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282_c_01L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8권
016_0282_c_01L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第八


안혜보살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016_0282_c_02L安慧菩薩糅
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 제품 ③
016_0282_c_04L決擇分中諦品第一之三
016_0283_a_01L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율의업(律儀業)ㆍ불율의업(不律儀業)ㆍ비불율의업(非不律儀業)을 말한다. ‘율의업’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에 수렴되는 업이고, 정려율의(靜慮律儀)에 수렴되는 업이고, 무루율의(無漏律儀)에 수렴되는 업이 있다.
【釋】‘별해탈율의에 수렴되는 업’이란 바로 7중(衆)이 받는 율의를 말하는 것으로, 비구율의(比丘律儀)ㆍ비구니율의(比丘尼律儀)ㆍ식차마나율의(式叉摩那律儀)ㆍ근책율의(勤策律儀)ㆍ근책녀율의(勤策女律儀)ㆍ오바색가율의(波索迦律儀)ㆍ오바사가율의(波斯迦律儀) 및 근주율의(近住律儀)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출가율의(出家律儀)’를 건립하게 됩니까?
행을 닦아 악행을 멀리 여의면서 욕행(欲行)도 멀리 여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비구 따위의 출가한 5중으로 인하여 목숨이 다하도록 살생 따위를 멀리 여의는 것 및 범행이 아닌 것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오바색가율의’와 ‘오바사가율의’를 건립하게 됩니까?
율의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받아 지녀서, 악행을 멀리 여의되, 욕행은 멀리 여의지 못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 2중에 연유해서 건립된 것으로 목숨이 다하도록 욕사행을 여의지만 범행이 아닌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근주율의’를 건립하게 됩니까?
악행도 멀리 여의지 못하고 욕행도 멀리 여의지 못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단지 낮이나 밤을 지정하여 계율에 가깝게 머무르는 율의이니, 그 율의를 서서히 모두 수학하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다.
만약 오바색가율의의 학처(學處) 일부분만을 닦아 익히는 경우, 이것을 성취하였다고 말해야 합니까? 성취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합니까?
여기서 성취하였다고 말하게 되면, 계를 범하는 데에 해당된다.
선체반택가(扇半擇迦) 따위가 오바색가율의를 받아 지니는 것을 제지하여야 합니까?
그가 오바색가율의를 받아 지니는 것을 제지하지 않더라도 그의 오바색가의 성품은 자동적으로 제지된다. 비구와 비구니 따위의 이부(二部)의 출가대중(出家大衆)을 가까이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선체반택가의 경우는 비구와 비구니 따위의 출가한 2중을 가깝게 모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오바색가의 성품이 제지되는 것이다. 이형(二形) 또한 이와 같으니 남자와 여자의 번뇌가 항상 함께 드러나 행하여 2중을 가까이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따로 해설하지 않겠다. 또 반택가(半擇迦)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생경반택가(生更半擇迦)ㆍ질투반택가(嫉妬半擇迦)ㆍ반월반택가(半月半擇迦)ㆍ관쇄반택가(灌灑半擇迦)ㆍ제거반택가(除去半擇迦)를 말한다.
【釋】‘정려율의에 그 업이 수렴된다는 것’이란, 한 번 일어나면 바로 계율을 범하게 되는 번뇌의 종자를 꺾어 누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욕계의 욕(欲)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유(有)에 떨어지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초정려(初靜慮)ㆍ제2정려ㆍ제3정려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유(有)에 떨어지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정려율의에 수렴되는 신과 어의 2업(業)’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 성품에서 계율을 범하는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이란 탐과 진 따위의 욕계에 얽매어진 번뇌와 수번뇌를 말하는 것이다. ‘능히 그들의 종자를 꺾어 누른다는 것’이란, 복대치(伏對治)의 세력에 연유해서 그들의 종자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욕계의 욕을 여읜다는 것’이란, 복대치의 세력에 연유해서 약간이나마 욕탐을 여의거나 또는 완전히 욕탐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그 유(有)에 떨어지는 원리’란, 그들이 계율을 범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원리의 성품을 말한다. ‘초정려ㆍ제2정려ㆍ제3정려의 욕을 여읜다는 것’이란, 원분대치(遠分對治)의 세력을 인하여 그들이 일으키는 계율을 범하게 되는 번뇌의 모든 종자를 전변시키고 감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제4정려의 욕을 여의는 것을 해설하지 않은 이유는 무색계에는 추색(麤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생략하여 색계의 색(色)에 기인한 계(戒)의 율의를 건립하지 않는 것이다. ‘무루의 율의에 수렴되는 업’이란, 사제를 이끈 이가 무루의 작의하는 힘으로 성취하는 ‘무루의 원리를 이루게 되는 계의 성품’을 말한다.
‘불율의업’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불율의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태어난 종성(種性)에 기인하거나, 또는 그가 종사하는 직업에 기인해서 그 기약된 것이 행해져서 그의 업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불율의’라 합니까?
소위 생계(生計)를 위해 양을 잡는 일ㆍ생계를 위해 닭을 치는 일ㆍ생계를 위해 돼지를 기르는 일ㆍ생계를 위해 새를 잡는 일ㆍ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는 일ㆍ생계를 위해 사슴을 사냥하는 일ㆍ생계를 위해 토끼 덫을 놓는 일ㆍ생계를 위해 도둑질하는 일ㆍ생계를 위해 망나니짓을 하는 일ㆍ생계를 위해 소를 잡는 일ㆍ생계를 위해 코끼리를 잡는 일ㆍ생계를 위해 제단을 세우고 용주(龍呪)를 외우는 일ㆍ생계를 위해 감옥을 지키는 일ㆍ생계를 위해 염탐하는 일 따위이다.
【釋】‘생계를 위해 양을 잡는 일’이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양을 도살하고 기르고 판매하는 행위이니, 이처럼 ‘생계를 위해 닭을 치는 일’이나 ‘생계를 위해 돼지를 기르는 일’도 그 상응하는 것을 따르게 된다. ‘생계를 위해 코끼리를 잡는 일’이란, 숲속에 살면서 야생의 코끼리를 잡아 훈련시키는 것이다. ‘생계를 위해 제단을 세우고 용주를 외우는 일’이란, 주문을 익혀서 독사를 춤추게 하여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다. ‘생계를 위해 염탐하는 일’이란, 이간하는 말로써 다른 사람들을 망쳐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다. ‘그가 태어난 종성에 기인하거나 또는 그가 종사하는 직업에 기인하는 것’이란, 그러한 가문에 태어나거나 나머지 가문에 태어나거나 그들 모두가 그 가문의 계급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 기약된 것이 행해져서 그의 업이 이미 결정된 것’이란, 신과 어의 방편이 예전에 결정된 것으로 인하여 그 현행이 기약된 그들의 업을 ‘불율의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비율의비불율의업’이란 비율의비불율의(非律儀非不律儀)에 머무른 자에게 존재하는 선불선업을 말한다. 보시(布施)나 애어(愛語) 따위의 업이나 구타하는 업은 율의불율의에 수렴되지 않기 때문에 ‘비율의비불율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순락수업(順樂受業)ㆍ순고수업(順苦受業)ㆍ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이다.
【釋】‘순락수업’이란 욕계에서 제3정려까지 존재하는 선업이고, ‘순고수업’이란 불선업을 가리키는 것이고, ‘순불고불락수업’이란 제3정려 이상에 존재하는 선업이다.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ㆍ순생수업(順生受業)ㆍ순후수업(順後受業)이다.
【釋】‘순현법수업’이란 업이 현법 가운데에서 이숙되어 성숙하는 것으로, 자정(慈定)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조작된 것이 감소하거나 증가하거나 반드시 눈앞에서 그 이숙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정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무쟁정(無諍定)에서 일어나는 것과 멸정(滅定)에서 일어나는 것과 예류과(預流果)에서 일어나는 것과 아라한과에서 일어나는 것도 이와 같다.
또 부처님께서 상수(上首)로 계시는 승가대중 사이에서 짓는 선악의 도(道)도 반드시 눈앞에서 그 이숙을 얻게 된다.
또 그 밖의 맹렬한 이근(利根)이 그 의요(意樂)의 방편으로 행하는 선업과 불선업도 눈앞에서 그 이숙을 얻게 되는 까닭에 ‘현법수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이생에서 업을 짓게 되면 바로 이생에서 성숙하게 되는 까닭이다. ‘순생수업’이란 무간생(無間生) 가운데에서 그 이숙이 성숙되는 업이다. 여기서 ‘무간생’이란, 다음 생을 말하는 것이니, 소위 5무간업(無間業) 따위에서 능히 그 생이 이숙되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한 가지의 무간업을 지은 자가 무간생 가운데에서 그 이숙을 받는다면, 만약 많은 무간업을 지은 자는 무간생 가운데에서 어떻게 그 이숙을 받게 됩니까?
