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_0266_c_01L‘결택(決擇)’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결택에는 네 종류가 있다. 제결택(諦決擇)ㆍ법결택(法決擇)ㆍ득결택(得決擇)ㆍ논의결택(論議決擇)을 가리킨다. 또 ‘제결택’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에 의거한 4성제를 말한다. ‘고제’란 무엇입니까? 유정이 태어나는 것과 태어나는 것이 의지하는 처소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유정세간(有情世間)과 기세간(器世間)이다. 그 순서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거나 그 태어나는 처소를 모두 ‘고제’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유정이 태어나는 처소’입니까? 여러 유정이 태어나는 나락가(奈落迦:지옥)ㆍ방생(傍生:축생)ㆍ아귀(餓鬼)ㆍ인간(人間)ㆍ천상(天上)의 취(趣)를 말한다. 【釋】‘인간’이란 동비제하(東毘提訶)ㆍ서구다니(西瞿陀尼)ㆍ남섬부주(南贍部洲)ㆍ북구로주(北俱盧洲)를 가리킨다. 여기서 ‘천상’이란 4대왕중천(大王衆天)ㆍ삼십삼천(三十三天)ㆍ야마천(耶摩天)ㆍ도사다천(都史陀天)ㆍ낙변화천(樂變化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ㆍ범중천(梵衆天)ㆍ범보천(梵輔天)ㆍ대범천(大梵天)ㆍ소광천(少光天)ㆍ무량광천(無量光天)ㆍ극광정천(極光淨天)ㆍ소정천(少淨天)ㆍ무량정천(無量淨天)ㆍ변정천(遍淨天)ㆍ무운천(無雲天)ㆍ복생천(福生天)ㆍ광과천(廣果天)ㆍ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ㆍ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ㆍ무변공처천(無邊空處天)ㆍ무변식처천(無邊識處天)ㆍ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ㆍ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다. 어떠한 것이 그 태어나는 것에 의지가 되는 처소 즉 기세간(器世間)입니까? 수륜(水輪)은 풍륜(風輪)에 의지하고 지륜(地輪)은 수륜(水輪)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釋】이 같은 지륜에 의지하여 소미로산(蘇迷盧山:수미산)ㆍ칠금산(七金山)ㆍ사대주(四大洲)ㆍ팔소주(八小洲)ㆍ내해(內海)ㆍ외해(外海)가 있다. 소미로산의 사방 바깥층에는 단계적으로 4대왕중천과 삼십삼천이 거주하는 처소가 별도로 있고, 다시 외륜(外輪) 위의 허공에도 천궁(天宮)들이 있으니 바로 야마천ㆍ도사다천ㆍ화락천ㆍ타화자재천이다. 또 색계천이 거주하는 처소는 따로 있다. 모든 아소락(阿素洛:阿修羅)이 거주하는 처소도 따로 있고, 또 모든 나락가가 거주하는 처소도 별도로 있으니 열나락가(熱那落迦:熱地獄)ㆍ한나락가(寒那落迦:寒地獄)ㆍ고독나락가(孤獨那落迦)를 가리킨다. 아울러 일부분의 방생과 아귀가 거주하는 처소도 따로 있다. 이렇게 하나의 해, 하나의 달이 주변으로 빛을 뿌려 그 비춰지는 방향과 처소를 ‘하나의 세계’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천 개의 세계 속에는 천 개의 해와 천 개의 달과 천 개의 소미로산, 천 곳의 4대주 , 천 곳의 4대왕중천, 천 곳의 삼십삼천, 천 곳의 야마천, 천 곳의 도사다천, 천 곳의 화락천, 천 곳의 타화자재천, 천 곳의 범세천(梵世天)이 있다. 이러한 것을 총괄해서 소천세계(小千世界)라 이름한다. 다시 천 개의 ‘소천세계’를 총괄해서 두 번째로 중천세계(中千世界)라고 이름한다. 천 개의 ‘중천세계’를 총괄해서 두 번째로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함께 존재하는 그 바깥 테두리[大輪]를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다. 또 이 같은 삼천대천세계는 동시에 무너지고 동시에 이루어진다. 비유하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이 마치 물레방아같이 끊임없이 공중에서 아래로 퍼붇는 것처럼, 동방에도 끊임없이 무량한 세계가 있다. 어떤 것은 무너지는 중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생기는 중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막 무너지려는 순간이고, 어떤 것은 이미 없어진 채로 남아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생겨나는 순간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이미 이루어진 채로 남아 있기도 하다. 동방처럼 모든 열 군데의 방향도 이와 같다. 유정세간이나 기세간이나 모두 업번뇌의 세력에서 생겨나고, 업번뇌의 증상에서 일어나기에 총괄적으로 ‘고제’라고 이름한다. 다시 고제에 수렴되지 않는 청정한 세계가 있으니, 이는 업번뇌(業煩惱)의 세력에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고 업번뇌가 늘어나는 것에 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직 커다란 원력에 의해서 그 청정한 선근이 증상되어 인도받게 된다. 이 와 같이 태어나는 처소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기에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이것은 정려(靜慮)에 의해서 얻어지는 정려의 경계도 아닌 것이니, 하물며 심사(尋思)로써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또 고제의 모양을 간략하게 해설하였으니, 지금은 고의 모양에 대한 차별을 자세히 해설하도록 하겠다. 이것은 소위 생고(生苦:태어나는 고통)ㆍ노고(老苦:늙는 고통)ㆍ병고(病苦:병드는 고통)ㆍ사고(死苦:죽는 고통)ㆍ원증회고(怨憎會苦:원수를 만나게 되는 고통)ㆍ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ㆍ구부득고(求不得苦:얻으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간략하게 이 같은 일체의 고를 수렴하게 되면 바로 오취온(五聚蘊)의 고가 된다.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중고(衆苦)에 핍박받기 때문이고, 나머지 다른 고에 의지받기 때문이다. 【釋】‘중고에 핍박받기 때문’이란, 일찍이 모태의 숙장(熟藏) 사이에서 태어나 갖가지 지극히 부정한 물건에 핍박받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고, 또 태중에서 나오려는 때에 그 사지가 커다란 고통에 핍박받는 것을 가리킨다. ‘나머지 다른 고에 의지받는 것’이란, 태어나는 까닭에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중고가 가까이 따르는 것을 말한다. ‘늙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그 시분이 변화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병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대종(大種)이 변화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그 목숨이 변화하여 없어지는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원수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고통이 됩니까? 서로 만나게 되면 고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과의 이별’이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이별에서 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얻지 못하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바라더라도 과보가 없다는 고가 생기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이 같은 일체의 고를 수렴하는 5취온은 어떤 이유에서 고가 됩니까?
