스승이나 벗의 가르침이 없이 자연히 홀로 깨달아 영원히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니, 중간의 수행을 하여 중간의 과보를 얻기 때문에 독각이라고 한 것이다. 혹은 인연을 보고 의지하여 성스러운 과보를 깨달았기 때문에 또한 연각(緣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독각종성(獨覺種性)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과보를 얻는 모든 것을 다 독각지라고 한다. ‘보살지(菩薩地)’라는 것은 큰 깨달음을 희구하고 유정을 불쌍히 여기거나 혹은 보리를 구하여 뜻과 소원이 굳고 강하여 오랫동안 닦고 증득하여 영원히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니 큰 수행으로 큰 과보를 얻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종성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과보를 얻는 모든 것을 다 보살지라고 한다. 삼승의 대의는 뒤에서 널리 분별한 것이다. ‘유여의지(有餘依地)’라는 것은 유여의열반지(有餘依涅槃地)를 말한다. ‘의(依)’는 곧 유루가 의지하는 대상이 대략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시설의는 오취온(五取蘊)을 말하니,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가유의 것을 시설하여 종성(種性) 등이라고 부르며, 둘째 섭수의(攝受依)는 일곱 가지의 섭사(攝事)를 말하니, 곧 부모로부터 처자ㆍ노비ㆍ심부름꾼ㆍ하인ㆍ친구ㆍ권속이며, 셋째 주지의(住持依)는 네 가지의 음식을 말하며, 넷째 유전의(流轉依)는 사식주(四識住)와 십이연기를 말하며, 다섯째 장애의(障碍依)는 모든 천마(天魔)를 말하며, 여섯째 고뇌의(苦惱依)는 모든 욕계를 말하며, 일곱째 적열의(適悅依)는 모든 정의 즐거움을 말하며, 여덟째 후변의(後邊依)는 아라한의 상속하는 모든 온을 말한다. 지금은 하나의 최후변의(最後邊依)를 온전히 취하고, 여섯 가지의 섭사와 유전과 장애를 제외하고 나머지의 일부를 취하였다. 또 이 지 중에 네 가지 적정이 있다. 첫째는 고적정(苦寂靜)이니 미래의 고가 필경 생기지 않음을 말하고, 둘째는 혹적정(惑寂靜)이니 모든 번뇌가 필경 생기지 않음을 말하며, 셋째는 업적정(業寂靜)이니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닦아 익히는 것을 말하며, 넷째는 사(捨)적정이니 육항주(六恒住)가 육근문(六根門)에서 기뻐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상사(上捨)에 안주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아라한 등은 무학지(無學地)에 머물러서 네 가지 적정을 갖추었으나, 의지가 조금 남아 있으므로 유여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지에서는 곧 이승(二乘)의 무학신(無學身) 가운데 유루ㆍ무루의 모든 법을 다 자성으로 삼는다. 여래는 비록 진실한 몸과 마음으로 유루의 나머지 의지가 없으니, 변화함이 있어서 유루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변화의 모양에 의하여 또한 유여의지라고 하기도 한다. ‘무여의지(無餘依地)’라는 것은 무여의열반지를 말하니, 모든 유루여의를 다 버렸으며, 이승의 유위무루도 버렸다. 여래는 비록 유위의 무루는 있으나, 모든 유루여의는 없기 때문에 무여의지라고 말한다. 이 지 중에는 오직 청정한 진여가 나타내는 매우 깊은 공덕만이 있고, 모든 분별을 여의고, 모든 희론(戱論)을 끊어서 온(蘊)ㆍ계(界)ㆍ처(處) 등과 인간ㆍ천상 등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상즉[卽]하였거나 여의었거나[離] 유라고 하거나 무라고 하거나 있는 바의 모든 명칭과 모양은 다 임시로 말한 것이다. 어떤 뜻으로는 이 지는 바로 구경(究境)의 택멸(擇滅)과 진여와 무위를 성품으로 하며, 아울러 여래의 유위무루의 공덕을 성품으로 하니, 여래의 공덕은 매우 깊어 모양을 여의었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오식지(五識地) 등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으나, 실제로는 또한 포함한다고 하였다. 어떤 뜻으로는 여래의 유위의 공덕은 유여의를 포함하고, 무위공덕은 무여의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뒤에서 논하기를 “무여의지는 오지(五地)의 일부이니, 무심지와 수소성지와 성문지와 독각지와 보살지를 말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