한 생 가운데에서 한꺼번에 일체의 이숙된 것을 받는 데에는 어떠한 오류도 없다. 왜냐하면 만약 많은 무간업을 지은 자의 경우에 그 느끼게 되는 신체의 형태가 극도로 유연한데다가 그 느끼게 되는 고 또한 양이 많고 맹렬해서, 이로 인하여 한꺼번에 갖가지 커다란 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나머지 선업과 불선업이 있으니, 무간생 가운데 태어나지만 그 생 가운데에서 이숙이 성숙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순생수업’이라 이름한다.
【釋】‘순후수업’이란 무간생 이후에야 그 이숙이 성숙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업 가운데에서 처음 성숙되는 위치를 해설하고자 순현법수(順現法受) 따위의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니, 이같이 하나의 위치에서만 이숙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만약 업이 이생에서 지어졌더라도, 이생을 떠나고서 그 이숙이 성숙하는 것을 ‘순현법수업’이라 이름하게 된다. 만약 업이 이생에서 지어졌더라도, 무간생이 지나서야 그 이숙이 성숙하는 것을 ‘순생수업’이라 이름하게 된다. 만약 업이 이생에서 이루어졌더라도, 무간생을 지낸 다음에야 그 이숙이 성숙하는 것을 바로 ‘순후수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바로 선순가원순경(善順訶怨順經)에 나와 있으니, 그 경전에서 “무간업을 인하여 나락가 가운데에서 수없이 나고 죽으면서 커다란 고의 이숙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또 업의 차별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ㆍ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ㆍ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과 능히 모든 업을 소진시키는 비흑백무이숙업(非黑白無異熟業)이 있다.
【釋】‘흑흑이숙업’이란 불선업을 가리키는 것이니, 염오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불가애과의 이숙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백백이숙업’이란 삼계의 선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불염오에 기인하는 것이고 가애과(可愛果)가 이숙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흑백흑백이숙업’이란 욕계에 묶여 있는 잡스러운 업이니, 선불선업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업인데 어째서 ‘선불선업’이라고 하십니까?
여기에서는 생의 찰나적인 모양을 축약하지 않고 한 종류의 업을 해설하는 것이기에 이 또한 ‘선불선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요(意樂) 및 그 방편을 간단하게 총괄해서 하나의 업이라고 해설하게 된다. 이 같은 경전의 뜻은 간략하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눠진다. 만약 흑업이거나 백업이거나 그 모양이 서로 비슷하지 않을 때에는 한 종류의 흑업이나 백업으로 건립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업을 의요하게 하려는 까닭에 검다고 하고 방편에 기인해서 희다고 하거나 혹 어떤 업은 방편에 기인해서 검다고 하거나 의요하게 하려는 까닭에 희다고 하는 것이다.
【釋】‘의요(意樂)하게 하려는 까닭에 검다고 하고, 방편에 기인해서 희다고 하는 것’이란, 마치 유일법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먼저 그 모양을 내고 신심이 나게 하여 보시를 행하게 하는 것 내지는 출가시키려는 것이다. ‘방편에 기인해서 검다고 하거나 의요하게 하려는 까닭에 희다고 하는 것’이란, 마치 유일법처럼 자손이나 제자들을 위험한 곳을 멀리 피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하는, 가엾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하여 갖가지 신업과 어업의 추악한 모양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 같은 때에 발생하는 잡념이다. ‘비흑백무이숙업’은 모든 업을 능히 소멸시키는 것으로, 방편무간도(方便無間道)에서의 모든 무루업을 말한다. ‘방편무간도’란 그 같은 여러 가지 업의 단대치(斷對治)인 까닭이다. ‘비흑(非黑)’이란 번뇌의 중고(衆苦)를 여읜 까닭이고, ‘백’이란 한결같이 청정한 까닭이고, 무이숙(無異熟)이란 생사와 서로 어긋난 까닭이고, ‘여러 업을 소멸시키는 것’이란 무루업의 세력에 인하여 흑업 따위의 세 가지 유루업과 이숙의 습기를 영원히 뽑아내는 까닭이다.
또 일체의 무루업을 총괄해 보면, 차별이 없기에 모든 장애가 이것에 순종하는 체성이다. 따라서 그 차례에 맞추어 곡업(曲業)ㆍ예업(穢業)ㆍ탁업(濁業) 따위의 모든 염오업(染汚業)과 정업(淨業)과 모니업(牟尼業) 따위의 모든 청정업(淸淨業)을 건립하는 것이다. ‘곡업’이란 신업ㆍ어업ㆍ의업이 정직한 8성도지(聖道支)를 장애하여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업’이란 신업 따위의 업이 능히 그 상속을 염오시키는 것이니, 이에 따라 이 같은 장애업(障礙業)을 발생시키게 된다. ‘탁업’이란 신업 따위의 업이, 외도들의 전도되고 삿된 소견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모든 여래의 청정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치되더라도 이를 믿지 않고 혼탁한 가운데 수렴되기 때문이다. 또 단멸(斷滅)과 상주(常住)에 떨어지는 차별이 있으니, 잘못된 처소 가운데로 떨어지는 이치를 ‘곡업’이라고 이름한다. 손감견(損減見)에 수렴되어 청정하게 세워진 법을 미워하는 이치를 ‘예업’이라고 이름한다. 살가야견에 수렴되어 참다운 무아의 바른 견해를 가로막는 이치를 ‘탁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정업’이란, 이와 같은 잡염업(雜染業)과 상위되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세 가지 정업’이란, 선법(善法)ㆍ정법(淨法)ㆍ시라(尸羅)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직한 소견에 수렴되어 신업ㆍ어업ㆍ의업으로 계율을 훼손하여 범하게 되는 소견의 번뇌를 멀리 여의는 까닭이다. ‘세 가지 모니업’이란, 유학과 무학이 모든 무루의 신업ㆍ어업ㆍ의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직 여러 가지 ‘모니’가 이 같은 업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보시 따위의 온갖 청정업이 있다.
보시업(布施業)이란 무엇입니까?
인연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등기(等起)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처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에 기인하기 때문에 ‘보시업’이라 분별하는 것이다.
【釋】‘인연에 기인하는 것’이란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을 가리키고, ‘등기에 기인하는 것’이란 그것이 행(行)과 사(思)를 갖춘 것을 가리킨다. ‘처소(處所)에 기인하는 것’이란 보시되는 물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당하게 보시를 행하는 때의 신ㆍ구ㆍ의의 세 가지 행을 가리킨다.
시원만(施圓滿)이란 무엇입니까?
잦은 보시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치우치지 않고 보시하기 때문이고, 그 구하는 것에 따라 만족스럽게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가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치에 의거하여 경전에서 ‘대시주자(大施主者)’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자주 보시한다는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와 같이 자주 익힌 것이 성품을 이루는 것에 인하여 자주 보시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일체의 사문과 바라문 따위에게’란, 이처럼 치우치지 않고 보시하는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차별 없이 모두에게 보시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나 마실 것 따위’란 그 바라는 것에 따라 원만하게 보시한다는 이치이니 그 원하는 것에 따라 모든 생필품을 골고루 보시하여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다시 집착하는 것 없이 보시하기 때문이고, 널리 청정하게 보시하기 때문이고, 지극한 마음에서 보시하기 때문이고, 되풀이해서 보시하기 때문이고, 전답과 기물을 보시하기 때문이고, 신참과 구참비구를 잘 안배해서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가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치에 의거해서 경전에서 “해탈의 행사(行捨)로써 손을 뻗쳐 약을 보시하되, 정기적인 제사 따위를 멀리하고 그 행사를 갖추어 알맞은 때에 약(藥)을 올바르게 보시하여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구절들은 그 순서에 따라서 집착하는 바가 없는 보시 따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釋】‘집착하는 것이 없는 보시’란, 유(有)로 회향(廻向)하지 않고 생필품 따위로써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 ‘전답과 기물’이란 빈고전(貧苦田)과 공덕전(功德田)을 가리킨다. ‘손을 뻗친다는 것’이란, 널리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는 손을 잠시라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제사지낸다는 것’이란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성품이 된 까닭이다. ‘사(捨)가 구족하였다는 것’이란, 지혜를 위주로 삼기 때문이다. ‘시약을 올바르게 보시하되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것’이란, 구하러 온 이들에게 보시하는 물건을 고르게 분배하기 때문이다.