고를 추중(麤重)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고를 간략하게 수렴하면 여섯 가지의 고가 되나니, 즉 핍박고(逼迫苦:핍박받는 고통)ㆍ전변고(轉變苦:전전하는 고통)ㆍ합회고(合會苦:만나는 고통)ㆍ별리고(別離苦:이별의 고통)ㆍ소희불과고(所希不果苦:바라는 바에 과보가 없는 고통)ㆍ추중고(麤重苦:추중하는 고통)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고를 확대하면 여덟 가지 고가 되나니, 여섯 가지나 여덟 가지나 마찬가지이다. 그 동일한 것이 3고(三苦)를 설명했던 것처럼, 이 가운데 여덟 가지 고가 있다. 고를 해설하셨는데 여기에서 ‘여덟 가지’가 ‘세 가지 고’를 수렴합니까? 아니면 ‘세 가지 고’가 ‘여덟 가지 고’를 수렴하게 됩니까? 전전하여 그 모양을 수렴하는 것이니, 소위 생고(生苦)ㆍ노고(老苦)ㆍ병고(病苦)ㆍ사고(死苦)ㆍ원증회고는 고고(苦苦)를 드러내는 것이고 애별리고ㆍ구부득고는 괴고(壞苦)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얻었거나 미처 얻지 못한 순락수법의 그 자체적인 모양이 파괴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일체 5취온의 고를 간략하게 수렴하면 모두 행고(行苦)를 드러내는 것이니, 해탈하지 못하면 두 가지의 무상(無常)이 덧붙어서 편안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앞에서 두 가지 고 즉 세속제고(世俗諦苦)와 승의제고(勝義諦苦)를 해설하셨는데, 어떠한 것이 ‘세속제고’이고, 어떠한 것이 ‘승의제고’입니까? ‘생고’에서 ‘구부득고’까지가 ‘세속제고’이다. 이 같은 일체의 고를 간략하게 수렴하는 5취온의 고가 바로 ‘승의제고’이다. 진여의 문을 안립하는 것에 연유한 출세지(出世智)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여러 가지 관행(觀行)이 있다. 고성제에 있어서 네 가지 행으로써 공상을 관찰하는 것이니, 무상상(無常相)ㆍ고상(苦相)ㆍ공상(空相)ㆍ무아상(無我相)이다. 어떠한 것이 ‘무상상’입니까? 대략 열두 종류가 있다. 바로 비유상(非有相)ㆍ괴멸상(壞滅相)ㆍ변이상(變異相)ㆍ별리상(別離相)ㆍ현전상(現前相)ㆍ법이상(法爾相)ㆍ찰나상(刹那相)ㆍ상속상(相續相)ㆍ병등상(病等相)ㆍ종종심행전상(種種心行轉相)ㆍ자산흥쇠상(資産興衰相)ㆍ기세성괴상(器世成壞相)이다. 어떠한 것이 ‘비유상’입니까?
일체의 시간에 처해서 아(我)와 아소(我所)의 성품이 언제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상’이라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성제에 연유해서 언제나 아와 아소에는 자체적인 성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여기서 ‘무상’의 무(無)는 삭제된다는 뜻이고, ‘무상’의 상(常)은 일체의 시간이란 뜻이다. 이 같은 ‘상(常)’이 ‘무(無)’인 까닭에 ‘무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괴멸상’입니까? 제행(諸行)이 생기자마자 없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잠깐 존재하고 다시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변이상’입니까? 제행이 이생(異生)하는 것이니, 그 비슷하지 않은 모양을 상속하는 것에 연유해서 유전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별리상’입니까? 제행이 증상하는 세력을 잃었거나, 또는 다른 것에 귀속되었어도 여전히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釋】생필품 따위의 사물이란 때가 되면 저절로 망가지거나 다른 사람이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현전상’입니까? 바로 무상함에 처해서 그 인(因)이 가까워짐에 연유하여 지금 무상함을 받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법이상’입니까? 장차 무상이 다가오는 것이니, 그 인이 가까워짐에 연유해서 반드시 받게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찰나상’입니까? 제행은 그 머무는 찰나 이후에는 반드시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釋】제행이 순간순간 그 자체를 보다 적게 획득하는 것이 틈이 없으므로 반드시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상속상’입니까? 무시(無始)의 시간 이래로 모든 행이 생기고 멸하는 것이 부단히 상속되기 때문이다. 【釋】무시이래로 생사에 전전하는 모습이 윤회를 타고 막히고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병등상’입니까? 4대(大)가 시간에 따라 그 수명이 변화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釋】4대가 어긋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치아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따위의 그 머무르는 시간의 세력이 다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종종심행전상’입니까? 동일한 시간에 탐심이 일어나거나 또는 동일한 시간에 탐심을 여의는 것을 가리킨다. 【釋】이같이 노여움과 노여움을 여의는 것이 있게 되고,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이 있게 된다. 만약 만났다면 흩어지게 되고, 만약 내려갔다면 올라가게 되고, 만약 높아졌다면 높아짐을 여의게 되고, 만약 조용했었다면 조용하지 못하게 되고, 만약 안정되었었다면 안정되지 못하게 되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심행(心行)이 유전하는 것이다. 그 머무르는 것에 연유해서 능치(能治)와 소치(所治)의 위치가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자산흥쇠상’입니까? 흥하는 것은 모두가 망하게 되는 변화를 말한다. 【釋】여러 세간에 기인된 부귀영화는 즐거워 할 것이 못되니 이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기세성괴상’입니까? 화(火)ㆍ수(水)ㆍ풍(風) 세 종류의 대(大)가 이루어졌다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화재(火災)ㆍ수재(水災)ㆍ풍재(風災)에 연유해서 대지(大地) 등의 겁수(劫數)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 태우고 잠기고 부서지는 것도 순서대로 행해진다. 또 삼재(三災)의 정상위가 있으니, 위로는 제2정려ㆍ제3정려ㆍ제4정려까지를 말한다. 화재ㆍ수재ㆍ풍재로 말미암아 세계의 안정된 성립이 파괴되는 처소는 제1정려ㆍ제2정려ㆍ제3정려의 변제(邊際)까지이다. 그 이상의 나머지 것을 삼재의 정상위(頂上位)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 순서에 따라 제2정려ㆍ제3정려ㆍ제4정려에도 처소의 차별이 있다. 제4정려의 외궁(外宮) 따위는 비록 이루어졌다 무너지는 외부의 재앙은 없으나, 저 모든 천상의 궁전 따위도 함께 생겨나고 함께 없어지는 것이기에 ‘이루어졌다 무너진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세 종류의 중겁(中劫)이 있으니 이른바 기근(飢饉)ㆍ역병(疫病)ㆍ도병(刀兵:전쟁)이다. 이 같은 소삼재겁(小三災劫)의 구경위(究竟位)가 전방위적으로 출현하는 것을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1중겁(中劫)의 초기에는 수명이 감소하기만 하고 1중겁의 후기에는 수명이 늘어나기만 한다. 이와 같이 18중겁은 그 수명이 늘어나고 감소되는 것이 반복된다. 【釋】‘1중겁의 초기에는 수명이 감소한다는 것’이란 겁이 성립되는 때의 스물한 번째 겁을 말한다. ‘1중겁의 후기에는 수명이 늘어나기만 한다는 것’이란 최후의 겁을 말하는 것이다. ‘18중겁은 그 수명이 늘어나고 감소하는 것이 반복된다는 것’이란 그 중간의 18개 겁을 말한다. 20중겁이 되면 세계가 바로 무너지기 시작하고, 20중겁 동안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20중겁 동안 세계가 무너진 채로 남아 있으며, 20중겁 동안 세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20중겁 동안 세계가 이루어진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을 모두 합한 80중겁이 1대겁(大劫)이 된다. 이 같은 겁수(劫數)에 인연해서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천상의 수명이 나타나게 된다. 또 이미 해설한 것처럼 그 수명이 다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복이 다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업이 다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러한 곳들에 있는 유정들이 이러한 처소에서 마침내 사라지는 것이다. ‘수명이 다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때가 되면 죽는 것을 말한다. 【釋】이것을 간략하게 ‘때가 다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수명의 시간이 궁극에 다다른 것에 연유해서 바로 이때에 죽기 때문이다. ‘복이 다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때가 다하지 않았는데도 죽는 것으로, 바로 복이 없어져서 죽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간략하게 ‘때가 다한 것이 아니다’고 설명한다. 【釋】저들 유정이 정미(定味)에 탐착하게 되면 복의 세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만 명을 다하는 것이다. ‘업이 다한다는 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순생수업(順生受業:그 생에 따라 받는 업보)과 순후수업(順後受業:3생 후에 받는 업보)이 모두 다하기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간략하게 그 상속이 다했다고 설명한다. 【釋】여기에서 순생수업과 순후수업의 그 수용(受用)이 다한 것으로 인하여 업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곳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고의 모양’입니까? 세 가지 고나 여덟 가지 고 또는 여섯 가지 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러한 것을 ‘고의 모양’이라고 이름한다. 어째서 경전에는 무상이 곧 고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삼분(三分)의 무상이 고상을 연(緣)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생분무상(生分無常)ㆍ멸분무상(滅分無常)ㆍ구분무상(俱分無常)을 가리키는 것이다. 【釋】‘생분무상’이 연이 되는 까닭에 고고(苦苦)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생분무상’이란, 현재 존재하는 것이 없으나 고품(苦品)의 제행이 핍박받는 것으로 이 같은 무상에 연유해서 연을 삼는 까닭에 고고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다시 ‘멸분무상’이 연이 되는 까닭에 괴고(壞苦)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멸분무상’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도 다시 없어지는 것이기에 낙품의 모든 행을 즐거워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이 같은 무상에 연유해서 연을 삼는 까닭에 괴고(壞苦)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다시 ‘구분무상’이 연이 되는 까닭에 행고의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된다. ‘구분무상’이란, 추중(麤重)의 모든 행이 상속하여 유전하는 것으로 생겨나거나 소멸하거나 모두 즐거운 것이 못된다. 이 같은 ‘구분무상’에 연유해서 연을 삼는 까닭에 행고(行苦)의 성품을 알게 된다. 바로 이 같은 이치에서 박가범(薄伽梵)께서 “모든 행이 무상하기에 모든 행은 변하여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으니, 다시 이러한 이치에 따라서 “자아를 느끼는 모든 수(受)는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의 불고불락수 및 낙수를 비밀스러운 뜻에 따라 ‘고고’라고 말씀하신 것을 숙지해야 한다. 고를 섭수하는 성품은 세간에서 널리 이해되기 때문에 다시 비밀스러운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생멸의 두 가지 법에 수반되는 모든 행 가운데에 있는, 생고 따위의 여덟 가지 고의 성품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무상한 것이 바로 괴로움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상한 모든 행 가운데에 있는 생 따위가 고(苦)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란, 여래가 이 같은 비밀스러운 이치에 따라 “무상에 인연하는 까닭에 ‘고’는 일체행(一切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도(聖道) 또한 무상하기 때문에 이 또한 고에 해당할 것이다. 어떠한 것이 ‘공한 모양’입니까? 만약 이 같은 비유(非有)에 처하게 되면, 이 같은 이치로 말미암아 공하다는 것을 정관(正觀)하게 된다. 만약 여기에서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이 같은 이치로 말미암아 그 존재하는 것을 진실되게 알 수 있나니[如實知], 이를 이름하여 ‘공의 성품에 선입(善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실답게 안다는 것’이란 전도되지 않았다는 이치이다. 온ㆍ계ㆍ처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러한 처소에서 어떻게 그 밖의 다른 존재가 있겠습니까? 온ㆍ계ㆍ처가 항상 상주하여 변하여 없어지지 않는 법으로서의 아ㆍ아소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이치로 말미암아 저러한 것들이 모두 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처소에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이 같은 처소 또한 ‘무아’의 성품이고 이 같은 자아 또한 그 성품이 없으며 자아가 존재한다는 그와 같은 성품도 없다. 이러한 것을 ‘공의 성품’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모든 행이 상주한다는 따위의, 그들의 모양으로 말미암는 자아는 이 가운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모든 행은 자아라는 성품의 모양을 여의었기에, ‘무아’라는 참다운 성품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품을 공의 성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박가범께서는 비밀스러운 이치로써 “유(有)를 유라고 진실되게 알아야 하고 무(無)를 무라고 진실되게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세 종류의 공의 성품이 있으니, 자성공성(自性空性)ㆍ여성공성(如性空性)ㆍ진성공성(眞性空性)이다. 첫 번째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체적인 성품에 의지한 관찰이니, 이 같은 자체적인 모양으로 말미암아 비존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의타기(依他起)의 자체적인 성품에 의지한 관찰이니, 이같이 인식되는 것은 모두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원성실(圓成實)의 자체적인 성품에 의지한 관찰이니, 이것에 연유해서 공이 참다운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무아상’입니까? 아론자(我論者)가 자아의 모양을 세우더라도 온ㆍ계ㆍ처에는 이 같은 모양이 없다. 온ㆍ계ㆍ처에 나라는 모양[相]이 없기 때문에 무아상이라고 이름한다. 유아론의 외도가 모든 행이 바로 자아라고 헤아리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모든 행은 이 같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가범께서 비밀스러운 이치에서 “모든 법은 다 무아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같은 일체는 아소(我所)도 아니고 아처(我處)도 아니고 아아(我我)도 아니기에, 이 같은 이치를 바른 지혜로 진실되게 관찰해야 한다. 이 같은 말씀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습니까? 