보시된 재물의 원만함을 어떻게 인지하게 됩니까?
보시된 재물이 거짓말이나 허위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남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번뇌를 여읜 까닭이고, 보시한 재물이 청정한 까닭이고, 보시한 재물을 법답게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것을 ‘보시된 재물의 원만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치에 의거해서 경전에서 정근(精勤)을 일으켜 보시를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釋】여기서 ‘재물’이란 그 보시된 재물이 거짓말이나 허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짓말이나 허위로 얻었다는 것’이란, 정근을 일으키지 않고 재물을 얻거나 자신이 머무르는 처소에서 다른 사람이 맡긴 물건을 사사로이 가지기 때문이다. ‘손과 팔을 움직이는 힘으로 재물을 얻는다는 것’이란, 그 보시된 물건이 남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란, 자신의 손을 빌려 얻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고생하여 얻은 것을 갖가지 방편을 꾸며서 그러한 재물을 획득하는 것이니, 이는 남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러움을 여읜 물건’이란, 그 보시된 재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번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보시된 재물로 인하여 더러운 번뇌의 염오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여법한 재물’이란, 그 보시된 물건이 청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칼ㆍ독약ㆍ술 따위의 더러운 것이 아닌 보시물이기 때문이다. ‘여법하게 얻었다는 것’이란, 그 보시된 물건이 법답게 수용된 것이니, 점성술 따위의 삿된 직업을 멀리 여읜 재물이기 때문이다. 또 계경에서 “시라를 성취하여 별해탈율의를 잘 방호(防護)하고 궤범(軌範)에 따라 그 다니는 곳을 모두 원만하게 해서, 미세한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익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여기서 ‘시라를 성취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청정한 시라를 받아서 보호하는 것이다. 받아 지닌 청정한 계율에 상응하여 어긋남이 없기에, ‘시라를 성취하였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서 ‘별해탈율의를 잘 보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출리(出離)의 시라를 잘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해탈을 구하고자 따로 보호하는 모든 율의를 말하는 것이기에, ‘별해탈율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율의로 인하여 속히 생사의 고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의궤(儀軌)에 따라 그 다니는 것이 원만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시라를 청정하게 갖추어 훼손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의궤가 원만하다는 것’이란 여러 가지 위의 따위가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에게 비난받지 않기 때문이다.
【釋】‘그 다니는 것이 원만하다는 것’이란, 모든 비구대중이 다니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처소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인가 하면, 극장ㆍ유곽ㆍ술집ㆍ왕가ㆍ전다라갈치나가(旃荼羅羯恥那家)이다.
‘아주 작은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용맹심을 내어 시라를 정성스럽게 익히기 때문이다. 차죄(遮罪) 가운데에서 용맹심을 내어 정성스럽게 닦아 익히고 받아 지니는 것을, 마치 성죄(性罪)처럼 여기기 때문이니, 이리하여 ‘소소한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킨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익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원만하게 시라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니, 그 학처를 모두 갖추어 원만하게 받아 배우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배우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지금 이후로는 시라에 의지하는 것이니, 경전을 풀이해 보면 신(身) 따위를 보호한다는 이치가 드러나 있다.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의 보호’라고 이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바른 견해로 인하여 거두어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듣고 허락하신 대로 오고 가는 따위의 일은 반드시 그 갈 곳을 잘 살펴서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원만한 구족’이란 무엇입니까?
끝까지 계율의 범하는 것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니, 청정한 시라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신업과 어업의 청정한 현행’이란 무엇입니까?
후회 없음[無悔] 따위로 인하여 차차 행을 닦아 나가되, 정을 얻을 때까지 의지하기 때문이니 정력(定力)에 의지하여, 계율을 범하게 되는 번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지극히 어질게 현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염오의 생각에 섞이지 않기 때문이니, 염오의 생각이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결같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죄가 되지 않게 현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삿된 것을 멀리 여의어서 범행 닦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니, 유(有) 및 재물에 회향하지 않고 범행(梵行)을 닦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 성현들에게 칭찬받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해롭지 않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쉽게 함께 머물기 때문이니, 스스로를 높여서 남을 경멸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함께 머물기 힘든 것은 남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순종하여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열반법에 순종하는 것에 기인해서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니, 능히 수순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성스러운 도를 능히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감추거나 드러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선법은 감추고 악법은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니, 자신의 공덕은 감추고 자신의 허물은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신업과 어업이 사이좋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범행을 닦는 이들이 섭수하는 시라(尸羅)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라를 섭수하는 범행이 동일하기에 같은 것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절도 있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어른을 존중해야 하는 자리에서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스승 및 스승과 동년배의 어른을 존중해야 하는 처소에서 자신의 교만함을 억눌러 시키는 대로 섬기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공경스럽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한 가르침을 공경스럽게 받들어 따르기 때문이니, 어른의 말씀을 존중하여 따르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번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고행의 치열한 고뇌와 저급한 깨우침을 멀리하기 때문이니, 외도의 저열한 욕해행(欲解行)과 여러 가지 고행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그러한 것에 의해 괴로움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고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재산과 직업을 포기하여도 후회와 고뇌가 없는 것이니, 재산과 직업을 포기하여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가 나중에라도 번뇌의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후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비록 성취가 약간 있더라도 이를 기뻐하지 않으며 그에 따른 후회도 없기 때문이니, 선품을 닦다가 약간의 성취를 얻더라도 이를 기뻐하여 만족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뒤따라 후회하는 것을 여의고 힘자라는 데까지 닦아 익히기 때문이다. 마치 세존께서 “이와 같이 유정들은 자신의 업에 기인해서, 그 업의 상위에서 서로 다투게 되고 업에 따라 생겨나게 되고 업에 의해 여의게 되는 것이고, 또 업에 기인해서 유정 사이에 높낮이와 우열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유정이 모두 자신의 업에 기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스스로 지은 업에 말미암아 이숙과를 받기 때문이다. 여러 유정이 자신의 업에 기인하는 까닭에 ‘자신의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업의 이숙을 받는 까닭에 ‘자신의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업이 어긋나는 것에 따라 다투게 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업에서 얻게 된 이숙을 받을 때에 선업과 불선업이 서로 어긋나 다투기 때문이다. 여러 유정이 그 업이 어긋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다투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업이 어긋나는 것에 따라 다투게 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선업과 악업의 업력에 따라 스스로 받게 되는 그 이숙과의 가애와 불가애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유정이 스스로 지은 업에서 가애와 불가애의 이숙과를 받을 때에, 그 업의 시초는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이것은 원인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간의 성품이나 자재천(自在天) 따위에 원인하는 것입니까?
바로 업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업을 따라 생겨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모든 유정은 멀리 여의는 인(因)이 없다거나 그 같은 인을 싫어하여 오직 업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러 유정이 멀리 여의는 인이 없다고 여기거나 그 같은 인을 싫어하여 오직 업 따위의 인연에 의해서만 생겨나게 된다. 이처럼 업에 의지하여 유전하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명(明)에 의해서 멸진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역시 여러 업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전에서는 “업에 의지해서 멀리 여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업에 의해 여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대치하는 업에 의지해서 업에 얽매임을 풀기 때문이며, 무루업에 의지해서 유루업을 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업에 의해서 멀리 여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유정사이에 서로 그 지위가 높고 낮은 것이 존재합니까?
업에 기인하는 까닭에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서 자체적인 차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유정 사이에 서로 그 공덕이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존재합니까?