외사(外事)에 비교해서 이 같은 일체는 ‘아소’가 아니라고 비밀스럽게 말씀하시고, 내사(內事)에 비교해서 이것은 ‘아처’도 아니고 ‘아아’도 아니라고 비밀스럽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외사에 있어서 오직 아ㆍ아소의 모양을 헤아리기 때문에 단지 아소만을 제거하게 되고, 내사에서는 아ㆍ아소의 모양을 종합적으로 헤아려서 아ㆍ아소란 짝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무상이란 모두가 찰나의 모양이라고 해설하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심ㆍ심법이 찰나의 모양인 것에서 색 따위도 찰나적인 모양임을 숙지해야 한다. 마음의 집수(執受)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등류(等流)하는 것에서 그 존재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고, 마음을 따라 전전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의존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마음에서 마음이 증상되기 때문이고, 마음이 자유로이 전변하기 때문이고, 또 최후의 지위에서 변하여 없어지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고, 이미 생겨난 것은 연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소멸되기 때문에 색도 역시 찰나 간에 소멸하는 것임을 관찰해야 한다. 여러 무상한 행이 소멸되는 따위의 모양이나 심ㆍ심법의 찰나간의 모양도 세간에서 이해될 수 있기에 다시 해석하지 않겠다. 여러 색 따위의 법이 찰나에 변하는 모습은 세간에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므로 바로 현재 시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釋】‘마음의 집수에 연유한다는 것’이란, 색 따위의 신체가 찰나에 기인하여 순간순간 집수하는 까닭에 찰나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심법에 등류하여 존재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란, 색 따위의 신체가 항상 식(識)과 더불어 구족되기 때문이니, 식이 만약 떠나가게 되면 바로 붕괴되어 버린다. 신체는 마음과 더불어 그 존재가 평등한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마음이 매순간 생겨나고 없어짐을 결정하게 된다. ‘마음에 따라 전전하는 것’이란, 세간에서 드러나 보이는 마음이니 고위ㆍ낙위ㆍ탐위ㆍ진위 따위의 위치에서 그 신체가 따라 전변하는 것을 말한다. 찰나적인 마음을 따라 전변하는 까닭에, 신체도 순간순간 소멸하는 것이다. ‘마음에 의존하는 것’이란, 세간에서 마음이 근(根)이 있는 신체에 의지하기에 세간에서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만약 법이 이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더라도 이러한 것은 스스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능히 의지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으니, 불씨 따위가 장작 따위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 같은 신체도 찰나적인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찰나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마음의 증상에서 생겨나는 것’이란 일체의 내부적인 색이나 외부적인 색이 모두 마음이 증상되어 생겨나는 것이고 그 능생인(能生因)이 찰나적으로 소멸하는 까닭에, 소생되는 과보 역시 찰나적으로 소멸되는 것이다. 세존께서도 “여러 가지 인이나 여러 가지 연은 색에서 능히 생겨나지만, 색조차 무상이다. 저 무상한 인연의 세력에서 생겨나는 까닭이다”고 말씀하셨으니 색이 어떻게 상주하는 것이겠는가? 이 같은 경전의 옛 뜻에 따르면 신체는 반드시 찰나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유로이 전변하는 것’이란, 만약 뛰어난 덕을 갖춘 심지를 성취한다면 일체의 색에 처해서 그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전변할 수 있다. 그 찰나마다 능히 변화하는 수승한 이해에 기인해서 전변이 생겨나는 까닭에, 색 따위의 찰나간의 도리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지위에서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란, 여러 색 따위가 처음 자체적인 성품을 여의게 되면, 순간순간 변하여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최후의 지위에서 불꽂처럼 변하여 도리에 따르지 않더라도 이와 같이 되리니, 그러므로 색 따위가 처음부터 매순간 변하여 없어지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자체적인 종류가 상속되어 점차 늘어나는 것이 인이 되어 마지막의 조잡한 모양이 변하여 없어지게끔 유인하는 것이다. ‘이미 생겨난 것은 연을 기다리지도 않고 저절로 소멸한다는 것’이란, 나머지 다른 연을 대기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소멸되기 때문에 최초의 생겨난 위치에서 그 소멸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만약 생겨나는 그 시초에 파괴되고 소멸되는 시초가 파괴되고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여, 나중에야 이와 같은 파괴와 소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는 모두 소멸되는 법이라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처음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되는 것이기에, 여기에서 ‘제법의 찰나’라는 이치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색(色)이 여러 가지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4대종(大種)의 색이거나 4대종의 소조색(所造色)이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떠한 이치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동일한 처소에 함께 하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의도이시니, 이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소조색에 연유하여 대종의 처소를 여의고 별도로 건립된다는 공능(功能)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같은 존재의 모임이 이 같은 대종색에서 성취된다면, 이같이 모인 것이 바로 대종색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숙지해야 한다. 혹 어떤 존재의 모임은 마른 진흙덩어리처럼 오직 한 가지 대종색뿐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이 진흙덩어리가 물에 젖은 것처럼 두 가지 대종색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이 진흙덩어리를 불에 굽는 것처럼 세 가지 대종색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이 진흙덩어리가 물에 젖은 채로 불에 구워지는 것처럼 모든 대종색이기도 하다. 이처럼 변화하는 위치에 처한 소조색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만약 이 같은 존재의 모임에서 이 같은 소조색을 얻을 수 있다면 이 같은 존재의 모임도 이것과 다른 것이 아님을 숙지해야 한다. 혹 어떤 존재의 모임은 빛과 같이 오직 한 가지 소조색뿐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소리ㆍ향기ㆍ바람 따위처럼 두 가지 소조색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향기나는 연기처럼 세 가지 소조색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향기 나는 연기에 그 색깔이나 향내를 가진 것에 연유해서 그 촉의 차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釋】‘촉의 차별’이란, 여기에서의 가벼운 성품을 가리킨다. 또 어떤 것은 사탕 덩어리처럼 네 가지 소조색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이 사탕 덩어리가 부딪쳐 소리가 나는 경우처럼 다섯 가지 소조색이기도 하다. 또 만약 이 같은 존재의 모임에서 대종색과 소조색을 그 종자에 따라 나눌 수도 있으니, 이 가운데에 이와 같은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숙지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이와 같이 추물(麤物)에 의지하는 것을 종자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 하나하나 존재의 모임 가운데에 일체의 종자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소조색에 이르기까지 그 대응하는 것은 동일하다. 또 추취색(麤聚色:인지가 가능한 합성물)은 극미색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설하는 것도, 이 극미란 것이 그 바탕이 없는 것이고 실재하지 않고 자체적인 성품이 없어 오직 헛되게 건립된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이는 그 분석을 되풀이하여도 한량없기 때문이다. 단지 각(覺)의 지혜로 말미암아 차츰차츰 그 미세한 분제(分際)를 덜어내어 분석하되, 분석 가능한 변제(邊際)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변제를 축약해서 극미를 건립한 것이다. 만약 여러 극미에 실체적인 성품이 없다면, 이를 어떻게 건립할 수 있습니까? 이는 그 합성된 한 가지 모양[一合相]을 제거하려는 이유이고, 또 여러 가지로 존재하는 색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러한 때에 망령되게 일체의 여러 가지 색이 하나로 합성된 모양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바로 여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수법을 순조로이 해득해서 무아의 성품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며 또 여러 가지 소유색(所有色)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까닭이다. 만약 각의 지혜로써 일체의 존재하는 모든 색을 이와 같이 분석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이르게 되면 이와 같은 때에 바로 여러 색이 모두 진실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같은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 것으로 인해서 모든 법의 무아인 성품을 순조로이 해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고법(苦法)에는 간략하게 여덟 종류의 차별이 있다. 광대부적정고(廣大不寂靜苦)가 있고, 적정고(寂靜苦)가 있고, 적정부적정고(寂靜不寂靜苦)가 있고, 중부적정고(中不寂靜苦)가 있고 미박부적정고(微薄不寂靜苦)가 있고 미박적정고(微薄寂靜苦)가 있고 극미박적정고(極微薄寂靜苦)가 있고 비고사고주대적정고(非苦似苦住大寂靜苦)가 있다. ‘광대부적정고’란 무엇입니까? 일찍이 여러 가지 선근을 쌓지 못해서 욕계에 태어나는 이들이다. 【釋】욕계에 연유한 모든 생취(生趣)는 고가 구족되어 드러나기 때문이고 선근을 축적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여러 취로 나아가는 것을 제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순서에 따라 ‘광대부적정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적정고’란 무엇입니까? 이같이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선근이 이미 생겨난 이들이다. 【釋】반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적정부적정고’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세간도(世間道)로 인해서 욕심을 여의고 선근을 심은 이들이다. 【釋】이와 같은 욕계의 고를 세간도로 인해서 욕심을 여의고 선근을 심은 자는 고고 따위를 뛰어넘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이 아닌 까닭에 그 순서에 따르게 된다. 다시 중부적정고와 상응하는 것을 마땅히 해석하도록 하겠다. ‘중부적정고’란 무엇입니까? 색계에 태어나서 순해탈분을 여읜 이들이다. ‘미박부적정고’란 무엇입니까? 무색계에서 태어나서 순해탈분을 여읜 이들이다. ‘미박적정고’란 무엇입니까? 모든 유학을 가리킨다. ‘극미박적정고’란 무엇입니까? 명근이 남아 있어 6처(處)를 연하는 모든 무학을 가리킨다. ‘비고사고주대적정고’란 무엇입니까? 구경(究竟)을 이미 성취한 보살마하살들이다. 【釋】그 보살승(菩薩乘)의 대비 원력 때문에 모든 있는 것[諸有] 가운데에 태어나는 것이다. 한량없는 중생이 커다란 고통을 상속하는 것을 능히 소멸시켜 주는 까닭에 주대적정고(住大寂靜苦)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설명했던 사고(死苦:죽는 괴로움)의 그 죽는 것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선심사(善心死)이거나 불선심사(不善心死)이거나 무기심사(無記心死)이다. ‘선심사’란 총명하고 예리한 마음이 겉으로 행해지는 지위이다. 스스로의 선근의 힘이 지속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또는 다른 것에 이끌려 수렴된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선심을 일으켜 명종위(命終位)로 나아가는 것이다. ‘불선심사’도 역시 총명하고 예리한 마음이 겉으로 행해지는 지위이다. 스스로의 불선근(不善根)의 힘이 지속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또는 다른 것에 이끌려 수렴된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불선심을 일으켜 명종위로 나아가게 된다. ‘무기심사’란 총명하고 예리한 마음이 겉으로 행해지는 지위이기도 하고 총명하고 예리하지 못한 마음이 겉으로 행해지는 지위이기도 하다. 이는 그 연이 결여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또는 무공능(無功能)을 보태어 행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무기심을 일으켜 명종위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선심사ㆍ불선심사ㆍ무기심사를 말하는 것은, 아애(我愛)에 의지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그 명근이 끝나는 마음자리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청정한 행을 닦는 이는 명종위에 임해서 신체의 아랫부분부터 차가운 촉감이 생기게 되고, 부정한 행을 닦은 이는 명종위에 임해서 신체의 윗부분부터 차가운 촉감이 일어난다. 행실이 부정했던 자는 중유(中有)로 태어나는 때에, 그 모양이 마치 검은 양이나 검은 염소의 빛깔을 띠는 것이 마치 캄캄한 밤중처럼 음침하고 어두우나, 청정한 행을 닦은 이가 중유에 태어나는 때에는 그 모양이 백련광(白練光)을 내는 것이 마치 맑은 밤하늘의 별과도 같다. 또 이 같은 중유는 욕계나 색계의 생위(生位)를 바로 받는 이도 있고 또 무색계의 명종후위(命終後位)를 받는 이도 있으니, 의생(意生)이라 이름하는 건달박(健達縛) 따위이다. 7일간의 기한을 채워서 머물기도 하고 도중에 죽기도 하고 때가 되어 옮겨가기도 한다. ‘의생’이라 말하는 것은 화생(化生)하는 신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오직 그 마음이 인이 되기 때문이고 향기에 끌리기 때문에 ‘건달박’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는 향기에 가까이 따라가 그 태어나는 처소에 이른다는 뜻이다. 【釋】‘7일간의 기한을 채워서 머물거나 도중에 죽기도 한다는 것’이란, 이것은 그 태어나는 연을 속히 성취한 사람을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만약 7일이 지나도 태어날 연을 얻지 못하면 그 명근이 다하는 때에는 반드시 중유 가운데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도 7일의 기한이 차면 이를 넘기지 못한다. 때가 되어 옮겨가기도 한다는 것이란 이 같은 지위에서 그밖에 다른 태어나는 장소로 떠나가게 되는 강력한 연이 현전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제4정려를 얻고 나서 내가 아라한이 되었다는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는 비구의 경우, 그가 제4정려의 경지에서 중유로 태어나는 때에 해탈을 비방하는 삿된 소견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지옥의 중유로 바뀌어 태어나게 된다. 