모든 유정의 성취에는 그 공덕과 과실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유정의 업이 이숙하는 것은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은 경전의 뜻은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아니면 모두 생각으로는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업의 이숙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可思議]이란 무엇이고, 업의 이숙이 생각해 볼 수 없다는 것[不可思議]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선업이 인취와 천취에서 가애과를 이숙하는 것이 ‘가사의’이고, 3악도에 떨어지는 여러 불선업이 불가애과를 이숙하는 것은 ‘가사의’이다. 바로 선업과 악업으로 말미암아 선취와 악취에 떨어져 가애과와 불가애과의 이숙을 얻는 것이다. 세간의 지혜란 능히 생각하고 의논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로 인하여 정견 따위의 공덕을 이끌어 밝힐 수 있다. 이 같은 업감(業感)에 기인하여 모든 유정과 자신이 이숙되는 따위의 갖가지 차별이 ‘불가사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신(內身)에 형색 따위가 이숙되는 것을 말한다. 그 한량없는 차별이 진실로 생각으로 헤아리기 힘든 것이기에, 일체지(一切智)가 아닌 중생의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만약 억지로 생각하게 되면 그만 미쳐버리는 따위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또 선업과 불선업의 처차별(處差別)ㆍ사차별(事差別)ㆍ인차별(因差別)ㆍ이숙차별(異熟差別)ㆍ품류차별(品類差別) 따위가 모두 ‘불가사의’이니, 이와 같은 업의 ‘처차별’ 따위에 기인하는 것은 한없고 가없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釋】여기서 ‘처차별’이란 이러이러한 장소에 머무는 것만으로 이러이러한 업을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도시나 농촌이 그 일이 각각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차별’이란 그 의지하는 사물을 말하는 것이니, 유정의 수법이거나 비유정의 수법이다. ‘인차별’이란 선근과 불선근이 그 상응하는 것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숙차별’이란 내신이 이숙되는 것을 말한다. ‘품류차별’이란 갖가지 차별의 그 한량없는 품류를 말하는 것이다. 또 갖가지 외사차별(外事差別)이 있으니, 그 업감의 쓰임새도 ‘불가사의’한 것이다.
어떠한 업의 감득에 연유해서 가시 따위가 예리하고 날카롭게 되는 것입니까?
이 같은 종류가 세간에 있게 되는 것도 ‘불가사의’에 섭수되는 것이니, 소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세간이란 말은 부처님께서 명명하신 것이다.
【釋】‘말니(末尼)에 상응하는 업’이란 월애주(月愛珠) 따위가 능히 물맛을 좋게 하는 그 업의 쓰임새가 참으로 헤아리기 힘든 것을 말한다. ‘약초에 상응하는 업’이란 이 같은 약초를 지니는 것으로 그 모습을 감추는 것 따위를 말한다. ‘주문에 상응하는 업’이란 이 같은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불에 타지 않는 것 따위를 말한다. ‘술법에 상응하는 업’이란 그와 같은 술법에 연유하는 까닭에 열병 따위를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 또 모든 관(觀)을 닦는 이들의 위덕(威德)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위덕의 세력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지 따위를 능히 흔들거나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 따위이다. 또 모든 보살이 자재한 것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른바 그 명(命)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마음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재물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업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태어남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수승한 이해가 자재한 까닭이고, 그 원력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신통이 자재한 까닭이고, 그 지혜가 자재한 까닭이고, 그 법이 자재한 까닭이다. 모든 대보살이 이러한 자재한 힘에 연유하는 까닭에 그 지어지는 업의 쓰임새도 불가사의한 것이다. 여러 대보살이 그 명이 자재한 힘에 연유해서 여러 수행(壽行)을 지속시켜서 그 바라는 것을 따르되 그때에 맞추어 머물게 되는 것이고, 그 마음이 자재한 힘에 연유해서 그 즐기는 것에 따라,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자재하게 되는 것이고, 수승한 이해의 자재한 힘에 연유해서 대지 따위를 변화시켜서 물이나 불 따위로 만드는 수승한 이해가 자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원력의 자재한 힘에 연유해서 그 즐기는 것에 따라 한량없는 중생을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원만한 대원력을 발하게 되는 것이고, 그 신통의 자재한 힘에 연유해서 한량없는 유정을 교화하기 위하여 갖가지 신통의 변화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고, 그 지혜의 자재한 힘에 연유해서 모든 법의 이치를 말로 풀어내되 그 설명이 걸림없이 원만한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그 법의 자재한 힘에 인하여 한량없는 수의 명신ㆍ구신ㆍ문신으로 소달람(素怛纜) 따위의 무상의 교법을,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 건립하는 것 내지는 일체 유정으로 하여금 일시에 그들의 마음을 모두 크고 환희롭게 하는 것이다. 또 모든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것과 모든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사업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어째서 여래께서는 구경(究竟)의 무공용처(無功用處)에 이르러 청정한 일미(一味)의 법계(法界)를 증득하셨는데도, 모든 불세존께서는 중생에 응(應)하여 이익되고 안락한 갖가지 유정의 사업을 지으시되, 그 시절에 따라 응하셔서 모두 성취시키시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 및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다시 집제에는 총괄해서 네 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있으니, 인상(因相)ㆍ집상(集相)ㆍ생상(生相)ㆍ연상(緣相)을 가리킨다.
‘인상’이란 무엇입니까?
남아있는 습기(習氣)를 능히 이끌어 발하는 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인상’이라 한다. 업번뇌(業煩惱)에 인하여 윤회의 습기가 되는 인을 이끌어 발하기 때문이다.
‘집상’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의 유정 내에 모여든 습기를 가리키는 것이니, 그들이 유정의 무리에 처해서 함께 일어나는 인(因)을 ‘집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여러 유정이 습기를 모으는 것으로 인하여, 인취나 천취 따위의 유정에 처해서 능히 종류별로 그 모양이 비슷한 형태를 이루는 것이니, 평등하게 일어나는 인이기 때문이다.
‘생상’이란 무엇입니까?
그 내신(內身)이 제각기 한량없는 품류가 차별되는 생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생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들 여러 유정들의 각각의 내신이 상속하되, 취(趣)를 결정해서 그 심지로 태어나는 따위의 모든 일체 품류의 차별이나 유정천에 이르기까지 그 태어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연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유정들이 갖가지 행사(行捨)의 인을 성취하는 것을 ‘연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능히 유정들로 하여금 일찍이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자 자체가 행사하여 그 자체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집제의 체상’이라 하는 것이다.
‘멸제(滅諦)’란 무엇입니까?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아주 심오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세속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승의(勝義)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원만하지 못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원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장엄하지 못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장엄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유여(有餘)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무여(無餘)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가장 뛰어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이 같은 차별로 인하여 멸제를 분별하게 된다.
‘그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도에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依)가 소멸되거나 능히 소멸시키거나 또는 성품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멸제의 모양’이다.
세존께서 “안처와 이처 그리고 비처ㆍ설처ㆍ신처 및 의처가 있으니, 이 같은 처에서 명색(名色)이 끝까지 소멸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이리하여 너희들이 지금 이 같은 처(處)를 관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른바 여기서 ‘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안처가 궁극적으로 소멸하여 색상(色想)을 멀리 여읜 것이고 아울러 의(意)가 궁극적으로 소멸되어 그 법상(法想)조차도 멀리 여읜 것이다. 이와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그 소연(所緣)이 나타나서 진여경계위(眞如境界位)에서 유루법이 소멸되는 것이 멸제의 모양이다.
‘아주 심오한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그들의 모든 행이 구경(究竟)에 다다라 적멸(寂滅)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적멸에서 그들의 모든 행을 추론하더라도 다르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다르거나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다른 것도 아니면서 그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모든 행이 구경에 다다라 적멸해졌을 때, 이와 같은 적멸은 그들의 모든 행과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행과 서로 연관되지 않은 다른 체를 드러내는 것이 되고, 만약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집착한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도리에서 구(俱)도 아니고 불구(不俱)도 아닌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 가운데에서 만약 희론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바른 사고도 아니고 도도 아니고 진여도 아니고 또 훌륭한 방편에 의한 사고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존께서 “이러한 6촉처(觸處)가 없어지고 욕(欲)을 여의어 일체가 소멸되고 고요하며 잠잠하고 사라진 따위를 다르다고 말하거나,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거나,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도 말하거나,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희론이 없는 곳에서 도리어 희론을 만드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6처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가 가능한 여러 희론도 6처(處)가 소멸되면 모든 희론이 끊어져 버리니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이처럼 온갖 희론이 끊어져 적멸한 것이 열반이고, 바르지 못한 사고를 ‘희론’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응이사의(應爾思意)에 처해서 다르다고 사고하는 것이다.
‘응이사의’란 무엇입니까?
올바르거나 묘하거나 여의는 따위의 갖가지 사유를 말한다.
‘세속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세간도(世間道)가 그 종자(種子)를 끊는 데에서 소멸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세존께서 따로 “그와 같은 분(分)이 열반이다”고 말씀하셨다.
‘승의(勝義)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성스러운 지혜로 종자를 영원히 뽑아내는 것에 의하여 소멸되는 것이다.
‘원만하지 않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모든 유학 혹 예류과(預流果)에 속하거나, 혹 일래과(一來果)에 속하거나, 혹 불환과(不還果)에 속하는 따위의 유(有)가 소멸하는 것이다.