또 중유 가운데 머물더라도 또한 능히 여러 가지 업을 축적하는 것은, 예전에 익힌 세력에 인도된 선(善) 따위의 사(思)가 현행하기 때문이다. 또 중유일지라도 같은 종류의 유정들을 살펴 볼 수도 있으니, 예전에 선업과 불선업을 함께 행했던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꿈속에서 서로 만나 그들과 더불어 함께 놀게 되는 것이다. 중유의 형태는 장차 태어날 처소의 중생들 모양과 비슷하다. 태어나게 될 처소와 비슷하다는 것이란 미리 그 형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중유는 다니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없어서 마치 신통력을 갖춘 것처럼 오고감이 신속하지만, 그 태어나게 될 처소에서는 구애를 받는 것이 있다. 또 이 같은 중유가 그 태어날 곳에 처해 있는 것이, 마치 저울의 양쪽 추가 내려가고 올라가는 이치와 같아서 그 수명이 다했다가 다시 생을 받는 시간도 이와 같다. 중유에 머무르는 때에도 그 태어날 처소에 탐애(貪愛)를 일으키기에, 나머지 다른 번뇌로써 그 연을 삼아 이를 보조하게 된다. 이 같은 중유의 신체가 탐(貪)과 더불어 모두 소멸하게 되면, 바로 갈라람(羯邏藍)의 신체가 식(識)과 더불어 생겨난다. 여기까지가 이숙(異熟)이니, 이 이후로는 근(根)이 점차로 생겨나서 자라나게 된다. 마치 연기법(緣起法) 중에서 해설한 것처럼 네 가지 생류(生類)에 처해서 혹 난생(卵生)을 받거나, 태생(胎生)을 받거나, 습생(濕生)을 받거나, 화생(化生)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연기법 가운데에서 해설한 것처럼’이란, 명(名)과 색(色) 따위의 전후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頌】 처음에는 갈라람(羯邏藍)이 다음에는 알부담(頞部曇)이 생겨난다. 이로부터 폐시(閉尸)가 생겨나고 폐시에서 건남(鍵南)이 생겨난다.
그 다음이 발라사가(鉢羅奢)이니 이때부터 머리카락과 손톱 및
모양을 갖춘 근(根)의 형색이 서서히 자라난다.
‘집제(集諦)’란 무엇입니까? 여러 번뇌 및 그 번뇌의 증상(增上)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업을 총괄적으로 ‘집제’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고집(苦集)에 연유해서 생사의 고가 일어나는 까닭이다. 【釋】‘번뇌의 증상에 의해 생겨나는 업’이란, 유루업(有漏業)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오직 ‘애’만을 설하여 집제를 삼으신 것도 이 같은 ‘애’의 세력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그 가장 수승한 것에 따라 설법하셨으니, 애(愛)이거나 후유애(後有愛)이거나 탐희구행애(貪喜俱行愛)이거나 피피희락애(彼彼喜樂愛)를 ‘집제’라 이름하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수승하다는 것’이란, 그 변행(遍行)되는 이치를 가리킨 것이다. 애착에 연유해서 여섯 가지 변행의 이치가 갖추어지는 까닭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그 여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사변행(事遍行)이니, 이미 얻었거나 얻지 못한 일체의 자기 신체와 그 경계에 관한 일이 두루 행해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신체를 이미 얻은 것에서 애(愛)가 일어나고, 자기의 신체를 미처 얻지 못한 것에서 후유애(後有愛)가 일어나고, 경계를 이미 얻은 것에서 탐(貪)ㆍ희(喜)ㆍ애(愛)와 함께 행해지는 것이고 경계를 미처 얻지 못한 것에서 피피희락애(彼彼喜樂愛)가 일어난다. 두 번째는 위변행(位遍行)이니, 고고의 성품 따위의 세 가지 지위에 처해서 모든 행 가운데에 그 행을 두루 따르기 때문이다. 이미 얻은 고고(苦苦)의 성품의 지위에 처해서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일어나고, 미처 얻지 못한 고고의 지위에 처해서 불화합애(不和合愛)가 일어나고, 괴고(壞苦)의 성품의 지위에 처해서 불별리애(不別離愛) 및 화합애(和合愛)가 일어나는 것은 이미 얻고 이미 얻지 못한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행고(行苦)의 성품의 지위에 처해서 우치애(愚癡愛)가 일어나는 것은 번뇌의 추중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기 때문이고, 이와 아울러 불고불락수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직 아뢰야식만이 가장 뛰어난 지위이니 이 같은 지위에 의지해서 아치문(我癡門)으로 인한 탐애(貪愛)가 전변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세변행(世遍行)이니, 삼세에 처해서 그 행을 두루 따르기 때문이다. 과거세에 대한 추억을 일으키는 행이 그 행의 애착을 두루 따르는 것이고 미래세에 대해 즐겁기를 바라는 행을 일으켜 그 행의 애착에 두루 따르는 것이고 현재세에 대해서 탐착하는 행을 일으켜 그 행에 대한 애착을 두루 따르는 것이다. 네 번째는 계변행(界遍行)이니,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세 가지 애착하는 순서가 삼세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구변행(求遍行)이니, 탐애에 기인하여 욕계에 존재하는 삿된 범행을 두루 추구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추구하는 세력에 연유하여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욕계의 고를 초래하는 것이고, 유구(有求)의 세력에 연유해서 색계와 무색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고를 초래하는 것이다. 삿된 범행을 구하는 세력으로 인하여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 안으로 유전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종변행(種遍行)이니, 유와 무유를 애착하는 변행이 단상(斷常)하는 일체의 종류를 가리킨다. ‘번뇌’란 무엇입니까? 중생수(衆生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연기(緣起)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경(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삿된 행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계(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수가 많은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번뇌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중생수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여섯 가지와 열 가지를 가리킨다. 여섯 가지는 탐(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의(疑)ㆍ견(見)을 말하고, 열 가지는 앞에서의 다섯 가지와 다시 견에서의 다섯 가지 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을 말한다. 무엇이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만약 법이 생겨날 때 그 모양이 적정(寂靜)하지 못하다면, 이같이 생겨나는 것에 연유해서 마음과 신체가 그 적정하지 못함을 상속해 적정하지 못하게 전변하는 것이 ‘번뇌의 모양’이다. 따라서 적정하지 못한 성품이 여러 번뇌의 공통적인 모양이다. 【釋】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산란부적정성(散亂不寂靜性)이고, 전도부적정성(顚倒不寂靜性)이고, 도거부적정성(掉擧不寂靜性)이고, 혼침부적정성(惛沈不寂靜性)이고, 방일부적정성(放逸不寂靜性)이고, 무치부적정성(無恥不寂靜性)이다. 무엇이 연기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번뇌의 수면(隨眠)을 영구히 끊지 못한 까닭이고, 순번뇌법(順煩惱法)이 앞에 나타나 존재하기 때문이니, 바르지 못한 사유가 앞에 나타나 일어나는 것에서 이 같은 번뇌가 생기는 것을 ‘연기’라고 이름한다. 