‘원만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모든 무학 즉 아라한과에 속하는 따위의 유가 소멸하는 것이다.
‘장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혜해탈(慧解脫)하는 아라한의 유가 소멸하는 것이다. 삼명 따위의 가장 뛰어난 공덕에 의해 장엄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엄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구분해탈(俱分解脫)하는 3명(明)과 6통(通)의 아라한의 유(有)가 소멸하는 것이다. 한량없는 갖가지 뛰어난 공덕에 장엄되기 때문이다.
‘유여(有餘)이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소멸해야 하는 의(依)가 남아 있는 것이다.
‘무여(無餘)이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소멸해야 하는 의(依)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가장 뛰어난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과 보살이 열반에 머물지 않고, 일체를 포섭하여 소멸시키는 것이다. 언제나 편안하게 머무르는 것으로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 것[無餘永斷]ㆍ영원히 벗어남[永出]ㆍ기지개를 펴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永吐]ㆍ진(盡)ㆍ이욕(離欲)ㆍ멸(滅)ㆍ적정(寂靜)ㆍ몰(沒) 따위이다.
어째서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 것’이라고 이름합니까?
후속되는 나머지 구절로 인한 까닭이다.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다는 것’은 표제구(標題句)이고 그 밖의 나머지 것은 해석구(解釋句)이다. 그리하여 ‘나머지 구절에 연유한 까닭’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별구(別句)에서 이것을 모두 풀이하는 것에 연유하기 때문이고, 전(纏)과 수면(隨眠)이 모두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에 ‘남김없이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영단’이라고 이름합니까?
여러 가지 ‘전’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전’을 끊는 것에 의거해 해설한 것으로, 이러한 것이 이미 생겨나게 되면 모두 멀리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영출’이라고 이름합니까?
모든 전(纏)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면을 끊는 것에 의거해서 해설한 것이다. 근본을 제거하여 영원히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멸’은 견도와 수도의 대치에 기인하여 구별되기 때문에, 두 가지로 건립하는 것이니 바로 진(盡)과 이욕이다. 이것은 다음의 문답에서 말하게 된다.
어째서 ‘영토(永吐)’라고 이름합니까?
수면(隨眠)에서 기지개를 펴고 영원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진(盡)’이라고 이름합니까?
견도(見道)의 대치(對治)에서 마침내 속박을 벗어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번뇌의 덩어리 가운데에서 약간 만이 남아 있는 까닭에 ‘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욕’이라고 이름합니까?
수도(修道)의 대치에서 속박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 수도에 연유하여 여러 심지의 욕을 여의고 점차로 드러나는 까닭에 ‘이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유(有)에 연유하여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속박을 여의기 때문이고 미래의 고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의 문답에서 설명하게 된다.
어째서 ‘멸’이라고 이름합니까?
미래의 그러한 과보의 고통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능히 미래의 고가 나지 않게 하는 법을 이루는 까닭에 ‘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현법 가운데에서 근심스러운 번뇌가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의 문답에서 말하게 된다.
어째서 ‘적정’이라고 이름합니까?
현법(現法) 가운데의 그러한 과보로부터 마음의 고통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몰(沒)’이라고 이름합니까?
나머지 모든 일이 영원히 소멸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숙업(宿業)의 번뇌에 감득된 여러 온이 자연스럽게 멸하여 없어지기 때문에 ‘몰’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별구’로서 앞서의 ‘무여영단’이란 ‘총구(總句)’를 풀이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함이 없다[無爲]’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3상(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나고 죽고 머무르는 세 가지 함이 있는 모양은 궁극적으로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함이 없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보기 어렵다[難見]’고 달리 이름합니까?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의 경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스러운 지혜의 눈으로써만 보여지는 경계이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전변하지 않는다[不轉]’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여러 취(趣)가 차별적으로 전변하는 것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지옥 따위를 오고 가는 유전을 여의고 항상 편안하게 머무는 까닭에 ‘전변하지 않는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비굴하지 않는 것[不卑屈]’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세 가지 애착을 여의기 때문이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세 가지 애착을 영원히 여의었기에, 여러 유 가운데에서 비굴해질 곳이 없으므로 ‘비굴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감로(甘露)’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온(蘊)의 마장(魔障)을 여의기 때문이다. 일체의 죽는 것에 의지가 되는 온을 영원히 여의는 까닭에 ‘감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무루(無漏)’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일체 번뇌의 마장을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집’이라 이름합니까?
계율을 어기지 않고[無罪] 깨끗하고 즐거운 것에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탈의 즐거움에 의지하는 것이기에 ‘집’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모래언덕’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삼계와 단절되기 때문이다. 생사의 큰 바다에서 높은 언덕으로 뛰쳐나오는 까닭에 이를 비유해서 ‘모래언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널리 제도함’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일체의 커다란 고난이나 재난과 횡액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득하여 생ㆍ로ㆍ병 따위를 소멸시켜서 여러 고난과 횡액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귀의(歸依)’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허망하지 않은 그 의요(意樂)의 방편에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그 의지한다는 이치가 바로 ‘귀의’의 뜻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수승한 귀의처’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일체의 가장 뛰어난 성인의 성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적멸로 인하여 가장 뛰어난 성스러운 성품이 의지하는 처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아라한이 그 방편을 증득하는 소연경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불사(不死)’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생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태어나는 것이 없다면 죽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무열뇌(無熱惱)’라고 이름합니까?
일체 번뇌의 열기를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일체 모두 얻지 못하는 고통의 커다란 열뇌를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불타지 않는 것’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일체의 근심스럽고 한탄스러운 걱정과 괴로움 따위 여러 번뇌의 산란함을 여의기 때문이다. 일체의 근심 따위가 불타오르는 것이 영원히 식어 아주 시원한 까닭에 ‘불타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편안함’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두려움을 벗어나 그 의지처에 머물기 때문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모든 두려움이 없이 ‘성스러운 머무름’에 의지하는 까닭에 편안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시원함’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모든 유익한 일에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시원한 선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청량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즐거운 일’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가장 뛰어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즐거움에 의지하는 까닭에 ‘즐거운 일’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상서로운 길’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그것을 증득하기 위해서 쉽게 닦을 수 있는 방편에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쉽게 닦는 방편의 소연경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병이 없다’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일체의 장애로 인한 병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번뇌 따위의 여러 장애에 대한 병을 여읜 까닭에 ‘무병’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부동(不動)’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일체의 어지러운 움직임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여러 경계의 희론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여의는 까닭에 ‘부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열반’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무상적멸(無相寂滅)한 커다란 안락함에 머무는 것[大安樂住]에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일체 ‘사’ 따위의 여러 가지 상(想)을 영원히 여의고 궁극적으로 적멸한 커다란 안락함에 머무르는 소연경이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다시 멸제(滅諦)의 변론에 의거해서 무생(無生) 따위의 그 명의차별(名義差別)이 있으니, ‘고제의 모양’과 그 이치가 상반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釋】‘고제의 모양’이란 그들이 유정의 종류에 처해서 상속하여 태어나는 그 모양을 번복하기 위한 까닭에 이같이 문답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무생(無生)’이라고 달리 이름합니까?
생의 상속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고제의 모양’이란 연속해서 태어난 이후에 자신과 대중의 분한(分限)이 점차로 원만해지는 것이기에, 여기서 그 모양을 번복하기 위한 까닭에 이같이 문답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무기(無起)’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지금 이후로는 차츰 생겨나는 것을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무조(無造)’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전제(前際)의 모든 업번뇌(業煩惱)의 세력에 인도받는 것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또 현재의 고는 능히 조작되는 것으로, 나머지 이숙된 여러 업 번뇌의 의지처이기에, 그 모양을 번복하기 위한 까닭에 이같이 문답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무작(無作)’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현재의 모든 업 번뇌를 만들지 않는 것에 의지 받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또 ‘고의 모양’이란 후유에서 이숙의 상속이 간단없이 생겨나는 것이기에, 여기서 그 모양을 번복하기 위한 까닭에 이같이 문답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멸’을 ‘불생(不生)’이라고 다르게 이름합니까?
미래의 상(想)이 상속하는 것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멸제에는 총괄적으로 네 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있으니, 멸상(滅相)ㆍ정상(淨相)ㆍ묘상(妙相)ㆍ이상(離相)을 가리킨다.
‘멸상’이란 무엇입니까?
번뇌에서 속박을 여의기 때문이다. 유전하는 인을 말하는 것으로 번뇌에서 속박을 여의기 때문에, ‘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정상’이란 무엇입니까?
고에서 이계하기 때문이다. 행고(行苦)에 수렴되는 적정하지 못한 모양의 취온(聚蘊)에서 속박을 여의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묘상’이란 무엇입니까?
즐겁고 청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뇌의 고를 궁극적으로 속박을 여의어 자연히 낙(樂)과 정(淨)으로 자체를 삼는 까닭에, ‘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상’이란 무엇입니까?
언제나 이로운 일이기 때문이고,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지극한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그 차례에 따라 상이익(常利益)과 안온이익(安隱利益)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게 선한 성품이 ‘멸제의 성품’이다.
‘도제(道諦)’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에 연유해서 고를 깨닫고 고집(苦集)을 끊고 고멸(苦滅)을 증득하고 도를 닦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도제의 모양’이라고 약설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4성제에 의거하여 그 작용을 빌미삼아 도제의 모양을 드러내는 것이다.
【釋】도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자량도(資糧道)ㆍ방편도(方便道)ㆍ견도(見道)ㆍ수도(修道)ㆍ구경도(究竟道)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도의 자체적인 성품 및 권속에 의지해서 도제의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자량도’입니까?
여러 이생(異生)이 간직하는 시라(尸羅)를 가리킨다. 6근(根)의 문을 잘 단속하고 음식도 그 양을 잘 조절해서 초야(初夜)ㆍ후야(後夜)에 언제나 잠자지 않고 지(止)와 관(觀)을 열심히 닦아 정지(定地)에 머무는 것이다. 또 나머지 모든 선업을 익혀 나가는 문소성혜(聞所成慧)ㆍ사소성혜(思所成慧)ㆍ수소성혜(修所成慧)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닦아 익히는 까닭에 현관(現觀)을 성취하여 해탈의 소의(所依)가 되는 법기(法器)의 성품[器性]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러 이생(異生)이 간직하는 시라 내지는 정지(定地)에 머무르는 따위가 ‘자량도의 체’이다. 그들이 청정한 시라 따위를 수습하는 것에 연유해서 극히 원만해지기 때문이다.
【釋】‘그 나머지 모든 선법을 익혀 나가는 것’이란 무회(無悔) 따위나 문소성혜ㆍ사소성혜 따위에서 생겨나는 여러 지혜이니, 난선위(煖善位) 따위의 성취를 말한다. 순서대로 진제를 인견해서 여러 가지 장애를 영원히 끊도록 그 상속을 감당하는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방편도’입니까?
자량도에 해당되는 것은 모두 방편도이나, 방편도에 해당되는 것이 모두 자량도는 아니다. ‘이미 양식을 비축한 도’란 순결택분(順決擇分)의 모든 선근위(善根位)를 말하는 것이니,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순제인법(順諦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을 가리킨다.
‘난법’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진제 가운데에서 그 별도의 행상을 안으로 증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삼마지발라야(三摩地鉢羅若) 및 그것에 상응하는 따위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다. 청정한 정심(定心)에 연유하여 진제에 의거하는 계경 따위의 법을 증상하여 그 문(門)에서의 여러 가지 이치를 현현시키는 것으로, 저것에 인연하여 생겨나는 사마타(奢摩他:止定)나 비발사나(毘鉢舍那:觀) 따위를 ‘난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정법’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진제 가운데에서 그 별도의 행상을 안으로 증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따위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다. 그 정법에 연유해서 전전하여 증진되어 상계(上界)의 지위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순제인법’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진제 가운데에서 그 별도의 행상을 안으로 증득하는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따위의 법에 일부분만 편입해서 그 일부분만 따르게 되는 것이다.
【釋】‘일부분만 편입되었다는 것’이란 소취하지 않는 것을 한결같은 인혜(忍慧)로써 터득하기 때문이다. ‘일부분만 따른다는 것’이란 능취하지 않는 것에 따라 통달하는 소의처이기 때문이다.
‘세제일법’이란 무엇입니까?