【釋】‘번뇌의 수면을 영구히 끊지 못한 것’이란, 그러한 것의 품(品)의 추중을 영원히 뽑아내지 못한 까닭이다. ‘순번뇌법이 현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란, 가애(可愛) 따위의 경계를 현전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바르지 못한 사유가 현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란 그러한 경계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모양을 취하여 이것을 따라 탐ㆍ진 따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엇이 경계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일체의 번뇌를 써서, 그 일체 번뇌의 소연경(所緣境)이 되는 것 및 여러 가지 번뇌사(煩惱事)를 인연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욕계의 번뇌 중에서 무명ㆍ견(見)ㆍ의(疑)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번뇌는 그 상지(上地)를 인연하는 경계가 되지 못한다. 이같이 무명 따위가 비록 상지를 능연할 수 있다고 하나, 그러한 것이 친히 상지를 인연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심지를 인연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것의 문(門)에 의지해서 분별을 일으키는 까닭에, 그것을 건립하여 소연(所緣)을 삼게 된다. 무명이 상지를 인연한다고 말하는 것은 견 따위와 상응하는 견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살가야견ㆍ불견ㆍ세간은 제외된다. 이는 다른 심지를 인연하는 모든 행을 집착하여 자아로 삼기 때문이다. 상지의 여러 번뇌도 하지(下地)를 인연하는 경계가 되지 못하니, 이는 그 지(地)에 해당하는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멸제와 도제를 연하는 여러 번뇌는 멸제와 도제를 직접 인연하는 경계가 되지 못하고, 멸제와 도제에 연유한 출세간지(出世間智)는 그 후득지(後得智)에서 안으로 증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에 의지해서 허망하게 일어난 분별에 연유해서만 소연이 된다고 해설한다. 이는 분별로 헤아린 경계는 분별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번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연무사(緣無事)와 연유사(緣有事)이다. 【釋】‘연무사’란 견과 그 견에 상응하는 법이고, 여기서 ‘견’이란 살가야견 및 변집견을 말한다. 나머지 다른 번뇌를 ‘연유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이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탐(貪)이 진(瞋)과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진과 의(疑)의 경우도 이와 같다. 나머지는 모두 상응하는 것이다. 탐과 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어째서 탐이 진과 상응하지 않는가 하면, 일향(一向)의 상위법(相違法)은 반드시 함께 전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탐이 의(疑)와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도, 경계에 대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지혜로 말미암는 것이지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釋】‘나머지 다른 것은 모두 상응하는 것’이란, 탐과 진의 경우처럼 나머지 다른 만 따위와는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탐의 경우처럼 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은 진이 탐ㆍ만ㆍ견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일에 있어서 증오나 노여움이 일어나는 경우, 여기에서 고거(高擧)가 생겨나지 않는다. 아울러 나머지 다른 상응도 능히 추측할 수 있으니, 그 이치에 따라 숙지해야 한다. 진이 탐ㆍ만(慢)ㆍ견(見)과 상응하지 않으면 만도 진(瞋)ㆍ의(疑)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무명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일체 번뇌에 상응하는 무명이고, 두 번째는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니, ‘불공무명’이란, 진제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견이 진ㆍ의와 상응하지 않고, 의는 탐ㆍ만ㆍ견과 상응하지 않으며, 분(忿) 따위의 수번뇌도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 전전상위법(展轉相違法)은 탐분(貪分)과 진분(瞋分)처럼 반드시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번뇌가 전전하여 상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무참(無慙)ㆍ무괴(無愧)는 일체의 불선품(不善品) 가운데에서 항상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만약 자타의 불선법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을 여의게 되면 이와 같은 처소도 없게 되는 까닭이다.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도 일체의 염오품(染汚品) 가운데에서 항상 서로 상응하는 것이니, 만약 감임(堪任)하지 못하는 성품 따위를 여의게 되면, 염오의 성품이 이루어지는 처소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여러 번뇌가 온갖 이치에 의지하여 갖가지 문(門)의 차별을 건립하는 것으로, 소위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ㆍ폭류(瀑流)ㆍ액(軛:멍에)ㆍ취(取)ㆍ계(繫)ㆍ개(蓋)ㆍ주(株)ㆍ올()ㆍ구(垢)ㆍ소(燒)ㆍ해(害)ㆍ전(箭)ㆍ소유악행(所有惡行)ㆍ누(漏)ㆍ궤(匱)ㆍ열(熱)ㆍ뇌(惱)ㆍ쟁(諍)ㆍ치연(熾然)ㆍ조림(稠林)ㆍ구애(拘礙) 따위이다. ‘결’에는 몇 종류가 있습니까? 또 무엇이 결이고, 어느 처에 결이 있습니까? 결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무명결(無明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의결(疑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이다. ‘애결’이란 삼계의 탐을 말하는 것이니, 그 결에 얽매이기 때문에 삼계를 싫어하여 여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싫어하여 여의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여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해서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한 여러 가지 ‘결’은 그 모양이나 쓰임새나 위치에서나 그 ‘결’을 논하는 차별이 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애결(愛結)과 같은 것이라면 도대체 어떠한 것이 ‘결’입니까? 삼계의 결이 바로 자체적인 성품이다. ‘결’이란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이 있기에 삼계를 싫어하여 여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이 전전하는 것에 연유해서 불선법이 현행하게 되고 선법이 현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지위에서 매이게 됩니까? 후세에서 고의 과보가 행해지는 지위이다. 