무간심지(無間心地)의 삼마지발라야 및 그것에 상응하는 따위의 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무간도에서 반드시 최초의 출세도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016_0282_c_05L復次業差別有三種謂律儀業不律儀業非律儀非不律儀業律儀業復有三種謂別解脫律儀所攝靜慮律儀所攝無漏律儀所攝別解脫律儀所攝業者卽是七衆所受律儀謂比丘律儀比丘尼律儀式叉摩那律儀沙彌律儀沙彌尼律儀鄔波索迦律鄔波斯迦律儀及近住律儀依止何等補特伽羅建立出家律儀依能修行遠離惡行遠離欲行由比丘等出家五衆乃能盡壽遠離殺生等惡及能遠離非梵行故依止何等補特伽羅建立鄔波索迦律儀鄔波斯迦律儀依能盡壽遠離惡行不遠離欲行由彼二衆建立盡壽離欲邪行非離非梵行故依止何等補特伽羅建立近住律儀依止不能遠離惡行及不遠離欲行是故爲彼但制日夜近住律儀爲令漸漸俱修學故唯修學鄔波索迦一分學處爲說成就鄔波索迦律儀爲說不成就耶應說成就而名犯戒扇搋半擇迦等爲遮彼受鄔波索迦律儀不耶不遮彼受鄔波索迦律儀然遮彼鄔波索迦性不堪親近承事比丘比丘尼等二出家衆故如扇搋半擇迦不堪親近承事比丘比丘尼等二出家衆故遮彼鄔波索迦性二形亦爾女煩惱恒俱現行不堪親近承事二衆故不別說又半擇迦有五種謂生便半擇迦嫉妒半擇迦半月半擇迦灌灑半擇迦除去半擇迦靜慮律儀所攝業者謂能損伏發起犯戒煩惱種子離欲界欲者所有遠離離初二三靜慮欲者所有遠離名靜慮律儀所攝身語業性發起犯戒煩惱者謂貪瞋等欲界所繫煩惱隨煩惱能損伏彼種子者謂由伏治力損彼種子離欲界欲者謂由伏對治力或少分離欲或全分離欲有遠離者謂從彼犯戒所得遠離性離初三靜慮欲者謂由遠分對治令彼發起犯戒煩惱所有種子更衰損所以不說離第四靜慮欲者由無色界麤色無故略不建立色戒律儀無漏律儀所攝業者謂已見諦由無漏作意力所得無漏遠離戒性不律儀業者謂諸不律儀者或由生彼種姓中故或由受持彼事業故期現行彼業決定何等名爲不律儀所謂屠羊養鷄養猪捕鳥捕魚鹿罝兔劫盜魁膾害牛縛象立壇呪守獄讒搆好爲損等屠羊者爲欲活命屠養買賣如是養鷄猪等隨其所應縛象者恒處山林調執野象壇呪龍者習呪龍蛇戲樂自活讒搆以離閒語毀壞他親持用活命由生彼種姓中或由受持彼事業者謂卽生彼家若生餘家如其次第期現行彼業決定者謂身語方便先決定要期現行彼業是名不律儀業非律儀非不律儀業者謂住非律儀非不律儀者所有善不善業若布施愛語等業若敺擊等業律儀不律儀所不攝故名非律儀非不律儀又業差別有三種謂順樂受業順苦受業不苦不樂受業順樂受業者謂從欲界乃至第三靜慮所有善業順苦受業者謂不善業順不苦不樂受業者第四靜慮已上所有善業等復次業差別有三種謂順現法受業順生受業順後受業順現法受業者若業於現法中異熟成熟謂從慈定起已於彼造作若損若益必得現異如從慈定起從無諍定滅盡定流果阿羅漢果起亦爾又於佛爲上首僧中造善惡業必得現異熟又有餘猛利意樂方便所行善不善業得現異熟所以名爲現法受業若業於此生作卽於此生熟故順生受業若業於無閒生中異熟成熟無閒生者卽次此生謂五無閒業等能得生異熟若造一無閒者於無閒生中可受其異熟若造多無閒業者於無閒生中云何得受其異熟於一生頓受一切所得異熟無有過失以者何若造衆多無閒業者所感身形最極柔軟所感苦具衆多猛利此頓受種種大苦復有所餘善不善於無閒生異熟熟者一切皆名順生受業順後受業者若業於無閒生異熟成熟於此業中從初熟位建立順現法受等名不唯受此一位異熟若業於此生造卽從此生已去異熟成熟說名順現法受業若業於此生從無閒生已去異熟成熟說名順生受業若業於此生造度無閒生已異熟成熟說名順後受業若作是卽爲善順訶怨心經如彼經言由無閒業於那落迦中數數死生受大苦異熟復次有四種諸業差別謂黑黑異熟業白白異熟業黑白黑白異熟非黑白無異熟業能盡諸業黑黑異熟業者謂不善業由染污故不可愛異熟故白白異熟業者謂三界善業不染污故可愛異熟故黑白黑白異熟業者謂欲界繫雜業不善雜故云何一業亦善不善此中不約生剎那相說一種業亦善不善然約意樂及方便摠說一業是此經意此二種若黑若白互不相似建立一種黑白業故或有業意樂故方便或有業方便故黑意樂故白樂故黑方便故白者猶如有一爲欲誑他先現其相令信己故行於惠施乃至出家方便故黑意樂故白者如有一欲令子及門徒遠危處安憐愍心現發種種身語麤惡遂於此發生雜染非黑白無異熟業能盡諸業者謂於方便無閒道中諸無漏以方便無閒道是彼諸業斷對治非黑者離煩惱垢故白者一向淸淨故無異熟者生死相違故能盡諸業者由無漏業力永拔黑等三有漏業與異熟習氣故復次摠約一切無漏業無有差別有障㝵隨順體性如其次第建立曲濁等諸染污業牟尼等諸淸淨曲業者若身意業能障正直八聖道支令不生長穢業者若身等業能污相續依此發生如是障業濁業若身等業依止外道顚倒見生一切如來淸淨聖教之所對治不信混濁之所攝故復有差別墮在斷常邊違處中行義名曲損減見所攝增惡淸淨所立法義名穢薩迦耶見所攝障眞無我見義名濁淨業者與如是等諸雜染業相違類解三淨業者善淨尸羅正直見所攝身意業離毀犯戒見垢故三牟尼業者謂學無學所有無漏身意業唯諸牟尼有此業故又有施等諸淸淨業施業云何謂因緣故等起故處所故自體分別施業因緣者謂無貪無瞋無癡善根等起者謂彼俱行思處所者謂所施物自體者謂正行施時意業云何施圓滿謂數數施故無偏黨施故隨其所欲圓滿施故施得圓滿依此義故經作是說爲大施主者此顯數數施義由彼串習成性數數能施故一切沙門婆羅門等者此顯無偏黨施義無有差別一切施故若飮等者此顯隨其所欲圓滿施如所意願一切資財皆施與故無所依施故廣淸淨施故極歡喜施故數數施故田器施故善分布新舊施故施得圓滿依此義故經作是解脫捨舒手施樂遠離常祠祀具足於正施時樂等分布如是諸句隨其次第顯示無所依施等無所依施者謂不迴向有及資財而行惠施田器者謂貧苦田功德田舒手者行惠施手不潛縮故常祠祀者串習祠祀以成性故捨具足者慧爲先故於正施時樂等分布者於來求者所施物等分布故云何應知施物圓滿謂所施財物非誑詐得故所施財物非侵他得故所施財物非穢離垢所施財物淸淨故所施財物如法所引故是名施物圓滿依此義故經作是說發起正勤所得財物者此顯施物非誑詐得誑詐得者謂不起正勤而得財物於自住處他所寄物謀詐得故運手臂力所得財物者此顯施物非侵他得侵他得者非自運動手力而得他所勤苦種種方便獲得財侵陵取故離污垢物者此顯施物非穢離垢由所施物遠離污垢染污如法財者此顯施物淸淨遠離刀毒酒等非淨施物故如法所得者顯施物如法所引遠離僞斗稱等邪命財故復次如經中說成就尸羅善能防護別解脫律儀軌則所行皆悉圓滿微細罪生大怖畏於諸學處善能受云何成就尸羅能受能護淨尸羅謂受持淨戒相應無缺故名成就尸羅云何善能防護別解脫律儀善護持出離尸羅故謂爲求解脫別防護所有律儀故名別解脫律儀由此律儀能速出離生死苦故云何軌則所行皆悉圓滿具淨尸羅難爲毀責故軌則圓滿者諸威儀等非聰慧人所呵責故所行圓滿者遠離五種諸比丘衆所不行處故何等爲五謂唱令家婬女家酤酒家王家旃荼羅羯恥那家云何見微細罪生大怖勇猛恭敬所學尸羅故於遮罪中勇猛恭敬修學護持猶如性罪是故名爲見微細罪生大怖畏云何於諸學處善能受學圓滿受學所學尸羅謂具足圓滿受學學處是故名爲於諸學處善能受學從是已後依止尸羅釋佛經中護身等義云何名爲防護身語由彼正解所攝持故謂如佛所聽往來等事必先覺察方正行云何身語具足圓滿終不毀犯所毀犯故謂不違損淸淨尸羅云何身語淸淨現行由無悔等漸次修行至得定爲依止故謂依定力令犯戒垢極遠離故云何身語極善現行污尋思所不雜故謂染污尋思所不能雜一向淨故云何身語無罪現行遠離邪願修梵行故謂不迴向有及資財修行梵行爲諸聖賢所稱讚故云何身語無害現行不輕陵他易共住故謂不由自高陵蔑於人難共住等爲損害故云何身語隨順現行能隨順涅槃得故謂能隨順得涅槃得能引聖道故云何身語隨隱顯現隱善顯惡故謂隱自功德顯自過云何身語親善現行同梵行者攝受尸羅故謂同梵行攝受尸羅應歸趣故云何身語應儀現行於尊尊位離憍慢故謂於尊長及等尊長所伏憍慢如應供事故云何身語敬順現行於尊教誨敬順受故謂於尊語敬順而受離自見取故云何身語無熱現行遠離苦行熱惱下劣欲解謂離外道下劣欲解行諸苦行自燒然故云何身語不惱現行棄捨財業無悔惱故謂由棄捨財業無有追悔彼於後時無熱惱故云何身語無悔現行雖得少分不以爲喜無悔恨故謂修善品雖獲少分不生喜足離諸悔恨盡其所能而修習故如世尊說如是有情皆由自業業所乖諍從業所生依業出離業能分判一切有情高下勝劣云何有情皆由自業由自造業而受異熟故謂諸有情由其自業故名自業自者不與他共自業異熟故名自業云何業所乖諍於受自業所得異熟時不善業互違諍故謂諸有情由業乖諍故名業所乖諍隨善惡業力自所受異熟不愛別故是諸有情受自作業不愛異熟時初從何生爲無因耶因世性自在等耶從業所生云何從業所生是諸有情遠離無因惡因唯從業所生故謂諸有情遠離無因惡因唯由業等因緣所生如是已說依業流轉爲明歸滅亦依諸業是故經言依業出離云何依業出離依對治業解業縛故謂依無漏業能斷有漏業故唯依業而得出離云何有情高下謂由業故於善惡趣得自體差云何勝劣謂諸有情成就功德過失差別如世尊說有情業異熟不可思議如是經意非一切種皆不可思云何業異熟不可思議云何可思謂諸善業於人天趣得可愛異熟是可思議諸不善業墮三惡趣得不愛異熟是可思議由善惡業往善感得可愛不可愛異熟世閒智者能思議故由此能引發正見等功德卽由此業感諸有情自身異熟等種種差別不可思議謂內身等異熟有形色等無量差別難可思議除一切智不能思議强思議者發狂等過故復次卽善不善業處差別事差別差別異熟差別品類差別等皆不可思議由卽此業處差別等無量無邊難可思議故處者謂住如是處造如是業或於城邑或於村落如是等謂所依事或有情數或非有情數因者謂善不善根如其所應異熟者謂異熟內身品類者謂種種差別無量品類又有種種外事差別能感業用不可思議由何等業感棘刺等鋒鋩銛利如是等類墮在世閒不思議思議世閒佛所制故又末尼珠術相應業用不可思議末尼相應業者謂月愛珠等能出水等業用難思藥相應業者謂執持此藥藏隱形等呪相應業者謂誦此呪便不燒術相應業者謂由彼彼術故治熱病等又諸觀行者威德業用不可思云何彼心威德力故能動大地昇虛空等又諸菩薩自在業用不可思所謂命自在故心自在故財自在業自在故生自在故勝解自在故願自在故神通自在故智自在故自在故諸大菩薩由如是等自在力所作業用不可思議謂諸菩薩由命自在力持諸壽行隨所欲樂爾所時住由心自在力隨其所樂於三摩入出自在由勝解自在力轉大地爲水火等勝解自在由願自在力隨其所樂能引無數自利利他圓滿大願由神通自在力爲欲攝化無量有情顯示種種神通變現由智自在於諸法義訓釋言詞無滯辯說圓滿究竟由法自在力以無量種名句文身建立素怛纜等無上教法隨其所應乃至一切有情於一時閒能令彼心皆大歡喜又一切佛所作諸佛應所作事業用不可思議云何如來到於究竟無功用處證得淸淨一味法界諸佛世尊之所應作利益安樂諸有情事隨時如應皆能成立如是諸佛及佛境界不可思議復次如是集諦摠有四種行相所謂因相集相生相緣相因相云何謂能引發後有習氣因是名因相由業煩惱是能引發後有習氣因故集相云何謂彼彼有情所集習氣於彼彼有情類爲等起因是名集相由諸有情所集習氣於人天等有情類中能爲相似形貌種類平等起因故生相云何謂各別內身無量品類差別生因是名生相是諸有情各別內身相續決定趣生地等所有一切品類差別乃至有頂生因故緣相云何謂諸有情別別得捨因是名緣相能令有情得未曾得自體捨已曾得自體故如是名爲集諦體相云何滅諦謂由相故甚深故世俗故勝義故不圓滿故圓滿故無莊嚴故有莊嚴故有餘故無餘故最勝故別故分別滅諦相者謂眞如聖道煩惱不生若滅依若能滅若滅性是滅諦相如世尊說耳及與鼻身及與意於此處名色究竟滅無餘又說是故汝今當觀是處所謂此處眼究竟滅遠離色想乃至意究竟滅遠離法想由此道理顯示所緣眞如境上有漏法滅是滅諦相甚深者謂彼諸行究竟寂滅如是寂滅望彼諸行可說異不異亦異亦不異非異非不所以者何若彼諸行究竟寂滅是寂滅與彼諸行可說異者應與諸行不相繫屬條然異體若不異者是染相由此道理非俱非不俱何以無戲論故於此義中若生戲論正思議非道非如亦非善巧方便思如世尊說此六觸處離欲沒等若謂有異無異亦有異亦無非有異非無異者於無戲論便生戲論乃至有六處可有諸戲論六處旣滅絕諸戲論卽是涅槃若於如是絕諸戲論寂滅涅槃不正思議是名戲論於應異思議乃異思議故云何應異思議謂正妙離等種種思議世俗者謂以世閒道摧伏種子所得是故世尊別名說爲彼分涅槃勝義者謂以聖慧永拔種子所得滅不圓滿者謂諸有學或預流果攝一來果攝或不還果攝等所有滅圓滿者謂諸無學阿羅漢果攝等所有滅無莊嚴者謂慧解脫阿羅漢所有滅無三明等最勝功德所莊嚴故有莊嚴者謂俱分解脫三明六通阿羅漢等所有滅有無量種種最勝功德所莊嚴故有餘者謂有餘事滅無餘者謂無餘事滅最勝者謂佛菩薩無住涅槃攝所有以常安住一切有情利樂事故差別者謂無餘永斷永出永吐寂靜沒等何故名無餘永斷餘句故謂無餘永斷#是摽句餘是釋是故說言由餘句故由後別句此摠故纏及隨眠皆悉永斷故名無餘永斷何故名永出永出諸纏故依斷諸纏說謂已生者皆遠離故名永吐永吐隨眠故此依斷隨眠謂除根本永不生故如是諸滅見修道對治別故建立二種盡及離故次問言何故名盡見道對治離繫故煩惱聚中餘少分故亦名爲何故名離欲修道對治得離繫故由彼修道離諸地欲漸次所顯故離欲由有如是俱離繫故當來苦滅故次問言何故名滅當來彼果苦不生故能成未來苦不生法故名爲滅又於現法憂惱寂靜故次問言何故名寂靜於現法中彼果心苦永不行何故名沒餘所有事永滅沒故宿業煩惱所感諸蘊自然滅盡故名爲由如是等別句釋前無餘永滅摠何故此滅復名無爲離三相故滅住異三有爲相究竟相違故名無何故此滅復名難見超過肉眼眼境故唯聖慧眼所行境界故名難何故此滅復名不轉永離諸趣差別轉故離地獄等往來流轉恒常安住故名不轉何故此滅名不卑屈三愛故永離欲無色三愛於諸有無所卑屈故名不卑屈何故此滅復名甘露離蘊魔故永離一切死所依蘊故名甘露何故此滅復名無漏永離一切煩惱魔故何故此滅復名舍宅無罪喜樂所依事故解脫喜樂所依止故名舍宅何故此滅復名洲三界隔絕故於生死大海挺出高原故譬洲渚何故此滅復名弘濟遮一切大苦災橫故證得此滅病等諸苦災橫永遠離故何故此滅復名歸依無有虛妄意樂方便所依處故由於彼滅所發意樂及正方便無虛妄性所依處故所依止義是歸依義何故此滅名勝歸趣能爲歸趣一切最勝聖性所依處故由此寂滅能爲歸趣最勝聖性所依止處是阿羅漢證得方便所緣境故何故此滅復名不死永離生故諸無生者必不死故何故此滅名無熱惱永離一切煩惱熱故永離一切求不得苦大熱惱故何故此滅名無熾然永離一切愁嘆憂苦諸惱亂故一切愁等熾然永息極淸涼故名無熾然何故此滅復名安隱離怖畏住所依處故無老死等一切怖畏聖住所依故名安何故此滅復名淸涼諸利益事所依處故一切淸涼善法所依故名淸何故此滅復名樂事第一義樂事出世閒樂所依事故名樂事何故此滅名趣吉祥爲證得彼易修方便所依處故爲證涅槃易修方便所緣境故何故此滅復名無病永離一切障㝵病故離煩惱等諸障㝵病故無病何故此滅復名不動永離一切散動故離諸境界戲論散動故名不何故此滅復名涅槃無相寂滅大安樂住所依處故永離一切色等諸究竟寂滅大安樂住所緣境故爲涅槃復次依滅諦辯無生等名義差別與苦諦相義相違故苦諦相者於彼彼處有情類中相續而生爲翻彼相是故問言何故此滅復名無生離相續故苦諦相者續生已後自身衆分漸次圓滿爲翻彼相是故問言何故此滅復名無起永離此後漸生起故苦諦相者宿業煩惱勢力所爲翻彼相是故問言何故此滅復名無造永離前際諸業煩惱勢力所引故又現在苦是能造作餘有異熟諸業煩惱所依止處爲翻彼相是故問言何故此滅復名無作不作現在諸業煩惱所依處故又苦相者後有異熟相續生起無有閒斷爲翻彼相是故問言何故此滅復名不生永離未來相續生故復次滅諦有四種相謂滅相靜相妙相離相何故名滅相煩惱離繫故謂流轉因煩惱離繫故名滅何故名靜相苦離繫故行苦所攝不寂靜相取蘊離繫故名靜何故名妙相樂淨事故諸煩惱苦究竟離自然樂淨以爲自體故名妙何故名離相常利益事故不復退還最極安隱如其次第名常利益安隱利益最勝善性是滅諦相云何道諦謂由此道故知苦斷集證滅修道是略說道諦相今於此中依四聖諦以其作顯道體相又道有五種謂資糧道方便道見道修道究竟道如是五種依道自性及眷屬以顯道諦差別資糧道者謂諸異生所有尸羅守護根門飮食知量初夜後夜常不睡眠勤修止觀正知而住復有所餘進習諸善聞思修所生慧修習此故得成現觀解脫所依器性謂諸異生所有尸羅乃至正知而住等是資糧道體由彼修習淨尸羅等極圓滿故復有所餘進習諸善者謂無悔等由聞思等所生諸慧得成煖等次第見諦斷諸障相續堪任性方便道者謂所有資糧皆是方便有方便非資糧謂已積集資糧道者所有順決擇分善根謂煖法頂法諦忍法世第一法煖法者謂各別內於諸諦中明得三摩地鉢羅#若及彼相應等法由淨定心依諦增上經等法於意言門諸義顯現緣彼所生奢摩他毘鉢舍那等是名煖法法者謂各別內證於諸諦中明增三摩地鉢羅若及彼相應等法由彼頂法展轉增進居上位故順諦忍法者謂各別內證於諸諦中一分已入順三摩地鉢羅若及彼相應等法分已入者於無所取一向忍解故分隨順者於無能取隨順通達所依處故世第一法者謂各別內證於諸諦中無閒心三摩地鉢羅若及彼相應等法從此無閒必起最初出世道故
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第八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