이처럼 에결 따위도 역시 그 이치에 따라 숙지해야 한다. ‘에결’이란 유정에게 있는 고(苦) 및 순고법(順苦法)이 마음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 【釋】에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에경(恚境)의 모양에 처해서 마음이 이를 버리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해서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해서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만결’이란 일곱 가지 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하열만(下劣慢:卑慢)ㆍ사만(邪慢)이다. 【釋】‘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과만’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만과만’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아만이란 5취온에 처해서 아ㆍ아소의 존재를 관찰하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증상만’은 법을 아주 수승하게 증득하지 못하고도, 자기가 이미 법을 아주 수승하게 증득하였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하열만’은 자기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을 자기보다 조금 못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사만’은 공덕이 없는데도 자기에게 공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이같이 ‘만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아ㆍ아소를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아ㆍ아소를 집착해서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무명결’이란 삼계의 지혜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 【釋】무명결에 묶여지기 때문에 고법(苦法)과 집법(集法)에 처해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여러 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하는 까닭에 미래세의 고와 그 고에 상응하는 법을 초래하게 된다. ‘고법과 집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란 과보의 성품과 원인의 성품에 처한 유루의 모든 행을 말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근심거리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결’이란 세 가지 견(見)을 가리키는 것으로, 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이다. 【釋】‘견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삿되게 벗어나고자 하는 허망한 분별을 추구하는 것으로, 내가 앞으로 해탈한다든지, 내가 해탈되었다든지, 이미 해탈했다든지, 나는 상주한다든지, 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든지, 또는 불법 가운데에는 해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삿된 출리(出離)에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취결’이란 견취결(見取結)과 계금취결(戒禁取結)이다. 【釋】취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삿된 출리의 방편에 대해서 허망한 분별에 집착하게 된다. 8성지도(聖支道)를 버리고 살가야견 따위에 허망하게 집착해서 그들이 내세우는 계율이나 금지하는 것 따위를 청정한 도라고 여기고, 삿된 출리의 방편을 허망하게 집착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의결’이란 진제에 대해서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킨다. 【釋】의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의혹이 허망하게 생겨난다. 이처럼 의심내는 까닭에 삼보의 처소에서 바른 행을 닦지 못하게 되고, 삼보의 처소에서 바른 행을 닦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질결(嫉結)’이란 이로움에 탐닉해서 다른 사람의 호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것을 가리킨다. 【釋】질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자신의 이익을 아끼고 중히 여겨서 법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이로움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간결’이란 이로움에 탐닉하여 생활필수품에 대한 인색한 마음을 가리킨다. 【釋】간결에 얽매이는 까닭에 저축하는 것만을 아껴서 멀리 여의는 법[遠離法]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저축하는 것만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박(縛)’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박(貪縛)ㆍ진박(瞋縛)ㆍ치박(癡縛)을 가리킨다. 탐박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이 괴고(壞苦)에 묶여지고, 진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고고(苦苦)에 묶여지고, 치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행고(行苦)에 묶여진다. 【釋】‘탐 따위의 박에 연유해서 괴고 따위에 묶여진다는 것’이란, 탐ㆍ진ㆍ치로서 ‘낙(樂)’ 따위에 처한 수(受)는 언제나 수면(隨眠)이기 때문이다. 또 탐박ㆍ진박ㆍ치박에 의지하는 까닭에 선법의 가행(加行)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를 이름하여 ‘박’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여러 중생을 외부적으로 묶어 놓는 것과 같아서 두 가지 일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첫 번째는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머무는 처소를 마음껏 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법(內法)의 탐박ㆍ진박ㆍ치박 또한 이와 같음을 숙지해야 한다. ‘수면’에는 일곱 종류가 있으니, 욕애수면(欲愛隨眠)ㆍ진에수면(瞋恚隨眠)ㆍ유애수면(有愛隨眠)ㆍ만수면(慢隨眠)ㆍ무명수면(無明隨眠)ㆍ견수면(見隨眠)ㆍ의수면(疑隨眠)이다. 【釋】‘욕애수면’은 그 욕탐분(欲貪分)이 추중(麤重)한 것을 가리킨다. ‘진에수면’은 그 진에품(瞋恚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유애수면’은 색계와 무색계의 탐품(貪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만수면’은 만품(慢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무명수면’은 무명품(無明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견수면’은 견품(見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의수면’은 의품(疑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만약 욕구(欲求)를 여의지 못하면 그 욕애(欲愛)와 진에로 말미암은 수면의 소수면(所隨眠)이 그 문에 의지해서 이 두 가지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유구(有求)를 여의지 못하면 유애(有愛)에 연유한 수면의 소수면이, 삿된 것을 여의지 못하고 범행(梵行)을 추구하게 되면, 만ㆍ무명ㆍ견ㆍ의에 연유한 수면의 소수면이 증가되게 된다. 그들 중생이 약간의 대치도(對治道)를 성취하는 것에 기인해서 교만을 부려서 성제(聖諦)를 알지 못하고 외도(外道)의 삿된 해탈법이나 그 해탈의 방편을 허망하게 분별한다면, 그 차례에 따라서 세 가지 ‘견’이나 두 가지 ‘취견’에 빠지게 된다. ‘결’에서 해설한 것처럼 마침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인 정법과 비나야(毘奈耶) 가운데에서 머뭇거리면서 의혹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